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 훈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화교육?" 

군 장성의 연설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막상 순화교육의 실상은 사람의 가치를 완전히 짓밟고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하는 인권유린 그 자체였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사람이 몰래 군용견 개밥을 홈쳐 먹다가 걸려서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구타를 당했으니 그곳은 분명히 개보다 사람의 가치가 훨씬 못한 곳이었다.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 

"인간 재생" 
"땀으로 그늘진 과거를 씻는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인간교육장" 
  
도대체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일반 시민들에게 전두환 정권은 어용 언론들을 통해 깡패와 전과자, 인신매매범들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을 순화 교육시키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언론의 보도를 보고 들은 국민들은 그 모든 보도를 있는 그대로 믿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삼청교육대가 사회의 악을 뿌리 뽑고, 사회 분위기를 건전하게 이끌기 위한 긍정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이 잘한 일 중의 하나가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깡패들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던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조금만이라도 열린 눈과 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바라보면 삼청교육대는 전두환 군사 정권이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가장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서 일반 시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인권 유린의 치욕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주 동안의 강제 순화교육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군인의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어떻게 사람을 4주 동안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4주 안에 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충실하기 위해 훈련 조교들은 '죽이기 아니면 사람 변화시키기'라는 각오로 표현조차 하기 힘든 구타와 지옥 훈련을 거듭했다. 또한 잡혀 온 사람들에 대한 획일적 매도는 어이 없이 끌려 왔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갔을 때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두 번째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과 같았다. 군부는 삼청교육대에 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불량배, 깡패, 전과자들인 것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사실상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전두환 정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반동분자들(?), 쓰라는 대로 기사를 쓰지 않았던 신문사 기자, 영문과 까닭도 모르고 그저 군경 합동 단속과 머리 숫자 채우기에 걸려든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부녀자와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 자 대상은 무척 다양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보냈던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돌이켜 볼 때 그 기간 동안 내 머릿 속을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나가자'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이 견디기 힘든 구타와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삼켜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밤에 도주를 시도했다가 몇 시간 뒤 잡혀 와서 죽을 때까지 얻어맞는 사람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때의 악몽을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그때의 아픔과 고통이 마음 가운데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시의 기억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그 모든 악몽을 묻어 두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지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상처는 드러나야 치유가 될 수 있는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프고 치욕적인 상처를 그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기만 한 사람들은 이미 상처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삼청교육대에 관한 한 나는 20년을 함께 살아 온 아내에게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최근에 내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했던 일을 고백했을 때 아내는 뒤로 나가 자빠질 정도로 놀랐다. 그때의 일들은 되새길수록 더욱 고통이 심해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이렇게 그 당시의 모든 일을 아내와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 당시의 일들을 남김 없이 고백하는 동안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절반을 사로잡고 있던 삼청교육대의 악령이 드디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의 기억 은 지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었던 악의 실체였다. 
  
빨간 모자의 조교 

나는 아직까지도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곤 한다. 빨간 색깔의 모자는 내게 있어서 가해와 폭력의 상징이다. 삼청교육대에서 빨간 모자를 썼던 조교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은연 중에 쾌감을 느끼는 그런 가학 적인 변태인간들이 많이 있었다. 저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미삼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대방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큰 쾌감과 자신의 힘을 느끼면서 내심 만족하는 것이었다. 시골 논밭에서 개구리를 잡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재미 있겠지만 잡혀서 놀림을 당하는 개구리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삼청교육대에서 우리는 시골 논밭의 개구리와 같은 심정을 느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대 안에는 5개 소대가 있었는데 나는 제3소대에 속해 있었다. 매일 새벽 5시면 기상시켜서 밤 10시까지 잠시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고, 계속 얼차려와 뼁뺑이 돌리는 것이 저들의 일과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연병장을 도는 구보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냥 구보가 아니라 조교의 명령에 따라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빠르게 달렸다가 속도를 늦추곤 했다. 좀 나이가 든 사람은 연병장을 한두 바퀴 돌고 나면 영락 없이 뒤로 처지게 된다. 이때부터는 몽둥이를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 조교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지 더 이상 달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다가 뒤로 처지는 사람들은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그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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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조서 만들 때 누가 뭐라고 하든지 조서 내용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너 같은 녀석은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니까 내 말을 꼭 명심해라." 
  
