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꿈, 환상, 입신, 방언, 현상, 기적과 표적에 대한 단상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 행 2:17-19)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도적 권위를 부여 받아, 사도 시대의 기적과 표적, 예언, 환상, 방언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한다. 그들은 선지자 양성소를 만들어 사도적 권능을 부여 받은 선지자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기적 표적 예언 방언에 의한 성령운동의 사역 방법을 훈련시켜 전세계에 파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의 사역에 관하여 많은 비평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 비평의 요점은,


첫째, 거짓 기적 표적의 사례들이 드러난다.

둘째, 기사와 표적의 많은 부분들이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온전성과 합리성에 배치되며 하나님을 기괴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 성령님을 감정적이며 기이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존재로 오해하여 집회시 이들을 도출하려는 의도성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이교적이며 무속적인 범주의 것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넷째, 감성주의적 예배와 집회를 추구한다.

다섯째,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바른 교리(말씀)를 초월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천주교등 모든 교파를 초월하며, 복음에 대한 투철성이 없다.

여섯째, 번영신학을 추구하고, 성도들의 감정적 심리적 만족, 카타르시스, 치유에 사역의 포인트를 둔다.

일곱째, 번영신학과 은사주의에 입각하여 사역을 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도덕적 재정적으로 부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기적과 표적을 이야기 하지만 반면에 거짓 기적과 표적을 분별하라고 한다. 예언을 말하고 있지만 거짓 예언을 매우 증오하고 있다. 방언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방언에 대한 유의를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과 표적, 예언, 방언, 환상들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러워해야 하며, 성경의 말씀에 벗어나지 않는가를 분별하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전권에 맡기는 자세일 것이다.


요엘 선지가는 모든 육체에게 예언, 환상, 꿈을 주리라고 하였고 하늘과 땅에 기적과 표적을 베푼다고 하였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실현한 장본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예언에 따라 무엇을 하였는가 요약을 해보자.


1) 각나라 방언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 병고침, 죽은자 살리기, 앉은뱅이 일으키기등의 표적을 보임으로서 복음을 증명하였다.

3) 모진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순교하였다.

4) 복음(정경)을 확정하였다.


사도 행전에서 예언, 환상, 꿈, 기적표적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 이것이 전부이다. 오늘날 집회 현장을 가보면, 예언을 한다, 기적과 표적을 행한다, 방언을 한다, 환상을 이야기 한다는 모든 것들이 과연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 의아심을 일으키게 한다. 예언은 마치 무당이나 주술사들처럼 앞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성경에는 때로 앞날의 일을 예언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사도행전에서도 한 선지자가 어느 지역의 가뭄을 예언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은 특수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예언들을 보편화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예언은 다 천국 복음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이 쓴 요한 계시록도 바로 이 예언으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예언은 즉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 환상과 꿈은 무엇인가 ? 우리가 밤에 날마다 꾸는 꿈이 아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도 하여, 꿈꾸는 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도의 구원과 복음의 전파라는 목적이 아닌 것이라면 다 개꿈에 불과하다. 젊은이 들에게 부어지는 환상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뜻한다. 늙은이들에게 주는 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에 관한 지략과 비젼을 의미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이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예언, 기적 표적, 환상, 입신, 방언을 집중적이며 보편화 원리화하여 시행함으로서 많은 오류를 낳고 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많은 것을 개혁하셨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  죄로 죽어가는 인간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복음을 남기시고 “ 내가 분부한 것(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부활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는 너무 자명하다. 예언, 환상, 꿈, 기적 표적, 입신, 방언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복음의 전파를 향한 목적성을 가져야 하고, 성경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다른 목적성을 가지거나, 성경의 모본을 따르지 않을 때는 바로 배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은사주의 및 신사도 운동가들이 사역의 키로 생각하는 은사적 요소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본다.


1)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미래를 예언(예측)하는 경우는 매우 특수한 복음적 상황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 원리화해서는 안된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렘 5:31)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도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9:8-9)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렘 23:26)


2) 방언은 성경의 말씀대로 유의하며, 개인의 신앙적 덕을 위한 은사로서 누려야 한다. 방언을 공중예배의 사역 방법으로 채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의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고전 14:14 )

방언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 고전 14: 4)


3)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법칙을 하나님 자신이 어겨가면서 특수한 시대적 필요성과 상황에서 베푸는 것이다. 또한 기적과 표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증명과 하나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이다그 외의 다른 목적은 전혀 없다. 오늘날 사도 시대 이후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확정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을 수 있는 기적과 표적은 사도 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시대, 예수님 초림전 시대와 전혀 다른 양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적 부활로서 표적을 완성하시며, 이것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 시대에 표적을 보이시지 않겠다라고 까지 하시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 이 시대는 병고침이라든지 귀신을 쫓는 일에 있어서도 기적과 표적의 개념이 아니라 치유의 개념이며, 은사의 개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병고침과 귀신 쫓음을 기적 표적의 형태로 생각하여 드러내어 보이며 전시적인 효과를 일으키면서 사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병든자가 있으면, 장로(목사님)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는 모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라는 이야기는 당시의 치료적 상황에서 기름바르는 것이 치료 행위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볼 때 정상적인 의사의 치료 행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반면에 말세에는 거짓 기적과 표적을 분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의 속마음은 우리가 표적과 기적을 보고 비로서 믿거나 믿음을 굳게하기 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과 표적을 사역의 한방편으로 삼아, 이것을 집중화하고 원리화하는 것은 거짓 기적을 양산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기적은 오히려 이러한 것이다. 가을에 되면 온산이 빨갛고 누렇게 변화하는 것, 아프던 내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치유력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 달이 한달을 주기로 이지러짐과 둥그러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 우주에는 셀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있음에도 지구가 다른 별들과 충돌하지 않고 그 궤도를 철저히 지키며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 내가 지금 존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 하나님의 창조하신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과 질서에 따라 운행된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그런데 죄에 물든 인간은 이러한 기적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를 역행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자주 남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존중하며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며 감탄하는 인간을 원하실까, 역행적 기적들을 보며 놀라워하며 그것을 좇는 모습을 원하실까 ? 잠간이라도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과 더불어 창조 사역에 참가하신 분이다. 성자하나님인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가 역행적 표적을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데, 성령 하나님은 역행적 표적을 즐겨 베푸시는 분일까 ? 이와 같이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생각은 불일치할 수 있는가 ?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 (마 16: 3-4)


<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 (막 8:1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 요 20:29 )


4) 꿈과 환상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비젼을 의미한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벧전 1:12 )


5) 입신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석상세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입신 현상은 성경에 여러차례 기록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의 부복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것이 일어난 특수한 상황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집회 현장에서 임파테이션( 성령 전이 )라는 사역 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쓰러트리는지 쓰러짐인지를 집중화 원리화하여 실시하는 것은 전혀 성경이 허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이러한 쓰러트림을 행한 모본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성도와 치유 대상자들을 일으키기만 했다는 기록을 간과할 수 없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 행 9: 4)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 계 1:17)


6) 성령 집회들에 보이는 각종 감정적 현상들( 진동, 낄낄거림, 통곡, 짐승소리, 뒹굼, 몸부림 등등)이 성령의 임재할 시 일어는가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상들은 궂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다른 집회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교적 집단에서 흔히 볼수가 있으며, 심리 치료 현장에서도 나타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정서적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며, 치유의 도구로 사용한다. 왜 이런 현상들이 하나님(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집회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하실 때 과연 이런 현상들을 도출하는 집회를 하셨는가 ?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면 성령님은 이러한 현상을 긍정하실까 ? 여기에 대해서도 아니다이다. 성령님은 지와 정과 의를 고루 갖춘 신격이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신 분이 아니다. 특별히 감정적인 성품이거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시는 그런분이 아니다. 온전하시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신다. 은사주의자들의 맹점은 성령님이 감정적이며 어떤 특이한 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자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이 감성이 풍부하시기도 하지만, 지적으로 칼같이 냉철하신 분이기도 하다. 성령의 열매의 하나로서 절제와 인내라는 것이 있다. 은사주의적 집회의 특징은 첫째 지나친 감성주의로 흐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감성을 절제하고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집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는 사역자와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만 드런내고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모습을 보이며,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 보여야한다. 소위 성령 운동이라하며 벌이는 이 집회에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 임재하면 새술에 취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사도행전에 “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 ( 행 2:13)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새술에 취하게 되면 감정이 흥기되고 약간 분별력을 잃은 듯한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 성령의 새술에 취하게 된다고 그들이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감정적인 상태, 어떤 황홀한 상태가 되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섬세하게 보지않으면, “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라는 말씀을 놓칠 수 있다. 사도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열심히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여” “새술에 취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어떤 사람을 “성령의 새술에 취하였다”고 말한다면 그를 조롱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도들이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각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는 기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 신 5:32)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 신 28 : 1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갈 5:22-23)



나가는 말

성령의 현상은 온전함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온전함과 거룩함이 있으며, 이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앞에 인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할 뿐이다. 거룩함 가운데 있는 화평이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지금 신사도 운동가들이 집회에서 보이고 있는 빈야드 현상들은 결코 성령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사와 기적 표적에 대하여 바른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집중화하고 원리화하여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펼치고 있다. 은사의 남용과 오용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성령에 집중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유의하지 않는다. 거짓 기적과 심리적 현상들을 성령의 운동이라고 부르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딴에는 진실과 충정으로 이 성령 운동에 임한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지 않는 곳에는 성령께서 임하지 않을 것이다.


<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 마 7: 22-23)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24>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 고후 11: 13-15)









출처 :알파코스 원문보기 /양무리마을/ 글쓴이 : 푸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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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내 친구야
     
    아련한 추억속에...
     그리움만으로 남아있는 내 친구야
     
    우린 그때 낙옆이 굴러가는 것만 보고도
    허릴 잡고 까르르 웃어댔었지...
     
    봄이면 산나물을 캔답시고
    바구니를 옆에끼고
    어른들 꽁무니를 졸졸 따라나섰다가
     
    길가에 꽈리를  틀고 앉은 뱀을 보고는
    들고있던 바구니마저  팽개쳐버리고
    자지러지 듯 울면서 도망쳤었고...
     
    여름이면
    앞산의 산자락을 돌아 후미진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며 내려가며 가재도 잡고
    올챙이도 잡으며
    깔깔대었네
     
    가을이면 너와 함께
    뒷산에 올라 도토리도 주웠었고
     
    겨울이면 썰매를 탄답시고
    송판대기 한장에 냉큼 올라앉아
    코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도록
    앞뜰의 웅덩이를 따라 돌며 뱅글거렸지...
     
    달 밝은 밤이면 동구밖 빈 공터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술래잡기를 했고...
     
    그 때 넌 어쩌면 그렇게
    꼭꼭 잘도 숨었든지...
     
