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사모 수칙 10훈(訓)

부제: 내가 눈물로 터득한 노하우/최송연

        

1. 기도를 게을리 마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모가 섬기는 교회는 언제나 부흥한다.
그것은 어떤 역경이 와도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담대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기 때문이다.

2. 말씀을 많이 읽어라.
성도들은 목사님뿐만 아니라 사모도 성경박사이기를 원한다.
평소에 꾸준히 읽어두면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줄 수가 있다.

3. 좋은 어머니가 되라.
문제부모가 문제아를 낳는다는 말은 목회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알라.
비뚤어진 자녀가 있는 목회자 가정은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 부모의 신앙인격이 이중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부모, 특히, 집에서 어머니가 올바른 신앙관점으로
자녀를 훈계로 양육하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설사 잠시 빗나간다 해도 다시 되돌아온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4. 목사님을 잘 내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명심하라.
 목사직은 영적인 일로서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책이다.
 따라서 사모가 그의 건강관리도 잘 해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그의 애인도 되어주고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때로는 친구도 되어 주어야 하며 때로는 야당이 되어
 비뚤어진 길을 가지 못하게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고 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5.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마라.
헌신이란 이유로, 개척교회란 이유로 사모가 교회 안에서 동분서주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길러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재능이 많은가? (피아노 혹은 꽃꽂이) 내가 직접 하려 하지 말고
조금 부족해도 성도들 중에서 그 일을 하게 하라. 그것도 안되면
가능성이 있는 성도를 택해서 무료 개인지도를 시켜서라도 그들이 하게 하라.
일꾼이 없는가? 그래도 사모는 앉아 있으라 그러면 주께서
적재적소에 적당한 일꾼을 보내심을 깨닫고 놀랄 것이다.

6.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어떤 명분으로도 투기성 투자는 사모가 할 일이 아니다.

7. 매력적인 사람이되라.
굳이 사모가 아니더라도 너무나 화장이 짙거나 사치스러우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물며 사모이랴. 또 너무나 남루하게 하고 다녀도 궁상맞아 역시 보기에 좋지가 않다.
외모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단정히 하고 무엇보다 속 사람( Inner person)을 강건히 하라.
지식과 교양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 잘 다듬어지면
반드시 ‘고운 우리 사모님’이란 칭호와 함께 여자 성도들의 사랑과 신망을 받게 된다.

8. 지식과 정보에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많은 교양서적들을 읽고 가능하다면 적어도 한 가지 외국어 정도는 능통하도록 노력하라.
특히 이민목회자의 가족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성도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존경보다는 멸시가 뒤따르게 된다.

9. 구제에 힘쓰라.
구제를 많이 하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후히 갚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10.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라.
여자 성도들의 매서운 입씨름에 말려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원수까지라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사모가 가장 참기 어려운 때가 바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말을 (대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사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만들어 내는 말들로서
 신빙성이 없는 소리들이다.)들었을 때 자기의 결백함을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사탄에게 칼을 넘겨 주게 되는 때임을 깨닫고 결코 분노하거나
또는 말질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란 명분으로라도 말을 쏟아 놓아서는 안 된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고 참고 있노라면 반드시 주께서 일어나 도와주신다.
그렇게 되면 시험의 물결은 곧 잠재워지게 되고 오히려 그런 사모가 신뢰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면 억울하고 분한 소리를 액면 그대로 받게 되고
그때 자신이나 목사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장10절 하반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1-24).

 

하나님이 기적적인 행동을 보여 주시는 첫 번째 이유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명예를 회복하시며,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주장하십니다. 그는 이런 일을 행하심으로써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교회를 조롱하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제지하고 사로잡으며 경악시...킬 만한 무언가를 보여 주십니다. 자,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흥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입니다.

체험 그 자체를 위해 부흥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부흥의 때에 수반될 수 있는 체험에 대해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일차적으로 그런 체험 자체를 위해 부흥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체험이든 체험을 약속하는 집회에 항상 달려가는 사람들, 이 집회 저 집회 돌아다니는 사람들, 항상 자기 생각만 하면서 체험을 하고 싶어 안달하며 체험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흥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를 드러내려는 데 있습니다.


-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223-224쪽.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만들어진 매듭이 있다면 반드시 풀고 가십시요  



      세상 살면서 어찌 나를 싫어하고
      질시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내가 잘나가도 못나가도
      질시하거나 질타하는 이웃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잘 헤아리는 지혜가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을
      결정 해주는 지표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보는
      대개가 남을 칭찬하는 쪽보다
      남을 흉보는 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 치우쳐져 있는 것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교육이요 수련이며 자기 성찰인 것입니다.

      그 모든 수단들이 자기에게 도전하는
      적을 없애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이렇게들 말하지요.

      백명의 친구가 있는 것보다 한명의
      적이 무섭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백 명의 친구가 나를 위해준다 해도
      마지막 한명의 적이 나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는 것 뒤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강하고 세다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
      무시했다간 어느 세월에 내 앞에
      강한 사람이 서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정말 거짓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 하루 어쩌다가 행여 매듭이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풀고 가십시오.
      그것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어
      훗날 아주 풀기 힘든 매듭으로 될 수 있습니다.

      꼭! 잊지 마십시요.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푸는 것이 이기는 길입니다..

      -좋은글 중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사모님을 기절시킨 이메일..?

    강원도에 사는 사업가 김씨가
    부산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이메일을 썼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아내의 이메일 주소를 잘못 쳐서
    메일이 엉뚱하게
    얼마전 세상을 떠난
    김목사님의 사모님에게 발송되고 말았다.

    목사님 사모님은 이메일을 받아
    읽고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회복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메일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써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여보, 무사히 도착했소.
    그런데 이 아래는 정말이지 무척 뜨겁구려."
출처 :단감산악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 정금자

대한민국 명장 명품전 (청와대 사랑채)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상에서 가장 자연적인 곳  (0) 2015.02.13
고향 생각  (0) 2015.02.11
Plitvice 공원과 폭포 (Croatia)  (0) 2015.01.20
아치스 국립공원의 비경  (0) 2015.01.18
The Komodo island (Indonesia)  (0) 2015.01.13


    오직 영원한 것에 초점 맞추라 이태리의 밀라노 성당 출입문에 라틴어로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십자가 오른쪽 밑에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 그 왼쪽 밑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도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 조봉희 목사의 ‘단순하게 사는 영성을 개발합시다’에서- 단순한 신앙의 중심점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초점 맞추어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새벽 종소리]

'새벽종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모험  (0) 2015.01.30
이젠 딛고 일어섭시다!  (0) 2015.01.24
이래도 찬양, 저래도 찬양  (0) 2015.01.17
최고의 민족은 기도하는 민족이다  (0) 2015.01.15
말씀의 진리  (0) 2015.01.11

a1.jpg

 

 

어머니의 기도


너에게로 내 몸을 굽힌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야,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니? 이 작은 것아.


너는 많은 사람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나는 분명히 믿는다


너를 쳐다보지 않고 네 목소리만 듣고도
수천의 사람 가운데서 너를 알아볼 수 있고,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의 젖가슴을 빠는
너의 입술을 알 수 있음을.
이 지상에서 너는 나의 유일한 존재니까.

나는 말 없이도 너를 이해하고,
큰 소리 없이도
너는 깊은 잠에서 나를 깨운단다.


- 야누쉬 코르착의《홀로 하나님과 함께》중에서 -


*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저에게 묻는다면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어머니의 눈물기도였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납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자란
아들과 딸은 망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관심 표명  (0) 2015.02.03
우리의 밤이 곧 낯으로 바뀌리라  (0) 2015.01.28
새해에 따를 말씀(대문)  (0) 2015.01.09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0) 2015.01.04
새날의 기도  (0) 2015.01.02

안수는 마력이 아니다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요즈음 안수 문제로 논란이 심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안찰 기도로
사람이 죽는 경우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수, 안찰의 부작용
이 부각되면서 몇 년 전 총회에서 허용된 안수를 다시 금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
은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안수


먼저 구약 성경에 보면 안수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다. 먼저 야곱
이 자녀를 축복할 때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창 48:14). 그리고
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바칠 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였다(출 29:10,
레 1:4).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일
때에는 먼저 그 말을 들은 자들이 그의 머리에 안수하였다(레
24:14). 그리고 레위인을 정결케 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인에게 안수하였다(민 8:10).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울 때 모세가 그에게 안수하였다(민 27:18-23).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안수를 많이 하셨다(마 8:15, 막 1:41,
8:23, 25, 눅 4:40 등). 그러나 손을 대시지 않고 그냥 말씀으로 고치
실 때도 많았다(마 8:13, 9:6, 12:13, 15:28, 17:18 등).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실 때에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마19:13-15, 막 10:16). 하지만 사도들을 세우실 때

예수님이 안수하셨다는 기록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단지 말씀으로 그들을 세우셨으며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마 10:1, 막 3:13-15, 눅 6:12,13). 초대
교회에서 맛디아와 바울과 바나바와 실라를 세울 때에도 안수했다
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세울 때
에는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였다(행 6:6). 그리고 사마리아의 사
람들이 ‘성령’ 받을 때에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였다(행 8:17).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도 바울이 안수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
였다(행 19:6). 디모데는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았으며, 그 때 예언
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받았다(딤전 4:14; 딤후 1:6 참조). 그리고 사
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당부했
다(딤전 5:22). 이것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직분자로 세
울 때 안수가 일반적 관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수 그 자체가 영적인 은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
도행전 6장 3절에 보면 초대 교회의 일곱 사람들은 안수받기 전에
이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 사도행전 13장 3절에 보면 이미 직
분자로 봉사하고 있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금식 기도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 의하면 예
언과 안수는 은사의 ‘기원’이 아니라 ‘통로’였다. 즉, 안수 자체가 은
사를 가져다주는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하나의 수
단, 통로가 되었다는 말이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본 안수


이러한 사도들의 안수 관례는 고대 교회에서 세례와 치유 시, 그리
고 타락한 자와 이단들을 다시 받아들일 때, 결혼과 회개와 임직 시
등에 사용되었다. 임직의 경우에 안수 권리는 오직 감독만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안수는 항상 기도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오랫동안 직분
은사를 수여하는 상징적 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서히 ‘자
동적으로’(ex opere operato) 역사하는 하나의 성례(聖禮)로 이해
되어 갔다.


