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찬양과 예배에 대해서는 마지막입니다. 다음 시리즈는 언어에 관련된 시리즈로 4차에 걸쳐서 연재하겠습니다.


요사이 교회 음악은 복음성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더구나 CCM이라고 분류되는 애매모호한 곡들이 무분별한 상태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곡조에 신앙적 가사를 붙여서 부르던 것이 변천하여 곡조 뿐만 아니라 가사까지도 색깔이 불분명 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음악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예를 들면, 노래를 부르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일단 노래를 부르면 그 사람은 자신이 부른 노래의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심심풀이로 세상노래를 부르는 것도 삼가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찬송가를 몇 시간씩 듣고 불렀어도, 잠깐 듣고 잠깐 부른 세상노래가 더 큰 영향력을 노래를 듣고 부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 곡조에 하나님적인 가사를 붙여서 부를 때에 좋은 결과만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기대입니다. 가사가 미치는 영향력과 함께 곡도 영향력이 마찬가지로 크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복음성가가 교회에서 사용되게 된 중요한 역사적 동기 중의 하나는 믿지 않는 세상의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 곡조에 익숙해져 있는 저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곡조, 즉 귀에 익숙하여 듣기에 좋고 부르기에 편한 곡조에 교회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사를 붙여서 따라 부르도록 만들고, 점차 복음 성가 곡의 영향력을 받고 따르게 하여 결국은 교회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접근 방법이 청소년들을 교회에 와서 “의자에 앉게 하는데” 까지는 상당한 실효를 거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즐겁게 해 주면서 교회로 끌어오려 했던 노력의 결과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물리쳐 버리고 복음성가를 찬송가의 자리에 앉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복음성가가 양육을 시켜야 하는 교육 현장에서 쓰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한 것은 복음성가가 가진 가사의 영향력이라고 한다면, 복음 성가가 가진 세상적 곡조의 세상적 영향력이 믿는 아이들, 즉 양육 받는 도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적용될 때 아무런 부정적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분명히 은근하지만 확실한 영향을 미쳐서 이번에는 믿는 아이들을 믿지 않는 세계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성가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찬송가가 사라져 가는 것도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꼭 전통적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찬송을 모르기 때문에 신령한 음악의 세계, 즉 성령께서 수 십년 또는 수 백년을 두고 계속적으로 역사하신 신령한 음악의 세계를 접해보지 못하고 자라면서 신령한 음악과 세상 음악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적 교회 음악을 듣고 배우며 자란 사람은 금방 분별이 되어 거부감이 올 수 있는 곡을 복음 성가만을 부르며 자란 사람은 거부감을 못 느끼는 결과적 차이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음악은 우리가 좋아한다고 우리 마음대로 불러서는 안됩니다. 음악의 힘과 능력이 사람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우리 마음대로 즐기다가 싫으면 옆으로 치워놓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가사만을 보면서 아무 곡이나 교회에서 부르도록 허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복음성가가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훌륭한 복음성가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찬송기를 아예 모르는 상태로 복음성가만 부른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책임지고 양육 받는 아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성령께서 곡도 가사도 만드셨다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확실하게 인증된 신령한 음악인 찬송가를 우선적으로 듣고 부를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기억합시다! 믿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선교의 대상이기 이전에 양육의 대상이라는 점을!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2/15/2005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담임 최영호 목사
www.sewoondol.org  www.deliverusensemble.com

츌처: USA 아멘넷: 공부합시다 님.




호박의 황색은 주로 카로티노이드라고 하는 색소에 의해서 빛깔을 띠게 된다.

카로티노이드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 잘 알려진 것은 체내에 들어가서

비타민A로 변하는 카로틴이 있다.

비타민A가 암을 예방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최근 연구에서 카로틴도

암을 예방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카로틴도 몇 개의 종류로 나뉘는데 β카로틴에는 암발생을 억제하는 작용과 함께

암을 치료하는 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동물실험에 의해 확인됐다. 암을 예방하는 작용은

β카로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밖의 다른 카로틴의 작용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이 실시되었다.

발암촉진물질에 의해서 활성이 상승하는 효소에 대한 카로틴이 어떠한 효과가 있는가를

조사한 결과 β카로틴보다는 α카로틴쪽이 억제효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폐암과 피부암의 발생에 대한 효과를 쥐를 사용해서 조사해 본 결과 α카로틴이

β카로틴보다 강력한 항암효과를 나타냈다. 이미 암에 걸린 세포에 대해서도 역시

카로틴을 첨가한 경우와 첨가하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 암세포의 증식방법을 비교해 본 결과

이번에는 암의 증식억제작용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α카로틴은 암의 억제작용이

β카로틴보다 10배정도 뛰어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루틴이라고 하는

카로티노이드에도 암의 발생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고혈압 예방·개선

겨울에 호박을 먹으면 오래산다고 하여 옛날부터 호박은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들은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하였지만 의학적으로도 호박은 상당히 좋은 식품으로 증명되고 있다.

고혈압의 원인으로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는 것을 들고 있다.

소금에 포함되어 있는 나트륨이라고 하는 성분이 문제가 된다.

나트륨은 우리들 몸에 필수부가결하거나 소금을 너무 섭취해서 나트륨이

혈액중에 과잉되면 몸 조직안의 수분이 증가한다. 수분이 증가한 혈액은

중량도 증가해서 심장은 지금까지 중량이상의 압력을 받아 혈액을 보내지 못하게 되어

혈압은 당연히 올라가게 된다. 또 나트륨은 혈관벽에 흡수되어 혈관근육을 수축시킨다.

혈관이 좁게 되면 심장은 좁게된 혈관에 혈액이 보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압력이 필요하여 혈압이 높아지게 된다.

◆ 동맥경화 방지

동맥경화는 문자그대로 동맥의 혈관벽이 딱딱해지기 때문에

수축성을 상실하여 막히거나 터지기 쉽게 된다. 이것이 뇌혈관에서 일어나면

뇌졸중의 원인이 되고 심장혈관에서 일어나면 심근경색등의 심장병을 초래한다.

이와같이 여러 가지 성인병의 원흉이 되는 동맥경화를 방지해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비타민C이다. 비타민C는 콜레스테롤이 생성을 억제하고

피속의 콜레스테롤치를 정상적인 수치까지 내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 눈병을 막아준다

비타민A는 우리신체의 생리기능을 정상적으로 지켜주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부족하면 야맹증등 여러 가지 결핍증이 몸에 나타난다. 야맹증은 어둠속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는 병이다. 우리들 눈의 망막에는 빛을 감지하는 세포와 색을 감지하는 세포가 있다.

비타민A가 결핍되면 빛을 감지하는 세포의 작용이 나쁘게 되어 빛의 어둠속에서는 보이지 않게 된다.

중년이 되면 시력이 쇠퇴해지기 때문에 매일 비타민A가 부족하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눈병이라고 하면 현대사회의 고령화와 함께 늘고 있는 것이 백내장이다.

백내장은 안구에 있는 수정체라고 하는 곳에 혼탁이 생겨 시계가 침침해지는 병이다.

수정체는 카메라의 렌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렌즈가 혼탁해지면

물체를 보는 것에 이상이 생겨 확실히 볼 수 없게 된다. 50세를 넘어서면 반수이상의

사람이 백내장에 걸린다고 한다. 백내장은 일종의 노화현상이라고 하는 설이 유력하지만

확실한 원인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연구가 거듭되면서 백내장에 비타민C가

관계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백내장에 결려있는 사람의 수정체를 비교해 보면

정상적인 사람과 비교하여 현저하게 비타민C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비타민C의 결핍이 백내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비타민C를 적극적으로

섭취하는 것으로 백내장을 예방하거나 진행을 늦출 수 있다.

◆ 대장암 발병억제

지금까지 대장암은 서구인에게 많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 때문에 대장암이라고 하는 병명자체는 아직 귀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은 이 대장암이 급증하고 있어 21세기초에는 사망률은 위암을 앞지를 것이다.

대장암의 큰 요인이 되는 것은 변비이다. 우리들 장안에는 대장균과 유산균등

몸에 좋은 작용을 하는 균이 살고 있다. 따라서 변비가 계속되어 변이 대장안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이 좋은 균이 나쁜균으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이 나쁜균이

음식물의 가스와 담즙산을 분해하여 발암물질을 만든다.

대장암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식물섬유를 많이 섭취해야 한다. 식품섬유에는

장내의 좋은 균을 늘리는 작용이 있다. 좋은균은 식물섬유를 먹이로 하여 증식하고,

´유기산´이라고 하는 대사물을 발생시키고 이 유기산이 장벽을 자극하여 장의 운동을 촉지하고

변통을 촉진해 준다. 또 좋은균에는 나쁜균을 퇴치하는 작용이 있고 나쁜균이 만든

발암물질을 해독시켜 준다. 식물섬유에는 대장을 통과하면서 장벽에 부착되어 있는

발암물질을 흡착하는 작용도 있다. 식물섬유에 붙어 있는 발암물질은 변과 함께 체외로 배출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식품이 호박이다. 호박은 섬유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식품이다.

일반적으로 식물섬유라고 하면 양배추와 양상추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실은

호박이 양배추와 양상추보다 많은 식물섬유를 포함하고 있다. 또 호박은 반찬하기 쉽고

잎사귀야채에 비해서 한번에 많은 양을 섭취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양배추와 양상추를

100g과 150g을 먹으려면 힘이 들지만 호박이라면 아주 쉽게 섭취할 수가 있다



출처:  USA 아멘넷/ 김성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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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에 대한 Word Origin & History

"Contemporary"
1630s, from M.L. (Medieval Latin). contemporarius, from L. con- "with" + temporarius "of time," from tempus "time". Meaning "modern, characteristic of the present" is from 1866. Noun sense of "one who lives at the same time as another" is from 1630s, replacing native time-fellow (1570s).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German composer, resident in England, noted particularly for his oratorios, including the Messiah (1741) and Samson (1743). Other works include over 40 operas, 12 concerti grossi, organ concertos, chamber and orchestral music, esp Water Music (1717)

미국의 현대 대중 복음전도 운동가로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드와이트 무디(D. L. Moody)는 1837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North Field)에서 태어났다. 1855년 회중교회의 교회학교 교사였던 킴볼의 지속적인 전도로 회심하여 신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1875년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다.  
 
 아이라 데이비드 생키 (Ira David Sankey 1840~1908)
1840. 8. 28. 펜실베니아 에딘버그(Edinburg, Pennsylvania)의 경건한 감리교도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긴 겨울동안 벽난로 주위에 모여 오래된 찬송가를 즐겨 부르곤 했는데, 16세때(1856년) King's Chapel이라 불린 한 교회의 부흥회에서 회심하였고, 그가 출석한 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주일학교 교장과 합창대 지휘자가 된 후, 악기들을 교회 예배에 도입하는데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생키는 20세때(1860년) 링컨 대통령의 군대에 자원 입대했으며 군대 내에서 합창대를 조직해 예배시 군목을 보조하기도 했다. 생키의 첫 번째 찬송가집은 1873년에 영국에서 출판되었는데 '신성한 노래들과 독창곡들'(Sacred Songs and Solos)이라 이름붙여졌으며, 잇따른 복음찬송집(Gospel Hymn series) 제1권부터 제6권까지가 1875과 1891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이들 중 여러 판이 수개국어로 번역되어 수백만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판권으로 인한 수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는데 그 상당액은 무디의 교육사업을 돕는데 사용되었다.
 
 생키는 미국 복음주의 대중집회의 선구적 음악 지도자(music director)로서 무디의 복음전도 집회에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복음성가(gospel song)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무디와 함께 사역하면서 주로 무디의 설교 후에 생키가 노래했는데 그의 선율적인 목소리는 깊은 확신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 활발하게 시작된 복음성가는 부흥사 무디와 복음가수 생키 (1840-1908)에 의한 도시 복음전도 집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복음성가(Gospel Song)가 본격적으로 불리운것은 1874년 블리스가 지은 [복음성가Gospel Songs] 라는 작은 모음 곡에서 비롯되었다. 블리스는 1869년 여름 시카고에서 생키를 처음 만났으며, 시카고에 머무르는 동안 무디가 설교하는 예배에서 자주 찬양을 하였다. 이후 블리스는 무디의 권유로 유명한 부흥사 윗틀(Whittle)이 인도하는 집회의 찬양 인도자로 사역하였으며 지금 우리가 즐겨부르는 찬송가 "달고 오묘한 그말씀 " 하나님의 진리등대"등 많은 복음성가를 작사 작곡하였다. 
 
