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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13:25).
유형 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뿌려져 있는 넓은 들판과 같다. 신자와 불신자, 거듭난 사람과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천국의 자녀들과 악의 자녀들이 모두 회중 가운데 섞여 있다.
순수한 복음의 선포로도 이 상황은 막을 수 없다.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들은 이 상태를 변함 없이 유지해 왔다. 초대교회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들도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경험을 했다. 현재의 사역자들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교회나 종교적인 모임도 ‘알곡’으로만 이루어진 단체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의 영적 대적인 마귀가 늘 ‘가라지’를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엄격하고 철저히 훈련시키더라도 이 상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성공회나 장로교, 감리교, 그 밖의 독립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깨끗하게 한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순수한 알곡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노력과 방법들이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가롯 유다와 같은 신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많은 신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가라지를 뿝으려다 알곡의 뿌리가 뽑힐 위험도 있다. 이러한 열정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해를 불러올 수 있다.
심겨진 알곡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전연히 가라지가 자라게 되고 그리스도에게서도 점차 멀어지게 되어 있다. 한편 어거스틴이 남긴 은혜로운 격언 가운데 깊은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오늘의 가라지가 내일의 알곡이 될 수 있다.”
- 존 라일, 『존 라일의 예수묵상 365』, pp 18-19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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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내용은 유일하다. 성경의 완전한 권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계시론에 기독교 영감론이 첨가되어야 한다. 영감론이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중요한 일들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 기록 자체가 참되며,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지켜져 그들의 생각과 표현의 습관이 온전히 유지되면서도, 그들이 쓴 책이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이 되는 것이다.
이 “완전 영감” 교리는 지속적으로 잘못 제시되어 왔다. 이 교리의 반대자들은 완전 영감 교리가 성령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인 것처럼 말해 왔다. 성령이 저자들에게 셩경 내용을 불러 주었고, 저자들이 그것을 받아쓴 것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모든 희화화된 내용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한 천박한 비판을 그저 따르기에 앞서, 본인이 직접 그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좋은 태도다. “기계적” 혹은 그와 유사한 몇 가지 무례한 말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실제로 완전 영감 교리는 성경 저자들의 개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정보 획들을 위해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이 만들어진 역사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완전 영감 교리가 부인하는 것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완전 영감 교리는 성령이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잘 가르쳐서, 다른 모든 책에는 반드시 있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의 기록을 포함하지만, 참된 기록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감 교리에 따르면, 그것도 실제로는 참된 기록이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인 것이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주, 성경의 오류에 관한 미묘한 문제를 피하고자 “기계적 영감설”, “받아쓰기 영감설”, “성경을 부적으로 사용하는 미신” 등에 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설교자도 성경은 “신성하다”고- 실제로 그것이 더욱 인간적이기 때문에 더욱 신성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덕을 세우는 데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외면은 속임수다. 오류로 가득한 성경을 “신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현대의 범신론적 의미에서 “신성하다”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불완전함과 죄로 가득한 세계의 진행과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경배하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다.