루터파 교회는 초기에 이러한 가톨릭의 견해를 배척하였으나 나중
에 그것을 다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그것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
기도 했다. 이에 반해 개혁 교회는, 안수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
며 따라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일치하게 가졌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이는 안수에 대해 그것은 유익하며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기독교 강요」IV,3,16; 또한 Aretius,
Spanheim, Koelman 등), 어떤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생
각하였으나 미신적 사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의 사용을 억제
하였다(엠던 총회, 도르트레흐트 총회, 미들버르흐 총회; Voetius,
De Moor, M. Vitringa 등).


어쨌든 안수는 임직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나 사도들에 의해, 그리고 장로들에 의해 한 마
디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수에 의해 특별한 직분의
영이 기계적으로 전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안수는
필요한 은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에 요구되는 은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수는 어떤 직분으로 부름받은 자를 공
개적으로 세우는 것이며, 그 직분을 시작하도록 엄숙하게 취임시키
는 것이다. 그것은 부름받은 자가 적법한 절차를 따라 그리고 하나님
으로부터 보냄 받았으며, 그리고 그 직분에 필요한 은사들을 소유하
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가 그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존경해
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엄숙하게, 공개적으로 선언하
는 것이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IV, 제4판,
pp.365-367 참조).

 

한국 교회와 안수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안수에 대해 마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목사나 장로 안수식 때 안수를 통해 무슨 영력을 받는 것으
로 생각하는 경향이 은연중에 배어 있다. 마치 안수자들의 손을 통해
영력이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관심은 온통 안수
식 자체에 몰려 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언제 목사로 임직받았는가?”라고 묻지 아니
하고 “언제 안수받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장로 장립의 경우에
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안수만 받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수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목사나 장로로 세움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목사의 경우에, 그 사람이 합당한 신학 교육을 받았
는지 여부와 충분한 신학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 그리고 목사
로서 합당한 신앙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의 문제이다. 이런
것들은 대개 신학대학원 졸업 여부와 목사 고시 합격 여부, 교회의
청빙 여부로 판정된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다 통과했다면 그 사람
은 목사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며, 이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안
수는 이제 그 사람이 목사로서 자격이 있으며 교회에서 목사직 수행
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외적 의식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신학 교육과 준비 과정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안수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화
란개혁교회에서는 목사 안수식이란 게 따로 없다. 목사 임직식을 할
때 목사나 신학 교수 한 분이 초청받아 와서 설교를 한 다음 내려와
서 혼자서 손을 얹고 간단히 기도함으로 끝난다. 거기에는 무슨 거창
한 안수식도 없고 사진 찍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목사로
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으며, 합당한 신학 교육을
거쳐 최종적으로 목사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장로 임직식 때에는 아예 안수를 하지 않는다. 그저 주일
오전 예배나 오후 예배 시에 목사가 장로 임직을 위한 예식문을 읽고
서 장로 후보자를 불러 세운 후 서약 문답을 하고 교회 앞에 장로 취
임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끝이 난다. 그 시간은 총 10분 정도밖에 걸
리지 않으며, 노회 임원들을 초청하는 일도 없고 타교회 교인들을 초
청하는 일도 없다. 안수식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사진 찍는 일도 없
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많이 되는 것은 병 고침 곧 치유(治
癒)와 관계된 안수 기도이다. 이런 것은 종교개혁 당시나 그 후의 서
양 교회에서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논의가 되지
도 않았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오순절 계통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한국의 장로교회에게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병을 고치실 때에 안수하실 때도 있
었고 하지 않으실 때도 있었다.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방법은 경우에
따라 다르며 다양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안수하신
것은 그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되기 때문이 아니라, 연약
한 인간에 대한 긍휼과 연민의 정을 표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병자를 위한 기도에서 안수가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는 안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안수는 경
우에 따라 시행할 수도 있고 시행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안
수에 마력적인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
이다. 치유의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안수에
게서 오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인 지침


따라서 안수의 사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각각의 형편에
서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천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목회자는 안수의 무분별한 사용
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성령의 강력한 충동에 의
해 안수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안수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안수 자체가 아니라 기도이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다.


아울러서 우리는 건덕상의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어린아
이들의 경우에는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문제될 것
이 없다. 그리고 남자 성도들의 경우에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
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안수를 피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특별히 젊
은 여성의 경우에는 피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
제라가보다 건덕상의 문제이며 실제적인 지침이다.


그리고 안찰(按擦)의 경우는 성경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예수
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신 경우와(마
8:15) 소경들의 눈을 만지신 경우(마 20:34), 그리고 병자의 양쪽 귀
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아서 병자의 혀에 손을 대신 경우(막 7:33)
등을 볼 수 있지만, 병자들 두드리거나 때렸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꺼지 아니하시
는 예수님께서 왜 병들고 약한 환자를 두들기고 때려야 하는지 도무
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안찰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잘못된
것이며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정통신학저널 Orthodox & Reform theology Journal

 

개혁주의 마을/Grace

'개혁주의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신앙 고백이 중요한가?  (0) 2015.02.04
교회 개혁의 출발점  (0) 2015.02.02
사후 세계  (0) 2015.01.09
개신교 (改新敎, Protestantism) 개요  (0) 2015.01.03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  (0) 2014.12.29

 

 

'나' 와 '우리'의 갈림길

서로의 우정이 무척이나 깊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세상을 알기 위해
함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친구가
땅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야, 오늘은 나의 운수가 트인 날이구나!"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몹시 섭섭한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나' 라는 말을 쓰나?                             
이럴 때는 '우리' 라는 말을 쓰면 좋지 않은가?"

두 사람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지갑을 가지고 길을 떠나려 할 때
지갑을 잃어버린 주인이라며 한 남자가 뛰어왔습니다.

그는 두 친구를 보고 다짜고짜
"도둑놈들!"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자 지갑을 주운 친구가 옆의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우리를 도둑으로 몰다니..
우리는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웠을 뿐이오."

그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가 막힌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나?
조금 전 운수가 좋을 때는 '나'라 하고, 궁지에 몰리자
'우리'를 찾으니 무엇이 진짜 우리 사이인가?"

사람들은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는 왜 언제나
'우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걸까요?
우리 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보다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한  어렵고 힘겨울 때 '우리'라는 버팀목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말입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고단한 인생길에서
위안과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ㅡ 좋은글 중에서 ㅡ
출처: 말씀과 새빛 장로교회/상록수

a1.jpg

a2.jpg

a3.jpg

a4.jpg

a5.jpg

a6.jpg

a7.jpg

a8.jpg

a9.jpg

a10.jpg

a11.jpg

a12.jpg

a13.jpg

a14.jpg

a15.jpg

a16.jpg

a17.jpg

a18.jpg

a19.jpg

a20.jpg



 

                                          당당한 칼빈주의

 

 

- Ian Hamilton/신호섭 역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기질적으로 얼마나 조용하고 얌전하며 공격적이지 않은지 관계없이 전혀 선천적이지 않은 덕목이다. 따라서 칼빈이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를 강해하면서 어거스틴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겸손이다. "나무가 뿌리를 땅 아래 깊숙이 박고 있어야 높이 성장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겸손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다면 그는 멸망을 향하여 자신을 높이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칼빈과 같은 사람이 겸손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자만과 비판의 대명사가 아닌가? 칼빈은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칼빈주의적 선택과 예정 교리는 어절 수 없이 겸손보다는 자만을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칼빈은 "우리에게 겸손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들의 멸망을 향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때로 건방지고 교만하게 행동하며 차갑고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이 이런 행동을 통해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참된 특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자민 워필드는 칼빈주의를 "하나님의 위엄 하심이 인간의 모든 삶과 경험에 가득 차는 것"으로 정의한다. 워필드가 의미하는 바가 거룩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잘 드러나 있는 이사야서 6장에 그림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이사야를 우쭐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 사건은 이사야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외치고 말았다. 여기 진정한 칼빈주의의 참된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열쇠가 있다. 칼빈주의는 절대로 교만하거나 차갑거나 냉소적이거나 당당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우리는 결코 높아지신 위엄의 '위엄의 왕을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의 타락한 심령을 가지고 그의 존전에서 결코 당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워필드가 칼빈주의의 근원은 신학적 체계에 있지 않고 '신앙적 자의식' 안에 있다고 말한 의미이다. 칼빈주의의 뿌리는 (낮이 밤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그곳으로부터 특별한 신학이 나타나는 '신앙적 태도'에 심겨져 있는 것이다.