구치소에서 재판을 대기하며 미결수로 기다리고 있던 시간은 참으로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감옥에는 외부로 향한 작은 창문 하나가 벽 높은 곳에 있었다. 가끔씩 그 창문가에 참새들이 날아와서 마음껏 지저귀다가 마음이 내키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새가 너무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자유가 그렇게 크고 고마운 것이라는 사실을 감옥 안에 있으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 일 주일 정도가 지난 후 드디어 호출이 왔다. 

'내가 왜 여기를 들어왔나.' 

마음 속으로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검사실로 들어갔다. 방에는 사복 차림의 형사 그리고 군인 분위기가 물신 풍기는 다른 2명의 건장한 사람이 역시 사복 차림으로 있었다. 

"이름이 김태훈 맞나?" 
"예." 
"얼마 동안이나 선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공갈 협박하는 건달짓을 하면서 살았나?"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미 너를 동네 깡패로 고소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니, 누가 나를 동네 깡패라고 합니까?" 
"글쎄,고소한 사람이 있으니까 네가 구치소까지 들어온 것이 아니겠냐고. 긴 말할 시간 없으니까 조서에 지장이나 찍 어. 순순히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조서 내용을 한 번 읽어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난 후에 지장을 찍겠습니다. 그리고 정식 재판을 받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데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습니다." 
"아니,이 새끼가 아직 주둥이만 살아가지고,정식 재판 같은 소리하고 자빠져 있네" 
조서 내용을 직접 보겠다는 말 한마디에 갑자기 욕설이 퍼부어지더니 방 안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 새끼가 깡패 건달 주제에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무슨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아. 이 새끼, 정신이 바짝 나게 한 번 맛 좀 보여 줘라." 
  
잽싸게 사복 차림의 형사와 군인이 동시에 팔을 뒤로 잡아채더니 구둣발로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뼈가 쪼개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자칫하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조서를 들고 팔을 잡아끌어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그 조서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결국 강제로 그 조서 내용에 동의한다는 지장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10여 대의 버스가 구치소에 도착했고 완전무장한 계엄군인들에 의해 공포 분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어디론가 강제 이송되고 있었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은 세상 이 좋아졌지만 1980년대에는 군사 정권이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었다. 6시간 정도는 족히 버스가 달려온 것 같다. 버스 안에서 여러 차례 내 손으로 여기저기를 심하게 꼬집어보기도 했다. 제발 현실이 아니라 꿈이기를 바랐다. 이런 악몽이라면 정말 빨리 깨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는데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정말 간절하게 이 모든 일들이 꿈이기를 바랐는데...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미명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밤새도록 어디론가 달려온 버스는 구치소 수감자들을 군부대 연병장에 쏟아 놓고 마치 청소차가 할 일을 다하고 쓰레기 하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주위에 서 있던 군인들은 말끝마다 욕설이었다. 연병장 중앙에 고장난 로봇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람들에게 군복이 한 벌씩 지급되었다. 옷의 크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지급된 군복 안에 자신의 몸을 맞춰 집어넣어야 했다. 배가 남산만큼 나온 사람이 조그만 군복을 지급받아 배꼽이 볼썽 사납게 불거져 나왔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땅콩처럼 조그마한 사람이 큰 군복을 받아서 완전히 쌀푸대 속에 아이가 들어가 있는것과 같은 그런 웃지못할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에는 일제히 바리깡으로 머리를 삭발시켰다. 긴머리가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그 옆에서 함께 흐느끼던 사람은 남자녀석이 계집애처럼 질질 눈물을 흘린다고 붙잡혀가서 기절할 정도까지 구타를 당했다. 머리를 깎는 바리깡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털을 뽑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난폭하게 바리깡을 밀어대는지 가끔씩 머리 살점이 머리털과 함께 떨어져 나오면서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한 사람 말을 할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절대 함구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300-400명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머리를 모두 삭발시킨 뒤에는 5개조로 사람들을 나눠서 합판 조각으로 엉성하게 야전 침대를 만들어 놓은 막사 안으로 각각 나눠서 배치를 시켰다. 그리고 아침 해가 제법 높이 올라 왔을 때 쯤 막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연병장으로 집합시키더니 소속군대 고위 장교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사회에 올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 연유로 인해서 오늘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정신과 육체를 말끔히 순화하고 사회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도록 집중훈련을 받은 후, 순화교육 평가에 따라 빠르면 4주 이내에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순간도 다른 생각하지 말과 이번 순화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길 바란다. 국가는 여러분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사회악이 아니라 앞으로는 사회의 발전과 건설에 앞장서는 건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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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 25:5)


