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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다(Coming Home)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이국으로 가 버린 작은 아들과
집에 남아 자기의 의무를 다 한 큰아들입니다
작은아들은 술과 여자에 빠져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큰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이 맡은 모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느라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두 아들은 잃어버린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 대하여 슬퍼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서 자신이 원했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내키지 않는 복종은 둘 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작은아들을 닮았던지, 혹은 큰아들을 닮았던지,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안에서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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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8:21-32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와 그 십일조를
받아서 다시 십일조를 내는 레위인들의 십일조를 다루고 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얻는 생활수단으로서의
소득과 기업인만큼 중요한 것이다.(21:24,28)
그러나 이 십일조 제도는 단순히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기업과 삶의 주인이심을 택한 백성들에게 알리며 ,백성들로
하여금 주 하나님을 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제도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1.기원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중 1/10을 준데서 시작된다.(창 14:17-20) 그 후
야곱도 소득의 1/10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창 28:2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과 역사가 깊은 십일조를
출애굽 당시에 다시 언급하시고 구체적으로 설명,제도화 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배려는 이 제도의 기원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기 위한 조치였다(말 3:7-12)
2.성경의 기록
모세 율법 가운데에서 십일조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은 레 27:30-33,
민 18:21-32, 신 12:6-12.신 14:22-29등에 나온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취하는 모든 산물, 즉 곡물,과일,가축 등에서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해야 함을 밝혔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있다.(대하31:5,느10:37-39;12:44;13:12,
말3:10,마 23:23,눅 11:42)
3.종류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세가지로 구분된다.
가.제 일의 십일조(민 18:21-24)-성전에서 봉사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일반백성들이 소출의 1/10을 바치는 것
나.제 이의 십일조(신 14:23-27)- 성전에 가져가서 잔치용으로 사용
(돈으로 바꾸어 가져갈 수 있고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살 수 있게
허용)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성도간의 교제와 관련지어짐
제 삼의 십일조 ( 신 14:28-29,신 26:12-13)- 안식년을 기준하여
제 3년과 6년에는 제 이의 십일조로 잔치를 하지 않고 각
성에서 모아 가난한 자와 고아 그리고 과부를 돕는 구제비로
사용, 용도만 다를 뿐 제 이의 십일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님
이때 책임자는 이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거짓없이 사용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해야 되었다.(신 26:13-15)
4. 유대인들의 헌금 정도
유대인들은 여기 언급된 십일조 외에도 첫열매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바쳤으며 일명 ‘큰 예물’이라고 하는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양털 가운데 일부를 제사장에게 주었다
(신 18:4-5)
히브리인의 주석인 미쉬나에 의하면 소득의 1/40-1/60 정도로
바쳤다고 한다.
한편 제일의 십일조는 큰 예물을 제외한 나머지 양의 1/10 ,
그리고 제 이의 십일조와 제 삼의 십일조는 또한 앞의 헌물을
제외한 것의 1/10이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은 성막건축 등
특별한 목적으로 바치는 예물(출 35:20-29)과 제사 제물을
제외하고도 소득의 20% 이상에 이른다.
5. 십일조의 영적의미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댓가성 물질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며 인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그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고 베풀어주신 물질에 감사하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자발적으로 드리는 올바른 신앙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 후 스스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인간에게 시간과 물질의 일부를 특별히
구별하여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칠일 가운데 하루를 바치는
안식일이 시간에 대한 기준이요 의무조항이라면, 소득의
십의 일을 바치는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기준이요 의무
조항이다. 그러나 이는 7일 가운데 하루만 혹은 소득의
1/10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율법의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따라서 이러한 규례의
올바른 준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법으로 정하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침은 모든 시간과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청지기에 불과함(마 25:14-30)을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올바른 십일조 헌물관을 정립하여 청지기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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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더 예쁜 꽃은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당신의 순수한 눈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두서없이 늘어놓는 내 푸념을 끝까지 들어주는
당신의 예쁜 귀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홀로 외로워하는 내게 다가와 노래를 불러주는
당신의 고운 목소리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떨어진 내 꿈들을 희망으로 보듬어주는
당신의 깨끗한 손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비바람에 쓰러질까 늘 바람막아주는
당신의 다정한 발걸음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지친 내 몸을 조용히 일으켜 감싸주는
당신의 포근한 가슴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이 순간에도 교차하고 있는
당신과 나의 사랑입니다.
꽃은 순간적 향기로 유혹을 하지만
우리의 변함없는 사랑!
