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핵실험으로 핵 공포 현실화
미국은 북 도발에 전쟁 준비 나서
중국·러시아·일본도 대응 채비
태풍의 눈 한국은 오히려 차분
북은 사력 다해 수소탄 만드는데
빈손 한국 정부는 갈팡질팡
내년 원자력 연구예산 대폭 삭감

핵무기 원천 기술 없어질 위기

━ 누구도 원치 않는 전쟁

북한은 핵보유국이 됐다. 이제 핵전쟁 위협을 안고 살아야 한다. 딱하게 됐다. 후손들에게 정말 면목이 없다. 정확한 상황 판단이 필요하다. 핵원자로 전문가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군사전략가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과 심층 인터뷰를 했다. 그림은 주 교수가 제공했다. 두 분의 견해를 토대로 진단과 처방을 모색했다.

 

계산되지 않는 위험

한반도에 핵전쟁이 일어날까? 한반도 지축을 뒤흔든 북한 풍계리 6차 핵실험은 강대국의 무력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2017년 9월 3일로 지난 시대의 세력 균형은 무용지물이 됐다. 가공할 공포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공포심이 선제타격으로 발현되면 곧 전쟁이다. 100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은 ‘누구도 원치 않은 전쟁’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두려워서 공격했다. 경쾌한 걸음으로 참전했던 유럽인 1000만 명이 죽었다(김정섭, 『낙엽이 지기 전에』).

 

한반도 전쟁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그런데 강대국들은 계산되지 않는 위험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김정은을 통제할 사람은 본인도 잘 모르는 자신뿐이다. 4대 강국 지도자들은 지난 세기 그 어느 때보다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다.

히로시마 원폭 10배 이상의 수소폭탄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국 정부의 대응은 느리고 부정확했다. 북한 핵실험 위력은 5차보다 5~6배 이상 강해졌고, 지진관측소에 측정된 지진파가 규모 5.7 정도라고 했다. 일본은 북한 핵실험 3일 뒤 수정치를 발표했다. 위력은 5차 실험의 13배, 지진 강도는 규모 6.1로 몇십 배 커졌다는 것이다. 원폭이 아니라 수소폭탄이고 TNT 폭약 기준 160kt, 히로시마 원폭의 10배 위력을 가졌다고 최종 확인했다. 중국 지진관측소에서는 규모 6.3 지진파가 잡혔다. 무엇이 옳은가? 북한이 터트린 저 가공할 무기의 실체를 알아야 정확히 대응할 것 아닌가.

포괄적핵실험금지기구(CTBTO)는 지진파 규모를 6.1로 최종 평가했다. 미국원자력학회 펠로인 주한규 서울대 교수가 지진파 규모 5.7~6.3을 생성해 낸 핵무기의 위력을 추정했다. 지진파 규모 5.7은 TNT 폭약으로 50kt, 6.3은 200kt에 해당한다(그림 1). 한국의 지진관측소는 풍계리 핵실험 장소로부터 15도 각도 내부에 위치해 있기에 전방위적 측정이 어렵다. 지진관측소가 만주 전역에 분산된 중국이 측정한 수치, 6.3이 더 실체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그림 2). 원자폭탄(atomic bomb)의 한계치가 20kt이라고 보면 지진파 규모 6.3을 일으킨 그 핵실험은 200kt 위력의 수소폭탄(hydrogen bomb)이라는 게 주 교수의 결론이다.

북한은 이제 수소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명실공히 핵보유국이 됐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이 강온전략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북한은 꾸준히 이걸 노렸고 급기야 성공했다. 그 수소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 피해 범위는 그림과 같다. 반경 2㎞ 내에서는 거의 사망(초록색), 반경 6㎞ 내에선 3도 화상에 신경세포 괴사(노란색)·치명상 60만 명·총 사상자 250만 명에 달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시나리오다. 공포를 부추길 필요는 없지만 정확히 알아야 대책이 나온다.

전술핵을 다시?
김정은이 마구잡이로 쏴 올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과 거기에 탑재될 핵탄두가 일으킨 미국의 공포심리는 허리케인급이다. 9·11 사태의 충격은 에피소드다. 미국 본토가 핵미사일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핵탄두로 뉴욕을 공격하는 평양발 포스터도 나왔다. 미국 군사기지가 밀집한 괌에 시험 발사한다고 했으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격분할 만하다. 미국은 모든 가용한 군사력 자산을 동원하는 실질적 전쟁 준비 단계로 돌입했다. 중국·러시아·일본도 군사력의 일자진(一字陣)을 펴고 있다. 한반도가 태풍의 눈이다.

 

그럼에도 몽롱한 나라는 정작 한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절박한 심정이지만 상대가 북한인지 미국인지 헷갈렸다. 전쟁 발발 여부를 좌우할 한국의 목소리는 사실 모기 소리만 한 게 현실이다. 이상희 전 장관은 북한의 괌 공격 위협을 떠올렸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당사자로서 괌 공격은 한국을 공격하는 것과 동일한 도발행위로 간주한다’고 결연히 말했어야 옳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합참의장과 전략본부장을 지낸 군사전문가다. ‘전쟁 불가론’과 ‘한·미 동맹 책임론’ 중 어느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가? 어느 쪽이 상황 통제에 효력이 있는가?

 

이 전 장관은 북한의 6차 핵실험은 92년 합의한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을 최종 폐기 처분한 도발이라고 결론지었다. 공동선언은 ‘①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사용을 하지 아니하며 ②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미군의 전술핵이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럼 다시 불러와야 하는가? 트럼프 대통령이 전술핵 재배치를 들고 나온 맥락이다. 보수 야당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맞받았다. ‘핵에는 핵으로!’ 전술핵 재배치는 강대국의 반발과 세계적 비난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국민은 재무장론과 대화론 사이에서 헷갈린다. 그럼 손 놓고 있어야 할까? 탈핵·탈원전이 우리의 길인가?

 

탈원전의 충격

북한의 핵 위협을 정말 심각하게 고려했다면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그리 성급하게 선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탈원전이 향후 60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다고는 했지만 원전 기술은 핵무기 원천 기술을 쌓는 영역이다. 주 교수는 한국의 원전 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손을 놓으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전마피아? 다른 분야도 관련 업계 소수집단이 그러하다. 핵무장을 전제하지 않고도 핵 기술 연구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학자와 연구자들은 오직 ‘공익’을 위해 일했다고 억울해했다. 그런데 왜 원자핵공학자들을 이익집단 내지 안전위해집단으로 매도하는지 따져 물었다.

 

핵무기 개발에는 순도 높은 핵물질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다. 사용후 핵연료의 고온 전기분해 과정인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은 핵물질 추출과 관련된 기술이다. 다만 순도 높은 핵물질 추출은 규제가 많아 현재는 고속중성자원자로에서 평화적 이용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년 정부 재정에 파이로프로세싱과 고속중성자원자로 연구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미래 대비 원자력 연구도 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주 교수는 허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관련 기관의 채용계획도 중단됐다. 전국 원자핵공학도가 갈 곳이 없어졌다. 유학 인력도 외국에 눌러앉는다. 북한은 사력을 다해 수소폭탄 제조에 성공했다. 수소폭탄 개발 충격에도 우리의 정부 방침은 탈원전이다. 사리에 맞는가? 새로운 변수 앞에 재논의가 필요하다.

 

레드라인 공방

냉정히 인정하자. 북한은 이미 핵무장국가다.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다종화가 가능해졌다. 이런 마당에 레드라인 월선(越線) 여부를 따지는 한국 정부의 공방전은 좀 한가롭게 보인다. 대통령은 ‘레드라인을 넘지 않게’ 대비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듯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는 “레드라인을 아직 넘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기준이 뭘까? 월선을 기다리는가? 적어도 냉정한 정부라면 레드라인과 상관없이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핵 앞에 궁하다. 딱하게 됐다. 공포로 가득한 국민을 대신해 물어보고 싶다. 군사적 압박? 무력 전개? 글쎄 핵을 쥐고 있는 김정은은 그런 것들을 다 비웃지 않을까. 한국 정부의 몫은 기상천외한 다른 발상에 있을지 모른다. 김정은이 대적하는 상대는 미국이다. 코리아패싱(Korea passing)은 이미 핵무장의 본질이고 한국 정부가 공언한 ‘운전대론’에는 운전할 차가 없다.

 

빈손 한국

청와대 관계자들과 여당 지도부는 대화론(對話論)의 유혹을 벗지 못한다. 대화론은 철 지난 유행가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대화가 이뤄졌다고 치자. 이상희 전 장관은 전략가답게 대화 테이블의 일그러진 상황을 예견했다. 꾸준히 북한을 설득해 대화 테이블로 유도한들 북한이 할 말은 명백하다는 것. ‘미국에 전해라, 우리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는 메시지. 미국과 일대일 핵군축회담이라면 몰라도, 핵도 없고 정권마다 논조가 바뀌고 레토릭을 남발하는 남한과는 대화 자체가 시간 낭비임을 북한은 알고 있다. 남한 정부의 관계자들은 정무적 판단에만 몰입한다는 사실도 이미 간파했다. 복잡한 사안은 덮고 위험한 것은 숨기고 정권에 덜 해로운 쪽으로 기우는 단기전술가·임기응변가들이다. 깊고 넓은 안목으로 핵무장에 대처할 냉철한 전략가·이론가들은 길게는 2~3년 일하다가 모조리 퇴장한다. 그 결과가 핵무장 북한 앞에 ‘빈손 한국’이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한 영국 시민이 해변에 널브러진 20만 청년을 보며 탄식한다. ‘독일은 군사에, 영국은 민생에 몰입한 결과가 이거다’. 그렇다고 군사로 몰려가야 할까?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핵무기의 본질은 ‘전쟁 억제’다.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자기도 죽는다. 김정은도 핵무기의 두 얼굴 중 ‘죽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틈새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이상희 전 장관은 “우리에게도 핵무기가 있다”고 실낱같은 희망을 피력했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예를 들면 인민 봉기와 소외된 권력집단의 쿠데타, 불만세력의 김정은 암살 같은 것 말이다. 체제 붕괴를 가장 두려워한다면 한국은 북한의 아픈 점을 들춰내고 확대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비용도 적게 든다. 가성비가 최고다. 이상희 전 장관은 세 가지 전쟁을 열거했다. 대북 심리전, 정보전, 경제전.

