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위 ‘부흥의 물결’ 이라는 명제 하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치유사역’, ‘입신’, ‘금가루현상’, ‘ 죽은 사람 수십 명을 살렸다’ ‘하늘에서 금발의 미녀 천사가 (싸구려)보석을 떨어트렸다’ ‘초자연적 능력’, 등등…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야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경을 신앙 생활의(Cannon)잣대로 알고 믿는 성도 중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단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함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인터넷에 올려진 이런 말들과 자료들을 접했을 때, 혹시, 19세기에 일어났던 그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런가?…사실, 기대하는 마음과 긍정적 시각으로 그 사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또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아주사 거리의 부흥이 우리 세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현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부흥의 불길이란 것에 무언가 예감이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대로 뭉쳐서 예언이란 이름으로 서로서로 올려주기도 하고 세워주는가? 하면 성경에도 없는 ‘입신’이란 이름 아래 천국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드나들고, 각종 보석(싸구려)들을 천사가 떨어트렸다고도 하고… 심히 수상쩍은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봅니다. 글쎄요, 그런 조잡한 일들이 과연 성서적이며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은사(선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글, 입신상태의 말,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다 똑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그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 급)

2.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 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 및 직분 자들

3.‘샤머니즘’적 신앙, (무당 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것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사단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 차,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드기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본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로 신비주의 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듯,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듯 보이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대처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한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 것 (계22:18_19절, 벧후1:20절 참조)

2.이적과 기사가 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그 말씀에 따라서 반드시 영을 다 믿지 말고 말씀을 토대로 검증할 것 (요1서4:1절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그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말 것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할 것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 쳐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풀이할 때,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눅24장32절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볼 때,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입신’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 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구태여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들의 꿈에나 혹은 비몽사몽 간에라도 나타나셔서 통곡하셨다면, 그 이유가 오직 사람들의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요, 사람의 영혼을 전도하지 않는 게으름과 주의 종들의 시기질투로 말미암아 전도문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만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그 이외에 어느 것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시게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설사 통곡하시는 주님을 환상에서나 비몽사몽 간(저 역시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에 뵈었다고 하여도 그 이유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더 신령하다고 착각을 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떨어진 자요 그런 영혼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전락된 상태일 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무조건 모든 기적과 이사는 폐지되었다 주장을 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이적과 기사가 다 검증없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모두어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교회가 다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주인이 되심을 믿고, 주님의 청지기로서 서로 섬기며 봉사해야 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또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어떤 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허락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고,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신령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습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 1)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 15)


   글: 별똥별/최송연


    

   


고구려의 기술력

1. 고구려의 철기술

고구려가 위치한 요동지방 특히 안시성 일대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철광산이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철기 문화가 빌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철기술은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
아차산성에서 대규모 고구려 유적이 발굴되었을 때,
고구려의 무기가 온전한 상태로 발굴이 되어서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는데,
고구려의 철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수했습니다
도끼(부월)를 분석해 봤는데 뒷부분엔 연철 앞부분엔 강철로 만들어서 그 기술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화살촉을 분석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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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중 놀라운 사실 - 평균 탄소함유량 0.51%는 현대의 특수 강철의 제련도와 대등하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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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반 화살과 어느정도의 차이를 낼까??
고구려 전통활인 맥궁과 가장 비슷한 각궁에 실어서 일반 화살과 대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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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화살이 함석판 4개를 관통한 것에 비해, 고구려 화살은 다섯장을 가뿐히 관통..


2. 고구려의 갑옷

뭐 고구려의 갑옷은 튼튼해 화살도 튕겨낸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보았는데, 실험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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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리에서 동시대의 갑옷 복원품과 대조해 화살을 쏘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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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일반 갑옷은 당연히 뚫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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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갑옷... 눈비비고 다시 한번 보자. 헉.. 튕겨 나온다.


3. 고구려의 성벽

수양제가 113만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때,
그 당시 위진 남북조를 통일할 때 쓰인 최첨단 공성무기들을 모조리 끌고 와서
6개월동안 요동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죠.
투석기를 수백대를 비롯해서
동차(橦車 : 큰 궤에 바퀴를 달고 그 속에 들어가서 쇠뭉치 같은 것으로 성 밑을 쳐서 파괴하는 것)같은
성벽 파괴용 최첨단 무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동안 함락을 못시켰을까?
그정도 기간에 113만이면 성을 무너트려 버리는것도 쉽게 가능했을 텐데..
답은 고구려의 축성기술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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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의 기본 벽돌 쐐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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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안에 돌들을 촘촘히 박아서 완성

중국의 성과 대조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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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 투석기나 동차같은공성 무기로 큰 충격을 받았을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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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벽은 끄덕없지만, 중국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실제 기록에도 투석기와 동차로 요동성의 성벽을 공격을 해도 하루만에 복원이 되니,
수양제의 멘탈 붕괴에 크나큰 일조를 했다는 이야기..

그나저나 우리 정부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중국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통채로 먹으려고 동북공정을 획책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리요...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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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인간의 뇌와 컴퓨터

앞서 말한 대로 근육의 활동은 근세포에서 나오는 칼슘이온이 마이오신과 액틴 단백질을 끌어당기고 놓도록 조절함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비슷하게 두뇌의 활동도 신경세포에서 일어나는 이온과 신경전달물질의 움직임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미세한 전류전자파의 흐름, 곧 뇌파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두뇌의 활동은 특정부위별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머리에 전류감지장치를 붙여서 측정하면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대략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환자의 뇌경색이나 뇌손상 같은 두뇌의 문제가 어느 부위에 있는지도 추정해낼 수 있다. 이것이 병원에서 하는 뇌파검사이다.

뇌파는 0.5~50 헬츠의 매우 느린 진동수의 전자파로 발생한다.
(헬츠: Hz, 1초에 1회의 진동수를 가지면 1 Hz이다.)
정신을 집중할 때는 14~30 헬츠 정도의 주파수가 나오고 격앙되면 더 높은 주파수가 나온다. 눈을 감고 쉴 때는 8~13 헬츠의 알파파가 나오고 수면상태에서는 0.5~4 헬츠의 델타파가 나오고, 꾸벅꾸벅 졸거나 얕은 수면상태, 또는 꿈을 꿀 때는 4~8 헬츠의 세타파가 발생한다.

뇌파의 측정을 더욱 정밀하게 하게 되면, 예를 들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때는 어느 부위에서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 오른발을 내디딜 때는 어느 부위에서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 왼팔로 라켓을 휘두를 때는 어떤 부위에서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도 알 수도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생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즉 뇌파를 컴퓨터에 기억시키고 머리에 연결된 전극으로 뇌파를 보내면 컴퓨터가 이를 식별하여 연결된 물체에 움직임의 명령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의 주인공 마르탱은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하고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방대한 외부정보를 얻고 소통한다.

실제 이러한 시도와 실험은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우스를 조작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커서를 움직이고 컴퓨터게임을 한다든지 자판을 두드리고 기계를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뇌-기계접속(Brain-Computer Interface, BCI)라고 한다.
이 기술은 나아가서 전신마비나 사지불구인 사람에게 인조 팔과 다리를 만들어 달아주고 이를 머리에 부착된 뇌파감지기를 통하여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머리 바깥에 전극을 부착하는 방식은 그리 정밀하지 못 하기 때문에 두개골 내부, 곧 두뇌에 직접 전극을 심는 방법이 고려된다. 그렇지만 민감하고 연약한 두뇌에 직접 전극을 부탁하는 것 역시 의학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 또한 머리의 외부에서 근적외선을 뇌로 쏘아 분광기로 뇌혈관의 산소량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뇌의 의사를 감지하는 기술도 시도되고 있으나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몇 년 전 네이처誌에 보도된 브레인게이트 이식실험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5년 전 사고로 척수가 잘려 전신마비가 된 20대 매튜 네이글은 브라운대 뇌과학자 죤 도나휴 교수가 개발한 100 개의 전극이 달린 브레인게이트 칩을 뇌 속 운동피질에 이식했다. 그리고 네이글은 ‘움직이겠다.’는 생각만으로 허리를 굽히거나 의수를 움직이는 등 16가지의 움직임을 해낼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기술은 사이보그로 연결된다.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오래 전 재미있게 시청하였던 ‘600만 불의 사나이’와 ‘원더우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SF 영화에 등장하는 초능력의 주인공들을 떠올릴 것이다. 과연 뇌과학의 발달은 그런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조팔과 인조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뇌과학기술은 ‘생각’을 감지하여 컴퓨터로 옮기는 게 아니라 단지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인 뇌파를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뇌의 서로 다른 움직임이라도 거의 같은 뇌 부위에서 거의 같은 뇌파로 나타날 경우 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두뇌의 모든 부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과 지시를 뇌파만으로 분석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수천, 수만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움직임과 수행지시를 뇌파만으로 수행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SF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수준의 사이보그 또한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과 차이가 없는 빠르고 정교한 뇌파작동장치가 가동되려면 뇌의 각 부위를 엄청나게 세분하여 전극을 삽입해야 하고 슈퍼컴퓨터와 정교, 복잡한 기계장치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를 들어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으려면 엄청난 강도의 강철근육과 강철뼈도 필요하고 그 힘을 만들어내는 기계장치, 초음속에도 타지 않는 피부.... 이런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빠르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사이보그도 뇌는 인간의 뇌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뇌는 사이보그의 그러한 격렬한 움직임에 남아나지를 못 할 것이다.  

오늘날 초고속연산과 무한정에 가까운 기억정보능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여 이제 바둑과 체스게임에서까지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뇌를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뇌와 컴퓨터는 다르다.

컴퓨터는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고 연산을 수행하는가?
그것은 컴퓨터가 제아무리 많은 기억용량을 가진다 해도 기본적으로 0과 1의 조합으로 신호를 저장하는 기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영상이나 생각을 기억하는 기능이 없다. 다만 검고 흰 두 종류의 바둑돌을 사용하는 것처럼 ‘011001110’식으로 반도체 기억소자를 감응시켜놓았다가 이를 끌어오거나 연산시켜 작동시키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계덩어리일 뿐이다.
아름다운 영상이라도 그 영상을 수많은 화소로 쪼개고 각 화소별로 밝기와 색깔을 0과 1의 신호로 변환하여 저장하였다가 이를 끄집어내어 재생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컴퓨터일 뿐이다.

지능을 갖춘 컴퓨터? 생각하는 컴퓨터?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많은 정보를 분류하고 세분화하여 가장 나은 결론에 도달하도록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입력해서 어떤 질문에 대하여 미리 입력된 해답 중 하나를 찾아내도록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컴퓨터가 아무리 화려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아무리 뛰어난 대답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10010001110...’으로 기억시켜놓은 기계적 신호를 조합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컴퓨터의 기억은 사실 기억이 아니다. 신호의 저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기억 자체의 기억이다.
인간이 자신의 뇌의 뉴런에다 입력시켜 기억하게 하는 그 기억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저장되며 또한 도출되는지는 현대과학이 풀어내지 못 하는 신비다.
또한 1,000억 개의 뉴런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는 끝없는 기억과 사색과 명상의 세계는 컴퓨터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생명과학자들은 DNA의 염기서열이 ATGC라는 네 가지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에 이 네 가지의 순열조합이 유전정보를 이루어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설사 ATGC, 네 가지 염기서열이 조합을 이루어 유전정보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 저장형태는 컴퓨터 기억소자처럼 0101의 단순한 On-Off 식 배열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비밀은 현대과학의 접근을 허용조차 하지 않고 있다.

뇌세포의 기억과 DNA의 유전정보, 그것은 어떻게 어떤 형태로 입력된 것일까? 이 놀라운 아이디어와 설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대체 이 신비한 생명체를 만들고 그 정보를 입력한 이는 누구일까?

