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에너지와 발전소 이야기

‘에너지’라는 말은 참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활력 있는 사람에게 에너지가 넘친다고도 하고,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리학에서는 에너지를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또 ‘일’이란 어떤 물체를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적으로 에너지는 열에너지, 전기에너지, 위치에너지 등으로 구분하고, 산업적으로는 수력에너지, 화력에너지, 원자력에너지, 태양력, 풍력, 조력 에너지 등으로 구분한다.
또 자동차 같은 기계장치를 구동하는 원동기(엔진)나 가정용 난방시설을 운용하는데 사용되는 기름, 석탄 같은 연료도 화석에너지로 부른다.

대한민국은 오늘날 8,000만 킬로와트가 넘는 발전설비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야말로 경이적인 발전설비 세계 최단기간 성장기록을 세운 나라이다.

1945년 해방당시,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시 한국의 발전설비는 그야말로 보잘 것이 없었다.
60만 킬로와트 짜리 수풍수력, 모두 80만 킬로와트에 달하는 장진강, 부전강, 허천강 발전소 등 거의 대부분의 전력설비는 북한에 있었고, 남한에는 왜정시대에 건설된 2만5천 킬로와트 짜리 터빈발전기 네 대에 보일러 여덟 대를 연결해 놓은 총 10만 킬로와트 짜리 영월 구화력, 서울 당인리화력 2만 5천 킬로와트 발전소 두 개, 춘천, 의암, 청평의 조그만 수력발전소, 부산항 부두에 매어놓은 레지스탕스호 발전함 3만 킬로와트가 거의 전부였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발전소 확보와 사수를 명하였고 화천수력을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전투로 3만 명 이상의 젊은 국군장병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지금 보면 겨우 12만 킬로와트 짜리 작은 수력발전소이지만 당시로서는 휴전 후 남한의 전력사정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산업시설이었던 것이다.

대장쟁이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수풍수력 하나만 있었으면 남한의 전기는 풍족할 텐데.....” 하시던 이야기는 아직도 뇌리에 또렷하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래야 백열등을 켜는 수준이었던 당시, 그러나 일반선은 날이 어두워지면 들어왔다가 통금시간이 되면 꺼지고 특선이래야 온종일 쓸 수 있었는데 그나마 껌뻑거리고 정전되기 일쑤였던 당시 전기사정을 나이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시리라.

그런 전기조차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비쌌던지 조그만 백열등 하나를 방 두 개 사이에 난 구멍에다 매달아놓고 함께 쓰고, 화장실 가는 길에는 푸른 색 5촉짜리 컴컴한 등 한 개 달아놓고, 그나마 아까워서 달달 떨면서 쓰던 전기......,
두꺼비집을 몰래 열고 전선껍질을 깐 다음 계량기를 거치지 않도록 전선을 연결해서 전기를 훔쳐 쓰고, 전선주에 몰래 연결해서 도적질해 쓰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전깃줄에 연결해서 몰래 쓰는 전기도적질이 또 얼마나 성행하였었던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 혁명정부가 추진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조선전업, 경선전기, 남선전업 등 민간삼사를 강제로 통합하여 국영화하고 강력한 전력자원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군사혁명 후 불과 한 달 반 뒤인 7월 1일에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발족된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군사혁명정부는 “새벽종이 울렸네.”, “잘 살아보세.” 새마을운동과 함께 전원개발특례법, 토지수용법 등 법제도를 마련하고, 차관을 빌려와 당인리 2, 3호기, 마산화력, 삼척화력 등을 건설하고 기술요원을 미국으로 보내어 교육시키고 팔당댐, 남강댐을 막는 등 전력설비를 늘이는데 안간힘을 썼다.

대장쟁이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던 1969년 2월에 한국전력에 입사하였다.
입사당시 한국의 전력설비는 모두 163만 7천 킬로와트에 불과하였다.
아직도 영세성이 꾀죄죄 흐르는 한국전력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은 원자력 발전소 하나가 100만 킬로와트를 넘고 총발전설비는 8,000만 킬로와트에 이른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1968년을 끝으로 당시까지 다니던 전차가 철거되고 있었고 서울화력 5호기 25만 킬로와트짜리 터빈이 한강인도교를 건널 수 있느냐, 없느냐로 신문이 떠들기도 했었다.

대장쟁이는 가끔씩 쓸데없는 쪽에 기억력이 좋을 때가 많다.
한국전력 설비규모 163만 7천 킬로와트, 자본금 460억원, 총자산 1,519억원, 1968년 순이익 74억원, 종업원수 12,000 명....... 40년이 넘게 지난 아직도 외우고 있는 숫자들이다.
경부선 길이, 지구둘레, 지구-달 거리, 지구-태양간 거리, 에베레스트 산 높이....,, 이런 돈 안 되는 것들도...., 억지로 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당시 한국전력의 자본금, 자산규모, 순익규모를 보라, 물론 당시 화폐가치가 높긴 했지만 국가의 전력회사가 얼마나 영세하였던지......

그리고 30년 세월이 지난 후, 대장쟁이가 한국전력을 떠나던 1998년, 한국전력의 발전설비는 5,500만 킬로와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본금은 3조 2천억, 자산규모는 62조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값싼 산업전력 공급으로 기업들은 수출에 열을 올렸고 국민들은 에어컨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세월동안 대장쟁이는 발전소 운전원으로,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건설 엔지니어로 뼈 빠지게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쁜 한국전력 같으니라고. 대장쟁이를 포함한 2,369명을 명예퇴직금까지 빼앗고 밀어내다니....... 일부 퇴직자들이 퇴직금반환청구소송을 했더니 퇴직금을 "근로기간중 채권, 채무의 정산'이라는 해괴한 해석을 붙여 원고패소판결을 한 법원,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다시 돌아가서, 1970년 여름, 경부고속도로 428킬로미터가 준공되었다. 총공사비 450억원.
그리고 이듬해 또 하나의 거대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수풍수력에 버금가는 55만 킬로와트 짜리 고리 1호기 원자력발전소 총공사비 550억원으로 건설추진”.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1호기 기공식 축하연 케이크를 자를 때 그랬단다.
케이크를 원자력발전소 모양으로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나이프로 자르라 하니 박 대통령이 좀 머뭇거렸던 모양이다.
그 때 옆에서 장기영 총리, “각하, 자르십시오, 한 쪽은 고리 1호기, 다른 쪽은 앞으로 건설될 후속기입니다.”라고 말했단다.
그제야 박 대통령은 “아, 그래요?” 하고 케이크를 힘차게 잘랐단다.

고리 1호기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78년 4월에 준공되었다.
실제 전기출력은 58만 7천 킬로와트, 실제 투입된 총공사비는 1,280억원.
이 고리 1호기는 준공되던 해에만 한국전력이 그 해에 올린 순이익 600억원 중 300억원을 혼자 달성하는 효자 발전소가 되었다.
(아, 지금 늘어놓는 이런 모든 숫자와 날짜들도 대장쟁이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혹시 착오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1978년에 준공된 고리 1호기는 거저주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리 1호기는 발전원가가 다른 화력발전소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공짜와 다름없는 전기, 그야말로 돌리기만 하면 이익이 펑펑 쏟아지는 전기를 생산해내는 발전소가 되었던 것이다.

불과 1,280억 원의 공사비(나중에 건설된 원자력발전소들은 공사비가 1조원을 넘어간다.)로 웨스팅하우스가 건설해준 고리 1호기는 킬로와트아워당 2원 정도에 불과한 전력원가로 전력을 생산해 냄으로써 한국전력은 많은 이익을 올려 견실한 재무구조를 확보하고 이후 계속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들을 건설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값싼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산업전력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전력요금은 일본의 40%, 미국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세계최강의 수출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박대통령의 선견지명에 의하여 도입된 고리 1호기와 그리고 우수한 기술과 인력을 값싸게 제공한 대장쟁이 같은 산업전사들 덕분이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설계수명이 다 한 고리 1호기를 일부 설비를 교체하여 계속 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 하고, 비상디젤발전기의 위치가 쓰나미를 전혀 대비하지 못 하고 있다는 지적과 비판이 있지만, 고리1호기가 대한민국 전력산업과 경제개발의 일등공신임에는 틀림없다.  

미국은 전력설비 면에서 상황이 그리 좋지 못 하다.
미국 전역에 100기가 넘는 원자력발전소가 있지만 대부분 60~70년대에 건설된 노후화된 발전소들이다.
1979년 발생한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 이후 미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원자력발전소 설계요건을 크게 강화하자 건설비가 급등하고 건설중이던 발전소까지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더욱이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원전사고는 미국의 원자력산업을 싸늘한 빙하기로 밀어 넣고 말았다.
이후 30년이 넘도록 미국에서 원자력발전소는 단 하나도 더 건설되지 못 하였다.

물론 미국에는 원자력발전소 말고도 수많은 화력과 수력발전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제 원자력발전소들이 거의 노후화되었고 그러나 이를 대체할 발전설비의 투자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또한 아울러 송배전설비 등 전력설비도 너무 오래 되어 낡았다는 점이 미국의 전력설비의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너무 길면 여기쯤에서 쉬었다가 읽으세요, 지송~^_^)


서설이 길었다.
어쨌든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장 일반적인 전력원은 수력과 화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력(水力)발전은 댐을 막아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수차(水車)를 돌리고 수차에 연결된 발전기에서 전기가 나오게 하는 가장 간단한 구조를 갖는다.
고낙차에서는 펠턴수차, 중낙차에서는 프란시스, 카플란 수차, 저낙차에서는 프로펠러 수차가 사용된다. 한국의 수력발전소들은 대부분 프란시스 수차나 카플란 수차이다.

