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믿음’과 ‘예수 믿음’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예수 없는 기독교 주장하는 ‘신 중심의 신학’ 주의해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이 두 ‘믿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두 ‘믿음’은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대부분 현대의 신학계에서는 이 두 믿음을 구별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이 두 ‘믿음’은 언제부터인가 한 믿음이 아닌 두 개의 구별된 믿음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예수 믿음’과 ‘하나님 믿음’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 믿음’에는 ‘예수 믿음’이 내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 진영에서 ‘예수 믿음’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 믿음’ 만을 강조하게 되어 부득이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의 이면에는 현대의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없는 기독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신 중심의 신학(God-centered Theology)에서는 예수 없는 기독교마저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믿음’이란 절대자의 은혜, 절대적인 사랑과 무한한 은혜가 조건 없이 수여됨이 강조되며,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가 강하게 주장되면서 몰입과 집중이 강조된다. 반면에 ‘예수 믿음’은 믿는 자의 몰입과 집중이 아닌, 믿음의 대상에 대한 명료화를 강조한다. 믿음으로 믿음의 대상인 예수의 인격과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알아 가는 은혜를 받는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가 강하게 주장됨은 구주 예수를 더욱 붙들도록 훈련한다.

 

전자, 즉 ‘하나님 믿음’은 믿는 자의 몰입과 집중으로 흐름이 강조되고 후자, 즉 ‘예수 믿음’은 믿는 자에게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지식이 강조된다. 전자의 믿음은 모든 종교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가 가능하고, 후자의 경우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이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허용될 수 없다.

두 믿음은 차이가 없다고, 즉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Christ-Centered Theology)과 신 중심의 신학(God-centered Theology)에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중심 신학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과 현격한 구별을 확정짓고 말았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 믿음’과 ‘예수 믿음’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두 구별된 믿음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의 목회자와 성도들이라면 공히 구별된 이 두 ‘믿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라면 자신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 ‘하나님 믿음’인지, ‘예수 믿음’인지를 구별해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의 지체들 역시 목사가 말하는 믿음이 하나님 믿음인지, 예수 믿음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바른 성도의 교제를 이룰 수 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믿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가지 믿음이 한 교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믿음은 교회의 통일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서는 오직 하나의 믿음만이 고백될 뿐이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머리이신 ‘구주 예수 믿음’의 체계를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는 것에서 ‘오직 예수 믿음으로’를 외쳐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 구속의 제사로 말미암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으며, 예수의 중보 없이는 그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행 4:12).

 

구주의 중보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되어 구원받은 백성에게 영원한 찬양을 받는다. ‘할렐루야’로 영원한 찬양을 드리는 백성이라면 자신이 드리는 영원한 찬양의 대상을 바르게 아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필수 사항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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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ㆍ아몬드ㆍ피스타치오

 

 

뱃살 빼는데 좋은 7가지 음식

 



복부비만의 상징인 뱃살은 보기에도 안 좋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적신호다. 한 때 이런 뱃살을 집중 공략하는 '뱃살 다이어트'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런 뱃살 다이어트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단일불포화지방산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단일불포화지방산은 몸에 이로운 고밀도콜레스테롤(HDL)을 높이고, 혈관 벽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국의 건강 정보잡지 '프리벤션'이 단일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뱃살을 빼는 데 도움을 주는 음식 7가지를 소개했다.

아몬드=아몬드에 풍부한 비타민E와 단일불포화지방산은 몸에 나쁜 저밀도콜레스테롤(LDL)을 감소시킨다. 아몬드에는 식물성 단백질과 섬유질이 많이 들어 있다. 특히 견과류에는 지방 성분이 있어서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몬드의 지방은 몸속 에너지 소비를 촉진시키는 불포화지방이고, 섬유질이 많아 살을 빼는 데 도움이 된다.

호두=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다. 심장을 보호하고 두뇌 발달에도 도움을 준다.

땅콩버터=항산화물질인 비타민E, 뼈를 구성하는 마그네슘, 근육과 신경의 기능에 중요한 칼륨, 면역강화 작용을 하는 비타민B6 등이 많이 들어있어 뱃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심장병 예방에도 좋다.

올리브유=오메가-3 지방산이 들어 있어 염증 반응을 줄이고 심장병이나 암,
알츠하이머 병에 좋다. 저밀도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기능이 있다.

