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펭귄(Emperor Penguin)들은 1년에 하나의 알을 낳아 키운다고 합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알을 넘겨 받는데 이때 알이 남극의 얼음에 닿으면 금새 얼어 붙기 때문에 수컷은 알을 발 위로 조심스럽게 받아서 자신의 배 가죽으로 덮어 알을 부화 시킵니다
알에서 새끼가 나온 후에도 아빠 펭귄들은 새끼를 자신의 발 위에서 한시도 내려놓지 않고 품어 키웁니다
아빠 펭귄이 알에서 깨어난 새끼를 돌보는 사이,알을 낳고 탈진한 어미 펭귄은 속히 바다로 나가 먹이를 먹습니다
그리고 먹이를 뱃속 가득 채운 다음 아빠 펭귄과 새끼가 기다리는 곳으로 급히 돌아가야 합니다
엄마 펭귄이 먹이를 갖고 돌아 오기를 기다리며,아빠 펭귄은 자신의 뱃속에 저장해둔 먹이를 조금씩 뱉어내어 새끼에게 먹이는 것으로 겨우 새끼의 목숨을 이어 갑니다
최후의 먹이까지 먹이고 더 이상 먹일 것이 없으면,그때까지 엄마 펭귄이 당도하지 못하면 아빠와 새끼는 모두 굶어죽게 됩니다
아빠 펭귄과 새끼가 사는 유일한 길은 뱃속에 물고기를 가득 채운 엄마 펭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마 펭귄을 호시탐탐 노리는 천적이 있습니다 바로 바다 표범이지요 바다표범은 바다에서 먹이를 잔뜩 사냥한 펭귄이 빙하 위로 뛰어 오르는 지점에 잠복하고 있다가 펭귄을 덥칩니다
바다표범의 급습에 놀란 펭귄들이 부지런히 도망칩니다
물린 펭귄은 오랜 사투 끝에 날갯죽지가 찟겨 나가면서 겨우 바다표범의 입에서 벗어 납니다
간신히 살아 난 어미 펭귄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지친 나머지 얼음위에 배를 깔고 미끄러지며 계속 앞으로 나아 갑니다
펭귄이 지나간 흰 얼음 위에는 다리와 날개에서 흐른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그 어미 펭귄이 혼신의 힘을 다해 찾아 간 곳은 자신의 새끼가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상처 입은 어미 펭귄이 구슬피 울며 자신의 새끼를 부르자 잠시 후 새끼 한마리가 그 어미 앞으로 다가 옵니다
어미는 즉시 입을 벌려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기 시작합니다
상처 입은 어미 펭귄이 필사적으로 살아 돌아온 유일한 이유는 오직 그 새끼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그 새끼의 생명을 보전할 방법이 없기에 어미는 날카로운 바다표범의 이빨에서 벗어나 피 흘리는 몸을 이끌고 새끼를 찾아 돌아온 것 것입니다
바다표범에 물리는 그 순간에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먹이를 기다리며 점점 생명이 꺼져가고 있을 자신의 새끼였을 것입니다

최근에 읽은 이용규선교사님이 쓰신 '더 내려놓음'에 있는 내용입니다

상처받은 어미 펭귄의 모습에서 어떤 이미지가 생각이 나시는지요?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는,배고픈 새끼를 돌보기에 여념이 없는 어미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집니까?
이 책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이 이 예화를 인용하시며 하신 말씀은, '하물며 하나님은....'이었습니다
 '짐승의 새끼를 제물로 삼을 경우에는 최소한 생후8일 이상 되도록 했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짐승어미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까지 미쳤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아 죽이실 때, 얼~마~나~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부모의 역할,아버지의 책임과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 부끄럽습니다
 
         ...누구보다 부모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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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전체보기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을 때 폴란드의 유대인 전용 시장에 한 노인이 빈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사 가세요!”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노인장! 아무것도 팔 것이 없지 않소?” 그러자 노인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는 희망을 팔고 있소. 우리 민족의 꿈과 비전을 팔고 있소.” 그렇습니다. 희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입니다. 희망!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며, 인생의 새 아침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고 카드빚에 쪼들려 미래가 어둡게만 보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희망의 시작이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분 때문에 오늘도 희망차게 살아야 할 이유와 특권이 있습니다. - 예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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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구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동물, 아니,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선택의지능력’을 인간에게만 부여하셨음을 알게하여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요, 우리에게는 권리장전의 표식이요, 선과악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멋진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무조건 순복하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짐승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도 또 그분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선택의지능력도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율권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악을 택할 수도 있고 선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율성의 능력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사랑보다 자신이 선택한 자율적인 사랑이 더 의미가 있고 더 가치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들을 용서하시는 방법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 죄인들을 향해 “너의 죄를 사하노라…”  어느 영화장면의 한 대사처럼 그렇게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셔도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요10:18절 참조) 그러길래 십자가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값진 사랑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남편보다 훨씬 더 잘 생기고 유능한 남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즐거이 내 남편을 사랑하며 내 가정을 지킵니다.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요 내가 선택한 내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다 미쓰 코리아는 아니며 다 팔등신 미인들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며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씁니다. 내가 택한 나의 가정이요 내 아내이기 때문이겠지요…우리는 때때로 선택권을 남용해서 실낙원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한 예로,
얼마 전, 뉴욕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 중의 한 유능한 목사님이 7계명을 범하고 추락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특히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잠시잠간의 쾌락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늘의 유혹과 싸워 이길 것이냐? 선택의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당당히 승리할 것을 택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요, 정욕을 택하는 것도 자신의 몫입니다. 만약, 그 목사님께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십자가의 길을 택했더라면, 가족의 행복은 물론, 그의 목회여정은 한결 더 빛이 났을 것이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라 하는 칭찬과 예비된 상급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보다는 보이는 육신의 쾌락을 택했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사랑스런 가정을 어둡게 했으며 에덴동산같이 사랑스럽고 축복된 교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선을 선택할 수도 있는 자율권이 주어진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멋진 피조물들입니다!  처음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이 권리를 남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낙원,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선택의 능력을 남용한 인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나에게 주어진 이 멋진 선택의 권리를 남용하지만 않는다면 이 선택의 능력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가 있고, 그 길을 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택하고 실낙원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로, 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예수 그리스도)을 택하고” (신명기 30:19)



최송연/사모




  짧은 인생이 끝을 내면 영원한 세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영원한 주님나라가 내 앞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앞에 서게 될 그때에 후회없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1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하였읍니다  나그네와 행인같은 삶을 살고있지만 하나님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성도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왜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거룩한 성도라 하면 과연 내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 까 하게 되며 부담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서 하나님앞에 서면 내가 사는 그 나라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거룩한 백성이 들어가며 거기는 거룩한자 뿐이기 때문입니다  속된 자와 가증한 자가 있지 아니하는 영광의 나라이기 때문에 거룩되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이란 구약적 단어로는 "밝다, 빛이난다, 황홀하다, 영광스럽다, 분리한다, 갈라놓는다 구별하다"의 뜻이 있읍니다  신약적 단어로는 "존경, 깨끗함, 신성"의 뜻이 있읍니다   하나님과 영화로우신 주님은 이 세상과는 화합이 안되는 분리됨으로 그래서 성도는 분리된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깨끗하고 빛이나고 존경받는 분리되는 삶을 살수 있읍니까?   불가능 하기에 그래서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가능한 방법이 있읍니다 믿고 따르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읍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능합니다

 
  히13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죄사함을 믿으면 됩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하였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아니하면 절대로 거룩하게 살 수 없읍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앞에 거룩된 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으로만 가능하게 됩니다

    말씀을 바로 믿지 아니하면 엇갈려 방향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말씀은  방향을 제시하여 인도해주시며 정결케 되도록 다듬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만 거룩하게 될수 있읍니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읍니다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나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진리안에 선 자만이 거룩하게 살 수 있읍니다

 (3)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가능하게 됩니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나님앞에 자신을 드리며 마음을 드려 기도할 때 거룩되게 살 수 있는 삶이 됩니다


2) 거룩하심의 공동체에 대해서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모인듯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아래 모여 찬송과 기도드림이 성령께 이끌리어 거룩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에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모임이기에 거룩합니다 교회의 각기관과 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모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범죄하지 않습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광스런 교회,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로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3) 하나님 나라가 거룩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삼상 2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눅1: 35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계15:4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거룩합니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계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그곳에 우리도 갑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예언했읍니다  이사야는 2,7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아 앞으로 오게 될 주님나라를 지금보며 예언합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현재같이 보여주며 기록하게 하십니다  사35: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사64:4-5에서  성도가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주님과 결혼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나라에 사는 기쁨이 충만한 그 장면을 말씀하고 있읍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이며  '쁄라'는 결혼한 여자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안에 자기를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잘 다듬어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였읍니다  딤전4:7-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느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하였읍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알고보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우리도 경건의 연습을 하여 세상에 유익을 주며 내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주여 내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하소서' 기도하며 살아가실 때 힘주시고 도와주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08/26/08  남전도회 헌신예배 말씀요약)

정리: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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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열 가지

      1.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2.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시기 위하여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 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장 11∼12

      3.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태복음 5장 17절

      4.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 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10∼13절

      5.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장 27절

      6.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과 심판을 알리시기 위하여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태복음 12장 18절

      7.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8절

      8.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8: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태복음 18장 12∼14절

      9.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장 28절

      10.
      많은 사람이 죄사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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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8절 말씀에 "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니까 몰랐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의 몸에는 여러가지 지체가 있읍니다  눈은 작은 지체지만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눈에 대한 말씀으로  육신에 속한 눈과 영에 속한 눈에 대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육신에 속한 눈에 대하여

