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몸을 떠나는 영혼을 찍다

Scientist Photographs The Soul Leaving The Body
과학자가 몸을 떠나는 영혼을 찍다.​

The timing of astral disembodiment in which the spirit leaves the body has been captured by Russian scientist Konstantin Korotkov, who photographed a person at the moment of his death with a bioelectrographic camera.

영혼이 몸을 떠나는 영적육체이탈의 순간에 죽음의 찰나에 있는 사람을 "생체전기사진카메라"로 촬영하는  러시아 과학자 Konstantin Korotkov 에 의해 포착 되었다.

The image taken using the gas discharge visualization method, an advanced technique of Kirlian photography shows in blue the life force of the person leaving the body gradually.

1240625_10151880132439844_1111935693_n

An interesting aspect of  Electrophotonic Imaging (EPI) applications is the research into consciousness processes. Many years of experimentation have made it possible to identify bioelectrographic correlates of 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 (ASC) These are particular states, which a person enters during meditation, mental training, religious ecstasy, or when under the influence of drugs, psychedelics or anesthesia. For many years we have been measuring Russian extrasensories, Candamblier priests in Brazil, participants of the Ayahuasca ceremony in Peru,  Chinese Qi-gong masters, and healers in Germany, the USA, and Slovenia. And almost all of these observations we obtain signs characteristic of ASC. Similar results, using the most diverse devices and methods, were obtained in the laboratories of different countries. This shows that the processes of consciousness are apparent on the physiological processes measured by the EPI method.

▼ Scientist photographed soul leaving body, human aura & energetic fields [1/2]


http://youtu.be/auoJV4re3nU

▼ Scientist photographed soul leaving body, human aura & energetic fields [2/2]  


http://youtu.be/RmE5Cl2odBQ

▼ interview konstantin korotkov  


http://youtu.be/fZczmTkfqKY

▼ Mind over Matter: Secrets of human aura revealed by Russian scientists 


http://youtu.be/B6NIUV24vcQ

▼관련기사 출처
http://worldtruth.tv/scientist-photographs-the-soul-leaving-the-body/





[앵커]

최근 한국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안상홍증인회 즉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회와 구원파 박옥수 측이 CBS의 비판보도와 관련해 거액의 민사 소송을 각각 제기했습니다.

이단 세력과 맞서 싸우는 CBS를 위해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최경배 기잡니다

[기자]

한국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이단 세력들이 CBS의 비판 보도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거액의 민사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안상홍증인회, 즉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회는 최근 남부지방법원에 CBS 보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면서 정정 반론보도와 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제출했습니다.

하나님의교회측이 문제를 삼은 것은 지난 4월 28일 방송된 뉴스 보도로, 세월호 참사 배후에 구원파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이단 피해자들이 연합해서 개최한 집회 소식을 전한 기사 내용입니다.

이날 집회에는 하나님의교회를 비롯해 신천지와 구원파 등 이단 사이비 피해자들이 참석해 이단 사이비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단속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고
CBS는 집회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교회측은 이단 피해자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며 이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하나님의교회측은 이번 소송 외에도 대학가를 파고드는 이단 세력의 문제점을 비판한
CBS 보도에 대해 정정 반론보도와 7억원의 손해배상을 언론중재위에 신청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중재위에선 조정이 성립되지 않아 하나님의교회측이 CBS를 상대로 추가 소송을 제기해 올 가능성이 큽니다.

구원파 박옥수측인 기쁜소식선교회도 CBS의 비판 보도에 대해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구원파 박옥수 씨가 신도들에게 특정 식품을 암과 에이즈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처럼
홍보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의 3년 전 뉴스 보도를 문제 삼은 겁니다.

이처럼 이단 세력의 무차별적인 소송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보호라는 막중한 사명을 지닌 CBS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적극 대응할 방침입니다.

(최인 상무 / CBS 선교TV본부장)
“한국의 대표적 이단 세력에 속하는 구원파 박옥수측과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측에서 소송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CBS는 이단 세력과 타협하거나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대처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CBS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기도해주시고 이길 수 있도록 협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단 세력이 CBS를 상대로 거액의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 이단 세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언론의 비판 보도를 잠재우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CBS는 어떤 이단 사이비 세력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 교회를 보호하고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 담대히 이단 세력과의 맞설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CBS뉴스 최경배 입니다.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USA아멘넷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 최덕성 교수

 


교황 프란치스코.jpg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장 프란치스코



[특별기고]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①


로마가톨릭교회의 ‘다름’은 과연 용인할 만한 수준인가?


크리스천투데이, 2014.07.31.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3986



기독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성격과 생김새가 다르듯, 교회와 기독인의 신앙·표현·실천·관심은 조금씩 다르다. 자신과 다른 견해와 고백을 가진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의 넓이와 깊이가 필요하다. 삶의 형태 차이를 가진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활동은 언제나 절실하다.


기독인의 결함 가운데 하나는 같음보다 다름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동질성보다 차별성을 부각시켜 타인이나 타 집단과 대립각을 세우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본질과 기본에 충실하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기 위해 애씀이 마땅하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가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경우에는, 같음보다 다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름에 이르게 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가진 독특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가동되었고, 사실상 이들에 의해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좌 밑으로 ‘귀정(歸正)’하는 형태의 교회일치운동이 추구돼 왔다. 개신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의 가시적인 조직체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고속 행진을 해온 것이다.


최근 한국의 로마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회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교회들이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조직했다. 신앙고백 또는 교리, 곧 신앙과 가시적 조직체 곧 직제를 통일시키려는 목적으로 알려졌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은, 신자들이 서로의 교회를 교파나 교단을 바꾸는 정도로 여기는 현상을 낳고 말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하고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m Sanctam)’를 추구하자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렇듯 서로가 모두 같은 ‘기독교’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결국 같은 교회인가? 두 교회는 형제관계인가? 교파가 다른 정도인가? 개신교회 신자가 천주교회로 옮기는 것은 장로교회에서 침례교회나 감리교회로 옮겨가는 정도의 이동에 불과한가?


지난해에 모인 WCC 제10차 부산총회는 종교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선교-전도 선언서’를 선포했다. 한국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를 핵심으로 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에 지극 정성을 다했다. 대한민국 정부로 하여금 거액의 국비를 보조하게 했다.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던 세계교회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해운대에서 자본주의의 특권을 누렸다.


WCC 부산총회 뒤, 한국사회에는 대형사고가 거듭 발생해 왔다. 세월호 침몰로 꽃 같은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죽었다. 지하철 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건물 화재 사고, 자살사고, 열차 사고, 소방헬기 추락사고, 악성 언론으로 말미암은 국무총리 후보자 자진사퇴 사고 등,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재난들이 발생하고 있다.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땅에 거꾸러진 상태는 그 어떤 사고보다 더 심대하다. 대한민국은 ‘패닉(panic)’ 상태다. WCC 부산총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개신교회와 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가시적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없지 않다. 입헌군주제처럼 교황은 상징적 인물로만 존재하고, 그 조직 안에서 개신교회의 교리, 제도, 예배, 실천을 그대로 살리면 존재할 수 있다. 이 구도는 계시된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기본 진리-교리에 일치할 때만 실현 가능하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여러 비성경적 미신적 교리들을 폐기처분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현재의 교황은 종종 유별난 행동으로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성경적·역사적·이론적 근거가 없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교리들을 폐기처분한다고 선언할 용기가 있는가? 로마가톨릭교회가 역사적 기독교, 사도들의 복음에서 너무 멀리 가버렸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겠는가? 화체설, 연옥설, ‘기록되지 않은 성경’, 사제의 면죄권, 사도직 계승교리, 교황수위권, 교황무류교리, 만인보편구원주의, 종교다원주의, 계급주의 교회론, 미신적 마리아 교리 등을 폐기한다고 선언하지 않겠는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후, 개신교 진보계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를 교회로 인정했다고 좋아했다. ‘갈라져 나간 우리의 형제들’이라고 일컬으면서 개신교회를 형제로 여긴다고 기뻐했다. 김삼환 목사는 평화방송 텔레비전 문답에서 천주교회를 ‘형님’ 또는 ‘큰집’으로 일컬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7년에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종래의 교회론을 바꿀 의도가 없었고, 바꾸지도 않았다고 천명했다. “유효한 성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황과 교제하며 그에게 복속하는 주교만이 유효한 성찬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개신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라는 말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형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무류성 교리에 따르면, 위 성명은 교리·신앙·도덕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변개·취소될 수 없다.


로마가톨릭교회는 WCC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 않는다. ‘교회가 아닌 집단’과 ‘교회인 로마가톨릭교회’가 동등한 자격으로 가담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WCC 하부조직에는 회원으로 가담하여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을 이 단체에 계속해서 강화시켜 왔다. WCC의 몬트리올 보고서(1963)의 ‘전통론’ 또는 ‘대문자 T 이론’은 로마가톨릭교회를 형제 교회로 인정하고, 개신교회가 교황좌 아래로 ‘귀정’하는 길을 만들어 준 대표적 신학문서이다.


로마가톨릭교회 교황은 바티칸이라는, 지구상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제국의 황제이다. 교황 방한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NCCK 회원교회들, 특히 예장통합, 기하성, 그리고 WCC를 적극 지지했던 기독교 언론, 신학교, 대학교, 그리고 자칭 복음주의자들이 앞장서서 환영하고 싶어할 것이다.


기억하는가? 한경직 목사가 바오로 2세를 환영한 뒤 한국교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꾸준히 부흥하던 교회들의 성장이 멈췄다. 저성장 시대로 돌입했다. 반면 한국 천주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후 개신교회 신자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으로 본다.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천주교회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과 더불어 다가올 한국 개신교 교인 수 감소보다 더 걱정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회의 키를 잡고 밀 까부르듯 까불고 계신 듯하다. 쭉정이는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남게 되리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복음 진리로 무장한 신앙고백 공동체는 교황의 방한으로 더욱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최근 일본 동부지역에 몰려온 쓰나미는 핵시설을 강타하여 일본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다수의 일본인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세슘(Cesium)이라는 방사능 원소의 오염이 가져올 죽음의 그림자 때문이다. 세슘의 맹독성이 너무 강하여 열도를 무인도로 만들 수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는 같음과 다름, 곧 동일성과 구별성이 공존한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독특성이 심각한 이유는 세슘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균과 같이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기독교 또는 성경적 신앙을 추구해온 개신교회의 멸절(滅絶)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 교회를 진리의 보루가 아니라 여러 미신과 인간적인 것들의 요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진, 유럽·북미·대양주 주류 교회들의 갑작스런 퇴락과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신앙과 직제 일치를 핵심으로 하는 WCC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들은 사실상 주검으로 변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관계는 형제인가?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인가?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교황의 방한을 환영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교인들이 빠져나갈까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다. 신자들이 떠날 경우, 교회를 폐쇄하면 된다. 목사직은 의식주 해결의 수단이 아니지 않은가.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에 때맞춰, 두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 차이 몇 가지를 주제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는 제목으로, 세슘이나 AIDS 같은 맹독성으로 복음 신앙에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특징들을 논하려 한다. 만인보편구원주의(종교다원주의), 사도직 계승교리(교황 수위권), 교황 무류성, ‘기록되지 않은 성경’ 교리, 마리아 교리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 전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리움마저 행복입니다 
                   최송연
                     
그리움은
슬픈 것이라 말들 하지만
당신을 그리는 내 마음은
늘 가슴 설레는 행복입니다

선홍빛 십자가 
당신 사랑을 깨닫던 그 순간이 
내겐 너무도 소중하기에
당신 사모하는 내 마음 행복입니다

당신께로 
나아가는 머나먼 이길
고달프고 힘든 일도 잦지만
언젠가 당신과 함께일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에 그리움마저 행복입니다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을 만난 후  (0) 2014.08.30
청포도 향기  (2) 2014.08.23
수채화처럼 고운 生  (0) 2014.07.18
아플 땐 아프다...최송연  (9) 2014.07.09
소원의 항구  (0) 2014.07.05