핵무장이 심화될수록 북한 인민 심리전을 확대해 소규모 봉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방법은 여럿이다. 정보전과 더불어 실행하면 기대 이상의 효력을 거둘 수 있다. 경제전은 유엔 안보리와 미국이 결의한 세컨더리 보이콧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이 앞장서는 적극성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당장의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김정은을 좌불안석으로 만드는 핵무기다. 꾸준히 실행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국론 분열은 독약이다.

공포를 부추기는 담론은 자제해야 하지만 정확한 상황 판단은 필수적이다. ‘북한은 초근목피로 연명해도 핵은 놓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핵무장 북한’과 ‘빈손 한국’이란 극한적 대조가 몰고 올 열패감과 공포심을 이겨 낼 새로운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한국의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그래도 대화’와 ‘그렇다면 재무장’ 간 격돌의 수렁에 빠져들수록 북한은 핵 종교의 위력을 즐길 것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출처:http://v.media.daum.net/v/20170914010204702?rcmd=rn

개같이 충성하던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는가?


북한 국민들이 겁이 많아서 반정부 투쟁을 못한다고 비웃는 남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그들에게 반정부 데모가 못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해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들을 납득시킬 자신이 생겼다. 남한의 현실이 북한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무식한 백성들은 누가 나라의 수령이 되든 별 상관이 없다. 오직 배불리 먹여주고 잘 살게 해준다고 속이면 그만이다. 즉 우둔한 백성들이 민주화 투사가 되는가? 아니면 무능한 노예가 되는가 하는 것은 그 나라 정치가들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솔직한 말로 북한 주민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실상 반정부 민주화 투쟁이란 것을 해야 할 필요성을 그리 느끼지 못하였다. 왜냐구? 우선 무식한 백성들이 배가 고파야 정부 욕을 하겠는데 일을 하든, 안하든 출근만 하면 공짜나 다름없이 강냉이 죽이라도 평등하게 먹여 주었다.


또 백성들은 일자리 없어서 백수가 되고 돈이 없어야 나라님 욕도 하겠는데 누구에게나 싫든 좋든 직업은 무조건 준다. 또 집이 없어서 한겨울에 노숙을 해봐야 제도를 잘못 만난 한탄이라도 하겠는데 닭장 같은 집이라도 공짜로 국가에서 해준다.


또 자식들 교육비 걱정을 해봐야 한숨이라도 나오겠는데 나라에서 공짜로 모두 공부시켜주고 교복도, 교과서도 주었다. 또 아픈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고 누가 죽어나가야 원한이라도 서릴텐데 누구나 공짜로 치료를 해준다.


또 말도 안 되는 세금을 쪽쪽 빨아가야 못살겠다는 소리라도 나올텐데 일한 것보다 노임은 턱 없이 적게 주고 그 대신에 세금은 형식상 완전히 폐지해주고 ‘수령님’ 몸값만 올렸다.


또 누구는 자동차 타고 다니고 나만 힘들게 걸어 다녀야 불만이라도 생길텐데 큰 간부들만 사업용 승용차를 탔을 뿐, 백성들은 전체가 걸어 다니는 교통평등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생각이 트였다는 북한의 간부들은 어떠한가?

두말말고 한번 간부자리 꿰차고 아첨만 잘하면 일생동안 공짜 자동차에, 공짜 큰 집 쓰고 먹을 걱정 없고 자손들까지 공짜로 공부시켜서 공짜로 간부를 만들 수 있으니 누가 그 정부를 반대하자고 국민들을 선동하겠는가?


한마디로 북한 정부는 “물질적인 공짜”와 “정신적인 평등”이라는 얼림 수로 지혜롭고 정신력이 강한 북한 주민들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묶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북한은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노동당과 수령을 100% 지지하는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 그 “공짜와 만민평등”이란 것이 국가창립 40여년 만에 남한보다 잘 살았다던 북한을 백성들이 굶어죽는 가난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공짜”와 “만민평등”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망하게 하는 독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싸워서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와 한강의 기적도 이루어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남한 땅에서, 지난날의 북한식 정치방식과 노예로 변해가는 국민들을 다시 체험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금 무슨 정신인지 나랏돈을 마구 공짜로 뿌려서 국민의 입을 막고 현 정부의 몸값만 올린다. 북한의 선전선동 수단을 닮아가는 이 나라의 언론매체들은 말도 안 되는 대통령 우상화 선전과 억측선동으로 국민들의 정신을 마구 흐려놓는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무식한 백성들은 “공짜와 평등”이란 얼림수에 속아서 자기네 정부가 그 어떤 한심하고 위험한 정치를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처럼 현 정부의 지지도는 날을 따라 점점 올라간다. 한참 사기들이 났다. 꼭 북한의 어제를 보는듯하다.


나라를 걱정해서 쓴 소리하고 욕을 하던 애국자들은 북한처럼 찍소리도 못하고 감방가고 벌금형에 처해진다. 대기업가들은 회사가 국유화 위기에 처하고 군 장성들은 정부와 병사들 눈치 보기에 정신들이 없다.


역사를 보면, 공짜를 좋아하고 만민평등에 유혹된 국민은 민주투사가 아니라 무능한 노예로 전락되며, 그런 나라는 반드시 북한과 같이 망하는 것이 진리였다.



출처: 김태산님 페이스북

 

이제는 정신 좀 차리고, 현실 분별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짓들을 잠시라도 멈추고, 현실을 제대로 보자.


만약 미국이 북괴의 미사일 시설을 폭격했다고 치자.

북괴는 차마 미국에 보복은 하지 못하고 대신 한국에,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제발 대화 한번 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한국에다 고사포질과 미사일질을 해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그것이 미국 탓인가? 미국이 자국에 가해지는 핵미사일 위협을 봉쇄하기 위해 온갖 외교적·경제적 수단을 다 시도해보다가 그 어떤 수단도 먹히지 않자 최종적 수단으로 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이 미국을 비난해야 할 일일까?


왜 다른 핵보유국에는 안그러냐고? 세계 어느 누구도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않으니까. 중국이 미국을 ICBM으로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적 있는가? 심지어 소비에트연방과 미국도 서로 공격을 하진 못한 상태에서 냉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북핵은 '맞아도 안죽는 형제의 핵'이라는 안일한 망상에 빠져있다고 해서, 세계 모든 나라들도 다 똑같은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할거라고 보는가? 절대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북한 정권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북한 정권의 탓이다. 미국의 탓이 아니다. 미국을 탓하는 것은 마치 방탄복만 안 입었어도 총맞을 일은 없었을 거라는 식의 앞뒤가 완벽히 바뀐 황당하기 짝이 없는 헛소리다. 총 쏜 범죄자의 탓이지, 범죄자 소굴을 덮친 경찰의 탓이 아니라는 얘기다. 망상에서 좀 벗어나라.


지금 전 세계에서 북괴 편을 드는 나라는 오직 단 하나 뿐이다. 대한민국. 심지어 중국조차도 북한이 도발을 감행하면, 말로라도 경고성 발언을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북한이 무슨 도발을 해도, 그져 "평화 평화"만 부르짖으며 대화에 목매며 애걸복걸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제외한 전세계가 이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또 이해하는데...


정말 분별력 있고 현실감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미국 전역에서 을지 프리덤가디언 훈련을 위해 대한민국에 속속 도착하고 있는 미 본토의 예비군과 현역장병들이 도착하는 공항과 항구 거리로 달려가 그 젊은 군인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안아주고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매년 일년씩 적금을 넣은 사비를 털어서 감사의 메달을 제작하여 미국으로 날아가 미 전역의 6.25참전 용사들을 발로 뛰며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분들도 계신다.


"대한민국은 그대들의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는다"고 새겨진 메달을 걸어주고 안아줄 때, 자신들이 지켜낸 그 가난했던 나라에서 온 감사의 메달을 전달받는 노병들과 그 가족들은 감격에 젖어 행사장은 항상 눈물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고마움과 자부심, 그리고 이를 지켜낸 숭고한 동맹과 우정을 확인하는 감동의 자리일수 밖에 없다.


애국심은 이런 곳에서 싹트는 것이지 고급식당 안 싸구려 잡담에서 싹트는 게 아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라면, 솔선수범으로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류의 숭고한 가치인 우정과 신뢰와 희생에 대해 가르쳐줘야 한다.



