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인생의 말년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다윈이 운명하기 몇 달 전 호프 부인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를 방문했다.

 성경을 펼쳐 들고 있던 다윈에게 호프 부인이 물었다.

“지금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다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성경입니다. 아주 고귀한 생명의 책이지요.”

호프 부인은 창세기를 펼쳐 보이며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허구를 설명했다.

그러자 다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놀라운 고백을 했다고 한다.

“나는 참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했습니다.

 진화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학문이 아닌
창조론과 적대되는 종교처럼 신봉하게 되었지요.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증거해 주십시오.”


진리는 죽음 앞에서 진위가 또렷이 밝혀진다.

다윈은 죽음을 앞에 두고 창조론을
진리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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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女, 연하 베트남男 30년간 사랑하다 결국
 
BBC 보도 “국경도, 30년의 긴 세월도 그들 사랑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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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성과 베트남 남성의 국경과 세월을 초월한 사랑이 세계인의 가슴을 적셨다. 영국 BBC방송은 14일(현지시간) 밸런타인데이 특집으로 북한 여성 리영희(65)씨와 베트남 남성 팜 녹 칸(64) 부부의 러브스토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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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이 리씨를 처음 만난 건 23살 청춘이던 1971년 북한 함흥에서다. 유학생으로 화학을 전공하던 칸은 리씨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뒤로 칸은 1년 반 동안 리씨와 사랑에 빠졌지만 1973년 홀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국제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했고 리씨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를 잊지 못한 채 한글로 쓴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외부 세계 접촉을 막는 북한은 두 사람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았다. 칸이 베트남 주재 북한대사관에 편지 왕래를 허가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일이 20년 동안 이어졌다.

 

북한 당국은 수차례 베트남 스포츠팀 통역관으로 북한에 입국한 칸에게 “리씨가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거나 “이미 숨졌다.”고 거짓말도 했다. 칸은 믿지 않았다. 어느덧 마흔다섯의 중년이 된 리씨가 1992년 칸에게 “우리가 늙어가도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젊다.”고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칸의 애타는 사랑은 9년 후 기적처럼 성사된다. 칸은 2001년 평양을 방문하게 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자신의 사연을 절절히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북한 당국은 베트남 국가 주석의 요청을 받아들여 칸과 리씨의 결혼을 허가했다. 둘은 이듬해인 2002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지 꼭 31년 만이다. 리씨는 55세, 칸은 54세로 초로(初老)였다. 리씨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에서 그 사람과 그렇게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랑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며 “남편은 30년이 넘도록 장가도 안 가고 나에게 편지만 쓰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다. 칸은 “아내를 향한 내 마음은 지금껏 단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BBC방송은 홈페이지에서 이들 부부의 사연을 9장의 사진을 통해 세계에 전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경험하지만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생김이 각자 다르듯 살아가는 모습도 모두가 다릅니다.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다르고 비전이 다르고, 성격 또한 다릅니다. 서로 맞혀가며 살아가는 게 세상사는 현명한 삶이지만 내 생각만 고집하고 타인의 잘못된 점만 들추길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흔히들 말을 하지요. 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우선 남을 탓하기 전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본다면 자신도 남들의 입에 오를 수 있는 행동과 말로 수 없이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은 크게 해서 자신만의 탑을 높이 세워 두고 조금은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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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봅시다……. 희생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이솝이야기에는 이런 우화가 나옵니다. 하루는 늑대가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늑대는 긴 주둥이를 가진 학에게 자신의 목에 걸린 가시를 뽑아주면 후하게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은 학은 벌린 늑대의 입 안으로 긴 주둥이를 넣어서 늑대의 목에 걸렸던 가시를 성공적으로 뽑아 주었습니다. 곧 이어 학이 늑대가 약속한 보상을 요구하자 늑대는 너무너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늑대의 입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놈을 본 적이 있어? 너는 내 입 속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온 것만으로도 큰 보상인줄 알고 내게 감사해야 해! 목숨을 건진 은혜를 생각해야지…….”

늑대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술 안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텔레비전 연속극 안보고, 비디오 안보고,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마땅히 자기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들을 제거하게 되었으면 제거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도리어 자기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베푼 것 마냥 생각해서 그 때부터는 자신들이 하나님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못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희생”을 당하고 있다는 희한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비디오나 연속 방송극을 안 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이 “늑대” 수준임을 깨닫고 당장에 회개하셔야 합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뻔뻔스러운 늑대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봉사하는 것도 희생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너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고 싶다고 했을 때, 삭개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봉사 자체도 은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특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수다 떨 시간이 없는 것은 자식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 인하여 가질 수 있는 축복이요 은혜요, 특권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은혜이고, 아내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도 은혜 아니겠습니까? 혹시 아내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잘못된 사고방식을 반드시 올바로 고쳐야 합니다. 남편을 위해서 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고, 남편을 위해서 도울 수 있으면, 도울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아내와 대화시간을 갖는 남편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30분의 시간을 내는 것을 “굉장한 희생”으로 생각하는 남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위한 시간이 곧 남편을 위한 시간이고, 아내가 살아야 남편도 살 수 있고, 아내가 기쁨을 만끽할 때 남편도 집에 들어오는 것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희생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봉사는 희생이 아니라 은혜요 축복임을 명심합시다!

은사대로 일하는 것도 희생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은사를 사용해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부르고 싶어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면서 큰 희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착각하고 있는 분입니다. 내가 찬양 부를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더 좋아하는 사람은 부르는 사람 자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희생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찬양대원으로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 일을 하면서 억울해 하면 안 됩니다. 때때로 처음에는 열심히 봉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혼자서 수고하는 것 같아 억울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분들에게 그러면 쉬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면 속으로는 대단히 섭섭해 하십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사용할 때, 삶에 기쁨이 오기 때문이지요.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은혜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을 잘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분이지, 우리들을 이용하고 이득을 얻으려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 것도 우리를 위하여 명하시는 것이고, 성경을 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들인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해서 하시는 말씀이고, 예배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고, 봉사를 하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감을 주시는 것도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녀들로서 희생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당장에 멀리 쫓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지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4-27). 술 마시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고, 손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아내와 대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고, 양보하고, 남편 뒷바라지를 해 주기 위해서 수고하고, 집안의 질서를 세우고, 비디오 보지 말고, 연속극 보지 말라는 것은 지혜롭게 살라고 권하는 것이지 희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지혜롭게 살라고 하시는 권고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미련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담배 피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무엇보다도 나와 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야 말로 희생이 아니라 은혜인 동시에 지혜인 것입니다. 아무리 옆집 여자가 돈을 물 쓰듯 하면서 놀고 자고 먹고 멋만 부리며 산다고 해도 조금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녀 교육 안 시키고 그 시간에 자신만의 인생을 즐기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똑 같은 것이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시키기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희생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사는 최고 최선의 삶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야말로 은혜를 깨닫고 은혜 가운데 기쁨과 감사로 사는 차원 높은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로써의 삶 속에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감안해 볼 때 기독교인들이라고 특별히 더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덜 고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신자의 고생은 가치 있는 고생이고, 불신자의 고생은 무의미한 고생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창세 이후, 지금까지 온 우주에서 희생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 이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나 때문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에게 나의 생애를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예수께 받은 은혜의 일부분을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은 희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소위 말하는 “희생”은 실질적으로는 큰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로써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 가운데 일부를 값없이 받았던 대로 값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즉 나의 희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여 받은 은혜를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 과거에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 양치기의 고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스스로 자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맹수들로부터 나발이라는 부자의 양 떼를 지켜 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즉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은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양 떼의 소유주였던 나발은 이런 다윗의 선행을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언제 너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삼상 25:21). 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보신 하나님께서는 열흘 정도 후에 나발을 치셔서 그의 생명을 취하여 가셨습니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설사 비록 내가 부탁한 것이 아니더라도, 은혜를 받았으면, 적어도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갚을 수 있으면 갚을 줄 알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해서 아깝게 생각하거나 희생한다고 생각하거나 억울해 하면 나발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즈음은 값없이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녀들을 교육시켜 달라는 부탁에도 부모님이 “그러면 제 인생은 뭐예요?”라고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 택함 받은 우리들은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는 희생이라는 말을 없애고, 은혜와 감사라는 말만 하면서 살아간다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더욱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2/10/2006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담임목사 최영호
www.sewoondol.org   www.deliverusensemble.com



출처: USA 아멘넷/ 공부합시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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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기억 속의 그대

                                              최송연

 

                      내 기억 속에 늘 아름다운 그대,

                      따뜻한 배려가 있는 마음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감사한 그대,

                         힘들 때 잡아 주던 따뜻한 그 손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불쌍한 그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부러운 그대,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 용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그대,

                           한없이 쏟아부어준 그 사랑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우고 싶은 그대,

                        내게 아픔을 준 그 모진 말들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안타까운 그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그대 하는 말이, 그대 행동이
                           너와 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임을...

                           사랑으로 수놓으며 예쁘게 살아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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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
    행복은 근사한 말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속 깊은데 숨어있는 진실이며 행동하는 양심 입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행복은 또 스스로 만족하는 데에 있습니다. 남보다 나은 점에서 행복을 구한다면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한 두 가지 나은 점은 있지만 열 가지 전부가 남보다 뛰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이란 남과 비교해서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
    옮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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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 그날, 부자세습에 분노했던 김일성대 학우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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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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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아 기억나니 주석궁 앞을 밤 새도록 거닐며 우린 북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대학청사에서 삐라를 뿌리고 투쟁의 불씨가 되겠다던 친구야
굶어 죽어가는 꽃제비를 보며 가슴치던 또 다른 친구야
어떻게든 살아만 있기를…
한국에 오니 사람들은 북한에서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더구나
하지만 그건 이름없이 스러진 숱한 북한의 반정부 투사들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
2대 세습도 못견뎌했던 우리인데 이젠 3대 세습이라니…
속으로는 도리질을 하며 겉으로는 충성맹세하는 슬픈 현실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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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주성하 기자가 의 옛 친구들에게 쓴 ‘회한의 편지’

이제는 우리가 헤어진 지 10년도 더 지났구나. 친구들, 아니 동지()들아.

