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죄, 진짜 도적질>
- 관련말씀: 로마서 7장 7-14절

죄에 너무나 둔감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어때? 세상이 다 그러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말이나 도적질 정도는 죄로 여기지 않으며 자신에게 불리하면 거짓말해도 정당하다고 가르치는 세상입니다. 국민학교 학생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가 안 훔쳤다고 거짓말을 하며 돈을 훔친 캐셔도 딱 잡아 뗍니다. 미국법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을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한국법원도 감금이나 강제, 위계, 심지어는 미란다법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의자가 한 자백의 법률적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간첩도 무죄방면을 하고 있습니다.
도적질이 죄가 아니라 도적질하다가 들키거나 도적질했다고 자백하는 것이 죄인 세상, 도적질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행위가 범죄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세대는 죄에 대한 집단 무감각증과 마비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그런다고 해도 죄는 죄입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죄는 죄입니다.
양심이 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의 심중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죄와 관련된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죄 문제가 없다면 기독교는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세상의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만유의 주(主)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거나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대한 죄는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토록 지으심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도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도적질해서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사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주인노릇 합니다.
탐심과 우상으로 놀아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애인이 도적과 놀아나듯 원수와 놀아나고 더럽혀지는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그 죄를 모릅니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착하게 살면 됐지,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자기 자신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탈취한 죄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이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이대니까 그제야 죄를 보고 깨닫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진 죄를 보고도, 죄를 깨닫고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주인노릇을 쉽게 포기하지 못 합니다.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 자신을 자기것으로 삼으려는 도적심보 말입니다.
탐심은 죄를 깨달은 다음에도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고 주인노릇을 계속하게 만듭니다.
탐심은 기회를 보아 율법이라는 거울을 피해 자기의 욕심을 이룹니다.

결국 모든 죄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죄인은 탐심 때문에 자기마음을, 자기자신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지 못 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 자기, 자신의 주인 노릇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바울은 바울서신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아니 바울자신에게까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 도둑놈들아..!!!".

아, 우리는 계속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탐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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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새 언약적 순종 (언약과 조건) / 마이클 호튼

  

언약과 조건

 구속 언약 - 삼위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조약 - 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다윗, 새 언약의 약속은 본질에 있어 불변하며, 깨어질 수 없으며,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관계없는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에 있어 우리는 수혜자지 파트너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언약은 시행상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은혜 언약은 신자와 신자의 후손들과 맺은 언약이다. 은혜 언약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것은 아니다. 즉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은 천상에 있는 이스라엘 보다 범위가 더 넓다. 광야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사용해서 동일한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신약 시대의 상속자들에게 경고했다(히4:1~11).

 

신약 성경은 우리 앞에 최종 구원을 위한 많은 조건을 열거한다. 처음의 회개와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는 견인은 '이것 없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거룩함의 부분들이다(히12:14). 이러한 거룩함은 전달되는 의라기보다는 전가되는 의인 우리의 칭의 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되는 우리의 성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신앙고백의 표지에 의해 양과 염소가 분리될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24장). 그러나 양들은 자신들이 배고픈 자를 먹이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고, 가난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염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했노라고 주장했다. 거룩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되는데, 보통 우리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은 우리 영화와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다. 즉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순종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히6:4~5).

 

이것은 우리가 행위 언약과 구분하고자 했던 무조건적인 약속의 좋은 소식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특히 성경이 있는 이런 중요한 경고를 받아들이는 데 대해 우리 시대에 아주 많은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조심스럽게 차이점을 다시 살피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칭의를 성화와 영화와 구별해야 한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칭의와 구원을 아무런 구별 없이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외에 다른 조건 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구원은 성경에서 넓게 이해되며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을 포함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 칭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선행되는 다른 조건들이 있다. 회심한 어떤 사람의 경험을 상기해 보자. 어떤 사람은 그에게 성경을 주었고, 다른 사람은 그를 교회에 데려갔으며,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그를 회심시키셨다. 물론 세부적인 것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조건들이며, 그러한 것 없이(인간적으로 말해서) 구세주를 아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율법을 들어야 하고, 율법에 의해 죄를 깨달아야 하며, 회개하여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변화되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한때 거부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의 하나도 칭의의 근거나 수단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신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그들에 의해서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칭의의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다. 조건은 수단이 아니다.

 

의롭게 된 자들은 거룩하게 되며, 어느 날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엡2)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가 아닌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다(롬6:4~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적인 눈멂과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화되고 있는 사람만이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런 내적 거룩을 칭의와 구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새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것며,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과 약속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을 구별해야 한다. 율법은 명령할 수 있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다(갈3:21). 율법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자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율법 언약에서 조건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라는 공식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은 언약조항의 성취에 근거해서 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 언약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명 율법의 요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근거는 변한다.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은 우리 돌같은 마음을 살같은 마음으로 바꾸시며 그 마음에 자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워 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해 준 결과다. 약속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것을 또한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 죄 용서를 약속하시고 난 다음 우리 자신의 돌같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반역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공하시는 구원은 총체적인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칭의 만이 아니라 중생, 성화 그리고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이 이 무조건적인 약속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은혜 언약은 기초와 관련해서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구속 언약에 의존한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고집 센 후손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악명 높은 아들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계획을 그들을 통해 성취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계획은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양 무리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끝까지 보호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같은 조건이 우리에게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고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면 어쨋든 우리가 만족시켜야 할 조건 -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끝까지 보호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밀 가운데 섞여 있는 가라지나, 돌짝 밭에 떨어지거나 가시덤불에 의해 질식한 씨다. 어떤 가지들은 열매 맺지 못하고 잘릴 것이다. 이것은 사실 떨어져 나간 사람들, 자신의 장자권을 다른 하찮은 것에 팔아넘긴 에서같은 사람들에게만 위협이 된다. 외적으로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종말에 최후의 추방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매주 함께 모여 언약 갱신 의식에 참여하는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6장에서 무서운 경고 다음에 이런 위로의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6:9).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은 언약 공동체의 회원이며, 언약 공동체 내에 있었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심지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놀라운 유익을 얻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적 연대감이 그 자체로 "구원에 속한 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복음 설교로 우리 마음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로 믿음을 굳게해 주신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성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말씀과 성례를 통해 자신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경고들이 그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결코 꺼져 가는 촛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과 순종- 언약과 조건)에서 발췌, 251~25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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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위대한 선택과 용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세월호!
이 사건속에
부끄러운 선장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희생을 분명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씻기 어려운 상처와 기억을 남겨줬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이 
기억만이 남겨져선 안됩니다
우리에겐 위대한 용기를 가진 전재용 선장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강도만난 이웃을 위해 그 어떤 불이익과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몸소 위대한 사랑을 선택했던
전재용 선장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회자되기를 소원합니다


보트피플 전재용 선장 거대한 희생 & 위대한 생명1

 
http://youtu.be/2zlx0Tn8SHI


▼ 보트피플 전재용 선장 거대한 희생 & 위대한 생명2


http://youtu.be/o7J10E63n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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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률 폐기론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 내지 완전주의 반대편 극단에는 도덕률 폐기론이 있다.

문자적으로 '반(反) 율법주의'를 뜻하는 이 관점에서는 율법이 - 율법의 형벌과 준엄함뿐만 아니라 율법의 규범적 지위도 - 신자에게는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앞에서 제시된 많은 논증들이 여기서도 타당하다. 우리는 신명기부터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에 이르기까지 삶의 규범으로서의 도덕법에 대한 호소의 완벽한 일관성을 살펴보았다. 차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 사이에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율법으로 인해 정죄를 받는다. 사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킬 의무를 더 명시적으로 지운다(갈5:3).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의미에서의 (삶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법 없는(아노모스) 상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다(13절). 바울은 바로 14절에서 율법의 요약이 사랑임을 상기시키며 계속해서 사랑의 표출을 성령의 열매로 추론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도덕법을 루터파 및 개혁파 신학자들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라고 부르는 것 -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지도하는 용도 - 에 따라 적용한다.

 

여러가지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에 대한 똑같은 오해를 공유한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처럼  삶을 위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규정들이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기능한다. 율법 언약에서의 원리는 "이것을 하면 살 것이고 그것을 어기면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복과 저주의 기초는 언약의 조건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다. 그러나 은혜 언약에서 기초는 우리의 대표자이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심으로써 개인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는 이 교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의 가장 충만한 문자와 영에 따라 의롭다고 선언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율법은 믿음으로 가득한 감사의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다.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 심지어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는 기능이라고 가정하는 듯하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의 법과 맺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도덕률 폐기론은 율법주의처럼 전형적으로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 '사랑의 법' 또는 성경에 결코 언급되지 않은 다양한 규칙들 같은) 율법에 대한 몇몇 개념을 재도입하며 - 마치 이런 명령들이 어떤 식으로든 십계명보다는 덜 까다로운 듯이 - 그 개념을 복음과 쉽사리 혼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을 '외적인 준수'와 대비되는 내적인 영에 대한 거의 영지주의적인 집착으로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율법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구약에서 주어지고 예수님이 가장 심오하게 추론하신 율법에 대한 해석이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태도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성화를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자아의 모든 의식을 폐하라는 권면으로 표현하면서도 종종 성화란 결국 인간의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의 규범조차 도닥법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권면은 일종의 법이다.

 

율법은 칭의에 대해서나 성화에 대해서나 여전히 측정 기준이다. 율법을 통해 죄인은 정죄받고 심지어 신자의 가장 훌륭한 행위조차 부족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다.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우리를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로 몰고 가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세 번? 용도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생략하는 이들이 종종 부과한 성화를 위한 부담스러운 규칙들, 기술들, 공식들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단순히 우리의 양심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신자들은 소중히 여긴다. 신자들은 생명을 얻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받은 생명을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율법을 지키기를 갈망한다. 율법은 칭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성화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계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당황하지 않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사랑, 오래 참음, 자비 절제 온유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그와 같은 요약에 잘 들어맞는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의 표현으로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의 심각한 요구 조건과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죄와의 싸움에 대한 비현실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복음은 설령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라"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변형되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실제 관행에 있어서 이 권면은 가장 가혹한 율법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자신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쳤다는 것을 실제로 알겠는가? 완전주의의 율법주의적인 흐름과 도덕률 폐기론적인 흐름은 그와 같은 신비적인 정적주의에서 수렴된다. 도덕률 폐기론은 결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율법주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성화를 다루면서 의기양양한 직설법,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베푸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되살리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은 자신을 완전히 넘겨주었거나 하나님이 자기 방식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둔 특별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두 번째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복이다. 우리가 세례로 말미암아 연합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위기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린다(롬6:13). 우리가 이 기준에 따른 행동에 얼마나 많이 못 미치느냐와 관계없이 우리가 처한 직설법적인 상황에 관한 사실은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가 그 지배권을 상실한 것은 바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은 이 사실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도리어 그런 싸움은 우리의 거듭남과 성화의 실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지을 길이 없다. 그 둘은 사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과 은혜와의 갈등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과의 협력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 사랑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베르카우어는 종교개혁의 관점이 성화나 거룩한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의 관점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되돌려놓기 때문에 성화와 관련이 아주 많다. 믿음은 아무런 주관적인 영향이 없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과 더불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시킨다.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언제나 순수한 선물로서 그 기초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언약은 듣고 응답하며 수동적으로 받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 드리며 이웃을 섬기는 진정으로 쌍방적인 관계를 낳는다. 칭의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반면, 성화에 있어서 그 둘은 씨앗과 꽃처럼 서로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칭의는 신앙생활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성화와 선행의 끊임없는 원천이다. 루터는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믿으며 너의 믿음은 내가 너에게 너를 의롭게 하는 자요 구주로 값없이 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는 의롭게 되어라.'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 때문에 당신을 받아 주시거나 당신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 우리가 유익한 권면은 말할 것도 없고 (거듭남, 죄의 폭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과 우리의 일평생 동안 우리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 우리 몸의 부활과 죄의 현존으로부터의 자유 등과 관련한) 어떤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하더라도 루터가 여기서 요약하는 소식만이 의롭다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이는 믿음 안에 있는 어떤 미덕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각 행위의 혼합된 동기로 인한 번민 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유롭게 선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 때문에 우리의 선행조차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몫이나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닌 우리 이웃의 몫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율법의 이런 가혹한 요구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완전한 엄격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기분 좋게 매우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의 멍에에 메인 이들은 매일 자기 주인에게 특정한 임무를 할당받은 종들과 같다. 이 종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임무의 정확한 분량을 성취하지 못하면 주인 앞에 감히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더 관대하고 공평하게 대접받으므로 자신이 한 일이 불완전하고 반밖에 못했고 심지어 흠이 있더라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저 없이 내어놓고 비록 자신이 아버지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순종과 자발적인 마음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런 자녀가 되어 우리의 섬김이 제아무리 작고 무례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우리의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께 인정받을 것임을 굳게 신뢰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상당한 정도로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칭의 때문에 선행의 불결함은 그 선행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보상받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와 같은 관점은 올바르게 행위의 근거를 믿음에 둘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동기나 그 호의를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떠나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한다. 그런 관점은 우리의 사랑과 섬김은 하나님과 우리 인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는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않지만, 아무리 무기력하게 열성 없이 불완전하게 행해졌더라도,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돌보시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세상을 포용하는 행동주의를 위해 우리를 해방시킨다.

 

복음주의적인 신앙고백서(1560년)는 성화와 윤리가 없는 전가로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기는커녕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성화의 영이 없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가 참된 믿음으로 받는 주 예수의 영은 누군가의 마음을 차지하자마자 곧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이전에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육체와 성령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싸움이 찾아온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의롭다 하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종교개혁의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렇게 되풀이한다.

 

같은 사도가 믿음을 효력 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부른다(갈5:6). 믿음은 또한 양심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섬김을 베풀게 하고 역경 중에 우리의 인내를 강하게 하며 참된 고백을 만들어 내고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좋은 열매와 선행을 낳는다.

 

그런 선행은 개인적인 이득이나 공로에 대한 어떤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라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보완하는 인간의 프로젝트도 아니고 자유의지와 주입된 은혜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다루는 과정도 아니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말씀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창조된 사람들은 그들 안에 거하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을 통해 실제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더욱 거룩해진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이중적 원천(신인협력설) 대신 칭의와 내적 갱신이라는 이중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 자신의 의라는 개념은 죄의 정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즉 단순히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지 않는 거룩함이나 의의 모든 흔적에 대해 우리는 바울 못지않게 강경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과 똑같이 우리도 만일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 창조, 허구가 아닌 실제 초자연적인 거듭남, 영혼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B. 도덕률 폐기론)에서 발췌, 674~6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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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 장로 호칭제 상정 거부

2014/09/17 (수) 09:31 ㆍ추천: 10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는 9월 16일(화) 오전 10시 영원한교회에서 31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이날 남침례회 정체성에 대한 뜨거운 토론들이 진행됐다. 임원회(회장 김영환 목사)는 지방회 규약 수정안을 올렸는데, 핵심은 '호칭 장로'에 대한 것이었다. 미남침례회는 교회에 목사와 집사 직분만 있지만, 한국의 침례교(기독교한국침례회)는 호칭 장로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장로직을 선호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현실적인 문제가운데, 장로를 임직하지는 않지만 '장로'로 호칭한다는 것.


