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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에 관한 12가지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자에게 “회개의 물세례” 받을 것을 명령하셨음.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슥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눅11: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갈5:22/롬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갈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요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는 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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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령세례는 누가 베푸시는 것이며 , 또한 누구에게 주시는 것인가?
1) 성령을 부르기를 마10:20 에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라"라고 함.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시니 원래는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 해야 옳다. 그런데 이 때는 예수께서 이 땅에 머물러 계시는 때이므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성령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12:18, 눅4:18, 요3:34" 등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부어 주셨음을 증거한다. 다시 말하며 그리스도로서 지상에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성령을 보내시는 입장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시는 입장임.
2)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즉 천상으로 승귀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이 되신다. 여기서 두가지 핵심이 있는데, a. 여전히 아버지께서 보내시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요14:26). b. 예수께서 천상으로 승귀하시고는 그 승리와 또 받으신 영광의 표징이 아버지께서 예수께 성령을 이 땅에 보낼 수 잇는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행2:33).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라 해도 맞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또 승리하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받아 보내셨다해도 맞는 것이다.
3) 여기서 한가지 더 보탤것은 비록 구약성경에 직접적으로 성령을 보내셨다고는 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예언하고 약속하셨기에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령의 오실 것을 겔36:26-27 같은 곳에 예언하고 계시며 특히 요엘서 2:28-29은 오순절날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는 자들에게 사도들이 직접 인용하면서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 하면서 대답한다. 그래서 행2:33 에 계속해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즉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강림사건)"이라 했는데 바로 앞에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 . . 부어 주셨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예언되었을뿐 아니라 약속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께서 반드시 먼저 해를 받으셔(십자가를 지시고 승리)야만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높이시는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높임을 받으시는 상태에서야 비로소 성령을 아버지께 당당히 받아서 교회와 성도에게 부어 주실 수있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를 요7:39에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라고 놀랍게 선언하신다. 우리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 일 이전에는 반드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께 높힘을 받는 일이 선결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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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인생의 말년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다윈이 운명하기 몇 달 전 호프 부인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를 방문했다.
성경을 펼쳐 들고 있던 다윈에게 호프 부인이 물었다.
“지금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다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성경입니다. 아주 고귀한 생명의 책이지요.”
호프 부인은 창세기를 펼쳐 보이며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허구를 설명했다.
그러자 다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놀라운 고백을 했다.
“나는 참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했습니다.
진화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학문이 아닌 창조론과 적대되는 종교처럼 신봉하게 되었지요.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증거해 주십시오.”
진리는 죽음 앞에서 진위가 가려진다.
다윈은 죽음을 앞에 두고 창조론을 진리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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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사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수 있는
솔직함과 아는 것을 애써 난척하지 않고도
자신의 지식을 나눌수 있는 겸손함과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돋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비치는 거울이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남에게 있는소중한 것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선한 눈을가지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화를 내거나 과장해 보이지 않는
온유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특함으로 자신의 유익을 헤아려 손해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의 행복을
기뻐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잔꾀를 부리지 않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깊은 배려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잠깐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을 줄 아는 지혜를 쌓으며,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며
행복해 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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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오기 직전이 가장 추운 법이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당신의 습관을 최대한 다스리 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당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떠날 때에 우리 모두는 시간이라는 모래 밭 위에
남겨 놓아야하는 발 자욱을 기억해야 합니다.
산 속의 적은 물리치기 쉬워도 마음속의 적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속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남보다 영리
하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요.
그 하나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옳은 사람과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당황하지 마십시요.
사방이 다 막혀도 위쪽은 언제나 뚫려있고
하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젊음은 마음의 상태이지 나이의 문제가 아님을
명심 하십시요.
매력은 눈을 놀라게 하지만 미덕은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때때로 죽음을 생각 하십시요.
그리고 그 위에 당신의 생명을 설계하십시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안다면 한층 인생의 무게가
더해질 것입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 하기보다 좋은 가정을 지으십시오.
호화주택을 짓고도 다투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막살이 안에 웃음과 노래가 가득한 집이 있습니다.
크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작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좋은 나무는 쉽게 크지 않습니다.
바람이 강하면 나도 강해지고 숲이 어두우면 나무는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갑니다.
햇빛과 추위와 비와 눈은 모두 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주는 최고급 영양소입니다.
인생의 시계는 단 한번 멈추지만 언제 어느 시간에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이 내 시간이라 하고 살며 사랑하며 수고하고
미워하지만 내일은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시계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면
기회를 사용하도록 철저히 준비하십시오.
