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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에 있었던 뉴스가 다시 화제입니다.
최근 오클라호마 주 의사당에서 십계명 조형물을 철거한 후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2014년, 미국 남부 오클라호마주가 주 의사당에 사탄의 조각상을 세우는 문제로 극심한 진통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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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을 숭배하는 종교단체인 '사탄 템플'이 의사당 내 설치를 요구하는 사탄 기념물의 디자인을 공개하자 기독교는 물론이고 다른 종교와 시민단체들까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각종 요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탄을 모시는 종교는 안톤 라베이(1930~1997년)가 1966년 샌프란시스코에 세운 '사탄교회'를 위시로 여러 곳에서 생겨나 부흥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오클라호마주에 사탄 기념 논란이 불거진 것은 2012년 지역 기독교계와 집권 공화당이 의사당에 십계명 비를 세운 데서 비롯됐습니다.

그러자 힌두교 등 다른 종교들도 자신들의 상징물도 의회에 세우게 해달라는 청원을 제기하는 등 반발이 잇따랐습니다.

8일(현지시간) AP 통신과 지역 언론에 따르면 청원을 낸 단체 중에는 2005년 창시된 것으로 알려진 '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 등 신흥 종교 외에 동물권익보호단체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국수 괴물이란 뜻의 '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는 스파게티 귀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는 종교로, 이번 사탄 논란 덕분에 인지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스파게티교는 면가락이 세상과 인류를 구하고 인도한다고 믿기 때문에 국수를 건져 물을 털어낼 때 쓰는 채 등 주방기구를 신성시합니다.

이슬람교 신자가 베일을 머리에 쓰듯 국수채 등을 머리에 뒤집어쓰는 게 그들의 상징입니다.

논란이 커지자 미국 최대의 시민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대(ACLU)는 다른 종교가 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의회를 상대로 십계명비 철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고, 이를 틈 타 신흥종교 중에서 그나마 세력이 큰 사탄 교회도 끼어들어 갈등을 부채질했습니다.

사탄템플이 공개한 상징물은 2m 정도 크기의 조각상으로, 큰 날개와 머리에 뿔이 달린 염소의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아있는 악마와 그 좌우에 미소 짓는 아동이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템플 측은 이 조각상은 사타니즘을 대표하는 동시에 의사당을 찾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사탄의 무릎에 앉아 영감을 얻고 묵상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상에 대해 공화당과 기독교계는 "미치광이들의 수작에 놀아나서는 안된다"며 의사당 측에 '사탄의 요구'를 거부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민자유연대는 "십계명비는 설치하면서 사탄상은 안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공박하며 여론몰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의회 시설물을 관리하는 의사당보존위원회는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상징물 설치 허가를 요구하는 모든 청원에 입장 표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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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색설화

 

 

출처: 작은자'

꽃명: 황와색설화  닉네임: '황비'라고 하네여.^^

가격: 10억! 아주 희긔종이라고 함.

창조주 솜씨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1) / 박일민 교수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늘 깨어서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시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셨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계획을 하시는 일과,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는 일과,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간섭을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각각 작정, 창조, 섭리라고 부른다. 이 중 작정과 창조에 대해서 다루되 본호에서는 작정, 다음호에서는 창조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작정의 대상과 목적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는 분이시다(엡 1: 11).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작정의 대상이나 범위, 그리고 그 성질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하찮게 보이는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이나 국가나 온 인류에 이르기까지와 바다와 바람과 햇빛과 비 등 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우연하게 보여지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생사화복이나 인류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체적인 일들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며(마 6:26), 참새 한 마리라도 허락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이(마 10:29)가 하나님이시다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면서(마 10:30) 그 하나라도 상치 않게 하신다고 하셨다(눅 21:18).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게"(행 17:26) 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것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작정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변함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항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며(롬 8:28), 불변한다. 출애굽 40년을 보자. 40년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땅을 내주고 쫓겨가야 할 정도로 죄악이 성해질 때를 기다리는 기간이었다. 40년 세월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의 과정이었다. 바벨론 포로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타국에서의 70년은 슬픔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이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는 여호와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기간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은 합력하여 선이 되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합력하여 결과적으로 선이 되어지고, 특히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어떠한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일 때에라도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2. 작정과 예정

사도 바울께서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서도 사람을 향한 작정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것들 중에서도 영혼의 구원, 즉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작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특별한 관심사인 사람의 구원에 관한 작정을 흔히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작정은 만사, 만물(萬事, 萬物)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지고, 반면에 예정은 이성적인 존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진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는 영생과 영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도 영생을 위한 예정이 있고, 영벌을 위한 예정이 있다. 영생을 위한 예정은 선택이라고 부르고, 영벌을 위한 예정은 유기(遺棄)라고 부른다.

 

 

(1) 유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지만,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죄를 범했다. 사람은 그 죄의 댓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사망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 살아날 수도 없고,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영원한 형벌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말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셨다"(엡 2:1)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악해졌다. 그리고 죽은 시체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사람의 죄는 점점 더 관영해지고 악해졌다.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의지의 남용으로 죄를 범하거나, 죄 가운데서 점점 더 악해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막지 않으시기로 예정을 하신 것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요셉이나 바로의 예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요셉의 형들에게는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방법을 통해서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심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기근에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대비를 하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었다(창 45:5). 또 애굽 왕 바로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고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지는 재앙들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을 위한 결심을 촉진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애굽에게는 그 완악한 죄를 인한 형벌을 내리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출 10:27 등)는 적극적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나 추수 때까지 알곡 속에 섞여 자라는 가라지 등을 비롯한 많은 말씀들에서 발견된다.

