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사용설명서♥

고통은... 10개월 무이자 할부를 활용하고.

감동은... 일시불로 구입할 것.

사랑은... 30년 만기 국채를,

우정은... 연금처럼 납입할 것을 권함.

감사는... 밑반찬처럼 항상 차려놓고,

슬픔은... 소식할 것.

고독은... 풍성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 처럼 싱싱하게,

이해는... 뜨거운 찌개를 먹듯 천천히,

용서는... 동치미를 먹듯 시원하게 섭취할 것.

기쁨은... 인심 좋은 국밥집 아주머니처럼 차리고,

상처는... 계란처럼 잘 풀어줄 것.

오해는... 잘게 다져 이해와 버무리고,

실수는...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통깨처럼 다룰 것.

고통은... 편식하고,

행복은... 가끔 과식할 것을 허락함.

슬픔이면서 기쁨인 연애는...초콜릿처럼 아껴 먹을 것.

호기심은...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서라도 마음껏 소비하고,

열정은... 신용대출을 권함.

은혜는... 대출이자처럼 꼬박꼬박 상환하고,

추억은... 이자로 따라오니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움은... 끝끝내 해지하지 말 것.

신뢰는... 선물
의심은... 단기 매도를 권하며

평화는... 종신보험으로 가입할 것.

변덕스러움은... 에널리스트가 분석하듯 꼼꼼하게 다루고

아픔은... 실손 보험으로 처리하고

행복은...
언제든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에 넣어 둘 것을 권합니다.

넘.좋아서 펌했어요
즐겁고 행복한날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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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이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유익을 주나,  매우 무시되는 진리 
아더 핑크 

 

그러나 지난 19세기 기간에 하향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던 기독교는 
죄의 악함을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가능성들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를 선언하는 대신에 죄의 불편성만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진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로 아첨하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함으로,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된 조건에 대한 비참한 묘사가  
아주 말살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혼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 인기 있는 신앙을 시험하여 본다면- 
소위 ‘복음적인 기독교’의 명칭으로 불려지는 교회들 중 10분의 9를 
평가하여 본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성경에 묘사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술과 정면으로 맞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조건이 파멸과 영적인 죽음 상태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의 지극한 죄 됨이 
그러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타락의 깊이가 정말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장엄한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눈에 인간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그려주는데 있다. 

 

또는 인간의 그의 조물주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여할 임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완전성을 선언할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래의 조건과 인간이 저지를 배도를 윤곽적으로 그려주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파멸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처방도 그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담당하여야 할 일이다. 
우리들이 나면서부터 빠져있는 그 무서운 함정의 구렁을 
진정으로 바라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타락의 상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속으로만 치유가 되는 무서운 질병에 걸려있다. 
우리들이 앓고 있는 처참한 질병의 정도가 얼마나 되나를 아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치평가도 좌우될 것이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은
시편 51편 강해에서 이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복음 사역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려면 
먼저 그리스도 없이는 자기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비참의 지점을 지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다다를 수 없다. 
이 비참의 주요 요소는  
우리들의 본래적인 죄악성과 실제적인 죄악성,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죄인 됨을 확연히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리들은 그 죄와 진노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이 위대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서 이러한 비참한 느낌을 가지게 하고
그 죄와 진노에서 건지실 오직 유일하신 분께 죄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처한 비참의 원인은 
우리들의 본성이 부패하여 있다는 것이다. 

 

또는 원죄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목적을 위하여 아주 합당한 다음 말씀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략)....... 

이 교리는 성경의 진리이다.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그저 진리의 대원천인 성경의 교리로만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근본적인 교리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 어떤 사람도  
그 교리 때문에 시험에 빠져 고통을 당하게 않게 하시기를 원한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큰 강조점을 주고 있다. 

성경의 부분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처한 비참한 처지와 노예상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부패, 눈멂,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영적 본질에 대하여 가진 반감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철저한 부패가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능함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선언과 증거는, 
모든 인간들이 사단에게 매여 종노릇 하고 있음과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능력이 전혀 없음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저 간접적으로 희미하게 말하지 아니하고 
강조적으로 아주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점은, 성경이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여러 수백가지의 증거들 중 하나이다. 


는 ‘슬프게도 무시되는’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 교리는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강단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파멸과 비참함을 별로 설교하지도 않으며,
강단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 교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곳에서도, 
이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못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교육이나 사상의 주류는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다.
다윈의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마저,  
그 가설의 악한 영향이 자주 나타나 보인다. 

 

현대 강단을 맡은 사람들이 침묵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출석하는 세대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통탄할 정도로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자기들이 처하여 있는 어두움의 무서운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매고 있는 고집스러움과 불신앙의 사슬을 
지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천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할 정도이다. 

수천수만의 설교자들은 자기들의 회중들에게
그네들이 본질상 무서운 처지에 있음을 신실하게 말해 주는 대신,
크레믈린에서 일어난 최근의 소식이나, 핵무기의 발전에 대한 소식을
해설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설교자들의 신앙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적인 교리’ 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 정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다른 극히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관점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신앙이 바로 이 점에서 성경적이라면, 
그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을 개선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오직 유일한 소망임을 분명하게 지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죄인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타락한 존재가 선을 이룩하려고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그는 많은 오류에 빠지지 아니할 것이다.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나는 알미니안(arminian), 아리안(arian), 소시니안(socinian), 무율법주의자(antinomian) 
의 체계로 기울여지는 사람 치고  
먼저 인간 부패, 또는 인간의 진노받아 마땅함을 과소평가하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신학적인 소양을 훌륭하게 갖추었던 스타이플러(j. m. stifler)는 이렇게 말하였다. 

“거짓된 신학은 그 원천을 인간 부패에 관한 바르지 못한 관점에 두고 있다.
이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영적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모든 참된 경건의 근원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비열함에 대한 바른 관점에 있다. 
또한 참된 경건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관점에서 샘 근원을 찾는다. 
그것 없이 진정한 자기 혐오감이나 회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긍휼에 대한 진정한 이해,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 

 

허망한 사람의 미몽을 깨워 
자기의 무가치함과 자기 의(義)의 무가치함을 확신케 하는 데에 
이 교리를 알게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부패하였음을 아는 설교자도, 
자기 스스로는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진정으로 인식하고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진리를 전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듣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사랑하는 데서 떠나 
자기들에게 거는 모든 소망을 영원히 기각하여 버리게끔 
이 진리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진리를 전하는 자기의 신실함을 의뢰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그 진리를 적용시켜 달라고 떼를 써야 할 것이고, 
자기의 가련한 노력을 그렇게 축복하여 달라고 간청해야 할 것이다. 

.....(중략)....

이 교리는 ‘가장 필요한 교리’ 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 대다수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빠진 인간의 무서운 상태를 너무 강하고 음울하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어두움과 더러움을 말로는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하여도 
잘 나타낼 수 없다. 
다음의 진리의 말씀이 묘사하는 바와 같은 인간의 상태의 비참함과 전적인 무능을 
묘사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2:39,40) 

은혜의 이적을 경험한 영혼들의 상태를 대조하여 볼 때, 
그 점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 교리는 ‘가장 유익을 주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흔히 이 교리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지각을 깨우친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한, 
자기들을 의뢰하는 마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한다. 
성령의 강력한 작용만이 자기 신뢰를 포기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신실한 말씀전파를 사용하시기 원하신다.  ]


아더 핑크의 ‘인간의 전적타락’(청교도 신앙사, 역간) 중에서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캘리의 올해 겨울은

그 어느해 보다 가물었습니다.


해마다

많은 눈이 내리는

씨에라 네바다도 예외는 아니었죠.


씨에라 네바다 선상에 있는

요세미티 역시 많이 가물었습니다.


눈으로 길이 막혀서

해마다 5월이나 되어야 열리는

Glacier Point 가는 길도 눈이 없어서

두 달이나 앞당겨진 3월에 열릴 정도였죠.


그런데 지난 4월 7일,

요세미티에 정말 오랜만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일 제쳐 놓고

 

눈내린 요세미티로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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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서

4월에 눈을 본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작년에도

4월 중순에 눈이 내렸죠.


심지어 5월에도

눈이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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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는

무척 가물었는데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눈소식은 끝났다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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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늘의 날씨는

기상대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날씨를 주관하시는 

하늘의 하나님만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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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로 가는 길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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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뷰 주변도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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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뷰에서 본

고지대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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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터널 뷰에서 본 밸리는

눈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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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보에는 4-6인치의

많은 적설량이 예상되었으나

밸리 지역에는 1-2인치에도 못미쳤습니다.


10095735_10.jpg


그나마 아침에

해가 나자마자 눈은

순식간에 녹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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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눈을 촬영하는 중에

요세미티의 봄도 함께 촬영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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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명물 가운데

덕우드(dogwood)란 꽃이 있는데

이 꽃은 보통 4월 중순 경부터 만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기온이 높았던 관계로

예상보다 훨씬 빨리 피었습니다.


10095735_13.jpg


그래서

개화한 덕우드는

고스란히 눈에 노출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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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들에게는

그야말로 대박이었습니다.


눈덮인 덕우드를 찍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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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 같으면

이맘 때쯤 폭포에

물이 우렁차게 흘러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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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는

폭포의 수량이 쥐꼬리만큼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도

그나마 눈이 왔기 때문에 저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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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alveil Fall,

신부 면사포 폭포도

수량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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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눈이 모두 녹으면

당분간 폭포의 수량은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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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으로 눈이나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면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폭포를 더 이상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5월은

요세미티에서

폭포의 수량이 가장 많은 때인데....


10095735_20.jpg


눈이 녹기 전에

아이들이 재빨리

눈사람을 만들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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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세드과 강 주변엔

봄의 신록이 찾아왔는데


해프 돔 꼭대기에는

어제 내린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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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Meadow 주변에는

벌써 bush lupine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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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의 가뭄이 길어지니

요세미티에서 눈을 보기도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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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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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야, 일본아.
일본 : 웅?
대한민국 : 왜 독도가 니네 땅임?
일본 : 우리 나라랑 가깝잖아.
대한민국 : 가깝다고?
일본 : 웅.
대한민국 : 니네에게는 가까운 기준이 뭐임?
일본 : 이동수단이 기준이지.
대한민국 : 니네는 독도 어떻게 가?
일본 : 우린 비행기 타고
대한민국 : 너네 배 타고 못가?
일본 : 왜 이래? 배 타고 가면 엄청 멀어.
대한민국 : 우린 배 타고 가는데 배 타고 가도 가까워.
일본 : 그래서? 비행기 타고 가면
시간이 더 절약 되니깐 우리 땅임.
대한민국 : 니네 나라 사람 중에
독도에 사는 사람 있어?
일본 : 없지.-_- 어떻게 살아?
대한민국 : 우린 사는데
일본 : .....?;;;;
대한민국 : 우리는 우리 나라 땅이니깐
살 수 있어서 사는데
너네는 못사니깐 니네 땅 아니네?
일본 : 웅......... ⊙_⊙;;;;;
대한민국 : 너네가 인정 했다.
독도는 우리땅임! 아, 그리고!
일본 : 왜?
대한민국 : 너네 지진 났을때 독도는 지진 안났다!
또 니들 독도 가려면 여권 있어야 되잖아.
우리 없어도 돼.

일본 : ..........;;;;;




독도는 대한민국 땅♥
대한민국 사람이면 꼭!!! 퍼가요.
독도는 한국땅........!!

* 안퍼가면 : 일본 nom.
* 퍼가면 : 한국 사람♡♡♡.
* 올렸다 지우면 : 일본 nom.

*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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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젊은 연인의 고백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통통 튀는 젊음과
      활기찬 사랑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모든 이벤트들이
      자신들의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웃으며 거리를 걸어다녔고,
      세상에서 자신들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에
      빠져 있다는 환상적인 착각을 즐겼답니다.

      그런 그들이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한 노년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아무 대화도 없이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답니다.

      젊은 연인은 나이가 들면 사랑하는 사이에도
      할 말이 없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부부의 모습이 약간
      가여워 보이기까지 했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젊다는 것과 열정적으로
      사랑 한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이 식탁을 떠나면서
      노년 부부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둘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무런 대화도, 관심도 없는것처럼
      묵묵히 앉아 있다고 여겼던 두사람이
      식탁 밑으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던 거지요.

      단지 손을 마주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왔기에
      아무 대화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젊은 연인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부부의 모습을
      불쌍하게 생각한 자신들이 부끄러워졌죠.

      사랑은 젊고 열정적이 않아도 좋습니다
      화려하고 상큼한 사랑은
      물론 보기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켰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지켜준 사랑만큼
      빛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순간에 불타오르는 열정보다는
      상대방을 말없이 비추어주는
      은은한 등불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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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 박영돈 교수


김세윤 교수님의 책, “칭의와 성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어, 뒤늦게나마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과거 김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많은 유익과 통찰을 얻었던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너무도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1. 가장 아쉬운 점은 전통적인 구원론에 대한 김 교수님의 비판이 종교개혁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김 교수님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교수님이 제시한 성경적인 대안이다. 김 교수님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같은 구조와 특성을 띠고 있다. 그는 성화를 “의인됨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칭의와 성화』, p. 189). 또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칭의와 성화』, p. 192).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 감독(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김 교수님이 주장하듯이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을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성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르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복음을 바로 잡으려는 김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그마저 선진들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칭의론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 속에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500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탱해온 핵심교리를 뒤집는 주장을 할 때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분석이 마땅히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성경신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주관이나 신학적인 전제가 완전히 배제된 성경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님이 개혁주의 구원론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의 해석의 관점은 전통적인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세부적으로 논하고 싶은 점이 많아 “칭의와 성화”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을 써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책의 제목은 “다시 전해야 할 칭의의 복음”이 어떨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축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 재 발굴하여 바르게 전파해야한다. 복음 사역자들이여,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여러 도전 앞에 주저하며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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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짜 부활을 믿는가? / 박신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마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2-24)



