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죽지 않은 궁극의 이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 바 되었고 참새 한 마리도 주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1,300명의 나환자 성도들이 사는 곳에서 신학을 가르친 일이 있었다. 내 피부를 보고 기적같이만 느껴졌다. 어느 소경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단 3분 동안만이라도 하늘과 초원과 꽃을 보고, 아내의 얼굴과 아기의 미소를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다. 내가 소경이 아닌 것 하나만으로도 평생 못다 감사하겠다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30만 명이 지구상에서 죽어가는데 내가 죽지 않는 것이 30만분의 1의 기적이며, 궁극의 이유는 하나님이 죽지 않게 한 것이다.
      내가 소경이 아닌 궁극의 이유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내가 예수를 주라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그의 자녀가 된 것이 내가 태어난 일보다 더 큰 기적 중의 기적같이만 느껴진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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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되면 별을 바라봐


      아저씨 밤이되면  별을 바라봐
      나의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에 있는지.
      아저씨에게 가르쳐줄수가 없어
      하지만  오히려 그게나아.
      아저씨는 많은  별들중에 어느한별이
      나의 별일거라고 생각하며 바라볼테니까 말야.
      그러면  아저씨는 별들을 바라보는게 좋아질거야.
      별들이 모두 아저씨의 친구가 되는거지.
      그리고 나  아저씨에게 선물을 하나주고싶어.
      어린왕자는 또 웃었습니다.
      나는 너의 그웃음소리가  좋단다.
      그것이 내가 바로 아저씨에게 주고싶은 선물이야

      아저씨는 다른 사람과 다른 별을 가지게 될거야.
      그게무슨말이지?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그많은 별들중에서 웃고있을테니까.
      아저씨 에게는 모든 별들이 웃는 것처럼 보일거야
      그러면  아저씨만이 웃는 별을 보는거지.

      별은 아름다워 그것은 눈에 보이지않는 꽃이 하나있기 때문이지.


          어린왕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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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에 관한 12가지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자에게 회개의 물세례받을 것을 명령하셨음.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11: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5:22/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


4. 성령세례는 누가 베푸시는 것이며 , 또한 누구에게 주시는 것인가?


1) 성령을 부르기를 마10:20 에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라"라고 함.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시니 원래는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 해야 옳다. 그런데 이 때는 예수께서 이 땅에 머물러 계시는 때이므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성령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12:18, 눅4:18, 요3:34" 등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부어 주셨음을 증거한다. 다시 말하며 그리스도로서 지상에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성령을 보내시는 입장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시는 입장임.


2)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즉 천상으로 승귀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이 되신다. 여기서 두가지 핵심이 있는데, a. 여전히 아버지께서 보내시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요14:26). b. 예수께서 천상으로 승귀하시고는 그 승리와 또 받으신 영광의 표징이 아버지께서 예수께 성령을 이 땅에 보낼 수 잇는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행2:33).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라 해도 맞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또 승리하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받아 보내셨다해도 맞는 것이다.


3) 여기서 한가지 더 보탤것은 비록 구약성경에 직접적으로 성령을 보내셨다고는 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예언하고 약속하셨기에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령의 오실 것을 겔36:26-27 같은 곳에 예언하고 계시며 특히 요엘서 2:28-29은 오순절날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는 자들에게 사도들이 직접 인용하면서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 하면서 대답한다. 그래서 행2:33 에 계속해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즉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강림사건)"이라 했는데 바로 앞에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 . . 부어 주셨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예언되었을뿐 아니라 약속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께서 반드시 먼저 해를 받으셔(십자가를 지시고 승리)야만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높이시는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높임을 받으시는 상태에서야 비로소 성령을 아버지께 당당히 받아서 교회와 성도에게 부어 주실 수있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를 요7:39에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라고 놀랍게 선언하신다. 우리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 일 이전에는 반드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께 높힘을 받는 일이 선결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4)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인생의 말년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다윈이 운명하기 몇 달 전 호프 부인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를 방문했다.

 성경을 펼쳐 들고 있던 다윈에게 호프 부인이 물었다.

“지금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다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성경입니다. 아주 고귀한 생명의 책이지요.”

호프 부인은 창세기를 펼쳐 보이며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허구를 설명했다.

그러자 다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놀라운 고백을 했다.

“나는 참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했습니다.

 진화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학문이 아닌 창조론과 적대되는 종교처럼 신봉하게 되었지요.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증거해 주십시오.”

진리는 죽음 앞에서 진위가 가려진다.

다윈은 죽음을 앞에 두고 창조론을 진리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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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뉴욕 첫눈을 보고 있노라니 Dietrich Fischer Dieskau 가 부른 슈베르트의  보리수가 생각나서 유투브에서 퍼왔습니다.

1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 한 그루 서 있네;
그 보리수 그늘 아래서
나는 그리도 많은 단꿈을 꾸었지.
나는 그 보리수 가지에다
그토록 여러 번 사랑의 말을 새겼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갔었지


2
나는 오늘도 깊은 밤을 지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네,
그때 어두움 속에서도
나는 눈을 감았지.
그리고 보리수 가지들이
쏴쏴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3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로 바로 불어 닥쳤네;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네.
지금 나는 그곳으로부터
여러 시간이 걸리는 곳에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보리수의 쏴쏴 소리를 듣고 있네: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혹자는 이 성악곡이 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단꿈)을 얻었다거나
한국의 성황당과 연결지어 해석하기를 좋아하나
그저 왕년의 음악 감상실에서 인생의 고뇌와 낭만을 즐기던 시간을
회상하시며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아멘넷 게시판/누지문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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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선관위원장 이광선 목사가 2012년 1월 20일 서울 엠베서더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장聆� 목사 이단성 전혀 없다’는 내용의 한기총 문서 공증 건에 대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서공증 건은 한기총이 지난해 11월 19일자 성명서에서 “이광선 목사와 이대위원장 고창곤 목사 이름으로 ‘장재형 목사는 이단성이 전혀 없다’는 정식 문서를 공증하여 줌으로써, 무려 7년여에 걸친 공방이 무혐의로 끝났다”고 발표한 내용이다.

이 목사는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성명서에 발표된 것처럼 이단성이 없다고 공증을 해준 바가 있는가”라고 묻자 이 목사는 “내가 모르게 직원들이 사인을 해준 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 목사는 최근 한기총 선관위원들의 행적과 비교하는 말을 했다. 이 목사는 “2012년 1월 14일자 국민일보 성명서에서 ‘2012년 1월 11일 오후 3시 신일교회에서 5개 항에 대한 기자회견을 실시한 점을 본인의 과실로 유감을 표한다’고 나와 관련해서 발표했는데 나는 그런 사과를 한 적도 없고 오히려 강력하게 말했는데 거꾸로 나왔다”며 “허위 조작”이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이 목사는 2011년 11월 19일 성명서(장재형 목사 관련 문서 공증 건)에 대해서도 “내가 공증을 했다는 것은 허위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또 2010년 대표회장 재임 시절 변승우․장재형 목사에 대해 각각 이단성·재림주 의혹 무혐의 결론을 내린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당시 위원장 고창곤 목사)의 보고서를 임원회에서 통과시킨 일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이 목사는 “이대위원들이 (장재형·변승우 목사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길래 ‘연구를 했는가’라고 물었고 ‘연구를 했다’고 이대위원들이 답했다”며 “이대위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단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회원 교단들이 반발하는 것을 보고 매우 난처했다는 이 목사는 “이대위를 너무 믿고 받아줬다”며 “이대위 결과만 보고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출처: 아멘넷 게시판/ 기자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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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사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수 있는
솔직함과 아는 것을 애써 난척하지 않고도
자신의 지식을 나눌수 있는 겸손함과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돋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비치는 거울이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남에게 있는소중한 것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선한 눈을가지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화를 내거나 과장해 보이지 않는
온유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특함으로 자신의 유익을 헤아려 손해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의 행복을
기뻐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잔꾀를 부리지 않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깊은 배려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잠깐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을 줄 아는 지혜를 쌓으며,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며
행복해 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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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날 보고...



    사람들은 날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난,

    날마다 흔들리며 방황하며 사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은 자니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열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난,

    바리새인처럼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나의 자만심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날 보고

    많은 달란트가 있다고 부러워 합니다.

     

    그러나 난,

    나의 잔 재주만 자랑하는

    아주 못난 그런 자입니다.

     

    사람들은 날 보고

    이해심 많고 사랑 많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난,

    아직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랑없는 쓴 뿌리만 가득한 자입니다.

     

    사람들은 날 보고

    남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자라 말합니다.

     

    그러나 난,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하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찾는 자니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온유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내 안엔

    온갖 혈기와 성냄

    배려하지 못하는 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날 보고

    거룩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내 안엔

    거룩함이 없습니다.

    입술과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자입니다.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볼품없고

    볼썽 사나운 불쌍한 자일 뿐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구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그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해처럼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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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낳은 미술의 대가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그림,

'만종'을 탄생시킨 화가 '밀레'를 아시죠?

그 '밀레'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화가이지만

처음부터 그의 그림이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무명화가였던 그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마저 받았다고 합니다.

전혀 작품이 팔리지 않아 가난에 허덕이던 밀레에게 하루는 
그의 친구인 '루소'가 찾아왔습니다.

"여보게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네의 그림을 사고 싶어하네.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주게."

루소는 이렇게 말하며 반신반의하는 밀레에게 선급이라며 300프랑의

거금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답니다.
 

루소가 건네주었던 그 돈은 밀레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돈은 밀레에게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 큰~ 희망과 용기를 안겨준 것입니다. ^^

그리하여 밀레는 생활에 안정도 찾게 되었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그림에 열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몇 년 후, 밀레의 작품은 정말로 화단의 좋은 호평과 함께 인정을
받아  아주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이제 경제적 여유도 가지게 된 밀레가 친구인 루소의 집에
찾아갈 일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몇 년 전에 루소가 다른 사람의 부탁이라며 사서 가져간
그 그림이 루소의 거실벽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밀레는 친구의 깊은 배려의 마음을 알고 눈물을 글썽였고
자기를 이토록 아껴주는 친구를 실망시켜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림에 열중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했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지쳐가는 어려운 친구에게 돈을 도와주는 루소의 마음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먼저 친구인 밀레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는 배려하는 마음이
바로 밀레를 미술의 대가로 만들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피로 값 주시고 산 바 된 너와 내가 아우러져 우리가 되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인 가정,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야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남을 배려하는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피곤에 지친 당신의 목사님과 사모님, 혹은 리더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보다 잘 감당할 수 있는
위대한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
상대방을 배려하는 당신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피곤한 당신의 남편과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뿌듯한 기쁨과 행복감을 안겨준다는 것 기억하세요...

인간은 행복하면 창의력도 생기고 하는 일에 능률도 오른다거든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아픈 마음 싸매어 주며,

넓은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함께 모아 보아요,우리.


 

아름다운 마음이 모여질 때 내 가정이 복되고

내가 몸담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날로 날로 부흥발전해 나갈 수 있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얼굴마저... 흐믓하신 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는 다른 이의 자긍심에 상처주기보다는
따스한 격려의 말 한 마디 잊지 않도록 해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대의 따스함이 베어있는
그 말 한마디, 비록 작게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그대에게, 상대에게, 행복을 심는 씨앗이 된답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

** 많은 분들이 알고 있던 대로,

밀레에게 있었던 '루소'란 친구는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사상가 '루소'는 아니고 동명이인이라고 합니다.

독자님들은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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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단에 들어가보면 이들이 기성교회와
별반 차이없는 것을 알고 혼란스럽게된다
그 곳이 이단이라고 미리알고 들어가면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들의 잘못된점을 분별하려고 애를쓰게된다
그러나 이런 사전 정보가 없이 들어갔다가는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되는 것이다
감리교 교단의 총무로있던 목사가 그 이단에와서는
"이 교회의 성도들의 뜨거움과 신실함을보니 참 많은 도전을 받는다"
라고하였다
이사람이 모 기독교신문사를 소개시켜주어서 그 이단을 크게 홍보하게
도와주었던 일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할때에 이단은 우리와는  다를것이라 생각하지만
천만에 오히려 더욱 뜨겁고 신실해보인다
그들이전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와 다를바가 없다
그럼에도 왜!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느냐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조엘 오스틴도 그런 딜레마에 빠진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있는 그들이 이단으로 보이지 않는것이다
나는 몇번인가 조엘오스틴의 설교를 들은적이 있다
그는 뛰어난 달변가이고 웅변가였다
그러나 성령의사람은 아니다

세상에는 참복음과 유사복음이라는 두가지 복음이 전파되고있다
유사복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것에는 이견이 없다
끝이 얼마남지 않은 사단이 이제는 마지막카드를 들은것이다
바로 "고육지책" (苦肉之策) 이다
진리인것처럼 보여서 속이며 더큰것을 노리는것이다
몰몬교는  어떤곳인가?
한국으로 말하자면 통일교와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이단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전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 본체가 들어나는것이다
지금 이단을 통해서 전파되는 유사복음으로 말미한 폐해는
하나님을 믿지않게되고 가정이 파괴되며
한 개인의 인생이 허탈함으로 빠지게 하는것이다
이들은 더이상 하나님을 알고싶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하면 치를떨고 미워하게 된다
하나님은 없다라고 외친다
사단이 의도한 열매를 이단들은 충실히 맺어간다

기독교지도자들중에  조엘오스틴같은 사람들이
생각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큰믿음교회 변승우씨를 추종하는 목사들도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서울에 있는 큰믿음교회의 집회에 들어가보면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의 기도소리에 압도당한다
이들이 과연 이단인가 싶은생각이드는것이다

신약의 인물중  바나바는 성경의 지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정작 성령을 받지못하였다
결국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복음의 증인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것을 보게된다

성령받았다는것이 외형적으로는 특별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 구분하기란 쉽지않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은밀한 삶을 보면  알수있는것이다
개인적인 은밀한 삶을 확인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주장만을 듣고 어느정도 분별하는것이다
조엘오스틴은 사단의 동조자로 그 역활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깨닫지 못할것이다
이단에 저와 함께있던 목회자들을 구해내면서 그들에게 회개할것을
강조하였다
우리들이 사단의 동조자가 되어서 믿음의 형제들을  
미혹했던 일들을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통해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는사람들을
보지못했던것 같다

조엘오스틴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목회자에게만 있는것은 아니다
일반성도들에게되 일어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받는것은 믿는자들의 핵심이다
영적인 소경은 바로 성령받지못한데에 기인된것이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출처: 아멘넷/ 도봉옥님

 


개혁교의 대표적인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됩니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다는 군요.)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저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입니다. 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하지요.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까?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이 말은 표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개혁교회(다는 아님)중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중 방언과 예언은 중지되었다고 가르치지요. (아래 참조를 올려두었음)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직통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글: 별똥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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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글 모음


봄 오기 직전이 가장 추운 법이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당신의 습관을 최대한 다스리 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당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떠날 때에 우리 모두는 시간이라는 모래 밭 위에
남겨 놓아야하는 발 자욱을 기억해야 합니다.