 생키는 집회때마다 풍금(Reed Organ)에 맟추어 노래를 하며, 많은 복음성가를 부르며 소개하게 되었다. 무디와 생키의 공동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1872년에는 영국에 초청이되었고 복음성가의 가치가 인정되는 데 공헌하게 되었다. 생키와 무디에 의해서 꽃이 핀 복음성가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또는 변형되어 불리고 있고, 세계와 한국 교회의 음악 여러 부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찬송가 책에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의미의 찬송가와 간접적 표현의 복음성가도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3분법에 의하면 찬송(Hymns) , 복음찬송(Gospel Hymns), 복음성가 (Gospel Songs) 로 나눌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블리스는 자신의 찬송가 제목을 [복음성가] (Gospel Songs, 1874) 라 하였고 일년후 생키와 블리스가 찬송가를 다시 편집 할 때는 [복음찬송과 성가](Gospel Hymns and Sacred Songs, 1875) 라고 하였다.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쉽게 구분한다면 찬송가에는 "아멘"이 붙는다. 복음찬송이나 복음성가에는 "아멘"이 붙지 않는다. 그러므로 찬송가 끝에 아멘이 있으면 찬송가이고 아멘이 없으면 복음성가나 복음찬송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높이며 찬양하면 찬송가이며, 우주만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찬송하는 내용이면 복음찬송이고, 경혐적이고 주관적인 내용일때는 복음성가이다. 요즘엔 워낙 많은 복음성가가 창작되고 또 수 많은 찬양사역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찬양인도자나 특송자들은 사역 현장에 알맞는 좋은 곡을 선별해서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 이다. 또한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찬양가사와 멜로디를 잘 선택해야하는 안목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총신대 홍정표 교수의 글 중에서
"찬양의 동기는 바로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어야한다.상황을 바꾸어 개인적으로 이것을 적용해보면 죄로인해 죽었던 나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나의죄를 대신지시고 돌아가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 할것은 그 사랑과 은헤를 찬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특히 젊은층에서 너무 체험적인 내용의 성가들이 많이 불려왔었다. 이것은 자칫하면 궁극적으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빼버리고 내가 받은 은혜와 감격에 파묻혀 일종의 자기만족과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정도의 얄팍한 수준의 노래밖에 되지 못하는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노래가 새롭게 큰 힘을 가지고 한국 교회에 도전을 주고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찬송은 쉽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인데 시는 구약의 시편과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찬미는 찬송가와 예배때 불리는 성가곡들이며 신령한 노래는 그밖의 생활 속에서도 필요한 기도, 확신, 전도, 그리고 헌신 등에 관한 노래들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복음성가문제로인해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이 많아 복음성가(Gospel song)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흔히 복음성가라하면 현대 스타일로 작곡되어지고 노래되어지는 모든 곡들을 말하는데 이름바 복음 성가 "나의 입술에 모든 말과 "라는 찬송을 볼 때 이 노래는 사실상 예배와 경배 혹은 기원 찬송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잘못되어 진 것은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구분을 가사와 곡의 내용보다 곡의 스타일(현대적인가 아닌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복음성가인가 아닌가는 곡의 내용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마땅하다. 현재 우리 나라 찬송가 안에서도 많은 복음 성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송가 안에 들어 있다고 해서 찬송가로 불리워지는 것이지 엣날스타일의 복음성가이다.(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Gospel Hymm 이라고도 함)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복음성가라하는 것 중에도 WORSHIP SONG(예배와 경배를위한 찬양),SCRIPTURE SONG(성경을 가사로 한 찬양),Gospel song(복음성가),contemporary music(현대스타일의대중적인찬송) 등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출처: USA 아멘넷/ Aposlte 님



영혼의 친구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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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stle님, CCM이 복음전파의 수단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럴까요?

어느 분이 이전 글에 댓글로 이미 달아놓으셨지만, CCM은 크리스천 컨템포러리 뮤직의 약자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크리스천의 마인드와 메세지를 담아낸 '현대음악'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즉, 현대음악의 다양한 쟝르들 - 록, 재즈, 컨트리 등등 - 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현대음악의 틀 안에 복음적인 메세지를 담아낸 음악이 CCM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CCM은 엄밀히 말해 그 대상이 '세상 사람'이고, 그 주제는 물론 하나님 '찬양' 이 될 수도 있지만, '찬양'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고민해보아야할 다양한 문제와 소재들을 직설적으로 때론 은유적으로 표현해낸 것이 CCM인 것입니다.

물론 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CCM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 음악의 한 형태라고 분류할 수 도 있겠지만,  이러한 분류는 CCM이 가진 본연의 목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두리뭉실한 정의가 될 수 있습니다. CCM은 이미 믿음을 가진 기신자들 안에서 공유되고 공감되어지는 찬송가와 복음성가와는 그 표현방법이나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성경66권만큼 그 권위를 인정하는 찬송가 음악들은 일반적으로 제목 그대로 '찬송'에 그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보면 모든 찬송가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 의 목적 자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곡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모르진 않으시겠죠?

1900년도 초기에 '복음성가'로 불리워지던 곡들이 찬송가로 채택이 된 경우가 많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신자들의 거센 반대와 항의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진 않으시겠죠? 예배에는 오르간 따위의 천한 악기가 쓰여질 수 없다고 못박아두었던 시대가 불과 몇백년전이라는 것도 모르진 않으시겠죠? '찬송' 본연의 의미는 오직 그 대상이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의미합니다. 찬송가의 모든 노래가 '찬송'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찬송'보다는 권면이나 확신, 사랑과 나눔의 주제를 가진 찬송 아닌 찬송가들도 수두룩하지요. 하지만 그냥 편하게 우린 이 모두를 통칭하여 '찬송가'라고 하는 것 뿐입니다. 어쨌든 찬송가는 절대적으로 이미 교회의 안마당으로 들어온 신자들 안에서 공유되어지는 노래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찬송'이지, 찬송가의 근본 대상은 절대 사람이나 회중이 아닌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성가'는 뭘까요? 찬송가에서 좀 더 넓은 범주로 넘어가야 합니다. '복음 성가'는 찬송가와 같은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복음전파의 목적과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세상사람들을 향한 선포의 성격을 가진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성가'라는 표현이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복음성가'라는 것도 근 1세기 가까운 시간을 거쳐 다듬어지는 동안 일종의 '찬송가'만큼의 권위를 획득한 것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일단 '복음성가'의 기준은 명확한 성경적인 메세지가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면서 성도도 만족시키고, 게다가 세상사람들을 향한 복음선포와 사랑의 권면 또한 그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복음성가' 역시 CCM에 비하면 좀 더 보수적이고 '복음' 본연의 칼라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찬송가와 더불어 교회 예배 음악으로 널리 쓰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찬양인도의 선곡은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비율을 거의 50:50으로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CCM으로 갑니다.

CCM이라는 쟝르에 대한 왜곡이 생각보다 많은 분들에게 만연해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CCM마저도 무조건 교회내에서, 그것도 성도들끼리만 은혜나누고 함께 공감하며 감동하는 테두리 안에 가두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예수님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들, 혹은 교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나 물음표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찬송가 혹은 복음성가는 어떻게 들려질까요? 거의 외계언어 수준일겁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아프리카 토속 부족민들이 함께 모여 신나게 부르는 그들만의 노래를 문명인인 우리들은 너무나 낯설고 괴상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이라는 겁니다. CCM으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르게 할 순 없지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CCM은 분명 아직 믿음의 세계를 접하지 못했거나,  기독교 문화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굳게 닫혀진 마음문을 조금씩 열어갈 수 있는 '크리스천' 음악의 한 조류입니다. 제발 CCM으로 은혜를 받냐느니, CCM은 왜 그리 세상음악하는 꼴이랑 똑같냐는 말씀 좀 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글 앞부분에서 이미 서술해놓은대로 CCM은 다양한 현대음악의 쟝르를 빌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굳이 믿는 사람들이 세상음악, 그것도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세상의 음악들을 흉내내야 하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죠? CCM의 터닝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세상음악들의 '때깔'은 대단합니다. 사운드와 악곡도, 그러한 음악들을 연주하는 아티스트들도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들이 널려있다시피 합니다. 그만큼 청자들의 귀도 높아질만큼 높아진거죠. 그런데 소위 우리가 말하는 '교회음악'은 뭐하고 있습니까? 맨날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끼리만 은혜받고 우리끼리만 감동하고 있으면 세상사람들이 우리 음악에 귀를 기울여 준답니까? CCM은 바로 이러한 이슈에서 출발하는 일종의 문화전략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교회 문턱까지는 끌고와야 안마당으로 들어오라고 다시 한 번 권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CCM에는 담아낼 수 없는 - 비신자들의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감안해야 하기에 - 본격적인 복음적 음악과 찬양들을 그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디 CCM을 우리 교회안에서 불려지는 예배찬양이나 복음성가와 혼동하지 마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주님을 떠났거나, 혹은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CCM은 충분히 감동이 될 수 있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뀔 수 있는  '복음전파'의 좋은수단입니다. 분명히 CCM안에 깊은 은혜를 담아내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CCM을 교회내의 음악, 즉 예배음악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저도 절대 반대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CCM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사람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CCM의 존재의의와 그 목적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적어도 예수가누굴까? 교회는 무얼까?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라는 긍정적인 의문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하나만 들어도 CCM은 분명 그 존재의의가 확실한 크리스천 음악의 한 조류인 것입니다. 앞으론 아멘넷에서 CCM이 세대를 갈라놓는다는 둥, 교회에서 CCM이 찬송가보다 더 많이 쓰여서 걱정이라는 둥, 복음성가와 CCM의 정확한 의도와 목적도 모르고 그 둘을 통용하여 쓰는 경우의 글들은 더 이상 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아멘넷/ 김성진님




찬양 시리즈 계속됩니다. 이 시리즈에 실리는 글들은 모든 복음성가/CCM 을 죄악시 하는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 무엇이 더 적합한지 독자들이 읽으시고 기도하시며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반대하시는 분들 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읽지 마시고 기도하며 정말 내가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음악이 무엇일까 깊히 고민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보수,진보 관심없습니다. 하나님중심에 저는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복음성가를 즐겨했고 CCM의 시초라고 할수있는 Calvary chapel 의 Maranatha 시리즈 그리고 거기서 파생한 Vineyard 음악, 그리고 Alter Boys, Resurrection Band, Undercover, Sweet Comfort Band, 후에 Steve Curtis Chapman, DC Talk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David Ross (오대원 목사) 의 찬양대등 나름대로 CCM 을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던중 지금 저희 목사님을 통해 찬송가의 아름다움, 깊이, 예배에 합당한 음악등을 알게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만하고 시간이 되시면 아래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찬송 소리를 듣고 싶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하신 것처럼 해석하시는 분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의 결과로, 요즈음 하나님은 찬송을 너무 너무 좋아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께 될수록 많은 찬송을 불러드려야 할 의무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속해서 똑같은 옛날 찬송가들을 불러드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아름다운 노래들을 많이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전체의 내용과 동떨어진 자의적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앞뒤에 나오는 내용들이 음악과 관계된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과 관계된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싶으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애굽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권세와 능력으로 당당하게 구원해 내심으로 세계만방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타락과 징계, 그리고 구원받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신실하심, 선하심, 온유하심, 강력한 능력, 창조주이심과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세계만방에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지 즐기시는 분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밥도 주고, 훈련도 시키고, 같이 놀고, 운동시키고, 항상 자식처럼 데리고 다니며 즐기고, 귀엽게 노는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완용 같은 인간들을 위하여 독자 아들로 하여금 모진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시고 무지막지한 매를 맞도록 그냥 놔두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인류의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모든 죄의 삯을 혼자 감당하게 하셨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놀고 싶어서 자녀를 가지려는 부모는 정말로 자식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감상하고 싶어서 “노예”를 키울 수는 있지만, 노래 소리를 들을 목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정상적인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자녀로 삼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기대치는 예쁜 율동이나 소리를 내는 정도보다는 훨씬 높고 고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찬송을 불러야 할까요?