    사람의 눈은 근시안, 원시안, 정상적인 안질을 가진 사람이 있읍니다  어떤 사람의 눈은 밝게 보지만 어떤 사람은 어두워서 잘 못보는 사람, 멀리있는 것이 잘 안보이는 사람, 멀리 보는 사람, 노안,태생때부터 눈이 나쁜 사람이 있읍니다  예수님은 마 6:22-23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말씀하셨읍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신의 눈이 밝으면 좋습니다  어두우면 온몸이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읍니다


2) 영에 속한 눈에 대하여

    영에 속한 눈은 육신에 속한 눈과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본문2:14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러니까 영적인 일에 대해서 육신의 눈가지고는 안되며 영의 일을 전혀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교회일, 주의 일은 영적으로 볼줄 알아야 하며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1) 영적인 눈은 어떻게 해야 밝아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아지는 겁니다  시19:8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보이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눈을 밝게 합니다 영적인 일을 할 때 보여 졌으면 문제가 될것 없읍니다  보여지지 않을 때에 주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보여달라고 기도하며  보여졌으면 이 모든 일들을 평안하게 해주세요 기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밖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기에 안보였다는 겁니다 영적인 눈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2) 영적인 눈은 성도가 얻을 기업이 보여집니다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성도는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이 떠지면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으며 내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집니다  그안에서 영광의 풍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이 하고 싶어집니다  무슨 일을 내가 왜 해야하는지 알고나면 그 일을 주님앞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아름다워지고 보상이 쌓여집니다  육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했으면 하나님앞에서 헛수고 한 것입니다  주님앞에 하고 난 것은 주님의 일을 한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주님의 도구일 뿐이었음에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영적인 눈을 뜨고 올바르게 주의 일을 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4) 하였읍니다  영적인 성도가 눈을 뜨면 미래가 보입니다


3) 영적인 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내 눈에 보여집니다

    육신에 속한 눈은 세상만 보여집니다  영에 속한 눈은 주님나라가 보여집니다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님! 언제 오시렵니까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행7:55-56에서 스데반은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것을 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성도의 눈은 주님 세계를 보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4)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교점

 ***보이는 세계는  (1) 이 세상은 죄악세상이다  (2) 고통과 슬픔의 나라다  (3) 기근과 전쟁이 계속있다  (4) 죽음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1) 하나님 나라는 영광스런 나라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 희락이 넘친다  (3) 영원한 평화, 생명과 생명수가 흐르는 아름다운 나라다  (4) 영생하는 나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한다


5)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방법

 (1) 위에 것을 생각하며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늘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하나님 말씀을 읽기와 공부하는 것입니다

 (3) 기도 생활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지만 특히 영적인 눈이 밝아 주님을 정확하게 보는  지혜와 명철로 마음,생각,정신,사상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눈을 떠서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라보았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엣것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위하여  주님앞에 영적인 눈을 떠서 살아감으로 주님앞에 후회없는 삶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08/23/08 새벽기도회 말씀요약)

정리: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 보기 전에는…
이 세상이 늘 힘들기만 할 뿐이라고
자주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들을
바라보느라 너무 빠져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여유가
내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 보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이기적일 뿐이라고
늘 원망을 했습니다.


내게 잘못 대해 주는 사람들을
바라보느라 너무 바빠서…

친구의 진실한 사랑을 바라볼 여유가
내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 보기 전에는…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가질 수 없음에
늘  아쉬워 했음을 고백합니다.


이 땅 위에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소유하느라 너무 빠져서…
모두 다~ 두고 떠나야 하는 유한한 인생임을
내가 잊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 보기 전에는…
내 사랑하는 가족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할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느라 바치는
모든 시간들이 너무 행복해서…
그들과의 이별은 결코 내게 오지않을 것이라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 보기 전에는…
죽음이란 너에게만 찾아오는 악마라고
방심을 했습니다.

세상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며
나는 건강하다 환상속에 빠져서…
죽음이란 만민앞에 평등한 평준화임을
내가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 보기 전에는…
죽음 저 편의 세계를 준비해 두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너무도 낯설기만한 그곳…
죽음의 문턱에서 두려워 떨며…
울고 서있는 내게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모든 것들이 다
나를 떠나 버리고 아무도 없는 그 곳에는
오직 그 분만이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제 나는 그 분과 함께…
그 분의 못자국 난 손에 이끌려…
두려움없이 죽음의 문턱을 잘 넘어 갈수 있도록…
보다 나은 준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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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나 얻을 수 있는
강한 체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구했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간구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
오히려 지혜를 배웠습니다.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은연 중에 나는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내가 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부족하되
만인 중에서
가장 풍족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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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시더라.(요16:33)

아마도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 이 말씀은 두고두고 제자들의 삶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귀한 약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후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박해와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척박한 삶속에서도 제자들을 절망하지 않도록 견고하게 붙들어 준 능력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결국 구약의 성도들과도 동일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맺은 특별한 관계에서부터 출발한 민족입니다. 그 약속의 당사자는 놀랍게도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만유를 창조하신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이성과 인식의 한계를 초월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하나님이 오심으로부터 시작되어진 특별한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로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망 아래 허덕이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심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동등이시며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셔서 죽으셔야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시 살아나셔야만 한 놀라운 우주적인 사건은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이루워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의 열두 자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온 것이 언약사상입니다. 그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의 성도들에게까지 갱신되었고 그 언약의 중심에 오늘 제자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아주 독특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속에서 면면히 흘러온 변함없는 약속의 확인은 세상의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이론으로나 문화로도 설명할 수 없는 유일함입니다. 본래 죄악으로 부패했고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실낙원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번성해 갔습니다만 이미 어그러진 사상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가 회복 불능으로 엉망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죄악의 관영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언약은 취소될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한 백성이요 패역한 나라요 이미 마귀의 종으로 전락해 버린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계획은 흑암의 세계속에 한줄기 빛으로 섬광처럼 내려온 것입니다. 모두가 죄악으로 치우치며 죄악에서 뒹굴고 죄를 먹고 마시며 취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보존되어서 구별될 수 있도록 역사를 주관하시는 섭리속에서 오늘 여기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미혹과 혼돈 속에서 인간들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으로 온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는 자들에게만 열려진 당연한 역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으며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이성적으로 보게 된다면 결코 볼 수 없는 그 영원한 세계의 역사를 우리는 보는 자들입니다. 바로 내 손에 쥐어지고 내가 손을 들어서 펼치기만 하면 훤히 보이는 세계를 성경을 통해서 가까이에 주셨건만 동일한 성경을 열어서 보는것조차 믿음으로가 아니라면 보기는 보아도 못 보는 것이며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귀가 가려져서 듣지를 못하는 것이며 종교적인 전통으로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점으로 오늘날 현대 지성인들에게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아무리 율법서를 연구하고 암송했어도 정작 메시아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우지 못하고 무지한 일반 세리요 죄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며 산상수훈이며 산 떡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도 역시나 자기 지혜를 토대로 바라보는 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은 뻔히 보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눈을 두지 못하고서 자주 전통이나 형식에 얽매여서 성령의 음성과 깨닫게 함을 전혀 못 보는 영적인 시각 장애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보는자들이라고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에게는 오늘의 본문이 사실상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올라 가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조차도 알 수가 없었던 제자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함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면 그는 틀림없이 거짓의 영에 속은 자요 마귀의 도구일 뿐입니다. 적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공공연하게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살후2:3-4)

그러나 사실은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성도들은 큰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려움에 있는 성도들에게 밝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붙잡고 인내하며 견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결같은 사도들의 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디에서도 이러한 고난의 가르침은 없고 평안과 번영과 이생의 자랑과 성공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더이상 성도들에게 삶의 인내나 역경에 대하여 준비하지 못하도록 귀를 막고 축복받기위한 도구로서 말씀을 이용하는 시대로 변한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던 것과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을까요?

이시대의 교회들인 성도들에게 세상 만국의 영화를 보여 주면서 한번만 딱 한번만  나에게 절하면 거져 주겠다는 메세지가 범람을 합니다.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모든 저주와 질병에서 해방되었으므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현세적인 번영복음으로 당당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에게 명하여 빵이 되게 하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시더라. 그러자 마귀가 주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동안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주더라. 그리고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것들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그것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고 하니,(눅4:3-7)

마귀가 주께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것들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그것이 나에게 넘겨졌으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리라. 이렇게 달콤하게 유혹하는 설교가 판을 치는 것이 우연일까요? 부자되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며 성공하는 자들의 습관 운운하면서 말씀을 도구로 이용하는 곳에 엄청난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수 많은 무리들이 몰려 올 때에 그곳을 떠나서 홀로 계셨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결코 혼자이기를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곳에 섞이기를 원하며 인정받기를 원하며 사람들의 대접 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인정해주면 더 큰 사역지를 물색하느라 경력을 포장하고 겸손을 가장하면서 더 큰 교회로 청빙되기를 꿈꾸는 현실입니다. 나는 그럴만한 자격과 실력이 있으니 한번 시험해 봐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낮아지심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이 겪은 지독한 고난은 옛날 이야기나 전설이 되었고 지금은 풍성함과 번영과 소돔의 화려함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대입니다. 이미 교회는 등대로서의 소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회칠한 무덤처럼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울고 애통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며, 너희는 슬퍼하겠으나 너희의 슬픔은 기쁨이 되리라.

여기 어디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형통을 말씀하셨읍니까?

