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죽었습니다!

실제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서 흘리신 보혈 오직 그것으로 인해 더러운 오물같은

우리의 죄가 씻겨지는 것입니다.

 

그 나무에서 흘리신 보혈 도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리스도에 대해서 들을 때 당신의 마음이 기쁨으로 춤을 추며

나는 더러운 사람들 중에 가장 더러운 사람입니다.

 

저에게 소망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면 그래요 당신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에겐 회개가, 적어도 회개의 씨앗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은 모든 자들은 아무도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시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고 지옥의 죽음은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천년후에나 올 것이라고 신경을 안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25년 50, 60년 안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이 여기로 오시든지 여러분이 그분에게 가든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볼 것이며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십니다!

그 분이 오실때 그것은 동시에 대단히 좋을 것이고 굉장히 무서울 것입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하늘문을 가르시고 내려 오실때 가장 광대하고 강력한 인간들과

그들의 군대는 말을 타고 내려 오시는 그분의 눈길 한 번에

산들에게 그들을 묻어달라고 외칠 것입니다!

너무 광대하시기에 모든 것 위에 절대적인 주권으로 앉아계십니다.

당신은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어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바로 그 분과 지속적으로 걸으며

당신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한국교회 미래 지속가능한 해법은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읽어보니

2014/08/06

 
▲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저자 최윤식, 생명의말씀사) 출처: 생명의 말씀사 ⓒ뉴스파워

지난 1일 본지는 ‘한국 교회 계속 감소...대책 마련 시급’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교회가 세워졌지만 제주도와 경상도 지방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교회수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이 위기 속 한국 교회는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까? 그 해답을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저자 최윤식, 생명의말씀사)에서 찾아봤다.

이 책의 저자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와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최윤식 원장(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장·한국 뉴욕주립대 미래연구원장)이다. 미국의 권위있는 미래학 정규과정인 휴스턴대학교 미래학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학위를 받은 그는 미래예측기법, 미래전략경영, 시스템사고, 미래모니터링 등을 바탕으로 정부기관과 국내외 기업, 비영리 단체, 그리고 개인을 대상으로 미래와 관련된 자문과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사랑의교회에서 고 옥한흠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수년간 부목사로 섬겼던 최 원장은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통해 미래학과 성경에 입각한 한국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했다.

■한국 교회, 잔치는 끝났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성장이 멈춘 것을 넘어서 쇠퇴기에 돌입했다고 분석했다. 한국 사회의 인구구조 변화와 기독교 자체의 부흥동력 상실, 그리고 점점 지속되는 교회 이미지의 실추로 한 세대(30~40년)가 지나면 최악의 경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라고 볼 수 있는 주일학교 총인구 변화 추이만으로도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기독교 총인구 중 주일학교는 1960년대 폭발적으로 상승했지만, 1980년부터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예장 통합 측에서만 지난 10년 동안 주일학교 어린이 부서가 38만 명에서 28만 명으로 줄었고 기독교성결교회는 30%가 감소했다.

필자는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2050년경 교인 중 60~70%가 은퇴자로 가득 찰 것이며, 농어촌이나 소도시의 경우 그 수가 80~90%에 이를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측을 내놨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한국 교회 위기, 문제는 무엇인가?

필자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꾼 꿈을 요셉이 해석한 이후 그들이 7년의 흉년에 대비한 것처럼 한국 교회도 그 흉년의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한국 교회 위기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 위기의 내부 진원지를 초대형 교회만이 살아남는 기형적 목회 환경, 조화와 균형 무시에 따른 목회 생태계 교란, 뿌리지는 않고 거두려고만 하는 교회 사역, 둔감해진 시대적 소명 등 4가지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이와 같은 내부적 요인을 제외하고도 한국 교회의 위기는 외부적인 문제에 휩싸이고 있다. 교인들의 삶에 직결되는 글로벌 경제 위기와 출산율 저하 등이 그 주된 요인이다. 필자는 이 모든 변화는 한국 정치, 외교, 경제의 방향 전환에 영향을 줄 것이고 한국의 미래 방향이 바뀌면 교인들의 미래, 그리고 생각과 삶의 모습이 바뀌게 된다며 내부요인만큼이나 외부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제 불황으로 인한 성장 한계 문제와 중산층의 붕괴는 자연스레 목회환경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 교인들은 말로만 중산층이었고, 말로만 잘 살게 됐을 뿐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소득은 줄고 빚만 늘어난 ‘보릿고개 시절보다 더 가난해진 교인들’이라 표현했다.

■문제는 더 찾아올 것……한국 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미래 키워드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현재 일어난 문제들만 해결하면 위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일까? 앞으로도 상황은 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세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이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무분별한 종교혼합주의, 개인주의 신앙과 가나안 성도들, 점점 약해지는 영성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한국 교회의 미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필자는 이런 미래 키워드들 중 ‘통일’이라는 키워드를 ‘핵폭탄급 변수’라 칭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필자는 교회가 통일 한국을 위해 얼마만큼 준비를 했는지 독자에게 질문한다. 축복받는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통일에 대한 영적, 심리적, 사회적, 선교적, 경제적 준비를 시급히 해야 하며, 이런 준비가 선행되지 않은 채 통일이 되면 북한 교회의 급격한 세속화와 남한 교회의 극심한 분열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필자는 독일의 통일을 통해 한국 교회가 통일을 위한 3가지 준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재정적 준비이다. 서독 교회는 통일 직전까지 동독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역을 실시해 결과적으로 통일비용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두 번째로 북한 교회의 영적 순수성을 지켜 줄 준비다. 필자는 이미 세속화될 대로 세속화된 한국 교회는 북한의 영적 순수성을 지켜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며 이 상태로 통일이 되면 북한 교회는 수년 내에 찢기고 타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을 보호할 준비다. 준비된 통일을 한 독일조차도 통일이 된 지 20년이 흐른 후에야 동독 지역에서 서독 출신 국회의원이 당선될 정도로 감정의 골이 컸다. 통일이 되면 우리는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통일을 위한 간절한 기도만으로 만족할 때가 아니라 구체적인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주장한다. 서독 교회가 동독 교회를 지원해 독일의 통일과 안정에 배후로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복음적 평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교회, 해법은?

한국 교회는 역사의 굴곡가운데 우는 자와 함께 울며 그들의 편에 서 오며 부흥을 맞이했다. 하지만 요즘은 10년 뒤에도 우리 교회가 문을 닫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겉으로는 세계 최고의 기독교의 아성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지만 속으로는 영적으로 곪고 문드러져 있는 세계 최고의 세속 교회가 우리의 현 주소라며 ‘통회하는 울음’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처럼, 평양대부흥운동처럼 다시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불덩이가 쏟아지려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세속화된 교회가 아닌 통회하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선제적 대응 방식으로 교회나 교단이 정책 방향을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에 가치를 두시지 않는다며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개인과 교회 공동체 성장을 위한 10단계 프로세스(부르심, 비전 자극, 비전 코딩, 비전 스캐닝, 비전 디자인, 비전 이퀄라이징, 비전 훈련, 비전 재인식, 비전 네트워킹, 비전 재생산)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 프로세스를 통한 비전훈련 영역은 영성훈련, 자질훈련, 능력훈련 등 세 가지로 나뉜다. 필자는 이를 통해 구체적인 자신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고, 교인들을 전인격적이며 균형잡힌 성장으로 이끌게 된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책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이기는 전략은 늦더라도 씨를 뿌리는 것이라며, 미래에는 ‘찾아가는 전도’보다는 ‘찾아오게 하는 전도’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람은 가치에 따라 이동하는 존재로 교회가 한 발 먼저 이웃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가치있는 것을 제공하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찾아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자는 책에서 교회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이 교회는 ‘한 몸’이라고 로마서 12장 4절에 표현했고, 예수님 또한 자신을 ‘머리’, 교회를‘몸’이라 지칭했듯이 성도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된 ‘지체’인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는 고린도전서 말씀처럼 어떠한 문제를 한 지체만의 문제로 치부하고 공격하면 그것은 올바른 해결방법이 아니다.

필자는 ‘안주는 곧 박탈’이라며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설명했다. 산소호흡기에만 의존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변화를 통한 살아있는 교회로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우리 앞에는 ‘변화냐 안주냐’라는 선택지가 놓여있다며 책은 끝을 맺었다.

