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tle Finland는

언뜻 그 이름으로 보아서는

리틀 도쿄처럼, 미국에 있는 어느 핀란드 마을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Little Finland는

핀란드라는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Nevada의 Mojave Desert에 있는 황량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접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길찾기도 만만치 않아서 오지(奧地)만 찾아다니는

Hiking 매니아나 사진가들이 아니면 좀처럼 찾지않는 곳입니다.

 

Little Finland는

다른 하이킹 코스나 사진 스팟과는 달리,

일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에

Little Finland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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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Finland는

위치상으로는 Lake Mead의 북동쪽에,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의 3개주의 접경 지역인

Virgin Peak(8,075ft)의 남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Little Finland의 외형은

Valley of Fire와 비슷하지만,

Little Finland는 Valley of Fire보다

 

더 많은,

혹은 더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훨씬 더 날카롭고 독특한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Little Finland의 정식 명칭은 Devil's Fire인데

Hobgoblin's Playground(요귀들의 놀이터)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한인사회의 사진사들에게는

Little Finland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Little Finland가 어떠한 곳인지 한 번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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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Finland의 입구 언덕에서 바라 본 리틀 핀란드의 남서쪽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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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Finland의 북서쪽 전경입니다.

 

Little Finland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온갖 신기한 형상들이 포진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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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핀란드에 비가 내리면

이렇게 물이 고였다가 증발하면서 바위를 침식시키며 모양을 만듭니다.

 

여기에 바람이 불면서

풍화작용으로 말미암아 더욱 독특한 모양으로 바뀌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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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Devil's Fire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대부분의 색상이 붉은 색이며,

게다가 모양이 불붙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이 많습니다.

 

Hobgoblin's Playground 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또한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마치 요괴,

혹은 도깨비 모양처럼 보이는 그런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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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과 아래의 사진은

같은 모양을 위치만 달리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처럼 이곳은 같은 모양이지만 위치에 따라 모양과 색상이 달라지는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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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요괴가 또 다른 요괴위에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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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요괴(goblin)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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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의 hobgob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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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혀를 내민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괴물같아 보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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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룡이 엄마 등에 올라탄,

혹은 익룡이 날아가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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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역시 하늘을 나는 용가리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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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위를 기어가는 용, 혹은 도마뱀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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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이륙하려는 비행기, 혹은 땅을 박차고 도약하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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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휘날리며 돌진하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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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과 아래 사진은

같은 모양을 위치를 바꾸어 찍은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은

선인장의 위치가 왼쪽에,

아래 사진은 오른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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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Ancient Elephant,

혹은 Flying Dumbo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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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상(Flying Dumbo)을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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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저 사진사와 같이 아래쪽에서 위로 찍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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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모양이 됩니다.

이름하여 Flying Dumbo, 혹은 Ancient Eleph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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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도 도마뱀이 바위 위에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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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달린 괴물이 뭔가를 들이 받으려고 뿔을 내밀고 달려드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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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잘린 코뿔소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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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를 헤엄치는 영국 네스호의 괴물처럼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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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면

아치스 국립공원의 아치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약간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거대한 바위 언덕이

물과 풍화작용으로 말미암아

약한 부분부터 조금씩 깎여 나갑니다.

 

그러다가

강하고 단단한 부분만 혹 모양을 이루며 남게 되는데

 

그 혹 모양 가운데서 다시 약한 부분이

풍화작용으로 떨어져 나가면 위와같은 구멍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구멍이 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약하여서 풍화작용으로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이죠.

 

아치스의 대부분의 아치는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생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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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 아니 하늘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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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미국 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최고의 전문 가이드 주안(power21)

 

 

 
T.S.Nam - Blue Ballon Theme From Jeremy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 : 7]    


//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단 마귀가 가져다 주는것입니다.

  

당신은 확신하십니까? 

Steve Nicholes (http://www.wolkorea.org)

 

<요한복음 10:27~30>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빅토리아여왕이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예배에 참석해 영생이란 주제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다 들은 후 여왕은 누구든지 영생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예배당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도 누구든지 완전한 확신을 갖을 수 있는지를 알아낼 방법을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이 대화를 존 타운센드(John Townsend)가 듣게 되어 궁정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존 타운센드는 영국에서 많은 고아원들은 지은 죠지뮬러의 친한 친구입니다.

 

타운센드는 여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친애하는 빅토리아 여왕폐하, 미천한 제가 떨리는 손과 친애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서 준비하신 집에서 영원히 사는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위대하신 여왕께 요한복음 3장 16절 과 로마서 10장 9~10절 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하신일들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저의 서명을 여기다 남깁니다. 당신의 미천한 종, 존 타운센드"

 

2주후에, 존 타운센드는 여왕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됩니다.

"존 타운센드에게; 당신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심스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당신이 알려준 구절들을 읽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일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하신 '내가 가서 너희의 자리를 준비하겠다' 라고 하신 집에서 당신을 만날 거라 믿습니다.(서명)빅토리아 그웰프(Victoria Guelph) "


심지어 영국의 여왕도 구원의 확신이 가능하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제가 여러분의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릅니다. 당신은 문으로 와서 문을 열것입니다. 그러곤 "들어와..들어와도돼!"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당신은 문에 서서 계속 "들어와..들어와도돼!"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런 행동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에 무엇이 좋은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이라 되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문앞에 서서 "들어와..들어와도돼!"라고 외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어떨때에는 그들은 기도하고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과 생활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가서 좋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곤 다시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제 마음에 들어와주세요." 그런 후에는 그들은 계속해서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약간 바꾸어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문으로 오겠지만 이번엔 문은 잠겨있고 문이 잠겨진 집안에서 "들어와..들어와도돼!"라고 말합니다. 이런 행동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에 좋은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도 이와 역시 같습니다. 그들은 모임에 가고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이 기도하면 당신은 기독교인이 될것이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기도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릅니다. 그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에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기도합니다, "예수님, 들어오소서. 저의 마음으로 들어오소서."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는 척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할것입니다. 또 그들은 의로운 척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1.당신은 예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제 손안에 있는 동전이 '영생'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동전을 봉투에 넣습니다. 봉투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곤 동전을 넣은 봉투를 여러분께 줍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예수님(봉투)이 있습니다."


"맞습니다...다른건 없습니까? " "영생(동전)도 제게 있습니다.", "맞습니다.

[디도서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 하나님은 영생의 약속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마음에 와달라 부탁하십시오.


요한복음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중 한명이 될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할때 여러분 역시 영생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될것입니다.

 

2.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9절의 그의 손은 아버지의 손입니다.동전을 하나 집어 제 오른손에 놓을 것입니다. 저의 오른손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 들어오길 바랄때 여러분은 예수님 손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29절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손에 있다는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제 왼손은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제에게 영생(동전)이 있고 제가 예수님 손안에 있다면 저는 역시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 목사님이 하나님과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팔을 펴서 작지만 상처입은 새를 잡고 있는 손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물었습니다. "제가 손을 완전히 펼치면 어떻게 될까? " 신도들이 답합니다."그 새는 날아가려고 날개를 퍼득이겠지만 땅으로 떨어져 죽게될것입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그러면 제 손을 닫으면 어떻게 될까요? " 신도들이 답합니다. "그 새는 갇혀서 죽게 될것입니다. " 그러자 목사님은 미소를 지으시곤 말하셨습니다.

"친밀한 것이란 무엇을 감싸고 있는 손과 같습니다. 완전히 열린 상태도 아니며 또 완전히 닫힌 상태도 아닙니다. 그 곳은 성장할수 있는 장소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전능한 손은 경외해야하고 존경해야합니다. 그러나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손은 쉴 수 있는 곳이며 피난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안에서 안전함을 느낄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평안과 근심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됩니다.

 

하나남의 손 가운데에서 우리는 사랑과 친밀함과 성장과 평안의 장소에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누구도 짓누르시거나 버림받게 하지 않으십니다. 악마나 적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요한복음10:29).그의 존재안에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의 아들 벤쟈민은 최근 예수님이 그의 마음과 삶에 와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에게 "저는 제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면 저는 하나님의 주먹안에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주먹을 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싸우시고 당신을 보호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손안에 있을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3.당신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10:29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28절은 예수님이 주신 삶은 영생이라 했습니다. 영생이라면 얼마나 긴 걸까요? 영생의 끝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생은 영원하다란 의미입니다. 끝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삶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오른손을 여러분 앞으로 내어보이십시오. 엄지를 포함해 모두 5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히브리서13장 5절에는 5단어가 있습니다."나는 절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겠다(I will never leave you) ". 한 단어씩 말하면서 새끼 손가락부터 엄지손가락까지 손가락을 하나씩을 구부리십시오."예수님은 나를 절대 버리지 아니하신다(Jesus will never leave me)". 이번에는 '나를'이란 말대신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보십시오. "예수님은 Steve를 절대 버리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면 절대 버리시지 않으실거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시험 한 번 해보세요 엄청난 효과

 

1. 양파를 4등분(等分)하여 와인에 자박하게

잠기게 한다

 

2. 2~3일 상온(常溫)에서 두고 숙성시킨다


3. 양파를 건져내고 와인을냉장보관(冷藏保管)한다

 

4. (燒酒)소주 잔에 하루에

2 ~3 번정도 마신다

와인 한병에

중간(中間)크기의 양파 4-5개 정도(程度)

알맞습니다.

 

효과(效果)

당뇨병(糖尿病)의 혈당치(血糖値)

혈압(血壓)도 정상화(正常化) 된다

얼굴 화끈거림 갱년기(更年期 ),

수족냉증(手足冷症), 고혈압(高血壓)

정상(正常) .무릎통증해소 (痛症解消),

관절완치(關節完治).몸무게 10kg 감량(減量).

이명증 개선(耳鳴症 改善), 침침한 눈이 밝아짐.

비문증 (飛蚊症, 눈에서 모기가 날아다니는것

처럼 보이는 증상) 이 해소(解消)

변비(便秘), 소변통(小便痛), 두통(頭痛),

백발(白髮),주름살 감소(減少).

성기능(性機能) 회복 및 증강(增强).

 

 

이같이 거짓말 같은 사실(事實)이 일본(日本)

건강 잡지(健康 雜誌) 장쾌(壯快)

명예(名譽)를 걸고 수십 페이지의 체험(體驗)

사례(事例)를 소개(紹介)했다.

복용후(服用後) 갱년기(更年期),

뇌경색 호전(腦硬塞好轉), 생리(生理) 다시시작

우리나라에도 소개(紹介)되어

 

너무 좋은 자료(資料)이니 참고(參考)하세요

 

 

 

 

 

 

 

변승우 씨, 어쩌다 출교당한 이단 됐는가
2009년 10월 09일 (금) 07:52:28 정윤석 기자

금년 장로교단의 총회에서 가장 큰 이단문제 이슈는 변승우 목사의 이단성 규정 여부였다. 결과적으로 이번 총회에서 변승우 목사에 대해 ‘교리적 측면에서’ 가장 강도 높게 규정을 내린 교단은 예장 통합측(총회장 지용수 목사)이고, ‘행정적으로는’ 예장 백석측(총회장 유만석 목사, 구 합동정통)이 고강도 처분을 내렸다.  

