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툭하면 예배를 회복하겠다, 예배를 바로 세우겠다는 사람들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예배 회복이라니?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드려온 예배가 잘못된 예배, 가짜 예배였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예배는 크게 함량이 모자란 3류 예배 혹은 불의와 야합한 예배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느 집 아들 하나가 느닷없이 동네 한복판을 누비고 다니며 “우리 집을 회복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면 다들 그 집안에 심상찮은 일이 터진 것이라고 의아하게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예배 회복, 예배 회복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또 아주 애매모호한 말들을 즐겨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헤 깔리게 만들어 놓기 일쑤다. 잘못하다간 예배 회복이 아니라 예배 혼란만 초해할 것 같다는 우려가 앞설 때도 있다.  

예컨대 ‘워십리더’란 말을 놓고 생각해 보자. 예배 회복을 위해 집회를 준비했다고 하면서 워십리더는 아무개라고 소개하고 있다. 워십리더를 전통적인 예배 환경에 적용해 보면 예배 사회자를 말함인가, 아니면 설교자를 말함인가? 아니면 성경 봉독자 혹은 대표 기도자?

아무리 활짝 열린 예배라고 가정해도 그렇다. 예배라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찬양이 있어야 하고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고 또 그 말씀을 풀어 적용의 원리를 설명하는 설교도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봉헌 순서, 예배를 마치고 세상 속으로 파송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한 축도의 순서도 있어야 한다.
은혜 받고 성령 체험하면 됐지 주보에 깨알같이 박혀 있는 그 알량한 예배 순서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다 아예 이단 삼단으로 빠지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하랴!  

대개 열린 예배에 참석해 보면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한마디씩 툭툭 멘트를 날리기도 하고 간증이나 권면도 한다. 어느 때는 개인 신상에 관한 잡소리를 줄줄이 꺼내 들 때도 있고 그러다 감정이 격해지면 울기도 하고 소리치기도 한다. 때론 회중들에게 손을 올려라, 손뼉을 쳐라 갖은 주문을 다하기도 한다. 그를 두고 워십 리더라고 하나?

그러나 이렇게 형식 없이 떠들썩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드려야 할 예배의 경건성과 거룩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글쎄, 이건 아니다란 생각을 갖게 한다.  

아무리 교회에 덜 친숙한 사람이나 예배당 환경에 거부감을 느끼는 소위 구도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떼어내고 캬바레같은 요란한 조명등에다 값비싼 스피커를 고드름처럼 매달아 놓았을지라도 예배를 드린다고 모였을 경우라면 예배의 기본은 갖춰야 되지 않겠는가?

요즘엔 전통적인 예배와 구도자 예배, 혹은 열린 예배를 따로 드리는 교회도 늘어나고 있다.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뜻에서 가능하면 전통을 외면하고 찬양이나 영상 기기를 활용하여 예배 순서와 내용을 다양화하는 것은 참가자들의 문화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 가는 부분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 동안의 모든 예배는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는 것처럼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소리친다면 도대체 회복의 원점은 어디이고 회복의 방법과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지금 우리들의 교회에서 드려지는 젊은이 예배나 감성적 모드의 예배를 덮어놓고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 것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덮어 놓고 옛 것을 거부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어휘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키보드, 드럼, 기타, 그 ‘찬양 3종 세트’를 준비해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쌍팔년도’를 살아가는 교회로 비웃음을 살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도 한때의 유행이고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에게서조차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더구나 요즘 지구촌의 젊은 기독청년들은 신비와 침묵, 묵상과 절제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께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기사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컨템퍼러리를 받아들이는 넓은 가슴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지난 2천 여 년 역사를 통해 축적한 전통이나 형식을 깔아뭉개는 것도 복음의 전진을 막아서는 일이 아닐까?  

예배의 진정성을 말할 때 단골손님으로 소개되는 두 인물이 가인과 아벨이다. 둘 다 예물을 바쳤지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것은 받으시고 한사람은 거부하셨다. 드리는 마음의 자세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배의 회복도 형식에 매달려 그냥 건성으로 드리는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와는 거리가 먼 개인의 영성의 깊이가 문제이지 유명세를 타는 어느 워십리더가 단 칼에 해 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예배 수리 전문가’가 사람인가, 아니면 천사인가?

ⓒ 크리스천뉴스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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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십계


1) 가정을 항상 지키십시오.

남자는 일에 삽니다. 그래서 남편의 눈에는 아내가 집에서

살림 잘 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소박한 꿈을 가지고 내조자의 역할을 감당하십시오.


2) 항상 미소를 짓는 기쁨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집안의 태양입니다. 달과 별은 울지만 태양은 항상 웃습니다.


3) 갈빗대의 철학을 가지세요.

갈빗대는 보호의 역할을 하며 가정에서 갈빗대는 부드럽게

휘어 있어 부드럽게 남편과 자녀를 감싸줍니다.


4) 칭찬하며 용기를 주십시오.

남편의 약점을 캐내어 공박을 주지 말고 용기와 칭찬을 아끼지 마십시오.

가정에서 힘과 용기를 충전시켜 내보내야 성공합니다.


5) 가정 예배로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남편은 외부의 유혹을 받으므로 주의 말씀으로 삼가며

경건된 삶을 살도록 가정 예배로 승화시키는 것이

화목과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6) 실력을 함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는 생활 패턴이 흐트러지고

게으르기 쉬운데, 지식과 인격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존경을 받습니다.


7) 식사시간을 즐겁게 유도하십시오.

다양한 메뉴의 반찬과 음식으로 남편과 자녀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음식 나누는 시간이 화해와 행복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8) 저축 정신과 절제의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뼈 빠지게 번 물질을 아끼고 남에게 절제하는 아내의

섬세한 미덕이 요구됩니다. 흑자 가계를 위해 헌신하십시오.


9) 복종의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남편은 거센 아내, 대드는 아내를 가장 싫어합니다.

사랑이 있는 복종이 소원성취의 비결입니다.


10)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맡기십시오.

남편의 부족한 면은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세요.

같은 방향의 사랑은 열매를 맺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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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습관을
최대한 다스리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당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실수한 인생이지
실패한 인생은 아닙니다


봄오기 직전이 가장 추운 법이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떠날 때에 우리 모두는
시간이라는 모래밭 위에 남겨놓아야 하는
발자욱을 기억해야 합니다


산 속의 적은 물리치기 쉬워도
마음 속의 적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속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남보다 영리하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요

그 하나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옳은 사람과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기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속삭이시지만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분은 크게 외치십니다

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당황하지 마십시요
사방이 다 막혀도 위쪽은 언제나 뚫려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젊음은 마음의 상태이지
나이의 문제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요

매력은 눈을 놀라게 하지만
미덕은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믿음은 칫솔과도 같은 것
정기적으로 매일 사용해야 하는 것,
그러나 남의 것은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때로
죽음을 생각하십시요

그리고 그위에
당신의 생명을 설계하십시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죽음과 부활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안다면
한층 인생의 무게가 더 해질 것입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 하기보다
좋은 가정을 지으십시오

호화주택을 짓고도 다투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막살이 안에 웃음과 노래가 가득한 집이 있으니...

크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작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좋은 나무는 쉽게 크지 않습니다

바람이 강하면 나무도 강해지고
숲이 어두우면 나무는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갑니다

햇빛과 추위와 비와 눈은
모두 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 주는 최고급 영양소...

인생의 시계는 단 한 번 멈추지만
언제 어느 시간에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이 내 시간이라 하고
살며 사랑하며 수고하고 미워하지만
내일은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시계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면
기회를 사용하도록 철저히 준비하십시오

어떤 바보라도
사과 속의 씨는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 속의 사과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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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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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그런데, 부자들이 그녀에게 물은 것은 “어디 땅을 사야 돈을 벌까”, “어떤 주식에 투자해야 할까?”가 아니었다.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어떤 사람을 믿어도 될지,  “어떤 일을 벌였는데 생각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였다고 한다.

부자들에겐 분명히 자기만의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그녀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어떤 생각과 습관을 가지고 있을까?

Point 1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누구나 부자 되기를 꿈꾸지만 잘해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커서 자신감을 억누르면 결국 꿈을 축소하게 되고 의지도 점점 약해진다. 여자는 다른 사람을 성공시킬 수 있는 멘토링 능력과 재테크 능력을 타고났다. ‘나는 남편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고 ‘남편 역시 부자가 될 만한 재목’이라고 확신을 갖는 게 중요하다. 운명은 자신의 행동과 마인드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혼을 해도 서너 번은 했을 것 같은 A씨. 하지만 그녀는 화목하게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 현재 1000억원대 부동산의 소유자다. 그녀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주변에서는 ‘그녀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배짱과 뚝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보다 돈이 많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자신보다 뛰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를 쓴다.

Point 2 가정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인다

성공한 아내들은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남편을 끊임없이 격려하며 균형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사람들 앞에서 남편의 체면을 세워주고, 평소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은 자주 할수록 좋다. 한편으로는 비서이자 파트너로서 남편의 승진과 사업에 기여하기도 하고, 자녀들이 부자가 되기 위한 마인드와 자세를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가정에서의 권력은 여성성에서 나온다. 부드럽게 가정의 권력을 쥐고 칭찬과 배려로 남편과 가족을 통솔해야 한다. 남편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잔소리하거나 기를 꺾지 않는다. 남편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당근책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불만이 있거나 다툴 일이 있을 때 여자 쪽에서 목소리 톤을 낮추고 부드럽게 말을 꺼내면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는다. 살짝 스킨십까지 동원하면 남자도 여자의 요구 사항을 들을 준비가 된다. 남자는 잔소리하는 여자를 엄마처럼 생각한다. 엄마에게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려는 게 특징이다. 남자에게 이런 안도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Point 3 자신을 위해 투자한다

가정을 이끄는데 온 힘을 기울이더라도 자신을 위한 투자에 소홀하면 그는 어느 순간 가족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중년이 된다. 자신의 인생이 억울해 우울증에 빠지면 일확천금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실 남자는 여자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가족은 아내가, 혹은 엄마가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사실을 때로는 부담스러워한다. 일방적인 희생을 멈추고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의 삶에 당당한 여자는 빛이 난다. 낭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배우고 필요할 땐 감각적으로 치장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부자들은 인생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매우 화려하거나 훌륭한 미모는 아니더라도 분명한 개성이 있다. 부자 여자들은 전업주부이지만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지낸다. 그들은 돈보다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하루 1시간 이상은 꼭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운동을 한다.

Point 4 시간 약속을 정확히 지킨다

보통 전업주부들은 시간관념이 약한 편이지만 이들은 시간 약속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으면 시간 약속은 신용의 문제라는 인식도 강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돈을 아끼기 위해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루는 24시간, 1초를 10원으로 계산해보면 우리 통장에는 매일 아침 86만4000원이 입금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돈은 하루가 지나면 사라진다. 그 소중한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없앤다는 건 아깝지 않은가. 부자 여자들은 좀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일을 먼저 한 후 남는 시간에 집안일을 한다.

Point 5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안다

커다란 좌절과 실패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지만 부자들은 그 위기를 극복해 성공을 거두고 행복을 찾는다. 남편이 골프용품 수입업체를 운영한다는 B씨 역시 고난의 시기가 있었다.
“친척과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모두 날리고는 자살하려는 남편을 말리는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래도 절망 속에서 남편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제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B씨는 어려운 여건보다 남편이 꿈을 포기해버리는 게 더 두려웠다고 한다. 그는 끊임없이 ‘영원한 행복이 없듯이 영원한 불행도 없다는 것’을 남편에게 주지시켰고, 남편이 다시 ‘모험’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웠다. 남편은 아내의 이런 격려를 받으며 다시는 가족들을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한 번의 경험으로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남편을 부자로 만든 여자들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장이냐 퇴보냐’가 결정된다.