마태복음 15장의 열처녀 비유는

휴거를 기다렸던 신부들과

그 중의 일부가 혼인잔치에 성공적으로 들어간

신부들에 관한 대표적인 이야기다.


이 비유에서 드러난 핵심 사안은,

첫째,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이다.

둘째, 더디 오므로 열명의 처녀 모두가 잠이 들었고,

셋째, 그 와중에 슬기로운 처녀들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넷째, 마침내 신랑이 왔다는 것이다.




신랑은 왜 더디 왔을까?


준비하는 천사들이 농땡이를 부려서일까?

아니면 준비가 미처 덜된 예비신부가

더디 와달라고 센 기도를 한 이유때문일까?


말씀에는 짝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벧후 3장 9절에 이에 대한 답이 성경에 있다.


어떤 이들은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오래 참으사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더디 오시는 이유를

모두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에 두도록 하자.


지금 상황은 더디 오는 걸까? 속히 오는 걸까?


준비된 신부들에게는 더디 오는 것이겠지만

준비가 덜된 신부들은 속히 오는 상황일 것이다.



준비한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잠이 들었다.


어떻게 슬기로운 처녀들까지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들은 잠을 자고도 어떻게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잠을 잤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과 반대상황이다.


아무리 건강체질이라 하더라도

1년 내내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잠을 잤다는 것도 영적인 의미로

10처녀 모두 깨어 있지 못하고 영적으로 잠을 잤다는 의미라면,

10처녀 모두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잠을 잤다는 의미는

늦은 시간까지 신랑이 오지 않아서

육신적으로 잠을 잤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일상의 삶에서

주님만 기다리는 상황을 요청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상의 삶을 소홀히하고

예상한 시간에 집중했고 예상한 시간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신적인 일상의 삶과

깨어 있는 영적인 삶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슬기로운 자들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등불을 들고 나간 처녀는 10명이었지만,

그 중 5명은 그 날이 지연되자 등불이 꺼져갔고,

5명의 등불은 신랑이 오는 시간까지 꺼지지 않았다.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의 차이점은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포기하는 미련한 자들과 일편단심 슬기로운 신부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마음이 변한다면 일편단심이 아니다.


한결같이 주를 신뢰하는 까닭에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신다(사 26:3).

그들의 태도는 한결같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하나님을 굳게 굳게 의지한다.

바르게 사는 이들의 길을 평탄하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닦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달하거나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주께서 결정하시는 길을 느긋하게 걸어 간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정하시든지 그 분을 신뢰하며 걸어간다.



결말은 마침내 신랑이 왔다는 것이다.


신랑을 기다린 이 스토리에서

만약 신랑이 끝까지 오지 않았다면,

혼인잔치 이야기는 실패한 신부들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 처녀들과

도중에 포기한 처녀들의 성공담과 실패담이 교훈을 주는 것이다.