오늘(2일) 아침 북한에서 3대 부자 세습이 공식 확인됐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너희 생각이 났다. 함께 뜻을 모으던 옛일들이 떠올라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운명에 새삼스레 더욱 가슴이 아팠다. 마침 4일은 중국 베이징(北京)대 학생들이 주축이 됐던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20주년이 되는 날이구나. 아마 우리의 고민도 그 무렵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A야. 시국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너에게 처음 던졌던 말을 기억하니? “넌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니”였어. 지금 고백하지만 난 그 말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 너를 3년 동안이나 지켜봤다. 북한에서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이런 말은 쉽지 않지. 너도 알다시피 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내 말이 국가보위부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최고 정치교육을 받고 있는 놈이 우리 정치제도에 의문을 품었다”는 죄목만으로 정치범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남쪽에서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봤다.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주입받은 복제인간들이 그 사실에 의문을 품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미국 영화야.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를 떠올렸어. 착한 너는 그때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나를 고발하지 않았지. 그 대신 내 생각을 돌리겠다고 무진 애를 썼지. “장군님을 믿고 따르면 좋은 시대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네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지 궁금하다. 당시 김일성대 인근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지. 속 터놓고 말할 곳을 찾던 우리는 지금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변한, 가로등이 환한 주석궁 앞 거리를 오가며 날이 새도록 우리 조국(북한)의 미래를 논했지. 그 헤아릴 수 없는 숱한 밤들….

굶주림에 피골상접해 숨져가는 동포들 모습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B야, 너는 어느 날 “이 사회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투쟁의 불씨가 되겠다”며 김일성대 2호 청사 22층에서 삐라(전단)를 뿌리고 분신 자결하겠다고 했어. 난 그때 밤새도록 너를 설득해야 했지. “무서워서 누가 네가 뿌린 삐라를 감히 주워볼 수 있겠니. 필요 없는 짓이다. 8촌까지 멸족당할 게 뻔한 여기서 가족을 먼저 생각하자. 북한이라는 수용소에서 헛된 죽음을 맞는 대신 밖으로 뛰쳐나가 수용소 사람들을 구출하는 투사가 되자”고 설득했었지.

그런데 결국 나 혼자 남한에 왔어. 너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이 자꾸 든다. 김일성대 출신이 처형되는 경우엔 주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며 공개총살이 아니라 비밀리에 처형된다고 들은 바 있어. 어떻게든 살아있길….

너를 생각하면 혼자 살아남은 자의 비애가 가슴을 찌른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대인 빅토르 프랑클 박사는 이렇게 말했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금서()를 잘 구해오던 C도 생각이 난다. 북한에 100부밖에 출판되지 않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틀 밤을 새우며 손으로 베끼면서 처음 접해보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매료됐던 때가 생각나. 우리는 자본주의도 꽤 괜찮은 사회라며 우리 조국의 사회주의가 갖는 모순에 대해 밤새워 토론했지. 일반인은 구경하기도 힘든 달러를 흔들어대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다니던 고위 간부들의 자식과 지방 어디서나 볼 수 있던 굶어 죽어가는 꽃제비들을 목격하고는 너는 가슴을 쳤지. 넌 “가족까지 버리며 목숨 바칠 용기는 없다”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조용히 체제에 순응해 사는 길을 택했었지.

그리고 D 동지. 엘리트 군인으로 10년을 바치고 대학에 왔었죠. 나이가 많아 우린 D 동지라고 불렀었죠. 내가 먼저 접근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D 동지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먼저 내게 물었죠. 당신의 현실 인식과 분석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졸업 후 최고위급 간부의 사위가 되어 출세의 길에 들어섰죠. 정운의 후계 추대를 계기로 북한 간부들이 충성 경쟁을 벌인다고 들었습니다. D 동지 역시 앞장서고 있나요? 늘 뛰어난 분이었으니깐.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됐을 지금은 가슴속에 과거의 고뇌를 묻고 있나요, 아니면 버리셨나요?

친구들아. 당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고뇌는 입으로는 ‘인민’이란 말을 달고 살면서 실제로는 사실상 봉건왕조인 정권이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답답함이었지. 그러면서 ‘사회주의가 과연 인민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냐’ 하는 고민을 했었다.

함께 고뇌했던 우리가 지금은 세 갈래 길로 갈려 걷고 있구나. 누구는 충성계층으로, 누구는 방관자로, 그리고 나는 반항의 길로…. 탈북을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난 늘 우리 마음속에 공통분모가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밤을 새우고 아침엔 씩씩하게 강의실에 올라가는 열혈청년이었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다면….

남한 사람들은 내게 “북한엔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니 세계 유일의 세습체제를 견디는 인민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겠지. 그런 질문들은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 바쳐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북한은 바보들이 사는 곳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을 때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단다. 북한 사람들이 흘린 피는 남한보다 100배는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수십만 명의 정치범과 체제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귀중한 목숨을 잃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그들의 희생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누구라도 북한에서 하루만 살아봐도 그런 질문은 할 수 없다. 남한 사람들은 광복 후 소련이 아닌 미국이 진주한 것에, 억울하게 숨지면 이를 써줄 수 있는 언론환경을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말할 권리는 한 번도 박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신이 분신해도 적어도 자신의 가족은 함께 몰살되지 않음에 감사해야 한다.

10여 년 전 우린 김일성 김정일 2대 세습에도 그토록 못 견뎌 했지. 그런데 지금 3대 세습이란다. 난 너희들에게 “3대 세습이 가능하냐”고 묻고 싶다. 누구나 머릿속에선 도리질하면서 겉으론 충성을 맹세하는 이 현실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너희는 보지 못하겠지. 북한에서 이 글을 볼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 대다수는 나의 김일성대 선후배들일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더구나 한국 언론까지 볼 수 있다면 3대 세습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두뇌까지 노동당에 맡기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평양에 돌아가는 날이면 이 글을 꼭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떤 고민을 함께 했었는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토론기를 다시 내가 몸담은 동아일보에 싣고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이미지 전체보기


주님은 나의 사랑
                         - 손영진 작사 곡


주님은 나의 사랑 주님은 나의 기쁨
주님은 나의 노래 주님 찬양합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 주님은 나의 기쁨
주님은 나의 노래 주님 찬양합니다
찬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 할렐루야 주님 찬양합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 주님은 나의 기쁨
주님은 나의 노래 주님 찬양합니다
찬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 할렐루야 주님 찬양합니다
찬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 할렐루야 주님 찬양합니다
찬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 할렐루야 주님 찬양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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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FOX NEWS 영상들은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황당한 일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위의 것들은
아예 법적으로 어떻게 미국이 하나님을 버리고 되려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결정했는지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이다

캐나다 미국 영국 등 서구 나라들의 현재 상태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법적으로 말 못하고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법적으로 말 못한다

곧 전세계 트렌드가 될것이다

성경은 이미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런일이 일어날것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주님은 곧 오신다


지금 예수님께 삶을 온전히 드리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더욱 어림도 없다

정말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태도를 정할 때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은 아직 우리가 하나님께로라도 돌아올수 있기는 하지만
곧 이 은혜의 때는 끝난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는 이제 그만두라

아직 할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돌아오라

기억하라

우리는 단지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 직전에 살고 있다

은혜의 때를 놓치지 말고
구원 받을 만 할때에 받으라


이웃 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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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에 관색(觀色) 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지도받는 무리들의 얼굴색을 살펴라 이다.
지도받는 무리들의 얼굴이 풀이 죽어있는가?
무겁고 침통한가?
밝고 생기가 도는가?
그들이 일일이 말을 못해도 얼굴색에는 나타나게 되어있으니 얼굴색을 잘 살펴서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지도자는 항상 잘못된 책임은 내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맹자는 이렇게 가르쳤다.
1.내가 사랑하는데도 친하게 되지 않으면 내 사랑을 반성하고(愛人不親 反其仁)
2.나는 예의로서 대하는데 답이 없으면 내 공경 심에 부족함이 없는지 반성하고(體人不答  反其敬)
3.다스리는 대로 다스림 받지 않으면 내 지혜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반성해보고(治人不答 反其智)
4.할일을 했었는데 바라는 대로 얻지 못했으며 모든 원인은 내게 있으니 나를 반성하라(行有不得皆反 求諸己)

잘못된 모든 원인은 지도자에게 있으니 잘 반성하고 고치면 모든 것이 전회 위복이 될 것이다.(퍼온 글)

안길중 목사님은 동작구에서 개척을 시작하여 중형교회로 성장하자 헐 뜻는 사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 일일이 꼬투리를 잡는 사람. 자기 주장대로 안 들어 준다고 대드는 사람, 목회 방침이 틀렸다는 사람, 심히 괴롭힘을 주는 사라들이 일기 시작하였다.내가 개척을 하였는데 저런 자들을 다 잘라버려도 목회 할 수 있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아니다 기도해 보아야지 하고 그는 기도원에 가서 이들을 어쩌면 좋습니까? 주제로 기도하는데 그들은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말이 교회를 위하여 잘못된 말이 아니다는 깨달음이 와서 교회로 돌아와 자신의 잘못을 사과 하고 그들의 요구를 다 수용하고 회개 하였더니 그렇게 즐거워하며 35년 목회하는데 그렇게 잘 도와주어 700여명의 교회로 성장시키고 원로 목사로 은퇴 하였다고 하였다.

백두산 천지 물 한 방울이 두만강이냐?  압록강이냐? 목회는 기로의 분기점이 있는데 이때가 목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성공과 실패는 여기에서 결정된다. 물 한 방울의 5m의 낙지점이 천리만리를 갈라 놓는다. 젊은 목회자들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신중 신중에 신중을 더하라.목회의 실패는 경솔의 결과이다.

출처: USA 아멘넷/ 장달윤 목사님


우리라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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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서로에게 말하고 생각할 때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16.jpg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 단어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면 나는 왠지 그 사람과 한층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에 푸근해집니다. 19.jpg

난로 같은 훈훈함이 느껴지는 단어 그 단어는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20.jpg

나는나 너라고 시작되는 말에서 보다 우리로 시작되는 말에 더 많은 애정을 느낍니다 31.jpg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온전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23.jpg

사람은 근본적으로 어깨와 어깨끼리 가슴과 가슴끼리 맞대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24.jpg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25.jpg

이 세상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맑고 아름다워지리라 믿어 봅니다. 26.jpg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 너라는 삭막한 말에 비한다면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겨운지를... ㅡ내 삶에 휴식이 되어주는 이야기 중에서ㅡ 28.jpg


♬ 흐르는곡/♬ 십자가 바라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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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 당한 자들과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과 7장]

이 세상은 이미 정죄되었고 불태우기 위하여 간수된바 되었습니다. 심판과 마지막날은 반드시 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사단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께서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천군천사가 환호하며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토록 소망하였던 그 날이 온 것입니다.