잘될것은 꿈도 꾸지 말라 하십니다. 세상은 너희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하십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일들이 결코 없을 것이다 하십니다. 너희는 울고 애통할 것이다 하십니다. 세상은 기뻐하며 너희를 조롱하고 핍박할 것이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형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어떻게 교회만 가면 만사 형통이라고 합니까? 교회안에서 부르는 찬양에도 그렇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부르지요? 세상 부귀와 세상 자랑도 다 버렸네 합니다. 헌금송을 부를때도 그렇지요? 세상 복락 멀리하고 주만 따라 갑니다 하지요? 입으로는 이렇게 찬양하면서 가르침은 왜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사업 번성하고 부자되어야 한다고 할까요? 주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은 완전히 드러납니다. 성경은 그것을 극명하게 밝혀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저 범사사 잘 될것이다 하며 축복의 말씀을 하시면 좋으련만 고난과 핍박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자들의 처음 모습입니다. 처음의 삶은 이렇게 이미 어둠과 사탄에게 속한 세상에서의 싸움을 해야 하기에 필연적으로 핍박과 어려움에 던져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다음 약속을 세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과 핍박이 몰려 온다해도 성도가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넉넉하게 승리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한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 하십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세상의 임금이 쫒겨났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승리하셨다는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성공이 본질이 아닙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오직 승리입니다. 승리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현실적으로 낙심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고 쓰러질 수 밖에 없지만 아주 쓰러지지 않음은 승리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능력이며 권세인가를 아는 자라면 어떤 조건속에서도 평안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승리하신 주님께서 평강의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권세와 영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연약한 소자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의 발걸음과 함께 승리의 노래를 주님께 올리며 본향을 향하여 한걸음 씩 걸어가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런 귀한 약속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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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은 오늘,
이곳은 내일이 우리들의 고유명절,
한가위라고 하네요. ^^*

외국에서 살면서부터 점점 기억 속으로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들의 고유명절...

잠시 가을길을 걸으며
마음의 여유로움을 찾아보세요.

가족이 있어 행복하고
이웃이 있어 행복하고
친구가 있어 행복하고
건강이 있어 행복하고

행복을 입으로 고백하세요.행복이 별건가요?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이죠.

행복은 행복을 느끼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작은 요정,
행복을 고백하지 않는 자의 곁에서는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 버린다고 하네요...^^*

주 예수님의 은혜가 사랑하는 님들의 가정에 풍성하기를!!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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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을 준비를 하고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 전에 대답하지 않는다.

-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 말을 더디하고, 먼저 생각하며 서둘러 말하지 아니한다.

- (잠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 (잠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 (잠 21: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 (잠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3.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한다.

-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4.진실을 말하되 언제나 사랑 안에서 말한다.

  
사실을 부풀려 말하지 않는다.

-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5.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다투지 않고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 (잠 17:14)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 (잠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6. 화를 내면서 대꾸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꾸한다.
- (잠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 (잠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7.잘못을 했으면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

상대가 잘못을 고백하면 용서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사하심을 얻으리라

-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8.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 (잠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 (잠 20:5)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찌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9.상대를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 시켜주고 격려한다.
-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살전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하라





10.누가 말로 공격하거나 비판하거나
책망하면 똑같이 대꾸하지 않는다.

-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melon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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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외에 다신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출20:3 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였읍니다  신6:4 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하였고  사44:6 에서는"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하였읍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속성이란 어떠한 것의 자질 혹은 고유성 또는 유일한 성격등 그런 것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계속 동일하시고 중단이 없읍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딤전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시 102:24 , 27, 히13:8)

 (2)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삼상15:29 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말3:6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3)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출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삼상 2:2 "여호와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사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벧전1:16 "기록하였의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4)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시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스9:15, 시145:17)

 (5)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시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신4: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시86:15, 롬9:18)

 (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4:8-15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3:16 , 요일3:16)

 (7)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신9:7 "그런즉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딤후2:13, 신32:4)  신실하다는 것은 미쁘시다는 것과 뜻이 같은 것으로 미쁘심은 신실하심입니다

 (8) 공의로우십니다

    신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 시19:9 , 사45:21)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 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입증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배웠읍니다 영원토록 동일한 마음과 변함이 없고 거룩함으로 의롭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있고 신실하며 공의롭게 살아가도록  하나님!  이렇게 살도록 힘주세요 , 도와주세요  하는 것이 아름다운 기도이며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람들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기 원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07/27/08 새벽 기도회 말씀 요약)

   

정리: 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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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아름다운 글


 

삶이 버거울 때..

뒤를 돌아보는 지혜를 가지세요.
두려움이 앞서 망설였던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믿었잖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먼저 한 걸음
나아가 보는 거예요.

무엇이 앞에 있는지 모르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것은 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자신을 믿는 그 순간에
이미 두려움은 사라진다는 거잖아요.



 힘들 때는 ..

하늘을 보세요
같은 하늘 아래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오해 속에서도 따뜻하게 믿으며
바라봐 줄 거예요.
오해가 사실이라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상황으로 이해해 줄거예요.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는 그 짐을
하늘에 날려 보세요.

분명히 받아줄 거예요.
항상 그래 왔듯이 말없이 지켜봐 줄 거예요.
우리 서로 믿을 수 있잖아요.



 슬플 때는 ..

비를 맞으며 걸어보세요.
어깨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모두 씻어 버리세요.

하늘도 울어 주잖아요.
함께 잊어버리는 거예요.
젖은 몸을 말리며 다시 웃을 수 있을거예요.

외롭다 느껴질 때
저녁 노을을 바라보아요.
아쉬움을 남기며 가장 화려하게
지는 저 태양처럼

아쉽지만 모두 버리는 거예요.
우리 그럴 수 있잖아요.



 기쁠 때는 ..

사람들의 행복을 조금씩
나누어 가졌다 생각이 되면
그냥 웃어 주세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맑은 웃음으로
모두에게 웃음이 묻어날 수 있도록
그냥 웃는 거예요.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잖아요.

소중한 자신을 위해 누구보다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 버려요.
그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잖아요.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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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참 좋습니다



당신이 참 좋습니다
당신은 어느 가을날의 속삭임처럼
첫 발자국의 설레임으로 오셨습니다.

연보라빛 국화꽃 향기 가득 안고서
찾아온 가슴 떨리는 그리움이었습니다.
오랜 그리움 끝에 찾아온 당신은
내 생애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꽃바람으로 일렁이며 가슴 벅찬
사랑이 되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생명의 끈으로
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을
알지 못했기에 늘 가슴 저리는
고통의 사랑 속에서도

기쁨의 꽃을 피우며 사랑을 노래하는
새가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알고 당신을 만남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며 행복인 것을
오직 당신으로 인해 삶은 의미 있으며

슬픔도 아픔도 견딜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 향기 가득한 은혜의 선물 주시며
소중한 생명 주신 귀한 사랑에 늘 감사하며
당신이 참으로 좋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참 좋습니다 당신이 참 좋습니다
당신은 어느 가을날의 속삭임처럼
첫 발자국의 설레임으로 오셨습니다.
연보라빛 국화꽃 향기 가득 안고서
찾아온 가슴 떨리는 그리움이었습니다.
오랜 그리움 끝에 찾아온 당신은
내 생애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꽃바람으로 일렁이며
가슴 벅찬 사랑이 되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생명의 끈으로 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을
알지 못했기에 늘 가슴 저리는
고통의 사랑 속에서도
기쁨의 꽃을 피우며
사랑을 노래하는 새가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알고 당신을 만남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며
행복인 것을 오직 당신으로 인해
삶은 의미 있으며 슬픔도
아픔도 견딜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 향기 가득한 은혜의 선물 주시며
소중한 생명 주신 귀한 사랑에
늘 감사하며
당신이 참으로 좋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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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은 원시종교의 한 형태 또는 그 단계로서 엑스터시와 같은 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 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 예언, 치병, 제의, 귀신의 인도 등을 행하는 주술적이며 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을 말한다. 북아시아의 샤머니즘 이 가장 고전적·전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역에 따라 여러 샤머니즘의 형태가 있으며, 다른 종교 현상과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람들은 샤마니즘이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이고 모든 나라는 다양한 형태의 독특한 샤마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자들은 샤마니즘이 유교나 불교 혹은 어떤 형태든지 유일신 종교보다는 원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샤마니즘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만물은 쇠퇴하는 경향이 있고, 식어져가며,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물리학에 적용되는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적용된다는 것과 모든 인류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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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신앙 가운데 특히 무속이 기독교에 끼친 악영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복사상을 꼽는다. 기복신앙을 문제삼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무속의 기복사상이 종교를 주술적으로 변질시켜 많은 폐해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다름아닌 한국교회가 기복사상의 늪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복을 바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 기복신앙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국교회가 기복주의에 빠지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복사상은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무속신앙의 기복사상은 철저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특징이다. 무속신앙에는 정신적인 복의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후 토착화 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무속의 기복사상이 그대로 기독교에 유입됐다는 것이다. 복을 위해서 신을 믿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물질적인 응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등이 바로 무속신앙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속의 기복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믿는 사람 들이 복을 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기복사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복빌기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치중해 있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 한국교회에 끼친 공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열심 있는 신앙 태도를 갖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을 드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어떻게 살든지 지성을 드릴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신앙 태도는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작정 기도를 한다든지, 수요 예배 철야기도까지 하게 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 신앙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인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기복주의 신앙은 기독교의 탈을 쓴 것이지 성경적 신앙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인간 종교요, 본능의 신앙인 것이다. 기복주의 신앙은 어떤 이유로든 받아 들일 수 없는 미신이요 잘못된 혼합주의 영성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기복주의 신앙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대다수 목사와 성도들이 아예 기복주의 신앙에 완전히 세뇌되어 있다. 그것이 엄청난 거짓이요, 이단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기복주의를 약속하고 하나님께서 물질적 대가와 보상을 주실 것처럼 약속을 한다. 그러한 값싼 은혜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활개를 치고 복음이 바겐세일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가르치시면서 물질적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버린 유대인처럼 고난의 신학이 아니라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일을 하고 나서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눅 17:10)고 고백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복주의 신앙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과 연관시키면서 기독교의 영성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에 뿌리깊은 기복신앙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나만 잘되면 거만이라는 이기적인 신앙인을 길러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개교회주의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신앙인들이다. 자기만 잘되면 거만이라는 기복신앙이 한국교회가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기복신앙은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다.  