어떤 바보라도 사과 속의 씨는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 속의 사과는 하늘만 압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이 많고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픈 추억이 많고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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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0) | 2012.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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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0) | 2012.0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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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함정에 걸린 사람들 (0) | 2012.0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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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절제한 태도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0) | 2011.12.08 |
쥐 녹이는 ‘마운틴듀’ 사람이 마셔도 괜찮나 마운틴듀 치아 침식률은 콜라의 6배 2012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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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음료 ‘마운틴듀’가 쥐를 녹인다고?” 지난 주 라이브사이언스, NBC, CBC 등 미국의 언론매체에 ‘탄산음료 마운틴듀가 쥐를 녹인다’는 거짓말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실려 화제가 됐다. 콜라, 사이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는 마운틴듀에 쥐도 녹일 만큼 위험한 물질(?)이 들어 있다니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사실로 인정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펼친 곳이 다름 아닌 마운틴듀의 제조업체 펩시코(PepsiCo)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로써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는 고백을 스스로 털어 놓은 이유는 펩시코에 걸린 한 소송 때문이다. 2009년 미국 일리노이주에 사는 로널드 볼 씨는 자판기에서 구입한 마운틴듀에서 죽은 쥐가 나와 피해를 입었다며 제조업체인 펩시코에게 손해배상금 5만 달러(한화 약 5700만 원)를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다. 볼 씨가 음료수를 구입한 시점은 2008년 11월 10일. 그는 회사 자판기에서 마운틴듀를 구입해 한 입 마셨는데, 역겨움을 느껴 바로 뱉어냈다. 남은 음료를 컵에 따라 살펴봤더니 뜻밖에도 작은 쥐 한 마리가 나왔다. 크게 놀란 볼 씨는 캔에 적힌 전화번호로 즉시 연락을 했고 펩시코 측은 손해사정인을 보내와 테스트를 해보겠다며 쥐와 남은 음료수를 가져갔다. 하지만 17개월 뒤인 2010년 4월 8일, 해당 쥐를 면밀하게 분석한 펩시코는 자사 제품에서 쥐의 사체가 나왔다는 주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두 달 이상 자사 제품에 들어가 있던 쥐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인다는 것. 펩시코는 “한 달 이상 마운틴듀에 담근 쥐는 꼬리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뼈와 살 구조가 모두 사라진 젤리 같은 형태만 남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쥐의 해부와 실험을 맡았던 수의사 로렌스 맥길은 지난해 10월 8일 일리노이주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 “마운틴듀에 4~7일 정도 담근 쥐라면 뼈에서 칼슘이 모두 빠져나오고 내장 구조는 파열되며, 30일이 지나면 꼬리 일부분만 남기고 모든 구조가 사라진다”고 적었다. 반면 볼 씨가 보내온 쥐에는 뼈와 내장 기관, 연골까지 남아 있었다. 또 “문제의 음료수가 개봉된 것은 제작되고 74일 뒤인데, 그 안에 들었다고 주장하는 쥐는 태어난 지 4주를 넘지 않은 어린 상태였다”며 “음료수 제작과정에서 쥐가 들어갔을 가능성은 적다”고 진술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외신들은 “제조 과정 중에 쥐가 들어갈 수 없음을 입증했을지는 몰라도 마운틴듀가 쥐도 녹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보도했다. 재판이 진행중인 일리노이 주 매디슨 카운티 법원은 펩시코 측에 이달 11일까지 구체적인 답변을 요청한 상태다. ●마운틴듀 치아 침식력은 콜라의 6배 음료수가 쥐를 녹일 수 있다니 사람이 마셔도 괜찮은걸까. 마운틴듀의 산성도는 pH3.4에 이른다. 마운틴듀가 이 같이 강산성을 보이는 이유는 산미료 기능으로 넣은 시트르산 때문이다. 시트르산은 레몬이나 라임 등 귤속 과일에 많이 들어 있는 천연 물질로 음식에 신맛을 내기 위해 사용된다. 적당한 신맛은 식품에 청량감을 주고 미각에 상쾌한 자극을 주며 침의 분비를 촉진해 식욕을 돋운다. 그런데 이 시트르산은 칼슘과 매우 잘 결합하기 때문에 치아의 에나멜 층을 침식시키는 기능이 있다. 같은 산이라도 콜라에 사용되는 인산이나 사과산에 비해 침식률이 높다. 같은 탄산음료인 콜라의 산성도 역시 pH2.5에 이른다. 최은정 이화여대 과학교육학과 겸임교수는 “이런 강산 음료는 살균력이 있어 변기청소나 피 얼룩을 제거할 때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004년 미국 메릴랜드대 치대 안소니 본 프라운호퍼 명예교수는 사람의 어금니를 마운틴듀와 콜라에 각각 2주간 담그는 실험을 했다. 2주 뒤 마운틴듀에 담갔던 어금니는 에나멜층이 처음보다 약 6%가량 사라졌지만 콜라는 1%가 약간 넘게 녹았다. 놀랍게도 다이어트 마운틴듀에서는 에나멜층이 8%나 사라졌다. 이 같은 성질 때문에 치의학 전문가들은 음료수를 마실 때는 가능한 한 음료수가 입 안에 오래 머무르게 하지 말고 단숨에 벌컥 들이마셔야 한다고 충고한다. 또 다 마신 뒤에는 바로 양치질을 하지 말고 입 안을 물로 행군 뒤 하는 게 좋다. 물론 탄산음료는 마시는 순간 빠르게 소화기관을 타고 흘러 내려가 분해되기 때문에 건강한 소화기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탄산음료로 인해 내장기관이 부식될 위험은 없다. 하지만 산성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린이는 성장발육에 지장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 뼈엉성증(골다공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김윤미 기자 ymkim@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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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우리는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나, 선교사가 된다거나, 기독교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일'입니다. 먹고살기 위한 직업으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사명'으로 한다면 분명 '하나님의 일'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8-29)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나는 필연적으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의 생활태도는 거룩함을 추구하고, 내 마음은 깨끗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엄청난 교회당을 짓고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한다 해도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고 삶은 거짓과 속임수로 충만하다면 그 사람들에게 종교는 '사업'일 뿐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엄청난 큰 일꾼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최용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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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강요
1) Inst 1536.