Point 6 아내가 직접 재테크를 한다

종자돈은 자기 복제 능력이 있다. 종자돈을 모으지 못하면 재테크와는 영원히 결별이다. 그녀들은 치열하게 종자돈을 모았다. 아니 무식하게 모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모으기 시작한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 궁상을 떠느냐’고 해도 목표액을 채울 때까지는 꿋꿋하게 나아갔다.
그 다음은 관리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가정에서 현명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다 새나가게 마련. 돈 관리 능력 면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탁월하다. 설문에 응한 부자 부부 중 71%가 주로 여성이 돈을 관리한다고 밝혔다. 그녀들도 대부분 처음에는 ‘여자가 뭘 알아’ 식의 주변 시선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재테크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공부해 남편의 지지를 얻어내고 경제권을 쥔 후에는 탄탄대로였다. 과거에는 7대3 비율로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했지만 최근에는 5대5 정도로 바뀌고 있다.




                                     

                                           evergreen/Christin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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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가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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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었다는 가장 확실한 징후는 고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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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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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결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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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주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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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보여질 수 있듯이
사소한 일이 사람의 인격을 설명해 줄것이다.
[스마일즈]

꿈꾸는

사람은 그가 우습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가장 뚜렷이 성격을 드러낸다.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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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신을 찾으려는 인간성의 반응이다.
[화이트헤드]

 
꿈꾸는
죽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은
살아야 할 때도 모른다.
[존 러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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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비관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비관적으로 된다.
[빌리 브란트]


출처: 서춘웅 목사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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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garden)목회

며칠전 오랜만에 벌들이 윙윙대며 나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살펴보니 지난해 심은 여섯 구루의 나무 중에서 네 개가 하얀 꽃과 연분홍 꽃을 피웠고 벌들이 부지런히 꽃들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꿀을 모으고 있었다. 보기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굳은 땅을 파고 물을 주고 거름을 섞어 그 나무들을 심을때는 땀도 나고 힘이 들었지만 애쓴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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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는 화단이 있는데 주로 선인장을 심었다. 작은 선인장들을 사다 심었는데 이제는 제법 자라서 대부분이 예쁜 꽃을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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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작은 꽃이나 선인장을 사 왔을때는 분가리를 하거나 화단에 직접 옮겨 심어야 한는다. 그 어린 꽃들은 너스리에서와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사를 온 셈이라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특별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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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나 선인장은 그 종류가 많고 한 화단에 이런 다양한 것들을 심다보면 그 관리가 쉽지 않다. 어느 것은 종일 햇볕을 좋아하고 어떤 것은 그늘을 더 좋아한다. 어느 꽃은 건조한 것을 좋아하지만 다른 것은 습기가 필요하다. 또 자라는 속도나 크기도 서로 다르다. 이런저런 지식이 없이 꽃이나 선인장을 심다보면 관리에 실수가 적지 않다. 따라서 꽃들의 생장과 화단의 조화를 위해서는 자주 자리를 옮겨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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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도 이와같다는 생각이 든다. 화단은 교회요 신자는 꽃이다. 어린 꽃같은 새신자에게는 세심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이 부족하면 실망하고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거나 적응이 힘들어 마침내는 교회를 떠나고 만다. 꽃은 제때에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해 주고 거름을 주어야 제대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것도 종류에 따라 달라야 한다. 이처럼 새신자들은 모두가 서로 다르다. 일률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만 주어 생존하는데만 주력해야 할 선인장같은 신자가 있는가하면 빨리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신자도 있다. 이런 신자에게는 곧바로 말씀과 훈련에 돌입해야 하며 잘 자라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자리도 넉넉하게 주어야 한다. 화단이 그 조화나 질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위해 꽃들을 옮겨 심어야 하듯이 교회도 질서와 그 사명의 효과적인 성취를 위해서는 신앙의 성숙과 은사에 따라 일군을 세워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잘 안배해 주어야 한다. 이는 화단의 모양을 바꾸는 일과도 같은 큰 일이기 때문에 종종 시험이 따른다. 따라서 제직 임명이나 직원 선거는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직은 믿음과 신앙의 원만한 인격 그리고 은사를 고려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도 없는 사람을 사회의 경력이나 재력같은 외모만 보고 중직자로 세운다면 유익보다는 피해가 더 크다. 이런 사람들은 곧 교회의 얼굴이 되며 화단같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해칠 뿐아니라 다른 신자의 섬김에 장애가 되며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도 걸림돌이 되기 쉽다. 이런 신자는 더 큰 장애물이 되기 전에 앞자리가 아닌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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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어찌 화단에서 꽃 가꾸기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인격을 다루는 목회는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꽃밭을 가꾸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섬기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아름다운 화단같은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매주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교회마다 주일설교의 CD에 전도지 그리고 볼펜, 메모지 또는 휴지의 작은 미끼까지 곁들여 안 받겠다는 것을 억지로라도 전달하는 전도자들의 수고와 고충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마다 서로 경쟁하면서 불신자보다 신자에게 내 교회로 오시라는 전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전도의 대상과 목적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앞마당에서 윙윙대며 날아드는 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화와 질서 꽃같이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갖춘 교회, 겸손히 은사에 따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화단같은 교회가 된다면 불신자들이 찾아 나오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앞마당의 벌떼처럼 말이다.
그래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화단목회이다

                                글:서춘웅 목사님

★ 아래 가수분들의 곡들은 절대 올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침해 고발가수들의 명단 한곡당


50만원씩 벌금이 부과 된다고 합니다 가나다 순으로...

 


강타.거미.거북이.김현정.김종국.기태


나얼.나훈아


디오씨.디테


러브홀릭.러브홀릭ost.럼블피쉬


문희준.민우


박정현.빅마마.비


신화.세븐.스카이.서태지.시태지크.송대관.신지


유리.이호섭.이수영. 유진.임재범.이소은.이오공감.이승

 

환.


이선희.이지혜1집.이이스.왁스.요구르팅ost.


장나라.조성모. 주영호. 지누션. 제이. 장윤정2집.자우

 

림.


코요테. 플라워. 테이.태진아.토니.


백지영.휘성.한주일.한경일. bmk. mc몽.


sg워너비 ( 총 56 명 )

 

 

지난 1월 17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저작권보호법이 3개월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앞으로
4월 16일부터는 강력한 단속
있을 예정입니다. 유료로 음원을 샀다고 하더라도 소수가 이용하는 공간이 아니면
게재조차 할 수없으며, 저작권이 있는 음악에 대하여는 퍼가는 것도,

퍼 오는 것도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프로사진작가들의 사진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님들의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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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안부를 여쭙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답니다.

특별히 한가지 말씀드릴려고 자판을 두드립니다~

어느 홈피에선가...

가브리엘 오보에라는 연주음악이 있어서

드레그해서 파란에 있는 제블로그에 올렸었는데

저작권자가 고소를 했더라구요...

건당 백만원이라고 하드라구요...

플룻연주가 한 개 더 고소대기중이라고...ㅎㅎㅎ

경찰서에선 합의를 하라고 하더군요..

해서...

전화를 했더니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좀 깎아달라고 했더니

두개니까 백만원을 달라고 해요...

거긴 아예 법률사무소에서 맡아서 하는 가 보더라구요..

암튼...

백만원에 합의하기로 하고....

경찰서를 나왔는데요...

사실...

저는 그 홈피 주인에게 항상 허락을 맡고 올리거든요?

그리고...파일을 다운받아서 한 것도 아니구요...

또... 어떤 영업적 상업적 목적도 없었구요...

단지...

제목만 보고...

가브리엘 천사가 생각나서.....가져다 올린 건데...ㅠ.ㅠ

그런데요...

부산에서는 초범이고...ㅠ.ㅠ 범이라고 하니까 좀...피식~

초범들은 다 용서해 준대요...

기도원에서 눈물 콧물 흘림시롱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어떤 마음으로 가져다 올린 줄 아시잖아요....엉엉 앙앙~~

책임져 주세요....으흐으으응~~ 팽~~ 코 풀어 가면서...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요...

담 날 아침에...남동생이 전화를 했어요...ㅎㅎㅎ

잊고 있었는데...

제 남동생이 저작권보호 협회 다녀요...

동생한테 듣고선 연락을 했더라구요..

합의하지 말라고 하대요...

검찰로 바로 넘길거라구요...

아무것도 모른체 겁먹지 마시고요...

합의하지 마시고요...

검사님앞에 가셔서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처음은 다 용서해 준대요!!

왜냐면요...

목적이 없기 때문이죠...이익을 추구하는 뭐 그런것요..

저도 아직 결과는 안나왔지만

딸래미에게 전화했더니...

뭔 걱정을 다 해싸쏘...하나님이 다 알아서 없던 일로 해 주실건디...

지는 걱정이 하나도 안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요...

두 달이 똑같은 대답을 하드만....

남동생이 전화를 해서 마음을 놓게 만드네요...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말을 했더니...

두 딸의 대답이 또 같은 거 있죠....

내가 기도했는디...당연하제라~~ ㅎㅎㅎㅎ

엄마보다 나은 믿음들이어서 가슴 뭉클~~...

이아이들의 기도대로 없었던 일로 해 주실 줄 믿고

다른 기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글/기쁨의 꽃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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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앤드루 매터스는
                        <마음 가는 대로 해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사람들을 사귀면서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인생에서 좋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한숨 쉬지 마라.
                         고민은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 시행하라.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라.
                         고민을 하나 안하나 결과는 똑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고민은 10분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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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는 행복 **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 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言語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 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日常 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 詩 이 해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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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국가관이 어떠해야 하는가?

에스더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국가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국가는 신앙의 자유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터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국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자신의 높은 지위를 버릴 각오까지 하면서 왕에게 자신의 민족을 위한 간곡한 청을 하게 된다. 왕후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수고, 아니 목숨을 걸고 왕에게 청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족과 백성을 극적으로 살리는 해피엔딩을 이끌어 내게 된다. 과연 국가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고백이 무색하지 않을 결과였다.
오늘은 한국시간으로 3.1절,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대표 33인과 그로부터 촉발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피끓는 외침을 외치었다. 비록 그 사건으로 더 많은 박해와 핍박을 겪어 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지만 결국에는 8.15 광복을 맞는 내적인 디딤돌을 마련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 3.1절의 외침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식이 깨어있고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일제가 강제하는 신사참배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선 땅에서 참다운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피를 토하는 노력이 결국에는 광복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국가를 위해서 에스더처럼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한국에 있을 때, 토플을 준비하러 어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원의 문 앞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대표선수이다"라고...
이 말의 의미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한국인의 긍지를 잃지 말고 대표선수라는 의식을 갖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그 공부를 통해 대한민국을 더욱 단단한 나라로 만들라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대한민국 대표선수'라는 의식이 있다. 비록 지금 당장 국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시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장차 지금 하는 공부를 통해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두말할 것없고 나아가 국가를 위해서 젊음을 불태우고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값진일임에 틀림없다.
몇천년전의 에스더의 국가관을 다시 생각하며 3.1절을 맞이해본다. 그리고 다시한번 신앙인으로서 국가를 위해서 할 수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출처제공:승리교회 함영주 목사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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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는가?