범영수 ⓒ 뉴스파워

출처:USA아멘넷

신세계질서의 아젠더와 에볼라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온몸피범벅돼 사망

http://youtu.be/fb_Ev7ydcW4

 

▼신세계질서의 아젠더와 에볼라 바이러스 

 

 

  


아프리카 교통수단 발달도 확산 원인

-사망자 장례 과정에서 전염되기도
-의료진 통해 전염된단 루머 나돌아
-에볼라, 국내 유입 가능성은 낮아

■ 방송 : CBS 라디오 FM 98.1 (07:30~09:0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대담 : 김영미 (국제분쟁지역 전문PD), 김우주 (대한감염학회 이사장)

여러분, 혹시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올들어 사망자만 700명을 돌파했고 치사율이 90%인 무서운 바이러스입니다. 문제는 전염력이 매우 높고 치료제도 백신도 없다는 것인데 지금 아프리카 전역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륙간 확산 가능성이 있어서 전세계가 이 바이러스를 주목하고 있죠. 과연 어떤 상황인 것인지 오늘 자세히 짚어봅니다. 먼저 현지 반응을 취재하고 있는 분입니다. 국제분쟁지역 전문PD 김영미 씨입니다. 김영미 PD, 안녕하십니까? 

◆ 김영미> 네, 안녕하십니까.

◇ 박재홍> 에볼라 바이러스 밤새 취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정확한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요?

◆ 김영미>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1300명 가까이 감염된 걸로 알려져 있고, 700여 명이 사망했는데요. 이것도 집계가 된 게 이 정도이지, 밀림 속이나 이런 데서 알려지지 않은 그런 죽음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것까지는 아직 집계가 되지 않은 상황이고요. 그리고 지금 전염병이 가장 심각한 기니에서 접하고 있는 국경들 같은 경우 거의 다 폐쇄가 된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웃국가인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세네갈, 코티디브아르 전부 다 국경이 폐쇄가 돼서 갑자기 폐쇄된 국경 때문에 급하게 국경을 넘어야 되는 상인들이나 무역하는 사업가들 전부 지금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는 상황입니다.

◇ 박재홍> 기니에서 주로 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기 때문에 인접 국가에 국경이 폐쇄된 그런 상태군요. 그런데 이 에볼라 바이러스가 올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잖아요?

◆ 김영미> 현지 이야기로는 1976년에 처음 콩고에서 발견이 돼서 그 지역의 강 이름인 에볼라강 이름을 따서 에볼라 바이러스라고 명칭이 생겼는데요. 아프리카 밀림에서 알려지지 않은 바이러스 이름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지역마다 변성바이러스도 굉장히 많아서 의학계가 대처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 같고요.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가 없는 이유는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국소적으로만 발생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백신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아마도 투자가 많이 되지 않은 것 같고, 연구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 아프리카 대륙뿐만이 아니라 비행기를 통해서 다른 대륙간 이동도 가능한 상황이어서 전 세계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에볼라 바이러스 관련 자료 (미국 CDC 홈페이지 제공)

◇ 박재홍> 무엇보다 교통수단이 많이 발달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염가능성이 높은 상태이고. 그런데 올해 유난히 급속히 전염됐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또 어디 있을까요?

◆ 김영미> 아프리카도 하루하루 교통수단이 발달했고요. 현지인들은 에볼로 바이러스가 급하게 퍼진 것을 버스 때문이라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그런 병이 생기면 부족 하나만 전멸하고 그냥 끝났던 것들인데 이제는 감염된 사람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옆 마을에도 전염이 되고, 급기야는 도시까지 가게 되고, 그리고 나라 간에 국경도 넘게 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인데요,

또 현지의 독특한 장례식도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한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에볼라 바이러스로 사망한 시신이 굉장히 끔찍합니다. 눈이나 코를 통해서 피가 계속 넘어오기 때문에 이들은 장례식 때 시신을 깨끗이 씻겨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서 시신을 씻깁니다. 하지만 에볼라 바이러스는 지금 현재 사람 간에 감염이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쪽 장례식 풍습 때문에 더 많이 감염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의료진한테도 굉장히 많이 큰 타격을 줬는데요. 이번에 사망자 가운데 50여 명 가까이가 의료진입니다. 현지인들은 의료진 때문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더 퍼진다는 루머가 지금 한창 돌고 있어서 감염된 사람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의료진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 박재홍> 그러니까 신체적인 접촉으로 생기기 때문에 의료진도 치료를 하다 보면 당연히 접촉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감염이 또 발생하기도 하고 또 루머까지 있는 그런 상황이네요. 현지인들 얘기 들어보면 이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 어느 정도인가요?

◆ 김영미> 현지인들 같은 경우는 체계적으로 의학지식이 없기 때문에 주로 주술사를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또한 의료 시설이 열악한 지역이기 때문에 의료 시설까지 접근하는 데 굉장히 어려움이 많고요. 그리고 의료진에게 가더라도 이 바이러스가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저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이고,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명칭보다는 자기네들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라는 '죽음의 바이러스'로 더 많이 불린다고 합니다.

◇ 박재홍> 그럼 의료진도 거의 목숨을 걸고 진료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인가요?

◆ 김영미> 네, 에볼라 전문의가 갑자기 사망하는 것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의료진은 겹겹이 보호가 될 수 있는 방호복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바이러스에 방어벽이 거의 뚫린 거죠.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더 확산이 될지 모르겠지만 의료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인 나라들이기 때문에 그런 점이 가장 염려스럽습니다.

◇ 박재홍> 말씀 들어보니까 굉장히 상황이 심각하네요. 빨리 진정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 김영미> 네, 감사합니다.

◇ 박재홍> 국제분쟁지역 전문PD 김영미 씨였습니다. 이번에는 전문가 한 분을 연결해 봅니다. 대한감염학회 이사장을 맡고 계신 고려대 의대 감염내과의 김우주 교수입니다. 교수님 나와계시죠?

◆ 김우주> 네.

◇ 박재홍> 앞서 현지의 심각한 분위기 들어봤는데요. 이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증상이 정확히 어떻게 나타나는 겁니까?

◆ 김우주> 바이러스에 노출된 후에 2일~21일의 잠복기를 거쳐서 갑자기 고열, 오한, 두통, 근육통, 소위 몸살감기 증상으로 시작하죠. 아울러 설사, 복통, 구토, 위장감염상이 있고 이어서 전신에 발진이 돋고 그 다음에 피를 통하거나 장출혈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쇼크와 혼수로 발병 8일~9일 사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특히 초기증상인 고열, 오한, 근육통 같은 것들은 열대지역의 흔한 말라리아라든지 라사열과 같은 풍토병과 중상이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초기에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을 진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굉장히 무서운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겠는데 감염 경로가 정확히 어떻게 됩니까? 신종플루처럼 호흡기로도 가능한 건가요?

◆ 김우주>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에볼라 바이러스는 감염된 환자의 혈액이라든지 체액, 땀이라든지 눈물, 대변과 같은 환자로부터 나오는 분비물을 접촉했을 때 감염하게 됩니다.

 
(사진=이미지비트 제공)

◇ 박재홍> 조금 전에 김영미 프로듀서와도 인터뷰가 했었습니다마는 현지에서는 이러한 질병에 대한 지식이라든지 어떤 예방 수칙이라든지 하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인 것 같아요.

◆ 김우주> 지금 기니라든지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이 3개 국가는 공중보건의료체계가 열악하고 예방수칙에 대한 홍보라든지 시행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환자발생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 박재홍> 그렇다면 국제 사회의 도움이라든지 WHO라든지 하는 곳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 김우주> 지금 WHO하고 미국의 자원의료 봉사단체가 현장에 의료진을 보내서 방역에 도움을 주고는 있는데, 미국의 의료봉사단체에서 간 의료진 조차도 감염돼서 지금 치료받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의 방역이나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박재홍> 지금 이 에볼라 바이러스를 전세계가 주목을 하고 있는 가운데 홍콩에서도 의심환자가 발생했다가 음성으로 판명난 일도 있었고. 에볼라 바이러스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하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일까요?

◆ 김우주> 지금 이번 사례가 역대 40여년 동안 에볼라 출현 이후에 가장 큰 유행이고, 또 하나 지금 라이베리아에 있는 공무원이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고 나이지리아로 여행가서 확진이 돼 사망한 케이스가 2, 3일 전에 발견됐습니다. 그 얘기는 잠복기가 2일~21일, 3주까지 길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이라든지 유럽이라든지 다른 대륙으로 여행 가서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이 수입이 될 수 있다는 사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현지에서 걸려서 국내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지만 상당히 낮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박재홍> 현지에도 교민들이 계실텐데 조심하시면 좋을 것 같고. 그렇다면 이 바이러스는 언제쯤 진정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요?

◆ 김우주> 지금 예상이 쉽지 않은 것이 의료체계가 미비하고 방역 책임자까지 사망할 정도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분간 더 유행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 박재홍>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네요.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우주> 감사합니다.