산 속의 적은 물리치기 쉬워도 마음속의 적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속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남보다 영리
하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요.
그 하나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옳은 사람과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당황하지 마십시요.
사방이 다 막혀도 위쪽은 언제나 뚫려있고
하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젊음은 마음의 상태이지 나이의 문제가 아님을
명심 하십시요.
매력은 눈을 놀라게 하지만 미덕은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때때로 죽음을 생각 하십시요.
그리고 그 위에 당신의 생명을 설계하십시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안다면 한층 인생의 무게가
더해질 것입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 하기보다 좋은 가정을 지으십시오.
호화주택을 짓고도 다투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막살이 안에 웃음과 노래가 가득한 집이 있습니다.

크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작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좋은 나무는 쉽게 크지 않습니다.
바람이 강하면 나도 강해지고 숲이 어두우면 나무는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갑니다.
햇빛과 추위와 비와 눈은 모두 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주는 최고급 영양소입니다.

인생의 시계는 단 한번 멈추지만 언제 어느 시간에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이 내 시간이라 하고 살며 사랑하며 수고하고
미워하지만 내일은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시계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면
기회를 사용하도록 철저히 준비하십시오.

어떤 바보라도 사과 속의 씨는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 속의 사과는 하늘만 압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이 많고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픈 추억이 많고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미국 CBS에 출연 중인 오스틴 목사 부부(CBS 화면 캡쳐)

지금 미국에선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다. 한 명의 후보가 사퇴한 가운데 5명의 후보가 후보 자리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이 중에서 2008년 대선 때 중도 하차한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롬니는 앞서 치러진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경선)에서 모두 승리했다. 오는 21일(현지시간) 예정인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에서도 선두가 예상된다.

이렇듯 롬니가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복음주의기독교권에서는 몰몬교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다. 롬니가 독실한 몰몬교도이기 때문이다.

롬니의 증조부는 몰몬교도들이 19세기 신교도의 핍박을 피해 서부로 이동, 유타주에 정착할 당시 교인들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롬니 자신은 몰몬교 재단의 브리검영대학을 졸업한 뒤 해외 선교 활동을 벌였고 매사추세츠주에서 교구장을 지냈다.

일부 복음주의 목사들이 “몰몬교는 이단이며 롬니도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복음주의 교인들은 그에게 투표해서는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가운데 지난 16일 조엘 오스틴 목사는 CBS에 출연 “롬니는 자신과 같은 진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미국서 가장 큰 레이크우드처치를 담임하고 오스틴은 지난 16일 아침 ‘CBS 오늘 아침(This Morning)’ 프로에 출연, 몰몬교도인 롬니 후보에 대해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크리스천”이라고 밝혔다.

오스틴은 이어 “롬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한다”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이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8년 대선 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표를 의식해서 버락 오바마 후보(민주)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원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를 통해 속죄 받았다”고 말하고, 모르몬교 부담을 떨치지 못한 롬니 전 지사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의 구세주였다는 것을 믿는다”고 공개 신앙고백 한 바 있다.)

오스틴은 또 “종교 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며 “몰몬교는 기독교와는 다르지만 롬니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오스틴, 빌리그래함전도협회 회장 프랭클린 그래함. 남침례교(SBC) 윤리와 종교위원장 리처드 랜드, 프리즌펠로우십 창립자 척 콜슨 등은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몰몬교도인 롬니를 지지해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유명 텔레반젤리스트인 빌 켈러는 이들의 발언을 “사탄에 이끌린 행동”이라고 비난하며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교인들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병왕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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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녹이는 ‘마운틴듀’ 사람이 마셔도 괜찮나

마운틴듀 치아 침식률은 콜라의 6배

2012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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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음료 ‘마운틴듀’가 쥐를 녹인다고?”

지난 주 라이브사이언스, NBC, CBC 등 미국의 언론매체에 ‘탄산음료 마운틴듀가 쥐를 녹인다’는 거짓말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실려 화제가 됐다. 콜라, 사이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는 마운틴듀에 쥐도 녹일 만큼 위험한 물질(?)이 들어 있다니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사실로 인정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펼친 곳이 다름 아닌 마운틴듀의 제조업체 펩시코(PepsiCo)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로써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는 고백을 스스로 털어 놓은 이유는 펩시코에 걸린 한 소송 때문이다. 2009년 미국 일리노이주에 사는 로널드 볼 씨는 자판기에서 구입한 마운틴듀에서 죽은 쥐가 나와 피해를 입었다며 제조업체인 펩시코에게 손해배상금 5만 달러(한화 약 5700만 원)를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다.

볼 씨가 음료수를 구입한 시점은 2008년 11월 10일. 그는 회사 자판기에서 마운틴듀를 구입해 한 입 마셨는데, 역겨움을 느껴 바로 뱉어냈다. 남은 음료를 컵에 따라 살펴봤더니 뜻밖에도 작은 쥐 한 마리가 나왔다. 크게 놀란 볼 씨는 캔에 적힌 전화번호로 즉시 연락을 했고 펩시코 측은 손해사정인을 보내와 테스트를 해보겠다며 쥐와 남은 음료수를 가져갔다.

하지만 17개월 뒤인 2010년 4월 8일, 해당 쥐를 면밀하게 분석한 펩시코는 자사 제품에서 쥐의 사체가 나왔다는 주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두 달 이상 자사 제품에 들어가 있던 쥐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인다는 것. 펩시코는 “한 달 이상 마운틴듀에 담근 쥐는 꼬리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뼈와 살 구조가 모두 사라진 젤리 같은 형태만 남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쥐의 해부와 실험을 맡았던 수의사 로렌스 맥길은 지난해 10월 8일 일리노이주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 “마운틴듀에 4~7일 정도 담근 쥐라면 뼈에서 칼슘이 모두 빠져나오고 내장 구조는 파열되며, 30일이 지나면 꼬리 일부분만 남기고 모든 구조가 사라진다”고 적었다. 반면 볼 씨가 보내온 쥐에는 뼈와 내장 기관, 연골까지 남아 있었다.

또 “문제의 음료수가 개봉된 것은 제작되고 74일 뒤인데, 그 안에 들었다고 주장하는 쥐는 태어난 지 4주를 넘지 않은 어린 상태였다”며 “음료수 제작과정에서 쥐가 들어갔을 가능성은 적다”고 진술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외신들은 “제조 과정 중에 쥐가 들어갈 수 없음을 입증했을지는 몰라도 마운틴듀가 쥐도 녹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보도했다. 재판이 진행중인 일리노이 주 매디슨 카운티 법원은 펩시코 측에 이달 11일까지 구체적인 답변을 요청한 상태다.

●마운틴듀 치아 침식력은 콜라의 6배

음료수가 쥐를 녹일 수 있다니 사람이 마셔도 괜찮은걸까.

마운틴듀의 산성도는 pH3.4에 이른다. 마운틴듀가 이 같이 강산성을 보이는 이유는 산미료 기능으로 넣은 시트르산 때문이다.

시트르산은 레몬이나 라임 등 귤속 과일에 많이 들어 있는 천연 물질로 음식에 신맛을 내기 위해 사용된다. 적당한 신맛은 식품에 청량감을 주고 미각에 상쾌한 자극을 주며 침의 분비를 촉진해 식욕을 돋운다.

그런데 이 시트르산은 칼슘과 매우 잘 결합하기 때문에 치아의 에나멜 층을 침식시키는 기능이 있다. 같은 산이라도 콜라에 사용되는 인산이나 사과산에 비해 침식률이 높다.

같은 탄산음료인 콜라의 산성도 역시 pH2.5에 이른다. 최은정 이화여대 과학교육학과 겸임교수는 “이런 강산 음료는 살균력이 있어 변기청소나 피 얼룩을 제거할 때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004년 미국 메릴랜드대 치대 안소니 본 프라운호퍼 명예교수는 사람의 어금니를 마운틴듀와 콜라에 각각 2주간 담그는 실험을 했다. 2주 뒤 마운틴듀에 담갔던 어금니는 에나멜층이 처음보다 약 6%가량 사라졌지만 콜라는 1%가 약간 넘게 녹았다. 놀랍게도 다이어트 마운틴듀에서는 에나멜층이 8%나 사라졌다.

이 같은 성질 때문에 치의학 전문가들은 음료수를 마실 때는 가능한 한 음료수가 입 안에 오래 머무르게 하지 말고 단숨에 벌컥 들이마셔야 한다고 충고한다. 또 다 마신 뒤에는 바로 양치질을 하지 말고 입 안을 물로 행군 뒤 하는 게 좋다.

물론 탄산음료는 마시는 순간 빠르게 소화기관을 타고 흘러 내려가 분해되기 때문에 건강한 소화기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탄산음료로 인해 내장기관이 부식될 위험은 없다. 하지만 산성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린이는 성장발육에 지장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 뼈엉성증(골다공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김윤미 기자 ymkim@donga.com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우리는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나,

선교사가 된다거나, 기독교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일'입니다.

먹고살기 위한 직업으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사명'으로 한다면

분명 '하나님의 일'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8-29)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나는 필연적으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의 생활태도는 거룩함을 추구하고,

내 마음은 깨끗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되고 장로, 권사가 되어서

엄청난 교회당을 짓고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한다 해도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고

삶은 거짓과 속임수로 충만하다면

그 사람들에게 종교는 '사업'일 뿐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명의 신자라 해도 그 마음에 깨끗함을 사모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엄청난 큰 일꾼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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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 귀신 셋이 모여 신세를 한탄했다.




첫 번째 조상귀신이 말했다.

“구정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이라며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모여서 벌써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두 번째 조상귀신이 말했다.

“자넨 그래도 나아.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고.

알고 보니 해외 여행 가서 거기서 차례를 지냈다는 거야.”




세 번째 조상귀신이 말했다.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 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가도 된다더군.”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 상을 받았나?”
 
“먼저 회원 가입을 해야 된다 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 가입을 하나?

그래서 그냥 왔지.”

 
 
조상 귀신 이야긴 그만 합시다.
 
제대로 먹여주지도 못하면서리.....
 
 


해처럼달처럼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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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님께서 수고하여 주신 덕분에, 주소에 들어가서 읽어본 결과,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 선생의 입장을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보다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즉, 칼빈 선생님의 뜻이 해설자들의 말에 의해서 호도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잘 정립해주고 있는 분은 역시 칼빈 선생님이시란 생각입니다!

1. 기독교 강요
1) Inst 1536.

((그들은(여기서 그들이란, 거짓 기적을 조장해 내는 현대판 신사도 파와 같은 천주교회를 지칭)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칼빈

여기에서, 현대는 사도 시대와 같은 기적(동일한 능력,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던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 살렸다는 말은 모두 거짓 사도들이 꾸며낸 말일 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것, 주께서 오라고 하시면 오늘이라도 가야합니다. 잠시 잠간의 기적으로 인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신사도 파, 아이홉 파처럼 날라리 사이비(토마스님의 표현을 빌렸슴다.^^)가 그때 당시도 횡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거짓 기적, 사단의 장난질을 경계하자는 단호한 의지가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구분되고 우리(개혁교도들)에게도 성령님에 의한 참된 기적이 있고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 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붉은색이나 밑줄을 그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 칼빈 , 아멘!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거짓과 참을 구분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칼빈  이런 용어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칼빈 선생의 위의 문단이 저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어쩌면 이토록 합일한지, 성령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참된 성령의 역사로서의 기적은 옛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처럼 그렇게 큰 능력으로 임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주께서 그들을 사용하신만큼의 기름을 부어주시지는 않지만, 주님의 뜻에 따라서 여전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은,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거짓 영, 거짓 기적을 성령의 능력으로 분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장난에 휩쓸려 넘어갈 뿐아니라 거짓 삯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어간다!!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목사님들도 칼빈 선생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을 약간씩 뒤틀어서 이해하지 마시고 아, 와 어, 가 다름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아래 Thomas님처럼 바른 이해를 가짐으로써, 맡겨주신 주님의 양떼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http://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25&command=body&no=158&


글: 별똥별/ 최송연

1. 기독교 강요

 

1) Inst 1536.

