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웃이 누구일까요(Who is My Neighbor)?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2:38)

그러나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나의 이웃은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병 든 사람들,
배 고픈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도움을 필요한 사람들"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예수님의 대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누가복음 10:29~37)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그러니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에서 참된 이웃은
옷이 벗겨지고 얻어맞아, 반쯤 죽은 상태로
길가에 누워 있는 가련한 사람이 아니라,

"길을 건너 이 사람에게로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사람" 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의 이웃은 나를 돕기 위하여 길을 건너
내게로 다가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레오나르도 킬러 박사는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하고
25,000명을 시험한 후, 인간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하고 진리는 단순하다.
내 손이 수고할 때 먹고 복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겉으로 그렇게 사는 척만 한다면 결코 그 열매를 맛볼 수 없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해 단두대를 만들었다
.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만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숙하고 싶다면 셈 레벤슨의 말에 귀 기울여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희 음식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 주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다면 어린아이에게 하루 한 번씩 네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결코 혼자서는 걷지 말라.”

그렇다. 이제 영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건의 시간을 심고 경건의 습관을 갖고 눈물로 씨를 뿌리라.
그러면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둘 수 있다.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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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운다.

백금산 목사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

   일반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마지막 청교도’,‘마지막 웨일즈 칼빈주의 메도디스트’,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 ‘20세기 복음주의 지도자 5인(로이드 존스, 제임스 팩커, 존 스타트, 프란시스 쉐퍼, 빌리 그래함) 가운데 한 사람’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마다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로이드 존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1)는 우리로 하여금 로이드 존스를 연구하고,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충분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


로이드 존스가 미친 영향력의 핵심

로이드 존스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로이드 존스는 이레네우스와  오리겐 같은 교부도 아니요, 루터와 낙스처럼 위대한 개혁자도 아니요, 존 웨슬리나 도슨 트로트맨처럼 어떤 교파나 선교단체를 창설한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어거스틴이나  칼빈같은 뛰어난 신학자도 아니었으며, 윌리암 케리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위대한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로이드 존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일까?   물론 로이드 존스가 당대의 영국 복음주의 교회에 미친 영향은 다양했다. 그는 1950년부터 시작된 매해 크리스마스 전 화.수 이틀간 6개의 강의 토론을 하는 모임인 웨스트 민스트 대회를 통해서 개혁신학 특히 청교도 신학에 대한 관심을 영국에 새롭게 불러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1달에 한 번 모이는 웨스트 민스트 목회자 모임을 통해 영국의 400여 목사들의 목사로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I.V.F로 많이 알려진 국제 복음주의 학생단체의 설립과 기초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뿐만아니라 영국의 젊은 목회자들이 ‘우리는 진리의 깃발사(배너오브트루스)의 자식들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청교도 신학의 원전들을 수없이 많이 복간해낸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 ‘배너오브트루스’(Banner of truth)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런던신학교와 청교도 신학의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복음주의 도서관 설립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러한 많은 공헌은 이중 한가지만 하더라도  훌륭한 업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로이드 존스가 미친 영향력은 근본적으로 그의 설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로이드 존스와 또한 그의 설교만이 아니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에게서 더 많은 것들을 교훈받을 수 있다.


나와 로이드 존스와의 만남,

  나는 로이드 존스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또한 한 번도 직접 그의 설교를 들어 본 적도 없다. 그가 활동했던 무대는 영국이었고, 그의 생존연대(1899-1981)는 거의 20세기와 더불어 시작되어 20세기의 끝무렵에 마감되었으니  나와는 두 세대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막 대학생활을 시작한 때였으므로 그 때 아직 나는 로이드 존스의 이름을 듣지도 못했었다.    내가 처음 로이드 존스를 접하게 된 것은 신학 대학원 3학년 시절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였다.  로마서 강해를 몇장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너무 논리적이고 딱딱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짧은 본문을 가지고 너무나 길게 설교해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설교집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못했던 나는 곧 그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이드 존스의 [부흥]을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왔던 교회의 모습과는 다른 교회의 모습이 그 책에 그려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부흥된 교회의 모습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새로운 신앙세계였고, 너무나 놀라운 교회의 모습이었다. 로이드 존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변했다. ‘이런 설교를 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 단순히 지적인 놀음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로마서 강해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2권씩 로마서 강해 8권과 에베소서 강해 8권을 독파해 나갔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감동, 감격, 희열, 감사... 나에게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에 로이드 존스가 쓴 모든 책을 구해서 읽게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복음과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나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목회와 설교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신학대학원 3년간 배운 것보다 더 크고 심오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와같이 나는 로이드 존스를 읽으면서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 중의 중요한 몇가지는 다음의 다섯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목회자인 우리 모두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첫째.설교에 목회자로서의 목숨을 걸라

우리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설교의 중요성과 우선성에 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에서 제일 큰 개혁주의 교회가운데 하나인 웨스트 민스트 채플에서 약 30여년간 행한 설교를 통하여 설교가 무엇인지를 20세기 교회에 보여주었다. 목사로서의 목회사역가운데 설교는 다른 것과는 대체할 수 없는 목사의 고유한 직무이며, 가장 최우선적인 직무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로이드 존스이래 20세기 후반의 교회는 성경의 한 책을 연속 강해하는 설교 붐이 일어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목회설교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목회는 분명 설교하는 것 이상의 많은 영역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우선순위는 무엇보다도 설교사역이라는 것을 로이드 존스는 우리에게 아주 웅변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설교를 듣는 사람도 설교를 통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의 설교시간에 임하는 것이 오늘의 많은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변화시켜오셨는지에 대한 확신을 교회역사를 통해서 또한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로이드 존스는 오늘날 설교에 대한 불신과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설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설교자로 부름받은 자신의 소명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또한 설교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확신가운데 이 세대의 수많은 방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설교사역에 자신을 전력 투구하도록 격려한다.

.

둘째.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로이드 존스를 통해 우리는 부흥에 대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도전받게 된다. 로이드 존스는 작게나마 그의 에버라본 시절 목회현장에서 부흥을 경험했고, 평생토록 부흥이 다시금 자기시대의 교회위에 임하기를 기도했다. 그는 자기를 18세기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8세기는 그에게 있어 부흥과 각성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영광스러운 경험을 한 시대였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휘트필드, 하월 해리스, 다니엘 로랜드,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였다. 존스가 말하는 부흥이란 소위 ‘부흥회’나 ‘전도집회’ 또한 ‘교회성장’이나 ‘교회개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부흥은 한마디로 오순절 성령부으심의 반복이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이 볼수 있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하심이기도 했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고 있는 부흥에 대한 시각을 통해 그동안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던 여러 가지 운동들 즉 제자훈련, 귀납적 성경공부, 강해설교, 전도폭발, 경배와 찬양, 은사집회등등 끝없는 각종 프로그램과 방법과 수단들을 통해서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했던 우리를 노력들을 정직하게재평가하고,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또한 교회의 문제에 대한 피상적인 진단과 피상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책에 대한 시사를 받게 된다.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이 난무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부흥은 죽은 교회를 살리고, 잠든 교회를 깨우며, 무기력한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로이드 존스의 강조점은 우리가 충분히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통해 부흥을 위해 기도할 분명한 이유와 목표를 배우게 된다.


세째,교회사를 읽어라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로이드 존스의 해박한 교회사에 대한 지식 특히 청교도와 부흥사와 신앙위인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사는 신학교 다닐 때 배우던 과목의 하나이거나 교회사 교수만이 독점적으로 공부하는 분야로 남기 쉽다. 그러나 목회일선에 있는 목회자 자신이 교회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형편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형편을 다른 시대의 교회와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비교시각을 가질 수 있게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 현실의 장. 단점을 깨닫게 되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또한 무엇인 전통적인 것인지를 분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역사하신 시대의 교회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목표와 방향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면에서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고 있는 교회사의 중요성 특히 모든 시대의 교회의 모범이 되는 청교도 시대와 부흥시대의 교회모습을 우리가 잘 아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통하여 오늘의 현실을 해석하고, 나아가서 내일의 한국교회를 만들어가는 가장 좋은 자원이자 이정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넷째, 조직신학의 기초를 닦아라

우리는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목회자와 설교자에게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된다. 로이드 존스가 로마서 강해와 같은 엄청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직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 로마서 강해는 조직신학을 로마서 본문을 통해서 가르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직신학은 성경전체를 하나로 통일시켜주고, 성경전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교리는 사실 성경해석의 열쇠요, 우리 경험의 지표가 된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회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실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조직신학의 중요성에대해서 그리고 교리공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무시하고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교리는 지루하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말고, 성도들의 생활에 관련된 흥미있는 주제를 설교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 결과 성도들의 신앙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편협하게 흐르는 한편 교리와 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성도들에게는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또 한편 인류역사 전체를 주관해가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일하심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성경론,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등의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주제들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야 할 필수적인 내용들이다. 이러한 교리적 내용들은 사실 성경이해와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본기와 뼈대라 할 수 있다. 모든 분야에 있어 기본기가 튼튼해야 하듯이 이렇듯 신앙과 삶에 있어서도 기본기와 같은 그리고 뼈대와 같은 교리적 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사역들을 통해서 이러한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되고 전통적인 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배우게 된다.