 

(2) 선택

한편, 하나님께서는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죽은 생명을 살리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아 엎고, 소경된 눈을 떠서 보게 하고, 귀머거리 된 귀를 열어 듣게 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빌립보 강가에 있던 루디아가 사도 바울께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게 된 것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6:1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경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신다"(시 119:18)고 노래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도록 하는 계획, 즉 은혜의 계획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경우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보다 내놓을 만한 장점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른 포도나무의 가지나 타다 남은 그루터기와 같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계시를 전달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윗이 임금으로 선택된 것도 그러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을 부으러 왔음에도 들에 있던 다윗을 집으로 불러 들이지도 않고 형들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는 같은 흙으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였다(사 45:9; 롬 9:21). 사도 바울은 이 계획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19)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있었다(행 13:48).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진다. 죄인에게는 영생으로의 선택이 무한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은 "모든 신령한 복으로 주어지는 복"(엡 1:3)이다. 만일 선택 때문에 감사가 아닌 비방이나 불평이 생겨난다고 하면, 이는 선택을 오해함에서 나온 것이다.

 

 

(3) 작정과 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에 흔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몇 가지 궁금한 문제가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면, 죄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까.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시지 않은 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진다면, 사람은 단지 로봇에 불과하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이다. 그 중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죄의 문제이다.

 

 

역사에는 하나님이 죄를 생겨나게 만드신 원인자이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만휼히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불의나 죄와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롬 9:14).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하나님의 생각과 활동은 항상 선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악한 수단을 동원하시지 않는다.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반드시 선한 방법을 사용하시고 악에 대해서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그 책임을 물으신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선이라야 참된 선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서 나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바로 죄이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우주 안에 온갖 악이 뒤따랐다. 그러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잘못인가.

 

 

본래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려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필연적이고 기계적인 찬양보다는 자발적인 찬양이 훨씬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게는 오직 선한 의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어졌다. 이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완전하심과 관계없이 피조물에게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그를 특별히 신임하여 훈련시키셨고 금전관리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신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넘겼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하였던 그의 결과는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악한 행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가 악용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전능하시다고 하여 죄도 범하실 수가 있다거나 스스로의 모순을 범하실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의 자유로운 사용을 강제로 막는 것은 자유의지를 주신 의도와 모순이 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예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죄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자유의지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에 앞서서 피조물의 창조가 먼저 고려될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사 60:21)이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창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목적의 가장 효과적인 달성을 위한 수단은 바로 자유로운 의지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려고 작정하신 이상, 그 창조 목적에 적합하도록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허용하신 죄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죄악된 피조물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선하심마저도 악용하여 죄를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작정과 인간의 책임

우리에게는 때때로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 다른 곳에 있으면, 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수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당연히 얻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책임전가에 급급할 우려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밀한 모든 부분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이 과연 인간의 나태함과 책임회피의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가.

 

 

모든 일은 궁극적인 원인, 즉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제2 원인들의 활용을 포함한다. 여기서 제2 원인이란 주로 자연법칙이나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의 노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수단으로 사용하여서 자신의 계획이 달성되어지도록 작정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거나 거스려서 일하시도록 작정하신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우리 편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그래서 작정은 체념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작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음식과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음식은 수고하여 일하는 자에게 보상으로 주어진다. 독을 마시면 죽는다. 여기서 음식이나 음식을 위한 수고나 독을 마시는 것은 제2 원인에 해당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2 원인이 되는 땀흘려 일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에게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살후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그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얻게 하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도록 하신다(마 7:7). 제2 원인을 활용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주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믿음과 천국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제공하심에서, 힘써 침노하는 자(마 11:12),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가 천국을 차지하도록 제2 원인을 활용하신다(딤후 4:7). 또 그 선물의 전달과정에 있어서도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힘써 외치는 전도자의 수고와 그 복음에 대한 진지한 들음이라는 제2 원인의 활용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한다.

 

 

로마로 향하던 사도 바울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폭풍으로 파선을 당한 276명 모두를 구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사도에게 보이셨다(행 27:24). 그러나 그 목적은 배불리 먹고, 안심을 하고, 밀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하고, 선원들의 경험을 동원하여 의논을 하고, 닻을 끊고, 키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해안까지 헤엄을 치는 등의 온갖 제2 원인으로서의 수단들이 동원됨으로써 이루어졌다(행 27:36~44). 또 민족의 위기를 앞에 두었던 모르드개의 경우를 보자.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는 말로 에스더의 역할을 촉구했다. 그리고 에스더는 밤낮 삼일의 금식과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감과 지혜로 왕을 접대하는 등 제2 원인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우리는 대부분 매사에 주도면밀하게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작정을 별 어려움이 없이 인정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정을 확인하고 더욱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그러나 죄나 사람의 책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되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소망 중에 전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겸손함으로 힘써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출처: 행복충전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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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2015년 현재 미국에는

59개의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국립공원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느니 만큼

머지않아 그 숫자는 60개가 넘을 것입니다.


59개의 국립공원 가운데

산 이름이 국립공원인 된 곳도 4군데가 있지요.


Rocky Mountain,

Great Smoky Mountains,

Guadalupe Mountains, Mt. Rainier입니다.


이 가운데

야생화가 가장 아름다운 산은

만년설이 덮인 레이니어 산(Mt. Rainier)입니다.



Mt. Rainier는

서부에 있는 국립공원 가운데

해발이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합니다.



높이가

14,410ft(4,392m)로서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본토에서 다섯 번째 높은 산입니다.



산이 높은 만큼

레이니어 산은 본토에서

가장 많은 빙하를 가지고 있지요.



레이니어는

산이 국립공원인 네곳 가운데서

야생화가 가장 아름답기로도 유명합니다.



봄이 되면

레이니어 곳곳에

환상적인 야생화들이 피어납니다.



레이니어에서

봄이란 3, 4월이나

5월이 아닌 6월부터 시작됩니다.



Mt. 레이니어를

관통하는 길은 123번, 410번,

그리고 706번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서쪽 진입로인

706번 길을 제외하면


나머지 길들은

겨울 내내 closed 되며

5월이나 6월에 다시 열립니다.