 

워필드는 '우리 삶에 있어서의 칼빈주의의 성취는 신학적 체계의 과학적 진술에서 만나는 근본적인 신앙적 의식의 발진'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칼빈주의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실수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우선 신학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적 태도' 즉 특별하고도 엄밀하며 그렇지만 하나님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체계를 태동시키는 마음의 태도이다. 칼빈주의를 구성하는 주요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예정론이 아니라 오히려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좀 더 자주 높이 선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이다. 다시 한번 워필드를 인용하자.

 

자신을 선택하신 분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전 구원의 과정과 매 국면의 삶이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 구원의 모든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배은망덕한 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열정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일기의 한 부분에서 브레이너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실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데려가 사람들과 천사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고한 천국으로 날 이끈다고 해도 나는 영원토록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 하나님을 더욱 더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라! 바로 이것이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더욱 원하는 한 가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진정한 칼빈주의는 선천적으로 온유하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왕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빚진 자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만하고 거만한 체하며 다른 죄인들,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경멸하고 멸시한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다시 한번 뒤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겸손'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약함과 눈물이다. 그렇다면 누가 겸손하길 원하겠는가? 그 누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처럼 순종적이길 원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마11:28-30).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악과 위선과 무정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누구이겠는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그 말씀과 행위에 있어서 권위로우신 분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 구세주에게는 결코 영적 우유부단이란건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를 무시하고 말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칼빈주의자의 본질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을 통하여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한에 달려있음을 배우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아셨다(요6:39). 예수께서는 또한 역사 속에 모든 사건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작정되어 있음을 아셨다(마10:29). 이러한 지식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 악한 죄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무정하게 하며 냉소적이고 경멸하게 만들었는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칼빈주의'를 모든 사람에게 자랑한 적이 있으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종이시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셨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은 '제한이 없으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것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2:18-20)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겸손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가?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 매우 풍성한 변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를 결정해준다. 기독교 예배의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예배 모임은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무가치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만일 우리가 겸손이라는 은혜의 강물에 더 깊이 잠기기만 한다면, 현재 복음주의권 안에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예배의 가벼움과 하찮음은 하룻밤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표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표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8-29).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근엄하고 지루한 예배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결코 그럴 마음이 없다.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생명으로 충만한 예배인데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사람을 높이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예배란 설교의 거장이나 음악의 거장의 숙련된 모습이나 연주를 보고 박수를 치고 칭송하는 공연이 아니다. 예배란 그 어원의 의미 그대로 엎드려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것이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의 또 다른 증거는 설교자의 개성이나 재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좌우되는 설교에 있다. 제임스 데니(James Denny)는 "설교자 자신이 재주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시다는 것을 동시에 제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복음으로 죄인과 성도를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가? 당신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믿는가? 당신이 설교자라면, 당신의 모든 준비가 바로 이 확신에 가득 잠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그 열매로 증명되듯이 겸손 역시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슬프게도 아주 종종 나는 강단에서 똑똑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겸손치 못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효과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독교 설교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겸손을 짓밟고 교만을 조장하는 것은 진정한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온유하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낳는다.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구세주와 함께 연합해 있으면서 어떻게 교만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기독교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당한 칼빈주의는 궁극적으로 모순되는 어법이다.

 

그렇지만 나로 하여금 칼빈주의는 또한 실제로 당당하다고 말하게 하라. 칼빈과 그의 신학적 영적 후예들이 당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이나 자랑은 결코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기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건짐을 당한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다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에 놀라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우리의 당당함이 어디에 자리할 것인가? 우리의 오만함이나 방자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의 자랑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의 자랑은 바울의 고백과 함께 고동치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칼빈주의는 당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구세주의 당당함일 뿐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은혜의 당당함이다. 그것은 높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시는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의 낮아지심을 통하여 우리가 높아질 수 있는 당당함인 것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교황>은 아직도 지상의 하나님인가?(천주교인도 잘 모르는 카톨릭의 무서운 이단성


이 글은 카톨릭이 직접 편찬한 <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많은 내용을 2p정도(사진 제외)로 줄였는데 더 이상은 못 줄이겠다.

어쨌든 한 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1. 교황은 지상의 하나님이며 율법도 바꿀 수 있다

 

• 바티칸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가 1대 교황으로 임명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 없는 억지에 불과하며, 베드로조차도 “이분은......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느니라 (행 4:11)”고 말하며,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 또한 성경 전체적으로도, 반석이 인간을 미화하는데 쓰인 경우가 없었다.

 

• 교황은 성경의 율법을 수정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

- “교황은,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의 왕으로서......하나님의 율법을 수정할 수 있고..... ( => Lucius Ferraris, "Papa, art" Prompta Bibliotheca 1782년)

(교황의 공식 칭호에 대한 글)

 

               

 

• 교황의 전용관인 3층 면류관의 의미 : 교황이 천상•지상•지하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의미

- “우리(주: 교황들)은 이 땅 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 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June 20, 1894, The Great Encyclical Letters of Leo XIII , 304 )

 

• 카톨릭은 공식적으로, 교황을 지상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였다.

-“ 교황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 => Lucius Ferraris, "Papa, art" Prompta Bibliotheca 1782년 )  (교황의 공식 칭호에 대한 글)

 

• 중요한 것은, 교황이 1992년에서야 <지동설의 갈릴레오>를 사면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황이 직접 철회하거나 교리책에서 없애지 않는다면, 그 교리는 계속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에 “교황의 결정은 틀릴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을 믿는 까닭이다. 어떤 교리들에 대해서 아무런 철회도 없이 침묵만 지킨다면, 그 교리들은 아직도 살아있다고 봐야 한다.

• (현대인들은 까먹고 있지만) “ 과거 개신교의 종교개혁가들은 한결같이, 계시록의 ‘작은 뿔‘,‘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의 단서를 지닌 ‘짐승’을 교황이라고 지적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 월간 풀빛목회, 강춘오목사 ( 한국 기독언론협회 회장,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 )

 

 

           2. 마리아는 만물의 여왕이다

 

• 교리문답에 나오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 중 몇 가지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 “그녀(마리아)의 중보로 영원한 구원의 선물이 우리에게 미치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969항 )

- “ 그러므로 마리아는, 변호인, 돕는 자, 중보자, 은혜를 베푸는 자의 이름을 가지며 교회 안에서 간구의 대상이 된다. ” ( 교리문답 969항 )

- “ 그녀의 삶이 끝났을 때, 하늘의 영광을 입게 되었고, 주께서 만물의 여왕으로 마리아를 높이셨다. ” ( 교리문답 966항 )

 

• 간단히 말하면 성경은, 마리아가 ”여자 중에 복이 있다”라고만 했지 그녀를 신성시한 부분이 전혀 없다. => 성경은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한다.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 예수시라. (딤전 2:5 ) >

=> 성경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변호인’이라고 한다. < 누가 죄를 지으면.....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예수그리스도시라. ( 요일 2:1 ) >

 

• 카톨릭의 마리아는 바벨론의 세미라미스 등 이교도 여신들과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또한 천주교인들은 존경의 대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기도의 대상이며, 교리문답에는 중보자이며 여왕으로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외에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언급하지 않는다. < 모든 이름 위에.....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 >

      

                    3. 태양신 숭배

        

           

 

                         

                                                        성체숭배행렬

 

태양신 숭배에 대한 공식적인 교리는 없다. 하지만, 성당들 내부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흔적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성체숭배행렬은 가장 태양을 사모하는 행사이다. 특별한 날에는, 태양모양의 <성체안치기>에, 태양모양의 빵을 끼워, 태양 형상의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4. 고해성사

 

카톨릭은 카톨릭의 신부와 교황이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가르친다.  - “주교들과 사제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 ( 교리문답 1461항 )

그러나, 성경은 결단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 <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죄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 막 2:7 ) >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존재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종교는, 그것이 신천지든, 통일교든, 카톨릭이든 다 이단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출처: JESUSwannabe


진정한 회개의 증거들


(고린도후서7장11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 내었느니라


1,먼저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라는 것은 자신의 죄 된 삶을 고치기 위한 간절함을 의미한다.


2,(얼마나 변증하게 하며)는 이제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서 은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3,(얼마나 분하게 하며)는 자신이 지은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죄에 대한 슬픔보다 더욱 강렬한 성질을 의미한다.


4,(얼마나 두렵게 하며)는 여전히 동일한 죄에 빠지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것을 말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성향이다.


5,(얼마나 사모하게 하며)는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6,(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적 성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성화된 열심이다.


7,(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는 스스로를 징계함으로써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성령님의 도우시는 믿음의 역사 가운데 (고후7:11)말씀의 증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홍만 목사님 저서중에서-

출처:물과피와성령/박요셉


부부간의 교통법규
 

 


부부간에도 지켜야 할 교통법규가 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대형사고가 난 다음에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부간에도 이 말은 해당되는 말이죠.

부부의 길을 어떻게 운행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거리에서는 교통경찰과 무인 카메라가

단속하지만, 부부의 길에는 교통경찰이나

감시자가 없기 때문에 서로 교통법규를

지켜나가야만 하지요.

그 부부가 지켜야 할 교통 법규 열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일방통행은 없습니다.

부부간에 일방통행은 없습니다.

언제나 쌍방통행이죠.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식의 일방 통행자는

부부 교통법규의 첫째 항목에서 빨간딱지를

떼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대화와 협조 속에 이루어져야 하죠.

 

둘째, 차간 거리유지입니다.

앞차와 뒤차가 너무 가까우면 충돌하기 쉽고,

너무 멀어지면 다른 차가 끼어듭니다.

 

부부간에 지나치게 가까우면 존경심이

없어져 충돌의 원인이 될 수 있죠.