얼마 전 작고한 한국의 유명한 목사가 “부활절만 되면 괴로웠다”라고 고백한 것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설교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어서야 부활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지옥에 가는 형벌에서 면제 받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 천국으로 가게 될 영원한 운명을 살아서부터 미리 보장 받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행한 베드로의 최초의 설교 초점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모여졌듯이 기독교는 한 마디로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의 목사님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면, 목사라는 직분과는 상관없이 사실은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인 동행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이 동행해 주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활동을 한 교인일 수는, 그것도 스스로 칭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사실상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잘못을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더러 잘못한다고 야단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작 문제는 부활을 믿는 데도 잘못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재림과 부활의 시기와 모습, 휴거, 대 환난, 적그리스도, 천년왕국 등에 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면 실제 삶이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왕자로 태어난 자는 장차 왕이 될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될 때까지 두 가지 유형의 생활양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왕이 될 것이니까 그저 편하게 놀고먹으려는, 심지어 왕이 되면 엄격한 규율 때문에 하지 못할 온갖 쾌락을 미리 맛보려는 왕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왕이 될 것에 대비해 열심히 배우고 훈련을 쌓는 왕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전자의 망나니 왕자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보장되다보니 죄에 대해 감각이 무뎌지거나 어차피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쾌락을 더 즐기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망나니 왕자는 왕이 된다는 궁극적 운명이 그 전의 왕자로서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오히려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부활이 신자에게 그 이전의 삶 즉 이 땅에서의 생활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론 싸이더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기에 만일 그것을 믿는다면 인생관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이 없다면  물질로 이뤄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부활이 있으면 이 땅과는 별도로 비물질로 이뤄진 눈에 안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땅에서 물질에만 의존하는 인생관을 가짐에 반하여 믿는 자의 그것은 다음 세상을 대비해 물질이 아닌 것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죽은 후의 하나님 심판에 대비해 미리부터 선행을 많이 하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심판이 면제된 신자로선 그런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영생이 있다면 이 땅의 삶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갈 찰나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진짜 시민권과 영원한 장막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신자의 진짜 인생은 천국에서 시작하기에 이 땅은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실습장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의 이 땅의 삶은 왕자로서 사는 것이라면 천국에 가서야 왕으로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아니 본격적인 인생은 죽음 이후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왕이 될 것을 대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니 왕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의 보상으로 천국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에 갖고 와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에 관한 인식이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이 끝나면 천국의 보상이 기다린다는 차원에만 머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이 없는 낙원에서 영원토록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경우를 겪더라도 참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최후의 도피성에 불과해졌습니다. 마치 “결국 나중에 누가 잘 되나 두고 보자. 너희는 지옥 가지만 나는 천국 간다!” 식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그런 복수 심리까지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천국에서 마음껏 한을 풀겠다는 기대 심리는 있습니다. 부활이 이 땅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없고 부활로 이 땅의 삶을 보완시키리라 작정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힘들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천국 삶의 훈련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고난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천국은 죄만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천국은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물질이 무한정으로 많아서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가능하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아예 없고 전혀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죄를 멀리하는 훈련뿐 아니라 물질 없이 사는 법도 배우고 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 자체를 아예 소유하지 말라든지 돈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선 물질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신자의 삶 자체를 좌우할 만큼 우선적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살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추하고 더러운 것 하나 없이 진선미가 완벽하게 구현되며 참 사랑으로 섬기는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신자는 그런 삶을 장래 일로 소망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방식대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천국 보화를 평생토록 갈고 닦아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가치를 자기가 속한 곳곳마다 심어서 천국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려준 불씨를 어떻게 하든 끄지 않고 천국까지 갖고 가는 것만이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작은 불씨를 천국의 불과 연결시켜 이 땅에 활활 번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신자는 물질만 목표로 사는, 즉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이 땅에서 물질을 다루는 면에선 당연히 뒤처지며 그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을 이미 소유했기에 물질에 의해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이 좌우되지 않으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하게 됩니다. 고달픈 현실이 육신적 불편은 될지언정 결코 영적인 고통으로 연장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이 땅의 고달픈 삶 자체가 천국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더욱 불쌍하지만 부활이 있으면 오히려 불신자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뿐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동안의 필요만 공급할 뿐입니다. 죽을 때 남는 것은 집, 자동차, 현찰, 본인의 육신도 아닙니다. 오직 눈에 안 보이는 영혼뿐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남지도 않을 것들에 영향을 받고 산다면 그만큼 헛된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영생을 소유한 자처럼, 이미 부활을 입은 자처럼 살지 않는 한 세상 사람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이미 확보된 부활이 이 땅의 인생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고하는 중심, 바라보는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영원과 이어진, 아니 이미 영원한 존재가 된 자가 일시적인 가치에 영향 받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단지 소망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부활을 실현하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물질에 좌우되는 인생들이, 사실은 때로는 그러는 내 자신이 진정 불쌍하게 보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의 노목사님처럼 교인은 되었어도 아직 부활을 진짜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2/13/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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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길(道)을 걷자

나는 지금 섬기는 교회로부터 3주간이란 긴 휴가를 허락받은 남편과 함께 넓디넓은 "시카고"를 여행 중이다. 아름다운 미시건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호텔에 머무는 특권을 얻고 아침저녁으로 바람결 따라 은빛으로, 잿빛으로 물의 무늬가 달라지는 화려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쉬는 시간도 행복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는 그 규모부터 판이한 "시카고", 이곳처럼 길이 여러 곳으로 갈라진 곳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쭉쭉 곧게 뻗은 길이 여러갈래로 난 낯선 곳을 렌터카로 운전하며 이곳저곳 누비는 즐거움 또한 쏠쏠하다.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도우미가 없다면 발이 호텔에 묶여 있어야 하겠지만, 다행하게도 네비게이션(GPS)이 자동차마다 부착돼 있어서 그 네비게이션(GPS)이 가르쳐주는 데로만 가면 초행길의 운전이라고 하여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음을 배우고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바른길(정도)을 안다는 것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금 바른길과 잘못된 길에 대한 귀한 교훈을 배우는 계기를 얻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또한 즐겁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달아나는 듯 작은 행복감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했던가? "전체란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것이다.”(A whole is that which has beginning, middle and end.) 라고. 모든 길도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겠지만, 신앙생활 역시,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앙생활을 전체(whole)로 본다면, 이 또한 시작과 중간(과정)과 끝이 일괄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시작과 중간(과정) 그리고 그 끝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할 이유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부어주신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은 무엇이어야 할까?

필자는 오래전 이단에 빠진 한 청년이 그 이단 신학교(신학원)를 수료하면서 소감문을 발표한 것을 어느 글에서 관심 있게 읽어본 기억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세 교회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리고 군대에 갔을 때는 군종병들이 교회 다니는 상관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병들을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가려 했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 다니던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이 여자 문제로 사모님을 버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단 단체에 속하게 된 동기라고 했고, 이단 신학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이단에 빠진 자)는 본질보다 비본질에 눈길을 돌렸고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사냥꾼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신앙생활 출발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중간이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중에서,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이 잘못되었다거나, 우리의 신학이나 교리가 잘못되어서 기독교를 버린 것이 아니다.

이 청년은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관한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듯 하다. 즉, 본질보다는, 비본질, 그러니까 죄인 된 인간들 삶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는 비본질(거듭나지 못한 장로님들의 부족함, 열심만 있는 군종 상관, 타락한 삯군 목자) 이런 인간의 부족한 부분에 자신의 신앙생활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수할 때 함께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결국, 그는 하나님을 떠났고 이단이 쳐둔 덫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는 또 이단 신학교 졸업식사 서두에 "천지의 대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들을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주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날 약속의 실체가 되셔서 영적 새 이스라엘 12 지파를 창설하신 우리의 이기신 者, 총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라면서 하나님께가 아닌, 그 단체의 교주에게 영광을, 그리고 찬양을 올렸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경험들이 어느 정도로 진실에 근거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기성교회로부터 실망하고 좌절하였다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지(無知)”때문이란 것이다! 이단으로 넘어가 이단의 교리를 배우고,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인간 이긴 者(그들의 교리에서 '이긴 자'는 복수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그 신도들을 가리키며, 단수로 사용될 때는 인간 교주를 그리고 인간 교주를 가리킬 때 '이긴 자'라는 존재는 보혜사, 사도 요한격 목자, 약속의 목자 등으로 일컬어진다고 한다)에게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말로, 그가(이단으로 빠진 청년)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 정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신관(神觀):

그리스도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우리 ‘ 주 예수 그리스도’한 분 뿐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아야만 한다. 무슨 뜻인가?

하나: 예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한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이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 참조)

둘: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이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요즘 각광하고 있는 사이비 자칭 이긴 자(이만희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신관(神觀)이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그리스도(Christ)란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살펴보면,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선명한 뜻이 함축돼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이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이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넷: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심판 主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 1) 첫 번째 오신 주님은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오실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심을 믿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하늘 어딘가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시고 잘못할 때는 벌을 내리시는 분,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우리네처럼 변덕스럽거나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성령의 조명 하심을 힘입어, 우리의 신관(神觀)을 재정립해 보아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 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 한다!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바로 믿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관(神觀)을 제대로 정립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요즘처럼 교계의 형편이 바닥을 치는듯하고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반기련이나 이단 사설에 미혹되는 이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적, 지성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이요,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가?” 정확한 개념을 배우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 설교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의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소리일까?

현대는 신학교도 많고, 교회도 많고, 종교 지도자라 칭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지도자 자리에 들기 좋아하여 싸우며 다투기를 즐기지만, 막상, 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이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머리로만 아는 예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고 받아들인 신앙인이 매우 드문 현실이다. 육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영의 일이다. ( 요 6: 63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無知)는 자신 뿐아니라, 수많은 영혼을 지옥 백성이 되도록 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무서운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무한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으며(롬 11:36),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롬 3:23-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란 것(롬 5:8; 벧전 3:18), 이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알고 있다면, 결코 이단으로 미혹되거나 빠질 이유가 없을텐데....

우리 신앙생활은 출발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야 하고, 가는 길, 중간(과정)도 주 예수 그리스만 바라보아야 하며, 신앙생활의 끝(Final)도,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되는, 올바른 신관(神觀)을 세워야 한다. 고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힘써 알고, 분명히 알도록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사순절이다. 절기에 연연하기 이전에 사순절의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배운다면 좋겠다. 신앙생활의 정도(道)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Knowing Christ)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Christ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 22-26)"





출처: USA아멘넷 /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존 낙스의 회심: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건짐 

존 낙스 (John Knox, 1513-1572)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가까운 해딩턴 (Haddington) 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곳에서 문법학교를 마치고 글라스고우 (Glasgow) 대학과 세인트 앤드루스 (St. Andrews) 대학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낙스는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잉글랜드에서 윌리엄 텐데일이 성경 번역에 헌신하고 있을 때 스코트랜드에서는 틴데일의 영성을 이어 받을 존 낙스가 태어난 것이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14살이었을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또한 토마스 길리엄 (Thomas Guylliame)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서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낙스는 개신교 교리를 확산시키고 있었던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게 되고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낙스는 카톨릭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개신교로 전향하였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했다. 낙스는 “하나님이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 내기를 기뻐하셨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 당국에 비판적이었다. 이처럼 낙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지 위샤트였다.

그리고 낙스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면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 그는 “내가 처음 신앙의 닻을 내린 말씀이 이 말씀이다”라고 말했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분명 낙스를 새로운 믿음으로 불타오르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으며, 3년 동안 성경연구에 몰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약 1540경 회심 후 그는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여 부패한 영혼들의 심령을 깨우치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의 암울한 상태

1) 성직자들의 무지와 부도덕과 타락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성직자들과 교회의 주교들, 수도원장, 수사, 성당 참사회원들은 너무나도 무지했다. 심지어 어떤 사제들은 알파벳도 모를 정도였다. 주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설교는 우선순위에 있어서 뒤로 쳐져 있었고,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사람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으며, 그들의 그릇된 삶이 그릇된 교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재산과 수입과 인력이 풍부했으며, 스코틀랜드 전체 재산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가난했지만, 교회는 가장 좋은 건물을 차지했다. 이처럼 교회가 부패하고 비대해져 안일에 빠진 이유는 면죄부, 연옥, 성례전과 같은 것들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순결을 서약하였지만 성적타락이 극심했고 여러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제들도 문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직자들은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매우 세속적이었다. 이처럼 교회는 무지하고 부도덕했고 타락했다.

2) 종교개혁자들이 핍박을 받고 화형 당함
16세기초 쯤 위클리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교회에 의해 심한 핍박을 받거나 처형을 당했다. 예를들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패트릭 해밀턴 (Patrick Hamilton)과 조지 위샤트 (George Wishart)는 붙잡혀 세인트 앤드류 성 밖에서 화형 당했다. 이들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될 때 까지 약 30년 동안 20여명의 개신교도들이 교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한 시대임을 알려 준 것이다. 타락한 그 시대가 낙스의 가슴에 교회 개혁의 싹을 키우게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대각성의 불을 지피게 하였다.

존 낙스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 -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꿈”

존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를 세워가는 꿈이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스코틀랜드 성시화에 대한 꿈이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혀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있으면서도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다시 설교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난 낙스는 영국에서 설교자로 사역을 했다. 먼저 존 낙스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황들의 추악한 삶을 폭로하고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적 복음을 계속 전파했다. 낙스는 공기도서의 사용을 거부하고 설교를 중심으로 자기가 고안한 예배서를 사용하였다. 낙스가 전한 말씀 앞에서 개개인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먼저 그는 영국에서 카톨릭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는데 특히 성찬식 때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관습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면서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행위를 금지시켰고 신자들을 성찬상에 둘러 앉게 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주의 방식으로 성만찬을 집행하였다. 그의 종교개혁적 설교는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불과 몇 달 만에 주민들은 로마 카톨릭을 폐기하고 미사 대신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개혁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카톨릭교도 ‘피의 메리 (Bloody Mary)’가 영국 여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 잔학한 여왕은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 하지 못하도록 개신교를 박해했고 수 많은 목회자들을 처형하였다. 낙스는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반 종교 개혁적이어서 나중에 낙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난민 목회사역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의 박해를 피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낙스는 칼빈을 만나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 칼빈 강당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며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했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1556-1559년 까지 영어 사용 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선포하였다.

또한 낙스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벌어지는 종교탄압과 폭정에 맞서 유명한 글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를 발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두 여왕들을 ‘괴물’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낙스는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 전체를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성경 주석의 집필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판된 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다. 그 후 영국 백성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은 영국을 ‘책의 나라’로 바꾸어 놓았으며 청교도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고 제네바 성경에는 장로교의 교리 문답서가 추가되었고 각주가 들어갔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열렬한 칼빈의 제자가 되어 개신교 신학에 깊이 빠져 들었고 그의 신앙은 상당 부분 칼빈주의화 되었다. 또한 그의 사상을 지배했던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들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 원리의 핵심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낙스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가리켜 “사도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한 낙스의 기도 -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낙스가 고향 스코틀랜드로 귀국할 때 했던 감동적인 기도가 있다.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하여 목숨 건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귀족들과 시민들이 돌아오는 존 낙스를 환영했지만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낙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심판하지 마소서. 그리고 주로 세상이 내게 대해 비난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심판하지 마소서.”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민족보다 강하다”고 말하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단 한 사람의 기도로 인해 스코틀랜드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백성들의 심령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교리 설교 -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남”

1559년, 낙스는 12년 동안의 힘든 망명 생활을 끝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교회는 카톨릭 일색이었지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을 알리며 카톨릭 색채가 가미된 모든 것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으며,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낙스의 설교의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진리라고 말하면서 설교 말씀을 적용한 후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전력을 쏟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개혁주의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희망으로 살아 있었고, 개혁주의 운동의 새로운 영적 생동감과 열정을 불어 넣었다. 낙스의 종교개혁은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메리 여왕 앞에서의 낙스의 강력한 설교

그러나 메리여왕의 등극으로 인해 카톨릭 교회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왕 메리는 의회를 설득하여 개신교회라는 이단을 박멸하고 옛 카톨릭 왕국을 재건하고자 했다. 여왕 메리는 법으로 금지시켰던 미사를 거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다음 주일에 종교개혁에 불탄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 (St Giles' Catheral) 강단에서 복음주의 교리를 주장하고,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제도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면서 미사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메리 여왕이 낙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떨었으며 그녀는 잉글랜드가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서 보낸 군대보다도 그의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여왕특사인 토머스 란돌프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시간 안에 귓전에 계속해서 때리는 5백 개의 나팔보다도 더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한 청년은 낙스의 다니엘서 본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내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설교 이후 낙스는 곧 메리 여왕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여왕은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며 자신은 로마 교회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므로 로마 교회를 수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낙스는 “로마교회를 창녀라고 부르면서 로마교회는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져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존 낙스를 이기지 못해 자신은 더 이상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메리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건드리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복수심에 가득찬 메리 여왕은 낙스를 반역죄로 몰고 가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낙스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의 설교를 듣던 많은 회중들이 다시 살아났다. 많은 시민들은 성경적인 개혁 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개혁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서민 대중을 개혁의 대열에 동참시켰다. 그의 설교의 권세는 도시를 개혁시켜 버렸다. 스코틀랜드에 말씀을 통한 대각성 운동과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과 부흥은 낙스의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낙스를 통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승리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이 찾아왔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교황의 관활권을 폐지했다. 또한 카톨릭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급적인 교회 제도의 악습과 오류를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와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1560년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균형 잡히고 건전한 교리”라고 승인하면서 국가의 신조로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교회 의식 가운데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며,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찬을 영적 임재로 해석했다. 이 신앙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교회가 재조직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복되고 장로교 형태의 스코틀랜드 개혁 교회가 합법적으로 확립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기독교 국가로 변하여 갔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계속되는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불굴의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용기있는 설교였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낙스의 삶과 죽음

낙스는 수 많은 환난들과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낙스는 저격을 당하기도 하고 매복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의 목숨은 종종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다. 혹독한 박해가 심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던 낙스의 순례자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었다. 낙스의 인생가운데 이 고난의 시기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훈련 기간이었다. 고난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 잘 준비된 낙스를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불과 황무지와 흘리는 피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낙스의 영향력은 특히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지대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해 주었다. 낙스가 생각한 성경적인 교회정치는 장로회주의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개혁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도 튼튼한 개혁교회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낙스의 불굴의 신앙과 확신이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을 낳게 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게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인생 말년을 맞이한 낙스는 뇌졸중으로 인해 심신이 몹시 약해졌다. 그는 임종 전에 부인에게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후 낙스는 아무런 고통도 움직임도 없이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회심 이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낙스의 인생은 끝이 났다. 제네바 대학 바스티용 종교개혁 기념비에는 국제적 종교개혁 운동가 기욤 파렐, 존 칼빈, 장 테오도르 드 베자, 존 낙스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낙스는 칼빈, 파렐, 베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낙스는 교회를 진리의 토대 위에 세운 스코틀랜드 개신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요, 16세기 로마교회의 교권주의가 팽배했던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 주목할만한 사건들을 일으킨 개혁운동의 아버지이다. 진리를 위해 담대하게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수 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의 귓가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존 낙스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용기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1. 그는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적 기류가 악한 길로 갈려고 할 때 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깨웠던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또한 여왕과 시의회가 교회 개혁을 꺽을려고 할 때 마다 방향이 흔들리지 않게 나아갈 길을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을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셨던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였다. 그는 시대를 분별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성경적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였으며 진리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2. 그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삶에서의 중요성은 그의 탁월한 설교의 능력이었다. 설교가 그의 생애의 중심이었고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고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설교의 메시지는 그분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또한 성령께서 설교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확신을 굳게 붙들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죄사함, 복음적 교리, 성령의 조명,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그리스도의 의와 풍성하신 은혜, 하나님의 자비와 형벌” 등 이었다.