비록 더디 올지라도 버텨라.

포기하지 말아라.

끝까지 신뢰하라.

신랑은 반드시 신부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약속대로 오신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소망이고 결말이다.



글쓴이: 카이로스 / ars

너는 특별하단다(You are special)


What they think doesn't matter.
All that matters is what I think
And I think you are pretty special.

Remember!
You are special because I made you.
And I don't make mistakes..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지.
그리고 난 네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한단다.


 

기억하거라.
내가 너를 만들었기 때문에 넌 매우 특별하단다.
그리고 난 절대 실수는 하지 않는다.



옮긴 글

개처럼 끌려가던 날 

완전 무장한 군인들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그대로 엎드리고 있어." 
"고개 들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조금이라도 몸의 움직임이 어눌해 보이면 가차 없이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여기저기서 수박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이 스무 살이 되도록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잔뼈가 굵어온 나였지만 이때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폭력의 연속이었다.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 하는 무저갱의 깊고 어두운 구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와 절망의 순간들이었다. 

군인들은 팔을 뒤로 해서 북어포처럼 열 명의 사람들을 묶은 뒤 총부리로 사정없이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를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곁눈으로 언뜻 보기에 10대 정도의 버스가 구치소 운동장에 정렬해 있었다. 우리를 구치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같기는 한데 당시 나는 내가 어느 곳으로 이동해서 얼마동안 있게 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단지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비밀스럽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만을 받고 있었다. 
  
버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머리에서는 조금 전에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은 곳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땀방울과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릎 사이에 그대로 고개 처박고 있어."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동작을 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아라." 

버스 안에는 3~4명의 군인들이 나눠 타서 계속 거칠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운전수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무심하게 버스를 운전하고만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지만 군인들이 지금 버스 안의 어느 곳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버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허리를 구부려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자니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이렇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것일까?' 

허리의 통증과 함께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등포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단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공장에서 해고된 뒤 소식도 전혀 없고 해서 정말 큰마음을 먹고 간 길이었다. 밥이나 제대로 먹으면서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초췌한 얼굴의 친구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 남동생 2명이 함께 있었다. 몸이 많이 아팠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걸려는 참에 동생들이 말을 막고 나섰다. 평소에 나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사이였는데, 마침 친구의 몸이 아픈 것이 내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삿대 질을 하면서 대드는 것이었다. 잠시 옥신각신하면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집 주변을 지나던 경찰 몇 명이 들이닥치면서 다짜고짜 수갑을 채웠다. 
  
그날 저녁 나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당연히 훈방조치를 받을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도대체 죄명이 뭔데 나를 구치소로 이감시키느냐 는 질문에 경사 한 명이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폭력에 공갈 협박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나"라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공갈협박?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치소로 이감되면서 나는 아내와 가족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구치소 감방은 20명이 서로 어깨를 부딪쳐야 겨우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 안에 확실한 서열이 있었다. 감방 한쪽 구석에는 냄새가 지독히 나는 변기통이 있었는데 그 변기통 옆자리는 전과도 없고 죄목도 변변치 않은 그런 시원치 않은(?) 사람이 앉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연히 오늘 새로 들어온 내 차지가 되었다. 가장 중앙에는 전과 19범이라는 고참이 앉아 있었다. 
  
구치소 안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고참 죄수가 재판장이 되어서 모의재판이 열린다. 물론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고참 죄수가 때린 형량이 실제 재판에서도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형무소를 그렇게 자주 드나들고 재판도 여러 번 받다 보면 거의 판사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 생각하며 실소를 지었다. 

내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중앙에 앉혀 놓고 모의재판 심문을 시작했다. 

