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서린 주검만 쌓인다 ...


자유가 없는 땅이다. 무슨 뜻인가? 사생활이 없다. 보호받지 못한다. 5호담당제·인민반제도·생활총화제도, 끊임없이 감시받고 단속되고, 가택수색도 무작위다. 정부 문서 표현처럼, ‘주민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다.


대체 무슨 죄인가? 북한에 태어난 죄 아닌 죄이다. 선거로 대표를 바꿀 수도 없다. 촛불시위는커녕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다. 불평을 했다간 잡혀갈 뿐이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이상이다. 법도 원칙도 없다. 똑같은 재판에 서로 다른 재판과 처벌이 된다. 김정은의 욕지기가 율법이다.


죽음의 영이 법이다. 도망갈 수도 없다. 여행증과 구간별 단속, 강제추방과 접근금지, 짐승처럼 사육된다. 교화소·노동단련대·집결소·구류장, 맘대로 가두고 멋대로 때리고 억지로 노동케 만든다. 노동교화형·노동단련형·노동단련처벌·노동교양처벌·무보수노동처벌 온갖 고문과 형벌들. 그리고 함부로 죽인다. 한 서린 주검만 쌓인다.


수백만이 죽었을까 아니면 수천만인가. 남한의 작은 허물에 쉽게 화내는 우리는 어째서 북한의 절대 악엔 이토록 관대한 것인가? 그렇다. 금수저·은수저·동수저, 계층과 차별은 굵어지고 분노한다.


잊지 말라. 강도 맞은 이웃을 외면할 때 닫힌 사회 가난과 저주는 더욱 번져갈 것이다. 주님이 기뻐할 금식이 물댄 동산, 샘의 원천이다. 깨져야 할 것은 남한의 ‘수저론’ 이전에 북한의 3계층 56개로 분류다. 부모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을 정하는 원시적인 폭력이다. 역사 속의 연좌제, 북한의 계급은 이렇다. 봉건시대도 이렇진 않았다. 봉건 시대, 노예제 사회다.


▪ 기본군중 : 1. 혁명가 2. 혁명가 가족 3. 혁명가 유가족 4. 영예군인 5. 영예전상자 6. 접견자 7. 영웅 8. 공로자 9. 제대군인 10. 전사자 가족 11. 피살자 가족 12. 사회주의 애국희생자 가족 13. 기타


▪ 복잡한 군중 : 1. 인민군대 입대 기피자 2. 인민군대 도주자 3. 귀환군인 4. 귀환시민 5. 반동단체 가담자 6. 일제기관 복무자 7. 해방전사 8. 건설대 제대자 9. 의거 입북자 10. 지대 관계자 11. 금강학원 관계자 12. 정치범 교화출소자 13. 종교인 14. 월남자 가족 15. 처단된 자 가족 16. 체포된 자 가족 17. 정치범 교화자 가족 18. 포로 되었다가 돌아오지 않은 자의 가족 19. 해외도주자 가족 20. 지주 가족 21. 부농 가족 22. 예속자본가 23. 친일파 가족 24. 친미파 가족 25. 악질종교인 26. 종파분자 가족 27. 종파연루자 가족 28. 간첩 가족 29. 농촌십장 가족 30. 기업가 가족 31. 상인 가족


▪ 적대 계급/잔여 분자 : 1. 지주 2. 부농 3. 예속자본가 4. 친일파 5. 친미파 6. 악질종교인 7. 종파분자 8. 종파연루자 9. 간첩 10. 농촌십장 11. 기업가 12. 상인성분



<4~5살 아이들이 중국 땅에 팔려간다>


중국 땅의 인신매매. 돼지처럼 팔려간다. 강제송환과 강제낙태와 영아살해. 나는 적지 않은 글들을 썼었다.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10대 중후반 미성년 여자아이들이 꽃제비로 지내다가 인신매매꾼에게 팔려간다. 4~5세 되는 아이들을 중국에 ‘양자’로 보내기 위해 인신매매를 통해 넘겨진다.


한국인은 우리 아들딸이 아니기에 외면한다. 자신의 소박한 행복만을 지키려 버둥댄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사명을 따르진 않는다. 겉 사람이 지배하는 종교인의 민낯이다. 속사람은 눌려있는 대다수의 얼굴이다.