 

칼빈의 초기 작품인 1536년판 강요에서부터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칼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3위1체중에서 ‘성령론’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잘 정리해야 성령의 은사 부분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 논고에서는 칼빈이 제시한 성령의 은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지만, 중간 중간에 성령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서 함께 서술하는 형식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1536년판의 헌사 부분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즉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 -- 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 과 기적들의 가치”란 제목에 당시 로마 카톨릭이나 재세례파의 입장과 다른 개신교의 독특한 입장을 변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칼빈은 어거스틴의 역사를 들어 변증하면서 기적의 은사를 연속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의 성격은 처음부터 非기독교적 분파에 속한 성격이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부분은 기적의 연속적인 성격을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확증해 주는 도구로 쓰였으나 이제는 계시의 종결성과 함께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수단으로 변화되었음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역설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초판 전체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주께서 당분간만 나타나게 하셨던 다른 이적들처럼, 신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전파가 계속적으로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사라졌다”

 

2) Inst 1559.

 

Inst1559판에서도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는 4권 19장에서 로마 카톨릭의 다섯가지 잘못된 성례를 논하면서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부분을 언급해 주고 잇다. 여기서 그는 초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은사는 이제 중단된 것임을 명확한 말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초대 교회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오직 복음의 존귀성과 또한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완성된 지금은 그런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없음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의 완성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은사가 중단되었음에도 로마 카톨릭이 계속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계속적인 은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 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이 외에도 칼빈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 가운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는 성경에 대한 논증 부분에서 성령과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또한 1장에서 성령에 대한 광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더욱이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서,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위에서 칼빈이 지적했던 방식은 오늘날도 제시되는 신비주의의 전형적인 방식인 것이다. 즉 성령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인도를 더욱 중요시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을 칼빈은 분명히 거절 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식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역사의 경륜 가운데 예비되었던 방식임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성령이 단독적으로 역사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은 성령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칼빈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보면 당연히 성경의 종결성과 함께 과거의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하여 사용하셨던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도 동일하게 더 이상 사용될 필요가 없기에 종결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성령의 은사를 연속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성경의 권위성을 성령께서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치명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 주석

 

1) 마가복음16:17-18

 

마가복음에서의 표현은 오늘날 은사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면 은사의 종결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여기서 주님의 약속은 당시의 복음의 확장과 권위를 위해서 주어졌던 것이지 계속적인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도 이것은 신자들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소수의 특정인에게만 주어졌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 은사는 분명히 단절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임시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새롭고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던 복음을 밝히 드러내는 뜻에서 그 당시만을 위해서 기적이 약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물론 이 세상은 배은망덕 때문에 이 특권을 상실한 것이지만 이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출발점에 있는 복음의 교훈에 충분한 보장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물론 이러한 기적의 용법이 그 후에 있어서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러한 실례가 아주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

 

2) 사도행전2:1-4

 

마가복음에서처럼 사도행전 중에서도 은사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즉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연속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칼빈은 당시의 성령의 은사는 마가복음에서 처럼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속에서의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의미를 늘 인식하고 각 구절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사라진 단회적인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절의 해석에서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의 혀가 나타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보다도 차라리 우리들과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이익에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 그들이 그처럼 갑자기 변화를 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오늘 우리가 그것은 우리의 유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유익이 되도록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 주기 위하여 특수한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심으로써 북음을 위한 전진의 길을 갖추어 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반영되고 있다. ---- 이 일이 우리를 위해 된 것인데, 복음이란 것이 우연하게 우리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겨 주신 가르침에 참여하지 못하는 국민이 하나도 없도록 여러 가지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을 부르신 부르심이 확인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해 주는 일도 된다.

 

위의 칼빈의 표현을 살펴보면 철저히 이 사건이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에 준비된 복음을 확증하기 위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동일한 체험을 하는 방식이 아닌 역사 가운데 확증되어진 복음, 즉 성경계시가 우리에게 확증된 것이 우리의 유익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고리도전서12:1-31

 

본 장의 내용은 성경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게 될 때 특히 많이 언급되는 장이다. 따라서 본 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적 입장이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칼빈이 본 장을 다루는 방식은 그의 전반적인 신학적 입장을 잘 고려하면서 접근해야만 그의 입장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 장의 주석 부분이 자칫 칼빈 자신의 입장을 불분명하게 표현한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와 또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비추어 보면 여기에서도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이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본 논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의 성령 은사에 대한 독특한 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칼빈의 은사에 대한 개념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이 사용하고 있는 은사의 개념이 오늘날 은사 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은사의 개념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칼빈은 은사를 폭넓게 사용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성질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즉 어떤 것만 특별히 ‘은사’라는 명칭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행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은사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는 은사가 연속되는가? 아니면 종결되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의 은사(은혜)는 결코 이 세상에서 끊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존재 자체를 위협받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개념을 기초로 하면서 칼빈은 이 은혜의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경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는 “은사의 종결” 개념이 아니라 역사의 경륜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스스로 단절 시키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도 표면상으로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중에서도 연속성과 단절성이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全 경륜적 방식에 따라서 차등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가지 은사들이 성경 계시의 종결성과 단절되는 것이 많으며 또한 연결되는 것들의 특징은 여전히 이 성경 계시와 연결해서 그 기능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본 장과 또한 다음 장들을 살펴보면 칼빈이 무엇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은 당시의 교회의 기초를 세우며 또한 복음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 것들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바울이 전체의 문맥과 흐름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복음을 통한 성경 계시의 확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이미 앞부분인 2장에서 그 기초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2장에와 다른 성령의 사역을 뒤에 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여전히 동일하신 성령의 사역 방식으로서 12장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4) 기타

 

다음에는 주석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칼빈의 주요한 표현들을 통해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여기서 우리는 기적에 대한 올바른 용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 기적을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날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독특한 관계를 깨뜨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이 말씀을 기적과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형편없는 오용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셨던 병 고치는 은사가 그들의 자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경우에 있어서 전도를 위한 보증이었다”.

③ (요10:41-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④ (눅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⑦ (롐23: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⑧ (신13:1-4)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3. Article.

 

1)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 논고는 성령의 은사와는 주제에 있어서는 거리가 있지만 그 원리적 방식에 있어서는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해준다. 칼빈은 당시 로마 카톨릭을 통해서 미신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성유물 숭배 사상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방식을 깨뜨리는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즉 신자들을 더욱 무지함과 우상 숭배로 이끄는 방식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접근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성도들을 성경으로부터 단절시키며 무지와 미신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성유물이 단지 기념적인 것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이것을 통해서 수많은 이적들을 함께 조장했기 때문에 오늘날 은사주의운동과 많은 부분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 자신은 성유물 숭배에 대한 비판의 성경적 근거 구절을 ‘살후2:11-12’에서 찾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견을 비판하는데 전형적인 구절이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형태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로 보았던 것이다.

칼빈은 더 나아가 오히려 구약에서조차도 이러한 미신적 행위들은 금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구약에서도 일시적으로 사용된 여러 가지 방식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시의 명령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드러내는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지 인간의 무지와 미신을 조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형태들은 구약에서도 철저히 우상 숭배의 형태로 나아갔음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와 연결되지 않은 형태의 은사적 방식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거짓된 형태로 교회에 다가왔음을 칼빈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거짓된 형태를 어떠한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칼빈의 말에서 그의 단호한 입장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군주라면 그것을 조금은 생각해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무는 그들의 불쌍한 백성들을 혼미한 것에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것들을 보고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못본체 한 것이 될 것이며, 또 그것을 막을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조롱 당하고 있음을 허락해 두는 것은 매우 무거운 죄가 되기 때문이다.

 

2) 칼빈의 점성술에 대한 경고

 

점성술에 대한 것도 성유물의 논고와 매우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살후2:11-12에서 그 근거 구절을 찾아오며 또한 이러한 방식도 동일한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 ‘예언’의 형태에서 같은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점성술이 개인과 인류역사에 대한 미래의 일에 대해서 점을 쳐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오늘날 소위 ‘예언’이라는 형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된 예언적 활동이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에도 늘 도전하는 형태로 있었음을 지적하고 또한 이 역사의 기초는 바벨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의 계시와 분리된 예언적 활동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오늘날 수많은 광란적인 환상들이 생겨나고, 게다가 그것들을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인 것처럼 받아 드려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이단과 어처구니없는 망상, 잘못되고 유해한 생각의 직접적인 원인은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에 복종시키기 위해 마련하신 정확한 규범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자들을 각종 바보 같은 행위에 내어버려두심을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결론

지금까지 칼빈의 성령 은사론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불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 가운데서 접근해서 이해할 때는 비록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은 불명확하게 보일지라도 결코의 그의 입장은 불명확하지 않고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위의 고리도전서의 설명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칼빈은 은사의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연속성이냐 단절성이냐로 보지 않고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본질은 같지만 역사적인 경륜 가운데 처리 방식이 다른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의식법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신약과 오늘날은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것이 단회적으로 쓰였고 또는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어떤 것이 영속적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지를 바로 여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의 계시가 완결되었기에 이것과 연결된 은사들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오늘도 계속적으로 연결되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세밀히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로는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역사 가운데서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분리 시키고자 했던 방식은 철저히 마귀적이며 비기독교적인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은사주의 방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지류에 있었는지를 바로 살피게 되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가운데 이러한 방식은 끊임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은 성경과 성령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성령의 수많은 은사들은 또한 성령께서 오늘날도 수많은 은혜의 형태를 부으시는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로 다가가서 그곳에 머물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순절의 잘못된 성령론에 대한 개혁주의의 바른 성령론과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주된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위에서도 밝힌 것처럼 철저히 삼위일체 가운데서의 성령의 자리를 먼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를 주장하는 것은 늘 이단의 형태로 제시되었으며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른 성령관은 자체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 가운데서 성령의 의미가 설명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과 결정 가운데서 사역하시기로 정해지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의 사역에서 벗어난 성령의 독특한 사역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수단으로 결정한 말씀과 연결되어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사역하시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령의 바른 사역에 대한 자리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우리는 다시 이해하게 된다. 칼빈은 교회론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무지해서 주의 입에서 듣고 배운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의 영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며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입으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니 우리는 이 한계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 영은 오류와 무지와 허위와 암흑의 영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와 지혜와 진리와 광명의 영이시며, 이 영에게서 그들은 그 받은 것에 대한 진상을 배우게 된다” 또한 칼빈은 4권 8장 13항에서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라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의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복음과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다. 이제 우리는 논적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주께서는 교회에 근신할 것을 명령하셨고,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금하셨다.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 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같이 말한다.”

이처럼 개혁주의 안에서 성령의 구원적 사역은 말씀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역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자리는 바로 이 사역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택자의 전 삶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자리는 말씀과 함께 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것을 할 때라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이러한 정신이 골로새서에 명확히 증거 되고 있다. (골3:16-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또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도 주기도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심, 지혜, 인자, 의, 자비와 진리가 빛나는 하나님의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모독함을 받지 않고 존경되고 찬양되도록 우리 전 삶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바른 사역은 신자의 전 삶속에서 그가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수 있도록 그를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을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가운데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바른 성령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위와 같은 의미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발체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증거하신 진리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고 싶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진리를 유혹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순수한 그대로 간직하고 섬길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참된 진리를 빛내기 위해서 거짓된 것들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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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 싫증이 나는가? 교회에 싫증이 난다면 그것은 교회의 설교가 어떠한 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비록 설교가 특별히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뽑아내어 그것들을 묵상해 보면
    삶에 있어 가장 생기가 돋우어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흥미가 없거나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설교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 때문임을 기억하라. 만일 '내가 예배에 열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목사님이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라고 바라면서 교회에 간다면
    당신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주일이 돌아올 때쯤이면 예배가 너무 드리고 싶어서 예배를 드리러 교회 안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지경까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예배를 드린 후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발견한 것을
    계속 묵상하는 과정 중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그분과 기도로 교제할 때,
    그분에 대한 진리들을 발견할 때,
    그리고 그 진리들을 묵상할 때 예배의 기쁨이 나타날 것이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종종 예배 장소에 있으면서도 거룩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도 골방에 들어가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은 좋아하지만 그 밀을 빻지는 않는다.
    그들은 옥수수를 얻게 될 텐데도 그것을 모으러 들판에 나가지 않는다." 과일이 나무에 달려 있어도 그들은 그것을 따지 않는다. 물이 그들의 발밑에 흘러도 그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예배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존 맥아더 / 참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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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와평강이 넘치는 커피브레이크-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졸업식에서 말하는 것이

대학 졸업식에 처음으로 가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리드대학(Reed University) 에 입학한 후

6개월만에 중퇴했습니다. 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18개월이나 학교에 남아 청강생으로 제가 듣고싶던 과목을

들었습니다. 학교를 그만 둔 이유가 무엇이냐구요?