잘못된 교리(신학)에서 잘못된 삶이 나온다

오직은혜

이글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1899 – 1981)의 글입니다. 성령이 보증하는 '진리'가 왜곡되고 부정되며 다른 거짓 것(인본주의, 영지주의, 율법주의, 번영신학, 뉴에이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혼합되어지고 대체되어지는 현대의 개신교 교회에 필요한 글인것 같아서 올립니다. 본 글은 Ken Silva 목사가 운영하는 Apprising Ministry 웹싸이트에서 퍼와서 번역한 것입니다. 싸이트의 주소는 www.Apprising.org 입니다. ================================================================================ People say, ‘Do not be negative; let us be positive; let us just preach the simple gospel’. But the Bible is full of negatives, full of warnings, ever showing us these terrible possibilities. If you find in yourself a dislike of the warnings of the Scripture and of this negative teaching, it is obvious that you have been duped by the wiles of the devil. You have not realized the situation in which you are placed. 사람들은 "우리 부정적이지말고 긍정적인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단순한 복음만을 설교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과 경고들, 일어날 나쁜 일들로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러한 성경의 경고들과 부정적인 가르침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마귀의 꾀임에 속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movements to which I am referring can be best classified and considered along the following lines. We start with Heresies within the Church, which have been caused and produced by the devil and his powers. I am not concerned to go into the detail of heresies; I am simply concerned to emphasize the fact of heresies, the fact of movements within the life of the Church that have so often led to terrible trouble and produced a state of chaos. 제가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풍조는 아래의 내용으로 잘 분류되고 검토되어 질 것입니다. 먼저 교회 안의 사탄과 그의 능력에 의해 생성된 이단들에서 부터 시작해보지요. 저는 각각의 이단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 보다는 이단들이 갖는 어떤 특정한 내용, 즉 교회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혼란과 어려움을 초래하는 원인들에 대해 강조하려고 합니다. A heresy is ‘a denial of or a doubt concerning any defined, established Christian doctrine’.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heresy and apostasy. Apostasy means ‘a departure from the Christian truth’. It may be a total renunciation or denial of it, or it may be a misrepresentation of it to such an extent that it becomes a denial of the whole truth. But a heresy is more limited in its scope. To be guilty of heresy, and to be a heretic, means that in the main you hold to the doctrines of the Christian faith, but that you tend to go wrong on some particular doctrine or aspect of the faith. The New Testament itself shows us clearly that this tendency to heresy had already begun even in the days of the early Church. 이단은 이미 정의되어지고 수립되어진 기독교교리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단과 배교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배교는 '기독교 진리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진리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기독교 진리를 잘못 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전체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변질된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그 영역에 있어서 좀 더제한적입니다.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과 이단이 되는 것의 의미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붙들고는 있으나 특정한 교리나 기독교 신앙의 한 측면에 있어서 잘못된 길로 치우치는 경향을 지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이단의 경향이 초대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One of the first things you are to learn in this Christian life and warfare is that, if you go wrong in your doctrine, you will go wrong in all aspects of your life. You will probably go wrong in your practice and behaviour; and you will certainly go wrong in your experience… We read about these things constantly in the newspapers. Some are rejoicing because Protestantism and Roman Catholicism are drawing nearer together. ‘What does the past matter?’ they say, ‘Let us have the right spirit, let us come together, all of us, and not be concerned about these particularities.’ I have but one comment to make about this matter, and I regret to have to make it. To me, all such talk is just a denial of the plain teaching of the New Testament, a denial of the Creeds and the Confessions and the Protestant Reformation! It is carnal thinking, in addition to being a denial of the truth.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과 영적 전투에서 배우게 되는 여러가지 것들중 한가지는, 여러분이 교리적으로 잘못 되어지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또한 잘못된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들과 행동들은 옳지 못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경험들을 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접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개신교와 카톨릭이 점점 더 가까와지고 있음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은 것이 대수인가? 우리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여러 사소한 교리들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말자"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비평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비평이 그리 기쁘지는 않습니다. 제게 저런 주장들은 신약의 가르침들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조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신교의 개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된 생각이요, 진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Bible, one thing only matters, and that is the truth. The Holy Spirit will honor nothing but the truth, His own truth. But that, He will honor. To me the most marvelous thing of all is that, the moment you come to such a conclusion, you realize that in a sense nothing else matters. … Nothing matters in the spiritual realm except truth, the truth given by the Holy Spirit, the truth that can be honored by the Holy Spirit. Is there anything more glorious in the whole of the ld Testament than the way in which this great principle stands out? God often used individual men, or but two or three, against hordes and masses. Is there anything more exhilarating than the doctrine of the remnant? While the majority had gone wrong, the ones and the twos saw the truth.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중요한 단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이 진리만을 보증하시는데 바로 하나님 자신의 진리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만을 유효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여러분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에,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성령에 의해 보증되어지며 주어지는 그 진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치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구약전체에 나타나는 내용들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이 위대한 원칙이 나타나는 방법처럼 영광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단이나 많은 무리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자주 한 사람 혹은 두 세 사람 소수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남은자 혹은 그루터기"의 교리만큼 고무적인 교리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몇 몇 소수의 무리들은 진리를 따랐습니다. Take a man like Jeremiah. All the false prophets were against him. There is a man who had to stand alone. Poor Jeremiah – how he hated it and disliked it! He did not like being unpopular, he did not like standing on his own, and being ridiculed and laughed at, and spat upon, as it were; but he had the truth of God, and so he endured it all. He decided at times to say nothing, but the word was like fire in his bones, and he had to go on speaking it. Obloquy and abuse were heaped upon him, but it did not matter; he was God’s spokesman and God’s representative. Similarly Moses had to stand alone when he came down from the Mount where he had met God. To stand in isolation from one’s fellows, but with God, is the great doctrine of the Old Testament in many ways. And it is emphasized in the New Testament also.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십시요,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그를 대적하였습니다. 그는 혼자이어야 했습니다. 가여운 예레미야가 홀로인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경멸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유명해지지 못하는 것을, 홀로 그 모든 비웃음과 조롱, 침뱉음 당하는 것을 싫어 했습니다.그러나 그 모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먹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뼈에 불처럼 임함으로 나가서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방과 학대가 그를 짓눌렀지만 그런 것은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였고 하나님의 이 보내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일이 모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대면한 후 산을 내려왔을 때 그는 혼자 였습니다. 자신의 동족으로 부터 고립되어 홀로 있게 될 때 그때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때라는 것은 구약성경이 여러 방법으로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일들이 일어납니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 알파코스, 이머징 처치 등등 교회는 복음전파와 급변하는 세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방법들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면서 진리가 왜곡되고 혼합되는 것은 반성을 커녕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수가 그것을 옳고 좋다고 따라갈 때에도 그것이 진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것이라면 외로이 혼자 남아야 하는 아픈 댓가를 치루어서라도 그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특별히 언급하신 카톨릭과의 에큐메니칼 운동 대신에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다른 움직임들과 운동들을 대입해보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는 로마가톨릭교회 / 최덕성 교수

 

 

자그레브_대성당.jpg


황금 마리아상 (자그레브대교회당)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는 로마가톨릭교회


[특별기고]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③ 마리아 숭배 

 

크리스천투데이, 2014.08.09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4158

             

▲최덕성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구원의 중보자로 믿는다.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은총을 받는 두 길이 존재한다. 예수와 마리아이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라 있다. ‘성사위일체(聖四位一體)’라 불릴 정도이다. 마리아는 신앙과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살았고 원죄가 없으며, 자범죄도 범하지 않았고, 죽자마자 육체를 가지고 승천했다고 믿는다.


마리아 교리는 구원자-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격하시키는 이단 사상이다. 마리아 숭배 행위는 우상숭배이다. 성경 어느 부분도 로마가톨릭교회의 마리아 교리와 ‘성모 숭배’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마리아 숭배는 지중해 세계에 만연한 이교의 여신숭배 사상 및 행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1. 일평생 동정녀 교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교리를 로마가톨릭교회의 진리로 확정했다(교회헌장 제52항,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499조). 공의회 ‘교회헌장’은 약 4분의 1 분량을 마리아 교리 서술에 할당한다(제52-69항).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의 형제들이라는 야고보와 요셉(마 13:55)”은 어떤 관계인가?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들이 “예수의 한 제자인 다른 한 마리아의 아들들(마 28:1)”이라고 한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형제들’이란 구약시대의 표현 방법이며, “예수의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말(가톨릭교회 교리서 제500조)”이라고 풀이한다.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교리의 배후에는 이원론적 헬라주의 사상과, 고행주의를 미덕으로 여기는 세속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성(性)을 경멸하는 이방 세계의 시각이 로마가톨릭교회를 통제한다. 교회는 플라톤주의 이원론과 고행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교리를 발전시켜 왔다.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가 여러 명의 자녀들 두었다고 증언한다.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했으나,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와 같이 자지 않았으며 아들을 낳자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다(마 1:25)”고 한다. 성령으로 잉태된 첫 아들을 낳은 뒤,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시사한다.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마 13:55-56)”.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갔으나 거기에 여러 날 머물러 계시지는 않았다(요 2:12)”. 이 구절들은 마리아가 성생활과 무관하지 않으며, 여러 자녀들을 낳았음을 시사한다.


예수께는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마 13:56)”. 위 번역문은 평양판 <성경전서(2010)>에서 옮겨왔다.


2. 원죄 없음 교리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마리아에게 불멸의 영혼이 주입된 후, 그녀는 윈죄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은혜를 입을 수 있었고, 또 은혜를 입었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태어났다”고 했다(John Trigilio Jr, Catholicism for Dummies, 2003, 265). 마리아에게 원죄가 없다는 교리는 19세기에 이르러 공식 교리로 등장했다.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마리아가 원죄의 오염 없이 아이를 잉태했다고 선포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전되었다(The Catholic Encyclopedia, VII, 674)”고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마리아의 평생 무죄설을 확정했다. 평생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라고 한다(교회헌장 제56항). 로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그녀의 전(全) 지상 생애 동안 어떠한 종류의 죄도 범하지 않았다. … 일평생 모든 자기 죄(자범죄)에 물들지 않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411조, 제508조)”고 한다.


마리아에게 원죄가 없는가? 자범죄와 무관한가? 이 교리는 마리아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아닐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3. 중보자 마리아 교리


교황 베네딕트 15세(1914-1922)는 마리아의 ‘구원 협력설’, 곧 중보자 마리아 교리를 선언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를 확정했다. “복된 동정녀께서 사람들에게 미치는 모든 구원의 영향은 사물의 어떤 필연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에서 기인하고, 또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나온다(교회헌장 제60항)”고 한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아들과 함께 수난을 겪었다.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했다(제61항)”.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인류 구속 역사에 참여했다. 구원사역에 협력했다. 마리아는 승천한 뒤에도 구원사역 임무를 계속한다.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주신다. … 그 때문에 복된 동정녀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중보자)라는 칭호로 불린다”고 한다. “하나님의 유일한 신성이 피조물들 안에서 실제로 갖가지 모양으로 퍼져 나가듯이, 구세주의 유일한 중개도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다양한 협력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불러일으킨다(제62항)”고 한다.


중보자 마리아 교리는 하나님이 마련한 구원의 길 밖에 또 다른 길, 다른 중보자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유일한 중보자(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존엄과 능력을 침해한다. 유일한 구원자-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모독하고 격하시킨다.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실제로 구원의 길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직접적으로 기도한다.


4. 마리아 승천교리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가 죽는 순간에 승천했다는 교리를 선포(1950)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녀였던 하나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의 생애를 마친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계시된 신앙의 진리이다(The Catholic Encyclopedia, XIII, 185)”고 믿는다. 성경은 마리아의 죽음에 관해 침묵하지만, 교회의 ‘전통―성전(聖傳)’은 그가 천국으로 들리어 올라갔다고 가르친다고 한다(Catholicism for Dummies, 265-266). “마리아가 지상 생애의 여정을 마쳤을 때 몸과 영혼은 하늘 영광으로 올림을 받아 주님에 의하여 만물 위에 여왕(Queen)으로 존귀하게 되었다.” 마리아가 “주님께로부터 만물의 여왕으로 추대받았다(교회헌장 제59항,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966조)”고 한다.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치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했다고 하지 않는다. 만물 위에 여왕으로 등극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가능성을 떠올리는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로마가톨릭교회가 마리아에게 부여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는, 원래 바벨론 신전의 여신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교 명칭을 마리아에게 부여하여,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탈하는 불경죄를 범하는 격이 되게 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하늘의 여왕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왕권 일부를 찬탈한 범죄자이다. 대역죄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종래의 마리아 교리와 교황 비오 12세의 선언들을 고스란히 추인했다. 마리아는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티 없이 깨끗한 동정녀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져, 주님들의 주님이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인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교회헌장 제59항)”고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향한 기도를 장려한다. 마리아는 하늘에서도 우리의 ‘변호자’로서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 그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중보자)라는 칭호로 불린다(제62항). 모성애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스도는 효성이 지극하기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제62항). 그래서 신자들은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님! … 이제와 저의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하고 기도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신도들에게 현실적으로 은총을 받는 길은 둘이다. 신자들은 중보자(중재자, 중개자) 마리아 조형물 앞에 촛불을 켜놓고, 그 상을 향하여 손으로 십자가 표시를 하고 합장으로 예를 올리며, 절을 한다. “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성경의 계명에 역행하는 종교 행위를 한다.


5. 우상숭배


마리아는 가장 복 있는 여인이다(눅 1:42).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육신 과정에 자발적으로 수종을 들었다. 구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귀한 쓰임을 받은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인간이다. 예배, 기도,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원죄가 없다거나, 자범죄가 없다거나, 승천했다거나, 인류 구원의 중보자, 중개자라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미신과 이교신앙과 광신과 교회 권력의지의 결과이다.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통치 이후에 교회 안에 들어온 이교는 서방교회의 미신적 교리를 부추겼고, 마리아 교리와 마리아에 대한 우상숭배 행습을 가져왔다. 에베소공의회(431)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神母)’라고 규정했다. 이 결정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에서 정통신앙으로 수용되고 있다.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뉘앙스를 지닌 이 칭호는, 본디 마리아를 높이는 표현이 아니라 그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 위격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마리아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흠숭, 공경, 상경은 실제 교회 생활에서 인간숭배로 자리잡았다. 신자들은 마리아 상을 향하여 절을 하고 공경의 예를 표한다. 십계명의 제2계명에 저촉되는 경배, 예배, 숭배 행위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십계명에서 우상숭배 금지 계명, 곧 제2계명을 배제한다. 열 번째인 탐심에 관한 계명을 둘로 나누어 열 가지 계명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우상숭배 금지 계명을 제1계명에 포함시켜 그 명령을 축소, 마비시킨다.


로마는 성상숭배, 성유물숭배, 성인숭배를 하고 있다. 또 일제 말기 정치적 동기로 일본의 신사참배, 중국의 공자숭배, 한국의 조상제사를 허용했다. 여러 해 전 김수환 추기경은 유생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물을 바치고 몇 차례 큰 절을 하고 술을 따라 바쳤다. 한국 천주교회 사제 문규현 신부는 국토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삼보일배 행사의 출범식을 하는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서, 산신령 화상을 향하여 불교 승려와 함께 큰절(사제서품 때처럼 바닥에 완전히 엎드리는 형식)을 하고 제물과 술잔을 바쳤다.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은 불교 사찰의 템플스테이 행사에 참여하고, 불교의 108 참회기도문을 외우며, 불상을 향하여 절을 하기도 한다. 십계명에서 제2계명을 빼버린 결과는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 활동으로 나타난다.


6. 이교 배경과 관련성


마리아 교리와 행습의 배후에 있는 이교 배경과 관련성은 성모에 대한 공경, 상경, 흠숭 또는 숭배 행위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뒷받침한다. 마리아론이 로마가톨릭교회 안에서 그토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으로까지 숭상되는 까닭은 이교 풍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마리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끝난다. 기독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는 기간과 그 뒤 얼마 동안,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없었다. 4-5세기까지도 마리아 축제라는 것이 없었다. 마리아에 대한 기도가 없었다. 마리아를 칭송하는 신학 이론도 없었다.


핍박기가 끝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391 AD)되면서, 기독인들 사이에 마리아 숭배 행습이 나타났다. 창검의 힘과 위협에 눌려 형식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들, 중생 체험이 없는 자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옛 종교의 여신들(female deities)을 예배하는 자신들의 풍속을 기독교 안으로 가져왔다. 마리아를 ‘항구적 동정녀’로 생각한 암브로시우스, 제롬, 어거스틴도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이 자칫 이교의 모신(母神) 숭배 신앙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위험성을 경고했다.


모신숭배 행위는 고대 근동의 여러 종교들에서 나타난다. 아르테미스(Artemis), 더메터(Demeter),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다이아나(Diana), 세레스(Ceres), 비너스(Venus) 등 여성 신 개념은 바벨론에서 왔다. 바벨론은 이 땅 ‘최초의 왕’의 아내인 이스타르(Istar)를 ‘위대한 어머니’로 숭배했다. 서양 세계에 기독교가 번영하면서 바벨론의 여신 숭배 사상은 마리아 공경과 숭배로 대체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경고한 바벨론의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 7:18; 44:17)’이 기독교의 ‘여신 마리아’로 바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으로 섬기던 여신 아스다롯 숭배(삼상 7:3, 4; 왕상 11:5, 33; 삿 2:13, 10:6)가 기독교 형태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 로마가톨릭교회 학자는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에베소라고 주장한다. 에베소는 마리아에게 아주 특별한 도시이다. 에베소공의회(431)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 교리를 다루었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규정했다. 이는 신학적인 동시에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에베소는 여신 아데미(행 19:27, 35)에 대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예수의 위격(位格)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러나 당시 에베소에 번창하던 헬라주의 여신 개념이 반영됐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에베소공의회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부여하자마자, 열성적인 이교 출신 기독교 신자들은 당장 “위대한 하나님의 어머니, 찬송받을지어다” 하는 송영을 올렸다. 그들은 정치적 동기 또는 형식상 기독교로 전향한 자들이었다. 송영 형식은 에베소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에 대한 칭송과 같았다. 이스다롯(Ishtar, Ishtarot), 퀴벨레(Cybele) 여신 숭배 개념과 이교 여신숭배 신앙 행습이 곧장 ‘하나님의 어머니’에게 적용되었다.


웅장한 교회당 모자이크는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묘사했다.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기오레대교회당 벽화는 마리아를 이교 여성 모신(母神) 형태로 표현한다. 마리아상에는 이교 여신들의 옷과 장식이 달렸다. 바벨론 여신과 동일한 모습의 하늘의 여왕으로 묘사되었다. 바벨론 어머니와 아기에 대한 예배 형태가 기독교 안에서도 나타났다. 마리아와 어린 예수를 함께 묘사한 그림들은 모자(母子)를 그린 이시스와 호루스, 퀴벨레와 아티스 그림과 동일한 형태였다(Erich Bruning, Project Einheit, 2004, 40-41). 여신을 숭배하던 종교 건축물들이 우뚝 솟은 것처럼, 큼직큼직한 마리아교회당, 마리아 기념 채플이 건축되었다.