칼빈의 초기 작품인 1536년판 강요에서부터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칼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3위1체중에서 ‘성령론’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잘 정리해야 성령의 은사 부분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 논고에서는 칼빈이 제시한 성령의 은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지만, 중간 중간에 성령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서 함께 서술하는 형식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1536년판의 헌사 부분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즉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 -- 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 과 기적들의 가치”란 제목에 당시 로마 카톨릭이나 재세례파의 입장과 다른 개신교의 독특한 입장을 변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칼빈은 어거스틴의 역사를 들어 변증하면서 기적의 은사를 연속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의 성격은 처음부터 非기독교적 분파에 속한 성격이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부분은 기적의 연속적인 성격을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확증해 주는 도구로 쓰였으나 이제는 계시의 종결성과 함께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수단으로 변화되었음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역설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초판 전체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주께서 당분간만 나타나게 하셨던 다른 이적들처럼, 신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전파가 계속적으로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사라졌다”
2) Inst 1559.
Inst1559판에서도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는 4권 19장에서 로마 카톨릭의 다섯가지 잘못된 성례를 논하면서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부분을 언급해 주고 잇다. 여기서 그는 초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은사는 이제 중단된 것임을 명확한 말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초대 교회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오직 복음의 존귀성과 또한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완성된 지금은 그런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없음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의 완성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은사가 중단되었음에도 로마 카톨릭이 계속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계속적인 은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 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이 외에도 칼빈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 가운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는 성경에 대한 논증 부분에서 성령과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또한 1장에서 성령에 대한 광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더욱이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서,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위에서 칼빈이 지적했던 방식은 오늘날도 제시되는 신비주의의 전형적인 방식인 것이다. 즉 성령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인도를 더욱 중요시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을 칼빈은 분명히 거절 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식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역사의 경륜 가운데 예비되었던 방식임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성령이 단독적으로 역사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은 성령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칼빈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보면 당연히 성경의 종결성과 함께 과거의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하여 사용하셨던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도 동일하게 더 이상 사용될 필요가 없기에 종결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성령의 은사를 연속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성경의 권위성을 성령께서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치명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 주석
1) 마가복음16:17-18
마가복음에서의 표현은 오늘날 은사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면 은사의 종결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여기서 주님의 약속은 당시의 복음의 확장과 권위를 위해서 주어졌던 것이지 계속적인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도 이것은 신자들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소수의 특정인에게만 주어졌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 은사는 분명히 단절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임시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새롭고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던 복음을 밝히 드러내는 뜻에서 그 당시만을 위해서 기적이 약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물론 이 세상은 배은망덕 때문에 이 특권을 상실한 것이지만 이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출발점에 있는 복음의 교훈에 충분한 보장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물론 이러한 기적의 용법이 그 후에 있어서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러한 실례가 아주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
2) 사도행전2:1-4
마가복음에서처럼 사도행전 중에서도 은사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즉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연속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칼빈은 당시의 성령의 은사는 마가복음에서 처럼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속에서의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의미를 늘 인식하고 각 구절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사라진 단회적인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절의 해석에서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의 혀가 나타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보다도 차라리 우리들과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이익에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 그들이 그처럼 갑자기 변화를 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오늘 우리가 그것은 우리의 유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유익이 되도록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 주기 위하여 특수한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심으로써 북음을 위한 전진의 길을 갖추어 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반영되고 있다. ---- 이 일이 우리를 위해 된 것인데, 복음이란 것이 우연하게 우리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겨 주신 가르침에 참여하지 못하는 국민이 하나도 없도록 여러 가지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을 부르신 부르심이 확인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해 주는 일도 된다.
