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남긴 ‘생식기 교리’
새 경전 <천성경>, “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2012년 09월 04일 (화) 22:38:58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 2006년 6월 13일 '우주 평화의 왕' 대관식 때의 문선명 교주(사진: www.tongil.or.kr)

2012년 9월 3일 하나님이 사망했다. 대한민국의 ‘자칭 재림예수’이자 ‘자칭 하나님’의 원조 통일교 문선명 교주 말이다. 그는 스스로 2001년 1월 13일 ‘하나님 왕권’에, 2006년 6월 13일 ‘우주(천주) 평화의 왕’에 올랐지만, 불과 10년을 못 넘기고 사망해 버렸다.

더구나 지상천국이 완성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2013년 1월 13일 ‘기원절’을 약 4개월 앞두고 사망한 터라 통일교의 모양새가 좀 많이 구겨졌다. 통일교에 의하면 육계가 먼저 천국이 되어야 영계가 천국이 될 수 있으며, 문 교주가 생존해 있을 때 지상천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은 ‘생사의 주관자’가 아니던가. 그런 하나님이 늙어죽다니…. 스스로 지상(육계)과 천상(영계)을 다스린다고 했던 그는 이로써 자신의 거짓을 증명한 셈이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딱 한 가지만 살펴보자. 그가 남긴 ‘통일교’의 핵심인 소위 ‘생식기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 <천성경>은 400여 권의 <문선명선생말씀선집>을 16개의 주제별로 핵심정리 한 것이다. 여기에는 1970년대 이후 통일교회 내외의 여러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 문 교주의 직접적인 언급들을 수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상생활과 영계’, ‘참가정과 가정맹세’, ‘하나님의 조국과 평화유엔’, ‘참부모님 천주승리 선포’ 등의 주제도 포함되어 있어 교주 사후 통일교의 미래에 대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원리강론>이 1950년대에 쓰인 통일교의 경전이라면, <천성경>은 2005년에 다듬어진 경전인 것이다.

최근 통일교 신도들이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문선명 교주 어록집 <천성경>을 살펴보면, 성적(性的)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교리가 더욱 노골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아래 “<천성경> 발췌록” 기사 참고). 남녀의 생식기가 ‘거룩한 궁전’이라며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면서 만들었겠느냐? 제일 좋아하면서 만들고 제일 정성들여 만든 것이 남자와 여자의 몸뚱이 가운데 어디일 것이냐, 무엇이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생식기라는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생식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거 맞아요, 안 맞아요? 왜 이상한 눈으로 봐요? ‘통일교회 교주가 생식기 얘기를 한다.’ 하는 눈으로 보고 있어요? 목사가 그런 생식기 얘기를 할 수 있어요? 다 침 뱉습니다. 생식기에 대해서 침 뱉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까? 남자가 여자의 생식기에 침을 뱉고, 여자가 남자의 생식기에 침을 뱉어요? 생식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한 생식기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완성한 아담의 자리입니다. 거룩한 장소이며, 거룩한 궁전입니다. 최고의 궁전입니다. 생명의 본성전이 생식기요, 사랑의 본성전이 생식기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통일교는 인간이 두 종류의 타락 즉, 영적인 타락과 육체적인 타락에 빠졌는데 둘 다 성적(性的) 타락이었다고 본다. 화와가 루시퍼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영적으로 타락했고, 후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담과 또다시 성관계를 맺어 육체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통일교의 타락론이 이렇게 이원론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원 또한 이원론적이다. 곧 영적인 구원과 육적인 구원 모두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사탄이 승리했으며, 그 결과 예수는 인류의 영적구원만 완성했을 뿐이다. 따라서 재림예수는 인간의 육체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지상에 육체로 태어나야만 하는데, 자신이 인류를 육체적으로 구원할 세째아담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게 문 교주의 주장이다.