완전 영감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는 이와 같이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성경 저자들이 작품을 쓸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직 그 증언이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성경 메시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가 되는 메시지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생사가 달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는 매우 다르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완전 영감을 거부할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모든 책에 대해 갖는 정도의 존경심마저 성경에 대해서는 갖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적인 성경관을 무엇으로 대체했는가? 종교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는 무엇인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 대신 내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유주의자는 구약의 잘못된 도덕적 가르침, 혹은 바울의 궤변론적 논증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상은 완전히 거짓된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사실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구원 사역의 의미는 그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완전히 제시될 수 없었다. 예언을 통해 제시될 수도 있었으며, 예수가 지상 생애 동안에 그 의미를 설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한 설명은 당연히 그 일이 성취된 후에 주어졌고,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성령의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령뿐 아니라 예수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권위마저도 굳게 견지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록된 예수의 말씀 속에는 현대 자유주의 교회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예수는 나중에 사도들을 통해서 드러날 더 충만한 계시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은, 기록된 말씀의 더미 속에서 비평 과정을 통해 걸러져야 하는 게 분명하다. 이 비평 과정은 확실히 매우 난해하며, 비평가들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 말들만이 역사적 예수의 진짜 말들로 선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자주 일어난다.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적” 예수의 말 가운데서도 어떤 말들은 참되지 않다고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개 많은 부분이 예수의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다. 설령 예수가 말한 모든 것이 참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의 중심적인 “삶의 목적”은 교회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장 짧은 복음서이며 현대 비평주의가 인정하는 가장 초기 복음서에 따르면,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본문이다(막10:45). 여기서 대속의 죽음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이런 말이 당연히 한쪽으로 밀쳐진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발견한 예수의 삶의 목적은 예수의 진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격리되고 잘못 제시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프로그램과 우연히 일치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참된 권위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기록된 교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결정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원칙이다. 산상수훈에서 뽑힌 윤리적 원리들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그것들이 예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관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의 권위에 근거해 있다는 말은 전혀 참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의 모범과 교훈에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상당한 분량을- 대표적으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라는 의식- 거부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진짜 권위는 오직 “기독교적 의식” 혹은 “기독교적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제도 교회의 다수결 투표에 의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방법은 양심의 자유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권위는 개인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을 “돕는” 것만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권위는 전혀 권위가 아니다. 개인의 경험이란 무한히 다양하며. 진리가 어떤 특정한 때에 작동되는 것으로만 간주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의주의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 한 책을 의지하는 것은 죽은 것이거나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했으면서도 세상에 불을 붙였다. 사람의 말을 의지하는 것은 맹종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생명이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수단만 남아 있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없다면, 세상은 어둡고 우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근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경 위에 서 있다. 기독교는 그 사상과 삶에서 성경을 근거로 한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죄 있는 사람의 무상한 감정에 근거해 있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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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 대학살 (천여명) "
사단이 주님이 오실때가 되니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것을
알고 분내어 크리스챤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만 죽이는 자를두려워말고 영혼과 몸을 지옥에 던져넣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이들처럼 나의구주 예수님을 시인합시다.
하나님앞과 천사들앞에서 우리를 주님도 주님백성 하나님가족으로 시인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 사건만 보지말고 예수님과 새예루살렘성을 바라볼때 위로부터 순교하도록 강한 기름부음이 스데반처럼 있었으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아마 아이들에게 이런 기름부으심주시고 이들에게서 두려움과 공포를 거두어 가시고 하늘의 평안을 주셔서 한사람도 부인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어졌습니다. 기도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대한마음 받으면 오히려 천국입성에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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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됨: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받게 되는 이중 은총 / J. 토드 빌링스
.....요한 칼빈은 사도 바울과 요한의 글에서 강조되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 안에 거함의 개념들을 토대로 하여, 이 새로운 신분이 어떤 것인지 잘 조명해 주고 있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께 입양되어 우리가 받게 되는 구원의 실체는 우리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고, 그 연합 안에서 받게 되는 이중은총에 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사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스도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중은총을 받게 된다. 첫째로는,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재판관 대신 은혜로운 성부 하나님을 하늘에 모시고 있게 되는 은총을 말한다. 둘째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받게 되는 성화의 은총을 가리키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경되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Inst. 3. 11. 1.)
칼빈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대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구별된, 그러나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은총을 받게 된다. 칭의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선언되며, 성화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덧입어 점진적으로 새롭게 재창조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받게 되는 이 이중은총은 완악하며 자족적인 노예상태에 있던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사모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는 일차적 은총은 법정적인 것, 법정에서 판사가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결정을 변경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여잡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옛 사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양자된 새로운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은 우리에게 주시는 바 그리스도의 의라는 이 은총 외에 우리가 첨가할 수 있는 노력은 아무 것도 없다.