 

저의 생모는 대학생때 임신을 한 미혼모였습니다

나를 키울 자신이 없었던 엄마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입양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입양을 하되

양부모는 반드시 대학출신이여야 한다는 조건을 세웠습니다

 

생모는 뱃속에 있을때

이미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이 된 상태였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들이 아니었고 딸이었습니다

남자로 태어났기에 변호사 부부와의 입양계약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대신 웨이팅 리스트에 있던

지금의 부모님이 나를 대학에 꼭 보내겠다는

각서를 받은 후에야 입양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나는 17년후에 리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이 노동자로 가난하게 살면서

어렵게 모은 돈을 모두 저의 학비에 써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가난한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학비에 써버리기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한 결정중에 가장 훌륭한 결정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그만두니, 평소 흥미를 갖지 못했던 전공과목이나

교양과목을 듣지 않아도 되고 대신 제가 좋아하는

다른 과목들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정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기숙사방을 구할 수가 없어

친구 방바닥에서 잠을 자야했으며, 밥을 사먹을 돈이 없어

코카콜라 병을 갖다 주고받은 5센트를 모아 밥을 사먹거나

일요일이면 밥을 공짜로 주는 하레 크리스나 절에가 식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호기심과 직감에 의해 그 절을 다녔지만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나에게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리드대학에서 가르치는 서예 클라스는

미국에서 최고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학교 게시판에 붙이는 모는 포스터나

심지어는 학교의 모든 책상 서람에 붙이는

라벨까지도 아름답게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정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전공과목을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서예(Calligraphy)를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활판 인쇄술에 관해서도 배웠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면서 예술적인 것들에 많이 빠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 이것들을 배우면서 나중에 밥벌이가

된다는 생각이나 희망을 주지는 않았지만

10년후, 첫 맥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 할 때

그 당시 배웠던 모든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배운 모든것을 맥킨토시를

디자인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맥킨토시가 컴퓨터로서는 처름으로

아름다운 활판 인쇄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때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서예 클라스를 수감하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지금처럼 다양한 서체를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아주 일찍 발견하였습니다. 위즈와 나는 내가 20대에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 회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10년동안 아주 열심히 일했고 10년 만에 애플은

자사니 2조원이며, 직원이 4천명이나 되는 거대한

회사로 발전하였습니다

 

내 나이 29살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맥킨토시 컴퓨터를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 나이 30 이 되었을때 나는 회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내가 만든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를당했느냐고요?

회사가 커지면서 나와 함께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아주 재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어떤분을

회사에 CEO로 고용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비전이 다르면서

우리둘의 관계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그 사람의사이가 아주 나빠졌을 때 회사 이사회가

그 사람편에서서 나를 회사에서 해고시켰습니다

그때 내 나이 30살이 였습니다

 

나의 해고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나의 모든 관심이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5년 후에 데이비드 팩커드와 봅 노이스를 만나

"실망시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럴때 조심스럽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애플에서 쫓겨났지만

아직도 내가 하는 일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당시 해고당한 후 그렇게 힘들었던 경험이 지금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최대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해고당한 후 5년동안

Next 라는 새회사와 또 다른 회사 Pixar를 설립하고

지금의 내 부인인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Pixa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컴큐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개발했고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이런 획기적인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애플은 Next 회사를 병합했습니다

그리고 나는애플로 돌아왔습니다

 

부인 로레네와 나는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좋은 약은 쓰다는 말처럼 살아가면서 당신 머리를 들고치는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나를지탱해준 것은 내 일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삶을 삶년서 당신의 짧은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Stay Hungry. Stay Foolish 계속 갈망하고 언제나 우직하게 전진하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습니다

대단히감사합니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중에서/스티브 잡스-

 

성령님의 증거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다.
성령님의 증거는

우리 영(靈)의 깊은 곳에 주어진다.
성령님의 증거는

눈에 보이는 외적(外的) 증거들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이 증명해야 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앙의 본질은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성령님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하시는 것이다.

A. W. Tozer / 성령님 365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
 
많은 사람이 성령님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도
온 천하에 자신을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자연 계시 속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더듬어라도 발견되어진다면 그 또한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별똥별/최송연




제목: 지옥은 실재합니다
그곳은 사람이 갈 곳이 아닙니다.(Tamara 간증)

완벽하게 행복한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행복하게 살 수 없다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모든 것이 이혼, 깨진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전 너무 어린 나이였고 어른들이 복잡한 일들에 대해선 이해할 수 없었죠. 그래서 그 깨진 관계가 모두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로부터 아마도 정신적으로 거부의 의미가 형성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거절당했다는 감정이 제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전 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그 후로, 별 의미없는 아주 작은 일에도, 나와 연관지어 아주 큰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아주 작은 모든 것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성장기를 겪으면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거절,거부’ 또한 커져갔습니다.
 “도대체 내 문제가 뭘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내 삶을 끝내는 것 뿐이였습니다.
 
그리고 전 아무도 날 볼 수 없기를 바라면서, 엄마 방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제겐 이 삶을 끝내야만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내 삶의 고통도, 외로움도, 모두다 말이죠.
그리고 그런 저를 그 무엇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마구 울며, 하나님께 소리치고 있었어요,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총은 발사되었고, 제 폐는 피로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두 귀도 점점 들리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전 알았습니다. 죽음이 내 영혼을 집어 삼키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때, 내 영혼이 나의 몸을 떠나, 어디론가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전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운명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는 것을요.
 
제가 있던 곳은 철저한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제 몸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자신이 절망 그 자체였으니까요. 내 자신이 외로움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너무나도 두려워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주변에 다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구상에 모든 이들에게 외칠 수 있는 말은 바로 단 하나뿐이였습니다.

“이곳에 오면 절대 안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영생은 실제입니다. 지옥은 진짜 있습니다. 천국은 정말 있습니다.
당신이 어떠한 삶은 사느냐에 따라 어디로 가는 것이 결정됩니다.
 
그곳의 있는 모든 이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진실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손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나를 건지시러 오심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손이 내려와 나를 건지시고 난 더 이상 죄의 고통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정결하고 깨끗게 하시어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화려하며 웅장한 것을 넘어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난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죠. 그리고 그곳에 대한 그 어떠한 구체적인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 너무나도 온전하고 완벽한 평안과 기쁨 속, 그 분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처음으로,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던 그 온전하고 완전한 기쁨. 그리고 그분의 손이 나를 들어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제 자신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천장을 지나 그 손이 내 육체로 나를 돌려보내고 다시 위로 올라갔고 전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요.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단 한번도 알수도 없던 영적인 힘이 나에게 생겼습니다.
내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내 안이 평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총알은 제 심장에서 1/4인치가 조금 안 되는 곳을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38 구경 총에서 나오는 압력으로 인해 내 심장이 폭발했을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진 것 외에는 그 어떠한 문제도 없는 저를 보며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면,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될 것입니다.
죄와 고통 속에 있거나, 빛과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어느 곳에 어떠한 모습으로 있던지, 그것은 당신 개인의 결정입니다.
 
저는 다른 이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 나의 정신적 그리고 감정적 상태는 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기쁨이 넘칩니다. 내 안은 평안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왕국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언제나 지키시며, 나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내가 해야 할 단 한 가지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나는 단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바로 알고 내어버리고 그분의 위대한 것으로 내안에 채우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임재가 내 삶 속에 가득하다면, 전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문제들도 평안과 넘치는 기쁨과 채워주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승리 또한 당신은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고민하고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그분의 자녀들과 언제나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것에 대해 가장 많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성경 속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일까요?
첫 번째는 '경고'입니다. 당신과 나는 분명히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 그분을 십자가를 지게 했나요?
그 모든 고통을 그분이 왜 감당해야만 했나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영생이 주어집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해 그 영생을, 고통 가운데 지내는 것에서부터의 구원 말입니다.
예수님, 그분께서 그 값을 치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나의 뜻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내가 그 값을 치루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지옥은 진짜 있습니다.
지옥을 가상이나 상상 속의 무언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옥은 실제입니다.
 
Tamara씨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곳을 아주 조금이라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것에 대해 전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기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셨고,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분을 믿고, 우리의 모든 죄를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아주 조금이라도 그 곳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도록, 당신을 보호하고 지키실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 살기 원하십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그만큼 그분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잘못한 모든 것에 대한 죄의 값을 그분께서는 당신을 대신하여 치루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그 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당신 한 사람뿐이였다 하더라도, 난 너를 위해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러 왔을 것이다.
 
선택은 오로지 당신의 몫입니다. 그분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시지만, 끊임없이 묻고 계십니다. 나를 영접하겠느냐고 말입니다. 문 앞에 서서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러분, 채널을 돌리지 마십시오. 등을 돌리지 마세요. 바로 지금, 선택하십시오.
 
“네, 예수님, 나의 안으로 들어 오세요” 라고 대답하세요. 그분은 모든 값을 이미 치루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값없이 드립니다. 당신이 해야할 단 한 가지는, 그분께 구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확신이 있고 진지하다면, 저와 함께 이 기도를 따라 해보세요.
 
아주 짧고 쉬운 기도입니다. 함께 해주세요. 그렇다면, 나머지 모든 일은 그분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저와 함께 기도하세요...

주 예수님, 크게 부르세요.

“주 예수님,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시길 원합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께 고백합니다. 나의 모든 죄와 모든 잘못한 일들을 용서하여 주세요.
 
예수님, 내 남은 모든 삶 동안 당신만 따르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시는 것을 압니다, 내가 그곳에 가길 원합니다. 당신께서 내가 머물기 원하시는 그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나의 안에 들어오세요. 나를 다시금 새롭게 해주세요.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 이 간증은 목양연가의 독자님이신 김남수 형제님의 요청으로 올려진 간증이기에 목양연가지기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최송연 드림

 

 

 


좋은 글 행복한 마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움"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 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 입니다.

마음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바라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 입니다.

아무런 말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 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 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 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 이름 부르고 싶은 것이
"보고 싶은 마음" 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 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 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 입니다.

출처 :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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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창덕 목사(예장 개혁 이대위 위원장)의 월경 잉태설 논쟁에 관한 투고 글입니다. 아멘넷의 편집방향과 무관없습니다. - 편집자


▲한창덕 목사(예장 개혁 이대위 위원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사도신경과 같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중요한 골격을 제시하고 있는 신조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예를 들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벨직 신앙고백서,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조 등이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줄 때나 직분자를 세울 때 아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믿고 고백하느냐고 질문을 꼭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은 ‘이단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고백을 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강압적으로 그런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해서 그런 고백을 하지 말아야 할까?

최근에 한국교회가 월경 잉태설 문제로 시끄럽다. 어떤 사람들은 월경 잉태설을 ‘마리아가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라는 것이라 정의 하고, 그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며, 기독교의 근간을 헤치는 것으로 이단적 사상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주장을 문헌을 통해 맨 처음 한 단체는 합동 측 서북노회로 보이며, 개인으로는 그 노회에 소속되어 있던 구생수 목사로 보인다. 그래서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연구가라 할 수 있는 최삼경 목사에 대해 총회에  “최삼경 목사 이단성 여부 조사청원서”를 냈으며, 구생수 목사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했는가. 월경으로 잉태했는가.」라는 책과 「실상은 사단의 회라」라는 책을 통하여 성령 잉태를 주장한 박윤식 목사가 월경 잉태를 주장한 최삼경 목사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고 하면서 통합 측과 한기총을 ‘실상은 사단의 회라’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였고, 그 후 통합 측 북노회, 이정환, 예영수, 이광호, 황규학, 원성현, 이형기 교수 등도 같이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이 논쟁은 본래 최삼경 목사가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박윤식 목사를 영입하자 “박윤식씨 이단 사이비 핵심 이단 옹호자에게 공청회를 제안한다”라는 제목으로 최삼경 목사가 그의 이단성을 2005년 6월 30일자 교회와신앙과 현대종교 8월호에 기고함으로 시작되었고, 거기에 대해 반발한 서북노회가 총회에 청원서를 냈으며, 합동 측 교수들은 “최삼경 목사가 “월경 없이 태어나면 인성이 부인 된다”고 말한 것은 정확하지 못한 말이요 불필요한 사색이지만 인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말인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므로 최 목사의 진술은 이단성이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라고 하면서 이단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합동 측 교회들은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교회가 들고 일어났으며, 총신대 신대원 학생들은 조기를 달고 수업하였고, 서북노회를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헌의도 빗발쳤다. 그래서 결국 2006년도 9월 총회에서는 서북노회 노회장인 박충규 목사가 공개사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쟁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서북노회가 공개사과 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 논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 논쟁은 계속되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월경 잉태설’ 혹은 ‘난자 잉태설’이란 이름으로 계속 되었으며, 한기총에서도 최삼경 목사를 공격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심지어 돌고 돌아 합동 측에서조차 불과 5~6년 전의 결의와는 정반대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 이 논쟁의 원인은 무엇이고, 주된 쟁점은 무엇이며, 그리고 누가 과연 옳은 것일까?


1. 문장 조작

최삼경 목사가 월경 잉태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 심각한 문장 조작이다. 그는 박윤식 목사가 사람을 월경으로 낳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두 종류로 나누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월경으로 낳은 자이지만 성경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 사람 있다고 하며, 그 사람들이 이삭과 세례요한과 예수님이라고 하자 그것을 문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 했었다.

월경이란 인간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월경이 있다는 말은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임신을 하면 월경이 없어지는데 그 피가 아이에게 가는 것이다. 그 피로 아이를 기르는 것이다. 이들에게 혹 눈에 보이는 월경이 없었다고 하여도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결국 이삭과 요한은 사라나 엘리사벳의 피를 받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박씨의 성적 모티브가 없이는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역시 통일교 출신의 변찬린씨의 영향 때문에 나온 말이다.

예수님도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 기독론적으로 맞는가? 이 말도 아주 이단적인 말이다. 예수님이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 속에는 예수님의 인성이 부정되고 만다. 우선 마리아는 요셉의 정액에 의하여 임신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이 주장하는 사상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그렇다. 그러나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마리아의 육체를 빌리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과도 같이 된다. 굳이 마리아의 몸에 들어가 10달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월경이 없었어야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처럼 마리아의 몸을 빌리지 않고 그냥 오셨어야 한다.

앞의 이삭과 요한 두 사람은 어머니의 경도가 끊어졌을 때(엘리사벳에게는 그런 말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임신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다르다. 마리아가 월경이 없었다는 말은 마리아의 피 없이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자랐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인성이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고도 남는다.

