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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다(Coming Home)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이국으로 가 버린 작은 아들과 
집에 남아 자기의 의무를 다 한 큰아들입니다

작은아들은 술과 여자에 빠져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큰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이 맡은 모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느라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두 아들은 잃어버린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 대하여 슬퍼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서 자신이 원했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내키지 않는 복종은 둘 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작은아들을 닮았던지, 혹은 큰아들을 닮았던지,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안에서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18:21-32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와 십일조를

받아서 다시 십일조를 내는 레위인들의 십일조를 다루고 있다.

십일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얻는 생활수단으로서의

소득과 기업인만큼 중요한 것이다.(21:24,28)

 

그러나 십일조 제도는 단순히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기업과 삶의 주인이심을 택한 백성들에게 알리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제도라는데 의의가 있다.

 

1.기원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1/10 준데서 시작된다.( 14:17-20)

야곱도 소득의 1/10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있다.( 28:2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과 역사가 깊은 십일조를

출애굽 당시에 다시 언급하시고 구체적으로 설명,제도화 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배려는 제도의 기원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기 위한 조치였다( 3:7-12)

 

2.성경의 기록

 

모세 율법 가운데에서 십일조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은 27:30-33,

18:21-32, 12:6-12. 14:22-29등에 나온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취하는 모든 산물, 곡물,과일,가축 등에서 1/10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해야 함을 밝혔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있다.(대하31:5,10:37-39;12:44;13:12,

3:10, 23:23, 11:42)

 

3.종류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세가지로 구분된다.

 

. 일의 십일조( 18:21-24)-성전에서 봉사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일반백성들이 소출의 1/10 바치는

 

. 이의 십일조( 14:23-27)- 성전에 가져가서 잔치용으로 사용

(돈으로 바꾸어 가져갈 있고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있게

허용)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는 ,성도간의 교제와 관련지어짐

 

삼의 십일조 ( 14:28-29, 26:12-13)- 안식년을 기준하여

3년과 6년에는 이의 십일조로 잔치를 하지 않고

성에서 모아 가난한 자와 고아 그리고 과부를 돕는 구제비로

사용, 용도만 다를 이의 십일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님

 

이때 책임자는 이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거짓없이 사용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해야 되었다.( 26:13-15)

 

 

4. 유대인들의 헌금 정도

 

유대인들은 여기 언급된 십일조 외에도 첫열매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바쳤으며 일명 예물이라고 하는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양털 가운데 일부를 제사장에게 주었다

( 18:4-5)

히브리인의 주석인 미쉬나에 의하면 소득의 1/40-1/60 정도로

바쳤다고 한다.

 

한편 제일의 십일조는 예물을 제외한 나머지 양의 1/10 ,

그리고 이의 십일조와 삼의 십일조는 또한 앞의 헌물을

제외한 것의 1/10이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은 성막건축

특별한 목적으로 바치는 예물( 35:20-29) 제사 제물을

제외하고도 소득의 20% 이상에 이른다.

 

5. 십일조의 영적의미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댓가성 물질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며 인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고 베풀어주신 물질에 감사하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자발적으로 드리는 올바른 신앙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 스스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인간에게 시간과 물질의 일부를 특별히

구별하여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칠일 가운데 하루를 바치는

안식일이 시간에 대한 기준이요 의무조항이라면, 소득의

십의 일을 바치는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기준이요 의무

조항이다.  그러나 이는 7 가운데 하루만 혹은 소득의

 1/10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율법의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따라서 이러한 규례의
올바른 준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법으로 정하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침은
모든 시간과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청지기에
불과함( 25:14-30)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올바른
십일조 헌물관을 정립하여 청지기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한평생의 여행(A Lifelong Journey)
 


집으로 가는 길은 한평생의 여행입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일부는
방탕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
또는 후회 속에 빠져
꼼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탐욕적인 환상과
성난 생각들에 잠겨 헤어나지 못합니다

흔히 우리는 한밤중의 꿈을 통하여
우리의 방황을 깨닫습니다
기도, 금식, 그리고
돌봄과 같은 영적 훈련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길입니다

집을 향해서 걸을 때 우리는 그 길이
얼마나 먼 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길을 가는 도중에
이미 집에 와 있음을 발견합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문어의 다리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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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문어를 식용으로 먹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놀랍겠지만, 정답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이다.

문어를 식용으로 먹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정도가 전부라고 봐도 된다.

서양에서는 문어, 낙지류를 아주 흉물스럽게 생각해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생낙지를 뜯는 장면에
소리를 지르고 기절하는 여자 관객이 있었을 정도다.

문어는 한자로는 팔초어(八梢魚) 혹은 팔대어 (八帶魚) 라고도 쓰며,
생물학적으로는 낙지과에 속하는 연체 동물이다.

문어는 바다의 현자라고 불릴 만큼 머리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동물의 지능을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이 없어 정확히는 몰라도
개나 고양이 정도의 지능은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몸의 색을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색 변화를 이용한 위장 능력은 상당한 편이다.

문어가 색 변화를 통해 숨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자.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위장 능력이 아닐까?
이 정도면 카멜레온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보통의 문어는 새우나 조개 등을 잡아먹고 살아가는데,
대형 문어의 경우에는 무려 상어(!)를 잡아먹기도 한다.

실제로 한 대형 수족관에서는 상어와 대형 문어를 집어넣은 적이 있었는데,
상어가 육식 어종이긴 하지만 문어는 위장 능력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문어가 잡아 먹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넣었다가 되려 상어를 잡아먹어
문어를 무시했던 수족관 관계자를 당황하게 만든 일화가 있다.

문어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낮에는 활동이 발견되지 않았었지만,
수족관 측에서 밤을 기다려 야간 카메라로 관찰해 봤더니
지나가는 상어들을 문어가 빨판과 다리를 통해 붙잡아서
허리를 부러뜨려버리는 엄청난 모습이 관찰된 것이었다.

서양에서 문어를 먹지 않는 것은 문어의 공격적 모습들을 자주 봐 왔기 때문에
문어를 바다에 사는 위험하고도 흉칙한 괴수로 여겨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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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는 하나의 뇌를 가지고 있지만, 놀랍게도 다리에도 사고하는 기능이 있다.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바다 속에서 헤엄치거나 먹이를 잡을 때처럼
크게 움직여야하는 동작은 문어의 뇌가 전체적으로 명령을 내리지만,
각각을 뻗고 구부리는 등의 세분화된 동작은 다리가 알아서 한다고 한다.

뇌의 명령 없이도 움직이기 때문에, 도망도 잘 간다.
문어에는 오징어보다 훨씬 많은 양의 타우린이 들어있고,
상대적으로 칼로리가 낮으면서 피를 맑게하는 작용이 있어
산후조리에도 좋은 훌륭한 보양식으로서 가치가 높다.

문어에 관해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 또한 적지 않다.

우선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 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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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초기, 세종14년 (1432년)에 편찬된 지리서인데,
기록에 따르면 문어는 전국 곳곳 경상도 / 전라도 / 강원도 / 함경도 등의
무려 37고을에서 토산물로 문어를 바쳤음이 기록 되어 있다.

조선 초기 이전에도 문어가 동해와 남해에서 잡혔음은 물론,
오래 전부터 우리가 문어를 먹어 왔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많다.

다음은 <전어지 佃漁志 > 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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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지에는 단지를 던져서 문어를 잡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전어지에 적혀 있는 서술에 의하면, 보통 문어를 잡을 때는
노끈으로 단지를 옭아매어 물 속에 던지면
얼마 뒤에 문어가 스스로 단지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

단지의 크기와 관계없이, 한 마리가 단지 하나에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어는 호기심이 많으며 구석진 곳에 박혀 있기 좋아하는 습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단지에 갇힌 문어는 자기 살을 뜯어 먹으면서 길게는 반년 정도까지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제 살을 먹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을 두고 문어방 文魚房 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 규합총서 閨閤叢書 > 에서는 문어의 음식으로써의 효능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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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합총서는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가 쓴 책이며,
당시의 요리 및 가정 생활 등에 관한 정보가 총망라된 명저이다.
빙허각 이씨는 여기서 문어에 관해 이렇게 저술하고 있다.

'문어는 돼지고기처럼 썰어 볶으면 그 맛이 깨끗하고 담담하며,
그 알은 머리 / 배 / 보혈에 귀한 약이므로 토하고 설사하는 데 유익하다.
쇠고기 먹고 체한 데는 문어의 머리를 푹 고아 먹으면 곧 낫는다'

수백년 전의 기록이며, 현대 의학의 기준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조상들도 문어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식품으로서 널리 즐겨 먹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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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나 혼례 등 중요한 자리,
혹은 왕의 수랏상에 올릴 정도로 귀한 식재료 대접을 받았다.

말린 문어는 공들여 오려서 국화, 소나무, 매화, 봉황 등으로 모양을 내어
상차림 장식으로도 활용해 왔고, 최근에도 폐백 음식 등으로 종종 쓰이는데
이것을 문어조(文魚條), 혹은 문어오림이라고 한다.

현대 의학 및 영양학적으로 분석해 봐도, 문어는 몸에 좋은 음식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위에서도 말한 바 있듯 단백질이 풍부하며,
당질 및 지방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다이어트 식품으로 좋다.

타우린이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망막의 기능을 증진하여 시력 감퇴를 예방하는 작용이 있으며
혈액 중의 중성 지질과 콜레스테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며 간 해독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피로 회복에도 탁월하다.

인슐린 분비를 촉진해 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당뇨병 예방에도 좋은 효과를 발휘하며,
비타민 E와 나이아신은 노화를 억제하고 세포를 활성화시켜주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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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 지방산으로 알려진 DHA 와 EPA 또한 풍부하게 들어 있어,
성인병 예방과 빈혈 치료에 효과 또한 있다.