다섯째.균형잡힌 독서를 하라

20세기 최고의 목사요,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는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영국의 제일 촉망받는 의사로서 인정받고 있던 중 목회자로서의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곧바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목회 일선에 뛰어들게 되었고, 장로교 계통의 한 노회에서 많은 논란 끝에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과정을 초월한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어떻게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유산과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 교회의 가장 탁월한 목회자요 설교자요 신학자로 우뚝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가? 이는 매우 궁금하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질문이다. 이 비밀은 로이드 존스의 독서생활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신학교나 마찬가지였고, 그가 읽은 책의 저자들은 그에게 스승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교에서 살아있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었으나, 책을 통해서 2000년 교회사의 가장 훌륭한 신학스승들로부터 자신의 신학과 목회를 배웠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독서는 분량과 분야에 있어서 놀라운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그중에서도 교회의 부흥사와 부흥시대의 중심인물들 그리고 청교도신학과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전집등이 로이드 존스가 가장 애독한 책의 목록들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딸이 자기 아버지를 기억할 때, 독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로이드 존스는 독서를 많이했다. “부친하면 우리는 독서를 연상합니다. 물론 저의 부친은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책을 읽었습니다. 읽어도 애독을 하였고, 정규적으로 읽었으며, 많이 읽었습니다”.2)  책이란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느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자들에게 균형잡힌 독서를 권한다. 그가 말하는 균형있는 독서가 무엇인지 그의 말을 직접들어보자. “균형있는 독서를 하십시오. 균형이 깨진 독서처럼 거짓된 지식을 낳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신학서적만 읽는다면 이러한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균형있는 식사를 하듯이 독서에서도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제가 겸손하게 말씀드린다면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신학서적과 전기 읽는 것을 서로 균형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렇게 했습니다. 항상 휴일에 그랬고, 매일같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특히 휴일 아침에는 신학책을 읽고 밤에는 전기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3)

목회자에게 있어서 독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신의 목회사역에 정말 유익되도록 독서를 잘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편식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만을 골라 읽기 쉽고, 정말 자신의 신학과 목회에 뿌리와 뼈대가 되는 책을 꾸준히 읽기 보다는 당장 급하게 써먹을 수 있는 책들만을 읽기가 얼마나 쉬운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가슴을 위해서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제시하는 경건서적과 신학서적을 균형있게 읽는 지혜가 있어야함을 배우게 된다.


어떻게 로이드 존스를 접근할 것인가?

로이드 존스를 접근하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1600개이상 남아있는 그의 설교 테이프를 통해서 그를 이해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병행해서 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간적, 금전적, 어학의 문제등 여러 가지로 인해 그의 테이프를 듣고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그래서 본고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는 아직까지 로이드 존스를 접해보지 못한 독자나 로이드 존스를 체계적으로 알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다음의 순서를 제안한다.


먼저, 먼저 로이드 존스에 대한 전기를 읽어라.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서전이나 전기 읽기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먼저 로이드 존스의 전기를 읽어보라.  전기를 통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고, 그의 삶과 사역을 이해하는 배경을 알게 되며, 그의 신앙과 신학의 성장과정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는  그의 외손자인 캐서우드(Catherwood)가 쓴 전기4)와 로이드 존스 밑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후에 ‘베너오브트루스’출판사를 이끌며 전기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이안 머레이(Iainh Murray)가 쓴 전기5)가 있다. 캐서우드의 전기는 간략한 것이 특징이고,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친밀성을 가졌던 경험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장점이 있다. 이에반해 머레이의 전기는 두권으로 된 아주 방대한 분량이 특징이며,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사역을 아주 상세하고도 밀도있게 그려낸다는 장점이 있다.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해서 볼 수 있으나 두 종류의 것을 다 본다면 더욱 도움이 되겠다.


다음으로,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다음 4권의 책을 먼저 읽어라. 이 4권의 책들은 로이드 존스의 중심사상을 바로 이해하고, 그의 다양한 면모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입문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목사와 설교]6)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는 설교에 관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이미 고전에 속한다. 이 책은 로이드 존스가 1968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트 채플의 설교사역을 마감한 후, 1969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6주 동안 행한 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20세기 최고 설교자의 44년간의 설교사역의 진수가 들어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온 설교에 관한 책들 가운데서도 이 책이 다른 설교학 책들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움을 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다음의 2가지다. 하나는 이 책의 진가가 설교의 기법과 방법을 가르쳐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로 하여금 참된 설교가 무엇이며, 목회사역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설교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에서 무엇보다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 즉 인간의 준비와 노력이상의 신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감동적으로 제시하는데 있다. 따라서 20세기 교회에 설교가 무엇인가?를 산증인으로서 보여주었던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고, 그의 설교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2[부흥]7)

로이드 존스의 사상과 사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의 성령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의 부흥관을 이해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열망은 웨일즈의 에버라본에서의 초기사역(1927-1938)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트 채플에서의 후기사역(1939-1968)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과 목회사역에 있어 그의 일관된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관심사였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부흥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격이 된다. 반대로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을 파악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당대 교회 문제의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부흥’이라고 믿었다. 즉 부흥은 교회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가장 긴급하고 필요하고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로이드 존스는 기본적으로 부흥을 교회사에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부흥의 핵심을 ‘동시에 많은 사람(교회, 지역, 국가전체)위에 성령이 임하심, 찾아오심, 부어주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은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부흥관을 1959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시간에 약 6개월동안 연속적으로 설교한 것을 모은 책이다. 이 부흥에 대한 연속설교가 행해지게 된 배경은 1859년 즉 이 설교들이 선포되기 100여년 전에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미국등 영어권 사용의 전 지역에서 대규모 부흥이 있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100년 뒤에 돌아보는 시점에서, 자신이 처해 있는 영국교회의 상황과 전세계교회의 상황이 다시 한번 1859부흥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이에 대한 부담으로 이 부흥에 대한 연속설교를 토해놓게 되었다.  교회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부흥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과 부흥신학에 대한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로이드 존스의 [부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흥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부흥역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로이드 존스의 가슴에서 이글거리고 있던 ‘부흥의 대한 열망의 불씨’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옮겨 붙게 될 것이다.


