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원수를 먹이라

사람은 누구나 복 받는 삶을 원한다.
그러나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복은 언제나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환경이 좋지 않을 때에는 “운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체념한다.
그러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비결이 있다.
여러분이 이 비결을 알고 실천하기만 하면 저주의 환경을 복된 환경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다.
그 비결은 바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을 할 때 그 축복은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축복의 말은
우리 삶의 환경을 지배하는 엄청난 능력이 되는 것이다.
-참 좋은 군사의 ‘복을 빌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까닭 없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원수를 축복하면 원수가 온화하고 온순하게 되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이 이와 같이 유익을 준다면 왜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오늘부터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축복하기 싫을수록 더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그 축복이 풍성하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만큼은...  (0) 2015.03.27
아무리 좋은 언변이어도  (0) 2015.03.24
왜냐고 따지지 말라...  (0) 2015.03.07
감사의 위력  (0) 2015.02.07
♥화장품 판매합니다 한세트씩 사주세요♥  (0) 2015.01.28

죄의 오염 / 존 칼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담의 영적인 생명은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계속 연합되고 결합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는 아담의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 전체를 뒤집어 놓은 그가 자신의 반역으로 인류를 타락시킨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롬 8:20, 22).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피조물이 인간이 받아 마땅한 형벌의 일부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저주가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영역에 두루 퍼졌으므로 그 저주가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퍼졌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불합리한 점이 없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늘의 형상이 지워진 뒤에 아담은 하나님께 받은 온갖 장신구-지혜, 미덕, 정의, 진리, 성결 등-을 빼앗기고 그 자리를 무시무시한 역병-맹목, 무능, 허영, 음란, 불의 등-이 대신하는 형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후손들도 함께 자기와 똑같은 비참한 상태에 몰아 넣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다윗의 고백에는 분명 아무런 모호한 점이 없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 구절에서 다윗의 의도는 자신의 부모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효과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자신의 태생적인 불결함을 되풀이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사례는 온 인류의 공통된 운명의 한 예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의 부정한 씨에서 나와 죄에 오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니, 우리는 태양 빛을 보기 전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렵혀지고 오염되었습니다. 욥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좐 칼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요일에서 주일로 변경이유/ 칼빈  (0) 2016.03.27
좐 칼빈-천국과 지옥  (0) 2015.10.10
부활-좐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  (0) 2015.03.19
성령의 신학자, 요한 칼빈  (0) 2015.03.14
당당한 칼빈 주의  (0) 2015.01.20

CBS '신천지에빠진사람들' 첫 방송..방송금지 가처분 기각

2015/03/17 ㆍ추천: 0      

이단 신천지가 법원에 낸 CBS 특집 다큐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이 오늘(16일)기각됐다. 이에 따라 CBS TV 특집 다큐 '관찰보고서-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16일 저녁 8시 10분 정상적으로 첫 방송을 할수 있게 됐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를 지키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신천지 아웃 캠페인(antiscj.co.kr)을 전개해온 CBS(사장 이재천)는 지난 4일 HD 송출 기념 특집 다큐 8부작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 제작 발표회를 가졌다.

이후 5분 분량의 방송예고 영상이 SNS를 통해 공개됐고, 현재까지 페이스북에서만 70여 만 명이 방송 예고물을 접했다.

전국 교회와 신천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방송예고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신천지의 실체를 폭로하는 방송 예고 영상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단 신천지 측에서는 곧바로 CBS를 상대로 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신천지측은 지난 6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 낸 가처분 신청문에서 “CBS가 신천지를 사교집단이자 가출과 이혼, 가정파탄, 자살, 폭행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이라는 취지로 신천지에 빠진사람들을 제작했다”며,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그러나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그동안 종교적 비판은 고도로 보호돼야 할 기본권으로 판단해 온 법원이 CBS의 제작물을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결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CBS TV HD특집 8부작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오늘(16일) 저녁 예정대로 첫 방송을 할 수 있게 됐다.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기획에서부터 제작까지 1년이 소요됐으며, 교계 최초로 2천 시간에 걸쳐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관찰 카메라에 담아 신천지의 실체를 샅샅이 파헤쳤다.

이번 방송으로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사회 전반에 신천지의 반사회성에 대해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CBS 특집 다큐 '관찰보고서-신천지에빠진사람들'은 16일 첫방송을 시작으로 다음 달 12일까지 8부작에 걸쳐 방송된다. 방송은 인터넷 신천지 아웃 홈페이지나, 페이스북 CBS JOY, 유투브 등 SNS에서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다.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USA아멘넷

한 눈 팔다가~

 

 

핸펀으로 보면 엄청 빨라요,,여그는 슬로우 고고,,,

 


a1.jpg

a2.jpg

a3.jpg

a4.jpg

a5.jpg

a6.jpg

a7.jpg

a8.jpg

a9.jpg

a10.jpg

a11.jpg

a12.jpg

a13.jpg

a14.jpg

a15.jpg

a16.jpg

a17.jpg

a18.jpg

a19.jpg

a20.jpg

a21.jpg

a22.jpg

a23.jpg


지난날 목회를 돌이켜 보면 적시의 목회적 타이밍을 놓쳐 낭패를 보게 된 사례가 적지않다. 순간의 타이밍을 놓쳐 목회적 손실이 발생하게 된 경우이다. 꼭 필요한 시간에 그 교우를 심방해 불필요한 오해를 풀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 타이밍에 그 계획을 추진했어야만 했다. 그 타이밍에 몸을 던져 그 기회를 포착해야 했는데 놓친 것이다. 그 때 교회를 이전했어야 했는데 이전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뛰어난 리더는 기회의 문이 열릴 때 어떤 방해물이라도 뚫고 전진해야 한다. 바울은 마게도니아 환상을 본 후 복음의 기회를 포착하고 유럽으로 나아갔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충언을 듣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그 다가오는 하나님의 카이로스 기회에 몸을 던졌다.

많은 리더들이 주어지는 순간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방해물을 만난다. 가장 흔한 방해물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기회가 주어져도 주변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의 말, 실망의 한마디 들으면 이내 기가 꺾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예 리더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당회나 교회 운영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한 마디로 인해 그 애써 준비한 계획을 던져 버린다. 그러면 결국 기회는 점점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번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비전과 계획을 밀어 부치는 뚝심도 리더들에게는 필요하다. 이기주의, 게으름, 기도 부족, 분별력의 부족, 용기의 부족 등으로 정작 밀어 부쳐야 할 계획을 휴지장과 같이 던져 버리는 리더는 소망이 없다.

어떤 리더들은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알아서 이루어 주신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넌센스이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척척 알아서 이루어 주신다는 이런 잘못된 착각에 빠져 있는 리더들은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없다. 과감하지 않고 실천적인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결코 기회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요즘 같은 목회적 불황의 시대에는 과감히 몸을 던지는 의지가 없이는 교회의 성장이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과감히 전진하지 않으면 우리의 리더십은 계속 정체를 면치 못한다.

리더는 당장 눈 앞에 상황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목회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영적 리더는 예리한 목회 타이밍 감각이 필수적이다. 종종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음성이 반복해 들리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 일을 행하게 하시 위해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있게 한다. 그 특정 사람을 만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은 적합한 상황, 적합한 때에 우리로 하나님의 기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신다.

성경에 에스더만큼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예리하게 분별해 그 상황에 몸을 던진 리더도 없을 것이다. ‘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며 자신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에스더, 그녀는 타이밍의 가치를 깊이 깨달은 그 시대의 거룩한 리더였다.

리더의 길에는 항상 위험이 제로인 상태는 없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된 일을 추진하려고 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위험을 위험으로 알고 그러나 믿음과 용기로 나아가면 추진력이 발생한다. 현재에는 나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의 계획을 이해하고 도와 주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심지어는 나에게 기회의 문을 제공하는 모르드개 같은 바른 사람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쉽게 기회에 몸을 던지는 모험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더십의 원리를 깨닫고 과감해 지고 분별력이 생긴 후에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나 목회는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믿음의 확신이 생겨난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목회적 타이밍을 포착하라,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라!

출처:USA아멘넷/정인수 목사 칼럼 

이 글은 John Calvin의「基督敎 綱要 - Ⅲ권」에서 그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25장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25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 교리를 주장함, 1-4)

1. 부활의 소망 : 이 소망의 중요성과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골 1: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 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 이처럼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힘을 준다 -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3. 바라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 완전히 썩어 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으로써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셔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4. 몸의 부활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각종 반대론자들의 반대론을 반박함, 5-9)

5. 이교도들의 반대론을 장례로 반박함. 천년왕국론자들의 오류 - 본성의 놀라운 충동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의 눈앞에 항상 부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장 풍습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천년왕국론자들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는데, 천이라는 수는(계 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

8. 몸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 부활의 모양 - 매장하는 몸들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장례는 왜 생겼겠는가?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 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9. 불신자의 부활 -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백을(행 24: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세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 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t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 -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예컨대 어둠, 울음, 이를 갊(마 8:12; 22:13), 꺼지지 않는 불(마 3:12; 막 9:43; 사 66:24), 심장을 갉아 먹는 죽지 않는 벌레(사 66:24) 등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좐 칼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좐 칼빈-천국과 지옥  (0) 2015.10.10
좐 칼빈 - 죄의 오염  (0) 2015.03.21
성령의 신학자, 요한 칼빈  (0) 2015.03.14
당당한 칼빈 주의  (0) 2015.01.20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0) 2015.01.08

두날개, “문제점 시정하겠다” 성명서 발표
신학적 오해와 오류 지적해준 이단연구가들에게 감사
 
크리스찬투데이   기사입력  2015/03/06 [06:21]

한국에서 시작, 미주에서도 적지않이 많은 한인교회들이 활용하고 있는 전도프로그램인 ‘두 날개 약육 시스템’이 그간 이단연구가들에 의해 지적받았던 문제점을 시인하고, 시정할 것을 약속했다.
2015년 3월 3일자로 ‘두 날개’ 대표 김성곤 목사가 발표한 성명서의 중요 요지는 “말씀과 성령의 두날개로 제자훈련 지향했으나 신학적 오해와 오류가 있었다. 최선을 다해 그 문제점을 수정하겠다”는 내용이다. 성명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성 명 서

두 날개 양육시스템은(이하 ‘두 날개’라 함) 부산의 풍성한 교회에서 199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국제컨퍼런스와 집중훈련을 개최하여 그동안 국내외 다양한 교단과 교회 그리고 선교회 등 50여 개국 1만 5천여 교회가 참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를 양육하여 선교를 지향하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고 확장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두 날개는 전 교우가 주일에 모이는 대그룹 예배와 삶의 현장에서 소그룹으로 모여 합심하여 전도하며 서로 섬기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교회 운동입니다.
한국에서 자생하여 지난 십 수 년 동안의 임상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두 날개는 말씀과 성령의 균형 잡힌 제자훈련을 지향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래를 펼쳐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신학적인 오해와 오류들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바입니다. 예를 들면 다락방, 신사도운동, G-12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단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아들여 그 동안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두 날개의 교육 교재를 수정하여 재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세계비전 두 날개 프로세스’로 건강한 신학적 내용과 순수한 복음만을 가르치겠습니다. 이단연구가들에 의하여 지적된 문제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 하여 수정하였고, 앞으로도 문제가 발견될 시 기꺼이 수정하여 한국교회를 살리는 전도의 프로그램으로 세워갈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본 프로그램에 문제점들을 지적해준 이단연구가들의 수고에 감사와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세계비전 두 날개 프로세스는 교회 내외 변화된 상황의 도전에 대해 건강한 교회 운동으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온 누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중단 없는 거듭남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할 세계 비전 두 날개 프로세스가 되도록 앞으로 더욱 뜨거운 사랑과 지도를 한국 교회에 겸허히 부탁드립니다.

주후 2015년 3월 3일
사단법인 두 날개 선교회 대표 김성곤 목사

15.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세례요한의 외침 ‘회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어디서 하나님의 교제에서 떨어졌는지 마음에 떠올려
잘못을 인정하고 처음의 마음과 행위를 갖는 변화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서 선을 행하는 행위까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Remember therefore from whence thou art fallen,
and repent, and do the first work;
or else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and will remove thy candlestick out of his place, except thou repent. 요한계시록2:5]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게 네 자리에서 촛대를 옮기시겠다, 하신다.
여기서 '촛대' 는 성령을 전인 우리 각자 ‘개인’ 이면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으로 넓은 의미의 ‘교회’ 로 본다.
마태복음 5:14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 시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고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공의의 자녀임을, 빛의 자녀임을 증거 하신다.
그 빛은
[스볼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과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15-16]
빛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며 복음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었다.
그 빛을 전해주기 위해 그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회개의 외침’이 있은 후
비로소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예수님께서 변형되었을 때에도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으며
그 빛을 누가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누가복음 2:2] 표현했고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으로
예수님은 빛이심을 선포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
As long as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요한복음 9:5]
빛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
하나님의 공의로 복음의 빛으로 오신 주님
이를 일깨워 주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빛의 자녀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For ye were sometimes darkness,
but now are ye light in the Lord: walk as children of light;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에베소서 5:8-9]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 빛 이라
때로 어둠의  걸림돌에 넘어져
때로 어둠에 거하였더라도 (were sometimes darkness)
다시 빛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를 하고
빛의 자녀로 영원한 빛에 거하기 위하여 빛의 열매를 맺으라 하신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빛의 열매는
선이인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착함 (goodness 공의)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 로 의로움 (righteousness 공의)
그리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진리로 진실함 (truth 공의)을 맺는
그리하여 빛을 세상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사람들로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하여.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세례요한은 ‘회개’를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세속에 물들고 혼합적이고 불순한 종교의 전통에 남아있는 성전이아니라
새롭고 변화되는 소망이 있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광야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을 누렸던 그 같은 광야에서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세속의 옷이 아닌 약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자연적인 섭리인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했다.

회개는
구약은 율법의 희생 제물로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면
신약은
생각을 고치고 그릇된 관념을 고친다는
헬라어 ‘메타노에오(metanoeo)의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까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도를 본받는
빛의 자녀로 빛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는,
참회(懺悔)의 눈물로(penitential tears)로 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Therefore leaving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of Christ,
let us go on unto perfection;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dead works,
and of faith toward God, 히브리서 6:1]

어린아이와 같은 기초적인 초등학문에서 떠나고
기초적인 교리와 학설에서 떠나고
떠나지 못하고 반복됨을, 뉘우치고(repent)
유익하지 못하고 덕이 못되는, 죽은 행실(dead works)을 버리고
그리고 완전하신 주님을 향하여 (and of faith toward God)
가는 온전한 행위가 회개이고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음을 선포함은
천국은 그리스도의 세계라
성령님과 함께 하시는 세상의 시작이라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가
그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사야 32:15-17]

회개의 대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오늘날 우리 모두이다.
이 기회(은혜)의 시간이, 이 순간이고
이 시간이 지나면 회개할 수 없음을 성경은 경고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려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For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once enlightened, and have tasted of the
heavenly gift, and were made partakers of the Holy Ghost,
And have tasted the good word of God, and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
If they shall fall away, to renew them again unto repentance; seeing they crucify to
themselves the Son of God afresh, and put him to an open shame. 히브리서 6:4-6]

그리고 회개의 외침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전도라
복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이 된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디모데후서 4:17]

그래서 회개는 들을 귀 있는 복 된 자의 복음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공의인 복음으로 사는 자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14]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의 공의를, 여호와께 말씀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이사야56:1]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이야기라면
우리를 향한 교훈적인 이야기라면
우리의 만족을 위한 바램이나 합리적인 사고 같은 이상적인 가치관으로
성경의 필요성이 제기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변함없이 우리를 향한 진리의 말씀이고
오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실상이고 실체이기에
성경을 읽고 이를 시인하여 고백하는 일이 회개이고 믿음의 길이라
누가 현대판 바리새인 인지 사두개인 인지 세리인지
믿음의 분량만큼 보이고
참된 믿음은 보이는 걸 행하기까지라
우리는 세례요한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에 외치지 못한다면
신학을 하였던 그렇지 않던, 교회의 직분이 어떻던
아직도  ‘초보’ 이거나
세례요한의 ‘독사의 자식’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외식하는 자’
현대판 바리새인 이거나 사두개인 임을
신앙의 양심으로 단언(斷言)한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3]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천국이 도래(到來) 했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변함없이 계신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과거의 일이 현재이며 현재가 현재이면서 미래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며 공급받는 힘의 원천이 되기에
성경을 읽고 행하려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의 나라를 구하는
그런즉 먼저 그의 나라(first the Kingdom of God)와
그의 의(his righteousness 공의)를 구하는 삶이 경건의 삶이며
이를 산제사(Living sacrifices)라 하고
이 시작은 회개로 시작된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이 외쳤듯이
이제는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우리가 외쳐야 한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졌느니라’



경상도 방언 능력시험이예요. 풀어보세요들.. ^^

정답은 아래에 ...

