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대죄(SEVEN DEADLY SINS)

7대 대죄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리스의 수도자 에바그리오 도 폰토에 의해 처음 체계화되었
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덟 가지였으며 인간이 그르치기 쉬운 부정적 성향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들 모두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 목록에 ‘질투’를 포함시키고 기존의 ‘교만’과 ‘허영’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17세기에 이 목록은 다시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멜랑코리’를 더
이상 죄에 포함시키지 않는 대신 ‘나태’가 새로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7대 대죄는 교만, 질투, 탐욕, 분노, 탐식, 음욕, 게으름을 가리킵니다.

1) 교만
교만은 라틴어의 Superbia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 오만, 자만심 거만함, 무례함을 말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첫 번째 계율인 ‘너희는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에 반하는 죄악입니다.

랍비 아딘 스타인살츠의 ‘교만’에 대한 정의는 “사람들이 곁다리에 불과한 비교방식을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애 쓴다면 빈 껍데기들만 발견하게 된다. 이 빈 껍데기들이 그럴 듯 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자신을 톰의 친구, 딕의 아들, 대단한 자리에 있는 중역, 이러저러한 업무를 하는 누구로 정의 내리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은 모두 우리들의 한 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들은 대개 비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눈에 띄고자 하는 이들의 특성이다. 진실한 단 하나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이루어진 다음부터 모든 것은 이치에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위대한 의미에 눈뜨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만심일 뿐이다. 부풀어 오르는 것은 커다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덕경에는 ‘교만’에 대한 경구가 씌어 있습니다. ‘만약 꽃병에 물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을 나르려고 하기보다는 꽃병을 가득 채우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가 칼날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갈아놓는다면 칼날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금과 옥이 방에 가득하다면 그 주인은 그 물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재산과 명예가 오만함으로 이어질 때 틀림없이 악이 뒤 따른다. 우리가 우리의 직분을 다해 이름을 얻기 시작할 때 일이 완수되자마자 지혜는 미망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성경 말씀에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에서는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언 13장 10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장 18절)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잠언 21장 24절)

2) 질투
질투는 라틴어 Invidia에 그 어원이 있습니다. 질투는 고통과 분노가 혼재하는 감정이자 타인의 번영과 행복에 대해 불쾌하게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마음이지요. 가톨릭 교회는 “질투는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한 십계의 마지막 계율을 반하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질투는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창세기의 한 대목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신께서 아벨이 바친 재물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카인의 재물에는 만족스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카인이 굉장히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지니까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화가 나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느냐?’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신께서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어야 했네. ‘왜 화가 났느냐? 내가 너의 재물을 받지 않아서냐, 아니면 내가 아벨의 재물을 받아서냐?’

작가 지오바니 파피니는 “내가 내 자신을 비하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최고의 길은 더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밑바닥에 떨어지기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자극이 없다면 나는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손상된 명예를 발판으로 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더 아름답게 다듬고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를 없앤다.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자아를 완성하는데 협력하게 된다.”

과학자이자 연구자인 윌리엄 M. 셀턴 박사는 ‘질투’를 낙오자들의 전형적 반응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고귀한 사상’ ‘사회 정의’를 이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성전 뒤에 숨어서 현실을 회피한다는 것이죠.

셀턴 박사는 학교가 학생으로 하여금 성공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어떤 성공이든 늘 부패, 조작, 도덕적 타락과 연결시킬 때 상황은 위험해진다고 지적합니다. 성공의 추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본질적인 조건이며 학생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는 성공을 증오하는 정신분열적 상태에 빠짐으로써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사회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마들이 ‘어둠의 왕자’를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답니다. 2년 동안 사막에 사는 어떤 수도사를 유혹했는데 돈이든 여자든 그들이 가진 걸 다 내밀어도 소용없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유혹하는 법을 잘 모르는구나. 날 따라와서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보아라.”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결한 수도사가 사는 동굴로 날아 갔습니다. 거기서 사탄이 수도사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네 친구 마카리우스가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승진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도사는 하늘에 대고 욕을 퍼붓더니 정신을 잃었답니다.

성경 말씀에 요셉이 형들로부터 질투를 받아 형들이 미디안 사람 이스마엘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버린다. (창세기 37장)
사울 왕이 다윗을 질투하여 다윗을 창으로 벽에 박으려 하였고(사무엘 상 18장 7~11절)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시기를 당하여 불량배들에게 끌어 내려 함을 당하고(사도행전 17장 5~9절)
또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잠언 24장 1절)
이러한 일을 경계하는 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에게 있지 못함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 20~21절)

3) 탐욕
탐욕은 라틴어 Avaritia에서 온 여성 명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 인색함, 비열함에 대한 과도한 맹신을 뜻하는 말이지요.

인색(탐욕)을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 계율(내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과 열 번째 계율(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에 반하는 것이라고요.
탐욕은 쾌락 또는 소유에 관한 무절제한 성향입니다.

“사막의 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련수사가 대수도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성자이시여, 제 가슴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제 영혼은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대수도 원장이 수사에게 병자성사에 같이 가자고 말했습니다. 환자의 가족들을 위로한 대수도 원장은 집 한구석에 여행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삼촌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 들어 있습니다,’ 환자의 조카가 대답했습니다. ‘삼촌은 그 옷들을 입을 적당한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샀지요. 하지만 가방 안에서 썩고 있습니다.’ ‘저 가방을 잊지 말거라. 그곳을 떠나면서 대수도 원장이 수련수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네 마음에 영적인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사용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 보물들은 썩어 사라질 것이다’

수백 년 전 랍비 모세 벤 마이몬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이름의 사자를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신의 영원한 섭리는 자신으로 하여금 인간의 건강을 돌보게 하는 것이라고요. 그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사랑이 매 순간 나를 인도하게 하소서, 탐욕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 혹은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에 나의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함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도덕경”에는 ‘갖가지 색깔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온갖 음악이 인간의 귀를 먹게 한다. 기름진 음식이 사람의 혀를 버려 놓았다.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분노와 과격한 열정을 심어 놓는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위험한 장애물을 낳기에 화를 초래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현자는 피상적인 것을 거부하고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 전서 6장 9절)

4) 분노
분노는 라틴어 Ira에서 온 여성 명사입니다. 성마름, 노여움, 분개, 복수심을 뜻하는 말이지요. 가톨릭교회는 “분노는 단지 타인을 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에 증오의 씨를 뿌린 우리 자신에게도 분노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자살로 끝이 난다. 우리는 단죄와 형벌이 신에 귀속된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예배당에 함께 기거하던 두 현자가 어느 날 담소를 나누었답니다. 한 현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싸움 한판 합시다. 이렇게 고립된 생활을 하니 인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소, 싸움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끝내 인간을 괴롭히는 정념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어떻게 싸움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렇게 해봅시다, 내가 이 벽돌을 여기 가운데에다가 놓을 테니 당신은 벽돌이 당신 것이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내가 아니다, 이 벽돌은 내 것이라고 반박하겠소, 이렇게 옥신각신하다 보면 결국 싸우게 될 것 아니겠소.’ 그래서 두 현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 싸우는 방법을 모르겠다던 현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이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이 벽돌은 당신이 가지시오, 싸움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싸움은 불가능합니다.’

재니스 윌리엄스(Janice William’s)라는 분은 45세에서 64세까지의 연령대에 속한 13,000명의 행동을 연구한 결과, 심하게 화를 내고 또 걸핏하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역경에 빠졌을 때 좀 더 차분하게 대하는 사람들 보다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세 배나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이유는 매번 화를 낼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혈액 속에 추가로 방출되기 때문이랍니다. 아드레날린 농도가 강해지면 심박수가 증가하는 동시에 혈관이 좁아져 혈압이 높아지고, 이런 증상이 반복되다 보면 일반적으로 심장마비와 관련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는 심장이 뛰는 속도가 변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맥에 쌓인 지방이 갑자기 팽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론 G. J의 책 ‘부정적인 감정, 화와 증오’중에서)

도덕경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모든 무기는 악의 도구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라면 절대로 그러한 도구를 사용해선 안되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군주가 가치를 두는 것은 고요함과 평안이다. 군주에게 무력으로 얻은 승리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도덕경은 군주의 분노가 살육을 부를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력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즐긴다는 뜻이다. 살육을 즐기는 사람이 제국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힘을 꺾고 싶으면 먼저 상대의 힘을 북돋아야 하고, 때려 눞히고 싶으면 먼저 일으켜야 하며, 빼앗고자 한다면 먼저 선물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이리하면 약자가 강자를 이길 것이다.”

성경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욥기 5장 2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시편 37편 8절)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언 29장 22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자의 분노는 이 돌보다 무거우니라.” (잠언 27장 3절)

5. 탐식
탐식은 라틴어 gula에서 온 여성 명사로 과다하게 먹고 마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탐식은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 무절제한 욕망입니다. 인간은 건강에 나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보다 음식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내보여서도 안 됩니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술에 취하는 것은 완전히 몰지각한 행동이며 대죄라고 말합니다.

에보트 신부는 한 수사와 함께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최고의 음식을 내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수사는 단식 중이었습니다. 음식이 나오자 수사는 콩 한쪽을 집더니 천천히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나오자 마자 에보트 신부가 수사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당신의 고결함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단식 때는 식사 초대에 응하지 마십시오.’

현재 개발도상국의 기아 인구는 7억7천7백만 명에 달합니다. 1996년 열린 세계식량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목표수치(1990년부터 1992년 사이의 기아 인구 팔억1천5백만 명의 절반)를 2030년까지 달성할 수 있을지 불투명합니다. 이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때문입니다. 고질적인 영양 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수가 1억9천4백만 명에서 2030년에 1억8천3백만 명으로 밖에 줄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자 우와이스를 만나고 싶어하는 빵 굽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와이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그 빵집에 가서 빵 하나를 집어 먹었습니다. 그러자 빵 장수는 그를 때리며 길바닥으로 내쫓았습니다. 이를 본 우와이스의 제자가 말했습니다. ‘미쳤군요! 방금 내쫓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스승님입니다.’ 빵 장수는 깊이 뉘우치고서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우와이스 말이 자신과 제자들을 식사에 초대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빵 장수는 그들을 근사한 식당에 데리고 가서 가장 비싼 음식들을 주문했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이렇게 구별하는 걸세, 저 사람은 내가 유명하기 때문에 금화 열 냥을 들여가며 진수성찬을 대접하지만 배고픈 거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네.’

하나의 바퀴를 완성하려면 바퀴살 서른 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마차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퀴 가운데의 빈 공간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유용한 것을 만들어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빈 공간이다.

성경에 “술을 즐겨 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 임이니라.” (잠언 23장 20절~21절)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언 21장 17절))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잠언 23장 2절)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잠언 28장 7절)

6. 음욕
음욕은 라틴어 Luxuria에서 파생된 여성 명사입니다. 호색, 육욕, 음탕함을 뜻하는 이 말은 식물의 무성함 또는 수액의 충만함으로 정의되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성적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욕구를 ‘음욕’이라고 말합니다. 욕망과 행동에 있어서 신의 목적은 배우자 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조화시키고 자식을 얻는 것입니다. 음욕은 여섯 번째 계율 ‘간음하지 말라’에 반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우화가 있습니다. 주와 우는 사찰에서 일주일 참선을 마친 후 귀가했습니다. 그들은 유혹이 어떤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둑에 도달했을 때, 한 아름다운 여인이 강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는 그녀를 안아 강을 건너 주고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어느 순간 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유혹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자네는 그 여인을 팔로 안았네, 그건 죄악이 자네 영혼에 스며들 기회를 제공한 거네.’ 주가 대답했습니다. ‘도반이여, 나는 우러나는 대로 행동한 걸세, 나는 그 여인을 건너게 한 후 강 반대편에 남겨놓고 왔네, 그러나 자네는 계속 생각 속에 그녀를 담아두고 있네, 그러니 자네가 죄에 더 가까이 있는 걸세.’

또 한 창녀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썼답니다. ‘나는 남자와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350 스위스 프랑을 벌었다. 나는 과장되게 행동했다. 만약 옷 벗는 시간, 좋아하는 척 꾸미는 시간, 뻔한 이야기들로 잡담하는 시간 그리고 옷 입는 시간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이 한 시간은 실제로 행위를 하는 데 드는 11분으로 줄 수 있을 것이다.
11분, 세상은 겨우 11분밖에 걸리지 않는 무언가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사람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유지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느라 애쓰고, 제네바 호수 주변을 같이 산책하고 싶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다른 여인들을 쳐다보고, 자신들이 입을 비싼 옷을 사고, 그것보다 더 비싼 옷을 자신의 부인을 위해 사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잃어버린 것을 보충하기 위해 창녀에게 돈을 지불하고 화장품, 다이어트, 운동, 포르노, 권력이라는 거대산업을 부양하는 것은 바로 하루 24시간 중 이 11분 때문이다.
남자들이 그들의 부인과 매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렇다. 하지만 ‘매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진짜 터무니없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 여자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에 대해, 돈과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문명에는 아주 큰 결함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간음과 탐욕과 악덕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장 22절~23절)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求?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잠언 6장 32절~33절)

7. 게으름
7대 죄악 중 마지막인 ‘나태’(게으름)는 라틴어 Prigritia에서 온 여성 명사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매일 땀 흘려서 빵을 벌어야 하고 일신의 안일과 당장의 결과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태는 육체적, 정신적 노력의 결핍에서 오며, 영혼을 타락시키고 결국 비탄과 우울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죠.

후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자마자 자신이 매우 아름다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에서 그리던 안락함과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때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도 됩니다. 무슨 음식이든 실컷 먹고 재미있고 즐겁게 지내세요.” 후안은 너무 기뻐서 그가 살았을 때 꿈꾸던 것들을 다 해봤습니다.
몇 년 동안 즐겁게 지내던 후안은 어느 날 하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미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했습니다. 이젠 약간의 일이 필요합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고 싶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일입니다. 이곳엔 전혀 할 일이 없습니다.”
“영원히 지루하게 살라는 말입니까? 차라리 지옥에 가겠습니다.”
그러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과도하게 일하는 사람과 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똑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겪는 자연스런 문제들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현실이나 삶에 본질적으로 수반되는 책임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출처-강박적으로 일하는 사람=The compulsive worker, 옥스포드. 2001)

불교전통에서는 영혼의 깨우침을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 중 하나로 ‘나태’를 들면서 이것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나태로 항상 같은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나태로 용기를 잃거나 자극이 없을 때이고, 마지막 무관심의 나태는 모든 일이 다 무의미하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언 19장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언 19장24절)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언 22장13절)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24장32절~34절)

작가의 말
우리는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지? 비록 내가 원했던 곳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고 가족을 부양했으니까 이 모든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일까?
빛의 전사는 ‘깨달음이 긴 과정이며 원하는 곳에 도달하려면 명상과 노동을 균형 있게 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착하면 우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질문 속에 나태와 냉담이 싹트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잘 해냈지만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결과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결과는 언젠가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올로 코엘료가 인간의 7대 죄악을 논한 에세이를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을 발췌하여 수록 가필하였습니다.
유네스코의 ‘영적 집중과 상호문화교류’ 프로그램 특별자문위원회이기도 한 코엘료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도교 등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끌어오고 현대 문명이 범한 잘못을 지적합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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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아침의 상쾌한 바람과 한낮의 밝은 햇살과 어두운 밤에 찾아오는 곤한 잠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면서 내 마음에 평화가 흐르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과 친구의 허물없는 격려와 한 이성에게서는 끊임없는 설레임이 전해져 옵니다. 이모든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내 의지가 아닌데도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고 늘 좋은 길을 향해 서있는 내 모습은 내가 받은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가 받은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있습니다. 많이 괴로워하거나 슬퍼 울 때도 있지만 곧 눈물을 그치고 내일을 향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날마다 지혜 늘어나고 삶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나를 가르치고 성숙시킨 분들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과 함께 서로 위하고 격려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초조하지 않고 만물과 만사에 순응하면서 담담히 나의 길을 가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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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석 장로의 이스라엘 회복 사상 비판(이필찬 교수)

바른신앙

송만석 장로의 이스라엘 회복 사상 비판
이필찬 교수 "송 장로 견해, 메시아닉 쥬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18


KIBI(한이성경연구소, 대표 송만석, Korea Israel Bible Institute)의 대표인 온누리 교회 송만석 장로는 <지금은 예루살렘 시대>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두란노에서 1999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2011년까지 17쇄를 거듭했다. 여기에서 그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고 분석 평가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송 장로의 견해는 앞에서 언급한 메시아닉 쥬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송만석 장로는 회복에 관한 말씀을 열거한다(31-34쪽): 사 11:11-12; 43:5-6; 49:12; 렘 3:18; 23:7-8; 30:3; 31:8; 33:24-26; 겔 36:24-25; 39:28; 호 3:4-5; 슥 8:1-8. 그리고 이러한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19세기 중반에 유대인들이 고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여 1948년에 독립국가가 되고 1991년부터는 구소련으로부터 대량으로 귀환하게 된 것과 독립 이후에 50년 동안 전세계의 비난 속에서도 한 국가로서 든든히 성장해 온 것이 말씀의 성취라고 서술하고 있다(34-35쪽).

송만석 장로는 이러한 예언들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는 관계 없는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하여 이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렘 16:14-15의 말씀을 인용하며 북방 땅과 쫓겨 가서 살았던 모든 나라에서 귀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출애굽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앞에서 열거한 이스라엘 회복에 관한 성경의 예언이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이 아니라 금세기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주장이라는 증거들을 나열한다.

송 장로의 주장:
1) 이스라엘 역사상 온 민족이 송두리째 뽑혀서 세계 각처로 흩어져 버린 것은 바벨론 포로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AD 70년 이후의 일입니다.

반박: 먼저 흥미로운 것은 송만석 장로가 AD70년의 성전 멸망을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멸망을 말씀하셨지 이스라엘 온 민족이 송두리째 뽑혀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은 전혀 없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이 송두리째 뽑혀서 세계 각처로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 두 경우에 송두리째는 아니지만 일부가 흩어지고 잡혀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맞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지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 계기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고토로 돌아 오게 될 것을 선포하게 된 것도 바로 바벨론 포로 사건이 배경이 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AD 70년 이후 이스라엘 온 민족이 송두리째 뽑혀 흩어지게 된 것은 성경의 본문과 전혀 관계 없다.

송 장로의 주장
2)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해온 경로를 보면 문자 그대로 동서 남북 전 지구상에서 돌아왔습니다. 단지 바벨론이나 그의 인접 국가들 정도에서 돌아 온 것이 아닙니다.

