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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교주 장남의 부인이었던 홍난숙씨의 고백!
[통일교]문선명의 전 며느리 홍난숙씨 탈출기
(월간 <교회와 신앙> 1999년 1월호)
<< 통일교 문선명 교주 장남의 부인이었던 홍난숙씨의 고백 >>
▼ 인터뷰 동영상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zIqZklMi8WE&feature=player_embedded
지난 해(98년) 8월 중순, 전 미국에 충격을 준 영문 서적이 하나 나왔다. 문선명 씨의 전 자부 홍난숙 씨가 쓴 <In the shadow of the Moons, 문씨네 그늘 아래서 - 문선명 목사 집에서의 나의 삶>(240쪽. 리틀 브라운사)이다. 이를 번역 요약한 내용을 여기 싣는다. 참고로, 문선명 씨는 한국 정통교단에서 정식 목사 안수를 받은 바 없으나, 편의상 저자가 쓴 '문 목사'란 용어를 그대로 쓴다.<편집자 주>
요란한 삐삐 소리에 선잠을 깼다. 해가 벌써 뜨고 있다는 사실이 날 겁나게 한다. 창문으로 비껴든 햇빛이 아기방의 푸른 무늬 벽지 위에 노닐고 있다. 신훈이의 요람이 놓인 마루방 밖으로 동트는 언덕의 윤곽을 가름할 수 있다. 바로 이 방에서 1985년 8월 8일 내가 첫잠을 잤었다. 삐삐를 울린 사람은 매들린이다. 황급히 손목시계를 내려다 본 나는 오전 5시 약속에 늦어졌음을 깨달았다. 요새 내가 왜 이다지 정신이 없을까? 몇 달 동안 서로 은밀히 만나 신중히 계획해온 것을 하루 아침에 망쳐 놓으려고 하는가?
나는 진홍빛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를 맨발로 건너 남편 침실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밤새 코카인을 흡입한 남편의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지금 나의 유일한 희망은 남편 문효진(문선명의 아들)의 마약 삼매경이 오늘 아침 또 한 번 건망증을 갖다주는 것이다. 그는 몇 달째 가구와 옷, 장난감 등이 이 저택 2층 방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불과 한 주 전, 효진은 눈이 충혈된 채 신준이의, 방 한 구석에 있던 IBM 컴퓨터가 없어진 것을 알아보았다. 다섯 아이들 중 맏인 열두 살 난 딸 신준이는 이미 너무도 태연하게 나의 공모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구중 궁궐 속처럼 음모로 가득한 문씨 댁 삶을 통해 아이들 모두는 비밀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아빠, 컴퓨터가 고장 나서 고쳐야 돼요.”
신준이가 서슴없이 대답하자, 효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기 방’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미 오래 전 내가 그곳을 버렸기 때문이다. 거긴 그의 단독 마약 소굴이요, 카펫 위에 온통 담배꽁초와 빈 테킬라 병이 굴러다니고, 포르노 비디오가 끝없이 돌아가는 곳이다. 그가 마약을 끊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을 발견한 지난 가을부터, 되도록 거기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써왔다. 코카인을 변기 속에 흘려 버리려는 나를 그가 심하게 구타하기에, 뱃속 아기를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주먹질을 해 대면서 욕실 바닥에 흩어진 흰 가루를 줍도록 했다. 그후 그는 임신 7개월 된 여성을 구타한 몰지각한 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메시아’의 아들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고 되레 날 훈계하는 것이었다.
뉴욕 시 북쪽 40분 거리에 있는 어빙턴의 외딴 곳 18에이커 짜리 저택이 바로 ‘무니들’로 알려진 통일교의 세계본부 겸 창시자의 집이다. 이른바 ‘이스트 가든’이라고 불리는 이 저택은, 문 목사가 자기의 ‘신적 사명’과 지상제국의 상속자인 맏아들의 소녀 신부로 삼고자 나를 한국에서 부른 이래, 14년간 나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열심이던 순진한 15살 여고생에 불과했던 나는 이제 자신의 삶을 되찾을 준비가 된 어엿한 여성이다. 나는 오늘 탈출하려고 한다. 결혼 생활에서 얻은 유일한 성스러운 소산인 내 자녀들을 데리고, 나를 매질하던 그 남자와 그렇게 만든 가짜 메시아 - 하나님이 지상 대리인으로 결코 택하지 않았을 문선명과 그의 아들 - 을 뒤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문 목사'를 '지금 내가 아는 사기꾼'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오로지 그런 깨달음이 하나님께 대한 내 신앙을 끝내 흔들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과정이다. 문은 하나님을 저버렸지만,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으셨다. 어린 여성을 성적 쾌락의 장난감 내지 분노의 배출구로만 삼아온 남편의 손아귀 속에서 나를 위로한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셨다. 잠든 아이들과 몇 주 동안 극비리에 챙겨온 가방들을 돌아보는 지금도 하나님은 날 인도하고 계신다. 문선명 목사에 대한 신앙은 지난 29년간 내 삶의 중심이 됐었지만, 이제 깨어진 그 믿음은 내 모성애에 견줄 바조차 못된다. 독기 서리고 밀폐된 ‘참가족’ 세계 속에서 오직 아이들만이 유일한 내 기쁨이었다. 나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도망해야만 한다.