드디어 어린양이 인을 떼시기 시작합니다. 첫째 인을 떼시자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은 자가 흰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 탄 자가 나오는데 땅에서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합니다. 셋째 인을 떼시자 검은 말을 탄 자가 저울을 들고 등장합니다. 넷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을 탄 ‘사망’이라는 자가 나와 땅 사분의 일을 검과 흉년과 사망과 짐승으로 죽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처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네 마리의 말은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서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지진과 전쟁과 기근과 죽음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시자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로 인하여 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영혼들에게 친구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 죽임 당하는 자의 수가 차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죽음과 희생을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시며 진노를 쌓아 심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이 떠나가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자신들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참으로 무섭고 참혹한 정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입니다.

계시록 7장에 들어가면 땅을 완전히 뒤집어엎으려고 땅의 네 모퉁이에 선 천사들을 향하여 다른 천사 하나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서 9장에 먹 그릇을 차고 등장하여 살육하는 기계를 가진 여섯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인 맞은 자들의 숫자, 이스라엘 각지파에 만 이천 씩, 도합 십사만 사천의 숫자를 듣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찬양하며 모든 천국천사가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 천사는 ‘이 무리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해 줍니다.

이 ‘십사만 사천’은 참으로 분분한 해석과 논란을 불러오는 숫자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과 바로 뒤의 ‘아무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무리’가 같은 무리인가 다른 무리인가,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셀 수 없는 무리는 각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구원받은 무리인가....... 신천지라는 괴상한 이단이 있습니다. 이만희를 보혜사로 믿는 신천지의 한 신도가 이만희가 있는 한국이 바로 천국이며 이 ‘십사만사천’이 거의 찼고, 다 차면 신천지가 시작될 것이며, ‘십사만사천’에 들어가야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되어 자신의 부모형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이없었습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사용된 가장 큰 숫자의 용어는 ‘천’이었습니다. 아직 ‘백만’ 곧 ‘밀리언’이라는 용어가 없을 때입니다. 영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천(Ten Thousand)’, ‘백천(Hundred Thousand)' 식 아닙니까? 즉 ’천‘은 당시의 가장 큰 숫자이였고 열둘은 하나님의 충만한 숫자이므로 ’12천‘, ’144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엄청난 숫자라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숫자를 딱 정해놓고, 겨우 14만 4천명으로 제한해놓고 무슨 입학시험 보듯이 커트라인으로 잘라 구원하시는 분이시겠습니까?

그보다 저는 특히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나오는”은 영어로 ‘have come' 현재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피한 자들도 아니요 환난을 면한 자들도 아닙니다. ’환난에서 막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자들인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인정받은 자들이요 어린양의 보혈로 구별된 자들인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휴거’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를 몰다가, 비행기를 몰다가 운전사가, 비행사가 사라져버리고 환난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함께 전삼년반환난휴거설, 후삼년반환난휴거설도 있습니다. 하긴 어느 누가 그 무서운 환난을 당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 할 것이라(마24:22)는 무서운 환난을 당하지 않고 들림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6장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들, 7장에서는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자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온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서 마치 용광로에서 정련된 금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한 욥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아시고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심판과 환난을 거쳐서 어린양의 피에 적신 흰옷 입은 무리를 이끌어내시는 것은 만일 심판과 환난이 없다면 가라지와 쭉정이와 찌끼까지도 분리되지 않고 함께 거두어질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판과 환난이 두렵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주를 믿는 당신은 염려할 것 없습니다. 철은 용광로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금은 아무리 단련하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금을 찌꺼기와 함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가진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이고 참사랑이라면, 당신이 어린양의 피에 씻기어 있다면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단 한 방울의 귀한 어린양의 피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환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환난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목을 베고 사자에게 던지고 기름가마에 던지는 개인적인 환난이나 믿음의 증거로 인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는 일은 어느 세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환난은 있습니다. 풍요와 안일, 회의와 증오, 유혹과 타락 같은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시험은 매일같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믿음 때문에 핍박당하고, 손해보고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혼돈의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기기 힘 드는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이 어두운 세상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임당하며 환난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닥친 환난을 믿음으로, 사랑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이겨내십시오. 휴거로 면하려 하지 마십시오. 담대하게 믿음으로 부딪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임 당하거나(6장), 큰 환난에서 나오거나(7장),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할 것입니다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대답: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가장 난해한 것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도 온전히 이해하여 설명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인간보다 훨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아버지도 하나님, 예수님도 하나님,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가 진실이 아니라거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이 용어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한 존재로서 한 분의 하나님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서술할 때 쓰였습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세 명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유일한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지만, 이 용어 사용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공존하시는 세 인격체로 구성된 한 분의 하나님”보다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니까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개념이 성경에 나와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럼 몇 성경 구절을 살펴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 나가 봅니다.

1. 오직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2. 삼위일체는 세 인격으로 구성됩니다 (창세기 1:1, 26; 3:22; 11:7; 이사야 6:8; 48:16; 61:1; 마태복음 3:16-17; 28:19; 고린도후서 13:14). 구약의 구절에 있는 히브리어를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1에는 복수 명사 “엘로힘”이 쓰였습니다. 창세기 1:26; 3:22; 11:7그리고 이사야 6:8에는 복수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과 “우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둘 이상을 가르킵니다. 영어는 오직 두 가지 형태, 단수와 복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쌍은 2개 만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세 형태가 있습니다. 즉 단수, 쌍, 그리고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의 쌍은 눈, 귀, 그리고 손과 같이 쌍을 가진 것에만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과 “우리”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둘 보다 많은 즉 셋 이상이 되어져야 합니다 (천부, 아들, 성령).

이사야 48:16 과 61:1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61:1을 누가복음 4:14-19과 비교하여 보세요. 마태복음 3:16-17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서술합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천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할 때, 성령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 와 고린도후서 13:14은 삼위일체 가운데 구별되는 세 인격체를 말하는 예가 됩니다.

3. 또 다른 많은 구절들도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구별합니다. 구약에서 “주 (LORD)” 는 “주 (Lord)” 와 구별됩니다 (창세기 19:24; 호세아 1:4). 전자의 주는 “아들”을 소유합니다 (시편 2:7, 12; 잠언 30:2-4). 영도 또한 “주 (LORD, 민수기 27:18)” 와 “하나님 (God, 시편 51: 10-12)” 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성자 예수님도 천부 아버지 (시편45:6-7; 히브리서 1:8-9)와 구별됩니다. 신약 요한복음 14:16-17에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하나님 아버지를 따로 언급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나 성령님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로 언급한 또 다른 구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계시는 다른 인격체-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각 인격체는 하나님 되십니다 (요한복음 6:27; 로마서 1:7; 베드로전서 1:2).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 14; 로마서 9:5;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1:8; 요한일서 5:20).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5:3-4; 고린도전서 3:16).

5. 삼위일체 내 상호 종속, 의존: 성경에서 보여지듯이 성령은 아버지께 속하고,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께 속합니다. 이 삼위일체 내의 관계는 각 인격의 독립된 신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아들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20:21; 요한일서 4:14, 그리고 성령에 관하여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세요.

6. 삼위일체 각 인격체의 역할: 하나님 아버지는 이하 열거한 일들의 궁극적인 자원 혹은 원천이 되십니다. 가) 우주 (고린도전서 8:6; 요한계시록 4:11); 나) 계시 (요한계시록 1:1); 3) 구원 (요한복음 3:16-17); 4)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과업 (요한복음 5:17; 14:10).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개시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하여서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 창조와 우주 경영 (고린도전서 8:6; 요한복음1:3; 골로새서 1:16-17). 나) 계시 (요한복음 1:1, 16:12-15; 마태복음 11:27; 요한계시록 1:1). 다) 구원 (고린도후서 5:19;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4:42). 아버지는 이 모든 일들을 그의 매개체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또 성령을 통하여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창조와 우주 경영 (창세기 1:2; 욥 26:13; 시편 104:30). 나) 계시 (요한복음 16:12-15; 에베소서 3:5; 베드로후서 1:21). 다) 구원 (요한복음 3:6; 디도서 3:5; 베드로전서 1:2). 라) 예수님의 업적 (이사야 61:1; 사도행전 10:38). 이렇게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내셨습니다.

사실 어떤 뛰어난 묘사도 삼위일체를 적당히 표현해 내기 힘듭니다. 달걀을 예로 들자면, 달걀 껍질, 흰자, 노란자는 달걀의 부분들이지 달걀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의 한 부분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또 물로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 증기, 얼음은 물의 다른 형체일 뿐이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하나님의 단지 다른 형체가 아니라, 각각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 모든 비유가 삼위일체의 모양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적으로 합당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유한한 비유로 온전히 묘사될 수 있겠습니까?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사실에 초점을 두도록 합니다.” (로마서 11:33-34)

What does the Bible teach about the Trinity?
http://www.gotquestions.org/Trinity-Bible.html



"The term "Godhead" is found three times in the King James Version: Acts 17:29; Romans 1:20; Colossians 2:9. Three different Greek words are used, but each one means “divinity.” It is important for us to understand from the outset that God exists in three Persons. The concept of the Godhead is that God is one yet God is three. How can this be?"

흠정역의 신격(Godhead)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What is the Godhead?"
http://www.gotquestions.org/Godhead.html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 JuNick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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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님이 투신한 것 같습니다” 듣는 순간 주위가 빙글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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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을 잃은 뒤 자살자유가족 상담사로 나선 박인순 한국자살자유가족대표(왼쪽)가 상담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그는 “자살자 유가족 역시 함께 밖으로 나와야 살 수 있다”며 “혼자서는 그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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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똑같은 꿈이다. 대여섯 살 된 아들을 등에 업고 있다. 아이가 제법 무거워 포대기를 자꾸 추스른다. 눈을 뜬 아이가 “엄마, 왜 자꾸 깨워”라며 투정을 부린다. 다시 업어주니 아이는 쌔근쌔근 잠이 든다. 아이 얼굴에 손을 뻗어 본다. 보드라운 살결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그 순간 꿈이 깬다. 애가 닳아 숨이 가빠진다. 눈가도, 베개도 촉촉이 젖어 있다. 2009년 8월 3일 새벽. ‘딩동!’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아드님이 ○○○ 씨 맞나요?” “네, 맞는데요.” “집에 계시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이 방문을 열어봤다.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도, 거실에도 흔적이 없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경찰은 8층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는 하얀 천이 보였다. 》

○ 못난 부모 탓에 우울증 앓던 외아들이…

“아드님이 투신하신 것 같습니다.”