       신자들 중에는 찬송을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고 찬송을 부르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막연히 갖고 있는 생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찬송을 유난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찬송을 부른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찬송을 좋아하시고 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만, 이런 것들이 찬송을 부르라고 명하시게 된 우선적 동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것을 더 기뻐하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받을 때 좋아하고 자기 자신이 잘 될 때 좋아 하지만, 부모의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줄 때, 또 자녀들이 부모보다 더 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찬양을 기뻐하시지만, 하나님 자신 때문은 아닙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물들을 바치면서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답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고 책망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받고 싶으셔서 제물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심령이 제물을 바치는 과정을 통하여 바로 고쳐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듣기 원하시는 찬송도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찬송의 가사와 곡을 통하여 부르는 우리들의 심령이 바로 고쳐지고, 믿음에 굳게 서고, 평화를 누리고,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시켜줌으로 실질적인 삶과 심령이 온전히 변화되고 성숙해지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치라고 하는 것은 전부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헌금을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갖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에게 더 주시고 싶으셔서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받고 싶은 마음이 많은 하나님이시라면,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정성을 다하여 지어 바치려고 했을 때, 좋아 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하나님은 사실상 다윗의 제안을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생각하던 계획대로 마음껏 웅장하게 짓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설계도를 손수 만들어 보여주시면서 짓기는 솔로몬이 짓되 오직 설계도대로 짓도록 한정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정성껏 가장 멋지고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게 지으려는 다윗의 정성어린 마음을 물리치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라도 좋은 것을 주시려 하는 분이시지 받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받으시는 부분에서는 한계를 두셔서 지나치게 많이 바치고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도록 제한을 두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깊고 순수하고 선하신 의도를 모르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사람이 가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제물 자체를 받으시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 주시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의 수치를 가려줄 가죽옷 때문에 희생당한 짐승을 제물로 받으신 것인데, 하나님이 받고 안 받으시는 것에만 신경을 썼던 가인은 자신이 나름대로 준비한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깊으신 뜻을 알지 못하면 이런 일들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CCM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받으려고 노래 부르라고 한다면 CCM의 취지, 방법, 방향이 다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가장 좋을 것들을 주시려고 찬양을 요구하신다면 대중적 음악에 기초를 둔 CCM은 신중하게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CCM과 같은 유행과 인기에 편승한 음악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려고 하시는 최고 최선의 음악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노래 부른다면 CCM보다는 성령께서 신자들을 위해서 감동감화로 만들어 주신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런 노래는 부르고 저런 노래는 부르지 말라는 식의 명령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음악의 장르는 아무 것이나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아무 음악이나 교회로 끌고 들어와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실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든 안하든, 중요성을 인정하든 말든, 어쨌든 우리가 부르는 음악은 부르는 것과 동시에 당장 우리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실질적이고도 확실한 영향력을 예외 없이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냐고요? 우리들의 자녀들을 적어도 교회에 끌어와 앉혀 놓을 수 있을 만큼, 또 마음에 드는 찬양을 부르는 교회를 따라서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게 할 만큼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미미한 힘이 아니라,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음악을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음악은 부를 때는 내가 부르지만, 부르고 나면 음악이 나를 사로잡아 끌고 다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노래든지 그 노래의 곡조와 가사는 나름대로의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래의 쓸쓸한 곡조는 부르는 사람을 쓸쓸하게 만들고, 노래의 경쾌한 곡조는 사람을 경쾌한 기분을 갖게 만들고, 행진곡조는 힘을 줍니다. 노래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국가 가사는 나라를 생각하게 해 주고, 이별을 노래한 가사는 부르는 사람을 우울하고 쓸쓸하게 해 줍니다. 곡조와 가사가 우리에게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음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부를 수도 있고 안부를 수도 있지만, 일단 불러 놓은 음악의 곡조와 가사는 우리에게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다루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차에 타서 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고 브레이크를 밟음으로 육중한 자동차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도 할 수 있고 멈추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붙잡고 멈추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이기 시작한 차를 붙잡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일단 불렀다 하면 그 다음은 자신이 부른 음악의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 유행가를 장난삼아 불러 보는 것에도 될수록 삼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를 때는 내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지만, 일단 부르고 난 다음에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자신이 스스로 불렀던 노래의 영향을 노래 부른 사람 자신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곡이 그 곡을 부른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좋은 영향만 준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될 수 있으면 자주 불러야 한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음악을 주신 이유는 주신 음악을 사용함으로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악으로부터 보호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르기 싫어도 찬송을 부르면 찬송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일을 참고해 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던 여호람왕이 자기 마음대로 모압을 치기 위해 떠난 후 절박한 위기를 맞게 되자 엘리사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선지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뜻을 물어봐 달라는 악인 여호람의 뻔뻔스러운 부탁을 받고는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했던 일이 거문고 타는 사람을 불러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호람 왕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도무지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거문고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성령의 감동이 임하여 예언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르기 싫어서 안 부르고, 오직 부르고 싶은 곡들만 부르고, 더구나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해 주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악기를 만들어서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대로 마음대로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실한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게 해 주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덧입게 해 주기 위해서, 길을 인도해 주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찬송들을 혹시 부르기 싫을 때에라도 열심히 부르는 것이 우리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성도다운 태도이고 믿음이고 지혜인 것입니다.

       찬송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좀 헤아려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 최선의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부르라고 준비해 주신 찬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복음성가를 선호하시는 분들이 “CCM의 정당성 여부는 부르고 듣는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찬송가와 같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선 것입니다. 차라리 CCM이 더 진보적이고 현대적이라서 더 크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지금 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세대들에게 친근감을 주어 설득력 있게 접근하기에 가장 적합한 복음전파의 도구이며, 앞으로 올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고,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부르고 안 부르고를 결정하는 문제를 단순히 문화적인 이슈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불러다 놓고 “이제부터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라!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를 즐기겠다!”라고 하시는 분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잔치 장소와 음식과 예복까지 미리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자기 마음대로 준비해서 자기가 드리고 싶은 것을 자기식대로 드리는 것은 초대하신 분을 자기도 모르게 무시하는 것이 되고, 도리어 성령을 근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으로 외식을 시켜 주고 싶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무엇을 먹고 싶니?’ 하고 물었더니 무조건 햄버거를 사 달라는 거예요……. 아이들이 원하니까 사 주긴 했지만……. 조금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좋은 것을 주려고 불렀는데 별로 주고 싶지 않은 것을 요청 받았을 때의 부모 마음을 솔직하게 말한 것입니다. 좋은 찬송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르라고 하는데 “저는 문화적 배경이 달라서 잘 맞지 않거든요! 그런 것보다는 제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한 좋은 것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좋아하실 줄 믿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초대한 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만 하는 것은 성숙된 신자들이 가질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독생자 아들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깊은 사랑을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존중하고 따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 (삼상 2:30) 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르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종이 아름다운 노래보다 낫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은 노래 잘 부르거나 값진 제물을 많이 드리던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참고해 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노래 자체가 아니고, 노래에 의해서 만들어진 올바른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도 좋고 경배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한,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생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순종 없는 찬양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무겁고 더 불편하고 더 답답하게 만들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라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기뻐하시고 이미 사랑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하는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성령께서 찬송작곡자와 작사자 개개인의 삶속에 주인으로 좌정하셔서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시면서 함께 땀 흘리시고, 함께 울고, 함께 피 흘리시며 만들어 주신 찬송을 부르면서,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권세와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저런 찬양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애쓰기 보다는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다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인증 받은 전통적인 찬송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7/3/2007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출처: USA 아멘넷/ 공부합시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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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vatican.va/various/basiliche/san_giovanni/vr_tour/index-en.html

 

 





지난 며칠 동안 쏟아져 내린 눈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산과 들은 온통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인데, 회색빛 저녁 하늘이 착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서 오늘 밤에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어린 소녀의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고향 교회에서는 연세가 높으신 장로님의 인솔하에 청년들이(지금 생각하면 청년이래야 모두 중고등부 조무래기 학생들이지만...^^) 새벽송을 돌았다. 해마다 울 언니와 오빠는 새벽송 팀을 따라서 돌다가 밤이 늦어서야 상큼한 바람 향기를 몰고 들어와 잠자리에 들곤 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정말 많이도 부러웠었다.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 보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한 번도 데려가 주질 않아 섭섭했더랬는데, 오늘 저녁은 함께 가도 좋다고 한다. “언니, 나 정말 따라가도 되는 거지?” 아침에 이미 가족의 동의를 얻었건만,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너무 좋아서 무엇이건 말을 자꾸만 건네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래, 먼 길을 다녀야 하는데, 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리지 마!” 귀찮다는 듯, 짜증스럽다는 듯, 언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저 생글생글 즐겁기만 했다. 두 살 터울로 위인 언니는 무엇이건, 나보다 먼저 경험했기에, 내게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노래도 곧잘 부르는 우리 언니, 시쳇말로 나의 아이돌이었고 신기한 바깥세상을 미주알고주알 전해주는 꿈길의 통로였으니까. ㅋㅋㅋ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처음 새벽송을 따라갈 수 있었던 나의 성탄절 이브, 가슴이 설레어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언니와 오빠를 놓칠세라 허둥거리며 대문을 나서는 내게 어머니는 예쁜 오색실로 손수 짠 목도리를 다시 한 번 매만져주시며 “아가, 덤벙대지 마라, 그러다 눈길에 미끄러져 다칠라. 언니 손 꼭 붙잡고 잘 따라다녀야 한다 알겠지?” “네, 알고 있어요.” 따스한 털신이며, 두툼한 스웨터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한 채, 밖으로 나온 나는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가득 찬 듯, 두 발은 구름을 밟고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는 듯, 너무 행복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까만 밤하늘이 열리면서 새하얀 날개옷을 걸친 눈의 요정들이 하늘하늘 춤추며 어깨와 머리 위로 사르르 사르르 보드랍게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발이 폭폭 빠질 정도의 심한 눈보라가 되어 앞이 보이지 않도록 휘몰아친다.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따라 교회 성도님들 집집이 찾아다니느라 밤이 깊도록 하얀 눈을 맞았고, 무섭게 쌩쌩거리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다 눈길에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기도 했지만 아프다는 느낌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대문 밖에서 목이 터져라 찬양을 부르고 나면, 후덕하신 권사님들이나 장로님 댁에서는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추운데 잠시 들어와 몸을 녹이고 가라시며 모두를 따스한 방으로 안내하신 후, 맛난 식혜를 끓여서 내어놓기도 하시고, 어떤 집에서는 팥죽도 끓여 주시고, 그것도 여의치 못한 집에서는 과자 봉지를 사두었다가 안겨 주기도 했다. 중고등부 남학생 오빠들이 큰 자루를 메고 다니며, 건네주는 과자를 모두 넙죽넙죽 받아서 자루 속에 집어넣는다. 한 자루 수북하게 과자가 모이면 그것을 성탄절 당일, 주일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상이란 명분으로 푸짐하게 나누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두 뺨과 두 귀는 새빨개져 오고, 시리다 못해 얼얼해지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른들과 청년들로 구성된 새벽송 팀을 따라다니느라 어린 몸이 지치고 피곤하였을 것이나, 마음만은 그 옛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새록새록 감동의 밤이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뿌리가 깊어지며 자라서 별이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성탄절 이브의 아름다운 추억에 잠겨보게 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성탄절의 기원:

X-mas는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첫 글자 Χ(키)에 mas를 붙여서 쓴 것이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기원후 336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참배하러 왔다는 마태복음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현일(公現日,1월 6일)과 동시에 행해졌다. -위키백과사전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의 고대 영어 (Cristes maesse에서 유래) 그리스도교의 축일(12. 25).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시에 대중적인 공휴일이기도 하다. 로마 역서(曆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1월 6일에 하나님이 예수의 탄생과 세례 때 나타난 일을 기념했고, 예루살렘에서는 탄생만 기념했다. 4세기에는 동방교회 대부분이 점차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오랫동안 크리스마스를 반대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12월 25일 대신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했다. 동방교회는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지키게 된 후 1월 6일은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의공현대축일로 지켰다. 그러나 서방의 주의공현대축일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異敎)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백과사전

위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유감스럽게도, 성탄의 목적과 장소는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주께서 오신 그 중요한 날짜는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방 신을 섬기던 그날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날을 성탄일로 정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는 이토록 어설픈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어설픈 기원을 악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단 사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기독교를 정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며,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주위 문제를 더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다 사단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참으로 무섭고도 공교한 말로 기독교 믿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이단 단체에서 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약간은 어설픈 부분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그 내용을 더욱 무섭게 각색하여 아주 더러운 날을 기독교가 크리스마스로 숭배한다며 이곳저곳에서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라

주후 300년경에, 콘스탄틴 대제가 성탄일을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하여서, 다른 날자를 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그날은(12/25)은 이교도의 태양신 숭배의 날이어서 우리가 지키면 안 된다.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어찌 생각해보면, 정말 사단의 교묘한 방해전술일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탄절이 되면, 그 누구의 날도 아닌, 우리 주님의 탄생일로 생각하면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죽어주시려고 이 땅 위에, 그것도 마구간에서 낮아지신 그의 끝도없는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감사 감격하였던가.

그날이 사단의 날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있던 신앙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어놓고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사단의 고등 전술법이란 생각에 씁쓰럼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른 날, 그러니까,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어느 한 날을 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그 어느 날보다 이교도의 축제일로 섬기던 그날이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날짜라고 하는 것은 1년이면 365일, 모든 날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 아닌 날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교도들이 감히 어느 한 날을 내 날이라고 부르며 빼앗아 가려 하고, 우리는 그날은 사단 경배의 날이라고 두려워하면서 그 한 날을 사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못될 것 같다. 그야말로 컨셉이 문제가 아닌가 이런 말이다.

쉬운 예로, 별이가 태어난 날이 4월 8일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날은 부처가 탄생하신 날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지키기에, 너는 너의 생일이라고 축하하면 안 된다 라고 누가 나무란다면....Does it make sense? No way!

이거야말로 황당한 소리다. “그대들은 부처님의 생신으로 지키십시오, 난 내가 태어난 날, 나의 생일로 지킬 것입니다! 이렇게 고집한다면, 내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 되나요?” 물어보고 싶어진다.

