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다윗)을 생각하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맨 손으로 쓰러뜨린 담대한 신앙, 끝까지 의리를 지킨 아름다운 우정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뉘우칠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신앙과 원수의 목숨을 보존하는 아름다운 마음씨, 지혜로운 부성애, 뛰어난 전략,탁월한 지도력을 겸비한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전쟁과 정치에 능할 뿐 아니라 시를 짓고 비파를 뜯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각 방면에 다재 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요나단과 같이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친구가 있었으며, 요압과 같이 능력 있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그에게는 나단 선지자와 같이 범죄한 그를 책망하는 영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오늘 생일을 맞는 사랑하는 아들,데이빋(성원)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나단과 같은 친구를 저에게 주옵소서.

요압과 같이 탁월한 수하,장수,돕는 자를 저에게 주옵소서.

나단 선지자와 같이 그릇된 길을 행할 때 책망하며 바른 길로 인도할 영적 지도자를 저에게 주옵소서.

다윗 왕의 목자가 되신 주님이 저의 목자가 되셔서 그를 푸른 초장으로,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애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정녕 따르며 마침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23:1~6)

 

 

        .....오늘 25세의 건장한 청년이 된 아들을 기뻐하며....

글/김만니 깁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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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우선 ‘복’의 어의(語義)부터 알아보자.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하는데,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희랍어 율로기아(eujlogiva)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 선/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비해 마카리오스(makavrio)는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복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선의(善意, good will)로서 영적·물질적 은택을 통하여 나타나고 또 그로 인해 향유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복과 연관한 성경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복은 성경에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구약의 초두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복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부각되는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이러한 복의 향유는 아브람뿐만이 아니고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으로서 △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정점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25~26)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8~9, 13~14)

상기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복과 관련해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한다.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절정은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는 것이었다. (창 12:3; 갈 3:8)
② 땅의 모든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창 22:18; 행 3:25; 갈 3:14)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갈 3:13)
④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행 3:26; 갈 3:9)
⑤ 이러한 구원의 은택이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이다. (행 3:26; 갈 3:12, 14)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왜 바울이 구원의 은택을 설명하면서 그토록 ‘복’이란 단어를 강세적으로 사용했는지 납득이 간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바울은 예수를 믿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확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과 관련해 네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하늘에 속한”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이 복은 근본적으로 땅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둘째, 복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 “신령한”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 복이 “자연적 복들”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셋째, “모든” 복들이라고 함으로써 복의 포괄성과 총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문장 구조를 보면 “복 주다”라는 동사에 다시금 “복으로써”라는 부대(附帶) 성격의 부사구가 따라붙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복 받은 사실은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이라는 표현과 개념이 이 구절만큼 심층적으로 등장하는 곳은 아마 성경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복의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실현(“거룩함,” “흠이 없음,” “아들들이 됨” (엡 1:4~5) 등)에 있다. 이렇듯 신약 시대의 복은 구약과 달리 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그렇다면 복의 특징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왜 이런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일까? 왜 구약의 복이 주로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인 반면, 신약에서는 복의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 답변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특징지운 종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종교가 주로 인간의 표면에 치중하는바 형식적이고 외양적인 것이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종교의 핵심이 인간의 중심에 초점을 맞춘 신령하고 내면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물론 구약은 표면적·형식적일 뿐이고 신약은 내면적·영적이기만 하다는 식으로 대조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 두 면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전자에 신약은 후자에 착념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적 차원, 곧 '마음'에 대한 강조는 이미 구약 시절부터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인간 내면의 심층적 변화를 미래의 어느 시점, 곧 새 언약의 시대에서 찾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을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갖는 근본적 제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바울 사도 역시 복음 사역의 차이점을 구약 시대와 대조시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3)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의미 구조의 문제를 도입하고자 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적 주제는 그 의미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어떤 주제가 속에 담고 있는 영적·내면적 알맹이 혹은 정수(精髓)이고, '형식'은 그러한 주제의 의미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가시적·외형적 얼개나 틀을 말한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요소가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고, 또 내용은 반드시 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복'의 의미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이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의[내용]는 반드시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질적 은택(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을 한껏 누렸고, 그렇게 향유하는 물질적 은택은 그가 하나님의 선의를 누리고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신적 작동 원리였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 사이의 이와 같은 긴밀한 연접 현상은 종지부를 찍는다. 오히려 신약 시대에는 내용(하나님의 선의)만이 극명히 드러나고, 형식(물질적 은택)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약은 신앙의 자태에 있어 내면과 영적 실상을 현저히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내용의 노정을 유도하는 긴밀한 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를 충만히 누리면서도 물질적 은택은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가 하면, 물질적 은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의와는 거리가 한 없이 먼 삶의 모습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의를 심령으로 충만히 누리면서도 외적 번영 조건이 결여된 경우부터 살펴보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또 물질적 은택은 상당한 정도로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선의(곧 구원의 은택 및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약 5:5)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노라.” (계 3:17)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발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거나 성공과 번영을 기약해 주는 것 같은 성구 내용에 대해서는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런 경우 인용되거나 회자되는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이나 정당한 해석의 과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뽑혀 나와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이요, 둘째는 번영의 욕구와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절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첫 부류의 구절들은 기복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 성취를 지향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

자, 그러면 먼저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부터 하나씩 고찰하도록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구절은 우리가 욕망의 성취를 희구한다면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감초처럼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명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결코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막 9:17), 이는 제자들이 못 고쳤기 때문이었다 (18절). 그 아버지는 예수께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2절) 라고 외쳤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평가 절하의 멘탈리티가 깔려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막 1:24)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막 5:7)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고, (마 12:28) 심지어 그 권능을 사도들에게 부여하기까지 하셨다. (마 10:1) 그런데도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귀신 쫓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과 의문의 마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마가복음 9장 23절의 언명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 23절에 언급된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든 큰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식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구절도, 우리가 가진 꿈과 욕망을 이루어 주십사 하며 끈질기게 매달리면 성취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데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오직 그의 뜻대로 구할 때만 그렇다 (요일 5:14).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님 자신의 기도(마 26:39)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바울의 간구 경험(고후 12:8~9)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에 있어서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아마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데 이보다 더 많이 제시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주창자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못 이룰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도전한다. 그러나 바울은 빌 4:10~13 사이에서 자신의 사도적 임무 수행과 재정 형편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떠한 재정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무엇 하나 하지 못할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코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모든 것이 아니다.

번영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

이제 둘째 부류(번영의 욕구과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로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부터 살펴 볼 것이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삼하 7:2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장식패를 채우는 단골 성구로서, 그리스도인 개인보다도 자신이 속한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복을 희구할 때 안성맞춤인 것으로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상기 절에 나타난 바처럼 다윗의 가문에 약속된 복은 소위 다윗 언약-“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시된다. (눅 1:32~33) 따라서 자신의 가정에 물질적 복이 내리기를 고대하며 삼하 7:29을 간직하는 것은 빗나간 처사요, 무의미한 종교 행위이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상기 내용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구절이다. 야베스의 간구를 보면 ‘복’이 언급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사항으로서 “땅의 확장,” “환난에서 벗어남” “근심이 없음”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에는 구약적 의미 구조의 패턴(하나님의 선의[내용]가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문제인즉 신약 시대에는 이 두 가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야베스와 달리 구원의 사실과 은택에 초점을 맞추어 복 얻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창 22:17)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각 개인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또 다른 구절들

이제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데 기여해 온, 몇 가지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께서는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신 28:13)

위 성구는 필자가 우스개로 ‘머리-꼬리 콤플렉스’라 명칭을 붙이게 된 근거 구절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자녀들의 입학, 취직, 결혼 등과 연관하여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적용은 두 가지 면에서 그릇되었다. 첫째, ‘머리’와 ‘꼬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을 가리킨다. 신 28:1에 보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라고 되어 있고 11절에도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로 되어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관계가 외적 은택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가르침이다. 누차 말하거니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한 연접은 구약 시대로 끝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

이 구절도 장식패의 단골 내용인데 주로 사업장에 많이 걸려 있다. 보통 가게나 업소가 새로 생겨 출발을 할 때,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보잘 것 없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게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사용되곤 한다. 이 내용은 원래 욥의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하는 충고(욥 8:1~8)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런데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자녀들의 범죄 때문이므로(4절) 그런 영적 문제를 해결하면 머지않아 물질적 은택이 도래할 것(5~6절)이라고 설명한다.

빌닷의 처방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의 연접이라는 구약적 공식에 입각해 볼 때, 구구절절이 타당하다. 단지 자녀들의 신앙이 욥에게 문제를 초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성경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고, 혹시 범죄했다 할지라도 욥으로서는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곤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혹시 욥과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판정이 정확했다고 해도, 그것은 앞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화 때문에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는 것이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상기 성구는 형통 신학을 토착화한 신토불이 용어 ‘삼박자 구원’의 근거 구절이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경우 '영혼이 잘 되는 것'(영적 성숙)은 필연적으로 '범사에 잘 되는 것'(경제적·사업상 번영) 그리고 '강건한 것'(신체적 건강)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항목으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요삼 1:2의 내용을 잘못 나누었다. 이 구절은 흔히 생각하듯 세 부분이 아니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영혼이 잘 됨”이 한 부분이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이 또 한 부분이다. 또 삼박자 구원에서는 후반부의 내용과 관련해 “범사에 잘 되고”와 “강건함”을 별도의 사항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정당한 처사가 아니다. 오히려 “잘 되고”와 “강건함”은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