3)[성령세례]8)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는 [부흥]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다. 부흥이 교회적인 문맥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을 다루고있다면, 성령세례는 좀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 두 권의 책을 자매편으로 생각해서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성령세례]는 1964-5년 사이에 행해진 요한복음 강해 설교의 한 부분을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존스는 이 책에서 크게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존스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성령의 부으심’,‘성령 충만’,‘성령의 능력을 옷입음’,‘성령의 임하심’,‘성령의 내리심’,‘성령을 받음’등의 용어와 같은 사건을 달리 표현하는 동의어라고 이해하면서, 기본적으로 성령세례를 ‘중생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또한 체험적, 의식적인 면에서 받는 사람과 다른 사람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명백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세례의 증거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이해 등의 주관적인 증거와 얼굴의 표정이나 전도나 설교의 능력 등으로 나타나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강하게 역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러한 성령세례를 주시기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성령 세례관은 오순절의 성령세례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관은 20세기 오순절 교단의 성령세례관이 나오기 훨씬 이전의 교회의 부흥의 역사에 그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의 부흥관과 동전의 앞 뒤면과 같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을 제대로 추적하기 위해서는 로이드 존스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는 16세기 개혁자인 칼빈, 17세기 청교도였던 리차드 백스터, 토마스 굳윈, 존 오웬 그리고 18세기 부흥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성령관을 참고로 해야 하고, 넓게는 부흥역사자체를 고려해야한다. 9)


4)[청교도 신앙]10)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운데 하나는 그와 청교도와의 관련성을 아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가슴이 부흥에 대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었다면 로이드 존스의 머리는 청교도 신학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설교와 목회는 청교도적인 색채로 물들어있다. 그래서 그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부르기도한다.  그만큼 그는 청교도를 사랑했고, 청교도를 잘 이해했고, 청교도를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복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청교도에 대한 연구와 적용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해마다 ‘청교도 대회’의 주강사로서 후배들에게 청교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했고, 청교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접근하게 하기위해 ‘베너오브트르스’사를 통해 청교도 원전들이 복간되는 것을 도왔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청교도에 대한 박식한 이해와 청교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청교도 신앙]이다. 이 책은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트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19회분의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다. 즉 한해에 1회씩 그때 그때의 영국교회의 상황과 교회역사에 비추어 청교도가 그들에게 주는 실제적 도움을 받고자 의도된 강의다. 그러기에 그 체제와 내용은 통일성이 없고 산만하다. 따라서 이 책은 학위논문이나 연구논문처럼 학문적으로 체계 있게 청교도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교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역시 청교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주는 청교도들과 그들의 선배와 후배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 책보다 좋은 책이 없다. 이 책은 비단 청교도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존낙스, 휘트필드, 하월 해리스, 조나단 에드워드등의 교회사의 중요한 영적 거장들에 대한 전기적 관심과 좀 더 넓게는 부흥사와 교회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발시켜준다. 


마지막으로, 로이드 존스의 방대한 설교집들을 보라.

지금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들은 50여권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있다. 이미 발간된 그의 설교집들은 거의 다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내용에 따라 설교를 생활체험설교와 교리설교 그리고 전도설교로 구분한다. 또한 이러한 구분에 따라 실제로 웨스트민스트 채플시절 주일오전에는 주로 성도들의 삶의 체험을 다루는 설교를, 주일오후에는 전도설교를 그리고 주중에는 교리설교를 했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파악하려고 하면, 이 세가지 유형의 설교 모두를 고려해야 그의 설교자로서의 전체를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히 그의 출판된 설교집들은 위의 3가지 유형의 설교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되며, 그의 설교집을 읽을 때는 이 설교가 어떤 유형의 설교인가를 알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만일 이러한 구분을 잘하지 않고 그의 설교유형중의 어느 한 부류만의 설교집을 통해 그를 단정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오류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로마서강해」는 교리설교의 대표적인 경우이고, 「에베소서 강해]」는 생활설교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초기 웨일즈 사역기간동안 행해진 전도설교를 모아놓은 「전도설교」를 통해서 로이드 존스 전도설교의 특징을 잘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의 설교진면목은 어떤면에서 그의 전도설교에서 더 잘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로이드 존스의 어떤 설교들도 실제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나의 멘토, 나의  평생 스승 로이드 존스

 우리 시대에는 참된 영적인 스승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영적인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목회에 있어 스승을 꼭 살아있는 사람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동시대의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전시대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우리의 멘토요, 우리의 평생스승으로 삼고 그들에게서부터 진정한 목회와 신학을 배울 수 있다. 이런의미에서 로이드 존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요 스승가운데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가운데 하나며, 또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가운데 하나다. 목사로서의 나의 신앙과 신학, 설교와 목회는 로이드 존스를 알게 되므로 전환점을 맞이했고, 평생 공부와 목회에 목표와 방향설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로이드 존스를 만나고 난후 그를 길잡이로 해서 내게 큰 도움을 주는 더 많은 스승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서 어거스틴(5세기), 칼빈(16세기), 존 오웬(17세기), 조나단 에드워드(18세기), 스펄젼(19세기), 로이드 존스(20세기)를 나의 멘토요, 나의 평생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로이드 존스는 여기 한국 교회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평생 배울 수 있는 영적 거인이요, 스승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또한 그의 대부분의 책이 번역되어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다. 로이드 존스를 만나 그에게서 배워 보라. 그는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아니 참으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로이드 존스의 여러 모습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보기 위해서는  크리스토프 캐서우드가 편집한 다음의 책을 보라.

Christopher Catherwood, Martyn Lloyd-Jones: Chosen by God. (Westchesrer: Crossway Books, 1986).


2.프레데릭 캐서우드, 엘리자베스 캐서우드,「마틴로이드 존스와 그의 독서생활」이중수 옮김 (서울:양무리서원, 1993), p.32.


3.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서문강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54.


4.Christopher Catherwood,

Martyn Lloyd-Jones: A Family Portrate,

(Grand Rapids: Baker BooKs, 1994).


5. Iain H. Murry, Martyn Lloyd-Jones: The First Forty Years 1899-1939.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2). 이안 머레이의 전기 2권중 제1권은 번역되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안 머레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초기 40년」서문강 옮김 (서울:청교도신앙사, 1990).

Iain H. Murry,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2).


6.마틴 로이드 존스,「목사와 설교」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로이드 존스의 설교관에 대한 좋은 연구서로서 2권의 책이 있다. Tony Sargent, The Sacred Anointing: The Preaching of Dr.Martyn Lloyd-Jones (Wheaton:Crossway Books,1994), 정근두,「로이드 존스의 설교론: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서울: 여수룬,1993).


7.마틴 로이드 존스,「부흥」서문강역 (서울:생명의 말씀사,1988).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이 체계적으로 잘 요약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려면  1959년 청교도 대회에서 행한 ‘부흥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연구’라는 강의를 참고하라. 로이드 존스,「청교도 신앙」pp.13-35.


8.마틴 로이드 존스,「성령세례」정원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9.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에 대한 좋은 분석서로서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Michael A. Eaton, Baptism with The Spirit: The Teaching of Martyn Lloyd-Jones.

( Leicester: Inter-Varsty Press, 1989).


10. 주 4번참고.

자료출처: 생명나무 쉼터


     

                                                                              

     
     
     
     
     
     
     

     





벧전 3:19절의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시니라”는 무슨 뜻인가?                                김선기 목사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은 흔히 난해 구절로 취급되며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곳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벧전 3: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시대에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 때 순종하지 않고 홍수에 멸망한 사람들 곧 순종치 않고 지옥에 간 ( 노아의 8명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으로 지옥에 있는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모순이 따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지옥간 자들에게만 전도하셨습니까? 더욱이 이미 지옥에 간 자들에게도 전도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던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말의 구조와 헬라어의 구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무시한 채  나온 오역의  결과로 엄청난 혼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벧전 3:19~20절을 원문으로 보면  "주님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 곧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가셔서 선포하셨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불순종했을 때가 노아의 시대 방주가 예비 되고 있는 동안이었으며 이 방주에서 극소수 곧 8명만이 구원 받았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주님이 선포하셨는데 그 때가 바로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고 있을 때였고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극소수 곧 8명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옥은 지옥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한 개의 영어 단어 "hell"(지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세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게헨나, 하데스, 탈타루스)가 있는 데 영어는 모두 오직 "hell" 하나로만 번역했고 우리말도 거의 구별하지 않고 번역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옥은 흔히 불못이라고 말하는 “게헨나” 또는 음부라는 뜻의 “하데스”가 아니고 “탈타루스”로서 노아의 홍수 시대에 범죄했던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었던 감옥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벧후 2:4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여기에서 지옥이 원문에 “탈타루스”입니다. 또 유다서 1:6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바로 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신 곳이 “탈타루스”입니다.

그리고 19절의 “전파하시니라”도 전도하다의 뜻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케뤼소”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탄을 좇아 타락한 천사들에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사탄의 심판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천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심판 때까지 “탈타루스”에 갇혀 있게 되었는가? 여기서의 범죄가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을 때 같이 동참하여 타락했던 천사들의 범죄가아니라 이 천사들이 노아시대에 범죄했다는 것을 본문은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들이 과연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들과 노아홍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도전했던 사탄, 지금도 꼬리를 감추고 교활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발버둥치고 있는 사탄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너무나 무방비 상태인 것 같습니다.  

페트라 성경원어 연구원 /개혁주의마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신 그리스도

-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의 해석과 교훈 -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본문입니다. 이 본문 앞뒤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 .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 . .  