▲발언하는 이창송, 정태진, 최창섭 목사(왼쪽부터)

남침례회와 장로 호칭제

임원회는 몇년에 걸쳐 일부 회원목사에게서 호칭 장로제도에 대한 안이 계속 올라오자, 지난 6월 월례회에서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후 이번 정기총회에 정식안건으로 올린 것. 기존의 지방회 규약은 "장로 장립제도를 시행하는 교회는 본 회에서 자동 탈퇴하는 것으로 정한다"라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본회는 개교회의 안수집사 제도 시행을 원칙으로 정하지만 개교회의 의사와 형편에 따라 안수 받은 집사를 장로로 호칭할 수도 있다"라고 바꾸는 수정안을 냈다.

결론적으로 이 수정안은 회원들의 반대로 상정되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거수로 표결을 한 결과, 과반수가 훨씬 넘는 회원들이 상정 자체를 반대했다. 먼저 원로들이 앞장 서 반대했다. 원로 이창송 목사는 호칭 장로제는 목사와 집사로 이루어진 침례교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더 나아가 집사를 장로로 호칭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상정 자체를 반대했다. 원로 정태진 목사도 남침례회와 뉴욕지방회의 규약 전문에는 신약성경의 신앙과 원리에 따르게 되어 있는데, 호칭 장로라는 것이 성경에 없기때문에 수정안을 상정할 수 없다는 규약발언을 했다. 남침례회 한인총회 총회장을 지낸 최창섭 목사도 성도들에게 침례교회에는 목사와 집사가 있다고 계속하여 가르쳤는데 다르게 가르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최 목사는 장로를 세운다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니라며,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로교회를 하면 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호칭 장로제는 교단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본인은 침례교회 목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호칭 장로제를 반대했다.

호칭 장로제를 찬성하는 침례교 목사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김재용 목사는 호칭 장로제에 대한 수정안은 침례교의 전통의 문제나 성서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개교회의 제도에 관한 문제라며, 성서는 손을 대지 못하지만 제도는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마이클 목사는 "남침례회의 전통은 다른 생각을 가진 교회, 신학이 다른 교회가 모여 연합하는 것이다. 남침례회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신학과 생각이 달라도 선교를 통해 연합해서 하나된다. 또 남침례회가 장로교와 다른 것은 개교회주의이다. 남침례회는 개교회에서 장로를 세운다고 문제시 하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해서 장로를 세우면 이단시 하면 안된다. 장로제도가 없어 좋은 인재들을 다른 교단으로 빼앗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에는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가 큰 남침례회 한인교회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남침례회는 왜 장로라는 직이 없을까? 골든게이트신학교 안상희 교수는 아멘넷과 인터뷰에서 "남침례회는 성경에 나오는 장로라는 직분은 교회의 직분이 아니라 유대나라의 문화적인 위치개념으로 본다. 우리나라에도 '마을유지'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마을유지'가 정치적인 직분이 아닌 것 처럼 성경에 장로라는 호칭이 나오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이라고 보지 않고, 신약교회의 직분은 집사와 목사만 있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단체사진(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임원교체

사업보고 및 임원선출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는 25개의 교회들이 소속되어 있다. 임원선출을 통해 회장에는 부회장 김재용 목사, 부회장에는 총무 이재홍 목사를 선출하여 업무의 연속성을 기대하게 했다. 회장단 회의후 총무 이선일 목사, 서기 박춘수 목사, 회계 안병재 목사, 각 위원장등을 공천했다.

총무부(이재홍 목사)는 사업보고를 통해 5회의 임원회, 뉴욕과 뉴저지 연합 송년모임, 중독 영화 상영, 뉴욕과 뉴저지 연합체육대회 등이 사업을 보고했다. 사회선교부(박진하 목사)는 3개 개척교회에 7천2백불을 지원했다고 보고했다. 교육부(김재용 목사)는 석정문 목사 초청 코칭세미나와 37명이 참가한 목회자 가족수양회 등 사업을 보고했다. 청소년부(노기송 목사)는 찰랜지 청소년연합수련회가 제이콥 김 목사(필라안디옥교회 EM목사)를 강사로 뉴저지 리벤젤 수영관에서 14개교회 128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고 보고했다. 여선교부(이영미 사모)는 연말모임을 가을 소풍으로 대신했으며, 기도모임을 가졌다고 보고했다. 또 새해에는 사모중창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미국의 금권정치-1

 

* 목차

1. 금권정치

2. 미국의 금권정치

3.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인한 미국의 신계급주의

 

 

1. 금권정치

경제력이 있는 소수의 부유한 계층이 지배하는 정치.

한국에서는 흔히 금력(金力)에 의해서 좌우되는 정치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에서 사용된 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 의한 정치(aristokratia)와 부에 의한 정치(plutokratia)를 대립시켰고, 플라톤은 종교의 지배와 부의 지배를 대립시켰다.

금권정치는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각 시대와 각 국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독일의 푸거가(家)는 금융력으로 카를 5세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또 교황 레오 10세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19세기 영국의 로드차일드가(家)는 나폴레옹전쟁에 개입하여 거부가 되고 왕후에 대한 금융과 조세 청부(請負)를 통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본주의시대에도 여러 나라에서 재벌들이 선거자금의 조달 ·매수, 대표자의 정계파견 등을 통하여 정부의 정책을 움직이고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에서 부자의 지배를 의미하였으며, 지자(知者)의 지배나 전사(戰士)의 지배, 그리고 가난한 대중의 지배와 대치되는 하나의 체제를 뜻했다. 그것은 처음 정치참가의 조건으로 일정액 이상의 재산을 요구하는 정체(政體)로서 나타나, 과두제(寡頭制)와 관련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과두제를 플라톤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두 국가의 대립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지배자의 수(數)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자에 의한 빈자(貧者)의 지배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금권정치에 대한 비판은 과두제에 대한 비판과 연결·전개되어 왔다.

원래 정치사회는 어느 정도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산계급(有産階級)에 의해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시대의 지배적 정치형태는 금권정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귀족제(貴族制)가 금권정치와 마찬가지로 소수자(少數者)의 지배이면서도 덕이 있는 인간에 의한 지배였는데 반하여, 과두제·금권정치는 좋지 못한 소수자 지배를 의미하였다. 로마에서는 영토의 확대에 따라 빈부의 차가 점차로 벌어져 제정기(帝政期)에 들어서자, 정치는 황제와 부유계급에 의해 독점되었다.

금권정치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 다시 출현한 것은 중세 후기에 화폐경제가 침투하여 상업이 활발해져서 중세도시가 원거리 무역을 좌우하는 대상인(大商人)에 의해 지배되면서부터이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나 독일의 푸거가(家), 한자동맹(同盟)의 여러 도시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바로 이러한 도시의 부(富)를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근세 이후 절대왕정(絶對王政)이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도시의 부유한 상인은 왕실에 대한 금융을 실시하고 또 조세의 징수를 청부 맡게 되어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시민혁명을 거쳐 근대민주주의가 성립된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정치권력은 인민의 의지에 기초를 둔 것이었지만, 재산에 근거한 참정권(參政權)의 제한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다. 선거법 개정에 따라 그 제한이 철폐된 뒤에도 자본과 정치권력과의 유착은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금권정치라는 말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전개에 대한 좌익(左翼)의 비판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주의(國家社會主義)를 표방한 나치스에 의해 유대계(系) 금융자본에 대한 공격으로서도 사용되게 되었다.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부의 정책은 군사·공공사업을 통하여 많은 이권을 창출한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정부의 사업과 대자본과의 유착이,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가(政治家) 개인 차원에서의 이권개입이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금권정치는 단순히 정치윤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현대정치사회의 구조에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2. 미국의 금권정치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정치는 실제로는 돈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를 치루려면 TV 광고나 유세에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는 거액을
기부한 후원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와 국회에서는 후원금을 내는 대기업과 소수의 부자를 위한 정책이 채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워싱턴은 여러 이익집단(기업, 협회,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로비집단이 번성해 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정부관료 출신이 로비집단이 되기 때문에 쉽게 정경유착이 진행되고, 기업가 출신이 해당 정부기관의 관료가 되어서
기업을 위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미국 국민은 베트남 전쟁,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 레이건의 이란 콘트라 사건, 클린턴의 화이트워터 사건 등으로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정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미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제인데, 어느 정당을 뽑더라도 대선공약을 뒤엎기 일수이며,
서민보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벌이게 됩니다.

미국에서 하원의원을 하려면 50만달러 정도의 돈이 들고, 상원의원을 하려면 수백만 달러의 돈이 들어갑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들은 공식적으로 보조 받은 선거자금 외에 1억2천5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였습니다.
돈줄을 잘 잡는 것이 선거의 당락과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선거기간 대통령 후보의 주요업무는 선거자금
모금활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 정치를 좌우할만큼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미국인들은 '컨트리 클럽'이라고 부릅니다.
컨트리 클럽 회원들은 주로 대기업의 엘리트 그룹, 각종 이익단체와 조합들, 거부들로 이들은 주로 워싱턴의 정치의제를
조율하고, 정당을 지원하며, 거액의 정치헌금을 냅니다.
이들은 거액의 기부금을 민주당과 공화당에 내고, 백악관 만찬에 드나들며, 정당위원회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미국은 정치자금법에 따라 정치헌금을 낼 때에는 여러 통로를 이용하는데, 그 통로 중 하나가 정치행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s, PAC)입니다.
미국은 1904년부터 기업이 연방 선거자금을 직접 특정후보에게 주지 못하도록 법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PAC는 회사직원이나 조합원으로부터 돈을 기부 받아 후보에게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위해 결성되었습니다.

개인이나 PAC는 의회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데, 연방법에 따라 한도액이 정해져 있습니다.
개인은 한 선거에서 한 후보에게 1천달러 이상 기부할 수 없고, PAC도 한 후보에게 5천달러까지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후보에게 전달되는 선거지원금을 유권자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어려운 돈이라는 뜻에서 '하드 머니'(hard
money)라 부릅니다.

이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소프트 머니'(soft money)인데, 소프트 머니는 최고 한도액 없이 누구나 무한정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회사나 조합들이 많이 내는데 액수가 천문학적이어서 선거에 직접 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프트 머니는 당조직 활동비나 당원들의 봉급, 임대료를 내는데 쓰이며, 수백만 달러가 드는 TV 광고료로도 쓰입니다.

이 소프트 머니를 듬뿍 내는 기업이나 개인이 워싱턴 컨트리 클럽의 회원이 되며, 이 중 1백인을 추려 '1백인 클럽'이라
하고, 이들이 미국 정치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클럽 회원들은 금융계 실세, 스포츠 연예 도박 산업을 주무르는 자들, 방송 언론계의 거물, 법조계와 의료계의 실세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안건이 다루어지는 소위원회의 출석을 보장받습니다.
이들은 수백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기부하며, 민주 공화 양당에 선거자금을 내기도 합니다.
연간 2백만 달러 이상 기부하는 기업으로는 필립 모리스, 나비스코, 아메리칸 파이넨셜, 애틀랜틱 리치필드, 암웨이 등입니다.
연간 1백만 달러 이상 기부하는 기업으로는 메릴린치, 쉐브론, 전국교육협의회, U.S. Tabacco C6 등입니다.

미국에는 여러 종류의 컨트리 클럽이 있어 개중에는 자격요건이 까다로운 곳도 많지만, 워싱턴 컨트리 클럽은 누구나
현찰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경영악화로 한 번에 수천 수만명씩 해고하면서도 정치자금만은 꾸준히 냅니다.
AT&T, 시어스 로벅, GTE, 나이넥스, 델타 항공, 체이스 맨하튼 은행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국인의 99.97%가 한 번에 2백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낼 수 없는 형편임을 감안한다면 단 0.03%의 사람들이 미국의
주요 국가시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0년대 중반 선거법 개정과정에서 등장한 이 소프트 머니 시스템은 민주 공화 양당의 무한대 선거자금 모금 경쟁을
유발하였습니다.

소프트 머니는 미국의 정치구조를 부패시키고, 양당 간의 정책노선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더 많은 기부금을 유치하기 위해 기업끼리 거래를 붙히고, 기업은 더 강력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많은 돈을 내려 합니다.
이로 인해 워싱턴의 정치는 거대한 돈 시장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워싱턴에서 각종 행사의 저녁 만찬에 초대되려면 최소한 1만달러 정도는 내야 하고, 5만 달러 정도 내면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국회의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1995년 클린턴 대통령이 담배에 대한 연방세를 올리고, 담배회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히자 필립 모리스와
나비스코 같은 담배회사는 즉시 공화당에 230만 달러를, 민주당에 42만 달러를 기부해 힘을 썼습니다.

1994년 공화당은 뉴욕에서 정치자금 모금파티를 열고, 누구나 10만 달러만 내면 공화당 간부들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할 수 있고, 정치기류에 대한 설명회도 듣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나란히 사진도 찍게 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도 이에 질세라 누구나 10만 달러만 내면 기부자뿐 아니라 부인까지 동행해 대통령과 식사를 하고, 덤으로
엘 고어 부통령과 힐러리까지 만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마련했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고 취소했습니다.

워싱턴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은 기부금을 모으는 능력이고, 이런 능력을 갖춰야 2선, 3선 의원으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하원의원에 출마하려면 44만 달러가 들고, 상원의원에 나가려면 440만 달러가 듭니다.
상원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려면 매주 1만 5천 달러씩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상원의원은 의정활동보다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선거자금을 모아야 다음 선거를 치룰 수 있습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 후보는 9천만 달러를, 클린턴 후보는 1억 3천만 달러를 썼습니다.
1992년 각 당의 전당대회 비용까지 합쳐 대통령 선거에 든 총 비용은 5억5천만 달러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모으고 쓰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워싱턴의 정치방식입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은 바쁜 와중에도 파티 참석자와 3시간에 걸쳐 일일이 악수를 하곤 했습니다.

미국에서 정치가 못지 않게 막강한 힘을 가진 부류는 통상 로비스트로 이들의 입김에 따라 미국의 국제무역이 좌지우지됩니다.
통상(通商) 로비스트는 미국 다국적 기업을 대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주로 외국기업이나 외국정부 또는 특정 이익단체를
대변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통상 로비스트의 수가 늘어나면 미국의 대외 무역적자는 늘어나고, 미국 중상층 삶의 질은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해 국내산업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로비스트의 영향으로 강력한 무역제재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5년 통상 로비스트는 554명으로 늘어났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1,610억 달러로 증가해 수백만명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외국 기업들은 로비스트를 앞세워 미국 관세를 낮추고, 수입상품에 대한 각종 제약을 완화했습니다.

통상 로비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국가는 단연 일본으로 이미 30년 전에 대미 통상 로비에 관한 책을 낼 정도입니다.
미국에 대규모 수출을 할 때부터 일본의 대기업이나 무역단체, 정부부처들은 영향력 있는 워싱턴의 로비 법률회사에 의뢰해
이들로 하여금 의회나 관련기관에 나가 일본을 대표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은 통상 로비를 위해 연간 1억 달러 이상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최혜국 대우를 받으며 미국에 가장 낮은 관세로 수출하고 있는데, 1985년 중국의 대미 수출액은 38억달러에서
1995년 445억달러로 증가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대중국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낮은 수입관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통상 로비스트의 활약 뿐만 아니라
중국에 시장을 노리는 미국의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중국의 입장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3.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인한 미국의 신계급주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날로 심해져 주체할 수 없는 재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특권층 계급이
있는가 하면 저임금과 실업으로 생계가 어려워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는 저소득 계층이 있습니다.
미국의 헌법부터가 대부분이 부자인 55명의 백인 남성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졌고, 노예제도를 합법적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미국은 현재도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 정책 등을 계속하고 있고, 노동자의 권리와 혜택은 축소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1987년 한 해 동안 미국 전체 인구의 1/5 즉 5천만명 이상이 연평균 5천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소득층의 가난은 필연적으로 절망을 불러 일으켜 범죄와 폭력, 마약중독과 알코올중독, 정신질환과 가정폭력,
가정파괴와 결손가정 등을 유발합니다.

