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사명' (십일조) / R.C. Sproul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1947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야구 시합을 보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다. 나는 삼촌과 손을 잡고 포비즈 경기장 관람석의 우리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경기장 한쪽에서 선수들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이비 덩굴 잎이 덥힌 담장과 관람석 중앙의 기념탑 뒤쪽에 있는 오래된 철문과 베이브 루스가 그의 마지막 홈런을 날린 우익수 쪽 관람석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철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삼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갑을 조심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즉각 그 지시를 따랐다. 자리에 앉은 다음 나는 "이제 지갑에서 손을 떼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삼촌은 그래도 좋다고 하셨다. 왜 갑자기 그런 주의를 주셨는지를 묻자 삼촌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기 둥근 목 칼라가 달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렴. 신부란다. 신부나 목사가 가까이 올 때면 언제나 지갑을 조심해야 한단다. 그 사람들은 모두 돈을 뺴앗아 가려고 하거든."

내 첫 번째 야구 경기 관람은 십일조와 자선금에 대한 냉소적인 자세를 처음 대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삼촌과는 다르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치셨다. 매주 나는 내 용돈의 10%를 헌금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오래 전부터 그렇게 배웠고 또한 계속해서 그렇게 해왔다.

갈수록 믿지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나 헌금에 대해 거센 비난을 퍼붓는다. TV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십일조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청지기가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매주 주일에 헌금을 한다. 헌금을 하기 바로 직전에 나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십일조와 헌금으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헌금이 예배의 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구약 성경의 십일조]
 

성경에 가장 먼저 기록된 헌물은 가인과 아벨이 드린 것으로 창세기 4장에서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3-5)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보다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 하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린 반면, 아벨은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셨다. 아벨은 양을 친 반면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농작물을 제물로 드렸다. 성경 그 어디에도 양을 치는 목동이 땅을 경작하는 농부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서 11장 4절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하신 것은 그가 드린 제물의 방법 때문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믿음없는 행동은 동생에 대한 질투로, 분노로 표출되었다.

나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다. 그는 그의 제물을 믿음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진수이다.

제사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핵심으로 이어진다. 구약 성경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시하면서 희생 제사 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약의 회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번제단'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구약 시대의 번제단 같은 것은 없다. 동물의 피로 희생 제사를 드리던 시대는 끝이 났다.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의 막을 내리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히9:24-10:3)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대속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생의 원리까지 제거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예배와 감사를 통해 우리의 시간과 힘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성경적인 헌금은 전반적인 청지기 사명의 일부이다.

청지기 사명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창세기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특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되심을 찬양하는 예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했던 시편을 통해 창조를 찬미하고 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리 '소유물'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유물들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관리할 것을 기대하신다.

성경에 '청지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경제'(economy)라는 단어가 파생되어 나온 헬라어 단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다. '집'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오이코스'(oikos)와 '법'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노모스'(nomos)가 합성된 이 단어는 직역하면 '가정 법' 또는 '가정 규정'이란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의 청지기는 집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주인이 집안 일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정의 물자를 배분할 책임이 있었다. 청지기의 일은 찬장에 음식을 가득 채워 놓고, 돈을 관리하고, 잔디를 정리하고, 집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명하신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세상을 관리할 책임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동산을 파손하고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꾸고 경작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낭비되거나 상하지 않게 돌봐야 했다.
 

나는 리고니어 성경연구원(Ligonier ministries)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 일에는 모든 최고 경영 관리자가 해야 하는 자원의 배치라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사역을 하지만, 우리에게는 관리해야 할 건물과 규정이 있고, 사람들과 컴퓨터와 사무실 집기와 물자가 있고 또 돈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 하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 우리의 시간과 인력과 돈을 낭비하고 우리의 설비나 장비를 잘못 사용한다면 우리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불충한 청지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어떤 자원을 다 써버리면 다른 일에는 그 자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100불이 있는데 그 돈을 가지고 모두 옷을 샀다면, 더 이상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비록 억만장자라 할지라도 모두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일한다. 어떤 자원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은 우리가 어떤 청지기인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 동산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역과 가정 생활과 개인적인 일 등,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다. 이 모든 일들은 자원을 관리하고 배치하는 일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이다. 그 젊은이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유산을 받자마자 재산을 늘리거나 투자하려 한 것이 아니라(종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술과 여자와 여흥에 다 허비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는 결국 돼지들이 먹는 열매를 먹으며 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탕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삶을 낭비한 것이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청지기 사명을 저버린 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지구상에 두셨다. 삶을 낭비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이 탕자가 새로운 삶을 찾고 다시 제 정신을 차리게 될 때까지 그의 삶이었다.
 