미국의 대학 캠퍼스 안에서 학생들이 바지를 엉덩이가 보일 정도로 허리 밑으로 내려있는가 하면, 잠옷 바람으로 나다니는 학생들까지 있어서 대학 당국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기사가 났었다.
그런데 기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 스스로가 단정한 옷차림을 함은 물론 대학 캠퍼스 내에서 실천해야할 복장에 대한 지침까지 만들어 나눠주며 옷 바로 입기 운동을 벌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그 동기였다.
‘여러분! 누구도 당신들의 속옷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며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말이나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 관행까지도 바꿀 수 있게 하는 능력 이것이 지도자의 힘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오바마 대통령은 많은 젊은이의 존경과 모본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분명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가톨릭교회의 대표였던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이 전국적인 애도의 물결로 이어지면서 그 분이 평소 말씀하고 실천했던 감사와 사랑, 나눔의 실천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무엇이 이렇게 전국민적인 크고 아름다운 반응을 일으키게 하였는가?
그 분이 진정한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분은 군사 정권때 그 정권에 도전했던 민주화운동의 인사나 학생을 감싸 보호해 주었으며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있었다.
그 분은 계급제의 성직제인 한국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지만 평소에 늘 서민적인 친밀감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으며 임종전 병원에 입원해서도 병원과 의사들에게 자신에게 특별한 치료나 대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김추기경은 직위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고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는 청빈한 삶을 실천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의 존경받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력의 힘이었다.
물론 그 분은 개신교회 목사와 다르게 가톨릭의 신부였기에 가정을 가지지 않았고 그것이 권력앞에서 용기와 물질이나 탐욕을 멀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위와 처지가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지금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이 분만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 없을 것 같다. 한국교회 지도자중 어느 분이 죽는데도 전 국민적인 애도를 이끌어 내거나 그 분의 말씀이나 삶을 본받자는 운동이 사회 일각에서나마 일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분이 담임했던 교회를 떠나서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한 마디로 한다면 이기적인 욕심일 것 같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물질에서 자유롭지가 못한 것 같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겸손하게 섬기는 자의 자세이기 보다는 군림하고 섬김받으며 다른 교회들과 협력 보다는 독자적인 개교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해마다 교단 총회에서 뽑는 총회장 선거는 밝고 투명하기보다 부정(돈)으로 얼룩질 정도로 명예욕에서 세상 정치인 못지않았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때이다. 그리고 신뢰의 회복은 먼저 지도자들의 반성과 지도력 의 회복에 있다. 지금이야 말로 한국교회가 김수환 추기경 죽음에서 참된 지도력을 배워야 할 때다.

출처 ; 서충웅 목사님방,Easther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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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의 감사

오늘 하루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하루로 너무나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가겠지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한 영혼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무서운 무기가 되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주님 오늘도 내 입술에 파숫꾼을 세우시사
감사의 말, 위로의 말, 힘이 되는 말,
생명이 되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늘도 마귀사탄에게 참소거리를
제공치 아니하도록 성령하나님 내 영혼을 깨워주셔서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 함께하셔서
주님이 살아계시는 분이 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를 돌아볼 때 내가 내뱉은 말들을 통하여
정말 주 앞에 떳떳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기도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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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다는 속을 더 가꾸는 사람

요즘에는
모든것들이 화려합니다.
밤거리의 네온사인은 화려하다못해
현란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마찬가집니다.
무엇을 그리 치장할 일이 많은지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밥먹는 사간보다 더 길어지고있습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것은 분명 바람직한일입니다.
나쁘다고 탓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씁쓸한기분이 드는것은 무엇때문일까요?
그것은 겉만 화려했지
속은 정갈하게 가꾸지 못한 까닭입니다.
겉보다는 속을 더 가꾸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자연히 겉도 아름답기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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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꿩의 비름>


^*^입과 혀에 대한 격언^*^

1 어진 사람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만 들은 것을 이야기 한다.

2 귀로 무엇을 들을 것인가, 눈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는

   자기 의지대로 하기 어렵다.
   그러나 입은 의지대로 할 수 있다.

3 혀는 마음의 붓이다.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4 자기가 하는 말을 자신이 건너게 될 다리라고 생각하라.
   그리하면 튼튼한 다리가 아니면
   당신은 건너지 않을 것이다.

5 현명한 말은 현명한 행동보다 못하다
   ‘이를테면’하는 말을 듣거든,  그것은 예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 말은 약과 같은 것이다.
       신중히 생각해서 말해야 한다.

6 한대 맞은 아픔은 언젠가는 없어지지만,
   모욕 당한 말은 영원히 남는다.

   ▶ 급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급하게 잘못을 저지른다.

7 말이 당신의 입 안에서 돌고 있을 때 그 말은 당신의 노예이지만,
   일단 밖으로 튀어 나왔을 때는 당신의 주인이 된다.

   ▶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남을 욕하는 것보다 낫다.

   ▶ 침묵도 하나의 대답이다.

   ▶ 침묵은 어진 사람을 더욱 어질게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침묵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8 어리석은 자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어리석은 자는 수다스럽다.

9 지껄이기를 잘하는 어리석은 자는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와 같고,

   말없이 가만히 있는 어리석은 자는
   고장나서 움직이지 않는 시계와 같다.
   둘 중에 후자가 훨씬낫다.

10 영혼까지도 휴식이 필요하므로,
   인간은 잠을 자는 것이다.

   입에도 휴식을 주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탈무드의 격언 中)


출처:서춘웅 목사님 방.....준비: Esther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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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는 나무
나, 당신의 나무이기를 원합니다

가라져 말라비틀어져도
같은자리,자리매김하며
당신이 주는 비를 기다리는
사철 옷 매무새 바꿔 입고
기다림, 해를 거듭하며
당신이 스쳐주는 바람을 맞이하며
당신으로 하여 흔들릴 때
묵묵히 지켜 봐 주세요

당신이 흩뿌린 눈으로 하여 추울 때
짚새가 되어 덮어 주세요

그대가 새처럼 떠난다 해도
나,당신의 나무이길 원하는 것은
언제도 찾아주는 그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나, 당신의 나무이길 원합니다



나, 당신의 나무이길 원합니다/채련

급류를 헤쳐 나가는 리더십

 

예수님은 거친 시대에는 이렇게 사역하라고 가르치셨다

고든 맥도날드  Gordon MacDonald December 27, 2008 이지혜 옮김

 

 

 

아내 앤과 나는 14 피트짜리 카약 두 대를 갖고 있다. 카약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 것도 화려하고 매끈하고 간편하다. 제조사윌더니스 시스템스(Wilderness Systems)―가 호수나 잔잔한 강이런 곳을 카약 타기에서는 정수(flat-water, 淨水)라고 부른다에서 타기 좋게 설계한 것들이다.

우리는 정수(淨水) 카약 타기를 즐긴다. 메인이나 뉴햄프셔 주에서 나란히 노를 저으면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 가끔 강둑에서 말코손바닥사슴이나 사슴, 물새 같은 야생동물을 목격하기도 한다. 카약을 타면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기름 값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우린 자주 카약 예찬론을 펼친다. 그것도 꽤 진지하게.
물론, 세차게 흘러내리는 물살에 바위와 소용돌이와 암붕(岩棚)이 도사리고 있는 급류에서 타도록 설계된 카약은 따로 있다. 이런 곳에서는 배가 뒤집히기 십상이다. 급류 타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데, 이건 오히려 미친 짓에 가깝다.

급류에서 카약을 탈 때는 이야기를 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거나 야생동물 사진을 찍거나 하는 일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카약이 뒤집히지 않고 제대로 전진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잔잔한 호수에서 오후 한 나절 아내와 함께 카약을 타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러나 카약을 타고 급류를 헤쳐 나온 사람들은 온몸이 쫄딱 젖고 기진맥진한 채 배에서 기어 나온다. 그 사람들은 다들 재밌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나는 정수 같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아 물론, 변화와 혁신도 있었다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정도였고, 적응할 수 없을 만큼 심하지도 않았다. 목회를 시작하고 처음 5년간 나는 잔잔한 호수에서 유유자적 노를 젓는 것 같은 목회를 했다. 소소한 변화는 있었지만 큰 무리는 없었다. 마이크와 앰프, 스피커 시설을 들여 놓은 것이 큰 사건이라면 큰 사건이었다. 성가대 감독과 오르간 연주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도 꽤 큰 결정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주일 아침 교회 지하실에서 커피를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 발상에 놀란 교인들이 여럿 있었고, 몇 사람은 이 일 때문에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나는 신학 교육도 정수 같은 세계에서 받았다. 그렇게 말들은 안했지만 이런 생각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라, 특정 신학 체계(그게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겠다)를 섭렵하라, 그리고 개인 경건 생활을 유지하라말하자면, 정수 타기 목회(flat-water pastoring)를 교육받은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정수 시대에 맞게 설계된 목회 리더십이 작동을 멈췄다. 세상은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모든 것들조직, 사상, 제품, 심지어 지도자까지이 갈수록 단명했다. 곳곳에서 바위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거시적 차원에서, 1960년대는 격변기였다. 끔찍한 암살 사건, 과학 기술 혁신, 도덕성 혼란, 국제 동맹 재편, 부정 축재와 빈곤의 심화가 이 시대를 장식했다.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폰, 아이팟 같은 실생활에서 중요한 기기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목회자는 상담자, 매니저, 기술자, 마케터 역할까지 해야 했다.

우리는 한 세대 만에 정수에서 급류로 들어갔다. 여기서 한 굽이 더 돌면 나이아가라 폭포가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내 말의 요점은, 급류가 걱정된다면, 지금이야말로 강가로 노를 저어 나가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당분간은 급류가 이어질 테니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 본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신학이나 영성, 방법론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급류는 기독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삶의 속도가 극적으로 빨라지고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시대가 전에도 있긴 했다. 그때도 지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찾아내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예를 들어 보자.

루터. 루터의 시대는 활판 인쇄 기술 덕택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가 널리 확산된 시대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을 개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제도들은 부패했고, 그래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루터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새로운 현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부인했다. 하지만 루터는 달랐다. 그는 기독교 세계를 자극하여 신학과 교회에 신선한 혁신, 곧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급류 속에서 오히려 성공했다. 그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사상과 영성을 발전시켰다.

웨슬리.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산업혁명과 촌락에서 공업 도시로 인구가 대규모로 이동하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하지 못했지만, 웨슬리는 그 변화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말을 달려 사람들이 일하는 탄광과 시장, 항만 같은 곳으로 찾아가 그들에게 맞게 복음을 전했다. 그를 통해 회심한 민중들을 기성 교회가 받아주기를 거부하자, 웨슬리는 그 사람들을 모아 속회(band)와 반회(class)라는 조직을 꾸렸다. 당대의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웨슬리의 혁신적인 소그룹 사역은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현재의 인물로는 하이벨스가 있다. 내 친구 빌은 루터나 웨슬리와 나란히 소개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빌 하이벨스는 교회가구도자들”(seekers)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한 우리 시대 새로운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나는 하이벨스와 그의 젊은 동역자들이 정수 교회(flat-water church)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규칙들을 하나하나 깨나가면서 기성 교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을 수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끈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루터와 웨슬리와 하이벨스는 때로 배가 뒤집히는 것도 개의치 않으면서 급류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는 어땠는가? 그 시대에 적절한 비전과 계획을 품은 새로운 사역이 일어났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급류 시대에 들어맞는 참신한 신학적 통찰과 새로운 영성이 탄생한 것이다.