문 교주 사망 이후 후계구도와 그가 남긴 재산에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세계종교’ 운운하는 통일교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비성경적 이단집단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통일그룹 회장 문국진 씨(문교주 4남)는 “통일재단과 통일그룹의 모든 사업은 통일교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바 있다. 즉, 정통교회 성도들은 통일교가 운영하는 각종 기업, 학교, 예술단체 등을 소비하는 것이 곧 이런 신성모독적 통일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임을 앞으로도 각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통일교 경전 <천성경> 발췌록
(“우주의 근본 - 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우주의 근본은 뭐냐 하면 남성과 여성입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중심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식기 원론입니다. 다 그렇게 돼 있잖아요?”(<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르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에요? 눈이 달라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관이 달라서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달라서 남자와 여자가 다르냐? 생식기가 다르기 때문에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 하나 때문에 달라졌다는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왜 태어났어요? 남자라는 말은 여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남자라는 말은 선유(先有) 조건으로 여자를 인정하는 겁니다. 남자는 덩치가 크지만, 덩치 작은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여자는 뭣 때문에 태어났어요? 그 남자 여자가 다른 게 뭐예요? 뭐가 달라요? 손이 다르고, 눈이 다르고, 코가 다르고, 입이 다르고, 그래요? 뭐가 달라요? 한 가지 다른 게 뭐라구요? 하나는 오목이고 하나는 볼록입니다. 그게 생식기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와 여자를 완성시키는 것은 생식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눈도 하나예요, 둘이에요? 왜 둘이에요? 콧구멍은 둘이에요, 하나예요? 왜 둘이에요? 입술은 둘이에요, 하나예요? 왜 둘이에요? …그 목적이 무엇이냐? 배고플 때 밥을 먹기 위해서 그게 있는 거예요? 그 사용하는 목적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이겁니다. 자기 혼자서는 사용 목적을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지 않으면, 영원히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누가 여자를 불러요? 눈이 불러요, 머리가 불러요, 몸이 불러요, 심정이 불러요? 누가 불러요? 또, 여자는 무엇 때문에 남자를 불러요? 누가, 어느 쪽이 불러요? 입이 불러요? 사용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생식기는 상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절대적으로 남자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남자는 절대적으로 여자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게 절대적이에요, 상대적이에요? 절대적입니다. 역사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합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무엇이 다릅니까? 성기관을 포함한 그 몸이 우선 다릅니다. 그러면 남자의 성기관은 누구에게 절대 필요합니까? 남자의 성기관은 여자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기관이 하나는 오목하고 하나는 볼록한데, 왜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둘 다 뾰족하게 하든가, 둘다 납작하게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습니까? 모두 상대를 위해서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평화의 기지도 그렇고, 지상천국 천상천국 모든 것이 사랑에서 벌어집니다. 무슨 사랑? 남자의 사랑입니다. 여자의 사랑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한 사랑입니다. 그 남녀의 사랑이 어디에서 합해요? 얼굴에서 합해요, 손끝에서 합해요? 오목 볼록에서 합하는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생식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거 맞아요, 안 맞아요? 왜 이상한 눈으로 봐요? '통일교회 교주가 생식기 얘기를 한다.' 하는 눈으로 보고 있어요? 목사가 그런 생식기 얘기를 할 수 있어요? 다 침 뱉습니다. 생식기에 대해서 침 뱉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까? 남자가 여자의 생식기에 침을 뱉고, 여자가 남자의 생식기에 침을 뱉어요? 생식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한 생식기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완성한 아담의 자리입니다. 거룩한 장소이며, 거룩한 궁전입니다. 최고의 궁전입니다. 생명의 본성전이 생식기요, 사랑의 본성전이 생식기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아무리 볼록이 있더라도 오목이 없으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오목과 볼록, 남자와 여자의 개념이 먼저였겠어요, 사람이라는 개념이 먼저였겠어요? 그걸 생각해 가지고 똑똑히 대답해 보라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 사람의 개념이 먼저예요, 남자의 성, 여자의 성의 개념이 먼저예요? 근본이 그겁니다.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생식기관이 우주 창조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남자의 생식기가 창조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걸 몰랐습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생식기가 인간 창조의 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제1의 조상이 생식기입니다. 이 생식기로부터 남자와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생식기로부터 남자와 여자로 갈라진 것입니다. 갈라진다는 개념은 본래의 개념 다음입니다. 본래의 개념에서 갈라져 남자와 여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암놈과 수놈이 생겨날 때 몸뚱이가 먼저 생겨났겠어요, 생식기라는 것이 먼저 생겨나기 시작했겠어요? 중간에 가면서 암놈과 수놈이 결정돼요, 암놈과 수놈이 결정돼 가지고 크기 시작합니까? 어때, 윤박사? 결정돼 가지고 크기 시작하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암놈과 수놈을 누가 결정했어요? 아메바가 내가 수놈이 되겠다고 해서 수놈이 될 수 있습니까? 암놈 아메바는 절대적으로 암놈 아메바고, 수놈 아메바는 절대적으로 수놈 아메바입니다. 왔다갔다 할 수 없습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결론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제일 수고롭게 지은 곳이 어디겠어요? 눈이에요, 입이에요, 코에요, 손이에요? 인간들은 그것을 생각도 않고 있습니다. 그게 사랑의 본거지입니다, 사랑의 본거지. 사랑의 본거지가 어디예요? 남자와 여자의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본궁이었다 이겁니다. 거기서부터 남자의 사랑을 알게 되고, 여자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을 모릅니다. 사랑의 주인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남자의 사랑의 주인은 여자이고, 여자의 사랑의 주인은 남자입니다. 사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만드는 것이 사랑의 기관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는 남자의 생식기를 천년만년 잘 지키는 주인이 돼야 되고, 여자는 그 생식기를 천년만년 잘 지키는 여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문총재입니다. 그렇게 이것을 틀림없이 지키게 하고 그렇게 만드는 책임을 진 사람이 참부모의 이름을 가진 부모더라 이겁니다. 참부모는 간단합니다. 바람둥이 여자와 남자를 데려다 놓고 바람피지 않고 절대적으로 절개 지키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참부모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사랑의 왕궁이 어디예요? 이런 얘기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걸 바로잡지 못하면 세상이 다 틀어집니다. 아귀가 안 맞으면 온 천하에 요사스러움이 벌어집니다. 문총재가 지금까지 고심해 우주의 근본을 파헤치다 보니 딱 도착한 곳이 생식기였습니다. 생식기에 도착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천지의 조화가 여기에서 소용돌이 치더라 이겁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왜 생겨났어요?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게 뭐예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하나돼요?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거예요? 생식기를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게 조화통입니다. 이 자리에서 사랑의 완성이 벌어집니다. 참사랑이 처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남자와 여자의 생명이 하나되는 곳도 그 자리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핏줄이 교류해 심어지는 곳도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이상적 사랑의 본궁이요, 혈통의 본궁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본연의 곳을 본궁이라 하는데, 누구도 그 가치를 바꿀 수 없습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아담과 해와의 생식기 그 자리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식기는 사랑의 본궁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천지 창조의 전체, 하나님까지 완성시켜서 안식시킬 수 있는 왕궁인데, 그것이 본궁입니다. 하늘나라도 첫째가 아니요, 지상나라도 첫째가 아닙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본궁입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그 자리는 또 참사랑을 중심삼은 본궁이지만, 참생명을 중심삼은 본궁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혈통을 중심삼은 본궁이고, 지상천국의 출발지요, 천상천국의 출발지라는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인간의 생식기가 참사랑의 장소입니다. 거기에서 사랑의 행위가 연결되지요? 딴 데서 그런 게 아닙니다. 거기가 남자와 여자의 생명이 연결되고, 생명이 합쳐지는 궁전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면, 그 혈통으로부터 아들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혈통의 궁전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여자와 남자의 생식기는 사랑의 궁입니다. 사랑의 왕궁입니다. 자궁이 귀합니까, 남자와 여자의 그것이 귀합니까? 말해 봐요. 자궁 때문에 생식기가 생겨났어요, 생식기 때문에 자궁이 생겨났어요? 심각한 말입니다. 웃을 말이 아닙니다. 남자가 있기 때문에 자궁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자의 그것은 남자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연결이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뭘 합니까? 생명의 연결이 안 됩니다. 그걸 통하지 않고는 역사를 연결시킬 수 있는 혈통의 연결이 안 됩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여자의 생식기가 우주적인 본원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맺는 그 자리가 사랑의 본궁(本宮)이 됩니다. 본연의 궁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결혼 첫날밤의 사랑이 사랑의 본궁의 출발입니다. 여자의 생명, 남자의 생명이 처음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생명의 본궁이 그곳이요, 혈통이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혈통의 본궁이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거기가 지상천국의 본궁이요, 천상천국의 본궁이요, 인간완성의 본궁이요, 하나님 완성의 본궁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내 생식기는 사랑의 본궁이다, 내 생식기는 생명의 본궁이다, 왕궁이다, 내 생식기는 혈통의 왕궁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왕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니 본궁에 찾아가서 거하실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사랑의 본궁이 되어야 하고, 생명의 본궁이 되어야 하고, 혈통의 본궁이 되어야 하고, 양심의 본궁이 되어야 합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본궁, 생식기가 뭐예요? 사랑의 왕궁이요, 생명의 왕궁이요, 혈통의 왕궁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것 붙들고 살고, 아버지 어머니도 그것 붙들고 살고, 자기 부부도 그것 붙들고 살고, 앞으로 태어날 아들딸도 전부 그것 붙들고 살지요? 그것 안 붙들고 사는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습니까? 종자내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나쁜 것이 됐어요? 쌍소리라고 하지요? 왜 쌍소리예요? 거룩한 소리입니다. 거룩한 말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거기에서 영원한 사랑이 연결되어 영원한 생명, 영원한 혈통이 나옵니다. 가장 귀한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면서 만들었겠느냐? 제일 좋아하면서 만들고 제일 정성들여 만든 것이 남자와 여자의 몸뚱이 가운데 어디일 것이냐, 무엇이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생식기라는 것입니다. 생식(生食)하는 밥쌀을 갖다 담는 그릇이 아닙니다. 생식기라면 사는 것을 심을 수 있는 그릇이다 이겁니다. 생명의 생식입니다. 생명을 심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사무엘하 14장)
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5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 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두지 아니하겠나이다.
8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관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왕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요, 치리하는 자요,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해야 할 그 왕이 먼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다윗은 암논의 일이나 압살롬의 일을 법대로 처리하지 못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입니까? 다윗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범죄가 하나님의 맡기신 왕의 책무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올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시거나 바꾸지 아니하셨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사울이든 다윗이든 또 누구이든 인간 왕은 완전할 수 없고 인간 왕이 다스리는 나라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 왕을 세우면 백성들이 어떤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한지 삼년이 지났습니다. 오늘말씀 사무엘하 14장을 보니 요압이 계략을 꾸며 드고아의 한 슬기로운 여인을 상제로 꾸며 다윗왕에게 보냅니다. 드고아 여인이 다윗왕에게 말합니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었는데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인자를 처단하겠다고 남은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가 끊어지고 남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영영 끊어질 것입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생명을 위한 법이지, 법을 위한 생명이란 말인가? 그대의 아들은 죽임 당하지 않으리라.” 그러자 드고아 여인이 말합니다. “왕이시어, 그게 바로 왕이십니다. 어째서 아들을 돌아오지 못 하게 하십니까?”