 
자료 출처: 추수군대
  무너진 곳을 다시 건축하고

            황폐한 땅을 개간하여

            폐허로 변한 곳을 다시 세워주시는


            황무지의 땅이 에덴동산 처럼

            주님이 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를 다시 불러

            행위를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며

            인생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을 알게하시는


            온갖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는

            주님의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위대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아끼신 하나님 이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새로운 마음과 새영을 넣어 주실 것입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 대신에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주의 영이 건축하였음을 기억하게 하시어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도록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겠다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 되리라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에스겔36장)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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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사도 운동이다 무슨 무슨 부흥이다 이빨이 변했다는등 각가지 현상들이 곳곳에서 번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개인적인 단상으로 이러한 현상에 관하여 졸고를 올린적이 있습니다. 저는 유행처럼 번진다는 것으로 묘사를 했습니다만 혹시 못 보신분들이 계시다면 이쪽으로 이동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무명이라서 여러 카페나 게시판에 올려서 익히 보신 분들도 있을줄 압니다만 오늘 묵상 글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것 같습니다. http://cafe.naver.com/pray153/332



오늘은 '증거'라는 테마로 정리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먼저 최근 불거지는 현상들이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저마다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집회 동영상이나 현장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그들은 한결같이 목소리를 내고 있고 동의하는 자들역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문제는 너나할 것 없이 그런 현상들에 대하여 소수의 경계하자는 주장보다는 포괄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침묵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내노라하는 교회와 교단에서도 뚜렷한 지침이나 어떤 근거를 공식적으로 천명해서 성도들이 바르게 판단할수 있도록 입장을 정하지 않아서 더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아니라면 제가 그 부분을 아직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만 주류적인 교회와 교단에서 이부분을 깊숙하게 터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습니다.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같이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은 입장이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잃을것이 없으니까 함부로 말을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뛰어난 신학자도 아닐뿐더러 단독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자만 성경을 조금만 관심있게 읽는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이 분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신학자나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에게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강조한바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3:15~17)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의 양식이며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위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보고인 성경을 우리가 가까이 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왜 오늘날 기적과 현상에 사람들이 몰려들까요? 성도안에 성경이 함께 말씀이 함께 살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최 우선적으로 해야하고 쉬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기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기도하는 자체가 성도를 온전하게 이끌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의아해 하시거나 반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고 하실줄 압니다. 기도없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실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올리자면 저는 지금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게 아닙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바르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뜻을 알 수 있고 알아야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때 말씀을 인용해서 유창하게 하는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우리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무리 중요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른채 하는 기도는 결국 이방인들이 중언부언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본성적으로 부패한 우리의 육신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도로 밖에는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러므로 말씀을 먼저 사랑하고 끊임없이 양식으로 알고 규칙적으로 섭취를 해야 합니다. 기도 만능으로만 치우치게 되면 말씀보다는 능력위주로 가는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 집단들치고 능력빼면 뭐가 있습니까? 전부가 불의 종이니 능력의 종이니 하면서 계시를 혼자만 받은양 스스로 포장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기도해서 불 받아서 직통계시 받았으니 와 보라! 하는 것이지요?



능력의 종 기도의 종이 한번 안수 하고 기도만 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만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쫒겨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집안일이 형통하게 된다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잘된다는 식으로 말씀과는 전혀 다른길로 가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고달프고 지친 이들에게는 정말 솔깃한 소식일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안되니까 까짓 굿은 못하더라도 능력받은 종에게 가서 안수나 한번 받아보자 라는 심정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또 보면 집회 홍보성 글이나 신문에 보면 치유받고 고침 받았다는 간증들로 빼곡하니 안믿을 수가 없겠지요. 아침마다 현관에 끼어 있는 그러한 홍보자료들을 꾸기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을 통해 신앙이 자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되니까 자꾸만 기도회나 열심을 내고 그래도 안되니까 무슨 집회나 부흥회에 갈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부흥사를 동원해서 성도들을 모으려는 계산때문에 서로 품앗이 하는 현상들을 접하면서 씁쓸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짧은 제 생각이지만 목사님들 가운데 설교로 성도들을 확실하게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려는 과도한 꿈을 대부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환상에 젖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희망 사항일뿐입니다. 물론 탁월한 설교가 회중들을 변화로 이끄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로 변화된 성도들을 자세히 보시면 설교 이전에 이미 성도 스스로가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먼저 변해진 후에 목사님의 설교가 들려지고 그것의 결과가 마치 특정 목사님의 설교때문에 변화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라서 반드시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좀 비약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수 많은 무리들이 변했을까요? 겨우 열두제자 인데 그나마도 한 제자는 배반을 해버렸습니다. 그 제자들 역시 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능력의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느 분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까 삼천명이 믿었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변화한다고 말입니다. 성령을 의심하거나 재한하지는 않지만 과연 오늘날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설교하는자가 있어서 한번 설교에 수천명이 변화되는 일이 있을까요? 글쌔요....



과거에 세계적인 부흥사하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연일 초 만원 인파를 기록했다고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엄청난 사람들이 결신을 했습니다. 한국에도 엄청났었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결실을 맺었다고 보도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세계단일 교회 단일 교단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교회도 있습니다. 거의 불가사의할 만한 대 부흥을 이룬 곳에서도 연일 목사님의 불같은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수백 수 십만명의 신도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교회를 통해 매 주일 위성으로 은혜로운 설교를 경청합니다. 동시 다발적으로 아멘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놀라운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분명 변화되었지요?



그러나 그 변화된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변화되었는데 어째서 한국 교회는 성도들은 연일 성장하거나 변화의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왜 지역사회에서는 아직도 욕을 먹는일이 칭찬 듣는 일보다 더 많을까요? 왜 신문 지상에서 비리나 부정 부패에 연관된 인사들속에는 기독교인들이 부지기수란 말입니까? 저는 지금 부정적인 부분만을 확대 해석한 것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게 왼손 오른손조차도 모르게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 많습니다. 선교사로 목사로 혹은 문화 속에서 사회 구석 구석에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느라 애쓰고 수고하신 분들 많습니다.



설교는 본인이 먼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성도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가감없이 말씀대로만 증거하면 나머지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도들에게 깊이 들어가서 변화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변화를 주는 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이끌어 가시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내 설교가 모자라다 해도 빈틈도 많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계신 말씀이 예리한 검이 되어서 성도들의 영혼을 찌르며 마음과 생각을 살피셔서 새롭게 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 각자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성령안에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성경이며 말씀 사모함이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길어 졌는가 하면 성령에 대하여 대부분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하면 자꾸만 불같은 어떤 능력으로만 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엘리야의 능력을 기대합니다. 귀신 쫒고 방언하고 병고치는 능력으로만 중요함을 인식하기에 진정한 의미로서의 성령을 혼동하지 않나 싶습니다. 성령을 우리가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과 동일하지요. 예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신중하게 살피게 된다면 성령의 참 능력의 실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맘대로 움직이거나 조종 할 대상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부르고 외친다고 임하시는 성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임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서로 하나로 연합되셨기에 그렇습니다. 따로 따로 움직이시거나 여기 저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시되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다른 의미로 성령을 찾거나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번짓수가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니까 성령님은 저족에 계신줄 알고 부르짖어 오시옵소서 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실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욥에게 질문하실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따로 따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유기적인 연합이며 신비로운 연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자꾸만 각각의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인식 하는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 따로 믿고 예수님 따로 믿고 성령님 따로 영접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한때 유행한적이 있는 성령님에 대한 책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성령님을 무시하지말고 따로 영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말은 성령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어도 성령을 구합니다. 금식하며 뜨겁게 철야기도회를 하면서 성령충만을 간구합니다. 그런식의 기도회에서는 인간적인 감정의 흥분과 심리작용이 어울어져서 무엇인가 기분을 좋게할 수는 있습니다. 열린 음악회라든가 유명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도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이미 믿는 순간에 우리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따로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식으로 성령을 구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며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하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는 말씀을 벗어나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은사나 방언이 끊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능력이란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하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의 기도의 방향을 교정하시며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연단하시며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어떤식으로는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미리 알려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6)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 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기에 성령님과 함께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성령님께서 함께 주심입니다. 성령의 엄청난 역사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분명하게 나를 증거할 것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간구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을 사모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그런 의미를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명백하게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밝히 알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늘 새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것들은 전혀 새로울게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뒤로한채 아무리 기도에 열을 올리고 세미나 가고 부흥회 가고 신비한 현상들을 따라 가봤자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의 경험을 소개 합니다.