   
▲ 변승우 목사를 제명출교시키기로 결정한 예장백석측(구 합동정통) 총회모습

통합측은 94회 총회에서 변 목사에 대해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라고 결의했다. 예장 합신(총회장 임석영 목사)은 “이단성이 심각하다”, 예장 합동(총회장 서정배 목사)은 “참석금지, 1년 더 연구”, 고신(총회장 윤희구 목사)은 “극히 불건전한 사상”이라며 작년에 이어 ‘참여금지’ 단체임을 재확인했다. 더욱이 예장 백석측은 교단 소속 목사였던 변승우 목사를 참여금지 대상으로 정하고 제명·출교까지 시켰다.

이번 규정으로 변 목사는 두 가지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게 됐다. 첫째, 변 목사는 5개 교단이 같은 해 열린 총회에서 일제히 이단 내지 그에 준하는 규정을 내린 최초의 목회자로 기록됐다. 둘째, 자신이 소속한 교단에서 이단성 문제로 제명·출교까지 된 최초의 인물도 변승우 목사가 됐다. 출교(黜敎)란 예장 백석측 총회헌법 ‘제 3편 권징-제 1장 총칙-제8조 책벌 및 내용’에 따르면 “불신자와 같이 인정하여 제명하고 교회에 출석을 금하는 것으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중범죄자나 이단에 가입하여 돌아오지 아니하는 자에게 과하는 벌”로 정의된다. 출교는 백석측 책벌 규정 중 가장 마지막 항에 해당한다.

변승우 목사는 왜 이토록 자신이 소속한 교단에서 제명·출교를 당하고 5개 교단에서 일제히 이단성 규정을 받게 된 걸까?

   
▲ 설교하는 변승우 목사(큰믿음교회 설교 동영상 캡쳐)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 출간 후 교계에 ‘구원관’ 논란 야기
변승우 목사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는 2004년 5월 출간한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은혜출판사)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신의 첫 번째 책을 통해 변 목사는 한국교계에 ‘구원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구원관에 혼란이 온다’며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본 사이트 <교회와신앙>(wwww.amennews.com)은 교계 최초로 변 목사와 관련한 논란을 2004년 12월 경 기사화했다.  

   
▲ 변승우 목사의 첫번째 저서 지옥에가는크리스천들

이 때 <교회와신앙>은 변 목사의 율법주의적 구원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설교를 하나 공개했다.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에서 설교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이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에도 일부 등장하는 변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마 5:20을 설교하며)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요?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잘 들으세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변승우 목사,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기독교의 근간인 ‘이신칭의’를 통째로 부정하는 듯한 변 목사의 설교다. 변 목사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관’이다. 이 설교에서 그는 분명히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의’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어야 하는 의’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교하고 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만 매우 편의적이고 편협한 인용일 뿐이다.

이런 변 목사의 위험성에 대해 <교회와신앙>은 지속적으로 교계에 알려왔다. 변 목사의 서적과 설교를 분석해서 그의 핵심 주장을 제목으로 한 기사 “바리새주의 정통교회가 가장 사악한 이단”(2008년 10월 28일자 기사) “새로운 계시의 일부는 초성경적인 것”(2008년 11월 13일자 기사) 등 10여 꼭지의 변 목사 관련 내용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월간 <현대종교>도 2005년 11월호에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논란’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현대종교>는 이 기사에서 △신도들의 ‘환상’을 통해 변 목사가 ‘우상화’되고 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이 구원관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월간 <교회와이단>은 2007년 9월, 교계 인터넷 신문 <뉴스파워>는 2009년 5월에 변승우 목사와 관련한 논란들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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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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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법칙을 아시나요! 사람들은 귀 때문에 망하는 사람보다 입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마라. 뒷말은 가장 나쁘다. 구시렁거리지 마라.
 
2.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들을수록 내편이 많아집니다.
3.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된다. 흥분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가 힘이 있다는건 아시죠.
4.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하라. 듣기 좋은 소리보다 마음에 남는 말을 하라.
5. 내가 “하고”싶은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을 해라. 하기 쉬운 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라.
6. 칭찬에 “발”이 달려있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있다. 나의 말은 반드시 전달된다. 허물은 덮고 칭찬은 자주 해라.
7. “뻔”한 이야기 보다 “펀”(fun)한 이야기를 해라. 디즈니만큼 재미있게 해라.
8. “혀”로만 말하지 말고 “눈”과 “표정”으로 해라.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힘이 있다.
9.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 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10. “혀”를 다스리는 것은 나지만 내 뱉어진 “말”이 나를 다스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책임을 져야한다. 소통은 귀로듣고 눈으로 말하는 것이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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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신학(종말론, 죽음)/ 박일민 교수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여기에는 성별이나 지위나 그 무엇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은 왜 죽는가 하는 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자기가 처한 시대나 종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설명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대부분이 성경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설명들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나 성도가 죽음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죽음의 정의 


최근 들어 괄목할 만한 현상 중에 하나는 의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다. 전에는 불치의 병으로 알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질병들이 지금은 손쉽게 정복되고 있다. 그 결과로 사람의 수명이 매우 길어졌다. 그 중에도 특히 놀라운 발전은 장기의 이식수술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장기 이식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죽음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에 직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심장의 활동(맥박), 또는 폐의 활동(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죽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장기 이식기술의 발전은 폐, 심장, 간과 같은 중요한 장기의 이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뇌사, 즉 뇌의 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죽음으로 인정하자는 요구를 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죽음 개념으로는 중요한 장기의 이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도 뇌사를 인정하자는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해 놓고 있다. 


그대로 두면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한 사람의 장기로 다른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하자고 하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뇌사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에 진행된 장기 기증운동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등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뇌사의 인정에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 반대 이유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제시된다. 


뇌사 판정기준에 대한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뇌사판정 기준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하바드 외과대학의 기준마저도 완벽하다고 보기가 어렵다. 더욱이 오판을 방지하기 위한 이중삼중의 장치를 마련한다고 해도, 사람의 판단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녀야 할 생명이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다. 즉 뇌사 판단의 결과로 장기 이식이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기이식을 위해 서둘러서 뇌사 판정을 내림으로써, 뇌사의 판단이 장기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 또는 보다 더 큰 유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생명 주관권을 침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사하실 수도 있는 기회를 말살시킨다. 


죽음은 폐 활동의 정지인가, 심장 활동의 정지인가, 뇌 활동의 정지인가. 성경은 죽음의 의미를 정지에서 찾지 않는다. 성경은 정지가 아닌, 분리를 죽음으로 이해한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끝이나 종결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죽음의 반대가 되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흙으로 빚은 육체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영혼과 결합되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결합의 상태가 분리되어, 육체는 왔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고 있다(전 12:7, 약 2:26). 


이러한 의미는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어야 할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는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엡 2:1). 그리고 천국의 영원한 행복의 상태에서 분리되어, 저주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다(계 2:11).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명 되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지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에서 분리되어지는 것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의 원인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씀한 것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히 9:27). 그러면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가 죽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언젠가는 죽게 될 유한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인가. 


성경은 창세기를 포함하여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창조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 만큼 불안전했다고 한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심히 좋아하셨다. 그러므로 죽음의 원인을 창조, 즉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은 무리이다. 


죽음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셨다. 아담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다. 그 결과로 아담은 죽음을 선고받았다. 그러므로 죽음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확인이 되어진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어짐,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했다. 그리고 야고보께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다. 


하나님과 언약에서의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아담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 5:15)이라고 했고,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왕노릇 하였은즉"(롬 5:17)이라고 말씀했다. 


죽음에 대하여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 


성경은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했다(전 7:2). 사람은 죽음을 대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나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들을 가져야 할까. 


첫째, 절망을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성도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고후 5:1).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러 가는 것이다(계 14:13). 눈물을 씻고 위로를 받으러 가는 것이다(계 21:4).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딤후 4:7).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때문에 절망을 하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라고 노래했다. 또 사도 바울께서는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는 사람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빌 1:21). 또 다른 곳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빌 1:23). 그래서 그는 죽음을 가리켜서,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라고까지 말씀했다(고후 5:8). 또 사도 요한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했다. 


둘째, 죽음의 원인 그리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성도들이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축복된 삶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히 복된 일이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축복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은 쏘는 것(고전 15:55), 또는 맨 나중에 멸망을 받을 원수라고 부를 만도 하다(고전 15:26).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대할 때, 죄가 죽음의 원인이었음을 생각하고, 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되돌아보고 회개의 기회를 삼아야 한다. 동시에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련된 구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또 죄의 결과로 영원한 죽음을 면하지 못할 사람들을 생각하고, 전도의 결심을 다져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생각은 항상 가져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대할 때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여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사람이 범한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의 수한(壽限)을 정하여 각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또 거두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사 38:5).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럴 만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은 그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과의 뜻과 섭리를 분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원망이나 불평이나 아쉬움이 생겨날 수 없다. 죽음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도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서로를 위로를 받아야 한다(살전 5:18). 그리고 오히려 감사를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사명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사람들은 살려두고 계시는 것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성사되지를 못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이루셔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다 완성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운명을 하셨다(요 19:30).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대할 때,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에게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남아 있는 사명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또 죽기 전에 그 사명을 완수해야겠다는 결심의 기회를 삼아야 한다. 


장례의 방식 


영혼이 떠난 육체는 단지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시신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그 육체는 영혼과 더불어서 생명체를 유지하던 몸이다. 영혼을 담았던 그릇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차 부활하게 되어질 육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신을 존중시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장례는 죽은 자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엄숙하게 치루어야 한다. 


장례는 어떠한 방식으로 행해지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례가 보통 매장(埋葬)이나 화장(火葬)의 방법으로 시행된다. 특수한 경우에는 수장(水葬)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민족들에게서는 초장(草葬), 조장(鳥葬), 풍장(風葬)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화장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화장을 하게 되면 부활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데서부터 나온 생각이다. 그러나 장례의 방법이 부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육체가 화장으로 공중에서 분해되는 것이나, 매장으로 땅 속에서 분해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장례는 어떤 방식이든 형편에 따라서 엄숙하게 행하면 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부득이 한 방법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 특별한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화장을 해야 한다. 또 장기간의 항해 중에 사망한 사람은 수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이 다 가능한 상황이라면, 매장을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장은 죽음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육체를 영혼과 분리되게 하여, 그 왔던 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매장이다. 성경에서는 매장이 일반적인 장례방법으로 등장한다. 성경에 화장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간과 사울 왕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뤄졌다(수 7:25,26; 삼상 31:10-13). 그러나 이들의 장례는 정상적인 장례가 아니었다. 아간은 저주의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다. 사울 왕은 전시 상황 때문에 부득이하게 화장을 했었다. 


한편, 기독교 역사를 보면 화장은 종종 부활을 반대하는 의도로 시행되어 왔다. 기독교룰 핍박하던 자들은 부활을 부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방 종교에서 행하던 화장 방법을 따르도록 강요를 했었다. 따라서 화장을 따르면, 부활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매장 방식은 여러 가지 고려되어질 요소가 없지 않다. 매장지의 부족으로 토지 이용에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장방식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필요 이상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지나친 치장으로 사치를 조장하는 일도 금지되어야 한다. 특히 그릇된 성묘 방식을 유발하여, 우상숭배의 위험에 말려들게 해서는 안 된다. 