"전과가 있는가?" 
"없는데요." 
"무슨 죄로 들어왔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잡혀올 때 무슨 일이 있었을 것 아닌가?" 
"친구 집에서 말싸움이 벌어졌는데 지나가던 경찰이 들어와서 무조건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너도 별볼일 없는 놈이구만." 
"여기 잡혀온 놈들 중에 너같이 어리숙한 녀석들이 수두룩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같은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술 먹고 고성방가 하다가 잡혀 온 사람, 길거리에서 소변보다가 잡혀 온 사람, 장발머리 단속에 걸린 사람, 구멍가게에 외상값이 밀려 주인의 신고로 잡혀 온 사람, 몸에 문신 새긴 사람 등등이 많았다.
 
과거 같았으면 경범죄로 걸려서 각서 정도 쓰게 하고 훈방 조치되었을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두 구치소로 후송되어 정식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전과 19범이 되는 사람은 눈을 부릅뜨면서 나에게 한마디 훈계를 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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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선택 그리고 언약과 설교 예배

 

고재수 교수

  화란 개혁교회 안에서 언약은 중요한 연구대상의 하나였다. 이 언약에 대해서 여러 총회가 중요한 결정들을 하였다. 예를 들어 1905년의 총회는 언약의 자녀의 위치에 대해 결정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아래 있는 언약의 자녀는, 자라는 동안 그 행실이나 교리상 반대의 경우가 명백해지기까지는, 중생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특별히 30년대에 언약이라는 주제는 많이 토의되었다. 언약의 기초가 다시 연구되었고 옛 신학자들, 특히 칼빈 견해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여러 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1936년 총회는 다른 주제들 중 특히 언약사상을 연구할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1942년에는 한가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개혁교회 내의 여러 그룹들은 그 총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많은 교수들과 목사들 및 장로들을 강압적으로 축출하였다. 이렇게하여 고신교단의 자매교회인 화란 개혁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언약에 대한, 특별히 언약의 자녀의 위치에 대한, 이 총회의 결정에 불볼했다는 이유 때문에 축출된 사람들인 것이다.

 

화란 개력교회 안에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80년대에 출판된 책 두가지를 언급하지면, 첫재로 캄펀(Kampen)신학교의 교의학 교수였던 깜파이스(,Kamphuis)교수(그는 1987년에 은퇴했다.)가 1984년 에 출판된「영원한 언약」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다분히 교의학적 성격을 갖는다. 다른 하나의 책은 은퇴 목사였던 프랑커(Joh. Francke)가 다음해에 「빛나는 계역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책인데 그 책은 성경에 나오는 언약의 과정들을 추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개혁교회 안에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가 마주했던 난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약에 대해 이런 두권의 책이 쓰여질 정도라면 이 제한된 글에서는 언약에 대해 얼마나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기서는 세 가지 주제를 선정해서 그 분야에서 언약사상의 영향이 어떠한가를 살펴 보기로 했다. 충분히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이글을 통해 적어도 언약사상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 선택한 세 주제는 설교, 세례 및 축도이다.

 

1. 언약과 설교

 

일반적으로 설교를 이 언약사상에 연결시키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화란에서 언약사상은 바로 여기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많은 목사들은 언약에 대한 올바를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많은 목사들은 언약이 선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된 자는 언약에 속하고 선택되지 못한 자는 언약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때로는 언약 안에 구분을 두기도 했다. 외적 언약, 즉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시는 언약과 내적 언약, 즉 선택된 자들과만 맺으시는 언약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설교에 어떤 결과를 낳는가? 예를 들어 설교자가 성부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자. 설교자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기를 약속하십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만일 언약과 선택을 동일 한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하나님은 선택자의 아버지가 되실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십니다”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사람이므로 사람들 중 누가 선택되었으며 누가 유기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설교자가 말하는 것은 회중의 일부에게만 해당되고, 결국 그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이 될 수 밖에 없다. 즉 “저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말합니다”라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정말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 시하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논리적 결과이다.