레이니어 산의

1년 평균 강설량은

670.9인치(약 1,704cm)인데


올해 2015년엔

예년의 3분의 1 밖에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적게 내리자

410번, 123번 모두

예년보다 3-4주 앞당겨 오픈되었죠.



눈이 빨리 녹은 만큼

올해는 봄도 빨리 찾아 왔습니다.



해발이 낮은 지역도

6월이 되어야 야생화가 피는데


올해는 5월말부터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년 같으면

7월이나 되어야 절정일텐데

올해는 6월 말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Mt. 레이니어에서

가장 멋진 야생화를 볼 수 있는 곳은

Skyline Trail과 Tipsoo 호수 주변입니다.



2015년에만

5월부터 6월 사이에

Mt. 레이니어에 다섯 번을 갔는데


네 번째 갔을 때에야

야생화의 절정이 언제인지 알겠더군요.



설산에 핀

야생화를 보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Mt. Rainier로 가십시오.

설산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야생화를 보게될 것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사랑나무
                            최송연                      

시인들은 

사랑을 미화시켜 노래하고 사랑하면 행복할 것이라며 늘 사랑을 목말라 하고 사람들은 하늘 저 멀리 별들이 반짝이듯, 사랑하면 기쁨이 반짝일 것이라며 늘 사랑을 굶주려 하죠 그렇지만 사랑과 행복은 동의어도 아니고 사랑은 저 멀~리

별나라에 가서 따올 수 있는 진귀한 보석도 아니랍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한 때보다 가슴 아픈 때가 더 많죠

그대

수고와 눈물의 각오 없이는 사랑하겠다 말하지 마세요
사랑은 십자가를 지는 것 내가 피땀 흘려 가꾼 나무에서만 거둘 수 있는 열매, 그 숭고한 희생의 결정체니까요

 

 

 


사랑나무
                            최송연 
                    

시인들은 

사랑을 미화시켜 노래하고
사랑하면 행복할 것이라며
사랑을 늘 목말라 하죠

사람들은
하늘 저 멀리 별들이 반짝이듯,
사랑하면 행복이 반짝일 것이라며
사랑을 늘 굶주려 하죠

그렇지만
사랑과 행복은 동의어도 아니고
사랑은 저 멀~리

별나라에 가서 따올 수 있는
진귀한 보석도 아니랍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한 때보다
가슴 아픈 때가 더 많죠

 

그대

수고와 눈물의 각오 없이는
사랑하겠다 말하지 마세요

사랑은 십자가를 지는 것
내가 피땀 흘려 가꾼 나무에서만
거둘 수 있는 열매,
그 숭고한 희생의 결정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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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같이 이글거리던 해가 서쪽 산 아래로 막 떨어져 내린 어스럼 하늘가에는 뾰족한 초승달이 내걸리고, 앞마당에는 모기향 대신 피워놓은 모닥불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은은한 풀 냄새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녁식사를 끝낸 어른들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방금 쪄낸 손가락처럼 가녀린 햇고구마에 구수한 숭늉을 곁들여 마시며 밀렸던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눈다.

서울서 내려온 사촌들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짓 한 번에 우르르 사립문을 밀어젖히고 캄캄한 들판으로 내달린다.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 귀뚜라미, 쓰르라미들의 합창이 시작되고, 가까운 개울에서는 개구리들이 뒤질세라 청승을 떨며 굵은 목소리로 베이스를 넣는다. “찌르르 찌르르, 개굴개굴” 생명을 가진 놈들은 모조리 참여를 하는 듯, 합창 소리가 한창 흥겹게 흐르는 캄캄한 들판, 짝을 찾는 개똥벌레(반딧불이)들이 노랗고 따뜻한 불을 꽁무니에 매달고 현란한 춤을 추며 들판을 온통 노란색 불꽃으로 수놓는다.

내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면, 나와 사촌들은 저녁밥 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반딧불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 같다. 엎어지며 자빠지며 노란 불빛을 보고 내달리지만 날아다니는 놈들이라 쉽게 잘 잡혀주지를 않는다, 어찌어찌 하다가 한 마리를 붙잡기라도 하면, 마치 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듯, 우리는 조심조심 양쪽 손으로 그 빛을 움켜쥐고 들여다본다. 꼭 움켜진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꼬물꼬물 새어나오는 것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스한 불빛, 나는 그 빛을 막아 보려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양쪽 손을 꼬옥 움켜쥐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불빛, 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노란빛을 뿜어내는 작은 요정 같은 개똥벌레, 나는 그 빛이 너무 신기해 마치 꿈을 꾸는듯했고, 그런 때면, 가슴 깊이 숨겨져 있던 행복감이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피어올라 등줄기를 타고 살금살금 흘러내림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해도 어둠이 삼킬 수 없고,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 이것이 빛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빛 되신 주님을 영혼에 품은 삶, 어두운 그림자로 덮을 수도 감출 수도 없고, 빛을 품지 않은 채, 빛 된 삶을 살아내기 역시 쉽지가 않을 것이다.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사는 삶, 그리 만만하지도 녹록지도 않다.