주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하얀 천을 들춰 보았다.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시신은 깨끗했다. 흘러내린 코피 한 줄이 땅으로 떨어졌을 때의 충격을 증명할 뿐이었다. 혹시 그냥 잠든 것 아닌가. “○○야!” 흔들어 깨워 봤으나 대답이 없었다.

전날은 바로 엄마의 생일이었다. 조촐한 생일파티가 끝난 뒤 아들은 “엄마, 우리 영화 보러 가요. 매트릭스요. 부활의 메시지가 담겼다던데요”라고 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내일 가자.”

마지막 대화였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혹시 영화를 봤더라면 소중한 아이는 엄마 곁에 있었을까.

“CCTV를 보시겠습니까?”

차마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장례식은 하루 만에 끝났다. 시댁에서 흉사(凶事)니 서두르자고 했다. 미처 슬픔을 느낄 틈도 없었다. 스물두 살 외아들은 그렇게 곁을 떠났다. 박인순 씨(58)는 그 후 아이 업어주는 꿈을 자주 꾼다.

종종 엄마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자던 자상한 아들이었다. 교보문고에서 두세 시간은 거뜬히 앉아 있다 오는 책벌레이기도 했다. 변변한 과외 한번 못 시켰지만 명문대에 진학했다. 영리하고 따뜻한 아이였다. 모진 결심을 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우울증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자살을 기도했다. 팔목에는 칼로 그은 흉터가 남았다. 상담을 받으면 호전되다가 상담이 끝나면 다시 나빠졌다. 어린 나이에 정신과를 다니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극복해 낼 것이란 믿음도 컸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별거를 시작했다.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수치심, 한편으로는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까지 3년이 걸렸다. 엄마는 자신의 상처가 너무 아파 미처 아이의 상처를 돌보지 못했다.

동네에 별거한다는 소문이 나 이사를 갔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아이는 부산 아빠 집으로 보내졌다가 서울 엄마 집으로 오가기를 반복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섯 번 이사했다.

“아이가 산 날이 8000일 정도예요. 뽑았다, 심었다, 뽑았다, 심었다…. 한 번도 뿌리를 못 내리고 살았던 거예요. 뿌리가 없으니 시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 그날 이후 살아도 산 게 아닌 死線의 날들

이혼한 뒤 양육비 한 푼 못 받았다. 당장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막막했다. 다행히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신학대에도 진학했다. 몰두할 일이 있어야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길이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루 3, 4시간 자면서 버텼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가 아이에게 저녁을 먹였다. 아침 일찍 학교에 보낸 뒤 집을 나왔다. 5년 넘게 아이는 혼자 지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 아이의 병은 이미 깊어졌다. 군에 입대했다가 사흘 만에 되돌아왔다. 팔목의 상처를 들켰고 우울증 진단이 내려졌다. 대학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마다 징병검사를 다시 받았다. 완치 판정을 받아 입대하든지, 면제 판정을 받든지 해야 하는데 2년간 입대만 자꾸 미뤄졌다. 학교를 휴학한 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 나 이제 좋아진 것 같아. 평생 약을 먹을 순 없잖아요.”

약을 끊은 지 두 달쯤 지났을까. 아이는 집 앞에서 뛰어내렸다. 우울증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 줄 몰랐다. 꾸준히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가슴을 쳤다. 병의 원인이 부부 갈등은 아니었을까 싶어 또 가슴을 쳤다. 장례식장에서 아이 아버지를 만났다. 회한으로 흐느끼는 그를 보고 처음으로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비였고 박 씨는 어미일 뿐이었다.

가족의 죽음.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슬픔이다. 그러나 자살은 여느 죽음과 다르다. 고통의 원인이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 왜 나를 버렸을까 하는 분노, 떳떳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수치심 등 온갖 감정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먼저 떠난 고인을 따라가는 가족도 많다.

“1년간 누워서 울기만 했어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죠. 채집당한 곤충이 산 채로 핀에 꽂혀 있는 듯한 아픔이었어요. 아무도 이 핀을 뽑아주지 못하죠.”

먹고 자는 것조차 잊었다. 무기력증에 빠졌다. 아들이 뛰어내릴 때 느꼈을 두려움부터 몸이 부서지는 통증까지 하나하나 느껴지자 숨이 조여 왔다. “오죽했으면…” 하는 주위의 차가운 시선. 따뜻한 시선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불효했다.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위로의 말은 비수가 돼 꽂혔다. 자연스럽게 가족도, 친구도 멀어졌다. 화장을 하는 것도, 옷을 차려 입는 것도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TV를 보며 웃다가도 ‘내가 이래도 되나’ 싶어 순식간에 마음이 어두워진다. 박 씨는 남 앞에서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을 ‘가면 쓴다’고 표현한다.

아들의 1주기. 아이가 떠난 날보다 고통스러웠다.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일이면서 아들의 기일인 날. 그리고 몸에서 혹을 발견한 날이기도 했다. 림프샘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덤덤했다.

“간단한 수술이면 됩니다.”

의사의 말에 ‘차라리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외쳤다.

○ 무너지기 직전 만난 동병상련 사람들

그 즈음부터 ‘생명의 전화’ 자살자 유가족 자조모임에 참여했다. 7주간 매주 자살 유가족끼리 만나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주변에서는 다들 심장마비인 줄 알지만….” “결국 아내가 딸을 따라갔어요.”

이런 말들이 오갔지만 불편하거나 숨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 편안했다. 그냥 손을 마주잡고 안아주기만 해도 위로가 됐다. 심리상담보다 더 힘이 됐다. 상담소에 가면 심리상담사가 오히려 당황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같은 프로그램을 세 번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자살이 일어나면 그 사람의 죽음에만 관심이 쏠려요. 남은 사람의 삶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십수 년이 지나 고인을 따라가는 사람도 많죠.”

박 씨는 지난해 4월부터 직접 유가족 상담사로 나섰다. 일주일에 사흘 동안 반나절씩 ‘생명의 전화’에서 전화 상담을 한다. 유가족 모임인 한국자살자유가족대표도 맡고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회복이 가장 더디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마음을 알까. 지난해 A대학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그 가운데 한 아이의 엄마가 흐느끼며 전화를 걸어왔다.

“외동딸이 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픔을 감추려는 남편은 ‘그만하지’라며 호통을 친다고 했다. 아내는 벌써 잊었나 싶어 서러워진다. 항해하던 배가 부서진 것과 같다. 남은 가족은 난파된 배 조각에 매달려 위태위태하다.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가 너무 원망스러워요.”

아내를 잃은 남편은 갑자기 생계와 육아라는 현실적인 짐을 떠안게 된다. 가족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 ‘너 때문에 내 아이가 갔다’는 처가의 비난에 가족과도 멀어진다. 수화기 넘어 “아이를 씻기고 먹이는 일조차 잘 안 돼요.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마음에 ‘주홍글씨’가 새겨진 사람들이다. 특히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한다. 상담 이후 꾸준히 연락해 오는 유가족이 80명 정도다. 하루 2, 3통씩 유가족이 전화를 걸어온다.

“폭우가 쏟아진 뒤 물에 잠긴 길을 건너봤어요?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허리를 감고 걸어갑니다. 힘들지만 유가족 역시 함께 밖으로 나와야 삽니다. 혼자서는 못 견딥니다.”

○ 그들을 살리며 살아야 할 이유 찾았다

자살 유가족에 대한 시선도 바뀌었으면 한다. 한마디, 한마디 눈물을 꾹꾹 눌러가며 기자에게 어렵게 속내를 털어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자살 유가족은 대표적인 자살 고위험군. 예방이 필요하지만 상담비용이 높고 정보가 부족해 방치되는 사례가 많다. 자살이 발생했을 때 병원, 경찰서 등이 유가족을 자조모임에 바로 연결해 주면 이차적인 사고를 막을 수 있다.

박 씨는 접었던 공부를 3월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끼리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어 사회복지학을 공부한다. 아이가 못다 이룬 꿈이기도 하다.

오늘 밤에도 아이를 업어주는 꿈을 꿀지 모른다. 꿈에서라도 다시 한 번 아들을 만져볼 수 있다면…. 아이에게 하고픈 이야기도 있다.

‘네가 엄마에게 남겨준 살아야 할 이유를 이제야 찾았다고….’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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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쉼표" 가 주는 여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보고도
      살짝 웃어 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번 더 뒤돌아 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잠시 쉬임을 가지며
        깊은 호흡을 한번 해보십시오
        머리가 상쾌해지고
            가슴이 시원해 질 것입니다.
              잠시 쉬면서
              미루어 놓았던 자신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여행을 한다던가
                모처럼 보고픈 친구를 찾아간다던가...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좋은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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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심을 잃지 않는 지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그리고 셋째는 뒷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입니다.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초심에서 열심히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첫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배우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견습생이 품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동심입니다.
                피카소는 동심을 가꾸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초심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반기련의 위력으로 기독교는 반드시 박멸되고, x 집은 문닫고, x 먹(목사)은 산업현장에서 땀을 흘리게 되며, x 독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내년도(2011년도) 통계청에서 전국인구센서스를 하게 되는데, 내년도까지 기독교인구는 적어도 10-20% 이상 줄 것으로 저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10-20%는 곧 x 독교가 망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입니다. )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 문구는 자신들의 혁혁한 공로로 우리 기독교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자랑하느라 신바람이 난 어느 반기련 인사가 그의 게시판에 올려놓은 황당한 발언 중에서 가장 mild한 문장을 카피해 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란 긴 세월을 자랑하며 내려오지만, 정서는 유교 사상과 샤머니즘 사상이 뼛속 깊이 파고든, 그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는 턱없이 미련하고 패역한 민족이었을 뿐이다. 샤머니즘에 물든 우리 조상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신(神)으로 간주하여 거기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recognized)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때가 되어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보수신앙은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우리 땅에 소개했으며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먼저 받아들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알지 못하여 망해가는 민족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은 신앙의 보수를 부르짖었고, 새벽마다 울부짖는 눈물의 기도가 방방곡곡 울려 퍼졌으며 깨끗하고 청결한 삶을 몸소 실천실행함으로써 성령의 사람이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도 모든 기독교 역사가 지닌 공통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피 흘린 발자취’ 위에 건축이 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분들의 눈물 어린 기도로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새벽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선교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는 나라, 통계를 보면, 개신교인 숫자만 전체 국민의 21.6%(2009 년)가 되기까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랴, 비행기를 탄 채 밤하늘에서 잠시 내려다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십자가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 이토록 훌륭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그 찬란한 신앙의 업적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으로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덕스러운 향기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닮은 신실한 사람들’이란 명예로움을 향기처럼 흩날리던 멋진 공동체였으나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x 독교’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많은 지각있는 성도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다. 이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돌아 보며 문제를 파악하고 조율(調律)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이토록 혼란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심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지켜 나가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치중하는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이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도 같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는 2천 년이라는 긴 역사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성경을 기초로 다듬고 다듬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며,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의 무수한 논쟁을 거쳐나오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긍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을 받은 위대한 산물이요, 보배로운 유산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개인이 자신의 입맛대로 새로운 자가신학을 양산(量産)해 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급히 조율(調律)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많지만 우선 몇 가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교는 정(靜)적이요, 기독교는 동(動)적이다.