둘째, 본문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했듯 “잘 되고”와 “강건함”이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면, 이 부분으로부터 경제적·사업상 번영과 신체적 건강이라는 별도의 두 내용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범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꼭 경제적이거나 사업상 번영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또 “잘 되고”와 “강건함” 역시 각각 물질적 번영과 신체적 건강으로 대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중복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은 마땅히 “신앙생활의 전반적 면모가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에 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삼박자 구원은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의 전형적 예이다. 만의 하나 이 내용들이 삼박자 구원의 주창자가 주장하는 대로라고(즉 필자의 첫째와 둘째 비판이 틀렸다고)해도, 이 구절에서 “삼박자 구원”의 교리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아다시피 이 구절은 가이오라는 개인(요삼 1:1)에 대한 간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게 되기를 바란다”[간원]와 “~해야 한다”[당위]나 “반드시 ~하게 된다”[필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논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이처럼 요한삼서 1장 2절은 그저 '바람'의 차원이기 때문에 삼박자 구원이 요구하는 당위나 필연의 차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는 '삼박자 구원'은 실상 성경적 근거가 결여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기복신앙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신앙의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폐해는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도 중요시하시는 구원의 복(특히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이 복을 주시고자 하셨는데)을 값싸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구원의 복을 등한시하면 이와 긴밀히 연관된 여타의 신앙적 면모들(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 고난 중 즐거워함,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감)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현저히 약화되고 급기야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본질적인 복은 '구원의 복'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을 마다하면 곧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주로 경제적 번영, 세상에서의 성공, 사업의 번창, 안락한 삶 등의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 은택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cf. 약 1:17) 그러나 이것들은 복의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이런 것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처럼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런 신앙의 패턴에 노출될 때,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며 이 세상 신이 군림하는 신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왕국의 건설에 분주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기에 바쁠 것이다.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이 비극적이고 비참한 개인적·공동체적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 개혁의 기치를 들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복과 관련하여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이 있도록 줄기차게 가르치고 순종의 마음으로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둘째, 배우고 이해한 참된 복의 내용이 실제로 우리의 심령에 내면화되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의 복이 의미하는 신앙 내용(하나님의 자녀됨, 영생, 하나님을 앎, 성령님의 내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음, 주님과 친밀히 사귐 등)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복의 문제와 관련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회개하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참된 복의 내용을 배우고 내면화했다 할지라도 실제 삶의 상황에 들어가서는 시험을 받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빈번하다. 그때마다 그 속에 질펀히 앉아 있지 말고 즉각 회개하고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방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해당되지만, 특히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들의 가르침과 모범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그 내력과 연조가 워낙 깊어진 바람에 극복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좌시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 극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요는 우리 각 개인(특히 지도자)과 공동체에 수시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느냐 하는 것과 이 거대한 내면의 적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쟁의 의지를 발휘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출처:아멘넷 댓글 중

  대한민국은 불교국가인가?

촛불시위 주동자들이 피신해 있던 조계사로부터 나오는 조계종 총무원장님의 차량을 경찰 나부래기가 감히 검문한 일이 있은 후 불교차별에 항의하는 법사님들, 승려님들, 불자님들, 보살님들이 서울광장에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하였던 이명박 대통령님의 취임 후 그 정책과 행동거취도 불교계에서는 심히 못마땅하고 괘씸한가 봅니다. 불교계의 반발과 항의가 얼마나 거센지 소망교회 장로님이신 이명박 대통령님 가족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도 못 누리고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도 못 나가고 가족예배로 주일예배를 대신하고 있다는 측은한 소식입니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불교계야말로 최대특혜수혜자요 대한민국은 불교국가입니다. 전국 국립공원이나 경치 좋은 곳들은 죄다 사찰들이 차지하고 앉아 산행이라도 한 번 할라치면 입장료, 관리비, 문화재관람료 등의 명목으로 시주를 강제로 해야 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어째서 속세를 떠난 절들이 전국의 그 많은 산과 골짜기들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역사를 따져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우리네 선조들의 공유재산이었을 금수강산은 그 후손들이 불교를 떠나 다른 종교를 갖게 되었더라도 이용할 권리와 그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사찰들이 우리 선조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차지하고 있단 말입니까? 전국 방방곡곡 요지마다 차지하고 앉아서 산을 오르려는 국민들로부터 거둔 통행료와 강제시줏돈으로 도시 한복판까지 진출하고 있는 불교계와 교회 하나를 짓기 위하여 온 교인이 헌금을 하고 땅을 매입하고 피땀 흘려 건축해야 하는 기독교계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이게 불교국가지 뭡니까?

또 그렇습니다. 10원 짜리 동전에다 다보탑을 그려 넣고 그 다보탑에다 또 작은 불상을 새겨 넣어서 온 국민이 불상들을 주머니에 모셔 넣고 다니게 만들지를 않나, 전국 경치 좋다는 곳은 으레 석불, 석탑, 암자이고, 동해 아름다운 바닷가에다가 100여 미터 높이의 불상을 세워 관세음보살께서 동해바다와 어민들을 지켜주시는가 하면, 팔공산 기슭에는 전 대통령 가족의 수십억원 시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을 세워 부처님께서 자비하신 눈빛을 중생들에게 그윽하게 비추시는 일들이 불교국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가능한 일입니까? 만일 기독교계가 대한민국 어디에다 예수상(像)을 크게 만들어 세운다든가 교회가 공원 입장료를 받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교계는 종교차별을 외칠 게 아니라 국민들에게 국립공원들과 자연경관부터 돌려주어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리 깎고 장삼만 두르면 전국 수려한 경관의 국토가 주어지고 우리의 선조들의 공유재산을 물려받아 차지한다는 것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삽시간에 서울광장을 메운 가사장삼부대가 과연 속세를 떠나 오욕칠정, 백팔번뇌를 끊고 득도하려는 수행자들이란 말입니까? 이대로 간다면 불교계는 대한민국을 말기고려보다 더 부패하게 만들 것입니다. 불교계는 종교차별을 외치고 세를 과시할 게 아니라 소유와 욕심을 버리고 부당점유한 강산을 국민에게 반환하고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 그렇다고 불교에 진리가 있다는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글/친구님 출처:어느 댓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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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아가서 2장10-13)


Following

사랑 노래 

님따라 나선 이길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
머나먼 길

서리서리 겨울 된서리
쉴새없이 몰아 대고


언 발 동동
절룩이누나

춥게만 느껴지는

모진 이 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며

섬기는 십자가의 길이라네.

더 이상은 못가겠다 떼쓰며

울고있는 나에게

사랑의 주님께서 찾아주셨네.


주님은  못자국 선명한

그 사랑의 손으로 

흐르는 내 눈물 닦아주시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힘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워 주시니


오늘도 나는

한쌍의 반구가 포구에서

사랑노래 부르듯

주님의 품을 포구삼아

사랑노래 부르며

피맺힌 십자가의 모진

이 길을...

한걸음 두걸음 가보려 하네.


참고 (반구: Turtledove (호도애) 는
비둘기과의 일종으로서 암수의 사이가 너무나 좋아
사랑의 새, 혹은 연인이라고도 부른다.)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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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드의 지인이자 토론토 부흥회를 주관한 TACF (To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 교회의 John Arnott 목사 (별로 달가운 인물은 아니지만) 가 교회 웹 뉴스레터를 통해 타드가 폭주도 했다고하네요. 정확히 어느시점인지는 말을 안했지만 글의 흐름으로 봐서 레이크랜드 부흥회때였던것 같습니다. 링크는 >>>http://www.tacf.org/tacforghome/Visitors/LakelandToddBentleyUpdate/tabid/761/Default.aspx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은 간음했다는 확실한 소스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이 2번째 affair 이고 또 위의 뉴스레터를 봐서라도 육체적으로도 일이 있었지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혼도 결정적인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무겁네요 -.-;;


자료제공/겨자씨, 출처:아멘넷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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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벤틀리를 두둔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크리스챤들은 성화의 과정속에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 못 할 자신만이 아는 죄악이나 상처가 모두들 있을 줄로 압니다.-) 하셨습니다.

예, 우리 성도들이 성화의 과정속에 있다는 것도 맞고, 다른 이에게 들어내지 못 할 자신만이 아는 죄악이나 상처가 모두들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도 맞습니다. 죄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롬3:23절 참조)

그러나 그 죄와 상처가 과거 예수믿기 전의 사건이냐, 예수믿고 난 후의 사건이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지은 죄라면 그리고 상처라면, 그 누구도 말 할 수 없겠지요. 주께서 이미 그의 흘리신 피로 사해 주셨는데, 주님보다 높으신 자가 누가 있어 형제의 잘못이나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날부터는 새로워져야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 고후5:17절 참조)예수 믿고나서도 여전히 죄가운데서 머물기를 기뻐한다면, 과연 그것마저도 우리가 간과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시니라(요8:11절 말씀)” 여기에서 분명 우리 주님께서는
“Go and sin no mor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in no more” 이것이 용서받은 죄인들이 준수해야 할 수칙입니다. 그럼에도 개가 그 토했던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그 씻었던 곳에 다시 들어가는 행위마저 미화시키려는 님들은 도데체 어떤 분들인지 묻고 싶습니다. 주님보다 더 큰 자들입니까? 주님의 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칠 수가 있고, 관용이란 미명하에 성도들에게 헛된 교훈으로 죄의 길을 걷도록 종용하는 그 의도를 어떻게 받아드려야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벤틀리의 죄악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파렴치한 행위의 출처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죄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들에게 영을 다 믿지말라고(요1서4:1절 참조) 하셨고, 우리가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벌써 성서적으로 검증해 볼 때 틀렸다고 수없이 많은 형제자매들이 사랑으로 경고를 해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김승진이란 사람과 그때 당시 D19이란 필명을 쓰신 여기 이 글을 쓰신 성현경목사님은 우리를 향해서 “사랑이 없는자, 현대판 바리새인들, 영안이 어두운 자들’이라고 비웃으며 정죄하기를 쉬지 아니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벤틀리의 실체가 들어났음에도 아직도 홰개의 영이 보이지를 아니하는 오만함을 통탄하고 있는것입니다! 아시겠는지요?

벤틀리를 엘리사의 혈기로 다스린죄와 같다고 보시는 것도 참으로 황당한 망언입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 법정에서도 죄의 경중이 있습니다. 살인이라고 해도 다 같은 살인이 아닙니다. 우발적범죄냐, 아니면 계획적범죄냐, 죄의 질에 대해서 그 처벌 또한 달라집니다.