피스타치오=루테인, 제아잔틴 같은 카로테노이드 색소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 카로테노이드는 특히 눈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검버섯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바라기 씨=섬유질이 많아 시장기를 금세 없앨 수 있다. 비타민B가 많이 들어 있어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 좋다. 항산화물질인 비타민E도 풍부하다.

아보카도=심장을 강하게 만드는 열매다. 비타민B가 많고 당분 함량은 1% 이하로 낮아 당뇨병 환자들에게 좋은 음식으로 주목 받고 있다. 아보카도에는 콜레스테롤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는 베타시토스테롤이 다른 과일보다 더 많이 포함돼 있다.

 

코메디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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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설교하는 부분입니다

 

1) 모세의 설교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1) 하나님의 행하신 이적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신 1:30-31에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받으며 날개 위에 업는 것같이(신 32:11) 너희를 인도하여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고 듣고 계신다고 모세가 설명해줍니다

 

(2)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했습니다

 

    모세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아 들으라  오늘날 너는 알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기에서, 듣는 다는 것은, 청종하는 것, 곧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신32:1)   이사야도 사1:2 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역시  백성들이 듣지 않는 것에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이 믿음으로 내 마음에 화합하도록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실생활에서 순종이 나타나게 됩니다.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했습니다 

 

2) 영적인 공동체(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수14:22-23에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 것을 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죽었습니다 모세도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을 거역하고 반석을 2번쳐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못했기에 (수20:10-12)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공회앞에서 삼가해야 할 언행심사가 있습니다   딤후2:14 "너는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우리에게 공동체 앞에서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거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9:3-5절의  마음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너의 의로움을 인함으로 정직함을 인하여 이 땅을 얻었다 생각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맹세하신 것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그 땅의 민족들이 악하기에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하심은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주시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눈물과 고통이 있는 삶의 과정속에  아름다운 결과로 이루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인도하심도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속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오늘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께 영광돌림으로  장래 모든 일들을 인도하시고  이루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12/13/08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는가요? / 박신 목사


[질문]

교회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3대까지 흐르는데 우리 대에서 기도로 끊어 줘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제 딸이 우리 집안에도 흐르는 저주가 있어서 그동안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지금도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으니 말입니다.

[답변] 박신목사

신자의 가계에도 사탄의 저주가 흐르고 있으니 이를 끊어야 한다는 이론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비성경적입니다. 이는 풀러신학교의 실천신학교수였던(지금은 그 학교에서 퇴직함) 피터 와그너에게 뿌리를 두고 매릴린 히키가 발전시킨 것을, 이윤호 교수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으라"는 책으로 1999년 한국에 소개한 것입니다.    

와그너는 죄와 허물을 구분하여 허물(iniquity)이 "가계를 통해 대물림 된 죄로 인한 죄책(guilt)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컨대 가문마다 특유의 동일한 허물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조상의 죄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증거로 맥스 죽스와 죠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을 분석한 사례를 듭니다. 흉악범 죄수였던 불신자 죽스는 불신자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의 가문 516명이 선조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청교도 목사이자 미국의 일차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 1,394명은 모두 출세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가문의 표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 극단에 속하는 두 표본을 선택 비교했기에 통계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비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 불신자나 흉악범 집안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나오고, 믿음이 좋은 가문에서도 현실적으로 비참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하자면 이 이론 자체의 합리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한두 극단적 예로 그 부족한 합리성을 억지로 메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이론을 주창 내지 동조하는 사람들은 가문의 영적지도를 그려보라고 합니다. 족보에 적힌 모든 선조들의 인생 이력을 가능한 일일이 상세하게 적어서 비교 분석하면 어떤 공통적인 단점이 명백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컨대 주정뱅이 집안에 주정뱅이 후손이 나고, 선조가 이혼을 하면 후손도 많이 이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 이론이 옳다고 믿거나, 뭔가 석연찮은 것 같기는 한데 현실 상황은 그러니 곤혹스러워 합니다.