책 좀 읽는 독자라면, 이 정도 역사는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례를 통해 용기를 얻도록 해야 한다. 영적인 지도자로 부름 받은 모든 이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새로운 방식으로 적응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용기를 설교하고 가르치며 몸소 본을 보여야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브라이언 a맥클라렌(Brian McLaren)이 그의 책 제목을 「모든 것은 변해야 한다!(Everything Must Change!)로 붙인 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저 새로운 기술이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인 지도자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고 적응할 것인지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예수님이 맞닥뜨린 급류
우리의 근본적인 문서성경는 급류 시대의 삶과 사역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도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이라는 것을 성서 시대의 사람들도 느꼈을까?

예수님이 수난을 받으시기 전 감람산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과 같은 급류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세계 유대교 본부에서 행정가들과 종교 호사가들(administrators and religious dilettantes, 서기관과 바리새인/편주)과 한판 붙으셨다.

예수님이 그들과 정면충돌하신 사건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될 판이었다. 감람산 세미나가 있던 날, 결국 사달이 났다. 반대자들의 편협한 형식주의에 넌더리가 난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성전 문을 박차고 나가셨다. 마태복음 23장 마지막 부분(37-39/편주)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별사를 읽어보면, 이런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표현해 보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당신들의 영적인 민감성에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나는 이제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당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교회를 걸어 나가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예루살렘 도성에 계신 그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이 왜 그러셨는지는 잘 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도 그러신다면, 그 까닭은 뭘까?

예수님이 그렇게 성전 문을 나서시자, 깜짝 놀란 제자들은 뒤따르며 이렇게 여쭈었다. “이 건물들이 보이십니까?” 그들은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선생님 편으로 포섭해야 할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셨다고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우습게 보셨단 말씀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뒤돌아 제자들을 보시고는 성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것들이 보이느냐? 내가 말하노니,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리라!” 예수님의 말씀 몇 마디에, 성전과 그것이 상징하는 종교 체제는 성전에서 건물로, ‘이것들로’, 돌들로 전락해 버렸다.

전율이 느껴지는 전락이다.

이런 격렬한 대화가 오간 후에 급류 시대를 대비한 세미나가 이어졌다. 거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제자들을 속속들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성전을 이 세상의 중심, 곧 이 땅에 마련해 두신 하나님의 본부로 여기며 살아 왔다.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성전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이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고작 이런 질문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 이 일이 일어난단 말씀입니까? 이것이 주님의 승천(이나 재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질문들은 자기네 스승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떻게든 이해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느라, 뜻도 모르고 한 말인 것 같다. 제자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성전이 망한다면, 도대체 안 망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마태복음은 계속해서 전쟁과 인류 멸망, 자연재해, 판치는 불의, 속임수, 사회 분열을 언급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할 것만 같은 세계 체제가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는 그림을 그리신다. 역사의 시대마다 나타났던 수많은 급류들을 묘사하신 것이다. 어떤 지역을 보나 세계 전체를 보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역시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내 생각에, 예수님은 무시무시한 급류 시대에 대비하여 글로벌 비전을 갖추도록 지금도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신다. 예수님은 구세주시니 적당한 선에서 경고나 몇 말씀 하시고 낙관적인 역사관을 내비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제발 부탁드려요. 이 갈릴리 촌뜨기들을 보내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을 성취하려 하신다면, 이런 식으로 겁주시면 안 되죠! 그랬다가는 다 줄행랑을 치고 말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의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세상은 지진해일과 국제 분쟁, 경제 불안이 난무한 오늘날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틀림없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지독하게 운 나쁘고 엉망으로 꼬이기만 하는 날에(나는 이 표현을 주디스 바이올스트(Judith Viorst)의 책 제목에서 따왔다이 동화 책은 「난 지구 반대편 나라로 가 버릴 테야!(고슴도치)로 역간됐다/편주),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과 청지기로 신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다음 내용은 급류 시대를 헤쳐 나가는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변함없는 원칙들이다. 각 항목은 이 지구 위 어떤 문화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역사의 어떤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 이것들은 기독교 사상의 핵심에서 뽑은 것들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정리했다.

내가 가르친 나라는 제도나 권력과는 상관이 없다.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황금 건물이나 석조 건물도 아니다. 이 나라는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하늘의 진리가 동력이다. 천지 만물이 사라진다 해도, 내가 가르친 진리는 망하지 않고 건재할 것이다. 이 진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 진리를 기억하고 소화하여 실천하라.

급류처럼 힘겨운 시기를 예상하라. 어려움이 닥칠 때를 대비하라. 삶이 쾌청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거친 환경이 찾아올 것이다. 고난을 겪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 가운데 순종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나를 따르려면 목숨까지 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 아무런 고난도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왕의 왕이 다시 와서 역사를 마무리하시는 그 날을 대비하라. 그때에는 기이하고 전에 없던 일들이 있을 것이다. 신실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갈라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너희는 날마다 내가 다시 올 날을 예상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약속하는 재림이 있기에 너희는 소망 있는 백성이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소명을 온전하고 신실하게 실천하라. 내가 너희에게 믿고 맡긴 것들(과 사람들)을 지혜롭게 관리하여 책임감 있는 청지기로 살라. 너희 행동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을 명심해야 한다. 너희가 이끄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너희는 충성했는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너희 생명과 자원을 투자했는가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굶주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죄수들)을 소홀히 하지 마라. 그들이야말로 너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는 날, 연약한 형제자매들에게 한 너희 행동을 보고 하나님은 판단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략을 분명히 말씀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회심시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제자들)의 공동체로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리더십에서 인상적인 점은 바로 그 단순심오함이었다. 예수님의 원칙은 그 어떤 사역 환경에도 적용 가능하지만, 급류 시대에는 더욱 적절하다. 때로 돈과 건물과 조직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필수는 아니다.

이 제자/사도들이 예수님의 계획을 적용하여 아주 훌륭하게 실행해 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실수, 지연, 반대 세력? 물론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굳건하게 나아갔고, 주님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제자들의 전략은 무자본과 풍부한 인력이었다.

이 문화에서 저 문화로 옮겨 다니면서 맞닥뜨린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제자들은사역 계획을 조정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훈련시켜 자신들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훌륭하게 준비시키셨다. 급류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염려와 나의 기대
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급류에 적응하면서, 과학기술과 프로그램 개발, 조직적인 전략 같은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험한 환경을 돌파하도록 우리를 안내해 줄 신학과 영성을 개발하는 일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내가 낙관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소위 남방 개발도상국(Global South)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점점 더 많이 배울 것이다. 그들은 북방 선진국(Global North)에 사는 우리보다 감람산 세미나의 내용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당분간은 계속해서 급류가 밀려올 것이다. 경제 상황, 국제 관계 재조정, 민족 이동 같은 것들이 우리 생각과 감정을 극한으로 몰고 갈 것이다.

빈부 격차 심화, 전통적인 가족 관계와 결혼 제도의 붕괴, 에너지 고비용 같은(말하자면 끝도 한도 없다) 현실적인 문제가 신자 공동체를 시험할 것이다. 그중에는 이런 시험을 견뎌 내지 못하는 공동체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잘 극복하는 공동체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감람산 세미나에서 하신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결과로 말이다. 온몸이 물에 쫄딱 젖고 지쳐 나가떨어질 지경이라도 급류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영적 리더십의 훌륭한 모델이 될 것이다.

 

 

출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Washington Post 誌에서 발행하는...2009년 1월 18일자 Parade 誌에
미국 제 44대 대통령 오바마가...당선자 시절에 썼던 "아이들에게 쓴 편지"가,
"내가 너희와 모든 아이들을 위해 하고 싶은 것"(What I Want For You-And Every Child)이라는 제목과,
'내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My Daughter)라는 부제로 게재되었습니다.

감동적인 내용이라...번역해 보았습니다.
한글 문맥을 위해서...상당 부분을 의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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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들아,

너희들이 지난 2년 동안
선거를 위해 여러 야외행사와 퍼레이드와 주 행사 state fairs 에 참여하면서
엄마가 먹지 못하게 했던 정크 푸드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좋아 했을 것 같구나.

그러나 그것이...엄마와 너희들에게 쉽지는 않았을 거다!
이제 너희 둘은 새로운 강아지를 얻게 되서 신이 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2년을 대신할 수는 있겠니?

지난 2년 동안
아빠가 너희들과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해
얼마나 아쉬워하고 그리워 했었는 줄 아느냐?
오늘 우리 가족 모두가 이 일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고 싶구나!

아빠가 젊었을 때,
세상이 모두 아빠 꺼 같았단다.
어떻게 출세하고...성공해서...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겠다는...
아빠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바로 그때 너희를 갖게 되었는데,
너희들은 호기심이 많았고...장난도 많이 쳤고...
너희가 웃을 때마다...아빠의 마음에는 모든 욕심이 사라졌고
아빠의 하루가 환하게 빛나기만 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지금까지 아빠가 하려고 했던 그 모든 꿈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단다.

아빠는 아빠 생애에서 가장 큰 기쁨은
너희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너희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하고
그 행복이 너희들의 삶에 이루어 지게 할 수 없다면
아빠 자신의 삶은 어떤 것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얘들아,
너희들을 위해서 하고 싶었던 것들 때문에...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하고 싶었던 것들 때문에
아빠는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거란다.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이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에 맞게 학교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도전 정신을 일깨워 주고...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학교에서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부모들이 부유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대학에 갈 수 있으면 좋겠고..
월급을 많이 주고 건강보험 같은 베네핏이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존엄하게 은퇴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새로운 많은 것들이 발견되고 또 만들어져서
너희들이 새로운 기술과 발명품들로써 너희의 삶의 질이 나아지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보다 더 깨끗하고 안전하게 만들수 있으면 좋겠다.


 


인간적으로도 모든 벽들이 허물어져서
인종적으로나...지역적으로...
남녀 간에나...종교적으로...분리된 것을 넘어서
서로에게서 가장 좋은 점들만 바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때로는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젊은 남녀를 전쟁터나 위험한 곳으로 내 보내야만 한단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할 때,
아빠는 가장 좋은 이유가 있을 때만 그렇게 하겠고,
먼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끝마칠 수 있도록
아빠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용감한 미국인들이 싸워서 얻는 그 모든 것들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어린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이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특권에는 책임감도 따른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아빠가 너희들만 할 때에...
너희 할머니가 아빠에게 .독립선언서를 읽어주시며...가르쳐 주셨던 것이란다.
2백년 전에 기록된 이 글들이 의미있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평등을 향해 나아갔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하시며 가르쳐 주려고 하셨던 교훈 말이다.

너희 할머니는 아빠에게
미국이 완벽하기 때문에 미국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의 나라를 완벽하게 만드는 일에 남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새로운 세대들과 더 가까이 함으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미국이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할 책임이란다.


너희 둘다 이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알고 있는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금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었던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미 국가가 우리 가족에게 많은 것을 주었는데,
너희가 이 나라에 무엇인가 돌려주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네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너희가 너희의 잠재력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너희가 자신 보다 더 큰 짐을 지게 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란다.

너희 꿈을 끝없이 이루면서 이 사회에서 성장하려면
너희들이 이것들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사랑이 많고 헌신적인 여인으로 자라나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려면,
너희가 할 수 있는 것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도 배우고 꿈꾸며 자라나서
잘 되게 하는 바로 그것이 바로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이다.
그것이 바로 아빠가 우리 가족으로 이 위대한 모험을 하게한 이유란다.

