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세습금지의 신학적 근거.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머리말: 세습금지법 통과는 한국교회 신뢰 회복의 신호탄

감리교가 지난주(2012년 9월 25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입법의회에서 국내 개신교 교단들 중 최초로 목회자 가족의 교회 대물림을 제도적으로 막는 ‘세습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부모가 담임자로 있는 교회에 그의 자녀 또는 자녀의 배우자는 연속해서 동일 교회의 담임자로 파송할 수 없다. 부모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 그의 자녀 또는 자녀의 배우자는 담임자로 파송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조선일보, 2012.9.26. A23). 무기명 투표 결과 총 투표자 390명 중 찬성 245명 반대 138명, 기권 7명으로 통과됐다(KBS TV9시 보도, 2012. 9.25). 새 교단법은 ‘부모와 자녀나 사위나 며느리가 연속해서 한 교회를 담임할 수 없다’고 명시(明示)한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에서는 앞으로 목사인 아버지가 자녀나 그 배우자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교회 세습’이 원천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62.8%로 찬성으로 신설된 개정안은 2012년 9월 28일 공포되어 시행에 들어갔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에서는 어느 교단 총회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았다. 감리교가 개정한 세습금지법은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 모든 교단에 적용되어야 한다. 필자는 학자요 장로교 목사로서 이러한 개정안에 찬성하고 환영하면서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성경적 근거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는 야훼의 언약궤를 메며 야훼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야훼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구별받았다. 레위 지파는 그 형제 중에서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야훼가 그의 기업이었다(신 10:8~9). 구약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 나오고, 대대로 세습되어 야훼를 섬기는 직분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땅이나 재산을 갖지 않고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 어느 지파에서나 나올 수 있고, 소명받기 전의 직업도 다양하다. 그리고 예언자가 세습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가문의 세습으로 이루어졌다. 그 집안에 태어난 자식이 불알이 터졌거나 한쪽 눈알이 빠졌거나 팔이 병신이거나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하지 않는 한 남자는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다른 직업은 가질 수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구약의 제사장이다.

교회 세습의 합리화 근거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세습에서 찾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목사는 세습이 아니고 소명직(召命職)이다. 주님이 불러서 사명을 주시고 양무리를 치도록 맡기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목회자라고 그 아들이 반드시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세습직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사(祭司) 계급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어부, 세리 등을 불러 제자로 삼았다. 사도직도 그 자식들에게 세습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의 제자들도 그 직을 세습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에는 세습이 없었다. 구약성경의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도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살 수 있게 했으나 분깃이나 기업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회 세습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는 ‘축복권’만 아니라, 돈과 명예와 권력(교권)까지 한꺼번에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타락의 징조가 되는 것이다. 교회 세습을 구약의 제사장직에서 찾으려는 발상은 전혀 개신교적이 아니다.

2. 교의학적 근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권한은 세습될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것을 세우거나 개척한 목회자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제사장은 없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로마 천주교가 말하는 교회 직제의 제사장 신분을 보편화하였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다. 종교개혁 교회는 예수 대속(代贖)의 피를 믿고 그의 은혜를 힘입어 보좌에 나아가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더 이상 혈육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자녀의 신분이 혈통으로 계승되지 않고 믿음으로 계승된다고 말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유대인이나 목회자의 혈통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 아니라, 믿음이 조건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는 혈육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신앙고백하는 자가 받는다. 혈육이 아니라 믿음이 핵심이다.(마 16:17-19). 교회의 목회권은 교권적으로나 혈육으로 전(傳)해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소명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혈육적인 세습이 정당화될 수 없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하). 목회권은 담임목사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 가운데 소명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3. 교회사적 근거

로마 천주교 주교좌성당 세습(cathedral transmission)은 중세교회사에서 이미 실패한 제도였다. 중세에 천주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난 현상이 주교좌성당의 세습이었다. 당시 성행하던 주교좌성당의 세습 행위를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바로 성직자 독신주의였다. 주교좌성당을 두고 이루어지는 세습으로 인해 중세교회는 성직매매와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다. 급기야 클뤼니(Cluny)수도원의 일원으로 수도회 개혁운동을 주도한, 청렴한 수도승 힐데브란트(Hildebrand)가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는 그레고리 7세(Pop Gregorius VII, 1073-1085)로서 교회개혁 청사진을 담은 27개의 교황령을 반포했다. 그 주요 내용은 성직매매 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敍任)권 금지, 사제 결혼 금지였다. 교황은 성당 세습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성직자 독신주의를 전격적으로 교회에 끌어들였다. 1074년 그레고리 7세의 성직자 독신주의 선언은 교회의 세습 행위를 막으려는 특단의 조치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까지 교회는 수도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직자들이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고, 권력과 명예와 돈이 모이는 주교좌성당은 중세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교좌성당 세습은 교회의 화합을 해치고, 사교회화(私敎會化)하여, 공교회성(公敎會性)을 약화시켰다. 11세기 그레고리 7세 개혁 이후, 성직자는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게 되었으며 독신으로 생활해야 했다. 12세기 중엽(1110년)에는 종교법에서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을 법으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성직자는 성무에 종사하여야 하고, 묵상과 기도에 전념해야 하기에 무소유자로서 세속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이처럼 주교좌성당 세습의 차단을 위하여 성직자 결혼금지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한국에서 개신교가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의 역사를 밟아온 것은 초기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초기 개신교 목사들은 교회 건물을 올리기 전에 학교와 병원·복지시설부터 세웠다. 이런 헌신(獻身)이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존경과 신임의 반석(盤石)이 됐다. 그러나 신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외형은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초창기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이 희석되기 시작했다. 대형 교회 목사직은 돈과 명예·권력이 따르는 자리가 됐다. 일부 목사는 은퇴 후에도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교회를 아들이나 사위에게 대물림하기에 이르렀다. ‘목회 세습’과 ‘교회 세습’은 구분되어야 한다. 목회 세습이란 목회자의 자녀가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는 것이며, 교회 세습이란 목회자가 자녀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 세습은 재산권과 관련이 없고 신앙과 정신적 품성만을 물러 받는 것이기에 좋은 전통이 될 수 있으나, 교회 세습은 재산권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는 악습이 되는 것이다.

4. 사회윤리적 근거

교회 세습은 담임목사 ‘사교회화’(私敎會化)의 전형이다. 세습은 공적 기관인 교회를 개인이나 가족의 사유물로 여기는 것으로, 신학적·성경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교회 세습은 정의 수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 사회, 경제 영역에서 공정한 경쟁원칙을 무너뜨린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담임목사의 사유재산화한다. 대형교회들은 담임목사의 절대적 카리스마, 교회의 목표를 복음의 전파보다 성장에 두고 있는 번영주의,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 등의 특징으로 대표된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은 인사권, 재정 등 모든 권한이 담임목사에게 귀속하는 구조를 바탕으로 단순히 목사직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권한(재산권, 인사권 등)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세습의 문제는 종교적인 영역인 동시에 사회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회 세습은 이대로 가면 기독교가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여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규제 기구는 없다. 개교회가 스스로 판단해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단의 헌법이나 장정에 세습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 공교회적으로는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에 감리교 총회에서 통과된 세습금지법이다. 이것도 완벽한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세습에 사욕(私慾)을 가진 목사는 교단을 탈퇴해서라도 그 자식에게 교회를 물러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자신이 올바른 교회론과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의 교회 세습에는 교회론과 가치관의 심각한 왜곡이 있다. 목회자의 교회론과 사회윤리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한다.

5. 시대적 근거

개신교계에서는 1997년 ‘대형 교회 세습 1호’로 불려온 서울 충현교회 김창인(95) 원로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하면서, 강남 K감리교회 등을 비롯한 다른 교회 세습의 ‘물꼬’를 텄다. 지금까지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강북 K감리교회, 강남 E감리교회, M감리교회, 인천 S감리교회 등 세습이 유행해 왔고, 장로교회에는 변칙 세습과 목회자 퇴직금 경쟁이 유행하고 있다. 감리교회의 경우 서울을 비롯한 인천, 경기 등에 수천 명 모이는 교회는 다수가 세습되어 왔다. 3천 명에서 6천 명 정도의 교인이 모이는 감리교회들은 교회 세습을 결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2012년 6월 14일 김창인 목사가 “한국 교회와 하나님 앞에 저의 크나큰 잘못을 회개합니다. 충현교회 성도 가슴에 씻기 어려운 아픔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들을 무리하게 담임목사로 세운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조선일보 6월 14일자 A2면 보도〉라고 고백한 것 등을 계기로 교회 세습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져 왔다. 교회 세습은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 신뢰를 잃은 핵심 원인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받게 되었고,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가 기독교적 가치를 전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고난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가 반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그런 부끄러운 교회가 되었다.

