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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utu.be/TjLCJKoot4U

 

 

 
      "    또 한 해 가  저무는데.....

                                     진 설병

국화가 지면
이 한해도
또 가고 맙니다.

봄 아침 이슬 머금었던
둥글레가
저렇게 서리에 바래지고

감나무 우듬지 까치 밥
다람쥐도 아껴
한 개만 달려 남았군요!

동네공원 단풍잎은
세월에 날려
은혜인양 뜨락에 쌓입니다.
일 년치 묵은 걸음 자욱
죄 쓸어다 놓은 것 같습니다.

이젠
그렇게 밤을 미 틀던
집 앞 공원의 웅성거림도
벤치 위
닭살 돋던 속삭임도
한낮 숲 그늘의 배려였든 지요.

야윈 바람
하필이면 앙상한 가지에 걸려
앙탈을 부리고
엊그제는 구름 마저
초상을 당했는지
눈물을 뿌리고 지나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또 님이 그리워 졌습니다.
내가 님께로 가든지
어서 님이 오시던지!......
유독 비 오는 날은
님 생각이 간절해 지거든요.

거룩하단 사람들이
모여 앉은 그자리
눈 부릅뜬 고함소리
앉으라 서라
틈새로 들리 던
둔탁한 의사봉 소리..
데모 군들의 선동소리 보다 진한 것……..

망막에 꽂혀지고
고막에 새겨 진 것
지워 지고 씻겨 저야 되는데….

간간이 아침 노을은 짙고
저녁 해도
짙은 루즈를 칠 한 채
굽은 허리 그냥 져 버리네요.

물론 여기나 저기나
소화불량 먹거리가 지천 이지만,
정작 허기진 배 꾸리는
채울 길이 없네요.

그렇습디다, 모순이죠.

당뇨 앓는 비만의 아림
사치로 운 푸념의 갈등도
밀물 썰물
파고의 현상 입니까!

거룩한 곳에는
소돔 인들이 제법
아론을 대신해 서 있고

바알과 아세라와 어울려
덩 더 쿵 한 무리 굿판
춤 사위가 복되다 하는군요!

소알 길에 본 새벽
옹기점 같이 솟는 연기
롯인들 원했겠습니까!

어찌 토네이도가 지나간
아침같이
그렇습니다.

하기야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
우리 땅 끝자락 바닷가에 모여
로-드 맾을 그리고 있고
지구 촌은
도 다른 날을 위해
불을 밝히고 있네요.

근데
정녕 오실 님은 기척도 없고……
언덕 위 올라서도
여전 그 메아리
녹음 인 듯 들려 올 뿐입디다.

돌아와 앉으니
하필 초인종이 울려
행여 누구인가
부리나케 나가보니
UPS 소포가 왔는데요.
어쩐지 애타는 마음은
소포 뭉치를 싸고 돕니다.

나팔 소리로 오실
님이 신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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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것을 아시나요?
(제6계명의 위력)


우리의 심령을 피폐하게 만들고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 신앙생활을 헤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6계명의 위력을 알지 못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얼마나 될까요?

둘러보건대,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이 제6계명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인간과 인간의 소중한 관계가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하며

회복할 수 없는 데까지 악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소중한 관계성이 깨어지는 것은 큰 사건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뜻밖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사소한 말의 실수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내가 받아 아프다고 비명지르며 고통 받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행복해야 할 가정이 깨어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다정하던 이웃과 친지의 관계성이
어이없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행복한 개인, 가정, 사회생활,
그리고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십계명 중 제6계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 
핵심 key word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6계명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에이, 우리 별님도,
우리가 살인을 어떻게 한다고 그런 말쌈을?
궁금하신가요?

우선, 살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종류가 있음을 우리 함께 잠시만 생각해 보실까요?

필살(筆殺): 조진은 공명에게 필살 된다.(삼국지 중)
글로써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 예가 되겠습니다.

(口殺):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심하면 사람도 죽인다.
입(口)으로 사람을 죽(殺)인다는 뜻이랍니다.

구살(構殺):
허구()의 사실()을 날조하여 죄로 몰아 죽이는 것,
 말
로는 성도라고 하나 마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당하면(시기, 질투)
상대를 적으로 간주, 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꾸미기도 하고 모함하기도 하는 말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많이 안타깝지만 사실인 것을요.

촌철살인(寸鐵殺人):
'한마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 라는 뜻

말로서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경계하라는 의미이겠습니다.

禍自口出 이고 病子口入이라
"화는 스스로 입으로부터 나오고
병은 스스로 입으로부터 들어온다" 라는 말이라네요.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자칫하면 사람도 죽이는 것입니다.

작은 입에서 이렇게 무서운 살인을 저지를 수 있으니,
옛날 성현이나 선지식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입조심이었겠지요.

입으로 나오는 나쁜 말 몇 가지,
악담, 거짓말, 이중 말, 모함하는 말, 그리고 쓸데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그 무엇보다도 입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조심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존경하는 마음,
무엇보다 말을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물러설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내게 잘못 했을 때,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는 cool 한 마음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오해가 생겼을 때에는 상대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어 주고 받아주는 넓은 아량마저 갖춘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니까요...^^

오늘날,
성도들의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흉기를 사용한 직접살인,
물리적인 살인을 실행에 옮기기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대개는 구살이 이에 적용되는 살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에 따른다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사람의 양심이란 것도 이미 병이 든 상태이기에,  
온전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기준, 신앙의 잣대(Canon)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과 생각을 비추어 보고
날마다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느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약 3: 8-11)

바른말, 정직한 판단으로 권고하는 것은 용기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꾸미거나
자기 생각으로 상대의 마음을 저울질해서
함부로 헐뜯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 마 5:26)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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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문은 내가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신을 숨기고 감추는
    작은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의 문은 항상 잠궈 두고
    함부로 열게 되면
    자신이 큰 손해를 보는 줄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타인이 들어올 수 없게 굳게 잠가 두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커다란 열쇠를 채워 두고
    사람을 대한다면
    상대방도 더욱 굳게 닫아 두고
    경계하며  채워두고 또 채워두게 됩니다.

    자신의 집 잠긴 문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려 한다면
    많은 부작용이 생겨
    좋지 못한일이 생길 것입니다.

    대화의 중요성은
    먼저 나부터 문을 열어 놓아야
    타인도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간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문을 열어 보세요.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활짝 열어 두세요

    분명히 누군가가 필요할 때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 좋은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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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구성된 시편 111편, 112편, 119편, 애1.2.3.4

    우리말의 가나다라 순서에 따라 각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시가 있듯이 성경에도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답관체 시가 있어 매우 주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말로서 다음과 같이 만들어 본다면

     

    1.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답관체라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踏冠體) 형식의 시라고 한다.


    2. 그런데 성경가운데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답관체 형식으로 4권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편에서 가장 긴 시편 119편이다. 시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한연에 8절씩 배열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
    א)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ב)로 시작하고 (17-24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세 번째 글자인 "끼멜"(נ)로 시작하고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119편은 무려 176절 22연으로 되는 긴 시가 되었다.

    시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예례미아 애가도 5장까지 됐는데 1장2장의 1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22절 끝절은 타우(ת)로 끝난다.히브리어 알파벳은 22개이 때문이다. 그러나 3장은 좀 다른데 앞 1장2장과는 다르게 (1절~3절)은 히브리어 첫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끝절인 (64절~66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끝자인 타우(ת)로 끝난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22자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알파벳 1자마다 3구절씩 묶으니 66절에서 끝난다.예례미아 애가 4장도 1~2장과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5장은 전혀 다르게 답관체 형식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이하게 보일지라도 히브리어 원문에는 글자 하나하나에 자음하나하나에까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녹아있고 시적 표현과 음률이 잘 배합되어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본문에 히브리어 및 헬라어 원문이 안보이고 네모로만 나타나면 여기를클릭해서 폰트설치하셔야 원문을 볼수 있다.

     

     

           
           
           
          

     

    시편 111편 내용

     

             הללו יה  

    1     אודה יהוה בכל־לבב   A 알렢

                 캅레     칼베   웨야       데오

            heart     with-all-of    Yahweh   I-will-extol

                내가 전심으로 야웨를 높이리로다

                        בסוד ישרים ועדה׃       B 뻬트 

                    데에우      림사여      드소베

                and-assembly  upright-ones in-council-of

                       내가 정직한자의 회와 공회중에서

     

     

                 גדלים מעשי יהוה     G 끼멜

                                 여호바     마아세   게도림

                      Yahweh    works-of  great-ones

                         여호와께서 하시는일이 크니


           
    דרושים לכל־חפציהם׃
          D 달렏

                    헤페체헴       르칼           데루쉼

     delighters-of-them  by-all-of  ones-being-pondered

                 이를 즐거워하는 모든자가 탐구하는구나

            

     3          הוד־והדר פעלו  H

                                    로아포 달호여 드호

                        deed-of him   and-majestic   glorious

                              그 행사가 존귀하며 엄위하며

              וצדקתו עמדת לעד׃        W 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카데치여

              to-forever  one-enduring  and-righteousness-of-him

                                그의 의가 영원히 있도다.
               

       4      זכר עשה לנפלאתיו   Z 자인 

                      우티로페니레  사아    켈제

    for-deeds-being-wonders-of-him  he-caused remembrance

                    그가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חנון ורחום יהוה׃         H 헤드 

                        웨야     훔라여        눈한

                  Yahweh  and-compassionate  gracious

              야웨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도다.

                                                                                                                                                                                              

     5          טרף נתן ליראיו   T 테드

                                  우이아레리  탄나  프레테

                       for-ones-fearing-him  he-provides  food

                     야웨께서 자기를 경외하는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יזכר לעולם בריתו׃       Y 요드

                        토리베     람오레      콜지이

                     covenant-of-him to-forever  he-remembers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כח מעשיו הגיד     K 카프

                                   드닌히  우차아마   흐아코

                            he-showed   works-of him   power-of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לעמו לתת להם נחלת גוים׃      L 라멧

              임고  트라하나  헴라  트테라      모암레

         nations  land-of  to-them   to-give    to-people-of him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7    מעשי ידיו אמת ומשפט   M

                  트밧사미우  트멤에  우디야   쉐아마

                and-just   fathful   hands-of-him  works-of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이며
                     נאמנים כל־פקודיו׃           N

                      우이다쿠피   콜   님마에네

          precepts-of-him  all-of   ones-being-trustworthy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8      סמוכים לעד לעולם   S 싸멕

                       람오레   드아레       킴무쎄

                    to-forever   for-ever   one-being-steadfast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עשוים באמת וישר׃          Y 아인

                       살이여  트메에베      임수아

            and-uprightness  in-fathfulness  one-being-done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9     פדות שלח לעמו       P

                     모암레      라사     트두페

              for-people-of-him   he-provided  redemption

               야웨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צוה־לעולם בריתו               TS 차데

                        토리베   람오레  아흐우치

            covenant-of-him  to-forever  he-ordained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קדוש ונורא שמו׃            Q 코프

                        모세  라노여      쉬도카

                        name-of-him  and-being-awesome holy

                       그 이름이 거룩하시고 지존 하시도다

     

     10   ראשית חכמה יראת יהוה   R 레쉬

                     웨야   트아레이   마크호      트쉬레

                Yahweh  fear-of   wisdome    beginning-of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שכל טוב לכל־עשיהם    S 신 

                 헴쉐이  콜레  토브        켈쉐

             ones-following-them  to-all-of   good  understading

                   그 계명을 따르는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이                      

            תהלתו עמדת לעד׃     T 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라힐테

                 to-eternity   one-enduring   praise-of-him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고비야(히브리어로 뜻 죽다)  גֹּוִיָהּ  : 제 성씨, : 그리고, : 하나님

    고비야 : '하나님과 나' 입니다.(갈 6: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출처: 아멘넷, 고비야님


    書林逍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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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사랑스러운 나무 
                           Alfred Edward Housman

     

     

    나무들 중에서 가장 사랑 스러운 벚나무는

    이제 가지 마다 만발한 꽃을 피우고

    부활절에 즈음하여 흰 옷을 입고서 

    숲속 오솔길 옆에 줄지어 있구나

      

    내 평생 일흔 살 생애 중에서

    다시는 스무 살이 돌아오지 않으리

    열흔 번의 봄에서 스므 번을 뺀다면

    가만있자 남은 것은 쉰뿐이구나

     

    화사로운 꽃을 보기에는

    쉰 번의 봄도 너무 짧으매

    벚꽃이 피어 있는 숲으로 가서

    흰 눈처럼 피어 있는 꽃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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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의 강1/마종기  (0) 2011.11.23

    인생은 끈이다.
    사람은 끈을 따라 태어나고,
    끈을 따라 맺어지고, 끈이 다하면 끊어진다.
    끈은 길이요, 연결망이다.
    좋은 끈이 좋은 인맥, 좋은 사랑을 만든다.
    인생에서 필요한 5가지 끈을 알아보자.