위의 칼빈의 표현을 살펴보면 철저히 이 사건이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에 준비된 복음을 확증하기 위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동일한 체험을 하는 방식이 아닌 역사 가운데 확증되어진 복음, 즉 성경계시가 우리에게 확증된 것이 우리의 유익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고리도전서12:1-31
본 장의 내용은 성경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게 될 때 특히 많이 언급되는 장이다. 따라서 본 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적 입장이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칼빈이 본 장을 다루는 방식은 그의 전반적인 신학적 입장을 잘 고려하면서 접근해야만 그의 입장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 장의 주석 부분이 자칫 칼빈 자신의 입장을 불분명하게 표현한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와 또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비추어 보면 여기에서도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이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본 논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의 성령 은사에 대한 독특한 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칼빈의 은사에 대한 개념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이 사용하고 있는 은사의 개념이 오늘날 은사 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은사의 개념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칼빈은 은사를 폭넓게 사용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성질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즉 어떤 것만 특별히 ‘은사’라는 명칭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행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은사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는 은사가 연속되는가? 아니면 종결되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의 은사(은혜)는 결코 이 세상에서 끊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존재 자체를 위협받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개념을 기초로 하면서 칼빈은 이 은혜의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경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는 “은사의 종결” 개념이 아니라 역사의 경륜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스스로 단절 시키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도 표면상으로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중에서도 연속성과 단절성이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全 경륜적 방식에 따라서 차등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가지 은사들이 성경 계시의 종결성과 단절되는 것이 많으며 또한 연결되는 것들의 특징은 여전히 이 성경 계시와 연결해서 그 기능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본 장과 또한 다음 장들을 살펴보면 칼빈이 무엇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은 당시의 교회의 기초를 세우며 또한 복음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 것들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바울이 전체의 문맥과 흐름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복음을 통한 성경 계시의 확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이미 앞부분인 2장에서 그 기초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2장에와 다른 성령의 사역을 뒤에 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여전히 동일하신 성령의 사역 방식으로서 12장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4) 기타
다음에는 주석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칼빈의 주요한 표현들을 통해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여기서 우리는 기적에 대한 올바른 용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 기적을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날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독특한 관계를 깨뜨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이 말씀을 기적과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형편없는 오용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셨던 병 고치는 은사가 그들의 자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경우에 있어서 전도를 위한 보증이었다”.
③ (요10:41-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④ (눅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⑦ (롐23: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⑧ (신13:1-4)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3. Article.
1)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 논고는 성령의 은사와는 주제에 있어서는 거리가 있지만 그 원리적 방식에 있어서는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해준다. 칼빈은 당시 로마 카톨릭을 통해서 미신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성유물 숭배 사상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방식을 깨뜨리는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즉 신자들을 더욱 무지함과 우상 숭배로 이끄는 방식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접근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성도들을 성경으로부터 단절시키며 무지와 미신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성유물이 단지 기념적인 것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이것을 통해서 수많은 이적들을 함께 조장했기 때문에 오늘날 은사주의운동과 많은 부분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 자신은 성유물 숭배에 대한 비판의 성경적 근거 구절을 ‘살후2:11-12’에서 찾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견을 비판하는데 전형적인 구절이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형태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로 보았던 것이다.
