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말

(Words That Come From the Heart)

우리 속에서 육신이 되지 않는 말은
'단순한 말' 로 남을 뿐입니다
이러한 말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그러한 의사가 없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선을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해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면,

이 말은 새 생명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의 근원지와 접촉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남을 즐겁게 하는 사람',
즉 단순히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기는 하지만

우리 내면의 생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는 않은 말을 골라서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유혹을 강하게 받습니다

 

우리의 말이 확실히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침묵속에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주 한 분 만이 (God and God Alone)

God and God alone
Created all these things we call our own
From the might to the small
The Glory in them all
Is God's and God's alone
주 한 분 만이 이 모든 세상 창조하셨네
우리 소유로 알던 이 모든 영광이 다 주께 속했네

God and God alone
Reveals the truth of all we call unknown
And all the best and worst of man
Won't change the Master's plan
It's God's and God's alone
주 한 분만이 감춰진 진리 드러내시네
주의 모든 계획은 그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으리

God and God alone
Will be the joy of our eternal home
He will be our one desire
Our hearts will never tire
Of God and God alone
주 한 분만이 영원히 우리 기쁨 되시네
오직 주님 한 분만 사모하는 마음 변할 수 없으리

(Chorus)
God and God alone
Is fit to take the universe's throne
Let everything that lives
Reserves its truest praise
For God and God alone
주 한 분 만이 온 우주의 통치자 되시네
생명있는 모든 것 오직 하나님만 찬양케 하소서


출처: 열매맺는나무 카페

 





    공동체를 창조하는 말
    (Words That Create Community)

    말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말은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하여 말을 할 때면,

    사람들이 이 말을 받아들이고, 또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듣는 사람이 필요하고,

    작가에게는 독자가 필요합니다. 삶으로 나타난 인간 경험,

    즉 육신이 말로 바뀔 때 공동체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가 본 것을 얘기해 줄께.

    와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들어 보렴.

    앉아 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 줄께.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얘기해 줄께. 기다려 줘"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우리의 삶을

    그 사람들의 삶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은 우리 모두를 모이게 하여 공동체 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육신이 말로 바뀔 때, 성령의 사람 다운,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인 집단의 일부분이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Ⅵ벌콥의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에 나온 요약 내용입니다.

714P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1. 고려되야 할 용어

2. 이 용어들의 의미

중생에는 두가지 요소, 즉 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principie)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나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적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

 

마드---벌코프의 글을 계속살피겠지만 전자를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말합니다.

 

715페이지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 여기서 재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전자= 생명의 발생임 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새 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후자=bearing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구절입니다.

 

다시 위의 글의 가져오면서 글을 써내려 갑니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 < 라마드--- 반복되는 내용이 있지만 >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시키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울 포괄적으로 사용했다.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도르트 신조도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그 다음에 벌코프의 말이 의미 심장하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포괄적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이러한 포괄적 사용은 종종 혼동을 초래하고 매우 필요한 구분들을 무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중생과 회심이 동일시 되는 반면, 회심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협력하지만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선언된다.중생과 칭의의 구분은 명백해졌지만,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점차 필수적이고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 라마드: 여기를 보면 벌코프는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 신조와 벨기에 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좁은 의미로 중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어서 벌코프의 글을 씁니다.

투레틴은 두 종류의 회심을 구분한다. 첫번째는 습관적인 또는 수동적인 회심으로서, 영혼의 성향 혹은 습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는 중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실제적 또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여기서 나온 습관이나 성향이 신앙고 회개에서 능동적이되는 것이다.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벌코프의 중생에 대한 주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시말해서 벌코프는 재발생과 새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과 중생은 구분하자는 것입니다.중생을 단지 영혼안에서의 새생명의 주입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한는 것으로 제한 한 것이라고 봅니다.

 

 

C. 중생의 본질

 

1. 그릇된 견해들

(1)

(2)

(3)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지않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제가 알기론 피터 마스터스는 회심을 중생에 포함시키는데 벌코프는 그 반대입니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벌코프는 중생을 회심과 구별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즉각적 변화라 말하고 있군요.

 

중생을 즉각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①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 인간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이다.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구원의 순서가 오늘날처럼 완전히 전개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벌코프가 하는 말은 과거의 중생에 대한 부족했던 부분을 을 언급하고 있는 말입니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

 

D. 외적 부르심에 대한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2. 내적 부르심의 특성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

(1) 17세기 신학에서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이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아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심과 중생이 인과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적 부르심까지도 포함하는 일반적 부르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죄인의 삶에서 은혜의 사역의 발단을 지칭하기 위해 중생보다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광법위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사역간읜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그리고 부르심이라는 용어가 사도 시대에 성행한 것은 선교적 시대에 교회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그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력한 부르심으로서 의식 생활 가운데서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벌코프가 앞문장을 이야기 하고 자하는 이유는 다음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야한다.

===> 여기까지의 글을 보자면 중생과 칭의 그리고 효과적 부르심을 17세기의 신학에서는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는 군요. 그렇지만 벌코프는 구별하자는 이야기구요.따라서 중생에 대하여 칼빈의 글과 루터의 글, 도르트신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웻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벌코프의 중생의 의미는 다른 겁니다. 아니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명확한 의미에서는 벌코프는구별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부터가 벌코프가 이야기하는 핵심이라고 보여지는 군요.

 

(2)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3)부르심과 중생의 관련순서

===>우리가 다음의 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 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볼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가 심기어 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 이것이 벌코프가 말하고자하는 중생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④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안에 탄생괸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한다. 새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새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라마드: 여기서 보면 벌코프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과 넓은 의미에에서 중생의 사역의 완성,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인데 여기가 벌코프가 논하는 핵심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한다.

새 생명은 종종

유아기들이 복음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생성되게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생활하며 그들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한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마드: 마지막 부분을 보면 즉시, 모두 동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이것은 의미 심장한 부분입니다.

벌코프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와 시간간격이 없는 경우를 두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군요.

 

벌코프의 글을 읽은 부분에 대한 벌코프 글에 관한 저의 결론(견해)입니다.^^

중생을 넓은 의미로 다룬 것은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신조와 벨기에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중생을 좁은 의미로 구별해서 사용했다.(벌코프의 글에서 유추)

그리고 벌코프도 좁은 의미로 사용했다.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까지적용한다해도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시간간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중생을 논하더라도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


 

힘들어 하는 당신에게..

 

                                                                                                                              

                                                                                                           
   행복과 불행의 양이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직 슬픔에 젖어 있는 당신에게...

늙기도 전에 꿈을 내던지려고 하는 당신에게
또한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는 진리를
아직 외면하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할 만큼
아직 늙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건 단 한가지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옛 노트에 적어보는 일입니다.

당신이 한때 가졌던
그리고 아직도 당신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로 남아있는
그 꿈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한쪽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쪽 문이 열리지요.
문이 닫혔다고 실망하는 당신에게
다른쪽 문을 찾아보기를 두려워하는당신에게

앙드레지드가 말했습니다.
〃지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들 사이로
영원히 열정을 몰고 가는 자는 행복하여라〃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당신이 이 글의 주인공이기를 원합니다.

삶은 때론 낯설고 이상한 것이긴 하지만.
신은 목적을 갖고 당신을 이곳에 있게 했습니다.

그 목적을 외면 한다면
당신은 외롭고 고립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움을 충분히 실현 할 만큼
당신은 이미 완전한 존재입니다.

당신이 삶을 창조합니다. 
다른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불면의 밤을 헤치고
자기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당신에게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안 당신에게...

창조적이고 평상적인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 좋은글 -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에게 보내는 아침 편지  (0) 2012.09.18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  (2) 2012.09.17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0) 2012.09.10
밑불이 되어주는 사람들  (0) 2012.09.04
'나'와 '우리'의 갈림기  (0) 2012.09.01

[이단성 핵심체크] 이재록(만민중앙교회)
2010년 03월 04일 (목) 08:10:23 정윤석 unique44@paran.com

이재록 씨(70세, 만민중앙교회 담임)는 1943년 전남 무안 출생으로서 7년간 질병으로 고통당하다가 1974년 기도 중에 치료를 받고 교인이 됐다고 한다. 이 씨는 1982년 13명의 신도와 함께 만민중앙교회를 개척, 2010년 현재 10만 신도와 30여개의 지교회를 갖고 있다고 한다.

만민중앙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의 직함은 연합성결신학교 이사장, 민족복음화신문 사장, 기독교세계부흥선교협의회 상임총재, 세계기독방송 네트워크(GCN) 이사장, 세계기독의사 네트워크(WCDN) 이사장이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이스라엘을 비롯, 미국, 일본, 파키스탄, 케냐, 필리핀, 온두라스, 인도, 러시아, 독일, 페루, 우간다 등 세계 각지에서 수십만, 수백만 명이 운집했다는 대형집회를 개최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해마다 5월이면 치유집회를 진행함으로 지병이 있거나 건강에 문제가 있는 신도들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 그림: 만민중앙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이 씨는 <나의 삶 나의 신앙>,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십자가의 도>, <믿음의 분량>, <천국과 지옥> 등 50여 권을 저술했고 이 책들은 영풍문고 등 유명한 서점들의 기독교코너에서 판매가 되고 때론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이 씨는 한국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많은 언론에 신앙칼럼도 기고하고 있다. 이 씨가 담임으로 있는 만민중앙교회에 출석하는 유명인사로는 모 여대 총장 출신인 J씨, 유명 S 댄스그룹의 Y씨 등이 있다.

활발한 대외활동으로 인지도가 높아지는 이 씨지만 한국교계에서는 명확히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장 통합측과 합신측에서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이단으로 규정했고 199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극단적인 신비주의 이단으로 규정했다.