수력발전소는 댐을 건설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일단 발전소를 건설하고 나면 연료가 들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러나 강수량이 많지 않을 경우 이용률이 떨어지므로 그리 경제적이지는 못 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낙차가 크지 않고 유량이 많지 않아 남한지역의 모든 하천을 다 막아서 수력발전을 한다 해도 (이를 포장수력이라고 부른다) 발전량이 250만 킬로와트, 원자력 발전소 두어 기의 용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은 발전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홍수조절과 농업, 공업용수공급에 보다 큰 목적을 두어 ‘다목적댐’으로 건설한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는 조력발전도 한국의 서해의 곳곳을 다 막아서 조력발전소를 만든다 해도 200만 킬로와트 정도를 얻을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의 수력, 조력은 전력공급 면에서는 미미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태양력은 캘리포니아나 애리조나 사막 같은 곳이 좋다. 그러나 이 역시 경제적이지는 못 하다.
집광판(集光板)을 수백만 평, 수천만 평 넓은 면적의 땅에 설치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야간, 비오거나 흐린 날에는 발전이 불가능해지는 것도 문제이다.
따라서 태양광발전은 개별적으로 가정이나 시설에 갖추는 것은 몰라도 상업적 발전용으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풍력발전도 상황은 비슷하다.

따라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소는 여전히 연기를 뿜어내는 화력발전소들이다.
한국의 경우 화력발전소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60%가 넘고 이 중 거의 대부분은 석탄(호주, 인도네시아 등에서 들여오는 수입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50만 킬로와트급 발전소들이다.
과거 60~70년대에는 불과 2만 5천 킬로와트급 조그만 석탄발전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대용량화하여 오늘날은 수 십 기의 50만 킬로와트급 신형화력발전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소는 현재 20기 정도가 운전 중이고 몇 기가 건설중이다.
전체발전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30~35% 정도 된다.

화력발전소들 중에는 LNG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것들도 있다.
LNG는 연소가스가 깨끗하기 때문에 도시지역에 주로 건설되어 있는데 연료비가 워낙 비싸 전력생산단가가 높은 결점이 있다.
경유를 사용하여 가스터빈을 돌리는 가스터빈발전소도 있고 가스터빈에서 나오는 뜨거운 배기가스를 회수하여 보일러에 집어넣어 활용하는 가스터빈-화력 복합발전소도 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디젤엔진을 사용하는 내연기관발전소도 있었다.
이러한 발전소들도 전력사정이 어려울 때는 유용했지만 전력생산단가가 비싸서 점차 퇴출되었다.

대표적인 발전소인 석탄화력 발전소들의 구조와 원리는 이렇다.
석탄을 컨베이어로 옮겨 석탄미분기에 집어넣어 밀가루보다 더 곱게 빻는다.
그 미분탄을 뜨거운 공기와 함께 보일러에 불어넣어 연소시킨다.
보일러 안에는 수많은 튜브들이 있고 그 속에는 물이 흐른다.
그 물은 보일러급수펌프로 엄청난 고압(약 200기압 이상)으로 보일러에 공급된 것이다.
급수가 보일러에 들어오기 전에 급수가열기들을 거치면서 상당히 뜨거워진 상태가 된다.

보일러 안에서 튜브를 흐르며 가열된 물은 증기드럼에 들어가서 증발된다.
증발된 증기는 다시 과열기라고 부르는 튜브를 통과하면서 섭씨 약 550도, 150 기압으로 과열된 고온고압증기가 되어 터빈을 돌리게 된다.
터빈은 1초에 60회전 (3,600 rpm)으로 회전하면서 같은 축으로 연결된 발전기를 돌려 전기가 생산되게 된다.

그런데 터빈을 돌리고 난 증기는 어떻게 되는가?
터빈을 돌리고 난 증기를 대기로 내보낸다면 아직도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증기를 공중으로 내다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증기로 날아가는 양만큼 물을 계속 보충해주어야 하는 문제도 생긴다.

그렇다면 진공을 만들고 증기를 진공까지 계속 흐르도록 한다면 증기로 하여금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터빈 출구에 복수기를 설치한다.
복수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바닷물 튜브들이 지나면서 냉각시키고 증기는 복수기의 진공에 끌려들어가면서 그 흐르는 힘으로 계속 터빈을 돌린다.
그리고 물로 응축되어 회수된 다음 다시 보일러로 돌아간다.
이것을 열역학적으로 카르노 사이클, 재생재열 사이클 같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이것이 간략하게 말한 화력발전소의 구조이다.

대장쟁이는 그 발전소에서 뜨거운 과열증기가 흐르는 배관들과 계기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황산가스를 들이키며 뜨거운 버너를 교체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며 젊은 날을 보냈다.
다른 발전소이지만 끔찍한 사고도 있었다.
과열증기배관이 터져서 그 뜨거운 증기에 몇 사람이 그만.......!
또 발전기에 들어가는 수소, 그 수소병이 폭발하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난 사고.......,
그런 위험한 곳에서 나를 지켜주신 것은, 이제 와서 돌아보니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또 잠시 휴식)



어쨌든 화력발전소는 그렇고, 원자력발전소는 무엇인가?
원자력발전소는 터빈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화력발전소나 같다.
다만 석탄이나 가스, 벙커씨유(Bunker-C Oil)를 태우는 보일러 대신 우라늄의 핵분열을 이용하는 원자로설비를 가진 발전소이다.
그런데 원자로설비가 보일러보다는 더 복잡하고 위험하고 비싸다.

원자로에 사용하는 핵연료는 우라늄이다.
그런데 천연우라늄에는 우라늄 235는 불과 0.3%이고 나머지 99.7%는 쓸모없는 우라늄 238이 들어있다.
그래서 천연우라늄으로부터 우라늄 235를 뽑아내는 농축과정이 필요하다.
이 때 사용하는 방법은 우라늄을 가스화해서 원심분리기로 고속회전 시켜 비중차를 이용하여 우라늄 235의 비중을 높여가는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이렇게 해서 우라늄 235를 95% 이상 농축하면 우라늄 원폭이 된다.
우라늄 원폭은 플로토늄 원폭과 달리 고온을 발생시키는 다이너마이트 뇌관이 필요 없다.
다만 우라늄을 따로 떼어 놓았다가 한데 합치기만 하면 임계점을 넘는 우라늄이 저절로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북한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도입한 원심분리기 2,000 대를 서방의 원자력전문가에게 공개한 적이 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핵연료는 우라늄 235가 3~4% 정도로 농축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폭과 같이 폭발할 수가 없다.
핵폭탄용 우라늄이 순도 높은 알코올이라면 발전용 우라늄은 맥주 정도라고나 할까, 대신 연탄처럼 천천히 분열하면서 타게 된다.

한국에는 우라늄농축시설이 없다.
그래서 핵연료는 수입해 온다.
다만 한국전력이나 한국업체들이 우라늄원광을 확보하여 미국이나 캐나다의 농축공장에 공급하고 가공케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발전용으로 농축된 우라늄을 한국으로 운반해 와서 한국핵연료주식회사에서 핵연료다발을 제작하기도 한다.

일단 핵분열을 시작하고 나면 위험하지만 처음 우라늄은 손으로 만져도 위험하지 않다.
그래서 수작업으로 우라늄을 작게 뭉쳐서 옐로케이크(Yellow Cake)로 만들어 볼펜 지름 정도의 작은, 길이가 2.5 미터 정도 되는 지르코늄 대롱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 대롱들을 100여개를 묶어 하나의 핵연료다발을 만든다.
핵연료다발은 그 대롱 사이로 물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대롱들은 서로 떨어져 있다.

원자로는 그 두께가 15~20 cm에 이르는, 지름 3미터, 높이 6미터 정도의 강철용기이다.
그 안에는 핵연료봉 다발 120개 정도, 노형에 따라서 그 이상이 들어간다.

여기, 원자로에 물이 들어간다.
그런데 원자로에 들어가는 물은 완전히 밀봉된 채 원자로냉각재펌프에 의하여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사이를 순환한다.
그리고 가압기에 의하여 그 압력이 유지된다.
만일 이 물이 증발되어 터빈을 돌린다면 터빈계통은 순식간에 방사능으로 오염되어버릴 것이다. 원자로계통의 물과 터빈계통의 물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원자로계통 안의 물은 증발되지 않는다.
산 위에 올라가서 밥을 지으면 물이 100도가 안 되어도 끓어버린다.
반대로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으면 물이 100도를 훨씬 넘어 끓게 되어 더 높은 온도로 밥을 지을 수 있게 된다.
물을 꽉 눌러서 물의 압력을 계속 올리면 물이 끓는 온도는 계속 올라간다.
물을 252.2 kg/cm까지 압력을 높이면 섭씨 372도가 되어야 증발하게 된다.
이것을 물의 임계점이라고 부른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원자로계통의 물을 증발시키지 않고 섭씨 330도 정도까지 올려서 증기발생기로 보내서 튜브 안을 통과시키면서 튜브 바깥쪽으로 흐르는 터빈계통의 물을 가열하여 증발시키고 터빈계통의 증기로 터빈을 돌림으로써 방사능오염 없이 터빈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드리면 좋겠는데......)

이렇게 해서 화력발전소처럼 섭씨 550도, 150기압의 고온고압증기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서는 270~280도, 100 기압 정도 되는 증기라 하여도 엄청난 양의 물과 증기를 순환시키고 엄청나게 큰 증기터빈을 돌려서 화력발전소보다 더 많은 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의 매력은 작은 핵연료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화력발전소가 내뿜은 엄청난 연기나 분진이나 석탄재도 없다.
거대한 석탄수송선박이나 하역설비도 필요 없다.
단지 1년에 한 번씩 핵연료의 3분의 1만 교체해주면 된다.
방사능문제만 없다면 그야말로 클린에너지(Clean Energy)요 꿈의 에너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원자력발전소는 방사능 누출의 위험 때문에 까다로운 설계, 수많은 안전설비와 부대시설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처리가 큰 부담이 된다.