뇌세포만 보더라도 진화가 허구라는 사실은 또 드러난다.
인간의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식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사고하는 기능일 가진 것은 오직 뇌세포뿐이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처음에 생겨난 아메바로부터 진화가 시작되었다면 그 처음 아메바는 지능을 가질 수 있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저장 세포는 누가 발명하였단 말인가?
지능 없는 아메바가 지능 있는 아메바를 발명했단 말인가?

기억 없는 단순생명체 아메바가 진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의 저장기능도 없는 아메바가 어떻게 경험을 살려 개선을 하고 용불용, 자연선택을 해가면서 진화를 한단 말인가?
수십 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로 이루어지는 DNA에 그 신비한 유전정보를 담는 일이 도대체 아메바에 의하여 가능하단 말인가?
혹시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에 원래 유전정보가 들어있었다고 우길 것인가?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가 ATGC로 그렇게 늘어서서 연결만 되면 유전정보가 저절로 생겨난다고 우길 것인가?

진화론자들이 진화를 주장하려면 가장 먼저 유전정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이 시작되었는지, 또한 기억이라는 신비한 생명현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진화야, 제발 우기지 좀 말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물

       

       한 어머니가 처음으로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을 때, 유치원 교

      사가 말해주었다.

       "아드님한테 다동증(多動症) 증상이 있는 것 같아요. 자리에 앉

      아서 채 3분도 견디지 못하는 걸요.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선생님이 엄마한테 무슨 얘기 했어?"

       순간 어머니는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솟구쳤다. 반 아이

      40명 가운데 유독 자기 아들만 선생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우리 아들을 칭찬하시더구나. 단 1분도 자리에

      앉아있질 못하던 애가 지금은 3분 동안이나 견딘다고 말이야.

      다른 애 엄마들도 모두 부러워하더구나. 반 아이들 가운데 우리

      아들이 제일 조숙하다고."

       

      그날 저녁, 아들은 평소와 다르게 어머니가 일일이 먹여주지

      않고도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부모 회의에서 선생

      님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번 수학 시험에서 아드님은 전체 학생 50명 가운데 겨우

      40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혹시 아드님의 지능지수

      가 낮은 게 아닌가 의심되네요."

       

      교실을 나서면서 어머니는 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마주 앉은 아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무척 기특해하더구나. 워낙 머리가 좋

      아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네 옆 단짝 정도는 이길 수 있겠다더구

      나. 그 아인 이번에 겨우 21등을 했다면서?"

       

      그 말에 아들의 눈에는 금세 정기가 감돌았다.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졌으며, 이튿날엔 평소보다 일찍 학

      교에 갔다.

       

      아들이 커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부모회의에 참석한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호명하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회의가 다 끝나도록

      아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가 하고 묻

      는 그녀에게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성적으로는 아드님의 고등학교 입학은 아무래도 벅 찰 것

      같습니다."

       

      학교 문을 나서니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길에서 어머니가 아

      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너한테 아주 많은 기대를 하시더구나.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겠다고 말이다."

       

      그 이듬해 아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3년 후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아들에게 왔다

      가라는 전화가 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대학

      에 합격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얼마 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명문 K대학 이니셜이 붙은 서류

      봉투를 어머니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홱 돌려 자기 방으

      로 뛰어들어가더니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뒤쫓아간 어머니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이 기쁜 날 울긴 왜 우냐?"

       

       "엄마, 난 내가 머리 나쁜 애라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엄마가

      나를 그토록 믿어주셨기에······."

       아들의 말을 들으며 어머니는 지난 10여 년간 가슴속에 혼자

      묻어두었던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희비가 엇갈린 맑

      은 눈물이 두 손에 받쳐든 합격통지서를 적시고 있었다.

       

       

      **

       하늘엔 별이 있어 아름답고,

      땅에는 꽃이 피어 아름답지만

      사람에겐 사랑이 있어 아름답다.

      -괴테

       

       

      출처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랑(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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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분주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과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의 싱그러움 속에 잠깨는 작은 새들의 문안 인사가 사랑스럽습니다. 희망을 그린 하루가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 질 것들을 예감하면서 그대들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대문에 붙여 놓은 광고지를 살짝 떼어내며 힘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만큼 작아지고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행복 또한 초라한 누더기 입고선 추운 겨울벌판 같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하루는 자신을 위하여 불평을 거두고 마음을 다스려 사랑과 희망의 시선으로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 보셨으면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환경에 굴함 없이 간직한 꿈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향하는 길에서 지쳐 멈춰서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로 또 다시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의 불씨를 끄지 않은 한 닥친 역경과 시련마저도 그 불꽃을 강하게 피우는 마른 장작에 불과 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인격을 지닌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고 희망을 그려 가시는 너그럽고 자랑스러운 하루였으면 합니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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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평하고 멸시하고 천대하여도
겸손은 나를 평온케 합니다. ”  -앤드류 머레이-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기꺼이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씀에 복종하셨습니다.
(빌2:9절)
 
포기하심, 종이 되심, 죽기까지 복종하심....
큰 울림이 되어 내 영혼을 마구 뒤흔들며
폭풍처럼 휩쓸고 밀려오는 새벽
이른 아침입니다.
 
겸손은 마음에 온전한 평온을 말합니다.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내게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나는 과연
슬퍼함 없이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는지,
종의 형체란 엄청난 자리에까지 내려가서도
실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신 것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마음이 되어
그 말씀에 복종할 수만 있다면…

간절한 소원과
좁혀지지 않는 현실의 괴리감이여

그분을 사랑하는 나는, 적어도,
교만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장담했었는데…
 
그런데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
이것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주 슬퍼하고 자주 낙담하는 내 모습,
포기해야 할 때면 늘 안달했던 내 모습
억울한 말을 들을 때면
그 밤이 하얗게 지새도록
뒤척이며 잠 못 이룬 날이 또 얼마던가….
 
그래, 바로 그것
내 이면에는 나도 알지 못하는 교만이
 가만히 둥지 틀고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겸손이란
그럴듯하게 포장된 외면적 겸손,
위장된 겸손일 것뿐이었습니다!
 
지성(知性)으로 위장되고,
믿음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고….
 
성령님께서
나의 위장된 겸손의 실체를
 밝히 보여주신 엄청난 축복의 새벽입니다.
 
오, 나의 주님…
어이없이 짓밟힌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교만이었습니다.
 
내 자리가 너무 힘들다고
낙심한 그것이 교만이었습니다.
 
내가 겸손한 삶을 살고 있노라고
착각하는 것 역시 교만입니다.
 
난, 정말 예수님을 닮고 싶은데...
 주님의 그 진실한 겸손을 온전히 닮고 싶은데...

험난한 그분의 십자가를 따르노라 말하기 전
가장 쉬울 것 같은 겸손 하나조차
온전히 따를 수 없는 자아(自我)의 벽이여...

오늘도
부족한 영혼 탄식하며
 능력 주시는 주님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7: 24-25상)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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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는 신학자의...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 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버림받은 심령이다.


둘째,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된다.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와야 한다.

이것이 안 들리는 사람이 저주받은 사람이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원망과 불평 뿐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노라.” (빌 1:4)

 

생각할 때마다 원망하고 분하고

한이 맺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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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는 전기와 같다 
                                     

    전기가 지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와 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어둠은 물러가지 않고 불빛은

    밝혀지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이와같이

    항상 우리의 생활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주여'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은 막이

    생겨서 어려운 현실에 접하게 된다. 만일 어두운 방에

    앉아서 스위치를 누를 생각을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하고....

     

     

    나에게만 이 어두움이 유독히 기습한다고 실의에 빠져

    남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얼마나 우매한

    일이 되겠는가.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미쳤고

    스위치만 누르면 빛이 방안에 가득히 비치도록 구조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어두움을 운명으로 체념 해버리는 것은 그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 전기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영향력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기도'라고 하는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것이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문을 열게 되고,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할 속에 이끌어 오게

    되며,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소관으로

    넘겨드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우리 생활

    속에 광명이 있게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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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세월을 두고,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서로서로를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무엇보다도 말세적 징조의 하나겠지만, 성령을 가장한 사단의 장난 또한 극심하다. 하여,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과 혼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실제 성령님의 역사로 주께 올리는 영의 기도는 결코 무아지경이 되거나 정신을 잃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아니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28절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했고,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 (이성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그 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 全能) 하나님 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나 분명한 영적 언어임이 확실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셨으니, 영언 "ability"를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예수의 구원이 해탈과 득도?… “도올의 과도한 비약”
      이미지 전체보기
      ▲차정식 교수. ⓒ 크리스천투데이 DB

      도올 김용옥 씨가 최근 ‘도마복음한글역주’(통나무)를 완간하며 또 한번 기독교에 도전적 메시지를 던지자 한일장신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차정식 교수가 김 씨의 책과 사상을 분석한 글을 최근 한 언론에 기고했다.

      ‘도올 김용옥의 도마복음한글역주를 평함’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차 교수는 “도올이 자신의 신념에 강하게 함몰된 나머지 도마복음에 대한 전문학계의 논의를 편취해 그것이 보편적 대세인 양 선전하고 있다”며 “이러한 방식에서 왜곡된 과잉 열정과 그로 인한 파행의 흐름이 드러난다”고 비판했다.

      김 씨는 ‘도마복음…’에서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사상에 기초해 기존 복음서의 내용을 짜깁기한 후대의 외경문헌이 아니라 그것들 본래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로빈슨, 크로산 등 서구 학자들의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차 교수는 “도마복음이 예수의 본래적 원형을 담아내고 있다는 주장은 도올의 말대로 학계의 대세가 아니며 일부의 주장일 뿐”이라며 “그가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크로산을 비롯한 학자들은 북미 성서학계의 지극히 적은 일부 신약성서학자들 및 고대기독교문헌학자들”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대중적 어필을 목적으로 한 의도적 파격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진술은 과도한 자의식의 도취로 인해 더러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사실의 왜곡과 황당한 허세를 동반하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성취를 얼룩지게 하는 결함”이라며 “가령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 운운하는 거창한 장면들은 모두 마가의 드라마 구성에서 연유된 픽션으로 간주되는 것이 현재 성서학자들의 대세’라고 하는 것은 직관적 판단을 넘어 과도한 비약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차 교수에 따르면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를 보는 김 씨의 시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말들에 잘 나타난다.

      “묵시주의적 종말론과 예수에게 부과된 온갖 기독론적 인식은 후대 교회에 의한 왜곡이다. 그것은 고작해야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복음서 작가들의 변형 결과였을 뿐이다” “도마의 예수에게 천국은 시공간의 개념으로써의 천당이 아니요 곧 주체의 개벽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결국 도마복음의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길은 개인의 해탈이요 득도에 다름 아니었다” “구원론과 관련해 예수에 대한 일체의 신앙을 거부해야 한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깨달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과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예수는 니체보다도 더 본질적인 무신론자다”

      차 교수는 “무모한 일반화 등은 동서고전을 섭렵한 저자의 방대한 탐구 의욕이 섬세한 학문적 검증의 결여라는 패착으로 드러난 사례”라며 “이러한 과잉 자의식은 한 술 더 떠 ‘나 도올을 모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 도올이 말하는 말씀에 내재하는 성령, 그 진실을 모독할 수는 없다’는 식의 치기어린 독백으로 추락하기도 하는데, 이는 너무 비성찰적인 진술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그의 탐구 정신은 기독교인들도 배워야”

      김 씨의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차 교수는 학자로서의 그의 탐구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차 교수는 “도마복음의 사상적 정수를 발견하고 예수의 원형적 신학을 조명하면서 도올은 그 특유의 풍부한 동양사상적 지식을 맘껏 활용한다”며 “동서사상의 융합과 소통을 도모하고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을 기획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또한 “특히 그의 비판적 지적대로 자폐적이고 배타적인 체제의 논리를 고수하면서 사회적 반성과 검증을 거부하는 한국교계의 인습적 관행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려는 그의 예언자적 결기는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리라 본다”며 “동양사상의 원융적 지혜와 이로써 촉발되는 계몽적 선기 역시 도마복음의 주해뿐 아니라 교조주의적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성찰적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차 교수는 “그는 도마기독교의 원산지인 근동의 여러 지역을 장기간 여행하면서 온 몸으로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더했다”며 “이 치열한 탐구 정신의 진취성과 구도자적 모험의 개방성은 그를 싫어하는 기독교인들도 열과 성을 다해 배워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인류 문명의 기원과 역사의 원형을 찾아 온 몸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치열한 예수의 구경적(究竟的) 신학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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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희망 입니다

      내 입에 따뜻한 말 한마디 담겨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그 말로 남을 위로 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고
      기쁘게 할수 있으니까요.