 

 

 

 

 

 

 

'웃으며 삽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갑내기 부부의 소원 ㅋㅋ  (0) 2015.03.22
한 눈 팔다가  (0) 2015.03.20
현대판 3 년 고개  (0) 2015.03.05
진짜 웃긴 이야기-자취생과 119  (0) 2015.02.14
"없다" 시리즈라네요.^^  (0) 2015.02.07

 

 

 

 

 


봄이 오려나 봐요/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벚꽃 필 제면...  (0) 2015.04.03
나를 위하여...  (2) 2015.03.25
수채화처럼 고운 生  (0) 2015.02.24
바다가 내게 해준 충고  (0) 2015.02.20
믿음의 날개  (2) 2015.02.20

칭의(Justification) 그리고 중생(Regeneration)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칭의는 법정적 의미로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이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가진 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가 가지신 의로움인데

그것이 신자들의 의로움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의  교리이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한 자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전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은 

그가 택한 자들을 법적이고 공적으로 대표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한 자들의 죽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택한 자들의 부활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칭의교리는 택자들이 아무런 행위를 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적 행위로 말미암아 획득된 의로움을 값없이 전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칭의는 값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의의 전가는 반드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칭의를 얻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칭의가 믿음으로 주어지는가?

칭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택자들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공적이고 법적으로 대표하는 관계에 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자들의 죽음으로 간주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택자들의 부활로 간주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법적이고 공적인 대표의 관계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택자와의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연합이 바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칭의를 얻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가져오는 믿음인 것이며 

오직 이 믿음으로 택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그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곧 택자의 죽음과 부활이 되는 것이다.


중생 교리는 이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중생이란 성령의 역사인데 택한 자에게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중생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유익을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이다. 

중생을 통하여 택자들에게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은 택자들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는 수단이 된다.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 곧 거듭남이란 첫번째 아담에서 연합되어 있던 자가 죽고 

두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첫 아담과 연합되어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그의 죄책과 죄성과도 연합되어 있으므로 

죄책과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수여받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칭의의 실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중생을 통하여 주어지며 

그 믿음을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자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부활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영적 유익이 신자의 유익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없는 믿음은 없으며 믿음없는 칭의가 없을 것이니 

결국 중생없는 칭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는 믿음은 오직 중생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 이후에 성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전에 

중생없는 칭의를 먼저 염려해야 한다.  

중생없는 칭의는 헛되고 거짓된 칭의일 뿐이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듯이 

진정한 칭의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르고 선명한 중생교리의 확립은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글/캡투유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GijS/57 

 



데이비드 윌커슨(David Ray Wilkerson)의 이름을 들었거나 그의 유명한 '타임스쾌어 교회'에 관한 이야기와 뉴스 또는 그의 글을 읽은 독자가 꽤 있을 것이다. 이미 연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디보션 뉴스레터(영문/한글)를 아직 받는 한인들도 있는 모양이다. 

윌커슨은 뉴욕시의 교단 무소속 대형교회(현 교인수 약 8,000명)인 타임스쾌어교회와 그의 대외사역을 위한 '월드챌린지'의 설립자/목회자였고, 특히 십대 중독자 재활 프로그램인 '틴 챌린지'의 창설자였다. 또 과거 '십자가와 단도' 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 악명 높은 갱단 '모모(마우마우)스'의 두목인 니키 크루즈를 두려움 없는 담대함과 온화한 인품으로 감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윌커슨은 지난 2011년 4월 27일, 텍서스주의 US 라우트 175 선상에서, 아내를 태운 채 운전하다 원인 모르게 중앙선을 넘어 맞은편 길로 들어섰다가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던 트?터 트레일러와 충돌하여 발생한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부상 당한 아내, 그웬 윌커슨 여사(72)도 이듬해인 올해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윌커슨이 왜 중앙선을 넘어갔는지는 여태 밝혀지지 않았다. 


윌커슨의 죽음은 상당히 예언적(?)이었다. 그의 블로그의 마지막 포스트는 이랬다: 


   "죽음의 골짜기와 그늘을 지나가는 분들에게: 

이 말씀을 들으세요: 어느 어둡고 끔찍한 밤을 지내면서 울음이 계속될 터입니다. 그 어둠 속에서, 님은 아버지의 속삭임을 들을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왜 지금인지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그 모두가 나의 계획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연이 아니었다.'" (참고: 뒷 부분을 수정한 다른 버전도 있음.) 


윌커슨은 왜 갑자기 이런 죽음을 죽었을까? 흥미롭게도 죽음 얼마 전, 그는 신사도운동의 거물, 베니 힌의 (윤리성 등) 문제점을 겨냥한 듯 간접적으로나마 메시지 도중에 신랄하게 비평한 적이 있었다. 



 

1958년. 윌커슨은 밤늦게 '레이트(늦은밤) 쇼'를 보다가 문득 "하나님, 제가 텔레비전을 팔고 TV 보는 시간에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라는 물음으로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단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한 뒤 어느 날 밤 곁에 놓인 '라이프' 잡지에 눈이 자꾸 끌렸다. 세속 잡지인 줄 아는데도 그가 끌리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의문을 표시했단다. 그 속에 뭐가 있냐고..('라이프' 잡지는 '타임' 등과 함께 일루미나티 계열 매거진으로 유명하다.) 


 

윌커슨은 곧 뉴?시의 갱 멤버들과 마약 중독자들을 상대로 사역하려고 펜실베이니어에서 뉴?으로 왔다. 1987년에는 뉴?시 심장부 부근에다 타임스쾌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엔 한인들도 상당수 다니고 있다. 만년인 1999~2008년에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기독교 사역자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열고 다녔다. 또 '십자가와 단도'에서처럼 많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통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 사실이며, 이 세대를 향한 끊임 없는 경고 나팔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윌커슨이 죽은 이튿날, 아들 게리는 한 기독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구약적이기보다 신약적인 예언자"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윌커슨의 '예언'이라는 것은 정반대로 매우 구약적이다. 이런 모순성은 신사도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왜 신약시대 사람이 구약적으로 예언해야 하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사도 파울은 그의 은사론에서 분명히 신약 시대에는 특정 대언자(선지자/예언자)보다는 성도가 은사의 하나로서 (교회의 덕을 쌓는) 예언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른 신사도들처럼 윌커슨 역시 구약적인 미래성 예언들, 좀 더 나쁘게는 '점술적' 예언을 남발했다.  


윌커슨은 1973년 미국의 미래에 관한 환상(비전)을 "받았다"며 '더 비전'이라는 책자를 계속 발행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그의 예언들은 '경제혼동에 의한 온 세계의 경기침체', '자연이 겪는 진통', '오물의 홍수와 추악의 세례', '예수 크리스토님을 사랑하는 크리스천들을 채우신 참 성령께 대한 미친 듯한 박해' 등으로 표현되곤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탐 리글(검증블로거)은 윌커슨의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1. "1999년부터는 TV상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저는 제 영혼 속에서 5년 이내로 소위 복음 텔레비전 방송국이라는 것은 더 없게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들 모두가 파산하여 완전 파멸할 것이라고요." -1994년 12월 12월 솔로몬교회에서 한 '예언'. 


그런데도 1999년을 훨씬 넘어 2012년인데도 수많은 복음 방송국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윌커슨 영혼 속의 혼동 내지는, 성령님 아닌 딴 영들의 사주에 의한 엉터리/거짓 예언이고,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2. 1993년 인종폭동과 1,000건의 동시다발 화재? 


   "저는 이곳 뉴?시에서 한꺼번에 1,000건의 화재가 일어나는 환상들을 되풀이 보아왔습니다. 제가 확신하기로는, 인종폭동들이 곧 일어날 것입니다. 뉴?시는 폭발할 준비가 된 하나의 화약고입니다. 연방과 주 웰페어(사회복지) 삭감이 그 발화점이 될 것입니다. 내년에 뉴?시의 혜택이 끊긴 데 분노한 10만 명의 남자들이 거리에서 난동을...연방 방위군이 질서회복을 위해 동원될 것이고요. 뉴? 시가지로 탱크들이 지나갈 것입니다...나다니기가 너무나 위험하여 교회들은 한동안 폐쇄될 것입니다.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할 것입니다." -1992년 7월 7일


그런 유와 비슷한 폭동은 이 '예언'의 불과 몇 달 전인 같은 해 4월, 뉴욕보다 큰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미 발생했다. 바로 흑인 한 명이 백인 경찰에게 집단 구타 당한 '?니 킹' 사건의 불똥이 엉뚱하게도 LA의 한인 상가로 튄 나머지 한인들이 희생양이 되어 쑥대밭이 된 악명 높은 'LA 폭동사건'이었다. 윌커슨은 아마도 이것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본 것이 인상적이어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가 몇 달 뒤에 나타난 모양이다. 그런 것을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심리적 혼동일 뿐이다. 

윌커슨은 이 예언의 성취기간 마감이 '내년'(93년)이라고 해 놓고도 추후 이것을 '미래'로 수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의 딴 날자를 위한 것인 양 또는 연기된 양 적당히 넘겨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게끔 하는 (신사도 계열 예언들과 같은) 상투적인 수법이라고 리글은 비평힌다. 



3. 2000년 재정 붕괴


윌커슨은 2000년 4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저는 지난 2년간을 크게 울고 지내면서 미국은 최후 통첩을 받고 있으며 심판이 문앞에 다가왔음을 들을 만한 사람에게 경고해 왔습니다. 이것이 나라의 끝장이라곤 말하지 않았지만, 재정 붕괴를 앞둔 최후 통첩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편지를 2000년 4월 15일에 쓰고 있습니다. 제 책상 위에는 어제 신문 탑 기사가 있습니다. '검은금요일-하룻만에 역사상 최악의 주가폭락'-다우 지수가 618 포인트, 내즈?은 355로 떨어졌다네요. 저는 향후 60일간 뭐가 올지 알지 못합니다. 혹 마?이 반등한다 해도 잠시일 뿐, 붕괴는 불가피합니다-아무 것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이 역시 주가폭락에 뒤따라 해 본 신사도식 '뻥'이요, '대포 예언'이다. 60일 사이의 재정붕괴는커녕 그해 5월 22일 주식시장은 기록적인 주가를 나타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윌커슨은 자기 실수임을 시인했다. 혹시 몇년 후에 올 경제대란을 미리 예고한 게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너무나 벗어난 얘기다. 그의 뒷막이 수습담을 들어 보자. 


   "(최근) 기도하면서 저는 주님께 언제라도 제 실수를 고백할 준비가 돼 있다고 아뢰었습니다...마켓이 기록주가를 나타냈을 때, 저를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옳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그는 여기서 적어도 자기 과오를 시인했다. 그런데 그런 남발을 보다 앞서 조심했어야 했다. 



4. '1000 화재' 예언 재탕


그러고도 그의 이 습벽 내지 악습(?)은 그치지 않았다. 2009년 3월 7일엔 그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임박한 재난'이 경고됐다: 


   "지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재난이 일어날 참입니다. 너무나 끔찍하여 우리 모두가 떨 것입니다-심지어 가장 경건한 사람도요...지난 10년간 저는 뉴?시에 발생할 1,000건의 화재를 경고해 왔습니다(독자는 기억하는가?). 그 불은 거대한 메가플렉스(영화관)를 삼켜버릴 것이며, 뉴저지와 커네티?도 그리할 것입니다. 전국 주요도시에서 우리가 여러해 전 와츠와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던 그런 폭동과 작렬하는 화재를 겪을 것입니다.

세계 도시에 폭동과 화재가 있을 것입니다. 타임스쾌어, 뉴?시에서 약탈이 자행될 터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것은 경기침체도, 불황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국과 열방들의 들끓는 죄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세속 기초를 부수어 버리십니다."


당시 일부 교계 주요 인사들은 딱하다는 식의 조소를 보냈으나, 윌커슨은 "성령에 의한 예언"이라고 응수했다. 과연 2009년과 2012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아니라면 앞으로 언제 벌어질 것인지? 

그런데 성경은 그보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와일드한 영혼 초청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 추수기인가, 심판기인가? 이에 대한 분별의식이 그에게도, 신사도들에게도 없어 뵌다. 



윌커슨의 가르침


윌커슨은 이렇게 가르쳤다:


   "하나님의 말세 교회는 (1세기 교회 때보다) 더 커지고, 더 막강해지고, 더 힘세어지며, 예수님의 더 큰 계시를 (받아?) 지닐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오순절 때보다 더 큰-기름부음이다...내가 보는대로는 예수 크리스토님의 복음은 이 세대에서 온전히 전파되지 않았다!" (말세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 5,23,94)


전형적으로 신사도적인 이런 주장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외려 반대로, 성경 행전(일부)와 사도 서신서, 요한 계시록 등 도처에서 (대부흥은커녕!) 말세에 큰 배도와 혼동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스스로 괴롭힘?


복음으로 인한 수난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객관적 사실이니 딱히 혹을 달 필요도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윌커슨의 경우, 해너 허나드의 "스스로 괴롭힘이 곧 천국길"이라는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윌커슨은 자기 책 '예수님을 위해 좀 더 굶기'에서 스스로 괴롭힘과 자기청결이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쟁취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자기금욕주의는 구약의 율법이었고(예: 레?서=레위기 16'29), 이미 중세 때부터 있어온 것이고, 현대에 와서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준) 워치먼 니 같은 사람들이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일종의 율법주의이기도 하다.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인고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 없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사랑하게 됐을 뿐이다. 물론 페트로(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고통하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말했다(페트로A=벧후 2'18-25, 4장). 그러나 이것은 다만 우리의 합당한 섬김일 뿐,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윌커슨의 이 가르침은 거짓이며, 아울러 '그런 체' 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기타 의문점들


윌커슨은 생시에, 널리 알려진 미 교계 문제 명사의 한 명인 기독교방송국(CBN) 설립사주, ? 라버슨( 팻 / 패트 로벗슨 )과 비교적 가까이 지냈고, '700 클럽'의 초청연사로 자주 섰었다. 조울 팰서 CBN사 채플린(회사내 사목)는 윌커슨의 한 친구이다. 


[ 라버슨은 다음과 같이 문제투성이 인물이다.] 


- 그 역시 다양한 거짓 예언 남발로 악명이 높았다. 

- 그의 아버지는 꽤 널리 알려진 프리메이슨 명사였다. 

- 아프리카에 다이어먼드 광산을 보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타임' 표지 기사에 명사로 뜨면서, 비밀집단 신호 같은 이상한 포즈('사자발')를 취한 모습이 부각됐다. 

- 700 클럽 멤버 등 헌금 기부자를 위한 기도 등에서 '아니면 말고' 식 치병기도를 하곤 해왔다.

- 기도 도중 '싸탄 싸인'(일명: 엘 디아블로)이라고 불리는 문제의 사악한 손짓을 하곤 했다. 


팰서는 윌커슨이 잔인할 만큼 자신과 하나님, 타인에 대해 정직했다면서 "곧은 길을 걸어갔고 진정한(authentic)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가 "현대를 위한 예언가"였음을 믿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윌커슨이나 또 라버슨의 거짓 예언들은 뭔가? 그것도 정직과 진정에 속하는가? 이들은 너무나 윌커슨의 장점만 부각시키는 데 급급하고, 그의 문제점은 다루지를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고인이 그저 흠 없이 완벽하고 온전한 길로만 갔다고 믿게 하는 셈이다. 


윌커슨이 가고 없는 마당에 우리는 과연 그를 어떻게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기억해 두자. 그가 아무리 참신한 하나님의 종 이미지를 주었다고 해도 아무도 분별/검증 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차해옥 님 방에서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과 율법  (0) 2015.03.31
스위시 영상으로 보는 "가상칠언"  (0) 2015.03.27
사순절에 묵상할 말씀  (0) 2015.02.28
하나님의 관심 표명  (0) 2015.02.03
우리의 밤이 곧 낯으로 바뀌리라  (0) 2015.01.28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승구 교수 / 합동신학대학원



<기독교 개혁신보>의 요청으로 써서 기고하는 글을 여기 미리 소개합니다. 여러 분들이 다 같이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50여년-40 여 년 전부터 ‘바울에 대한 새 관점’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신약학계에서 나타났으니 이것이 이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타났고, 이에 대한 좋은 비판서들도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또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여러 관점들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2성전 시기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와 바울에 대해서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의 견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근거한 주장과 논의라는 문제를 지닌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 분들은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에 대한 기존의 이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문헌을 정확히 살펴보면 제 2 성전시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말하는 모습과는 다르다고 하며, 따라서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장을 따라서 생각하지 말고 역사적 검토를 거친 역사적으로 바른 판단을 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의 렌즈로 읽지 말고 바울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근거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정향성을 지닌 독특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객관적으로 옳지도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작업도 자신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사료에 근거한 철저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는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이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그 내용과 관련해서 이런 해석을 하는 분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구원에는 은혜로 들어가며, 단지 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1) 마치 바리새인들과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시사를 주는 해석들은 그것이 성경의 묘사된 예수님의 해석이든지 개혁자들이 해석한 바울이든지, 다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 자신들이 해석한 유대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그리고 은혜로 구원 얻은 자들이 그 은혜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임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은혜에 근거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유대교가 말하는 율법을 지켜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여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의 논의에 충실하면서, 새 관점주의자들은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삶을 잘 살아 그들의 순종의 삶 전체에 근거하여 최후에 칭의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음과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근거하여 최종적 칭의를 받는다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칭의 선언이 우리의 삶 전체를 염두에 두고 내려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믿음에 근거해서 앞당겨 선언하는 것이 현재적 칭의라고 한다.

이처럼 무게의 중심이 최후 심판에서 칭의 선언이 주어질 것에 주어지고, 그 때에는 우리의 행위 전체를 고려하여 칭의하신다고 함으로 결국 이전에 천주교에서 주장하던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런 바울 해석이 옳다면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기의 논의에서 개혁자들이 틀렸고, 천주교적 반펠라기우스적 입장이 옳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종교개혁이 잘못한 것이라는 주장이 되므로 개신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주장이다.