와그너, 히키, 이윤호 교수의 이론과 저서에 대해선 이미 반발 논문, 서적 등이 많이 발간되었습니다. 그들의 결정적 잘못은 자기들 이론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 구절들이 자의적으로 선택된 데다, 그 해석마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학술적 혹은 구체적 측면이 궁금하시다면 인터넷에서 서취하면 관련 정보와 자료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가장 원론적인 측면에서만 그 잘못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묶을 존재는 없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1:17)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4,25)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므로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물이 다른 것에 기원을 두고 또 상호 관련을 맺지만 하나님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만은 그 어떤 것에도 부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역사가 당신께서 정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특정 규칙에 의해 이뤄진다는 뜻이 조금이라도 내포된 어떠한 진술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운행할 수 있는(다른 말로 자존하는) 사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계에 사탄의 저주가 흐른다는 진술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미 결정된 어떤 법칙이, 그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사탄이 만든, 한 가문의 중요 인생사를 주도한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세계에, 동물까지 포함해서, 당신의 일정 법칙을 사전에 심어 놓았습니다. 천체나 지구의 운행, 기후, 환경 등은 자연법칙에 따르며, 동식물은 종족보존이라는 본능에 종속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아도, 엄밀하고도 실제적인 의미에선 피조세계 전부를 다 주관하시지만, 자연과 동식물은 존재하고 번식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게끔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코로 받은 생령으로서 그분과 항상 교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만은 미리 정해진 법칙인 본능에만 따르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묶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그 형상은 파괴되고 사단의 미혹하는 영에 지배를 받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오히려 사탄이 인간을 묶고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구속계획은 당신의 뜻과 일정에 따라 완벽하게 진해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과 특정인에게는 성령이 간섭하여 그분의 뜻을 좇을 수 있게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후에는 그 은혜의 길이 복음 안에서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신자의 심령에 성령이 내주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통제만 받는 존재로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신자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면 그 저주의 근원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3-4대 이상의 인생들을, 그것도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전혀 미치지 못하거나 막힌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그 저주하는 힘이 묶어버린다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 법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먹은 신 포도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이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우선 모든 영혼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비의 영혼이 속함같이 아들도 속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각자 일대일로 대면하시어 교제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께 벌을 받아도 오직 자기만의 잘못 때문이지, 아비의 죄 때문에 아들이 벌 받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어떤 사람이라도 평생에 지은 모든 죄는 한 번의 심판으로 끝이 납니다. 죽음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면 어떤 다른 벌이나 상도 추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쪽에서 못다 내린 벌이 남아서 또 다시 그 후손을 힘들게 하거나, 사탄이 그렇게 하도록 묵인하신다면 하나님의 품성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일입니다. 거기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것으로 이미 심판이 내려졌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예수를 믿는 순간 영생에 들어간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과거, 현재, 장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용서 받은 것입니다. 신자의 가계에마저 사탄의 저주가 흐른다면 이런 모든 성경의 진리가 부인되는 셈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영생과 영벌을 변경시키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에서 힘든 일만 생긴다고 반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그너가 십자가로 구원 받아야 할 죄와 후손이 당할 허물을 구분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가계에 몇 대에 걸쳐서 흐른다는 것은, 아무리 죄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 아닌 허물에 대한 현세적 고난이라고 해도, 그 저주를 당하는 자의 잘못된 행위나 결점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순전히 선조의 허물로 인해 후손이 억울하게 덤터기를 덮어쓰는 셈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생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은 완전히 배제 됩니다. 그분이 묵인만 한다 해도 당신의 품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밝혀 놓은 당신의 징벌과 심판의 원칙과도 상충됩니다.

성경에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7, 신5:9,10)는 말씀이 있긴 합니다. 아비의 악을 자손 3-4대까지 보응한다고 합니다. 이는 죄의 용서와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생각을 밝힌 것이지 문자적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만약 아비의 악을 후손 3,4대까지 보응하는 것이 옳으려면, 당연히 인자를 베푸는 것도 1,000대까지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조가 잘한 일로 후손 천대가 복을 받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세상에서조차 재벌 집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이 온갖 혜택을 누리는 일은 엄청난 비난을 받는데 하나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행하겠습니까?

한국이 반공(反共)을 국가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았을 때에 아비가 공산주의자면 자식의 사회 활동에 여러 제약을 가하는 연좌제(連坐制)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불합리한 전근대적 제도라 한국사회가 성숙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을 인간사에 적용하거나, 사단에 의해 적용되는 것을 묵인하시겠습니까?

죄의 형벌이 삼사 대까지 미치는 것은 순종의 축복이 천대까지 이른다는 것과 대조한 표현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빨리 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면 회개치 않은 죄에 대한 징벌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말하자면 3대 1,000의 비율) 은혜를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당신께 순종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그렇게 귀하고도 기쁘게 여길 뿐 아니라 신자 자신의 유익 및 복락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이지 않습니까?  