      내 눈에 눈물 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그 눈물로 가난과 슬픔으로 지친 이들의
      아픔을 씻어 낼수 있으니까요.

      내 귀에 작은 소리 들려온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말과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속삭임을 들을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은은한 꽃 향기와 군침 도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좋은 친구 한 사람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그 친구에게 내 마음 털어놓을 수 있고
      지칠 때는 따뜻한 위로도 받을수 있으니까요.

      내 가슴에 사랑 하나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사랑이야말로 행복을 여는 열쇠이고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니까요..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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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길 ★※    
       
       
      이렇게 살아가게 하소서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늙어가더라도 지난 세월에 너무
      애착하지 말고 언제나 청춘의
      봄날로 의욕이 솟아 활기가 넘치는
      인생을 젊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러난 욕심 모두 몰아내고
      언제나 스스로 평온한 마음 지니며
      지난 세월을 모두 즐겁게 안아
      자기 인생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시간표마다 
      아름다운 행복의 꿈을 그려 놓고
      매일 동그라미 치며 사는 삶으로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한 줄씩
      그어지는 주름살 나이가 들어
      인생의 경륜으로 남을 때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며
      마음의 부자로 여기며 살게 하소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남긴 징표를 고이
      접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머지  
      삶도 더 아름다운 마음 지니며
      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가는 길
      살아온 날들이 너무 많아 더 오랜
      경륜이 쌓인 그 무게 노여워도 
      노여움 없이 무조건 마음으로 모두
      나누어 주어 아무것도 마음에 지닌
       
      것 없이 자연스런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백조가 너무나도 평온하게 
       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푸르고 잔잔한
      마음의 호수 하나 가슴에 만들어 놓고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근심
      없는 시간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게 하소서
       
       
       
      -좋은 글 중에서 -

       

      ※★ 오늘의 만나 ★※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
        
      (시편 91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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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있는 풍경 사랑이 있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서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만큼 가슴 시릴 정도로 슬픈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은 행복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슬픔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나 행복해서 저절로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때로는 슬픔 속에서 행복에 잠기는 순간도 있다. 행복한 사랑과 슬픈 사랑 참으로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이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사랑만이 가질 수 있는 기적이다. 행복하지만 슬픈 사랑 혹은 슬프지만 행복한 사랑이 만들어 가는 풍경은 아름답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랑이란 내가 베푸는 만큼 돌려 받는 것이다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었지만 아무것도 돌려 받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사랑을 원망하거나 후회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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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가시나무 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가시나무 새는 한 유명한 소설책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새는 평생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길고 가장 뾰족한 가시를 가진 나무을 찾다가

      그런 나무를 발견하면 나무에 자신의 가슴이

      찔리게 해 죽는다는 전설의 새입니다

      죽을 때 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한번 내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 소설을 소재로 복음성가 가수였던

      하덕규 집사님이 작사했던 '가시나무 새'가 유명합니다

      노래는 자신의 내면이 죄악, 욕심, 교만, 불순종, 게으름 등의

      가시들로 가득찬 가시나무 숲과 같아서 주님이 들어와

      쉴 만한 장소가 못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 내면에는 너무도 많은

      죄악의 가시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시에 당신의 가슴이 찔려 죽으면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또한

      바다와 바위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계속 파도를 치면서 바위에게 접근하지만

      바위는 그것을 되받아치면서 계속 밀쳐냅니다

      그렇지만 바다는 파도를 치며 바위에게 또 다가갑니다

      바위는 또 밀쳐냅니다

      그러나 바다는 또 다가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수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우리는 수없이 그런 예수님을 밀쳐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찔림을 각오하고 십자가 위에 올라가셨 듯이

      지금도 우리의 찌름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늘

      일방적인 사랑이요 희생적 사랑입니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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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잔잔한 행복 ★※


      마음이 맞는 사람과
      아침공기를 마시며 산책할 수 있다면
      손을 잡지 않아도
      따스한 온기가 가슴으로 느껴져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면
      욕심없는 행복에 만족하겠다.

      마음이 닮은 사람과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다면
      눈빛이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
      가슴으로 포근하게
      슬픔을 안아줄 수 있다면
      이름없이 소박한 삶에도 만족하겠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벗이 되어 동행할 수 있다면
      꼭 옆에 같이 살지 않아도
      가끔씩 기분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들뜬가슴 열어 세상을 헤쳐 나간다면
      때때로, 지치고 힘들다해도
      손해보는 삶이라도 후회는 없겠다.

      세상에 빛나는 이름 남기지 못한다 해도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알았다면
      명예가 사랑보다 귀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면
      앞에 놓인 빵의 소중함을 경험했다면
      진실을 위해 소중한 어떤 것을 희생했었다면

      먼 훗날, 어둠이 조용히 나리울 때
      삶의 잔잔한 행복을
      차지했었노라 말할 수 있겠다.


      - 좋은글 중에서 -

      ※★ ♡오늘의 성경♡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 야고보서 1장 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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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시험과 연단의 시작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사람 탓이 아닌 바로 나의 죄와 허물 때문이라는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고난과 시험을 받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 아니면
      환경때문이라고 탓하고 원망을 하는것을 봅니다

      저는 이단에 빠져서 있다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그 이단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막상 이단에서 나왔지만은  모든 재산도 잃어버리고
      삶의 터전도 잃어버린 상태라 막막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이단에 빠진사람들을 구하려하니 생업에 종사할수도 없어서
      우리 다섯식구들은 1주일에 1 만원으로 근근히 생활했던 기간이
      약 2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할수 있었던 원동력은 "구원의중요성" 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빠저서 계속 있었다면 지옥형벌을 면할수 없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그러기에 구원이란 온 천하와도 바꿀수없는 소중한것란것을
      진정으로  절실했기 때문이였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구하고 이단과 싸운다고 생업을 뒤로 하였지만
      아내는 언제나 나를 신뢰하고 따랐습니다(정말 귀한 나의 동역자입니다)
      당장 먹을것이 없자 아내는 마트에 알바를 해서 얼마를 벌어왔고
      들에 나가 냉이, 고들빼기, 남들이 수확한 고구마밭에서 이삭을 주어와서
      근근히 생활했습니다
      그 당시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암울했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때입니다
      그래도 죽으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교단의 도움을 받고자 동분서주했지만
      정작 교단에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월세를 못내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오고
      집주인이 손에 쥐어준 달랑 120만원을 가지고 평택에 살집을 구했지만
      어디서도 우리 5식구가 살수있는 집을 그 돈으로 구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변두리에 창고집을 월30만원을 주고 얻을수 있었습니다
      그전에 살던집에 비하면 참 누추하였지만 그러나 우리가족은
      보금자리가 생겼기에 너무도 기뻤습니다

      보증금 100만원을 넣고 보니 20만원이 달랑 남았고
      이제 곧 월세를 내야할때가 돌아오는데 이렇다할 수입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정에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참 평안이 임하였습니다
      세상의 평안은 이미테이션 평안입니다
      물질이 풍부하고 가족들건강하고 걱정거리가 없을때에 사람들은 흔히
      평안하다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평안은 참평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족에게 임한 평안은 궁핍하고 세상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우리가족들의 마음에는 참평안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함이 생기며
      모든것을 잃는다하여도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것을 포기할수 있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대로 가난하고 비천하게 산다하여도 구원이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이 구원의 기쁨때문에 날마다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나왔습니다
      동네에서는 우리가족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단순한 징계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 연단을 통해서
      이전보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계기로삼으시는것을
      본인은 체험하였습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도 고난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앞날의 두려움이 짙은 안개처럼  우리에게 몰려와도
      결코 두려워 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중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봐야 합니다
      천하와도 바꿀수없는 구원은  환란중에 참소망이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선인이나 악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찌 아버지 하나님께서 고통을 외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반전을 기대하십시요
      우리의 심령깊은곳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는날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공급하시는 지혜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 지혜는 세상학문의 지혜와는 비교할수 없습니다
      본질을 꿰뚤게 되며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아비와같은 애절한 마음을 알게됩니다
      그 사랑앞에 한없이 울게 됩니다
      그 깊으신 뜻앞에 고개숙여집니다
      진실로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지독한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아멘넷/ 도봉옥님


      영성이란 무엇인가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현대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헨리 나우웬이나 리차드 포스터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영성을 가꾸려고 노력하며, 신학 교육에서도 영성 신학이 등장하고 신학도들의 영성 형성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도날드 카슨의 말대로,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은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의 영성, 저항의 영성으로부터 여성운동의 영성, 동성애의 영성, 켈트 영성, 심지어 종교다원적 영성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무분별한 운동들이 영성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란된 영성의 시대에 올바른 영성과 그릇된 영성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참된 영성의 형성과 성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


      초대교회가 오랜 핍박을 받는 동안 사막이나 동굴, 혹은 오지에 칩거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수도원적 영성운동에 이어, 중세에는 신비적 영성운동이 만발하였다. 이에 대해 생활 속의 영성을 강조하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 모방운동(Devotio Moderna)이 새롭게 일어나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회에서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영성 운동이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17세기 개신교회가 이성과 교리 중심적인 정통주의에 치우치자 반동적으로 발생한 경건주의 운동으로, 성경에 대한 묵상과 기도를 강조하는 경건생활을 추구하였는데, 후에 존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회를 창시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도 각성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두 번째는 19세기 자유주의가 개발한 영성으로 슐라이에르막허의 보편적 종교성의 신학에 기초하여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영성을 추구하였는데, 윌리암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1902)에서 심리학과 신경과학을 이용하여 신비한 종교적 경험들을 설명하였다. 세 번째는 20세기 초에 발생한 오순절운동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하며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논의되는 영성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1960년대부터 갑자기 발생하였는데, 이는 세속화신학과 사신신학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시기는 제2차 바티칸회의가 열리고 개신교회와의 교류가 시작되는 때이며, 동시에 제2차 프랑스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반문화운동이 과격하게 확산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는 때이고, 또한 미국에서는 반전운동과 히피운동이 발생하면서 힌두교의 구루들을 중심으로 뉴 에이지운동이 출범하던 때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영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로마 카톨릭의 영성 신학에 대한 소개가 시작된 후 개신교에서는 엄두섭의 수도적 관심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자 김경재가 1985년 [영성신학 서설]로부터 92년 [종교다원시대의 기독교 영성]까지 여러 권의 영성에 대한 저서를 출간함으로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은 신자유주의에서 출발하여 점차 복음주의 계열로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발단과 전개과정이 그 문제점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종교적 영성


      그러면, 우리는 현대의 혼란된 영성에 대해 어떤 분별력이 필요한가? 그릇된 영성의 첫 번째 유형은 자연종교적 영성이다. 이것은 참된 영성을 찾기 위해 기독교를 넘어 타종교로 떠나는 종교편력의 영성이다. 현대 카톨릭의 선구적 영성운동가인 토마스 머튼은 기독교의 영성을 추구하다가 보다 더 고차원의 영성을 위하여 동양종교로 향하였으며,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불교나 힌두교에서 영성을 추구한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복음적인 영성 논의에서도 타종교, 특히 선불교에 대한 탐구가 흔히 발견된다. 또한, 카톨릭을 교리적으로 정죄하고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개신교인들도 영성에 있어서는 무비판적으로 토마스 머튼이나 헨리 나우웬을 열독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쓰가 지적하는 대로, 기독교 안에 풍요한 영성의 전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매한 영성을 다른데서 찾고 빌려오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인지 모른다. 더욱이, 영성을 찾아 타종교로 떠나는 영적 방황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종교성은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타종교에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기초적이고 저급한 영성일 뿐이며, 참된 영성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을 때만 가능한데 고급한 영성을 위해 저급한 종교로 나아가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극도의 고행이나 수련을 통과한 사람에게서 우러나는 초연한 인간성이나 난해한 경전과 선문답 같은 문구가 풍기는 오묘한 도리가 아무리 외적으로 고매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적대관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의 위장된 교만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에 의존하는 구원을 거부하는 영적 반항의 연장일 뿐이다. 물론, 일반은총적 차원에서는 그들의 종교성이나 인간성이 어떤 측면에서는 많은 기독교인보다도 더 개발될 수 있으며 따라서 존경심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러한 영성은 모두 특별은총적 차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승격되고 승화되어야 할 영성들이다.