세습 결정을 하는 이들 교회들은 하나같이 교인들이 원하고 장로들을 비롯한 교회 중직들이 원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가 이미 부자간 대물림으로 인해 갈등과 시험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장로교 대교단 소속 교회들은 한 교회에서 30-40년씩 목회를 하고 은퇴하는 목사들이 퇴직위로금을 수십 억씩 경쟁적으로 챙겨간다고 한다(대형교회 세습관행 끊어야 한국교회 미래있다. 교회연합신문, 2012.9.23. 3면). 이런 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 교회에도 없는 일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정신, 곧 시대정신이 있다. 기독교가 이를 반영하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다. 실질적으로 부모의 교회를 이어받아 목회를 잘하는 목사도 있다. 하지만 사회의 요구가 그렇고, 교회의 신뢰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이번에 세습금지법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사회의 요구”다. 즉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교회 세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리교 총회에서 세습금지법이 전격적으로 통과되자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감리교, 개신교 역사를 한 次元 높이 끌어올렸다”고 보도했다(조선일보, 2012.9.26.일자). 한겨레신문도 이를 보도하면서 이것은 “개신교 교단의 쇄신운동”이라고 평가했다(감리교 ‘교회세습’ 안한다. 한겨레|입력2012.09.25 21:30|수정2012.09.25 23:50). “감리교단이 가족간 교회 대물림을 끊기로 스스로 발의(發議)해 결정한 것은 한국 교회의 자기 정화(淨化) 능력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다. 감리교단이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개신교 신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담당할 긍정적 역할에 아직도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도 반가운 소식이다”(조선일보, 2012.9.26.일자). 세습금지법 통과와 함께 이제 한국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소망의 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교단의 ‘교회 대물림 금지’에 대해 “교회의 자기 개혁과 쇄신을 바라는 사회의 요구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라고 한 감신대 교수들의 지지 성명은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뜻있는 모든 사람의 정직한 소감이기도 하다

맺음말: 세습 금지는 시대의 요청이며 시민의 정서, 모든 개신교단이 이에 동참해야

감리교 세습금지법의 전격적인 통과는 한국 개신교사에 획을 긋는 신선한 쾌거다. 감리교단은 규모에서 소속 교회 6200개, 신도 수 160만 명으로 한국 개신교 3대 교단 중 하나다. 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교단에 이어 셋째로 큰 교단으로 꼽힌다. 이런 감리교의 교회 세습 반대 추진은 개신교계 전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감리교의 세습금지법 통과는 한국교회가 자정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기쁜 징표가 아닐 수 없다.

감리교는 지난 4년간 교단의 수장인 ‘감독회장’ 자리 등을 둘러싼 법정 다툼이 이어지면서 교단 행정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다. 지난 6월에야 서울 연회 감독을 지낸 김기택 감독이 법원 명령에 따라 임시 감독회장 업무를 시작했고, 교단 총회도 열리면서 행정 기능이 되살아났다. 그동안 흙탕물을 뒤집어 썼으나 이번을 계기로 감리교가 다시 살아났고, 한국 개신교의 자정(自淨)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장로교를 비롯한 타교단이 응답할 차례다. 한국교회는 여태까지 개교회주의로 나가면서 사회적 이목을 피하고 다녔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회로부터 도덕적 윤리적 지탄을 받았다. 필자가 사이비 이단을 사회윤리적으로 비판하면 안티기독교는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그 비판을 우리에게 돌리곤 하였다. 교회법은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한국교회가 지금 시대정신을 거역하면 교회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사회가 바라는 건전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장로교 통합, 합동, 기장, 고신 교단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출처: 김동호 목사의 face book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기다림 님


통일교 문선명 교주 장남의 부인이었던 홍난숙씨의 고백!

[통일교]문선명의 전 며느리 홍난숙씨 탈출기
(월간 <교회와 신앙> 1999년 1월호)

<< 통일교 문선명 교주 장남의 부인이었던 홍난숙씨의 고백 >>

▼ 인터뷰 동영상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zIqZklMi8WE&feature=player_embedded

지난 해(98년) 8월 중순, 전 미국에 충격을 준 영문 서적이 하나 나왔다. 문선명 씨의 전 자부 홍난숙 씨가 쓴 <In the shadow of the Moons, 문씨네 그늘 아래서 - 문선명 목사 집에서의 나의 삶>(240쪽. 리틀 브라운사)이다. 이를 번역 요약한 내용을 여기 싣는다. 참고로, 문선명 씨는 한국 정통교단에서 정식 목사 안수를 받은 바 없으나, 편의상 저자가 쓴 '문 목사'란 용어를 그대로 쓴다.<편집자 주>

요란한 삐삐 소리에 선잠을 깼다. 해가 벌써 뜨고 있다는 사실이 날 겁나게 한다. 창문으로 비껴든 햇빛이 아기방의 푸른 무늬 벽지 위에 노닐고 있다. 신훈이의 요람이 놓인 마루방 밖으로 동트는 언덕의 윤곽을 가름할 수 있다. 바로 이 방에서 1985년 8월 8일 내가 첫잠을 잤었다. 삐삐를 울린 사람은 매들린이다. 황급히 손목시계를 내려다 본 나는 오전 5시 약속에 늦어졌음을 깨달았다. 요새 내가 왜 이다지 정신이 없을까? 몇 달 동안 서로 은밀히 만나 신중히 계획해온 것을 하루 아침에 망쳐 놓으려고 하는가?

나는 진홍빛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를 맨발로 건너 남편 침실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밤새 코카인을 흡입한 남편의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지금 나의 유일한 희망은 남편 문효진(문선명의 아들)의 마약 삼매경이 오늘 아침 또 한 번 건망증을 갖다주는 것이다. 그는 몇 달째 가구와 옷, 장난감 등이 이 저택 2층 방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불과 한 주 전, 효진은 눈이 충혈된 채 신준이의, 방 한 구석에 있던 IBM 컴퓨터가 없어진 것을 알아보았다. 다섯 아이들 중 맏인 열두 살 난 딸 신준이는 이미 너무도 태연하게 나의 공모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구중 궁궐 속처럼 음모로 가득한 문씨 댁 삶을 통해 아이들 모두는 비밀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아빠, 컴퓨터가 고장 나서 고쳐야 돼요.”
신준이가 서슴없이 대답하자, 효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기 방’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미 오래 전 내가 그곳을 버렸기 때문이다. 거긴 그의 단독 마약 소굴이요, 카펫 위에 온통 담배꽁초와 빈 테킬라 병이 굴러다니고, 포르노 비디오가 끝없이 돌아가는 곳이다. 그가 마약을 끊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을 발견한 지난 가을부터, 되도록 거기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써왔다. 코카인을 변기 속에 흘려 버리려는 나를 그가 심하게 구타하기에, 뱃속 아기를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주먹질을 해 대면서 욕실 바닥에 흩어진 흰 가루를 줍도록 했다. 그후 그는 임신 7개월 된 여성을 구타한 몰지각한 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메시아’의 아들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고 되레 날 훈계하는 것이었다.

뉴욕 시 북쪽 40분 거리에 있는 어빙턴의 외딴 곳 18에이커 짜리 저택이 바로 ‘무니들’로 알려진 통일교의 세계본부 겸 창시자의 집이다. 이른바 ‘이스트 가든’이라고 불리는 이 저택은, 문 목사가 자기의 ‘신적 사명’과 지상제국의 상속자인 맏아들의 소녀 신부로 삼고자 나를 한국에서 부른 이래, 14년간 나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열심이던 순진한 15살 여고생에 불과했던 나는 이제 자신의 삶을 되찾을 준비가 된 어엿한 여성이다. 나는 오늘 탈출하려고 한다. 결혼 생활에서 얻은 유일한 성스러운 소산인 내 자녀들을 데리고, 나를 매질하던 그 남자와 그렇게 만든 가짜 메시아 - 하나님이 지상 대리인으로 결코 택하지 않았을 문선명과 그의 아들 - 을 뒤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문 목사'를 '지금 내가 아는 사기꾼'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오로지 그런 깨달음이 하나님께 대한 내 신앙을 끝내 흔들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과정이다.  문은 하나님을 저버렸지만,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으셨다. 어린 여성을 성적 쾌락의 장난감 내지 분노의 배출구로만 삼아온 남편의 손아귀 속에서 나를 위로한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셨다. 잠든 아이들과 몇 주 동안 극비리에 챙겨온 가방들을 돌아보는 지금도 하나님은 날 인도하고 계신다. 문선명 목사에 대한 신앙은 지난 29년간 내 삶의 중심이 됐었지만, 이제 깨어진 그 믿음은 내 모성애에 견줄 바조차 못된다. 독기 서리고 밀폐된 ‘참가족’ 세계 속에서 오직 아이들만이 유일한 내 기쁨이었다. 나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도망해야만 한다. 

당초 내가 큰 아이들에게 떠날 생각을 알리자, 그것이 곧 여태 즐겨온 호화로운 삶의 끝장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뒤에 남겠다는 아이가 없었다. 앞으로는 대저택도, 운전기사도, 올림픽 사이즈 풀장도, 당구장도, 승마 레슨도, 사립학교와 일본어 선생도, 최고급 휴가도 없는데 말이다. 문씨 집 바깥 담 저편에서는 아이들이 ‘메시아의 참 자녀들’이라는 경배를 받지 않게 된다. 아이들에게 절하고 섬길 기회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신도들도 없을 것이다.