                1. 예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
                성경을 보면 세 초부터 세 말까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동(動)적인 하나님이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하셨다. 병자를 고치기도 하셨으며, 잃은 영혼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하셨고, 각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의 일을 감당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지금까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일하시는 분, 동(動)적인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요 8 : 29)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의 사역 시작은 파송(보내) 하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많은 무리 중, 70인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이 ‘각 동네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셨다. (눅 10 :1- )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지상명령)도 역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 :19)...!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희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세상으로 가라.” 하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佛敎, Buddhism)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 없어 확실히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잠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른 종파와 매한가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라고 보겠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니 그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고행이요, 신(神)의 경지를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니, 도를 닦으며, 참선 (參禪)도 하고, 좌선 (坐禪)도 하고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앉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성도는 참선(參禪)이나 좌선(坐禪)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도를 닦아야 하는, 정(靜)적인 불교(佛敎)의 불자(佛者)들이 아니라 그분(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역동(力動)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이런 윈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닫고 알기만 한다면 하루는 24시간 1년이면 365일을 가만히 앉아서 찬양과 기도만 하고 들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그것이 신탁(神託, oracle)이건, 예언이건 간에, 처음부터 성경적 개념이 아니며, 이치에 맞지도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면 ‘주께서 가라시면 세상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마 28 : 16 - 20)

                구약 성경에 느헤미야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삽을 들어 예루살렘 성곽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했다. 느헤미야는 일하는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느3: 15-23 참조).

                3.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정(靜)적이어야 할 불교는 세상으로 내려와 동(動)적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반대로 가장 역동(力動)적이어야 할 기독교는 정(靜)적이 되어야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비우고 깊이 기도에 착념하면 하나님의 심장까지 들락날락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 종교에서 도입한 ‘관상기도’의 현주소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12시간, 1년이면 365일을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만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생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좋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명령은 “세상으로 나가라!”하는 것인데, 언제 세상으로 나가서 언제 전도할 수 있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성도이고, 그럴 수 있는 여건이 허락지 않는 성도나 목회자들은 매일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그들을 흠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듯, 영의 세계에서도 상하(上下), 우열(優劣)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動)적이어야 마땅할 기독교가 정(靜)적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며, 변질한 사례일 뿐이다. 모두 욕심을 따라 변질시킨 것이다. 우리는 돌이켜야 산다. 아직도 늦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느 특정 구절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말씀 속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하고 날마다 나의 신앙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조율(調律)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 :6-8)



                By: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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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다시 우주물리학 앞에 선다.

                우리는 우주여행을 거쳐 인체와 생명의 신비, 그리고 진화론의 문제, 나아가 에너지와 원자력까지 살펴보았다. (대장쟁이의 과거이력과 넋두리까지......)

                특히 생명과 생명체가 결코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생명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으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결코 과학으로 밝혀낼 수 없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생명체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창조주의 창조주이심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를 지으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으로도 창조주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들, 곧 물질을 바탕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궁극적으로 모든 물질과 모든 존재의 기원의 문제다.
                우주의 모든 물질, 모든 에너지, 모든 현상의 근원의 문제다.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에너지, 모든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창조주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부터 출발하여 시간과 공간의 문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왜 시간과 공간인가?
                만일 시간과 공간이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라면 창조주도 어쩔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속하여 시간과 공간의 피조물(우연히 생겨났든 스스로 존재하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스스로 존재하는 (I am who I am)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신, 곧 창조주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를 있게 하는 시간과 공간이 창조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창조주는 시간과 공간을 지으셨는가?
                과연 창조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시간과 공간이 창조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인가?

                그래서 창조주의 창조에 관한 과학자적인 궁구(窮究)는 결국 우주물리학 앞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아득한 우주물리학 앞에 선다.
                인간의 이 조그만 머리와 인식의 한계로는 결코 헤아려볼 수 없다 할지라도......



                고전물리학은 아이작 뉴턴으로부터 시작된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은 1705년 앤 여왕으로부터 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8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국가와 대중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하였으며, F=ma 로 알려진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자연현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설명, 해석하는 고전물리학의 장을 열었다.

                뉴턴의 운동 제2법칙으로 불리는 F=ma 공식은 관성의 법칙으로도 설명된다.
                어떤 물체의 상태, 곧 속도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으면 그대로 지속된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으면 물체는 정지상태를 지속하거나 직선운동을 그대로 지속한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불변으로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러한 뉴턴의 물리학법칙은 자연계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풀어내는 궁극적인 진리로 믿어졌다.
                그러나 X선과 방사선이 발견되고 원자의 구조가 밝혀지고 난 뒤부터 전자기와 원자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면서 현대물리학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현대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인 상대론과 미시세계의 자연법칙인 양자론을 모두 포함하는 이름이다. 상대론은 아인슈타인이 수립하였지만 양자론은 보어, 하이젠베르그, 플랑크, 슈레딩거, 디락 등 수많은 과학자들의 공동노력과 발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역학과 전자기학은 쿨롱, 가우스, 옴, 암페어, 비올사발, 키르히호프, 패러데이, 맥스웰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법칙들과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그리고 빛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이미 앞서 이야기 나눈 바와 같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함께 가지는 빛의 신비를 파헤쳐가던 과학자들은 광속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문제와 빛의 관계, 즉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빛과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이란 세상의 모든 것이 항구불변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움직임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빛과 운동속도에 따라 시간과 길이가 달라지는 것을 나타내고 운동량과 에너지의 관계에서 질량과 에너지는 결국 같다는 유명한 공식  E = mc²를 증명해낸다.

                1. 속도에 따라 시간차가 난다. (동시(同時)의 상대성)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버스와 전등이 사용된다.
                버스의 한 가운데 천정에 달린 전등이 ‘반짝’ 했다고 치자. 버스가 정지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 빛이 버스 앞쪽이나 뒤쪽에 도착하는 시간은 버스 안에 있는 사람에게나 버스 밖에 있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관측될 것이다.
                그러나 버스가 달리고 있다면 달라진다.
                만일 그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반짝’ 하는 빛도 버스와 함께 달리므로 앞에나 뒤에나 동시에 도착한 것으로 관측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버스 밖에 있는 사람이 관측한다면 빛이 버스의 뒤에는 빨리 도착하고 버스의 앞에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은 바꾸어서 말한다면 빛이 일정한 거리를 달리면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간=빛이 달린 거리’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초는 빛이 30만 킬로미터를 진행한 시간이다.
                그런데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빛이 더 먼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만일 버스가 매우 빨라서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깝다고 치자.
                그러면 천정에서 ‘반짝’ 한 그 빛이 버스의 앞에 도착하려면 버스의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한참을 달려야 할 것이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나 버스 밖에서 관측하는 사람이 볼 때는 빛이 한참을 따라가서야 버스의 앞면에 도착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버스 안에서 느끼는 시간은 짧지만 버스 밖에서 관측한 시간은 길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버스의 속도가 빠를수록 그 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만일 버스가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빛이 버스를 따라잡지 못 하고 같이 달리게 되고 이것은 시간이 정지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다른 설명으로, KTX 열차 안이라고 생각해보자.
                대장쟁이가 농구공을 열차바닥에 튕겼다고 치자.
                열차가 정지상태라면 농구공이 움직인 거리는 아래위로 튕긴 거리다.
                1초 사이에 농구공은 튀었다 떨어지는 약 2미터의 거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열차가 고속으로 주행중이라면 열차 밖에서 보는 사람이 볼 때 농구공은 엄청난 거리를 날아간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여기에서 농구공이 빛이라고 치고 그 빛이 달린 거리가 시간이라고 쳐보자.
                달리는 열차 안에 있는 사람이 느끼기에는 똑같이 농구공이 한 번 튀었다가 떨어졌을 뿐인데 농구공은 엄청난 거리를 달린 것이다.
                즉 엄청난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이 관계를 간단한 삼각형 그림으로 그려서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한 삼각함수로 풀어내면 결국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삼각형의 밑변이 무한히 길어지면, 즉 속도가 빛의 속도에 이르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계산이 된다.
                그리고 이 계산공식에서 (수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제곱근공식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약간 복잡하므로 생략한다. )  E = mc² 라는 결과가 도출된다.

                2. 질량의 에너지변환

                자, 앞에서 말한 대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E = mc² 공식이 과연 실제로 증명되는가?
                빛의 속도와 시간의 관계를 가지고 도출한 이 공식이 실제 물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좀 엉뚱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 않은가?
                만일 이 공식이 들어맞는다면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되고, 만일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된다면 그것은 물질의 질량에다 광속의 제곱을 곱하는 에너지가 나온다는 계산이 되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를 들어 1 그램의 물질이 사라지면 그 물질을 광속 곱하기 광속의 거리로 옮기는 일만큼의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1그램의 질량이 소멸되면 그 1그램을 30만 곱하기 30만 킬로미터, 즉 900억 킬로미터, 곧 지구에서 명왕성까지의 거리의 15배의 거리에까지 옮겨놓을 만큼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핵폭탄(원자력발전도 마찬가지이지만)은 우라늄이나 풀로토늄 같은 물질이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바뀌면서 질량이 바뀔 때, 그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맨해튼 프로젝트로 알려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조차 과연 물질이 소멸될 때 E = mc² 만큼의 에너지가 나올 것인지에 대하여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였고 실제로 뉴멕시코 사막에서 이루어진 핵폭탄 실험을 보고서야 그 엄청난 결과에 놀랐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발견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혹한 파괴가 아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먼저 쓰여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속)

                3.목자의 정신

                 

                양들을 안다.

                The Leadership Style of Jesus의 저자 마이클 유셒(Michael Youssef)은 “양들을 앎”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체험 사례를 말하고 있다.