그는 아들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종으로 여겨질 것을 각오하고 회개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기쁘게 맞아 주었고, 그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것은 모든 탕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분은 은이나 금이나 그 어떤 보화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는 그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다(고후4:7). 이 소중한 보화를 그저 평범한 질그릇에 담아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청지기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의 핵심에는 십일조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십일조가 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이 신약 시대에 와서도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역할을 살펴보자. 십일조라는 말은 '십분의 일'이란 뜻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해마다 자기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었다. 십일조의 이점은 계급 투쟁과 질투로 인한 책략을 막아 버리는 데 있다. 어느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른 그룹의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불공평을 막아 준다. 그리고 어떤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부과하게 되면 경제가 정치화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똑같은 비율로 십일조를 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일 년의 10,000불을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0불이다. 그리고 일 년에 1,000,000불을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000불이다. 부자가 더 많은 돈을 내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과 같은 비율이 적용되었다.

구약 성경을 보다 보면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최근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4%만이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평균 수입의 2%만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사가 정확하고 십일조에 대한 원리가 아직 유효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96%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교회와 목회자와 기독교 교육에 속한 것을 도적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라기서 안에서 제기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놀라며 움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것을 훔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반응했다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들에게 신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십일조를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도록 레위 족속을 따로 구별하셨다. 레위 족속은 국가의 영적, 교육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다른 족속들로부터 구별되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상품과 용역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장 경제를 이해하고 계셨을 것이다.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체, 의사, 변호사, 그리고 최고의 수입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시장 경제 속에서는 그들의 용역이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교사와 목회자들의 용역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에서 가장 수입이 적은 전문가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학교 교사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십일조를 제정하셨다.


목회자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목회자의 보수에 반영된다.

목사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면 목사의 보수가 적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역자들이 전적으로 사역에 헌신하면서 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해 주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헌신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재정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만일 100불을 가지고 사역한다면 우리의 사역은 그 돈의 액수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돈을 낭비하고 10불 정도만을 사역에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문적인 경영 능력이 있고 청지기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해도 100불을 가지고 110불만큼의 사역을 할 수는 없다.

기독교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그 헌금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사역은 제한을 받는다.



[신약 성경의 십일조]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유물로 전해진 기독교 초기의 고서를 보면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십일조를 계속 했다.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도들의 가르침'이라 불리는 '디다케'(Didache)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후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도 십일조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기독교 교회 역사의 초기 문서에서 우리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계속해서 십일조를 실천했음을 볼 수 있다. 또 디다케에는 "기부를 하기 전에 손에 땀이 나게 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중하게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비유가 아닌가? "기부하기 전에 손에 땀이 나게 하라." 이것은 돈을 주지 않으려고 너무 꽉 움켜져서 손에 땀이 나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디에 기부할 것인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후원하는 문제와 관련해 논쟁의 여지를 야기시킨다. 말라기 3장 10절에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구약 성경에서 땅의 소산물이나 동물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관리하는 중앙 창고로 가져갔다. 모든 백성의 십일조는 그곳에 모았다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레위인들이 다시 분배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도 중앙 창고가 있어야 하며 모든 십일조를 그곳에 모았다가 다시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 하나의 중앙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 각 도시와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중앙 성소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중앙 창고로 모으는 것 역시 애매한 일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원리를 기초로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은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우리가 번 돈을 지금 다 사용하기보다는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본이 그 부를 늘려가면서 우리를 위해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투자는 영원한 보상이 따르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그 보상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자녀, 그리고 손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하나님의 일에 투자해야 한다. 이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신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투자한다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십일조를 우선시하는 것을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것이 좋다. 아이에게 용돈으로 1불을 준다면 그 중 10센트는 주일날 헌금 주머니 속에 넣도록 가르치고 아이가 어려서부터 이 원리를 배울 수 있게 하라. 정부가 원천징수하는 세금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세금을 공제한 금액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정부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알아보려면 지출 명세서를 살펴보라. 당신의 보화가 있는 곳에 당신의 마음도 있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된다.


성경 읽기, 기도, 예배, 섬김, 청지기 사명 이 다섯 가지는 생산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훈련해야 할 핵심 요소들이다. 이 다섯 가지는 교회의 건강과 우리의 영적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다섯 가지를 신실하게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R.C. Sproul의 '당신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발췌 (120-14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글/ 한아름 님

영적 교만

 

조나단 에드워즈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단의 손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Edwards)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편만하면서도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이 문을 통해 사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심히 바라는 신자의 마음에 들어 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는 이 통로를 통해 마음을 검게 하며,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 손잡이를 이용해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끔 만든다. 이 질병이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질병 역시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

 

교만은 어떤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만함은 자신을 너무나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 잣대가 이미 생각의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교만보다 더 자가당착에 빠지고 찾아내기 힘든 것은 없다. 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린다는 것이다.

