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쟁이

 [열왕기하 25:16-17]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취하였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그 한 기둥은 고가 십 팔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머리가 있어 고가 삼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빼앗아간 금은 그릇들과 놋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에스라 1장 7절부터를 보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레스 왕이 느부갓네살이 약탈하였던 성전기명들을 되돌려 주었는데 금쟁반 30, 은쟁반 1,000, 금대접 30,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 도합 5,400 개나 되었습니다. 여기에 놋기구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고레스 왕이 놋기구까지 되돌려주었더라면 운반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 옛날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놋기구들은 깨뜨려서 가지고 갔으니 그 놋들은 무기나 그릇이나 또 여러 다른 용도로 쓰여 흩어지고 없어져 버렸겠지요.

느부사라단이 깨뜨려서 바벨론으로 가져간 놋의 중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름 4규빗(약 2미터), 높이 18규빗(약 8.5미터)이나 되는 거대한 두 놋기둥과 그 위에 얹힌 머리, 지름 10규빗(약 4.5 미터)에 높이 5규빗(약 2.4 미터), 두께 10센티미터의 거대한 놋바다와 그 놋바다를 떠받치고 있는 놋으로 만든 10 마리의 소, 너무 크기가 커서 깨뜨려서 옮겨갔다고 하는데, 그 많은 놋기구들은 오늘날 크레인을 동원하고 대형트럭들이나 기차로 수송한다고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물건만 빼앗아 가져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숨도 무자비하게 가져갔습니다. 다 죽이고 사로잡아가고 빈천한 자만 남겨놓고 포도원을 갈도록 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도망치려다가 잡혀 아들들이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시드기야 자신은 두 눈이 뽑힌 채 결박되어 끌려갔습니다.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서 잡은 대제사장과 전 문지기와 내시와 시종들 60명을 바벨론 왕에게 끌어가자 바벨론왕은 이들을 남김없이 다 쳐 죽였습니다. 자비도, 긍휼도, 인정사정도 없는 잔혹하고 처참한 멸망이었습니다. 심판의 마지막날도 이러하겠지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왜 이렇게 참혹한 멸망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 사울이 버림당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고 다윗이 세움 받은 것은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멸망하는 최후순간까지, 마지막까지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멍에를 지워 예레미야를 보내어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하면 바벨론이 빼앗아간 성전기명들이 곧 돌아올 것이며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드기야왕에게 바벨론을 섬기고 배반하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불순종하면 처참한 마지막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순종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끝까지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멍에를 부수었고 시드기야는 듣지 않았으며 왕족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벨론을 섬기자 하던 그달리야를 쳐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끝까지, 그야말로 끝까지 불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까지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70년을 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구속사까지 중단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철저히 불순종하였어도 하나님은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속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여호야긴 왕을 37년만에 끌어내어 회복시키셨고 바벨론에서 스알디엘을 낳게 하심으로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장 12절 참조). 유다의 남은 자들을 귀환시키시어 예루살렘을 재건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400년의 암흑기,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때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지키시리라 하신 약속과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끝까지 불순종한 인간들을 끝까지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불순종이라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종하던 나까지도 기어히 구원하셨습니다. 





법궤 발굴과 예수님 피 발견의 진실과 거짓(1) 


<시작하면서>

우리는 보편적으로 구약 제사에서 지성소에 법궤가 없는 제사는 생각할 수 없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혹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기까지는 법궤가 있는 제사를 드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하게도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로 예수님이 오시기 500년 전,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부터 지성소에 법궤가 없는 제사가 실제적으로 집례 되었다. 어쩌면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비밀이었을 것이며, 반면에 아는 사람들에게는 법궤의 행방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며, 그리고 고고학자들에게는 고도에 관사였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었던 법궤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에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법궤에 대해 어떤 이들에게는 비밀이 되며, 어떤 이들에게는 궁금증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서 사라진 법궤와 2000전에 골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발견했다는 동영상이 돌다니다가 요즘 아주 유명세를 타면서 특히 한국교계에 이슈가 되고 있다.


여러분은 법궤에 대해 비밀, 궁금증, 관심사 중에 어디에 속했는가? 그리고 혹시 이동영상을 본 사실이 있는가? 만약에 보았다면 동영상을 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처음으로 동영상을 접사람들은 대부분이 대단한 발견으로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니면 사라진 법궤의 재발견과 그 비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환호의 기쁨의 미소를 보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동영상의 주인공은 론 와이어트(RON WYATT, 1933-1999)라미국 이다. 와이어트가 전하고 있는 ‘법궤와 예수님의 피 발견’이라는 동영상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동영상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여기 근래에 있었던 놀라운 발굴에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난 2500 백여 년에 긴 세월 동안 언약궤가 실종되어 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동안 그 행방에 대해 여러 가설들과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언약궤를 찾으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수년 전 위 있는 고고학자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인 론 와이어트가 성지를 방문했을 때 성령님의 강권적인 감화 감동에 의해 골고다의 예레미아 동굴 속에 언약궤가 감추어져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이스라엘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 수년 동안 사를 했다. 언약궤는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약탈을 피해 황급하게 운반되어 당시 골고다 속에 예레미아 동굴 안에 비밀리 보관되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500 여년에 긴 세월 동안 묻혀 있었으므로 탐사는 수많은 역경에 부딪쳤으나 그만 포하려고 절망할 때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격려하였고, 마침내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는 비밀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밀 장소 바위 천정에 틈이 나 있었고, 피의 흔적이 아직도 남있었다. 바틈을 따라 외부로 연결된 장소는 놀랍게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세워졌던 정확한 자리였다. 그리고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는 영화에서처럼 위가 아니라 사람들에 통행이 많은 도로 옆이었고, 그 바위틈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순간 강한 지진으로 인하여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예수님의 보혈이 그 바위틈으로 스들어 비밀 장소에 보관되어 있던 언약궤의 속죄 자리에 뿌려지게 되었다. 선상에 재단보혈이 뿌려짐으로써 인류와 세상의 속죄를 완성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속죄좌에까지 보혈이 뿌려지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바위틈에서 채취한 혈흔에 수분을 가하여 정밀 분석한 결과 혈액아직도 살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부친으로부터 유전되는 염색체는 발견할 수 었고, 모친이 동정녀 일 때만이 나타나는 염색체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가 이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어 공개적인 검증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두 번째 동영상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세미나 너무 감사하며, 내용이 너무 좋았습니다. 당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검사한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계신다고 했는데 그 시험(검사)결과가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마른 피는 죽은피이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다. 바로 왕의 피, 바로 왕의 미라를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방법을 다 해봐염색체는 하나얻을 수 없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사물들은 변한다. 내가 모든 것다 알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죽은피에서는 단 하나의 염색체도 얻을 수 없고, 염색체에서 DNA 같은 물질을 추출할 수 없다. 이것은 맞는 사실이다. 이 일은 살아 있는 백혈구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분석에 앞서 우선 그 피를 이스라엘에 있는 연구소로 가져갔다. 나는 PNN에서 이 일했던 한 사람에게 한 연구소의 목록을 받았는데 그 곳은 어떠떠한 수준을 가진 은 곳이라고 했다. 나는 단지 그들에게 이 피를 조사해 달라고 했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나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그들은 한 번 조사해 보자고 했다.


우리는 그것을 재구성할 것이며 일상적인 상황에서 체온 상태로 72시간을 유지해서 부드럽게 부풀린 상태에서 진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평소에 하던 일이다. 나는 당신들이 조사할 동안에는 그곳에 있지 않겠다. 그들은 고맙다고 했고 내가 돌아왔을 때 그들은 조사를 마쳤다. 내가 지금 말 하건데 그들은 그것이 사람의 피라고 했다. 그들은 필요한 든 조사를 다 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배양기에 둔 백혈구 중 몇 개를 취해 48시동안 체온에 맞춰 두자고 했는데 그들은 죽은피라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러나 나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시험하는 동안에 그곳에 있지 않고 나왔다. 내가 그곳에 다시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것을 끄집어내어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한 기술자가 건너편에 있는 다른 기술자를 부르고 그들의 책임자도 불렀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한동안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나를 보고는 와이어트씨 이 사람의 피는 오직 24(?)개 염색체만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46개를 가지고 있다. 23개는 어머니 쪽에서 23개는 아버지로부터이다. 22개의 상염색체(성염색체가 아닌 것)는 어머니로부터 22개 상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 온다. X염색체는 어머니로부터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 얻는다. 이 피는 모계 쪽으로 23 염색체만 있는 것이다. 한 방향의 염색체만 있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발생할 수가 없다. 만약 모계의 염색체만 가진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 분의 모든 육체적 특징들은 모계에 의한 상염색체로 결정되게 된다. 그 분께서 남성의 유전적 요소가 없음은 그 분께서는 인간 남성과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피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말합니다. 이 피는(울먹이면서) 나는 이 피가 메시아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확신컨대 이 일은 큰 변화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자의 동영상 내용은 론 와이어트가 직접 간증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며, 후자론 와이어트의 간증 집회에서 한 자매로부터 직접 질문을 받고 와이어트가 즉석에서 답변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그래서 두 동영상은 같은 장소에서 했던 내용이다.


글로만 보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별법궤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충격이겠지만 밀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 이상에 어떤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영상을 직접 보면 충격 플러스알파이다.


두 동영상 중에서 특별히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이 몇 군데 나온다.

첫째는 동영상 간증의 주인공인 론 와이어트는 고고학자이며, 독실한 그리스인이라는 이며, 둘째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감화 감동으로 그 동안 찾고 찾았던 법궤가 있는 비빌 장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는 것과 네 째는 법궤는 골고다 지하에 있는 예레미야 동굴에 약 2500년 동안 비밀리에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직까지 동굴 안에 남아 있었는데 피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예수님의 피가 법궤에 뿌려졌다는 사실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살아있는 예수님의 피를 검사했더니 염색체가 부친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23개는 전혀 없고 모친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23개만 있다는 것이다.


환상과 같은 바로 이런 대목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동영상에 매료되어 아무런 검증 없이 쉽게 빠져들어 대단한 발견이라며 환호의 기쁨을 멈추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도 마찬 지이다. 평신도들은 그런다 치더라도 목회자들은 달라야 는데 오히목회자(선교사)가 더 앞장선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며 또한 심각한 문제아닐 수 없다. 왜냐하론 와이어트의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하는 일들을 목회자들이 모두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굴과 예수님의 살아 있는 피를 발견했다는 영상은 얼마나 진실성을 지니고 있을까? 최소한 이러한 물음이 전제어야 한다. 왜냐하법궤는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검증되어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넓의미로서 신학적이며 현실적인 문제까지 이르러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소극인 의미로서 론 와이어트의 신앙적인 문제까지 검증해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 성에서 사라진 법궤찾는 것은 고고학자들의 몫이라고 치더라도, 법궤의 발견에 대한 진실성에 대한 검증은 목회자까지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필자지만 여기에 관심을 갖고 끼어들게 되었다.


실상은 필자도 2년 전에 이 문제의 동영상을 보았고 또 보았다. 당시 동영상을 본 첫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는데 다음 두 가지로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동영상의 진실성의 문제’였으며, 다른 하나는 론 와이어트의 잘 보이지 않은 술수가 보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남들은 잘 볼 수 없는 술수가 첫 이미지에 떠올랐던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에 법궤의 발굴과 예수님의 살아 있는 피를 발견했다론 와어트의 상은 어디까지 진실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본 동상에 대해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그리고 신앙적이며 현실적인 문제까지 다양하게 검증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적인 검증>

법궤(히, ארון הברית 아론 합릿,)는 ‘증거궤’ 혹은 ‘언약궤’라고도 한다. 그런데 호칭에 대해서는 법궤(레16:2)보다는 증거궤가 먼저 사용되었으며(출25:22), 가장 나중에 사용된 것은 언약궤(민10:33)이다.

사용된 용례(用例)는 법궤는 단 한 번 사용되었고(레16:2), 증거궤는 약 20여 번 도 나오며, 언약궤는 가장 늦게 나오지만 40여 번으로 가장 많사용되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법궤보다는 언약궤(증거궤)로 불러지고 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궤’,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 ‘주 여호와의 궤’라는 이름으로도 불러졌다(삼상 4:11, 삼상 5:7; 왕상 2:26)


언약궤(言約櫃)는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안팎에 금으로 쌌다. 크기로는 가로2.5 규빗(112.5cm), 세로1.5 규빗(67.5cm), 높이1.5 규빗(67.5cm)며, 언약궤의 모양윗가를 둘러서 테를 만들고, 밑판에는 고리를 네 개 만들어서 채를 꿰어서 메고 다닐 수 있게 했다(출25:10-22).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과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다(신31:26).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의 거룩한 언약(계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신9:11). 그 예로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요단강 건널 때나 여리고의 공격 시와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두에 섰다(수3:1-4:18, 수6:6-21; 삼상 4:4-7:2).


언약궤를 두는 장소는 성막이나 성전에 있는 지성소에 항상 두었으며(왕상8:1), 희생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질 때,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씻겨 지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교제가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제사의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언약궤와 깊이 관계되어 있었다. 언약궤의 설계자는 하나님이시며, 시공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 만들어진 최초의 언약궤는 광야 성막 지성소에부터 안치작했다. 가나안에 입성하여 솔로몬예루살렘 성이 완공된 이후에 비로소 언약궤는 성전 지성소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약궤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상징되어 왔다. 언약궤의 관리는 주로 레위 지파가 맡아서 했다.


언약궤는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을 초월하여 수난의 역사를 가지다. 하나님의 임재 장소로 상징되는 언약궤가 수난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언약궤의 수난사를 예수님의 고연관시키고 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약궤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언약궤의 이동 경로를 보면 언약궤는 실로에 도착했으나(수18: 1)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빼앗기게 되었다(삼상4:1-11). 언약궤를 중에 두었던 블레셋은 독종에 시달리다가 못 견디어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반환하게 된다(삼상5장). 언약궤는 안정된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계속 동을 거듭하게 된다.


언약궤는 다시 벧세메스와 럇여아림을 거쳐 오벳에돔의 집에 도착하여 3개월 동안 머물러 있게 된(삼상6장; 삼하6:11장). 그 이후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마련된 다윗의 장막으로 옮겨졌다가(삼하6:17)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비로소 안치되었다(왕상8:1-9). 이후 주전 약 586년 경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성과 솔로몬 성전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왕하25장). 이즈음에 언약궤는 성전에서 사라져 버린 것으로 추측하며 이것으로 언약궤의 수난사는 끝을 맺는다.


그러나 언약궤의 수난사에 대한 최후의 마무리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하고 있다(렘3:16).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이 예언의 말을 하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대의 사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침략을 직접 목격며,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동시에 무참하게 짓밟히며 무너진 사실도 알았던 선지자였다. 그래서 지자 본인도 바벨론 포로로 끌러간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미 언약궤가 없어진 것을 알고 있었던 선지자가 이런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 언약궤의 존재 여부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것분명하다. 그래서 선지자의 언약궤에 대한 예언은 네 가지가 그 핵심이라할 수 있다. 첫째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언약궤의 수난사’가 이제는 났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며, 둘째로 언약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불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며, 셋째로 언약궤는 이제 이 세상에서는 필요 없기 때문에 찾을 필요도 없지만, 만약에 아도 찾지 못을 말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상징적언약궤는 언약궤의 원형이신 수 그리스도께서 도래하면 완성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예은 외형적으로는 언약궤의 불필요성을 말하고 있으나 내면적로는 약궤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언약궤의 불필요성에 대해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언약궤의 대한 최후의 예언과 론 와이어트의 법궤 발굴은 많은 부분서 불일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말 것이며, 찾지 말라고 하셨데 론 와이어트는 법궤를 찾고 찾았을 뿐만 아니라 말하고 또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경(선지자 예언)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론 와이어트가 말하고 있는 예레미야 동굴도 사실보다는 유전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동굴이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는 주지(周知)의 사실이지만, 론 와이트가 말하고 있는 예레미야 동굴이 설사 골고지하에 있다고 치더라도, 론 와트의 법궤의 발견은 선지자의 예언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론 와이어트가 법궤의 발견을 했다면 당시에 다음과 같은 시나리(scenario)가 전제 되어야 한다. 예레미선지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살렘으로 귀환했을 때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이미 무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 이후에 성과 성전 재건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는 바벨론 군대가 약탈해 가는 한 성전이 허물어지기 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언약궤를 바벨론 군대가 해 갔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언약궤의 행방은 고고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어 찾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바벨론 군대가 언약궤를 약탈해 가지 않았다면 성전이 허물어지기 전누군가가 언약궤를 예레미야 동굴 속으로 황급히 피신시았을 것이며, 선지자는 귀환 후에 자신의 동굴에서 언약궤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동굴에서 언약궤를 견하게 된 선지자는 론 와이어트가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하고 감격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이 패망하고 성전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약궤는 전혀 소실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그것도 자신의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니 론 와이어트와는 비교될 수 없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 없이는 론 와이어트는 예레미야 동굴에서 법궤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시나리오가 없었는데도 론 와이어트예레미야 동굴에서 법궤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거짓이 분명하다. 그래본 주제가 “법궤의 발굴과 예수님의 피 발견에 대한 진실과 거짓이다” 그래서 필자는 론 와이어트가 2500년 만에 예레미야 동굴에서 비밀리에 보관되어 온 법궤를 발견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있었는지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성경적으로 검증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개역 개정판)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신의 동굴 속에 있는 언약궤를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 이런 언을 하고 있을까? 물론 선지자는 예언의 주체가 아니다. 다만 기록하는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선지자는 언약궤를 이미 찾았고, 선지자는 깊은 감격으언약궤를 그리워(생각)하고 있으며, 선지자는 언약궤를 두 눈으로 직접 보며 기억하고 는데 언약(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선지자로이런 예언을 하도록 계시를 주셨을까? 이것은 당시 현장(현상)과 예언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결코 이런 예언을 하도록 계시를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론 와이어트의 법궤 발굴은 선지자의 예언과도 너무나도 동떨어진 발상이다. 필자가 2년 전에 론 와이어트의 동영상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느낀 점이 ‘진실성의 문제였다고 지적한 것은 바로 성경과 일치하지 못하고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지자 예언)을 무하는 동이 아닐 수 없다.’고 앞 단락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성경의 진실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론 와이어트의 법궤 발굴은 선지자의 예언과도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일치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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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중사모| 원글보기
 
지상 최고의 멋진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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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치닫는 한기총, 박윤식 목사도 이단 면죄부
다락방 이어 평강제일교회까지, 한기총 어디까지 가나


한기총이 이단해제 면죄부를 남발하며 위상을 스스로 추락시키고 있다. 한기총은 17일 통일교와 전도관 교리를 혼합한 사상을 가르쳐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에 대해 ‘이단 해제’를 결의했다. 다락방 류광수 목사에 이어 또다시 이단 해제에 나선 한기총의 무차별적 행보에 교계 안팎으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기총 실행위에서 특별위는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에 대해 '이단성 없다'고 보고했다. 실행위는 만장일치로 특별위 보고를 통과시켰다.ⓒ뉴스미션

“박윤식 이단성 없다…타 교단 이단 규정은 ‘조작’”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이하 한기총)는 17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중강당에서 제24-4차 실행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날 실행위원회에서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이건호 박사, 이하 특별위)는 과거 예장통합, 예장합동 등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는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에 대해 이단성 여부를 재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

특별위는 검증 보고서에서 “박윤식 목사의 신앙 및 신학사상을 철저히 검정한 결과, 박윤식 목사는 이단성이 없으며 그를 이단으로 규정한 기존의 발표는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예장통합과 합동에서 박윤식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들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거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왜곡된 것들이었다”며 “박윤식 목사는 자신의 신학과 신앙 사상을 점점 발전시킨 결과 구속사 시리즈 9권을 발간하여 자신의 성경 중심적 개혁신학 사상을 밝히 드러냈다”고 치하했다.

그리고 홍재철 대표회장은 20여분 간 박윤식 목사 재심을 위한 특별위를 구성하게 된 경위와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이어 즉시 회원들에게 가부를 물었으며, 특별위의 박윤식 목사 이단 해제 보고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일부 실행위원 특별위 보고에 반발

하지만 특별위의 이같은 검증 발표에 몇몇 실행위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합동보수 강창수 총회장은 “내가 박윤식 목사에 대한 이단 조사를 3년 넘게 했다. 특별위의 발표는 잘못된 발표다. 책이나 글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진짜 문제는 신학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한기총 이대위원인 김창수 목사도 “특별위를 구성하려면 이대위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절차상 문제가 많다. 나는 이대위원임에도 한 번도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홍재철 대표회장이 “그런 말은 하지마라”며 발언을 중단시켰다.

또 박윤식 목사에 대한 재심 요청에 따라 이단성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했다는 한기총 특별위 구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제기된다. 한기총 내부에 이대위가 존재함에도 불구, 임시총회 결의도 없이 외부 인사를 위원으로 영입해 특수 기관을 구성하고 단 며칠 만에 임원회와 실행위를 열어 이단 해제를 순식간에 통과시켰다는 지적이다.

김창수 목사는 “공청회나 전체모임 등의 절차를 전부 무시했다. 행정적으로는 신학박사보다 더 나은 목사님들이 많다. 이대위를 통해 행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대위 회칙에도 그런 내용이 있지 않은가” 반문했다.

이에 대해 홍재철 대표회장은 “목사님들이 이 문제를 다루면 편협해진다. 신학적으로 밝지 못하다. 제3자인 신학자에 의해 검증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강변했다.

박윤식 목사 이단해제가 알려지자 한기총 대표회장을 세 번 역임한 길자연 목사도 17일 오전 교계 일간지에 성명을 내고, 한기총의 이단 해제와 관련 모든 한기총 공직 사임을 밝혔다.

길 목사는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연합 기관이지 이단의 해제를 주된 업무로 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며 “한기총 소속 교단의 동의가 없이 한기총이 단독으로 이단을 해제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입지를 뒤흔드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이단 해제된 다락방과 이날 실행위에서 해제된 박윤식 목사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히며 “해제를 원할 시 한국교회와 각 교단의 합의하에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길 목사는 홍재철 대표회장의 취임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 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런 성명을 내면서 한기총의 이단해제에 대해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특별위원회 위원들이 인사하고 있다. 특별위는 한기총 이대위와는 별도로 외부인사로 구성된 이단 조사 기관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뉴스미션

문광부 “정관 변경 허가 취소, 지금 정관은 모두 무효”

한편 이날 실행위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5일 한기총 정관 변경 허가를 ‘직권 취소’한다는 공문을 보낸 것과 관련해 논의가 있었다.