법은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대로 집행하면 살아날 자도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래서 생명을 위하여 법의 집행을 유예하는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리시려고 죄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칩니다.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남을 용서해야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기 보다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나 자신부터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행동으로 인정하는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셨습니다.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의의 옷의 예표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동생을 죽인 가인은 참살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하시고 표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인치심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거저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자기 아들을 대신 처벌하시고, 그 피 값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남을 쉽게 용서하지 못 합니다.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 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잘못을 계속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윗은 의인이고 압살롬은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압살롬은 마귀의 자식이고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일까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은 다윗이나 압살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압살롬은 악인, 다윗은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다윗 편에 섭니다. 압살롬을 정죄하고 나를 다윗의 편에 속한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은 다윗 같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해지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삼하 14장)을 좀 더 읽어보면 다윗은 압살롬을 그술로부터 데려오게는 하였지만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용서가 안 되어 그랬는지, 남의 이목이나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2년을 지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면서 아들에게는 용서를 베풀지 못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베풀지 못 하고 자신은 의인의 편에 서고 압살롬은 악인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2년이 지나자 압살롬이 요압에게 ‘차라리 그술에 그냥 있는 게 나을 뻔 했다.’고 말합니다. 온전한 용서가 아닌 반쪽짜리 용서로 인하여 압살롬의 마음에 응어리와 한이 맺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제야 마지 못 해 다윗왕은 압살롬을 부르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하는 용서 역시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이때부터 압살롬은 이를 악물고 절치부심, 와신상담, 반역의 준비를 진행합니다.

용서는 완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해서 구원하여 지옥으로부터 건져내신 다음 어디 다른 곳에 놔두고 꼴 보기 싫다고 얼굴조차 안 보시는 반쪽짜리 용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돌아온 탕자를 완전히 용서하고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맞아들여 자녀로 삼으시고 기뻐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끌어안으시는 완전한 용서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교만이요 죄입니다.

만일 다윗이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고 사랑하였더라면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랬더라면 이스라엘 역사가, 성경의 기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당신은 혹시 누군가를 반쪽짜리 용서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완전한 용서를 하십시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원천(The Source of All Love)

      부모, 형제 자매, 배우자 , 애인,

      그리고 친구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랑이 깨어지고 제한된 형태로 옵니다

       

      사랑은 권력 싸움, 질투, 분노, 원한,

      그리고 심지어는 학대에 의하여 얼룩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사랑도 우리의 마음이 바라는

      완전한 사랑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랑은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 때문에 비롯되는

      상처로부터 파멸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무조건적인 그리고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며,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밑불이 되어주는 사람들
    재질이 단단한 참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타닥거리지 않고 불꽃이 화려하거나 높지 않으며 엷은 푸른빛으로 오래오래 잘 타오른다.
    소리 없이 타면서 다른 것들의 밑 불이 되어주고 타다가 꺼지면 참숯이 되어 다시 불을 일으킨다.
    사람들 중에도 말없이 타오르며 다른 사람의 밑불이 되어주고 따뜻한 온기를 내는 참나무 장작 같은 사람들이 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일,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외롭고 소외된 마음들을 한껏 보듬는 일, 먼저 헤아려주고, 먼저 아파해 주는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환한 빛이 되어주는 어떤 것. 그러한 것들이 밑 불이 되어주는 일일 것이다.
    거침없이 큰 목소리를 내며 타오르다 이내 불꽃이 사그라지고 마는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힘을 주고 살맛을 주는 사람은 바로 참나무 장작 같은 사람들이다.
    목소리가 낮고 불꽃의 키도 높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굳이 이기려고 남을 해하는 일도 없고 굳이 빼앗으려고 차례를 어기는 일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따뜻한 인간애와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성취해내는 모든 일들을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이 있어 우리의 겨울은 춥지 않다.

    -옮긴 글 <그대 홀로 있기 두렵거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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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 보셔야 할 동영상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_popup?v=tCAffMSWSzY#t=28


인터넷에서 곧 삭제 될 것입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권능
      (Empowered to Receive Love)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 아버지"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고, 이 관계로부터

      다른 여러가지 인간 관계의 의미를 찾도록 했습니다

       

      아바는 매우 친밀한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빠"라는 뜻입니다

      아빠라는 말은 신뢰, 안전, 확신, 소속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밀감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아버지라는 말이 흔히 상기시키는 권위, 권한,

      그리고 통제와 같은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빠라는 말은 가슴에 껴안는

      그리고 양육하는 사랑의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의 부모, 우리의 형제 자매,

      우리의 배우자, 우리의 친구 그리고

      우리의 애인에게서 받는 사랑을 총망라하며

      또 그것을 영원히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이 주는 선물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다리가 되어주신 예수님*

                    글 : 조아시




            이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짐으로

            건널수 없는 바다를 왕래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키는

            다리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할 일인가!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그 길을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열지 못하는

            그 길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제물이 되셔서

            막혔던 길을 여시고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셨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이 아닌가!