최삼경 목사는 박윤식 목사가 사람들을 ‘월경으로 낳은 자’와 그렇지 않은자로 나누면서 예수님을 ‘월경 없이 낳은 자’라고 하자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이용하여 마리아가 예수님을 월경 없이 낳았다면, 즉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피와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라고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삼경 목사는 그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문장을 조작하여 최삼경 목사를 월경 잉태설을 주장하는 자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공격은 필자도 당하였다. 필자는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 최삼경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며 11가지 항목으로 조목조목 지적히면서 총회에 올린 글을 보고 오히려 거기에 이단성이 있다며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인 이정환 목사는 “박윤식의 이단정죄는 사실이 왜곡돼 최삼경, 자신의 월경잉태론 벗고자 박윤식옹호론자로 이단정죄요구”라는 제목으로 글을 이단 옹호언론으로 규정된 에클레시안(로엔처치)에 올리면서 필자에 대해서도 신성과 인성이란 말을 다 빼버리고 심각한 문장 왜곡을 통하여 “예수는 성령이 마리아의 난자를 이용해서 낳은 피조물”이라 했다고 하면서 통합 측의 총회에 이단성 조사 헌의를 했다고까지 하였다.


2. 혈통 유전설과 예수님의 인성

이 논쟁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신성모독과 심각한 기독론적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쟁점은 통일교식 혈통 유전설과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문장조작을 통하여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마리아의 피를 받았다는 것은 죄로 오염된 인간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분을 구속주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하며 심각한 이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피 속에 죄가 있고 피를 통해 죄가 유전된다는 통일교식 혈통 유전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변질시켜 신성모독이라고 한 것이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당신의 인격으로 하나님 되심의 중단됨이 없이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과 상관없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신· 인으로 탄생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류의 일원이 되셨으며, 신성과 인성을 지니셔서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과 동일본질이셔서 완전한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기도 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그분은 다만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신인 양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거나 두분(두 인격)이라거나 신성이 변하여 인성이 되거나 인성이 변하여 신성으로 화하지도 않고, 두 성품이 합쳐져서 제 3의 성품이 되지도 않는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성을 입으셨다 하더라도 성자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

기독론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네 가지 이단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님의 영혼의 자리에는 로고스인 하나님이 있고 껍데기만 사람이라고 함)가 있으며, 또 하나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이중인격이 되게 하는 네스토리우스 주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제 3의 성품이 되었다고 하는 유티케스주의가 있다.

그런데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거나 천적실질을 주장하고, 예수님의 두 성품 중 신성만 있는 것처럼 그분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하며, 죄가 마치 물질이나 되는 것처럼 죄가 피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에 대해 신성모독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라 하며, 죄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용납할 수가 없다. 죄를 만약 피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물질이라 한다면 우리는 코피만 흘려도 죄가 없어지고, 수혈만 받아도 죄가 많아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것이겠는가?


3. 이정환 목사의 문제점

이정환 목사가 소속되어 있는 통합 측 북노회에서는 합동 측 서북노회와 거의 같은 논리로 최삼경 목사의 이단성을 조사해달라고 질의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통합 측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최종 보고서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이단대책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내 놓았다.


4. 최삼경목사의 글에 대한 신학적 판단

a.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최삼경목사가 자극적이고 불경스럽게 보이는 “월경”이란 단어를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은 박윤식 이단 집단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다. 물론 최삼경 목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한 인성을 긍정하면서 그분의 신성 또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월경으로 태어났느냐’는 공격은 최삼경 목사 이전에 칼빈도 받았다. 당시 재세례파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이와 같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칼빈은 당연히 재세례파의 이러한 공격을 논박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 강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들 무리 중 몇몇은 부끄러움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우리가 그리스도는 처녀의 월경의 씨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의 피와 연결되지 않았는지 반문할 것이다 -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칼빈, 『기독교강요』, 2. 13.3)

Some of their tribe, however, casting shame aside, too wantonly ask whether we mean that Christ was engendered of the virgin's menstrual seed. In return I shall ask them whether he did not unite with his mother's blood - which they will have to admit.(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 13. 3)

b.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피와 살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당시 재세례파의 대표자들인 멘노 시문스(Mennon Simmons), 덕 필립스(Dirk Philips) 등이 주장한 사상이었다. 이에 대해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진영에서는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와 실체적인 연결(substantial unity)을 갖는다는 주장으로 이 견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 후 우리 교단의 전통인 개혁파 진영에서 만든 몇몇 신조에서도 칼빈의 이러한 사상은 확인되고 있다. 이 부분에 해당되는 신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벨직 신앙 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년)

18항: 성육신(Article 18: Incarnation: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살을 취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들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자녀들의 살과 피를 공유하며, 육체에 따른 다윗의 허리의 열매이며, 육체를 따라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의 열매이며,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다윗의 씨요, 이새의 뿌리의 가지이며, 유다지파에서 나셨고, 육체를 따라 유대인들에서 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다름이 없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Therefore we confess, against the heresy of the Anabaptists who deny that Christ assumed human flesh from his mother, that he "shared the very flesh and blood of children"; that he is "fruit of the loins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born of the seed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fruit of the womb of the virgin Mary"; "born of a woman"; "the seed of David"; "a shoot from the root of Jesse"; "the offspring of Judah," having descended from the Jews according to the flesh; "from the seed of Abraham"-- for he "assumed Abraham's seed" and was "made like his brothers except for sin."(http://www.reformed.org/documents)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년)

질문 35,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뜻은 무엇입니까?*What is the meaning of: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대답: 그것은 현재나 장래나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으며, 따라서 다윗의 참된 씨가 되었으며, 죄가 없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That the eternal Son of God, who is and remains true and eternal God, took upon himself our true manhood from the flesh and blood of the Virgin Mary through the action of the Holy Spirit, so that he might also be the true seed of David, like his fellow men in all things, except for sin.(The Constitution: Part I, The Book of Confessions, P.C.U.S.A))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년)

1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참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분이시다. 때가 찼을 때 삶의 본질적인 속성과 공통된 연약함을 가진 사람의 본성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 안에서 그녀의 본질을 취하셔서 잉태되셨다. 그리하여 완전하면서도 완벽한 그리고 전적으로 구분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에 연합되셨는데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이 없으시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단 하나의 중보자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The Son of God the second Person in the Trinity, being very and eternal God, of one substance, and equal with the Father, did, when the fullness of time was come, take upon him man's nature, with all the essential properties and common infirmities thereof, yet without sin;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of her substance. So that two whole, perfect, and distinct natures, the Godhead and the manhood, were inseparably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without conversion, composition, or confusion. Which person is very God and very man, yet one Christ,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The Constitution: Part I, The Book of Confessions, P.C.U.S.A))

본 교단의 헌법의 요리문답 (2007년)

문 2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참 육신과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성력의 능력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그에게서 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c.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음에도 어떻게 죄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장로교회의 전통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본 교단은 예수님이 사람의 살과 피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성을 가지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며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정환 목사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대위 연구보고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최목사의 월경잉태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피와 살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도하고 이같은 비판을 이단자들의 주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마리아를 통해서 성육신하심과 실체적 인성을 취하신 것을 부정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해 연구보고서는 월경잉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몰아가는 최삼경 목사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9)

이정환 목사는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당장 자신도 「최삼경 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필자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최삼경 목사의 월경잉태 주장의 실체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릇된 주장을 바로 잡고자 함과, 동시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월경과 무관하게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피를 단 한 방울 받지 않으셨다”는 내용으로 신문에 기고하자 최삼경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며 연구, 조사하여 줄 것을 제 95회 총회에 헌의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필자의 주장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단하에 이 글을 써서 알리는 또 한 가지 이유이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10)라고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정환 목사는 자신이 예수님은 마리아의 피를 단 한 방울도 받지 않았다고 해 놓았으면서도 자신을 포함하여 최삼경 목사를 공격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태아의 성품은 산모의 피를 받아 먹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전인적인 유전형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생식세포를 통해) 물려받은 유전자와 임산부의 행동양식과 그가 처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아기의 신체적 특성과 성품이 형성되는 것이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25)

이정환 목사는 최삼경 목사와 필자를 난자 잉태설이라 공격한다. 난자란 피조물인 마리아의 것이기 때문에 그 난자로 예수님의 인성이 형성되어졌다면 그것은 그분을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은 신· 인 양성을 지닌 예수님을 신성의 잣대로만 가지고 그분을 피조물이라고 했다는 그릇된 주장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공격해놓고는 정작 그 또한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생식세포, 즉 그의 난자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생식세포에 대해 “생식을 통해 유전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세포”라고 요약한 다음 “다세포생물이 유전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세포이다. 생물의 종류에 따라서 형태나 생성방법에 매우 다양한 차이가 있으며 특히 무성생식에서는 포자가 생식세포다. 유성생식에서 생식세포는 배우자가 되며 이는 일반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에 대해 놀아나는 한국교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조상숭배인 제사(祭祀)를 성도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다림님께서 저의 기고 글에 대한 언급있어 지난 글을 올립니다. 구정 설이 얼마 남이 있지 않았습니다. " 아울러 아멘넷에 연재되고 있는 '서재생 목사님'(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신 목사님)의 글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명절 때 차례나, 조상 기일이 되면 제사(祭祀)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제사는 한국의 전통문화 중 가장 비중이 큰 예절(제례)문화입니다. 유교는 부모에 대한 존경을 사람됨의 기초로 생각하고 제사는 효(孝)의 연장선에서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동양적인 문화에서는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아니라, 효도(孝道)의 행위이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므로 기독교인들 중에도 제사를 드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목회자 분은 제사(祭祀)는 조상님들을 섬기는 효도행위지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중에도 혼돈하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의 가르침은 제사(祭祀)가 무익할 뿐 아니라, 귀신(鬼神)에게 드려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고전10:20). 이에 한국교회는 제사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굳건한 신앙을 견지한 선배들 덕분에 오늘의 기독교는 그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꽤 오래 전부터 제사(祭祀)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의 미풍양속(美風良俗)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주교는 이미 오래 전에 제사(祭祀)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교황의 교서를 내렸습니다. 과연 제사는 우상 숭배인가, 미풍양속인가? 그것이 우상숭배라면 우리는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이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면 잘못된 편견을 버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효도도 아니고 조상숭배인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제사(祭祀)의 의미

조상숭배제사 제례(祭禮)는 신(神)의 뜻을 받아 복(福)을 비는 의례입니다. 조상숭배인 제사에 대한 제례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조선 후기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통치 이념이었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습니다. 따라서 조상 제사 숭배 의례도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치국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하였고, 성리학의 중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禮)”입니다. 특히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조상숭배의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사(祭祀)의 의미는 조상숭배에 대한 의례 행위라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조상은 누구이며 자손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먼저 알아보는 일입니다. 한국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는 조상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잊혀지고, 산 사람과는 단절되는 문화가 아니라. 즉 조상들은 죽었지만 자손들과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조상에 대한 인식은 통과의례에서 여실이 보여줍니다.

첫째로 제사의 의미로서는 한 사람이 조상이 되는 시작이 환갑의례입니다. 곧 환갑부터 죽음까지는 “살아 있지만 죽은 조상”의 대접을 받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제사의 의미로서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노인” 대접을 받는 상청(喪廳)의 단계입니다. 죽은 뒤부터 탈상 때까지 3년 동안은 장남 집의 마루에 혼백을 모신 상청을 마련해 놓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산 자손은 죽은 조상을 위해 상식(上食)을 올리고 생신도 지내 드립니다. 또 그 집에 찾아온 손님은 제일 먼저 상청에 인사를 드린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인사해야 합니다. 이 밖에도 평소에 담배를 좋아했다면 담배도 피워 놓는 등 마치 집안에 살아 계신 어른처럼 대접합니다. 3년 탈상 전까지는 죽었지만 산 사람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제사의 의미로서는 제사기간입니다. 탈상이 끝나면 상청에 있던 혼백은 장남 집의 사당에 모시게 됩니다. 제사 기간 동안 그 조상은 적어도 1년에 4번 이상 자손으로부터 대접을 받습니다. 곧 본인의 기제사 날, 배우자의 기제사 날 그리고 설날과 추석의 차례입니다. 이 제사 기간은 약 1백 년 동안 계속 됩니다. 그것은 1대를 25년으로 잡아 4대(고조)가 될 때까지 제사를 받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제사의 의미는 시제입니다. 종손으로부터 4대조 이상이 되면 사당의 위패는 장손의 집을 떠나 묘에 묻히면서 먼 조상이 됩니다. 시제대상이 된 조상에게는 1년에 한 번씩 대개 음력 10월이나 3월에 문중 자손들이 묘에 찾아와 차례를 올립니다. 이 묘제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제사의 의미를 정리해 보면 우리 조상들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뉘어서 후손으로부터 대접을 받습니다. 곧 첫 단계는 환갑에서 사망까지로서,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서 산 조상의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사망에서 탈상까지 죽었지만 “살아 있는 노인” 대접을 받는 상청 시기의 단계입니다. 당음은 상청 기간이 끝나고 자손집의 사당에 조상으로 모셔져서 1년에 4번 대접을 받는 제사 기간입니다. 마지막은 1년에 한 번씩 묘지에서 자손들과 만나는 시제 기간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의미는 조상은 죽었지만 자손의 기억과 생활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1) 역사로 본 제사(祭祀)

중국의 공자이전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때에 제사(祭祀)를 지낸 기록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드린 것이 아니고, 뛰어난 황제에게 지냈습니다. 제사(祭祀)의 이론적인 뒷받침은 송나라 주희(주자)가 유, 불, 도교의 영향을 받은 유교철학(성리학)을 만들어 처음으로 조상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한다고 강조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서(禮書)에 의하면 “제왕은 하늘에 제사지내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지내며, 사대부(士大夫)는 조상에게 제사지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에게는 천지가 절대자이고,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에게는 산천이 절대자이며, 그렇지 않은 사인(私人)에게 있어서의 절대자는 조상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세시(歲時)풍습(風習)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효(孝)를 계속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조상을 섬기는 제사(祭祀)를 일러 “효를 계속하는 곳” 이라고 합니다.