바알과 아새라의 850명 이방 제사장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서 승리한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 한마디에 간담이 녹아서 로뎀나무 아래 엎드러져서 이제 그만 족하오니 생명을 거둬 가주십사 한탄합니다. 그렇게 능력을 경험했던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아합 왕의 병거 앞에서 비를 뚫고 달려서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사기가 오를대로 올랐던 엘리야 앞에는 온전히 맥이 빠진 악녀 이세벨이 무릎꿇고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똑히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물에 흠벅 젖은 엘리야의 제단을 태운것을 본것입니다. 정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날 말하는 그런 무슨무슨 부흥의 현장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기대했던 변화의 조짐은 아무곳에서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꿈쩍도 하지않은체로 오히려 이세벨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죽이겠다는 선포를 합니다. 그 서슬퍼런 이세벨의 경고를 듣고 엘리야는 다 틀렸구나 하고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18:9-18)



좀 길지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대와 조건속에서 현상속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큰 소리로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주님은 매일 새롭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만 한다면 그 세미한 음성을 성령을 통해 각자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수 있을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의 현장에는 성경과 말씀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까? 그 자리가 사실은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 자리보다 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복된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성경 말씀앞에 열려있지 않게 된다면 결국은 특별한 것을 원하게 되고 말씀과 동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를 원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동하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안에 함께 하십니다. 자꾸만 다른곳에 쫒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디에 어떤 조건과 신분속에 있다해도 우리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증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의 표징은 그런 것입니다. 증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아멘.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글/빈의자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중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은혜를 받겠읍니다

1) 라오디게아 지역의 역사적 배경

    빌라델비아 지역에서 동남쪽 64Km지역으로 리쿠스계곡의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BC261-246년경에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하여 이 도시가 건설되었읍니다  라오디게아의 이름은 왕비 Laodice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읍니다  요10:22에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여기에서 수전절이라 함은 수리아왕 안티오쿠스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진것을  BC165년경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깨끗케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등불을 켠것을 기념하는 것이 수전절입니다  라오디게아의 특성은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AD17-AD60년까지 지진이 여러번 있어 지진을 대비하여 도시계획을 잘한 큰 도시로 발전시켰읍니다   로마의 원조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도시발전을 시킨것으로 보아 부요하여 잘 살았던 것이 특색입니다  비옥한 땅이요 넓은 초원이 있고 산업과 공장들이 발달되고 잘 살게 되었으며 금융활동을 했으며 은행업이 발달된 도시였읍니다  외부의 침입과 핍박이 없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함이 없이 살며 시이스 여신상을 섬기는 곳에 라오디에가 교회가 세워졌읍니다 사람들이 살기에 평안하니까 어려움이 없으니 하나님앞에 구하지 아니하고 내적신앙은 쇠잔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 3:15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오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하셨읍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교회의 상황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신앙관이 없다는 오늘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 교회들의 특색있는 신앙관에 대한 교훈입니다


2) 라오디게아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

 (1) 신앙이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다 (15-16절) 하셨읍니다  왜 이들은 이러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생활이 안전하고 평안한데서 온것입니다  사람들이 외적인 핍박이 있고 내적인 어려움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고난이 있음으로 하나님앞에 부르짖게 됩니다  보십시요  라도디게아 교회가 모든 환경과 사회구조와 사는 것에 풍부하여 부자요 부요하니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미지근한 것입니다 

 (2) 교회안에서 물질공세를 한 성도들이 있었읍니다  부요층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며 그리스도를 섬긴다 하지만 신앙이 뜨겁지 않으니 현실 만족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8:24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니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셨읍니다  그래서 그런지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예수님의 칭찬이 한마디도 없읍니다  그저 미지근하다,눈멀다,벌거벗었다로 책망을 하셨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도록 하나님 섬기기에 적당하게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30:5-9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움이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하고 아굴이 간구한 내용입니다


3) 예수님께서 권고하신 말씀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18절) 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너 자신이 변함없는 믿음을 가져서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부요한 것 같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주님 보시기에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18절) 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 받은 심령이 되어 수치를 당치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흰옷이란 성도들이 죄씻음 받은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행실을 뜻합니다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8절) 했읍니다  성령의 눈으로 보라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육신의 것만 생각하고 보고 있으니 거듭나서 영적인 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4) 네 마음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니 열려지지 않는 겉치례 신앙입니다  세상과 물질에 속한 사람의 마음은 예수님께 있지 않읍니다  성도들이 그것을 지적 받고 있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드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읍니다 문을 여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주인 되시고 뜨겁게 주님을 섬기며 세상것에서 벗어나고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주님나라의 친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마음의 문밖에  예수님을 세워놓은 죄가 기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적받는 것을 우리도 자신을 점검하도록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는 자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08/05/08 화요 찬양예배 설교말씀 요약)

!!
 
정향범 ㅅ ㄱ ㅅ 입니다..
 
다음은 오리사에 사역하는 초이 선교사님의 메일입니다..
 
보시고 오리사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샬롬!!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몇일간 저는 고민했습니다.
기도편지를 나누고 이쪽 소식을 나누어야 하는데 변하지 않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또 다시 나누어야 함에 여간 힘이 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시각각의 어려움속에서 믿음의 승전보와 믿음의 간증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에

한편으로는 찐한 감동에 있습니다.




디갈이란 형제는 지난 5개월전에 밀알 심장재단(회장:이정재 목사)을 통해서 수술을 받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하여 형제의 마을 전체가 불에 타서 자기 집을 피신해서 약 200킬로를 걸어서 지금 YMCA의 이재민 구호소에 와 있습니다.

그 형제가 살았던 동네는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힌두교 지도자가 운영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지역 사람들은 꿋꿋하게 믿음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통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목사님도 잃고 또 마을 사람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꿋꿋하게 우리가 죽더라도 결코 믿음은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목사님과 마을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결국 천국에 갔을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핍박의 여정속에서 진한 믿음의 삶을 엿보는 것이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힌두 교인들이 강제적인 개종을 요구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힌두교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생과 죽음앞에서 쉽지 않은 일들을 겪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거짓속임수에 이끌려 핍박을 감행하는 사랑하는 힌두교 극렬주의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인하여 이곳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의 시간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이땅에 있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여기 저기서 도움의 손길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이들을 돕기도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들이 너무 협소하기에 서로 협력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피신을 가있는 상황입니다.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려움이 있습니다.

점차 이곳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다양한 것들이 나누어지고 있는데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돕고 섬기는 일들과 그리고 다음의 사역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계속 오릿사를 위해서 사랑과 기도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끊임없는 사랑과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곳 까페에 오시면 http://cafe.daum.net/missionindo 또 여러소식을 접할수 있습니다.

요새 토드 벤틀리와 큰**교회 이야기로 시끄럽습니다만..


이 논란의 핵심에는 캔저스시티 대언자(선지자) 그룹(Kansas City Fellowship/Prophets, KCF/KCP)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윌리엄 브래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늦은 비 운동을 이어받은 마이크 비클밥 조운스가 설립한 KCF/KCP의 대한 신랄한 비판보고서를 소개합니다.


아래는 그들의 실체를 고발한 [내부자 보고]에 해당하는 Ernie Gruen Report의 내용입니다.


그(Ernie Gruen)는 Mike Bickle(IHOP 이사장), Bob Jones(벤틀리와 B목사의 멘토), Paul Cain(성추문 목사) 등과 Kansas City Fellowship(KCF)을 함께 동역합니다.
뒤늦게 그들의 사역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고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다 포기하고 KCF를 빠져 나온 후,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의 명령에 따라 KCF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알린 오순절계 사역자입니다.


이 리포트가 공개되자 그들은 존 윔버의 산하로 숨어들어 빈야드 교회로 변신하게 됩니다. 윔버는 후에 피터 와그너와 손잡고 늦은비/신사도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합니다.


문제의 내용 제목과 내용의 일부만!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나머지는 리포트에서 확인하십시오.

(제 부족함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번역된 내용이 원문과 일부 다를 수도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리포트(영문) 주소입니다. http://www.intotruth.org/kcp/Abberent%20Practises.pdf


1. 마이크 비클은 (선지자가 아닌) 밥 조운스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고 추켜 세웠다.
밥 조운스는 알콜중독, 폭력, 도박, 밀수, 악령지배 등으로 20년 이상을 방탕하게 살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미워하던) 12명을 죽이던지 용서하던지 하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다행히도^^) 그들을 용서하고 갑자기 선지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
2. 마이크 비클은 그의 '운동'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만들기 위해 터무니 없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꾸며 냈다.
예를 들어, "밥 조운스가 석달 동안 가뭄이 들다가 8월 23일에 비가 올 것으로 예언했는데 바로 그렇게 되었다. 우리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다"라고 주장하나
기상청 등의 자료로는 그 기간 중(6월)에 평년 이상의 비가 온 것으로 나와 있다.

..
3. 마이크 비클의 '선택된 씨앗 세대' 신학은 어처구니 없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과 천사들이 바울, 다윗, 베드로..의 혈통으로부터 골라낸 그의 자녀들은 사도행전의 10000배의 기적을 일으키며, 그 중 30만명은 사도가 되고, 그 중 35명의 KCF 사도들은 사도바울과 같이 될 것이다. 벽을 뚫고 지나가며, 10억 이상을 구원하며, 없어진 팔을 즉시 만들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기가 막혀..)

..
4. 마이크 비클은 겉으로는 자신이 아래와 같이 비판하는 [은사계열 목사들과 리더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려고 매우 노력했다.
"우리는 현재의 은사적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 질서를 찾고 있다.
악령의 영향을 받은 불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이러한 기존 질서로부터 우리는 탈피하기 원한다
."

..
5. 마이크 비클은 신자들에게 거듭난 형제자매들로부터 핍박과 거부를 당할 것을 예상하라고 가르친다.
"새 질서가 오면, 이는 (기존 것보다) 열배 백배 크기 때문에, 마찰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다윗(새 질서)의 기름부음에 대한 사울(기존 질서)의 시기를 틈다 악령이 들어 왔듯이.."

..
6. 소위 '선지자'들이 전혀 무책임한 예측을 하고, 하나님이 재앙을 준다는 경고성 예언으로 성도들은 겁주는 것을 보았다.
'선지자' 존 폴 잭슨은 85년 9월 "모든 은행의 반이 문을 닫고 예금과 대출의 75%가 문닫고, 달러는 폭락하고 주식은 추락할 것이다"라고 했다.