            주님의 대속의 은총이 없었다면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으로

            떨어질 인생들에게

            내 아버지께로 갈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주만따라 가야겠네

            세상 유혹 물리치고 믿음으로 승리하세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가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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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성화는 체험일까요? 예를 들어 예전에 성질이 고약했거나 그 비슷했던 사람들이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립니다. 저는 그런 체험들을 인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살아오면서 그렇게 간증할 체험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성화와 체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자,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런 종류의 체험이 곧 성화를 의미한다는 증거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체험이 성화의 일부는 될 수 있으며 성화에 큰 도움은 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곧 성화는 아닙니다. 우리는 체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리를 세워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라는 것입니다(고후 3:18). 성화는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제가 볼 때 체험이 곧 성화라는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로 다른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데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가운데 성화를 이루어 가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화는 체험이 아닌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저(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일입니다. 성화에 체험이 포함되어 있고 체험이 성화를 도와주기는 하지만, 성화 자체가 곧 체험은 아닙니다. 성화는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의롭다 함을 얻은 순간, 중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성장과 발전의 과정입니다. 체험이 곧 성장 관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장을 도와주며 촉진하는 역할은 해 줍니다


             

            포도나무선교회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수 있는 권능

            (Empowered to Call God 'Abba')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다른 친숙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지셨던 관계, 즉 서로 친숙하며,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뢰하고, 권능을 주는 관계를 우리도 하나님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런 관계가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며, 성령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참조)은 우리의 마음속의 부르짖음, 즉 우리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오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어떤 갑작스런 통찰력이나 노력으로 얻어진 확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영이 우리 영과 친교를

            나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주장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긍훌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존재할 권리
            (Empowered to be God's Children)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행동하는 것 그대로가 바로 우리일까요?
            남들이 우리에 관하여 애기하는 그대로가 우리일까요?

             

            우리가 행사하는 권력이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흔히 이런 식으로 우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영은

            우리의 참된 영적 자아를 나타내 보여 줍니다

             

            성령은 우리가 성공이나 명성,

            또는 권력의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걱정의 노예로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두려워해야 할 종의 영을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15)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여성 목사 제도 어떻게 볼 것인가?

                                 (원제 : 여성 목사 제도 허용할 수 없다)

             

                                                                               서창원 목사(삼양교회 담임) 

            최근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된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특히 K교수는 성경편 집론까지 제기하며 여성 목사의 안수에 대한 논란의 불을 지핀 바 있다. 이 문제와 관련 서창원 목사의 글을 다음의 순서에 따라 게재한다. 서창원 목사는 삼양교회를 시무하고 있고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있으며 한국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대표와 '진리의 깃발지'를 발행하고 있다.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 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2.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만이 남성과 여성이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것인가?
            3. 고린도 전서 14:34-35와 디모데 전서 2:11-12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들어가는 말

            유독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고 느끼는 곳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하면 그곳은 교회라고 한다. 전통적인 보수층 교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성목사를 세우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때에 여성 성직허용에 대한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과열되고 있다.

            지난 7월 5일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논하는 공청회 자리에서 강사로 초청된 K 교수는 여성안수 불허는 비성경적이고 거짓교사들이라고 톤을 높였다. 거기에다 성경의 영감설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을 하여 보수계층의 목사들과 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말까지 하였다. 그 이후로 교단적인 대응을 기다려온 필자는 실망한 마음을 가지고 K 교수의 글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고자 펜을 들게 되었다.

            1.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우열 문제가 아니라 질서 문제로 보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가? 성경에서 남녀관계는 동등성(sameness)이 아니라 평등성(equality)을 가르친다. 동등하다는 말 자체는 본체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등하시듯 남성과 여성의 본질(substance)이 같을 때 우리는 동등성을 말할 수 있다.

            창세기를 보면 남성과 여성은 만들어진 재로가 다르다. 남자는 흙을 빚어 만들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물론 이것이 우열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라는 호칭 자체가 다르다. 예수와 하나님은 호칭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으로서 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호칭이 다르며 결코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측면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다 평등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타락이전에도 그 차이는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남자를 언급하면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했다. 그리고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라고 하였다(고전 11:7-10). 그 전에는 여자의 머리가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전 11:2).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하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권위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머리에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천사들을 인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수종들어 섬기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속하여 섬겨야 할 자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여성들의 섬김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 표시로 여성은 머리에 뭔가를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권위 하에 있는 공교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임재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가 집전되는 곳에서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한다는 것은 마치 창녀들이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그 당시 부정한 자, 머리를 민자들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전 11:6). 그 연장선상에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 14:34-35절 말씀과 디모데 전서 2:11절이 언급되었다고 본다.

            2. 성경은 위계 질서를 무시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다(고전 14:34).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엡 5:22). 이것은 남성과 관련하여 여성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세상에서 여성들의 두각이 교회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는 독립된 영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법이 최우선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직된 유무형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남녀 관계는 지위 문제가 아니라 질서 차원의 권위 문제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동등이 아닌 평등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머리뼈나 발가락뼈가 아닌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절에 이야기하고 있듯이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평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동일한 성도이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위를 가진 주님의 백성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차별이 없는 것이지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위계 질서에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구분이 없는 동등성만 있다고 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1-2). 위계 질서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3.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만이 남성과 여성이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한 것인가?

            여성안수 허용론자들은 그 길만이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한다. K 교수의 지적처럼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여성들이 성직에 전혀 나서지 않았을 때에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왕성하게 성장을 했는가?

            작금의 교회성장 추세를 보자. 그토록 탁월한 여성 인력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예전에 비해 여성 목사들과 장로들이 그렇게 많아졌는데. 교회가 더 활력이 넘치고 주님의 교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더 잘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K 교수에 따르면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 때문에 오직 12 제자만 택하였다고 했다(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4). K 교수의 주장대로 갈라디아서 3:28절이 그야말로 동등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인데 유대인들의 문화를 거역하는 일을 그 전능하신 분이 왜 못하셨는가?

            성령의 능력은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다 뛰어넘는 것이다. 복음의 효과적인 열매를 위해서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는 것은 신학자의 궤변이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될 제자들임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처음부터 남녀 동등성을 주장하시며 사역의 동등성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왜 문화적인 영향력 때문에 양보하였겠는가? 그가 12사도 속에 여성을 넣지 않은 것은 성직에 있어서, 교회 조직에 있어서 여성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장이나 사도 바울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바른 가르침이다.