오징어 먹물은 치질과 여성의 생리 불순에 탁월한 효과가 있기까지 하니,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단 하나도 버릴 곳이 없는 최고의 보양식이 아닐까 한다.

문어는 겨울이 제철이다. 여름이 끝나고서
점점 쌀쌀해져 가는 지금, 문어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문어, 겨울이야말로 문어를 먹기에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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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ko.wikipedia.org
인터넷 검색
blog.naver.com/wbflqleldh


▲김동호 목사가 작성한 기도문

2012.9.20 김동호 목사님

http://www.youtube.com/watch?v=7YtSVpx4sDI

2012.9.21 금란교회의 반론

http://www.youtube.com/watch?v=LRfzkYP9v9I




출처: USA아멘넷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당신의 순수한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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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두서없이 늘어놓는 내 푸념을 끝까지 들어주는
당신의 예쁜 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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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홀로 외로워하는 내게 다가와 노래를 불러주는
당신의 고운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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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떨어진 내 꿈들을 희망으로 보듬어주는
당신의 깨끗한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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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비바람에 쓰러질까 늘 바람막아주는
당신의 다정한 발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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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지친 내 몸을 조용히 일으켜 감싸주는
당신의 포근한 가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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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이 순간에도 교차하고 있는
당신과 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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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순간적 향기로 유혹을 하지만
우리의 변함없는 사랑!
꽃보다 더 예쁜 사랑향기는
감동으로 못다 핀 영혼까지 눈물짓게 합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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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에 어디에 레위인이 목사라고 나왔습니까? 레위인은 레위인입니다. 십일조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로 사용되어지면 안되고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구제비로만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도에게 드리는 답변이기에, 한 분에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시 같은 생각을 품고 계신 분이 계실까?하여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모든 믿는 자)들의 보혜사 되시며 우리들의 스승이되신 성령님께서(요한복음14:26절 말씀 참조) 친히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변론이 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나눔(Share)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이곳에 올립니다.

먼저, 우리(성도)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은 아래의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 문자적 해석 (Literally)
2. 영적 해석 (spiritually)

1) 구원론:
반드시 문자적(liter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에 구세주로 믿어야 구원함을 얻는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외에 여러 곳) 것은 불변의 진리요, 따라서 그 어떤 다른 해석도 주석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로, 필자는 여기서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인 구원론이나 문자적 해석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성경말씀에 영적 해석이 왜 필요하며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십일조의 사용도에 관해서 잠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축복론
영적인(spiritu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성경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봅시다. 갈라디아서 3:6-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3:29절 말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엔 문자적 (literally)인 해석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예,이런 경우엔 영적 (spiritually)해석이 필요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결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해석으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3) 하나님의 집
마가복음11:16-17절 말씀에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신 것을 문자적 해석이라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러니까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킴입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영적 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집은 천국이란 해석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만 성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으로서의 하나님의 집, 그러면 그곳은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곧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 교회와 공동체 교회, 연합한 모든 교회를 지칭합니다. 기능은 다르나 주의 성령을 모신 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본론:
자, 이런 맥락에서 십일조와 레위인에 대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키3:10절 말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허기야, 십일조폐지론 자들은 이 부분도 다른 이단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도, 뒤틀고 왜곡시켜 입맛대로 바꾸고 있지만...ㅋㅋ)

1. 십일조를 드려야만 하는 이유,
2. 십일조를 받는 대상.
3. 십일조를 내는 목적.
4. 십일조를 드리는 장소.

여기에서 1번에서 2번까지는 우리 모두(성도들) 잘 아는 사실이라 재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같고, 제 3번과 제 4번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과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3.십일조를 드리는 목적:
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에 양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말 3: 10절 하반절)

그렇다면,
4.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장소가 분명 어딥니까?
예, 그것 역시
나의 집(말3:10하반절), 곧 하나님의 집, 땅 위의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성전이 됩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레위인은 오늘 날 누구인가? 아직도 이스라엘(야곱)의 12아들중 3째의 후손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레위는 분명 야곱의 세째 아들이요, 그들의 후손에 국한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레위인은 상관관계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일부를 걸러내고 믿는 것이며, 갈라디아서3:6-9절, 15-16절은 삭제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과연 현대인, 그리고 이방나라의 사람들로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성도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영적자녀들이라면 그 영적가족들 중에서 레위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며, 이는 그 역활 면에서 구분이 지어질 수가 있습니다. 즉 만인제사장 시대에서 굳이 레위 지파가 비록 영적이라고 하더라도 필요한가? 생각해보면,

구약시대의 레위인은 누구며 그들의 역활은 무엇이었는가? 레위지파는
1. 전적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지파였다.
2. 그들에게는 세상 기업이 없어야만 했다.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했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 (민수기 4:15절, 신명기18:1-2절, 대상15:2절.로만 생활 해야했다.

영적으로 레위인을 오늘날 목사, 교사, 혹은 복음사역자들로 보는 정당한 이유: 목사, 혹은 복음 사역자들은,

1.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있는 자란 점.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로마서 10장 15절 말씀) 했다.
2. 목사나 복음 사역자들은 세상에 다른 직종을 갖지 말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한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전 9장1-18절 말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과 십일조는 하나님의 창고와 하나님의 집인 성전(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양식이 되며, 그것으로 레위인(영적 목사, 복음사역자) 포함, 객(나그네)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신명기14:28-29말씀 참조)


십일조와 헌물로 구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자세는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어야 하고 그 재물을 사용하는 자 또한 주님 앞에서 잘 사용하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오시는 그날 악하고 게으런 종이라 책망받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넘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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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죄를 짓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용서하지마라! / 찰스 스펄전

 

 


(삼하18:31)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압살롬을 피하여 다윗 왕과 그 신하들은 황급히 도망하였고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만일 쉴 틈을 주지 않고 그 뒤를 추격하자는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되었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손에 거의 틀림없이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셨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의 거짓계략을 택한 것입니다.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하여,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요나단(동명이인)과 아히마아스를 보내어 다윗에게 빨리 피하라고 기별을 합니다. 다윗에게로 가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측에 발각되어 바후림의 어떤 사람 집에 들어가 우물 속에 숨었을 때 그 집 여인이 우물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 두 사람이 들키지 않게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 왕에게 후새의 전갈이 전달되고 다윗왕 일행은 급히 요단강을 건너 도망합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숨 막히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다윗일행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였을 때 거기에서는 암몬족속 사람들이 먹을 것을 풍성하게 가지고 와서 다윗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기운을 차리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을 위기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력을 회복하고 전열을 정비한 다윗과 백성들은 뒤쫓아 온 압살롬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윗을 성에 머물게 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전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출전하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아니, 지금 다윗이 압살롬 생각할 때입니까?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꼴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부하들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격려를 해 주어야 할 텐데 다윗은 오히려 왕권을 찬탈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반역자요 원수가 된 아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를 패배시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그의 자랑인 긴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상수리나무에 매달리고 맙니다. 요압의 부하는 다윗의 부탁대로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그런데 요압은 작은 창 세 개를 들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그 부하들은 에워싸고 압살롬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승전을 한 다윗의 군사들은 다윗의 통곡 때문에 풀이 죽고 마음이 슬퍼서 슬금슬금 죄지은 사람들 같이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다윗은 얼굴을 감싸 안고 계속 슬피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 모양을 보다 못 한 요압이 다윗에게 따집니다. “왕이시어, 우리가 몽땅 죽고 압살롬이 이겼어야 하는 겁니까? 백성들 앞에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그제야 다윗은 마음을 추스르고 백성들 앞에 나섭니다.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왕의 통곡.....,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며 참 슬프고도 착잡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윗은 패역한 아들,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압살롬마져 사랑하여 그 죽음 앞에 통곡하였는데, 이 모습을 어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창에 가슴을 찔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그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나타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에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고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원수 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품안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셔야 했던 그 아픔과 그 고통이 하나님이라고 왜 없었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죄인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의 눈에서 어찌 피눈물이 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 순간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고통과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 사랑과 기쁨이 범벅이 되어 또한 하나님의 가슴을 얼마나 헤집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통곡을 들으며 백성들은 민망하여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죄인들을 부르시며 통곡하는 음성을 듣는다면 어찌 더욱 민망하고 죄송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압살롬을 위하여 우는 다윗왕의 통곡을 들으며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세상의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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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 먹어보려다가 다 박살냈네 아공 어쩌지..으흑~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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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공 엄마가 도배안하고 우리가 하도록 두다니..ㅠ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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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헐~~ㅋㅋ 보기만해도 징그럽고 무시한뎅..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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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아기 자알 봅시다요..ㅋㅋ방인줄 아나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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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다..ㅋㅋ 오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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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공..죽을뻔했네 앙앙..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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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무서워 어어어~~

ㅋㅋㅋ 모두 우습죠..아슬..아기 엄마들 안전사고 조심하세요.ㅋㅋ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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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Taking Up Our Crosses)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24)

 

예수님은 "십자가를 만들라" 또는
"십자가를 구하라" 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지지 않으면 안될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만들거나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감당할 만큼 튼튼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그 십자가를 들어올려서
우리의 십자가로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공부를 못할 수도 있고, 불구일 수도 있으며,
우울증을 앓고 있을 수도 있으며,
가족들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을 수도 있으며,
폭력이나 학대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으며,
부인할 수도 있으며, 또한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십자가를 들어올려서,
그것을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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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Ⅰ)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Ⅵ벌콥의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에 나온 요약 내용입니다.

714P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1. 고려되야 할 용어

2. 이 용어들의 의미

중생에는 두가지 요소, 즉 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principie)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나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적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

 

마드---벌코프의 글을 계속살피겠지만 전자를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말합니다.

 

715페이지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 여기서 재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전자= 생명의 발생임 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새 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후자=bearing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구절입니다.