“우린 이제 엄마랑 작은 집에서 살래요.” 맏딸의 말은 내 소박한 꿈을 그대로 전해 받은 것이었다. 의혹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온 집안이 조용해지자 나는 저택 안의 홀과 정든 방들을 오가며 기도와 흐느낌에 잠겼다. 눈을 감으면 지난 몇달 동안 나를 사로잡던 의문이 또 떠오른다. 과연 나는 올바른 짓을 하고있나? 떠나는 것이 정말 하나님 뜻인가 아니면 실패의 징조인가? 왜 남편이 날 사랑하게끔 만들지 못했나? 왜 그를 바꾸지 못했을까? 그냥 이대로 머물러 기도하면서, 아들이 자라면 언젠가 통일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선명 목사의 생활 궤도 밖으로 떠나는 것은 곧 영적으로 버려짐을 뜻하는데, 신체적 위험도 동시에 따르지 않을까? 내가 도망가면 통일교가 날 잠재우려고 추적해 오지 않을까? 차라리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 효진이 나와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던 것이 몇 번이던가. 마약이나 술을 먹고 기분 좋으면 살인 흉내도 예사로 하지 않던가. 교회 돈으로 산 진짜 총으로 나나 누구든 방해하는 자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효진의 뻔뻔스런 행위가 심지어 평소 무관심한 아버지 문 목사까지도 화나게 만든 후로 지금껏 나는 차근차근히 준비해 왔다. 네 남편의 잘못은 다 너 때문이라며 아내 자격이 없다고 문 목사가 오히려 나에게 책임을 물을 때,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도주계획에 최선을 기울였다. 결심하자마자 돈부터 챙겼고, 아이들 교육비로 따로 떼어둔 돈을 은행에서 찾았다. 시어머니(한학자)가 정기적으로 건네준 용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다. 아기 출생 기념식 때 교회서 입으라고 시어머니가 예거 부티크에서 사다준 수천 달러 짜리 옷도 그 이튿날 현금으로 바꿔왔다. 문씨네를 이미 떠나 따로 살고 있는 나의 오빠와 문 목사 맏딸인 내 올케의 도움으로 매사추세츠에 적당한 집도 하나 봐 두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날 때 부러워하던 내가 몇 년 후 같은 신세가 되는 셈이다.

과거 문의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다가 교회를 이탈한 나의 부모들을 염려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염려스러웠다. 부모님은 오빠로부터 내가 탈출했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의 도움이 늘 고마웠다. 어릴 적 서로 의견이 안맞는 일이 있을 때도 오빠는 늘 나를 도왔다. 그는 우리의 탈출 후 보호 방법을 알려 줄 변호사를 미리 찾아냈고, 탈출 당일부터 변호사의 조언이 도움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화요일에 떠난 것도, 매사추세츠 카운티 가정법원이 매주 수요일 학대받는 여성들의 배우자 접근금지령 신청을 청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5년간 아이들을 돌봐준 구미코 부부를 보호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그녀는 이트 가든 정원사인 남편과 함께 헌신적인 일본계 통일교도였다. 구미코는 몇 주 동안 내가 짐싸는 것을 보고도 침묵했다. 아무도 감히 참가족의 일원에게 질문하는 무례를 행치 못하지만, 그녀는 수년간 나의 고통을 목격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떠난 것을 발견한 문 목사로부터 그녀가 추궁당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떠나기 약 한 달 전, 구미코에게 남편과 둘이 어디서 살고 싶냐고 묻자, 남편 부모가 계신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구미코는 시부모가 늙고 병든 데다 남편은 독자다.

이스트 가든에서는 ‘어머님’ 한학자 씨의 허락 없이 어떤 인사 변경도 있을 수 없었다. 문 목사보다 23살이나 젊은 그녀는 보좌 배후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녀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내 부족을 고자질함으로써 승진하려는 아첨꾼들에게 늘 둘러싸였기 때문에, 나와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적은 총애나마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베이비시터를 두기보다는 나 혼자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어머님’에게 통할 듯 싶었다. ‘아버님’도 스태프 진이 너무 비대해 먹여 살리는 비용이 비싸다고 불평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베이비시터와 정원사를 한 명 덜 씀으로써 절약된다는 생각에 어머님은 기꺼이 내게 찬동했고, 피터 김 보좌관을 통해 여비를 주라고까지 당부했다. 그래서 구미코 부부는 우리가 떠나기 이틀 전에 고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기를 돌봐준 또 한 여성은 이스트 가든의 경비원 남자와 한국에서 곧 결혼하게끔 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10월까지 충분히 한국 집에 머물다가 오라고 그녀에게 일렀다. 문 목사가 2,400만 달러급 독채 호화 저택과 집회소를 지은 이래, 우리는 시누이 인진 씨네 가족과 함께 19개 방 짜리 맨션을 함께 써왔다. 행운인지 하나님의 도움인지, 인진 씨네는 우리가 떠나기 전 주말에 어딘가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 우리가 떠날 기미를 인진 씨가 알아냈더라도 심각히 여기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애들을 데리고 잠시 사라짐으로써 효진을 겁주려나 보다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문씨 집안에서 내가 영 떠날 줄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실은 내가 그러리라 생각할 만큼 날 충분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14년간 문씨네 한 가운데 살면서 내가 뭘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물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명령하고, 나는 순종했을 따름이다. 그런 무관심이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신훈이를 깨웠다. 바로 오늘 아침, 난 지 9개월 되는 착한 애다. 아기는 내가 짧은 소매 잠바를 입히고 누나와 형들을 깨울 동안 울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매들린을 만나고 올 동안 조용히 옷을 입고 있도록 일렀다. 매들린 프레토리어스는 작년에 나의 첫 친구가 된 여성이다.

그녀는 삐삐로 연락해 가며 나의 탈주를 돕고 있다. 매들린은 10년 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 바다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에게 홀려 통일교도가 됐다. 집에서 멀리 떠나 있는 젊은이에게 접근하여, 처음에 기분 좋은 말을 나누다가 교회 얘기로 들어가, 집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통일교의 상투적인 포교술이다. 매들린은 지난 3년간 효진을 도와 통일교 녹음설비가 있는 맨해튼센터 스튜디오에서일해 왔다. 그러면서 그의 마약남용과 불같은 성미를 지켜본 그녀는 내가 탈출계획을 털어놓자, 자진해서 돕겠다고 말했다. 물론 효진이 알면 그녀에게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이미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해 왔다. 수 주 전 우리 둘이 부엌에서 차를 마시며 몰래 얘기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와 날더러 위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매들린에겐 집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는, 만일 내가 교인 중에 누구와 사귄다면 내 손가락을 모두 분질러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매들린을 만나러 갈 때, 나는 정원사와 경비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델리 가게 앞에 기다리고 서 있는 매들린을 몰래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집안 도처에 널린 감시카메라는 거의 매일 의자나 램프, 박스나 가방 등으로 가렸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구를 재배열하고 어머님 대신, 또 다른 문씨 저택인 벨베디어로 입던 옷을 간수하러 간다고 하면 아무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새 삶을 시작할 때 쓸 가구를 보관하려고 시내에 임대해 둔 임시보관소에 가곤 했다. 오늘은 거기서 나의 오빠와 매들린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빙턴과 태리타운 거리는 고요했다. 무더운 여름철에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를 관광하러 온 여행객들이 오갔다. 나는 미리 약속해 둔 골목에서 매들린을 만나 그녀를 담요 아래 가린 채 집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짐을 하나씩 매들린의 차에 다 싣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오면, 오빠를 만나 매사추세츠로 떠날 참이었다. 마지막 짐을 차에 실은 후, 매들린과 나는 아이들을 모두 맨발로 데리고 몰래 아빠 침실을 지나 중앙 계단을 통해 정문 현관으로 나왔다. 짐이 빼곡한 차에 아이들을 하나씩 밀어 넣은 매들린은 자신도 좌석에 비집고 들어가, 아이들과 자신을 감춰줄 담요를 뒤집어썼다. 나는 느릅나무 고목이 늘어선 길게 굽은 드라이브 길로 차를 천천히 몰아 집 대문으로 빠져나가면서, 새로 온 경비원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스트 가든을 나와 서니사이드 레인으로 접어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월간<교회와신앙> 99년 1월호)
김성훈 / <교회와신앙> 미주 특파원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


1. 기도(祈禱, prayer)

 

1) 사전적인 의미 :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2) 성경적인 의미 :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형태(잠15:8;대하7:14;엡6:18;약5:15;딤전2:1;골4:2).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 하는 것이다(마6:9-15,7:7,엡6:18).

 

2. '하다'의 용법

1) 동사 : 사람이나 동물, 물체 따위가 행동이나 작용을 이루다.

2) 보조동사 : 앞말의 행동을 시키거나 앞말이 뜻하는 상태가 되도록 함을 나타내는 말

따라서  '기도하다' 는 '하나님께 빌다'됩니다.