MBC시사고발프로그램인 에서 이재록 씨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하자 만민중앙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국가기간 시설인 방송국의 주조종실을 점거하는 방송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켜 사회의 주목을 끈 바 있다. 이재록 씨의 이단성은 다음과 같다.

1. 이재록 씨는 자신의 몸에 있는 피를 흘려 원죄·자범죄가 사라졌고 죄성이 없는 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씨의 가장 큰 이단성의 핵심은 ‘인죄론’에서 나타난다. 이재록 씨는 1998년 7월 5일 주일 저녁 집회 시간에 자신의 몸에 있는 피를 죄다 흘려 원죄·자범죄가 사라졌고 죄성이 없는 피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 씨 주장을 그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피, 보혈의 피라고 하는 것은 원죄, 자범죄가 전혀 없는 피를 보혈의 피, 이 피만이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것이고 이 피만이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아버지 보좌 좌편에 있을 수 있나요?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수없이 보셨으니까 제가 말할 수 있죠. 또 해, 달 속에, 빛 속에 저와 주님이 함께 있으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이젠 말할 수 있죠. 저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녜요. 이제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이제 말할 수 있죠.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작업이 지금부터 수 년 전에 바로 92년인가요? 피 흘렸을 때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피 흘렸을 때 팔 일 동안 피를 흘리면서 제 부모로부터 받은 피, 제 몸 속에 있는 모든 피는 다 쏟았고 팔 일 동안에 물로 피가 되어서, 물을 마셔 피가 되고 해서 팔일 동안에 그 피를 걸러서 깨끗한 피로 만드셨습니다. 물로 피가 됐으니까 곧 물은 영적인 말씀, 영생이죠. 이 말씀은 하나님, 곧 하나님 말씀으로 내 피를 만드셨기 때문에 이 피안에는 죄성이 없다는 것이죠.

원죄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로 인 쳐지고, 이제 해 달 속에 오셔서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공포하는 것이고, 바로 좌편에 앉을 수 있는 권세를 쥐어 준 것이고 그래서 전에도 배운 말씀을 들어보시면 바로 '죽고 사는 권세를 네게 주었다'는 것이 바로 그런 연유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씨는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1992년도에 부모로부터 받은 피를 몽땅 쏟아버리고 새 피를 받아 원죄와 자범죄가 없어져버렸다고 설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와 자범죄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에 있는 피를 흘려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 10)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죄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해결되는 것(벧전 1:18~19)이다.

2. 이재록 씨는 자신을 신격화한다.
원죄와 자범죄가 없다는 이 씨의 주장은 ‘자기신격화’로 연결된다. 다음 주장을 살펴보자.

“그렇게 흘린 피를 장장 8일 동안 흘리고 있었는데 그 피가 어디서 나옵니까? 물을 마시면 피가 되고, 물을 마시면 피가 돼서 8일 동안 그 상태로 만드시고 다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는데 그리고 나서 저번에 말씀하시는 것 봤는데 ‘너는 그때 피를 흘림으로 네게 원죄가 없어졌고, 그래서 너는 죽음이 너를 피해 가는 것이고, 악한 자가 너를 만지지를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너에게 그래서 무한한 권능이’, 우리 주님이 가지신 무한한 권능이 ‘네게도 주어져서 너도 이제 그렇게, 그 이상으로 그게 역사가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이재록, 1998년 7월 5일 주일저녁예배).

① 자신은 부모로부터 받은 피를 92년도에 몽땅 쏟아버리고 죄성이 없는 새 피를 받아 원죄와 자범죄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며, 그때의 피 흘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은 많은 신도들이 직접 목격한 바라고 한다(1998년 7월 5일 저녁예배, 10월 23일 금요철야집회).
② 그래서 죽음이 자신을 피해 가고, 죽고 사는 권세가 있다고 한다(1998년 7월 5일 저녁예배).
③ 주님이 자신을 해와 달 속에 넣어 세상에 공포해주셨는데, 이는 "너와 나는 하나"라고 주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빛 되신 하나님과 자신이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같이 약속 받은 증거를 각종 빛을 통해 증거해 준 일은 자신 외에 창세 이래 없다고 하며, 자신과 주님이 달 속에서 세계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루는 대화를 했다고 한다(1998년 6월 21일 주일예배, 6월 28일 금요철야집회, 7월 5일 저녁예배, 7월 17일 금요철야집회, 10월 16일 금요철야집회).

④ 자신의 영이 하나님 보좌 좌편에 앉아 있다고 한다(1998년 7월 5일 저녁예배).
⑤ 자신에게는 심판 날에 주님 옆에서 성도들을 위해 직접 변호해 줄 권세가 있다고 한다(1998년 7월 5일 저녁예배).
⑥ 2천년 전의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완성하셨고, 자신은 물위를 걷는 것 외에 66권의 말씀을 다 이뤘다고 한다(1998년 6월 21일주일예배, 6월 28일 금요철야집회).
⑦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든 선지자들과 주님의 제자들이 이재록 씨 자신이 부르면 나타나서 경배한다고 하며,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까지 자신이 기도하면 임재하신다고 한다(1998년 7월 5일 저녁예배, 1998년 7월 17일 금요철야집회).
⑧ 꿈속에서도 자신의 영이 심방해서 치료역사를 베풀고 축복도 주고,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노라'고 하신 주님께서 어느 곳에나 가실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영으로 다른 곳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 함께해주고 안수기도도 해준다고 한다(1998년 5월 5일 특별부흥성회, 8월 9일 주일예배).
⑨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천국 가는 여정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관건이라고 한다(1998년 6월 28일 주일예배).

만일 이재록 씨가 진정으로 위와 같은 권세를 가졌다면 그는 바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서, 실질적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의 신격화 사상은 심각한 이단성을 내포하고 있다.

   
▲ 이스라엘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이재록 씨(이재록 씨측 홈페이지 갈무리)

3. 이재록 씨는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를 특수화하고 있다

이 씨는 ‘우리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식의 직설적인 말만 하지 않을 뿐 여러 유형의 주장으로 만민중앙교회를 특수화하고 있다. 이 씨의 관련 주장을 요약해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① 만민중앙교회에 성경의 모든 선지자, 천군 천사, 예수님이 내려왔다고 하며, 심지어 만민중앙교회에 하늘문이 열려 보좌도 내려오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임재하셨다고 한다(1998년 6월 28일, 7월 5일 주일저녁예배, 7월 10일, 7월 17일, 10월 23일 금요철야집회).
② 만민중앙교회에 하나님께서 새예루살렘(이재록 씨가 말하는 5단계 천국 중 의의 면류관, 금면류관을 받을 자가 가는 천국) 열쇠를 놓고 가셨다고 한다(1998년 7월 5일 주일저녁예배).
③ 만민중앙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무지개를 띄워주시는 등 각종 표적과 기사를 넘치게 보여주신다고 한다(1998년 7월 5일, 7월 10일, 9월 25일, 10월 16일, 10월 23일 금요철야집회).
④ 만민중앙교회에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고 하늘문이 열렸으며 그 하늘문이 닫히지 않고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열려 있을 줄로 확신한다고 말한다(1998년 7월 17일).

이재록 씨의 주장은 모두 극단적 신비주의적 체험에서 비롯된 주장으로서 하나님의 신성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보좌(마 5:34, 19:28, 행 7:49, 히 1:8)가 특정한 공간안으로 내려왔다는 주장이나 새예루살렘 천국 열쇠를 두고 가셨다거나 하늘문이 열렸다는 주장은 모두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4. 이재록 씨는 천국이 5단계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재록 씨의 내세관은 5단계의 천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1단계는 상급이 없고 행함이 없는 자가 들어가는 낙원이요, 2단계는 썩지 않는 면류관 받는 천국(고전 9:25~27)으로 1층천이요, 3단계는 영광의 면류관 받을 자가 가는 천국(벧전 5:4)으로 2층천이요, 4단계는 생명의 면류관 받을 자가 가는 천국(약 1:12, 계 2:10)으로 3층천이요, 5단계는 의의 면류관, 금면류관 받을 자가 가는 천국(딤후 4:8, 계 4:4)으로 바로 새예루살렘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믿음도 5단계가 있다.

즉 1계단 믿음은 회개하고 그리스도 영접하였으나 행함이 없고 상급 없는 믿음으로 낙원에 가는 믿음이요, 2계단 믿음은 구원받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나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썩지 않는 면류관 받는 곳으로 1층천에 가는 믿음이요, 3계단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죄와 싸워 버리며 나가는 믿음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2층천에 가는 믿음이요, 4계단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3층천에 가는 믿음이요, 그리고 소위 마지막 단계 5계단 믿음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지닌 자들이 가는 '새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한다(이재록,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P.226). 그런데 이재록 씨는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새예루살렘에 들어가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1998년 7월 17일 금요철야집회 2부: 하나님 임재 실황중계).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낙원’은 이재록 씨의 말처럼 상급이 없고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1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천국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강도에게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말하셨고(눅 24:43), 바울이 낙원과 천국을 동일시했고(고후 12장), 그리고 낙원에도 생명나무가 있다고 한 점을 볼 때(계 2:7), 낙원이 천국의 1단계라는 이 씨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서 ‘영광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을 말할 때 이는 같은 천국의 상급들을 말하고 있을 뿐(약 1:12, 벧전 5:4, 계 2:10), 결코 이재록 씨의 말처럼 천국의 계층을 말하지 않는다.

