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5) 정규교회출석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왜 기독교인은 집에서 그저 성경공부와 기도를 통하여서 영성을 개발할 수 없는가?


히브리서 10:25는 확실하게 명령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지시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회의 헌법은 교회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능한 한 상세하게, 대표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매주 첫 날에 만났습니다. 교인들에게는 그날에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가져오도록 지시했습니 다 (고린도전서 16:2). 

교회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유는 흔히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감사 의 마음 때문에 영향을 받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보다 세상 친구들이 더 존경을 받는다면, 그때는 교회의 출석은 그 중요성과 매력적인 면에서 퇴색될 것입니다. 만일 세상의 죄악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성도들이 존경을 받고 아름답게 생각된다 면,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교회 예배는 그것이 인간의 것일 때 지루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임재하시는 예배는 진실한 신자에게는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영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름다움과 권능으로 임재하시는 곳에 참석하기를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느낌을 떠나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참석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중요성을 알아 보기 위하여 성경을 찾아보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하여 매 주일마다 하루를 따로 남겨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0:8).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은 (마가복음 2:28)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충실하였으며, 그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의 집을 정기적으로 찾았습니다 (누가복 음 4:16).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예배하는 처소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필요를 느꼈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들은 그보다 덜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의 전통으로 지켜오던 안식일은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한 주일의 첫날에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날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함께 모이는 것이 필수적입니 다. 관계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들은 고립해서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몇 사람의 은자(隱者)들은 명상하며, 또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세상을 멀리하고 떠났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생활 양식으로 영원히 홀로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의 중요성을 이해함으로, 친교를 위한 우리들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친교를 가지려고 애를 쓰는 것보 다, 우리들은 교회에 갈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도시에 있을 때라도, 그곳에서 같은 신념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역 교회에서 가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의 친교는 정서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 라 기독교인의 헌신에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격려하고 (데살로니가전서 4:18), 위로하며 (고린도후서 1:3,4), 또한 서로의 짐을 져주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2). 동료 신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에서 실패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말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는 물론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어떤 사람들은 일단 성경의 기본적인 교훈을 배우면 더 이상 교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 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위선자들”의 혼란 없이 혼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논리는 교회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들의 영적 건강 상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교회에 가거나 혹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집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건전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덕을 세우며 또 교화를 받기 위해서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혼자서 그러한 권면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오순절 교회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공중 예배에서 성령님의 은사가 역사하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여러 신자들을 통해서 그가 선택하는 대로 교회의 덕 세움을 위해서 그 은사들을 나타내십니다. 함께 만나는 것은 그러한 덕 세움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 다. “이 모든 일[은사]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 라” (고린도전서 12:11,12). 

믿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지상 대 명령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필수 적입니다 (마태복음 28:19,20). 비록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그 주를 살면서 혼자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일은 일어 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린 자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 을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신자들 그룹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갑니다. 그 질문은 “신자가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기독교를 유지하고 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질문은 “신자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만나는 것을 그치지 말라고 하는 성경의 영감된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받게 되는 모든 유익과 상급을 잃도록 허락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관심사: 

하나님께서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 타낼 수 있도록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것은 지역 교회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헌신하도록 주님의 사랑하는 부르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해야만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예배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몇 지역교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망한 신자들은 그런 때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를 떠나거나 신자들과의 교제를 가지지 않는 대신에, 헌신적인 신자는 그러한 경우를 교회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적인 도전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지속적인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야고보서 5:16). 우리 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안에 주신 그룹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보내신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부분입니다. 교회의 출석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에 신실함은 은혜스럽고 활력 있는 예배의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경은 일괄적인 톤으로 한 하나님이 삼위(세 위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분명히 특별계시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기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라고 말들 하지만, 필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 받는 그때부터 그 사실이 분명한 사실로 믿어졌다. 이것이야말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성령 하나님의 조명 하심이라 믿으며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혼동에 처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삼위일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던 유능한 신학자, 목회자가 이단으로 지목받아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극심한 논쟁으로 이어져서 사랑 안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져야 할 형제 자매가 서로 손가락질 하며 한 치의 양보함 없이 다투기도 하여, 안티와 이단들이 손뼉치며 즐거워하도록 하는, 정말 가슴 아픈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쉽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영혼들을 바로 세워줄 수가 있을 텐데…늘 기도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오늘 아침, 주께서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이다.” 깨우쳐 주신다. (요 10: 30절 참조)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그 생김새나 모양이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르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object)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란 것이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필자는 아주 오래전(약 6년 전쯤인 것 같다),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과 삼위일체 론에 부딪혀 한 판 설전을 크게 벌렸던 적이 있고, 그때, 아멘넷 운영자 님과 편집위는 필자의 손을 들어준 고마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도사님이란 분의 주장인즉슨,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主)시요, 메시아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강하게 우겼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전도사님의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 목회자님들의 질문이며,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에 많은 이단들이 정통교단에서 파생되기도 하고 여호와증인 같은 이단 종파들이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만 제대로 정립된다면 삼위일체가 그리 어려운 교리적 산물만은 아닌, 성경의 핵심 사상인 것을 믿을 수 있고, 예수가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단코 이단으로 넘어가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여,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되심, 그리고 정통 교단이 인정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시는가?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대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2.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성부, 말씀(성자),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심을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 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서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 (빌2:5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4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3)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시록 1: 8절)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 8절) 성경의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 13) 천명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고 계신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 증거하신다.
대부분의 말씀이 그러하듯, 요1서 5:7절 말씀은 한글 번역판보다 영어성경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현대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님들께서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림자, 실체, 그리고 빛의 관계성:
예수님, 그림자, 빛, 이 셋을 따로 떼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예수님 한 분을 신약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실체, 요1:1 ), 빛(요 1: 4), 구약에서 율법(오실 이의 그림자, 골 2: 16- 17)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율법)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오실분의 그림자인 율법)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6-17)
 
그림자 =율법(율법=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 실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빛(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물로서, 바위로서 표현되기도 하나 관계성을 설명하려니까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빛을 연관짓되 성경의 정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 1-9) =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그분은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성경은 증거하신다. 그러나 온전히 다른 위격을 소유 하신 분, 한 분 하나님이시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 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번역문
 
결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의 그림자(shadow)가 실체(substance))와 따로 떨어져서 일 할 수도 없고 그림자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빛을 통하여 생성되는 그림자와 실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 10: 30절 참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그분의 신비함(mysterious)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숨겨진 비밀이며 주의 영으로 계시(revelation)해 주시고 성령의 조명 하심을 입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의 비밀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것일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림자에 생명을 입힐 수도 있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실 수도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히 알게 된다면, 삼위일체 론(論)이 이해되지 않을 이유 없고, 성경에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그 정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이시니,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 물 그리고 피니 이 셋이 하나로 일치하니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요 5: 7-8)
 
위 성구는 KJV 의 같은 구절을 필자가 그대로 직역해 본 것입니다. 삼위 일체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어떤 사람이 모함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빛은 하나님, 말씀(예수 그리스도 곧 실체), 성령님은 그림자(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설파한다고 몰아가며 비방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설명할 때, 그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갖추신 분이란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 5)예수님이 빛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시요, 율법으로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아래는:
본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밝히신 독자님의 글을 이곳에 옮겨다 놓습니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별이 사모님의 칼럼에 발제자의 영성을 신뢰하기에 +10 추천으로 우선 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언뜻 이해하기에 벅찼습니다. 처음 대하는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 라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설명 하는 새로운 명제에 걸려 더 이상 읽어 내려 갈수가 없었습니다.

발제자가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전제를 달아 놓았듯이 의아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명제 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실체”로 설명하는 예가 성경에서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 갑니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골2:17),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계속 드리는 똑같은 제사로는 예배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10:1)”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위와 같이 율법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예로 성경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으로, “그림자와 실체”로 “삼위일체” 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전혀 무리가 있다 할 수 없다.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확인 합니다.

"삼위일체" 를 설명하는 새로운 대 발견이다.
“휴” 과연 별이 사모님 이시다. 안심 입니다.) - 잠긴동산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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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도록 달콤한 문명의 빛이 가장 참혹한 시절에 잉태되었다. 주님은 그러한 분이다. 칠흑 같은 밤에 부흥의 씨앗이 심겨졌다. 
   
  1910년~1945년 사이 일제(日帝) 통치는 한민족 최악의 시련기였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오죽하면 나라가 망하게 됐을까? 
  
2. 구한말.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 부정부패(不正腐敗)는 극에 달했다. ‘썩음’은 향락(享樂)과 음란(淫亂)을 부른다. 지배층인 양반들은 빼앗았고, 피지배층 백성들은 빼앗겼다. 없는 자는 살기 위해 딸들을 팔았고, 가진 자는 축첩(蓄妾)으로 여러 여인을 거느렸다. 개화기 신문·잡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이 문란한 성도덕에 있었다” “음풍(淫風)이 크게 떨쳐 집마다 마을마다 음부(淫婦)가 아닌 여자가 드믈다” 금수강산은 죽음의 비만 내리는 악취 나는 쓰레기장이 되고 만다.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미신(迷信)이 판친다. 감기만 걸려도 굿을 했고 무당이 감기에 걸리면 친구 무당이 또 다시 굿을 했다. 이런 식으로 역병(疫病)이 동네를 휩쓸면 마을은 황량한 폐허로 변했다. 5000년 우상숭배는 구한 말 한민족을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3. 형통(亨通)이 반드시 축복은 아니요, 고난(苦難)이 꼭 저주는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사람을 죽이고 속사람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 사도 바울이 어느 날 살 소망까지 끊어져 버렸다. 왜 일까? 왜 이런 고통과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그는 말한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
  
  한민족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치욕의 채찍을 맞으며 부르짖을 때,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오직 예수’ 믿음의 씨앗을 심었다. 일제시대 ‘평양대부흥운동’ 조력자 중 하나인 선교사 메티 노블은 자신의 책 ‘조선회상’에서 나라가 망하던 ‘절망적’ 모습을 놀라운 ‘희망적’ 언어로 적었다. 
  
   “1907년 1월2일 성령의 나타나심 : 성령이 강한 권능으로 평양 교회들과 여러 다른 지역에 임하였다. 그 결과 웨일즈 지방의 大부흥에 관해 읽은 내용과 흡사한 위대하고 영광스런 흥분상태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통회하고....우리 선교사들은 이 민족과 우리 자신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메티 노블은 무당, 기생, 과부 등 당시 버려진 자들에게 생명을 전했다. 에스겔의 마른 뼈 같은 조선백성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듣고 생기를 받는다. 피눈물은 신바람이 돼 민족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한일합방이 있던 1910년, 조선교회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시작했다. 그 해 2월23일 메티노블은 “숱한 경이로운 일들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올해 최고의 사건은 백만인 구령운동이다”이라며 무당 출신 한 여성의 간증을 이렇게 적었다. “한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고 있어요. 백만 인이 오고 있어요. 너무 행복해요. 이 생에서 제 가장 큰 소망과 염원은 백만 성도를 목도하는 거예요”
   
  저주받던 삶을 살던 무당, 기생 출신 여성들은 돈과 물질을 달라는 세속적 바람을 읊은 게 아니다. 대신 “이 민족과 우리 자신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땅을 진동케 할 부흥, 지옥을 텅 비게 할 부흥을 바랬다. 부흥 아니면 주님의 진노가 또 다시 임하게 될 것임을 알기에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며 “원컨대 주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해 달라(사 64:1)”고 외쳤다.
  
4. 화려한 연꽃은 더러운 진창에서 피어난다. 조선이 그랬다. 복음을 듣고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신 주님이 이 나라도 살려줄 것임을 믿었다. 그렇게 믿었던 예표(豫表)적 인물이 있었다. 30여 년 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다. 
  
  그는 19세기 말 당시 조정(朝政)에 반대한 대가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성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 그는 선교사가 건네준 성경을 읽었다. 성령이 강하게 임했다. 감옥 안이 빛으로 가득 차는 체험을 하였고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느꼈다. 이때 입술에서 터져 나온 첫 기도가 있었다. ‘save my soul, save my country’ 나의 영혼을 구하신 주님이 민족과 나라를 구해달라는 간구였다.
  
  상황과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건, 주님을 만나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임을 깨닫는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의 길이니 그 행복을 전하러 나섰다. 이승만은 감옥 안의 양반 출신 청년들을 전도했고 1902년 12월28일 역사 상 감옥 안의 첫 예배를 주님께 올린다. 감옥의 이름도 스스로 복당(福堂. The House of Blessing)으로 바꿔 부른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벋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찬송은 현실이 되었다.
  