출처: 이재홍 & Grace Choe님 페이스북

전략군 지도에 'MDL-울진-포항-부산 앞바다' 타격권 표시

전문가 "괌 타격 미사일 발사 예상지점은 무수단리"

베일 벗은 전략군사령부…전경에 지하벙커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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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전략군, 남한 전역 4등분해 미사일 타격권 설정(서울=연합뉴스) 북한은 15일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를 통해 미사일 전력을 총괄 운용하는 전략군이 우리나라 전역을 4등분해 미사일 타격권을 설정해놓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남조선 작전지대'(붉은 원)라고 쓰여있는 지도에는 우리나라 전역을 4개로 구분한 라인이 그어져 있고, 그 라인 끝마다 미사일 기종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적혀 있다. 2017.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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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홍국기 기자 = 북한의 미사일 전력을 총괄 운용하는 전략군사령부가 우리나라 전역을 4등분해 미사일 타격권을 설정해놓은 사실이 처음 포착됐다.

전략군에 배치한 스커드와 노동미사일 등 주로 단거리 미사일을 이용해 유사시 남한 곳곳을 타격할 수 있는 유효사거리를 기준으로 타격 범위를 설정해놓은 것으로 분석된다.

15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전략군사령부 지휘소 내부 모습을 보면 김락겸 전략군사령관으로부터 괌 포위사격 방안을 보고받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뒤로 3개의 지도가 벽면에 걸려 있다.

이들 지도에는 '남조선 작전지대' '일본 작전지대' '태평양지역 미제 침략군 배치'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있다.

이 가운데 '남조선 작전지대'에는 우리나라 전역을 4개로 구분한 라인이 그어져 있고, 그 라인 끝마다 미사일 기종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적혀 있다. 이 글씨는 블라인드 처리를 해 식별되지 않는다.

4개의 라인이 그어진 곳은 군사분계선(MDL) 축선-울진권역-포항권역-부산 앞바다 등이다. 그리고 4개의 도표가 지도에 그려져 있는데 각 라인 안에 있는 주요 부대와 국가전략 핵심시설 등을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4개 라인이 미사일 타격권역을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선임분석관은 "북한이 우리나라 전역을 4등분 해 미사일 타격권역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스커드와 노동미사일의 타격권역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 작전지대'라고 적힌 지도에는 일본 남쪽 태평양 해상까지 라인이 그어져 일본 전역이 북한 미사일 타격 범위에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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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략군 지휘소 내부에는 태평양 괌의 앤더슨 미 공군기지로 추정되는 위성사진도 걸려 있다. 앤더슨 공군기지에서는 북한이 벌벌 떠는 B-1B 랜서, B-52 폭격기 등이 한반도로 출격하는 장소다. 북한이 괌을 타격할 수 있다는 위협을 최대한 부풀리고자 이 위성사진까지 지휘소에 걸어놓고 공개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김정은 앞에 놓인 '전략군 타격계획' 지도에는 북한에서 괌까지 길게 라인을 그려놨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경로를 표시한 것이다.

발사지점을 확대해보면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인근으로 나온다. 기존 함경남도 신포에서 발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과는 다른 것이다.

신 선임분석관은 "무수단리에 넓은 발사장이 있어 여러 발을 사격하기에 적합하다"면서 "전문가들이 말해 왔던 신포에서 쏠 경우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괌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특이한 것은 북한에서 괌까지 그어진 라인의 한 중간지점에 알 수 없는 표시를 해놓았다는 점이다.

신 선임분석관은 "라인 중간에 끊어지는 지점을 표시했는데 발사지점에서 거리상 단 분리나 재진입 지점은 아닌 것 같다"면서 "그 지점의 태평양 해상에서 뭔가 관측할 수 있는 시설을 띄워 놓겠다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북한 발사 장소에서 괌까지의 중간지점의 태평양 해상에 관측 선박을 띄워 놓고 이 선박에서 미사일의 비행 거리와 속도, 각도, 자세 등을 측정할 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사일이 괌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이 선박에서 미사일을 자폭시키도록 하는 역할도 하지 않겠느냐는 추정도 나온다.

아울러 북한은 관영 매체를 통해 전략군사령부 지휘소를 비롯해 사령부 전경과 지하벙커에 이르기까지 사령부의 내·외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전략군의 모체는 미사일지도국이다. 북한은 김정일 집권 시기 군단급으로 출범한 미사일지도국을 김정은 체제 들어 전략로켓군으로 확대 개편한 뒤 2014년 초 육·해·공군과 동격의 제4군종으로 전략군을 창설했다. 북한은 지난해 전략로켓군을 창설한 7월3일(1999년)을 '전략군절'로 제정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발표했다.

threek@yna.co.kr

왜 순교의 피는 북한 사람의 몫인가요?


J 집사님께.

집사님이 보내신 “북한에서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김정욱 목사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하자”는 카카오톡 단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씨가 지난달 사망한 뒤 북에 억류된 한국인 선교사 3명의 귀환이 다시 관심사가 됐지요. 정부 당국자도 “남북 당국 간 대화 채널이 복원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억류된 우리 국민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했죠.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함께 기도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악한 것일까요. 제 말도 한번 들어보십시오.

저는 김 목사가 2014년 평양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범죄자라고 지칭한 그는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북쪽 사람들을 첩자로 소개하고 중개했다”며 “제가 저지른 반국가 범죄 혐의에 대해 북한에 사과한다”고 하더군요. “가족에게 건강하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말도 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선 김 목사 지시로 간첩활동을 했다는 북한 주민들의 자백 영상도 상영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국정원 간첩으로 몰려 죽었겠죠. 한 북한 소식통은 그 사건으로 평양에서 최소 30명, 많게는 100명 넘게 체포됐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에선 기독교를 믿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국정원 간첩 혐의까지 썼는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길 기회조차 없습니다. 김 목사가 선고받았다는 무기형이 그들에겐 간절한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죄라곤 중국 단둥에서 한국 선교사를 만났던 것밖에 없습니다. 몰래 성경 좀 읽고 용돈을 받아 쓰자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단둥의 그 선교사가 무책임하게 제 발로 평양에 올 줄은, 보위부에 체포돼 자신들을 스파이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고문당해 어쩔 수 없이 불었다고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저만 해도 북-중 국경에 너무 가고 싶지만 가지 않습니다. 제 목숨도 소중하지만, 혹 제가 체포돼 수많은 사람이 연쇄 피해를 볼 것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삼킬 각오가 돼 있어도 가기 싫습니다.


지난달 중국에 가서 가족과 접촉하려던 탈북자 6명이 북한에 납치됐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제가 자다가 보위부에 납치돼 아는 사람들을 줄줄이 불어 죽게 하고는 기자회견장에 나와 “제발 나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장면은 상상조차 끔찍합니다.

한때 북-중 국경엔 탈북자 선교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탈북자들을 모아놓고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치는 ‘통독반’들도 즐비했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순교하자고 가르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처소가 공안에 발각되면 일어나는 일은 비슷했습니다. 선교사는 한국으로 추방되고, 탈북자들만 북한에 끌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저는 북에서 기독교를 믿었다고 고문받다 죽는 탈북자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왜 순교의 피는 탈북자만의 몫인가요. 물론 납치되거나 테러당한 선교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개는 탈북자만 죽고 선교사는 살았습니다. 김 목사가 무사 귀환하면 선교 대상이 됐던 북한 주민들만 죽고 한국 선교사는 살아 돌아오는 기록이 또 하나 생길 겁니다.

저는 자신이 순교할 각오가 됐을 때 탈북자에게 그리 가르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 독약을 삼킬 각오가 됐을 때 북한 선교에 나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선교보다 열 배 이상의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 북한 선교입니다.

하지만 그런 각오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선교사들도 적잖게 봤습니다. 예전에 위험한 북-중 국경에서 탈북 고아들을 키우는 선교사에게 애들을 안전한 한국으로 무사히 오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죠.


얼마 전 러시아에서 탈북한 북한 노동자는 도움을 주는 한국 선교사가 성경 공부만 계속시킬 뿐 한국으로 가는 데 도움 줄 생각조차 없다고 제게 연락해 왔습니다. 중국에서 탈북 고아를 키우면, 탈북 노동자를 개종하면 선교사는 후원자 앞에 면목이 서겠죠. 그러나 그게 고아와 탈북민을 위한 일인가요. 그들에겐 안전하게 살 한국행이 우선입니다.

이 글로 열악한 사역 현장에서 고생하는 많은 선교사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물론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역자도 사소한 부주의로 한순간에 사람을 죽이는 사역자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북한의 한국 선교사 억류에만 분개하고 당장 구출해야 한다고 할 때, 누군가는 그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탈북 기자인 제가 아니면 누가 또 하겠습니까. 집사님, 제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출처: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97393

머리말

미국 복음주의 영성가요 베스트셀러 선정 작가요 미국 장로교단(PCUSA) 목사인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1932~)이 최근 미국 릴리전 뉴스와의 인터뷰(Religion News Service, Jonathan Merritt, July 1, 2017, Eugene Peterson on Changing His Mind about same sex Issues and Marriage; 크리스천투데이 2017.07.13. 강혜진 기자 보도; 오마이뉴스, 유진 피터슨의 동성결혼 발언 논란이 남긴 것동성결혼 관련 발언 철회하면서 말 바꾸기 비판 일어 , 17.07.15 17:09 최종 업데이트 17.07.15 17:09, 기자 지유석 lukesw)에서 밝힌 동성애에 관한 허용 입장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릴리전 뉴스 기자 조나단 메리트(Jonathan Merritt)는 "만약 목회사역을 한다고 가정하고, 당신 교회에 다니는 동성커플이 와서 주례를 부탁하면 수락할 것인가?"라고 물었고, 피터슨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동성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고 피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성경이 증언해주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인 성질서에서 이탈한 견해로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 결합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다음 6가지 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I. 성경은 동성애가 명료히 “가증한 일”(죄)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은 오늘날 논란되고 있는 ‘동성애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물론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는 아니어 보인다." 이러한 피터슨의 견해는 동성애가 순리(順理)인 이성애에서 빗나간 역리(逆理)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피터슨이 ‘동성애가 시대적이고 문화적 전환 속에 있으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고 규정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성과 계시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는 창조질서로서 부여된 이성애(異性愛)의 순리에서 이탈하는 것으로서 죄(罪)다. 동성 사이에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정신적 관계가 있는 것이 순리(順理)나, 동성(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 육체적인 결합과 결혼은 역리(逆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당시 로마인들의 동성애에 관하여 바른 성적 질서에서 이탈하는 역리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피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롬 1:26). 유다서는 소돔 고모라의 동성애 음란 행동을 영원한 불의 형벌의 죄로 다음같이 명료히 지적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7).