나는 오래 전, 사랑하는 지인으로부터,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면 편한데....나뭇잎 하나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참으로 힘든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야곱과 같이 험악한 세월을… 나그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멜을 받고 공감하며 가슴이 울컥, 눈물이 솟구침을 느낀 적이 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성도가 거대한 세상 속을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자신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억지가 버젓이 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보려는 몸부림이 어리석게도 보이고 그런 자신이 한없이 작게 보여지기도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창피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일들을 종교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행하고도 당당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버텨오던 신앙의 힘이 맥없이 무너져내리며 기운이 스르르 빠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빛의 자녀가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 진리의 길을 걷자고 외쳐보아야 무슨 유익이 있을까…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맞서 싸우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이고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좁은 길을 걸으라 하신다. 캄캄한 밤에 빛을 밝히라 하시고 썩은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명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 영혼에 빛을 먼저 품어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12: 46절 말씀).” 주님께서 빛으로 오신 이유가 그 빛을 믿는 자에게도 같은 빛으로 비추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참 빛 되신 주님의 영(성령 하나님께서)이 내 속에 빛으로 들어오신 그 순간에 나는 주님의 빛을 품게 된 사람이다. 내 안에 빛을 품고 있으면 그 빛이 나를 통하여 발산되게 되어 있다. 작은 반딧불이 내 손 안에서 빛을 발하는 동안에는 내가 아무리 그 빛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항상 주위 환경을 탓한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썩었고 종교계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다고 탄식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빛이 필요한 시각은 주위가 캄캄했을 때가 아닌가? 방부제 역활의 소금이 필요한 때는 그냥 두면 음식을 썩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한 체, 의로운 체, 잘 믿는 체, 사랑하는 체, 충성하는 체,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려고 몸부림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부닥치게 되면 낙심하기도 하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하고 더 심하면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형적 열심파( 골 4:14절 참조)데마도 결국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딤후 4:10절 참조)바울을 떠났음을 볼 수 있다.

성도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참 빛 되신 그분을 마음속에 모시는 그 길 뿐이다. 그런 다음, 내 속에 계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절 참조) 말씀 하셨다.

종교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을 모셨는가? 아니면 모신 척 가장 하는가? 이런 차이는 순금과 도금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정말 예수님을 모신 성도라면 그 속에 있는 빛이 희미하게나마 밖으로 발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원리가 적용된다. 작은 반딧불이의 불빛마저 감출 수 없거든 하물며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물론, 성도라고 해도, 이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늘 승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코 세상이, 흑암이, 성도를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은 성도의 마음속에 빛 되신 주님,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짜는 다르다. 아무리 껍데기로 잘 믿는 것 같고,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참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에 빛을 나타낼 수 없다. 이런 상태는 과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믿음, 도금한 금과 같은, 외형만 번쩍이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삶, 종교인의 삶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은 이런 도금한 금과 같은 가짜 성도들을 바라보고 갈팡질팡한다. 이런 잘못된 사람들을 기준 잣대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시켜 손가락질 한다. 이런 현상은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타남을 보게 된다. 믿음 좋은 사람이 가정에 소홀히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음 좋은 사람이 사기 치고, 도적질 하고, 간음하고, 살인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도금한 금과 순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자칫 외향적인 믿음, 나타내 보이는 열심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로지 참 빛을 그 영혼에 품은 사람을 가리킴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비록 조금씩이나마 삶의 변화와 성장이 따름을 보게 된다. 산 생명을 소유한 모든 사물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자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다. 생명이 없는 것은 변화도 없다.

고로 성도는 오늘 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점점 더 성숙해 지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성화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성도의 마음속에 빛으로 내주해 계신 그분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지키시되 그리스도의 그날까지 우리를 견인해 주실 것이다.

“너 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 14-16절 말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 칼럼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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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어느 겨울밤,
    뉴욕 즉결법정에 한 할머니가 섰다.

    사위는 실직해 집을 나갔고 딸은 병들어 누워있었다,
    할머니는 굶주리는 손녀들을 보다 못해 빵집에서 빵을 들고 나오다 붙잡혔다.

    초범인데다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들은 방청객들은 내심 판...사의 선처를 기대했으나
    판사는 단호했다.

    판사가 법정에서 할머니를 향해
    "늙어 가지고 염치없이 빵이나 훔쳐 먹고 싶습니까?" 라고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이에, 노인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고 대답을 했습니다.

    판사가 이 노인의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당신이 빵을 훔친 절도행위는 벌금 10달러에 해당됩니다." 라고 판결을 내린 뒤
    방망이를 '땅!' '땅!' '땅!' 쳤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인간적으로 사정이 정말로 딱해 판사가 용서해줄 줄 알았는데
    해도 너무 한다고 여기저기서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판사가 판결을 내리고 나더니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내가 그 벌금을 내는 이유는
    그 동안 내가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나는 그동안 좋은 음식을 너무나 많이 먹었습니다."
    "오늘 이 노인 앞에서 참회하고 그 벌금을 대신 내어 드리겠습니다."

    이어서 판사는
    "이 노인은 이곳 재판장을 나가면 또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여 방청한 여러분들도 그동안 좋은 음식을 먹은 대가로
    이 모자에 조금씩이라도 돈을 기부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방청객들도 호응해 십시일반 호주머니를 털어 모금을 했다.
    그 모금액이 무려 470달러나 되었습니다.

    이 재판으로 그 판사는 유명해져서 나중에 뉴욕 시장을 세차례나 12년간(1933-1945)
    역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라과디아' 판사라고 전한다.
    아깝게도 이분이 뉴욕시장으로 재직 중에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셨다.
    뉴욕시는 시내에서 가까운 허드슨 강 강변에 '라과디아' 공항을 지어
    오늘도 많은 여행자들에게 편안하고 편리한 공항을 잘 쓰면서 이분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그 판사님이 무죄를 판정 하였다면 법은 공평하다는 취지에 위배되고,
    할머니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방청객으로 부터 혹은 주위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판사의 현명한 '벌금 10달러'판결이었다.