    1.매끈

    까칠한 사람이 되지 마라.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고,
    모난 돌은 정맞기 쉽다. 세련되게 입고,
    밝게 웃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매너 있게 행동하라.
    외모가 미끈하고 성품이 매끈한 사람이 되라!



    2.발끈

    오기있는 사람이 되라.!
    실패란 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
    어려운 순간일수록 오히려 발끈하라!






    3.화끈

    미적지근한 사람이 되지 마라.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화끈하게 하라.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
    내숭떨지 말고 화끈한 사람이 되라!



    4.질끈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
    실수나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을 쓸데없이 비난하지 말고
    질끈 눈을 감아라.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입이 간지러워도 참! , 보고도 못 본척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다른 사람이 나! 비난해도 질끈 눈을 감아라!





    5.따끈

    따뜻한 사람이 되라.
    계산적인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이 되라.
    털털한 사람, 인정 많은 사람,
    메마르지 않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아는 따끈한 사람이 되라!

    끈끈한 만남이 그리운 세상이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한번 인맥은 영원한 인맥으로 만나려는
    끈끈한 사람들이 아쉬운 세상이다.
    매끈, 발끈, 화끈, 질끈,
    따끈함으로 질긴 사랑의 끈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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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형수술


    아내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 부쩍 성형 수술을 해달라고 졸라댔다. 


     

    성화에 못 이긴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유명하다는 성형외과를 찾아갔다. 


     

    의사선생님이 꼼꼼히 살피면서 고칠 부위를 검사했다.


     

    의사는 한참을 견적을 계산해 보더니 아내를 잠시 밖으로 내보냈다.


     

    불안해진 남편이 견적이 도데체 얼마나 나왔냐고 물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의사가 드디어 결심을 한듯 말을 했다.



     

    "이 정도의 수술비면 위자료로 주시고, 새 장가를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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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인규
                   
    요즈음 눈을 의심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소위 정통교회에 속한 목사들이 이단들의 주장을 대신 옹호하고 지지해 주며, 이단연구가를 거꾸로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명 월경잉태론이라고 불리는 논쟁인데, 친이단신문들이 이와 관련한 기사를 계속 싣고 있으며, 이단들도 함께 동조하고 있는데, 그동안 친이단성향을 가졌던 몇몇 일부 목사들이 그들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몇몇 일부 목사들이 친이단신문과 이단들과 함께 동조를 하는 이런 이상한 일이 나타나고 있을까?  

    한국교회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P교회 P목사는 마리아가 월경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즉 여자의 월경을 죄악의 결과로 보는 매우 특이한 견해로서 예수의 무죄성을 이상한 개념으로 판단하는 주장인데,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원죄를 아담의 불순종으로 보는 견해가 아니라, 피로 인하여 전하여진다고 보는 잘못된 죄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경의 뒤에는 하와가 뱀과 간음을 하여서, 여자가 월경을 하게 되었다는 통일교의 원죄론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월경을 통해서 낳은 자식들이죠? 여기 월경을 통해서 낳지 않은 자식들이 어디 있어? 우리 어머니가 월경을 통해서 다 낳았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아들의 씨는 월경 필요 없이 낳았다는 것을 이미 구약 때 아브라함 때 비밀을 보여줬죠? ···하나님께서 죽은 송장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낳았죠? 그러니까 장차 예수가 그렇게 온다는 것을 미리 마귀 몰래 누군가에게 암시를 해줬죠? 암호를 대 준 거 아닙니까?”(P 목사의 설교 녹취록).

    P목사는 하와가 아담 몰래 뱀과 간음을 하여 가인을 낳았다는 통일교식 원죄론을 주장하였으며, 그 결과 여자에게 월경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누구의 자식이냐 이 말이야? 하와의 육체 속에 심어 놓은 정말 아담이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와서 심어 놓은 씨인 줄 아담은 깜깜하게 영계가 어두워서, 알 수 없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말씀을 들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P 목사의 설교 녹취록).

    최삼경 목사는 P목사의 녹음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P목사의 이단성을 적절하게 비판하였는데, 그러한 과정 중에서 최삼경 목사는 마리아가 월경이 있는 여자라고 주장하면서 P목사의 원죄관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최삼경 목사는 P목사의, 월경없는 여자 마리아를 통해 예수가 태어났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살과 피는 월경하는 여자 마리아의 살과 피에서 취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이단옹호언론으로 이미 발표된 신문들과 일부 친이단 인사들이 이단규정된 P목사보다 오히려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며, 소위 월경론잉태론이라는 이상한 명칭을 만들어서 이단이라고 모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은 친이단신문이니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것이다. 친이단신문이나 이단들의 입장으로서는 항상 눈의 가시와 같았던 최삼경 목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우리의 눈을 의심하는 일이 있었는데, 예장통합의 L목사, Y목사, E 신문의 H목사와 같은 친이단성향으로 평소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몇몇 목사들이 그러한 친이단언론 등의 주장에 동조를 하면서, 이단옹호언론과 함께 ‘월경잉태론’이란 단어를 만들어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제 여기에 한기총 질서위까지 이단옹호언론과 친이단인사들과 동조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 왔다. 사실상 질서위의 발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이단옹호언론들과 친이단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그 내용이 그대로 반복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기총의 발표가 충격인 것은 그것이 소위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연합기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제까지 보여줬던 한기총의 정상적 이단규정의 모습과 판이한 이 모습은 왜 나오는 것일까? 말없는 다수는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이단옹호언론과 친 이단 인사들이 문제제기한 논조와 동일하게 따라가고 있는 한기총 질서위의 발표처럼 최삼경 목사는 예수님의 성령의 잉태를 부인하고 신성모독을 하는 사람일까?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에게로부터 왔다고 하면 이단이란 말인가? 필자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고의적인 목적이 있는 조작이다. 그것에 대해서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일반 여성과 동일하게 정상적으로 월경이 있었다고 하면, 성령잉태를 부정하는 것인가?
    둘째, 인간의 원죄가 그 모친의 월경 때문인가?
    셋째,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취하였다는 정상적인 기독론이 이단인가?
    넷째, 그것도 아니라면, P목사가 주장하듯이 마리아가 무월경이었다는 주장에 한기총 질서위는 동의하는가? 여자의 피를 통하여 원죄가 전해진다고 생각하는가?

    -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고 나셨지만 그러나 그 인성마저도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얻으신 것이지 죄로 오염된 인간 마리아의 피를 통해서 물려받으신 것이 아니다.(기독교연합신문에 기재된 L목사의 글)

    (1) L목사는 최삼경목사의 주장을 "모든 주장을 종합하면 마리아의 월경, 곧 마리아의 피를 통해서 태어났다는 뜻이다"라고 자의적인 추측과 해석을 하고 있다. 즉 그가 월경잉태론이라는 용어를 조작한 것이다.
    (2) 또 아래 글의 제일 밑 부분에서 그는 "예수님의 인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얻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3) 그는 마리아가 죄로 오염된 피를 갖고 있다고 말하였다.

    최삼경 목사를 월경잉태론자라고 비판한 글들을 살펴보며 몇 가지를 비판하고자 한다.

    1) 마리아가 월경이 없었나?
    우리는 성경적으로 마리아가 월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성경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뭘까? 이는 P목사의 이단적 주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마리아에게 월경이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며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죄가 유전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을 했었다. 이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최삼경 목사도 ‘월경’을 말하게 됐던 것이다. 성경은 마리아가 동정녀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언급한다. 그러나 마리아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무월경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또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피를 통해 죄가 유전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 특히 통일교식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마리아가 무월경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어왔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수태를 예고하였을 때에, 마리아가 만약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석녀였다면 마리아는 “나는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답변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는 점을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야만 한다. 즉 마리아가 수태를 하게 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 된다고 생각한 이유는, 처녀 마리아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며,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기를 잉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마리아가 일상적이며 정상적인 처녀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2) 인간의 원죄가 모친의 월경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단이다.
    인간의 혈액을 통하여 죄가 전해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병원에서 누구의 피인지도 모르는 혈액수혈을 받을 때에 거부를 하여야만 할 것이다. 인류의 원죄는 첫사람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그것을 불순종함으로서 초래된 것이다, 그 원죄로 인한 죄책이 사망으로서 온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며, 그 원죄로 인한 부패성, 오염이 곧 죄성이 된다. 원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오염된 혈액으로 죄가 전달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단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피에 죄가 오염되어있단 말인가? 그것이 기독교의 원죄인가?
    만약 모친의 월경이 없어야만 태아가 무죄가 된다거나, 모친의 월경이 있으면 태아가 죄가 있다고 주장을 하면 그는 당연히 이단이 될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체가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

    3)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가 아닌 성령 혹은 하늘로부터 왔는가?
    이러한 주장은 교회사적으로 정통기독론에서 이미 결정되었던 이단적인 주장이다. 정통신학은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약 예수의 인성이 우리와 다른 인성이라면 심각한 이단적인 기독론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대신 져야 해결된다. 예수의 피와 살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피와 살이며 마리아의 살과 피로 취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2:14).

    기독교의 주요한 신앙적인 기준이 되는 칼케톤신조도, 웨스트민스터신조도, 모든 정통교단의 조직신학이 예수의 인성은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취하여졌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조직신학은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나, 예수의 인성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취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벌콥과 마틴로이드존즈와 웨인그루뎀 등 거의 모든 조직신학자들과 하문호, 황승룡 교수 등 국내의 조직신학자들도 모두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된 새로운 인성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자를 위해 새로운 인성을 창조하셨으며, 이 인성은 말하자면 마리아를 통해 단순히 전해졌을 뿐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은 틀렸습니다. 성육신 교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성을 자신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취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인성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마리아에게서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자주 강조하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이십니다“(마틴로이드 존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50쪽).

    “이것은 크나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했고, 마리아에게서, 그의 몸의 세포 하나에서,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같은 책. 355쪽).

    마틴 로이드존스는 예수의 인성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월경있는 여자 마리아로부터 취했다는 최삼경 목사의 주장은 신성모독도 아니고, 성령잉태를 부인하는 주장도 아닌, 정확한 정통신학적 견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다.

    “‘아 알았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특별한 인성을 창조하셨구나, 그렇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이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인성을 마리아에게서 취하였으나, 이 일은 성령에 의해 전혀 죄와 오염에서 자유롭게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같은 책, 357쪽).

