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르치소서..
        최송연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되 오만하지 않은 별빛의 그 청아함을... 한여름 불볕 쏟아지는 들녘,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아나는 저 들풀의 강인함과 서리서리 된서리 모진 바람 몰아치나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대나무의 그 꿋꿋한 기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내신 당신의 그 겸손하심마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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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가르치소서..
                                 최송연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되
              오만하지 않은
              별빛의 그 청아함을...

              한여름
              불볕 쏟아지는 들녘,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아나는
              저 들풀의 강인함과

              서리서리 된서리
              모진 바람 몰아치나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대나무의 그 꿋꿋한 기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내신  
              당신의 그 겸손하심마저도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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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래 전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다.

                (무조건 성령 받으라는 게 뭐하라는 겁니까? 기도하고요? 부흥집회 참석하고요?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성령 받게 된다면 수천 번도 더 받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를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령이 저에게 임하셨다고 1초 만에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던겁니까? 제가 바보라서 그런지 제 믿음이 거짓인 것인지, 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지, 예수를 믿고도 여전합니다. 까칠한 제 성격을 바꾸자고 뭔짓인들 안 해봤겠습니까? 님은 저처럼 스스로에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상처줌으로 인해 준 상처를 다시 돌려받는 악순환에 "주여 나를 죽여주세요"하고 기도해 봤나요?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정말 해결방법이 있다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써주세요. 님의 글은 저같은 사람에게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고 둘러 보니 웹상으로 이곳저곳에서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 부분을 함께, ‘구체적으로’ 좀 다루되 신학적으로가 아닌,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질문자님께도 긍정적 해답이 되고 우리에게도 다시금 좋은 깨달음이 되도록 성령님의 조명 하심을 간구해 보면서...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이다. 사람의 영혼(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질문자의 말씀대로,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a) 회개(悔改, Repentance)가 있게 된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①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롬3:20)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②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시51:17)을 동반하는데,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③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 ‘슈브’는 ‘돌아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역시 ‘뉘우치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아’는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웨스트민스트 회개 중
                 
                b) 옛(육신적) 사람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전환(Conversion)된 여정이 시작된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하며 생활로 증거된다. 내가 마음에 예수가 구세주임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롬 10: 9-19절 참조),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요,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만만에 콩떡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21장 1절은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께서’와 ‘그 말씀대로’를 두 번 반복하여 사라를 권고하시고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걸고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미쁘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 변개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 함일 것입니다.

                ‘권고(眷顧)하셨다.’라는 말은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베푸사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시어 사라가 아들을 낳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어떻게 행하셨을까요? 앞서 20장에서 그랄왕 아비멜렉이 반하여 데려가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하나님께서는 90세 된 할머니 사라에게 아이를 낳고 젖먹일 수 있는 청년의 젊음을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사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될 아브라함도 그렇고요. 여러분도 그럴지 모르지요. 하나님께서 쓰시면 나이 들어도 젊고 건강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100세가 넘으셨는데도 정정하게 복음을 전하고 계신 방지각 목사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란 “정확하게 말씀하신 때가 되어”라는 뜻입니다. 더 이르게도 아니고 더 늦게도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이라 하라.” 하신대로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하였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신대로 이름을 예수라 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과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아들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돌려 달라 하시면 돌려드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의 일백세 때요 사라의 구십세 때입니다. 사라가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으리라.’ 하셨을 때 장막문 뒤에서 듣고 웃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라만 웃은 게 아니라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하옵소서.” 하면서 엎드려 심중에 웃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웃고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루어지니 또 온 세상이 기가 막혀 웃을 일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 반항도 아니하고 십자가에 맥없이 달려 죽는 자를 비웃었습니다. 그 예수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이 어처구니없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웃음이 아니라 모든 족속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너 같은 죄인, 너 같은 인간이 무슨 구원이냐고 세상이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90세 사라가 이삭을 품에 안고 웃은 것처럼 우리는 지금 예수 믿음을 품에 안고 웃으며, 또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웃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이 손가락질 하면서 웃습니다. 개독교라고 하면서 웃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 하기 때문에, 교회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비웃기도 하겠지만 복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품에 안고 웃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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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성경은 하나님의 의(공의)를 우리에게 남긴 기록으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by inspiration of God,
                ‘inspiration’ 은 영감(靈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보살 핍이라
                보이시는 계시이며 가르치는 교시이고
                성령님의 우리에 대한 감응이라 우리마음을 변화시키고 인도하시는 감화이고
                그리고 숨을 들어 마시는 호흡을 의미하며
                ‘inspiration’ 이란 단어는 KJV에 이곳과 욥기 32장 8절 두 군데 쓰여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이
                But there is a spirit in man:
                and the inspiration of the Almighty giveth them understanding]
                inspiration of the Almighty, 전능자의 숨결,
                태초에 아담에게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신 하나님의 숨결.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숨결을 남겨놓은 책으로
                우리가 숨을 쉴 때 마다 하나님의 의(공의)가 생명과 같이 유지하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공의로 교육하기에
                is profitable for doctrine 절대적인 말씀이다.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기로 간 자들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생이라는 수많은 목사라는 자들은
                성경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자신의 권위를 위한 수단으로 권력으로 교권을 강화하였다.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All the saints salute you.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2-13]