반대로 상대에게 너무 무심하거나

냉정하게 대하면 부부 사이에

 

제3의 인물이나 장애물이 끼어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부사이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경적금지입니다.

자동차의 경적으로 인한 피해가 큰 것처럼,

당신의 높은 목소리는 상대방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목소리부터 낮춰야 하죠.

도란도란 조용조용 말하는 것을 잘 습관화

 

시키면 싸울 때도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겠죠.

 

넷째, 추월금지입니다.

무리하게 경쟁적으로 추월하는 일 때문에

서로 부딪혀서 대형사고가 납니다.

부부가 상대방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면 사고가 나죠.

당신 같은 주제에 하며 업신여기는 말은

금물입니다.

부부는 경쟁상대가 아니라 영원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차선위반입니다.

차선은 보기 좋으라고 그려놓은 금이 아니죠.

차선은 생명선입니다.

부부는 하나라고 하지만 서로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각자의 차선을 가면서 서로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여섯째, 신호위반입니다.

신호위반을 자주 하는 운전자는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이 크죠.

배우자의 얼굴이 빨간 신호인지 파란 신호인지

알고 행동해야 현명한 사람입니다.

또한 파란 신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인내심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곱째, 차량진입금지위반입니다.

차가 들어가서는 안 될 길이 있습니다.

그런 길에 들어갔다가 뜻밖의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개인적인 것을 지나치게 들추어내서는 안 됩니다.

서로가 아끼며 존경하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간할 줄 알아야

 

현명한 부부가 되지 않을 런지요!

 

여덟째, 일단정지 지키기입니다.

일단정지를 무시하고 달리면 사고를

내는 수가 있죠.

부부가 대화할 때에도 일단정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면 곤란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기 때문입니다.

일단정지를 하여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들어 보나마나 뻔 하지 하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죠.

 

아홉째, 정면충돌을 피하는 것입니다.

내 차선으로 상대방의 차가 달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내 차선으로 잘 가고 있다며

그대로 달린다면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죠.

너 죽고 나 죽는 사태 가 빚어집니다.

부부간에 내 주장만 옳다고 우긴다면

정면충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부부간에 너 죽고 나 죽자 는 식으로 간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상대가 차선을 위반하여 달려온다면,

일단 피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일단 피해서 정면충돌을 모면한 다음

문제를 차분히 풀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이죠. 그래야 서로 납득과 후회와

 

수긍이 가는 것 아닐까요?

 

열 째, 수시로 점검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점검을 하다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데서

문제가 나타나는 수가 있죠.

아무리 행복한 부부라 하더라도 갑자기 문제가

생겨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서로의 문제점을 평소에 점검한다면

부부 사이에 사고는 없습니다. - 옮긴글 -

 

       

       

       


      '일상/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名醫 납시요!~  (0) 2015.02.24
      당신에게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면  (0) 2015.02.07
      시험 한 번 해보세요, 엄청난 효과!  (0) 2015.01.13
      어느 어머님의 말씀  (2) 2014.12.31
      ◈감자의 효능◈  (0) 2014.11.22

      기독교와 몰몬교의 교리 차이점

       

      기독교와 몰몬교의 교리 차이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사이비 이단 대책 위원회, 사이비 이단문제 상담소 제공

      몰    몬    교

      기    독   교

      1> 육체적 하나님을 믿는다.(교성88:27)

      2> 많은 하나님으로 다신교를 주장한다. (값진 진주 4:5)

      3> 하나님들은 한때 사람들이었다고 믿는다.(1844 스미스가르침 P.345)

      4> 아담도 하나님으로 믿는다.(교성27:11, 78:15-16)

      5>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분리된 세 하나님으로 믿는다.(교성130:22)

      하나님 영성을 부인하고 또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육을 가진 존재로 피조물이며 사람도 종국에는 하나님이 된다고 믿는다.

      1> 하나님은 유일신이다.(이사야 44:6)

      2> 하나님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24)

      3> 전지전능,무소부재,만왕의 왕 유일한 하나님

           (딤전1:17,6:15-16)

      4>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마28:19)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유일한 분이시며 절대적인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다. 또 삼위일체되신 제1위격인 성부 하나님이시고, 성부 아버지와 성자 아들은 하나되심을 믿는다.

       

      * 그리스도에 대하여

      1> 예수는 우리의 맏형이다.(구원2:33-34, 교성93:21)

      2>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다.(교성 132:37, 구원교리1:18)

      3> 그리스도의 성령잉태를 부인하고 육체적 탄생으로 아담이 아버지라 한다.(저너랄논단1권 P.50)예수는 다처가라한다.(교성132:61-62,저너럴디스커스2, P.81-82)

      4> 예수는 대속자가 아니라고 가르친다.(모세서6:53,교성1:32,믿음의 아티클85,89)

      예수는 우리의 맏형이며 육체적관계로 태어났고 갈릴리 가나에서 결혼했으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개인의 죄사함과는 관계가 없고 몰몬의 계명을 지켜야만 죄사함받고 구원받는다고 한다.

      1>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메시야이시다.(요한복음4:25-26)

      2> 성육신하신 분이다.(요한복음 1:14)

      3>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시다.(마태복음 11:27)

      4> 성령으로 잉태하심이시다.(마1:18, 눅1:35)

      5>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빌립보서 2:6-11)

      6>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로마서 9:5)

      성육신하시고 신성을 동시에 가지신 완전한 신.인 양성의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분이시다.

       

      * 성경에 대하여

      1> 몰몬경과 교리성약을 경전으로 믿는다.

          (니파이29:6,구원의 교리Ⅲ P.165)

      2> 성경을 하나의 역사로 본다.(저너럴논단 2권 P.75)

      3> 성경이 훼손되고 누락되었다한다.(니파이 1서 13:28)

      신구약 성경은 구원의 안내서가 못되고 요셉 스미스가 받은 몰몬경과 교리성약 및 값진 진주가 구원의 안내서이므로 몰몬경을 경전으로 삼는다.

      1> 영감성(디모데후서 3:15-17)

      2> 계시성(출애굽기 24:27, 요한계시록1:10-11)

      3> 정경성(요한계시록 22:18-19, 누가복음 16:17)

      4> 유일성(요한복음 10:35, 디모데후서 3:16)

      5> 불변성(누가복음 21:33, 베드로전서 1:25)

      6> 생명성(베드로전서 1:23, 히브리서 4:12)

      신구약 성서는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정경으로 믿는다.

       

      * 사람에 대하여

      1> 사람은 자존하는 영이다. (교성39:29)

      2> 피조가 아니라 자존하는 영의 조직으로 영원한 존재로

           본다.(모세서 3:5)

      3> 아담과 하와도 죽지 않는 존재다.(니파니2서 2:22)

      4> 육체가 있어도 타락전에는 피가 없었다.(구원의 교리 P.90)

      5> 어린이는 완전무죄라고 가르친다.(교성33:38)

      사람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땅에 와서 살기전에 영들(Spirits),곧 자존하는 영적 존재로 죽지 않을 몸이며, 아담은 유성의 하나님이며, 우리 육체와 영의 아버지이며 우리도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

      1>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다.(창2:7)

      2>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1:26)

      3>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다.      (슥12:1,창2:7)

      4> 사람은 죄값으로 죽음에 이른다.(히9:27, 롬6:2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범죄하여 죄값으로 죽음에 이른다.

       

      * 타락에 대하여

      1> 타락은 자녀를 갖게함이다.(니파이2:25)

      2>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지혜로운 처사라고 한다.

          (모세서5:10-11)

      3> 아담의 타락을 타락으로 보지 않는다.(구원의 교리1:114)

      4> 아담의 죄는 진정한 죄가 아니다.(구원의 교리 1:114)

      아담과 하와의 범법과 타락은 죄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축복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으로 인식하며 이는 곧 지상에서 인간들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한다.

      1>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불순종에서 기인한다.

          (창3:5)

      2> 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심에서 왔다.(창3:5)

      3> 이 죄로 저주받아 우리에게 전가되었다.(창3:15-19)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불순종(창3:11)과, 하나님과 똑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창3:5)으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했다.

       

      * 구원에 대하여

      1> 요셉 스미스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다.(브리감논설 p.435)

      2> 모든 사람은 자연히 구원 얻는다.(지옥이 없기 때문에)

      3>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믿음의 조건 p.85-87)

      4> 멜기세덱 신권을 소유해야 한다.(구원의 교리 p.33-34)

      5> 죽은자도 대신 침례로 구원받는다.(교성124)

      6>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다.(구원의 교리 Ⅱ권 p.28)

      구원은 선행에 의하여 얻어지고, 몰몬교만이 구원이 있고, 조상과 죽은자도 대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으며 인간은 계속 하나님이 되어가고 있다는것이다.

      1> 예수의 오신 목적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마1:21)하고      자 십자가에서 그 죄를 대속키 위함이다.(마20:28)

      2> 예수의 십자가로 그가 오신 목적을 완전히 이루셨다.      (요19:30, 벧전2:24-25)

      3>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롬1:16, 10:9-10)

      예수는 인류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 천국에 대하여

      1> 일등천국은 해의 천국이다.(구원의 교리1권 p.54, 2권 p.20)

      2> 해의 천국은 남녀간 독신자는 들어갈 수 없고, 신전 성례자와 계명을

          지킨 자들이 들어간다.(구원의 교리 1권 p.56-58, 교성 132:17)

      3> 달의 천국이다.(교성76:71-74)달의 천국에 가는자는 몰몬의 율법없이

          죽은자외 세상에서 몰몬의 복음을 거절했다가 죽은 후에 받아들인자 및

          땅에서 존경받은자 용감하지 못한자(교성76:71-81,맥콘카이교리p.708)
        * 달의 천국사람은 해의 천국사람에게 지배를 받는다.(교성76:78)

      4> 별의 천국이다.(구원교리 2,p.210)
      별의 천국은 깨끗지 못한자, 거짓말장이, 마법사, 몰몬교가 아닌 모든 기독교인 및 몰몬성약을 깨뜨린 자가 간다. 모든 인간은 위의 세가지 천국 중에서 자기의 선행에 따라 선택하여 들어간다고 한다.

