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끝자락에서....
은혜받구 감사해서 올립니다.

 

-목사는 목사다-

1.목사는 목사(牧師)여야 한다.

목사란 말 그대로 맡긴 양을 치는(牧-칠 목, 혹은 돌볼 목) '양돌보미'이다. 양치기라 하면 격이 낮은 듯 해서 잘 안 쓰는데, 그러면 목자 혹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을까.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자였다. 예루살렘에 분뇨 처리하는 직업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었던 직업군이었다.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 속에서 목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켰다. 혹, 양을 잃거나 이리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물어주어야 했기에 가난한 목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양들을 돌봐야 했던, 실로 고달픈 직업이었다.(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이었 듯이 일설에는 목자도 도둑놈 취급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 붙어서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 '놈(者)' 이상이 아니다. 놈이란 단어가 '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는 '들판에 목자처럼' 밤낮 수고해야 하는 직업 아닌 직업이 목사다. 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놓는 것이 어떨까. 목사란 그런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 목사'란 사실을 한국교회가 진즉에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진 않았으리라.

주인이 맡긴 양들을 목숨바쳐(죽도록 충성하며) 잘 섬긴 목자들은 비록 이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지라도 훗날, 주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며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사라 불리워도 좋다고 본다.

1.목사는 목사(目四)라야 한다.

다시 말해 눈이 '네 가지'라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눈이 멀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 한다.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건강해야 한다.

상식의 눈이 있어야 한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바른 이성적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같아 안타깝다.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판단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도 사는 모습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억대 연봉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 평균임금 정도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한다.(70-80% 목회자들은 그 것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서야 어찌 말씀의 꼴을 먹일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볼 줄 아는 목사가 바르게 목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의 눈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이 있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로서는 말짱 도루묵이다. 주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더하여, 목사는 온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주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한다. 또한 마음이 깨끗하여 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주님의 눈빛만 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목자일 것이다.

1.목사는 목사(木死)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나무기둥(스타우로스)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사형법을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형장에 세워놓은 나무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서 쓰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가게 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나무기둥에 매단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인다.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주님이 이 나무기둥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 하고 있다. '사도행전', '베드로서'.. 등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강조코자 함이다.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과일이 과육과 과즙으로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무에 달려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주식으로서-밥 혹은 빵)이요, 생명의 음료(생명을 위한 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의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자기와 및 자기를 믿는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요,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향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죽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중앙, 에굽 혹은 소돔이였다.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요, 의미인 것이다.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 신비다.(바울의 복음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일반 신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 이름해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군가. 목사도 안 죽는데 누가 누구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죽자! 주님 죽으신 그 나무에 함께 달려죽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러데 어찌하여 산 냄새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6년 전에 쓴 칼럼인데 오타수정해서 다시 올려봅니다.

이 칼럼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별사모님의 덕분입니다. 왠고하니 필자가 즉흥적으로 아멘넷 독자게시판에 올린 글을 별사모님이 추천해서 초대칼럼란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글: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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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으로 거처를 옮기다가 시날평지(바벨)를 만나 정착생활을 하게 된 인류... 그들은 그 곳에 성과 도시와 나라를 건설하고 바벨탑이라는 흉물을 쌓아올렸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4)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그들의 마음의 동기는, 이 세상을 향한 사탄마귀의 사악한 꿈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꿈은 마귀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죄와 사망 권세 아래 포로가 되어 마귀가 부추기는 이 더럽고 추악스러운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미친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1. 성과 대를 쌓아 하늘 대기에 닿게 하여

- 사탄마귀가 결코 포기하지 않은 꿈은,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 지극히 높으신 자와 비기는 것입니다(사 14:14). 하늘 꼭대기에 올라 결국 자기자신이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한 몸에 받기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오르고 또 오르는 것입니다.


번번이 하나님께서 막으심으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높아지고자 하는 그 교만은 멈추질 않습니다. 이것이 사탄마귀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마귀에게 속하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인 것입니다.