넷째로, 그렇게 해석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imputation)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새 관점주의자들은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의 믿음으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구원 얻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들은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삶으로 궁극적 칭의를 받는다고 하여 결국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 관점주의적 해석이 결국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임이 천명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은 바울에 대한 새 관점주의적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저 학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논의의 다양성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주장인 것이다. 성경을 중요시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게 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학문적 논의한 것을 보려면 필자가 최근에 써서 출간한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3)을 보십시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메가처치 리더요 저술가인 릭 워렌이 Catholic News Service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카톨릭과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Holy Father(거룩한 아버지,성부)”라는 언급을 해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관련글>> Rick Warren Calls Pope “Holy Father”


워렌은 지난 달 바티칸에서 있었던 “Complementarity of Man and Woman(남녀의 상보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컨퍼런스에 참여한 후 (교황과 카톨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나눈 것보다 훨씬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말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삼위일체를 믿으며, 성경을 믿으며, 부활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는다’라고.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릭워렌은 계속해서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성자(망자) 숭배에 대해서 이렇게 변호하고 있다.

 

“때때로 개신교도들은 카톨릭 신자들이 마리아를 또 다른 신으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카톨릭의 교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성자(망자) 숭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습니다. 왜 성자들에게 기도하냐고? 하지만 당신이 그들의 말을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면 우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훨씬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인 차이점은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사원문>> Rick Warren’s Call for Christians to Unite With Catholics, ‘Holy Father’ Raising Concerns



​릭워렌이 교회를 배도의 길로 이끌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완전(perfect)하고, 항상 옳은 일을 하는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

 

 

릭 워렌이 카톨릭과 개신교 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 일루미나티 멤버(CFR 회원)요, Chrislam 운동을 통해 종교 통합에 앞장을 서고 있는 릭 워렌이 이제,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와의 통합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거짓 선지자 프란치스코를 향해 ‘Holy Father(성부)’요 ‘He's doing everything right(그는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며 로마 카톨릭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 개신교회는 교황이 이끄는 로마 카톨릭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의 이단성을 폭로하며 시작된 개신교(protestant)의 뿌리를 부정하는 선언이요, 개신교회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게 만들려는 ‘음녀 바벨론’에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바치겠다는 ‘배교’인 것이다.

 

릭 워렌 뿐 아니라, 이 땅에도 한국교회를 ‘음녀 바벨론’에게 통째로 헌납하려고 하는 사악한 배교의 무리들이 있다. 이들을 경계하고 물리치지 않으면 결국 많은 영혼들이 종교통합이라는 배도의 큰 물결에 휩쓸려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 예레미야 -

 

태그
종교통합,프란치스코,릭워렌,거짓선지자,배교,배도,wcc,cfr,일루미나티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장)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지난 번 말씀이 "이게 무슨 소리냐?"였습니다.
앞서 52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이게 무슨 소리냐?",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며 수군거렸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60절에서는 제자들까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며 또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수군거림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망가뜨리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이나 고린도후서 12장 20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수군수군하는 것을 심각한 죄악과 교회의 분열증세로 말씀합니다. 그 수군수군하는 것이 지금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물으십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 Son of Man, 다니엘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바로 나, 그 인자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어찌하려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쯤 힌트를 주면 아무리 둔한 자라도 왠만하면 눈치를 채고 정답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나 먹통같은 무리들이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이상 설명을 못 하십니다. 인자, 곧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을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실 것을, 그렇게 살과 피를 내어주실 것을 더는 말씀하지 못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 말씀을 우리말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영혼이 중요하지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원론적,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아니 앞서 5장에서부터, 아니 7장, 8장.... 계속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유대인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고난과 죽임의 십자가 대속에 관하여는 비밀에 두신 채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참 생명의 떡’으로 계속하여 주장하고 계시고 유대인들은 도대체 영 알아먹지 못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 영혼은 중요하고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고 말씀하셨다면 이는 중심 주제를 벗어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영어성경이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는 것도 유용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가 NIV 영어성경에는 “The Spirit gives life.”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문자 S Spirit입니다. 즉 ‘영’이라는 주어입니다. 곧 ‘영이 생명을 주신다.’입니다.
헬라어를 보면 “토 프뉴마 에스틴 토 쏘포이운.”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자는 영이시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지금 주님은 “영이 살린다. 육은 무익하다, 못 살린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살리시지 인간은 못 살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영,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너희를 살게 하실 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 곧 인간이라면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교들은 생명을 살리거나 주지 못 합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리신단 말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심 같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신 것 같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 같이
그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토록 설명을 하셔도 안 믿는 자는 안 믿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제자들이 떠나갑니다.

주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그런데 과연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이렇게 대답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도대체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보내신 자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께 붙어있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 나와 앉아 이 말씀 듣고 계십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주님 앞으로 나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인 줄 알고 나오셨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 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과 손길에 이끌려 나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나와 계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께 보내신 자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도 "어렵도다." 하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가 그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하시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들이 나의 택한 나의 자녀들이다. 너는 가서 너의 살과 피를 먹여 그들을 살리라.”  
그래서 주님은 오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그 귀하신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이 있으라  (0) 2015.05.09
태초에 하나님이  (0) 2015.05.01
매일 먹기 싫습니다.  (0) 2015.02.19
시시한 오병이어 말고  (0) 2015.02.10
노 젓는 제자들  (0) 2015.02.09


 

 

내 기억 속에 그대

                            최송연

 

내 기억 속에 늘 아름다운 그대,

따뜻한 배려가 있는 마음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감사한 그대,

   힘들 때 따스하게 손잡아  준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불쌍한 그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부러운 그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용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그대,

      한없이 쏟아부어준 그 사랑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우고 싶은 그대,

   내게 아픔을 준 모진 말들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안타까운 그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그대 하는 말이, 그대 행동이
      너와 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임을...

     사랑으로 수놓으며 예쁘게 살아요,우리.

   

.





 

 

이미지 전체보기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도 사랑할 수 있어요  (2) 2015.04.10
사랑 이야기  (0) 2015.03.21
은혜의 길(道)에서  (0) 2015.03.10
순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가고  (5) 2015.03.06
배려하는 마음  (0) 2015.03.04

칼빈 탄생 오백주년 (1509-2009)을 맞이하여 그가 남긴 공헌과 영향력을 평가하는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이 나왔다. 칼빈은 지난 2천 년간의 기독교 신학과 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5대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라틴 교부들과 동방 교부들을 통합하여 네 명을 손꼽는데, 암브로스, 제롬, 어거스틴, 그레고리 등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을 종합하여 다섯 번째 교부의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빈은 이들 초대교회 교부들을 훨씬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기독교 신학과 성령론을 제시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는데 기여했다.

 

 

 

(1)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의 등장

 

20세기에 저명한 개신교 역사학자 에밀 레오나르드 (Emile G. L?onard, 1891-1961)는 칼빈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새로운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 (a new type of man, the Calvinist)라는 명칭이 그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 칼빈주의자는 첫째, 윤리적으로 엄정하고, 둘째 고난과 박해와 시련에도 새로운 교회를 중심으로 믿음을 견고히 지켜내며, 셋째 직업의 소명의식을 가진 성도를 말한다.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유형, 칼빈주의가 역사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당대 종교개혁자들의 장점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힌 신학자로, 사도 바울 이후에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확한 가장 분명한 복음의 전파자였다. 칼빈주의는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대명사가 되었다. 독일에서 등장한 루터파도 아니요, 스위스 쮜리히에서 시도되어지던 쯔빙글리파도 아닌, 새로운 유형의 교회와 성도들이 뚜렷하게 등장한 것이다. 새롭게 나타난 이들의 독특한 신앙적인 색채는 칼빈의 성경적 신학과 경건에 근거하고 있어서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칼빈주의자라는 호칭은 칼빈이 원했던 바도 아니요, 더구나 16세기에는 별로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챨스 5세 치하의 유럽 전 지역에 새로운 종교개혁이 퍼져나가면서, 루터를 따르는 독일지역과 쯔빙글리를 따르는 스위스 동맹으로 구별되었는데, 이들과도 다른 새로운 개신교 그룹이 칼빈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차츰 세계로 퍼져나간 칼빈주의는 영국에서는 장로교회, 유럽 대륙과 다른 지역에서는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17세기에는 청교도 신앙인들이 계승하였고, 한국에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정착되었다.

 

제네바의 사회사를 연구하여 세계적으로 저명한 칼빈 학자, 로버트 킹던 박사는 칼빈주의자들은 각 지역마다 새로운 교회에 관련된 통일된 사회공동체로 재구성하고, 조직화된 교회제도를 통해서 권징의 실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새로운 교회질서를 유지해나가는 구조가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칼빈은 스콜라주의에 빠졌던 중세신학자들을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다시 세웠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믿어야할 주요주제를 정리하여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성경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해설과 토론을 묶은 기독교 강요성경주석은 상호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는 도구였다. 그가 기독교 휴머니즘 학자로서 법학을 공부한 재능을 바탕으로 채택한 주제중심의 논증방식은 종교개혁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밝혀주었다. 칼빈의 저술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왜곡을 지적하면서 애매모호한 교회전통을 털어내고 성경적인 신앙진리를 밝혀주는 빛과 같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사상과 동시대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걸작이다. 칼빈은 성경적인 기독교 진리의 회복을 염원하면서 어거스틴과 칼케톤 신조” (451)를 계승하고, 정확한 신학의 개념들을 정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교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서 창조적인 기념비를 세웠다. 칼빈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근면한 노동과 직업윤리를 정착시켰으며, 제네바 사회의 개혁을 일궈내어 사회 공동체의 조직적 건설에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칼빈의 신학은 제네바를 넘어서서 스위스 전지역으로, 프랑스로, 다시 네델란드, 영국, 독일, 동유럽으로 퍼져나가 종교개혁 시대에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경건한 신자들에게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칼빈은 피터 마터 버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 1499?1562)가 쓴 신학총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버미글리는 이탈리아 출신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히브리어에 능한 휴머니즘 학자였는데, 개신교로 개종하여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의 동지였으며, 노년기에는 쮜리히의 불링거와 같이 개혁운동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칼빈은 성경적 설교, 제네바 교회의 재조직과 운영, 강해설교 중심의 예배와 시편 찬송의 회복, 봉사와 권징의 확립, 심지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근면과 직업에의 소명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엄청난 공헌을 남기게 된 칼빈의 기본적인 사역이자 제네바 교회를 개혁한 수단들은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설교를 통해서 제네바 시민들을 교화하고 도덕적으로 변혁하도록 하였다. 제네바 시는 세 지역으로 나누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하였다. 칼빈은 세 중에 어느 곳인가에서 성경에 따라갈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었다. 1541년 여름에 다시 돌아와서, 2년여 전에 떠날 때에 중단했던 그 다음 본문에 대해서 강해설교를 이어갔다. 25년 동안 약 4천편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풀어주었다. 설교의 역동성은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세계 칼빈 신학자들에게마저도 이런 성령의 신학자의 모습이 여전히 잊혀져있다.

 

둘째로, 칼빈은 당회를 통한 권징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제네바 시민들은 25명 내외로 구성된 목회자와 장로들이 시행하는 훈계를 순중하였다. 매년 당회원들은 시민들의 투표로 개편되었다. 당회는 성만찬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순결을 촉구하였다. 제네바 당회는 시의 도덕적인 질서를 세우는 일에 전적인 권한을 갖고 성도들의 행위를 감독하였다. 각종 음행들, 성적인 타락, 놀음, 과도한 음주, 방탕을 부추기는 춤추기 등은 당회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한 후 처벌을 받았다. 상업적인 거래에서 속임수와 고리대금도 엄격한 징계의 대상이었다. 1550년의 경우, 아직 칼빈의 지도력이 확고히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인데, 제네바 시민의 약 6.5%가 치리를 받았다.

 

당회의 처벌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개인적인 권고를 통해서 회개하게 하되, 비밀리에 당회에서만 반성토록 기회를 주고 마무리 되었다. 거의 대부분은 칼빈이 권면과 조언을 직접 제시하였다. 반성하지 않는다거나, 좀 더 심각한 범법자들은 회개와 반성의 분명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당했다. 아주 심각하게 공공의 안정을 해친 자들은 시정부의 처벌기관으로 이관되었다. 교회 전체 앞에서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회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성도들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규제할 수 있었다.

 


 

 

(2)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킨 종교개혁자

 

이처럼 위대한 종교개혁 시대의 탁월한 신학자 칼빈을 일컬어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평범한 성도들과 일부 목회자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들릴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파격적인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칼빈을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무려 백 여 년이 넘게 이 칭호를 사용하여 왔으니, ‘공인된 칭호가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혹자는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려면, 그러면 칼빈에게 성부의 신학자혹은 성자의 신학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던 사람이므로 어떤 칭호든지 붙여도 가능하다. 칼빈은 제네바 초기사역에서부터 삼위일체 신학을 근간으로 제시했다.

 

Scripture and pious experience itself show us in the absolutely

 

simple essence of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개인적인 주관주의를 넘어서서, 칼빈은 성경에서 성령의 작용이 함께하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제시로서 신봉하였다. 하지만 굳이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칭을 사용한 연유는 그의 신학체계에서 항상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성경적으로 강조되었으며,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왜곡되어져 왔던 성령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제 위치로 회복되어졌기에 붙이게 된 말이다. 기독교 신학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온전하게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대한 정리를 함으로써 성경적 진리를 회복시켰기에 칼빈에게 이 명예로운 호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성령의 권위를 빙자하여 태초부터 교회에 들어온 사탄의 모든 허구적 고안들이 날조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슬람교 모하메드와 천주교의 교황은 성경에는 완전한 교리가 완전하게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고차원적인 교리가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어 왔다는 것을 주장한다.

 

재세례파와 자유방임파들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 똑같은 수렁에 빠져서 미쳐있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가르침이나 교리를 소개하는 영은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복음의 가르침에 인을 쳐서, 그 가르침을 확증하는 일을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비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황이나, 모하메드나,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을 단호히 배척한다. 그들이야말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패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우상숭배이다. 항상 보이는 우상을 통해서 위안을 삼으려는 인간의 어두운 욕심 때문에 영적인 어둠에 빠져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말하자면, 영속적인 우상의 제조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과 담대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감히 자기들의 역량대로 하나님 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거짓되고 허망한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대신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끊임없이 우상을 생산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는 교만과 대담한 무지가 가득 차 있다. 칼빈의 맑은 영혼이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칼빈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는 성령의 사역에만 의존하려 한다.

 

우리가 아직도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당대 혼돈을 극복하면서 정리해 놓은 것들과 그가 실천하였으며 실체로 남긴 유산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칼빈에게서 순수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확고한 기초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칼빈 한사람만을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셨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개혁은 우연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16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루터, 쯔빙글리, 부써, 외콜람파디우스, 버미글리, 멜랑톤, 불링거, 파렐, 비레, 부겐하겐, 베자, 낙스, 무스쿨루스, 까피토, 쟝 스트룸, 피터 마터 버미글리, 미코니우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쟌키우스 등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기여하였다. 그 시대의 기라성 같은 수재들이 곳곳에서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중요한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수행했었다.

 

지난 기독교 교회의 2천년 역사 속에서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이후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을 체계화한 인물로 칼빈을 손꼽고 있다. 세계 교회가 믿어야할 보편적인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종합적으로 찾아서 정리하고 세웠으며, 천년을 내려온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다시 한번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갱신, 예배의 갱신, 신학의 갱신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칼빈의 저서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3) 총체적 오류에 빠진 교회를 살려내다.

 

칼빈은 성경의 모든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노력한 신학자였다. 그래서 다섯 번이나 수정 보완하여 마침내 완성한 기독교강요최종판 (1559)에는 무려 26가지 중요한 신학 주제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 성경의 필요성과 신빙성, 참 하나님에 대한 설명, 삼위일체, 창조, 섭리, 타락한 인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율법,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리스도의 위격, 그리스도의 사역, 믿음, 회개,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부인과 묵상), 칭의, 선행과 확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기도, 선택이 주는 위로 (예정론), 최후 부활, 참된 교회, 교회의 권위와 권징, 세례, 성만찬, 교회와 국가 등이다. 그 어느 것 하나라고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자 본질적이 것들이다. 모두 다 잘 이해하여야 할 기초적인 성경의 교훈들이다. 칼빈은 각종 주제들을 성경에 비교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경건한 신앙고백과 같고, 순수한 성경적 해석과 진술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설교처럼 토로하는 열정을 담아놓았다. 그리고 그 행간에는 어느 주제에서나 성령의 사역을 빼놓지 않고 연관 지어 설명하여 놓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성을 건설하여 놓았다.

 

성경적 신학자로서 칼빈이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문제점을 수정하고자 제시한 핵심적인 내용들 가운데서 성경관, 신론, 기독론, 교회관, 구원론, 성례론, 설교론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구원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전달되고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성직주의와 독선적인 주장들로 인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성령의 적용사역이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가 적용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주장하여, 제 자리에 되돌려 놓은 신학자이다.

 

칼빈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신학, 특히 결정적으로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새롭게 제시했다. 면죄부와 고해성사, 미사참여로 혼돈을 겪고 있던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미신적인 신앙행태를 제네바 교회에서는 완전히 철폐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촛불을 밝혀놓고 성자들의 공로에 의지하려는 기도는 금지되었다. 성령의 신비로운 작동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개인에게 믿음을 주며, 말씀으로 교회에 감동을 주신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구원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적용사역에 의하여 결정된다. 성령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의 심령에 심어지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만들어진다. 성경은 성령에 의하여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써 놓은 책이기에 성령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서 구원사역에 동참한다. 성령은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를 창설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모든 구원의 방편들을 활용하여서 성부의 계획이 성자로 인하여 성취되었고, 이를 적용하고 보전하는 구원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성령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체계화한 최초의 신학자가 바로 요한 칼빈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과 교황제도의 비성경적인 문제점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은 고집스럽게도 성례 중심의 신앙생활과 성직자 중심의 구원론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는 옳바른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16세기에 칼빈이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켜서 제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교회, 특히 성직자가 실시하는 성례를 통과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때에 값없이 주어지는 죄사함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받음과 동시에 죄의 저주가 더 이상 우리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된다.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을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영 같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조롱하기까지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의 철학이 그러하다.”