문광부는 한기총 정관 제39조(정관개정) 3항에 ‘전항의 정관 변경은 총회 의결 즉시 효력이 발생하며 추후 행정적인 절차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승인을 받는다’라고 규정된 것과 부칙 44조 ‘개정 정관은 임시총회에서 의결된 즉시 시행한다’는 조항이 잘못됐다며 기존에 정관 변경을 허가한 것을 직권 취소했다.

위 정관 내용은 민법 제42조 2항에서 ‘주무관청 허가가 없으면 정관변경 효력이 없다’는 규정과 정면 충돌한다. 때문에 문광부는 주무관청 허가 없이도 정관 효력이 ‘즉시’ 발생할 수 있도록 규정한 한기총 정관 39조와 44조 내용이 ‘무효’임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홍재철 대표회장이 임기 연임을 위해 지난 해 10월 개정한 정관부터 이후 정관 모두 법적으로는 현재 효력이 없게 됐다.

문광부 이동희 행정사무관은 이와 관련해 “정관 변경 허가를 직권 취소했기 때문에 현재로선 2011년 7월 7일 정관이 유일한 합법적 정관”이라고 설명했다. 단, “지난 2년 간 홍재철 목사의 대표회장직 수행과 결의는 유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광부의 이같은 결정으로, 당장 홍재철 대표회장의 연임 시도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대표회장 임기를 ‘2년 단임’에서 ‘2년 연임’으로 바꾼 정관 개정안이 내년 1월 한기총 정기총회 일자까지 문광부 허가를 받지 못하면 대표회장 후보 출마조차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기총은 이에 따라 이날 실행위에서 이날 정관 39조를 ‘전항의 정관 변경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승인을 받는다’로 개정하고, 부칙 44조는 ‘삭제’하는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한편, 문광부에 다시 허가 신청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문광부 내 조율이 필요하고 허가가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어 1월 정기총회까지 주시해야 할 문제다.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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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을 사랑하는 - 송명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으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내가 기쁘게 살아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세상을 견뎌 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내가 시험을 이겨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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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인 은혜란? / 조엘 비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은혜’라는 히브리어와 그 파생어들은 ‘친절함, 은총, 인자하심’을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선한 뜻, 인자, 은총’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구속 사역에서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에 대한 과분한 은총을 의미한다. 은혜란 불행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값을 치르고 수여된 복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실행에 옮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모든 역경과 인간적인 불가능을 이기는 강력이다. 은혜는 성경의 핵심이지 우리의 구원의 핵심이다.

 

은혜는 불행과 지옥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들(전적 타락)을 구원하는 것이 오직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께서 이 은혜의 사역에 참여하고 공헌하신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성령께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그 의도를 성취할 것이다. 구원적 은혜의 대상자들은 틀림없이 구원받고 말 것이다.

 

도르트 신조 제3,4교리 제11항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택자들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실 때, 또는 그들 안에서 참 회심으로 역사하실 때에는, 외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또한 거듭나게 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사 닫힌 것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받지 못한 것을 할례받게 하시고, 지금까지 죽어 있던 의지를 살려서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하여 악함과 불순종함과 완고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선하고 순종하고 온순하고 활기차고 강하게 하여, 마치 좋은 나무처럼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0장1절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 단지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된다.”

 

불행하게도 불가항력적이라는 용어는 의지를 향한 죄인의 변덕스러운 힘이나 폭력을 암시할 수도 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매우 강력하고도 강제적인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했던 사람들보다 더 기쁘고도 즐거우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91-197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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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씨 육성설교①-씨앗속임
한기총 이대위, “‘최삼경 일당’이 조작했다” 주장…과연?
2013년 12월 17일 (화) 02:09:18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씨 육성설교-씨앗속임

평강제일교회(구. 대성교회) 원로목사 박윤식 씨는 1991년 예장 통합측 제76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됐습니다. 기독론, 타락론, 계시관, 창조론 등의 이단성 때문입니다. 특히 박 씨는 타락론에서,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고 함으로 통일교와 같은 성적 모티브를 가졌으며, 타락 후에 인간에게 월경이 생겼다고 하여 이 ‘월경하는 여인의 입장에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함으로써 정통적 타락관과 배치된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20여년이 지난 2013년 12월 3일, 홍재철 대표회장 사단의 한기총 임원회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이건호)의 <박윤식 목사 신앙 및 신학사상 재심요청 검증보고서>라는 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박윤식 목사는 이단성이 없으며, 그를 이단으로 규정한 기존의 발표는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의 보고서입니다.

특히 보고서의 24쪽에서는 “통합 총회의 불법성: …최삼경이 독자적으로 창작해낸 거짓말이었으며, 통합 측에서는 이러한 최삼경 씨의 거짓말을 근거로 박윤식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것”이라고 하며, 30쪽에서는 “하와와 뱀과 성관계를 하여 가인을 낳았다는 것에 대하여: …박윤식 목사의 ‘씨앗속임’은 1981년 7월 5일 주일에 행한 설교로서, 여기에서 박윤식 목사는 영적인 씨를 말하고 있지만 육체적인 씨를 말하지 않았다. 이 설교에서 하와가 뱀과 성관계를 맺어 가인을 낳았다는 내용은 전연 없었다. 송사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박윤식 목사는 ‘…분명히 아담은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해서 가인을 낳았다고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돼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그치지 않는 거짓의 말잔치 앞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을 지경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의 자리로 인도받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새삼 실감합니다. 이제 <교회와신앙>은 이 참람한 내용의 설교를 한국교회 앞에 직접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박윤식 씨의 설교를 직접 듣고 과연 누가 거짓을 조작하였는지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편집자주>

평강제일교회(구. 대성교회) 박윤식 씨 육성설교①-씨앗속임 녹취록
(아래의 숫자는 ‘씨앗속임’ 설교 테이프 시간을 표시한 것입니다.)

(앞면) 00:01:28 ~ 00:02:07
앞으로 나오세요. 앞으로, 빨리, 말씀 딴 거 생각해. 그리고 설교 제목을 좀 바꿉시다. 딴 거해요. 귀한 말이에요. 귀한 말. 요한계시록 12장의 내용을 파헤치는데 창세기 4장과 로마인서 9장과 이사야 1장을 해명하지 못하면은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은 해명은 영원히 안 됩니다. 잘 들으세요, 오늘 여러분들이 남은 자야, 남은 자. 뭐요? (남은 자!) 남은 자만이 공부하는 거야.

00:04:24 ~ 00:05:57
이것이 결론인데 그 해를 입은 여자가 왜 아들을 낳느냐, 또 예수님이 남자 없이 성령으로 왜 마리아 뱃속에 거룩한 씨가 들어가서 이렇게 성령으로 낳은 이유가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을 잘 들으면 풀리게 됩니다.

이거 보세요, 김 장로님이 이제 저를 낳았어요. 예를 들어 말합니다. 이게 우리 아버지야. 낳았는데, 나보고 하는 말이 “너는 내가 너를 낳았지마는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에이그, 아버지 그러지 마시오. 농담하지 마시오. 아, 내가 아버지의 종자인데 무슨 말이오?” “아니야. 하나님께서 내 육신으로 넌 내 아들로 인정하고프지마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말래.” 그러니까 “아, 왜 그렇습니까?” 물어보니까, “너의 어머니와 나와는 널 낳을 때 약속이 없이 낳았다. 육신의 정욕이 이게 발동이 돼서 그저 관계해서 난 자식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씨는 틀림없지마는 뜻으로 볼 때 너는 내 새끼가 아니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라고 했대.” 그러면 인간 윤리, 도덕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아들이 아니라고 할 때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 뜻만 하나만 우리가 읽고선 제가 금번 성경의 비밀을, 또 원리를 오늘 파헤치겠습니다. 알았지요? 로마서 9장 6절 이하 다 같이 읽읍시다.

00:06:48 ~ 00:07:43
(교인 : 로마서 9장 6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느니라.) 예,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 종자가, 말씀의 로고스의 아들이 아니라, 오직 약속이라고 하고서 하나님께서 말씀이 나왔지요. 언약을 통해서 난 자식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씨, 종자가 되겠습니다. 알았지요? 요것을 머리에 외워두고 자, 이것 보세요. 그러면 창세기 4장 1절을 다 읽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말씀하면 믿어야 되는데 요놈의 여자가 말했다 말이야.

00:08:08 ~ 00:09:18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게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 했으면 그냥 “아멘!”하고 믿어야 할 텐데 아, 요놈의 여자가 살짝 속였거든. 그러니까 이 말씀의 영이 떠난 아담은 민충이 같이 자기 씨인 줄 알고서 “그래, 하나님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낳았지.” 알았어요?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는 아담이 속아 넘어가고, 또 여자 자신도 어둠의 권세 사단한테 속아 넘어가고, 그러니깐 낳고 보니까 전부 뱀 알, 뱀의 씨들만 낳았다 그 말입니다. 알았지요?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세상에는 방해하는 악령이 있기 때문에 이 해를 입은 여자가 왜 그렇게 만국을 다스릴 철장 가진 아들을 그렇게만 낳아야 되느냐 말이야. 왜 그렇게 역사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오늘 그 문제는 시간 관계로 다 말씀 못 드리지만 여러분들 귀담아 듣는 가운데 창조 이후로 오늘까지 이 말씀의 비밀은 전 세계에 공개되지 않은 것을 제가 잠깐 말씀을 공개하겠습니다. 잘 들으세요.

00:09:40 ~ 00:11:30
자 이것 보세요.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분명히 한자리 같이 했지요? 했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말 했는고 하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 아담이 말하지 않고, 그 여자가 재치 있게 먼저, 하와가 뭐라고 말 했는고 하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 했단 말입니다. 알았지요? 이거 봐, 이거 봐. 세상에 쉽게 말하면은 여자가, 남편 있는데 죄를 졌습니다. 어떻게? 춤바람 나 가지고 놈팽이와 같이. 이것은 뭐 생활주변에 있는 사실 아니오? 그래 어째서 아이를 낳았어요. 뗄려고 애쓰는데 남편이 자기도 동침하기 때문에 “내 아들이겠거니” 하고서 “떼지 마. 아, 딸밖에 없는데 아들인지 알게 뭐야.” 낳은 다음에 가만히 보니까 그 여자는 춤춘 남자 얼굴을 알갔어, 모르갔어? 알갔지? 닮았다 말이야. 그러니까 보기 미안하니까 “에게게, 당신 닮았네.” 그러겠어, 안 그러겠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씀했다 그 말입니다. 알았지요?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주석에도 없어, 잘 들어. 그러니까 떠들지 말라는 거야. 잘 들어. 깊은 얘기, 깊은 얘기 들으면 다 벌렁벌렁 넘어질 사람들이 무슨 깊은 얘기, 깊은 얘기 말이야. 이날까지 성구에 대해서 의심 없이 우리가 연구도 하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서 지나왔다 그 말이야. 그런데 그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 같으면은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일을 해야 될 텐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정말 방해하고 별 지랄들 다 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벌써 씨가 달라.

00:13:14 ~ 00:14:45
그러니까 씨앗 속임들 하지 말라고, 이제는. 이런 비밀을 알 때에 씨앗 속임 할 놈 하나도 없어. 다시 한 번 1절 귀담아 정신 차리고 다 같이 시작. (교인: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가 되었다니까 남편 되는 아담이가 꺼떡꺼떡 했다 그 말입니다. 자기 아들인 줄 알고.

00:15:17 ~ 00:15:53
(마 7:16 읽고) 자, 이것 보세요. 이 성구 말씀을 볼 때 나무 농사짓는 것을 무슨 열매 따는 거 말하는 거예요, 이 사람의 농사를 말하는 거요? 사람이지요? 자, 이것 보세요. 이 가인이 분명히 아담의 아들이었다면 아담이 살인자가 됐어? 아담이 살인자요? 못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요? 그러니까 이 성구를 봐서도 이 가인은, 잘 들으세요. 벌써 이 아담한테, 인류한테, 씨앗을, 씨를, 속이는 작전을 하고 있다 그 뜻입니다. 알았지요?

00:15:56 ~ 00:16:29
그럼 하나님을, 내가 성경을 증거할게요. 난 분명히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와가 씨앗 속임을 했느냐? 난 퀘스쳔 마크만 붙이고, 했다 안 했다 하는 것은 여러분 말씀 들어 가지고 여러분들이 답변 내시기 바랍니다. 대성교회 박윤식 목사가 말했다는 말 하지 마세요. 왜 그러느냐, 여러분들이 좀 위험한 사람들이야. 조금만 말하면 쓸데없이 나팔 불고 말이지, 괜히 이단자 만들고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이건 공개하지 말고 잘 듣다가 마지막 다 제가 결론 내린 다음에 그때야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00:18:11 ~ 00:18:36
그러면 가인은 누구의 자식이냐 그 말이야. 가인은 하와의 육태 속에 심어 놓은, 정말 아담이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와서 심어놓은 이 씨인 줄을 아담은 깜깜하게 영계가 어두워서, 영계가 정말 마비가 돼서 알 수 없는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 아시고 말씀을 잘 들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0:27:23 ~ 00:29:07
요한1서 3장 8절부터 12절. “에게게, 당신 닮았네.” 남자들 다 조심하세요, 믿지 않는 사람들 말이야. 당신은 뭐 당신 닮아. 이거 봐요. 자,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그래서 내가 족보를 내놓지 못한 것은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또 잘 들어요. 또 뭐인고 하니 남자 따질 필요 없이,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나 정말 밀양 박 씨의 계통을 통해서 낳느냐, 중간에 우리 어머니나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 우리 할머니가 새치기해서 내가 실은 문 씨인데, 박 씨 집안에서 낳기 때문에 내가 박 씨로 내가 됐느냐. 전 세계, 이거 봐요, 인류 역사 가운데 씨앗 속임이 있어, 없어? 틀림없지요? 난 밀양 박 씨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야, 솔직히 말해서. 은혜 받은 이후로 절대 믿지 않아. 과연 순수하게 우리의 조상이 말이지요. 우리의 조상이 정말 박혁거세 계통으로 나왔느냐, 할머니가 아차 하는 순간 강간을 당했든가, 여러 우리 조상 가운데 우리 할머니가 평양 기생이라든가 이런 가운데 술을 따라 주다 “마셔라, 부어라” 하다가 다른 씨를 받아서 이렇게 나를 또 낳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후레아들, 내가 쌍놈이오? 밝히 믿자고, 밝히. 그래서 예수님으로 씨앗 속임을 다 알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주겠다, 새 이름을 주겠다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야. 알았어요?

00:30:37 ~ 00:31:47
(요한1서 3:8~12) 자, 이거 보세요. 분명히 가인은 악한 자의 반열에 섰지요? 씨가 달라. 그 새끼는. 그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았어? 달라. 벌써 종자가 달라, 종자가. 종자가. 그렇기 때문에 속을 썩을 때 ‘으이구 저 놈의 종자. 으이구 세상 놈의 저놈 그냥. 전부 저런 망종이다, 망종.’ 그렇지요? 망종이에요. 결국은 망종이다 그 말이야. 이거 아셔야 돼. 이 비밀을 아셔야 돼. 이거 알 때 예수님이 왜 남자 없이 성령으로 태어났는지. 하도 속이기 때문에 안심이 안 돼.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한테 남자를, 숫처녀인데, 응? ‘마리아야!’ ‘예.’ ‘나실 바 거룩한 메시야를 널 통해 낳겠다.’ 그러니까 이 바보 같은 여자가 또 뭐라고 질문해.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그래? 싫으면 관두려마.’ 갈려고 했지요? 갈라고 할 때 놀래 가지고서 붙잡고 ‘주의 계집 종이오매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했지요? (예.) 그때 성신이 딱 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날 때에 마리아 뱃속에서 장난질 했어, 못 했어?

(뒷면) 00:00:00 ~ 00:00:20
마귀 새끼들이 했어, 못 했어요? 못 했지. 알 턱이 있나, 비밀인데. 성령 비밀인데. 남자가 있어서 뽀뽀하고 한 이불 속에 자야 장난할 텐데 아, 숫처녀 가운데 영의 문제인데, 싹 와서 성신이 임해 가지고 인류를 구원하는 그 거룩한 생명의 씨를 딱 심어놓고 갔지요? 응?

00:01:20 ~ 00:02:39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렸다. 피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 해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간단히 해명했지마는 피눈물 나는, 하나님의 서러운, 안타까운, 기가 막힌 거,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되 만인간이 환영하는 가운데 이렇게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숨겨서 씨를 보낸 이유가 어디 있느냐. 마귀가 장난할까 봐 그렇게 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알았지요? 이거 기가 막힌 말이야.

그러니까 저는 늘 눈물 흘리고 지내는 게 그거야. 지난번 십자가 증거 할 때 왜 울었느냐, 이런 얘기해야 할 텐데 시기상조거든. 말은 못하지, 능력이 없습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인류의 구세주를 보내는데 그렇게 안 보내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말이야. 이런 더러운 이 여자의 피 속에는 다른 씨들이 많이 흐르고 있어. 그러기 땜에 안심이 안 돼.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주권적 행사로써 인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친히 인간세계에 뛰어들 때에 마리아의 뱃속에 거룩한 성령의 씨가 들어가 이렇게 되었다는 거, 알았지요?

00:05:08 ~ 00:05:55
따라 하세요. 헤롯왕도(헤롯왕도) 아브라함의 순수한(아브라함의 순수한) 믿음의 혈통이 아니라(믿음의 혈통이 아니라) 중간에(중간에) 할머니가(할머니가) 새치기 당했더라(새치기 당했더라). 해서 그 헤롯왕이 자칭 유대인 같지만 그건 에돔 족속이야. 혈통이 어드매요? (에돔!) 에돔! 예수 당시 때 헤롯왕은 유대인의 피가 아니라 그 할머니가 새치기 당했어요. 누구한테? 에돔 놈한테, 그래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았지요? 그 성경역사가 다 말하는 거야. 없는 것 말했다간 대번 이단 소리 듣게? 이렇게 무서운 말씀의 세계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알았어요? 전 세계 다 보세요, 전 세계. 씨앗의 속임이 있나, 없나 다 봐. 거짓말인가.

00:12:13 ~ 00:14:11
아, 예수가 와서 여자와 관계해서 새끼 낳는다면야 암만 재주가 좋아도 1년에 하루에 하나씩 낳는다 해도 365명밖에 못 낳아. 그러면 전 세계 어떻게 만들어? 그렇지 않소? 마귀의 씨들은 자, 들으세요. 마귀의 씨는 한번 붙으므로 하나 낳는다. 계산해 봅시다. 그러나 예수의 씨는 어떻게 낳느냐, 그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씨가 두루룩, 두루룩 이렇게 쏟아지는 거야. 알았어요? 아주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이거 봐요. 전체 마귀 씨가, 잘 들으세요. 예수 당시 때 전 세계 인구가 5억이야. 얼마요? (5억) 이거 죽어도 잊어먹지 말라고, 예수 당시 때 전 세계 인구가 5억인데, 이거 봐요. 전 세계 인구 5억이 다 소속이 마귀입니다. 마귀 씨야. 그 중에 참 씨가 몇 밖에 없어요? (하나) 하나인데, 이 하나 갖다가 5억 이상 능가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도 비법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말씀의 그 비밀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내가 씨를 좀 봐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 같으면 “씨를 보려면 큰 처녀를 하나 얻어 오누마.” 육신 같으면 이렇게 말할 거야. 근데 하나님 보세요. “너 십자가에 달려서 넌 죽어야 되겠다.” 예수님이 “아니, 내가 씨를 보겠다는데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씨 어떻게 봅니까?” “너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 믿기만 하면 씨가 두루룩, 두루룩 쏟아지게 할께. 걱정하지 말고 믿어! 이래야 마귀가 씨를 심지 못하지. 사람을 통해서 또 씨를 뿌리기 시작하면은 또 마귀가 속여서, 하와를 속이듯이, 또 먹게끔 하는 거야. 야야 전 인류가 건드리지 못하고 다치지 못하게, 오직 씨를 생산하는 것은 아들 예수야, 너 밖에 없으니 너가 십자가를 통해서 씨를 많이 생산해라.” 그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알았어요?

00:14:48 ~ 00:15:08
월경을 통해 낳은 자식들이지요? (예) 여기에 월경 없이 난 아들, 딸이 어디 있어? 우리 어머니, 할머니도 다 어머니, 아버지가 월경을 통해서 아, 아버지는 아니지. 어머니가 월경을 통해서 다 낳았어요. 근데 우리 하나님의 아들의 씨는 월경 필요 없이 낳았다는 것을 벌써 구약 때 아브라함 때 비밀 보여줬지요? (예)

00:16:00 ~ 00:16:36
그러니깐 예수가 장차 그렇게 온다는 것을 미리 마귀 몰래 믿는 자에게 암시를 해줬죠? 미리 암호를 대줘서 우리가 아는 겁니까? 그런데 예수님 총각의 몸으로 그렇게 아들을 많이 낳을 수가 있느냐? 할 때에 십자가 피 속에, 알았죠? 그 십자가 피는 여자의 피가 아닙니까? 이거 봐요. 예수의 십자가의 피가 여자의 피라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피밭을 통해서 아들, 딸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 피가, 알았죠? 그게 바로 말씀을 낳는 아들 딸을 낳는 공장이다. 신령한 배다. 그 뜻입니다.

00:22:20 ~ 00:22:51
가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했지요? (아니오) 그러니까 그것은 남자가 말하지 않고 여자가 말했지요? (예) 말하는데 요한일서라는가 야고보라든가 말씀 볼 때에 소속이 가인은 어디요? 악한 자에 속했다고 했지요? 처음부터 살인자 마귀라고 했고, 속이는 거짓의 애비에요, 애비. 알았지요? '거짓'의 애비가 들어앉아서 거짓말 싹 나온 거야. 그러니까 거짓말할 때마다 뭐가 튀어나옵니까? 뱀, 뱀, 뱀이 튀어나와, 뱀이. 알았지요?