    ​ 피오렐로 라과디아 판사 / 뉴욕시장.
    (Fiorello La Guardia, 1882-1947)



은사주의 운동’과 ‘신사도개혁운동’의 신학적 특징들



김병훈 교수_합신 조직신학



‘은사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음성 듣고 행하는 것처럼 보여
최종 계시인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는 위험성 가지고 있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악한 영에 대해 승리했으며,
완전한 구속을 보증하는 성령을 받았음을 분명 인식해야 해



1. 몇 가지 실례들

‘제3의물결-은사주의 운동’의 신학적 특징들은 신사도개혁운동의 주창자
인 국제추수선교회(HIM)의 설립자이며 공동대표이며 하비스트락 교회 담임목
사인
한인 1.5세 체 안(Che Ahn) 목사가 최근에 한국에서 모였던 집회
(2006. 5. 8-10, Cindy Jacobs 초청 잠실 올림픽홀)에서 한 간증의 한 토막
을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 부흥은 많은 현상을 동반한다. 많은 떨림이 있다. ... 하나님은 나에게 성
령과의 만남이 있을 때 환경에 대해서도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나
는 강력한 몸의 진동과 떨림이 있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뛰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수 있었다. 내 영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광이
둘러서 있는 보좌를 봤다. 주님과 하나 되는 순간 ‘너는 천국에서 나와 함
께 앉아 있다’고 하셨다. 보좌는 권세를 뜻한다. 즉시 내 몸으로 돌아왔
다. 이 육체이탈을 경험한 이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 (전
정희, “밀려드는 ‘新사도적 개혁 운동’ 파도,” 교회와 신앙,
amennews.com, 2006.6.5)

체 안 목사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하여 그는 육체이탈의 경험을 말
하며, 그것이 곧 성령의 부흥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기 어려운 신비주의적 체험을 통한 현세의 문제 해결을 말하는 주장이다.
고린도후서 12
장에 기록된 체험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그것이 곧 영혼과 몸
이 분리되는 육체이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주님께로부터 받
은 환상과 계시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한 은혜의 체험으로 인하여 바울 사
도는 이로 인하여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
과 곤란을 당하는 일을 오히려 기뻐하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 안은 자신
의 신비적 체험을 말하면서 집회에 모인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하며
자신의 기도를 따라하도록 하였다.

- 제게 주신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시간 종교의 영을 묶나
니, 궁핍의 영을 묶나니, 끊어버리노라.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 지어다. 다
시 심나니, 믿음으로 내가 축복을 받습니다. 더 나은 직장을 받습니다. 월급
의 인상을 받습니다. 승진을 하게 됩니다.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유업을 받
습니다. 모든 빚이 끊어졌습니다. 수표가 내게 날아옵니다. 형통함이 옵니
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할렐루야! (전정희,
“밀려드는 ‘新사도적 개혁 운동’ 파도,” 교회와 신앙, amennews.com,
2006.6.5)

이 기도가 바울 사
도의 기도와 얼마나 다른가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사도적 직접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복음의 이해와 삶이 사도
와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 비록 그러한 주장을 하
는 사람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 인터넷에서 그들과 관련한
자료를 살펴보면 상당한 정도로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여성 예언자(?)로 높
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씬디 제이콥스(Cindy Jacobs)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 하늘로부터 두루마기가 와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 자리에 와 있다. 여
기에! 저기에! 저! 저 뒤로 가고 있다! 바로 이 자리에! 여기! 저기! 취하
라! take it! 뒤로! 뒤로! here! here! 여기 임재! 받으라! 취하라! 하나님
의 파도가 임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지금 일하고 있다. (전정희,
“밀려드는 ‘新사도적 개혁 운동’ 파도,” 교회와 신앙, amennews.com,
2006.6.5)
씬디 제이콥스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눈으로 보며 그것을 회중들로 하여
금 손을 들어 잡는 손짓과 더불어 취하여 받으라고 외쳤다. 이러한 메시지
와 현상에 담겨 있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점과 오류들은 집회
현장 안에서는
오히려 성령의 물결이며 능력의 체험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에 덮여지고 오히
려 고무된다.

2. 예언, 지혜, 지식의 은사

이러한 현상들을 결과하는 ‘제3의물결-은사주의 운동’은 다음과 같은 신학
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청취
하여, 예언과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전하는 신령한 은사를 인정하는 것이
다.
이 은사는 알파코스에서도 중심적인 은사로 높임을 받는데, 그 예언의 은사
는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되는가와 관련한 내용, 그러니까 왼
쪽으로 가야할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야할 것인가와 같이 매우 구체적
인 결정을 지시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우리가 다 믿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역사
와 삶 가운데 자신의 작정을 이루어 가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교훈을 보이셨
고, 이 교훈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판단하여 순종토록 하셨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내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행동을 하도록 교훈하고 있지 않
다. 말하자면 개인의 세세한 삶의 정황 안에서 신탁을 통하여 구체적인 인도
를 받도록 교훈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누군가가 이러한 구체적이며 세세한 삶의 선택들에 대해서 하
나님의 뜻을 말하여 주겠다고 주장하는 점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이므로 너희 가운데서 그를 제하라고 경계의 말씀을 주고 있다
(신 18:9-14).
지식의 말씀은 알파코스와 빈야드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은사 가운데 하
나이다. 이들은 치유의 은사를 행하기 전에 모인 이들 가운데 누가 치유를
받아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여 낸다.
예를 들어, 이 자리 모인 자들 가운데 주님께서 치유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
는데,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사람을 찾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아픈 부분과 동일한 신체 부위에서 자신도 아픔을 느
낀다고 말하며,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는 은사이다. 말하자면 지식의 은사는
치유의 은사와 함께 가면 치유를 실행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언과 지식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직접 받
게 됨으로 그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 방불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
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갖는다.
삶의 자리에서 성경의 교훈을 받아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
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비밀한 예언을 인정하
게 되면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에게 영적 형편을 의지하게 된
다.
말하자면 그 예언자(?)에 의하여 영적 질서가 재편성이 되며, 은사가 보이
는 능력의 규모에 따라서 권위가 계층적으로 형성이 되며, 그 예언자는 하나
님의 뜻을 밝히는 열쇠를 지닌 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즉 그는 하나님과 우
리 사이에 하나의 제사장, ‘다리를 놓는 자’(pontifex)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열쇠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있었던 예언의 은사는 살아 있던 사도들에 의하여 무리한 무질
서가 나타나지 않도록 통제를 받았다. 즉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를 받았
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도들에 의한 성경이 기록이 된 이후에, 성경 이외
에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 어떠한 예언이나 계시가 있다는 것은 성경과
더불어 최종적인 계시적 권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결코 인정
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능력 기도