5. 이재록 씨는 아담은 공룡을 애완동물 삼았으며 지구에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건축재료는 UFO로 날랐다고 주장한다.
이재록 씨의 황당한 주장을 그대로 들어보자.
“아주 먼 옛날에는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과 첫째 하늘에 있는 이 땅이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아담의 권세 아래 다스려지던 곳으로서 아담은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갔지요. 그러면서 아담은 이 땅에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는 상징 것을 짓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피라미드라 말씀드렸죠. 물론 피라미드를 모두 아담이 지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었던 것도 있고. 맨 처음에 지었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자 특별히 시간을 내어 이 땅위에 내려옵니다. 어떤 장소에 얼만한 크기로 지어야 하고 또 무슨 재료들이 필요한지 살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이날만큼은 예전과는 다르게 그 휘화에 있던 그룹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했습니다”(이재록, 창세기강해, 2002년 2월 22일 금요철야 설교).

“그리고 이러한 그룹과는 좀 역할이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룹 중에 하나의 모양을 따서 아담에게 특별히 만들어 주신 존재도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공룡이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공룡은 아담에게 있어서 마치 애완 동물과 같은 존재였으며 아담은 이러한 공룡에게 큰 사랑을 주었고 공룡도 아담을 따르며 기쁨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룹과 공룡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요. 그룹은 영물이었고 공룡은 어차피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였기에 이로 인해 생기는 역할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룡이 아무리 아담의 사랑을 받았다 해도 아담을 위해 그룹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공룡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이재록, 창세기강해, 2002년 1월 15일 금요철야).

“아담은 모든 재료와 피라미드를 세우게 한 기구를 에덴동산으로부터 날라 왔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러분들이 UFO를 떠올려 보면 풀립니다. UFO도 그 종류가 많아서 그 중에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것도 있지요. 마치 비행기 중에 화물기가 있는 것처럼 UFO 중에도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어서 얼마든지 피라미드를 세우기 위한 재료와 기구들을 나를 수 있는 것입니다”(이재록, 창세기강해, 2002년 1월 18일 금요철야).

이재록 씨의 창세기강해 중 피라미드, 공룡, UFO와 관련한 주장은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일고의 비판적 가치가 없다.

6. 맺는 말
이재록 씨는 신도들에게 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특수화해왔다. 이렇게 소위 기적이라는 현상 때문에 그의 신도들은 이재록 씨를 특별한 존재로 믿고 따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말씀하신다. 이재록 씨는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곳이다. 그런데도 현재까지 진리의식이 무감각해진 일부 교계 인사들과 일부 교계 언론의 비호를 받으며 이렇다 할 제재를 받지 않고 다시 교세를 키우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재록 씨를 ‘이단이 아니다’, ‘이단으로 규정했었으나 오해가 풀려 해제됐다’는 유언비어도 난무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씨에 대한 이단규정은 그것이 발표된 이후 단 한번도 규정한 주체에 의해 철회된 바가 없는 바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종합자료 Ⅱ, 한기총 이단사이비문제상담소, 2007
만민중앙교회 홈페이지(http://www.manmin.or.kr)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건강한 성결인 건강한 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2006년
이재록,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______, 1998년 7월 5일, 7월 10일, 7월 17일 주일, 금요철야 집회 등의 설교
출처: 교회와신앙

      육신이 되는 말
      (Words That become Flesh)
      말은 중요합니다
      말이 없이는 우리의 행동이 의미를 잃습니다
      의미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장래에 대한 전망, 통찰력, 이해 그리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말은 위로와 위안, 격려와 희망을 줍니다
      말은 두려움과 고립, 수치, 그리고 죄책감을 없애 버립니다
      말은 화해하게 하고, 단합하게 하며, 용서하며, 치유합니다
      말은 평화와 기쁨, 내적인 자유와 깊은 감사를 가져오게 합니다
      요컨대 말은 그 날개에 사랑을 태워 나릅니다
      사랑의 말은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삶에서 육신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육신이 될 때,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된 말씀입니다
      예수님 속에서는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하나였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기도는 자랑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골방에서 기도해도 골방 밖에
‘골방기도 중’이라고 써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고 길 어귀에서 존경을 강요하는 자세로
기도하는 바리새인 보다 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기도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면서 거침없이 자랑합니다.
어떻게 긴 시간 기도한 것을 자랑합니까?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숨기는 사람입니다.
-김의환 목사의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서-

집을 살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집은 값이 많이 나가지 않습니다.
프라이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프라이버시가 없는 집은 값이 떨어집니다.
인격적인 면에서도 하나님과 나만이 가지는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사람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만이 만나는 기도 시간에
외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나의 진심을 인정받을 수가 있고
응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새벽종소리




(삼하 16장)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급전직하(急轉直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올라가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속된 말로 잘 나가다가 망하여 추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궁을 빼앗기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들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가다니요.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다윗 왕을 배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못 믿을 게 인간들이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게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겨를도 없습니다. 다윗은 황급히 도망치고 있습니다.

위기를 당하고 상황이 바뀔 때 사람들의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참된 친구는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가드사람 잇대가 죽어도 함께 죽겠노라고 다윗 왕의 앞장을 섭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이 법궤를 메고 다윗 왕을 따라나섭니다. 아렉사람 후새는 다윗의 변함없는 친구로 예루살렘성에 남습니다.

기회주의자들과 간교한 자들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모사가 되어 일거에 일등공신과 권력자가 되려고 획책합니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는 이 기회를 이용,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배반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주인의 재산을 가로챕니다. 더욱 악한 것은 바후림에서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이제 다윗왕은 끝났다고 다윗 왕을 욕하고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여, 네가 잘 될 줄 알았더냐.” 다윗에게 갖은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티끌을 던집니다. 견딜 수 없는 모욕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가 나섭니다. “제가 가서 감히 우리 왕을 저주하는 저 개 같은 자의 머리를 베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를 만류합니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명하신 것이라, 나는 달게 받겠노라.” 기세가 오른 시므이는 계속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립니다. 그 수모를 당하며 도망하는 왕과 신하들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욕과 수모를 감수하며 참아내는 다윗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닥친 이 수모와 환난이 밧세바와의 범죄로 인한 징벌이며, 그래서 다윗이 이 수모를 달게 받고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깊은 다윗의 신앙과 이 일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저 다윗의 죄를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원래 왕은 누구의 자리였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지만 다윗에게 왕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에게 바꾸어 해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는 누구 것이며 천국은 누구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그 이름 믿는 것 하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약속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자격이 있었더란 말입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광의 자리에 앉혀질 자격이 도대체 티끌만치라도 있습니까?

잠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매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10달러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니, 왜 돈을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아 두십시오.”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안하고 계면쩍어 쭈뼛거렸지만 날이 가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주기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아니 왜 돈을 안 주시는 거죠?” 지금까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텐데 안 주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의 목숨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공로가 티끌만치라도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벌레 같은 날 위해, 이 추악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라고 고백한 욥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설사 지금 나의 생명을 지금 거두어 가신다 해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와 지금까지 허락하신 생명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 해도 순종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단순히 다윗에게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벌을 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나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여 그 값이 치러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으며 다윗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다윗의 진정한 축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징벌과 고난이 없이 평안하게 왕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복된 자이겠습니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다윗이 복 된 자이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다윗이기를 원하십니까?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구조사가 무슨 큰 죄라고...  (0) 2012.10.08
다윗의 통곡을 들으며  (0) 2012.09.20
반 쪽 짜리 용서  (0) 2012.09.05
십일조란 무엇인가?  (0) 2012.09.01
네가 나의 거할 집을 짓겠다고?  (0) 2012.08.24

 

 

 
 
 
 
♡독자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서 죄송해요♡    
   


 

이곳 목양연가를 찾아주시는

독자님들께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드리고자

열~~씨~~미 노력하는 것 모두 아시죠?

 

어제 오늘 목양연가가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했었고,.

목양연가 블로그가 사라져버리면서

"찾으시는 주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공지가 뜨는 겁니다.

 

어찌어찌 해서 다시 찾아들어 갔고

본래 상태 대로 수정을 해두려고 '저장'을 누르는 순간,

 

"한 번 고친 주소는 24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다시 수정할 수 있다."

 

목양연가를 처음 열 때

제가 너무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도와주신 분이

삽입해 두신 주소였기에...

머리가 나쁜 지가 외우지를 못했고

이제는 좀 외우기 쉬운 숫자를 넣어두자...

 

그랬던 것이

목양연가 전체가 사라지는 것일줄이야!!!

누가 알았겠나요?

 

하여,

어제 저녁서부터 조회수가 딱 멈추는 것을

보면서....아마도 많은 분들이 목양연가가

해체된 것으로 오해 하셨을 것 같습니다.

 

목양연가를 찾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는 것이 10 년은 더 된 것 같더라고요.

 

 

목양연가 회복된 기존 주소:

http://lake123172.tistory.com/ 입니다.

 



그동안 불편을 드려서 죄송해요.

         모든 분들의 양해를 바라면서...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 

         목양연가 섬기미: 별똥별/최송연 드림

 



 



 

 

 

 







기독교 공익 위한 신천지 비판활동은 ‘죄 안됨’
창원지검, 신천지 전 교육부장 지명한 씨 불기소 처분
2012년 08월 12일 (일) 20:56:50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신천지(교주 이만희) 신도 정모 씨가 신천지 전 교육부장 출신 지명한 씨를 고소한 사건이 최근 ‘불기소’ 처분됐다.