  사형수 이승만은 6년 여 감옥 생활 끝에 극적으로 출소한다. 이후 명 연설가, 문장가로 서울과 지방을 누빈다. 
  
  이승만의 열정도 조선의 멸망은 막지 못했다. 1910년, 결국 나라가 망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놀라운 미래를 말한다. 요셉처럼 꿈꾸는 자가 된 이승만은 출소 직후 쓴 ‘독립정신’에서 한민족이 언젠가는 “일류국가(一流國家)”가 될 것이라 적었다. 이승만이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3년에 쓴 ‘한국교회핍박’은 더욱 구체적 형태로 다가올 ‘승리(勝利)’를 말한다. 인용해보자. 
   
  “청년 애국운동가들이 삼삼오오 경향(京鄕)에 나타나고 소리 높여 전도하는 말이 ‘우리는 나라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천국(天國)을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이 다 따라 생기리라’였다. 태극기 사용이 금지된 후로 매 경축일에는 적십자기를 교회당에 높이 달았으며 애국가 부르는 것이 금지된 후로는 찬송가를 대신 사용해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가 가자!’는 곡조를 높은 소리로 기운차게 불렀다. 이에 순검, 병정과 비밀요원들이 틈틈이 찾아들어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게 되었다” 
   
  교회는 불 속에서 크는 법이다. 일제 핍박 속에서 한국 교회는 애국가 대신 찬송가를 불렀고 ‘땅의 나라’가 없어진 상태니 ‘하늘의 나라’를 구했다. ‘오직 주님만 믿으면, 아니 주님만 믿어야 살 길이 생긴다’ 그렇게 믿었다. 절대적 신앙, 절대적 믿음, 절대적 예수의 세대가 지옥의 불에서 생겨난 셈이다. 
   
5. 20세기 초 이승만은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예측했다. 이승만은 ‘한국교회핍박’에서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 같이 특별히 택하여 동양에 처음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긴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벌써 제주도와 북간도,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와 북경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활발히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국인들을 택하사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의 기초를 잡게 하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이 “교회의 일에만 전력하면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을 모두 기독교로 인도할 것”이라고도 썼다. 일본이 칼로 일어나 동양을 집어삼킬 때 이승만은 기독교로 동양을 발전시킬 구상을 한 것이다. 또 “이대로 얼마동안만 계속하면 한국 백성의 장래 문명, 자유, 복락을 손꼽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승만과 같은 선각자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보며, 무덤 속에서 부활을 꿈꿨다. 지옥의 비가 그친 뒤 새롭게 태어날 민족의 미래는, 중국은 물론 자신을 침략한 일본마저 기독교로 인도할 것이라 말했다. 아시아 전역에 기독교 문명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적은 셈이다.
  
6. 이승만 혼자만이 아니었다. 광복 직후 정동제일교회에 모인 김구와 김규식 선생도 각각 “경찰서 10개를 만드는 것 보다 교회 하나를 세워야 한다” “성경 위에 나라를 만들어야 침략 받지 않는 강대국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음을 체험한 탓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건너며 야훼만 믿게 되었던 것처럼, 동방의 이스라엘로 불리던 한민족 지도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한다는 이들이 나왔다. 피와 땀과 눈물은 가슴 저민 고통이었지만 그 가운데 숨겨진 주님의 사랑은 신비로웠다. 
  
7. 이승만처럼 ‘제사장 나라’의 꿈을 꾸던 이들의 믿음은 1948년 건국으로 열매를 맺었다. 35년 쌓인 기도는 같은 해 5월31일 기도를 하면서 나라를 여는 힘이 되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바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문’으로 국회속기록 맨 앞에 실리게 된다. 당시 국회의원 중 기독교인이 10%도 안 되는 척박한 상황이었지만, 198명의 초대의원 모두 순전한 핍박의 신앙에 경의를 표하며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35년 고난 속에서 잉태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민족이 탄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운 ‘잘 못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땅의 나라 없던 시절 하늘의 나라를 구했던 수많은 이들의 눈물 어린 기도의 결과다.
   
  새것이 된 백성과 주님의 언약(言約)관계도 시작됐다. 하나님께 바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문’에 실린 “민생복락(民生福樂)” “남북통일(南北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달라는 간구는 35년 죽음을 오가며 외쳤던 기도의 제목이었다. 주님이 민생의 복락을 주시면, 통일된 한국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평화를 이루어 내겠다는 담대한 ‘제사장 나라’의 선언이었다. 
  
8. 주님은 이 언약을 현실로 만들어 주셨다. 우선 민생복락을 주시어 세계에서 성장스피드 최고인 나라를 만들게 하셨다.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힘이다. 일제(日帝) 핍박 속에서 “살려 달라” 부르짖던 선조들의 기도와 6·25, 4·19, 5·16, 유신과 5·18, 6·29 등으로 이어진 격랑 속에서도 “민족복음화”를 외치며 산기도와 철야기도, 여의도 광장을 메웠던 기도의 힘이다. 
  
  풍요(豊饒)는 그 어머니 경건(敬虔)을 잡아먹는다 했던가? 정작 ‘민생의 복락’을 선물 받은 뒤 우리는 영안(靈眼)이 닫혀져 버렸다. 
  
  남북통일의 사명도, 세계평화의 비전도 희미해졌다. 80년대 이후 현세적 욕망과 이기(利己)의 기도가 판치며 제단의 불도 쇠잔해졌다. ‘민생의 복락’은 선교한국의 조건부 축복일 뿐인데, 꿈을 잊어버리니 백성은 부패와 음란에 빠져 갔다. 썩어간 사회에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끔찍한 재앙이 터졌다. 모두 우리 탓이다. 꿈을 잊은 우리 교회 탓이다. 
  
9. 세상이 어둡다. 조국에 혼란이 덮친다. 교회는 피 묻지 않은 검을 든 채 잠에 빠져 버렸다. 
  
  영적 지각변동을 준비할 때이다. 우선 지난 60년 성장의 그림자, 부패와 음란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우리가 이 땅의 부패와 음란을 회개할 때 미쁘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다. 
  
10. 회개만큼 중요한 것은 정체성(正體性)의 회복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주님이 왜 이 나라를 만들고, 자라게 해 주셨는지 깨닫는 것이다. 
  
  주님이 세상의 끝에서 민족을 살리신 이유는 사명 탓이다. 공포의 심연에 빠져 헤매던 백성을 구하신 이유는 비전 탓이다. 그것은 이승만의 100년 전 기도처럼 일본, 중국을 너머 온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통일한국(統一韓國), 선교한국(宣敎韓國)의 꿈이다. 
  
  내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위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사명과 비전의 성취다. 한국의 현재는 어두워 보여도 그리고 시련이 있어 보여도 사명과 비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심치 말고 낙망도 말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운 것(고후4:16)”이다. 죄에서 돌이킨 우리는 낙심과 낙망이 아니요 사명과 비전을 깨닫는 길로 가자.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통일한국(統一韓國), 선교한국(宣敎韓國)의 꿈을 향해 전진하자. 
  
11. 사명과 비전을 향해 기도하자. 지난 100년 ‘오직 예수’의 신앙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망국(亡國)과 가난(家難)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듯,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분단과 불안과 갈등의 시련을 이겨낼 것이다. 자기를 의뢰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될 때, 기도의 영성을 회복할 때, 바로 그때 지난 60년 이 나라에 임했던 기적은 통일한국에 몇 곱절 강력히 임하게 될 것이다. 
  
  평양, 남포, 원산, 의주, 갑산, 영변, 장진 모든 산골짜기 자유(自由). 自由. 自由가 퍼지게 날 까지 부르짖고 기도하자. 自由가 모든 계곡을 메우는 날, 절망의 산(山)은 깎여 희망의 돌이 만들어 질 것이다. 김일성 가문의 재산으로 태어나 버림받던 백성들은 공포와 궁핍과 저주에서 해방케 될 것이다. 기회, 희망, 꿈이 없다 투덜대던 청년들도 소망을 꿈꾸며 초원과 대륙을 달려갈 것이다. 남북의 백성, 영남과 호남,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산산이 갈라진 7천만은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함께 싸우며 영혼의 자유를 땅 끝까지 전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나오는 그 날을 꿈꾼다. 사명을 위해 생명을 건 세대, 거룩·성결·사랑·용기의 성령으로 가득 찬 그 세대가 나올 때 북한도 살고 남한도 살아날 것이다. 세상은 어두워 보여도 주님이 이 땅에 남기신 남은 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때가 차면 이들이 일어나 나팔을 불 것이고 교회는 깨어나 미스바로 모여들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이때라! 잠에서 깨어나 나팔을 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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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의 새로운 계산법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진에 따르면 100에서 97을 뺀 3과 100에서 96을 뺀 4를 더한 7을 다시 100에서 뺀 93이 앞 두 자리에, 3과 4를 곱한 12가 뒤 두 자리에 자리합니다.
 
90단위의 곱셈 계산은 암산으로 하기 어려운데 인도의 수학법으로 하면 암산으로도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인수분해를 응용한 것이라 합니다. 과연 인도에서는 실제로 이렇게 계산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다른 사실 하나는 현재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도 원래 인도에서 쓰던 숫자를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으로 전하면서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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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어린이들은 구구단이 아닌 19단을 외우고 다닌다 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수학이 인도를 IT 강국으로 이끄는 밑바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출처 :  blog.naver.com/hairgo01/1012292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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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YouTube : Supertramp - The Logical Song)


제15장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

하나님의 성회는 그의 초기부터 믿음생활의 중요성을 인정해 왔다. 성경이 그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생활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믿음은 두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다. (히11:6)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구원(행16:31), 성령세례(행11:15-17), 하나님의 보호(벧전1:5), 자유와 물질적인 공급을 포함한 약속들의 기업(히6:12) 및 증거의 동기(고후4:13) 등은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가운데 있는 것들이다.

모든 세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신자들이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모범에 유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롬4:20-24) 그들은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눅17:5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믿음을 키워야 한다. (롬10:17) 믿음의 생활은 곧 승리의 생활이다. (요일5:4)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때때로 사람들은 위대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가끔 교사들은 이러한 극단주의들을 옹호하였다. 어떤 때는 추종자들이 이러한 가르침들에서 더욱 벗어나 그리스도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로 나타났다. 적극적 및 부정적 고백은 최근에 어떤 집단 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 들여진 표현들이다. 이에 관한 책이나 사용 형태에서 나타나는 정의는 이러한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극단들은 표면화 시킨다는 사실이 곧 고백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진리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1:9) 그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마10:32, 롬10:9,10) 그들은 선한 고백을 유지해야 한다. (히4:14, 10:23)

그러나 사람들이 교리를 강조함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거나 위배할 때는 그들은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주의 일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극단들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떻게 배치되는지 알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에 대한 입장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고백하다”라는 단어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정하다, 혹은 자인하다, 믿음을 인정하다” 등이다. 고백은 또한 믿게 된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이나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과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관점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고백을 적극적인 관점과 부정적인 관점으로 나눈다. 부정적인 것은 죄, 아픔, 가난 혹은 다른 원치 않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고백은 바람직한 상황을 인정하거나 자인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과 강조가 있겠으나 결론은 기분나쁜 일이 부정적인 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해질 수 있으며 좋은 일이 적극적인 고백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같다. 여러 책에 표현된 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신자가 부정적 자세를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를 계속 긍정할 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좋은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는 가난, 질병 그리고 아픔 따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고백할 때만이 아프게 될것이다. 어떤 사람은 질병 자체와 질병의 증상을 인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은 신자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차를 타고, 가장 좋은 것들을 갖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신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그들의 돈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 필요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재정적이든 관계없이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받으며,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와같이 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백하기를 시작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가질수 있다고 가르침 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입 밖으로 나간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말을 충분히 반복하면 입 밖으로 나간 말은 궁극적으로 원하는 축복을 야기시키는 믿음을 낳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이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문제가 없는 인생을 약속하고 있으며 이것의 옹호자들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문맥에서 떼어 생각하거나,그 주제에 관하여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시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극단주의는 진리를 왜곡시키며 궁극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신자들에게 상처주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장에 해를 끼친다. 신자들이 믿음의 생활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신 승리에 대하여 연구할 때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균형잡힌 성경의 강조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신자들을 돕기보다는 당황하게 하는 극단주의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자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서해석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것이다. (고전2:13) 이 원리의 기본적인 적용은 확립된 교리 안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조명에 근거를 둔 교리만이 이 성경적인 해석법칙을 확인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이 약함을 시인하는 것이 곧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시인하는 것이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질병을 시인하는 것이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성경의 조화와 반대되며, 이미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사밧은 적군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었다.(역대하20장)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였으며,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여져서 강하게 되었다.(고후12:9,10)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놀랍게 공급하신 것은 제자들이 무리를 먹일 만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시인한 후에 있었던 일이다.(눅9:12,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수고할 수 있게 지도하신 것은 그들이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시인한 후의 일이었다.(요21:3-6)

이 사람들은 부정적인 고백을 사실과 반대되는 적극적인 고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가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처한 상황을 말하였다. 비록 그들이 부정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하나님은 놀라웁게 간섭하셨다.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해 보면 적극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해진다. 바울, 스데반, 드로비모와 같은 초대교회ㅡ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에 풍부하고 건강한 상태로 살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교리는 성서의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개발될 때만이 건전하게 될 것이다.