마틴 루터는 이 본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놀라운 말씀이요, 동시에 신약 성경 가운데서 어느 것보다도 모호한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베드로가 뜻한 바를 확신 있게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Peter and Jude, 166). 위대한 종교 개혁자 루터가 이 본문의 의미를 확신 있게 알지 못했다면, 과연 누가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실제로 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교훈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본문의 의미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표현을 지옥에 갇힌 죽은 자들의 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서 노아 홍수 때 멸망당한 사람들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서 오늘날에는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전파됩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 9:27). 그러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베드로전서 4장 6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본문은 지금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즉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육체적으로 죽어있지만 장차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성경학자들은 "옥에 있는 영들"을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지옥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셨습니다. 이 해석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18절과 19절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치고, 19절에 있는 "가서"(남성・단수・주격 분사 "포류떼이스")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18절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이 진술에 이어서 19절에 "가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19절). 예수께서 언제, 어디로 가셨다는 말입니까? 본문의 흐름을 고려할 때 부활하신 후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셨다고 보아야 합니다(예수님의 죽으심 → 부활 →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심). 이렇게 보는 것이 예수께서 영으로 노아시대로 가셨다고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같은 단어(19절과 똑같은 형태의 분사)가 22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나타냅니다. 개역 개정에서도 같은 단어를 "(하늘에) 오르사"라고 번역하여 승천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예수께서 영으로 노아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해석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표현이 죽은 사람들의 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pneuma,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죽은 사람들의 영을 의미하려면 반드시 "죽은 사람들의," 또는 "의인의"와 같은 수식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참조. 히 12:23, "의인의 영들"). 신약성경은 물론 유대 문헌에서도 "영"이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죽은 사람들의 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뉴마(pneuma)"가 아니라 "프쉬케(psychē)"입니다. 또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을 "옥(phylakē)"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데스(Hades)"나 "스올(Sheol)"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영으로 노아를 통해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지 밝혀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영"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사용될 때, 거의 예외 없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마 8:16; 10:1; 막 1:27; 3:11; 5:13; 6:7; 눅 4:36; 6:18; 7:21; 8:2; 10:20; 11:26; 행 5:16; 8:7; 19:12-13; 딤전 4:1; 계 16:13-14;)이나 천사들(히 1:14)을 가리킵니다. 유대 문헌인 제1에녹서에서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옥"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20장 7절에서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 있는 장소를 가리킵니다(참조. 계 18:2). 이런 증거를 종합하면 "옥에 있는 영들"이란 하나님께서 옥에 가두신 악한 영들이나 악한 천사들입니다. 이 해석은 다른 성경의 지지를 받습니다. 예컨대, 베드로는 자신의 두 번째 편지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벧후 2:4). 유다서 6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따르면, "옥에 있는 영들," 즉 하나님께서 옥에 가두신 불순종한 천사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노아시대에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일 것입니다(창 6:2).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범죄하였습니다(유 4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벧후 2:4).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성령에 의하여 가셔서 선포하신 대상이 바로 그 악한 천사들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였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유 6절). 그들은 영원히 멸망당할 것입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승천하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는 베드로전서 3장 22절은,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신 것이 승리의 메시지였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써 타락한 천사들은 물론 사탄과 사망과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물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십니다! 

 
오늘날 다수의 성경학자들이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물론 이 해석에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이나 단어들의 사용례에 비추어 볼 때 여러 해석들 가운데 이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이 해석은 최초로 베드로전서를 받은 독자들의 형편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1세기 당시에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비방과 고난과 시험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더 무서운 불시험이 그들에게 닥쳐올 것입니다(4:12).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2:20) 열심히 선을 행하라(3:13)고 권고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도전합니다(4:13).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4:16).

그런데 비방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중에 즐거워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만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께서 악한 세력들에게 승리를 거두시고 진정한 통치자가 되셨음을 확신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겉으로 보기에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싸움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에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옥에 갇힌 악한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이 사탄과 악한 영들을 이기신 진정한 승리자요 그들의 통치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모든 영적 세력들)을 다스리십니다(3:22).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지금 그의 독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능히 다루시고 마침내 벌하시리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독자들은 지금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과 그들을 조종하는 악한 영적 세력들조차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악한 영적 세력들을 이기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영적 세력들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자기 백성이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그 고난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진정한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악한 세력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은 이미 패배했으며, 마지막 형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최종적 승리를 확신한다면 오늘의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세기만큼 극렬한 고난이 없는 시대에 사는 신자들에게 이 본문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건져주신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악한 영적 세력들에게까지 승리를 거두신 진정한 만물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지금도 악한 영적 세력들이 이 세상의 경제 정치적 구조와 함께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 배후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정한 승리자이자 통치자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한다면 사회 경제적 위기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얻은, 그리고 약속된 최종적 승리를 확신하면서 능히 위기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영적 세력들은 물론 만물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승리자 그리스도 예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가 모든 상황과 위기를 다루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선지동산 51호 게재 / 성경본문바로읽기(18) / 길성남 교수


                                          사진: 아름다운 엔세네다의 아침바다


 용기 있는 생활(A courageus Life)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흔히 우리는
서로에게 얘기합니다 용기는 영적인 덕입니다
용기라는 말의 courage 는 라틴어의 cor 에서 왔는데
그것은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용기있는 행동은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용기있는 말도 마음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 느낌,
열정 그리고 결정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용기있는 삶이란 중심으로부터 사는 삶을 뜻합니다
그것은 깊이 뿌리를 내린 삶이며, 피상적인 삶과는 반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라는 말은
"당신의 중심이 말하게 하십시오" 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어김없이 이 가을에 당신이 왔습니다.
찬란한 개울가의 낙엽을 물들이며 당신이 왔습니다.







    벌써 제 방으로 찬바람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창문이 열렸나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매서운 아픔을 뚫고...
    해도 해도 이길 수 없는 불가항력의 시간을 넘어








    소용돌이 굴레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이 가을에 당신이 왔습니다.








    깊은 상처로 당신은 찢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든 이 땅의 열매의 세트는 풍성하기만 합니다.








    당신이 만들어주신 이 모든 선물 세트는
    어디를 가나 넘쳐납니다.
    그러니 내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으리오








    사랑하는 당신아,
    고독한 가을은 싫소이다.








    이렇게 당신이 맺어 놓은 사연이 절절하고,
    당신의 열정이 온 산을 물들여 놓고, 정작
    이런 가을 날 슬픈 당신은 싫소이다.








    드높은 하늘로 내 마음은 새털처럼 나르고
    당신이 주신 탐스러운 소망은 내 혼을 요동칩니다.








    여기가 당신이오,
    당신이 여기라








    내 혼이 당신이오,
    당신이 내 혼이오








 사랑하는 당신아!
이 풍성한 가을에 당신을 얼싸안고 뛰리 이다.
아니, 당신 속의 나는 잠들고 말리이다.


 

 

  

 

세계 각처에서 갑자기 뚫린 거대한 구멍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속수무책인 자동차 사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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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던 자동차 갑짜기 지면이 붕괴되면서 구멍속으로 떨어진 사진을 최근 많이 접하게 된다.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저기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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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원인에는 지질과 기후에 의한 천재지변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결함공사와 같은 인재에 의한 사고까지 세계 곳곳 에서 발생한 공포의 도로함몰 사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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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007년 발생한 도로 함몰현장으로 직경 20미터, 깊이 150미터이르는 초대형 구멍이었다. 이 구멍에 주택 20채가 삼키고 3명이 행방불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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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중국 남부 남창시(南昌市)에서 운전 중에 갑짜기 발생한 도로함몰 사건으로 운전자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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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과테말라 수도 과테말라시티 중심가에서 6월초에 발생한 도로 함몰현장 모습. 시가지 교차로 한 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출현했다. 직경 20미터, 깊이 60미터로 시민들도 충격을 받았다. 이 사고로 주택 몇 채가 소실되고 건물 경비원 한 사람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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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설명 : 630일 밤, 말레시아의 한 도로에서 폭 5미터에 걸쳐 붕괴.소실된 도로 현장. 이 천재지변으로 트럭 한 대가 구덩이로 떨어졌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경찰은 현재 도로붕괴의 구체적인 원인을 조사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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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르진크스라는 거리의 주차장에 갑짜기 나타난 거대한 구멍.