칼빈의 당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이 자기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의로움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공로 외에는 없다고 가르치는 오늘날의 MTD(도덕적 치유적 이신론(理神論)) 신학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빈은 우리의 구원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드러내는 "선한 행위"가 필연적으로 따르지만, 그렇다고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칼빈이 생각할 때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성화 역시 의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우리의 구원은 용서(칭의)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성화)도 포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화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과 같은,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서 보이는 "우리 편에서의 반응"이 아닌 것이 된다. 칭의가 그러하듯 성화도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칭의와 성화 사이의 논리적 상관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구별은 존재하지만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칭의와 성화 사이에 시간적 간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를 받으면서 다른 은총은 받지 않는 경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두 은총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은총을 분리됨 없이,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것은 거부하면서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죄의 사면만을 받으려는 것은, 킬빈 자신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리스도를 둘로 찟으려는 시도"라 하겠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을 입양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하나님 자녀라는 법적 신분은 받아들였으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도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 나가시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예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와 읽기, 성찬 참여, 기도와 교제, 궁핍한 자들을 위한 섬김에 이르기까지. 지면상의 제약으로, 나는 칼빈이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는 기도와 성만찬, 이 두 주제에 집중하려고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와 성만찬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덧입도록 우리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이중은총적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안에서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으며," 그러므로 우리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우리가 필요한, 그러나 결핍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 안에 풍성하게 있다는 것과, 성부께서는 그 풍성함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차고 넘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넘쳐나는 샘에서 우리의 결핍된 것들을 길어 올리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향한 초점, 그리스도를 향한 이런 갈구야말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바탕인 것이다. 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입양 절차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자격으로 기도에 들어갈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간구를 예수님의 기도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맛보는 기도의 삶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칼빈도 말하고 있거나와,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저 우리의 힘과 노력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이 입양 절차의 보증이 되시기에,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한껏, 목 놓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주저함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잊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기도할 수 있는 담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십사 언제나 성령님을 우리 앞에 붙잡도록 하자. 우리만 놓고 보면, 두려움 때문에 이 땅의 임금에게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입양의 주관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근심을 가슴으로 받아주시고자 부드럽게 부르고 계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하늘의 임금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에 우리가 받게 되는 이중은총의 맥락에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칭의를 통한 사면과 새로운 삶이라는 은총을 거저 주고 계시다는 사실의 반증이 된다. 우리의 의와 새로운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우리 양심은 잠잠해지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과정 가운데,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과 전능하신 왕의 자녀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수납에 대해 가르침에 있어서, 그리고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바, 성찬에 있어서 떡과 잔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시적이 되었다는 내용을 칼빈이 언급할 때, 입양의 언어는 그 중심에 위치한다. 자신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에서 성찬론을 다루는 칼빈의 첫 문장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종으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단번에 우리를 그 가족으로 입양하셨다"고 입양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될 정도이다. 입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의 수혜자가 되었다. 킬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에게 관심을 가지신다. 그렇기에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시기 위해 우리 생 전체를 통틀어 우리를 먹여 기르시는 역할을 책임지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풍성함 가운데 우리를 계속해서 양육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온 입양아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친히 증거하신대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이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참되고 복된 영원한 생명을 받는 영적 만찬"을 베푸신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의 유일한 음식이 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의 안에 거하는 것과 말씀과 성찬을 먹음으로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단순 모방하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묻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에 합쳐져야만 한다. 이 합쳐짐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의미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이렇게 해서 입양과정과 입양된 자녀로서의 새로운 삶의 효력이 발생한다. 하나님께 입양된다는 것, 그것은 영성훈련이나, 빈민구제, 이웃 사랑을 하는 등의, 우리 노력을 통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맺게 되는 열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for you) 이루신 사역의 열매(칭의)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in you) 하고 계시는 일(성화)의 열매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이 복음이 전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흉내 내거나 예수님이 하셨을 법한 일을 하는 우리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기쁜 소식은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신 새로운 삶 속으로 참여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J. 토드 빌링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3. 하나님의 자녀됨: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받게 되는 이중은총)에서 발췌, 71~81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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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은 영(靈)인가 혼(魂)인가? (Q&A) / 박신 목사
[질문]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개역본)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킹제임스 흠정역)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생령’과 ‘혼’의 차이가 무엇인지요?