    에든버러 프리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인 도널드 맥클라우드의 “그리스도의 위격”(IVP) 50쪽을 보자. 그 교수는 예수의 인성에 마리아의 난자와 유전자, 수정체까지 기여하였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ex Maria) 즉 마리아의 실체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마리아는 어떠한 인간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기여하는 바(난자, 유전자, 보통의 수정체의 성장과 정상적인 분만)를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기여하였다. 전적으로 적절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의 태의 열매’(눅1:42)였다. 존피어슨은 자기의 태의 열매와 관련하여 다른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것이라도 마리아에게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동정녀가 어머니로서의 행위들을 수행하도록 민들어 주는데 필요한 것 이상의 역할이 성령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개혁주의 유명한 신학자 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200쪽을 보자.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 마리아에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재세례파의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육신에서 가끔 말씀이라 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다. 이것은 본래의 실재가 중지되었다거나, 한 인간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전이나 후에나 확실히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신성에다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는 성육신을 통하여 마리아의 실체에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실제로 인류의 일원이 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며, 마리아는 단순히 그것이 통과하여 온 운하, 혹은 도관이었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에 대항해서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문호 교의신학 (4) 기독론, 한국로고스연구원, 91쪽을 보자. 역시 예수가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취한 것이 아니며, 그 인성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단지 마리아를 통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 "예수의 참되고 완전한 인성을 깨뜨리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한다.

    “초대교회의 어떤 이단자들과 재세례파에서는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을 하늘로부터 가져오셨고 마리아는 단지 그의 인성이 통과하는 관(channel)과 같은 것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인성을 깨뜨리는 잘못된 주장이다.”

    기독교의 기독론은 칼케톤회의에서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본다. 우리 개신교는 카톨릭의 수많은 신조를 모두 지지하지 않지만, 초대교회의 3개의 신조, 즉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신조는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것을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칼케톤신조는 “신성으로는 창세 전에 성부로부터 출생하였고,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하여 신의 수태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이정석교수 역)고 되어있다.

    또 웨스트민스터신조 8항 2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예수의 인성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그녀의 형질(본질, substance)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8.2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고 동등한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때가 차매 그에게 인간의 본성, 즉 그에 따르는 모든 본질적 속성과 죄를 제외한 공통적 연약성을 취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그녀의 형질로 잉태되었다. 그리하여 두 가지의 전체적이고 완전하며 구별되는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함께 나누어질 수 없게 결합되어 변환, 혼성, 또는 융합되지 않는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지만, 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중보자이다.”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23쪽을 보면 “이와 같은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 볼 때에 인성과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심으로 인간인 어머니로부터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탄생하셔서 완전히 인간이 되게 하시고 동시에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 잉태되게 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승룡교수의 조직신학(한국장로교출판사) 하 46쪽을 살펴보자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의 참여자임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예수가 현실적인 한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태어났음을 말한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그 여자의 살과 피로부터 태어났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거의 모든 정통신학은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에게로부터 온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장로교회 목사라면 캘빈의 기독교강요의 2권13장 성육신편에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캘빈은 기독교강요 성육신론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가현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키온파들과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와 다른 천상적 육신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마니교도를 비판한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도 여자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났다고 하기 때문이다(갈4:4).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염치도 버리고 방자하게 묻는다. 그리스도는 처녀의 경도 씨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냐고···. 나는 그가 어머니의 피와 결합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며, 그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에서 곧 추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하므로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라고.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났다고 할 때에(마 1 : 5) 유사한 생산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태는 여기서 처녀 마리아를 그리스도가 통과한 수로(水路)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놀라운 생산방법과 보통 방법을 구별한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며,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나며,요셉이 야곱에게서 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셨다고 한다. (기독교강요, 2권13 성육신 / 3.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혈통 )

    오늘날도 예수의 인성이 마리아가 아니라 하늘에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더욱이 그들은 이단교회를 동조하고 있지 않는가?

    4) 최삼경목사가 성령의 잉태를 부정하였는가? 일부 목사들과 친이단성향의 신문기사에서 최삼경목사가 성령의 잉태를 부정하였다고 말하거나,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였다는 내용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최삼경목사가 쓴 글을 아무리 읽어도 성령의 잉태를 부정하거나 인성을 부정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이런 거짓조작을 하는 자체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령의 잉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고, 현재 논의가 되는 점은 예수의 인성이 어디로부터 왔는가가 아닌가? 또 과연 마리아의 피를 통하여 죄를 물려 받았는지에 대한 논쟁이 그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삼경목사는 예수의 인성은 마리아에게서 왔다고 주장하며, 최목사를 공격하는 몇몇 목사들은 예수의 인성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또 마리아가 월경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최삼경목사가 마치,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공격을 하고 있지 않는가?

    5)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일부 목사들의 친이단적인 성향이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이단을 연구하고 대처하는 사역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단을 연구하는 목사를 최소한 방해하거나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지방교회를 동조하여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으로 모함하고, 이단 P목사에 동조하여 최삼경 목사를 월경잉태론자로 모함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결과로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제 여기에 한기총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단사상을 경계하고 오히려 이단자들과 이단옹호언론과 친이단성향을 가진 목사들이 이미 주장했던 논리를 갖고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출처: 아멘넷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목사)가 왜 지금의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그 내막을 살펴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현재 이광선 직전 대표회장과 최측근인 박중선 목사,그리고 길자연 현 대표회장과 최측근인 홍재철 목사, 이렇게 4인방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런데 이 4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박중선 목사가,기성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이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교계로부터 이단 의혹을 받아왔던 장재형 목사와 변승우 목사에 대해 한기총이 혐의 없음을 발표하자, 주요 교단들이 이를 반박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연 자리이다.
    당시 예장합동총회 이치우 총무가한기총 4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박중선 목사가 2005년 베뢰아 성락교회로부터 1억여 원을 받았다고 처음 폭로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데다 장재형 씨와 변승우 씨 이단 해제가 주된 내용이어서 이치우 목사의 발언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한기총이 최근 이단을 옹호하는 듯한 행보를 계속하면서 4인방 가운데 한 명인 박중선 목사의 이단 금품수수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CBS가 최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성락교회는 지난 2005년 6월 세 차례에 걸쳐 박중선 목사가 설립한 한국기독교총협의회에 1억 7천만 원을 송금했다.
    이 돈 가운데 1억 천만 원이 다시 박중선 목사가 속한 예장합동 개혁진리 교단으로 빠져나갔다.

    한국기독교총협의회는 한기총과 유사한 이름을 사용하는 별도 법인으로 박중선 목사가 주도해 만든 조직이다.
    돈이 입금된 2005년 이후 이 한기협은 기존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베뢰아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에 대해 이단혐의가 없다고 발표하는 무리수를 뒀다. 당시 베뢰아 성락교회 측이 1억 7천만원 원을 송금한 것이 대가성 있는 돈이었다는 의혹이 이는 대목이다.

    박 목사는 이단 관련성 때문에 당시 한기총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다시 복권 돼 지금은 한기총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처럼 명백한 금품수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중선 목사는 이단으로부터 받은 금품수수를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CBS가 확보한 증거 제시에도 불구하고 박중선 목사는 이단으로부터 1억 여 원을 받은 사실에 대해 시종일관 부인하고 있는 것.
    지난 14일 열린 WEA 한국유치 감사예배 현장에서 CBS는 박중선 목사를 만나 이단 베뢰아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은 사실에 대해 집중 캐물었다.
    박 목사는 자신이 설립한 한기협 이름으로 금품을 받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만 일관했다. 그러면서 갑작스런 취재가 당황스러웠는지 취재진에게 욕설을 하며 취재용 카메라를 내려치기도 했다.

    CBS는 이후 박 목사에게 수 차례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 한기총 관계자들이 뉴욕에서 WEA 터너 클리프 총재와 회동을 했다. 왼편부터 박중선 목사, 이광선 목사, 터너 클리프 총재, 길자연 목사, 장재형 목사, 홍재철 목사.     © 크리스찬투데이

    문제는 이런 박중선 목사가 한기총의 WEA, 세계복음주의연맹 총회 유치 과정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교 출신으로 이단성을 의심받고 있는 장재형 씨를 연결시킨 인물도 바로 박중선 목사로 알려졌다.
    특히 박 목사는 지난해와 올해 전, 현직 대표회장과 함께 WEA 뉴욕사무소를 함께 방문해 장재형 씨와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요즘 한기총이 이단 옹호 행보를 보이는 데는 이처럼 이단과 밀접한 인사들이 한기총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출처 = CBS TV보도부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이라고 하는 것도 조작이다
                           
                                                                                          이인규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이라고 발표한 한기총 질서위원회는 신학적으로 무지한 사람들만이 모여 있는지, 아니면 최삼경목사를 평소부터 이단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헐뜯고 비방하던 L목사와 같은 사람들의 글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이며, 정말 측은하고 한심한 생각만 든다. 한기총은 조사를 잘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기총은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이라고 조작하는 자들을 조사하기 바란다.
                                     
    조사를 하기도 전에 한기총 질서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용도목사의 이름으로 발표한 성명서는 최삼경목사에 대해서 이단들이 사용했던 "이단감별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최삼경목사에게 "심각한 이단성이 있다"는 표현과 “신성모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예장통합은 최삼경목사를 이대위원장에서 해직시키라"는 내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질서위원회 위원장인 김용도목사는 9월21일에 조사를 한 것이 처음 모인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21일날 오전에는 삼신론과 월경잉태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하도록 되어 있고, 오후에는 최삼경 목사를 오라고 하여 듣고 그걸 우리가 종합을 해서 어떤 대책을 의논하기로 되어있다”라고 말하는 녹음자료를 갖고 있다. 삼신론과 월경잉태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조사를 받기는 커녕 조사위원회의 명단에 들어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질서위원회 위원장인 김용도목사는 전화에서 이XX라는 분과 통화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XX: 질서위원장 위원장 목사님 이름 써 놓고요. 최삼경이가 이단성이 있다 이런식으로 만들어 놨어요. 아예.

    김용도: 이단성 있다고 그러면 안되지. 이단성에 대해서 시비가 있으므로 조사를 21일 한다고 그래야지. 말도 안되지.

    이XX: 그래도 나는 목사님 명예에 누가 될까 싶어서 미리 전화 드리고, 목사님에게 알려 드리는 거예요.

    김용도: 그러면 내가 한기총 그새X들 조져뿌리는 거야. 그 따위 식으로 내이름 가지고 지난번에도 장난했는데, 요번에도 또 그러면 조져 뿌리는 거야.

    질서위원회 위원장은 조사를 한 적이 없으며 조사를 하기도 전에 이단성이 있다고 발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며칠전에 질서위원회는 최삼경목사를 "심각한 이단성, 신성모독"이라고 발표하며 "이미 조사를 하였다"고 발표를 한다.  
    질서위원회의 위원장인 김용도목사는 한기총을 “조져 뿌리기” 바란다
    그리고 김용도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한기총은 21일에 조사를 하여 24일에 발표를 하였으니, 3일만에 조사를 하여 발표한 것이 되는데, 더욱이 그 내용도 예전부터 조작과 매도를 하던 몇몇 목사들의 무지한 내용에 불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임원회나 실행위원회에서 결의가 되기 전에 미리 기자회견을 발표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결국 월경잉태론을 조작하던 그 목사의 평소의 조작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그것도 친이단신문 4곳만 불러 발표를 하게 된다.
    한기총은 조작을 하려면 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조작을 하기 바란다
    먼저 질서위원회가 발표한 내용을 살펴보자

    - 최삼경 목사는 “성부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요 성자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요 성령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영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 영들의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하나님도 한영이요, 성령님도 한 영인데 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라고 주장한 바 있다.(교회와 신앙 96.12월호) 최 목사의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도 한 영이시고 성령도 한 영으로서 하나님은 두 본질(영)을 가진 분으로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자신이 주장한 하나님은 ‘한 영이 아니라 세 영들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삼위 하나님은 영이 각각 다른 본질을 지닌 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고 이종성 박사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 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형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 존재방식에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삼위일체라는 형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 목사는 삼위 하나님을 각각의 본질을 가진 ‘세 영들의 하나님’, 곧 세 분 하나님으로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의 질서위원회 기사)

    정통삼위일체는 본질로서는 하나이지만 인격으로는 상호교류가 가능하고 구별이 되는 셋이어야만 한다. 즉 삼위일체는 하나의 단일성(Oneness)과 동시에 셋의 구별성(Threeness)을 말하여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인 점에서 하나라고 하면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이 되고, 본질로서 셋이라고 할 때에는 삼신론이 된다,

    질서위원회는 최삼경목사가 “성부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요 성자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요 성령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다.”라고 말했다고 인용하면서 그것을 삼신론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지의 소산으로 보인다.
    분명히 최삼경목사의 글은 “성부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오, 성자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오, 성령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서위원회는 “인격으로서”이라는 단어를 빼버리고 그 대신 “본질”이라는 추가시켜 최삼경목사가 “삼위하나님은 영이 각각 다른 본질을 지닌 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최삼경목사가 본질과 인격에 대해서 구별한 내용을 설명한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생략하고 있다.