      신비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두 번째 유형은 신비적 영성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신통력을 흠모하고 추구하는 영성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영적 성숙이나 수평적 차원은 무시된 채 신적 존재와의 수직적 교통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수행하고 엑스타시적 종교체험을 추구한다. 카톨릭의 신비적 영성이 하나님과의 약혼과 결혼으로 나아가는 영성의 7단계를 제시한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이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였다면, 오순절운동으로 야기된 개신교의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한다.


      한국교회 영성의 독특한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결국 현상적으로 보자면 한국 기독교의 영성은 불교, 유교, 도교와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는 김정훈의 진단이나, 샤마니즘을 비롯한 전통종교의 영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결국 이교화를 결과한다는 김성태의 지적은 주로 신비적 영성을 우려한 것이다. 마술적 신유를 위해 이교의 방법을 도입하여 성령수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비적 치유를 현혹하는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비성경적 예언들까지도 용납하여 결국 시한부 종말론의 수치를 초래한 신비주의적 신앙행태는 참된 복음보다 신비현상 자체를 추구하는 다른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윌리암 제임스는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도 동시에 신비현상을 긍정하였으며,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의 신비현상들을 수집하여 심리학과 신경의학으로 설명하였고, 신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심령과학도 단순한 테크닉으로서 신비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적 영성은 세계의 모든 신과 모든 영과 모든 신비 현상을 이용하여 신비체험과 초능력을 소유하려는 뉴 에이지 영성과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낭만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세 번째 유형은 낭만적 영성이다. 이것은 영성을 경건한 감정의 고양으로 이해하는 감상적 영성이다. 영성가들의 영적 편력을 탐독하며 문학적 영성을 형성하고 영적 무드를 즐기며, 큐티를 통하여 경건한 감정을 향유하지만, 만일 그것이 거룩한 감정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기서 그치고 실천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가롭고 낭만적인 감상일 뿐 고난이나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는 현대의 지성적이며 사치스러운 영성이 아닐 수 없다.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슐라이에르막허는 기독교의 본질을 종교적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감성적 종교를 추구하다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로버트 로버츠는 [영성과 인간의 감정]에서 “기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감정들의 세트(a set of emotions)”라고 정의하며 영성을 감정 중심으로 이해하였지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심적 명령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을 흠모하는 하나의 종교적 감상으로 끝날 것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가서 느끼는 거룩한 감정이나 위대한 종교시를 읽으며 일어나는 숭고한 열정이 참된 영성의 본질이 아니며, 기독교의 영성은 느낌 이상의 실재적 삶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참된 경건생활이란 문학적인 경건서적을 즐기고 분위기 좋은 찬송을 부르며 고요한 명상과 시적인 기도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


      실로, 영성이란 일시적 감상이나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희열과 같이 존재론적 실체가 없는 일시적 경험도 아니며,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와 구별되는 인간의 제4성도 아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영혼의 성품, 성질, 혹은 성향을 가리킨다. 기독교 인간론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즉, 프뉴마 혹은 프쉬케라고 부르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구별되어 모든 정신적 실체와 기능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질적 실체로서 정신 혹은 마음이라고도 불리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체와 불가분리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나 죽을 때에는 육체와 분리되어 내세로 가게 된다. 비물질적인 영혼에는 여러 기관과 기능들이 존재하는데, 지능이나 감정이나 의지 등이 포함된다. 영혼은 오로지 순수하고 완전한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homo spiritualis)로서 영성을 소유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각자 그 기관들이 다르게 개발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지능이 가지는 성품이나 성질을 가리켜 그의 지성이라고 하고 감정이 개발된 성품과 성향을 그의 감성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영혼 전체의 성품을 가리키는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그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어떻게 개발되었고 무엇을 경험하였으며 어떻게 통합되었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 연구와 독서 등 지적 노력에 집중함으로서 지성이 고도로 발전하여 훌륭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감성이 메마르고 의지가 박약하여 종합적인 영성에 있어서는 편향적이고 미성숙한 영성을 가질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그와 반대로 감성만 발달한 경우나 의지만 발달한 경우도 있어서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영성에서는 저급한 사람들도 있다.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사랑의 감성이나 의지는 결여한 채 교리적 지성에 치우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근본적 교리도 부정한 채 사회운동만을 추구하는 행동적 의지에 치우치고 신비주의자들은 윤리나 교리보다도 신비적 감성에 치우친다. 노영상이 ꡔ영성과 윤리ꡕ를 연결한 것도 도덕성은 개발되지 못한 채 편파적 영성을 추구하는 문제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영혼이라는 실체에 근거하지 않는 영성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기반을 상실한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영성의 시작과 완성


      영성이 영혼의 성품이기 때문에, 영성은 영혼의 개발과 발달과정을 반영한다. 인간은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죽은 사람에게만 영혼이 없다(약 2.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범죄로 인해 죽었고 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비록 생물학적인 영혼은 존재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즉 영혼의 정상적인 기능의 관점에서는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란 영적 사망의 상태에서도 기본적으로 살아 기능하고 있으므로 불신자에게도 기본적인 영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기반인 하나님과 단절되고 대립된 인간의 영성은 고갈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교제를 통해 풍요한 교류가 시작되는 중생의 시점에서 참된 영성이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죄악으로 인해 수많은 집단들로 분리되어 서로 차별하고 대립하는 인간들과의 화해와 사랑, 그리고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 회복도 결과한다. 따라서 타종교나 불신자들의 인간성이 어떤 면에서 심오하게 개발될 수도 있으나, 전인적인 영혼의 품격과 성향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창조자인 하나님과의 거부와 대립과 반항 상태에서 건전한 영성의 개발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중생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의 영성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성숙하고 발전되어야 하며, 이것을 구원론적으로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성화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 영혼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악적 요소를 정화하며 자기의 독자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진하여 마침내 내 속에 그리스도만이 살게 되는 상태에 이르는 긴 과정으로서 천상에서야 완성된다. 우리의 신앙은 지성(notitia)과 감성(assensus)과 의지(fiducia)에 상응하는 전인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신앙의 성장은 세 기능의 종합적 발전과 강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그리스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본 받고 대치할 때 완성되며, 그런 노력과 참여를 통하여 우리의 영성이 개발되고 성숙해진다.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기독교는 동일한 본질을 소유한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을 믿는 삼위일체 신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성부교나 성령교라고 부르지 않고 성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통해서만 올바른 하나님 이해와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영성은 오로지 그리스도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였다. 영성의 길은 곧 그리스도의 길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성부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그릇된 영성을 결과하였다. 일부 오순절파는 성령을 중심으로 영성을 발전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동등한 신이지만 자기 중심성을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도록 돕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성부도 성령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관계할 수 있다.


      오늘날 뉴 에이지나 요가, 선, 단, 기 훈련 등의 방법으로 종교는 거부하면서 영성은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로버트 풀러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 아닌 사람들(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는 책에서 이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 약 20퍼센트가 이 그룹에 해당한다. 이들은 영성을 무엇이든지 신비적인 교감이나 능력으로 생각하며, 수많은 악령들과 영적인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 없이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그릇된 영성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존 도슨이 지적한 대로, 이러한 자유방림적 영성은 개인주의적으로 인격적인 교제와 훈련을 요구하는 공동체를 거부하고 책임과 평가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의 훈련과 교제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독자적 욕심과 야망을 포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개성화된 영성


      그러므로, 영성의 개발은 매 순간 성령에의 절대적 순종을 통한 성령의 열매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한 우리의 끊임없는 헌신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초대교회로부터 영성 개발은 수도원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오늘날에도 상당한 영성훈련 프로그램들이 수도원적이다. 한편, 개신교회도 현대 산업사회의 도시화와 개인주의적 경향에 대응하여 제자훈련, 가정교회, 소그룹, 셀그룹 등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였다. 퀘이커 교도인 리차드 포스터는 묵상, 기도, 금식, 학습의 내적 훈련, 단순, 고독, 복종, 섬김의 외적 훈련, 고백, 예배, 인도, 축제의 집단적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멘토이기도 한 달라스 윌라드는 이와 같은 영성 개발 혹은 훈련 프로그램들이 “새로운 율법주의(new legalism)”로 부상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획일화된 프로그램이 모두에게 획일적인 훈련을 강요하여 획일적인 영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기 독특한 소명과 독특한 개성과 독특한 경험을 가지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은 모든 개인에게 독특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비록 참된 영성이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전인적이어야 하지만, 각자 개성 있는 영성들이 개발되어 신앙공동체로 모일 때 교회는 조화롭고 풍성한 공동체가 되고 다양한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전인적 몸이 되며,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이 전면적으로 풍요하게 실현될 것이다.

      역겨운 동아일보와 되풀이되는 역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어제(29일) “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은 중앙정보부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진실·화해위는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동조했으며 언론의 자유, 언론인들의 생존권과 명예를 침해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면서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등 적절한 화해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결과를 얻은 동아투위 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동아투위 정동익 위원장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진리가 확인됐다”며 “언론탄압이나 강제 해직 같은 야만적인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경향발췌)

      이번 결과를 보면서 YTN과 KBS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YTN과 KBS 경영진의 무모한 행각이 다시 조명받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YTN은 이미 대량해고와 징계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마침 오늘이 TYN을 생각하는 날, YTN과 함께 하는 날로 오후 7시에 서울역에서 집회가 있다니 그 의미가 더 크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33년 전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2008년에 신문사가 아니라 방송사를 대상으로 똑 같이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이번 결정을 보면서 이 비굴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사람들, YTN과 KBS의 경영진은 그리고 KBS의 어용노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집니다. 그들에게도 진실에 대한 영혼이 있을까요? 


      재미 있는 것은 동아일보 홈페이지 회사소개란을 보면 지난 74-75년의 백지광고사태를 자랑스럽게 적어 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측의 굴복으로 비참하게 끝난 백지광고사태마저도 이용하는 더럽고 비겁한 짓이지요.

      아 또 하나 재미 있는 것은,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에 대한 오늘 결과가 '동아일보 인터넷판'에는 아직 살리지 않았다는 거죠. donga.com 에서 '광고탄압'으로 검색해보니 촛불집회 때의 소비자주권운동 때의 기사만 보이는군요. 내일은 실릴까요?