 

3. '드리다'의 용법

 1) 동사 : ① ‘주다'(물건 따위를 남에게 건네어 가지거나 누리게 하다)의 높임말.

              ② 윗사람에게 그 사람을 높여 말이나 인사, 결의, 축하 따위를 하다.

  2) 보조동사 : ‘주다'(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함을 나타내는 말)의 높임말.

따라서 '기도드리다'는  '하나님께 빌어 드리다' 됩니다.

 

* 2, '하다'의 용법과 3. ''드리다'의 용법에 따르면,

기도자가 하나님께 <빌다>가 되어야 하는데,

기도자가 하나님께 <빌어 드리다>가 되어 잘못된 어법입니다.

'드리다'를 쓰려면 '기도'를 목적어로 바꾸어 <기도를 드리다>로 표현해야 바른 어법이 됩니다.

 

* 비슷한 용례로

'예배하다', '예배드리다'를 혼용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예배드리다'는 틀린 어법이며, '드리다'로 쓰려면 '예배를 드리다'로 사용하여야 바른 어법입니다.

 

4. 성경에서의 용법

 

1) '기도하다'가 합당한 증거

[눅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삼상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 '기도를 드리다'가 합당한 증거

[행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시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대하33:13]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5. 결론

 

'드리다'는 '주다'의 높임말입니다.

'주다'는 [동사]로  

'물건 따위를 남에게 건네어 가지거나 누리게 하다.'

'남에게 어떤 자격이나 권리, 점수 따위를 가지게 하다.'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물건도 아니고, 자격이나 권리, 점수도 아닙니다.

어떤 요구 사항을 말로, 마음으로 '비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는 '주다'라는 동사와 결합할 수 없기에 '주다'의 높임말인 '드리다'와 결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드립니다', '기도드렸습니다'는 잘못된 어법이고 표현입니다.

꼭 '드리다'를 사용코자 한다면 '기도'에 ''을 붙여 목적어로 만들어 '기도 드립니다'로 표현해야 합니다.

목적어가 되면 행위 또는 의식 전체를 의미하여 문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드리다'의 용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 것은 그것이 높임말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상대편을 존중한다는 동기는 좋으나 형태가 없는 것을 '드립니다'는 오히려 결례가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드렸습니다"와 같은 과거 형태가 아닌,

"기도합니다"와 같은 현재 형태로 끝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을 때까지 그 기도는 지속적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 자료

 

1) 기도응답의 기준(基準)

①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대로 행하신다(엡3:11;행4:28)

② 의와 공의가 기초이다(시89:14;대하7:14;요9:31;히1:8).

 

2) 기도 응답의 유형(類型)

① 그래(yes) : 즉시 응답하신다(마8:3,14:30-31;민11;2;삼하24;25;대하30:20;사38;5)

② 안 되겠다(no) :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거절하신다(애3;8;고후12:87-9

③ 기다려(wait) : 적절한 때에 주신다(행1:7;요11:6,43)

④ 보라(see) : 다른 방법으로 주신다(마20:23;고전12:7-10).

 

3) 기도 응답을 막는 요소(要素)

① 구하지 않음으로 해서(약4:2)

② 잘못 구함으로 해서(약4:3)

③ 죄를 지어서(사59:1,2)

④ 죄를 마음에 품어서(시66:18)

⑤ 받을 것을 의심해서(약1:5-7)

⑥ 불순종으로(슥7:13).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선택되다(Being Chosen)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하여 붙잡히셨습니다 아니 선택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택된 분이십니다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은 그의 가장 귀한 아들을 세상의 구세주가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 즉 독특한 방법으로 알려지고 사랑받으며 또 발탁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가 선택된다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은 선택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되었음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경쟁도 적대 관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신 것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고 독특하며,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선택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함께 기뻐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 중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용어에 대한 고찰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정당한 고찰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특히 신앙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으로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참과 거짓이 분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입되는 다양한 용어들은 특히 더욱 주의가 요구된다. 그 중에 한 문장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한국 교회 강단과 공동체 안에서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 혹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어떤 연유로 “기름 부으심”이란 단어가 도입되었는지 경로에 대해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되고 있다. ‘기름 부으심’이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기름 부으심의 의미 및 주체에 대한 고려가 없이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한 때 “성령 충만”이란 단어로 논의가 깊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 충만’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단어 사용이 전이된 것으로 평가된다. 성령 충만이란 단어가 면밀한 검토함으로 적합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럴 즈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등장한 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시는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고찰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성경의 용례는 없다. 성경의 용례에는 “주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씀한다. 구약에서 “주”는 “여호와”를 지칭하며, 신약에서 “주”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이 세례를 주는 성경 이해는 없으며, 성령이 기름을 부어 주는 것 또한 없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임한 종말론적 사건이다.


  “기름부음”은 ‘anointment’이다. 문자적으로 이해될 때는 ‘oil’로 이해될 수 있지만, ‘anointing’으로 이해해야 한다. 칼빈은 anointed를 눅 2:26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성령 세례를 의미로 주석하였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메시야의 사역으로 모든 세대에게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서는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신성하고 선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구별'된다. 성별(聖別)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물체인 경우도 많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이 거룩한 장소에 임하여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보증하고 상징하기 위해서 제단·제기(祭器)·신전·무기·옷가지에도 기름을 붓는다. 고대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중병에 걸린 사람과 노인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을 성사(聖事)로 시행해왔다.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기름부음을 임종의식으로 여겨왔는데, 대개는 죽음이 임박해서 숨이 끊어지려 할 때 비로소 그 의식을 행했으며, 따라서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Daum 백과사전)” 기름 부음이란 용어가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케되는 것이 정통 신앙인데, 사제의 기름 부음으로 성별케하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름 부음’에 대해서 칼빈은 메시야 직임과 주의 백성됨의 직임으로 제시하는데,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별(聖別)이나 치유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칼빈은 중세교회의 그릇된 성경 용례를 말씀에 합당하게 제시해주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되는 용례가 성별(聖別), 치유, 능력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성경에서 전혀 사용된 적이 없는 비성경적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다른 용례를 만들어 단어를 정착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인 용어 사용임으로 단어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

  만약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사용하려 한다면 성경대로 “주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유사한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단어 사용이 된다.

개혁주의마을

사탄의 도구가 된 교황제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만일 계급제도가 교회를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가를 알고 싶다면 로마천주교의 계급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로마 천주교에서 교황의 명령은 보통 사람들, 즉 단순히 그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모든 신도들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이런 제도는 사탄이 교회를 아주 쉽게 무너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곧 사탄이 한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다면 그는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천주교의 교황제도는 실제로 역사 속에서 사단의 손 안에 들린 치명적이며 위험스러운 무기가 되고 말았다. 이 제도로 말미암은 최악의 상황은 교황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좌를 찬탈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분명한 규칙들이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분명한 규칙들이 있는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자들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교회의 왕으로 통치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3:8).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엡 4:15,16; 5:23).

 그러나 교황이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교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미사가 주의 만찬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제사의 충분성을 부인하면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를 희생제사로 다시 드려지게 하는 패역을 저지르고 말았다.

 교황제도 아래에서 그들은 마리아를 우상으로 만들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 중재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중보자로 불리게 되었다. 또 마리아는 죄가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마리아의 승천이 기념되었다. 그밖에도 성인숭배, 고해성사, 선행의 교리, 성골숭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사는 수도원 생활 등등 온갖 미신적인 행위들이 교회를 더럽혔다.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교황의 힘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리고 교황 통치의 무거운 짐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이시고, 유일하신 감독이시고, 당신의 피로 사신 유일한 교회의 머리이시다.

 기독교개혁신보/개혁주의마을

       

      세상을 위한 양식이 되기 

      (Becoming Food For The World)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요약하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으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축복을 받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어

      이 세상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택되시고, 축복받으시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양식이 되신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바로 그 신성한 여행 길입니다

       

      우리가 빵을 들어 축복하고 떼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주는 것은 우리가 평생에

      그리스도의 생애를 좇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또한 예수님과 같이 선택되고, 축복받고,

      깨어진 사람으로서의 생을 살아서

      세상의 양식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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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칼럼] 거짓말을 파는 청춘 멘토들

잘 나가는 자들이 거짓말 더 해…언제고 인생이 쉬웠던 적 없었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거리에는 역겨운 장면도 많다.

“이 차에는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귀도 그렇다.

제 자식을 가지고 남들에게 어쩌라는 말인지…, 짜증을 돋운다.

“이 차에는 광어와 도다리가 타고 있어요”라는 수족관 차량의 패러디가 차라리 애교스럽다.

“영어 잘하는 내 자식이 왜 국내 영업부에 배치되었는지”를 인사부장에게 따지는 신입사원의 부모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살려면 이혼하라든가, 그 월급이면 집에서 용돈 줄 테니 그냥 놀아라는 철없는 부모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과보호 신드롬이 넘쳐난다.

안철수 교수가 청춘 콘서트로 인기를 끌고 지방선거에서 2040이 집단투표를 던진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언론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소위 청춘들의 분노에 동정공감한다는 기사가 지면을 도배질한다.

