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년 후 이루어진 예언

[열왕기상 13장]

오늘 말씀은 여로보암에게 일어난 기이한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유대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벧엘로 가서 여로보암이 분향하는 단을 향하여 외칩니다.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또 그 예조로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이 말씀을 보니까 마태복음 1장 21절에 기록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금송아지 앞 제단에서 분향하다가 그 소리를 들은 여로보암이 손을 펴 ‘저를 잡으라.’ 할 때 그 손이 말라서 거두지 못 하게 되고 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집니다. 놀란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손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고 자기 집으로 가자, 예물을 드리겠다 하나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길로 돌아가다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슬픈 선지자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게 됩니다.

분향이 무엇입니까? 분향은 하나님께서 향내를 맡으시며 받으시는 것입니다. 분향은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죄인의 분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죄 때문에 향내가 아니라 악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죄 없는 짐승을 잡아 태워서 죄의 악취를 잠시 제거한 다음 성소에서 분향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또 이것은 죄 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이 드려진 다음에야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은 성도의 기도가 금대접의 향으로 드려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상은 죄든 뭐든 가리지 않고 분향을 받습니다. 우상이 악취 덩어리니 죄나 악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상 앞에 분향하는 것은 자신을 우상에게 드리는 행위입니다. 지금 여로보암이 하는 짓이 바로 그짓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00 년이 지난 다음 “단아, 단아.” 하고 외쳤던 '하나님의 사람', 그 슬픈 선지자의 예언은 성취됩니다. 유다왕국의 요시야 왕은 산당을 헐고 우상을 훼파하며 하나님의 전을 수축하고 율법책을 찾아 절기를 지키며 유다왕국이 잠시나마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벧엘의 산당을 헐고 묘실에서 산당 제사장들의 뼈를 꺼내어 우상의 단 위에다 불사르고 산당 제사장들을 단 위에서 죽이고 그 뼈를 거기에다 불사르는 통쾌한 일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그 날도 이처럼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로보암은 그 선지자의 무서운 경고를 받고도 우상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을까요? 결국은 그 후손과 집안이 땅에서 끊어지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 때문에,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 드리러 가면 그들의 마음이 유다왕국으로 돌아설까봐 그랬다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왜 여로보암을 따라 단과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앞에 엎드려 제사하고 분향했을까요? 참으로 이상하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으면, 우리 같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금송아지에게 절하라고?" 반란을 일으켜 여로보암을 내쫓고 금송아지와 제단을 때려부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갔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내심 백성들은 그게 더 좋았을 것입니다. 일년 삼차 절기 때만 되면 뜨거운 중동지방의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니 그게 좋았을 것입니다. 가까운 벧엘이나 단에 가서 제사 드리니 그게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봐야 레위지파가 제사장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제사 지내고 분향하는 것도 눈꼴시었는데 이젠 직접 제사 드리고 분향할 수 있으니 그것도 속시원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는 게 좀 께름찍해서 도저히 자기가 나서서 하지는 못 하겠지만 여로보암 왕이 앞장서서 해주니 자기책임도 아니고 마음의 부담도 한결 덜어졌을 것입니다.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는 결국 여로보암의 권력을 위한 계략과 백성들의 편안하게 자기 마음대로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합치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슬픈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씨름이요, 싸움이요, 전쟁이라고 말씀합니다. 속이는 자들과 거짓선지자들과 허탄한 세상의 유혹과 때로는 강압과 위협과 위험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끊임없이 여호와의 전에, 오늘날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얼굴을 뵙고 그 말씀으로 새힘을 얻고 그 능력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여로보암이 이끄는대로 편안한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로보암들이 편안한 신앙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께름직해 하면서도 여로보암들이 만들어놓은 편안한 곳에서 자신이 좋은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합니다. 사자에게 죽임당할 줄도 모르는지 하나님의 말씀도 고쳐서 행한다 합니다.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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