추도 예배 


예배는 형식이나 장소나 조건과 관계없이 어느 경우에나 가능하다. 탄생을 감사해서 예배할 수 있다. 생일을 맞이해서 예배할 수 있다. 승진을 감사해서 예배할 수 있다. 질병과 고통 중에도 예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과 관련하여 예배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장례 예배나 추도 예배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예배는 어떠한 경우이든 조건과 관계없이,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 사람이나 사람의 업적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졸업이나 개업 등 예배의 조건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추도 예배는 죽음을 계기로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사망한 사람을 위한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한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추도 예배는 자칫하면, 이미 죽은 사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를 피하기 위한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나라의 전통 제사에서 하는 것처럼, 사진이나 음식을 진설하고 예배를 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오직 죽은 자가 가졌던 그 믿음으로, 그가 믿었던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가 마친 후에, 그가 걸어갔던 믿음의 발자취, 또는 그가 남겨 놓은 업적들을 되새겨 보는 일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추도 예배가 전통적인 제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여 우상숭배에 흐를 위험이 많다면, 탄생일을 기념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자살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으려는 자들이 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해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죄의식을 이겨내지 못해서, 살길이 막막하여서 등 그 이유도 매우 다양하다. 근래에 들어서는 자살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 또 그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종종 교회의 상당한 직분자들 중에서도 자살을 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떤 사이비 단체에서는 그릇된 사상 때문에, 집단 자살을 하여 충격을 주는 일도 있다. 


그러나 자살은 어느 경우이든 옳지 못하다. 자살은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손상을 입히거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 것은 분명히 죄이다. 자살은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하는 죄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시고, 고통을 면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험을 주시되 감당할 만큼 주시고, 피할 길을 겸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비하심을 부인하는 죄이다. 


또 자살은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믿음은 행함을 수반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는 자답게 모든 여건들을 용감히 헤쳐나가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자살은 가장 용감한 사람의 행위 같아 보이나, 사실은 가장 비겁한 행위이다. 죽음의 유혹까지라도 이겨낼 만한 믿음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의 위대한 무기이다. 믿음은 자살을 유혹하는 모든 조건들을 극복해낼 수 있게 해준다. 믿음은 태산이라도 저 바다에 옮겨 놓게 할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9:23). 


죽음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온다. 죽음은 죄의 삯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는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따라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것이 없다. 오히려 소망 중에 감사하고,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삼아야 한다. 성도는 스스로 생명을 헤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유혹과 사망의 쏘는 것을 이겨야 한다 



-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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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C.H.매킨토시


3.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회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또 어느 정도 무엇이 참 회심이 아니라는 것도 지적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회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확실한 가르침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다 못하지 않고, 보다 틀리지 않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는데 전혀 회심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에 대해 몹시 염려되는 바다. 소위 회심했다고 하는 많은 간증이 나오고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적합 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믿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단순히 무감각한 청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움직임은 없고, 양심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실제적 활동도 없고, 세상과 함께 철저한 부서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 감정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 들고, 또는 어느 복음 전도자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면서도 자아(self)는 판단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집착은 계속 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의는 없고, 또한 신약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특성을 지닌 그런 진짜 회심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심하는 그런 회심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천박한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시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혜로운 복음 전도 사업에 몰두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밝은 빛으로 그 문제를 상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아마도 우리의 복음 사역에 많은 인간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능력과 효율성 자체를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데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할애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좋은 결과를 보려는 욕심에서 많은 회심자들의 일시적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을 회심으로 인정해 주고, 공중 앞에서 공포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열의가 위축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들의 열심을 더 강렬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남모르게 더 열심을 간구할 것이며, 공중 앞에서는 청중들에게 더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이 와야 함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바른 자세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바른 자세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사하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아를 비운 마음으로 의뢰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골방에서나 공중 앞에서나 회심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보다 똑바른 마음으로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황금 같은 알곡과 잘 익은 열매가 열릴 것이다. 그럴 때 진짜 회심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회심은 그 회심 자체가 증거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회심자와 함께 회심의 신용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은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음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회심한 경우를 일일이 세고, 우리들의 사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만심과 자기 만족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귀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하는 마음 자세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설교자로 또는 대단한 복음 전도자로 땅 끝까지 드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자세인가!

 

진실로 영의 인격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의 사역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맡길 때 복음 사역의 위엄과 실제적 효과와 중요성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에서는 행복과 영적 평안함과 실제적 효과는 점점 증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되고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살전 1:1-3) 


이것은 참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확실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증거로 알게 된 것이다. 즉 한 성도가 택함을 입었을 때, 알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축복 받은 사도는 그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해설자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으로 살았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설교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하고 수고했다. 그는 사랑스럽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나,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나, 다른 지역에서의 기적 행함에 대해서 전혀 과장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랑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난체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헌신하는 사역자였다. 그러한 그의 생활 자체가 회심의 일을 했고, 그의 전 생활이, 그의 영이, 그의 생활 모습이, 그의 태도가, 그의 생활 습관이 그의 설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사역자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박한 사역이 사역자의 천박성의 결과임을 바울의 생활 태도로 믿게 된다.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성령의 드러남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충만한 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설교에는 혹 이런 생활의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유창한 언어구사가 많을 수 있다. 소위 재치라는 것도 많이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귀를 즐기고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으로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오! 거룩한 기름부음은 어디 있으며, 살아 있는 열의와 깊은 진지함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일상 생활과 습관이 산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주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의 사역을 되살아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회심의 일이 사역자에게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괴기한 생각은 멀리멀리 안녕이다! 그런 일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은 사역의 모든 부분과 매 경우마다 항상 바르게 붙들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보통 어떤 도구를 사용하실까? 우리 사역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주님의 마음에 드는"것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비고,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는 자신을 비웠는가? 우리의 손은 깨끗한가? 우리의 교제, 우리의 방법, 우리의 환경은 깨끗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주께서 그의 거룩한 봉사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은혜 받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하사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보다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계속 진행하자. 그 전체의 내용은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한편에는 사역자의 특성이요, 다른 한편에는 사역 자체의 특성인데, 그 특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6-9) 


이것이야말로 참 사역이다. 그 사역은 그 자체에 신임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것이나 불만족이 전혀 없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도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주님의 인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분명함을 줄 수 있는 확고함이 있다. 회심의 역사는 행해졌고, 그 회심의 결과는 기쁨 충만함으로 뒤따랐다. 그 증거는 더 멀리 더 넓게 펴져 갔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심자의 수를 세어 드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었는데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고, 그 사역에 또 다른 말을 더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설교한 것 뿐이다. 거기에는 헛됨도 없고, 그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 할 수조차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설교 내용을 믿고, 그 내용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적 진리의 유창한 언어구사가 아니었다. 어떤 틀에 박힌 열매 없는 교리 강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퍼부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깊숙이 느끼는 그러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슴에 와 닿은 모든 것을 수령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참 열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흥분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들뜸도 아니고,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요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행 17:1-2) 

 

귀하고 능력 있는 강론이었다. 하나님께 구하노니 우리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한 역사가 있기를 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 


이 얼마나 단순한가! 성경으로 예수를 설교했다. 그렇다 여기에 위대한 바울의 설교의 비밀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신 인격자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로 설교했다.

 

이 설교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심자들의 생활 속에서 산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틀에 박힌 설교가 아니고, 종교 대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설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착한책과 사람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
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인간극장 휴먼시네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행복한 눈물 (Happy Tears)

http://youtu.be/sDxVix7JieM?list=PL1XAdPlOLH2hN2ejbjC2XIy5KZSpSvL6U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http://youtu.be/_aWecTKRC2Q?list=PL1XAdPlOLH2hN2ejbjC2XIy5KZSpSvL6U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김광석


아무도 없었습니다.



(2)
그런 믿음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잔디 위에 앉히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도 못 하는 무리들,
자신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앉히고
그리고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원대로 나누어주십니다. 달라는대로, 먹고 싶은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어떻게 나누어 주셨을까요?
떡과 물고기를 한 사람에게 주고 나면 똑같은 떡과 물고기가 또 생기고 또 생기고.... 그랬을까요?
떡과 물고기가 뻥튀기처럼 뭉실뭉실 커지고 부풀어나고 늘었을까요?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복음서 어디에도 그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건 궁금해 하지 마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하다면 왜 안 적었겠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11절을 보면 축사하시고, 감사기도, 축복기도 하시고 나누어 주셨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디아도켄, NIV영어성경을 보면 distributed, 나누어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4장 19절을 보면 좀 다릅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답니다.
떼어, broke, 부수어, 뜯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떼어내고, 잘라내고, 부수어내어 나누어 주어도 끝없이 남아있는 떡과 물고기...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제자들에게 열 두 광주리가 가득하게 남은 떡과 물고기....

떼어서 나누는 것은 성찬식입니다.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떼어서, 그 생명을 나누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
천주교는 성찬식할 때 보면 신도가 무릎을 살짝 꿇고 앉으면 사제가 동그란 조각을 입에 넣어 주지요.
루터교회의 성찬식도 비슷합니다.
많은 교회들도 그릇에다 조그많고 납작한 빵 조각들을 담아서 한 개씩 집어들도록 하며 성찬식을 합니다만,  
저는 한 개의 큰 빵이나 떡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떡을 떼면서 “내가 지금 주님의 몸을 내 손으로 떼어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이것이 내 피라 하셨습니다.
떡은 떼고, 포도주는 잔에 담아 주셨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14:19)
마태복음14장 19절을 보면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떡을 떼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떠어져서 제자들의 손에 나누어졌을 때 그것은 배고픈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광주리 가득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원대로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살리고도 남는 그리스도의 참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예한 그들은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실컷 배부르게 먹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붙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토록 풍성한 성찬식을 베푸신 다음 혼자 쓸쓸히 산으로 피하시는 주님......
그 무리 중에도, 제자 중에도, 아무도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산으로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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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 진리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할 때 그 톤을 낮추거나 공적 예배에서 성경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찌르는 양날 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화의 방편으로부터 마음 문을 닫는 셈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부드럽게 만들려 하거나 불신자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딱딱한 진실을 그들에게서 감추려 하면, 교회는 연약해지고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역이 방해를 받으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에 엄중한 지적을 받을 것이다. -존 맥아더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중에서-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조각 퍼즐처럼 말씀을 나누는 것은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조금 미련할 정도로 주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밀어 넣은 말씀이 훈련을 통해 언제라도 용수철처럼 내 삶속에 베어나 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사는 삶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수술대에 올려놓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닮기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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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하나님 / 아더 핑크

 

성경은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정신을 높여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고에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개념들을 제공해 주셨을 뿐 아니라, 사용한 그 말을 받아쓰게 하셨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내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구두 영감설을 부정하는 그 어떤 인간적인 이론도 사탄의 간계이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공격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성경의 모든 장에 각인되어 있다. 그처럼 거룩하고, 천상적이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인간에 의해 고안되었을 리 만무하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해 알려 준다. 이것은 아주 진부한 말이 될 수도 있으나, 특별히 오늘날에는 그런 말이 필요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고 믿는 ‘하나님’(God)이 점차 이교도들이 고백하는 ‘신’(god)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스포츠가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 쾌락에 대한 지나친 탐닉, 가정생활의 파괴 등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었던 것과 동일한 여러 질병들의 증상이다.