여호와 증인들은, 파수꾼이란 말, 또 시한부 종말론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 이런 성경에서 좋은 말은 다 빼앗아 가고 우리는 두려워서 그 단어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 이제는 주님의 탄생일이라고 역사적으로 한 날을 택해서 경배하며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이런 사랑스러운 축하의 날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사단의 음흉한 간계(?)로 보인다. 다른 어떤 좋은 대안도 없으면서.... 사랑으로 선택하면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아멘넷 게시판에 올려진 동영상, 유대 뿌리교의 지도자인 ‘짐 스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만큼 그는 비록 왜곡된 정보일지라도 정확한 정보인 것처럼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더하는 것이 현 기독교인 것처럼 말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분(짐 스텐리)의 인용하는 성구는 전부 구약적인 말씀으로서, 신약시대는 적용시키면 안되는 제사법 제도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이단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헐뜯기 위해서 모든 역사적인 배경이나 성경 말씀을 자신의 어떤 틀에 꿰어 맞추기 하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그런 부패하고 깨끗지 못한 마음일지라도 주님께로 돌아가면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하물며 날짜겠는가? 그 어떤 것이건 창조주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다. 인간이 더럽게 만들었고, 더러워진 부분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만 하면 깨끗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더럽다면 인간의 마음만큼 더러운 것이 세상에 다시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더러운 인간의 깨끗지 못한 심령이지만, 성령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좌정하셨기에,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정해주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비록 짐승들이 거하는 마구간이었지만,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그 순간 그 자리는 깨끗하다 못해서 순백하다. 깨끗한 천군 천사가 동원되어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리로 바뀌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더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 드려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

짐 스텐리와 그 종파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서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다른 것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깨끗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몰라서 지은 죄가 얼마이겠는가? 우리는 태양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소년소녀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행복해 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가시겠는가? 짐 스텐리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사단의 종이란 뜻이 된다. 진리를 혼합한 사단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런 억지성, 모함성 발언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더 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마음이라면, 이미 태양신을 섬기는 마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소중한 날을 더러운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빼내어서 사단에게 내어 준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욕되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잘못일까?.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신다.

우리는 날짜나 절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그들,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삿날이었다하여, 이제 와서 그날을 터부시하거나 너무 더럽게 생각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온갖 추악한 죄로 더러워진 인간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이 성도라 인치심을 받는다. 날짜도 죄인들이 더럽게 제사를 지냈던 날짜라면 이제는 주님께 드려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날로 제정하여 지키면 그것으로 깨끗하여 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가하나 모든 것이 절제 되어야 한다. 그들(이방 신들을 섬기는 자들)처럼 무절제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그저 1년 12달 중 어느 한달, 한 날을 뽑아내어 이 땅 위에 죄인의 몸을 입고 구속 주로 오셔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잊지않고 기념하는 마음, 그런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택은 자유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분의 지혜를 우리 모두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것 뿐이다. 모든 것이, 더욱 밝게 보여지고,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명하셨지만, 탄생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적은 없다. 그러니까, 너무 얽매일 필요 또한 없겠지만, 주님이 오심을 기념하는 마음을 드린다고 하여서 죄인으로 몰아가실 분은 더욱 아니시란 것을 굳게 믿고 사랑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생활이었으면 좋겠다.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 17),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 5: 1)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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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실망하는 일을 겪기 마련이지만
고통과 상실감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면
건강과 인생과 아끼는 관계들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실감과 상처 안에서 지혜를 찾는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길이다.

- 그렉 브레이든의《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중에서 -

* 상실감의 경험,
가장 아픈 고통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중대한 갈림길입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더 높이 치솟느냐의 기로입니다.
당장은 너무 아프지만, 잃은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축복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상실의 경험'은 또 하나의 더 나은 꿈과
지혜를 안겨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상실감과 상처 안에서 지혜를 찾으라 누구나 살면서 실망하는 일을 겪기 마련이지만 고통과 상실감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면 건강과 인생과 아끼는 관계들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실감과 상처 안에서 지혜를 찾는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길이다. - 그렉 브레이든의《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중에서 - * 상실감의 경험, 가장 아픈 고통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중대한 갈림길입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더 높이 치솟느냐의 기로입니다. 당장은 너무 아프지만, 잃은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축복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상실의 경험'은 또 하나의 더 나은 꿈과 지혜를 안겨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I. 서론

내면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급진적인 외부세계의 발달(물질문명의 발달)과 정신적성숙의 부조화로 겪고 있는 인간들은 내면적 궁핍과 갈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혼란과 혼돈의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하여 새로운 탈바꿈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오늘날의 뉴에이지 운동이 형성되기 이르른다. 그러나 이 운동이전에 이미 서구에서는 당시 문화와 가치관의 틀을 형성해 주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으로서 무신론 주의가 등장했고, 내면세계의 풍요와 성숙을 꾀하는 심리학을 통한 인본주의적인 내면운동이 일어났다.



II.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

헤겔은 말하기를 "니체는 이미 죽은 하나님을 축하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어 있다"라고 니체는 그의 책 「Joyful Wisdom」에서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가장 타락된 개념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모순되며 삶을 변화시켜 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서 신의 죽음은 문화적 사실로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는 문화적 인식은 곧 인간해방으로서의 경험을 의미했다. 이와같이 니체에 관한한 신의 죽음은 인간해방의 징표였다. 사실 신의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고, 문화적 포로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자 하나님은 죽었다. 너 고상한 인간들아 이 하나님은 가장 위엄한 존재이다. 그가 무덤에 누워있기에 당신은 다시 부활한다."라고 니체는 외쳤다.

니체는 1900년 죽었다. 그러나 "신의 죽음"의 주제는 미국 신학자 William Hamilton 과 Thomas Altizer에 의해서 다시 부활 되었다. 그 때가 바로 1960년대이다. 시사 주간지 Time지는 1966년 부활절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사실 Hamilton 과 Altizer는 신의 죽음의 운동은 이미 1961년에 Gabriel Vahanian에 의해서 "신의 죽음(The Death of God)"이라는 저서가 출판되면서 시작 되었다. Vahanian은 그 후 1978년 "신의 죽음이란 문화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부언했다. 말하자면 이전 세대의 기독교와 후기 기독교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출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설명이었다. 해밀톤과 알타이저는 바하니안 이상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의 죽음이란 문화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사실이었다. 그들이 전해주고 하는 메시지는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개념의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회복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복음이란 분명히 구원적인 행동으로서 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신의 죽음의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로빈슨은 1963년에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기독교적인 신의 비평의 상당부분은 인습적인 신론(conventional theism)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과연 신은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습적인 종교(교회)안에 갇혀진 신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사실 인습적인 기독교의 신관에 대한 비평은 로빈슨 이전의 1956년 Alasdair MacIntyre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무엇이 신학적인 혁명인가?에 대한 답을 하면서, 하나님은 현상 뒤에 숨겨져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세상적인 해방에 관련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은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한시적인 세상이라는 객관적인 구조 안에 계시는 실체라고 주장했다.

사실 신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의 부재나 계속성에 대한 의문제기였다. 19세기 말기로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철학이나 신학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에서 말하고 있는 그 실체는 인간의 상실감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상실감과 일치하고 있다. 좌절감 상실감 속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신의 죽음이란 신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신이라고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죽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잠재울 수 있는 전능한 실체이기 때문이다(실존적 비관주의). 이것 역시 당시 팽배하고 있는 인습론적인 하나님, 혹은 이신론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추적인 산물이었다. 신의 죽음을 말한다면 "어떤 신이 죽었느냐"는 물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입증한 초월적인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서구의 인습론적인 유일신론을 의미한다.

1907년 프로이드(Freud)는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라는 저서를 발간하면서 프로이드는 종교를 근본적으로 병리적이고, 혼란된 상태, 그리고 보편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신경증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의 모델로 보았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우주적으로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의 미성숙의 형태이며, 어린 시절 성적인 욕구가 성숙한 어른의 상태로 탈바꿈하는데 실패한 결과로 보고 있다.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라는 저서의 제 5 장은 단순히 신앙의 심리적인 원인들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허위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 프로이드가 언급하는 "종교의 비진리성"에 대한 가정은 심리적인 분석에 의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인습적인 이성주의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문화적 종교에 대한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이드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손상시켰다고 주장하나, 그의 작품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프로이드는 당시의 믿음과 신앙적 실천이 상당히 신경증적이고 혼란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했다.

인습적인 종교의 눈으로 보기에는 믿음과 의혹은 마치 무신론자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했다. Justin Martyr는 자기 스타일로 만들어진 신을 거부하는 의미에서 무신론이라는 타이틀을 환영했다. 하나님의 세계는 끊임없이 경험되어지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하나님이다. 성서적인 믿음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경험 가운데에서 알려지는 하나님이시다. 경험없는 하나님은 지적인 추상의 하나님으로 남는다. 불트만은 그의 저서 「Jesus and the Word」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으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건의 최종적인 원인이라는 사상으로 그 의미를 보충 하려고 한다면, 그가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사변에 불과하다. 이 믿음에 아무리 굳게 달라붙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믿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결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문화적인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세대들은 모순적인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매우 실용적인 듯하지만 내면에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다. 이성적이면서 초이성적인 세계(신비의 세계)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미 서구사회에서 겪었던 몸살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와 가장 유사한 구조와 현상을 지닌 사회가 미국이다. 그 만큼 그 사회가 이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면 보다 적합한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사회가 겪고 있던 뉴에이지 운동은 대강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III. 뉴에이지 운동

뉴에이지 운동이란 특정한 이념을 중심으로 한 어떤 공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어떤 특정한 노선이나 선언문 같은 것도 없다. 단지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발전되어 온 하나의 시대적 정신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정치적인 운동, 내면적이고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운동, 해묵은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서 전적으로 내면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정신적 잠재개발운동 내지 문화적 운동, 건강을 하나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연의 조화라는 차원에서 보는 건강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시대정신이 실천적으로 반영된 하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그 특지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반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60년대 미국은 젊은 세대를 분노케 하고 회의케 하는 사조들과 사건들이 많이 터져 나왔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문화는 지극히 사변적이었고 지성주의적이었다. 계몽주의를 방불하는 냉랭한 영적 분위기에 젊은이들은 기성적인 권위와 문화에 대항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반문화적인 운동은 60-70년대에 걸쳐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비트족과 히피(Hippie)족들은 틀에 박힌 생기없는 물질문명과 기술문명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를 선언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객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가치관에 더 이상에 의미를 두려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관적인 신비의 세계로의 탐닉을 시도하였다. 이 반문화 운동은 환각제와 비교(occult)를 주관적인 신비의 경험의 매개체로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심리학자 Timothy Leary,(1920 --)나 철학자 알란 와츠(Allen Watts, 1915-1973), 시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 --)등이 LSD와 같은 환각제 등을 신비적인 내면세계의 체험 내지 종교체험의 정당한 매개체로 인정해 주는데 기여한 인물들이다. 특히 그것을 신앙운동의 틀안에서 적극적으로 LSD를 사용했던 사람은 Timothy Leary 였다. 그는 LSD 사용을 종교적 순례요 성례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종교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경험의 결과인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일산화 질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마음의 본질과 의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졌다. 이렇게 역사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는 약물과 의식의 관계가 1967년 LSD (Lysergic Acid Diethylamide)으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약물을 통한 하나님의 추구는 결국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만연하는 물질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물음에 대해서 어떤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약물의 문화로부터 그 약물의 경험을 뛰어 넘는 새로운 영성운동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이며 하나님 추구 역시 개인적인 일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리고 음악이 그들의 세계를 대변해 주었다. 질서잡힌 사고를 할 수 없을 만큼 고출력 앰프를 사용하여 귀가 찌어질 듯한 소음 섞인 밴드와 현란한 조명으로 그들의 심리를 광랑케 하는 록 음악이 출현했다. 또한 강력하고 자극적인 음향효과를 통해 환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이키델리 록 (Psychedelic Rock)이 나타났다. 이 음악은 기성세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불만과 분노를 담아내었고 동시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꿈을 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1967년 6월에 사흘간 계속된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열린 "몬테레이 페스티벌"이나 1969년 8월 16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우드스탁(Woodstock)의 록 페스티발은 청년 문화를 대변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도덕적 의무에 매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반문화 운동은 당시 젊은이들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현실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며, 기독교가 배경이 된 미국의 주류문화나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새 세대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향한 갈망의 표현이었다.



2. 뉴에이지 운동은 혼합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이고 종교다원적이다.

뉴에이지 운동이란 반문화적이면서 종교적인 성격을 깊게 띄고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은 각기 다른 종교들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각기 다른 표현양식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이다. 그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신이며, 자아이다. 小我는 凡我로 확장되며, 그 범아에서 모든 소아는 일체가 된다. 소아는 범아로부터의 분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종교를 인정하나 배타적인 종교의 배타성은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각 종교로부터 필요한 만큼 흡수하여 혼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했던 영지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절대적인 초월자에 대한 귀의보다는 내면 안에 있는 신, 각 개체에 존재하는 신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사명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신의 속성을 분여받았다. 표현양식이 다를 뿐이다. 이 신은 비인격적인 힘이거나 거대한 우주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힌두교나 기타 동양의 신비종교가 그들의 이러한 입장에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3. 깨달음을 강조한다.

요즈음 서양인들은 유대교 및 기독교의 틀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믿음"을 동양신비종교에서의 "깨달음"으로 그 유형을 대체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동양 전통에 눈을 돌리면서 위협받고 있는 자신들의 사회와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들을 위해 무언가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찾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교회가 종교의 참된 영적 측면을 상실했다"라고 말하면서, 조직적 종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개인적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믿음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양의 형이상학과 "새 의식 운동"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그것들이 기술주의를 앞세우는 서양정신의 압제적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대체세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양 사상들은 인간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서양의 합리주의, 물질주의, 상업주의 문화를 비난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대안적 사상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들은 서양 교회가 영성적이고 선지자적 역할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동안 생겨난 공백을 메워주는 사람들로 자처하고 있다.