정모 씨는 지명한 씨가 지난 4월 8일 창원실내체육관에서 발언한 “신천지인들은 육적인 음행이 죄가 아니라 영적인 음행이 죄라고 가르쳤고, 그렇게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천지의 자매들이 신천지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안 좋은 모습들을 저는 많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너무 실망스러워 신천지를 나오게 되었습니다”는 내용이 허위사실이라며 지 씨를 고소했었다.

자신들의 교회는 음행에 있어 육적인 부분이나 영적인 부분에서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 씨는 마치 신천지에서는 영적인 부분만 음행이라고 강조하고 육적인 음행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발언해 자신을 포함한 신천지인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창원지방검찰청(2012형제18652)은 “피의자(지명한 씨를 의미함: 기자주)가 신천지에 10년가량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이 본 것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자신의 판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며 “일반적으로 인정된 종교단체인 기독교의 행사에서 이단 종교단체인 신천지에 대하여 위와 같이 발언한 사실은 사회적 상규의 입장에서 비추어 보아 특정한 사회집단인 기독교측에 공익성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명한 씨가 발언을 한 장소가 신천지를 규탄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모인 부활절연합대성회인 점, 그리고 지 씨가 기독교인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기독교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알리기 위해 말하였다고 주장한 점 등을 보면 신천지인들을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지명한 씨는 지난 2001년 7월 신천지 부산 야고보 지파에 입교한 이래 신천지 구역장, 교육부장을 거쳐 약 7년 간 교육강사로 활동했다. 올해 1월 26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공식 탈퇴기자회견을 가진 지명한 씨는(2012년 1월 27일자 “육체영생 믿는다면 이만희 씨 사후대비 왜 필요한가” 기사참고) 이후 자신이 신천지를 탈퇴한 이유와 신천지 교리의 모순을 알리는 비판 활동을 벌여 왔으며, 지난 4월 8일 창원시 부활절 연합집회 강사로 참여해 “신천지는 정신적으로 깨끗하면 되지 육체적으로는 방종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고, 신천지의 대표 이만희는 죽지 않는다고 가르치며, 14만4천명이 모이면 신천지 신도들 또한 육체가 죽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간증한바 있다.

출처: 교회와신앙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34



우리가 말하는 것을 모두 실천하는 생활을 할 때에만,

우리는 말을 할수 있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침묵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경우에도,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마저도 우리가 위선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직 우리 자신의 말이 더 이상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떤 사람도 자기의 이상과 비전을

완전히 실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과 비전을 강한 확신과

두터운 겸손으로 선포할 때,

우리는 차츰 우리가 말하는 진리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말보다

언제나 큰소리로 말한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한, 우리는 우리의 말이

겸손한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신약시대에 와서 예언자나 선견자는 성서적으로 볼 때 성도에게 붙일 수 있는 합당한 호칭이 아니라고 봅니다. 선견자(先見者, Seer, 로에라, 하지), 선지자( 나비)는 모두 비슷한 역할로써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신약시대에 와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구약시대의 선견자(先見者, Seer) ... 선지자들과 같은 개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선견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선견 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딤전3:15절 참조) 성경을 읽고,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들의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말씀이 주는 깊은 뜻을 깨닫게도 해 주시고 개인에게 레마로 친히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성도가 특별한 사명 자로서, 굳이 따로이 이름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바이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바이더(Provider), 사전적 의미로는 ‘공급자, 준비자’ 그런 뜻입니다. 가족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사람, 가족의 모든 생계, 미래를 책임지고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사람이요, 주님의 말씀으로 미래에 닥칠 재앙을 대비해 착실히 준비하는 '프로바이더'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도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어린 아이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대재앙, 지구 종말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바로 선견자적 사명을 가진 프로바이더들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먼저 듣고 먼저 아는 우리가 종말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가 하는 그 방법론도 확실히 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입니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處善人 動惟厥時).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矜其能 喪厥功).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惟事事乃其有備 有備無患).”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습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居安思危思則有備 有備則無患).”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듭니다. 지구 온난화(地球溫暖化, 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溫暖化)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입니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합니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 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합니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지난 9.11테러 사건이나, 동남아 일대를 강타한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멕시코의 돼지인풀루엔자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제대로 된 ‘ 프로바이더’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

종말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바이더들의 맹활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9.11테러나 지난번 해일과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사람들이 다 대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자와 시간은 알 수없다.” 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로부터 영적테러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무장되어야만 합니다.

종말이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지요,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십니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 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바로 '굿 프로바이더'입니다.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먼저 아는 우리들이 “Good Provider”가 되어야만 하고, 다른 이에게도‘Good Provider’가 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아, 광야로 가라!  (0) 2012.10.07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일조의 올바른 사용도  (9) 2012.09.21
도(道)를 넘지 마라  (0) 2012.08.31
은몽(恩夢)  (0) 2012.08.22
양 도둑질...?  (0) 2012.08.15

성경을 상고하라 (요5:39)

 

조지 휫필드

 

사두개인들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로 와서, "세상에서 일곱 남편들을 소유했던 그 여자가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므로 오해하고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3-31)  

 

만일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 퍼져 온 모든 오류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본다면, 그 오류들은 대부분이 동일한 기초로부터,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서 오신 그 분은 성경기록들을 자신의 변함없는 규범과 안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사로부터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도 주님은 그 대답으로서, "너는 무엇을 읽느냐?" 하시면서 자신에 관하여 성경을 언급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25-28)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심을 받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도,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모든 공격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점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의 행동 원칙이 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성령만으로 우리의 행동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꾸짖을 수 있는 대응책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 그렇다면, 무한히 성령으로 충만하신 우리의 구주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언급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존중하지 않고, 그 거룩한 말씀을 무시하며 옛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케케묵은 책으로만 다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이유는 성경의 기록들이 무엇을 말씀하며, 어떠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라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둘째,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을 할 때 유익을 얻도록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믿는 자의 의무입니다.

 

저는 먼저,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제가 성경이라고 할 때 율법서와 선지자들의 글과, 여러 세기 동안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아 온 책들, 그러니까 보통 성경이라 불리는 책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는 '진리의 성경기록들'(다니엘 10:21)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쓰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기초로 보면 다른 책들은 '진리의 기록물, 또는 경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개인이 사사로이 해석하거나, 그의 권위나 창작에 의해서 기록된 것들이 아닙니다. 예전에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담으로 인해 우리가 타락하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할 바대로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낸다면 그것들의 총체와 본질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인 두 가지의 큰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 속에 있는 모든 위협의 말씀이나 약속과 교훈의 말씀, 모든 권면과 교리들, 모든 의식과 유대 율법의 경륜 아래서 지정된 예식들과 제사법, 성경의 역사적인 부분 모두가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타락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오실 중보자를 바라보도록 지시하며 이미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죄 없는 상태에 계속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외적인 계시를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마음판에 깊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금지된 열매(창세기 2:15-17)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계시가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비참과 흑암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적인 계시가 없었다면 말입니다.

 

자,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보면 됩니다. 만일 우리가 타락한 피조물들이 아니라면,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가증한 부패함들(마가복음 7:21-22)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는 부패한 존재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심 그 자체이시므로 그 분 자신처럼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선한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성의 혼돈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의 실제 됨됨이와는 전혀 다른 마음의 성향과 기질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라고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본성적으로는 거만하고, 분노에 차 있으며, 복수심에 들끓고, 하나님의 정결하심과 거룩하심과 오래 참으심과는 상반되는 열정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자, 이것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닙니까?

 

또한 그런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서 그 해로운 경우를 발견함과 동시에 자기를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그럴 듯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그는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비참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단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한 선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현대의 자연신론자들처럼 부패하고 패역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라도 성경을 보면서 그 점에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 인생이여, 어찌하여 너는 눈멀어 흑암과 비참함 속에 떨어져 있는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소원하는 바에 이르는 길,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를 따라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비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 두 가지 진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시에 관통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다른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비참과 우리의 행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타락과 회복, 한마디로 말해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우리 구원의 위대한 헌장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맺어진 언약의 계시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마땅히 성경을 읽고 탐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연합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필요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입증하려고 외향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벌이는 논증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들이 그러한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그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자기들 속에서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고 상의한다 할지라도 자기들이 원하는 것밖에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들을 비교하며 밝혀낸다면, 자기들의 모든 결핍을 해결할 처방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은 마음의 결핍과 소원을 정확하게 채워 준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얼굴을 물에 비추어 보면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듯이 말입니다.

 

서기관이 어디 있으며, 지혜자가 어디 있으며, 이 세대의 견실함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을 제쳐 놓고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표적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단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의 기록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믿고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단순히 읽는 데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깊이 밝혀내는 일을 자기들의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2.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을 할 때 유익한 방법들

 

저는 여기서 성경의 기록들을 어떤 방식으로 비교하며 밝혀내야 유익한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항상 기억해 두라는 것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 (요한복음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항상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밭에 숨겨진 보물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러 예언들과 모형들, 제사들과 그림자들을 통해서 예표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고, 신약 성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모든 뜻을 계시하시는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항상 그리스도를 기억해 두면 동편에 떠 있는 새벽별처럼 여러분을 메시야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하지 못한 모든 것을 여는 열쇠와 같이 작용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신비들의 부요함과 지혜를 열어줄 것입니다.

 

(2) 성경의 기록들은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비교하며 밝혀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마다 결단코 성경의 내용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깨달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1:25/누가복음 10:21/누가복음 24:45)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밝히 보여 주십니다. 자기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기를 겸손하게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5:12-14)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낼 때, 특별히 신약 성경을 읽을 때에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같은 자세를 취하도록 애를 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든지 사무엘처럼 기꺼이 들으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사무엘은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사무엘상 3:9)라고 말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상과 상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거역하고 싶어합니다. 오, 갓난아기들처럼, 그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들이 더 이상 조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읽을 때에 필리스티아인들이 삼손을 끌어다가 우스갯거리로 만든 것과 같이 농담처럼 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혼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두려움 속에서 자라갈 것입니다.