 

명목상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오늘날의 ‘하나님 개념’은 급속하게 고대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모습과는 아주 다르게, 인간의 어떤 지적인 능력으로도 고안해낼 수 없는 속성들을 갖고 계시고 완전함을 옷 입고 계신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게시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 실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을 떠나서는 그분에 대한 그 어떤 이론적 인식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1)라는 말씀은 여전히 진리다. 성경이 무시되는 곳에서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이 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지적으로 알기 위해 성경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분을 실제적이고, 인격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방식으로 아는 것이다. 불행히도 오늘날 이것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공부를 통해서 - 과학 교서를 떼면 과학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지식만 따진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만, 즉 자연 현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방식으로만 알려질 수 있다. 다시 말해, 각 심령에 대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오직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지각 능력을 통해만 알려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을 갖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물은 스스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인은 자연을 초월하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참 하나님’을 알기 전에 반드시 영생이 주어야져 한다. 이것은 요한일서 5장 20절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어떤 이해, 즉 새로운 피조물에 의한 영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초저연적인 지식은 초자연인 체험을 낳는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은 대부분 ‘옛 아담’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런 신앙생활은 부패한 것들로 가득 찬 무덤을 뒤덮은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신앙생활은 외적 ‘형식’에 불과하다. 건전한 신조가 있는 곳에서조차 그런 신앙생활은 너무나 자주 생명력 없는 정통에 불과하다.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정통주의자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재해 있었고, 율법이 해석되고 있었고, 여호와께 대한 예배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 7:28).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아버지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 8:54-55).

 

이 말씀이 성경을 소유하고, 열심히 탐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경하던 사람들에게 퍼부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들은 하나님이 이론적으로는 잘 알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은 갖지 못했다.

 

기독교계의 상황도 유대인 세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 혹은 영적 지식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어떻게 우리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다.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면 그 샘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지식은 초자연적 체험을 낳고, 초자연적 체험은 초자연적 열매를 맺는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변혁과 혁명을 가져오신다. 그래서 자연적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즉 자연과 정반대되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일은 현재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자들 중 약 95%정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상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외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참으로 그는 은혜로 인한 기적의 존재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운 피조물”(고후 5:17)이다. 그의 체험과 삶은 초자연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인 체험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된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또한, 그와 반대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한다.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체험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이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는 일은 결코 없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활기를 띠신다. 말씀으로 인해 성령은 죄에 대한 가책을 일으키신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확신을 주신다. 말씀을 통해 성령은 성도를 자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읽기와 공부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효과를 통해서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유익을 얻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사후세계 / 박일민 교수


사람들은 대부분 사후세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도 과연 존재를 하는 것인가.
또 존재를 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것인가 하는 등의 질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 경험을 해보지 못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영혼 불멸과 중간기라는 주제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영혼 불멸

1) 영혼 불멸의 개념

사도 바울께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했다(딤전 6:16).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히 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피조물을 가리켜서도 죽지 않는다고 한 말씀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한 말씀이나(요 3:16),
마귀와 거짓 선지자와 악인들이 세세토록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고
한 말씀이 그러하다(계 20:10). 그러므로 영생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가 없다.

영생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사용될 때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믿는 자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축복된 상태를 누리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귀와 악인들의 경우에는, 죽지 않고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과 악인의 영생에는 그 내용에서 서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악인들의 경우는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인의 영혼이든 악인의 영혼이든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복되거나 저주스러운 상태와는 상관없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만큼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영생이라고 하기 보다 영혼 불멸이라고
부른다. 그래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생과 구분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2) 영혼 불멸의 증거

사람들은 구체적인  증거를 좋아한다. 그래서 영혼이 불멸함에 대해서도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혼이 불멸함을 애써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 속에서 영혼이 불멸함에 대한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죽음을 가리켜서, 흔히 열조에게 돌아간다고 표현한다(창 15:15 등).
이 표현은 조상들의 영혼이 불멸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에녹의 승천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했기 때문이다(히 11:5).

욥은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했다(욥 19:26).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혼의 불멸을 전제로 한 말이다. 다윗도 같은 의미에서 말하기를,
"나의 의로운 중에 주를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다(시 17:15).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던 아들이 죽었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했다(삼하 12:23).
솔로몬 역시 같은 의미에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시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말했다(전 12:7).

예수님께서는 영혼이 불멸함을 전제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0:28).
사도 바울께서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고후 5:1),
만일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만다고 했다(고전 15:19).

솔로몬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전 3:11).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사람의 모든 본능적 욕구들은 각각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식욕은 음식물을 대상으로 가진다.
부귀욕은 재물을 대상으로 가진다. 명예욕은 지위를 대상으로 가진다.
따라서 영원을 사모하는 욕망도 그 대상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영혼이 불멸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던 방송 프로 중에 "전설의 고향"이 있다.
전설의 고향은 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한국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줄거리나 형식은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더운 지방에 사는 아프리카 사람, 추운 지방의 에스키모, 서양의 아메리칸 인디안,
동양의 이집트나 인도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육체를 떠난 영혼의 활동에 대한 생각이 모든 민족에게서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영혼의 불멸이 분명한 사실임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영혼이 불멸함은 천사가 죽지 않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눅 20:36). 천사는 육체가 없다.
그러나 천사는 사람과 동일한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동일한 사람의 영혼도 역시 불멸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영혼이 지닌 특성도 역시 영혼이 불멸함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공간을 차지하는 않는 불가분적(不可分的)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분적이라는 말은 불변함, 즉 불멸함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2. 중간기

예수님께서는 장차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의 재림은 최후의 심판을 위함이다.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서, 의인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 반면에 악인은 지옥에 던져진다.
그런데 영혼이 불멸한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영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가.

우리는 한 개인의 죽음에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중간기(中間期)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중간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만일 중간기가 있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하는 것과, 그곳에서는 어떠한 상태로 지내게 될까 하는 것이다.

1) 중간기의 장소

기독교 초기의 성도들은 중간기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사말도 "마라나타(주께서 임하시니라)"라고 했다.
그러나 임박하게 여기던 주님의 재림 소식은 없고,
주변에서는 많은 핍박들과 다른 이유들로 죽는 자들이 늘어갔다.
그리하여 점차 중간기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죽어서 곧 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잘 믿는 소수의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이후에 다시 한 번 고통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고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러한 생각들은 마침내 중세에 이르러, 천국과 지옥 이외에 연옥이나 림보와 같은 곳이 있다는
교리를 낳게 했다.

중세의 로마 교회는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례는 세례를 받지 이전에 범한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가급적 시간을 늦추어서 임종 직전에 가서야 세례를 받으려 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중한 죄를 범하게 되면, 세례의 효력을 상실하고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마침내 죽은 영혼이 가게 될 중간기의 장소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세의 로마 교회가 말한 중간기의 장소들은 다음과 같다.
세례를 받고, 객관적인 공로를 가진 사람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과 중한 죄를 범하여 세례의 효력을 상실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들어간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지만, 객관적인 공로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연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세례를 받지는 못했으나, 구약시대에 살았던 성도의 영혼과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에
죽은 아이들의 영혼은 림보에 들어간다.
이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연옥과 림보라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1) 연옥이란 어떤 곳인가

중세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연옥이란 많은 고통 속에서 정화와 연단을 받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 정화와 연단의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기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나 제사 또는 성행으로 단축되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중세 교회의 가르침은 외경 마카비 2서 12:38-45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마카비서는 영감된 권?㎏? 가진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임할만한 근거로 이용되어 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구절들 자체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신임을 할 수
없게 한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사람의 죄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용서받아진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된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졌던 자기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만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성경의 교훈과도 상충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연옥 사상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부패한 교회로 하여금 면죄부를 팔게 하는 구실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연옥을 사단의 고안물이라고 맹렬히 비난을 했다.

(2) 림보란 어떤 곳인가

림보(Limbus)는 라틴어로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슥 9:11에 나오는 "물 없는 구덩이"를 지옥주위에 있는 지하 동굴이라고 생각하여서
사용하게 된 용어이다.
중세 로마교회는 림보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세례를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Limbus Patrum, 선조림보), 세례는 못 받았으나 자범죄가 없이 죽은 어린아이들(Limbus Infantum,
유아림보)의 영혼을 위한 중간기의 장소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벧전 3:18-20과 요한 3:5이 그 근거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내용은 림보와 거리가 멀다.
벧전 3:18-20은 예수님께서 노아의 입을 통해서 노아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던 사실과,
그들이 그 복음을 듣지 않다가 지옥에 던져진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요 3:5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그래서 죄 사함을 받은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원은 결코 세례의식이나 사람의 공로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안에는 낙원과 음부를 중간기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의 영혼은 죽어서 낙원으로 가고, 악인의 영혼은 죽어서 음부로 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최후심판이 있은 이후에는 각각 천국과 지옥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한다.

(3) 낙원이란 어떤 곳인가

예수님께서는 한편 십자가에 달려 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그러므로 그 강도는 낙원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그 낙원은 어디일까. 예수님께서는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하시고 운명하셨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운명을 하신 후에 가신 곳을 알게 되면,
낙원이 어떤 곳인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켜서,
흠 없는 어린양이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 9:12).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단번에,
즉 운명과 동시에 즉시로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성소는 하늘의 지성소, 곧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이었다.
그러므로 그 강도가 간 낙원은 바로 천국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낙원은 다름 아닌 천국의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된 말이다.
눅 16:26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도 역시 천국의 동의어에 해당된다.

(4) 음부란 어떤 곳인가

성경에는 음부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음부는 악인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시 9:17).
그러나 의인도 가는 곳이라고도 했다(창 42:38).
음부는 아무런 의식이 없는 곳이라고 했다(전 9:10).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장소라고 했다(눅 16:23).
이것은 음부의 의미가 항상 동일하지가 않음을 의미한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특별한 구분이 없이 모두 음부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음부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죽음 또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무덤을 의미한다.
세째는 지옥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이나 무덤은 죽은 영혼이 가는 곳이 아니다. 죽은 영혼이 가는 곳은 지옥뿐이다.
따라서 중간기적인 의미의 음부는 지옥과 동일하다.
음부를 죽은 악인의 영혼이 가는 중간기 장소로 보는 것은 음부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야 함을 무시함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중간기 장소로
천국과 지옥 이외의 별개의 장소가 따로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인의 영혼은 즉시로 천국에 간다. 악인의 영혼은 즉시로 지옥에 간다.
중간기 천국과 지옥은 육체가 없다는 점 이외에는,
최후 상태의 천국이나 지옥과 다를 것이 없다.

2) 중간기의 상태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죽는 것을 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무의식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죽은 사람의 육체 상태가 자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는 사람들이 깨어나게 되는 것처럼, 죽은 사람도 장차 부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영혼은 자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서 이 땅에 있었을 때와
동일하게 육체를 떠난 이후에도 의식적인 활동을 계속한다.