                가톨릭은 이 문장을 곡해하여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saints’ 성도를 성인으로 번역하여 그들이 본받을 만큼 훌륭한 교인이 죽으면
                성인이라 추대하고 그들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품을 악귀를 쫓는 신성한 물건으로
                삼고 또 성인 중 한사람을 수호성인으로 삼고 그 성인들의 영혼과 교통한다는
                영매술로 초혼 술을 믿는 근거의 성경구절이 이 구절이다.

                개신교는
                교파와 거의 상관없이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된 자들로 넘친다.
                다음은 어느 교의 헌법으로 목사의 직무 중 1조 헌법이다.
                < 1.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고
                성도를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과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짧은 문장에 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고... ”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이란 말인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하나님의 대리인들은 한국과 이곳에도 넘친다.

                한때 설교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던 곽선희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려면 설교를 잘해야 한다며 행정이나 행사의 탓이 아니라
                설교를 잘 못하기에 부흥이 안 된다 했다.
                그럴까? 아니다.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듣다 거부감이 들어 그만둔 사람이라
                설교의 달인이라니 달인이 다른 뜻이 있는지 몰라도.
                그가 축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아니에요. 이건 기도가 아니에요. 축도입니다.
                그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풀레이(pray)가 아니고 베네딕션(benediction)이에요.
                축복을 선포하는 거예요. 복이 있으라 하는 것이에요.
                그걸 고어로서 있을 지어다라고>
                미안하지만 ‘benediction’ 이라 단어는
                내가 읽는 KJV 에 있지도 않고 ‘지어다, 라는 말은 잘못 번역된
                한글성경 개역개정의 오류이며 ‘선포’ 라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선포적인 진리의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던데.

                한국 CCM 소개서에는 축도를 이렇게 정의 한다.
                < '베네딕션(Benediction)'은 예배순서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 복을 누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시대에 주님께로 돌아올 많은 영혼들이
                축복받고 격려 받는 사역을 감당할 사명감을 갖고 붙여진 이름이다.
                멤버 모두가 서울예대, 백제예대, 숭실대 출신의 전공자들로써 작곡자를 따로
                두지 않고 팀원들이 직접작곡, 작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축복을 노래까지 하며 축복을 구하나 무엇이 진정한 축복이기에,
                예배의 시작부터 시작하여 설교의 시작과 끝 그리고 축복기도
                축복, 축복... 진정 축복을 받아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이 넘쳐서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복음의 의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대정신을 잃고 복을 받고 누리자는 기복신앙의
                축복은 이미 축복이 아니다.

