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대장쟁이


내가 무슨 공으로 세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혹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거나 하나님을 오해하는 생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빚을 지실 분이 아닙니다.
무엇이 부족하시거나 필요하시거나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십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지구에서 1억 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태양은 지구가 130만 개나 들어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1초에 수소 약 400만 톤을 핵융합하여 헬륨으로 변환시키면서 빛과 에너지를 내뿜습니다.
수소 400만 톤이면 수소폭탄 몇 개냐고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몇 천억 개인지, 몇 조 개인지..
그렇게 엄청난 수소를 태우는데 태양이 금방 다 타버리는 거 아니냐고요?
그런 걱정 필요없습니다. 태양이 가지고 있는 수소는 수십억년을 쓰고도 앞으로도 수십억년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랍니다.

인간 중에 누가 그 태양의 에너지를 사용한 대가로 연료를 넣어 주고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공기와 물을 쓰고 그 사용량을 보충하여 되갚아 드리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거저 쓰고 공짜로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을 있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 위에, 그 태양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무슨 도움이 필요하며 무슨 빚을 지시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에는 아무것도 도움 받지 않으시면서 모든 것을 베푸시는 전능자, 창조주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품는 순간 그것은 내가 무엇을 넣어 주어야 태양이 나를 비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 드려야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내게 먼저 빚을 지고 그 빚을 구원으로 갚으시는 "빚 지시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우주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다만 감사와 순종밖에,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밖에 드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비춰지게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별을 보여주시면서 후손을 약속하실 때 믿어서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 후손은 복수가 아닌 단수명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면서 무엇을 약속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며 약속하고 계십니다.  
"저와 같으리라."
그러므로 그저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처럼.
그러면 궁창에 빛나는 영원한 별이 될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뻐꾸기 둥지  (0) 2014.07.20
그 참혹한 광경의 예표  (0) 2014.07.14
밤하늘의 별을 보고  (0) 2014.06.30
(욥기 16)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0) 2014.06.11
욥기 15) 네가 무엇을 아느냐?  (0) 2014.06.06

a27.jpg


      건물(建物)은 높아졌지만
      인격(人格)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高速道路)는 넓어졌지만
      시야(視野)는 더 좁아졌다.

      소비(消費)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家族)은 더 적어졌다.

      생활(生活)은 편리(便利)해졌지만
      시간(時間)은 더 부족(不足)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所重)한 가치(價値)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學力)은 높아졌지만
      상식(常識)은 더 부족(不足)하고,
      지식(知識)은 많아졌지만
      판단력(判斷力)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專門家)들은 늘어났지만
      문제(問題)는 더 많아졌고,
      약(藥)은 많아졌지만
      건강(健康)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法)은 잊어 버렸고,
      평균수명(平均壽命)은 늘어났지만
      시간(時間) 속에 삶의 의미(意味)를 넣는
      법(法)은 상실(喪失)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宇宙)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世界)는 잃어버렸다.

      공기(空氣) 정화기(淨化器)는 갖고 있지만
      영혼(靈魂)은 더 오염(汚染)되었고,
      원자(原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偏見)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自由)는 더 늘었지만
      열정(熱情)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平和)는 더 줄어들었다.


      글 / 반기문 UN사무총장


'일상/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의 8개의 수족 여자 아이  (0) 2014.07.10
별난 미국 가지가지 다 있다  (0) 2014.07.05
건강장수를 위한 '발끝 부딪히기'  (0) 2014.07.03
만남  (0) 2014.06.18
신종사기 조심 하세요  (0) 2014.06.16

알곡과 쭉정이

노기송 ㆍ 2014/07/03

2년 만에 집회 차 한국과 중국 하얼빈에 다녀왔다. 팔십이 넘으신 외삼촌이 안산시에 계셔서 인사차 방문하였는데, 역시 지난 4월16일 세월호 침몰에 제일 피해가 컸던 단원고등학교가 있어서 안산시 전체가 마치 초상집 같았다. 단원고를 방문하여 애도라도 표시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긴 추모행렬에 일정상 밖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고 왔다.

전남 완도 섬에도 집회 차 가보니 초상집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와 완도는 해상거리로 10분 거리라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완도에서는 4월11일부터 5월 11일까지 국제해조류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행사 또한 썰렁하다 못해 같은 초상집 같았다. 그 대회 미주 홍보대사로 완도군에서 PGA 프로골퍼 최경주와 김정두 목사님(완도선교교회)을 두 명 선발하였다. 그중에 김정두 목사님은 행사 전 3개월 동안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전 미주를 돌며 열심히 홍보하였는데, 그만 세월호 침몰로 빛을 바랬다. 그런데 초상집 분위기는 안산과 완도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다. 특히 전라남도 교계는 이번 부활절 때 ‘예수 다시 사셨네’ 찬송가도 크게 부르지 못할 정도로 전체 부활절 예배가 침울한 가운데 드렸다고 한다. 세월호가 대한민국 전체를 침몰시켰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대한민국을 이런 분위기로 만들어 놓으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도 기독교의 가장 기쁘고, 즐거운 큰 절기인 부활절을 앞두고. 거기에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큰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 영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더욱 정신 차리라는 것이다. 특히 이번 사고로 밝혀진 대로, 그 배후에는 이단으로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 ‘구원파’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구원파’는 한국 창시자 권신찬(1996년 사망)의 사위 유병언과 박옥수가 이어가고 있는 무서운 이단 집단이다. 그 집단에서 운영하는 해운 회사 배 세월호가 이번에 침몰한 것이다. 사고 경위는 알려 진대로,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선박에 대하여 얼마나 엉터리로 점검과 관리가 허술했는가? 마치 ‘구원파’ 교리가 엉터리고 가짜 인 것처럼. 이로 인해 전 국민이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반감을 더 사고 있는가. 특별히 그 이단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우리에겐 얼마나 소중한 이름들인가. ‘기독교’, ‘복음’, ‘구원’. 이 모두가 우리가 전도할 때 잘 사용하는 단어들인데, 이제는 그런 말조차 꺼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전도가 막힐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이 세 단어를 합치면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제는 ‘예수’라는 말도 전하기가 힘들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귀하신 메시지가 있다. 말세 장 마태복음 24장 6절 말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이런 일들이 벌어짐이 지극히 말세 징조임에도 끝이 아니라? 왜 그럴까? 그것은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난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난리를 보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참 믿음을 보시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의 죽음이 다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으라는 영적인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메시지인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이런 난리를 통하여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난리들이 나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욱 열심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장 12절 말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런 난리가 터지고 나면 서로 남만 탓한다. 정부가 어떻고, 관피아 어떻고, 누가 어떻고, 남 탓하기 바쁘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말씀처럼 교회를 심판하신다. 이런 난리 속에 교회 안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신다. 그 말씀이 요한계시록에도 있다. 11장 1절,2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예수님 재림의 진짜 징조는 교회 안을 심판하실 때 이다. 그래서 요즘 국내외 교회들마다 문제가 많고 시끄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항상 내 자신의 부활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평소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 믿음, 부활 신앙으로 살고 있는지.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보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서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교회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 성도다. 마라나타!

노기송 목사.(뉴욕새예루살렘교회)

ⓒ 크리스찬투데이
USA아멘넷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