죽어 육체를 떠난 이후에도 영혼은 지적인 활동을 한다.
그래서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지던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이나 나사로도 알아본다.
또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기쁨과 위로로 받기도 하고,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적인 활동에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차이가 있다.
남보다 더 많이 맞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남보다 더 큰상을 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태는 고정이 되어 있어서 변경되는 일이 없다.
기쁨이 고통으로 변하는 일은 없다. 반대로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는 일도 없다.
또 그 가운데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고 가지도 못한다(눅 16:26).

사람의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면,
그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을 수도 있는가.
그래서 필요하다면, 이 세상에 다시 올 수도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招魂)도 가능할 수 있는가.

우리 주변에는 제사에나 꿈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심령 과학회와 같은 단체도 있다.
때로는 성경에서 그 실예를 찾아보려는 사람도 있다.
곤경에 처한 사울 왕이 엔돌에 살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낸 후, 예언을 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삼상 28:3-25).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마귀의 간교한 술책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온 것이다.

성경은 죽은 영혼이 이 세상에서 다시 올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욥은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했다(욥 7:9, 10).
그리고 다윗은 죽은 아들과 관련하여 이르기를,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했다(삼하 12:23).
또한 성경은 초혼을 엄히 금지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서 용납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신18:11).
뿐만 아니라, 신접하는 자는 반드시 물로 쳐죽이라고까지 하셨다(레 20:27).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체가 한 번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의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상태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 달라지는 일이 없다.
그 상태는 이 땅에 살아있는 잠시 동안의 삶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러기에 현재의 삶은 너무나도 값지고 중요하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1월호)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이유를 제대로 찾게 해주라 공부 안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해.. 라고 말하면 소용없다. 공부를 안했을 때 어떻게 네가 고생할지를 강력한 것을 찾아서 반복해주면 된다. 만일 효과가 없다면 이유를 제대로 못 찾은 것이다. 게임을 끊고 싶다면 게임의 나쁜 점을 많이 찾아 붙여놓으면 된다. 시간이 낭비된다. 가까운 것 만 잘 보이고 먼 것은 안 보인다. 머리가 지쳐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등등... 그리고 이유를 찾았으면 많이 반복하면 된다. 전도하라고 강요하는 것 보다는 전도했을 때 어떤 상이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해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애드민 목사의 ‘하늘의 로또’에서- 게임 잘하는 아이들은 항상 반복합니다. 잠깐만 쉬는 시간에도 합니다. 자다가 일어나서도 합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합니다. 하늘의 로또는 어떻게 캡니까? 말씀을 읽고 듣는데서 나옵니다. 동기부여가 됩니다. 자기 하는 일에 스스로 미쳐서 반복하는 자녀를 원하십니까? 왜 배워야 하는지 왜 전도해야 하는지 이유를 제대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면 스스로 반복하고 열심히 매달리게 됩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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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에게서만 남도 쪽에 있는 섬들 중에 거의 다가 기독교인인 섬들이 있다. 이곳은 섬사람 80% 이상이 교회에 다닌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니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제자훈련이 안되고, 성경공부가 안되고... 그 어떤 새로운 시도가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 좋은 것 같지만 답답하다....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대로가 좋다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있는 경우도 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뜨거운 마음이, 심장이 식어 있다는 것이다. 심장이 식어 있는데 어찌 건강체를 이룰 수 있겠는가? 늘 뜨겁게 요동치는 심장을 가져야 진정한 그리스도인 아닌가? -이주호 목사의 ‘죽음보다 무서운 것’에서- 중세 기독교가 부패해 가기 시작한 원인도 국교가 되었으니 전도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뜨거운 마음이, 심장이 식어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중세 기독교는 온 몸이 냉해지고 곳곳에 암이 생기고 결국 온 몸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개인도 살아 있는 신앙인이라면, 온 몸에 복음의 열정이 흐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뜨거운 마음,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은혜의 동력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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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교리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편51:10)

 

제가 볼 때 사람이 천성적으로 중생의 교리에 반대하는 것만큼 이상한 일은 없습니다. 또 거듭남과 중생의 교리에 반대하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깊이를 잘 보여 주는 일은 없다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신약성경을 읽어 보면 그 당시 사람들도 이 교리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요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도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중생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주님을 싫어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의 깊이를 폭로하시고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그를 오해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때도 중생의 교리를 싫어했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

존 웨슬리도 참으로 회심한 후에 옥스퍼드 대학으로 돌아가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다가 미움을 받았습니다. 옥스퍼드의 존경받던 종교 인사들은 이 교리가 싫어서 웨슬리가 대학에서 계속 설교하는 것을 금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사람,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중생과 거듭남이라는 크고 놀라운 성경의 교리를 반대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나 인간의 형제 됨 같은 주제에 대한 강연이나 설교를 들을 때에는 전혀 반박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삶을 살라는 권면을 들을 때에도 이견을 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합니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책망조차 전적으로 옳고 지당한 말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육에 속한 사람들 앞에 서서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면 "대체 이게 무슨 괴상한 교리야?"라고 반문합니다.

>>>>>>>>>>>>>>>날마다 읽는 마틴 로이드 존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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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연가(戀歌) /최송연

    기다림이란 이런 걸까 바람이 너무 세차게 느껴지네 한여름 동안 청청함을 자랑하던 저 활엽수 불어치는 찬바람에 누렇게 변하더니 이제 그 바람 부는 대로 쓸려가누나 겨울밤은 이렇게 점점 깊어가고 바람 더욱 거세어지나 임 그리는 내 마음은 늘 푸른 송죽향이네...


    ** 단어 해석 도우미:

    시험과 환난을 견디지 못해

    변질하는 성도(활엽수)와

    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성도의 절개는

    송죽향임을 노래한 것임**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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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정준모

 

 

1.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칼빈의 신학과 삶의 핵심 주제며 교리이다. 그의 여러 문헌과 작품 속에서, 칼빈은 다각적인 측면에서 경건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경건은 칼빈 신학의 하나의 공통된 주제라기보다는 그의 신학 전반의 방향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총체와 구원 지식에 필요한 핵심 교리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읽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에 대해 언급한 후 칼빈은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다. 참 종교를 결정짓는 것은 경건이다. 칼빈은 경건을 외형적인 모습에 나타난 어떤 형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진실한 경건, 참된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만큼 그분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의 의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거역이 죽음보다 더 악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나 경건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을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칼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들을 통해 종교가 발생되고 이런 능력들이 경건에 대한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경외라고 부른다.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스며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경건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는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다스리시고 양육하시는 우리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회개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인 경건은 거룩함 속에서 평생 성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맺게 되는 열매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경건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모든 인간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전 삶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계명에 대한 논의에서도 칼빈은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사랑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경건은 교회에 관한 정황 속에서 순수한 교리로부터 얻게 되는 믿음 있는 삶을 내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생각한다. 결국 칼빈은 이 개념을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로 이해하면서도, 단지 경건의 교리만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보여주었다.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어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며, 경건이 완성된 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경건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보았고 경건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경건은 사랑, 경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경배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3.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자유의지
 
인간 본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며 염세적인 견해를 가진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처절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관하여 그 어느 개혁자들보다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였지만, 『신앙교육서』에서는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영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은 죄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타고난 능력들을 박탈당하였으며, 단지 영혼이 결여된 육체만을 음미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손상되어 부패해 버린 신체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눈을 돌리든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럽고,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에 관하여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여전히 인간의 부패로 잔존하는 모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추할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 영혼의 모든 능력은 죄로 점유되었고 저급한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가증한 불경건이 인간 이성의 아성을 점령해 버렸으며, 교만이 그 마음의 은밀한 장소까지 침투해 들어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전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범죄를 저질렀으며 모든 인류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죄의 독성에 빠져서 오직 죄의 열매만을 맺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맨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거울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영했을 것이지만, 죄로 지워져 버린 이 형상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회복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보다 이 두 번째 창조 즉,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풍성하고 강력하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여지를 갖게 된다고 칼빈은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칼빈의 사상은 성경적이며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죄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기 전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어두운 색채로 죄악의 실체를 묘사하는 칼빈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을 첨가시켜서 자유 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유 의지에 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갖게 된다. 타락된 상태의 관점에서 자유 의지를 바라본 칼빈은 “육체에 속한 인간은 전 영혼이 한결같이 죄 속에 거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를 모두 갖는다고 말한다. 칼빈 자신은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거나 간단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근본 입장은 명확하다. 원래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던 인간은 바람직한 구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기만 했다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아담은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자기가 넘어지는 것을 알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버렸던 것은 처음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부인함으로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결정론에 빠질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노예 의지를 부인함으로 운명론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예의지를 모두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칼빈은 인간에 관한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모두 거부한 반면, 그는 분명코 한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른 한 측면에서는 노예의지를 인정하였다.

 
4. 십계명과 삶
 
칼빈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따르지 않고, 사도 바울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율법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삶을 정확히 측정할 목적으로 당신이 친히 부여하신 규정 혹은 표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참된 의로움과 인생의 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은 죄인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칼빈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에게는 무익하다고 본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우리를 지속적으로 훈육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악을 버리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권고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점에서 그 유익성을 찾는다. 율법은 우리가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며,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이런 통제는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이미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에 사역하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칼빈은 십계명을 아는 사람이 온전하게 성경을 안다고 하였다. 칼빈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이해를 가진다. 우선 하나님은 영적인 율법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이해되고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십계명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심장, 영혼, 생명, 목적, 마침, 그리고 성취라고 하면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진술한다. 따라서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부가적으로 율법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모세의 마지막 네 권의 책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강력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은 십계명을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의 근거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기시키셨는데,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의 주인이심을 밝히면서 그 자유를 누리는 길이 계명에 대한 순종임을 언급하며 율법과 자유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는 바이다. 그 점에 있어서 칼빈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도록 훈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우리의 판단은 점점 흐려지기 쉽다.
 