지반침하와 함께 자동차도 서서히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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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사고로 이어질뻔 했던 주유소를 직격한 함몰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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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플로리다주 탬파 주택가 한 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자동차를 집어키고 구멍이 점점 커지는 바람에 인근에 위치한 11가구의 주민들이 긴급하게 몸을 피했다고 11일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 구멍은 현지 시간 일요일 아침 갑자기 생겨 폭과 깊이가 각각 6m, 3m인 이 구덩이는 현재 폭과 깊이 모두 점점 넓어지는 동시에 깊어지고 있다고다행한 것은 이 구멍으로 인해 다친 사람은 아직까지 보고되지 않고 있다고.

 


사족(蛇足):

 "수수께끼의 괴구멍"'에 대한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이를 "싱크홀(Sinkhole·땅꺼짐)" 이라고 부른다 석회암 지형에서 자주 발생하며 석회암이 지하수에 녹아 지반이 침하되는 현상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신중호 책임 연구원은 "싱크홀은 지표면의 토질에 따라 갑자기 큰 구멍이 생기면서 꺼지기도 하고 서서히 무너지기도 한다" 고 말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괴구멍"은 전자에 속한다고 밝혔다 이 경우는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땅이 내려앉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신 연구원은 지반침하의 원인에 대해서는 "석회암 지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도한 지하수 개발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 는 " 10년 전남 무안에서 지하수 개발로 지반이 침하 되는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하수도 지반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다 퍼내면 지표면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쓰촨성의 "괴구멍"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오랜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들이 무리하게 지하수를 퍼내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한 바 있다.


과테말라 "괴구멍"에 대해서는 당국은 당초 열대성 폭풍 ‘애거사’가 동반한 폭우로 지반이 깎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이튿날 입장을 바꿔 생성 원인을 자세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노후 하수도에서 새어 나온 물이 지반을 약화시켰으며 당국의 늑장대응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땅이 무너지는 '괴구멍'은 석회암 지역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자연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경론자들은 도심이나 주택가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의 경고" 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하수 개발이 무분별하게 이뤄진다면 "싱크홀"은 무서운 "블랙홀"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Posted by ccooffeeLa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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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일 독일 중부 Schmalkalden의 주택가에 발생한 불랙홀


--A giant sinkhole opened up in a residential area of the town of Schmalkalden, Germany--

 

독일 중부 슈말칼덴(Schmalkalden)의 주택가에 11 1일 직경 3040m, 깊이 20m에 걸쳐 도로가 함몰한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이 사고로 주차중었던 자동차 한 대가 구멍속에 빠졌으나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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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블랙홀(Sinkhole)은 점점 커지고 있어 주민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고 있다. 경찰 당국은 현재 도로가 함몰한 정확한 원인를 조사중에 있다.

 


과테말라 시내한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5 27일부터 시작된 과테말라의 화산, 지진, 폭풍, 홍수의 겹친 자연재해를 입었다. 게다가 원인을 알수없는 공포의 거대구멍이 주택가에 생겨서 집 한채를 삼켜버렸다.


5 27 Pacaya산이 용암과 화산재를 분출하면서 과테말라시 전체를 화산재로 뒤덮어 버렸고, 공항이 폐쇄되고, 이를 보도하던 기자가 사망하기도 하였다. 설상 가상으로 복구 중에 다시 발생한 열대폭풍은 많은 비를 몰고와서 화산재의 홍수와 함께 산사태 등을 일으켰으며 거대한 수직 구멍은 아직도 그 원인을 알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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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로 집에 몰려 들어온 진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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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암.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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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지역에서 간신히 구조된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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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에서 긁어낸 화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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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로 뒤덮인 여객기. 과테말라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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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위험지역에서 아이들을 우선 대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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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에서 날라온 돌에 맞아 부상당한 사람. 눈위에 꿰멘자국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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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로 뒤덮인 시골어느 마을. 화산재는 암석조각으로 보통의 불이난후 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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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 주변 주민들은 딴곳으로 대피한 상태. 아직도 그들은 다시 화산이 폭발할것

 

을 두려워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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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폭풍이 지나간 바닷가. 많은 부유물들이 해변에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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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복구를 위해 폭풍의 와중에도 화산재를 제거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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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난 거리에서 한 소녀가 막힌 배수구를 찾아 뚫을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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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폭풍과 동반된 폭우로 산의 일부가 깍이고, 진흙이 쓸려내려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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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절개되고 사람들은 잘린 다리를 이용해 여전히 강을 건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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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퍼낸 진흙을 집 밖으로 퍼나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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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처럼 물이 불어버린 시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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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떠내려와 완전히 망가져버린 차안에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아이들이 내부를 뒤져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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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이 창문까지 올라온 상태에서 그나마 자신을 깨끗하게 돌본 여인이 근심스럽게

 

이야기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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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망가졌지만 그래도 자기 개들을 찾고는 기뻐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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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와 진흙 가득한 강물이 한차례지나고 집에 들어와보니 감당이 안되는 상태다.

 

한 여인이 자기집을 둘러본 후 슬퍼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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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만 꺼내서 바깥에서 잘려나보다. 어머니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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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공급된 구호물자가 창고에 쌓여있고 경비가 지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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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줄줄이 서서 구호물자를 나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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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잠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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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대원들이 생존자 구조를 위해 산사태지역을 수색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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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흙이 뭍은 손으로 벽에 손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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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로 숨진 사람들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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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로 11명이 사망한 지역에서 발견된 진흙더미에 반쯤 붙힌 승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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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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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워도 치워도 끊임 없는 진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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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사람들의 점근을 막기위해 경찰이 경비를 서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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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있는 동안에 주택가 사거리에 거대한 Sinkhole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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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3채와 4거리 중앙을 삼켜버린 거대한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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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이 30미터이고, 깊이는 60미터이다. 여기서 3마일 떨어진곳에 3년전 유사한 거대구멍이 생기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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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호수에 구멍이???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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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마을/행복천사 >


그는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천사가 아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처럼
꼭 필요한 순간에 내게 다가와 위로와 소망을 준다.


세상에 홀로 서있는 것 같은 순간에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 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내 마음에 천사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는
땅의 천사이다.

어는 날 나 또한 누구에게
땅의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천사들만이 누리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수잔 듀크의 시 ‘내게 다가온 천사’에서

 

우리 주위 곳곳의 천사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처럼
때를 맞추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들은 가게 점원, 우체국 직원, 공장 근로자,
간호사, 트럭 운전사 가정주부, 교회 선생님,
심지어 어린이라는 사실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조용히 선을 베푸는
땅의 천사를 만나기도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면
나 자신이 천사의 삶을 살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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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공동체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기
Reconizing Christ in Suffering Communites)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도 고통을 받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해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학대당하고,
그리고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가족, 고통받는 친구들, 고통받는 종교 단체,
고통받는 소수 민족, 그리고 고통받는 국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통받는 사람들도 선택되어, 축복받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그리고 세상에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독려하여
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게 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노력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높은뜻 정의교회 시온찬양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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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13~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여호와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성부만이 여호와라고 주장한다.
여호와는 성부에게 해당한다는 여호와의 증인의 말과는 달리
성경을 보자면 여호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에게 해당된다.

 

여호와라는 내용이 나오는 성경

출3:13-15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증인이 하루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말하고 싶지않으니 가라고 해도 끈질기게 늘어져서 그러면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나오냐고 나는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하면서 신세계역을 피는데 그들의 책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는 안나오고 의미만 나온다고 말했다. .......

 성장와 성령이  여호와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대주면 당신의 진리가 그릇되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냐고 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고 신약에는 안나오는데 그 여호와라는 단어가 주라는 단어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말했다. 성경을 보자.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마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해석: 여기서(마3:3) 주는 예수님을 가르키고 구약 사40:3에는 여호와라고 기록되었다. 다시말해서 주의 길은 여호와의 길과 같은 것이고 여호와는 예수님(성자)이다라고 나는 그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또 성경구절을 찾아보자고 했다.
욜2:28-32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요엘서 2:32절에 나오는 여호와가 예수님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사도행전2:16-21절을 찾아주었다.

 

행2:16-21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서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는데 사도행전2:21절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요엘서에 여호와라고 표현된 사도행전의 주가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라고 나는 이야기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행2:21절의 주를 예수님이라고 36절은 말하고 있다.