4. 인본주의적이며 낙관주의를 지향한다.

인간이 무엇인냐? 스펭글러는 이렇게 주장한다. "내가 하나님인가? 내가 그리스도인가? 내가 무한대(the Infinite)가 부풀어 나는 곳으로부터 당신에게 오는 존재(a Being)인가?...나는 이 모든 것들이요, 그 이상이다." 즉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영적이기 때문에 무한하고 전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요 과제는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우주 자체가 영적인 실체여서 인간의 삶이 우주의 힘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가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을 각성함으로서 보다 고차원적인 의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 개인적인 자아와 현상적인 자아를 넘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는 고자아(The Higher Self)가 있다. 이 고자아는 초인격적인 자아로서 신비스러운 수준에서 다른 자아들과 일체가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여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 잠재력은 여러 가지 교육기법에 의해서 일깨워질 수 있다. 각 개인이 자기 환경을 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 자기 성취와 자기 실현이 인생의 당연한 목표이다. 인간이 처한 모든 질곡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능력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5. 체계적인 탈바꿈을 추구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요가나 선이나 마인드 콘트롤, 초월명상 등을 수련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련방법은 명상이다. "신지학 협회"(The Theosophical Society)의 창설자인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는 "명상은 침묵이며 말로 하지 않는 기도이며 플라톤이 표현한 대로 신을 향한 영혼의 열렬한 전환이다. 이는 틀별한 선(good)이 아닌 선, 그 자체 곧 우주적인 지고선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명상을 통하여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뉴에이지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라즈니쉬도 "명상을 통해 무한(infinite)으로 될 것이며 그리고 우주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전체(the whole)와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뉴에이지 운동에 관련된 이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자아를 우주적인 의식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자아의 가장 내면에 이르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가장 완전하고 심오한 실재(reality)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이다.

개인적 재통일(분리된 자아의 재통일, 분리된 자아는 하나의 환영이기 때문이다), 내적 재연결, 자아의 잃어버린 부분들의 재결합을 이루고 나면 훨씬 더 큰 대자아와 연결되는데, 여기서 마틴 부버의 말대로 "나와 너"의 결합과 영적인 융합이 이루어진다. 무관심하게 여겨졌던 형이상학적인 친구들이 이웃과 가족처럼 느껴진다. 가장 기묘한 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탈바꿈"이다. 자아에 대한 두려움,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는다. 예를 들자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끊임없는 실험과 배움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탈바꿈된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대자아에 이르렀다는 증거이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누린다.



장로회산학대학 유재룡 교수의 칼럼 중 일부임

 

참고서적

David Spangler, Revelation: The Birth of a New Age (San Francisco: Rainbow Bridge, 1976).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1988).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Theology as Spirituality (New York: Harper & Row, 1985).

Marilyn Ferguson, 『뉴에이지 혁명』(The Aquarian Conspiracy) (서울: 정신세계사, 1994).

Morton T. Kelsey. The Other Side of Silence: A Guide to Christian Medita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76.

William James,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61).


* 본 논문은 장로회신학대학의 유해룡 교수님의 글임  

(한국어23분)

 

 

다음의 것들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지옥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인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이 심판의 주로 재림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본인음성)



 


이슬람의 여성인권침해의 충격영상!

 

 

 

이슬람은 평화적 이미지를 가장한 무자비한 살인마 집단입니다. 이슬람이 우리나라에 침투하는 것은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당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당신의 자녀와 당신의 후손을 생각한다면 이슬람을 국가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네덜란드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늦습니다.  





 


찬송가와 CCM, 새 노래란?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2-15).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기도 했었습니다. 열심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볼 줄 아는 명철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 눈에는 좋게 보여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 일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너무나 크고 많은 일을 한 것 같더라도, 나중에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 동안 했던 모든 수고가 완전히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변치 않고 견고하고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 값싸고 다루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눈에 보기에 크고 멋있고 웅대해 보이는 건축물을 단시일 내에 만들 것이 아니라, 값비싸고 다루기 어렵더라도 진귀하고 든든하고 오래 견디는 견고한 재료들로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다음 그 모인 사람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여세를 몰아 세력을 확장시키기보다는 도리어 모여오는 사람들을 피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쫓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심으로 또다시 흩어버리시고 오직 12명의 제자만 남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과 뒤에서 큰 무리를 지어 따르던 사람들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을 당장 거룩한 도성으로 만들려 하지지 않으시고, 도리어 말없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따르던 사람들을 완전히 실망시켜 떠나게 만드셨고, 오직 믿음이 있는 사람만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세는 우리들이 반드시 꼭 배워야 할 자세이며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음악의 적합성 여부도 이런 기준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 당장에 사람들을 많이 오게 만들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지금 세상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르의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여 손쉽게 사람들을 모으려는 것은 결코 예수님과 같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을 모아서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큰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이면 무조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형 교회가 된다는 것이 결코 언제나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심각한 타락과 한심한 다툼은 주로 교회가 대형화 되었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대형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고, 인기가 좋고, 예배 분위기를 살려주고, 사람들을 많이 교회로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음악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분별해 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음악에 대하여 많은 팽팽히 엇갈린 주장들이 오고 감으로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비추어 과연 CCM이라고 분류되어 요즈음 예배드릴 때나 전도할 때 사용되는 계통의 음악들이 교회 음악으로 적합한지, 자녀들에게 부르게 해도 괜찮은지의 여부를 논의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 몇 가지 논쟁이 되는 점들을 추려서 부모님들이 알고 있어야 할 점들을 몇 회에 걸쳐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CCM이 과연 성경에서 권하고 있는 “새 노래”에 해당되는지 살피는 일부터 시작하여,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수용하는 것이 합당한지, 예배 음악으로 적합한지, 교육적 측면은 어떤지, 하나님은 CCM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CCM의 추구가 과거의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도 검토해보고, 세상 곡조와 하나님의 말씀을 합치는 것이 합당한지도 논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왜 찬송을 부르라고 우리들에게 권하시는지 하나님의 의중에 대하여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울러서 전통적인 찬송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전통적인 찬송가에 포함된 복음성가들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더구나 과거에 세상 오페라나 가곡의 곡조들이 수용된 것과 요즈음의 대중가요가 수용된 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등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영적으로 유익한 것을 생각해 보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유익한 것들 보다는 당장 듣기 좋고 재미있고 신나고 내 마음을 알아주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것들을 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교회음악을 선택 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듣기에 감미롭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음악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상고하여 보고 주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함을 받은 음악을 택하는 지혜로운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적 측면에서 본 찬송가와 CCM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 지어다” 시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CCM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노래”가 아닐뿐더러, 새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찬송가를 오래된 옛 노래, CCM은 최근에 새로 작사 작곡 되어진 노래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권하는 새 노래가 CCM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성경 말씀들 중에 똑 같이 “새”라고 번역 되지만 상당히 근본적으로 다른 두 헬라어 단어인 kainos neos의 차이점을 모르고 또한 히브리어인 chadash의 정확한 의미를 소홀히 지나쳤기 때문에 빚어진 잘못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 성경이 말하는 새(kainos) 노래는 시간적으로 새로(neos) 만들어진 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kainos는 질적인 새것을 의미하고 neos는 시간적 새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새 노래의 ""라는 헬라어 단어는 시간적으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최근의 것을 의미하는 neos가 아니라, 본질과 의미에서 새로움을 뜻하는 "kainos"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담근지 얼마되지 않은 새(neos)포도주를 뜻할 때는 neos로 포도주의 상태를 표시했지만, “새(kainos) 부대", "(kainos) 계명", "(kainos) 마음"을 표현할 때는 질적으로 새로운 상태를 나타내주는 kainos라는 형용사가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새(neos)” 포도주와 “오래된” 포도주의 차이점은 오직 시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새”부대와 “낡은”부대는 시간적으로 “금방”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없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부대라도 한번이라도 쓰였으면 낡은 가죽 부대가 되는 것이고, 1년 전에 만들어진 가죽부대라고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부대이면 “새(kainos)” 가죽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무덤이기에 예수님을 “새(kainos)”무덤에 두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kainos란 시간과는 상관없이, 아무튼 질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의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특질을 지닌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적인 사랑만 알고 있지 하나님의 세계에서 요구되는 아가페 사랑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아가페” 차원의 사랑을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재하고 있지 않는 아가페 사랑을 높은 차원의 새(kainos)계명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kainos로써의 “새”의 의미는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면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CCM은 시간적으로는 최근에 만들어진 새(neos)노래가 될 수 있지만, 세상에서 이미 널리 유행되는 장르의 특징적 곡조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쓰기 때문에 질적으로는 새(kainos) 것이 사실상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유행가를 부를 때마다 부르는 사람이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되나요? 유행가는 노래를 부를 때에 새로운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옛 사람의 감정을 가지게 만들어 줄 뿐입니다. 대부분의 CCM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세상 유행가 풍의 멜로디에서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 새(kainos) 노래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분명히 “전통적인 찬송가”가 도리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새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는 작곡된 시간으로 보면 옛 노래이지만, 부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오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솟아나고, 몰랐던 것을 새롭게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고, 식어지던 믿음이 소생함을 얻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옛 노래처럼 언뜻 들리더라도 분명히, 제대로 부르면, 부를 때마다 “새 노래”가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히브리어로 언급되고 있는 “새(chadash)노래”도 최신 유행가의 곡조에 가사만 성경적인 것으로 대치시킨 형태의 복음성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말의 새것을 의미하는 chadash라는 단어도 시간적인 새것을 뜻하기보다는 질적인 새것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에 "새 노래"라고 표현된 chadash라는 히브리어도 새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는 bariyah나 시간적으로 가까움을 의미하는 qarowb이라는 단어 대신, 질적으로 새로운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chadash는 무조건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성적으로 새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chadash)’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chadash)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서 기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해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들 중에는 새(chadash)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새(chadash)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라는 말씀은 새로 작곡하여 노래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고, 도리어 특성상 새로운 노래, 해 아래의 세상에는 없는 노래, 즉 거룩하고 신령한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명하시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70역을 보면 시편에 등장하는 "새 노래"라는 단어에서 쓰인 chadash라는 히브리어들이, 예외 없이 모두, neos가 아닌 kainos라는 헬라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생겨난 지 이미 오래된 찬송가를 부르고 있지만,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여 다시금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맛보며 뜨뜻미지근했던 마음이 활기를 찾아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면, 항상 불러오던 옛날에 만들어진 찬송곡일지라도, (chadash)노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약에서 말하는 새(kainos)노래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독특한 음악을 주셨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라는 말씀의 뜻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포괄적 행동 규범 안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명하신 행위 규범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룩하라”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거룩”이라는 것은 “분리된, 다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거룩하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과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야 된다는 뜻이고 동시에 신앙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찬송가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만들어진 곡조와 가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가 들어도 무엇인가 일반적인 노래와는 다릅니다. 그런 의미로 보아도 찬송가는 거룩한 음악이며 질적으로 새로운 “새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부를 때마다 부르는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새 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지칭하고 있는 ""노래를 새로 만들어진 CCM으로 보기보다는 세상 노래와 다르고 항상 새로운 감동을 주는 전통적 찬송가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노래는 새로 작곡된 CCM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 감화로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셔서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인간의 심령에 소생함을 주고, 잘못을 깨우쳐주고, 믿음을 일깨워 주어 왔고, 아직도 여전히 감동 감화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전통적인 찬송가를 제외하고는 달리 “새 노래”를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수백 년이나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그 질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불리워지고 있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 신령한 노래들입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권하는 찬송은 계속해서 새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되었건 새롭게 만들어졌건 상관없이, 세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고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종류의 노래들과는 확실히 구별이 되는, 오직 하나님만 갖고 계시고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거룩하고 고상한 성품과 특질들이 확실히 포함된 곡과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로 찬송을 부를 것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더욱 찬송가를 귀히 여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 부르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4/14/2007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출처: 아멘넷, 작성자/ 공부합시다님




30대 초반의 직장인입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주 직장을 옮기게 됩니다.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오래 있으면 좀이 쑤십니다. 어머니는 교회 집사이십니다. 그런데 저보고 역마살(驛馬殺)이 끼어 그렇다고 합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정착해야 하는데 어딘가 자꾸 불안한 것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제 자신이 한심스럽습니다. 역마살이 끼면 정말 그런가요? 역마살이란 뭐예요?

1, 역마살(驛馬殺)의 기원

역마살(驛馬殺)은 늘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이동하는 살(殺)을 말합니다. 역마살은 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속신앙에 근거를 둔 생활 용어입니다. 역마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역마살은 무의식 속에서 자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고도의 통신기술이나 교통시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마다 역참(驛站)을 두고, 그곳에서 역말을 갈아타고 업무를 보러 다니곤 했습니다. 이때, 역참에 준비해 놓은 말을  역마(驛馬)라고 하며, 역마는 전국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살(殺)은 사람이나 물건 등을 해치는 독한 기운(氣運)을 일컫는 말로써 흔히 “살(殺) 맞았다”, “살(殺) 내렸다”와 같이 쓰입니다. 따라서 “역마살”이라고 하면 천성적으로 역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팔자(八字)라는 뜻으로 “저 친구 역마살이 끼었군”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역마살은 12년마다 한번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운(大運)에 역마살이 있으면 10년 기간 역마살에 관한 일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역마살이 사주에 나오면 액운(厄運)이 있으므로 역마살을 풀어주기 위하여 살(殺) 풀이 굿을 합니다. 역마살이 끼는 것은 죽은 광대의 넋이 씌어서 그렇다 기도 하고 노상에서 객사한 거리귀신이 씌운 것이라고도 합니다.