    난 너를 찾으려고 창수네 뒷간으로 갔다가
     푸르른 달빛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고
     
    너무나 무서워서
     슬그머니 집으로 도망쳐 버린 기억들...
     
    그리운 내 친구야,
    아직도 내 기억속에 너의 얼굴은
    동그란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이건만...
     
    나의 단발머리와 동그랗고 귀엽던 얼굴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거울 속에는
    어느새 눈가에 잔주름이 짜르르
    낯설기만한 어느 중년 부인이  
     
    여전히 큰 눈엔 씁쓸한
     웃음마저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가만히 서 있네
     
    내 그리운 친구야,
    새해라고 별것이 있겠느냐
    어찌보면
    육신이 날로 날로 후패해지는
    아픔일 수도 있을테지..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야 내 어찌하리
    세월의 끝자락을 잡고 계신 그분을
    친구삼아
    한 걸음 두 걸음 진실하게 걸어 가노라면
     
    언젠가는
    하이얀 백발의 면류관을 쓰고
    속사람이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노년기를 맞을 수가 있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절 말씀)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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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지말입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넉넉히 이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목표가 성도의 필수적요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넉넉히 이기는 성도의 생활이 될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육신적 전쟁이 있습니다

 a. 육신적 전쟁도 서로 투쟁하는 형식이 따릅니다

    국가전쟁은 무기를 사용하며 경제적 전쟁은 물질이 따릅니다 
정신적 전쟁은 지혜가 따라야 하며 개인적인 전쟁은 마음을 다스리는등
여러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만, 특징은 너를 죽여야만 내가 이기는 것입니다.

 b. 영적인 전쟁은 육신적인 전쟁과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악한 영에 대해서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성도는 악한 영의 도전을 받아 영적 전쟁을 육신적으로 생각하다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떤 전쟁인가 하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했습니다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인 영적 악한 영에 대한 것입니다  육신적 전쟁은 총칼등 무기가 따르지만 총칼로 하면 실패하는 악한 영에 대하여 선으로 도전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방법입니다


2) 넉넉히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기게 합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악의 세력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미 이기셨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힘앞에서 사탄이 영원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할 때에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시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피하고 신뢰하면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깁니다

영적인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겨논 싸움이란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요, 믿음이 있는 자를 주께서 세상을 이기도록 도와 주십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믿음으로 이길수 있습니까  우리 앞에 걸어간 역대 선진들을 보아서 알 수 있읍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전쟁때마다 하나님께 물었고 지시에 따라 순종하며 나갔을 때 승리했습니다  기드온이 삼백명과 항아리와 횟불로  어떻게 무수한 적군을 이길 수 있읍니까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나갈 때 그 상황에서 적군들이 서로 충돌하여 치게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해 주신 것입니다  히스기야왕도 산헤립의 군사 십팔만 오천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늘의 천사가 와서 멸종시켰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신 것입니다


(3) 소망이 이기게 합니다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도 인내하며 내 소망이 주님께 있으면 영적인 세계에서 이기게 해주십니다  내 생각과 촛점이 내가 세상에서 내이름을 위해 하면 영적인 전쟁에서 완전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내 소망의 주님을 위해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서 이기게 하십니다


3) 성도가 영적전쟁에서 왜 넉넉히 이기지 못하고 실패합니까

 (1)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2) 자기가 전쟁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탄에게 실패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믿지 않는 불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고 삼지 않아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인 사탄 마귀의 올무로 영적 전쟁으로 올라갈 때 지혜와 명철을 주시옵소서   약하고 어리석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악한 영에 대하여 선으로 싸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어 넉넉히 이기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를  의지하며 기도할 때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악의 도전을 이김으로 평화의 삶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고, 이 악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멋진 성도가 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10/18/08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정리: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소록도 이야기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아닌 듯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저에게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그 아이가 열 한 살 때였지요"


"......"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세째, 네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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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이적과 기사, 입신- 모두 성경적인가?

 

요즘 소위 부흥의물결 이라는 명제하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치유사역, 입신, 금가루현상, 수십명의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하늘에서 금발의 미녀천사가 (싸구려)보석을 떨어트렸다 초자연적 능력, 등등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야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치드라도 성경을 잣대로 알고 믿는 성도들 중에서도 갈피를 잡지못하고 이단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함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인터넷에 올려진 이런 말들과 자료들을 접했을 때, 혹시, 19세기에 일어났던 그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련가?사실, 기대하는 마음과 긍정적시각으로 그 사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또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아주사거리의 부흥이 우리 세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부흥의 불길이란 것에 무언가 예감이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대로 뭉쳐서 예언이란 이름하에 서로가 서로를 올려주기도 하고 세워주는가? 하면 성경에도 없는
입신이란 이름아래 천국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이드나들고, 각종 보석(싸구려)들을 천사가 떨어트렸다고도 하고 심히 수상쩍은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봅니다. 글쎄요, 그런 조잡한 일들이 과연 성서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글, 입신상태의 말,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다 똑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그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급)

2.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및 직분자들

3.‘샤마니즘’적 신앙, (무당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것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차,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득이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것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본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적으로 있어서 그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듯,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듯 보여지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대처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플지 말아야한다는 성경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것 (계22:18_19절, 벧후1:20절 참조)

2.이적과 기사가 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그 말씀에 의거해서 반드시 영을 다 믿지말고 말씀에 따라 검증할 것 (요1서4:1절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그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말것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할 것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 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켜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됨을 인쳐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풀이할 때,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눅24장32절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 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볼 때,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입신’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궂이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들의 꿈에나 혹은 비몽사몽간에라도 나타나셔서 통곡하셨다면, 그 이유가 오직 사람들의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요, 그 영혼을 전도하지 않는 게으럼과 주의 종들의 시기질투로 인해서 전도문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만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그 이외에 어느 것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시게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사 통곡하시는 주님을 환상에서나 비몽사몽간(저 역시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에 뵈었다고 하여도 그 이유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더 신령하다고 착각을 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떨어진 자요 그런 영혼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전락된 상태일 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무조건 모든 기적과 이사는 폐지되었다 주장을 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이적과 기사가 다 검증없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안에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합치고,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합쳐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교회가 다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며 주인이 되심을 믿고, 신령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이는 가르키는 자로, 또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 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김을 위해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 되고,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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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3 과 요한복음 10장은 내용이 같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 우리는 양이라 했읍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목자되신 예수님을 잘 따라야 합니다


1) 목자는 무엇이며 양은 무엇입니까

    목자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한다  위험을 돌보며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양은 좋은면과 나쁜면이 있읍니다  좋은면은 성품이 온순하며 풀을 잘 뜯어먹고 젖을 많이 냅니다  번식력도 강하고 털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잘모이는 마음도 양의 성품입니다  또 남을 해치지 않고 목자를 잘 따라갑니다  나쁜면은 굉장히 약합니다  몸집은 크지만 정신력이 약합니다  사리분간을 잘 못하며 방향감각이 없읍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잘 보살핀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했읍니다  양은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잘 살아 나갈 수 있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성도에게 목자가 되어주셔야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읍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잘 따라가야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라온다 했읍니다  주님 성전에 모이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목자입니다  다른 분이 목자가 될 수 없읍니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했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려고 십자가를 지셨읍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하셨읍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값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읍니다  누가 나를 살리기 위해 죽어준 자 있읍니까?  예수님뿐입니다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시요 목자이심을 내 마음에 견고히 믿어져야 합니다  믿어지지 아니하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나를 위해 채찍맞으시고  고통당하시고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으며 성령으로 오셨읍니다  내 마음에 계시면서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권고하시며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을 바로하는 것입니다


3) 양도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의 음성 비슷하게 들려오는 음성들이 있어 양떼들을 엇갈리게 합니다  신앙생활 흐트러트리는 이리떼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요  예수님의 음성을 바로 분간할 줄 알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양은 분별해서 따라가게 되어있읍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까닭에 따라오지 않는것이 불쌍한 것입니다  주님의 양이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며 생활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따라간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배운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생각, 생활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속에서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정확성을 가져야 허랑방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영혼 구원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압니다  이름을 불러내며 하나하나 자기 양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내이름, 내생활을 아십니다  날 지으신 예수님이 내이름 나의 모든 것을 모르시겠읍니까  모든 것을 아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알면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읍니다  주님께 기도하면 필요한것 주십니다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시73:28) 하였읍니다


4) 이런 사람이 영생을 얻습니다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내가 주님 사랑하면 인자하심이 따라오며 주님과 함께하는 생활을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것,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기에 함께 하시기에 거합니다 성전에 나오기에 여호와의 집에 거합니다  이 세상이 끝이나면 주님나라에 갑니다  여호와의 집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그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주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순종하며 따라갈 때 내 평생에 주님이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니 두렵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필요를 주십니다  영생을 주신 주님, 목자되신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잘  따라가는 양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10/14/08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정리: 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정말 가슴 아픈 사진들....

Picture by x_Boo_x
제 친구가 이 사진들을 보내줬는데, 정말..... 이사진들 보고 울뻔 했어요...
제가 이 아이들에게 해줄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죄책감을 느꼈어요...
우린 정말 행복한거예요
Picture by x_Boo_x
오늘 우연히 학교 에서 구로야나기테츠코의 '토토의 눈물'을 읽게 됬는데,
이 책 꼭 읽어 보세요. 음식은 물론, 마실 물도 없어 그나마 귀한 흙탕물이라도 매우 고맙게 마시는 아이들...영양실조에 걸려 말을 하나도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니 정말, 정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어요....
Picture by x_Boo_x
 
Picture by x_Boo_x
 
Picture by x_Boo_x
 
Picture by x_Boo_x
 
Picture by x_Boo_x
 
Picture by x_Boo_x
이 사진. Kevin Carter이 저 사진을 찍고 플레처 상을 받았다네요. 근데 저 사진.... 저 사진 속의 저 아이..... UN에서 나눠주는 음식을 얻으러 가려고 저 몸으로 1km 이나 떨어져 있는 곧으로 가고있는데.... 저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저 새. 죽으면 쪼아먹으려고..... 그 후론 저 아이가 어떻게 됬는지 아무도 모른데요...정말 충격적인것은, Kevin Carter이 저 사진을 찍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에요.... 제발 저 아이좀 도와주지..... 많이 화가 나네요. 저 사진을 찍고 우울증으로 Kevin Carter은 3일 후에 자살을 했고.....

공명조(共命鳥)

공명조(共命鳥)란 실크로드에 전해지는 전설속의
새입니다.