            교회에서 성직을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세우시지 않은 일, 그리고 더구나 갈라디아서 3:28을 그토록 확신 있게 주장하는 사도 바울도 그를 따르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로 안수하여 세우거나 임명한 일이 없는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일부 교회와 K 교수와 같은 신학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보다 더 권위있는 존재인가? 사도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우리가 해도 된다고 위임해 준 일 이 어디 있는가? 교회의 모든 구조와 가르침 및 예배가 다 기록된 말씀, 즉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라야 한다. 몇몇 사람들의 주장이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한 제도개선이 가능하다면 성경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4. 부활소식을 전한 여성들, 선지자로서 예언하는 일들을 한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음의 메시지, 하늘나라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는 일은 남녀가 따로 없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구원의 은총에 여성들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면 구약에서부터 명백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 남녀노소가 다 홍해를 건너갔다. 율법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승으로 인하여 여자들을 제외시킨 것이지 그 유명한 쉐마 교육 헌장이 내포하고 있듯이(신명기 6장)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주의 말씀 혹은 토라를 가르치고 강론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혁명적인 일을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마리아를 남자들과 함께 예수의 발 밑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을 사도의 숫자에 끼이게 되도록 나아간 것이 아니다. 사도들도 가룟 유다 대신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을 사도 수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었다. 복음의 은총은 차별이 없어도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어서 직분 수여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구분을 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그 부활의 첫 소식을 여성에게 허락하셨는가? 복음의 증인, 혹은 부활의 증인은 K 교수의 지적한 대로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용한 것은 복음의 증인은 이미 요엘서에서 예견한 대로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임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 그것이 말씀 선포자인 설교자로서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증인이지만 모두가 다 사도요 선지자요 전도자인 것은 아니다. 즉 공교회 앞에서 여성을 설교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상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역할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5. 바울 사도는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공교회 앞에서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복음의 효과적 설득을 위하여 단지 문화적 양보를 하셨다고 말하면서 복음의 분명한 역효과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것은(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1)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마리아의 지시대로 부활의 메신저가 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리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 뵙고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고하라고 하였지(요 20:18) 이 사실을 만민에게 선포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공식석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나선 적이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눅 24:9-10).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여성들의 설교 사역을 인정했다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고린도 교회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직 성경의 정경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여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특별한 은사들을 사용하신 점이다. 그 때 무질서하게 여성들이 나서게 되는 상황을 사도 바울이 질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 전서 11장의 내용이다.

            여성들이 교회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요 남성과 천사들의 권세 하에 있는 자들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성경에 분명 여성들 중 선지자들이 있다. 빌립의 네 딸들이 그러하며(행 21:9) 아기 예수를 기다리던 안나 할머니가 그러하다. 후자는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때 미리암을 비롯하여 훌다와 드보라와 같은 여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신약에서 선지자들이라는 공식적 칭호가 전자에게 주어진 것은 틀림없다.

            빌립의 네 딸들이 무슨 예언을 하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남자 사역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이 사역자로 나설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일반적인 규범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면 여자만이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있다. 발람 선지자를 태우고 간 나귀도 말하지 않았는가?

            공교회가 조직된 이후, 특히 성경의 정경이 완성 된 이후에 계시가 주어지는 특별한 예언이나 방언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린도 전후서가 기록된 연대는 대체로 주후 56년경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의 목회서신에 해당되는 디모데 전후서를 기록한 연대는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사건으로서 바울의 죽음을 앞에 둔 때로 본다면 주후 65년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는 이미 신약교회가 그 틀을 다 잡아가고 있던 때이기 때문에 안정된 상황에서 교회를 어떻게 목회하여야 하는지를 다룬 그의 서신에 교회 직분자들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장로직이나 혹은 감독직에 여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가? 도리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조항은(딤전 3:2) 분명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은 직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석의 논란이 있는 "여자들도"(딤전 3:11)라는 문구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여성 감독을 의미한다면 굳이 그렇게 불분명하게 표현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에 오라고 한 장로들 가운데는 여성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바울이 그토록 애지중지 여기고 동역자로(행 18:2)까지 간주한 브리스길라도 장로로 세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바울이 여성 편력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목회서신에 장로도 집사도(딤전 3:12) 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교회의 직책에 있어서는 남녀의 기능적 차이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디모데 전서 2:11-12절은 분명 엄청난 모순이 된다. 
             
            6 고린도 전서 14:34-35과 디모데 전서 2:11-12절은 후대에 삽입된 글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은 일부 학자들과 더불어 K 교수의 주장처럼 후대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 전서도 몇몇 학자들의 의견처럼 1세기말에 영지주 의자들의 여성들의 물의에 대한 경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설을 의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주어진 말씀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후세에 삽입했다고 할 때 왜 고린도 전서 11장에 다 할 것이지 14장에 해서 논란이 되게 했을까?

            고린도 전서 14장의 사건은 K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논리적 모순덩어리가 아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O. P. Robertson, The Final Word, The Banner of Truth, Edinburgh, 1993). 따라서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성령이 임하신다고 해서 중구난방으로 예언하거나 방언하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질서 있게 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앞의 11장에서 남성에게 복종하는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공교회 앞에서 잠잠할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35절은 34절과 구분되게 심지어 교회 앞에서 질문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도 설교를 할 수 있다 없다가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여성들이 장로 혹은 감독 및 집사직분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K 교수는 '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한국 교회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많은 교회도 없다. 비록 안수하여 목사나 장로 및 안수 집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개혁교회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초대교회 여성들의 활동 못지 않게 허용하고 있다.

            단지 안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들을 굴종시키는 것인가? 여성 목사와 장로를 허용한 교단들은 근본주의적 칼빈주의(?) 교단들에 비해 더욱 든든해 졌고 세계선교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있는가? 역사적으로 세계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에도 여성이 사역자로 나서지 못하여 교회 성장이 제한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의 은사들이 제한되지 않고 한량없이 부어져 복음의 물결이 출렁거릴 때도 여성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내적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살았던 대각성과 부흥의 시대의 그들에게서 여성 안수불허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성경 해석의 여지 를 불러일으킨 기록도 하나도 없다.

            지금의 논란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함께 세속적인 여권신장 운동의 영향을 교회가 받아 요동치고 있는 일이다. K 교수는 성경 진리를 위해서 몸부림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땀흘리고 있는 순결한 사람들을 거짓 보수주의자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교회에서 여성을 추후도 굴종시켜 본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하지도 않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여성들에게 안수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옷차림에 대한 문제나 머리에 두건을 써야 하는 일이나 신자들의 자유에 대한 남용적인 문제들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9)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 그 자체로만 해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진다. 한쪽 구석에 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한 설교가 어찌 신약성경에 수록된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27권만을 주신 것은 그 모든 내용들을 함축하여 정수(精隨)만 주셨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한단 말인가? 비본질적인 것은 소홀하게 다룬다든지 혹은 우리 임의대로 혹은 우리들의 편리대로 각색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의미인가?

            K 교수는 성경의 영감설을 믿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정확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물론 이는 원본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본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본을 들이밀지 않으시고 계신 것이다.

            성경 번역 작업에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참 의미를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시는 것도 믿는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라고 말한다. 만약 여성 성직 허용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지난 2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께서 방치해 두시고 오늘날 누구보다도 똑똑한 일부 신학자들에게 발견케 하여 교회에 소개하라고 하셨다고 한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순된 존재라고 말하는 불경죄에 빠진다. 더 이상 계시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주어진 신구약 성경 66권으로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7.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의 성직을 허용하는 가르침인가?

