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근본 제가 아이에게 어디가든지 이 말을 잘 기억하라. 라고 했다 첫째, 엄마 아빠의 말은 옳고 부모님은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하라. 아니면 맞든지 굶던지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회사나 군대 상관의 말은 다 옳고 그들은 선하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직장에서 나오고 가난해질 것이다. 셋째, 부모나 상관은 절대 권력은 아니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무조건 100% 옳고 선하고 의로우시다. 아니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이 지혜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애드민의 ‘새로운 의의 개념’에서- 이 땅의 권세를 부정하는 학생들을 보세요. 선생님, 부모님 말씀 안 듣는 학생들은 이상하게 교회를 안갑니다. 이 땅에서 대드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대들기 때문에 못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절대 권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옳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 선합니다. 이것을 왜 그러냐고 따지는 것은 엄마에게 말대꾸하다가 맞는 것과 똑같습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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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생활은 무엇인가?
< 벧후3:10-13>


1. 거룩한 행실(11절 하반)
“거룩하다” 함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나 자신을 하
나님께 내어 맡김이다. “행실”이란 말 ‘아나스트로페’는 히브리어 ‘할
락’에 해당되는데 생의 방법을 가리킨다. 기독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방법을 취한다. 여기서 방법이란 것은 개별적인 행위를 말하기보다 생애를 의
미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행실”은 “거룩한 생애”라고 번역해야 된다. 거
룩한 생애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김이다. 마치 수술 받을 환자가 담당 의사
에게 그의 몸을 전적으로 맡김같이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이다.

2. 경건함(11절 하반)
“경건”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세베이아’는 ‘좋게 놀란다’는 어원적 의
미를 가진다. 신자는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살아야 된다(고전 10:31). 뿐만 아니라 그는 특별한 자리, 곧 정
신차려 성경을 읽음과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 이 두 가지
는 경건생활의 원천이다. 그는 이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만남
으로 좋은 놀람을 체험하게 된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이
세상의 행복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여기에 한 가지 첨부할 것은 경건한 자의 대인 관계이다. 경건한 자는 사람다
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기독신자로 멎어지는 자는 신자
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람 상대로 의(義)를 행해야 된다는 것이
다. 즉, 경건하다고 하여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들
과 잘 화합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략적(政略的) 합작도 아니고, 능률
증가의 목적으로 사회적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단결도 아니다. 이것은 나 자
신을 희생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려는 이웃 사랑의 생활이다. “하나님 아버
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
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
니라.”(약 1:27).

3. 내세를 사모함(12-13절)
인류는 이 세상 문명에서 만족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 세상 문명은 먹고
마시고 자식들을 잘 길러내려는 것밖에 무엇이 더 있는가. 카알라일의 말과
같이 현세의 문명은 돼지문명이다.
내세를 사모하는 삶은 영혼 본위의 삶으로 나타난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그리스도의 義)를 인하여 산 것이다(롬 8:10). 몸은 인류
의 조상 아담 때부터 지은 죄로 인하여 죽는 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몸
은 죽고 영혼을 구원하여 완전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순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구속 받은 신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다. 이
참된 소망을 가진 신자는 아침이나 저녁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재림
을 기억하고 행해야 된다.
< 영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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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jpg



치매 상태에서 예수 부인해도 구원받는가?


해방 뒤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알려진 어느 목사님이 모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예고치 않고 찾아온 그를 담임목사가 알아보고서 축도시간에 강단에 모셨다. 강복 기도를 부탁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은 청중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욕을 뇌까렸다.  "이 xx들아. xxx들아..." 그리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오둥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담임 목사는  치매 증상을 알아 채고서 곧장 그를 끄집어내렸단다.


기독신자였던 사람이 치매 상태에서 예수를 욕하고 부정해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치매(알츠하이머, 일명 노망)는 질병 중에서 가장 험악한 병이다. 증세가 심해지면 먼저 인격파탄 중상이 나타난다. 인간다운 존엄성을 완전히 상실한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후 지퍼를 열어둔 채 그대로 나오면 건망증이고, 화장실에 가서 지퍼를 열지도 않고 볼일을 보면 치매라는 말이 있다. 목사이었던 분이 치매 상태에서 예수를 저주해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치매에 걸리기 전에 얻은 믿음과 칭의가 이 경우에 유효할까? 이런 쓰 잘 데 없는 신학 질문일랑 하지 말고 치매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라.


한국 보건복지부는 아주대학교 의학연구팀에 의뢰하여 치매 예방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전 세계의 치매예방 논문 161편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규모로 연구하여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건복지부가 권장하는 대표적인 치매 예방법 '베스트 7'은 아래와 같다.


1. 친구 만남과 집 청소

매일 친구를 만나고, 집 청소를 하라(최고수준). 청소하기, 정원 가꾸기, 뜨개질, 요리하기, 스포츠, 종교 활동 등 3가지 매일 실행 시 치매 80%를 예방하는 것이 가능하단다.


2. 두뇌활동

두뇌 활동을 활발히 하라(최고수준). 활발한 두뇌활동은 인지기능 저하를 예방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경험으로 뇌에 자극시키면 기억력과 정보처리 능력이 향상된다. (이메일쓰기, 책, 신문읽기, 악기 배우기 등이 인지기능의 개선에 효과가 있다).


3. 걷기

주 3회 이상 걷기운동을 하라. 1회에 30분 이상, 3-4km를 걷는다.


4. 음주

적당한 음주를 하라. 1주에 1-2잔 3회의 약간의 술은 알츠하이머성, 혈관성 치매 발병률을 낮춘다. 다량의 음주는 오히려 치매를 재촉한다.


5. 오메가 3와 과일

등푸른 생선과 우유, 과일 주스를 마시라. 등푸른 생선은 오메가 3가 풍부하여 뇌세포를 보호한다. 우유는 뇌신경을 보호한다. 황산화 성분의 과일 야채는 뇌혈관을 세척한다.


6. 종합비타민

특히 비타민C-E 그리고 엽산 보충제 복용하라. 복용한 사람은 치매 발병률 50-66%가 낮아진다.


7. 금연

담배를 피우지 말라/ 흡연은 신경세포를 사멸시켜 치매 가능성을 높인다.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치매 확률이 3배 높다.


아래는 신승태 님(인디컴)의 “치매를 예방하는 확실한 방법 50가지”이다. “죽음보다 잔인한 치매를 예방하는 법”을 옮긴 것이다.


1.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라.

2. 좋은 물을 많이 마셔라.

3. 감사 기쁨의 말을 쓰고, 원망 비난의 말을 사용 말라.

4. 뇌에 영양을 주는 식품을 섭취하라. 호두, 잣, 토마토, 녹차가 좋다.

5. 두부 청국장등 콩류를 많이 먹어라. 콩은 뇌 영양 물질덩어리다.

6. 계란은 완전식품이다. 콜레스테롤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먹어라.

7. 식탁에 멸치그릇을 놓아두고 수시로 먹어라. 멸치는 보약이다.

8. 치아가 손상되면 바로 고쳐라. 이가 없으면 치매가 빨리 온다.

9. 음식은 꼭꼭 씹어 먹어라.

10. 편식하지 말라.