반박: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1)구약에서의 표현 방식은 강조를 위해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2) 구약에서의 북쪽과 땅끝은 세계화된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범위가 아니다; (3) 실제로 바벨론 포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반드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로부터 몰려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겔 36:19에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라고 되어 있어서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송 장로의 주장
3) 이사야 11장 11절 말씀을 보면 첫 번째 귀환이 아니라 두 번째 귀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박: 우선 사 11:11은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만일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면 이러한 내용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황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다시’라는 말은 두 번째 귀환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앞선 출애굽과 히스기야를 통한 구원사역를 배경으로 하나님은 다시 반복해서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사역을 일으키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적용하는 것은 본문과 본문의 구약적 문맥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송 장로의 주장
4)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에 쓰여진 선지서입니다. 8:1-8까지의 내용을 보면 각처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반박: 슥 8:1-8이 포로 후에 주어진 말씀이라 하더라도 포로 후의 정황에 해당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포로 후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특별히 9절은 대하 15:1-7을 배경으로 하여 성전 재건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송 장로의 주장
5) 렘 30:24 내용은 이러한 사건이 ‘말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바벨론 포로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박: 송만적 장로는 종말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구약 성경에서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은 종말적 사건이다. 종말이란 시간적으로 마지막이란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된 순간을 일컫는다. 선지자들이 종말을 내다 보면서 선포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포로 귀환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가 되었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성전을 건축하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였으며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재건을 위해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온전한 성취가 이루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 후에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이르는 대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약소국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신약 성경 저자들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재해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이 있다는 말씀을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종말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송 장로의 주장
7) 누가복음 21장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고 하셨습니다. AD 70년 이후 예루살렘은 비잔틴 제국, 페르시아, 십자군, 터키, 영국, 요르단 등 적어도 10개국 이상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1967년 6월, ‘6일 전쟁’으로 이 지역이 이방인의 손에서 유대인들의 손으로 넘어 왔습니다.

반박: 21:24의 말씀은 구약에서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패턴을 활용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이 패턴이란 구약에서 항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끝나고 나면 그들의 심판을 위해 도구로 삼았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참조 사 10; 13-14; 33; 47; 렘 50-51; 단 9:26-27; 겔 38; 합 1:1-2:3). 그렇다면 눅 21:24은 구약에서 예루살렘 심판의 표현에 대한 인유(引喩, allusion)라고 할 수 있다. 눅 21:24의 문맥은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내용이다. 이 성전은 예수님 말씀대로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이것은 송만석 장로도 동의한바 있다). 이 내용을 서술하면서 구약에서의 심판의 패턴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며 자연스럽다. 이것을 2000년 후에 이스라엘의 회복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음에는 송만석 장로의 겔 36-37장을 근거로한 이스라엘의 3단계 회복론에 대한 비판을 하겠다.

나는 행복한 사람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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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시점을 아는 방법 - Rabbi Joel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랍비가 그의 학생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어느 한 학생은, "지척에 있는 집이 보이면서 그 집이 자신의 집인지, 이웃의 집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요?"라고 답하였습니다. 하지만, 랍비는 정답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이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들에 있는 동물이 눈에 보이면서, 그 동물이 자신의 것인지, 이웃의 것인지를 분간할 때가 아닐까요?" 랍비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정원의 꽃을 보면서 색깔의 차이를 볼 때가 아닐까요?"라고 답하였지만, 그것 역시 랍비가 생각하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랍비가 답하기를, "너희들이 말한 답들은 구분, 분간, 그리고 차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밤이 끝이 나고 낮이 시작되는 시점은, 너의 옆에 있는 지체들을 너의 형제로, 너의 자매로 볼 수 있을 때, 서로 서로 묶여져 있음을,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져 있음을 인식할 때, 비로서, 너희들은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How do we know when the night is over and the day has arrived?
In which students try to answer this question for the rabbi.
One says: Rebbe, night is over and day arrives, when you can see a house in the distance and determine if that’s your house or the house of your neighbor.

Another student responded: Night is over and day arrives when you can see an animal in the field and determine if it belongs to you or to your neighbor.
Yet another student offered: Night is over and day has arrived when you can a flower in the garden and distinguish its color.
No, no, no thundered the Rebbe. Why must you see only in separations, only in distinctions, in disjunctions. No. Night is over and day arrives when you look into the face of the person beside you and you can see that he is your brother, she is your sister. That you belong to each other. That you are one. Then, and only then, will you know that night has ended and day has arrived.

영문 원예화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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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 에드먼드 클라우니

믿음은 ㆍ 2013-12-11 (수) 10:24 IP: 1.xxx.205 ㆍ조회: 16      

교회에 대한 조망: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교회'에서 발췌

교회의 표지를 규정하려면 우리는 교회가 보이는 형태를 가졌다고, 즉 교회는 땅위에서 보이는 사회로 조직된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천상적인 것인가 아니면 지상적인 것인가,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천상적인 용어로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으로 선택된(엡1:4-5) 교회는 이 세상의 욍국에 비교될 수 없다(엡1:23; 5:23; 골1:18; 요18:36). 교회는 하나님의 거처이며,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한 산 돌들로 지어진다(엡2:20); 벧전2:5). 주님만이 자신의 백성을 정확하게 아시며, 그들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에 의하여 하나님께 연합된다(딤후2:19; 요3:8).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가톨릭 변증자들이 제시한 외형적인 설명을 반박하였다. 교회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이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벨라민 추기경이 교회는 베니스 공화국처럼 가시적이라고 말할 때 그는 신약 성경에 사용된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한스 큉이 지적하듯이, 그렇게도 완전하게 보이는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거룩한 공회를...믿사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에서 구분되어 알려지고 있다. 교회에는 회원들과 교직자들이 있다. 성례는 교회의 믿음과 소망의 외적인 표지이다. 하지만 교회에는 위선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도 이스라엘이 아닌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들어 있다(롬2:28; 9:6). 악한 자들은 축출되어야 한다(고전5:13). 큰 집에는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딤후2:20). 요한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이 있다고 쓰고 있다(요일2:19).

우리는 교회의 보이는 측면도 보이지 않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를 보이는 측면으로만 제한하면 하나님의 선택의 실체가 제거된다. 주님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양들을 알고 계시므로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말을 듣고 행위를 보기 때문에 위선에 의하여 속을 수도 있고 참된 믿음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속을 아신다.

서로 겹치는 두 원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도식이 이 사실을 보여 준다. 한 원은 '보이지 않는' 교회,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하나님이 아시는 모든 성도이다. 다른 원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보이는' 교회다. 거기에는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 주님의 많은 백성은 다른 백성들에게 알려진(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꼻지 않은 다른 7,000명을 남겨 두셨는데도 얼리야는 오직 자기 홀로 남았다고 느꼈지만. 왕상19:18). 그러나 '보이는' 교회를 나타내는 원에 속해 있으면서도 겹치는 부분에는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주님이 그를 향하여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사람이다.




A원: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 = 우리에게 보이지 않음
B원: 우리가 보는 교회 = 우리에게 보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두 측면은 인식하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교회를 규정하며 그 둘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로 모이는, 지금까지 있어 왔고 현재 있으며 앞으로 있을 선택된 자들로 이루어진다”(25장1절). 보이는 교회는 “전 세계를 통하여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다”(25장2절). 이 예리한 구분은 우리가 오직 보이는 교회와 관계 맺을 수 있음을 표시한다. 이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중생을 증명하기 위한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요구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회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자신의 기만을 드러내는 위선자는 외면적으로 교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피난처로 삼을 수 없으며, 회원으로서 그가 누린 특권은 그의 심판을 더욱 엄중하게 할 뿐이다.

복음 주의자들은 가끔 교회의 보이지 않는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을 변명한다. 만약 보이지 않는 교회만 중요하다면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심지어 사도성까지도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보이는 교회에 대한 관심의 상실이 교회를 새로 창안해 내기 위한 길을 열었다. 신약 성경이 교회의 형태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는 바가 없다는 가정 아래, 경영에 관한 훈련을 받은 지도자들이 최근의 사회 과학 이론에 따라서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교회' 제8장 교회의 표지에서 발췌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520


고대 성서 사본, 온라인 공개
바티칸과 옥스퍼드 도서관, 총 150만 쪽 디지털화

 세계 최대의 도서관 중 두 곳인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과 옥스퍼드대학교의 보들리 도서관에서는 고대 히브리어, 그리스어, 초기 기독교 필사본 1백5십만 쪽을 스캔해 온라인에 게재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12월 3일부터 전 세계에서 누구나 희귀하고 소중한 종교, 문화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4년에 걸쳐 진행될 이번 프로젝트의 첫 사업으로 공개된 웹사이트는 보들리에 소장된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도 게재되었다. 이 성서는 현재 50권밖에 남아있지 않다.

 
정보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폴론스키 재단에서는 3백3십만 달러 규모의 이번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레너드 폴론스키는 국제적 금융회사인 핸서드 글로벌 PLC의 회장이다. 바티칸 도서관장인 체자레 파시니 추기경은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이 필사본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2권으로 이뤄진 구텐베르크 성서 외에도 11세기에 만들어진 그리스어 성서와 손으로 그린 그림과 목판 삽화가 포함된 15세기의 독일어 성서도 이번에 함께 공개되었다.

 
1451년에 설립된 바티칸 도서관은 현재 18만 건의 필사본, 1백6십만 권의 책, 15만 점의 회화와 조각을 소장하고 있다. 보들리는 영국 최대의 대학 도서관으로서1천1백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교황청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중국에 있는 도서관과 협력해 비슷한 디지털화 프로젝트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폴론스키는 오랫동안 다양한 자선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의 명예 연구원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의 웹사이트는 http://bav.bodleian.ox.ac.uk다.
 
출처: 파워뉴스 USA

아하스의 죄, 므낫세의 죄

대장쟁이 ㆍ 2013-12-10 (화) 20:41 IP: 173.xxx.141 ㆍ조회: 10      

[열왕기하 24:1-4]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요시아가 앗수르를 치러 올라가는 바로느고를 대적하였다가 허무하게 죽은 후 국민들은 요시아의 시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장사지낸 후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기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습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아버지 요시야와는 전혀 달랐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즉위한 지 불과 석 달 뒤에 애굽왕 바로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잡아다 립나에 가두었고 애굽으로 끌고 갔으며 여호아하스는 거기서 죽었습니다. 바로느고는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여호야김(여호와는 세우신다)라고 고쳤습니다.

우리는 애굽왕 바로느고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애굽왕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앗수르를 치러 올라가며 또 자기 앞을 막아서는 요시야 왕에게 “내 앞을 막지 말고 비키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였을까요? 또 여호아하스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자 여호아하스 왕을 끌어가고 엘리야김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 유다의 왕으로 세우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징치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방 애굽왕 바로느고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다를 간섭하고 가르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까요? 이렇게까지 하셨건만 여호야김마져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유다는 끝내 돌이키지 못 하였습니다. 결국 애굽의 세력도 약해지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중동지역을 석권하게 되면서 유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맙니다. 여호야김도 죽고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는데 여호야긴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벨론이 쳐들어와 즉위한 지 3개월밖에 안 되는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그 아자비 맛다니야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 왕으로 세웁니다.

바로느고는 금과 은을 벌금으로 부과하여 빼앗아가는 정도였지만 바벨론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유린하고 죽이고 훼파하고 약탈해갑니다. 유다는 이제 더 강하고 더 악한 이방 바벨론의 치하에 들어가 빼앗기고 바치고 섬겨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도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시드기야 왕 9년에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섬기지 않고 배반하자 바벨론은 유다를 재침공하고 시드기야 왕 11년에 시드기야는 도망치다가 잡혀 그 아들들은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약탈, 파괴되고 유다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24장 3절은 유다의 멸망 원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유다에 임함은 여호와께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함이니 이는 므낫세의 모든 죄로 인함이며 그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흘린 무죄한 자들의 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 므낫세의 죄가 어떠했기에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며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셨을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대표적인 유다왕으로는 아하스와 므낫세를 들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앗수르왕 디글랏 블레셀의 우상신전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고서 제사장 우리야를 시켜 예루살렘에 큰 제단을 만들게 하고 그 제단에서서 일월성신과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습니다. 요아스의 할아버지 므낫세도 아하스와 같이 일월성신과 우상들을 섬기고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퇴락하고 제사는 폐하여졌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 밖에서 우상의 제단을 만들고 악행을 저질렀고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여호와의 전 마당에다 일월성신 우상제단을 쌓고 성전 안에다 바알, 아세라상을 세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죄한 자들을 죽여 예루살렘을 피로 가득하게 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아하스는 성전 밖에서 악행을 하였고 므낫세는 악행을 성전 안에서 저질러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짓밟고 욕보인 것입니다.

아하스와 므낫세의 악행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비교하자면 아하스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죄에 해당하고 므낫세는 그리스도를 밟아 현저하게 욕보인 죄악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은 믿음을 버리고 타락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인 자들로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그리스도를 버렸고 므낫세는 그리스도를 밟고 능멸한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욕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하스와 므낫세의 악행, 특히 므낫세의 악행으로 인하여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음에도 유다와 예루살렘을 버리시기로 하신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밟아 현저히 욕보인 자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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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픔 1시간 즐기면 만성병 훌훌~ 탈출 ♣

“꼬르륵, 꼬르륵…” 이 소리만 들리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허겁지겁 먹을 것부터 찾는다. 그래서 ‘꼬르륵’ 소리는 배고픔을 알려주는 배꼽시계로 통한다. 하지만 이번호에는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현혹되지 말자는 것이다. 꼬르륵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먹을 것부터 찾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왜?” 당연히 드는 궁금증일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 몸을 건강하게 할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배고픔의 정체, 그 속에 숨어 있는 건강 비밀을 한 번 캐보자.


Part 1 배고픔… 정체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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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하루 세 끼 밥을 먹는다. 편의상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안배해 놓고 식사를 한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는 사는 데 꼭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먹는 것이 곧 생명이다.
그런데 혹시 어떤 이유로 식사 시간을 놓쳤거나 한 끼를 굶었을 때를 떠올려보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하기 어렵다. 소위 말하는 ‘배고픔’이다. 좀 더 정리된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식사를 한 후에 음식을 다시 먹고 싶은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고픔은 우리 뇌의 시상하부 바깥쪽에 있는 음식물 섭취중추가 관장하고 있다. 음식물을 섭취한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하는 감각이다.

이런 욕구가 느껴지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배고픔을 달래주려 애쓸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배고픔의 표시는 내 몸의 에너지가 부족함을 알리는 신호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해결해 주어야 할 위급상황으로 해석한다. 그런 탓에 배고픈 느낌이 들면 무조건, 즉시 무언가를 입속으로 밀어넣고 본다.


그런데 이 같은 우리들의 생각에 제동을 거는 사람이 있다. CHA의과학대학교 차움 비만센터 윤지연 교수는 “배고픈 감정은 반드시 우리 몸의 칼로리나 영양소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며 “먹을 것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배고픔을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것이 각종 만성병을 예방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PART 2 배고픔을 즐겨라! 왜?


배고픔을 즐기면 만성병을 예방한다?
얼른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그 근거가 뭘까?
이 물음에 윤지연 교수는 “오늘날 우리의 먹는 행위가 미처 예상치 못한 병폐를 낳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잠시 생각해보자.


 

2‘나는 정말로 배고파 본 적이 있던가?’
‘혹시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없는 데도 때맞춰 식사를 하지는 않았던가?’


‘하루 한 끼라도 굶으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던가?’
이 세 가지 물음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 6시 30분,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을 먹는다. 그래야 회사에 지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배는 전혀 고프지 않다.


그래도 오전에 일을 하려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며 꾸역꾸역 아침밥을 먹는다. 하루 한 끼 굶는 것을 두려움으로 느낀다. 행여 늦게 일어나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오전 11시쯤 되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속쓰림도 느껴진다. 그 느낌이 싫다. 그래서 그 바쁜 아침 시간에 맛도 없는 아침밥을 먹는다.

 

 

아마도 이런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배고픈 느낌을 싫어한다. 우리의 유전자에 그렇게 각인돼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오늘날처럼 먹을 것이 풍족했던 시절도 일찍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보니 먹을 것이 있을 때는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한다는 코드가 입력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먹을 것이 풍족하다. 어딜 가나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게 먹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먹고 또 먹는다. 너무 많이 먹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는다. 아예 배고플 짬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우리 몸에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풍부한 영양소가 내 몸에 에너지를 내고, 늙지 않게 할 것이며, 오래 살게 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될 줄 미처 알지 못했다. 배고픔을 느끼기 전에 미리 먹는 습관이, 먹을 것이 너무 많은 시대 과식하는 식탐이 우리 몸에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도화선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윤지연 교수는 “현대인의 질병 대부분은 진정한 배고픔을 모르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왜 배고픔을 모르는 것이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까?
이 물음에 윤지연 교수는 “배고픔을 느낄 시간을 주지 않으면 우리 몸속에 있는 지방이 일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을 하지 않는 지방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우리 몸 구석구석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비만을 부르고, 당뇨를 부르고, 고혈압을 부르고, 암을 부르고….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진원지가 되기 때문이다.

Part 3 배고픈 시간은 내 몸속 지방이 타는 시간

“배고픔을 모르면 지방이 일을 안 한다!”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이것만은 꼭 기억하자.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 그 원리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감정은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음식물 섭취중추에서 비롯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음식물 섭취중추는 혈중 당분이 떨어지면 곧바로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다. 우리 몸의 혈중 당분이 떨어졌다고 해서 칼로리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자면 조금 복잡한 생체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몸은 음식에서 영양소를 섭취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쓰고 남은 영양소는 저장해둔다. 당질은 글리코겐의 형태로 저장되고, 과잉의 당질과 단백질, 지질은 지방세포에 저장된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우리 몸의 에너지 저장고라 부른다.


이렇게 저장된 영양소들은 가장 쉽게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혈중 당분이 떨어졌을 때 꺼내 쓰면 된다. 이때 비교적 손쉽게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것이 간이나 근육에 저장된 글리코겐이고, 그 다음이 지방이다.


윤지연 교수는 “우리 몸은 혈당이 떨어져 배고픔을 느끼게 되면 일단 간이나 근육에 축적된 글리코겐이 분해되어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그런 다음에 지방을 분해해 쓰게 된다.”고 밝히고 “그 시간은 대략 1~2시간 정도 걸린다.”고 말한다.


5바로 이것이다. 이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 지방이 일을 하게 하려면 배고픔을 느낀 시점에서 1~2시간 정도 여유를 둬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지방이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분해되어 우리 몸의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배고프다는 신호를 느끼게 되면 곧바로 음식부터 찾는다. 대부분이 그렇다. 심지어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는다. 게다가 많이 먹는다.


윤지연 교수는 “이렇게 되면 곧바로 혈중 혈당이 올라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몸속 지방은 힘들게 일을 해서 에너지를 만들려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가만 있어도 혈중 당분이 알아서 에너지를 내는데 굳이 나설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방은 놀고 먹는다. 제 일은 하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저장되는 지방덩어리와 친구하면서 내 팔뚝에, 내 허벅지에, 내 허리에 불룩불룩 살을 찌우는 미운 짓을 하게 된다.


그게 전부라면 오히려 다행이다. 지방조직의 속이 꽉 차서 더 이상 지방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 지방은 혈액 속에 잔류하면서 고지혈증을 만들고, 혈관에 피떡도 형성한다. 혈관의 탄력성도 떨어뜨리게 되면서 고혈압, 동맥경화, 당뇨 등 각종 만성병을 유발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따라서 배고픈 느낌이 들자마자 음식부터 찾아선 안 된다. 1시간 정도의 배고픔은 반드시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 몸속 지방이 일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반드시 기억하자. 배고픈 시간은 내 몸의 지방이 태워지는 귀중한 시간임을.