 

(3)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되, 읽는 말씀을 실행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십시오.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 (요한복음 7:17).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의 신비들이 너희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받게 되어 더 풍성히 가질 것이나, 누구든지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노니, 이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또 깨닫지도 못함이라." (마태복음 13:11-13).

 

하나님께서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저희로 거짓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을 의향이 조금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감추어 놓으신 것은 정당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믿고, 따라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그 분 자신을 분명하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요한복음 4:2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눈먼 소경에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 눈먼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도 "너와 말하고 있는 이가 그니라"(요한복음 9: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알고 그 계명을 지키고 싶은 소원은 전혀 없으며, 또 주님의 성령 속에서 계시된 말씀의 단순함을 비웃는 자들'에게는 결단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결코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호기심에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4) 읽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십시오.

성경기록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비교하며 밝혀내기 위해서 여러분이 읽는 모든 것들을 여러분의 마음에 적용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타락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지 않습니까? 모든 교훈과 위협적인 말씀, 약속의 말씀은 그 말씀들을 직접 받았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할 때에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갈라디아서 2:20)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 들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 각자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리들과 역사적인 사실들은 자신에게 적용해야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고, 의로 훈육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을 읽는 모든 영적인 독자들의 체험에 비추어, 감히 저는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비교하며 밝혀내고 적용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지 않았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우림과 툼밈1)이 대제사장의 흉배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고, 이미 주어진 말씀을 모든 신실한 독자의 마음에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하면 더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을 위한 완벽한 원리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그 길을 정확하게 지도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아닌 성령의 지시가 오직 유일한 법칙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는 그 주장을 부인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확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거룩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원하는 특별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은 저로 하여금 다음의 요점에 이르게 합니다.

 

(5) 성경이 쓰여지도록 간구하신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경기록들을 유익하게 비교하며 밝혀내는 또 다른 방안은 성경이 쓰여지도록 간구하셨던 성령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들은 영이시며 생명이기 때문에 자연인은 그 말씀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보며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말씀들이 이스라엘을 앞서 인도했던 구름 기둥에 비유된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마치 구름 기둥이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는 어둠처럼 보였듯이 자연인에게 성경의 기록들은 깜깜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빛과 생명입니다. 파라오와 그 집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어둠처럼 보였던 구름 기둥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는 밝음과 영광스러움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코데모가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서 그처럼 무지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아직 자연인이었기 때문에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구주의 제자들이 주님과 그처럼 자주 교제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말씀하신 가르침들의 본질에 대해서 날마다 오해를 했던 것도 성령께서 아직 그들에게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연인의 휘장'이 그들의 마음에서 걷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경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체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 비유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채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책'의 거의 모든 교훈에 포함된 영적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방식 외에는 사람들의 마음과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께 대하여 이방인이라면 그 분의 말씀에 대해서도 계속 이방인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그 분 자신과 같이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복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의 문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가장 즉각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다음 요점으로 나아가 봅시다.

 

(6) 성경기록들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성경기록들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따라서 여러분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요한복음 16:13)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간간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가능하다면 모든 구절을 읽을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성경책을 덮은 후에는 읽은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여러분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자, 이렇게 하면 거룩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임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로운 감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이 빛을 받아 깨어날 것이며, 여러분의 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성령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기록들을 읽을 것뿐만 아니라 읽은 것을 표시하고, 배운 것들이 내적으로 소화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혼을 위한 양식과 생수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치 아폴로처럼 성경기록들 안에서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꺼이 배울 의향을 가진 서기관처럼 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쌓인 선한 보화들이 나오게 하십시오. 구약과 신약성경의 말씀들 속에서 배운 것들이 여러분의 행실 속에 더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7)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되 끊임없이 집요하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기록들을 끊임없이 읽으십시오. 본문 속에 있는 우리 주님의 표현대로, "성경을 상고하십시오"(요5:39).

 

감추인 보화를 파내듯이 성경기록들을 파고드십시오. 감추인 보화를 찾는 사람의 모습이 성경에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성장하려면 금과 은을 캐내는 사람들처럼 구주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기록들 속에 은밀할 것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주의하고, 겉치레적이고, 몹시 서두르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충분하게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다만, 부지런하고 면밀하고 겸손한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의 특징으로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편 1:2)"를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여호수아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기록들을 경건하게 뿐만 아니라 날마다 비교하며 밝혀내십시오. 성경기록들 속에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복음 5:39) 지혜의 문에서 끊임없이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그때까지가 아니라, 그때서야 그 지혜의 문이 여러분에게 열리며 하늘 보화들을 보여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자라 하더라도 그 하늘 보화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대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자라면 여러분에게 있는 짧은 시간을 주의깊게 활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에 의해서 마지막 날에 용서함을 받기도 하고, 그 말씀들에 의해서 정죄함을 받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멸시받는 책에 대한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연극이나 소설, 또는 재미난 책들이 여러분의 입맛을 더 당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상태라면 여러분이 가진 그 분별력은 손상된 것임을 감히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침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 분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내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쓸모없는 그 책들을 읽는 것이 죄냐고 물으시겠지요? 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무익한 대화에 빠지는 것도 죄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몹시 슬프시게 하고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권면해 드린 것들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십시오. 제가 제시해 드린 방안대로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파헤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그 책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쓰여진 책들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는 것이 죄악이고 위험하며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 내가 어린 아이였고,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몰랐을 때, 나는 세상이 해롭지 않다고 말하며 추천하는 그런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식이 있다 하던 다른 아이들이 행했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일을 내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생명의 선한 말씀을 맛보게 되었으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완전한 지식을 아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집어던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해 주는 이 책만을 읽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를 맛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결코 하늘의 만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빈 껍데기와 무가치한 빵과 죄악적인 소일거리들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 속에는 거짓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오락들을 매우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좋아했던 지난 과거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벌집보다 더 달게 느껴질 것이고, 금이나 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시편 19:1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여러분의 혼은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배부를 것이며(시편 63:5), 여러분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복되신 창조주의 영을 따라 형성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인도함을 받을 것이며, 내세에는 그 분의 거룩한 말씀의 빛을 따라서 영광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출처: 개혁주의마을에서

 



      구부러진 들길 같은 사람 나는 구부러진 들길이 좋습니다 구부러진 들길을 가노라면 나비의 밥그릇 같이 넓죽한 해바라기도 만나고 하늘거리며 손짓하는 가녀린 코스모스의 미소도 만납니다
      저녁이면 뽀얀 연기가 올라오는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정겹고 노을 지는 하늘 동구 밖 샘터를 따라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이 흘러 좋습니다
      구부러진 하천 작은 바위틈 아래는 알록달록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삽니다 길가에는 은은한 향을 품은 들꽃도 철 따라 피고지고 그곳은 밤이면 별빛이 더 초롱거립니다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습니다
      나는 구부러진 들길 같은 사람이 좋습니다 가는 길에 江도 만나고 산도 만나며 태풍도 만나고 눈보라도 만나고 울퉁불퉁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자빠지며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에게는 소박한 들꽃처럼 순수한 향이 있어 좋습니다..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 길로 쉽게만 살아온 사람,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반듯하게 보이지만 도시의 딱딱한 아스팔트 냄새가 나서 싫습니다
      먼지투성이 감자 고구마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나는 좋습니다
      '보톡스' 주사로 매끈매끈한 이마보다는 구불구불 굵은 주름살이 가족을, 이웃을 품고 가는 사람, 남에게 해를 입힐줄 모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등이라도 기꺼이 내어줄 줄 아는 사람
      구불구불 매끄럽지 못하고 투박한 언어 속에 인간 냄새가 흙내음처럼 물씬 배어나 정겨운 이... 그런 사람이 나는 좋습니다



      좋은 글을 토대로 '패러디' 한 것임 글/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UL>

    


    올바른 종말론 신앙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요즈음 잘못된 종말론이 극성을 떨치고 있다. 물론 사이비 종말론은 전부터 늘 있어 왔지만 세기말과 천년기말을 맞이하여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밀레니엄 공포를 조성하고 있으며, 이곳 저곳에서 잘못된 종말론을 미끼로 순진한 사람을 미혹하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종말에 대해 올바른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미혹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종말

     

    성경은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은 옛날부터 그냥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이 끝나는 종말이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주의 시간은 끝없이 돌고 도는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직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선적인 시간의 진행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시고 또한 그것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에 의해 한층 강화되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로 들 수 있다. 구약 성경은 수없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고, 때가 되매 약속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이를 통해 우리 하나님은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약속하시고 때가 되면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셨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끝이 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 가운데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살전 4:16, 행 1:8, 계 1:7). 그 때에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며, 그 외의 사람들은 다 불못에 던지워 영원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1-15). 이 외에도 성경은 종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해 주고 있다(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살전 4:13-5:11, 벧후 3장, 계 20장 등).

