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신자들은

  존 오웬

  성실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그를 예배하고, 그가 지정하신 수단만을 사용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성실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는 "간음" 또는 "통간"이라고 부르신다.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거짓된 예배는 "음행"이다. 사람들이 거짓된 예배를 하게 만드는 교회는 "음녀의 어미"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성실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와 예배를 마음으로 성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예배가 아닌 다른 예배를 드리면 신자들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고,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의지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질을 결정하도록 하는 일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나님은 "누가 이런 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라고 물으신다.

그리고 "너희가 사람의 유전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예배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정하신 것을 벗어나 하나님 예배에 관한 어떤 일이나 권한이 있다는 논리는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끔찍한 미신과 간음, 그리고 혼동과 죄와 박해와 전쟁들의 원인이다. 계시록의 대부분은 이 진리를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기도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무시될 때, 복음의 능력있는 전파가 무시되고, 안식이 경시되고, 거룩이 박해받게 된다.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교회에서 법을 제정하시는 독점적 권리와 능력을 빼앗기게 되며, 참남편이 밀려나고 간음자가 남편으로 들어 앉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일이 없는 감독이 그의 집을 맡게 된다(엡 4: 11). 오만하고, 겉으로만 드러내며, 이교와 유대교와 적그리스도적인 근원에서 나온 의식들이 도입된다. 그 모든 것들은 한마디라도, 아니 한 점, 한 획이라도 하나님의 책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실한 그리스도인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그리스도가 명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도 않고 시행하지도 않는다. "주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는 말과 함께 그의 이름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그들은 하늘의 천사의 말이라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들도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만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마 28: 20).

 

성실한 신자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포용하여 받아들이고 실행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기 원하시는 것을 부지런히 찾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마을

 

가라지의 비유 / ‘하나님 나라와 비유’(홍창표 교수)에서 발췌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이 비유의 전반적인 문맥은 다음과 같은 반대 이미지들을 한 쌍으로 하여 짝을 이룬다.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생선과 뱀,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 하나님과 재물, 개와 거룩한 것, 진주와 돼지, 좁은 문과 넓은 문, 양과 염소, 알곡과 잡초이다. 이처럼 반대되는 것들을 한 쌍으로 만든 것은 마가복음 4:10~12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준 제자들과 주지 않은 “외인들”로 구분한 것과 조화를 이룬다. 가라지 비유는 바로 앞에 기록된 씨 뿌리는 비유(마13:1~9, 18~23)와 한 쌍을 이룬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지 않은 땅에 뿌려진 씨와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한 쌍을 이루고,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대조된다. 여러 구절에서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은 것”과 “적은 수가 선택받은 것”이 대조되고 반대되는 주제로 한 쌍을 이룬다(마13:47~50, 22:14, 25:31~46, 7:13~14; 눅13:23~24, 7:22~23, 13:26~27)


이런 반대되는 이미지로 한 쌍을 이룬 문맥은 심판이 올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실제로 심판이 오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인내할 것과 죄사함을 가르치신 복음서의 일반적인 넓은 문맥에 가라지의 비유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일부 비평학자들에 의하면 이 비유가 초대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면서, 비유가 생긴 동기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지나친 열심을 가진 자들, 다시 말하면 “인자”가 종말의 심판 때에 행하실 특권인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는 것을 이 지상에서 이루려고 하는 열심자들을 경고하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A. Schlatter, Der Evangelist Matthaus(1933), p.442) 그러나 이 논의는 비유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제시한 것은 임시적인 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종들이 제시한 것이 임시적인 분리(a provisional separation)였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같은 교인들에게만 적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유에서 나타난 분리는 알곡에서 가라지를 마지막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 일어날 최종적인 분리(the definitive separ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비유의 주제는 종들과 주인 사이에 분리시키는 자가 누구인가 혹은 어떠한 종류의 분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즉 분리가 추수할 때까지 연기된 것이다.