주후 5-6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마리아를 계시록 12장 1절의 ‘열두 별의 관을 쓴 여자’로 해석했다. 마리아를 성부, 성자, 성령과 동격으로 간주할 정도로 높은 공경을 바쳤다. 마리아에 대한 공경 의식은 5세기에 나타났다. 마리아 축제는 7세기, 마리아 무흠(無欠) 잉태설, 곧 원죄가 없다는 사상은 12세기에 각각 등장했다. 마리아 승천교리는 15세기 신학논쟁의 주제였다. 동정녀 마리아의 우주적 권위는 그가 지상의 생을 마칠 때 몸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신앙에서 극대화되었다. 그 무렵 마리아에 대한 기도가 등장했다. 서양 중세인들은 사실상 마리아를 포함한 ‘성사위일체(聖四位一體)’를 믿었다. 마리아는 존경, 흠숭, 공경의 차원을 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서양 중세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했다. 십자군 원정을 치른 서방세계의 신앙은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여,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 구원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였다. 어머니와 그 아들의 이야기는 대단한 호소력을 지녔다. 죄인을 위해 마리아가 아들에게 동정적 탄원을 하면, 그 어떤 무서운 죄와 비열한 허물도 모두 용서한다고 믿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청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직자와 수도사만이 아니라 왕, 기사, 농부도 마리아의 도움을 간청했다. 성모는 낭만적 망상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리아를 위한 전승 기념물로 건축되기도 했다. 그 시대 농부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섞인 땀방울 뿐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의 유방에서 짜냈다는 젖을 지역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대와 그 이후, 마리아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19세기에 105차례, 20세기 430차례 나타났는데, 모두 여성의 환영(phantom)으로, 광명―빛 또는 그와 유사한 형태였다고 한다. 성경은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난다고 한다(고후 11:14). 유럽연합 기(旗)에 새겨진 12별의 왕관은 열두 별이 달린 왕관을 쓴 ‘하늘의 여왕(계 12:1)’, 곧 국가와 종교와 세상의 통합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유럽연합 기(旗) 초안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초안이 거절되자, 유럽위원회 문화성 수장 폴 레비가 현재의 것을 만들어 승인을 받았다. 벨기에인 레비는 유태교에서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어느 날, 마리아 상에 비치는 햇빛에 반사된 푸른 하늘에 나타난 장엄한 황금 왕관에서 유럽연합 기 모양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유럽연합이 ‘하나님의 어머니’, ‘하늘 여황’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그녀를 지극히 공경함을 상장한다.


마리아 신앙은 이처럼 이교의 텃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일부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은 로마교회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Regina coeli)’, ‘공동 구속자(Coredemtrix)’, ‘은총의 중재자(Mediatrix gratiarum)’ 같은 칭호들로 치장하는 행위를, 그릇된 신앙심의 결과이며 궤도를 이탈한 무절제한 짓이라고 본다(Rene Laurentin, Kurzer Traktat der Marianischen Theologie, 1959, 101).


7. 마리아 교리와 교회일치운동


한국 천주교 교의학자 심상태 교수(수원가톨릭대)는 에큐메니칼 운동 맥락에서 마리아 교리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마리아 숭배 또는 공경의 타당성을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온 인류와 세계를 위한 구원사적 기능을 수행한 데서 찾는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에 어머니로 참여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자의적으로 적극 협력했으며,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順命)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했다. 따라서 교회가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바치는 공경인 흠숭지례(欽崇之禮)보다 낮으나 일반 성인들에게 바치는 공경지례(恭敬之禮)보다 한층 높은 상경지례(上敬之禮)로 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함이 지당하다고 주장한다(심상태, 가톨릭의 교회 일치적 마리아론, <사목> 244, 1999.5., 21-55).


심상태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그리스도를 잉태했으며, 사망 즉시 승천했다고 하는 로마가톨릭교회 교리는 공의회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교황이 ‘특수 교도권’으로 일방적으로 선포했다고 말한다. 이 지적은 마리아 교리에 대한 심상태의 부정적 관점을 암시한다. 그는 마리아에 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비판적인 아래 글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다.


“하나님의 모친 마리아가 교회를 위해서 전구한다 할지라도 죽음을 물리쳐야 하고, 사탄의 어마어마한 힘과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다. 마리아가 이를 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마리아는 온갖 최고의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기는 하나 그리스도와 똑같이 간주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신앙과 겸손의 모범을 따를 것을 원한다. 그런데 마리아에 대한 과장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서야 할 자리에 마리아가 대신 들어서게 된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마리아 교리를 문제 삼지 않은 채 사실상 인정하는 형태로, 로마가톨릭교회와 가시적 교회일치를 추구해 왔다. WCC 역사에서 마리아론이 쟁점으로 전면에 부각된 적이 없다. 마리아론을 부정적으로 다룬 문서도 없다. 더구나 마리아 교리에 우호적이다. WCC의 ‘하나의 신앙고백(1990)’은 에베소공의회(431)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과 관련해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의탁, 그녀의 활동적 신앙의 반응, 그리고 그녀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교회의 유형(typos)과 모범으로 여겨져 왔다”고 말한다.


WCC는 개종전도금지주의와 관련하여 회원교회들에게 로마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숭배 행위를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WCC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마리아론을 옹호한다. 고대 교회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규정했고, 개신교회, 정교회, 로마가톨릭교회가 모두 성육신의 신비에 신앙을 두고 강조하므로 “마리아 숭배가 미신이 아니냐고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Rita Turner, Mary in the Ecumenical Movement, 1991, 668)”고 한다.


WCC 관련 문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마리아론’은, 마리아 교리에 대한 이 단체의 우호적인 태도와 신념이 “로마가톨릭교회와 대화를 한 결과”라고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마리아가 유용한 촉매 역할을 하며”, 이로써 “상호 두려움이 잠재워졌고, 공동의 광장이 움터 나왔다”고 말한다. 동방정교회가 나름의 마리아 전통을 주장하지만, 서방교회 경우처럼 교리적 공방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바 마리아론을 특별히 공식적으로 교리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실제로 에큐메니칼 토론에서 제기되는 논쟁점은 마리아론 자체의 내용보다, 오히려 그와 관련된 계시의 정통성 문제, 그리고 교황의 절대 무류성에 관한 교회의 권위 문제”라고 지적한다.


WCC는 마리아 교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해방신학과 여성신학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숭배는 강렬하다고 말한다. 여관 주인에게 거부당한 임산부 마리아의 모습, 폭력에서 도피하는 장면, 자신의 아들을 조용히 어른으로 키우는 여인, 그의 학대와 고난을 증거하고 그의 승리에 동참하는 모습 등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WCC의 교회 일치 패러다임을 대변하는 위 글은 이밖에 여러 이유들을 제시하면서 “믿음과 일치의 표본인 마리아는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라고 한다. 마리아론이 WCC가 추구하는 세계교회 일치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리를 계급화한다. ‘더 중요한 교리’와 ‘덜 중요한 교리’로 나눈다. “가톨릭 교리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일치교령 제11항;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90조)”고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높고, 연옥설이나 마리아론은 낮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이형기 교수는 로마가톨릭교회와 WCC의 외형적 교회일치를 긍정적으로 본다. 가톨릭대(가톨릭신학회)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쓴 논문(2009)에서 로마가톨릭교회가 말하는 ‘진리들의 위계’를 근거로, 로마가 개신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계급이 낮은 일부 교리들을 포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가장 높은 꼭지점에 두고, 비(非)로마가톨릭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개신교회)이 고백하는 교리와 불일치하는 연옥설, 마리아론 같은 위계가 낮은 자리에 있는 교리들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말한다(이형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의 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연구: 종교다원주의 맥락에서 WCC의 ‘신앙과 직제운동’에 비추어서, <신학사상> 64, 2009 겨울, 236).


로마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낮은 계급에 해당하는 교리라도 이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진리들의 위계’에 대하여, “모든 계시된 교의는 같은 신적 신앙으로 믿어야 할 것이다(교회에 대한 오류를 반박하는 가톨릭 교리 선언, <사목> 34, 1974.7., 125)”라고 못 박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일치교령’은 진리들의 위계질서에 대한 배타적 원칙을 담고 있다. 진리들의 “서열은 어떤 교의가 다른 교의에 의거하거나 다른 교의에 의해 설명된다”고 한다(일치교령 제11항; 앞의 글 125). 마리아에 대한 흠숭, 상경, 공경이라는 위계로 구분되는 교리들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로마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의 순수성을 손상시키거나 흐리게 하는 ‘거짓 평화주의 일치운동’을 경계하라고 명한다. 에큐메니칼 운동 파트너에게 모든 가톨릭 교리를 명확하게 온전하게 제시하라고 한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설득시킬 표현과 방법을 찾으라고 한다. 바티칸은 진리들의 “서열은 어떤 교의가 다른 교의에 의거하거나 다른 교의에 의해 설명한다(앞의 글, 125)”고 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표방하는 교리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장로교 에큐메니스트 이형기와 그가 이끌어 온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지나친 순진함과 오판이 드러난다.


맺음말과 질문


마리아는 마리아 교리에 크게 진노하리라. 그 교리는 그리스도의 독보적인 구속사역을 격하시키며,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 방식으로 마리아를 모독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행위, 곧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는 우상숭배이다.


마리아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마리아 교리와 숭배는 로마가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려고 묵인, 수용, 교리화한 이교 사상이며 미신적 행습이다. 화체설, 희생제사 이론, 연옥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인숭배 등과 더불어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교리이며 종교행위이다.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마리아 교리를 폐기하고 그를 숭배하는 종교행위를 금지하노라 선언할 용기가 없는가? 미신적인 이단 사설(邪說) 마리아 교리를 버리고 로마가톨릭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개혁하지 않겠는가? 성경과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역사적 기독교와 일치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계속>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 전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1989-2009)


(위 사진: 페북 친구)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어루만짐 그녀가 나를 아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는 내 팔을 어루만지거나 목을 긁어주면 내가 차분해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또 내 머리를 긁어주고 내 귀를 문질러주었다. 그녀의 그런 어루만짐에 나는 편안해졌고, 안절부절 못하는 일이 줄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쁨과 고요가 있다. - 존 엘더 로비슨의《나를 똑바로 봐》중에서 - *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난치병 환자의 체험글입니다. 유심히 지켜보고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고 아픈 몸과 마음에 기쁨과 고요가 찾아옵니다. '건강하다'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깊이 멍들고 지쳤을 때 누군가 사랑과 정성으로 지켜보고 어루만지면 다가오던 병도 한걸음 물러갑니다. 기쁨과 고요가 옵니다. [고도원 아침편지]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으면 힘이 되는 명언  (0) 2014.08.25
질투와 시기심의 차이  (0) 2014.08.18
톨스토이 인생 10훈  (0) 2014.08.09
작은 친절의 결과  (0) 2014.08.03
지워지지 않는 못자국  (0) 2014.07.31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건성으로 붙듭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환영의 뜻을 표하지만, 구원을 받았으니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에는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말하면서도 그분의 인격을 닮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신 임무들과 유익들을 분리시킵니다.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임금과 구주”( 5:31)로 삼으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구원받기는 열망하되
, 죄짓는 데서 구원받기는 그다지 바라지 않습니다.
생명의 구원을 바라면서 여전히 육체의 정욕도 갖고 싶어 합니다
.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구원과 육체의 정욕을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
또 그들은 자기들의 몇 가지 죄는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들릴라의 무릎에서는 떠나지 않으며, 사랑하는 헤로디아와는 이혼하지 못합니다. 오른손이나 오른쪽 눈을 제거할 만큼 결단력이 있지 못합니다.

이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편벽됨 없이 영접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의도와 목적대로 그분을 받아들이되, 아무런 예외나 제한이나 보류함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다스림도 받으려고 애씁니다
.
그는 바울과 같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시키시든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대로 자기를 쓰실 수 있도록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돌아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 하나 하나에 동의하고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로 행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으로는 원치 않으면서도 의무감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행하는 데 반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며,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데서 자유를 누립니다.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유로이 그분을 따라가며,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당신께 속한 자들을 완력으로 통제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의 왕이십니다.
그들은 그분의 은혜로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며 그분을 섬깁니다.
노예처럼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 아들처럼, 배우자처럼, 사랑과 충성이 우러나와서 자진해서 섬깁니다.
한마디로 회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끊임없이 공부합니다
.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의 매일의 관심사입니다.
그는 자기 속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고 마침내 거룩함으로 온전해질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위선자는 거룩함을 천당에 들어가는 다리로써만 좋아합니다
.
그는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습니다.
죽어서 천당에만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것만이 그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단지 천당에 가기 위해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
그는 지옥에 가지 않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룩함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 소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관과 목표가 바뀌었습니까?
거룩함이 여러분의 추구하는 바요, 신앙이 여러분의 주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 셈입니다
.

 


- 조셉 얼라인,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중에서

 


★도베르만과 소방관의 감동이야기!

 

안녕하세요? 도치가 오늘 여러분들께 감동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께요 도베르만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일텐데요 강아지도 고마운걸 알고 사람에게 고맙다고 감사의 표시를 하는 마음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화재가 발생 하여 소방관들이 출동하였습니다. 화재가 발생 집안에서 고립된 한마리의 도베르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도베르만은 사냥개로 유명하여 왠만한 남자들도 낮선 도베르만을 보면 쉽사리 다가서기 힘듭니다. 