미국 정부는 200만명의 살 곳 없는 미국인들에게 줄 보조금은 과감히 삭감하면서도 700억 달러나 들어가는 스텔스
폭격기 개발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는데 1,500만명의 저소득 계층이 식량배급표를 받지 못해 만성적인
영양불량 상태에 놓였으며, 아사를 면하기 위해 구걸하는 사람이 3만명이 넘었습니다.

미국의 빈부격차가 심해진 사상적 배경에는 잘살던 못살던 자기 책임이라는 자유방임주의와 경제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는 희생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주요 기능이 부자와 권력 있는 자로부터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은 역사적, 정치적, 제도적으로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 헌법을 기초한 55인은 대부분 부유한 노예주, 법률가, 상인, 채권소유자, 기업인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지 워싱턴의 최측근 보좌관이자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정치사상을
지도철학으로 삼았습니다.

해밀턴은 "모든 사회는 소수집단과 다수집단으로 나눠진다. 소수집단은 부자와 명문가 출신이며, 다수집단은 대중이다.
그러므로 최상층 계급에게 명확하고 영속적인 정부역할을 부여하도록 하라."고 언급했습니다.
부자들은 정부가 빈자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 주기를 원했고, 독립선언서에 쓰여졌던 '생명, 자유, 행복추구'라는
문구는 헌법 비준과 동시 폐기되고, 그 대신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새로운 문구가 헌법 수정조항 5조로 등장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출발부터 부의 분배보다는 부자들의 재산권을 지키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적으로 '탈주 노예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노예가 다른 주로 도망쳤을 경우 그를 본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법률입니다.
정부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가차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여 보조금을 조성해 은행가들이게는 연방은행(national bank)을 세울
수 있는 자금을, 제조업자들에게는 관세 형태의 보조금을, 채권 보유자에게는 정부 차원의 보증을 제공했습니다.

남북전쟁 이전에 수십년 동안 자본가들은 정부와 의회의 특혜적인 지원에 힘입어 막대한 부를 형성하였습니다.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는 철도와 운하 설립자들은 스스로 자금을 마련하지 않고, 입법부에 뇌물을 제공함으로써 마련했습니다.
1856년 위스콘신의 라크로스 앤드 밀워키 철도회사는 90만 달러 상당의 주식과 채권을 72명의 주의회 의원과 주지사에게
제공함으로써 100만 에이커의 땅을 공짜로 얻었습니다.

1850년대 10년 동안 주정부들은 2,500만 에이커의 공공토지를 철도 투기꾼들에게 무상으로 불하했으며, 수백만 달러의
융자까지 덤으로 안겨주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거국내각(National Goverment)은 1억 에이커가 넘는 토지를 여러 철도 자본가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Union Pacific Railroad)는 1,200만 에이커의 공짜 땅과 2,700만 달러의 정부융자를 챙겼습니다.

이에 반해 매일 5마일에 달하는 철도를 놓으면서 더위와 추위로 수백명씩 죽어 나갔던 2만명의 노동자(퇴역군인과
아일랜드 이민자)를 위해서는 정부는 땅 1평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1~2달러를 받고 센트럴 퍼시픽에서 일했던 1만명의 중국인 노동자와 3천명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한 푼의
융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미국의 경제공황 당시에는 노동자의 1/3이 일자리를 잃었고, 기아와 노숙이 전국으로
화산되었지만 이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재계를 위해서는 철도법의 시행, 하천과 항구 개발, 운하건설에 투입된 수억달러의 재정기부금, 해운사업과
고속도로 건설업에 지원금, 높은 관세장벽 등으로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재계는 미국 정부의 공권력과 군사력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1954년 CIA는 과케말라에서 유나이티드 푸르트 사(United Fruit)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의 대통령을 제거했습니다.
1973년 미국 정부는 IT&T(국제전신전화회사)와 공모하여 칠레의 국부를 너무 많이 착취해 외국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1984년 미국 군수계약 순위 상위 12개 기업 중 5개 기업이 상당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연방 소득세를 단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12개 순수 기업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확보한 수익은 190억달러였는데, 이들의 평균 세율은 겨우 1.5%였습니다.
반면 당시 미국 중산층은 소득의 15%를 세금으로 납부하였습니다.

기업은 정부의 경찰력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소작인과 노동자의 파업을 강제로 진압하였습니다.
철도 노동자, 직물 노동자, 탄광 노동자, 자동차 고무 철강의 노동자들이 지방정부의 경찰력과 연방군대에 의해 탄압�습니다.
기업가들은 법원에도 의지해 변호사를 고용하여 찬사의 판결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파업과 보이콧을 불법화하고, 피케팅을
규제하며, 파업 주도자들을 투옥시켰습니다.

1905년 뉴욕주 입법부가 제빵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하루 10시간, 주 6일 노동으로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을 때
대법원은 이 법이 계약의 자유를 침해함으로 위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고속성장을 이룬 미국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는데 1914년 한 해에만 3만 5천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고,
70만명 이상이 상해를 입었습니다.

1911년 뉴욕시의 트라이앵글 피복회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계속 일을 시키기 위해 작업 중에는 문을 잠가 두었습니다.
그래 3월 25일 화재가 발생했고,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8,9,10층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불길 속에 갇혔고, 대부분 불에 타 죽거나 창문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이었고, 그 중 146명이 죽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의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대물림 되어 '새로운 계급제도'(신계급주의)가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소득이 높은 계층의 자녀들은 좋은 환경과 교육여건에 있기 때문에 저소득층보다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몇 배나 높습니다.
재력가들에게 유리하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미국의 경제제도는 부자들은 더욱 부자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이에 반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뉴질랜드 등 서유럽 선진국들은 자본주의의 병폐인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일찍부터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복지국가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세금을 국민복지보다 국민에게 쓸모 없고 전쟁의 위험성만 높히는 군사비 지출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가 발달할수록 중소기업이나 중소상인은 도퇴되어 중산층은 몰락하고, 소수의 대기업과 임원에게만 부가 집중됩니다.

 

* 참고서적

1. 미국 현대문명 보고서 (박영배, 미채)

2. 오만한 제국 (하워드 진, 당대)

 

잠언 11/4 재물은 진노의 날에 유익하지 않으나, 의는 죽음에서 구해 내느니라.

잠언 15/16 소유가 적어도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큰 재물로 인하여 고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23/4~5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네 자신의 지혜를 그칠지니라. 네 눈을 허무한 것에 주목하려느냐? 재물은 반드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향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전도서 5/8 네가 어느 지역에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함과 재판과 정의를 심하게 왜곡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 일을 이상히
여기자 말라.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이가 지켜보시며 그들보다 더 높은 이가 있음이라.

마태 16/25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마태 19/23~24 그 후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또 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더라.

누가 12/19~20 그리고 나서 내 혼에게 말하기를, 내 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혼을
네게서 앗아가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누가 12/33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헤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들라. 고갈되지 아니하는
하늘들의 보물이니, 거기에는 도둑도 접근하지 못하고 좀도 손상시키지 못하느니라.

야고보서 5/1-6 이제 오라, 너희 부자들이여, 너희에게 닥칠 재난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의복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들의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일꾼들에게 속임수로 주지 않은 품삯이 소리지르며, 추수꾼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그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분은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계시록 18/2~3 그가 큰 음성으로 힘있게 외쳐 말하기를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 이는 모든 민족들이 그녀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로 취한
까닭에 땅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또 땅의 상인들은 그녀의 사치의 풍요함으로 부유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더라.


 


출처: 사모님사모님/피스마리아

그리스도와의 연합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왜 아직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 연합을 다루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는 온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 역시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제보다 더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속이 적용되는 여러 측면만 더불어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구속이 적용되는 한 단계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넓은 견지에서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속이 적용되는 모든 단계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속을 적용하는 일에는 물론, 단번에 이룬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심에 자리한다. 구원 과정 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한 단계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구원은 다름 아닌 이 연합의 다른 단계들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짧은 표현이 말하는 것이 바로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단순히 구속의 적용을 의미할 때만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어떤 측면은 구속의 적용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포괄적인 의미를 먼저 이해할 때, 구속의 적용과 관련해서도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련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살펴보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디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부께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 성부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셨다. 여기에 내포된 것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 전에 성부께서 우리를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성부께서 영원한 사랑의 경륜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 우리가 그 원천에까지 구원을 최대한 거슬러 가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자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것도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과 연합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롬 6:2-11, 엡 2:4-6, 골 3:3-4).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구속 역사를 생각할 때, 창세전에 성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죽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리스도와 백성들 간의 연합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은혜의 신비로운 작정과 상관없이 구속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엡 5:25).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졌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지금 바울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받음으로 확정되었다.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누리기 시작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라는 사실에 놀랄 이유는 없다. 영원 전에 성부의 택정하심으로 구원이 시작된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단번에 구원에 참여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제로 구속에 참여한 자가 될 때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보류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새 생명의 시작만 그리스도 안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이 지속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동일한 관계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된다(롬 6:4, 고전 1:4-5, 참조. 고전 6:15-17).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살아감으로 신자들은 새 생명을 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잠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살전 4:14, 16).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음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만큼 이 연합의 불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죽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죽음으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 하지만 그렇게 분리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와 더불어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때, 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고전 15:22).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된다(롬 8:17).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의 선택에 뿌리를 박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결실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평은 광대하고 장구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 않고 영원까지 이른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야는 두 개의 초점을 따라 궤적을 그린다. 하나는 영원한 경륜 속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신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영광이다. 전자는 그 시작이 없고, 후자 역시 그 끝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와 더불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영원한 세대를 통틀어 계속될 완성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조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세의 역사로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땅의 역사가 의미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은 신자들이 이런 조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영광의 소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것이 무엇인가? 신자들이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경륜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당하는 여러 어려움과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자들로 하여금 큰 확신으로 장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항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초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장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택정하심의 실체를 확신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 항상 현재적으로 누리는 그분과의 연합이다. 영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것처럼, 지금도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성부로부터 받는다(참조. 엡 1:3-4). 신자가 영원한 기업의 후사로 인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셨고, 그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참. 엡 1:13-14).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니고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암담함과 두려움뿐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음으로 시간과 영원의 전체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주 포괄적인 주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시작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 종국적인 결실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구원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는 어느 한 단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취와 적용에 이르는 구속의 전 과정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친히 값 주고 사셔서 구속해 주시기로 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효력 있게 적용하고 나누어 주실 것을 확증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구속이 효력 있게 적용되기 전에는 실제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도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상기시켰다(엡 2:3, 12).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를 위해 유효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는 그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것이다(고전 1:9). 이처럼 성부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이 있어야, 사람은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고 구속의 복을 누리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적, spiritual"이라는 말만큼이나 더 자주 왜곡되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모호하거나 막연한 느낌을 가리킬 때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과 관련해서 쓰인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행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마음이란 성령에 붙잡히고 성령에서 비롯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연합의 끈이 바로 성령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참조. 고전 6:17, 19, 롬 8:9-11, 요일 3:24; 4:13). 우리는 구원하는 은혜가 역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긴밀한 관계를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은 주의 영이시고 그리스도는 성령의 주다(참조. 롬 8:9, 고후 3:18, 벧전 1:11).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나큰 신비다. 성령이 연합의 끈이라는 사실은 이 신비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신비를 환히 밝혀 준다. 한편으로는 이 신비를 감각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한 감성으로 다가가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인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누리는 연합은 한 하나님으로 세 위께서 누리시는 그런 연합과는 다르다. 삼위 하나님의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보는 연합 -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 과도 다르다. 우리가 누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한 인간을 이루는 연합과도 다르다. 단순히 감정, 정서, 지각, 생각, 마음, 목적과 같은 것들의 연합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연합이다. 하지만 성령의 본성과 사역과 일치하는 아주 신령한 연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고 그의 백성이 그분 안에 거하는 연합은 성령의 본성이나 사역과 일치하는 우리의 분석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신령한 연합이다.

 

2. 이 연합은 신비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신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에 나오는 "신비"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해가 도무지 불가능하거나 불가사의한 일을 가리키기 위해 흔히들 이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성경이 신비라는 말을 쓸 때의 의미는 아니다. 로마서 16:25-26에서 사도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신비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우선, 영원 전부터 신비로 간직되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 감취었다. 둘째, 하지만 계속해서 감추인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나타나고 알려졌다. 셋째, 하나님 편에서의 이런 계시는 성경을 통해 이루어졌고 성경에 담겨 있다. 성경을 통해 온 나라들에 계시되었고 더 이상 비밀로 감취어 있지 않는다. 넷째, 이 계시가 목적하는 바는 온 나라들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비란, 눈으로 보지 귀로도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계시와 믿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 우리가 누리게 된 비밀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가 바로 이 같은 신비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면서, 그것을 남편과 부인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과 비교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바울은 또다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하면서 이 연합에 대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한다(골 1:26-27).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 연합의 가치와 이 연합에 포함된 친밀함을 잘 알 수 있다.