00:24:32 ~ 00:25;23
고맙고 감사하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불과 몇 백 명에 지나기 않지마는 진지하게 참, 서론적으로 저희들이 하와의 그 임신 고백, 그 씨앗 속임, 과연 아담은 영이 무뎌 그 뜻을 깨닫지 못해서 자기 아들인 줄 알고 있지마는 낳고 행동을 볼 때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종자였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았습니다. 주님이여! 이렇게 저희들은 살기를 원합니다. 말씀 받기를 원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 받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씨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씨로써 남은 여생을 깨끗하게 주의 뜻대로 살아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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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 박영선 교수,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

 

이 원고는 201311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발췌한 것입니다. 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 송영찬 국장>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 보수주의는 역사, 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 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 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 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 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 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 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 text를 존중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특히 구약이 그렇다. 구약에는 문맥이 있다. 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context 없이 전하면, 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 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text 자체, 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창세기 28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 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 현실적 필요, 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 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 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 본문,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변증이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 심지어 감동과 환희, 사색과 성찰도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 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 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 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 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 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 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 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 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 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 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 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며, 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 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 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 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 전통주의 항목, 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 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 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 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 이 명령을 기억하라. 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 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 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게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인가? 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 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 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 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 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 필연으로부터인가? 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 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 보전 하려고 한다. 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 그리고 칼빈을 모르면, 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 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인격적 요소인 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 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땅을 보라.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 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


홍재철 목사, 예장합동 탈퇴 선언
예장합동 총회임원회 한기총 탈퇴 결정에 대한 반발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가 19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예장합동 임원회의 ‘한기총 탈퇴’ 결정에 교단 탈퇴라는 초강수로 화답했다. 그는 “선한 자를 죽이려고 하는 합동 측에 더 이상 머물러야 될 이유가 없다”라며 “오늘 이후로 본인은 합동을 탈퇴한다”고 밝혔다. 
 
탈퇴서는 기자회견 이후, 노회에 보낼 예정이며 원로목사로 있는 경서교회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홍 목사는 “은퇴하지 않고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면, 교회까지 교단에서 탈퇴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번 교단 탈퇴결정은 “내 결단이고, 내 의사일 뿐”이라며 교회와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홍 목사는 예장합동이 “한국교회와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지 않고 교권을 이용해 남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음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한기총의 잘못이 무엇인지 따져보자며 예장합동 측에 공개토론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어 박윤식 목사에 대한 이단해제 결정을 내렸던 것도, 박 목사가 소속된 교단에서 보낸 재심요청에 따른 것으로 “각 교단의 권위 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이대위 조사결과, 박윤식 목사에 대한 이단성 혐의 내용들이 일부 이단연구가들에 의해 완전 왜곡, 날조, 조작된 허위사실들로 밝혀졌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한 실행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박윤식 목사 관련 이대위 보고서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를 삼는다면 “누구든 그 증거들을 제시하고, 이대위원들과 진실여부를 다투어야할 것”이라고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이대위 특별위원회에서 소속한 학자들이 공정하게 조사하였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홍 목사는 “자신은 의롭다 여기며 남에게는 비판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일은 바리새 교권주의자들이나 하는 짓”이며 “한기총 역대 대표회장들이 재임 시에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것이고, 내가 재임 시에 이단으로 규정하거나 해제한 것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예장합동 교단이야말로 “비복음적으로 영적인 살인을 일삼고 있다”라며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집안싸움을 하다가 세월을 보낸 것이 합동 교단이었다. 이런 교단이 과연, 한기총이 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하며 간섭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돌아온 탕자를 받아준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라며 회개하고 지도를 원하는 이단시비 대상자들의 돌아옴과 회심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한기총이 하는 일을 지켜봐 달라. 결코 정도를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교회를 개혁시키면서 누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서 서로를 화합하고 한국교회가 재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준수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Banana를 절대로 당신의 냉장고에 보관하지 말라!!!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이것을 읽은 후에 그대는 결코 banana를 전과 같이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Banana는 3가지 자연 당(sugars)을 함유하고 있다.
즉, 자당(sucrose), 과당(fructose) 및 포도당(glucose)이 섬유질과 결합되어 있다.
Banana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이며, 상당한 energy를 증대시킨다.

단 2개의 banana는 90분간의 정력적인 작업점검을 위해 충분한 energy를 제공한다고, 연구결과가 입증하고 있다.

Banana가 세계적인 뛰어난 운동선수들에게 첫째 가는 과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energy가 우리들의 건강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banana의 유일한 방도는 아니다.

Banana는 또한 상당수의 질병이나 심신상태를 이겨내거나 혹은 방지하는데 도움을 주므로, 우리들의 일상 식사에 겯드려 먹어야 할 것이다.

1). Depression (우울증, 의기소침):

우 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MIND에서 시행한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Banana를 먹은 후에는 더 좋은 기분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것은 생체가, Banana가 함유하고 있는 일종의 단백질인 tryptophan을 serotonin으로 개변시킴으로써 당사자를 편안하게 하고 양호한 기분을 증진시켜, 대체로 더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PMS (premenstrual syndrome; 월경전 증후군):

Pill(환약) 은 잊어버리고 banana를 먹어라. Banana는 혈당(blood glucose) 수준을 조졸하는 vitamin B6를 함유하고 있어 그대의 기분상태에 영향을 줄 것이다.

3). Anemia (빈혈):

Banana는 철분(iron)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혈중의 hemoglobin (Hb)의 생산을 자극한다. 따라서 빈혈상태를 돕는다.

4). Blood Pressure (혈압):

이 독특한 열대과실인 banana에는 potassium(K)량이 매우 높으나, 염분(Na)은 오히려 낮으므로, 높은 혈압을 완전하게 이겨내게 할 수 있다. 따라서, US FDA는 혈압 및 뇌졸중 (strokes)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banana의 능력을 공적으로 주장하기 위하여 banana 산업을 허용하였다.

5). Brain Power (뇌의 능력):

영국의 Twickenham school(Middlesex소재)의 200명의 학생들은 그들의 brain power를 증가시키기 위해 아침식사, 간식 및 점심에 banana를 먹게 함으로써 금년도 시험에 도움을 받았다. 연구결과는, potassium이 많이 들어있는 과실은 학생들을 더욱 민첩하게 만들므로써 공부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6). Constipation (변비):

식사에, 섬유질이 많은 banana를 포함시키면 정상적인 장운동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하제 (laxatives)에 의지하는 일 없이 변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7). Hangovers (숙취):

숙취를 치료하는 기징 신속한 방도의 한가지는 꿀을 첨가하여 banana milkshake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 Banana는 꿀의 도움으로 위를 진정시키며, milk가 위를 달래고 전신에 수분을 공급하는 동안 감소된 혈당수준을 회복시킨다.

8). Heartburn (가슴앓이):

Banana 는 생체에서 자연적인 항산효과를 지닌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가슴앓이로 고생한다면 진정에 도움이 되게끔 banana를 먹어보아라.

9). Morning Sickness (입덧; 아침구토증)

정상적인 식사 중간에 snack으로 banana를 먹는 것은 혈당수준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입덧을 피하게 한다.

10). Mosquito Bites (모기 물림):

곤충에 물린데 바르는 cream을 찾기 전에 banana껍질의 안쪽을 물린 부위에 문질러보라!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이 부어오르는 것과 염증을 감소시키는데 놀랄만큼 성공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11). Nerves (신경):

Banana는 B군 vitamin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으므로 신경계를 진정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12). Overweight & Pressure at Work (과체중과 일에 대한 압박):

Austria에 소재하는 심리학연구소에서의 연구는, 일에 대한 압박이 chocolate나 chips (잘게 썬 감자튀김 등)과 같은 위안식품을 탐식헤게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5, 000명의 병원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지나치게 비만한 사람들은 긴장을 요하는 직업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허둥대는 식품의 욕구를 피하기 위해 우리들은,

혈당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고져 매 2시간마다 고도의 탄수화물 식품을 간식함으로써 혈당수준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그 보고서는 단정하였다.

13). Ulcers (괴양):

Banana는 그것의 연한 구조(짜임새)와 부드러움 때문에 장관 장애에 대한 식이식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과도한 기록자 case에서 고민없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생과실이다.

그것은 또한 과산성을 중화시키고 위표면(점막)을 coating함으로써 자극(통증)을 감소시킨다.

14. Temperature control (체온조절):

여러 다른 문화권은, banana가 임신부들의 신체적 및 정서적 체온 양쪽을 더 낮출 수 있는 ‘시원하게 하는’ 과실로 보고 있다. 예컨대, Thailand에서는 임신부들이 그들의 아기가선선한 체온에서 분만되도록 banana를 섭취한다고 한다.

15. 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 계절성 정서장애):

Banana는 자연적인 분위기 촉진제인 tryptophan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SAD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16. Smoking & Tobacco Use (흡연 및 담배사용):

Banana 는 또한 금연하고져 하는 사람들을 돕는다. Banana는 B6, B12 vitamin을 함유하며, 아울러potassium(K) 및 magnesium(Mg)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nicotine퇴출의 영향으로 부터의 생체회복에 도움을 준다.

17. Stress (스트레스):

Potassium 은 활성 무기물(vital mineral)로서, 심박동, 뇌로의 산소(O2) 공급 및 생체의 수분평형을 조절한다. 우리들이 stress를 받았을 때 우리들의 대사 비율은 상승하며, 따라서 우리들의 potassium 수준을 감소시킨다. 이 상태는 높은potassium 함유 banana snack의 도움으로 다시 평형을 되찾을 수 있다.

18. Strokes (뇌졸중; 발작):

'The New England Jour. of Medicine" 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정상적인 식사의 일부로서 banana를 섭취하면 뇌졸중에 의한 사망위험율을 40%나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 Warts (사마귀):

신란하게 논의되는 이들 교체요법은, 만약 그대가 사마귀를 때어버리고져 한다면, banana깝질 의 일부분을 때어내어 껍질표면을 밖으로 하여 사마귀위에 놓는다.

Plaster 나 외과용 tape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고정시킨다.

이상과 같이, banana는 참으로 여러 가지 병증에 대한 자연적인 약물이다.

그것을 사과 한 개와 비교할 때, 단백질에서 4배, 탄수화물에서 2배, 인(P)에서 3배, vitamin A와 철분에서 5배, 그리고 기타 vitamin과 mineral에서 2배이다.

그것은 또한 potassium(K)이 풍부하며, 주변의 가장 가치있는 식품중의 한가지 이다.
그러므로, “Banana 하루 한 개는 의사를 멀리하게 한다”는 잘 알려진 명언처럼 생각을 바꿀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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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트니스 리는 교회관에도 이단이다
지상논쟁5-2 교회와신앙측
1997년 11월 01일 (토)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Ⅰ. 지난 호에 대하여
윗트니스 리편의 변증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전호에서 필자에 대하여 제기했던 글을 보면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이고, 둘째는 기독론에 대한 부분이고, 셋째는 인간론에 대한 부분이며, 넷째는 교회론에 대한 부분이다. 필자는 지면이 너무나 넘쳐서 본호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변증하고 그리고 지난 호에 약속한 것처럼 교회론에 대하여 소개하고 비판한 다음에 다음호로 본 지상논쟁이 끝나게 됨으로 그 때 기독론과 인간론과 함께 마지막 정리를 하도록 하겠다.

글을 시작하며 먼저 밝혀 두고 싶은 점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이 논쟁이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기도하며 이 글을 썼음을 말해 둔다. 다음으로는 필자가 그 동안 개신교, 기성교회, 정통교회란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본호에서는 정통교회란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겠다. 후론하겠지만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정통교회가 무엇인지 정의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에게는 스스로 모순된 말이 너무 많다
진실이란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나는 주관적인 것이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것이다. 전자를 진심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실이란 주관, 객관 이 두 가지가 다 옳아야 한다. 그래야 참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란 편협성과 제한성 때문에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모두 자신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객관이라고 믿는다는 뜻이요 객관을 향해 가고 있고 가겠다는 의지요 표현으로 본다면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이요 진실로 객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항상 주관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객관적인 진실을 구하는 사람인지 알려면 먼저 그의 주관적인 진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주관적으로 자기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관은 객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요 객관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이요 망원경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주관적으로 자기 모순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에게서는 객관적인 진실은 검토해 볼 필요도 없다. 그는 진리를 이용하는 사람일 뿐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도 진리를 바르게 찾아가는 사람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진리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를 살펴볼 때 너무나 자기 모순이 많다는 것이다. 먼저 그 점을 하나씩 지적함으로 이들이 얼마나 진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에 부족한 안목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인지 증명하고 싶다.

(1)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에게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필자를 너무 쉽게 이단이라고 하는 점이 모순된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필자의 말을 대단히 싫어했고, 이단이란 말은 인신공격적인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용하지 않도록 여러 번 요구한 바가 있다. 처음에는, 이단 판정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자제해 달라고 하였고(어차피 절대는 하나님 앞에 가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를 향해 가고 있을 뿐 모두 상대적이란 점에서 이 말도 틀린 말이지만), 독자들에게 이단이란 선입견을 주게 된다는 등의 이유를 말하며 이단이란 말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 처음에 필자는 윗트니스 리편에서 할 수 있는 요구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요구를 들어 주지 못할 이유도 충분히 밝힌 바 있다. 필자는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소신에 변함이 없고, 그리고 이단이란 명예훼손과 관계가 없으며, 본 논쟁의 목적이 윗트니스 리가 이단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필자를 너무나 쉽게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는 점이다. 그것도 필자는 필자의 삼위일체 사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고 이들도 그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옳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이라고 본다는 것이니 주관적으로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이단이란 말을 인신공격적인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교리적인 용어로 사용한다. 그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단이란 말을 인신공격적인 용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사용했으니 결국 필자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취지에서 이단이라고 한 것 같다. 심지어 필자가 했던 한두 마디 말에 의해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정죄한 것은 사려 깊은 일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더라도 정직하고 객관적인 안목을 가진 진실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재는 자와 너를 재는 자가 같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필자를 이단이라고 주장해서 억울하다거나 그 영향이 두려워서 하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너를 도둑놈으로 만들어 나의 도둑놈 됨을 면하려는 윤리는 성령의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윤리라고 본다.

(2)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가 이단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단이란 말을 사용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이단이란 말에 대한 어떤 정의도 없이 이단에 대하여 변증하고 또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점이 모순된다
필자는 이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개념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개념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고, 또한 그 기준 속에서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주장하고 가능하면 그의 이단성을 널리 알려 성도들로 미혹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전호(97년 9월호)에서 필자에게 이단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였다. 그것도 성경에 근거하여 밝히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저들도 이단이란 말을 정의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고도 이단이 아니라는 변증도 했고 이제 다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정죄까지 하고 있으니 모순된다. 이를 상대적인 이단으로 보아야 하는지 절대적인 이단으로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하는 것은 절대적이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사용하는 수법이다. 필자가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은 채 사용한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으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이단이란 말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이단이란 말을 정의했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고, 자신들은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고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이요 모순이다.

비록 우리 모두는 이단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이단이다“, “아니다“라고 변증하고 있었던 것은 무언중에 이해하고 있는 공통적인 개념이 있었기 때문으로 믿는다. 사실 이단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단이 아니다“, “이단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필자가 아니라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같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인격‘이란 용어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고 사용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윗트니스 리가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모르고 사용하는 것 같아서 필자가 먼저 정의하였고 그리고 윗트니스 리의 정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은 사용하면서도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고 하는 등 한 사람의 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적당히 지나가려 하고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인격이란 말을 정의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나 필자에게 이단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다 모순이다.

(3) 필자가 삼위일체에 대한 필자의 사상을 충분히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정죄하는 것도 모순된다
필자는 삼위일체에 대한 필자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이유를 앞에서 자세히 밝혔다. 필자가 필자의 삼위일체 사상을 충분히 밝히지 않았음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규정했다. 이는 분명히 사려 깊지 못하고 나아가 모순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본호에서 교리적인 면에서 삼신론자가 아님을 구체적으로 변증하겠지만, 이단의 절대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사람들로서 한두 마디 말로 남을 이렇게 쉽게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절대적인 이단규정인가? 윗트니스 리에 대한 필자나 교단의 연구에 대하여는 사려 깊지 못한 연구였다고 자주 말하면서, 자신들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쉽게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기를 바라는가? 물론 본 필자라도 이단이면 이단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단 몇 마디 말로(그 말도 삼신론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지만)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이 아니라는 변증도 같은 수준의 변증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한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뭐라고 하든지 필자의 입장은 이렇다.
첫째, 본 논쟁의 초점은 필자의 이단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윗트니스 리에 대한 이단 규정이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바르게 한 규정인가 아닌가를 밝히자는 것이다. 특히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 양태론을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으니 그 점도 분명히 밝히겠지만, 본 논쟁의 초점은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을 밝히자는 것임을 잊지 않기 바란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교회와신앙>이 할애하고 있는 지면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적어도 <교회와신앙>이 이단자들에게까지 지면을 할애하는 본래 뜻이 그 점에 있음을 인지하기 바란다.

둘째, 삼위일체는 너무나 방대해서 그것만으로도 1년간 <교회와신앙>, 전 지면을 다 할애해도 부족할 것이다. 더욱이 삼위일체의 그 난해성과 신비성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그렇다. 결국 이번 6회 동안에 끝까지 삼위일체 논쟁을 벗어나지 못할 터인데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셋째, 윗트니스 리가 변형된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필자나 예장 통합 교단에서 윗트니스 리를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바르게 이해를 했으나 그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즉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할 때에도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아니면 정통신학의 입장은 어떠하든지 성경적인 입장에서 그러하다는 말인지(그것도 윗트니스 리가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지만) 밝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처음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인 것이 아님을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것처럼 주장을 하다가, 이제는 자신들이 성경적인 입장에서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는 쪽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 필자가 이단자들과 논쟁을 해 보면서 거의 마찬가지로 느꼈던 점이다. 예컨대, 안식교와 논쟁을 하였는데 그들도 그랬다. 대부분 이단들은 처음에는 오해라고 주장을 하다가, 다음으로는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해도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가, 마지막으로는 자신들이 성경적으로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본 논쟁을 잘 지켜보기 바란다. 정통신학의 기준에서 볼 때 윗트니스 리가 변형된 양태론이란 점이 확연히 밝혀진다고 해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굴복하지 않겠지만, 그 점이 먼저 밝혀진 후에 성경적으로 옳은지 틀린지 따져야 할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따져야 할 초점은 성경적인 면에서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바른 이해가 되었는지 그리고 바른 기준 설정이 되었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은 절대로 성경적인 입장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성경적이냐 아니냐는 그 다음의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하고 그 논쟁이 끝난 후라면 필자도 성경적인 논쟁을 적극적으로 할 것을 약속한다.

(4) 필자의 신론은 이단적이고 기독론은 비성경적이라는 말도 모순된 소리이다
필자가 보기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기준은 정통신학의 삼위일체 교리를 기준해서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왠일인지 저들은 필자의 기독론은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 말은 아마 자기 나름으로는 성경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 같다. 하나의 기준으로 필자를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단‘이란 말과 ‘비성경적‘이라는 말로 나누어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우선 두 개의 기준을 따로 가지고 말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이단이란 말과 비성경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도 모순된 소리이다.

그리고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면 그는 분명히 이단인 것이다. 기독론은 한편으로는 삼위일체론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구원론이 된다.  2천년 동안 신학은 기독론 중심으로 발전된 것은 바로 구원론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회의는 기독론 문제로 이단을 규정했다. 사도신경도 대부분이 기독론 중심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렇게 볼 때 어떤 사람이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면 그는 이단 중에 이단이다. 기독론은 이단을 가장 밝히 볼 수 있는 현미경이 아닌가? 그런데 저들은 필자가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면 필자를 이단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비성경적이라고 했겠는가? 삼위일체론도 기독론도 비성경적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삼위일체론도 기독론도 이단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저들이 이단이란 말과 비성경적이란 말을 나누어서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왜 그랬을까? 필자가 보기에, 필자를 삼위일체론에서 이단이라고 한 것은 ‘정통신학‘을 기준해서 하는 말 같고, 기독론에서 비성경적이라고 한 것은 ‘성경‘을 기준해서 하는 말로 들린다. 즉 자신들의 기독론이 정통신학과 다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는 자신들이 옳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볼 때 윗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윗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정통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비록 자신들은 성경적으로 옳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정통교회의 기독론과 다르다는 간접적인 시인이다.

(5) 성경적인 논쟁을 하자고 해 놓고 학자들의 의견을 많이 인용하는 점도 모순되며, 필자에게 성경적인 논쟁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중요한 교리를 밝히며 성구를 전혀 인용하지 않았던 것도 모순된다

필자나 윗트니스 리편 모두 성경적인 논쟁을 하자는 데 일치한다. 그런데도 필자는 성경적으로 적극적인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필자의 논쟁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구를 인용한다고 성경적인 논쟁이며,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성경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주장은 성경과 신앙 내지는 신학에 대하여 이원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장하는 무지한 견해라고 본다(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이원론적 의식에 대하여는 후론하겠다). 필자는 이미 실례를 들어 말을 했다. 예를 들어 통일교의 경전인 <원리강론>이란 책에는 칼빈이 저술한 불후의 명작으로 여겨지는 <기독교강요>라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구보다 더 많은 성구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필자가 성구를 인용하지 않아서 신학과 신앙적으로 모순되거나 그릇된 주장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점이 있으면 밝혀 주기 바란다.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는 성구를 인용하고 변증하고 있고 앞으로도 하겠다. 성경 용어를 사용했다고 절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사상과 일치한다고 본다면 성경도 기독교 역사도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비록 필자가 하나 하나에 성경적으로 논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윗트니스 리에 대한 필자의 이단규정이 성경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필자가 따르고 있는 정통교회의 교리 자체를 성경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지방교회의 글은 주장하는 진리의 매 항목마다 성경의 근거가 분명하여 필요시 성경말씀을 직접 인용하였(다)“고 말하였다(97년 3월호 138쪽).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왠일인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중요한 부분에서 어떤 성구도 인용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96년 8월호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밝인 일이 있다. “우리의 실행들“이란 란에서 보면 '거듭남', '분별', '헌신', '주님을 사랑함', '하나님의 말씀', '기도', '그리스도를 체험함',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 '생명의 성장', '인간 생활', 그리고 '그 영'(125~128쪽)에서는 단 하나의 성구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이런 곳을 제시하려면 너무나 많이 할 수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위에 성구가 인용되지 않았으니 위의 항들은 모두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개인 사상으로 보아도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필자에게 성경적으로 증명하라느니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모습이 너무나 모순스럽다.

그리고 필자는 학자들의 말도 인용하지 않았다. 진짜 성경적인 논쟁에서 학자의 말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학자들의 주장은 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도전받기 때문에 많은 논쟁만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존경받는 학자라도 성경적으로 실수를 할 수 있다. 루터도 성경관에서 실수를 했고(예컨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했다), 구약학 학자로서 유명한 에드워드 영 박사도 66권을 다 성경으로 보지 않는 큰 실수를 했으며, 이단연구가로 공헌을 세웠던 월터 마틴 같은 학자도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실수를 했다.