                 

                나는 방금 큰 은행의 은행장인 봅 구이돈(Bob Guyton)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였다. 우리는 그 은행의 귀빈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즐비한 사무실들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은행가는 그 사무실에 있는 한 일선 여직원과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고 있는 그녀의 남편의 안부를 물으면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후에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에 그는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직원에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행 현관으로 나와서 그는 거기에 있는 경비원의 이름을 부르고 그 경비원의 아내의 안부까지도 또한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서 물어보았다. 그 은행에는 수백명이 근무하고 있을 것인데도 최고 책임자인 그 은행장은 모든 직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봅이 일종의 “선한 목자”라고 생각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마이클 유셒은 또 다른 체험을 말한다.

                 

                어느 주일날 나는 한 유명한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후에 그 교회의 목사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모든 교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밝은 미소를 띤채 “안녕히 가세요”하며 정성껏 인사를 나누었다. 그 목사는 최소한 열번도 더 상대방이 미처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아, 그거 참 잘되었군요”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똑 같은 미소를 띠고 똑 같은 말을 하고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 중에 한 늙은 부인이 그 목사에게 다가가자, 그는 “오늘도 잘 지내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슬픈 모습을 한 이 작은 부인은 “남편이 목요일 밤중에 갑자기 아파서 겨우 앰블런스를 불렀어요. 그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습니다만...”하고 급하게 대꾸했다. “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뵙게 되어서 다행입니다.”라고 그 목사는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언제나 하시는 일에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은 즉시 다음 사람에게 향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나는 그가 너무나도 경솔히 행동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 부인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2천명이 넘는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많은 인원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그 목사가 교인 개개인을 다 알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이야기한 은행장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고 그 교회를 나왔다. 은행장은 그의 양들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의 양들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이 그는 그들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리더는 그의 양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이름을 아는 것 이상으로 훨씬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 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이 요구되어진다. 사랑이 없는 목자는 양들을 등록되어진 숫자로, 명부에 기록된 이름으로, 인건비의 계산 대상으로, 자랑할 만한 통계숫자로만 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리더십은 통계 숫자와는 거리가 먼 유형이다. 그 분이 양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며 또한 “나는 나의 백성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양을 모두 사랑하면서 동시에 개별적으로 사랑하신다. 그 분은 무리의 각 개인을 알기 때문에 그 무리의 전체를 아신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자신의 안전 보다도 양들의 안전을 더 중요시 하였다. 구약성서를 보면 다윗은 사자가 자기의 양떼를 공격하였을 때 맨손으로 사자와 싸워서 구해내었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양들을 먼저 생각한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을 것을 예언하면서 스가랴서 13:7절을 인용하셨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마26:31) 역설적이지만 선한 목자를 침으로써 그의 양들은 무사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기의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이상의 예수님의 리더십 스타일에서 우리는 또 다른 원칙을 찾을 수 있다.

                 

                원칙3 :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안다. 좋은 지도자는 추종자, 부하들을 안다.

                                                 

                                                                                                                 <JS 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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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가?


                하루 종일 매춘부처럼

                육신적이고 세상적으로 살다가
                한밤중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기도드릴 수 있을까?
                죄악 속에서 사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명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A. W. Tozer / 성령님 36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5)


                깊은 거룩을 갈망하는 감정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더 불안해질 것이다. 죄를 멀리할수록 죄로부터 떨어지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고 또한 아직도 죄짓기를 좋아하는 자신에 대하여 더욱 슬퍼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것도 미래의 영광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가 들어갈 천국에서는 단지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거룩의 최고점도 그들이 더욱더 갈망하는 거룩의 추구를 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위의 것을 향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갈망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3:13-15)

                그러면 “어떻게 영적 기쁨이 가져다주는 만족감과 끊임없는 추구가 서로 일치하겠는가?”라고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어떠한 불일치도 없다. 영적 기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영혼을 만족시킨다.

                첫째, 영적 기쁨은 인간의 본성과 영혼의 요구에 완벽하게 적응한다. 영적 만족을 맛본 사람은 심오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결코 그 맛에 싫증을 내지 않으며,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영적 기쁨을 한번 맛본 사람이 결코 같은 돛� 기쁨을 얻기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둘째, 영적 기쁨은 우리를 우리의 기대에 따라 살게 한다. 높은 갈망은 높은 기대를 낳는다. 그렇게도 갈망했던 세상 기쁨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영적 기쁨은 절대 그렇지 않다. 영적 기쁨은 항상 우리의 기대에 따라 우리의 삶을 살도록 한다.

                셋째, 영적 기쁨은 우리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족의 한도내에서 우리를 만족시킨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는 그 범위의 한도를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만약에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만큼의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 기쁨은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 영혼을 만족시킨다. 이는 우리의 깊은 요구를 충족시키고 우리의 기대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며 또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우리에게 채워준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적 기쁨이 완전해질 때까지 우리가 더욱 더 목말라 하는 것과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

                이것은 세상의 거짓 종교가 주는 기쁨과는 차원이 틀린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갈 것을 두려워할 때 그는 영적 빛을 보기를 원하거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기를 원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갈망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거짓 경험이 그로 하여금 구원받았다고 느끼도록 만들어 그를 속일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사실에 만족을 느끼며 안주할 것이다. 만약 그가 경험한 것이 아주 강렬한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거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는다. 사실 성경은 진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을 찾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69:32, 70:4).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변화 받은 후부터 하나님을 찾고 갈망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변화를 받아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선한 싸움이나, 정사와 권세들에 대해 씨름하는 것이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나, 항상 기도하는 것이나, 또는 늘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변화 받기 전에 마치 이러한 모든 일들을 이미 경험한 것처럼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모든 일이 평화스럽게 쉽게 풀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비성경적인 것으로 잘못된 일이다.

                물론 위선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며 또한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어떤 영적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이기적인 확신을 구하기 위하여 보다 나은 영적 경험을 갈망하며, 또한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다 더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어떤 갈망을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흉내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을 갈망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 또는 죽음과 천국을 경험하는 것, 이런 것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표징이 아니다. 최선의 표징은 보다 더 거룩한 마음을 품고 보다 더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것이다. 

                출처: 양무리마을/ grace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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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이런일이] ‘금시계’ 삼킨 물고기 하와이서 잡혀~!

                2009년 6월 9일 오전 9:24공개조회수 206428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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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금시계가 발견되는 동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미국 하와이에 사는 커트 캐리쉬가 지난 3일(현지시간) 카우와이 섬 포트 알렌 해변에서 범상치 않은 물고기를 잡았다고 AP 등 해외 언론이 보도했다.

                친구들과 함께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던 캐리쉬는 유난히 어색하게 헤엄치는 하와이산 노미 ‘니누’(Nenue)를 발견했다. 몸길이 25cm 가량인 니누는 움직임이 다른 물고기들에 비해 훨씬 느릴 뿐 아니라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이 있는 해변 쪽으로 헤엄쳐 왔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캐리쉬는 방망이를 들고 허리 깊이의 물에 뛰어들어 손쉽게 물고기를 손에 넣었다. 잡은 뒤 확인하니 물고기의 배가 이상하게 불룩했지만 그는 ‘그냥 살이 통통하게 찐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아이스박스에 넣어뒀다. 그날 저녁, 생선 구이로 요리해 먹기 위해 아이스박스 문을 열었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니누가 금시계를 뱉어 입에 문 채 죽어 있었던 것.

                시계는 오랫동안 물 속에 있었던 듯 표면이 낡아 있었지만 한눈에도 진짜 금시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이 금시계는 전혀 느려지지도 않고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어 주위를 더욱 놀라게 했다. 30년 동안 하와이에서 산 그는 “오랫동안 낚시를 해봤지만 물고기가 금시계를 물고 온 것은 처음”이라면서 “생각지 못한 큰 행운이 찾아왔다.”며 즐거워했다

                 

                 

                 

                겨울에 그리는 수채화 - 오광수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면
                당신의 곱고 하얀 마음을
                눈 속에서 찾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더 하얗게 되면
                당신의 그 고운 마음씨들이
                하얀 꽃가루처럼 날아가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숨어 버릴 테지요.


                개울물이 꽁꽁 얼어 버리면
                당신의 맑은 노래 소리를
                겨울 내내 듣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더 반짝거리면
                당신의 그 맑은 노랫소리는
                퐁당 깊은 물속에 들어가서
                물고기들의 자장가로 변해 버릴 테지요.


                찬바람이 씽씽 불어버리면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늘에서 볼 수 없을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너무 추우면
                당신이 베푸는 따스함들이
                살금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린이들의 말동무가 되어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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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우라늄 핵분열과 원자로

                앞서 말한 대로 천연우라늄에는 안정적인 우라늄238이 99.3%이고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정상태의 우라늄235는 0.7%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이 천연우라늄을 정제하여 우라늄235가 3~4% 정도 되도록 농축한 것이다.

                핵무기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95% 정도로 농축된 우라늄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 미소간 핵무기감축협상의 결과로 많은 핵무기가 해체되었다.
                아직 남아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인류가 몇 번이나 전멸되고도 남지만, 어쨌든 상당량의 핵무기가 감축되면서 핵무기에서 나온 우라늄235를 천연우라늄에 적당량 섞어서 발전소용 우라늄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핵연료봉은 MOX라고 부른다.  

                원자로에서 핵분열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중성자로 우라늄235의 핵을 때림으로써 시작된다.
                중성자로 핵을 때리면 불안정한 우라늄235는 핵분열을 일으키고 다른 안정적인 원소로 바뀐다.
                그리고 그 질량 차이만큼 에너지를 내면서 중성자 세 개 정도를 아울러 내놓는다.
                그러면 그 중성자들은 다른 우라늄235를 때려서 핵분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한 놈을 쥐어박으면 그놈은 열을 내고 쪼개지면서 중성자로 그 옆의 놈들을 또 쥐어 팬다.
                그러면 그 옆의 놈도 열을 내고 쪼개지면서 중성자로 그 옆의 놈들을 쥐어박는다.
                그래서 원자로 안은 우라늄 235들끼리 중성자로 쥐어 패고 열 내고 쪼개지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인간은 고걸 이용해서 ‘으흐흐.... 열심히 싸워라......’ 그 열로 물을 가열하고 증기를 만들어서 터빈발전기를 돌린다.