     

    참된 예언자

     

    이런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 ‘미래’를 알고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의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성령)이 오시면 그가 ‘장래 일’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요 16:13)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곧 이 말은 우리가 미래의 일들을 하나 하나 다 아는 ‘점쟁이’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이 세상은 불로 심판받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전하는 참된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인용된 요엘의 예언 중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17절)는 말씀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마지막 날에 부활과 심판이 있으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전하는 참된 예언자들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점쟁이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어서 엉터리 예언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확실하게 미래를 말하는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혼란한 세상에서 참된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성경 예언의 특징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이 세상 점쟁이들의 점이나 거짓 예언자들의 종말 예언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세상의 점이나 예언들은 막연한 불안감의 해소나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충족, 또는 이기적인 욕심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참된 구원이나 경건한 생활이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목적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명한 요엘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다. 요엘 선지자는 말세에 성령이 임하실 때의 현상들을 말하고 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였다(행 2:21, 욜 2:32).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도 종말 자체에 대한 강론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데에 초점이 있다. 따라서 참 예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예언들은 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만물의 기본 요소가 해체될 것을 말한 후에 이렇게 묻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이에 대한 답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이다(벧후 3:11,12). 이처럼 성경의 예언은 종말 현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곧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며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삶’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건과 근신을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며 방탕하게 만드는 종말론은 그 근본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것들

     

    그런데 기독교 안에도 이상한 종말론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거나 혼란케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 중에는 완전히 잘못된 이단들과 그렇지는 않지만 잘못된 종말론으로 성도들을 혼란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종류와 범위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하려는 시도는 다 잘못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신다고 날짜를 계산하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한 때는 ‘다미선교회’란 단체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며 1992년 10월 28일 밤 12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떠들었는데, 이들의 주장에 많은 성도들이 흔들린 것은 우리 한국 교회의 신앙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안식교의 초기 지도자들 중 하나였던 윌리엄 밀러는 1843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가르쳤지만 그 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1844년 10월 22일에 재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역시 허위로 판명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지정하여 미혹한 일은 기독교 역사상 많이 있었는데, 어떠한 형태이든 그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거나 자기의 체험에 근거해서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 우리 나라의 몇몇 고등학생들이 기도 중에 계시를 받았다며 1992년 10월 중에 주님이 오신다고 주장한 것은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인다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은 몇몇 순진한 사람들을 꾀어 거짓 계시를 퍼뜨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변장술에 능한 사단은 오늘날도 계속 모양을 바꿔 가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어떠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다 잘못이라고 보아야 한다.

    셋째로,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며 위험하다.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성경 구절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자들이 있다. 특히 계시록 강해를 전문으로 하는 부흥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견해를 퍼뜨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은 거의 다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아마겟돈 전쟁’이라든지 ‘EC 10개국 연합’이라든가 ‘666 바코드’ 운운하는 따위는 사람들의 그릇된 호기심을 이용하여 성경을 무슨 암호 풀 듯이 이상하게 해석하여 사람들을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경건에서 떠나 점점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며, 이를 통해 참 종교를 훼손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이상하고 불경건한 이야기들에서 떠나 바르고 참된 믿음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 종말과 관련된 어려운 구절들에 대해 우리는 억지로 해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채로 남겨 두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는 멸망에 빠질 위험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벧후 3:16).

    넷째로, 종말론을 사칭하여 금품을 강요하거나 현세의 삶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임박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집을 팔고 재산을 처분해서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학교 공부나 직장 생활을 포기하고 오직 기도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따위는 다 이단적인 종말론이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쉬 동요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살후 2:2).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미혹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하며, 이를 위해 늘 깨어 있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올바른 삶의 자세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 올바른 종말론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우쳐 준다. 죄와 악으로 물든 이 세상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거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며, 이 세상과 벗하여 죄와 악에 빠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란 곧 이 세상의 모든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삶이며, 또한 이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아니하고 ‘정결함’과 ‘순수함’을 지키는 삶이며, 또한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이 모든 것은 곧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을 통해 실천되어야 할 것들이다. 따라서 올바른 종말론 신앙은 우리의 ‘현재의 삶’의 의미를 더욱 의미 있게 하며 강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재 이 시간, 이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천국에 가는 것을 삶의 최고 목적으로 생각하고 늘 천국 가기만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신앙은 한편으로 귀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때가 되면 갈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옳게 살며,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을 많이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하루 동안에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짐을 볼수록 더욱 열심히 주님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할 날이 그만큼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복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된 종말론 신앙이다. ♧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

        어떻게 성령이 우리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요?

        흔히 우리는 증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변호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흔히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화제로 삼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과 동료들에게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한 선교적인 노력은

        흔히 불완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마음에 분열을 일으킵니다

         

        성령은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

        그리고 절제와 같은 열매들을 통하여

        가장 설득력 있게 자신을 드러내 보입니다(갈라디아서 5:22)

         

        이 열매는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얘기합니다

        따라서 항상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들이

        성령을 믿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보다는

        "내가 성령 안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We are The Glory of the Lord)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영과 성령이공동으로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로마서 8:16 참조)

       

      이 증거는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0:31)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자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성령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과 친교하면서 살 때에만

      우리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글입니다. 남침례교단 총회장을 두 번 지낸 찰스 스탠리 박사는 애틀란타에 있는 First Baptist Church 담임 목사님이십니다. 또한 미 전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인 In Touch 에 사역하시는 훌륭하신 (성경공부) 교사이십니다. 저는 평신도로서 성경말씀에 관심이 많지만 논쟁은 싫어합니다. 표적의 은사에 대한 논쟁은 아멘넷에서도 많이 있었지만 항상 결론은 흐지부지하게 끝이 났습니다. 우연히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이란 책을 읽다가  부록의 "표적의 은사" 에 대한 글을 읽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표적의 은사에 대해서는 신자들 간에 갈등과 이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분란에 대해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것들이 그 문제 위에 덮여있는 안개를 걷어 진리를 명확히 볼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ㅣ.

    1. 사도 바울이 "우리는 보다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한다"고 말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이 중요도에 따라 은사들을 배열해 놓은 것을 보면 방언의 은사는 제일 마지막에 위치해 있다(고전 12:28).

    2. 왜 어떤 이들은 섬김이나, 구제, 그리고 긍휼의 은사가 아닌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애쓰는가?

    3. 치유의 은사를 받은이가 병원에 취업하거나 개업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사가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혜택을 받는 이들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긍휼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풀 수 있다. 구제의 은사를 받은 이들도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구제를 베풀 수 있다. 왜 치유의 은사만이 그것의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가? 그리고 이 은사의 경우 그 수혜자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5.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치유나 방언의 은사는 그것을 지닌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일과 더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약을 보면 '공개적'으로 이들 은사를 발휘함으로써 그것을 행한 자가 하나님의 메신저로 인정받는 것을 볼 수있다. 공개적이란 말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적을 행했던 곳과 요즘 이른바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이들이 그것을 행하는 곳을 대조하기 위해서다.

    6.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지 않은 이들이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표적을 보이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7. 눈 깜빡할 새에 병자를 고치는 것과 일생 동안 유혹에 대해 자기 절제를 발휘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확실하게 성령의 권능을 증거하는 것인가?

    8.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방언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고 싶어하는가? 내가 어떤 아버지이며, 어떤 남편인지, 또는 어떤 할아버지 인지를 묻는 사람은 왜 하나도 없는가? 내가 무엇을 하지 않으며, 무엇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무엇을 할 계획도 없다는 얘기를 할 때는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인가? 결국 나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내게 능력을 주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게 어떤 은사를 주는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내가 왜 다른 능력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모욕해야 하는가?

    9. 지금도 하나님께서 치유의 역사를 행하고 계심을 믿는가? (나의 답변은) 예. 하나님께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그 일을 하고 계심을 믿는가? 예. 어떤 사람이 신비스럽게 병 고침 받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예. 치유의 은사가 본인에게 있는가? 아니오. 나는 치유의 은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만나 본 적도 그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뜻대로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JuNick 님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을 상고하라/조지 휫필드  (0) 2012.09.12
    올바른 종말론 신앙  (0) 2012.09.11
    카톨릭교회에서는 '연옥설' 주장  (0) 2012.09.06
    오바마 동영상 꼭 보세요!  (0) 2012.09.04
    성화는 체험인가/로이드존스  (0) 2012.09.03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야
    그 안타까움을 알게 되는
    못난 인간의 습성
    내 자신도 그와 닮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때면 매우 부끄러워집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말소리와 새소리
    오케스트라의 힘찬 선율을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못 만져보게 될 것처럼 만져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냄새와 맛을 못느낄 것처럼
    꽃향기를 마시며
    매 손길마다 맛을 음미하십시오.

    못 가진 것들이
    더 많았지만 가진 것들을 충분히 누린
    헬렌 켈러여사의 글입니다.

    문제의 근원은
    있고 없음이 아닙니다
    없는 것들에 대한 탄식에
    자신의 시간을 망쳐버리느냐
    있는 것들에 대한 충만함에
    자신의 영혼을 매진하느냐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이미지 전체보기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  (2) 2012.09.17
    힘들어 하는 당신에게  (2) 2012.09.14
    밑불이 되어주는 사람들  (0) 2012.09.04
    '나'와 '우리'의 갈림기  (0) 2012.09.01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2) 2012.08.28
    CENTER>

    사랑의 증인(Witness of Love)

    우리의 주위 환경이 우리들로 하여금

    생존권을 확보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세상이 우리에게 조건을 제시하기 전에는,

    우리가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지식은

    책이나 강의,TV 프로그램, 또는 세미나로부터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지식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의 가까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거나,

    또는 아주 옛날에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를 선포하고,

    또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1.”닐 암스트롱은 무슬림이다.”

     

       
     
     
     
    지난 주말 세계 톱 뉴스는 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의 사망소식이다. 그는 한국동란때에는 공군조종사로서 무려 78회나 출격, 인민군의 대공포에 낙하산 탈출을 하였지만 적지에 떨어지지 않아 구조되기도 하였다. 그는 달에 착륙하여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식의 간증을 하여 일부 한국교회 목사들이 그의 신앙을 칭찬하였다. 그러면서 구 소련의 유리가가린은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나는 신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인터넷 댓글에는 "암스트롱이나 가가린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수 년 전 한기총 이광선 목사가 그런 설교를 하였다."고 하면서기독교 목사들 거짓말쟁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글이 올려져 있다.