복음주의 교회를 비롯한 역사적 정통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바울의 서신(로마서)은 단지 당시 로마시대의 동성애에 관한 바울 자신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사도적 복음 전도자로서 그 시대의 문화적 관행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다.

 

II. 동성애 커밍 아웃은 세속적 문화적 퇴폐 추세요 말세 징조이다.

유진 피터슨은 동성애에 대한 문화적 추세가 변천하고 있으며 최고를 향하여 전환 가운데 있다고 다음같이 난관적으로 피력하였다: “우리는 변화의 중심에 있고 나는 이것이 최선, 그리고 최고를 향한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들의 커밍 아웃(coming out)은 오늘날 사회의 세속회가 더욱 심각해지고 간음이나 간통이 법적으로 합법화되고 있는 성 자유화 과정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전에는 성 소수자들이 정체성을 전혀 드러내지도 못했는데 오늘날은 시대적 상황과 추세가 성의 자유와 해방으로 흐르는 가운데서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서구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강하게 나타나고, 3년전부터 퀴어축제가 서울 광장에서 공식적으로 거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 낙관적으로 보아질 문화적 발전 추세가 아니라 윤리적 퇴락과 말세의 징조이다.

동성애가 성 소수자인 것은 창조 질서의 순리가 이성애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대부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성애의 탈선이기 때문에 소수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식물을 비롯한 만물을 암컷과 수컷으로 지으시고 인간도 남녀로 지으셔서 사랑하고 번식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다. 성(sex)은 상대가 있다. 성의 질서란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순리(順理)다. 동성 간에 사랑은 우정이다. 이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 교류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남녀에게 독특한 감정과 서로 간에 없는 다른 성기(性器)를 주어서 마음과 감정만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서 서로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 화합을 육체적으로 교류하고 화합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동성 간의 성적 교류는 창조 질서의 역리(逆理)로서 옳지 않은 것이다. 성경은 동성간의 성적 결합을 가증(可憎)하다고 말하고 있다.

 

III. 교인들의 동성애 커밍아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정리(情理)에 서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인터뷰에서 다음같이 동성애 신자를 아무 문제 없은 신자로 여겼다고 말한다: “협력 목사로 있었던 교회에 레즈비언인 여성들을 문제삼은 적은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교회의 다른 성도들과 같은 크리스천으로 여겼다.” 이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 목회자의 바른 태도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종의 태도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피터슨의 제자들 중 음악 사역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고백하는 “저는 동성애자”라는 말을 들었으나 저들을 동일한 크리스천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목회관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여론(與論)과 정리(情理)에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목회자로서 동성애자들을 방문하고, 저들의 영혼을 보살피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는 일은 목회자로서 책임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로 존경받는 신학자요 목회자인 유진 피터슨이 동성결혼, 더 나아가 성소수자에 대하여 성경이 죄라고 규정하는 동성애를 허용했다는 목회적 입장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동성 간의 성적 결합은 부부 사이의 정상적인 성애가 아닌 비정상적인 성애로서 서로의 욕심에 따른 그릇된 성행위다. 바울 사도는 로마시대의 남자와 남자 사이, 여자와 여자 사이에 행해지는 동성애라는 그릇된 성애에 관하여 다음같이 음욕에 불타는 역리적인 성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IV. 복음주의자 유진 피터슨 경우는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영적 쇠퇴 단면

유진 피터슨의 태도는 동성애를 인정하여 교인들과 타협하는 목회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말한다: "20년 전이면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난 나와 같이 신앙생활에 열심인 성소수자들과 알고 지낸다. 성소수자와 관련된 논의는 끝났다고 본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다른 교회로 갈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이 시대가 앓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결코 끝나지 않았다. 동성애는 성질서의 옳고 그름의 문제로서 이에 대한 우리의 결정은 우리의 삶과 인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동성애 신자들이 “자기 만큼 영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유진 피터슨이 두둔하는 것은 목회자로서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고 본다. 동성애, 동성혼에 있는 자들이 정상적 영적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거스리는 것이다. 동성애를 하는 삶이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필자는 바울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시대에 이교도들 사이에 횡행하던 동성애에 관하여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동성애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 교합하는 것이므로 이는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 의하면 동성애는 영성(거룩한 인격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V. 유진 피터슨 파동(동성애 인정과 번복)은 그의 정리되지 않은 동성애 입장에서 비롯.

피터슨과 인터뷰를 진행한 메리트 기자는 후속보도를 통해 피터슨이 2014년부터 동성결혼에 대한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4년 피터슨이 웨스턴 신학교(Western Seminary)에서 했던 강연 영상을 근거로 들었다. 피터슨은 이 영상에서 "자신의 교회에 두 명의 게이 성도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자살했고 한 명은 이혼해야 했다. 이로 인해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또 자신의 자식이 게이(gay)임을 알게 된 목회자 가정을 도왔던 일도 말했다.

그의 인터뷰가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자 피터슨은 7월 13일(현지시간) 미 유력신문인 <워싱턴포스트>지에 입장문을 내고 진화에 나섰다. 피터슨은 이 입장문에서 "나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성경적 결혼관임을 분명히 한다. 난 모든 사안에서 성경적 견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그는 동성애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피터슨은 성소수자를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 "게이들은 내가 섬겼던 다양한 교회, 대학 캠퍼스, 공동체에 있었다. 그들을 방문하고, 영혼을 보살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한 일은 목회자로서 책임“이라고 고백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목회자가 자기 교회 신자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에게 보다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보이면서도 그의 성적 태도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행위”임을 말해주고 거기서 나오도록 도와주는 치유목회를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 생각된다.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동성결혼, 더 나아가 성소수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데서 이번 논란이 비롯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제외한 서구교회가 비슷한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다. 최근 퓨리서치센터가 진행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비율이 최근 10년 동안 14%에서 35%로 2배 가까이 증가했고, 백인 청년 복음주의자들의 경우 동성결혼 지지율이 약 절반에 가까운 47%인 것으로 나타났다.(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증가한 이유? 크리스천투데이, 강혜진 기자 입력 : 2017.07.04. 18:50). 이는 복음주의 교회의 성경관과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동성애 허용 추세는 교회가 성경 말씀에 철저히 입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피터슨의 성경관은 장로교단의 목회자요 신학자로서는 철저히 개혁주의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성경에 대해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성경은 모든 부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렇기에 성경을 이해하자면, 우리는 그 등장인물을 파악하고 배경을 이해하고 줄거리를 따라가야 한다. 성경의 클라이맥스와 대미를 이해하자면, 우리는 거기까지 전개되어 온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고조되는 긴장과 깊어지는 갈등을 함께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때처럼 우리는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어야 한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완역본, 복있는사람, 2,360쪽; 유진 피터슨 "성경은 결국 이야기, 푹 빠져들어야,"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 입력 : 2016.01.29. 22:42). 피터슨은 ”성경은 결국 이야기“라고 하나의 내러티브로 보나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계시적 성격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의 관점이 이번 사태를 야기하지 않았나 보아진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인간을 찾아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서 변하나, 하나님의 이야기는 시대를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VI. 교회의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서 변함없는 하나님 계시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릴리전 뉴스(Religion News)와의 인터뷰 후 파문이 일자 피터슨은 동성애 대하여 “기도해보니 아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동성애 지지를 철회(국민일보 보도, “기도해보니 아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 동성혼 지지 논란, 김상기 기자 입력 : 2017-07-16 15:15/수정 :2017-07-16 22:25)하여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피터슨의 영성은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동성애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놓고 파문이 일자 “기도해 보니 아니다”고 번명한 피터슨의 영성은 쓰여진 성경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보아진다.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더 중요시 하는 것은 복음주의자들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피터슨의 견해는 정통개혁주의적 영성에서 빗나가지 않았나 의심스럽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녀인 아담과 하와로 지으시고 저들이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어야 할 것을 정해주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창조 질서로서 주신 가정을 이루는 성질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창세기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언약 말씀의 불변성과 지속성에 관하여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4:15-18). 시편 저자는 인간의 관행은 시대마다 변하나 하나님의 법도는 영원히 지속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신자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자다. 하나님의 법도는 어느 시대에만 타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자손의 자손에 미치고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언약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란 결혼이란 이성 간에 이루어지며, 성적 교류도 동성이 아니라 이성 간에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이다.