필자가 존경하는 칼빈도 많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실수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초대교회 교부 중에 역사적 교회의 정통성을 어떤 교부보다 더 보여 주었다고 평가받는 터툴리안도 몬타니즘에 빠지는 실수를 하였다. 필자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충분한 책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열거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필자는 신학과 성경을, 교리와 성경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성경적인 논쟁을 하자고 주장하면서도 학자들의 이론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보는데 이도 모순된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필자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보다 오히려 더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6) 필자가 쓴 장로교의 안경이라고 지적한 것들에도 모순이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는 장로교의 안경을 쓰고 있다고 하기에 그 안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먼저는, 필자가 말씀 자체가 아닌 자신의 신학 지식에 근거하여 토론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 그 안경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떻게 이것이 장로교의 안경인가? 바로 이것이 필자가 쓴 장로교의 안경이라고 본다면 그가 장로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신학과 신앙을, 그리고 교리와 성경을 이원화하여 보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안경이요 이단자 윗트니스 리가 쓰고 있는 안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 실례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주장하는 윗트니스 리를 신인합일주의자로 보는 것이 장로교의 안경이라고 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장로교‘의 ‘장‘자도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때는 윗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가 아니라고 하고 이제 윗트니스 리를 신인합일주의자로 보는 것이 장로교의 안경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의 입장에서 보면 장로교는 음녀라는 말이 옳은 것이요, 또한 장로교의 입장에서 보면 윗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적 이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로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그러나 신인합일주의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저들이 장로교를 이렇게 보는 바로 그 눈이 윗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임을 인정하는 안경으로 보인다.

(7) 회복교회(지방교회)는 무지막지하고 호전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법정시비로 이단논쟁을 막으려는 비성경적인 자세가 모순스런 행위이다
필자가 “윗트니스 리가 소위 정통교회의 예배도 부정하고, 침례(세례)의 의미도 부정하며, 목사도 부정하고, 장로의 개념도 다르며, 심지어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고 있다“고 했던 말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의 말이 “기독교내 목회자와 성도들로 하여금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인들을 향해 적개심 또는 심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선동처럼 들린다“는 것이요, 또한 “윗트니스 리는 최삼경 목사가 묘사하듯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다“고 하였다.

필자가 적개심을 선동한다는 말에 대하여는 교회론에서 대답을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진리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감정 운운하여 저들이 오히려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려는 데 거침돌이 될까 봐서 하는 말로 들릴 뿐이다. 어쨌든 이들에게 모순된 행동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세상 법정에 제소하고 또 그것을 방패막이로 윗트니스 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점이 모순된 행동이다.

이미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전에 “비판적인 몇 사람이 합당한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명예훼손 혐의로 법정까지 비화되었습니다. 어려운 장시간의 소송 결과, 하나의 사건은 그들이 공개적인 사과문을 신문에 게재하고, 출판된 책들을 전부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고, 또 다른 소송 사건은 그들의 책이 명예를 훼손하는 거짓된 내용과 의도가 있는 것으로 법적인 판결이 났습니다“라고 하여(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자신들의 세상 법정 사건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자신들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은근히 협박하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세 가지로 대답하겠다.
첫째, 세상 법정은 이단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 세상법정에서 이겼다면 그것은 명예훼손 부분이었을 것이다. 만일 세상 법정에서 이단문제에 대한 판결을 받으려고 했고 받았다면 처음부터 그 세상 법정을 의지하여 이단이 아님을 증명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둘째,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갈 길이 아니란 점이다. 만일 세상법정에서 이단성여부을 판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필자와 필자가 속한 교단도 세상 법정에 제소해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는 이단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수십 번 싸웠고 결국 다 승소했지만 그것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가린다고 말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이겼으니 너는 이단이라고 말한 일이 없다. 단지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은 세상 법정에서 이단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이단들이 가지는 행태라는 점이다.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일이고, 그것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으로 믿으며, 그리고 이단규정에 혹 명예훼손 부분이 있다고 여긴다면 필자와 본 교단을 제소해 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고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기다리고 있겠다.

셋째, 이것은 자신들이 온유한 사람인 것처럼 정통교인들에게 비쳐지기를 바라는 자세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저주한다는 말이 마치 칼이라도 들고 정통교인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는 것보다 더한 저주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가 만난 여호와의증인들이나 안식교인들 중에 포학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적 선이 아니다. 아리우스는 인간적으로 정직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이란 사실을 아는가? 그런데 세상 법정을 들어 협박하는 것도 온유한 행위에 속한단 말인가?
필자가 윗트니스 리에 대하여 냉혹한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소신과, 성경에서는 이단자와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요이 1:10~11).

(8) 천주교에 대한 자세가 모순된다
윗트니스 리는 천주교에 대한(개신교를 포함해서) 자세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어느 때는 이 날개로 날고, 어느 때는 저 날개로 난다. 길이가 다른 두 개의 날개로는 나를 수가 없을 것인데 말이다.

어느 때는 천주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가진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후론하겠지만 이 말도 거짓된 말이다: 필자주).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 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습니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이제 반대로 천주교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하는 내용을 들어 보자.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구약의 바벨론은 모형일 뿐이지만 신약의 큰 성 바벨론은 실제의 것이다.  … 오늘날 큰 음녀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큰 음녀의 딸들은 누구인가? 이것이 로마 가돌릭 같은 류가 아니라면 이 말이 누구에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물론 다른 변명이 있을 것이나 모순되다는 것이다.

2. 대답해야 할 다른 문제들
(1)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지면의 제한성을 너무 많이 말하였다.
논쟁이란 평형이 맞아야 한다. 지난 호(교회와신앙, 97년 9월호)에 윗트니스 리편에서는 그 전에(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필자가 썼던 원고의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원고를 보내 왔다. 필자는 200자 원고지 130매를 사용하였으나 윗트니스 리편에서는 무려 180매를 사용했다. 그러니 50매나 더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지에 지면을 허락하였다. 그것은 진리는 힘에 의하여 좌우되기보다는 진리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 동안 본지의 방침인 반론권을 보장한다는 취지를 흐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전호에서 ‘지면의 제한성‘을 여러 번 호소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어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지면의 한계성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저들이 지면이 부족하다고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은 본 논쟁의 원래 취지였던, 즉 자신들의 이단성을 변증하는 점을 망각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교리를 소개하여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고 또 필자를 공격하여 자신들의 이단사상을 은폐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로 보인다. 어쨌든 본호에서 필자도 180여 매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한 번밖에 남지 않은 논쟁이 하나님 앞에, 한국교회 앞에 그리고 독자들 앞에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기도하며 다섯 번째 논쟁에 임한다.

(2) ‘정통교회‘란 말을 정의하라는 것에 대하여
필자는 개신교, 기성교회, 정통교회란 말을 모두 사용했다. 그러자 필자가 정통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마음대로 하는 추측이지만) 그 뜻을 정의하라고 요구하였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왜 이런 추측과 요구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정통교회란 말 때문일 것이다. 정통교회란 가치가 부여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에 천주교는 천주교를, 개신교는 개신교를, 심지어 안식교는 안식교를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점에서는 지방교회(회복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놀라운 것은 회복교회에서 기성교회를 가리켜 정통교회라고 말하는 기록이 있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필자는 필자가 존경하는 초대교회의 교부 이레니우스의 정통에 대한 견해를 취하겠다. 정통이란 성경의 ‘전승‘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외적인 전승이 아니라 내적 전승, 말씀의 전승, 그리고 성령의 전승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개신교를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개신교회를 정통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3)‘이단‘이란 말을 정의하라는 점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단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단이다“, “아니다“고 하였다고 해도, 그리고 필자가 이단이 무엇인지 모를까봐 필자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물었다고 해도 필자는 대답을 하려고 한다. 그대신 필자도 요구한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다음에 ‘이단‘, ‘사이비‘, ‘신흥종교‘, 그리고 ‘유사종교‘란 말에 대하여 신학적(성경적) 정의를 내려 주기 바란다.

필자는 이단에 대한 역사적, 성경적(신학적), 그리고 현실적 정의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만 밝히겠다. 이단문제는 교리(교훈: 요이 1:9~10)가 그 본질이다.  즉 이단이란 어떤 교리(교훈)에서 발생했든지 직간접적으로, 결과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을 바꾸어 놓을 때 그것을 이단이라고 한다. 필자가 사용하는 이단이란 말의 개념이요, 그런 관점에서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4)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미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윗트니스 리가 이단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는 그들의 교리가 그렇다. 그들 스스로 지방교회(회복교회)를 정통교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이며 조직적이며 제도적인 기독교에 속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습니다“라고 선명히 밝힌 바 있다(교회와신앙, 1996년 8월호). 비판은 교회론에서 하겠다.

둘째는 자신들을 기독교 내부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정통교회를 기독교 내부라고 표현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5쪽). 자신들은 기독교 내부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임을 인정한 말이다.

셋째는 실제로 지방교회(회복교회) 교인들이 정통교회 교인들과 교제하지 않음을 필자가 지적했고 저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변증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정통교회의 교리를 기준으로 할 때 윗트니스 리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역시 효과적으로 정통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한 전략이요 꾀요 궤계일 뿐이다.

(5)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원론자이다
성도는 성경 중심으로 산다. 변하지 않는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온전한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늘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며 또한 모든 일에 성경의 비판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이다. 그리고 그 깨달은 진리를 가지고 신앙의 규범을 삼고 또 그것을 교리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과 교리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교리는 분명히 성경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교리에다 성경적인 가치를 부여해도 안 되지만, 반대로 교리와 성경을 이원화해도 안 된다. 만일 성경과 교리를 이원화한다면 그는 절대로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자로 바른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우리의 깨달음은 성경 자체는 아니다. 그리나 그 깨달음을 통하여 교리를 만들고 또한 그것을 우리의 신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장로교의 신앙의 원리도 하나의 교리요, 또한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신앙의 원리도 하나의 교리이다. 단지 서로 자기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필자는 교리에다 성경과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교리와 성경을 따로 나누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자가 믿는 교리는, 그것이 교리화되었든 교리화되지 않았든, 성경적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단 문제는 성경적인 문제라는 말과 교리적인 문제라는 말은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만일 교리적 믿음, 성경적 믿음을 따로 나눈다면 그는 이원론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서 절대로 바른 신앙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교리적 믿음과 성경적 믿음, 둘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신앙에는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리와 성경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교리도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인데도 성경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윗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하여는 교리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모순점과 그 이원성을 증명하고 비판해 보겠다.

윗트니스 리는 성경적인 것과 교리적인 것을 나누지 않고 성경적인 것만 취급한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삼위일체‘란 말이나 ‘이단‘이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말을 하려면 그것이 교리적인 의미인지 성경적인 의미인지 먼저 밝힌 후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사용할 때는 교리적인 의미요 자신들이 사용할 때는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이는 교만과 무지의 극치이다.

그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 점이 더 선명해 진다. 즉 윗트니스 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분명히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인격‘이란 말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최삼경 목사가 문제를 제기한 용어들인 ‘인격‘이니 ‘격위‘니 또는 ‘페르소나‘니 하는 말들은 성경 용어가 아니다. 그것들은 신학자들이 편의상 지어낸 말들이다. 그리고, 인격과 위격 또는 격위는 모두 한 단어(헬라어의 페르소나(Persona), 영어의 펄슨(Person)를 번역한 것이다. 양태론으로 오해되기 쉬운 단어도 최목사가 지적한 ‘위격‘이란 단어가 아닌, ‘프로소폰(얼굴)‘ 또는 ‘존재의 양식‘이란 단어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4쪽). 삼위일체 논쟁에서 말하겠지만 분명히 성경 용어가 아님을 알면서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원론적이란 말이다. 필자에게 성경적으로 말하라고 다그치기 잘하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떤 말로 변명을 하는지 다음호에서 들어 보겠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인격이란 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 없는 용어를 교리화하여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위일체(삼일 하나님) 교리이다. 칼빈도 처음에는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러나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은 없지만 삼위일체 사상이 있기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점은 윗트니스 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경에는 ‘삼일 하나님‘이란 말은 없다. 그런데도 윗트니스 리가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삼일 하나님이란 용어는 성경적이고 정통교회에서 사용하는 삼위일체는 교리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역사적인 교회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란 점에서 한 점의 의심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변형된 양태론이라고 본다.

필자에게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처럼 신학과 성경을, 교리와 성경을 구별하여 요구하고 증명하는 경우를 본 일이 있는가? 그러나 저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교리와 성경을 나누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큰 모순 중에 모순이다. 예를 들어 저들의 입장으로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적이라기보다 교리적인 것이라고 해야 맞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말도 ‘삼일하나님‘이란 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위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교리적인 논쟁을 성경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성경적인 논쟁을 교리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또는 교리적인 논쟁 따로 성경적인 논쟁 따로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필자는 성경 66권을 전적으로 믿는다. 필자가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와 장로교의 교리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교리는 성경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교리를 성경과 동일한 수준에 두지 않지만, 저들처럼 성경과 교리를 이원론적으로 나누지도 않는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자신들은 성경적이요 정통교회는 교리적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에게 장로교의 안경을 운운할 때에도 그러했다. 필자가 보기에 분명히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나 지방교회(회복교회) 교인들은 윗트니스 리가 주장한 가르침들은 하나의 사상이요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곧 성경이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의 교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공연히 그렇게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무언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신격화된 교주임에 틀림이 없다.

3. 교리적인 부분에 대하여
(1) 삼위일체 논쟁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삼위일체 문제에 있어서 주장했던 초점은 두 가지로서 필자가 삼신론자란 것이요 그리고 윗트니스 리는 양태론자가 아니란 것이다.

1)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한 점에 대하여
필자를 삼신론자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필자가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삼신론이란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 영들이란 용어를 분리의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삼신론이라는 것이다. 하나씩 변증하겠다.

① 필자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내재를 부인하지 않으며 본질의 단일성을 믿고 인격의 구별성을 믿는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최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예를 들어보자.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 속에서도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164~165쪽). 위 말은 무슨 뜻인가?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는 계시지만 지상에 계신 예수님 안에는 안 계시다는 말이다. 또는 인격이신 아버지는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본질로만 아들과 함께 한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아버지는 보내시는 분으로서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보내심 받은 아들만 아버지와 떨어져 땅으로 왔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이 최목사가 삼신론자임을 증명한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5쪽).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하겠다.
첫째, 필자의 말로 하나님의 상호내재를 부정한다고 말한 일이 한 번도 없는데 필자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몰아 세운 것이다. 이 점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로도 확인될 수 있다. 전호에서 저들이 이런 가정을 했다. “최목사는 성령님을 영접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7쪽). 이 말은 필자가 상호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한 말이다. 말일 필자가 상호내재를 부정한 일이 있고 그렇게 확신한다면 이런 가정은 가정으로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가정인 것처럼 저것도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저들은 필자의 신학적인 배경을 알고 있다. 필자의 교육적 배경이 삼위의 상호내재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피하기 위하여 만든 가정이다. 그 동안 필자는 얼마나 여러 번 ‘한 본질‘의 하나님을 말하였던가?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저들에게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본질의 하나님을 말하고도 삼신론자가 된 경우가 기독교 역사 속에 있었는가?

둘째, 위의 말에서도 필자가 삼위의 상호내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해 보자.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했다. 이 말이 삼신론을 의미한다면 필자는 삼신론자가 되겠다. 분명히 인격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이라고 제한하여 말하였다. 이 점에 대한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분명히 한 인격으로서의 내재요 결합이라면 이는 양태론이다. 그리고 그것을 삼신론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분명히 삼신론자가 되겠다.

셋째, 문제는 단순해졌다. ‘인격‘이란 말로 하나님을 정의할 때 ‘세 인격‘이란 말도 가능하고 ‘한 인격‘이란 말도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삼위일체를 정의하면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요 그렇게 하면 그것이 양태론이란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삼위의 상호내재성을 한 인격으로써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논쟁의 초점이 좁혀졌다. 후론하겠다.
지금까지 기독교 내에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단이 된 사람이 있었는가? 기독교 외부에 다신교의 측면에서 삼신론 사상이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없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다음에 꼭 기독교 2천년 속에서 기독교 내부로부터 삼신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된 사람 중에 필자와 유사한 사람이 있었는지 밝혀 주기 바란다. 그런 하나님으로는 아예 믿을 수도 없다.

필자가 자신들을 양태론자라고 말하자 삼위일체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때로는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로 그리고 삼신론자로 비난을 받았던 교회의 역사가 있었다고 말하였다(97년 7월호 159쪽). 먼저 필자가 몰라서 묻는다. 언제 누구를 통해 어거스틴이 양태론자로 그리고 삼신론자로 공격을 받았는지 역사적 자료를 다음호에 밝혀 주기 바란다. 자신들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복잡성을 몰라서 한 말이고,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그 복잡성을 다 알고 했다는 말인가 의심스럽다.

② 둘째로 필자는 세 인격의 하나님도, 본질적으로 연합의 하나님도 부정하지 않지만 분명히 ‘세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으며 ‘한 인격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삼신론을 의미한다면 필자는 삼신론자가 되겠다.

삼위일체에는 분명히 3의 의미와 1의 의미가 있다. 3은 분리의 의미요 1은 연합의 의미이다. 그래서 신학의 흐름에 따라서 3을 강조하는 곳도 있고 1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즉 동방신학은 3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서방신학은 1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몰트만 같은 사람은 3을 강조하다 보니 삼신론적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삼위일체 신학(신앙)을 보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로 3도 되고 1도 된다면 필자는 삼위일체 교리는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교리는 불가지론적인 교리이기 때문이고, 역사적 교회는 그런 불가지론적인 교리로 이단을 가장 많이 규정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윗트니스 리는 삼위 하나님을 ‘한 영‘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분명히 ‘한 인격‘으로서의 ‘한 영‘이라고 하면 양태론이요 단지 ‘한 영‘이란 말을 본질에 대한 말로 했으면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는 ‘한 영‘이란 말을 본질의 의미가 아니라 인격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충분히 증명했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157쪽). 그런데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의 말은 듣지 않은 것처럼 귀를 막고 위선을 부리고 있다. 다음 항에서 더 변증하겠다.

2)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증한 점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전호에 한 변증에 의해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양태론임이 더 선명해졌다고 본다. 분명히 윗트니스 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말하였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를 옳다고 변증했기 때문이다. 이를 선명히 하기 위하여 또 다시 직접 인용해 보자. 윗트니스 리의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윗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 52쪽). 그리고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이다. “그러나 ‘영‘이라는 단어는 상황이 다르다.

‘영‘은 성경 용어이며 그 사용법에 엄격한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이 만든 용어인 ‘세 위격(또는 인격)‘도 분리의 의미로 쓰면 삼신론이 된다. 즉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세 하나님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4쪽).

위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한 영‘은 ‘한 인격‘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세 위격(또는 인격)도 분리의 의미로 쓰면 삼신론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다시 말한다. 필자는 한 본질의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님도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며, 성령님도 한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만일 삼위 하나님이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첫째, 각각 하나님은 온전한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1/3쪽의 하나님이란 말이 된다. 하나님의 인격이 셋도 되고 하나도 된다면 하나님은 손오공처럼 열 명도 되고 천 명도 되는 마술을 부리는 분이란 말이 된다. 그러나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 한 분이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각각 1/3쪽의 하나님 셋이 모여서 온전하신 하나님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 하나님도, 성령님 하나님도 각각 온전하신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세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왜냐? 인격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삼경이라는 사람의 인격은 하나이다. 그런데 목사 최삼경이와 교수 최삼경이가 싸움을 하거나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가 한 인격의 하나님을 말한다면 기독교는 무질서한 종교가 된다. 사도신경으로 예를 들어 보자. 이렇게 시작된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이다.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해도 무관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예수님을 믿사오며 …“ 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성령님을 믿사오며 …“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한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양태론자이다. 그리고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성령님 하나님께서 동정녀에게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해도 된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을 단일 인격으로 보는 양태론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창조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고 사도신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 예수님도 성령님 하나님도 거기에 참여하셨다고 본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본질적인 속성에 있어서 하나요 그리고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은 예수님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 하나님이 참여하셨다. 왜냐?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은 성령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속에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 예수님도 계신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삼위 하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기도로 예를 들어보자.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기도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게 된다. “성령님 하나님! …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예수님 하나님! … 성령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그래도 아무런 잘못이 없게 된다. 저들의 말처럼 삼위 하나님이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말이다. 윗트니스 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은 바로 양태론적 삼위일체관과 신인합일주의 사상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셋째, 역사적으로 ‘인격'(페르소나: persona)이란 말을 본질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일이 없다.
삼위일체에 대하여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과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외에는 없다. 그런데 ‘인격‘이란 말은 동방교회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서방교회에서 사용한 말이다. 윗트니스 리도 이 말을 사용했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를 나타낼 때는 ‘우시아‘란 말을 사용하였고, 셋을 나타낼 때는 ‘휘포스타시스‘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서방교회에서는 하나를 나타낼 때는 ‘서브스탄티아‘를 사용했고, 셋을 나타낼 때는 ‘인격‘(페르소나: persona)이란 말을 사용했음을 이미 밝혔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156~157쪽).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좁혀졌다. ‘인격‘이란 말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한 영‘이란 말에 대하여 3의 구별성을 의미하지 않고 1의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함으로 피해갈 수도 있다. 사실 윗트니스 리는 ‘한 영‘이란 말을 분명히 ‘한 인격‘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증명했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음이 앞의 논쟁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은 본질의 단일성을 말할 때는 사용할 수 없다. 오직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진 자외에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인격‘이란 말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란 점과 이종성 교수의 ‘인격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의 뜻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말을 빌어서 적당히 도망가려 하였다. 변증하겠다.

먼저, 그렇다면 인격이란 비성경적인 용어를 왜 사용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어디에서 인격이란 말을 가져다 사용했는가? 가능성은 세 가지이다. 성경에서 가져다 사용했든지, 아니면 신학적인 용어로 사용했든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서 사용했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해도 다 틀렸다. 먼저는 성경을 강조하고 성경적으로 하자고 말하는 사람으로 성경에 없는 말을 가지고 그렇게 중요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면 윗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요 그리고 모순된 행위요 그리고 이원론적이란 말이다. 만일 신학적인 용어로 인격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분명히 양태론자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사용했다면 그것부터가 지방교회(회복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요, 그리고 그 의미를 정의했어야 할 것인데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모두 엉터리이다. 윗트니스 리의 책에 ‘인격‘이란 말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말한 것처럼 ‘인격‘이란 말을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한다면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필자는 이종성 교수의 말에 대하여는 변증하지 않겠다. 그러나 필자의 정의는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맞는 정의라고 본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 점에 대하여 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격‘이란 말을 모르고 쓰고 있기 때문이든지 또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면 양태론적인 입장이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 학자인 이종성 교수의 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자란 증거요, 그러기에 필자를 삼신론자로 볼 수밖에 없는 증거이다.