 

그 순간 화재가 발생한 집은 불길이 사방에 번져서 더욱 큰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는데요. 도베르만은 큰소리로 마구 짖어대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소방관은 처음에는 그 도베르만이 무서웠습니다. 한번도 대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떡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같이 불길에 휩싸여서 위급한 상황에 도베르만의 신경이 날카로워졌을거라는 판단에 노련한 소방관이라도 쉽게 다가갈수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하지만 불속에 생명을 구하지 않고 지낯칠수는 없기에 소방관은 급하게 달려가서 도베르만을 품에 안고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방관은 불길 속에서 구한 개를 마당에 옮겨둔뒤 다시 화재 현장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화재를 진압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화재는 마침내 진압이 되었고 위험에 처해있던 도베르만을 구한 소방관도 많이 지쳐 땅 바닥에 주저 앉아 한숨을 돌리고 있었는데요. 이때 마침 옵저버 신문사의 한 사진작가가 도베르만이 멀리서 소방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진작가는 도베르만이 소방관 쪽으로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무슨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카메라를 들어 올려 도베르만과 소방관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도베르만은 화재를 진압하드라 온몸이 그을린 소방관에 다가가 키스를 하였는데요 화재 속에서 구한 도베르만은 임신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도베르만은 자신과 뱃속의 아기들을 화재에서 구해준 소방관에 다가가 감사의 의미로 이렇게 키스를 하였고 사진작가는 그 순간을 이렇게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사람이나 강아지나 생명이 있고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사람도 은혜를 입으면 감사함을 표현하지만. 강아지들도 이처럼 은혜를 입으면 감사함을 표현합니다. 너무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네요 그리고 사진만봐도 너무 멋있는 것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ehrmdls10?Redirect=Log&logNo=220055295245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 어머니  (0) 2014.08.28
감동글-<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에서 고른 글 >  (0) 2014.08.19
사랑받는 사람의 비밀  (0) 2014.08.11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0) 2014.08.04
3달러의 호의  (0) 2014.07.14



포장된 욕심

얼마 전,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맞고 무너진 가자지구의 한 민간인 아파트 건물 더미 아래서 신음하던 젊은 여인을 봉사자들이 힘을 합하여 무사히 구출해낸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세계인이 모두 기뻐한 적이 있다. 이 여인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었고 병원으로 후송하던 중 안타깝게도 차 안에서 숨졌다. 죽은 어머니로부터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가 인큐베이터에서 살아 숨 쉬는 앙증스러운 모습이 전 세계로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악한 세상에서 기적을 본다면서 누리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 기적의 아기는 끝내 작은 인큐베이트 안에서 눈 한 번 제대로 떠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이렇게 푸르른 어머니와 아기가 어이없게도 어른들 욕심의 희생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슬픈 소식은 전 세계 누리꾼들의 분통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희생자는 항상 힘없는 아이와 여자. 노인이란 것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할 지도자 ‘하마스’가 오히려 자기 백성을 방패로 삼아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수적으로 열세한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타켓으로 자살 테러를 부추기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보복을 목적으로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민간인의 거주지도, 어린 새싻들의 배움터인 학교 건물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지금껏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으로 죽은 가자지구의 희생자 3분의 2는 민간인이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인권센터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약 13만 명은 집을 떠나 국경 쪽으로 피신했고, 6만 명 이상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가 학교시설에 마련한 대피소로 몸을 피하고 있다. 이들은 전기 공급 중단과 식수, 의료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무서운 일의 시작(뿌리)은 어디서부터인가? 그것은 사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육적으로는 양국 간의 권력욕, 물질 욕이고 영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숙명관계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근거한 약속된 땅을 되찾고자하는 시도, 즉 사명으로 포장된 욕심이지만, 세상법과는 조화될 수없는 시도라 하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질문을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아름다운 말로 자신의 마음속 욕심을 포장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은 전문인들이 그렇다. 억울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변호사님들, 그러나 막상 억울한 일을 당해 찾아가면 터무니 없이 비싼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사선생님들, 때때로 진료비가 없으면 진료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명으로 포장된 욕망의 끝은 어딜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치인들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겠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의 발람이 그랬고, 신약의 가롯 유다가 그랬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랍비여, 평안하십니까?” 입맞춤으로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였다. 구약성경의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직분을 가지고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하는 삯꾼 목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유다서 1장 1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발람의 길’이란 삯꾼 목자의 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에겐 멸망과 심판이 기다릴 것뿐이다(딤전 6: 20-21). 그렇다면, 현대 교계는 예외인가? 목사님들은 과연 제대로 된 사명 자들만 계실까? 현란한 말솜씨가 사명자의 길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특히, 부름을 받은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명 자는 행동하기 전, 먼저 본인의 삶 속에 사랑의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확실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에만 집착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참사람,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된 전인적 인격을 갖춘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복음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는 것인지, 그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이토록 맹목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나의 생명, 누구를 위해 바칠 것인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하며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맡은 사역자들이라면 더욱더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 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도력 혹은 깨달음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욕심이 사역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사례라고 보겠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혈기를 죽여야 한다, 교만을 죽여야 한다, 정욕을 죽여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정신없이 뛰고 있는가? 일의 동기 가치를 부여하라(value entitlement),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라, 발걸음(행보)에 가치를 부여하라, 삶의 가치를, 죽음의 가치를 부여하라.

우리는 심지 않은 것, 거두어들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심은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 생명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종일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지 않은 생명을 주와 함께 거두어들이는 기쁨을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육신대로, 정욕대로 살겠다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열심 내고 있는 그 일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이 빠졌다면 문제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역, 역시, 자살폭탄 테러범만큼이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며,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야말로 일말의 가치조차도 없는 하찮은 일에 목숨 거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병기로 사용되게 원수에게 내어주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일꾼,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진실함이 없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서 외식하는 지도자들, 이렇게 허황된 신기루 같은 거짓 믿음을 사명자란 그럴듯한 포장지로 미화시키는 마음이 자기 자신과의 분열, 대인 관계에서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 감정을 와해(瓦解)시키고, 결국 모든 것을 공중분해(空中分解)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그리스도의 선물인 은혜를 주셨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견해차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데 도구로 사용하길 원하신다. 욕심을 버리면 내가 보이고 내가 보이면 우리가 보일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 다르다. 다양성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나와 다르다고 하여 형제. 자매를 원수로 삼지 않을 것이고 사명이란 이름 하에 상대를 무차별 사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르면 비록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나와 다른 견해는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디로부터이겠는가? 내 마음속에 과연 올라가려하는 욕심이 없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상대를 정죄하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은 수용하고 공존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주께서 원하고 계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한다면, 결코 사명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려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느냐.”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듯 울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통곡한다. 나 자신만이라도 형제의 영혼을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딤전 6: 20-21)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하시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반응을 요구하고, 또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본문은 복음을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가 그 위대한 가치에 적합한 태도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나님 앞에 섰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여야한다. 이 말은 매우 놀랍고 혁신적인 성경 용어다. 첫째, 서로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둘 있다면, 그중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복음과 세상은 서로 유사점도 없고, 친밀하지도 않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큰 혁신인지를 잘 보여준다. 복음을 받고 그 요구에 따라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11:1,7,27,벧전1:8).

 

2,000년 전, 반란죄와 신성모독죄로 처형된 메시야를 섬기기 위해 개인의 자율성과 자치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다수와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고 교회라는 핍박받는 소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뜻하며, 십자가에 매달린 선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믿음을 위해 온갖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진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것 하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신앙은 배타적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했다면,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를 증오해 멀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모든 것(특히 자아)을 포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의 공로나 선행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선행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인격과 온전하신 사역만 전적으로 의지한다.

 

셋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삶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은 오직 예수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2:36). 하나님은 그분의 왕을 거룩한 산에 세우시고, 그분에게 반역하는 이들을 비웃으신다(2:4-6).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마치 그런 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세우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세우신 주님께 철저히 복종하며 살라고 명하실 뿐이다. 따라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모든 자율성과 자치권을 복음의 주님께 기꺼이 넘길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복음 설교자는 이런 말의 뉘앙스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구도자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정직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은 또한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놓고 이 어둡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신다(11:28,10:16,3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 합당한 예배이다.

 

넷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구원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동기이자 목적이요 원천이시다. 그분은 우주의 중심이시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 전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다.

 

처음 회심했을 때 겉으로 드러난 극적인 현상은 없을지라도, 그 효력은 점차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호수 중앙에 던진 작은 돌맹이처럼, 복음의 파장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장 바깥쪽까지 구석구석 퍼진다. 참된 회심자는 복음을 이전 삶에 추가되는 부가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복음으로 옛 사람을 대체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옛 삶은 버려진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생명)의 원천이요 유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의 일부로 여기거나, 이미 소유하고 있는 다른 좋은 것들에 하나를 더 보태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좀 더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장신구가 아니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분 자신이 곧 우리 생명이 되신다(3:4).

 

과거에 아무리 훌륭하던 것도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3:7,8). 비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이룬 개인의 업적은 한갓 헛된 허영심을 보여주는 증거물, 곧 눈 깜짝할 새에 무너질 모래성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고 가르치셨다. 어려운 말씀”(6;60)은 그리스도가 단지 삶의 양념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자이시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요, 사막에서 생수를 내는 바위시며, 생명과 열매 맺을 능력을 공급하는 포도나무시다(6:31-35,41,47-51,고전10:4,15:5,6).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자는 양식이 아닌 것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곧 먹고 죽지 않게 하는 양식을 위해 살아간다(55:2,6:50).

 

설교자는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복음을 맏아들이라고 외쳐야 한다. 설교자는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이 시대의 양식을 버리라고 외쳐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참된 양식이 쌓여 있는 곳간으로 인도해야 한다. 다윗처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34:8)라고 권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분과 한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분의 구원을 진정으로 맛본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 폴 워셔, 복음, pp 22-27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결혼은 미친 짓, 이런식이라면...

 

"색다른 결혼식  열망이 지나쳐... 누드로, 번지점프하며, 상어소굴에서..."


결혼식장이나 교회, 성당만을 결혼 예식의 장소로 생각하십니까?  색다른 곳에서 색다르게 예식을 치르려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누구나 결혼식을 잊지 못할 예식이 되게 하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색다른게 아니라 아주 심하게  유별난 걸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나체로 하는 결혼식, 번지점프하면서 결혼식, 상어소굴에서 하는 결혼식 등 말이죠.
 
 

| 누드 결혼식 |

HbPaxwNjmkianU_IfMFuHA.jpg
e4iqUbdxCEiVhFITQvAEVg.jpg
   
최대 장점은 신랑이건 신부건 돈들여서 예복 맞춰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들러리도 최소한의 치장만 합니다. 하객들도 훌훌 벗습니다. 피로연에서도요. 플로리다주의 사이프레스 코브 리조트는 누드촌으로 사랑받는 곳인데 1년에 10건 정도 결혼식이 열립니다. 겉치장을 벗어버린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결혼맹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보이네요. 디즈니월드가 있는 올랜도에서 남쪽으로 30분만 가면 나옵니다. 

 

| 번지점프 결혼식 |
lIzwC8YzpOOIbg9CCw0dYw.jpg

결혼은 강심장을 지닌 사람만이 하는 것. 이런 메시지를 온몸으로 말해주고 싶은 것일까요?  50여m 상공에서 예식을 치른 후 ‘결혼 행진’ 대신 번지점프로 화끈하게 떨어집니다. 굳이 하늘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에게 물어봤더니 대답이 그럴 듯 하더군요. “하늘의 천사한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예요.”

 

| 얼음 궁전에서 결혼식 |
OA612gZJqJjPUFgA9f16ww.jpg

퀘벡시티의 글레세이 호텔에선 영하의 아이스 홀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습니다. 새하얀 순백의 세상에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자태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신랑 신부의 결혼맹세가 영하의 온도에서 꽁꽁 얼어붙어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신부에겐 평생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따라붙겠죠.

 

| 코끼리 등에 업혀 결혼식 |
VdHjOThFEzIWdXFcmB0kfg.jpg

코끼리는 품위와 우아함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거대한 코끼리 등에 올라타 결혼행진을 하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옛 수마트라 왕국의 결혼식 처럼 커플은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 등 위에서 성혼 선언을 하고 행진을 합니다. 코끼리에서 내리면 그곳이 바로 발리섬의 허니문 리조트입니다. 수마트라 코끼리는 멸종위기 동물이라 예식 비용의 일부는 코끼리 보호기관을 위해 쓰인답니다.

 

| 상어 소굴에서 결혼식 With Some Fishy Guests |
e50AQmbrWyw2DcrRCa9exA.jpg

뉴욕 롱아일랜드 수족관에서 평생 잊지 못할 결혼식을 치를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상어가 바로 옆에서 기웃거리는 가운데 신랑 신부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비장하게 결혼맹세를 하게 됩니다. 주변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겠죠? 갑자기 “결혼식은 용궁 예식장~ 주례는 문어 아저씨~ 하객은 상어~ 예물은 조개 껍데기~” 라는 동요가 떠오르네요.

 

| 수퍼마켓, 음식점에서 결혼식 |
vCADasQ8bhYbfut.4Q1l0w.jpg

일반인의 쇼핑 공간이 어떤 이들에겐 유니크한 결혼장소가 됩니다. 주례사가 끝나고 퇴장할 때 마트의 카운터에서 결혼증서를 떼면 되겠습니다. 전에 한번은 맥도날드에서 결혼식을 치른 커플도 있어요. 피로연 음식은 빅맥으로 저렴하게!

 

박흥우 - 가시꽃 사랑




그 순종이 어떤 순종이었는지

대장쟁이

로마서 5장 12-19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은 온갖 오해를 받으시면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지라 아파하시고 피곤해하시고 목말라 하시고 배고파하시고 슬퍼하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어주마.’는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피투성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2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범사에”는 영어로 ‘in every way,’ ‘모든 면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면에서 형제와 같이 되셨다, 즉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으로 같은 형제인 레위인을 세우신 것은 한 형제여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같은 핏줄, 같은 형제의 입장이 되어 형제를 위하여 죄사함을 구하며 간절히 하소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입장이 다르다면, 진심으로 간절하게 죄사함을 구하는 제사장 직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으로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자기 몸을 드려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하여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던 일이 실패했다고 칩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죄와 죽음, 심판과 멸망이 자기와는 상관없으니까, “에이, 구원하려고 했는데 실패했군, 할 수 없지.” 하고 도로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그만입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은 겉모양으로만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실패하면 우리 죄인들도 끝나지만 예수님도 함께 죽는 겁니다. 한 형제, 한 운명체가 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심한 통곡과 간구로 기도하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영광 다 버리고 십자가 지셨네.” 하고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처절한 사랑이었는지,
예수님의 성육신이 얼마나 비장한 결단이었는지, 그 순종이 어떤 순종이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그럴지라도  (0) 2014.09.01
어느 쪽 명령을 따르는가?  (0) 2014.08.24
예수 우리 하나님  (0) 2014.08.03
너는 내 앞에서 걸어 완전하라  (0) 2014.07.30
뻐꾸기 둥지  (0) 2014.07.20

                                                   바티칸 광장

자세한 내용 보기=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reformanda.co.kr/xe/index.php?document_srl=51076&mid=theology


a1.png

a2.png

a3.png

a4.png

a5.png

a6.png

a7.png

a8.png

a9.png

a10.png

a11.png

a12.png

a13.png

a14.png

a15.png

a16.png

a17.png

a18.png

a19.png

a20.png

a21.png

a22.png

a23.png

a24.png



약 3만7천 명 반대 청원 서명…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불쾌감 줘”

미국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대규모 악마숭배의식이 열릴 계획인 가운데, 3만7천 명이 넘는 이들이 이에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이 도시 로마가톨릭 대주교 역시 항의했다.

미국전통과가정자산수호협회(the American Society for the Defence of Tradition, Family and Property)의 존 리치(John Ritchie) 학생행동책임자는 “악마숭배의식은 우리 국가의 뼈대에서 하나님을 제거하려는 시도”라며 “이 항의에 동참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악마숭배의식의 유일한 목적은 가장 음란하고 외설적이며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하나님과 가톨릭 미사와 성체 성사(Holy Eucharist)를 공격하는 것”이라며 “악마숭배자들은 교회에서 성별된 예배자를 빼앗아 끔찍한 방식으로 훼손한다”고 덧붙였다.

리치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을 왜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미국인을 비하하는 연단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신성모독을 촉진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 행사는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며, 센터 직원들과 정부 노동자들은 가톨릭 신앙을 겨냥한 행사를 돕고 이 행사 아주 가까이에서 일하도록 강요받는다”고 덧붙였다. 또 5월에 하버드대학에서 열릴 예정이던, 이와 유사한 악마숭배의식이 대중들의 항의로 즉시 취소됐다고 언급했다. 리치는 “이 행사도 취소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 하버드대학에서의 악마숭배의식이 취소된 후, 하버드 스퀘어 바깥에 서 있는 악마주의 권리 운동가들. ⓒTHE SATANIC TEMPLE 페이스북

악마숭배의식은 9월 21일 이 지역 시민센터(civic center)에서 열릴 예정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 의식은 오클라호마시티 지역 악마숭배단체의 대제사장인 아담 다니엘스(Adam Daniels)가 계획했다. 다니엘스는 “악마숭배의식에 가톨릭 미사와 유사한 주제가 포함돼 있으며, 참가자는 하나님 대신 사탄에게 예배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전통과가정자산수호협회는 이 의식에 반대하는 청원서에 7월 24일 현재까지 3만7,877명의 서명을 받았으며, 목표는 5만 명이다. 이 청원서에는 “내 마음과 영혼을 다해, 9월 21일 오클라호마시티 시민센터에서 개최될 예정인 악마숭배의식을 완전하고 강력하게 반대한다”며 “당신에게 전 세계 가톨릭 신자 1백만 명과 오클라호마의 가톨릭 신자 20만 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미국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이 행사를 취소하기를 촉구한다. 신성모독은 절대로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고 적혀 있다.