◇ 박재홍> 대한감염학회 이사장이시죠. 고려대 의대 김우주 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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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 비상’ 국제사회 경계령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에볼라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정부가 31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수도 몬로비아에 있는 한 학교의 텅 빈 교실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서성이고 있다. 몬로비아/AFP 연합뉴스

3개국 감염자 700명 넘게 숨져
라이베리아 등 비상사태 선포
미 CDC는 ‘여행경보’ 상향 조정
WHO, 1억달러 긴급 투입키로

치사율이 최고 90%에 이르는 전염병인 에볼라 출혈열(이하 에볼라)이 서아프리카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정부는 방역활동 강화를 위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도 에볼라 확산을 막기 위해 자금과 인력을 추가 투입하기로 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였다.

1 일 <로이터> 통신 등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시에라리온 정부는 31일 에볼라 창궐을 막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발병지역을 앞으로 60~90일 차단·격리하기로 했다. 해당 지역에선 공공행사가 제한되며, 감염인을 찾기 위해 군병력이 가택수색도 진행할 예정이다. 라이베리아 정부도 이날 같은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또 시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시설도 잠정 폐쇄했으며, 필수인원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에게 30일 동안 의무휴가에 들어가도록 했다.

어 니스트 바이 코로마 시에라리온 대통령과 엘런 존슨 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은 다음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미국-아프리카 정상회의’ 참석을 이날 전격 취소하고, 1일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서 열린 에볼라 대응책 마련을 위한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세계보건기구 쪽은 이 자리에서 서아프리카 에볼라 방역활동을 위해 1억달러 규모의 예산을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아프리카 ‘에볼라’ 감염 현황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는 지난 3월 에볼라가 처음 발병한 기니를 비롯해 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 등 3개국에 방역 전문인력 50명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했다. 또 이들 3개국에 대해 기존의 ‘여행 주의보’(레벨-2)를 최고 단계인 ‘여행 경보’(레벨-3)로 상향 조정하고, 필수 의료진 등을 제외하고는 여행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토머스 프리든 질병예방통제센터장은 <가디언> 등과 한 인터뷰에서 “최상의 시나리오에 따라 방역작업이 이뤄진다 해도, 에볼라 발병이 잦아들 때까지는 향후 3~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조처는 최근 이들 국가에서 감염자 발생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지난 24~27일에만 122명이 추가 발병해, 이 가운데 57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세계보건기구가 31일 내놓은 최신 집계자료를 보면, 지난 3월 이후 서아프리카 3개국에서 모두 1322명이 감염돼 이 가운데 728명이 숨졌다. 특히 일부 지역에선 에볼라 바이러스가 외부에서 전염됐다고 생각한 주민들이 현장에 급파된 의료진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어, 방역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뉴욕 타임스>는 “과거 에볼라 발병 때는 특정 지역에 한정돼 감염됐는데, 이번엔 3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지고 있어 상황이 좋지 않다. 해당 국가는 물론 국제사회도 초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화를 키우고 말았다”고 짚었다.

1976 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에볼라 강 계곡에서 처음 나타난 이후 중서부 아프리카 국가를 중심으로 주기적으로 발병해온 에볼라는 치사율이 50~90%에 이르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고열·구토·설사 증세와 함께 출혈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감염인의 혈액이나 침·땀 등 체액을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볼라가 치명적인 이유는 현재까지 예방백신은 물론 치료제도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병 초기에 감염인을 격리하고, 외부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게 전염을 막는 데 급선무다. 이어 추가 발병이 사라질 때까지 감염인이 접촉한 모든 사람을 추적·격리하는 조처를 되풀이하는 것이 에볼라를 퇴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http://blog.daum.net/jinsook5546/17569


아르만드의 아빠의 이야기

     
  1989년 아르메니아에 8.2도의 지진이 일어나 불과 4분 만에 3만 명이 죽고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극 속에서 인간의 가장 선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혼란과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학교 건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잔해의 무더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아들의 교실이 있었던 건물 모퉁이로 달려가서 그 잔해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떤 현실적인 소망을 가졌던 것인가요? 그 잔해 더미 속에서 아들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가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잔해 더미를 헤치며 아들을 찾은 것은 아들에게 항상 아빠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막 잔해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을 때, 다른 부모들은 그를 끌어내면서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아버님, 너무 늦었어요. 그들은 이미 죽었어요. 당신이 도울 수 없어요. 이제 집으로 가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후에 소방관 부장이 그를 잔해 더미에서 끌어내면서 말했습니다. “곳곳에서 불과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요. 당신이 위험해요. 집으로 가세요!” 결국은 경찰이 와서 말했습니다. “다 끝났어요. 당신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어요. 집으로 가세요. 우리가 처리할게요.”

 그러나 이 아버지는 8시간, 12시간, 24시간, 36시간이나 계속 잔해를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38시간이 지나서 그는 돌을 끌어 당겼고, 그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즉시 그가 소리쳤습니다. “아르만드!” 그때 아들의 말이 들렸다. “아빠?! 오셨군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어요. 다른 아이들에게 ‘아빠가 살아 있다면, 아빠가 나를 구해 줄 거야’라고 말했어요. 아빠가 약속을 하셨죠. ‘아빠가 나를 위해 항상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아빠가 이제 약속을 지키신 거예요!  (Max Lucado의 책 “He Still Moves Stones”에서 발췌함)

 아르만드의 아빠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의 놀라운 모형입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에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되는 사랑의 많은 속성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 때,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때, 해결책을 찾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모든 것이 흔들려 다 파괴되었을 때 잠잠히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펀글 -
.


남한 면적의
약 5배인 캘리포니아는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본토에서
텍사스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state입니다.

 

캘리포니아의 크기가 넓은 만큼
사막, 온대, 아열대, 지중해성 등의 다양한 기후와
바다, 섬, 산과 산맥, 계곡, 강 등 천혜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곳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산을 가지고 있는 바
곳곳에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웅장한 폭포들이 자리잡고 있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요세미티의 나무들과 폭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요세미티의 폭포들은
봄의 우렁차고 웅장한 모습과 달리
여름이 되면 수량이 쥐꼬리처럼 줄어들어 무척 초라해집니다.

 

하지만 여름에도
수량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시원하고 멋진 폭포가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릴 Burney Falls 입니다. 

 

※ 아래의 모든 사진은

삼각대가 없어서 손으로 들고 찍은 사진입니다.

 

 

30162749_1.jpg

 

버니 폭포는 이름이 약간 긴

McArthur-Burney Falls Memorial State Park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줄여서 MBFMSP 라고 하겠습니다.



30162749_2.jpg


LA에서 가기엔

상당히 먼 거리이기 때문에

Mt. Shasta나 Lassen 화산 국립공원,

 

혹은

레익 타호에 갈 때

곁들어 방문하면 좋습니다.


30162749_3.jpg

 

MBFMSP는

그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버니폭포가 중심이 되는 주립공원입니다.



30162749_4.jpg

우렁찼던 요세미티의 폭포도

여름철이 되면 수량이 형편없이 줄어드는데

 

왜 버니 폭포는

여름철에도 수량이 줄지 않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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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의 발원지는

폭포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진

버니산(Mt. Burney/7,863ft)에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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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산 주변은

오래 전 화산활동에 의해

주변의 지대가 제주도와 같은

현무암(basalt)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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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동안

버니산에 높이 쌓였던 눈은

봄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데

 

눈이 녹은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에서 강을 이룹니다.


30162749_8.jpg

 

말하자면

MBFMSP 일대엔

지하에 강이 흐르는 대수층이 있습니다.



30162749_9.jpg

버니산에 눈이 녹은 물과

대수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폭포의 상류 약 0.7마일에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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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산의

눈녹은 물이 흐르는

폭포 상류의 Burney Creek은

여름철이 되면 물이 말라 버리지만

 

대수층에서는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내기 때문에

버니 폭포는 여름에도 수량의 감소없이 줄기차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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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의 높이는

약 129ft로 알려져 있으며

넓이는 약 250ft(76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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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에서

하루에 흘러나오는 물의 양은

379 million 리터(약 1억 갤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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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버니 creek을 거쳐 Lake Britton로 간 다음

 

다시 Pit River를 통해

태평양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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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한 버니 크릭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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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 Britto의 모습...

 

버니 크릭은 Lake Britton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30162749_16.jpg

버니 폭포의 아래쪽

버니 크릭에서 낚시하는 이의 모습입니다.


30162749_17.jpg

버니 폭포 주변에는

Burney Creek Trail, Falls Loop Trail,

 

PSEA Trail,

그리고 PCT(Pacific Crest Trail) 등

다양한 Trail 들이 있습니다.