엘리사선지자는 자신의 아픔이요, 상처인 대머리를 자꾸만 놀림받는 것에 화가 동해서 화를 불같이 내었습니다. 그 결과로 악동들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엘리사의 마음에 계속 품고 있던 죄질이 아닙니다. 우발적인 범죄로서 물론, 그것까지 없었드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겠지만, 인간이 신령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예로 들어, 하나님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으니, 사람을 신성시하지 말라는 영적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벤틀리는 다릅니다. 그가 무서운 것은 그의 간음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을 선지자라, 하나님께로부터 직통계시를 받고, 자기가 안수기도하면 성령이 전이 (Impartation)된다고 하며, 하늘에서 천사들이 자기에게 멧세지를 전해준다고 하여,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했다는 것과, 그 일로인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기존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없는 교회요 자신에게 와야만 병이 낫는다고 하여 어리석고 무식한 영혼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교회를 멀리하게 유도하고 벤틀리나 다른 수많은 거짓교사들를 추종하도록 하는 여기에 그 문제점이 컸다고 봅니다.

그 옛날 한국의 박태선과 같고, 현재 전주 윤율리아와 같이 무서운 종교사기행각이였었고, 벤틀리의 간음은 당연한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종으로 울려주셨음을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Impartation….벤틀리의 안수로 인해서 그의 영력이 전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의 음란한 영을 다른 이에게 전이 하고, 그의 죽은자와 교제하던 더러운 영이 전이되고, 그의 사기성이 전이되고…이 전이된다는 것이 영계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악한 길로 전이되고 인도될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우리들의 사랑을 단 몇마디의 달콤한 말로 미화시키려는 님의 숨은 의도가 이 시간, 우리 모든 성도들, 그리고 지각이 있는 독자들의 안타까움과 거룩한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최송연/사모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부흥(?)의 현장을 보고서...


먼저 이 글은 순전히 부족한 그리고 개인적인 글이며
느낌임을 전재로 쓰는 글입니다.
제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분별력이 공인된 사람도 아님을
밝히면서도 어디까지나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미력하나마 성도를 섬기는 섬김이로서 그냥 지날 수 없기에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히는 바입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옵는것은
모든 현상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생각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에 대하여 개인적인 모니터링을 소감으로 올리는 글이라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것을 밝힙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소감이오니 그저 지나가다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도 더러 있구나 웃어주시면 피차에
즐거우리라 생각을 합니다.

들어갑니다.

많이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마디 올립니다.
과거에 한국교회는 부흥회가 흥왕 했었습니다.
부흥강사의 열정적인 언변과 강한 카리스마는 회중들을 압도하였고
긍정과 부정적인 영향이 교차하는 가운데 교회의 외향적이며 엄청난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다소의 결함과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회심과 믿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혹은 개인적으로 신앙의 열정을 얻어서 삶이 변화되는 일들이 많았다는걸
간증들을 통해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들의 불완전한 제도와 환경을 통해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분명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우려를 표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급격하게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놀라운 현장들이 속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늦은감이 없지않지만
다른 분들에 비하여 늦게야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마다 "성령의 역사" 라고 주장을 합니다.
집회는 연일 초 만원이고
동영상은 매체의 발달로 신속하게 각종 개인 블로그나 홈피나 카페를 통해
매일 업그래이드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화재의 현장으로 끊임없이
유도하고 있느것을 보게 됩니다.

각종 동영상은 일파만파로 전국을 강타하며
열광적인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예전부터 기독교 tv 체널을 통해서 미국이나 홍콩의
유명한 집회를 보왔습니다. 보면서 느낀 점은 영어를 모르니까
번역된 자막과 강사를 동시에 보느라 어지럽기는 했지만
참 잘한다는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저는 비록  모든면에서 졸하지만
설교 원고를 준비해서 하지 않으면 말한마디 못합니다만
거기 나오는 명 강사님들은 무대를 좌우로 자유로이
거닐면서 때로는 작게 혹은 강력하게 연설하는것을 볼 때
과연 잘한다며 스스로를 비교하며 좌절감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과연  저 강사님들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니까 그렇지 하며 부러워 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주어져서
저렇게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습니다.

암튼간에,
그런 반면에 또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정말 성경적인가? 라는 검증 작업을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집회 이름과 강사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미 유명 스타 강사들을 두고서 치열한 누리꾼들의
논쟁들도 점입가경입니다.

그동안 눈팅으로 죽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꼭 보라고 권유하며
제 카페에 동영상을 올렸기에 정말 시간도 없고 개인적으로 관심도
없었지만 큰 맘 먹고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부흥회와 일부 유사한 은사 집회,치유집회를 걸르는
입장이었기에 그랫습니다. 그런 사역이 그르냐 옳으냐를 떠나서
순전히 개인적으로 갈급하지도 않았고 말씀을 가까이 접하기도
개으른 저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간증집회역시도 저는 개인적으로 질색을 하는 입장입니다.
그 간증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간증은 일생을 두고 한 두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간증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해도
본의 아니게도 사람들은 간증자가 뚜렷하게 인식이 될 뿐이며
나도 저 간증자와 같이 열심히 무엇인가를 결단해서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드롬과 환상을 줄 뿐이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낮아짐의 복 보다는
망함에서, 부도난 인생에서의 반전으로
일약 성공하는 신앙과 사업가로의 환상이 대두될 우려때문에...
더구나 인기 스타와 연예인들의 간증 역시 그 순간에는 감동일찌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존하는
경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일부러 피하는 입장입니다.

참으로 별스러눈 인간이죠 ^^

그러면 너는 잘났는가?
라고 혹시 질타 하신다면 "아닙니다"라고 정중하게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교단이나 교파나 제도권을 부인하지도 않지만
절대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다 불완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고 세운 제도역시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교회도 동일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기록되고 계시된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우침을 신뢰할 뿐입니다.

은사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하거나 맹신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생각보다도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단순하게
덮어놓고 말씀을 믿는다고 타박 하기도하지만,
솔직하게 인간은 아무도 쉽사리 맘을 열지 않습니다.

누가  무조건 믿겠습니까?
이단종파나 사이비 집단에 빠진 사람들도
무조건 믿는게 아니라 나름대로 분석해보고 생각해보고
선택을 하게 된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죄로인하여 분별할수
없는 상태가 먼저임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쉽게 어떤것을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것을
역설하는 중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이기전에 먼저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것의 결과로 믿음이 온것이지요.

그렇다면 아직 그런지못한 저 사람들은 왜? 라고 질문하신다면
저는 왜 그런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니 알 수없습니다
라고밖에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너무 서론이 길었지요 ^^
나름대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느라고 조심하다보니...

제가 교만하다고 지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현장에 있었나?" 라고 물으신다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암소리 말아라 자격이 없다고 하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만 관련자료와 집회 동영상을 객관적으로 본것이 전부입니다.
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대동소이 한것이라 봅니다. 과거에 비하여 특별하다거나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한가지 다른게 있다면 과거에 비하여 엄청나게 세련되었고
각가지 음향이나 시스템의 놀라운 발전입니다.

현대 지성인들이 무리없이 거부감 없이 받아 드릴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가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성적으로 수준이 훨씬 세련미가 있습니다. 고급화되어서
왠만한 영화나 뮤지컬을 보듯 생동감이 전면에 흘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관전평이 그만큼 멋있었다는 비유입니다.

그러한 분위기와 연출이라면(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지만 이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가 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잔뜩 기대하고 소망하는 이들에게는 굉장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부분이 매우 격앙되었고 한층 고조 되었을 때 들려오는 강사의
목소리는 엄청난 효과가 있으리라 짐작 됩니다.
과거의 부흥강사의 걸걸하며 둔탁한 쇳소리에도 열광했었는데
지금의 세련되고 능숙한 강사의 목소리는 거부할 수 없는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접한 동영상도 그랬습니다.
마치 최면을 걸듯(용서하십시오. 개인적으로 믿음이 없이 객관적으로
볼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반복 되는 강사의 부드러운 소리는 회중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습니다.

잔잔하게 호소력있게 흐르는 배경 찬송이나 보혈찬송,혹은 복음송은
특히 회개를 촉구하는 보컬과 사운드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간절하게 치유를 갈망해서
강단앞에 올라온 환자들은 이미 은혜를 받을 준비가
최고조로 달했던 것입니다.
강사의 선포에 곳곳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준비된 도우미들은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잡아주면서
바닥에 눕도록 배려해 주고 담요로 덮어 줍니다.

어떤 부자유한 환자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 서는 것을
카메라는 따라갑니다. 강사는 그 환자에게 다가가서

계속 주문을 외우듯이 말합니다.

더   더   더를 외칩니다.

혹은 영어로 짧게 말하기도 합니다.(이것은 영어권 강사의 동영상입니다)
간간히 "예수 이름을 외치며 선언하고"
또 분위기를 반전하듯이 가라 않히면서 속삭이듯 말합니다.

"성령님 오시옵소서"를 끊어질 듯이

때론 작게 때로는 좀더 확실하게 오고가며 반복하고
백 그라운드에 울리는 찬송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장내를
어우릅니다.

물론 제가 본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국내외 동영상을 다 접할 시간도없습니다만 암튼 제가 볼 때
개인적인 느낌을 지금 적는 것입니다.
비난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러한 집회에 참석 하셔서 은혜를 받으시고 치유를 받으신분들과
관계자님들께는 죄송합니다.

똑같은 현상을 보아도 보는 시각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도 어떤이들은 분석하고 비평을 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합니다만
또 어떤이들은 감격하며 감사함으로 신앙하는 것도 봅니다.