    - 만일 한 영이란 말이 본질의 단일성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맞다고 볼 수 있으나 윗트니스 리는 한 인격으로 한 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며, 성부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고 성자도 한 인격으로 한 영이고 성령도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다'(최삼경목사의 답변)

    최삼경목사는 지방교회에 대해서 “본질의 단일성으로서 한 영”이라고 했다면 맞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인격으로서 한 영”을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라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로 조작하는 것을 지나쳐서, 어머니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아버지가 어머니 가방에 들어가셨다”로 조작하고 있는 것과 같다. 최삼경목사가 말한 “한 인격으로서”라는 말은 없어지고 “각각 다른 본질을 가진”이라는 말이 고의적으로 추가된 것이다.
    게다가 이종성박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정작 중요한 말은 모두 생략하고 필요한 말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유치하고 비열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이런 조작과 모함의 보고서를 만들면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였는지 묻고 싶다.
    한기총과 같이 필요한 글만을 인용하지 말고, 이종성박사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보자. 이종성박사의 글은 오히려 지방교회의 “일영론”을 비판하고 있으며, “상호관계에서 세 영”을 말하고 있는데, 질서위원회는 오히려 최목사를 비판한 것처럼 조작을 하고 있으며, 정작 이종성박사가 상호관계에서는 세 영이라고 한 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 기독교인 가운데 우리가 믿는 대상인 3위1체 하나님을 한 영으로 집약해서 일령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영이다’라는 말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영성과 성령의 영성이 아버지 야웨의 영성으로 승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통적 신관은 아니다. 물론 성령도 영이요 그리스도도 영으로 계시고 야웨 하나님도 영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3령신론을 말해서는 안 된다. 이 세 영이 한 영으로 합일이 된다. 그러나 한 영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 영으로 계시면서, 하나님 자체 안에서 그 세 영이 상호관계 안에서 하나와 셋으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이종성, 교회와신앙 2001년 10월호).

    이종성박사의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방교회와 같은 일영론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세 영이라고 하는 3영신론을 말할 수 없지만, 상호관계 안에서는 세 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세 영으로 계시는 분은 아니다, 그러나 세 영은 인격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상호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본질로 말할 때에는 “하나”, 혹은 “한분”이라는 용어로 표현을 하고, 인격으로 말할 때에는 “셋”, 혹은 “세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며, 일반적으로는 “한 영” 혹은 “세 영”이라는 단위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최삼경목사는 “영”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최삼경목사는 지방교회가 그런 용어를 주장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인용한 것이다,
    어느 사람이 나의 수입이 한달에 몇달러인가를 물었다고 가정하자. 나는 한국의 돈 단위인 원으로 답변하지 않고 그 사람이 말한 방식을 그대로 표현하여 달러 단위로 설명을 하였다. 나중에 누군가가 나에게 왜 한국사람이 달러라는 단위를 사용했는가를 물으면서 내가 미국사람이라고 공격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최삼경목사의 글을 하나로 빼지말고 그대로 올려 보자.
    최삼경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세 인격이 세 영이 아닌 하나의 영”이라고 하는 주장을 비판하고 있었다. 즉 지방교회는 “세 인격이 하나의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이고, 최삼경목사는 “한 인격으로서 한 영”이라고 말한 것이다.

    -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하나님의 경륜, p. 16)으로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는 `삼일(三一)하나님'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 그렇다. 그는 비록 인격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셋'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영을 말할 때는 `한'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영이시요 성령님도 `한' 영이신데 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

    지방교회는 원래 한 공간, 한 장소에서의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는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윤무를 말한다. 정통신학에서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는 장소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교류, 상호침투라는 동적인 개념을 포함하여야 한다. 만약 상호내재가 한 장소에서의 동시존재적인 개념만을 말한다면 성부가 성자를 파송하고 성령을 파송한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지며 인격적 구별을 할 수 없어진다.
    갑바도기아의 교부와 어거스틴이 처음 주장하던 상호내재는 원래 오리겐의 종속설을 비판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하나님이 예수보다 크고 예수는 성령보다 크다”는 종속론적인 주장은 “하나님안에 예수가 있고 예수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상호내재라는 주장 앞에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87쪽)

    실제로 어거스틴은 상호내재를 분리할 수 없는 동시존재로 설명하기도 하였지만, 곧 비판을 받았다. 그러한 상호내재는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므로 양태론적인 뜻을 갖게 되었으며,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상호내재를 구별된 인격으로서 동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정립하게 된다. 교회사를 보면 캘빈과 토론한 양태론자인 세르베투스도 한 공간에서의 삼중적인 개념을 도입하였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베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이종성박사가 최삼경목사에 대하여 올려준 견해를 참고하자면, 상호교류적인 인격적 관계를 말할 때에는 “세 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을 숫자적으로 표현할 때에 “영”이라는 단위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세 인격이 하나의 영”이라고 한 것을 비판하기 위하여 최삼경목사는 인격적으로 “하나의 영이 아니라 세 영”이라고 지방교회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 용어를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충분히 이해된다. 최삼경목사는 결코 “본질적으로 세 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질서위원회의 구체적인 조작을 더 살펴보자

    - 삼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이시다. 영은 페르소나(위격)가 아닌 숩스탄티아(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삼위일체론에서 페르소나를 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신론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할 때는 언제나 영은 하나님의 속성, 곧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 영이란 단어를 한 하나님 안에서 인격적 개체를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세 영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본질의 단일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삼신론 사상이다. 이 문제와 관련 최삼경 목사가 예장(통합) 총회에 그가 삼신론자가 아니다라고 해명한 신학자들이 제출한 답변서 중 김영제박사(합동신학원 교수)의 답변서에는 “persona 를 영으로 번역하면 안된다” 고 지적하며 최삼경 목사가 하나님을 세 영(persona)으로 주장한 것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아무리 읽어도 최삼경목사는 본질적인 면이 아닌 인격적인 면에서 “세 영”이라고 하였으며, 그것도 지방교회의 “하나의 영”을 비판하기 위한 언급이었다. 질서위원회는 최삼경목사가 말한 “세 영”을 “세 본질“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본질이 영이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은 되지만 “본질”이라는 뜻이 아니다. 질서위원회는 L목사의 글을 그대로 베껴왔기 때문에 이런 실수까지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만약에 영이 하나님의 본질을 말한다면, 영적 존재인 천사도 하나님의 본질인가? 사람의 영도 하나님의 본질인가?
    그렇다면 육체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었는가? 또 상호관계에서 세 영이라고 말한 이종성박사도 삼신론자인가?

    질서위원회는 이제 김영제박사의 주장도 조작하고 말았다.
    질서위원회가 인용한 것은 본래의 의미와 전혀 다르다 못해 정반대의 해석을 하고 말았다. 한글을 이해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조작을 하기 위함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질서위원회는 김영제박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최삼경목사가 삼신론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문은 정반대의 뜻으로서 김영제박사는 “인격을 영으로 대치하였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가 이단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하나님의 경륜, p. 16)이라고 말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김영제박사는 오히려 지방교회와 토론한 최삼경목사의 노고를 칭찬하고 있었다.
    또한 최삼경목사는 인격을 영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는 세 영이라고 말한 것이며, 지방교회가 인격을 영으로 대체한 것이다,
    김영제박사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보자.

    -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를 물질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터이므로 성경 말씀을 영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를 문자 그대로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해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의로 확정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것이 재확인되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전후로 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이단설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온 신앙고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이해해야 하고 너무 많은 말을 붙여 설명하려고 하면 오류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이를테면 "인격"(persona, person)을 "영"이란 말로 대치해서 설명하다 보면 잘못된 이론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윗트니스 리는 양태론적인 견해로 너무 많이, 나름대로 너무 깊이 설명하려다 보니까 결국 불경스런 예까지 들면서 점점 더 저급하면서도 자기 확신에 찬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귀 노회에 아무쪼록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시고 잘 분별해 주시며 최삼경 목사의 그간의 노고를 치하시고 그분을 위로하시며 격려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김영제박사의 글)

    김영제목사는 인격을 영으로 대치하는 지방교회를 비판하고 최삼경목사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는데, 질서위원회는 김영제박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최삼경목사를 비난하는 이상한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에서 “본질”이라는 단어는 원래 히1:3의 “본체”를 말하는 “휘포스타시스”로서 “본질, 본체”로 번역되며, 그것이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어거스틴은 “페르소나”로 번역하면서 그것이 “인격, 위격”(person)으로 사용이 된 것이다, 즉 예수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므로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는 것에서 이 단어가 “페르소나”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된 것이다. 결국 후에 본질이라는 단어는 우시아, 즉 숩스탄티아가 되어진다. 이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인격이라는 뜻 외에 배우가 가면을 쓰고 일인다역을 하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서 양태론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어거스틴의 고전적 삼위일체가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또 하나 어거스틴의 실수 중에서 신적본성을 영으로 적용한 견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질서위원회가 알았다면 영을 본질이라고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영”이라는 단어가 다른 삼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을 알고 고심하였다고 전해진다.

    - 어거스틴을 공정하게 평한다면, 어거스틴 자신은 결코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영’을 삼위일체에서의 제3위의 개인적인 이름으로 간주하지 않고 신적본성에 대한 명칭의 하나로만 간주했다. 그리하여 그 단어는 성부, 성자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지칭되기도 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02쪽)

    그렇다면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가 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을 그대로 인용하여 보자. 지방교회가 하나의 영을 주장하는 배경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최삼경목사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다.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16쪽)

    우리나라 한기총의 질서위원회는 지방교회와 같은 양태론자들인가?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인격을 하나의 영으로 알고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지방교회 복음서원의 다른 책을 보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인격을 하나로 본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0쪽)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는 위격이라는 용어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가 양태론자이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더 살펴보자. 그는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그 영을 구별하지 않는 일영론자인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 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령 42쪽)
                                 
    아마 한기총질서위원회는 아래 위트니스 리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삼경목사와 같은 정통삼위일체를 삼신론으로 알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니케야신조를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이다. 그들은 한 인격, 한 영, 한 실제를 주장하고 있다.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439쪽)

    지방교회가 소위 삼일하나님이 하나의 영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질서위원회는 다음 글을 잘 읽어보기 바란다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한기총은 아래 신학자들도 삼신론이라고 조사하겠는가? 아니면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이라고 조작한 친이단인사들을 조사할 것인가?

