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교회와 신앙 고백 공동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개혁 교회는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교회 건설 운동의 열매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했다. 교회를 신앙 고백 공동체로 보고 계급적인 교회관을 거부한 채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가르치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 공동체를 재건하고자 했다.


오늘날 교계 일부에서 성경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진리에 대해 차츰 등을 돌리고 거짓 교사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는 비진리에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다원주의(pluralism), 포용주의(inclusivism),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로 흐르고 있다. 이런 풍조 아래 한국 교회는 점차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 교회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해야 한다. 유럽과 미국의 주류 교회들처럼 교인들의 수가 떨어지고 생명력을 상실한 한 채 사양길로 접어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신앙 고백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당찬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교회

개혁 교회는 신조와 신앙 고백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한편 신조와 신앙 고백에 집착하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다. 제네바신앙고백서, 벨기에신앙고백서, 도르트신경, 하이델베르크신앙문답, 제1스위스신앙고백서, 제2스위스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등을 만들어냈다.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가 참이라는 강한 신념에 기초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표현한 것이다.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곳에서 멈추며, 되돌아가라고 하는 곳에서 되돌아서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조와 신앙 고백서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가르치기보다 위로, 사랑, 인간 관계, 축복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신조나 신앙 고백서들에 대해 등을 기댈 수 있는 방어벽 정도로 취급한다. 직분 받기 전에 한 번쯤 읽어보는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자를 누르기 위해 방패용으로 가끔 인용하는 실정이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교회가 공적인 신앙 고백문을 갖고 있으나 그것은 문건일 뿐 회원 교회·회원 단체·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자신의 신조나 신앙 고백에 상반된 신학을 가진 구성원들을 규제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신학자, 종교혼합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들을 포용한다. 심지어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공적으로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는 자들에게 신학교에서 목회자 양성을 허용하고 있다.


몇몇 교회들은 신조나 신앙 고백의 상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성경의 참된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자유주의 기독교가 교리와 신앙 고백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교리를 믿을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이런 움직임은 교리나 신앙 고백서를 가볍게 여기는 풍토를 조성한다.
공식화된 신조나 신앙 고백 없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화이다. 신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인정하든 않든 나름대로의 신조 공식과 신앙 고백적 진술을 소유하고 있다.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는 배격해야 하지만 신앙 고백은 언제나 중요하다.


성경은,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어떤 지침(clue) 없이 신자 개인과 교회에게 알기 쉬운 안내를 제공하기엔 너무 방대하다. 신조와 신앙 고백은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케 한다. 신조와 신앙 고백의 일차적 목적은 교육, 복음 전도, 참된 성도의 삶의 본질인 위대한 자유에 대한 즐겁고 행복한 선포이다(롬 10:9; 고전 12:3; 딤전 6:13; 요일 4:2). 참된 신앙이 존재하는 곳에 언제나 신앙 고백과 그것에 대한 강한 열정이 존재한다.
 
중추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종교개혁자들이 펼친 교회 개혁은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그분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지는 교회 재건 운동이었다. 교회의 표지(標識)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진리에 대한 강력한 민감성의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의 선포를 교회의 항구적인 표지로 보았다. 교회의 존립이 그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존재가 교황 중심의 교계(敎階)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는 교회관을 거부했다. 거창한 조직체와 성직 제도 그리고 예배당을 가졌다고 참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는 곳에는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진리를 떠난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교회의 표지는 단순한 설교 행위가 아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중추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교회 안의 미신적인 겉치레 예배와 의식을 개혁하고자 했다.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를 가르치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수를 뿌리고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형식과 절차를 밟는다고 해서 참 예배, 참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설교할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제시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가 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사도성이 어떤 인물과 처소와 지위로 계승되는 게 아니라, 신앙과 교리의 계승으로 유지된다고 확신했다. 신앙 고백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 성경, 신조를 의심할 여지 없이 참 교회의 표지로 여겼다. 이런 확신을 바탕으로 그들은 ‘오직 성경’에 토대를 둔 진리의 기둥과 터 곧 신앙 고백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목격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말씀``-교리를 무시하는 교회,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 설교, 십자가 없는 선교, 부활과 영생에 대한 고백이 없는 신학을 목도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한국 교회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행위를 교회의 표지인 말씀 선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예배와 교육이 설교 위주로 진행된다고 해서 개혁 교회의 표지를 가진 것은 아니다. 교회의 표지는 바울이 가르치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 초대 기독교인들이 박해 중에도 믿고 확신한 교리를 선포하는 일이다. 중추적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자들의 설교나 인본주의적 내용으로 일관하는 설교는 교회의 표지가 아니다.
 