세속에서 사주에 역마살(驛馬殺) 있으면 한 곳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이사. 이민. 이동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각종 물자의 변동과 해외사업(海外事業), 운수(運輸)사업, 수송(輸送)사업과 관광(觀光)에 관련된 업무와 운동과 여향을 좋아하여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부평초(浮萍草) 같이 살아간다고 합니다. 한문으로 풀이하면 역마처럼 이리 저리 떠돌다 죽는다는 표현입니다.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자동차와 배와 비행기가 역마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살(殺)을 만나면 이사를 한다든지 이민 또는 여행을 하게 되고 이동하는 중에 교통사고와 같은 끔직한 사건이 일어나기 쉽고, 사건의 결과  재산상의 큰 손실과 결혼 생활의 파탄과 신체상의 치명적인 상해를 당하게 됩니다. 아무리 분주하게 돌아다녀도 이익은 별로 없고, 삶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여도 최소한의 생활이 어렵고 관제 구실이 생기는 살이 곧 역마살이라고 합니다.

  2, 역마살(驛馬殺)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한국 교회는 전통적인 민족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속신앙의 영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속신앙은 외래종교를 받아들여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자신은 내면에서 그것을 융화하여 결국은 무속신앙화 하고 있습니다.  한국 종교사에 나타난 불교, 유교, 도교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나긴 역사변천에도 소멸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해온 무속신앙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겉은 기독교적이나 속은 무속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가정에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역마살이 끼웠다”고 하는 것은 비신앙적이며, 비교육적인 무속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80년대부터 민족전통에로의 강력한 회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전통적인 미신행위인 점이나 굿을 하는 사람들도 민족문화를 계승하는 자들로 인식되었고, 점이나, 굿, 풍수지리설, 단전호홉, 기(氣)체조 단군숭배 등이 새마을운동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 사람들의 생활 한복판에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전통문화로의 회귀현상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은 서양종교라는 인식과 함께 전통문화의 파괴자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신앙적 무장이 없는 교인들은 무속신앙적인 생활용어를 아무 생각 없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일진이 좋지 않다”
“관운이 없다”
“띠 궁합이 안 맞아”
“역마살이 끼었다”

한국의 무속신앙은 민간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속신앙은 무당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귀신(鬼神)과 인간(人間)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 무당입니다.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대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전통에 기반한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토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행태를 갖고 있었고, 지금도 갖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진리의 말씀 위에 온전히 서서 성경 말씀 중심 언어 신앙생활에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보충자료
기고 글에서 역마살(驛馬殺)의 살(殺)에는 “살(煞)”과 “살(殺)”은 둘 다 “살”이라고 읽기도 하고 “쇄”라고 읽기도 합니다.
(1)살(殺); 살인(殺人), 살기(殺氣), 살생(殺生), 살해(殺害), 살상(殺傷)
(2)살(煞); 급살(急煞), 흉살(凶(煞)
한국에서 살다보면 “망신살이 뻗쳤다”, "역마살이 끼었다“, ”급살을 맞을 놈“ 등의 말을 비교적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또 평소 모습과 많이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특히 나쁜 쪽의 일이 일어나거나 나타났을 때 ”살이 끼었나?“라고 말 합니다.

기고한 역마살(驛馬殺)보다 역마살(驛馬煞)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역마살(驛馬煞)'로 교정하고자 합니다.
다음 기회가 되면 “살”이란 무엇인지 기고 하고자 합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칼럼 글


아름다운 곡 주소를 올려주신 '주기신'님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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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에게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느끼는지 차마 알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기 전까지는 그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한 의미로 다가왔지만 결국 인연이 아님을 깨닫고 그 사람을 보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기까지는 1분밖에 안 걸리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기까지는 1시간밖에 안 걸리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하루밖에 안 걸리지만 누군가를 잊는데는 평생이 걸립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대부분의 것들을 저절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꿈꾸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꿈꾸세요.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세요. 되고 싶은 것은 되도록 노력하세요. 사랑은 오직 하나이고 기회도 오직 한 번이니까요. 구란 그 사람과 같이 그네에 앉아 한마디 말도 안하고 시간 후 헤어졌다 마치 당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대화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입니다.
 Handel / Mess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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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멘넷, 작성자/ 고비아님


케네스 헤긴, 그는 누구인가 

 
//
B목사가 추앙하고 많은 영향력을 받은 사람 중 대표적인 한 사람이 "케네스 해긴"입니다. 그는 케네스 해긴의 책들을 적극 소개하고 추천하고 있기도 합니다.
 
해긴은 소위 "말씀 믿음" 운동 주도자이며,
그 역시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 이단적 사상을 가진 문제가 많은 자입니다.
 
 
<<<동영상>>>: 무질서한 웃음집회에서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해긴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3087215584762831021&q=Kenneth+Hagin+%26+Kenneth+Copeland+-+Pentecostal+Bedlam&total=2&start=0&num=10&so=0&type=search&plindex=0
 
   
 
‘케네스 해긴’과 ‘말씀믿음 운동’의 이단성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 Sr., 1917∼2006?)은 오순절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케년(E. W. Kenyon, 1867∼1948)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맥코넬(D. R. McConnell)은 [다른 복음]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소상히 밝혀 놓았다. "해긴은 참으로 케년의 저술에서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꼈으면서도 그것이 케년의 저술임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범죄 행위이다."
 
케년은 침례교 목사로서 오순절 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 설교 등을 통해 자기의 메시지를 잘 따르면 병과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역의 초기에 케년은 감리교의 완전 성화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에 그는 에머슨 대학에 등록했는데 이 곳은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 사상과 행태 등으로 얼룩진 기관이었다. 그 대학의 에머슨 학장은 유일교 목사로서 결국 에디 부인이 만든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단)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에머슨 대학 출신 중 여러 명이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넘어가 거기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케년은 이들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의 원인이 되며 긍정적으로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고 또한 신유나 기타 다른 기적들이 반드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해긴은 케년으로부터 ‘긍정적 고백 이론’을 물려받아 현 시대 오순절·은사주의 안에 파급시켜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은사주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케년의 책들은 해긴, 코플랜드, 고셋, 캡스 등 ‘긍정적 고백 이론’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에게 지침서가 되었다."
해긴은 그리스도의 육적 죽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영적죽음과 지옥에서의 투쟁이 죄를 제거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해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보냄을 받아 그곳에서 사탄과 및 그의 마귀들과 투쟁을 벌이고 승리한 결과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이단 교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아주 명백하게 가르친다(행 20:28; 히 9:14; 10:10). 다시 말해 속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에서 자신의 영을 내놓으시며 돌아가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또한 예수님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그분은 결코 길을 잃은 죄인이 아니셨다. 비록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나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셨다. 그분은 결코 지옥에서 사탄과 그의 마귀들에게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실 성경은 사탄이 지옥에 있다거나 혹은 지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곧 그는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 1000년 동안 무저갱 즉 바닥 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될 것이고(계 20:1∼3), 궁극적으로는 불호수에 내던짐을 당할 것이다(계 20:10). 또한 성경은 지금 이 시간에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해긴은 크리스천도 예수님같이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매우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없다. 스스로 큰 기적과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오순절 부흥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행한 적이 없다.
 
해긴은 또한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덟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 자기를 지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중의 일곱 번째 환상은 1962년 12월 12일에 일어났다. 그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모든 교단과 교회를 움직이사 그들이 다 구원받고 성령 침례를 받게 될 것을 자기에게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에서 한 가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예언은 이미 위글스워스가 두 플레시스에게 말한 적이 있으며, 현재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연합 운동을 통해 이런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이 예언이 실제로 이 세대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을 통해 이제는 오순절 성령 운동 연합 대회에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들이 대거 참석하여 천주교 미사를 거행하는 일을 아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같은 오순절·은사주의 종교 통합 운동이 진리의 성령께서 주관하는 운동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해긴은 또한 건강·번영 복음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유·건강도 이미 갈보리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유와 축사를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긴의 주장은 그의 행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는 여러 차례 심장병으로 고생했고 어떤 때는 한달 반이나 심장병으로 누워 꼼짝하지 못한 적도 있다. 한편 그는 건강·번영·축복 복음을 매우 강조해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영적·재정적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다시는 예전과 같이 부자가 되게 하거나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에게 딸린 천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명령해서 필요한 것을 다 얻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이제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만 하면 천사들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고 그는 헛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래서 믿음·신유·번영 부흥사들은 한결같이 말의 능력 혹은 입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로 긍정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같은 말·믿음 이단교리는 현재 모든 오순절 교회 안에서 아주 확고한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
 
다른 오순절 부흥사들의 집회와 마찬가지로, 해긴의 집회 역시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한번은 소녀 하나가 영 안에서 죽음을 당해 무려 아홉 시간이나 움직이지 못했고 그의 동료들이 그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는데 해긴의 부인과 또 다른 두 사람이 과연 이 일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자 해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주사 자기 손가락을 그 세 명의 이마에 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대자 이 세 명은 곧바로 마룻바닥에 넘어져 마비가 되었고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이 해긴의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자, 그는 다시 손가락을 그들의 이마에 댔고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났다고 한다. 해긴은 자기의 능력을 통해 한 여인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공중부양은 심령술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천국과 지옥을 다 다녀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해긴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웃음 부흥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웃음 운동' 부흥사 하워드-브라운을 초청해서 집회를 열곤 했다. 1997년 10월 12일에서 24일 사이에 미주리 주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웃음 부흥 집회는 비디오로 녹화되었는데, 그 비디오 테이프(맨 아래 표시 사이트 참조)를 보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회에서 벌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해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케네스 코플랜드 등이 참가했다. 이 집회에서 해긴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사람들을 향해 숨을 내쉬고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막 치면서 통로로 걸어갔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막 쓰러지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여자들은 치마가 다 벗겨진 채 뒤로 넘어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뛰어 나와서 덮을 것을 가져다가 넘어진 여자들의 하체를 가렸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해긴의 아들 역시 술 먹은 사람처럼 마룻바닥에서 구르며 소리를 지르며 아무 이유도 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해긴을 부축할 의무를 지닌 해긴의 수행원 가운데 한 명도 술 취한 것처럼 하며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인의 무릎 사이로 넘어졌다. 한 마디로 그 곳은 혼동과 혼돈의 장소였다. 술 취한 것 같은 해긴을 강대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네 명의 남자 수행원이 필요했다.
 
참으로 해긴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지금까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가 운영하는 '레마 성경 훈련 센터'를 수료한 뒤 해긴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온 세상의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미국에서만 180여 개의 방송국에서 방송하고 있고 단파를 통해 전세계의 80여개 국에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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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Word Faith) 운동
(이하 내용은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중에서 발췌함)
‘믿음 운동’이라고도 알려진 ‘말씀 신앙 운동’ - 말씀, 믿음 공식, 믿음의 말씀, 긍정적 고백, 말하고 주장하기 또는 건강과 부요와 형통의 가르침 등 - 은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 운동의 한 갈래다.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랜드와 글로리아 코플랜드, 로버트 틸턴, 프레드 프라이스, 찰스 캡스 등을 위시한 말씀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든 신자에게 경제적 번영과 완벽한 건강을 약속한다. 그들은 그 정도 축복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말씀 신앙 운동의 신학은 기독교를 가장 저급한 인간 중심적 종교-기독교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을 윽박지르고 꾀어 내고 조종하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부두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체계로 바꾸어 놓았다.
해긴 등 말씀 신앙 지도자들은 신약적인 기독교의 핵심을 더렵혀 신자들의 초점을 건전한 교리,예배,봉사,희생,사역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대신 약속된 경제적, 물질적 ‘축복’으로 옮겨 가게 한다. 그런 축복들은 말씀 신앙의 공식을 알고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실 것으로 기대되는 화물이다.
 
말씀 신앙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지만, 성경적 기독교의 진리는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주술(呪術), 즉 영적 테크놀로지이다.
말씀 신앙 운동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의 교리는 신자 개인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하나님을 신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나 산타 클로스나 시종의 역할로 전락시킨다. 말씀 신앙 신도들에게 최고의 권위는 자기 자신이다. 이 운도의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신자들에게 작은 하나님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부추긴다. 말씀 신앙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케네스 해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아직 자신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곧 그리스도입니다...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화육(化肉)입니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아담이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행동했고 아담이 말한 것은 이루어졌다. 아담이 사탄에게 무릎을 꿇고 사탄을 자기 위에 받들어 모셨을 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하나님이 사탄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지만 반역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보다 아래 등급으로 떨어졌다.
코플랜드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다시 ‘하나님과 동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권리를 얻으셨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동급이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축복(치유,구원, 경제적 축복, 육체적 축복, 가정적 축복...등)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 전부가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 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해긴과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들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신자를 즉위시켰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에서 그들의 거의 모든 다른 오류가 뒤따라 나온다.
그들은 사탄의 최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창 3:4-5).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마귀 자신을 타락하게 한 바로 그 거짓말이었다(사 14:14)
 
말씀 신앙 운동의 예수님은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심지어 사탄의 본성까지 취하셨다고 말한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33년동안 공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성육신 기간 동안 신성을 비우셨다는 (케노시스 신학으로 알려진) 개념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전개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신 것(빌 2:7)은 신적인 속성만을 사용하는 것을 보류하셨다는 뜻이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는 예수님의 불변성 때문에 불가능하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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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심각한 이단 사상을 가진 해긴과 말씀 신앙 전도자들을 전혀 분별없이 추앙하고 따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조국 교회들과 성도들이여,
정신차리고 이런 멸망케하는 허탄한 미혹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진리로 돌아갑시다!
 