원자력발전소 설계와 건설은 철저한 확인과 검증이다.
설계부터 지진에 견디도록, 안전성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모든 설계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다.
튼튼하게 설계되는 것은 물론이고 시험과 테스트를 거쳐 안전성을 입증하도록 한다.
사용되는 재료도 그 성분, 제조과정(Mill Sheet)과 시험증명(CMTR, Certified Material Test Report)을 요구한다.
가정되는 모든 사고를 가상하여 어떤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비상설비가 필요하고 어떤 기기들이 작동되어야 하는가, 모든 설비들은 고장을 대비하여 예비설비를 갖추고.......

모든 작업들, 이를테면 용접을 할 때도 용접봉 확인, 용접사자격확인, 작업순서와 요건, 온도와 습도조건 확인, 용접 한 번 하고 검사 한 번 하고, 용접 한 번 하고 검사 한 번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 검사기록을 일일이 서류로 남기는 식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모든 설계와 작업 상황을 데이터화하고 문서화해서 보관한다.
수많은 그 서류와 기록들 가운데, 대장쟁이의 노력과 고심과 땀이 배어있는, 그리고 서명과 필적이 들어있는 설계검토서, 설계변경서, 작업지시서, 부적격보고서들도 지금 영광원자력발전소 등 원자력발전소 품질서류보관소(QA Vault)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미국형 원자로에서 최악의 사고가 날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느니 천만분의 1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1979년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와 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에 강화된 원자력규제요건은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워서 그대로 설계, 건설, 운전되는 경우, 경미한 사고들이야 그렇지만 중대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그야말로 제로(0)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사실 일본의 경우는 미국과는 좀 다르다.
그들은 설계와 품질관리시스템을 미국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체기술과 시스템으로 독립적인 건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쿠시마원전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설계치를 넘어가버린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에 침몰되어버린 셈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일본 동해안과 같은 지진대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 것은 애당초 좀 무모한 것이었다 싶다.

어쨌든 원자력발전소 설계와 건설의 안전요건이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USNRC)에 의하여 엄청나게 강화되는 바람에 원자력발전소 건설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원자력발전원가는 화력발전원가에 비하여 유리할 것도 없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미국의 원자력산업계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원자력발전소를 꾸준히 건설해왔다.
발전소 안에 쌓여만 가는 핵폐기물을 영구저장 할 장소를 얻지 못 해 안면도, 굴업도, 영덕, 울진, 변산반도 등을 환경단체들에게 쫓겨 다니며 전전하다가 결국 별로 마땅치도 않은 경주 방폐장 부지를 수 천억원 지역개발지원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곤욕을 치렀지만, 석탄과 석유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국가적 에너지상황 때문에 원자력은 한국으로서는 대안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아랍에미레이트 원자력수주라는 대어를 건지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에너지원은 없을까?
바다 밑에 무한정하게 많다는 얼음메탄, 하이드레이트 이야기도 들리고, 우주공간이나 달에 집광판을 설치하고 전력을 만들어 마이크로웨이브로 지구로 보낸다는 아이디어도 나오는데.......


오늘은 좀 다른 방향의 글이 되어 버렸다.
원자력에너지......
물질의 소실이 에너지로 변환되는.......
아인슈타인이 풀어낸 E = mc²의 비밀을 살펴보기 전에
원자력발전 이야기 좀 장황하게 했다.



어휴, 너무 길게 써버렸네유.
(인내시험?)
독자님들, 지송함당~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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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1. 싸운 후에는 항상 그가 먼저 전화를 한다.
진짜 화가 났더라도 싸운 후에는 그녀를 달래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먼저 전화를 하게 되는 것,
사랑의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2. 약속 시간에 늦어도 전혀 화를 내지 않는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음에도, 기다리는 동안 분명히 열받았는데도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 내려는 마음이 샥~ 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폭력!

3. 평소에는 말이 없는 사람이라던데, 3시간 이상 전화로 수다를 떤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길래 금방 만나고 와서도 또 전화질 (?)일까?
그러나 해도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는 것! 해본 사람만 안다.

4. 그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당신을 소개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친구나 가족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당신을 자신의 세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뜻.

5. 당신에게 반지나 목걸이 등을 사주려고 한다.
자꾸 돌봐주고 싶고 무언가를 사주고 싶은 욕구. 소유욕의 또 다른 표현이다.

6. 대화를 할 때 당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리 시선을 돌리고 싶어도 어느새 사랑하는 이의 얼굴로 돌아가 있는 시선.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반응이다.

7.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고민을 말하며 당신 앞에서 운다.
남자는 아무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만약 그가 당신 앞에서 괴로움을 얘기하고 눈물을 흘린다면 당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

8. 당신의 얼굴을 만지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은 스킨십은 그야말로 본능이다.

특히 당신의 감은 눈, 입술을 만지는 그의 손길은 당신을 가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9. 과거의 여자 친구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 이유는 복잡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받고 당신을 믿기 때문이다.

10. 끊임없이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당신의 발가락 모양, 귀의 생김새… 아주 사소한 것까지 그는 알고 싶어한다.

11. “우리가 결혼을 하면…” 이란 말로 시작하는 말이 많아진다.
남녀 모두 사랑을 하면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여자랑 결혼하면 어떤 빛깔로 살까? 자꾸 생각을 하니, 입 밖으로 나올 수밖에.

12. 당신의 여동생이나 남동생과 만나고 싶어한다.
그들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13. ‘야근 때문에 꼼짝 못해’라고 해놓고, 당신이 가만히 있으면 ‘잠깐은 볼 수 있어’라고 말한다.

누구보다 당신을 보고 싶은 것은 그 아무리 일이 밀렸어도 자신이 좀더 고생할 각오로

당신을 위해 시간을 뺄 수 있는 결단(?) 도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14. 박찬호의 야구 경기와 데이트중 당신을 선택한다.
TV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세기의 대결을 중계한다고 해도 당신의 부름에 나올수 있다.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15. 당신의 부모님이 보고 싶어 한다고 하면 너무나 기뻐 한다.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그가 바라고 바라 던 일이다.


<여자>

1. 자꾸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여자들끼리 있으면 멀쩡한데 그 앞에만 가면 목소리가 이상해지고,
자꾸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의 ‘오 마이 베이비’가 되고 싶기 때문.

2. 하루 종일 그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다.
눈 밖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꾸 보고 싶은 그. 당신을 상대 하지 않아도 그냥 옆에서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3. 자꾸 그의 생각이 나서 일하기가 힘들어진다.
자꾸 그의 얼굴이 떠올라서 정신 집중이 안된다. 어느 때는 짜증이 날 정도이다. 문득 그도 나 같은 상태일까? 궁금해진다.

4. 바보 같은 줄 알면서도 그에게서 전화가 안오면 전화기를 떠날 수 없다.
그가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 안 한다. 그러면 전화기에서 눈을 떼 지 못하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보같이!

5. 그가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눈물부터 쏟아진다.
예전에는 이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그가 한마디만 해도 눈물이 뚝!

6. 그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다.
집안일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식사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손수 요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는다.

7. 그와 똑같은 반지를 나눠 끼고 싶다.
그와 함께 커플링을 끼고 다니며 서로에게 도장을 ‘꽉!’ 찍어 버리고 싶다.

8. 만나면 헤어지기가 싫다.
이러면 안되는데,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콧대도 세워야 하는데 정말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다.

9. 가끔 그의 몸의 일부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품에 안겨도 성이 안찰 때가 있다. 이렇게 안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난다.

10. 옷을 입을 때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부터 걱정된다.
예전에는 내 스타일대로 옷을 입었는데, 이젠 옷을 고를 때도 화장을 할 때도
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부터 생각하게 된다.

11. 그에게 자꾸 무언가를 사주고 싶다.
필요 없다고 해도 그에게 옷도 사 입히고 싶고 뭐든지 해주고 싶다. 아내로서의 연습이랄까?

12.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그와 함께 가고 싶다.
친구를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항상 그를 데리고 가고 싶다.

그와 함께가 아니라면 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친구들은 배신감에 치를 떤다.

13. 그와 단둘만 여행을 가고 싶다.
반드시 밤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품에 안겨서 눈뜨는 아침이 자꾸 상상된다.

14. 그의 동생들에게 잘해 주게 된다.
그의 동생, 그의 어머니 그의 가족과 친해지고 싶거나 최소한 잘보이기 위해 신경을 쓰게 된다.

15. 그의 과거가 궁금하다.
그가 말을 안 한다면 더욱 궁금해진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그전에 만났던 여자는 얼마나 사랑했을까?

그래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여자랑 나랑 누가 더 예 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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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예정론은 무엇인가? 예정론은 성경적인가?