30162749_18.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blog.koreadaily.com/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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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한 이해와 설교

박영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남포교회 담임목사 ]

 

<이 원고는 2012년 4월 16일 합신에서 있었던 합신교단 목회자를 위한

신비주의 운동과 신천지 이단에 대한 설교적 대응세미나 강의안입니다. >

 

 

들어가는 말

이번 세미나의 큰 주제가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와 비판입니다. 원래 신비라는 것은 어느 종교에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신비가 없으면 종교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 이해되는 범위와 능력이라면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될 수 없는 능력, 이해될 수 없는 방법, 이해될 수 없는 내용, 즉 성경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측량할 수 없는이라고 표현하는 더 깊고 높고 놀라운 것이 있어야 종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부정적인 신비주의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인 신비가 무엇인가를 다루고자 합니다.

 

 

1. 기독교 신앙의 신비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의 기대나 이해와 다른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구원의 목적이요,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전자는 구원이 영생복락이기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후자는 그것이 고난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1) 구원에서 완성까지의 사이에서 직면하는 현실 : 환난

설교는 청중에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은 로마서 51-4절에서 얘기하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되어 은혜로 들어가게 된 믿음의 자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은혜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완성의 자리를 바라보는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로마서 53절은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함으로써 중간 과정을 환란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란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본성이 요구하는 잘못된 신비로 빠지게 됩니다. 즉 신앙이 힘이 되며 환란을 해결하는 수단이 되고, 신앙을 가지는 것이 세상이 가질 수 없는 보상을 해줌으로써 신앙인이 된 것을 인정받는 어떤 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2) 면제되지 않는 고통 : 사망의 역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고후 4:10-12)

기독교 신앙인의 현실은 환란이며 고난이며 죽기까지 고통스러운 기간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자들은 자신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난과 고통을 끊임없이 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성경은 신자들의 고통을 면제시켜주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나를 죽인 세상에서 너희가 살아야 된다고 분명하게 못 박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고통을 면하는 것이 신앙이고 보상이고 정당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비를 몰라서 현실적 대안들이 비집고 들어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3) 환난이 이루어내는 것 : 영광

종교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기대는 종교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요, 인정받는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신비란 그것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거나 안전장치입니다. 물론 신비란 종교의 필수적 요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신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신비는 그 해결책도 아니고 안전장치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17절에서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영광으로 가지만 환란을 통해 간다고 서로 엮고 있습니다. 환난이 영광을 만든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신앙입니다. 영광을 약속받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환란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란과 고통은 패하고 망하는 과정으로 보지 승리로 가는 과정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아주 중요한 답이 하나 있는데 빌립보서 2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4) 신자에게 고난의 의미 : 신자가 처하는 현실이며, 영광으로 가는 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2:5-9)

우리는 많이 희생하고 충성하고 사역을 순종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았다고 오해합니다. 우리가 앞에 있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영광으로 들어가는 자리의 고난을 희생과 헌신으로 바쳐 영광을 보상으로 받는 과정으로 이해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추심, 종 되심, 섬김, 희생, 죽으심은 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으로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탄생 즉 성육신을 놓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했던 것과 똑같이, 그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은 낮아짐과 죽으심을 영광과 함께 묶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는 하나님에 대한 영광은 낮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높이실 수 있는데 낮춘다는 개념과 다릅니다. 섬기고, 군림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편들고, 용서하고 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으로 용서와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나라는 다스리고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고 섬기고 죽는 나라라고 끊임없이 강조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어떤 핑계와 타협점도 없습니다.

 

5)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신비 : 고난, 순종, 온전케 됨

예수님이 보냄을 받는 자리는 히브리서 57-9절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7-9)

비록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지만 무슨 심한 고통과 눈물로 처절하게 기도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설교자가 자기의 인생과 사역이 고달프고 이해가 가지 않고 죽을 것 같지 않으면 그는 아직 설교자가 아니고 꿈을 꾸는 자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나 초창기 설교를 보면 그때는 현실을 몰랐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정답을 알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설교가 살기가 둥둥합니다. 식칼 들고 날뛸 때입니다. 냉장고도 잘라서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하소연도 아니며 절망도 아닙니다. 주께서 거기까지 오신다는 것을 아는 초청입니다. 그 눈물이 있어야 청중들이 비로소 예수님의 품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항복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 와서 끌어안으시기만 하고 끝나는가?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 다시 오셔야 일어납니다. 우리 사는 동안 이것은 믿음으로 어떤 증거로 확인은 시켜 주셔도 완전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6) 신앙생활의 본질적 덕목들의 의미 : 능력과 보상이 아님

골로새서 3:12-17은 골로새서 31절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에 이어서 나오는 결론의 요구들로, 용서와 겸손과 이해와 사랑 등 신앙생활의 본질적 덕목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능력과 보상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겸손이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겸손 하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기독교 신앙이 목적하는 성품으로 되어 있지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환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즉 영광을 군림하여 강요하는 힘으로 갖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증명하시듯이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에서 섬기는 자리, 종의 자리로 가라고 불러내었다고 성경을 이해해야 맞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이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한 번씩 언급하면 모든 성도들의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답이 없다는 실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덕목들을 신앙인에게 주어진 보상이나 능력이나 힘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2. 연속성과 반전의 신비

 

1) “약함강함의 연속성이 갖는 신비

죽어버리고 망하는 환난의 과정이 어떻게 영광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약함과 강함이라는 불연속이 연속으로 묶이는 모순이 어떻게 가능한지 중요한 힌트를 바울에게서 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사단의 가시를 빼어달라고 세 번 기도하고 주님으로부터 이 답을 받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7-10)

절망과 죽음, 그리고 영광과 승리라는 서로 대립적이고 불연속적인 두 실체가 하나로 묶이는 신비가 소개됩니다. 내가 죽고 지는 것과 영광의 승리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길입니다. 둘을 묶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 둘을 하나님이 하나로 묶으시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묶으심, 그 불연속을 연속선상에 묶는 그 신비가 예수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의 약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요청하여 그가 강한 것보다 더 강한 예수로 말미암아 그가 약할수록 예수의 임재로 인한 예수의 강함이 그가 강한 것보다 더 강한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이 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여기 예수가 기독교 신앙의 이 고난이 왜 승리를 만드느냐, 고난은 실패와 멸망과 패망으로 가는 길인데, 분명히 하향 곡선인데, 상승 곡선으로 갔어야만 만나는, 그 정점에 있는 승리와 영광과 어떻게 둘이 묶일 수 있느냐할 때 그 둘을 묶는 신비로운 열쇠가 예수인 것을 증언하는 장면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의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고 약할 그때에 주께서 그에게 능력으로 머무실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약함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성경적 신비로 이해합니다. 실패와 절망과 사망으로 끝나는 과정이 어떻게 모순 될 수밖에 없고 대척점에 있는 영광이라는 결과를 이룰 것이냐 할 때 거기에 예수가 등장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이 만들어내는 한탄과 절망과 비명과 낙심이 어떻게 영광으로 묶일 수 있느냐에 대한 풀이가 나옵니다. 예수가 그 신비의 주인이십니다.

 

2) “죽음부활의 연속성이 갖는 신비

로마서 425절에는 구원론에 관한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이 부분을 구원의 방법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예수의 신비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우리와 동일시되고 우리를 죄에서 꺼내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오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셔야 함께 부활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는 것은 그가 우리와 동일시되어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죽음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당신과 묶으심으로 부활해서 우리가 함께 해서 부활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고 예수님은 혼자 살아계시고 이게 아니고, 우리의 부활을 위하여, 우리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우리 죽음에 찾아오셔서 당신과 우리를 연합시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이것에는 모든 죽는 자들의 자리까지 찾아오시는 예수라는 것과 죽음을 부활로 바꿀 수 있는 부활의 반전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찾아와 끌어안아 부활에 참여시켜 죽음을 부활로 반전시키는 능력자로 소개됩니다. 예수는 죽음을 생명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로마서 4장에 이 이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논하는 중에 그가 믿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분이요,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요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부정적으로 무한대로 간 자리도 뒤집어 반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반전을 어떻게 이루시느냐 하면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 창조 사역보다 더 들어가 죽음을 결과 시키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형편의 자리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죽음이란 갈 데까지 다 간 것입니다. 그 죽음에서 부활로 뒤집으시는 것이 예수의 신비입니다. 예수의 부활에는 어떤 죄도 버리지 않고 모든 죄를 품고 죽고, 모든 죽음을 생명으로 반전시키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까지의 깊이와 부활로의 반전을 증거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통과 절망의 깊이가 예수 안에서 영광의 실제적 내용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3)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 반전, 전복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논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예수에게서 실제로 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붙잡고 있는 자들입니다. 설교자로서 우리가 찾아가는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승리하시기를 위하여 죽음의 자리로 찾아오신 것 같이 그 믿음으로 찾아가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우리 설교자들의 성육신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결국은 승리로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현실적으로는 고통스럽습니다. 그 한계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자리로 찾아감으로서 성도들은 절망과 자책, 혼란, 의심, 불안, 공포로 규정되는 지금의 신앙 현실이 아직 보답, 보상되지는 않고 현재 처해있는 현실과 단절되어 있는 부활의 결과로 반전된다는 것을 설교자에게서 봅니다. 그런 현실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으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경험은 우리를 분명히 넘어뜨리고 있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만들지만 약속된 부활의 승리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환란은 현실이고 약속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 둘이 설교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그것이 묶여 있듯이 설교자 안에 그것이 묶여 있습니다. 그가 낙심하지만 도망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극복했고 해결했기 때문에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자리에서 아직 약속을 믿음을 설교하는 것에서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그 모순된 불연속인 두 현실과 약속을 묶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보다 큰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능력이나 증거를 제시하는 것보다 큽니다. 설교자라는 한 육체를, 한 인격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이 일을 묶어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3. 설교자 : 기독교의 신비를 증거 하는 자