 

이 연합을 성명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광범위한 유비가 아주 인상적이다. 가장 고차원적으로는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 간에 이루어지는 연합에 비교된다. 너무나 경이롭고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요 14:23, 17:21-23). 가장 낮은 차원으로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돌들과 그것들을 떠받치는 모퉁잇돌과의 관계에 비유된다(엡 2:19-22, 벧전 2:4-5). 이 두 가지 경계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관계와 존재에서 비롯된 많은 각종 유비들이 이 연합을 성명하기 위해 성경에 등장한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 사이의 연합과도 비유된다(롬 5:12-19, 고전 15:19-49). 남편과 부인이 이루는 연합과도 비유된다(엡 5:22-33, 참조. 요 3:29). 인간의 몸과 머리가 이루는 연합과도 비유된다(엡 4:15-16). 포도나무와 가지에도 비유된다(요 15장). 이처럼 생명이 없는 존재의 영역에서 삼위 하나님의 위격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존재들에서 비롯된 유비들이 이 연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원리를 배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과 방식을 모퉁잇돌과 다른 돌들 사이에 이루는 것과 같은 연합 정도로 격하시켜서도 안되고, 포도나무와 가지가 이루는 연합으로 한정해서도 안되며, 사람의 머리와 몸, 혹은 남편과 부인이 이루는 연합으로 축소시켜서도 안된다. 연합의 방식과 본질과 성격은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다. 유사하기는 해도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간의 연합을,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차원의 연합 가운데 하나로 한정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연합을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 간의 연합의 차원과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유비는 동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곧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삶 속에 결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비유들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고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원리인 유비가 곧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무엇을 서로 비교했다고 해서 그것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피조물이 참여하는 이런 모든 연합과 조화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이 바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이다. 가장 위대한 신비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경건의 신비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육신 가운데 나타나신 성육신의 신비다(딤전 3:16). 하지만 피조물이 참여하는 가장 위대한 신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이 신비라는 사실은, 그것이 신성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누리는 연합과 비교된 사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믿음을 발휘하는 데 포함된 기이함을 묘사할 때 우리는 흔히 신비로운mystical 이라는 표현을 쓴다. 믿음의 삶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신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사귐은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를 말한다. 믿음의 삶이란 승귀하셔서 영존하시는 구속자와 누리는 살아 있는 연합과 교제의 삶이다. 믿음이란,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구속을 성취하신 구속주에 대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요 중보자로 영존하시는 분을 믿는 믿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믿음이란 살아계셔서 구원자와 주가 되시는 그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정점에서 발휘되는 것을 교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비교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사귐은 어디에도 없다. 의식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그의 백성들은 그분과 교제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한다(벧전 1:8). 믿음의 삶은 사랑의 삶이요, 사랑의 삶은 교제의 삶, 곧 영존하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과의 신비로운 친교의 삶이다. 믿음의 삶은 죄와 상관없이 자기 백성들과 같이 모든 일에서 동등하게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들이 당하는 유혹과 고난과 연약함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가지신 분과의 사귐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쇠와 같은 냉랭한 이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믿음의 삶이란 열렬하고 뜨거운 사랑과 사귐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참된 신앙의 면류관이요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체 구원 교리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작정된 모든 것, 단번에 이루신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획득하고 보장된 모든 것,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고 참여함으로 누리도록 하신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복의 상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될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라는 이 범주 안에 다 포함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과 복락의 정점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양자됨이란 있을 수 없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기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바울은 성부께서 거룩하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을 택정하신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 삼으셨다고 덧붙인다(엡 1:4-5).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한 백성을 택정하신 것과 양자 삼으시기 위해 예정하신 것이 대구를 이룬다.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이렇게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표현 방식을 통해 우리는 성부께서 이루신 선택에 포함된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본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양자됨은 이 놀라운 은혜를 상보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준다. 양자됨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정점에 이르고, 양자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다(롬 8:17).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2-23).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고가 감취어진 그분과 연합되었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그들은 완전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함이 없이 풍성한 은혜와 진리와 지혜와 권세와 선하심과 사랑과 의로움과 신실하심의 샘에서, 이 세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장차 누리게 될 삶을 바라는 소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길어 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만큼 주 안에서 확신과 능력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하는 진리는 없다. 이 진리는 또한 성화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승천하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얻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연합에 포함된 고상한 특권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인식함으로 감사와 순종과 헌신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연합은 교제를 의미하고, 이런 교제는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경외하고 사랑과 겸손으로 동행하게 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 측면을 간과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누리는 데 심각한 결함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다른 위격들과 누리시는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위격들과의 관계를 적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0:30).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가지시는 것과 유사한 관계를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바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너무나 엄청난 말씀임이 분명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물론 성부께서도 오셔서 신자 안에 거처를 정하신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말씀은 아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일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신자들과 연합하여 그들과 함께 거처를 정하시는 분은 성부만이 아니다. 성령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의 연합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는 요한의 말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은 예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하신 증거를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만들고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고상한 차원의 신비다. 여기서 신비란 뭔지 모를 막역한 느낌이나 황홀경과 같은 신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참되고 살아계신 한분 하나님과 사귀는 신비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에서 각각의 위격이 가지신 독특함을 누리는 세 분의 구별된 인격과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부를 알고, 아버지로서의 그분만의 독특한 성품과 역사를 통해 그분과 교제한다. 그들은 또한 성자를 알고, 아들과 구주와 구속주와 존귀하게 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가진 독특한 성품과 역사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한다. 그들은 또한 성령을 알고, 대언자와 보혜사와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이 가진 독특한 성품과 역사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한다. 이 교제는 황홀경 가운데 누리는 몽롱하고 막연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에 기초한 믿음이요,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 계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믿음이다. 이뿐 아니라 깊은 감정의 샘을 솟구치게 하는 거룩한 사랑과 기쁨에 겨운 믿음이다. 신자들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엡 2:6).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골 3:3).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하게 된 마음과 물로 씻기움을 받은 몸을 가진 그들은 믿음의 확신으로 가까이 나아간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가 아닌 하늘로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뵙고 있기 때문이다(히 9:24).


 

[구속,2부 14장,복있는 사람,pp.23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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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CONNOR`S READING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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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Connor|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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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 박향리 일명 불알나무









☞ 별의별 다양한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은 참 재미있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위 젖가슴 열매를 보니 웬만한 여성 젓가슴보다
     더 예쁜것 같습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얼마 전 한 일간지를 통해 ‘교회 건물을 여호와 증인에게 매각 결정’이 보도돼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당시 교회 관계자는 교회 매각 문제가 논란이 되자 ‘보고만 받았을 뿐’이라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이런 교회의 행동에 실망한 몇몇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최근 크리스천 포스트에 한 건물 안에 교회 예배와 사탄숭배자들 미사가 함께 드려지는 것과 관련된 논란이 보도되었다. 사탄 숭배자들과 한 건물에서 예배 드린다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해당 교회 목사는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고 당당히 목회 소신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오클라호마시 커뮤니티 교회(Oklahoma City Community Church, OKC) 담임인 톰 매닌(Tom Mannin)은 최근 자신들이 예배 드리는 건물 안에 있는 시청 뮤직홀에서 사탄숭배자들의 블랙미사(black mass)를 이달 말부터 같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한 시의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매닌 목사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랑의 사도로서 반응하길 원하며, 예수께서 그를 반대하고 싫어했던 이들에게 하셨던 그 방식대로 우리가 대응하길 희망한다”라며, “우리는 은혜와 평화로 다양한 믿음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길 기도한다”고 말하며 시청센터에서 블랙미사를 가지려는 Dakhma of Angra Mainyu를 향해 언급했다.

그는 블랙미사를 올리려는 이들에 대해 적개심을 표현하는 이들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마태복음 5장 38-42절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미움을 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주 쉽다”라며, “하지만 누군가가 싫어함에도 사랑으로 대한다면 그 미움은 지속될 수 없다. ‘응보의 법’을 뛰어넘어 사랑의 법칙으로 승화시킨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클라호마 시는 금년 초 주정부가 운영하는 시민 센터(civic center)에서 블랙미사를 가지려하는 사탄숭배자 그룹(satanist group)에게 극장 사용을 허락했으며, 이 그룹은 오는 9월 21일(일)에 미사를 드릴 예정이다.

이 소식은 오클라호마 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했으며, 반기독교 의식을 허락한 오클라호마시의 결정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7월엔 블랙미사 중단을 요구하는 3만 7천명의 서명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오클라호마 공화당 주지사인 매리 폴린(Mary Fallin)은 사탄그룹의 의식을 ‘가톨릭 신앙에 대한 역겨운 조롱’(disgusting mockery of the Catholic faith)이라 폄하하면서, “미국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호를 받긴 하겠지만, 그것이 비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라며, “뉴욕 사탄숭배자들이 오클라호마까지 왔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유발하는지 깨닫고 이 행사를 취소하길 기도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호와 증인’에게 건물 매각을 한다는 점이 두려워 남 탓으로 일관한 교회의 태도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걸 알면서도 나름 소신을 밝힌 매닌 목사의 태도를 단지 문화의  차이로 돌리기에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두 장면이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6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 마이클 호튼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복음을 죄 용서로 축소시킬 때, 우리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들의 '높이와 깊이'를 잃어 버린다. 우리는 한편으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요구와 다른 한편 성화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자유를 주는 좋은 소식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칭의와 죄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행동과 관계있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독교인의 삶은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복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율법의 제3용도(기독교인의 행동을 위한 가이드로서의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점에, 이 문제는 쉽게 반율법주의(우리는 율법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는 신념)와 율법주의(율법을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신념)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의 삶이 전적으로 어떤 규범도 없이 살아야만 한다고 실제로 믿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십계명은 신약 시대 신자에게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가르치는 그룹에서 양육받았지만, 일련의 비성경적인 문화적 금기사항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말았다. 우리는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마시는 기독교인은 아마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범들이 사실 십계명이 도덕법을 받아들이는 교회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율법적으로' 기능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모두 기독교인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이 질문은 이런 규범이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 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된다. 나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아내가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선물을 아내를 위해 사는 버릇을 충분히 고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종종 아내가 가져야 한다고 또는 아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내에게 사 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받지 못했을 때, 내 반응은 종종 이렇게 될 것이다. "어때, 만일 당신이 크리스마스나 당신 생일 때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게 분명히 말했다면,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자발적이면서 창조적이지는 못했을 거야." 물론 어떤 정해진 날에 자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표현할 때, 아내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시다.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하고자하는 욕구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고집스럽게 자기마음대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우리의 자부심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아내는 나처럼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시는 율법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하는 본성에 뿌리박은 뜻에서 나온다.

 

만일 이런 논의가 사실이라면 -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불변하는 성품의 표현이며, 신약은 도덕적인 율법을 철회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는 것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법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보다 우리의 의무가 더 작지 않다. 이 도덕법은 모세 신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의식법과 시민법과 쉽게 구별될 수 있으며, 여전히 신구약 성도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심지어 인류가 창조될 때 양심에 도덕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은 모든 인류에게도 구속력이 있다.

 

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변호해 왔는데, 이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율법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요컨대, 때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과 복음을 조심스럽게 구별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다룰 때는 이 둘을 혼동한다. 마치 이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 가는 여행길에 율법으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에 있어서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불가능하다. 율법의 여러 가지 용도에 있어 기본적인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즉 율법은 명령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율법(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되는)은 결코 이 이상을 하지 않는다. 십계명이거나 바울의 성령의 열매에 대한 가르침이거나 간에 이러한 도덕적 지침은 인도하고,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려 줄 수 있지만 결코 우리 마음을 움직이거나 우리 행동에 동기부여를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왜 순종이 열매인지를 보여 준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죄 용서만이 아니라 중생과 새로운 순종으로 시작된 완전한 회복임을 상기해 보라.

 

이러한 마음을 다한 신뢰와 순종이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찰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나머지 피조물을 신실하게 다스리도록 하셨다. 우리는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악한 것이 아니라 의롭게,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창조되었다. 타락은 파괴와 분리와 분열을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본성이나 자신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변경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온전한 파트너로서 인간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빛 아래서 우리는 시편 40편에 나오는 시인의 입 속에 담겨진 새 노래를 읽을 수 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6~8).

 

용서는 좋은 것이며, 순종은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반복된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10장에 오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10).

 

논증은 아주 평이하다. 요점은 옛 언약 예배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는 새 언약에 약속된 유일한 언약적 복이 아니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저자는 죄 용서뿐만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대한 예레미야 31장을 인용하면서 다시 되풀이 한다(히10:15~17).

 

핵심에는 우리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번에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이 최종적으로 우리의 언약적 대표에 의해 단번에 드려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 안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향기나는 제물이 되도록 하셨다는 선언이 있다. 말하자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언약 범한 자를 위한 동물 속죄 제물이 아니라 언약에 순종하는 인간 자신이 감사 제물이다. 율법은 어긴 들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모든 죄에 대한 참된 용서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기뻐하시는 감사의 순종적인 을 주지는 못한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죄일에 예루살렘 여행을 위해 가족들의 짐을 꾸릴 때마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데리고 가는 울고 있는 양은 계속적으로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그리고 자신의 뒤에 던져 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묻어 버리고, 우리를 살려 새 생명을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한 가족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용서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히7:19). 복음은 궁극적인 용서와 완전함 두 가지 모두를 준다. 즉 지금 용서와 영광 중에 우리의 것이 될 완전함의 시작을 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에는 용서를 넘는 두 종류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죽음만이 아니라 삶, 십자가에서 기꺼이 처형당하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적 뜻에 날마다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그 순종을 우리 안에서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이 "첫째 것을 폐하심(옛 언약)"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새 언약)"이다. 더 이상 우는 양과 염소가 없으며, 한 몸 곧 우리 주님의 몸이 새 언약 제사 즉 순종과 죽음의 제사가 준비된다.

 

확실히, 우리 순종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내적인 쇄신과 갱신은 언제나 진행 중이며,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의 마음의 거룩과 삶에는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이러한 새 언약의 복은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것 안에 있는 모순은 순종에 근거해 생명을 약속한 바로 그 율법이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롬7:10). 이것은 완전히 직관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종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더 착한 사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에 기록된 율법인 행위 언약을 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은 우리 밖에서 오는 소식이며, 메신저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고 완전히 낯설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종교는 속박이다. 그러나 복음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행한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하나님 자신은 율법 자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하셨다. 율법은 명령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새로 회심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숙한 신자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존 머리가 말한 것처럼, "율법은 칭의에서 한 것보다 성화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 처음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우는 것보다 우리에게 성화를 위한 힘을 주는 것이 율법의 직무는 아니다(심지어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원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와 동일하다. 즉 율법(그리고 우리의 순종)이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고, 구원받아가고 있으며, 구원받게 될 자로서 율법(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대해 반응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심판에서 "무죄 선언"을 해 주는 복음과 함께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서, 그 동일한 율법은 우리 길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을 계시해 준다.

 

용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순종은 더 위대하다. 속죄제물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감사제물은 하나님이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직설법)(롬12:1~2).

 

그러므로 복음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직설법(즉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좋은 소식-하나님의 자비)이 명령법(즉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로서의 율법)에 동기를 부여한다. 율법 언약에 의해 결정되는 성화를 위해 오직 은혜로 용서와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 모순은 그대로 남는다. 즉 율법 언약은 정죄로 인도하는 반면 약속 언약은 율법이 요구는 하지만 결코 줄 수 없는 바로 그 순종으로 인도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비록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언약 공동체에 가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구원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며,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위한 심판은 엄중하다.

 

한 예화가 이 실마리들을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각종 최신 장비를 가진 신형 돛배를 상상해 보라. 위성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돛배는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맞는 계획을 짤 수 있다. 심지어 여러분이 좌표에서 벗어날 때 경보 신호를 울릴 수도 있다. 이제 여러분이 인상적인 장비를 의지한 채, 바다로 나가 돛을 활짝 펴고 전력 항해를 하다 점점 바람이 줄어들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고 해 보자. 그때 돌풍이 갑자기 동쪽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라디오가 경보를 해 준다. 일단의 동료 선원들이 라디오에서 조언을 준다. 그러나 안내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각종 정보들과 동료들의 유익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바람 없이는 안전한 곳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여러분은 온갖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항구로 움직일 수 없다.