공명조(共命鳥)는 머리는 2개 몸은 하나인 새,
한편은 낮에 일어나고 다른 한 편은 밤에 일어나
언제나 서로 시기하고 으르렁대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공명조(共命鳥)는 결국 시기심을 끊지
못하고 다른 한편에 독약을 먹여 같이 죽고 만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전설이 지닌 본래의 의미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인간 마음의 모순과
갈등을 상징하고 있다지만….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한 몸같은 부부, 한 몸같은 이웃,
한 몸같은 교회, 한 몸같은 국가,

한 몸에 머리가 둘이되면, 사고에 혼란을 가져오고
지적능력을 마비시켜,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인지 원수인지 조차 구분이 안되어
밤낮  시기하고 질투하며 으르렁대다가
결국 같이 망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가요?

공동체의 머리는 언제나 하나이어야만 합니다.
물론, 서로가 도우며 생각을 함께 모두는 것은 좋지만,
머리되겠다고 서로 우기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머리되시고 모든 영적지도자들은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협력하고 사랑하며
내 몸같이 섬기는 교회,

아내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가장을 머리로 하는 가정,
아랫 사람을 자기의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지도자가 머리되는 직장과 국가로
이루어 나갈 수 만있다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 얼마나 더 풍요롭고
얼마나 더 아름다울가요….

오늘은 왠지 전설속의 공명조(共命鳥)가
더욱더 가슴시린 이야기로 떠오릅니다.

우리 주님은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가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가 없다(막3:24-25절 말씀)” 고 하십니다.

내 자아 속에서, 내 가정에서, 내 이웃에서, 내 교회에서
서식하고 있는 공명조(共命鳥)를 몰아 내지 못한다면….
결국은 모두 망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최송연 사모

주님의 관심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이 말씀을 음미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주의 관심이 누구에게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었는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보았습니다. 또한 이 시대의 믿음의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수 많은 교회들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관심과 우리들의 관심이 얼마나 동일한가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참 부끄러움을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떤것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관심을 두셨습니다. 세상에서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죄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무너져 가고 상처를 안고 그렇게 소망없이 힘겨웁게 버티는 인생들에게 주님께서 다가 가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지만 주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입술로는 찬양을 하면서도 주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 은혜와 구원을 노래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뒤를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거져 받았지만 나는 자꾸만 계산을 하고 손해를 안보려고 머뭇거렸다는걸 생각해 봅니다. 머리로는 온갖 교리들로 무장을 하고 학습을 하고 조언도 하지만은 정말로 주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채우지 못하고서 나하고 다른 형제들을 향하여서 혀를 찼었고 조금의 실수와 허물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서 쉽사리 정죄해 버렸던 저를 봅니다.

주께서는 이러 이렇게 하셨는데 어떻게 주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그럴수가 있는가 라며 흥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너무 완벽한 교회를 상상한 나머지 조금의 허물조차 감싸지 못하고서 비판에 열을 올렸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다들 몰라서 그런다고 볼맨 소리를 하면서 내가 친절하게 알려 줘야 겠다고 거품을 물고 논쟁도 했었습니다.

그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을 내서 참견도 하고 가르치려고 했지만 내가 변화시키려는 음험한 생각에 홀로 짜릿함도 느꼈더랬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상처만 남았고 상처만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지치고 상함으로 절망하는 자신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를 잘 알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길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주님앞에 머물러 봅니다. 주님의 뒤를 자세히 찾아 보려고 주앞에 머물러 봅니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다시 힘든 싸움을 하려고 머물러 봅니다. 내 안에 위선과 거짓과 왜곡된 마음과 오만과 편견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주시기를 간구해 봅니다.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관심은 이렇게 가난한 자들과 포로된 사람들과 눈 먼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이라는걸 다시한번 봅니다. 그리고서 주님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자유와 다시 보게함과 풀어서 돌아 다니게 하셨는데 나는 과연 얼마나 다른것에 목숨을 걸고 살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주께서는 꼭 당신의 고향에서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선민이며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믿고 스스로의 교만과 독선과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백성들에게 영적인 가난함과 포로됨을 모르고 눈 멀었다는것도 모르면서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알수 없는 것에 억눌린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게 배척을 당할 것을 아셨지만 주님은 말씀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으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해도 소 귀에 경을 읽는 것같지만 주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의는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알려주려 합니다. 나에게 이득이 없고 방해만 되고 거추장 스러운 상대는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일 겁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아무도 거절하시지 않으셨고 피하지 않으셨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계산하며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 봅니다.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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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됩니다  믿음으로 자기 백성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읍니다  생활면에서 사명적인 면에서 신앙적인 면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1) 생활면에서

 (1) 자기 백성이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사며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미6:8)

 (2)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고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벧전5:5)

 (3) 분수에 맞는 생각 하기를 원하십니다 (롬12:3)

 (4)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십니다 (잠27:2)


2) 사명적인 면에서

 (1) 성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1서3:18)

 (2) 하나님의 교회 섬기는 것입니다 (행20:28)

 (3) 성도들이 신앙안에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살전2:7-8)

 (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행1:8, 마28:18-20, 막16:15)


3) 신앙적인 면에서

 (1) 자신의 신앙 견고성을 원하십니다 (고후13:5)

 (2) 믿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히11:6)

 (3) 주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살전4:13-18  살전5:4, 마24:42, 계22:20)


    겸손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내 생각을 버리며  나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때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고전13:4-7은 사랑의 실체입니다  성도들과 그런 관계를 사명적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생명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된 성도가 모이는 것입니다  성도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는 것으로 봅니다   주님은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어린아이를 기르듯이 가르치며 양육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안에서 교제하며 서로 사귀는 것을 사명적으로 알고 하는 것입니다(빌1:3-6)  자신이 예수님안에 있는 예수님 믿는 사람인 것을 확증해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의 결론입니다  주님 오셔서 나타내시면 다 끝이 납니다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것을 바라보며 먼저 해야 할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2-17)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어 나에게 원하시는 생활,신앙,사명에 확신과 힘을 주시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0/11/08 새벽기도회 설교말씀 요약)

정리: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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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2007년 2월호 추천 해외 아티클


<위대한 교사가 되는 법> - 마틴 엉거


- 예수님의 교육 원리 -

 

1. 준비의 원리

 

위대한 교사는 주제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이 시간을 위해 그 분은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연구하고 준비하셨다.

위대한 교사는 부단히 자신을 준비한다.

우리는 홀로 기도하시며 자신을 준비하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마태복음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 겸손한 권위의 원리

 

위대한 교사는 권위를 휘두르지 않고도 권위를 드러내 학생을 섬긴다.

 

(마태복음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당시 교사들은 엄격한 권위주의자들이었고, 율법의 본질보다 전통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위가 있으셨지만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으셨다. 그것이 그들과 다른 점이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가르친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섬세한 노력을 요하는 숭고한 사명이다. 참된 가르침에는 권위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고 그것은 결코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주의자와 권위있게 가르치는 사람은 다르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만일 위대한 교사가 되고 싶고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자신을 낮추고 학생들을 섬기라.

 

 

3. 긍휼의 원리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을 긍휼히 여긴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이렇게 말했다.

"의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긍휼은 없는 경우가 있다. 의는 차갑고 딱딱하고 무감각할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으려고 배 밖으로 나왔다가 물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실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가라앉게 내버려 두어 물을 좀 먹게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4:3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보시고 도우셨다.

 

 

4. 인식의 원리

 

훌륭한 교사는 좋은 안테나를 가지고 가르침의 상황 속에 있는 3요소 - 교사/주제/학생 간에 펼쳐지는 미묘하고 역동적인 상호교류를 흡수한다.

교사는 각 개인에게 다가가서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뉘앙스, 무관심이나 의심의 기미, 동의를 표시하는 작은 끄덕임, 저항하는 몸짓 등에도 주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안테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교육 컨설턴트인 조지 레오나드는 "배운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교육은 학습자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교사는 변화의 매개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변화를 두려워한다.

예수님 이전과 이후의 모든 교사는 학생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해 왔다. 동시에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학생들의 상태와도 직면해야 했다.

예수님은 이 딜레마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그분은 단 12명의 제자들을 통해 진리를 온 세계에 전달하셔야 했다. 뿐만 아니라 12명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까지 가르치셔야 했다. 예수님이 이 딜레마를 푸신 방법은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었따.

 

예수님은 교사로 오셨고, 교사로 사셨고, 교사로서 떠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가복음 1:1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을 보내시면서 어떻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지 가르치셨다. 또 지상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보실 때, 그 특별한 낚시를 계속하라고 그들에게 도전하셨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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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 "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신앙생활 하면서 경험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읍니다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은혜받고 난 후 성령에 이끌려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의 감사함을 기록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7절에서 내 육체에 가시가 있는데 가시처럼 찌르는 육체의 고통을 말씀하고 있읍니다


1) 질병의 가시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가시는 아마도 눈병인것 같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행 9:18의 기록을 보면  사울이 예수믿기 전에 기독교를 핍박하고 박해하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길에 빛을 본 후  3일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고통가운데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시어  사울에게 보내시고  아나니아의 안수받고 난 후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읍니다  바울은 그 때부터 눈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성경 학자들은 바울 몸 속에 있는 가시는 틀림없이 눈일 것이라 말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 이것을 없에 달라고 세번 주께 간구하였으나 주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답변했읍니다  네 목숨을 살려준 것만으로 감사하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어려움이 있읍니다  사람마다 가시의 성격이 다르지만 몸의 가시, 생활속의 어려운 사건이 가시처럼 찌릅니다  그것을 견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읍니다  이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가시만 해도 견딜 수 있읍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때 신앙생활을 감사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 약한 그 때 거기에서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이 약할 그 때에 강한 능력과 온전해 질 수 있읍니까  그것은 사람 마음이 너무 자고하고 자만하며 교만하기 때문에 그 사실이 꺾여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며 자신을 낮추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 때부터 역사하시고 말씀하시고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과 어려움과 한숨쉬는 일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무릎꿇고 기도가 간절할 때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 그것입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마지막 골목 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돕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이슬은 산꼭대기 높은 곳에 있지만 깊은 계곡에 더 많이 내립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은 신앙생활에서 겸손하게 내려앉을 때 은혜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 했읍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에 교만병이 올라오면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 살게 되고 은혜받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케 되어 강하여 집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온전하여 집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 손에 붙잡혀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히지 아니하면 온전하게 될 수 없읍니다  내 속사람을 죽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잡고 심령과 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나팔로 사용하실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심으로 능력있읍니다  바울은 조건좋은 가문과 교만할 수 있는 학문을 가졌지만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며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배웠다 했읍니다 (빌3:5-8)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난 후 사울은 파괴되고 부셔지고 예수님만 귀하게 보였읍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버린다 하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하였읍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싶습니까  마음을 주께 드리고 자신을 낮추어 복종함으로 , 겸손하게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신앙생활 잘 할 수 있게끔  그리스도의 능력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하도록 주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4)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자연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능력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역사의 재앙사건, 홍해를 건넘, 광야40년 동안 주신 모든 물질은 초자연적 역사로 하나님이 해주신 능력입니다  기드온이 300명으로 수만명을 죽이는 것은 총칼이 아니라  자기들 끼리 죽이게 되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이 해주시는 능력입니다   다윗이 물멧돌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였읍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이 어려움과 고통가운데 무릎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이 모든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를 죽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앞에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혀드리면 초자연적 하나님이 신앙생활을 축복하십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에게 있는 가시를 통해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나아가 무릎꿇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갈 때  믿음의 사람 강한 사람이 됩니다


    나의 삶속에 있는 가시 , 경제 건강 자녀등등 모든 가시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겸손하게 무릎꿇어 기도하며 하나님만 높혀드릴 때 초자연적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10/09/08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정리: 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자유게시판을 엽니다!
여러분들의 좋은 의견들을
남겨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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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청년에게 주는 50가지 충고

1.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구하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말아라.
   하나님을 먼저 만나는 일에 목숨을 바치는 백성이 되어라.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다.