특히 어렵고 명확하지 않은 윤리적 결정들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율법의 개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기에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사항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취하여 작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형상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우리가 아들로서 입양되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의 정신, 생명, 목표, 그리고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율법은 모든 부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참으로 율법의 모든 교리, 명령, 약속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본질이시며 완성이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토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보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받을 모델과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자유
 
칼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자유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자유이며,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자유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곧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그분이 부여하신 은혜의 결과로 우리는 회개와 중생의 삶을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칭의는 전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이다. 칼빈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인으로 선언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의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무엇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명저인『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칭의 교리를 정립하려고 시도하는 칼빈은 기독론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칭의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파생된다고 보았던 칼빈의 사상은 그의 율법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칭의와 자유의 관계를 오랫동안 생각하였던 칼빈은 양심이 칭의에 의하여 죄책에서 자유롭게 될 때에, 칭의의 중심적 의미는 분명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진정한 경건에 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믿음의 중요한 행동인 기도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롭다. 칼빈은 그 근거를 바울의 율법 폐지에 대한 언급에서 찾는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그것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그 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과 그 요구들로 말미암은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폐지된 것은 율법의 규칙이 아니라 절대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를 통하여 얻게 된 자유에 반대하는 요소이다. 이제 믿는 자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양심의 끝없는 속박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양심의 자유’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오랫동안 속박시켰던 율법에 복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요구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고 있었던 그 속박은 벗어졌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하며 그 자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율법 아래뿐만 아니라 복음 아래서도 요구된다. 그러나 양쪽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의 명령들에 대해서 요구되는 엄격하고 혹독한 복종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인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순종에 대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충족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율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한 주인을 찾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속된 자유임과 동시에 섬기는 자유다”라고 한 루터의 말을 반복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김’ 그 자체이며 섬기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순종 안에 거하는 자유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가 자발적이어야 하듯이 복종 또한 기쁨의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랑과 감사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순종이 아니다.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기쁨의 순종은 단지 그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 진정으로 자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결국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지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할 수 있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6. 선택 교리 
 
선택과 예정은 칼빈의 교리들 가운데 가장 강조되지만 또한 오해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증거하는 수단이다. 선택은 자주 귀중한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보여준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주권의 틀에서 이해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예정되었다는 근거를 가진다. 칼빈은 선택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선택 교리는 성경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철저히 따른다. 또한 그는 바울의 주장처럼 선택 교리를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순전한 관대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에 의하여 당신의 자녀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로 예정하셨던 사람들 속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인 예정은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

 

예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는 칼빈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로서 『신앙고백서』, 『제네바 신앙교육서』,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은 이 교리를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이중예정교리’는 인간 이성에 의하여 이해될 수가 없는 오묘한 진리이며 인간 이성에 장애물과 같은 개념이다. 칼빈은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고 예정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에 대해서 주님 자신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그들에 대한 각기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감추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간파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지혜의 지극히 경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심판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선택과 유기 사이의 평행 관계를 생각하는 일부 신학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누가 선택되었고 유기되었는지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이런 입장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곳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 대해서 칼빈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은혜에 집중된다. 그가 우선 강조하는 사항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그분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불확실성과 혼돈이 아닌 위로의 원천이 된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확실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였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부터 정하셨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단지 비참한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우리의 선택을 반영하고 명확하게 해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다루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리스도만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가장 진지한 것이며, 서약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거울 안에서 보여주는 생명을 숙고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장 진지한 것과 서약을 붙들고 있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있다.

 

7. 믿음과 이신칭의
 
칼빈의 <신앙교육서>에 따르면, 그는 선택교리를 살펴 본 후에 바로 믿음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는 믿음을 역사적 사건들과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에 대한 가슴의 확신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지가 아닌 지식에 근거하는 믿음은 약속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또한, 믿음에 관한 지식은 뇌보다도 가슴의 문제이며,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기 때문에 이 지식은 특별하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통한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넘어가며 일어나야 하는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강조하였지만 지성보다는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신앙에서 의지의 역할을 중심에 두고 지성의 역할을 주변에 둔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 믿음은 성령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복음에 있는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에 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믿음의 영구한 대상’이시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확인되며, 제시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모든 신적인 자비의 부요함을 제공해 주시는 믿음의 지속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이 자비롭게 나를 향하시고,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실 것이라는 지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은총 위에서만 사람의 심장이 쉼을 얻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은총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외적인 유일한 서약이 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주어진 진리의 약속에 기초된 지식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하는 이 지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서 견고하고 확실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또한 믿음의 창시자요 저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롭고 언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효과적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어주도록 하는 끈으로, 이것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일체에 있다. 칼빈은 종종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신비적인 결합’이라고 한다.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호의 안으로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수납’으로 정의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토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오는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받아 죄 용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감 있게 서게 된다”고 그는 더욱 완성된 정의를 내린다.

 

칼빈에게 칭의는 단지 법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칭의는 죄의 사면과 전가로 구성된다. 따라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수납되는 것이며, 용서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놀라운 선물들 중의 하나는 양심의 평화와 조용한 기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칭의를 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보았다.
 
8. 기 독 론
 
니젤(Niesel)의 명저인 『칼빈의 신학』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특징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보았다. 그는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고, 목표이며, 목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가 성경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직분(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르쳤던 초대 교회처럼, 칼빈도 『신앙교육서』에서 두 직분만 가르쳤다. 그러나 1539년의 『기독교강요』 두 번째 판에서는 『1541년 신앙교육서』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덧붙였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가 교회의 영원한 지배자이며 옹호자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와 세상과 육에 대한 모든 투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며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자기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신 죄에 대한 유일한 만족과 중보의 간구하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지금도 제사장의 직무를 계속하고 계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최종판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희생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그분께만 속해 있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 하나님의 진노의 소멸,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세 번째 직분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선지자로 오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언하시고 모든 것을 계시하실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주권적인 대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직분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세 직분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직분들은 모두 우리의 선을 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분에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유익은 우리의 주인과 교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학자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모든 저서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그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에 완전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도 구원의 성취를 재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보고,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본질을 분리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씻겨졌고 죽음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의가 소생되었고 생명이 살아났다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능이 소멸되어서 우리 안에 효험이 있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승리를 얻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9. 기도론 (1) 기도와 믿음
 
칼빈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기도에 큰 비중을 둔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였던 기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도 칼빈이 기도에 대해서 논의한 글은 그 중심에 위치한다.

 

기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믿음이다. 즉, 기도와 믿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기도가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부족을 확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부족의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가련함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찾게 된다. 즉, 그는 창조주이신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주실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총체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묵상하며, 그의 전 기대는 그 분께 의존하며, 그의 모든 소망은 그 분께 집착하고 그분 안에서 쉼을 갖게 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요 훈련은 기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의 참된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진정한 기도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필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칼빈은 성경의 약속은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연료와 같다고 하면서 성경을 좋아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소망을 나타내는 신앙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표현이자 호흡과 같아서 거룩한 교리에 대한 지식이 내 몸에 살아 움직이는 표가 된

다. 기도의 중요성 때문에 칼빈은 기도에 원칙과 형식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논한다.

 

또한 기도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필수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기도가 칼빈의 경건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경건은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기도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기도와 믿음은 모두 그 초점과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이러한 풍부한 요소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마치 엄청난 보화가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믿음의 눈을 통하여 보게 되며, 그 보화들을 기도를 통하여 파내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에서 기도와 예배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고넬료가 연단 받을 때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렸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칼빈은 진심으로 열렬히 예배에 몰두하였던 고넬료가 거기에서 신앙의 힘을 얻었다고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간청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놀라운 평화와 안정을 갖게 된다. 기도는 살아있는 신앙 표현이며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받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 기도론 (2) 기도의 필요성과 규칙
 
칼빈의 기도의 필요성과 기도의 규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이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들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그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선 믿음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해야 할 여섯 가지 이유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도록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 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기도로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로, 우리가 연약한 때일수록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

 

칼빈은 기도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원, 기쁨, 하소연을 포함한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내어놓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이며, 우리 마음의 순수한 감정의 작용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선택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약속과 함께 온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모두 기도의 동기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기도의 규칙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신자들을 위하여 적절한 기도의 규칙들을 열거하고 논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합당하게 대화하기 위하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 의존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탄원을 불타는 열성으로 아뢰어야 한다. 전심으로, 진지하게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합당한 기도의 전제 조건은 통회하는 심령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과 가치에 대한 생각은 일체 포기하고 겸비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고백적인 응답이다. 신자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 또한 모든 기도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간청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가 수반되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회와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자는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과 기도에 온 정신을 바쳐야 하고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정신을 모으기 어려울 때는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마음과 생각이 주를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성화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할 것과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인내로 간구할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준다.

 

[출처]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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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에릭슨이라는 미국 여성이 있습니다. 틴 에이져 시절에 미국 메릴랜드의 체스픽 베이라는 강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잘못되어 전신마비로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시련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었던 그녀는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할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이런 몸이라도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직후에 자신의 입술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그녀는 입술에 연필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그림이 알려지자, 유명한 볼펜회사에서 광고 모델을 제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나오는 모든 광고 아래 영어로 P.T.L(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양하라!)이라는 글자를 삽입하기로 합의하고 출연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복음전도자로, 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미국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역경이 왔을 때, 원망 대신에 그 역경 중에서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왔을 때 불평 대신에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찬송하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가 있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왕하 20:5

오늘도 모든 역경속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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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감하게 렛 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주어진 화살과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과감하게 let go해야 한다. 우리가 let go할 것들을 그리하지 못한다면 stop할 것이다. Let go해야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인생의 길에서 장벽을 만날 때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만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넘치게 하라. Let go 하면 하나님이 우리로 그 장벽을 넘어가게 하신다. -김승욱 목사의 ‘가정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녀들을 놓고도 let go 할 만한 것을 let go 하십시오. 그들을 그저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또한 가정의 문제를 let go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세워지고 드려지기 위해서 과감하게 let go 해야 합니다. [새벽 종소리]

 
성화란 무엇인가? /제임스 보이스 거룩한나그네길

 

 

 

 

거룩함(성결)은 중요하고 또한 실제적이다.


거룩함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맨 밑바닥에 있다.
평균적인 사람들은 중간쯤에 있다.
선한 사람들은 꼭대기 근처의 상위권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100퍼센트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성이 ‘성결’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성결의 본질은 아니다.
성결의 본질은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그분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무한히 구별된다.
거룩한 하나님 같은 존재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다.


빛은 하나이지만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동시에 많은 빛들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거룩함의 네 요소

첫 번째 요소는 ‘위엄’이다.
왕좌에 앉아 있는 왕처럼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시다.
‘영광’이라는 말은 거룩함의 바로 ‘위엄’의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분은 위대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분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두 번째 요소는 그분의 ‘의지’이다.
그분은 추상적 개념이나 수학적 공식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의지를 갖고 계신데, 그 의지에 따라 일들을 성취하신다.

무엇보다 그분은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고, 하나님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신다

세 번째 요소는 ‘진노’이다.
그분의 진노는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보이시는 정당한 반응이다.
 

네 번째 요소는 ‘의’(義)이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이 실현될 때 그분의 의가 이루어진다.
그분은 이 세상이 그분의 도덕적 성품에 따라서 살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도덕적 의(義)의 훌륭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네 요소들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말씀은 “내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만큼
너희도 도덕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거룩하게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분이 거룩하시듯이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그분이 ‘구별되시듯이’ 우리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인’(saint)이나 ‘거룩하게 하다’(sanctify)라는 영어 단어들은 로망스어(라틴어에서 유래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거룩한’을 뜻하는 ‘홀리’(holy)라는 영어 단어는 고대 게르만어(독일어, 영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어원적 배경이 어떻든 간에 이 단어들에 담긴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성화’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가지고 다녔던 성막을 모세가 하나님께 바칠 때 그는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했다”(민 7:1).
다시 말해 그는 그것들을 거룩하게 했다.

그가 단(壇)의 돌이나 금속의 성질을 신비롭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이 거룩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구별했을 뿐이다

 

 

구별되는 세 단계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구별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처럼 구별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구별되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의식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누구도 구별될 수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 단계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마 3:8),
‘죄에서 돌이켜서 믿음을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을 떠서 그분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처음으로 죄를 회개할 수 있다.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고, 결국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향하게 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를 구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그분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결(거룩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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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생

(조직신학 개론, 존 M. 프레임, 개혁주의신학사, 266p~269p에서 발췌)

 

 

구원의 첫 번째 축복이며, 구원의 서정의 두 번째 단계는 중생 또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는 우리에게 새 생명, 새 마음을 주십니다. 중생은 효과적인 부르심의 첫 번째 효과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순서 중 첫 단계입니다.