[답변]
모든 성경은 번역본이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매일 읽고 있는 성경은 원어본이 아니라 번역본이라는 사실입니다. 번역자(기관)에 따라서 그 용어나 표현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역본에서 ‘생령’으로, 흠정역에서 ‘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네페쉬”인데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한 단어인데도 문장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용례(用例)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각각의 문장과 앞뒤 문맥에 따라 실제로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었고 사용했던 의미로 바꿔서 번역합니다. 개역본이 취한 번역 방법입니다. 반면에 흠정역의 경우는 주로 원어와 의미가 가장 근접하는 단어를 선정하여 성경전체에서 그 원어가 나올 때마다 동일한 단어로 번역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이 두 번역방식은 각기 장단점이 있는데, 한 쪽의 장점은 다른 쪽의 단점이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다양한 의미의 단어로 바꾼 경우는 이해하기 쉽고 문맥 안에서의 뜻과도 대체로 일치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의미가 다른 여러 원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게 됩니다. 원어의 뜻을 알려면 일일이 대조해봐야 합니다. 반면에 흠정역처럼 원어 하나에 동일한 단어로만 번역되면 그 일관성은 유지됩니다. 원어와 대조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원어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문맥 안에서의 활용되는 의미는 독자가 스스로 추정해봐야만 된다는 단점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와 자기 조카 롯과 하란에서 그들이 모은 그들의 모든 소유와 또 그들이 얻은 혼들을 데리고 가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라.”(창12:5-흠정역) “얻은 혼들”로 번역된 단어의 문장과 문맥 안에서의 뜻은 “얻은 사람들”(개역본)입니다. 히브리 원어는 동일하게 ‘네페쉬’이고 KJV 영어판도 일관되게 ‘soul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국어 흠정역은 당연히 영어판 KJV와 동일하게 ‘혼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영어번역본들, 대표적으로 NASV는 persons, NIV는 people로 번역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으셔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혼이 나를 축복하소서, 하매”(창27:19- 흠정역) 아버지의 혼을 개정역은 “아버지의 마음껏”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본들을 다시 살피면, KJV ? soul, NASV와 NIV ?단순히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이 네페쉬는 구약성경에 751회 사용되었는데 영어로는 soul 475, life 117, person 29, mind 15, heart 15, creature 9, body 8, himself 8, yourselves 6, dead 5, will 4, desire 4, man 3, themselves 3, any 3, appetite 2, 기타 45회입니다.
그리고 개역본은 원래 영어번역본과 한자번역본을 중심으로 번역했기에 영어번역본의 방식대로 따랐습니다. 또 KJV가 어렵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많아 새로 개정된 영어 NKJV는 상기 창12:5에서 soul 대신에 people로 번역했습니다. 최신판 영어흠정역도 다른 영어번역본처럼 문장과 문맥의 뜻에 따라 적절한 용어로 대체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영과 혼의 차이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성경은 번역본이라 용어와 표현이 다를 수 있음부터 인식하고 대해야 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원어에서 영과 혼의 구별이 있는지 여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혼(魂)은 인간의 지정의 측면 즉, 인간 혼자로만 따져서 육체와 구분되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네페쉬’이고 헬라어로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경우와 신약성경에서 ‘푸쉬케’(예: 살전5:23, 히4:12)를 사용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영어로는 용례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반면에 영(靈)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왕상22:21), 헬라어로 ‘프뉴마’(눅8:55)인데 영어로는 ‘spirit’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본 인간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특별히 구약성경)로 볼 때는 이 둘의 의미를 혼동해서 즉,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질의하신 창2:7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네페쉬(영어 soul, 한글 혼)인데 실제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내면)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인간(의 내면)”이라고 표현한 까닭이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이분법(육체와 정신, 육신과 혼) 혹은 삼분법(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해서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의 온전한 한 인격체로만 대하며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고 안 서고는 한 인간 전체로서 행할 바이자 책임입니다. 내 정신은 하나님을 찾는데 내 육체는 반대라는 법은 없습니다. 정신이 멀어졌기에 육체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한 인간 안에서 육체에만 혹은 정신에만 은혜나 벌을 구분해서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육신이 정신보다 또는 혼이 영보다 열등하다거나, 육체가 죄의 근거 내지 원인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악하고 추한 것이라 죽으면 완전히 없어지고 영만 천국으로 간다는 헬라식 이분법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신자에게는 마지막 날의 육체를 포함한 전 인격체의 완전한 부활이 궁극적 소망이자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과 신자의 믿음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편의상 삼분법적 구분을 사용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흠정역도 영혼몸으로 번역) 하나님께서 신자의 육체, 정신, 영 전부를 주님 오시는 날까지 거룩하게 보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흠정역도 동일한 번역)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까지 심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로 하여금 그 영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따르게 하며, 혼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며, 육신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름답고 강건하게 가꾸도록 바꾸어준다는 것입니다.