“고백하다”에 대한 헬라어는 “같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할 때 죄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의 어떤 약속을 고백할 때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약속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에 관하여 적절하게 말하였다. “당신이 복음 안에서 좋아하는 것을 믿고 싫어하는 것을 배척한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적절하게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교리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고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한 것이 된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소원을 비쳤을 때 그는 가장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대상17:4) 다윗은 재료를 모으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성전건축은 솔로몬이 할 일이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하는 대신에 바울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후12:9)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의 소원이 항상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정욕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타락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기쁨 혹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으로는 정욕이라는 말보다 기쁨이라고 번역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그 잔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다.(눅22:42)
성경은 신자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는 바울이 가끔 그랬던 것처럼 당황하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고후4:8) 그때에 단순히 마음의 소원에 근거한 적극적인 고백을 하기 보다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롬8:26,27)
하나님의 뜻은 항상 신자의 계획이나 욕망보다 우선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4:15)

신자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적극적인 고백을 반복하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기분좋은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을 수도 있다. 신자들은 바울의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고난이 없는 삶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신자는 강청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그것은 강청하는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게 만든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물질적, 육체적 및 영적인 축복의 영역 안에 있으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고백하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양식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지만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1:5)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셨으나(눅24:49), 또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가르치셨다.(눅11:13)

홍해에서 모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출14:15) 신자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깨우쳐 주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다.(롬12:12, 빌4:6, 살전5:17) 예수께서는 기도에 있어서 강청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자기의 손님에게 줄 빵을 구하려고 밤중에 찾아온 강청하는 친구에 대한 묘사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본원리가 되었다.(눅11:5-10)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주님이 기도에서 강청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이다.(눅18:1-18) 이 사람들에게 기도없는 적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강청함을 권유하셨다.

하나님은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아서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명령들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기도에 기름을 부으셨음을 안다. 강청하는 기도는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표시일 수도 있다.

신자들은 이생에서 고난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자가 환경에서 지배당하기 보다는 환경을 지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난과 질병은 신자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되는 환경들 가운데 들어있다.


만일 신자들이 이 세상의 임금들을 본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고난이 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그러나 이 세상의 임금들조차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성장보다는 물질적 육체적 번영에 더욱 관심이 많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들의 본으로 왕중의 왕을 택한다면 그들의 욕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서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것에 대하여 기록한 롬8:17이 진리라고 인정할 것이다. 즉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감추기 보다는 그 약함 안에 있는 영광에 대하여 자랑하기까지 하였다.(고후12:5-10)


그리스도는 부요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마8:20)

하나님이 그의 예비하신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을 축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만일에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필요할 때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중요한 것이 비극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심을 그만 두신 적이 없었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는 고난 가운데 계셨다. 그는 장로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마16:21, 17:12) 그는 고난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셨다.(눅22:15)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그의 고난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인정했다.(눅24:25,26,32)

신자들이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왕의 모델로서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고난당할 수 있음과 때로는 모든 환경을 기분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기분 좋지않은 환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다 왕다운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가 고난당할 것을 보았다.(행9:16). 후에 그는 골로새인들을 위하여 당한 고난을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보았다.(골1:24) 하나님은 신자들의 필요를 공급한다고 약속하시고, 경건한 자를 유혹에서 어떻게 건지는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인생을 다스리는 것은 또한 고난을 포함을 하고 있다. 자신을 주님께 맡긴 신자는 이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만일에 인생이 기준 좋은 경험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환멸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며, 그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눅9:23)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문제들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들은 항상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믿음에 대한 자랑거리일 수도 있다. 이것은 히11:32-40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레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자들은 실재적인 시험을 적용해야 한다.

이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사해 보면 풍족한 사회에 살고 있는 기존의 크리스찬들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들이 믿는 것과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실천하는데 그것이 당신들과 다른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부추긴다.

믿음에 대한 실재적인 시험은 그것이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 가르침이 풍족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가? 혹은 그것이 세상의 난민 가운데서도 역사하는가? 그 가르침이 믿음을 위하여 무신론자의 정권에 의해서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의 손에 순교를 당하거나 가혹한 육체적 상처를 입은 신자들은 자격미달의 신자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우주적인 적용을 지닌다. 그것은 부유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빈민굴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정글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 똑같이 효과가 있다. 그 열매를 시험하는 것은 여전히 교사 혹은 가르침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 결정하는 한 방법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신자들은 레마라는 말을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헬라어 “레마”에 대한 문헌은 거의 없으므로 구두 전달(Oral communication)에서 사용된 그대로 그것을 상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짓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레마는 현재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감을 받은 것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갖는다고 한다.

이 구분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 구분은 헬라어 신약에서나 혹은 70인역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두 단어는 헬라어 신약이나 70인역에서 동의어로 사용된다. 70인역의 경우에 레마와 로고스는 둘다 대화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다바르”라는 단어(번역하면 하나님의 말씀)는 예레미야 1:1과 2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레마와 로고스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23과 25 절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23절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로고스”라고 썼고, 25절에서는 “주의 레마는 세세토록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엡5:26에서 신자들은 “물로 씻어 레마로” 깨끗이 되었다고 했다. 요15:3 에서 신자들이 “내가 일러준 로고스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한다.

로고스와 레마 사이의 차이는 성경적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로 말해졌든지 레마로 표현되었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영감된 것이며, 영원하고 힘이 있는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든지 말해졌든지 그 기본적인 특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둘째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있다. 성경구절은 믿음의 유추나 문맥에 관계없이 선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레마 원리라고 하는 이런 작용에서 사람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 그 말씀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몇가지 예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 신자들이 성경의 구절을 문맥에서 따로 떼어 놓거나, 어떤 구절은 영원하고, 다른 구절은 현재의 것으로 하는 크리스찬 실존주의의 형태를 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결론

어느 교리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이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지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진리의 전체적인 견해 이하에 근거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목적에 해를 끼칠 뿐이다. 그것은 때로 성경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견해보다 더 해롭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다면 그 가르침이 성경의 다른 원리와 모순되거나 극단적인 강조를 하고 있어도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료, 필요에 대한 공급, 믿음 및 신자의 권위 등과 같은 위대한 진리를 가르친다. 성경은 절제된 마음이 승리하는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서 항상 생각해야 한다.

잘못 사용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위대한 진리에서 물러서려고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과장된 강조가 그들의 기대를 항상 만족시키지도 못하며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하나님까지도 등질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탈선들이 발전되어 가는 사실이 그것들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아니다. 의견차이의 존재가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열심히 연구해야만 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이 충실히 전체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이유이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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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좋은지 알아.

결혼한 지 2년이 넘도록 사랑한다는 말도예쁘(?)다는 말도 전혀 해 주지 않는 무뚝뚝한 남편에게 거세게 항의하는 새내기 어린 사모에게 던져준 남편의 말이었다.

“...  … ... ?

내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그 쟁쟁한 경쟁자(?) 들을 다 제쳐 놓고 이 남자와 결혼을 했더란 말인가?  성경이 좋아서 언제나 성경이야기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껌벅거리고 앉아 있던 한 가난한 신학생의 무뚝뚝한 그 점에 영적인 매력이 숨겨져 있다고 착각(?) 하고
결혼을 결심한 자신에 대한 후회가 막심했다.


여자는 듣는 데 민감하고, 남자는 보는 것에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좋은 줄 알라니?

그 말 한마디만 믿고 살아가자니 때로는 외롭기도 했고때로는 슬프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어쩌면 무뚝뚝한 자신을 커버하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던졌을 남편의 그 말소리가 꽤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지게 되는 것은 또 어쩐 일인가?  내가 그만큼 무디어진 걸까? 아니면 그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는가?

나는 그 후자라고 믿는다. 세월은 내게 진실이 없는 달콤한 언어보다는 진실을 수반한 침묵의 언어가 가져다주는 깊은 의미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행함은 없이 말만 번드레한 정치인들, 목회자들, 직분자들, 남편들, 아내들, 친구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결혼생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좋은 것임을 내가 좀 더 일찍이 배웠더라면...,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원망하며 슬퍼하며 목마르게 지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안 그런가?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요한복음 10:25절下반절 참조 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말보다는 행함에 그 무게를 더 실어주고 계심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때론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 것 같아도그분이 사랑이심을 의심치 말자. 오늘 당장 내 귀에 들리는 소리도 없고 내 눈에 보이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하여도 그분의 그 침묵하심이 곧 나를 위하심인 줄 믿는다면…,  내 믿음의 여정이 그렇게 목마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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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는

5년째 극심한 가뭄을 맞고 있습니다.


2014년의 겨울은

기상 관측을 한 이래로

약 150년 만의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그러나 올 겨울은

지난해보다 더욱 가물었습니다.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는 씨에라 네바다는

3월 말에 이미 대부분 지역의 눈이 녹았습니다.


급기야 지난 4월1일,

캘리의 제리 브라운 주지사는

2013년 대비 25% 강제 절수라는

최후의 카드를 빼들었습니다.


국립 기상대에서는

5단계의 가뭄을 규정하고 있는데

2단계(D2)를 Severe Drought으로 규정합니다.


Severe Drought보다

더 심각한 가뭄이 D3인데

D3는 극심한 가뭄(Extreme Drought)을 말합니다.


D3보다 더 극심한 가뭄은

Exceptional Drought(D4) 라고 해서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유례없는 가뭄을 말합니다.


2015년 3월의 경우

캘리의 D3지역이 70%

D4지역이 무려 50%가 넘습니다.


이 수치는

캘리의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뭄이 심하면

당연히 일자리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가주 농산물의

대다수를 수확하는 센트럴 밸리 곳곳에서

No Water No Job이란 팻말과 현수막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뭄이 계속되어 강수량이 줄면

캘리의 대명사 가운데 하나인 야생화도 피지 않습니다.