다드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의 분리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조급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심을 해소시켜 주시려고 가라지의 비유를 베푸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주인이 추수 때에 가라지가 알고 중에서 있다고 해서 추수를 미루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이스라엘 안에 죄인들이 있다고 해서 미루어지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C.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p.185)  


물론 다드는 자신이 세운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의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그렇게 관찰한다. 그러나 가라지 비유는 추수에 대하여 말하면서 분리하는 것을 미루지 않고 곧 실행되어야 할 때로 묘사한다. 다시 말하자면 가라지의 비유에 나타난 추수는 현실에서 아직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는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알지 못하고 범하는 죄인들이라고 저주한 사람들과도 교제하였는데,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사게 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the dragnet) 비유를 베푸시게 된 동기였다.


가라지의 비유의 확실성을 두고서 한때 비평학자들은 마태가 마가복음 비유의 단편에서 가져와 꾸며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확실성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도마복음이라는 위경의 연구를 통해 반박을 받게 되었다.((B.B. Scott, Jesus, Symbol-Maker for the Kingdom) 그리고 다드 교수도 비평학자들의 이런 의견을 배척하고 마태복음의 비유가 독자적이라고 논증했다.(C.H. Dodd, op.cit, pp.137~183) 그러나 다른 비평학자들처럼 다드도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는 마태복음 13:36~43이 마가의 씨 뿌리는 비유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이차적인 것이라고 했다. 다드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마태복음 13:36~43에 “설교적”(homiletic)인 것과 “종말론적”  (eschatological) 동기가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C.H. Dodd) 이것은 가라지 비유의 설명을 단순히 자신의 실현된 종말론적 전망에 국한시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가라지 비유의 확실성을 더 심하게 비난한 사람은 예레미아스(J.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이다. 예레미아스는 마태복음 13:36~43에 합당하지 않은 말들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 하나가 38절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 “세상“이란 의미를 가진 아람어가 기독교 이전 시대에도 있었는지 의심한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의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할 필요 없이, 그러한 의미를 가진 아람어 ”알마“가 나타났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밭은 세상”이라는 말이 다른 구절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11:27, 13:31,32, 24:14, 28:18,19; 요3:16, 4:42).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곳에 선포되어야 하는데, 물론 즉시 그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10:5,6), 점진적으로 모든 곳 곧 온 세계에 공포되는 것이다.


“밭은 세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벗어나 온 세계에 미칠 선교사역을 전제하고 있다(10:16~18, 28:18~20). 이 말은 10:5~6에 나타난 협의의 명령인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에 국한된 열두 제자의 사역에 배타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확증된다. 여기서 실제로 “밭”이라는 말은 교회를 의미한다. “밭” 곧 교회가 세상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가 온 세상에 공포되므로 예수님이 “밭은 세상”이라고 설명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주적이며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 곧 교회가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셨다.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예, Augustine, Breviculus Collationis cum Donatistis) 칼빈도 “세상”이 제유(synecdoche,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거나, 한 단어로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방법, 또는 그 반대)로 교회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능력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심을 의미하며, 교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실현이요 결실인 것이다.


예레미아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마13:36~43)을 예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38절에 나타난 “악한 자”가 마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아스는 세상이라는 말처럼 “악한 자”라는 아람어가 마귀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단언하듯 확증을 내세울 수 있는 논의는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마귀가 흔히 나타나며(마4:1, 5:37, 6:13), 사단의 자녀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마귀의 아들들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마귀 곧 “악한 자”라는 말은 비방자(slanderer), 참소자(accuser, 욥1:9; 슥3:1,2; 계12:9,10), 대적 마귀(adversary, 벧전5:8)를 뜻한다.


마귀가 “악의 왕자”(prince of evil)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믿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믿음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마귀”를 만나게 되었다(마4:1,5,8, 13:39, 25:41; 요3:8,10; 유9; 계2:10, 20:2; 마5:37).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난 뒤 분노와 질투와 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증오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내며, 특별히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고 구원역사를 이루시려는 하나님께 그 증오를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의 목적은 자기의 대원수 메시아를 속이려고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예레미아스가 논증한 대로 비록 아람어.문서에서 “악한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확증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 자신이 확증이 되신다.