칼빈은 더 나아가 오히려 구약에서조차도 이러한 미신적 행위들은 금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구약에서도 일시적으로 사용된 여러 가지 방식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시의 명령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드러내는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지 인간의 무지와 미신을 조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형태들은 구약에서도 철저히 우상 숭배의 형태로 나아갔음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와 연결되지 않은 형태의 은사적 방식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거짓된 형태로 교회에 다가왔음을 칼빈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거짓된 형태를 어떠한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칼빈의 말에서 그의 단호한 입장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군주라면 그것을 조금은 생각해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무는 그들의 불쌍한 백성들을 혼미한 것에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것들을 보고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못본체 한 것이 될 것이며, 또 그것을 막을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조롱 당하고 있음을 허락해 두는 것은 매우 무거운 죄가 되기 때문이다.
2) 칼빈의 점성술에 대한 경고
점성술에 대한 것도 성유물의 논고와 매우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살후2:11-12에서 그 근거 구절을 찾아오며 또한 이러한 방식도 동일한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 ‘예언’의 형태에서 같은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점성술이 개인과 인류역사에 대한 미래의 일에 대해서 점을 쳐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오늘날 소위 ‘예언’이라는 형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된 예언적 활동이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에도 늘 도전하는 형태로 있었음을 지적하고 또한 이 역사의 기초는 바벨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의 계시와 분리된 예언적 활동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오늘날 수많은 광란적인 환상들이 생겨나고, 게다가 그것들을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인 것처럼 받아 드려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이단과 어처구니없는 망상, 잘못되고 유해한 생각의 직접적인 원인은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에 복종시키기 위해 마련하신 정확한 규범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자들을 각종 바보 같은 행위에 내어버려두심을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결론
지금까지 칼빈의 성령 은사론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불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 가운데서 접근해서 이해할 때는 비록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은 불명확하게 보일지라도 결코의 그의 입장은 불명확하지 않고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위의 고리도전서의 설명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칼빈은 은사의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연속성이냐 단절성이냐로 보지 않고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본질은 같지만 역사적인 경륜 가운데 처리 방식이 다른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의식법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신약과 오늘날은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것이 단회적으로 쓰였고 또는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어떤 것이 영속적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지를 바로 여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의 계시가 완결되었기에 이것과 연결된 은사들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오늘도 계속적으로 연결되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세밀히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로는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역사 가운데서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분리 시키고자 했던 방식은 철저히 마귀적이며 비기독교적인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은사주의 방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지류에 있었는지를 바로 살피게 되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가운데 이러한 방식은 끊임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은 성경과 성령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성령의 수많은 은사들은 또한 성령께서 오늘날도 수많은 은혜의 형태를 부으시는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로 다가가서 그곳에 머물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순절의 잘못된 성령론에 대한 개혁주의의 바른 성령론과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주된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위에서도 밝힌 것처럼 철저히 삼위일체 가운데서의 성령의 자리를 먼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를 주장하는 것은 늘 이단의 형태로 제시되었으며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른 성령관은 자체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 가운데서 성령의 의미가 설명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과 결정 가운데서 사역하시기로 정해지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의 사역에서 벗어난 성령의 독특한 사역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수단으로 결정한 말씀과 연결되어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사역하시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령의 바른 사역에 대한 자리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우리는 다시 이해하게 된다. 칼빈은 교회론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무지해서 주의 입에서 듣고 배운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의 영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며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입으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니 우리는 이 한계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 영은 오류와 무지와 허위와 암흑의 영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와 지혜와 진리와 광명의 영이시며, 이 영에게서 그들은 그 받은 것에 대한 진상을 배우게 된다” 또한 칼빈은 4권 8장 13항에서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라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의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복음과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다. 이제 우리는 논적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주께서는 교회에 근신할 것을 명령하셨고,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금하셨다.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 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같이 말한다.”
이처럼 개혁주의 안에서 성령의 구원적 사역은 말씀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역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자리는 바로 이 사역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택자의 전 삶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자리는 말씀과 함께 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것을 할 때라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이러한 정신이 골로새서에 명확히 증거 되고 있다. (골3:16-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또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도 주기도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심, 지혜, 인자, 의, 자비와 진리가 빛나는 하나님의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모독함을 받지 않고 존경되고 찬양되도록 우리 전 삶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바른 사역은 신자의 전 삶속에서 그가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수 있도록 그를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을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가운데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바른 성령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위와 같은 의미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발체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증거하신 진리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고 싶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진리를 유혹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순수한 그대로 간직하고 섬길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참된 진리를 빛내기 위해서 거짓된 것들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출처] 칼빈의 성령의 은사론 연구 (한마음개혁교회) |작성자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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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평강이 넘치는 커피브레이크-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졸업식에서 말하는 것이
대학 졸업식에 처음으로 가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리드대학(Reed University) 에 입학한 후
6개월만에 중퇴했습니다. 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18개월이나 학교에 남아 청강생으로 제가 듣고싶던 과목을
들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둔 이유가 무엇이냐구요?