3. 그는 기도하는 설교자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기도에 관한 글도 많이 썼다. 낙스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4. 그는 용기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인생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용기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낙스는 왕의 절대 권력과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여왕도, 교황도, 국민들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턴 백작은 낙스의 묘 앞에서 "여기 일평생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누워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건전한 교리와 악을 꾸짖은 담대함에 있어서 모든 참된 목회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며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설교였다. 강단에서 낙스와 같이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악하고 음란하고 매우 혼탁하다. 이러한 때에 악한 시대를 잘 분별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진리로 심령을 깨우는 불꽃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낙스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있는 설교자를 그리워 하고 있다. 부흥이 없는 이 때에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에 또 다른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또 다른 부흥은 낙스와 같이 진리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자, 능력있는 설교자, 기도하는 설교자, 용기있는 설교자들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김현배 ⓒ 뉴스파워

 


 

    그대도 사랑할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사랑’이라고 말들합니다. 맞는 말이죠. 사랑만큼 아름다운 것이 다시 또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눈물의 씨앗…? 글쎄요. 느끼는 사람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죠, 사랑의 감정이란 주관적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말도 느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네요. 하지만, 대체로 사랑이란 아무래도 ‘주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준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준다는 것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특권"을 내어놓는 것, 그것이 무엇이건, 누구를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사랑'이란 생각입니다. 쉬운 예로, 톡톡! 손으로 물을 털면서 자기 몸만 아끼던 아가씨가 결혼하게 되고 아기를 낳게 되면 엄마가 됩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꺼이 포기하게 되고... 아가씨의 권리 포기는 곧 어머니란 위대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죠. 남자의 권리가 사랑 때문에 포기될 때 '아버지'란 위대한 이름을 창조주께로 하사받는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되고서도 자유분방한 남자로서 살아야겠다 고집하고 엄마가 되고서도 깔끔을 떠는 아가씨로만 남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렇게 사랑이란 주는 것,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권리라도 기꺼이 포기하게 하는 마법술이랍니다.^^ 우리 가 예수님을 사랑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포기하셨고 기꺼이 십자가를 택하셔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그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이며, 다시 더 없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가슴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의 비극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변질한 사랑' 때문이요, '사랑의 부재'문제, 손에 한 번 움켜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여기에,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이 있다고 주창한다면 너무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이름 아래 내가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마저도 기꺼이 내어주고 포기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이라고...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과 교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나 국가가 건강할 것이며, 인간사의 많은 비극을 확실히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 입으로 사랑한다 백 번 말하기보다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한 사랑을 해 보기 원하시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자신이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 작은 것 하나라도, 사랑이란 이름을 위해서 내어주고 그 사랑을 위해서 포기해 보라고 권해드리고 싶군요. 오늘 당신의 그 결단이, 지금부터 ‘온전한 사랑’의 길로 그대를 초대해줄 것입니다! 외로운 그대에게 사랑할 수 있는 초대장이 될 수 있었기를~ 그대도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절 말씀)"

    글: 별똥별/최송연 출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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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로 엮은 호수위에 떠있는 섬에 사는 사람들 ! 푸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를 30분 정도 가면 우로스 ( Uros )섬을 만난다. 갈대 (토토라)로 만든 섬이다.

호수에 떠있는 40여개의 섬 에는 약 35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으며 학교와 교회도 있다.이 섬에 사람들은 우루족이라고 불리며 티티카카 (TitiCaca)호수애서서식하는물고기, 물새등을 잡고, 밭에서 감자 등을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관광객상대로 생활하고있는사람도 많다. 또한 섬과 섬을 연결하는 수단이 되는 배도 이 '또르또라'로 만든다.

우루족이 이렇게 갈대섬에서 산 지 벌써 680년이 넘었다고 한다. 토토라로 만드는 건 섬 뿐이 아니다. 집도 만들고 곤돌라 모양의 배도 만든다. 토토라의 연한 순 부분은 먹기도 한다.

우로스 섬은 이렇게 만들어진 갈대섬 40여개를 통칭하는 말인데,큰 섬에선 10여가구가 살기도 하지만 작은 섬은 달랑 집 2채인 곳도 있다.

갈대 더미가 물에 둥둥 떠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밤이면 습기가 올라와 아주 춥다고 한다. 섬의 바닥은 계속 썩어들어가는 상태다. 바닥이 많이 썩으면 갈대를 위로 계속 쌓아 무게를 지탱할 두께로 만들어줘야 한다.

우로스 섬의 뜻이 '매일 새롭게'라던데, 늘 토토라를 위로 쌓아야만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듯하다. 큰곳에는 우체국, 박물관및 후지모리 대통령 시절 지은 학교도 보인다.

잉카 시대에 천민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코파카바나에서 생활을 하다가스페인 군에 쫓겨서 이곳에서 섬을 만들어 살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몇 백년에 걸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원시 생활형태를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 갈대섬에서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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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여성 안수(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금하는 성경적 교훈(Biblical Teaching against Women’s Ordination)/조영엽 박사


디모데전서 2:11-12, 3:2, 고린도전서 14:34-35; 등은 여성 안수를 금하는 가장 핵심 되는 성구들이다. 그만큼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말씀들을 아전인수격으로 달리 해석한다.



1. 디모데전서 2:11-12 주해


디모데전서 2:11-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 말씀은 여자는 ① 전적으로 순종하라 ② 조용히 하라 ③ 배우라 ④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⑤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1) 전적으로 순종하라.

“일절 순종함으로”(엔 파세 휘포타게, ; in all subjection; 모든 복종으로, 전적 복종으로)는 전적 완전 복종(full submission)을 가리킨다. 이 단어(복종)는 신약에 4회 나타난다(고후 9:13; 갈 2:5; 딤전 2:11; 3:4). “복종”(휘포타게, ; subjection; 복종)은 영어성경 KJV에는 복종(subjection)으로 바로 번역되었다. “휘포타게”는 군사적 용어로서 이는 하급자가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휘포타게의 동사 휘포타소( )는 후포( ; under; 밑에)와 타소( ; to arrange; 정열하다, 배치하다)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파세( ; all, 모든)는 복종을 강조하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병사가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듯이 여자가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씀이다. 여성도는 교회에서는 감독자(목사와 장로)에게 복종하여야 하며,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딛 2:5; 딤전 2:11). 그러나 한국어로는 순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순복은 부드러워 귀에 거슬리지 않는 반면 의미는 그대로 살아 있으니 여자에게는 순복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권위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것은 여자가 취할 적절한 자세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것만 순복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2) 조용히 하라.

“조용히”(엔 헤쉬키아, ; in silence; 조용히)는 침묵을 뜻한다. ‘헤쉬키아’가 KJV, RSV에는 silence(침묵, 조용함)로, NASB, NIV에는 quietness(고요함)로 번역하였다. 헤쉬키아는 방해받지 않는 조용과 고요의 상태를 의미하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조용하게 있는 태도로서의 침묵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헤쉬키아는 종교집회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서 조용하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가리킨다. 여자가 공예배시에 말을 하여 예배를 방해하거나 또는 질문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이 단어는 완전한 침묵 또는 함구무언(complete silence or no talking)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행 22:2; 살후 3:12; 딤전 2:11; 벧전 3:4). 전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또는 침묵한다는 단어는 씨가오( ; to be silent; 조용히 하다, 침묵하다)이다(눅 9:36; 18:39; 고전 14:34).


(3) 배우라.

“배우라”(만다네토, ; let learn; 배우라)는 단어는 3인칭 · 단수 · 현재 · 명령형으로 사람이 행하여 오는 전례·관습·규례 등을 주시하여 관찰하므로 배우고 지식을 증가시키라는 말씀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강의를 통하여 지식적으로만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학생들이 실습을 통하여 지식을 획득 증가시키는 것과 같다.

본문에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에 대하여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과 성경원리에 입각하여 고찰할 때 의심 없이 교회의 지도자로부터 배우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는 교회에서나 어떤 종교적 모임에서도 조용히 배울 것을 가르친다.


(4) 여자의 가르치는 것(강도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가르치다”(디다스코, ; to teach or instruct; 가르치다, 교육하다)라는 단어는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남편이 아내를,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평신도들을 교훈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가르친다”는 이 단어는 주로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회당들·성전·마을·들판·해변가 등에서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 사용하였다(마 5:2, 19; 7:29; 9:35; 11:1; 13:54; 21:23; 26:55; 28:20; 막 4:1; 6:6…). 그리고 사도들과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행 4:2; 5:21, 25, 42; 11:26; 15:35; 18:11, 25; 20:20; 21:21, 28; 28:31; 엡 4:11; 딤전 4:11; 6:2; 딤후 2:2). 그러므로 본문에서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함이며, 이것은 설교를 포함한다. 이 직분은 족장들이, 제사장들이, 랍비들이, 감독들이, 목사들(엡 4:11)이 감당하여 왔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원문에는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I do not permit)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부정을 나타내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 단어는 충고나 권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암시한다. 따라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공예배시 여자가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서 교역자(감독=장로=목사)로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강도권을 말한다.

칼빈(John Calvin)은 고린도전서 14:34 주석에서 “교회에서 가장 최고의 위치를 점령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위한 책임은…여성이 교회 전체에서 권위를 가짐은 얼마나 부당한가? 가르침의 직분은 교회에서 최고의 직분이요, 결과적으로 복종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

그러면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의 가르침 자체를 부인하는 말씀인가?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교훈하는 의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의 권위와 지도하에서 가르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늙은 여자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권면하였고(딛 2:3-4),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사내 아이인 디모데를 가르쳤다(딤후 1:3-5). 이와 같이 교회에서 여성도들이 주일학교 반사·성가대·구역장·전도회·기타 여러 면에서 가르치는 일·전도·상담·봉사·구제 등은 매우 중요하므로 강조되어야 한다.


(5) 남자 주관하는 것(치리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자”(아넬, ; an adult male, husband)는 남자 어른 또는 남편을 뜻한다.

“주관하는 것”(아우덴테인, ; to exercise authority; 권위를 행사하다) 이 단어는 권위를 행사하다(아우덴테오, ; to exercise authority or to domineer over, 위에 권위를 가지다 또는 지배하다)의 현재·부정·능동이다. 현재 부정사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개념이 있다.


“허락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do not permit;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르치는 것과 연결되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일, 남자 위에서 권위를 행하는 일을 계속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선언하였다(고전 11:3; 엡 5:23). 성경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다(엡 1:22, 23; 4:15; 5:23; 골 1:18). 머리는 온 몸과 지체들을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남자는 여자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여자가 남자 어른들이나 남편을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여자는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여자를 남자의 몸으로 삼으신 제도와 위계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때로부터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설정하신 원리요 제도이다. 주관하는 일(치리권)은 교회에서는 감독(장로)의 임무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고 하였다. 여기서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과 인도하는 자들은 동일한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사역자들 곧 장로들을 가리킨다(딤전 3:5; 5: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자가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여자의 목사 또는 장로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을 가르치는 직분과 다스리는 직분이다. 이 직분들은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여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2. 고린도전서 14:34-35 주해


고린도전서 14:34-35,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도들을 향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권면하였을 때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귀에는 그 말씀이 하등의 이상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자신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일반적으로 여자들(구나이케스, ; women; 여자들)로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과 결혼한 여자들 전체를 가리킨다.


(1)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공예배(Public Worship)와 관계된 교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일부 여신도들이 예배시간에 무질서하게 질문 아닌 질문들을 하거나 또는 말을 하므로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교훈하였다. 즉 그런 질문들을 즉시 중단할 것과 장기적으로는 그들을 교육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교훈하였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예배 도중에 자기 남편에게 질문하는 것까지도 규제하였다.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어도 잘 알지 못하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하였다(14:35).

“교회에서”(엔 타이스 에크레시아이스, ; in the churches; 교회들에서)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어떠한 집회에서도(in any assemblies) 잠잠하라는 말씀이다(Calvin, Bengel, Meyer, Ellicott).

“잠잠하라”(씨가토산, ; let be silent; 조용히 하라, 잠잠하라, 침묵하라).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 2:11에 “조용하라”(헤쉬키아, )는 말씀보다 강한 표현이다. 이 단어의 시상은 3인칭·복수·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문에는 여자가 잠잠하여야 할 이유를 “왜냐하면”(가르, ; for, because; 왜냐하면, …때문에) 이라는 접속사가 밝히고 있다. 즉 여자가 잠잠하여야 할 이유는 여자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과도 관계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에는 방언과 예언도 포함된다. 사도 바울은 본 장(고전 14장)에서 방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고,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무질서와 혼돈을 방지하기 위하여 방언에 대한 규례를 상세하게 교훈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영적 은사로서의 방언이 존재하던 사도시대에도 방언이 여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영적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계속적이고도 반복적인, 뜻이 없는, 정신나간 사람의 헛소리 같은, 중언부언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위 현대 방언이란 말할 나위도 없다. 성경적 방언은 외국어였으며, 계시의 완성(기록)과 더불어 자연히 끝났으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자의 강도권과도 관계되는 교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디모데전서 2:12, “여자의 가르침을 허락함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 즉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것(강도, 설교)과 전체 회중을 다스리는 것(치리)을 여자에게 허락함이 없다.


(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자의 치리권과도 관계된 교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말씀의 근본적 권위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면서 여하한 의문이나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여자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다스리는 자에게 순종하에 있음(to be under obedience)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본절에서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씀은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여자의 복종은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결과 즉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는 말씀과 연결하여 해석하여야 정당하므로 본절에서의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여야 마땅하다.

“오직 복종할 것이요.”(휘포타세스도산, ; let them be subject; 그들로 하여금 복종케 하라)는 휘포다소( )의 3인칭·복수·현재·명령·중간태이다. 중간태(middle voice)는 주어가 어떤 면에서 그 주어 자체에 관계되거나 또는 주어 자체가 직접 행동(동작)에 관계하는 것을 나타낸다.2) 그러므로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여자들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자원하여 직접 복종할 것을 가리킨다. 여자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요, 명령이요, 여자의 미덕이다.

사람의 머리는 온 몸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온 몸은 머리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여자는 가정에서는 남편에게(엡 5:22) 그리고 교회에서는 영적 지도자에게(고전 14:34; 딤전 2:11-12) 복종하여야 한다. 이것은 질서의 개념이요, 불평등의 개념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만 복종을 요한다.