▪ “함경북도 온성군 노동단련대에서 동료수용자 여성 1명(36세)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보안원에게 구타당해 유산했음(2011년 10월).”


▪ “평안북도 도 집결소에서 동료수용자 여성 1명(26세)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군의관이 보안서 병원 내에서 강제수술을 시켰음(2011년 10월).”


▪ “양강도 집결소에서 동료수용자 여성 1명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계호원에게 구타당해 유산했음(2011년 11월)”


▪ “2012년 지역 미상의 집결소에서 동료수용자가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구타를 하여 유산을 유도하였음. 양강도 혜산시 미상의 구금시설에서 동료수용자가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음(2012년 7월).”


▪ “양강도 혜산시 보안서 구류장에서 동료수용자 1명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음(2012년 11월).”


▪ “함경북도 길주군 노동단련대에서 동료수용자 1명이 임신 중이어서 노동이 힘들다고 했음에도 강제노동을 하다가 자연낙태하게 되었음(2013년 5월)”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중국 땅의 인신매매. 돼지처럼 팔려간다. 강제송환과 강제낙태와 영아살해.

나는 지금껏 적지 않은 글들을 썼었다. 하지만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북한 수용소 시설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의 배를 걷어차는 일은 일상적”이라는 탈북여성들의 증언은 되풀이된다. “아이를 비닐에 싸서 살해한 뒤 화장실에 버리게 하였다” “온성 OOO에서 탈북여성 수감자의 출산한 아이를 비닐에 싸서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청진 OOO에서 ‘중국 놈의 아이를 뱄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자마자 비닐에 싸서 질식사시키는 것을 목격했다(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백서(2007)’)”


90년대 중·후반 대량 아사 기간 중엔 더 잔인했다.

“박스에 아기 시체가 가득 차면 밖으로 버려졌다” “산모가 보는 앞에서 수건으로 질식시켰다” “아기를 박스 안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비닐에 싸인 채 창고에 죽을 때까지 방치됐다” “젖은 비닐봉지에 넣어 질식시켰다” 데이빗 호크의 ‘감춰진 수용소(Hidden Gulag)’에 나오는 증언들이다.


조사 및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 및 비인도적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 비인도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권리와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 벌레보다 못한 신세이다. 주님은 무엇을 원할까? 침묵인가? 타협인가? 공존인가? 이른바 평화인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 시 “차후도 당분간 공산압제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성명을 냈었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에 있는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유엔은 이 목표를 위하여 확약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국가적 목표, 국가 이성은 빛바랜 휴지가 되었다. 압제의 땅에서 탈출한 상당수 탈북자들마저도 김정은 정권을 유지·지원·강화할 이유를 말하고 다닌다. 햇볕정책을 지지한다. 북한의 맘몬을 피해 이제 남한의 맘몬에 절한다. 초라한 생존의 몸부림, 측은한 사람들.


그러나 예수의 영을 받은 이들은 미혹치 마소서. 가련한 동포를 잊지 마시오. 모른 체 하지도 마시오.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기 위해 부르짖어 외치소서. 주님이 내리칠 심판의 칼날을 피하소서.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소서.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인생"이기에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아래 "세가지"에 있어서 <한국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분명한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이해를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세가지는 정치적 이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슈로 그치는 것도 아니라) '영적인 이슈'로 나라와 후대 가운데 큰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는 요인들인 것입니다.


이에 <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리더 되시는 교계 어른들은 이 세가지에 있어 더욱 분명한 견해를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민감하고 이해관계>가 얽히 섥힌 주제들이란 것을 알지만, "십자가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다!"라고 분명한 진리를 외쳐 주셨기에 마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세가지 중요 사안에 있어 분명한 소리를 내주심으로 듣고 따르는 성도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그 위치에 계신 분으로써 맞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원하셨던 "진정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북한정권>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취해 주셔야 합니다.

아래의 사진들만 봐도 북한 정권은 이해할 수도, 함께 해서도 안되는 집단입니다.



북한 전역에는 무려 3만 8천여 개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김일성, 김정일 시체를 보관하기 위해 금수산기념 궁전이란 것을 지었는데, 무려 8억 9천만 달러라는 큰 돈을 썼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 굶어죽은 북한 주민들이 3백만 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이 돈으로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샀었더라면 많은 북한의 주민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돈입니다.