      예전에 썼던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에 대한 글입니다.
      이번 진실화해위의 결과를 보며 참고가 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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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전, 지금과는 다른 사람들


      지금은 온갖 쓰레기들의 집합소로 보이는 동아일보도 한 때 잘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백지광고 시위 때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동아일보 사옥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지광고 사건 후에 비열하게 남게 된 사람들이 지금의 동아일보 맥을 이어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974년 말부터 1975년 5월까지 동아일보의 지면이 비거나 이상한 광고로 채워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예 백지로 나오거나 일반시민들의 작은 광고들이 지면을 채우는 일이 발생하는 데, 이를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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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연행에 항의집회를 가진 기자들이 언론수호 만세를 부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와 자유언론수호대회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비상계엄과 국회해산을 포함한 유신헌법이 발효되고 나서 많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됩니다. 그 후 73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박정희 8대 대통령 취임합니다. 지식인들의 극렬한 저항은 2년여를 계속되었고, 유신정부는 74년 1-4회의 긴급조치로 맞섰습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언론은 철저한 통제를 거쳐 제작되고 있었습니다.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교정 받아 실렸습니다. ‘연탄값 인상’이란 제목도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연탄값 현실화’로 바꾸기도 하는 등의 전방위 통제가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자괴심에 빠져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언론의 보도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의 동아일보 앞에서의 동아일보 불태우기 시위가 있자, 기자들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떨치고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

      이 가슴 뭉클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의는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이 가이 가슴 뭉클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의는 경영진의 반대로 10월 24일 신문에 실리지 못하고, 기자들은 제작거부로 맞서다 25일에 실리게 됩니다.

      백지광고의 시작

      그 이후 동아일보에는 그간 실리지 못하던 인권, 데모, 야당인사들의 발언, 개헌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정부는 결국 광고주들을 회유협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를 조여오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백지광고사태의 시작입니다.

      대형광고주들이 광고원판을 회수하고 광고취소를 요구하자 자체광고로 버티던 동아일보가 결국 74년 12월 26일 처음으로 광고해약사태에 대한 우려의 기사와 함께 세 면의 하단광고가 백지로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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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6일의 첫 백지광고 모습)


      동아일보가 백지로 광고를 내 보내자 시민들의 폭발적인 격려를 받게 됩니다. 시민들은 광고를 채우기 위해 동아일보로 몰려들게 되고,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의 교포들까지 동참하는 범국민적 언론자유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택시운전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동아일보로 가자는 시민들에게는 택시비를 받지 않는 분도 있을 만큼 국민의 성원 속에 진행된 백지광고 채우기는 74년 5월 중순까지 이어집니다.

      첫 테이프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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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광고)


      이를 시작으로 장준하, 문동환 등 지식인의 동아일보 지지 광고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1월 4일 3면에 고은 시인은 ‘동아일보에 붙이는 노래’를 싣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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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시인의 동아일보에 붙이는 노래)


      “우리는 알고 있노라 동아가 우리의 것임을/ 우리나라의 겨울 산 능선과 벌판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 어느 시대의 권좌가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동아는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 동아가 동아 이상의 것임을알고 있노라/ 동아의 취재자는 우리 자신이며/ 동아의 편집자는 우리 자신이며/ 동아의 텅 빈 광고야말로 우리 자신의 아우성임을 알고 있노라 .........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의 의와 사랑의 자손으로서 세세생생 살아있노라/ 동아여, 동아여, 동아여, 동아여, 고난의 동아여”


      하지만 이 보다 더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개개 국민들의 마음입니다. 동아일보  지면을 꽉 매웠던 국민들의 가슴 뭉쿨한 감동은 뜨겁게 우리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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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매일 끊이지 않았다)


       


      “동아야 우리는 안다. 너희는 불사조임을...”

      “가슴아픈 우리는 꼭 승리한다.”

      “자유 정의 진리여 싸워 이기라.”

      “동아의 굳건한 필봉은 꺾이지 않으리.”   

      “존경하는 삼천만 배달민족이여 권력과 악질 재벌들에 대항하여 우리 국민의 선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아를 구하는 데 모두 일어납시다. 그리고 권력의 앞잡이나 하고 재벌의 돈이나 받아먹는 다른 신문이나 방송은 구독이나 청취를 하지 맙시다.”

      “동아의 고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아픔입니다. 힘을 내어 용감히 싸워 주십시오.”

      “해마다 1년간 모은 돼지저금통을 깨어서 불우이웃을 도와왔으나 이번에는 광고해약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아를 위해 쓰기로 했습니다.”

      “굽히지 말고 견디어라 민족의 얼 동아여, 기필코 광명 있으리”

      “우리들에게 희망을 준 동아일보여 감사드립니다.”

      “긴급조치로 구속된 동료학생들에게 차식비로 전하려 했으나 이길마저 당국이 차단해서 광고없는 동아일보에 성금으로 바칩니다.”

      “민의가 동아의 고난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자랑이요 조국의 등불인 동아일보를 사랑합니다.”

      “동경 정인량의 맥박은 동아와 함께 뛰고 있습니다.”

      “배운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사죄하나이다.”

      “4.19의 꽃은 어디에 피었는고?”

      “술 한잔 덜먹고 여기에 내 마음을 담는다”

      “요즘처럼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국민들의 열망조차도 3월 들어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정부의 강경한 탄압에 굴복한 사측에 의해 국민들의 갈망이 날아가 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측은 75년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하게 됩니다. 이에 항의하여 송건호 편집국장(전 한겨레신문 대표)의 사표 제출, 기자와 아나운서들의 제작거부, 그에 이어 130여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의 해고가 단행됩니다.

      송건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장이나 주필도 나를 신임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에게 원한을 가질 일도, 더욱이 신문사를 그만둘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측의 굴복과 어용신문으로의 전락


      정부의 탄압에 굴복해 대량 해고를 단행한 동아일보는 그 이후로 정부의 기관지로 전락해버리고, 열광적으로 진행되던 격려광고는 4월 들어 급격히 줄어들다 5월 들어 완전히 끊겨버리게 됩니다. 국민들은 동아일보 해직을 접하고 기자들의 복직과 성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등 격렬히 항의하지만 동아일보 사측의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못하고 동아는 더 이상 민족의 신문이 아닌 어용 신문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백지광고사태를 지나면서 해직된 이들은 함께 해직된 조선일보 기자 12명과 함께 80년에 해직언론인협회를, 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기관지로서 '말'을 창간하게 됩니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 뒤에는 자유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으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게 됩니다. 결국 지난 동아일보의 굳은 언론인들은 해직의 아픔을 딛고 한겨레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아 대한민국

       

      

       

      식습관’편 - 탈모예방에 좋은 음식 BEST 10

      웰빙바람이 거세다. 운동부터 먹는 것, 사는 곳까지. 김찬월 소장은
      상담을 위해 찾아온 고객들에게 상담과 함께 탈모에 좋은 음식들을 소개하곤 한다.
      1편 ‘생활습관’과 마찬가지로 식습관도 꾸준함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부터 김찬월 소장이 추천하는 웰빙 탈모예방음식 BEST10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발이 흑발 된다.’는 검은콩

      검은콩의 모발 형성에 탁월한 효능은 지닌 식품이다.
      검은콩은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서 피로회복과 대사를 돕는다.
      원활한 혈액순환의 영향으로 ‘백발이 흑발 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검은콩 섭취를 계속 하다보면 빠지던 머리가 다시 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또한 검은콩에는 모발성장에 필수성분인 시스테인(Cysteine)이 들어있어
      탈모를 방지해주고, 탈모가 진해 중인 경우 이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발성장에 좋은 불로장생음식 검은깨

      검은깨는 장수, 모발건강, 그리고 장 기능 개선에 탁월한 음식이다.
      검은깨에 들어있는 지질이라는 성분은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두피에 영양을 공급해 주어 탈모를 막아준다.
      일찍이 대머리가 된 사람도 검은깨를 꾸준히 섭취하면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검은 깨는 새치나 흰머리가 나는 것도 방지해준다.

      ○탈모예방을 위한 영양소 덩어리 해조류

      가히 탈모예방을 위한 최고의 음식이라 할 수 있는
      해조류는 그야말로 영양의 보고다.
      해조류에는 모발 발육촉진인자인 요오드(Iodine)를 비롯하여
      머리털을 구성하는 각종 비타민, 유황과 철분 등이 풍부하다.
      특히 머리카락의 주성분인 케라틴의 형성을 돕는 비타민A, 손상된 머리카락을
      재생시키는 비타민D, 혈액순환을 돕는 비타민E가 풍부하다.

      ○카테킨이 풍부한 녹차

      녹차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인체 내에서 커피의 그것과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녹차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탈모 촉진 유발인자인 ‘5-알파 환원효소’를 제거한다.
      또한 녹차잎에서 추출한 카테킨(Catechins)은 항안드로겐 특성이 있어서
      탈모방지에 효과가 뛰어나다.

      달걀노른자가 탈모방지에 효과적

      달걀노른자에 들어있는 ‘비오틴(비타민H라 불리며 비타민B군 중 가장 최근에 발견됨)’이
      머리카락 형성에 많은 도움을 준다.
      장기간 항암치료를 받은 경우 비오틴이 결핍되기 쉽다.이런 분들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가 바로 비오틴이다.
      물론 일반 탈모로 고민하는 남·여에게도 효과가 있다.

      ○만병통치약 ‘물’

      한의학에서는 물 섭취와 탈모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의학자들은 탈모가 열이 많아 생기는 병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곧 신진대사의 문제가 탈모를 유발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물은 우리 몸속의 노폐물을 원활히 배출하게 도움으로써 독소를 밖으로 배출시켜 준다.
      하루 적정 물 섭취량은 2.5리더 정도이다.
      음식으로 약 0.5리더 정도를 섭취하기 때문에 별도로 2리터 정도를 더 섭취하면 된다.

      ○모공을 단단하게 하는 잣

      잣에 풍부하게 함유돼 있는 비타민E는 시력회복과 빈혈치료는 물론
      모공을 단단하게 하는 데도 효능이 있다.
      하루 10알씩 꾸준히 섭취하면 탈모방지는 물론 머리카락에 윤기도 흐르게 된다.

      ○지질이 풍부한 호두

      호두에는 탈모방지에 효과적인 지질과, 단백질, 비타민B1과 비타민E가 풍부하다.
      하루에 세 알정도 꾸준히 섭취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머릿결을 고와지게 하는 마늘

      마늘에 들어있는 ‘알리신’은 탈모를 예방하고 신진대사를 돕는다.
      상기한 바대로 탈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신진대사와 혈액순환이다.
      마늘은 물처럼 몸의 노폐물을 빨리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준다.
      한 편, 마늘을 찐 후 욕조에 담가서 마늘탕을 만들어 목욕하면 출산 후
      탈모현상을 보이는 여성들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여성 탈모예방에 특히 좋은 구기자

      한방에서 여성형 탈모(원형탈모)의 주원인을 신경의 흥분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신경안정에 효과적인 구기자 달인 물을 마시라고 권한다.
      더불어 구기자 달인 물로 머리를 감는 것도 탈모예방에 효과적이다.