 

Part 4 진짜 배고픔은 어떤 것일까? 자가 체크법


이쯤 되면 왜 배고픔을 1시간 정도 즐겨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배고픔이라는 말이 참으로 추상적이다. 어느 정도의 배고픔을 즐겨야 하는지 감도 잘 안 잡힌다. 만약 그것이 고민이라면 진짜 배고픔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자가 체크법을 참고해보자.


<배고픔의 지수 알아보는 법>
* 하루 날을 잡아서 3끼를 굶어보자.
* 그런 다음 배고픔의 정도를 0~10으로 나누어보자.
* 아주 배가 부른 상태를 10으로 하고, 3끼 굶은 상태를 0으로 설정하자.


● 0단계 : 3끼를 굶은 상태
● 1~2단계: 아주 배가 고픈 상태
● 2~3단계 : 배고픈 상태
● 3~4단계 : 배고픔만 사라진 상태
● 5~6단계 : 조금 더 먹을 수 있는 상태
● 7~8단계 : 후식까지 먹을 수 있는 상태
● 9~10단계 : 거북해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


윤지연 교수는 “성인의 경우 1~2단계에서 식사를 하고, 5~6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좋다.”고 밝히고 “더 욕심을 낸다면 하루 세 끼를 굶는 과정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그래야 저장된 지방을 분해하는 신호를 우리 몸이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part 5 참기 힘든 배고픔 다스리는 5계명

3배고픈 시간은 내 몸속의 지방이 타는 시간이다. 따라서 최대한 즐겨야 한다. 그래야 건강해진다. 윤지연 교수는 “지방을 태우자는 말은 단순히 체중을 줄이자는 의미는 아니다.”고 밝히고 “지방을 태워 에너지로 쓸 수 있는 몸으로 만든다는 것은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는 절대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배고픔을 이겨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것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윤지연 교수가 공개하는 배고픔 다스리는 노하우 4가지를 소개한다.



배고프다는 느낌이 들면 물 한 잔을 마시자

 

그러면 음식에 대한 다급한 요구가 없어질 것이다. 실제로 배가 고파도 여건이 여의치 않아 그 시기를 놓친 경우 어느 새 배고픔은 사라져 있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배고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는 ‘이 시간은 내 몸의 지방이 타는 시간이야. 조금만 참자’고 자신에게 다짐을 해보자. 그리하여 적어도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배고픔의 기분을 즐겨보자.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배고픔 정도를 체크해보자

진짜 배고픔인지, 혈당이 떨어져서 생긴 배고픔인지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식사 전에 내가 배고픈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먹을 때도 많다. 그저 먹는 것이 좋아서 먹기도 한다.
그래선 안 된다. 배가 고플 때만 식사를 하자. 아니, 배고프기 시작한 후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참다가 식사를 하자.


맛있는 것부터 먹고 포만감을 느끼기 전에 먹는 것을 멈추자

 

음식을 먹을 때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부터 먹도록 하자. 즐기면서 먹으라는 말이다. ‘이것은 먹으면 안 되는데, 살찌는데’ 하면서 안 먹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먹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지 말고 먹고 싶은 것 위주로 먹되 포만감을 느끼기 전에는 반드시 젓가락을 놓자. 그 정도는 별로 힘들지 않고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적게 먹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자

 

소식은 일급 장수 비밀이다.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이론이다. 무조건 몸에 좋다고 많이 먹는 우를 범하지 말자. 그것이 되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일단 몸속에 집어넣은 것은 무엇이든지 위에 도착하면 반드시 처리되어야 한다. 위장이 싫다고 해서 그 일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인은 어떤가? 하루 종일 먹을 것을 달고 산다.


또 많이 먹는다. 그렇다보니 우리 몸은 그렇게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고 흡수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우리 몸의 에너지가 소화 이외의 일도 할 수 있도록 되도록 적게 먹고, 적당히 먹고, 때로는 뱃속을 비워주는 센스도 종종 실천하자.


윤지연 교수는 “이제부터라도 배고픔이 느껴지면 반사적으로 없앨 생각부터 하지 말고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밝히고 “그것은 음식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다.”고 당부한다.

 

윤지연 교수는 “이제부터라도 배고픔이 느껴지면 반사적으로 없앨 생각부터 하지 말고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밝히고 “그것은 음식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다.”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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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콘드리아 연구 인류 어머니는 단 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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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적 결론 다지역 기원설 설득력 잃어 

 ‘단일지역 기원설’ 인류역사 시간표 앞당겨 

  

▲ 아담과 이브는 엄연히 실존하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아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세기 2:7-8)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이브)라 칭하리라 하니라”(창세기 2:20-23)

 

● ‘극적인 결실’ 아담과 이브의 흔적을 찾다

▲ 첨단 분자생물학 대쾌거! 아담과 이브 실존 인물임을 밝히다.    
우리 인류의 공통조상은 과연 누구였을까? 첫 번째 조상은 진정 누구인가? 성경은 그들의 이름을 ‘아담과 하와!’라고 확고부동하게 전한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는 날조된 허구일까? 아니면 과학적 진실일까? 하는 딜레마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양각 날 세우기 극명한 대립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오랜 과제였다.
 
이제 이 문제에 한쪽 손을 들어줄 객관적 성과가 서서히 그 무대의 중심에 전면 등장하고 있다.

전통적 화석학과 고생물학적 연구는 물론 첨단 유전자 기법까지 포괄하는 분자생물학 수준에서 경이적 성과들이 총망라된 가운데 인류의 뿌리 찾기 과업이 제 궤도에 오르고 있다.
 
이제 현대 유전학에서 경천동지 대발견으로 진화론적 인간생성이론이 마치 공산주의 종말처럼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믿기지 않는 역사적 현장들에 생생하게 접근하기로 한다.

DNA 고고학이 태동한 것은 불과 30년이 되질 않는다. 1984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앨런 윌슨(Allan C. Wilson)은 죽은 생물체에서도 DNA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 앨런 윌슨! 분자생물학의 판도라상자를 열다.
이어 3년 후, 美 앨런 윌슨, 레베카 칸(Rebecca L. Cann), 마크 스톤킹(Mark Stoneking) 박사팀은 1987년 네이처(Nature)誌에 기고한 논문에서 각 대륙을 대표하는 147명의 여성으로부터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 결과, 이들 모두는 한 모계의 자손이며, 유전자 변이의 지역적 분포로 추정컨대 인류 공통의 조상 할머니는 약 14만년에서 28만년 사이 아프리카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60억 인류의 어머니임을 밝혀냈는데,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l Eve)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들은 이브를 추적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 조상을 둔 미국 거주 여성 147명의 산모에게 아이의 태반을 기증 받도록 설득하였다. 태반은 체세포의 표본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들은 미국과 아프리카, 유럽, 중동, 그리고 아시아의 여성들을 택하였다.

세 연구가들은 획득된 DNA 샘플에서 돌연변이로 인한 차이를 비교했다. 돌연변이의 변화가 가장 많은 곳이 첫 번째 DNA가 시작한 곳이고, 어디서, 언제 사람이 시작했는가를 가리킨다. 이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에서는 한 지역 즉, 아프리카 계통의 미토콘드리아의 DNA만이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나머지 모든 지역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 레베카 칸(Rebecca L. Cann)      
생물종이 한 지역에서 오래 거주하면 유전자의 변형이 축적되어 다양한 후손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집단 중 일부가 이를 벗어나 광활한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 밀도가 느슨해지면서 다양성도 줄어든다. 이것을 ‘창시자 효과(founder effect)’라 칭한다.

이 효과에 따른 유전자 다양성을 지역별로 조사하고 그 경로를 역추적하면 기원을 파악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잘 모르는 지역을 찾아가는 것보다 더 정교하다는 평가이다.

상술하면, 유전자 다양성(遺傳子多樣性, genetic diversity)이란 하나의 생물종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들 사이에 유전적 변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유전자 다양성은 하나의 생물종이 다양한 외부 환경 변화에 적응하여 생존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풍부한 유전자 다양성은 외부적인 환경 변화에 순응하여 종이 여러 세대에 걸쳐 유지되어 보존될 수 있도록 일종의 ‘완충제’ 또는 ‘쿠션’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브보다 한발 앞서 창조된 아담의 발자취는 어떠했을까?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디모데전서 2:13). 근래 들어 아담의 존재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가 발견됐다.

미토콘드리아 이브 논문에 자극받아 Y 염색체를 통해 아담을 추적하는 연구들이 속속 진행되었는데, 미국 예일대학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등의 과학자들은 약 18만8천 년 전에 생존했던 것으로 보이는 인류조상의 흔적을 각각 발견, 1995년 11월 과학전문지 네이처를 통해 발표했다.

▲ 1995년 11월 과학전문지 네이처를 통해 아담의 존재를 규명하다.
2000년에는 스탠포드 대학과 하버드대학을 포괄하는 14개 공동연구팀에서 지구촌을 대표하는 1,062명 남자의 Y 염색체를 정밀 조사한 결과, 현존 인류의 공통 조상 할아버지는 대략 35,000~89,000년 전 사람이며, 이 시기에 그 후손이 아프리카로부터 지구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이는 에덴동산 기록과 일치한다는 보고를 ‘네이처 제네틱스’(‘Nature Genetics)에 기고한바 있다.

2001년에는 중국에서 매머드 연구결과를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했다. 상하이 후단대학을 중심으로 한 13개 국제공동 연구팀에서 12,127명이나 되는 아시아 남성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Y 염색체 조사를 벌여 이들의 공통조상이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검증한 결과, 예상과는 달리 이들의 공통조상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35,000~89,000사이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남자였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와 같이 글로벌 접근이 아닌 한국과 일본의 두 나라 사이 연구 결과이긴 하나, 1997년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는 일본 민족의 원류를 찾는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는 일본인의 상당수가 한국인과 유사한 유전자 구조를 갖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는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돌연변이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유입시킨 것이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말해줬다.

 
● 놀라운 비밀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

▲ 과학자들은 분자생물학에서 현생인류의기원을 연구할 때 여성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DNA(mtDNA)를 집중 추적했다. 
인류의 조상이 단 한사람인 아담과 이브에게서 기원했을 것이라는 신빙성을 입증시킨 최첨단기법에 대해 심대하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주인공은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이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와 Y 염색체에는 “인류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가진 DNA가 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보통의 DNA는 부모의 것들이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 어머니로부터,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만 물려받아 뒤섞임이 없다.
 
어쩌다 돌연변이가 일어나 하나 둘 정도가 변할 뿐이다. 따라서 같은 민족끼리는 미토콘드리아나 Y염색체의 DNA가 거의 같다.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 DNA 분석의 위력은 알프스에서 얼어붙은 미라 상태로 발견된 설인(ICE MAN) 논란을 잠재움으로써 그 위력을 입증하였다.

1991년 9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알프스 산맥에서 미라 한 구가 발견됐다. 방사선 연대측정 결과 약 5천 년 전의 시체로 판명됐지만, 누군가 남미의 미라를 옮겨다 알프스의 눈 밑에 묻은 것이라는 조작론이 끊이지 않았다.

▲ 나아가 연구진은 영국 남부지방의 경영 컨설턴트인 ‘마리 모슬리’라는 여인이 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199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설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유럽인이 분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DNA는 현재의 유럽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아가 연구진은 영국 남부지방의 경영 컨설턴트인 ‘마리 모슬리’라는 여인이 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렇듯 DNA가 인류의 계보를 탐구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오르자, 1990년대 후반 들어 인류학자와 분자생물학자들은 전 세계 민족들의 DNA를 수집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유전자를 비교해 현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각 민족들이 언제, 어떻게 갈려 나왔는지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일단, 그 시발은 앞서 밝힌 1987년 ‘미토콘드리아 이브’ 설이 제기되면서 부터이다.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분석을 통해서 인류의 모계 계보를 밝혀낼 수 있다는 혁명적 연구결과가 나온 것이다.

먼저 이브의 실체를 규명한 미토콘드리아의 고유 특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사람의 몸 세포의 핵 안에 DNA뿐만 아니라 세포의 ‘발전소’인 핵 바깥의 미토콘드리아 속에도 작은 DNA가 있다. 

▲ 사람의 미토콘드리아와 Y 염색체에는 “인류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가진 DNA가 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과학자들은 분자생물학에서 현생인류의기원을 연구할 때 여성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DNA(mtDNA)를 집중 추적했다. DNA는 인간 세포 중 세포핵과 미토콘드리아 두 곳에 들어 있다. 유전자 두 세트로 이뤄진 세포핵의 DNA는 엄마 아빠에게서 절반씩 물려받아 재조합되기 때문에 추적하기 힘들다.

반면, 1만 6000개 정도의 염기쌍으로 구성된 미토콘드리아 DNA는 세포질에 존재하기에 난자를 제공하는 모계로만 유전되며, 한 세트로 전달돼 추적하기 용이하다. 길이도 비교적 짧을 뿐더러, 모계를 통해서만 이어지기에 비교 분석할 대상도 분명하고 무척 간편하다.

또한 미토콘드리아에는 핵막으로 보호를 받는 다른 유전자에 비하여, 비교적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는 특정 부위의 DNA를 비교해 보면 근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돌연변이는 일단 일어나면 축적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차이 나는 부위가 적을수록 가까운 근친 관계이거나 몇 세대 거치지 않은 가까운 조상이 된다. 따라서 매우 손쉽게 인류의 기원을 푸는 열쇠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추적 결과, 현생 인류의 어머니는 약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산 한 여인으로 압축됐다.

아담에 대한 추적은 훨씬 뒤에 이뤄진다. 인류의 아버지 아담을 추적하는 일은 이브 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으로 알려졌다. 세포핵 속 23쌍의 염색체 중에서 가장 작고 부계의 정자를 통해서 한 세트로만 전달되는 Y염색체의 유전적 변이를 역추적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y염색체를 이용, 모든 인류의 공통 조상아버지를 추적했다. y염색체는 남성을 결정짓는 성염색체의 하나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유전된다.

▲ 애리조나대학의 마이클 해머박사는 인류공통의 y염색체 원조는 약 18만8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했다.      



























애리조나대학의 마이클 해머박사는 인류공통의 y염색체 원조는 약 18만8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인류공통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시발점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브를 추적하는 미토콘드리아 분석과 아담을 추적하는 Y염색체의 분석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 결과 인류의 기원은 모두 사하라사막 남쪽의 동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 초점 맞춰진다.

y염색체를 유전시킨 남성은 아담뿐이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토콘드리아 DNA를 남긴 여성은 이브뿐이었다. ‘미토콘드리아 이브’이론과 ‘Y 염색체 아담’ 이론이 제기되고, 많은 후속연구의 검증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도출되면서, 인류기원 연구에 혁명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왜 하필 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거가 제시된다. 그것은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홍적세의 조산운동을 근거로 든다.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산맥의 형성은 아프리카 서부와 동부의 기후를 바꾸게 되었다. 즉, 적도 근처의 편서풍이 아프리카 서부에는 많은 비를 뿌리게 된 반면, 동부 지방에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은 사바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인류의 아버지 아담을 추적하는 일은 이브 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으로 알려졌다. 세포핵 속 23쌍의 염색체 중에서 가장 작고 부계의 정자를 통해서 한 세트로만 전달되는 Y염색체의 유전적 변이를 역추적한 것이다.   

 
● 밝은 빛 ‘단일지역 기원설’ 대승거두다

▲ 단일지역 기원설은 성경의 기록처럼 인류는 특정시기에 특정지역에서 돌연히 출현한 한 쌍의 부부로부터 인류가 전 지역에 퍼져나갔다는 이론이다.    
그동안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지역 기원설"과 "단일지역(아프리카) 기원설" 두 가지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단일지역 기원설은 에덴동산 가설로도 불리며, 성경의 기록처럼 인류는 특정시기에 특정지역에서 돌연히 출현한 한 쌍의 부부로부터 인류가 전 지역에 퍼져나갔다는 이론이다.

이에 반해 다지역 기원설은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이미 퍼져 살고 있던 유인원 또는 인류이전의 고대인들 간에 유전자 교환을 통해 점진적으로 인류에 가까운 종으로 진화해왔다는 이론이다.

좁혀보면, 인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나타나 전 세계로 퍼졌다는 아프리카 기원설과 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인류 조상이 나타나 이들 전체가 현대 인류의 유전자 풀을 이뤘다는 다지역 기원설이 그것이다.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단일기원설이 백전백승 이상의 대승과 하등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다음은 그동안 진화론적 다지역 기원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던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의DNA에 대한 연구기록들이다. 처절하게 패인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7년에 뮌헨대학의 마티아스 크링스(Matthias Krings)팀은 펠트호퍼 동굴(Feldhofer Cave)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하는데 최초로 성공하였다. 이를 인간의 평균 유전자 염기서열인 HRS(Human reference Sequence)와 비교하여 평균 27.2개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 인간들끼리는 평균 8개가 다른데 비하면 매우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2000년 다시 크링스(Krings)팀이 4만200년 전으로 추정되는 크로아티아 빈디자 동굴의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로 같은 실험을 수행하자 HRS와는 23개의 차이를 보였다.

이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과학자들은 이 연구팀은 또한 14,000년 전과 5,500년 전에 살았던 인류화석에서 추출되었던 DNA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서 인간 미토콘드리아 유전자가 지난 수만 년 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했는데, 결론은 “인간의 DNA는 줄곧 변함이 없었으며, 중간 어느 시기에도 유전자 이입의 증거는 없었다.”고 2003년 미 국립학술원지(PNAS)에 보고한바 있다.
 
▲ 진화의 부정! 여러 지역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화석들은 하나같이 네안데르탈인 특유의 DNA 표식을 가지고 있어. 모두가 같은 종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반면 유사한 시대, 유사한 지역에 살았던 인간의 화석에서는 이러한 DNA 표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지역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화석들은 하나같이 네안데르탈인 특유의 DNA 표식을 가지고 있어. 모두가 같은 종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반면 유사한 시대, 유사한 지역에 살았던 인간의 화석에서는 이러한 DNA 표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유전자 이입이 없이 그들의 종을 유지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종을 유지하며 생존하여 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규명되었다.

 
▲ 다지역 기원설(오른쪽)은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이미 퍼져 살고 있던 유인원 또는 인류이전의 고대인들 간에 유전자 교환을 통해 점진적으로 인류에 가까운 종으로 진화해왔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중간형의 골상을 보인 화석들은 어찌된 영문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선 유전자 분석을 해본 결과 이 두 점의 화석중 하나는 전형적인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인간의 DNA를 가지는 것이 확인되어. 수십 년에 걸친 네안데르탈인 논란에 결정적 종지부를 찍게 된다,

 
● ‘새로운 정설’ 인류의 역사는 엄청 짧다

지금까지 인류 진화는 수백만 년에 걸쳐서 매우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어 왔다고 앵무새처럼 반복적으로 주창되어 왔으나 최초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연구는 l4만년에서 28만년쯤 전에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에서 일탈하기 어려워 사상누각의 신세이다.

과학은 성경의 하와에 해당하는 유전인자의 후보를 찾았다. 과학은 성경의 아담에 해당하는 유전인자의 후보를 찾았다. 과학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시기보다 훨씬 최근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발견했다.