다른 하나는 이른바 ‘능력기도’의 추구이다. 능력기도의 능력이란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의 응답을 확실히 보장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어떠한 현
실의 미래도 우리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
력을 뜻한다.
능력기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신자 일반과 일상의 일과 관련하여 대화를 나
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실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현
실과 미래를 바꾸는 능력기도에 담겨 있는 ‘능력’의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
에 대한 이해와 충돌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
고 또 고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라 할지라도 연약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죄를 범하
며 살면서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서 회개와 거룩한 순종의 인도함을 받는다.
복음은 고난의 십자가를 포함한다. 십자가의 신학이면서 또한 고난의 신학이
기도 한 복음은 빈야드에서 말하는 능력의 신학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음으로써 받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케 하시어 심어주신 새 성품
에 따라 성경의 교훈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은혜를 가리켜 말하는 것
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현실을 바꾸는 능
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능력의 신학’은 ‘고난의 섭
리’를 부정하는 그릇된 결과를 낳는다.

4. 치유 사역

알파코스와 빈야드 교회의 신학적 특성들 가운데 ‘치유사역’은 그들 사역
에 있어서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치유사역은 외적인 신체의 치유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감정 및 영혼의 치유까지를 망라한다. 앞서 말한 예
언적 지식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
내 이후에 치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위해 기도한다.
이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치유사역을 단순히 긍정적으로 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강조해야할 교회사역의 핵심적 요소로 생각을 한
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기 때문이
다.
빈야드 설립자 존 윔버가 그의 책 능력전도(Power Evangelism, 나단출판사,
2003년 7
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으로 표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이해에 따라서
자신들의 치유사역을 설명한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에 의
한 치유사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치유
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치유의 효과적인 범위의 측면에서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치유사역 자체는 ‘이미’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표적일 뿐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다. 즉 치유, 축사, 죽은 자를 살리심,
오병이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 물 위로 걸으심 등의 모든 이적들은 이것
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가 이루실 십자가
와 부활의 사역을 가리키는 표적들인 것이다.
이러한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 사
역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
는 평강의 나라, 임마누엘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할 것
임을
보이신 것이다.
결국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의 부활로 인하여 성취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재림으로 완성될 때에 이
루어질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한 십자가 죽음을 이루시고 또한 부활을
하셨으니, 이처럼 역사적으로 이미 일어난 구속 사건들을 믿거나 그 의미들
을 이해하기 위하여, 표적들이 다시 새롭게 나타나기를 바랄 이유나 그것들
에 의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과거에 있었던 표적들
을 믿고 그것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표적으로써 가리키
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과 그의 구속사역의 의미를 바르게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
역으로 인하여 죄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누리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지,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치유의 사역
을 행하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8장 16-17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
리고 예수께서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
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신”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
야 할 것인가는 이사야 53장의 해석과 관련을 갖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으로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말하여 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8장에서 치
유와 관련한 이적에 대한 해설을 이사야 53장으로 연결한 것은 그 치유의 이
적이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죄사함의 은혜를 가리키는 표적임을 말해준
다.
즉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 사
역을 가리키는 표적인 것이며, 그 표적들은 실체인 구속 사역이 이루어진 이
후에는 더 이상 구속사역의 이해를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 아닌
것이다.
만일 ‘이미’라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치유사역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음을 말하며, 또 ‘아직은 아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모든 이
들이 다 치유를 받는 보편적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라면, 왜 비단 치유사역만
이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겠는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도, ‘오병이
어’ 이적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이적도, ‘물 위로 걸으시는’ 이
적 등도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은 아님’은 치유사역의 효과적인 범위에
따른 양적 개념으로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동일한 하나님 나
라의 질적 완성의 개념에 따라 구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의
관점에서의 ‘능력전도’의 변명은 신학적 타당성을 잃는다.

5. 영적 전쟁

끝으로 빈야드 제3의 물결의 신학의 특성 가운데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소
위 말하는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은 실제
적으로 매우 심각하다. 프랑크 피레티(Frank Peretti)가 쓴 소설, 어둠의 권
세(This Present Darkness, 예찬사, 1986)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영적 실상
이 그러한 것처럼 이해하는 커다란 잘못을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영적 싸움의 대상은 뉴에이지를 좇는 사람들 또는 악한 영들
이다. 악한 영과의 싸움은 피터 왜그너(Peter Wagner)가 그의 책 기도는 전
투다(Warfare Prayer)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적, 주술적, 전략적 전투
의 세 구조로 실행이 된다. 이러한 영적 전쟁의 전재는 각 지역과 나라와 대
륙마다에 각각의 영역을 관장하는 귀신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
개인적이며 주술적이며 전략적인 차원에서 전투를 실행하여야 하며, 이것이
성도가 부르심을 받고 있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물리적인 물체나 건물들도 귀신들에 의하여 오염이 되어 있기 때
문에 물리적인 건물이나 물체들을 향하여서도 축사를 통해 영적 전쟁을 치열
하게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귀신들과 맞서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이러한 적어도 주술적이며 전략적인 영적 전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이 아니고 오직 축사의 은사를 사람들에 의한 대리적 전투를 통해서 실행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영적 전쟁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성
경에서 말하는 영적전쟁과 사
뭇 다른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영적 전쟁은 귀신들과 직접 대항하는 것
이 아니고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의 도리를 확신하고 거룩함을 온전
히 이루어 가며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거룩한 공동체를 실현하며 섬기는 것
과 관련한 것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 확인이 되는 영적 전투와 관련한 모든
교훈들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권면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already)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악한 영에 대
하여 승리를 하였으며(엡 2:1-3), 장래에 있을 완전한 구속을 보증하는 성령
을 받았다(엡 1:13-14).
이러한 맥락에서 ‘이미’ 승리한 것이요, 완전한 승리는 ‘아직은 아닌’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지역에 속한 악한 영들을 내어쫓아야 한다는 의미에
서 귀신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감행하여야 하는 전략적 의미에서의 영적 전투
는 결코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영적 전쟁이 아니며, 신뢰성을 갖지 못한
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document_srl=5273