이런 이해 속에서 설교자의 책임이 새삼스럽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식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는가 하는 것이 제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과정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 신비를 풀어야 됩니다. 원래 신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른 그의 아들이 영광의 자리로 가는 과정이 왜 환란이어야 하며, 왜 실패요, 죽임이어야 하는가를 풀어내어야 합니다. 여기에 설교자들의 중요한 이해와 성경적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고난과 영광의 불연속성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연속성을 가짐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어떻게 죽음에의 위협과 절망으로의 자책이 영광을 이루는지 증거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1) 신비의 증거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설교 하고나면 누구나 느끼는 것은 창피해서 제주도로 도망가 버리고 싶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창피를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똑같이 포기하고 싶은 자리까지 보냄을 받습니다. 목사인 내가 설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하루에도 골백번 나오는 자리로 보냄을 받습니다. 여러분 모든 현실을 사는 인생들이 겪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인생은 지지고 볶고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고난 속에 우리를 몰아넣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필요하긴 한 거야? 소용이 있긴 있는 거야? 하나님이 내 사정을 알긴 아는 거야? 관두지, . 이만큼 속았으면 됐지. 그만하지. 죽는 게 낫지. 성도들의 이러한 현실과 동일한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 목사가 대표로 서서, 그 고난과 고통을 감당치 못하는 비명과 절규 속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끝을 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늘 반대한 것이 아니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금같이 나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셔야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못 견디겠습니다. 제 생일을 달력에서 빼 주십시오. 거기에 바로 욥기의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 믿음으로 시작된 은혜로 부름을 받은 자의 궁극적 승리를 가진 하나님과 우리의 현실사이를 묶는 신비가 있습니다. 둘이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데 어떻게 영광이 결실될 것이란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반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모든 것은 그래서 부끄럽고 막막하고 의심스럽고 처절한 현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모든 고난을 감수함으로, 그 고난으로 피해를 입음으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생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 육체가 아니며 우리가 받는 보상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핍박을 받고 결박을 받고 망해가고 고난 속에 있는 종을 통하여 신자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설교자는 그 존재로 그 소명으로 이미 시작하는 사역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눈물과 아우성을 분노로 발산하지 않고 영광으로 이해하는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불연속의 고통을 예수 안에서 부활로 연결하는 실존이 되는 것입니다.

 

5) 영광으로 가는 길의 증거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교인들에게, “내가 살지 죽을지 모른다. 나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히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일뿐이다. 사실 죽어서 그리스도와 살게 되면 그것이 더 좋다. 그러나 너희를 위하여 내가 살겠다.”고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데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립보서 1:20-26)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있고, 살아서 나올지 죽어서 나올지 모르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것이므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져보면 그는 죽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에 들어가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하는 이유는 그가 살아 있는 것이 빌립보 교회에게 유익하기 때문인데 어떤 의미에서 유익하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은 고난의 길을 사도 바울이 걸음으로써 그 고난과 환난이 궁극적 실패로 가는 길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자신은 고난의 인생을 계속할 마음이 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내가 있으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그 도움이란 고난을 면하고, 마음이 평안해지고의 도움이 아니라 이 고난의 길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바울쯤 되는 사람이 그 고난의 길을 감으로써 성도들에게 보여주어 믿음의 담력을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편안히 지내는 것보다, 살아서 고난 받기를 택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고백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보상이 없는 고난의 길을 너희를 위하여 계속 걷겠다. 그리하여 현실의 고난이 끝이 아니고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진실이고 실제라는 것, 곧 그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증거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내가 감수하는 것으로 한 육체 속에 묶여 있는 이 둘, 곧 고난과 영광을 묶는 작업을 너희에게 증거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는 일을 고난으로 내가 고난을 감수함으로 감당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 위대함이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 결과로 끌어안았느냐는 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생으로 되살려 놓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사망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으로 뒤집기 위하여 성육신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끌어안을 수 있는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모든 기독교 신앙인이 갖는 예수를 믿는다는 동일한 고백을 설교자가 어디로 묶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현실 속에서 절망하고 낙심하여 내 인생과 믿음 생활은 영광으로 가는 것과는 다르고 불연속이고 실패라고 느끼는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필수 조건입니다. 설교는 행하기 이전에, 선포하기 이전에, 설명하기 이전에, 자기가 반전시킬 청중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거기에 모든 설교자들이 괴로워하고 오해하는 이 문제가 있습니다. 왜 더 완벽한 믿음과 능력을 주시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설교자는 마법의 지팡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기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뒤집기 위해서 그들을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자리까지 보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선교여행이나 심방을 가듯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동일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청중의 삶과 현실을 모르면 설교는 뒤집을 전제 조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울어야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너무 거룩하고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여러분이 죄인인 것 같이, 아니 죄인으로 울어야 합니다. 설교할 자격이 없고 오늘 하루를 버틸 힘이 없는 생활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렇게 능력이 없단 말인가로 우는 자만 강단에 올라설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나도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모든 설교를 성립케 하는 유일한 시작입니다. 이 조건이 없으면 그 설교는 거짓말입니다. 넉넉해서 하는 설교는 없습니다. 넉넉함은 예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쫓아오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괜찮다. 괜찮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절망은 하나님의 필요와 만족의 필수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

        지명교회카페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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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기독교 신비주의

 

http://www.ligonier.org/learn/articles/mystic/

by 피터 릴백(Peter Lillback)

 

 

14세기는 신비주의가 만개한 시대였다. 당시의 신비주의는 오늘날까지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운동이다. 신비주의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개인적이고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별한 정신적 체험과 상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신비주의는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는 않다. 전세계 철학과 종교들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술가인 위디오니우스(Pseudo-Dionysius) 등의 신플라톤 철학과 8세기 위디오니우스의 저술들을 번역한 스콜라 철학자 존 스코투스(John Scotus)에게 영향을 받았다.

14세기에는 신비주의 도미니크파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hart),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 등이 활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신비주의 저서인 [독일신학_Theologica Germanica]이 어느 정도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신비주의자인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t Groote)는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를 세웠는데, 그 단체가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신비주의자 중에는 여성인 노위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있으며, 동시대 여성 신비주의자는 시에나의 캐더린(Catherline of Sien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등이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원인

교회사의 다른 이면에는 마술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징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이유로 그것은 매우 의심쩍고 비정통적인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출현했다. 금욕주의, 성례적 미신주의,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도 이에 포함된다.