                중성자를 얻어맞는다고 다 쪼개지고 갈라지는 건 아니다.
                우라늄238은 점잖게 중성자를 모른 체 하기도 하고 중성자를 받아들여 제식구로 만든 다음 풀로토늄으로 바뀌기도 한다.
                또 중성자들이 난리를 치는 걸 그냥 두면 너무 과열되기 때문에 카드뮴 봉을 연료봉 사이에 집어넣어 중성자를 흡수해서 줄이고 원자로 냉각수에다 붕산(Boron Acid)을 넣어서 중성자들을 감속시키고 진정시킨다.

                원자로를 안전하게 돌리는 것은 냉각재와 중성자감속에 달려있다.
                드리마일아일랜드나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은 모두 원자로냉각재, 즉 물이 원자로에 제대로 공급되지 못 하는 냉각재상실사고, 그래서 우라늄봉이 물로 냉각되지 못 하고 허공에 노출되어 녹아버린 사고이다. 우라늄봉이 녹으면 우라늄이 흘러나오고 위험이 확대된다.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로건물 상부에 설치된 비상분무기로 붕산수가 뿌려지고 비상냉각수가 회복되어 그 정도에서 다행히 사고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안전시설이 작동하지 못 하였다. 동경전력관계자들이나 관료들은 상세한 정보를 밝히지 않고 숨겼다. 미국의 기술지원도 거부했다.
                궁여지책으로 바닷물을 퍼 넣었다. 소방차를 동원하고 헬기를 동원하여 건물 안으로 퍼 넣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하여 바닷물에 섞인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방사성동위원소로 바뀌어 오염되고 그 오염된 바닷물이 증발되어 주변으로 확산되고 바다로 흘러들어가 광대한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말았다.

                냉각재 다음이 중성자감속이다.
                중성자를 어떤 방식으로 감속시키고 조절하느냐에 따라 원자로의 노형이 달라진다.
                서방의 대표적인 원자로형은 가압경수로이다.
                경수(輕水)란 가벼운 물, 즉 보통 물을 말한다.
                원자로계통에 물을 높은 압력으로 순환시키면서 붕산을 넣는 것이다. 붕산의 농도에 따라 중성자의 속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연료봉 사이에는 카드뮴 봉을 집어넣는데, 운전중일 때는 카드뮴 제어봉이 위로 들려져 있다가 원자로를 정지해야 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아래로 떨어지면서 카드뮴이 원자로 안으로 들어가 중성자를 흡수하여 원자로를 세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국의 다른 원자력발전소들은 전부 가압경수로들이다.
                그런데 월성원자력은 중수로이다.
                중수로(重水爐)는 무거운 물, 중수(重水)를 사용하는 원자로라는 뜻이다.
                보통의 물(輕水)은 H2O인데 중수는 D2O이다.
                무슨 뜻인고 하니 수소원자 두 개, 산소원자 하나는 같은데 중수를 이루는 수소원자는 중성자가 두 개인 수소, 즉 중수소(重水素) 'D'이다.
                이 중수소는 자연계에 흔하지 않다. 깊은 호수나 바다 밑에서 정제해서 얻는데 매우 비싸다(월성원자력 직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대통령이 마시던 시버스 리걸 양주보다 더 비싸다고.....).
                또 중수소는 수소폭탄의 원료가 된다.

                월성원자력의 중수로는 중수를 냉각재로 사용하면서 천연우라늄을 사용한다. 즉 우라늄 238이 대부분인 천연우라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라늄 235가 빨리 소진되기 때문에 우라늄연료봉을 자주 바꿔주어야 하고 그래서 운전 중에도 원자로를 정지시키지 않고 교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당연히 발전소 안에 쌓이는 폐연료봉의 양도 가압경수로에 비하여 훨씬 많다.

                이러한 월성원자력의 중수로는 캐나다(AECL: Atomic Energy Canada Limited)에서 개발된 것이다.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면 우라늄 비용은 줄지만 중수비용이 너무 비싸 경제성에서 유리한 것은 없다.
                그런데 천연우라늄에 많이 들어있는 우리늄238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풀로토늄239로 바뀌는 양이 훨씬 많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박정희 대통령이 풀로토늄 핵폭탄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견제를 뚫고 캐나다의 중수로를 도입하였다는 추측이 나온다.  

                비등수형원자로(BWR)는 가압경수로형이 원자로계통과 터빈계통을 완전히 분리하는데 비하여 원자로에서 증기가 직접 터빈까지 가서 터빈을 돌리는 적극적인 시스템을 사용한다.
                좀 더 높은 효율성으로 미국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최근 중국에서도 채택되고 있다. 한국에는 없다.

                구소련에서 개발된 체르노빌원전 같은 원자로는 경수를 냉각재로, 그리고 인공흑연을 감속재로 쓴다.
                천연우라늄을 사용한다.
                흑연으로 만들어진 파이프들이 핵연료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원자로가 서방의 가압경수로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훨씬 더 크다.
                이러한 원자로는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플로토늄 생산을 위한 원자로를 발전용으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서방의 가압경수로는 원자로가 1미터 이상 두께의 튼튼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가 있는데 체르노빌 같은 구소련의 원자로들은 일반건물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체르노빌원전사고는 냉각수상실로 노심이 용융되고 인공흑연들이 연소하면서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원자로건물지붕을 날려버리고 방사능물질들이 확산된 사고이다.

                흑연감속로에는 구소련의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 말고도 용융염원자로, 영국에서 개발된 마그녹스라는 노형도 있고 영국이 이를 개량한 개량가스냉각로라는 노형도 있다.
                그리고 서구의 원자로들도 안전성을 높여 비상상황에서 굳이 조작하지 않고 가만 두어도 자동으로 냉각, 정지, 안정되는 방향으로 기기와 설비가 작동되도록 하는 안전원자로(Passive Reactor)의 모델이 제시되는 등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또한 벨기에를 주축으로 추진하고 있는 미래형원전에 참여하는 문제도 한국이 추진해야 할 과제이다.

                핵연료가 사용되고 나면, 대표적인 가압경수로의 경우를 보자면, 우라늄238 95% 정도, 풀로토늄 0.9%, 우라늄235가 분열되어 다른 물질로 변화된 물질들이 3% 정도 된다.
                그리고 우라늄235인데도 아직 남아 있는 미연소 우라늄도 0.8%정도 된다.

                이쯤에서 핵폐기물 문제를 좀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발전소에서 나오는 핵폐기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용하고 난 핵연료, 고준위폐기물이다.
                둘째는 운전중 방사능으로 오염된 쓰레기들이다.
                방사능이란 놈이 멀쩡하던 다른 물질을 방사성동위원소로 만들어서 방사능이 나오게 오염시킨다. 이를 저준위폐기물이라고 한다.
                저준위폐기물은 고체, 액체, 기체폐기물로 나누어 처리하는데, 누르고 태우고 끓이고 압축시켜서 부피를 줄인 다음 드럼통에 넣어서 폐기물저장고에 집어넣는다.
                더 큰 문제는 사용하고 난 핵연료, 고준위폐기물이다.  

                사용하고 난 핵연료는 금방 식는 게 아니고 계속 열이 난다.
                연탄재가 금방 안 식는 것처럼....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이것들을 큰 콘크리트 물탱크에다 넣어두고 냉각시킨다. 그렇게 물속에 쌓아둔 사용후핵연료가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더 이상 보관할 데가 없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영구방폐장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환경단체들이 들고 일어나고 주민들이 결사반대하여 안면도, 굴업도, 울진, 영덕, 부안으로, 쫓겨 다니다가(부안군수는 방폐장 유치하자고 했다가 돌 맞았다.) 지금 경주에 방폐장을 건설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크고 더 넓은 방폐장이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다.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는 지하에 저장한다.
                폐기물저장소 이에 공원까지 꾸며놓았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는 바닷가의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방페장으로 사용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6~7년 지난 핵연료는 열이 좀 덜 나므로 물에서 끄집어내어 공기냉각식 저장고에 보관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고 영구보관하는 방향으로 정책결정을 하였다.
                네바다 유카마운틴인가 오하이오엔가 엄청난 규모의 방폐장을 건설하고 영구처리를 하고 있다.
                미국에서 원자력을 들여오고 한미원자력협정을 맺고 있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영구보존처리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재처리하면 나오는 엄청난 양의 플로토늄이 핵폭탄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 그래서 모든 국가로 하여금 아예 재처리를 못 하도록 금지하고 미국 스스로도 솔선수범하는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일본만이 재처리를 하고 고속증식로를 건설하여 시험운전을 하고 있다. 시험케이스인 셈이다.

                한국은 2014년에 한미원자력협정이 갱신되는데 일본처럼 핵연료재처리를 할 수 있도록 요구할 것인가, 지금처럼 방폐장 지어서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계속 보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고 앞으로의 원자력추진방향을 협의해야 한다.

                프랑스의 수퍼피닉스, 일본의 몬주 고속증식로(Fast Breeder Reactor)는 이미 사용된 핵연료를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풀로토늄을 분열시키면서 계속 풀로토늄을 만들어내는, ‘때면 땔수록 연료가 불어나는’ “꿈의 원자로”라 불린다.
                고속증식로가 되면 지금처럼 폐연료봉이 거의 나올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지하에 저장되었던 사용후핵연료를 꺼내서 재사용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일본이 몬주에 고속증식로를 짓고 운전하고 있지만 사용되는 액체금속냉각재(소듐)로 인하여 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

                소듐은 가열상태에서 산소나 물, 콘크리트 등을 만나면 화재와 폭발을 일으킨다. 또한 섭씨 98도 이하로 떨어지면 고체가 되어(물이 얼어붙는 것처럼) 동파를 일으키고 파이프와 용기 등 시설을 망가뜨린다.
                이 때문에 일본의 몬쥬 고속로는 화재사고로 10년 이상 정지되어 있다가 수리를 마치고 잠깐 운전에 들어갔다가 다시 정지되고 말았다.

                원자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자.
                그런데 한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실무경험자로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대로 원자력발전은 그리 경제적이지 않다.
                원자력은 적은 핵연료로 엄청난 에너지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는 쌀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미국의 경우 원자력 에너지가 화력보다 더 쌌던 적은 없다.
                더구나 1979년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강화된 원자력규제요건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비는 폭등해버렸다.
                한국도 최근 들어 석탄화력의 발전단가가 대용량화와 기술개발, 표준화로 원자력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다.  
                그리고 핵연료의 특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라늄 238은 전혀 사용도 못 하고 풀로토늄도 못 쓰고 우라늄235만 조금 쓰고는 핵연료를 통째 영구폐기처분을 해야 하는 점도 원자력의 경제성을 제한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한국만이 예외였다.
                원자력의 놀라운 경제성을 보여준 유일한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특히 고리 1호기가 그랬다.
                세계에서 그처럼 값싸게 건설한 원자력발전소는 없었다.
                고리 3, 4호기(95만kw 2기) 건설비는 2조 2,000억원 정도 들었다.
                대장쟁이가 땀 흘린 영광 1,2호기는 고리 3,4호기 설계를 복제하였기 때문에 설계비용이 절감되었고 총공사비 2조 440억원이 들었다.
                이 역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이었다.