3. 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6 주해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2)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딛 1:6).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디모데전서 3:2과 디도서 1:6 말씀은 남녀의 성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중혼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데 그 진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목사는 한 남편의 아내도, 독신녀도 무방하다고 한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 때문에 여자는 그 직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이라 보아야 한다”(『교역과 여성 안수』, pp. 103-104) 라고 한다.


반증(反證):

(1) 본 절은 교역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감독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무흠하고 고상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교역자는 결혼관에 있어서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교역자는 이성적으로도 깨끗함을 요구한다. 성경적 이성관 결혼관은 일부일처(one man-husband and one woman-wife)이다. 결혼은 성적 순결성(sexual purity)을 강조한다. 사람이 결혼하였을 경우 한 아내만을 소유한 자(only one wife at a time)만이 교역자의 자격이 있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는 말씀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 독신(single)이나 또는 결혼은 하였으나 아내가 사망한 연고로 홀아비가 된 독신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이 말씀은 교역자가 결혼하였을 경우 한 아내만을 소유하여야 한다는 진리이다. 목회자의 자격에 기혼과 미혼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목사는 한 남편의 아내도 독신녀도 무방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으로 성경교훈에 위배된다.


(2) 감독은 남자이어야 한다. 성직자의 자격에 기혼이냐 미혼이냐의 구별은 없다. 그러나 남녀의 성 구별은 분명히 있다. 감독은 남자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감독직을 여자에게는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이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씀의 논법을 빌어 감독은 한 남편의 아내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성경해석은 성경의 원리에 근거하여야 한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나 신약시대의 사도들 그리고 그 이후 이 제사장 직분(예배를 주관하는 직분)은 남자에 의하여 남자만이 수행하여 온 직분이다. 성직에는 인간의 자유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4. 여성 안수를 금하는 이유들(Reasons Why Against)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인간의 타락 사건에 근거하여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유(가르, ga;r; for; 왜냐하면)를 밝혔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우리에게 공평한가 또는 합리적인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이유들은 하나님의 이유들(God’s reasons)이기 때문이다.


(1)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 있어서 -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helper)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도덕적·인격적·영적 실유(實有)임으로 금수(禽獸)와는 만족할 만한 인격적·유기적 관계를 맺기 불가능하였다. 사람이 홀로 지낸다는 것은 곧 고독과 공허감을 면할 수 없다. 아담은 독처하였기 때문에 외로웠으며, 그러기에 옆에서 돕는 배필이 필요하였으며, 하나님은 하와(여자)를 남편을 돕는 배필(helper)로서 지으셨다(창 2:18). 이런 의미에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전 11:9)라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곁에서 돕는 자는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는 여자가 남자 어른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게 설교하거나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창조의 원리,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

그러나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돕는 배필은 종속적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열등성도 우월성도 의미하지 않는 상응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돕는 이란 “아담을 위하여가 아니라, 아담에게 어울리는, 아담에게 상응하는 것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에제르는 단순히 일을 돕거나 자식을 낳아주고 살림을 살아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후원을 뜻하며 협력(partnership)을 의미하는 말이다.”3) “… 여기서 강조는 남자와 여자의 종속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동반자로서의 결속과 책임성에 대한 당위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4) 이 단어 자체는 높거나 낮은 등급이나 계급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서 “돕는 배필”의 참된 의미를 변절시켰다.5) 그와 같은 아전인수격의 해석은 본문의 내용과 성경해석의 원리(문자적·문법적·역사적·교리적 해석)에 위배되므로 고려할 가치도 없다.


(2) 창조의 순위에 있어서 - 여자는 나중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나중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3). 여자가 남자를 주장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나중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만물의 영장으로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나중에 지음을 받았다(창 2:21-23).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으니 원리상 먼저 태어난 것과 같다. 먼저 태어난 자(장자, first born)는 아버지의 차석에 있는 자요, 아버지 사후에는 가정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창 27:19; 49:3; 왕하 2:9; 눅 15:11-32). 그런데 나중에 지음을 받은 자가 먼저 지음을 받은 자를 주관한다는 것은 몸이 머리를 주관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이는 성경의 원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여자는 남자보다 나중에 지음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근거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조의 원리와 순위에 있어서도 여자는 남자 위에서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도록 의도된 바가 없다.


(3) 범죄의 순위에 있어서 - 여자가 먼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사도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가 먼저 사단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 이 말씀은 아담은 범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와가 속임과 꼬임을 받아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음을 보여준다. “속이다”라는 단어가 아담의 경우에는 “아파타오”( ; to mislead, deceive, beguile; 잘못 인도하다·속이다·기만하다·미혹하다)로 사용되었고, 하와의 경우는 “엑사파타오”( ; to deceive wholly, beguile throughly; 완전히 속이다·철저히 기만<미혹>하다)라는 강조형이 사용되었다.6)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다 사단의 속임을 당하였으나 하와의 경우는 사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히 꾀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창세기 3:6은 아담과 하와가 각기 범죄한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하와는 뱀(사단의 화신)의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하였고,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는 금령을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의 꾀임으로 하와로부터 금과를 받아먹음으로 범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창세기 3:6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로마서 5:12-21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a Coverant of Works의 당사자로서 인류의 대표로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고, 디모데전서 2:14은 하와가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하와는 아담처럼 비록 하나님과의 언약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언약에 관계된 자로서 범죄한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12-21, “한 사람”(one man)이라고 5번 기록되었는데(롬 5:12, 15, 16, 18, 19), 여기서 한 사람이란 분명히 “아담 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한 사람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임을 또한 가리킨다. 따라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는 아담 자신에게는 물론 아담의 후손 전(全)인류에 똑같이 그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준다.

그러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자신과 전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many) 사람은 모든(all) 사람을 가리킨다.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의 범죄와 그 결과는 온 인류 위에 미치는 것과 같이, 하와는 행위언약에 관계된 자로서 그녀의 범죄와 그 결과는 모든 여자들 위에 미친다는 사실을 성경은 또한 밝히 가르치고 있다. 그 한 예는 여자의 해산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창 3:16). 해산의 고통은 잉태하는 모든 여자들 위에 임하며, 여자가 남자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은 창조의 원리와 타락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하와는 모든 여자들의 대표라는 “대표성의 원리”(A principle of representative)에 의하여 여자의 가르침과 다스림(설교하는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을 성경은 금하였다.


(4) 신적(神的) 권위에 있어서 - 여자가 남자 주관함을 허락하지 않음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하와와 범죄로 인한 결과이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남자를 머리로, 여자를 몸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정·교회에서의 남녀의 직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성경은 여자는 남자 아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남자는 그리스도 아래 있음을 또한 말씀하셨다(엡 4:15; 5:23). 따라서 남자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다스림을 받을 자가 다스리고, 가르침을 받을 자가 가르친다면 그것은 신적(神的)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정과 교회의 위계질서를 전복(뒤집어 엎음)하는 일이다. 경건한 여성도들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자신들의 높은 신분을 깨달아 여성 안수를 반대한다.


(5)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 여자는 연약한 그릇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들의 신체적·정신적·심리적 면에서이다.

신체적인 면에서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다.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그릇”(스케우스, ; vessel; 그릇)은 문자적으로는 컵이나 쟁반 같은 그릇을 가리키며(막 11:16; 눅 8:16; 요 19:29; 행 10:11, 16; 롬 9:21; 딤후 2:20; 히 9:21; 계 2:27; 18:12), 상징적으로는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 즉 사람의 육체를 질그릇으로 비유하였다. 본래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만든 질그릇과 같다(창 2:7).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육체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매우 연약하다. 남자의 신체도 연약하지만 여자의 신체는 더욱 연약하다.

“더 연약한”(아스데네스테로, ; weaker; 더 연약한·더 힘없는·더 무기력한)은 아스데네스( )의 비교급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심리적인 면 등 여러 면에서 더 연약하므로 남자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할 위치에 놓여있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차이가 있으며 그로 인하여 비롯되는 “남성과 여성의 삶에 있어서의 역할과 위치의 불가교체성(the inexchangibility of roles and places in life between man and woman)을 믿기 때문에 여성의 교회에서의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강도와 치리)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자는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남자보다 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여자는 독립적이 아니라 의존적이며, 다스리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러한 신분과 위치에 있는 여자가 남자를 주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위배된다. 남자는 남자의 위치를 지키며 남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되는 것처럼, 여자는 여자의 위치를 지키며 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될 것이다.


(6) 여자의 생리적 현상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의 생리적 현상(멘스, menstration)이다. 성경은 여자의 월경 기간이나 해산 후에는 부정하다고 하였다(레 12:2, 5; 15:25-26). 이것은 현대 의학상으로나 위생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월경 기간이나 해산 전후 상당한 기간에는 부부가 서로 가까이 하지 않도록 명령되었다(겔 18:6; 22:10).

월경기간에는 생리적 변화가 많이 일어난다. 구토·변비·속쓰림·가스 형성·두통·현기·요통·질 분비물·피곤·치질·살 부음 ….

월경기간에는 정신적 심리적 변화도 많이 일어난다. 짜증·신경질·히스테리 등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상과 같이 생리적·정신적·심리적 변화가 1개월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하에서 어떻게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집안일을 돌보는 이 중요한 일들을 제쳐놓고 어떻게 성직(聖職)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여자 목사 제도를 찬동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자매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는 것이요, 신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


(7) 여자의 음성(목소리)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또 하나의 증거는 여자의 목소리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여자의 음성을 아름답게 그리고 고음(high volume)을 내어 앨토(Alto)나 소프라노(Soprano)를 맡게 하셨다. 반면에 남자의 음성은 굵게 그리고 저음을 내어 테너(Tenor)나 베이스(Base)를 맡게 하셨다. 그렇게 하므로서 남자의 음성과 여자의 음성의 조화와 미를 산출케 하신다. 또한 여자의 음성은 여자의 신분에 맡도록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남편을 기쁘게 하는 꾀꼬리 소리 같은 음성을 내게 하시며, 남자의 음성은 남자의 신분에 맞도록 아내를 다스리는 머리로서 권위적 저음을 내게 하신다. 여자의 음성 자체가 여자의 강도권과 치리권을 거부한다.


(8) 여성 안수를 찬동하여 시행하는 교단들도 실제상은 여성 안수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취하고 있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교단들의 교회들 다수는 여성 안수에 대하여 그리고 안수받은 여자 목사(신부)를 교역자로 모시는 데 대하여 거부반응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본성(human nature)도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 허용하는 교단들의 성직자 통계들이 이것을 증명한다.



5. 여성 안수 찬동자들의 궤변들(Arguments for Women’s Ordination)


(1)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이라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로마서 10:12; 고린도전서 12:13; 갈라디아서 3:26-28; 골로새서 3:11 등의 구절들을 오용하여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Sexism)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직에 남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직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여성 안수를 금하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 남자니까 성직을 맡을 수 있고 여자니까 성직 안수가 불가하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직 안수 문제에 있어서 남녀차별의 잘못은 구약의 관점에서 성서 신학적으로 갈라디아서 3:28에 이르러 시정될 수 있고 긍정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7) “남자와 여자의 교회직제의 구별이란 더 이상 성서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라고 주장한다.8) 아이디(Ide)는 “여성 성직의 권리와 책임을 제거하는 것은 오로지 성차별 때문에 나왔다”라고 주장하였다.9)


반증(反證):

성 구별과 성 차별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성 구별은 남성·여성을 구분하는 것이요, 성 차별은 어느 한 성(남성 또는 여성)을 다른 한 성(性)보다 대우를 달리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초지종 성 구별이요 성 차별이 아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sex)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직분을 달리 맡기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분리의 역사(work of separation)를 하신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창 1:4), 하늘 위의 물(구름)과 궁창 아래 물로 나누시고(창 1:7), 육지와 바다를 나누시고(1:10), 주야를 나누시고(1:14),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되 그 영광을 달리하시고 (1:16), 모든 생물들을 암수로, 사람을 남녀로 나누어 구별하셨다(2:18).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들이다(창 1:27). 그리고 남녀 모두 구속함을 받아 천국 유업도 같이 누릴 형제자매들이다. 그러나 가정·교회에서의 직분과 기능은 상이하다. 이것은 남녀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별에 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동시에 상이하다(equal but different).


여성 안수 찬동자들이 오용하는 성구들은 과연 여성 안수와 관련된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말씀들인가?

로마서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민족적 구별이다. 율법아래서 유대인은 선민(택한 백성)이요, 헬라인은 이방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여러 면에서 큰 차이·차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과의 거리를 멀리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주(Lord)가 되신다. 여기서 “부른다(call upon)는 말씀은 간구하다·예배드리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표현이다”(창 4:26; 12:8; 13:4; 21:33; 26:25; 왕상 18:24; 왕하 5:11; 시 79:6; 사 64:7; 욜 2:32).10)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말하면 저를 믿고 저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주님이 되신다(행 9:14, 21; 22:16; 고전 1:2; 딤후 2:22).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적 구별, 인종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종이나 자유자나 …”는 사회의 신분적 구별이다. 일반적으로 과거에는 종은 가난한 자요, 자유자는 부자이었다. 실제상 그 당시 고린도 지방에는 종(노예)이 약 40만 명이요, 자유인이 약 25만 명이었다고 한다.11)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회 신분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는 말씀은 성령세례를, 성령세례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중생”을(요 3:3, 5),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상징적 표현으로서 성령을 받음을 가리킨다.


갈라디아서 3:26-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남자나 여자”성적 구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성 구별은 있어도 성 차별은 없다. 여성 안수 문제는 성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성 구별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는 민족적 차별·인종적 차별·사회적 신분의 차별·성 차별 등이 있어 왔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자유자는 종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에 있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 차별(sexism)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윤리적 사회적 성적 구별을 초월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는 그와 같은 차별들이 다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남녀 관계는 성 차별이 아니라 성 구별이다. 이 말씀도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골로새서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할례당과 무할례당: 종교적 구별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때에는 이방인도, 무할례자도, 약속의 언약들에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종교적 구별이 없다(옙 2:11-16). 모두가 새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갈 6:15). 거기에는(축복받은 자리에는) 할례 받았으면 들어가고 할례 받지 못하였으면 제외되는 곳이 아니다.

야만인이나 구스디아인: 문화적 구별이다. 거기에는 문화적 구별이 없다. 당시 야만인은 헬라 언어와 문명에 무식한 자들, 문명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스디아는 발칸 반도 북쪽 남러시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곳 사람들은 짐승들보다 조금 나은 야만인들 중의 야만인이었다고 한다.

상기 구절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민족적 인종적 차별·사회의 신분적 차별·성 차별·문화적 차별 등이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음에 여하한 차별이 없이 동등하다는 말씀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여성 안수 찬동자들이 오용하는 성경구절들은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말씀들이다.


(2) 여성 안수를 금하는 성구들은 그 당시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고린도전서 14:34-35이나 디모데전서 2:11-12 말씀들은 그 당시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편지들이 쓰이고 보내어진 배경들을 성경해석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고전 11:5-6) 등을 실례로 든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자들로 하여금 머리에 수건을 쓰도록 권면한 것은 창녀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창녀들은 남자들에게 매력을 얻기 위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얼굴을 노출시켜 남자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말하였다. “만일 자기 아내가 밖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다니는 것을 남편이 발견하면 이혼의 근거가 되었다.”13)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창기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권위에 복종하는 표시로 머리에 꼭 수건을 쓰고 다녀야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그와 같이 “여자는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는 말씀도 그 당시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니 지금 이 시대에는 해당이 안된다고 한다.