      1> 마음의 천국(누가복음 17:21)

      2> 교회 천국(마태복음 13:33)

      3> 천년 천국(요한계시록 20:4)

      4> 영원 천국(사65:17, 히스기야11:16)

      하나님께서 인류의 궁극적 구원은 영원한 천국, 곧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 교회에 대하여

      1> 몰몬교만이 유일한 참교회라고 한다. (믿음의신조 p.204)

      2> 몰몬교만이 유일한 지상의 하나님의 무리라고 한다.(메콘카이p.603)

      3> 몰몬교에 들어와야만 구원 받는다고 한다.(구원교리2권 p.1-구원)

      이름대로 몰몬교는 "말일의 교회"천사로부터 아론과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받았을 때 교회가 원상복귀되었다고 하며 몰몬교만이 참교라고 주장한다.

      1>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골로새서 1:18)

      2>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에베소서 1:23)

      3> 교회인 몸의 지체는 성도이다.(엡 5:30)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의 집합체로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 종말론과 재림에 대하여

      1> 요셉 스미스의 작은 아들 에프레임이 시온에 흩어진      지파를 모은다.(구원교리 Ⅲ p.253)

      2> 미국의 미조리땅이 시온의 도시를 세울 장소이다.

           (교리와 성약 57:1-2)

      3> 몰몬의 새 시온은 미국이다.(교리와 성약 57:3)

      몰몬교 신조 10조에 의하면 미 대륙에 시온(예루살렘)이 건설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상을 다스리고 땅은 새로워져서 낙원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1> 휴거하다.(살전4:17,고전15:51)

      2> 천년왕국(계20:1-6)이 성취된다.

      3> 신천신지(계21:2-22) 영원천국이 완성된다.(계22:5)

      4> 백보좌 심판이(계20:11-15)있으며 구원받지 못한자는 지옥에 들어간다.(계20:10)

      5>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살전4:16, 살후1:17) 지상재림(마24:30, 스가랴 14:4)으로 본 그대로(행1:11)오신다(계1:7. 11:12) 심판주로 오시나(살후1:8-9)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마24:26)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미국 남서부에 위치한

      유타의 5대 국립공원은


      산으로 이루어진

      여타의 국립공원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으로 이루어진

      자이언 캐년 조차도

      산이라는 느낌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느낌을 줍니다.


      유타의 국립공원 가운데서도

      가장 신기한 지형을 지닌 곳은

      다름 아닌 아치스(Arches) 국립공원일 것입니다.


      아치스 국립공원엔

      대략 2천개 이상의 아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아치스에서 가장 유명한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를 비롯하여


      Landscape 아치,

      샌듄 아치, 더블 아치 등

      이름있는 아치들도 많이 있지만


      특정한 이름이 없는

      무명의 아치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치스에는

      아치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모양의 후두를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기묘한 바위들도 있습니다.


      아치스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08184231_1.jpg


      아치스 국립공원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08184231_2.jpg


      먼저 공원 입구의

      팍 애브뉴(Park Avenue)와

      코트하우스 타워(Courthouse Towers)가 있는 남쪽,


      더블 아치와

      터릿 아치가 있는 남동쪽,

      델리킷 아치가 있는 동쪽,


      그리고 

      데블스 가든이 있는 

      북쪽으로 나누어집니다.


      08184231_3.jpg


      아치스 입구의

      왼쪽에 있는 팍 애브뉴는

      인디아나 존스의 3탄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곳입니다.


      08184231_4.jpg


      코트하우스 타워의 모습입니다.


      Courthouse Towers는

      두 군데의 뷰포인트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La Sal Mountains Viewpoint이고

      다른 하나는 Courthouse Towers Viewpoint입니다.


      08184231_5.jpg


      코트하우스 타워는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모양이 각각 다르게 보이는데,


      코트하우스는

      남쪽과 서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석양 무렵에 촬영하면 예쁜 색감의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08184231_6.jpg


      Three Gossips의 모습입니다.

      T.G는 코트하우스 타워 맞은 편에 있습니다.


      08184231_7.jpg


      더블 아치와

      델리킷 아치로 가는 갈림길에 있는

      밸런스트 락(Balanced Rock)이 있는 곳입니다.


      왼쪽에 있는 사람과

      밸런스트 락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이 바위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갑니다.


      08184231_8.jpg


      밸런스트 락은

      위쪽 바위와 아래쪽 바위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Balanced Rock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08184231_9.jpg


      관찰자가 위치를 이동하면

      바위의 모습도 다르게 보이지요.

      가운데 바위가 밸런스트 락입니다.


      08184231_10.jpg


      밸런스트 락의

      전체 높이는 128ft(약 39m)입니다.


      목의 위쪽에 있는

      상단 바위의 크기는

      스쿨버스 3대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08184231_11.jpg


      밸런스트 락을

      지나서 우회전하면

      터릿 아치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가는 도중에 왼쪽에 있는

      Garden of Eden의 모습입니다.


      08184231_12.jpg


      해가 지기 직전에

      붉은 색이 나오기 전에

      골든 칼라의 짧은 시간이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바위에 빛이 비취면

      위와 같은 색감이 나오게 됩니다.


      08184231_13.jpg


      골든 컬러 타임에 촬영한

      North Window의 모습입니다.


      08184231_14.jpg


      red color time이 아니더라도

      white balance를 manual로 설정하면

      인상적인 컬러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08184231_15.jpg


      터릿 아치(Turret Arch)의 모습입니다.

      열성적인 사진작가들이 터릿 아치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08184231_16.jpg


      터릿 아치 방향에서 본

      North Window의 모습입니다.

      거대한 아치의 규모가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08184231_17.jpg


      The Windows Section 주변에서

      먹구름에 가린 해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을 때 한 컷...


      08184231_18.jpg


      짙고 푸른 먹구름이

      마치 바닷속 배경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08184231_19.jpg


      라 살 산맥을 배경으로

      터릿 아치의 모습이 보입니다.


      라 살 산맥은

      캐년랜즈에서나 아치스에서나

      늘 사진의 배경이 되어주는 고마운 산입니다. 

       


       

      08184231_20.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건전한 종말론1

       

       

      마지막 때에 대한 교리는 성경 속을 흐르는 진리의 큰 물줄기 가운데 하나를 이룰 정도로 중요하다.

      특히 신약 성경에는 '마지막 때'에 대한 언급이 300회 이상 나오는데, 이것은 25절 마다 한 번의 빈도로 기록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신약에서 세상 종말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곳은 하나도 없다.

      "믿음이나 예수의 보혈, 심지어 사랑에 관한 말씀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교리이다"라는 성경학자 케논 호이트의 말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면 냉소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독교가 이천년 동안이나 말세를 강조해 왔지만, 아직도 지구는 건재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세상 종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광신자로 몰아 붙이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 이천 년 역사를 돌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믿음이 무시되었던 시대치고 교회가 쇠퇴하거나 부패하지 않는 때는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재림과 종말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생명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리스천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이다.

      종말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치고 정신 차려서 신앙 생활 잘해 보려고 하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종말에 대해서 절대 회의적이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옥 한 흠 목사 -

       

       

       

       

      건전한 종말론2

       

      일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크리스천의 태도는 세부류라고 봅니다.
      ⓵ '무관심파' 입니다. 종말이 '너무 난해하다'고 생각하여 신학자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로삼아 종말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⓶ '경원파' 입니다. 이들은 종말론이 '너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을 떠올리며 잘못될까봐 가능한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읍니다.

      ⓷ '초관심파' 입니다. 이들은 곧 종말이 임할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 한채 다급하게 종말만 준비하거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시한부 종말론이 되는 것입니다.

       

      (1) 건전한 종말론에 대한 실제적 지침
      그러므로 이 시대야 말로 종말론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종말론을 위한 네가지 지침을 제시하고져 합니다.

      ❶.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성경말씀에 의존 하여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에 개인의 경험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신비한 체험을
      결코 신앙이나 교리의 근거로 삼을수 없읍니다.
      하지만 종말의 특정 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 근거를 경건한 사람들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에
      두고 있읍니다. 이는 명백히 말씀드려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체험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찌라도 주관적 이기에 언제든지 잘못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전한 종말론은 언제든 성경을 유일의 계시로 인정하며 그 어떤 체험보다 성경을
      더 강조했읍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주장하면 그것은 단적으로
      잘못된것 입니다. (갈1:7~8)

      ❷. 미래의 예언보다는 신앙 원리를 강조합니다.
      성경의 상징적 내용들을 어떤 특정 사건, 또는 인물에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는 건전치
      못한 접근 방법입니다.
      예를들면 열뿔을 공산주의나 E.C.공동체로 '666'을 히틀러나 키신저 또는 컴퓨터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에는 탁월한 영석(靈釋 = 영적인 해석) 으로 감탄을 자아 냈지만
      시대가 지난 오늘날 그것은 잘못된 해석임이 드러났읍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은 자극적인 사건 중심의 예언보다는 언제든 신앙원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❸. 특별한 종말 준비보다는 성실한 삶을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에 관한 메세지가 나올때 마다 강조되는 것은 특정장소로 서의 모임,
      일상생활의 포기, 신비한 체험등이 아니라 성실한 삶입니다.
      (고전15:51, 살후3:11-12, 딛2:13-14, 벧전4:7-11)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은 협박성의 휴거나 재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철학자인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말중에 유명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찌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노라'
      오늘을 성실하게 사는것이 최상의 종말준비인 것입니다.