금욕주의는 급진적으로 물리세계를 거부하는 사상으로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금욕주의는 신플라톤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성례적 미신주의는 그레코-로만 신비종교들의 영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미트라와 이시스를 섬기는 사교가 이에 해당한다. 교회는 이 미신주의가 특별한 의식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특징이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 이 미신주의의 특징은 성례, 순교자의 성물, 교회의 영웅들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경을 4중으로 주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적 시각 대신, 성경은 비밀스럽고 형이상학적이며, 종말론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는 지식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여 의식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욕망은 무엇을 결과했는가?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을 맥락에서 벗어난 상태로 읽으면, 지나친 영적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변화산상의 변형사건(17:1-13), 바울의 삼층천 경험에 대한 묘사(고전 12:2),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부지불식간 성경적 기독교신앙을 비기독교신앙, 이교의 신비적 체험과 철학 등에 혼합시키게 된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또다른 원인을 언급할 때, 우리는 중세적 맥락도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페스트의 유행과 높은 사망률, 이단의 박혜, 십자군전쟁, 부유한 교회의 상태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 신비주의는 위협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외부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무시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과 기술

수도원운동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을 떠나 수도원생활을 했는데, 14세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수도원운동이 확산되자, 수도원에서는 수행자들에게 신비체험을 증진시키는 명상과 관련한 경건 계획표를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금식과 순례를 훈련으로 삼았으며, 좀더 급진적인 금욕주의 형태로는 극단적 금식, 수면금지, 자기 태형 등이 있다. 종교적 황홀경에 대한 신비주의자들의 탐구는 정신의 수위성(秀偉性)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반복 기도를 통해 정신을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려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활용하였다. 첫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부정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역설(力說)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두 방식 모두 본질적으로 사색적이었다. 어떤 방식도 성경적 계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내적이고도 비이성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했다. 그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행위는 종종 가설적이었고, 성경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자들

14세기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하여 각자 자신들만의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동방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로 기도를 통한 내적 침잠을 지지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금언(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을 활용하였다. 그는 이 금언 속에는 범신론과는 다르지만 인간 신성화의 형태가 담겨있다고 주장했다. 팔라마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신 반면, 인간은 신적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자세로 신성한 문장을 암송하는 등의 여러 신비주의적 의식을 발전시켰다.

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지식관에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의 불꽃_spark of the soul” 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다. 그 불꽃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게 하여 영혼 속에 하나님을 출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이것은 오직 자아와 이 세상을 포기할 때만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생명과 그 신적 본성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영혼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여 신이 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이 지식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순전한 신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축복의 이상_beatific vision”은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영원 속에서만이 영구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교황은 나중에 에크하르트의 범신론적 주장을 비판하였다.

 

중세신비주의의 유산

신비주의 신학은 중세기를 끝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 교회에서도 꾸준히 재등장하였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오시그의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 von Ossig), 일부 영국 청교도들이 신비주의적 주장을 했다.

또한, 다양한 개신교 전통 속에도 신비주의가 들어있거나, 신비체험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주의, 퀘이커, 오순절운동, 은사주의운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는 종교적 체험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같은 양상을 주도한 이들로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등이 있다. 이들 모두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극복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비체험 등에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정당한 계시 진리이며, 누군가가 어떤 개인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의심해 봐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당신을 예배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성령과 말씀 간의 철저한 연결성, 말씀과 성례의 성경적 결합, 겸손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는 범신론이나 인신공양적 미신주의 등등의 여러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성경은 거짓 가르침이 우리 인간의 타락한 품성에서 나타나기 태문에 영을 시험하라고 가르친다. 구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 선택, 사상, 이상 등등이 구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와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좇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 특별히 종교개혁적 의미의 신앙의 회복은 무절제한 신비체험을 거부하고,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경적 계시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내적 충동성을 우선적인 영적 안내자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묵상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행하시고 말씀으로 기록하신 특별한 이적들을 상고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분을 말해주는 성경을 알아야 하고(5:46),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예배와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지상명령을 기억하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10:27). 또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뿌리를 두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를 내적으로 체험한 마음과 감정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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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억대를 호가하는 분재들!


분재계 거목 최병철, 신안군에 30억상당 분재 기증

명품 분재
(신안=연합뉴스) '분재계 거목'으로 불리는 최병철 박사가 신안군에 기증할 명품 분재. 최 박사는 한평생 가꾼 30억원 상당의 명품 분재 200여점을 기증한다. <<관련기사 참고>>   


 

대전에 사는 김영삼씨가 20년간 키운 '곰솔나무' 분재입니다 

 

이게 바로 1억원이 넘는 분재입니다
일본 사람이 1억원을 주겠다며 팔라고 했는데,
김씨가 거절했다는군요.

2013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장에 2억원짜리 곰솔분재

이들 분재는 한국분재조합원들의 소장품들로 억대 분재이다.  

500년생 적송 10억대의 천년송 입니다 

일본 분재협회 회장이 15억에 팔라는 것도 거절한 상수 허부랜드에 있는 명품소나무

주목 자태입니다

주목의 전설 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연 와....10억대 주목

일산 꽃전시회 출품되였던 주목나부 분재

수억대의 주목나무

주목나무 분재

억대의 춘란 감상 하세요...

▲2005년 ‘벽담’의 단아한 자태▲

서울 강남 아파트 30평형 한 채 값이 10억원을 훌쩍 뛰어 넘었지만강남 집값 못지않게 비싼 것이 있다. 바로‘난(蘭)’이다. 우리나라 에서 가장 고가의 난은 촉당 1억5천 만원(최상품 기준)을 호가하는 엽예품‘벽담’이다.

▲한국난문화협회 류중광이사장이 소장한 ‘벽담’

- 호가 6억원(촉당 1억5천 만원▲

‘벽담’은 잎 가운데 부분이 아예 노랗게 변이 돼 희귀종 중에서도 희귀종에 속한다. 이 난은 일본에 3촉, 국내에 7촉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벽담을 소장한 사람은 한국난문화협회 류중광(57) 이사장이 유일하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류 이사장의‘난실’은
 여느 대기업의
‘비밀금고’ 못지않게 보안시설이 잘 돼 있다. 류 이사장이 소장한 난 3000여 분은 시가 200여 억원에 이른다

류 이사장은 일년에 난을 팔아 10억 여원의 소득을 올린다. 여느 전문직 종사자 못지않은 고소득이다. 류 이사장의 해마다 8억~10억원 어치 난을 판 후 이를 세무서 에 신고한다.

우리나라의 난 애호가는 100여 만명.
난 업계 종사자에 따르면 난 애호가 중 촉당 수 백 만원에서 수천만원대의 난을 구입하는 수요는 3만 여명 에 이른다.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는 고가의 난을 누가 살까? ' 하고 의구심이 들지만 고가의 난 일수록 찾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억대의 한국 춘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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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곱게 화장한 얼굴이 아니라 언제나 인자하게 바라보는 소박한 어머니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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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은 기다란 손톱에 메니큐어 바른 고운손이 아니라 따스한 손으로 정성스럽게 보살핌을 주는 어머니의 거치른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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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사랑을 나눌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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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검소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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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 사랑이 없는 곳에는 웃음과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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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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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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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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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76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청지기 사명' (십일조) / R.C. Sproul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1947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야구 시합을 보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다. 나는 삼촌과 손을 잡고 포비즈 경기장 관람석의 우리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경기장 한쪽에서 선수들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이비 덩굴 잎이 덥힌 담장과 관람석 중앙의 기념탑 뒤쪽에 있는 오래된 철문과 베이브 루스가 그의 마지막 홈런을 날린 우익수 쪽 관람석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철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삼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갑을 조심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즉각 그 지시를 따랐다. 자리에 앉은 다음 나는 "이제 지갑에서 손을 떼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삼촌은 그래도 좋다고 하셨다. 왜 갑자기 그런 주의를 주셨는지를 묻자 삼촌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기 둥근 목 칼라가 달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렴. 신부란다. 신부나 목사가 가까이 올 때면 언제나 지갑을 조심해야 한단다. 그 사람들은 모두 돈을 뺴앗아 가려고 하거든."

내 첫 번째 야구 경기 관람은 십일조와 자선금에 대한 냉소적인 자세를 처음 대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삼촌과는 다르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치셨다. 매주 나는 내 용돈의 10%를 헌금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오래 전부터 그렇게 배웠고 또한 계속해서 그렇게 해왔다.

갈수록 믿지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나 헌금에 대해 거센 비난을 퍼붓는다. TV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십일조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청지기가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매주 주일에 헌금을 한다. 헌금을 하기 바로 직전에 나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십일조와 헌금으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헌금이 예배의 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구약 성경의 십일조]
 

성경에 가장 먼저 기록된 헌물은 가인과 아벨이 드린 것으로 창세기 4장에서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3-5)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보다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 하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린 반면, 아벨은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셨다. 아벨은 양을 친 반면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농작물을 제물로 드렸다. 성경 그 어디에도 양을 치는 목동이 땅을 경작하는 농부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서 11장 4절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하신 것은 그가 드린 제물의 방법 때문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믿음없는 행동은 동생에 대한 질투로, 분노로 표출되었다.

나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다. 그는 그의 제물을 믿음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진수이다.

제사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핵심으로 이어진다. 구약 성경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시하면서 희생 제사 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약의 회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번제단'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구약 시대의 번제단 같은 것은 없다. 동물의 피로 희생 제사를 드리던 시대는 끝이 났다.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의 막을 내리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히9:24-10:3)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대속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생의 원리까지 제거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예배와 감사를 통해 우리의 시간과 힘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성경적인 헌금은 전반적인 청지기 사명의 일부이다.