2) 한국의 제사(祭祀)의 역사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특수한 왕만 제사(祭祀)를 지냈습니다. 불교(佛敎)가 성행했던 때에는 조상에게 제사(祭祀)지내지 않고, 13세기말 고려 말에 유교의 성리학 영향으로 사람들이 사당(위패나 신주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곳)을 짓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종교를 성리학으로 결정하고 조상(祖上)의 제사를 태조(太祖)가 장려하였으나 평민들은 처음에는 제사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사(祭祀)를 장려한 교육적 목적은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 제사를 받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점점 제사가 평민들까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제사(祭祀)는 한국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풍속(風俗)입니다. 13세기 억지로 왕가에서 강요해서 생긴 풍속입니다. 유교에서 온 풍속이 한국에 정착된 것입니다.

제사(祭祀)는 중국의 계급사회를 반영합니다. 원래는 왕, 제후, 충신과 같은 상류층에서만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제사(祭祀)를 지내야만 궁중의 위대한 신하가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주나라 때는 홍제는 7개, 큰 제후는 5개, 작은 제후는 3개, 제상들은 2개, 관원과 스승은 1개의 사당을 갖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평민들은 무덤에 가서 제사(祭祀)지내게 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와서 이 질서가 깨지고, 제사(祭祀)가 일반화되었습니다.

고려 말엽 공민왕 2년에 정몽주가 제정한 제사(祭祀)규정을 보면 3품관 이상은 증조부모까지 3대를 제사지내고, 6품관 이상은 조부모까지 2대, 7품관이하 서인들은 부모까지만 제사(祭祀)를 지내라고 했습니다. 제사도 신분에 의한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칠품 이상의 관원은 불과 20% 미만으로 일반국민의 80% 상당의 인원이 칠품이하의 관이나 서인이었기 때문에 전 국민 중 대부분은 부모제사만 지냈습니다.  

조선조의 경국대전에서도 이런 신분에 따른 제사 제도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모두가 앞을 다투어 고조부모까지 4대를 제사지내게 되었습니다. 신분제도(身分制度)가 철폐되면서 상위자가(관원) 조부모까지 하향하지 않고, 서민들까지도 고조부모까지 상향해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69년에 제정된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을 통해 조부모까지의 제사를 권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것이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글자 그대로 제사는 조상섬기는 우상숭배(偶像崇拜)입니다. 분명하게 제사란 종교적인 우상숭배이며, 그것은 제사 의식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우선 지방의 내용을 보면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씁니다. 여기 신위(神位)라는 말은 신(귀신)이 앉았다는 뜻입니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신(祖上神)이 나타나 굽어 살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제사는 하나님께 죄(罪)가 됩니다. 죽은 자를 기념하지 말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분명히 조상신(祖上神)을 묘사하고 있고, 참신(參神), 강신(降神), 초헌(初獻), 축문(祝文)등은 모두가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조상을 신으로 여기는 말에 해당합니다. 제사(祭祀)가 진정 효도(孝道)라면 중국으로부터 제사가 들어오기 전에는 제대로 효도(孝道)를 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될 것이며, 제사를 지내지 않는 서양이나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불효자(不孝子)인 셈입니다.

3. 제사(祭祀)의 종류

한국의 미풍양속(美風良俗)에서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祭祀)는 효(孝)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제사에는 기제(忌祭), 시제(時祭), 차례(茶禮), 묘제(墓祭)가 있습니다.

1) 기제(忌祭)
기제(忌祭)는 해마다 고인이 돌아가신 날(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로써 세인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제사이며, 기독교인들은 이날 추모예배로 대신하곤 합니다. 과거 기제의 봉사대상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4대조까지 지냈으나 현대에는 대개 2대조까지, 그리고 후손이 없는 3촌 이내의 친족에 한해서 기제를 지냅니다. 죽은 친족을 굶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는 곧 제사(祭祀)란 죽은 조상도 음식을 잡수셔야 살 수 있다는 신앙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흔히 “제사 잡수신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것은 생활이 어렵거나 부양할 자손이 없는 근친을 돌보는 것 같이 죽은 조상도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필자의 가정에서 동학 혁명의 주인공인 전봉준 누나가 후손이 없어서 필자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조상이 굶게 되면 그 동티(재앙)가 친족 자손에게 내린다는 신앙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상이 굶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굶주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 집안에다 재앙을 내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문중에서는 양자를 들려서라도 제사를 지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이러한 전통적인 기제사를 이해 속에서 제사문제로 예수님을 믿기를 망설이는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2) 시제(時祭)
시제(時祭)제사는 돌아가신 날에 관계없이 적절한 날을 택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즉, 시제는 어떤 지역에 문중을 형성하고 있는 씨족(氏族) 마을 구성원들이 5대조 이상의 조상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전통 사회에서 시제의 양산은 훌륭한 조상의 자손임을 증명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지배 계층으로 인정받는 측면과 더불어 한곳에 대대로 뿌리 내리고 살고 있는 집단이라는 과시적인 면도 있습니다.

전통 사회에서 개개인은 “서 아무개” 개인으로서의 행세보다는 그 지역의 “서씨 문중”의 일원으로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 여러 성씨의 문중간의 위세 경쟁은 바로 각 개인의 그 지역에서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었습니다. 시제는 바로 이 문중의 위세를 위한 행위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문중 씨족 문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시제는 1년에 4번 즉 춘하추동(春夏秋冬)의 계절마다 고조(高祖) 이하의 조상을 함께 제사하던 합동 제사입니다. 조선 시대 이후 기제가 중시되면서 점차 퇴색하여 사계절의 시제(時祭)를 모두 행하는 가문(家門)은 드물고, 보통 봄은 삼짇날, 가을은 중양절(重陽節)에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1년에 한 번만 행하는데 조상을 모신 사당이나 사당이 협소할 경우 대청에서 시제를 지냅니다.

3) 차례(茶禮)
차례(茶禮)제사는 간소한 약식 제사(祭祀)로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그리고 명절이나 조상의 생신일 아침이나 낮에 지내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민족명절에 조상에게 올립니다. 차례도 기제사처럼 4대 고조(高祖)까지 지내며 명절날 아침에 각 가정에서 조상의 신주(神主, 지방 또는 사진)를 모시고 지냅니다. 차례는 가문에 따라서 사당이나 벽감(壁龕)이 있는 집에서는 대보름날, 한식, 단오, 중양절(음력9월9일) 동지 등에 차례를 지냅니다.

그러나 지금은 차례(茶禮)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설에 지내는 연시제(年始祭)와 추석(秋夕)에 성묘를 겸한 제사를 말합니다. 차례의 제수와 절차 여시 기제(忌祭)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무축단작(無祝單酌)이라  하여 축문을 읽지 않고, 술 역시 한 잔만 올리는 것이 원칙이나, 근래에는 핵가족 시대이므로 제사를 올리는 형식처럼 술 역시 여러 잔을 올리기도 합니다. 원래 이 차례는 차를 올리는 절차를 내포한 중국식 제례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관행의 차례에서는 차를 올리는 절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차례이지만 보통 제사처럼 제수를 장만하고 술을 올리며 제사 지내는 것이 관례입니다. 세인들이 기제사 및 묘사와 더불어 중요한 조상숭배의 의례로 꼽고 있습니다. 차례에 제수를 차리는 것은 다른 제사와 다를 바 없으나, 설에는 떡국을 올릴 수 있고, 추석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 햇과일과 함께 올립니다.

4) 묘제(墓祭)
산소로 찾아가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5대조 이상의 조상들에게 늦가을에 묘소(墓所)에서 직접 제사를 지냅니다. 고례(古禮)에 의하면 제주를 비롯한 여러 참사(參祀)자들이 검은 갓과 흰옷을 갖추고, 일찍 산소에 찾아가 절하고, 산소를 둘러보면서 세 번 이상 잘 살피며 잡초가 무성하면 정성껏 벌초하고, 산소 앞을 깨끗하게 쓸고 난 후, 산소의 왼쪽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토지신(土地神)에게 먼저 제사를 지낸 뒤 산소 앞에 정한 자리를 깔고 제사상을 차립니다.

조상(祖上)에 대한 제례의식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하나의 전통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하나의 세습이고 문화이며 역사이기 때문에,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해도 여전히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상숭배(祖上崇拜) 의식은 조상신에 대한 종교적 숭배로 발전하여서 후손이 조상들을 섬기고 제사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심을 낳았습니다.

4, 기타 제사의 여러 상식과 시대의 변천

1) 제사상(祭祀床)에서 금기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복숭아는 예로부터 귀신을 쫓는 과일로 복숭아를 제사상에 올리면 조상의 혼이 올수 없으므로 복숭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둘째로는 끝 자가 치자로 끝나는 고기(멸치, 꽁치, 갈치)는 하급어종으로 분류되어 조상에 대한 예로써 최상의 음식을 대접한다는 예의에서 제상에 금기하는 음식입니다. 셋째로는 마늘이나 고춧가루는 귀신(鬼神)을 쫓는 음식으로, 동짇날 팥죽을 쑤어서 잡신을  예방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붉은색은 귀신이 싫어하는 색으로서 제사 음식에 금기하는 식품입니다. 넷째로는 비늘이 없는 생선(뱀장어, 메기)등은 부정한 생선으로 제상에 올리지 않는 금기 음식입니다.

2), 제주(祭主)는 누가 되는가

제사(祭祀)에서 제주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주가 누구냐에 따라 지방(紙榜)에 쓰는 친족관계가 틀려집니다. 즉 부모님의 제사에 있어서는 아들이 제주가 되는 것이 원clr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손자를 제주로 합니다. 아들이 있다 해도 다른 집에 양자로 입적된 상태라고 하면 역시 제주가 되지 못합니다. 아들이 없다면 딸도 제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때 사위는 제주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남편의 제사는 아내가 있어도 자식이 제주가 됩니다. 아내의 제사는 자식이 있어도 남편이 제주가 됩니다. 자식의 제사는 손자가 있어도 부친이 제주가 됩니다. 부친과 자식이 없는 형제의 제사는 동생이 제수가 됩니다. 부친, 자식, 형제가 없는 사람의 제사는 조카가 제수가 됩니다.

3) 죽은 사람에게는 왜 절을 두 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전통문화(傳統文化)인 절하는 예절에는 설날 같은 명절 때 할아버지나 부모님께 드리는 세배는 한번 절을 합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낼 때는 절을 두 번 합니다. 이처럼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절하는 횟수가 다른 이유는 음양(陰陽)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 1번 절은 양을 뜻하고, 2번 절은 음을 뜻합니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양(陽)이고, 죽은 사람은 음(陰)을 뜻 합니다. 그래서 절의 횟수도 음양으로 구분하여 산사람에게는 1번 절을 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2 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상(장례)을 당한 초상집에 가서도 이런 경우를 쉽게 접하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의 영정 앞에서는 2 번 절을 하고 상주 분들에게는 1번 절을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절 할 때는 산사람과 죽음 사람에게 하는 손 모습이 반대로 합니다. 즉, 산사람에게 절을 할 때는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절을 하고 , 여자는 그와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려놓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할 때는 위 경우와 남녀 각각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4), 콘도제사와 호텔제사, 해외제사 어떻게 이해할까요?

매년 명절 연휴에 조상의 후손들은 여행을 떠나서 숙박지에 간단히 제물을 마련하고 조촐하게 차례를 올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과연 돌아가신 조상들의 혼(귀신)이 후손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국내라면 모르지만 해외여행지에서 제사(祭祀)나 차례(茶禮)를 지낼 경우에 외국어 모르는 조상의 혼(귀신)이 혹시 이국땅에서 길 잃고 헤매지는 않을 까하는 생각을 필자는 하게 됩니다. 올해는 동남아에서 다음에는 유럽에서 다음에는 미국에서 지내고 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5) 병원에서 운명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집 밖에서 객사(죽음)한 시신을 집으로 들여오지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임종(숨이 끊어지기 이전의 상태) 할려고  하면 산소 통을 끼고 집에 와서 임종을 준비 했습니다. 즉, 운명(殞命)이란 사람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집에서 운명해야 조상이 있는 선영에 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 반대로 임종이 가까워지면 집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서 운명 하는 시대로 변하는 참 재미있는 현상들입니다. 그 이유는 가정에서 치르던 장례가 아파트 중심의 주거문화 변화로 병원 장례식장의 편리함에서 온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운명한 경우 장례식장으로 가기 전에 바로 사망진단서를 발급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외부에서 사망한 경우 병원 응급실를 경유 해서 사망진단서나 사체검안서를 반드시 발급받아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운구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례문화가 현대 교육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5. 제사(祭祀)에 대한 성경적 견해

제사(祭祀) 행위를 조상에 대한 전통 문화적 인륜의 예절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우상숭배(偶像崇拜) 또는 샤머니즘과 연결된 행위로 볼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 제사는 우상숭배이자 미신이며, 십계명의 1~3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신위(神位)”라는 글을 써 붙이고, 절을 하는 것은 분명 조상(祖上)을 신으로 여기고, 숭배하는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제사가 우상숭배나 무속행위가 아니라고 합니다. 제사는 먼저 가신 조상이나 가족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인륜의식, 전통문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제사는 조상숭배 행위이므로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왜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제사(祭祀)는 조상숭배 의례입니다.