꽃보다 더 예쁜 사랑향기는
감동으로 못다 핀 영혼까지 눈물짓게 합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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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에 어디에 레위인이 목사라고 나왔습니까? 레위인은 레위인입니다.” 십일조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로 사용되어지면 안되고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구제비로만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도에게 드리는 답변이기에, 한 분에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혹시 같은 생각을 품고 계신 분이 계실까?하여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모든 믿는 자)들의 보혜사 되시며 우리들의 스승이되신 성령님께서(요한복음14:26절 말씀 참조) 친히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변론이 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나눔(Share)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이곳에 올립니다.
먼저, 우리(성도)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은 아래의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 문자적 해석 (Literally)
2. 영적 해석 (spiritually)
1) 구원론:
반드시 문자적(liter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에 구세주로 믿어야 구원함을 얻는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외에 여러 곳) 것은 불변의 진리요, 따라서 그 어떤 다른 해석도 주석도 필요가 없습니다. 고로, 필자는 여기서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인 구원론이나 문자적 해석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성경말씀에 영적 해석이 왜 필요하며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십일조의 사용도에 관해서 잠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축복론
영적인(spiritually)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성경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봅시다. 갈라디아서 3:6-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3:29절 말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엔 문자적 (literally)인 해석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예,이런 경우엔 영적 (spiritually)해석이 필요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결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해석으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3) 하나님의 집
마가복음11:16-17절 말씀에 “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하신 것을 문자적 해석이라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러니까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킴입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영적 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집은 천국이란 해석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만 성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으로서의 하나님의 집, 그러면 그곳은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곧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 교회와 공동체 교회, 연합한 모든 교회를 지칭합니다. 기능은 다르나 주의 성령을 모신 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본론:
자, 이런 맥락에서 십일조와 레위인에 대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키3:10절 말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허기야, 십일조폐지론 자들은 이 부분도 다른 이단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도, 뒤틀고 왜곡시켜 입맛대로 바꾸고 있지만...ㅋㅋ)
1. 십일조를 드려야만 하는 이유,
2. 십일조를 받는 대상.
3. 십일조를 내는 목적.
4. 십일조를 드리는 장소.
여기에서 1번에서 2번까지는 우리 모두(성도들) 잘 아는 사실이라 재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같고, 제 3번과 제 4번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과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3.십일조를 드리는 목적:
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에 양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말 3: 10절 하반절)
그렇다면,
4.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장소가 분명 어딥니까?
예, 그것 역시 ‘나의 집’(말3:10하반절), 곧 하나님의 집, 땅 위의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성전이 됩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레위인은 오늘 날 누구인가? 아직도 이스라엘(야곱)의 12아들중 3째의 후손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레위는 분명 야곱의 세째 아들이요, 그들의 후손에 국한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레위인은 상관관계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일부를 걸러내고 믿는 것이며, 갈라디아서3:6-9절, 15-16절은 삭제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과연 현대인, 그리고 이방나라의 사람들로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성도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영적자녀들이라면 그 영적가족들 중에서 레위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며, 이는 그 역활 면에서 구분이 지어질 수가 있습니다. 즉 만인제사장 시대에서 굳이 레위 지파가 비록 영적이라고 하더라도 필요한가? 생각해보면,
구약시대의 레위인은 누구며 그들의 역활은 무엇이었는가? 레위지파는
1. 전적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지파였다.
2. 그들에게는 세상 기업이 없어야만 했다.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했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 (민수기 4:15절, 신명기18:1-2절, 대상15:2절.로만 생활 해야했다.
영적으로 레위인을 오늘날 목사, 교사, 혹은 복음사역자들로 보는 정당한 이유: 목사, 혹은 복음 사역자들은,
1.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있는 자란 점.”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로마서 10장 15절 말씀) 했다.
2. 목사나 복음 사역자들은 세상에 다른 직종을 갖지 말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해야 한다.
4. 반드시 성전에 있는 양식,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해야만 한다.(고전 9장1-18절 말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과 십일조는 하나님의 창고와 하나님의 집인 성전(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양식이 되며, 그것으로 레위인(영적 목사, 복음사역자) 포함, 객(나그네)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신명기14:28-29말씀 참조)
십일조와 헌물로 구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자세는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어야 하고 그 재물을 사용하는 자 또한 주님 앞에서 잘 사용하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오시는 그날 악하고 게으런 종이라 책망받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넘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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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Taking Up Our Crosses)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6:24)
예수님은 "십자가를 만들라" 또는
"십자가를 구하라" 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지지 않으면 안될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만들거나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감당할 만큼 튼튼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그 십자가를 들어올려서
우리의 십자가로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공부를 못할 수도 있고, 불구일 수도 있으며,
우울증을 앓고 있을 수도 있으며,
가족들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을 수도 있으며,
폭력이나 학대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으며,
부인할 수도 있으며, 또한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십자가를 들어올려서,
그것을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File #1 : 0609032haram.wma(1.44 MB), Download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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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Ⅰ)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Ⅰ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Ⅱ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Ⅲ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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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벌콥의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에 나온 요약 내용입니다.