믿음이 적은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성령님은 스스로, 자의로 행하십니다.
누구의 구속이나 지시나 명령에 혹은 간구에 사로 잡히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거룩한 영광,권능,능력, 영원하심,권위,위엄이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바람처럼 운행하시며
오시기도 하시고 떠나시기도 하십니다.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구주임을 기쁨으로 증거하십니다.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물론 병을 치유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모든 믿는자들에게 생각나게 하십니다.
알게 하십니다.
믿게 하십니다.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어느 특별한 사람의 요청에
왔다갔다 하실까요?
그것도 병자를 치유하는 장면을 보고자 운집하였고
방송을 위해 준비한 곳에서 말입니다.
능력을 보기를 원하는 장소에서 과연 성령님이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실까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많은 예수의 이름이 선포됩니다.
성령님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원하실까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집회의 현장에는 부흥 강사만 클로즈업될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강사의 카리스마와 열정을 볼 것입니다.
강사의 특별한 능력을 볼 것입니다.
오직 강사만 보이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거기에 예수께서 증거가 될까요?
거기에 성령께서 증거가 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울려 퍼지겠지만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보다 강사에 열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강사에게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혹시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까?
기도하면 환자가 고침을 받습니까?
방언이 나오고 안수하면 방언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가가 됩니까?
그럴수 있습니다. 예언도 나오고 환상도 보입니까?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 하십시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소멸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분노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

일찍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막13: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막13:6)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13:21~23)

이런 조짐이 언제 나타날까요?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그 위용을 그 벽돌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이 큰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것을 말씀하신 후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이라고 자랑삼아 섬기는 우상 덩어리가 된 것을
예수님께서는 큰 건물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13:4)

성령님은
누군가의 간구와 명령에 순종하시는 분이 아니올시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삶을 사시면서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위함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과 사도들역시나
그들의 삶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이심과 그의 십자가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능력을 받아서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구세주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병을 치유하자고 성령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가셨고 거기에서 40일동안 주리셨다는것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성령받고 방언 은사를 받으면 능력을 받아서 자기가 영광을
받아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조심하십시오.

본인은 아니라고 성령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하실찌라도
결과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면
빠져 나올수 없다는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단도 광명한 천사로 자기를 위장해서 얼마든지 능력과 표적을 행한다고
바울사도가 경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친다는 좋은 명분으로
집회를 하다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높아져가는걸 경험할 것입니다.

도대채 무엇을 구하십니까?

성령을 구해서 뭘하시려고요?

한번 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열광하는 집회는 방언, 치유,표적,은사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럴수 도 있습니다. 분명 표적과 기사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마가복음 13장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인정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1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막13: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막13:6)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13:21~23)

주님은 분명하게 경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골방에서 겸손하게 무릎꿇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는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며
낮아지기를 소원하는 심령에 기쁨으로 임하신 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의 온 영혼을 치유하시며 깨끗하게 하시며
말씀으로 채우시며 먹이시며
오직 예수님만 보게 하십니다.

조용히
낮은곳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던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라서
한 걸음씩 걷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찾는이가 적은 곳입니다.
길이 좁고 협착하여 걸어가기에 힘이 드는 곳을
비틀거리며 가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오직 주님이 아니면 안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주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무능한 자들에게
성령은 임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
흠모할 가치가 없는 초라하고 볼 품없는 연약한 자들에게
작은자들에게 성령은 기쁨으로 임하십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소자들에게 성령은 임하시고
권능을 주셔서 땅끝까지 가게 하십니다.

빈 손으로 갈찌라도
제가 수고해서 자비량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본인이 수고해서 밥을 먹으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곤핍하나 감사합니다.
병들어도 감사합니다.
가난해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성령은 오십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크게 날아 오르기를 꿈꾸십니까?
예수님은 아주 낮은 곳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시려면 땅 바닥에 엎드리지 않으면 안되는거 아십니까?
성령의 능력은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져서
맨 발로 땅을 딛고 기어가는 자로 만드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으로 살고 예수님으로 죽는 그런 자리로
성령님은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살펴 보세요
성령님이 어디에 관심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세요.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어 보세요.

두서없는 글입니다.
그저 작금의 현상을 보면서 부족한 제 안에 울리는 소리를
적었습니다. 함께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기를 소망해봅니다.
긴 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008-07-31. 주님과함께

구원론(救援論, Salvation)

우리(성도)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다름아닌 구원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구원론을 다루기를 회피하는 것은 구원론이란 사실 신학상의 용어로서 잘못하면 오해를 가져오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가 나가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지도자들의 견해를 있는 그대로 받고 수용하여 자기것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어떤 성도가 구원론을 접하게 되면 그것의 깊이와는 상관이 없이 ‘내가 아는 이것이 정답이다. 다른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칫 흑백주의로 흘러 들어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필자는, 우리(성도)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구원론은 과연 어떤 것인가? 광범위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구원론의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구원((救援)의 뜻: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구원’은 각각 ‘예수-아’와 ‘소-테-리아’인데, 보편적으로는 임박한 악과 위험으로 부터 구출해 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 의미를 좁혀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된 생활에서 구해 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구원, ‘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만 약 150회정도 나온다. (막3:4, 행27:20참조)

2. ‘쏘테리아’의 원형동사는 영원한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다시말해 구원이란:영과 육이 질병과 진노로부터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함 (롬5:9절 참조).

3. 마지막으로 ‘소테리아’는 종말적인 점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롬13:11,고전5:5, 히9:28절 등, 참조).

기본 구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 것이 기본 구원론이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게 되는가? 아니면 죄와는 상관없이 영원구원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으로 남게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 교회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부터 연구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성도)가 교회의 어떤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3: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중생 (重生, born again) 중생이란 ‘파링게네시아’인데 그 뜻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거듭난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가지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이 때도 반드시 고의성이 없고, 실수라야만 하며 짐짓죄나 고의적인 죄는 거듭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는 기분으로 회개기도를 올리고 돌이켜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요13:6-9절 참조 )

그러나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 곧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
요1서5: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세상의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 경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고 받아드리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교회에는 수없이 다녔으나 교회 마당만 밟을 뿐,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속에 모신 삶이 아닌 종교인의 행위에만 그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도 언제든지 그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은 주어진다. 죽기 직전에 가서라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그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어떤 중직을 맡아서 일을 했다고 하여도 죽기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다면, 그런 자에겐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많은 이들의 죽음앞에서 두 가지 길로 갈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born again)기 전에는 구원이 없고, 형태는 있으나 알갱이가 없는 가라지들이며,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에 구원을 잃을만한 대죄를 지을 수 없도록 주께서 지켜주신다. 요1서5:18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가 거듭난 자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간단하다.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 삶이 엉망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는 능력이나 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적과 이사는 사단의 힘을 빌려서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령의 선한 열매가 생활 속에 맺혀져야 한다. 즉 다시말해, 진실로 거듭난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먼, 거듭나고 구원을 맛본 자가 하나님보다 그 죄의 유혹이 더 큼으로 인하여 죄에게 졌다면(반드시 고의성이나 짐짓(계속) 짓는 죄가 아니어야만 함)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 그 죄가 만일 ‘음란이나 간음’ 죄라면, 눈물로 자백하고 예수님께 고하면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그 죄를 지은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 주어 멸하고(고전3:17, 고전 5:1-5절 참조)그 영혼은 구원을 받게되니, 영원한 구원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 성령을 홰방하는 죄(마12:31-32참조)와 배도, 즉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에서 만은 돌이켜야 한다. 이런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불만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무리 강같이 넘쳐 흘러도 그 강물 속에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지 않는다면, 조상(원죄)적부터 내려오는 죄의 형벌을 속죄 받을 수 없고 자기가 그 모든 죄(조상(원죄)의 죄와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요3:36절 첨조)

그런고로: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말씀) 하신 말씀위에 굳게 서서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있나 확증하고 (고후13:5절 참조) 또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항상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여(롬10:9-11)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부끄러움과 회한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김과 구원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최송연/사모



어제는 오랜 만에 야구장엘 다녀 왔습니다
이곳 엘에이의 홈구장인 Dodger's Stadium 에서 Atlanta Braves 와의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높은 언덕위에 세운 경기장엔 4만 여 관중의 함성소리로 가득했고 식을 줄 모르는 여름밤의 열기와 함께 조명등은 점점 더 밝아져 갔습니다
때때로 터져 나오는 탄성과 야유,또 박수소리...
좀 지루하다 싶을 때 인 5회 말,Dodgers 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전광판에 안내문이 나오더군요
이번 공격에 누구던지 홈런을 치면 모든 관중들의 표가 Universal Studio에 들어갈 수 있는 관람권이 된다고...아이들에 한해서 입니다만...
그런데 이게 웬일...선수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치만...좌중간을 넘기는 통쾌한 2- Run HOME RUN이 터져 나옵니다
발을 구르며 외치는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구장은 떠나갈 듯하고 한 밤의 열기는 더 해 갑니다
틈틈히 선수들의 약력은 물론,상황설명,작전까지...아들의 친절(?)한 해설에 귀 기울여 주는 척...처음부터 미소와 기대감에 가득한 얼굴로 하나도 놓치치 않으려는 듯,게임에 집중하는 조카 딸 헬렌...
매 회(inning)마다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맞춰 일어서서 신나게 춤을 추는 친구 아들...
이름이 John인 친구 아들은 다운 신드롬을 갖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야구경기도 실은 John 과 1년전에 한 약속때문 이었습니다
나이는 23세의 청년이지만 아직 10살이 채 되지 않은 마음과 생각,몸집까지 소년입니다
혼자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엔 무리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먼저 인사하고 손을 내밀고 반가이 안깁니다
어제 밤 그리고 오늘 아침 내내,떠 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다운 신드롬을 갖고 있는 John의 깨끗하고 따뜻한 마음, 그 순수함이 내겐 없었습니다
영적인 다운 신드롬을 갖고 있는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모태신앙을 갖고 여기까지 왔는 데....
23년의 두배 하고도 10여년을 더 살았는 데...
 