제사(祭祀)는 조상숭배 의례이므로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제사의 행위는 특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조상들에게만 행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증조부(曾祖父)까지만 제사를 드린다면, 그 이상의 조상들은 구천을 떠돌며 배고파 고생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후손이 제사(祭祀)지내면 조상의 혼백이 나무로 된 신주를 하나의 거처로 삼아 사후(死後)에도 얼마간 안정된 삶을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사(祭祀)란 죽은 이를 계속 공양함으로써 효(孝)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추양계효(追養繼孝)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죽은 조상의 영혼(귀신)을 섬기는 조상숭배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효도(孝道)는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으며 그 뜻의 신학적 의미가 큽니다. 먼저는 죽은 조상의 혼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혼도 종교적(宗敎的)대상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신앙 위에서 효도(孝道)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성서적 신앙(信仰)입니다.

어떤 성자나 위인도 물론 자신의 조상도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하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예배함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효도(孝道)와 예배가 다르며 추모(追慕)와 제사(祭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죽은 자의 혼백이 배회하다가 다시 찾아와서 제사의 공양을 받는다는 생각은 무속신앙입니다. 영혼(靈魂)의 주인은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시며 죽는 순간 그 영혼은 그 시체에서 떠나며 자의로 다시 찾아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사 때 음식에 수저를 꽂아 놓거나 술을 부어 드리는 일 등은 그 자체가 미신적(迷信的) 의식이라고 보여 집니다. 성서적 효도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살아 계신 부모님을 주안에서 공경하는 신앙적(信仰的)인 효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은 사후(死後)에 영혼(靈魂)은 산자와 두절됨을 말합니다.

제사(祭祀)는 사실 부모를 공경하는 의식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유교의 도덕률과 기복사상이 혼합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靈魂)은 결코 세상에 떠돌아다니거나 다시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천국으로 예수를 영접지 않은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누구나 죽으면 심판이 있고 예수를 믿은자는 상급의 안믿은자는 영벌의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귀신의 영혼이라고 믿고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대로 제사는 귀신을 불러 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미풍양속(美風良俗)이 아닌 13세기부터 중국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족 안에서 제사(祭祀) 문제로 갈등하는 이들은 지혜롭게 행동하되 타협하지 말고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제사와 관련하여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죽은 자와 산 자간 대화나 교통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16:19-31).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천사는 천사고 귀신은 귀신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사람이 죽는다고 귀신이 되는게 아닙니다.  성경은 사후(死後)에 영과 육이 분리되었을 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의로운 자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빛과 영광 가운데서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한 교훈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살아 있는 자에 한하여 인격적 예우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동양적 효의 개념은 살아생전에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이 효도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후의 영혼은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거나 영원히 지옥에서 버림받습니다. 죽은자를 인격체로 볼 수 없고, 죽은자에 대한 제사를 효도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3) 제사(祭祀)에 대한 성경적 의미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의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 드렸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합니다. 여러 가지 제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속죄제사 입니다. 그 제사는 피를 흘려서 뿌려 드렸고 제물(祭物)을 온전히 불살라 드렸습니다. 따라서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의 제사는 마음과 뜻을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예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곧 제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4) 기독교 제사(祭祀)는 추도(追悼)인가? 추모(追慕)인가?
기독교(基督敎)는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고 예배로 대신 하는데 이 때 드리는 예배의 명칭에 두 가지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추도(追悼)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추모(追慕)예배라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추도(追悼)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추도예배라고 하는 것보다는 추모(追慕)예배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1) 추도(追悼)의 의미

추도(追悼)라는 말은 좇을 추(追) 슬퍼할 도(悼)자를 써서 추도(追悼)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도(追悼)라는 용어는 죽은 조상을 슬퍼한다는 뜻으로 이 말속에는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 나서 살아있는 이들이 애통하며 슬퍼하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죽음 자체를 슬퍼하지 않습니다(살전 4;13). 필자도 추도예배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당사자의 신앙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목회 하는 중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조상을 추모하는 예배가 되어야지 조상의 기일이나 생일에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이 잘못은 아니나, 성경적 원리는 아닙니다. 원래는 추도예배란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도 전통적인 제사의식에서 약간은 마음이 편하려고 나온, 우리 한국의 타협책으로 봅니다.  

(2) 추모(追慕)의 의미

추모(追慕)라는 말은 좇을 추(追) 그리워할 모(慕)를 써서 추모식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추모(追慕)라는 용어의 뜻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워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상고해 보면 죽음 후에 믿는 우리 부모나 조상(祖上)이 천국에 가계시지만 살아생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부모나 조상의 신앙을 받들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우리가 한 가족임을 느끼며 더욱 사랑해야 함을 다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도(追悼)보다는 추모(追慕)가 좋습니다.

(3) 추모(追慕)예배의 의의

첫째로 추모(追慕)예배는 전통문화적인 조상을 제사하는 의식이 아니라, 추모(追慕)는 조상의 은덕을 감사하고 기리는 의미의 예배입니다. 여기에는 조상(祖上)의 귀신(鬼神)과 결부되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둘째로 추모(追慕)예배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주는데 있습니다. 죽음은 정해진 것인데 죽음 후에는 심판과 부활이 있어 천국과 지옥으로 바로 감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다시 돌아오거나, 구천을 떠도는 것이 아니며, 모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사망의 부활을 통하여 지옥에 있는 영혼과 만나던지, 생명의 부활(復活)을 통하여 천국(天國)에 있는 영혼과 만나 영생에 들어감을 상기하는 예배입니다.

셋째로 추모예배는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 날은 한 핏줄의 고마움을 나누며 형제, 자매간, 일가 친척간에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추모예배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현실 생활에 급급했던 모습을 재정리하고, 다시 한 번 살아 있을 때에 은혜와 구원의 감격에 겨워 더욱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고, 이 땅에서 우리가 잡았던 것은 다 놓고 가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임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가치 있게 살다가 가는 결심을 나누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로는 추모예배는 전도의 기회로 사용해야 합니다. 서로 떨어져서 바쁘다는 현실 인식 앞에서 만남과 대화의 시간이 없었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신자가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모범을 보여서 불신 가족들에게 빛이 되고, 향기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할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4) 추모(追慕)예배 준비

첫째로는 고인이 쓰시던 성경이나 찬송 등을 예배상위에 올려놓고, 또는 사진도 좋습니다. “이분이 너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었다” 하고 자식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자녀교육상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향이나 촛불은 켜지 말고, 지방도 쓰지 말고, 음식상은 할 수 있으면 미리 차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도 제사음식을 똑같이 장만하고 절만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에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은 추모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족들이 모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할 뿐입니다. 조상의 귀신(鬼神)이 찾아와서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제사음식으로 장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사상에 음식 놓는 형태를 취하지 말고 예배드릴 준비를 합니다.

둘째로는 식사나 교제는 추모예배를 온전히 드린 후 가져야 하며, 고인의 육성 녹음된 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면 예배 후에 식사 때나 다과시간에 보는 것도 추모의 의미가 있습니다.

(5) 기독교(基督敎) 추모의 의미

기독교인이 신앙 중심을 가지고 행하는 조상에 대한 추모예배는 우상숭배나 조상의 혼령과 만나는 일이 아니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배려 앞에 그 모든 것을 위탁하고 믿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또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의 약속 안에서 진실히 살 것을 다짐하고 앞선 조상들의 생명을 역사적 인격체인 후손들의 삶을 통해 더 풍성하게 이어갈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어버이께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의 근거라고 가르칩니다(레19:3, 출20:12, 엡6:1~3). 그러므로 살아 계신 동안 효도하면, 장수하고 땅에서 잘되는 복을 받고, 돌아가신 후에는 그 분의 업적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입니다.

5. 기독교인이 제사(祭祀)음식을 먹는 문제

기독교(基督敎)인들이 제사(祭祀)음식을 먹을 것이냐 먹지 말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역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상(偶像)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되는 성경 구절은 두 곳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바울이 고린도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첫째는 우상의 제물(祭物)을 먹어도 된다는 분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와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27) 입니다.

둘째, 제물(祭物)을 먹으면 절대 안 된다는 분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우리가 축복(祝福)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10:16~21) 입니다.

이 두 성경구절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먹어도 된다는 곳에는 시장에서 파는 제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에 바쳐졌던 것이라고 해도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이라고 해도 먹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상의 제례(祭禮)행위가 끝난 후에 제물은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단 먹어서 덕이 안 될 때는 먹지 말라했습니다. 그러나 먹어서는 절대 안 되는 곳은 우상의 제단에 제례행위를 하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같이 먹고 뛰놀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상의 제례행위를 같이 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우상에 제사행위는 제례의식 중의 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같이 뛰노는 것이 제례절차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제례(祭禮)행위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절대로 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례를 행하는 곳에서 같이 그 의식에 동참해서 그들의 의식에 따라 제사음식을 먹는 것은 그들의 제례의식을 같이 행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례행위가 끝나고 난 후에 제사 음식은 제례(祭禮)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식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제물이라고 해도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사서 먹으라고 했고 초대를 받아서 제물을 주었다고 해도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례(祭禮)행위를 하는 의식에 따라 제물을 먹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제례(祭禮)의식이 끝나고 난 후에 제물은 먹든지 안 먹든지 자유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 친정집에서 제사(祭祀)를 드린다고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기독교(基督敎)인이라고 해서 절이나 제사(祭祀)행위에는 참례하지 않는 것까지는 가족들이 이해했는데 제사음식을 먹지 않는다며 집사님이 밥도 굶고 집으로 그냥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이 굶고 가는 것을 보고 예수가 무엇인데 하며 가슴아파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많은 친척들도 도대체 예수가 무엇인데 그놈의 예수는 형제(兄弟)간의 천륜도 끊느냐고 하면서 앞으로 우리 가족들은 절대로 교회에 가지 말라고 울분을 터트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우상의 제물과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偶像崇拜)행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해서 전도의 문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사(祭祀)음식을 먹음으로 가족들과 불화하는 일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고전10:3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제사(祭祀)음식 먹는 것이 하나님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제사음식 먹어서 가정의 전도의 기회로 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남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는 말도 유대교 신자들이 시장에서 파는 우상(偶像)의 제물을 꺼리기 때문에 남의 양심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6, 제사(祭祀)문제와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것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추도, 추모예배는 기독교적이라고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추도, 추모예배는 죽은 사람을 그리면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제사(祭祀)는 원래 한국 고유의 풍속이 아니고 중국에서 온 중국 풍속입니다. 제사는 조상을 귀신으로 보는 신앙에서 온 것이고 제사를 드려야 조상들이 복(福)을 주고 드리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과 너무도 거리가 멀어, 그동안 한국교회는 제사대신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를 기리며 부모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추모, 추도예배도 기독교신앙에 일치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삼환목사(명성교회)는 서울나들목교회(박원영목사) 설립예배에서 ‘새로운 출발’이란 제목으로 “교회 안의 모든 것은 생명을 갖게 된다”며 “추모, 추도예배에 대한 바른 성경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삼환목사는 “기독교는 죽은 사람을 기념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생명만을 기념 합니다. 기독교의 최대 절기인 부활절과 성탄절은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굳이 추모예배를 드리려고 한다면 ‘부모님 탄생 몇 주년 기념예배’로 드리는 것이 성경에 가깝다”고 설명했습니다.

7. 나오는 말

목회일선의 경험에서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라는 핑계가 단순한 핑계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버리며 조상에 대한 제사(祭祀)를 버리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식이든 그 의식이 가지는 뜻이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의식 속에는 조상의 혼의 가호를 받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욕망(慾望)이 우선되고 심지어는 이 자손들의 액운(厄運)과 재해를 막아 주고 또 큰 복을 내려 줌을 바라는 기복 사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살아있는 늙은 부모는 자손을 돕지 못하고 죽은 부모의 혼백은 자손에게 복을 줄 수 있다는 엉뚱한 말도 나오게 되고 살아 계신 부모에게 등한히하고 죽은 후에 극진한 제사를 드리는 크나큰 불효인 제사의식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조선(古朝鮮)의 원시 종교였던 무속신앙(巫俗信仰)에는 제사풍속이 없었습니다. 무속신앙에서는 오히려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상제사는 한국의 전통도 아니며 한국의 문화도 아닙니다. 제사(祭祀)는 중국의 풍속이요 문화입니다.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했지만 제사는 지내지 않았으며 오늘날 불교 국가에서도 조상제사를 행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제사는 고려말기 중국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받아들이면서 고려왕조의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조의 정치이념으로 시작된 것으로 조상숭배(祖上崇拜)신앙인 제사(祭祀)의례도 이때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조 500년 동안에 우리 고유의 민족의례가 유교의 조상숭배 형식의 틀에 갇혀서 지나온 셈입니다.

한국인의 조상숭배(祖上崇拜) 사상은 조상의 신이 자손들을 돌봐주고 평강과 축복을 주는 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생존시에는 불효(不孝)막심하던 사람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제사는 빚을 내서라도 잘 드립니다. 이런 분들은 효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의 부귀와 평강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고 분묘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조상숭배인 제사문제를 어떻게 이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제사는 조상(祖上)의 신을 섬기는 것으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게 아니라는 사실의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으로는 조상제사(祖上祭祀)가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神)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偶像)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罪)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2~5)  

서울대현교회/ 서재생목사/ 승려생활에서 개종




By: 김성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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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목사의 불참으로 무산된 공청회에서 최삼경 목사는 월경잉태론 및 삼신론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뉴스미션

최근 또다시 도마에 오른 마리아 월경잉태론과 삼신론에 관한 공청회가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이하 세이연) 주관으로 16일 대림감리교회에서 열릴 계획이었으나, 이정환 목사의 불참으로 무산됐다.