대답: 로마서 8:29-30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한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에베소서 1:5과 11은 말하길,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해 많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성경에 부합하는 교리입니다. 핵심은 예정론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예정되었다는 말은 성경에서 그리스어로 “prorizo”라 하는데 “그 전에 결심하다”, “임명 받다”,”미리 결정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어떤 것이 일어나도록 미리 해 놓은 하나님의 결정을 뜻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무엇을 먼저 결정하셨습니까? 로마서 8:29-30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미리 운명적으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들을 미리 운명지어 놓으신 것입니다. 수 많은 성경구절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로서 선택받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2, 31; 마가복음 13:20, 27; 로마서 8:33; 9:11; 11:5-7, 28; 에베소서 1:11;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1:4; 디모데전서 5:21; 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1:1; 베드로전서 1:1-2; 2:9; 베드로후서 1:10). 예정론은 성경적으로서 하나님 그의 주권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사람만 선택하셨는가? 중요한 것은 아무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로마서 3:23), 모든 자들이 영원한 처벌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로마서 6:23).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지옥에 영원히 머물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몇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선택 받지 않은 자들에게 불의하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받을 정당한 결과 가운데 있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몇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 불공평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을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20명의 사람 중에서 5명에게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가정해보세요. 돈을 받지 못한 15명은 화가 날까요? 아마 그렇겠죠? 그러나 그들이 화를 낼 자격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몇 사람에게 좀 후덕하게 행동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을 선택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을 우리의 결정권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에서 말하길 우리는 선택의 자유 의지를 가졌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러며 구원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10).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는 아무도 거부하시지 않으시고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 앞에서 돌아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신명기 4:29). 하나님의 미스터리 가운데 예정론은 하나님에 의해 인도 받은 사람 (요한복음 6:44)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 (로마서 1:16) 이 두 가지 사실 모두와 어느 정도씩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고, 또한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동일하게 진리입니다. 로마서 11:33을 보세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영어원문: http://www.gotquestions.org/predestination.html

출처: 아멘넷 게시판/ JuNick님


질문: 영원히 보장되는 구원은 죄를 정당화 시키는가?

대답: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랄는 교리가 빈번히 부정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살고 싶은 데로 살아도 여전히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추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령 이것이 실생활에서 가능하다 할지라도 영원한 구원의 본질은 아닙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 짓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의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차이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구원은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8-9; 요한복음 14:6).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순간 그는 구원 받고, 그 구원을 보장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갈라디아서 3:3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믿음으로서 구원 받았다면, 그 구원은 믿음으로 유지되고 보장되어집니다. 구원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유지하는 것도 내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유다 24절). 우리의 구원을 붙들고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0:28-29).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마서 8:38-39).

한 번 받은 구원의 영원성을 부인하는 것은 내 선한 행위로 나의 구원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직 은혜로서 가능한 구원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적으로 구원을 받았지 나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4:3-8). 고로 구원이 계속 유효하도록 유지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내 죄 값을 갚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모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 그러니까 구원 전과 구원 후의 모든 죄를 대신하기에 절대적으로 족합니다 (로마서 5:8;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그럼 이렇게 주장하면서 구원 받은 자는 살고 싶은 데로 맘대로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사실 이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위선적입니다. 성경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살고 싶은 데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육체의 행위를 맺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 요한일서 3:6-9은 분명히 합니다. 진실한 신자는 계속되는 죄 가운데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죄가 은혜를 더한다는 거짓 주장에 사도 바울은 주장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1-2).

영원히 보장되는 구원은 죄를 지을 수 있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보증된다는 것을 아는 보장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인 것을 알고 이해할 때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지불하신 값을 알고서도 어느 누가 계속해서 죄에 빠지겠습니까(로마서 6:15-23)?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영원히 보장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사람 중 누가 그 사랑을 도로 하나님의 얼굴에 던지겠습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진실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6).

http://www.gotquestions.org/license-sin.html

 

 

질문: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는?

대답: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둘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아십니다. 아마 다른 여느 교리들보다도, 이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너무 멀리 치우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누가 구원 받을지 아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로마서 8:29; 베드로전서 1:2). 에베소서 1:4은 말하길 하나님은 이 땅의 기초를 세우시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신자들을 “선택 받은” 자와 (로마서 8:33; 11:5; 에베소서 1:11;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1:4; 베드로전서 1:2; 2:9) “뽑힌”자들로 묘사합니다(마태복음 24:22, 31; 마가복음 13:20, 27; 로마서 11:7; 디모데전서 5:21; 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1:1; 베드로전서 1:1). 신자들은 미리 예정되었고 (로마서 8:29-30; 에베소서 1:5,11) 구원을 위해 선택되었다고 분명히 합니다(로마서 9:11; 11:28; 베드로후서 1:10).

성경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 할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10).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아시며,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며, 그리고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 세가지가 어떻게 함께 조화되는지는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11:33-36). 우리의 책임은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즉 예정론, 선택론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http://www.gotquestions.org/sovereign-free-will.html

 

출처: 아멘넷 게시판/ JuNick 님

 

죽을 때 후회하는 5가지
① 내 뜻대로 살걸
② 일 좀 덜 할걸
③ 화 좀 덜 낼걸
④ 친구들 챙길걸
⑤ 도전하며 살걸


만일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돈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구체적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임종의 순간을 미리 맞았던 타인들의 '깨달음'을 참고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영국 <가디언>은 1일 최근 영어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가지>를 소개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말기 환자들을 돌봤던 간호사 보니 웨어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모아 펴낸 책이다.

가장 큰 회한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지 말고, 스스로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삶이 끝나갈 때 쯤 돼서야 얼마나 많은 꿈을 이루지 못했던가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선택' 때문에 꿈의 절반조차 이루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일 좀 덜 할걸' 하는 후회는 '모든 남성'에게서 나타난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회사에서 쳇바퀴를 도느라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배우자와의 친밀감을 놓친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도 서둘러야 할 듯 싶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기 위해 감정을 억압했던 '부작용'을 지적했다.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이 된 원인 역시 여기에서 찾았다. 냉소와 분노가 '병'을 만들었다고도 여겼다.

사람들은 또 임종 직전에야 '오랜 친구'� 소중함을 깨닫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땐 친구들의 연락처도 수소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좀 더 행복하게 놔두지 않은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랜 행동양식과 습관 속에서 친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에 머물러 살았다. 그들은 편안한 삶에 "만족한다"고 정당화해왔지만, 결국은 크게 웃고 삶의 활력소를 찾고 싶었다는 걸 깨닫고 이 세상을 떠났다.

전정윤 hani.co.kr기자ggum@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잘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실은...잘 감동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는 의미를 찾을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풍부한 감동으로 가득찬 마음이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감동하는 마음이란 결코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누구나 셀 수 없이 많은 감동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죠. 자신이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면 감동은 그저 감동으로 끝날 뿐 풍부한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감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감동이더라도 감동하고 있는 자신을 칭찬해 주세요. 칭찬받은 감동이라면 그냥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마음에 머물러 작으나마 풍부한 열매를 맺습니다. 작은 감동의 열매가 맺힐 때마다 당신은 더욱 더 많은 것에 감동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입니다. 감동할 것 투성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지내십시오.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걸 아셨다면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 '참으로 마음이 행복해 지는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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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반 개로 대장암, 폐암 예방 효과 항암, 항산화인자 베타카로틴의 보고

    마오리족 사람들에게 대장암의 빈도가 극히 낮다는데서 착안해
    뉴질랜드 대학이 최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마오리족의 고구마 섭취량이 다른 종족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학은 계속된 연구를 통해
    붉은 색이나 보랏빛 껍질을 가진 과일이나 채소에 포함된 항산화물질의 양이
    그렇지 않은 군에 비해 4배 이상 높고, 생체 이용도도 더 높다는 것을 밝혀냈다.

    1986년 미국 뉴저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폐암에 걸린 군과 그렇지 않은 군을 비교한 결과, 폐암을 가장
    잘 예방하는 식품으로 뽑힌 것이 고구마, 호박, 당근이었다.

    이는 항암, 항산화 인자로 잘 알려져 있는 베타카로틴(비타민 A의 전구체)과
    글루타치온이 풍부하기 때문으로,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마, 호박, 당근을 합쳐 하루에 반 컵 정도만 먹으면,
    전혀 먹지 않는 사람보다 폐암에 걸릴 확률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하였다.

    고구마에는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는 비타민 B1, B2, C와
    젊어지는 비타민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타민 E(토코페롤)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특히 고구마에 들어 있는 비타민 C(100g당 25mg)는
    조리과정을 거쳐도 70-80%가 파괴되지 않고 남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몸에 좋은 성분들은 특히 고구마의 껍질에 많기 때문에
    가능한 껍질을 벗기지 말고 잘 씻어서 먹는 것이 좋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 아메리카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식량으로 재배되어 왔고
    그 후 중국,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영조 대왕 당시(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구마를 많이 먹으면 방귀가 지독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됐다.
    고구마에 포함된 다량의 섬유소가 인체에 유익한 장내세균들에 의해 분해되면서,
    가스 발생의 양은 증가하지만 고약한 냄새를 일으키는
    인돌, 황화수소 등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아마도 방귀의 양이 늘어 이렇게 착각하거나
    함께 먹은 음식들의 영향을 받아 냄새가 나는 것을
    고구마의 탓으로 오인하는 것 같다.

    고구마를 자를 때 나오는 우윳빛 액체인 얄라핀도
    섬유소와 더불어 변비 해소에 큰 도움이 되므로
    요구르트, 청국장 등과 함께 부작용이 없는
    변비 치료 보조제로 사용될 수 있다.

    고혈압 환자는 하루 소금 섭취량을 6g 이하로 권장하고 있으나,
    우리가 보통 먹는 음식에는 하루 12g이상의 소금이 포함되어 있는데,
    고구마 100g중에는 칼륨이 460㎎이나 함유되어 있어
    여분의 염분을 소변과 함께 배출시키므로 혈압을 내리는 작용을 한다.

    철분도 풍부하여
    요즘 편식하는 아이들이나 다이어트하는 여성들에게
    흔한 철 결핍성 빈혈 해소에 도움이 된다.

    중간 크기 고구마 한 개의 열량은 170 Kcal정도로(100g당 약 130Kcal)
    다른 음식에 비해 섬유질이 풍부하여 포만감이 쉽게 느껴지고
    변비해소와 피부 미용에도 도움이 되므로
    저녁 식사 대신 우유 한잔과 함께 먹으면
    다이어트하는 사람에게 아주 좋은 대용식이 될 수 있다.

    고구마를 고를 때에는 껍질이 얇고 선명한 색깔에
    표면에 상처가 없는 단단한 것이 좋으며
    수염뿌리가 많은 것은 질긴 경우가 많다.