지난 주말 집회때 주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손을 내밀라!!"
권능의 팔을 잡기를 원합니다
의로운 오른 손에 붙잡힌 바 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보좌로 나아 갈때에 기뻐 찬미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 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육적,영적으로 다운 신드롬을 앓고 있는 John 과 제가 주님의 팔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의로운 손,능력의 팔에 붙잡혀 남은 삶, 주님의 영광을 드러 내길 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41:10)
 
           ....주님이 사랑하시는 John을 생각하며....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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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점심식사후 약 1시반 쯤에 LA를 떠나 멕시코로 향하여 출발 하였습니다  SAN DIEGO 한국 그로서리 마켙에 들러 김밥과 음료수 등 필요한 몇가지를 구입하고 국경으로 향하였습니다

마침 출퇴근 시간이어서 한 30분 정도 지체하였으나 예정대로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TIJUANA를 통과하여 ENSENADA로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섰습니다  약 100km 거리인데 주변 환경이나 경치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해안선을 따라 뻗어 내려간 이 1번도로 주변은 몰라 볼 정도로 변해 가고 있더군요   같이 간 친구가 " 이럴때 '상전벽해'라는 말을 쓰는가? "라고 할 정도 이었습니다
무사히 ENSENADA에 도착하니 오후5시가 조금 늦어 날이 어둑어둑해 지기 시작하더군요  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다시 30분이 소요...다시1번도로를 들어서니 어느새 밤이 되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는데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사방은 불빛하나 없는 칠흙같은 밤길을 3시간 달려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엄목사님은 오래전 멕시코시티에 유학을 하고 근교에서 한인 교회를 섬기다가 이곳 SAN QUENTIN에 온지는 10여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네 인근에 6개의 교회당을 세웠고 특히 주변에 있는 CAMPO(농장집단거주지역)를 방문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당은 물론이고 본인의 사택도 손수 지었다고 하는데 솜씨가 보통은 넘을 것같고...겉모습 부터가 완전히 현지인과 구분이 않될 정도가 되었더군요
보통 새벽 4시반에 일을 하러 나가 오후 5~6경에 들어 온다고 합니다
주로 토마토 농장에서,엄지 손가락보다 작은 토마토를 5갤론 통에 가득 워 트럭에 싣는 일인데 이런 5갤론 통을 하루에 50개를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루에 받는 돈이 $8.00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 10살이 넘는 아이들은 모두 데리고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른들은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도 글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올해 계획과 목표는 이 아이들에게 글을 배워주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일에 동참하고자 친우들 몇명의 성금을 전달하였습니다  아침 새벽에 손수 해준 식사를 하고 셋이서 찬양을 몇곡 불렀습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주님 나라 이 땅위에 임하소서....

돌아오는 길은  참 수월하더군요   갈 때 밤에 비하면...그렇지만 보인다고,시야가 좋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큰 산을 한 둘 쯤 넘어야 하는데 "어제 이런 길을 넘어 왔구나!!"    길은 좁고 반대편에선 콘테이너 추럭이 중앙선을 넘나들며 마주 달려오고 옆에는 아찔한 낭떠러지에...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께서 Foot Print 예화를 말씀하시더군요
나와 동행한 주님이..발자욱을 남기신 주님이, 일생의 가장 힘들 때에는 나를 안고,업고 가셨다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을찌라도 주님은 함께 계십니다  비록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아무 도움이 없을 때에라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곁에 계심이기 때문 입니다  이 세상의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날 찌라도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니 영원토록 저 천성에 이르도록....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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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한테 받은 이적과 기사? 아리송해

2008/07/16 17:09

복사 http://blog.naver.com/yoochinw/130033325221

밥 존스의 "귀신이 나를 죽였다" "예수가 죽은 사람을 가슴 속으로 빨아 들였다"라는 어찌할 바 모르겠는 발언을 다룬 'Let Us Reaon' 웹사이트에서 그의 발언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밥 존스의 발언내용에는 두 개의 버전이 있으며 내용이 약간 다릅니다만 두가지 모두 시차를 두고 밥 존스가 직접 한 말들입니다.


[버전1]의  내용은 1988년 KCF 교회에서 밥 존스가 했던 말들입니다.
원고의 출처는 여기입니다.
"Mike Bickle, Bob Jones, Visions and Revelations, 1988"


[버전2]의 내용은 근래 패트리셔 킹의 'Extreme Prophetic'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밥 존스가 한 말입니다. 밥 존스는 타드 벤틀리와 함께 프로그램의 단골(?) 중의 한 사람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3MRJ3wA5neU
(비디오 시작 4분 30초 정도부터 밥 존스가 간증(?)한 내용입니다.)


굳이 제 의견을 첨부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내용의 출처: http://www.letusreason.org/Latrain52.htm


<<< 버전1 >>>


(밥 존스는 낙태와 동성연애의 증가를 우려하며 그가 마귀와 나눈 대화를 말합니다.)
"다음 번에 누구에게든지 이 주제에 관해 예언하면 그(마귀)는 나(존스)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말하기를 '
그것만 그만두면 네가 원하는 이적과 기사의 세계로 (너를) 돌려 놓겠다.
너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며 원하면 밤낮으로 예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 이 두가지 주제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

 

(심각한 코피로 인해 근사(near death)상태로 천국에 간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아픔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어두운 곳에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동굴 안이었고 밑을 내려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 주님. 제가 겉옷을 깨끗하게 했나요? 그럴 시간이 충분했나요?'
거기에 내 옆에서 걷던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봐도 되니 밥 보시오'
나는 나의 겉옷을 내려다 보았는데 그것은 크리스탈 빛 같았습니다."

 

...

 

"빛의 형태로 계신 예수를 보았는데 모든 연령의 남자들과 여자들을 붙잡고 키스했습니다.
그 후 그들을 그(예수)의 몸으로 흡수해서 그들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마치 두 개의 큰 문이 바로 그의 가슴에 있는 것 같이 그냥 바로 없어졌습니다.
나는 냉장창고 같은 지옥으로 가는 엘레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 탄, 예수께서 원치 않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위임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10억명의 영혼을 예수가 그 속으로 빨아들일 수 있도록 새 말세교회의 리더들은 만지라고 했습니다."


<<< 버전2 >>>


"마귀가 나타나서 다시 한번 그런 (낙태, 동성애, 마약관련) 예언을 하면 나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속하지 않고 주께 속하였으며, 그가 무섭지 않으며, 그가 나에게 손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날 그가 나를 죽였고 나는 죽어서 주께로 가서 줄을 섰습니다.
왼쪽을 바라보니 슈퍼마켓 에스컬레이터 같은 것을 타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엄청난 사람들이 그 줄에 있었습니다.
내가 선 줄은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으며 우리는 걸었습니다...
이 (세상) 삶을 지나가니 동굴이 있어서 그리로 들어갔는데, 동굴 밖을 살펴보니 동굴 입구에 한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는 하얀 빛이었으나 그보다 더 하얀 빛이 나에게 손을 내밀며 잡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깨끗한 채로 죽었나? 나의 겉옷은 나의 삶 때문에 때가 묻지 않았나?'였고, 나는 내가 깨끗한지 보기(알기)를 바랬습니다.
내 곁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나는 결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paracletos, 성령님이셨습니다...
그가 이제 봐도 된다고 말씀하시기에 보았더니 내 겉옷은 하얀 색이었습니다."


..


"왼쪽을 바라보니 (98%의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역자추가) 돈에 쌓여 있는 사람들, 위스키병 안에 들어간 사람들, 마약 같이 생긴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지옥에서는 세상에서 섬기던 신을 섬깁니다.. (그들은 에스컬레이터의 끝에서 더 이상 빛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미끄러졌습니다. 역자추가)."


..


"(나의) 줄에는 100명의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큰 흑인여자가 있었는데, 나는 얼굴없는 사람에게 '주여 이건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녀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 그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그녀를 살펴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네, 주님'이라고 하며 두팔을 던졌습니다.
그는 그의 팔을 그녀에게 두르고 바로 입술에 키스를 하고 (가슴에 문이 있는 것같이 역자추가) 그녀를 빨아 들였습니다..."


(비디오는 2, 3편으로 계속되며 얼굴없는 사람이 자기를 빨아들일 차례가 왔을 때 말하기를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 마귀가 너를 죽였다. 되돌아 가라. 2020년 경에 10억명의 18세 이하의 젊은 영혼을 추수하는 대추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히어링이 짧아서리.. 죄송합니다.

http://kr.youtube.com/watch?v=4g6ZZ-ChTTc

http://kr.youtube.com/watch?v=30t0G0HuP4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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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밤 히스페닉인 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칸들의 색다른 풍습중의 하나 인,여자아이가 만 15세 되는 해에 큰 잔치를 벌이는 일종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꽃으로 장식을 한 식장엔 잘 차려 입은 선남선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결혼식의 신부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조명을 받는 주인공은 예쁜 드레스를 입고 비슷한 또래의 소년들과 어울려 춤을 춥니다
이날 부터 공식적으로 남자친구를 사귈 수 있고 화장도 하고 숙녀로서 하이힐을 신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드레스에서 야외복차림으로 또 평상복 등 몇번 씩이나 옷을 갈아 입고 나오더군요
부모들이 그렇게 여유있는 사람들이 아닌 데....
낭비로 느껴 질 정도의 성대하고 풍성한 잔치는 늦은 밤 내내 계속됩니다
 
반면 유태인들의 성인식은 남자 아이가 만 13세 되는 해에 치룹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신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시기에 성인식을 행함으로 책임있는 존재로 선택받은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유태인의 성인식입니다
성인식을 치룬 후 일년동안에는 의무적인 사회봉사를 하게 하고 많은 여행을 하게 하여 이웃과 사회에 책임을 지는 존재로 성장시킵니다
"바르 마쯔바" 라고 하는 데 '바르'는 아들이란 뜻이고 '마쯔바'는 계약이란 말이라고 합니다
유태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을 치룬 유태인 소년은 이때부터 회당의 회원이 될 자격을 갖게 되고 또 모든 유태인들이 금식하는 욤키퍼(대속죄일)의 금식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부모로선 일차적인 종교적 책임을 면하게 되는 날이고 당사자로선 자기자신의 신앙에 책임을 지는 영적독립을 하는 날이 됩니다
 