▲ 네이처에 따르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발원했으며 이후 중동과 유럽, 아시아를 지나 태평양의 여러 섬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산했다.   

지난 2008년 과학저널 네이처(Nature)는 인류 DNA분석에 따른 인구이동의 연구 결과를 게재했다. 전 세계 29개 인류 집단별로 485명의 DNA를 채취해 50만개의 DNA표지를 상호 비교한 결과 인류 집단 간 관계와 고대 이주 경로가 밝혀졌다. 네이처에 따르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발원했으며 이후 중동과 유럽, 아시아를 지나 태평양의 여러 섬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산했다.

많은 민족들은 독자적 민족 신화를 만들어 자생적 기원을 주장하지만, 역사적 연구는 모든 인종과 민족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인류는 단일한 조상에서 유래하여 인류를 형성하였다.

이제 성경이 말하고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와 지역의 차이만이 상존할 뿐, 인류 단일 기원설이 지배적 항구불변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모든 과학적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들은 성경의 기록처럼 인류의 시작이 중동지방부터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인류의 문명은 중동지방, 현재 이스라엘 지역에서 출현하였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인류 문명이 여기서 발원되고 전파되면서 이집트, 인도, 중국의 황하문명의 태동은 일반 역사책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 인류기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스톤킹(Mark Stoneking)    
인류기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스톤킹(Mark Stoneking)은 “인류는 젊은 종이며, 문화권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거의 없고, 미토콘드리아 DNA의 개념 하에서 보면 다른 어떤 척추동물이나 포유류보다도 인류 상호간에 훨씬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심지어 뉴기니아인의 DNA가 다른 뉴기니아인보다 오히려 다른 아시아인의 DNA와 보다 더 가까울 정도다.” 라고 하였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앨런맨(Alan Mann)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극적인 도약을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 우리와 같은 인류가 아주 최근에야 나타났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미토콘드리아의 자료들은 결정적 증거 자료이다.”

모든 인류는 아담과 후손으로서 노아 홍수 이후 인류는 중동지방에서 번성하다, 바벨지역에서부터 갑작스럽게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인류는 서서히 이동한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여러 지역에서 문명의 자취를 남겼다. 이런 고고학적 증거들은 성경의 기록들과 일치하고 있다.

▲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그 조상은 자바원인, 베이징원인, 네안데르탈인 등으로 불린 후기 구석기 시대 이전의 존재와 완벽하게 다른 종이란 점이다. 무엇이 누구에게 치명적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상술하자면, 인종의 발생은 노아대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에서 크게 기원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바벨탑사건 이후 발생한 민족의 분리와 이동에서 유래한다. 한 인류였지만, 언어가 통하는 사람끼리 집단을 이루고 전 세계로 흩어졌으며 그들이 거하게 된 지역의 기후와 환경, 영양과 생활방식 등이 인체를 적응시켜 피부색과 신체적 구조의 변화가 초래된 것이다.

이제 확실한 것은 현재의 모든 인류의 조상은 한 여성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이고, Y 염색체에 대한 연구는 한 남성으로부터 온 인류의 기원을 증거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분명해졌다.

연구의 핵심은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그 조상은 자바원인, 베이징원인, 네안데르탈인 등으로 불린 후기 구석기 시대 이전의 존재와 완벽하게 다른 종이란 점이다. 무엇이 누구에게 치명적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해답은 그 연구 성과에 물어보라.

▲ 거주 지역의 기후와 환경, 영양과 생활방식 등이 인체를 적응시켜 피부색과 신체적 구조의 변화가 초래된 것이다.
 출처: 파워뉴스 USA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아침의 상쾌한 바람과 한낮의 밝은 햇살과 어두운 밤에 찾아오는 곤한 잠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면서 내 마음에 평화가 흐르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과 친구의 허물없는 격려와 한 이성에게서는 끊임없는 설레임이 전해져 옵니다. 이모든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내 의지가 아닌데도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고 늘 좋은 길을 향해 서있는 내 모습은 내가 받은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가 받은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있습니다. 많이 괴로워하거나 슬퍼 울 때도 있지만 곧 눈물을 그치고 내일을 향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날마다 지혜 늘어나고 삶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나를 가르치고 성숙시킨 분들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과 함께 서로 위하고 격려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초조하지 않고 만물과 만사에 순응하면서 담담히 나의 길을 가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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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믿음은 ㆍ 2013-12-09 (월) 09:39 IP: 1.xxx.205 ㆍ조회: 14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13. 교회 내에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그릇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파가 그러했고 도나투스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길 원인을 우리 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태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태만을 벌할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엡5: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 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마13: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둔다(마13: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마당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여 있게 된다(마3: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 짐이 되리라고-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 방면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방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 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1: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1:11, 3:3, 5:1, 6:7, 9:1 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5: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15: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랑을 돕지 못했다(고전13: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 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묻노니,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갈1:2)  

칼빈의 기독교강요(하) 제4권 제1장 13~14. 26~29p에서 발췌 / 생명의말씀사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513


교회에 가라지가 있는가?

짐보 

교회에 가라지가 있는가?
일단 가라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태복음13:38-39]
의 성경을 인용하여 제 주장을 하면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를 가시적인 교회(지상교회)에서
성도와 거짓성도(가라지)와 함께 있지만 심판 때에는 구별되어
참 성도는 천국에 거짓 성도는 지옥에 던 질것이라 가르치신다.“
반대 의견은
밭=세상 이라 밭=교회가 아니라는 의견이다.
그럴까 그럼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거짓 성도) 은 인정하시는가?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세상과 교회 그리고 가라지를 의미하며 읽어보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1. The Son of man shall send forth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out of his kingdom all things that offend, and them which do iniquity;
마태복음 13:37-43]
가라지는 마태복음13:24-40에 단 한번 언급만 있고
여기서 ‘아버지 나라=his Kingdom'을 주목하고.

겨자씨 비유를 보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가 나무 같이 자라나서 공중의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를 하는데
여기서 ‘자기 밭’이 나옵니다.
[Another parable put he forth unto them, saying,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KJV에서는 'in his field' 로 묘사합니다.
밭 = 교회다? 무리?
비유를 바라보는 표현을 주목하고
*마태-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 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32
*누가-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3:19
*마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일  만큼 되느니라
But when it is sown, it groweth up, and becometh greater than all herbs,            
and shooteth out great branches; so that the fowls of the air may lodge under the shadow of it. 4:30-32, KJV 32
겨자씨를
누가-(나무)가 되어
마가-(풀보다 큰 가지)를 내며
마태-(나무)가 되매

여기서 마태를 소개하면
마태(Matthew)는 직업은 천한 자로 살인자 같이 취급받는 세리였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이 그를 세관에 까지 찾아가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와 예수님의 만남도 바닷가도 회당도 아닌 가버나움의 세관에서다.
그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를 예수님의 족보를 (마1:1-16,2:5-6,26:3)
그는 구약의 수많은 책들을 인용할 만큼 학식이 있었고
종족인 유대인에게 복음과 예배를 가르쳤다.
복음서중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와 해석(13:24-30,36-43)는 마태복음만 있다.
이외도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13:44), 진주의 비유(13:45-46)
물고기 그물의 비유(13:23-35), 포도원 농부의 비유(20:1-6)
두 아들의 비유(1:28-32), 열 처녀의 비유(25:1-13)
최후 심판의 비유(25:31-46)
은 마태복음만 나타나는 아홉까지 비유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천국(Kingdom of Heaven)의 사용하여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을 -
그 비유의 핵심은 천국이라 할 수 있다.
네 복음서중 유일한 아홉까지 비유는 마태복음의
‘그리스도(메시아)-유대인의 왕-다윗의 자손 등으로 쓰여 있음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으로 의해 성취된 것 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전통의식을 생략한
마태복음은 특징은 유대인을 위하여 써진 복음서라
“하나님 나라” 가 아닌“천국”으로
“종말”을 특별히 마태복음에만 “교회”라는 명칭이 있다.(16:18,18:17-18)
정리하면 불완전한 교회의 모형이 천국이고 종말에는 진정한 천국이 임한다는.
세리로서 숫자에 민감한 시각으로 그 임함의 진행(성장)을 보았기에.
열 처녀의 비유처럼 돌연히 임하는 천국을.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는 비유와 알곡과 가라지 비유 등
서서히 성장하는 천국을.
가라지가 밀과 비슷하나 이삭이 나면 구별이 뚜렷해지듯이
교회(지상교회)에서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종말(심판)을
그리고 천국(완전한 교회)을 강조했다.

이제 시각을 넓혀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들(거짓 성도)이고
좋은 씨를 부리는 이는 인자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이 마귀는 처음 에덴동산에 가라지를 뿌렸고
아담의 하와의 가정에 가인에서 뿌려졌고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스마엘이
이삭의 가정에 에서가....등
마귀는 열두제자 중 가롯 유다를 가라지로 뿌려 사도들과 함께 자라게 하였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열두제자 중에서
마귀는 공통되게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자라게 가라지를 뿌려놓는다.

다시 13장10-11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냐 물어본다.
예수님의 대답은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but not to them]
여기서 ‘천국의 비밀’은 복음을 이야기 하고
‘씨’는 마태가 이야기 하는 예수님의 천국(Kingdom of Heaven)의 비유고
씨 “알곡”이다.
‘그들 에게는 아니되었나니 -but not to them' 그들은 ‘가라지’이고
‘알곡과 가라지’는 밭에=교회에 뿌려졌고 이 세상에 속한다.

문자 그대로는 밭=세상이기도 하지만
밭이 세상이라 하신 이유는 세상에 속하여 존재하는 교회를 이른 거로
초대교회와 교부들이 해석하였고 그것이 전승이며 유래로 알고 있다.
초대교회가 태동하고 삼백년이 넘어서야 교회의 건물이 지어졌고
그 전까지는 가정교회로 가시적으로 교회와 세상이 구별됨이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밭을 교회로 여겼다.
“어거스틴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들을 헌용하면서
교회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했다.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분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때인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적,
가시적 교회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이긴 하지만
이는 "섞인 몸(corpus permixtum)"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인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verum)"과
"위선적인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simulat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서, 교회가 "섞인 몸"이기 때문에
"신비적인 몸(corpus mysticum)"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들에서 등장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및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비유(마 13:47-50)들을 전형적인 예로 삼았다.
나쁜 부류들과 좋은 부류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가서 주님에 의해 분리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최종적인 판단자들(final judges)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교회가 성결하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며,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지 모든 구성원들이 성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communio peccatorum)였으나,
믿음으로 성도들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가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름과 흠이 없는 교회(엡 5:27)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다.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Augustine)의 성서해석 김 영 도 목사“

마귀는 가정에서
사회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존경받는 자로
교회에서 의와 열정이 넘치는 광명의 천사 같은 일꾼으로 지도자로
카멜리온과 같이 위장하는데 최고 선수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지상교회는
성령으로 중생한 참성도와 거짓성도가 공존하는 교회이다.
가라지같은 거짓된 성도는 평상시에는 알곡 같이 위장을 하였기에 구별하기 어려우나
결정적인 시가가 오면 거짓일꾼으로 거짓목사로 거짓 그리스도인 인 본색을 드러내기에
구별된 교회 밖의 세력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색으로 위장하여 해독을 암암리에 퍼트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교회의 복음을 변절시키거나 퇴색시켜
분열과 분쟁을 파탄(破綻)을 일으키어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을
그들의 이권으로 장악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함은
성경의 말씀이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익히 경고하였다.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숫한 변절자들과
지난 교회의 교회사가 이를 뒷받침 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보면
서머나 교회-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연약하지만 충성된 교회는 칭찬을 받았고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받았다.
이 일곱 교회의 모습이 가시적인 현대교회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시고도
나중에 사도바울을 부르신 까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대답이 다 같을 순 없더라도 그가 틀림없는 위대한 사도였다.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하였지만 우리가  정확히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헤아린다는 건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정의하는 교회” 를 주장하신 분들
님들의 믿음과 신학과 교회는 완벽합니까?
하나님의 관점....?
= 하나님의 시각....?
세상에는 완벽함이 없습니다.
완벽한 지상교회도
완벽한 성도도.

위대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
그도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안다는 고백을 하며
그의 태도는 겸손합니다만
이곳에 누가 잘못된 성경의 해석을 하거나 인용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은혜를 입은 자라면, 긍휼로 살아가는 자라면
좀 더 친절히 설명해 서로의 믿음을 확증하고 확정하는 진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면 좋으련만.
사랑이 없다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 유익이 없습니다.

제 주장은 이글로 마칩니다.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넉넉한 믿음의 장이 되어 토론하고
이제는 새로운 분들의 글을 보는 신선한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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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들어 하나님의 교회 존속[存續],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위협하는 기현상이 각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런 기현상들은 기업화된 대형교회들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일부 황당한 목사들에게 그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한 방법으로 왜곡시켜 전하고 통전 적이고도 유기적인 말씀을 앞 뒤 문맥을 살펴 총체적인 뜻을 밝혀 전하려하지 않고 한 구절만 똑 떼내어 그 구절에만 매달려 전체적인 뜻을 흐리게 하여 가르치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기성교회는 아예 구원이 없는 것 같은 속임수이건만,표면적으로는 사역자들의 비리에 항거하는 거센 목소리, 진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목소리인 것처럼 미화시켜 내어 놓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말에 현혹된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고 집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이단이나 다른 사이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간다.

구원 받는 백성이 줄어 들고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점점 사라지게 하려면, 하나님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고 교회와 말씀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 중 하나임을 성도들이 인식해야 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어근(語根)부터 살펴보자:
 
교회(敎會)란 그리스어로는 큐리아코스(kuriakos = 주에게 속하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틴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이며, ‘불러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청받은 무리, 성령의 부르심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대관식에 참예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란 뜻이 있다. ‘카할’은 구약에서 회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하며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구약교회를 ‘광야 교회(congregation)', 그곳에 모세가 있었다고 했다(행7: 38절).

교회(敎會)의 구분:

1. 민족적으로, 첫째, 예루살렘 교회인 초대교회, 둘째, 이방인 교회다. 이방 세계의 각 나라, 각 족속, 각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총칭할 수 있다 .

2. 영적으로, 첫째, 개인 교회(고전 3:16절), 둘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말할 수 있는데,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다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보이는(가시적인, 유형 교회)교회: 보이는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말하며, 성경은 이 교회를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골1: 18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 28절, 벧전 1: 17-19잘), 또는 거룩한 무리(히 13: 12절, 벧전 1:2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비가시적인 교회(무형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로써,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계 21:장 전장 참조). 지역과 인종과 역사를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모여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총칭한다.

3. 교회를 영적으로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둘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무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땅 위에 교회(敎會)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후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상에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를 세우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눅19: 10절).
2.하나님께 경배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엡1: 4-6절).
3.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창 되게 하기 위함( 마 28: 19-20).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 요 6: 49절).
5.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함(엡 3: 9-11, 3: 20-21, 5: 9).

교회를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
a.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 18절, 엡5: 23절 참조).”

b.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지역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성도는 마땅히 주신바 탈란트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15절 말씀).

c. 성경은 혼자 예배드려도 은혜받을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하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면 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 24-25절).”

d.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깨어지면 안된다. “두세 사람이(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20절 말씀).”

e. 성도는 믿음 안에서 친교(코이노니아)해야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친교란 영어로 fellowship,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koinonia)다. 여기에는 물건을 함께 쓴다의 뜻이 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초대 교회는 물건을 함께 나누었다. (행2: 44, 4: 32절 참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요소라면 다음은 회원 간의 친교이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롬 12: 5, 고전 12: 27절 참조)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 되어진 성도들임을 깨닫는다면, 결코 '혼자만 정결하다’라고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이다.

f. 보이는 성전,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거룩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 내 집(가시적 교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막 11: 7절)."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적 교회 성전 건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개인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 장소 또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파는 곳을 술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모신 개인 교회가 모여서 거룩한 분께 예배드리는 그 장소를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주님을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관계없이 천국이요 거룩한 곳, 성전이다.

이런 것을 볼 때, 가시적인 교회(보이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대관식에 초청받은 무리는 보이는 교회를 거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회(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1.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마 3: 12)”

본문에서 (his threshing floor)이라고 소유격을 사용하셨음을 주목하자. 그 뜻은 이미 불러냄을 받은 무리(개인교회)가 그분의 소유이다.(광의적으로는 모든 세상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개인교회가 모여 공동체 교회(가시적 교회)를 이룬 곳을 주님께서는 (나의 타작마당)이라고 소유격을 특별히 붙여서 사용하시기 기뻐하셨다.(나의 백성, 내 백성 등등)

2.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마 13: 30)

마태복음 13장의  "세상"은 육신 세계를 의미하고 추수 때 교회와 분리시키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라함은, 믿는 자, 믿지 않는 불신자 모두 섞여 살아가는 육신 세계를 총칭하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모든 세상 사람이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롬 3: 10절 참조) 과 의인(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개인 교회)을 양이라 하고 주께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고 갈라내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러하다.

마태복음 13장 한 구절만 풀이하여 “세상”에는 가라지가 있으나, 교회 안에는 모두 알곡만 있다라고 주장 한다면 모순이다. 교회(개인교회나 공동체교회), 예수님을 마음에 구세주로 믿는 자가 되면, 그 즉시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벗어나서 하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을 가리킴이라면 그 성전된 육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욱신)는 세상에 속하였으나 그 권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피로 깨끗게 된 알곡이지만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기 까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주님의 때가 되기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서로 부대끼며 자라고 있는 들판이 세상 속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알곡된 자들에게 주어졌고, 그 사명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단이 날이면 날마다 가라지를 뿌려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인 교회가 모여모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인 (공동체 교회) 안에도 사단의 회가 있다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계 2장 참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가롯 유다가 나왔다. 가라지는 분명히 있다.

세상(코스모스)에서 교회는 제외된다고 그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주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거듭난 영혼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귀한 무리이기에 하늘에 속하였으나,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땅, 곧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갈 2장 4절 그리고 고후 11장 26절에서 바울은 거짓 형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거짓 형제에게서 해를 많이 당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가라지들이 있었음을 가리킴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가라지들이 들어왔음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교회 안의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낼 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님께만 있다.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자격이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가르고 골라내시는 분은, 농부 되신 우리 주님의 고유권한이며 그분의 주권하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라지 같다고 하여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다. 가라지를 찾아내고 갈라내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말씀의 떡을 떼는 것,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을 밝히고 논하는 그 선(line)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이다. "너는 가라지" 혹은 "너는 사단의 자식"이라고 쉽게 정죄하거나 손가락질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내가 갈라내려 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그 정신을 논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알곡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여 나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내가 참 열매인가? 그렇다면 가지 되신 주님께 더욱 바싹 붙어 있어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는 말을 하기 전, 세워주고 밀어주고 살려주는 말을 하자. 다시는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개인교회)를 찢지 말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신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하심이다. 주께서 당하신 그때 그 모진 고통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찢을까 삼가 조심하자. 말세가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28절 하 참조).”