※ 아래의 야생화 사진은

   모두 2015년에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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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의 개화에는

날씨와 강우량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비가 내리는 양보다는

비록 비가 적게 오더라도

얼마나 자주 왔느냐가 더 큰 영향을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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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작년처럼

캘리는 최악의 가뭄을 맞았지만


그래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멋진 야생화를 피워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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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야생화가 발아할 무렵과

꽃을 피우는 시기에 맞추어

절묘하게 비가 와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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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근 3-4년 동안

꽃을 보기 힘들었던 카리조 평원에도

많은 꽃을 피워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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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캐스터를 포함한

앤털롭 밸리의 지역은


꽃이 핀 지역과

피지 않은 지역이

극명하게 갈리워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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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경우

파피 보호 구역 주변에서

그나마 꽃을 볼 수 있었지만


올해의 경우

파피 보호구역의 야생화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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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건너편에는

그런대로 꽃들이 피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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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올해 야생화가 가장 잘 핀 곳은

바로 야생화 삼각지역 주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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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삼각지역은

골든 밸리, Little Oak Valley와

138번을 이어주는 지역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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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하차피의 블루릿지와

앤젤레스 국유림의 Mt. Liebre와

Mt. Sawmill 사이의 골짜기를 앤털롭 밸리라고 부르는데


야생화 삼각지역은

바로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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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이

야생화 삼각지역을 잘 모르는 이유는

그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또한

파피보호 구역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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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말하면

야생화 삼각 지역은

발품을 팔아야 접근이 가능하며


때로는

비포장 길도 가야 하기 때문에

일반 차량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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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장소를 알고 싶어서 가는 길을 묻는 이들이 있는데


산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같이 가지 않는 이상 알려줘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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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갔던 작가들은

이곳 삼각지역의 야생화가

올해 최고의 야생화였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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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야생화 길은

그야말로 숨막힐 정도로

환상적인 야생화 길이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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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도

이곳에 야생화가 핀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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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캘리의 계속된 가뭄으로


야생화는 점점 더

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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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중순 경에

비가 한 번만 더 내렸더라면

남가주 대다수 지역의 야생화는 절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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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대하던 비는

끝내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피어나던 야생화는

절정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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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극심한 가뭄 중에도 

그나마 좋은 야생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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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상학자들은

가주 뿐 아니라 미국의 남서부에

메가 가뭄(Mega Drought)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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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년 동안 이어지는

메가 가뭄이 실제로 닥친다면


미국 남서부의

아나사지 인디언들이

가뭄으로 그들의 정든 집을 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캘리를 버리고 떠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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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 속에서

야생화를 찾는다는 것은

사치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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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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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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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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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a4.bmp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a5.bmp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a6.bmp  
    정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a7.bmp
    정녕 중요한 것은 당신이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열 네 번째 
질문 기독교인의 소송

기독교인은 소송에 연관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의 원칙이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고소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다른 신자들을 소송하는 것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권면(고린도전서 6:1-8)하면서 바울이 가진 주요한 관심사는 그러한 행위가 교회의 평판과 그리스도에 미치는 불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이해하면서, 언제 법적 행동이 적절하고 언제 적절하지 않은가를 질문하는 것은 적합합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행위에 대한 권위있는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일 그것이 그러한 행동을 허락하는지 아니면 금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은 상해나 손실에 대해서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 니다. 복수에 관한 모세의 율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 출애굽기 21:23,24)은, 오늘날의 공의에 대한 서구세계의 표준으로는 잔인하고 미개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복수하는 일을 제한하고 가족의 불화를 없애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생명 은 생명으로 혹은 눈에는 눈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형벌은 없습니다. 덜 심각한 경우에는 유죄 당사자가 가해자가 받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금전을 지불할 수 있 었습니다 (비고. 출애굽기 22:12 - 23:9). 사울과 그의 후계자의 왕정시대 전에는 재판은 흔히 그 도시의 장로들이 행했습니다 (룻기 4:1-12). 왕정시대에는 시민 사이의 잘못과 범죄에 대한 징벌은 왕과 그의 행정관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열왕기상 3:16-28).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표준의 행위를 가르쳤습니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며, 겉옷까지 내어주고, 그리고 십리를 동행하라고 지시했 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8-48, 6:14,15). 그러한 행위는 악을 선으로 극복하게 만들었으며, 잘못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를 개심(改心)하게 만드는 의도된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로마서 12:17-21). 이러한 “새로운 의로움”은 상해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상해한 것 에 대해 벌을 주며, 혹은 손해에 대해서 배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속 마음 가짐과 그의 “원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가해 한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보상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 하 는 행위가 개인의 화해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 삼자인 기독교인에게 그들 사이를 중재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었습 니다. 만일 그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그 문제를 전체 교회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기를 거절할 때에는 그를 이교도인과 같이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18:15-20). 

고린도전서 6:1-8에는 사도 바울이 신자가 다른 신자에 대해 세상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으며 (고린 도전서 1:26-31), 그 소송은 재정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인 사람에 대한 것을 취급했었기 때문에, 그 소송은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는 이름있는 부자 두 사람이 포함되었을 것 같습 니다. 그 소송에 대한 원고(原告)는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거나 (마태복음 5:38-48)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교회를 포함시키는 대신에 (마태복음 18:15-20), 소송을 제기한 것처 럼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세상 법원 앞에서 두 신자들이 투쟁하는 것이 알려짐으로서 기독교 지역 사회가 추문을 빚어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혜” 로 소문났던 교회(고린도후서 11:19)에 그러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고린도전서 6:5)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치욕을 안겨주는 것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을 뻔하였다고 (고린도전서 6:1-7) 그 원고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피고가 불의를 행하고 속였다고 (고린도전서 6:8)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그러한 일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2-6). 바울은 만일 죄를 범한 사람이 “이방인과 세리”라고 교회가 선언하면 그 소송이 적당 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7). 아마도 그러한 소송은 세상의 정부가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며,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고 하는 로마서 13:1-5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를 끼쳤을 때, 그 피해를 입은 신자는 그 문제 를 하나님의 판단에만 맡기고 단순히 잊어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 신자가 기도하고 또 주의 깊게 고려한 후에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에는 먼저 당사자와 직접 만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만일 그것 을 통해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믿는 사람인 중재인을 찾아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교회 앞으로 (담임 목사, 인정받는 장로나 집사,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중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때때로 법적 충돌은 신자와 신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바울 자신은 로마 법 아래서 자신을 방어하는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사도행전 16:37-40. 18:12-17, 22:15-29, 25:10- 22). 

명백히 바울은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을 시민에게 관계된 모든 법적 권리의 상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정부의 기능이 정의를 구현하고 잘못할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령님께서 주신 총명함으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또한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신자에 대한 질문은 절대로 “어떻게 내가 개인적인 복수를 할것인가?” 가 아닙니다. 대신에, 적절한 질문은 “내가 어떤 행동을 (소송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해야 사회의 정의를 가장 잘 구현하며,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고,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향을 가장 적게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소진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잘못된 일을 고치기를 거절한다면, 그 때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마태복음 5:38-48, 6:14,15의 말씀과 로마서 13:1-5의 말씀의 균형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개인의 동기부여를 검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1. 상해의 배상에 대한 나의 욕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속 법원의 힘에 호소하려는 것인가? 
2. 고린도 사회가 아닌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 만일 내가 세상 법원에 소송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인가? 
3. 나는 나의 청구(혹은 방어)에 완전히 정직한가? 아니면 자기기만을 통하여 상해금 액보다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보상을 받기 위하여 (혹은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 고 있는가? 
4. 성령님은 절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에 반하는 권면을 하지 않으시기 때 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기도한 후에, 어떻게 하는 행동이 “성령님에게 좋게 보이는가?” 
5. 추가적인 보호의 일환으로, 교회의 지도자나 장로 직분의 위치에 있는 다른 신자들의 권면은 무엇인가? 

관심사: 
미국 사회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배상 책임 보험 (liability)과 다른 형태의 보험이 그것입니다. 공중을 위한 정책은 여러 가지 상해에 대한 개인 보상의 방법으로 보험을 제정했습니다. 여러 경우에 소송 관계자는 법적으로 피고일 지는 모르지만 그 상해에 대한 실제적인 지불인은 보험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기독교인이 다른 신자의 나쁜 운전 때문에 심하게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두 당사자 사이의 법적 소송은 개인적인 악한 감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사고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보험자의 자동차 배상 책임 보험이 보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신자는 (고린도의 경우와 같이) 세상의 법정으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기 전에 교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지는 않으며, 공중의 정책에 의해서, 피해자가 단지 법적 체계를 이용하도록 함으로서 그 상해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 지역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신자인 변호사들이 해를 끼친 사람을 위한 조정 혹은 중재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그러한 그룹으로부터 중재를 받는 것에 대한 법적인 이점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적절한 합의서를 통하여, 기독교 중재 그룹이 내린 결정이 세상 법정에서의 결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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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思慕曲) 최송연 그립습니다 힘들 때면 먼 산을 향해 나즈막이 속삭입니다 사랑합니다 외로울 때면 새벽 공기 속에 조용히 고백해 봅니다 밤과 낮 꿈속에서조차도 임 그리는 내 마음은 나도향처럼 순전하고 그 사랑 내 영혼의 별이 됩니다 죽도록 사모하는 나의 주님, 당신의 그 거룩한 성상(聖像) 나 친히 만나뵐 수 있는 그날만이 내가 살아가는 완전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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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하심의 엄정함과 신실함을 인생에서 확인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정말 헛된 것입니다.

이런 확인은 특별한 경험이나 기적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누적되는 인생의 무게와 영혼의 깊은 갈증에 대해 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인생은 정말 허무합니다.

인생이 다만 쳇바퀴를 도는 것이라면 어떤 깨달음, 어떤 기쁨, 어떤 우연과 해프닝에

삶의 모든 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창조에서 심판까지 하나님이 지으시고 목적하시고 채우시는 현재가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우연이나 체념에 모든 것을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감싸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눈물과 실패를 가지고도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라는 방점이 찍힐 때까지

놓아두시지... 않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장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시간과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 박영선, <박영선의 다시 보는 로마서> 중에서

 

 

출처: 한우리성경강해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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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는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생명은 고귀하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하나밖에 없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가요?

 

  천민자본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치였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가치관이 전도된 아노미 현상 때문일까요?

 

  이상한 이야기지만, 천민자본주의적 계산법으로 따져 봐도 인간의 값어치는 꽤 나갑니다. 한 예로, 이 하나가 부실해 새로 해 넣으려 해도 수백만 원이 들고, 신장 하나 이식하려 해도 수천만 원이 듭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의 몸값은 아마 수십억 원은 족히 될 것입니다.

 

  웃기는 비유지만, 사람 한 명이 걸어 다니는 것은 수십억 원짜리 빌딩 한 채가 걸어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인간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이 물려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뿐인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 인데, 소중한 생명을 담보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입니다.

  다시 빈손이라 생각해 마음을 비우고 새롭게 시작합시다. 비우면 언제든 채워질 것이고, 채워지지 않는다면 채워 주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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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시인의 부자 십계명]

1. 자녀가 보통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면 당신은 부자다.

2. 이웃이 잘될 때 흐뭇한 마음이 들면 당신은 부자다.

3. 남을 위해 돈을 쓸 때 주저하거나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으면 당신은 부자다.

4. 식사할 때 건강함과 주어진 음식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들면 당신은 부자다.

5. 남을 비판하기 보다는 염려와 축복이 더하면 당신은 부자다.

6. 과거를 후회하거나 현재를 한탄하기보다는 내일에 대한 꿈이 더 크면 당신은 부자다.

7. 가장 중요한 일을 할 때나 가장 바쁠 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당신은 부자다.

8. 교회에 헌금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재산이라 생각할 수 있으면 당신은 부자다.

9.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부자다.

10.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당신은 정말 큰 부자다.

 

고객의 만족에 매몰되는 교회

차성도 교수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고객을 만족시키지 않고서는 어떤 성공도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고객의 만족도는 점차 중요시되고 있다. 그래서 연말만 되면 고객의 만족도가 높은 회사나 상품들이 대문짝처럼 발표된다. ‘고객을 만족시켜라! 그리해야 성공할 것이다!’라는 슬로건이 대세를 이루면서 ‘고객만족’이라는 세상가치가 교회에도 보란 듯이 들어와서 설교, 예배, 주일학교에서도 고객(?)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시도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핵심요소가 설교라는 설문결과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는 너무도 중요하다. 이토록 중요한 설교에서도 고객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설교는 점차 ‘좀 더 달콤하고 좀 더 순하게’ 변질되고 있다. 마치 술꾼들이 순도 100%의 위스키를 그대로 마실 수 없어서 순하게 희석하거나 달달하게 주스를 섞듯이... 왜냐하면 고객들이 입에 쓴 설교보다는 좀 더 달콤하고 좀 더 순해서 아무런 부담 없는 설교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복음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복음까지 적절하게 희석해서 복음도 달콤하고 순하게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6)처럼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기에 모든 교회들은 예배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이같이 중요한 예배에서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도 예외가 아니다. 예배에도 점차 바빠지고 편리를 추구하는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여 예배는 점차 ‘좀 더 짧고 좀 더 편리하게’ 변질되고 있다. 이제는 설교의 내용과 관계없이 20분 이내여야 명설교이고, 예배도 50분 이내에 마무리해야 은혜롭단다.

 

또한 고객들이 골프약속이나 각종행사 또는 바겐세일쇼핑이나 학원수업에 늦지 않으시도록 그들의 편리를 최대한 충족시켜드리는 예배도 마련해야한다. 고객들의 이런 요구들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고객들이 주저 없이 옮겨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배의 인스턴트 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예배가 고객의 만족이라는 세속가치에 빠져서 고객 중심으로 변질되고 있지만,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시 86:12)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주 나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송하는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여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의 최대 관심은 자녀교육이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자녀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자녀를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양육이 되어야한다.

 

그럼에도 명문학교에 입학해야 성공이며 무엇이든 재미있어야만 한다는 세상가치를 그대로 답습하여 주일학교는 점차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재미있게’ 변질되고 있다. 고객들의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주일학교를 최대한 간단히 줄이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일학교를 짧게 끝내면 끝낼수록 칭찬을 받는 반면에 주일학교를 1시간 이상 진행한다거나 예전처럼 토요일에 제자반을 운영하는 교사는 외려 지탄의 대상이 된다.