11. 고민 갈등에 노예가 되지 말라. .

12. 호두를 넣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굴리기를 하라. .

13. 박수를 열심히 쳐라.

14. 화가에게는 치매가 없다. 손으로 많이 그려라.

15. 악단 지휘자는 모두 장수한다. 손을 많이 쓰라.

16. 뜨개질을 하라. 머리와 손을 많이 사용하라.

17. 가운데 손가락을 마찰하라. 뇌가 즉각 반응한다.

18. 손을 뜨거울 때까지 비벼라. 그 손으로 온몸을 마찰하라.

19. 집 앞을 쓸어라. 청소도 되고 운동도 된다.

20. 때로는 몸만 쉬지 말고. 생각도 쉬어라.

21. 뜨겁게 사랑하라. 사랑이 뜨거우면 치매는 도망친다.

22. 화내지 말라. 흥분 할 때마다 수십만 개의 뇌세포가 파괴된다.

23. 남을 미워 말라. 미움은 피에 독성물질을 만들어 낸다.

24. 과거에 집착 말라. 미래를 설계하라.

25. 잔소리하지 말라. 잔소리 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기(氣)가 소진된다.

26. 짜증은 체질을 산성으로 만든다. 산성체질은 종합병원이다.

27.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이렇게 하면 의사가 필요 없다.

28. 겨울 외출 시에는 방한모와 장갑을 꼭 지참하라.

29. 정수리를 10분 씩 두드려라. 뇌에 좋은 자극이 된다.

30. 헌 마음 버리면 새 마음이 들어온다.

31. 책이나 글을 많이 읽어라. 소리 내어 읽으면 최고의 뇌운동이다.

32. 이름 전화번호 숫자와 지명 등을 열심히 외워라. 머리를 쓰라.

33. 취미 생활은 삶의 윤활유다. 적극적으로 취미 활동을 하라.

34.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다. 빨리 풀어라.

35. 스님은 치매가 없다. 참회 108배의 효능이 두뇌까지 영향을 미친다.

36. 대화 상대를 만들어라. 외로움은 가장 큰 형벌이다.

37. 노래방기기를 장만하라. 노래와 춤은 치매예방의 최고다.

38. 글의 쓰기와 읽기를 생활화하라. 뇌 운동에는 그만이다.

39. 퍼즐 게임 끝말 읽기를 즐겨보라. 머리가 녹슬지 않는다.

40. 낙천적인 사람은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성격을 개조하라.

41. 많이 움직여라. 몸도 마음도 활동이 멈추면 병들게 마련이다.

42. 호기심을 가져라. 삶의 윤활유가 된다.

43. 봉사와 베푸는 마음은 뇌를 건강하게 한다.

44. 밥을 잘 먹고 숙면을 취하라.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 건강하다.

45. 박장대소 포복절도 요절복통의 달인이 되라.

46. 억지로 참다 보면 뇌세포에 손상이 온다.

47. 청소와 세탁은 기계로 하지 말고 손 청소, 손 빨래를 하라.

48. 술, 담배와 결별하라.

49. 명상과 호흡을 배워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라.

50. 신앙을 가져라. 신앙의 힘은 기적을 만든다.


아래는 어느 페이스북 친구가 제공한 치매 상태 검사 방법이다.


그림으로 검사 해 보는 치매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아래 질문에 답해 주세요.

 

 

 

 

 

 


 

다 찾아 볼 수 있으면 치매나 알즈하이머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또 아래와 같은 두뇌 테스트 방법이 있다.


정면이 먼저보이면 이성적
옆면이 먼저보이면 감성적

두 가지 다 보이면 두뇌가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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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란 누구인가?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모집을 한 일이 있었다

...도대체 친구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다.


이 현상 모집에서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친구란? 기쁨을 더 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
그게 친구입니다



2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정이다.
그저 모든것을 이해해주는 거다
당신을 비판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는 사람이 친구다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이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다."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친구가 밥보다 좋았던 어린 시절

다투며 사랑하며...울며 웃으며...

그땐 친구가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으니

그때를 '순수시대'라 부를까...

 

조금 더 자라서 친구는 대화의 창이자

이상의 날개를 타고 함께 훨훨 나를 수 있는

꿈이자 무지개였었지

 

나이가 들어가는만큼 더 차곡차곡 쌓이고

가꾸고 모아져야만 할 아름다운 우정,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하나 둘 떠나가고

또 떠나보내어야 한다고들 말하네...

 

내가 어려울 때 누가 있어 내 곁을 지켜줄까...

나는 여전히 소아적 마음을 버리지 못해

떠나보낼 때마다 눈물 짓고...

 

이 세상 그 어디멘가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지만,

순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가고...

 

아직도 달려가야 할 머나먼 인생 여정,

죽음 저편 언덕까지 함께 가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임을

깨닫고 믿어지는 순간이 내게는 너무 길고 멀었네...

 

 

"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
(삼상 18: 1)

 

 

글: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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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과 지옥의 성경적 근거가 궁금합니다. - 죽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Q&A) / 박신 목사


    [질문]


    하나님께서 성경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기록하셨지만, 모든 비밀을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미리 알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 - 그러나 함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그 의문을 이제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과 지옥이 과연 있는지, 그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애매한 단어로 설명하는 '천국'과 '지옥'이 엄밀하게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기로는 성도가 죽으면 몸은 땅에 묻혀 쉬게(잠자게..?) 되고, 영은 '천국'이라고 불리는 하나님 나라로 가 있다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에 몸이 거룩하게 변해서 다시 살아나고 영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 것 같은데, 그럼 불신자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요? 몸은 땅에 묻혀 심판을 기다리면서 쉬고, 영은 지옥을 가서 사단에게 고통 받다가(눅 16:23처럼?) 예수님 재림 때 몸이 다시 살아나서 심판받고, 다시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인가요?

    너무 막연한 질문 같아서 몇 가지 추려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1. 예수님 재림 전, 성도가 죽으면 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완전한 영적인 세계겠죠?)

    2. 예수님 재림 전, 불신자가 죽으면 어딜 가게 되나요?
    보통 말하는 불지옥이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어떤 공간, 이라는 것도 정말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그냥 '영적 사망 상태' 로 있게 되는 것, 즉 영이 '소멸'하게 되나요?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예수님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쉬는 상태' 즉 자는 상태가 되나요?

    3.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몸이 거룩하게 되어 다시 살아나고 그 안에 영이 다시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후에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나요, 아니면 그 거룩한 '몸'이 다시 천국으로 들려올라가나요? 그리고 재림하신 이후의 삶과 재림하기 전에 죽은 성도들이 가는 천국의 삶이 같나요, 다른가요?

    4. 예수님 재림하신 후 불신자들은 어디로 가게 되나요?
    그냥 지옥에 가서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사단을 완전히 멸하신다고 많이 들은 것 같은데, 그럼 재림이후 사단의 존재가 완전 사라진다면 불신자들의 영 또한 같이 사라지거나(소멸), 그 때에 다시 구원하시거나(?), 사단은 없지만 하나님이 주는 고통을 받게 되거나, 그 중 하나일 텐데..

    5. 주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라는 것은 다니엘의 '육체'에게만 하신 말씀인가요? 아니면 영 또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쉰다는 의미인가요?

