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낳기 경쟁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하심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여 7년의 수고를 수일 같이 여기며 기쁘게 감당하였지만 못 생긴 레아가 먼저 야곱의 처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택하였지만 하나님은 레아를 먼저 택하신 것입니다. ‘총(寵:사랑받음)이 없는’, 즉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 하는’ 레아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레아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룰 아들들이 줄줄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 하였으나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받은 것입니다. 레아는 아들들을 낳으며 이를 인하여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르우벤’ “보라, 아들이다!”, ‘시므온’ “하나님이 들으셨다.”, ‘레위’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 ‘유다’ “찬송하리라.” 아들들에게 그는 남편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이름들을 지어 줍니다.

  반면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받는 라헬은 잉태하지 못 합니다. 아들을 줄줄이 낳는 형을 투기하여 남편에게 투정합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투정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지 어째서 사람에게 떼를 씁니까? 태의 상급과 열매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데 남편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이 노하여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이에 라헬은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빌하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단’ “신원, 내 소원을 들으셨다.”로 짓습니다. 빌하가 다시 아들을 낳자 이름을 붙입니다. ‘납달리’ “나의 씨름, 내가 형과 경쟁하여 이겼다.”

  아들을 낳지 못 하는 라헬이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고 이로 인해 남편 야곱의 사랑이 여전히 라헬에게 있는 것을 인하여 그랬는지, 생산을 멈추자 불안하여 그랬는지 레아는 자기도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더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행복하기를 원하여 ‘갓’, “행운”, ‘아셀’, “행복”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리고 큰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캐온 ‘사랑의 묘약’ 합환채를 양보하는 대신 남편과의 잠자리를 차지하여 다시 다섯 번째 아들을 낳고 ‘잇사갈’, “갚아주셨다.”로 짓고 또다시 아들을 낳아 ‘스불론’ “거주함”으로 지어 남편이 자신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딸 디나를 낳습니다. 이렇게 레아는 무려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게 됩니다.

  이제 야곱의 네 아내 중에서 아들을 낳지 못 한 건 라헬뿐입니다. 자기소유인 여종이 낳은 아들도 자기 아들이지만 자신이 직접 낳지 못 한 아쉬움과 수치심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를 들으시고 태를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라헬이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이름을 ‘요셉’ “하나 더”로 지었습니다. 아들을 하나 더 달라는 소원입니다. 나중에 슬프게도 라헬은 베들레헴 길에서 '하나 더' 베냐민을 낳고 죽습니다만 하나님은 라헬에게도 두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슬람은 아내를 네 명까지 허용합니다. 아마 에서가 네 아내를 취한 것과 또 야곱이 네 아내를 얻었던 것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혼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창 2:24)”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에게 네 아내를 주시고 그들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전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는 책(요5:39)’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네 아내를 통하여 주님과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이룰 거룩한 혼인잔치와 새 예루살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豫表)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아내들의 아들 낳기 경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오시기까지 잉태의 고통을 감내하며 생명과 계보를 이어가는 약속의 기다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까지, 앞 다투어 메시아의 계보에 참예하려는 믿음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면 복음으로 영적 자녀들을 레아와 라헬이 경쟁했듯이 앞다투어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인간의 선택이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전혀 알지 못 했고 전혀 뜻하지도 않았고 다만 질투와 사랑싸움으로 경쟁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 [와우! 과학] 사람 머리 통째 이식 ‘프랑켄슈타인 수술’ 가능할까?


과연 한 사람의 머리를 분리한 뒤 다른 사람의 몸에 통째로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지난 3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컴퓨터 과학자 발레리 스피리도노프(31)가 내년 12월 사상 첫 '머리 이식수술'이 예정대로 실시될 예정이라고 밝혀 관심을 끌고있다. 특히 스피리도노프는 다음달 이 수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큰 윤리적 논란을 일으킨 이 수술은 한 사람에게서 머리를 통째로 분리한 뒤 이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방식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신경외과전문의 세르지오 카나베로 박사가 주도하는 이 수술은 이같은 방식 때문에 일명 '프랑켄슈타인 수술' 이라는 비판도 받고있다.




쥐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머리 이식 수술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내년 12월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머리 이식 수술이 진행될 예정이다. 


* 사지마비 환자들이 다른 이의 신체를 빌어 우뚝 서게 하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머리이식 수술이 진행될 것이라 한다. 이미 원숭이를 통한 실험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바 있는지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머리이식 수술도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머리이식 수술이 본격적인 궤도에 이르게 되면, 돈 많은 부자들(일루미나티들)은 타인의 몸을 빌어 영원한 삶을 누리려 할 것이다.