      ❹, 재림의 시기 보다는 재림의 준비를 강조합니다.
      성경에서는 재림의 징조에 관해서는 알수 있으나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알수도 없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24:36)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행1:7)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살전5:1)
      그래서 성경은 종말의 긴박한 의외성 때문에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마25:10) 처럼
      또는 해산할 여인(살전5:3) 처럼 평상시에 성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은 재림의 시기보다는 재림의 준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재림의 시기를 특정이로 계시한다는 단체나 개인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단인 것입니다.

       

      (2)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이제 우리는 종말론에 대해서 공연한 오해나 두려움을 떨쳐버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 원리를 근거하여 요한계시록을 읽고 그날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경험보다 성경을, 예언보다는 신앙의 원리를, 특별한 종말 준비보다는 성실한 삶을
      그리고 재림의 시기보다는 재림의 준비를 중요시 하면서 종말론을 배워 나간다며는
      여러분들은 바로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고생이 되면서도 행복하고 어려우면서도
      보람된 하루하루가 될것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런 말을 했읍니다.
      '잘 보낸 하루가 평안한 잠을 가져다 주고, 잘보낸 일생이 평안한 죽음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준비된 자세로 주의 재림을 몹시도 기다리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지구 종말론에 대한 자세

       

      지구 종말론이 다분히 서양적,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마야에 끼워 맞추는 일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우리고유 토속 신앙에서 싹튼 종교에서도 천지 계벽론을 오래전부터

      주장 하고 있으며. 기독교에서 분파한 모 종교에서도 말세에 대한 준비하여 구원 권에

      임하여야한다는 설교 원문이 무수히 발행된바 있다.

      어원의 발생을 두고 볼 때 가설과 진실은 인간이 경험을 하였든지 경험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될 때 말이 성립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이었지만 왜 사람들이 2012년

      종말론에 회의적이기 보다 긍정적이었던가.

      우리 주위를 살펴 볼 우주 천체 과학적인 측면을 떠나 종교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노아홍수 사건처럼 비가 나리는 사태가 오래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계속해서

      말세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인간의 기본도덕 개념이 흐려지어 살인과

      성 폭력 행위는 동물보다 잔혹한 짖을 쉼없이 세계곳곳에서 자행되어지고 이제는 무감각

      하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한 놈이 범한 그 죄는

      온 인류가 범죄 해 나가도록 세포 분열하듯이 타고 번져나가게 되어 있으며 이를 몸으로 인간은

      받아드려지게 의식구조가 창조되어 있고 또 자신은 그것보다 더함 짓을 만들어 낸다는것이다.

      오늘날 곰곰히 되삭여보면 날마다 죄악의 골은 점점더 깊어져 가고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이 더 살아갈 수 있도록 용서받지 못하며, 이로 인해 종말로 몰아가고 있으며

      인간들 자신의 입으로 만들어 내 뱉는 종말론이다. 그리고 그 날과 그 시간은 인간자신들의

      스스로 느껴지도록 창조주가 창조하여 둔 것이 아닐까싶다. 세상에 미물인 들쥐도 홍수가

      나는 시간을 미리알고 대피한다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종말을 모를 리 없지 않을까?.


      종말이 오고 아니 오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종말에 대비한 선한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가 될 때 그 종말은 새로운 질서의 삶을 열어주는 길이 될것이다. 종말이 다가온다면

      이는 창조주의 소관이다. 인간이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종말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종말을

      대비 한 삶의 자세가 되어 오늘을 잘 못살아가는 자신들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살아가는 자세가

      종말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

       

       

       

       

       

       

       

       

       

       

       

       

       

       

       

       

       출처: 개혁주의 마을/Ezra

      '종말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난 전 휴거- Perry Stone  (2) 2015.07.09
      휴거  (6) 2015.02.19
      종말론, 죽음  (0) 2015.01.12
      종말이야기: 천국과 지옥- 유태화 교수  (0) 2014.07.27
      누가의 역사화된 구속사적 종말론  (1) 2014.07.19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이브를 사랑했던 여인  (0) 2015.01.27
      The Canaima park 와 Angel 폭포 (Venezuela)  (0) 2015.01.24
      기기묘묘한 Little Finland  (0) 2015.01.14
      무서운 자연 현상  (0) 2015.01.02
      여우짓도 귀엽네...ㅋ  (0) 2014.12.21
      
      
        이래도 찬양, 저래도 찬양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여야 한다. 항상은 그야말로 항상 이다. 힘들어 죽겠어도 찬양, 누구에게 배신당해도 찬양, 돈을 떼여도 찬양, 매를 맞아도 찬양, 가게물건을 다 털려도 찬양, 남편이 나를 버려도 찬양, 억울하게 옥에 갇혀도 찬양, 병에 걸려도 찬양, 직장을 잃어버려도 찬양. 사고를 당해도 찬양. 이래도 찬양 저래도 찬양 아침에도 찬양 한낮에도 찬양 밤중에도 찬양 ,하루 종일 찬양 이러한 상황에서도 찬양하는 자가 성도이다. -정구지 목사의 ‘항상 하여야 할 것 3가지’에서- 어떠한 상황에도 다윗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런 신앙을 가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는 것이 성도들이 해야 할 첫 번째로 ‘송축하되 내 입에 계속 하리로다.’ 내 입에서 계속 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입니다. 원망 욕, 저주, 등은 절대로 하지 말고 ‘찬양, 찬양 아침에도 찬양..’ 찬양을 계속 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성도입니다 [새벽 종소리]

       

      '새벽종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젠 딛고 일어섭시다!  (0) 2015.01.24
      오직 영원한 것에 초점 맞추라  (0) 2015.01.22
      최고의 민족은 기도하는 민족이다  (0) 2015.01.15
      말씀의 진리  (0) 2015.01.11
      동기를 부여하라!  (0) 2015.01.09

      당신은 광光(빛)신도인가 광狂(미친)신도인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찬송가 348장은 야고보서 4장 7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를 근거로 작사됐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이 찬송가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불려진다면 어떠할까?

      요즈음 한국 교계뉴스를 보면 교회신도들이 행하는 폭력에 할말을 잃게 된다. 얼마전 주일아침 서울에 위치한 모 감리교회당 앞마당에서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신 모 목사 교회 신도들이 데모를 했다. 합신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신 모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할 그 시간에 다른 교회앞에 모여 데모를 하다가 급기야 예배당에 집입, 이 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이단연구가인 이인규 권사를 잡아, 계단으로 끌고 내려오면서 폭력을 행사했는데 그들은 마귀(?)와 싸우는 의로운 신자들인양 당당했다.

      얼마후 그들은 예장 합신교단의 신년하례회가 열리는 곳에 몰려들어가 행사장을 밀가루로 도배하고 참석자들에게 밀가루를 마구 뿌려댔다. 또 마귀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의기양양한 그들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경기도 모 교회당에 몰려들어 주차장을 점거하며 또 그들의 마귀들과 싸웠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 있는 모 교계 언론사 사무실을 습격하여 문을 부수며 언론사 마귀(?)들과의 일전도 치러냈다.

      한국사회에 정말 필요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직종 3가지가 있단다. 이 3D가 기독교계에도 있는데 바로 이단대처와 연구를 하는 사명자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위험하고(Dangerous), 힘들고(Difficult), 지저분(Dirty)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단대처사역을 위험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사역으로 치부하고 교계가 방임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단대처사역에 헌신한 이들 대부분은 자비량 선교사라 할수 있다. 교단에 소속된 이단 연구가들은 이단대책위원회 등 각 교단기구에 소속되어 공식적인 활동과 후원을 받을수 있지만 독자적으로 이단대처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은 이렇다할 외부도움없이 홀로 감당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진리에 바로선 목회자와 성도들은 온전한 이단연구가들을 향한 이상한 그룹들의 공격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광(狂)신도들에게 광(光)을 나타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대로 행동하는 모본을 보이고 또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차후에도 교회와 이단 대처 사역자들이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선례를 만들기를 촉구한다.

      이는 이단의 폐해를 절감하는 한국정부나 교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터전인 미주 한인교계도 회피해서는 안되는, 적극 동참해야만 할 중대사이다. 그래야 사이비와 이단들로 인해 온전한 기독교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전도의 길이 막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光신도와 狂신도를 제압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

      이태경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행복만을 구슬로 엮어... 