청춘 콘서트 복제품도 대유행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바야흐로 청춘이 위로받는 시대다.

이런 엉터리 콘서트일수록 가짜 멘토들이 목청을 돋운다.

가짜들은 일자리가 없어 청년 백수가 늘어나는 것이나 자기 집 갖기 어려운 주택사정이나 다락같이

높은 등록금이 모두 기성세대의 잘못이라며 송구스러워한다.

세상의 거친 풍파도 어른들의 잘못이고 결혼을 늦추는 것이나 저출산도 모두 사회의 잘못이라며 어쩔 줄을 몰라한다.

가짜 멘토들은 철부지 부모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이 대신해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대부분 거짓말이다.

“우리가 대학 졸업할 땐 일자리가 널렸었다”는 말부터가 지어낸 말이다.

당연하지만 주로 명문대를 졸업한 정치인이나 의사나 교수 출신이라는 멘토들이 이런 거짓말을 한다.

어느 때고 명문대 졸업자에게 일자리가 없어본 적이 없고 대부분 청춘들에게는 일자리가 충분히 있어본 적이 없다. 20,30년 전에는 일자리가 더 적었다.

아니 일자리 자체가 없었다.

독일 파견 광부나 간호사 모집에는 대졸자들이 몰렸다.

(물론 비명문대다) 이들은 남의 나라 지하 2000m 막장에서 땀을 흘렸고

간호사들은 병원에서 백인들의 사체를 씻었다.

70년대 초에는 월남에 나가 피값으로 돈을 벌었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는 20만명 이상의 청춘들이 숨막히는 중동의 공사장에서 일했다.

그게 삶의 진면목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어 잘나갔던 인간들이

지금 멘토랍시고 있지도 않은 말을 허황하게 지어내면서 애들에게 설레발을 치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었던 시대는 386이 대학을 졸업하던 80년대 후반 잠시였다.

386은 아직 구조조정 대상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세상을 우습게 보고 있다.

이게 소위 세대 문제의 본질이다.

일자리는 정부 아닌 기업이 만든다는 것도 이들 가짜 멘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지금도 중소기업 현장에는 사람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취직 안 된다고 남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런 일자리는 다른 사람 세금으로 먹고산다.

잘나가는 멘토라는 인간들은 대부분 정부가 주는 자격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 일을 너무 쉽게 말한다.

1%에게 세금 더 걷어 무얼 해보자고 너무도 쉽게 말하는 인간들을 강도라고 부르지 않으면 달리 부를 적당한 말이 없다.

남의 돈 가볍게 아는 이들도 청춘들에게 마약을 먹이는 자들이다.

2030 세대가 절망 끝에 결혼도 안 하고 집도 구하기 어려워졌단 말도 지어낸 말이다.

언제고 자기 집 갖고 결혼한 청춘은 없다.

반지하방에 세들어 살아도 뜨거운 사랑으로 좋은 것이 젊음이다.

자기 집 구입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70년대 평균 30년에서 지금은 14년으로 내려왔다.

왜 새파란 청춘이 강남에 제 집을 갖고 있어야 하나.

아니 그런 세상은 있어 본 적이 없다.

그게 오히려 비정상 아닌가.

과도한 물질주의가 청춘을 망치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하지 않나.

좋은 대학 나와 교수며 의사며 정치인이요 종교인으로 출세깨나 한 자들이

지금 청년들에게 인기까지 얻으려고 거짓말을 해대는 모습이 실로 역겹다.

지식의 마약상일 뿐이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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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 이승구 교수님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1)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 교회가 좀더 개혁신학이 지향하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서,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인 벨직 신앙 고백서에 대한 강해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7년 개신교회의 순교자로 소천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 s, 1522-67)가 1561년에 당시에 스페인의 천주교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프란덜스(Flanders)와 네덜란드(Netherlands)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6년 안트베르프(Antwerp) 대회(Reformed Synod), 1571년 엠덴(Emden) 대회, 1574년 도르트 대회(Dort Synod)와 1581년 미델부르그(Middelburg) 대회에서 수납하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때인 1619년에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도르트 전국 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하여, 지금까지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1 조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de Natura Dei)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순하시고 영적인 한 존재가 계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영원하시고, 불가해적이시며[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으시며], 보이지 아니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모든 선의 넘쳐흐르는 원천이시라는 것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칼빈과 그의 학생이었던 앙뜨안느 드 라 로셰 샨디우(Antione de la Roche Chandieu)가 작성하여 1559년 파리 대회(a synod at Paris)에서 개정되어 받아들여진 프랑스 신앙 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제 1 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하며 단순한 본질을 가지신, 영적이고,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며, 무한하시고, 불가해적이며(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으시고), 이루 말할 수 없으며(ineffable),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전히 선하시고, 온전히 의로우시며, 온전히 자비로우신 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을 "단순하시고 영적인 유일하신 존재"(one only simple and spiritual Being)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신 6:4; 왕상 8:60; 고전 8:6; 딤전 2:5;). 그런데 그 유일하신, 하나이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십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인 얼굴, 눈, 코, 입, 등, 손, 손가락, 발 등을 가지고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일종의 의인법적 표현, 정확히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을 볼 때에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이렇게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20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고 말한 것에 의존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 전서 1:17과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이시니"라고 말하는 디모데 전서 6:16의 말씀도 같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지 아니하시고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해당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을 뵈옴(visio Dei)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디모데전서의 말씀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월필드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뵌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당신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뵌 이는 그 자신이 피조물로서, 더구나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는 무자격함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조인을 받아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감격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6], p. 491).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이렇게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더욱 더 분명히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단순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은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할 때의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본질이 복합적이지(compositeness) 않으시다, 따라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지거나 할 수 없다(free from division into parts)는 뜻에서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 신학이 늘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 없게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의 단순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 속성이, 그 절대적 온전성 때문에, 그의 존재 전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each of the properties of God, because of their absolute perfection, is identical with His Being). 이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벨직 고백서의 내용에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체를 생각해 보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알아 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한 기쁨의 근원이 되듯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묵상 자체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 (2)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 하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초의 사상을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3)

공유적 속성들(1)

지난번까지 논의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아주 독특하게 하나님께서만 가지신 속성들입니다. 이번에 생각하려는 속성들도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마는, 어떤 제한된 의미에서는 피조물인 우리도 그런 속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선배들은 이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공유적'이라는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공유적 속성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절대적으로, 가장 뛰어나게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피조물 수준에서 반영하는 정도로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공유적 속성들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공유적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이런 용어를 써 왔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공유적, 비공유적이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항상 그만한 차이가, 천지의 차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개혁파의 후렴 어귀의 하나인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지혜로우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는" 것입니다(고전 1:25). 따라서 하나님께서만이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와 과정과 관련해서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과정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가는 과정을 경탄하며 보아야 합니다. 창조와 섭리와 구속 사역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십시다. 그는 의 자체이시고, 그에게는 불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본성이 의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법(eternal law), 또는 영원법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그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주장하고 나가시는 데서도 당신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공의를 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창 18:25).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온 세상에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선하십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그저 선한 사람, 선한 선생님으로 보고 인간적인 한도 내에서 아주 선하다고 하는 뜻의 "선한 선생님이여"라는 말에 대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선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 수준에서, 즉 신성의 수준에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fons omnium bonum)이십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약 1:1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체적으로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은혜로우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선의 원천이시라는 이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항상 옳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우리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도 할 수 있고 (시73편, 렘 12장, 하박국 1장, 욥기), 하나님께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때 온 세상은 그저 그 입을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우심을 생각하면서 다시 그 입을 벌려서 그저 그분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혜와 의로우심과 선하심,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적 신정론(eschatological thedic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에 가서야 하나님이 옳은지 아니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 끝에는 그 옳으심이 온전히 선언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어느 시점에서나,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옳으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항상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특히 공유적 속성을 연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로우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만이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려고 하는 이도 하나님을 가까이해야만 합니다. 선한 것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반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여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지혜롭게 살피고 판단하며, 항상 옳고 의로운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며, 선한 성품을 드러내서 참으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오래 참아 나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당신님의 성품을 잘 깨닫고 반영할 존재들을 두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의미이고, 구속의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비록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고귀한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고 개혁된 형상을 지닌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주요 신조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강해(4)