지난 달 캄보디아 방문중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 '혼전순결식' 이 생각납니다
15~20평크기의 실내에 꽉 들어 찬 청소년들이 손을 들고 목청을 높여 찬양을 하고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기도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려운 데...
예배당엔 캄보디아 특유의 향료내음이 땀냄새와 어울려 진동을 합니다
예배당안에 있는 것이라곤 가정용 선풍기 두대 뿐이었는 데 그나마 정전으로 돌아 가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점점 혼탁하여가고 성적 문란이 당연시 되어 가는 요즈음,특히 에이즈가 점점 창궐하는 캄보디아에서 최초로 시도한 '혼전순결식' 은 어느 성인식보다 그 의미가 크다할 수 있습니다
'혼전순결식'에 참여한 캄보디아의 청소년들의 영롱한 눈동자에서 캄보디아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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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암학회와 심장학회, 한국암협회에서 일반인에게 추천하는 암 예방 수칙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국서 사망률의 첫째인 심장혈관질환과 둘째인 암, 셋째인 중풍병, 또한 현대인의 고질병인 고혈압, 당뇨병등은 모두 우리가 생활습관을 바꿈으로써 조절할 수 있는데 적당한 운동과 건강식으로 예방 및 조절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암예방 주요 권장사항;       <by ACS, AHA, ADA>
A항상 건강체중을 유지할 것
ㄱ.        신체운동으로 열량섭취의 균형유지
ㄴ.        평생 지나친 체중증가를 피함.
ㄷ.        체중과다나 비만시엔 건강체중을 목표로 점차 조절하며 유지할 것.
( 정상체중지표인 BMI란 Kg/meter x meter 로서 25이하로 유지할 것)
B 신체운동을 생활습관화할 것
ㄱ.        성인은 땀날정도의 운동을 최소 30~60분이상 매주 5일이상 할 것
ㄴ.        청소년들은 중등도 이상의 신체운동을 최소 60분이상 매주 5일이상 할 것
C건강식 특히 식물성음식을 많이 섭취할 것
ㄱ.        음식과 음료수의 분량은 건강체중유지를 생각하여 과다섭취 피함
ㄴ.        여러 야채과일을 매일 5분량 이상씩 섭취하며 다채로운 식단으로 균형잡기
ㄷ.        비정제 곡물(현미밥/ 갈색 빵)등을 취할 것
ㄹ.        붉은 육류 섭취양을 제한할 것 (흰 닭고기, 생선, 호두 등으로 대치)
D알콜 섭취를 제한할 것: 어떤 경우에도 하루 한두잔을 넘지마세요.

한국과 미국의 암협회권장사항의 차이점을 고찰해보면,
한국암협회는 절대금연 및 짠 음식을 줄이고 탄 음식을 삼가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한국인의 위암방지를 위한 중요한 권고사항이다. 소금저장식품은 위암, 구강암, 인후암의 빈도를 높힌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심장학회에서도 소금의 양을 6그람이하로 제한하라고 추천하는바 이는 고염분음식이 고혈압과 중풍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B형간염 예방접종, 안전한 (부부만의) 성생활, 발암물질 노출방지, 암조기 검진수칙 따르기를 추천하고 있다.

미국심장학회에서도 금연을 강조하면서 혈압/당뇨병을 조절하고 고지혈증을 조절할 것을 적극 추천하고 있다. 비만인 사람은 허리둘레가 남자는 40인치이하, 여자는 35인치를 절대 넘지않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야채과일 섭취증가는 위암, 식도암, 직장암, 폐암예방의 효과가 높음이 확인되었고 유방암, 자궁암, 전립성암등에도 골고루 효과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붉은 육류섭취는 직장암유발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확인되었고 전립선암과 췌장암에 연류돼 있는 증거가 확인되었다.
신체운동증가는 유방암과 직장암을 예방하는 탁월한 효과가 증명되었으며 자궁암예방에 효과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균형체중유지는 유방암, 자궁암 및 직장암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식도암과 췌장암에 효과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과다알콜섭취는 식도암을 유발하며 유방암을 초래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직장암과 간암, 췌장암에 연류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대다수의 보조식품은 2006년 현재로선 확실한 암예방효과를 증명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정제형태의 보조식품보다는 원료식품(과일,야채, 생선류 등)의 섭취가 더 바람직함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동물실험에선 등푸른 생선에 다량 포함된 오메가3지방산이 암세포형성과 암진행을 저지함이 입증되었으나 이를 포함한 정제형태의 보조식품이 생선식품을 대치할 만큼 인체에 혜택을 주는지는 증명되지 못한 상태이다. 생수 물을 많이 마시면 방광암과 대장암을 줄인다는 연구가 있는데 하루 물 8컵이상 마시라는 주장이 있다.
한국인에 많은 위암방지 대책을 다시 한번 고찰해보면 1. 야채과일을 매일5분량이상씩 섭취하고 2. 소금이 많은 음식을 줄이고 3.건강체중을 유지하는 것이다. < 1분량이란 사과, 귤 1개섭취하거나 생야채1컵의 분량을 말함.>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아니하였는바..’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악을 십자가 보혈로 씻고 항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때 주께서 우리의 신체와 영혼을 온전히 보전하시고 그날에 상급을 풍성히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처:아멘넷-정리: 박범렬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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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물 없는 구름 (CLOUDS WITHOUT WATER) / 프랭클린 홀 기름부음? 배교?

2008/08/13 05:31

복사 http://blog.naver.com/yoochinw/130034198745

1-1       물 없는 구름 (1부)

CHAPTER 1    CLOUDS WITHOUT WATER (PART 1)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유다서 1:12)


1940년대 후반 늦은 비 운동의 탄생에 기여한 중요한 영향력이 몇 있었다. 첫째는 오순절 교단 내에서의 영적 수위에 대한 일반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상태었다. 많은 평신도뿐 아니라 지도자급 인사들도 오순절교회가 이전의 교파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계신 원래의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에는 그들이 조직적 절차적 기능에 너무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광이 떠나고 있다! 빌 해몬(Bill Hamon)에 의하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오순절 기관들은 끝없는 토론과 논란이 되는 교리에 대해서 컨퍼런스를 열곤 했다. 앞서의 영광을 모르는 2세대, 3세대의 오순절 교인들이 생겨 났다. 평범한 모임에서는 원래 나타났던 초자연적 나타남들이 사라졌다. 초자연적 은사가 적용되고 초자연적 예배가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법칙'이라기보다 '예외'에 해당되었다. 오랜 교회 멤버들은 좋았던 시절에 대해 간증하곤 했다. 새 교역자들과 젊은 세대 성도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문에 대해 배고파 했다. 요엘 2:15-17, 호세아 6:3, 호세아 10:1 구절이 많은 오순절 성도들의 설교제목이 되었다.

"금식을 선포하라,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라.. 휴경지를 부수라.. 늦은 비 때에 비를 구하라..그러면 너희가 주를 아는 것에 따르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비로 오실 것이다. 땅 위에 늦은 비로."

리차드 리스(Richard Riss)는 쓰기를:

1930년대 중반부터 오순절 교인들 사이에는 깊은 영적 배고픔이 있었다. 칼 브럼백(Carl Brumback)에 의하면, "지난 십년간 너무나 분명했던 예배의 깊이와 성령의 은사의 작용이 30년대 40년대에는 더 이상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영적인 배고픔과, 그리고 프랭클린 홀과 윌리엄 브래넘이라는 두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늦은 비 운동이 탄생되었다. 늦은 비 운동과 그의 독특한 교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첫번째 사람은 프랭클린 홀(Franklin Hall)과 그의 저서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Atomic Power With God Through Fasting And Prayer)"이었다.



             프랭클린 홀 (FRANKLIN HALL)



1946년, 프랭클린 홀이라는 사람이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대형 금식기도 매일부흥센터를 설립했다.
교회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부흥과 회복을 가져오는 방법으로써의 금식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이 부흥센터의 중심 목적이었다. 홀은 전형적인 은사주의자였음은 센터에서 터져 나온 거친 주장과 과장된 표현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홀은 뉴스레터에서 주장하기를:

한두번 윗층 창문에서 나온 거룩한 연기와 불꽃 때문에 소방서에 신고가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불을 끄려고 호스를 가지고 계단을 뛰어 올라 갔다. 소방대원 중에는 이것이 자연적인 불이 아님을 보고 부흥센터의 커다란 홀에 앉아서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메리 소머빌(sister Mary Sommerville)'이란 나이 든 자매가 음식 없이 83일을 금식했다고 홀은 주장한다. 그녀가 "이 뛰어난 금식으로 인해 너무 튼튼해져서, 고귀한 성령의 내외적 충만함에 취해서 여기저기를 달리고 춤췄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사탄에 유혹을 받기 위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하신 기간의 두 배가 넘는 기간이다. 이런 식의 주장과 함께 수백 명이 구원을 받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여러 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았다는 일상적인 주장들이 있다.


홀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이란 책이 쓰여진 것이 이 즈음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방문을 바라며 찾던 오순절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목이 제안하는 것 같이, 이 책은 금식과 기도로 영적 능력을 바라며 하나님을 충성되게 찾는 이들에게 폭발적인 영적 능력을 약속한다. 홀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캐나다 성회 감독이었던 월터 프레드릭 목사는 캐나다에 있는 모든 오순절 목사들에게 홀의 자료를 보냈으며, 우리의 글을 보고 40-50년 대에 금식을 한 후 유명해진 사역자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윌리엄 프리만, 고든 린제이, A.A. 알렌, O.L. 재거스, 게일 잭슨, 오랄 로버츠, 데이빗 논, 윌리엄 브래넘, W.V. 그랜트, 윌리엄 하겐, 데일 헨슨, 토미 힉스

홀은 책에서 "금식 없이는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금식과 함께 기도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는다고 주장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해 위대한 영혼이 나타나기를 구했다. 기근과 식량부족이나 비가 부족할 때, 그들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위대한 영혼을 찾았으며,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았다.