청지기 사명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창세기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특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되심을 찬양하는 예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했던 시편을 통해 창조를 찬미하고 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리 '소유물'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유물들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관리할 것을 기대하신다.

성경에 '청지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경제'(economy)라는 단어가 파생되어 나온 헬라어 단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다. '집'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오이코스'(oikos)와 '법'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노모스'(nomos)가 합성된 이 단어는 직역하면 '가정 법' 또는 '가정 규정'이란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의 청지기는 집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주인이 집안 일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정의 물자를 배분할 책임이 있었다. 청지기의 일은 찬장에 음식을 가득 채워 놓고, 돈을 관리하고, 잔디를 정리하고, 집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명하신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세상을 관리할 책임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동산을 파손하고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꾸고 경작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낭비되거나 상하지 않게 돌봐야 했다.
 

나는 리고니어 성경연구원(Ligonier ministries)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 일에는 모든 최고 경영 관리자가 해야 하는 자원의 배치라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사역을 하지만, 우리에게는 관리해야 할 건물과 규정이 있고, 사람들과 컴퓨터와 사무실 집기와 물자가 있고 또 돈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 하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 우리의 시간과 인력과 돈을 낭비하고 우리의 설비나 장비를 잘못 사용한다면 우리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불충한 청지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어떤 자원을 다 써버리면 다른 일에는 그 자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100불이 있는데 그 돈을 가지고 모두 옷을 샀다면, 더 이상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비록 억만장자라 할지라도 모두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일한다. 어떤 자원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은 우리가 어떤 청지기인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 동산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역과 가정 생활과 개인적인 일 등,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다. 이 모든 일들은 자원을 관리하고 배치하는 일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이다. 그 젊은이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유산을 받자마자 재산을 늘리거나 투자하려 한 것이 아니라(종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술과 여자와 여흥에 다 허비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는 결국 돼지들이 먹는 열매를 먹으며 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탕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삶을 낭비한 것이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청지기 사명을 저버린 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지구상에 두셨다. 삶을 낭비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이 탕자가 새로운 삶을 찾고 다시 제 정신을 차리게 될 때까지 그의 삶이었다.
 

그는 아들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종으로 여겨질 것을 각오하고 회개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기쁘게 맞아 주었고, 그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것은 모든 탕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분은 은이나 금이나 그 어떤 보화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는 그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다(고후4:7). 이 소중한 보화를 그저 평범한 질그릇에 담아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청지기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의 핵심에는 십일조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십일조가 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이 신약 시대에 와서도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역할을 살펴보자. 십일조라는 말은 '십분의 일'이란 뜻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해마다 자기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었다. 십일조의 이점은 계급 투쟁과 질투로 인한 책략을 막아 버리는 데 있다. 어느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른 그룹의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불공평을 막아 준다. 그리고 어떤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부과하게 되면 경제가 정치화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똑같은 비율로 십일조를 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일 년의 10,000불을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0불이다. 그리고 일 년에 1,000,000불을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000불이다. 부자가 더 많은 돈을 내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과 같은 비율이 적용되었다.

구약 성경을 보다 보면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최근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4%만이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평균 수입의 2%만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사가 정확하고 십일조에 대한 원리가 아직 유효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96%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교회와 목회자와 기독교 교육에 속한 것을 도적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라기서 안에서 제기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놀라며 움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것을 훔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반응했다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들에게 신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십일조를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도록 레위 족속을 따로 구별하셨다. 레위 족속은 국가의 영적, 교육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다른 족속들로부터 구별되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상품과 용역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장 경제를 이해하고 계셨을 것이다.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체, 의사, 변호사, 그리고 최고의 수입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시장 경제 속에서는 그들의 용역이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교사와 목회자들의 용역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에서 가장 수입이 적은 전문가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학교 교사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십일조를 제정하셨다.


목회자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목회자의 보수에 반영된다.

목사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면 목사의 보수가 적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역자들이 전적으로 사역에 헌신하면서 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해 주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헌신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재정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만일 100불을 가지고 사역한다면 우리의 사역은 그 돈의 액수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돈을 낭비하고 10불 정도만을 사역에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문적인 경영 능력이 있고 청지기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해도 100불을 가지고 110불만큼의 사역을 할 수는 없다.

기독교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그 헌금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사역은 제한을 받는다.



[신약 성경의 십일조]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유물로 전해진 기독교 초기의 고서를 보면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십일조를 계속 했다.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도들의 가르침'이라 불리는 '디다케'(Didache)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후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도 십일조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기독교 교회 역사의 초기 문서에서 우리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계속해서 십일조를 실천했음을 볼 수 있다. 또 디다케에는 "기부를 하기 전에 손에 땀이 나게 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중하게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비유가 아닌가? "기부하기 전에 손에 땀이 나게 하라." 이것은 돈을 주지 않으려고 너무 꽉 움켜져서 손에 땀이 나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디에 기부할 것인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후원하는 문제와 관련해 논쟁의 여지를 야기시킨다. 말라기 3장 10절에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구약 성경에서 땅의 소산물이나 동물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관리하는 중앙 창고로 가져갔다. 모든 백성의 십일조는 그곳에 모았다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레위인들이 다시 분배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도 중앙 창고가 있어야 하며 모든 십일조를 그곳에 모았다가 다시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 하나의 중앙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 각 도시와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중앙 성소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중앙 창고로 모으는 것 역시 애매한 일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원리를 기초로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은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우리가 번 돈을 지금 다 사용하기보다는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본이 그 부를 늘려가면서 우리를 위해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투자는 영원한 보상이 따르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그 보상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자녀, 그리고 손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하나님의 일에 투자해야 한다. 이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신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투자한다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십일조를 우선시하는 것을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것이 좋다. 아이에게 용돈으로 1불을 준다면 그 중 10센트는 주일날 헌금 주머니 속에 넣도록 가르치고 아이가 어려서부터 이 원리를 배울 수 있게 하라. 정부가 원천징수하는 세금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세금을 공제한 금액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정부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알아보려면 지출 명세서를 살펴보라. 당신의 보화가 있는 곳에 당신의 마음도 있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된다.


성경 읽기, 기도, 예배, 섬김, 청지기 사명 이 다섯 가지는 생산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훈련해야 할 핵심 요소들이다. 이 다섯 가지는 교회의 건강과 우리의 영적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다섯 가지를 신실하게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R.C. Sproul의 '당신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발췌 (120-14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글/ 한아름 님

영적 교만

 

조나단 에드워즈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단의 손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Edwards)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편만하면서도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이 문을 통해 사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심히 바라는 신자의 마음에 들어 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는 이 통로를 통해 마음을 검게 하며,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 손잡이를 이용해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끔 만든다. 이 질병이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질병 역시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

 

교만은 어떤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만함은 자신을 너무나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 잣대가 이미 생각의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교만보다 더 자가당착에 빠지고 찾아내기 힘든 것은 없다. 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린다는 것이다.

 

교만함은 많은 모양과 형태로 나타나 양파껍질처럼 여러층을 마음 속에 이룬다 - 한겹을 벗기면 바로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을 가장 최선의 노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마음의 탐사자(성령)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영적교만은 그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직관적인 판단으로는 구별해 내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열매와 결과를 보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열매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에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매우 주의 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민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궁구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위선자의 불행한 망상과 죽은 경건함의 비꼬는 태도이며, 수많은 신자들의 거룩함에 반대한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이와 달라서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하거나, 그들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얘기한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 은혜안에서 진보가 적다고 헐뜯으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자들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겸손한 자들은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비상한 발견을 하였을 때에라도 자신의 죄악됨과 천함에 대해 압도되어 있다.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타인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하고 표정과 행동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비록 자신의 세상에서의 의무에 충실할 것이지만 홀로 천국을 향해 걸어 간다. 온 세상이 그를 저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 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의 나중이 되려하며, 양보하고,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때,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자신에게 표해야 할 마땅한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갖는다.

 

근본주의자 성경이 절대 틀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그대로 재림하실 것을 믿는 사람을 아십니까?

  

교황 프란치스코가 전 세계를 향해 그들을 과격분자로 선고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평화의사도를 자처하는 지도자의 굉장히 충격적이고 위험한 발언입니다.

 

 

       

 

 

 교황이 받은 질문은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해 당신이 가지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답변입니다.


 (교황)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는 않지만 폭력

           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다."


 

그가 "근본주의자들은 폭력배들이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간단하게 말해


"국가들간의 평화와 종교들의 연합을 위해서 근본주의자들을 처단해야 한다.