    껍질 색깔이 진하고 속살이 누럴수록
    항산화 물질인 베타카로틴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고구마 한 개만 먹어도
    하루 권장 베타카로틴의 2배 가까이 섭취가 가능하니,
    환경오염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한 밥상에 진정한 웰빙 식품인 고구마가
    다시 한번 인기를 얻을 날을 기대하며,
    오늘 퇴근길에 가족들을 위해 따끈한 군고구마 한 봉지는 어떨까?

    (김진용 교수 = 고려의대 소화기내과, 대한암예방학회 학술 간사)

    출처: USA아멘넷/ 김성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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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님과 과부 이야기.....


          한 신부님이 젊은 과부 집에 자주 드나들자,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좋지 않는 소문을 퍼뜨리며
          신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과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신부가 암에 걸린 젊은 과부를
          기도로 위로하고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가장 혹독하게 비난했던
          두 여인이 어느 날 신부를 찾아와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그들에게 닭털을 한 봉지씩 나눠주며
          들판에 가서 그것을 바람에
          날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닭털을 날리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신부는 다시 그 닭털을
          주워 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닭털을
          무슨 수로 줍겠느냐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여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니
          용서 해주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합니다.
          험담을 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상하게 하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세사람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험담을 하는 자신이요,

          둘째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며

          셋째는 그 험담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퍼온 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골 3:17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오늘 하루도

              세끼를 꼬박 챙겨 먹었습니다.

              아침엔 간단한 빵 한 조각

              점심엔 밥 한 그릇

              저녁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구수한 누룽지도 끓여 먹었습니다.

               

               

               

              커피도 마시고

              쥬스도 마시고

              물도 마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며

              사람들도 만나고

              저녁엔 교회도 갔더랬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예배 후 찬양 연습도 하고

              그리고, 탁구를 치며 교제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그 모든 것들을 무엇을 위하여

              먹고 마시며

              사람도 만나고

              게임도 즐겼는지요.

               

               

               

              그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것이

              얼마나 있었던가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것도

              모두 다 저를 위하여 한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남의 유익과

              기쁨을 구하는 것보다

              나의 유익을 구하여 왔습니다.

               

               

               

              마음으로조차도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고...

              ‘영광’이요?

              참으로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그냥 부지런히 저를 위하여

              살아온 일상의 하루였습니다.

               

               

               

              유대인(가족 또는 지인 등)에게나

              헬라인(이방인, 이웃)에게

              디딤돌이 되어 주지 못하고

              거치는 돌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보다는

              마음 아프도록 실족케 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

              지금 이 침상에 엎드려 호소합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지나온 이 하루도

              우리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옵소서.



              - 해처럼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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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수십년 만의 2월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하는 데...
              여기는 포근하고,따뜻한,마치 한국의 초가을 날씨입니다
              구름 한점없는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고 신선합니다
              해가 바뀌고 어느 새 달도 바뀌어 2월 둘쨋 날입니다
              엊그제는 이곳 멕시코에서 공장을 가동한 지 만 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사무실 직원이 몇 있었지만 직공을 모집해 생산을 시작,공장가동을 한 날입니다
              지난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 지...
              어려움과 부족함,아쉬움이 많습니다만,그보다 더 큰 것은 감사,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은 60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셋째 형이 하늘나라에 간 지 만 4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월이 모든 것을 같이 가져간 것 처럼...아쉬움, 회한, 슬픔, 눈물, 고통...잊고 살았습니다
              지난 4년의 세월...기다리던 손자,손녀가 예쁘고 아름답게, 튼튼하게 성장합니다
              그렇게 걱정하던 둘째 아들(조카)이 좋은 규수를 만나 몇달 후면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천군천사와 함께 영광의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셋째 형...

              마침내 '영광의 찬송'이 되게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드립니다
               
              새해의 소원과 계획을 잘 이뤄나가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승리!!!
               

              좋으신 하나님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를 여인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줄 압니다.

              또 사랑하는 동생을 먼저 떠나 보내는 형님들과

              누님들의 아픔과 황망함은 저의 아픔에 비 할수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교류하며 동역하시던 친구, . 후배 목사님,

              사역자님들의 아쉬움 또한 클 줄로 생각됩니다.

               

              () 김창혁목사님은 제 셋째 형님이십니다.

              셋째 형 ()김창혁목사님과 저는 30년전 한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이 미국땅에 왔습니다.

              () 김창혁 목사님과 저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에 관해, 교회와 가정에 대해,

              그리고 어릴 적 드나들던 골목길, 찻집

              또 자녀들과 천국에 계신 부모님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셋째 형() 감창혁 목사님은

              동생인 제게 해서는 안될 말까지 해주셨습니다.

              마땅히 감추어야 할세상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하지 못 할,

              당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며,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형은 제게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얼굴을 대하면서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 그냥 지나쳤냐고무관심했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병원 가야 한다고 말할 때 왜?

              그렇게 무심했냐고 한마디 원망의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형님께선 한국에서 30년 그리고 이 미국땅에서 30년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신 것처럼

              형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 바 된 것처럼

              제 셋째 형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싫어 버린 바 되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제 셋째 형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사랑할 대상이 제 셋째 형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고난의 길, 가시밭 길, 외롭고 쓸쓸한 길을

              혼자 걷게 하지 않으시고 같이 하셨습니다.

              아니 그 고난의 여정을 통해 마침내 정금같이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흠과 점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온전함으로, 즐거움으로,

              그 영광 앞에,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서게 하셨습니다.

              셋째 형님은 제게 늘 나는 무능력하다, 우유부단하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너무 이기적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때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5~^년의 삶을 옆에서 지켜 보며

              저는 많은 것을 깨닫고 알게 되었습니다.

              무능력하다는 말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릴까? 하는

              깊은 고심과 고뇌의 한탄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에게는 너무나 철저했고 엄격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한 없이 너그럽고 유순하며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속내의 하나 사 입지 않으시며 식사도 간단하고 저렴한 것,

              햄버거와BEEF BOWL 로 흡족해 하셨습니다.

              여름에 냉면 한그릇이 형에게는 큰 사치였습니다.

               그런 분이 주위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던,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제게는 가장 아끼는 것,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지난 해 11 8일 의사로부터 옴 몸에 전이가 되어

              수술도 할 수 없다는 암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첫마디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지요! 추호도 흔들림 없이,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의연하며 단호하셨습니다.

               

              바로 지난 주, 꼭 일주일 전 입니다.

              병원측으로 부터 별로 할 일이 없다는 마지막 통고를 받으셨을 때에도

              입에서 먼져 터져 나온 것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던지 죽던지 뜻대로 하소서   라는 찬양이었습니다

               

              제 셋째 형()김창혁 목사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몇 살이나 어린 동생인 제게도 하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신 적도 없었습니다.

              식당에서나 어디서나 제게 상석을 양보하려고 하셨고

              당신이 주문한 음식을 잊고 제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괴로워하셨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일, 알아 주지 않는 일에 땀을 흘리시고

              모든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

              당연히 책망하고, 원망하고, 탓을 하고

              꾸지람을 해야 할 때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으시며 견뎌 내셨습니다.

               

              병중에, 그 고통 중에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으셨고 짜증 한번 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병문안 간 저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웃음을 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매 순간마다 고백하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주의 종이었으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을 이뤄 드리기를 소원하는

              주님의 진실한 종이셨습니다

               

              () 김창혁 목사님은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찬양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처럼

              찬양하기를 기뻐하며 즐거워 하였습니다

              그의 찬양에는 힘이 있었고 혼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의 찬양을 들으면 지옥권세가 떠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의 찬양을 들으면 마치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며 

              천군천사의 화답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찬양하며 우리도 덩달아 힘을 얻었습니다

              그와 같이 찬양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곤 했습니다

              그는 찬양 바로 그 자체이었습니다

              작은 교회당이 떠나갈 듯 부르시던 그 찬송소리가

              벌써 저 하늘나라에 울려 퍼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시다가

              바라던 대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형님은 저희 가족 중 키가 작고 체구도 적은 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거인 이었습니다

              그는 작은 예수 이었습니다

               

              눈을 감기 하루 전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들, 자부가 남편에게,

              아버지께 하였던 말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여보! 사랑해요! 그동안 잘 못해 드려서 죄송해요

              아버님! 제가 얼마나 아버님 사랑하는 줄 아시죠?

              아버지! 미안 해요!잘못했어요! 앞으로 잘 할께요! 아빠! 사랑해요!

              아빠! 잘 했어! 아빠! 잘 했어! 아빠! 사랑해요

               

              한숨 가시고 죽음 없는 날 사모하며 기다리니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떄 나의 기쁨 넘치리라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 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사랑하는 셋째 형.

              창혁이 형..미안해요!!  사랑해요!!

              그리고 형!! 존경합니다!!!

               

                 .사랑하는 형의 따뜻한 체온과 차디 찬 몸을 만진 날.

               

               

              글/ 김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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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상도 할마이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할매가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

              (다른 할매가)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려 주었다 안카나 ."

              "아이고 머리 풀어 헤치고 다닐때 알아 봤다"

              (이때 암말않던 할매가)

              "어이 예수가 누고 ?"

              "몰라 우리 며늘아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거 보이 사돈 어른인 갑지뭐!!"

              ㅎㅎㅎㅎㅎ

              그후에 또 다른 할매가 물어 보는데

              "그래 문상은 갔더나?"

              "아니 안 갓다."

              "왜 안갓노?"

              "갈라 캤더니 사흘만에 살아나따 카더라."