배너 미니스트리의 트리샤 틸린(Tricia Tillin)은 홀의 책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에 대해 쓰기를: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 그리스천들의 성경지식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여기에는 매우 이상하고 이단적인 문장들이 가득하며 기독교 서적이라기 보다 오컬트 책자 같아 보인다. 홀은 크리스천들이 오랫동안 금식을 하면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영적 변환(transformation) 과정을 거쳐 죄없는 온전함과 죽지 않는 상태를 이루게 된다고 믿었다. 이밖에도 그의 가르침 몇가지는:


. 완전하게 된 신자는 중력을 이기는 힘을 경험하게 된다.
. 그들은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 그들의 옷은 낡지 아니하며, 몸냄새가 나지 않아서, 결코 씻을 필요가 없게 된다.
. 그들은 결코 아프지 않게 된다.
. 예수로부터 받은 불멸의 물질, 모두가 볼 수 있는 금색 물질이 그들 몸에 나타나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불을 보고 느끼게 된다.
. 모든 사람은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한다.
. 체험되는 구원-하나님의 불, 영광-이 몸에 30일 동안 적용돼야 하며, 이는 육체의 질병, 피로, 연약함을 제거할 것이다.
. 책의 초판에는 '남자아이회군(corporate manchild)' 교리가 있었었다.

홀의 가르침은 그가 틀림없이 모종의 오컬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Jewel van der Merwe는 쓰기를:

그의 나중 저서 '불멸로의 회귀'는 크리스천들이 UFO, UHO(비상천상물체), IHO(불멸천상물체)와의 경험을 통해 죽지 않게 되며, 중력제어와 부상제어가 가능하게 되어 불멸에 이른다고 시사한다. 홀은 또한 '뜬눈' 기도를 만들었다. 그는 눈을 감으면 믿음이 파괴되므로 (눈을 떠야) '불멸의 축복'이 더 잘 오게된다고 말했다.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쓰기를:

홀은 점성술에 기초한 12궁도(별자리, Zodiac)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타당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며, 이런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몇가지 아이디어를 그의 가르침을 통해 제시한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궁도의 8번째 싸인(sign)인 전갈자리에서 우리는 쏘려고 침을 세우고 있는 전갈의 모습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싸인이며, 이것은 성(sex)의 영역을 다스도록 되어 있다. 하늘(들)의 싸인 바로 앞에 심판자의 싸인이 있다. 생명을 주는 예수가 죽음을 향해 다가 가서 '사망의 쏘는 것'을 뽑았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홀의 가르침에 대한 또 다른 주된 포인트는 그가 말하는 불멸설에 있다: ""잠자는, 기초 없이 지어진 교회"를 "참 뜻과 부르심으로 속으로" 깨워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지켜질 때 뒤늦게 쏟아지는 억수같은 의의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 속에서 말해 왔던 땅에 내리는 영생불사(Immortality)의 비."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의 삶에서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홀의 가르침은 늦은 비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라는 이단적 교리를 세우게 된다. 홀의 시대의 '거듭난', '성령세례를 받은' 오순절 크리스천들이 프랭클린 홀의 가르침의 비성경성과 오컬트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당황스러운 사실에 대해 우리는 트리샤 틸린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랭클린 홀과 그의 가르침이 노스 배틀포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에 일어났던 늦은 비 '부흥'에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그 '부흥'의 주된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언 호틴(Ern Hawtin)은 쓰기를:

금식에 대한 진리는 부흥에 기여한 큰 요인이었다. 부흥이 있기 일년 전 우리는 프랭클린 홀의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을 읽었다. 우리는 바로 금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오랜 기간 금식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선한 형제 홀을 통한 큰 진리의 회복이 없었다면 이 부흥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목차보기]

1.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연대적인 구분

  성부시대 ;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양심시대, 율법시대)

  성자시대 ; 예수님 탄생부터 십자가 죽음까지 (마태,마가,누가,요한)

         * 신구약 교차점 : 침례 요한 때로 기점이 된다(눅16:16, 마11:12)

         * 제사법 종결 : 십자가 죽음으로 종결되었다 (히9:10, 눅23:45)

  성령시대(은혜시대) ;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 신약교회가 시작된 때는 행2:1-4에서 부터 시작이 됐읍니다  


2.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1) 얼마나 사랑하시느냐 ;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합니다 (엡5:25)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입니다(행20:28)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며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2) 언제까지 사랑하시느냐 ;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사랑하십니다 (살전5:23)

 (3) 하나님은 교회가 상처받는 것을 원하시 않으십니다 (고전1:10)


3. 하나님께서 지상교회를 세우신 목적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고 하나님의 보화를 성도가 받게 합니다 (골2:2-3, 골1:13-18, 엡3:10)

 (2)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려고 (계1:10-11)

 (3) 교회를 통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요3:16, 딤전2:4, 벧후3:9)

 (4) 일꾼삼아 (딤후2:1-2) 일터로 보내시려고 (눅10:1-2)

 (5) 누가 주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까 ;  부름받은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엘리사 ; 농부를 불러서 , 아모스 ; 드고아 뽕나무 밭에서 불러서,  기드온 ; 타작 마당에서 , 베드로 ; 고기잡이 배에서 , 마태 ; 세관에서 , 바울 ; 폭군중에서 

    그런고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신약의 사도들의 예를 들었읍니다


4. 주님은 교회가 아름다운 신부같이 꾸며지기를 원하십니다 (마25:1-10)

 지혜있고 준비성있는 처녀를 원하십니다  준비성있는 처녀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1)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한사람 (계7:9-12) 

 (2) 성령으로 신앙을 단장한 사람 (마25:5-8)

 (3) 심령을 새롭게 하는 사람 (롬12:2) 

 (4)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 (요3:8) 

    하나님은 성도가 아름답게 신부처럼 단장하기를 원하십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1) 복음을 위한 일꾼의 자세로  (골1:23하)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참예하는 자세로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3) 성도들을 그리스도안에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목숨을 내어주었으며  언제까지 사랑하시는지 세상 끝날까지 주님앞에 설 때까지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관심을 배웠읍니다  교회를 잘 섬기며 빈부귀천 구별없이 부르시어 크게 사용하신 것처럼 일꾼된 자세로  섬기며

사용받는자로 주님의 은혜안에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07/12/08   새벽기도회 설교말씀 요약)            

주님 손잡고 갑니다
        
아버지
세상은 너무 무섭습니다
너무나도 약한 저는 앞으로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용기가 제겐 없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여기까지 살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온갖 비 바람을 함께 맞아주신 주님
그 거치른 손 바닥에 못자국을 보면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주님

그 피에 젖은 손으로
그렇게도 아파 하시던 주님
이제 그 손의  핏자국이 제 손에도 흐릅니다
주님의 숨 소리가 제 심장을 고동 칩니다

너무나 작은 저에게는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여기까지 함께 걸어와 주신주님
비록 세상이 광야와 같이 나를 몰아쳐도
제 손 꼭 잡아주시는 주님 옆에 계시니
눈 꼭 감고 주님 따라 살렵니다

무서워서 눈 감고
두려워서 눈 감고
더욱 더욱 주님 손 꽉 잡고 갑니다
제 손을 잡아주시는 그 팔을 잡으며
오늘도 이렇게 걸어 갑니다

눈 감고 갑니다
넘어져도 주님 잡고 계시니 그저 갑니다
그 음성 듣고 힘을 내어 갑니다
그렇게 좋아라 갑니다
좁은 길 갑니다
주님
너무 빨리 가지 마세요
천천히 가세요
제가 따라갈수 있을만큼만
그렇게 조금만 앞에 가세요
주님 손만 잡고 갑니다

글/주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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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힘들 때 드리는 기도
                                     

주님,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나쁜 사람이라
오해 받았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진실한 친구라 믿었던
그 사람이
우리를 배신하고
떠났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우리가 낳았기에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를 떠나
먼~곳으로 가야만 할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을
죽음이 갈라 놓았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주님,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외롭고 힘이들 때에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한번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옵시고…

우리를 배신하며 떠난 야속한
이들로 인해서
외롭고 힘이들 때엔
우리가 당신을 배신했을 때에도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손 내밀어 주시던
당신의 따뜻하신 그 사랑이
기억나게 하옵시며…

이유없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외롭고 힘이들 때엔
우리가 이유없이 당신을
아프게 하였을 때에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늘~감싸주시며 품어주시던
그 넓고 따뜻하신 가슴이
기억나게 하시사...

우리도 우리에게 아픔을 준
모든 사람들을 다시한번
감싸며 품어줄 수 있는
그런
넓고 따뜻한 가슴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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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발톱이라는 식물이 있다.

관절치료에 효능이 있는 아프리카식물이다.

뿌리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뿌리가 드러날 때 비슷한 느낌을 주곤 했다.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가르치신 것일까


고난을 말리던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은 발톱을 보셨을까

예수님을 판 유다는 그 발톱이 스스로를 해쳤을 까


만일 우리가 내려놓음을 생각한다면

소중히 여기는 명예나 부요함뿐만 아니라,

깊숙이 숨겨진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나타나는

이 발톱을 펴서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 까


서로 할켜 상채기를 만들며

생존의 도구로 정당하게 사용되어지는

하지만 우리의 양심을 흔드는


이 발톱이 숨은 자리에서 펴지고

십자가 앞에 내려져서

보혈로 다듬어 지는 것


이것이 성화가 아닐까

성품에서 공격성을 상실하는 것

악에 대하여 의지박약이 되는 것

불의에 대하여 무지해 지는 것


신학적 관점의 충돌에서

신앙의 논쟁에서

교회 분쟁에서

나타났던 우리의 공격성이

거룩한 소망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예수님처럼 온유한 그리고 온전한 답변으로

매듭을 지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을 보니

그 발톱이 치유되지 못해

발생한 아픔이 아닌가 한다.


주님

십자가 아래서

인류의 발톱에

살 짖기시고 피 흘리신

당신이 이제야 보입니다.