 

또는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칭의에 대해 설교한다 하자. 설교자로서는 그는 청중들에게 믿음을 통한 칭의의 영광스러운 선물을 보여 줄 것이다. 즉 사람들이 죄인일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복음을 전달한 다음의 결론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칭의인데 선택된 여러분은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약속은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 단계는 청중들이 선택 받았는지의 여부를 발견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큰 약속을 듣고서도 자신들이 그 약속을 받을 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택된 자인지 알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이 약속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자기가 선택받은 줄 확신하기만 한다면 죄 용서의 약속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을 받았다고 쉽게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삶이여 어떻게 살든 이제 선택 받았으니 그 약속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항상 고뇌에 빠져 살게 될 것이다. “그 약속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나는 죄인이고, 거듭 하나님께 죄를 짓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가끔 또 다른 단계가 따라온다. 그 추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언약은 선택된 자들만 위한 것이다. 따라서 둘째,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것임을 확실히 알기 전에 먼저 자기가 선택받은 자에 속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고민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출구를 발견한다. 그것은 셋째, 체험이다. 그들은 특별한 체험을 찾는다. 마음의 감동이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 등이다. 이것을 갖고 그들이 선택받은 자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도 자기의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개혁교회 이 목사들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물에 대해 힘을 다해 설교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들은 물어야만 했다. “이 모든 약속들이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이 약속들을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면 합니다.” 많은 청중들은 진열장에 있는 맛있는 빵을 보고 서 있는 배고픈 거지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빵을 보고서도 먹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사야 55:1에 나오는 이사야의 위대한 말씀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런 문제의 원인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한데 있다. 그때 많은 목사들은 성경을 다시 연구하게 되었고, 칼빈에게 돌아가서, 성경과 성경의 교훈을 따라 칼빈도 다르게 말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좀 쉽게 하기 위해 여기서는 칼빈 대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장 3항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은 이로써 죄인에게도 예수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시되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하나님의 언약과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을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선택된 자들에게인가? 아니다. 죄인들에게서이다. 하나님 말씀의 영향 아래로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두 개의 기본적인 본문을 간단히 제시하겠다.

 

창 1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 언약의 할례라는 표시로 확인 되었다. 그런데 이 약속에 속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할례의 표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믿었던 아브라함인가? 성경에 따르면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종들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들 모두가 언약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또 17:12 참고).

 

그 두가 선택된 자들이었는가? 우리는 모른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큰 의심이 가는데 그는 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언약의 표시를 거절한 몇몇 사람의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언약의 벌을 받을 자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언약에 속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언약은 선택된 자의 수 이상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라도 모르겠다. “그것은 신약 시대와는 다른 구약 시대가 아닌가? 언약이 처음에는 선택된 자의 수 이상으로 맺어졌지만 신약에서는 언약이 선택된 자들에게만 체결된 약속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39절을 살펴보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이 말을 누구에게 했는가? 선택된 자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에 대한 약속(38절)을 받을 것이라는 말인가?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36절에 나온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음으로써 무거운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2:4)죄 용서와 성령에 대한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당시 모든 청중들에게 확장시켰다. 그들은 죄를 회개해야만 했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했다. 그때 그들은 죄 용서를 받고 성령까지라도 받을 것이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졌다. 언약의 백성은 선택된 자와 수와 동일할 수 없다. 언약의 약속은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로 부르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30년대의 화란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사야 처럼 청중을 하나님의 선물에게로 초정하는 설교를 했다. 또 베드로처럼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시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의 언약사상의 의미를 발견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부요함을 보여주고는 그것을 믿으라고 한다. 또 설교자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벌이 있음을 말해주고, 그때 다시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선택에 따라 제한된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백성의 믿음은 선택에 따라 제한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청중들에게 언약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믿는 자들만이 그 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언약의 선물은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 창 17장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거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위대한 약속의 한 부분으로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하신다.(8절)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땅을 받을 줄 알았는가? 실제로 그 일은 그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고 수백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약속의 땅을 그들의 나라로 받았다. 그럼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약속을 확실히 알 수 있었는가? 오직 믿음으로였다. 이것은 이미 후손에 대한 약속에 표현되었던 것이고(창 15:6, 롬 4:9이하), 히 11:9, 13이하에도 나타난다.