 

교만함은 많은 모양과 형태로 나타나 양파껍질처럼 여러층을 마음 속에 이룬다 - 한겹을 벗기면 바로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을 가장 최선의 노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마음의 탐사자(성령)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영적교만은 그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직관적인 판단으로는 구별해 내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열매와 결과를 보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열매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에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매우 주의 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민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궁구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위선자의 불행한 망상과 죽은 경건함의 비꼬는 태도이며, 수많은 신자들의 거룩함에 반대한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이와 달라서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하거나, 그들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얘기한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 은혜안에서 진보가 적다고 헐뜯으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자들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겸손한 자들은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비상한 발견을 하였을 때에라도 자신의 죄악됨과 천함에 대해 압도되어 있다.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타인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하고 표정과 행동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비록 자신의 세상에서의 의무에 충실할 것이지만 홀로 천국을 향해 걸어 간다. 온 세상이 그를 저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 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의 나중이 되려하며, 양보하고,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때,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자신에게 표해야 할 마땅한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갖는다.

 

근본주의자 성경이 절대 틀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그대로 재림하실 것을 믿는 사람을 아십니까?

  

교황 프란치스코가 전 세계를 향해 그들을 과격분자로 선고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평화의사도를 자처하는 지도자의 굉장히 충격적이고 위험한 발언입니다.

 

 

       

 

 

 교황이 받은 질문은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해 당신이 가지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답변입니다.


 (교황)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는 않지만 폭력

           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다."


 

그가 "근본주의자들은 폭력배들이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간단하게 말해


"국가들간의 평화와 종교들의 연합을 위해서 근본주의자들을 처단해야 한다.

평화와 연합은 근본주의자들이 존재할 때는 불가능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절대 틀리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그는 근본주의자입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참 백성을 처단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 이것은 근본주의에요. 근본주의는 모든 세게종교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환호~)

 

천주교는 환영받고 말씀을 따르는 우리는 핍박과 고난을 받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시기가 눈 앞에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 자기의 정책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속임수가 형통하게 하고 자기 마음속에서

자신을 높이며 평화를 빌미로 많은 사람을 멸할 것이요,또 그가 일어나서 통치자들의

통치자를 대적할 터이나 그가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무너지리라.  (단 8 :25)

 


백마 탄자와 흰 말의 비밀

요한계시록 권위자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해석 해부 4-1강(계 6장 1절~2절)

 

요한계시록 6, 7, 8장 개요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 번호키를 누른다. 집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는 단 하나다. 그 번호를 눌러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번 잘못 누르면 ‘락’이 걸린다. 매우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열 때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바른 열쇠가 있다. 그리고 바른 코드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이라는 열쇠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 돌리는 예배, 즉 찬양과 경배’의 코드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예배가 요한계시록을 여는 바른 열쇠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게 된다. 반면 어린양을 따르지 않고 배척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인·나팔·대접에 이르는 가혹한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

   

▲ 강연하는 이필찬 교수

 

 

전문은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02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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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친절의 결과

미국 텍사스주 그랜드 프레이어리에 찰스 하비라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매우 조급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인터뷰를 하러 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약 10분 정도 늦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비의 눈에 한 중년 부인이 자동차 타이어가 터져서 차를 길가에 대어 놓고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비는 아무리 바쁘다 해도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차를 그 뒤에 세우고 터진 타이어를 갈아 끼워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인터뷰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에 이제 좋은 직장을 얻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회사에 가서 입사 서류를 들고 인사과장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비는 인사과장과 짧은 면접 후에 즉시 좋은 자리에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 회사의 인사과장은 바로 자동차 타이어가 터져서 길가에 서 있었던 그 중년 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작은 일에서부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충성스럽게 돌보는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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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하나님

대장쟁이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예수님을 내어주셨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몸을 드린 속죄제사를 하나님이 만족하게 받지 아니하셨다면
예수님은 결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으며
우리는 여전히 진노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드린 말씀이지만 다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 하는지.....

죄인 된 인간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죽지 않을 길이 없는 것이 죄인 된 인간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죄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살기 위하여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죄 값을 누군가가 치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죄의 값을 치러준다는 것은 대신하여 죽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 인류를 다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누군가가 대신 죽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모든 인류의 대속자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속죄제물로 짐승을 잡았지만 짐승을 아무리 많이 잡은들 사람 하나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 같은 영적존재도 안 됩니다.
그런 존재는 죽어줄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만으로만 대신할 수 있지 다른 존재로는 대신이 안 됩니다.

둘째는 그 대신 벌 받아 죽어줄 사람 자신이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자기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대신하여 죽어줄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설혹 죄 없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은 한 사람만을 대신해 죽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를 위해 대신 벌 받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온 천하인간보다 더 가치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신 죽어주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어떤 존재라도 천하의 모든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대신 벌 받아 죽어주신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뿐 아니라 우주만유보다 더 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최초의 가장 고귀한 피조물, 미가앨 천사장이라면) 예수님의 속죄제사는 온 인류를 구할 수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앞절 24절을 보십시오.
(롬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데 익숙해 있습니다만,
사실은 하나님이나 주님이나 다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4절을 다시 읽는다면 “곧 예수 우리 하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신비스럽고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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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4:24-25)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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