 

더욱이 교회의 중직들까지도 자녀가 수험생이라는 빌미로 학생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꺼림으로 중고등부가 점차 와해되고 있다. 교회의 중직들조차도 지금 중고등부가 와해되면 도미노처럼 장차 교회 전체가 와해된다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또한 고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다보니 주일학교에 재미는 넘쳐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고갈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일학교가 고객의 만족에 매몰되어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재미있게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라는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b)라는 고백을 통해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순종해야하듯이 우리는 사람의 만족보다는 하나님의 만족을 추구해야한다.

 

성경은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일군으로 삼은 것은 바로 고객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임을 분명히 명하고 있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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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속에 핀 사랑꽃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삶의 기쁨과 설레임이며

아름다운 나의 희망입니다

 


 


 

당신이 나를 위하여

사랑을 하고 있다기에

나의 마음을 비워두었습니다


그 사랑이 이 마음에

촉촉이 스며들도록

내 영혼과 가슴을 비워두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맺어온 인연의 끈이

이어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기를 바래봅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혼자인 사랑이기보다는

그 사랑을 서로가 나눌 줄 알면서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서로의

참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어느날

당신 마음에 태풍이 휘몰아쳐

당신의 마음이 흔들릴때

횡단보도 빨간 신호등이 켜질때

어쩔 수 없이

멈춰서는 자동차처럼

당신 마음이 힘들어 하고 있을때

나의 부족한 사랑이지만


 

당신의 마음밭에

아름다운 사랑의향기로

당신의 마음에 힘이 되는

사랑의 꽃을 피어 드리겠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랑이 흔치는 않습니다

물에 비치는 꽃처럼 아름다운 그런사랑 

 

 

 



                                                                      
 
선인장 닮은 꿈나무 
                    최송연
 
온상에서 
곱게만 자라는 나무 
너무 부러워하지 마

그것들은 줄기가 연해서
작은 비바람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부러지니까

힘들었던 과거
아팠던 인간관계
그 속에 갇힌 채
울고만 있으면 뭘 할 수 있나

차라리
쓰라린 경험을 거름삼아
마음 밭 토양을 가꾸고 
그곳에 날마다 한 그루 
꿈나무를 심는 거야

사막에서도 
한 송이 고운 꽃을 피우는 
선인장 닮은 꿈나무를 말이야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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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th Hahn State Recreation Area에서

오후 4시 20분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약 1시간30분 동안

두 대의 카메라(Nikon & Canon)로 촬영한 다운타운의 석양사진입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시간 순서가 아닌 임의의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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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 부근으로 헬기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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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 뒤로 눈덮인 Mt. Baldy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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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 Lee의 HOLLYWOOD sign 판이 보입니다. Mt. Lee는 산타 모니카 산맥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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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다운타운의 color가 변하기 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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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건물이 햇빛에 반사되어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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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 Baldy의 컬러도 핑크색으로 물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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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그가 없다면 다운타운 뒤로 보이는 눈덮인 볼디도 더욱 선명하게 보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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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의 다운타운의 모습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너 늙어봤냐? 난 젊어봤단다 
​ 
삼십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 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백수라고 부르지 

월요일엔 등산 가고 화요일에 기원 가고 
수요일엔 당구장에서 
주말엔 결혼식장 밤에는 초상집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세상나이 구십살에 돋보기도 안쓰고 
보청기도 안 낀다. 
틀니도 하나 없이 생고기를 씹는다.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하게 하는가 
세상은 삼십년간 나를 속였다.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말려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말도 배우고 중국말도 배우고 
아랍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거야 

너 늙어 봤냐 난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비 되고 
할배 되는 아름다운 시절도 
너무나 너무나 소중했던 시간들 
먼저 가신 아버님과 스승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 
인생이 끝나는 것은 포기할 때 끝장이다.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본국에서 유명한 어느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 자신을 ‘서울의 어느 신학대학원의 교수라’고 밝힌 한 교수님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가?’ 라는 거창한 명제 아래 밝힌 글의 요지는 결국, 현대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끝을 맺고 있음을 보았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학대학교 교수라고 자신을 밝힌 그 교수님은 이런 엄청난 명제를 다루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단 한 구절의 성경 말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과 또 여러 신학자의 견해가 그러함으로 그러하다.라고 하는 경솔함에 놀랍다 못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다시 말해서 그 교수님은 성경 말씀을 가감(減)하는 죄를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범하고 있으며 들은풍월이나 자신의 지식만으로 성경을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 교수님 한 분뿐이랴, 안타깝게도 현대는, 성경을 자신의 잣대로, 입맛대로 가감하기도 하며 다시 쓰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성도)는 오늘날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요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요 10장 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라고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직통 계시적 형태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성도)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어야만 한다. (행 27: 22-25 참조)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1. 특별계시, 혹은 기록(문서)계시, 2. 일반(자연)계시로 나눈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말씀을 가르키며,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성도(양)는 반드시 목자의 음성, 곧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들의 속에 계시면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몫이며, 반드시 성경 말씀을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밝히 들려지고 필요한 말씀이 생각나게 도우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양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바른길,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다. 언제 어느 때 장사가 잘되고 또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고 없고, 등등…이런 유의 점치는 형식이나 족집게 점쟁이 식의 음성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4: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다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 분별 법 성서에 따른 근거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 21절) 했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 할 때나 무시로 기도 할 때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그 음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수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 내는 훈련을 시키셨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서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 되어야만 한다.

1.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23절 하반 절)".

2.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성구가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 14: 26절)

3.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 32절)”.

4.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치며 성령님의 하실 일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 의식이나, 직통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자주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무언(無言)의 향기 최송연 어둡던 내 영혼 주님의 빛 비취셨네 내 영혼에 비친 주의 빛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소망이게 하소서 삭막하던 내 영혼 주님의 사랑 임하셨네 내 맘속에 임한 주의 사랑 세상의 삭막함을 감싸 안는 향기이게 하소서 주의 은총으로 산 생명 된 영혼 그 생명의 향기 바람결 따라 멀리 퍼지고 꽁꽁 언 땅 헤치고 돋아나는 새순처럼 깨끗한 기상 무언(無言)의 향기 되어 널리 전하여질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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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교회의 휴거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은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변화할 것은 간절하고 복스러운 교회의 소망이다.” (살전4:16, 롬8:23, 딛2:13, 고전15:51,52) 

예수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가 다시 지상에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주의 깊게 경고하였다.(마24:42-51, 25:1-13, 막13L37, 눅12:37) 그들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마24:3) 그의 재림에 대한 확증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요14:2,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쳐다보는 무리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되풀이 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1:11) 이것은 그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서신서가 예수의 재림을 가르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재림의 절박성은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구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비록 초림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대의는 재림이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신자는 끊임 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빌4:5, 히10:37, 약5:8,9, 계22:10)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기대의 상태에서 살았다.(고정1:7, 살전1:9,10) 고전15:51과 살전4:17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신자들의 휴거

재림에 관한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은 죄인들의 심판을 수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건으로 말하며, 또 다른 경우는 재림이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며 지상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휴거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나,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웹스터 사건”(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Unabridged)에서 휴거에 대한 정의를 “그리스도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들을 그들이 그 주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지구 위의 왕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린다. “휴거된다.”는 단어는 살전4:17의 “끌어 올려”라는 표현대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실 때에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구에서 갑자기 없어지고, 불신자들은 남아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마24:26-42)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보고 통곡할 때라고 말씀하셨다.(마24:30)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진노의 때라고 말하였다.(살후1:7-10)

살전 4:13-18에서 바울은 재림의 다른 양상을 생각하였다. 이 간단한 구절은 신약에서 휴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가르침이며 이것은 오직 살아있는 신자와 주 안에서 죽은 신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이때에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공중에 오시는 것을 묘사했으나 슥14:4 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재림시에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요일3:2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살전4:17에서 사용된 “끌어올려”에 대한 헬라어는 행8:39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준 후에 사용된 “이끌리어”라는 단어와 똑같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단어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휴거시에 지구에서 신자들을 끌어올릴 능력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살후2:1에서 바울은 휴거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에 대한 헬라어는 히10;25에서 예배를 위한 크리스찬의 모임에 대하여 사용된 “모이기”와 똑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의 주변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초자연적으로 휴거되는 것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녹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지구에서 기적적으로 없어진 것이다.(창5:21-24) 히브리어 기자는 이 경험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돌연히 없어진 것을 보여준다.(왕하2:1-13) 고전15:51은 살전4:14-18과 똑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은 휴거시에 살아있는 신자와 죽은 신자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불렀으며(고전15:51), 전에는 숨겨졌으나 성령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라고 하였다. 빌3:21에서 바울은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낮은 몸”이 변하게 되는 때와 연결 시키고 있는데 이것 역시 휴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다.

휴거에 관한 구절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구절은 그의 성도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골3:4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다서 14절 역시 그의 공적인 나타남과 관련된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을 행하시려고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고 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그의 오심에 대한 두가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의 중간 시기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악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대환란 시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다. (단12:1, 10-13, 마24:15-31, 살후2:1-12)

크리스찬과 대환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서 오시기 전에 심각한 환란을 견뎌야 하지만 교회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시기 이전에 휴거될 것이다. 살후 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대환란은 주의 날의 일부이다.)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라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바울의 시대부터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이 막고 있다. 오직 교회가 휴거에 의해서 지구에 없어질 때 이 사람은 공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는 휴거에 대한 구절에 이어서, 살전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살전5:2,3)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살전5:4) 바울이 여전히 주의 날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살전5:9) 바울이 대환란을 포함하여 주의 날의 심판에서 신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신약성경은 여러차례 말한다. 그러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신약에 충만하게들어있는 임박성에 대한 가르침(the teaching of imminence) 시대의 마지막 징조가 나타날 때 그들은 위를 보며, 대환란이 아니라 그들의 구속을 기대하면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눅21:28)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들은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휴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임박성의 교리(the doctrine of imminence)와 조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대환란 전에 세상에서 들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도 부합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소돔에서 롯을 구출할 때까지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성경의 무게는 환란 전 휴거를 지지하는 편에 실려 있다. 신약에서 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절박성이 강조된다. 휴거 이전에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동안 디도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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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각 분야의 명사들의 명단을 선정해 소개하는

영국의 온라인 인명사전 사이트 Biography online에 게재된

역대 가장 위대한 여자선수 리스트 45인에 김연아 선수도 포함되었네요.

저처럼 피겨 스케이팅을 제외하고는 절대적인 스포츠 문외한도

상식을 쌓기 위해 이름을 익혀둘 정도였던 레전드 선수들도 많이 눈에 띄는데요.

              

( biographyonline.net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출신의 정치철학·교육 전문가인

Tejvan Pettinger 씨가 2004년에 설립한 온라인 인명사전 사이트입니다.)

      

   

현존하는 여자선수들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선수들까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세계 여자 스포츠의 최고의 별들이 망라된 리스트입니다.

이 리스트에 포함된 45명의 세계 여자 스포츠 스타들 중 김연아 선수는

두 번째로 최연소이고요, 유일한 아시아 국가 출신 선수이네요.

(정정: 아시아 국가 선수로는 인도의 사니아 미르자와 함께 2명이 포함되었습니다.

정정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또한, 피겨 스케이터들 중에서는 소냐 헤니와 페기 플레밍, 김연아 3명

리스트에 포함되었습니다.

        

이 리스트에서 김연아 선수는 마리아 샤라포바(28번째)에 이어

29번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Famous female athletes

           

A list of the greatest female athletes.

가장 위대한 여자선수 리스트 (45인)

           

출처: biographyonline.net Click

              

로티 도드 Lottie Dod (1871 – 1960) (영국, 테니스, 양궁, 골프)

5회 윔블던 단식 챔피언, 1908년 올림픽 양궁 은메달, 브리티시 여자 아마추어 골프 타이틀 획득,

영국 필드하키 국가대표.

           

베이브 디드릭슨-자하리아스 Babe Didrikson Zaharias (1911-1956) (미국, 야구, 육상, 골프)

           

파니 블랭커스-코엔 Fanny Blankers-Koen (1918-2004) (네덜란드, 육상)

1948년 올림픽 육상 100m, 200m, 80m 허들, 400m 계주 4관왕

            

라리사 라티니나 Larisa Latynina (1934 – ) (구소련, 체조)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올림픽 체조 개인 종목 금메달 14개 & 단체전 메달 4개로 최다기록.