공유적 속성들(2):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께서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시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는 그 지혜로우심의 한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지식은 이 세상 진리의 원천이고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둘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2) 그의 피조계 전체에 대한 지식.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아신다(comprehension)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지 않을 실 수 없는 지식이요, 그의 의지의 작용의 결과로 아시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로부터 '필연적 지식'(scientia necessaria)이라고 불려져 왔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신학(theologia Dei)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의식 전체를 온전히 다 아십니다. 이것을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께는 존재와 의식과 지식이 동연적(同延的, coterminu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다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점차 알아 가시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에 숨기어졌던 자신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영원적 지식(eternal knowledge)을 가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종합적 지식일 수 없으며, 논의적(discursive) 지식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은 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해서도 온전한 지식을 가 지십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그가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피조계에 대한 참(진리)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실재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 의 온 세상에 대한 불변하는 온전한 작정(decree)에 근거해서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 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 은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s)인 이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근거해서 알고 계신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찰적으로(intuitive) 단번에 아시는 것입니다(scientia visionis). 하나님께서 무엇을 관찰하시거나 추론해서 어떤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지식의 증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연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이런 인식을 바르게 가진다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학적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된 문제, 섭리와 관련된 문제, 십자가의 구속의 범위와 관 련된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 다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필연적 지식도 아니고, 우연적 지식도 아닌 소위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 이런 문제의 해결이 더 쉽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에 대해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 하시는 자"(시 94:10)이신 하나님께 그 무엇이라도 숨 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웃기는 (ironical) 상황입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숨기려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라고 외칩니다(사 29:15).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이 온전하신 "지식의 하나님께" 우리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삼상 2:3).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듯이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해 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러내고 있는 이런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묻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 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사 40:37). 그렇게 생각하거나 묻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구 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마 6:8). 이처럼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학적 질문을 모두 답해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 문제들도 거의 다 해결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하나 님의 온전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지식을 갖 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인지적 사명(cognitive mandat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인(analogical) 관계 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원형적 지식(original knowledge, archetypical knowledge)이라면, 우리의 지식은 유비적 지식(analogical 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 유비성에 충실할수록 우리의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 그 자체는 우리가 능히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수사적으 로 묻고 있듯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전 2:16). 그러나 하나님 께서 드러내 주신 바 계시가 있으므로,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2:16).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말합니다(고전 2:13). 그러므로 우리의 유비적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드러내어 보이신 계시에 의존하는 지식, 계시 의존적 사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에 신학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 학문(scientia christiana)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 나님의 온전하신 지식을 우리의 피조물의 수준에서 유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지식 이고, 참된 학문입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 분과가 추구하는 진리의 기 준이 바로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부디 우리의 인지 적용이 이렇게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생각하는 바르고 온전한 인지 작용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하는 실천적 의미의 하나가 바로 이런 우리의 인식 작용이 바르게 작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게 하나님의 지식과 이에 대해 유비적인 우리의 지식 활동을 논할 때 이 를 공유적 속성으로 언급했던 우리 선배들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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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현장입니다.
저의 아파트 옆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1개의 현지 천주교 대형집회입니다.
하루 왼 종일 마이크를 최고로 올려놓아 어질어질 하던
하루였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조용해 졌지만
우리는 갑지기 멍~해 진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영향으로

천주교는 엄청난 교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이도 모였죠.

 

 

 

거의 2시간 가량 비가 솥아졌지만

그 빗속에서 춤추고 구르고...

정신없이 빗속으로 튀쳐나오고들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나오라는 말에 하나씩 둘씩

앞으로 나와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인도자는 신부입니다.

 

 

 

군중들 사이에서도 하나씩 둘씩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튀쳐 나오다 

물위로 쓰러진 청년을 물에서 끌어내는 모습 

비오고 난 뒤니까요~~

 

 

 

군중들 사이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앞으로 끌어 내 놓습니다.

천막 안에서 마구 쓰러지면 감당 할 수 없어

안전사고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보라색 치마와 바지 입은 자들은 '도우미'랍니다

 

 

 

초저녁 집회를 마감 하기 직전

모두 앞으로 모여 기도한 후

쓰러진 자만 땅에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아이(현지 신학생)들이 하는 말입니다. 

하루 종일 집회에 시달려 피곤해서 

그냥 땅바닥에 드러 누워버렸답니다.  

무지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vivace 님


 



받아야 할 때와 주어야 할 때
(A Time to Receive and A Time to Give)

언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 언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주의를 
필요로 하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우리는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주려고, 주려고, 그저 주려고만 합니다

우리는 주는 것이 관대함의 표시이며 
또는 심지어 영웅주의의 표시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어. 
다만 주기만을 원해"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받지 않고 주기만을 계속하면 
우리는 곧 다 타 버리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육체적인, 감정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우리가 깊은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서 
기쁜 마음으로 주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어야 할 때와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생활을 원한다면 우리는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대하여 똑같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이 글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 교수이신 조병수 목사님의 글임을 밝힙니다.

              


    초대교회를 처음부터 위협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마 24:24), 거짓 선지자(마 24:24; 벧후 2:1), 거짓 교사(벧후 2:1)였다. 이 가운데서 특히 거짓 선지자가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는 한편으로는 거짓 그리스도의 사주를 받고, 한편으로는 거짓 교사를 사주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은 전체적으로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벧후 2:1),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요일 4:1), 거짓 선지자가 장차 세력을 규합할 것이라(계 16:13∼14)고 말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거짓 선지자의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의 등장에서 잘 나타난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 오나 속에는 노략하는 이리라"(마 7:15). 거짓 선지자는 노략하는 이리이다. 노략이란 것은 이미 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신자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는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예수 믿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에 전념한다. 진정한 전도자는 이미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성도에게 추파를 던지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참조. 롬 15:20). 기존 신자를 탈취하는 자는 스스로 거짓 선지자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 시대에는 이런 노략질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

    거짓 선지자들의 두 번째 특징은 그들의 언어에서 잘 나타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다"(마 7:21). 거짓 선지자는 언어가 강렬하다. "주여"를 두 번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얼마나 언어로 열심을 내는지를 알려준다. "주여 주여"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과 찬송 경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의하라. 예수를 주라고 부르짖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오묘한 고백서를 작성하고, 문학적으로 매끄러운 고백서를 암송한다고 해서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막힌 곡조로 노래하고, 별의별 악기를 사용하고, 사지백체를 흔들어 율동하면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그럴싸한 신앙고백서를 제시하고, 정신이 빠지도록 노래를 부르게 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세 번째 특징은 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거짓 선지자는 예언과 귀신 쫓음과 권능 행함으로 성도들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진다. 예수께서는 이들이 심지어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 쫓고 능력 행하는데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마 7:23)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이처럼 분명한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예언이나 쫓아다니고, 귀신 쫓는 일에 홀딱 반하고, 신기한 일 찾아다니느라고 눈이 벌게 진자들은 결단해야 한다. 솔직히 예수 복음을 따르든지 귀신 복음을 따르든지!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데 있다고 지적하신다(마 7:21).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성품의 결정이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뿜어낼 것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주의 이름을 고백하고 노래하게 하거나 주의 이름을 팔아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데 마음을 두게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것은 거짓 고백주의이며, 거짓 공로주의이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가 만났던 위험이며, 바로 이것이 현대교회가 만나고 있는 위험이다.

     

    전상범목사님의 페이스북/개혁주의마을

    제목: 조선의 엘리야 박관준 장로님이 받은 계시와 환상들

    1. 회심 (1905년) (30세)

    그것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승리한 190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공중에서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절벽 유위면 혈벽입하라!”

    소스라쳐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다.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는 ‘이것이 영계의 계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와 붓을 꺼내서 방금 들은 그 명령을 한문자로 즉석에서 옮겨 보았다.

    “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그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절벽’은 곧 그의 방탕한 생활이 절벽과 같이 위험한 생활이란 뜻이다. 그러면 이 같은 생활이 위험하니 다른 방향에 옮겨서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혈벽’의 뜻은 곧 이해할 수 없었다. ...

    생략...

    박관준 장로는 이를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7년에 영변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2. 부르심 1935년 (60세)
    아버지는 매일 새벽과 저녁 두 차례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나는 무려 한 시간에 걸쳐 드린 아버지의 기도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여, 저로 하여금 병으로 죽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1935년 어느 날 밤, 아버지는 한 환상을 보았다. 아버지가 교회당 강도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횐 옷을 입은 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대답하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거룩한 이가 어떤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들여다보며 우뚝 서 있었다. 아버지는 송구스런 태도로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는 횐 옷을 입은 거룩한 이 앞으로 나가서 조심스레 그 종이를 넘겨다보았다. 횐 두루마리 위에는 사오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제일 첫 줄에 ‘박관준’이라고 분명히 씌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이 명단을 보고 깨어났다.

    이것은 비몽사몽간에 본 이상한 환상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배달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읽으니 아니나 다를까 교회에 일대 중대 문제가 돌발했다. 그것은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 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 평양의 삼숭 자매 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존폐 기로에 직면했다는 톱기사였다. 교회 학교인 평양 숭실 전문 학교에 까지 신사 참배 문제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전번엔 국부적으로 중학생들이 강요에 못 견디어 응한 것 같았으나 이번엔 세 학교가 모두 신사 참배를 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동교의 교장이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 매큔 박사는 당초부터 강경히 신사 참배를 반대함으로써 평안남도 학무국 당국과 일대 정면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기에 폐교의 운명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톱기사였다. 

    3. 평양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환상
    수감된 날 밤, 아버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를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한 환상을 보았다. 어떤 성찬을 담은 밥상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뒤엎어지며 횐밥이 그릇에서 쏟아지고 흙투성이가 되는 광경이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총회가 실패할 것을 예감했다. 