              .
              .
              .
              .
              .
              .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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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서 목사가 그래서야 되느냐며 한탄을 하셨다. 무슨 문제냐고 여쭈니 고향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 이야기다. 이제 40대 초반 강원도 산골에 젊은 나이에 오셔서 10여년,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겠지만  성도는 점점 줄고 재정도 너무 열악한데 목사님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전혀 무관심해 보이신다는 것이다. 은퇴장로인 아버님은 몇년째 목사님과 성도들을 위해 매일 밤마다 가정에 기도 제단을 쌓고 계신다. 사모님과 두분 모두 무슨 공부를 하신다고 주중에는 집에 안계시고 그나마 계셔도 무슨 세미나다. 무슨 모임이다 매일 시내로 출타하신다. 목사님은 몇년 째 석사학위때문에 계속 학교를 다니시더니 올해엔 박사과정을 밟느라 또 학교를 가야하신단다.

              늙어 글도 제대로 읽지못하시고 대부분이 문맹인 할머니들 몇명이 전부인데 왜 박사학위가 필요하냐신다. 어려운 교회재정으론 사례비는 커녕 기름값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요즘 새로 승합차를 뽑으셨다. 몇년전부턴 새벽기도도 나오지 않아서 두 노인분들만 새벽예배를 드리시다가 이젠 아예 집에서 새벽예배를 드리신다. 드리던 속회예배도 그만두어야 할 판이란다.

              심방이라곤 1년에 한번있는것도 제대로 안하고 주일예배와 저녁예배 그리고 수요예배엔 컴퓨터 화면을 틀고 성경공부를 시킨다고 몇 년째 닥달을 하시는데 무슨 신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노인분들 전부 졸고 웬 고역인지 그나마 드문 드문 나오던 젊은 분들도 나오지 않으니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시는지 모르겠단다. 목사님이 기도도 하지 않으시고 심방도 않으시고 박사학위에 몸이 단 목사님과 사모님... 늙고 병든 성도들을 위해 치유기도와 외롭고 쓸쓸한 그들을 위해 심방 한 번, 손 한번 더 잡아주는 것이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도록 기도라도 해주시는 것이 시골 노인들에겐 위로요 은혜가 된다. 아무리 명 설교를 한다 한들 문맹인 그분들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남아있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하소연을 하시는 아버님은 김목사는 그리하지 마시게, 그리하지 마시게 라며 신신 당부를 하신다.

              그러면서 이웃 동네에 있는 교회는 목사님이 얼마나 성도들을 위하시고 챙겨주시는지 모두 다 우리 목사님 최고라고 자랑을 하며 그 깊은 시골에 멀리 도시에서 본 시골 동네 성도들 보다 더 많은 수의 성도들이 일부러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회 재정도 넘쳐나고 목사님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가 넘친다며 장로님도 우리교회로 나오라고 권하더란다. 본교회에서 예수믿고 구원받고 신앙생활해서 50년동안 고향 교회를 지켜오신 아버님, 교회는 아버님의 삶이요 인생과 같은신데 비록 은퇴하였어도 나이 여든에 어찌 교회를 옮기겠느냐신다. 그저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 목사들이 기도하며 말씀보고 묵상하고 심방하고 목회하는 일에 정진하는 것보다 각종 세미나에 교회성장 프로그램에 가짜 박사학위 받느라 자격증 취득하느라 정신들이 없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각종 사업하느라 또한 건축하느라 대출 받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을 채우느라 일명 ‘스펙’을 갖추느라 정신이 없다.

               목사에게 박사학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또는 자아성취를 위한 노력일 뿐, 영혼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다. 오히려 목회자는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진대 도시교회로 가기위한, 더 큰 교회로 진출하기위한 교두보와 더 좋은 조건과 환경을 누리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세상적인 가치와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것이 아니고 목회를 더 잘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영성을 채우고 이루기 위해 더 기도하고 더 낮아지고 더 버려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은가?  목회가 무엇인가? 진정 목자의 사명을 내팽개치고 병들고 굶주린 양떼들은 이리가운데 버려둔 채 자신의 성공과 욕심만을 채우는 것이 목회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스펙을 쌓느라 정신없는 동안 양떼는 흩어지고, 병들고 죽어가고, 이리에게 잡아먹히고 울타리를 넘어 다 흩어지는데도 전혀 감각도 없는 사람들... 자신이 섬기는(?) 양들이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채 옆집 우리에 든 살진 양떼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는데도 이 게으로고 악한 목자는 강제로 젖을 짜기에만 급급하다. 
               
              주님이 주신 목사라는 엄청나고 위대한 최고의 직분을 우습게 여기고 그저 밥벌이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 당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따위의 도깨비감투 따위와 박사와 교수 따위의 세상 타이틀을 좋아하는 자들... 왜 주님께서 친히 기름부어 세우시고 명하신 목사라는 이 영광스런 직분에 감사하고 만족하지 못하여 헛되고도 헛된 다른 직함과 타이틀을 탐낸단 말인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이틀 자랑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박사학위는 절반 이상이 가짜고 나머지도 대부분 명예(역시 가짜)다. 목회학 박사치고 목회 잘하는 사람 별로 없고, 신학박사치고 성령 충만한 사람 별로 없다. 돈만 몇 백 있으면 박사 그냥 된다.  명박(명예박사), 목박(목회학 박사) 그거 돈 얼마 안 든다.

              내가 알고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 한국의 대표교단 소속이고 속칭 스펙이 대단한 분이셨다. 그분이 외국에서 공부를하시고 박사학위를 받으러 가시던 중 비행기 안에서 묵상하시는데 주님께서 물으셨다. “너 박사학위를 왜 받으려고 하느냐?”   “예! 주님, 주를 위해섭니다.” “정말 나를 위해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것이냐?” 그 두 번째 질문 앞에서 목사님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 사실은 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세운 목사 너를 원하지 박사를 원하지 않는다” 그 목사님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공항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학위를 받지 않으시고 말이다.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셔서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신다. 얼마 전까지 섬겼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도 그런 분이셨다.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실로 귀감이 된다.

              외국유학을 하면 영성이 더 충만해지는가? 유학파 출신 목사, 박사 학위가진 목사를 선호하는 성도들도 문제다. 자신의 모자람을 담임목사를 통해서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성도들, 자신의 교회의 크기와 성도들의 숫자로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있는 성도들, 자신들의 삶에 교회의 강단에 정작 무엇이 빠져있는지 자신의 영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조차 감각하지 못한 채 넓고 화려하고 큰 길로 달려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라는 책이 있다. 작은 교회 작은 목회를 지향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참된 목회를 꿈꾸며, 또는 땅 끝 불모지에서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선기는 수많은 종들도 있다. 그런데 매머드급의  교회의 어느 목사님은  "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마라. 목회에 실패한 이들이나 하는 변명이다. 주님 보기에 큰 교회가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들에게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그저 아름다운 문장 표현이요 유명한 책의 제목일 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루저(loser)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시골 오지에서 또는 낙도에서 몇 명 안 되는 주민들과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섬기며 헌신하는 종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무서운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목회란 사업이요 돈벌이요 출세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킬 도구에 불과하다. 갖가지 행사와 훈련과 세미나와 프로그램을 동원하고 인맥을 동원하고 자금을 동원하고 심지어 정치까지 동원한다. 그 들의 설교는 사람을 위한 이야기이며 복음이란 말로 허울을 쓴 포장지에 불과하다. 그 내용물은 돈, 명예, 성공, 출세, 축복 따위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은 세상적인 복과 전혀 다른 것이다. 제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성경의 말씀과 섞지 말라.  거기에 무슨 복음이 있는가? 거기에 무슨 구원이 있는가?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는가?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고, 예수님 자신이 구원이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며,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며,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시다.

              오늘날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복음이 얼마나 선포되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선포하고 죄인임을 각성시키고 죄를 회개시키고 죄를 미워하도록 결단시키고 세상 명예와 모든 욕심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절대 명령과 순교를 각오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헌신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 나라 내가 천국 되어 사는 생명복음,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자신을 성전 -거처- 삼으시고 나의 삶을 통해 당신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시고 나타내시고자 하심을 알고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스런 삶을 살도록 주님의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사명이요 본분인 것이다. 이 복음은 강단에서 백성들에게 선포되어져야 하며 또한 목회자 자신이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

              무엇이 축복인가? 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이름으로 구원받고 성령 안에서 오신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삼고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역사하심을 좇아 행하는 믿음이 축복인 것이다. 이것이 성전 됨이요, 교회요, 천국의 삶이며 이 천국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목사가 먹사로 전락한지는 이미 오래고 목회는 생업을 위한 것이고 성도들은 교회를 교제의 장소, 친목의 장소, 사업을 위한 사교의 장소요 예배와 헌금은 명예와 욕구 충족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 예수와는 그저 잘 아는 친분이 있는 분 정도며 헌금은 복채요 로비자금일 뿐이다.