이 협회는 청원서를 오클라호마시티 시민센터의 스테판 샤프(Stephen Sharpe), 믹 코넷(Mick Cornett) 시장과 메리 펄린(Mary Fallin) 주지사에게 보냈다.

오클라호마시티 폴 코클리(Paul Coakley) 주교는 이 도시 지도자들에게 악마숭배의식 개최 중단을 위한 중재를 촉구했다. 코클리는 “시민센터가 명백하게 가톨릭 미사를 우롱하는 불경스러운 행사를 위해 티켓을 팔며 이를 오락거리로 선전한다는 것에, 우리는 충격을 받았고 가슴 아프다”며 “이 의식은 가톨릭 신자 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의 가장 성스러운 믿음을 악마적으로 곡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출처: 크리스챤 투데이LA=주디 한 기자 la@christianitydaily.com   | LA=주디 한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245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일주일에 체지방만 -1 kg씩 빼기 미션"
(매주 이만큼씩 뺄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거 아녜요??)

 

 

여러분들 쇼핑 좋아하시죠?^^


매번 장에 갈 때 마다 장바구니의 품목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살을 빼는 방법들도 매번 똑같을 수는 없답니다.

다채로운 방법들이 있고, 뭘 하든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중요할 뿐이죠.

 

다음 제가 제안하는 미션들은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쇼핑 품목이라고 생각하세요~!

음식은 사면 돈 나가고 살이 찌지만, 이 미션들을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담으면 살이 빠집니다. ㅋ

오늘 저는 10여 가지 팁을 드리지만, 이런식의 다양한 다이어트 미션들을 리스트업 해
자신의 다이어트 카트들을 채워보세요.

예쁜 옷을 사는 것 보다, 좋은 건강식품을 구매하는 것 보다 더
자신을 멋지게 가꿀 수 있는 다이어트 쇼핑이 될테니까요.^^

 

 

 

 

체지방 1 kg 은 7200 kcal 입니다.
그것을 7일간 줄이려면, 하루 약 1,000칼로리를 줄여야 하죠.

 

만약 내가 요즘 체중의 변화가 없이 특정 체중을 유지중이라면,
매일 내가 먹는 양을 잘~~ 합해보면 그것이 내 '일일 소모칼로리'이기도 하답니다.

 

내가 '매일 소모하는 칼로리'는
기초대사율이 (약 60~70%)
활동대사율이 (약 20~30%)
식사 소화에 필요한 에너지가 (총 섭취량의 약 10%)랍니다.

 

그런데, 이 일일 권장 섭취 칼로리 (= 일일 소모 칼로리)는 BMI(체중과 키로 살 찐걸 따짐)를 기준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니 만약 내가 체지방률이 높은 비만이라면,
근육량이 적고 체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으므로 기초대사율은
근육형인 동급 체중인 사람보다 낮겠죠?



(일테면(같은 이 임), 이 사진 처럼 둘이 같은 나이 같은 키, 같은 체중일 경우,  
BMI 를 기준으로 하는  일일 권장섭취량은 같지만, 
일일권장량 만큼 매일 먹을 경우, 좌측 체지방형 여성은 살이 찌고,
우측 근육형 여성은 유지하거나 빠진다.)



그 경우에는 운동을 해도 효과가 적고, 같은 양을 먹어도 살이 잘 찐답니다.

 

지금부터 말하는 10가지 미션을 잘 지키면
이번 주에 체지방 1키로를 제거할 수 있답니다.

 

 

 

한 번 따라해보실래요?^^


# [ 식이 미션 ] 하루 700 칼로리는 식이조절로 없앱니다.

 

 

1. 주 1~2회 먹던 야식, 회식을 줄이거나 없애면
자그마치 500~2,000 칼로리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야식을 한 번 하면 얼마나 먹나..

그걸 제거하면 그만큼 빼려고 덜 고생해도 되죠!

 


( 치킨 한 조각만 드시는 경우는 없죠?^^)

 

* Tip : 그래도 만약 칙힌을 밤에 먹었다면???
-> 셀러오의 '완소법'을 따라하세요~! (아래 설명)

 

 

2. 현미로 바꿉니다.

그러면 한 술 덜 먹어도 배는 더 부릅니다.

왜냐면 섬유질이 많고, 오래 씹을 수 있기 때문에~!
(매 끼니 50칼로리 세이브 효과)

 

(신이 님의 다이어트 식단 굿!)

 

 

3. 소스와, 국물을 남깁니다.

국물에는 염분이 가득, 소스에는 기름과 당분, 염분이 가득하답니다.
우리가 먹는 고추장을 생각해보세요. 물엿, 소금이 들어갑니다.
샐러드 드레싱의 경우에도 소스에는 좋은 기름이든 나쁜 기름이든 들어갑니다.
(젖가락으로 털어 먹으면 50~100칼로리를 하루에 줄일 수 있답니다)

(ㅂㅂㅎ 님의 먹방 - 떡볶이 소스 보셔요~! 물엿 덩어리임 ㅠ.ㅠ)

 

 

4. 식후 디저트를 제거하세요.

식후에는 뭘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답니다.
디저트들은 최소 50~100칼로리 이상이죠!
음식점에서 식사 후 나오는 그 어떤 디저트들도 제거를 하면
하루에 가볍게 100칼로리를 날릴 수 있답니다.
(식혜든, 과일이든, 과자든, 케익조각이든, 요거트든...)

 

 

5. 우유나 과일주스나, 탄산음료 대신 물로 바꾸세요.

목마름을 칼로리 있는 음료로 대체하지 마세요.
당분은 혈당을 끌어올려 더 시장하게 만든답니다.
(하루 200칼로리는 가볍게 제거 : 우유나 주스 한 잔에 100칼로리 이상)

 


(173님이 올려주신 별다방 1000칼로리 악마의 음료)

 

 

6. 시럽을 제거하세요.

커피에 시럽이나 프림 빼는거. 다이어트 한다면 기본이죠?
라떼를 매일 드셔보세요. 한달에 1키로 이상 불어납니다. ㅡㅡ; (경험담)
(하루에 가볍게 50~ 200칼로리를 세이브)

 

 

7. 물을 추가하세요. 물은 대사의 촉매!

일어나 한 잔 - 식사 30분 전 한 잔, 식후 3시간 후 한 잔, 자기 전 한 잔.
이뇨 커피 한 잔 당 수분 보충 물 1잔!
물은 칼로리가 0 인 최고의 마이너스 칼로리 푸드입니다. ^^
공복에는 시원한 물도 좋지만, 식사 후 소화중엔 미지근한 물로~!

 

 

8. 비타민 미네랄을 더 보충하세요.

에너지 부스터입니다. 또한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게 돕죠.
이왕이면 천연으로! 왜냐면 합성은 석유화합물. 뭐가 좋겠어요! 

 

 

9. 단백질을 조금 더 챙겨 드세요.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상관 없답니다.
근육도 만들어주지만 포만감이 오래가 덜 먹게 합니다.
아침 단백질 식사는 하루를 배부르게 하죠.
계란을 1개 더 추가해 먹고, 밥이나 빵, 면은 뭉친 계란 사이즈 만큼 줄이세요.

 

 

10. 과식한 다음 끼니는 칼로리 제거 식이법인 '완소법(러오의)' 하세요.

소화가 잘되는 소량의 식사 후에는 다음 끼니를 꼭꼭 챙겨도 좋지만,
치킨, 삼겹살 같이 소화가 더진 지방이 많은 음식을 많이 먹었다면,
다음 끼니는 완소(완전 소화/완전 연소) 하세요.


완소 방법은 비타민 미네랄을 보충하고 한 끼를 건너 뛰거나,

아주 가벼운 채소 스무디를 먹으며 폭식예방, 식사 리듬을 살리는 방법이 있죠.
(과일 한개를 먹는 것 보다 여러 채소를 섞은 스무디가 식이섬유나 미량영양소 보충 면에서 더 좋답니다.)


ㄴ이럴 때 활용 굿인 비타샵 그린스무디

(광고 살짝 : 그린스무디 1포 무료시식 / 구입은 요기서
 카페 직영 비타샵 http://vitashop.co.kr/ )

 

 


# [ 신체 활동 미션 ]

하루 300칼로리는 활동량 늘리기로 없앱니다.

 

1. 운동은 뭐든 한 가지 하세요!

그게 뭐든 좋습니다.
어떤 운동을 하든 몸은 아마 하루에 100칼로리는 더 태우려 할걸요?
걷기든, 낮은 산 등산이든, 에어로빅 댄스든, 타바타든, 길들 짧든...
운동을 통해 100칼로리만 태워도 성공입니다.

(욕심 내서 500칼로리를 태워도 뭐라 않습니다만,
운동이 두려워 포기한다면 아니한만 못하죠.
또한 과한 운동으로 뺀 후 운동량을 유지 못하면 역시, 요요가 옵니다.
무리 마세요~! 갈길이 멉니다)

 

30일 다이어트 챌린지

http://cafe.daum.net/slim/O3T0/1372 
ㄴ 강추 5분 스쿼트 + 점팽잭 동영상.

 

 

2. 오래 앉아 있지 마세요. 사무실에서든, 이동할 때든..

1시간에 3분만 시간 내서 하체 운동을 하세요.
10번 모이면 30분이 됩니다.


스쿼트, 제자리 점프, 점핑잭, 런지 워킹, 계단 오르기, 제자리 달리기...
화장실 가능 시간은 물만 빼지 말고 1분 운동으로 심장을 뛰게해 혈관 청소를 해주세요.
이것으로 하루 200칼로리는 더 소모할 수 있답니다.

 


(스쿼트가 잘~~ 되면 이제 스쿼트 점프를 하세요! 절반만 해도 같은 효과!)

(과체중이거나 무릎이 아플까 걱정이시라면, 의자스쿼트부터 하셔도 됨!)

 

 

이렇게 하루의 식이요법과 활동량 늘리기로
1000칼로리를 더 소모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 일주일을 보내면 체지방 1키로 감소,
한달이면 4키로 감소입니다! ^^

 

어렵지 않죠?

 

가장 어려운 것은 '시작하는 것' 입니다.!

그건 마음 먹기 나름~~ !^^

마음이 잘 안먹어진다면,
이유를 찾아보세요.
살을 빼는게 내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  ^^

 

셀러오.

 




사랑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직장이나 가정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비밀은 무엇일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의 정신 의학자 사이토 시게타가 쓴
"사랑받는 사람들의 9가지 공통점"에 보면
사랑받기의 가장 중요한 비밀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남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사랑받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또 너무 완벽을 추구하지 않고
알맞게 너그러우며
인생을 80퍼센트로 사는 사람에게는
편안함과 여유가 느껴지는데,
이런 사람은 남에게도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과잉 친절이나 배려로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기다릴 줄 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 시간으로 바꾼다.

모임에서 늦는 사람이 있을때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즐거운 이야기로 지루한 시간을
잊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과연 누가 더 인기가 좋을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의지가 된다
무슨 일이 생겼을때
든든한 의논 상대가 되어 주는 사람은
대개 인내심이 강하고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남의 실패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며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이나 나쁜 소문이 돌았을때
퍼뜨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멈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위로나 충고를 할 때에는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한 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말해준다.
사람들은 이런 이에게
신뢰감을 느끼고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높여준다
누구에게나 한가지 좋은 점은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아내고
이를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잘 이해하고 개성이나 약점 까지도
감싸줄 줄 알아야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고화질의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한다면
다른이가 나를 좋아할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백만불 짜리 비밀정보)

돈 안들이고 고질병 치료

                

 

관절염, 알레르기, 천식, 고혈당,  변비, 편두통, 기관지염,

습진, 불면증, 심장과 신장, 폐질환, 백혈병, 뇌막염, 폐경기의

갱년기 현상,  암,  에이즈, 호르몬 이상,  하지정맥,  고혈압, 

당뇨병,  소아마비,  음식 알레르기, 두통

 

잇몸이 내려앉아 이뿌리가 드러나는 것,

 발 뒤꿈치가 갈라지는

 증상,치태, 치석 제거, 입 안이 잘 허는 증상과 잇몸병,

 구강염 등

** 아프던 발목과 발이 훨씬 나아짐 (1달 하신 분)**

 

※이틀에서 2년 사이에 모든 질병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오일 풀링(Oil Pulling)

 

     참기름, 들기름, 해바라기씨 기름을 이용하여 입안을 청결

    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오일을 이용한다. 

    그러나

, 효과 면에서 국산 압축식 참기름, 들기름이 좋다.

 

        탁닛한 스님의 불교 TV방송법문 중에서

인도의 의사 카라치

    는 기름을 이용하여  우리 입안을 깨끗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참기름

혹은 다른 기름 한 수저를 입안에 넣는다.

  혀를 이용하여 입안에서 기름을 순환시킨다.

       혀로 입안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기름이

 닿을 수 있게 움직여 준다.

 기름을  머금고 씹어 주는 것이 좋고

 우물우물 20분이상 한다.

그  20분의 시간은 일종의 대화이고 혀와 몸안에

    있는 모든 기관과의 소통이다.

 

    인도와 중국의 의학에 따르면

혀는 몸 전체의 상태를 나타낸다.

    좋은 의사는 혀만 보고도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

    폐에 해당하는 부분, 소화기관에 해당하는 부분,

 심장에 해당

    하는 부분들이 각각 존재한다.

 

     기름을 꼭꼭 씹듯이 하여 입안을 청결히 하는 동안

 혀와 몸의

    각 기관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

  침을  돌게 하고 침과 기름을

    골고루 섞이게 해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 기름에는 비타민A,E,B,C등의 산화방지제가 들어 있다.

 

     기름을 입안에서 씹고 있는 동안 이런 성분이

 혀의 작용으로

    몸안에 스며들게 된다.

몸의 모든 기관에는 이로운 미생물이

     존재하는데 그 미생물들은 몸에 도움이 되고

이로운 것을 우리

     에게 보낸다. 이때 입과 몸의 각 부분에 있는

 미생물이 입으로

     올라오기 시작하고 세균과 독소들도 함께

 올라와서 기름 속에

     갇히게 된다.

 

        거기에서 자극과 촉진이 일어나는 것이다.

 입안의 세균이

      정화되어 기름 속에 갇히고 독소도 갇힌다.

 여기에 있는 독소

      는 세균 같은 것으로 그것은 몸에 아주 해롭다.

      처음 기름으로 입안을 청결히 하고나면

입 안이 아주 개운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름가글을 통해 입 안에 모인 수 많은

     세균과 독소가 기름에 흡수되어 갇힌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균이 독소들 속에서

 헤엄쳐 다니는것이 보인다.

 특히 10분이나 20분이 지난 후에는 아주 독소

      가 많으므로 삼키면 안 된다.