예레미아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을 거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마태복음(13:38)에 기록된 “천국”이라는 말이 제한(qualification)하는 단어가 없으므로 세상적 정권을 표시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레미아스가 이같이 주장하는 근거로는 히브리어 말쿠트를 제한하는 말이 없으면 세상적 정권을 가리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레미아스는 그러한 근거에서 “천국의 아들들”(38절)이란 말이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표시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했다. 예레미아스가 “천국의 아들들”이란 말을 그처럼 이상하게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같은 말이 마태복음 8:12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마태복음 8:12의 “천국의 아들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천국의 아들들”이란 말이 어떤 문제를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8절에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라고 한다. “천국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독립된 말이 아니며, 본문은 “좋은 씨”를 곧 “천국의 아들들”이라 말한다. 38절의 “좋은 씨“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이 온 세상에 공포되어야 할 것이다. 그 좋은 씨의 결실이 ”천국의 아들들“ 안에 나타나는 정도에 따라 천국의 아들들은 좋은 씨 자체와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함의하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략법”(elliptical) 표현들 중 하나이다. “...의 아들들”이라는 말 중에서 “...의”라는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나 혹은 “악한 자”에게 매여 있는 더욱 깊고 가까운 관계를 나타낸다.(H.N. Riddelbos, Matthew, 126p)


예레미아스가 마태복음 8:12을 바로 해석한 것은 사실이다. “나라의 본 자손들”에서 소유격 “의”는 “종속된“(belonging to) 혹은 ”예정된“(destined for)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SBI, 476~78; 마9:15~23:15) 그러므로 ”나라의 본 자손들“은 유대인을 나타내고, 그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아들들(3:9~10) 곧  혈통에 의한 권리로 말미암아 나라에 속한 자들로 인식한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 같은 유대인의 전제와 전망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하셨더라도 의미는 다른 것이다. 같은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용법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8:12의 문맥은 한 백부장의 산 믿음을 다루고 있다. 구원을 확증한 백부장의 믿음은 혈통과 권리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불신과 대조를 이룬다. 그 같이 불신하는 유대인들 곧 “나라의 본 자손”들이란 유대인 종족으로 태어나 메시야의 왕국을 바라보고 언약의 권리만 소유한 자들을 뜻한다. 하지만 그런 외적 유대인들이 언약의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8:12이 증거하고 있다. 반면 13:38의 “천국의 아들들”이란 참된 이스라엘 곧 메시야의 왕국에 참여하게 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8:12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13:38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혈통적, 법적 권리를 가진 아브라함의 자손이 “본 자손”으로서 왕국의 많은 특권들(the kingdom privileges)을 소유하고 내려왔기 때문이다.(시147:20; 사63:89; 암3:2; 롬9:4; 엡2:12; Wm. Hendriksen, Matthew, p.397)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받은 것이다. 8:12의 “본 자손들 혹은 자녀들”이라는 말은 유대인 하나하나가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대다수가 바깥 어두운 데 버림받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부정적으로 묘사된다.(H.N. Ridderbos, op.cit, p.164)


예레미아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을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천사들이 “그 나라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41절)라고 한 대목 때문이다. 그는 가라지를 거두는 일을 천사들에게 맡긴다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 그러나 이 말이 그처럼 이상한 것도 아니고 다른 성경구절과 조화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계시록 14:14~16에 보면 “인자” 자신이 알곡을 거두고 14:17~20에 보면 포도 수확을 천사들에게 맡기고 있다. 마태복음 24:31에는 인자가 재림하실 때 천사들을 보내는데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계시록 14:14~20과도 조화를 이룬다. “인자”가 자기의 택한 자들을 모으는 데 종속적 혹은 부차적인 기능(a subsidiary function)을 천사들에게 맡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태복음 13:40은 부차적인 일 곧 “가라지를 거두는” 일을 천사들에게 맡길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3:24~30, 36~43의 가라지 비유와 설명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확실한 비유라는 점은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25절에서 “원수”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기 때문에 고정된 “그 원수”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 말이 “셈족어 방식”이므로 고정적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 그냥 원수(an enermy)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 것을 28절이 확증하고 있는데, 28절에는 원수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가라지는 ”곡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자라는 초기에는 이 둘을 분간하기 어렵다.