              사탄은 교회를 자신의 집과 놀이터로 삼고 있다. 성도들은 마귀의 먹잇감이 돼버렸고 주의 종들은 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렸다. 이제 마지막 선교지는 교회요 전도대상자는 교인들이다. 오죽하면 각종 이단과 사이비, 신천지 같은 집단에서 대놓고 교회와 교인을 추수대상자로 삼겠는가? 그런 곳으로 넘어지고 빠지는 영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진리에 목말라 참된 복음에 목말라 헤매다가 거기 진리가 있는 줄 알고 빠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인가? 그들 영혼을 진리로 세우지 못한 복음을 먹이지 못한 책임을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으며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교회당 건물 짓기 위해 전 재산을 드리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장로, 권사 되기 위해 헌금은 수백 수천씩 드리면서 굶주리고 이웃집의 헐벗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는 얼마를 드렸는가? 노회장, 총회장 해먹으려고 교단의 대표가 되기 위해 몇 억씩 성도들의 생명 같은 헌금을 마음대로 쓰면서 땅 끝 복음을 위한 선교에는 얼마나 쓰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육신을 따를 것인가 성령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지금은 어느 때 인가? 이 세상은 그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다. 말세 중 지말, 세상의 끝에 와다. 이때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때를 사는 우리들은 무엇을 준비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마지막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 하셨다.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우리의 주가 되시는 그분은 우리와 완전한 합일로 함께 계신다. 그분을 24시간 인식하고 생각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며 내생각과 내 감정과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한다면 주님을 갈망하고 경외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당신의 거룩하심과 덕스러움과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주님 안에서 사는 삶이요 온전히 주님을 위한 삶이 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영적인 스펙을 쌓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것이며 구하는 것마다 이루어 질 것이며 주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를 존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금방 변하고 시들고 거짓되고 헛된 명예와 부, 성공이라는 선악과와 세상풍조를 따르지 말고 모든 것을 아시고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철저히 진실한 모습으로 설 때에 주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의 스펙을 높여주실 것이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다 내어드립시다. 주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합시다. 그리고 주님께 먼저 물읍시다. 분명한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삽시다.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출처: USA 아멘넷/ 김은태 님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앉아 계시며
              성도를 위하여 중보 하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도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assembly to the LORD your God) (신16:8 Assembly of God)와 
              성도가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것과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독생자 아들의 보혈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하여 주시는 것과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성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과 
              신랑되시는 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 



              보수님!^^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이유라는 연재 칼럼을 시작하신 김동욱님으로 인식하고 공개적으로 답변 합니다. 김동욱님 본인이 아니시라면 자신의 신분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보수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김동욱 !^^ 저를 아시지요. 저는 극보수 추구하는  잠긴동산 입니다. 또한 근본주의, 기독교에는 어울리지 않은 극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 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고자 하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바탕을 두는 성향이라면 대화를 볼만한 상대로 여겨집니다. 김동욱님의 성향이 극진주의 가깝기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며 어떤 방식이든지 대화를 해보고 싶습니다

               

              김동욱님으로 부터는 예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두고, 믿고 따르는 성도의 무리에서 없는 극진주의가 보입니다. 예수의 사람의 성향이 아닌, 인간 칼빈 추앙하며 따르는 듯이 보여 참으로 유감 입니다.

               

              성경을 믿습니까? 칼빈을 믿습니까? 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시조인 칼빈 선조를 믿는 것입니다.

               

              "칼빈은 사단의 종이다!"라는 21세기 기독교에 새로이 등장한 statement  "보수 " 오해에서 비롯되어 잘못 와전된 주장이라 여겨 집니다. 잠긴동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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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속한 교회의 신앙생활 수십년을 돌아 볼 때에 시기적으로 여름철이면 제직들이 까칠하게 변하던 모습들을 회상해 봅니다. 여름철 담임 목사님이 선교 여행으로 강단을 비울 때마다 전도사, 은퇴목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다만 순종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당연한 몫으로 제직들이 설교 준비하는 동안에는 까칠하게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감당하는 평신도의 주일예배 설교 내용을 자토장에 내려 놓음은 본인이나 교회 자랑 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선포 되어 진 말씀 중에 많은 내용들이 지난 수년 동안 이 공간으로부터 발췌된 것들로 아멘넷의 고정 논객이라면 누구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들 입니다. 혹 내용이 각자의 신앙노선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용납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교리적으로 문제가 보이시면 바른 권면을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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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가 주일 대 예배 강단에 섰습니다. 심히 두렵고 떨리지만 다만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함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잠긴동산에게 설교 담당이 됐다는 소식에 “이건 말도 안돼! 장로가 주일 설교를 하다니?” 라며 되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비록 두려움으로 이 자리에 서기는 하지만, 받아 들이는 데는 마음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만인 제사장설” 을 수용하여 가르치는 교단에 소속 합니다. 그러므로 장로가 주일 강단에 선다? . . . 말이 됩니다. 장로뿐이겠습니까? 안수 집사님도 1부 영어예배를 인도 하셨습니다. 주중 예배는 권사님 집사님들이 말씀을 인도 하였는데, 어느 권사님은 대지 10으로 나누어서 멋있게 설교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은 이중언어로 설교를 하시는데 얼마나 좋으신지요, 집사님 한 분은 “수요예배 close” 하시더니 그래도 신앙의 연륜이 깊으시니 얼마나 훌륭하게 감당 하셨는지요.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비울 때에 제직들이 강단에 설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특권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비약이 없어 구원 받고 20~ 30년은 믿어야 굳건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살아남아 있는 마지막 사도 요한에게 성령께서 말씀을 주신 이 때가 사도 요한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한지 20여 년이 흐른 때라고 합니다. 한 교회를 20년 정도는 섬기며 헌신해야 교회의 기둥이다 불림을 받을 수 있음이 성경적 입니다. 수십 년 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기둥을 하나씩 맡아서 감당하시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의 그 수고와 눈물과 기도를 주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분들은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OOOO 한인교회의 기둥이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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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말씀 출애굽기12:3-10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 란 제목으로 허락하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출12장은 유월절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죄와 억압에서 해방할 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대 서사시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 구원의 대 서사시의 이 역사에 동참하려는 자에게는 이스라엘 본토인이나 거류민이나 이방인이나 또는 타국 품꾼에게라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이 있는데,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정하신 법 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로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안에 있으면 죽음의 천사가 지나는 밤에 천사는 그 바른 피를 보고 그 집을 유월하여 넘어 가겠다, Pass Over 하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입니다. 구약에서의 유월절의 약속은 신약의 백성들을 구원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사용하시어 보이시는 예표이며 그림자 입니다.

              구약에서 보이신 예표 대로 신약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이는 장차 메시야가 와서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인간을 구원할 비밀이 담겨있는 그림자이며 모형 입니다. [출 11:4-8] 인간사에서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그 집의 대가 끊겨 멸망한다는 의미 입니다.

              성도에게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 공로로 인하여 멸망 당하지 않고 살아 남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며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 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 하셔서 죄로 물든, 모든 인간들을 구원 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Message이며 Manual 입니다. 너희가 이 Manual대로 따라 오기만 하면 너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주시겠다 하시는 Message요, 사랑의 편지요, 변치 않는 약속 입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이며, 신약에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신랑으로, 재판장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딤후3:16)으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기록한 책(벧후1:21) 입니다. 구약에서는 350회 신약에서는 1518회에 걸쳐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말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말과 동일한 것 입니다. 믿는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하시지 않으시고 내 아들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사9:6).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어떤 대상을 향해 믿는 샤마니즘이나 다를 바 없는 신앙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전하는 기쁜 소식 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없이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 드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카페트를 수십 년 밝고 다녔더라도 말씀을 깊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도우시며 지키시고 재판장 되시는 예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잘 알아 깨닫도록 도우실 때에 비로소 영안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되며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고자 동물을 희생 시키는 제사 법이 있었습니다. 희생시킬 어린 양은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만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끌고 온 희생양의 머리에 손을 언고 자기 죄를 전가하여 안수한 뒤, 배를 갈라 피를 흘리게 하고, 각을 뜨고, 불에 태워서, 화제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립니다. 드려지는 화제의 연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를 사하시는 제사 법 입니다.

              1995년도 우리교회에서 지금 예배 드리고 있는 이 성전을 봉헌을 하고 난 후 다음 해부터 매년 선교 여행이 시작 됩니다. 1997년 선교 여행에서 목사님과 같이 간 교인들이 선교 여행 중에 루마니아 어느 시골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됩니다. 민박한 그 집의 주인이 평생을 양을 치는 목자 였다고 하는데 그 주인이 들려 준 이야기 입니다.

              양들은 새끼를 낳은 후에 어미 양이 자기 새끼를 돌볼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무리 중에 그대로 놔 두면 짓발혀 죽을 수밖에 없기에 양을 치는 목자는 새끼들을 데려다가 숙식을 같이 하며 새끼 양마다 각각 이름을 지어주고 젖을 먹이며 키우는데 자라서 스스로 풀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키운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처럼 정성을 들여 키우게 되는데 이렇게 애지중지 키우다 보면 양은 목자 목소리를 알아 듣고 목자만 따라 다닙니다. 이렇게 자라 난 양들이 모여 수십 수백의 양 무리가 되는데 목자는 그 많은 양들을 이름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롱아” 하고 목자가 부르면 풀을 뜯어 먹던 초롱이 양이 머리를 딱 들고는 자기 목자한테 매에헤 하고 온다고 합니다. 주인이 아닌 다른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머리만 들었다가 다시 숙입니다. 또한 양은 시력이 약하여 1미터 앞을 못 봅니다. 그러니 이 어린 양이 다 자랄 때까지 목자와 숙식을 같이 하며 지극한 정성을 받아가며 자랄 수 밖에 없는데 그 어린 양과 목자와의 친근감이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까지 형성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10:2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 속죄 제물로 내어 준바 되고 단번에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보혈의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고 사신 바 된 양이 되는 성도들을 목자가 양들을 이름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들을 각각 이름으로 기억하시며 지극히 아끼며 사랑 하십니다.

              그런데 선교 팀이 머물던 그 집 주인이 후회스러운 일이 한가지 있는데 그 양들 중에서 어찌나 말을 안 듣는 녀석이 있었는지 평생 동안 양 두 마리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평생 후회하는 것 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목자의 말을 듣지 안고 죽음을 당하는 염소 같은 양이 되고자 하는 그런 성도님은 안 계시겠지요. 그래서 목사님이 목자에게 양을 죽인 게 죄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며 전도를 하였다는 이야기 스토리 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몽골로 선교여행을 매년 가는데 선교여행 마지막 코스가 있다고 합니다. 양을 잡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가를 확인하는 것 입니다.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순종을 하는데. 예수님을 양으로 많이 묘사 합니다. 양을 죽이는데 작은 칼로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배를 쨉니다. 고통이 있을텐데 양은 움직이지도 않고 빤히 주인만 쳐다봅니다. 양의 배에 찢어진 부분에 손을 집어넣고 숨 쉬는 부분을 막는데도. 양은 잠잠하여 주인만 쳐다봅니다. 숨통이 막히므로 창자가 풍선처럼 부풀어 밖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죽어가는 고통 중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주인만 바라 봅니다. 주인의 뜻이라면 끝까지 순종하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양은 눈을 조용히 감는데 죽은 것 입니다.