 

칼빈은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깊이 인식하여 성경적 신앙을 정립하였고, 설교사역, 성경의 해석, 기도생활, 각종 목회활동에서 성령의 감화력을 강조하였다. 칼빈의 확신에 찬 설명을 들어보자:

 

도덕적 추측에 관계된 궤변론자들의 쓰레기 같은 주장들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다. 그들의 그런 주장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심령이, 망상에 사로잡혀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그들의 심령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그들의 그러한 반론에 대하여 답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데, 실제로 사람이 자신만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주는 분은 오직 성령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고 명백하게 실현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신학자라고 해서 칼빈이 오직 성령론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종합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어야할 보편적 교훈을 성경에서 찾아서 바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일생동안 강단에서 외쳤고 신학생들에게 강연하였고, 때로는 잘못된 가르침을 제거하기 위한 논쟁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논쟁에서 취한 엄격한 자세와 명쾌한 분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네바에서 행한 권징때문에 칼빈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 가톨릭은 말할 필요도 없고, 루터파, 자유파, 재세례파, 심지어 같은 쮜리히에서 활동한 쯔빙글리파 개혁주의자들도 때로는 칼빈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쟁자들이 쏟아놓은 비판의 내용들은 칼빈의 신학에 대한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말았다. 이런 비판자들로 인하여서 밤잠을 설치면서 남긴 칼빈의 저술들이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성령의 신학자칼빈을 잘 모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면, 제발 세계 신학계에서 왜 성령의 신학자, 칼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바란다. 왜 이런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연구해 보고 찾아보기를 권유 드린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서, 성령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심령의 평안을 얻게 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깨어지기 쉽고, 온갖 연약한 것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그런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무수한 악들에 의해서 압도당하지 않게 하시며 충분할 정도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아울러, 성령이 이렇게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음하고 탄식하며 우리의 속량을 향하여 힘써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증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복음과 가장 순수한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할 때에 칼빈의 해석들은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12:2)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지 한 사람 유명한 신학자에게 얽매여서 정통성을 주장해보려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했다는 몇 마디에 따라서 성령에 관한 유명한 격언이나 소개하면서 그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빈을 인용하되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거나, 유식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지식인의 속임수요, 오용이자 남용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을 활용하여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파하려면 성령의 주권적 사역을 이해하여야 한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와 성경전체의 가르침과의 근본적인 연계성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을 떠나서, 성령의 간섭이 없이는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거나 교훈을 세울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서 계시가 선포되고 알려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하는 칼빈의 교리적 설명들을 그냥 교과서적으로 암기하거나 그저 나열하는데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칼빈의 교리에 대한 교과서적 암기는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므로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이 형성된 지 거의 오백 여년이 흘러갔는데도 세계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큰 감화를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신학에 담긴 신선함과 역동성 때문이다. 칼빈의 저술들 중에서 어떤 부분들은 우리 한국에 사는 성도들에겐 다소 어렵다고 느껴질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분하게 그의 글을 읽어보면, 복음을 갈망하던 청년 칼빈이 점차 성장하면서 성경에 담긴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과 인도하심을 통해서 확신과 위로를 발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중세신학이 신비주의와 모호한 영성신학에 빠져서 잃어버린 성령의 사역을 선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체계를 참고하여 명료화했다. 그의 여러 저술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종합적인 안목과 그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확실한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글은 어디를 펴 놓아도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게 된다. 바로 성경에 담긴 성령에 관한 교훈이 그대로 살아있다. 기독교 성도들은 성령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지혜로 인하여 오늘의 혼탁한 사상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분별력을 갖추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이 말씀은 율법주의와 바리새적인 교육을 받아왔던 사도 바울이 복음에서 터득한 엄청난 확신의 토로였다. 성령의 사역을 확신하게 된 칼빈의 경우에도 마치 바울 사도의 감격과 같은 기쁨이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신앙내용을 터득하여 제시해 놓았고, 세계 기독교인들이 이를 따르게 되면서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개혁주의 전통과 유산을 선교사들을 통해서 물려받았고, 성경적이며 종합적인 확신을 더욱 견고히 세워 나가야 한다.

 

성령의 신학자라는 다소 거창한 명칭을 칼빈에게 수식어로 붙이게 된 이유는 그가 오직 성령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치중하여 사역했다거나 신학저술을 발전시켰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칼빈의 신학이 오직 성령론 한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다거나, 성령론만을 전문으로 연구한 신학자라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추호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칼빈은 성령의 능력 체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거나, 성령의 체험중심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처럼 편향성을 가진 신학자가 아니었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의 발전 역사에서 오직 성령론이라는 한 분야에 관하여서만 공헌을 남긴 것이 아니다.

 

사실 칼빈은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종교개혁을 총망라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 거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기독교 신학사의 발전사에서 남긴 선구자적인 공헌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하나님을 아는 교리 (인식론)의 확립, 경건 신학의 정립, 기독론에서 신성과 인성의 교류, 예수님이 맡으신 삼중직 (선지자, , 제사장) 에 대한 교리,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교리들, 고해성사의 허구를 갈파한 점, 구원의 확신과 예정론의 옹호, 교회론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 직분론의 확립, 장로제도의 회복과 교회의 독립권 쟁취, 세례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등 헤아릴 수 없는 신학 주제들에 대해서 최초로 명쾌한 교리를 체계화한 신학자였다. 가히 기독교 신학의 발전역사에서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공헌을 남겼다. 역시, 성령론 분야에서도 칼빈은 종교개혁의 혼돈기에 가장 명쾌한 성경적 체계와 해석을 세워 놓았다.

 

신학자들이 앞 다투어서 칼빈에게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호칭을 헌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명칭을 붙이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칼빈이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주권적으로 구원을 적용하는 저자라는 적합한 호칭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장악하여 행사하고 있던 구원의 적용이라는 권세가 모순임을 적발하고 지적하였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주권 하에 있으며, 그 구체적 적용 사역들은 교회를 통해서 성직자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가운데 자유롭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이 친히 주권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는가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성령의 신학자라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 유럽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이 전달된다고 주장하여, 결국 성령의 사역을 무력화시키고 로마 교회에 종속시켜 버렸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로마 교회가 구원의 적용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쾌한 성경적 주장을 함으로서 성령의 위치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던 것이다. 성령으로 하여금 그 위대한 구원 사역의 창시자이자, ‘양자의 영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새로운 영을 불어넣은 분이라고 칼빈은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칼빈이 이를 가장 먼저 체계화하여 올바로 가르쳐 주었고, 그 후로 교회들이 이 기본적인 복음의 기초를 잘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입각하여 체계화한 나머지 매우 정교하면서도 딱딱한 교과서처럼 정리하지 않고, 칼빈 자신이 먼저 성령의 역동성과 권능과 감화력을 실제로 체험하여 구원의 여러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사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풀이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칼빈의 저술들을 읽을 때에는 어디서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장을 느끼게 되며, 성령에 감동된 중심에서 나오는 매우 신선하고 순수하며 고결한 감동을 받게 되어진다.

 


 

 

(4) 워필드 박사,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

 

칼빈의 성령론이라는 주제가 결코 잊혀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지적을 처음으로 강조하신 분은 지금부터 백여 년 전에 미국에서 칼빈 연구의 기틀을 세우신 워필드 박사였다. 필자가 확신을 갖도록 눈을 열어준 것도 역시 워필드 박사가 남긴 칼빈 연구 논문들 속에서였다. 워필드 박사의 칼빈 연구업적은 훗날 영국과 북미주에서 많은 후배 학자들의 칼빈 연구에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필자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할 때에, 마크 놀 (Mark Noll) 박사에게서 프린스턴 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였다. 매주 그가 발표한 프린스턴 신학자들에 관한 논문과 저술들을 섭렵하는 한편, “워필드 박사의 경건과 성령이해를 학기말 논문으로 제출하면서 상세히 연구하였다.

 

1909, 칼빈이 출생한지 400주년이 되던 해에도 미국 남부 죠지아주 사바나에서 칼빈 탄생을 기념하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워필드 박사가 초청강연을 맡았었다. 당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하던 워필드 박사는 그 해에 칼빈에 관한 논문을 무려 일곱 편이나 쏟아 내놓았는데, 영어권에서 칼빈의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기초석이 되는 훌륭한 연구 성과였다. 박학다식하여 많은 방면에 지속적인 논문을 펴낸 워필드 박사는 최고의 신학자, 칼빈이라는 논문에서 그 어떤 이름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이름이 칼빈에게 합당하다고 선포하였다. 그 후로, 주요 칼빈 신학자들이 이를 다시금 재인용하면서 강조하였다. 워필드 박사의 연구 성과 이후로 여러 칼빈 학자들과 성령론 전문가들이 동의를 표시하였고, 이젠 확고한 명칭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성령의 사역이란 교리는 칼빈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다. 물론, 칼빈이 이것을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조직적이요 적합한 표현을 제시한 첫 번째 신학자가 바로 칼빈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의 사역들에 대해서 확실한 소유를 하게 되어졌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칼빈이 끼친 공헌들이 많다는 평범하게 받아들여져 오고 있는 견해를 훨씬 능가하는, 이 보다 더 놀라운 교리사의 현상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칼빈의 여러 저술을 완벽하게 독파한 연후에, 성령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가장 뛰어나게 강조하고 제시한 신학자라고 특징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기독교 강요라는 책은, 죄악된 인간을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로 인도하며, 죄악된 인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논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워필드 박사의 주장은, 그 이전에도 그러하였듯이, 또 다시 20세기 초엽 영어권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성도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자유주의신학, 실존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등은 칼빈의 성령론을 덮어버렸다. 특히,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기독론 중심의 신학체계를 제시되면서 칼빈의 성령론은 완전히 묻혀 버리고 말았다. 다른 일부 기독교 교파에서는 칼빈의 신학사상이 너무나 신학적 과학과 같이 논리적이며,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의 논쟁부분에서는 너무나 자기 주관적이라고 논평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워필드 박사는 칼빈에게서 그처럼 편협한 마음을 가진 교리주의자의 면모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오히려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한 신학자였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죄인으로서 접근하였다.”

 

칼빈의 성령론을 연구하면서 워필드 박사가 주목한 부분은 구원의 적용자로서 사역에 대해서 정확하게 서술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비록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구원론에 다소 주관적인 면모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요, 오히려 구원의 이해를 가장 바르게 접근하여 제시한 훌륭한 이해라는 것이다. 구원은 각각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제공 되어지는 것이므로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것이 오히려 구원론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생명의 창조자요, 저자요, 수여자라고 칼빈이 이해하였다. 칼빈은 구원의 적용자로서 성령의 사역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하였다. 구원의 적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워필드는 성령의 증거사역에 대해서도 칼빈이 가장 적절한 설명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칼빈이 개혁주의 교회에 기여한 것은 성령의 증거라는 교리가 가장 기본적인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누구보다도 성경의 진실함에 대해서 증거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에 의존할 뿐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체 안에 스스로를 입증하는 확증을 오직 성령의 내적증거로부터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계시하는 자는 아니다. 성경 속에 담긴 계시의 확증자로서 성령은 성경이 스스로 입증하는 본질을 확실하게 증거하여 주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칼빈이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음을 주목하였다: “칼빈주의가 특별히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초자연주의로서, 이는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하나님의 긴밀한 사역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워필드는 당대 신학자들이 진화론과 같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빠져있어서 초월적이요 초자연적인 차원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칼빈의 초자연주의가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는 교리적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구원의 초자연주의라는 일관된 교리야말로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워필드 박사의 칼빈 해석을 지지하는 최근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죤 머레이 교수는 "칼빈은 매우 합당하게 성령의 신학자로 명명되었다고 하였다. 머레이의 뒤를 이어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최근 성령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술을 많이 남긴 리챠드 개핀 교수는 비록 널리 인기 있는 해석은 아니라 하더라도 워필드의 지적을 지지하였다. 개핀 교수도 역시 워필드 박사의 해석에 동의하면서,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하여서 성경의 신적 기원과 진리성에 대해 확신을 주는 칼빈의 주장이야말로 교회가 칼빈에게 빚지고 있는 매우 뛰어난 확증이라고 인정하였다. 개핀 교수는 칼빈이 기독교강요3권 구원론에서 논의하는 것들 중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특별히 주목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칼빈은 개인적인 죄인의 체험 속에 구원의 적용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성령론의 논의가 적절하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퍼거슨 교수는 가장 최근에 펴낸 성령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교과서적인 저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가 칼빈의 성령론에서 가장 핵심이며 이후 개혁주의 구원론의 뼈대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논문에서도 역시 성령의 신학자 칼빈의 설명들이 얼마나 중요한 초석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워필드 박사의 선언과 이를 지지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들이 담긴 칼빈의 성령론에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살펴본 바, 비록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명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언을 하고 난 후에 좀 더 그 주장을 입증하는 상세한 연구를 더 이상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아쉽게도 성령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성령론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후대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 성령관련 내용만을 집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비록 짧은 논문들에서지만, 워필드가 칼빈의 성령 이해에서 발견한 핵심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내용이 아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결국 칼빈주의가 특별히 주장하는 초자연적 구원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 속에서 성령이 친히 즉각적으로 역사한다.” 다시 말하면, 워필드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 자연주의적인 신학이 세력을 펼치는 상황에서 칼빈의 성령론은 초자연적인 근원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구원의 지속적인 초자연주의는 칼빈주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일부 칼빈 학자들에게는 아직도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라는 선언이 간과되고 있지만, 옛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는 여전히 이를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죤 머레이 교수는 워필드 박사의 주장을 매우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칼빈의 성경해석과 신학전반에 성령의 사역이 균형 잡혀 있다고 하였다. 리챠드 개핀 교수, 퍼거슨 교수, 그리고 갓프리 교수 등은 모두 다 워필드와 죤 머레이의 해석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에버딘 대학교에서 죤 오웬이라는 퓨리턴 신학자를 연구하여 기독신자의 생활에 관한 교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싱클레어 퍼거슨 (Dr. Sinclair B. Ferguson) 교수가 당시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개설한 과목이 바로 칼빈의 성령론이었다. 필자는 박사과정 첫 학기 첫 과목의 제목에서부터 엄청난 충격과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이때부터 필자는 매우 생소하게 느껴진 바로 이 성령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새로운 칼빈 신학에의 해석을 시도하고자 노력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필자는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가장 잊혀진 부분이 성령론 분야임을 입증하면서 전체 칼빈 저술을 통해서 재조명했다. 마침내, 그리스도와의 연합: 칼빈의 신학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라는 박사 학위논문이 완성되어졌다.

 

2009년은 칼빈 탄생 오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성대한 세계 칼빈 연구자들의 학술대회와 기념행사가 있었다. 필자가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달라는 심사위원회의 연락을 받았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필자가 발표한 글을 통해서 다시금 조금이나마 칼빈주의 확장사 연구에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면서 일주일간 지속된 세미나 시간에서도 칼빈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맡았는데, 필자의 연구내용을 경청했던 많은 칼빈 학자들의 격찬을 받게 되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교 법학교수 스킬 박사는 월스트릿 저널 기고문에서 이번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오백주년의 의미를 세계대륙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에 대한 확인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간다의 대주교 헨리 옴브리가 설교한 것과 한국의 칼빈 학자로 김재성 박사가 아시아에서의 칼빈주의를 발표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의 발표문을 포함하여, 이날 발표된 칼빈의 시대, 사상, 영향 등은 귀한 연구자료가 될 것이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연구하는 죠엘 비키와 파이파 교수 등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워필드 박사의 주장을 기본으로 따르고 있다. 최근에 비록 소수이지만, 칼빈의 성령론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논의를 다루고 있어서 유익한 도움을 주고 있다.