2. 컴맹이 되지 말아라.
   인터넷에 도사들이 되어라.
   그러나 섬기지는 말아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지도록

   기도하며 컴퓨터를 다스려라

3, 남들이 싫어한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남들이 좋아한다고 자만하지 말아라.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무시당하지 않는 영향력을 발하는
   인생들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하자.

4. 불이 없이는 도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을 만나야 아름다운 흙이 아닌 도자기가 된다.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아름다운 도자기로 만들어지는 순간임을 기억하자.
   피하기 보다는 감당하는 인생들이 되자.

5. "돈을 많이 벌면 십일조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지 말아라.
    지금 조금밖에 없어도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100원의 수입이 있더라도 십일조를 하자.
    그러한 자 만이 큰 것도 감당하는 은혜를 누린다.

6. 영성을 먹이겠는가? 죄성을 먹이겠는가?
   영에 먹이는 인생이 되자.
   영은 기도와 말씀으로 먹이면 살아난다. 그러면 죄성도 죽는다.

7. 비오기를 기도했는가? 우산을 들고 나가라.
   은혜를 위해 기도했는가? 성경책을 들고 나가라.

8. 찬양 테이프는 꼭 사서 들어라. 복사해서 듣지 말아라.
   복사된 은혜는 오래가지 못한다. 대가를 지불해라.

9. 남들이 너의 기도를 비난하는가? 변명하지 말고 웃어 넘겨라.
   싸울려고 하지 말아라. 우리는 사람과 싸우는 존재들이 아니다.

10. 3일 동안의 수련회는 3일동안의 은혜이다.
     그것으로 1년을 버틸려고 하지 말아라.
     수련회가 끝난 뒤 받은 은혜를 자랑하지 말고
     말씀을 읽고 묵상해라. 그것으로 우리는 평생을 승리할수 있다.

11. 기독교 서적이 일반 서적을 앞지르는 베스트셀러가 될수 있도록

     책을 많이 사서 읽어야 한다.

     빌려 읽는 사람은 크게 되지 못한다
     사서읽고 책앞에 내이름을 쓰자.

12. 내가 다니는 학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교지이다.
      비난하지도 말고 불평도 하지 말자.

      기도하는 일이 나의 할 일이다.

13. 우리의 목표는 1등이 아니다.
     믿는 자는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이다.
     백 댄서가 되기를 원하는가?
     최선을 다하여

     백 댄서계에 영향력을 주는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되자.

14.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젼은 무엇인가? 그것을 자랑하라.
    그리고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15. 신발은 항상 깨끗하게 하고 다녀라.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들이다.
     그발을 품어주는 그릇도 당연히 깨끗해야 한다.

16. 우연을 믿지 말아라. 운명도 믿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우연도 운명도 없다. 다~섭리가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의 뜻을 물어라.

     묻는자에게 가르쳐 주신다.

17. 교회예배에 빠지지 말아라.

     영의 살이 빠진다. 영은 찌워야 산다.

18. 백화점의 세일을 기다리는가?
     공짜로 주는 사은품을 기대하며 달려 가는가?
     하나님의 은혜도 공짜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늦지 말고 달려 가자.

     영원히 변치 않는 은혜라는 사은품을 주신다.

19. 우리의 목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죽는 것이다.
     영원히 살려고 몸부림 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어떻케 죽어야 할것인가를 묵상하라.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살다가 죽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을수 있는 인생들이 되어야 한다.

20. 휴대폰을 들고 교회에 오는데 성경책은 안들고 오는 사람들.
     하나님의 응답이 휴대폰으로 오는줄 착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

21. 신발을 구겨신고 다니지 말아라. 네인생의 길도 구겨진다.

22. 수련회에 갔는데 누군가가 좋아진다.
     전도여행을 갔는데 누군가가 마음에 든다.
     속지 마라. 사단의 속삭임이다.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좋아지고 마음에 든다면
     그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23. 내이름이 적혀진 성경책을 가지고 다녀라.
     성경책과는 이산가족이 되지 말아라.

     제일 슬픈 영적인 헤어짐이다.

24. 담배에 중독되지 말아라. 술에 중독되지 말아라.
     컴퓨터에 중독되지 말아라.
     그러나 말씀에는 중독이 되어도 된다.

25. 오늘도 우리의 소원이 있다면 예수님 꿈꾸는 것이다.
     서로 축복하자 " 잘자 예수님 꿈꿔"

26. 예배에 집회에 기도모임에 끌려 다니지 말고

     끌고 다니는 주도하는 삶을 살자.

27. 꿈꾸는 자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는 요셉의 형들이 되지 말고
     남의 꿈에 나도 도전 받고 오히려 더 큰 꿈을 꾸는 자가 되자. !

28. 지나간 과거의 남의 잘못을 끄집어 내지 말자.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같은 인생의 모습이다.

29. 손가락으로 남을 비난하지 말아라.
     비난하는 너의 손을 자세히 보아라.
     하나는 상대방이지만 4개는 나를 향하고 있다.
     나머지 4손가락 모두를 펴라. 그리고 그 손으로 축복해라.
     귀한 손이 된다.

30.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받았으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이 받는다.
     당신은 사랑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지금도 그 사랑 주고 있는 줄 믿는다.

31. 빛은 드러내야 한다. 숨기면 안 된다.
     내가 빛인 것을 드러내자. 그래야 주변이 밝아진다.

32. 찬양 테이프 많이 사서 듣자.
     그래서 조성모의 곡보다 부흥 찬양 테이프가 더 많이 팔리는
     역사를 만들자. 부흥이 일어나는 일이다.

33. 믿음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가? 슬퍼하지 말자.
     그대는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따로 분리된 백성이다.

34. 돈이 많음을 자랑하지 말고 똑똑함을 자랑하지 말고
     잘생긴 것을 자랑하지 말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자랑하자.
     하나님 아닌 모든 것! 들은 사라질 것들이지만
     하나님은 영원불면 한걸 알고 있으면 말이다.

35.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는 목표를 가져라.
     그리고 시간을 사용하라.

36.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집앞에서 몇시간이나

     기다리는 남자가 되지 말아라. 망하는 지름길이다.
     기도하는데 몇시간씩 쓰는 남자들이 되어라.

37. 여자의 화장과 옷차림에 반하지 말아라.
     화장은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모습에 반하여 기도하라.
     나도 기도하는 인생이 된다.

38. 남자의 화려한 모습에 반하지 말아라.
     화려함은 고생을 상징한다. 주님나라 위하여 충성하는 모습에
     찬양하는 모습에 반하여 기도하라. 나도 기도하는 인생이 된다.

39. 나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종이에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놓고 하루에 한번씩
    큰 소리로 읽어라.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40. 노동은 기도다. 일 열심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자.
     그것도 주님이 받으시는 기도다. 기도는 노동이다.
     기도는 땀 흘리며 열심히 하자. 대가가 있다.

41. 중국 선교사가 되길 원하는가?
     지금부터 중국어를 배우자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길 원하는가?
     아프리카 말 배우고 문화와 역사를 지금부터 배우자.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
     제발 성경 좀 읽자.

42. 열방을 품길 원하는가?
     그럼 열방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자. 열심히 하자.

43.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싱거운 것을 맛있게 한다.
     세상에 사는 맛을 보여 주자. 나의 얼굴을 통해서 보여주자.
     웃고 다니자. 싱거울 정도로 말이다.

44. 여자의 변신은 무죄란다.
     그러나 여자의 회심은 영광이요 축복이다.
     자매들이여! 변신하지 말고 회심하자.

45. 주목시키지 못하는 것은 칼라가 아니다.
     여기 세상을 주목 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있다. 바로 복음이다.

46. 매일 새롭게 배달되는 신문에는 새로운 게 없다.
     그러나 늘 똑 같은 소식과 사건을 적은 그 책은 늘 새롭다.
     바로 성경이다. 읽고 새로워 지자.

47. 기도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비웃는 자들 편에 서서 함께 조롱하는 자로 서 있겠는가?
     아니면 기도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비난 받으며 무릎을 꿇는 백성이 되겠는가?
     선택은 나의 무릎에 달려 있다.!

48.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육체도 늙고 죽는다.
     영을 단련하자. 영원까지 이어진다.
     말씀의 운동, 기도운동을 열심히 해서 영을 튼튼히 하자.

49. 위대한자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꿈을 꾸는자가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자. 그리고 위대한 사람이 되자

50. 위대한 요셉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만들어 진 것이다.
     위대한 요셉으로 만들어 지기 원하는가?
     그럼 고난을 환영하고 기뻐하라 .


출처:CG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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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을 아십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짐승 곁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당신의 외로움과 쓸쓸한 시간을 알고 계십니다.

 

폭군에게 쫓겨 먼 나라로 피난했던 아기 예수님은
나그네와 같은 당신의 적막함을 알고 계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깃들일 곳이 없었던 예수님은
의지할 곳 없는 당신의 불안을 알고 계십니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난 예수님은
당신의 땀과 고생과 그 피로를 알고 계십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은
욕심의 수렁 앞에 선 당신의 위험을 알고 계십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은
당신의 답답함과 절망을 알고 계십니다.

 

친구들의 떠남과 배신을 체험하신 예수님은
혼자서도 굳세게 살아보려는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호소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약함과 실패의 발걸음을 알고 계십니다.

 

수건을 동이고 제자의 발을 씻던 예수님은
숨은 봉사와 당신이 지불한 희생을 알고 계십니다.

 

갈보리 언덕을 홀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남몰래 흘리는 당신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이면서도
무감각한 것이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느낄 때 인것 같습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주님도 나를 찾기 어려우실꺼야.'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주님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당신만이 뚜렷하게 보일 뿐입니다

 

(출처):CG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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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르, 찌르르, 쓰르르, 쓰르르'
풀벌레 소리 요란하며...
코스모스가 만발한 가을입니다.