상기 두 구절에서 영혼육으로 인간을 셋을 구별했어도 결국은 그 셋 전부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영만 따로 거룩하게 보존하고 성장시키지 않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한 인간을 영혼육이 합일(合一)이 된 하나의 인격체 전체로 보시고 그에 맞게 대우합니다.
창세기 2:7의 뜻은?
창세기 2:7의 원어 네페쉬에는 영, 혼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NASV NIV 등에선 “living spirit”이 아니라 “living be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한 흠정역의 “living soul”도 동일한 의미이긴 하지만 자칫 ‘soul’ 만 살아있는 듯 오해될 수 있는 것보다 더 적합한 번역 같습니다.
또 비록 주로 혼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원어가 사용되었지만 앞뒤 관계로 봐선 우리말로는 영으로 번역되는 편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영혼육으로 구분시킨 의도와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 당신의 영을 인간에게 부어넣어 주셨다는 뜻이 강조되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내면을 말하는 영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글 개역판이 생영(生靈)으로 번역했다고 해서 영만 살아있다거나, 하나님이 영을 특별히 우월하고도 인간 중에서 별개로 구분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영혼육이 합일된 하나의 인격체 아담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보다 창2:7에서 더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다른 모든 동식물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있으라’는 명령 한마디로 이 땅에 존재케 되었습니다. 인간만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직접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당신께 아주 특별한 존재이자 창조의 궁극적 묵적이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세계를 인간이 생존 번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완벽하게 조성한 후에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 가운데는 단순히 육체적 생명과 지정의를 망라하는 정신(본 주제에선 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도 함께 불어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으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릴 소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1:28)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도록 영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게 만드셨다는 중요한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해야만 그분 대신에 그분의 뜻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한글 개역판 ‘생영’의 의미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개역, 흠정역도 영으로 번역, 헬-프뉴마, 영어-spirit)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을 자기는 물론 이 세상의 주인으로 세움으로써 그 영(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이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이런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 중에는 스스로 기꺼이 순전한 감사와 경배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여서 은혜를 주셔야만 하나님을 순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개역, 흠정역도 동일한 번역) 한 죄인의 영에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막고 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성령이 오셔서 깨트리고 임재 내주해주셔야 비로소 예수를 믿게 되고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예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주님이 천국 보좌의 본래 위치로 되돌아가심)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16:8-11)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인데 성령이 오셔서 그 죄에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영(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 물리적으로 혼과 구분되는 것은 아님)을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시어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2:7에서 두 성경이 영과 혼으로 갈리는 것은 번역상의 차이일 뿐이지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 단순히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으로 구분하지 마시고 최초인간 아담을 완전한 한 인격체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단 그를 특별한 방식으로 만드셨는데 동물과 달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신 목적,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소명을 달성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만 첨언하자면 성경에서 서로 모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혹은 교리적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수 없는 신자로선 당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변 목회자에게 질문하시어 일일이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떨어진 상태의 의심이 아니라 온전하고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구도(求道)입니다. 만약에 그럴 기회나 여유가 없다면 성경 전체를 반복해서 통독하셔야 합니다. 앞뒤 문맥을 관통하고 나면 그런 지엽적인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정확한 의미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25/2014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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