       

빌리 진 킹 Billie Jean King (1943 – ) (미국, 테니스)

총 38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 보유 - 이중 12회는 단식 우승 타이틀.

1973년에 Bobby Riggs와의 성대결에서 승리.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Martina Navratilova (1956 – ) (체코/미국, 테니스)

18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과 31개의 메이저대회 복식 타이틀 보유. 총 177회 우승.

         

소냐 헤니 Sonja Henie (1912 – 1969) (노르웨이, 피겨 스케이팅)

3회 올림픽 챔피언 ('28, '32, '36년), 10회 월드 챔피언,

당대 최고 개런티의 헐리웃 여배우.

          

베릴 버튼 Beryl Burton (1937 – 1996) (영국, 사이클)

5회 트랙 레이스 월드 챔피언 & 2회 도로 레이스 월드 챔피언,

무려 25년 연속으로 국내 무대를 평정한 영국 여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윌마 루돌프 Wilma Rudolph (1940 – 1994) (미국, 육상)

1960년 올림픽 100m, 200m, 400m 계주 3관왕.

미국에서 여자 육상을 메이저 위상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

      

마가렛 스미스 코트 Margaret Smith Court (1942 – ) (호주, 테니스)

24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 보유, 1970년에 4개의 그랜드슬램 대회 타이틀을 모두 석권.

        

그레테 바이츠 Grete Waitz (1953 – 2011) (노르웨이, 마라톤)

마라톤 코스를 2시간 30분 이내에 주파한 최초의 여성.

뉴욕 마라톤 9회 우승, 크로스컨츄리 세계선수권대회 5회 우승.

           

크리스 에버트 Chris Evert (1954 – ) (미국, 테니스)

18개의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 3회 복식 타이틀.

단식 경기 승률 89.9%로 당시 최고 기록.

            

나디아 코마네치 Nadia Comaneci (1961 – ) (루마니아, 체조)

1976년 올림픽 3관왕. 체조에서 6.0점 만점을 최초로 받은 선수.

           

재키 조이너-커시 Jackie Joyner-Kersee (1962 – ) (미국, 육상)

가장 성공적인 여자 육상선수 중 1명. 올림픽 7종경기 & 멀리뛰기 금메달

         

슈테피 그라프 Steffi Graf (1969 – ) (독일, 테니스)

22개의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 - Open era 시대 최고 기록.

377주 연속 월드랭킹 1위 기록.

        

아니카 소렌스탐 Annika Sorenstam (1970 – ) (스웨덴, 골프)

가장 성공한 여자골퍼. 72차례 공식 LPGA 타이틀 획득.

          

미아 햄 Mia Hamm (1972 – ) (미국, 축구)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 275 경기 출장, 월드컵 2회 & 올림픽 2회 우승.

국제 경기 153골 기록.

         

클라라 휴즈 Clara Hughes (1972 – ) (캐나다, 사이클, 스피드스케이팅)

1996년 하계올림픽에서 사이클로 2개의 올림픽 메달 획득 후

2006년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5,000m 올림픽 금메달 획득.

          

테글라 롤로프 Tegla Laroupe (1973 – ) (케냐, 마라톤)

케냐 여자 마라톤의 영웅. 마라톤 세계기록 기록(지금은 깨짐),

하프-마라톤 5회 월드 우승. 현재 UN 스포츠 대사로 활동.

       

폴라 래드클리프 Paula Radcliffe (1973 – ) (영국, 마라톤)

현재 여자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 2005년 마라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모니카 셀레스 Monica Seles (1973 – ) (유고슬라비아/미국, 테니스)

1990년에 프랑스오픈 최연소 우승자에 등극 (당시 16세).

9개의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 보유.

           

캐시 프리먼 Cathy Freeman (1973 – ) (호주, 육상 400m)

Commonwealth Games(영연방 올림픽)에서 우승한 최초의 어보리진 선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타티아나 레베데바 Tatyana Lebedeva (1976 – ) (러시아, 멀리뛰기 세단뛰기)

멀리뛰기와 세단뛰기 양쪽 모두에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도약의 여왕'이란 별명으로 불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과 3개의 올림픽 메달 보유.

             

비너스 윌리엄스 Venus Williams (1980 – ) (미국, 테니스)

전 월드랭킹 1위 테니스 플레이어.

현재까지 7차례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 획득 & 13개의 복식 타이틀.

동생 세레나 윌리엄스와 함께 여자 테니스에서 애슬레티시즘의 신기원을 이룸.

          

호프 솔로 Hope Solo (1981 – ) (미국, 축구)

2000년부터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 골키퍼 1순위.

2008년과 2012년 올림픽 금메달, 2011년 월드컵 준우승.

            

세레나 윌리엄스 Serena Williams (1981 – ) (미국, 테니스)

현재까지 19개의 그랜드슬램 싱글 타이틀 획득 & 15개의 복식 타이틀.

4개의 올림픽 금메달 보유.

        

케이티 테일러 Katie Taylor (1986 – ) (아일랜드, 복싱)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 아일랜드에서 스포츠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여자복싱의 명성을 크게 견인.

           

마리아 샤라포바 Maria Sharapova (1987 – ) (러시아, 테니스)

4개의 메이저 그랜드슬램 대회 모두 석권, 2012년 올림픽 은메달.

스포츠 이외의 분야에서 자신만의 비지니스와 모델 활동으로도 인기를 끔.

       

           

김연아 Kim Yuna (1990 - ) (대한민국, 피겨 스케이팅)

2010년 올림픽 금메달. 종합점수 세계 최고기록 보유 

           

          

- 이 리스트에 선정된 여자선수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가장 어린 선수

- 유일한 2명의 아시아 국가 선수들 중 1명

            

셸리 앤 프레이저 프라이스 Shelley Ann Fraser Pryce (1986 – ) (자메이카, 육상)

2008년과 2012년 올림픽 100m 2연패. 5회 월드 챔피언.

           

캐스터 세메냐 Casta Semenya (최연소 1991 – ) (남아프리카 공화국, 육상 800m)

2009년 세계선수권 우승 & 2012년 올림픽 은메달.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후에 성별 검사를 받음.

        

참고:

캐스터 세메냐는 외관상(인상, 체형, 낮은 목소리 등) 18세의 여자로 보기 힘든 측면이 있어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에서 결승이 벌어지기 전 성별검사를 의뢰하였다. 이런 처사에 남아공 의회 스포츠, 레크레이션 위원회에서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IAAF를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또 남아공 육상연맹은 사전에 IAAF로부터 성 판별 검사 요구를 받은 적이 없다고 강하게 반박하였으며, 남아공의 칼레마 모틀란테 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성 판별 검사는 비인간적인 처사"라며 유감을 표했다.

세메냐 자신은 이런 논란이 부담되어 20일 열린 시상식에 불참하려 했으나, 주변의 설득에 마음을 다시 잡고 시상식에 올랐다.

세메냐는 성 판별 검사 결과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모두 지닌 간성으로 밝혀졌으며, 안드로젠 불감 증후군으로 추정된다.

(출처: 위키백과 Click)

            

성별 논란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남아공 기수로 선정되는 등

여자선수로서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지난해 동료 육상선수인 바이올렛 라세보야와 결혼 발표.

             

캐서린 은데레바 Catherine Ndereba (1972 – ) (케냐, 마라톤)

2회 월드 챔피언 & 보스턴 마라톤 4회 우승,

2001년에 2시간 18분 47초로 여자 마라톤 최단기록 작성.

           

메리 랜드 Mary Rand (1940 – ) (영국, 육상)

1964년 올림픽 멀리뛰기 금메달 & 5종 경기 은메달.

        

페기 플레밍 Peggy Fleming (1948 – ) (미국, 피겨 스케이팅)

1968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챔피언 & 3회 월드 챔피언.

은퇴 후 해설자와 유방암 예방과 연구를 위한 계몽 활동에 앞섬.

            

조안 베누아 Joan Benoit (1957 – ) (미국, 마라톤)

1984년 올림픽 여자 마라톤 우승.

1983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22분 43분을 기록, 1985년까지 세계기록 보유.

             

넬리 킴  Nelli Kim (1957 – ) (구소련, 체조)

최고의 all around의 체조선수 중 1명으로, 1976년과 1980년 올림픽에서 5개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5회 월드 챔피언이기도 하다.

          

참고:

넬리 블라디미로브나 킴(한국식 이름 김경숙)은 구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피해를 당한 고려인의 후손.

굳이 따지면, 김연아 선수가 이 리스트에 오른 유일한 아시아 선수가 아니라

넬리 킴도 아시아계 선수이기는 하지만 구소련 소속 선수였으며 현재는 유럽 벨라루스 국적이므로,

국가로서는 김연아 선수가 유일한 아시아 국가 출신 선수입니다.

      

넬리 킴 최근 사진

(현재는 국제체조연맹 기계체조 기술위원장?)

            

쟈니 롱고 Jeannie Longo (1958 – ) (프랑스, 사이클)

9회 도로 레이스 월드 챔피언 (1985~2001년), 1996년 올림픽 금메달.

역대 최고의 여자 사이클 선수 중 1명이며, 오랜 커리어 지속으로 유명.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Florence Griffith Joyner 별명 'Flo Jo (플로조)' (1959-1998) (미국, 육상)

1988년 올림픽 3관왕 (100m, 200m & 400m 계주).

1988년 기록한 100m(10.49초) 세계기록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음.

       

트레이시 컬킨스 Tracy Caulkins (1963 – ) (미국, 수영)

1984년 올림픽에서 5개의 세계신기록과 3개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보니 블레어 Bonny Blair (1964 – ) (미국, 스피드스케이팅)

3번의 서로 다른 올림픽에서 모두 5개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1994년에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선수"에 뽑힘.

                

빅토리아 펜들턴 Victoria Pendleton (1980 – ) (영국, 사이클)

사이클 트랙 레이스 올림픽 2연패 (2008 & 2012년), 9회 월드 챔피언.

스프린트 discipline 전문.

           

앨리슨 펠릭스 Alison Felix (1985 – ) (미국, 육상)

현대 여자 육상에서 가장 유력한 지배적인 스프린터들 중 1명.

2012년 올림픽 200m 금메달. 400m 계주와 1,600m 계주에서도 금메달.

          

제시카 에니스 Jessica Ennis (1986 – ) (영국, 7종경기)

홈에서 열린 2012 런던 올림픽에서 7종경기 금메달 획득.

런던 올림픽 홍보 모델로 큰 인기를 구가.

         

사니아 미르자 Sania Mirza (1986 – ) (인도, 테니스)

인도 출신 여자 테니스 선수들 중 최고 랭킹 (단식 랭킹 27위, 복식 랭킹 5위까지 오름).

아시안 게임 혼합복식에서 2회 금메달 획득 / 2014년 US 오픈 혼합복식 우승.

인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림.

        

마리아네 보스 Marianne Vos (1987 – ) (네덜란드, 사이클)

가장 성공한 여자 사이클 선수들 중 1명.

시클로크로스 레이스, 도로 레이스에서 다수의 월드 타이틀 획득, 트랙 레이스에서 올림픽 금메달.

투르 드 프랑스에서 대회 첫 여성경기로 치러진 2014년 'La course by Le Tour de France' 우승.

            

            

               

             

 

 

 

 

 

 

 

 

 

 

 

 

 

 

 

 

 

 

 

 

 

 

 

 

 

 

 

 

 

 

 

 

 


출처 : http://blog.chosun.com/queen1570/7740467

https://youtu.be/aScm8VThkNs



사교춤
기독교인은 사교춤을 추거나 혹은 심지어 춤추는 것에 참가해도 괜찮는가?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가?
춤에 대한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적 서약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열 세 번째 질문
춤을 출 것인가 추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은 오랜 세대를 걸쳐서 기독교인들을 난처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교회 지도자들이 언급하기를 무시했었던 문제점이다. 춤을 추는 것이 아무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 몇 가지 주장을 합니다.

(1) 춤은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 주며 사회적 품위를 얻도록 도와준다.
(2) 성경은 춤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3) 몇몇 비 오순절적 교회들은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춤을 주선하고 후원한다.
(4) 춤은 친교를 위한 즐거운 활동이다.
(5)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며,

그러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교인 들이 발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네 가지 분야에서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 ‘춤’이 제일 최고의 방법인가요? 개인이 춤을 추는 것을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어떤 사람이 비극적으로 뒷걸음질치며 결국에는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의 영적 복지에 위험한 기회를 주는 것일까요? 