 가져온 곳: 개혁주의마을/Grace

성막을 묵상하라 2 (휘장과 전설병상)


휘장 (Veil of Temple)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막 (커텐: curtain / veil) 입니다

  


 

마가복음 15:  37-38

예수께서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앞에 담대히 나갈수가 있습니다

  

진설병 상Table of showbread

 



<!--[endif]-->


 

 

출애굽기 25 29-30

 

너는 대접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위에 진설병 두어 항상 앞에 있게 할지니라

 

<진설병 : Consecrated bread >
고운 가루로 만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성소 안의 떡상에 올려놓는 떡을 말한다. 원래 뜻은 얼굴의 빵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놓는 빵이다( 25:30). 진설병은 열두 개의 구운 빵으로 줄에 여섯 개씩 줄로 진열하였으며( 24:6-7) 안식일마다 위에 올려놓는 일은 제사장이 맡았다(삼상 21:6). 하나님께 드리고 거두어 들인 빵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었는데( 24:5-9), 다윗의 경우 제사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들과 함께 진설병을 먹었다(삼상 21:1-6). 진설병을 두는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금테를 주위에 둘렀으며 상의 위치는 성소의 북쪽 등대 맞은편에 있었다( 26:35).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성만찬이 바로 이  진설병 상 (showbread table)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예수님의 몸과 피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때 꼭 기억하세요 



출처: http://blog.daum.net/choo1567/48

Don Choo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 까지...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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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중국학자에 장웨이린 교수가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일본 교수들의 말만 듣고 학술연구회에서 거북선을 처음 보았다.

저런 배가 400여년 전에 있었단 말인가?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술연구회의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일본교수진의 도움으로 책 7권을 하루만에 다 읽고 책을 놓은 뒤.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소리...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위인이 있다면 누구일까 물었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한참 동안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말했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일거라고...

그리고 학생들에게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두들 의아해 했다.

400여년 전 조선과 일본의 전쟁 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께 말한다.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조선 수군장수 이순신은 5천 명도 안되는 군사와 50척도 안되는 함대를 이끌고 40만 대군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하여 조선을 구할수 있었다.

일본군은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싸움의 고수들이었고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물고기나 잡고 농사나 짓던 나약한 병사들이었으나 단 1년 만에 훈련시켜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 여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한다. 나는 1시간 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 까지...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장웨이린 교수는

동북공정의 일환인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았다가 이순신 학술회를 시작으로 고구려 역사 편입 작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말한다.

역사학자가 후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두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히틀러가 몇백만 유태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며 숨기는 것,

또 한가지는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다.


성공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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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신종은 진린 장수로부터 긴급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은 우리 명나라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나라국으로 귀속 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페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은 신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 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폐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의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 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 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험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를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 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 여 척만이 남았으매 당황한 조선 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 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 여 척의 함대로 수 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하지만 조선의 국왕과 조정 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은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 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 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페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페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은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충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 오랑케를 켠제케 하소서. [ 명나라 장수 진린 ]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 전투였던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모두가 깜짝 놀라고 당황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순신장군님의 지휘함대가 제일 앞서 나가 왜적과 싸우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명나라 진린장수는 중국 광동출신으로 1597년 (선조30년) 정유재란에 어위도총관 전군 도둑으로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와 강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더블어 일본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워서 광동백을 하사 받는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그 후 고향으로 돌아 가지만 명나라가 망하자 진린의 후손은 한국 남해 장승포에 옮겨 살면서 광동 진씨의 뿌리가 된다.



명나라 장수 진린을 통해서 본 옛날 조선(대한민국)의 역사는 정말 슬프고 만감이 교차한다. 나라가 절대적인 위기인데도 장수를 모함해서 나라를 더 망치는 못난 일이 오늘날에는 없는지 살펴 보고 깨달아야 할것이다.



진린이 본 조선시대의 부끄러운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분명 의미 있는 교훈이 되어 슬푼 역사를 더이상 만들지 말아야 할것이며 특히 지난 역사를 통해서 본 훌륭한 인물들은 왜 대한민국에서는 살기가 힘든 것일까 ?



http://www.youtube.com/watch?v=6qq1XYz5JAk < ----- 클릭 하시겠습니까 ?



2014년 6월 18일 애국우파








이등병과 선임 부사관



군에 갓 입대한 한 이등병이
몹시 추운 겨울날 밖에서
언 손을 녹여 가며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소대장이 그것을 보고
안쓰러워하며 한 마디를 건넸습니다.



“김 이병!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다가 하지.”

그 이등병은 소대장의 말을 듣고 취사장에

뜨거운 물을 얻으러 갔지만,
고참에게 군기가 빠졌다는 핀잔과 함께

한바탕 고된 얼차려만 받아야 했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와 찬물로 빨래를 다시 계속하고 있을 때

중대장이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김 이병!  그러다 동상 걸리겠다.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서 해라!”

신병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이번에는 취사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 봤자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혼만 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빨래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중년의 인사계(선임부사관)가
그 곁을 지나다가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어이~!  김 이병!
내가 세수를 좀 하려고 하니까 지금 취사장에 가서

그 대야에 더운 물 좀 받아 와라!.” 

명령을 받은 이등병은 취사장으로 뛰어가서 
취사병에게 보고했고,
금방 뜨거운 물을 한 가득 받아 왔습니다.

그러자 인사계가 다시 말했습니다. 



“김 이병!
그 물로 언 손을 녹여가며 해라!
양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동상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소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인사계(선임부사관)
3명의 상급자 모두
부하를 배려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정말로 부하에게 도움이 된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의 관점에서 일방적인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에게 도움을 줬다고 혼자 착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우리는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배고픈 소에게 고기를 주거나,
배고픈 사자에게 풀을 주는 배려'는
나의 입장에서 단지 내 만족감으로 하는
허상의 배려입니다.