 

다시 위의 글의 가져오면서 글을 써내려 갑니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 < 라마드--- 반복되는 내용이 있지만 >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시키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울 포괄적으로 사용했다.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도르트 신조도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그 다음에 벌코프의 말이 의미 심장하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포괄적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이러한 포괄적 사용은 종종 혼동을 초래하고 매우 필요한 구분들을 무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중생과 회심이 동일시 되는 반면, 회심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협력하지만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선언된다.중생과 칭의의 구분은 명백해졌지만,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점차 필수적이고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 라마드: 여기를 보면 벌코프는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 신조와 벨기에 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좁은 의미로 중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어서 벌코프의 글을 씁니다.

투레틴은 두 종류의 회심을 구분한다. 첫번째는 습관적인 또는 수동적인 회심으로서, 영혼의 성향 혹은 습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는 중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실제적 또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여기서 나온 습관이나 성향이 신앙고 회개에서 능동적이되는 것이다.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벌코프의 중생에 대한 주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시말해서 벌코프는 재발생과 새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과 중생은 구분하자는 것입니다.중생을 단지 영혼안에서의 새생명의 주입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한는 것으로 제한 한 것이라고 봅니다.

 

 

C. 중생의 본질

 

1. 그릇된 견해들

(1)

(2)

(3)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지않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제가 알기론 피터 마스터스는 회심을 중생에 포함시키는데 벌코프는 그 반대입니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벌코프는 중생을 회심과 구별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즉각적 변화라 말하고 있군요.

 

중생을 즉각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①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 인간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이다.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구원의 순서가 오늘날처럼 완전히 전개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벌코프가 하는 말은 과거의 중생에 대한 부족했던 부분을 을 언급하고 있는 말입니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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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외적 부르심에 대한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2. 내적 부르심의 특성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

(1) 17세기 신학에서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이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아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심과 중생이 인과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적 부르심까지도 포함하는 일반적 부르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죄인의 삶에서 은혜의 사역의 발단을 지칭하기 위해 중생보다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광법위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사역간읜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그리고 부르심이라는 용어가 사도 시대에 성행한 것은 선교적 시대에 교회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그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력한 부르심으로서 의식 생활 가운데서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벌코프가 앞문장을 이야기 하고 자하는 이유는 다음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야한다.

===> 여기까지의 글을 보자면 중생과 칭의 그리고 효과적 부르심을 17세기의 신학에서는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는 군요. 그렇지만 벌코프는 구별하자는 이야기구요.따라서 중생에 대하여 칼빈의 글과 루터의 글, 도르트신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웻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벌코프의 중생의 의미는 다른 겁니다. 아니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명확한 의미에서는 벌코프는구별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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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터가 벌코프가 이야기하는 핵심이라고 보여지는 군요.

 

(2)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3)부르심과 중생의 관련순서

===>우리가 다음의 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 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볼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가 심기어 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 이것이 벌코프가 말하고자하는 중생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④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안에 탄생괸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한다. 새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새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라마드: 여기서 보면 벌코프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과 넓은 의미에에서 중생의 사역의 완성,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인데 여기가 벌코프가 논하는 핵심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한다.

새 생명은 종종

유아기들이 복음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생성되게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생활하며 그들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한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마드: 마지막 부분을 보면 즉시, 모두 동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이것은 의미 심장한 부분입니다.

벌코프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와 시간간격이 없는 경우를 두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군요.

 

벌코프의 글을 읽은 부분에 대한 벌코프 글에 관한 저의 결론(견해)입니다.^^

중생을 넓은 의미로 다룬 것은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신조와 벨기에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중생을 좁은 의미로 구별해서 사용했다.(벌코프의 글에서 유추)

그리고 벌코프도 좁은 의미로 사용했다.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까지적용한다해도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시간간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중생을 논하더라도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





    아래로 향한 움직임 (Downward Mobility)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위로 향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고들 여러가지 방법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 각광을 받는 것, 새 기록을 수립하는 것 등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우리들을 신문의 제1면 기사로 실리게 하며, 그리고 우리들에게 돈과 명성의 대가를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의 길은 이와는 현저히 다릅니다 그 길은 위로 향해 가는 길이 아니고, 아래로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밑바닥까지 내려가며, 무대 뒤에 머물고, 말석(末席)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길은 선택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그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며,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며,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의 관계를 모르면서 율법과 은혜를 논하는 성경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빠져 율법폐기주의를 성경 진리라 여기는 분들이 늘어가는 이런
시대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귀한 글을 이렇게 올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계시의 점진성을 고려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유기적, 통전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특히
율법처럼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서로 나뉘어 기록된 경우에는
율법의 본질이 바로 생사화복, 선악을 명시 규정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법,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믿는 자들을 의로
교훈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기초위에 율법의 양면을 통시하여야
성경적으로 균형잡히고 바른 율법관을 정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성교단과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신학이론은 율법 폐지론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율법 완성론이고 기성교단과 교회에서
수용하는 신학주의는,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율법주의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오만방자하게 율법 폐지와 무용론을 주장하는 율법폐기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진리(하나님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 율법성취주의(롬 3),율법을 법있게
쓰는 율법선용주의 (딤전1),곧 하나님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 순종주의입니다(신 30).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기에 율법을 지킬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난 의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명하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성령의 뜻을 좇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좇아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서 세울수 있는 법이지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빛의 자녀들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치고 돕고 인도하는 진리의 영이 바로
성령이고 하나님의 자녀 곧 빛의 자녀들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아 교훈하는 책이 바로 신구약으로 완전온전케 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성경의 목적이 기록된 딤후3장 참조)

율법의 근본은 하나님 사랑이고(신 6) 율법의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명하는 계명이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폐하거나 금하는 법은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계시와 교훈은 하나님을 믿으니 율법과
선지서에 예언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고 율법이 명하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행위에 의지하지 말고 믿음에
의지하여 좇아 의의 법에 이르라는 교훈이고 그리스도의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없이 하거나 헛되게 하는 법이 아니라 완전케 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말씀이 구약의 말씀을 완전케 하였듯)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 10:16>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롬 2>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딤전 1:8>

율법(성문화된 율법이 없는 자들에겐 양심법)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있는 법이고 사람은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전 12/롬 2/고후5)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아래
곧 믿음의 법(은혜법,복음법 곧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그 영혼이 해방되어
죄의 주관을 받지 아니하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 신령한 복이 있기에 정죄심판에서
벗어나 저마다 일한대로 받는 상급심판이 적용되는 것입니다(고전 3)

성경에서 율법이 있다는 것은 율법 준행의무와 율법에 따른 심판이 있다는 의미로
(롬,약 참조)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육신에 있고 행위에 속하여 율법의 저주아래,
죄와 사망 아래 죄의 종으로 매였다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영에 있고(롬 8:9) 믿음에 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의와 생명의 주관을 받으며 의을 성취할 의 종으로 매여 있다는 의미로
구분되어 기록되었으니 성경적으로 구분되어 기록된 것을 구분하여 성경말씀으로
성경이 해석되게 하지 않으면,율법에 대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여도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함이듯 법의 제정자요 해석자요 변역자요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 아래서 율법의 형벌을 다 받으시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신 것임.

모세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계명의 법입니다. 모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고 믿음의 주, 속죄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요,율법 외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계명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있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령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굳게 성취되도록,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모세율법이 믿음의 때가 되어 육신으로
오신 믿음의 주 곧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완전케 되어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언약하신 복음의
말씀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분리됨
없이 또 차별없이 믿음에서 난 의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가운데 굳게 세워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약성도에게 주어져
있듯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믿음 법)이 함께 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법으로 신약 성도에게 주어져 있음을 인지하여야 왜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기나 육신으로는 마음이
원치 않는, 율법이 아닌 불법 곧 죄의 법을 섬긴다라고 하였는지,
왜 신약성도인 바울이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고전 9:21> 라고 하고
though I am not free from God's law but am under Christ's law
being not without law to God, but under the law to Christ
though not being without the law of God but under the law of Christ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하였는지
Do we, then, nullify the law by this faith? Not at all! Rather, we uphold the law.
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왜 신약성도를 요한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 설명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서로 연결됨을 깨닫게
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Then the dragon was enraged at the woman and went off to
make war against the rest of her offspring -- those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hold to the testimony of Jesus.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

This calls for patient endurance on the part of the saints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remain faithful to Jesus

율법에 대한 성경의 점진적 계시를 적용하고 유기적 통전적으로
해석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론과 연결되게 성경적인 율법관을
설파하는 신앙의 선배들 예를 들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나 아멘넷에서
오랫동안 바른 글들로 유익을 더하고 넷상에서 다양한 신학적인 질문에
성경적인 답변을 해오신 박신 목사님 같은 분들의 주장에는 귀를 닫고

믿음에 의지하여 좇으면 의와 생명의 법이 되고 행위에 의지하여 좇으면
죄와 사망의 법이 되는 율법의 양면성,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기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성도의 상태를 통시하지
못하고

성경이 율법이 있는 것(준행의무 있음)과 율법 아래 있는 것(죄와 사망의 저주
아래 있음), 율법주의(은혜에서 떨어지는 주의)와 율법성취선용주의
(은혜 아래서 믿음으로 행하는 주의)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도,

그 이유를 간과하고 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을 오해하고 성경말씀과 함께 가지 못하는 율법관을 설파하는 거짓
성경교사들의 주장에 귀를 열면

마치 기존의 정통교단과 교회가 미처 깨닫지 못한 영적지식을
새로이 깨달은 것 마냥 기독사이트를 돌며 복음진리를 호도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을 하는 그릇된 열심을 보이며 각 사이트에서
율법 논쟁을 촉발하고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소란케 하게 됩니다.