        옛날 인더스 강 근처에 알리 하페드라는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농장을 가지고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어느 날, 동방의 현자라 불리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만약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 하나가 있으면 나라를 살 수 있고,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면 자식을 왕으로 만들 수 있소.” 이 말을 듣고 그는 다이아몬드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현자는 그에게 “높은 산 사이에 하얀 모래땅이 펼쳐져 있고,
        그 모래땅을 가로지르는 강을 찾으면 그곳에 다이아몬드가 있을 것이오.”
        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다음날 곧바로 농장을 처분해 돈을 마련하고
        다이아몬드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을 거쳐,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을 다 뒤지고 유럽까지 찾아보았지만 현자가 말한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스페인의 한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농장을 샀던 사람이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고
        농장 사이로 흐르는 개울가에 갔다가 반짝거리는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알리 하페드가 그렇게 간절히 찾던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농장의 뒤뜰이 바로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골콘다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던 것입니다. 동네의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가 하소연했습니다. “도저히 여기서는 장사가 안 되네요. 몇 년 동안 이곳에서 장사를 했지만 전혀 가망성이 없어요. 이사라도 가야겠어요.” 목사님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습니다. “제가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951번지에 사는 사람을 아십니까?” 가게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가끔 저희 가게에서 물건을 사 가는걸요.”
        목사님이 다시 “그럼, 그가 주로 무슨 물건을 사 갔는지 기억하십니까? 또 그의 직업이 무언지, 종교가 무엇인지, 가족이 몇인지, 가족들은 무얼 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가게 주인은 “글쎄요”하며 말문이 막혔습니다. 목사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웃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아마 당신은 부자가 됐을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미리미리 알아서 꼼꼼히 준비해 두었더라면 장사가 잘됐을 테니까요.
        당신은 이 동네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알리 하페드’와 ‘편의점 주인’의 이야기가 시사해 주는 바를 공감하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등의 말들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통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알리 하페드처럼 한방의 대박을 좇아다녀선 안 됩니다.
        금은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현재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입장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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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좋은 나이는 언제일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일까요 ?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방청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답니다.
      어린 소녀가 대답하길..
      "두 달 된 아기 때요.
      모두가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사랑해주고 관심도 보여주니까요."

      어떤 학생은 대답하길..
      "열여덟 살입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자동차를 몰고 어디든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도 되니까요."

      성인  남자가  대답하길..
      "스물 다섯 살이 제일 좋은 나이죠. 혈기 왕성한 나이니까요.
      마흔 세 살인 지금은 야트막한 고개를 오를 때조차 숨이 가쁘답니다.
      스물 다섯 살 때는 한밤중까지 일을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지금은 저녁 아홉 시만 되면 잠이 쏟아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떤 이는... 
      마흔이 인생이 정점이고 활기도 남아 있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라고 했답니다.

      어느 숙녀는... 
      쉰 다섯이 되면 자식을 부양하는
      가사책임감에서 놓여나서 좋은 나이라고 하더군요

      예순 다섯 살이 좋다는 남자는 그 나이에
      직장에 은퇴한  다음 인생을  편안하게
      쉴 수 있어서 좋은 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방청객 가운데 대답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모든 사람들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모든 나이가 다 좋은 나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자기 나이가 주는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세요."

      생각해 보니 할머니 하신 말씀이 맞는 말인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 나이가 많던 적든 가장 소중한 시간이며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좋은 나이 아닐까요.

      먹어만 가는 나이에 가끔은 불만스럽게 생각했는데,
      앞으로 제 나이를 사랑해야겠습니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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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당신이 12월에 나셨는지 3월에 나셨는지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게 오셨다는 사실, 오직 그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당신이 베들레헴에 나셨는지 나사렛에 나셨는지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낮은 자들을 찾아

      비천한 곳으로 오셨다는 사실, 오직 그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주님!

      당신이 처녀의 몸에서 나셨는지 그렇지 않은지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 오직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불원천리 찾아가

      주님을 뵙는것도 황공한데

      당신이 우리에게 오시다니요!...

      화려한 궁전과 장엄한 성전을 외면하고

      초라한 저희 집에 오셨다니요!...

       

      영원한 당신의 먼지로 돌아갈 육신을 입으셨다니요!...

      이 모든 일이 바로 저를 위한 일이었다니요!...

      감사하다는 말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나요?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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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의 은사

       

      두 가지 방언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에게 하는 대인(對人) 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하는대신(對神) 방언이다.

       

      사도행전 2장 4-12절의 말씀을 보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외국에 나가 본 일도 없고 그래서 외국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여러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할 줄 모르는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 대인(對人)방언이다. “외국어 하나 마스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성령의 은사로 배우지도 않고 들어보지도 못한 외국어를 술술 말할 수 있다니 참으로 탐나는 은사구나”하고 생각한다면 그 오해이다. 대인 방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의 언어는 하나뿐이었다. 모든 민족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한 곳에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창세기 11장 1-9절의 말씀을 보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때부터 인간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여러 나라 말로나누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데 나라마다 인종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소위 언어의 장벽이 복음의 땅 끝 전파의 방해가 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언어의 장벽을 성령의 능력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이 대인 방언인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기록되어 있다.

       

      대인 방언이란 흔히 오해되고 있듯 어떤 외국어를 배우지도 않고 그냥 술술 말하게 되는 그런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꼭 전해야 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도 모르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이 대인 방언인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다. 이 분이 남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마침 주일이라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디 교회가 없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호텔 근처에 작은 교회가 있어서 덮어놓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모두가손뼉을 치며 신나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성도가 앞으로 나와 간증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간증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한국 목사님은 스페인어는 전혀 몰랐고 다만 눈치로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다. 그냥나가버릴까 생각도 했으나,  이런 교회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하는 호기심으로 그냥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간증이 끝나자 그곳 목사님이 단상에오르더니 한국 목사님보고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당신은 처음 보는 동양 사람인데 보아 하니 믿음도 좋고 간증꺼리도 많은것 같은데 오늘 여기 온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니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고 눈치로 그렇게 이해한 것뿐이다.

       

      한국 목사님은 말이 안 통해서 못하겠다고 손짓발짓으로 거절을 했으나 어떻게 된 것이 그곳 목사님은 막무가내 간증을 하라고 강권하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한국 목사님은 단상으로 올라가서 간절한 기도를 올린 다음,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지껄이자 하고 아무 소리나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더니 한국 목사님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목사님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를 더욱 열심히 지껄였다. 이윽고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증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 한국 목사님은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전혀 알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간증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인 방언이다.

      이런 대인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 극히 드물게는 필요할 때면 언제나그것도 여러 나라 말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책에서 보니 St.Francis Xavier 라는 사람은 인도, 한국, 일본, 등지에 파견된 전도사였는데, 이 은사를 받아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고도 그 나라 말로 전도  사명을 완수했다고 한다. 또 어떤 할머니는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영어로 하는 설교를 스페인어로 다 알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또 하나의 방언인 대신(對神) 방언은 어떤 것인가?

      대인 방언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말을 하고또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신 방언은 나의 영이 성령의도우심으로, 또는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리는 하늘나라의 언어인 것이다. 대신 방언은 말하자면 신비한 영의 언어이며, 이런 뜻에서 대인 방언보다 훨씬 귀한 은사인 것이다. 

       

      이 대신 방언은 신비한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나의 영과 하나님 외에는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사람들 중 특별히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대신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우리가 보통 방언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 대신 방언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대인 방언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수 은사이지만, 대신 방언은 많은 사람에게 주시는 흔한 은사이며, 그러면서도 대인 방언보다 훨씬 신령하고 유익하며 그래서 누구나 다 받아야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방언(대신 방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이제부터‘방언’하면 이 대신 방언을 말한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이유

       

      은사는 받겠다고 해서 다 받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 은사를 사모하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은사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누구나 받는 은사이고, 누구에게나 주시는 은사이고,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제일 작은 은사, 별로 귀한 은사가 아닌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모든 은사 중 가장 흔한 은사이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성령의 모든 은사 중 가장 귀한 은사가 방언의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희귀한 것이 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데 꼭 있어야 하는 귀한 것일수록 그것을 아주 흔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것 없이는 단 몇 분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마는 공기 같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량으로 공급해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매우 흔한 은사이고,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아주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 방언이 어째서 그토록 귀한 은사인가?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영 사이에 전용 무전기를 설치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무전기를 통해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수시로 하나님과 나의 영이 비밀 통화를 하는 것이다.

       

      2)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나도 모르는 것을 기도한다.

       

      사람이 기도를 할 때, 곧 인간의 언어로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은매우 제한적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밖에는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영으로 기도를 할 때에는 곧 방언으로 기도를 할때에는 내 속에 있는 영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생각, 나의 육신의 욕망이나 세상적인 욕심을 떠난 순수한 영적 소원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3) 방언은 신령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방언을 받은 사람이라면 입술과 혀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방언이 터져 나오던 그 첫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신령한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는 하나의 강렬한 체험이다. 그때 느꼈던 희열과 하나님께 바쳤던 뜨거운 감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신령한 영계에 그 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4) 방언은 다른 신령한 은사로 통하는 문이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 예언, 병 고치는 능력, 능력 행함의 은사 등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방언은 신령한 은사로 들어가는 활짝 열린 문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는 다른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방언 기도하는 것에 의해서 영이 자란다.

       

      방언 기도를 통해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되고, 이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 나의 영이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이 성장하게 되면 그 만큼 하나님을 더 가까이 체험하게 된다.

       

      방언을 받는 방법


      방언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간절히 사모하며 주야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은사 중에는 그 은사가 이미 임해 있는데도 본인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는 본인의 입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은사가 임하는 즉시 본인이 그것을 알게 된다. 방언은 반드시 기도하는 중에 받게 된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져 나오는 일은 절대로 없다. 

      때문에, 평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는 결코 임하지 않는다. 방언 그 자체가 기도하기 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오래 믿고도 방언도 받지 못한 사람은 대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방언의 은사는 속으로 묵상 기도를 할 때에도 임하지 않는다. 크게 소리 내어 외치며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가 임한다. 혼자서 기도할 때보다도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큰 소리를 내며 열정적으로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는 더 잘 온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원에 가거나

      금요 철야기도나 은사 집회 등에 자주 참석해서 모두들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그 속에 끼어 힘을 다해 큰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해야 한다.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외치며 기도할 때 방언이 갑자기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다른 것을 위한 기도를 정신없이 하고 있을 때 예기치 않게 방언이 터져 나오는 수가 많다.

       

      처음 방언은 어떻게 터져 나오나?

      입술이 비틀리거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혀가 굳어져 입천장에 올라붙거나 하여간 발성 기관인 입술이나 혀에 갑작스런 이상이 생겨서 이상하고 묘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게 방언이다. 방언의 은사가 임한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이 있다. 방언의 은사가 왔구나! 하고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멈추면 안 된다. 

       

      계속 입술과 혀를 놀려야 한다. 계속 입술과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뜻도 모르는 소리를 질러대야 한다. 이렇게 1분이고 2분이고 계속 하고 나면 이제 방언의 은사하는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은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 나는 대로 혼자 앉아서 소리를 내어 방언하는 연습을 하며, 또 여러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특히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 그 틈에 끼어 방언 기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 때고 마음만 먹으면 방언을 자연스럽게 술술 나오도록 연습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소리 내는 연습이 되면 다음에는 그 소리에 내 마음의 간절함을 싣는 연습을 한다. 이상한 소리만 내는 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마음속의 간절함을 그 소리에 실어 드리는 것이 방언 기도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방언을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며 노력은 하는데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있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방언이란 시동을 걸어 놓은 자동차 엔진처럼, 가만히 있어도 방언이 저 혼자 나오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는 이제 입속에서 방언이 나오나 안 나오나 입 다물고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한다. 방언의 은사는 입술이나 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심령 속에 오는 것이다.

       

      처음 방언이 터져 나올 때, 입술이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마비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제부터 너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노니 앞으로는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좋다, 하는 하나님의 신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신호를통해 내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 힘으로,나의 의지로 내 혀와 입술을 움직여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언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게 하나님의 은사냐? 하고 물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방언이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에 실려 올라가는 나의 영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한 중년의 신도가 있었다.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분인데, 꽤 오래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방언을 하지 못했다.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방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방언 받기를 갈망했고 우리 교회로 옮겨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방언을 받게 하려고 매일 밤교회에 함께 나와 강대상 밑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그는 우리말로 기도를 드리고 나는 방언으로 기도를 드렸다.