    질문하게 된 동기는 사실 이렇습니다. 과연 지옥이 우리가 흔히 비유하는 불지옥으로 영원히 사단이 주는 고통을 받는 곳인지 잘 모르겠고, 그게 맞더라도 주께서 사단을 멸하신다면 그 때는 그 고통 받던 영혼들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다른 생각은 우리 영의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과 유리된,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으면 생명의 근원과 끊겨있기 때문에 영 또한 사망, 즉 그대로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도 저에게는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제가 망령된 생각을 하거나 잘못된 생각으로 죄를 범할까 겁납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성경적인 지식을 얻고 싶습니다. 완전하게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진실'만을 알고 싶고, 만약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냥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그 날이 되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알 수 없을 테니까요.

    [답변]

    신학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인 인간의 ‘중간상태’, 즉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중간상태란 다른 말로 인간이 죽은 직후에 되는 모습인지라 모든 신자가 가장 궁금해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완전한 부활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되는 마지막 때에 대해선 기술(記述)이 비교적 많은 반면에 죽음 직후의 상태에 관해선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이 드뭅니다. 또 중간 상태와 마지막 때의 명확한 구분 없이 설명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님이 걱정한대로 전체로 따져 들어가면 더 애매해질 수 있습니다.

    신자는 가장 먼저 눈에 안 보이는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는 영원토록 완전한 모습으로 실존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물질적 가시적 영역뿐 아니라 영적 비가시적 영역을 망라하여 전 우주를 태초부터 영원까지 거룩하게 통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한 구체적인 의문들도 바로 이 확신 위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즉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또 그 영생의 핵심이 죽음 이후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이 땅과 별도로 따로 존재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신자가 천국과 지옥의 모습과 그곳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그런 곳이 분명히 있고 또 그곳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도 완벽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과 지옥 자체를 전혀 몰라도 된다거나 알 필요 없으니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서 섣부른 추측을 해서 오류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천국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장 핵심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입니다. 한 죄인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이미 그는 영생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 안에서 사는 것이며 죽음은 그 영생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하나님 왕국은 사단의 왕국과 함께 일정 시점까지 병존하고 있어서 완전한 영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으나 아직 최종적인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후로 천국은 역동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고 신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서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여전히 있고 신자 또한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완전한 천국은 현재와 같은 모습의 이 땅에선 구조적,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 쪽에선 영원토록 완전하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 땅의 인간에게 천국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전히는 오지 않았다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완벽한 통치입니다. 단지 인간 쪽에선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은 인간 개인에게나 인류라는 전체 공동체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신자 개인으로 봐선 죽음으로 물질적 육신은 소멸되고 그 이후에 가는 곳에 육신이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모릅니다. 또 성경은 마지막 날에 새롭게 변화된 이 땅으로 부활한 성도가 (신령한) 육신의 모습을 입고 다시 온다고 가르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도 아무도 모릅니다. 신자 개인에게도 ‘이미’와 ‘아직’의 두 가지 영생이 있는데 그 중간상태와 ‘아직’ 이후의 영생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 공동체적 측면, 즉 이 땅 전체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과 그 변화가 새로운 창조(사65:17)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분명히 있지만 그 창조의 과정과 그 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에 대해서도 ‘이미’의 천국만 알뿐 ‘아직’의 천국과 그 중간상태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성경은 이 네 가지 측면을 딱 부러지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지금껏 신학적인 수많은 쟁론이 있어 왔지만 어느 누구도 딱 부러지게 이것이 맞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로 일부러 혼동하게 해서 천국에 대한 신비감만 더 고조시키려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었다면 죽음 이후부터 중간 상태와 나아가 완전한 부활까지는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모든 영역에서 항상 완전하기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온전한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도 바로 그 진리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옥에 떨어진 부자 나사로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내보내어 자기 형제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려주어 생전에 회개토록 하여 죽고 난 후에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천국에 갔다가 온(잠시 죽었다 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천국에 오래 가 있다가 땅으로 되돌아 온) 나사로라면 얼마나 설명을 정확하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전에 성경에 계시된  천국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메시야에 대해 믿지 않으면 아무리 설명을 잘해주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비유대로 당신께서 죽었다가 살아나도 믿지 않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삼층천(천국을 의미하는 히브리 식 표현)까지 갔다 왔습니다. 바울이 거짓 실토를 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이는 가히 사람이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 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후12:2,4,6)  

    우선 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은 인간의 말로는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표현이 정확하게 안 될뿐더러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 즉 잘못된 기대를 할 수 있음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또 그가 죽은 후에 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에스겔과 같이 순간적으로 시공간을 이동하여 천국을 갔다 왔습니다. 그러나 몸이 같이 갔는지 같이 가지 않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육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영만 갔다 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신령한 육신을 입었었는데 확실히 알지 못하고 본인마저 심지어 단지 그랬지 않나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직 죽기 전이라 인간 육신의 지정의로만 판단했기에 천국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의 설명으로 봐서는 천국에도 분명히 감각적으로 지각이 되는 어떤 시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형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이 지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또 지정의적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료(Substance)로 구성되어, 어떤 구조(Structure)로 이루어진, 어떤 차원(Dimension)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그런 요소들이 없던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에게는 완전한 부활이후 뿐 아니라 죽음 직후의 중간상태도 여전히 또 다른 미지의 ‘아직’의 천국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직’ 천국에 대한 소망을 귀하게 가꾸되 그런 소망이 커질수록 오히려 이 땅에서 ‘이미’의 천국을 제대로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을 준비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마련해 놓았으니 인간은 철저하게 제대로 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1-4) 꼭 재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이 영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국 보좌에 앉으셔서 구원과 심판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믿는다면 구태여 그 처소가 어떠할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런 천국 소망을 가진 자들이 아직도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들, ‘이미’의 천국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그 소망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천국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벧전3:15) 해야 합니다. 소망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소망을 가진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의 통치는 완전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 통치 아래로 초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마5:16)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다른 말로 천국)는 이 땅이든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영역이든 영원토록 완전합니다. 그 사실을 확신한다면 천국을 신학적으로 상세하게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알 필요까지 없고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범위 안에서 이 땅에서부터 ‘이미’의 천국을 누리고 죽음 이후의 ‘아직’의 천국을 소망만 하면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구체적인 답변을 드릴 수 없지만 질문하신 순서대로 간략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삼 말하지만 성경이 중간상태와 완성된 이후의 천국에 관해서 또 개인과 공동체적인 천국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1. 예수님 재림 전, 성도가 죽으면 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완전한 영적인 세계겠죠?)