은혜를 언급하여도 행위에 속한 율법 준수를 구원의 전제 또는
궁극적 조건으로 삼으면 결국 교회가 경계해야 할 율법주의이듯
그리스도의 율법을 언급하여도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
폐지나 율법무관,무용성을 복음의 전제 또는 궁극적 내용으로
삼으면 결국 교회가 경계해야 할 율법폐기주의라는 사실을 알아야
율법에 대한 양대 오류에서 벗어나 성경적으로 균형잡히고 바른
율법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을지라도 은혜로 받는 구원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으니 전형적인 율법주의는 아니다 또는
모세 율법 폐지나 무관,무용성을 주장하고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말하고 있으니 전형적인 율법폐기주의가 아니다
라는 식은 결국 성경에서 벗어난 반쪽짜리 불완전한 이론에 대한
비성경적인 궤변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으니 구약의 모세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고
율법은 구약 성도와는 관계가 있을지라도 신약성도와는 상관없으며
신약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분들은 하나님의
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모르고 그 뜻과 명령도 모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계시에 무지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유대인에게 먼저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폐하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새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언약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온 세상 각 족속 나라에 주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굳게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모세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이고 그렇기에 모세율법이 기록된 구약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율법이
기록된 신약의 말씀이 함께 하여 온전한 성경으로 신약성도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계시와 교훈은 바로 신약성도에게 바로
그것을 교훈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

성경 말씀을 통해 성경에 기록된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연약하고 무익하고
아무것도 완전케 못하는 계명의 율법이란 것이 무엇인지,그것이 폐해진 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 것이 세워지는 율법의 변역을 통해 율법이 완전케 되었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로마서의 믿음으로 율법을 폐할 수 없고 도리어 굳게
세운다는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자가 된다는 말씀은
율법의 계명 하나만 어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율법적 원리를 통해 율법적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교훈하기 위한 구절임이 그 전후 문맥을 통해 분명해지는데

그 구절을 오해하여 도출한 율법 단일체론으로 율법은 단일체라 일부만 폐하거나
일부만 적용시킬 수 없으니 전부 폐하거나 적용시키려면 전부 적용시켜야 한다고
하는 율법폐기주의자들은 성경이 율법의 제사직분을 분리하여 페할 것 폐하고
새로 세울 것 새로 세우는 율법 변역과 율법 재해석을 통해 강화시켜 완전케
하였음을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이 율법중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규례로 정하여
이방인 성도들에게 지키게 하였다는 사실이나 바울이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하고 디도에게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한 사실들을 두고도 율법은
단일체론 운운하며 율법적 할례를 받게 하였으니 또 폐해진 율법의 규정
일부를 지키게 하였으니 은혜에서 떨어져 율법 아래로 돌아가게 한 것이라고
할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과 구원의 복을
누리며 살았던(롬 4:1-12) 구약 유대인 성도가 여호와의 율법 (the law of the LORD)
을 즐거워하고 섬기며 성취하며 찬양하였듯 (시편 1편 ,시편 32편,시편 119편,합2)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과 구원의
복을 누리며 사는 신약 성도도 유대인 이방인 가릴 것 없이 함께 하나님의 법
(the law of God)을 즐거워하고 섬기며 찬양하고 살 수 있습니다(롬 7).

하박국과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구원원리가 다르지 않음을,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예표된
복음의 법, 은혜의 법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성취되어 나타난
것임을, 바울이 구약 말씀을 통해 그 서신서에서 기록하여 설명하고 있고
또한 복음의 법 은혜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어느 언약안에서건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기록하여
교훈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난 의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폐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율법 폐함을 정당화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핑계하는 이론과 주의가 있다면 바로
그런 이론이나 주의가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와 함께 다른 복음을
전하고 복음진리를 호도하는 이론 주의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에게로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가 어떻게 율법에 자유하게 되었고 율법의 무엇에 자유하게 되었는지
(롬 6),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여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옮겨지게 된
자들, 행위에 속하여 율법의 저주아래 있다가 해방되어 믿음에 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옮겨지게 된 자들, 곧 육신에 있지 않고 행위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하나님께 종이 되고 의의 종된 자들에게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의 뜻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통해 교훈하고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율법아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율법완성-
성취선용론인지 아니면 은혜와 그리스도로 율법을 핑계하여 믿음으로
율법폐지-무용폐기론인지 성경 말씀으로 검증해 보기를 율법 폐지
무용을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으로 기운 분들에게 제안해 봅니다.

By: 이정숙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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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에
영롱한 이슬을 만들고

새벽별 두 눈에 가득 채우면
따뜻한 당신의 미소는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하루를 걷는 아침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

늘 부족하고
채워질 수 없는 가슴에

당신 심장에 내가 있고 내 심장에

붉게 불든 꽃잎 되어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랑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세상 속에서
배운게 없었고 등지고 돌아서는
무서움을 알게 되었지만

당신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동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

늘 욕심 많은 날이지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이 만큼만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

당신 안에서
살아 숨을 쉬는 동안

더 이상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당신이 곁에 있어


고마운 하루에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조금은 비워두며 살겠습니다
.


- 좋은 글 中에서 -

 


 

매혹적 음성,

중국의 여가수 '테레사 텐'이

4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기 전에 부른 노래

월량대표 아적심- 등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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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신의 활동(活動)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댜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단10:10-14;계16:13-16).

2)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수행에 이용되기도 한다(삼상16:14;고후12:7).

3)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고 사단의 권위를 확장하려 한다(엡6:11,12).

4) 인간(마4;24)과 동물(막5:13)을 사로잡아 병들게 한다(미9:33;눅13:11,16;행10:38).

5)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게 그릇된 교리를 유포한다(딤전4:1).

6) 복음을 방해하며(행13:10), 믿지 못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한다(마13:19).

7) 죄 짓도록 올무를 놓는다(딤전3:7;창3:4,5).

8) 의심과 불신앙이 일게 하고(창3:4,5), 분쟁이 있게 한다(고전3:1-3).

9)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전10:20).

10) 점을 치게 한다(행16:16).

11) 어떤 귀신은 감금을 당했으나(벧후2:4;유1:6), 어떤 귀신은 매이지 않고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

12) 귀신들은 광야나 황무지에 산다고 여겼으며, '아사셀'(레16:8,10)을 대표격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김기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2.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시된 성구에서 밑줄 그은 말이 이유의 근거입니다.)

 

 

1)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음부에 갇혀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하22:6]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왕상2:9]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찌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시9: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시31:1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시55:15]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찌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잠7: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눅16:22]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 불신자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눅16:30,31]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불신자로 죽은 자의 영혼은 이 땅에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눅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4) 불신자로 죽은 자는 심판 때에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5)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영혼이라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16:13,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불신자의 사후 영혼이 귀신이라면 용의 입에서 나오며, 마지막 날 하나님과의 전쟁을 위하여 세상 임금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없습니다.

 

 

6) 김기동은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감기약과 페니실린 등의 약보다 능력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귀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눅13:11]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마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막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따라서 감기동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요, 무속 신앙에서 나온 사상으로 오직 신자를 미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목사님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Ⅰ)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 마틴 로이드 존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
(마 5:17,18)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시는가? 이 질문은 너무나 놀라운 것으로 우리를 경배와 숭배로 이끕니다. 주님은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정확한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하셨습니다(갈 4:4).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나셨다는 성육신에 관한 중요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율법 위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을 지키셔야만 했던 분으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 만큼 분명하게 거룩한 율법의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특성을 보여 주신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으면 이 개념이 얼마나 완전하게 참된 것인가를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셨는가를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설명해 주셔서, 계속해서 율법을 확증하시고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주장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때에 '아무도 자신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 없으며 자신에 대해 어떤 고소도 할 수 없다' 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고소를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 앞에서 그분을 고발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충분히 성취하신 삶을 사셨고 완전하게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어떠한 작은 항목도, 일 점 일 획도, 범하거나 성취하는데 실패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탄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에서 율법 아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전(全) 믿음의 중심인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묻게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거듭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복음주의의 본질은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참된 교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순전히 감상적인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꾸짖으셨던, 이른 바 십자가의 비극을 생각하며 슬피 울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우리에게 일종의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전(全) 목적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안에서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오직 율법의 관점에서만 이해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며, 율법이 선고하는 판결은 사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필히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죄의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죽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께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형벌을 따로 따로 두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그분께서 법령으로 정하신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로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과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여러분과 제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형벌이 그같이 죽음으로(역자주:그리스도의 죽음)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있는 거룩하며 흠없고 점없는 자신의 아들의 몸으로 죄를 처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율법의 성취라는 엄밀한 관점에서 십자가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위의 죽음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가장 이상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곧 죄로 인한 형벌을 친히 자기 안에 와 자기 위에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예표를 성취하신 것을 봅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어 보십시오. 태운 헌물과 희생물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장막과 성전 의식과 희생단과 씻는 물두멍 등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상세한 말씀들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린 빵(shewbread)과 대제사장과 기구(vessel)와 기타 이 모든 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들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최종적으로 성취되어질 것들의 그림자요, 예표요, 대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실로 이 예표들 하나 하나를 문자적으로 성취하시고 수행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혹자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세부사항을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행하신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예표와 그림자의 완전무결한 성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시며, 주님은 헌물(offering)이시며, 주님은 희생물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하늘에 드리심으로 의식법의 전 항목을 그분 안에서 성취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주님께서는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자신을 하늘에 드리심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께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2-4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논거(論據)입니다.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이것이 왜 주님께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약하여 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죄 때문에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는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친히 율법을 성취하신 방법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5 장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의(義)를 성취하십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성취해야 합니다. 둘은 함께 역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과 율법으로 사는 권능을 주십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께 대적이 됨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같은 로마서 8 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우리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율법에 복종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복종합니다.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십시오.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
께서는 위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새언약을 맺고자 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이같으니, 내 법을 너희의 생각과 마음에 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 법을 너희 밖에 있는 돌판에 쓰지 않고 육체의 마음 판에 쓰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8장에서 다룹니다. 그는 8 장에서 새 언약, 곧 새로운 관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율법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성취하는데 열심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림으로 이 모든 것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대언자들에 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대언자들의 대언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취되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율법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여드린 바와 같이 의식법(儀式法)에 관해서는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삶에서 의식법을 준수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준수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의식법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의 확증으로, 후에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고, 마지막으로 성전과 성전에 속한 것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단이시며, 희생물이시며, 씻는 물두멍이시며, 향이시며, 그밖에 모든 것 되심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레위기의 율법 조항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나의 태운 헌물이요, 나의 희생물이요,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내게 적용되고 있으며, 내가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실현된 것을 보며,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법에 관한 입장입니다.