 

기독교인의 삶도 종종 이와 같다.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항구에서 나와 우리 죄가 용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아는 기쁨으로 흥분된 채 전력으로 항해한다. 우리 구주에 대한 새로운 사랑으로 감사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구주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지정해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려 한다. 그러나 넓은 바다로 나갔을 때, 영적인 침체를 만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능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영적인 기술의 장식품은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거나, 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또는 영적 승리를 위한 이 계획을 따르거나 죄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 단계들을 따름으로써 배를 다시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안내자들은 흔히 율법(즉 하나님의 지시)도 아니고 복음(즉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동)도 아니다. 단지 동료 선원들의 유익한 조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조언은 복음보다는 더욱 율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사항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언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여러분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느낌을 더 깊게 받게 된다. 완전히 지쳐 여러분은 포기하고 다시는 항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신선한 강력한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바람은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다. 여러분이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신실하지 않은 항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세계에 대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듣는 일이다. 이것만이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해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여러분을 안전하게 항구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전 생애는 항해하는 과정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넓은 바다에 나갔다가, 점점 지치기도 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으로 다시 우리의 항해를 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지점에서도 전력 항해를 하고 있거나 물 속에서 죽은 경우는 없으며, 단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 6~8장에서 발견하는 움직임이다. 승리의 직설법으로 시작해서(6:1~11), 도덕적 명령법을 통해(6:12~14), 다시 직설법으로 갔다가(6:15~7:6), 죄와 싸우면서 완전히 지쳤다가(7:7~24), 다시 승리의 직설법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 돌아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희망으로 가는데, 이런 희망을 위해 지금 우리는 성령을 계약금으로 가지고 있다(8:1~39).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명령보다 인도하는), 율법은 율법이 하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율법이 처음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다가(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인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화된다(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길을 안내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직설법인 선포 없이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절망 아니면 자기 의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많이 우리는 감사함으로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하는 능력을 복음의 덕분으로 돌려야 하고, 그러한 감사가 이루어지는 바른 길을 율법의 덕분으로 돌려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에서 발췌, 257~268p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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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당연한 얘기지만, 짝퉁을 근사近似하게 만들지 못하면 이것으로는 사람들을 속이기가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의 미혹들은 근사해 보이도록 만들어진다. 항상 강조하지만, 이런 근사하게 만드는 과정 중에서는 늘 진리와 거짓이 교묘하게 혼합된다. (물론 처음에는 거짓의 농도가 엷게 시작했다가 차차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의 농도가 짙어질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뉴에이지도 소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그런데 "마이트레야"로 불리는 이 뉴에이지의 재림 그리스도는, 물론 성경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며, 기독교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 앞에 "적"자를 붙여야 할 존재이다. 따라서 뉴에이저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겠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인 것이다. (이 뉴에이지 그리스도, 마이트레야에 관해서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무지개의 숨겨진 위험들<<"을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지금쯤은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겠지만, 현대 뉴에이지 그리스도 개념은, 신지학회의 블라바츠키와 앨리스 베일리<< 등을 통해서 ("마스터"들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전달되었으며, 이후 신지학회를 비롯한 많은 뉴에이지 세력에 의해 증진되어 왔다. 특히, 앨리스 베일리는 이 그리스도 마이트레야의 지상 데뷰(?)에 관한 예언적(?) 내용을 "승천 마스터" 드왈 쿨Djwhal Khul(DK대사)로부터 받아 적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재출현)"The Reappearance of the Christ이란 책으로 발표했는데, 이후 이것은 그들의 교리서 중 하나가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에는 세계통합과 종교통합도 언급되고 있다.)

 

블로거는 그들의 속임수가 조만간 현실적으로 흥행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이미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상당히 진행해 왔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교설들을 증진하는 뉴에이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영문 비디오를 소개하니, 많은 독자들이 아래 비디오를 보고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기를 바란다. (능력이 안 되어서 자막을 달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비디오에 나오는 이미지에도 독자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뉴에이지 재림 그리스도는 집단 그리스도(Corporate Christ/하이어라키) 개념이며, 그들의 "아버지의 집"은 샴발라에 있다 - 비디오 이미지 캡처]

["최종적으로, 더 이상 인류의 요구에 맞지 않는 세계 기구들과 사회 구조들을 재조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래 첫번째 비디오 5:28 ~ 5:39)]

 

[유의! 뉴에이지 비디오]

  .  

 

참고로, 내용 중에 신사도들이 좋아하는 "구름덮음"oveshadowing 개념이 등장한다. 비디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직분이며, 현재 그리스도직은 마이트레야가 맡고 있으며, 그가 2000년 전 예수를 "구름덮음"으로써 예수를 그리스도로 현신시켰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는 승천대사들과 함께 올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The Reappearance of the Christ" 뉴에이지 교리 전문보기<<



행여, 내가...

                      최송연

주님,
날마다 내 영혼의 불을 밝혀주십시오
불어치는 거센 폭풍
연약한 영혼이 감당하기에
너무 거세고 캄캄해
행여, 내가
주의 길을 벗어날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주님,
아침마다 사랑의 향기로 채워 주소서
나를 모함하고 비방하는 말들
연약한 감성이 소화하기에
너무 강팍하고 드세어 
행여, 내가
본분 망각하고 대항할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주님,
흰눈처럼 정결한 당신 영을 부어주소서
마음 깊은 곳에 엉겅퀴로 돋아난
갖가지 절망적인 상념들
연약한 지성이 감당하기에
너무 두껍고 질겨
행여, 내가
거기 얽혀 헤어나지 못할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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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19장 64편)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시편119장 64편)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남편 미국인 형제들과 자녀들이 많은 교회이다. 담임목사님이 교회를 비운 토요일 새벽기도회이다. 목사님이 안 계시므로 성경을 교대로 읽으며 설교를 대신하자 제의를 하고 성경에서 가장 긴 말씀 장인 Psalms (시편) 119편을 영어로 번갈아 가며 176 끝절 까지 회중과 교대로 1절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성경을 교대로 읽어 내려오며 순서가 되어 시편119편64절을 내가 읽게 되었다. 64절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을 읽는중에 내 중심에서 빤짝하며 기쁨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1991년도 5월 마지막 주간에 참석하였던 어느 집회에서의 3째날 새벽 시간이다. 2째날, 분명 은혜를 사모하여 참석하게 된 집회인데, 내일이면 마지막 날인데, 2일째 저녁임에도 아무런 잡히는 것이 없었다. 2박3일을 집회참석, 1주일 왕복 티켓, 자영업을 하는 처지에 1주일 문을 닫으며, 2주반 정도의 영업 손실을 감수하고 참석한 집회인데 2일째 저녁이 마무리되는 시간임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갈급한 심령으로 2일 저녁도 지났다. 3일 째 마지막 새벽을 맞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세상은 간데없이 주의 사랑을 묵상하며 사모하는 심령에 젖어 있을 때인가 보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둘러싸는 듯 하며 주의 사랑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다. 끊임없는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하여 닦아오는데, 마치 온 우주에서 사랑이 끊임없이 몰려 오는 듯 하다. 마치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사랑사랑 피어 오르는 듯한 형상으로 느껴지며 나에게 닦아온다. 사람으로서의 만족의 극치를 보이는 베드로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는 신앙고백이 절로 연상되는 부분이다. 마치 그 집회하던 산장이 천국같이 느끼게 된다. 그 후에 얼마 동안을 눈물로 지샜는지 모른다.

시편119편64절 앞 부분을 읽어보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분명 한글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로 쓰여진 것은 분명한데 받는 의미와 느낌이 영어 본문으로 받는 느낌 보다는 많이 부족하고 감이 전혀 다르다. 받는 느낌이 영어 본문에서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땅 위에 주의 사랑이 가득하도다”

64절 까지 성경을 읽어내려 오다, 영어로 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본문을 읽으며, 그 집회에서 받은 나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실제가 존재함을, 영어 성경에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성경은 계속 읽어 내려가고 있으나 마음의 중심에서는 받은 주의 사랑을 성경으로 comfirm 하며 세상을 다 소유함과 같은 기쁨이 짧은 순간에 빤짝하며 마지막 절을 다 읽을 때까지 기쁨으로 떨리는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다.

주어진 말씀을 읽은 후 모두들 흩어져 기도에 들어간다. 평소에 자주 하던 대로 기쁨이 감사가 되어 기도를 시작하니 찬양으로 입술을 열게 하시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방언찬양이 자유롭게 흘러 나온다.

나에게는 방언찬양 중에 받은 미완성된 곡들이 있는데 대개는 곡을 잊어버리고 만다. 찬양 중에 받은 곡조가 여럿 있으나 오선지에 옮길만한 실력이 없기에 이번에는 곡을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하며 임시로 가사를 부쳐 놓고 기억하는 찬양곡이다. 그 방언찬양을 찾아 시작하려면 도, 레, 미, 파, 솔, 라, 라~ 라~ 라 하며 음을 찾아 가사를 붙혀 부르는 찬양이다. 언제 텔레비전에서 보니 걸 구룹 아이돌이 역시 도, 레, 미, 파, 솔, 라, 라~ 라~ 라 하며 음을 찾아 연습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잠긴동산에게 배워서 따라하는 것만 같다 ㅋ ㅋ

곡에 임시로 부쳐 논 곡의 가사를 소개한다
오! 나의! 예수~ 여! ~ ~ 오! 나의! 구세주! ~ ~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 ~ 오! 나의 예수님! ~ ~ ~

달랑 한 절만 부쳐놓은 미완성 가사이다. 최소한 몇 절은 부쳐 놓아야 가사다운 가사가 되지 않겠는지요. 기쁨으로 벅차하며 입을 열게 하시는 대로 방언찬양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역시 그 미완성 찬양이 흘러 나온다. 그런데 찬양을 드리는 중에 그 동안 끙끙거리며 완성할 수 없었던 가사가 입술에 붙어서 저절로 나온다

1. 오! 나의! 천부~ 여! ~ ~ 오! 나의! 하나님! ~ ~ ~
날 사랑하시는 ~ 하나님! ~ ~ 오! 나의 하나님! ~ ~ ~

2. 오! 나의! 예수~ 여! ~ ~ 오! 나의! 구세주! ~ ~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 ~ 오! 나의 예수님! ~ ~ ~

3. 오! 나의! 보혜사! ~ ~ 오! 나의! 성령님! ~ ~ ~
날 주께로 인도하시는! ~ ~ 오! 나의 성령님! ~ ~ ~

유일하신 삼위일체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를 않는가! 할렐루야! ^^

이렇게 왜, 언제, 어디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찬양을 어떻게 해 왔는가를 간증한다면
먹물로 게시판을 가득 채우더라도 모자를 것이다! 할렐루야!^^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잠긴동산

어찌보면 여자들은

'사랑한다' 라는 말보다 '예쁘다'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예쁘다' 라는 그말을 듣기위해

예쁘지고 싶은 여자들이

평생동안 시간과 돈을 써가며 예뻐지는데 공을 드리는 것도

여자의 의미는 아름다움에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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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예쁘다' 라는 말이 

얼굴에 비중을 둔 평범한 표현이라면 

" 아름답다, 우아하다 "라는 말은

얼굴의 선과 이목구비가

신체적인 비율과도 아우려져

 빚어내는 총체적인 분위기를 말하지 않나 싶다.


*

 

나도 한때는 예쁘다는 말을 듣고자

몸부림을 친적도 있었지만

예쁘다, 아름답다는 내게 해당하지 않는것은

누구보다 내가 너무 잘 안다고 하는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만약

억지를 부려도 용서가 된다면

차라리

 '서글서글하다' 라는 표현이 

그런대로 솔직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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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놀라운것은

  내 능력으로는 절대로 예쁜 여자도 아름다운 여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니

저절로 깨달아 진다는 점이다.

 

물론

'예쁘고 싶다' 는 욕망이

'젊고 싶다' 로 서서히 교체 되긴 했지만

그 억지도

일시적인 집착에 불과 하다는 것도 안다.

 

*

 

음악감독인 박칼린이

 -사는 동안 멋지게-  라는 제목으로..

두번째 에세이  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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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갑자기 '멋지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그런데

'멋진여자' 보다 '멋진 사람' 이 훨씬 마음에 땡긴다.

 멋짐에는 웬지 당당함이 버티고 있는것 같다.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의 늙은 모습에 초연하고,

자신이 선택에서 비롯된 어떠한 결과에도 당당하며

무엇보다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당당할 줄 아는

사람을 향해 나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

 

 앞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나한테도 주어질련지 모르지만

죽기전에

자기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서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을 끊임없이 하면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멋진 사람으로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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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그러기에

 멋지다는 소리도 아무나 들을 수 있는게 아니다. 

 본인이 아닌 주변에서 그렇게 느끼고 또 인정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들 찾는 도전과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

그것을 즐기는 열정과 카리스마를 지닌 박칼린을

그래서

 '멋진 사람' 이라 평가하는 모양이다.

*

 

나이가 들면 인간은 용기를 잃고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데 

 독신도, 음악감독도 아니고

게다가

카리스마 조차 없는 주제에

멋진사람 이고 싶어하는것은 무슨 베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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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sica-

                                                                                   

'냄새란 겉에서 속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속에서 겉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지금까지는

기껏 겉표면에다 냄새를 바르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안으로 부터 스며 나오는 당당한 냄새를 위해

 고민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 또한

'호모사피엔스 Homo Sapiens'

생각하는 사람처럼 갈고 닦는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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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슬
 



'삶의 목적과 의미' (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 / 마이클 호튼

 

 

구약 성경에 대한 모호성

 

~~'율법'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명령을 가리킨다. '복음'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본문을 가리킨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아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신 사실과 하나님이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성취하신 일들을 가르쳐 준다.(23p)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때부터 모든 신자는 성령에 충만하고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수놓인 마음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성령의 열매'로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덕성이나 인품의 성과가 아니라 율법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고 우리 속에서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도록 일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 - 심지어 가장 변태적이고 문란한 사람까지도 - 은 자기 양심에 기록된 법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지만 신자만이 자기 마음에 기록된 율법을 가진다. 다시 말해, 사람은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 수 있다. 거듭나기 전에 율법은 정죄하고 저주할 뿐이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끌 뿐이다. 더 이상 율법은 "당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맡으신 본분을 다하시지 않을 것이다."는 말로 위협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완전한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맡겨진 본분'까지 친히 이행하셨다. 이제부터 이 무조건적인 약속은 자신의 순종이나 노력으로 약속의 어느 한 부분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줄뿐 아니라,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는 새 심령을 우리에게 준다. 바울 사도가 신자의 삶에서 율법을 없애기는커녕,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고후3:3~4)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고 선포한 사실에 주목하라. 

 

이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과 대립되는 위치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생명을 주는 성령을 배제한다면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의 복음 약속도)은 죽은 것임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히려 죽은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고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힘쓸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혹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든지 '더 큰 성령 충만'을 받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생명은 온전히 모든 신자에게 속한다. 성령만이 "허물과 죄"(엡2:1)로 죽은 사람을 끄집어 내어 소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되살아난 사람은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긍정적이고 다정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는 아브라함이 그렇듯이 약속의 후사이며,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의무를 갖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19:6)으로 삼으신 일은 이제 신약 성경의 교회에 적용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벧전2:9)로 구성된다.(27~29p) 

 

바리새인은 성경(오늘날 구약 성경)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도덕규범이나 생활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구약 성경이(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도덕법은 이미 죽음 반대편에 있는 천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 조건 없이 구속받고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오늘날 구약 성경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접근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을 따분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통해 펼쳐지는 구속의 관점에서 구약 성경의 주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새롭게 환기시킬 것이다.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라합과 여러 선지자와 더불어 우리도 율법과 약속이라는 가보를 이어받는다.(32p)

 

율법에 대한 강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미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이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 백성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마치 계명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새 생명에 들어가거나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첫 계명을 시작할 필요가 없으며,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모든 일 -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조건의 성취까지 포함시켜 - 에 기초해 자기 백성에게 친히 주장하시는 전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우리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신다.(34p)

 

도덕적 용도

 

율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이 율법에 완전히 순응할 수 없으며, 자신은 그 도덕적 탁월함에 근접할 수 있다는 식으로 율법을 다루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에 따라 요구하신 완전한 기준으로 율법을 다루어야 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므로) 단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목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님 그분의 의에 도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마음먹지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에 자비로운 천국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에게 율법은 정죄와 심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다윗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율법은 의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로 다가온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시119:32). 양자 됨의 특권을 아는 자만이 시편 기자와 같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말할 수 있다.(36~37p) 

 

 

마이클 호튼의 '삶의 목적과 의미'(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췌, 23~3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19세기 미국의 개척사는

인디언 멸망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인디언=Nativve American)

 

19세기의 미국이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인디언의 영토와 땅은 줄어들었고

그들의 삶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갔습니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유럽 이민자의 수가 급증하게 되자

동북부에 살던 인디언의 땅을 강제로 빼앗더니

 

마침내는 서진하면서

기름진 평원 인디언의 땅은 물론이거니와

비교적 황량한 서부 인디언의 땅마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상당수 부족은 멸망당했으며

살아남은 부족은 전쟁과 강제 이주로 말미암아

인구가 급감하거나 멸망직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연방정부에서

인디언의 땅을 빼앗은 후

그곳에 백인들을 거주시키기 위해

인디언들을 먼 곳의 황량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지요.