(마 24:4-5, 24-2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show)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성도들)도 (복음의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살후 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십자가복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믿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복음)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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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무질서한 웃음집회에서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해긴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3087215584762831021&q=Kenneth+Hagin+%26+Kenneth+Copeland+-+Pentecostal+Bedlam&total=2&start=0&num=10&so=0&type=search&plindex=0
  
  
[출처] 무질서한 웃음집회에서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케네스 해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작성자 이단박멸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의 주장과 이중성
합신 이단상담연구소장 박형택 목사 재반박 기고문
 
박형택
변승우 목사가 큰믿음교회 사이트와 그의 설교등 여러 곳에 필자를 매도한 글을 보았다. 이단사냥꾼이니 종교마피아니 하면서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으로 표현한 내용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특히 그동안 한기총과 교단을 중심으로 이단연구와 조사에 헌신하면서 많은 이단들을 분별해 내는 역할을 했던 4사람 필자를 비롯하여 최삼경 목사(통합), 진용식 목사(합동), 최병규 목사(고신)뿐 아니라 한기총과 한장총등 연합기관에 대하여도 왜곡된 글을 싣고 신랄하게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마치 큰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매도한 것은 가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그러한 내용을 다 스크랩해 놓고 있지만 자신의 이단성에 대한 굴레를 벗기 위하여 필살의 행동을 하는 것이라 여겨져 측은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보다 분명하게 비성경적인 변승우 목사의 주장하는 내용 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비판하고 그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실제로 그가 얼마나 이중적이며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 변승우 목사는 자신의 책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책에도 그렇게 썼다.
    
작금에 변승우 목사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수정증보판을  시판하고 있는데  위 책을 홍보하는 내용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5년전 책을 쓸 때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책은 너의 책이 아니다. 나의 책이다." 
 
만일 변승우 목사가 5년 전에 낸 책이 성령의 영감으로 계시적인 것이라면 과연 수정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수정이 필요한 계시라면 결국 하나님이 계시를 잘못주신 것과 같은데 하나님을 불완전한 계시를 주신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요즈음 한참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이단 신천지 증거장막성전의 이만희씨는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썼다고 하는 <요한계시록 실상>이라는 책을 여러 번 수정했다. 수정할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바뀌었고 성경도 다르게 해석을 하였다. 그가 받았다는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인지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똑같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면 왜 성경과 모순되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빙자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수여자로 자칭해 왔다. 이단 중에 자신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신격화하거나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수여자 내지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높이지 않은 이단들이 지금까지있었는가?

토마스 주남 여사가 쓴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고 그 계시의 연속으로 변승우 목사가 <지옥 가는 크리스천>을 썼다는 것은 토마스 주남과 함께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은 성경이 아직 미완성이라는 전제아래 주어진 논리로서 성경의 완전성이나 충족성을 부정하고 있는 위험한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변승우 목사는 자신을 <사도>라고 스스로 밝혔다. 과연 변승우 목사는 사도인가?   

다음의 글은 변승우 목사가 필자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보내온 내용의 일부이다.

< 반론 : 나는 자칭 사도가 아닙니다. 하이디 베이커, 밥 존스, 예수 파담, 신디 제이콥스, 빌 해몬, 질 오스틴, 슈프레자 싯홀, 마크 듀퐁, 제프 젠슨, 샨 볼츠, 라이언 와이어트, 제레미 넬슨, 마크 비써, 사무엘 리... 등을 위시해서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국제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내가 사도로 부르심 받은 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국내외의 수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들 역시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라고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듯이 사도가 사도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며, 더우기 천국에서는 사도나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큰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도냐 아니냐 이런 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닮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위의 글을 보면 “변승우 목사는 사도”이다. 그런데 그가 사도됨을 인정한 사람들을 그는 거론했다. 위의 사람들이 인정하면 사도인가? 국외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국내의 어떤 목사가 그를 사도로 알아보고 인정했을까? 변승우 목사를 사도로 인정했다면 그만큼 신뢰성이 있고 권위가 있는 사람일텐데 그 이름을 밝혔으면 좋겠다.

사실 신사도개혁운동은 피터 와그너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고 로저 샢이 “다가오는 사도시대”라는 책에서 바울 사도 외에 바나바, 실라, 디모데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아볼로, 안드로니고, 심지여 여자인 유니아, 에바브로디도, 심지어 이름없는 사도까지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터 와그너이나 케네스 헤긴등은 토대적인 사도와 일터사도, 수직적 사도와 수평적 사도등 다양한 사도들을 들먹이며 현재에도 사도가 있다는 사실들을 증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사도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성경구절을 연구해 보면서 그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과연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열두 사도와 바울 사도 이외에 다른 사도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최고의 사도로서의 예수”를 주장한다. 히브리서 3:1절에 보면 “함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요 히브리서에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주님은 실제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가? 아니다. 사실 이 말씀은 주님이 사도이고 대제사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에서 사도요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는 중보자로서의 대제사장 역할을 하셨다는 의미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특별하게 선택된 12사도와 같은 특별한 직분이 아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다 사도이면 모든 목사와 선교사가 다 사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사도는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주님의 선택을 받은 열두 사도를 지칭하여 고유명사와 된 사람들이다.

지금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에베소서 4:11-12와 에베소서 2:20을 제시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0)

우선 에베소서 2:20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의 말씀은 교회의 터로서 이해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늘날의 교회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도들과 당시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워졌다는 주장이다. 과연 말씀의 의미가 그러한가?  이 말씀은 당시 교회의 기초가 두 직분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설명하는 설명하는 것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에베소서 4:11의 말씀에서 성도들을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계속 존재해야 하지 않느냐, 왜 사도와 선지자는 없고 목사와 교사등 다른 직분만 계속 존재하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에 존재하던 초대교회에 있었던 직분을 바울사도가 나열한 것이지 직분의 계속적인 존속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 12:28에서 나열한 말씀은 사역의 다양성을 말씀한 것이지 그 직분이 오늘날도 계속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로서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에베소서 4:11절의 사도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사도들”이라는 단어를 어원을 따라 일반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씀으로 이해했다. 필자는 이 해석을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한다.

    "i take the word 'apostles' not genarally and according to its etymology, but in its peculiar signification, for those whom christ particularly selected and exalted to the highest honour. sush were the twelve, to whose nember paul was afterwards added."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4. p179

그리고 같이 언급된 “선지자” 들에 대한 말씀도 고린도전서 14장에서와 같이 예언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로 이해한다.

성경 본문이 12사도외에 다른 일반적인 사도직분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로저 샢이 “다가오는 사도시대”라는 책에서 바울 사도 외에 바나바, 실라, 디모데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아볼로, 안드로니고, 심지여 여자인 유니아, 에바브로디도, 심지어 이름없는 사도까지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도행전 13:43(두 사도), 14:1(두 사도),14:3(두 사도) 14:4-5(두 사도를), 14: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울사도 외에 다른 사람들이 사도인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두 사도라는 단어는 원문에는 그들이(3인칭복수)라고만 나오고 사도행전 14:5에는 “사도들에게”, 14:14에는 “사도들이”로 나온다. 원문에는 둘이라는 말이 없다.

 물론 복수이기 때문에 바나바도 사도가 아니냐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사도인 바울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 일행으로서 사도라고 표현한 것이지 바나바가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바나바가 사도였다면 그가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했을 것이나 바울을 떠나 독립적으로 사도라고 호칭한 곳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살전 1:1과 2:6의 관계도 해석할 수 있다. 12사도와 바울사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사도라고 성경은 증거한 곳이 없다. 

성경에서 사도들을 일반화하여 보냄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사도라고 말하는 흔적도 없으며 사도라고 할 때는 구별된 특별한 사람들임을 증명한다. 행 8:1, 9:27, 15:2,4등이 그 예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피터 와그너를 비롯하여 신사도운동을 하는 사람은 첫째 사도는 스스로 사도된 것을 안다는 것이며 둘째 주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칭 사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도는 선출된 것이 아니며 주님이 부르심을 입어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이 사도라고 인정했다는 논리를 펴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며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결국 스스로 사도라 칭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셋째 변승우 목사의 독설과 비방, 그리고 모함은 성령의 사람으로서 나타나는 결과인가? 

변승우 목사의 독설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이미 그의 독설과 비방과 매도는 명예훼손의 수준을 넘고 있고 심지어 그의 홈페이지에는 필자의 학력까지 제보를 받았다며 조작된 내용을 게재하고 있음을 보았다. 또 합신 교단에서 20년 이상을 이단연구를 해온  필자를 다른 이대위원들과 이간을 붙이는 식의 모함을 한 내용도 있었다. 이미 누가 그러한 조작을 했는지 짐작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모함과 조작을 계속할 지 두고 볼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거짓된 영에 속한 사람을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여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이단의 특징 중에 하나가 베드로후서 2장에 말씀한대로 “탐심을 인하여 자기가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리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다. 

아무리 사실을 왜곡할 지라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조작이나 거짓을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할지라도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 이단성 있는 사람의 주변에는 이단옹호자나 같은 이단성 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또 이단옹호언론도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보통이다. 유유상종이다.





징조란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 사건에 대한 암시를  미리 알려주는 것을 뜻합니다

 

1) 마지막을 알려주는 징조

  (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이란 자기를 가리켜서 메시야라  예수라 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란  성경을 잘못 가르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실제를 흐리게 하며  나타나는 이적과 기사를 덧보이게 하는 일들을 합니다

계시록 13 11절에서 보면  땅에서 짐승들이 올라옵니다   이들은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하는 이들의  종말은 멸망이라 했습니다 (유다서 4, 11-13  13:15-18   20:9-10)

  (2)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회복입니다

     마 24:32 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예수님께서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이야기 하시며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예수님이 곧 가까이 이른 징조로 알라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주후 70 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  약 1900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져 살아갑니다   제 2 차 세계대전 말렵  UN 의 허락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나라의 꽃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잎이 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지거든  예수님이 다시 오실 징조로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1948 년 제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 수십년이 흘렀고  예수님이 곧 오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 13 장의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국가적인 면에서 통치하는  세상 권세를 행하는 주권자들입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들은 다른 세상을 만들려는 일들을 거짓 선지자를 통하여 말하게 합니다   성경을 가졌어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대하여 거짓으로 가르칩니다   이 모든 일들을 성경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시고  시대의 징조로 보여주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3)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 사 3:16)    이사야는  예수님 나시기 약 750년전의 사람으로   구세주의 오심,  십자가 죽음과 부활,   열방 나라의 심판 ,  하나님 나라의 회복, 구원과 천국에 대하여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을 하나님께 받아 기록했습니다       사 3:16-26 을 보면   그 옛날에 있을 수 없었던 일들이  장차 후일에  요즈음의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하게 될 것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성경을 봄으로    지금의 세상을 보며  사람들의 모습과 차림새를 보며    하나님의 징조 소리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감으로  보여주셨고  듣게하셨고  깨달음으로  주님 다시 오심을  믿는 자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합니다

       단 12:4 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했습니다     옛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교통수단과  컴퓨터로 오늘날에는  얼마나 빨리 왕래하게 합니까

 

2)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1)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2)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느 때 오실지  그 때를  아무도 모릅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과  섬기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도록 돕는 일을 하며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언해 놓은 것들이  오늘날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징조로 보게 하시오니

깨어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영광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3절) 물었습니다     징조란  어떤 일어나는 사건이  그 실제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되어질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1)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은 징조

    세상 종말의 실제적 사건을 물었는데  물음의 뜻에는  1) 예수님은 창조주요  역사의 주인이시기에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요   2) 실제적인 사건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 뿐이니  말씀해 주십시요   3) 자기 자신들의 신앙을 정립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요 하는 뜻이 있습니다

 

2)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의 대답

  (1)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2) 난리의 소문과 전쟁과 지진과 기근이 있다

  (3) 성도들이 미움을 받는다

  (4)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난다

  (5) 환난이 있겠다

    재난이 올 때에 알려주는 신호인 사이렌 경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큰소리고 길게 울리며  대비하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난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은  영적으로  듣고 준비하라는  예보입니다      세상에 있을  미혹의 영으로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라 하며 사람을 미혹하며,   재난의 시작과,   주님의 이름을 위하며 받는 환란 ,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다른 것을 믿도록 유혹하며,   큰 환난이 있는데  예수믿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게 그 날들을 감해 주신다 했습니다

 

3) 이러한 징조를 알려 주시는 이유 

  (1) 신앙의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어라   (시13:3)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마음과 생각을 지키지 못하여  잘못하면 깊은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우니  잠자지 말라고 가르쳐 주심으로 신호를 울려줍니다

  (2) 시간의 긴박성 입니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소문들의 징조들이  경보소리 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려주며  성도들이 공중에 들림 받게 될 그때가 올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이 나의 질문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 마지막 때에 되어질  예수님의 답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하소서     실제적으로  국가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어나게 될 징조의 소리를 듣고  준비하며 깨어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소서      (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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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의 유래와 멘토링

 

  

멘토란 뜻은/ 정신적 지주, 또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스승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선생을 말합니다.