시민법은 어떻습니까? 시민법은 본래 특별히 하나님의 신정국(神政國)으로서 그 당시 특별한 상황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신정국가(神政國家)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사역의 말기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왕국을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21:43의 말씀으로, 대언과 관련하여 전(全) 성경에서 가장 중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10 에서 새로운 민족이 교회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정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민법 역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덕법이 남았습니다. 도덕법과 관련한 입장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기서 영원하고 영구한 것,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항상 존속해야 하는 관계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첫째가는 큰 명령이라고 칭하신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명령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단지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도 역시 이스라엘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옛 의식법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영원한 상태요, 그분께 대한 우리의 영구한 관계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 신약성경에 의해 해석된 바와 같이 - 지금까지 존속해 왔듯이 지금도 존속하고 있으며, 시간의 끝까지 그리고 우리가 완전하게 될 때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사도는 서신서를 읽는이들에게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죄는 여전히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상기시켰습니다. 요한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여전히 율법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율법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비록 내가 유대인이 아니었을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죄를 범할 때 나는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현재 입장입니다.

미래에 관하여 저는 단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궁극적으로 왕국이 온 땅에 미칠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말하는 돌이 온 세계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금 진행중이며, 마침내는 성취될 것입니다. 율법과 대언자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완전히 실행될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린 자는 궁극적으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결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뉘우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죽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그들에게 내려질 선고는 "저주 받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그와 같이 정죄하는 것은 율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모든 점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시된 것을 이용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義)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 아래 거할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필히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행위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 장이 논증하는 전부입니다.

구원은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생활의 규칙으로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에 관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가지려 하며, 율법을 은혜에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은혜와 반대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 언약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은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그리고 홀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가 지금 너희에게 율법을 준다. 너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의 참 특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죄의 심히 죄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이 주어진 후 430 년 후에 온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로와 질 수 없다는 점과 우리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속에 많은 대언과 많은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은혜로 충만하여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과 관련한 모든 희생물과 의식(儀式)도 역시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계획된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태운 헌물과 의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그러한 것들은 단지 유대인과 다른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비교종교의 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이교도 의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약 복음을 실지로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예식과 의식은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너는 삼가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만들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율법에 관한 이러한 모든 관점들이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율법에 관한 거짓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은혜에 관하여 거짓된 견해를 갖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위 도덕율폐기론(Antinomianism)으로서, 죄악되고 게으르며 나태한 형태의 영적 삶을 살기 위하여 은혜의 교리를 남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행하든 나는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 안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은혜에 관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거짓 견해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단지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점은 우리가 자주 이 점에서 거룩에 관한 거짓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성화(sanctification)를 받아야 할 체험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소위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인 체험을 경험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하며, 그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셨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를 열망합니다. "나의 명령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로 반드시 율법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며 이 율법을 지키기를 열망케 하는 이 새 마음과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19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이 명령 중 하나를 어기고 또 그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것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삼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영존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 장에서 주님은 이를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주님, 주님, 하고 말하는 자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요?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십계명과 도덕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정결케 하사 선한 일들에 열심인 특유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디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의가 성경기록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에 라도 너희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주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려운 것이였고, 동시에 영광스러운 진리에 관여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율법과 대언자를 보고, 이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며, 율법에 관한 보다 깊은 견해를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관점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 위에서 집행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처형하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속죄의 대속 교리는 그가 율법을 완전히 실행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친히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모든 예표는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대언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을 거스려 율법을 깨뜨리고 있는 우리 비참한 반역자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 [곧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 놀라운 감정이나 체험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며, 모든 점에서 그분을 닮은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로] -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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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이철 목사, "성경적인 믿음과 삶 자체가 영적전쟁"
2012년 09월 08일 (토) 17:59:05 정이철 ( 메일보내기 )

사탄이 하는 일을 분별해야 하는데 힘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속으로 위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고 착각하고 더 열정을 쏟는다. 기도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미 찬양의 영역에 사탄의 장난이 들어온 것처럼, 기도의 영역에도 사탄의 교묘한 미혹이 역사하고 있다. 요즘 새로 나온 특별한 기도에서 그런 일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사실은 사탄에게 속아서 이상한 믿음으로 변질된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요즘 나타나는 이상한 기도들을 살펴보자.

하나님과 직통하는 중보기도

중보기도로 하나님과 직통한다는 기도 사상은 요설이다. 이제 그 누구도 하나님과 기도로 직접 대화 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보기도나 은사는 없다. 그러므로 국가나 지상 교회의 중대사를 하나님과 대화하며 논의하는 중보기도의 자리로 나간다는 사람은 이상스런 사람들이다. 그러한 일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었다. 모세와 다니엘과 같은 자들은 선지자이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중보자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중대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리로 나갔다. 중보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작정이 변경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도 꼼짝없이 따라야 할 정도로 힘 있고 위대한 기도를 그들이 했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삶과 신앙이 그 정도로 강하고 위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역할과 사명이 장차 오실 참 선지자이며,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시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중보를 예행하게 하신 것이었다.

중보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고, 중보자이신 그가 우리와 세세토록 함께 하시니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의 행복과 구원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직통하면서 교회와 다른 사람들의 장래사를 하나님과 논하는 중보의 자리로 나가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기어이 사기극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실제로 지금 어디에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중보기도 학교들과 중보기도 세미나들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들 속에 그런 것들이 많았다. 이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현상도 나타난다. 사탄이 그 사람들을 속이는 체험을 주기 때문에 자신들이 중보기도로 뭔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신(성령)이 임하도록 선택 받은 선지자들과 지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멀리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입은 우리는 다르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기도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의 특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지성소의 법궤에서 나오셔서 우리의 몸과 교회를 성전(고전 3:16) 삼으셨다. 구약 백성들은 멀리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기도했었고, 그러한 기도에도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직접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 앞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더 잘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는가. 이것이 신약 성도의 기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전에서 기도한다고 하여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장래를 조종하고 결정하는 중보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 존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겸손하고, 진지하고, 간절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응답의 유무는 영원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경건하게 가꾸어도 엘리야 같이 기도할 수는 없고, 아무리 신실하게 가꾸어도 모세 같이 기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 시대에 미리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불완전한 인간 중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신디 제이콥스라는 미국 여자 분이 하나님과 직통하는 중보기도에 매우 능하다고 소문나 있다. 어떤 분이 그녀를 이렇게 허무맹랑하게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신디 제이콥스는 여교사이자 중보기도자로 부르심을 받아 세게 여러 나라에 중보기도 특공대를 이끌고 있는 중보기도자의 용사이다. 그녀의 기도는 성령의 이끌림으로 기적적이며, 때로는 큰 대회를 앞두고는 사탄과 직접 대면하여 기도로 싸우기도 한다. 기도 중에 손을 들거나 적을 쳐부수는 동작을 상징적으로 취하기도 하며 깊은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기도하기도 한다. 그녀의 기도에 세계가 달려있기도 하고 그녀의 기도에 하나님의 대회가 달려있기도 하다.”

신디 제이콥스라는 미국 여자가 이렇게 알려지게 된 것은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대단하게 믿게 만드는 그럴싸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도록 꾸미고 장난하는 큰 귀신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신앙으로는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 다니고 있다. 신사도운동 집회에서 사람들에게 악한 영의 장난이 일어나 술 취한 듯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혀가 풀려서 웅얼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음의 영상을 보자. 이 영상의 말미에 IHOP의 집회의 강단에 서 있는 신디 제이콥스도 보인다. 그녀가 귀신의 영에 취하여 몸을 바르게 가누지 못하고 말도 뚜렷하게 못하고 웅얼거리고 있다. 그녀가 하는 말은 토론토 쪽에서 활동하는 신사도운동과 마이크 비클의 IHOP과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의 신사도운동 그룹이 하나로 뭉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예언하는 내용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직통하는 중보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귀신의 장난이라는 것이다.


사탄을 직접 결박하는 중보기도

사탄을 직접 결박한다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요란을 떨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귀신들에게 기도로 직접 가격하고 결박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직접 귀신들에게 접근하여 타격을 가하는 형태의 기도이다. 주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시행된다.

“…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은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결박될지어다)!”

이런 기도를 시행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귀신의 정체와 성향을 명료하게 드러내려고 애쓴다. 나무꾼이 더 효과적으로 나무를 찍기 위해 도끼의 날을 세우듯이 기도의 날을 세우고서 사탄을 직접 타격하려는 태세이다. 그들은 귀신을 공격하는 기도를 할 때에 반드시 그 귀신들의 특성과 행동거지를 요약하여 끄집어내면서 한다.

“음란을 조장하는”,
“장기간 가난과 독재로 지배하는”,
“공산주의로 통치하는”,
“동성애, 낙태, 맘몬주의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러한 기도를 대중화시킨 사람은 퓰러신학교의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였다. 그는 미군이 첨단장비들을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것처럼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쟁을 시작할 때, 워싱턴 펜타곤에 있는 미군의 수뇌부는 첨단위성을 가동하여 상대국의 핵심 군사시설물들의 위치와 그 주요 기능을 미리 파악한다. 이것이 피터 와그너에게는 ‘영적도해’(spiritual mapping)라는 개념을 발전되었다.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탄의 중요 거점과 그 성향과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다.