아빠는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너희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희를 사랑하고 있고...
백악관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할 때...너희들이 잘 참아 주고
들뜨지 않고...우아하게...웃음을 잃지 않고 지내준 것이...정말 고맙구나.

 
사랑하는 아빠로부터    /펌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딤전 2:11-12)

              
최근에 와서 본문은 여성 성직 문제로 논난의 주제가 되었으며 실제로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교파를 제외한 다수 교파에서는 여장로제와 여목사제를 두고 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보아 그것이 가능한가?
 
사실 본문은 고린도전서 14:31-35, 디도서 2:5 등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본문의 교훈은 그것이 목회를 가르치고 있는 서신이라는데 그 비중이 크다고 하겠다. 여성 성직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바울의 이 말씀이 모든 후시대의 신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확증하기에는 충분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바울의 교훈일 뿐이라는 것이다.1)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그 시대적인 산물로 본다면 본문과 연관된 남편과 아내의 교훈도 시대적인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오늘의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성경을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서의 성경은 신앙생활의 한 참고서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면 실제로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1. 이 본문에는 남자에게 허용되는 것과 여자에게 허용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 여자는 남자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남자 회중).  다른 말
      로 하면, 가르치는 장로의 기능이나 설교로서 회중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목사로서의 권위를 가진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여자에게가 아니라 남자
      에게 허용된 것이다.
   2. 반면에 이 구절은 여자가 개인적 근거에서 사적으로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예컨대 부리스길라가 그 남편 아굴라와 함께 아볼로를 가
      르쳤다(행 18:26). 또 여인이 예언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빌립의 네 딸은 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었다(행 21:9). 루디아는 그녀의 가정에서 했던
      성경 공부와 기도 그룹에서 리더의 역할을 했다(행 16:14, 40).
   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립된 교회의 상황에서 여성 사역자는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은사와 재능을 소유했던지 남자를 지배하는 교회적 권위를 가
      져서는 안 된다. 여자는 교회의 사역에서 돕는 자가 되어야지 지역 교회 사역의 지도자로서 안수 받은 목사의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디모데전서
      2:12에서 분명히 그것을 제외시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12제자 선택과 70인 전도자를 선택해서 팔레스틴을 복음화시킨 예에서도 분명하다.
   4. 이 구절은 분명하게 교회의 직제에 있어서 여성의 종속됨과 가정에서 남편에게 대한 아내의 종속됨 사이에 상호 연관이 있다. 아내는 더 많은 은사
      와 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경건 생활에서 남편의 권위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다. 아내는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
      종해야 한다(엡 5:22-24).2)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본문은 여자가 남자를 위한 공중 사역을 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주장의 근거로서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의 창조와 타락의 순서를 들고 있다. 그러기에 핸드릭슨은 여성의 성직금제는 마치도 물 속에서 새를 날게 하지 않음과 같다고 전제하고, 공식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과  공예배에서 말씀 선포의 방편으로 남자를 지배하는 권위 행사는 여자에게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다.3)  이런 공적인 가르침이나 설교의 금지는 고린도전서 14:33-36과 완전하게 일치된다.4)
 
그러면 여자의 집사직은 어떠한가?
여성의 집사직은 그 직분의 성경상 다스리는 직분이 아니고, 봉사의 직분이기 때문에 여성의 본성에 잘 맞을 뿐 아니라 성경에 그 실례도 있으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로마서 16:1에서 여집사 뵈뵈를 언급하고 있다(diakonos). 그리고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여자 집사의 예이다. 물론 뵈뵈가 회중의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 집사로서 안수를 받았는지는 불확실하며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바울은 여기서 뵈뵈를 교회 법의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여하튼 여성의 성직제는 적어도 이 목회서신의 본문에서는 금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1975년 오늘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지에 "왜 나는 여성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가"의 제하의 글에서 에리자베스 에리옷(Elizabeth Elliot)은 "교회나 가정에서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남성에게 귀속되어 왔다"고 하였다.

   주
   1. J.  Glen Gould, I and II Timothy, Titus(B.B.C. Vol. 9),  p.577
   2. G.L. Archer,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pp.411-413
   3. William M. Hendriksen, Timothy and Titus(Banner, 1964), p.109
   4.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IVP), p.76

글/ 서춘옹 목사님
성경적 교회론에 기준을 둔 목회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7-18)  

예수님은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앞으로 출생할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었다.  향후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질 것이다. 물론 신앙고백의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다.(행 5:42, 9:22, 17:3, 18:28)

이 믿음은 성령으로 인해 가능할 것이다.(고전 12:3) 이를 위해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한 후 50일 뒤에 온 오순절에 세상에 강림했다.(행 2:1-4) 성령 강림절은 신약 교회가 탄생한 날이었다. (고전 12:13) 이 이후 신약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게 하는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다. 이런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해야 한다는 권면이 성경에 기록된다.(요20:19, 행20:7)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신약의 뿌리가 구약에 있듯이 신약 교회의 뿌리도 당연히 구약에 있다. 구약 성경에 교회론은 이미 설명되어 있다. 선민 이스라엘은 상식적으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신약 성경에서 교회론이 자세히 설명될 필요가 없었다. 구약 시대의 교회 모습을 추적할 수 있다면 좀 더 성경적인 교회론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구약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처음으로 창세기에서 신약 교회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만물 창조 후 하나님은 하늘을 제외한 모든 것을 통치시킬 목적으로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 (창 1:26-28) 하나님의 주례 아래 이들은 결혼했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창 2:18-25) 이들을 통해 인류가 번성할 것이며 이들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창 1:28)은 수행될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통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지상에 건설될 것이다.(창 1:26) 타락 이전 최초의 가정은 인류 최초의 인류 사회로써 가장 작은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학교, 교회와 정부 역할까지 한꺼번에 수행했다. 이 가정에서 가장(家長)은 교사요, 목사요 그리고 왕이었다. 달리 말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가장은 선지자, 제사장과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삼직분은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위한 방법이었다.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이지만(창 1:26) 가정이란 제도에선 질서를 요한다. 이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아담에게만 먼저 명했고(창 2:16-17) 그가 하와를 비롯한 향후 출생할 자녀들에게 가르쳐 행하도록 했다. 이것은 문화사명이 남녀에게 동등하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잘 비교된다.(창 1:28)

가장의 복합적인 역할은 출애굽 사건 발생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때까지 시대를 ‘족장 시대’라 부른다. 출애굽 사건 이후 선민 나라가 형성되며 예전 가장이 소유한 삼직분들은 분리되며 나누어졌다. 아론 지파가 대제사장 직분을 그리고 유다 지파가 왕 직분을 혈통적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선지자 직분은 각 지파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면 출애굽 사건 전후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안식일 규례를 지켰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특별한 장소에 모여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를 전혀 명하지 않았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가정에 모여 쉬면서 안식일을 지켰다. 가정에서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했다.

이 때 삼직분의 소유자인 가장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제사나 예배를 주관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단을 쌓을 때 항상 가장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창 8:20, 12:8, 13:18, 22:9, 26:25, 33:20, 35:7)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부터 노아의 홍수 심판을 지나 선민의 마지막 족장인 야곱까지 적어도 2000년 동안 경건한 사람들은 가정에 모여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배했다. 이들에게 가정이 바로 교회 자체였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하나님은 움직이는 성전인 성막을 지어 이스라엘과 함께 행하였다.(출 29:43-46)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성막을 따라 행했다.(민 10:33-36) 가나안 땅 정착 후 에브라임 지파의 영내에 위치한 실로라는 지역에 이 성막은 안착했다. (삼상 1:7,24)  그러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이스라엘은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다윗의 등극 이후 유다 지파의 영내에 위치한 예루살렘이 성전 건축 장소로 비로소 지목되었고(대하 3:1)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은 완공되었다. (왕하 6:38)

율법에 의하면 장성한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정도 예루살렘 성전에 삼대 절기에 반드시 참석하여야 했다. (출 23:17) 이들 절기는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유월절, 맥추절이라고도 하는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이었다. 이스라엘은 나머지 절기들에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석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모여 자신을 경배해야 한다고 반드시 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막 또는 성전 시대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 드렸는가? 삼대 절기나 번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면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사는 곳인 고향의 집에서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준수했다. 이 당시 회당은 아직도 없었다. 이때도 선민 이스라엘에게 가정이 교회 역할을 했다. 그러나 특이한 사실은 출애굽 사건 이후 이스라엘이 교회로 불렸다는 것이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스데반 집사가 지적했다.(행 7:38) 이 지적은 출애굽 사건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구약 시대 교회론도 구원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곧 하나님 나라였다.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이면서 동시에 교회였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삼대 절기나 개인의 번제물을 요하는 제사를 드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이지 않았다. 이들은 고향의 집에 머물며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다윗 왕국은 멸망당했고 이 때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선민은 이방 나라들로 흩어져 살았다. 이 때 회당이 생기며 유대인들은 안식일 마다 회당에 모였다. 비로소 이들은 집이 아니라 회당에서 구약을 읽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예루살렘 방향을 향해 하루에 세 번 절을 하며 기도했다.(단 6:10)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이런 신앙 삶을 계속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방인들을 비롯한 개종한 유대인들은 성도의 가정을 교회로 삼아 모였다. 그것도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 모여(행 20:7, 고전16:1-2, 계1:10) 성전 제사나 회당식 예배를 대체시켰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인해 구약의 제사 제도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더 이상 율법에 따른 제사는 무용해졌다. 자연스럽게 사도들의 가르침이 신약 시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날까지 교회는 신자들이 소재하는 곳에 자발적인 조직으로 출발하며 세워졌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핀 성경의 구속사에 반영된 교회의 모습들이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이 발견된다.

첫째 근본적으로 가정이 중요한 예배 장소였다. 출애굽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즉 족장 시대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안식일 마다 가정에 모여 쉬면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즉 교회라는 구체적인 건물은 전혀 없었다. 타락 이전 삶과 예배가 전혀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 사명(창 1:28)을 수행하는 삶이 하나님께 향한 예배 행위 자체였다.

타락 이후에도 이런 예배 방식은 한 동안 변함이 없었다. 셋의 후손을 비롯한 경건한 무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창1-2장)와 메시아에 대한 약속(창 3:15)에 근거를 두고 삶의 현장에서 계속 신앙 삶을 영위했다. 이 당시에도 교회와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가장이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존재로서 가정에서 예배를 주관했다.

이 사실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특별히 거룩한 장소라는 교회론이 수정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이런 신비한 교회론은 한국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심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지적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불교나 무교라는 한국의 전통 종교가 주는 신비주의적인 영향이 한국 기독교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 육체적인 출애굽 사건은 이미 오래 전 발생했지만 영적 그리고 정신적 출애굽 사건은 그 후 오랜 동안 진행되었다. 마찬가지 현상이 한국 교회에 진행되고 있다.

구약 성경의 예배론과 교회론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 교회론은 오늘날 기독교 가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지적한다. 이 점에서 구약의 교회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사는 곳인 가정이 교회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가장은 가정에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한다. 교회의 목회자가 그 역할을 수행해 준다는 식의 사고는 비성경적이다. 오늘날 이혼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가장의 역할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시대 구약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가정의 영적 역할은 회복되어야 한다. 남성 교인의 각성이 요구된다.