사교춤을 추는 것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파괴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세상의 모양을 받아들임으로서 영적 쇠퇴의 위기를 맞게 될까 요? 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들은 매번 그 말이 사용될 때의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4번 정도 춤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들 중에서 성경은 그 어느 하나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교춤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말은 (예배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혹은 (다윗과 같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영웅에 대하여 즐겁고 넘쳐흐르는 축하를 표현하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내 산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무슨 종류의 춤이 추어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그 부적절한 축하와 술 마시고 떠드는 것에 대해서 노(怒)를 발하였었다는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2:19). 우리는 또한 마가복음 6:22-29의 내용으로부터 헤로디아의 딸 이 헤롯과 그와 함께 한 술에 취한 사람들 앞에서 추었던 춤이 매우 강한 흥미를 돋우게 하거나 감각적인 것이어서 왕이 적절한 판단을 못하고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 그 명령은 그가 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사교춤을 지지해주는 성경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삼가해야 하는 악과 죄악스러운 행위의 목록에 춤이 특별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춤이 초대 신약 교회가 세속적인 사회로부터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던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이성 사이에 어떤 육체적 접촉으로 인한 감정과 정욕에 대한 주의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유혹, 특별히 정욕과 성적 유혹을 피할 것 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8; 디모데전서 6:9-11; 디모데후서 2:22). 비록 사교춤을 추는 많은 부부들이 부도덕적인 행위를 결코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22은 우리들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것을 권합니다"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악에 이를 수 있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에서 가지는 사교춤이 외딴 곳에서 애무와 다른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부부들보다는 훨씬 더 낳은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교춤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 친밀함을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사교춤이 순진한 사람을 유혹과 죄악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교춤을 추는 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춤을 사절하는 것 그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 은 아닙니다. 만일 마음이 어떤 잘못된 것에 머문다면 어떠한 주의나 법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남녀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위에 기술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 단순히 춤이 제공하는 우정과 교제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모험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의 사회 ---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세상 --- 의 상태는 중요한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도덕적 표준과 순결과 거룩함에 대한 확신이 구식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사회는 음행, 단절된 관계, 이혼, 혼외 임신, 성병,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에 대한 감정적인 폭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 는 도덕적 표준에 대한 이러한 방탕한 태도에 대하여 지금 무거운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낮아진 도덕적 표준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들의 교회에서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직면하여서, 교회는 그들의 백성이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비추어, 자신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사교춤을 추는 것을 절제할 것을 모든 기독교 성인과 부모들에게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16-18; 디도서 2:11-14; 디모데전서 2:21-22). 


관심사: 우리나라 어떤 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의 기독교 청년들이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와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청년들을 “진실된 사랑은 기다린다”는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모들의 일부는 또한 사교춤이 그들 자녀들의 발달에 똑같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모순되는 일입니다. 춤에 참가함을 통하여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성적 순결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도덕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때문에 단 한 생명이라도 영원히 상실 된다면 그것은 결코 어떤 개인, 부모, 혹은 교회라도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교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지도 모르 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춤을 추는 곳 대부분의 환경이 유혹적이고 꾀는 분위기 인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음악, 불륜한 가사, 희미한 불빛, 그곳에 참석하는 어떤 사 람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 --- 모든 것들이 더 큰 유혹으로 이끄는 육체의 접촉의 밀도를 증가시켜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립학교의 춤에 대해서는 이러한 묘사가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지만, 춤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귐은, 나중에는 기독교인의 생활 형태에 전적으로 위협을 주는,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행동이 허용되는, 그러한 환경에서 춤에 휩쓸 려들도록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흔히 건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죄악 된 환경에서 춤을 춘다는 이유 때문에 춤추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독교 현대 음악을 이용하여 “기독교인 춤 클럽”을 조직합니다. 춤이 흔히 다른 악과 연 결된다는 바로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주는 그러한 활동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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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살아간다는 것은
가득 채워져 더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워가며 닦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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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 내지도 않고 담으려 하는 욕심,
내 안엔 그 욕심이 너무 많아
이리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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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면 내 가슴 속에
이웃에게 열어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수수한 마음이 들어와 앉아 둥지를 틀구
바싹 마른 참깨를 거꾸로 들고 털때
소소소소 쏟아지는 그런 소리 같은 가벼움이
자릴 잡아 평화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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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내 강물엔 파문이 일고
눈자국엔 물끼 어린 축축함으로
풀잎에 빗물 떨어지듯 초라하니
그 위에  바스러지는 가녀린 상념은
지져대는 산새의 목청으로도
어루만지고 달래주질 못하니
한입 베어 먹었을때
소리 맑고 단맛 깊은 한겨울 무우,
그 아삭거림 같은 맑음이
너무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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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히게 울어대는 뻐꾹이 목청처럼
피 맺히게 토해내는 내 언어들은
죽은 에미의 젖꽂지를 물고 빨아내는
철없는 어린 것의 울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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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곧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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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 속에
영혼 속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것도
역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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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스리는 주인도
나를 구박하는 하인도
변함없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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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금을 울리는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외침, 외침들
그것도 역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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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채찍질 하는 것도 나요,
나를 헹구어 주는 것도 나다.

-좋은글-





** 아래 간증은 실제 인물이며 저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독자님 중, '질문'(Watchman)님의 체험 간증과 일치하여서 올려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이영미(가명)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나의 간증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나는 여러분께 사단이 어떻게 성령님의 가면을 쓰고 왔는지 나의 체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7년, 저는 모 장로교회에서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또 나름 열심히 우리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내 딸 민아(가명)를 만져주시기를 바랐고 난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내 딸 민아가 병이 다 낫게 되어 말도 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어면 하는 나의 간절함과 소망이었습니다. 난 기도를 잘 할 줄 몰라서 기도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것이 되풀이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난 친구를 통해서 믿음이 참 좋으신 집사님 한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믿음도 좋았고 사랑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체험도 많이 하신 분이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분도 아픈 상처가 있어서 나에게 더욱더 신경을 써주셨고 우리 민아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많이 의지했었지요. 난 그분을 너무 좋아하였기에, 그분이 나가는 교회를 자진해서 따라갔고, 그 교회로 옮겨서 열심히 함께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우리 민아도 데리고 매주 주일 성수를 지키면서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해왔었지요. 그런데 난 그분처럼 방언도 할 줄 모르고 아무런 영적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질투도 나고 속도 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께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그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다가 응답받았고 많은 체험과 기도할 때면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것을 매 기도시간마다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 말씀처럼 밤마다 사사기 6장 37-40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기를 시작했고 난 주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같이 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진동이 왔습니다. 어느 날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몸에 진동이 오면서 떨리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뛰는 듯 공중에 뜨는 듯, 도저히 절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다 빠지는 듯했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온몸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난 점점 신비주의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집사님을 따라서 외국 분이 인도하는 “치유 집회, 신유 집회도” 서슴없이 따라다녔습니다. 난 사실 오랫동안 신유 집회라면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아 1살 때 유명하다는 흑인 치유강사가 왔다기에 한 번 가봤었는데 그때 우리 아이 아빠랑 저는 너무 실망을 해서 그 후 10년 동안 그런 집회라면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치유, 신유 집회에 정신을 빼앗기고 성령 충만한 집회라면 우리 딸 민아를 데리고 열심히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집회 때 방언도 받고, 수많은 외국 목사님들로부터 안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이 점점 이상하게 뭔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할 때면 환상도 보이고, 기도하다가 내 입을 통해서 예언도 하고, 서울 어느 큰 교회 C 목사님의 DVD 설교집을 틀어놓고 찬양을 드리다 보면 내 손과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기도할 때면 내 몸을 가지고 어떤 힘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시작되고 매일같이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자다가도 내 몸을 막 흔들어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 민아 방에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놀라서 급하게 민아에게 가다가 넘어진 적도 있습니다. 또 내 입을 통해서 민아가 6월 20일 날 말을 한다고 하는 예언도 주었고 8월 22일 날이면 민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달력의 날짜까지 짚어주면서 예언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좋아서 우리 남편이랑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라고 하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많이 읽어라. 금식해라. 찬양 드려라. 기도 많이 해라. 교회 열심히 다녀라.”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열심히 하라고 하니까( 만약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한다던지 성경을 멀리하라고 했더라면 의심했겠지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다 복종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금식도 하루 한 끼만 먹고 30일 씩 3번을 연달아서 금식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금식할 때면 더 역사를 심하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하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토하고 토할 때 이물질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서 창자를 다 뒤틀어서 토하게 합니다. 그때 난 너무 힘들어서 거울을 보면 핏줄이 내 얼굴에 가득했고 얼굴이 너무 심하게 상해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참고 기도할 때면 쓰레기통을 준비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담임 목사님께 의논하면 마귀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귓가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들리듯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 귀신하고 노는 거야. 너 지금 귀신을 부르는 것이야.”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 방언이 또 마귀를 야단치는 소리가 나오는데 정말 무섭게 야단을 치고 그 방언이 나올 때면 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내 몸을 뒤틀듯이 아주 심하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내 입에서 흉측하고 괴상한 소리가 내 입으로 나오는 것이었어요. 정말 무서웠습니다. 머리끝, 털끝이 다 쭈빗쭈빗 섰고 소름도 끼치고 나의 혼이 다 나가는 듯했고 난 그 순간 “예수님 도와주세요.”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귀신의 소리가 끝나면 내 손이 움직여서 귀신이 다 나갔다고 신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3일 밤 똑같이 귀신한테 시달린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 성령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면, “네 왼쪽에 서 계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화한다는 것은 귀로 말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에서 떠오르는 말로 또는 내 입으로(육성으로) 물어보면 대답해 줄 때는 내 몸을 흔들어서 대답을 주는데 꼭 우리가 사람하고 대화를 하듯, “응, 그래. 그래 맞아.” 하는 듯 탁탁! 제 몸을 쳐줍니다.

그러다가 신나면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제 남편이 절더러 밖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꼭 미친 사람같다고. 난 그 말도 듣지 않고, 성령님과 대화한다고 확신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난 대화를 했고 방언으로 찬양도 드리고 난 그때 내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2007년 1월부터 5월까지 성령님인 줄만 알고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치유 은사 집회가 있었는데 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열심히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유명한 강사들이 왔었는데 난 그곳에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서울의 한 대형교회 H목사님도 병낫기를 구하면서 그곳에 와서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도 안수를 받았습니다. 손에 금가루가 가득 묻어 있는 사람,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신한 사람, 이빨이 변해서 금이빨이 되는 것도, 또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국이 보인다는 사람, 또 안수 받고 쓰러져서 울다가 이유 없이 한없이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거룩한 웃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웃는데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집회 시간에는 뜨거웠는데 집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맹맹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마다 난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나의 현상에 관해서 의논했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을 주는 것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속지 말고 믿고 계속 의지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5월에 LA에서 유명한 ‘치유 은사’를 가졌다는 C.S라는 여자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새롭게 하소서’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도 하신 분이고 그 CD가 나한테 한 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CD를 듣는 순간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물며 그분과 전화 통화를 하기만 해도 내 몸이 쓰러지며 중심을 잡을 수 없었고 남이 부축해서 겨우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 남편과 나는 그분이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사는 지역으로 오시게 되어서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난 그분께 나의 모든 현상을 의논했고 그분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일 수도 있고 내 영, 내 자아일 수도 있다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해서 속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의 예언도 거짓이니까 믿지 말라고, 다 잊어버리고 주님만 믿으라고 하더군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고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방언도 물어보았지만, 통역을 해보시더니 방언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딸 민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믿고 기도하라고, 예언을 해주시고는 LA로 돌아가셨습니다. 역시나 그분의 예언도 날짜가 지나도 예언대로 우리 딸 민아가 일어나지 않았고 난 너무도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난 다시금 치유집회를 찾게되었고 그곳에서 외국 사람 한 분을 만났는데 당신의 친구분 간증을 해주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서 기도하라고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말씀들을 적은 종이를 주면서 꼭 승리하라고 하더군요. 난 말씀을 받아가지고 와서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말씀 선포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여러 날을 반복해서 기도하다가 어느 날은 정말 영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 드렸슨데 정말 너무나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아주 깊은 곳이라고 해야겠는데,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아주 아주 깊은 곳, 마음 어디에선가 아주 속 저 깊은 곳에서, “성령이 아니다!”라고 하는 큰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난 너무도 놀라서 한동안 아주 잠깐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것에 화가 났고 성령님인 줄만 알았던 것이 마귀, 사단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난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멈추었고, 방언도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방언이 나오더니 이번에는 아주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면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놀랐고, 하나님께 다시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더니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난 하나님이 너무도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늘 생각하고 믿었는데 그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이 너무 크고 두려워서 어디로든 숨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꼭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대로 귀신과 놀고 있다가는 지옥으로 가겠구나 싶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성경 말씀만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와 닿기 시작하고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난 내가 나갈 교회를 잃었고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3, 4개월 방황하며 주님께 계속 좋은 교회를 찾게 해주십사 기도로 여쭈다가 별똥별 사모님(그땐 누군지 전혀 몰랐음)께서 부군 목사님과 함께 섬기시는 지금의 교회를 이 교회의 장로님을 통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이 나와 맞는 시간이고 해서 한 번 방문해보기나 하자고 왔던 것이 지금까지 4년 째 출석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 참석하는 때가 12월 마지막 때였는데 주일 대예배 설교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예배 시간마다 찬송에서도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 주보에 인쇄된 찬송을 펴는 순간 주보에 있는 찬송가 한 마디 한 마디가 빠져나와 내 얼굴로 다가오면서 내 눈으로 내 입으로 들어가는 듯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주보를 덮었다가 다시 펴는 순간 하나님 말씀 한 말씀이 한 말씀이 또 다시 빠져나오는 듯, 내 얼굴로 다가오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온다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자꾸 쏟아졌습니다. 그날은 하루 온종일 뜨거운 눈물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제 속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끌려다닌 지난 세월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합니다. 내가 내 딸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너무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자신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게 접근한 것을 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난 사단의 장난질을 통해서 더욱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간증을 읽으시는 여러분, 절대로 사람으로부터, 아니, 치유강사들에게 안수받지 말고, 또 방언 받지 마세요. 그 방언은 마귀로부터 왔음을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그 예언들도 틀린 것은 모두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성경 말씀에 있다는 것을 우리 별사모님이 말씀해 주셨고 정리해 두신 글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보았습니다. 어느 여자 분이 내 앞에서 방언을 받을 때 그분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것을, 나 역시 방언이 바뀌면서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방언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때는 마귀가 방해를 하는구나 했었는데 아닙니다. 그 방언의 실체는 괴물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후로 저는 두 번 다시 방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방언을 통해서 무시무시한 체험을 했으니까요.