            만인제사장 교리가 무엇인가? 아무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제사장 교리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무식한 사람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 논리가 맞다고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성직을 왜 허용 못하는가? 그들도 만인제사장들인데 말이다. 왜 여성에게만 말하는 것인가? 중 고등 학생들은 안되는가? 누구나 성직자가 된다는 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고린도 전서 12:29-30절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천주교의 사제제일주의에 반하여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성도라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 성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누구든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직 수여교리로 주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을 왜곡해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만인제사장이기 때문에 설교도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여 실지로 그렇게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이 현대적 조류요 현대 감각이 있는 신선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을것이다. K 교수는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71)고 했다.

            여성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것만이 여성해방인가? 지금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종살이하고 있는가? 이미 그들도 만인제사장으로서 남성들과 평등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과 잠잠하라고 하는 성경적 가르침은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지켜져야 할 가르침이다.


            나가는 글

            첫째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자이지만 수행할 역할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열의 문 제가 아니라 질서의 구분을 나타내는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성 안수가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교회 밖의 여권신장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이 교회를 공 격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휩쓸려서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신학 자들과 목사들의 현란한 지적 논리로 교회를 혼란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부활소식을 처음 접한 여성들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파할 설교권까지 여성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할 일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 다만 필자의 논지는 성경에 명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증거가 전혀 없는 성직 허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니다.

            넷째로 고린도 전서 14:34-35절 말씀과 디모데 전서 2:11-12절 말씀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삽입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 영감으로 주신 주님의 명령이다. 교회 제도와 교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에 의해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 성경에 기초할 뿐이다.

            다섯째로 만인제사장 교리가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직 문제가 아니라 다른 중보자 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나귀에게도 성직을 주자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빗나간 비약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 라"(고후 2:17),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수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시대적 문화나 가치관이 성경 해석의 열쇠가 아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할 뿐이다. 진리를 거스리는 거짓 선지자 노릇은 하지 말자. 오직 이 땅에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는 그 영광의 날이 속히 임하기를 사모하며 이 글을 마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천지 탈퇴 기자 회견(전 신천지 교육강사 지명한)-펌

             

             

             

             

             

             

             

             

             

             

            Re:신천지 탈퇴 기자 회견(전 신천지 교육강사 지명한)CBS 보도-펌

            //

             

            신천지 강사 출신 탈퇴 기자회견,

            "신천지 교리는 거짓"

             

            자료 제공해 주신 엘더님 감사드립니다.

            -------------

            계시록을 푼 자는 신천지밖엔 없다 하길래 어떻게 풀었나 보았더니 아 글세? 재림예수=2마니,,, 허허 이런 이런,,,

             

            속히 복사 및 스크렙해 가세요.

             


            '나' 와 '우리'의 갈림길


            서로의 우정이 무척이나 깊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세상을 알기 위해
            함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친구가
            땅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야, 오늘은 나의 운수가 트인 날이구나!"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몹시 섭섭한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나' 라는 말을 쓰나?                             
            이럴 때는 '우리' 라는 말을 쓰면 좋지 않은가?"

            두 사람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지갑을 가지고 길을 떠나려 할 때
            지갑을 잃어버린 주인이라며 한 남자가 뛰어왔습니다.

            그는 두 친구를 보고 다짜고짜
            "도둑놈들!"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자 지갑을 주운 친구가 옆의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우리를 도둑으로 몰다니..
            우리는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웠을 뿐이오."

            그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가 막힌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나?
            조금 전 운수가 좋을 때는 '나'라 하고, 궁지에 몰리자
            '우리'를 찾으니 무엇이 진짜 우리 사이인가?"

            사람들은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는 왜 언제나
            '우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걸까요?
            우리 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보다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한  어렵고 힘겨울 때 '우리'라는 버팀목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말입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고단한 인생길에서
            위안과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ㅡ 좋은글 중에서 ㅡ
            

             

            첫 가을 편지를 그대에게

             

             

            가을이 오는 길목입니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새끼 강아지 걸음처럼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바다 끝에서 연분홍 혀를 적시고 떨리듯 다가오는 미동 괜스레 가슴이 미어집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내 마음 안달이 났습니다. 차마 전하지 못했던 사랑 가을보다 먼저 전하고 싶어서 내 마음 안달이 났습니다.

             

             

            물살 같이 빠른 세월이라 사랑도 그렇게 흘러 갈까봐 미루고 미루어 전하지 못한 마음 어린 짐승 날숨같이 떨며 소리없이 그대를 부릅니다.

             

             

            가을이 온 뒤에도 지금처럼 높은 산과 긴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바라 봐야만 한다면 꽃망울 속 노란 꽃가루 같이 가득한 그리움을 어떻게 할까요. 

             
            갓핀 꽃잎같이 곱고 성당의 종소리 같이 맑으며 보름달 같이 밝은 그대는 작은 새의 깃털같이 부드럽고 함박눈 같이 고요한 나라입니다.
            아아, 가을이... 바다 끝에서 생겨난 가을이 새끼 고양이 눈망울 같이 내 마음을 바라봅니다. 어린 짐승 발소리처럼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을이 나뭇잎에 안기기 전에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가을보다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가을 밤 (여수) / 이연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낮서른 타향에
            외로운맘 그지없이 나홀로서러워
            그리워라 나살던곳 사랑하는 부모형제
            꿈길에도 방황하는 내정든 옛고향
            명경같이 맑고푸른 가을하늘에
            등불가에 젖는달빛 고즈넉이 내릴제
            줄지어가는 기러기떼야 서리내린
            저녁길에 어딜찾어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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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할 수 있는 권능(Empowered to Pray)

             

            기도는 성령이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언제 기도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걱정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방법이나 기교에 관하여

            쉽게 걱정에 빠집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기도를 하는 자는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는 성령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의 생각을 아십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6~27)

             

            이 말을 이해하면, 우리는 성령이 위로를 주는 분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의 선지학교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일은 우리 학교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시장전략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른바 ‘작지만 강한’ 강소(强小)대학 전략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학교법인 한국침례신학원(이사장 성지현)은 지난 7월 12일 제96차 이사회를 열고 제13대 총장으로 배국원 교수를 선출했다. 이에 오는 9월 17일부터 시작되는 총회에서의 인준을 기다리고 있는 배국원 총장 선출자를 만나 인터뷰했다.