                축복기도(Benediction) 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로
                가톨릭의 성자 베네딕트에서 유래되었다는 로만 가톨릭의 기록이 있다.
                < 가톨릭의 성자 베네딕트는 약 480년경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orcia)에서 태어나서
                누르시아의 성자로 불리우며 로마제국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로마 동쪽의 Sabiner 에 3년 동안 은둔하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영적인 스승이 되어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529년에 마지막으로 세운 Monte Cassino 수도원이다.
                베네딕트는 Benedict 는 라틴어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온 말로
                ‘축복받은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인으로 불리는 베네딕트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를 독살하려고
                마실 포도주잔에 독약을 넣었는데 이를 모르고 성인은 전과 다름없이 정성을 다해
                그 잔에 십자가로 축복하였더니 그때 그 잔이 즉시 박살났다고 한다.>
                그는 547년경 몬테카시노에서 죽었으며 8세기 말부터 7월11일에 그를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969년에 가톨릭의 축일(Natalis S Benedicti)로 지정되었으며
                베네딕트는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디모데전서 4:1]



                [MD할리우드] ‘겨울왕국2’ 이디나 멘젤, “엘사 여자친구 원한다”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겨울왕국’에서 엘사 목소리 연기를 담당했던 이디나 멘젤이 속편에서 엘사의 여자친구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22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 레드카펫에서 ET온라인과 만나 “엘사를 고무시킬 수 있는 좋은 생각이다. 나는 디즈니에게 그것을 생각해보라고 할 것이다. 엘사는 내 인생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미국 성소수자 단체 GLAAD(the Gay & Lesbian Alliance Against Discrimination)는 지난 3일(현지시간) ‘겨울왕국2’에 엘사의 여자친구를 만들어달라며 SNS에서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엘사에게 여자친구를 줘(#GiveElsaaGirlfriend)’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글을 올리고 있다. 2,500명을 목표로 진행되는 서명운동은 현재 399명이 모자란 2,101명이 서명했다.


                이 단체는 엘사를 동성애자로 선언하면 LGBT(성소수자) 아이들에게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현재 ‘겨울왕국’의 주제곡 ‘렛 잇 고’는 LGBT 공동체에서 찬송가로 불리고 있다.


                ‘겨울왕국2’는 2018년 개봉 예정으로, 현재 프로덕션이 진행중이다.


                [출처: 마이데일리]



                * 2014년 겨울왕국이 개봉할 당시 이 영화 속에 동성애라는 주제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본 블로그의 글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바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성애 문화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왕국 속에 담긴 동성애 코드를 이해못했지만, 개봉 당시부터 미국에서는 이미 겨울왕국을 동성애 영화로 규정하고 이를 분석한 글들이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분석글들 가운데 본 블로그를 통해 소개되었던 내용 중에 일부이다.


                “겨울왕국이라는 작품 속에는 동성애라는 주제가 숨겨져 있다. 사실 ‘숨겨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노골적이다. 겨울 왕국은 다르게 태어난 한 어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이 때문에 동성애적인 메타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 역자주).


                그녀의 부모는 이 소녀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또 한편으론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엘사의 진정한 속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존재로 취급되어 궁전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그의 가족들과 사람들은 그녀를 배척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것이 영화 ‘겨울왕국’ 스토리이고, 또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을 주제로 한 독립 영화들 속에 담긴 전형적인 스토리이기도 하다. ” (출처>>)


                우리가 흔히 ‘가족영화’라고 알고 있는 겨울왕국과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에 대해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현재 제작 단계에 있는 겨울 왕국 2에 엘사의 여자친구가 등장해야 한다는 요청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큰 흥행기록을 남긴 영화 겨울왕국 속에 담겨진 동성애 코드(메시지)는, 이 영화 속 주인공 엘사에 열광하는 어린 아이들의 생각 속에 동성애에 대한 암묵적인 호기심과 동경심을 심어 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 겨울왕국은 2차 대전 이후 CIA와 함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Mk Ultra Projcet(마인드컨트롤) 실험을 진행했던 일루미나티 기업 디즈니가 이 땅에 많은 아이들을 동성애자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한 마컨 작품인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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