당초 내가 큰 아이들에게 떠날 생각을 알리자, 그것이 곧 여태 즐겨온 호화로운 삶의 끝장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뒤에 남겠다는 아이가 없었다. 앞으로는 대저택도, 운전기사도, 올림픽 사이즈 풀장도, 당구장도, 승마 레슨도, 사립학교와 일본어 선생도, 최고급 휴가도 없는데 말이다. 문씨 집 바깥 담 저편에서는 아이들이 ‘메시아의 참 자녀들’이라는 경배를 받지 않게 된다. 아이들에게 절하고 섬길 기회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신도들도 없을 것이다.
“우린 이제 엄마랑 작은 집에서 살래요.” 맏딸의 말은 내 소박한 꿈을 그대로 전해 받은 것이었다. 의혹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온 집안이 조용해지자 나는 저택 안의 홀과 정든 방들을 오가며 기도와 흐느낌에 잠겼다. 눈을 감으면 지난 몇달 동안 나를 사로잡던 의문이 또 떠오른다. 과연 나는 올바른 짓을 하고있나? 떠나는 것이 정말 하나님 뜻인가 아니면 실패의 징조인가? 왜 남편이 날 사랑하게끔 만들지 못했나? 왜 그를 바꾸지 못했을까? 그냥 이대로 머물러 기도하면서, 아들이 자라면 언젠가 통일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선명 목사의 생활 궤도 밖으로 떠나는 것은 곧 영적으로 버려짐을 뜻하는데, 신체적 위험도 동시에 따르지 않을까? 내가 도망가면 통일교가 날 잠재우려고 추적해 오지 않을까? 차라리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 효진이 나와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던 것이 몇 번이던가. 마약이나 술을 먹고 기분 좋으면 살인 흉내도 예사로 하지 않던가. 교회 돈으로 산 진짜 총으로 나나 누구든 방해하는 자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효진의 뻔뻔스런 행위가 심지어 평소 무관심한 아버지 문 목사까지도 화나게 만든 후로 지금껏 나는 차근차근히 준비해 왔다. 네 남편의 잘못은 다 너 때문이라며 아내 자격이 없다고 문 목사가 오히려 나에게 책임을 물을 때,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도주계획에 최선을 기울였다. 결심하자마자 돈부터 챙겼고, 아이들 교육비로 따로 떼어둔 돈을 은행에서 찾았다. 시어머니(한학자)가 정기적으로 건네준 용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다. 아기 출생 기념식 때 교회서 입으라고 시어머니가 예거 부티크에서 사다준 수천 달러 짜리 옷도 그 이튿날 현금으로 바꿔왔다. 문씨네를 이미 떠나 따로 살고 있는 나의 오빠와 문 목사 맏딸인 내 올케의 도움으로 매사추세츠에 적당한 집도 하나 봐 두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날 때 부러워하던 내가 몇 년 후 같은 신세가 되는 셈이다.