반증(反證):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생활양식과 영구 불변한 보편적(우주적) · 신앙적 · 도덕적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한 상황(specific situation)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므로 그 당시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나 보편적(우주적) 일반적 규칙들(universal, general rules)은 시대 변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일반적 규칙들은 시대 변천이나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어느 시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적용되는 영구불변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34-35; 디모데전서 2:11, 12 등은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물론 그 당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닌 것은 당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쓴 것은 남편에 대한 순복과 존경의 표시로서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은 창기로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건을 썼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는 잠잠하였고 집 밖에서는 수건을 쓰지 않고는 다니지 아니하였다.14)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드리는 것은 자신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1세기에 유대인들은 물론 로마와 헬라인들도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녔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쓴 것은 권위(남편)에 대한 복종의 상징이었다. 여자에게는 남자라는 보이는 머리(visible head)가 있음으로 그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썼다(고전 11:10). 그러나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닌 것이 오늘날에는 제재를 받지 않는 것처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금한 것도 이 시대에는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의 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에서 나온 말이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는 것 여부는 당시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배경에 의한 것이요,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시대 그 지방의 생활 양식이었다. 그러나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금하신 말씀들은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될 내용들이 아니다. 성경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천하는 문화적 배경들이 있으며, 세월이 변하고 또 변해도 변치 않는 변할 수 없는 영구불변한 진리가 따로 있다. 전자는 문화적 생활양식이요, 후자는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그런데 여성 안수를 금하는 말씀들은 시대적 배경에 의한 문화적 생활양식이 아니라 영구불변한 진리이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입을 것과 입지 않을 것,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등등 생활양식에 관한 규례들이나 생활양식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되었다. 그 변화들이 성경의 교훈에 역행하거나 충돌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10계명을 위시한 신앙적·도덕적 규범들은 시대 변천에 관계없이 변할 수 없는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진리를 바로 깨닫지도 구별하지도 못하므로 창조의 원리와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3)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음과 같이 신약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고 신약시대(초대교회시대)에도 여선지자들이 있었음과 같이 이 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다. 출애굽시대, 사사시대, 열왕기시대, 그리고 구약 말기에 미리암·드보라·훌다·노아댜·안나 등 여선지자들이 있었다.

미리암(Miriam)은 모세와 아론의 누이로서 여선지자(prophetess)였다(출 15:20-21). 그리고 미리암이 여선지자로서 무엇을 전하였는지, 사역 기간이 얼마이었는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드보라(Deborah)는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여선지자이었으며, 동시에 여자로서는 유일한 사사였다. 고로 사람들은 드보라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았다. 그녀는 바락으로 하여금 가나안의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 군대를 멸하도록 명령하였다(삿 4:4-24). 야빈은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훌다(Huldah)는 유다 왕 요시아시대에 살룸의 아내 여선지자이었다. 훌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gods)에게 분향하며 죄를 범하였음으로 회개를 촉구하였다(왕하 22:8, 14-20; 대하 34:22-28).

노아댜(Noadiah)는 거짓 여선지자로서 도비야와 산발랏과 합세하여 느헤미야와 느헤미야가 기도한 자들을 반대하였다(느 6:14).

안나(Anna)는 여선지자로서 결혼하여 7년 간 남편과 같이 살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말씀하였다(눅 2:36-38).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이 여선지자들 이외에도 사라, 한나, 아비가엘, 에스더 등도 여선지자라고 불렀다. 초대교회에도 예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고전 11:5). 빌립의 결혼하지 아니한 네 딸들도 여선지자들이었다(행 21:9). 따라서 신약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상기와 같이 우리는 구약시대에 소수의 일시적 여선지자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여선지자들은 구약시대 전반에 걸쳐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역도 매우 미흡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적 직분, 왕적 직분 즉 제사 드리는 일과 다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일시적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일시적 역사는 하나님의 일반적 역사에 위배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4) 사도행전 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빌립의 네 딸들도 여선지자들이었다는 궤변


반증(反證):

일반적으로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하는 것(마 15:7; 요 11:51; 벧전 1:10; 유 14절)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고전 11:5; 14:1-5).

그런데 빌립의 딸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1:5; 14:1, 3-5, 24, 31, 39의 말씀들과 같은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예언은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나가서 전하는 것으로서, 예언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안위를 주며,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므로 그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였다.

복음을 나가서 전하는 것은 선지자나 성직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할 일이다. 빌립의 네 딸들은 선지자가 아니었다.

존 칼빈(Calvin)은 빌립의 네 처녀 딸들의 예언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이 처녀들이 예언의 직분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인도하고 다스리심으로…그들이 일반 회중 집회 아닌 가정에서 또는 어떤 개인 장소에서 예언하였다고 생각이 든다”라고 하였다.16)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가정에서나 또는 어떤 개인 장소에서 복음을 잘 전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여자의 강도권과 치리권을 금한 고린도전서 14:34, 35;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과 충돌되지 않는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빌립의 네 딸들처럼 기록된 말씀을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고전 14:1).


(5)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중동의 고대 이방종교들은 여신들에 대한 숭배는 물론이고 신전(temple)에서의 여제사장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서 매춘행위를 하였다.17)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은 여성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 제사장직만이 존재하여 왔다.18) 구약 율법에서 여성이 제사장 자격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성 안수가 불가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19) 오늘날은 여성들에게도 교육과 훈련을 시켜 안수를 줄 수 있다고 궤변을 토한다.


반증(反證):

물론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와 같은 혼음종교와의 구별은 언제나 분명히 하였다(레 18:3; 렘 3:1-2; 겔 16:16, 23). 그러나 구약시대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들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직은 모세시대부터 제도화되었으나 실상은 인류의 초창기 아벨 때부터이다(창 4:1-5; 히 11:4). 아담의 10대 손 노아는 족장으로서 온 가족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창 8:20-21). 도 자녀들의 수대로 매일 아침 일찍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곤 하였다(욥 1:5). 아브라함도(창 12:7-8), 이삭도(창 26:25), 야곱도(창 35장; 36장) 그 이후 아론의 자손들을 통한 제사를 드렸다(레 10:1-2). 구약시대 공적인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하여 태동된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자아의지에 의하여 결정된 성직(聖職)이다. 그리고 구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신약시대에 장로와 감독(목사와 감독)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저들은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들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으로 여제사장은 제외되었다고 주장하니 성경도 신구약 교회 역사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나타낸다.


(6) 신약시대에도 여성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궤변

“여성도 동반자(partner)로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성직에 봉사함으로 이 시대의 사명을 다해 보자는 것이다”.20) 그리고 “로마서 16:1, 3, 7, 12; 빌립보서 4:2-3 등에서는 뵈뵈·브리스길라·안드로니고·유니아· 순두게·유오디아 같은 여인들을 동역자라 칭하고 복음을 위하여 주안에서 바울과 함께 힘쓰며 수고하였다” 특히 겐그리아 교회 일꾼 뵈뵈는 집사가 아니라 복음사역을 맡은 사역자라고 주장하면서 여자 목사 제도를 주장한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동역자”를 성직자(목사 또는 신부)로, 일반적으로 여자 교역자를 디아코노스( )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교역자라고 주장한다.21)


반증(反證):

사도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교회 내에서의 여성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직분을 귀하게 여겼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빌 4:3)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또 로마에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롬 16:3)고 언급하고 문안을 부탁하였다. 그는 또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를 교회의 일꾼으로 많은 사람들을 돕는 자로 천거하였다(롬 16:1).

그러나 위의 여러 부녀자들은 각기 속한 교회에서 각기 맡은 직분(봉사직)에 충성하므로 사도 바울을 조력한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여러 부녀자들은 교회의 일꾼들이요, 광의적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라고 칭하였다. 그 부녀자들은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서의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7) 신약시대는 남녀 모두 제사장이므로 여자도 제사장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신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남녀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직분으로서의 성직 안수는 남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이다(Ibid., p. 57)라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물론 구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참 신자들에게로 이전되었다. 민족적 이스라엘로부터 영적 이스라엘로 이전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마다 왕같은 대제사장(every believer-High Priest)이 되어(벧전 2:9)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하나님께 직접 예배드리는 특권이 부여되었다(히 4:16).

그러나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예배 인도자와 예배드리는 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예배 인도자도 예배드리는 자들 중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배 인도자는 예배의 요소들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 회중 앞에서 설교(강도), 성례(세례·성찬) 거행, 다스리는 일(치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는 축도 등을 포함한 예배 순서 일체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반면에 예배드리는 자들은 일반 회중들이다. 구약시대 제사는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드렸고 신약시대 예배는 기름부음 받은 목사가 인도한다. 따라서 성직 안수는 남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남녀의 구별에 의하여 제정하신 하나님의 성직 제도를 전면 부인하고 도전하는 행위이다.


(8)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은사를 받았음으로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동일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남녀 차별 없이 다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우리는 여자들의 받은 은사의 다양성과 탁월한 지식·재능·능력 그리고 신앙적 열심 등을 결단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여하한 이론적 뒷받침이나 근거가 없다. 여자들도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여성도들의 신앙적 열심과 헌신적 봉사는 참으로 남성도들의 귀감이 된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 초기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도들이 어떤 은사들은 남자와 동일한 은사를, 또는 남자보다 더 많은 은사를 받았으므로 각기 전문분야에서 높은 직위에 앉아 활동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동일한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은사를 받았을지라도 동일한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분들은 남자들에게만, 어떤 직분들은 여자들에게만 그리고 어떤 직분들은 남녀 모두에게 맡기셨다.

제사장직은 이 세상의 다른 전문직들과는 분명히 상이하다.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천직(天職)이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성직은 천직이요, 천직은 하나님께서 제정,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중요한 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성 안수 반대는 여성은 열등하고 남성은 월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각기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잘 개발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9) 여성 안수 반대는 형평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궤변(여신도들의 수, 봉사에 비추어)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에는 여성도들이 다수이며 교회의 봉사도 여성도들이 더 적극적이니 형평의 원리에 맞도록 여성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증(反證):

물론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여성도들이 다수이며, 여성도들의 헌신적 교회 봉사는 뭇 남성도들의 귀감이 된다. 그러나 성직은 남성과 여성의 수의 비례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은 소위 형평의 원리에 맞도록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직의 원리에 따라서 안수를 허락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직의 원리란 성직은 남자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성직을 남녀 평신도의 수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10) 여성 안수 반대는 비민주적이라는 궤변(최고 의결기구에서 제외되므로)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의 최고 결정기구는 당회인데, 당회는 소수 남자 목사와 남자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전체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비민주적 결의기관이다. 소수 남성이 다수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권 침해라고 한다. 다수의 여성들이 결의 기구에 참여치 못하니 교회 운영이 잘못된다고 한다.


반증(反證):

물론 당회는 남자 목사, 남자 장로로 구성된 교회의 최고 결의기구이다. 그러나 개신교 다수는 회중이 공동의회를 열어 장로들을 선택하고 노회가 안수하여 장립한 후 장로들로 하여금 성도들을 대표하여 일을 처리하는 의회 민주 주의이다. 그러므로 당회는 교회 전체의 의사를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남자 장로들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려 왔으니 과거 2,000년 동안 교회의 행정은 비민주적이고 독재였단 말인가? 교회 역사에 그 많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은 어찌하여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는가? 경건한 여성도들은 어찌하여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가? 그들은 성령의 뜻을 거슬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11) 하나님의 여성상(Female image of God)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말하기를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남성상(male image of God)만을 전통적으로 생각하여 왔다. 과거의 유대교 전통이나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비유하는 데만 치중하여 하나님을 “남성신”으로 착각해 온 경향이 있다. 남성신은 남자와 연결되어 남성 제사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여성이 성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여성상(female image of God)을 발굴하여 여권(woman’s right)을 다시 찾고, 여성들에게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여성상을 엘 샤다이에서 발견한다고 궤변한다. 하나님의 명칭들 중 “엘 샤다이”( )는 주석적으로 볼 때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이해되며, 젖먹이는 가슴(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해석되는 엘 샤다이의 모성적 이미지는 구약의 하나님 이해로서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고 하였다.22)


반증(反證):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들 중 엘 샤다이( ; God Almighty)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창 17:1; 28:3; 35:11; 48:3; 49:2; 출 6:3 등). 70인역에는 엘 샤다이를 판토크라톨( ; Almighty; 전능자)로 번역되었다. 신약에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 ; Lord God the Almighty)으로 되어 있다(계 4:8).

“엘 샤다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하나님의 양육하심과 돌보심을 나타내는 모성적 이미지로 이해해도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은 억지 주장이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시며 해산의 수고와 양육하심과 돌보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모성적인 역할도 하신다(사 49:15). 그렇다고 하나님의 명칭을 임의로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개칭할 수 있는가?


(12)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An Inclusive Language Lectionary)

미국의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미국교회협의회(NCCC in USA) 교육목회분과위원회는 여성 해방, 여권 운동, 남녀평등 운동의 일환으로 남성 명칭들을 남녀를 함께 지칭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들로 대치하였다. 남녀 11명이 위원이 되어 1980년부터 3년 동안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이란 책들을 출간하였다.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첫권(Cycle A)은 1983년부터, 둘째권(Cycle B)은 1984년부터 그리고 셋째권(Cycle C)은 1985년부터 예배시 교독문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23)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포괄적 용어로 『신약과 시편』(An Inclusive Version)을 5년 편집 끝에 출간하였다.24)

미국교회협의회가 남성 명사들을 남녀가 공히 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들로 대치시킨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God the Father→God the Father and Mother)

신구약 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위한 그의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고(마 6:9), 빈번히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Father or my Father)라고 불렀다(막 14:36; 마 11:27; 23:9).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중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남녀평등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명칭까지도 임의로 변경한 것은 불신앙적 배교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신(神)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sex)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가장 잘 묘사한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이”로(the Son of God→Child of God)

자유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자격(sonship)으로서의 아들이라는 특수명칭을 아들과 딸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인 아이(child)로 대치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여자아이로 성을 바꾸거나 또는 여자아이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하시기 전에는 성자 하나님(God the Son)으로 그에게는 신성(deity)만 있었다. 그러나 도성인신 하심으로 그의 신성에 인성(humanity)을 취하사 신인(God-Man)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만은 완전한 신(神)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님은 남자(male)이었다(마 3:17; 막 1:11; 마 4:1-3; 11:27; 15:39; 27:40; 막 13:32).


“왕” “지배자”로(King→Ruler)

왕이란 명칭은 위엄과 권위 그리고 통치권을 나타내는 남성 명사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세상에는 여왕(queen)들도 있다고 하면서 왕이라는 명칭 대신 지배자란 명칭으로 대치하였다.


“남자” “사람”으로(Man→Person)

자유주의자들은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 안트로포스( )는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명칭이므로 남녀를 모두 나타내는 단어인 사람(person)으로 대치하였다고 궤변 한다.

물론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 안트로포스는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사람”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마 4:4; 12:35; 요 2:25).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의미에서 “남자”까지도 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는 사람(person)으로 대치한 것은 성 구별까지도 철폐하는 망동(妄動)이다. 그러기에 저들은 호모섹스까지도 허용하지 않는가?


“형제들” “형제자매들”로(Brethern→Brothers and Sisters)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 형제들이란 형제 자매들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형제들을 형제 자매들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물론 형제들이란 단어 아델포스( )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친구들을 가리키기도 하며(요 20:17), 형제들을 가리키기도 하며(마 1:2; 14:3), 이웃을 가리키기도 하며(마 5:22, 23, 24; 18:15, 21), 같은 민족을 가리키기도 하며(행 3:17; 롬 9:3),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마 28:10). 그러나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남자 형제들(brothers)만을 가리킬 때도(행 7:23, 26; 히 7:5) 자매들(sisters)이란 말로 대치할 수 있는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로(Abraham→Abraham and Sarah and Hagar)

여권운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사라와 하갈의 이름을 더 추가함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사라의 계통인가? 하갈의 계통인가?를 알 수 있다고 궤변한다. 그리고는 마태복음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을 우리의 아버지로 사라와 하갈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임의로 추가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할 수 없다는 무서운 계명(계 22:18, 19)도 아랑곳없다.


“경찰” “경찰관”으로(Policeman→Police officer)

폴리스(police) 다음에 접미어로 맨(man; 남자)이 붙었으니 맨(남자) 대신에 어휘서(officer; 관)를 붙이므로 남녀경찰관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의장” “의장”으로(Chairman→Chairperson)

의장(chairman)은 체어(chair) 다음에 접미어로 맨(man; 남자)이 붙었으니 맨(남자) 대신에 펄손(person; 사람)으로 고쳤다.