              [찬송가141장]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성으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당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 하시기 원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되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Standard에 미치지 못하기에 인간들을 그대로는 구원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죄와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 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되 공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인류를 위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십니다. 무조건 적으로 사랑하시기 원하시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인류를 구원 하시기 위하여 죄가 전혀 없으신 독생자 아들을 내어 주시기로 결정 하십니다. 인간 중에 어느 누가 친 자식을 남을 구하기 위하여 죽음으로 내어 줄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하늘 보좌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셔야 할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아버지 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손수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참 인간이신 아들의 모습으로 보이시며, 내가 그 어린 양의 피를 보면 그 집을 유월하여 넘어가리라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어린 양 제물이 되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받으신 고통과 수모와 부끄러움, 보혈의 피를 모두 흘리시며 죽으시기 까지 달리신 그 고난은 모든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 부터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당하신 고난 입니다.

              본문 출12장 5절~7절 입니다.
              5.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흘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지금도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의 제사예식처럼 동물의 피로 제단에 뿌리며 예배 드리지는 않지만, 제단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미 우리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피의 구속의 능력을 바라보며 믿는 것은 그 피를 우리들의 심령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시는 밤에 좌우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있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자격은 본토인이나 이방인에게 동일하여 넉넉하게, 누구든지, 얼마든지 지구의 70억 전체 인구에게라도 자격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양의 피를 머리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자들만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말씀 입니다

              죄를 지으면 어떤 값을 치러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나요? 세상 법정에서는 여러 가지 형량이 있습니다. 집행유예로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사형, 오직 지옥 행 입니다. 죽음으로만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6장 23절에 분명히 기록된 말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면 죄 중에 태어났고,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다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의 제사”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임을 당하면, 그것으로 우리들이 죄의 값을 치룬 것으로 여겨 주신다는 말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울음소리는 애끓는 버들피리 소리인양 간장을 녹인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목자를 찾아 헤매는 애끓는 어린 양의 심령과 같은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양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떠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원 하십니다.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면 기뻐하시며 어깨에 메고 돌아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양을 어깨에 메고 계신 성화를 보신 적이 있지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린 그림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인간의 육신의 아버지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대다수의 분이 부모님이신데 사랑하는 자녀의 얼굴을 한번 떠 올려 보시며 얼굴 모습을 그려 보십시요. 혹 자식의 모습이 떠 오르지 않으신 분이 있으신가요? 그런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있을까요? 젊은이 들은 혹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랑하는 님의 얼굴을 떠 올려 그림을 그려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 오르지 않는가요. 그러한 사랑 관계도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고 창조 하셨으며 자신의 피 값주고 사신 성도들을 기억하시며 사랑하시며, 머리카락 까지도 세시며, 성도들을 각각 이름으로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합니다. 각자의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오늘 도전하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 에서는 믿음이 형성되는 현상으로 구원에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각자의 믿음이 자리하는 장소를 구분 할수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있고 또한 각자의 영혼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히 믿음이 마음에 자리 잡고 형성이 됩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의 평강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런데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어찌 CONTROL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갈대 같아서 도대체 마음이 어찌 변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내 마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믿는다 하는 자는 자기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망각하고 다만 자기 주먹을 믿는 자와 같을 것 입니다.

              성도가 믿어야 할 것은 오직 성령으로 인치시고 확증해 주신 믿음, 성령으로 심지가 굳어 각자의 영혼에 각인된 믿음만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영혼을 능히 구원할 겨자씨와 같은 100%의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스스로가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한 영혼이 주 안에서 구원받고 성도로 갓 태어나는 순간을 주께서 거룩하다, 의롭다 인정하시고 불러 주시는 것을 칭의 라 합니다. 의롭게 되는 칭의, 성결을 거쳐 성화을 지나, 하늘 나라에 입성하여 주와 연합 할 때에야 우리가 영화로운 신분이 됩니다.

              한 사람이 성도로 갓 태어나 영화로운 천국백성이 되기까지의 여정에서 주로부터 받은 믿음을, 점도 흠도 없이 순결하고 정결한 신부의 정절로 지키며 성도의 옳은 행실로 믿음을 승화 시켜 나가는 것은 성도가 담당해야 할 몫 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길이 마치 천로역정 과도 같을 것입니다. 내 정과 열심으로 천국을 침노하고자 해도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가 없습니다.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 하심과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셔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분의 뜻대로 나를 주관하실 수 있도록 나를 Avaiable하게 넘겨 드려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을 지키려면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히브리 인들에게는 죄를 회개할 때에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법이 있습니다. 구약이 거의 끝나가는 (요엘2:13)에서“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 올찌어다”말씀 하십니다.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 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하나님께서 모형과 그림자의 뜻을 주신 것이고 신약에서의 할례는 마음에 하는 할례를 말합니다. 즉 회개의 뜻 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마음에 할례를 받고 회개하는 자만이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 올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자 만이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는 두렵고 떨리는 죽음의 밤에 대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집 안에 있어 죽음을 면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셔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끌려가 당신과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죽음을 당하셨음을 믿는 자마다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구속하시는 능력과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영광 거두십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 주시리라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 가면 하나님도 한 발자국 다가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로 나아 오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나아 오는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 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 전체를 요약한 요3:16의 말씀 입니다

              즉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시는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의 피의 권세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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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손에 쥔 모래와 같다.


              손바닥을 편 채 가만히 있으면
              흘러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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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꽉 잡으려고
              손을 움켜쥐는 순간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손바닥엔 조금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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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도 그렇다.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며
              서로에게 조금의 여유를 주면
              사랑은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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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너무 강한 소유욕으로
              서로를 꽉 움켜쥐면
              사랑은 어느새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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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육체의 상처를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몸은 자연적인 치료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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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우리가 할 일은
              자연이 우리를 치료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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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고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더욱 강하고
              더욱 행복하고
              더욱 다감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옮 겨 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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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를 격려하는 삶을 살아가자 ☆※ 인생이란 나그네가 걷는 마음의 여행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에서 잠시 머무는 것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하며 굳건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여행은 어둠이 아닌 밝은 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반발할 뿐입니다 남모르게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는 사이에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어 상대방의 마음이 부드럽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판에 동요하는 사람은 완성의 길에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 맞지 않은 사람과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먼저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섯 손가락의 역할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성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장점을 살려주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곧 상대방을 응달에서 햇볕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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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총 길자연 대표회장 '임기 연장' 논란
              비대위, 1월 31일로 임기 끝나..길 목사측, 차기 대표회장 선출때까지 연장
              http://christian.nocutnews.co.kr/show.asp?idx=2045945
              CBS TV보도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길자연 대표회장의 1년 임기가 1월 31일자로 끝났다.
              하지만 길자연 대표회장은 오는 2월 14일에 열리는 대표회장 선출때까지 임기를 연기해 놓은 상태여서 논란이 일 전망이다. 길자연 대표회장의 1년 임기를 되돌아봤다.

              지난 해 1월 정기총회에서 대표회장 인준이 거부되면서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던 길자연 대표회장은 임기 시작직후 곧바로 대표회장 직무가 정지돼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길 목사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해 7월 이른바 7.7 특별총회에서 대표회장 인준을 받으면서직무정지가 풀려 대표회장에 복귀했다.
              그러나 대표회장 복귀 이후 한국교회의 모든 고통과 십자가를 홀로지고 잔여임기 동안 한국교회를 섬기고 떠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런 약속은 공염불에 그쳤다.

              지난 해 9월 27일 임시총회에서 길 목사는 취임사를 통해 "한기총과 여러분과 한국교회의 모든 허물은 제 어깨에 짊어지고 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길 목사는 대표회장에 복귀하자마자 정치적 보복을 시작했고 특별총회에서 통과된 개혁정관을 폐기해 지금의 한기총 사태를 야기했다.

              특히 자신의 최측근인 홍재철 목사를 앞세워 한기총 사무처 직원을 강제로 구조조정하는 한편, 홍 목사를 차기 대표회장에 만들기에만 열중했다.
              이 때문에 예장통합총회를 비롯한 주요 20여개 교단들을 중심으로 한기총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도록 한 원인도 제공했다.

              또 한기총은 1년 내내 한국교회를 위한 대변자 역할을 하지못하는 연합기구로 전락했고, 군소교단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공교회성도 약화됐다.
              이로 인해 길자연 대표회장은 임기내내 법적 소송에 시달렸다.

              길자연 대표회장의 임기는 7.7 특별총회에서도 확인했듯이 1월 말로 끝나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는 14일 차기 대표회장 선출 때까지 임기를 연장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하지만 한기총 정상화 비대위는 임기연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이다.

              최귀수 총무(한기총 정상화 비대위 운영위원)는 "차기 대표회장 선출은 현 대표회장이 선출하는 기간은 이미 마쳐졌다고 생각된다"며 "1월 31일로 대표회장 임기가 모두 마쳐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대위는 대통령을 못 뽑았다고 해서 임기를 연장하는 국가가 없듯이 정관에 1년 임기가 규정되어 있는 만큼 깨끗하게 퇴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년 임기를 다 마친 길자연 대표회장.
              마지막까지 한기총 사태 해결보다는 측근의 대표회장 만들기에만 앞장섬으로써한기총은 물론 자신의 명예도 함께 추락하는 모습이다.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 사무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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