 

 

 

(5) 칼빈의 영향과 칼빈주의 성령론의 발전

 

칼빈의 신학사상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 그쳤다면 오늘날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거대한 신학적 유산과 교회들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세계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었기에 지역과 언어를 초월하여 널리 공감대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생생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에게 공감하면서도 각각 자신들의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칼빈주의 신학은 다양하게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핵심에 해당하는 중요 교리가 바로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라는 점을 공통분모로 삼았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적용을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는 가운데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어졌는데, 이는 칼빈 이후로 모든 칼빈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신학사상이 되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한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칼빈은 신학적인 영향력은 실로 방대하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칼빈의 위대한 신학사상은 후대의 신학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은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 되었기에 후대의 성도들은 편리하게 분별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17세기로 내려오면서 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를 규명하는 신학서론(prolegomena)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의기독교강요의 첫 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발전시킨 해답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삼위일체론을 비롯한 신론, 하나님의 경륜과 언약, 성경과 계시의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사역,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분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 구원론의 전체 과정과 예정론의 이해, 기도의 실제와 이론, 교회의 직분과 권징, 세례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등 기독교신학에서 다루는 핵심 분야 전반의 발전이 칼빈 사상과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범위를 좀 더 좁혀서 살펴보려는 성령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도, 정통 신학을 세우려는 17세기 기독교 교리학자들과 퓨리턴들, 그리고 최근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자들은 연속성을 갖고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20세기 초엽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이 여러 개의 교단을 형성하면서 마치 성령론을 부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오순절파 교회들만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좁은 시야에서 본 것이다. 칼빈주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는 성령이 없었다거나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학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1907년 미국에서 오순절파의 방언운동 이후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어졌다는 주장도 잘못된 말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 한 가지에 해당하는 방언운동을 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미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여 믿음생활을 경주하여 왔고, 철저히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경건을 힘써왔던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장로교회에는 성령이 없어서 힘이 없고 나약하며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칼빈 당대의 문서들과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요약한 성령론을 들여다보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와 강조에 있어서 연속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칼빈의 성령론에서 강조되어진 것들이 역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칼빈주의자들에게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앞에서 워필드 박사가 지적한 칼빈의 성령론에 나오는 것들이 주로 칼빈주의자들의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은 모든 교리의 핵심으로서 신학의 전반에서 다루어졌으나, 오늘의 성도들과 교회 사역자들이 철저히 연구하고 조사하지 아니하여 무지하게 덮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하이델베그 교리문답서에 핵심적인 교리들은 모두 다 성령에 연계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사역과 승천과 중보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동역과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중생, 성화, 믿음, 기도, 확신, 영적 전쟁, 종말론적 기대, 설교, 성례들에 관련되어 있는 성령의 적용적 사역을 다루고 있다. 거의 모든 구조와 문항에서 성령의 사역이 관련을 맺고 있다.

 

1563년에 독일에서 나온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작성한 간단한 신앙교본이다. 이 문답은 독일 남서부 지역의 영주 프레데릭 3세가 종교개혁의 시대에 자기의 영지 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통일된 신앙을 갖추어 주고자 만들게 된 문서였다. 독일에서는 영주의 신앙이 곧 그 지역의 신앙이다는 원칙을 결정하였으므로 그는 객관적인 신앙에 대한 안목을 추구한 나머지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멜랑톤에게 배운 우르시누스와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올레비아누스까지도 초청하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서술형식이 아니고, 질문과 답변 형태로 되어있다. 그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무학자들과 문맹자들이 쉽게 깨닫도록 하려는 교육적 의도에서였다. 129개의 문답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성령에 관계된 내용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의 칼빈의 주장들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

 

첫 문답에 핵심을 담았는데, 사람에게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성부의 섭리적 보호와 우리 안에 감사하는 마음과 영생의 확신을 창조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3-11문까지 죄책과 불행을 다루면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나야함을 밝힌다. 21문에서 성령은 믿음을 창조한다고 되어있다. 우리 인간들이 죄의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8문답). 칼빈이 기독교강요314항에서 믿음은 성령의 기본적인 사역이다고 주장한 말과 제 327항에서 믿음에 대하여 개념을 정리한 것이 거의 그대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도 들어있다. , 성령이야말로 믿음의 저자이라는 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들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에게서 온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게 하신다” (65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믿음의 정의를 내린 제 21문답은 거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같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 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이다. 곧 순전한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이다.”

 

21문과 22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24문답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설명한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는 구속주로, 성령은 우리의 성화를 관장하신다는 경륜적 사역의 구별,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사역에 관한 구분을 칼빈이 설명한 바와 같이 풀이하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칼빈의 성령이해는 먼저 삼위일체론에서 나오고 있는데, 각 위격이 담당하는 사역을 구별하여 설명한 바 같다.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24문에서 64문까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사역을 풀이한다. 53문답에서 성령은 첫째,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 나를 위로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였다.

 

65문에서 82문까지는 은혜의 수단들을 다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믿음을 창조하고 확증하는 성령의 사역을 다룬다. 성례를 규정한 68문답과 세례에 대한 설명 (70문답, 73문답)들도 모두 칼빈의 성령론과도 깊은 연계성이 발견되어진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칼빈이 성령의 사역에서 손꼽는 구원의 적용사역 가운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성령의 역사하심인데 역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도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연합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76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 은 무슨 뜻인가?

 

: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더욱 더 연합됨을 의미한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며, 그의 참된 몸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심을 확증한다 (80문답)

 

마지막 부분, 86문에서 129문까지는 성령을 주제로 우리가 감사하는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가를 다룬다. 십계명을 간추린 질문들에서 성령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고, 기도에 대한 부분에서도 줄곧 언급되어져있다.

 

 

 

2) 돌트 신경

 

16세기 후반에 큰 희생의 기초 위에서 개혁주의 교회를 발전시킨 네델란드에서는 1618년에 알미니우스파와의 신학논쟁을 통해서 돌트 신경을 작성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을 강조한 다섯 가지 조항을 담고 있기에 성령에 관한 내용을 그리 많지는 않지만, 칼빈의 핵심 강조점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칼빈의 입장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에게 외부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역사하는 성령에 의하여 말씀 선포의 사역이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였다.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도들의 증거사명과 선교를 강조하였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청교도의 회심

 

영국과 미국에서도 청교도들도 성령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해석을 한 단계 높여놓았다. 성령에 대한 언급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42, 대요리문답에서는 38, 소요리문답에서는 10회나 언급되어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확장된 성령의 이해를 추구하면서, 성령의 신성, 삼위일체 내에서 성령의 인격,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의 관련성,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개인에게 적용사역을 하는 주관적 영역과 성도들의 삶에서 인도하심과 객관적인 사역 등이 다루어졌다.

 

회심체험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 종교개혁 이후로 세대가 점점 흘러가면서 아무런 열심도 없는 명목상의 기독교신자가 많이 양산되어갔다. 16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는 청교도들의 시대는 기독교인이라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외형적 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위선적인 기독교인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분별하고자 회심체험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의 신앙이 달라졌다기 보다는 세대가 흘러가면서 그에 합당한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 것이라고 본다. 참다운 신앙을 점검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을 강조하였는데, 죄인이 회개하였다는 경험을 목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점검하였고, 교회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래서 워필드 박사는 퓨리턴 사상은 총체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즐겁게 연구하는 정신으로 거의 가득 차 있다고 본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와 대, 소 요리문답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성령이 사람의 심장 속에서 내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을 통해서 역사하되 성령의 외적인 도구를 통해서 역사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 다가 새로운 생명과 권능을 심어서 효과적으로 죄를 ?아내고, 죄인을 복음에 반응하도록 가능하게 하고 기꺼이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역사한다.

 

기본적으로 청교도 신학자들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목회자들의 공적인 말씀 선포사역과 개인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맺어야할 열매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였다.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굳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피조물로부터 즉각적으로 흘러나오는 뛰어난 결정체들은 회심에 대한 열망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이라고 썼다. 굳윈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루시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들은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요 또는 무너진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켜서 거룩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고 하였다.

 

영국 청교도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의 성령론은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 연구에 담겨있다. 청교도 교과서를 저술한 신학자 오웬은 성령론에 주목하여 좀 더 심화된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성령의 인격과 개인 성도의 생애 속에서 역사하심에 대해서 상세한 풀이를 하였다. 오웬의 저작전집 4권에서는 성령과 성경의 권위, 조명, 기도, 영적인 위로, 은사들을 실제적으로 풀이했다. 오웬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남긴 유산을 연구하면서 왜 아직까지 성령에 관한 교과서가 한권도 없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묶어서 제시하였다.

 

오웬을 비롯한 위대한 퓨리턴들이 총망라되어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는 무려 5년간의 산고 (1643-48) 속에서 나온 기도의 결정체였다. 이들 17세기 절정기의 영국 퓨리턴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강조를 성경과 연결시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담아 놓았다. 간단히 지적하자면 칼빈의 성경관처럼 성령의 내적 증거사역을 강조한 것부터 연속성을 입증해준다.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

 

회심은 성령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성령은 두 가지로 동시에 일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말씀이라는 도구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해와 확신을 불어넣으시고, 이와 동시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여 일어나게 되는 특수한 것, 매우 예외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기대하였다. 따라서 회심을 기대하던 퓨리턴들은 점차 성령의 축복을 어떤 예외적인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여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돌보아 주고 성장시켜 주는 것이라야 하는데 다소 지나치게 이것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쉐퍼드의 책, 진정한 회심(The Sincere Convert, 1643)이란 책에는 참된 신자의 소수를 분별하기; 그리고 구원받는 회심의 엄청난 어려움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칼 바르트에 의해서 확산된 신정통주의는 청교도 신학자들이 칼빈의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언약사상을 비난했다. 칼빈을 비롯한 16세기의 기본적인 개혁주의 입장과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청교도 신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후대에 조금씩 다른 독특성을 추가하기도 했다고 비판한다. 청교도들이 너무나 완고하게 구원을 얻기 위한 회심체험을 매우 강조하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미리 준비를 하게 한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20세기 중엽의 신정통주의자들이 17세기 청교도들의 시대적 과제를 온전히 이해한 것일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성도들이라도 앞선 세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과연 신정통주의자들은 정확하게 잘 파악하였을까? 시대마다 장소마다 신학적인 강조점과 방법론이 약간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17세기라는 시대적 환경은 전혀 그 이전 세대와는 달라졌다. 영국과 미국 신대륙에서 새롭게 대응해야할 심각한 문제점들이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퓨리턴들은 하나의 규칙을 생각하고 있었던 바, 죄의 확신은 율법을 선포함으로 촉발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을 갖기 전에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 면 그 누구도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기 전까지는 구원 을 받고자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려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매우 강조되었던 믿음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한 요점으로서 퓨리턴의 회심 교리에서 강조된 매우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준비 단계의 지식이나 확신만을 가지고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언할 수 없다. “준비단계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우리는 확고한 내적인 자격들을 이해하게 되어지고, 죄의 상태에 있는 영혼의 육적인 요소와 율법과 복음의 동시적인 사역 가운데 새겨진 회심과의 사이에 도달한다. 성령의 동시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영혼은 즉각적으로 믿음의 사역에 들어가게 되는데, 예를 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되 후기 퓨리턴의 거장 리챠드 백스터의 경우, 복음의 선포와 요리문답 교육을 지속하므로 키더민스터에서 행한 그의 목회사역은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17년 동안에 무려 육백 명을 회심시켰다. 18세기 마지막 퓨리턴에 해당하는 토마스 보스톤의 경우에도 들과 산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처음 그가 성찬을 베푼 사람들은 60여 명이었지만, 20여년이 지난 후인 1731년에 시행한 마지막 성찬에는 777명이나 참가하는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모두 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의 비판에 직면했었다.

 

스코틀랜드 칼빈주의 신학자 제임스 뷰캐넌의 성령론 교과서에서도 역시 퓨리턴 전통에서 중요시되어온 회심 사역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졌다.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일으키시는 성령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데 집중하였다.

 

 

 

4) 부흥운동과 특별한 체험

 

칼빈의 성령론이 영향을 끼친 개혁주의 부흥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 미국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죠나단 에드워드 (1703-1758)와 죠지 휫필드 (1714-1770)가 이끌던 개혁주의 부흥운동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독특한 회심체험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자극을 받아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칼빈의 입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들은 교회사에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서 부흥의 중요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이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칼빈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었고, 직면했던 신앙인들의 문제점들도 전혀 달랐다. 지금도 부흥운동은 성령의 특수한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주권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도 일상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흥운동은 교회 안에서 다시 체험을 유발하고 있고,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에드워드는 부흥운동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인류의 타락 이후로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 면에서 볼 때에는 구원의 사역이란 하나님의 영의 놀라운 전달수단에 의해서 주로 수행되어졌다고 관측되어진다. 비록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영향이 평상적으로 일반적인 범위에서는 항상 있어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위대한 일을 수행하도록 함에 있어서 취해진 방법은 항상 놀라운 표출이 일어남으로 시행되었는데, 특별한 긍휼의 열매들이 맺히는바 우리의 임무를 지금부터 더 앞으로 수행함으로써 충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 부흥운동이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부흥사가 부흥의 방법론을 확산시켜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부흥사들이 영광을 받거나, 부흥을 일으킨 현장 즉 어떤 특정한 교회가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휫필드는 자신들의 사역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임을 인정하였다. 휫필드는 교단을 초월하여 부흥운동의 도구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였다. 마이크가 없던 시대에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선포한 복음이 바람결을 타고 널리 퍼지는 특수한 현상들을 체험하였다. “회심하지 않은 목회사역의 위험성이라는 설교에 담긴 내용들을 당시 미국 장로교회 부흥운동가 길버트 테네츠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휫필드에 이르러서 뉴잉글랜드와 영국 장로교회는 설교의 강조점이 달라졌는데, 준비단계를 강조하기 보다는 즉각적인 회심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것은 요한 웨슬레의 설교에서 나온 영향이기도 하다.

 

 

 

5) 인간중심적 부흥주의와의 충돌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론이 점차 소원하게 다루어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잘못된 부흥운동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부흥운동은 개혁주이 신학이 강조하여 온 기본적인 주제들 보다는 사람들의 현장체험으로 치우게 되어졌다. 따라서 개혁주의 진영은 전혀 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성령의 일상적 사역에 대해서만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흐름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챨스 피니 (Charles G. Finney)가 주도한 19세기 초기 부흥운동은 1837년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 (New School)로 나뉘어졌다. 에서 나타났다. 피니는 부흥설교에서 먼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도록 자극했다. 성령이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고 깨닫고 듣는데 심리학적인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회심하도록 유도하였다. 피니의 인본주의적인 부흥설교는 성령에 대한 신학적 곡해이자 나쁜 방법론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죤 네빈은 부흥운동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피니의 방법이 지닌 모순점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미국적 낙관론과 복음적인 알미니안주의와의 혼합으로 전개되자 개혁주의는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무디 (Dwight L. Moody, 1837-1899)의 부흥운동은 피니와 다르다고 확신하였던 챨스 핫지 박사가 적극 후원하였고 신학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지도해 주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령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당대의 잘못된 성령운동의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워필드 박사는 로마 가톨릭, 알미니안주의자들, 웨슬레안들, 퀘이커주의자들, 정숙주의자들, 케직사경회 운동 등에서 완전주의라는 공통분모가 발견하였다. 이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죄에 대한 기본인식이 잘못되어 있다고 설파하였다. 죄가 현존하는 한, 인간이 율법의 조항을 완전히 지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이 너무 가볍게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워필드는 특히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하심에 대하여 방대한 저술로 복원시켰다.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강조하면서, 유아세례의 이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점차 감리교회와 부흥운동이 인간적인 방법론 (Methodism)에만 치우게 되면서, 기본적인 교리와 신학을 무시하고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를 간파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찍이 감리교회에서 강조하는 회심체험을 위한 부흥회는 축소주의적이요, 펠라기우스적인 부흥회라고 공격하였다: “감리교회는 성례의 예민한 감각을 죽여 버린다; 그것은 매우 차가운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교제를 무시해버린다. 신앙고백에서 제시한 진리를 무제한적으로 무시하도록 만든다. 우리 주 하나님이 육십 육권으로 된 아주 두꺼운 책을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생각하라고 주셨는데, 감리교는 그 복음을 싸구려처럼 쓸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은 자발적인 조직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은혜롭게 주어지며 경험된다고 주장했다.

 

19세기와 20세 초엽,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워필드의 영향으로 인하여서, 미국 개신교회에서는 구원의 집행자로 역사하는 성령의 모든 사역들을 다시금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알렉산더 핫지도 역시 성도의 믿음생활에 절대적으로 간여하는 성령의 결정적인 역사를 강조하였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마크 놀 교수에 의하면, 프린스턴 신학의 유산과 전통 속에는 균형 잡힌 성령론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칼빈의 성령론은 견고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리챠드 개핀 교수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날의 성령 역사는 요엘서 28절의 성취로서 이해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행사되는 날로 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단 한번 일어났지만 영원토록 그 효력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성경이 종결된 이후로 예언적 성격의 방언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입장을 전개했다. 퍼거슨 교수는 1995년 자신의 구원론강의 노트를 발전시켜서 성령에 관한 종합적인 교리를 체계화 하면서 많은 현대 오순절 운동의 주장들이 지닌 모순점들에 대하여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다시 해답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칼빈에서 퍼거슨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자들이 내놓은 일련의 성령에 관한 연구들은 개혁주의 교회와 장로교회가 결코 성령에 관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입증하는 신학적인 증거들이다. 성령에 관하여 가장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보편적 진리들을 추구하였고, 놀랍도록 풍성한 답변들을 찾아 놓았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개혁주의 신학에 성령이 빠져버렸다는 잘못된 편견은 버려야 한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연구 업적들을 자신만 모르면서 마냥 남들이 하는 험담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연구가 우리가 지금 궁금하게 생각하는 모든 문제점들을 다 해결해 주었다고 볼 수 없다. 아직도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더욱 궁금해 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놓쳐 버리고, 좀 더 특수한 것, 좀 더 새로운 것, 좀 더 강력한 것을 직접 체험하려 하면서 성경 말씀을 저버리는 성령운동은 혼돈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칼빈으로부터 그리고 그 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남긴 성령에 대한 강조들 가운데서 우리가 얻어야할 지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혜도 필요하고, 성령의 권능과 능력에 사로잡혀서 다시금 소망을 새롭게 하는 시기에 처해 있으므로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하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므로 사람의 지혜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16:13-17).

 

우리는 지금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기독교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기뻐하시도록 자신의 욕망을 내어 버리고 제물로 드려지는 삶이라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믿음 안에서 성화의 삶을 매일 살아가는 것은 평범한 생존이 아니라,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소망에 넘치는 성령 충만한 자의 자화상이다.