    서론에서 바울의 삼층천 체험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것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육신이  따라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는 의미에선 영적인 세계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세계 안에서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나름대로의 질료와 형체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인지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단순히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신학자 벌콥은 “죽음은 존재의 멸절(滅絶)이 아니라 육신적 생명의 종결이다. 존재의 중지가 아니라 생의 자연적 관계들의 분리이다. 생명과 죽음은 존재와 비존재로서 서로 반대되지 는 않으며 다만 존재의 상이한 양식(樣式)으로서만 반대된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어떤 것이며 죽음 이후의 그 개인과 가는 곳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이 땅과는 다른 존재 양식으로 그 양식이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천국 자체의 외형적 모습도 요한 사도가 묘사한 것을 넘어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계4:2-6)

    그러나 요한이 실제로 천국을 갔다 온 것이라기보다는 환상으로 보았고 또 그로선 최선의 설명을 했겠지만 여전히 우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우선 그도 이 땅의 육신이 살아 있는 상태라 “~ 같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특정한 당신의 뜻을 계시하고자 인간 지정의의 이해 수준에 맞게끔 보여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1절)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 일어날 일이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말씀하지 않아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그러나 마땅히 될 일이므로 반드시 일어나는 확실한 약속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외형적 차원에서 천국이 이 땅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따져봐야 확실하고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대신에 신자는 이 땅과 확실히 다른 것 하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죄가 없는 곳입니다. 신학적으로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의 3단계로 나누는데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순간적 구원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 성화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면서 죄의 능력에서 자유하게 되려고(free from the power of sin) 노력하는 진행 중인 구원입니다. 마지막 영화는 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옮기어져(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완성되는 구원입니다.

    흔히들 천국이 눈물과 한숨과 슬픔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묘사되는 근본 이유도 단순히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 자체가 없기에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신자가 가는 곳은 죄가 완전히 없으며 성삼위 하나님의 실체를 보고 알 수 있으며 그분과 완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이 땅과는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2. 예수님 재림 전, 불신자가 죽으면 어딜 가게 되나요?
    보통 말하는 불지옥이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어떤 공간, 이라는 것도 정말 성경적 근거가 있나요? 혹은 그냥 '영적 사망 상태' 로 있게 되는 것, 즉 영이 '소멸'하게 되나요?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예수님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쉬는 상태' 즉 자는 상태가 되나요?



    성경의 주제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님이 꼭 수난의 종으로 인간의 모습을 띄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가를 밝힌 책이라면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과 그 결과를 밝혀놓은 책입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해석의 열쇠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 말은 성경 해석의 일관된 기준이 골고다 십자가를 지향할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신도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먼저 따져보는 것이 성경 해석의 가장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지옥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과제도 예수님이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따져보면 쉽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지옥이라는 단어를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것도 아주 참혹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말입니다. 직간접으로 언급한 내용이 마태복음에만 무려 12군데 이상 나오며 평행복음서까지 따지면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마 5:22 / 5:29,30 / 7:19 / 7:23 / 8:12 / 10:28 / 13:49,50 / 18:6 / 22:13 / 23:15 / 25:30 / 25:41) 반면에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서에는 오직 야고보서 3:6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몇 구절만 살펴봅시다. “형제를...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그 앞 구절에 따르면 옛사람들(구약)은 살인은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도 무시무시하며 구체적인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5:29,30)고 했습니다. 눈이나 손 하나가 잘려나가는 것보다 지옥의 고통이 훨씬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휠체어 타며 핸디캡으로 사는 것도 아주 고통스러운데 그것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이 핸디캡이 되는 한이 있어도 지옥 가는 것만은 피해라는 것입니다. 비록 비유의 뜻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그만큼 지옥의 참혹하고 고통스런 실체에 대해 구체적 묘사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 즉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8:12)고도 했습니다. 고통이 심한 곳에서 이를 갈고 있다면 불신자가 죽어서 단순히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하시는 자”(10:28)라고 했지만 불신자가 죽으면 당장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런 권능을 갖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불신자의 영혼이 지옥에 머물면서 언젠가는 완전히 멸하게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끝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49,50)고 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말씀으로 인해  불신자의 영혼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무덤에서 쉬고 있다가 부활 후에만 고통을 당한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불신자는 죽은 직후부터 바로 지옥으로 들어가 부활 때까지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를 별도로 강조하여 부활한 영과 육이 함께 불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4번 질문의 답변 참조)  

    한 개인으로 봐선 육신의 죽음은 사실상의 세상 끝이 되고 악인은 당연히 바로 풀무 불에 들어가게 되지만 언제 부활을 거쳐 최후의 심판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류 공동체로 봐도 언제 세상 끝이 시작될지, 또 그 시작되는 시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고 사단을 결박하여 부활한 불신자와 함께 영원한 불 못에 던져 넣어 그 심판이 완성되는 시점 간에 간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론에서 '이미'와 '아직'의 천국을 그것도 개인과 공동체로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설명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고 길게 설명드렸던 것입니다.  

    성경이 왜 이렇게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지 탓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자체가 벌써 한 개인에게 주는 말씀이자 인류 전체에게 주는 말씀이니까 그렇습니다. 또 학술 교과서나 과학 논문처럼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책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구분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구분해 놓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벌써 영원토록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매뉴얼에 불과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유지 보존 전승 번역된 책이라 읽는 자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읽으면 구원을 얻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라면 성령의 감동과 인도가 필요 없습니다. 단순히 신자는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도 신자의 노력으로 얻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언급을 봅시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불신자의 영이 지옥으로 떨어져 영영한 불로 마귀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성경적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그것도 아주 강조한 개념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예 신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불지옥에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는”(눅16:24) 모습들이 비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지배하는 지옥이라는 별도의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서 불신자의 영은 죽은 직후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신학자의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옥에 관해 하신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신약의 다른 서신서에 지옥이라는 직접 언급이 없다고 사도들이 그 실체를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 서신서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언급들만도 다음과 같습니다. (롬2:3-9 / 고후5:10 / 살전5:3 / 살후1:6-9)

    3.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몸이 거룩하게 되어 다시 살아나고 그 안에 영이 다시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후에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나요, 아니면 그 거룩한 '몸'이 다시 천국으로 들려올라가나요? 그리고 재림하신 이후의 삶과 재림하기 전에 죽은 성도들이 가는 천국의 삶이 같나요, 다른가요?