                                     최송연

           

          어제는 비록
          좌절과 낙담으로 캄캄했을지라도
          저기 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더 넓은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광할한 마음이 내게 있으니 행복하고

          나 비록
          나누어 줄 재물 넉넉지 못하여
          가난한 이웃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사랑으로 품어 줄 수 있는
          따스한 가슴이 내게 있으니 행복이네

          아침이면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별꽃이 무리지어 흐르는 밤하늘
          살랑이는 실바람 향기 속에
          내 주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
          그 또한 더없는 행복 아니던가

          영원의 시간 속에서
          한 경점(更點) 같은 人生,
          작은 소요에 마음 뺏겨 슬퍼하거나
          덧없는 분노로 채울 것이 무엇이랴


          나의 작은 生의 바구니엔
          행복만을 오색 구슬로 엮어
          소복소복
          담고 채워도 모자랄 유한한 小空間,
          날마다 그분의 은총 아래 나 거하기 원하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 2- 4)

           

           

            이미지 전체보기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 사랑은...  (0) 2015.01.26
      삶이란 그런 것...  (0) 2015.01.24
      겨울 연가(戀歌)  (0) 2015.01.08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0) 2015.01.05
      세밑의 끝자락에서...  (0) 2014.12.31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C.H.매킨토시


      5. 성도의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회심의 주제에 대한 긍정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 버림" 즉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휘어잡았던 모든 사물로부터의 돌이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의 어둡고 캄캄했던 모든 지난날들의 정욕과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행전 26: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심은 단순히 죄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리라. 

      회심은 우리들의 모든 비참한 과거 생활과 영적 타락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건짐을 받은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한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회심은 이 세상 신과 이 세상 임금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세상으로부터의 건짐이요, 한 때 우리를 휘어잡았던 사악한 세상 애착 즉 죄에 대한 사모와 죄된 행실로부터의 건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데, 회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댓가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제도인가? 

      우리가 만일 이 세상과 나 자신과의 이음줄을 끊는다면, 또는 우리의 과거 쾌락과 오락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등진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1:9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준다. 충분하고도 확실하고, 분명하고도 납득이 갈 만한 해답을 준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귀한 해답이다. 그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귀한 해답이다. 

      나의 과거라는 우상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된 즐거움 대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세상의 부와 영예와 세상의 우월감 대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대치인가? 


      탕자가 먼 나라에서의 넝마 조각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최고의 옷이었다. 돼지의 쥐엄 열매 대신 무엇을 얻었던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살찐 송아지였다. 먼 나라에서의 비참한 고역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환영이었고, 아버지 자신의 품이었고, 바로 아버지의 식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참 회심 속에 있는 두 면(곧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의 감동적이고도 인상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얻지 않는가? 이 비길데 없는 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멋진 회심인가! 얼마나 멋진 우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인가!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의 언어가 감히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사랑의 빛에 쏘임을 받는 그의 감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헌옷, 쥐엄 열매, 돼지, 종살이, 냉냉하게 굳어진 자아, 궁핍, 기근, 비참, 도덕적 타락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영원히 없어졌다. 그 대신 이루 말할 수 없는 밝고도 행복한 가정의 기쁨과 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는 축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고, 또한 그의 돌아옴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예인가? 귀하고도 거룩한 사실에 대한 예이다. 

      하늘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 회심에 대한 예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 것의 포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으로의 인도됨이다. 고향으로 돌아옴이다. 아버지 품으로의 되돌아옴이다. 가정으로의 돌아옴이다. 어떤 틀에 박힌 메마른 공식 문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능한 역사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참 회심이다. 독자들께서 충분히 납득하기 바란다. 

      이 위대한 사실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안일하게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돌이킴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말 같아도, 복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무엇이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라고? 

      아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이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돌이킴"이라든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라는 말속에 함유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온전하신 영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신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임장으로, 그분의 미덕으로, 그분의 피의 대가로, 그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이름의 향기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그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시고, 그분의 자격까지도 나누어주신다. 다만 하나님으로써의 그분 자신의 위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만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니라"(요 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요한 복음 17장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기도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10)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26) 


      자, 이제, 이보다 더 고상하고 더 축복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처럼 일치되고,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나누듯이 그분과 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그분의 평화,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이 모든 사실이 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며, 특성인 것이다. 


      지옥 구덩이의 영원한 공포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 죄 사함 받는다는 것, 씻음을 받는다는 것,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기초로, 동일한 특성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자비이며, 축복이며,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호의 속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전지 전능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걸작품인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말하는 회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청난 큰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사악한 일로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에 빠졌을 때에라도,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죄와 사단의 타락한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진노의 자녀로 곧바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최대의 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세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보다 뒤쳐지는 자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못된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은혜로 감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엡 1:3-7) 


      여기 얼마나 깊은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지혜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배려로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보이신다.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칭의, 우리의 온전한 구원, 우리를 영접함, 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인데 이 모두는 이 광대한 온 우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위치말고, 다른 위치에 우리를 둔다면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의 요구에 미치는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 속 사랑에 대한 만족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너무나 신비하다. 너무 훌륭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귀해서 확고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 사랑에 따라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초로 해서 활동하신다. 


      탕자는 품꾼 중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행한 공적에 따라 대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위치는커녕 종의 위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전혀 우리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상에서 돌이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 존전에 인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동행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생수를 찾으며, 소멸되지 않은 근원으로 인도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그분 안에서 찾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고, 또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절대로 안된다. 

      과거의 우리의 대상물을 갈망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분깃을 깨닫는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상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돼지나 쥐엄 열매를 찾았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탕자가 복된 사랑의 가정이라는 밝고도 거룩한 곳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를 한숨 지며 바란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돌이켰다고 고백하고, 잠시동안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열의가 식어지고 지치고 만족을 잃는다. 그들 내면의 역사는 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우상은 잠시 포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 마음에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만족감과 심령의 안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름을 따라, 그 가련한 심령들은 세상을 한번 더 바라게 되고,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평상시보다 더 많은 탐욕으로 어리석게도 헛된 것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히려 보다 큰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사단의 옹호자가 되어 회의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단순히 이 악한 세상에서 헛된 꿈과 기만을 버리고 떠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곳에서나 원하는 모든 진실 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거룩하게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다. 영원히 세상과 끊어진 사람이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자신이 이미 세상을 심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을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저울로 세상을 달아보았고 세상에 대하여 영원히 등을 돌린 것이다. 대신,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진지하고, 당당한 목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바로 그를 구원키 위함이요,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케 위함인 것이다. 


      -출처: 착한책과 사람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히브리서 11장 4절~32절은 믿음의 본을 보였던 허다한 증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벨과 에녹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무엘과 선지자들에 이르는 수많은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른 모든 사례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한다(히 11:32). 이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을까.

       

      이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와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관한 내용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구원의 의미

      “구원”의 문자적인 의미는 건짐, 도움, 해방을 뜻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재난이나 불행 또는 쳐들어오는 적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나(시 34:6, 행 7:25), 병의 치료를 받는 것(마 9:22)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말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장 일반적 의미의 구원은 죄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죄의 용서, 죄의 법적 책임과 죄의 오염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죄로 말미암는 지옥 형벌에서의 건짐 등을 가리켜서 구원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다음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죄를 용서받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즉 거듭남(중생)과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것(칭의)이다. 이러한 일은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과거에 이미 완성된 것을 나타내는 동사(과거 완료형)로 표현한다(눅 7:50, 딛 3:5 참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날로 거룩하여져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성화)이다. 이것은 믿는 순간 시작되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현재 진행형)로 표현한다(히 10:39 참조).

       

      셋째는, 죄의 결과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금도 죄의 흠과 티가 없는 상태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 즉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것(영화)이다. 이것은 죽는 순간에 가서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주께서 나를 ···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딤후 4:18)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는 동사(미래 완료형)로 표현한다(빌 2:12, 약 1:21 참조).

       

      그러므로 특별한 언급이 없이 구원이라고 하면,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죄를 용서받고 거듭나는 것(중생)만을 제한해서 구원이라고 하려는 사람도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성급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어떤 의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를 먼저 밝혀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이라야,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거나, ‘구원받고 있습니다’ 또는 ‘구원 받을 것입니다’ 라는 식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구원받는 방법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밝혀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원을 받는 방법이 매우 분명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는 말씀들이 이를 입증해준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기도, 선행, 봉사, 노력, 헌금, 종교의식, 세례 등 사람의 그 무엇도 구원을 위한 조건이나 공로(功勞)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말씀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요 14:6), 만일 있다면 그는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으로 우회적 표현을 통해 교훈하기도 하셨다(요 10:1, 8).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살았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를 인류의 모든 사람들, 즉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할 수 있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라고 구원의 방법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밝힌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직접적인 말씀에서 확인이 될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로서의 구약 시대 성도들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대전제로 밝히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고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분명하게 강조한 점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 당시나 신약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육신을 가지고 직접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장차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문설주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거나, 장대 끝에 달린 뱀을 바라보거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받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구원에 이용된 어린 양이나 뱀 등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장차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물로 제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예표들 속에서 그림자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해도, 이미 육체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과 똑같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가, 아니면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돌이켜 보는가 하는 시점(時點)만이 다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이 없다.

       

      로마교회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례제도가 생겨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신 후, 육체가 무덤에 머물던 사흘 동안에 집단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원은 세례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증거로 받는 것, 즉 구원의 결과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에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각자의 양심에 따른 심판의 결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양심에 따른 심판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설사 양심에 따른 심판을 해본다 하더라도 의롭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없는 어린 아이까지도 다 알 수 있듯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 예외 없이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롬 3:10).

       

      이제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던 예표에 대해서 살펴보자.

       

      3. 구약의 예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징적인 글이나 말 또는 행동을 하는 데 익숙해 있다. 이러한 사람의 성품에 맞도록 성경에도 많은 상징적인 사물, 행동, 표현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예표에는 구약이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상징과 구분되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예표와 상징이 다른 점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예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사용된다. 둘째, 상징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을 포함하지만, 예표는 미래의 인물이나 사건만을 소개한다. 셋째, 악한 것은 결코 선하고 좋은 것의 예표가 되지 못한다.