 

그 와중에

수많은 인디언들이

추위와 병과 배고픔으로 사망했는데

 

Trail of Tears나

The Long Walk에 보면

당시의 비극적인 참상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연방정부에서는

인디언의 대부분의 땅을 빼앗았지만

너무나 황량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던 지역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사람들은 다른 인디언들처럼 눈물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호피(Hopi)인디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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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피 인디언의 땅 깊숙한 곳에

미국 서부 오지의 비경인 블루 캐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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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은

사지 작가는 물론이거니와

오지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가보아야할 곳 Top 10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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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은

마치 브라운색의 초컬릿처럼,

멀리서 보면 먹음직스러운 바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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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의

지형과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에 접속하면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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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이

호피인디언과 관련이 있기에

여기서는 호피 인디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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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이

연방정부에 의해 고통받았다면,

 

호피 인디언은

인접한 나바호 사람들에 의해 고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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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인디언 지역은

나바호 지역에 둘러쌓여

마치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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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의 땅이

원래 황량하고 척박했지만

그나마 나은 땅은 모두 나바호 인디언에게 빼앗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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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호피 인디언들의 남은 땅은

사람이 살기엔 강우량이 턱없이 부족하고,

 

농사를 짓기엔

너무나 황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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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를 수탈한 스페인 시대부터

호피는 스페인과의 싸움에서 밀리며

세컨 메사(Second Mesa)주변의 고원으로 쫒겨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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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를 전후하여

같은 인디언이었지만

부족이 다른 나바호에 의해

그나마 남아있던 좋은 땅을 빼앗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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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인디언의 삶이 비참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호피 인디언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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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인디언의 주도로인

264번을 운전해서 가다보면

 

간간히 보이는 집들이

60년대의 한국 시골을 연상케 하는데

여기가 과연 21세기의 미국이 맞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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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 인디언이나

동북부의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호피부족 또한 한국 사람들처럼

몽고 반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고 반점은 중국집 이름이 아닙니다)

 

얼굴이 동양사람,

특히 한국계와 비슷하여

한 조상의 갈래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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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부족은 자신들이

푸에블로 인디언의 후손이라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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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부족은

우리네 할머니들처럼

지금도 밥을 먹기 전에 고수레를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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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인디언의 유산 가운데

외부 사람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커치너(카치나, Kachina) 인형일 것입니다.

 

커치너는 토착신의 일종인데

부족에서 만들어진 커치너 인형은

최저 수백불에서 최고 수천불에 이를 정도로 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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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인디언은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모계 사회를 유지하고 있으며

 

족벌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족벌 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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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Hopi)는

peaceful people로서

평화로운, 혹은 평화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한편 Hopi는

perfect이란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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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전체 인디언의 실업률은 평균 약 50%입니다.

 

그런데

호피 인디언의 실업률은

약 7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로 보건데

호피 인디언의 삶은

인디언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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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은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호피 인디언의 우울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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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인디언의

문화와 유산을 사진으로 남긴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Curtis)라는 유명한 사진 작가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커티스가 1922년에 촬영한

Hopi Mother이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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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빅토리아 오스틴 발언 미 교계 파장 불러와
“예배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니


 
▲ 빅토리아 오스틴 [조엘 오스틴 미니스트리 동영상 캡쳐 ]


번영신학의 대표주자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의 아내 빅토리아 오스틴의 발언이 최근 미 교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빅토리라 오스틴이 유튜브에 올린 한 동영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때 그분도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며,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은 말은 그것이 하나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 나올 때, 예배드릴 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때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녀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이에 플로리다 팜 시티 크로스교회 스티브 캠프 목사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빅토리아의 발언은 인본주의적이며 성서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다”라며,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다”라고 전했다.

보수 성향 블로그 레드스테이트닷컴의 편집장 에릭 에릭슨은 영화 <빌리 메디슨(Billy Madison), 1995년 작>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해 “당신이 한 말은 내가 지금껏 들어본 말 중 가장 어리석고 희한한 말이며, 전혀 이성적인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보가 됐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길”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편, 미국에서 간혹 교회 목사의 사모가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는데, 때로 이번 경우처럼 논란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우려가 되고 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부인 빅토리아 오스틴의 문제의 발언 동영상

송금관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출처: USA아멘넷


율법주의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또는 신율법주의)는 (1) 성경의 명령에 대해 완전하고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거나 (2) 불완전한 순종이나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더 다가가기 쉬운 규칙으로 대체하여 요구 수준을 낮춤으로써 오류를 범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전자에 찬성하면서 특히 대중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함축한다."라고 알려진 칸트 윤리학의 특징이 된 원리를 도입했다. 이 원리는 19세기의 부흥주의자 찰스 피니도 호소했다. 피니는 하나님은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실 수 없기 때문에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보편적이고 완벽하며 연속적인 율법에 대한 순종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법적 내지 법정적인 의미에서의 칭의란 있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살편본 것처럼 이 원리는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성 전체는 도덕적으로 죄에 속박되어 있다. 바울과 더불어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단을 배격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관련된] 더 흔한 오류는 율법의 요구를 느슨하게 하고 그 결과 은혜에 대한 개념의 수준도 낮추는 것이다. 중세 후기 유명론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부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엄밀한 공의(적정 공로)에 따르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선한 노력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재량 공로)에 따라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의의 요구 기준을 낮추는 한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행하면 하나님의 재량으로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아우구스부르크 산앙고백서의 변증 부분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오류였다. "그러나 양심이 그 죄와 비참을 올바로 인식할 때 모든 농담과 모든 명랑한 생각은 사라지고 상황은 극도로 무거워진다.....그러나 그와 같은 놀란 양심은 적정 공로로나 재량 공로로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느끼고 그래서 금세 두려움과 절망 속으로 가라 앉는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진영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역사에서도 복음을 새로운 법으로 다루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오류를 지칭하기 위해서 영국 청교도주의에 의해 '신율법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실제로 가톨릭교회 교리문답(1994년)에서는 복음을 '새로운 법'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위해 산상 설교를 사용하고 우리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기 위해 성례를 이용한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을 성취한다. 이와 유사하게 재세례파, 소키누스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구약은 수많은 율법들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반면, 신약은 율법을 사랑으로 대체한다는 가정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 온 율법의 요약이다.(마22:36~40) 사실 모세는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레19:18만 언급하면서. 참조, 롬13:9) 그랬던 것처럼 이미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이런 정확한 요약을 제시했다. 사실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을 성령의 열매 대 육체의 열매라는 관점에서 추론하면서 이를 갈라디아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한다(갈5:15~6:10). 계명들은 단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규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의 명령들(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거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라는 것과 같은 권면들)을 구약의 도덕법과 대조할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는 일종의 법이다. 반면 복음은 새로운 법, 도덕적 엄격성의 이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와 칭의에 대한 자유로운 선언이다. 더 나아가 율법을(예수님이 판단하신 종교 자도자들의 율법 준수와 같이) 단순한 외적 준수로 전락시키는 일은 실제로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인 사랑보다 더 쉽다. 내적인 부패를 위장하는 외적인 거룩함은 얻을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새 마음을 줄 수는 없다.(마23:25~28).....

 

 

율법주의의 한 형태는 완전주의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신자들은 죄를 초월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요한일서 3장 3~4절, 9절에 호소한다. "주[그리스도]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펠라기우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완전한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실은, 도달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반면, 존 웨슬리가 가르친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형태의 완전주의에서는 신자들이 알려진 모든 죄를 초월하여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신자들은 여전히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사랑 안에서 완전해졌다. 웨슬리의 견해는 웨슬리가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의 교리를 고수했으면서도 성화는 뒤이은 믿음의 행위, 보통은 위기의 경험을 통해 주어지며 그런 경험 속에서 '완전 성화'를 얻는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로 인해 구별된다. 찰스 피니는 웨슬리주의의 견해를 넘어서서 원죄와 대속적 속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거듭남을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로 보는 이해를 거부했다.

 

바로 이런 전통에서 '고차원적인 삶' 운동이 특별히 케직 사경회를 통해 출현했다. 이 운동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신비주의적 경건을 도입했다. 그 주요 옹호자들에 따르면 신자들은 첫 회심에 뒤이은 두 번째 신앙 행위(보통은 위기의 경험)를 통해 (때때로 '완전한 항복'으로 묘사되는) 더 높은 차원의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복'에 대한 이 독특한 가르침은 비록 이 경험의 필연적인 증거들에 대해서는 종종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지만 웨슬리주의자(감리교인), 케직 운동 추종자, 오순절파를 하나로 묶는다.

 

칭의와 성화의 분리(그리고 그 결과 의롭다 함 받은 자와 완전히 성화된 자의 분리) 외에도 이런 유형의 완전주의는 일부 신자들(즉, 육신적이라 묘사된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과소 실현 종말론으로, 다른 일부 신자들(즉,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는 과다 실현 종말론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전통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보다 신자의 내적인 삶과 경험과 도덕성에 더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성경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벧전1:16; 마5:48; 약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또다시 "'해야 한다'가 '~할 수 있다'를 내포"하는가 하는 점이다. 거듭난 사람들은 거룩함에 전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몸을 의에 내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일을 완벽하고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경은 죄의 지배가 깨어졌다고 가르치며 이를 바탕으로 죄가 우리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롬6:12). 그러나 성경은 또한 신자의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히12:4)에 대해 말하며 우리에게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할 것을 명한다(약5:16).

 

요한일서 3장의 완전주의적인 해석에 대한 가장 분명한 도전은 바로 그 서신에서 나온다. 요한은 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1:8~2:2).

 

더 나아가 요한일서 3장 9절은 두 번째 복을 받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모든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앞선 구절들에서 요한이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원시적 영지주의의 가르침(즉, 그리스도는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며 실제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시지는 않았다는 가현설적인 관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몸 안에서 저질러진 죄들 또한 단지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그 다음 세기의 더 명시적인 영지주의에서 볼 수 있는 도덕률 폐기론적인 관점이 이런 가르침에 수반되었을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서 행하신 일이 단지 겉모습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육체 안에서 저지르는 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요한이 겨냥한 표적이라면, 가장 적절한 해석은 육신적인 방종에 빠진 삶을 사는 이들은 내적으로 거듭나지 않았다 해석이다. 어떤 경우든 1장의 가르침은 "우리가 죄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한 나머지 "우리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반박한다.

 

칭의가 성화 속에 합쳐지든 성화에서 분리되든 간에 그 결과는 똑같다. 다시 말해 그 결과는 약속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어떤 진정한 변화 - 즉, 두 시대 사이의 갈등 - 도 일으킬 수 없는 도덕주의다. 베르카우어가 "삶의 갱신의 문제가 도덕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라고 썼을 때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바울은 성화, 윤리의 문제, 교회의 조화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부활과 관련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에서 성화에 대한 논의로 넘어갈 때 "믿음의 영역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론에서 실제로의 이행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칭의 속에서의 믿음에서 성화의 실제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칭의의 실제와 성화 속에서의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를 성화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그 둘을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화가 "칭의에서 끊어지거나 추출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칭의와 성화의 구별로 인해 각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인지 인간인지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그와 같은 분명한 분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의롭다 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도록 요청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 될 것이다. 성경이 이런 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가르친다(고전1:2, 30, 6:11; 살전5:23. 참조, 행20:32, 26:18). 바빙크가 표현하듯이 "많은 이들이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이 얻은 거룩함으로 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 최소한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런 오류와 가까운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갈3:1~9).

 

구원의 서정 어느 시점에서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에 있어서도 자연을 초자연적 능력으로 고양시키는, 영혼에 주입된 원리라는 개념을 도입할 여지는 없다. 은혜는 우리가 하등한 자아에 의해 끌어내려지는 연약함에서 회복되어 거룩한 길로 되돌아가도록 우리 안에 주입된 약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은혜는 자연을 해방시켜 진정으로 다시 자연으로 되게 하는 -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모습대로 되게 하는 - 하나님의 은총이며 선물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을 해방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죄에 물든 세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차원으로서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추가적 선물'에 대해 언제나 맹렬히 반대해 왔다." 개혁신학은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영광의 신학'보다 '십자가의 신학'을 변호하려는 루터파의 관심에 공감한다.

 

갱신은 단순히 칭의 속에서 구원에 대한 첨가물, 부속물이 아니다. 성화의 핵심은 이 칭의를 양식으로 삼는 삶이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칭의와 인간의 행위로서의 성화 사이에는 아무런 현저한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라는 사실은 삶 전체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붙드는 믿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한다. 믿음은 모든 것이 그 주위로 회전하는 중심축이다. 믿음은 그 차제로서는 창조적이지 않지만 우리를 자율적인 자기 성화와 도덕주의에서 보존해 준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따라서 우리는 성화의 지점에서조차 주입된 성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 (개혁파 신앙고백서의 진술들이 특별히 마3:1~9; 요6:63; 롬10:8~17; 약1:18; 벧전1:23을 따라 주장하는 바대로) 믿음을 창조하는 것은 복음이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생겨난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성화 및 다른 모든 복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복음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은 믿음, 생산적인 회개, 사랑, 성령의 열매 등 그 모든 것을 주신다. 내적인 거듭남과 점진적인 갱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성령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새로운 삶의 원천은 결코 주입된 원리가 아니라 한 살아 계신 인격이다.

 

"오직 믿음(sola-fide)은 칭의의 핵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화의 핵심이기도 하다."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웨슬리의 교리에 있어서 "오직 믿음은 출발점이 될 뿐 믿음과 성화의 관계는 단절된다. 웨슬리가 오직 믿음을 고수하면서도 신인협력설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두 번째 복을 위해 일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복인 죄 용서를 양식으로 삼도록" 부르심 받았다.