조상의 죄를 품은 다니엘의 기도

문제는 다니엘이 조상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그것도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를 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단9장) 분명히 열조(조상)가 지은 죄로 인해 자신들이 수욕을 받았기에 그에 대한 분노를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단9:7-10)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16절)

그러나 7-10 절을 자세히 보면 "쫓겨 간 그들"과 또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고 패역하였다고 합니다. 선조뿐 아니라 후손들도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는 16절에선 아예 "우리의 죄"를 "열조의 죄악"보다 앞에 내세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단지 조상의 죄로 인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죄악을 선조부터 대대로 지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그 세대도 동일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조상의 죄를 억울하게 덮어 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사50:1) 심판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의심 혹은 불평하는 자에 대하여 분명히 각자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크신 하나님께서 참고 참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징벌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다니엘이 속했던 세대의 죄만으로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에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인내의 한계가 차서 벌을 주어야 할 때가 마침 그 세대가 된 것 뿐입니다.

어떤 한 세대의 죄악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삼사 대에 걸쳐서 계속 벌만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에게도 그들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사백년을 참아주셨지 않습니까? 그것도 자기 백성은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각 세대의 죄를 일일이 그 세대에만 주어도 한 세대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삼사 대까지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지금껏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그분이 인류에게 회개의 기회를 더 오래, 더 많이 주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따라서 그 무엇보다 신자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각자가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마땅히 내려야 할 벌을 당신의 무한하신 긍휼 때문에 연기하고 있음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본심은 우리에게 죄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에서 구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가계에 저주가 흐르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 인간은 각 세대들마다 또 다른 죄를 짓고 그에 따른 징계들은, 선조의 죄를 참으셨다 해도 동일한 죄를 짓고 있기에, 항상 나타날 것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기도를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자기와 자기들 세대의 잘못부터 주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고 있는 환난의 원인을 영적으로 정확히 분별하였기에 백성을 대표하여 열조들이 미처 못 한 회개를 대신하면서 징계를 거두어 달라고 용서를 구하는 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시내 산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쳐가며 기도한 모세와 동일한 심정인 것입니다.

DNA와 결혼

죄를 지으면 삼사 대에 이어서 벌주겠다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 오해할만한 말씀을 십계명을 주시면서 덧붙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십계명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작 주목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2,5-7)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아들과 손자를 하나님 말씀으로, 당시로선 율법으로 잘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온 이유입니다. 각 가계마다 부모가 신앙과 도덕의 훌륭한 본을 보이는 가운데 그 천성과 교육과 환경이 아주 잘 조화를 이룬 결과일 뿐입니다.

시쳇말로 의사 집안에 의사 나오고 사기꾼 아들이 사기꾼 되는 것이 가계에 축복이나 저주가 흐르고 그것을 이어가거나 끊는 일을 안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바 대로 된 것입니다. 교육과 환경에 따른 후천적 결과일 뿐입니다.

물론 가계마다 타고난 천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특유의 허물이 실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인범 아버지에 살인범 아들이 생겨도 아비가 아들에게 살인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네 만은 바로 살라는 훈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았을 것입니다.

설령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기질적으로 포악한 면을 타고 나고 또 살아가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긴 했어도 아들이 스스로 살인하지 않고 선하게 살면 됩니다. 살인범이 된 것은 전적으로 아들의 죄이자 책임입니다. 성경이 오직 각 자의 죄로만 벌을 받는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우환이라도 일차적으로 본인과 당사자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업에 실패한 것은 담력, 지혜, 자금, 계획 등에 착오가 있었고, 사기를 당한 것은 정보와 주의력의 부족이었고, 질병은 건강관리를 못한 때문입니다.

거기다 천성은 기계적으로 똑같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한 형제들 중에서도 서로 기질과 성격이 다릅니다. 사이코패스의 아들이라도 교육과 환경에 따라 천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났다는 것은 분명 특정 분야에서 죄악과 사탄의 시험에 잘 넘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올바른 (신앙)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유별나게 나쁜 천성이 있다 해도 서로 다른 천성을 가진 남녀 간의 대를 이어가는 결혼을 통해 점차 순화되어질 수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에서부터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 믿는 자끼리 결혼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도 가계의 우월한 특성을 유지하도록 열성 대신에 우성이 유전되는 법칙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항은 신앙교육에 헌신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어떤 믿음이 좋은 선조가 가문의 저주를 끊어서 후손 천대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약속은 아들과 손자를 철두철미 십계명으로 양육할 때만 유효하다고 성경이 분명히 밝혀 놓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수명으로 따지면 믿음의 사람이 자기 가문 안에서 영향을 끼치는 한계는 삼사 대(손자 내지 증손자)까지 뿐입니다. 아주 장수하여 오대(고손자)까지 볼 수 있는 자도 있지만 극히 드물고 또 그 정도 되면 이미 현실적으로 믿음의 본을 보이거나 신앙 교육을 할 처지를 넘어섭니다.