    (이수영목사의 글)
    - 주 안에서 문안 드리며 귀 노회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귀 노회에서 본인에게 의뢰한 최삼경 목사와 지방교회측과의 삼위일체 논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최삼경 목사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 그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인격으로 계신다는 것,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본질이며 신성과 권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 그 세 인격은 서로 혼동되지 않고 구별되지만 세 하나님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최목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상호내재를 부인하지 않으며 분리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최목사의 이해와 설명은 정통 삼위일체론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 것이라고 봅니다. 최목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세 영들'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참 하나님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최목사가 삼신론자라는 것은 억지 주장이며, 오히려 지방교회측에서 최목사를 삼신론자라고 본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양태론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확실한 반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이수영)

    (차영배교수)
    - 몇 해 전에 최삼경 목사와 윗트니스 리측이 교리논쟁을 했다. 그 때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임을 밝히자, 반대로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최목사가 논쟁 중에 '윗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한 분 하나님(성자) 안에 다른 두 분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인격이 된다고 한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 라고 한 것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태론적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그 본질과 속성이 모두 하나라는 것, 환언하면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분이시면서 모두 참 하나님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므로 ‘일체’ 곧 ‘하나’이시다.” 그러므로 저는 최 목사는 삼신론자가 아니고 바른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다고 소견을 밝힙니다.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학장 차영배 드림)

    최삼경 목사의 신론에 대한 질서위원회의 연구 결론의 마지막 2번과 3번 항목을 살펴 보자

    2. “성부의 영, 성자의 영, 성령이 각각 하나라고 한 것은 셋에 속한 부분”이라는 최삼경 목사의 주장은 하나님을 삼등분하여 성부, 성자, 성령을 각기 1/3로 분리시킴으로 성삼위가 하나의 신적 본질안에 서로 구별되며 나뉘거나 혼합되지 않고 상호 종속됨이 없이 온전하신 개별적 실재를 손상시키고 삼위가 하나가 될 때만이 완전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3. 최삼경 목사는 ‘영’이 하나님의 본질, 곧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영이심을 의미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영이시요 성령님도 한 영이신데 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 하는 주장은 하나님의 영과 성령은 각기 다른 영이라는 뜻으로 성부의 영과 성령의 하나되심을 부정하고 성부의 영과 성령이 각각 다른 영이라고 주장함으로 이신론, 혹은 삼신론 주장을 하고 있다.(크리스천투데이에 올라 온 질서위원회의 보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질서위원회의 보고서는 최삼경목사의 주장을 변질시키거나 추가시켜 조작이 되어 있다. 최삼경목사가 언제 하나님을 삼등분하여 1/3씩 분리되어있다고 말하였는가? 최삼경목사가 언제 삼위가 본질적으로 각각 다른 영이라고 하였는가? 최삼경목사는 본질의 단일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인격의 단일성에 대해서 비판을 한 것이 아닌가? 인격을 셋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1/3 이라는 주장인가? 질서위원회는 지방교회와 동일한 양태론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령도 하나이며, 주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하나라고 말한 바울도 삼신론자인가?
                 
    엡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결과적으로 한기총의 월경잉태론도 조작이었고, 삼신론도 조작이었다.
    이러한 유치하고 비열한 조작행위가 우리나라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소위 한기총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슬프다. 한기총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정통삼위일체마저 삼신론이라며 이단시비를 제기하는 이런 친이단성향의 인사들을 다시는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목사직에서 영구 제명을 시켜야만 할 것이다.

    또한 월경잉태론과 심신론이 모두 동일한 그룹의 사람들에 의하여 조작되었으며 동일한 몇몇의 친이단신문에 의하여 퍼지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들의 음모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들의 정체를 드러나게 할 뿐이다. 그들은 이제 한국교회에 치명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후대에 알리게 될 것이다. 월경잉태론도 조작이었고, 삼신론도 조작이었다. 이러한 유치하고 비열한 조작행위가 우리나라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기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슬프다. 한기총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이런 친이단성향의 인사들을 다시는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목사직에서 영구 제명을 시켜야만 할 것이다.
    월경잉태론과 심신론이 모두 동일한 그룹의 사람들에 의하여 조작되었으며 동일한 몇몇의 친이단신문에 의하여 퍼지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한다.  



    출처: 아멘넷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감이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남의 생각이나 느낌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내 행동의 내비게이터가 되면 내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 정도언의《프로이트의 의자》중에서 - * 남의 눈치를 보지않고 당당하게, 거침없이, 사는 것도 멋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를 바랄수록 주변을 더 잘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파트너십이 생기고 진정한 조화와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남의 눈치나 평가는 두려워 말되 주변과의 조화와 소통의 문은 늘 열어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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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주머니 그리움을 담아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가 있었음 좋겠다. 미움 덩어리를 담아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 하나 있었음 좋겠다. 끝없는 원망으로하여 끓어오르는 불씨를 가두어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보고싶고. 또 보고싶은 님의 얼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님의 목소리도 담아 둘 수 있었음 좋겠다. 먼 훗날. 마음주머니 조용히 꺼내어 헤쳐 풀어보며. 냉가슴 봄 눈 녹듯 스르르 녹아 내릴 때 그때는 말할 수 있으리. 모두가 사랑이였다고. 참으로 열심히 사랑하며 살았노라고. 참으로. 사랑을 담아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가 있었음 좋겠다. -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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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달 150만원으로 사는 백만장자

              최근 한 해외언론에 소개된 백만장자의 사연이 행복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 관심을 끌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백만장자인 칼 라베더는 작년 자신의 전재산을 기부하고 지금은 한달에 1,350달러(약 150만원)로 생활하고 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라베더는 어릴때 부터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 돈이 더 많은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득 자신이 돈을 더 벌기위해 노예처럼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결국 큰 결심을 하게됐다.

              라베더는 "하와이에서 오랜시간 머물면서 호텔 등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내 돈을 보고 친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 "긴 시간동안 정말 제대로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아프리카와 남미도 여행했는데 나의 부와 그들의 가난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돼 죄의식을 느꼈다." 며 "나의 소비행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남은 인생을 편하게 살기 힘들다고 결론내렸다." 고 털어놨다.

              결국 그는 그의 사업체, 자택, 별장, 고급 자가용을 모두 팔아 제3국을 돕는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라베더는 "인간은 경제적인 성공에 집착할 때 인간다움을 해칠 수 있다." 며 "난 내자신을 찾기위해 수십년을 소비했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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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에의 접근 - 칼 구스타프 융
              무의식에의 접근 - 칼 구스타프 융
              칼 G.융 외. 『인간과 상징』. 이윤기 역. 서울: 열린책들, 1996. 1장 참조.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2Lpfw1j0BlYJ:sang1475.com.ne.kr/data/156.hwp+%EC%9C%B5+%EC%A0%95%EB%A0%B9&cd=18&hl=ko&ct=clnk&gl=kr

              꿈의 중요성
              인간의 언어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나 이미지는 상징이 아니다. 상징이란 특정한 함축성과 관습적이면서도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모호하지만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감추어진 무엇을 내포한다. 이러한 상징성은 정확하게 정의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무의식적 측면’을 지닌다. 수레바퀴의 형상을 ‘신성한’ 태양에 관련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측면인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인간이해의 범주를 넘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완전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개념들은 끊임없이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의식적 측면에서의 상징 사용과는 반대로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꿈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상징을 만들어낸다. 이런 측면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지각에서조차 무엇을 완전히 안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지하면 결국 인간의 지식이 부딪히는 한계, 인간의 지식이 통과할 수 없는 영역은 반드시 있는 법이다.
              더욱이 우리의 현실지각에는 무의식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감각이 현실에 반응할 때조차 현실의 현상은 ‘심적 사상’으로 변하는데, 이것의 궁극적인 ‘심적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구상적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지적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들이 의식할 수 없는 종류의 사상도 존재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의식의 문턱에 있는 사상’은 기존에 있었던 경험이기는 하나 이미 잠재의식에 동화되어 있는 사상을 말한다. 직관과 깊은 사색은 이를 의식화시키는 작업 중의 하나이며, 일반적으로는 꿈을 통해 상징적인 이미지로 분출된다.
              꿈의 연구를 통해 심리학자는 의식이 지닌 심적 사상의 무의식적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많은 학자들은 무의식으로 인한 두 개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격의 분리 현상은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신경증적 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일반적인 무의식적 징후이며 인류공통의 유산이다. 물론, ‘마음’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노릇을 하고 있는가의 연구는 가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미지의 부분이라는 개념에 저항해온 데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미개인들은 인간 자신의 영혼뿐만이 아닌 다른 영혼도 깃들어 있는 것으로 믿는다. 개인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자기와 심리적으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심리학적 사실이다. 미개인들의 믿음에서, 개인의 마음이라는 것은 안전한 결합상태를 이루지 않고 억제할 수 없는 역동성 앞에 쉽게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진보된 문화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들 역시 정신의 해리를 통해 정체성을 상실하고, 분위기에 따라 이성을 잃기도 한다. 오히려 자기 통제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일종의 덕성으로까지 분류된다. 따라서 최근에 성립한 ‘의식’이라는 개념은 무척 취약해 보이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자기 마음 일부를 고립시킬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에 속한다. 그러나 이를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문명의 소산이지만, 무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의식의 통합이 이루어진 상태도 자신을 다스린다는 관점에서는 유익하지만,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간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불안을 내포한다.
              이런 배경에서, 의식의 무의식적 측면에 최초로 경험적 탐구를 시작한 선구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그는 꿈이 의식적인 생각이나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일반적 가정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데 동의했고, 이들에 따르면, 신경증의 증상은 꿈의 그것처럼 무의식이 그 자체를 표명하는 상징적 방법이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무의식적 문제를 탐구하는 출발점으로 ‘자유연상법’을 통해 꿈을 이용했다. 즉 꿈을 꾼 사람으로 하여금 그 꿈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가 마음에 환기시켰던 느낌을 이야기하게 하고, 환자가 말한 것이나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하여 병의 무의식적 배경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환자는 자신이 무엇을 회피하는지, 억압하는지를 알 수 있게되며 그가 위장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한계 안에서 의사가 궁극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그 자신의 예상을 확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꿈-상징의 원인이 억압과 욕구충족이라는 프로이트 이론에 대해 반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무의식이 지어내는 풍부한 환상인 꿈을 해석하는데 자유연상법은 부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환자의 콤플렉스를 찾아내기 위해 자유연상의 출발점으로 반드시 꿈을 이용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자, 물체, 회화, 일상적 대화조차도 꿈과 동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 콤플렉스로 말미암은 정서적 충격에서 생기는 꿈이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나는 꿈에 특수하면서도 보다 의미 있는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다시 말해 자유연상으로 꿈을 통해 콤플렉스를 찾는 것보다는 꿈이 드러내는 모습과 내용에 더 주의를 기울여보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꿈에 대한 태도변환은 쓰는 방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꿈의 시작과 끝, 시간과 공간 등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여러 측면 모두를 싸잡아 안을 수 있는 기법을 사용했다.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이것을 조사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환자의 콤플렉스를 알아내는 방법은 여럿 있으며 한 개인의 전인격적 심리적인 생활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꿈과 상징적 이미지가 보다 중요한 역할에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가령, 꿈이란 것은 성적인 비유 이외에 다른 정보도 싸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성적인 여러 상징들 중 꼭 한 가지 상징이 꿈에 나타난 이유는 전혀 다른 심리적인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은 꿈의 해석에 꿈에 명백하게 나타난 소재만을 사용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유연상법은 꿈을 꾼 사람을 꿈의 내용물로부터 유리시킨다. 내가 쓰는 방법은 꿈의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빙빙 도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내 어떤 환자의 꿈에는 그의 부인으로 생각되는 술에 취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여자를 본 사람이 있다. 실생활에서의 부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환자는 꿈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거부했다. 여기에 자유연상을 이용하면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콤플렉스로 도달할 것이고 이 특별한 꿈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생리학자들은 내분비선의 얼개를 바탕으로 모든 인간에게 남성적․여성적 요소가 두루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내가 ‘아니마’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남성이 지닌 여성적 측면이다. 남성에게 아니마는 여성관계에서 일종의 열등한 기능을 나타내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은폐되어 있다. 그 환자의 꿈은 그의 여성적 측면이 타락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도덕적 훈계가 아닌 완벽한 신사라는 허구 속에서 균형을 잃고 있는 그를, 꿈은 의식적인 평행감각을 갖게 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의식이라는 것은 무의식적․미지의 것에 저항함을 알 수 있다. 이 ‘쇄신공포증’은 미개인뿐만 아니라 문명인을 포괄하는 모든 역사적 현실에서도 많은 희생제물을 만들어왔다.