USA 아멘넷: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믿음은 ㆍ 2013-12-07 (토) 10:01 IP: 1.xxx.205 ㆍ조회: 30      

9부 교회
54장 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490]..........................................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의 '교회’ kerk라는 단어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은 추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설교가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다가오는 메시아의 나라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론적 개념이다. 그리고 또한 이 나라는 중생, 용서, 갱신을 통해 여기 지상에서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존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사람들의 교제보다는 훨씬 더 영적인 소유물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어린아이들의 소유이거나 소유가 되고, 하나님 나라 자체는 성령에 의한 평화, 기쁨, 즐거움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최소한 여기 지상에서 조직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유익들이 주어지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지상 어느 곳에서도 마무리되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특히 현세적 개념으로 직분들과 봉사들을 지니고 하나님의 회집한 백성으로서 가시적 세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유익들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준비하는 수단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과정에서 불순하고 사실상 교회에 속하지 않는(위선자들과 또한 신자들 가운데 있는 옛 사람) 온갖 요소들을 포함하는 반면, [영적] 소유물인 하나님 나라는 순수하고 순전하며 오직 거듭난 자들만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머리로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자기 백성의 왕으로 등장하고 만유 가운데 만유가 되기 위함이다.(F.A. Philippi)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성경에 의하면 교회의 본질이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선택이 실현된 것으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고 의롭다고 하고 영화롭게 하며(롬8:28)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롬8:29) 거룩과 구원(엡1:4)을 위한 것이다............이 모든 것은 교회가 그 본질상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외적으로 교회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본질, 교회의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나 교회가 아니다............

[491]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견지하는 한, 교회의 개념은 다루기 곤란한 어려움을 낳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 언제나 신자들의 모임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 또는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래서 타락 전 아담과 하와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에 아직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많은 신학자들이 천사들을 교회에 포함시킨다고 할지라도 천사들 역시 교회의 회원들로 여겨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물론 천사들의 주님이며 자기 십자가로 모든 것을, 천사들과 사람들도 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올바른 관계에 놓았다고 할지라도, 천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 않았고, 타락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모은 교회의 회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장 22절에 따르면, 신자들이 물론 천만 천사와 교제하지만, 이 천사들은 23절의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교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낙원의 약속 이후로 지금까지 지상에 살다가 조상들의 림보나 연옥이 아니라, 하늘에 취해진 모든 신자들이 교회에 속한다(히12:23).

현재 아직 지상에 사는 모든 신자들은 교회에 속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또한 나중에 종말에 이르기까지 장차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자들도 교회에 속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렇게 가장 넓은 의미로 취해진다고 할지라도, 단지 상상으로만 존재하고 결코 실현되지 않는 플라톤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 실존의 보증을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작정, 은혜언약의 확실성, 그리스도의 중보자직, 성령의 약속 가운데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 회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낙원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수천 수백만 명이 이미 하늘로 취해졌고, 그들의 수효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증가되며(승리적 교회), 현재 아직 믿지 않거나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틀림없이 믿을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로 교회를 생각할 때,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지상에 사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전투적 교회)는 단지 교회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상의 교회와 과거와 미래의 교회와의 연계성을 확고히 붙드는 것은 좋고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늘에 기록되고 언젠가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신부로서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될 자들의 한 모임, 한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전체의 이런 통일성을 견지하는 것은 일체감을 높여 주고, 용기를 북돋아 전투하도록 자극한다. 만일 우리가 더 나아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한정한다면(전투적 교회), 이것은 다시금 더 넓게 또는 더 좁게 취해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현재 모든 교회,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현존하는(보편적 교회) 모든 신자들을 전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한 국가나 한 주(州)에 있는 신자들(행9:31)을 생각할 수 있으며(국가의, 주(州)의 교회), 또는 도시든 시골이든 특정한 지역의 신자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특정한, 지역 교회).

이런 맥락에서 ‘보편적 [또는] 국가적 교회’는 ‘특정한 교회’보다 앞선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체가 부분보다 앞서는 하나의 유기체다. 교회의 시작은 낙원이며(창3:15), 또한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이다(행1:8). 예루살렘 교회가 단독 교회로 존재하는 동안 보편적 교회,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였고,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 옆에 등장한 교회들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의 설교를 통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여기까지 교회의 개념은 분명하고 선명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직면한다. 첫 번째 어려움은 성경에 이런 교회의 개념이 항상 불신자들도 포함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구체적인 특정 그룹들과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비록 이스라엘의 후손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민족 전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렸다. 신약 교회에서도 훨씬 적은 정도라 하지만, 알곡 가운데 쭉정이와 곡식가운데 가라지가 있었다. 그리고 사도 시대 이후 교회들이 거듭 세속화 되고, 부패되고, 분리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교회 모두를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신학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항상 인정했고, 성경의 본을 따라 교회의 본질이 불신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진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 안에 있는 이런 불신자들의 현존을 쭉정이와 알곡이라는 성경적인 이미지, 또는 몸과 영혼, 외적인 사람과 내적인 사람, 몸 안에 있는 불신자들은 “나쁜 액체와 같다.”(In R. Seeberg) 스콜라 신학자들과 로마교 신학자들도 이와 같이 말했다.

예를 들어, 벨라미누스는 불신자들도 교회의 회원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R.F.R. Bellaminus), "단지 교회의 몸일 뿐, 교회의 영혼“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치고 만다. ”좋은 사람들은 교회의 내적인 부분이며, 나쁜 사람들은 외적인 부분이다.“ 불신자들은 ”단지 ‘외적인 연결’로 교회와 연관된 죽은 메마른 회원들“이다. 그들은 ”믿음의 고백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나, ”사악한 행실에 관한 한“ 마귀의 왕국에 속한다. 그들이 ”경건의 모양으로는 아들들이지만, 미덕들의 결핍으로 인해 낯선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 두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그룹이 존재한다.(R.F.R. Bellaminus) 그리고 [로마교 교리문답]은 전투적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성경에 의하면 그물 속에 나쁜 고기들, 밭에 있는 가라지와 타작 마당에 있는 쭉정이, 지혜로운 처녀들 가운데 있는 미련한 자들과 방주 안에 있는 부정한 동물들이라고 말한다.(Catechismus Romanus) 이것은 이론상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실재적으로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중세 말경에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로마교는 또한 외적으로 회원이 되는 것, 역사적 믿음, 교회의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조장한다.

종교개혁은 이런 견해를 반대했고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구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과 “보이지 않는 사랑의 결합에 의해 그들로부터 분리된 자들”에 대해 이미 말했었다.(Augustinus) 사실상 로마교는 이런 구별에 대해 그 어떤 반대도 할 수 없고, 로마교 자체가 한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들, 두 그룹”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이것을 수용한다. 벨라미누스는 “숨은 불신자들”을 취급하고(R.F.R. Bellaminus), 묄러는 루터가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로 이해하는 것을 칭송하고, 비가시적 신자들이 가시적 교회의 담지자들이라고 말한다.(J.A. Mohler) 하지만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의 대부분은 거부되어야 하거나 최소한 교의학에서 논의되지 않는다. 교회가 비가시적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리스도가, 승리적 교회가 그리고 종말에 완성될 교회가 우리 눈에 현재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가 여러 장소와 많은 나라에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거나 핍박의 시기에 숨겨져 있거나 때때로 말씀과 성찬의 봉사가 중단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의 구별은 단지 전투적 교회에만 적용되고, 따라서 교회는 그 영적인 측면에 따라 또는 교회의 참된 회원들 안에서 비가시적이란 것을 가리킨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경우, 교회의 영적 측면과 참된 회원들은 하나로 합쳐져 따로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다. 마음의 내적 믿음, 중생, 참된 회심, 그리스도와의 숨은 교제 등은 영적 소유물들로서, 자연적인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교회의 참된 형태를 부여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의 영적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오류가 없는 척도를 준 일이 없다. “교회는 가장 내밀한 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안다. 그러므로 알곡 가운데 쭉정이가 들어 있고, 참된 신자들 가운데 위선자들이 들어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또한 언제나 가독교회 내에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전투적 교회,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에 대해 사용된 ‘교회’라는 명칭은 로마교와 개신교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은유적인 의미를 지난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핵심적인 요소를 형성하고 교회에 본질을 제공하는 신자들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전체가 부분에 따라 불린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며 그렇게 지속된다.

[492] 이렇게 이해할 때, 그 누구도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구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교회의 개념과 연관된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은 단지 은사적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제도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이 모임 자체는 단지 그리스도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봉사한다. 이것은 신자들의 모임이지만, 또한 신자들의 어머니이며, 유기체이지만 또한 제도적 기관이며, 목적과 동시에 수단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제도로서의 교회 사이의 관계는 다음 장, ‘교회의 통치’에서 비로소 논의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개념은 묘사하기 힘들어서 국가 안에 있는 백성과 정부가 구분되어 따로 취급될 때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처럼, 신자들의 모임을 제도로서의 교회의 조직과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때 비로소 교회의 개념을 바르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F. Turretinus)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구별을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구별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슬며시 후자에 속하지 않는 의미를 후자에 부여한다. 한편으로 교회를 단지 그 관념이나 승리적 교회만이 아니라, 또한 지상의 전투적 교회에 따라 ‘예정된 자들이나 선택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위클리프), 또는 ‘완전한 자들’의 모임으로(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펠라기우스, 칼빈에 의하면 재세례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 또는 ‘한 번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으로(노바티아누스), 또는 아메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경계선을 긋는 것처럼, 성찬에 참여하는 교회 회원들(성찬을 받는 자들)의 모임으로 묘사하는 자들이 있다. 다른 한편, 교회의 무게중심을 신자들의 모임에서 계급적 제도, ‘온 세상의 외적인 최고 군주제’로 옮기고, 교회의 본질을 ‘듣는 교회’보다는 훨씬 더 ‘가르치는 교회’에서 찾는 로마교가 있다.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을 최소한 어느 정도 참된 회원들로 견지하기 위해, 교회를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멜랑흐톤, 뢰에, 클리포트 등), 또는 세례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뮌히마이어, 델리취, 필마르 등) 묘사하는 모든 자들이 이 방향에서 출발한다.

이 두 견해들은 일방적이어서 교회의 본질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

‘교회의 본질’ (개혁교의학 제4권 351~360p에서 발췌) / 헤르만 바빙크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9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신앙고백서들의 증거 / 로버트 레이몬드

믿음은

4.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한 신앙고백서들의 증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5.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들었고, 지금 모여들고 있고, 장차 모여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의 충만이다.

유형 교회 또한 복음시대에는 보편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다(이전 율법 시대처럼 한 민족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이 유형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참 종교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권속이다. 이 교회를 떠나서는, 즉 교회 밖에서는 통상적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 보편적인 유형 교회에게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모으는 일과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직과 말씀과 규례를 제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따라, 그 자신의 임재하심과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효과적으로 모아지며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쉽게 볼 수도 있고 때로는 보기가 더 어렵기도 한다. 그 보편적 교회에 속하는 개 교회들은 그들 안에서 복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받드는 데 따라, 또 성례가 시행되고, 공동 예배를 순수하게 행하고 안하고에 따라 더 순수하기도 하고 덜 순수하기도 하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일지라도 혼잡함과 과오를 범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당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게 마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달리 아무도 없다. 다만 교황은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및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에 비하여 자신을 높인다.


‘최신 조직신학’(로버트 레이몬드) 1088p에서 발췌, 기독교문서선교회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3



개신교의 교회관 / 루이스 벌코프의 교회론에서 발췌

믿음은 ㆍ 

개신교의 교회관 / 루이스 벌코프의 교회론에서 발췌

3. 개신교의 교회관.

종교개혁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로마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이며, 특별하게 형식적 교회관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개혁은 외형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로부터가 아니라 성도의 무리로서의 교회로부터 교회의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자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이 같은 입장은 개혁 교회의 신조들을 통해서 거듭 천명된 바 있다. 예컨대 벨기에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은 참된 신자들의 회중인 한 보편 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스위스 일치 신조도 같은 진리를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실실한 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통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바르게 경배하며 섬기는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조건 없이 주어지는 모든 선한 은혜들에 믿음으로써 참여하는 자들이다”(17장).

선택의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무형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또 모이게 될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로 구성된다. 또한 이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배우자이며 몸이며 충만이다”(25장). 보편 교회, 곧 하나님의 계획안에 존재하며 시대의 과정에서만 실현되는 교회는 시간 속에서 영생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택함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도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었다. 무형 교회만이 아니라 유형 교회도 또한 성도들의 공동체(무리)로 간주되었다. 이 두 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이며, 따라서 본질도 하나이다. 두 교회가 모두 본질적으로 성도의 무리이다. 그러나 무형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로서 신자들만을 포함하는 교회인 반면, 유형 교회는 인간이 보는 교회로서 자녀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함으로써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교회이다. 여기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포함될 수 있고 또한 항상 그러했다. 그것은 알곡에 가라지가 섞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분명히 드러난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바울은 유형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악한 자들과 범죄자들에게서 떠날 것을 역설한다(고전5장; 살후3:6,14; 딛3:10).


'벌코프 조직신학'의 교회론에서 발췌 (p821~822),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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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색은 위장관 출혈 의심해야"*
* ●* *뒤끝 없이 한 덩어리로 떨어지는‘바나나형 황금변'이 최고**
**●* *건강하면 똥 냄새 고약하지 않아**
**●* *채식 많이 하면 배변 양 많아져**
**●* *굵은 똥은 대장이 건강하다는 증거**
**●* *변의(便意)만 느끼고 똥 안 나오면 직장 혹 의심해야**
**● 신생아 배내똥과 죽기 직전 똥은 닮은꼴*


▼ 똥은 생산을 상징*

농사를 짓던 우리 민족에게 똥은 결코 지저분함의 대명사가 아니었다.

‘꿈에 똥을 밟으면 재수가 좋다’고 했던 이유도  똥을 더럽게 생각하지 않고 생산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산은 곧 돈으로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반면 보릿고개로 대표되던 가난을 빗대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했다. 가난하면 그만이지, 애꿎은 항문이 왜 찢어지? ?걸까?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물만 먹으면 똥 덩어리가 굵어지고 물기가 없이 딱딱해져요.
똥이 되직하게 나오니까 항문이 찢어지는 거죠.**

**사람은* *초식 동물이 아니라서 섬유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거든요.
대장 내에서 분해되지 않고 다 똥으로 나오는 겁니다.*



*섬유질은 스펀지처럼 수분을 흡수하면서 부풀어 오르지요.
섬유질이 똥의 양을 많게 하거든요.* *
그러니 섬유질만 먹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식이섬유는 몸 안에서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대변의 발효를 돕고 해로운 성분까지 함께 끌고 나가는 청소부와 같다. 변을 부드럽게 해서 배변을 도와주는 식이섬유에는 과일, 해조류, 콩류가 있고, 변의 양을 늘려 변비 예방에 효과가 있는 식이섬유로는 양상추,오이, 브로콜리, 양배추 등이 꼽힌다.**

**식이섬유를 먹을 땐 평소보다 물을 더 많이 먹어야 배변에 도움이 된다.

▼ 삶은 똥이다?

*서울대 의대 박재갑(朴在甲·62) 교수는 지난 30년간 6,000여회* *
수술을 했는데, 대장암 수술만 5,000회 이상 집도한 대장 항문암의 최고 권위자다.
대장이 전공이므로 그에게 변(便)은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교수는 “삶이 똥을 닮았다”면서 “입으로 들어간 건 반드시
똥으로 내놓아야 하듯이 삶 역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고 했다.

▼ 똥과 섭생

*“똥이 ‘굵다’ ‘가늘다’ ‘되직하다’ ‘묽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일수록 배변량이 적어요. 배변량이 식이섬유 섭취량과 비례하거든요.
가공식품을 많이 먹고 채식을 적게 하면 섬유질이 부족해서 똥을 적게 눠요.

**육류만 먹으면 똥의 볼륨이 작아져요.
대장은 영양가 높은 음식물이 지나가면 천천히 내려 보내요. 흡수할 것이 많거든요.

**영국에서 실험을 했어요.
육류 위주로 먹게 했더니 하루에 똥을 100g 정도 눴답니다.
그런데 채식 위주로 바꾸니까 배변량이 육식 먹을 때보다 배가 늘었다고 해요.”

**건강한 성인은 변의 양이 하루 200g 이하, 한 컵 정도다.
의학적으로 ‘변비’란 배변량이 하루 35g 이하,
일주일에 2번 이하 화장실에 가는 상태이고, * *
‘설사’는 배변량이 하루 300g 이상, 하루에 4번 이상
화장실에! 가는 경 우를 말한다.**

**배변량은 국민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육식을 즐기는 서유럽의 경우 100g밖에 안 되지만
파푸아뉴기니 국민은 하루 배변량이 무려

▼ 자신의 똥을 관찰하는 사람 증가*

*“양변기 쓰고 나서 똥 안 보는 사람이 없을걸요.  조금이라도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똥에 피가 묻었는지,
똥 색깔이 달라졌는지 무의식적으로 보게 돼 있어요.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 똥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놀랄 겁니다.
‘양변기 때문에 사 람들에게 참 이상한 취미가 생겼구나’싶을 정도입니다.”


▼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대변의 색깔이 바로 달라지진 않잖아요?*

**“그렇1kg에 달한다고 한다. 채식 위주의 문화권에서는 배변량이 많고,
육식 위주의 문화권에서는 섬유질 섭취의 부족으로 배변량이 적은 편인데,
파푸아뉴기니 국민은 주식으로 채식만 고집하기 때문에
배변량이 세계최고 수준이다.