(13) 외국의 전통적 교회들은 다 여성 안수를 시행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와 신앙 교류를 같이하는 다른 나라들의 전통적 교회들은 다 여성 안수를 허락한다. 국제 교류적 측면에서도 여성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먼저 여성 안수를 실시하는 다른 나라들의 소위 전통적 교회들이란 어떤 교회들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교회들과 교류하는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도 자유주의 교회들 아니면 신비주의 교회들이다. 실례로 우리 나라의 통합측 장로교와 기장측 장로교가 교류하는 미합중국장로교(PCUSA), 기독교감리회와 교류하는 미국연합감리교(UMC) 등은 극도로 타락한 자유주의 교회들이며, 우리 나라의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기하성)와 오순절 성결 교회와 교류하는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현대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신비주의 교회들이며, 구세군은 오래 전부터, 영국 성공회는 1974년부터 여성 안수를 실시하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여자 목사, 히피 목사는 물론 호모섹스 목사들도 있다. 이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과 비성경적 연합 운동(Ecumenical Movement)도 하고 있다. 그래도 이들 교회들이 전통적 교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4) 여성안수 반대는 생명경시라는 주장

여성안수 찬동자들, 여권운동자들은 여성안수 반대를 생명경시와 동일시하여 여성안수 반대는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예장 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생명경시 발언 대책위원회).


반증(反證):

여성안수 반대와 생명경시는 전연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성안수 반대와 생명경시를 동일선상에서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 되는 논리적 모순이다.

생명은 생명체를 존재케 하는 원동력이다. 원동력이란 생명체를 활동시키는 힘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마꾸겠느뇨?”(마 16:26)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소위 생명을 중시한다는 여권운동자들과 여성안수 찬동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산아제한(Abortion)을 찬동한다. 산아제한은 무제한 어린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이다. 생명의 근원이시오 부여자이신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창 9:5-7; 제 6계명)고 명령하셨다.


(15) 여성안수 반대하는 자들은 철저히 회개하고, 여성안수 반대제도를 철폐하라는 궤변

최근 “예장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생명경시 발언 대책위원회”에서 있은 윤철호 교수의 특강의 마지막 발언들 중의 하나.


반증(反證):

모든 사람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있다. 이는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어떤 종파, 어떤 교단의 신앙노선, 교리적 입장, 예배의 형태 등등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관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생명과 같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어떤 종파, 어떤 교단, 어떤 신앙노선을 선택하는 여부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나의 신앙관과 다른 사람의 신앙관은 전적으로 반대될 수 있다. 그 때에 나는 다른 종파, 다른 신앙에 관하여 나의 신앙의 세계에서 잘못된 신앙, 잘못된 교리 등에 관하여 가르쳐야 하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유 3). 그러나 자기의 신앙관과 배치된다 하여 그 세계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 철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요,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위배된다.



6. 여성 안수 제도의 진전 과정(Developments in Womens Ordination throughout Church History)


(1) 1927년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된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모체 중에 하나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 Commission on Faith and Order)가 1927년 스위스의 로잔(Lausanne)에서 처음 모였을 때 400명의 대표들 중 7명이 여성들이었다. 여성 대표들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사역과 직분에 관하여 진술하기를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올바른 위치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고 하였다.25)


(2)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147개 교단 352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한 그때도 “여성의 완전 목회사역에 합의하지 못하였다”고 함으로 일부 자유주의교회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채용하고 있으면서도 여자 목사 제도의 찬반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26)


(3) 1961년도 11월 18일부터 12월 6일까지 인도의 뉴델리에서 모였던 WCC 제3차 총회 시에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가정, 교회, 사회, 남녀 협력 분과 위원회와 협력하여 여자 목사 제도를 연구하도록 요청받았다.


(4) 이에 호응하여 불란서 파리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1963년도 7월 12-26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모였던 제4차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이 연구보고서는 여자 목사 문제에 대하여 적극 찬동하였다. 그리고 “목회사역에 있어서의 여성”이라는 주제하에 연구를 계속할 것을 추천하였다.27)


(5)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현재 교회 연합 협상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특히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결의하였다.28)


(6) 1968년 7월 4일부터 20일까지 스위스의 읍살라(Uppsala, Switzerland)에서 모였던 WCC 제4차 총회에서는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찬동하는 피치를 들었다. “현재 여자 목사 제도가 점차 증가한 것과 이 경험에 비추어 신학적인 반영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29)


(7) 1970년도에 “앞으로 다가 올 안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WCC 조사에 의하면 당시 215개 WCC 회원 교단들 중 “72개 교단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허락하고 있다”고 하였다.30)


(8) 1971년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루베인(Louvain)에서 모였을 때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토론에 더욱 집중하였다. “19세기 동안의 여자 목사 제도 반대세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은 교회에서 변하고 있다. 여자 목사 문제는 취급하여야 하며 그때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녀의 동등한 공동참여 문제에 관하여 활발히 토의하면서 남녀의 공동 참여야말로 참된 공동사회의 지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목회사역에 남녀 상호 인정을 강조하고 이것이 복음에 대한 반응의 한 형태라고 하였다. 여자 목사 제도는 교회정치와 헌법에 관련된 것이요, 교리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31)


(9) 1975년도 11월 23일부터 12월 10일까지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개최되었던 WCC 제5차 총회에서도 여자 목사 제도를 제2분과와 제5분과에서 취급하였다. 제2분과에서는 “연합은 완전한 이해를 요구한다”라는 제목 하에, 제5분과에서는 “교회와 사회에 있어서의 여성; Women in Church and Society”이라는 제목하에 여자 목사 제도를 토의 및 결의하고, 이 안건에 대한 특별 건의서를 WCC 총회에 건의하였으며, WCC 총회에서는 그 건의서를 채택한 후 WCC 산하 회원 교단들에게 여자 목사 제도에 관한 결의문을 추천 및 권장하였다.

WCC 제 5차 총회의 결의 채택 사항들

여자 목사 제도에 관하여 결의 채택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회원 교단들은 여성들의 신학적 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것.

② 회원 교단들은 모든 결의기관들 안에 적극적인 여성 참여를 보장할 것.

③ 여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교회들은 남자들과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고, 동일한 급료를 지급할 것.

④ 여자 목사 제도에 신학적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는 회원 교회들은 모든 안수직 목회사역에 여자들이 참여하도록 행동을 취할 것.

⑤ 여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회원 교회들, 다른 교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교회들, WCC에 가입하지 않은 비회원 교회들 모든 교회들에게 여자들이 받은 은사의 척도에 따라서 안수직 목회사역에 전적인 여성참여를 권장한다”고 하였다.32)


실제상 WCC는 나이로비 총회에 참가하는 대표들 중 상당수의 여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회원 교단들에게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그 총회의 “총대 20%는 여성들이었다”.33)


(10) 1975년 헬렌 스파울딩(Helen Spaulding)이 마련하고 WCC의 교회와 사회분과 위원회에서 주최한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295개 회원 교회들 중에 104개 교회(교파)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허락하고 있으며, 기타 교회들은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였다(Ibid.). 그러나 동년(1975년) WCC의 자체조사에 의하면 WCC 회원교단들 중 ⅔이상이 여자 목사 안수를 허락한다고 보고하였다.


(11) 1978년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인도의 방갈로에 있는 기독교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모였던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는 WCC에 13개 추천사항들을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 제9항의 내용에 의하면, “여러 교회 단체들에게 여자 목사 안수를 권장한다”고 하였다.34)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교육 목적 중 하나는 교회와 사회에 여성 참여를 증가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35)


여자 목사 제도는 자유주의 신신학 노선을 걷고 있는 교회들, 신오순절주의(신비파) 교회들, 군소 독립교단들, 그리고 지금은 소위 복음주의 노선을 걷는다고하는 신복음주의 교회들 대다수가 채택하고 있다. 한국에 교회들 다수는 앞을 다투어 여성도들에게 목사 안수를 줌으로 여자 목사 홍수시대가 이미 도래 되었다.  더욱이 급진적 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일부 교회들(예를 들면 미국 장로교나 미국연합감리교 같은 교파들)은 여자 목사는 물론 히피 목사, 호모섹스 목사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분명히 앞으로는 더 많은 여성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의 강단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그 증거로는 여자 목사 제도를 채택하고 시행하는 “교파 신학교들의 학생수의 30-40%가 여학생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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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 존 라일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안전은 보장되어 있다. 전능하신 건축가께서 영광스런 약속을 하셨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모두 소멸되고 사라지겠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다. 만물은 외부의 공격이나 내면의 부패로 인해 무너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지으신 성전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많은 제국들이 세워지고 번성하다가 쇠하여 사라지곤 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두로, 카르타고, 로마, 헬라, 베니스와 같은 나라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가? 인간의 손으로 세운 나라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전히 건재하다.

 

가장 강대한 도시들도 폐허로 변했다. 바벨론의 높은 성벽도 평지가 되었다. 니느웨의 궁궐도 흙더미로 변했으며, 100개나 되었다는 테베의 성문도 지나간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참교회는 아직도 존재한다.

 

물론 초창기에 세워진 유형 교회들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에베소교회와 안디옥교회가 어디 있는가? 알렉산드리아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가 어디 있는가? 고린도교회와 빌립보교회가 어디 있는가? 그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그들은 주교와 교회 회의와 의식과 학문과 전통을 자랑할 뿐,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 안에서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복음을 굳게 붙잡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당한 직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믿음을 올바른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 결과 세상의 다른 것들처럼 되고 말았다. , 그들에게서 촛대가 옮겨졌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참된 교회는 한 곳에서 짓밟히거나 압제를 당하면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려 번성한다. 불과 칼, 감옥과 벌금과 형벌 등 그 무엇으로도 그 생명력을 없애지 못했다. 박해자들은 모두 죽어 가야 할 곳으로 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더욱 왕성해졌다. 참된 교회는 인간의 눈에는 지극히 약해 보여도 모루(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처럼 강해 지금까지 박해의 망치를 수없이 부러뜨렸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해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태복음 1618절의 약속은 참된 교회 전체에 적용된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언제나 존재한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그분의 백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합이 통치하 던 때도 이스라엘 가운데에 신실한 백성이 칠천 명이나 남아 있었다.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브리스톨 해협의 밀물과 썰물을 막을 수 있겠는가? 행성들이 정해진 궤도를 도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신자의 구원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석 위에 세워진 참된 교회에 속한 신자라면, 아무리 미약하고 가치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온전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신비한 몸을 이루는 관절과 마디를 단 하나도 부러뜨릴 수 없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관계를 절대 갈라놓을 수 없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떼이다 그리스도의 양떼에 속한 양들은 설령 병든 것일지라도 단 한 마리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성부께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8:19).

 

참된 교회는 세상의 알곡이다. 채로 치고 흔들어 이리저리 걸러 내도 알곡은 단 하나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고 모두 곡간에 저장될 것이다. 오직 껍데기와 쭉정이만 불에 탈 것이다. 그분의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분은 알맞은 때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그분의 군사 명단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똑같다.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10:28)라고 친히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소 아래에 있는 감옥의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복되신 예수님, 그들이 저를 주님의 참된 교회에서 내쫓을 수는 없나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사탄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서 신자를 단 한 사람도 내쫓을 수 없다.

 

세상의 자녀들이 교회를 아무리 사납게 대적할지라도 회심 사역을 방해할 수는 없다. 율리우스 황제가 "지금 그 목수의 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떤 나이 든 신자가 "그분은 율리우스를 위해 관을 만들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율리우스는 전투 중에 사망했고, 그의 모든 영광과 권력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스미스필드(16세기에 이단자를 화형시키던 곳)에 불이 타오르고 래티머와 리들리가 장대에 묶여 화형을 당할 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는가? 그분은 교회를 세우고 계셨다. 그 일은 혹독한 시련의 때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영혼을 의탁한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다. 그분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강하시다.

 

형제들이여, 사역자들이 죽고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멸망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늘 뜻하신 일을 이루시고, 더 밝고 영광스런 별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그 별들은 모두 그분의 오른손 안에 있다.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를 떨쳐 버리라. 정치가들의 책략이나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들의 간계 때문에 위축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에 필요한 것을 늘 공급하신다. 그분은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도록 교회를 보살피신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29-36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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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작은 새의 기도

                       최송연

 

내 영혼에

성령의 불을 밝혀주소서
불어치는 모진 폭풍 
너무 거칠고 캄캄하여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님 사랑

내 마음속에 넘쳐나게 하소서
동족의 비방하는 돌팔매질
너무 강퍅하고 드세어  
여린 날개 접지 않기를...  

 

날마다

생명 시냇가로 나아가

그 물 마시기 나 원합니다

주의 피로 씻은 영혼

바람에도 오염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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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없는 삶을 위한 10계명 1. 남들보다 재미있게 살아라 마음껏 웃음을 터뜨리면서 최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보다 기분을 들뜨게 하고 기운을 솟구치게 하는 것이 없다. 가능한 이런 웃음을 생활화 한다면 사는 동안 즐거움과 활력이 넘칠 것이다. 2. 통찰력을 얻어라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자기 만족조차 얻지 못하는 공허하고 초라한 삶을 살게된다. 통찰력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때 얻어진다. 3.깊이를 얻어라 통찰력으로 최선의 나를 발견한다면 깊이로는 최고의 신을 발견한다. 궁극적으로는 지혜가 다가와 우리를 껴안으며 통찰력과 깊이가 하나임을 보여준다. 4. 도피처를 마련하라 혼란스럽거나 부담스런 상황에 이르면 도피의 문을 연다. 한계에 부딪혔다는 생각이들면 과감하게 떠나라. 그리고 돌아와도 괜찮을 때까지 자신만이 즐겨찾는 도피처에서 돌아오지마라. 자신의 영혼을 달래주고 채워주는 곳으로 멀리... 5.매일 밤 글을 써라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위대한 침묵을 통해 자기 반성을 하고 그 느낌을 글로 쓴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6. 자신의 직업에 대해 생각하라 내 직업에 영향을 준 고마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직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본다. 7.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라 다양한 친구들과 교제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최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일이다. 죽는 날까지 자신을 교육시키자. 8. 잠시동안 혼자 살아라 혼자 사는 생활은 일상의 끊임없는 욕구에서 한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짐으로 평화와 고요의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제안이나 경계없이 우리의 인생에 접근할 수 있도록하며 자아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나 혼자 사는 외로움과 스트레스 등도 알아야 함을... 9. 자신을 소중히 대하라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역시 소중히 대할 줄을 안다. 10. 아무것도 잃을게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무언가를 잃는것보다 더 나쁜 것은 인생에 없다. 그러나 잃어야할 것을 잃고 나면 신비스런 죽음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생으로의 비밀스런 준비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될때 인생을 보는 시각은 더크고 넓어지며 삶의 모든 부분이 전보다 더 신성하게, 더 재미있게 드러나고 사는 법을 알게 되지 않을까. 전 여기다 덧 붙여서..끝까지 믿음으로 살아라 ㅎㅎ 즐거운 나날들이 되세요^^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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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정을 따지지 말라. / 박신 목사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6-17)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牛耳讀經)라는 말대로 소는 글을 읽어 주어도 전혀 알아먹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전도자가 가끔 느끼는 기분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부정의문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러했다고 하며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중적 예언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언을 인용해 전하는 것을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귀에 경 읽는 것처럼 느껴져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 전도자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간섭하여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로 전도를 망설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속뿐 아니라 개인 구원도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차피 구원받도록 정해져 있다면 구태여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바울이 예정을 말해놓고 본문처럼 스스로 믿도록 전하라고 권하면 성경 말씀끼리도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정론을 더 확정지어 주는 내용입니다.