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시다라고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성령이 여호와인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사6:1-10 사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아도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야흐웨? 체바오트)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내가 또 주(아도나이)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6장 1절과 8절에서 나오는 아도나이여호와로 묘사되며 8절에서는 아도나이께서는 내가= 우리 로 묘사된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6:9 여호와께서(-->원문:그가) 가라사대 (너는)가서 이 백성에게 (너는)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9절에 나오는 “그가”는 문맥상 아도나이며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라고 한글성경이 표현해도 옳은 것이다. 이 그가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가 신약에는 무어라고 되어있느냐가 중요하다.

 행28:25-27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디아 --통하여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사6:9의 “그가 한글성경은 여호와께서” 가 행28:25절에는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6:9절의 그가(여호와)라는 단어는 행28:25절의 성령과 같으므로 성령이 여호와이다라고 나는 말했다.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기본형: 프슈도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기본형: 프슈도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을 동일시 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부가 여호와 이시고 성자가 여호와 이시고 성령이 여호와이시다.

 

요약

[성자가 여호와]

사40:3 여호와의 길---> 마3:3 주의 길

욜2:28-32 여호와의 이름---> 행2:16-21 주의 이름

36절 예수 =주와 그리스도

 

[성령이 여호와]

사6:9-10 ---> 행28:25-27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9 여호와께서(-->원문:그가) 가라사대 (너는)가서

행5:3절 성령을 속이고 = 행5:4절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lamad님 http://cafe463.daum.net/_c21_/bbs_read?grpid=1QfVM&fldid=D0VS&contentval=0007J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453&regdt=2012100922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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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복/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Ⅰ. 문제제기
침례교 목회자 가운데 사도신경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痼甄�. 처음부터 침례교의 이상과 전통을 받아들여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을 반대해왔던 목회자들은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별 관심이 없거나, 목회 현실상 불가피하다고 판단해서, 아니면 사도신경이 성도들의 신앙교육상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공적 예배에서 암송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
필자는 오늘날 모든 한국 침례교회들이 반드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제적 조항으로 그런 법을 만든다면, 그것 자체가 침례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도들과 목회자의 판단에 따라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암송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규제할 강제적 기구는 침례교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동안 침례교회의 선배들이 왜 사도신경을 거부해왔는가 하는 문제는 한번쯤 분명하게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은 침례교의 정신과 관련해서 사도신경의 문제를 몇 가지 각도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II. 신앙고백과 신조의 차이점
“신앙고백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신조는 반대한다.” 이것이 바로 침례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침례교회는 수많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지만, 신조는 거부해왔던 역사적 독특성을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고백과 신조(사도신경)의 차이를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1. 신앙고백의 필요성
침례교회가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신앙고백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신앙의 주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함이다. 주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내가 덤으로 안고 들어가는 것이 신앙일 수 없다. 나는 나의 신앙의 주체가 된다. 그것이 비록 개별적인 신앙고백이든, 아니면 특정한 집단의 신앙고백이든, 그 신앙고백을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신앙고백의 세 번째 필요성은 이단사상을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는 데 있다. 내가 믿고 있는 대상이 누구이며 어떤 내용을 복음으로 믿고 있는지 검증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신앙고백은 공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라고 하셨다.

2. 신앙고백의 문제점: 신조화(信條化)
세상에는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는 법이다. 신앙고백의 유용성 못지 않게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네 가지 차원에서 신앙고백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형식성, 2) 강제성, 3) 획일성, 4) 우위성. 이 네 가지 특징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신조(Creed)라고 한다.
침례교 목회자 허셀 홉스(Herschel Hobbs)는 신앙고백과 신조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앙고백이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을 진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신조는 당신이 우리의 교회에 일부가 되려면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침례교는 결코 신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만일 이것을 믿지 않으면 나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고백이 아니라 신조다.”
신앙고백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형식화되면 참 신앙은 살아남을 수 없다. 신앙고백이 강제성을 띠게 된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신앙을 보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신앙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동일한 형태로 신앙고백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획일화된 신앙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나치게 중요시되고 강조되면 그것은 성경보다 높은 실제적인 권위를 차지하게 된다. 신앙고백이 신조로 변하면, 그때부터 신조화된 신앙은 나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자발적이고 다양성이 용인되는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면서도 그것을 획일화하고 강제성을 띠는 신조로 변질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1963년 미국 남침례교의 신앙고백(Baptist Faith and Massage)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신앙고백의 원리를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신앙고백은 침례교회들의 일치된 견해로 이루어진다. 2) 신앙고백은 결코 완전한 진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유롭게 개정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3)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침례교의 어떤 단체라도 그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출판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한이 있다. 4) 침례교 가운데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는 신구약 성서다. 신앙고백은 해석에 있어서 안내의 역할을 할 뿐, 양심을 지배하는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5) 신앙고백은 성서로부터 나온 종교적 확신에 대한 진술이다. 다른 삶의 영역에서의 탐구나 사상의 자유를 방해할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3. 사도신경이 나온 배경과 문제점
  1) 배경
예수님에 대한 신약성경의 단순한 신앙고백들은 제2세기 교회에 전달되면서 여러 가지 다른 항목들이 추가되고 해석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형태의 신조가 생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적 사상과 헬레니즘 사상이 서로 혼합되고 상호 작용하기도 했다.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신조”를 필두로 여러 신조들이 형성되어 나갔고, 반면에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비교적 통일성을 이루었다.
사도신경의 초기 형태는 이른바 “로마신조”라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거룩한 교회, 육체의 부활 등에 대해 대체로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 많이 첨가되었고, 오늘날 형태로 완성된 것은 8세기 경이었다.

   2) 문제점
사도신경이 가장 악용된 사례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신학적 폐쇄성이다.
왜 성서 침례 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 사도 신경을 외우지 않는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성서 침례 교회는 역사적인 뿌리나 교회의 전통이 장로 교회와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국가교회(state church)와 자유교회(free church)가 있는데, 자유교회는 국교에 반대하여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며, 예배의 의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한다. 침례 교회는 자유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분위기에 차이가 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도 아니고 또 그들이 우리의 신앙의 기준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성경적이면서 그들과는 다른 전통과 특징을 가진 교회나 교파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예배 의식이나 예배 순서가 조금 다르다고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식의 사고는 불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도 신경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내용보다도 형식화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사도 신경에 언급된 내용중에 우리가 믿지 않는 교리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예배 때마다 외우는 것은 반대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그 내용은 뒷전이 되어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서 염불을 외우는 것과 방불하게 된다.
셋째, 사도 신경을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 신경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 신경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에 관해서 조금 고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사도 신경은 12사도가 한 구절씩 쓴 것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한 전설에 불과하고, 실상은 서서히 발달되어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AD700년경에 오늘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사도 신경의 초기 형태는 2세기말(약170년경)에 나타났다. 침례받을 때나 불신자들의 질문에 손쉽게 답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단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때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러한 단순한 초기 형태에 한 구절씩 더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데스(또는 지옥)로 내려갔다.' (이 구절은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없음)는 구절이나, 'holy church'(sanctam ecclesiam; 거룩한 교회)에ꡑcatholic'(보편적이라는 의미도 되고 천주교회라는 의미도 됨) 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것이라든지, '성도의 교통ꡑ(sanctorum communionem)이라는 표현은 모두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6-7세기에 더해진 내용들이다.
이중에 특히 '성도의 교통ꡑ은 지금도 천주교회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으로 해석해 소위 천주교회의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특히 천주교회의 지배하에 여러 구절이 더해져 오늘의 형태가 된 사도 신경을 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반복해야 되는가? http://biblemap.kimc.net/church/bbc3.html; 2001년 2월 19일 접속.
*참고: 「한국천주교회 200년 이 땅에 빛을」, 66, 147.

4. 한국 침례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문제
얼마 전에 한국 침례교의 담임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내용 가운데 사도신경에 관한 대목이 있어서 이 자리를 통해 일부 밝히고자 한다. 전체 응답자(277명) 가운데 공적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고 답한 목회자는 88명(31.8%), 암송하지 않는다는 목회자는 189명(68.2%)이었다. 이 수치는 대체로 한국 침례교회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전체적인 설문분석은 차후에 발표될 것이다).
목회자들이 사도신경 암송을 공적 예배에 도입한 이유와 반대하는 이유를 직접 기록하도록 했다. 아래의 표는 위로부터 많이 응답된 순서로 정리한 것이다.