과거 문의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다가 교회를 이탈한 나의 부모들을 염려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염려스러웠다. 부모님은 오빠로부터 내가 탈출했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의 도움이 늘 고마웠다. 어릴 적 서로 의견이 안맞는 일이 있을 때도 오빠는 늘 나를 도왔다. 그는 우리의 탈출 후 보호 방법을 알려 줄 변호사를 미리 찾아냈고, 탈출 당일부터 변호사의 조언이 도움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화요일에 떠난 것도, 매사추세츠 카운티 가정법원이 매주 수요일 학대받는 여성들의 배우자 접근금지령 신청을 청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5년간 아이들을 돌봐준 구미코 부부를 보호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그녀는 이트 가든 정원사인 남편과 함께 헌신적인 일본계 통일교도였다. 구미코는 몇 주 동안 내가 짐싸는 것을 보고도 침묵했다. 아무도 감히 참가족의 일원에게 질문하는 무례를 행치 못하지만, 그녀는 수년간 나의 고통을 목격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떠난 것을 발견한 문 목사로부터 그녀가 추궁당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떠나기 약 한 달 전, 구미코에게 남편과 둘이 어디서 살고 싶냐고 묻자, 남편 부모가 계신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구미코는 시부모가 늙고 병든 데다 남편은 독자다.
이스트 가든에서는 ‘어머님’ 한학자 씨의 허락 없이 어떤 인사 변경도 있을 수 없었다. 문 목사보다 23살이나 젊은 그녀는 보좌 배후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녀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내 부족을 고자질함으로써 승진하려는 아첨꾼들에게 늘 둘러싸였기 때문에, 나와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적은 총애나마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베이비시터를 두기보다는 나 혼자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어머님’에게 통할 듯 싶었다. ‘아버님’도 스태프 진이 너무 비대해 먹여 살리는 비용이 비싸다고 불평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베이비시터와 정원사를 한 명 덜 씀으로써 절약된다는 생각에 어머님은 기꺼이 내게 찬동했고, 피터 김 보좌관을 통해 여비를 주라고까지 당부했다. 그래서 구미코 부부는 우리가 떠나기 이틀 전에 고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기를 돌봐준 또 한 여성은 이스트 가든의 경비원 남자와 한국에서 곧 결혼하게끔 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10월까지 충분히 한국 집에 머물다가 오라고 그녀에게 일렀다. 문 목사가 2,400만 달러급 독채 호화 저택과 집회소를 지은 이래, 우리는 시누이 인진 씨네 가족과 함께 19개 방 짜리 맨션을 함께 써왔다. 행운인지 하나님의 도움인지, 인진 씨네는 우리가 떠나기 전 주말에 어딘가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 우리가 떠날 기미를 인진 씨가 알아냈더라도 심각히 여기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애들을 데리고 잠시 사라짐으로써 효진을 겁주려나 보다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문씨 집안에서 내가 영 떠날 줄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실은 내가 그러리라 생각할 만큼 날 충분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14년간 문씨네 한 가운데 살면서 내가 뭘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물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명령하고, 나는 순종했을 따름이다. 그런 무관심이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신훈이를 깨웠다. 바로 오늘 아침, 난 지 9개월 되는 착한 애다. 아기는 내가 짧은 소매 잠바를 입히고 누나와 형들을 깨울 동안 울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매들린을 만나고 올 동안 조용히 옷을 입고 있도록 일렀다. 매들린 프레토리어스는 작년에 나의 첫 친구가 된 여성이다.
그녀는 삐삐로 연락해 가며 나의 탈주를 돕고 있다. 매들린은 10년 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 바다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에게 홀려 통일교도가 됐다. 집에서 멀리 떠나 있는 젊은이에게 접근하여, 처음에 기분 좋은 말을 나누다가 교회 얘기로 들어가, 집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통일교의 상투적인 포교술이다. 매들린은 지난 3년간 효진을 도와 통일교 녹음설비가 있는 맨해튼센터 스튜디오에서일해 왔다. 그러면서 그의 마약남용과 불같은 성미를 지켜본 그녀는 내가 탈출계획을 털어놓자, 자진해서 돕겠다고 말했다. 물론 효진이 알면 그녀에게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이미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해 왔다. 수 주 전 우리 둘이 부엌에서 차를 마시며 몰래 얘기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와 날더러 위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매들린에겐 집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는, 만일 내가 교인 중에 누구와 사귄다면 내 손가락을 모두 분질러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매들린을 만나러 갈 때, 나는 정원사와 경비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델리 가게 앞에 기다리고 서 있는 매들린을 몰래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집안 도처에 널린 감시카메라는 거의 매일 의자나 램프, 박스나 가방 등으로 가렸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구를 재배열하고 어머님 대신, 또 다른 문씨 저택인 벨베디어로 입던 옷을 간수하러 간다고 하면 아무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새 삶을 시작할 때 쓸 가구를 보관하려고 시내에 임대해 둔 임시보관소에 가곤 했다. 