성경이(아니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갚는다는 말씀의 진짜 의미입니다. 한 인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대수 안에서 본을 잘 보이고 신앙 교육을 철저히 시키면 하나님의 축복은 천대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삼사대의 마지막 후손은 그 다음 삼사대 후손의 선조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 표본적인 예로 창세기에 족장 스토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계의 저주를 끊는 것 같은 주술적 측면이 아닙니다. 자식들을 믿음 안에서 바로 양육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가계의 영적 지도를 그려서 자기 가문의유전적, 기질적, 사회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항들을  앎으로써 교육과 환경을 바로 잡는 데에 응용해야지 혹시라도 허물을 저주라고 간주하면 하나님조차 사단에게 묶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모르거나 믿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니엘처럼 자신의 죄부터 회개하고 잘못을 고쳐나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미 심판이 끝난 선조의 죄까지 용서 받을 수는 결코 없으며, 또 후대의 축복까지 대신 책임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자녀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키워서 그 자녀 스스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요컨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자식이 결코 이가 시지 않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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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는가?  (0)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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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성도만은 되지 말자

 

 

작금 소위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가나안성도들이라는 말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곧 교회나 목회자 혹은 신도들에게 상처를 입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관련해 교회를, 혹은 목회자 때로는 한 때 함께 교회에 다녔던 신도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상처받고 이로 인해 원망과 불평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 있는 주장의 근거라고 말하기에는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자기들이 받은 상처나 혹은 불만과 불평을 교회에 나가지 않는 빌미로 삼는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가나안성도들이 과거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거나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탓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했었다. 광야는 본래 그런 환경이다.

 

물론 가나안성도들이 광야의 성도들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끼친 대상이 교회이거나 목회자이거나 신도들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남 탓만 하고 있다가는 그들이 정작 싫어하는 그들과 함께 망하는 길로 접어들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탓하고 있는 동안 자기 마음은 정당한 이유를 찾아서 편안할지 몰라도 그 영혼은 그 상처를 준 자들와 똑같이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고달프다 할지라도 담담히 짊어져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 분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반대로 남을 탓하고 핑계를 대는 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자와 다를 바 없다.

 

핑계하고 탓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교회의 지체들과 그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여정을 출발해야 한다. 불을 토하듯 그 심정을 토하더라도 불만과 불평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체들과 함께 광야의 길을 걸으며 그 짐을 지는 신자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참된 위로와 안식이 내려 올 것이다.

 

기독교개혁신보

 

돈놀이, 이자놀이

대장쟁이



[느헤미야 5장]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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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돈벌이 방법이 돈놀이, 이자놀이라고 합니다. 만일 2,000년 전 예수님 탄생 때 야구방망이 만 한 금덩이를 가지고 연리 5% 이자로 꼬박꼬박 불려나갔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그 금덩어리는 지구보다 더 커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교육하는 것이 돈놀이, 곧 이자의 무서움, 이자의 위력이라고 합니다. 아이 이름으로, 예를 들어, 1,000 달러를 가지고 채권이나 확실한 금융상품을 사게 합니다. 만일 연리 10% 짜리 금융상품을 샀다 치면 10년 뒤에는 2,593불, 20년 뒤에는 6,727불, 30년 뒤에는 17,449불이 됩니다. 30년 만에 17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또 매달 아이로 하여금 10달러씩 적금 붓듯이 꼬박꼬박 금융투자를 하도록 하여 20년, 30년 뒤에 얼마나 불어나는지를 체험하도록 합니다. 돈을 빌리고 이자를 무는 경우와 반대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의 극명한 대비를 통하여 재산을 모으는 자세와 재테크 방법을 철저히 교육하는 것입니다.