2. 우리 이름을 내고

-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 이름을 내는 삶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언제나 내 장래, 내 건강, 내 돈, 내 가족, 내 뜻, 내 야망, 내 소유, 내 자식, 내 직장, 내, 내, 내게 속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무수히 많은 '내'가 모여 '우리'가 되고 세상 욕심으로 쩔어 있는 죄악 짱아치가 된 '나'와 '우리'가 모여 결국 자기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허망하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마귀의 나라는 흩어지지 않고 집착하는 나라입니다. 자기 것을 포기할 줄 모르기 때문에 움켜 쥐고 삽니다. 남을 위해 사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악착같이 긁어모으며 삽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일평생 뼈빠지게 일하여 안정적인 노후와 장래를 추구합니다. 도무지 내려놓는 법을 모르고 흩어질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경직된 삶을 살면서 도무지 흩어지지 않는 나라... 참 자유가 없는 나라... 


이것이 바로 공중의 권세잡은 사탄마귀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이 세상 나라인 '바벨론 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1. 성과 대를 허물고 바닥 골짜기로 내려가는 나라입니다.

2. 우리 이름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나라입니다.

3. 온 세상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흩어지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려면 이 나라에 합당한 삶과 가치관으로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난 사람이 여전히 교만하게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하고,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의 이름으로 살고,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여 모든 것을 움켜잡고 내 것을 잃을까봐 흩어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만나고 천국과 지옥이 실제가 된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려고 해도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되어 내려오셔서 날 위해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값을 치르시고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여전히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성령님을 모시고 모든 능력과 권세와 자원을 넘치도록 채움받는 사람이 여전히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죄와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며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 자신이 쌓고 있는 바벨탑을 허물고 각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죽은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게 속아 바벨탑을 높이높이 쌓아올리며 살아가던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제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만나게 하시고 이 복음이 제 삶에 실제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이제 제 인생, 제 꺼 아닙니다.


주님의 소유된 제 자신과 제게 주신 모든 것들주님의 뜻대로 영혼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남은 생애동안 더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기를 선택하며,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주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겠습니다.


더 많이 내려놓고 더 많이 흩어져 내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제 힘으론 절대 안되는 거 주님 아시죠?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심으로 가능한 일이니 오늘도 제 안에서 당신의 삶을 살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 / 곰팅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한 가지 일, 즉 믿음에 대해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사람이 믿음 없이 행동하는 모든 일은 헛되고 무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 하나만을 요구하시므로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는 믿음과 인간의 공로 및 노력 사이에 암묵적인 대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애쓰면, 말하자면 주로(主路)를 벗어나 달리다가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그런 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평생토록 불쌍할 만큼 자기를 괴롭게 해도 자신의 삶의 기준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다 헛 수고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 사랑도 경시해선 안 될 것이고 그 밖의 다른 신앙의 의무들도 그 위치와 영예를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다른 선행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믿음은 이웃 사랑이나 그 밖에 다른 선행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해지는 까닭은, 믿음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스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믿음과 믿음의 열매를 분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믿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삼으셨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출처: http://thevine21.hompee.com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미 교도소 수감자로는 처음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게 될 매닝(좌)과 수술 후의 예상 모습 

미군 교도소 내에서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허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AP통신에 따르면 13일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성명을 통해 “미국내 교정 시설을 통틀어 재소자가 성전환 수술을 한 사례가 없었는데, 이번 캔사스주 군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전 육군 일병 첼시 매닝(28)이 첫 번째 이정표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며, “군 당국이 마침내 옳은 일을 한 것에 무한히 안도하고 있고 그들의 결정에 갈채를 보낸다”고 보도했다.
 
원래 이름이 브래들리인 매닝은 2013년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이라크전 군사 기밀과 국무부 자료, 동영상 등을 빼돌린 죄로 징역 35년을 선고받고 군 교도소에 수감 중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이라고 밝힌 뒤 성전환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해 왔다.
 
지난 9일부터는 최소한의 인권존중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했고 5일 만인 13일 미군 당국으로부터 성전환 수술을 약속 받고 단식을 중단했다. 매닝은 앞으로 1-2주 후 의료진을 만나 성전환 수술을 상담 받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10월부터 시행되는 새 국방부 정책에 따르면 성전환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군인은 의학적인 치료와 병행해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출처: 크리스챤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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