 

완전주의는 장차 있을 영광을 너무 서둘러 취하는 것이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율법주의로 귀결되는 기대다. '두 번째 복'은 그 연결고리를 구성한다.....베드로는 놀라운 어획량에 경악하여 자기 스승의 선하심에 직면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스승의 광채에 휩싸인 베드로는 단지 머리만 조아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말들이 밤공기를 가를 참이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이 말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충성심과 사랑으로 감싸려 했다. 여기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영광에 잠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이 말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를 두고 한 말이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속하는 말이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실질적인 질문은 "칭의가 신비적 연합으로 전달되는 모든 복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한가?라는 질문이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우리 자신의 것이라면 부분적인 의조차도 부정하는 바로 그 교리문답[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24주일]에서 신자들은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오직 이신칭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작이다..... 성화는 단지 칭의의 뒤를 이을 뿐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천국의 열쇠를 논하는 31주일 문답에서는 천국은 "신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들의 모든 죄가 실제로 용서받는다는 것을 신자 각 사람에게 모두" 선포함으로써 열리고 닫힌다고 가르친다. 이 "때마다"라는 말은 믿음과 칭의의 상호 관계가 지닌 계속적인 적절성을 설명해 준다.....십계명을 설교하는 목적도 신자들이 "죄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더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5문].....따라서 구원의 길에서 칭의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진로는 결코 없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진정한 성화는 반복해서 말하지만 칭의와 죄사함을 향한 이 지속적인 방향 설정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성화를 하나님의 칭의의 사역에 뒤이은 인간의 사역으로 보는 "이런 관점의 희생자는 하나의 인과적 과정인 성화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며 그는 결국 가톨릭처럼 주입된 은혜와 양적인 성화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칭의에서 비롯되는 성화에 대한 - 따라서 우리의 모든 복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다는 인식에 대한 - 대안은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 가는 과정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동일시하는 도덕주의적인 행동주의다.

 

그러나 신약에서 '제자'는 본받음을 포함하지만 본받음으로 환원되기는 어렵다. 신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본받음조차 그리스도와 고난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은 우리의 고난은 속죄의 고난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복음의 진보에 기여한다(벧전2:21, 24). 베르카우어가 인식하듯이 "따라서 따르는 이들은 어느 것이든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고침 받았다." 이런 도식에서 본받음이란 "속죄에 상응하게, 속죄를 기초로 삼아 사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양 떼]은 결국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제로 이끌 길이 아니라 그들이 끊임없이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때문에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제자도가 본받음을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단 그리스도가 무엇보다도 우리 대신 들으시고 순종하신 분임을 인식한 다음에는 우리도 그리스도와의 법적 연합뿐만 아니라 유기적이고 신비적인 연합 속에서 더 이상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4:4). 영웅을 닮아 가는 숭배자와 형을 닮아 가는 아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결속은 우리의 맏형을 우리 자신의 성화의 선구자로 삼으시는 성령께서 창조하시고 붙드시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친밀하다.

조지 린드벡은 우리에게 제자도와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올바른 범주는 속죄나 칭의가 아니라 율법의 세 번째 용도임을 일깨워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실재를 근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에 부합되게 살아 가려는 도덕주의적인 시도로 전락한다. 그런 신학에서는 "계시가 구원론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아마도 그렇게 말하겠지만 율법이 복음을 흡수한다."고 린드벡은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무엇보다 먼저 본보기가 되시고 그 다음에 구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 반대다." 말하자면 본받음이라는 주제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우리는 다시 율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이들로 판결한 후에 (율법의 제3용도 속에서) 이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고후 9:21) 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교회 역사 내내 수많은 방식으로" 칭의는 물론 성화에 있어서도 "복음과 율법의 참된 관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을 베르카우어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두 반대되는 경향이 분명히 나타난다. 복음을 새로운 율법으로 만드는 경향과 복음을 율법에서 단절시키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둘 다 하나님의 은혜와는 반대된다. "어떤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바르트는 율법을 그 내용이 은혜인 복음의 형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율법을 이런 지위로 환원시키는데 반대한다. 그로 인해 율법은 실제로 복음 속에서 용해된다."

 

참된 믿음 속에서 삶의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은 조화롭게 계발된다. 율법은 신자를 세상 속으로 - 그의 이웃, 그의 가난한 형제자매(약2:15), 그의 원수, 감옥에 갇힌 그의 형제,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로 - 인도하며 좋든 나쁘든 이 땅의 신들, 결혼, 행정 당국과 접촉하게 한다.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 바울은 반복적인 열정으로 거룩함을 설파하지만 다음과 같은 자신의 명백한 선언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A. 율법주의)에서 발췌, 665~6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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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몽골제국의 위엄, 100만의 인구로 세계를 정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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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약소국이지만 진짜 제국 시절에는 어마어마했네요;;;

 

김영태 - 바람

 
T.S.Nam - Blue Ballon Theme From Jeremy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 속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신을 찾는 인간의 모습이다. 어느 민족이건 그들의 문화 속에, 물론, 그 정도나 형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을 섬긴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고 그 출발점은 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좇겨난 때부터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쫓겨난 그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다.
 
그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유전으로 물려받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가는 곳마다 신을 찾으려하고 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위로 받으려하는 모습을 연출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이 귀소본능(歸巢本能)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영적 무지(無知) 상태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은 오히려 여러 가지 형태의 신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신을 섬기기도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견해이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1.이방인들의 하나님: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장 22절 하)”라고 지적한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많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그 어느 국민보다 더 종교성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다고(행 17: 23절)바울 사도가 지적하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모든 만물이 다 신이다. 산에는 산신령, 돌, 나무, 폭포수, 물에는 용왕님, 하늘에는 일월성신님, 부엌에는 삼신님, 심지어 우리가 먹는 된장 간장독마저 모두 신이 관장한다고 믿을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국민의 종교성이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2.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나 막상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라고 물어보면 정작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 신앙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안에서 잠시 분류해
보면:
 
a.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개념은 막연하다. 하나님이란 하늘 공중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착각하고 있다. 죽은 후에 천당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그뿐이니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천국보험'을 들어 두는 심경이라고나 할까?
 
b.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늙은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복신앙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라 보면 틀림 없다. 이들의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기분이 좋아진 하나님이 복을 한 아름 안겨다 준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좀 시원치 않으면 화가 난 하나님은 당장에 매를 때리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하며 또 물질에 큰 손해를 끼치게도 한다고 착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죄하기를 잘한다. 다른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에 큰 질병이라도 들면, 그것을 저주받은 것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성도가 물질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하나님을 믿는 것에 길든 성도들은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란 불안과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했음을 아는 상태에서 병이라도 들면 불안하고 두렵다. 이런 틈을 타 자칫 신령하다는 자들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뭔가 해결될 것같다는 심리를 이용하는 사이비 치유사역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니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전지전능 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이시다. 도덕적 속성으로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시며, 신실과 공의가 완전하신 분,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짧은 지면에 다 말씀을 드릴 수 없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믿어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성경이 계시해 주고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고 있는가? 그것은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 주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 하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한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심을 믿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청지기 자세'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지난 번에도 잠시 말씀드린 대로, 청지기란 자기의 것이 없다. 내가 누리는 것 중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내게 있는 것은 모두 주인의 것이다. 내 건강, 내 생명, 내 자녀, 내 물질, 모두 주인의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받아 누린다는 개념이다.(시 24: 1절) 따라서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복 받으려고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그동안 받아 누렸으니 그 은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 분의 일을 드린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것인데 십일조뿐 아니라 내 재산 모두 드려야 마땅하지만 십 분의 일이라도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이런 자세가 선한 청지기의 올바른 물질관이다.
 
둘: 하나님을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입니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구원관이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뜻이 함축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우리가 죽어서나 만나 보는 염라대왕도 아니다. 변덕 많고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재 정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이 신앙이 올바른 신관이다.
 
고로, “당신의 하나님은?” 하고 묻는다면,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답하고 그대로 믿는다면, 그 속에 성도가 지녀야할 올바른 물질관, 구원관, 신관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가장 올바른 정답이 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화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 11- 12절 말씀)”



출처: USA아멘넷/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아멘넷/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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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소라 본문, 그리고 70인역의 원문에 대한 간단한 이해자료 (2) | 주니(joonie76)

 

조금 더 자료를 인용해 볼까요..?... 쿰란 사본의 발견은 주전 3세기부터 주후 1세기 사이에 구약 성경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존속하였음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칠십인역이나 사마리아 오경이 맛소라 성경과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번역 및 전수상의 오류나 고의적 변경 등을 가지고만 설명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차이점은 얼마든지 성경 전수상 다른 전승을 대변해줄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대부분 차이점에 있어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략)... 맛소라 성경은 유대인 학자들이 모여 새롭게 편집해낸 인위적 작품이 아니요 기존의 여러 성경 사본 중 가장 잘 전수된 사본 하나를 골라 그것을 표준 전통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표준 성경이 정해진 후 이와 전통을 달리하는 사본들은 하나씩 하나씩 '게니사'에 묻히게 된다. ('게니사'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는 성경 기록을 함부로 파기할 수 없어서 이들을 별도로 보관해 두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나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어 있어서 서기관들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응급 사태 때문에 일부 유대인들은 칠십인역이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72인의 장로에 의하여 번역된 것이 아니라 다섯 사람에 의하여 번역된 것이라 하며, 토라는 번역문에 있어서 적합하게 재현될 수 없으므로 칠십인역이 완성된 날은 마치 이스라엘 자손이 참 하나님을 금송아지의 형상으로 바꾼 날과도 같이 불행한 날이라고 선언하였다. (Massecheth Sepher Torah I; Sopherim I 7) 이러한 혐오감은 후에 칠십인역이 완성된 날을 테벧월 8일로 정하여 민족적 재난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중략)

 

칠십인역을 하나의 통일적인 사본 내지 본문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맛소라 성경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칠십인역의 출애굽기는 칠십인역의 창세기와는 다르다. 후자가 맛소라 성경과 같거나 비슷한 본문을 대변해주는 반면, 전자는 맛소라 성경과는 전혀 다른 히브리어 대본(Hebrew Vorlage)을 반영하고 있다. 칠십인역 예레미야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보다 넓은 개념의 사해 사본 내지 보다 좁은 개념의 쿰란 사본도 마찬가지이다.

 

사해 사본 내지 쿰란 사본은 하나의 성경 사본도 아니요, 같은 종류 사본들의 집합체도 아니다. 물론 쿰란 외에 맛사다, 나할 헤베르, 와디 무라바아트 등지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동일 집단, 곧 맛소라 성경 계열에 속한 사본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쿰란 사본에 대하여는 이러한 주장이 전혀 적절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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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 appreciate your work for my child.

(선생님 우리 애 땜에 수고가 많으시네요.)

2. Is she (he) keeping up with the class?

(애가 수업은 잘 따라가나요?)

3. Please let me know (숨쉬고) if I can help you with anything.

(제가 도와 드릴 것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4. Please let me know (숨쉬고) if she(or he)’s having a problem.

(애한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

5. I know my child is in good hands.

(우리 애가 선생님을 잘 만난 것 같아요.)

6. I know we can count on you.

(선생님만 믿습니다.)

7. I was wondering (숨 한번 쉬고) if she(he) could get in the gifted program.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우리 애가 공부 잘하는 반에 들어갈 순 없나요?)

8. How much is the gross a month?

(가게 총 매출은 얼마나 되나요?)

9. How much are the expenses a month?

(매달 비용은 얼마나 드는 편이죠?)

10. How much is the profit a month?

(순수익은 얼마죠?)

11. How much is the rent per month?

(한 달 임대료는 얼마에요?)

12. What are the terms of the lease?

(계약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13. Is the business steady?

(장사는 꾸준히 되는 편인가요?)

14. I make enough to get by.

(먹고살 만큼은 벌어요.)

15. You crack me up.

(너 골 때리게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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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She is gonna blow.

(저 여자 폭발하기 직전이야.)

17. Leave her alone.

(쟤 건드리지 마.)

18. I’m starving to death.

(배고파 죽겠다.)

19. Don’t worry about it.

(부담 갖지 마세요.)

20. It’s my treat today.

(오늘 내가 쏘는 거니까.)

21. Order whatever you want.

(실컷 시켜봐.)

22. Can I have number 3?

(3번 주세요.)

23. Can you close the door?

(문 좀 닫아줄래요?)

24. Can I ask you something?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25. I don’t think this is right.

(이게 아닌 거 같은데요.)
 

26. It is on sale, but I was charged wrong.

(이거 세일인데 저한테 정가에 팔았네요.)

27. You gave me the wrong change.

(잔돈을 잘못 주셨어요.)

28. Can you go clean up the table?

(가서 저 테이블 좀 치워줄래요?)

29. Is EJ Brown around?

(EJ Brown 있어요?)

30. Is this number for EJ Brown?

(거기 EJ Brown네 맞나요?)

31. May I ask who’s calling?

(전화 거신 분은 누구시죠?)

32. May I speak with customer service?

(소비자 상담실과 통화하고 싶은데요.)

33. I’m calling about my bill.

(고지서 때문에 전화했는데요.)

34. Who should I speak with?

(누구한테 얘기하면 되죠?)

35. What is this about?

(무슨 일이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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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I got the dates mixed up.

(어머, 약속이 다음 주인 줄 모르고 이번 주로 착각했네요. )

37. I’m available at that time.

(나 그때 시간 돼요. )

38. I’m not available at that time.

(나 그때 딴 일이 있어서 안돼요. )

39. I’m spread thin.

(바빠서 몸이 두개라도 모자라겠다. )

40. I’d like to make an appointment.

(약속 시간을 정하고 싶은데요.)

41. Something came up,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42. I can’t make it.

(못나가겠어요.)

43. Put your shoes on!

(신발 신어야지!)

44. Put your clothes on already!

(옷 좀 빨리 입어라 엉?)

45. I was trying to put my boots on this morning and…

(오늘 아침에 부츠를 신으려고 하는데…)

46. the zipper burst.

(지퍼가 터졌다.)

47. My calf got bigger.

(내 알통이 더 커졌다.)

48. I’m so embarrassed.

(아으, 쪽팔려.)

49. I’m shocked.

(나 충격 먹었잖아.)

50. “You see… I told you so.”

(거봐요… 제가 된다고 그랬잖아요.)

51. I’m just looking for now.

(일단은 구경 좀 하고요.)

52. I’m just browsing.

(그냥 좀 둘러보고요.)

53. Can I see that one?

(저것 좀 보여 줄래요?)

54. Can you show me the one next to it?

(그 옆에 것도 좀 보여 줄래요?)

55. I’ll think about it.

(생각 좀 해보고요.)

56. Can you put these aside for me?

(이것 좀 보관해줄래요?)

57. Somebody is holding my stuff for me.

(누가 내 물건 어디다 챙겨 놨을 텐데요.)

58. Can you move over a seat?

(옆으로 한 자리 옮겨 줄래요?)

59. Why don’t you come over to my house?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60. Can you slide over?

((벤치 같은데서) 옆으로 쫌만 가봐봐.)

61. I’m sorry, but can you scoot down a little bit?

(미안하지만 조그만 당겨 앉으실래요?)

62. Is this seat taken?

(이 자리 비어 있는 건가요?)

63. This seat is taken.

(여기 자리 있어요.)

64. Can you trade seats with me?

(우리 자리를 좀 바꿔 앉으면 안 될까요?)

65. We’re going to be out of town for some time.

(저희가 한동안 어딜 좀 가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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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We’re leaving this Friday and coming back next Tuesday.

(이번 주 금요일에 가서 다음 주 화요일에 올 거예요.)

67. I’m going to pick him up early this Friday, around noon.

(이번 금요일에는 애를 다른 때보다 일찍,

정오경에 학교에서 데려와야 할 것 같네요.)