..
7. 그들은 성도의 미래에 대한 사적인 지시예언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다. 이런 빗나간 예언은 사람들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다.
100명이 넘는 빗나간 예언을 받은 사람들과 상담한 기독심라학자는 상담결과를 보고 성취된 예언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어려운 시기에 빗나간 예언은 더 큰 고통과 더불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고 말했다.
- 예언의 삼분의 이가 맞으면 꽤 잘한 것이다 - 밥 조운스

..
8. 캔저스시티(KCF) 선지자들은 우리의 교회들을 방문해서 그들에게 교회문을 닫으라고 예언했다.
어느 장로의 증언
"KCF의 세 선지자가 우리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이 이 교회를 해산하라고 하셨으니 거역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예언을 따르지 않으면 교회 문에 Ichabod(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고 적겠다고 했다."

..
9. 터무니 없는 가르침을 깊은 영적 진리라고 조장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층천에서 마귀를 쫒아 내고, 예수의 발 아래에서 죽일 것이다. (밥 조운스)
꿈글자(dream alphabet)풀이를 통해 꿈의 99% 이상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존 폴 잭슨)

..
10 - 12. 생략하겠습니다.
신기한 현상만을 강조하고(10),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 이런 내용에 접하게 되며(11), 이런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의 현상(12)에 대한 내용입니다.



--

보고서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편지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보고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총 130 페이지)

특히, 밥 조운스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큰**교회 뿐 아니라 에스*기도****도 KCF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무쪼록 분별에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리포트(영문) 주소입니다. http://www.intotruth.org/kcp/Abberent%20Practise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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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15:21)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들도 나처럼 핍박을 받을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나만 믿으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할것이다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인하여 너희들도 핍박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아마도 귀를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온 제자들입니다. 주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는 표현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사람으로서는 다 버린것과 같습니다.

가정을 돌봐야 하는 가장 베드로역시 고기잡이 하던 일을 버리고 주님을 쫒았습니다. 베드로는 장모도 있었기에 아내가 가장의 짐을 져야 한다는 추측입니다. 동네사람들은 집나간 베드로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좀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아내와 가정을 나몰라라 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는 베드로는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했을것입니다.

아내역시 처음부터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근거가 될만한 기록이 없는것으로 봐서 어떻게 남편을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남편을 빼앗아간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좋게 생각할 수만 있을까요? 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혹시 속썩이는 사위 때문에 홧병이 생겨서 열병이 생긴것은 아닌지 모르지요. 베드로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께서 친히 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온가족이 예수님을 믿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시 수종을 들었다는 누가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4:38,39)

세리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세금걷는 세관원으로서 동족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가정을 지키는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도 돌봐야할 식구가 있었겠지요. 근무지에서 열심히 일하던 마태도 예수께서 "나를 쫒으라" 하신 부르심 한마디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쫒아갔습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눅5:27,28)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직장을 포기하고 예수를 쫒아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성경 기록자들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눅5:11)

모든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쫒았다는것은 더 이상 뒤돌아 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미련을 버리고 오직 앞에 계신 예수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쫒았던 제자들에게 어떤 보상이나 대우를 지금 약속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앞으로 출세가 보장되는것이 아니라 더 힘들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바꾸려면 돌이키라는 배려는 아닐까요?

예수님은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참이시며 공으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고 거짓으로 위로를 하시거나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모든것을 버리고 쫒아온 자들에게 결국 보여주심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실패를 보여 주십니다. 세상에서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받으심을 당하시고 그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 하셨습니다.

오죽 그런 말씀을 하셨으면 수제자 베드로가 강하게 화를 내면서 주님 절대로 그렇게 죽으시면 안된다고 강변하지 않습니까? 내가 결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도록 가만 있지 않겠다고 열변을 토로하지 않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렀거라! 이렇게 강력한 꾸지람을 들으면서 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는 어떤 가르침이 난무할까요?

나를 믿으면 범사가 잘되고 형통한다는 번영복음과 성공의 복음과 기복적인 복음이 판을치고 있지 않습니까? 개척교회의 표어가 성도 삼천명이 목표고 그것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자고 하고 전도 특공대를 조직해서 열심을 동원합니다. 과연 한 영혼을 찾아서 주님앞에 인도하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교인수 목표 3천명을 위한 열심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고난의 십자가나 핍박이나 골고다로 가신 주님의 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긍정의 힘이나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가 득세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여리고를 함락시키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만이 난무할 것입니다. 불의 종이니 능력의 종이니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과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면서 늘 더 크게 더 멀리 더 높이를 추구하며 주의 이름을 외칠 것입니다. 가난과 절망속에 있던 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으로 다가올 기쁨의 좋은(?)소식이며 구원의 소리이며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병원한번 못가는 이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안수하면 고침 받는다는 소리와 간증들이 구원의 소리아닌가요? 한번 속지 두번 속냐하는 심정으로 벼랑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교회에 온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에게 잘될것이다 복 받아라 무조건 충성하라 하나님께 물질 심으면 육십배 백배로 흔들어 누리도록 부어주시니 걱정말고 바쳐라 하는 복음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요?

안수집사 장로 임직 받으려면 수백만원을 기부해야 하는 현실속에서 과연 주님의 핍박과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저같아도 십자가는 빼겠습니다. 승리의 간증 성공의 무용담만 전하지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설교를 하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성경에 보면 많습니다. 부자되고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추려서 당신들도 성공하고 부자될 수 있다라고 부추깁니다. 거기에는 꼭 조건이 들어 갑니다. 복 받을 짓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복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연 대형교회 성도들이 모두가 골고루 부자이며 잘 사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수백억원씩 건축을 해서 건물은 대형화되고 시스탬은 첨단화 되고 땅은 많이 소유해서 부자가 되었겠지만 그것을 정작 누리는 이들이 과연 교회 성도들일까요?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면 가난해서 월세도 못내고 전세자금 날리고 부도난 성도들을 교회에서 지원해서 다시 회생한 성도들도 많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전 아직까지 교회에서 그렇게 지원 받아서 회생한 사람 있다는 소식 못들었습니다.

교회 성도들가운데 솔직히 카드 연채로 신용불량인 사람들 많이 있을것입니다. 그들이 물론 잘못해서 실수해서 빛을 못 갚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구조속에서 빛을 떠 안게 되어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들을 향한 구제의 손길은 혹시 있는지요? 성도 수만명을 자랑하는 교회안에서는 도대체 그 많은 헌금을 어떻게 운용하는 지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 할말도 없지만 말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하십니다. 너희도 핍박을 할 터이요 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때문에 이러한 주님이 겪으신 모든 일과 핍박과 고난과 멸시를 똑같이 제자들에게 할거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반드시 형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나처럼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때에도 내가 함께 할 것이다고는 약속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현장에서 주님도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의 증인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마중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막으신게 아니라 함께 스데반과 더불어 맞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 아닙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내가 그 자리에 못 박힘이며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내가 우리가 함께 죽으심이요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부활하심도 내가 살아나고 부활한 것이며 우리가 살아나고 부활한 것이라는 주님과의 동일함입니다. 성도의 최고의 복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행한 일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고난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는 말씀 입니다.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 이름으로 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그들이 알지 못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 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커다란 벽이 있으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을 아는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이며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성도라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며 고난가운데 살아갈까요?

물론 우리의 무지함과 죄로 인한 고난을 똑같이 여겨서 받는 핍박이 아니라 의로운 길에서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의 잘못과 죄로인하여 당하는 고난일찌라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다루시고 회개의 길로 이끄시며 새 사람으로 인도하심이라면 그것또한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속에서는 우리의 실패와 허물과 죄까지도 다루셔서 결국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을 약속하시며 핍박을 가르치심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할 수있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의 삶이 비록 초라하고 못난 인생일 찌라도 우리의 이러한 것까지도 넉넉하게 십자가로 품으시고 받아주시며 전심으로 돌이켜서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의 자리로 이끄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을 풍랑이는 바다로 재촉하신 주님처럼 말입니다.

밤 사경에 폭풍과 사투를 벌이는 제자들을 지나치지 아니하시고서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분명 광야의 고난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고난속에서 주님이 함께 계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낮아질 때 바로 거기 함께 낮아짐으로 맞아주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아멘.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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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20)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복음서를 계속 묵상하면서 놀라는 것은 예수님은 단 한번도
보통 사람들이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를 누려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그닥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유대라는 작은 나라는 여호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유일신으로 섬기는 독특한 나라였습니다. 주변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성향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강대국가도 아니었기에 역사적으로 수난을 많이 당한 한 많은 민족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이라면 초 강대국인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긴채 로마의 한 지방자치정권과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겨우 행사할 권리가 있다면 유대의 종교적인 행위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뿐이지 실상은 포로신세와 같은 처지입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부당한 억압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을까는 일일히 다루지 않더라도 짐작하고도 남겠지요. 나라의 소중한 주권을 잃어버린채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은 어느날 로마 황제의 특별한 명령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귀향해서 호적등록을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구조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효율적으로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한번에 구별할 수 있는 장치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곳곳에 흩어져서 유대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들을 무력화 할 수있고 감시할 수 있도록 샘플 조사를 하려는 의도가 있겠지요.