이 가을이 지나면....곧 겨울이 오겠지요.
울 문턱에 서 있자니...
이솝이야기 중에 한 편이 생각나더군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녹음방초가 우거진
한여름 개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때 베짱이는 시원한 그늘 밑에 누워서
노래하며 놀기만 했더래요...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간 후
어느덧 무서운 겨울이 찾아왔지요.
매서운 북풍에 온 땅은 얼어붙고…
밤낮으로 몰아치는 된서리와 눈보라는
산과 들을 하얗게 뒤덮어버렸는데

아뿔싸, 준비 없던 베짱이는 가엾게도
그만 굶어 죽게 되었더래요.

그제야 베짱이는 후회하며 울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온 여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준비했던 개미네는 따뜻한 집에서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와 있던 한편의 이솝이야기입니다. 아시죠?

준비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준비하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는데…


문제는,
우리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으로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기름준비를 잘한 다섯 처녀와 기름준비를 전혀 하지 아니한 다섯 처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냉혹히 분류하시는 때가 있는데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도 개미
신자와 베짱이 신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디에 속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 깨어서 준비하라!”
애타게 경고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읍쓰~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다구요?
쉬운 이야기 속에 진리가 담겨져 있거든요. ^^



별똥별/ 최송연


   9.11테러 이전에 미국에서는 이슬람의 확산이 두드러졌었다.  특별히 도시에 사는 흑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9.11 테러가 이슬람에 의해 자행되면서 그 확산의 속도가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9.11 테러에 직접적인 공격목표가 아니었던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그 세력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다만 이슬람에 대한 선호의 성향이 변했을 뿐이다. 9.11 테러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이며 비교적 관대한 이슬람의 수피교(Sufism)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에 이슬람 개종자들은 오히려 이슬람교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면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예측을 불허하는 정반대의 현상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데 그 이유가 특이하다. 영국 남자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추잡하고 속물적인 눈빛이 싫어서 이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슬람이 되면 이슬람의 베일은 그런 남자들의 눈빛으로부터 자신들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또 흑인계 남성들을 포함한 많은 남자들은 이슬람 가정에서 남성들을 위엄있는 가족의 부양자이자 수호자로 이상화하는 것에 많은 호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이슬람 선호의 이유로서는 이슬람교가 마약과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유럽의 대다수의 기독교 국가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이런 개종의 확산에 대한 신속한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영국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새 이슬람 개종자들을 돕는 프로젝트(New Muslim Project)가 생겼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많은 모슬렘 결혼상담소들이 있어서 미혼 개종자들에게 모슬렘 배우자를 찾을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새 개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종을 친지들에게 알리도록 격려할 뿐 아니라 실제 이슬람 신앙에 도움을 주는 복장과 목욕의식, 머리를 자르는 것 결혼과 장례에 대한 지침과 조언을 제공해 주고 있다.
   유럽의 국가들은 이슬람의 성지점령으로 성지순례가 어려워지자 성지를 이슬람의 손에서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독일, 영국, 불란서가 힘을 모아 이슬람과 싸웠던 11세기의 십자군전쟁을 지나간 추억정도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19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신학의 자유주의는 유럽 전체의 신앙을 약화시켰고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전도와 선교에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살고 잇는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의 역할을 못한다면 세상에 밟히고 모슬렘에 패배하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성적인 순결, 성경적인 가정과 자녀교육으로 세속화와 타락의 세상에서 기독교의 신앙이 빛이요 소금임을 밝히 드러내야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함으로 더 이상 이슬람의 확산을 막고 세계선교의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할 때다. ▣


글/서춘웅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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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손
 

 
알브레히드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시대 화가다.
 
그는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비를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친구와 만나 의논을 했다.
그친구가 이렇게 제의를 했다.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라
나는 네가 졸업할때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며 너의 뒷바라지를 하겠다.
네가 졸업한 후에
네가 다시 나의 뒷바라지를 하면 되지 않겠니?"
 
 

 

 
그는 뒤러를 위해 열심히 일해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다.
뒤러가 졸업할 무렵에는 그의 그림도 하나씩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뒤러가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 식당에 갔을때
친구는 마침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여! 저의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 이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나이다
내가 할 몫의 능력을 뒤러에게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제 친구가 진실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 주소서"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가
기도하는 손을 본 순간
뒤러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뒤러는 곧 바로 붓을 들고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는데 . . .
이것이 저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되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다.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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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rer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
독일이 EU에 가입하기전
독일화폐에 그려져 있었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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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까지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12지파에 분배한 일꾼입니다


1) 여호수아의 가족적 배경

    여호수아는 애굽의 압제아래서 노예로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민13:8에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요"  민13:16에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칭하였더라" 했읍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의 이름은 눈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이 안되어 있읍니다  호세아 즉 여호수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나와 광야의 40년 생활동안 모세를 잘 도왔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 지도자로서 부름을 받는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지도자로 부름을 받기 이전에 전쟁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전쟁을 지도하며 모세를 도와 전쟁을 치룬 위대한 장군입니다  출17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 지역에 올라갔을 때 아말렉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막으려 하여 싸울 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령을 따라 전쟁을 치러 나갔읍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아론과 훌은 모세의 양손을 받들었으며 여호수아가 아말렉 군대를 물리쳤던  실제적으로 싸운 전쟁의 경험이 있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민27:18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 고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지도자로 부름받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모세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지도자 모세를 잘 도와 전쟁을 잘 치룬 전쟁의 경험이 있는 여호수아 입니다

    영적교훈으로는 누구든지 다 주의 일을 할 수 있읍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영적전쟁 경험이 있고 말씀의 무기를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에 이끌림을 받는 그 사람이 세움을 받습니다  그 사람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3) 전쟁터에 나가는 여호수아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3가지가  수1:6- 에 나옵니다 

 (1) 마음을 강하게 하라  사람의 마음이 자기의 생을 좌우하는 좌표가 되기에 마음을 강하게 하여 하나님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담대하라  어떤일을 할때에 담대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적군이 몰려와도 놀라지 않는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3) 율법을 지키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지키면 네가 너를 승리의 장부로 이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겠으며 조상에게 맹세한 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터 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말씀에 붙잡혀서 마음을 강하게 담대히 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은 우상을 섬겼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겠다 한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빼았겼습니다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 말씀의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며 영원성 있는 말씀에 이끌리어 살아감으로 영적인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 승리한 여호수아

 (1)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요단강을 건널 때에 제사장을 통하여 언약궤(하나님의 말씀)를 앞장세워 요단강에 들어설 때 강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어 백성들이 건너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나의 무기로 삼으면 불가능이 가능한 삶으로 그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세상을 살아갈 때 요단강이 갈라집니다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힘이 있습니다 


(2) 믿음으로 나갔을 때 누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수5:13-15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뽑아들고 마주섰는 것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갈 때 돕는 자가 하나님의 군대 장관 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때 군대장관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했읍니다  지시받기 전에 군대 장관이 먼저 있었고 지시함을 받고 지시대로 행하였더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한 여호수아가 승리한 장면입니다  오늘날 내가 해결 할 수 없는 영적인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는 대로 하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장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책임지신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장하는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40년 광야생활 동안 굶기지 아니하고 배가 부르도록 먹이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거기서 나는 식량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다 함같이 우리도 주님나라 갈 때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장하십니다   (마6:25-) 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을 본받아 신앙생활에서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며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함으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09/16/08 화요예배 설교말씀 요약)


정리: 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 눈물, 피 …

 

 

 

제가 섬기는 교회의 건물은 지은 지 오래되어 군데군데 낡고 비가 새어 얼룩이 져 있고, 칠은 벗겨지고, 금이 가고,또 갈라져서 위험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지난 5월, 우여곡절 끝에 건설회사를 하는 친구가 흔쾌히 일을 맡아 무사히 공사를 끝 마쳤습니다.  천정을 다 뜯어 내고 주저 안았던 지붕 Frame을 들어 올려 보강을 하고, 새로 천정을 만들고, 전기공사와 새로 페인트칠까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을 했습니다.  공사를 하느라 주차장에 쌓아 놓은 의자들이 눈에 거슬렸는데 마침 의자수리(Upholster)를 하시는 분이 재료비만 받고 새 천을 씌워 주셨습니다.  강대상에 있는 의자에도 새 천을 씌우려고 옮기는 중에 한 의자에만 심한 얼룩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치 비가 스며들어 얼룩이 진 천정처럼....  바로 목사님의 땀과 눈물, 콧물자국이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시시 때때로 기도하시며 흘리신 땀과 눈물, 콧물로...

무릎을 꿇고, 의자에 얼굴을 파묻고 드리신 그 기도,땀과 눈물,때로는 피를 토하며 드린 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길 기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넘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확신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26:8)

 

 

 

      ....창립 28주년을 맞는 승리교회와 목사님을 생각하며....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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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복음에 빚진 자로서,
복을을 위한 일꾼의 자세로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꺼이 참예함으로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안에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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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흥망성쇠와 한 때 자유로웠던 국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마키아벨리같이 어름처럼 차가운 강심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 부흥과 쇠퇴, 정치적 부상과 몰락에는 반드시 인간의 이기심이 지나치게 작용하거나 공공의식이 결여되거나 도덕적 절제가 무시되는 것 등의 요인들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곤 하였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인간 이성이 조종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역사 전반에 널러있다 하겠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라도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온순하게 길들이기는 벅찬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문명이 활화산 위에 세워진 요세와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산업사회에서보다 인간의 이기심이나 탐욕의 사회적 폐해가 비교적 적었지만 문명과 산업의 발달은 도시인구의 팽창을 가져왔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극한에 이르게 되어 모든 문제를 길거리에서 해결하려 합니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리 주장이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군중들의 집단행동은 적을 섬멸하려는 군대와 같이 포위하고 협박하고 옥죄며 강요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어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비교적 조용하고 안정된 일상에서는 한 사회가 얼마나 쉽게 분열하고 붕괴될 수 있는가를 잊고 지냅니다. 또한 문명의 혜택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면 누릴수록 더 많은 혜택과 풍요를 누리려는 극심한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절대적인 빈곤상태에서 좀 더 잘 살기 위한 경쟁은 발전이라는 열매를 맺지만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한 극단적 경쟁은 최소한의 도덕과 준법정신까지 무시하게 되어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무방비상태로까지 내몰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이 비록 심판이라고 할지라도 약한 자를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조치이고 또한 악한 자들을 일깨워 경성시키시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후에도 독일 사람들은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운명의 얄궂음을 불평하면서 화가 치밀어 자신들과 국가의 운명을 히틀러의 손에 내맡겨 버린 것은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공포와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은 물론이거니와 유럽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전승국가들 또한 전쟁에 이긴 것을 도덕적 정당성으로 해석하고 평가하여 자기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 전쟁에서나 집단적 싸움에서나 혹은 개인 간의 마찰에서 이긴 자는 역사의 심판자처럼 행세하거나 그 행위에 대한 승자위주의 도덕적 평가를 정당화 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들을 비껴갔다고 하여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하나님인 것처럼 처신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심판만큼 끔찍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세는 사람을 통한 심판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택했던 것입니다. 역사적 심판이 임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구약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 그 이유는 도덕적 타락이었고 그 목적은 전 세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박력 있고 독창적인 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 특혜를 향유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지만 온 세계를 위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한 국가 전 인류를 향해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처음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지배하거나 지역적 확장을 통해 전 인류를 향한 역사적 사명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이스라엘에 의해 로마 제국을 거처 대영제국에 퍼져갔고 지구 반대편인 샌프란시스코에까지 전파되었으며 또 다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한반도를 거처 지구촌 오지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곧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탐욕과 이기심을 경계해야 하고 승자 위주의 도덕적 평가 또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출처:아멘넷, 글/ 황상하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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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남의 이야기 열심히
들어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한 소리 또하고 또하고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남이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쾌해 하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자신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

말로 보여주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많이 불행하다.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신이 만물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잘 된 이유를...
찾는 사람은 행복하고
안 될 이유만
찾는 사람은 불행하다.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 람은 불행하다.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 사람은 행복하고

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 사람은 불행하다.