여기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기막힌 모순을 하나 더 증명해 보자. 필자는 ‘영성‘이란 말과 ‘영‘이란 말이 같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영‘이란 말을 ‘인격‘이란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그러기에 ‘영‘을 ‘성령‘으로 이해해서도 안 됨을 충분히 밝혔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인간관을 말하면서 죄도 인격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인용해 보자.

“죄(Sin)는 육체 안에 거하고(롬 7:20), 왕노릇하고(6:12), 주관하고(6:14), 살아나고(7:9), 기회를 얻어 속이고 죽인다(7:11). 이러한 것은 다 ‘죄‘의 인격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4쪽). 위의 말과 삼위일체를 연결해 보자면 이런 우스운 논리가 생긴다. 즉 죄에게 ‘인격성‘이 있다는 말과 죄가 ‘인격‘이란 말이 같은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지옥에 갈 존재는 사탄이 아니라 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죄도 인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과 ‘영성‘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영성‘이란 말과 ‘인격성‘에 대한 이해이다.

Ⅱ. 교회론에 나타난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
1. 교회론에 대한 변증 중에서

(1) 교회의 조직(교파)과 교회 성도들을 구분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 동안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자신들의 교회관에 대하여 정통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했던 말들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미 지방교회는 역사적이며 조직적이며 제도적인 기독교에 속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34~135쪽). 다음으로는 “지방교회측은 기독교 안에 있는 참된 믿는 이들에 대해 그 분들이 어느 교파에 소속해 있든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하며 사랑한다“고 했다(97년 3월호 136쪽).

그러면서도 “다만 성경의 진리를 말해야 할 경우(특히 성경을 해석할 때), 윗트니스 리는 기독교 안의 믿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항상 ‘기독교의 비성경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지하기 바란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36쪽). 그리고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37쪽)고 하여 기독교를 포함하여 바벨론 음녀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런면서 “윗트니스 리는 ‘교회조직(교파)‘과 ‘교회 성도들(Person)‘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후자는 성경에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6쪽).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첫째,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정통교회에서 볼 때 교회론에서도 이단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통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다음호에 ‘거룩한 공회‘에 대해 말이 많을 것으로 추측한다). 역사적인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더욱 정통교회에서 윗트니스 리가 이단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스스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요, 역사적인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들이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 아니기를 원할 수 있는가?

둘째, 조직과 교파와 체계가 바벨론이요 음녀라면 그 조직과 교파와 체계가 정죄받으면 될 것이다. 조직과 교파는 사람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직과 체계는 단지 사람이 만든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는 확신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조직과 체계 자체도 성경적인 것으로 믿는 것이 정통교회이다.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조직과 체계는 그렇지 않은가? 윗트니스 리가 가르친 조직과 체계는 조직과 체계가 아니라는 모순된 소리를 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귀신같은 소리를 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은 성경 자체라는 교주같은 소리를 하겠는가?

셋째, 이는 말장난이요 ‘네모난 삼각형‘ 같은 소리다. 이는 한편으로는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란 정죄를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통교회를 음녀 바벨론으로 보게 하고, 나아가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자는 잔꾀에서 나온 말로 들린다. 사람이 없는 조직이란 필요도 없는 것이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산주의를 비판할 때 그 공산주의적 사상을 따르는 사람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비록 공산주의 정권 아래 있어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방교회(회복교회)를 다니면서도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몰랐건 반신반의했건 핵심적인 부분에서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필자는 보았다. 그는 비록 외적으로 형식적으로 회복교인이지만 내적으로 회복교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정죄할 때의 의미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유치하지만 그 말을 역으로 하자면 이렇다. 필자는 비록 윗트니스 리를 이단의 괴수라고 보고 있지만 또한 그의 사상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을 같은 의미로 정죄하지만 그러나 회복교회 안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있다. 이는 필자가 이단으로 생각하고 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도 동일하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가 교파안의 성도들을 저주하고 욕했다고 말했다. 이 어떠한 거짓말인가!“(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6~167쪽)라고 말했다. 필자가 윗트니스 리가 교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저주하지 않았는데 거짓말로 했다는 말이다. 그 사실 여부는 다음 항에서 거론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윗트니스 리가 교파와 성도들을 구별해서 욕했느니 욕하지 않았느니 말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필자도 역으로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필자가 윗트니스 리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였지만 이런 말이 가능하다. “언제 필자가 회복교회 교인들을 이단이라고 저주한 일이 있는가?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에 있는가!“ 필자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하고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할 때에는 그의 사상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입을 가지고 이런 괴변을 결코 말할 수 없다고 본다.

(2) 개신교인들이 서로 오고가며 예배를 드리고 교역자가 서로 사역지를 옮길 수 있다면 구태여 교파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말(97년 9월호, 153쪽)에 대하여
위의 말은, 필자가 지방교회 교인들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받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실제로 개신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현실 자체가 그들이 정통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지적한 말에 대한 변호이다. 동문서답식 말이지만 조금 생각해 보자.

우선 필자가 말한 ‘정통교회와 회복교회 사이에 서로 넘을 수 없는 담이 있다‘는 말에 대한 간접적인 시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왜 이렇게 회복교회 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솔직히 “회복교회 교인들은 정통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정통교회를 부정한다“고 말한다면 정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는 성경적으로 모든 교회와 교인들은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로 일치할 때에만 하나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하나만 성경적이요 다른 것은 다 음녀요 바벨론이라고 보는가? 그렇게 본다면 역시 이단의 교주 같은 안목일 것이다. 필자는 장로교의 제도와 사상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에 장로교 교인이지만, 그러나 감리교나 침례교의 사상과 제도는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 같은 형제라고 본다는 말이다. 같은 장로교라도 그 안에서 교단마다 또는 심지어 사람마다 사상이 다를 수 있다. 필자의 친한 친구라도 필자와 다른 사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한계 안에서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한 나라에 도(道)가 나누어져 있다고 국경이 나누어진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정통교회와 지방교회(회복교회)에는 부자와 나사로가 오고 갈 수 없는 것 같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심지어 필자가 예장 합동측에서 공부를 하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재 예장 통합측에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을 “합동측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눈에 좋고 바람직한 일로 보일지, 아니면 이익을 따라 옮겨 다니는 기회주의자로 비칠지는 속단할 수 없는 일 아닌가?“(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53쪽)라고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인격이 의심스럽다. 전혀 관계가 없는 합동측 사람들의 생각을 추측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비인격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같은 형태로 말을 함을 독자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런 말을 하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를 회복 교인들이 논리도 구별을 못하는 저질스런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볼지, 안 볼지 속단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어쨌든, 바로 필자가 합동측에서 통합측으로 와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통교회와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차이란 점을 잊지 않기 바란다.

(3)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가 정통교회 교인들의 적개심을 선동한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그것의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미련에 속한다. 먼저, 필자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보는 주관적인 진실을 알고 있다면 이런 말은 무익한 말이 아닌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 같으면 내 자식이 해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감정선동은 하지 않고 먹지 못하도록 하겠는가? 그렇게도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을 그토록 신랄하게 저주하신 점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4) ‘교회 문제가 90% 목사의 책임‘이란 말을 인용하는 점에 대하여
먼저, 위의 말은 정통교회 목사가 정통교회 목사의 자성과 회개를 촉구하며 한 말이다. 이단들에게 정통교회 교회가 이렇게 잘못됐으니 정통교회가 잘못됐고 이단들이 맞다는 뜻에서 한 말이 결코 아니다.

다음으로, 역시 지방교회(회복교회) 교인들이 정통교회와 한 형제가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만일 한 형제였다면 그것을 가지고 정통교회를 비난하는 말로 인용하지 않고 오히려 아파하고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잘못됐다고 내가 옳은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단들은 정통교회의 약점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인용한다. 그래서 이단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부정적인 도구라고 본다. 필자는 정통교회 안에 많은 잘못이 있음을 알고 있고 아파하고 회개하고 있지만 그 문제로 이단에게 송사를 받아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부모라도 내가 내 자식의 잘못을 지적하고 또 채찍을 가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고 채찍질 당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채찍질하시지만 또한 그 하나님께서 싸매어 주심과 같다.

(5) “오 주 예수여!“를 주문처럼 외우지 않는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고전 1:2; 딤후 2:22) 지방교인들처럼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정통교회 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지만 “오 주 예수여!“라고 회복교회 교인들처럼 부르지는 않는다. 저들은 또한 “오 주 예수여!“를 외움으로(부름으로) 주 예수님의 부요함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5쪽).

그러나 정통교회 교인들 중에 회복교회 교인들처럼 “오 주 예수여!“를 외우지 않아도 풍성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더 많음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필자가 주문처럼 외운다는 말이 기분을 상하게 해서 이런 변증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떤 주문은 그냥 마음의 진실과 관계 없이 형식적으로 외워도 된다는 그런 주문도 있는가? 정통교회 교인들이 보기에 주문처럼 외운다 그 말이다.

2. 윗트니스 리가 주장하는 교회론의 실상은 무엇인가?
이미 윗트니스 리의 교회관과 정통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입장은, 윗트니스 리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정통교회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은폐한 부분을 제하고, 그 사상이 충분히 나타났다고 본다. 하나씩 변증할 가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사실 자체를 나타냄으로 우선 충분하다고 본다. 예컨대, 목사제도에 대한 저들의 입장이 너무나 형편없는 것도 이에 속한다. 지면 관계상 사상을 소개만 하고 필요하다면 다음호에 비판을 하도록 하겠다.

(1) 윗트니스 리에게 있어 교회의 직분이 다르며 목사를 부정하며 장로의 개념이 다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목사라는 제도보다 계급적인 목사를 부정한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7년 9월호 167쪽). 정통교회에서 목사제도를 계급적인 의미로 말하는 목사론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목사제도 자체를 말하는가? 아니면 그 실제를 말하는가?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도제도를 만드실 때 가룟유다같이 되라고 만드신 제도가 아닌데도 가룟유다가 생긴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룟유다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회복교회 제도가 회복교회 지도자 중에 그런 사람이 절대로 생기지 않도록 그것을 보장해 준다면 우리 모두 정통교회 제도를 버리고 회복교회 제도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인간 자체의 약점으로 안다. 다음호에 목사제도를 계급적으로 만들었다는 목사론을 꼭 좀 소개해 주기 바란다. 이단자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자신이 우습지만, 필자는 섬기는 목사로 살려고 늘 자신과 싸우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미 이들이 정통교회의 목사제도와 장로개념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 확인은 충분히 됐기 때문에 내용을 조금 소개하겠다. 저들은 목사제도 자체를 다스리는 제도로 보고 있다.

“성경 안에 교회를 다스리는 목사가 있는가? 교회 전체의 책임을 지고 성도들을 키우며 목양하는 사역자가 있는가? 없다. … 성경에 있는 교회 안에는 오늘날의 목사나 변질된 목사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1988, 240쪽), “장로는 지방에 있는 형제이므로 다른 곳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다른 곳에서 사람을 그 곳에 파견하는 모든 방법은 다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위의 책, 242쪽),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 사역자의 위치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형제이다“(위의 책, 255쪽).

(2) 윗트니스 리는 기성교회 예배를 부정한다
여기에서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이현웅 목사가 정통교회의 예배의 갱신에 대하여 쓴 글을 인용한 일이 있다(교회와신앙, 97년 9월 169쪽). 앞에서 ‘교회 문제가 90% 목사의 책임이란‘ 말을 인용했던 점에 대하여 변증한 내용을 여기에서도 그 대답으로 취하고, 지방교회측이 정통교회의 예배를 부정하는 글을 인용하겠다.

“이런 집회(정통교회의 집회를 말함: 필자주)는 한 사람이 말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집회이다. 이런 종류의 집회는 지방 교회의 범위 안에 없다. … 성경은 교회자체가 일방적이고 능동적인 이런 집회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렇게 예배하는 식의 집회가 이미 교회 집회가 되어 버렸고 또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집회가 되어 버렸다. 거의 모든 교회가 이런 집회 위에 세워져 있고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곧 무너질 것 같다. … 그러나 성경대로 본다면 이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죽어 있는 상태이다. 그는 일년 52 주일마다 예배당에 가서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 교회에 온 적이 없는 것이다“(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1988, 251쪽),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는 무엇이고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는 무엇인가? 원탁형의 집회는 다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이고 강단이 있는 집회는 다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한 지방 교회 안에서 첫 번째로 폐지되어야 할 것은 강단의 이런 집회이다. … 강단의 집회가 폐지되지 않는 한 지방의 집회는 있을 수 없고 지방 교회 또한 자랄 수 없게 된다. 강단의 집회는 사도가 있을 때만 가질 수 있고 사도가 없을 때에는 가질 수 없다. 사도가 메시지를 전하고 떠난 후 그런 집회는 즉시 끝나야 한다“(위의 책, 257~258쪽).

지면상 평가는 하지 않아도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넘어가겠다.

(3) 윗트니스 리는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한다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는 이 점에 있어서는 다 문제가 없다. … 그러나 누구든지 믿기만 하고 침례받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지 않은 것임을 기억하라“(워치만 니, 그리스도인50 필수과정I, 1989, 11쪽),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이것이 정통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위의 책, 14쪽), “하나님의 구원의 각 방면 중 어떤 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얻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침례받음으로 참여할 수 있다. 믿고 침례받아야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윗트니스 리, 진리공과-제1단계 제3권, 1987, 88쪽).

옳고 그름을 비판할 지면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통교회의 세례(침례)관과 다르다는 것이요 결국 구원관도 다르다는 말이다.

(4) 지방교회측은 한 지방에 1개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모순된 소리를 한다
“지방은 군과 같이 크지 않고 구와도 같이 크지도 않으며 한 나라와 같이 크지도 않고 사람들이 한 군데 모여 살고 있는 하나의 행정 단위만큼 큰 것이다. 이런 지방이 성경 안에 있는 교회의 경계이다“(워치만 니, 사역의 재고, 1988, 98쪽), “지방보다 더 작은 것도 지방 교회가 아니고, 지방보다 더 큰 것도 지방 교회가 아니다“(위의 책, 99쪽), “지방 교회의 행동은 반드시 모든 교회들에게 유익이 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지방 교회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므로 지방 교회의 결정은 유일한 결정이다. 지방 교회의 결정은 최고의 결정이고 최종적인 결정이다.

지방 교회 위에 다른 기관이 없고 그 아래에도 다른 기관이 없다. … 또한 다른 교회들보다 더 높은 조직과 권위를 가진 교회는 하나도 없다. 성경은 다른 교회들보다 더 높은 권위가 있는 어떤 지방 교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기독교가 이 땅 위에 있는 최고의 조직과 기관으로서 이 땅에서 이보다 더 낮거나 더 높은 조직이나 기관은 없다“(위의 책, 109~111쪽).
역시 평가할 지면이 없다. 단지 노회나 총회제도를 부정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5) 정통교회를 바벨론이라고 한 내용들
제도가 어떠니 성도가 어떠니 하지만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 가톨릭교는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어떤 것에게로 갔다. 같은 원리로 타락한 개신교 교회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 분이 아닌 다른 것에게로 갔다“(윗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하여, 1990, 12~13쪽),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게 가련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와 그 밖에 이교와 연루된 모든 단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벨론인들이다.

음녀들의 어미의 천주교 교회는 큰 음녀요, 그 밖에 모든 바벨론 단체들은 그 딸들이다.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 곳에 없다. 그 분이 우상 숭배와 이교주의로 가득찬 곳에 거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1991, 94~95쪽),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분열과 혼돈으로 가득 차있을 뿐 아니라 우상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기독교는 전통으로 충만하다, 전통은 허위요 허위는 공허하다. 허위는 또한 일종의 우상 숭배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뭔가 헛된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오늘날의 기독교에 적용해 본다면, 기독교의 상황이 정확히 바벨론과 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음녀로부터 나와서 예루살렘 곧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위의 책, 103쪽).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동일하다. … 왜냐하면 오늘날 죽어 있음 때문이다. 죽은 가르침들, 죽은 집회, 죽은 교회들, 죽은 지식, 죽은 메시지들, 죽은 책들, 심지어 죽은 성경! … 오늘날 기독교는 죽어 있다! 그것은 죽은 종교이다. … 우리 모두에게는 돌이킴이 필요하고 돌이켜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독교로부터 분별될 필요가 있다“(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 10~11쪽).

앞에서 윗트니스 리편의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얼마나 거짓된 말인가를 증명하는 말들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너무나 많으나 생략하겠다. 단지 분명한 것은 윗트니스 리측은 정통교회가 아니라는 점이요, 또한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는 바벨론 음녀요 죽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짧은 말로 본호의 결론을 삼겠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에게 ‘필자나 필자가 속한 교단의 윗트니스 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음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자주 말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회개하고 사과할 자는 필자가 아니라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이다. 필자의 연구나 교단의 연구는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조금도 균형을 잃지 않은 연구로서 필자의 연구나 교단의 연구가 부족한 것처럼 말한 인신공격적인 말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회개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월간<교회와신앙> 1997년 11월호)



 

 

 

 

 

 

 

 

 

 


낙엽의 소원/최송연   

사르르 사르르
가을 떠나간 자리에 
첫눈이 내려 쌓이고 
 
푸르던 기상
청청함이 사라져가는 길목 
낙엽이 되어도 견디고는 싶은데
 
매서운 칼바람 
밤낮으로 흔들며 할켜대니
한 겨울 견디기가 버겁습니다
성탄의 주여, 오소서 서럽디서러운 기운마저 땅에 떨어져 묻히기 전에...

 

 


단어해석 도우미^^ 칼바람 =시련/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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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다락방 류광수 목사 순서자로 초호화 행사 '논란'

2013/12/17 ㆍ추천: 0  ㆍ조회: 63      

한기총이 연말 의례적으로 개최하는 행사가 여당 국회의원들을 대거 초청하고, 이단 논란이 있는 인물까지 행사 순서에 넣는 등 치우쳐 논란이 일고 있다. 수천만 원에 달하는 호화판 행사도 적절치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합동 등 몇몇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다락방 류광수 목사가 이날 행사에서 해외문화교류재단 이사장 직책으로 다문화가정자녀 장학금 시상을 했다.ⓒ뉴스미션

이단 논란 인사 참여, 호화판 행사 ‘물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이하 한기총)가 연말 행사로 갖는 ‘대한민국 기독교의 밤’이 12일 오후 6시 여의도 63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다락방’ 류광수 목사가 순서를 맡아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다락방전도총회 전 총회장인 정은주 목사도 준비위원장을 맡아, 행사 전반을 주관했다.

이날 류 목사는 한기총 회원단체인 해외문화교류재단 이사장 직책으로 다문화가정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는데,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류광수 목사를 이단 규정에서 해제한 후 처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인지 다락방을 이단에서 해제하지 않은 예장합동 교단의 안명환 총회장은 축사 순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교계 관계자에 따르면, 당초 격려사를 할 예정이던 길자연 목사(합동)도 불참을 통보해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장합동은 다락방 이단 문제로 지난 9월 한기총에 대해 ‘행정보류’를 결의한 상태다.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단체는 바로 한기총”?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은 한 해 동안 한기총을 이끌어 온 홍재철 대표회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한기총이 기독교 정체성을 지키고 나라와 민족을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기관이라고 칭송했다.

한기총 증경회장 이용규 목사는 축사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판을 치는데 이에 맞서 기독교 정체성을 지킨 것은 한기총 밖에 없다. 기독교를 복음주의로 이끌어 갈 단체는 한기총 밖에 없다. 한기총은 이 사회를 진실로 구원할 유일한 단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날 행사에는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석해 보수 기독교계 정치 모임을 방불케 했다. 순서지에 없던 황우여 대표최고의원, 이해훈 최고의원, 김기현 정책위원장, 손인춘 광명을 당협위원장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황우여 의원은 “홍재철 대표회장이 이끌어 온 한기총이 어려운 현실과 수많은 문제를 이기고 교회를 이끌어준 것 감사하다”며 “한국이 하나님의 공의와 평강이 강 같이 넘쳐흐르도록 기도하자”고 축사했다.

한기총의 한 해 사역을 돌아보는 영상 말미에는 2007년 박근혜 대통령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피아노로 반주하고 목회자들이 찬송을 따라 부르는 장면이 상영되기도 했다.

한편 연중 행사로 열리는 한기총의 ‘대한민국 기독교의 밤’은 올해도 어김없이 여의도 63시티 대형홀에서 호화롭게 치러졌다.

테이블에 앉은 참석자만 640여 명, 식사로 제공한 코스 메뉴와 선물만 계산해도 수천만 원에 달해 교계 연합 행사로 적절하지 않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바로 일주일 전 실행위원회에서 ‘필리핀 재해구호금 모금을 하고 있는데, 현재 모인 돈이 없다’며 회원 교단들의 후원까지 독려한 바 있어 호화판 행사의 명분이 더 무색해졌다.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 내이전정(內耳前庭) 이란? 

일명:이석증(耳石症)

 

최근 어떤 모임에서 식사를 하고
일어서다가 아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다친데가 없어 다행이었지 넘어져 골반이 부서지는 노인들이 허다하다.
 그런 노인들 4분의 1은 6개월 이내에 죽게 되는 것이 상례라고 한다.
그러니 노인들에겐 넘어지는 게 무척 위험한 일이다.
왜 노인들은 잘 넘어지나?
여태까지는 노인들이 잘 넘어지는 이유는 다리가 약해지거나 정신이 흐려지거나 시력이 감퇴되거나 걸음걸이가 둔해지기 때문이라고 의사들이 믿었다. 하지만 지난 5월호 내과의학 학지에 발표된 연구결과를 보면


노인들이 잘 넘어지는 이유는

(內耳前庭) 기능장애 때문이라고 한다.
내이전정은 귀 안쪽에 있는 기관으로
균형을 감지하는 기관이다,
균형감지에 이상이 생기니 잘 넘어질 수밖에 없다,

 

 40세 이상 미국인 35%와 60세 이상 노인들 50%가 내이전정 기능장애자라고 한다. 이 연구는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 의대 이비인후과 교수 유리 아그라월 의사가 주도했다,
이 연구팀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실시한 '국가보건 및 영양시험 설문조사'에 참가한 5086명의 성인에서 얻은 데이터를 분석했다.
내이전정 기능장애자는 어지러움을
느끼기 때문에잘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아그 璨 의사가 설명했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장애자는 넘어질 찬스가 12배나더 높고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는 장애자도 넘어질 위험도가 3배 정도 더 심했다.
내이전정 기능장애자는 귀가 멀어질 위험도도 높았다.
내이전정의 위치가 청각기관에 가깝고 혈관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이전정은 머리의 회전 운동 방향에 관한
감각정보를 뇌에 보낸다.
사람은내이전정에

오는 신호와 더불어 시각과 촉각을 이용해 균형을 유지한다.그런데 내이전정에 이상이 생기면균형을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아직 내이전정 기능장애의 원인은 확실히 모르지만 노화가 주원인이고 흡연,

고혈압증 당뇨병 탓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얘기한다. 검진은 용이하다. 패드를 깐 표면에 아무것도 잡지않고 서서 눈을 감으면 어지러워 넘어지는 사람은 내이전정 기능장애자다.