개전 초기에 미군은 이미 파악된 적국의 중요 군사시설을 레이더에 나타나지도 않는 스텔스 폭격기와 크루즈 미사일과 같은 초정밀 폭격 장비들을 동원하여 정밀한 외과수술처럼 정확하게 타격하여 적국을 제압한다. 이것이 피터 와그너에게서는 ‘Smart Bomb Prayer’(정밀폭격기도)로 발전되었다. 지배하는 귀신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재래식 폭탄을 엄청나게 쏟아 붓는 과거의 전쟁방식이 아니라 미군의 정밀폭격처럼 악한 영들의 정체를 딱 꼬집어 내면서 그 자리를 콕 찌르듯이 기도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후세인의 군대가 많은 스커드 미사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미군을 이기지 못한 것은 후세인의 구형 미사일의 정밀성이 미군의 신형 정밀 폭탄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은 피터 와그너의 말이다.

“우리는 사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아주 많은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마트폭탄기도’(Smart Bomb Prayer)이다.” C. Peter Wagner,「영적 전투를 통한 교회성장」(나겸일 역)(서울: 서로사랑, 1997), p.263.

적의 중요 군사시설이 파괴되면 마지막으로 미군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된 보병이 적국에 진입하여 싸움을 마무리한다. 이것이 피터 와그너에게서 귀신이 지배하고 있는 땅을 직접 밟으면서 기도로 귀신들에게 직접 타격하는 기도의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소위 ‘땅 밟기 기도’(Walking Prayer)라고 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땅을 밟는 기도를 몇 가지고 세분화하였다.

속으로는 귀신을 대적하지만 겉으로는 평화롭게 노래하면서 걸어가는 모양새를 취하는 ‘찬양행진’(Prayer March), 자신들의 사는 주변의 거리를 표시나지 않게 걸으면서 그 지역의 귀신들을 타격하는 ‘거리기도’(Prayer Walks), 먼 곳에 있는 사탄의 근거지를 격파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다녀오는 ‘원정기도’(Prayer Expeditions), 그리고 매우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사탄의 핵심적인 근거지를 타격하는 가장 고난도의 싸움인 ‘기도여행’(Prayer Journeys) 등으로 세분화하였다.

성경적인 믿음과 삶 자체가 영적전쟁

이 모든 것들은 기도로 직접 사탄을 결박함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선교지에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의 이런 사상은 어디서 유래하였을까? 한국의 김기동의 베뢰아 신학이라고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때 김기동의 교회에 있었던 분의 증언에 의하면, 피터 와그너는 80년대에 김기동의 교회를 수차례 방문하였고, 베뢰아 귀신론을 배웠다. 이후 자신의 책에도 성락교회를 떠오르는 대표적인 제 3의 물결교회로 소개했으며, 자신의 제자 존 번 교수에게 ‘김기동 교회성장학과’(Southwest Baptist University)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 정도로 베뢰아 신학의 ‘귀신퇴치 = 하나님 나라 회복’이라는 그릇된 사상이 피터 와그너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유통금지로 항목으로 처리된 것이 피터 와그너라는 유명한 신학자에 의해 ‘영적도해’, ‘기도폭탄’, ‘땅 밟기 기도’라는 형태로 더 발전되어 미국에서 먼저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시 역수입되어 한국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왜 이들의 영적전쟁 개념이 성경적이지 못한가? 성경은 영적전쟁이 수행되는 방식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성도의 영적전쟁의 본질이 얼마나 하나님과 바르게 연합되는가의 문제라고 가르친다. 복음으로 병든 인간이 회복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귀신과의 게임은 절로 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귀신 잡는 해병대’를 칭찬하시지도 않고 그렇게 훈련되라고도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순종하고 섬기라고 하실 뿐이다. 그러면 귀신도 맥없이 떠난다.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되었을 때 사탄은 인간을 철저히 지배하였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의 사슬이 깨어졌다. 그의 권세의 기반이 되는 정죄의 효력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사탄의 종에서 순식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인 이변이 일어났다. 이것 자체가 최대의 영적전쟁이었다. 판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우리가 과연 무슨 노력을 하여 흑암의 대왕 사탄에게서 벗어났는가?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뿐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이다. 그랬더니 마귀의 사슬과 저주가 깨어지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영적전쟁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행복을 즐거이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바르게 살면 그것이 온다. 그러므로 예수를 성경적으로 잘 믿는 것이 영적전쟁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너무나도 협소하고 조잡하게 변형시킨다. ‘귀신 추방’이 영적전쟁이라고 오도한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초딩’들의 이해이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순종하고 바르게 믿어 하나님과 화평한 지경에 이르고,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날마다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면 은혜와 행복이 따라온다. 이것을 잘해 나가는 전 과정이 성도의 영적전쟁인 것이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의 육신과 기질과 이성은 부패한 상태이고 죄성이 가득하다. 그래서 도무지 하나님의 가이드와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를 못하고, 하나님이 이미 주신 안전과 행복조차도 계속 유지하지 못한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다스려주심과 인도하심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실존이고, 모든 기독교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바르게 살 수 있다. 사탄은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죄로 유혹하여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사탄과의 긴장 상태를 죽을 때까지 끌고 가게 되는데, 이것이 성도의 영적전쟁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밖으로 나가 사탄이 어둠의 권세에 눌리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절박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이지 않아야 은혜를 지키고, 사탄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우리더러 쉬지 말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낙망치 말고,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수 없이 강조했다.

중보기도로 사탄을 직접 결박한다는 사상은 비성경적

그러나 중보기도로 사탄을 결박한다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런 주장은 복음의 원리와 구조를 왜곡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미 불건전한 경계해야 할 자들로 공표되었다. 기도가 사탄을 직접 대적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치시는 내용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 성도의 기도가 사탄을 결박하고, 귀신들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직접적인 무기라고 하신 내용이 없다. 기도에 관한 모든 성경의 말씀들은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해지고 강건해지고 성령충만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결과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전쟁의 유리한 자리를 항상 점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든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도우심이 임하여 자신들과 교회와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삶이 강건하게 되기를 비는 내용이다.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3~19).”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 은혜를 더욱 충만하게 입어 복음을 더 깊이 깨달아 알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는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뜻과 도우심을 간구하는 수단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기도로서 하나님께 도우심과 은혜를 간구하셨지 사탄을 결박하는 기도를 하시지 않았다. 기도와는 별도로 그러한 권능을 행하셨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3~17).”

그러므로 참새를 쫓아다니면서 새 총 쏘는 애들처럼 부흥과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귀신을 물리치는 기도를 쏘고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은 그릇되었다. 언제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일 뿐이다. 성도가 하나님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사탄을 직접 타격하는 무기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과 행복을 방해하는 귀신을 결박하여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합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서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기꺼이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가 사도들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직접 명령하고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전하는 새로운 계시와 새 복음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였음을 보여 사람들이 믿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이적행하는 권능을 주셨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이미 드러난 계시를 믿고 따를 뿐이니 그 점에 크게 다르다.

여하간 어떠한 경우에도 기도가 사탄을 결박하고 타격하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오해하게 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언제나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도가 직접 사탄을 타격하여 부흥과 변화를 일으킨다는 이해는 바르지 않다. 혹시 그러한 사상이 결부되어 있지는 않나 우려되는 기도운동을 소개한다. ‘여리고기도운동’이라고 하는 기도운동이 워싱턴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2005년부터 은상기 목사님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도운동인데, 일반 기도와 다른 특징은 매주 토요일 새벽에 워싱턴 DC에 소재하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미국의 정치, 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는 7개의 중요 장소에서 각각 기도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그 중에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도하는 팀의 모습니다.

이 기도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사탄을 결박한다는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명확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중요한 장소를 찾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전부 미신적이거나 나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특정한 곳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탄의 영들을 결박한다는 믿음이 있어 보인다.

첫째,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장소 앞에서 매번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그곳에 임하여 미국의 장래를 복되게 하는 중요한 결정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을 타락시키기 위해 그곳에서 악하게 장난하는 사탄의 영들을 결박하겠다는 의도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청소년들과 가정의 회복을 위해, 홈리스들을 위해, 지역의 교회들과 주일 예배를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신문에 나온 것을 보니 기도에 관한 귀한 면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기도로 직접 악령들을 결박한다는 발상이 섞여 있다면 그것 때문에 위험스러운 기도운동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항상 동일하게 듣고 응답하시는 분이므로, 반드시 국회의사당 같은 중요시설 앞에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도 기도에 대한 오해를 유발할 소지가 높다.

둘째, 지난 7년간 이 기도운동을 이끌었던 은상기 목사님의 뒤를 이어 이성자 목사님이 이 기도운동의 리더가 되었다는 것도 이 기도운동의 신학적인 성향을 의심하게 만든다. 인터네셔날갈보리교회의 이성자 목사는 미국의 한인교회들 속에서 신사도운동을 전개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신사도운동가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 그 지역에 그릇된 영향을 미친다는 원성이 생기기고 했고, 자신도 뉴욕의 신사도운동 교회인 사랑과진리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신사도운동가들은 직접 사탄을 결박하는 중보기도를 매우 중요한 사역으로 간주한다. 이성자 목사도 김종필 목사가 이스라엘 회복과 부흥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을 제압하기 위해 시행한 유대 광야지역 땅밟기기도(Prayer Walk)에 동참했었다. 이성자 목사가 이 기도운동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도로 직접 사탄을 결박한다는 사상이 그곳과 무관하게 보이지 않게 한다.