                미국에서는 70~80개월이나 걸린 건설공사를 한국사람들은 60개월 이내 마쳐버렸다.
                밤샘작업, 돌관작업, 무휴작업.......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했다.
                80년대 초반 미국의 용접사 인건비가 시간당 25불일 때 한국의 용접사는 일당 20불이었다.
                한국의 인건비수준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 하였다.
                당시 대장쟁이가 받던 봉급(월 2~30만원) 또한 세계최저임금수준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밤새우고 머리를 싸매고 하루라도 빨리 건설해야 한다는 국가적 사명감으로 젊음의 피를 짜내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의 발전원가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저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고 발전원가의 절반 이상이 건설비용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포항제철의 신화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역시 7~8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값싸면서도 우수한 인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조선, 자동차, 중공업 마찬가지다.
                7~80년대에 피땀 흘리면서 바친 세계 최저렴, 최우수 인력이 이루어놓은 것이다.

                원자력발전소가 그처럼 저렴한 원자력전력을 생산해내자 많은 기생충들과 업둥이들이 한전에 달라붙었다.
                정부관계자들, 핵폐기물 연구한답시고 10년 세월 유럽관광이나 다니던 박사들, 수많은 연구소들, 기술자립을 핑계로 한 한전 뜯어먹기......
                영광3,4호기는 기술자립한답시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달라는 대로 주고 가르쳐가면서 기자재를 사줘서 살려낸 한국중공업....... 거저먹기 원자력연구소.......
                에이, 이런 이야긴 그만 두자.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일본이 지금 몬쥬 고속증식로를 시험가동하고 있다.
                일본은 고속증식로기술을 개발하여 앞으로 세계원자력시장을 석권해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대장쟁이가 볼 때 고속증식로가 일본에게 그러한 영광을 가져다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우라늄을 수십 배나 더 사용할 수 있는 고속증식로는 매력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의 전력단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라늄, 핵연료가 아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우라늄이 고갈된다면 몰라도 우라늄을 지금처럼 사용한다 해도 앞으로 100년은 더 갈 수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고속증식로를 애써 개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속증식로가 액체금속냉각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기존 가압경수로 같은 재래식 원자력발전소에 비하여 건설비가 훨씬 비쌀 수밖에 없는 고속증식로를 어느 나라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입할 것인가?

                결국 사람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과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전력공급,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경쟁력......., 모두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던 것이다.

                에고~
                대장쟁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여?

                아, 한 가지 빠뜨린 중요한 이야기 더 있다.
                일본 말이다.
                안 된 이야기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으로 참변을 당한 일본이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였고 2011년 3월 11일 일본북동부를 뒤흔든 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원전이 노심용융을 일으키고 방사능을 누출하는 최악의 사고를 당하였다.

                그런데 몬쥬.......
                몬쥬 고속증식로가 설치된 지역도 지진 안전지역이 아니다.
                몬쥬 고속증식로에서 만일 최악의 사고가 난다면 막대한 양의 풀로토늄 때문에 후쿠시마보다 더욱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왜 지진대에 놓여있는 일본이 그토록 원자력발전소에 집착해왔는지.......

                핵융합?
                태양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을 지구에서 만든다면?
                인공태양?
                수소원자 두 개를 합쳐서 헬륨원자 한 개를 만들고 그 질량 차이만큼 에너지를 얻는 핵융합반응로를 개발한다면 이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라늄의 핵은 크지만 수소의 핵은 매우 작다.
                따라서 아주 고온으로 만들어, 수천만도, 1억 도의 고온 플라즈마를 만들어야 핵융합반응이 일어나는데 그러한 고온을 견딜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가 없다. 공중에 띄워놓는 방법도 없고.......
                그래서 수소폭탄은 가능하지만 핵융합로는 지금으로서는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에고~
                아무튼 원자력은 그렇다.
                어서 원자력을 대체하는 꿈의 에너지원이 개발되었으면,
                그리하여 방사능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에고~
                오늘도 너무 길었네.
                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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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염오(離諸染汚)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답게 꽃피우는 사람을
                연꽃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이제염오(離諸染汚)의 특성을 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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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여악구(不與惡俱)

                연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뿐이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 그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악과 거리가 먼 사람,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를 연꽃의
                불여악구(不與惡俱)의 특성을 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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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향충만(戒香充滿)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
                한사람의 인간애가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고결한 인품은 그윽한 향을 품어서 사회를 정화한다.

                한자락 촛불이 방의 어둠을 가시게 하듯 한송이 연꽃은
                진흙탕의 연못을 향기로 채운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계향충만(戒香充滿)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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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체청정(本體淸淨)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항상 청정한 몸과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본체청정(本體淸淨)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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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상희이(面相喜怡)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얼굴이 원만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었으며
                말은 부드럽고 인자한 사람은
                옆에서 보아도 보는 이의 마음이 화평해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면상희이(面相喜怡)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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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연불삽(柔軟不澁)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래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이와같이 생활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고 사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유연불삽(柔軟不澁)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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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자개길(見者皆吉)

                연꽃을 꿈에 보면 길하다고 한다.
                하물며 연꽃을 보거나 지니고 다니면
                좋은 일이 아니 생기겠는가?

                많은 사람에게 길한 일을 주고 사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견자개길(見者皆吉)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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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부구족(開敷具足)

                연꽃은 피면 필히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꽃피운 만큼의 선행은 꼭 그만큼의 결과를 맺는다.
                연꽃 열매처럼 좋은 씨앗을 맺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개부구족(開敷具足)의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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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숙청정(成熟淸淨)

                연꽃은 만개했을 때의 색깔이 곱기로 유명하다.
                활짝핀 연꽃을 보면 마음과 몸이 맑아지고 포근해짐을 느낀다.
                사람도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성숙감을 느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가 있다.
                이런 분들과 대하면 은연중에 눈이 열리고 마음이 맑아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성숙청정(成熟淸淨)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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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이유상(生已有想)

                연꽃은 날 때부터 다르다.
                넓은 잎에 긴 대,굳이 꽃이 피어야
                연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연꽃은 싹부터 다른 꽃과 구별된다.
                장미와 찔레는 꽃이 피어봐야 구별된다.
                백합과 나리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사람 중에
                어느 누가 보아도 존경스럽고 기품있는 사람이 있다.

                옷을 남루하게 입고 있어도 그의 인격은 남루한 옷을 통해 보여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생이유상(生已有想)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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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일 스위스 제네바 인근 레만호의 호반 도시  ’Versoix’  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 났습니다.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보니 온 도시가 얼음에 뒤덮혀 버렸습니다. 꼭 영화 ‘투모로우’와 같은 장면이 펼쳐 졌던 것입니다.

                 

                 시민들이 이 장관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습니다. 한 어린이가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길을 뒤덮은 얼음을 만져 보고 있습니다.  

                A man and a child walk along an ice covered promenade on the bank of lake Leman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Bitterly cold weather sweeping across Europe claimed more victims on Sunday and brought widespread disruption to transport services, with warnings that the chilling temperatures would remain into next week.

                 

                유럽을 휘감고 있는 살인 한파, 일요일에도 희생자는 계속 발생했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교통혼란이 이어졌습니다. 이 한파가 다음주에도 이어질거라는 예보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스위스에서 5일 이런 장면이 연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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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게 진짜 차인지 얼음 조각 작품인지?

                시민들이 얼음으로 뒤덮힌 차를 배경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A woman takes a picture of a man near an ice covered car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Bitterly cold weather sweeping across Europe claimed more victims on Sunday and brought widespread disruption to transport services, with warnings that the chilling temperatures would remain into next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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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 바닥에 앉아 얼음을 만지고 노는 어린이.

                A boy sits in front of an ice covered car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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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의 문 손잡이

                A car door handle is pictured on an ice covered vehicle on the bank of Leman Lake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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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만호 호반 산책길을 걷는 소녀.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합니다.  옆에 있는 얼음 벤치, 역시 얼음 조각이 아니라 실제 벤치입니다.  

                A girl walks on the ice covered pavement along the bank of Leman Lake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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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영락없이 영화 투모루오의 한 장면 같습니다.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메달려 있는 고드름, 간밤에 강풍이 불었다는 증거겠죠.

                People walk on the ice covered pavement on the bank of Leman Lake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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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만호의 얼음으로 뒤 덮힌 선착장에서 한 남자가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A man takes a picture from the ice covered harbour wall on Leman Lake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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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동일.

                A man takes a picture from the ice covered harbour wall on Leman Lake in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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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에 뒤덮힌 대포. 이건 2월 3일 사진. 3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An old cannon completely covered in ice is pictured on a windy winter day near the harbour of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3, 2012. At least 139 people have died across Eastern Europe and Germany since the cold snap began, interrupting what had been an unusually mild European winter.

                 

                 

                 

                이미지 전체보기보트와 수영금지 경고판에 얼어 붙은 고드름. 고드름이 수평으로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하네요.  Ice is pictured on a boat on a windy winter day in the harbour of Versoix near Geneva February 3, 2012. At least 139 people have died across Eastern Europe and Germany since the cold snap began, interrupting what had been an unusually mild European winter. The board reads ” Jumping and swimming forbidden”  

                 

                도시를 뒤덮은 얼음. 사진의 저런 얼음은 어떻게 생길 걸까요?  사진 캡션에는 별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얼핏 호반 도시라 추운 겨울날 호수 쪽에서 시내쪽으로 강풍이 불어 호수에 큰 파도가 일고 거리를 덮친 파도가 얼어 붙어 저렇게 된 것 같습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람 속의 습기가 얼어 붙은 거라고 합니다. 호수에서 습기를 잔뜩 품은 바람이 불고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저렇게 바람 속의 습기가 저런 형태로 얼어 붙는다고 합니다.  

                ‘Ice storm’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착빙성(着氷性) 폭풍우로 번역하는 모양입니다.

                레만호 인근 지역의 경우 파도로 인한 물방울도 많이 섞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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