오늘은 거기서 나의 오빠와 매들린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빙턴과 태리타운 거리는 고요했다. 무더운 여름철에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를 관광하러 온 여행객들이 오갔다. 나는 미리 약속해 둔 골목에서 매들린을 만나 그녀를 담요 아래 가린 채 집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짐을 하나씩 매들린의 차에 다 싣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오면, 오빠를 만나 매사추세츠로 떠날 참이었다. 마지막 짐을 차에 실은 후, 매들린과 나는 아이들을 모두 맨발로 데리고 몰래 아빠 침실을 지나 중앙 계단을 통해 정문 현관으로 나왔다. 짐이 빼곡한 차에 아이들을 하나씩 밀어 넣은 매들린은 자신도 좌석에 비집고 들어가, 아이들과 자신을 감춰줄 담요를 뒤집어썼다. 나는 느릅나무 고목이 늘어선 길게 굽은 드라이브 길로 차를 천천히 몰아 집 대문으로 빠져나가면서, 새로 온 경비원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스트 가든을 나와 서니사이드 레인으로 접어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월간<교회와신앙> 99년 1월호)
김성훈 / <교회와신앙> 미주 특파원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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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祈禱, prayer)
1) 사전적인 의미 :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2) 성경적인 의미 :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형태(잠15:8;대하7:14;엡6:18;약5:15;딤전2:1;골4:2).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 하는 것이다(마6:9-15,7:7,엡6:18).
2. '하다'의 용법
1) 동사 : 사람이나 동물, 물체 따위가 행동이나 작용을 이루다.
2) 보조동사 : 앞말의 행동을 시키거나 앞말이 뜻하는 상태가 되도록 함을 나타내는 말
따라서 '기도하다' 는 '하나님께 빌다'가 됩니다.
3. '드리다'의 용법
1) 동사 : ① ‘주다'(물건 따위를 남에게 건네어 가지거나 누리게 하다)의 높임말.
② 윗사람에게 그 사람을 높여 말이나 인사, 결의, 축하 따위를 하다.
2) 보조동사 : ‘주다'(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함을 나타내는 말)의 높임말.
따라서 '기도드리다'는 '하나님께 빌어 드리다'가 됩니다.
* 2, '하다'의 용법과 3. ''드리다'의 용법에 따르면,
기도자가 하나님께 <빌다>가 되어야 하는데,
기도자가 하나님께 <빌어 드리다>가 되어 잘못된 어법입니다.
'드리다'를 쓰려면 '기도'를 목적어로 바꾸어 <기도를 드리다>로 표현해야 바른 어법이 됩니다.
* 비슷한 용례로
'예배하다', '예배드리다'를 혼용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예배드리다'는 틀린 어법이며, '드리다'로 쓰려면 '예배를 드리다'로 사용하여야 바른 어법입니다.
4. 성경에서의 용법
1) '기도하다'가 합당한 증거
[눅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삼상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 '기도를 드리다'가 합당한 증거
[행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시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대하33:13]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5. 결론
'드리다'는 '주다'의 높임말입니다.
'주다'는 [동사]로
'물건 따위를 남에게 건네어 가지거나 누리게 하다.'
'남에게 어떤 자격이나 권리, 점수 따위를 가지게 하다.'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물건도 아니고, 자격이나 권리, 점수도 아닙니다.
어떤 요구 사항을 말로, 마음으로 '비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는 '주다'라는 동사와 결합할 수 없기에 '주다'의 높임말인 '드리다'와 결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드립니다', '기도드렸습니다'는 잘못된 어법이고 표현입니다.
꼭 '드리다'를 사용코자 한다면 '기도'에 '를'을 붙여 목적어로 만들어 '기도를 드립니다'로 표현해야 합니다.
목적어가 되면 행위 또는 의식 전체를 의미하여 문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드리다'의 용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 것은 그것이 높임말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상대편을 존중한다는 동기는 좋으나 형태가 없는 것을 '드립니다'는 오히려 결례가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드렸습니다"와 같은 과거 형태가 아닌,
"기도합니다"와 같은 현재 형태로 끝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을 때까지 그 기도는 지속적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 자료
1) 기도응답의 기준(基準)
①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대로 행하신다(엡3:11;행4:28)
② 의와 공의가 기초이다(시89:14;대하7:14;요9:31;히1:8).