             
            ▲ 배국원 침레신학대학교 제13대 총장 선출자

            신임 총장으로 선출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소감과 함께 개인적 ‘신앙 여정’을 소개해 주십시오

            부족하기 그지없는 저에게 이 귀중한 사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수많은 목사님, 교직원, 학생, 성도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학교와 교단을 위해 열심히 뛸 것을 약속드립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돈독한 침례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전국여전도회의 선구자였던 어머님 방호선 집사(후에 일본침례교 목사 안수)의 서원기도로 늦게 얻은 막내아들로서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한국침례교의 1번지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서울침례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배웠고 특히 중고등부 시절 이른바 ‘왕의 사신단’(RA) 프로그램을 통해 뜨거운 복음적인 신앙과 사명감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고 또 고백했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침례교 신앙이 이후 저의 신학 여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김에 ‘신학 여정’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기독교 복음 사역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느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님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철학과로 진학해서 먼저 신학을 위한 철학적 기초를 쌓았습니다. 이후 미국 Southern Baptist Seminary에 유학하여 신대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침례교의 성경적이며 목회적인 신학을 잘 배운 다음, Harvard 대학에 진학하여 종교철학 전공으로 Ph. D를 받았습니다.

            귀국한 다음에는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주로 신학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습니다. 귀국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신학자로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종교다원주의 논쟁, 후기자유주의 신학 등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최근에는 기독교와 과학의 문제를 흥미롭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신임 총장으로서 어떤 경영 철학으로 학교를 이끌어 가실 것인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학교가 정말 신학교다운 특성을 개발하고 정립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만의 교육적 개성이 분명히 확립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교육이념에 충실한 학생들을 배출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침례교신학의 정체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일입니다. 침례교는 독자적인 신학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제 우리 학교의 우수한 교수들의 지혜를 모아 한국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을 체계적으로 천명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the Bible-loving people)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 침례교인들의 성경적 진리관을 담은 신학을 정립하겠습니다.

            그러한 경영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구상 중인 구체적 방안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제가 추구하는 침례신학대학교의 미래를 내적 변화와 외적 성장, 두 가지 면으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학교발전을 위한 내적 변화의 시작은 화합하는 학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지난 2004년 이후 우리 학교는 크고 작은 아픔과 어려움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이제 교수들이 하나가 되고, 직원들이 한마음이 되고, 학생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야말로 학교발전의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자 가장 필요한 장기발전계획의 시작입니다. 나아가 교단 목사님들이 진심으로 축복하는 신학교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외적 성장은 한 마디로 우리 학교의 지경을 넓히는 일입니다. 수도권 진출의 꿈을 이루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사이버 캠퍼스 개념을 공격적으로 도입하려고 합니다. 대전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전국 및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우리의 지경을 넓히는 사업으로 구상하는 것은 다문화 선교를 위한 신학 허브(HUB) 프로그램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단은 수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여 왔습니다. 이제 선교의 열매가 무르익으면서 많은 현지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신학수업의 기회를 갖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선교사를 해외로 보낼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을 우리나라에 불러와서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선교지의 젊은이들을 우리 학교에서 데려와 체계적으로 신학훈련 시키는 일종의 “신학한류”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가진 꿈은 우리 대학교를 누구나 손꼽는 명문 신학대학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에서도 인정할 만큼 참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는 신학교로 만들겠습니다. 하나님의 선지학교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일은 우리 학교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시장전략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른바 ‘작지만 강한’ 강소(强小)대학 전략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동두천 제2 캠퍼스 설립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동두천 제2 캠퍼스 설립 문제는 우리 학교의 가장 시급한 현안 중의 하나입니다. 그동안 도한호 총장님과 행정부가 수고하셔서 동두천 제2캠퍼스 사업을 진행시켜 온 것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지난 해 교단총회에서 동두천 캠퍼스에 대한 정관변경안이 부결되는 등 이 계획에 대하여 많은 교단 목사님들이 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학교 내에서도 이 사업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합니다.

            10월 15일 취임한 뒤 연말 혹은 연초에 도시관리계획 용역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 수 개월간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학교와 교단을 망라하여 동두천 캠퍼스 문제에 관한 열린 토론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총장으로 선출된 후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논란이 일고 있는데, 입장을 밝혀 주십시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비방으로 인해 교단과 학교에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10여년전 <불교평론>에 기고했던 논문이 시비의 단서를 제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 삼는 논문의 제목이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그 역사적 배경과 현재”라는 지극히 객관적인 정보를 요하는 학술 논문이었으므로 그런 오해가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당시 다른 신학자들과 불교학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는 특집기획 속에 저는 서두에 종교다원주의를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임무를 맡았었기 때문입니다.

            총장에 당선된 이후 우리 학교의 신약학 교수 한 사람이 위의 논문을 중심으로 저를 비방하는 광고를 계속 게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히 기도하면서 기다렸지만 너무 비이성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탓에 저도 8월 24일자 침례신문에 제 신앙과 학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전면광고를 게재하였고 이를 통해 저에 대한 오해는 해소되었다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만 이런 비방에 관한 제 대답은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근 50년전인 중학교 1학년 때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예수님 보혈의 공로 이외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을 쓴 적이 없는 기독교인입니다. 저의 복음적 신앙고백에 관한 가장 분명한 증인은 지난 22년간 우리 학교에서 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저와 대화를 나누고 설교를 들었던 동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시는 모든 목회자, 선교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1세기는 교회의 목회와 선교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에 대항하여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신 것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분명히 위기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위기’란 위험하긴 하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충분한 역량과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 두 축의 균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수직의 끈을 꼭잡고 우리들의 이웃을 향한 수평의 끈을 아름답게 펼칠 때 우리는 오늘의 위기를 반드시 내일의 기회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신학교가 앞장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 번 힘차게 선포하고 회복시키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목사님들의 뒤를 이어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소중한 사역자들을 길러내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 신학교를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동산으로 만들기 위해 목사님들의 기도와 이해와 후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늘 기도해주시고, 좋은 의견 많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여러분의 제안을 경청하고 적극 반영하여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배국원 총장 선출자(60)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침례신학대학원(M.Div.)과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Th.M.)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1990년부터 침신대 신학과(종교철학) 교수로 재직해 신학과 학과장, 교무처장, 학생실천처장, 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배 총장 선출자는 오는 10월 15일부터 4년간 제13대 총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병왕 ⓒ뉴스미션