      다른 사람에게 방언을 받게 하기 위해 함께 기도를 할 때에는, 가능한 한 큰 소리로, 되도록 빠르게 그리고 열성을 다해 소리를 내야 한다. 이렇게

      여러 날 동안을 했는데, 그래서 방언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안 오는 것이었다.

       

      “성도님, 방언이 올 때가 되었는데, 이상한 거 느껴진 것이 없나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방언이 입에까지 왔다가 그냥 갔어요. 아직도 기도가 부족한가 보죠?”

      “내? 방언이 입에까지 왔다가 그냥 가요?”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입술이 비틀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순간, 방언이 왔구나 하고 생각한 그는 이제 자기 입에서 방언이 구구절절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입술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방언은 가만히 있는데 저 혼자 줄줄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바로 이것을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면 그게 무슨 은사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방언은 바로 그런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뜻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는 은사가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소리는 내가 내는 것이다. 소리는 내가 의도적으로 내지만,

      성령께서 그 소리에 영들은 듣고 아는 “뜻”을 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방언은 소리에 그 뜻이 있지 않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방언을 이미 받아서 방언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방언할 때 내는 소리 그 자체에 뜻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치 인간들의 언어처럼 소리나 소리의 순서에 어떤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지만, 방언 기도를 할 때 내는 그 소리 자체에는 아무 뜻도없다. 랄랄랄 하든 룰룰룰 하든 또 뭐라고 하던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

      도 없다는 말이다. 필자도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에는 소리 그 자체에 어떤뜻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 영 자신의 의지로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방언 기도를 하며 내는 소리는 단지 나의 영이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밖으로 들어내고 있을 뿐,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의 내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입으로는 랄랄랄랄 하고 한 가지 소리만 하고 있어도 기도하는 영은 하나님을 향해 온갖 내용의 기도를 다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 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것을 통역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이 문제는 방언 통역의 은사를 말 할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저 입술만 놀리고 뭐라고 소리만 내고있으면 그것이 방언 기도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진정과 간절함과 뜨거운 열정이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입술로만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혀와 입술만 움직여 이상한 소리만 낸다고 그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그 방언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진정과 간절함과 열정이 실려야 하는 것이다.

       

      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다.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겨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이 여자 집사님은 밤마다 교회에 나와 밤을 새며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들어보니 소리만 요란했지 전혀 방언 기도가 아니었다.

      남이 하니까 소리만 흉내 내어 하는 가짜 방언이었다. 사실은,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방언 소리를 들어보면 방언 기도 아닌 소리뿐인 가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 있는 것이다.


      귀신 방언이 있는가?

       

      사람들 중에는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해 전, 어떤 사람이 간증하는 중에 들은 것인데, 그가 하루는 산에 가서 밤에 기도를하고 있는데, 새벽 무렵이 되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며 산 길을 내려오는데 그 방언이 좀 이상해서 분별을 해 보았더니 귀신이 따라오면서 그들의 입을 빌어 하는 귀신 방언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 못 안 것이다. 귀신 방언이란 없다. 방언은 성령의은사이기 때문에 귀신은 절대로 방언을 할 수 없다. 방언은 나의 영과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귀신 방언이란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오직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귀신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리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이것은 내가 잘 아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교회에 나이 많으신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집사님의 다 큰 자제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서 이 여자 집사님은 매일 밤 교회에 나와 아들을 위해 기도를하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 기도가 한창 무르익을 때면, 이 집사님은 강대상 밑에 엎드려 방언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루는 스스로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느 젊은 여자 집사님이  이 할머니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방언은요, 모두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이에요.”
       

      할머니 집사님은 이 말에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매일 밤잠을 안자고자정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기도를 했는데, 그게 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도였다니!

      할머니 집사님은 그 후에도 매일 밤 교회에 나오기는 했으나 기도는 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나서 방언 기도도 못하고 우리말로 기도를 하려고 해도 통기도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매일 밤 멍하니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그 젊은 여자 집사님은 참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놓았다. 아들의 병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막아버린 것이었다.

       

      방언에는 귀신 방언도 없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도 없다. 방언 기도란 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교대로 혹은 이중창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귀신 방언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자.

       

      <부르는 소리> 2부“기도와 응답”의 초판이 발간된 것은 1989년 11월 15일이었다. 지금 필자가 얼마간의 수정을 가하며 컴퓨터에 입력 작업을 하고 있는 지금은 2003년 10월이다. 그러니까 초판을 낸지 거의 14년 만에 수정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 14년 동안, 필자는 이 귀신 방언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기도 하고 또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다. 분명히 귀신 방언은 있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느냐? 하는 항의였다. 


      그 중 어떤 여자 목회자께서는 상당히 흥분된 목소리로 필자를 비난하는 전화를 걸어 왔다. 그 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부르는 소리>는 목회자들이 많이 읽고 있는데 그런 잘 못된 소리를 써서사람들을 잘 못 가르치고 있으니 죄가 크다. 빨리 귀신 방언이 있다고 수정해라.” 나는 대답했다.

      “귀신 방언은 없습니다.”

      그 분은 나를 설득할 기세로 말했다.

      “왜 없어요. 내 귀로 듣고 있어요!”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가지고 귀신 방언이라고 말한다. 실은 나도 그런 방언 같은 소리는 많이 들었다.4-5년 전의 일이었다. 성지 순례를 떠난 일행 중에 귀신들린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버스 속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숙소에 들었을 때, 나는 그 여인을 내 방으로 불렀다. 그녀 등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귀신을쫓기 시작했다. 나는 좀처럼 귀신 쫓는 일은 하지 않지만, 그 날은 나도 모르게 그것을 하게 되었다. 한 참 방언 기도를 하지 그녀는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을 내서 방언을 하며 귀신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여인은 더욱 심하게 토하고 나는 더욱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쓱 쳐들더니 나를 행해 방언으로 대들기 시작했다. 워낙 큰 귀신같아서 나는 그만 쫓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귀신이 그 여자의 입을 빌어 나에게 방언으로 대항했다고 지금 내가 썼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 귀신은 그 여자의 입을 통해 방언을 말한 것이아니라, 내 방언 흉내를 낸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귀신 방언이라고 말한다. 귀신이 방언하는 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귀신도 방언을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하나로 성령으로부터 받는 은사요, 은사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비록 귀신이 방언 같은 소리를 낸다고해서 그것이 어떻게 방언이 되는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남들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따라서 그런 소리를 낸다고 그게 방언인가?

      아니다. 빙언 흉내다. 흉내는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일 뿐이다. 귀신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한다고 그게 방언이란 말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방언같이 들리는 소리일 뿐이다.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영 분별의 능력이 있거나, 약간의 방언 통역의 능력만 있었더라면 그 귀신이 남의 입을 빌어 지껄이는 그 소리가 방언 아닌 소리일 뿐이라는것을  알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방언은 소리 내는 은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기도다. 방언이란 입으로는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내 영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있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 그럼, 그것은 귀신이 아니지. 따라서 귀신은 절대로 방언을 할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방언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귀신 방언이 있다거나 귀신도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귀신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이정도 말했는데도 아직도 귀신 방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도 좋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속은 못 보고 겉만 본다. 영은 못 보고 육만본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하면 그 귀에 울리는 소리만을 듣고 그게 귀신 방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영의 소리는 못 듣고귀에 울리는 소리만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방언에는 귀신 방언도 없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방언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참 방언이라면,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올라가는 내 영의 간절하고 신령한 소망인 것이다.

      방언에 대해 또 한 가지 잘 못 알려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방언을 일본 방언이니 중국 방언이니 혹은 독일 방언이니 하고 부르는 것이다. 대인 방언에는 물론 일본 방언도 있고, 중국 방언도 있다.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자기도 모르는 일본말이 쏟아져 나왔다면 이것은 일본 방언이다.

       

      그러나 대인 방언이 아닌, 우리가 하는 대신 방언에는 일본 방언이니 중국방언이니 하는 것은 없다. 아마도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이 일본말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서 일본 방언이라고 이름을 붙였겠지만, 방언은 그것이 설사 어느 나라 말처럼 들릴지라도 방언은 그냥 방언인 것이다.

       

       

      방언 배우는 법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방언을 가르친다.반면,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에 의하면 방언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인데 어떻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노력해서 그것을 배울 수도 없고 또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가 바로 그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가? 사실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방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은사가 이미 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은사가 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껴도 방언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언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가르친다는 것은 방언의 은사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은사를 입으로 내서 말할 수 있게 소리 내는 연습을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방언 소리 내는 연습은 어떻게 하나?

       

      1)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그 흉내를 내어 혼자서 소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해 본다. 이때,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도 없으니까 소리에 너무 신경 쓸 것 없이 그저 혀 돌아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소리만 내면 된다.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엉터리 영어 흉내 내듯 해도 되고, 하여튼 쉴 새 없 이 혀와 입술을 놀려서 아무 소리나 끊기지 않고 나오게 하면 된다.

       

      2)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방언으로 기도하는 곳에 가서 그 속에 끼어 앉아 크게 소리를 내어 방언 기도를 해 본다. 모두들 열심히 소리 내어 기도를 하기 때문에 옆 사람이 뭐라고 기도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옆 사람이 혹시나 내 엉터리 방언을 듣고 흉보지나 않을까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마음껏 큰 소리를 내어 방언을 해 본다.

       

      3) 이제는 정성을 다해 열심히 소리를 내면서 나의 영혼을 그 방언 소리에 싣도록 노력해 본다.

       

      4) 좀 더 숙달된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자주 방언 기도를 해야 한다. 신령한 사람이 방언 기도를 하면 그 옆에 함께 앉아 그의 방언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따라 방언기도를 한다. 이런 것을 자주하면 방언 기도의 영력이 자란다.

       

      영적으로 깊은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방언을 하면서 나의 정성을 그 방언 기도 위에 다 쏟아 넣어야 한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도 연습을 해서 방언 흉내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방언은 아니다. 방언은 사람의 힘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셔야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고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소리 내는 방법만 배우면 곧 방언을 할 수 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소리를 배워 방언 같은 소리를 낸다 해도 그것은 방언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들 주위에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입으로 소리만 내는 방언 아닌 가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아 이들 방언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방언 받고 조심해야 할 일

       

      방언은 가장 귀한 은사이다.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수단이다. 방언은 이렇게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 모두가 다

      이 방언의 은사 받기를 원하신다. 그렇긴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 은 방언은 모든 은사 중 가장 낮은 은사라는 사실이다. 가장 귀한 은사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은사이다.


      방언의 은사는 모든 신령한 것으로통하는 문일 뿐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내 앞에 신령한 영의 나라로 통하는 문이 막 열렸을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은사를 받고 조심해야 할 첫째는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모든 은사가 다 그렇지만, 방언도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남들 앞에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천사 루시퍼는 자기의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교만해졌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하나님처럼

      뭇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 마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하여 교만해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마귀의 마음인 것이다. 교만은 마귀의 특성이며, 교만하다는 것은 마귀를 닮았다는 것이다.


      방언은 모든 신령한 것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 은사 받아 더욱 겸손해지고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면 차츰 하나님의 더욱 신령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방언이 귀한 은사라는 것은 그것이 신령한 하나님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하는 점이다. 그러나 자칫 교만해져서 그것을 남에게 자랑을하거나 경박하게 사용하면 그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닫히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이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여럿이서 한 자리에 모여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에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남들이 조용조용 기도를 하면 나도 조용히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모두들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하면 나도 크게 외치며 기도를 한다. 사람들이모두 조용히 기도를 하는데 혼자서 큰 소리로 외쳐대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느 작은 교회의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모두들 조용히 소곤소곤기도를 하는데 근처에 사는 다른 교회 신도들이 몇 사람 와서 큰 소리로

      방언을 외쳐대는 바람에 그만 그 교회의 경건하고 조용한 새벽기도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외쳐대는 방언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지 않는다.  