 

VII. 한국교회는 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지난 7월 14일-15일 서울광장에서 동성애자들의 축제가 있었다. 소위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 동포들의 인권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으면서도 동성애자 인권을 주장하고 선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축제에 성소수자의 인권부스를 차려서 공식 참가한 것은 인권위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에 3차로 있었던 퀴어축제로 서울광장은 동성애 선전장이 되어 버렸고, 성인 남녀들이 거의 벗은 몸으로 음란한 모습을 연출하여 인간의 품위를 훼손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인 동성애 추세를 보면서 유다서의 말씀이 연상된다. 사도 유다는 거룩한 사도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8). 위의 문장은 세상의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 때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권위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바로 오늘날 21세기가 성(性)질서가 무너지고 간음과 간통이 사회적으로 허용되고 동성애와 동성혼이 허용되는 때라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 선전자들은 집단 속에서 분열을 일으키며 육에 속한 자들이며, 성령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이번 퀴어축제에서 보는 바같이 정상적인 성질서에 사는 자들에게 음란한 행실을 보임으로써 혐오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맺음말

동성애는 예전부터 있어온 그릇된 성문화적 추세요,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에는 더 크게 만연하는 타락한 인간들의 그릇된 성적 관습이다. 동성애는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성질서의 옳고 그름의 문제다. 순리가 아니라 역리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것이다. 동성애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성적으로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정과 사회를 존속시키는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동성애 행위를 진리를 거짓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5).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10년전 보다 동성애에 대하여 예전보다 2배로 허용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피터슨 같은 복음주의 목회자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심지어 예일대 복음주의 철학자 월터스토프도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의 계시 말씀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번을 기회로 한국교회만은 이러한 동성애를 허용하는 비성경적 입장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선지자와 사도와 종교개혁자들이 전해준 사도적 신앙 위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세우고 진리의 등대가 되어 진리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널리 비춰야 할 것이다. 사도 유다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같이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9).

 

김영한  yunghankim1@naver.com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80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미군·미국인·미국 돈이 빠지는 날...


수풀을 들추고 드러난 진실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한 손을 털고 다른 한 손도 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얼핏 윤곽을 잡기 어렵다. 한미동맹의 ‘동맹’을 강화한 것 같기도 하고, 남북교류의 소위 ‘자주’를 강조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일까.

 

한미동맹? 7월4일 북한의 자칭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전후로 열린 한·미·중·일·러 정상들의 양자 및 다자 회담을 거치며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북한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하는 등 일련의 정상회담에서 ‘선(先)제재, 후(後)대화’ 노선을 보였다. 한·미·일은 94년 정상 회동 시작 이후 처음으로 공동성명도 채택했다.

 

공동성명 내용인즉 “한반도 비핵화 원칙으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즉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강조한 뒤 “미국의 재래식 및 핵 역량을 활용한 한국과 일본에 대한 철통같은 방위 공약을 재확인하였다”며 “국제사회가 북한과의 경제적 관계를 축소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고 “북한과 국경을 접한 국가들”, 즉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북한을 설득하는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라”고도 했다.  

 

반면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3일 회담을 통하여 ‘사드 배치 반대’와 ‘제재보다는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5일 열린 UN안보리 회의에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주장한 것을 ‘중거리 미사일’이라며 언론 성명 채택을 무산시켰다. 시 주석은 6일 文대통령 앞에서 “北·中 혈맹”을 역설했다. 중국·러시아로선 북한 핵보다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 견제가 더 우선적인 국익이라고 보는 것이다.



<北정권 교체나 붕괴 없다는 4NO 원칙>

 

정부는 표면적으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협력의 불가피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는 전제가 있다. 文대통령은 6월30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나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며, 북한 정권의 교체나 정권의 붕괴를 원하지도 않는다. 인위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가속화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4No’의 원칙을 밝혔다.

 

이는 7월6일 베를린 쾨르버 재단에서 밝힌 대북 평화구상으로 이어졌다. 역시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며, 정권의 교체나 붕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나아가 남북관계가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른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할 것이란 요지를 밝혔다.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한 비정치·민간 교류 지원의 의지도 역설했다. 대북지원은 8일 G20정상회의 대통령 연설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됐다.



<피할 수 없는 답을 피해 가면 시간만 흐른다>

 

한반도 문제의 해법은 김정은의 개과천선이다. 핵개발을 포기하고 개혁·개방하면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인 상상이다. 핵무기는 업적 없는 김정의 유일한 권위의 ‘근원’인 탓이다. 가짜 백두혈통 출신, 인민에 가져다 준 것은 가난뿐이다.


핵무기를 포기하면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지도자, 최고 존엄 김정은의 민낯이다. 개혁·개방까지 나선다면 체제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주민들이 인터넷만 사용해도 김정은을 지도자로 따를 리 없다. 핵 포기와 개혁·개방은 과거에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미래에도 불가능하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혈로는 70년 체제의 운명을 걸고 개발해 온 핵과 함께 북한 체제를 끝내는 것이다. 압박과 봉쇄와 억지(deterrence)로 백기를 들게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답을 피해 가면 시간만 흐른다.


한·미·일 3국은 7월4일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닌 ‘대륙 간 사거리를 갖춘 탄도미사일’로 공식 규정했다. ICBM에 버금가는 사거리를 갖춘 것으로는 평가되지만 대기권 재진입체 등 핵심기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음을 고려한 것이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수년 내’ ICBM은 완성될 것이다.

 

ICBM이 완성으로 치달으면, 미국도 ‘독자적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다. 북폭을 할 수도 있지만 타협할 수도 있다. ‘북폭’은 화끈해 보이나 중국과 러시아, 복잡한 외교적 문제를 낳는다. 무엇보다 4No원칙을 밝힌 한국 정부의 절대적, 사실상 결사적 반대를 넘기 쉽지 않다.


‘타협’은 북한과 단계별로 적당히 주고받는 게임이다. 핵 폐기 이전에 테러단체에 핵 확산을 하지 않고 외부도발, 핵실험·미사일 발사를 자제해 준다면 이른바 평화협정을 맺어주는 시나리오다.



<북폭이냐, 타협이냐>

 

미국이 북폭이 아닌 타협으로 선회하면 북한정권과 한국정부, 중국과 러시아 모두 환호할 지 모른다. 그러나 타협의 미래는 어떨까? 한미동맹은 유지될 수 있다. 동맹의 파기는 ‘미국’은물론 ‘한국’에게도 부담스럽다. 다만 북한과 그 뒤 중·러의 힘이 남진(南進)하며 한·미는 말 그대로 형식적 동맹이 된다. 주한미군 지상군은 철수하고 해군과 공군은 한국의 기지를 활용할 것이다.


지상군을 붙박이로 한반도에 두지 않는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다. 미국은 타협의 대가로 중국과 한국에 대해선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일본과 동맹을 강화해 ‘대륙세력의 힘’을 누르려 할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미래를 이미 상정한 것인지 모른다. 6월30일 나온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조건에 기초한 한국군으로의 전작권 전환이 조속히 가능하도록 협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文대통령 임기 내에 전작권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전작권 전환은 노무현 정부가 2012년 4월로 이양을 합의한 후,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천안함 폭침 3개월 뒤 2015년 12월로 연기했고, 박근혜 정부 들어 북핵 문제 해결 뒤로 무기한 연기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조속한’ 전환을 재합의, 5년 내 전작권 전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전작권이 한국군에 넘어가면 한미연합사령부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단 사실이다. 연합사가 사라지면 한미동맹은 더욱 형식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미국이 한국서 한쪽 손을 터는 것이 된다. 주한미군이 해·공군 위주로 잔류하건 한미동맹의 틀 거리가 유지되건, 거대한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70년 간 유지해 온 해양세력과의 연대가 느슨해지고, 그 이전 반 만 년 계속돼 온 대륙세력과의 결합이 견고해지는 미래이다.


그 틈을 파고들며 남한 정부와 북한 정권의 교집합인 6·15와 10·4선언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맺어질 것이다. 한미 간 동맹을 남북 간 연합이 대체하는 셈이다. 미국을 통해 유입된 자유주의에 대륙의 사회주의 흐름이 섞이며 가치의 혼재와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다.



<한 순간 봇물 터져 미군·미국인·미국 돈이 빠지면>

 

상황은 더 극으로 치달을지 모른다. 남한에 국가보안법 철폐와 반공세력 약화로 주사파가 더욱 창궐하면 주한미군 기지 등을 중심으로 반미시위가 격렬해진다. 한 순간 봇물이 터지며 미군과 미국인, 미국 자본까지 빠져나갈 수도 있다.


남(南)월남은 1973년 1월 평화협정 체결 이후 주월미군이 철수했고 2년 뒤 북(北)월맹의 남침으로 멸망했다. 한반도에서는 1950년 1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반년 뒤인 6월25일 김일성이 남침했다. 설령 미군이 모두 다 나가지 않아도, 한국이 전체주의 국가인 北·中·露와 유착해 과연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드(THAAD)의 한국 배치가 지지부진하면, 이는 미국의 ‘독자행동’을 부추길 것이다. 2기가 경북 성주에 들어와 있지만 레이더 가동에 필요한 유류 공급이 원활치 못하다. 4기를 추가로 배치할 때까지 이른바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거쳐야 한다. ‘일반 환경영향평가’는 반미 성향 시민단체들의 공청회·토론회·세미나 등 숱한 난관을 안고 있다. 정부는 “사드 철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급속도로 개량되고 사드 배치가 시간을 끌게 되면, 미국은 남은 한쪽 손마저 털 수 있다. 역시 ‘북폭’ 아니면 ‘타협’을 저울질할 테지만 한국의 결사반대 아래서 후자로 기울 공산이 크다.   