    앞의 두 질문은 한 가지 주제만을 언급하신 것에 반해 이번 질문은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질문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에 대하여 따로 답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3.1. 부활 후에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서는가? 성도들이 다시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실현을 기록해놓은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신약은 오셔서 하신 일이라는 주제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의 천국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그 천국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신천신지(新天新地)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으로 종결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그분과 죄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여 창조의 구속사적 완성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본문에서 새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네오스’ 대신에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카이노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전 하늘과 땅의 변형이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고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또 이사야는 창조라는 단어를 창1:1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뜻의 ‘바라’를 사용했습니다. 신약에서 요한이 신천신지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한 계시의 확실성을 구약에서 이사야가 이미 보증한 셈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대할 때에 성경은 항상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이 땅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전히 문제는 그 외적 모습과 과정은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부활한 신자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진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표현대로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아마도 이미 먼저 죽어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그 신천신지로 옮겨져서 아니면 옮기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셈입니다. 반면에 땅에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성도들은 그 곳으로 옮기워지니까 우리 식 표현으로는 들리어 올려가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르고 내린다는 것은 공간 이동상의 방향만, 그것도 수직 방향으로만 따진 것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어법상의 표현 즉 말로 설명하려니까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그 도래가 새로운 창조라면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 땅의 영역 즉 지상에 천국이 내려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의 지상 도래나 성도의 들림이 어떤 방향 아니 어떤 모습이 되던 관심을 가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로선 이미 죽은 성도나 그날까지 남아서 이기는 자에게는 신천신지가 유업으로 주어진다는 것만 믿고 그 소망을 간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자꾸 공중 들림에 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래 성경 구절의 해석이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게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몇 가지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바울 당시의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자기들 당대에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걱정했습니다. 아직은 신약 성경이 완전히 정경화 되어 천국에 대한 신앙적 지식이 정립되기 전이라 일반 교인들로선 이미 죽은 사람들은 음부에서 자는 것으로만 이해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으리라 염려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을 기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염려를 불식시키려는 것이지 공중 들림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휴거(Rapture)를 설명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바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아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그리스도 안에,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부활 때에 죽은 자가 살아 남은 자보다 차별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입니다. 나아가 살아남은 자가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지는 것보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 따라도 주신 질문의 답변은 부활한 성도가 다시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오는(정확히는 옮기워지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가 공중 들림을 한다는 것도 재림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다시 천국에 가거나 공중에서 이 땅을 함께 통치한다는 식의 해석(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적 근거나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공중 들림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 곁에 있는 천사들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했습니다. 또 구약의 에녹, 엘리야의 승천 기록이 있고 또 신약에도 빌립이나 사도 바울의 공중 들림과 비슷한 체험도 있으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승천이 부활 시에 성도의 공중 들림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그러나 휴거의 구체적인 모습과 시기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따지면 지구는 둥근데 모든 인간이 다 그분의 공중 재림을 알고 또 성도들이 동시에 공중 들림을 하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일이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또 동양과 서양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없고 그렇다고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면 이미 전 세계에 TV로 중계될 텐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질 것 아닙니까?

    성경을 싱상으로만 풀자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너무 문자적 자구에 묶여서 잘못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성도들도 너무 구체적인 모습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영광중에 가시적, 인격적으로 하늘로 통해 강림하시되 성도들은 그에 버금가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그분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권위 있는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는 공중 들림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지상에 따로 구별되어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즉 신약시대에서 예수님의 재림까지가 바로 천년왕국으로 해석하는 분도 많습니다. 휴거도 대 환난과 연결하여 환난 전, 환난 중, 환난 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로도 나뉩니다. 구체적인 시기와 모습은 평생을 성경만 연구한 종말론 전문가들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3.2. 이미 죽은 성도들이 재림 전과 후의 삶이 같은가 다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예수님 재림 때에 구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고 하니까 성도가 죽은 직후의 상태는 혹시라도 불완전한 구원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성도 개인으로선 완전한 구원은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 될 때에 그리스도의 면전에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후5: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빌1:23) 특별히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온전한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이른다”(12:23)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성도가 죽을 때에 “거룩함으로 완전해진 의인의 영혼들은 최고의 하늘에로 받아들여지며 그 곳에서 그들은 빛과 영광 중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육신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죽음 이후의 성도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지만 단 하나 재림을 맞이하지 못한 것만 다릅니다.

    그럼 재림 이후는 재림 전과 어떻게 달라집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가장 중요한 차이는 천국에 있던 영혼이 부활 후에는 육신의 구속마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에 관한 당위성과 그 의미 및 구체적 모습은 고린도전서 15:12-58까지 자세하게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기에 적합한 신령한 육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 육신의 구체적 모습이 어떠할지는 복음서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에선 “육신의 부활이 당신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들고 있습니다. “금생 이후에 내 영혼이 즉각적으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취하여 올려질 뿐만 아니라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킨 바 되고 나의 영혼과 또 다시 연합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육신과 같이 될 것이다.”

    재림 전과 재림 후의 죽은 성도의 삶은 죄가 아예 없는 곳에서 완전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맞대면 하여서 그분과 교제하며 세세토록 찬양한다는 면에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재림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기워지고 또 그곳에 적합한 신령한 육신을 덧입게 된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4. 예수님 재림하신 후 불신자들은 어디로 가게 되나요?
    그냥 지옥에 가서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사단을 완전히 멸하신다고 많이 들은 것 같은데, 그럼 재림이후 사단의 존재가 완전 사라진다면 불신자들의 영 또한 같이 사라지거나(소멸), 그 때에 다시 구원하시거나(?), 사단은 없지만 하나님이 주는 고통을 받게 되거나, 그 중 하나일 텐데..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또 그 영생의 핵심이 죽음 이후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이 땅과 별도로 따로 존재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서론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요컨대 예수를 믿는 신자와 믿지 않는 불신자와는 그 영원한 운명이 완전히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것은 죽음 직후에서 중간상태와 부활 이후까지의 모든 과정을 망라해서 그래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히9:27)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롬2:6-8) 하십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구하는 즉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와 세상의 썩을 것을 구하는 자를 구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죽음 이후에 불신자가 다시 회개할 기회는 전혀 없으므로  영원한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인간의 영혼이 가는 이 땅과는 다른 두 영역에서 상호 옮겨질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연옥이나 선조(先祖) 혹은 유아 림보(limbo) 같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사후 영혼의 중간정거장은 성경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서는 사후의 악인의 영혼들은 “지옥에로 내던져지며 거기서 그들은 큰 날에 심판 받기로 예비된 고통과 완전한 흑암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육신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이 두 곳(천국과 지옥) 이외에 성경은 아무 곳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불신자의 영혼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라는 2번 질문의 답변에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부활 때까지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은 모르지만 분명히 고통 가운데 지냅니다. 그 후 예수님의 재림 시에 육신의 부활을 입습니다. 구약에서 다니엘 선지자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그 사실을 확증했습니다.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부활을 예언한 다니엘서가 말하는 바로 그 인자(메시야, 단7:13)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재림 때에 모든 신자와 불신자를 부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부활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 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1-15)

    부활한 불신자는 불못에 던지워져 둘 째 사망을 당한다고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 공히 육신의 죽음이 있는 것과 또 신자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에 대비해서 불신자만 당하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뜻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신자는 두 번 태어나고(육신적 출생과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남) 한 번만 죽지만(육신), 불신자는 한 번만 태어나고(육신) 두 번 죽는다(육신과 영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 후에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완전히 결여된 채로 죄의 완전한 지배로 이뤄진 무궁한 혼란의 상태에서 육과 영혼의 극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질문자님이 생각한 대로 사단과 불신자의 영이 완전히 멸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한 불신자는 사단이 이미 던지워진 불못으로 함께 던지워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합니다. 흔히 사단이 완전히 멸해진다고 하는 말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불못에 영원토록 완전히 던지어졌기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지상에서 신자를 훼방하던 사단과 죄와 사망이 이젠 더 이상 신자에게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이 정반대가 된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품 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반면에 불신자는 사단과 함께 불못에서 영원한 고통만 당하는 것입니다.

    5. 주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라는 것은 다니엘의 '육체'에게만 하신 말씀인가요? 아니면 영 또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쉰다는 의미인가요?