    4. 1938년 미나미 조선 총독에게 보낸 편지 원문 초고

    .... 국가 장래에 불상사가 있을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측량키 어려운 바이며, 참 신이신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로써만 능히 알 것입니다. 사람은 목전의 일만 볼 수 있으나 신은 구원한 일을 통관해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신령과 신비로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교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시대에 선지자들이 시대를 따라 참 신의 계시를 받고 국가 장래에 관한 중대한 일을 민간에 반포도 하였으며, 혹은 국가에 고지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소생이 측량컨대 벌써 6회를 통하여 정부를 내방한바 그 노정리 수는 합위 일만여리를 산할 것입니다. 전 우가끼 총독 시대에 2회, 현금 각하 부임 이후에 이번까지 4회로 충고 직간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은 진실로 국가와 인민을 위함입니다. 생은 재천 학멸하여 각하를 보필할 만한 정치적 지식은 비록 없을지라도 기독교 신앙 생활 33년 간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을 힘입어 함지사지에서 누차 구출되었습니다.

    2월 5일 각하 면회 시에 낭독한 것은 일본 제국에 대한 예언을 환상 중에서 발견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사건입니다. 각하 부임 이후는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시어 표시하시고 그밖에 환상으로 명령하시므로 천리 밖에서 일부러 찾아와 역혈히 충고하는 바입니다. 성인의 말씀에도 지자천려에 반드시 일실이 있고 우자천려에 반드시 일득이 있다 하였으니, 원컨대 각하는 묵사 만념하여 조선 기독교에 문제 된 신사 참배는 교회 자유에 방임함으로써 정부는 관계하지 마시기를 거듭 역혈히 충간하는 바입니다.
    주강생 1938년 5월 27일
    위천위인생(爲天爲人生) 박관준

    5. 일본에 대한 계시 (안이숙 여사, 박관준 장로, 최권능 목사 만나다)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나(박관준)는 50여 년을 예수를 믿어 왔지만 이번처럼 주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은 적은 없었지요. 만일 이같이 원수 놈들의 핍박이 심할 때 하나님이 평안한 때와 같이 가만히 계시면 어떻게 믿는 자들이 이 무서운 핍박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 주님! 주는 나의 피난처요 강한 방패요 높은 산성이시니이다.”하며 감격해한다.

    이 놀라운 그의 믿음의 말을 들은 우리는 이 노인(박관준)의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태도에 우리의 태도를 고쳤다. 그는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유황불을 비와 같이 쏟아 내려서 멸망시키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요나가 니느웨에 간 것같이 자기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부와 고관들에게 경고하고 싶으나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 하니 어찌하오리까 하고 열심히 기도하던 중 계시를 받고 바로 그 다음날 떠나 무작정 평양으로 왔는데 주님이 인도해 주셨는 고로 이렇게 대번에 찾아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나는(안이숙) “평양성으로 가라”하신 말씀과 “네가 하라”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평생의 소원이 약을 먹고 주사를 맞다 병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 이름으로 칼에 맞아죽든지 스데반같이 돌에 맞아 죽든지 기름 가마에 던짐을 당하든지 해서 단번에 죽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 왔소. 그런데 아마도 내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인지 주님이 나를 단번에 죽게 하려고 하는가 보지요. 죽으면 개도 뜯어 먹지 않을 이까짓 썩어질 몸을 바쳐 주님 위해서 단번에 죽는다면 아! 그 영광스러운 순교의 기쁨을 어찌 다 감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루 저녁은 예배당에서 밤새 철야 기도를 하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것이 웬 소린가 해서 그 목소리를 찾아가 보니 평양 성내의 장작 파는 장작터였는데 키가 조그마한 백발의 한 늙은이가 “예수 천당”하고 외치고 있었다. 때가 때인 만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은 잡혀가고 그렇지 않은 성도들은 산으로 들로 도망 다니고 숨도 크게 못 쉬는 이런 험악한 시대에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분이길래 저렇게도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 늙은이를 쳐다보고 섰노라니 또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예수 천당”이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위엄이 있었고 눈은 확신으로 번뜩이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 지팡이를 잡았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저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했더니 그 말을 듣자 그는 성난 표정을 하고 나에게 큰 소리로
    “예수를 믿으면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거요? 지금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데 입으로는 밥만 먹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한단 말이오, 응?”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전도였구나. 전도다. 일본에 전도해야 한다. 일본에 경고하라는 것은 곧 전도하라는 것이다. 그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로구나. 그래 그래.”

    순식간에 내 마음은 변했다. 이때부터 나는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막 거리로 뛰어나갔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모조리 붙들고 전도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사람은 모두 송장같이 보였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라다니며 애걸하며 울면서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권면했다. 붙들고 울며 권하는 내말에 감동을 받는 이도 많았다. 어떤 이는 계속 절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어떤 이는 믿는 이지만 더 잘 믿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내가 정신 이상인가 해서 뚫어지게 보다가 도망을 치는 이도 있었다.

    여하튼 내 잠잠히 믿던 양식, 즉 기도하고 성경 읽고 외우고 숨어만 있던 내 신앙 생활에 이 두 노인 박 장로와 최권능 목사로 인해서 안팎으로 큰 변동을 일으키고 혁명을 가져왔다.

    “얘! 이숙아, 내가 너를 기독교 학교인 사립학교를 보내려고 그렇게도 애쓰고 기도했는데도 주님은 너를 기어이 일본인이 가르치는 공립만으로 소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전문학교에까지 보내고야 말으셨다. 너에게 일본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하도록 한 것도 이때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주님의 사명이면 속히 순종하고 죽는 것이 지 오래 끌고 기다릴 필요가 무어냐? 너는 일본말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잘한다고 아버지 비서인 시오상이 늘 말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네게 그런 재주를 주셨는가 했는데 참 주님은 다 경륜이 계셨고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되는구나. 그런데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지 않아?”

    드디어 나는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이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떠나가는 이를 위해 지하 교회 회원 모두가 3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산과 굴속에 숨어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연락해서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했다. 

    6. 일본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

    첫째, 큰 도는 나라의 한계가 없고, 진리는 중외에 능히 가통하므로 오늘날 동아 오억만 생명의 사활 문제가 이번 의회에 달려 있다는 것.

    ]둘째, 하나님의 섭리로는 그 나라의 종교 부흥 여하에 따라 국가의 패망과 번영이 좌우된다는 것.

    셋째, 인간의 정부가 소위 ‘종교법안’을 제정하여 종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간섭하고 탄압한다면 세계와 인류를 통괄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하늘의 재앙을 내리실 것이니 의회 의원 제공이 진리를 깨닫고 못 깨닫는 데 국가의 흥패가 달렸다는 것.

    넷째, 일본 제국의 정부와 국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축복을 받아 강성하여져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강대한 나라 백성을 다 쫓아내고 밟는 곳마다 너희의 소유가 되려니와 돌이켜 마음에 미혹하여 다른 가신과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하심을 받아 반드시 패망하고 만다’는 것(신명:11장 참조).

    다섯째, 일본 정부는 신도 등 종교를 폐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기독교로 국교를 제정하라는 것.

    여섯째,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라고 모두 주장하니,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과 가신(바알 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도전을 한 것과 같이, 일본 정부 주최로 넓은 광장에 장작 백단씩을 쌓아 놓고 신도, 불교, 기독교의 대표를 그 위에 앉힌 후 일시에 불을 질러 그 속에서도 살아남는 대표가 믿는 종교로써 국교를 창정하자


    7. 감옥에서 받은 계시

    "옥중지도자들 중에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여사는 기도하는 중에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에서 큰 뱀이 기어 나와 조선 교회를 통째로 삼켜 버리려고 입을 벌리며 달려들자 주기철 목사가 큰 검을 빼어서 그 뱀을 세 동강으로 찍어 내던지는 환상이었다. 이 놀라운 환상을 보고 오 여사는 더욱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옥중 성도들에게 퍼졌다. 뿐만 아니라 주남선 목사와 최봉석 목사는 옥중에서도 개인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죄수들을 위해 옥중 교회를 세우고 신자가 된 죄수들에게 세례까지 주었다. "

    1945년 해방 예언

    어떤 직원이 간수를 뒤따라오며 무슨 말을 건네자, 간수는 그와 상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라고 한 걸음쯤 아버지보다 뒤처졌다. 이때 안 집사는 재빨리 아버지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얻었다. 

    “장로님, 재판 때에 재판장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재판장이 나더러 말하기를 ‘일본이 대동아 전에서 이렇게 승리를 하고 있으니 영감님 너무 고집 피우지 말고 신사 참배에 동의하고 이제는 감옥에서 나가시오’ 하기에 ‘미나미 총독도 나에게 머리를 숙이며 충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재판장인 당신의 말을 듣겠소?

    명년인 1945년 8월에는 당신들이 나를 가두어 둘래야 가두어들 수도 없을 것이오. 그때 일본이 망하든지 조선이 독립되든지 간에 끝장이 날 터이니 나는 그때에 나가겠소’라고 말했지.”