여러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간증을 하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으며 끝까지 간증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간증을 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참고:
내 사랑하는 딸 아이의 병명은 aicardi syndrome 이라고합니다, 아주 희귀병이고 전 세계에서는 300명, 미국 전역에서 50명 밖에 없다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주에서도 단 한 명 우리 딸 '민아'뿐이랍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을 할 수도 혼자 일어나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으며 눈도 제대로 뜰 수도 없습니다. 특수 제작된 침대에 누워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민아가, 그래도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올해 16살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들(치유 은사) 집회 장소에서 나타난다는 하얀 안개
그들은 이 현상을 "Dust Angel"(먼지 천사)라 부른다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최송연
언제나
눈부시게 푸른 날 아니어도 
당신의 향기로 가득한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오늘이게 하소서

날마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어도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오색 무지개 피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내일을 꿈꾸게 하소서

맨 처음
당신이 나를 찾아주신 그 순간부터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내 앞길
설령, 눈부시게 푸른 날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불평도 불만도 없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영원이게 하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최송연

언제나
눈부시게 푸른 날 아니어도
당신의 향기로 가득한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오늘이게 하소서

날마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어도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오색 무지개 피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내일을 꿈꾸게 하소서

맨 처음
당신이 나를 찾아주신 그 순간부터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내 앞길
설령, 눈부시게 푸른 날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불평도 불만도 없는 마음
당신 한 분으로 행복한 여정,
영원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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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비결 / 박신 목사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시77:7-11)



미국에 이민 와서 노년이 되도록 고생을 많이 한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가지만 은퇴 연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힘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 일을 하려면 건강이 따라가 주지 않아 너무 힘드시지 않느냐?”라고 물어봤습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몸이 고달픈 것은 견딜 만한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일을 마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텅 빈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습求? 문을 열기가 마치 지옥문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였습니다. 종일 힘들었으니까 샤워하고 쉴 것을 생각하며 기쁘게 집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 정반대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의 타격이 더 커다는 증거입니다. 본능에 따라 생존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게 되어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남들과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참 의미와 행복을 느끼게끔 창조되어졌기에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결핍되면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는 경우가 생겨도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사랑은 오직 그분께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면 그 때야말로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최근 기독교 신자인 여자 연예인들이 우울증이 도져서 연달아 자살을 한 것이 예사로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나아질 조짐은 아예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갑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토로했습니다. 인생사란 희비가 교차하게 마련이고 비록 환난 중에라도 다른 좋은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의심하고 불만을 가질 리는 없습니다. 좋은 일은 전혀 생기지 않고 환난만 겹쳐진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기자의 심경에 극적인 변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환난이 끝나고 상황이 아주 호전된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혹시 그동안 비관적, 부정적이었던 자기 생각을 낙관적, 긍정적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습니까? 아니면 아예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버렸습니까? 그래서 자족하여 마음이라도 편하게 된 것입니까? 그도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럼 신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습니까? 우리의 흔한 생각과는 다릅니다. 즉 그 연약함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인간이 불완전하고 무능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구원을 애절하게 기도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자기를 잊어버린 것 같이 여겨진 바로 그 생각이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한 것이 실제로는 의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따져보았더니 주께서 그럴 리는 결코 없다는 부정의 뜻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내가 옛날 곧 ‘이전 해(old days, years)’를 생각하였아오며”(5절)라고 했듯이 그분께 받았던 은혜를 회상해 보았더니 잘못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버리신 것은 아닐까?”라고 하면 의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는 일시적은 몰라도 영원히 버리실 리 없다는 생각이 내포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묵상해보아도,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겠는가? 인자하심이 길이 다할 수 있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을 잊을 리 있겠는가? 노하심이 긍휼을 막을 정도로 그 긍휼에 한도가 있을 리 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는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은혜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것, ‘다시는’ 베풀지 않는다는 것, 인자가  ‘길이 다한다는’ 것, 은혜 베푸심을 ‘잊는다는’ 것, 긍휼이 ‘막힌다는’ 것 등은 하나님에게 전혀 해당 사항이 아닙니다. 비록 신자가 아무리 위급한 환난 중에 있어도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the years of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에서 체험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해 내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정작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인정해야 할 부분은 능력의 측면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능하고 불완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사실이자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다 해 주시옵소서!”가 믿음의 출발이자 기도의 본질인 것만은 분명하며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나 기도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매번 “아빠! 내가 힘이 없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 나는 너무 연약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라고 아빠에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너무나 웃기는 일 아닙니까? 아기는 단순히 아빠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만 하면 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대신에 아이는 “아빠가 왜 빨리 한 해주지?”라는 불평과 의심은 끊임없이 합니다.  

말하자면 아기는 능력이 부족해 아빠에게 의존하는 측면에선 전혀 연약하지 않고 너무나 잘합니다. 반면에 아빠의 진정성과 성의에 대해선 자주 의심합니다. 대부분의 신자의 믿음도 이와 똑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 또한 정작 연약하다고 고백할 부분도 하나님의 긍휼을 의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자식은 부모를 떠날 수 있어도 부모는 절대 자식을 포기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는 것조차 신자의 연약함이 아닙니다. 이 또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아기가 약하고 무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듯이 신자가 하나님을 잊는 것은 거의 본성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자에게 정작 연약한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잊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환난 중에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난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이전에 자신의 이 연약함부터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긍휼을 그칠 리가 없다는 진리를 지난 세월의 은혜에 비춰서라도 확고하게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긍휼은 그분의 나를 향한 분노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므로 그 긍휼을 막을 것은 이 세상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연약함을 없애면 강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들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 어떤 노력들을 합니까?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 활동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신자들은 기도나 말씀에 약하면 믿음이 약하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기도나 말씀에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믿음 자체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 자체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연약한 부분을 개선시키면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생기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 약해짐은 그분의 긍휼에 제한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시작하지 기도나 말씀을 덜 보았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착각은 지금 닥친 환난에만 신경이 팔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때일수록 기도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묵상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외면당하는 일이란, 특별히 신자에겐 너무나 비일비재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로 다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들 때마저도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 아닙니까?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환난은 잠시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6,17)

지금 혹시 환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영원히 당신을 잊겠습니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겠습니까?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겠습니까?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겠습니까? 은혜 베푸심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 중에 하나라도 답이 ‘예스’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믿지 않아도 심지어 불평해도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잠잠히 주만 바라보십시오. 혹시라도 그렇게 하기 힘드시면 하나님과 교통했던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소한도 예수님의 십자가라도 바라보십시오. 과연 신자를 향한 그분의 긍휼에 끝이 있겠는가를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2/12/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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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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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이 본문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 곳곳에서 발견되는 금덩어리 같은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감동적인 말씀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이 바울 사도와 같이 이처럼 위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말씀의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춰 보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본문에 나타난 모습이 오늘날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 곧 불길한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직시하려면 그런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두 구절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가리는 일종의 질산 테스트와 같다고 생각한다. 질산 태스트는 가장 민감하고도 정교한 테스트이다. 정통성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성적인 동의에 그치는 정통성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정통성은 질산 테스트라고 일컬을 만큼 진정한 척도는 아니다. 또한 도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성은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 또한 경험, 거듭나는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은 질산 테스트라고 불릴 만큼 정교하고도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척도는 이 구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본문은 그 세 가지 척도, 정통성, 도덕성, 경험을 보증한다. 본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척도는 삶에 대한 반응이다. 곧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진정한 척도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 주변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번 폭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척도란 궁극적인 것, 곧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하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의 관점에 빗대어 말하면, “삶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를 비롯한 자연재해나 심각한 유행성 질환이나 질병이 발생해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척도이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삶이 가장 암울하고 모질게 보이는 최악의 상황 앞에서 과연 우리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진정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척도는 행위와 도덕성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지성으로만 믿는 것은 위기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척도는 경험적인 요소, 곧 삶과 그 능력과 활력을 보증한다. 진리를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바울처럼 반응할 수가 없다.

 

바울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당한 시련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박해를 받아도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고후4:8-11).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을 그렇게 고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에 의존하지 않는다. 심리학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용기와 담력의 철학을 견지했다. 매우 유능하고 지성적인 그들은 인생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또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원한다면, 어깨를 당차게 펴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제력을 키우고, 엄격히 훈련하여 의지를 철석 같이 다지고, 절대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는 기독교와 정반대이고 아무 상관이 없다. 스토아철학은 체념의 철학으로서, 기독교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는 상황을 견디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단지 버티고 서서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극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매우 적극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상황을 견디거나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넉넉히 이기는자들이다(8:37).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주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바울도 이전에는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변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을 믿었다. 오직 이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느라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삶을 깊이 바라보고, 또한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준다. 나는 때때로 기독교 신앙을 마치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우거나 높은 산 위로 데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으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세상은 우리를 짓누르고 버겁게 하여 그 안에 파묻혀 길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그런 세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바울은 이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먼저, 그는 우리가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인 됨으로써 시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받는 가장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잠시라고 말하고 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덧붙인다. 바울은 시간을 영원이라는 방대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무한한 시간, 백만 년이 거듭되는 장구한 세월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영원이다. 시간을 그런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어떻게 보일까? 찰나처럼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나 삶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면, 마치 그것이 제멋대로 구는 독재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4). 지금,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시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기독교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2:6). 기독교인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영원에 속해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은 환난이라는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바울은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겪은 혹독한 시련을 언급하고 나서 그는 그것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고난은 그를 완전히 짓뭉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몹시 무겁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시련 자체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가볍다고 말한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중한 것에 비할 때 그것은 지극히 가볍고 잠시의 것이었다.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기독교인이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영원을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에 그의 비밀이 있다. 그는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모든 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가볍게 여겨졌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단번에 끝난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 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의 가정, 자동차, 재산 등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2:9) 라고 말한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허리케인이 연이어 몰아닥친다 하더라도, 하늘에 간직된 것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폭탄을 한데 모아 동시에 터뜨린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업은 영원히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일단 이 영광을 보고 나면, 그 무엇으로도 낙심하거나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세상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의 환난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본 영광,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더욱 확고히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세상에 살았던 성도들의 비밀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시대에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시기를,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로이드 존스, 영광을 바라보라, 1, pp 10-43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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