이날 토론을 위해 참석했던 최삼경 목사는 자신의 사상을 비판했던 이정환 목사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며, 월경과 관련한 자신의 발언은 이단자 박윤식과의 논쟁에서 불가피하게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정환 목사 불참으로 공청회 불발

불발된 공청회는 소위 ‘마리아 월경잉태론’과 삼신론에 대해 최삼경 목사와 그의 사상을 비판했던 이정환 목사의 일대일 토론으로 열릴 계획이었다.

주최측은 “공청회를 개최하기 위해 두 분의 목사에게 초청장을 내용증명으로 보내고 전화를 걸었으나 이정환 목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불참하겠다고 말했다”며 “다른 날짜로 변경 가능하다고 요청했으나, 이 목사가 ‘최삼경 목사가 세이연에 소속돼 있어 가지 않겠다’ 했다”고 설명했다.

이정환 목사의 불참으로 공청회 대신 최삼경 목사의 발언과 질의응답이 진행됐으며, 이와 관련한 세미나도 열렸다.

최삼경 목사 “이정환 목사 주장, 상식적으로 말 안돼”

최삼경 목사는 이날 모두발언을 통해 자신을 비판한 이정환 목사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일축했다.

최 목사는 “이정환 목사가 주장한 글을 보니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큰따옴표를 써서 41번이나 사용했다”며 “나는 ‘예수가 마리아의 피를 받아 먹고 자랐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의 글만 보면 어느 누구도 나를 이단이겠구나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리아의 피를 받고 안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남자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무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기에 예수가 무죄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월경이란 단어는 이단자인 박윤식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또한 삼신론에 대해서는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기 쉬운 것이 삼신론이며, 칼빈도 삼신론과 관련해 이단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경에서 기도하는 하나님과 들으시는 하나님이 구분됐듯이 각각의 다른 인격을 가졌으나, 본질은 하나다”라며 “내가 왜 삼신론인가. 내가 본질의 단일성을 부정한 적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윤화미 ⓒ뉴스미션

출처: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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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aith Healing과 Divine healing의 정의

1. 용어와 관련된 문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치유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심지어 강신술 기법들과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심령 치유와 같은 뉴에이지 운동과 여러 치유술들의 다양한 측면들이 널리 대중화되
고 있으며 동양 종교들의 영향이 넓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박스터(J. Sidlow Baxter)의 정의-in the book of "Divine Healing of the Body"
그리스도인들의 치유에 관한 네 가지 용어
신유(divine healing)
기적 치유(miracle healing)
믿음 치유(faith healing)
초자연적 치유(supernatural healing)

"이들 용어들은 여러 가지 모임에서 때로는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로운
망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면서 애매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중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용어는 신유(divine healing)가 좋다
고 생각한다.
우리가 신유에 관하여 말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항상 단 한 분이신 참되신
하나님의-성경에 계시되었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절정을 이루셨
던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치유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유(divine healing)라는 용어가 갖는 의미는 다음의 용어들이 가지는 것에 비하여
우월하다.

A. 기적 치유(miracle healing)
사단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신 13:1-3 행 8:9-25 계 13;13; 16:14 19:20)
기적 치유는 신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B. 믿음 치유(faith healing)
치유의 근원이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라는 인상을 받게된다. 그러나 divine
healing은 인간의 응답보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C. 초자연적 치유(supernatural healing)
초자연적 치유란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말로서 항상 divine
healing 일수는 없다. 사단, 천사들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들도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D. 심령 치유(psychic healing)
어떤 물체를 통하여 그 소유주의 상태를 진단하거나 강신술을 통한 진단, 투시력, 마
술적인 기법들이 포함된다. 성경은 이를 엄히 금하고 있다(신 18:9-13)


John Stott는 심리학적. 의학적 방법들에 의한 것이든 혹은 그 어떠한 방법도 사용하
지 않았던 간에 모든 치유는 divine healing이라고 주장하였으나 divine healing이
란 용어 사용을 의술의 도움이 없이 또한 자연적인 치유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개
입하심으로 일어나는 치유에 제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초월 명상(TM)같은 동양 종교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집단들도 병든 자를 치
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주장을 그리스도인들이 무시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치
유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거부되어야 할 것은 그러한 치유의 근원
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divine healing을 부인하지 않는 가운데 초자연적 치유가 비그리스도적 맥락
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회의론자들에 동조하여 오늘날에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초자연적 치유를 인정하는 비기독교적 입장 및 그리스도
교적인 纛揚� 모두 거부되는 경우가 많다.

2. 세속적인 세계관
그리스도인들이 신유를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적인 서양적 세계관의 막대한
영향을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물들어 있
다. 현대 세속주의의 초석을 이루고 있는 이 두 가지 사상은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
의에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서 지난 2세기동안 서양적 사고 형성에 엄청
난 영향력을 행사하여왔다.

물질주의 세계관: 이 세상에는 물질 및 그것의 운동과 변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세상에는 어떠한 초자연적 reference point가 있을 수 없다

합리주의: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합리적인 방법
에 의해 해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신의 섭리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로 인하여 성적 타락과 방탕과 물질 만능주의가
초래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피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또 다른 차원에서 세속
주의 영향아래 있다. 즉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초자연적 개입 특히 육체적 치유의 가
능성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세속주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물론 회의주의자가 모두 불건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가볍게 믿는 것을 피하
여야 한다. 문제는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치유 역사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유를 들면서 우리의 관심이나 사고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서양적 세속주의의 영향을 극복한 뒤에 즉 오늘날 초자연적 치유가 일어
날 수 없다는 생각을 극복한 후에 비로소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3. 신학적 역류
기적은 어 이상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신학적인 사고는 하나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 이미 치유나 기적의 역
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신학자들에 따라 그 시기
에 관하여 약간씩 견해를 달리하고 있기는 하나 대체로 치유가 사도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형성된 뒤로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표적과 기사가 중단되었다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견
지하고 있다.
개혁주의자 칼빈도 신유에 대하여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

.........한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
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행사하라는 어떠한
위임도 받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루터는 그의 초기 저작인 요한복음 설교집에서 기적 시대는 초대 교회에 한정된 것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따
라서 그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계시될 필요가 없으며 새롭고 특
별한 계시가 필요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로마 카톨릭교회 신학은 오늘날에도 기
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Francis McNutt

.......실제로 치유는 개신교 교인들보다는 카톨릭 교인 편에서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카톨릭 교인들은 신유를 포함한 기이한 은사들로 축복받은 성자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신유는 아직도 성자로 시성되기 위한 하나의 시금석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톨릭 신자들은 신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데 별
로 어려움이 없다. 다만 신유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있어 하나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신유를 거부하고 있는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한가지 점만은 성서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신학적 이유로 오늘날 이루어지는 표적, 기사의 가능성은
부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만은 열정적으로 수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제 우리가 신약 성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나 치유의 체험을 근거로 한 그리
스도 신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신학은 부분적으로나마 현
대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적응한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
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막 13;22-23)"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이유로 기적을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치유에 대한
이 같은 이해 즉 치유가 초대 교회 시대에는 나름대로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할 뿐이라는 이해는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려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4. 고난에 대한 이해
모든 고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부러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유를 거부하게 하는 커다란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런 생각
을 따른다면 우리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결과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을 기회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치유의 제일차적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C.S. Lewi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통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악일뿐더러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악이다. 고통은 우리에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가 즐거워 할 때에는 속삭이시고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에는 보통
의 소리로 말씀하시고 우리가 고통하고 신음하고 있을 때에는 큰 소리로 외치시는
분이시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일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메가폰인 것
이다...................

이와 같이 고통이 우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divine healing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
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질병을 사람들의 적으로 이해하셨다. 그것은 악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
으며 사단의 왕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장 깊고도 무서운 병은 죄이며 육체적 질병
이나 가난과 같은 결과들은 죄를 그 원인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병든 사람들
이 기도를 통해 모두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는 모
든 질병과 가난 그리고 죄악이 영원히 사라지는 날이 오게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의 고난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표지가 되고 있
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은 롬 8:17에서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
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고 바울을 포함한 신약 성서 기자들은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
에 참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히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넘치는도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
으심을 본받아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
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고난과 신유를 조화할 수 있을까? 그 열쇠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치유를 비는 기도
와 고난을 통한 성장은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1)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을 몸소 도모하시는 일이 없다.
2) 하나님께서는 악을 직접 제거하신다.
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심으로써 그것을 극복하신
다.
4) 결국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악을 체험하게 되지만 그것들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의 네 가지 요점을 질병에 적용하기에 앞서 우선 박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박해를 받게 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
히려 압제자에게서 구원, 해방, 보호받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
서 박해를 통해 역사하시기도 하며 그것을 통해 승리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질병에 관하여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질병에 걸
리도록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질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
사하심을 알고 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길에는 질병이 포함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든지 혹은 그렇지 않던 간에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사용하
여 역사하실 수 있으나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대처할 필요는 없다는 원
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여러 가지 믿음의 유형들(후반부에 자세하게 다루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divine healing을 거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접하게
되는 사례들이 천박하고 유치하거나 비인격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치유를 행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리석고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성숙되지 못한 모습들을 보
임으로써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치유 역사를 행하신다는 말을 들을수록 더욱 비판
적이기도 초자연적 현상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신학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이다.

펌글
-> 출처는  http://cafe.daum.net/wooriwoomulga/BjBO/22?docid=g0PE|BjBO|22|20031129095039&q=%C7%D1%B5%BF%BE%C8%20%C1%D6%B4%D4%B2%B2%BC%AD%20%BA%A3%C7%AE%BE%EE%20%C1%D6%BC%CC%B4%F8%20%C4%A1%C0%AF%C0%C7%20%C0%BA%BB%E7%B4%C2%20%B4%D9%B8%A5%20%B8%F0%B5%E7


신사참배 강요는 일제가 일어 상용, 창씨개명 등에 이어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다. 일본의 전래 민간신앙인 신도(神道)는 자연이나 조상, 영웅, 역대 천황 등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多神) 종교인데, 메이지시대 이후로 천황제와 함께 군국주의 침략정책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군사·경제·문화적 침략이 시작되면서 신도(神道)도 함께 한반도에 상륙했다. 한일병탄 이전에는 주로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에게 국한됐으나 이후 총독부가 신사(神社)를 세워 보급에 박차를 가하면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25년 총독부는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사립학교 학생들을 시작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나 기독교계의 반발로 일단 물러섰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들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총독부가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부 학교는 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었으며 학교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만 했다. 총독부는 어용 기독교 지도자들을 앞 세워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조상숭배의 미덕’이라고 강변하면서 반대자들을 핍박하였다.



총독부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따라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학생들

이런 강압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기독교계는 결국 총독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35년 12월 안식교단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뒤이어 성결교단도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또 천주교는 1936년 5월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신사참배를 시행하였다. 참고로 교황청 포교성은 1936년 5월 25일 “신사는 황실 존경과 애국용사 존경을 나타내는 애국심의 발로이며 자발저인 것”이라는 성명을 통해 신사참배를 용인했다.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임을 자처해온 장로교는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했다. 이날 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감옥에 가두어 총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반대는 묻지도 않고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가하여 시국 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날 부총회장 김길창(金吉昌) 목사는 23명의 노회장들을 데리고 평양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였다. 또 같은 달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이로써 조선내 모든 기독교 교단과 교파가 신사참배에 동참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신사참배 인식 운동'과 '신사참배 권유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홍택기, 그 오른쪽은 김길창 목사(출처-<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1938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주삼·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식, 장로교의 홍택기·김길창 등 지도급 교역자 5명으로 구성된 ‘신궁참배단’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등을 참배하였으며, 일부 목사들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또 장로교는 이듬해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전쟁 전승 기도운동과 시국강연회·모금운동을 벌였으며, 헌금을 모아 '조선장로호'라는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1936년 조선 전역에 ‘1면(面) 1신사(神社)’ 정책을 시행하면서 총독부는 신사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6월 현재 조선 내 신궁(神宮)은 2개소, 신사는 77개소, 면 단위에 건립된 소규모의 신사는 무려 1,062개소에 달했다. 이밖에도 각급학교에는 호안덴(奉安殿)을, 또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를 보급해 모든 조선인들이 집 안팎에서 아침저녁으로 참배토록 강제하였다. 이로써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한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모든 교역자들이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더러는 총독부 당국자를 찾아가 청원운동’을 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굴복한 교회를 비판하면서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펴기도 했다. 주요인물로는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함남의 이계실 등이며, 만주 지역에서는 박의흠·김형락·김윤섭 등이 활약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치안유지법·보안법·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죄인으로 다뤘는데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했고, 주기철 목사 등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달했다. 이밖에 교회 2백여 곳이 폐쇄되기도 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기독교 신앙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천도교 등 다른 종교에도 적용됐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반면 기독교는 교계 전체가 동참했던 만큼 갈등과 후유증이 컸다.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해방 후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동참한 사실에 대해 한동안 침묵하다가 한경직 목사의 참회 이후 몇몇 교단에서 뒤늦게 참회를 발표했다.

영락교회 한경직(1902~2000)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템플턴상 수상 축하행사 때 인사말을 통해 "반세기 전에 지은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한다"고 회개한 바 있다. 또 2006년에는 소장파 목회자들이 결성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의 반성문을 발표한 바 있다.

교단 차원에서는 2006년 1월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교단 중 처음으로 교단의 친일 행적을 사죄했다. 이어 2007년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가 3·1절을 기념해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같은 해 9월 총회 때 신사참배 행위를 사과했다. 또 2009년 예장 합동과 통합, 기장, 합신 등 4개 장로교단은 교단 분열 60년 만에 처음 제주 연합예배로 모여 신사참배 참회기도를 드린 바 있다.



출처: 아멘넷/ 도봉옥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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