계급적 교회관을 배격하는 교회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신앙 고백 공동체로 이해한 것은 교회를 계급 조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계급-교권 개념의 교회관을 배격했다. 개혁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직 사이에 상하의 구별이 없고 다만 직임이 구별된다고 보았다. 집사로 봉사한 사람이 장로로 임직되는 것은 승진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제자들이며 사무에 관한 일을 제외하곤 그들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다”라고 말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주의는 계급주의와 사제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계급적 구조를 배격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등하다고 강조한다.


존 칼빈은 만인제사장주의를 보완하여 안수례에 의해 세움을 받아 영적 직무를 수행하는 교역자와 그 교역자의 영적 보살핌을 받는 일반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지만, 그 직무는 구분된다고 가르쳤다. 무질서를 싫어한 그는 교역자의 권위와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동체의 효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직능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거기에 일정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각각의 직분 사이에 질서가 유지돼야 하고 존경과 신뢰에 바탕을 둔 사역이 이뤄져야 한다. 인도를 받는 자는 인도하는 자를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고 순종해야 한다(히 13:17). 신도들이 목회자를 존경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교회는 교회 안의 직분들을 다분히 계급 개념으로 이해한다. 일반 성도보다 집사, 집사보다 장로, 장로보다 목사의 계급이 더 높거나 서열상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배나 연장자를 존경하고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다. 집사로 봉사하다가 장로로 선택돼 봉사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교회의 직분은 문화의 맥락에 따라 그 개념이 약간씩 다를 수 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과 똑 같은 형태의 직분을 유지하지 않아도 교회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무방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계급적 직분 이해와 교권적 교회관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 직분의 본질을 흐릴 정도다. 유교의 장유유서, 서열 의식과 그것에 바탕을 둔 전제 정치 문화와 권위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계급적인 직분 이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로나 권사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잡음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서둘러 장로가 되고 싶어 하고, 집사나 권사로 선출되고 싶어 한다. 공동 의회, 교인 총회에서 집사나 장로로 선출이 되지 않은 일로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섬길 기회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은 계급을 얻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리 집사인 연로한 부인에게 권사라는 ‘직위’를 만들어 ‘승격’시키는 것도 계급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들이 개교회 안에 다양하게 남아 있다.


교회 안의 계급 의식은 교회의 영적 활기와 역동성을 앗아간다. 교회를 경직시킨다. 계급 의식에 투철한 교회일수록 의식적(儀式的)이고 건조하며 열정이 없고 획일적이다. 교조적인 권위와 질서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교회일수록 창의적이지 않다. 주님 안에서 사랑, 기쁨, 자유, 평화, 화해, 용서의 보람을 누리기 어렵다. 노인성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권위적이 되고 반지성적이 된다. 이런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에 억압당한다.
 
먼저 진리에 민감하라

한국 교회가 개혁 교회다운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은 먼저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상적인 개혁 교회는 신조와 신앙 고백을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교회의 실제적인 표지로 간직한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명료하게 가르치고 확고하게 고백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신앙 고백 공동체가 교권주의, 중세기적 미신, 새로운 형태의 이단, 거짓 교사의 가르침 등에 저항력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다. [object TEXTAREA]
 
최덕성 _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 200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