신앙이 변질된 사람들에 의해 크게 일어난 중보기도운동

신디 제이콥스는 하나님과 직통으로 대화하는 중보기도를 뿐 아니라 사탄과 직접 싸우는 중보기도도 잘하는 모양이다. 1992년에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에 관한 많은 영향을 미친 <방패 기도>라는 책을 썼다. 중보기도에 관한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 책이다. 그때에는 나도 분별하지 못하고 읽었었다. 그 책의 38-39페이지를 보면 존이라는 사람의 사역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제인이라는 여성이 새벽 2시에 사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잠을 깼다는 내용이 나온다. 피터 와그너는 존이라는 사역자를 죽이기 전에 먼저 그의 중보자 제인을 사탄이 공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너무 힘든 싸움이어서 제인은 천사들과 다른 중보자들의 도움을 절규하면서 요청했다. 그때 한 천사가 방으로 들어서면서 흑암의 세력이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인에게 또 다른 중보자 신디 제이콥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디 제이콥스는 제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젯밤 2시 경에 당신의 방에서 엄청난 흑암의 세력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어요. 그 세력이 물러갈 때까지 중보기도로 당신과 함께 싸웠답니다.”

너무나도 그럴싸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신디 제이콥스는 어떻게 멀리 떨어진 제인에게 귀신이 찾아간 것을 알았을까? 정말 중보기도의 은사와 용사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다 귀신에게 미혹되고 귀신의 장난의 도구가 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생 허물어지는 소리들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매우 많다. 그 중의 하나는 신디 제이콥스가 IHOP의 어떤 집회에서 귀신의 기운에 포로가 되어 휘청거리고 웅얼거리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었음을 보여주는 앞에서 본 영상이다. 정상인들에게는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적인 성도들의 눈에는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 무당이 되거나 미혹의 영에 포로가 되어야 귀신이 잘 보이고 천사가 자주 보인다. 신디 제이콥스와 중보기도 잘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다.

1992년에 중보기도라는 비성경적인 사상을 크게 선전한 책을 쓴 피터 와그너도 이미 귀신의 역사에 미혹되어 있었다. 1982년에 빈야드운동을 일으켰던 존 윔버(John Wimber)가 플러신학교의 세계선교학교(School of World Mission)에서 ‘기사와 이적과 교회성장’(Signs, Wonders and Church Growth)라는 과목을 강의하였다. 피터 와그너도 그 수업을 이끄는 공동강의자였으나 실질적으로 강의를 이끌었던 사람은 존 윔버였다. 존 윔버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배우는 것이 그 수업의 내용이었다. 세계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한 빈야드운동을 목회자들에게 가르치는 최초의 신학교 강의였던 것이다. 피터 와그너도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의 자리에 앉아서 존 윔버의 강의를 들었다. 그때부터 피터 와그너의 인생과 신앙이 급속히 변하기 시작했다.

존 윔버의 강의는 실습과 함께 병행되었다. 자주 치유와 이적을 일으키기 위한 기도회가 진행되었고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성령의 역사(?)가 강의실에서 일어났다. 빈야드 운동의 대표적인 특징인 성령의 기름부으심(anointing)과 그것을 사람이 사람에게 전이하는 임파테이션 현상을 실습하였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탐구해야 할 신학교의 강의실에서 귀신 장난이 연구되고 실습되었던 것이다. 피터 와그너도 존 윔버에서 몇 차례 기도(임파테이션)를 받았다.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말로 포장된 가장 더러운 저주가 피터 와그너에게도 1982년 존 윔버의 수업 시간에 임했다. 다음은 그 수업시간의 존 윔버에게 기도, 즉 임파테이션을 받았을 때의 경험을 피터 와그너가 자신의 책 「제 3의 바람」에다 기술한 내용이다.

“굉장한 느낌의 평화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완전히 맥이 풀려 이러다가 강의실 바닥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나는 존 윔버가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생방송하듯이 설명하는 소리를 들었다. ‘성령께서 와그너 박사에게 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에게 임한 성령을 보실 수 있습니까?’ 아마 나는 5분정도 거기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존 윔버가 나에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당신에게 사역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약을 중지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며칠 후에 나는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나의 혈압이 낮아진 데 대해서 놀랐고, 나는 그 동안 나에게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었다. 주의 깊게 듣고 난 그는 ‘거참 재미있군요. 보통 그런 일은 최면 상태에서 일어나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점차 투약량을 줄여 주었고, 몇 달 후 나는 약을 완전히 끊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나의 세계관에 종지부를 찍었다. 처음에는 회의론자에서 시작된 세계관 변화표는 방관자가 되었다가 결국 참여자가 되기로 결심함으로 끝이 난 것이었다. 나는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역을 배워나갔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지 않았지만 용기를 갖고 치유사역을 계속하니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었다. 곧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일상사가 되었다.” (피터 와그너,<제 3의 바람>, 정운교 역 서울: 하늘기획, 1993, p.52.)
)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몸의 기운이 빠지는 현상은 신사도운동가들이 일으키는 가장 대표적인 마력이다. 최면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피터 와그너의 말을 들은 의사도 그 현상이 최면과 같다고 했다. 최면을 일으키는 사람이 손을 대거나 가까이 대화를 거는 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쓰러지거나 의식을 잃고 주거 않거나 눕는다. 그리고 심하면 낄낄거리거나, 웃고, 울고, 구르고, 괴이한 소리(방언?), 그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등의 현상도 나타난다. 그리고 우울증이나 질병이 떠나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현상을 일으켜주는 능력이 나타나기도 한다.

정말 기가 막히는 사실은 힌두교의 영성수련에서 이와 동일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먼저 쿤달리니 각성이 일어난 구루가 다른 수련자들의 이마 등의 신체부위를 터치하면 그 사람에게서도 쿤달리니 각성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후 또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일을 일으키는 구루가 된다. 신사도운동가들과 힌두교의 구루들이 역할이 일치하고, 구루들과 신사도운동가들에게 기도를 받거나 접촉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일치한다. 그리고 그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일치한다. 신사도운동가들의 기름부으심과 임파테이션이라는 것과 힌두교의 쿤달리니 현상은 너무나도 유사하다.

존 윔버에게서 기도를 받을 때 피터 와그너에게 몽롱해지는 최면 현상이 나타났고, 이후 피터 와그너에게 짝다리를 잘 교정하는 이적이 생겨났다. 피터 와그너의 유명세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더러워졌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다.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서 더러운 영향을 받았고, 어떤 한국 목사는 수업 중에 그에게서 기도를 받고 짝 다리가 치유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짝 다리를 교정하는 능력이 나타났다. 그도 이후 치유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에게서 짝다리가 교정된 경험을 한 사람을 나도 만났다.

피터 와그너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그런 더러운 능력이 전이되었는지, 그리고 그 신학생들과 지도자들을 통하여 또 얼마나 많은 교인들에게 사탄의 더러운 능력이 들어갔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의 기운에 많이 감염된 교인들이 우리와 함께 섞여 사는 괴로운 시대를 살게 되었다. 만일 어떤 목사를 처음 만나면 그에게 귀신의 기운이 있는지 조심스레 살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중보기도로 사탄을 직접 결박하고 타격할 수 있다면서 소통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귀신의 역사가 많이 실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속았고, 남들도 속이고, 복음의 진리까지 훼손하는 것이다. 사탄을 직접 결박하는 거짓된 중보기도 운동을 일으킨 피터 와그너가 이미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다음의 영상을 보라. 지난 2008년에 피터 와그너가 중심이 되어서 타드 밴틀리라는 사람을 사도로 안수하는 위임식의 장면이다. 맨 처음에 피터 와그너가 등장하여 개회순서를 인도하였고, 그 다음에 다른 거짓 사도 채 안이 나와서 타드 밴틀리에게 안수하여 넘어뜨렸다. 그리고 채 안의 스태이시 캠블이라는 여성을 소개하면서 축사 형식으로 예언하게 하였다. 그 여성의 모습을 보면 흉측한 귀신이 그녀에게서 장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사탄의 장난이었다. 이날 사도로 위임 받은 타드 밴틀리도 불과 수 개 월 후에 또 다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 번개같이 몰락했다. 교회의 복음을 더럽히는 이런 가증한 사탄의 장난의 중심축이 피터 와그너였다.


직접 영계로 들어가는 중보기도

중보기도를 부지런히 하면서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서 또 하나의 새로운 트랜드가 생겨나고 있다. 그것은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듯이 중보기도로 영계를 여행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중보기도가 우주선과 같다. 우주인들이 그것을 타고서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것처럼, 중보기도라는 비행접시를 타고서 육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넘나들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우스운 기도인데, 이것이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럴싸하다.

오래전부터 선지자학교, 사도학교, 중보기도학교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교인들을 특별하게 훈련시키는 큰믿음교회(변승우)라는 곳이 서울에 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키다가 소속했던 예장 백석교단으로 담임목사에게 ‘제명출교’(2009년 94회 총회)라는 한국교회 100년사에서 처음 보는 가혹한 징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에 다른 주요 6개 교단이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계속 논란이 이어지더니 금년(2012년) 7월에 또 다시 그 목사가 졸업한 신학교를 운영하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교단)’ 마저도 소속 교회들과 교직자들에게 일체 교류하지 말도록 결정하여 공표하였다.