남의 잘못을 잘 용납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의 잘못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무서워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차 탈 수 있는데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걸을 수가 있는데 차타는
사람은 불행 한 사람이다
.

- 좋은글 중에서 -

잠자는 공주 / 신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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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러시아 작가,1918~2008)은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암병동>에서 개인에게 발생한 암일찌라도 그 질병에는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극한 질병-암이나 그 밖에 모질 병-을 앓는 것이 그 사람이 처한 사회 환경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없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 사회인 이상 그 사람이 정치인이든 혹 연예인이든 혹 목사이든 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정몽헌 씨의 자살

최근 10여년 어간에 일어난 자살가운데 가장 깊은 사회적 의미를 수반한 사람은 정몽헌씨일 것이다. 대북 경협과 금강산 관광등의 사업 추진으로 주목받던 사업가이자 정주영회장의 아들로써 이른 바 '왕자의 난'을 주도했던 그가 검찰 조사를 받고 돌아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12층 사옥에서 투신 자살했다.
당시는 정상회담이 있은 후였고, 정치권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의 댓가로 지불된 이른 바 '검은 돈'의 출처가 정몽헌에게서 나왔다고 보았고, 결국 조사 과정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던 정몽헌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불과 56세였다....

2.안재환과 최진실의 자살

2005년 주홍글씨를 만들고 스토커에게 고생하던 이은주(당시25세)가 자살했다. 그 날은 2월22일이다. 그 전 주에 나는 인터넷에서 심한 모욕적인 명예 훼손을 당하고 괴로워 했던 때라 이은주가 자살한 그 순간의 고통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그리고 그 후 최근 발생한 안재환의 자살과 잇따른 국민 또순이라는 최진실(40)의 자살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나같이 교회에 다녔고, 장례마저 교회에서 예배로 드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행렬에 도대체 우리가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3. 생명의 존엄성

자살은 또 하나의 범죄임이 분명하다. 그 일로 어떤 심판을 받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인과 같은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살은 미화되거나 방조되어선 안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예계에서 이어지는 이러한 줄-자살(마치 한사람이 죽으면 또 죽고 하는)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고, 그 것역시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제는 마치 헐리우드의 스타들이 겪을 법한 심한 스트레스와 인기가 오르고 내리는 데 대한 불안, 팬(대중)들에게서 받는 칭찬과 비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진실은 그의 마지막 문자에서 '세상이 섭섭하다'고 했고 '내가 사채업자도 아닌데'하면서 진실이 왜곡된 것을 괴로워했다. 일설에는 이런 모함과 중상 모략에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자살을 택했다고 했다..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진실은 5년전 이혼과 슬럼프를 잘 이겼지만 계속 외로움이나 인기에 대한 강박으로 수면제없이는 살지 못했고, 신경안정제등을 많이 투여하거나 술에 의존했다고 지인들이나 언론이 밝힌다.

결정적으로는 당일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가라고 전문가들은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을 도대체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고, 그의 죽음은 어떤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것인가?

4. 모방자살-자살도미노 :베르테르 효과

이미 며칠 전부터 전국에서 욕실이나 화장실에서 최진실처럼 죽는 모방자살이 보도되고 있다.(연합뉴스) 비슷한 상황에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고 있지만 인터넷등에서 벌어지는 댓글과 '괴담'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70살이 다 된 트위스트 김이 댓글 때문에 죽을려고 했다고 한다. 이은주나 몇몇 자살한 연예인들이 공히 '살인 댓글'에 괴로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냥 받아넘기지만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주는 말... 그 말 한마디가 사람을 무너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범일 수도 있다.

5. 자살예방 캠페인과 교회가 할 일

이은주도 교인이었고, 최진실 안정환도 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살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교회를 다녔기에 더욱 양심에 고통을 받고 자신이 짓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괴로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양심의 고통이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양심도 진실도 없이 변해 가는 것은 아닌가? 갸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목매어 자살했다. 그에게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던 것인가?

전날 우리 여인들은 정조를 잃고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큼 정조와 생명을 동일시 했던 적도 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의 대표들은 자신이 망가뜨린 회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복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민영환(1861~1905)은 우국충정으로 민족의 비극인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보고 2000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쓰고 자결했다.

같은 자실이라도 다 각각 의미가 부여되는데....

생명이 번역하면 '살아라(生)는 명령(命)'이며 사명이다. 사명이 다하면 죽지만 사명이 다하지 않으면 살아서 끝까지 생의 준엄한 명령이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뜻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교회는 이런 믿음의 도리를 가르치고 적어도 한 번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인생(영혼)이 자칫 극단적인 선택(자살)을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사랑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꼭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자살하려는 사람이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이나 예수님 대신이라도 그 사랑을 보여준 '어떤 분-목사님'을 기억하고 기도했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그 영혼들이 죽어가면서 후회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당부한다.
어떤 사람이든 이 세상에 올 때는 불우하게 왔든 행복하게 태어났든 사람이면 모두가 존귀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울증이 심하면 정신과나 교회 목회자에게 상담도 받고 치료도 받아야 하는데 감추면서 끝까지 가둔다면 결국 어려운 지점에 가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자...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많고 고아도 있고 집도 없는 사람도 있고 지위도 없고 직업도 없고 노숙자도 있고 감옥에 갇힌자 들도 있고 등등 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견뎌내는 이웃들을 보면서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산다면 자살할 여유가 있는가? 왜 자살하는가? 살아야지 보람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좋은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와 형재(자매)들이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우리 주위에 나의 따뜻한 말 한디로 자살을 막을 수 있다면 꼭 사랑의 말,위로의 말,격려의 말을 하는 풍토를 만듭시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고통으로 어려움을 당한 연예인  최진실 안정환 이은주외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아멘넷, 글/ 김바울 중국자비량선교사
10월의 둘째 주말입니다
많이 들 힘드시죠?
한치 앞을 내다 보기 어려운,급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전혀 예측불허한 일들로 정신이 없습니다
한달 앞으로 다가 온 미국대통령선거도 그렇고 무엇보다 시시각각 변하며 요동치는 경제상황의 끝은 어딘지 도저히 짐작조차할 수 없는 때입니다
내노라 하는 세계적인 투자은행들의 줄도산과 주식의 끝없는 추락 등...
아침 신문엔 빅3,자동차업계의 대표적인 3사(GM,FORD,CRYSLER)의 도산 내지는 폐업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할 것없이,가진자나 없는 사람이나...걱정이요, 한숨뿐 입니다
 
20세기는 모든 면에서 일방적이고, 완전한 미국의 승리였다고 합니다
특히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절감과 유통혁신,노동자의권익을 통한 중산층의 확대 등으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초반에 일어나는 현상ㅡ 미국경기의 하락으로 인한 영향력감소 내지는 쇠퇴,EU의 통합과 영향력확대,중국,인도등 아시아 신흥국가들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잠재력ㅡ은 자유민주주의의 체계를 위협하며 새로운 질서나 제도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경제학자들,석학,투자의귀재들도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은 민초들이야...
 
오늘 아침에 펼친 성경구절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
              .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 내가 알았고...'(전3:1~12)
 
전도서의 저자가 깨우친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참 선이신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가운데 인생여정에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며...
 
   *지난 해 가디나장로교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신 서춘웅목사님께서 웹싸이트를 열었습니다
    신구약성경의 난제와 설교,목회칼럼과 질의응답을 하는 코너도 있습니다
    방문하셔서 축하해 주시고 또 귀한 말씀,성경의 풀리지 않던 궁금했던 점들을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www.revdavidsuh.com....입니다


글/김만니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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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Achilles)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한 신화적 인물로서 아버지 ‘펠레우스’(Peleus)와 어머니인 바다의 요정 ‘테티스’(Thetis)사이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을 불멸의 인간으로 만들려는 생각에 물에 담그기만 하면 불멸할 수 있다는 마술의 ‘스투스’(Styx)강물에 어린‘아킬레스’를 담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한쪽 발목을 잡고 물에 담근 후 다시 다른쪽 발을 물에 담그는 것을 그만 깜빡 잊어 버렸다.

때문에 ‘아킬레스’는 성장한 후 그 어떤 화살이나 무기에도 끄떡을 하지 않는 불멸의 영웅이되어 가는 곳마다 대 승리를 얻긴하지만 그에게는 약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의 다른 한쪽 ‘발목의 힘줄’(Achilles tendonitis)였다.