2) 기도 응답의 유형(類型)
① 그래(yes) : 즉시 응답하신다(마8:3,14:30-31;민11;2;삼하24;25;대하30:20;사38;5)
② 안 되겠다(no) :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거절하신다(애3;8;고후12:87-9
③ 기다려(wait) : 적절한 때에 주신다(행1:7;요11:6,43)
④ 보라(see) : 다른 방법으로 주신다(마20:23;고전12:7-10).
3) 기도 응답을 막는 요소(要素)
① 구하지 않음으로 해서(약4:2)
② 잘못 구함으로 해서(약4:3)
③ 죄를 지어서(사59:1,2)
④ 죄를 마음에 품어서(시66:18)
⑤ 받을 것을 의심해서(약1:5-7)
⑥ 불순종으로(슥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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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용어에 대한 고찰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정당한 고찰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특히 신앙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으로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참과 거짓이 분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입되는 다양한 용어들은 특히 더욱 주의가 요구된다. 그 중에 한 문장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한국 교회 강단과 공동체 안에서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 혹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어떤 연유로 “기름 부으심”이란 단어가 도입되었는지 경로에 대해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되고 있다. ‘기름 부으심’이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기름 부으심의 의미 및 주체에 대한 고려가 없이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한 때 “성령 충만”이란 단어로 논의가 깊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 충만’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단어 사용이 전이된 것으로 평가된다. 성령 충만이란 단어가 면밀한 검토함으로 적합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럴 즈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등장한 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시는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고찰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성경의 용례는 없다. 성경의 용례에는 “주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씀한다. 구약에서 “주”는 “여호와”를 지칭하며, 신약에서 “주”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이 세례를 주는 성경 이해는 없으며, 성령이 기름을 부어 주는 것 또한 없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임한 종말론적 사건이다.
“기름부음”은 ‘anointment’이다. 문자적으로 이해될 때는 ‘oil’로 이해될 수 있지만, ‘anointing’으로 이해해야 한다. 칼빈은 anointed를 눅 2:26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성령 세례를 의미로 주석하였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메시야의 사역으로 모든 세대에게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에서는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신성하고 선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구별'된다. 성별(聖別)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물체인 경우도 많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신이 거룩한 장소에 임하여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보증하고 상징하기 위해서 제단·제기(祭器)·신전·무기·옷가지에도 기름을 붓는다. 고대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중병에 걸린 사람과 노인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을 성사(聖事)로 시행해왔다.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기름부음을 임종의식으로 여겨왔는데, 대개는 죽음이 임박해서 숨이 끊어지려 할 때 비로소 그 의식을 행했으며, 따라서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Daum 백과사전)” 기름 부음이란 용어가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케되는 것이 정통 신앙인데, 사제의 기름 부음으로 성별케하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름 부음’에 대해서 칼빈은 메시야 직임과 주의 백성됨의 직임으로 제시하는데,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별(聖別)이나 치유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칼빈은 중세교회의 그릇된 성경 용례를 말씀에 합당하게 제시해주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되는 용례가 성별(聖別), 치유, 능력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성경에서 전혀 사용된 적이 없는 비성경적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다른 용례를 만들어 단어를 정착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인 용어 사용임으로 단어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
만약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사용하려 한다면 성경대로 “주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유사한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단어 사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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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도구가 된 교황제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만일 계급제도가 교회를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가를 알고 싶다면 로마천주교의 계급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로마 천주교에서 교황의 명령은 보통 사람들, 즉 단순히 그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모든 신도들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이런 제도는 사탄이 교회를 아주 쉽게 무너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곧 사탄이 한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다면 그는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천주교의 교황제도는 실제로 역사 속에서 사단의 손 안에 들린 치명적이며 위험스러운 무기가 되고 말았다. 이 제도로 말미암은 최악의 상황은 교황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좌를 찬탈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분명한 규칙들이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분명한 규칙들이 있는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자들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교회의 왕으로 통치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3:8).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엡 4:15,16; 5:23).
그러나 교황이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교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미사가 주의 만찬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제사의 충분성을 부인하면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를 희생제사로 다시 드려지게 하는 패역을 저지르고 말았다.