1950**년대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배변량이었다’는 소문에는 근거가 있다.
가난과 기근으로 나물만 먹던 그 시절 한국인의 배변량은
지금의 3배 쯤 됐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이 동남 아시아인,
일본인과 함께 치질 발병률 세계1위로 꼽혔는데
섬유성 식품을 많이 먹어 배변량이 많았던 탓이라고.**

**똥 색깔 변하면 상황은 심각하다.**

**입에서 항문까지의 길이는 약 9m 이고 어떤 음식이든
1박2일이면 변이 되어 배출된다.

대변의 색깔이 달라질 정도라면 사태가 심각한 거죠.
대부분의 사람이 색깔이 달라지기 전에 병원! 을 찾아
沽. 똥에 피가 섞이면 아차 싶은거죠. 피가 붉으냐 검으냐에 따라 달라요.
붉은 피가 섞여 나오면 항문이나 직장, 대장에 출혈이 있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대장이 워낙 기니까 피가 항문까지 내려오면서
똥에 섞여 버리면 중간중간 검은색을 띠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검은 똥은 선지를 먹어도 나올 수 있거든요.
출혈이 없어도 적혈구 내에 철 성분이 산화되면서 똥이 검어지기도 합니다. 
요즘은 너도나도 와인을 즐겨 마시는 분위기인데,
적포도주를 많이 마셔도 검은 똥을 눌 수 있어요.**

**그러나 만일 자장면 색깔의 똥을 눴다면 문제가 달라요.
흑변이 나오면 상부 위장관의 출혈을 의심해 봐야 해요.
또 혈액이 위장관을 지나면서 위산이나 장내 세균에 의해
흑변으로 바뀔 수도 있고요.* *

**방치하면 소화성 궤양 혹? ?위암의 진단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빈혈을 치료하려고 철분제를 복용했거나 감초 식품을 먹어도
흑변이 나올 수 있어요.”**

**또 채식을 한 것도 아닌데 기름지고 양이 많으면
췌장염에 의한 흡수장애가 있을 수 있어요.
똥에 코 같은 점액이 자꾸 묻어나오면 대장암을 의심해야 합니다.* *
대장암을 만드는 세포가 점액질을 분비하거든요.”**

**똥이 영어로는‘덩(dung)’이다. 발음이 비슷하지 않은가?
대변 볼 때 ‘똥’ 하고 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속설이 있다.
동양에서는 ‘쌀이 소화되고 남은 찌꺼기’라는 의미로
분(糞) 혹은 변(便)이라고 했다.**

▼ 똥 냄새

*“건강하면 똥 냄새가 고약하지 않아요.  똥 냄새는 자연의 냄새잖아요.
닭똥 특유의 냄새가 있듯이 인분에도 특이한 냄새가 있어요. * *
하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닙니다.
똥 냄새는 대장 내에 있는 세균 때문에 나요.**

**똥 냄새가 심한 사람은 장 안에 세균이 득실거리고 있는 겁니다.
대장에 요구르트에 들어 있는 ! 유산균이나 올리고당 같은
좋은 균이 많으면 냄새가 심할 리 없어요.”**

**그는 “점심에 청국장을 먹었다”면서
청국장과 변에 대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줬다.*

*“우리나라 사람들, 청국장 좋아하거든요.
콩을 발효시켜 만든 게 청국장 아닙니까.
콩을 발효시킬 때 냄새가 얼마나 고약합니까.
서양인은 이 냄새를 ‘똥 냄새 같다’고 하잖아요.
똥 냄새와 청국장 냄새가 이웃 사촌쯤 됩니다.
똥이든 청국장이든 세균이 발효돼 냄새가 나거든요.
좋은 세균은 발효되고 나쁜 세균은 부패하잖아요.
대장 내에 좋은 세균이 많아야 냄새 덜 나는 똥을 누게 되는 거죠.”**

**대장에는 500종 이 넘는 세균이 살고 있다.
대장균은 음식물 찌꺼기를 분해해서 비타민 B, 비타민 K, 아미노산 등을
몸에 공급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배탈이 나거나 설사를 할 땐 몸에 이로운 세균보다
해로운 병원성 균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 *똥의 색깔로 여러 질병을 의심*
*“지나치게 옅은 갈색이면 적혈구가 파괴되는 자가면역 질환이나
간 질환을 의심해야 해요.
희거나 회색이라면 담도가 폐쇄됐을 수 있고요
피와 고름이 섞인 설사를 한다면 대장이나 직장에 염증이 있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 똥의 모양

*“전 솔직히 똥이 더러운지 모르겠어요.
제 환자들이 모두 똥과 관련되잖아요.
저는 무조건 환자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봐요.
대장암 수술 후에도 대장을 이어놓았는데 혹시 좁아지지 않았는지,
뭔가 만져지지 않는지 점검해야거든요. 그러니 매일 똥을 만드는 거죠.* *

**손가락이 항문으로 8~10cm 들어가면 똥이 안 묻어나오는 사람이 없어요.
전 똥을 만져도 마치 밀가루 반죽 만지는 기분입니다.**

**제가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똥’이라 말하면 다들 웃어요.
외부 강연에서 ‘똥’이라고 하니까 ‘점잖지 못하다’고 언짢아하는 분도 있었죠.
방송에서도‘똥’이라고 했더니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더라고요.”**

**박 교수는 “똥과 친해지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옛날 어른들이 ‘똥이 굵어야 잘산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에요.
건강? ?사람의 똥은 바나나 모양이면서 굵고 황금색입니다.
또 뒤끝을 남기지 않고 시원하게 한 덩어리로 떨어집니다.* *

**몸이 안 좋거나 허약해지면 국수 가락처럼 흐물흐물하게 떨어져요.
요즘 여성들, 다이어트를 너무 심하게 해서 빼빼 마른 똥을 눠요.
먹은 게 없으니 대장에서 똥이 뭉쳐질 리가 없겠! 熾
.**

**또 폭식하고 폭음하면 대장에서 수분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아 무른 똥을 눕니다. 무른 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구리겠지요.
육류, 커피, 술이 주원인입니다.
과음을 하면 알코올이 소장과 대장의 운동을 자극해서 설사를 일으켜요.”**


▼‘니 똥 굵다’는 ‘너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너 건강하다’는 뜻*

*“똥이 굵은 건 장내에 변의 흐름을 막는 혹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굵으면 나쁜 세균이 들어가도 희석이 잘 돼요.
배변량이 많아야 비워내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빨리 비워내야 대장 안쪽 세포들이 똥 속의 발암물질과 접촉할 시간이 적어져요.* *

**변비가 있으면 똥 속 발암물질이 대장의 점막과 접촉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겠죠. 똥은 무조건 몸에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해요. 규칙적인 배변습관이 필요합니다.”*! *

**건강한 사람의 대변은 굵기가 2cm, 길이는 10~15cm라고 한다.**


**▼* *변이 가는 사람*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면 변이 가늘어지죠.
똥의 수분이 대장에서 흡수되면서 되직해지고 딱딱해지는데,
자주 누면 변이 묽은 상태로 나오기 때문에 굵어질 수 없어요.**

**▼* *변비에서 설사로, 다시 변비로 장기간 반복된다면 건강의 적신호*
**사람의 항문은 동그랗게 벌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굵은 똥이 밀고 나오니까 항문이 넓어지는 거죠.
그런데 변의(便意)가 느껴져 힘을 줬는데 가늘게 나오는 건 문제가 있어요.
대장에 혹이 생겼을 수 있거든요.
똥은 대장 속 통로의 상태에 따라 굵기가 달라질 수 있어요.
혹 때문에 대장 통로가 좁아졌다면 똥이 가늘어지겠죠.
몇 달간 계속 가늘게 나온다면 검사해봐야 합니다.”**


**▼* *대장에 문제가 생기면 방귀 냄새부터 고약*

*“뭘 먹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요.
대장균이 아직까지 소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음식물 찌꺼기(섬유질)의 일부와
단백질 등을 발효 시키면서 악취가 나는 가스를 발생시키는데, 이게 방귀입니다.**

**대장 내에는 질소 산소 등 400여 종의 성분이 있거든요.
변비 때문에 대장이 꽉 막혀 있으면 냄새가 더 고약해질 수 있겠죠.”**


**▼* *방귀 소리가 크면 건강*

*“직장과 항문이 건강한 사람이죠. 하지만 습관적인 경우가 더 많아요.
 특히 여성들은 너무 참다가 소리가 커질 수 있죠.”**

**건강한 성인은 하루에 방귀를 13회 이내로 뀐다. 최고 25회까지 정상이라고 한다. 방귀는 질소, 이산화탄소, 수소, 메탄 따위로 구성돼 있어 무색무취다.
하지만 음식물과 지방산 등의 분해 물질인 암모니아가 대변과 냄새를 만든다.**

**대변의 냄새로 질병의 유무를 구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하지만 방귀를 너무 자주 뀌거나 너무 오래 참아 복통이 심해진다면
이는 가스증후군의 일종이다.
유제품이나 양파 당근 바나나 셀러리 등은 방귀의 횟수를 늘리고,
쌀 생선 토마토 등은 방귀의 횟수를 줄인다고 한다.**

*대변 속 기생충 검사실*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고 해요.
기름진 육류를 먹고 폭음을 하니까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더 악화되죠.
변비-설사의 반복이 심하면 대장 어딘가에 혹이 있지 않나 의심해봐야 합니다.**

**대장에 혹이 있으면 똥이 일시적으로 못 내려가요.
똥이 안에서 썩으면 안되니 설사를 통해 내보내는 겁니다.**

**토끼 똥처럼 힘을 줘야 겨우 나오던 것이 갑자기 폭격하듯 물똥으로 나오는 거죠. 요즘 대장에 혹 있는 사람이 참 많아요.”**


**▼* *평소와 다른 똥은 병과 관련*

*“똥을 누고 싶어 화장실에 갔는데 안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리 힘을 줘도 안 나오면 문제가 있는 거죠.
항문에는 외괄약근과 내괄약근이 있습니다.
내괄약근은 무의식 상태에서도 오므리고 있는, 지치지 않는 근육입니다.
위쪽에서 똥이 내려오면 자동으로 열립니다.**

**직장은 항문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방귀인지 설사인지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직장 쪽에 혹이 생기면 뭔가 묵직한 게 자꾸 느껴져요.
꼭 똥 덩어리 같단 말이에요.
그러면 자꾸 변의를 느끼는 거죠.
그런데 (화장실에) 막상 가면 안 나와요.
그 정도로 변의를 느낀다면 꽤 큰 혹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 칼빈 주석에서 발췌

믿음은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마 13:24~30, 36~43)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이상 그 안에는 좋고 신실한 자들과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무장하고 괴로움을 주는 장애물 중에도 철통같은 신앙을 지속해야 한다.

주님께서 교회를 자기 밭이라고 칭하셨을 때 가장 적절한 비교를 하셨다. 신자들은 그의 씨앗들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그리스도께서 그 밭이 세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주님은 이 밭을 교회에다 적용시키시기를 원하고 계셨음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고 주님은 결국에 가서 이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밭을 가는 주님의 쟁기는 세상 끝까지 미칠 것이요. 주님은 도처의 어느 밭에나 관여하셔서 생명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에 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는 교회가 제유(提喩)에 의하여 온 세상으로 해석된다.

이제 주님께서 ‘곡식’과 ‘가라지’에 관하여 의미하시는 바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복음이 그 뿌려진 곳에서 사악한 관념들에 의해 즉시 부패되고 변질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와 같은 부패를 일소하는 일에 열중할 것을 금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 상황과는 다르다. 도덕적 상황에서는 악이란 그 자체의 시정이 불가능하므로 그 존속을 그대로 두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순결에 영향을 주는 불경건의 잘못들만이 확실히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가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의문점을 분명하게 해결하고 계신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으니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선인과 마귀적인 악인의 씨를 뿌려놓으신 것으로 오해하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마니교도들이 그들의 허구적인 이원론을 그럴듯하게 꾸며대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오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모든 악은 마귀 안에 있는 것이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든 간에 건전한 본성의 부패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창조시에 좋은 씨로 만드시지 않았고 단지 이 선택된 자들이 원죄의 감염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영의 은혜로 중생시키실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귀가 악한 사람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며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타락시키고 순결한 씨앗을 손상하는 다른 씨를 주님의 밭에다 뿌리고 있을 뿐이다.


존 칼빈의 성경주석 공관복음 I.II 519~520p에서 발췌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5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비판한다  

 

In Criticism of John MacArthur's <Charismatic Chaos> 

 

 

  

구요한 목사

( 서울대 경제학과. 뉴욕 법과대학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졸업. 서울 생명의교회 목사)

 

  

 

 

  존 맥아더는 비록 뛰어난 강해설교자이자 목회자이지만 그의 [은사 I & II]는 건전한 영적 체험의 결핍과 영적 현상에 대한 무지 및 신학적 편견이 낳은 추악한 부산물이다-

 

필자가 90년대 초에 존 맥아더의 Charismatic Chaos( [은사 I & II ]로 번역됨)1)을 처음 대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경험이나 나쁜 경험에 의해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은사주의자들의 수많은 실책을 자세하고 다양하게 수집한 그의 열심에 놀랐고 동시에 몇 가지 전통적이고 독단적인 교리로 영적인 현상을 쾌도난마같이 난도질하는 그의 만용에 또 한 번 놀랐다.  

 

존 맥아더는 자신이 마치 현대의 선지자인양 서문에서 자화자찬을 주저 않고 늘어놓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책을 보고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해 성경적으로 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편지가 쇄도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필자가 아는 어떤 집사는 존 맥아더가 쓴 [은사]라는 책 제목만 보고 혹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뭔가 배울게 있나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다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하여 조금 읽다가 내다버렸다. 

 

또한 필자가 아는 한국 유수 장로교 신학교 출신의 한 목회자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체험한 후 "한국에서 신앙생활하고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소개 받지 못하고 마치 전통적인 것이 신앙의 전부인 양 잘못 소개한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영적으로 기만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 식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의 일방적인 논리 전개로 악 영향을 받아서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 나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은사운동 변호](Charismatic Manifesto)라도 한 권 집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후 시간이 다소 흘렀고 필자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은사운동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의 주장을 마치 군대의 야전 전투교범처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수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도 어쩐 일인지 오늘날의 성령의 외적인 사역에 관해서는 체험이 있는 평신도보다도 못한 엉뚱한 견해를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양 내세우는 경우를 필자는 너무나 많이 목격해 왔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권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 맥아더도 마찬가지이다. 강해 설교가로 이름이 나있고 스스로 개혁, 보수주의자를 표방하기 때문에 반(反) 은사운동의 성향이 있는 한국의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그의 견해를 금과옥조같이 따르고 있다.  

 

필자 또한 말 그대로 '은사주의자들의 혼란들'을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낀 사람이다. 지나친 건강 축복 복음, 병적인 체험 추구, 영적인 교만, 체험을 말씀 위에 놓는 오류, 오늘날의 계시에 대한 오해, 몇 가지 신기한 영적인 은사를 가져야 신령한 신자라고 착각하는 오류 등 은사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존 맥아더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전통적이고 해묵은 몇 가지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교리로 성경이 지지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나 관행조차 무차별 포격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만용이고 객기에 지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끔찍한 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존 맥아더는 자신이 마치 개혁, 보수신학의 선봉장인 것처럼 과시하지만 필자가 알기에는 그가 제시하는 몇 가지 독단적인 교리는 오늘날 개혁, 보수신학 내에서조차 심각한 도전을 받는 주장들이다. 더군다나 '경험보다는 교리를 중시한다'는 그 자신이 자세한 주석적인 근거도 없이 은사주의자들의 여러 가지 오류를 나열해 놓고는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는 식의 경험적 논리를 서슴지 않고 내세운다.  

 

맥아더 식으로 어느 한 신학 전통의 오류를 파헤친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을 것이 과연 있을까?  

 

존 맥아더 자신의 전신인 '세대주의자의 혼란들'은 어떤가? 심심찮게 시한부 종말론으로 홍역을 치루는 이유는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의 천상 재림 따로, 지상 재림 따로 라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어떤가? 맥아더가 배운 신학 전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필자도 원한다면 맥아더식으로 [세대주의자들의 몽유병]이란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전통은 내세우지만 바른 행위와 삶이 죽어 있는 '죽은 정통'의 폐해는 어떠한가? 교조적 집단이기주의, 개교회주의, 형식주의, 전통주의 및 총회 임원의 부정선거, 장로 및 임직자의 금권선거, 강도사 및 편목 가입으로 인한 금전 개입 등, 필자는 소위 말하는 정통 교파에 직접 소속한 경험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썩어빠지고 화석화되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람이다. 만일 내가 [정통 교회의 흙탕물]이란 책을 출판한다면 맥아더의 [은사] 못지않는 오류를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은사운동을 무작정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부 반(反)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성경의 진리가 왜곡되고 성령의 다양한 사역이 소멸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필자는 맥아더의 주장의 오류와 독단을 그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개혁,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간단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진리는 체험이 아니라 말씀에서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진리는 체험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체험이 진리의 이해를 주도해서는 곤란하지만 체험 또한 진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을 중시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또는 말씀)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시간을 두고 곰곰히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 그 주장의 오류를 발견했다. 이 주장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적어도 성령의 외적인 사역에 관한 한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무 체험에 근거한 인간의 논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말하자면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말씀이나 교리 그 자체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이 해석한 말씀'이란 말이다. 자신들의 무 체험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해석한 말씀'만이 유일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야 말로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록된 말씀은 불변하지만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발전, 변화해 가야 하지 않는가?  

 

성경의 진리는 원어나 역사적인 배경을 연구하고 독단적인 교리에 충실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체험이 없는 경우 사변적이고 편파적인 교리가 생길 위험성이 너무나 많다.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했다가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후에 종전의 견해를 바꾸고 성경을 다시 이해하기 시작한 전문교역자나 신자들의 이름이나 간증 목록을 대라면 책 한 권도 모자랄 것이다.  

 

존 맥아더는 은사주의자들이 반(反)지성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반(反) 체험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둘 다 모두 바른 성경해석과 건전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계시(revelation)라는 말의 정의 문제이다. 개혁, 보수신학은 성령의 감동(Inspiration)과 조명(illumination)을 구분한다. 성경의 기록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성령의 감동은 완전하지만 성령의 조명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보수신학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대해서만 (특별)계시 라는 말을 사용한다.  

 

존 맥아더는 이런 식으로 계시란 말을 정의한 후, 은사주의자들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이들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펄펄 뛴다. 천하에 이런 이단이 어디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개혁, 보수주의자들 예를 들어, D. A. 카슨, 웨인 그루뎀, 번 포이트레스 등이 지적하듯 성경 자체는 계시라는 말을 그렇게 좁은 의미의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계시하다"의 헬라어는 아포칼립토이며 명사형은 아포칼립스이다. 성경에서 이 말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7),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엡 1:17),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계시(고전 14:26)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 하는 것은 조직신학자들의 독단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 보수신학을 접할 기회가 없는 은사주의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계시라는 단어를 성령의 조명이란 차원에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좁은 의미의 전문 술어로만 이해하여, 마치 기록된 성경 계시에 무엇을 더하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들의 용어 사용상의 미숙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성경에 있는대로 사용했지만 듣는 자가 자기들의 신학의 편견으로 그렇게 듣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 못할 이단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계시는 개혁, 보수신학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지 감동은 아니다.  

 

감동(inspiration)이란 말도 문제가 있다. 사실 이 말도 성경이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라틴어에서 생긴 말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성령의 감동(이 경우는 영어로 moved by or prompted by the Holy Spirit 의미에 해당)이라는 말을 너무나 평범하게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거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평범한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하등 잘못이 아니다. 개혁, 보수주의자들도 평범한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계시라는 말만 왜 좁게 전문적인 의미로만 정의하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너스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기만 하면 곧 성경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과민 반응이다. 모든 솥뚜껑을 자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성경 자체가 계시라는 말을 평범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 과연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같은 기적이 지속되는가? 존 맥아더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적 종식론이 마치 개혁, 보수신학의 대표적인 입장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물론 개혁, 보수신학자들인 번 포이트레스, 고든 피, 웨인 그루뎀 및 잭 디어 등도 기적 계속론을 주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의 기적 시기를 3시기(모세, 엘리야 및 사도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기적의 기능을 특별 계시인 성경의 기록을 증거 하는 것으로만 국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적 (또는 이사와 이적)의 기능은 너무나 다양하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요 3:2; 9:32-33),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실(고전 2:4; 고후 12:12),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마 12:28),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마 14:14; 20:34; 막 1:41 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출 14:4; 요 2:11),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마 9:22; 15:28),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왕상 17:1-16, 17-24), 전파하는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사람들을 모아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마 4:24-25) 등 무수히 많은 이유로 기적을 행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런 명백한 성경의 구절들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조직 신학자들의 독단만 앵무새처럼 나열한다. 번 포이트레스는 기적을 특별 계시인 성경의 기록을 증거 하는 좁은 의미로만 국한시키는 조직신학자들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2)  

 

필자는 맥아더에게 묻고 싶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과거의 신학자들이 반대파를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변증법적인 기적 종식론을 마치 불변의 금과옥조처럼 주장하는 그 태도가 과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우는 개혁, 보수주의자의 태도인가? 은사주의자들이 체험에 의해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독단적인 논리로 성경의 진리를 외면하는 오류를 맥아더는 먼저 시정해야 하지 않는가?