       

      구약에는 이런 특징을 가진 수많은 예표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예표들에는 세 가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 유형은 사람이 예표로 사용된 경우이다(예; 아담, 멜기세덱, 아브라함, 요셉, 아론, 요나 등), 둘째 유형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물이 예표로 사용된 경우이다(예; 유월절, 출애굽, 홍해 건넘, 광야에서의 방황, 구리 뱀, 반석, 가나안 정복, 아브라함의 부르심, 사사들의 활동 등). 셋째 유형은 의식(儀式)과 관련된 것들이 예표로 사용된 경우이다(예; 제단, 제물, 제사장, 성막, 성막의 기구들, 할례 등).

       

      그러나 모든 예표들은 그 유형과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씨 또는 다윗의 혈통으로 소개된 언약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각각 그 당시에 주어진 예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했고, 또 그 예표를 믿고 따라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통해서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시대에는 예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예수님 당시에는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그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 과거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마다,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행위나 의식(儀式)과 같은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려 하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다만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찬양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팬플룻의 전래  (0) 2015.07.27
      속죄하신 구세주를(새298장) -사랑이야기3  (0) 2015.02.21
      찬송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  (0) 2015.01.08
      때로는 너의 앞에  (0) 2015.01.04
      O Holy Night  (0) 2014.12.21

       

       

       

        생각하는 여유 너의 웃음 너의 밝은 웃음이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이 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빵이 되고,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고 좋은 꿈을 꾸게 하는 베개가 된다. 때 문 잘 자라지 않는 나무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고 잘 날지 못하는 새는 날개가 약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거친 사람은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이고 불평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땅과 정성 땅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채송화 씨를 뿌리면 채송화를 피우고 나팔꽃 씨를 뿌리면 나팔꽃을 피운다. 정성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쁜 일에 정성을 들이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고 좋은 일에 정성을 들이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딱 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도 딱하지만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이가 없어 못 먹는 사람은 더 딱하다. 짝 없이 혼자 사는 사람도 딱하지만 짝 을 두고도 정 없이 사는 사람은 더 딱하다. 다람쥐와 두더지 나무에 잘 오르지 못하는 다람쥐는 슬픈 다람쥐다. 땅을 잘 파지 못하는 두더지도 슬픈 두더지다. 그보다 더 슬픈 다람쥐와 두더지는 나무를 포기하고 땅을 파려는 다람쥐와 땅을 포기하고 나무에 오르려는 두더지다. 따르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따르지 않는다. 거짓말 하는 사람에겐 희망이 따르지 않고 간사한 사람에겐 친구가 따르지 않는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랑이 따르지 않고 비교하는 사람에겐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 좋은 글 중에서 -


      이제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오르면서

      경상도말도 중국어로 표현해야 
      globalization 에참가 하게된다



      몇 가지를살펴보면 
      :

         


      臥以來算老 (와이래산노)

      – 엎드려서오는세월을헤아리며기다린다

      (인생무상늙어감을헤아린다는뜻)


       

      雨夜屯冬 (우야둔동)

      – 비오는밤에겨울을기다리듯이


       

      母夏時努 (모하시노)

      – 어머님은여름시절에힘만드시는구나


       

      苦魔害拏 (고마해라)

      – 괴로운마귀가나를해치려붙잡는다


       

      氷時色氣 (빙시색기)

      – 얼음이얼때색과기가되살아나니


      知剌汗多 
      (지랄한다)

      – 아는것이어그러지면하릴없이땀만많이흘린다



      文登自晳 (문등자석)

      – 문장의길에오르면스스로밝아지는도다

       


      謀樂何老 (모락하노)

      – 즐거움을도모하니어찌늙으리오

       



      牛野樂高 (우야락고)

      – 소치는들판에즐거움이높도다


       

      澤度儼多 (택도엄다)

      – 법도를가려의젓함을많이하라


       

      熙夜多拏 (희야다나)

      – 달밝은밤에생각에붙잡힘이많구나


       

      無樂奚算老 (무락해산노)

      – 낙이없으니어찌늙음을따지리오


       

      尼雨夜樂苦移裸老 (니우얄락고이라노)

      – 대저비오는밤기쁨과슬품에헐벗은노인근심케하네


       

      文登歌詩那也 (문디가시나야)

      – 시예에오르니 노래와 시가 어찌하오리


       

      天地百歌異 (천지백가리)

      – 천지에 백가지 노래가 다르니라


      苦魔濁世里不拏 
      (고마탁세리불라)

      – 고통과마귀가흐린세상에붙잡히는구나.


       

      .경상도 사투리에 이렇게 깊은뜻이 있다니 역쉬 갱산도 사투리

      는 못말려
      !!!



       

       Provided by B. C. Yun, PhD,  editor in chief



       

      
      
        최고의 민족은 기도하는 민족이다 미국 워싱턴에 가면 국회의사당이 있는데 아마도 전 세계에서 아름다운 최고의 건물일 것이다. 이 건물의 윗 부분은 돔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 돔 안에는 전부가 기도실이라 한다. 그런데 1955년부터 이 기도실이 비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국정으로 모두가 바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묵상하고 명상하며 기도한다고 한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미개하고, 창조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문화인이고 지성인이 되는 것이다. 최고의 민족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민족들이다. 기도하면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지켜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갑형 목사의 ‘기도가 이 민족을 구한다’에서- 지금 나라가 어둡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이 땅에 있는 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민족을 지키는 것은 60만 국군도 주한미군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교회의 부르짖음과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가 이 민족과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 언제든 나라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만이 이 민족을 정직하게 할 것이며, 선교하는 선진 민족이 되게 할 것이며, 기도만이 남북을 복음으로 통일시킬 것이며, 우리를 세계 속에 도약하는 민족이 되게 할 것입니다. [새벽 종소리]

       
      출처:사모님사모님/달빛

      '새벽종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직 영원한 것에 초점 맞추라  (0) 2015.01.22
      이래도 찬양, 저래도 찬양  (0) 2015.01.17
      말씀의 진리  (0) 2015.01.11
      동기를 부여하라!  (0) 2015.01.09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에게서만  (0) 2015.01.09

      Alison Krauss(앨리슨 크라우스)- 1971년 7월 23일~)는 미국싱어송라이터이다.

      2012년까지 그래미상을 27회 수상하여, 가장 그래미상을 많이 받은 가수로 기록되어 있다.

       

      Alison Krauss...When You Say Nothing At All / 4:07.

       

      ♬ When you say nothing at all(당신이 아무말 하지않아도) / Alison Kraus(앨리슨 크라우스)

      It's amazing how you can speak right to my heart
      당신은 어떻게 저의 심장과 바로 이야기 할수 있는지 놀라워요

      Without saying a word, you can light up the dark
      말한마디 없이도 당신은 어둠속에서 빛이되어 줍니다.

      Try as I may I could never explain
      그 이유를 난 절대 설명할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What I hear when you don't say a thing.
      당신이 아무말하지 않아도 내가 들을수 있는것들에 대해..

      The smile on your face lets me know that you need me
      당신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당신에게 제가 필요하다는것을 알게 해줍니다.

      There's a truth in your eyes,saying you'll never leave me
      진실이 가득한 눈동자로 절대 날 떠나지 않겠노라 당신은 말합니다.

      A touch of your hand,says you'll catch me if ever I fall
      당신의 손을 잡으며 언젠가 내가 떨어지게 되는 날이오면 그때
      나의 손을 잡고 구원해줄 사람은 당신이라 저는 말합니다.

      Now, you say it best when you say nothing at all
      이제 당신은 침묵속에서도 최상의 말을 들려줍니다.

      All day long I can hear people talking out loud
      하루종일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귓가를 맴돌지만

      But when you hold me near, you drown out the crowd
      당신이 날 안아줄땐,그 모든 사람들로 부터 절 끌어당겨 줍니다.

      Old Mr. Webster could never define
      절대 규정지어 질수 없는 Old Mr. Webster

      What's being said between your heart and mine
      저와 당신의 마음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는것일까요..

      The smile on your face lets me know that you need me
      당신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당신에게 제가 필요하다는것을 알게 해줍니다.

      There's a truth in your eyes, saying you'll never leave me
      진실이 가득한 눈동자로 절대 날 떠나지 않겠노라 당신은 말합니다.

      A touch of your hand,says you'll catch me if ever I fall
      당신의 손을 잡으며 언젠가 내가 떨어지게 되는 날이오면 그때
      나의 손을 잡고 구원해줄 사람은 당신이라 저는 말합니다.

      Now, you say it best when you say nothing at all
      이제 당신은 침묵속에서도 최상의 말을 들려줍니다

      The smile on your face lets me know that you need me
      당신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당신에게 제가 필요하다는것을 알게 해줍니다.

      There's atruth in your eyes, saying you'll never leave me
      진실이 가득한 눈동자로 절대 날 떠나지 않겠노라 당신은 말합니다.

      A touch of your hand,says you'll catch me if ever I fall
      당신의 손을 잡으며 언젠가 내가 떨어지게 되는 날이오면 그때
      나의 손을 잡고 구원해줄 사람은 당신이라 저는 말합니다.

      Now, you say it best when you say nothing at all
      이제 당신은 침묵속에서도 최상의 말을 들려줍니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멜로디가 흐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약속  (0) 2015.03.16
      마음으로 노래하라!  (0) 2015.02.20
      뉴에이지(New Age) 음악이란...?  (0) 2014.11.16
      Evergreen(Susan Jacks)  (0) 2014.11.08
      시월의 마지막 밤  (0) 2014.11.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