설교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지으시며 그의 아들을 위하여 보내시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야기 한다. 또 설교자는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의 복과 성령의 복을 받도록 권면 할 수 있다. 설교자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촉구한다.(고후 5:20) 누구든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지만 믿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르므로 생명을 보지 못할 것임을 청중들에게 선포한다(요 3:36)

 

또 듣는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자기가 선택받은 사람인지 많이 고민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전에 먼저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도 선택받았느냐에 대해 고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 약속을 믿으라. 내 벌을 두려워하고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청중들은 그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그들이 선택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2. 언약과 세례

 

우리는 세례를 가리켜 언약의 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언약교리에 변화가 생기면 세례에 대한 관점에서도 직접적인 변화가 나온다. 이 경우는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1905년 총회의 결정사항을 인용한 바 있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아래 있는 언약의 자녀는, 자라는 동안 그 행실이나 교리상 반대의 경우가 명백해지기까지는, 중생되고 그리스도의 안에서 성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2-1944의 총회에서 일어난 일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이 결정을 해석한 일이었다. 그 때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용에 언급된 중생된 아이들이 누구인가하면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실 때 다만 선택된 자녀들에게만 약속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받지 못한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해 주셨는가?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고 명확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명확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중생과 용서를 약속해 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결과는 물론 세례가 두가지 다른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복음의 일반적 제시이며 다른 하나는 중생의 특별한 확신이다. 첫째의 것은 언약의 외적면에 속하고 둘째의 것은 내면적 언약의 진실한 부분에 속한다. 전자에 있어서 세례의 내용은 은혜의 말이며, 후자에 있어서는 은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하나님 편으로부터와 인간 편으로부터 제시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편으로부터 살펴보자. 언약의 약속은, 가장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창 17:7,8절에 나오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세례의 양식과 꼭 같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의무 및 축복과 함께 그 자신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그런데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게 되면 이 꼭 같은 세례의 표현의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결과는 참담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두 말을 하시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가지고 때로는 이것을 의미하고 또 때로는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는 식이다. 그래서 세례의 이 약속이 경우에 따라서 동일한 약속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일은 일간의 편으로부터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난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그 약속을 나에게 주셨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 충분한 약속을 받았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후의 내 생에 동안에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용서와 영생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충분한 약속을 받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약속을 받았다면 내가 받은 세례는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하게 된다. 거기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는 표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을 찾게 되면 충분한 약속을 받은 줄 알겠지만 그 은혜의 표시를 찾지 못하면 단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밖에는 받은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40년대에 화란개혁교회에서는 교리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작은 문제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중심이 다음과 같은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세례시에 의미하시는 바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다시 창 17장으로 돌아가보자. 아브라함 집안에 속한 모든 사람과 그의 첫 아들 이스마엘까지도 할례를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언약의 표시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되고 아브라함이 특별히 받은 약속은 직접 이삭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약속을 받았다. 땅의 약속까지도 그의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먼저 이삭에게 돌아간 것이고 이스마엘은 이삭에게 순복할 때 그도 약 속의 가나안 땅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만일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머무름으로써 하나님께 구체적인 순종을 보이려고만 했다면 그도 몫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복하기를 거절했고(창 21;9) 그래서 내어 쫓김을 당했다(창 11:10-12).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에서는 언약에서 배제되지 않았으며 그는 언약에 속하여 모든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만일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그렇게 하였다면 언약의 약속은 그에게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히 10:29에 나오는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형벌을 받을 이 사람이 약속을 받지 못했던 자이겠는가? 아니다. 그 표현에는 세례 양식에서와 꼭같이 성자 및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고의적으로 거절했고 그 약속된 선물을 약용하여 언약을 깨뜨렸으며, 그럼으로써 그 언약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언약의 중심이 구약과 신약의 여러 단계에서 확실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것과 용서로부터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그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 모든 약속을 확실하게 하는 한 표시를 받는다. 또 우리는 그것에 포함되는 바를 확실히 안다. 성령에는 이중적 의미 같은 것이 없다. 세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약속을 특별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고, 그의 앞에서 행하면 우리는 그 약속된 선물들을 다 받을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례시에 그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3. 언약과 축도