     

 그 침과 기름이 뒤범벅된 것에는

 독소가 있기 때문이다.

 

        입 안에 있는 미생물의 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인구를 합한것보다 더 많다.

 젖산균이나 연쇄상구균 같은 것이 치석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들은 기름에 잘 반응한다.

 

       그리고 조금씩 기름에 의해 없어질 것이다.

 기름으로 입 안을

      청결히 하는 것을

 1,2주 계속하고 나면 이가 하얗게 되고 더

      단단해진다. 그것이 제일 먼저 느껴지는 변화이다.

 

      이것을 뱉으면 색깔이 우유처럼 하얗다.

 더 이상 노란 색깔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 많은 독소들이 있다.

        그래서 기름으로 입안을 청결히 한 후에는

 물로 여러 번 헹구고 양치해야 한다.

 

             이것을 실천하기 가장 좋은 때는 아침이다.

        어떤 사람들은 잠자기 전에 한 번 더 하기도 한다.

 

          15년 관절염을 앓던 사람이 이 방법으로 치료했고

  많은 항생제로 치유할 수 없던 질병들이

이 방법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이틀에서 2년 사이에 모든 질병이 치유될 수 있다.

 

         이것은 해독의 과정으로서 아주 비폭력적인 방법이고

        거기에는 부작용이 전혀 없다.

        * 인도의 일간지가

 이 방법을 실행한 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89%의 사람들이 최소한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병을 고쳤다고 대답했고,

 11%의 사람들만이 효과가 없었다고 대답 했다.

 

        11%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방법으로 안한 경우이다.

       카라치 박사에 따르면

 그렇게 몸 안에 독소를 배출할 줄 아는

       사람들은 수명이 아주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집에서 하는 Oil  Pulling ! 이처럼  간단한 것도 없다.

       어느 집에서나 있을 법한 오일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 실천 방법 >

    1. 물도 마시지 않은 아침 공복 

 압착식으로 짠 기름을

        한 스푼 입에 넣는다.

(하루중 시간 내어 한 번 이상도 가능)

 

    2. 가글하듯이

(목을 뒤로 젖혀 기름이 넘어가지 않도록 할 것)

        기름이 입안 구석구석 잇몸 사이사이를

 씻도록 소리가 나게

        움직이다가 턱근육이 아프면 씹기도 하고

 혀로 기름을 입 구석구석에 닿도록 한다.

 

    3. 기름이 걸쭉해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상이고 네 몸으로

       부터 온 독소이다.

20분 정도 한 후 그것을 화장실에 뱉어라.

       노르스름하거나 희어졌더라도 놀라지 말라.

 그것은 정상이다.

    4. 따뜻한 물로 두어 번 입을 헹구어

 화장실에 뱉고(물을 오염

       시키니 휴지에 뱉어 버리면 나을 듯)

 나서 양치질을 한다.

 

             < 효 과 >

 

        모든 입(입 안이 잘 허는 분도)과

 잇몸병, 관절염. 알레르기,

       천식,  고혈당, 변비, 편두통, 기관지염, 습진,

 심장과 신장,

       폐질환, 백혈병, 뇌막염, 불면증,

 폐경기 갱년기 현상, 암,

       에이즈, 호르몬 이상, 하지정맥, 고혈압, 당뇨병,

 소아마비, 발뒤꿈치 갈라진 것 등등


 

                                     <사용자들의 후기>

 

     1. 잇몸이 내려앉아 이뿌리가 드러나는 것,

 치석 제거.

     2. 얼굴의 붓기가 빠져 5년 내지 10년은 젊어진 듯.

 

     3. 40년 앓던 닭살(모공각화증)이라는

 피부상태가 21일 한 후

       95%이상 개선되고

 어깨 팔 엉덩이의 관절염과 통증이 완화.

      발바닥 통증도 완화.

 일생의 불면증이 해소되어 수면제 끊음.

 

      2~3주마다 한 번씩 터지는 헤르포스성 구강염도

크게 줄어

      들었고 이가 하얗게 되고 혀가 분홍빛을 띠게 됨.

 

      4. 오일 풀링을 하면 몸에서 가래가 밖으로 나온다.

        가래는 독이다.

 가래를 없애면 몸에 생명, 에너지, 빛이 깃

       든다. 인도 고대 의학법을 58년 동안 경험해서

말할 수 있고

       오일풀링은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치료법이다.

 

     5. 심장병 환자나 천식같은 폐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효과가 매우 좋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

 

   6. Oil Pulling은 마법이고 모든 병에 대한 놀라운 치료법이다

     7. 이는 매우 간단하고 싸고 안전하고 확실한 치료법이다.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한 성스러운 선물이다

 

     8. 변비와 치핵으로 40년동안 고생했는데

오일풀링을 시작한

         지 2주 안에 염증과 치핵이 감소했다.(82세)

 

     9. 플라그가 없어지고 치아는 하얘지고

 매끈하며 깨끗해졌다.

 

    10. 골다공증으로 인해 반투명해지기 시작했던

 이가 덜 투명하고 좀 더 크림색을 띄게 되었다.

머릿결과 피부도 좋아지

        고 음식 알레르기로 인한 20년 두통이 해소.

              이는 하얗게 되었고 무릎관절 통증이 완화

        * (명현반응 - 처음 이틀간은 입 안이 헐 수도 있다)

 

     11. 면역체계가 약해진 딸에게 끔찍한 병들이

 시작되어 단핵구종

(열나고  통증을 느끼며 림프샘이 붓는 병)

이라는  병때문에 고생했는데

 오일풀링을 하고 1주일후부터  확실히

         좋아졌고 피부도 좋아졌다.

 

     12. 유전적인 이유로 치아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오일풀링을하고 좋아졌다.

치과의사도 경과를 보더니 오일풀링에 대해 

        연구해 보고 싶다고 했다.

 

        13. 오일풀링을 시작한 후로는

 내 몸에 있는 굳은 살이 사라

         졌다. 당뇨와 잇몸병도 있었는데

 지금은 잇몸도 튼튼하고 치아도 아프지 않다.

     14. 잇몸은 훨씬 단단해졌고 피가 흐르지 않고

 입안은 깨끗해

          졌다. 발목과 발도 훨씬 나아졌다.

 ( 1달 하신 분)

 

     15. 3~7일 한 후 이와 잇몸, 관절이 좋아졌다.

          만성 무릎통증과 류머티즘염이 있었는데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7-14일째 내 이는 계속 희어

        지고 도자기 보다 더 하얗다.

         잇몸은 더 탄탄해졌고, 더 인상적인 것은

 3년간 고통받은무릎이 나아진 것이다.

 

      *14일째: 이 기적은 정말 놀랍다.

 발과 발가락 힘이 돌아왔다.

 

            26일째: 발꿈치 걷기를 할 수 있다.

  병원에서  MRI도 찍고

       진찰해보니까 좋아졌단다.

 하지만 등쪽에 통증이 아직 있어

       규칙적으로 치료 받고 있다. 

 이제 먹는 약은 줄어 들었다.

 

    * 이젠 그렇게 콜록거리지도 않는다(감기),

 폐도 좋아졌다.

     

 Badarzewska - 소녀의 기도★

 

 

 Badarzewska - 소녀의 기도





세계최고의 예술적인 빌딩들


▼미국, 시카고 스파이럴 타워
a1.bmp

a2.bmp


▼두바이, 레갓타 호텔
a3.bmp

a4.bmp


▼인도, residence antilia
a5.bmp


▼말레이지아, 페낭 글로벌시티 센트럴
a6.bmp

a7.bmp


▼중국, cctv headquarters
a8.bmp

a9.bmp


▼러시아 타워 : 에펠탑의 2배의 높이
a10.bmp

a11.bmp


▼러시아, gazprom headquarters
a12.bmp

a13.bmp


▼두바이, burj dubai
a14.bmp

a15.bmp


▼미국, 아쿠아
a16.bmp








      톨스토이 인생 10훈

      1. 일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성공의 대가입니다.

      2.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3.운동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끊임없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4.독서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5.친절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6.꿈을 꾸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대망을 품는 것입니다

      7.사랑하고 사랑받는데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특권입니다

      8.주위를 살펴보는 데 시간을 내십시오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너무 짧은 하루입니다

      9.웃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입니다

      10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인생의 영원한 투자입니다.
      출처: 서춘웅 목사님의 방/에스더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투와 시기심의 차이  (0) 2014.08.18
어루만짐  (0) 2014.08.14
작은 친절의 결과  (0) 2014.08.03
지워지지 않는 못자국  (0) 2014.07.31
인생을 배우는 마음  (0) 2014.07.27



70年代式 사랑
-김 성훈



약간은 불편하고
조금은 촌스런 시대,

熱力學지식이 부족해서
방안에서도 허연 입서리가
방점처럼 음절을 찍어대 던 시절,

누가 하나 먼저 죽으면
한쪽이 멍하니
밥을 못 먹는 그런 시대,

대신,
아이리시 수녀가 짠
거북이 목 스웨터가
눈만 땡그런 그녀 모습에
너무 잘 어울리던 시대,

태양을 닮은 그녀,
바다에서 온 그녀.






'문학/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는 그런 세상을 살았답니다  (0) 2015.02.12
오직 드릴 것은 사랑 뿐이라  (0) 2014.10.09
칼릴지브란의 시 -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0) 2014.07.19
내 마음의 등대  (0) 2014.07.08
파도 앞에서  (1) 2014.07.05
“하나님의교회, 이단 보도에 4억4천만원 손배청구는 ‘횡포’”

2014/08/07 (목) 11:22 ㆍ추천: 0      

 
▲하나님의교회가 정통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에 자신들의 교주 이름을 넣어 사용하는 모습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구 안상홍 증인회)’가 국민일보의 이단 고발 보도에 4억 4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파장이 커지고 있다.

한국교회언론회(대표 김승동 목사, 이하 언론회)는 7일 논평을 내고 “언론의 기능에 제동을 거는 횡포”라고 비판했다.

국민일보는 지난 4월 18일자, 25일, 5월 2일자에서, 각각 하나님의교회 피해자들이 말하는 포교법을 소개했다. 또 하나님의교회 피해자(하피모)의 증언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신도들에게 1999년 세상 종말이 온다고 하면서도, 이듬해 9월까지 분당지역에 본부 건물 신축을 위한 건설사와의 계약을 한 것을 보도했다. 이에 하나님의교회가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회는 “하나님의교회는 이미 한국교회의 2개 단체와 3개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바 있고, 2004년 대법원에서도 판결에서, ‘사이비 종교로 이단시 되어 왔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며 “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고 재산헌납이나 가출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 피해자들의 증언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언론회는 이들이 정통교회의 단체나 출판사에서 사용하는 책과 문서를 ‘사용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도 지적했다.

언론회는 “찬송가도 표절하여 사용하면서, 심지어는 ‘하나님’ 대신에 그들의 교주였던 안상홍(1985년 사망)의 이름으로 개사하는 등 충분히 이단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교회가 적반하장으로 공익적 차원에서의 이단 관련 보도를 문제 삼고 나온 것은 자신들의 문제점이 더 드러나는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유병언의 구원파 이단 문제가 사회 쟁점이 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를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소송’이라는 수단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언론회는 “이번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유병언과 그를 추종했던 구원파의 문제에서 이단들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폐쇄성과 해악을 끼치는가 하는 것은 증명이 됐다”며 “이 참에 하나님의교회를 통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반종교적, 반사회성이 없는지 샅샅이 살펴, 또 다시 종교를 가장한 이단들의 발호를 발본색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동희 ⓒ 뉴스미션
출처: USA 아멘넷

폴워셔(Paul Washer) 목사의 설교 : 설교 중생인가 결단인가.

 
 

폴워셔(Paul Washer) 목사의 설교 : 설교 중생인가 결단인가.

 

원제 : 중생 vs. 결단주의식 전도의 우상 (Regeneration vs. The Idolatry of Decisional Evangelism)

 

폴 워셔

번역 : 존시백(양무리 카페 회원 ID 명)

 

로마서 <?xml:namespace prefix = st1 />1:16을 보면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어떤 사람들은 사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할 임무를 띤 그가 이런 말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육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그의 문화에서 신봉하는, 거룩하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과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바울은 당시 문화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협상하여 메시지를 문화에 맞게 각색하고 재조합 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저주인 십자가에서 죽은 한 나사렛인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부조리였습니다. 외딴 곳에서 온 이 유대인이 육신을 입은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입을 열어 복음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배척 당하고 조롱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복음을 합당하게 전한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 수치스러움을 덜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살았던 인물들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젊은 플리니(Pliny the Younger)의 기록입니다. 고문 받는 두 노예 소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조사해보니 터무니없고 도착적인 미신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들의 의식은 범죄를 저지르고 십자가라는 죽음의 나무에 달린 한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라고 조롱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참된 종교를 파괴할 역겨운 망상, 무감각하고 미친 미신을 내세운다라고 말합니다.

 

듣기 싫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현대 교회 성장 전략들은 제가 방금 읽은 이 일들을 피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는 자기 부인이 기독교 신앙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아폴로의 신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 계속해서 헛된 망상을 하고, 재판관들의 옳은 판결로 정죄 받고 청춘기에 철에 묶여 최악의 죽음으로 처형된, 망상 속에 죽어간 한 신에 대해 슬퍼하며 노래하도록 내버려두라.

 

고대의 볼테르와 같은 사람이었던 루키아누스는 그의 작품 <페레그리누스의 죽음 De Morte Peregrini>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의 신들을 거부하고 대신 십자가에 달린 궤변가를 숭배하며 그의 법에 따라 사는 가련한 악마들이라고 조롱합니다.

 

오리게네스의 <켈수스에 대항하여 Contral Celsum>에서 켈수스는 선언합니다. 어린 아이를 잠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술 취한 노파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일들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원색적인 복음은 마찬가지로 불쾌하게 여겨집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인본주의 등 우리 문화의 모든 주의들에 대해 복음은 여전히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잠시만 살펴봅시다.

우리는 상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절대적 확신 위에 세워진 신앙 체계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을 칭송하는 위선을 보이면서도 정작 진리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개처형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연인은 타락한 피조물이며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스스로 지옥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점검하고 악을 제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합니다. 진리가 자기 상태를 드러내고 남아 있는 양심을 괴롭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진리, 특히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고 싶어합니다.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며, 그리하여 심지어는 마치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존재하더라도 알 수 없거나 우리 삶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까지 합니다.

 

복음에 대해 다음을 알아야 합니다. 숨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결코 지성이 아니라 의지가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이 무신론에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미워하여 마음에서 진리를 밀어내는 자들이 있으나 무신론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1:21). 달려드는 소를 피하기 위해 모래 속에 머리를 숨긴 사람처럼, 현대인은 양심을 잠재우고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다가올 심판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도덕적 절대성들을 부인합니다.