<'악'을 '악'으로 보지 않는 또 다른 '악'>

 

남북문제를 보는 뷰(view)는 북한 정권에 ‘연민’을 느끼는 순간 왜곡돼 버린다. 악(惡)을 악으로 보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작은 악이다. ‘시간과 돈을 주면 평화로 갚을 것’이라는, 북한의 선의(善意)에 기대는 햇볕정책은 진실이 아니며 성공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햇볕정책이 달빛정책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엄동(嚴冬)정책으로 각을 잡지 않는다면 북한의 변화는 요원한 일이다.

 

중국의 국제 전문가들조차 文대통령이 추진하려는 외교 정책이 난관에 봉착할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스인훙(時殷弘·시은홍)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7월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미·일과 중·러의 갈등 전선이 매우 뚜렷해졌다”며 “文대통령도 매우 곤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추수룽(楚樹龍·초수룡) 칭화(淸華)대 교수도 “文대통령이 온건한 대북정책으로 관계 개선 의사를 표시하고 남북회담 의사를 밝혀도 북한은 현재까지 (한국을)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추 교수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 뜻을 전혀 바꾸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반도 비핵화, 한미동맹 강화, 한·미·일 공동대응, 한·미·일 vs 북·중·러 대치 등 새로운 형태의 냉전을 암시하는 컨셉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수풀을 들추고 드러난 진실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한 손을 털고 다른 한 손도 털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형식화, 주한미군 무력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6·15와 10·4선언의 낮은 단계 연방제 속에서 해양과 맞닿아 온 기존의 문명 축은 대륙으로 급선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되살아나고 한반도 평화로 분식된 분단은 고착되며,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국지적 도발을 막기 위한 대북지원은 상습화된다.


한미동맹 이완으로 주변 강국 횡포도 늘어날 것이다. 미군·미국인·미국 돈이 슬슬 빠지며 장기적 침체와 국가의 쇠락 속에 남미식 몰락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노예상태에서 신음하는 북한의 2,400만 동족의 고통을 외면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유일한 변수는 북한정권의 조속한 붕괴, 급변사태 뿐이다.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fc]=1&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1084

 

심일보 대기자]국제 엠네스티가 “시민의 정치적 자유 국제조약에 위배된다"며 지난 3월 제출한 청원서에 대해 '박근혜 재판'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6일 월드한인총연합회(공동대표 정재윤·최창건·황일록)를 비롯한 미국, 카나다, 아메리카, 중국, 등 9개 국가 116명은 지난 3월 6일 대한민국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절차의 “시민의 정치적 자유 국제조약” 위반했다며 국제 앰네스티 국제본부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를 청원한 것에 대한 회신이다.

청원내용에는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신속심리의 위법성과 조약위반성, 시민의 정치적 자유 국제협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의하면 ,범죄피의자는 무죄로 추정되며(제14조②), 또한 방어를 위한 상당한 기간을 보장해야 한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론기일 연장신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용하지 아니하고, 부당한 이유로 조기에 심리를 종결하고, 신속한 재판을 하는 것은 국제조약에 위반하므로 무효라는 주장이다.

한편 이와 관련 극우 성향의 정미홍 더코칭 대표는 12일 자신의 SNS에 "엠네스티에서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인권유린적 재판에 대해 조사에 착수한다는회신을 받았다. Amnesty International 런던본부에 인권침해 specialist가 배당되어, 재판의 진행과정 처리조사와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인귄유린적 재판에 대한 적절한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맑했다.

이어 "미국에서 탄핵 진실규명을 위해 헌신하시는 목사님께서 큰 역할을 하셨다. 유엔 인권위와 트럼프대통령,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게도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불법 파면과 살인적 재판에 대한 진실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정 대표는 "국제 전문가들을 동원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유 민주의와 법치 파괴행위에 대해 진실을 알리고, 박근혜대통령 구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반드시 이긴다"고 말했다.
 

심일보 기자 jakys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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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기적의 인생 드라마 -

1949년 당시 12세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 운동하던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 왔다.

서울중학교에 입학했고 1년후 북한의 6.25 남침때 피난가지 못하고 고아가 되었고 그날의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 에게 서울중고등학교 교실에 불을 지르라 했다.

당시 서울중고등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 이 훈련받고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가는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이 불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한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교실 옆 목조 건물에다 불 지르고 북아현동 자신의 집으로 도망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큰 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 앞에 도착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처형 하겠다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 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길에 끼어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 희망원으로 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아원 원장의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들어 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은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 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희들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멩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 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을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어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 약값을 모으기를 했다.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약값을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하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 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 공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 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 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 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 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하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물었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 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 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콜릿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양아버지의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 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1957년 하버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 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즉,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버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 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지프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준 하나님

임종덕은 먼저 포겟 성경을 끄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이 포겟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 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너를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 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성경의 시편 1장에서 3장까지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였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 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번 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시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즉, 북한군 몇 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 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고 죽겠네! 아이고!” 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 마이 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2번째 포로가 된 임종덕을 다시 찾아온 하나님

한편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데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 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소위『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당시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 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하루 일과가 너무나 심심하니까, 이『러시안룰렛』놀음판을 매일 한 번씩 하는데 어떤 날은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 『러시안룰렛』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명씩 박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매콩강에 뛰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 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한 달 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 달 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 달 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따라 여자 경호원이 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 달 동안 훈련시켜준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선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발을 장전 두루룩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 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간에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 달 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드디어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 초 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이런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 날 특수전 훈련 때 배운 대로 뛰어든 그 물 속 그 위치에서 1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 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백 미터 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동안 2백 미터 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형 물뱀과 악어들 속에서 살아나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 내려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 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콥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콥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는 베트콩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콩인 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군데도 부상 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

임종덕은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임종덕에게 다시 그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콥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콩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인의 패잔병으로 판단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콥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콥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 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당한 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 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 째 되는 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더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

임종덕은 키가 팔 척 대장 같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한편 대위에서 6년 후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m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였다.


그 후의 남은 이야기

백악관서 은성무공 훈장, 대통령 안보비서관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에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기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5년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을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 번 만나면서 주은래가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개로 결혼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 때,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 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해졌다.

노벨평화상 감이 된 탁구공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 한 대로 1972년 2월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이민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 교회 설립

임종덕비서관은 LA출장 중에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 년 전 1953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그래서 임종덕비서관은 임동선 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 텐데 와서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여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종덕비서관을 장로추대를 했으나 자신이 장로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장로학과 장로란 책 두 권을 필독하고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미국 대통령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1974년 양아버지가 83세로 서거하고 화이트장군은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버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도 1979년 양국 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월19일 카터대통령을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 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보시요”하여 “ 현재 4만여 미군이 주둔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 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했다.

임종덕은 대통령비서관이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되므로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여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텅 빈 교회에 들어가서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을 예편하면서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미국 육사의 교과서 주인공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처 힘없이 누어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 ‘우물가의 소년’이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 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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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닐하던 뽕나무밭이다.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일하던 뽕나무밭이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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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버림받은 7살 소년 임용남은 서울역 인근 남대문시장에서 국화빵 몇 개를 얻어먹은 것을 시작으로 걸인 생활로 접어들었다. 한뎃잠을 자고 구걸해서 배를 채우면서 유령처럼 도시를 떠돌았다. 그래도 엄마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어 참을만했다.

추위를 피하려고 우연히 찾아 들어간 다리 밑 거적때기 오두막에서 걸인 노인을 만났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잘 빌어먹는 법'을 터득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그는 걸인 노인과 헤어져 엄마 찾기에 나섰다. 본격적인 유랑을 시작한 것이다.

문산, 의정부, 안양, 인천, 부평….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마다 '아들 버린 것을 후회하며 엄마도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이 상상만 하면 다리에 힘이 붙었다.

거리에서 만난 형들(걸인)과 어울리다가 범죄에 휘말려 파출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형들이 도둑질하는데 망을 본 것이다. 다행히 나이가 어려 감옥이 아닌 보육원에 보내졌다. 부평에 있는 에덴 보육원이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 보육원을 탈출한 그가 향한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 얻어먹고 한뎃잠을 자며 수원에서 한 달가량을 버텼다. 자연스럽게 다시 걸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맞춤한 잠자리를 찾아 누우려던 찰나였다.

"팔달산 근처였어요. 경찰이 저를 손짓하며 부르는데,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그 경찰이 저를 다짜고짜 지서로 끌고 갔고, 다음 날 아침 수원 군청(시청)으로 넘겼어요. 그곳에 도착해 보니 '전국 부랑아 일제 단속 기간'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붙어 있었어요. 그제야 저를 왜 끌고 왔는지 알 수 있었죠." 

소년 임용남은 여기저기서 붙잡혀 온 3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 선감도로 끌려갔다. 1963년, 그의 나이 만 12살이었다. 소년들은 죄가 있어서 끌려간 게 아니었다. 운이 나빴을 뿐이다. 죄가 있다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것, 배가 고파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것, 잠 잘 데가 없어 한데서 잤다는 것, 그러다 보니 옷이 무척 남루하다는 것뿐이다.

지난 1998년경부터 선감학원의 진상을 조사한 정진각 안산지역사회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당시는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정권이 아이들을 무더기로 잡아서 수용하던 때였다. 이른바 '후리가리(일제 단속)'라고 해서, 100명을 잡아넣으라는 지침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채워 넣어야 하는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부랑아도 아니고 고아도 아닌, 부모가 멀쩡하게 있는 아이를 유괴하다시피 해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하다.