714P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1. 고려되야 할 용어
2. 이 용어들의 의미
중생에는 두가지 요소, 즉 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principie)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나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적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
라마드---벌코프의 글을 계속살피겠지만 전자를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말합니다.
715페이지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 여기서 재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전자= 생명의 발생임 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새 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후자=bearing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구절입니다.
다시 위의 글의 가져오면서 글을 써내려 갑니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 < 라마드--- 반복되는 내용이 있지만 >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시키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울 포괄적으로 사용했다.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도르트 신조도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도 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그 다음에 벌코프의 말이 의미 심장하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포괄적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이러한 포괄적 사용은 종종 혼동을 초래하고 매우 필요한 구분들을 무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중생과 회심이 동일시 되는 반면, 회심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협력하지만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선언된다.중생과 칭의의 구분은 명백해졌지만,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점차 필수적이고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 라마드: 여기를 보면 벌코프는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 신조와 벨기에 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좁은 의미로 중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어서 벌코프의 글을 씁니다.
투레틴은 두 종류의 회심을 구분한다. 첫번째는 습관적인 또는 수동적인 회심으로서, 영혼의 성향 혹은 습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는 중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실제적 또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여기서 나온 습관이나 성향이 신앙고 회개에서 능동적이되는 것이다.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벌코프의 중생에 대한 주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시말해서 벌코프는 재발생과 새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과 중생은 구분하자는 것입니다.중생을 단지 영혼안에서의 새생명의 주입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한는 것으로 제한 한 것이라고 봅니다.
C. 중생의 본질
1. 그릇된 견해들
(1)
(2)
(3)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지않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제가 알기론 피터 마스터스는 회심을 중생에 포함시키는데 벌코프는 그 반대입니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벌코프는 중생을 회심과 구별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즉각적 변화라 말하고 있군요.
중생을 즉각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①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 인간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이다.
②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구원의 순서가 오늘날처럼 완전히 전개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벌코프가 하는 말은 과거의 중생에 대한 부족했던 부분을 을 언급하고 있는 말입니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
D. 외적 부르심에 대한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2. 내적 부르심의 특성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
(1) 17세기 신학에서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이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아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심과 중생이 인과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적 부르심까지도 포함하는 일반적 부르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죄인의 삶에서 은혜의 사역의 발단을 지칭하기 위해 중생보다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광법위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사역간읜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그리고 부르심이라는 용어가 사도 시대에 성행한 것은 선교적 시대에 교회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그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력한 부르심으로서 의식 생활 가운데서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벌코프가 앞문장을 이야기 하고 자하는 이유는 다음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야한다.
===> 여기까지의 글을 보자면 중생과 칭의 그리고 효과적 부르심을 17세기의 신학에서는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는 군요. 그렇지만 벌코프는 구별하자는 이야기구요.따라서 중생에 대하여 칼빈의 글과 루터의 글, 도르트신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웻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벌코프의 중생의 의미는 다른 겁니다. 아니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명확한 의미에서는 벌코프는구별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부터가 벌코프가 이야기하는 핵심이라고 보여지는 군요.
(2)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3)부르심과 중생의 관련순서
===>우리가 다음의 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 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① 논리적으로 볼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②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가 심기어 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 이것이 벌코프가 말하고자하는 중생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③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④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안에 탄생괸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한다. 새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새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라마드: 여기서 보면 벌코프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과 넓은 의미에에서 중생의 사역의 완성,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인데 여기가 벌코프가 논하는 핵심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한다.
새 생명은 종종
유아기들이 복음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생성되게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생활하며 그들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은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한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마드: 마지막 부분을 보면 즉시, 모두 동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이것은 의미 심장한 부분입니다.
벌코프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와 시간간격이 없는 경우를 두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군요.