배려와 성공은 
배타적인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조화입니다. 

사소한 배려가 쌓여서
인생을 바꾸어가고 자신의
일과 삶이 안전하고 즐거워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배려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상 '배려'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글 이라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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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언약인 구약에서 성막을 이해하는 일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연습을 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먼저 내자신이 왕같은 제사장임을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 9)

성막은 하늘 나라의 모형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직접 성막을 지나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연습을 한다.

물론 머리속에는 성막이 완전히 그려져야 한다.  성경에서 가장 졸렵고도 힘든 부분인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의 성막에 관한 이야기와 레위기의 제사와 제사장의 역할을 모두 공부해야 한다.

 

지금부터 성막을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성막 :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명하신 일

 

모세에게 하나님이 직접 제작하라고 한 성막에 대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직접 명하신 적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때도 직접 설계하시고 직접 만드는 일에 대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는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성막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가 안가서

 그냥  대충 넘어갑니다

이 중요한 성막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막에 대한 설계 및 제작

 

  •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성막을 제작했습니다
  • 성막의 설계와 일군을 지명하셨고
  • 지혜를 주셨고
  • 우리는 성막재료를 자원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때 될수있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계획을 하시도록 기다리는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일이 쉽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무것도 안하면 큰일나요뭔가해야합니다

우리가 할수있는 일은 해야합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이런말들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

 

우리가 우리 지식과 힘으로 시작하면 하나님의 큰 계획을 놓치기 쉽습니다

겨우 작은 결과는 힘들여서 나올수 있겠지만  큰 결과는 나올수 없습니다

 

재료 : 성막을 짓는 재료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렸다

 

출애굽기 35: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 드릴 것을 택하되마음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 드릴지니

 

출애굽기 35:29

마음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일꾼:  하나님이 지명하셨다

 

출애굽기 35:30-31

모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지명하여 부르시고

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애굽기 35:34-35

그와 지파 아히사막 아들 오홀리압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지혜로운 마음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출애굽기 36:1-2 

 

브살렐 오홀리압  마음 지혜로운 사람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모든 일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것이니라

 

모세 브살렐 오홀리압  마음 지혜로운 사람   마음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일을 하려고 마음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성막의 구조

 


 

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9:2 -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9:3 -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9:4 -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

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성막의 기구들





언약궤, 증거궤, 법궤   (ARK)



 


 

 

출애굽기 37

순금으로 만든 네모난 궤 (상자) 입니다

그 위에 두 그룹 (천사) 가 서로 얼굴을 대하면 날개로 덮고 있습니다

 

위의 덮게를 속죄소(Mercy Seat)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1년 한번씩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립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냅니다. 이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피가 뿌려짐으로 은혜의 보좌가 됩니다. 

 

이 속죄소는 헬라어로는 Hilasterion이라고 합니다

그뜻은 화해,속죄 라는 뜻입니다 

 

The Greek word for “mercy seat” in Hebrews 9:5is hilasterion, which means “that which makes expiation” or “propitiation.” It carries the idea of the removal of sin. In Ezekiel 43:14, the brazen altar of sacrifice is also called hilasterion(the propitiatory or mercy seat) because of its association with the shedding of blood for 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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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안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언약궤 안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만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양식

아론의 지팡이 -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에게 보여준 증거

십계명을 적은돌판 율법 

 

 

예수님이 바로 법궤(Ark)입니다

 

시편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 마음 두었나이다

언약궤안에는 십계명이 적힌 2개의 돌판과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와 만나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둘수있는 분은 예수님 한분뿐 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감추시고 그위에 어린양이 되신 자신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고 오직 은혜를 베푸십니다

화를 내고 싶어도 저주를 하고 싶어도 못하싶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때 다 쏟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묵상하면 예수님안에서 우리가 은혜가운데 있는것을 알게 됩니다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자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갑니다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증거궤 위에 있는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처: http://blog.daum.net/choo1567/47 /don choo




 

      17세기에 프랜시스 페넬론은 "유일하게 불완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의 불완전함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말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온전함의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은 곧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온전함을 측정하는 잣대는 우리가 다른 이의 불완전함을 얼마나 참아내고 용서하고 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지 못할 때마다 나는 내 단점을 생각하고 다시 인내합니다. 당신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스스로 비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으로 인해 인내심을 잃을 때, 유일한 불완전함은 "참지 못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단순함이 주는 기쁨/조이스 마이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매일 사과 한알 먹었더니 콜레스테롤이 깜짝

동맥경화 일으키는 LDL, 4주만에 뚝!
[사진=중앙포토]
 
사과를 매일 한 알씩 먹으면 4주만에 혈액 속의 나쁜 콜레스테롤(LDL)이 40%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과의 항산화 성분인 폴리페놀 보충제를 먹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의학 전문 온라인 사이트 코메디닷컴이 4일 전했다.

연구를 수행한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로버트 디실베스트로 교수는 “LDL, 즉 저밀도 지단백은 유해산소와 결합해 염증을 일으키고 조직을 손상시킨다”면서 “이것은 동맥경화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사과는 녹차, 토마토 추출물, 큐커민 등의 여타 항산화제보다 산화 LDL 수준을 낮추는 데 뚜렷하게 좋은 효과를 보였다고 그는 말했다.

연구팀은 40~60세의 건강한 성인 51명을 3 그룹으로 나눠 ①그룹은 사과(레드 딜리셔스나 골든 딜리셔스 품종) 한 알 ②그룹은 사과 한 알 분의 폴리페놀(194mg)이 포함된 보충제 ③그룹은 가짜 보충제를 각각 4주간 매일 먹게 했다. 그 결과 사과 그룹은 LDL 수준이 40% 낮아졌으며 보충제 그룹도 어느 정도 LDL 수준이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가짜 약 그룹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기능성 식품 저널(Journal of Functional Foods)’에 실렸으며 영국 데일리메일이 3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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