매년 한 번씩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진단을 받아보는게 안전하다.

미국의 질병관리 및 예방센터의 통계에 의하면 매년 미국에선 넘어져 죽게 되는 사람이 1만 5000명이 넘고, 넘어져 다치는노인이 300만이 넘는다. 

다치는 사람은 곧 남에게 의존해 살게 되니</ FONT> 개인의 자유를 잃는다.

 

그래서 치료비도 급증한다.

넘어져 다친 환자들 치료비가 연 200억불이 넘는다.
잘 넘어지지 않도록 하자면 균형 운동이 필요하다.
처음엔 뭣이든 한손으로 잡고 단단 마루위에서
한발로 서는 연습을 하고 나중엔 아무 것도 잡지 않고 한발로 서는 연습을 한다.

그 다음엔 눈을 감고 연습을 반복한다.
나중엔 물렁한 카펫이나 방석이 깔린 곳에 서서
연습하는게 좋다. 자리에서 일어설 땐 서서히 일어서고, 뭣이든 한 손으로 잡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양손에 물건을 들고 걷지 말고

넘어져도 한손으로 땅을 짚으면 골반에 충격을 덜어준다.
위 글 꼭 잊지 마시고 잘 지켜서 항상 건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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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비 기독교적



* 본 내용은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105~112p를 요약 정리한 것임.


- 학자의 혀



‘래리 킹 라이브’에 나온 조엘 오스틴


오스틴은 래리 킹(Larry King)과 가진 인터뷰(2008년 6월 20일, CNN)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래리 킹(Larry King)은 유대인, 무슬림 그리고 다른 불신자들에 대해 이어 물었다. “이 사람들은 잘못된 거지요, 안그래요?” 오스틴은 대답했다. “글쎄요, 그 사람들이 틀렸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있다고 믿는데, 나는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그렇게 믿고 있어요.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는 것만은 알지요. 정말 모르겠어요. 저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진실한지 보았거든요. 그래서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 경우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과 관계를 갖기 원합니다.

 

래리 킹 그리고 한 전화 질문자는 오스틴에게 그 질문에 답할 몇 번의 기회를 줬지만 거듭 마음이라는 단어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니다.”

 

오스틴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은 거룩함과 공평이라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순수함에 달려 있을 것이 분명해졌다. 이 입장에도 분명 진실이 있기는 하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 마음의 비밀을 여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오스틴이 우리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을 복음인 양 여기는 바로 그곳에서 성경은 마음에 대해 최악의 보도를 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게다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9)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정의로 열리는 재판에서 우리의 마음이나 인생의 기록을 면밀히 살핌으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착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허를 찌른 안셀름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있다.” 오스틴의 시각은 자력 구원이라는 펠라기우스 이단을 정서적으로 버무려 놓은 것에 푹 빠진 미국인들에게 잘 먹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래리 킹이 “죄인이라는 말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고 오스틴은 대답했다. “그런 말은 쓰지 않아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날 때 당신도 바뀔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놀라운 점은 오스틴이 죄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사소하게 보는 오스틴의 첫 움직임은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는 하나님에 대한 도발에서 우리를 건강, 부 그리고 행복에서 지금 멀어지게 하는 자아에 대한 도발로 시야를 옮기는 것에서부터 감지된다. 오스틴의 목표는 사람들이 그가 제시한 실천적인 원칙을 따라 지금 여기서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후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느냐 안 되느냐는 당신에게 달렸다. 특정한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당신의 것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죄를 이렇게 사소하게 만드는 두 번째 움직임은 죄를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도록 무기력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아니라 훈계로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행동들(부정적인 행위들)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오스틴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 사실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고 전제한다.


오스틴의 견해로는 죄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그가 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실수 혹은 실패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어떤 태도들과 행동들을 죄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도발이다. 이 수직적 차원(하나님께 대한 인식) 없이는 심지어 죄악 된 행동이라 해도 그 도덕적 맥락을 상실하고 만다. 아니, 죄는 역기능 이라는 심리요법적인 언어로 전환되고 만다.(조엘 오스틴이 말하는대로 매일 좋은 주차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막는 불건전한 행위 같은...)

심지어 죄를 하나님보다 동료 인간에 대한 잘못이라고 본 사회복음도, 죄를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사랑과 봉사를 베풀지 않은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오스틴과 같은 설교자들의 메시지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죄는 “나 자신의 기대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잘못”이 되었다. 이것은 자아도취 현상이다.



두 번째, 오스틴은 자신이 위에서 밝혔듯이 죄 혹은 죄인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분명히 ‘실수’와 비슷한 단어들이다. 그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롬3:23)”은 없다. 그에게는 단지 지금 최고의 삶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죄다.


“기독교인의 삶으로 사람들을 이끌기란 어렵습니까?”라고 래리 킹이 물었을 때 “그렇게 힘들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재미있는 일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깃드니까요…… 어떤 규칙 같은 것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 인생을 사는 것이죠.” 라고 오스틴은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앞뒤로 크게 오가는 추를 본다. 오스틴은 청소년 시절 재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율법주의에 움츠려 있다가 반율법주의(율법은 없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러한 도발을 식별해 낼만한 하나님의 규례조차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의가’ 아니라 ‘재미’가 기준이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이 아니라 자아 앞에서 행복한 삶이다.


오스틴에게서 발견되는 구도에서 그리스도가 필요한지조차 확실하지 않다!(최소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순종하는 삶, 속죄하는 죽음 그리고 의롭다함과 생명을 주는 부활 등과 같은 핵심적인 것 말이다.)



오스틴은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은 “한 세대 전의 때에나 맞는 일”이라고 말했다.

오스틴은 말하기를 “저는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사람들을 격려해 줍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삶을 사람들이 경험하도록 돕는 코치, 동기부여 교관이라고 여깁니다.” 라고 한다. 언뜻 들으면 상당히 겸손하게 들린다. 그러나 “저는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선 범법자로서 우리 모두를 얽어매고 있는 심판’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우위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 말이다.


대사(大使)들이 자신의 정책을 펼치는 것은 한마디로 오만이다. 특히 자기를 보낸 이의 말을 역행할 때는 더욱 그렇다. 오스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튼 유일무이하다고 중요한 분임을 인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명확하게 하신 점, 즉 그리스도가 닥쳐오는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하신 점을 무시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간 심성의 전적인 부패와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만으로 인한 구속을 선명하게 선포했다면, 오스틴은 이 중심적인 선언을 표방하길 거부함으로써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잘라 말한 분은 예수이시다.


오스틴에게 복음은 심판 날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정말 나쁜 소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마음,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값싼 선물이 아니라 무료 선물인 것이다.







* 출처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마이클 호튼, 부흥과 개혁사, 2009) 105~112p.
생명나무 쉼터

 

  ** 마태복음 강해 67 (마13:31-34) **

박윤선 박사


 

<본문>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이루려 하심이니라


<강해>

짧은 구절이지만 본문에는 세가지 주제가 나온다.

즉 1. 겨자씨의 비유 2.누룩의 비유 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이다.

여기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거의 같은 의미의 교훈을 가진 비유이며 천국의 또다른 특징을 가르쳐 주시는 가르침이다.

 

 


1. 겨자씨의 비유

이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3.3m) 커지는 천국의 확장성(성장)을 말하고 있다.

비록 천국(하나님의 사역)은 작게 시작 되지만 결국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말씀에서 받는 교훈은


 1) 항상 작은 것이라도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6)

 심는대로 거둔다 는 진리는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따라서 작은것이라도 심는 자가 거둘 수 있으며 더우기 천국의 사역을 작지만 시작하는 자는 엄청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언제나 작게 보이는 일이라도 먼저 심는 것, 시작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


 2) 따라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요긴한 것은 약한것 이란 말씀도 있듯이 작은 것이 더욱 값진 것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큰것 만 바라지 말고  작은 것 에 충실한 사람이 큰것을 얻는 사람인 것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25:21)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후회하게 되고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이 작은 것이라 해서 소홀히 한다면 큰 사명은 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을 불평없이 감당할 때 큰 것을 맡기시는 주님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3) 작은 것에서 큰것을 보는 소망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 지라도 큰 기대를 가지면, 소망이 있으면, 그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예) 달걀 두개 - 부자의 꿈


 4) 작은 봉사가 큰 축복을 얻는 것이다.

봉사는 멀리가서 많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값진 봉사인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마25:34-36)


 5) 스스로 작은 자임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은 겸손을 상징하지만 큰 자인줄로 착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물어 뜨리신다.(잠15:25)

마음의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잠18:12)

스스로 겸비하여 자신을 작게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솔로몬은 왕상 3:7에서  종은 아이라 출입할 줄 알지 못하고... 라고 말한다.

이런 솔로몬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다.(왕상3:13)

천국은 이런 작은 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누록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가 외형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성장, 즉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누룩이 반죽에 들어감으로서 커다란 빵이 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누룩이 된다면 세상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다.


 1)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무식한 베드로 한번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일자 무식 무디의 설교에도 수많은 사람의 회개가 뒤따랐던 것이다.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은 그가 달라지고 온 세계에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복음은 마치 누룩의 발효처럼 한 인간이 삶을 놀라웁게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2) 사회를 변화 시킨다.

영국이 해적의 나라에서 신사의 나라가 된것은 복음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 제일의 나라가 된 것도 복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누룩인 것이다.


 3) 주님은 내가 변화되기를 먼저 바라신다.

누룩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일단 가루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엄청난 힘을 기지는 것이다.

복음이 먼저 내심령속에 들어와 내가 변화되고 내가 변화됨으로 사회가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본문도 그 비유의 말씀중의 하나이다.

왜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시었는가 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쉽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들을 듣는 사람들은 일정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비유이다.


 2) 진리를 흥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진리는 그 전달하는 방법에 따라 쉽고 흥미있게 전달될 수 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앞서 말씀하신 가라지의 비유,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등은 진리의 말씀은 쉽고 흥미있게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3)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시78: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본문에서는 이사야의 말씀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는 구약의 예언을 이루심을 강조하는 것이 더 강하다.

즉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은 이미 예언되었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는 여기에서도 예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4) 알아 듣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13:11)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무가치하게 여기기 때문에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수 없으셨던 것이다.

우리 택함받은 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은 참가치가 있는 것이다.


         ****************  교        훈  **************


1. 항상 작은 것이라도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3. 작은 것에서 큰것을 보는 소망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4. 작은 봉사가 큰 축복을 얻는 것이다.

5. 스스로 작은 자임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6. 주님은 내가 변화되기를 먼저 바라신다.

7.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말씀이다.

 

 

출처: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아즈위"(Azwie, 희망). 

     

    "넬슨 만델라", 그는 D급 죄수였다. 최악의 정치범인 D급. 죄수의 면회는 6개월에 한 번, 편지도 한 통밖에 허용되지 않았으며, '시계'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으며 갈수록 죄책감만 늘어갔다...
    독방에 갇힌지 4년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듬해에는 큰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조차 없었으며, 가족 역시 14년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채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고립된 흑인 거주 지역으로 끌려갔다. 둘째 딸은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그가 해줄수 있는 것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낄때 "삶"은 절망 그 자체다. 이 끔찍한 무력감 앞에서 그는 아직도 더 견뎌야 하는지 혼란 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14년 동안 보지못한 맏딸이 자식을 낳았다고 찾아왔다. "아버지, 그때 편지로 말씀드린 제 딸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그들에게는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의 이름을 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맏딸은 그 무수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며 어른으로 성장했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딸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딸은 그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고는, 종이에 얼굴을 묻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겨우 참아냈다.
    종이에 묻은 잉크가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고, 거기에 적혀 있는 글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즈위"(Azwie, '희망')

    *넬슨 만델라(남아프리카 공화국) (1915~2013.향년 95세)

     

     

    -옮긴 글

    출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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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강해 66 (마13:23-30) **

박윤선 박사

 

<본문>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참조>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36-43)


<강해>


주제 * 알곡과 가리지의 비유

본문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로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내용은 예수께서 풀어주신 말씀(13:36-43)처럼 간단하다.

예수께서 옥토(교회)에 알곡(신자)을 뿌려 자라게 하셨는데 주인이 잠을 잘동안 원수(마귀)가 와서 가라지(불신자)를 뿌리고 갔다.

처음 자랄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커지면서 가라지와 알곡은 구분되게 되고 종(사역자)들이 이를 뽑아 버릴까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말리신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하나라도 알곡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심판때까지만 그냥 두라는 말씀이다.


1.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어느 교회에든지 신자와 불신자는 함께 있다.

진실한 신자들 틈에, 장사속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나, 편리 때문에 찾아 드는 이도 있고, 단순한 피안의 장소로 찾는 사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사단의 자식(악의 씨)도 있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알곡이 더 많기는 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인들은 이런 가라지들 때문에 시험이 든다든지, 신앙이 흔들리면 그것은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가라지를 뿌린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가라지들을 통하여 더욱 알곡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가라지를 그냥 두신 이유는 알곡 때문이지 가라지가 이뻐서가 아니다.

가라지는 어떤 때는 알곡보다 더 잘자란다.

키도 크고, 열매도 틈실한 것이다.

그것은 좋은 옥토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 가라지가 대우받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잘되고, 대우받는 것 때문에 결국 그가 가라지 인것이 들어나게 되는 것이다.

숨어 있으면 가라지 인지 알곡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라지는 자신이 결국 가라지인 것을 드러내게 된다.

이렇게 가라지가 구분 될때 뽑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구별할 수 있는 데도 그냥 두시는 것은 알곡을 다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가라지를 그냥 두시거나 더 잘되고, 대우 받는 것에 시기심이나, 불평 불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가라지를 그냥 두신 이유는 알곡들이 다치지 않고 잘자라게 하시기 위함이다.


3. 심판 때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구별되어진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의 운명은 꼭같은 양분을 먹고 잘 자랐어도 불가운데 던져진다.

그러나 알곡은 곳간에 들어간다.

아무리 형통하는 것 같아도, 잘되고 대우받는 것 같아도 결국 가라지는 불에 타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곡된 신자들은 가라지 때문에 시험에 드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추수때에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는 것 처럼 마지막 때 심판날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가려진다.

그 운명도 하늘과 땅 차이다.

하나는 영광 하나는 불에타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모든 신자들은 좀더 자신과 감사함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4. 가라지와 알곡은 씨가 다르다.

아무리 가라지가 알곡을 닮으려해도 알곡이 될 수는 없다.

근본 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참된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이 다르면 안된다.

콩심으면 콩나고, 팥심으면 팥난다.

우리 근본이 인간인가 예수그리스도인가를 돌아보라.

타락하고 죄지은 인간은 결코 알곡이 될수없다.

에수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만 알곡이 되는 것이다.

그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15:17)


            ****************   교     훈  ****************

1. 교회에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가라지는 잘 자라기 까지는 구분이 안된다.

3. 가라지를 그냥두시는 것은  가라지 때문이 아니라 알곡 때문이다.

4. 가라지 씨와 알곡의 씨는 다르다. 즉 가라지가 알곡은 될 수 없다.

5. 반드시 가라지는 불이 타게된다.

6. 가라지 때문에 시험에 드는 자는 마귀를 기쁘게 할 뿐이다.

7. 가라지를 알더라도 뽑아 태우는 것은 심판때이다.

 

 

출처: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생명나무 쉼터


그대는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제1부-

김요한 목사

 

제1부

마태복음 13장에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무리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한 무리는 알곡이고, 다른 한 무리는 가라지이다. 어떤 사람이 알곡이고 어떤 사람이 가라지일까? 먼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시는 그리스도의 해석을 살펴보자.
비유 :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 " 마태복음 13장 24~26절.

해석 :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13장 37~40절.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

이 비유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분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말씀인 진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고 계신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곡식을 여물게 하여 당신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밭"의 진정한 의미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뿌려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에 좋은 씨만을 뿌리셨지만, 밭으로 표현된 교회 안에는 가라지도 함께 자라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가 나오는 씨를 절대로 뿌리지 않으신다. 가라지는 언제나 사단이 뿌린 씨에서만 나오게 된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알곡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의해서 그 성품에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들을 뜻하며, 가라지는 오류와 거짓 가르침에 의해서 성품이 변화함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성과 특성을 나타내는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자는 반드시 성품과 생애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사단이 교회 안에 뿌려 놓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그 성품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변화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를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오도되어서 구원에 관한 진리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에는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기 위한 방법으로서 상대방의 밭에 잡초의 씨를 뿌려 놓았다. 잡초씨를 뿌릴 때에는 아무 씨나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밭에 심어 놓은 곡식과 비슷한 모양으로 자라나는 잡초씨를 뿌려놓음으로써, 싹이 난 후 한동안 곡식과 잡초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잡초는 곡식과 함께 어울려서 자라나서 밭의 주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와 같이 사단도 그의 악한 씨를 천국의 아들들인 "좋은 곡식"이 자라는 밭에 뿌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자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은 자기가 몰래 뿌려 놓은 씨에서 나오는 가라지들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과 책임을 그리스도께로 돌리고 있다. 가라지들도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오고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알곡과 별다른 차이점을 볼 수 없지만, 가라지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사단은 교회 안에 뿌려 놓은 수많은 가라지들을 통해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감추어 버리며, 그리스도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목회 사업을 하나의 장사 수단으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를 세상에서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교회 안에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탄식을 하게 된다. 아직 어린 곡식들이 주변의 가라지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혼돈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교회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흥과 개혁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교회 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라지들의 방해와 비웃음으로 인하여 저지받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주인의 종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자, 자비로운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품성과 동기를 판단하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성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의 생각에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교회에게 끊어버리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실수하게 된다. 왜냐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그 겉모습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가라지와 알곡은 세상 끝에 가서야 천사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사람의 동기와 성품을 판단하는 대신에, 사단이 교회 안에 뿌려 놓은 거짓 가르침과 오류들을 뽑아버림으로써, "좋은 씨"에서 올라온 알곡들에게 올바른 영적 양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이다" 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요17:17). 오직 진리만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리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만 당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다. 이와 반면에, 사단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거짓 가르침을 퍼트림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접촉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태초이래로 사단의 유일한 공격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였다.

 

가라지의 최후의 운명

가라지는 그 잎이 푸른 동안에는 곡식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밭의 곡식이 익어서 누렇게 되면, 곡식들은 열매가 충실하게 익어서 고개를 숙인 모습을 나타내지만, 가라지들은 아무런 쓸모없는 잡초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지금은 경건의 모양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가라지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끝인 추수 때가 되면,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 때에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지 않았던 자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심판의 때에 주님께서는 알곡을 거두어 하늘 곡간에 거두어 들이실 것이며, 가라지는 한데 묶어서 불에 태우실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지금은 거룩한 교회 안에 섞여 있는 상태로 자라나고 있지만, 종말에는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는 한 손이 모든 자들에게 각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여 줄 것이다. 진리의 빛을 가진 종들과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쳤던 목자들을 나누실 것이며, 백성들에게 경고의 기별을 전했던 충실한 종들과 백성들이 깊은 잠에 취하도록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은 불성실한 파수꾼들을 정확하게 갈라내실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빛과 진리대로 순종의 생애를 산 양떼들과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거절한 이리떼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에 의해서 세상 끝에 단으로 묶여져서 불에 던져질 사람들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41,42. 그리스도께서는 풀부불에 던지우는 자들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라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고 주말하다 교회에 다니는 종교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서야 비로서 자신들이 사단이 심어 놓은 거짓 가르침과 거짓 목자들에게 기만당했음을 깨닫고 풀무불 속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함으로써, "불법"을 조장하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라!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키며 손가락질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은 그런 거짓 형제들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에도 거짓 형제들이 있었지 않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이들도 열두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종하여 다녔다. 요술장이 시몬과 같은 사람도 침례를 받고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공언하였다. 바울을 버리고 진리에 등을 돌린 데마도 한 때는 충성스런 신자로 헤아림을 받았다. 심지어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은 사도 가운데 하나로 끼였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면서 가롯 유다를 붙드셨던 자애로운 모습은, 그분께서 패역하고 이기적인 인류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동안 참고 계신가를 보여준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참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거짓 형제들에 대해서 참으라고 부탁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 거짓 그리스도인들(가라지)이 남아 있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끝까지 주고자 하신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그분의 깊은 사랑과 자비를 보게 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스스로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오류와 죄에 빠진 형제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깊이 동정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과 연합하여 오류와 죄에 참여해서는 않된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과 죄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지만, 죄와 오류와 세속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성장해 가는 두 무리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마찬가지로 가라지에게도 같은 밭(교회)에서 같은 햇빛(성경 말씀)과 같은 비(성령)를 받으면서 자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추수할 시기가 되면,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명히 분별" 하신다(말 3:18). 그리스도께서 친히, 누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살기에 합당한지를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각 사람을 그 성품과 생애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대 위에서 아무런 무게도 더하지 못할 것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곧 성품이다.

교회라는 밭에 뿌려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알곡은 아니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통하여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상 끝까지 두 무리가 함께 어울려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하에서 한 무리는 곡식으로 여물어서 추수 때를 기다리게 되며, 다른 한 무리는 가라지의 모습과 본성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불에 태워지기 위해서 단으로 묶여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혹시 "불법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속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혹시 희생과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써, 가라지가 되기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도 그대를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지 않은 지금, "좋은 씨"만을 뿌리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라. 그대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의 마음을 낮추고, 그대 양심 속에 조용히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자신의 생애를 맡겨라.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

 

 

 

출처: 진리회복선교회  http://blog.daum.net/8520592/1414206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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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바라보는 법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한특별한 점을 발견해
내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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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결코 보지 못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그 장점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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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그런 능력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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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보면서
그 사람의 장점에는 지독히
인색하면서 단점은 잘 찾아내는
사람들.단점 하나라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곧 그의 전부인 양
부풀리곤 하는 사람들.