평화와 연합은 근본주의자들이 존재할 때는 불가능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절대 틀리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그는 근본주의자입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참 백성을 처단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 이것은 근본주의에요. 근본주의는 모든 세게종교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환호~)

 

천주교는 환영받고 말씀을 따르는 우리는 핍박과 고난을 받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시기가 눈 앞에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 자기의 정책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속임수가 형통하게 하고 자기 마음속에서

자신을 높이며 평화를 빌미로 많은 사람을 멸할 것이요,또 그가 일어나서 통치자들의

통치자를 대적할 터이나 그가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무너지리라.  (단 8 :25)

 


백마 탄자와 흰 말의 비밀

요한계시록 권위자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해석 해부 4-1강(계 6장 1절~2절)

 

요한계시록 6, 7, 8장 개요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 번호키를 누른다. 집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는 단 하나다. 그 번호를 눌러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번 잘못 누르면 ‘락’이 걸린다. 매우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열 때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바른 열쇠가 있다. 그리고 바른 코드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이라는 열쇠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 돌리는 예배, 즉 찬양과 경배’의 코드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예배가 요한계시록을 여는 바른 열쇠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게 된다. 반면 어린양을 따르지 않고 배척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인·나팔·대접에 이르는 가혹한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

   

▲ 강연하는 이필찬 교수

 

 

전문은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02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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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친절의 결과

미국 텍사스주 그랜드 프레이어리에 찰스 하비라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매우 조급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인터뷰를 하러 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약 10분 정도 늦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비의 눈에 한 중년 부인이 자동차 타이어가 터져서 차를 길가에 대어 놓고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비는 아무리 바쁘다 해도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차를 그 뒤에 세우고 터진 타이어를 갈아 끼워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인터뷰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에 이제 좋은 직장을 얻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회사에 가서 입사 서류를 들고 인사과장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비는 인사과장과 짧은 면접 후에 즉시 좋은 자리에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 회사의 인사과장은 바로 자동차 타이어가 터져서 길가에 서 있었던 그 중년 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작은 일에서부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충성스럽게 돌보는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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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 하나님

대장쟁이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예수님을 내어주셨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몸을 드린 속죄제사를 하나님이 만족하게 받지 아니하셨다면
예수님은 결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으며
우리는 여전히 진노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드린 말씀이지만 다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 하는지.....

죄인 된 인간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죽지 않을 길이 없는 것이 죄인 된 인간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죄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살기 위하여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죄 값을 누군가가 치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죄의 값을 치러준다는 것은 대신하여 죽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 인류를 다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누군가가 대신 죽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모든 인류의 대속자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속죄제물로 짐승을 잡았지만 짐승을 아무리 많이 잡은들 사람 하나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 같은 영적존재도 안 됩니다.
그런 존재는 죽어줄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만으로만 대신할 수 있지 다른 존재로는 대신이 안 됩니다.

둘째는 그 대신 벌 받아 죽어줄 사람 자신이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자기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을 대신하여 죽어줄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설혹 죄 없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은 한 사람만을 대신해 죽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를 위해 대신 벌 받고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온 천하인간보다 더 가치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신 죽어주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어떤 존재라도 천하의 모든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대신 벌 받아 죽어주신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뿐 아니라 우주만유보다 더 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최초의 가장 고귀한 피조물, 미가앨 천사장이라면) 예수님의 속죄제사는 온 인류를 구할 수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앞절 24절을 보십시오.
(롬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데 익숙해 있습니다만,
사실은 하나님이나 주님이나 다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4절을 다시 읽는다면 “곧 예수 우리 하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신비스럽고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
(롬4:24-25)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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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학교라는 특수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예언자)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좀 더 좁혀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란 사각지대()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벨리알의 사람이냐, 둘 중 하나, 영생의 길이냐, 영벌의 길이냐로 갈라지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검증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예언(豫言)과 동음어인 예언(預言) 이 두 단어의 뜻이 모두: ①앞에 올 일을 미리 말함 ②또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의지(意志)를 사람들에게 전(傳)하는 일 ③또는, 그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한자로 보면 예언(豫言)이 아니라 동일한 동음인 ‘預言’ (예언)을 뜻한다. 또 영어 'predict’ (prediction)이라는 단어와 'prophesy'(prophecy)라는 단어는 같은 뜻 같으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predict’란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의 단순 예언(預言)을 뜻하며, 'prophesy’란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서의 예언 (預言), 신탁(神託)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말씀 언(言)자에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 말이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겼다는 뜻이다.

(預言)자의 개념:
하나님의 선견자(先見者) ‘로에’ 와 대변자 (代辯者), ‘나비’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대변자’, 선견자란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말은 그 자신들의 영(spirit)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Holy Spirit)에 의해 말하게 한 대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9: 9, 렘 23: 16, 겔 13: 2절 참조).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 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대언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보혜사 성령님께로부터 성도가 신앙생활을 더 잘 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써,  때로는 예언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레마로 주시기도 한다. 곧 모든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직통계시적 형태를 취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우리(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활이시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있어야만 한다. (27:22-25)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몇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예수 그리스도), 혹은 기록(문서)계시(성경),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문서 계시인 성경 말씀 역시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1:19-20절 참조)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 혹은 문서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22:18-19절 참조),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기록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돼야 한다. 성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 선지(예언자)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의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권면 하며 안위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서 대언의 영으로 증거(예언)할 수 있으나, 반드시 교회와 사람(개인)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고전14:3, 계시록19:10절 참조.) 사업이 잘될는지, 자녀가 학교에 입학 가능한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어떤지...등등, 이런 류의 점치는 형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말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 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32절 말씀 )”.

d) (다 불과) 두 세사람이 증인, 검증이 되어야 한다.

(고전14:27)

 

d)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3절하반절)".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
)

f)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1:41-45
)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결론적으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악한 영에 미혹 받지 말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잘 인도되고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것 없고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온전하신 말씀 안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겸손하게 주와 동행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1-2)

 

아멘넷 별똥별 칼럼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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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면적의
약 5배인 캘리포니아는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본토에서
텍사스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state입니다.

 

캘리포니아의 크기가 넓은 만큼
사막, 온대, 아열대, 지중해성 등의 다양한 기후와
바다, 섬, 산과 산맥, 계곡, 강 등 천혜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곳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산을 가지고 있는 바
곳곳에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웅장한 폭포들이 자리잡고 있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요세미티의 나무들과 폭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요세미티의 폭포들은
봄의 우렁차고 웅장한 모습과 달리
여름이 되면 수량이 쥐꼬리처럼 줄어들어 무척 초라해집니다.

 

하지만 여름에도
수량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시원하고 멋진 폭포가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릴 Burney Falls 입니다. 

 

※ 아래의 모든 사진은

삼각대가 없어서 손으로 들고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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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는 이름이 약간 긴

McArthur-Burney Falls Memorial State Park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줄여서 MBFMSP 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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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가기엔

상당히 먼 거리이기 때문에

Mt. Shasta나 Lassen 화산 국립공원,

 

혹은

레익 타호에 갈 때

곁들어 방문하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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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FMSP는

그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버니폭포가 중심이 되는 주립공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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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찼던 요세미티의 폭포도

여름철이 되면 수량이 형편없이 줄어드는데

 

왜 버니 폭포는

여름철에도 수량이 줄지 않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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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의 발원지는

폭포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진

버니산(Mt. Burney/7,863ft)에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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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산 주변은

오래 전 화산활동에 의해

주변의 지대가 제주도와 같은

현무암(basalt)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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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동안

버니산에 높이 쌓였던 눈은

봄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데

 

눈이 녹은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에서 강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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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MBFMSP 일대엔

지하에 강이 흐르는 대수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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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산에 눈이 녹은 물과

대수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폭포의 상류 약 0.7마일에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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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산의

눈녹은 물이 흐르는

폭포 상류의 Burney Creek은

여름철이 되면 물이 말라 버리지만

 

대수층에서는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내기 때문에

버니 폭포는 여름에도 수량의 감소없이 줄기차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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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의 높이는

약 129ft로 알려져 있으며

넓이는 약 250ft(76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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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에서

하루에 흘러나오는 물의 양은

379 million 리터(약 1억 갤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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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버니 creek을 거쳐 Lake Britton로 간 다음

 

다시 Pit River를 통해

태평양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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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한 버니 크릭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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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 Britto의 모습...

 

버니 크릭은 Lake Britton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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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의 아래쪽

버니 크릭에서 낚시하는 이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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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폭포 주변에는

Burney Creek Trail, Falls Loop Trail,

 

PSEA Trail,

그리고 PCT(Pacific Crest Trail) 등

다양한 Trail 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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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blog.koreadaily.com/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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