(표) 사도신경을 암송하거나 반대하는 이유
찬성하는 이유
반대하는 이유
한국 기독교의 풍토이므로
이단시비의 해소를 위해서
타교단에서 전입한 사람의 정착을 위해
복음적 신앙의 핵심이 들어있으므로
특별히 하지 못할 이유 없다
교회역사를 통해 검증된 것이므로
신앙교육을 위해(초신자와 노인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
신앙은 고백하는 것이므로
침례교에는 마땅한 신앙고백이 없어서
해서 손해볼 것이 없다
성경에 없다
동의할 수 없는 신학적 내용이 있으므로
침례교 전통이므로
신앙의 다양성을 위해서(개인적 신앙고백)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천주교 종교회의의 산물(신조)이므로
사도의 고백이 아니다
우리가 채택한 다른 신앙고백이 있으므로
형식에 빠지기 쉬우므로
주기도문과 같은 권위가 없으므로



■사도신경의 문제점
[1]배경.
사도 신경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부터 지금보다 훨씬 많은 내용으로 전승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 전승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서기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회의, 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 회를 거치면서 수정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는 상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다나시우스라는 두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고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으며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예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 4세기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 - 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번도 사도 신경을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2] 성경의 가르침을 다르게 가르치는 것과 문제가 되는 표현들.
전체보다는 몇몇 성경과 문제되는 부분만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①"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오늘날 '저리로서'라는 표현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신앙 고백으로 주문 외우듯이 하는 행위는 로마 카톨릭의 상징주의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그곳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②"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준 인물이지만 그는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쓴 흔적을 여러 곳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 마27:24; 눅23:4, 14~15, 20, 22; 요19:4, 6, 12].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기회를 노려 예수님을 없애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빌라도를 통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형법상으로 보아도 빌라도는 종범이며 유대인들은 교사범에 해당합니다. 교사범은 그 형의 주된 범죄자로서 우리 나라의 형법 제 31조 1항에 의하면 타인을 교사하여 형을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법 제 32조 2항에 의하면 종범의 형은 정범의 형보다 경감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세속적 관점에서 보아도 교사범이 더욱 파렴치한 지능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범을 정범으로 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처형한 정범이 누구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전히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행3:13)라고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들의 죄, 좀더 구체적으로는 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므로 올바른 신앙 고백이 되려면 "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③"지옥에 내려가셨다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입니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경으로 번역되면서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덜기 위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독자들은 한영 성경의 첫 장에 나와 있는 한영 사도신경을 대조하여 참조하기 바랍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④"거룩한 공회"는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입니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경을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이것을 풀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참고 : 마10:17, 마26:59; 눅22:66; 요11:47]
⑤"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카톨릭의 성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와 산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도'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입니다.[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날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비슷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⑥"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경이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 신경은 끝맺음되어 있습니다.

[3]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신경 암송의 부적격성의 이유를 정리해 보면 ①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②출처가 분명하지 못하고, ③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고, ④완전한 신앙의 고백이 되지 못하며, ⑤어떤 부분에서 성경과 다르며, ⑥미신적인 요소와, ⑦성경에 완전한 고백이 있으므로(마16:16), 필요치 않다고 보아집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 합니다. '과연 사도 신경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로마 카톨릭 신부들이 이단 정죄의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사도들의 신경이라 명하고 그것을 이단 규명의 잣대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히 비 성경적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카톨릭 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반대하는 자는 신앙의 최대의 적, 곧 이단으로 정죄해 버립니다.  결국 현대 교회의 사도 신경 옹호론은 결국 중세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 정신, "Back to the Bible!" 정신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 외의 어떤 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곧 이단일 것입니다. http://bible.or.kr/qna/46.htm; 2001년 2월 19일 접속.


출처: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오빤교회스타일 유튜브 영상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가
세속적인 문화를 교회로 끌어드려야 하는가?

낯이 화끈거려...

Ito님 방^^
너희는 너희가 할수있는 모든것을
오직 진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열심히 행하라~
그러나,, 습관이나, 필요에 의하여
행할것이 아니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기 위하여 이처럼 행할찌니라~
 
이것이 곧,, 나의 소망이요
나의 명령이니,,
너희가 아무것도 자신의 공로로,
돌릴것이 없고~
 
다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감사히 여길때에
무엇이던지,,
너희에게 부족한것을,
내가 채워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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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의 몸(The Body of Community)

       

      우리가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빵을 뗄 때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변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공동체로서도 변화합니다

      나이도 다르고, 종족도 다르며,
      각각 그 배경과 역사가 다른
      우리 인간들은 한 몸이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빵은 하나인데 우리가 다 그 빵을 함께
      나눠 먹음으로 우리 많은 사람들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7)

      한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우리는 들어올려지고,
      축복받고, 부서지고 그리고 세상에 주어진
      살아 계신 예수님, 하나님의 자녀들,
      그분의 지체, 그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으로서 우리는 만백성과 만국가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뭉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소망에 대한 산 증인이 됩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목자가 친히 준 상처  - STU LINDNER

       

      저는 제 인생 속에서 원하는 것들을 어떻게 얻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와 대학때에 운동 선수였고 U.S. Air Force Academy를 졸업하였습니다. Air Force에서 저는 아주 뛰어난 사회 경력을 쌓은 후에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고 또한 돈을 버는 비결에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공은 제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삶 속에는 숨겨진 무서운 죄가 있었습니다.  음행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환경은 여러 음행의 관계를 갖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났고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계속 죄악에 빠졌고 심지어 음행에 중독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어두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계속 경고 싸인을 끊임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발사 밥(Bob)을 통하여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셨습니다. 매번 이발을 할 때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고 그는 저를 이발해 주면서 그가 읽은 성경 내용을 말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읽고 말해주는 성경 내용마다 저로 하여금 더 늦기 전에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치 제 모든 죄악의 비밀을 아는 듯 가장 합당한 성경 구절을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주님의 사랑의 경고가 몇 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계속 죄를 지었습니다. 상대를 바꾸어 가며 음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 속의 죄책감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저의 죄악을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한분 외에는. 바로 하나님이시지요.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호하시던 손을 아주 잠깐 떼셨습니다. 일초도 아닙니다. 순간입니다. 그날 저는 순간적으로 대형 트럭과 부딪혔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자랑하였던 건강한 몸은 완전히 상처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들것을 가져온 사람들이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크게 사고가 나서 몸이 망가졌기에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전문의가 와서 저를 보고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하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어느새 찾아온 제 친구 챨스가 눈물을 흘리며 저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제게 기적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챨스와 아내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의사가 빼낼 수 없다고 말하였던 제 몸에 박힌 모든 유리들이 다시 다 발견되었고 그 유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에는 성형 외과 의사가 제 얼굴 뼈를 보면서 말하길 그토록 많이 일그러진 제 얼굴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절로 다 회복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제 다리에서 붕대를 제거한 의사들은 보통 이러한 사고를 당한 후에 피부가 말로 다 할 수 갈라져 있어야 하는데 피부들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놀랐습니다.

       

      병원에 있었던 6주간은 저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게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보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들을 때 특별히 로마서를 통하여 무한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제 삶의 모든 죄를 보여주셨으며 동시에 그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고통 속에 누워 수천만번 하나님께 죄를 용서하여달라고 간구하였으며 제 이기심과 함께 수십년 동안 제 인생에 따라온 죄악된 음행과 음란의 습성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회개의 기간 가운데 제게는 슬픔과 기쁨이 계속적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슬픔은 제 못난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낭비한 삶에 대한 것이요 기쁨은 그러한 무서운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알수록 감사와 슬픔이 뒤섞였습니다.