68. I’m concerned that Adle might fall behind because of this absence.

(우리 아들가 이번에 학교를 이렇게 빠져서

수업에 뒤쳐질까봐 걱정이 됩니다.)

69. Could you please give him his homework beforehand?

(우리 애한테 숙제를 미리 주시겠어요?)

70. We’ll try to catch up that way.

(그렇게 해서 빠진 걸 메워 보도록 노력하겠어요.)

71. I would really appreciate it.

(그래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72. What’s wrong, officer?

(무슨 일이시죠?)

73. Here is my driving license and proof of insurance.

(여기 운전면허증하고 보험증입니다.)

74. I was in a hurry to pick up my kids.

(학교로 우리 애들 데리러 급하게 가는 길이었어요.)

75. I was just following the car in front of me.

(저는 앞차만 열심히 따라가고 있었어요.)

76. I didn’t know I was speeding.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77. Could you let me go with a warning, just for this?

(한번만 봐주세요)

78. I’ll never do that again.

(다시는 안 그럴게요.)

79. Oh, you shouldn’t have….

(이러시면 안 되는데요.)

80. How nice of you!

(어쩜 그렇게 친절하기도 하셔라.)

81. I could really use it!

(잘 쓸게요.)

82. It’s nothing.

(이거 별거 아닌데요.)

83. I hope you like it.

(맘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84. Don’t worry about it.

(부담 갖지 마시구요.)

85. You’ve been so helpful in so many ways.

(여러 가지로 얼마나 많이 도와 주셨는데요.)
 

86.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87. What is a new year’s resolution?

(‘new year’s resolution’이 무슨 뜻이에요?)

88. What’s your new year’s resolution?

(새해 결심 세우셨어요?)

89. My new year’s resolution is to lose weight.

(내 새해 결심은 살을 빼는 거야.)

90. I’ll quit smoking this year.

(올해는 담배를 끊고야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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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I’m determined to learn English this year.

(올해는 영어 공부를 꼭 할 거야.)

92. I keep trying, but it’s really hard.

(만날 한다고 하는데도 잘 안 되지 뭐.)

93. I have a stomach ache.

(배가 아파요.)

94. My child has a high fever.

(우리 애가 열이 높아요.)

95. My daughter has a runny nose all the time.

(우리 딸은 늘 콧물이 질질 나요.)

96. She threw up all night.

(애가 밤새 토했어요.)

97. She has been having diarrhea for 3 days.

(얘가 3일째 설사를 하지 뭐에요.)

98. My son’s been coughing for a whole month.

 (우리 아들이 한 달째 기침을 해요.)

99. I’ve been feeling dizzy lately.

(제가 요새 들어 어질어질 하네요.)

100. You did it!

(잘하셨어요!)

I don’t feel good today.

(오늘 몸이 찌뿌드드해. : 오늘 컨디션이 별론데.)

I don’t feel good about it.

(기분이 찝찝해.)

I don’t feel like it.

(나 그럴 기분 아니야.)

I felt bad.

(맘이 안 좋더라. : 양심에 찔리더라.)

I feel sick.

(나 속이 거북해.)

Do you feel like puking?

(토할 것 같니?)

I’m kind of upset.

(기분이 좀 안 좋네요.)

둘이 친한 친구 사이에요?

(Are you close friends with each other?)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She’s an acquaintance of mine.)

같은 직장 다니는 친구에요.

(She is my friend from work.)

그냥 교회에서 아는 사람이에요.

(I know him from church.)

우리 아들 학교에서 본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I’ve seen her at my son’s school.)

고등학교 후배에요.

(He’s a friend of mine from high school.)

저는 87 학번인데요.

(I’m class of 87.)

화장실에서 물이 끊임없이 나온다.

(Water is consistently running in the toilet.)

집 앞에 있는 맨홀에서 물이 샌다.

(Water is coming up through the manhole in front of my house.)

며칠째 그래왔다.

(It’s been like this for days.)

몇 달째다.

(It’s been doing this for months.)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I can’t stand it anymore.)

하루빨리 고쳐 달라.

(Can you fix this as soon as possible please?)

네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You’ve been very helpful.)

이거로 할 게요.

(I'll have this.)

'실란트로'는 빼주세요.

(Can you hold the cilantro?)

소스 좀 따로 더 주세요.

(May I have extra sauce on the side please.)

있잖아요, 음식 맛이 이상해요.

(Excuse me, but this tastes funny.)

맛이 간 거 같아요.

(I think it's gone bad.)

미안한데, 이거 고기가 너무 새빨게요.

(I'm sorry, but this steak is too bloody for me.)

계란 프라이 두 개요. 너무 덜 익히지는 말고요.

(Two fried eggs. Sunny-side up, and not too runny, please.)

몇 번째 기념일이에요?

(How long has it been since.(it happ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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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우리 만난 지 10년째 되는 기념일입니다.

(It’s the 10th anniversary since we've met.)

안녕하세요? 아들 엄만데요.

(Hi, this is Adle's mom.)

생일 초대 고마워요.

(Thanks for the invitation.)

아들가 이안이 생일 파티 간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Adle is really excited about Ian’s party.)

파티에서 뵐게요.

(We’ll see you there.)

애가 너무 재밌게 잘 놀았어요.

(He had so much fun.)

내 잘못이 아니다.

(It’s not my fault.)

나는 우회전 하려고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I was waiting to make a right turn.

마침내 내 순서여서 내 길을 가고 있었다.

It was finally my turn, so I was going my way.

뒤에서 내차를 들이 받았다.

The car behind me rear-ended me.

저 여자가 냅다 직진해서 달려오더니 내차 옆구리를 들이 받았다.

She was coming straight so fast and hit me on the side.

차가 아직도 많이 있었다.

The traffic wasn’t clear.

뒤차는 내가 갈 줄 알았나보다.

The car behind me assumed I was gonna go.

애기 가졌어요?

Are you expecting?

손님이 더 오실건가요?

Are you expecting someone?

(임신한지) 몇 달이나 됐어요?

How far are you?

얼마나 멀어요?

How far is it?

예정일이 언제에요?

When are you due?

마감이 언제죠?

When is it due?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요?(임산부에게 말할 때),

혹은 뭐 시키실 거에요?(식당에서)

Do you know what you’re having?

'리'라고 불러 주세요.

You can call me Lee.

미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어요?

What brought you here to America?

애들 때문에 왔죠.

I came here for my children.

미국 온 지 6개월 밖에 안됐어요.

It's been only 6 months since I came to the States.

적응이 어려웠죠.

 It's been a big adjus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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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어가 딸려서요.

For one thing, English is not my strong suit.

근데 익숙해져가고 있어요.

We're getting used to it, though.

저는 엄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I was brought up in a strict home.

이런 얘기 꺼내기는 좀 뭐한데요….

I hate to bring this up.

방 어지럽히지 마라.

Don't mess up the room.

상 차리는 것 좀 도와줄래?

Can you help me set up the table?

제가 헷갈렸어요(잘못했어요).

I messed it up.

오늘 직장에서 죽 쑤었잖아(실수했잖아).

I had a slip-up at work today.

잘해 드릴게요(보상해 드릴게요).

Let me make it up to you.day'가 '딱'입니다.

잘하다가 삐끗 넘어지듯이 뭔가 실수했다는 뜻이죠.

전망 좋은 높은 층의 방을 원한다.

I prefer a room on a high floor with a view.

가능한 한 제일 낮은 층을 달라.

I prefer a room on the lowest floor possible.

침대 두 개 있는 방을 달라.

Can I get two doubles?
 

커피 봉지 좀 더 갖다 줄래요?

Can I get extra coffee packets?

내일 청소해 줄 필요 없어요.

I won’t be needing maid service tomorrow.

새벽 6시에 깨워 주세요.

 I’d like a wake-up call at 6 am.

호텔 로비에 있습니다.

At the lobby level.

뭘 드릴까요?

What would you like today?
 

마실 것 좀 드릴까요?

Would you like something to drink?

하나씩 종류별로 드릴까요?

Would you like one of each?

몇 개나 드릴까요?

How many would you like?

주인이 하나 더 인심 쓴다.

I'll give you a baker's dozen.

작은 건 1불에 12개고, 큰 건 3개에 1불에요.

Donut holes are a dollar for a dozen while big ones are three for a dollar.

상자에 넣어 드릴까요? 봉투에 넣어 드릴까요?

Would you like them in a box or in a bag.   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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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One Summer Night - Chelsia Chan & Abi
02.. Ben - Michael Jackson
03.. Hey Jude - Beatles
04.. Let It Be - Beatles
05.. Sailing - Rod Stewart
06.. Words - F.R David
07.. My Heart Will Go On - Celine Dion
08.. I Will Always Love You - Whitney Houston






[방한한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프란시스"에 대해 궁금해져서 조금 찾아 봤다. (물론 그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등과 같이 대표적인 카톨릭 신비가로 꼽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 단, 필요할 때에만 말을 사용해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가 한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하지 말고 복음을 전파하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서 복음전파에는 말이 별로 필요없고 단지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말할 필요가 없이 ^^) 신비현상을 보여주라는 것이렸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엘 그레코를 비롯한 많은 신비주의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다. 잠시 그를 그린 그림들을 먼저 모아 본다.

부엉이와 생명나무, (오상五傷) 성흔, 직통계시(?), (두날개) 아기천사 그리고 그림 속에 계속 등장하는"해골"이 특징적 상징이라고 하고 싶다.

  
   

 

프란치스코는 황홀경(탈혼)에 빠졌던 유명한 신비가였다.그에게 나타났다는 신비현상은 황홀뿐 아니라 성흔(오상)부터 공중부양까지 다양하다. (물론 소위 "성인"이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고 하겠다.) "중세 시대의 신비주의<<"라는 자료는 프란치스코의 신비주의를 이렇게 소개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아씨시의 프란시스(A.D. 1182~1226)는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고 그 환상에 따라 복음의 말씀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하며 ‘가난’과 결혼하고, 평생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고 또한 동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늑대와 새들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꽃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신비주의는 십자가의 신비주의 그리고 자연의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20세 때에 주님으로부터 “내 집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듣고 문자 그대로 한 교회를 보수했지만 그 뒤에는 그 명령의 숨은 뜻을 따라서 타락한 교회 전체를 정화, 개혁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작은 형제단으로 시작한 수도회 모임이 후에 프란시스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이 수도회는 탁발 수도회로서 자신들의 소유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하고 손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프란시스는 글을 거의 저술하지 않았지만 신비주의를 생활화 하였다. 그의 생애의 절정을 이룬 십자가의 신비체험은 1242년에 40일간 금식하며 기도와 관상에 몰두하던 중에 일어났다. 그는 주님과 더욱 더 깊은 영적 표통을 하기 위하여 매일 기도하였는데 자기 영혼과 육신에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하였고, 어느날 그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못 박힌 한 스랍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 환상이 사라졌을 때 프란시스는 하나님께 대한 강렬한 사랑과 열정과 불을 느꼈고 그의 육체에는 그 천사가 준, 예수님의 상처와 똑같은 신비로운 성흔이 남겨졌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신비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어거스틴 신비주의를 잇고 있어서, 빛의 신비주의, 존재 신비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십자가) 신비주의로 설명된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은 형제, 자매가 된다. 특히 작은 자 안에서 주님을 보고 그들을 섬길 것을 강조하였다.

다음은 프란치스코가 만든 (카톨릭) 프란치스코 "형제단"인 작은형제회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그의 신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신비체험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은 신사도들의 소위 "성령(?) 안에서 죽임당함"Slain in the Spirit 현상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신비주의에 탐닉한 그가 제2의 그리스도로 칭송받는다"는 내용과, "모든 신자들이 쉽게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특히 눈에 들어 온다. (중앙의 사진은 블로거의 눈에는 상당히 "양성적"으로 보인다!)

 

 

아래 역시 "작은형제회"에 소개된 그에 대한 그림 "탈혼 중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위 프란치스코의 신비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탈혼, 오상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내용이다.) 이 사이트에 나온 그림 설명에 의하면 "닫혀진 성경"과 "산 꼭대기에 있는 도성" 그리고 그 옆의 "월계수"는 (예상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블로거에게는 각각 "말씀 무용론"과 "영지주의적 상승" 그리고 "카발라의 생명나무"를 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자연신비주의자답게 자연을 의인화한 "The Canticle of Brother Sun"라는 시를 썼다. 시에 나오는 "음양"의 상징인 해 형제와 달 자매, 그리고 오컬트 4원소인 물, 불, 바람(공기)과 흙(어머니 대지) 형제/자매들로부터 그의 영지주의/오컬트 성향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의 제목 "Brother Sun, Sister Moon<<"이 나왔다고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시가 널리 알려진 찬송가인 "온 천하 만물 우러러<<"의 가사의 기반으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Most High, all powerful, good Lord,
Yours are the praises, the glory, the honor and all blessing.

To you alone, Most High, do they belong
And no human is worthy to mention your name.

Praised be you, my Lord, with all your creatures, especially Sir Brother Sun,
Who is the day and through whom you give us light.
And he is beautiful and radiant with great splendor,
and bears a likeness of you, Most High One. (태양 형제는 지극히 높으신 주님과 닮았다..)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Moon and the stars,
in heaven you formed them clear, and precious and wonderful.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Wind,
and through the air, cloudy and serene, and every kind of weather,
through whom you give sustenance to all your creatures.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Water,
who is very useful, and humble, and precious, and chaste.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Fire,
through whom you light the night.
And he is beautiful, and playful, and robust and strong.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our Sister, Mother Earth,
who sustains and governs us, (어머니 지구 자매는 우리를 다스린다..)
and who produces fruit with colored flowers and herbs.

Praise and bless my Lord and give him thanks
and serve him with great humility.

프란치스코는 뉴에이지를 이끄는 마스터들인 소위 "승천대사<<"Ascended Master 목록에도 들어 있다고 한다. 뉴에이저들이 숭배하는 승천대사(승천마스터) 중에는 플라톤, 피타고라스, 프란시스 베이컨,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모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예수(?)가 들어 있다고 한다. (출처<<)

 

p.s.

이런 내용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신비주의 개념을 접한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내용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이래저래 아리송한 세상이다..

 

p.s. 2

존경받는(?) 프리메이슨 리더 맨리 P. 홀Manly P. Hall은 아시시의 프란시스와 단테가 신비주의 비밀집단 "투르바두르"의 일원이었다고 말했다.. 는 내용의 글이 눈에 띈다. 관심있는 독자는 아시시의 프란시스와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와의 관계에 대한 글 The Sufis and Francis of Assisi<<도 참고하기 바란다.

 

The church was somewhat at a loss in determining how to treat these wandering moralists. The Troubadours were most circumspect and androit in concealing their hidden purposes. St. Francis of Assisi was a Troubadour yet the church canonized him and it also had a warm spot in its heart for another brother of this mystic tie, the poet Dante. Yet in spite of their piety they were basically heretics and fighting with all their wisdom and courage they possessed to overthrow the temporal power of the church and state. (출처<<)

[2014/8/19 추가]

미국 카톨릭 사이트<<에 의하면, 동물의 수호 성인인 프란치스코는 동물들과 대화했으며, 새들에게 "나의 형제/자매 새들이여. 그대들의 창조자를 찬양하며 항상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새들한테는 말이 꼭 필요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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