만일 여기에서 호적 등록을 하지 않게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공식적인
활동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법 외국인 체류자들과 같이 기본적인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 큰 걸림이 되는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요셉도 베들레헴 고향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예수께서는 이러한 혼란한 중에 태어나셨고 그것도 변변하게 누울 자리가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헤롯왕의 비열한 살인명령으로 당시 갓 태어난지 두살 아래의 어린 유아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엄청난 끔찍한 공포의 시기에 나셨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아기 예수님을 숨기우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머나먼 애굽나라에 망명 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 시작부터가 고난의 출발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물론 이렇게 극심한 어려움속에 태어나는 생명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각지대안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속에 태어나는 생명들이 분명 있습니다만 보편적으로 볼 때는 거의가 안정적이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유년시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유대로 돌아 왔던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을 중심으로 성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원수들이 모두 죽고 나서 돌아 왔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다지 가정 형편이 좋을리가 없었던 예수께서는 일찍 아버지를 보내고서 어머니를 도와서 가장노릇을 해야만 하셨습니다. 목수일을 하시면서 가족을 돌봐야 했었기에 아마도 편히 쉴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거기서 40일을 주리시고 갈하셨습니다. 육체의 모든 기력이 다 빠졌을 때 사단의 시험과 유혹과 정면으로 싸우셔야만 했습니다.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
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안에 감추이신 독생하신 주님께서
말씀이신 우리 주님께서
죄인으로 옷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도
땅에 내려 오심만도 형벌일진데

거기다가 주리고 목마르시기까지 하시며 감히 더러운 사단 따위에게까지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누가 감히 메시아를 시험할 수 있습니까?
감히 사단따위가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님앞에 어떻게 설수 있단 말입니까?

l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종으로 오셔서 기꺼이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체질을 경험하시고 아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이제 최후의 시험인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자기를 따라 오겠다는 감동어린 고백을 하며 엎드린 어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7,58)

가는 곳마다 병자들로 가득 하셨고 들어가는 마을마다 귀신들이 앞을
막았습니다. 자기를 믿고 영접해야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한시도 맘 편할 수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결국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어찌 순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결코 평안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환경적인 조건들은 비록 거칠고 투박하고 쉼이 없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의 신비한 관계, 친밀한 사귐으로 인하여서 언제나 평안하셨습니다. 아무리 위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옷이 발가 벗겨짐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평강은 영원한 생명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말입니다. 육체의 고난이 없다고 평안할까요? 보이는 현재적인 부한 삶이 과연 성경적인 평안일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리 살지 못하셨을까요? 또한 제자들은 왜 그렇게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을까요?

어떤 분들은 자꾸만 육신적인 안락함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현세적이며 실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온 복음을 말합니다. 전인적인 복음을 주장합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여기서도 부유함을 믿음으로 받아야 온전한 구원이며 복음이라고 강변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이 일단은 부자로 성공해야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때요?
솔깃하지 않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도 보장 받고 덤으로 건강도 하고 물질적으로도 성공해서 하나님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라고 힘주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업도 사업도 성공해서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일등을 해서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난이나 인내는 그닥 신경쓰지 말자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를 누려야 진정한 믿음이며 복을 받은 것이지 어떻게 가난하고 병들면서 맨날 울며 불며 찔찔짜며 주여 주여 하는것이 복 받은신자냐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예수 이름으로 선포해서 병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것을 꼬박 꼬박 바쳐서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목숨걸고 해서 축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되시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누가 병들고 싶고 가난하고 싶겠습니까?

만일 이것이 온복음이라면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은 전부 믿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엉터리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병도 못고치고 부자도 못되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형편없는 가난뱅이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먹게 하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럼 예수님은 왜 그렇게 고난의 삶을 살았을까요?
바울과 사도들은 왜 그렇게 곤고함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을까요?
이들은 전부 믿음이 반쪽이거나 어디가 잘못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그걸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온복음을 누려야 한다는 주장대로라면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역시 아무런 효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도 못 고치고 부자도 안되었으니 십자가가 실패했거나
사도들의 믿음이 한참 모자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모두 믿음이 모자란 엉터리 신자라는 결론입니다.
그에 반하여 십일조 철저히 해서 사업도 성공하고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 뱃찌도 달고 떵떵거리며 잘나가는 신자들은 엄청난 믿음의 온 복음을 누리는 훌륭한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의 모양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제사와 의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호세아를 통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무슨 말씀인지요?
사람들이 너희를 환대하고 반기며 영접할 것이다 하시는 가요?
내가 핍박 당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말은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이 세상은 다르기 때문에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니까요. 모두가 저길을 갈때 우리는 이길을 가야 하니까요.
모두가 옳다고 할 때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이단 사이비도들을 비교해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이단 사이비들은 구별이 잘 안되거든요. 예전처럼 막가파식으로
하는곳 거의 없습니다. 세상에서 오히려 환영을 받지 않습니까?
세계의 대형 행사때마다 이단교파나 사이비 종단들이 참여하지 않는
행사가 없고 주관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행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기독교를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바르고 참되게 성경을 묵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구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라면 기존 제도권 교회와 여러가지로 상충되는 신앙관 믿음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에서 본다면 당연히 걸림이 되는 것이며 핍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핍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면 그들의 뜻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입 다물고 그저 아멘 하면서 은혜나 나누면 핍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짜피 제도권에 속해 있지 않아서 그나마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현재 제도권에 속해있는 사역자들이 저처럼 말한다면 거기서 살아날 수 있을까요? 미국의 유명하신 어느 목사님은 세미나에서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를 철저하게 돕는길이 무엇인가를 자상하게 교육시키고 있더군요. 담임목사의 꿈이 하나님의 꿈이라고 어쩌고 한것같은데 말입니다. 워낙 꿈꾸는 요셉이야기로 유명해져서 뭐든지 꿈꾸는대로 된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어떤것이 진정한 신앙이며 믿음이며 복음일까요?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주시지 핍박을 받을 것이니 각오 단단히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나 핍박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평안으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이 와도 환난이 와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주님의 평안이 주님을 따르는 모든자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지금도 동일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만을 소망하며 바라보며 인내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들에게 입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마5:3~12)

아멘.

출처: 아멘넷,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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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장경동 목사의 관련발언 전문이다.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계속 올라가면 어디까지 갈까? 아담이다. 그위에는 하나님. 첫번째 사람이 아담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아는 것이다. 기독교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불교는 모른다. 스님에게 첫번째 사람을 물으면 "어떻게 압니까" 그런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어서 안다. 그러니 기독교가 참 좋은 종교이다. 우월성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6일을 거쳐 세상을 지었다. 사람은 6일날 나왔다. 그런데 6일째 나온 사람이 5일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아담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안다. 간단하다.

뭔말인지 모르는가? 세상을 보면 3개 인종이 있다. 황인 백인 흑인. 왜그런가? 그이유를 세상사람은 모른다. 노아의 세아들들로 인해 인종이 퍼져서이다. 간단하다. 그것을 누가 아냐? 아무도 모른다. 노아의 세아들이 글씨를 알았나? 모른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어서 안다. 이런것을 모르는 종교는 다 가짜이다. 이런것을 아는 것이 진짜 종교이다.

무식하게 이야기 해 볼께. 내가 비범하다고 "경동교"를 만들면 되는가? 안된다. 큰일난다. 그래도 만들면 되는가? 경동교가 된다.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옳은 이야기이지만 왜 되는가?

안믿고 사는 사람들이 "경동교라도 믿고 살지" 하니까 된다. 모르는 사람때문에 된다. 둘째 되는 이유는 경동교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때문이다. 우리교회에 65명의 유급직원이 있다. 만약 내가 교주라고 선언하고 나를 믿으려면 교회에 있고 아니면 나가하면 갈등을 느낀다. 일부는 나가고, 그냥 월급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죄송하다. 이렇게 말하면 죄송한 것이 아니라 맞는 이야기인데, 그쪽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 이다. 내가 "경동교"를 만들면 안되는 것 처럼 2500년전 석가모니 선생이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것 이었다.

원불교, 통일교를 만들면 안된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는 자신이 훌륭해도 교를 자신을 믿는 교를 만들지 않았다.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참 신이시다. 이것이 ABC이다. 상식이다. 상식도 안되니 문제이다.

내말이 틀리면 이야기 해 봐라.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목사님과 여러분들은 모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들으니 간단하죠. 간단하다. 하나님이 가르쳐 준 지식이 아니면 알수 없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그것이 참된 교이다. 나머지는 솔직히 명함을 접어야 된다. 그래서 나는 스님들은 빨리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쓸데없는 것을 하지말고.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해 보겠다. 불교는 신이 없는 무신론이다. 석가모니를 믿는다는 것은 무식한 이야기이다. 석가모니가 자신을 믿으라고 그렇게 이야기 한적이 없다. 깨달아서 너도 성불하여 부처가 되라는 이야기이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믿는 것이다. 불교는 신이라는 말을 쓰면 안된다. 불교는 스스로가 성불하는 것, 자기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스님이 하는 일은 앉아서 염불하는 것이다. 염불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고뇌와 고통을 겪는 욕심인 108 번뇌를 없애는 것이다. 108 번뇌를 없애면 성불하는 것이다. 욕심을 없애고 자유로워 질때 성불이 되는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백팔번뇌를 없애려고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백팔번뇌를 없애겠다고 하는 것도 109 번째 번뇌이다. 안되는 것이다.

백팔번뇌를 없애 해탈하여 성불이 되었다고 치자. 그래 봤자 시주를 하여 얻어먹고 살아야 한다. 번뇌를 없애고 어떻게 살것인가를 잘 생각해 보라? 그러니 아무리 훌륭해도 얻어 먹고 산다. 그러나 성경은 간단하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한다. 그런 가르침으로 나가는 기독교는 가는데 마다 잘된다. 앉아서 백팔번뇌를 없애는 나라는 가는데 마다 안된다. 그래서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

한국사람이 한국종교인 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석가가 한국사람인가? 진짜 무식하다. 석가는 인도사람이다. 인도에 가면 60%가 길에서 태어나 60%가 길에서 죽는 60%가 길표 인생이다. 지독하게 못산다. 지금도 그사람들은 소를 섬기고 있다. 뭐하는 것인가? 잡아서 푹 고아서 먹으면 영양실조도 안걸린다.