둘째 신앙 삶의 주 무대는 교회가 아닌 가정이었다. 구약 시대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특정 장소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그냥 가정에 남아 안식일을 준수하였다. 이 당시 신앙 삶의 무대는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삶의 터전 중 하나였던 가정 자체였다. 이 당시 농업과 목축업의 시대였다. 이들에게 집 밖의 밭이나 농장 또는 양들과 함께 목초지를 따라 찾아간 산야 그리고 가내수공업 현장이 바로 삶의 현장이었다. 이들은 특정 장소에 모여 예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실천했다. 이곳에서 선민은 불신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일하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 때 불신자들과 가치관과 삶의 방법에서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기반을 둔 삶을 고집함으로 이들은 여호와가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실천해 보여주었다. 이를 알리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칭찬 받는 인격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즉 수준 높은 인격과 가치관 그리고 그에 따라 사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늘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6일 동안 살다가 제 7일, 식구들이 가정에 모여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구약 성경이 그려주는 신앙 삶은 신약 시대 교회 삶이 신앙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문화 사명(창 1:28)을 잘 수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함에 있었다.(창 1:26) 그러므로 성도들이 타락한 세상이라고 피해가며 한적한 곳에 별도로 사는 것은 창조 기사의 가르침에 반한다. 언젠가 메시아에 의해 성취될 구속을 소망하면서 구약 성도들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성별은 무엇인가? 창조 신학이 주는 가르침과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삶으로 불경건한 무리와 구별되는 것이다. 앞으로 올 메시아를 소망하기에 더더욱 그렇게 살아야 했다. 아브라함은 갈데아우르를 떠났지만 가나안 땅에서 원주민들 가운데 섞여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강대국들과 그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창 14장) 야곱은 하란에서, 요셉은 애굽에서,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에서, 에스라, 에스더, 느헤미야도 세상 제국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그 당시 최고의 권력까지 오른 성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경건한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 됨을 증명해 보였다.

셋째 기독교 교회는 모으는 목회 못지않게 보내는 목회에 더 치중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된 두 가지 사실은 신앙 삶의 현장은 교회가 아닌 성도의 삶이어야 함을 강변하며 그리고 그 삶은 신앙 인격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구약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신약 사도들도 주일을 지킨다. 그러나 이 둘 사이 차이가 생겼다. 이 차이는 당연하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창조 기사에 바탕을 두고 앞으로 올 메시아를 소망하며 신앙 삶을 살았다. 그렇게 이들은 구원의 은총을 선취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신자들은 이미 성취된 구속에 바탕을 두고 신앙 삶을 산다. 이 둘 사이 의미상의 차이는 너무나 중요하여 교사인 목사의 해석과 풀이가 요한다.

신구약 성도들이 읽은 성경 사이에도 량에서 차이를 보인다. 구약 성도들은 모세오경에 근거를 둔 비교적 간단한 신앙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는 66권으로 구성된 신구약 성경에 신앙의 기반을 두어야 한다. 가르침이 더욱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면서 교사인 목사의 역할이 커졌다. 더구나 신약 시대 이방인들이 교회에 편입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대인들은 상식적으로도 성경을 잘 알았지만 이방인 신자들은 성경을 전혀 몰랐다. 이들을 위해 당연히 교사인 목사가 교회에 필요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구약의 교회론에 의한다면 구원받을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교회로 모으고 이들을 잘 양육하여 하나님의 문화 사명을 수행할 일군으로 세워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것이다. 즉 모으는 목회 못지않게 보내는 목회에도 힘써야 한다. 교회가 전도와 양육과 훈련에 힘써야 할 이유다.

양적 성장론은 이 점에서 잘못이다. 모으는 목회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자 훈련도 개 교회 성장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어선 안 된다.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적인 구원은 이원론적인 이분법과 달리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만 아니라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참여를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를 증거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넷째 교회는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 삶을 잘하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교회 행사 자체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도의 양육을 목표한 목회를 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목회자의 사명이 무엇임을 잘 지적한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전1:24절)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따라 살기 쉬운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 목회자는 제자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 자신의 가르침이 좋다는 확신이 클수록 더 그렇다. 그렇게 신자들의 믿음까지 주관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 목회자가 아닌 부활 주 예수님만이 성도의 믿음을 주관할 수 있다.  인간 목회자는 늘 약점과 불완전함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성도의 믿음이 잘 자라도록 돕는 자로 그 역할을 한정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대목자장인 예수님이 목회자를 작은 목자로 불렀기 때문이다. 인간 목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주인의 어린 양들을 잘 먹이고 성인 양들도 잘 치리하며 또한 잘 먹여야 한다.(요 21:15-17)

이 점에서 그는 유모와 비슷하다.(살전 2:7) 유모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종으로 주인의 자녀를 자기 자녀처럼 돌보는 어머니와 같다. 돕는 자는 도움 받는 자의 인격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  스스로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먹이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  맑고 순전한 젖을 먹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벧전 2:2) 이것은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 맑고 깨끗해야 함을 전제한다.(마 5:8)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그리고 유모인 목회자는 구속의 목적이 창조 신학에 있음을 알고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 체계 아래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균형 잡힌 신앙 삶을 살도록 성도를 돕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든 신학 분야들을 아우르는 통섭(consilience)의 신학으로 잘 무장하여야 한다.

한국 사회의 특징은 매뉴얼이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무슨 일을 할 때 예전 한 일에 대한 평가는 다음 일을 잘하도록 돕는 매뉴얼이 된다.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아주 훌륭한 매뉴얼이 되며 사회는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매뉴얼은 일의 방법인 길을 알려준다. 일만 중요하지 않고 길도  중요하다. 좋은 매뉴얼은 바르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도록 돕는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매뉴얼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혼란은 가장 완벽한 매뉴얼인 성경을 무시한 결과는 아닌가?  이것은 일만 강조하고 길을 무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종교개혁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언제보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구호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이 무엇임을 먼저 묵상한 후 목회를 하도록 하자.

장창수 / 러시아 선교사·<교회개혁과 신앙 삶을 위한 자기부정> 저자
 
출처 :숭사리 교회개혁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 마리안느  /준비: 빈의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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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가 알아야 할 7가지 키워드 / 존 맥스웰 >

:+: 리더가 될 자격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것은 절대로 선출이나 지명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위나 직함, 계급이나 학위가 리더의 자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나이나 경험 때문에 리더의 능력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정확히 말해서 리더가 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걸린다.


:+: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따르고 싶은 리더가 될까?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한 열쇠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들이 따르고 싶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 다음 지침들을 명심하라.

1. 다른 사람을 위한 리더가 되라. 훌륭한 리더들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리더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리더가 된다. 로렌스 벨은 이렇게 말했다. “작은 일을 귀찮아하는 사람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여러분에게 그가 큰일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2. 먼저 좋은 부하가 되라. 좋은 부하가 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유능한 리더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 육군 사관학교 같은 리더십 기관에서는 장교들에게 먼저 유능한 부하가 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미 육군 사관학교에서 하버드 경영 대학보다 더 많은 리더들이 배출된다.

3. 긍정적인 관계를 세우라. 리더십은 영향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리더십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 요즘 세대의 리더들이 특별히 이 점에 주목하는 것은 직함이나 지위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대인 관계가 좋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4. 탁월성을 갖고 일하라. 평범한 사람을 존경하거나 따르는 사람은 없다. 자격을 획득한 리더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사용할 뿐 아니라,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수준으로 일한다.

5. 감정이 아니라 규율에 의지하라. 좋은 시절에 리더로 있는 것은 대체로 쉽다. 하지만 모든 일이 막힌 것 같을 때, 가령 당신의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자신도 리더를 그만두고 싶을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이 리더의 자리를 획득할 때다. 인생의 계절 속에서 리더들은 추진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들을 맞이한다. 그 시기를 잘 통과하려면 힘없는 감정의 모래알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든든한 규율의 반석에 의지해야 한다.

6. 당신의 목표에 가치를 부여하라.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존경받는 리더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잠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이것이 리더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이며 최고의 가치다.

7. 당신의 힘을 나누라. 리더십의 모순 중 하나는 자신이 가진 힘을 축적함으로가 아니라 나눔으로 더 좋은 리더가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저수지가 아니라 강물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을 세우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면 당신의 리더십은 상상할 수 없는 지경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신은 위의 지침대로 살면서 리더의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이 보여 준 용기와 인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따랐다.

우리도 그들에게서 리더십의 자질들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들여다볼 때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리더가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잊지 말라. 리더십은 한순간에 학습되는 것도,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존 맥스웰과 리더십 중에서
자료출처:CG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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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확실한 투자

 

금융 재난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글: 필립 얀시  Phillip Yancy


December 27, 2008 강선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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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2008년을 금융 쓰나미의 해로 기록할 것이다. 이 쓰나미는 가옥 압류와 파산, 실업이라는 상처를 깊게 파 놓았다. 이에 대한 조치로 각국 정부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폐기하는 경쟁이라도 하는 듯 막대한 돈을 은행과 투자 회사, 대형 보험사에 쏟아 부어 신용을 회복하고 자본 흐름을 복구하려고 애쓰고 있다.

전 세계 주식 시장의 시가 총액이 7조 달러나 감소하며, 가장 변동이 심했던 주간에 <타임지>(Time) 편집자의 전화를 받았다. “기도에 관한 책을 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같은 위기의 시기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지요?”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그 기도를 세 단계로 정리하게 됐다.

첫 번째 단계는 단순하다. 직감적으로 외치는 것이다. “도와주세요!” 해고나 건강 악화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노후 생활 자금으로 저축한 돈이 날아가 버린 사람들에게, 기도는 두려움과 불안을 표현하는 길이 된다. 잘 편집해서 기도를 드리면 세련되고 성숙한 기도로 들리겠지만, 나는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우리 귀에는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길 바라신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아시는 하나님은 금융 위기의 두려움이 연약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실 리가 없다.

기도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가 그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이다. 위기에 처해서 드리는 기도의 본보기 하면 나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보내신 그 밤이 떠오른다. 세 번이나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는데, 몸에 흐르는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고뇌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바뀌었다. 뒤를 이은 재판 장면에서, 예수님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기도로 염려와 불안을 떨치셨고,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다시 확신했으며, 다가오고 있는 공포에 굳게 맞설 수 있었다.

말씀을 드릴 뿐만 아니라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로 기도한다면, 기도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바로 묵상과 성찰의 단계다. 좋다, 살아가려고 저축한 돈은 사라져버렸다. 재앙과도 같은 이 일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금융 재난 관련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불러보았다.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자
비가 오고 홍수가 나도 반석 위 집 튼튼하네.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면 모래 위 집 무너지네.

위기는 나의 삶이 어떤 토대 위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금융 안전성이나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부의 능력에 궁극적인 신뢰를 두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하실이 물에 잠기고 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카고에 사는 친구 빌 레슬리(Bill Leslie)는 성경은 돈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한다고 말하곤 했다. (1)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아니면 착취해서?) (2) 돈으로 무엇을 하는가? (사치를 즐기는 데?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3) 돈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예수님이 하셨던 가장 신랄한 비유들과 말씀들 중에는 이 마지막 질문을 정곡으로 찌른 것들이 많이 있다.  

분석가들은 금융 붕괴의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먼저 유행에 뒤떨어진 구식 용어들―탐욕, 절제, 정직과 신뢰―의 먼지를 떨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경영진이 사원과 주주를 희생시킨 돈으로 호주머니를 불릴 때, 은행이 원금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출을 할 때, 돈을 빌린 사람들이 신용 계약을 저버릴 때, 시스템은 붕괴한다. 제대로 기능하는 경제는 가늘어 보이지만 단단한 신뢰의 망 때문에 유지된다. (의심스럽다면, 무얼 하려면 뇌물을 줘야 하고 물건을 사고서는 거스름돈을 꼼꼼히 세어봐야 하는 나라를 찾아가 보라.)