 

 

 

결론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개신교들의 운동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수직적인 성직주의를 깨트리고 성경적 종교개혁의 종합적인 완성자로서 칼빈의 공헌을 생각할 때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찬사가 결코 허황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성경에서 터득하여 제시한 지침들로 인하여서 개신교 전체가 도움을 얻을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사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예만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칭호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칼빈이 가졌던 다음과 같은 신앙인의 태도는 성령의 신학자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아야만 하지 않는가? 칼빈이 자신을 ?아냈다가 다시 부른 제네바 교회로 돌아가면서, 주변에서 강권하는 분들에게 보낸 심경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비장했었다.

 

나는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에게 바쳐진 희생 제물처럼,

 

나는 나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나이다.

 

......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뜻과 나의 애틋한 감정들을 바치오며,

 

복종시킬 것이며, 흔들리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뜻을 버려야만 할 때에는 언제든지,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말씀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나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합니다.”

 

칼빈과 개혁주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에 철저히 의존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칼빈은 혼돈에 빠져있던 제네바 교회를 철저한 신앙공동체로 바꿔놓았다. 그야말로 일생에 걸친 그의 헌신적인 희생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칼빈은 분명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말씀을 선포하였다.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성령의 역사로 갖게 되었다. 무모한 자기 과시나 소영웅주의에 빠진 자만심의 선포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서 체험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스리는 수많은 대적자들과 맞서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만 했었다. 그는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었을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약해질 수 있고, 조롱과 비난에 부딪혀서 인간적으로는 비참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그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깊은 연구와 경건한 생활의 근거는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위로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에 확신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감사하도록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한국교회도 다시 한번 신뢰를 받고 활발하게 살아나려면, 칼빈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모두가 체험하여서 성령의 사람으로 확고하게 일어나야 한다. 모두 성도들이 확실한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열매들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영생의 맛을 보는 내용이다. 살아있는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인 비전을 안고 나아가려면,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여야 한다. 사람의 감정이나 흥분이나 종교적 체험은 일시적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나 목표들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만다.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어야만 거룩한 사랑이 역사하게 된다.

 

 

김재성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88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좐 칼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좐 칼빈 - 죄의 오염  (0) 2015.03.21
부활-좐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  (0) 2015.03.19
당당한 칼빈 주의  (0) 2015.01.20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0) 2015.01.08
좐 칼빈-역경 중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  (0) 2014.12.29


행복의 실체 

나는 잘 되겠다고 노력하는 
그 이상으로 잘 사는 방법은 없고
실제로 잘 되어 간다고 느끼는 그 이상으로 
큰 만족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며 
경험하고 있는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것을 
내 양심이 증명해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이 받은 상처는 향기가 된다  (0) 2015.04.30
마음 사용설명서  (0) 2015.04.14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은?  (2) 2015.03.05
홀로 서기를 배워라  (0) 2015.03.04
어느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0) 2015.03.04

수도권 신천지 비밀교육장소 181곳 확인
CBS '신천지아웃' 사이트에 신천지 시설 위치, 사진 공개

2015/03/11 (수) 12:46 ㆍ추천: 0      



[앵커]

이단 신천지가 위장교회 형태로 동네 곳곳에 침투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의 한 위장교회는 허위로 교단 세탁까지 해가면서 포교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송주열 기지의 보돕니다.

[기자]

경기도 파주시의 한 교회 앞입니다.

신천지 피해자 가족들이 이 교회 앞에 모여 신천지 때문에 가출한 자녀들을 돌려달라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녹취] OOO / 신천지 피해 가족
“거기 가시면 안돼요. 육체영생하러 거기 가십니까”

취재진이 사실 확인을 위해 교회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상가 건물 4층에 위치한 이 교회 입구에는 예배 안내 광고판이 부착돼 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CCTV가 눈에 들어옵니다.

교육관 문을 열어봤습니다. 집회를 하는 지 누군가의 음성소리가 들립니다.

취재결과 여느 교회와 똑같아 보이는 이 곳은 다름 아닌 신천지의 위장교회로 밝혀졌습니다.

모 교단 총회 로고를 버젖이 사용하고 있는 이 교회는 확인 결과 이 교단과는 무관했습니다.

최근 신생 교단에 가입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총회에서는 신천지가 연루됐다는 정황이 포착돼 가입 신청이 취소됐습니다.

[인터뷰] 박용 총회장 / 대한예수교장로회 개신총회
“주소록이 보완되고 있는 유동적인 교단이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바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위장교회 목회자는 지난 2013년 모 교단을 사칭했던 위장교회 목회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교단을 사칭했던 수법으로 또다시 다른 교단으로 위장 세탁해 위장교회를 연 것입니다.

[기자] 목사님 계세요?

신천지대책전국연합은 교세 확장을 위한 교회들의 무분별한 영입이나 목회자 편입 등은 신천지 거짓 목회자들에게 포섭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아주는 것이라며, 각별한 주의를 촉구했습니다.

[스탠딩] 송주열 / 기자
"신천지대책전국연합은 현재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신천지 비밀교육장소들이 확인된 곳만 180 여 곳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고석표 기자가 신천지의 또다른 비밀교육장소 실체를 보도합니다."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 위치한 한 문화센터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느 문화센터와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흔한 간판도 없고, 창문은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 내부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30대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같은 또래로 보이는 한 여성을 문화센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녹취] 'ㅅ' 문화센터
“여기 설립 목적이 수다, 아줌마들 수다의 장으로 하다가 반응이 괜찮아서 회원들이 전부 자기 친구들 데리고 와서 놀아요.”

이 문화센터에서는 바리스타, 비즈공예 손뜨개, 맛사지, 자세교정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회원들 간에 서로의 재능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선전합니다.

[녹취] 'ㅅ' 문화센터
“여기는 서로 재능을 나누는 거에요. 서로 자기가 있는 재능을 가르쳐주고 배우기도하고. 요즘 재능 나눔 잘 아시잖아요.”

취재진이 문화센터 대표를 만나려고 했지만, 문화센터측은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녹취] 'ㅅ' 문화센터
"가세요. 가세요. 무조건 가세요"

송파구 석촌동의 한 상가 밀집지역.

한 시민이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여 몸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녹취] OOO / 신천지 피해 가족
"이 건물 2층에 사이비종교 신천지가 있습니다. 사이비종교 신천지를 아십니까."

몸싸움이 일어났던 건물을 찾아가봤습니다.

이 건물 7층에 올라가보니 실내 영화관 옆에 글로벌 바이블 스터디란 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두 곳 모두 신천지 위장 문화센터와 위장센터들입니다.

신천지대책전국연합은 신천지의 비밀교육장소는 외부 간판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출입구 쪽에만 선교, 힐링, 재능나눔, 센터, 상담, 아카데미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위장센터의 경우 신천지의 복음방 과정을 통과한 이들만 출입하는 곳으로 일주일에 4차례씩 신천지 교리를 가르친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CBS와 신천지대책전국연합은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 위치한 신천지 비밀교육장소 181곳을 밝혀내고, CBS 신천지아웃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했습니다.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장수마을에 갔더니 105세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장수 비결이 뭡니까?”

“안 죽으니깐 오래 살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다섯 살밖에 안 먹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100살은 무거워서 집에다 두고 다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장수의 비결이란 말이지요

 

“저, 어르신,

105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 욕하고

음해하고 그래서 열 받았을 텐데,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이렇게 오래 사세요?

우리 같으면 못 참고 스트레스 받아서 죽었을 텐데요“

 

그랬더니 너무나 간단한 답을 주셨다.

“그거야 쉽지.

욕을 하든 말든 내버려뒀더니

다 욕하다가 먼저 죽었어.

나 욕하던 녀석은 세상에 한 놈도 안 남았어.”

 

-좋은 글 중에서-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최대 산호초지역  (0) 2015.03.30
새들의 세계  (0) 2015.03.30
백두산 천지  (0) 2015.02.26
너 네 볼일 안봐 ???  (0) 2015.02.23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  (0) 2015.02.19

 은혜의 길(道)에서...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소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먼저 내버리라 명하신다.

 

은혜의 길(道)이란, 바로 깨닫는 것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먼저 털어내는 일부터 시작돼야 하는게 아닐까 ...

 

마음속에 수북하게 쌓아둔 죄,

은밀한 죄까지 모두 비워내는 것, 성령에 의지하여

모든 죄에서 떠나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비워낸 공간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심고

그 생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날마다

맑은 생수(말씀)를 마셔 열매가 맺히도록 하는 것이다 .

회개 없는 구원을 외치는 것은

그분의 고귀한 십자가 은혜(Grace)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려는 사단의 속임수일 뿐이다. -별똥별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

 








은혜의 길(道)에서...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소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먼저 내어버리라 명하신다.

은혜의 길(道)이란, 깨닫고 버리는 것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먼저 털어내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마음속에 수북하게 쌓아둔 죄
은밀한 죄까지 모두 비워내는 것,
성령에 의지하여
모든 죄에서 떠나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비워낸 공간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심고
그 생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날마다
맑은 생수(말씀)를 마셔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다 .


회개 없는 구원을 외치는 것은

그분의 고귀한 십자가 은혜(Grace)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려는 사단의 속임수일 뿐이다. -별똥별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이야기  (0) 2015.03.21
내 기억 속에 그대...  (2) 2015.03.14
순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가고  (5) 2015.03.06
배려하는 마음  (0) 2015.03.04
최상의 복수를 꾀하라  (0) 2015.02.26



♡ 부부가 같이 자야 하는 이유 ♡

최근 의학계는 사람의 질병 치료를 수술 대신
온열요법으로 치유하려는 추세에 있다.
그럼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처음 출생할 때는 체온이
섭씨 37도 가량이다가
나이가 들면 차츰 체온은 떨어져서
노인이 되면 36도쯤 되는데,
사람의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면역력은 5배로 증가한다.

잠은 11시부터 새벽 3시 사이
(子時에서 丑時사이)에는 꼭 자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시간대에 면역력을 키워주는
성장홀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시간대(寅時)인
3시부터 5시 사이에는
체온이 1도가량 떨어지게 되는데 사고사가 아닌 경우에는
이 시간대의 사망률이 약 67%로 가장 많다고 한다.

또한 35도는 암세포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온도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체온을 1도를 올리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꼭 필요한 건강법이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중에는 몸을 따뜻하게
유지한다는 온갖 건강매트가 나와 있다.
돌침대, 황토찜질매트, 옥 매트,
원적외선방출 ○ ○ 매트...등등
많은 종류의 온열매트가 원적외선을
방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피부만 따뜻하게 할 뿐
오장 육부의 온도를 올리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몸의 표면인 피부의 온도만
오르면 오히려 그 속 오장육부는
오히려 열을 빼앗기게 되므로 몸속은
체온이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체는 원적외선 중에서도
주파수 9~10의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같은 주파수대의 원적외선 파동을
방출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온열매트는 복사에 의한 체온
상승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적외선은 가시광선이나
근적외선과는 달리 심달력에 의해
그 빛이 피부를 뚫고 피하까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주파수는 4에서 1,000까지 997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도 인체의 원적외선 파동은 9 ~10의 주파수대인데,
그러므로 특히 같은 주파수의 원적외선 파동을
일반적으로 생육광선 파동이라고 부른다.

보통 36도의 물 한컵과 또 하나의 같은
온도의 물 한컵을 옆에 붙여 놓으면 몇도가 될 것가?
그것은 당연히 36도이다.인체는 다르다

36도인 두 사람의 몸을 붙이면 같은
생육광선 파동 두 개가 만나므로
복사열이 발생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체온은 1도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복사란 빛이 공기를 통하지 않고 직접
물체에 도달하는 성질을 말하며
몸을 붙인 두 사람의 체온은 모두 37도로 올라간다.

이것을 생육광선의 심달력에 의한
공진현상 또는 공명현상이라고 하는데,
서로 사랑하면 더욱 좋겠지만 사랑과는
관계없이 체온은 상승한다.

돈 안들이고 체온이 1도 올라가서 면역력이
5배나 증가되니 얼마나 좋을 것인가?
재미나는 현상은 복사열이 발생하여
체온이 올라가는 현상은
온도의 영향이 아니고 같은 주파수의
원적외선(생육광선) 파동의 영향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36도의 체온을 가진 사람이
표면온도를 20도로 설정한 인체와 같은

9~10 원적외선 주파수인 생육광선
파동의 건강매트에 누워도 체온은
37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온을 1도 높이는 힘은 온도가
아니고 생육광선 파동의 효과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건강 온열 매트를 구입할 때,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인체와 같은 주파수의
원적외선 파동을 방출하는지를 살펴서
구입하여야 현명하다 할 것이다.

엄마가 아이의 배를 문질러서
통증을 가라앉히는 것이나,
배가 아플 때, 자기 손을 아픈 배 부위에
갖다 대어 가라앉은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엄마와 아이, 또는 손과 배의
두 개의 생육광선 파동이 만나면서
복사열에 의한 체온 상승으로 세포가 죽어
생겨난 고름 등을 녹여 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어주어
울음을 달래주는 것도

모두 같은 현상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부부가 늙어서까지 잠자리에서 손잡고
잔다면 얼마나 복 받은 삶일 것인가?
각방 쓰는 여러 친구들 서로 의논하여
꼭 붙어서 자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옮긴글)

다음은 본인이 지난 2월 23일에 호주에서 모인 4차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 총회 시 이단연구가들 앞에서 한 강의다. 한국교계에는 이단 연구가들을 공격하여 먹고 사는 소위 ‘하이에나’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이 글을 이용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할 빌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염려가 적지 않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글을 밝히는 것은 이 강의는 나를 반성하는 의미의 강의이며, 이단 연구가들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며,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교계의 하이에나와 한국교회와 이단연구가들 몸에 붙은 기생충이 누구인지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3회로 나누어서 게재하는 바이다.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3)

최삼경 목사

바람직하지 못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1. 정직하지 않은 이단 연구가가 사라져야 한다.

   
▲ 최삼경 목사
주관적인 참을 ‘진실’이라고 하고, 객관적인 참을 ‘진리’라고 한다. 우리는 진리를 향하여 가는 자들로 진실할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않은 자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개의 잣대를 쓰거나, 두 개의 저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고무줄 자를 써서는 안 된다. 고무줄 자로 하면, 로마의 한 신처럼, 누구나 짧다고 빼죽이고 길다고 잘라죽일 수 있게 된다.

2. 부도덕한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성도로서도 여자 문제, 돈 문제에 깨끗해야 한다. 하물며 목회자로, 더욱이 남을 비판하는 이단연구가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비난 받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혹 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하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것처럼 모르고 헌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헌금한 자에게서 이단성이 발견되거나, 또 순수한 헌금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지면 그를 공적으로 밝히고, 가차 없이 돈을 돌려줘야 한다.

이단 연구가로서 심지어 한 사람이 검사의 기능과 변호사의 기능을 동시에 하여, 검사로 구형을 높이고 변호사로 수임료를 높이는 식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빌어먹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도적질해서 먹는 것은 죄다. 성공하지 못할 두려움보다 성공한 후에 찾아올 교만과 타락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밖에 있는 천만인의 원수보다 내 속에 있는 적은 한 가지 죄의 가능성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3. 극단적 이단 연구도 아주 위험하다.

토마스 칼라일이 “마틴 루터는 어머니 마음을 가진 개혁자였다.”고 했다는 점을 듣고, 본인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자의 자세라고 보기 때문이다. 뮨쳐와 같은 과격한 개혁자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단과 손을 잡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와 같은 자들이 많다고 안다. 또한 반대로 들이 댈 곳과 들이 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별하지 못하고 칼을 들이대는 포악한 이단 연구가도 있다. 사울의 목을 치지 않는 다윗의 그 사랑과 인내는 이단 연구가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늘 자신의 죄와 부족을 찾아야 하고,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 없는 이단 비판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단자만 죄인이 아니라 이단 연구가도 죄인이다.

날카로운 송곳이나 칼 하나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찌르는 재미에 취한 아이처럼 이단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어렸을 때, 어쩌다 가진 면도칼 하나를 가지고 이것도 베어보고 저것도 베어보고 재미가 나서, 그 칼로 집 옆에 큰 나무 껍질을 돌아가며 다 벗겨 버린 일이 있다. 결국 그 나무는 죽었고, 나도 부모님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사악한 이단을 대처한다는 미명 하에,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편견, 자기 욕심, 자기 교만 등을 숨겨 합리화하려고 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분들은 부정적 도구로 사용되는 분들로서 긍정적으로 보면 쓸모없는 무용한 사람들이다. 이단을 공격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그 많은 약점들을 그곳에 숨기는 그 악은 이단자의 악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없다.

한 평신도 이단연구가는 전천년설도 이단이고, 무천년설도 이단이라고 하고, 어떤 분처럼 방언 자체를 다 마귀의 사역으로 공격하고, 반대로 방언을 못하면 구원도 받지 못한 것처럼 하는 것은 다 극단론이다. 이는 모든 신비적 현상 자체를 모두 사탄 마귀로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단연구가는 누구보다 부드러워야 한다. 속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이단 연구는 위험하다. 이단이나 사이비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해도 가짜로 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가지는 것은 내 말이 맞는 것이 증명되기 위하여 회개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마약 환자는 갈수록 강하게 약을 먹어야 하듯, 갈수록 더 강하고 더 동정심 없는 이단 정죄에 익숙해져가는 이단 연구를 삼가야 한다. 포르테보다 피아니시모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진리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며, 신의로 진리를 그르치지도 않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리란 이름으로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쉽고, 자유자들은 신의를 앞세워 진리를 그르치기 쉽다. 물론 이 둘 중에 진리가 앞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믿음도 신의이다. 이단 연구는 보수주의자들이 한다는 점에서 이단연구가들이 이단연구가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개는 주인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논리라도 쉽게 배신한다. 이단연구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아무나 쉽게 비판하고 아무나 쉽게 정죄하기 익숙해져 있는 이단 연구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4. 소영웅주의적인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오차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영웅심이 있다. 욕심과 사명이, 애국과 정권욕이 함께 꼬여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오차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강단에서 망나니 칼춤 추듯 행동을 하는 자도 있고, 이단연구란 이름으로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은 이들을 ‘막가파 이단연구가’라고 부르겠다.