 

상대주의와 그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일을 복음이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스스로 부과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타락상과 반역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자치권을 거부하고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진리를 끝장내는 신념 체계인 다원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진리일 때, 즉 정반대로 모순되는 진술이 모두 진리라고 명명될 때 진리는 죽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처음 몇 세기 동안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낙인 찍히고 박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것이 여러분이 감옥에 가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둘러싼 문화는 유신론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신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었고 종교는 급속히 발전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신에게 관대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마치 야구 카드처럼 바꾸고 공유했습니다. 기독교가 나타나 손으로 만든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전체 종교 세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저와 그에 대한 숭배를 부인하고, 다른 소위 신들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하였으며 예수님만이 만유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습니다. 온 세상이 그 엄청난 오만함을 보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를 발했습니다.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이 말들, 엄청난 오만함을 보십시오. 똑 같은 시나리오가 오늘날 우리 세계에도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도덕에 관한 견해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모두 다 진리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합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언론매체와 학계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인해 이 견해가 순식간에 다수의 견해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병을 치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환자를 마취시켜 더 이상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잠에서 깨우고, 그런 비논리적 입장에 의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수치입니다. 복음은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을 강요합니다. 두 견해 사이에서 망설이기를 얼마 동안이나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주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바알이 주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복음주의자들 앞에서 해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이 철저히 배타적이라는 이야기를 복음주의자들에게 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일한 길로서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예수님은 한 길(one way)이 아니라 유일한 길(the way)이며, 다른 길들은 전혀 길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좀 더 관용적인 에큐메니컬주의로 한 발짝 조금만 내밀어 정관사 the를 부정관사 a로 바꾼다면 수치스러움이 제거되고 세상과 교회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단순히 야훼는 한 신이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아무런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는 한 구원자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해 되십니까? 우리가 그저 그는 우리의 구원자 이시다 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모든 수치가 제거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너희의 구원자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구원자가 있다. 너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언쟁도 없을 것이다. 너희 길이 그렇다면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우리가 이렇게만 한다면 결코 아무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는 부정되고 세상에는 구세주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인류는 양심과 문화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제단을 모두 다 부숴버리고 종교적 광신자의 열정으로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을 세속주의가 종교적 사고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속주의자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종종 자신의 종교에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광신적이 됩니다.

 

인간은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과 척도와 목표로 만들어 왔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찬양하고, 자존감에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하며, 자아실현을 최고의 선으로 격상시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에 스며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정확히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의 찌꺼기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기 주변의 도덕적 혼돈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사회를(최소한 자신에게 계몽 받지 못한 사회의 한 부분을) 비난합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양심의 증언이 옳을 수도 있다거나 세상에 있는 거의 무한대의 다양한 병폐들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은 수치입니다. 복음이 자신에 대한 망상을 폭로하고 그의 타락상과 범죄를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첫 번째 필수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참된 복음 설교를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복음은 인간들의 잔치를 망쳐놓고, 거짓을 드러내며,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거치는 돌과 미련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수치일 뿐 아니라 수치여야 합니다. 옛 부흥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 거했던 가장 거룩하신 분과 잘 지내지 못한 세상이 어찌 우리와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수치가 되어야 합니다. 수치가 되기 위해 광신자의 무리처럼 될 필요도 없고 온갖 미친 일들을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라는 이 한 가지 선언에 신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메시지에서 수치스러운 것을 제거하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구원의 능력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이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복음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폐하시고, 가장 위대한 지성들의 지능을 좌절시키시며, 모든 사람의 교만을 낮추기로 하셨습니다. 아무 육체도 그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고전1:31) 하려 함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당시의 종교, 철학, 문화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정치적인 전쟁,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진리에 관한 영적 전쟁입니다. 복음은 세상과의 휴전이나 협정을 거부하고 오직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까지도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바울의 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을 오늘날의 사조나 육적인 인간의 욕망에 순응시키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주의해야 합니다.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역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사역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성경적이지 않은 사역들입니다. 자라나는 선교사들인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역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 새로운 문화 사조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성경 해석자나 신학자, 성경 연구가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신성한 문서에 따라 사역과 전도를 하는 것이며 월 스트리트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타락한 세상 혹은 육적인 교인들에게 더 호소력 있게 만들기 위해 복음의 거치는 것에 물을 타거나 복음의 혁신적 요구를 부드럽게 만들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들은 복음을 재포장하고, 그 거치는 것을 제거하며, 육적인 사람에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복음의 날을 무디게 함으로써 복음을 좀 더 구도자 친화적(seeker- friendly)으로 만들려는 전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seeker-friendly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으시는 분(seeker)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와 메시지를 순응시키려거든 하나님께 순응시킵시다. 교회와 사역을 세우려거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과 그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소망 위에 세웁시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맞섭시다. 우리는 땅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설교에 앞서 한 가지 더 지적하겠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논증했듯 바울의 육신에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온갖 이유가 있었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믿을 수 없는 메시지이며 세상의 지혜에게는 바보 같은 소리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 우리의 메시지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를 잊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은 너무나 억지스럽습니다. 복음이 로마 제국 전체에 퍼졌다는 것이 복음의 초자연적 성격을 증명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구약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리스 철학이나 이교의 미신에 뿌리 내린 이방인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에 대한 메시지를 믿도록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는 의심스러운 환경, 즉 로마 제국에서 가장 멸시 받는 지역 중 하나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처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직업은 목수였고, 공식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순회 종교 교사였으나 복음은 그가 그리스 철학자와 고대 로마의 현인들의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가난하였고 머리 둘 곳도 없었으나 복음은 그가 삼 년 동안 말씀으로 수 천명을 먹이셨고, 온갖 질병을 고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신성모독자이자 국가의 적으로서 예루살렘 바깥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복음은 그의 죽음이 모든 인류 역사의 중추적 사건이며 죄로부터 구원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복음은 그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자기를 따르는 많은 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40일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복음은 자기 백성들에게 미친 신성모독자로 거절 당하고 국가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힘 당한 한 가난한 유대인 목수가 이제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주의 주이자 왕의 왕이시며, 시저를 포함하여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꿇어야 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의 시대에 이 메시지를 믿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아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누가 이런 메시지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로마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바깥과 세상의 온 나라까지 결코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이나 설교자의 유창함 또는 변증 능력에 의지했다면 그 메시지는 태어나자마자 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교전략들과 월 스트리트에서 빌어온 똑똑한 마케팅 계획들은 복음이라는 어리석은 거치는 돌의 진보를 조금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틴 헹겔은 십자가의 오랜 수치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의 한 분 선재하신 아들, 창조시의 중보자이며 세상의 구원자인 그 분이 최근 외딴 갈릴리에 유대인이라는 미천한 민족으로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십자가에서 평범한 범죄자로서의 죽음을 맞았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미쳤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이 진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에게 격려와 경고를 함께 줍니다. 첫째, 단순하고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 세상에서 끊임없이 복음의 진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격려를 줍니다. 둘째, 휘황찬란함, 달변, 똑똑한 교회성장전략을 통해 복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거짓말에 굴복하지 말라는 경고를 줍니다. 이런 것들은 회심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일어나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 찬 절망을 품고 복음을 진보시키는 성경적 방법, 즉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믿고 영광스러워하는 메시지를 담대하고 명확하게 선포하는 일에만 자신을 투신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불신앙과 회의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희망 없는 신화라고 조롱 당하고, 사람들은 우리를 편협한 고집쟁이나 종교적 책략에 속아넘어간 저능한 희생자들로 묘사합니다. 그런 공격은 종종 우리를 방어적으로 만들고 우리는 변증을 통해 반격하고, 우리의 입장과 적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저는 변증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훈련이 매우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능력은 여전히 복음의 선포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도록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그리고 사람의 지혜나 지적인 전문기술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역사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이 믿을 수 없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롭고 강력한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믿기는 고사하고 우리 말을 들어주기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의 선포가 얼마나 희망 없는 일인지요! 선포자가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인지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전도는 바보 같은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37:1~10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저는 방금 사람의 회심을 묘사하였습니다. 선포하러 나갈 때면 언제나 여러분은 에스겔입니다. 언제나 죽은 뼈들의 골짜기에 서서 그것들이 매우 말랐음을 봅니다. 에스겔의 시대에는 생명 없는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이 뼈들의 골수는 완전히 말라버려 단지 먼지와 같을 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술도, 어떤 설득도, 어떤 능력도,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지금 그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전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죽었을 뿐 아니라 죄에 메여 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생명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눈 멀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모든 조각을 제한하고 결박하려고 능력껏 모든 일을 합니다. 양심이 더 이상 그들에게 말하지 않도록 정지시키기 위해 모든 능력을 다 합니다.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영원토록 마귀의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가서 전도 기술을 배워 사용해 보십시오. 기나긴 강단 초청을 하고, 온갖 종류의 감상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그들의 열정과 감정을 조종해 보십시오. 당신에게 남는 것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된 한 무리의 사람들뿐일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골짜기 한가운데서 에스겔과 같은 사람이 한 발짝 걸어 나와 하나님께서 복 주기로 약속하신 유일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모집할 때, 아니면 후보자를 면접할 때 우리는 한 가지를 바랍니다. 사역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고 세상은 무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회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자신이 전쟁에 나가면서 몇 개의 무기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무기들-복음의 선포, 중보기도, 자아 사랑에 대한 희생적 죽음-이 강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복음이 진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육신의 수단에 의지하면 할수록, 교회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 위한 최신의 방법을 찾아 성장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현대 사회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스스로를 원수들 사이에 있는 바보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교회는 예수 놀이공원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한다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해서 그들을 붙잡아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하는 기본적인 초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표준적인 초청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당신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고 싶습니까? 기도할 때 그분이 들어오셨습니까? 당신은 진지했나요?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것은 현대 복음주의계에서 너무나 신성한 금송아지로 여겨지기 때문에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로 인해 마음이 상합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적인 언어들도 아니며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임을 확실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구가 없이는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만 이것은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상태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전도의 현장은 교회 건물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참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회심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 입니다. 폴 형제, 우리에겐 많은 교회들이 있어요 라고들 말합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름다운 마당 위에 세워진 수많은 멋진 벽돌 건물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에서 떠났으며 그 문에는 이가봇(영광이 없음이라는 히브리어)이라고 씌어있습니다.

 

이 초청문구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인생과 결혼, 재정, 자존감을 교정합니다. 죄인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그들이 자아 중심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의 일을 하고 싶어하며, 자신의 꿈을 갖고 있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걸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가 말합니다.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구요? 환상적이군요. 나도 나를 사랑해요! 이건 놀라워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한단 말이죠? 그건 불가능한 말 같네요. 누가 그런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구요? 나도 내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어요! 내가 예수를 받아들이면 그가 내 모든 놀라운 계획들을 도와줄 것이고 나는 당장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단 말이죠? 맞아요!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선택하겠어요. 당신은 그 두 가지를 가졌나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폴 형제, 우리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 , 당신 참 고약하네요. 비꼬기만 하는군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이 나라가 실제론 그렇지 않으면서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심지어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고 난 후에도 이어서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은 이런 초청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적절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게 하고 난 후에는 마치 교황처럼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그런 종교적 거짓말을 믿습니다. 훗날 그들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그들은 듣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종교적 거짓말이 그토록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이 질문은 종종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제시됩니다. 다음과 같이요. 어이, 당신은 우리 모두가 죄인인 걸 알지요? 그렇죠? 만일 그 사람이 ,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 질문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입니다. , 가고 싶어요. 그럼 당신의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시겠어요? 단지 5분이면 됩니다. 겨우 5분이라구요? ,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9).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5분이면 되나요? 5분입니다. 좋아요.

 

그 사람이 기도하거나 혹은 전도자에게 인도 받아 기도하고 난 후에는 그는 자신이 진지했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셨다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며, 만일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들이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보다는 과거 오래 전에 했던 결단의 진실성에 더 의지해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종종 몇 분 동안의 상담 후에 그들은 즉각 교회 앞에 세워져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 받습니다. 제가 틀렸다고 말하시겠지요. 저는 그런 장면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단체 상담을 위해 훈련 받은 상담자들에게 넘겨집니다. 초청이 진행되는 동안 오분 내지 십분 동안 이야기하고 즉각 교회 앞에 세워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회심 상담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만일 그들이 성장하지 않거나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면 다시 데려옵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그 날로 돌아가 그들의 결단의 진지성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구원을 의심하며 목사를 찾아온 사람들을 그 날로 다시 데리고 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한 일이 있나요? . 진지했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마귀의 방해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결코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자도가 부족하거나 육적인 그리스도인 교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간주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수련회에서는 그곳에서 결신한 사람의 60%가 한 번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병폐에 대해 그들은 제자훈련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훈련시키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제자도를 행해야 합니다. 과거 70년대에는 개인적 제자도가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교회의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제자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회심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간 이유는 한 번도 우리에게 속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회심에 5분을 사용하고는 염소를 제자훈련 시켜 양을 만드느라 50년을 보냅니다.

 

제가 분을 잘 내는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화가 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정치가가 문제가 아니라 복음주의 전도자가 문제입니다.

 

열매가 없다는 사실과 극도의 세속성으로 인해 그들의 회심이 혹시라도 의심을 받게 되면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기도의 진실성과 종교 지도자들의 확증에 기대어 자기들의 절망적인 구원을 방어합니다. 만일 상담을 한다면 침체 상태로부터 돌이켜 다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회심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결코 시험 받지도, 의심 받지도 않습니다.

 

어린이 전도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방학 중 성경학교의 98%에는 제 자녀를 참가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고 이어서 너희 중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사탄 숭배의 영향을 받아 등에 사탄의 상징을 인쇄한 가죽 재킷을 입고 뒷줄에 앉아 있는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아이들은 일어나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너희 중에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니? 저요! 이 기도를 할 사람? 저요. 그리고는 침례를 받으러 줄줄이 끌려가는데 많은 경우 그들이 그 시간을 정말로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티장에서와 같은 옷을 입힙니다. 그들이 부모에게 반항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들은 실제로 반항하며 커다란 부도덕과 죄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25세나 30세쯤 되었을 때 도덕적인 삶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어그러진 일들을 바로잡기로 결심하고는 삶을 재헌신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길 지속합니다. 그들의 도덕성은 자기 양심을 흐리게 하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도덕성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길을 떠나 방황하며 여자 친구와 자고, 마약을 하거나 팔고, 다른 모든 일들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의 부모나 목사가 찾아와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살기를 그만둬야 해. 다음과 같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 그리고 잠시 동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믿음에서 돌아섰구나. 그것은 네가 한 번도 그리스도를 몰랐으며 처음부터 사악한 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거라! 이것이 차이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현대판 주문을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선언으로 대치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만물을 유지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실 분입니다. 출애굽기에서의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34:6-7).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계시 중 하나입니다. 모세는 바위 사이에 숨었고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모세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모세의 반응을 보십시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34:8).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형태의 신을 제시한다면 그들은 분명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 신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십시오.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들의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야 함을 말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입니까?

 

다른 질문을 살펴봅시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복음을 들었으니 한 때 사랑했던 죄를 이제는 미워하십니까? 마귀에게 가서 자신이 죄인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렇지. 그것도 아주 대단한 죄인이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요.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 그들이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마치 나는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영접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죄인이예요 라고 하는 말도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요 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는 검을 사용하셔서 그 말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수 년 전 제가 설교할 때 그곳에는 한 여성이 인도하는 모든 면에서 준비된 상담자들이 있었는데 이 여성은 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울음이 시작해 전체 강당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울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기도 전에 한 소녀가 달려나와 울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자들을 바라보자 그 인도자는 나를 쳐다보며 마치 뭔가 좀 해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만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설교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한 후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왔고 저는 그녀가 저에게 따지려 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밑으로 내려가 그녀 곁에 서자 뭔가 좀 해보세요 라고 했고 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는 뭔가 조치를 취하려 했고 저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자매님, 하나님의 법궤에 손 대지 마십시오. 죄에 대해 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찢으시는 영혼을 위로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세요.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하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기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방식대로 여러분도 죄를 바라보기 시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죄를 미워하는 그런 신성한 태도의 씨앗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죄를 자랑하던 것이 부끄러움으로 변화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무언가를 행하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몇 사람 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이해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십니까?여야 합니다. 정치 이론과 선거는 모두다 유토피아에 관한 것입니다. 모두 다 사람이 살기에 멋진 곳을 만드는 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죄인들을 향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인생에 무언가를 행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 내내 하나님을 모르는 체했고, 미워했고, 냉담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십니까? 그분을 따르고, 찾고, 알고,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자 하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까?