이 비유는 다음의 세 가지 교훈을 전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자기의 공회, 곧 실현된 하나님 나라에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함께 공존할 것을 이 세상 끝날까지 허락하신다. 이 공존 현상은 다른 비유들에도 나타난다(마13:47~50, 22:9~10, 25:31~46).(cf. Jack Dean Kingsbury, The parables of Jesus in Matthew 13:) 2) 종말의 끝에 악한 자들은 의로운 자들과 분리되어 심판을 받고 영원한 저주에 들어간다. 3)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전에 인도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이처럼 가라지의 비유는 추수 때가 이를 때까지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을 종들은 그냥 그대로 놔두고 그 추수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받는 용서, 그리고 가라지가 당할 대심판, 이 세 가지 요점을 함축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말론은 서로 견해가 나누게 된다.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이 세상 끝까지 공존한다는 것은 무천년설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천년자들도 이 비유가 후천년설을 지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밭에서 가라지가 곡식으로 변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 세상이 기독교화 된다는 후천년설의 주장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후천년설은 이 난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한 세대(one generation)는 이전의 한 세대를 계속 이어 내려오는 것인데, 각 세대 안에는 부단한 변화(constant change)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인류 모두가 이 세상에 타락한 인생으로 들어온 까닭에 모두 다 가라지이고, 가라지로 시작한 것이 변화되어 곡식 곧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Boettner, Millennium, p.128). 세대주의자들은 이 비유에서 휴거를 찾는다. 물론 이런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에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대주의는 휴거한 후에 예수님이 천년 동안 악한 자들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라지 곧 악한 자들이 불에 태워졌으므로 악한 자들이 남아 있는지 문제가 된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세대주의는 가라지를 불태우려고 곁에 묶어 놓고 먼저 곡식을 거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마태복음 13:41~43(36~43)과 충돌이 난다. 마태복음 13:41~43은 마지막 대심판을 묘사한다.



‘하나님 나라와 비유’(홍창표 교수) 132~139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 [칼빈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2)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앞 문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듭나도록 촉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판을 말함으로써 조롱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많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에게 제시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거만스럽게 배척하는 만큼 그들 앞에 기다리는 형벌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엄한 심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불신자를 비교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아무 탈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무감각에서 일깨워지고 구원의 주(主)로 조롱했던 바로 그 분이 보복자로 등장하는 날,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이 가르침을 우리도 역시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그리고 요한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성취하실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를 가리켜 '키'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 전에는 온 세상이 뒤범벅인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고, 사실상 쭉정이로 가득차 있음으로써 그들은 쾌락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는 날, 온 마당에 가득찼던 쭉정이는 이 키의 바람에 날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복음이 각 개인에게서 쭉정이를 제거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많은 쭉정이를 버림 받은 자에게, 신실한 자를 알곡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타작 마당은(어떤 사람들 생각대로)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이것은 요한의 말이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명백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들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잠시 동안 뿐이고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없어지듯 곧 날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잠시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무용지물로 질식하고 있지만 곧 복음의 강풍으로 제거될 당시에 타락한 교회 상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쭉정이 밖에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받은 자들은 알곡이 되기 때문에 쭉정이와는 상관없이 곧 곡간으로 거둬들여질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정화작업을 시작하였으며 날마다 그 결산을 보고 계시지만, 전체 결과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최후의 순간을 지적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신실한 자들은 오늘날은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가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체험할 그 불의의 열기를 현재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을 고통으로서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갑론을박하지만, 여러 성경 귀절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불이라면 이사야 30장33절에 나오는 유황과 사름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은 벌레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벌레'라는 단어가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퍅한 사람들이 쓸데 없이 고민하는 온갖 억측같은 것은 뒤로 제쳐놓자. 이 여러가지 표현은, 우리의 단순한 마음이 파악하는 대로라면, 오늘날 인간의 이해력과 표현력을 초월하는 그러한 무서운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칼빈 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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