교황제도 아래에서 그들은 마리아를 우상으로 만들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 중재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중보자로 불리게 되었다. 또 마리아는 죄가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마리아의 승천이 기념되었다. 그밖에도 성인숭배, 고해성사, 선행의 교리, 성골숭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사는 수도원 생활 등등 온갖 미신적인 행위들이 교회를 더럽혔다.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교황의 힘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리고 교황 통치의 무거운 짐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이시고, 유일하신 감독이시고, 당신의 피로 사신 유일한 교회의 머리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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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칼럼] 거짓말을 파는 청춘 멘토들
잘 나가는 자들이 거짓말 더 해…언제고 인생이 쉬웠던 적 없었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거리에는 역겨운 장면도 많다.
“이 차에는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귀도 그렇다.
제 자식을 가지고 남들에게 어쩌라는 말인지…, 짜증을 돋운다.
“이 차에는 광어와 도다리가 타고 있어요”라는 수족관 차량의 패러디가 차라리 애교스럽다.
“영어 잘하는 내 자식이 왜 국내 영업부에 배치되었는지”를 인사부장에게 따지는 신입사원의 부모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살려면 이혼하라든가, 그 월급이면 집에서 용돈 줄 테니 그냥 놀아라는 철없는 부모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과보호 신드롬이 넘쳐난다.
안철수 교수가 청춘 콘서트로 인기를 끌고 지방선거에서 2040이 집단투표를 던진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언론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소위 청춘들의 분노에 동정공감한다는 기사가 지면을 도배질한다.
청춘 콘서트 복제품도 대유행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바야흐로 청춘이 위로받는 시대다.
이런 엉터리 콘서트일수록 가짜 멘토들이 목청을 돋운다.
가짜들은 일자리가 없어 청년 백수가 늘어나는 것이나 자기 집 갖기 어려운 주택사정이나 다락같이
높은 등록금이 모두 기성세대의 잘못이라며 송구스러워한다.
세상의 거친 풍파도 어른들의 잘못이고 결혼을 늦추는 것이나 저출산도 모두 사회의 잘못이라며 어쩔 줄을 몰라한다.
가짜 멘토들은 철부지 부모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이 대신해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대부분 거짓말이다.
“우리가 대학 졸업할 땐 일자리가 널렸었다”는 말부터가 지어낸 말이다.
당연하지만 주로 명문대를 졸업한 정치인이나 의사나 교수 출신이라는 멘토들이 이런 거짓말을 한다.
어느 때고 명문대 졸업자에게 일자리가 없어본 적이 없고 대부분 청춘들에게는 일자리가 충분히 있어본 적이 없다. 20,30년 전에는 일자리가 더 적었다.
아니 일자리 자체가 없었다.
독일 파견 광부나 간호사 모집에는 대졸자들이 몰렸다.
(물론 비명문대다) 이들은 남의 나라 지하 2000m 막장에서 땀을 흘렸고
간호사들은 병원에서 백인들의 사체를 씻었다.
70년대 초에는 월남에 나가 피값으로 돈을 벌었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는 20만명 이상의 청춘들이 숨막히는 중동의 공사장에서 일했다.
그게 삶의 진면목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어 잘나갔던 인간들이
지금 멘토랍시고 있지도 않은 말을 허황하게 지어내면서 애들에게 설레발을 치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었던 시대는 386이 대학을 졸업하던 80년대 후반 잠시였다.
386은 아직 구조조정 대상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세상을 우습게 보고 있다.
이게 소위 세대 문제의 본질이다.
일자리는 정부 아닌 기업이 만든다는 것도 이들 가짜 멘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지금도 중소기업 현장에는 사람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취직 안 된다고 남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런 일자리는 다른 사람 세금으로 먹고산다.
잘나가는 멘토라는 인간들은 대부분 정부가 주는 자격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 일을 너무 쉽게 말한다.
1%에게 세금 더 걷어 무얼 해보자고 너무도 쉽게 말하는 인간들을 강도라고 부르지 않으면 달리 부를 적당한 말이 없다.
남의 돈 가볍게 아는 이들도 청춘들에게 마약을 먹이는 자들이다.
2030 세대가 절망 끝에 결혼도 안 하고 집도 구하기 어려워졌단 말도 지어낸 말이다.
언제고 자기 집 갖고 결혼한 청춘은 없다.
반지하방에 세들어 살아도 뜨거운 사랑으로 좋은 것이 젊음이다.
자기 집 구입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70년대 평균 30년에서 지금은 14년으로 내려왔다.
왜 새파란 청춘이 강남에 제 집을 갖고 있어야 하나.
아니 그런 세상은 있어 본 적이 없다.
그게 오히려 비정상 아닌가.