 

우리가 8장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엡2:1-3). 이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신과 탄생이 새로운

육체적 생명을 가져오는 것처럼, 중생의 사역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져옵니다.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중생에 대한 저의 정의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입니다.

 

거듭남의 언어는 요한복음 기자로부터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만약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29, 3:9, 4:7, 5:1, 4절, 18절에서 요한은 유혹에 대항하는 거룩한 삶 안에서 자라는 성도 안에 심으시는 씨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의 언어를 사용합니다(고후5:17; 갈6:15; 엡2:10; cf 약1:18). 또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살아 있게 되는"자의 언어를 사용합니다(엡2: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자로 말하는 로마서 6장과 같은 본문에서 부활의 사상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와 함께 죄로 인해 죽고, 그와 함께 의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이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는 것처럼, 중생도 그의 부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거듭남은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겔36:26-27; 요3:8). 여러분은 스스로 태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탄생과 연관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여러분의 출생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선물, 즉 이런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일반적으로 성경이 표현하는 것처럼, 효과적인 부르심이 성부의 사역인 것처럼, 중생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창조는 "무로부터"(out of nothing)입니다. 창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는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실재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부활도 동일합니다. 부활 전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 안에서 우리는 수동적입니다.

 

더욱이 거듭남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들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만약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바꿉니다. 로마서 1장과 죄인들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중생은 우리로 진리를 거스르는 것을 멈추게 하시며, 하나님을 진실로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발생시키는 거듭남은 믿음에 선행됩니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성경적으로 부정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축복의 통로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믿음의 원인이지, 그 역은 아닙니다. 다시금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며, 믿음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이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중생이 믿음의 원인인 것처럼, 우리의 선한 행위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앞서 요한일서로부터 작성한 본문들을 기억하십시오. 요한일서 2:29은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말합니다. 의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중생 없이 의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처럼 중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발생합니다. 베드로전서 1:23은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cf 벧전1:25)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시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옵니다. 야고보서 1:18은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이는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바람 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여러분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혹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중생이 틀림없이 발생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바람처럼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선행들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믿음과 선행은 중생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요한일서 3:9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7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진술하며 사랑과 모든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는 명백하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부터 순종으로 바뀔 때, 거듭남을 주시는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 개론, 존 M. 프레임, 개혁주의신학사, 266p~269p에서 발췌)

 

 

 

존 M. 프레임
프린스턴 대학교(A.B.),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B. D.), 예일 대학교(A.M., M.Phil.)를 졸업하였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과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대학원에서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미국 오랜도에 위치한 개혁신학 대학(Reformed Theological Seminary)교수로서 조직신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신학, 변증학, 윤리학 그리고 예배에 관련된 많은 글들을 저술하였다. 그 저술에는 [주권에 관한 신학] (Theology of Lordship) 시리즈의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교리]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변증](Apologetics to the Glory of God)과 [코넬리우스 반틸: 그의 사상에 대한 분석] (Cornelius Van Til: An Analysis of His Thought)도 수록되어 있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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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다 틀리면 치매,..


3문제 다 틀리면 진짜 치매랍니다 ㅎㅎ

[QUIZ]
보는 즉시 문제를 풀기 바랍니다.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연필과 종이도 없이 말입니다.

준비 됐으면 시작하시지요~
3문제 다 틀린다면
병원으로 직행 하시길~ㅋㅋ

<문제>
달리기 경주에서 뛰고 있습니다.
2등인 선수를 앞질렀습니다.
그럼 지금 당신은 몇등?


 


2등을 앞지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으면
당신이 당연히 2등입니다.
1등을 앞지르지는 않았잖아요.
다음 문제에 틀리지 않도록 해보세요.
처음문제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안됩니다.

<문제>.
아주 헷갈리는 산수 문제입니다.
머리로만 푸세요.
연필과 종이는 사용 하지 마시구요.
자 시작합니다~

1000에다 40을 더합니다.
거기다 또 1000을 더합니다.
그리고 30을 더하고
다시 또 1000을 더합니다.
그리고 20을 더하고
또 1000을 더합니다.
이제 10을 더합니다.
그럼 총합은??

[ 답 ]
5000이 나왔나요?
또 틀렸네요.
실제 답은 4100입니다.
믿지 못하겠다구요?
계산기로 해보세요.
(40+30+20+10=100)
오늘 당신의 날이 아닌가 보군요.
이것도 못푸신분..
제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수없네요~흑흑
혹시 마지막 문제는 풀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
영희의 아버지는 5명의 딸이 있습니다.
: 일순,이순,삼순,사순이~
그럼~ 마지막 딸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답 ]
오순!!! 당연히 아니지요.
 
다섯번째 딸의 이름은
당연히 영희입니다.
문제를 다시 읽어보세요
누구의 아버지라고 되어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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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우 - 가시꽃 사랑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시다. 우리에게도 자기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굽은 길을 펴주실 수 있고, 거친 길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때로 큰 시련이 있어도 그 시련은 내가 끝장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다시 새롭게 시작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닥쳐도 스스로 선언하십시오. “나는 기름 부음 받은 존재이다.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 되신다.” -이한규 목사의‘ 하나님은 문제보다 큽니다’에서- 어떤 시련이 있어도 결코 부정적이 되지 마십시오. 최대한 불평을 자제하고 최대한 찬양하고 감사하십시오. 거듭난 성도에게는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장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작은 미물들도 자기 방어 시스템이 있는데 거듭난 성도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문제가 크면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크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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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보라! 빌립의 전도?(펌글)

지혜자


본문읽기, 요한복음 1장 35-51
참조구절,
1.요한복음 6장 1-9(오병이어의 표적과 관련해서)
1.요한복음12장 20-36(헬라인 몇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뵙고자 요청한 일)
1.요한복음14장 1-11(주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한 빌립의 요구)

요한복음(개역성경)에는 세 번의 "와 보라"가 나옵니다. 1장에서 두 번,4장에서 한 번입니다. 이 세 번의 "와 보라"의 의미를 각각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빌립이란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위 '본문읽기'를 해야 합니다. 본문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의 거니심(다니심)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의 거니심!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이하 생략)"-창세기3장-

'예수님의 거니심'은 대언의 영(말씀)인 세례 요한의 증언을 증업답게 하는 '행동계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창세기 3장 전체를 이 '거니심'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앞 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한 그 증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의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말하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세레요한의 증언(대언의 영)을 통해 부르고 있음이지요. '바람이 불 때'- 바람은 신(영),호흡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필자는 창세기 3장,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제 2위 되시는 성자 하나님으로 규정합니다. 그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현현하신 걸로 보는 것이지요.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셨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사도행전 2장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등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죄인찾아 구원하시는 일은 성 삼위 하나님의 역사(일)입니다. 실락원에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후손 모두를 부르시는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선생님! 어디에 머무십니까?" "와 보라".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 쯤 되었더라. 그 날 함께 거하니; -함께 거한 시간이-전 날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 까지란 말입니다. 전 날의 시간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35절의 그 이튿날이 낮시간대 임은 분명합니다(참고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시간은 무조건 로마시간으로 읽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시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두 제자는 전 날 어느 시각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 까지 머문 셈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드리느냐 하면,두 제자가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자기들 스승인 세례 요한의 증언, 그리고 구약 성경의 기록,또 예수님의 직접적인 증언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알아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누가 '카더라'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을 듣고 누구의 헛소리 같은-꿈이나 환상 예언 계시 입신의 말을 듣고 그 분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태도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영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진리의 영,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과 조명하심으로 바르게 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안드레의 반응과 본문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어서 드러나는 또 한 명의 제자의 반응을 통해서,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반응은 제 각각임을 알 게 됩니다. 안드레는 즉각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이심을 알아먹고서 자기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려 옵니다. 반면에 안드레와 함께 있던 그 제자에 대한 기록은 행간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도록 기록자 요한은 어떤 심오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3절의 이튿날은 35절의 그 다음날로서의 이튿날이 아닙니다. 이틀 뒤의 그 이튿날입니다. 35절에서 39절 상반절 까지 하루,39절 하반절에서 42절 까지 안드레의 전도로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고 게바란 이름을 얻었던 그 하루, 이렇게 짧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틀이 지나고 나서, 43절에서 "이튿날 예수께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합니다.(요한복음 1:1-18 서론 단락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체의 서술에서 육일을 드러내고 있는 기록자 사도 요한의 의도는 지난 번 강설에서 말씀드린 바 대로 요한복음은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로 기록했기에 그렇습니다.(수가성 우물가에서-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참조)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게 아닙니다. "만나"-'찾아서' 입니다.
"나를 따르라"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빌립에 대한 인간탐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빌립하면 누가 떠오릅니까. 알락산더 대제의 아버지 마케도냐의 빌립이 이 이름의 효시입니다. 적어도 역사적으로는요. 그리고 이두레와 드라고닛 분봉왕 빌립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그외 자기 동생(이복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 안디바의 동생 빌립,사도행전에 나오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의 봉사자(집사) 빌립 등등...

안드레나 빌립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가버나움 인근에 있는 작은 어촌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기록된 이 갈릴리 지역은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로마를 대신하여 다스리고 있는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유대지역보다 헬라문물을 더 빨리 더 많이 받아들인 지역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알렉산더 대제의 사후 그 휘하의 네 장군에 의해 분할통치할 때,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와 에굽의 프톨레미 왕조 사이에 마치 완충지역처럼 놓이게 된 바벨론 포수 이후의 중간기 시대의 유대인의 삶의 터전이요 형편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거쳐 이제 로마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방인 이두메 사람 헤롯의 통치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친 헬라세계의 문화와 문물의 영향으로 이제 유대인들조차 자식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지어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고의 체계도 아마 상당히 헬라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待望)은 극에 달했습니다. 공관복음의 기록처럼 때가 찼습니다. 모든 면에서 때가 찼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왜 빌립을 찾아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서도,빌립은 곧장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에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모세가 그 율법에 기록하였고 그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라고 합니다. 구약 전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지칭하는 유대식 표현입니다. 빌립은 메시야란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에둘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났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을 말하고 있음이지요. 그 분이 메시야라고 해서 만니봤더니 그냥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더라란 늬앙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기록들을(신약성경 당시) 보면 '예수'란 이름이 20여명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동명이인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신지역이나 아비의 이름을 붙여서 부름으로써 동명이인들을 구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빌립이 이를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자기 스승 세례 요한은 분명하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건만', 빌립의 눈에는 사람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 예수님이 기거하는 곳에 안드레와 함께 가서 하루 종일 있으면서 예수님의 됨됨이도 살펴보고 사는 모습도 눈여겨보고 이것 저것 물어도 봤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정보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어디서 오는 지 알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방의 갈릴리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깡촌(?)과 다를 바 없는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메시야란 그 어떤 면모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같은 동네 친구(?)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로 가건만 빌립 자신은 언뜻 따라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에 있을 때 "천국(메시야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선지자 요한의 소문을 듣고 생업도 뒤로 한 채,유대까지 와서 세례를 받고 요한의 제자가 된 빌립이 아닙니까. 확신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친구따라 강남가는 것' 이상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분부를 뒤로하고 먼저 나다나엘을 찾은 것이지요. 뱃사람 안드레나 그 형제 베드로의 사람됨과 인품,학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안드레 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덥석(?) 믿고 따라간다고 해서 빕립 자신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헬라 물을 먹을만큼 먹고 이름까지도 빌립이라 지은 가문이 이니던가! 상당히 주도면밀하고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 빌립!