            출처: USA 아멘넷
            십일조는 무엇인가? 1. 십일조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 일반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이 ‘십일조’ 하면 떠올리는 것이 말라기 3장 말씀이다. (말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를 하늘 문을 열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자신을 시험하라고까지 하면서 약속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유물로, 또한 교회의 헌금강요 내지 치부수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그럴까? 2. 구약시대 십일조의 시작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처음 정하신 것은 민수기 18장에서이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말씀 그대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레위지파는 성막에서 섬기도록 구별되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다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만 레위인들에게는 분배되는 땅이 없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거주지로 삼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간수할 성읍 주위의 조그만 땅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기업이다. 그들에게 나의 십일조를 돌린다.”고 말씀하신다. 민수기 맨 앞으로 돌아가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20세 이상의 남자를 다 세도록 하셨는데 여기에서 레위지파는 빠진다. 그리고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 중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를 다 세도록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000 명이다. 다음은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남자를 생후 일 개월 이상으로 모두 세라고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273명이다. 레위인 남자의 수보다 이스라엘 자손 처음 난 남자의 수가 273명 많다. 하나님은 모든 처음 난 남자, 곧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 주장하셨고, 이 뿐 아니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곡식과 열매의 처음 거둔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기 민수기 3장에서 보면 그 장자들을 도로 돌려주는 대신 레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겠다고 하시면서 교환하고 계신다. 그리고 돌려주실 장자가 레위인보다 273명 더 많으니까 한 사람에 오 세겔씩 돈으로 계산하여 1,365세겔을 받아 챙기신다. 너무하시다. 장자와 레위인을 바꾸어 주시면서 대충 넘어가시지 않으시고 그걸 돈으로 계산해 다 받으시다니. 3. 장자의 의미, 레위인의 의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장자를 유난히 푸대접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선 다윗이 말째 아들이다. 메시아의 계보인 유다는 넷째다. 야곱도 동생이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라도 걸리셨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 걸리셨다. 인류의 장자인 아담은 선악과사건을 저질러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선사했다. 아담과 하와의 장자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죽였다. 가인이 한다는 소리가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였다. 하나님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였을 것이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렇지 않은가? 형이 동생을 지켜주어야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그렇다. 못 된 인간의 맏아들은 형 노릇을 못 했다. 동생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때려죽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장자(장자권)를 압류하고 자신의 아들을 인간들에게 살려내는 맏형으로 내어주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형이 되셨다. 가인이 압류당한 장자권을 가지고 오셔서 말이다. 그렇다. 성경 여러 곳에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시편 22편과 히브리서 2장을 보라. 그는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형제가 되셨다 하지 않는가. 광야에서의 성막은 무슨 뜻인가? 성막은 ‘하나님이 그 구원하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 곧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막은 하늘의 참된 성소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태초부터 그 하늘의 참된 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자가 계셨지 않은가? 누구인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그 장자를 내어주신 것이다. 하늘에서 아버지를 섬기시던 맏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장자(장자권)를 몰수하고 “장자는 내 것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다.” 주장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민수기 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를 되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대신 레위인을 택하여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돌려주신 장자가 더 많은 만큼 오 세겔씩 돈으로 쳐서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셈에 철저하신 것은 단 하나의 생명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자신의 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다가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광야에 내려와 성막 가운데 계시면서 레위인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완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 레위인들이 기업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려면 형제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도 그렇다. 만일 십일조가 없었다면 2000년간 교회가 어떻게 지탱되어 올 수 있었겠으며 선교사는 어떻게 보내며 복음이 과연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그건 구약시대 이야기고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 따로 없고 그래서 십일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십일조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내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이다. 신약성도들은 십일조 낼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자는 천국 땅을 분배받지 않을 모양이지? 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아서 레위인들에게 돌리셨는가? 민수기 18:21절 말씀은 레위인들의 섬김의 대가(갚음)라 하셨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의 것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천국을 분배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 십일조는 하늘성소에서 섬기시던 아들의 몫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죄인들에게(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어주시고 대신 회막에서 레위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니 황송하게도 레위인이 그 십일조를 받게 된 셈이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하나님은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아들에게 다 주셨다.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들에게로 상속된다. 당연히 천국은 아들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천국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그 생명, 그 살과 피, 아니 그 아들 되심, 후사 되심, 상속권을 몽땅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까지 분배받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십일조를 내었는데 영원한 하늘의 약속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아들 됨을 받은 우리가 후사가 된 우리가 십일조를 안 내다니? 5.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제사장,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바로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십일조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히브리서) 야곱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사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고 서원한다. 아비 집은 영원한 구원의 처소요 안식의 처소요 천국의 예표이다.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 그것은 장자 에서가 물려받게 되어 있으며, 죄(?)를 범하고 도망가는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에 평안히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득한 훗날의 소망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재산을 팔아 타국으로 떠나는 탕자나 하나님을 떠나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한 신세의 야곱이 “제게 아비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곧 주님의 소유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오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과도 같다. 아버지의 집, 천국에 들어오는 자는 십일조를 당연히 내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의 십일조가 레위인들이 아직 허리 속에 있을 때 있었던 일로 아브라함, 야곱, 레위인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멜기세덱, 곧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풀이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비의 집, 가나안 땅, 곧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자가 드리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십일조는 천국을 분배받는 자,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표인 셈이다. 6. 십일조는 주님께 드리는 것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일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구원을 얻은 신약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모형이요 예표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In the one case, the tenth is collected by men who die; but in the other case, by whom is declared to be living. (NIV) 동사가 현재시제이므로 우리말 성경에 ‘받았느니라’는 ‘받느니라’라고 해야 옳다. 즉 구약시대에는 죽을 자들, 곧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았으나, 신약시대에는 살았다고 선언된 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일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십일조를 받으실 분이 분명해진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에서 이루어질 십일조의 예표인 것이다. 7. 십일조는 성도의 신앙이요 힘이요 자랑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십일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 십일조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십일조는 천국생명을 얻은 성도의 표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예배이다. 찬양이다. 이것은 입술로 드리는 것이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삶이다. 거룩한 산 제사(롬12:1-2)다. 이것은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몸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입으로 때우고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입으로, 몸으로가 아닌 현찰로 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안 드리는 것은 도적질이라는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훔쳐 먹는 것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주님의 생명을 훔쳐 먹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교회들이 재물로 타락하고 성도들의 믿음의 고백인 십일조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해도 십일조는 성도의 거룩하고 당연한 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십일조와 헌금의 잘못된 쓰임과 교회의 대형화와 개교회주의에 의한 헌금독점현상은 인간들의 문제이며 고쳐야 할 문제이지 십일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반기독교, 반교회인사들이 마치 십일조가 교회의 부패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면서 십일조 무용론 내지 해악론을 펴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십일조 없는 교회, 십일조 없는 기독교가 과연 힘이 있겠는가? 십일조 없이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어갈 수 있겠는가?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는 천국 못 간다는 뜻 절대로 아니다. 구원은 십일조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축복의 조건도 아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는 일종의 거래이자 기복신앙의 전형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다. 십일조가 성도에게 지워지는 책임이요 의무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우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슨 조건을 걸거나 바라면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은 성도는 스스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옳다. 아니 참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자는 자원하여 주님을 섬기며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십삼조, 아니 가진 모두를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일 가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십일조는 천국백성의 자랑스러운 의무요 표요 힘이요 자랑이다. 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군대의 보급선이다. 아름다운 드림이 하나님나라,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우고 이기게 할 것이다. (1년 전의 글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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