과도한 물질주의가 청춘을 망치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하지 않나.
좋은 대학 나와 교수며 의사며 정치인이요 종교인으로 출세깨나 한 자들이
지금 청년들에게 인기까지 얻으려고 거짓말을 해대는 모습이 실로 역겹다.
지식의 마약상일 뿐이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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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 |||
Homepage | http://gumsaram.com | |||
Subject | 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 이승구 교수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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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현장입니다.
저의 아파트 옆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1개의 현지 천주교 대형집회입니다.
하루 왼 종일 마이크를 최고로 올려놓아 어질어질 하던
하루였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조용해 졌지만
우리는 갑지기 멍~해 진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랑스 식민지 영향으로
천주교는 엄청난 교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이도 모였죠.
거의 2시간 가량 비가 솥아졌지만
그 빗속에서 춤추고 구르고...
정신없이 빗속으로 튀쳐나오고들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나오라는 말에 하나씩 둘씩
앞으로 나와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인도자는 신부입니다.
군중들 사이에서도 하나씩 둘씩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튀쳐 나오다
물위로 쓰러진 청년을 물에서 끌어내는 모습
비오고 난 뒤니까요~~
군중들 사이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앞으로 끌어 내 놓습니다.
천막 안에서 마구 쓰러지면 감당 할 수 없어
안전사고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보라색 치마와 바지 입은 자들은 '도우미'랍니다
초저녁 집회를 마감 하기 직전
모두 앞으로 모여 기도한 후
쓰러진 자만 땅에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아이(현지 신학생)들이 하는 말입니다.
하루 종일 집회에 시달려 피곤해서
그냥 땅바닥에 드러 누워버렸답니다.
무지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vivace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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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 교수이신 조병수 목사님의 글임을 밝힙니다.
초대교회를 처음부터 위협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마 24:24), 거짓 선지자(마 24:24; 벧후 2:1), 거짓 교사(벧후 2:1)였다. 이 가운데서 특히 거짓 선지자가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는 한편으로는 거짓 그리스도의 사주를 받고, 한편으로는 거짓 교사를 사주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은 전체적으로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벧후 2:1),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요일 4:1), 거짓 선지자가 장차 세력을 규합할 것이라(계 16:13∼14)고 말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거짓 선지자의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의 등장에서 잘 나타난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 오나 속에는 노략하는 이리라"(마 7:15). 거짓 선지자는 노략하는 이리이다. 노략이란 것은 이미 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신자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는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예수 믿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에 전념한다. 진정한 전도자는 이미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성도에게 추파를 던지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참조. 롬 15:20). 기존 신자를 탈취하는 자는 스스로 거짓 선지자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 시대에는 이런 노략질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
거짓 선지자들의 두 번째 특징은 그들의 언어에서 잘 나타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다"(마 7:21). 거짓 선지자는 언어가 강렬하다. "주여"를 두 번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얼마나 언어로 열심을 내는지를 알려준다. "주여 주여"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과 찬송 경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의하라. 예수를 주라고 부르짖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오묘한 고백서를 작성하고, 문학적으로 매끄러운 고백서를 암송한다고 해서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막힌 곡조로 노래하고, 별의별 악기를 사용하고, 사지백체를 흔들어 율동하면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그럴싸한 신앙고백서를 제시하고, 정신이 빠지도록 노래를 부르게 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세 번째 특징은 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거짓 선지자는 예언과 귀신 쫓음과 권능 행함으로 성도들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진다. 예수께서는 이들이 심지어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 쫓고 능력 행하는데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마 7:23)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이처럼 분명한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예언이나 쫓아다니고, 귀신 쫓는 일에 홀딱 반하고, 신기한 일 찾아다니느라고 눈이 벌게 진자들은 결단해야 한다. 솔직히 예수 복음을 따르든지 귀신 복음을 따르든지!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데 있다고 지적하신다(마 7:21).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성품의 결정이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뿜어낼 것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주의 이름을 고백하고 노래하게 하거나 주의 이름을 팔아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데 마음을 두게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것은 거짓 고백주의이며, 거짓 공로주의이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가 만났던 위험이며, 바로 이것이 현대교회가 만나고 있는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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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와 더불어 듣기
(Listening With Our Wounds)
고통속에 있는 사람과 유대감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과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그 아픈 경험을 얘기하기보다는
우울에 빠진 친구의 얘기에 주의력을 기울여,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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