이것을 안 그의 정적 ‘파리스’(Palis)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아킬레스의 취약점인 ‘건’(발목을 받쳐주는 힘줄)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고, 결국, 정적 'Palis'가 쏜 독화살 한 개가 아킬레스의 발목 힘줄을 관통하므로 아킬레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쓰러져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Point는 '아킬레스’가 죽은 이유이다. 물론, 불멸의‘아킬레스’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독화살이라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취약점인 ‘발목 힘줄”이 적에게 노출된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우리자신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아킬레스건’을 사단에게 결코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

세간에서 한 때, 유명하던 목사님들, 유능한 영적 리더들이 왜 무참히 땅에 떨어지고 쓸어지는가? 또 온누리에 별처럼 밝게 빛나던 연예계의 몇몇 유명인사들이 왜 자살이라고 하는 마지막 보루를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택해야만 했던가? 그것 역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좌절의 쓰디쓴 잔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셔야만 하는 잔이라 여기고 능히 들이킬 수 있는 믿음의 힘, 요셉처럼, 욥처럼 오늘의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길러내지 못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도 모든 면에서 뛰어나 보였던 그들에게 오직 그 부분이 취약점이였고, 그들의 아킬레스 건이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찾아서 막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약성경의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택함을 입은 큰 능력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이방여인과의 사랑놀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삼손은 사단에게 코를 꿰여 두눈을 다 빼앗겼고, 결국 목숨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또 신약성경에서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의 열두제자중에서도 유능하여 재정출납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물질의 유혹 앞에서 여지없이 넘어져 버렸다. 어이없게도 그는 단돈 은 30냥에 스승인 예수를 팔았고 결국 목매어 자살함으로서 천추에 한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아킬레스건’은 어떤 것인가, 돈?여자?명예? 혈기? 교만? 이기적인 성격? 그 어떤 것이든지 상관이 없다. 우리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아킬레스건’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롬3:10-12절 참조)

문제는 나의 ‘아킬레스건’을 속히 찾아내어 주님께 갖다드리고 그 약한 부분을 막아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거기에 문제가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교활한 사단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내게 있는 나의 취약점을 사단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단은 그 부분을 쉴새없이 공격을 해대고 있음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취약점이라고 할 수가 있는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속히 찾아내어  주님께로 들고 나가 그 약한 부분을 주님의 보혈로 막아달라고 간구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베푸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0-12절 말씀)"

최송연/사모



        
6장 과대망상 (DELUSIONS OF GRANDEUR) 기름부음? 배교?

2008/10/07 15:04

복사 http://blog.naver.com/yoochinw/130035993214

6장     과대망상

Chapter 6   DELUSIONS OF GRANDEUR


[Acknowledgement: 이 장은 TLT의 들풀님께서 번역해 주신 부분입니다. 제가 한 번역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번역보다 훨씬 나은 줄로 압니다. 번역해 주신 들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3~4>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Manifest Sons of God)' 지지자들은 성도들의 휴거와 부활이 우리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올려질 때 구름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대신에,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이 지구에서 여기서 변형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영화롭게 될 뿐만 아니라 신격화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도들이 지구 상에서 영화롭게 되고 신격화 된다는 것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 지구 상에 건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것을) 끝마쳤을 때에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지금 교회가 이 위업을 달성할 때까지 "하늘에 붙들려" 있다.


성경은 말세의 교회를 사람들 중에 움츠러들고 경멸당하는 소수로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붙잡혀 있다고 명백하게 설명한다. 신약성경에는 확실히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이 정복하는 승리의 교회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계시록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부터 돌아왔을 때에 - 대환란의 끝에 - 그렇게 설명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신약성경에 있는 말세의 교회에 대한 성경적 묘사를 너무 패배적이고 도피적이기에 거부하면서, 그들은 힘으로 왕국을 들여오고 대환란 동안 교회의 모든 적들 위에 승리하는 군대적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당신은 매달려 있지 않을 것이다 -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적그리스도가 당신을 잡기 전에 지구에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면서. 주님은 영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고 당신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 - 심지어 이 지구 상 바로 여기에서 신격화 될 것이다. 당신은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다. 악한 자 - 기름부음에 저항해 온 가라지들은 주님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방해받음 없이, 당신은 그리스도의 회군(Corporate body, )으로 나아갈 것이며 정복하며 정복할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왕국들을 정복할 것이고 당신의 모든 적들을 발밑에 두게 될 것이다. 당신은 "흰말을 탄 자"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리는 슈퍼 사도와 대언자들의 그룹에 의해 인도될 것이다. 많은 기적과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서 이 통일된 '그리스도의 회군(corporate body)'은 복음의 실재의 세상을 확신시킬 것이다. 수백만, 아마도 수십억, 사람들이 전세계적인 부흥 안에 있는 왕국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 - 환란이 다가온다; 대환란, 그러나 우리는 불신하는 세상 위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수행할 것이다…" 등등의 거짓말을 한다.


이 아이디어는 '비전'의 결과로서 1948년의 늦은비 부흥 동안에 나타났다:

그 영은 전체 학교 위에 동시에 임했고 모두는 다함께 예언하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나타남은 이 세대의 마지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Manifest  Sons of God)'의 비전에 의해 동반되었다. 사람들은 이 강력한 군대가 자기 앞에 있는 모두를 정복하는 걸 보았다. 아픔과 질병은 모두 사라지고 있었고 모든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하는 힘 앞에서 흩어졌다.

나는 이 '비전'이 성경적 토대에서 거부되어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은 주님의 재림을 나타내는 표적들 중의 하나는 지구 전체를 통해 질병과 기근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탄생 고통들 중의 하나이다. 노동의 고통처럼 이러한 표적들도 휴거될 때까지 빈도와 강도에 있어서 모두 증가할 것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태 24:7>

(영문성경에는 '기근과 역병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번역되어 있음/역자)


에이즈의 무서운 확산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말세의 시기 최근에 공표되었고 거의 박멸된 전염병들의 출현을 보았다. 사람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결핵, 말라리아, 콜레라, 그리고 다양한 다른 질병들이 다시 되돌아 왔으며 그것들을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던 약품들에 내성을 갖고 있다. 새로운 바이러스들의 출현은 항상 발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한타 바이러스나 무서운 에볼라 바이러스이다.


둘째, 이 '비전'은 신약성경에 표현된 대로의, 시대의 마지막에서의 사탄과 그의 군대에 대한 묘사와 모순된다. 이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사탄은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활용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을 신약성경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경고한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 살후 2:9>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표적은 미혹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세기가 증가하는 미혹은 표적들과 기사들로 특징지워진다. 사도 바울은 예언하였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3>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얀네스와 얌브레스에 비유하였는데 그들은 파라오의 궁정 마술사들이었고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의 가짜 기적들로 맞섰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 딤후 3:8>


이 사기꾼들은 그들의 사탄적 가짜 기적들, 표적들, 그리고 기사들로 "심지어 택함을 받은 자"까지 "가능하면" 미혹하려고 할 것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 참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신실하게 남을 것이기 때문에 미혹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짜로부터 진짜를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일까? 단순하게 진리, 즉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다.


따라서 말세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상반되는 이러한 두개의 모순은 이 비전이 거짓 비전이고 육체나 속이는 영에 의해 영감된 것이라고 명확하게 나타낸다. 그것은 심판되었어야 했고 거부되었어야 했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사람들은 말세의 교회에 대한 성경적 시나리오에 반항하고 있었다. 소수에 대한 이 묘사는 육체에 애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스배틀포드의 형제들에게는 우울하고 패배자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 '비전'을 두 팔을 벌리고 맞았으며 그 위에서 확장하기 시작했다. 오레곤주 포트랜드의 토마스 와이엇트라는 이름의 목사는 수년전에 비슷한 비전을 가졌었다고 주장했다:

'비전' 안에서 그는 교회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부흥을 향한 패턴을 보았다. 그는 어떻게 이 부흥이 조그맣게 시작해서 수 개월 정도 이내에 전 지구로 퍼졌는지 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생명의 모든 걸음으로부터 와서 강력한 군대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스스로를 늦은비 운동의 사도들과 대언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강력한 정복하는 군대 -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Manifest  Sons of God)'의 선봉장이라 보기 시작했을 때 엘리트 성향은 빠르게 형성되었다. 죠지 워낰은 그의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에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기 손가락을 그리스도에 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하라고 주신 일들을 끝마치는 데 기꺼이 자기 자신을 주었다. 그분의 많은 형제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을 대적하여 펼쳐진 어둠의 모든 권능에 대해 그들은 완전히 승리할 것이다 - 교회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다가오는 환란에 결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가운데서 수년 동안 신실하게 사역하셔야 했고, 겟세마네의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고, 로마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 했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셔야 했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먼지와 감금의 폐허로부터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머리로 인식되고 그분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분과 함께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 신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 우리는 확신한다. 떨어져 나감은 어떤가 하고 사람들은 논쟁할 것이다. 배교는 어떤가? 이것은 말세에 교회의 상태일 것이지 않은가? 물론 사도가 예언한 대로 배교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확실히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참 교회,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아들들, 극복하는 자, 신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람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에베소서 3:10>

엘리트 즉 나타난 아들들(manifest sons)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권능과 권위를 시행하면서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회군(Corporate Body)'이 될 것이다. 빌 해먼은 이렇게 썼다:

교회는 항상 군대였으나, 적극적인 그리고 소극적인 냉전(cold wars)과 열전(hot wars)의 상태를 겪어왔다. 교회는 군사적 군대로 다시 활성화되었고 "위대한 회복의 시기"가 시작된 이래 열전(hot war)에 착수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교회]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그분께서 그분의 성도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시는 때]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세상에 대해서는 어둠과 희미함의 날이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새로운 날의 새벽일 것이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교회-군대가 그분의 횃불이 된다]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들의 회원 사역 (membership ministry)을 알며]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신실하고, 겸손하며 그들의 소명에 일치하는] 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일치와 사랑]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자기의 위치와 실행에 신실한]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자아로의 죽음, 생명의 충만함 그리고 말씀-검을 가진 자] 성중에 뛰어들며 성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 요엘서 2:1~2> [이것은 주님의 교회-군대에 대한 대언자 요엘의 묘사이다] ([ ] 안의 글들은 해먼의 것임)

'요엘의 군대'라는 이름이 은사주의자들 사이에 고착된 이후에, 나는 이 관점으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의 '말세의 군대'를 요엘의 군대로 언급할 것이다. 이 예언이 진정으로 교회를 언급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예언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은 계시록 9:1~12 에 오리라고 예언된 군대와 같은 것을 묘사한 것임이 드러난다.

 

※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계 9:7>

※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요엘 2:4>

 

※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계 9:5>

※  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요엘 2:6>


※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계 9:2>

※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요엘 2:2>

 

※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계 9:8>

※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요엘 1:6>

 

※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계 9:9> 

※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요엘 2:5>

 

명백하게 이 두 개의 군대는 단일하고 같은 군대이다. 요엘의 예언의 여러 가지는, 그것은 묘사된 대로의 문자적 기병의 군대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말(馬)들은 벽을 오르지 않고 지붕에 올라가지도 않으며 도둑처럼 창문으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요엘은 요한이 계시록 9장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사탄의 군대를 묘사하고 있다. 요엘의 군대는 사탄의 군대이다!


그러면 왜 또는 어떻게 늦은비 주창자들은 그 안에서 교회를 볼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설명한 것과 같은 힘있는 정복의 교회를 신약에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최소한 우리 주님의 재림 후까지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구약의 많은 예언들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것에 의지하도록 강제된 것이다.