      필자가 자주 가는 서울에 있는 산에 있는 모 기도원에 가보면, 남이야 방해를 받건 말건 혼자서 큰 소리로 성난돼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산에서야 아무리 큰 소리를 치고 악을 쓰며 기도를 해도 상관없지만, 성전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에 혼자서 악을 쓰는 것은 좀 생각해볼 문제다.

       

      방언을 잘 하는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방언 기도를 하면 처음에는 조용조용 시작하다가 차츰 기도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면 모두들 힘을 다해 외쳐대다가 다시 낮아지기 시작해서 종용해지고 그러다가 또다시 고조되기 시작하면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외쳐댄다. 여럿이서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할 때에는 이렇게 높게 낮게 피도를 타면서 때로는 결렬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기도를 해 나간다. 이렇게 기도를 해 나가면 어느덧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각자의 영이 하나로 융합이 되고 각기 외쳐대는 기도의 내용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나타난다.

       

      거듭 말하거니와, 방언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기 시작해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귀로만 듣고 알던 하나님을 이제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열려라 참깨! 하면 보물을 가득히 숨겨 둔 바위 문이 열리듯, 방언을 말하면 놀라운 보화가 가득 숨겨진 신비한 하늘나라의 문이 내 앞에 스르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방언은 언제 하는가

       

      방언은 아무 때나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그러나 특히 방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1)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나올 때.

       

      기도를 하려고 꿇어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튀어 나올 때가 있다. 또 말씀을 읽다가 감동이 왔을 때, 특히 묵상 중에, 또 우리말로 기도를 하는 중에 방언이 절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고 싶을 때, 혹은 어떤 일로 인하여 심령이 몹시 상했을 때에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나온다. 이럴 때에는 당연히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2) 나의 기도 내용을 남에게 숨기고 싶을 때.

       

      기도의 내용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좀 거북한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럴 때에는 방언으로 가도를 하면 된다. 기도 전체를 방언으로만 해도 되고, 숨기고 싶은 그 부분만 방언으로 해도 된다. 이때에는 마음속으로는 우리말 기도를 하되 입으로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안수 기도를 해 줄 때에는 방언으로 한다.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 을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아무래도 그 사람 귀에 듣기 좋은 기도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때때로 이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그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3)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를 모를 때.

       

      기도를 하기 위해 꿇어앉기는 했으나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지 금방 생각이 안 날 때가 더러 있다. 이럴 때에는 방언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또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기도 말이 막히는 수가 더러 있다. 이럴 때에도 기도를 끊지 말고 방언으로 이어나가면 된다.

       

      4)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싶을 때.

       

      방언 기도란 나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내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니까 기도의 내용도 모르면서 그것을 나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바로 방언 기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언 기도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는 기도이다. 내 생각으로, 나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것을  오로지 하나님 뜻에 맡기며 하나님 뜻에 따르겠다는 나의 영의 기도인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언 기도를 할 때에는“지금 내 영이 드리는 이 기도가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하며 정말 그렇게 될 것을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면서 방언을 해야 한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드릴 때, 나의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기도는 모두 나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육신이 내가 아니라 내 영이 나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육의 소원이 아닌 내 영의 소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은 귀한 것이다.

      방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방언을 업신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방언을 금하는 교회도 있고, 또 더러는 방언은 옛날(초대교회시대)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방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5) 귀신을 쫓을 때,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할 때.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에는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그 기도에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영력을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말로 기도를 이어나가기 보다는 방언으로 하는 것이 훨씬집중이 잘 된다.

      병을 위한 기도를 할 때, 그 앓는 사람에 대해 또 그 병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나을 수 있을 것인지, 그  환자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을 때, 방언으로 하면 더 큰 능력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은 방언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는 그 사람의 믿음과 능력의 크기이다.

       

      6) 방언으로 찬송을 할 때.

       

      찬송가의 가사 대신 방언으로 찬송을 부른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찬송가 가사를 몰라서 혹은 생각이 안 나서 방언으로 바꾸어 찬송가를 불렀다면 이건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다.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은 열심히기도를 하고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사 대신 방언이 나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우리말 가사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는 방언 가사가 나와야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인 것이다.

       

      방언 찬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있는 찬송가 곡조에 방언 가사로 노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의 감동에 의해서 방언과 더불어 곡조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경우이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차츰 감정이 격해 오르면 그드리는 기도 말에 높낮이와 장단과 강약이 붙게 되고 그것이 조금씩 발전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비롯되었다.

       

      7)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기도드려야 할 때 방언으로 기도한다.

       

      우리말 기도를 드린다면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도 더 걸릴 긴 기도도 방언으로 드린다면 단 10 분이나 5분 동안에 다 드릴 수 있게 된다. 아니, 단

      10초 동안에도 다 드릴도 수 있다. 방언 기도는 나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영은 시간을 초월한다. 따라서 나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모든 기도를 한데 묶어서 한 순간에 하나님께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이 갖는이런 비밀을 알며 방언에 능숙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방언은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유익하고 귀한 은사인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께 대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나는 궤도를 벗어난 별처럼 무턱대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뜻을 억지로 따르고 당신의 법을 무턱대고 지키며 당신의 명령에 마지 못해 복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일들을 당신께서 주시는 온전한 선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인생의 슬픔일지라도 당신께서 주시는 포장된 선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아침에도 대낮에도 밤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그리고 겨울에도 나는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두겠습니다.
        햇빛으로 오시든 빗줄기로 오시든 나는 기쁨으로 당신을 내 가슴에 모시겠습니다.
        당신은 햇빛보다 더 밝으신 분 빗줄기를 내리시는 분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옵니다. 두드리소서. 당신께 문을 활짝 열어드리겠습니다. 아멘.

        조지 매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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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은 그 어디에도 사도시대 일어난 표적,이적이 
      사도시대로 중단되거나 또는 사도시대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라 직접 교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 표적들을
      16장에 언급하셨고 그 표적과 관계된 은사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질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성령은 그 뜻과 계획에 따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신자들을 통해서 표적이나 이적을
      나타내실 거라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 사단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것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 뿐 만 아니라 불의의 모든 속임도 
      있으니 진리인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을 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지 치우쳐서 사도시대 이후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능력과 표적과 참 
      이적은 더 이상 없다라는 사람에게서 나온 이론을 
      설파하라는 것이 아님,

      @ 견해차이로 가족과 아무리 치열한 변론을 
      한다해도,때로 불편해지고 감정이 상한다해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졌다해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미움이
      아니라 염려와 사랑일 것이고 그렇게 인도하시는
      이가 우리 한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지요.
      제가 여기서 대동소이할 수도 있고 대이소동할
      수도 있는 은사관으로 여러 분들과 좀은
      심각한 변론을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개떡같이 얘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소립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은사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주의는 은사중단보다 해악이 훨씬 
      크구요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됩니다

      @ 같은 논리가 은사지속론자들에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은사지속이라는 말은 은사중단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중단주의는 은사주의보다 해악이 훨씬 크다.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된다 라는 식으로

      @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나 비 성경적인 은사중단주의나 교회에 
      미치는 해악은 어느 것이 가시적으로 더 부각되어 보이느냐의 
      차이일 뿐 , 관점과 입장 차이에 따라 상대적인 “보다 크고” 
      “보다 작고”의 비교급으로 논하여 기울기를 선택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존의 은사주의와 은사중단주의를 성경적으로
      검증,수정하여 보다 성경적인 이론과 주의로 개혁시켜 나가는 
      것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바라 생각합니다.

      아멘넷에서 [방언중단론--방언귀신론]을 주장하는 질문님 
      준익님이나 넷상에서 [방언 필수론-방언구원론]을 주장하는 
      분들이나 모두 방언을 말하는 것을 체함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때 같은 체험을 하고도 그렇게 견해가 극과
      극으로 다른 것은 그 분들이 체험에서 나온 이론을 진리인 
      성경말씀보다 더 집착하여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사주의 잡는다고 성령의 은사 받아 잘 활용하는 성도들의 
      은사까지 잡아야 할까요? 그릇된 신학이론으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키는 시도를 해야 할까요? 
      악을 원천적으로 궁극적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선이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 악이 아니기에 잡는 방법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특별히 사모하라고
      하고 금하지 말라고 계시한, 지체와 몸의 덕을 세우는 
      은사들을 누가 어떻게든 사모하지 못하게 막고 금하게 
      하려고 성경 말씀에 반하는 신학이론을 들이밀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몸 된 교회의 덕이 세워짐을 
      훼방하고자 하는 사단 아니겠는지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특별히 교훈한 지체와 몸의 덕을 세우는 은사를 누가 
      어떻게든 그릇 되이 추구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케 하고 거짓 것을 믿게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몸 된 교회의 덕을 허물기
      위해 훼방하는 사단 아니겠는지요?

      사단의 미혹은 어느 한 방향으로만 되어 지는 것이 아니니
      신자들은 좌로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성도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주초를 두고서 바르고 건전한 
      은사관을 정립하고 각자 받은 은사들을 성경의 교훈에 따라 
      활용하여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시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최송연

      주님,
      이 새해 새 아침에…
      당신의 영을 내게 부어주소서
       
      주의 순백한 영으로
      내 삶에 순수성을 잃지 않고
      날마다 영원을 향해 피어나는
      새순(筍)이기 원합니다
       
      흐르는 세월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갉아 병들게 하고
        
      숨겨진 죄악은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시꺼멓게 더럽힐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인생이 가꾸어야 할 초원을 
       바싹 마른 검불로 태워 사위고
       
      매서운 역경의 된서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날 동안 
      쉽게 낙담하는 연약함에서 벗어나
      조금 더 강해지는 것은 좋으나
      당신의 도움없이도 잘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자고하지 말게 하시며
       
      사람을 사랑하되
      그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고
      한 점 죄악도 가슴에 숨겨두지 않도록
      분초마다 내 안과 밖을 살피시사
      견인(牽引)해 주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그리하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
      (살전 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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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강자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대는 절대 강자다.
      인생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주를 통째로 가슴에 품고 초연하라. 
      그것만이 그대를 승리자로 만든다.
      
      - 이외수의《절대 강자》중에서 -
      
      대망의 새해다.
      내 앞에 펼쳐진 이 한 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절대 강자'로 거듭나 보는 것은 어떨까?
      나만을 위함이 아닌, 어렵고 외롭고 아프고 사랑에 굶주린, 약한 사람을 위한 '절대 강자' 주님의 가슴을 닮은...
      그러기 위해서 올 한해는 우주를 통째로 가슴에 품어보는 거다!
      저~ 드넓고 광활한 우주, 별들의 속삭임이 흐르는 그 우주를 말이다. -글/최송연

       

      

          참 아름다운 만남 모니터 안에서의 만남은 참 아름답습니다. 닉네임 하나 이름표 달고서 초록 향기와 함께 들꽃처럼 수수하게 만나 늘 사랑을 꿈꾸며 행복을 이야기 합니다. 사랑의 향기가 다름니다. 어떤 사람은 일곱 색깔처럼 고운사람 글을 아주 맛갈 스럽게 잘쓰는 사람 마음이 따듯한 사람 사랑의 감정이 풍부한 사람 남몰래 가슴아파하는 사람 이렇게 색깔이 다른 다체로운 만남 속에서 사랑이 샘솟고 용기가 생깁니다. 아름다운 만남 때문 이겠지요. 이 작고 사소한 만남 이지만 담아두면 담아 둘수록 고운 향기가 나고 만나면 만날수록 편안 해지는 따듯한 사랑이 그렇게 맑은 샘물 흐르듯 향긋한 꽃내를 뿜으며 모든이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졌으면 합니다. 이런 소중한 만남을 사소한 감정 싸움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모니터에서의 만남도 귀한 인연입니다.
      행복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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