<멘토>란 단어의 유래는/ 옛날 트로이 전쟁때 그리스 연합국 중에 소속돼있던 <이타카>국가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가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친구에게 맡긴데서 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왕의 아들을 맡은 친구(멘토)는/ 왕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훈육하면서 키웠습니다.

왕의 친구는 왕의 아들에게/ 때론 엄한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때론 조언자도 되고/ 자상한 선생도 되어서/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충실히 잘 감당했습니다.

10년 후에 오디세우스 왕이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다시 돌아왔을 때/ 왕의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 왕은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교육시킨 친구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역시 자네다워! 역시 멘토(Mentor)다워! 라고/ 크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백성들 사이에서 “훌륭하게 제자를 교육시킨 사람”을 가리켜 “멘토”라고 불러주는 호칭이 유래 되었습니다.

멘토란 말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스승과 제자의 형태를 또다른 용어로 멘토와 멘티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멘토링이란? 멘토가 멘티에게 가르침과 조언을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멘토는 초중고대학선생님이나, 학원강사나, 스포츠 감독 코치뿐만 아니라, 유치, 유아원 선생님, 가정교사까지 모두/ 제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도했다면 누구나 <훌륭한 멘토>라는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경우에 따라서 누구나 멘토도 될 수 있고/ 멘티도 될 수 있는데/ 훌륭한 멘티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훌륭한 멘토가 될 것입니다.

#, 티칭과 코칭이 1대 다수의 개념을 포함한 교육이라면/ 멘토링은 1:1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 교육을 말합니다.


 -옮긴 글- 

 

 

 

 



지우고 싶은 날은 없다
    살아온 삶의 단 하루,
    그 어느 하루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아픈 날이었다 해도 지우고 싶은 날은 없습니다. 그 아픔 있었기에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아픔 있었기에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온 모든 날 그 어지러웠던 날들도 단 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누가 혹시 아픔과 슬픔 속에 고통을 잊으려 한다면 지우개 하나 드릴 수 있지만 고통의 날을 지우려 한다면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고통의 날이 얼마나 소중한 날이었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지나고 나면... 그래서 제가 지우개를 드린 걸 원망하게 될 거예요. 지나고 나면... 가만히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소중한 것처럼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해보면 모든 날 중 단 하루도 지우고 싶은 날이 없습니다. 지금 또한 소중한 날들 중의 하나가 또 지나가고 또 시작되고 있음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과 감사한 날들만 우리 생의 달력에 빼곡히 남게 됩니다. 옮기는 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 : 67,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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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ocked Scientists Ask: Is The Sun Is Dying?

    2011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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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ying sun lights bleak, dead landscape of Earth

    Shocked scientists hurriedly rechecked their data and gloomily admitted it's true: the sun's core is shrinking...the sun may be dying.

    충격 받은 과학자들, 서둘러 그들의 데이터를 다시 체크했고 걱정스럽게도
    그것이 진실이란 것을 인정했다: 태양의 핵이 위축되고 있다.
    태양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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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omed star (like ours?) in final death throes [NASA]

     

    Something is wrong with the sun

    Cosmologists and astronomers determine the age of things like planets, stars and galaxies. And they use that data—the best they have—to determine the age of Earth's sun.

    They determined during the past century that the sun's nearly 5 billion years old. Everyone was happy because according to observations of other stars similar to the sun that meant the Earth's star would last at least another several billion years.

    That question settled, the scientists ate well, slept well, and collected handsome honorariums for speaking engagements.

    Everything was copasetic and the universe was in harmony.

    Until 2010.

    During 2010 three unprecendented events took place.

     

    2010년에 전례 없는 세 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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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un, now a Red Giant, approaches Earth [NASA]

     


    전례 없었던 세 가지 사건들

     

    First, evidence emerged that the sun's core is shrinking—an indication that it may be using up it's hydrogen fuel at a faster rate than previously believed.

    첫째, 태양의 핵이 줄어들고(위축되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 - 태양이, 이전에 믿었던 것보다 더 빠르게 그의 수소 연료를 모두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Unfortunately, when the thermonuclear reactions at the core begin running out of hydrogen fuel, a star falls back on the next available element it has to burn: helium. Once that process starts, a star the size of our sun begins expanding and becomes a Red Giant.

    No, it won't explode as a nova or supernova, it doesn't have the mass. It will just swell up and up and vaporize Mercury, Venus, Earth and Mars.

    Second, astrophysicists discovered an unknown type of solar particle was mutating matter on Earth. What is this strange new particle? What are its properties? Why is the sun suddenly spitting them out?

    No one has a clue.

    둘째,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태양 입자들이 지구에 있는 물질들을 변이시키고 있다는 것을, 천체물리학자들이 발견했다. 이 이상한 새로운 입자는 무엇인가? 그 특성은 무엇인가? 왜 태양은 갑자기 그 입자들을 뱉어내고 있나? 아무도 실마리를 갖고 있지 않다. 

     

    Lastly, the sun is rapidly cooling and weakening to such a significant degree that it will—if the process continues unabated—eventually no longer shield the Earth from deadly cosmic rays. That's because the Earth is usually protected by the sun's magnetosphere, and as you've probably guessed, the magnetosphere's shrinking too.

    마지막으로, 태양이, 만약 그 과정이 줄어들지 않고 지속된다면 결국 태양은 더 이상 치명적인 우주선(우주 광선)으로부터 지구를 방어할 수 없게 될 의미심장한 정도로, 급격하게 식어가고 약해지고 있다.

     

    Accepted model of stars ages questioned

     

    Worst of all, recent observations of other stars with the Hubble Space Telescope, and several European Space agency telescopes, have confirm!!!!ed that some stars like our sun suddenly begin exhibiting inexplicable behavior—and then, with little warning, they rapidly swell into Red Giants swallowing any nearby planets.

    And now our sun is acting oddly in ways never before seen.

    The sun is exhibiting behavior that's baffling scientists worldwide.

     

    인정된 항성들 나이(측정) 마들(전형) 의문시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허블 우주망원경, 그리고 여러 ESA(유어럽우주국) 망원경들로 최근 다른 항성들을 관측한 결과, 우리 태양 같은 일부 항성들이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행위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거의 경고도 없이, 갑자기 위에 있는 행성들을 삼키는 붉은 거성으로 팽창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태양이 결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식으로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 태양은 전세계적으로 과학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처신(행동)을 나타내고 있다.

     

    [See Solar Scientists Agree That the Sun's Recent Behavior Is Odd, but the Explanation Remains Elu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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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me scientists are measuring the sun's shrinking core [Wikimedia CC]

     

    The terrible secret: the sun's been cooling since 1979 

    무서운 비밀 : 태양은 1979년 이래 냉각되어 왔다

     

    While the world was hoodwinked with global warming nonsense, the sun began cooling. It's continued to cool for the past 32 years. Now it's poised to cool much faster as it approaches the Maunder Minimum.

    Astronomers confidently predicted the sun would begin growing hotter again by 2007. When it continued to cool they rushed back to their calculators to check the batteries.

    Now the sun has entered its peak solar cycle, causing fears of solar storms destroying fragile technology, while the actual output can be charted and is still on a downward plunge.

    How low can the solar output go? No one knows. The last time it fell precipitously the interglacial period ended and an Ice Age gripped the Northern Hemisphere for 100,000 years.

    But it could be worse than that. If the sun is truly dying ice will eventually creep over most of the planet. Seven billion people will want to live at or near the Equatorial regions.

    그러나 그것은 그 보다 더욱 악화될 수 있다. 만약 태양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다면 결국 얼음이 지구의 대부분을 덮을 것이다. 70억 명의 사람들은 적도 지역이나 거기에 가까운 지역에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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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rrific evidence: strange solar emissions mutating matter

     

    Discovery of 'mutating matter'   

    '물질 변이' 발견

     

    For months mounting fear has driven researchers to wring their hands over the approaching solar storms. Some have predicted devastating solar tsunamis that could wipe away our advanced technology, others voiced dire warnings that violent explosions on the surface of the sun could reach out to Earth, breach our magnetic field, and expose billions to high intensity UV-rays and other deadly forms of cancer-causing rad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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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s core now emitting mutating particles [NASA] 

    태양은 지금 돌연변이시키는 입자들을 내뿜고 있다.

     

    Now evidence has surfaced that something potentially more dangerous is happening deep within the hidden core of our life-giving star: never-before-seen particles—or some mysterious force—is being shot out from the sun and it’s hitting Earth.

    Whatever it is, the evidence suggests it's affecting matter and the natural established rates of radioactive decay. Something once thought impossible. Some physicists are calling it strange and unknown. [See
    Terrifying scientific discovery: Strange emmissions by sun are suddenly mutating matter]

     

    How it goes from bad to worse to worst of all

    And this is where the story gets bad. Very bad.

    Are these strange particles that seem to be mutating matter and affecting the rate of radioactive decay somehow just a presager to the approaching Ice Age? Or is it something more ominous? Is it confirmation of a dying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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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under minimum may become worst ever, say scientists [NASA]

    최소한만 말해도 최악이 될 것이다, 나사 과학자들

     

    According to NASA, the sun will cool dramatically starting after 2013. Then for the next 30 to 50 years it will wallow in the Maunder Minimum as the northern latitudes grow colder.

    But, some are asking, with the nuclear core shrinking and bizarre particles being spewed from the life-giving star, could it be that old age has finally caught up with the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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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perate ESA mission probing the sun [NASA-JPL-ESA]   

    태양을 탐사하는 필사적인 ESA미션

     

    The sun: undergoing a strange change?

    태양 : 이상한 변화를 겪고 있나?

     

    "The average pressure of the solar wind has dropped more than 20 percent since the mid-1990s...

    "태양풍의 평균 압력이 1990년대 이래로 20% 이상 떨어졌다...

     

    The change in pressure comes mainly from reductions in temperature and density. [Emphasis added] The solar wind is 13 percent cooler and 20 percent less dense. The solar wind isn't inflating the heliosphere as much as it used to...That means less shielding against cosmic rays. [The solar probe] Ulysses also discovered that the sun's underlying magnetic field has weakened by more than 30 percent since the mid-1980s."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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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s 'protective bubble' shrinking exposing life on Earth to radiation

    태양의 '보호 거품' 감소는 지구 생명체를 방사에 노출시키고 있다.

     

    NASA solar physicists also report that he sun's so-called "Great Conveyor Belt" has slowed to a crawl. "We've never seen speeds so low; it's off the bottom of the charts. This has important repercussions for future solar activity."

    Yes, and important repercussions for Earth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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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s next? Ice Age...or Red Giant? No one knows!

    다음에 무슨 일이? 빙하시대 .... 아니면 붉은 거성? 아무도 모른다!

     

    That an Ice Age is approaching seems a given. How long it will last is anyone's guess. With the new uncertainty of past scientific theories and the odd behavior no one can explain, a dying sun underscores famous physicist Stephen Hawking's 2010 warning that we must get off Earth and into space and on towards other stars to assure human survival.

    A Red Giant will swell and expand, and then devour Earth, burning 30 times hotter as it converts to helium fuel.

    Toward the end the bloated, dying sun will grow more than 1,000 times brighter. Calling attention to the rest of the galaxy that more worlds have been consumed in a fiery death.

    Among them will b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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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 swallowing Earth on The Final Day...    

    마지막 날에 태양은 지구를 삼키고 있다....


     

    삶에서 만나지는
    잠시 스쳐가는 인연 일지라도
    헤어지는 마지막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는 뒤 돌아보지 않을 듯이
    등돌려 가지만..
    사람의 인연이란
    언제 다시 어떠한 모습으로
    만나질지 모른다.
    혹여...
    영영 만나지 못할지라도
    좋은 기억만을 남게 하고 싶다.

    실낱같은 희망을 주는 사람이든
    설렘으로 가슴에 스며들었던 사람이든
    혹은 칼날에 베인 듯이
    시린 상처만을 남게 했던 사람이든
    떠나가는 마지막 뒷모습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살아가면서 만나지는 인연과 헤어짐은
    이별.. 그 하나만이 라도 슬픔이기에
    서로에게 아픈 말로
    더 큰 상처를 주지 말자.

    삶은 강물처럼 고요히 흘러가며
    지금의 헤어짐의 아픔도
    언젠가는 잊혀질 테고
    시간의 흐름 안에서
    변해 가는 것이 진리일 테니

    누군가의 가슴 안에서
    잊혀지는 그날까지
    살아가며 문득문득 떠올려지며
    기억되어 질 때
    작은 웃음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Handel / Messiah - 00. 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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