혹시 당신도 그런 사람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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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못난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부분을
확대경으로 바라보느냐에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을 두고
그의 장점을 확대시켜 볼 수 있는 사람,
상대방의 단점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장점은 이상하게도 잘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곧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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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교회, 가라지 (마13:24~30) /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 발췌)

 

  마 13:24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여기 "천국"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헬라원어로 헤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을 가리킨다. 이것은 현세에 있어서는 진정한 교회요, 내세에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이고(계21:1,22:5), 사후의 세계에는 천당이다(요14:1-4). 이 귀절들에 나온 비유에서는 천국이란 말이 교회를 의미한 방면이 농후하다. 진정한 "좋은 씨"란 말은 예수님께서 이 뒤에 해석하신 대로(마13:38), "천국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 마음속에 참되어 받은바 되어 그 생활에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약1:18; 벧전1:23).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히 받으면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생활이 이세상의 사람과 달라진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산다.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 뒤에 해석하신 대로 (마13:38,39)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원수는 마귀"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 마귀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악도들도 섞여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의할 말씀은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왔다는 것이다. 곧, 이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한 씨가 들어온다는 말씀이다. (1)악한 씨는 신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에 들어와서 자라고 커서 장차 그의 신앙생활을 무실하게 만든다. (2)우리가 어떤 때에는 무엇을 선하고 유익하다고 하여 택하였으나 후에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참으로 선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 그것을 택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교회 안에 있는 악도도 한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실의 시기에는 그 본색을 나타낸다.


  마 13:28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들이 가라지와 같이 악한 결과를 나타낸 교회원을 교회에서 아주 단절시키고 아무런 소망도 두지 않으려는 심정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한 처분은 교회의 권징이 아니고 마지막 심판인 것이다. 권징은 단절하여 내어버리는 처분이 아니고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실시하는 사랑의 처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라지를 뽑는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고 자극성 있는 약을 주는 것과 같은 일종의 배양 행위이다.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이 말씀은 윗말에 있는 바와 같이 범과자를 아주 심판하여 내어 버림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징 행위를 금지함이 아니다. 교회가 범과자에게 대하여 권징하여야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바 있다(마18:15-20). 권징 실시의 필요에 대하여는 신구약이 일률적으로 가르친다.(고전5:1-13; 살후3:14,15).


 마 13:30

  둘 다 추구 때가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이것은, 교회가 그 교훈 노선이나 생활 노선을 분변 없이 해도 좋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사상이나 행위에 대하여 처리하는 것을 금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마16:6,12). 이 구절들에 있는 말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인신에 정죄함을 금지하는 것뿐이다. 인신 정죄는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 풀러라는 학자는 인간으로서 인신 정죄를 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말하였다. 그것은 (1)교회에 있는 외식자를 인간의 지혜로는 지목하기 어려운 까닭 (2)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인간이 한다면 악한 신자들도 외식자로 오해될 우려가 있다. (3) 교회에서 그렇게 불가능한 심판을 한다면 아직 나타나지 못하였던 귀한 영광의 그릇들이 쓸 데 없는 자로 오해되어 내어 던짐이 될 우려가 있는 까닭 (4) 진실한 신자들과 불신실한 자들이 서로 섞여 있으므로 신자들이 깨어 있게 되고 더욱 경건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장성택 처형 동영상' 미끼 신종 스미싱 '조심'
'장성택 처형 동영상' 미끼 신종 스미싱 '조심'
단축인터넷 주소 누르면 25만원 결제 연합뉴스|입력2013.12.14 22:14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북한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처형 동영상을 미끼로 한 신종 문자결제사기(스미싱)가 나돌고 있어 주의해야 한다.

 

 

 

14일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 따르면 최근 장성택의 처형 동영상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의 문자가 단축인터넷주소와 함께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해당 문자에 첨부된 인터넷주소를 누르면 바로 25만원이 결제된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은 "스미싱 문자에 포함된 인터넷주소를 클릭하는 순간 휴대전화 소액결제로 유도하거나 개인·금융정보 탈취 등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문자메시지 내용을 다양하게 바꿔 인터넷주소 클릭을 유도하는 수법이 반복될 수 있으니 예방수칙을 준수해달라"고 당부했다.

 

 

 

경찰은 예방수칙으로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문자의 인터넷주소 클릭 금지, 스마트폰의 보안설정 강화, 스마트폰용 백신 설치·주기적 업데이트, 공인된 오픈마켓을 통한 앱 설치 등을 소개했다. nomad@yna.co.kr (끝)


안보가 염려되어 올립니다.

정쟁중단 나라안정을 위한 서명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기독인서명참여주소> : 지도자는 물론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JgvBW_FCfJR80Gh5wJKMg7i4bSOPaDb89jqMFF39Ysw/viewform

 

<일반인서명참여주소>

https://docs.google.com/forms/d/1IDn7tYNHA06w8_CCmd-rL_hWw98sDTwRKFuaPZwFWRE/view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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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개혁파 정통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제27장 교회'에서 발췌 


11. 개인이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성령을 통한 그들의 소명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령의 소명이 외적인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에, 즉 선택받은 자의 마음에는 유효하게 하고 유기된 에게는 전적으로 무효하게 하기 때문에, (1) 오로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고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통하여 신자 개인에게 보증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가시적인 교회 공동체는 또한 가시적 측면, 즉 선포와 말씀의 외적 주재권이라는 가시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2) 교회가 외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한 은혜 언약의 공동체에는 속하지 않은 외식자와 죽은 교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전투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나눈다. 불가시적 교회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 유효적으로 소명된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며, 가시적 교회는 말씀에 의해 소명된 자들의 공동체이다.


마레시우스는 말한다.(XVI.51-52): "가시성과 불가시성이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교황파가 비방하는 대로 우리가 교회를 두 개로 분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다른 측면에서 교회에 속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형식적 요소인 선택과 신앙과 사랑은 불가시적이다. 따라서, 분명히 구별하고 확정할 수 있는 교회의 판별 기준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런 증표는 단지 혼돈과 가정을 조장하는 지역화의 암시를 부과할 뿐이다. 그러나 개교회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구별되었는데, 교회를 볼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참된 교회인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반틸은 말한다.(Hypotyposis, 218): "불가시적 교회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가시적 교회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시행을 받는 외적 연합체에 가입한 자들의 모임이다.“ 다른 교의학자들도 유사하다.


12. 그러나 이 둘은 두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한 교회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교제의 측면에서는” 불가시적이라 불리고, “외적인 고백이나 신성한 규칙과 정치의 측면에서는” 가시적이라고 불린다(픽테트, XIII.i.7).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두 종류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주체를 그 구성의 다른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것일 뿐이다. 리쎈은 말한다(XVI.9.1): "우리가 교회를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으로 구별할 때, 우리의 적대자들이 마치 우리가 두 개의 상호 대립되는 종류의 교회를 만들어 낸다고 비방하는 대로 이 구분이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다양한 상태에 따라 주체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러 면에서 가시적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여기서 그 내적인 형태, 즉 참된 신앙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생각되는 한 불가시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하다.“


13. 가시적 교회 외적인 말씀과 성례의 사용, 그리고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하나의 외적인 몸과 사회에 가입된 사람들의 회집이다“(레이든 신학통론, XL.32). 가시적 교회는 외적인 다스림과 예배의 통일성을 가진 지역적 교회나 외적인 고백의 통일성을 가진 고백적 교회의 형태를 가진다. 후자는 지역적 교회들과 복합될 수도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33): "이 가시적 교회는 두 방식으로 인정된다. 하나는 신앙과 성례뿐 아니라 외적인 통치와 교회의식의 형태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로 상호 연합된 사람들이 한 부락이나 도시나 지역 단위로 모이는 특정한 회집으로, 다른 하나는 비록 흔히 외적인 정치의 실제적 형태와 의식의 구체적 방식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성례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전 세계에 걸쳐 다른 장소에 흩어져 있는 연합적이고 우주적인 회집으로 나타난다.”


14.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불신자와 위선자들이 당연히 발견되지만, 그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비록 외적으로는 그들이 교회의 신앙고백을 표현하며 성례에 참여하고 교회법에 형식적으로 순응하지만, 그들의 불신은 결정적이어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아니라 단지 외적 조직의 연관자일 뿐이다. 리쎈은 말한다(XVI.8.1): “우리는 유기된 자가 교회의 외적 상태에 속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외적인 교회는 단지 신앙 고백과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성례 참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씀과 성령을 통한 내면적이고 유효적인 소명으로 구성되는 교회의 내적 상태에 속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교회의 본질적 형태가 오로지 외적 신앙고백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신앙의 내적 진정성에서 발견되어야 하는가? 만일 불경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단지 외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교제에 연합되어 있다면, 비록 그들이 신앙과 성결을 결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는가? 교인이라고 불리고 그 특권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참으로 믿고 중생한 신자와 경건한 자만이 아닌가? 여기서 교황파와 우리는 견해를 달리 한다.”


벤델린은 말한다(Coll,308): "불경한 자가 참된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 아닌 이유는 바로 실제적인 불경 때문이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교회에 머리와 분리되어 있어서, 비록 그들이 간혹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외적인 신조의 고백과 성례의 사용을 통해 신앙을 연출하는 한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고 성령에 의해 신앙으로 그에게 연결될 수 없다.“ 마레시우스는 말한다(XV.12): "선택받은 자만이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라고 하는 말이 가장 참되다.” 투레틴은 말한다(XVIII.iii.1): "소명된 선택받은 자들 외에 유기된 자나 불신자도, 그 사실이 숨겨져 있든 분명히 알 수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될 수 있는가? 교황파들은 긍정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15. 그러므로, 교회에는 권징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여 공동체로부터 그렇게 확인된 불경자와 위선자를 제거함으로써 자기를 정화해야 될 의무가 주어져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36): "비록 이 교회가 위선자와 불경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위선자들을 적발하고 그리스도의 처방에 따라 그가 위엄된 열쇠들을 사용하여 자기 집단에서 불경한 자들을 제거할 책임이 있다. 마18: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계2: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 14(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실제적인 신자의 경우에는, 바울이 권고하는 대로, 삶이나 신앙에서 결함이 발생할 때 동일한 권징을 통해 진지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고전5: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16. 불가시적 교회는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심한 선택받은 자들의 교제이다. 이 공동체를 불가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속하는 내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성령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과 생명이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효과와 외적 신앙고백과 선행은 불신자에 의해서도 기만적으로 모방될 수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오류 없이 중생자와 위선자를 구별하여 볼 수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27): "우리는 이 전투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별한다. 불가시적 교회는 특정한 교회이든 전 세계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회중이든 신자 그리고 선택된 자의 모임에 주어진 이름이다. 이 교회를 불가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실제적인 내적이고 본질적인 형태, 말하자면 참된 신앙과 성결이 신앙고백과 선행을 통해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이 이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이와 같은 것들을 근거로 하여 타인에 대해 무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볼레비우스는 말한다(111): "불가시적 교회는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것을 불가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속한 자들이 사람 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받은 자인지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누가 자기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다. 딤후2:19(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17.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이 일차적으로는 전체 교회에 해당되지만, 그것은 또한 그 지체인 개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브라운은 말한다(II.iv.24.22.7): "동일한 교회가 가시적이러고 불릴 수도 있고 불가시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나,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가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합법적 용법을 통하여 외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고백하고 성례를 거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불가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마음속에 존재하여 아무 인간도 볼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 볼 수 있는 성령과 참된 신앙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 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제27장 교회‘ 940~944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윗트리스 리의 사상으로 한국에는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지상논쟁6-2 교회와신앙측
1998년 05월 01일 (금) 00:00:00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1. 일단 논쟁을 마치며
약속한 6회의 논쟁이 막을 내리게 됐다. 얼마나 유익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라고 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면에 힘을 많이 쏟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로 별다른 사고 없이 마지막회를 맞게 됨을 감사한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비판하면 세상법정에 제소하거나 심지어 협박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반하여 윗트니스 리측의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이렇게 충실하게 지상논쟁에 응해 준 데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

필자편에서 반성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 싶은 점이 있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필자는 본지 96년 8월호부터 지방교회측과 윗트니스 리가 이단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논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에 윗트니스 리측과의 논쟁 외에 안식교측과도 무려 10회에 걸친 논쟁을 함께 시작했었다. 안식교측과는 논쟁에 필요한 시간과 주제 등 방법을 선명히 정하고 시작했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측과는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 오히려 짧은 논쟁을 길게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는 처음 몇 회에 소극적인 논쟁을 하게 됐음을 아쉽게 생각하고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더욱이 근자에는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측과의 전례 없이 치열한 논쟁을 함으로 인하여 이 논쟁의 마지막회를 여러번 연기하게 되었는데, 이 점에 대하여 독자들은 물론 윗트니스 리측의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에게도 사과와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제 지방교회측과의 논쟁이 일단 끝나지만 필자는 다시 논쟁할 뜻이 있음을 밝힌다. 그래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본 논쟁은 여러 가지 점에서 평형에 맞지 않은 논쟁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전에 서로 원고의 주제와 양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윗트니스 리측에서 더 많은 분량의 원고를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이 마지막 논쟁에서마저도 윗트니스 리측이 유리하게 됐다. 윗트니스 리측에서 필자의 원고가 마지막으로 들어가면 자신들의 입장이 불리하니 마지막 원고는 양측이 동시에 게재하자고 제의했다. 사실 윗트니스 리측의 요구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섬세하게 볼 때 그래도 역시 평형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윗트니스 리측에서 어떤 변증을 했는지 모르고 글을 쓰고 있고,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필자가 쓴 지난 변증에 대하여 글을 쓰다 보니 필자가 불리하게 됐다. 그러나 진리가 그런 순서나 양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필자는 지방교회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모르기는 해도 본 논쟁 후에도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물론 필자편에서 재변증의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동안 6회에 걸친 논쟁을 통해서 밝혀진 진리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서로가 미비하다고 느끼는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논쟁의 필요는 양쪽에 다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지난 논쟁이 너무나 삼위일체론 중심으로 진행된 감이 있다. 즉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아니다"를 말하다 끝난 것 같은 인상이 든다. 더욱이 평신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난해하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평신도들에게 유익이 감소된 요소도 있다고 본다. 이것도 재논쟁의 필요 중의 하나이다.

다음으로 필자가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들에게서 이단사상을 더 깊이 느낀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저들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많은 이단들을 낳게 한 사상적 모티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시간을 조금 보낸 다음에 재논쟁을 제의할 것이다. 윗트니스 리측에서 기꺼이 응할 것으로 믿는다. 그 때는 안식교측과의 논쟁 때처럼 주제와 양과 일정을 미리 정하고 논쟁 후에 양측 모두 그것들을 모아 단행본 책으로 출판할 수 있게 하고 시작했으면 한다.

본호에서는 역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에 대해 간단히 정리를 하고, 그의 인간관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틀렸는가를 더 깊이 취급하겠다. 그리고 지난 97년 11월호에서 취급했던 교회론과 관련하여,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은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기 위한 수단일 뿐 윗트니스 리의 교회관에 의하면 정통교회는 바벨론 내지 음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선에서 본 글을 마치려 한다.

2.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이미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많은 논쟁을 하였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마지막회인 이번에도 지난 번의 필자 글을 근거로 또다시 삼위일체에 대한 변증을 분명히 했을 것으로 본다. 또 무엇을 어떻게 하여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며 필자가 삼신론 이단이라고 증명하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도 또다시 논쟁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본호에서 다음과 같이 필자의 입장을 재정리하려 한다.

① '영'이란 말과 '영적'이란 말은 다르다.  물론 영이란 말을 형용사적 의미 즉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또한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역시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히 양태론이다.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세 영이 아니요 한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과(하나님의 경륜, 16쪽), 그리고 삼위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과(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또한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그것이 옳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본다.

②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심지어 유명한 학자들마저도) 인격이란 말을 본질의 단일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그것이 셋의 구별성을 의미하는지 하나의 단일성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인격이란 말의 의미를 혼돈하거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태론 삼위일체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③ 틀림 없이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은 수박 덩어리요, 아들 예수님은 조각난 수박 조각이요, 성령님은 우리 몸에 들어가는 수박즙이라고 말한 '수박 비유'를 보면 이는 분명히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이라고 비판하였더니(본지 96년 12월호, 136쪽), 처음에는 예화의 한계라고 하더니 후에는 그것도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언급하거니와 예화의 한계가 아니라 오류요 그리고 신인합일주의와 양태론 삼위일체관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예화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예화가 있는데 바로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에서 나온 예화가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요, 직장에서는 사장이요, 교회에서는 장로라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에 의하면 인격은 하나이다. 한 인격의 사람이 그 직능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의 수박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④ 필자는 삼신론자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변형된 양태론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물론 본질의 단일성도 다 믿는다. 성경적으로 믿고, 신학적으로도 믿고, 경험적으로도 믿는다. 그러나 본 지상 논쟁의 한 초점인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인가 아닌가'를 밝히자는 곳에서 필자의 삼위일체관을 구체적으로 변증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공격이 최대의 수비란 생각 때문에 필자를 삼신론자로 몰아 세웠는지는 모른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이단자들과 그리고 이단들 편의 도움을 입고 살아가는 교계의 몇몇 언론인들이 바로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했던 그 내용으로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공격했다. 필자로서는 '초록은 동색이요 유유상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얼마나 삼위일체에 대하여 무지했으면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의 글을 무기 삼아 필자를 '양태론적 삼신론자'라고 공격했다. 그랬더니 한동안 PC 통신에서 어떤 이들은 뒤의 '삼신론자'란 말은 빼고 필자를 '양태론자'라고 공격한 상황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필자가 하나님을 세 인격의 하나님으로 정의하자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하면서도 단수로만 사용하지 않고 복수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만으로 그를 삼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가?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윗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년, 52쪽)라고 했다.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공격하는 식으로 하면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그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단어 하나를 어떻게 썼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윗트니스 리의 신학적 신앙적 구조 자체가 양태론적이란 말이다.

⑤ 그리고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의 경세적인 면을 강조하다 보니 양태론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으로 보이고 있는 점은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경세적인 면을 강조해서 양태론적으로 보인다면 바로 윗트니스 리의 사상 속에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보든 경세적인 면으로 보든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3. 윗트니스 리의 인간론은 이단사상의 뿌리이다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모든 신앙적 신학적 구조는 철저하게 3분법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즉 윗트니스 리의 경우 인간 구조의 삼분설이 무너진다면 그의 신학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의 인간 구조의 삼분설(영, 혼, 육)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 모순을 낳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단사상인지 입증해 보겠다.

먼저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의 핵심 사상을 살펴보자.
"육이 인간의 외부 실체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성경은 결코 영(spirit)과 혼(soul)이 하나인 것처럼 혼동해서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혼과 육의 두 부분으로 분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을 세 가지 구분으로 즉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나누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귀절은 온전한 인간이 3부분으로 분리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워치만 니, 정동섭 역, 영에 속한 사람, 생명의 말씀사, 34쪽).

"영과 혼을 분리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문제인가? 영혼의 분류 여부는 신자의 영적 생활을 엄청나게 좌우하기 때문에 이는 극히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영의 영역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성장이 가능하겠는가? 영과 혼을 분별하는 일은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위의 책).

"성경은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진 세 부분으로 된 존재임을 제시한다(살전 5:23). 이 세 부분들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눅 1:46~47, 히 4:12, 빌 1:27). 몸이 있으므로 사람은 세상에 대한 의식을 갖고 물질 세계를 접촉할 수 있다. 혼이 있으므로 사람은 자아 의식을 가지며, 자아 의식은 사람에게 인격과 자아를 갖게 하며(마 16:26, 눅 9:25 참조), 생각하고 선택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한다. 영이 있으므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삼일 하나님을 접촉하고 영접하고 예배할 수 있다(요 4:24, 롬 8:16, 딤후 4:22). 영이신 하나님은(요 4:24) 사람을 지으실 때(창 2:7) 영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다(슥 12:1). 만일 사람에게 영이 없다면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을 것이다"(사람의 영, 윗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1986년, 서문).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에 들어오고 사탄은 우리의 육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에 들어온 하나님과 육에 들어온 사탄은 가운데 혼을 두고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수단이나 기관이 없는 것이다"(위의 책, 16쪽).
"우리 사람의 영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는 유일한 기관이다"(같은 책, 21쪽).
"우리 안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사탄이 죄로서 우리의 육신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 자아가 우리의 생각으로 대표되는 혼 안에 있다"(같은 책, 94쪽).
"사람의 영이 하나님 자신을 확산시키는 기지가 되는 것과 같이, 사탄에 의해서 점령된 육신은 사탄의 일을 할 수 있는 기지가  된다. 사탄은 육신에 거처를 정하고 혼에 영향을 준 다음, 혼을 통해 영을 죽이려고 한다"(하나님의 경륜, 윗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1987년, 138쪽).

한 마디로 윗트니스 리에게 있어 영혼육의 삼분설이 무너진다면 그의 모든 신학의 구조는 흔들리고, 구원도 성장도 회복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영과 혼을 분류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성장은 물론 구원도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잘못인가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씩 살펴보자.

(1) 성경은 삼분설을 말하지 않는다.
① 먼저 히브리서 4:12의 말씀부터 살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을 지지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여기 '영과 혼'이란 말은 영이란 실체와 혼이란 실체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관절과 골수도 다른 실체로 보아야 한다.

즉 인간의 구조는 3분설이 아니라 4분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영과 혼이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임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즉 관절과 골수는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의 구조로 볼 때 분명히 하나의 육의 실체에 속하는 두 개의 부분이다. 그렇다면 비록 영과 혼도 언어상 나누어져 있지만 두 개로 나누어진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의 실체를 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육을 관절과 골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비유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간을 감찰하신다는 뜻이다. 육의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는 말이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면 이상한 논리가 생길 것이다. 마치 하나님 말씀이 저 병원의 수술대의 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인가?

② 다음으로는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말씀이다. 이는 삼분설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성구로 사용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영과 혼과 몸이라고 했기 때문에 삼분설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도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을 지지하는 말씀이 아니다.

먼저 이에 대한 윗트니스 리의 말을 들어 보자.
"절대로 영을 혼으로, 혼을 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기독교 교사들은 영과 혼을 동의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볼 때 영과 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과 혼과 몸'에 '과'라는 접속사가 있기 때문이다"(윗트니스 리, 사람의 영, 한국복음서원, 1978년, 19쪽).