누구보다 더 고상하고, 누구보다 더 인격적이고, 누구보다 품위 있는 사람이 이단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인격과 학문성과 영성을 요구하는 행위가 이단연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단 연구는 일반 목회자의 수준과 신학적 수준을 넘어서는 최상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서 이단연구나 하고, 인격적 결함과 정서적 결함을 가진 자가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대법관을 하는 것과 같다.


결론 : 이단 연구자들의 하늘 상급이 클 것을 믿는다.

목회의 고통은 목회자만 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목회다. 그러나 이단 연구의 어려움은 그보다 더 하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서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다. 단 정직한 이단 연구에 한하여 그렇다. 십자가를 아는 자가 적고, 십자가를 지는 자는 그보다 더 적고, 십자가를 지고 기뻐하는 자는 그보다 더 적다. 이단 연구의 길은 십자가 중에 십자가이다. 그 고통과 어려움을 이단이나 정통교회에 화풀이를 하듯 하지 말고, 그 고난과 고통을 기뻐하는 이단 연구가가 되기 바란다.

본인은 이단 문제를 거울로 삼아서 볼 때 한국교회가 가장 잘 보인다고 자부한다. 그런 점에서 내 죄가 교회의 죄가 되었고, 교회의 죄가 민족의 죄가 된 것 같아 눈물로 회개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아파서 견딜 수 없다. 이제 눈물도 말라간다.

솔로몬 앞에 두 여자가 있었다. 하나는 가짜 어머니요, 하나는 진짜 어머니다. 진짜 어머니는 내 아들인데 아니라며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였고, 가짜 어머니는 찢어서 갖자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앞에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가? 아들을 살리려고 자기 아들을 포기하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일까? 한국교회와 이 민족 앞에 진짜 어머니를 찾기 어려운 것이 교회와 민족의 위기요 비극이다. 이단연구가들은 교회를 위하여 내 이익은 물론 내 사상, 내 교파, 내 자존심까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진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존귀한 이단 연구가가 되기를 눈물로 호소하며 강의를 마친다.

출처: 교회와 신앙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기 위한 필수 전제 (엡 2:20-22)

 

 

교회를 아는 지식의 중요성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특별한 각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서 사는 안일한 태도로 지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도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륜을 이해할 리 만무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란 것이 이런 것인데,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희희낙락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활태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교회가 이 세상 가운에서 특별히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값으로 사신 가운데 이렇게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으로 묶으시고,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서 필요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사명을 말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구원의 기관 노릇을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 가장 크고도 중요한 사명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의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기관을 이 땅에 내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라고 할 때, 교회는 그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인격들을 통해서 그 활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 교회의 한 분자로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펑범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수행하는 자로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분은 참으로 값진 것이고, 이런 의식 속에서 각성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인 것이요,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의 결국에 우리는 다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했습니다(1:9).

 

우리가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의 완성에 안전하게 들어가려면, 지금이라 불리우는 이 시점에서부터 이미 이 구원을 풍성하게 누리는 자로서 서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기관 노릇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구원의 기관 노릇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우선 필요시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일입니다. 성경이 교회를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열심히 연구하고 충분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고, 이때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도 말하며, 이러한 세상 가운데 처해 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교회로 하여금 정당한 세상관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이 세상관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여기에 비추어서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비로소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관을 정립하는 일이 성경을 하루 이틀 읽고 연구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삶의 다양한 체험과 경험 속에서 해석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외우는 식의 단순한 지적인 학습 방법만으로는 수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깨달아진 어떤 하나의 이론은 삶의 경험 속에서 더더욱 견고하게 확증되어지고, 이것이 다시 다음 단계의 확증으로 발전하는 등등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마침내 성도가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믿음의 삶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방식으로 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가리켜 체험적 지식이라, 혹은 살아 있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참으로 많이 하고 나름대로 오래했을지라도, 가령 교회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에, ‘교회란 이런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평소에 교회를 배우고 경험함에 있어서 순전히 지식적인 방법으로만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밤잠을 설치면서 각종 수험 예상 문제들을 암송하듯이 하는 그런 방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했을지라도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보여주는 정도의 뼈를 깎는 듯한 노력과 각오로 임했다면, 결과는 좀더 나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도의 각오와 노력으로 성경을 연구함으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신학자나 목사 혹은 기타 성경연구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혹시 이런 정도의 열심과 각오로 성경을 연구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성경 지식은 머리 속의 회전만으로는 온전히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온전한 것이 되려면 경험과 체험이 임상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정확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집행해 나가시는, 이때 최고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교회를 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심으로 교회를 이 땅에 내셨고, 교회로 하여금 아들의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관심의 최고 절정체요,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심에 있어서 기준으로 삼으시는 중심 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 만물의 모든 것들을 경영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1:11). 또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는 말씀하시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회복한 종교 개혁자들의 수고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을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물론 이 형식이라는 것은 또한 반드시 그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용이 없이 겉으로만 형식을 갖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형식이란 것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온전하게 수립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교회의 형식이란 것이 수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곧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하나님의 참교회가 온갖 미신과 거짓으로 더럽혀졌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기간이 얼마 동안이냐 하면, 대략 A.D 4세기 말경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때인 A.D 15-6세기경까지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교회의 정체성이란 것이 밖으로 알려지거나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로마 카톨릭이라고 하는 이름 아래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 거대한 조직은 자기네를 가리켜 스스로 교회라고 불렀지만, 과연 성경적으로 어떤 뒷받침을 받아서 그렇게 교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반대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성경에 눈을 뜬 사람들에 의해서 로마 교회가 사실상 거짓 교회인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고, 성경에 눈을 뜬 사람들의 각성은 이후 점차적으로 개혁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말틴 루터와 같은 사람은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최초의 사람인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이름 없이 수고하고 죽어간 이름 없는 종교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당시 보헤미야 사람 존 후스는 로마 교회를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중에 마침내 로마 교회 당국자들에게 붙잡혀서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의 불길을 여전히 지펴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이후 존 후스의 사상을 받들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다볼파(Taborites) 혹은 모라비안 형제들(the Moreviav Brethren)로 불리우면서, 로마 교회를 대항해서 종교개혁의 물결을 조성해 나갔습니다. 또 존 후스가 그처럼 로마 교회가 거짓된 교회인 사실을 깨닫고 눈을 뜨게 된 데에는 그의 시대 바로 앞에서 이루어진 존 위클립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 위클립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사람인데, 그가 이런 활약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접할 수 있었고, 따라서 로마 교회가 얼마나 거짓된 종교였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존 후스도 이 위클립의 영어 성경 때문에 참 교회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서서히 불씨를 지피셨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말틴 루터에 이르러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교회와의 투쟁이 일어난 이 사실로 말미암아 자연히 교회의 정체성 문제가 거론되게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의 거짓된 교회를 타파하면서 ‘참 교회의 실상이란 이런 이런 것이다’라고 제시했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이론들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는 것들이 바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내용들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러한 내용들에 입각하여 움직이게 되면 여기에서 자연히 형식이란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의 형식이란 것은 우리가 교회를 논하게 될 때에 우선적으로 논하여야 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대두됩니다. 적어도 어느 한 지역에 존재하는 지역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 교회로 발견되어지려면 바로 이 형식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형식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내용은 없이 겉으로 형식만을 갖추게 되면 안 되는 것이요, 또 사실상 내용이 없는 한에는 형식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각처에 많은 교회들이 지역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서울 하늘을 내려다보니까, 서울이 온통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들로 물결을 이루더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말도 80년대에 회자되던 것이고, 지금 우리는 96년도 말기의 시대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마만큼 서울에는 교회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서울 장안 구석구석에 교회들이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심지어는 한 건물에 두 세 개의 교회 간판이 걸려 있기까지 합니다.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은 몫이 좋은 곳을 찾기 위하여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을 찾기 위하여 서울 장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닙니다.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끝에 건물을 빌리고, 강대상과 의자 등등의 기구들을 사서 배치합니다. 좀더 재력이 있는 사람은 내부 치장에 신경을 더 써서 강대상 뒤에 휘장도 드리우고, 예배당 안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꾸미기 위하여 돈을 씁니다. 큰 교단에 속해 있는 개척자인 경우에는 피아노도 면세로 들여놓고, 마이크도 음질이 좋은 것으로 골라서 설치합니다. 예배당 유리창에는 ‘무슨 무슨 교회’라는 이름을 아름답게 새긴 조각을 붙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좀더 세심한 개척자는 그럴듯한 성구나 교회 표어들을 써서 여기 저기에 붙여놓습니다. 그리고는 주일날이 되면 예배를 진행합니다. 이때 소위 말하는 개척 멤버들조차 없이 이렇게 교회를 시작한 경우에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만이 이 날 예배의 참석자들입니다. 이후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전도합니다. 다소간 시일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후 사람은 한 사람 두 사람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나타납니다. 그것을 교회를 빨리 부흥시키려고 하는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교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정당하게 점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이 정한 최소한의 규례와 절차조차도 무시하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세례를 베푸는 일이 있게 되고, 순전히 그 사람을 붙잡아 놓으려는 목적으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직분을 남발합니다.

 

이상 살펴본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처음으로 개척될 때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한 큰 교회가 순전히 복음 전도를 위하여 다른 지역에 교회를 분가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앞서 살펴본 방식으로 새로운 교회를 교회가 개척되고 있는 실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이런 식으로 개척되는 교회들이 교회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 네온사인이나 교회 간판을 통하여 이름을 내는 등등의 것들은 교회의 형식이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교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내용이요, 혹은 형식이라고,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지금 현대적인 문화의 상황하에서 이런 것들이 교회에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고급으로 발달해 있는 현대의 실상 속에서 교회 역시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필수 요소들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제아무리 다양하고 고급스럽게 갖춘다 할지라도 결코 교회의 속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이런 것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양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처음에 개척하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항상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금 저 옛날 로마 교회가 지배했던 암흑기를 답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내용이나 형식이 전혀 비성경적인 것에 근거하여 ‘이것이 교회이다’라고 주장하는 결과를 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구분하는 시금석은 교회의 형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가령 우리 주위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이런 저런 종류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선교 단체일 뿐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때로는 복음을 섬김에 있어서 선교 단체들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아직까지 문명의 혜택을 잘 받지 못하는 제 3세계의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을 번역해서 원주민들에게 보급하기도 하고, 또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 단체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교 단체의 경우 성경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에 가르치고 있는 내용들이나 혹은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교회가 있어서 자기네를 가리켜 ‘우리는 교회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내용이 없다면, 그래서 교회의 형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는 사실상 하나의 기독교적 종교 단체로 평가될 뿐이지, 결코 교회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거나 또는 교회를 이루어 나간다고 할 때에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각별히 주의해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조건으로서의 정통성

 

교회가 교회도기 위해서는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를 개혁할 때에 이 형식 문제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이들이 세운 교회의 형식이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입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는 것이요, 두 번째로는 성례를 신실하게 집행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권징을 능력있게 시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사실이 있어야만이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이 이론이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작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교회 안에 권징이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있어야만이 교회는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고, 또 일정한 규율과 질서 체계를 유지함으로 교회가 스스로 혼란 가운데로 빠져들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일들을 미연에 방지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거듭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에 순결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일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수한 선포를 통하여서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며(고전 1:18), 또 이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자들의 삶을 잘 지도하는 가운데 구원의 항구로 안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23 2:2).

 

그런데 사실 현실적인 상황을 보건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명분 아래 이런 저런 세상적인 철학이나 윤리 도덕 등이 가르쳐지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기는 하되, 그 사상이나 이념을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심하면 왜곡시키기까지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말씀을 듣는 회중들까지도 이런 것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순전히 이야기주의로 빠져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무엇보다 첫 번째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할 때에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순전하게 선포하는 이것이 어떻게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하는 회의를 스스로 품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까닭에 복음을 고지식하게 선포하는 일을 미련하다고 보고는 대신에 여러 가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세상적인 철학이나 기타 이론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런 것을 준엄하게 타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지 않는 데서부터 교회의 타락은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 생활의 기반인 법인데, 바로 이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심지어 변개시키기까지 하면서, 그러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사실상의 이율배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논리와 행동하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성장이란 것은, 실질에 있어서는 전혀 교회가 아니요, 교회의 타락이라고 하는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딤전 3:15). 이 말씀을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가 하는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여기서 ‘기둥과 터’라는 것은, 진리를 기둥(pillar) 같이, 기념비(monument) 같이 높이 세우고 그 아래는 좌대를 돌로 쌓아 올렸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진리의 기둥이라는 기념비와 그 좌대가 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교회는 말씀을 높이 들어서 ‘이 기념비를 보시오’라고 하면서 남들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높이 들고 서야 하며, 바로 이것이 교회의 성립근거요 또한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교회는 말씀의 수호자요, 선양자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떠나서는 달리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은혜의 방도이다, 혹은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다 라고 하는 이 사실은 철칙과도 같은 원칙이요, 영원토록 불변하는 진리인 것이며, 하늘이 꺼지고 바다가 잠기며 태산이 무너져도 변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회를 개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를 그 첫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교회를 진단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회를 건설했습니다. 개혁자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 당시의 어떤 교역자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이 전한다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전하고, 혹은 사람의 말을 가하고 하는 등등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보면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과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말씀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단호히 선포하거니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순순하게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성례가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하고, 또한 권징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형식이요, 곧 교회의 표식인 것입니다. 이를 영어로는 ‘mark of the church’라고 합니다. 이들 세 가지 형식은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들을 구별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이 세 가지 형식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이 균등하게 작용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교회의 형식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형식은 어떤 임의의 기독교 단체를 평가할 때, 이것이 과연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정해주는 시금석 역할을 합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의 요소들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은 별도로 주제를 정하여 다루기도 합니다.)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거나 개척되는 처음 단계부터 이 세 가지 형식이 중심에 와야 합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이 없는 한에는 제아무리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고, 그럴듯한 값비싼 가구들로 교회당을 장식한다 할지라도, 결코 교회라고는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게 되면 이는 하나의 기독교적인 종교 단체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 평가일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에 세워지는 첫 출발의 시작 단계부터 이와 같은 형식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고, 만일 부득이 이런 것이 없이 교회로서 출발했다고 하면, 이후로는 이것을 자기네 교회가 성취해야 할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정통성의 문제

 