머리이식 수술이 궤도에 이르면 타인의 몸을 빌어 영생을 꿈꾸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지난 날 바벨탑을 높이 쌓아 “하늘에 닿게 하겠다”(창 11:4)했던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제는 과학의 힘을 빌어 영원한 삶을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리석고 망령된 일을 제지하시려고 주님이 다시금 강림하실 것이다(창 11:7).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 예수님의 섬김-

마태복음 8장 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베드로의 고향은 가버나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벳새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필자가 추정키로는 가버나움이나 그 인근 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벳새다는 헤롯 빌립의 영지이고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에 속한 지역입니다. 둘 다, 대 헤롯(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대왕)의 배 다른 소생들입니다. 다음 기회에 헤롯 가문을 한 번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뱃새다에서 고기를 잡아 큰 시장인 가버나움으로 가져와서 팔게 되면 통관세를 물어야 했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거처를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 장모가 병들었다'고 말씀드리거나, '우리 집에 한 번 오십사'고 요청했다는 그 어떤 시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것을 '보신' 것도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시시콜콜 자잘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렇지만 읽는 자들로 하여금 전후사정과 본문의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도록 여유공간을 제공합니다. 소위 말하는 행간읽기이지요.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는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 하시니,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처자도 생업도 뒤로 한 채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헌신을 외면하실 주님이 아니십니다. 베드로의 집안 형편을 아시는 주님은 몸소 베드로의 집에 심방하셔서 장모님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시름과 걱정을 덜어주셨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모른 채 하시는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워주십니다. 근심 걱정 주께 맡겨도 괜찮을 정도가아니라 넉넉히 돌봐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입장에서는 딸자식과 손주들을 외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위집으로 와서 살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오갈데 없는 장모를 모셨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 제목을 '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으로 정해 본 것이지요.

성경은 베드로가 배를 처분했다든지 가솔의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다든지 등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주님은 그 사정과 형편을 다 알고 계실뿐 아니라 금세와 내세에 복된 약속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

집을 나온 지도 어언 반 년이 넘어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자주 집에 가 볼 형편이 아닙니다. 인편으로 소식을 가끔 들을뿐입니다.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건만 약 한 첩 사들고 찾아가서 병문안하고 처자식과 오랫만에 회포를 풀 수 있는 입장도 못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있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으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씀으로 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베드로의 장모의 눈을 보셨습니다. '여자여~ 네 심정을 내가 아노라! 나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위를 대신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처자를 돌보는 너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를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주여~ 이 미천한 여종을 몸소 찾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야말로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을뿐 무익한(비천한) 종입니다'

무언의 대화가 오갑니다. 눈으로 말하고 손으로 서로간에 교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베드로의 장모는 이미 심령으로는 일어났습니다. 병은 마음으로 이기지 못하면 육신으로는 못 이깁니다.

열병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열병에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열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열병의 배후에 있는 귀신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와 복음을 훼방하는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보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갈수록, 마귀의 악한 궤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두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봉사하는데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이런 날 좀 봐주세요~'라고 안 해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시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생선을 팔든 채소를 팔든, 그 것이 나 자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가 공사판에 나가서 열심히 땀흘려 막노동하는 것도 주님이 보실 때는 거룩한 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가난한 성도가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를 축복기도 한 다음에 돌려줍니다. 거기다 십만원 정도 보태서요. 주님이 돈이 없으서, 돈을 좋아해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돈을 받으시겠습니까. 믿음과 정성, 그리고 헌신만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베드로의 장모도 시장바닥에서 생선장사를 했었는 지도 모르지요.

누가 큰 자입니까. 돈 많은 자? 권세와 부귀공명을 누리는 자? 그 누구도 아닙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해당하는 자가 진정 큰 자입니다.

제가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 장바닥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이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나가겠습디다. 돈없는 우리들은 사람취급도 안 하데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목사들이 돈을 밝히는 세태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런 목사가 안 보입니다. 일부 그런 분들이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정말 성실히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밝힐 돈이 없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인 것은 확실합니다. 죽을 적에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면서 왜 다들 돈에 눈이 어두운지... 주님의 사랑에 눈먼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이 말했었지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 자나 깨나 돈조심해야겠습니다. 이 말세지말에!

여인이 일어나 수종듭니다. 이 수종듦이 미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수종은 기분 좋을 때나 남이 알아 줄 때나 넉넉할 때에만 수종드는, 그런게 아닙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고달프거나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변함없이 주님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종은 섬김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내 형편 아시는 주님이 날 찾아오셔서 일으켜 세우셨으니 이제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해서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그것도 종의 자세로 말입니다.

여러분, 조건부 신앙을 아십니까. '내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했으니 주님, 복주세요~'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심부름했으니 용돈주세요~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해서 기쁜 맘으로 자원해서 끝까지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은 바로 그런 섬김, 미완료의 섬김이었습니다.

칼럼: 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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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반비례하여 시간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삶이다.
그리고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 


더러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또 더러는 굳게 닫은 마음의 문에
육중한 자물쇠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갈수록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가슴은 언제나 비어 있기를 빕니다.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열려 있기를 빕니다.

 
어느 바쁜 아빠가 모처럼 휴일을 맞아 식구들의 간청에 마지못해 낚시를 갔습니다
그날 밤 그는 일기장에
"오늘은 아이들과 노느라고 소중한 하루를 낭비하고 말았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일기장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했다. 내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그런사람이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때 감명깊게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책모서리를 접어 놓았던 것처럼,
누군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접어 놓을수 있는 그런사람이고 싶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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