폭력은 일상, 구걸해서 먹는 밥보다 못한 식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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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걸인 생활보다도 못한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구걸해서 먹는 것보다도 못한 식사가 나왔고 매 맞는 일은 일상처럼 돼 있었다. 자유도 없었고, 그 대신 단체 생활에서 오는 고단함만 있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성폭력이었다. 어리고 곱상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검은 손이 뻗어 왔는데, 소년 임용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요. 엄청난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거죠. 밤만 되면 지옥이에요. 함께 잠을 자는 막사 안에서도 그 짓을 했고, 산에 끌고 가서 하기도 하고. 아파도 소리 못 질러요.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낫이나 칼로 찌른다고 위협하니까요. 그때 총이 있었다면 다 쏴서 죽였을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반항을 하니까 그때야 그들이 그 짓을 멈췄어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감옥에도 갔었는데, 그곳이 선감학원보다 훨씬 나았어요."

그들은, 막사에서 힘이 있는 계층인 사장(막사의 장) 반장 같은 스무 살 정도 된 청년들이었다. 가해자는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피해자는 지옥이었다고 임 목사는 회상했다.

"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렸어요. 권력, 섹스 등. 쌀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요. 힘없는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으니 그들은 어쩌면 밖으로 나가기 싫었을 수도 있어요. 다리 주무르기부터 빨래, 잔심부름까지 다 해주었거든요. 그 시절에 어디 가서 쌀밥을 먹고,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힘없는 소년 임용남에게 그곳은 지옥이었다. 엄마를 찾을 수 없어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탈출뿐이었다. 탈출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자유를 얻게 된다. 6번째 탈출에도 성공했지만, 수원에서 다시 일제 단속에 걸려 선감학원으로 끌려가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잦은 탈출, 주의할 인물로 찍혀서...

 선감학원 피해자 임용남 목사
 선감학원 피해자 임용남 목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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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에 온 지 채 10일도 지나지 않아 소년 임용남은 탈출을 결심했고, 몇 달 뒤 첫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한 뱃사람 눈에 띄어 바다에 발도 담그지 못하고 실패했다. 뱃사람 만류로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고, 그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선감학원 사감 선생 등에게 붙잡힌 것이다.

붙잡혀 와서는 죽도록 맞았다. 곡괭이 자루로 맞았고 쌀부대 같은 데 집어넣고 몰매를 가하는 '부대 말이'도 당했다.

두 번째 탈출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화장실 문짝을 떼서 뗏목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실패했다. 화장실 문짝으로 센 물살을 헤쳐 나가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바다에 떠서 오도 가도 못 할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나가는 배가 있어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역시 몰매가 뒤따라 왔다. 첫 번째 탈출 때보다 훨씬 센 강도였다. 겁도 없이 화장실 문을 뗐다며 사감 선생이 미친 듯이 회초리질을 했는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선감도를 오가는 선박의 창고에 숨어든 게 세 번째 탈출이었다.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선주에게 들켜서 실패했다. 그 뒤로도 소년 임용남은 2년 동안 총 2번의 탈출을 더 감행했는데, 그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밤에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은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여섯 번째 탈출은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선 죽을 힘을 다해 수영을 연습했다. 그 덕분에 수십 명이 선수로 참가한 선감학원 수영대회에서 6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물때도 잘 맞춰 소년 임용남은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선감학원에 끌려간 지 3년여만이었다.

탈출한 지 3일만에 다시 일제 단속에 걸려서

 어린 넋을 건져 올리는 홈 맞이 굿이 열린 선감 선착장,
 어린 넋을 건져 올리는 홈 맞이 굿이 열린 선감 선착장,
ⓒ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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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쁨도 잠시, 소년 임용남은 수원에서 또 경찰에게 붙잡히게 된다. 탈출한 지 약 5일만이었다. 경찰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간 소년 임용남은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글자를 마주하게 된다. '전국 부랑아 일제 단속기간!'이라는 글이다. 3년 전에 일제 단속에 결려 끌려가 죽을 고생 끝에 탈출했는데 또 일제 단속에 걸린 것이다.

소년 임용남은 다시 선감도로 끌려가게 된다. 선감도로 오는 배 안에서는 자살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려 했지만, 경찰에게 가로막혀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 참담함이란, 가슴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탈출하기 위해) 헤엄치다가 차라리 고기밥이 되는 게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소년 임용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폭력이었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다음 숨이 꼴딱 넘어가기 전에 꺼내주는 이른바 물고문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물고문과 함께 가해지는 채찍질과 몽둥이세례도 끔찍했다. 시야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기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 보니 양호실이었다.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면서도 무턱대고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요. 그곳에 있는 3년 동안 10번 정도 죽음을 목격했는데, 대부분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경우였어요. 정말 끔찍합니다. 몸은 퉁퉁 불어 있고, 조그마한 조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시체를 건지면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묻으면 그만이에요. 개죽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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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Freedom Rally 연설!

(꼭 다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7월 1일,

독립기념일(7월 4일)을 맞이하여서 워싱턴디시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제가 들은 어느 연설보다도 훌륭한 연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연설에서 세가지 면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습니다.


둘째는, 가짜 미디어와 언론을 향해서

“내가 대통령이지 너희들이 대통령이 아니다.” 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셋째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약은:
1)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
2) 이제 미국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부를수 있게 될 것이다.
3) 미국에서 우리는 정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
4) 우리는 미국의 공공기관이나 공립학교에서 하나님이 제외되는 것을 원치않으며,

    축구경기와 같은 공공모임의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5) 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알기를 원하고,

    존경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정부가 통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6) 나는 종교 자유의 법안을 담은 행정 명령을 내려서,

    교회들의 정치적인 지지와 반대를 못하게 제약하는

    “존슨수정안 (Johnson Amendment)” 을 중지시켰다.
7)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한, 어느 누구도 당신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거나 복음전파를 방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8) 우리는 모두 같은 미국의 성조기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9) 우리는 모두 같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다.


역사상 어느 미국의 대통령도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연설을 한적이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요시야 왕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우리 모두가 트럼프 대통령의 안전과 리더십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영상으로 확인>

[선감도의 비극 ⑦-1] 양어머니의 학대, 도망치던 순간이 악몽이 되어

[오마이뉴스 글:이민선, 편집:성낙선]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 막사,
ⓒ 이민선
"제 말 안 믿어지죠?"

이 말에 무심코 "네!"라고 대답했다가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그럼 그만합시다. 믿지 못하는 사람한테 말해서 뭐해!"라며 실망스러운 듯 입 언저리를 씰룩거렸다. 다행히 잠시 뒤 감정을 추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증거가 될 만한 서류 같은 거 없나요? 저는 사실만을 써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했다가 또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실수하셨네!"라며 다시 입을 닫았다. 급히 '그런 뜻이 아니고, 증거가 있으면 더 신뢰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불쾌했다면 사과합니다'라고 수습 멘트를 날렸다. 그는 "뭐 그렇다고 사과할 일은 아니고"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쁘시겠지만, 내 평생 한이니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죽음으로 증명하라고 하면 나 죽어 드릴게."

내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던 것일까! 아니면 조급함이 서렸던 것일까. 그가 소리치듯 한 느닷없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잘 듣고 있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터뷰가 5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나 또한 지쳐가고 있었던 탓이다. 소리를 한 번 치고 난 뒤에 속이 후련해졌는지, 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절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지옥의 소년 수용소 안산 '선감학원'과 한국의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부산 '형제복지원'을 모두 거친 태장희(52세)씨와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7시간 넘게 이어졌다.

인터뷰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이러다가 숨이 멎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그의 열악한 건강 상태였다. 갑자기 힘이 몽땅 빠져 나가 버린 듯 목소리가 잠겨 들기도 했고 폐가 찢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기침을 해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연한 일을 벌여,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육신은 죽어 가는데 정신은 놀라울 만큼 명료

 태장희씨 다리, 지금은 훨씬 더 상태가 안좋다.
ⓒ 태장희
그를 지난 6월 28일 대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인터뷰가 정말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병색이 깊어 보여서다. 오른쪽 눈은 거의 감겨 있고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풀어 있었다. 스타킹 사이로 보이는 다리 빛깔도 거무죽죽했다.

그를 괴롭히는 병마는 뇌종양, 심부전 등 듣기만 해도 혀를 차게 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다. 그가 내민 진단서(2013년 발급)에는 '고혈압, 당뇨, 통풍, 심부전, 진폐증, 뇌종양'이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호흡곤란 등의 증상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급사의 위험이 있다'라는 의사의 소견도 있었다.

이 병마와 그는 수년째 함께 살고 있다. 의사는 이미 진단서를 발급한 지난 2013년에 길어야 3~6개월 정도 살 수 있으니 (삶을) 정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있다. 더군다나 그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다.

"내 몸은 이미 죽어 있어요. 그때(2013년)는 그래도 시력은 있었는데, 지금은 시력도 거의 없어요. 누우면 숨을 쉴 수가 없어 눕지도 못해요. 이 상태로 수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치를 이미 넘어 섰어요. 어째서 저에게 24시간 고통 받으면서, 잠 한 번 편히 잘 수 없는데, 이토록 명료한 의식을 지금까지 주시는지! 이 몸을 가지고 버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한다는 것만 알면 좋겠어요."

이 말과 함께 그의 처절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돈암동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네 살 터울 그의 형과 그를 잠시 이모가 맡아 길렀지만, 생활이 어려웠던지 어느 날 그를 홍씨 성을 가진 아들 없는 종갓집 '업둥이'로 보내 버렸다. 포대기에 싸서 홍씨 대문간에 버린 것이다.