둘째로 <동성애에 대한 입장>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품자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동성애에서 벗어나 치유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동성애 확산을 막음으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답게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복음을 말하는 분들이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는데 어떻게 '동성애'에 있어 성경의 입장과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나아가 한국교회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기독 언론 일부는 지속적으로 친동성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적 오보>는 성경의 진리를 거스르게 하는 것을 넘어 왜곡, 변질까지 시키는 것입니다.


13. 셋째로, WCC/종교통합에 있어 분명한 마음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함께 섬기라는 말은 없습니다. 아니 "인정치도 말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진리가 이러한데도, 얽혀도 너무 얽혀진 것인지 적잖은 리더십들이 WCC를 옹호하며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강건너 불 난 것 구경하듯 내 일이 아니듯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무슨 올림픽처럼 좋고 감동 있는 전 세계의 종교적 축제의 하나로 여기며 WCC 개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한다!"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영역에 있어서는 침묵하며 가만히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당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복음을 외쳐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세워주셨기에 선 자들이 더 분명히 설 수 있도록 교회당 밖, 선교지가 아닌 한국 땅 한복판에서 분명히 외칠 수 있도록 높이 올린 깃발처럼 외쳐 주었으면 합니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해도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북한 정권, 동성애, WCC>가 결국 "하나의 문제, 한 뿌리, 하나의 영"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생명책>에 기록될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영>,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 <세가지 영역>에 있어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 마라나타!



출처: 김영표 목사님 페이스북

포도주와 떡의 약조

 

홍수가 나서 물이 밀려 내려오는데 강 아래에 대책 없이 앉아 있으면 쓸려 내려갈 것입니다. 산불이 나서 타들어오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타 죽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는 누가 망대를 쌓으려면 먼저 앉아서 망대를 쌓는데 드는 돈과 자기가 가진 돈을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진 군사는 일만인데 이만의 군사를 거느린 왕이 쳐들어온다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승산이 없으면 빨리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린다면 미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미련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세상이라는 뜨뜻한 욕조에 느긋이 들어앉아 즐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두워가고 멸망과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빛을 찾고 진리를 찾고 자신의 생명길을 찾는 고민은 없습니다.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고민하거나 두려움 가운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그들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와 아이를 진멸한 것을 듣고 대책을 강구하고 머리를 짜내어 묘수를 찾아내었습니다. 사신의 모양을 꾸미고 낡은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해어지고 찢어진 가죽포도주 부대와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본진이 있는 길갈로 찾아와 화친조약을 맺자고 청합니다. 여호수아가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 멀리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무리는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속아 그들과 불가침 화친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그들이 바로 가까운 곳에 사는 진멸대상인 기브온 거민이라는 알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맹세 때문에 그들을 어찌하지 못 하고 살려 주어야 하게 됩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종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물 긷는 자와 나무 패는 자들이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다섯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치려고 쳐들어오자 여호수아는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가서 기브온 족속을 구해내는데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우박을 적군에게 퍼부어 죽게 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 온종일 해가 지지 않도록 하여 그들을 진멸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도망쳐 굴 속에 숨었던 가나안 족속의 다섯 왕을 쳐 죽여 나무에 매답니다.

설사 기브온 족속이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과 맺은 약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족속에게 손을 대지 못 하게 하셨고 그 약조를 깨뜨리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포도주와 떡이었습니다. 그들의 포도주는 낡은 가죽주머니에 담기고 그들의 떡은 마르고 곰팡이가 났지만 주님의 보혈을 의미하는 포도주, 주님의 살을 의미하는 떡은 결코 변질되지 않으며, 주님의 언약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멸당해야 할 기브온 족속이고 거짓말로 속임수를 쓴 교활하고 악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예수와 발음이 비슷함) 앞에 포도주와 떡의 언약을 들고 나아온 그들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훗날 다윗왕 때에 혹심한 기근이 삼년이나 계속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왕 때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학살한 죄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기브온 족속에게 학살과 학대를 자행한 일곱 사람을 끌어내어 기브온 족속에게 내어주어 목매어 달게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진노가 그치고 기근이 그쳤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 편에 속해야 삽니다. 어떻게 해서든 메시아의 계보에 속해야 생명을 얻습니다. 말세의 징조와 심판의 그림자가 가까울수록 말입니다. 거기엔 도덕과 체면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을 숨겨주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했으며 메시아의 계보에 속하게 됩니다. 룻은 죽기 살기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랐고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밧세바는 남편을 배신한 부정한 여자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체면을 생각하고 도덕을 지켰더라면 그들에게는 결코 구원이 주어지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최고지선(最高至善)입니다. 우물쭈물 따질 일이 아닙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생명을 구원해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최상의 선택