 

몇몇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면 이어서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당신 마음에 들어오시라고 기도로 구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공식 혹은 언어가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마가복음 1장은 다음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마음에 나를 영접할 사람이 누구인가?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거기 손 드셨습니다. 거기 손 드셨습니다. 지금 앞으로 나오실 분이 계십니까? 모두 앞으로 나오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기도를 합시다.

 

폴 형제, 지금 비웃고 있군요? , 그렇습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런 방법을 통해 구원 받았단 말입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가 아니라 그런 방법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폴 형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들이 있잖아요. 좋습니다. 한 번 살펴봅시다. 영접하는 자…” (1:12). 정말로 이 구절이 영접기도를 의미한다고 믿고 계십니까? 정말로 이 구절이 기도하기가 편치 않다면 나를 따라서 기도하십시오 라는 의미라고 믿고 계십니까? 그런 의미입니까?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한 전도자가 심지어 기도를 따라 하는 것 조차도 원치 않는 사람을 향해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이 말씀만 드리지요. 내가 말할 테니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거든 내 손을 꽉 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세요.

 

영접한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신학이라는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계속되는 교제에 자신의 인생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17:3). 자기 삶의 실체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혹은 그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순간, 믿음의 순간에 그들은 자기 삶을 예수님께 엽니다. 그들이 특정 수준의 진실성을 가지고 영접 기도를 했다는 것은 참된 증거가 전혀 아닙니다. 마음은 사악하여 속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마음의 진실성의 정도를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신약성경 전체에 증거가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어 구원에 이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믿은 증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점점 더 그분과의 교제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방주사를 놓듯이 복음으로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초청합니다. 만일 그 순간에 그들이 참되게 회개하고 믿는다면 그들은 그 순간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는 기도의 진실성 이상의 것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삶 속에서 성화를 통해 하나님이 끊임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9-10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중심 혹은 핵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좌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남은 생애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마음에 믿으라는 말을 우리는 마음에 그가 들어오시도록 요청하시겠습니까?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마음에 믿으라는 말은 당신 존재의 중심 혹은 핵심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비밀의 방을 열고 그를 들어오시라고 요청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증언이자 모든 건전한 복음주의적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시인[고백]하는 것을 참된 회심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전체를 통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바울이 여기서는 왜 시인하는 것을 추가할까요? 바울은 오직 믿음의 교리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공적인 시인이 마음으로 믿은 것을 보여주는 증거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말과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시인할 것입니다. 이것은 회심 했다고 추정되는 그 밤에 교회 앞에 서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일입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입니다. 제가 말과 행실이라는 말을 추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나를 주로 시인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은혜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제 말은 구원에 관한 잃어버린 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이라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소생[중생]시키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십니다. 그가 새로운 피조물처럼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이 중생의 증거입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 참으로 믿은 사람의 삶의 특징은 말과 행실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적인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믿음이 진정한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듣고 그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문화적인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우리가 1세기 로마 제국의 20여명 모인 교회라고 합시다. 로마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 중 일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양과 같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20명이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고 가정합시다. 로마의 어떤 건물을 짓느라 일하고 있고, 아무 문제 없는 아름다운 날의 점심 시간입니다. 우리는 봄 날의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북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을 들어보니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향로와 불이 얹어진 작은 제단을 가져오고 있고 우리는 겁에 질립니다. 모든 건설 인부들이 그들의 발 앞에 모여드는데 대부분은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군인들이 우리 모두를 불러모으며 이리 와서 시저에게 경의를 표하라라고 말합니다. 불신자인 첫 번째 인부가 나가 약간의 향을 취해 불에 던지고 시저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최대한 행복한 표정으로 물러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나 드디어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첫 번째 사람의 차례가 됩니다. 그가 걸어나가고 군인은 시저에게 경의를 표하라라고 하며 창으로 찌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그리고는 죽습니다. 다음 사람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고 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람.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 참으로 믿는다면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이라는 그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진리를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짤막한 기도를 하면, 당신이 진지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부르는 순간 그는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증거는 영접기도를 하는 인생의 한 순간 그들이 진지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구원의 증거는 참된 회개가 있는가? 믿음이 있는가? 복음의 은혜가 그들의 삶과 성장에 지속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신칭의의 증거는 성령님을 통한 계속되는 성화의 사역입니다.

 

3:20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첫째, 이 구절은 복음 초청의 문맥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는 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정도에서 벗어난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문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전도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 형제, 나도 알아요. 하지만 효과가 있다구요.

 

둘째, 이 구절이 명확하게 회심이나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에게 만일 그들이 마음을 열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데 이 구절을 사용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반면에 회심과 마음을 여는 것 모두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행16:14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왜 이 구절은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까?

 

셋째, 단순히 삶을 열도록 초청하는 대신 죄인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그 순간 주님이 무엇을 하실는지 살펴보도록 사랑으로 돕는 것 또한 합당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 복음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셨습니까? 성경의 진리와 제자도의 요구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점점 더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당신이 들은 일들에 대해 반응하고, 당신의 죄된 삶 가운데에서 자아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뢰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까?

 

넷째, 설사 우리가 이 구절을 전도에 사용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삶을 그리스도께 열었다는 증거는 마찬가지로 지속되는 교제일 것입니다. 문을 열면 그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참으로 그리스도께 열었다는 증거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로 인해 그리스도와 아무런 교제도 없고, 경건의 소망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도 그들이 한 때 교회에서 예수님을 기도로 초청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건 사실입니다.

 

이제 45초 남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알라스카 남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들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25명 정도가 모여 있는 설교단에 제가 올라갔을 때 어떤 키 큰 사람이 걸어 들어왔는데 그는 제가 만난 가장 슬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일 앞줄에 앉았습니다. 저는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고 난 후 전 아래로 내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봉투를 하나 꺼내어 저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지금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3주 안에 죽는다는군요.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숲 속에서 소를 방목하며 살았습니다. 거기 가려면 산을 넘거나 수상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가본 일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은 일도 없구요.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습니다. 내 평생 아무 것도 두려워해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죽을 것이라니 두렵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난 45분간 저는 복음, 즉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전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셨습니까? .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이 순간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 형제, 나는 이해했어요. 누구라도 이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이제 이해했으니 기도를 한다. 그게 다인가요? 저는 회개와 믿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 후 그는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해가 안가요. 저는 말했습니다. 보세요. 당신이 살 날은 3주가 남았고, 저는 내일 아침 떠나야 합니다. 제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당신이 죽을 때까지 3주간 함께 있겠습니다. 당신이 구원 받거나, 아니면 죽어서 지옥에 가겠지요. 이제 시작합시다.

 

주목하십시오. 전도자가 되는 것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상담해 주십시오. 결단하는 이가 많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저 결단일 뿐 회심이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레이븐힐이 종종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수 많은 교회들에서 한 번만 설교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성경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그리스도가 형상화 될 때까지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를 계속해 살펴보았습니다.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읽고, 또 한 시간이 갔습니다. 시간이 늦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머물겠습니다. 이 사람은 죽어갑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인 요3:16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다리에 제 성경과 그의 큰 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구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여러 번 읽지 않았나요.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의 생명이 여기 달려 있습니다. 그 큰 노인은 아래를 내려보며 계속 했습니다. 좋아요. 하나님이세상을이처럼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나는 구원 받았어.나는 구원 받았어내 모든 죄가 사라졌어! 내 손이깨끗해. 나에겐 영생이 있어영생이 있어나는 천국에 갈꺼야!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그걸 아시나요? 전에 이 구절을 읽어본 일이 없단 말이요?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차이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저에게 제가 복음전도에 반대하냐고 묻습니다.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 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는 식의 복음전도에 반대합니다. 그것을 증오합니다. 그런 전도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작은 표딱지를 붙들고는 관청에 앉아 면허갱신을 위해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표를 붙들고 천국에 가십시오. 우리가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저는 설교할 때 강단 초청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 이제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마음을 만지신다면 저에게 나오십시오. 우리는 여기에 밤새 앉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어떻게 할까요? , 당신은 구원 받았어요. 구원 받았어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으세요. 만일 오늘 밤 당신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구원을 향해 계속해서 회개할 것이고 회개 가운데 자라날 것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믿었다면 계속해서 믿을 것입니다. 이건 예방주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10년 뒤 경건치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가 복음을 전할 때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걱정 마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지 않소. 설교자 양반, 내 걱정 마쇼. 나 옛날에 다 했어. 뭘 했다는 말인가요? 예방 주사를 맞았단 말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해 수고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식사하러 가게 하십시오. 수고하고 기도하십시오. 복음의 다양한 약속들과 다양한 경고들을 가지고 그들과 상담하십시오. 저는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마치 진드기 한 마리가 세상이라는 바위를 향해 머리를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이 결단으로 인도되는 것에 신물이 나고 지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결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습니다. 어떤 복음주의 지도자가 그렇게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거의 완전하게 복음을 듣는 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그만 하십시오

 

<양무리 마을>

[출처] 폴워셔(Paul Washer) 목사의 설교 : 설교중생인가 결단인가


미국 대통령 바위얼굴이 조각되기 까지 Mountrushmore.jpg

1923년 사우스 다코타주의 역사학자 로빈슨은, 로키산맥의 블랙힐스

(Black Hills)의 연봉 바위에 서부개척에 공로가 많은 몇몇 인물들의
       초상을 조각할 것을 착안하고,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지역 연방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과
의견을 모으고 인물 선정을 논의한 끝에, 다음 네 명의 대통령을 조각
하기로 하고 당시의 유명한 조각가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
       초청했다.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미국 초대대통령으로 위대한 미국의 탄생에 공헌한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독립선언문을 기안했고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승리로 미연방을 살렸고 흑인 노예제도를
혁파한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서부의 자연보호에 공이 컸고 파나마 운하구축 등 미국의 지위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대통령
rushmore+%25281%2529.JPG
 
죠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
러햄 링컨
조각가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
images?q=tbn:ANd9GcSXLhQNNDGmDzXVCXsnCEFIN2PeES5PZXrnU-UzCvpku2dtq_KK Mount-Rushmore-Gutzon-Borglum-carving-1.jpg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 1871년 아이다호 출신으로 샌프란
시스코와 프랑스 파리에서 조각 공부를한 사람이다. 1925년 보글럼은
적당한 바위산을 찾아 답사에 나섰다.
길도없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천막을 치고 밤을 지새면서 공사에 알맞는
바위산을 찾아 2주간을 헤멘 끝에, 15일째로 사우스 다코타주와 와이오밍주 사이 로키산맥중에 솟아 있는 블랙힐스(Black Hills)거대한 바위산 밑에 도달한 보글럼은, 정상의 바위상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산에 오를 준비를 했으나 전문장비도 없이 500 피트가 넘는 절벽산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갖은 고생끝에 정상에 발을 딛고 조사한 후에 이곳에 조각하기로 결심했다.
Six_Grandfathers.jpg
 
보글럼이 이곳에 조각하기로 결심한 러시모어 바위산(Mt,Rushmore)
20121105_MT_RUSHMORE_1.jpg
 
★작업의 준비
우선 3마일 떨어져 있는 키스톤(Keystone)에서 무거운 권양기(Winch) 케이블,
착암기 등 작업에 필요한 물품들을 운반해야 할 도로가 필요했다.
다행히 역사적인 일에 감동한 키스톤 마을 사람들이 대거 참여해 도로공사에 나섰
으며,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나 어린이들까지 자발적으로 참가해 원시적인 도로 를 산밑에까지 만들었다.
이 때 만든 계단 수가 760개나 되며 수직으로 올라가다시피 하는 계단이 많아서
한 번 올라가는데 기력이 다 소진될 정도로 힘이 들었다고 한다.
권양기를 정상에 설치하고 연결된 케이블로 작업도구와 폭파에 사용되는 다이나
마이트 등이 운반됐으나, 계단을 이용하는 인부들이 지쳐서 작업능률이 오르지 않자 나중엔 권양기 케이블에 부착한 상자를 타고 오르내리게 했다.
케이블에 매달려 조각 그네모양의 의자를 케이블에 매달고 인부들이 타고 상하좌우로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작업도중 실수로 떨어지지 않게 안전벨트를 장치했으며,
지시 사항을 전달하게 인부들이나 권양기 운전사가 잘 보이는 곳에 소위 콜보이를 배치하여 양쪽의 말과 신호를 전달하는 방법을 썼다.
2ca5c4152b8cacbdb399f9ad68c3e624.jpg MORU-5531.jpg
 
대통령의 호소로 전국적인 모금운동
작업자체의 어려움과 자금조달 문제등이 있어 1927 8월에 드디어
조각작업이 시작 되었다. 당시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러시모어 산을 '미국민의 역사적인 기념지역' 으로 정하고 모든 국민이
적극 돕자고 호소하여, 노인으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전국민이 모금
       운동에 참여해 오늘날의 이 위대한 조각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2대에 걸쳐 완성
네개의 얼굴 윤곽이 완성단계에 들어서고 팔과 손 그리고 입은 옷 등의
작업에 들어갈 무렵인 1942년 봄, 어느날 갑자기 보글럼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돌발적인 보글럼의 사망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처음부터 아버지
옆에서 조수 역할을 한 아들이 감독직을 맡아 시작 14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미국 여행가이드' 참조>
작업 모습들
mount-rushmore-construction-gizmodo.jpg

mt-rushmore-seventy-years-old-and-weve-got-so-L-5UFN8L.jpeg

mount-rushmore-rooseveltmt-rushmore-on-tumblr-jcm1ao4q.jpg

Frame+from+Making+Mt+Rushmore+Abraham+Lincoln+under+construction+document+Gutzon+Borglum+designer+sculptor.jpg

Making+Faces+on+Mount+Rushmore16.jpeg
 
작업하는 인부의 모습을 보면 조각상 얼굴의 크기가 짐작이 된다;
Thomas+Jefferson+at+Mount+Rushmore+under+construction%2c+1939.jpg

mount-rushmore-under-construction.png

rushmore2.jpg
 
★완공 후의 모습들
 
rushmore.jpg
 
깎아내린 돌 부스러기만 50만 톤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Mount_Rushmore.jpg

MtRushmore.jpg
 
일조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인다. 루스벨트의 수염만 해도 20피트가 넘는다.
 
3399157643_01fb4093f9.jpg

Mount_Rushmore.jpg

Rushmore.jpg
 
위의 큰 사진들은 망원 렌즈에 의해 촬영된 것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여운 놈들  (0) 2014.08.12
세계최고의 예술적인 빌딩들  (0) 2014.08.09
억대를 호가하는 분재들!  (0) 2014.08.05
아름답고 신비한 궁전들  (0) 2014.07.28
월든호수  (0) 2014.07.25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을 통과한 사명  (0) 2014.09.01
하나님과의 인터뷰  (0) 2014.08.18
뒤 늦은 후회  (1) 2014.07.19
예수의 말을 들으라  (0) 2014.07.18
주제: 때를 아는 감각  (0) 2014.07.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