그러나 이 말씀은 바울이 인간의 구조를 설명하려고 하는 말씀은 아니다. 우리 성도들이 온전케 되기를 기도하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과 혼과 몸은 3개의 것으로서 복수인데, 거기에 따르는 동사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에서 '보전되다'라는 단어는 단수로 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의 전인적 실체 안에 기능을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위의 말씀을 가지고 인간 속에 영, 혼, 육 세 개의 실체가 있다는 증거로 삼으려 한다면, 다음의 말에 의하면 인간 속에는 4개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주님께서 우리가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내용이다. 윗트니스 리와 같이 한다면 우리에게는 마음, 목숨, 힘, 뜻이라는 4개의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똑같이 우리 인간의 전인됨을 말하고 있는데 앞에서는 3개로, 뒤에서는 4개로 구별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구조가 4개가 아닌 것처럼 3개도 아닌 것이다.

그보다 윗트니스 리의 말에 따라 앞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4:12의 말씀에 의하면 역시 인간의 구조는 4개가 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이 히브리서의 말씀보다 인간의 구조를 말하는 데 있어 더 일차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똑같이 같은 '과'에 의해서 히브리서에서는 4개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에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는 분명히 4개로 되어 있다.

물론 위의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말씀 하나만 떼어서 보면 인간의 구조가 영, 혼, 육 3개의 실체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하나로 보지 말고 다른 성경 말씀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을 설정한 것들이 소위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교리 교리' 하다가 교리주의에 빠져서 성경 위에 교리를 두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또한 윗트니스 리측과 대부분의 다른 이단들처럼 '성경 성경' 하다가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입장도 따지고 보면 교리이면서 교리가 아닌 것처럼 하는 무지와 위선이 있고, 나아가 자신들의 성경 해석은 교리가 아니라 곧 성경이라는 사탄적 교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말씀들을 보면 더 선명하게 3분설이 잘못된 교리임을 알 수 있다.

③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히브리어로 '루하흐', 헬라어로 '프뉴마')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우리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혼(히브리어로 '네페쉬', 헬라어로 '푸쉬케')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영이 아닌 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면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위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 만일 하나님도 혼이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혼과도 교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살펴보자. 다음의 성구들은 하나님을 혼으로 말하고 있는 성구들이다. 먼저 이사야 42:1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했는데, 여기 '내 마음에(my soul)'서 마음(soul)이 바로 '네페쉬'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을 혼으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물론 뒤에 나오는 '나의 신'은 영 즉 '루하흐'로 되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영만이 아니라 혼으로도 표현되어 있다는 말이다. 윗트니스 리의 주장과 전혀 반대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예레미야 9:9에서 보자.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에서의 '내 마음'은 영인 '루하흐'가 아니라 혼인 '네페쉬'이다.

또 다음으로는 아모스 6:8에서 찾아 보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네페쉬'로 표현하였다. '자기를 가리켜'(by himself)라는 말이 바로 '네페쉬' 혼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영(루하흐)이시지만 또한 혼(네페쉬)이시다. 어째서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에게는 이 말씀이 안 보일까? 그것은 성경을 선입견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성경 성경' 하지만 사실은 비성경적인 사람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신약에서 찾아 보자. 히브리서 10:38의 말씀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혼으로 표현하셨다. '내 마음'이 바로 영(프뉴마)이 아니라 혼(푸쉬케)인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만일 인간 구조와 하나님의 영에 대한 윗트니스 리의 정의가 맞다면, 먼저는 우리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유일한 기관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이 없는 타락한 인간도 얼마든지 혼이신 하나님과 혼으로 교통할 수 있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나아가 결국 하나님도 동물과 같은 존재라는 말도 되고, 동물도 하나님과 교제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영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④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경에서는 심지어 동물까지 영(루하흐)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윗트니스 리측의 사람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런 말씀일 것이다. 먼저 살펴보자.

전도서 3:21의 말씀이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인생의 혼'에서도 영 즉 '루하흐'를 사용하였지만 '짐승의 혼'에서도 영 즉 '루하흐'를 사용하였다. 다음으로는 요한계시록 16:3의 말씀이다.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는 말씀에 나오는 생물이 바로 영 즉 '프뉴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왜 그렇게도 입만 벌리면 영, 혼, 육을 찾는 윗트니스 리에게 이런 성구가 보이지 않을까? 비록 말로는 '성경 성경' 하지만 바로 성경을 성경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동물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동물의 '루하흐'는 사람의 '루하흐'와 다르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3분설을 포기하겠는가?

⑤ 성경은 주로 영 즉 '프뉴마'는 하나님에 대해서 주로 사용되고 혼 즉 '푸쉬케'는 그렇지 못하다. '프쉬케'는 인간편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반면에 '프뉴마'는 하나님편의 측면에서 사람을 나타내 주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외는 또한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영과 혼의 기능을 동일한 의미로서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죽음을 혼이 떠난 것으로 묘사된 곳도 있고(창 35:18, 왕상 17:21, 행 15:26), 반대로 영이 떠난 것으로 묘사된 곳도 있다(시 31:5, 눅 9:55, 눅 23:46, 행 7:59). 그리고 죽은 자들을 혼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마 10:28, 계 6:9, 히 12:23, 벧전 3:18~20).

또한 인간의 번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번민은 혼적 기능일 뿐 영적 기능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번민을 혼적 기능으로 말하기도 하지만(시 42:6, 요 12:27), 영적 기능으로 말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창 41:8, 요 13:21). 슬픔의 경우도 그렇다. 이는 영과 혼의 기능으로 성경은 말한다(삼상 1:10, 시 54:6, 행 17:16, 벧후 2:8).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영과 혼 모두에게 속한다(눅 1:46~47). 그리고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혼 중심으로 말 할 때도 있고 또한 영 중심으로 말 할 때도 있다(약 1:21, 고전 5:5). 성경에서 영과 혼의 기능이 구별되지 않고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차기 논쟁에서 더 깊이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윗트니스 리처럼 영적 기능과 혼적 기능을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3분법 자체가 전혀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사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2) 윗트니스 리의 말에는 스스로 모순된 점이 많다.
① 먼저는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많다.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물론 사탄도 분명히 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기에 인간의 육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에만 들어와 교제한다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영은 직접적으로 몸에 힘을 행사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중재자가 필요한데, 그 중재가가 영이 몸을 접함으로서 생겨난 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혼은 영과 몸의 중간에서 이 두 가지를 함께 묶고 있는 것이다. 영은 혼을 매개로 하여 몸을 복종(제어)케 함으로 하나님을 복종케 할 수 있다(하나님을 '복종케' 할 수 있다는 참람한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필자주). 마찬가지로 몸은 혼을 통하여 영으로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워치만 니, 정동섭 역, 영에 속한 사람, 생명의 말씀사, 41쪽).

"하나님편에는 영인 하나님의 영이 있으며, 우리편에는 사람의 영이 있다. 이 두 영이 서로 만날 때 신성한 관계가 있다. 신성한 영인 하나님과 우리 사람의 영이 서로 만남으로써 그와 같은 신성한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과 교통함에 있어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만큼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길이 없다. 같은 원리로 사람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수단이나 기관이 없는 것이다"(윗트니스 리, 사람의 영, 한국복음서원, 1978년, 16쪽).

그렇다면 이상하다. 하나님은 영이기에 인간의 영에 들어온다면 사탄도 영이기에 역시 인간의 영에 들어와야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영이 아니고 육인가 아니면 다른 영인가? 영에 들어올 수 있는 영과 육에 들어올 수 있는 다른 영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하여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이제 해괴한 어떤 변증을 할 것인지 다음 논쟁에서나 기대해 보자.

② 다음으로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육도 별개의 인격이 된다. 필자는 앞에서 이미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혼만 인격일 뿐 영은 인격으로 보지 않는 점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97년 8월호). 그런데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그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어디로 가든지 논리적 신학적 모순과 함정에 빠질 것을 알고 피한 것으로 보인다.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지만, 영이 인격이라고 해도,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해도 다 이단적이다.

그러나 만일 사탄은 육에 들어온다는 윗트니스 리의 말이 맞다면 육도 하나의 인격이라는 우스운 논리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인격이 아니고서는 인격체인 사탄의 영을 받을 수 없을 것이요, 그보다는 죄를 지을 수는 더욱이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비록 윗트니스 리는 혼만의 인격적 기능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 육도 인격이 되어야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인간 속에는 혼이란 인격 외에 육이란 인격이 따로 있는가? 윗트니스 리의 주장을 따르면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

사실 윗트니스 리측은 육도 인격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죄에게도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상)'라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20)고 했다. 이것은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죄(Sin)는 육체 안에 거하고(롬 7:20절), 왕노릇하고(6:12), 주관하고(6:14), 살아나고(7:9), 기회를 얻어 속이고 죽인다(7:11). 이러한 것은 다 '죄'의 인격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본지 97년 9월호, 163~164쪽)라고 했다.

위의 말 중에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상)라고 한 말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고 한 말을 가지고 윗트니스 리측은 "이것은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성경을 아는 사람들인지 모르는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이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고린도전서 6장 15~19절 말씀에 따라 성령도 우리의 육체에 거한다는 말이 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라고 했지 않은가. 오히려 고린도전서의 이 말씀이 더 직접적으로 우리 육체가 성령의 전이란 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육 안에 있고 성령은 영 안에 있다고 한다면 성경을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만일 육도 인격이라면 죽은 시체에도 사탄은 붙어 있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 심판은 육만 받으면 된다. 영만 천국에 가고 육은 지옥에 가면 될 것이다. 바로 이 사상이 김기동 씨를 비롯한 귀신파가 주장하는 이론을 낳게 했다. 즉 영인 귀신이 우리 인간의 몸에 붙어서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상을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많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사상이 나오는데, 거듭난 영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성도 무너진다. 영에 들어가서 죄 없는 영을 만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왜 육에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점이며, 그리고 왜 혼과 육을 죄 없는 혼과 육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③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영에 들어오고 사탄은 인간의 몸에 들어온다는 말이 잘못된 말이다. 죄란 전인이 짓는 것이지 육체가 따로 짓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죄란 우리의 마음을 좌소로 하는 것이지 육체를 좌소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간음 같은 죄라도 그 시작은 마음인 것이다.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죄의 좌소는 육체요, 이 육체에서부터 시작한 죄가 마음과 영으로 간다는 말이 된다. 아니다. 죄란 육에서부터 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음에서부터 육체로 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살펴보자.

잠언 4:23의 말씀이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예레미야 17:9 말씀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마태복음 15:19의 말씀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누가복음 6:45의 말씀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씀하였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신 것이다(마 5:21~2, 27~28).

성경에서 '육체의 소욕'(갈 5:17 등)이라 했을 때에는 육체가 짓는 소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있는 죄된 성품인 육에 속한 죄라는 말이다. '소욕'이란 말이 그렇다. 이는 마음의 욕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육이 인격이 아닌데 ?소욕?이 따로 존재할 수가 없다.

④ 윗트니스 리의 인간관에 의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말이 된다. 다음에 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하지만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인간은 온전한 창조물이 아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거듭나야 한다고 하고, 거듭남은 우리의 타락과 상관이 없다고 한다(사람의 영, 23쪽, 45쪽). 그러나 문제는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말이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는 점이다. 구약의 인간은 타락한 후 영이 죽었고 살아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우리가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고 활동적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혼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우리의 영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신성한 영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을 소생시키고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사람의 영, 47쪽).

그렇다면 구약의 타락한 인간에게는 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겠는가?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면상 차기 논쟁에서 더 깊이 그리고 새로운 문제점들까지 다시 취급할 수 있을 것으로 믿겠다.

필자가 보기에 윗트니스 리는 성경은 부정할지라도 인간 구조의 삼분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윗트니스 리의 모든 사상은 이 삼분설 아래에서, 위에서, 그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삼분설이 포기된다면 윗트니스 리도 회복교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요, 구원도 성장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논쟁에서 더 깊은 논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4. 윗트니스 리측은 교회관에서 정직해야 한다
모든 이단들은 정통교회에 대하여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는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얼굴이요 다른 하나는 정통교회를 부정하는 얼굴이다. 처음의 얼굴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받지 않으려는 뜻에서 만든 얼굴이요, 다음으로는 정통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만든 얼굴이다. 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는 것은 정통교회를 미혹하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거짓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윗트니스 리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정통교회와 같다고 말을 하며, 속으로는 정통교회와 다름을 알고 있으며,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필자가 '다르다' '같다'고 하는 말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핵심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윗트니스 리측의 "우리는 정통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동일한 성경적인 믿음을 존중합니다"(본지 96년, 8월호, 119쪽)와 같은 말은 자세히 따져보면 함정이 많은 말이지만 그러나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것 같은 말로 들린다. 그러나 본심은 그런 게 아니다. 정통교회는 음녀라는 것이다. 그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자세히 보면 보자기에 싸서 가시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정통교회를 부정하는 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먼저, 우리는 어떠한 전통적인 성경 해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성경 위에 서 있습니다"(본지 96년, 8월호, 120쪽)라는 말에서 보면 전통적인 성경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 해석 방법이 다르면 그 결과는 반드시 다르게 되어 있다. 필자의 지난 글에서도(본지 97년 11월호) 밝힌 바가 많지만, 본호에서도 그 내용을 좀더 깊이 밝히려고 한다. 지면 관계상 구체적인 변증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정통교회 교인들은 지방(회복)교회 교인들이 정통교회를 보는 정직한 입장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미혹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① 이제 지방교회는 다른 모든 이단들처럼 정통교인들을 자신들의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는 모든 추구하는 믿는 이들이 교회의 이상을 보고 지금 거주하고 있는 각 지방 안에서 실제적인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오길 소망합니다"(본지 96년 8월호, 123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실제적인 교회생활이란 바로 정통교회에서 말하는 교회갱신이니 교회개혁의 말과 유사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다. 실제적인 교회생활이란 지방(회복)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됨: 교회생활 안에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중점은 '하나를 지킴'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주님은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이 하나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를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은 '합일의 입장' 위에서 그 지방에 있는 모든 참된 믿는 이들로 이뤄진 지방교회들 안에서 표현됩니다. 우리는 하나를 주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는 분열을 거부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님의 간증이 분열된 것은 어떠한 부끄러움이며 비난거리인지!"(본지 96년, 8월호, 129쪽)라고 했다. 이 말도 겉으로는 원론적이고 신앙의 내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숨은 뜻은 지방교회 안에서 하나이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가 얼마나 정통교회를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는지는 그들이 나눈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워치만 니가 윗트니스 리에게 보낸 편지를 윗트니스 리가 소개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파의 분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았을 뿐 아직 교파의 제도 또한 잘못되었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윗트니스 리,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한국복음서원, 310쪽).

정통교회의 분열이 잘못되어 거기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제도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② 지방교회 교인들은 지방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교회로 보고 있음이 앞선 글에서도 나타났다.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처음에는 지방교회를 그냥 지방교회라고 표기했다(96년 8월호, 10월호, 97년 3월호, 7월호).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들의 교회를 말할 때마다 ?지방?이란 단어를 괄호 속에 넣기 시작했다(97년 9월호). 즉 '(지방)교회'로 표기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괄호 속의 단어는 빼고 읽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에는 지방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자세였다면, 후에 등장한 표기에는 지방교회만 교회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③ 무엇보다도 윗트니스 리가 정통교회를 바벨론 내지는 음녀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이미 필자가 지난번 글(97년 11월호)에서도 밝힌 바가 있지만 다시 더 보충적으로 살펴보겠다.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 카톨릭교는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어떤 것에게로 갔다. 같은 원리로 타락한 개신교 교회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분이 아닌 다른 것에게로 갔다"(윗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하여, 1990, 12~3쪽).

실질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바벨론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지방교회 교인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말을 듣고 분노하지 않을 정통교인들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게 가련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와 그밖에 이교와 연루된 모든 단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벨론인들이다. 음녀들의 어미의 천주교 교회는 큰 음녀요, 그 밖에 모든 바벨론 단체들은 그 딸들이다.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에 없다. 그분이 우상 숭배와 이교주의로 가득찬 곳에 거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1991, 94~95쪽).

한 마디로 오늘날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천주교가 큰 음녀요 개신교는 그 딸들이란 것이다. 그러고도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란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한다면 가증스럽다.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윗트니스 리는 거룩한 공회 즉 하나님의 몸을 떠나 사탄의 가르침을 받은 큰 음녀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딸들이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이는 필자 최삼경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분열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우상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기독교는 전통으로 충만하다. 전통은 허위요 허위는 공허하다. 허위는 또한 일종의 우상 숭배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뭔가 헛된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오늘날의 기독교에 적용해 본다면, 기독교의 상황이 정확히 바벨론과 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음녀로부터 나와서 예루살렘 곧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위의 책, 103쪽).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 교인들이 정통교인들을 선교의 일차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유이다. 즉 음녀인 개신교에서 나와서 지방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두 무리의 것들이 적에 의해 연합되어 있다. 한 면에는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또 한 면에는 가증한 물건, 음행, 더러운 것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두 무리로 무서운 혼합체를 만들었다. 간교한 것은 기독교계가 새 예루살렘의 재료들로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꾸미고 있는 것들 속에 있는 실제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분별하는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핵심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기독교계에는 밖으로는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과 더러운 것이 있다. 이 두 범주는 한 사람, 한 여인, 한 악한 여인 안에 연합되어 있다"(윗트니스 리, 그리스도냐 종교냐, 한국복음서원, 1987년, 210쪽).

기독교는 밖으로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지만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과 더러운 것으로 차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윗트니스 리와 그를 따르는 교인들이 보는 정통교회이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동일하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떠한가? 죽어 있는가 아니면 살아 있는가? 오, 형제 자매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데 머무르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나는 주님의 백성들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너무나 무겁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죽어 있음 때문이다. 죽은 가르침들, 죽은 집회들, 죽은「교회들」, 죽은 지식, 죽은 메시지들, 죽은 책들, 심지어 죽은 「성경」!"(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년, 10쪽).

"오늘날 기독교는 죽어 있다! 그것은 죽은 종교이다. 우리에게는 계시록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까지도 사도 요한은 돌이켰다. 내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등대를 보았는데(계1:12), 우리 모두에게는 돌이킴이 필요하고 돌이켜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독교로부터 분별될 필요가 있다"(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년, 11쪽).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이 남자라면 여러분은 남자이어야 한다. 여러분이 여자라면 여러분은 여자이어야 한다. 그것이 말(馬)이라면, 그것은 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소라면 소이어야 한다. 그것은 일부는 소이고 일부는 말(馬)일 수 없다. 여러분은 일부는 남자이고 일부는 여자일 수 없다. 그러나 바벨론은 일부는 교회이고 일부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 종류대로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계는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이다. 로마 천주교는 어미이며, 이 어미는 많은 딸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 딸들이 누구인지 알 것이라고 믿는다"(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쪽, 49쪽).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의 혼합이며, 이 혼합은 전적으로 불태워질 것이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바벨론이여」(계 18:2),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계 19:1~3)"(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년, 49쪽).

필자가 지난 96년 12월호에서 했던 말을 다시 기억해 보자. "양쪽이 객관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이쪽에서 볼 때 저쪽이 틀렸다면 저쪽에서 보는 이쪽도 분명히 틀렸을 것이다. 분명히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가 바벨론이요 음녀라면 정통교회가 보는 윗트니스 리는 이단일 것이요, 반대로 정통교회가 보는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라면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 또한 바벨론이요 음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복교인들은 개신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고 있으면서 웬일인지 개신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신들이 볼 때 개신교회는 바벨론이요 음녀임에 분명한데 개신교회에서 볼 때 회복교회가 이단일 수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때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보인 위선적인 반응은 이러했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부른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지난 8월호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지방교회 측은 기독교 안에 있는 참된 믿는이들에 대해 그분들이 어느 교파에 소속해 있든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하며 사랑한다는 점을 재차 밝혀둔다. 다만 성경의 진리를 말해야 할 경우(특히 성경을 해석할 때), 윗트니스 리는 기독교 안의 믿는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항상 '기독교의 비성경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최삼경 목사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식의 언급을 중단하고 진리를 토론하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를 요청한다. 예장통합측의 77차 연구보고서는,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윗트니스 리의 책들을 인용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이 연구보고서에서 윗트니스 리의 중심사상을 왜곡하여 독자들을 오도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의해 분명히 증명된다"(본지 97년 3월호, 136~137쪽)라고 했다.

누가 진실하고 누가 거짓된가? 이 얼마나 위선스럽고 가증스러운 변명인가? 만일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인정하겠는가 묻고 싶다. ?필자가 언제 지방교회나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를 이단이라고 한 일이 있는가? 필자는 지방교회 안에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형제로 여기고 있으며 존중하고 있다. 필자는 단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하였으며, 단지 지방교회 안의 이단적인 상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는 거짓이요 위선이요 말장난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사실 윗트니스 리가 정통교회를 비판하는 위와 같은 표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서도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필자를 역겹게 하고 가증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위의 말들은 최소한 최대한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정통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고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지방교인들의 상당수가 정통교인들로 이루어졌다는 제보의 의미를 알게 한다.

물론 지상 교회는 늘 부족함이 있다는 점과, 그래서 교회는 항상 개혁을 힘써야 한다는 점과, 그리고 선교 2세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 안에는 교리적 윤리적 부패가 심하다는 점에서 반성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고 본다. 그러나 결코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기준에서는 아니다. 더욱이 이단자인 윗트니스 리에게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록 성도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귀에게 송사를 받을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본호에서도 하나 하나 비판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성경 말씀으로 결론을 삼고 싶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5월호)





축의금 만 삼천원/이철환

친구가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를 등에 업은 친구의 아내가 대신 참석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축의금 '만 삼천원'과 '편지1통'을 건네 주었다.

친구가 보낸 편지에는

친구야!
나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지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장사가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기가 오늘밤 분유를 굶어야 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 삼천원'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너무 기쁘다.
개 밥그릇에 떠있는 별이 돈보다 더 아름다운 거라고 울먹이던 네 얼굴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내 손에 사과 한봉지를 들려 보낸다.
지난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가서 먹어라'

친구여!
이 좋은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마음 아파 해다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 해남에서 친구가 ◈~~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과 하나를 꺼냈다.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왜!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 할텐데!

멀리서도 나를 보고 있을 친구가 가슴 아파 할까봐 나는 이를 사려 물었다.

하지만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더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어깨를 출렁이며 울어 버렸다.
사람들 오가는 예식장 로비 한가운데 서서…!!

'친구'는'찾는 게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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