벌코프의 글을 읽은 부분에 대한 벌코프 글에 관한 저의 결론(견해)입니다.^^
중생을 넓은 의미로 다룬 것은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신조와 벨기에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중생을 좁은 의미로 구별해서 사용했다.(벌코프의 글에서 유추)
그리고 벌코프도 좁은 의미로 사용했다.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까지적용한다해도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와 시간간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중생을 논하더라도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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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에
영롱한 이슬을 만들고
새벽별 두 눈에 가득 채우면
따뜻한 당신의 미소는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하루를 걷는 아침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늘 부족하고
채워질 수 없는 가슴에
당신 심장에 내가 있고 내 심장에
붉게 불든 꽃잎 되어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랑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
매혹적 음성,
중국의 여가수 '테레사 텐'이
42세의 젊은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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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량대표 아적심- 등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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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신의 활동(活動)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댜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단10:10-14;계16:13-16).
2)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수행에 이용되기도 한다(삼상16:14;고후12:7).
3)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고 사단의 권위를 확장하려 한다(엡6:11,12).
4) 인간(마4;24)과 동물(막5:13)을 사로잡아 병들게 한다(미9:33;눅13:11,16;행10:38).
5)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게 그릇된 교리를 유포한다(딤전4:1).
6) 복음을 방해하며(행13:10), 믿지 못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한다(마13:19).
7) 죄 짓도록 올무를 놓는다(딤전3:7;창3:4,5).
8) 의심과 불신앙이 일게 하고(창3:4,5), 분쟁이 있게 한다(고전3:1-3).
9)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전10:20).
10) 점을 치게 한다(행16:16).
11) 어떤 귀신은 감금을 당했으나(벧후2:4;유1:6), 어떤 귀신은 매이지 않고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
12) 귀신들은 광야나 황무지에 산다고 여겼으며, '아사셀'(레16:8,10)을 대표격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김기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2.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시된 성구에서 밑줄 그은 말이 이유의 근거입니다.)
1)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음부에 갇혀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하22:6]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왕상2:9]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찌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시9: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시31:1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시55:15]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찌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잠7: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눅16:22]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 불신자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눅16:30,31]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불신자로 죽은 자의 영혼은 이 땅에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눅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4) 불신자로 죽은 자는 심판 때에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5)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영혼이라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16:13,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불신자의 사후 영혼이 귀신이라면 용의 입에서 나오며, 마지막 날 하나님과의 전쟁을 위하여 세상 임금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없습니다.
6) 김기동은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감기약과 페니실린 등의 약보다 능력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귀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눅13:11]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마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막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따라서 감기동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요, 무속 신앙에서 나온 사상으로 오직 신자를 미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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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Ⅰ)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Ⅰ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Ⅱ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Ⅲ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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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이철 목사, "성경적인 믿음과 삶 자체가 영적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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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하는 일을 분별해야 하는데 힘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속으로 위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고 착각하고 더 열정을 쏟는다. 기도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미 찬양의 영역에 사탄의 장난이 들어온 것처럼, 기도의 영역에도 사탄의 교묘한 미혹이 역사하고 있다. 요즘 새로 나온 특별한 기도에서 그런 일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사실은 사탄에게 속아서 이상한 믿음으로 변질된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요즘 나타나는 이상한 기도들을 살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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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 ♥
아들아
결혼할때 부모 모시는 여자 택하지 말아라
너는 엄마랑 살고 싶겠지만
엄마는 이제 너를 벗어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단다
엄마한테 효도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말아라
네 효도는 너 잘사는 걸로 족하거늘....
네 아내가 엄마 흉을 보거든
네 속상한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걸 엄마한테 옮기지말아라
엄마도 사람인데 알고 기분 좋겠느냐
모르는게 약이란걸 백번 곱 씹고
엄마한테 옮기지 말아라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널 배고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바쳤거늘
널 위해선 당장 죽어도 서운한게 없겠거늘,,,
네 아내는 그렇지 않다는걸 조금은 이해하거라
너도 네 장모를 위해서 네 엄마만� 아니지 않겠니
아들아
혹시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거든 조금은 보태주거라
널 위해 평생 바친 엄마이지 않느냐
그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독거 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는데 자식인 네가 돌보지 않는다면
어미는 얼마나 서럽겠느냐
널 위해 희생했다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은 들지 않겠니?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름만 불러도 눈물 아렷한 아들아
딸랑이 흔들면 까르르 웃던 내 아들아
가슴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내 아들아
그런데 네 여동생 그 애도 언젠가 시집을 가겠지
그러면 네 아내와 같은 위치가 되지 않겠니?