 

내려다보니 여전히 이 발톱은 남아있고

교회에도 이 발톱은

오히려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발톱에 찢기사 피 흘리시는

당신으로 인해 슬퍼질 때

발톱아래 흐르는 당신의 피에 놀랄 때

그 때야 모든 것이 부끄러워 질 것 같습니다.

글/김준성 출처:마열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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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유주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딤전3: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읍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잘 지어져감으로 든든하게 세워져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겠읍니다


1) 교회의 성격

 (1) 개인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내게 가장 가까운 면에서 내 개인이 하나님의 교회다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내 개인 교회가 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신앙생활 절대로 잘 할 수 없읍니다  내 개인 교회는 내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개인 성전이 모여 집단을 이루는 것을 공동체 교회라 합니다

 (2) 보이는 교회(가시적인 교회)입니다

    개인 교회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예배드리는 집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 합니다  이 성전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합니다  공동적으로 말씀 배우고 성령안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져 잘 세워진 든든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건물은 교회당이며 모인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3) 보이지 않는(불가시적인 교회)입니다

    계21에 보면 볼수 없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읍니다  우주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역사와 세기를 두고 우리 앞에 이미 주님나라에 있는 분들이 하나님의 영적인 신령한 교회입니다  우리도 장차 갈것이며 후손도 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수많은 영혼들이  우주적으로 모인 교회를 이것을 천국이라 합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세상물질로 지은 것 아니요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그 집은 영원성이 있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하는 곳을 주님의 세계, 주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가 그토록 중요합니까?  왜 모이기에 힘쓰라 예배드려라, 섬기라 합니까  그것은 개인 교회가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주님나라를 가기 때문입니다   현재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잘 믿다가 주님나라 가는 것이기에 섬기는 자인 직분자를 세웁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잠 섬기다가 주님나라에 가는 승리하는 교회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2) 든든하게 서가는 교회

 1) 어떻게 하면 든든하게 세워져 갑니까?  그것은 가르치고 배울 때 입니다  엡5:26-27에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때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집니다

 2)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까?   (1) 예수안에 뿌리가 박히도록 세움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골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2) 각 사람은 그리스도안에 신앙인의 완전한 자로 세워질 때 까지 배워야 합니다

 3) 가르치는 자는 누구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님이 가르치시고 교사가 가르치시지만 성령께서 스승이 되주셔야 합니다  내마음에 내 영혼에 가르치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님이 진짜 스승입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신 것은 배워서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내 마음이 변화됩니다  교안은 성경입니다  교사는 성령입니다  학생은 성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 든든한 내 자신의 교회로 세워집니다


3) 예수님안에서 서로 연결 되어져 가는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합니다  엡2:21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인 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읍니다  제일 중요한 내 개인적 교회가 잘 되어야 하고 내 개인과 서로 서로안에 있는 똑같은 예수님안에서 잘 연결되어 갈 때 든든히 서갑니다  또 예수님 사랑하는 교회와 교회가 서로 서로 연결되어져 가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주적인 교회가 모여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안디옥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져 안디옥 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행13에 보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안에 교사들인 바나바,사울,시므온,루기오,마나엔이 있었읍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아시안입니다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칸입니다  마나엔은 백인종입니다  피부다른 사람들이 한 교회안에 모여 복음을 가르쳤읍니다  우리도 좋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인종,지위,빈부귀천 차별없이 주님 사랑하며 섬김으로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성도들의 몸인 교회가 모여 하나되어 가는 교회로 지어져 가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따라 간절한 기도와 찬송을 드릴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루실 것입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영원한 주님나라에 가는 교회인 내 개인적인 교회와 공동체 교회가 하나님앞에 영광스럽게 지어져 가도록 성령께서 친히 세워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07/31/08 목요 기도회 설교말씀 요약)

정리: 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십일조를 하되 구약의 세가지를 다하는지 궁금합니다,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고 할때 말라기서의 복을 받을려면 이 세가지를 다해야하는것이 아닌지요?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의 세 가지 유형

모세 오경에는 세 가지 유형의 십일조가 등장한다. 첫 유형으로서 기업(基業) 해당용 십일조가 있는데, 이는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 레위 자손은 제사와 성막에 관련한 봉사에만 전념해야 했던 까닭에 다른 지파처럼 기업(땅)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치는 십일조(땅의 곡식과 각종 짐승)를 레위 자손에게 할당시켰다. 이로써 레위 자손은 생계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부과된 종교적 사명에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10분의 1을 제사장에게 바치도록 되어있었다(민 18:26~28).

십일조의 둘째 유형은 절기 충당용 십일조라 부를 수 있겠는데, 각종 절기 시에 필요한 예물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유형의 십일조는 온 가족이 (레위인과 더불어)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일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기가 힘들 때에는 그 십일조의 내용물을 돈으로 바꾸었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다시금 우양이나 포도주 등 자신이 원하는 품목으로 바꿀 수 있었다(신 14:24~26).

마지막 유형은 빈자(貧者) 지원용 십일조로써 매 3년마다 한 번씩 헌납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14:28~29). 세 번째 십일조는 3년마다 한 번씩 바치는 것이므로 매년 단위로 계산하면 3
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 십일조는 공동체 내 경제적으로 빈핍한 계층의 유익을 위해 설정된 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거하는 성읍에 비축하여 두었다가 필요시에 그 성내에서 사용하도록 했다(신 14:28; 26:12).

그리고 세상복을 구하는것이 잘못이라는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하지만 세상복을 누린다고 해서 자신이 십일조를 잘하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것은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물질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교만한 이유가 바로 그 착각 때문입니다,

저도 십일조 하는 사람입니다, 물질도 지금까지 주님께서 자족할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십일조 처음 시작할때에는 율법적으로 했고 아깝기도 했지만 말라기서말씀에 근거하여 기대도 했지요ㅡ
하지만 십일조 드렸다고 물질이 특별히 더 부자가 된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식투기나 부동산투기같은것을 한 친구들은 엄청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적으로는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인이라는 고백을 하니까요,,
그리고 크게 쓸데없이 나가는 돈이 없게 해주신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을 주님이 지켜주심도 분명히 체험합니다,
...

그런데 십일조=물질복의 통로는 아니다고 봅니다
십일조를 하면서 물질복을 받을수도 있지만 그복때문에 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십일조정신으로 이해해야합니다,
놀부처럼 제비다리 고치면 복받는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복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안의 진정한 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마치 세상복을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이나 복을 더 받은것처럼 착각하는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것이 복입니다,
그 여정에 주님께서 합당한 세상의 복도 주시고 연단도 주시면서 다듬어 가십니다,
십일조를 통하여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물질이 많아지는것보다 더 귀한 것들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에 감사할수가 있는것입니다,

복을 구하는것은 당연하지만 주님보시기에 합당하게 각자에게 복을 주신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것도 없고 오직 은혜임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글/ 아이린(어느 댓글 공방)

요즈음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되어 심각하게 대립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 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크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한 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만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고 말라기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 놓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이는 십일조를 내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양, 성도들을 기복사상으로 유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 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되고 도둑이되지 않기 위해서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일조를 내는 마음의 자세는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영죽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다는 고백,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학산되어지도록 하기위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 십분의 일을 사랑하는 주님께 드리되 자원하는 심령으로 모든 헌물(십일조 포함)은 드려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어떤이들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십분의 이나 삼, 더 나아가서 십분의 구까지도 기꺼이 드리는 성도가 있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을 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기뻐 받으시지, 의무나 인색함으로 하는 예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흠향하지 않으신다. 주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예물을 바쳐야할 필요가 어디있는가?(고후9:7절 참조)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서 뜨겁게 올라온다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아까울 것인가?

1. 구약의 모든 율법은 폐하였고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율법은 예수 크리스토안에서 완성되어진 것이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마5:17-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to fulfill)케 하심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십자가위에서 온전케 하셨다. 요한복음19:30절, 예수 크리스토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위에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그것은,
첫째: 구속사역을 다 이루심(믿음으로 구원을 받음)
둘째:  율법을 온전케 하심(사랑안에서 온전케됨)
구속사역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을 온전케 하심이란:
마태복음 22:37-39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약하여 율법은 사랑안에서 완성되어졌다.
1. 위로는 하나님 사랑  2. 아래로는 이웃(사람)을 사랑.
따라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자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함이 곧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반드시 십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명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궁금한가? 그렇다면 마태복음23:23-24절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에서 이것이란: 십일조를 말씀하심이고, 저것이란 의와 인과 신을 말씀하심이다. 곧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성립이며, 두가지(both) 모두 다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막12: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음이 먼저 들어간 후에 의무는 이행가능한 것이다. 쉬운 예로, 한 국가를 보면, 아이가 어릴 때에는 보호를 받고, 18살 인가, 20살인가?, 성인식이 끝난 후에 국민의 의무를 준행 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아이에게 국민의 의무 운운 하면... 그 아이가 그 나라의 국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아직 어린 관계로 그 의무가 무거운 짐이 되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영적인 세계에도 젖을 먹어야할 만큼 어린 아이가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이 있다고 바울사도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 (히5:12-14)

3. 축복받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한다는 사람들: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조건적이다. 믿음은 결코 조건적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말씀)” 고 말씀하신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요, 율법준행 자들의 케케묵은 소리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일 뿐,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성도)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신앙고백 행위가 되어야한다.

결코 의무나 억지로 해서도 안되고 또 복을 받기(기복사상)위해서 행해서도 안된다.

고로, 십일조는 내어야(성숙한 성도라면) 되고, 내지 않아(신앙이 어릴 때)도 되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전 재산은 드리지 못해도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적은 재물이 사용되어지는 곳에서 잃어진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널리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십일조를 대하는 올바른 마음자세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반드시 넘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농사의 원리처럼 모든 헌금에도 ‘증수의 원칙’이 성립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는 말로써 고후9:6절에서 밝히고 있는 말씀의 요지이다. 단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적용이 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니라. (고후9:7절 말씀)”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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