    이 질문의 답은 상기의 설명에 근거하여 이젠 질문자님도 충분히 추론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고난 가운데도 선지자로 충성을 다한 다니엘에게 주신 마지막 위로이자 약속의 말씀입니다. 신자는 죽으면 육체는 이 땅에서 썩고 영혼은 바로 천국으로 가서 완전한 구원을 누립니다. 그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신령한 새 육신을 덧입는 부활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하며 지냅니다. 그런 뜻으로 평안히 쉰다고 한 것이지 단순히 육신과 영혼이 무덤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무덤 속에 썩지 않고 남아 있는 뼈에 다시 생기가 들어붙어서 금생에 살던 동일한 육신의 형태로 이 땅에서 부활 될 것이라 믿거나 기대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 때 신자는 불교신자와 달리 죽어서 화장하면 안 된다는 말들이 돌았지만 완전히 잘못된 낭설입니다.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길게 설명했지만 사실 구체적인 어떤 모습이 잡히지 않아 실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사후에 가는 신자의 천국, 불신자의 지옥, 또 재림 이후의 신자의 신천신지 불신자의 불못의 구체적인 모습과 신자 불신자가 바뀔 양태 등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시기와 장소 또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토록 거룩하시고 완전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재림과 신천신지의 도래와 마지막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인내하고 되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회개치 않고 죽은 후에는 그 즉시로 그분의 은총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영원한 고통만 있는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신자는 진정으로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죽음 이후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살고 또 자기 주위에서부터 그 천국을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면 됩니다. 나아가 불신자가 겪을 지옥과 최후의 심판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울 것이 확실하기에 예수를 모르는 미혹된 영혼들을 정말로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한마디로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음 이후가 불안하거나 없다고 믿기에 이 땅에서도 허공을 치며 향방 없는 달음박질만 하며 초조하게 삽니다. 신자는 죽음 이후는 오히려 가장 큰 소망이 되기에 이 땅에선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항상 기뻐하며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이 신자 모두와 특별히 질문자님의 살아 있는 개인적인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1-4,8,9)  

    11/17/2006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최근에 발견된 성경 속 인물 골리앗의 유골입니다.
    다윗의 물맷돌에 맞아 죽은 흔적이 뚜렷합니다. 
     
    키가 3m에 육박했던(삼상17:4) 블레셋 장수를 향하여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이렇게 선포했던 다윗의 용맹함으로 더욱 흰두의 나라 인도에서 선교 사역에 전념하겠습니다. 
     
    샬롬!마라나타!
    인도 선교사 최석진 올림.^^

     

     

     

     

     

    율법과 복음의 혼동/마이클 호든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해 말하는 또다른 방법은,그리스어에서 서술법과 명령법 차이다.

    서술법은 우리에게 사실 그대로를 말해 준다.예를 들어,고양이가 매트위에 앉아 있다는 식이다.

    명령법은'고양이를 매트 위에 데려다 놓아라.'처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명령법이지 직설법이 아니다

     

    명령법 자체(그리스어에서는 수월하게 분별된다)가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나는 참으로 더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논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권면,심지어 그렇게 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이

    복음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나에게 어떤 것을 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때,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의

    강력한 힘을 조금도 희석시키지 않고 받어들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될수 있는 모든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를 상실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범한 자들로 정죄 받는다 .

    우리의 의는"더러운 옷"(사64:6)과 같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칭의)로 옷 입혀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중생)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하신다(성화)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율법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러나 오직 복음만이 율법의 법조문과 죄와 죽음의 지배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율법과 복음이 각각 단순히 십계명과 요한복음 3장16절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를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목적과 행동을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복음이다.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복음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많은 권면,명령,그리고 명령법들이 있다,이런 것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복음은 아니다.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복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지침도 필요하다.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야 깨끗해 질 수있고,우리의 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이것들이 우리를 감사가 넘치는 순종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율법(행위들)에 부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에 대해서라면 복음(믿음)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을 얻는 수단으로 착각함으로써,우리의"선행"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가장

    공격적인 죄가 되고 만다.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 이 선물을 받을때,

    믿음은 즉시 의의 열매를 생산해 내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좋은,거룩한 그리고 적절한 것들 조차 복음과 섞여버릴 때는,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즉 끝없이 펼쳐지는 드라마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中

    부흥과 개혁사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웃어보세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며칠 전,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아픈 개인사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가 풀러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뛰어난 신학자이며 제게도 책을 통하여 탁월한 신학적 통찰들을 제공해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런 아내와 살면서 미칠듯한 고독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결혼 24년 만에 분노하며 떠나겠다는 아내를 그는 놓아 보내야 했습니다. 수년이 흘러, 아내는 외로이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 때문에 불평을 하면 정신질환을 겪는 엄마와 사는 많은 아이들이 더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지적을 했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된 아들이 “아빠는 그때 30대 중반이셨잖아요. 난 겨우 7살이었다고요”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안겨준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긴 이야기(그의 삶은 아무리 길게 말한다고 해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 세월이었겠지만)를 읽으면서 저는 이런 고난이 그의 신학을 깊이 있게 만든 요소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사의 몇 분이 생각났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1761~1834)의 아내 도리시 캐리도 인도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들이 죽은 후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품으로 데려가시기까지 마지막 12년을 심각한 정신질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사에 탁월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토마스 보스톤(1676~1732)의 아내도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마지막 10년을 보내고서야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개혁신학의 거성인 벤저민 워필드(1851~1921)는 신혼여행에서 아내가 번개를 맞고 불구가 된 이래 평생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 두 시간 이상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아픔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신실하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깊이는 그들이 겪은, 답 없는 고난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정답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 우리와 똑같이 나눠가진 성향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답에서는 깊이가 나오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깊이 따위는 필요 없으니 편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천박하고 얄팍한 인생들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마지막 말이 제 가슴에 울립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난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이다......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의 주장이 최소한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답 없는 인생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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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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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
        세상 사람들
         
        누가 가장 따뜻할까?
        아버님의 엄한 말씀
        어머님의 무조건의 사랑
        할머니의 사랑
        할아버지의 사랑
        아내의 남편의 사랑
        남편의 아내사랑
        자식사랑
        자식의 부모사랑
        친구의 사랑
        내가사는 이웃사랑 
         
        그중에 가장 따뜻한 손은 어느 손 일까?
        이중에 따뜻한 손은 없다
        가장 따뜻한 손은 바로
        내마음에 손
        바로 사랑의 손인 것이다.
         
        비록 누가 나를 헐뜯어도
        잠시 참고 지나가면 잊혀질것이요
        비록 내손이 탐욕의 손길이나
        마음이 바른길로 가지 못할때
        손을 내 젖는 손 바로 그손이
        가장 따뜻한 손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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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사람과 옛 자아를 못 박지 않으면 우리의 옛 사람과 옛 자아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아는가? 그것은 드라큘라보다 무섭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자꾸 불평하게하고 원망하게 한다. 음란하게 하며 시기와 질투를 하게 한다. 쓸데없는 공명심을 갖게 하여 종교적 영웅심을 갖게 만든다. 이것이 폭발하면 교회에 문제가 일어나고 난리를 피우게 된다. -소강석 목사의 ‘하나님의 원하심’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보다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지은 죄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면 다 용서해 주시지만 옛 사람과 옛 자아가 죄를 짓게 하고 넘어지게 하기에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옛 자아가 살아나와 자신과 몸 된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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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가 낳은 미술의 대가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그림,

    '만종'을 탄생시킨 화가 '밀레'를 아시죠?