항상 네 아내를 네 여동생과 비교해보거라
네 여동생이 힘들면 네 아내도 힘든거란다
내 아들아
내 피눈물같은 내 아들아
내 행복이 네 행복이 아니라 네 행복이 내 행복이거늘
혹여 나 때문에 너희 가정에 해가 되거든 나를 잊어다오
그건 에미의 모정이란다
너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인데
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들 아깝지 않으리
물론 서운하겠지 힘들겠지 그러나 죽음보다 힘들랴
너의 에미 애비도 부족하게 살면서 힘들게 산 인생이다
그러니 너희 힘든거 너희들이 헤쳐가다오
다소 늙은 어미 애비가 너희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건 살아오면서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삶의 시간이란걸
너희도 좀 이해해다오
아들아
우리가 원하는건 너희의 행복이란다
내가 널 온전히 길러 목숨마저 아깝지 않듯이
너도 네 자식 온전히 길러 사랑을 느끼고
행복하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지 않을 정도에서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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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목사가 버릴 수 없는 3가지가 있다.
1. 사명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버리는 순간이, 목사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다.
너무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분명하다.
2. 신분
목사라는 신분을 벗어버리기란 쉽지 않다. 또한 그 신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장사를 하기도,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배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신분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유일한 밥벌이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3. 가족
가족도 버릴 수가 없다.
목회 현장이 아무리 힘들고, 진리에서 어긋나고, 부정과 불법이 난무해도
처자식 때문에 울며울며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다.
작금의 한국교회에서는 사명도, 신분도 가족 앞에서는 우선이라 말하기 쉽지 않다.
독자를 제단에 바치는 아브라함같은 신앙을 설교하면서도
내 자식을 사지로 내몰기는 쉽지 않다.
친구들이 찾아와 꾸짖기도 하고, 충고하기도 한다.
이렇게.....
부목사는
때론 불의한 명령 앞에서도 굽신해야 한다.
참고 참아서 훗날 강단에 서는 날,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목사인 아빠가 거짓말하지 않는 줄 안다.
아이들은 목사인 아빠가 불의와 타협하고
살아남기 위해 물질과 타협하고,
자식들을 위해 비굴을 참으며 사는 줄
모르고 있다.
가족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안길 수가 없어서
비겁해지고, 나약해지고, 눈치보면서
물질적 유혹에 손이 흔들리고,
정치적 협상에 마음을 팔고,
살아남기 위해 배신도 서슴치 않음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서 한 없이 벗어났어도
내 자식들을 거리의 제물로 바칠 수 없어서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울면서 가기도 한다.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만 헌신하여야 한다는
원초적 다짐은
목회 현장에서 한장의 검은 재로 변해버린다.
담임목사의 종, 담임목사의 노예,
담임목사의 가면이 되어 살아간다.
그분이 부당해도 정당하다고 해야 한다.
그분이 틀렸어도 맞다고 해야 한다.
그분의 말은 곧 법이요,
그분의 법은 곧 실행되어야 한다.
그분보다 잘 해도 안 되고,
그분보다 잘 나도 안 된다.
그분보다 은혜를 많이 끼쳐도 안 되고,
그분보다 실력에 뛰어나도 안 된다.
그분보다 인기가 있어도 안 되고,
그분보다 영향력을 끼쳐서도 안 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대로 했다간 큰일난다.
부목사에게는 담임목사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하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한다.
목사는 설교로 살고 죽어야 한다는 말대로 했다간 큰일난다.
설교는 수준이 낮고 형편없어서 담임목사보다 못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야 한다.
목사는 기도로 살고, 뛰어난 영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대로 했다간 큰일난다.
종처럼 기도하고, 영감으로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는 이제부터는 장로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고,
적당히 인간적이면서,
적당히 눈 감아 줄 줄 알고,
쉽게 가는 방법도 알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만 둔다는 말도 쉽게 해서는 안된다.
모리아산에는
진짜 예수를 못 박고
진리를 묶어놓고
가족들 손 잡고 내려오면 된다.
예수만 바라고 살다간 큰일 난다.
인맥을 늘리며 살 줄 알아야 한다.
신앙심으로 살다간 큰일 난다.
가장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라고 친구들은 말한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
원래
예수가 걸인이었던 것처럼,
걸인으로 사는 게 목사의 삶이 아닌가?
원래
예수가 옳은 선택으로도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죽기위해 사는 게 목사의 삶이 아닌가?
원래
예수가 성전을 등지고, 광야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거리에서 장사를 해도 길이 아닌 곳을 걷지 않는 게 목사의 삶이 아닌가?
주님이 함께 걸어오신 길이 아닐까봐
나는 그게 두려울 뿐이다.
.....................................
100년 만에 내린 엄동설한에
아이들 손 잡고 거리로 나온 후
그때부터 두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하는 아들 녀석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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