              무의식에서의 과거와 미래
              꿈은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수 있는 일차적이고 쉬운 소재이다. 꿈을 다루는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꿈을 하나의 사실로서 다루며, 꿈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 이외의 어떤 전제도 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 꿈이라는 것은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무의식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꿈이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 가정하고 그것이 인과적인지 목적을 지니는지를 따져보아야 마땅하다.
              할말이 있었는데 막상 생각나지 않는다든지,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는데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는지를 잊어버린 경우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내용물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신경증 환자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가 행동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이런 환자들은 허구를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히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이런 환자들의 경우, 무의식의 간섭으로 의식이 장애를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정신상태가 행동을 불확실하게 하는 것이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마비증세로 인해 감각상실 상태에 이른 환자는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무의식적으로만 인지한다. 이 상태에서 최면을 걸면 환자가 감각상실 상태에 있을 때의 일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신경증적 현상은 정상적인 일이 병적으로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고, 확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상태보다 명료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일상적인 건망증에서는 주의 집중이 이동한다는 정상적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의식은 극히 작은 이미지만을 파악하고 그것마저 사라져버릴 때 그림자로 남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에 사라진 것은 잠재적 상태에 계속해서 존재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발생적으로 소생한다. 반면에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곳도 무의식은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문득 떠오른 기억이 누군가의 대화를 방해하고 있을 때, 그 기억은 무의식이 보관하는 인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실마리, 혹은 방아쇠 효과는 신경증 증상의 발단을 설명할 때도 적용될 수 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급격히 일어나는 두통은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프로이트는 가능하다면 잊고 싶은 기억의 망각과 관련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불쾌감과 견딜 수 없음 때문에 의식적인 재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기억을 심리학자들은 ‘억압된 내용’이라 부른다. 이런 내용은 자아인격의 다른 한 측면인 마음의 어떤 상태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마음 속의 의도적인 내용과 비의도적인 내용을 세심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망각된 것들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많은 양상들 중에서 ‘잠재기억’, 혹은 ‘숨겨진 기억’의 예는 흥미롭다. 책을 쓰는 사람이 계획을 세워 줄거리를 전개시켜 나감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이야기가 뒤바뀌는 경우가 그렇다. 니체의 경우처럼 쓰는 내용이 다른 사람의 작품과 놀랄 만큼 비슷한 때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본인에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무의식에 기억되는 ‘순수기억’이 있다. 음악가들은 어린 시절 들었던 노래 따위를 자신의 작곡 테마로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생각이나 이미지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의식의 대체적인 스케치는 그 잠재적인 내용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잠재적인 내용물들은 부분적으로나 일시적으로나 영속적인 무의식의 형태를 취한다. 이 같은 내용이 의식을 벗어나 무의식으로 잠재의식화하는 것은 의식의 흥미나 관심을 끌기에는 미흡하므로 우리가 의도적으로 의식 밖에 밀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을 망각하는 것은 잡다한 경험으로 인한 의식차원의 혼란을 비켜나가는 정상적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내용물이 무의식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무의식이란 단순히 과거경험의 창고뿐만 아니라 미래의 심적 상황을 어림해서 폭넓은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생각과 창조적인 관념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영감을 통하여 놀랄만한 업적을 이루어내는 수가 있었다. 이 풍부한 소재의 광맥을 효과적으로 번역하는 능력은 어떤 사람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재를 산출하는 인간의 마음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꿈이 싸안고 있는 이미지나 관념을 기억이라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우를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때 꿈의 이미지는 우리 의식의 문턱에서는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생각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꿈의 기능
              꿈은 많은 상징이 싹트고 자라는 토양이다. 꿈속에서는 서로 모순되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꿈꾸는 사람에게 쇄도한다. 무의식은 깨어있을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내용물들을 엮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의 관념의 의미라는 것이 정확하고 잘 통제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무엇이든 곧잘 잠재의식화하기 때문에 의식의 영역조차도 무의식적 바탕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잠재적 의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며 그것이 어떻게 일상적 의미와 관련 있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이 같은 심리적 바탕색깔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인 개념은 문화적 배경이 같은 사람들에게도 약간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더구나 사람들의 체험이 서로 다를 때는 의미의 차이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대체로 잠재적인 것이지 쉽게 인지되는 정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의식의 가장 현실적 내용물에서도 벌써 주위의 불확실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명쾌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이 그림자가 바로 ‘심리적 사상’이다. 의식 속의 모든 개념은 그 자체로 심리적 연상을 지니며 무의식적 레벨에서는 개념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잠재적 측면이야말로 의식적 사고의 보이지 않는 뿌리이기 때문에 꿈의 분석에서는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꿈속의 이미지가 보통의 이미지보다 훨씬 회화적이고 생생한 이유는 꿈속의 이미지가 합리적 표현을 초월해있기 때문이다. 가령 ‘너 좋은 대로해’라는 뜻의 관용구인 ‘물에나 풍덩 뛰어들어!’라는 표현이 꿈속에서 실제로 호수에 뛰어드는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은유적인 방법을 지닌 꿈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다. 그러나 꿈은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정이 담긴 회화적인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인들은 원시적 심성의 특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상실하고 공상적․심리적 연상을 모두 무의식에게만 맡기고 산다.
              미개인은 무의식적 연상의 후광으로서 사물로부터 심리적 동일성, 혹은 ‘신비한 관여’를 느낀다. 반면에 우리는 이것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도 뭔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만다. 하지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감정의 움직임이 우리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문명시대의 공포는 모든 것을 악령의 탓으로 돌리는 미개인의 공포보다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문명인의 태도는 신경증보다 한층 위험한 병증인 불안신경증이나 모종의 공포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박’이라는 원시적 현상은 옛날과 다름없이 존재하며 단지 우리에게는 불유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현대인과 미개인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상징형성이나 상징표현에서 꿈이 맡는 역할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꿈이 미개인의 사고, 신화, 또는 제의와 유사한 심리적 연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고태의 잔재’라고 불렀지만 이러한 관점은 무의식을 의식의 부속물쯤으로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꿈에서든 이런 종류의 연상과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성이 있는’ 이러한 연상이나 이미지는 합리적인 의식세계와 본능의 세계를 잇는 다리노릇을 한다.
              깨어있을 때의 통제된 생각과 꿈속에서 만들어지는 풍부한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문명화한 생각을 영위하는 동안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날 만큼 강한 느낌을 갖게 하자면 ‘꿈의 언어’, 즉 꿈의 상징체제라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에너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무의식으로부터 날아오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모든 종류의 영향에 노출되어있는 의식적인 삶은 여러 자극으로 인해 우리의 개성과는 상관없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런 훼손이 깊어질수록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는 자꾸만 벌어져 신경증적  해리상태에 이르는데, 필경 건강한 본능과 자연과 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한다.
              꿈의 일반적인 기능은 심적 평형을 회복시키는데 있다. 나는 이것을 심리구조에서의 꿈의 보완적 역할이라고 부른다. 꿈은 비현실적 이상을 가지는 사람에게 현실에서의 인격적 결함을 보상하며 그들의 계획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내린다. 그런데 꿈의 경고가 무시되면 실제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나 예언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가를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을 통해 알았을 뿐이다. 우리는 위험이 거기에 오래 전부터 도사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 그리로 다가간다. 의식은 이를 깨닫지 못해도 무의식이 깨달아 꿈을 통해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꿈의 경고를 자비의 손길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꿈은 우리에게 함정을 만드는 수도 있다.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섣불리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정신의 특성에 접근하려면 오히려 원시인의 시각을 통하는 편이 더욱 바람직하다. 문명은 인류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나 그것의 배후에는 그만한 손해가 자리한다. 현대인들은 의식을 본능적인 마음의 심층으로부터 분리시켜왔으나 다행히도 그 기반은 무의식의 일부로서 꿈에 나타난다. 이 본능적 현상은 대단히 상징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꿈의 보상적 기능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꿈-상징은 마음의 본능적인 부분이 합리적인 부분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이를 해석하면 빈곤한 의식을 풍부히 하고 본능의 언어를 소생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꿈-상징을 간과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미개인이나 문명인 모두 꿈이 꿈꾼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거나 언짢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니까 꿈은 이해가 되었으나 잠재적으로 이해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해석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꿈이 특히 인상적이었거나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에 한한다. 그러나 이 해석에 따르는 어려움에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꿈-상징은 당사자와 직결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해석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전형적인 꿈과 단일한 상징(motif)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티프조차 꿈 자체 문맥의 전후관계가 고려된 상태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꾸게되는 꿈은 당사자 생활태도의 결함을 경고하는 것이거나 마음의 정신적 외상(trauma)을 체험하는 순간부터 꾸게되는 수도 있다. 나는 모티프가 동일한 꿈을 되풀이해서 꾼 적이 있는데, 꿈속에 펴든 책에서는 지극히 놀라운 상징적인 그림을 보게되었다. 일련의 마지막 꿈을 꾸기 전에 고서점에 주문한 연금술 서적 한 권이 도착했으며 그 책 속의 상징적인 그림들을 보는 순간, 나는 꿈의 그것이 떠올랐다. 내 인격과 관심이 의식했던 연금술 원리의 재발견이라는 새로운 코드로서 나는 되풀이되던 꿈의 모티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인식하고 나서부터는 다시 그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의 분석
              상징은 분명하고도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을 나타내며 의식적인 사고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상징이 저절로 만들어지며, 꿈 자체는 그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상징은 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심적 표현에서 생겨난다. 시계가 그 임자의 죽음과 때를 같이해서 멎어버리는 것 등의 사례처럼, 상징적 양식의 배열은 무생물과 무의식의 상호협력에서도 나타난다.
              상징 중에는 그 성질이나 기원으로 보아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집단적인 것도 있다. 집단적 상징은 주로 종교적 심상이며 몇 세기 동안 의식적인 다듬질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기원에 있어서는 무의식적인 ‘집단적 표현’이다. 꿈을 상징적인 것이라 가정하면 꿈의 해석은 무한하게 된다. 상징은 무한한 해석의 여지가 있으므로 신경증 환자의 생각을 분석가가 압도해버리는 경우는 치료적인 의미에서 무척 위험하다.
              언젠가 나는 나의 관심과 인생, 정신의 발달을 요약한 것으로 보이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꿈을 분석하며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그 꿈을 해석했다. 이처럼 분석자와 피분석자의 개인차가 많은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요인이 심리학적 이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직관은 의외의 통찰로 이어졌다. 즉 나의 꿈은 전적으로 ‘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꿈의 분석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두 인격 사이에 일어나는 변증법적 교감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한 편이 우세해지는 ‘최면요법’을 포기했다. 나의 목적은 환자의 권위와 자유를 지키고 보존하여 그가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의 길을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데 있다. 나는 프로이트와의 논쟁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을 세우기 전에, 먼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해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을 향할수록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요즘같이 변화가 급격한 시대에서는 개인에 대한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바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과거도 현재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신화나 상징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유형(類型)의 문제
              심리학은 분석가와 환자의 살아 있는 관계에 직면하며 대극성의 조화를 지향한다. 분석가는 자기 삶의 전체성을 동원하여 피분석자의 전인간성을 직면해야 한다. 이처럼 개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개인을 분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반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의 성격이 외향적인지 혹은 내향적인지 비교적 단순한 특징만 보고도 알 수 있다. 분석은 분석자와 피분석자 간의 유형이 같거나 다르거나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긴다. 프로이트는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 병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석했지만, 스스로 성찰하고 안다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유형이 특성이라 하기에 지나친 구별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몇 가지 다른 특성을 찾아보기 시작했다[p.60 도표참조]. 이 네 가지 기능의 유형은 의식이 그 경험의 방향에 사용하는 수단에 해당한다. 감각은 어떤 것의 존재 여부를, 사고는 존재하는 것의 정체를, 감정은 존재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직관은 존재하는 것의 유래와 지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의 문제를 염두해야 특정한 꿈에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인격의 그늘진 측면(shadow)만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까지도 무시하고 억압한다. 또한 꿈은 명확한 정보를 피하고 결정적인 점은 은폐한다. 프로이트는 꿈이 ‘검열’이라는 기능을 갖고 꿈꾸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한 생각으로부터 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꿈은 종종 잠을 방해하기 때문에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잠재의식 상태의 관념이나 이미지는 의식상태보다 긴장감이 훨씬 낮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함의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이나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강한 긴장을 받게 될 때마다 잠재적인데서 풀려나 의식의 경계로 떠오르며, 그 때 비로소 이것들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꿈이 우의적인 표현을 취해 난해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적 소재의 변장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모습의 모든 충동이 잠재의식에 보존되기 때문에 꿈의 소재들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꿈-상징은 마음의 유기적인 창조과정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본능적인 힘은 꿈을 통해 의식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좋은 영향인지 나쁜 영향인지는 전적으로 그 무의식의 실제 내용에 달려 있다. 의식화되는 것에 비해 무의식이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있을 경우, 무의식은 자기가 지닌 것의 기능을 왜곡시키거나 한 곳으로 치우치게 한다.
              억압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무의식에 떠넘겨버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중요한 행동 동기로 나타난다. 때문에 분석가는 정신장애의 원인에 관한 환자 자신의 어느 정도 자의적인 고백을 끌어내고 환자가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바를 파악한 뒤에 비로소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꿈이나 꿈-상징의 해석은 꿈꾼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마음의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꿈-상징에 나타나는 원형
              꿈은 대개 꿈꾼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강박적인 꿈, 정동성이 강한 꿈은 개인적인 연상만으로 만족스러운 해석을 내릴 수 없다. 이런 요소를 프로이트는 ‘고태의 잔재’라고 불렀다. 이는 개인 생활을 넘어서는 원초적이고, 내재적이고, 유전적인 인간의 심리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육체처럼 무의식적인 마음도 긴 진화의 역사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태의 잔재’를 ‘원형(archetype)', 혹은 ‘원시심상’이라고 부른다. 원형은 신화 이미지나 신화 모티프의 의식적인 표상이 아니다. 원형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티프를 어떤 표상으로 형성시키는 경향이다. 원형에는 본능적인 경향성이 있어서 뚜렷한 나름의 충동을 지닌다. 본능은 생리적인 충동으로서 주로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지만 공상 중에서 상징에 의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나타남’을 나는 원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녀의 꿈「p.69~70]은 파괴와 복원, 죽음과 부활, 세계의 기원, 영웅상, 4위성, 인간의 창조, 가치의 상대성 등의 원형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그 꿈은 소녀 개인의 죽음의 준비에 대한 암시를 보상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상징으로 표현된 개개의 형태는 개인적이지만 이 형태가 보이는 일반적인 패턴은 ‘집단적’이다. 집단적 사고 형태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받아온 것이며 세계 어느 곳에서든 동일하다.
              마음과 의식은 동일시할 수 없다. 꿈이나 환상이나 생각 중에는 문득 생겨났을 뿐 아무리 탐색해 보아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원인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진 옛날에 형성된 본능의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반성적 능력은 강렬한 정동의 폭발에서 기인한 고통스러운 결과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원형의 형태는 반성적 능력 이전의 정동적인 것이다.
              꿈이 예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실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덧붙일 수 있다. 다른 점은,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산출한다는 점이다. 이 경향은 원형의 문법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꿈은 시적이다. 원형은 이같이 자체의 주도권과 에너지를 가지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점에서 원형은 콤플렉스와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콤플렉스가 역사를 가지는 것처럼 원형도 범인간적인 것에 특징을 부여하는 신화, 종교, 역사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콤플렉스가 일방적이고 오류에 빠진 의식의 태도를 보상하는 것처럼 신화도 인류 일반의 고뇌와 불안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치유의 방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신화의 관념은 유사 이전의 어느 시대에 만들어지고, 믿어져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 견주어 권력지향적인 성직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원망충족을 위한 사고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만든다’라는 말의 어원은 ‘발견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찾는 행위 속에 이미 찾아질 것이라는 예지가 전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집단적 이미지의 기원에는 도무지 풀리지 않을 듯한 원형 패턴과 닿아 있다. 이 패턴이 반성적 대상이 된 근대 이후, 우리는 이전의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신화적 상징을 많이 알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상징이라는 의미 자체를 살았고 무의식적인 생명을 고무했다. 인간은 우선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마음이나 정신은 그 자체가 바로 발명자이며 창조자라고 믿는 사람은 많다. 이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 왔고 지금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내적인 행동동기는 우리 심층에 있는 심원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고대인들은 그러한 동기를 마나, 정령, 악마,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힘을 스스로 규제하지 못할 경우에 적대하거나, 불행하다거나, 심지어는 병으로 생각한다. 근대인들이 상당한 의지력을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이나 악마는 현대인들에게 막연한 불안이나 심리적인 갈등, 약물, 알코올, 담배, 무엇보다도 갖가지 신경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영혼
              본능과 의식은 접촉점을 잃고, 본능은 자신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방법을 찾는다. 때문에 생리적․심리적인 이상현상이 돌발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생기는 것은 원형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분열 상태의 노출을 피하기 위해 선을 그으려는 ‘구획심리’를 지닌다. 이는 한 개인뿐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구획 상태에도 적용된다. 문제는 구획된 양자 중 한편만을 지나치게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자기 본성의 그늘진 측면을 인식할 수 있어야 이런 구획심리를 어느 정도 와해시킬 수 있다.
              몇몇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가진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종교는 진실되지 않은 것으로 가정된다. 그런 것이 없이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인간 이해를 초월하는 이런 무의식적 관념을 어차피 검증할 수 없다면, 유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 상징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므로 문명 앞에 스스로  열등한 존재라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의미보다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이런 상징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는 후대로 갈수록 믿어지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어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과 모습으로 변형된다. 꿈-상징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나타난다. 꿈의 의미와 표면적인 꿈의 모습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꿈이 드러내는 이미지와 상징을 무시하자는 결론에서, 꿈은 양자를 포괄적으로 지닌다는 주장이 대두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꿈의 내용과 형태 모두를 연구하게 되었다. 꿈이 정상적인 자연현상이라면 그 이외의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은 상징이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상징해석은 논리적인 공식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서나 상징적인 관념을 만드는 생명 자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의 전체성과 상징의 관계를 주목해야 하고, 상징 해석에 있어서는 지성이 필요하다. 또한 상상력과 직관력도 고려해야 한다.