 

예배 마지막에 하는 축도의 양식이 화란에서 언약 사상과 관련하여 쟁점이 된 적은 없다고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좀 문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는 축도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배시에, 특별히 예배가 아닌 다른 행사에서 이 축도를 들을 때 좀 이상한 것은 이를 확장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바울이 쓴 양식대로 하지 않고 여기에다 다른 것을 덧붙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 위에’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축도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축복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지만 목사들의 생각에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신자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모든 청중들의 다 축복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들은 이 축도문을 좀 더 자세히 제한하여, 그 복이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쓸때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다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알고 있었는가? 고린도 교회에서는 교인들 가운데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은 서로 다투고 싶어했고, 다른 교인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자 하였다. 또 무서운 죄를 회중 가운데 방치해 두고 있었다. 심지어 바울이 그들을 꾸짖었을 때 그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사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는 신약의 바울서신서 중 가장 날카로운 글이다.

 

바로 이런 교회를 향해 바울은 가장 고상한 마지막 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다. 바울은 누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말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인가? 선택받은 자들에게인가? 아니다. ‘너희 모두’에게이다. 거스리고 죄인인 그 모든 사람들이 약속을 받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여기서 언약의 축복을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먼저 구약의 축복인 민 6:22-27을 생각해 보자.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다. 대상은 온 백성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복을 그 말에다 연결시키신다. ‘그들은 이같이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

 

그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복이 자동적으로 온다는 뜻인가? 율법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 복은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예를 들어 레 26장)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복 대신 벌을 주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복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의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모든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축복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오는 것이지만 실제로 불신자는 그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

 

눅 10:5,6의 인사 방식의 경우도 이와 동일하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서의 인사말은 그저 ‘평안하십시오’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신 사도들의 인사이다. 이때 평화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내포한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이 축복을 이스라엘 집들에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복이 자동적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만일 그 평안의 말에 응답하는 자가 있으면 그 하나님의 평화는 그 집에 머무를 것이다. 만약 받지 않으면 그 평안의 약속은 그 집에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룰 것없이 되돌아 올 것이다.

 

이는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의 모든 맺음말의 특성이다. 그것은 바울의 기도가 아니다. 또 그것은 불명확한 어떤 인간의 소원도 아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만을 향한 것도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이다. 회중에 속한 모든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이다. 고후 13:13의 말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지 축도가 아니다.

그래서 예배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기대하는 모든 것의 요약이다. 이 말에서 약속된 은혜와 사랑과 교통 이상의 것은 없다. 회중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목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그 축복을 듣는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일만을 해야 한다. 감사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믿음으로 주님의 모든 축복을 받는 일이다. 그때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모든 은사와 함께 약속해 주신 것을 알고 이 약속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시간을 충실하게 기다리며 살아간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애동안 하나님의 약속들이 다 실행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면서도 믿음으로 살았던 것과 같다. 이같이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물 중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원수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 즉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다 약속하셨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살기를 거절했고 그 약 속의 성취를 기다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결론

 

언약은 참된 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어느 곳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과 아닌 당신의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음을 기억해야 하다. 우리는 설교의 약속과 경고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설교에서 제시된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약속과 경고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성례에서 나타나는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축복의 약속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축복에 담긴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

출처: 언약과 개혁/ 주의 아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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