다음의 영상은 바로 그 교회의 지도자가 성도들을 인도하며 중보기도하는 모습이다. 사고를 당하여 중환자실에 있는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 내막이 너무나도 흥미롭다. 중보기도 비행접시를 몰고 영계로 직접 들어가서 예수의 생명의 능력을 풀어놓고 나오는 중보기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정도의 능력 있는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 저 교회는 대체 어떤 교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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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은 분들이 간증하는 것처럼, 중환자실이 닫혀져 있지만 영안에서는 그곳에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으로 바로 가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생명의 주님이 역사할 수 있도록 풀어 놓을 수 있습니다. 두 형제님을 위해서 합심하여 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중환자실로 들어가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이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주님! 이 시간에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영의 생명을 가지고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간 자연적인 영역에서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중환자실로 들어갑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에 피가 고여 있고 췌장이 찢어진 그곳에 우리가 들어갑니다. 우리 형제들에게 손을 얹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뼈들은 붙을지어다! 폐에 고인 피는 빠질지어다!’ ”

이러한 기도를 하는 분들은 당연히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그의 영이 이동하여 그 속에 숨어있는 가증한 우상들과 그것들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 성경의 내용(겔 8:1~18)을 근거로 들고자 할 것이다. 지금도 특별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능력을 풀어놓고 나오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정말로 어이없는 이야기이고 너무나도 유치하고 황당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할 수는 없을지라도 중보기도를 잘하는 누군가는 백악관의 회의실로 들어갈 수도 있고,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의 집으로도 들어갈 수도 있고, 교회를 해롭게 하는 악인의 몸속으로도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가서 능력이나 권능을 풀어버리고, 예수의 생기를 몰고 가서 복 돋아 주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영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특별계시와 관련되었다. 그들은 계시를 받고 전하는 특별한 일과 관련된 사람들로서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교회의 설립과 성경기록과 관련된 일부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경의 완성으로 특별계시는 완성되고 종료되었다.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살아있는 말씀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의 시대이다. 성령의 조명은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에 이끌리어 영계를 넘나들거나 어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공간을 이동하는 일은 결국 직통계시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어떤 곳으로 이동하여 무엇을 보았다며 예언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귀신의 역사를 따르는 거짓 예언자들로 판명된다. 거짓 예언자 오워가 성령으로 공간을 이동하여 미국 동부해안에 밀려오는 쓰나미를 보았다며 예언하는 영상을 보자.

영으로 직접 중환자실로 찾아가서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예수의 생명의 능력을 풀어놓고 온다면서 중보기를 하는 모습은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올바른 기도를 하려면 먼저 기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이 직접 영으로, 또는 어떤 영적인 기운으로, 그리고 천사를 대신 보내는 방식으로 공간을 이동하여 직접 무슨 일을 하게하는 중보기도는 기독교에 없다. 그런 것을 중보기도라고 한다면 속히 무당기도라고 이름부터 바꾸어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러한 일을 하신다. 천사도, 생명의 능력도, 치유의 권능도 모조리 예수님께만 속하고, 오직 그의 주권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간절히 간구할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할 수밖에 없고, 기도를 바르게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저절로 겸손하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공간을 이동하여 예수의 능력을 풀어놓고 돌아온다는 중보기도는 기독교의 옷을 입고 등장한 무당의 방술이다. 그들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위해 멀리서 사술을 행하고 잘 되게 해 달라고 돈을 받으면 먼 곳에서도 잘 되게 하는 주술을 행한다. 귀신에게 미혹된 사람들을 통해 바로 그런 무속의 사술이 중보기도라는 옷을 입고 들어온 것이다



출처: 미주뉴스엔죠이/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950

 


 


    영적인 용기(Spiritual Courage)

    용기는 위험을 수반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그랜드 캐년에서 뛰어내리는 행위,

    작은 원통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는 행위,

    뉴욕의 세계 무역 쎈터 (World Trade Center) 건물

    양쪽에 매어 놓은 줄 위로 걷는 행위,

    또는 노젓는 배를 타고 망망 대해를 건너겠다고 나서는

    행위는 모두 용기 있는 행위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모한 행동들은

    그 어느 것도 우리 인간의 중심부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두

    우리의 신체적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함으로써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으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적인 용기는 이러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명성과 인기를 잃어버릴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서 솟아나오는 소망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용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현세의 생명이라도 버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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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결혼할때 부모 모시는 여자 택하지 말아라
너는 엄마랑 살고 싶겠지만
엄마는 이제 너를 벗어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단다

 

엄마한테 효도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말아라
네 효도는 너 잘사는 걸로 족하거늘....

네 아내가 엄마 흉을 보거든
네 속상한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걸 엄마한테 옮기지말아라
엄마도 사람인데 알고 기분 좋겠느냐
모르는게 약이란걸 백번 곱 씹고
엄마한테 옮기지 말아라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널 배고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바쳤거늘
널 위해선 당장 죽어도 서운한게 없겠거늘,,,
네 아내는 그렇지 않다는걸 조금은 이해하거라
너도 네 장모를 위해서 네 엄마만� 아니지 않겠니

아들아
혹시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거든 조금은 보태주거라
널 위해 평생 바친 엄마이지 않느냐
그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독거 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는데 자식인 네가 돌보지 않는다면
어미는 얼마나 서럽겠느냐
널 위해 희생했다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은 들지 않겠니?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름만 불러도 눈물 아렷한 아들아 
딸랑이 흔들면 까르르 웃던 내 아들아
가슴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내 아들아
그런데 네 여동생 그 애도 언젠가 시집을 가겠지
그러면 네 아내와 같은 위치가 되지 않겠니?
항상 네 아내를 네 여동생과 비교해보거라
네 여동생이 힘들면 네 아내도 힘든거란다

내 아들아

내 피눈물같은 내 아들아
내 행복이 네 행복이 아니라 네 행복이 내 행복이거늘
혹여 나 때문에 너희 가정에 해가 되거든 나를 잊어다오
그건 에미의 모정이란다
너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인데
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들 아깝지 않으리
물론 서운하겠지 힘들겠지 그러나 죽음보다 힘들랴 

너의 에미 애비도 부족하게 살면서 힘들게 산 인생이다
그러니 너희 힘든거 너희들이 헤쳐가다오
다소 늙은 어미 애비가 너희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건 살아오면서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삶의 시간이란걸
너희도 좀 이해해다오

아들아
우리가 원하는건 너희의 행복이란다 
내가 널 온전히 길러 목숨마저 아깝지 않듯이
너도 네 자식 온전히 길러 사랑을 느끼고

행복하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지 않을 정도에서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작자미상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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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목사가 버릴 수 없는 3가지가 있다.

 

1. 사명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버리는 순간이, 목사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다.

너무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분명하다.

 

2. 신분

목사라는 신분을 벗어버리기란 쉽지 않다. 또한 그 신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장사를 하기도,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배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신분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유일한 밥벌이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3. 가족

가족도 버릴 수가 없다.

목회 현장이 아무리 힘들고, 진리에서 어긋나고, 부정과 불법이 난무해도

처자식 때문에 울며울며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

작금의 한국교회에서는 사명도, 신분도 가족 앞에서는 우선이라 말하기 쉽지 않다.

독자를 제단에 바치는 아브라함같은 신앙을 설교하면서도

내 자식을 사지로 내몰기는 쉽지 않다.

 

친구들이 찾아와 꾸짖기도 하고, 충고하기도 한다.

이렇게.....

 

부목사는

때론 불의한 명령 앞에서도 굽신해야 한다.

참고 참아서 훗날 강단에 서는 날,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목사인 아빠가 거짓말하지 않는 줄 안다.

아이들은 목사인 아빠가 불의와 타협하고

살아남기 위해 물질과 타협하고,

자식들을 위해 비굴을 참으며 사는 줄

모르고 있다.

 

가족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안길 수가 없어서

비겁해지고, 나약해지고, 눈치보면서

물질적 유혹에 손이 흔들리고,

정치적 협상에 마음을 팔고,

살아남기 위해 배신도 서슴치 않음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서 한 없이 벗어났어도

내 자식들을 거리의 제물로 바칠 수 없어서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울면서 가기도 한다.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만 헌신하여야 한다는

원초적 다짐은

목회 현장에서 한장의 검은 재로 변해버린다.

 

담임목사의 종, 담임목사의 노예,

담임목사의 가면이 되어 살아간다.

 

그분이 부당해도 정당하다고 해야 한다.

그분이 틀렸어도 맞다고 해야 한다.

그분의 말은 곧 법이요,

그분의 법은 곧 실행되어야 한다.

그분보다 잘 해도 안 되고,

그분보다 잘 나도 안 된다.

그분보다 은혜를 많이 끼쳐도 안 되고,

그분보다 실력에 뛰어나도 안 된다.

그분보다 인기가 있어도 안 되고,

그분보다 영향력을 끼쳐서도 안 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대로 했다간 큰일난다.

부목사에게는 담임목사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하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한다. 

 

목사는 설교로 살고 죽어야 한다는 말대로 했다간 큰일난다.

설교는 수준이 낮고 형편없어서 담임목사보다 못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야 한다.

 

목사는 기도로 살고, 뛰어난 영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대로 했다간 큰일난다.

종처럼 기도하고, 영감으로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는 이제부터는 장로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고,

적당히 인간적이면서,

적당히 눈 감아 줄 줄 알고,

쉽게 가는 방법도 알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만 둔다는 말도 쉽게 해서는 안된다.

 

모리아산에는

진짜 예수를 못 박고

진리를 묶어놓고

가족들 손 잡고 내려오면 된다.

 

예수만 바라고 살다간 큰일 난다.

인맥을 늘리며 살 줄 알아야 한다.

신앙심으로 살다간 큰일 난다.

가장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라고 친구들은 말한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

 

원래

예수가 걸인이었던 것처럼,

걸인으로 사는 게 목사의 삶이 아닌가?

원래

예수가 옳은 선택으로도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죽기위해 사는 게 목사의 삶이 아닌가?

원래

예수가 성전을 등지고, 광야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거리에서 장사를 해도 길이 아닌 곳을 걷지 않는 게 목사의 삶이 아닌가?

 

주님이 함께 걸어오신 길이 아닐까봐

나는 그게 두려울 뿐이다.

 

.....................................

100년 만에 내린 엄동설한에

아이들 손 잡고 거리로 나온 후

그때부터 두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하는 아들 녀석을 보며......


출처: 창골산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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