     

    암스트롱 사망 소식 후에 그의 종교가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일부 무슬림들은 그가 달에 착륙하고 나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 초기 이슬람 국가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할 때, 그의 귀에아잔“(이슬람 국가에서 확성기로 코란과 기도문을 읽는 것) 소리가 났는데, 내용은 기도하라는 음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너무 요란하게 퍼져서 1983년 미 국무성은 이슬람 국가 대사관에 특별 공문을 보내었다. 내용인즉, 암스트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는 것은 사실 무근이라고.

     

    1983 7 14일자로 미국의 이슬람 전문가 필 파샬도 동일한 내용의 서한을 암스트롱의 여비서로부터 받았다. 비서의 글로 보낸 내용은 자기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적이 전혀 없다고.

     

    그는 2005 9 6일 말레이지에서 개최 된 Global Leadership Forum에 참석하여 그러한 질문을 받고 분명 해명하였다. 그런데도 터키에 한 무슬림 신문은 그가 터키에 왔을 때 말콤 X(미국의 유명한 흑인 무슬림)가 기도한 바로 그 모스크에서 기도하였고 많은 무슬림들이 그의 뒤에서 기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나 이슬람을 위한 거짓말은 상관이 없고 책임 질 필요도 없다.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도 근거가 없다.” 

    동시에 그가나는 달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가가린도 러시아 정교회 신자라고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 목사들의 설교 역시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구글에 보도된 그의 자서전에 암스트롱은 Deist(이신론자)라고 하였다. 즉 신의 존재는 믿으나 신의 섭리나 예정은 믿지 않는 계몽주의 사상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무조건 폭로하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보도나, 아전인수격으로 유명인사를 자기종교에 끌어들이는 것 역시 종교계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도 댓글에 일부 무슬림들은 미국 기독교가 두려워 암스트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2. “미국대형교회 예배는 일종의 체면현상이다?"

       
     
     
     
    위 그림은 미국 대형교회 예배장면이다. 금년 미국 와싱톤대학의 한 연구소가 대형교회 예배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체면현상에 비유하였다. 이 연구보고는 금년 8월 미국 사회학회에서 발표되었다. 제목은 “God is like a drug: Explaining Interaction Ritual Chains in American Megachurch,"(신은 마악과 같은 것이다: 미국대형교회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예배의식의 상호작용의 연구이다. 이 보고서는 음악이나 스포츠도 청중들로 일종의 마약현상으로 분석하였다. “다만 종교는 도취감정의 차원이 다를 뿐이다. 초월의 감정과 거룩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다라고. 보고서는 특히 오순절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미국에서 최근 기독교의 영성을 심리학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사회학적 잣대로 비판 석하는 것은 좀 유감이다. 이러한 연구보고는 기독교회에 하나도 유리한 해석이 아니다. 최근 미국사회가 총기사고가 자꾸 일어는데 이러한 현상은 연구하지 않고 도리어 건전한 가치관이나 윤리관을 제공하는 보수적 기독교회를 이상한 눈으로 보게하는 것, 그것도 학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회를 폠하하는 것이다. 동성연애나 유산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은 미국이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최근 미국 탈보트 신학교와 그레이스신학교가 미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직원들이나 교수가 낙태할 때 드는 경비도 학교가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법률을 통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어제 아침 영국 BBC도 미국의 윤리적 논쟁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3. 독일 의사, 할례 행한 유대랍비 고소

    아래 그림은 유대 랍비의 할례의식 장면이다.

       
     
     
     
    최근 독일의 한 의사가 유대인 랍비 골드버그를 어린이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아직도 판단력이 없는 어린이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육체적 해악을 주었다고 고소하였다. 이 랍비는 지금까지 무려 3천명의 어린이들에게 할례를 주었다. 여기에 대하여 독일의 유대인 연합회 회장 모세 칸토와 이슬람연합회가 발끈하고 들고 일어났다. 남의 종교행위를 간섭하는 것이라고.

     

    독일에서 할례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문화충돌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다문화사회가 초래하는 사회적 분열현상이다. 독일인들은 일절할례”(포경수술)를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하여 진다.

     

     

    4. 뉴욕의 십자가를 시비하는 일부 시민들

       
     
     
     
    위 그림은 미국 뉴욕 쌍둘이 빌딩의 한 교회당 십자가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일부 사람들이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폭파당한 쌍둥이 빌딩 근처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철거소송을 제기한다고 한다.

     

     

    5.파키스탄에서 신성목독죄로 한 소녀 크리스찬 구속

     

       
     
     
     
    위 사진은 12살 크리스챤 림샤마시라는 소녀의 집을 장난감 총으로 겨누고 있는 무슬림 소년들의 모습이다.

     

    파키스탄은 신성모독죄(blasphemy)라는 법이 있다. 한 사람의 증인으로도 누구든지 이슬람을 모독하거나 코란을 찢는 행위는 사형에도 처할 수 있다. 이 법에 최근 12살짜리 한 어린 소녀가 걸려들었다. 지금 구속상태에 있다. 이 소녀가 사는 마을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인데 완전, 슬럼가이다. 이 소녀를 구속하기 위하여 체포할 때 근처 모스크는 확성기로 이 사실을 크게 외치면서 기독교 신자들을 타도하라는 식의 설교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한 상태이다. 미국무성이 이 사건에 특별 유감을 발표하면서 파키스탄 정부에 선처를 호소하였다.

     

     

    6. 파키스탄에 명예살해로 년 5천명 살해당함.

       
     
     
     
    한 국제인권단체는 파키스탄에서는 명예살해로 해마다 약 5천명이 죽는다고 보도하였다. 특히 최근 한 남자가 자기 부인을 아주 잔인하게 살해하여 사회문제가 되면서 이 문제가 불거졌다. 명예살인이란 여자들이 불륜이나 결혼전에 남자를 대하는 것은 가문과 이슬람의 명예를 손상시켰다고 하여 주로 가족들이 죽이고 이것을 지방 정부도 인정하는 것이다.

     

     

     

    7. 시리아 내전 날로 격화 불똥이 레바논으로 번져

    레바논에서 아사드 지지자들인 알라위파들과 수니파들이 심각하게 충돌, 레바논 사회를 어지럽게 한다고 레바논 정부가 곤혹스러원 한다. 시리아 반군들은 이번주가 최대고비가 될 것으로 보도하였다. 영어로 deadliest week.

       
     
     
     http://www.kscoramdeo.com/news/read.php?idxno=5547&rsec=MAIN&section=MAIN

     

     

    코람데오닷컴 /개혁주의마을에서 펌




     
     
    나의 가을이란...
                       초생달
     
    낙엽이 떨어지는 저녁 노을은
    추위를 재촉하는 듯...
    빗물에 불어 있는 벤치 위에 
    어쩌자고 나는 앉아 있나...

    빛 속으로 날아가는 불나비 되어
    선택의 기로에서 눈물 담고 헤매었다

    일찍 주님을 영접하였더라면
    허황된 [삶] 의 소모품들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미소 지을 수 있었겠지...
     
    그래서
    혼자라는 그 절대의 고독을
    사랑해야 하는 것인지...
    이 가을은 또 나를 방황하게 하네


     




     

    '문학/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  (0) 2012.10.24
    커피처럼 그리운 당신  (1) 2012.09.25
    첫 가을편지를 그대에게  (0) 2012.09.01
    행복/헤르만 헷세  (0) 2012.08.30
    나는 다시 태어날 거야...  (1) 2012.08.24

        사랑하기(Doing Love)


        우리는 흔히 사랑은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사랑의 느낌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의 느낌은 아름다운 것이고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사랑을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영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또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대체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비록 다른 사람들이 사랑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가 '사랑을 한다' 고 하면, 우리는 사랑의 느낌이

        사랑의 행동을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지인이 보내주신 찬양.^^


      <
      그리움     
                          최송연
      
      마음은 떠나지 못하고 
      몸만 떠난 것은 떠난 것이 아닌가 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그대를 위한 것이라 
      한껏 호기를 부려보지만 
      마음은 벌써부터 그리움으로 조여옵니다
      
      그대 창가에 찬비가 새어들지나 않을까 
      그대 뜰에 된서리 몰아치는 것은 아닐까
      쌀독에 들어가는 벌레들은 누가 잡으려나
      
      점점 깊어가는 밤
      몸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마음은 아직도 그대 가까이 서성이느라

      잠 못 이루니 추적거리는 빗소리마저 천둥 번개인 양 이명(耳鳴)에 시달립니다

       

       

       

       

       

       

      <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씨앗의 기도  (0) 2012.09.24
      이 9월에는...  (0) 2012.09.16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0) 2012.08.30
      나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0) 2012.08.29
      이젠 그만 눈물을 닦고  (0) 2012.08.21

      사랑의 작은 발걸음(Small Steps of Love)

       

      사랑을 아주 조금밖에 경험하지 못했는데도

      어떻게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으로

      작은 발걸음을 내디딤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미소, 악수, 격려의 말, 전화 한 통화, 카드 한 장,

      포옹 한 번, 친절한 인사, 지지를 표시하는 제스처,

      한 순간의 배려, 도움의 손길, 기부금,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랑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입니다

       

      각 발걸음은 밤에 타는 촛불과 같습니다
      그것이 어둠을 완전히 가시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많은 사랑의 작은 발걸음들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길고 아름다운 여행을 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故 문선명 교주의 ‘참자녀님’들 가운데 누구보다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2남 故 문흥진이다. 1984년 미국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의 통일교 내 직함은 영계(靈界)의 지도자, 즉 ‘영계총사령관’이다. 통일교에 따르면 그는 현재 죽은 자들의 훈련소인 ‘영계수련소’에서 통일교 교리교육을 담당하고 있는데, ‘육계(肉界)’에서 교인으로 살지 않다가 죽은 영혼도 가족과 후손의 바람에 따라 그곳에서의 수련으로 통일교인이 된다. 문 교주는 2005년 1월 2일 애승일(흥진님 추도일)에 “예수님도 영계의 대표자가 아니다”며 “흥진군이 영계를 대표해 참부모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자신이 죽어서 영계에 가서 할 일을 문흥진으로 하여금 먼저 하게 하였다고도 했다.