                    예정을 신학적 논리에 비춰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간단히 접근해 봅시다. 믿을 갖는 것이 혼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거나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 관심 내지 호감을 갖고 성경과 관련 서적을 연구해 깨달아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주위에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고 또 그 들음이 계기가 되어 믿게 됩니다. 교리적 설명뿐 아니라 신자가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들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믿도록 계기가 되어 준 사람의 입장에서 따지면 그에게도 똑 같이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죽 연결해 가면 전도자들의 고리가 생깁니다. 간단한 예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서양인 선교사가 생명을 걸고 전했기 때문에 신자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믿는 자들의 고리는 결국 열두 사도로 모아지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 따라서 예정되어 있기에 전도 안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은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뜻과 같아집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십자가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들도 개인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열 두 사도는 없었고 또 지금 신자 된 나 자신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스스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15)로 인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했습니다. 택정함을 입은 모든 세대의 신자들은 다음 세대의 예정된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해 영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신자가 전할수록 소귀에 경을 읽는 것 같은 체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정된 사람을 미리 알면 그들만 찾아가 전하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세대의 예정자를 전세대의 신자에게 완전한 비밀로 해 놓았습니다.  

                    만약 구원이 예정된 자를 미리 알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절대 건설 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자꾸 어차피 구원받을 최종 숫자는 변함이 없지 않느냐라는 점에만 주목해 전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민족 전체가 택정함을 받았다고 자신했습니다.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을 맛보았고 거룩한 율법마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기는커녕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우상숭배에까지 흘렀지 않습니까?

                    만약 택정함을 입은 자들을 미리 안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선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 유기(遺棄)자들이 볼 때는 그야말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지옥 간다면 선악을 분별해 시행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택함을 입은 자들을 죽이려 들 것 아닙니까? 택함을 입은 자도 어차피 구원 받는데 즐길 것 실컷 즐겨도 된다고 여길 것 아닙니까? 이래저래 죄악만 만연합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어야 할 복음이 거꾸로 죄악에 더 불을 지르는 격입니다. 자기들 자녀 중에도 구원 받을 자와 아닌 자로 나눠지면 부모가 제대로 그 자식들을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든 착하게 사는 자를 구원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구원관이 논리적으로도 틀렸다는 이유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만 지금 논하고 있는 관점에서만 봐도 전도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남의 구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합격점에 드느냐 못 드느냐 만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비유컨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고3 들이 무한 경쟁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선하게 살겠다는 노력이 단순히 서로 구원의 가능성을 다투는 문제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길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에게 나쁜 짓만 안 하면 됩니다. 대신에 서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바쁩니다. 지금 불신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정되어 있으니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 의심하는 것은 이 땅에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 건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과 통합니다. 전도란 단순히 구원 받을 사람의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의 최종 숫자는 하나님이 정하며 구원 자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전도를 인간이 구원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대신에 전도는 이웃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건설하려는 소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 예수님과 동행 하는 은혜와 기쁨이 너무나 귀하고 좋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주저하는 신자는 그런 기쁨을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심지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예정이지 확정은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로 구원이 예정된 자의 구원을 확정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예정된 자는 죄악과 사단의 사슬에 묶여 괴롭고도 비참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자식도 예정 밖에 있을 수 있으니 전도하지 않고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예정된 자를 구태여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일이 결코 미련한 짓이 아닙니다. 전도란 하나님이 예정된 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만들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미리 맛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숫자를 내 힘으로 늘리는 것이 전도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끼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복음을 말로 또는 삶으로 남들이 듣고 보아 분명히 알게끔 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열두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예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우리 자식 세대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두고 보시겠습니까?

                    6/7/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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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노우호 목사의 방언 검증론에 대한 논쟁이 페이스북(facebook)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실 공개적으로 책은 발간되지 않았지만(회원에게만 판매 됨), 그의 강의가 유투브에 올라와 있었고, 그의 책 요약본이 페이스북에 돌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방언은사 부정론이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반대는 주로 은사중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은사중지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본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있었지만 사도들이 죽으면서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을 넘어선다. 방언의 은사는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잘 몰라 잠시 착각하여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생각했었으나(고린도전서 12-14장) 나중에 그 실상을 알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린도후서 11장) 그의 주장이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최근에 그의 책 『방언을 검증하자』(경남: 에스라하우스 2014)를 입수해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방언을 검증하자는 그의 주장과 논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면밀히 분석해 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게다가 논리 또한 허점투성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과연 올바른 성서적 근거에 기인했는지 여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역시 그의 주장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단지 “그 사람은 체험이 없어서 엉터리 해석을 하지.”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본 결과,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크리스천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방언은사 부정론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 교회에서 행하지는 방언은 100% 가짜다. 자신이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의 은사를 검증해 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본래 없었고,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였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해 본 결과 외국어는 없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주장에는 많은 논리적 오류와 비약, 왜곡된 지식과 편향된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방언이 외국어라고?

                    노우호 목사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순환논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외국어라고 전제하고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전제와 똑같다. 그는 자신이 전제하는 것, 즉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을 선언할 뿐, 바울의 편지글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통해 방언을 검증했다. 노 목사는 ‘방언’을 가리키는 ‘글로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지방어’이기 때문에 방언은 실제 언어인 외국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글로사’의 의미를 일반 용법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헬라어에서 ‘글로사’의 기본 뜻은 ‘혀’다(막 7:33). 영어에서 모국어를 ‘mother tongue’이라고 하여 ‘언어’를 의미하듯이, 헬라어 ‘글로사’도 ‘언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행 2:11). 또 환유에 의해 이것이 ‘공통 언어를 쓰는 나라 혹은 백성’을 의미할 수 있다(계 5:9). 바울이 ‘방언을 말하다’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 ‘글로사’는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방언을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8-10). 바울이 열거한 9가지 성령의 은사는 모두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고전 12:1, 7)을 의미한다. 그런데 학습이 가능한 외국어가 성령의 은사 목록에 들어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또 바울이 설명한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는 구절에서도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님을 암시한다. 아울러 방언이 이성이 아닌 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방언을 통역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잘 아는 통역사가 아닌 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어서 바울은 방언이 공적으로 행해졌을 때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고전 14:6-19), 인간의 언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외국인이 된다고 비유하는데(10-11절),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할 때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과 외국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교통이 안 되는 공통점이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 외국어가 인간의 언어라면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

                    방언을 외국어인가로 검증한다고?

                    위에서 본 대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면 노우호 목사가 방언을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검증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그는 37년 동안 방언을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아닌 것으로 검증하느라 헛수고를 한 것이다. 방언의 진위 여부를 그것이 실제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엉뚱한 생각이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 통역 은사의 목적이 방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통역의 은사의 목적과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예배 가운데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고 하는데, 그 조건은 그것이 통역되지 않았을 때다(고전 14:5). 만약 통역이 되면 방언은 예언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고전 14:13). 예언이 위로, 책망, 권면을 통해 듣는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라면(고전 14:3), 방언도 통역을 통해 사람들을 세워 주는 은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의 목적은 예언의 목적과 같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하라고 한 일이 없다. 만약 있다면,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올바로 신앙고백을 하는가에 해당할 것이다(고전 12:1-3).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와 비슷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9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는 영 분별의 은사다. 영 분별의 은사란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고전 12:7) 어떤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임하는 은사다. 다른 이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의 출처가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즉시 분별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첫 선교 여행지인 구브로에서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나자마자 보였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바예수를 향해 “모든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1)고 말했다. 바울이 바예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토대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여 볼 때 이런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행 13:10). 그래서 혹 어떤 사람의 방언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분별해 낼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을 녹음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 해석이 동일해야만 참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방언통역의 실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의 주장 자체가 방언이 외국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실제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신자의 기도라면 통역의 범주는 그 기도 전체라기보다 그 사람의 위로와 책망과 권면의 필요에 따른 일부분이다. 또 통역의 은사 자체도 그것이 통역자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출되기 때문에, 같은 성서를 읽어도 다른 설교가 나오듯이, 같은 방언이라도 통역하는 사람의 언어와 신학으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노우호 목사가 제시하는 방언 검증의 원리로 제시된 사랑과 교회건덕(96-98)도 검증의 원리로써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길을 따라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는데(고전 12:31), 그 전제는 그 은사가 진짜라는 것이다. 은사의 진위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은사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고전 13:1-3). 바울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지, 사랑이 없이 사용되는 은사가 가짜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방언이 통역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는 자신을 세운다고 했지 교회를 세운다고 하지 않았다(고전 14: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가의 여부로 방언의 진위를 증명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또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인 일에 대한 분별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방언이나 예언을 하면 예배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이 그 예배 가운데 그 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4:29).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취소했다고?

                    노우호 목사의 주장 중 그가 매우 중점을 두는 것 중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실상을 잘 모르고 처음에는 은사로 인정했다가 후에 취소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0-12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를 비껴가기 위해 노 목사는 역사비평적방법론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식과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실상을 알고 은사로 인정한 사실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이 뭐라고 했기에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을 취소했다고 주장하는가? 흥미롭게도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방언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구절은 두 절이다. 첫째,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해도 잘 용납한다는 것이요(고후 11:4), 둘째,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이라는 것이다. 노 목사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속이는 일꾼(그는 개역한글번역을 사용하여 “궤휼의 역꾼”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이 바로 고린도교인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는 “궤휼의 역꾼”을 고린도교인 전체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교인 전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바울이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방언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대한 그야말로 엉터리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은 고린도교인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었다(고후 10:12, 18). 바울은 이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이들을 바울의 반대자 혹은 대적자라고 부른다. 최근 발행된 한 신약개론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대적자들은 분명히 당시에 회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방문자들로서, 그들은 회중과 함께하는 바울 사역에 어떤 위협을 초래”했던 자들이다(I. Howard Marshall 외,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162. ).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주석자들 가운데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은 고린도교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신약개론 책이나 고린도후서 주석 책 한 권만 읽어도 해결되는 문제를 노우호 목사는 말도 안 되게 풀고 있는 것이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그친 것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 후에는 그쳤다고 말한다. 그는 표적이 나타날 때의 순간성과, 이 표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계속 나타날 필요성을 착각한 것 같다. 표적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순간적이지만, 그 체험은 다른 곳에서 성령이 임할 때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다. 만일 노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에서 각각의 저자는 이러한 표적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썼다는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또한 성령이 임하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16:9-20) 저자는 예수 믿는 곳에 방언을 비롯한 여러 표적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고, 누가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사람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행 1:8).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엉뚱하다. 성서적 근거도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 비약도 심하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 그가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얻은 신뢰일 것이다. 둘째, 그는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학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칼빈을 신봉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는 매 은사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어투로 칼빈의 주장을 소개한다(70-83). 셋째, 그의 주장이 체험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헬라어 단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약 성경 구절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번역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 대한 역사적, 나아가서 비평적 해석까지 곁들여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애를 썼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일정 부분 신뢰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서 해석은 초보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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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해사본이란 1947년과 1956년 사이에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되어진 사본을 말한다. 이 "사본들"은 일부 완전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인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의미로 보면, 사해사본들은 주전 3세기 부터 주후 8세기 무렵까지의 문서들로서 사해바다 주변 지역의 7 장소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을 통칭한다. 사해바다 주변 지역들이란 것은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아트, 나할 헤베르, 나할 쩨엘림, 나할 미쉬마르, 그리고 키르벳 미르드 지역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에는 카이로에서 발견되어진 "그니자"까지도 포함되어지기도 한다. 한편,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은 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쿰란 사본들을 가리킨다. 1952년 3월 10일 부터 29일까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사해바다의 북서쪽 해변가 일대, 즉 하자르 엘 아쯔바흐에서 부터 라쉬 훼쉬카에 이르는 8 km 지역에 흩어져 있는 273개의 동굴들에 대한 답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9개의 동굴들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확인하였고 25개의 동굴들에서 쿰란 제 1동굴과 쿰란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같은 형태의 토기들과 유물들을 출토하였다. 그중에 단지 11개의 동굴에서만 "기록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가리켜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이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 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 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 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 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들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제 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7가지 두루마리 사본들은 ① 이사야 두루마리A(1QIsaa) ② 이사야 두루마리 B(1QIsab) ③ 공동체 규칙서 (1QS) ④ 전쟁사 (1QM) ⑤ 감사 찬양시편 (1QH) ⑥ 하바국 주석서 (1QpHab) ⑦ 창세기 외경 (1QapGen) 등이며, 이것들 외에도 72개의 조각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15개가 성서 내용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가, 스바냐, 시편의 주석서들과 2개의 공동체 규칙서의 부록들이다(1QSa; 공동체의 메시야 규율 1QSb; 축복문 모음집).

                     

                    제 2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있는 2Q5 같은 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Q18 은 제 2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라서(Sir 6:14-15, 20-31)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는 매우 초기에 해당하는 시라서 사본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10세기,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 그니자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라서는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 만이 알려져 왔었었다. 2번 동굴에서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 2 경전 사본 조각들도 제공한다. 그 밖에도 15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텍스트들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2개의 '쥬빌리(Jubeilees)' 사본들(3Q19, 3Q20)과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3Q24)' 등이 있다.

                     

                    제 3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에스겔 16:31-33, 시편 2:6-7,애가 1:10-12, 3:53-62) 내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3Q4)이다. 또한 유명한 "청동 플라크"(3Q15)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12개의 칼럼에 보물들(돈, 금, 은, 기타 보석들)이 감춰진 장소들이 열거되어 있다. 감춰진 보물들의 수량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들면, 4600 달란트의 은과 금 등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 누구도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있다.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4QpNah)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맞추어야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 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가운데는 테필린, 메주자, 그리고 탈굼(4Q128-157)들인데 DJD 6 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주석들과 구약성서와 관련된 시리즈들(4Q158-186)은 DJD 5 에서 다루었다. 또한 여러종류의 제 1에녹서가 1976년 J.T. Milik 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0개 내지 11개의 공동체 규칙서와 1896년 카이로 그니자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다마스커스 사본이 8개 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만 알려져왔던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의 일부도 발견되었고, Jubilees 의 히브리어 원본의 일부도 알려졌다. 또한, 토빗서의 사본(4개는 아람어, 1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통해서만 알려진 제 2경전)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감사 찬양시편 조각,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어진 곳이 4번 동굴이다. "하나님의 아들(4Q246)", "축복문 모음집(4Q525)", "율법의 실천을 위한 모음집"으로 알려진 4QMMT 등,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본문비평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들로 알려졌다.
                    (DJD=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Oxford:Clarendon)

                     

                    제 5번, 6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5번 동굴에서는 정경화 이전의 성서 텍스트들 8개(신명기 7:15-24, 8:5-9:2 열왕기 상 1:1, 16-17, 27-37 이사야 40:16, 18-19 아모스 1:3-5 시편 119:113-20, 138-42 애가 4:5-8, 11-15, 16, 18-19, 20-22, 5:1-3, 4-12, 13, 16-17 애가 4:17-20 과 개봉하기가 아주 어려운 테필린 한 개)와 17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 발견되었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는 1QS 2:4-7, 12-14와 병행구에 해당하는 "공동체 규칙서(5Q11)", 그리고 카이로 그니자 다마스커스 사본 9:7-10과 병행구인 "다마스커스 사본(DD)의 사본(5Q12)",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5Q15)" 등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6번 동굴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7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6Q1 창세기 6:13-21 과 6Q2 레위기 8:12-13 등의 기록이다). 나머지는 열왕기 상 3:12-14, 12:28-31, 22:28-31 열왕기 하 5:26, 6:32, 7:8-10, 7:20-8:5, 9:1-2, 19-21 시편 78:36-37 아가 1:1-6, 6-7 다니엘 8:20-21, 10:8-16, 11:33-36, 38 등의 내용들이다. 그 밖에도 24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도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덜한 이야기체 문학들, 예언적, 사법적, 제의적 내용들과 찬양시들이다.