이것도 장성한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해 한때 잘 나갈 때 사설탐정을 고용해 알아낸 사실이다. 그 전에는 이마저도 알지 못했다.

치매 걸린 할머니 송곳으로 찌르라 강요, 갈가리 찢긴 동심

 태장희 씨 어릴적 사진.
ⓒ 태장희
그의 양부모는 그에게 홍장희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는 했지만, 그를 홍씨 집안 자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업둥이를 내몰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두려워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했다.

"누군가 저를 안아준 기억이 없어요. 늘 맞을까 봐 두려웠고요. 그곳에서 10살, 광명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도망쳤는데, 지금도 도망치던 날 기억이 생생해요. 어렸을 때는 그 날 일이 악몽이 되어 자주 나타나기도 했고요."

그를 심하게 학대한 것은 양어머니였다. 학대는, 그의 양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완전히 역전이 된 거죠. 논 두 마지기에 팔리듯 시집와서는 아들 못 낳는다고 시어머니한테 엄청난 학대를 받다가, 치매에 걸리자마자 복수를 시작한 거예요. 툭하면 아무 이유 없이 할머니를 꼬집고 깨물고. 전 무서워서 말릴 수도 없었어요. 나중엔 송곳으로 찌르기까지 했는데, 언제부턴가 저한테 찌르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하지 않으면 그 송곳으로 저를 찔렀고요. 무서움에 덜덜 떨며 할머니를 찌르면서 제 동심은 갈가리 찢어졌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양어머니의 학대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남편이 툭하면 새벽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 저를 무릎 꿇려 놓는 거예요. 밥도 못 먹게 하고요. 힘들어서 다리를 풀면 그 두꺼비 같은 손으로 '빡' 그러면 저는 그냥 날아가요.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여자 슬리퍼 끄는 소리였어요. 그 소리만 나면 저는 숨이 막혔어요. 넥타이를 제 목에 감고 발로 제 어깨를 누른 뒤 당겼는데, 혀가 다 빠져 거품 물고 죽게 될 정도가 되면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이거 한참 하다 지치면 돌아가요. 그러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지요. 너무 어리니 대항할 수도 없고 분노할 줄도 모르고. 그저 두렵기만 한 거죠. 도망칠 때까지 제 일상이 이랬어요."

어느 날, 어린 홍장희가 '(학교에서) 엄마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양어머니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양어머니의 손에는 불에 벌겋게 달궈진 연탄집게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몸을 숱하게 아프게 했던 무서운 연탄집게였다. 그가 10살 된 겨울에 벌어진 일이다.

"5원짜리 동전을 꺼내려고 학교 스케이트장 얼음을 깬 적이 있는데, 그 일로 학교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고, 엄마 모시고 오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말을 전하자 그 시뻘건 연탄집게로 제 배를 인정사정없이 찔러 버렸어요. 갈 데까지 간 거죠. 가학증은 갈수록 심해지잖아요."

개밥 뺏어 먹으며 서울역까지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극한의 강제 노력 또한 수행해야 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그때 "도망쳐"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세 들어 살던 새댁이었다. 소년의 머리에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새댁은 "애한테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악을 썼다. 그리고는 "너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고 소리치며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소년은 죽을 힘을 다해 대문으로 내달렸다. 양어머니가 무어라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는 사이 신발 한 쪽이 벗겨졌다.

소년은 그 길로 버스를 얻어 타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까지 도망쳤다. 시장통에 떨어져 있는 배추 잎사귀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그 잎사귀에서 나온 즙으로 살에 눌어붙은 옷을 떼어냈다. 그러나 세상은 10살 어린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시장 경비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 신림동 파출소를 거쳐 봉천동에 있는 한 아동 보호소에 가게 된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여자 선생님이 있었고 먼저 말을 걸어준 예쁜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친절한 여자 선생님은 집 전화번호를 대라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그는 결국 집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다음 날 그의 양부모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끌려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목을 죄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뒷산으로 뛰었다. 밤낮없이 뛰다 보니 서울 동작구 흑석동이 나왔고 한강 다리를 넘자 서울역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서울역까지 가는 동안의 배고픔은 견공들이 해결해 줬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미안해' 하자 인심 좋게도 견공들은 자기의 밥을 뺏어 먹는 소년을 물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와 양부모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먼 훗날 마흔 줄이 넘은 홍장희가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딱 한 번 홍씨 일가와 연락이 닿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독한 악연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일이었을 뿐이다. 양부모인 홍씨 집안에 연락을 한 것은 병원이었다. 호적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씨 측에서는 매정하게도 병마에 휩싸인 홍장희에게 '그런 아들 없다'며 '유산 상속 문제도 있으니 호적을 파가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홍장희에서 태장희로 바뀐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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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 뉴스

남조선도 전쟁 터지면 무사할 수 없다"

(서울=연합뉴스) 북한은 지난 4일 실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 발사를 통해 미사일 탄두부의 대기권 재진입 및 단 분리 기술을 시험했다고 노동신문이 지난 5일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홍국기 기자 = 북한이 최근 대북 군사옵션을 시사한 미국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강력히 반발하며 이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북한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7일 대변인 담화에서 "미국은 군사적 공격 방안이 우리가 전략적 조치를 취하면 곧바로 대통령에게 제출될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며 "트럼프 역시 '북한에 대한 매우 강하고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느니 뭐니 하며 우리에 대한 군사적 공격기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이날 담화는 미국 CNN방송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국방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북한이 지하에서 핵이나 탄도미사일 시험을 감행하면 군사적 대응을 포함한 옵션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될 것이라고 전한 것에 대한 반발이다.

또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지난 5일(현지시간)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발사 도발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대북 군사옵션을 시사한 사실도 이번 담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유엔본부<뉴욕> AFP=연합뉴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발사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는 5일(현지시간) 뉴욕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전체회의에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말하고 있다. 헤일리 대사는 "우리가 가진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가 막강한 군사력(considerable military forces)"이라며 "미국은 스스로와 우방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 능력들을 최대한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bulls@yna.co.kr

담화는 '화성-14형' 시험발사에 대응한 한미연합 탄도미사일 사격훈련 등을 언급하며 "미국의 단말마적 발악으로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조선(대북) 적대시 책동이 극히 무모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우리 군대와 인민은 트럼프의 미치광이 같은 군사적 선택에 기꺼이 대응할 만단의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며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 보따리들을 자주 보내주어 미국을 더욱 불쾌하게 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담화는 "미국의 음흉한 선제공격 기도를 대화니, 주도적 역할이니 하며 가리워(가려)보려는 남조선 당국도 일단 전쟁이 터지면 무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redflag@yna.co.kr

미국의 북폭이 이뤄지려면

미국입장에서는 당연한 얘기지만,

자국에 손해가 최대한 가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손해를 최소화 해야하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이,

1. 주한 미국인들이 빠져나가야 함.

2. 미국의 자본들도 빠져나가야 함.

3. 미군 또한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전투를 해야 함.


즉, 전시상황으로 이어질 남한에서 싸우면

군인들의 피해도 막심할 것입니다.


미국은 이미 남한내에 RO같은 간첩세력이나

북한군의 땅굴침투에 의한 공격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국입장에서는 자국에게 위협이 되는

북한의 핵시설만 파괴만 하면 됨으로

미군의 불필요한 희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만약, 이상의 조건이 이뤄지지 않아,

미국의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상당 수 발생한다면,

미국의 국민여론에 의해 트럼프가 탄핵될 위기에 몰릴 것입니다.


어쨋든,

미국이라는 세계최강국가가  북한이 핵완성이 된 이후

미국본토까지 날릴 정도의 장거리기술력(ICBM)이 확보되면,

미국이 북한의 핵위협에 끌려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에,

미국은 절대로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북한이 100발의 핵을 날려 99개가 막힌다 치더라도

단 1개의 핵이 미국에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의 핵은 완성된 상태고,

미국 본토 (LA)까지 날릴 수 있는

장거리미사일능력은 완성단계 수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정부의 승락 없이도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 무!조!건!

북한의 핵시설을 파괴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이유는,

중국의 입장은,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의 핵시설은 부셔도 좋다...

하지만 미군과 한국군이 3.8선 위로 군사를 동원해 북한을 수복하려하면

중국도 가만 있지 않고 군사행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중국은

과거 6.25때처럼 한반도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다시 말해, 중국이 북한을 먹고 싶어한단 얘기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나왔듯이...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원래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였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전쟁나면 중국이  한반도는 원래 우리의 속국이니

우리가 도로 가져 가겠다라는 충분한 명분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원래 이런 말들은 양국간에 비밀리에 얘기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정부고 뭐고 죄다 좌빨간첩들이 곳곳에 득실대는 상황이니,

메인 뉴스로 그냥 날려버리고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첨엔 몰랐다가...

홍준표 후보가 싸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또 지금 정리하면서 그것이 맞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엇습니다.


문제는...

한국 국민들의 통일의지가 있냐는 것인데,

현재 하루종일 좌경화된 언론들의 편파보도만  보고

이미 우물안 개구리가 되다시피한 국민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우리가 왜 전쟁을 해야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한심한 수준의 안보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국민들 다수가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에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현재 본인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 바른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은 커녕,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주한미국인들과 자본들이 빠지기 시작하면

그 때는 눈치 챌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도

이미 6.25때 전쟁나기 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도...

다시금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소위 지식인이라며 

배우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월북을 감행해서 스스로 빨갱이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전쟁중에도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는 주어진다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전쟁이 날 것이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때는,

미국인과 미국자본이 빠지는 때,

그 때가 거의 맞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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