늦은비 주창자들은 말세의 교회에 대한 그들의 정복적 묘사를 그리기 위하여 소위 '대체 신학'이라는 것에 의지해야만 했다. 대체 신학은,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국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국가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모든 예언들이 이제는 교회에 적용된다. 이러한 예언들은 '비유적'이거나 '영적'이 되어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제일의 의미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교회에 적용하고 - 그러므로 그리고 그렇기에 사탄의 군대가 말세의 승리의 교회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고 있다. 국가 이스라엘 그리고 국가 이스라엘에만 적용되는 예언들이 비유적이 되고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천년 성전의 문지방 밑으로부터 동쪽으로 사해까지 흐르는 강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은 토론토와 펜사콜라에서의 현재의 부흥을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토론토 공항 크리스찬 협회의 부목사인 마르크 듀폰(Marc Dupont)은 이렇게 썼다:

일반적으로, 에스겔 47장에 묘사된 생명의 강과 같이, 성령님의 현재의 운동 (일부에서 '토론토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 은 발목 수준의 생명의 부흥이다 - 영적 각성을 불러오는.

에스겔(36~39장)에 있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들 - 요엘의 군대의 나타남으로 결과되는 교회의 말세의 부흥이 된다. '부흥' 리더 잭 디어 (Jack Deere)는 주장한다:

모든 사람 - 내가 아는 모든 학자, 내가 아는 모든 주석가 - 은 에스겔 37, 38, 그리고 39장의 이러한 말씀들이 모두 말세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모두 그것은 성령님의 말세 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생명없는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떻게 그게 시작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저 하늘에서 한 말씀만 하시면 될 수도 있다. 그분께서 우리들 가운데서 시작될 부흥을 단순히 야기하실 수 있다. 그분께서 성령님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죄에 대한 확신을 단순히 주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분께서 하시려는 방법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대언자(선지자)를 세우신다. 여기에서 뼈에 생명을 불러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대언적 말씀이다. [사람의 대언자, 그리고 나서 그것이 발생한다. 대언 그리고 나서 생명이 오는 방법의 각 단계에서. 참고번역 - 사람의 아들(인자)을 대언(예언, prophesy)하라, 그러면 그렇게 된다. 각 단계마다 대언하라. 그러면 생명이 온다.] 그리고 나면 그 대언의 결과는 무엇인가?  거대한 군대!




황금빛 잎새들의 슬픈 노래가

흐르는 가을 들녘 ...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스산한 바람 핥으며 지나가고...

 

서걱거리며 흐느끼는 억새 소리

먼 길을 걸어온 삶의 탄식이런가...


그대 

봄, 여름, 가을,
그렇게...

온 몸의 진액 긁어모아

알알이 영근 열매

생명을 나누어 주었건만

 

이제는

나뭇잎조차

지탱하기 힘 들어

모두 떠나 보내야만 합니까

 

그대여,
오늘 떨어지는 낙엽을

슬퍼하며 울기보다는...,


차라리,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는

화사한 마음 품고, 
앙상한 팔이나마
하늘을 향해 곧게 펴세요.

하늘은 언제나 거기 있답니다.
그 하늘과 함께 춤추며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뎌내기 위한 준비라도
착실히 하노라면,

잎새 모두 떠나버린 가을이라 하여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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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시작은 누가 했습니까 ?  예수님이 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  예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을 불러서 제자를 삼고 가르키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 도구로서 사용될 뿐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역과 범위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사람이 봉사, 충성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배우겠습니다


1) 예루살렘 교회

    제일 처음 모인 교인들은 예수님의 12 제자입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모였습니다  산과 들판과 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시작하는 초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강림하시기 전에 120 명이 모였습니다 (행1:15)  그 다음에 3천명이 모일때는 베드로가 설교를 한 이후였습니다 (행2:37-41)  그 다음은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을 갖게 된 수가 5천명 정도 되었습니다 (행4:5)  처음에 제자를 삼고 120명이 모였으며 믿은 사람의 수가 3천명 그리고 5천명 그 다음에는 남녀의 큰 무리가 모였다 했습니다 (행5:14)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죽은 이후에는 큰 무리가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이 나옵니다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느니라"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읍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말씀안에서 가르칠 때 우리 교회도 성장하려면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교회가 잘 성장합니다

  (2) 성도끼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읍니다  떡은 말씀의 떡으로 영적인 떡을 떼어 말씀을 나누어 먹는 것이며 거룩한 떡인 성만찬식을 말합니다

  (3) 기도를 했읍니다  행6:7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랬읍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 말씀을 기초로 성장하고 배우고 가르키고 성만찬의 떡을 떼고 기도하는 것을 전무했다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좋은 교회입니다  다음에는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배우겠습니다


    처음에 이 땅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예수님이 시작하였읍니다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시어 하나님앞에 모여 찬송과 영광 드리며 모든 사람들과 떡을 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모임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교회도  세상에 기울어지지 않고 외관상 나타냄으로 사람 중심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닮아가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길 기도합니다 (09/06/08 새벽기도회 말씀요약)


정리:비둘기 집사님, 감사합니다 ^^*

어느날 한 방송뉴스를 보니 "매니페스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화면에는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라 쓴 현수막 앞에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서있었다. 현수막에 쓰인 14자 가운데 9자가 영어다.

네트워크는 대충 '전국망'이란 뜻으로 잘 알려진 영어라 치더라도 매니페스토는 처음 듣는 소리다.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가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나도 '매니페스토운동'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운동인지 몰랐다. 신문에도 똑같은 제목이 붙어있는데, 기사를 읽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매니페스토] 영국영어에서만 '공약'... '공약실천 확인운동'이 낫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당들과 선거 후보자의 공약이 나중에 정말로 실천되는가 확인해보자는 것이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 내용이라면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해도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영어를 섞어'매니페스토운동'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정치적 선언'이란 뜻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공산주의 이론가 맑스와 엥겔스의 합작품인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의 '선언'이 메니페스토다. 영국에서는 '선거공약'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미국영어에서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선거공약을 '플랫폼(platform)'이라 한다.

영국에서만 통하는 단어의 의미를 가져와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 것도 그렇지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는 명칭을 굳이 왜 쓰는지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고치도록 권한다. 꼭 영어가 들어가야만 품위와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한국 지식사회에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런 건 언어적 사대주의다.

[DTI] 정확히는 'DTIR'... '소득대비부채비율'이 쉽고 정확

또 다른 예를 보자.

한 방송뉴스에서 "앞으로의 주택 대출은 기존의 집 가치 대신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 완전히 바뀌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뉴스에서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DTI는 '소득수준'을 가리키는 영어 약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DTI란 영어를 쓸 필요가 없을 터인데, 계속 DTI를 네번이나 더 썼다. 그러면서도 DTI가 무엇인지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DTI의 뜻을 아는 사람만 이 뉴스를 듣고 모르는 사람은 듣지말라는 투다.

DTI는 정확히 'DTI비율'이라고 하든지 'DTIR'이라고 써야 맞다. 'DTIR'은 주택담보대출 신청자의 소득대비 부채비율(Debt To Income Ratio'의 약자다. 여기서 부채란 대출자가 연간 상환해야하는 원리금 합계를 가리킨다.

DTIR을 한국에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소득대비부채비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번역이 될뿐만 아니라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DTIR이 대개 30%정도다. 예컨대, 연간 소득이 10만불인 사람이 집을 사려고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할 때 그가 1년간 모든 금융기관에 갚아야할 돈이 3만불이상이 되면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웰빙] 먹어도 살 안 찌면서 영양가도 있어야 '웰빙'?

방송언어에 있어서의 외국어 특히 영어 남용의 예는 '웰빙'과 '리베이트'에서도 나타난다.

'웰빙(well-being)'은 못 사는 것의 반대인 잘 사는 것, 아픈 것의 반대인 건강,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 것의 반대인 안전이란 뜻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웰빙이 '먹어도 살 안 찌고 영양가 있는'이나 '잘 먹고 잘 사는'이란 뜻으로 쓴다.

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처럼 새삼스럽게 '웰빙'을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이유를 알수가 없다.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저 영어가 들어가야 그럴듯해서 웰빙을 쓰는 것 같다.

[리베이트] 합법적인 돈이 왜 '리베이트'지?

또 '리베이트(rebate)'는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불법적으로 은밀히 건네주는 돈'의 뜻으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공무원이 업자에게 높은 가격으로 수의계약을 해주고, 업자로부터 사례금조로 몰래 받는 돈을 리베이트라고 쓰고 있다. 이런 검은 돈은 리베이트가 아니라 '킥백(kickback)'이라 한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외국어로 대신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쓰자는 얘기다.

[로드맵] '청사진' '지침' '길잡이'가 더 좋다

방송은 물론 신문도 '로드맵(roadmap)'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데, 청사진이나 지침, 길잡이같은 말 놔두고 굳이 일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로드맵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최근에 한 TV 기자는 "통일장관의 이번 발언이 핵문제 해결에 레버리지로 사용하려는 의도인지 불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지렛대'란 좋은 우리말 놔두고 왜 꼭 '을레버리쥐(leverage)'란 영어를 발음을 틀리게 하면서까지 쓰는지 모르겠다.

[AI] 한국만 쓰는 정체불명의 약자

얼마 전 조류독감이 국내에서 발생했을 때 한 방송사는 보도 중 계속 'AI'란 영어만 사용했다.

'AI'는 '에이비언 인훌루엔자(Avian Influenza)' 즉 조류독감의 약자인데, 미국 방송 아나운서들도 이를 줄여서 쓰지 않고 있다. 토플성적 세계 최하위권의 한국에서만 'AI'라고 줄여 쓰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정확해

요즘 언론은 또 "야당 대선 주자들이 '서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는 미국의 '네가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에서 잘라온 것 같은데, 이것도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알아들을수 있는데 굳이 영어를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영어 네가티브 캠페인 자체도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네가티브(negative, 부정적)의 반대는 포지티브(positive, 긍정적)이다. 경쟁자의 결점이나 부족한 점을 부각시켜야 자기가 이기는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어떻게 긍정적으로만 할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보다는 우리말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더 정확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골 세러모니]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없는 말

베이징에서 개최된 동계 아시안게임 시상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땅"이라고 쓴 카드를 들고 '깜짝쑈'를 벌였을 때 한국 언론은 '백두산 세리모니'라고 보도했다. 또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골 세리머니'라고 보도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세러모니(ceremony)'란 기념식 같은 '의식'을 가리킨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살았어도 나는 세러모니가 '골 세리머니'에서와 같이 쓰이는 예를 본 일이 없다.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쓰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영국인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골 세러모니'는 들어본 일이 없다 한다.

'세러모니' 대신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축하)'을 쓰면 또 모르겠는데, 세리머니라니 적당한 단어 같지 않다. 차라리 '깜짝쑈'란 말로 대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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