‘72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72는 복리이자로 원금이 두 배로 불어나는 기간을 쉽게 계산하는 숫자입니다. 예를 들어 연리 8% 이자율이라면 72 나누기 8 = 9, 즉 9년이 지나면 원금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연리 8% 이자로 모기지를 내어 집을 사고 30년 동안 상환한다면, 9년 동안 모기지 내는 돈으로 만일 거꾸로 저축을 한다면 2배로 늘어나는 돈을 반대로 갚는다는 계산이 되고, 18년 뒤에는 4배, 27년 뒤에는 8배라는 계산이 되므로 30년 동안 갚는 모기지 상환총액은 빌린 돈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결과가 된다는 계산이 됩니다. 연리 8%만 해도 이렇게 큰데 보통 크레딧카드 회사들이 물리는 이자 연리 16% (연체이자는 24%도 됩니다만) 정도를 가지고 계산한다면 72 나누기 16 = 4.5, 곧 4년 반마다 2배, 9년이면 4배. 13.5년이면 8배, 18년이면 16배, 22.5년이면 32배, 27년이면 64배라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이자놀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결사적으로 금융기관을 장악하려 하고 크레딧카드 회사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자라던 60년대, 70년대에 일수놀이가 성행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돈이 급히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선이자 10%, 20%를 떼고 나서 100일 동안 갚도록 합니다. 석 달 열흘 만에 이자 10%, 20%이니까 대단한 고리채였습니다. 그래서 일수놀이 하는 아줌마는 악바리 같은 무서운 사람이었지요. 또 전당포도 많았습니다. 돈이 급하면 시계나 보석, 옷 같은 물건을 맡겨놓고 돈을 빌리는데 이자가 비쌌습니다. 결국 돈을 갚지 못 하고 물건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참 많은 사람들이 이자에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크레딧카드 대금, 자동차할부금, 집 모기지, 학자금......  주위에 빚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매달 모기지를 내며 크레딧 카드 미니멈 페이먼트를 내며 허덕이는 서민들은 마치 중세시대의 소작농 같은 모습 같다 싶기도 합니다.

빌려주고 담보잡고 이자 받는 돈놀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깊습니다. 그 옛날 애굽에도 있었고, 그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를 따라했던 것 같습니다. 소위 알토란같은 금융투자와 재테크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도 귀가 솔깃합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롭게 투자하여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 오늘날 자본주의, 자유경제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것이 옳고 정당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돈놀이, 이자놀이는 그 놀이를 하는 편에서 보면 “신나는 돈벌이 게임”이지만 살기 위해 그 돈을 써야 하고 이자를 물어야 하는 편에서 본다면 올가미요 족쇄요 피를 빠는 노예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자놀이를 금하셨고 토지소유를 금하셨습니다. 토지를 안식년에는 쉬게 하고 희년에는 원상복귀토록 함으로써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7절 =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그러나 근본이 죄인들인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어디에서나 이러한 돈놀이, 이자놀이 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이때에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그 형제 유다사람들을 원망하는데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재산을 전당 잡혀야 합니다. 토지를 팔고 빚내어서 세금을 냈습니다. 우리 자녀가 종으로 팔려가도 이제는 토지가 없으니 속량할 힘조차 없습니다.”는 한심하고 가련한 처지들을 하소연합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끼리 이런 돈놀이 이자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참상을 듣고 느헤미야는 크게 노하여 귀인들과 민장들을 꾸짖고 전당잡힌 것들을 돌려주고 이자 받은 것을 돌려주도록 합니다. 귀인들과 민장들 앞에서 옷자락을 떨치면서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떨치시리로다.” 하면서 받은 것을 모두 돌려주고 이자를 받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자신이 12년 동안 총독을 하면서도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며 오히려 베풂으로써 솔선수범합니다.

저도 소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톰 싸인이 자신의 책 “맥월드 vs 머스타드 씨드”에 쓴 것처럼 교회가 젊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이자와 모기지의 족쇄를 벗고 자본주의와 금융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원합니다. 느헤미야를 부요케 하시어 12년 동안 자비량 하며 오히려 베풀었던 그 축복이 이 교회에도 임하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교회를 풍성케 하사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할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목사가 이러한 생각을 한다니까 이상합니까? 그렇다면 느헤미야도 이상하겠군요. 우리는 천국에 가면 한없는 풍성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천국의 모습을 이 땅에서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천국의 풍성을 맛보도록 허락하시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만인에게 보이도록 하는 축복을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아무튼 느헤미야의 이러한 결단과 과감한 조치는 돈놀이 이자놀이로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원망하고 분열되고 있던 귀환백성들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힘을 합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하나로 뭉치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 돈거래는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꾸어주되 이식을 취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도울 힘이 있으면 힘껏 도울 것이며 내미는 손을 거절치 말라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의 백성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모든 재산을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이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온 세상이 이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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