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하루 최송연 눈부시게 화사한 햇살 아니어도 좋네 나의 작은 창가에 한 줌 햇살 스며들면 족하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실바람 아니어도 좋네 내가 숨 쉴 수 있는 한 줄기 바람이면 족하지 하루살이 같은 인생 너무 욕심내지 않는다면 내게 주어진 이 하루가 神의 크나큰 은총인 것을 ...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 34 下),(빌 4:11-12 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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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仙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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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exander Warenberg & His Orchestra - Old Melody (From The Deer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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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선택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인가요? 만일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해 놓으셨다면, 그 문제에 관해 나는 실제로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마치 비밀장치와 과학기술이 사람들의 손을 올리거나, 복도를 걷게 하거나, 기도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며 종종 복음 전도를 한다. 우리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문제는 사람들이 죄로 물던 본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중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보가 불충분할 뿐이므로 감동을 주는 신앙고백이나 찬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로 그러한 수단들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중생이나 회심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게끔 만들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리시는 결정이지, 우리가 그 분을 위해 그렇게 결정할 리가 결코 만무하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할 때, 그 대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지불하셨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보로 보증하셨던 것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 -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한량없는 부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백인은 누구든지 오라! 혹은 미국인은 누구든지 오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어떤 사회-경제적 집단이나 정치적 집단, 혹은 인종적 집단으로 복음의 제안을 한정하시지 않는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만찬에서는 환대받는다. 하지만 사람이 오고자 의지적으로 결단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고 회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실제로 올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외부에서 그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과 자아 중심적 성향을 변화시키시고 생전 처음으로 죄악으로 가득 찬 의지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므로, 그때부터 우리는 새롭게 거듭난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예전에 마음대로 하나님을 싫어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는 아낌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기로 결정하셨고 우리가 반항하는 상태에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것을 이루셨는데, 감히 어느 누가 그것에 대해, 특히 우리가 예전에 말했던 모든 것이 '아니오'라는 부정뿐이었던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나는 예수님이 내 마음대로 행하도록 방치하시는 '마음씨 좋은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거슬러 강요하는 실력행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직시하게끔 만듦으로써 그리고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급하시는 완전한 자유의식으로 압도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는 자가 되도록 설복하신다.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게 되면 그 은혜는 절대로 거부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사람의 눈을 여실 때에 그 사람이 즉각적으로(효과적으로) 보게 되며, 성령께서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때에 하나님을 적대하던 사람들은 곧 그 분을 따르는 자가 되고, 죽었던 자들은 살아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비유에서, 어떤 의지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람들의 의심, 가령 눈먼 사람이 의지적 행동을 통해 시력을 회복한다든지, 골이 깊은 원수가 단지 어떤 결정을 통해 하나님의 편이 된다든지, 혹은 죽은 사람이 자기 부활을 통해 살아난다든지 하는 것 등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한번 살아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소생시킨 사람은 영적 죽음과 또다시 하나님한테서 소외당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그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류가 없고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이 넘치는 권유와 은혜로운 구속으로 우리를 붙잡으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한 사람들을, 그분께서 정하시고 용납하신 때에 자기 말씀과 영으로서, 그 본성적 상태인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으로 불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성을 영적으로 구원을 얻도록 일깨움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그것들을 제하시거나 강압적으로 그렇게 하시지 않고) 새롭게 하시며, 자신의 전능한 권능으로 무엇이 선인지를 결정케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끄신다(제5장).

바울 사도는 구원에 대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라고 공포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원치 않는다거나 달리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결정과 경영과 사역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처음에는 상당히 불쾌하고 귀에 거슬리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다른 대안을 가진 삶을 훨씬 능가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분개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자아 중심적 태도가 지닌 잣대가 아닐 수 없다.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Michael S. H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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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언으로 말함과 그 후에 따르는 방언 통역은 누구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방언과 방언통역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목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방언 통역과 함께 하는 방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들을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며, 그리고 신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경배하도록 촉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헌신하기를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와 계속되는 말씀에서 바울은 공중 예배에서 말했을 때 방언은 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이해가 되는데, 왜냐하면 적절하게 통역이 된 방언은 하나님의 장엄함과 영광에 대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능력에 힘입은 표현에 끌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예언의 은사를 혼동합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구별했습니다. 그는 예언의 은사의 목적은 굳건하게 하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 31). 그러므로 예언은 주로 믿는 자들의 유익함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의 말씀을 들은 믿지 않는 자들도 또한 책망을 들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4, 25).


칼빈의 핵심 교리 해설 (2) -정준모 목사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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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통과한 사명

 

                                       김지철

 

이 세상을 살피시는 하나님,

눈이 있어도 이 시대의 위협이

얼마나 크고 위험한 것인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귀가 있어도 이 시대의 탄식과 신음을 듣지 못했고,

들어도 그냥 무심히 넘겨 버렸습니다.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보면서도

마음에 거룩한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무관심이 우리 생각과 삶을 지배했습니다.

 

 

우리의 눈을 여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격는 위기가 우리 자신의 위기임을 깨닫습니다,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랑을 잃어버린

지도자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있고, 여기에 나 자신이 있습니다,

 

 

성령님이시여,

우리의 못되고 완악한 마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처럼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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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럴지라도


어느 기독교 웹사이트에서 읽은⌈미안하다, 죄인이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힘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순결을 지켰습니다. 미안합니다.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공평과 정직을 행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처벌이 두려웠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남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보답이 돌아오길 기대했을 뿐입니다.
나는 세상쾌락을 멀리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돈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저 그게 속 편히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 본성과 본질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돼지도 수세식 우리에 계속 목욕시키고 닦아주면 얼마든지 오물 속에 뒹굴지 않은 깨끗한 동물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돼지일 뿐입니다.
인간도 죄를 지을 수 없는 환경 속에 두고 24시간 감시하고 지키면 죄 안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죄인일 뿐입니다.

사과에 칼질을 하면 사과즙이, 복숭아에 흠집을 내면 복숭아즙이 나와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善)이라면 오른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어야 하고, 원수도 사랑하여야 하며, 찔러서 상처를 입히고 설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해도 그 말과 행동과 마음에서는 악(惡)이 아닌 선(善)과 축복이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금이나 보석은 오물 속에 넣어도 금이요 보석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거룩하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고 변질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예수 믿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크리스천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예수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이 마음, 여전한 죄성은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가짜 크리스천인가?”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조차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몸부림을 친 흔적이 로마서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롬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바울이 이럴진대 저와 여러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죄의 본질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고서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았다 해서 낙망하거나 구원을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벽돌 굽던 노예의 성품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행군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애굽의 고기가마 곁에 머물고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마늘을 먹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서 여전히 변화되지 못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군병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단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격이나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구원하시고, 가나안을 정복할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으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단 말입니다.
만일 인간의 본질이 바뀔 수 있다면 바꾼 다음 구원하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바꾸어지지 않는 죄악의 본질을 가진 죄인을 구원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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