    뜻밖에도 이 같은 말을 들은 안 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야. 분명히 나는 계시를 받은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이니까‥‥.”

    중략....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뿐인가? 내가 어제 새벽, 그러니까 감옥에서 위독해지기 전날, ‘관준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오늘이 졸업이다. 내일 나가서 삼 일 간만 성경을 가르치고 나 있는 곳으로 오너라.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다. 내가 금 면류관과 금띠 한 개를 네게 더 주리라. 이제부터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천국은 다 네 것이다’ 하는 계시까지 분명히 받았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뜻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헌신한 지 어언간 팔 년이 되었거든. 참 그대로 맞았지 그런데 ‘삼일 선생’이라는 뜻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감옥에서 나가서 삼 일 간만 성도들에게 신앙 간증을 하라는 뜻인데, 그래도 삼 년은 더 살아야 일본 정부나 총독과 더 싸울 수 있을 텐데, 참 어떻게 될는지.”

    안 집사는 아버지의 간증에 감격하고 방금 들은 간증담을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종이를 곱게 꼬아서 단단하게 만든 트렁크 손잡이 같은 것을 이상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장로님, 이게 무엇이야요?”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그것 말이야? 그것은 내가 8월 달에 출옥할 때 내 짐을 들고 나오려고 한 달 동안 노끈을 꼬아서 트렁크 손잡이를 만들어 미리 준비를 해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출옥하신 것이 아니어요?”
    “아니야, 진짜 출옥은 금년 팔월달이야.”

    안 집사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말은 지난번에 예언같이 말한 바를 거듭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아버지는 “1945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여 우리가 다 출옥을 하게 되고 조선이 독립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안 집사는 마음속으로 금년 8월을 주목하고 있었다.
    ......

    아버지는 1945년 정월을 맞이하자 금년 8월에는 석방되는 새해를 맞이하였다고 어느 해보다도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정월 중순경 어느 깊은 밤, 아버지는 감방 안에서 홀로 기도를 하고 취침 중에 환상을 보았다. 앞에 큰 바위가 나타났는데, 돌연히 양쪽으로 깨지더니 샘(생명수)이 콸콸 솟아나와서 마음껏 마셨다.

    또 천사가 나타나더니 ‘만나’ 라는 떡을 큰 그릇에 가져오고, 또 때를 따라 다른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것은 생명 과실이다”라고 하면서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한 아름 꺾어 가지고 와서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여 마음껏 먹었다. 아버지는 이같이 환상 속에서 영계의 음식물을 먹은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시장한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감방에 넣어 주는 관식을 전폐하고 더욱 금식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같이 6년 간 옥중 생활을 치른 아버지는 1945년 8월은 일본이 망하는 해라고 믿고 너무 기뻐서 40여 일 간에 걸쳐 금식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가 혼수 상태에 빠지자 형무소 당국자들도 당황해서 즉시 측근자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나는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계시와 같이 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의 말씀대로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때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러다가 점점 음성이 작아지더니 향년 70세를 일기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정각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은 이같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사 11:10-16)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 박영창(아들) 지음 두란노)

     

     

    우리의 상처와 더불어 듣기

    (Listening With Our Wounds)

     

    고통속에 있는 사람과 유대감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과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고통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자기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우울한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그 아픈 경험을 얘기하기보다는

    우울에 빠진 친구의 얘기에 주의력을 기울여,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주의력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반창고가 붙여진 우리의 상처는 우리가 혼신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치유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복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
     
    '복음'이라는 말이 오늘날은 심하게 잘못 쓰이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인간 중심적 용어로 복음을 다시 정의내리려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는 대신 인간의 필요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에 관한 메시지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의라는 낱말과 그 파생어는 로마서에 적어도 35번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메시지의 출발점이며 주제이다.
    죄 짓는 인간들이 거부하는 하나님의 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성취하셨다.
    이 의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죄인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개하는 복음의 요점이다.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가지 함축 의미가 있다.
    첫번째 뜻으로, 하나님의 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증오를 말한다.
    1500년대 초,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블랙 수도원에서 이 구절을 읽고 앉아 있었다. 훗날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내 마음에 천둥 번개와 같았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계시되었다는 말을 읽었을 때 온 마음으로 바울을 미워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영생을 가로막는 난공불락의 방해물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자신의 죄악됨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 죄악된 상태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받아 주심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17절에는 의(義)의 두번째 함축 의미가 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말한다.
    이 의는 믿는 죄인의 것으로 전가된다(롬 4:24).
    마침내 루터가 의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이 뜻을 이해했을 때, 그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그 발견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이 교리는 칭의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님이 신자의 원장의 자산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든 완전한 의를 공짜로 넣어 주시고 부채 부분에 있는 모든 죄를 없애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보실 때, 그 사람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온전히 의로운 것처럼 보신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4:5).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손상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바로 그 메시지가 복된 소식인 이유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한다. 그러나 복음이 모두 복된 소식은 아니다. 사실상 그리스도로부터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전혀 복된 소식이 아니다.
    바울의 복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그런 후에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체계적으로 입증하는 데 꼬박 2장 이상을 할애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현대의 복음 제시에서 거의 완전히 빠져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거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
    오늘날 전형적인 복음 제시는 바울의 출발점과 정반대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고 썼다.
    그러나 현대 복음 전도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는 말로 시작된다. 이용자에게 친절한 운동의 문헌을 읽어 보라. 그러면 적극적인 어조로 모든 메시지를 담는 데 열중하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한 목사는 이렇게 쓴다.
    교인이 아닌 (베이비) 붐 세대들이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흠 있다고 하고 심지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할지라도, 공적인 자리에 앉아 자신들을 벌레 같은 인간과 불운한 사람과 타락한 피조물과 전적으로 타락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베이붐 세대들의 목사로서 나는 그들이 소극적인 메시지라도 적극적인 용어로 제시된 것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는 사물들을 걸러내는 격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적극적인 말을 할 수 없다면, 심지어 부정적인 시사 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적극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베이비 붐 세대들은 아마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쓰는 어조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나는 일부러 내가 내 연령 집단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항상 적극적인 어조를 띠고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최근의 교회 성장 서적에 나오는 이런 논평은 거의 언제나,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타협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말을 담는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없다. 위에서 인용된 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모두 타락한 죄인이므로 필사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는 성경의 전제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 분명 우리는 타락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실 정도로 우리를 고귀하게 보셨다는 것을 역시 보여 준다."
     
    그는 이어서 이 세대에 효과적으로 사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말을 '낙관적'으로 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다시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하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며, 또 베이비 붐 세대가 습관적으로 소극적인 진리에 고개를 돌린다고 하는 그 저자의 근거 없는
    일반론과 의견을 달리한다.
    분명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소극적인 것을 회개할 동기로 받아들여야 하고 사실 그렇게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타락한 죄인이므로 필사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
    물론 두 문장 모두 옳다. 하지만 복음은 두 측면이 다 있어야 완전하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바울의 이런 출발점 즉, 인간의 필요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종종 빠뜨린다.
    앞의 어느 장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진리와 적극적인 것만 전하는 복음 제시를 종합할 길은 없다.
    믿지 않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진리를 '낙관적' 어조로 선포할 길은 없다.
    그 결과 이들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라는 현실이 제거되곤 한다.
    그리고 가장 고의적으로 비난을 해대는 곳은 바울이 복음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영원히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로마서 1장과 누가복음 16장과 히브리서의 모든 경고 구절과 구약 핵심 진리 가운데 상당 부분과 예수님의 말씀 절반을 포함하여 성경의 결정적인 부분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가혹하고 언제나 소극적이고 압제적이고 우울한 설교를 선호한다는 인상을 갖지 말라. 물론 나는 그런 설교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번 지적했듯이,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을 성경적으로 균형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전략은 복음이 전적으로 적극적인 것이 되도록 구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경적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라는 위협을 첫째 요점으로 살폈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라는 두려운 현실과 인간의 타락이라는 절망적인 가증스러운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주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런 주제를 끌어들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데 결정적인 핵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 의로운 분노가 없다면,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시 45:7).
    더욱이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완전하고 철저하게 죄를 미워하신다. 후자가 없이는 전자가 완전히 공허하다. 종종 진노와 자비라는 쌍둥이 강조점은 병행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구절은 좀더 친숙한 말인 요한복음 3:16과 같은 장에 나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한지 깨닫지 않고서는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멸망치 않고'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의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다. 신약과 구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한다.
    시편 7:11, 12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다'는 구절은 구약에 거듭 나온다(예. 삿 2:14, 20; 3:8; 10:7; 삼하 6:7; 24:1; 왕하 13:3; 시 106:40).

    신약도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예. 롬 2:5; 3:5; 9:22; 엡 5:6; 골 3:6; 계 14:10).
    히브리서 기자는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참고. 신 4:24; 9:3).
    이런 진리들이 우리로 안락하다거나 자신만만하게 느끼도록 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진리들은 호된 두려움과 무서움을 우리에게 가득 차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복음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무서움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올바로 평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참으로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19:23).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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