      통일교에 따르면 문흥진 군은 현재 1989년 사망한 외할머니 故 홍순애(=‘대모님’) 씨와 함께 일체(一體)를 이루어 ‘영계’를 대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영계에서 문흥진과 일체를 이룬 홍 씨가 1995년부터 영계소식을 시시각각 ‘육계(肉界)’에 있는 참부모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이때 김효남(=‘훈모님’)이라는 살아있는 여자 장로의 몸을 통해서 한다는 점이다. 김효남이라는 ‘영매’가 신도들에게 전하는 영계소식이 곧 흥진님과 대모님의 ‘천상천국 말씀’인 셈이다.

         
      ▲ 1984년 사망한 문교주의 2남 문흥진 군과 박보희 씨의 장녀 문훈숙 씨와의 영혼결혼식(사진: <자칭 한국의재림주들>)
      한국기독교통일교대책협의회(통대협, 대표회장 최재우 목사)의 이영선 사무총장은 “김효남 장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의 질문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통일교 신도였다”며 “어떻게 그렇게 급작스럽게 중심인물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참자녀님’들이 급부상하는 틈바구니에서 이미 사망한 이들도 ‘다른 이의 육신을 빌어 재림하고 있다’는 통일교의 주장들을 보면, 문선명 교주의 사후(死後)에도 어떤 모양으로 그의 통치가 계속될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포스트 문선명시대’에도 ‘문 교주의 통일교’는 계속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 때문이다.

      [ 참고자료 ]
      http://www.tongil.or.kr
      http://www.ipeacetv.com
      http://www.chungpyung.org
      박준철,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진리와생명사, 2003년
      조성식, “대해부 통일교왕국”, <월간 신동아>, 2006년 9월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역사편찬위원회, <홍순애 대모님(上)>, 성화출판사, 1997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역사편찬위원회, <계간 사보>, 성화출판사, 2003년 겨울호
      세계기독교신령협회, <지상생활과 영계(下): 문선명선생말씀 주제별정선11>, 성화출판사, 1997년

      출처: 교회와신앙 기사 일부 중 발췌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설을 주장한다.

       

      [연옥의 개념, 역사적 유래, 비판]

       

      이지명

      1. 연옥의 개념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설을 주장한다. “연옥”이란 라틴어로 "Purgatorium"이며, “깨끗하게 하다”, “정화하다”는 뜻이다. 즉 연옥이란 “정화의 장소”를 말한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정화 받는 장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2. 초대교회 교부들이 진술한 비슷한 개념들
      가톨릭교회가 공적으로 연옥을 교리로 확정하기 이전 초대교회 교부들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의 진술들은 연옥을 말하기보다는 죽음 후에 인간의 영혼이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마태복음 5: 26을 해석하면서 영혼이 부활하기 위하여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한 푼도 남김없이 치러야 할 교도소에 대하여 말한다. 키프리아누스(Cyprianus)에 의하면, 믿음 속에서 세상을 떠난 성도들, 특히 순교자들은 죽음 즉시 궁극적 구원을 얻지만,

        박해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부인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은 죽음 후에 정화를 받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에 의하면,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던 정화의 과정은, 죽음 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야웨신이 죄 된 인간을 위하여 설치한 "채무 구류소"(Schuldgefangnis)와 "지혜로운 불"에 대하여 말한다. 이 불을 통하여 죄로부터 깨끗해지는 정화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 과정은 인간의 죄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죄에서 인간을 깨끗이 씻고 부활의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야웨신의 자비로운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에 의하면, 인간 안에 있는 야웨신의 형상이 회복되기 위하여 정화의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그레고리는 정화하는 불로써 묘사한다. 이 정화의 과정이 죽음 이전까지 실현되지 않을 때, 그것은 부활 후에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끝난 후, 인간은 야웨신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3. 중세 가톨릭교회의 연옥의 교리화
      중세기에 이르러 연옥설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시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땅 위에서 지은 죄와 벌에서 정화의 불을 통하여 깨끗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Albert, Thomas v. Aquinas, Bonaventura, Skotus, Durandus) 본래 정화의 불이 물질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것인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정화의 불을 물질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리하여 정화의 불은 하나의 장소로 생각되었다.

      1274년 리용(Lyon) 공의회는 연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참으로 참회할 뜻이 있는 자들이 참회의 열매들을 통하여 그들의 행위와 게으름에 대한 보상을 하기 이전에.. 사망하였을 경우, 그들의 영혼은 죽음 후에 정화의 벌을 통하여 (poenis purgatoriis seucatharteriis) 깨끗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벌을 면케 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신자들의 중재의 기도, 미사 성제(聖祭)와 기도와 헌금, 그리고 교회의 질서에 따라 신자들이 행하는 경건의 여러 사역들은, 그들의 벌을 면케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연옥설은 1336년 교황 베네딕트 12세(Venedikt XII)의 교서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의 공적 교리가 되었다. 이 교서에서 교황은 마지막 부활이 있을 때까지 죽은 자들이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 이론을 거부하고, 죽은 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야웨신의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각 사람은 죽음과 동시에 야웨신의 심판을 받는다. 이 상태에서 영원한 삶에서의 자신이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모든 것은 인간 영혼 자신의 결단으로는 되돌이킬 수는 없는 상태가 된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야웨 신을 거부하는 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반면, 믿음 가운데서 죽는 자는 죄의 용서를 받는다.
      믿음 가진 신자는 그러나 야웨 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할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지 않았고, 자기의 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영혼은 그들의 죄를 완전히 벗기까지 연옥의 불 속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지옥은 모든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장소이지만 연옥은 죽음 후의 미래와 희망으로 가득한 장소이다.

      이 세상에 사는 신자들의 삶이 끊임없는 참회와 정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처럼, 죽은 자들의 영혼도 연옥의 불 속에서 참회하며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정화되어야 한다. 정화의 불 곧 벌과 정화의 상태가 있다.
      무거운 죄들과 시간적인 죄의 벌에 묶여 있는 영혼들은, 이 상태 속에서 정화된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규정한 법에 상응할 수 있는 데까지 인격이 완성되어진다. 연옥에서 인간의 영혼은 두 가지 벌을 받는다. 첫째는 저주의 벌이다. 하나님을 동경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보는 기간이 연기되어 고통을 받게 하는 벌이다. 둘째는 감각의 벌이다.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를 참회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정화하는 벌이다.

      살아 있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트렌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신자들의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무엇보다 먼저 야웨신의 마음에 드는 제단의 제물을 통하여 도움을 받는다" 즉 신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와 교회에 바치는 제물을 통하여 정화의 과정이 빨리 끝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살아 있는 신자들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길을 ‘성도의 교통’이라는 개념에서 찾아낸다. 살아 있는 성도와 죽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성도와 죽은 성도의 교통이 가능하며 성자의 중재가 가능하며 대신 보상을 제시 할 수 있다고 본다. 죽은 성도를 위하여 성만찬 즉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를 하거나 살아 있는 성도가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보상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연옥이 어디 있는지, 연옥의 고통과 정화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지, 연옥의 장소와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적 신비에 속한다.

      4. 연옥설의 문제점

      첫째는 성경에 명백한 증거가 없다.

      그들이 제시하는 구절은 마태복음 12장 32절과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5절이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서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 하리라”는 말에서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하는 과정이 죽은 후에 분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용서 받지 못 하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본문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 개념인 연옥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성령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5절에서는 한 개인의 특수한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고 말한다. 한 개인의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대하여 심판이 있을 것에 대한 언급이라고 보는 데, 그러나 이 본문은 거짓된 이론을 불에 타버리지만 복음의 참된 이론은 영속성을 가진다는 것에 초점 맞추어져 있다.

      둘째는 기존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리를 만들었다.

      박해 시에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부인 한 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들을 위한 설명을 시작했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죽은 자신의 친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걱정들로 인하여 중재 기도와 헌금 등을 드리는 것을 합리화하고, 또한 그것으로 교회의 재정이 마련되어지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이 교리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교회의 편리를 위하여 교리가 만들어져 합리화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셋째는 죽음 이후 신자에 대한 정화가 신자의 대리적 보상을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이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인간이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자신을 정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되는 것이다.
      넷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다섯째는 인간의 죽음은 육체가 죽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의식이나 인지, 의지도 함께 죽는다. 따라서 육체가 결여되지만 의식과 의지와 인지를 가진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주장은 현실적인 죽음의 현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출처: 김종수 목사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바른 종말론 신앙  (0) 2012.09.11
      표적의 은사/촬스 스탠리 목사  (0) 2012.09.10
      오바마 동영상 꼭 보세요!  (0) 2012.09.04
      성화는 체험인가/로이드존스  (0) 2012.09.03
      [강추]- 끝까지 인내하라  (0) 2012.09.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