나다나엘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의 돌처럼 굳은 선입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오라 보라"-오라와 보라는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앞의 오라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 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보라는 과연 그 분이 맞는 지 알아봐달라는 요구를 담고있는 단어입니다. 모세의 그 율법과 그 선지자들의 기록대로 그 분이 메시야가 맞는 지를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살펴봐달라는 요구를 담고 있는 명령형이지요. 평소에 빌립은 나다나엘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 인지 잘 알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 이름 나다나엘이 의미하는 바 대로요.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돌로메-돌로메의 아들-이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바돌로메는 별호처럼 불리던 호칭이고 히브리식 정식 이름은 나다나엘입니다.)

예수님은 47절 이하 51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언하고 계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홀로,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나다나엘!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메시야(이스라엘의 왕)를 보내주셔서 이방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기를 기도한 나다나엘! 그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마음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 나다나엘의 존전에 서 계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너를 보았노라" 빌립이 부르기 전에 '그 무화과나무'-특정한 지역에 있는-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이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 장소는 나다나엘 밖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무슨 기도를 했는 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는 분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그렇게 고백한 것이지요. "하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빌립도 덩달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고백했을까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리고서는 결정적으로 "....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창세기 28장 10절로 22절 말씀이 '인자'를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밝히 증언하심으로써 참으로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언약을 성취할 바로 그 후손(씨)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부음받으신 '산 돌'이신 그 분 예수로 말미암아 창28:22 상반절 기록(야곱의 예언적 행동계시)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할 유일한 하나님의 집-성전-입니다.(위에 적시한 창세기 관련 본문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요한복음 6장으로 갑니다. 6:1-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유월절 전입니다. 6장의 기록은 두 번째 유월절을 앞두고 일어난 표적이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이 왔을 때,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시고 그 의미를 유월절과 연관시켜 풀어주십니다. 5절에서 빌립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빌립을 시험코자함이었습니다. 무슨 시험이냐고요?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성전정화사건,예루살렘에서의 표적행하심,니고데모와의 거듭남에 관한 담화,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일,그리고 말씀으로 왕의 신하를 고치신 일,5장에서는 그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역시 말씀으로 고치시고 그 표적의 의미를 풀어주시되 예수님이 인자됨을 인하여 구원과 심판의 주가 되셨음과 성경의 기록이 자신에 대한 기록임을 밝히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6장에 와서 빌립을 시험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표적도 보고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은 빌립이 과연 믿음이 있는 지,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임을 알고 믿는 지를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의 반응은 빨랐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계산에 빨랐을 뿐이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믿은 안드레의 손길을 통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참으로 더디 믿는,아직도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빌립의 모습을 요한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장 20절부터 봅니다. 36절까지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헬라식 이름을 쓰면서 헬라말로 소통하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빌립에게 헬라인 몇이 접근해 옵니다.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아닌 유대교로 개종한 뼛속까지 순수한 헬라인임을 원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세 번째 유월절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기록이 '예수님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세계 각처에서 온 수많은 유월절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에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입성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인해서 환영인파는 더욱 대단했습니다. "....볼지어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한 내용입니다. 이런 차에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한 것이지요. 요청을 받은 빌립은 안드레를 찾습니다. 같은 제자라고는 하지만 결코 같은 제자일 수는 없습니다. 결이 다릅니다. 안드레의 위상을 빌릴 수밖에 없는 빕립의 현재의 처지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요12장 23-36의 기록을 통해 말씀하심으로써(답변하심으로써),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또한 따르는 무리들 그리고 일차독자는 물론이요 지금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우리들까지 교훈코자 하신 것입니다. 헬라인 몇은 메시야에 대한 일반적인 대망은 있었을지라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나 무리들의 행동,유대인들의 말을 들어봤을 때 예수님이 이제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실 것으로 알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빨리 줄을 잡고 줄을 서야 합니다. 메시야 왕국에서도 권력서열은 참으로 중요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요구를 듣고 '우리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는커녕 대뜸 안드레를 찾아 함께 예수님께 여쭌 빌립의 메시야관과 헬라인 몇의 메시야관이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안드레도 그런 분위기에 휘둘린 모습입니다. 아! 이제 헬라인들 조차도 예수님을 찾는구나! 분위기에 덜떴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섬기려는 것을 누가 마다하겠냐마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3절-.  메시야 왕국의 영광에 참여코자 예수님을 뵙고자 했던 헬라인 몇의 실상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빌립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의 답변과 이어지는 기록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여전히 아직까지도 육적인 안목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요14:1-11의 내용입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과 요구가 함께 나오는 기록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은 지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해 달라는 주문입니다. 9절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이 본문의 결론은, '이제 믿을 때도 되지 않았냐?' "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빌립의 믿음없음을 우리는 생생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 번의 "와 보라"의 기록 중 예수님이 친히 하신 그 말씀의 의미는 '오라 볼 것이다(너희들이 구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입니다. 반면에 빌립의 와 보라는 이미 위에서 상술한 것과 같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의 와 보라는 '지금 빨리 와서 내 말이 맞는 지 틀리는 지 살펴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확신에 찬 요청입니다. 왜냐하면 4장29절 상반절에 콜론(;)이 있고. 이어서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행사 때 빌립의 말을 전도용 구호로 쓰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전도자 빌립 운운하는 설교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어떤 방도가 되었던 지 간에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와 보라"고 요청함으로 해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제자 삼으셨습니다. 빌립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전도하면서 우리는,우리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이러 이러 해서! 우리 목사님은 참 훌룽한 분입니다. 학력과 이력을 전도지에 기재합니다. 물론 다 좋습니다. 수가성 여인처럼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을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교회 오면 복받습니다. 병고침 받습니다. 문제해결됩니다. 자녀들도 좋은 대학 갑니다. 남편 사업도 잘 됩니다. 일반 신자들이 성경적 전도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서 얼마든지 좋습니다. 데려오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교회 왔다가 잘 되면 다행인데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날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면 잘 된다더니 다녀봐야 좋은 일도 없더라. 돈이나 많이 바치라고 눈치나 주고' 이렇게 되면 전도는 꽝이 되는 겁니다. 전도(傳道)의 독려를 통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로 인도(引導)함을 받아 나온 자들에게 참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듣는 자들에게는 이 설교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로 준비하여 성령을 힘입어 능력있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현금(現今)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적인 복음선포와 가르침이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되고 있는 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교회 나갔다가 쉬거나 아예 발을 끊은 사람들이 주변에 이외로 많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 전에 택한 자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어처구니 없는 어떤 보수교단에 속한 교인들도 있습니다. 지들 교단과 교회가 최고인 줄 압니다. 말은 안 해도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예수님 자랑 복음 자랑은 뒷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가 정작 하고자 하는 말을 이제사 합니다. 목사든 직분자든 일반신자든 간에 믿음이 있다면 새겨들을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신자나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자들을 대할 때 제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이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없는 빌립과 여러 제자들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데리고 다녔습니다. 밥이나 축내는 자들이라는 시선으로 본 적이 결코 없으십니다. 사람들은 만인이 다 다릅니다. 자라온 환경이나 심성이나 학식이나 교양이나 사는 형편이 다 다릅니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잴 수가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라고 붙여준 사람이 있습니까? 갓난아기처럼 조심해서 애지중지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요? 믿음이 생겨 스스로 설 때까지요. 그 후로도 말씀으로 돌봄(케어)과 먹임이 필요한 한 마리 양임을 잊지말고 늘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대미를 장식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내 양을 돌봐라,내 양을 먹이라'고요.

나는 먹일 양이 없는데요? 정말 그럴까요? 잃어버린 버린 양들이 지천입니다. 시셋말로 천지삐까립니다. 죄인 불러 회개케 하시는 주님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잃은 양들을 찾으십시오.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양이 저절로 생깁니까? 복음전도를 통해 낳아야지요. 안 그런가요?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믿는 이들이 목양자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 1.5 저녁 나절에
유목민(遊牧民) 올림


출처: USA아멘넷


★~마음을 울리는 최고의 명언 30選~★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촛불이 되거나 또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 이디스 워튼 -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생텍쥐페리 -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 매튜슨 -



두려움 때문에 갖는 존경심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
- 카뮈 -



당신이 잘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행복에 도움이 된다
- 러셀 -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실할 수 있다
- 에릭 프롬 -



큰 재주를 가졌다면 근면은 그 재주를 더 낫게 해줄 것이며
보통의 능력밖에 없다면 근면은 부족함을 보충해 줄 것이다
- J.레이놀즈 -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



노동은 세개의 큰 악, 즉 지루함, 부도덕, 그리고 가난을 제거한다
- 괴테 -



지성을 소유하고 또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열 사람에게 언제나 승리한다
- 버나드 쇼 -



재물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 권리가 없듯이
행복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누릴 권리가 없다
- 버나드 쇼 -



힘 있을 때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 헨리 애덤스 -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차 있다
- 헬렌 켈러 -



사람은 부지런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착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놀면 음탕하고, 음탕하면 착함을 잊으며,
착함을 잊으면 악한 마음이 생긴다
- 소학 -



미래는 일하는 사람의 것이다
권력과 명예도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게으름뱅이의 손에 누가 권력이나 명예를 안겨줄까
- 힐티 -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된 일이다
- 존 F. 케네디 -



당신이 자신은 2위로 만족한다고 일단 말하면
당신의 인생은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 존 F. 케네디 -

무례한 사람의 행위는 내 행실을 바로 잡게 해주는 스승이다
- 공자 -



군자가 예절이 없으면 역적이 되고,
소인이 예절이 없으면 도적이 된다
- 명심보감 -



쓰러진 자 망할까 두렵지 않고
낮춘 자 거만할까 두렵지 않다
- J.버넌 -




예의는 남과 화목함을 으뜸으로 삼는다
- 논어 -



겸손한 자만이 다스릴 것이요, 애써 일하는 자만이 가질 것이다
- 에머슨 -



산이 높을수록 골은 낮다
- T.풀러 -



우선 겸손을 배우려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 O.메러디드 -



백권의 책에 쓰인 말보다
한 가지 성실한 마음이 더 크게 사람을 움직인다
- B.프랭클린 -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
- E.리스 -



시간은 위대한 스승이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자신의 모든 제자를 죽인다
- 베를리오즈 -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



비평가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마라
비평가를 찬양하는 동상이 세워진 적은 없다
- 장 시벨리우스 -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다
- 유대인 격언 -

 




http://youtu.be/Mspq-gl4A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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