 

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할 일들을 만나게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직업, 결혼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것, 어찌보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 하루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감옥 안에서 후회하며

지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순간 잘 된 선택으로 일생이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말같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 버릴 사안은 또 아닌 것같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고 하는 한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

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것과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의사로 다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인지 알면서도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자기 목숨을 던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보여주는

최상의 선택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순간의 모든 선택이 하나 하나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내 주위에서 내가 만난 한 영혼을 구원시킬 것이냐,

아니면 방치해 둘 것이냐, 하는 선택은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당신의 일생에 허락된 그 많은 선택의 시간들 중,

과연 “최상의 선택”에 사용되어진 시간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12:3절 말씀)”

 

글/최송연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최상의-선택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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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 중반까지 직장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신학공부를 할 때도 직장 생활을 하였고 전도사 시절에도 강도사 때도 목사 안수를 받고도 직장 생활을 하였다.

한마디로 직장과 교회를 겸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언젠가 부목사가 된 나에게 담임목사께서 수요예배 설교를 하라는 명이 떨어졌었다.

직장 퇴근시간이 6시이니까 7:30분에 드리는 수요예배에 설교하는 일은 시간상으로나 경험으로나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목사 초년생에게는 멋진 설교를 해서 성도들에게 목사로써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칭찬도 받고 싶었고 또 담임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은 왔고 난 직장 근무 중에 틈틈이 시간을 만들어 준비한 설교 원고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면서 만만의 준비를 하였다. 

퇴근시간 30여분전!

사장실에 고위직 인사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퇴근시간이 되었다고 훌쩍 자리를 떠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6시가 넘어 갔다. 도무지 두분의 면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교회에 갈 시간은 다가오고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역역했다.

이대로 퇴근하여 교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예배시간이 임박해 왔다.  갈등은 계속되었다. 교회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가

만일 퇴근해 버리면 사장이 노발대발 할 것이고 또 중대한 업무를 지시할 수도 있을 텐데 여비서 혼자 놔두고 퇴근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반대로 교회를 포기한다면 성도들과 담임목사는 뭐라 할까? 목사가 직장에 매여서 설교해야 할 자기 본분을 잃고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는 목사가 진정한 목사인가 한마디식4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갈등 속에 나는 그날 교회 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는 자기 직분에 사명감이 투철한 사원으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뒤엎어버린 파렴치한 목사로 남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민 사회에서 주일에 일을 하는 성도가 많아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신앙심이 좋은 교회 직분자들도 있을 것이다. 주일이 되면 이들도 지금 갈등한다. 교회를 가야하느냐? 직장을 출근해야 되느냐?

직장에서는 주일에도 교회를 포기하고 일하러 나온 용감한 사원으로 박수를 보내는 반면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한 믿음 없는 직분자로 인정해 버린다.

과연 직장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권 안에 들어간 거룩한 성도이고, 반면 주일 예배를 포기한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권 밖으로 밀려난 성도인가?

 

여기에 기독교 상황윤리가 적용된다.

현실적 상황에 따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주일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직장도 가정도 포기하면서까지도 주일을 지켜야 할 상황이라면 우리의 마지막 선택은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내가족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직장을 선택했다고  믿음도 져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우리에게는 이원론적인 사상적 흐름이 현대사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은혜받는 곳으로 이원화 시킨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교회 안에만 은혜가 수여된다고 하였나,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직장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사건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신앙은 갈등에 연속이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세상을 선택하셨나요? 대답은 아니요이다. 비록 직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인해 함께 교회 공동체와 예배를 못 드렸지만 그들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에 대단 열망이 더 강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결단코 주일을 못 지켰는데도 당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늘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 주일에 교회 공동체와 함께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 주시고  믿음도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들어 있을 것이다.

 

반대로 교회 못나가는 것이 현실이 어쩔 수 없어서 못나갔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성도들에게 묻는다. 어쩔 수 없어서 이젠 당연한 것이 되었다고 여긴다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두자.생활에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21:34)

 

갈등!

이 육신이 벗어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모두 갈등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일께다.     

 출처: 김동욱 500/한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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