              상징의 역할
              상징은 자연적 상징과 문화적 상징으로 구별된다. 자연적 상징은 마음의 무의식적인 내용물에서 파생한 것이고, 문화적 상징은 영원한 진리를 표명하기 위해 여러 종교에서 쓰인다. 문화적 상징은 의식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 문명사회에 수용되면서 집단적 이미지가 된다. 문화적 상징은 아직도 신성한 힘을 가지기 때문에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억압하거나 무시하면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후에 다시 의식으로 떠오르면 무의식의 상위계층을 변용시키거나 강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있던 ‘그림자’가 일어나 의식과 맞선다. 악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는 경향도, 일단 억압을 받으면 해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 무의식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금세기의 세계가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현대 문명의 기저인 합리주의가 신성한 상징을 미신으로 취급하고 여기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도덕적․정신적 가치를 상실했다. 정신이 인간의 한정된 자아사고로 전락하는 그 순간부터 고스란히 세계적인 규모의 분열과 해리를 대가로 치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교감이 끝나는, 이 엄청난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 꿈-상징이다. 그러나 자연의 언어로 나타나는 꿈 내용은 현대어로 번역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적 세계는 원시성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꿈에 원형이 고스란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탐구하려는 것은 현대인의 혼합된 정신, 바로 그 혼합물이 인간과 그 상징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상반되는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형이란 이미지인 동시에 정동이다. 이미지에 정동이 작용하면 심적 에너지가 생기고, 이때부터 상징은 역동성을 지니게 되며 반드시 의미가 산출된다. 그러나 원형이라는 것은 개념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원형은 생명 그 자체의 일부분으로서 관련된 개인의 생활양식의 문맥 안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원형은 의미가 고려되는 경우에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의 분화된 의식은 예전에 전인격이었던 마음의 바탕자리를 버렸다. 그러나 무의식이라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의 일부인 원시적 특성을 보존하며 그것들을 되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물이 상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공포를 느끼고, 억압되며, 신경증의 형태로 개인의 전인격 속으로 파고든다.
              유아기 기억의 빈틈을 회복하는 것은 원시심성을 회복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유아기의 기억을 회복하고 마음의 작용을 원형적으로 재현하면 의식의 지평을 넓히고 그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상징을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원형의 정동적 가치를 염두에 두면 이것은 결국 인격을 변화시킨다.


              출처: RPTministries

              (1) 성명서에, 최삼경 목사가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그런 하나님(삼위일체)은 아예 믿을 수도 없다”(교회와신앙 1997년 11월호 169쪽) 고 주장했다고 적시한 점에 대하여.

              최 목사에 대한 삼신론 시비는 이단 윗트니스 리(지방교회)측과의 지상 논쟁중에서 비롯되었다. 논쟁중에 그들이 먼저 최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비판하자 교계의 몇몇 이단 옹호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유포하면서 확산된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 하나요(단일성) 인격(위격)으로는 셋이다(구별성). 그런데 양태론자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인격(위격)은 셋이 아닌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윗트니스 리측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 하나이지만 인격(위격)은 셋’이라고 주장하는 최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최 목사는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기독교 외부에 다신론으로서의 삼신론은 있었어도 내부에서 삼신론 사상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하나님, 즉 삼신론이 의미하는 하나님으로는 아예 믿을 수도 없다고 글을 썼다. 심 씨가 제시한 출처 부분에 기술된 최 목사의 해당된 원 글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기독교 내에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단이 된 사람이 있었는가? 기독교 외부에 다신교의 측면에서 삼신론 사상이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없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다음에 꼭 기독교 2천년 속에서 기독교 내부로부터 삼신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된 사람 중에 필자와 유사한 사람이 있었는지 밝혀 주기 바란다. 그런 하나님으로는 아예 믿을 수도 없다 .”

              이처럼 원 글에 명백하게 나와 있는 대로, 최 목사가 ‘삼신론 하나님’은 믿을 수도 없다고 한 부분을 심 씨는 마치 최 목사가 ‘정통 삼위일체 하나님’은 믿을 수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왜곡했다. 삼신론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에 괄호를 치고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넣어 정반대의 뜻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글의 출처까지 그럴싸하게 제시했다. 정확하게 하면 심 씨는 이렇게 적시했다.

              [최씨는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그런 하나님(삼위일체)은 아예 믿을 수도 없다"(교회와 신앙 1997. 11월호. p.169)라고 하였다.]

