왜 나를 위해 죽으셨다 하시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좀 유치하고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초신자들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문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처음 예수 믿고 나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더랬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죽으셨다면 계속 죽어 계셔야지 어째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도로 살아나셨다면 죄인들이 도로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였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였습니다.
존귀하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이 만인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수 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인 나를 위하여 그것도 2,000년 전에 죽어 주셨다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혼자서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는 그렇게 깨달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하여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 받으려면 예수님이 계속 죽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수학적 사고였습니다.
이를테면 “맞바꾸기, 가감셈법”인 셈이지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는 단순한 셈법 말입니다.

그 단순한 수학적 생각이 잘못 된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계속 죽어계셔야만 우리가 그 대가로 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사망, 저주의 권세가 계속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와 사망, 저주를 깨부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박살이 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저주를 무마하거나 사단에게 제공되는 제물이 아니라(사단에게 제공된 제물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이단도 있더이다만), 죄인이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요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화목제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속 진노하고 계셨다면 우리의 죄도 해결될 수 없고, 예수님도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의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두 번째 의문은 주님은 이천년 전에 한 번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단 한 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수십억 인류를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통째로 구원하신다는 거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창조주이요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주님께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기보다 시간과 공간이 다 그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지요. 인간의 역사는 기껏 수 천 년인데 하나님은 텅 빈 우주공간에서 수 백 억년 동안 어떻게 기다리셨을까?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을 시간의 틀 안에 집어넣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백억년의 풍성한 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지요.
태양을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고생대, 중생대, 감브리아기, 쥬라기, 신생대........,
그 아득한 시간을 하나님은 필요하신대로 사용하신 거지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그것은 아무리 긴 시간이나 짧은 시간, 아무리 크거나 작은 공간이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동시에 지구상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가 주님께는 다 “현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현재형 시제로 “I am"이라고 스스로를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리거나 기억이 희미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결코 되돌아갈 수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되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어느 때이든지 모든 시간이 주님께는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현재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아래 엎드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을 때 주님은 다시금 생생하게 2000년 전의 ‘현재’로 돌아가 그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도 줄이거나 빼지 아니하고,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현재형이신 주님은 그 때로 다시 돌아가 그 쓰라린 고통을 다시금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고(産苦)보다도 더 혹독한 고통일 것입니다.
매번 한 사람의 죄인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을 찢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고통과 그 거친 십자가의 못에 살을 찢는 참혹한 주님의 고통은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더기로 한꺼번에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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