                     

                    제 7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7Q1은 출애굽기 28:4-7 그리고 7Q2는 예레미야의 편지 43-44(=바룩서 6:43-44)로 밝혀졌고 다른 것들은 너무 조각이 작고 적힌 내용의 분량이 충분치 않아서 해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제 8번, 9번, 10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8번 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테필린에서 또 어떤 것은 메주자에서 나왔다. 또한 창세기 17:12-19, 18:20-25 그리고 시편 17:5-9, 14, 18:6-9, 10-13 등의 문구들과 한 개의 비성서적 찬양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9번 동굴에서는 6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 1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 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거의 완전한 성전 두루마리(11QTemplea),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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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로이드존스 교리강좌 요약)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

                    The Eternal Decrees of God

                     

                    1. 작정교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일들을 생각하시고, 결심하셨으며, 결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 혹은 방법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흔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The Eternal Decrees of God)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1)성경이 작정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작정의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처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하지만 삼위일체교리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단지 그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교리는 참으로 어려운데, 영원하신 분의 마음, 즉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을 초월하고, 우리의 보잘것없고 왜소한 지성이 파악할 수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교리를 우리가 살피는 이유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며, 성경에 계시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고찰하고 연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9)

                    2) 작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더 위대하고 더 웅대한 개념을 갖게 해 줄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에 있어 진정한 난점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은 더 많이 예배할 것입니다.

                    3) 작정의 교리는 우리를 많은 오류로터 구해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하게 깨닫는다면 지금까지의 많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4) 작정의 교리는 커다란 위로를 준다.

                    유한한 세상에 잠시 자나가는 미미한 피조물일 뿐인 나의 배후에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작정이라고 하는 교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작정의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1) 당파심을 버리고 접근해야 한다.

                    즉 편견들과 모든 종류의 당파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당파심(party spirit)'이란 말은 우리 모든 사람은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발견하는 일보다는 이미 믿어왔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수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2) 철학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저주입니다. 철학은 정의상 언제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다르고 있는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는 그 안에 우리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겸손함과 경외심,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며 언제든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찾고 추구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이 교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나와야 하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성경의 계시를 넘어서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성경의 울타리)

                    믿음은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즉각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이 계시되어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입니다.

                     

                    3. 작정 교리의 기본 명제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변치 않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성경은창세전에”(1:4을 보십시오.)와 같은 문구를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주님의 나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때가차매”(4:4)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의 마지막과 궁극적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그분이 일어나게 하신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 계획은 고정되어 있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으며, 절대적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결정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계획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끌어 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시점에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믿으며 또한 특정한 시점에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기로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다시 말해 종말이 분명히 결정되어 있다면 그 종말로 이끌어 가는 모든 것도 역시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일들, 그 종말로 이끌어 가는 모든 것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교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자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들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0-11) 이 말씀은 모든 일에 적용됩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전체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통제하시고, 결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성경의 증거가 있습니다. 잠언에는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에는 주님이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30). 아주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하나님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잠언 21 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 왕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마치 물을 통제하듯 그를 통제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 10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2 13절에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

                    더 나아가 성경은 우리에게 심지어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3). 사도행전 4 27-28절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 사람들의 끔찍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따러 미리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돈을 벌려고, 그리고 질투심에 가득 차서 비열하고 매우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즉 그들의 악한 행동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작정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우리가 이미 인정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을 유발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악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며, 그분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악을 지배하십니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해도 좋습니다. 죄를 금하고 벌하는 도덕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죄의 발생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악에 한계를 설정하여 그 악이 벗어나지 못할 정확한 궤도와 이루게 될 결과를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도록 지배하십니다. 50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3)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심지어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바 사람들이 앞으로 취할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그분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에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이 교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원인과 결과, 자유로운 행동들은 하나님의 작정들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 11 25-26 :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셨다.

                    - 9 11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바울의 논증은 어느 하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야 한다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조적적이며 절대적으로 주권적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심지어 그렇게 생각하는 일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9:15~18)

                     

                    4) 하나님의 작정은 효력있는 작정이다.하나님의 작정은 유효적(efficacious)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하시고 뜻하시는 것은 틀림없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꺾을 수 없습니다.

                     

                    5)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 자신의 최고로 지혜롭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본성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하박국 1 13절에는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13)고 말합니다.

                    둘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의 본성 및 행동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비록 우리가 조화시킬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9:20-23)

                     

                    6)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을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십니다.(11:25-26), 요한복음 6 37에도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44절에서 우리 주님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3 38절에는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 13절에는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1 9절에서는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7)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모든 교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저것은 왜 그런가? 왜 하나님은 바로를 일으키셨는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라는 로마서를 기억합시다. 하나님과 맞붙어 싸우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우리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 된 존재가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까지는 궁극적인 이해를 보류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이 곳,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일관성이 있으심을 믿고,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창세전에 결정하신 일들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결정하신 일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고,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그 누구도 당신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거나, 당신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그만 두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그분은 나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아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여러분이나, 다른 누구도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굽혀 경배합시다.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서 겸손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그 계시에 우리를 복종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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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영광의 불꽃 최송연 태초부터 약속되어지신 분, 약속대로 성육신 하시어 몸으로 그 약속 성취하시네 양발 양손에 대못 머리에 가시관 허리에 날카로운 창 메마른 입술 '다 이루었다' 선포하시었네 삼 일 삼 야, 어둡고 긴 죽음의 터널을 지나 당신은 그렇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찬란한 부활의 아침 억겁으로 엉킨 죄의 쇠사슬 끊어내는 승리의 노래 죽었던 영혼 다시 살리시네 주여, 당신의 그 핏빛 사랑 영광의 불꽃 되어 영원토록 피어나소서 내 가슴 속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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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범죄와 육체의 언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다 할지라도 죄의 지배와 그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제 2 장 


                    인간이 불완전함으로 범하는 날마다의 죄와 결점은 성도로서의 최선의 일을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죄와 결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낮추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더욱더 육체를 제어하고 완전한 목적을 향하여 나감으로 마지막에 이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이 죄에 거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의 사단의 유혹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 끝까지 자비로 지켜주시고 능력으로 보존해 주신다. 



                    제 4 장


                    믿는 자들을 은혜 속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연약한 인간이 거스릴 수는 없으나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할 때 성도라도 육신적인 이 세상의 사단의 크고 무서운 죄에 빠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실제로 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베드로와 그 외의 다른 성도들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타락에 빠진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 5 장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히 거스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믿음의 사역을 방해하며 그들의 양심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에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그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빛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된다.



                    제 6 장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초한 그의 풍성하신 은혜는 비록 성도들이 심각한 죄에 빠져 있을 때라도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잃음으로 의인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통 가운데 방치해 두거나,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도 않으신다. 


                     

                    제 7 장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제 8 장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며 범죄로 인한 멸망에서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인간은 실수하여 범죄함으로 마음속에 결심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며 그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도고의 기도 그리고 성도를 보호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일이므로 결코 좌절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없다. 



                    제 9 장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지닌 믿음의 정도에 따라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심과 믿음으로 성도를 보존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이 확신을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의 참 지체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 지체가 된다는 사실과 죄사함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다. 


                     

                    제 10 장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주는 것과 어긋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 계시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기업이 된다고 말하는 성령의 증거로서 되는 것이다(롬 8:16). 또한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선한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제 11 장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의심으로 마음의 갈등을 갖게 되며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다만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



                    제 12 장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성도들이 체험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게 하신다는 이 확신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무시하고 세상적으로 나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정하신 길 안에서 조심스런 마음을 계속 가져서 그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제 14 장


                    복음을 외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같이 우리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해 주시되 그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며 또한 이 말씀에 의하여 권면하고 책망하며, 그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성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견인의 방식). 


                     

                    제 15 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교리와 계시된 말씀 속에서 충분히 나타난 확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성도를 향하신 위로를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를 미워하고 이 세상도 이를 조롱하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를 남용하고 이단들도 이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날마다 이 사랑을 갖고 마치 놀라운 보배를 가졌듯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만 영원토록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 /최송연

                      캄캄한 하늘이 찢어 질 듯

                      흑암을 갈라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희생제물로 내어준

                      사랑하는 외아들에게서

                      고개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으라

                       

                      “포기하겠노라.”

                      선언하시면 한순간에라도

                      그 치욕의 십자가를 박살 내고

                      성자 하나님을 구해 내고파 

                       

                      하늘에서는

                      열 두 영 더 되는 

                      충성스런 천군 천사들 

                      눈물 흘리며 대기하고 있었네

                       

                      험한 갈보리 산 그 십자가에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벌거벗기운 채

                       

                      양손과 양발에 박힌 대못이

                      부드러운 살점을 찢으며

                      뼛속 깊이 쪼개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는 괴로움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39)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도

                      참아내셔야만 하셨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랫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는데…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메마른 입술에는

                      쓰디쓴 신 포도주가 물을 대신하였고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가시로 엮은 면류관 사이로

                      흐르는 선혈은 피눈물 되어

                      창백한 두 뺨을 적셔 흐르는데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 22: 12)

                      개들이 둘러 진 쳤으며(시 22: 16)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낄낄거리는구나(시 22: 18)

                       

                      ‘아바,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어린 양,

                       

                      영혼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그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그 한 마디는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어버리는 포효,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시는

                      승리의 노래였으라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 돌로로사...


                      그 눈물의 길을 걸으신


                      나의 주여,

                       

                      당신의 그 거룩한 희생을…

                      당신의 그 아픔을…

                      당신의 그 수난을…

                      당신의 그 큰 사랑을…

                       

                      성령님께서

                      내 가슴에 깊이 각인시켜 주시는 이 밤,

                      나는 울며…통곡하며…,

                      온 밤을 하얗게 지새웁니다.







                       

                       왕께 바치는 내 노래/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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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도록,
                    메시야의 고난 예언, 성취,
                    성부, 성자, 성령님의 사역까지...
                    보이지는 않으나, 영의 세계, 저너머
                    천군천사들의 충성심과 눈물까지...

                    부족하지만,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대작을 꿈꾸며 기도하며 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벌레보다 못한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고 계심을 찬양합니다!!
                    주께서 영광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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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하여...  (2) 2015.03.25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사랑, 당신의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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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특별한 영적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오늘날과 같이 그렇게 단순한 외적인 신앙고백이 엄청나게 많이 행해진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집회들의 참으로 많은 자리를 회심하지 않은 회중들이 점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또한 참다운 신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성찬식에 참여하지도 않고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언제나 성직자들을 쫓아다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특별성회에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드는 무수한 무리들- 가정에서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기독교 정신을 조금도 행하고 있지 못하는- 은 빈 통이나 울리는 꽹과리보다 전혀 나을 바가 없다. 씨뿌리는 비유는 언제나 생생하고 고통스러운 예화이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들인 청중들은 항상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많은 신앙고백자들의 생활이 영적으로 단지 한 모금의 맛만을 보았을 뿐인 상태에 계속하여 멈추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육체들의 자극을 병적으로 갈망한다. 모든 설교들이 그들에게는 다 비슷한 것일 뿐이다. 단지 똑똑하고 빈틈없는 처세술에 대해 들을 때만 기뻐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무리 가운데 앉아 있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그런 자극을 추구하는 태도에 감염된 사람들이 아직 믿음이 확고하게 서지 못한 수많은 나이 어린 젊은이들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일종의 흥분적이며, 선동적이고, 감정적으로 기독교를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 신앙에 결코 만족해하지 못하며 아테네 사람들처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할 것이다. 평정된 마음을 소유한 젊은 신자, 자기 확신과 자부심에 부서지고 배우려는 마음보다도 언제나 가르치려고만 하는 마음이 깨어진 사람,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 매일의 꾸준한 노력에 만족하며,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조용하면서도 순종적인 태도로 행하는 그러한 젊은이를 보는 일은 진정 드물게 되었다.

                     

                    야단 법석한 소란과 섣부르고 주제넘은 의욕, 그리고 신앙의 연조가 깊은 그리스도인들을 성급하게 반박하며 규정하려는 태도, 또한 자신들은 건전하고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그들에게서 볼 수 있다.

                     

                    확실히 이와 같은 시대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영혼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체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언제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오늘 주어지는 권고를 취하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살피라. 그리고 그 잘못이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지 않은지 살펴 보라. 여러분은 적은 믿음, 부족한 회개, 적은 은혜, 불충분한 성화에 만족하며 편안히 앉아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극단에 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무의식 중에 몸을 움츠리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기독교 정신에 있어 철저하게, 아주 철두철미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의 얼굴이 온전히 태양을 향하게 하라. 모든 무거운 짐들과 여러분을 너무도 쉽사리 공략하며 괴롭히던 죄들을 던져버리라. 그리스도께로 보다 가까이 나아가고자, 그분 안에서 거하고자, 그분게 붙어 있고자, 그리고 마리아와 같이 그의 발 앞에 앉아 있고자, 생명의 원천을 마시고자 노력하라.

                     

                    장래에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23:18)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6-37)

                     

                    - 존 라일, 곧은 길, pp 19-51

                    청교도의 길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통일교 7남 문형진 “내가 후계자, 현재 통일교는 이단”

                    2015/04/02 (목) 07:34 ㆍ추천: 0      

                     
                    ▲사진은 월간 현대종교 갈무리

                    문선명 사후 통일교가 혼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어머니 한학자 총재의 집권 이후 재야로 물러났던 통일교 7남 문형진 전 세계회장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월간 현대종교는 4월호에 통일교의 현 상황을 보도했다. 한씨에 밀려 독자적인 목회활동을 선언했던 문씨가 최근 본인의 후계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통일교 공직자들의 파면을 선언했다는 것.

                    현대종교에 따르면 7남 문형진씨는 지난 2월 8일, 미국 생츄어리처치 설교에서 모든 국가 교회지도자의 천일국의 모든 공적직분에서 면하고, 문선명이 지목한 후계자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충성을 맹세할 것을 명령하고 나섰다.

                    그는 현재 통일교의 가르침을 ‘이단교리’로 치부하면서 아버지 문선명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문씨는 “공직자들이 새로 간행한 통일교 경전, 천일국 국가, 합동결혼식 문답 등의 내용을 변경하여 선친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 한학자에 대한 ‘신격화’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문씨는 “그들이 한씨를 ‘메시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신격화하고 있다”며 유일신에서 한번 멀어지면 그 이후로는 두 명의 신으로, 그 후는 나락”이라고 강조했다.

                    어머니에 대해 문씨는 “참어머님(한학자)께서는 가장 위에 계시지 않는다. 이것은 식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간신그룹은 여왕의 자리에 계시는 참어머님의 시간을 독점하고 있다”며 “참어머님을 해방시켜드리고, 참어머님의 주변에 있는 모든 정치적 구조로부터 여왕님을 구해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문씨의 설교와 선언은 통일교의 판을 전반적으로 흔들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이 월간 현대종교의 분석이다.

                    이러한 문씨의 행보에 대해 통일교는 지난달 2일 ‘세계회장의 직권남용 및 교리 위반’을 이유로 권한을 정지하는 공문을 내리고, 6일에는 문씨를 세계회장 직에서 면직하고 통일가 5녀 문선진씨를 임명했다.

                    2012년 9월 문선명씨가 사망하고, 통일교의 후계문제는 어머니 대후계자, 후계자 대 후계자, 교권자 대 후계자 등 다각적으로 진행됐다. 기본적으로는 한씨 중심의 통일교가 정착된 것으로 보지만, 통일가 가정 문제나 소송 등의 크고 작은 논란들이 있어 왔다.

                    현대종교는 “통일교에는 한씨 사후, 법통이냐 혈통이냐를 놓고 갈등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며 “한씨는 문선진씨를 중용하여 후계를 아들이 아니라 딸로 선회할 가능성도 비췄고, 통일교 내부 그룹 간 갈등도 보이는 상황”이라고 전망했다.

                    기사 전문은 월간 현대종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동희 ⓒ 뉴스미션

                    USA아멘넷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허락하시고 심지어 일부러 주실 때도 있지만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가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스스로 숨기도 하신다. 그렇지만 곧 스스로 나타내시고 드러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사야는 두 가지 진실에 대하여 확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과 고생을 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이 정하신 때에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슬픔은 가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든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셔서 슬픔을 한꺼번에 쏟아 붓지 않으시고 조금씩 나누어서 감당케 하신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 같다. 현명한 어머니는 아이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젖을 먹인다. 너무 빨리 주거나 너무 많이 주면 아기는 그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엄마 무릎에 젖을 토해 버리고 말 것이다. #상한 심령/예후 토마스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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