              조작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출처: 아멘넷/ 음해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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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한폭탄과도 같은 메탄 분출



                                                                                 - 존 아체슨 By John Atcheson -


              지구 북극의 온난화에 대한 북극 위원회(Arctic Council)의 최근 보고서는 전 세계적인 홍수, 북극곰과 바다 포유류의 멸종, 어업의 붕괴 등과 같은 불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북극 툰드라 지역에 잠재되어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현재 자연적으로 형성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가 얼음 형태로 차가운 북쪽의 진흙과 해저에 묻혀 있는데, 포접 화합물(clathrates)이라고 불리는 이 얼음은 기체상태가 되면 포함하게 되는 메탄 양이 3천 배나 된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20배 이상 강력한 온실가스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부분은 여기다. 기온이 단지 몇 도만 올라도 이 가스는 휘발되어 대기로 내뿜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더욱 온도를 상승시키고, 다시 더 많은 메탄이 분출되어 지구와 바다를 덮게 될 것이다.

              북극 툰드라에는 이 연쇄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4천억 톤의 메탄이 갇혀있고 북극 위원회가 예견한 내용은 이 포접 화합물을 녹여 온실가스를 분출시키기에 충분하다.

              한번 시작되면 이 연쇄반응은 가장 비관적인 예언자들조차도 언급하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지구온난화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이 병적인 환경보호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종말론적 환상일까?
              불행히도 아니다. 아주 설득력 있는 지질학적 증거에 따르면 지구 역사상 최소 두 번 이상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재난 중 가장 가까운 것은 지질학에서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도기 (PETM)라 부르는 5천 5백만 년 전에 일어났는데, 당시의 메탄 분출은 10만년 이상이나 기후를 혼란에 빠뜨리며 빠른 온난화와 대규모 멸종을 일으켰다.

              이런 재난의 시조는 페름기(Permian)의 끝인 2억 5천 1백만 년 전에 일어났는데, 당시의 연속적인 메탄 분출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릴 정도였다.


              산소농도가 급감하고 생명체가 멸종의 위협에 빠지면서 화석에 기록된 바다 생물의 94% 이상이 사라졌다. 얼마 남지 않은 종들은 그 후 5십 만년 동안 적대적인 환경에서 근거지를 마련하느라 고군분투하였다.

               

              다시 나무가 자라고 원시적인 산호초가 자리를 잡는 데에는 2천 내지 3천만 년이 걸렸다. 어떤 지역은 생태계가 예전의 건강한 다양성으로 돌아가는 데 1억년 이상이 걸렸다.

              지질학자 마이클 J. 벤튼은 최근 그의 저서 ‘생명의 위기: 역사상 최대의 집단멸종(When Life Nearly Died : The Greatest Mass Extinction of All Time)’에서 이 중대한 비극의 과학적인 증거를 밝힌바 있다.

              PETM과 함께 화산 활동에서 생긴 대부분의 이산화탄소인 온실 가스는 지구와 바다의 온도를 높여서 그 민감한 포접화합물에서 엄청난 양의 메탄을 분출시켜 걷잡을 수 없는 온실현상을 일으킨다.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은 무엇일까?

              두 경우 모두, 10.8˚F의 온도 상승이다. 이는 오늘날 지구온난화 모형에서 예측되는 2100년까지의 화석연료 연소로부터 예상되는 평균온도 상승의 상한 범위이다.
              그러나 이 모델들은 온난화를 일으키는 가스화합물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객전도가 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북극위원회가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온실가스 배출로 일어나는 온도상승은 하필이면 그런 불안한 포접화합물이 많은 극지방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단 이 걷잡을 수 없는 메탄 분출이 시작되면 되돌릴 길은 없다. 다시 손 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일단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류는 이런 연쇄 반응을 일으켰던 화산활동에 버금가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지질측량국(USGS)에 따르면 화산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150배가 화석연료 연소과정에서 배출되는데, 이 양은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의 약 1만7천 배다.

              이것이 북극위원회가 간과한 잠재적인 위험요소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메탄 분출은 과연 일어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어날 수 있다’와 ‘일어날 것 같다’의 사이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낼수록 ‘일어날 것 같다’ 쪽으로 더 기울고 있는 실정이다.

              해수면의 상승, 녹고 있는 만년설, 심해진 폭풍우, 늘어난 홍수, 서식지 파괴, 북극곰의 멸종 위기, 이런 것들은 잊어라. 이런 일들이 정말 일어난다고 해도, 온난화로 세계의 주요 농경지가 사막화되고 열대병이 확산되는 것도 잊어라.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은 부시정부의 선매권 정책과 같은 것일 테니까.

              지구의 대규모 멸종을 야기할 수 있는 실패한 에너지 정책 따위에 서명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한다. 

               지질학자 존 아체슨은 미국 연방 정부에서 다양한 정책 지위를 맡아오고 있다. 



               

              Methane Burps: Ticking Time Bomb

              By John Atcheson
              The Arctic Council's recent report on the effects of global warming in the far north paints a grim picture: global floods, extinction of polar bears and other marine mammals, collapsed fisheries. But it ignored a ticking time bomb buried in the Arctic tundra.
              There are enormous quantities of naturally occurring greenhouse gasses trapped in ice-like structures in the cold northern muds and at the bottom of the seas. These ices, called clathrates, contain 3,000 times as much methane as is in the atmosphere. Methane is more than 20 times as strong a greenhouse gas as carbon dioxide.
              Now here's the scary part. A temperature increase of merely a few degrees would cause these gases to volatilize and "burp" into the atmosphere, which would further raise temperatures, which would release yet more methane, heating the Earth and seas further, and so on. There's 400 gigatons of methane locked in the frozen arctic tundra-enough to start this chain reaction-and the kind of warming the Arctic Council predicts is sufficient to melt the clathrates and release these greenhouse gases into the atmosphere.
              Once triggered, this cycle could result in runaway global warming the likes of which even the most pessimistic doomsayers aren't talking about.
              An apocalyptic fantasy concocted by hysterical environmentalists? Unfortunately, no. Strong geologic evidence suggests something similar has happened at least twice before.
              The most recent of these catastrophes occurred about 55 million years ago in what geologists call the Paleocene-Eocene Thermal Maximum (PETM), when methane burps caused rapid warming and massive die-offs, disrupting the climate for more than 100,000 years.
              The granddaddy of these catastrophes occurred 251 million years ago, at the end of the Permian period, when a series of methane burps came close to wiping out all life on Earth.
              More than 94 percent of the marine species present in the fossil record disappeared suddenly as oxygen levels plummeted and life teetered on the verge of extinction. Over the ensuing 500,000 years, a few species struggled to gain a foothold in the hostile environment. It took 20 million to 30 million years for even rudimentary coral reefs to re-establish themselves and for forests to regrow. In some areas, it took more than 100 million years for ecosystems to reach their former healthy diversity.
              Geologist Michael J. Benton lays out the scientific evidence for this epochal tragedy in a recent book, When Life Nearly Died: The Greatest Mass Extinction of All Time. As with the PETM, greenhouse gases, mostly carbon dioxide from increased volcanic activity, warmed the earth and seas enough to release massive amounts of methane from these sensitive clathrates, setting off a runaway greenhouse effect.
              The cause of all this havoc?
              In both cases, a temperature increase of about 10.8 degrees Fahrenheit, about the upper range for the average global increase today's models predict can be expected from burning fossil fuels by 2100. But these models could be the tail wagging the dog since they don't add in the effect of burps from warming gas hydrates. Worse, as the Arctic Council found, the highest temperature increases from human greenhouse gas emissions will occur in the arctic regions-an area rich in these unstable clathrates.
              If we trigger this runaway release of methane, there's no turning back. No do-overs. Once it starts, it's likely to play out all the way.
              Humans appear to be capable of emitting carbon dioxide in quantities comparable to the volcanic activity that started these chain reactions. According to the US. Geological Survey, burning fossil fuels releases more than 150 times the amount of carbon dioxide emitted by volcanoes-the equivalent of nearly 17,000 additional volcanoes the size of Hawaii's Kilauea.
              And that is the time bomb the Arctic Council ignored.
              How likely is it that humans will cause methane burps by burning fossil fuels? No one knows. But it is somewhere between possible and likely at this point, and it becomes more likely with each passing year that we fail to act.
              So forget rising sea levels, melting ice caps, more intense storms, more floods, destruction of habitats and the extinction of polar bears. Forget warnings that global warming might turn some of the world's major agricultural areas into deserts and increase the range of tropical diseases, even though this is the stuff we're pretty sure will happen.
              Instead, let's just get with the Bush administration's policy of pre-emption. We can't afford to have the first sign of a failed energy policy be the mass extinction of life on Earth. We have to act now.
              John Atcheson, a geologist, has held a variety of policy positions in several federal government agencies.
              Copyright 2004 Baltimore Sun



               

                  이런 사람이 좋더라 손을 잡으면 손이 따뜻해지기 보다는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사람이 좋고 밥을 먹으면 신경 쓰이는 사람보다는 함께일 때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좋고 문자가 오면 혹시나 그 사람일까 기대되는 사람보다는 당연히 그 사람이겠지 싶은 사람이 좋고 걱정해 줄 때 늘 말로만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보다는 오직 행동 하나로 묵묵히 보여주는 사람이 좋고 친구들 앞에서 나를 내세워 만족스러워하는 사람보다는 나로 인해 행복하다고 쑥스럽게 말해주는 사람이 좋고 첫눈이 오면 전화로 첫눈이 왔다며 알려주는 사람보다는 '지금 나와! 집앞이다.' 이 한마디로 보여주는 사람이 좋고 겨울날 함께 걷고 있을 때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는 사람보다는 자기 옷 벗어주면서 묵묵히 손 꽉잡아 주는 사람이 좋고 내가 화났을 땐 자존심 세우면서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보단 다신 서로 싸우지 말자고 날 타이를 수 있는 사람이 좋고 전화통화를 하면 조금은 어색한 침묵과 함께 목소릴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보다는 자다 일어난 목소리로 하루일과를 쫑알쫑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좋고 감동을 줄 때 늘 화려한 이벤트로 내 눈물 쏙 빼가는 사람보다는 아무말 없이 집앞에서 날 기다려서 마음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 좋고 서로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일시적인 감정보다 사랑에 믿음이 더해진 영원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좋고 아직은 서로 알아가고 있는
                  낯선 사람보다는 이미 익숙해서 편한 사람이 좋고 내옆에 없을 때 곧 죽을 것 같은 사람보다는 그 사람 빈자리가 느껴져서 마음이 허전해지는 사람이 좋다. - 좋은 글 중에서 -
              어쩌다 기도할 때
              생각나는 사람보다
              늘 그리워 하며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좋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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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도 이제는 저멀리 고운 단풍은 낙엽되어 거리에 애물단지로 변하고 한쪽에선 어서 가라 하며 고운 함박눈 펑펑 내리는 11월의 마지막 날,,, 초겨울비가 처량하게 내리는 아침 사무실에 앉아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묵상에 잠긴다. 하나님게 부끄럼없는 삶을 펼쳐가는 것이 내 소망이고 바램이기에 오늘도 힘차게 기뻐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올릴것이다. 늘 새로운 하루을 주시는 하나님 그 반면에 오염된 버려야 할것들은 하루기 멀다하고 내 몸안에 축적되어간다. 늘 버린다고 애를 쓰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이되면 늘 후회하며 눈물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내 모습이 왜 그리 처량한지 모르겠다. 2011년도 이제 30일~ 진정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체 살아왔지만 마지막 마무리는 아름답게 보내고 싶다. 그 마무리는 내 삶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보일 수 있는 삶이기를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기를 내 입술에서 달고 오묘한 말씀이 한시도 끊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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