    그 '밀레'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화가이지만

    처음부터 그의 그림이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무명화가였던 그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마저 받았다고 합니다.

    전혀 작품이 팔리지 않아 가난에 허덕이던 밀레에게 하루는 
    그의 친구인 '루소'가 찾아왔습니다.

     

    "여보게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네의 그림을 사고 싶어하네.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주게."

    루소는 이렇게 말하며 반신반의하는 밀레에게 선급이라며 300프랑의

    거금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답니다.
     

    루소가 건네주었던 그 돈은 밀레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돈은 밀레에게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 큰~ 희망과 용기를 안겨준 것입니다. ^^

     

    그리하여 밀레는 생활에 안정도 찾게 되었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그림에 열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몇 년 후, 밀레의 작품은 정말로 화단의 좋은 호평과 함께 인정을
    받아  아주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이제 경제적 여유도 가지게 된 밀레가 친구인 루소의 집에
    찾아갈 일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몇 년 전에 루소가 다른 사람의 부탁이라며 사서 가져간
    그 그림이 루소의 거실벽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밀레는 친구의 깊은 배려의 마음을 알고 눈물을 글썽였고
    자기를 이토록 아껴주는 친구를 실망시켜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림에 열중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했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지쳐가는 어려운 친구에게 돈을 도와주는 루소의 마음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먼저 친구인 밀레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는 배려하는 마음이
    바로 밀레를 미술의 대가로 만들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피로 값 주시고 산 바 된 너와 내가 아우러져 우리가 되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인 가정,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야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남을 배려하는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피곤에 지친 당신의 목사님과 사모님, 혹은 리더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보다 잘 감당할 수 있는
    위대한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
    상대방을 배려하는 당신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피곤한 당신의 남편과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뿌듯한 기쁨과 행복감을 안겨준다는 것 기억하세요...

    인간은 행복하면 창의력도 생기고 하는 일에 능률도 오른다거든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아픈 마음 싸매어 주며,

    넓은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함께 모아 보아요,우리.


     

     

    아름다운 마음이 모여질 때 내 가정이 복되고

    내가 몸담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날로 날로 부흥발전해 나갈 수 있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얼굴마저... 흐믓하신 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는 다른 이의 자긍심에 상처주기보다는
    따스한 격려의 말 한 마디 잊지 않도록 해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대의 따스함이 베어있는
    그 말 한마디, 비록 작게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그대에게, 상대에게, 행복을 심는 씨앗이 된답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 많은 분들이 알고 있던 대로,

    밀레에게 있었던 '루소'란 친구는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사상가 '루소'는 아니고 동명이인이라고 합니다.

    독자님들은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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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ag.jpg

    다섯 명의 자식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아들이 유독 병약하고 총명하지도 못하여 형제들 속에서조차 주눅 들어 있는 아들이 아버지는 늘 가슴 아팠다고 합니다.

    어느 하루, 아버지는 다섯 그루의 나무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한 그루씩 나누어 주며 1년이라는 기한을 주었지요.

    가장 잘 키운 나무의 주인에게는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약속한 1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놀랍게도 유독 한 그루의 나무가 다른 나무들에 비하여 키도 크고 잎도 무성하게 잘 자라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였던 그 아들의 나무였던 게지요.

    약속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예상대로 이 아들은 자기가 딱히 무엇을 요구하여야 할지 조차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칭찬 하기를 이렇게 나무를 잘 키운 것을 보니 분명 훌륭한 식물학자가 될 것이며 그리 될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모두들 앞에서 공표(公表)하였지요.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명분 있는 지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은 이 아들은 성취감이 고조되어 식물학자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얗게 밤을 지낸 새벽 잘 자라준 나무가 고맙고 하도 신통하여 숲으로 갔습니다. 어스름한 안개 속에 움직이는 물체가 그의 나무 주변에서 느껴졌고 곧이어 물조리개를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의 두 눈에 보였습니다.

    그 후 이 아들은 비록 훌륭한 식물학자는 되지 못하였으나 미국 국민들의 가장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세계에 떨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으로서, 오늘날 미국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의 통치방식에 힘입은 바 크며. 국내적으로는 1930년대의 대공황 타개를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을 지도함으로써 이후 미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토대를 마련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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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ease Sign this Petition.




    독도 Petition 캠페인은 4월 20일까지 진행됩니다.

    구글은 구글지도에 한국의 고유영토인 독도의 이름을
    2012년 10월에 ‘Liancourt Rocks’으로 변경했습니다.
    독도의 이름을 2012년 10월이전으로 구글에게 복원을 요청하는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서명한 서류는 구글에 전달될것입니다.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미국 이외의 지역의 경우 주소를 한줄로 넣으셔도 됩니다..
    First Name Last Name
    Address
    E-Mail(Optional) Date
    Referral 

    다음의 PDF 파일을 다운로드하시고 출력하셔서 petition 을 작성하신후에 우편으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JIN DUCK & KYUNG SIK KIM FOUNDATION
    P.O. Box 913
    Cupertino, CA 95015
    전화번호: 408-483-6707
    실리콘밸리 한인회
    3707 Williams Rd,
    San Jose, CA 95117
    전화번호: 408-244-2400
    이메일: svkccenter@gmail.com
    KOWIN (Kyong I Yi)
    426 Gateway Dr #4
    Pacifica, CA 94044
    전화번호: 415-374-9935




    [앵커]
    이슬람 포비아 현상과 문제점, 대처방안을 살펴보는 기획보도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이슬람대책활동과 이슬람에 대한 교회의 종합대책 방향을 천수연, 고석표 두 기자가 잇따라 전해드립니다.

    [천수연 기자]

    한국교회가 이슬람대책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지난 2007년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팀 피랍사건 이후부텁니다.

    여기에 이슬람계 외국인 유입이 늘고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 발행이 시도되면서 교계의 이슬람교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습니다.

    조직이 구성된 건 2008년 무렵. 예장통합과 합동총회가 당시 정기총회를 통해 특별위원회를 신설하고, 이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보수 연합단체를 중심으로 대책이가 꾸려져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부 교단에서는 대책위원회를 상설화하는 등 대책활동을 강화하는 분위깁니다.

    [인터뷰] 노재경 목사 / 예장합동 교육국
    "이슬람대책위원회가 그동안은 이단대책위원회 안에 분과로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독립적이고 파워풀한 활동을 할수 없게 구조적으로 돼 있었죠."


    이슬람대책위의 주된 활동은 이슬람의 실체 알리기. 세미나 등을 통해 이슬람의 폭력적 종교성과 국내 이슬람화 전략 등을 한국교회에 전하고 있습니다.

    [전화인터뷰] 김정만 목사 /예장백석 타종교대책위원장
    “취업을 가장해 이슬람화 하려고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습니다.결혼과 출산 고지를 점령해서 한국 모든 여성을 이슬람화하려고 대책세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대책활동은 이슬람을 경계하는 소극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국내 무슬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현수 대표 / 한국프론티어스 국제선교회
    "또 한국사회에서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정체감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사회학적이고 때론 정치학적이고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구체적 데이터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예요."