안타까운 것은 조그만 훌륭한 사람이면 앉아 있다. 창의적인 일을 해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다. 일을 해서 연구를 하고 개발을 해야 나라가 잘되는데 머리기르고 그냥 앉아있다. 자체로 보면 훌륭한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무슨 노동력이 있고 연구 발전 생산력이 있겠는가? 안타깝다. 성경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마라"고 가르치니 간단하다. 가르침 자체가 벌써 잘될수 박에 없으며, 가르침 자체가 안될수 박에 없다. 내가 불교를 깐 것인가? 나보고 깠다고 하는데 바른말 해주는 것이다.

ⓒ 아멘넷 뉴스




근래 보기 드물게, 맑게 개인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따뜻하였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그리고 저와 누이가 지켜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셋째형의 모든 장례를 끝마쳤습니다
 
같이 있던 몇몇 형제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누님의 인도로
가족이 병상에서 아버님께,또 사랑하는 남편께 마지막 작별인사와
하나님께기도, 찬양을 하였지요
그러던 중 누님이 저를 부르시며 자리를 내 주셨습니다
형의 손을 잡고 위로 쳐드는 순간 호흡이 점점 가늘어 짐을 느끼겠더군요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다 그냥 형의 목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렇게 형은 가셨습니다
정말 조용히....아주 편안하게....가셨습니다   제품에 안겨서...
살아 계셨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가면서도 나를 생각해 줍니다
물 한모금을 삼키지 못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파
무작정"나도 물을 마시지 않겠다" 라고 결심을 한지 3일만 입니다
 
어제 입관예배에 많은 조문객이 와 주셨습니다
복도와 이층...미쳐 식장에 들어 오지 못한 많은 분들이
밖에 서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발인 예배와 공원묘지에서 있었던 하관예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위로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엊그제 저희 부모님(시신)을 모신 곳에 가서 남은 형제들이
기꺼이 제일 좋은 자리(?)를 내주기로 하여 아버님 바로 밑에 모셨습니다
 
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순수하고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몇년 전 힘들고 외로울 때,삶의 끈을 놓고 싶을 때,제 곁에 계셨습니다
나의 온갖 투정과 비판,원망...다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붙잡아 주셨습니다!  힘이 되 주셨습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제게 주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기도의 힘,사랑의 힘,찬양의 힘,으로 살라고....
그동안 형님을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염려하며 기도하며,힘을 주신 모든 분들께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심비에 새기겠습니다!!
 
 
              ....이제는 볼수 없는 형의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기를 소원하며....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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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줄 알았지요

인간의 진정성과 열심이 얼마나 무력한지요

내가 맘 한번만 먹으면 다 될줄 알았지요

그동안 내가 결심을 안해서 그렇지

나도 한다면 할 줄만 알았지요


그런 줄 알았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다를 줄 알았지요


죽겠다고   못살겠다고

힘들다고  왜  나만 이러느냐고

어려움을 호소할 때


겉으로는 위로해 주며 등 토닥거려 주었었지요

나는 절대로 아쉬운 소리 하지 말아야지

어떻게 살았길래 그 모양이지 하며

속으로 혀를 찼었었지요


어리석다고 미련하다고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노력하지 그랬느냐고

예전에 그렇게 엉뚱한 것에 마음 팔릴 때

그때 부터 알아 봤었지 하며


왜 그랬어 이친구야

진작 내 말 듣지 왜 그렇게 살았어 하며

위로 반 책망 반 그렇게 그렇게 지나면서도


정말 나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었지요

나는 그렇게 쉽지 않을것이라 장담 했지요


조금씩 조금씩

삶이 흔들리고 비틀 거릴 때마다

아직은 괜찮은 줄 알았었지요


이것은 별일 아니다 생각 했지요

걱정 하는 벗 들의 조언을 웃으 면서

난 괜찮아 걱정 하지 말게나

태연한 척 했었지요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정말 위험한 순간 이란걸

그 때는 몰랐었지요

별거 아닐 거라 안심 했지요


난 괜찮은 줄만 알았었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 했지요


내가 맘을 안 먹어서 그렇지

내가 결심 한 번만 하면 나는 다를 줄 알았었지요


인간의 진정성과 열심이 얼마나 무력한지

이제야 알아 버렸지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다 잃어 버리고서야

그래도 이제야 알았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았답니다


내 삶을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그 분의 존재함이 얼마나 큰 복이며

그 넓은 사랑과 그 품안에 거하며

그 나무 십자가 아래 조용히 앉아서

높이 들리신 내 주님을 봅니다


주 날개 그늘 아래 주 십자가 밑에

나 쉼을 원하며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 봅니다


2008-09-07. 주님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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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으로 하는 사랑*♡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 하는 일 인줄 알았습니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인줄..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도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디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    끝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가슴에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줄 알았습니다..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디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쌓아 놓았더니..    시들고 힘이 없어 죽어 갑디다..    때로는 문을 열어 바람도 주고    때로는 흘려보내 물기도 주고..    때로는 자유롭게    놀려도 주고 그래야 한답니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영혼을 앓듯 놓아주고..    죽을만큼 아파도 해봐야 한답디다..    모아둔 만큼 퍼내야 하고    쌓아둔 만큼 내주어야 하고..    아플만큼 아파야 한단걸    수 없이 이별연습을 하고 난 후에야    알수 있겠습디다..    사랑하는 일은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디다...*^^* -좋은글-
      글/좋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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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겠다"는 정성입니다.
"더 잘하겠다."는 욕심입니다.

"사랑한다."는 아름답습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허전합니다.

"감사합니다."는 편안함 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는 두렵습니다.

우리 마음이 늘 지평선 같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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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사랑도 감사도 늘 평평하고 잔잔하여
멀리서 보는 지평선 같기를 바랍니다.

아득한 계곡이나 높은 산 같은 마음이 아니라
들판같이 넉넉하고
순박한 마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바른 마음입니다.

앞만 보고 오를 때는 발끝만 보이지만
멈추어 서서보면..
내 앞에 지평선이 펼쳐집니다.

마음도 쉬어야 넓고 부드러워집니다.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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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는 곡~LE TEMPS D`UN ETE  /T.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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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쫓고 표적이 나타나는데도 이단인가? (교회와 신앙)


최삼경 <a href=mailto:sam5566@amennews.com>sam5566@amennews.com</a>



Q: 성경에 보면 수많은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 주변에도 기적을 행한다는 유명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단이 될 수 있습니까?

A: 이 문제는 넓게 보면 신비주의 문제입니다. 신비와 신앙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비를 부정하면 이성주의에 빠지게 되고, 신비만 좋아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이단의 온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그 답을 찾으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그 표적과 기사만 나타나면 무조건 진리로 인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라고 했고, 표적을 행하시는 것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요 12:18). 예수께서도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말씀하신 일도 있고, 바울도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고전 1:22)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도 유대인처럼 신비주의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그 신비주의성이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이제 사이비 이단이 발생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즉 한국교회에 가장 미혹성이 큰 사이비 이단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입니다. 예컨대 재미 교포들의 경우, 미국 문화권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권에서 발생한 크리스챤 사이언스나 몰몬교 같은 이단들에게 빠지는 확률은 낮습니다. 타 문화권에 살면서도 오히려 한국에서 발생한 신비주의자들인 김기동, 이초석, 이명범, 이재록, 김계화, 박무수, 박철수 등의 이단에 빠지는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 신비주의성이 많은 것이 사이비 이단들이 발생하는 사상적 원인 중에 가장 대표적 원인입니다. 베뢰아 아카데미의 김기동 씨(성락교회 담임목사)의 경우 한국의 유수한 교단들로부터(예장 통합, 합동, 고신, 개혁합신, 기성, 기침, 기감)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가장 객관성 있게 내려진 규정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김기동 씨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할렐루야 기도원의 김계화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결론부터 내리자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것과 이단이 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반대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오히려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표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주님께서는 표적 중심의 신앙인을 책망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 집 사건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난 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는데 그 이유는 저들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23-24). 그리고 예수님은 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비판하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2:39, 마 16:4)고 하였습니다.

왜 늘 기적을 쫓고 구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들은 이 말씀 앞에서 깨달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기적만 좋아하고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만나시면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적을 체험했다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리고 기적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며 또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례를 각각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구속사적 측면에서 계속 언급되는 사건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넌 기적일 것입니다. 430년의 한많은 종살이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수까지 자동적으로 갚는 순간입니다. 장정만 60만 명, 추산하여 200만 명의 아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분명히 믿었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까 생략하고 16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큰 기적을 체험하고 출애굽한 지 고작 2개월 15일만에 이들은 인간적으로도 할 수 없는 불신앙적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무엇을 말해 줍니까? 기적이 바로 참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조금의 의리라도 있다면 2개월 15일만에 이렇게 불신앙적인 원망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에 중에 행하신 기적 중에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정만 5천 명, 모두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 기적에 대하여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그 기적의 떡을 먹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날 가버나움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며(요 6:27-3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그들인데 기적의 빵이신 주님 자신을 먹으라고 하니까 아무도 먹지 않겠다고 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는 쓸쓸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적을 체험한 것과 믿음은 이렇게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적 때문에 자신을 쫓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을 행하여 택한 자까지 미혹한다는 주님의 예언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해 보면 좀 쉬워질 것입니다. "성경에 '말세에 누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가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지 행하지 못하는지 살펴보고, 기적을 행하지 못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며 기적을 행하면 내 제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이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고 그래서 택한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했습니다. 여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볼 때,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 그 미혹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기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사이비 이단에게도 얼마든지 기적과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적과 기사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주의자가 되어 이단에 빠질 위험성이 더 커집니다.

결론적으로 믿음과 기적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세의 심판대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주님에게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한 말과 주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여기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정말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항상 자신들만이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선전하고 그것으로 이단이 아닌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수단적으로 이용은 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부정하지도 않고, 기적과 표적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는 믿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출처:아멘넷 댓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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