우리는 여기서 정통성의 문제와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개척되거나 새롭게 세워지는 처음 단계부터 이와 같은 교회의 표식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바로 이 정통성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정통성이란, 교회를 세우는 자의 자격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란 아무라고 열심히 있기만 하면, 그 열심 있는 사람이 세우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생각에 의해서 현재에도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서는 세우는 자의 정통성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정통성은 다시금 하나님의 재가라고 하는 명제와 연결되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부르심을 입고, 그리고 보내심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이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와 변명으로서 그처럼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의 정당성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요, 문제는 객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객관성은 다름 아닌 정통성입니다. 그리고 이 정통성 혹은 객관성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의 자격과도 연결되어집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그렇게 할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자격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받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이 자기 혼자만의 주관성을 가지면 안되고, 자타가 시비를 따질 수 없을 만큼의 객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의 이 논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 곳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말할 때에,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터’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떤 사람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씀을 맡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신 가운데 당신의 말씀을 맡기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세우시는 사람이 없이는 교회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입었던 초대교회 당시의 때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려 함에 있어서 당신의 말씀을 맡을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나서서 다시금 앞서 이미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통성이란 것이 성립되어집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사도들의 시대와는 달리 이미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었고, 또 이와 더불어 교회의 창설이 끝난 관계로, 그리고 다름 아닌 교회를 세우는 일에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성격상, 이제 누군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 자신이 이미 정통적인 교회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고, 또 아는 바 그 진리에 이미 자기 자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사람이어야만이, 이후 교회란 이런 이런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남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정통성에 대한 해석입니다. 자기 자신이 교회란 이런 이런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깨닫는 대로 친히 자신을 적용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을 바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이론대로 자신은 물론이요 함께 인도함을 받는 다른 성도들을 목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교회가 세워짐에 있어서 이 정통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교회는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할 때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서 ‘이제부터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나가자’라고 합의하고, 그렇게 밀고 나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교회란 것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서까지 사수해 나온 진리의 법칙에 크게 위배됩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사람 편에서 먼저 모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심으로써 되어지는 일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사람들 편에서 스스로 먼저 모이는 데서 교회가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불러모으심으로 비로소 교회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일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하나님 당신께서 세우신 말씀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시는 모습을 띄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의 순수한 전파’라고 하는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 가운데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로는 말씀의 본질, 곧 진리성과 관련한 것이고, 둘째로는 말씀을 전파하는 자의 자격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은 피차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상 누구나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고, 또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입네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보편적인 차원에서 자격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특별한 의미, 그러니까 교회를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교회가 성립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말씀을 순수한 전파 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말씀의 순수한 전파의 당위성 문제를 떠나서 교회의 본질 문제를 다룬 적이 개혁파 교회권에서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작용하고 역사하는 가장 적합한 곳은 교회의 강단입니다. 이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어야만이 이 강단에 설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고, 또한 성례를 집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충분하게 드러내어 선포할 수 있으려면, 그마만큼 필요 적절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필요 적절한 훈련에는 성경 지식을 쌓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제로 한 사람의 교회원이 되어, 성경으로서 깨닫고 배우게 되는 교회의 이론을 몸으로서 적용해 나가는 과정까지 수반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훈련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의 죄값을 사유하셨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통하여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바탕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그렇게 깨달은 이론대로 자신을 적용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양육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필요 적절하게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필요 적절한 훈련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고, 이런 사람만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을 보면, 자신이 어느 날 작심을 하고 산 속에 들어가서 밥을 굶어가면서 소위 말하는 금식 기도에 힘썼더니, 갑자기 무슨 신기한 기운이 자기를 사로잡았는데, 이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켜서 마침내 그들이 발휘한 열심만큼이나 그렇게 깊게 교회를 색욕거리로 변질시키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능력이 없고,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는 신중함이 없고서야 어떻게 교회의 형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내 삯군 설교자로 변질되기 마련이고,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달음박질치며 달려나갔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다거나 훈련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우리의 능력이 심히 미미하다 할지라도 태산과도 같은 주의 일일지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자기 속에 교회를 아는 지식이 넘쳐나는 이것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함이 넘쳐나고, 교회를 아는 지식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지 않는 한에는 어느 누구도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나서거나 주장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아는 만큼만 이야기할 수 있고, 또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인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는 지식도 없고 체험도 없는 사람이고서야 어떻게 교회를 논하고 세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개혁파 교회는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단코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훈련받지 못한 사람이 강단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이 규례는 개혁파 교회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런 원리가 간단없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받지 못한 사람, 곧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마구잡이로 세워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들에 의해서 교회는 여지없이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들은 순전히 열심 하나만을 내세우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듭니다. 따라서 이들이 가진 교회상이란 것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고 추상적이기 그지없으며, 지극히 유아적이어서 유치하기만 합니다. 이들은 교회의 형식 혹은 표식을 이루어 내려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고,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건물을 짓고 여기에다가 사람들을 그득히 채우는 일에만 죽기살기로 뛰어다닙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하는 초기 때부터, 주보를 화려하게 만들고 교회 이름을 새긴 간판을 거창하게 내어단다거나 십자가 종탑을 높이 세우는 일 등등의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보건대, 그 이후 나아가게 될 발전과 결말이란 것이 이렇게 나타날 것을 이미 지금부터 충분히 예상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까닭에 중세기에 시작된 종교 개혁은 사실상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성함으로 이것을 완성하는 일에 초석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빠져버린 지난 날의 과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교회는 자기에게 교회를 세우려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함부로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려는 사람은 최소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양하고도 깊이 있게 아는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이것이 교회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자리잡음으로 교회의 형식이 되도록 하는 일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같은 마음으로 거듭난 증거가 있는 사람이 최소한 몇몇은 되어서 함께 동일한 각성 하에서 움직일 수 있어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만 믿는 신조도 뚜렷하게 가지고 있고, 교회적인 질서와 규범도 있어서 거기에 확고히 서 나갈 때에 비로소 교회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관이 투철하지 못한 어떤 한 사람이 순전히 열심하나만으로 밀어붙여서 건물을 얻고 거기에 교회 간판을 내어 거는 식으로도 교회란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아주 피상적인 고백만을 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고 합쳐가지고 적당히 성경공부를 하다가 기회를 살려 목사를 모셔오곤 하는 식으로도 교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워지는 교회들의 경우 신학적 결점을 치명적으로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의 표식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서부터 잘 드러나게 됩니다. 내용이 없으니 형식이 나올 수 없는 것이고,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신학적 지식이 없으니, 내용을 구성해 나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앙고백의 일치성도 없고, 신앙의 도리들에 있어서 논리적인 일관성도 없는 까닭에 객관적으로 드러내보일만한 교회다운 형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상황을 보건대 종교개혁기의 상황보다도 더 어두운 면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 이 시대는 당시와도 같이 개혁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온갖 박해를 당한다거나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기는 환난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건설해 나가는 일에 전념하는 주의 종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심히도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오직 로마 교회 하나만이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의 거짓된 것에만 맞서서 투쟁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혹은 영국과 같은 경우, 헨리 8세가 새롭게 시작한 성공회와 맞서서 개혁을 하는 것이 청교도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저마다 개혁파 교회임을 주장하고 내세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아니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까닭에 상황이 심히 어려워져버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름 우리는 온통 비스므레하고 유사한 것들에 둘러 싸여 있는 까닭에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하에 놓여진 것입니다.

 

상황이 왜 이렇게 처참하게 되었는가 하면,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지나치게 물량적인 부흥에 치중하느라고 자체에 규정된 교회 개척의 원리들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흥과 선의의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각 교단마다 자기네가 스스로 정한 교회법조차도 무시하면서 마구잡이로 교회를 개척해 나왔습니다. 각기 개개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점들은 있겠으나, 대개의 경우 교단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관련하여 지키고 따라야 할 질서를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교단의 헌법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신앙의 도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가령 교회가 한 사람의 구도자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따라야 할 일정한 질서 체계를 세운다거나 목사나 혹은 장로와 집사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밟아야 할 일정한 규율과 질서들도 설정해 놓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관련한 규례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자기네 판단에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런 저런 생각들을 여기 저기서 조금씩 취해서 모으는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실증되어진 개혁파 교회의 정통성의 기반 위에 서서 최종적으로 교회법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른 말로 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원리에 입각하여 세세한 부분들을 설정하고 규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에 가령 장로교 헌법이라 할 것 같으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헌법과 미국 장로교의 헌법은 근본 원리면에 있어서 동일한 것입니다. 지역적인 특성과 문화적인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차이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 원리면에 있어서는 영국 장로교의 헌법과 한국 장로교의 헌법은 서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학교들과 목회자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부흥되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혹은 선의의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서로 교세를 확장하는 데 집착하느라고 무질서하게 교회를 세워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학의 기반이 없는 비정통적인 신학교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오고, 신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재주를 피워 신학교를 졸업하고는 적당히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지역 교회들이 여기 저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세울 수 없는 것이고, 일정한 질서에 따라야 한다고 저마다의 교단 헌법들은 규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조금 전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 특별히 말씀의 순수한 선포가 교회의 중요한 표식인 것과 관련하여, 교단의 통제하에서 적절하게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설교할 수 있다고 못박아 놓았습니다. 목사가 아니면 성례를 집례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순전히 권위를 내세우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존귀하게 다루려는 데서 부득불 이러한 질서가 최소한도로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생들이 전도사라고 하는 명칭을 내세워 저마다 앞다투어 교회를 개척하고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어느 정도 사람을 모으게 되면, 각 교단마다 앞다투어 이들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가 되게 하고, 교회 설립을 인증해주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는 가히 신학교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요와 공급이 넘쳐나서 여기 저기 신학교들이 생겨나고, 신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학생을 모집할 때에 두루뭉실하게 넘어갔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목사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갖추어야 할 것으로 신앙고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하고, 또한 지역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지역 교회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실질에 성립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데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러나 이것은 자기 혼자만의 주관적인 신념이어서는 안되고,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봉사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드러난 은사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의 직분이란 것은 은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가 신학생을 뽑을 때에 이런 것을 확실하게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소명이 있느냐?’라고 묻기는 하지만, ‘예! 소명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교회의 ‘추천서’라는 것도 아주 요식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원래 이것은 목사 후보생이 실제로 지역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지, 나아가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만한 은사가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보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추천서 용지를 들고 와서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면, 그냥 찍어주었습니다. 만일 찍어주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교회를 떠나버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이즈음의 상황이 이미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새삼스럽게 신앙고백을 배우는 기괴한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믿음 안에 서 있고, 믿음의 도리들에 대해서 확고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기초 위에서 이제 목회에 관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 신학교의 과정인데, 어이없게도 신학교에서 신앙고백을 새삼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조차도 제대로 교수되는 예가 지극히 드물었습니다. 이것저것 배우느라고 대개의 학과들이 수박 겉핱기 식으로 가르쳐졌습니다. 신앙고백서를 아예 가르치지 않는 신학교도 있는가 하면, 가르친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생들의 경우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자신이 인격에로 흡수되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의 지식과 정보가 되어 그의 머리 속에 쌓여지게 되었습니다. 정보와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 얻는 신앙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초보적인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식과 정보를 가진 이것이 자신에게 있는 신앙고백인 것처럼 여김으로 큰 착각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열심을 낸답시고 나서서는 교회들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이후 하는 일들을 보니, 도무지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리 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여기 저기 움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목회하는 사람다운 자태가 엿보이지 않습니다.

 

표현이 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순전히 기업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미국 목사님이 ‘하나님을 파는 세일즈맨’이라는 책을 써서는 이런 형태의 목회자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일들을 하고 다닌다 말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순전히 마케팅 기법으로서 운영하고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겉으로는 성령님의 역사 운운하지만, 실제로 해나가는 행동을 보면 순전히 마케팅기법입니다. 이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은 순전히 기업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학’인가 뭔가 하는 세미나들이 여기 저기서 개설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곳을 기웃거리면서 복음을 판매하는 기발한(?) 방법들을 배우곤 합니다. 이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사람을 심각하게 하거나 진지하게 하는 내용들이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사람을 웃기고 편하게 해주며, 그야말로 싸구려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들은 주의 몸을 돌보는 목자요 교사로서의 목사입네 하면서도, 정작 주의 백성들에 대한 신실한 책임감도 없고,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인도하려고 하는 진지한 열심이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많이 긁어모아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백화점과도 같은 큰 건물을 지을까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야말로 기업하는 사업가들이 기업을 운영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듯이 하는 그런 행동들을 답습한단 말입니다. 교회원들의 영혼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여 관찰하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들을 인도하고 권면하는 일에 애쓰는 이런 모습을 도무지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인도하고 주관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행태들이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교회를 운영한다 하면서도 정작 성경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 무슨 이론 하에서 교회를 진리에 걸맞도록 운영해 나가겠습니까? 그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본받고 답습하는 것이 전부요, 누군가가 어떤 방법을 써서 교회를 크게 만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너도나도 달려가서 그 방법을 배우고 도입해서 써먹기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어이없는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에 소위 성공했다고 알려진 어떤 유명한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이 목회자가 어느 날 자기와 같이 크게 성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간증하기를, 자신이 큰 교회를 짓기 위해서 마음에 둔 어떤 땅이 있었는데, 마침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을 칠일 동안 돌았던 것이 기억이 나서, 자기도 매일 아침마다 그 땅을 찾아가 ‘하나님, 이 땅을 제게 주십시요!’하면서 그 경계를 돌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 땅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목회자가 이런 간증을 했는데, 이 간증을 들은 당신의 참석자들이 저마다 나서서 이 목회자처럼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네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방법을 가르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마치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인 듯이 가르쳐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들도 많다고 하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자기네가 정통이요, 가장 성경적인 목회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자부했습니다. 참으로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러자 이렇게 순전히 자기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정도를 강의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강론을 정리하자면,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로서의 형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물론 이 형식은 실제적인 내용이 있는데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용은 없는데, 껍데기로만 형식을 갖추고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개혁파 교회가 설정한 교회의 형식은 첫째, 말씀의 순수한 전파, 둘째, 성례의 신실한 집행, 셋째, 권징의 능력적 집행 등입니다. 이 세 가지 형식을 갖추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교회라고 평가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런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교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혹 형식을 갖춘 듯이 보여도 그야말로 껍데기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이런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형편에 있는 교회가 무언가 열심을 내고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면,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기독교적인 종교 단체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교회 타락의 주범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교회가 처음에 설립될 당시부터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그렇게 세워져야 합니다. 즉 교회를 설립하는 사람은 정통성이 있어야 하고, 부흥되려는 욕구에 미혹되지 않는 가운데, 항상 교회를 교회다웁게 하는 일에만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질적인 성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성숙이 수반되지 않는 부흥이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별히 은사를 더하심으로,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나갈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안산회복교회/전상범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 6일 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신보혜 씨와 은혜로교회 교인들

대전의 내로라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부인이 자신의 남편은 담임목사의 자격이 없다며 해당교회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황당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어린 자녀 두 명과 은혜로교회에서 공동생활 중

대전중앙교회 담임 목사의 부인 신보혜 씨는 6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최근 이단 논란 관련 폭력 행사 등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은혜로교회(신옥주 목사) 주최 기자회견에 참석 자신의 남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신보혜 씨는 “남편 이OO 목사가 대전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할 때부터 반대했고 사역하고 있는 지금도 진실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대한다”며 “목회자로서 기술적인 면은 훈련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바로 알고 진리를 진리대로 분명하게 전하는 면에서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신씨는 또 “훌륭한 목회자로 가장하고 외식하는 모습에 대전중앙교회 당회와 교인들이 속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며 “남편의 아내로서, 남편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염려하기에 담임목사직을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전중앙교회를 찾아가 모든 교인들에게 실상을 알리고 남편이 가정과 자신부터 돌아보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이러한 진심을 외면한 채 저를 도와 함께한 은혜로교회 성도들을 폭행하고 계단에서 밀어 중상을 입히는 행위를 부목사들과 교회 교인들, 경비 용역들이 저지르는 것을 보고 참으로 참담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신 씨는 지난해 여름께부터 이 목사와 따로 떨어져 과천에 있는 은혜로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자녀 두 명도 은혜로교회에서 공동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목사가 장인·장모와 함께 자녀들을 데리러 갔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은혜로교회 측 “우리가 오히려 폭력 피해자다”

이날 기자회견은 신 씨로 인해 최근 대전중앙교회에서 발생된 폭력사태와 관련, 가해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은혜로교회 측에서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며 사건 전말을 밝히기 위해 마련했다.

대전중앙교회에서는 지난달 1일, 15일, 22일, 25일 등 수 차례에 걸쳐서 대전중앙교회 교인들과 은혜로교회 측 성도들과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신 씨가 지난달 1일과 15일 은혜로교회 측 성도 8명과 함께 대전중앙교회를 찾아가 이 목사로부터 폭행을 당해 가정이 파괴됐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성도들이 폭행을 당해 사건이 커졌다는 것이 은혜로교회 측 입장이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남편 이OO 목사와 대전중앙교회 교인들을 위해 찾아간 사모 신보혜와, 도움요청을 받고 함께 한 은혜로교회 성도 8명을 대전중앙교회 교역자들이 계단과 교회에서 집어던지고 밀어 4명이 부상당한 것이 발단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15일 일방적인 폭행사태가 발생한 후 16일, 17일, 18일, 22일 등 수차례 대전중앙교회를 방문해 면담 요청했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했나 교회측은 면담에 대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25일 221명의 은혜로교회 성도들은 대전중앙교회 앞에서 준법 항의집회를 했으나 대전중부경찰서 서장의 지휘 아래 마치 폭도를 진압하듯이 하는 경찰관들의 행태를 보고 경악했다”고 덧붙였다.

은혜로교회 40여명 경찰서에 연행돼 수사 받는 중

알려진 바에 의하면 25일에는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은혜로교회 측 성도들이 교회 본관 로비 유리문을 깨고 교회당에 난입해 폭력을 행사해 수요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성가대원 80여 명이 3시간가량 감금됐고, 38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경찰은 은혜로교회 측 성도 40여 명을 연행해 조사 중이며, 대전중앙교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 신옥주 목사측의 행위에 대해 법률 대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중앙교회도 홈페이지에 “현재 폭력과 무단침입 등의 불법을 행사한 은혜로교회 신도 42여명이 경찰서에 연행돼 수사를 받거나 진행 중에 있다”며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공지 중이다.

이OO 목사는 교단지 <기독신문>과 인터뷰에서 “(아내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이번 사태 전에 아내를 찾아가 데려오려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은혜로교회측이 폭력적으로 나와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에 관여된 은혜로교회(신옥주 목사 측) 교인들은 최근 교계 곳곳에서 잇따라 과격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이 같은 행보는 이단 규정에 대한 항의 차원인 것으로 보인다.

예장합신은 지난해 9월 총회에서 신 목사를 자의적 성경 해석 등을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은혜로교회 측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왜곡·조작됐으며 이단 규정 과정에서 소명 기회도 제공받지 못했다고 억울하다고 주장해왔다.

   
▲ 대전중앙교회에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알림 배너

신학기 대학가 “이단 주의보!”… 캠퍼스별 이단 현황대부분 이단들, 새내기 대상으로 거의 모든 캠퍼스에서 활동 중

이병왕 기자  |  wanglee@newsnnet.com

 

3월이면 새내기들이 캠퍼스의 생명력을 돋운다, 하지만 기독 대학생 특히 새내기들은 사정이 다르다. 자신들을 향해 작정하고 달려들고 있는 이단과 끈질긴 공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단’은 대학교에서 활동할 수 있다. 큰 단체의 경우 정식 동아리를 만들기도 하고, 위장 동아리를 만들어서 은밀히 포교하기도 한다. 특히 대학가 입학 시즌에는 신입생들을 포교하기 위해 수많은 전략을 세우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모르고 큰 집회에 참석했다가 이단에 빠질 수 있다. 캠퍼스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언제든지 이단에 포교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이단 전문지 <현대종교> 4월호에 공개된 국내 150여 캠퍼스별 이단 현황을 소개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