저의 생모는 대학생때 임신을 한 미혼모였습니다
나를 키울 자신이 없었던 엄마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입양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입양을 하되
양부모는 반드시 대학출신이여야 한다는 조건을 세웠습니다
생모는 뱃속에 있을때
이미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이 된 상태였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들이 아니었고 딸이었습니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변호사 부부와의 입양계약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대신 웨이팅 리스트에 있던
지금의 부모님이 나를 대학에 꼭 보내겠다는
각서를 받은 후에야 입양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나는 17년후에 리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이 노동자로 가난하게 살면서
어렵게 모은 돈을 모두 저의 학비에 써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가난한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학비에 써버리기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한 결정중에 가장 훌륭한 결정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그만두니, 평소 흥미를 갖지 못했던 전공과목이나
교양과목을 듣지 않아도 되고 대신 제가 좋아하는
다른 과목들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정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기숙사방을 구할 수가 없어
친구 방바닥에서 잠을 자야했으며, 밥을 사먹을 돈이 없어
코카콜라 병을 갖다 주고받은 5센트를 모아 밥을 사먹거나
일요일이면 밥을 공짜로 주는 하레 크리스나 절에가 식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호기심과 직감에 의해 그 절을 다녔지만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나에게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리드대학에서 가르치는 서예 클라스는
미국에서 최고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학교 게시판에 붙이는 모는 포스터나
심지어는 학교의 모든 책상 서람에 붙이는
라벨까지도 아름답게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정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전공과목을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서예(Calligraphy)를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활판 인쇄술에 관해서도 배웠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면서 예술적인 것들에 많이 빠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 이것들을 배우면서 나중에 밥벌이가
된다는 생각이나 희망을 주지는 않았지만
10년후, 첫 맥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 할 때
그 당시 배웠던 모든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배운 모든것을 맥킨토시를
디자인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맥킨토시가 컴퓨터로서는 처름으로
아름다운 활판 인쇄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때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서예 클라스를 수감하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지금처럼 다양한 서체를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아주 일찍 발견하였습니다. 위즈와 나는 내가 20대에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 회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10년동안 아주 열심히 일했고 10년 만에 애플은
자사니 2조원이며, 직원이 4천명이나 되는 거대한
회사로 발전하였습니다
내 나이 29살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맥킨토시 컴퓨터를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 나이 30 이 되었을때 나는 회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내가 만든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를당했느냐고요?
회사가 커지면서 나와 함께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아주 재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어떤분을
회사에 CEO로 고용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비전이 다르면서
우리둘의 관계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그 사람의사이가 아주 나빠졌을 때 회사 이사회가
그 사람편에서서 나를 회사에서 해고시켰습니다
그때 내 나이 30살이 였습니다
나의 해고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나의 모든 관심이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5년 후에 데이비드 팩커드와 봅 노이스를 만나
"실망시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럴때 조심스럽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애플에서 쫓겨났지만
아직도 내가 하는 일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당시 해고당한 후 그렇게 힘들었던 경험이 지금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최대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해고당한 후 5년동안
Next 라는 새회사와 또 다른 회사 Pixar를 설립하고
지금의 내 부인인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Pixa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컴큐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개발했고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이런 획기적인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애플은 Next 회사를 병합했습니다
그리고 나는애플로 돌아왔습니다
부인 로레네와 나는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좋은 약은 쓰다는 말처럼 살아가면서 당신 머리를 들고치는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나를지탱해준 것은 내 일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삶을 삶년서 당신의 짧은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Stay Hungry. Stay Foolish 계속 갈망하고 언제나 우직하게 전진하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습니다
대단히감사합니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중에서/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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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행복한 마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움"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 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 입니다.
마음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바라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 입니다.
아무런 말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 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 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 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 이름 부르고 싶은 것이
"보고 싶은 마음" 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 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 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 입니다.
출처 :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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