전 세계 부가 7조 달러나 줄어든 바로 그 주간에,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 비율은 2억 3100만 퍼센트를 기록했다. 월요일에 100만 짐바브웨 달러를 저축했다면, 화요일에 고작 1.58달러만 찾게 된 꼴이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이 같은 사실은 위기의 때에 드리는 기도의 세 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단계로 나를 이끈다. 나 자신의 문제에서 눈을 돌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에는 노숙자도, 궁핍한 자도, 굶주리는 자도 없다는 것을 안다. 주식 시장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을 때, 나는 사립대학, 선교 기관, 그밖에 여러 비영리 단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기부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기관들이다.

2009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짓는 일에, 아프리카에서 에이즈와 싸우는 일에, 퇴폐적이고 과시적인 문화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는 일에 더 많이 기부하겠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다짐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세상의 논리와 상식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 간단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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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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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나라를 위한 충정이 담긴 값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유산입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단 그의 애국심만이 아닙니다.

난중일기를 통해 우리는 그의 신실한 삶을 감동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묵직한 삶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그의 희생이 우리 민족을 도탄에서 구해냈을 뿐 아니라,

어떤 위기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성숙한 삶의 태도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거북선 사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일관된 충성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모함과 음해를 당했습니다.

아마도 국가가 풍전등화의 절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번의 억울한 모함에도 불구하고 그 억울함에 대한 변명이나 호소가 없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입을 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유리한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기에서조차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초인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 침묵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총탄과 화살이 날아다니는 전장의 지휘대에서 곧장 감옥으로 끌려간 그의 심정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그러나 일기에서조차 자신을 모함하는 간신모리배들에 대한 비난이나 원통함의 표현들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을 그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충무공이 그렇게 위대한 애국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나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철저히 인식한 데에 있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는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더러운 인간행태들을 비난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은 일을 접어두고 자신에게 맡겨진 큰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안위와 영달에는 낭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침묵은 단순한 인내와 무력함이 아니라 넘치는 열정이며 빼어난 집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함과 음해로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것과 맞붙어 맹렬한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오늘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함과 음해는 그것 자체와 싸울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해나갈 때 저절로 소멸되고 마는 그런 덧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모함과 음해가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는 모함하는 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내 인격, 내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삶, 나의 인격이 진리로 드러날 때 그 모든 모함과 음해는 햇빛을 받은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비록 오래 참음이 요구되지만 거기서 침묵은 엄청난 에너지를 간직한 무공해 연료인 셈입니다.


 


자기 안에 깊숙이 자리한 침묵은 그 어떤 함성보다 힘찹니다.
고독은 침묵을 낳고,
침묵은 집중을 낳고,
집중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낳으며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힘이 생겨납니다.

그 힘은 천 배 만 배의 증폭된 힘이며 동시에 인간을 참 인간 되게 하는 변화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


충무공의 침묵을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는 깊은 침묵의 세계로 초대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무공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안위와 영달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중요한 한 가지에 우리의 열정과 관심을 집중하여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동안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열정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느끼는 내 마음속 깊은 조급함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침묵의 의미를 간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침묵의 의미와 거기에 담긴 엄청난 에너지를 다 보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충무공의 이야기를 접하다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침묵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과연 침묵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너무도 가볍고 촐랑거리는 예전의 제 마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힘을 모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한다면,

가끔은 침묵할 수도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를 가져봅니다.


어쨌든 착각에서 깨어나 입을 다물고 혼신을 다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


글/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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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자아상


          


            자기 존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있

        는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 또는 판단이다.


        당신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건강한 자아상은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결정하는 핵

        심요소 중 하나다. 자기개념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생

        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는 데 있다.


        반면 하나님과 같은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만족한 삶을 살아

        간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영화

        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

        하고 좋아하심을 알기에 자신감이 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고, 믿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 믿음

        을 끊임없이 성장시키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차고 넘치는 복을 예비해

        놓으셨다!

                                                                                 -조엘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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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여년 전에 미국에 귀화하여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미국에 거주한 지 5년이 경과하면 누구에게나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거의 형식적인 미국역사와 법률상식,영어시험등 간단한 서류심사가 있긴 했습니다만...
시민권선서를 하고 나오는 현관옆에 테이블을 놓고 각 정당에서 정당등록을 받고 있더군요
깊이 생각치도 않고 저는 민주당에서 나온 테이블에 가서 민주당원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지금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민주당은 영어로 DEMOCRACY, 공화당은 REPUBLIC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 데,민주당에 등록한 것은 공화당보다는 한국의 정치상황에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이유 하나뿐 이었습니다
당시,한국은 서슬이 시퍼렀던 군부통치하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민주투사나 반골은 아니었구요
 
오늘 드디어 미국의 새대통령이 선출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론조사를 통하여 예측은 했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일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아침 뉴스를 보니 벌써 새대통령 오바마에게 권면,충고의 글이 있습니다
몇가지 권면의 글중에 하나는 먼저 메케인과 협력하라! 또는 공화당원들을 중용하라! 등등...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입니다
마지막 대목에,이런 글이 있더군요
...Meet with a cross-section of religions leaders...
모든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라는 말이 되겠지요
신구교,유대교,불교,모슬렘등의 종교지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그들의 협력,지혜를 얻으라는 뜻이겠지요
정치와 사회,문화계등 전반적인 추세로 보아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종교계,특히 기독교일부에서도 타종교와의 협력,유대,상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소위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이것도 옳고,저것도 취해야 하고,무슨 주의,신념,사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행이랄까,좋은 소식은 캘리포니아의 주민발의안으로 상정된 Proposition 8 Eliminates Right of Same-Sax Couples to Marry 이 통과 된 것입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순리를 거스려 동성끼리의 결혼을 합법화한 것을 무효화한 것이지요
일단은 동성연애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소위 인류박애주의자(?)들의 의도를 제지하였지만...
지난 번 서울에서 만난 한 친구의 우스개 소리처럼 하던 넋두리가 생각납니다
요즘,아들 가진 친구들의 걱정거리는 연상의,그것도 자식이 있는 며느리를 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남자 며느리를 맞는 늙은 부모들이 점점 늘어 갈 것,또한 틀림없는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남자 엄마,여자아버지를 가르켜야 하고,동성의 결혼에 주례를 거부하는 성직자는 가장 큰 죄목인 인종차별법에 의해 엄청난 처벌을 받게 되는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참 답답하고...
믿는 자여!! 어이 할꼬!!
어느 제도나 사상이...새로운 정권,새로운 지도자에게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찟는 회개와 함께... 기도합시다!!
한 줌의 누룩이 포대안의 밀가루를 변화시키듯이...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4:12)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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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관심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이 말씀을 음미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주의 관심이 누구에게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었는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보았습니다. 또한 이 시대의 믿음의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수 많은 교회들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관심과 우리들의 관심이 얼마나 동일한가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참 부끄러움을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떤것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관심을 두셨습니다. 세상에서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죄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무너져 가고 상처를 안고 그렇게 소망없이 힘겨웁게 버티는 인생들에게 주님께서 다가 가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지만 주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입술로는 찬양을 하면서도 주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 은혜와 구원을 노래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뒤를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거져 받았지만 나는 자꾸만 계산을 하고 손해를 안보려고 머뭇거렸다는걸 생각해 봅니다. 머리로는 온갖 교리들로 무장을 하고 학습을 하고 조언도 하지만은 정말로 주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채우지 못하고서 나하고 다른 형제들을 향하여서 혀를 찼었고 조금의 실수와 허물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서 쉽사리 정죄해 버렸던 저를 봅니다.

주께서는 이러 이렇게 하셨는데 어떻게 주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그럴수가 있는가 라며 흥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너무 완벽한 교회를 상상한 나머지 조금의 허물조차 감싸지 못하고서 비판에 열을 올렸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다들 몰라서 그런다고 볼맨 소리를 하면서 내가 친절하게 알려 줘야 겠다고 거품을 물고 논쟁도 했었습니다.

그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을 내서 참견도 하고 가르치려고 했지만 내가 변화시키려는 음험한 생각에 홀로 짜릿함도 느꼈더랬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상처만 남았고 상처만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지치고 상함으로 절망하는 자신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를 잘 알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길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주님앞에 머물러 봅니다. 주님의 뒤를 자세히 찾아 보려고 주앞에 머물러 봅니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다시 힘든 싸움을 하려고 머물러 봅니다. 내 안에 위선과 거짓과 왜곡된 마음과 오만과 편견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주시기를 간구해 봅니다.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관심은 이렇게 가난한 자들과 포로된 사람들과 눈 먼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이라는걸 다시한번 봅니다. 그리고서 주님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자유와 다시 보게함과 풀어서 돌아 다니게 하셨는데 나는 과연 얼마나 다른것에 목숨을 걸고 살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주께서는 꼭 당신의 고향에서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선민이며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믿고 스스로의 교만과 독선과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백성들에게 영적인 가난함과 포로됨을 모르고 눈 멀었다는것도 모르면서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알수 없는 것에 억눌린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게 배척을 당할 것을 아셨지만 주님은 말씀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으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해도 소 귀에 경을 읽는 것같지만 주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의는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알려주려 합니다. 나에게 이득이 없고 방해만 되고 거추장 스러운 상대는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일 겁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아무도 거절하시지 않으셨고 피하지 않으셨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계산하며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 봅니다.

글/빈의자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흥망성쇠와 한 때 자유로웠던 국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마키아벨리같이 어름처럼 차가운 강심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 부흥과 쇠퇴, 정치적 부상과 몰락에는 반드시 인간의 이기심이 지나치게 작용하거나 공공의식이 결여되거나 도덕적 절제가 무시되는 것 등의 요인들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곤 하였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인간 이성이 조종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역사 전반에 널러있다 하겠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라도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온순하게 길들이기는 벅찬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문명이 활화산 위에 세워진 요세와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산업사회에서보다 인간의 이기심이나 탐욕의 사회적 폐해가 비교적 적었지만 문명과 산업의 발달은 도시인구의 팽창을 가져왔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극한에 이르게 되어 모든 문제를 길거리에서 해결하려 합니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리 주장이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군중들의 집단행동은 적을 섬멸하려는 군대와 같이 포위하고 협박하고 옥죄며 강요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어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비교적 조용하고 안정된 일상에서는 한 사회가 얼마나 쉽게 분열하고 붕괴될 수 있는가를 잊고 지냅니다. 또한 문명의 혜택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면 누릴수록 더 많은 혜택과 풍요를 누리려는 극심한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절대적인 빈곤상태에서 좀 더 잘 살기 위한 경쟁은 발전이라는 열매를 맺지만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한 극단적 경쟁은 최소한의 도덕과 준법정신까지 무시하게 되어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무방비상태로까지 내몰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이 비록 심판이라고 할지라도 약한 자를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조치이고 또한 악한 자들을 일깨워 경성시키시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후에도 독일 사람들은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운명의 얄궂음을 불평하면서 화가 치밀어 자신들과 국가의 운명을 히틀러의 손에 내맡겨 버린 것은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공포와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은 물론이거니와 유럽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전승국가들 또한 전쟁에 이긴 것을 도덕적 정당성으로 해석하고 평가하여 자기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 전쟁에서나 집단적 싸움에서나 혹은 개인 간의 마찰에서 이긴 자는 역사의 심판자처럼 행세하거나 그 행위에 대한 승자위주의 도덕적 평가를 정당화 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들을 비껴갔다고 하여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하나님인 것처럼 처신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심판만큼 끔찍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세는 사람을 통한 심판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택했던 것입니다. 역사적 심판이 임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구약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 그 이유는 도덕적 타락이었고 그 목적은 전 세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박력 있고 독창적인 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 특혜를 향유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지만 온 세계를 위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한 국가 전 인류를 향해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처음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지배하거나 지역적 확장을 통해 전 인류를 향한 역사적 사명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이스라엘에 의해 로마 제국을 거처 대영제국에 퍼져갔고 지구 반대편인 샌프란시스코에까지 전파되었으며 또 다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한반도를 거처 지구촌 오지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곧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탐욕과 이기심을 경계해야 하고 승자 위주의 도덕적 평가 또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출처:아멘넷, 글/ 황상하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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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러시아 작가,1918~2008)은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암병동>에서 개인에게 발생한 암일찌라도 그 질병에는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극한 질병-암이나 그 밖에 모질 병-을 앓는 것이 그 사람이 처한 사회 환경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없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 사회인 이상 그 사람이 정치인이든 혹 연예인이든 혹 목사이든 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정몽헌 씨의 자살