    또 국내 무슬림을 놓고 국내선교부와 이슬람대책위가 선교정책과 대응방향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도록 협력적으로 움직일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CBS뉴스 천수연입니다.

    [영상 채성수 편집 서원익]

    [고석표 기자]

    2015년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이슬람 인구는 약25만 명.

    전문가들은 그러나 10년 안에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100만 명에 육박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습니다.

    외국의 무슬림 인구도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 약 72억 명 가운데 무슬림이 약 22%로 약 16억 명.

    외신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2001년 무슬림 인구는 150만명, 10년이 지난 2011년엔 280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이상이 기독교인들이라고 알려져 있어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김군이 IS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제2의 김군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무슬림 바로 알기 교육도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무슬림의 확장은 경계하되 이로 인한 공포증 즉 이슬람포비아는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이슬람포비아는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혜롭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입니다.

    이에 따라 신학적, 종교적 편견을 넘어서서 무슬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CBS 뉴스 고석표입니다.

    천수연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USA아멘넷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소외된모습으로 그려지고, 값이 지불되기를 냉정하게 기다렸다가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면, 이 얼마나 저급한 신관인가, 하고 현대 자유의자들을 외친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원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해는 순전히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반론은 물론 죄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에 근거해 있다. 만약 자유주의 교회가 가정하는 것처럼 죄가 사소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도 가볍게 간주될 것이며, 하나님은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난 일은 지난 일이라고 처리하는 것은 듣기에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일이다. 같은 인간에게 범해진 죄의 경우에도 이런 식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죄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낭비되어 버린 삶의 돌이킬 수 없는 죄책을 누가 측량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런 죄책을 위해서까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는 샘을 제공했다. 하나님은 마치 옷을 입히듯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심판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선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진정한 도덕적 질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감히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간주할 수 있는지 이상하다. 예수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공의를 그분의 사랑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오직 사랑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무서운 말로,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말했다. 그는 보응적 정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오늘날처럼 죄에 대한 가벼운 견해를 받아들였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현대 자유주의 교사들은 소외된혹은 분노한하나님이라는 교리는 끔찍하다고 말한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을 지적하면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와 예수 자신의 분노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또한 예수의 모든 교훈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교훈과 모범에서 이렇게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을 예수의 참된 제자로 간주할 수 있는가? 진상은 이렇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교훈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는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체 신약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 자신의 교훈과 완전히 어긋난다. 사람이 일단 죄에 대한 유죄 선고를 진정으로 받았다면, 그는 십자가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상을 말하자면, 속죄 교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속죄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교리 그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오해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대해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이 마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드린 제물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값이 지불될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다가 지불된 후에야 죄를 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는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본적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린 이는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의 위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준 아버지의 위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제물을 드린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아무 값없이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다. 엄청난 값은 하나님이 지불하고 그 유익은 우리가 얻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런 사랑은 현대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느긋함과는 매우 다르다. 이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이 사랑, 오직 이 사랑만이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준다. 실로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도 기쁨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된 방법으로 찾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떻게 하면 기쁨이 될 수 있는가? 당연히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을 우울한 독재자나 엄격하고 의로운 재판관으로 간주하지 말고, 오직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만 간주하자고 권한다. 옛 신학의 공포여, 사라져라!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신을 경배하자!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종교가 기쁨을 위한 길이라는 이 제안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이 효과가 있는가? 둘째, 그것은 참된가? 그것이 효과가 있을까? 당연히 효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 자녀에게 영원한 고통을 가는 일이 결코 없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자 사랑의 아버지가 우주의 통치자인데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만약 모든 죄가 반드시 사해질 것이라면 후회의 아픔이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감사하지 않는다. 현대의 설교자가 자기의 역할을 아주 열심히 행한 후에도- 즉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불쾌한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 그에 어울리는 유창한 언어로 경축한 후에도- 회중은 어쩐지 옛날의 그 기쁨의 열광 속으로 들어가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진상을 말하자면, 현재 설교 속의 하나님은 매우 선할지는 모르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신이다.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유머만큼 무미건조한 것도 없다. 그렇게 희생을 치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만약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용서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경 쓸 것이 무엇인가? 그런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의 두려움에서 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국은, 만약 그런 천국이 존재한다면, 죄로 가득할 것이다.

     

    사람을 격려하기 위한 오늘날의 신의 개념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또 다른 반대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과 친절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자연을 통해? 인간의 통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당신이 우울하다고 거부하려는 그 신의 개념을 이전 신학자들은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 너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가 당신의 근거인가? 이것은 더 좋지 않은 주장이다. 저 바깥 어두운 곳과 영원히 타는 불,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말한 분이 바로 예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당신의 위로를 주는 신의 개념을 위해 오늘날 당신에게 직접 내려진 계시에 호소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밝은 면만을 보는 방식으로는 종교가 기쁨이 되지 못한다. 한편으로 치우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 영혼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은 진짜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은 재앙으로 끝나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불가침의 신비 속에 둘러싸여, 두려운 공의 속에 존재한다. 사람은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로 자신의 형편을 최대로 활용하며 감옥을 싸구려 금장식으로 치장하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은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기쁨의 여지는 없고 오직 심판과 불같은 분노를 두려운 마음으로 예상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은 현대 설교에 등장하는 위로하는 하나님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나은 점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창조나 자신의 피조물에게 얽매이지 않으며, 기이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복음은 이 메시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던 것이었다. 구원의 방법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더욱 아무도 몰랐다. 그 탄생, 그 생애, 그 죽음, 왜 그것이 그런 방법으로 그때 거기서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너무나 지역적이고, 너무나 특정적이며, 너무나 비철학적이고, 기대할 수 있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구원 방법이 더 낫지 않은가?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왕하5:12)

     

    그러나 만약 그것이 참되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가장 크신 자가 가장 사랑이 많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준 바 되었고, 모든 시대의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어졌고, 현자와 지자에게 감춰졌던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났으며, 오랫동안 갈망했지만 성취될 수 없었던 죄의 정복이 신비한 은혜에 의해 이루어졌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거룩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참으로 이것, 오직 이것만이 기쁨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 가까이 있는 기쁨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하나님, 오직 사랑뿐이고, 오직 아버지 외에 다른 분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더 안전하지 않을까? 이런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죄가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호와를 보고자 한다. 절망하고, 소망하고, 떨며, 반신반의하고, 모든 것을 예수에게 의탁하면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감히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임재 앞에서 산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85-194

    가져온 곳 : 
    블로그 >청 교 도 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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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주님 오심을 기다린다면 주님은 내게 와서 나를 배우라고 하신다. 주님을 배워 주님의 냄새가 나야 한다. 첫째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그 낮아짐과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 주시는 섬김을 배우라한다. 또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저들의 용서를 간구하셨으니 용서를 배워야 한다. 주님은 네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바울 사도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는데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없다면 다 허사요 허공을 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결국 주님 오심을 기다린다는 말은 주님을 배우고 천국을 소망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김진덕 목사의 ‘대림절을 지키는 마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살 영생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 땅의 정욕, 탐심, 시기심과 질투,교만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요? 땅에서의 삶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예수의 모습을 훈련하지 않고서는 영생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이 땅에서의 삶은 결국 천국의 삶을 훈련하는 훈련장인 것입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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