 

 

II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부정하다가도 자신들이 실제로 체험한 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기적 종식론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자들이 반대파를 대항하고 자신들의 무 체험을 변호하기 위해 고안해낸 인간의 논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기적 종식론은 수백 년의 교회사를 통해 너무나 정교하게 개발, 보완되어왔기 때문에 짧은 지면으로 모든 종식 이론을 반박하기에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체험이 있는 경우는 기적 종식론의 허구성을 금방 깨닫지만 실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논리가 정교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무 체험을 지지해 주기 때문에 좀처럼 기적 종식론을 버리지 못한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존 맥아더의 대표적인 오류 몇 가지를 비판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좀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신앙 변증 시리즈의 <기적은 계속된다>를 보기 바란다.)

 

 

 

첫째 맥아더는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기적과 오늘날의 그것들과를 비교한다. 맥아더에 의하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병을," 그것도 "즉각적"으로 고쳤는데, 오늘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은 모든 병을 고치지도 못하고 고치는데 시간도 걸린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신약적인 기사와 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맥아더는 같은 세대주의자인 노만 가이슬러3)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으며 에드워드 그로스4)도 이 주장을 따른다.  

 

성경은 과연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맥아더가 주장하듯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기록하는가? 도대체 맥아더의 태도가 학자적이지 못하다. 왜 그는 자기의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만을 인용하고 부정하는 구절들은 무시하는가? 그는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減)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걸핏하면 은사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르듯 그 자신이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 아닌가?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맥아더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왜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지 한 명만 고치셨을까?(요 5:1-9).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거나(마 13:5),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어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막 6:1-6).

 

이 구절들에 의할 때 어쩌면 맥아더 류의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신학 이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즉각적이 아니라 2회에 걸쳐서 소경을 고치셨다(막 8;22-26).

사도 바울도 모든 병을 다 고친 것은 아니다(빌 2:25-27; 딤전 5;23; 딤후 4:20).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가? 맥아더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이란 말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을 경직적으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오류이다. 성경에는 모든이란 말이 5천 5백회 이상 사용되며 여기에 any, none, every를 합치면 그 수는 1만 번을 상회한다고 한다.5)  

 

스타인은 모든이란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과장법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판정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그는, 다른 곳의 기록과 상충되는 경우나, 다른 곳에서의 예수님의 행동과 상충되는 경우, 또는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보편적인 술어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과장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타인의 지침을 따를 때,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고쳤다는 기록은 필자가 예로 든 성경 구절들과 상충되므로 문자적이 아니라 과장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는 목적은, 어떤 특정한 사실을 단순화하여 강조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주의를 사로잡아서 결단과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필사본(기록된 성경)이 태부족하여 듣는 것이 강조된 당시에 단순화한 과장법은 기억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구원설(universalism)이 옳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기록한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요 1:7; 벧후 3:9 등).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의해 그 의미가 제한되므로(마 1:21; 요 17:9; 엡 1:12; 롬 11:7),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제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이 개혁, 보수신학의 입장이 아닌가?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맥아더의 주장은 성경의 기본적인 성경해석학에 위배된다. 개혁, 보수신학의 강점이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논리의 일관성인데 맥아더는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기 위해 성경의 명백한 기록마저 무시하는 횡포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때문이다.

 

성경을 경직적인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의 오류이다. 이들은 성경 구절들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 "교회의 구원 따로, 이스라엘의 구원 따로"라는 이원론적인 구원관을 주장하며 "예수의 천상 재림 따로 지상 재림 따로"를 주장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원조가 되었다. 제이 아담스는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에 집착한 세대주의자들의 성경해석법을 한 물체가 여러 개로 보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라고 부른다.  

 

더군다나 맥아더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성경해석법을 주장하지만, 전형적인 세대주의적인 용어인 '문자적 해석,' '통상적 의미'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자인 번 포이트레스는 이러한 용어의 개념의 모호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6)  

 

또한 노만 가이슬러의 말장난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예수님이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고치셨다'는 자기의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2회에 걸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막 8:22-26)을 즉각적인 치유라고 주장한다. 즉 한 단계, 한 단계가 '완전한 치유를 향한 즉각적인 치유'였지 불완전한 치유가 아니라는 것이다.7)  

 

'두 번에 걸친 즉각적인 치유'가 성립되는 개념이라면 3번, 4번, 5번 더 나아가서 10번에 걸친 즉각적인 치유 개념도 성립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모두가 완전을 향한 즉각적인 치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군다나 가이슬러는 은사주의자들의 기사와 표적에 대한 목격담을 모조리 부정한 후, 자신은 실제로 드물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수많은 기적 목격담은 부정하고 자신의 목격은 진짜라고 주장하는 그 주장 자체가 다른 사람의 체험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의 체험'은 중시하는 체험적인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맥아더의 또 다른 횡포를 살펴보자. 그는 기적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그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말하는 곳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 (끝난다고 기록한 구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 주.) 또한 성경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구하라고 권면하는 곳도 없다. 신약 성경 모두를 살펴볼 때 신자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명령형으로 말하는 곳은 다섯 군데 밖에 없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으로 충만하라(엡 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20).8)

 

 

필자는 맥아더가 어떤 성경을 보는지 궁금하다. 필자가 보는 성경은 맥아더의 성경과는 판이하다. 성령과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이 도처에 있다.

 

구하라 . . . . 찾으라 . . . . 문을 두드리라 . . . .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 9, 13).

너희는 더욱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신령한 것(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고전 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딤후 1:6)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왜 이런 오류가 생기는가? 맥아더는 기적 종식론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성경에서 '성령이나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 구절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편견과 전제로 인해 분명한 성경의 기록을 외면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바른 신학과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틀릴 수 없다'는 영적인 교만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류를 자아낸 것이다.

 

 

III

 

Q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쟁쟁한 개혁 신학자이다. 그는 강의 시간에 '성경에 기록된 기적은 사도시대에 중지되었으며 악하고 음란한 세대만이 오늘날 기적을 요구한다'(마 12:39)는 요지로 강의했다. 필자는 강의 후 즉시 항의성 질문을 했다. 헤르만 리델보스의 The Coming of Kingdom(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제일의 표적은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는 것이며, 피터 와그너 교수의 연구 조사 등에 의하면 기적은 지금도 지속된다. 그런데도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가? 

  

Q 교수는 전혀 언짢은 기색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미스터 구의 말이 옳다. 나도 피터 와그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발걸음을 돌리는 Q 교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가 존경하는 교수가 실제로는 기적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고 믿으면서도 공적인 강의시간에는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는 그 이중성에 어이가 없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성경 중심의 개혁 신학을 자부하는 이곳에서조차 오늘날 도도하게 밀어닥치는 성령 운동의 거센 풍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자기들의 신학을 애써 인간적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이 측은해 보였다.  

 

이런 대화를 어느 동문에게 말했더니 그는 한술 더 떠서 말하기를 "교수들이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성령 운동이 교내에 불어 닥칠 것이므로 조심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전개한다.  

 

"성령 운동이 밀어닥치는 것이 걱정되어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안하여 나의 신학으로 브레이크를 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개혁주의자라고 자부하는 그 이중성에 또 한번 어이가 없었다.  

 

어떤 운동이 교회에서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한 분야를 강조하면 반대자들은 "그렇게 하면 전통 교회가 중시해 온 xx분야가 소홀히 취급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런 운동에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러면 비판자들은 왜 새로운 분야는 소홀히 취급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개하고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해왔던 것 잘못될까봐 걱정하고 있다니! 왜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걱정하는가? 이것이 바른 교리의 산물인가, 게으름과 편견의 산물인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수들의 이러한 내적인 갈등을 모른 채 그들의 기적 종식론으로 무장된 수많은 사역자들이 강의 시간에 배운 그대로를 실제 목회에서 적용하고 있으며, 그 밑에서 배운 평신도들 또한 비판의 여지없이 배운 대로 믿고 행동하여 성령의 사역을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맥아더같이 영향력을 끼치는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이 계속 기적 종식론을 지지하는 저서들을 출판해 내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도 맥아더식으로 한 번 말해보자.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오늘날의 '설교'는 신약적인 설교가 아니다.

 

성경을 보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한 설교는 준비가 없이 즉흥적이었고, 상당 부분이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성령의 감동이 완벽하였고 내용에 오류가 없었다.  

 

성경을 보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설교 준비했다는 말이 어디 나오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설교는 어떤가? 상당 시간을 소비하여 여러 참고서를 보면서 준비해야 하고, 성령의 감동도 부족하고 오류투성이다.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이런 설교를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또한 성경에는 말씀을 전파라고 했다(딤후 4:2). 맥아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읽든지 암송하여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왜 설교를 인간적으로 서론, 본론을 구분하고 예화를 넣고 2대지 3대지로 구성하는가? 성경에 이런 식으로 설교하라는 명령이나 권면이 어디 있는가? 그러면서도 오류투성이인 자신의 강론에 맥아더는 어떻게 감히 신약적인 용어인 '설교하다'(케이루소)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맥아더 식으로 말하면 오늘날의 설교는 신약적인 의미의 설교가 아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설교가 신약적인 의미의 설교가 아니라고 해서 필요가 없는 것인가?  

 

왜 자기들이 하는 것은 다 성경적이고 자기들이 잘 모르고 생소한 것에 대해서는 완벽을 요구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사역을 사사건건 트집 잡은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또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고쳤기 때문에 오늘날도 '기사와 표적'이라는 명칭을 붙이려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문자적으로 똑같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 은사의 차이를 간과한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슈퍼 모델이다. 그들이 올림픽 수영 선수라면 우리는 대충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올림픽 수영선수처럼 수영하지 않으면 수영이 아니란 말인가?  

 

사람마다 말씀 전하는 은사의 정도에 차이가 있듯이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롬 12:3), 은혜의 정도가 다르고(엡 4:7), 기름부음의 정도도 다르므로(요 3:34에서 예수님은 한량 없이 성령을 받으셨다), 은사의 효과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교회의 일상적인 체험에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수만 명의 교인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 수명의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기도로 병을 낫게 하든(약 5:16), 은사로 병을 낫게 하든(고전 12:10, 30)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맥아더는 벤자민 워필드의 잘못된 기적종식론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20세기 초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벤자민 워필드는 그의 [사이비 기적]에서 오늘날 기적 종식론의 이론적 근거를 확고히(?) 마련했다. 그에 의하면 기적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정당한 권위를 위임받은 대표들이라는 사실을 확증(authentication)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사도시대가 끝났으므로 기적은 "필연적으로 소멸되었다"(necessarily passed away)고 주장한다.  

 

워필드는 기적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 성경의 "원칙"(principle)이며 "역사적인 사실들"(facts)이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경의 원칙에 의해서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므로 그 이후에 일어난 기적은 모두 '사이비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워필드는 사도들의 범위를 확대시켜서 사도들 또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안수를 받은 사람들로 국한하며 그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 기적이 끝나는 것이 성경의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워필드는 그 증거로 주후 100년에서 150년까지 50년간의 교부시대 동안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주후 150년부터 300년까지는 기적에 관한 기록이 "더러"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없었다"고 주장한다. 주후 4세기에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이한 일"(marvels)이라고 한다.   

 

 

비판해 보자.  

 

먼저 워필드는 기적의 기능을 사도성 증거나 특별 계시인 성령의 기록을 증거하는 기능에 국한시켰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기적의 기능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밝혔다.  

 

워필드의 아류인 토마스 에드가는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초대교회 시대에 기적이 없이 말로만 복음을 전파했다면 누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겠느냐? 그러므로 기적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해 주었다'고 주장한다.9)  

 

오늘날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Sufficiency of the Scripture)을 내세우기 위한 것인데, 에드가는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사도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 자체로는 부족했다'는 이단성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한다.  

 

둘째, 필자가 보기에 워필드의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사도시대에 완전히 끝나는 것이 성경의 원칙이라면 그 이후에는 전혀 일어나지 말아야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없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주장을 억지로 내세우기 위해서 져스틴(Justin Martyr, 100-65),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 등의 기록을 제시하면서도 이들의 기록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독단을 서슴지 않는다.  

 

정통 교회의 수많은 교부들이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필드는 그들의 주장을 믿을 수가 없으니 자기의 논리에 의한 기적 종식론을 믿으라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경험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만큼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논리 또는 신학을 성경이나 믿을만한 신자들의 증언보다 앞세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워필드 뿐만이 아니다. 무수한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논리나 신학을 앞세워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워필드는 또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초기에는 기적을 부정하다가 후기에는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의 초기의 종식론을 옳은 것으로 인용하였다. 어거스틴은 초기에는 성경과 동등한 권위의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몬타너스의 열광과 광신을 대항하기 위해 기적 종식론을 주장했다.10)  

 

그러나 어거스틴은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자신이 직접 목격한 후 그의 견해를 바꾸었다. "오늘날에도 기적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들이 성경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읽고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하신다."11)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기적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되고 있다. . . 사실은 오늘날에도 기적들이 예수의 이름, 또는 가끔 성찬식을 통해서 가끔 성자들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기적 종식론자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리차드 개핀 교수조차 필자와의 대화에서, 워필드의 주장은 '주석적 근거가 없는 역사적인 경험(또는 무경험)에 의한 주장'이라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무)경험에 근거한 워필드의 주장'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맥아더는 더 나아가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한다.12)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은 말씀 중심으로 살아서 마귀의 세력을 대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약 4:7-8),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하면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벧전 5:8-9).

맥아더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성품의 문제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인 전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의 문제이다.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들의 거의 모든 강조점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읽어 보라. 오늘날의 교회를 특징짓는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병적인 고집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신자들에게 귀신들을 찾고, 귀신들에게 말하고, 귀신들을 대항하고, 조롱하고, 쫓아내라고 가르치는 것을 한 군데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13)  

 

에드워드 그로스14) 및 데이빗 폴리슨15)도 그들의 저서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피터 와그너 교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한 번이라도 실제로 쫓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체험 만능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중 상당수는 실제 체험이 없으면 지극히 추상적인 논리로 해석되거나 영해 (spiritulization)될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맥아더는 다른 사람들을 체험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내가 무 체험을 바탕으로 한 논리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필자는 맥아더 식의 견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을 쫓아내면 '구속사적'이니 '계시사의 독특한 사건들'이니 등등 거창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동일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오늘날의 신자들이 귀신을 쫓으면 '신비주의'니 '무속신앙'이니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 특히 사도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교리를 도출해 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더 나아가서 맥아더의 주장은 성경해석상의 전형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그는 첫째 A(기술)가 아니라 B(품성)이라는 헬라식 흑백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A(기술?)는 물론 B(품성)라고 강조한다.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맥아더가 말하는 기술)도 필요하고 성령의 열매(품성)도 맺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한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자(A) 내재하시는 분이다(B).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A) 완전한 사람이시다(B).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자 인간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둘째 그는 서신서 어디를 보아도 귀신을 쫓아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귀신 쫓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서신서들에는 한 군데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느냐'(침묵에 의한 논증Argument from Silence)는 주장이다.  

 

로마 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죽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마리아 승천설을 주장한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서신서에는 단 한 군데에도 기록되지 않았는가?'  

 

침묵에 의한 논증은 비판자의 논리에 의해 비판자 자신이 부메랑같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서신서들은 주로 교회 내부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내무생활 지침서'이며,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야전 전투교범'이라고 할 수 있다. 작전과 규율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야전전투와 내무생활을 혼동하지 않는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 자세히 기록한 사실을 구태여 서신서에서 불필요하게 재반복하여 기록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전통적인 개혁, 보수신학에서는 기독교의 교리와 경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역사서(주로 이야기체로 기록된 사도행전, 복음서 등)가 아니라 교훈서(특히 바울의 서신서)를 주요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리를 확립시키는 데 있어서 성경의 교훈적인 부분이 역사적인 부분에 비해 우선권이 있다'것이다.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여 성령론이나 마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보수신학 일각에서는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성경 안에 성경'을 인정하는 비성서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  

 

맥아더는 축귀에 대해서는 서신서를 기준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린다. 악기 사용의 근거를 신약의 서신서는 커녕 신약도 아닌 구약의 시편 150을 참고로 인용할 뿐이다.16)  

 

오늘날 누군가가 맥아더 식으로 "신약 성경 특히 서신서를 보라. 예배시 악기를 사용하라는 명령이나 권면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주장의 타탕성 여부를 성경에 비추어 상고하기는 커녕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살짝 돈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초기 종교 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미국의 청교도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도한 제1차 영적대각성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 예배 시 악기 사용을 금지했으며, 시편을 단조롭게 창(Chanting)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어왔다. 그들은 서신서에 악기를 사용하고 세상의 음악의 멜로디를 사용하라는 기록이 없다고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어느 지도자는 청교도 시대가 성경의 진리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시대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예배에 대한 이런 주장(성경 해석)이 다시 수정되었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절대 다수의 교회가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면서 어떤 교리적 갈등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결국 문제는 예배 시 악기 사용의 여부를 성경 전체는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혜의 산물로 보지 않고 굳이 서신서에서만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엉뚱한 교리를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개혁, 보수주의자들은 신앙고백, 선택교리, 예배의 기준, 선교와 전도, 교회의 정치제도, 유아세례 등 교회의 핵심적인 교리와 실천기준의 근거를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기적을 행하거나 축귀를 하면 왜 큰 일이 난 것같이 야단법석을 부리는가?  

 

맥아더 식의 무 체험자들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사역의 현장에서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필요할 때에는 축귀를 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자를 따라야 하는가? 어느 편이 성경적인가?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

 

 

 

IV. 윌리암 데아르테가의 맥아더 비판

 

 

교회사학자인 미국의 윌리암 테아르티가는 [성령을 소멸함]17)에서 존 맥아더의 [은사 I & II]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다음은 데아르티가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맥아더의 [은사]는 이전 책인 The Charismatics: A Doctrinal Perspective(1978)(은사주의자들: 교리적 전망)의 수정 증보판이다. 이 두 책에서 맥아더는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운동은 기독교 교회에 혼란과 무질서와 혼란만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은 환상과 잘못된 신학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맥아더는 미국 남가주 선 밸리 소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성경교사이며, 그의 근본주의적 설교를 통해 매주 1만 명 이상의 교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맥아더는 은사주의 신학에 대한 공격자일 뿐만 아니라 동료 복음주의자에 대해서도 과도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구원과 제자도와의 관련성에 대해 동료 세대주의자와의 신학 논쟁에 연루되어 있다.  

 

맥아더는 효력 있는 구원 체험은 제자훈련의 과정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구원 체험 자체가 영생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한다. 편견이 없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의 교환이 되어야 할 논쟁이(약 3:17),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난투극으로 전락되었다고 한탄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맥아더는 반대자들의 견해를 공격하기 전에 그것을 통상적으로 잘못 해석하거나 과장한다고 말한다.  