최근 10여년 어간에 일어난 자살가운데 가장 깊은 사회적 의미를 수반한 사람은 정몽헌씨일 것이다. 대북 경협과 금강산 관광등의 사업 추진으로 주목받던 사업가이자 정주영회장의 아들로써 이른 바 '왕자의 난'을 주도했던 그가 검찰 조사를 받고 돌아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12층 사옥에서 투신 자살했다.
당시는 정상회담이 있은 후였고, 정치권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의 댓가로 지불된 이른 바 '검은 돈'의 출처가 정몽헌에게서 나왔다고 보았고, 결국 조사 과정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던 정몽헌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불과 56세였다....

2.안재환과 최진실의 자살

2005년 주홍글씨를 만들고 스토커에게 고생하던 이은주(당시25세)가 자살했다. 그 날은 2월22일이다. 그 전 주에 나는 인터넷에서 심한 모욕적인 명예 훼손을 당하고 괴로워 했던 때라 이은주가 자살한 그 순간의 고통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그리고 그 후 최근 발생한 안재환의 자살과 잇따른 국민 또순이라는 최진실(40)의 자살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나같이 교회에 다녔고, 장례마저 교회에서 예배로 드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행렬에 도대체 우리가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3. 생명의 존엄성

자살은 또 하나의 범죄임이 분명하다. 그 일로 어떤 심판을 받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인과 같은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살은 미화되거나 방조되어선 안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예계에서 이어지는 이러한 줄-자살(마치 한사람이 죽으면 또 죽고 하는)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고, 그 것역시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제는 마치 헐리우드의 스타들이 겪을 법한 심한 스트레스와 인기가 오르고 내리는 데 대한 불안, 팬(대중)들에게서 받는 칭찬과 비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진실은 그의 마지막 문자에서 '세상이 섭섭하다'고 했고 '내가 사채업자도 아닌데'하면서 진실이 왜곡된 것을 괴로워했다. 일설에는 이런 모함과 중상 모략에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자살을 택했다고 했다..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진실은 5년전 이혼과 슬럼프를 잘 이겼지만 계속 외로움이나 인기에 대한 강박으로 수면제없이는 살지 못했고, 신경안정제등을 많이 투여하거나 술에 의존했다고 지인들이나 언론이 밝힌다.

결정적으로는 당일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가라고 전문가들은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을 도대체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고, 그의 죽음은 어떤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것인가?

4. 모방자살-자살도미노 :베르테르 효과

이미 며칠 전부터 전국에서 욕실이나 화장실에서 최진실처럼 죽는 모방자살이 보도되고 있다.(연합뉴스) 비슷한 상황에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고 있지만 인터넷등에서 벌어지는 댓글과 '괴담'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70살이 다 된 트위스트 김이 댓글 때문에 죽을려고 했다고 한다. 이은주나 몇몇 자살한 연예인들이 공히 '살인 댓글'에 괴로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냥 받아넘기지만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주는 말... 그 말 한마디가 사람을 무너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범일 수도 있다.

5. 자살예방 캠페인과 교회가 할 일

이은주도 교인이었고, 최진실 안정환도 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살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교회를 다녔기에 더욱 양심에 고통을 받고 자신이 짓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괴로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양심의 고통이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양심도 진실도 없이 변해 가는 것은 아닌가? 갸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목매어 자살했다. 그에게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던 것인가?

전날 우리 여인들은 정조를 잃고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큼 정조와 생명을 동일시 했던 적도 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의 대표들은 자신이 망가뜨린 회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복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민영환(1861~1905)은 우국충정으로 민족의 비극인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보고 2000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쓰고 자결했다.

같은 자실이라도 다 각각 의미가 부여되는데....

생명이 번역하면 '살아라(生)는 명령(命)'이며 사명이다. 사명이 다하면 죽지만 사명이 다하지 않으면 살아서 끝까지 생의 준엄한 명령이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뜻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교회는 이런 믿음의 도리를 가르치고 적어도 한 번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인생(영혼)이 자칫 극단적인 선택(자살)을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사랑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꼭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자살하려는 사람이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이나 예수님 대신이라도 그 사랑을 보여준 '어떤 분-목사님'을 기억하고 기도했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그 영혼들이 죽어가면서 후회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당부한다.
어떤 사람이든 이 세상에 올 때는 불우하게 왔든 행복하게 태어났든 사람이면 모두가 존귀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울증이 심하면 정신과나 교회 목회자에게 상담도 받고 치료도 받아야 하는데 감추면서 끝까지 가둔다면 결국 어려운 지점에 가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자...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많고 고아도 있고 집도 없는 사람도 있고 지위도 없고 직업도 없고 노숙자도 있고 감옥에 갇힌자 들도 있고 등등 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견뎌내는 이웃들을 보면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산다면 자살할 여유가 있는가? 왜 자살하는가? 살아야지 보람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좋은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와 형재(자매)들이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우리 주위에 나의 따뜻한 말 한디로 자살을 막을 수 있다면 꼭 사랑의 말,위로의 말,격려의 말을 하는 풍토를 만듭시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고통으로 어려움을 당한 연예인  최진실 안정환 이은주외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아멘넷, 글/ 김바울 중국자비량선교사
!!
 
정향범 ㅅ ㄱ ㅅ 입니다..
 
다음은 오리사에 사역하는 초이 선교사님의 메일입니다..
 
보시고 오리사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샬롬!!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몇일간 저는 고민했습니다.
기도편지를 나누고 이쪽 소식을 나누어야 하는데 변하지 않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또 다시 나누어야 함에 여간 힘이 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시각각의 어려움속에서 믿음의 승전보와 믿음의 간증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에

한편으로는 찐한 감동에 있습니다.




디갈이란 형제는 지난 5개월전에 밀알 심장재단(회장:이정재 목사)을 통해서 수술을 받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하여 형제의 마을 전체가 불에 타서 자기 집을 피신해서 약 200킬로를 걸어서 지금 YMCA의 이재민 구호소에 와 있습니다.

그 형제가 살았던 동네는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힌두교 지도자가 운영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지역 사람들은 꿋꿋하게 믿음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통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목사님도 잃고 또 마을 사람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꿋꿋하게 우리가 죽더라도 결코 믿음은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목사님과 마을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결국 천국에 갔을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핍박의 여정속에서 진한 믿음의 삶을 엿보는 것이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힌두 교인들이 강제적인 개종을 요구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힌두교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생과 죽음앞에서 쉽지 않은 일들을 겪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거짓속임수에 이끌려 핍박을 감행하는 사랑하는 힌두교 극렬주의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인하여 이곳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의 시간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이땅에 있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여기 저기서 도움의 손길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이들을 돕기도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들이 너무 협소하기에 서로 협력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피신을 가있는 상황입니다.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려움이 있습니다.

점차 이곳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다양한 것들이 나누어지고 있는데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돕고 섬기는 일들과 그리고 다음의 사역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계속 오릿사를 위해서 사랑과 기도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끊임없는 사랑과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곳 까페에 오시면 http://cafe.daum.net/missionindo 또 여러소식을 접할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불교국가인가?

촛불시위 주동자들이 피신해 있던 조계사로부터 나오는 조계종 총무원장님의 차량을 경찰 나부래기가 감히 검문한 일이 있은 후 불교차별에 항의하는 법사님들, 승려님들, 불자님들, 보살님들이 서울광장에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하였던 이명박 대통령님의 취임 후 그 정책과 행동거취도 불교계에서는 심히 못마땅하고 괘씸한가 봅니다. 불교계의 반발과 항의가 얼마나 거센지 소망교회 장로님이신 이명박 대통령님 가족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도 못 누리고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도 못 나가고 가족예배로 주일예배를 대신하고 있다는 측은한 소식입니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불교계야말로 최대특혜수혜자요 대한민국은 불교국가입니다. 전국 국립공원이나 경치 좋은 곳들은 죄다 사찰들이 차지하고 앉아 산행이라도 한 번 할라치면 입장료, 관리비, 문화재관람료 등의 명목으로 시주를 강제로 해야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어째서 속세를 떠난 절들이 전국의 그 많은 산과 골짜기들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역사를 따져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우리네 선조들의 공유재산이었을 금수강산은 그 후손들이 불교를 떠나 다른 종교를 갖게 되었더라도 이용할 권리와 그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사찰들이 우리 선조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차지하고 있단 말입니까? 전국 방방곡곡 요지마다 차지하고 앉아서 산을 오르려는 국민들로부터 거둔 통행료와 강제시줏돈으로 도시 한복판까지 진출하고 있는 불교계와 교회 하나를 짓기 위하여 온 교인이 헌금을 하고 땅을 매입하고 피땀 흘려 건축해야 하는 기독교계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이게 불교국가지 뭡니까?

또 그렇습니다. 10원 짜리 동전에다 다보탑을 그려 넣고 그 다보탑에다 또 작은 불상을 새겨 넣어서 온 국민이 불상들을 주머니에 모셔 넣고 다니게 만들지를 않나, 전국 경치 좋다는 곳은 으레 석불, 석탑, 암자이고, 동해 아름다운 바닷가에다가 100여 미터 높이의 불상을 세워 관세음보살께서 동해바다와 어민들을 지켜주시는가 하면, 팔공산 기슭에는 전 대통령 가족의 수십억원 시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을 세워 부처님께서 자비하신 눈빛을 중생들에게 그윽하게 비추시는 일들이 불교국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가능한 일입니까? 만일 기독교계가 대한민국 어디에다 예수상(像)을 크게 만들어 세운다든가 교회가 공원 입장료를 받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교계는 종교차별을 외칠 게 아니라 국민들에게 국립공원들과 자연경관부터 돌려주어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리 깎고 장삼만 두르면 전국 수려한 경관의 국토가 주어지고 우리의 선조들의 공유재산을 물려받아 차지한다는 것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삽시간에 서울광장을 메운 가사장삼부대가 과연 속세를 떠나 오욕칠정, 백팔번뇌를 끊고 득도하려는 수행자들이란 말입니까? 이대로 간다면 불교계는 대한민국을 말기고려보다 더 부패하게 만들 것입니다. 불교계는 종교차별을 외치고 세를 과시할 게 아니라 소유와 욕심을 버리고 부당점유한 강산을 국민에게 반환하고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 그렇다고 불교에 진리가 있다는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글/친구님 출처:어느 댓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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