 

베델신학대학원(미네소타주 세인트 폴 소재)의 학장이자 복음주의 학자인 밀라드 에릭슨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맥아더는 오해했다고 비판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한 삶과 성령의 은사를 담대하게 사용하는 것을 규정하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교리는, 특히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신학에 대한 맥아더의 비판과 적절한 관련성이 있다.

 

 

은사의 신학은 극단적인 기적종식론의 신학이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18)과 같이 맥아더의 영적 이해의 배경에는 스콧틀랜드 실재론19)의 가정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영적 현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저해하고 있다. 그는 신비주의란 부정적인 것이며 은사주의 신앙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는 객관적이고, 증명 가능한 사실과는 별개로 영적 현상을 인식하려는 믿음의 체계이다. 그것은 느낌, 직관 및 다른 내적 감각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 객관적인 자료는 도외시되기 때문에 신비주의는 내부로부터 그 권위를 찾는다.

 

신비주의와는 반대로 맥아더는 "진정한 영적 경험들"을 가질 것을 허용한다. 이것들은 회개, 염려, 기쁨과 잃은 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같은 경건한 감정들과 같은 구원의 과정의 감정들을 말한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맥아더는 객관적인 진리의 근거는 성경과 개혁 신학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학은 개혁 신학이다. 그것은 역사적 복음주의다. 그것은 역사적 정통 신학이다." 맥아더의 논리는 단순하다.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신학은 개혁 신학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따라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은사주의에 대한 맥아더의 공격은 기적 종식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벤자민 워필드 보다 도가 지나쳐서 17세기 이래로 볼 수 없었던 극단적인 기적 종식론을 주창한다.  

 

그는 오늘날 소위 말하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점검해 보았지만 진짜는 하나도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가 문제다. 진정한 기적에 대한 의학적인 검증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

 

 

 

맥아더의 '기능심리학'(faculty theology)  

 

한때 맥아더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 이 학생에게는 축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의 신학적인 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는 상담이나 전문적인 심리학자를 통해 이 학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했다. 이 학생은,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나쁜 생각하기를 중지해야 된다는 상담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맥아더의 접근 방식은 중세기에 시작되어 칼빈이 사용한 기능심리학적인 것이었다. *기능심리학은 의지가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며 그것은 보다 저급한 감정이나 생각을 지배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학생에게는 우울증적인 생각을 중지할 수 있는 의지력의 발동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생각 즉 지성이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성이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며 감정은 가장 저급한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인간이 전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플라톤의 헬라적인 인간관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신앙도 성경 공부, 신학 공부 등 지성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감정적인 체험을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필자 주)

 

 

 

오만한 신학  

 

맥아더의 [은사]를 읽어가노라면 그가 보편적인 교회의 다른 저서들을 얼마나 읽지 않았나 하는 것에 대해 그저 놀랄 따름이다. 마치 개혁 신학 외에 교부들이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의 저서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A. J. 고든이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에 대해 제시한 증거들은 그냥 무시되었다. 맥아더에게는 개혁 신학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마치 교회가 A.D. 90년에 갑자기 사라졌다가 종교개혁 기간 중에 다시 나타난 것처럼 가르친다.  

 

맥아더의 신학에서 가장 비극적인 요소는 성령을 대적하는 문제와 성령에 대한 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기각해 버리는 데 있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신성에 대한 증거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신자들이 이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맥아더는 주장한다.  

 

이것이야 말로 세대주의의 또 다른 위험성이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의 신자는 성령에 대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자와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분리시킨다. 만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위험을 경고하면, 지성을 통해 그 목소리는 (대다수가 동의하는) 바른 교리에 반대되는 것이으로 쉽게 거부해 버린다.  

 

이런 점에서 맥아더의 신학은 완벽한 바리새 신학이 되어버렸다. 즉 내가 속한 교단의 신학은 완전하므로 이상하거나 새로운 것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만일 동료 신자들이 나와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이단성의 유희에 빠지는 것이다. 나의 신학을 도전하는 꿈이나 환상은, 이 세대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 수 없다. 따라서 바리새 전통을 따르는 기적 종식론자는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학적인 견책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분별에 실패한 바리새주의   

 

비록 바리새주의는 분명한 역사적인 형태를 가졌지만, 어떤 특정한 시대에 바리새적 이단 현상을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바리새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오류를 증명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엡 4:14), 그것을 진정한 교회의 사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바리새 영(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다수가 동의하는 정통신학'(consensus orthodoxy))에 근거하여 비판하며,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가 혹시 그들 자신의 신학적 취약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성경에 비추어 보는 경우가 드물다.  

 

바리새주의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열매를 기준으로 다루기를 거절하는 데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록 어떤 운동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때, 극단주의와 혼란을 자아내어 '혼합된 열매'(mixed fruit)를 맺기도 하지만 그 운동은 전체적인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리새주의자들은,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구분하지 않고, 어떤 운동에 대해 그들의 마음을 결정한 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치우친 증거를 찾는다.  

 

바리새주의자들의 주장과 미국 법정은 재미있는 유사성을 공유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논쟁할 때 특히 법정공방전과 법정주의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미국 TV의 주인공은 형사 법정의 변호사가 아니면 검사들이었다.20) 법정공방의 특징은 상대방의 잘못을 과대포장하면서 자신의 약점은 감추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법정에서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영적 진리를 파괴하기 마련이다. 이런 방법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운동이 가진 진리를 인정하지 못한다. 기독교 사역이나 개인의 잘못만 잔뜩 열거해 놓고 그들의 통찰력이나 장점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 논쟁은 바리새 영으로 전염되기 쉽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적 비판과 바리새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슬픔과 자비를 보이지만 후자는 자기 의에 찬 기쁨과 "내가 그렇게 경고하지 않았는가"라는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 있다.

 

 

 

기독교 비극으로서의 바리새주의   

 

모든 바리새주의에는 기회를 놓치는 비극적인 요소가 있다. 교회의 긴급한 사명은 최근의 이런 바리새주의로 인한 손실을 속히 없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간섭으로, 바리새주의와 (함부로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하는) '마녀 사냥'으로 인해 야기된 혼란, 분열, 두려움 및 과대망상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바리새주의야 말로 교회의 영원한 이단이며 그것을 그렇게 인정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위기는 보다 높은 수준의 분별과 영적 성숙을 향한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상 필자는 존 맥아더의 견해를 그의 저서인「은사 I & II」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 보았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존 맥아더가 은사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내세우는 개혁, 보수신학의 교리들의 상당 부분이 개혁, 보수신학자들로부터도 심각한 도전을 받는 주제들이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인 성령 운동의 태동으로 인해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믿어온 전통적인 교리들을 성경에 비추어 상고해 본 결과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 개혁, 보수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 보수주의자의 태도가 아닌가? 인간이 만든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틀린 것이 판명되면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에 종속되어야 하지 않는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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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충수염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맘이 아픕니다 외동이라서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엄하게 교회에서도 언제나 다른 아이들이 우선이었고... 그래서인지 많이 아팠을텐데도 하루동안을 견디고 있었네요 서른이 훨씬 넘은 아들이 내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만 같아서 수술실 앞에 앉아 눈물로 기도하는 모정... 이제는 아무리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라지 않을겁니다... 비싼 전복 사다가 죽도 끓여 줄거구요 오늘만큼은 아들 바보이고 싶은 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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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꿈을 위하여 한국에,

조경현

그는 서울의 명문 S대학 1년을 마친 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시카고의 명문 C대학에 편입학을 하였다. 갓 성인이었지만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미래의 꿈과 공부로 달래면서 열공하였고 졸업반이 되었을 때, 그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학교의 교사로 나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미국 대기업에서의 특채 제의였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선 돈을 벌어야 할 심산으로 그 회사에 입사하였고, 그가 회사에서 부지런히 일한 결과 한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그가 3개월 전에 그 회사를 퇴직하고 한국에 입국하였다. 사실 그는 나의 중학교 동창으로서 우연찮게 밴드를 통해 소식만 서로 주고받다가 어제 강남의 한 식당에서 만났고, 함께 식사하면서 무려 다섯 시간동안 쉼 없이 대화거리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 신기하였다. 결국 그 음식점이 문을 닫아야 했기에 우리의 대화는 다음 만남(인천)으로 미루어야만 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외에 내가 현재 사역하고 있는 인천이 그의 어릴 적 고향이며, 그의 가정은 부모님이 함경도 분으로서 아버지는 장로, 어머니는 권사로 교회에서 퇴직하셨다는 신앙의 공통점도 있었고, 또 한 가지는 그의 꿈이 나의 꿈과 비슷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10년 전, 아내와 사별하는 아픔은 나와 다른 점이다.

이제 지난 과거는 모두 마음에 추억으로 남기고 새로운 꿈을 위하여 날개짓을 하기로 맘  먹었단다. 그의 꿈은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교회에서 양로원을 방문했었는데, 부유하게 살던 그에게는 그곳의 삶이 충격과 도전이었단다. 외롭게 살고 계시는 저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어린 가슴에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양로원같은 시설을 만들어 어르신들을 섬겨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경현아, 나는 내 재산이 ***인데, 이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구나.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런 맘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같애, 지금도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진 미국생활 30년의 삶을 청산하고, 시민권까지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일련의 준비를 했는데, 사회복자사 자격증 취득, 이미용 기술 습득, 간호보조사 자격증도 땄다. 그리고 미국에서 S대학원에 다니는 아들만을 남겨 두고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그의 눈은 총기가 있어 보였고, 마음의 열정도 보였다.

오늘 아침, 그런 묵상을 했다. 하나님은 성령의 예민한 이들을 불러 당신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행7;51). 오늘날 주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누구일까? 목사도 장로도 아니다. 어떤 감투를 쓴 이들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지만 주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일 것이다.

어제 늦게 귀가하였지만, 새벽에 일어날 때 필자는 얼마나 흥분이 되었는지 모른다. 지난날의 모든 피곤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기대로 하늘을 날듯 가벼웠다. 나는 어제의 만남을 통해 모처럼 주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주님은 때로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신선한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새삼스럽게 느낀 하루였다. 오늘은 또한 한 지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을 때 약간 홍조된 마음이었으니 또 기대되는 하루를 살련다.

13 12 3(화) 도현





 2013년 올해의 최고 자연 사진들
 
 
 
The Nature Conservancy는 1951년에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창립된 자연보호 자선단체로써 백만명이 넘는 회원들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미, 중미, 북미를 포함한 전체 미 대륙의 비영리 환경단체들 중에 가장 많은 자산 ($5.64 billion)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The Nature Conservancy는 매년 실시되는 설문조사에서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단체들 중 하나로 꼽힙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생명을 보전한다 ("Protecting Nature. Preserving Life.") 라는 표어로 운영되는 The Nature Conservancy는 일년 수익이 $550 million을 웃도는데 이러한 막강한 자금을 바탕으로 현재 미국을 비롯하여 35개국에서 다양하게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보전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The Nature Conservancy는 2년 후에 판매될 달력에 쓰일 사진들을 위해 여름내내 온라인 사진대회를 거행합니다. 이 달력들은 The Nature Conservancy의 중요한 마케팅 도구로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일반 상점에서는 살 수 없고 The Nature Conservancy 회원들 또는 관계자들에게만 제공되는 달력입니다.
 
2015년 달력에 사용될 자연과 생태계의 사진들을 선정하는 사진대회는 금년 9월에 마감되었는데 이번 달에 대상 후보 사진들이 발표되었습니다. 12월 23일까지 독자들이 온라인 투표할 수 있는데 최종 우승 사진은 2014년 1월에 발표되어 2015년 달력의 커버가 되고 나머지 사진들 또한 2015년 달력에 실리게됩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2014년 달력에 실릴 사진들인데 금년 1월에 The Nature Conservancy 사진대회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대상후보작들, 우수작들 그리고 대상으로 뽑혔습니다.
 
 


 
 Finalists 대상 후보 사진들 
 
 
 
 
 McDowell Mount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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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sdale, Arizona, U.S.A.
 

 

 

 Dragon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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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ia Beach, Virginia, USA


 

 

 Synchronized Brown Bear Clam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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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ok Inlet, Lake Clark National Park, Alaska, U.S.A.
 
 
 
 
 East Cliff Sur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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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ure Point Overlook, Santa Cruz, California, U.S.A.

 
 
 
 
 Tama F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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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Mountains Natioanl Forest, New Hampshire, U.S.A.
 
 
 
 
 Bloomington 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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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ington, Idaho, U.S.A.
 
 
 
 
 Lake Moraine at Ten Peaks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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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ar Lake Louise Village, Alberta, Canada
 
 
 
 
 Turtle in the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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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lua Bay, Maui, U.S.A.


  

 

 Wakatobi Island, Nda'a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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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katobi Shout East Sulawesi, Indonesia

 

 

 

 Giraffe E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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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geti, Tanzania


  

 

 

 

 Runners Up 입상작들 
 
 
 
 Pygmy Nuthat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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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kane, Washington, U.S.A.

 

 
 
 Butterfly F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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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mbopata National Reserve, Peru 

 

 

 

 

 Grand Prize 대상
 
 
 Sandhill Cr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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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wing Lake, Kensington Metropark, Milford, Michigan,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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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자대학교 '사랑의 엽서` 공모전 대상작! 어머니♥


제목 : 어머니


나에게 티끌 하나
주지 않는 걸인들이
내게 손을 내밀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부를 준 당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나한테 밥 한번 사준 친구들과 선배들은 고마웠습니다.
답례하고 싶어 불러냅니다.
그러나 날 위해 밥을 짖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당신이 감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드라마 속 배우들 가정사에 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일상에 지치고
힘든 당신을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습니다.

골방에 누워 아파하던
당신 걱정은 제대로
해 본적이 없습니다.



친구와 애인에게는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잘못은
셀 수도 없이 많아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제서야 알게되서
죄송합니다.
아직도 전부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지금 이순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곁에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은?
마지막질문에 모두가 현재 하고있는일과
그일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다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틀린 대답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지금 내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것입니다.



가까이에 있고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일 수록 소홀해지고 무심해지기 마련입니다.
2013년 가기전에
저의 곁에서 저를 바라보는 모든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싶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와 귀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간직합니다
소중합니다
기억합니다
항상입니다
존경합니다
나날입니다



즐겁습니다
은혜입니다
보답입니다
계속됩니다
영원합니다
함께합니다
존재입니다
이유입니다



현실입니다
전부입니다
지켜갑니다
신뢰입니다
믿음입니다
금수강산의
우리입니다
행복하시길
소원합니다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 뉴욕 큰믿음교회 집회 경계령

2013/10/21 (월) 16:03 ㆍ추천: 0  ㆍ조회: 2015      

뉴욕교협 산하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회장 최창섭 목사)는 10월말부터 리틀 넥에서 열리는 뉴욕 중보치유집회 경계령을 내리고 21일 산하 교회에 통지했다.

협의회는 최근 뉴욕의 한인 일간지 전면에 광고된바 있는 뉴욕 중보치유 집회는 뉴욕 큰믿음교회가 주최하는 집회이며, 뉴욕 큰믿음교회는 한국의 주요 교단들로부터 이단성을 지적당하며 참여 및 교류 금지 대상으로 경계되고 있는 서울 큰믿음교회(변승우)의 뉴욕 지교회라고 지적했다.

큰믿음교회 변승우씨는 한국교계에서 유례없이 주요교단 5개 총회(고신, 합신, 통합, 합동정통, 합동)에서 2009년 동시에 이단 관련 판정을 받았고, 자신이 속했던 교단에서 제명·출교를 당한바 있다. 통합 총회는 "직통계시에 근거한 잘못된 성경관과 계시론, 정통 구원관과 다른 구원론, 입신, 예언, 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형태"등의 변승우씨의 이단성을 발표한바 있다.


▲큰믿음교회의 세력확장-큰믿음교회 네트워크 홈페이지 캡처

뉴욕의 큰믿음교회는 2010년 11월 웨체스트 지역에 지교회를 세웠으며, 2012년 4월 한인들이 많이 사는 리틀넥으로 예배장소를 옮긴바 있다. 변승우씨가 운영하는 큰믿음교회는 한국을 중심으로 일본, 미국, 캐나다, 호주등 해외에 지교회가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뉴욕, 워싱톤 DC, 아틀란타등에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 전 미주 한인 교계의 공동대처가 필요해 졌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시드로스 It's supernatural 에 소개된 Shane Warren(셰인 워렌) 동영상(미국의 미래에 대한 환상)
http://cafe.daum.net/Bigchurch/LZk9/35993?q=%BD%C3%B5%E5%B7%CE%BD%BA&re=1

시드로스는 미국에서 It's supernatural이란 방송의 진행을 맡고 있고,

시드로스는 늦은비 토론토블레싱 집회를 하는 분이시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며

신사도주의자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사람의 설교나 책 자료들은 초자연적 은혜에 치중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기이한 현상을 35년간 연구해 왔다고 한다. 

셰인 워렌 목사
- 미국의 미래의 대한 예언
- 갑자기 하나님의 예언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였다.
- 주시시장에 관한 세세한 부분까지 말씀해 주셨다.
http://blog.daum.net/trance/12928211 

가정교회운동과 신사도운동의 공동목표는 쓰러뜨림?
http://blog.naver.com/yoochinw/130125184405

메시아닉 사이트에 링크된 신사도 인물들
http://cafe.daum.net/ontttc/5bHQ/4 

데이비드 오워는 거짓선지자인가 ?
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7713

초자연적인 화제를 다루다
천국간증, 놀라운 방언의 비밀, 초자연적인 간증, 교통사고로 61분 동안 죽어서 천국방문

- 기적과 치유의 사도
- 초자연적 간증 (방언기도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공개) - 글렌 아레키온
- 방언기도도 하면 마귀도 모른다.
-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교회와 도시, 국가가 변하게 될 것이다.
http://cafe.daum.net/shalomwoosister/bAJ/14649?q=%BD%C3%B5%E5%B7%CE%BD%BA


출처: 생명나무 쉼터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집을 나설 때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살피듯이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생각을 다듬고 마음을 추스려 단정한 마음가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듯이 내 마음도 날마다 깨끗하게 씻어 진실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하듯이 내 마음도 아프면 누군가에게 그대로 내 보이고 빨리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듯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위험한 곳에 가면 몸을 낮추고 더욱 조심하듯이 어려움이 닥치면 더욱 겸손해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린 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듯이 내 마음도 순결과 순수를 만나면 절로 기쁨이 솟아나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듯이 내 마음의 방에 어둠이 찾아 들면 얼른 불을 밝히고 가까운 곳의 희망부터 하나하나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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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는 개신교의 교리적 면죄부인가?

 

< 황대우 목사, 고신대교수 >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1. ‘이신칭의’는 성경해석의 원리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사실이다.

 

“예수천당”이라는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다. 그런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라는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이신칭의 교리는 전도전략에서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고 있으며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알을 낳았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현주소이다.

 

2. 교회연합은 수단이 아닌 본질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의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 즉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개인주의를 거부하는 교회론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는 질문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에 속한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마치는 말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document_srl=33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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