       

      과거 설교에서 들었던 내용이 기억났습니다. 가끔 목자들이 양의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다리를 꺾지 않으면 그 양은 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결국 목자의 눈을 벗어날 때 이리나 늑대나 야생 동물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죽음이 임하기 전에 목자는 양의 다리를 뿌러뜨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러진 다리를 목자가 친히 고쳐주는데 이 때 양으로 하여금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고 순종하게 만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고 나면 그 양의 다리가 온전하여집니다. 그러면 다리가 부러졌던 양은 절대로 목자의 음성을 무시하지 않고 순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양치기보다 수억만배 완전하신, 주의 백성들을 향한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고집으로 죄를 범하고 심지어 수년 동안의 사랑의 경고를 무시한 저의 다리를 꺾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저는 주를 향하여 아픈 신음을 내었으며 주께서는 친히 저를 찾아오셔서 제게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제 다리가 부러진 가운데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동차 사고는 제 인생의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생명을 잃는 순간까지 가 보았던 제게 있어서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모든 것은 허상일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고 성경을 읽는다고 하였지만 사고를 통하여 깨달은 것은 제가 얼마나 주님을 멀리하였고 얼마나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지 못하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주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기 시작하자 그 동안 형식적이었던 제 아내와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되었습니다. 아내를 향한 나의 사랑과 감사는 매일 깊어갔으며 주의 이름으로 저를 용서하는 아내 또한 오직 예수님 안에서 강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이제 거의 회복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고통의 흔적을 남겨 두셨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몸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 제 죄성을 기억하며 더욱 주의하게 됩니다. 또한 저처럼 죄의 유혹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결국 여러가지 죄의 열매를 먹고 있는 사람들, 특별히 감옥의 죄수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남겨 놓으신 고통의 흔적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게 하고, 아직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지만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경고하며, 또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완전하게 좌절하여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과 은혜와 용서를 알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고통을 통하여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하셨으며 이 고통은 제 남은 인생 속에서 제게 영적으로 무한한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고 전보다 사고 후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매일 하루 하루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 자녀들에게 아빠의 모든 실수와 회복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지의 산 증인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그들의 인생 속에서는 다리가 부러지는 순간이 없이 하나님께 오직 영광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귀한 제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한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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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 24장>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가 왜 하나님 앞에 그토록 큰 범죄였을까요? 왕이 국가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입니까? 우리는 다윗왕의 인구조사가 왜 하나님의 그토록 큰 진노를 부른 범죄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곧 하나님의 소유 된 나라, 신정국가(神政國家)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참 되신 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된 나라의 힘은 사람의 많음이나 군대의 강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의 힘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있습니다. 나라의 힘이 순종의 크고 적음에 달려 있습니다. 순종하면 강하고 불순종하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사기의 기드온 300용사의 이야기에서부터, 또한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구조사를 통하여 자신이 실질적인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인구조사가 왜 하나님께 범죄가 됩니까? 자기가 셈할 수 있는 돈은 자기 돈입니다. 남의 돈을 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겠다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대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 하고 자신이 직접 챙기고 다스리겠다는 교만이며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순종으로 막강하던 하나님의 나라는 급전직하(急轉直下), 불손종의 약한 나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범죄는 또한 선악과사건과 닮아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도 닮아 있습니다. 스스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약삭빠른 요압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뒤집어진 다윗의 눈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요압은 할 수 없이 아홉 달 20일이 걸려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며 인구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용사 80만, 유다장정 50만, 무려 130만을 헤아리는 대군을 보유한 나라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강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제야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좀 강해졌을 때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얼마나 간사하고 악한 것이 인간의 심사인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치시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감동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셔서 치시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되어진 사건을 살펴볼 때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게 된 동기가 교만이었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세우려는 욕심에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 왕, 모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바로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통하고 나아졌을 때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서며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 교만해지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의 죄악 된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셋 중 하나의 벌을 택하도록 하십니다. 첫째 7년 기근, 둘째 다윗이 석 달 동안 대적에게 쫓김, 셋째 삼일동안 온역. 이 세 가지 중 어느것을 택할 것인가? 다윗은 세 번째를 선택합니다. 그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고 백성들이 화를 당하는 쪽을 선택한 얍삽한 짓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손"이라..... 그렇군요. 하나님의 손 안에, 하나님의 소유로,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 손에 죽겠다....., 진작 그럴 것이지요. 다윗이 뒤늦게이지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잡혀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그렇습니다, 설혹 죽이신다 하여도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만이 우리의 복입니다.  

      .....
      .....
      사족....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성도수를 셈하고
      솔로몬에게 넘겨주려는 다윗 같은 목사님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허물고 있습니다.
      기근과 쫓김과 온역이 그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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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아드님을 저희 교회 교육 전도사로 모시고 옵시다. 아드님은 이중 언어에 능통하니, 우리 교회의 청년부를 맡깁시다. 청년부를 맡아서 가르치는 동안에 목사님의 목회 방법도 익히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이다음에 목사님께서 은퇴하시는 날, 목사님의 아드님을 우리 교회 담임 목사로 내정해 둔다면 교회가 안정되고 더욱 든든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목사님들이라고 하여도 너무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믿을 사람이 있어야지요. 우리는 목사님을 주님의 참된 종으로 믿을 수 있고 목사님의 아드님 또한 믿을 수 있으니 교회의 미래를 보아서 다시 없는 훌륭한 적임자입니다.

      목사님 편에서 생각해 본다고 해도 나쁠 것 없는 것은, 우리 교회는 목사님께서 개척하셨고, 그동안, 고생 많이 하신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이 정도의 성장을 하였는데 이토록 잘 짜여진 좋은 교회를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목사님, 아드님을 후임으로 세우고 이곳에서 아드님과 함께 목회하시면서 주님 나라에 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시다.”

      오래 전, 우리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대표급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 위원장 장로님과 재무부장 안수 집사님께서 우리 부부를 불러내어 맛있는 점심을 사주면서 간곡하게 권면하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웠고 무언가 울컥 하는 것이 올라오면서 뽀얀 안개로 갑자기 눈 앞이 흐려옴을 느꼈다. 아, 사탕처럼 달콤한 이 유혹(?)의 목소리, 멋진offer를, 남편 목사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남편 목사님의 답변에 집중했다.

      “그건 절대로 안될 소립니다. 그런 일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세습입니다.” 두 번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서 대답하는 남편 목사님의 답변에 두 분께서는 무척 상심이 되신 듯,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고, 우리 목사님의 단호한 결단의 대답도 몇 번이고 꼭 같은 톤으로 일관하셨다.

      그렇다. 세습, 그 달콤한 유혹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교회와 목사, 양쪽의 욕심(?)이 작용하게 된 사례라고 본다. 입술로 주인이라고 고백하던 그 하나님께서 전혀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인간적인, 극히 인간적인 욕심 말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여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학교, 우리 지역 최고 비싼 사립 학교에 풀 아카데믹 장학금을 받으면서 전교 학생회장을 하던 장한 내 아들, 중고등부 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설교 원고를 받아서 영문으로 번역하던 아이(물론, 어려운 모국어는 엄마인 나의 지도 아래였긴 하지만...),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유명 대학에서 아카데믹 풀 장학금을 주고 데려가더니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을 지급받으면서 공부하던 아들, 대학을 졸업하자 곧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기업이 놀랄만한 초봉으로 스카우트해 데려간 내 아들…이토록 고마운 아들놈이, 제 부모를 존경한다면서 자기도 목사가 되겠다고 한다.

      낮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또 야간으로 신대원을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틴에이저 나이에는 부모의 속을 썩인다고 울상들을 짓는데 내 아들놈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내 속을 썩여본 적이 없는 장한 놈이다. (자식 자랑은 팔푼이라던가, 구푼이라던가? ㅋㅋ) 하나님께 감사함을 이렇게라도 고백하는 맘이다.

      우리 교회의 식구님들이라면 우리 아들의 이런 장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하던 그 교회 담임 목사의 아들을 후임목사로 모시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담임에 대한 신뢰감이 자리한 때문일 것이고, 신뢰할 수 있는 목사의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아들 목사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낯선 목사님보다 마음이 편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때는 담임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습 그 허와 실

      세습이란 사전적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세습(世襲,世習)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한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가)자손에 의해 대대로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자자손손 그 왕권이 세습돼 내려오다가 고종 황제 때 나라의 멸망과 함께 세습도 끝나게 되었다.

      이런 안목으로 볼 때, 목회자가 대물림하는 것을 무조건 세습이란 용어로 비난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세습의 정의가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물려받는 것이라면, 목회자의 가정에서 무슨 물질과 명예를 물려받을 수 있기에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 그 자체만을 놓고 세습이라 비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말이다. 

      교회 재산은 분명히 아버지 목사 개인의 재산이 아니다. 재산이나 직위를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을 전수한다면,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구두 수선하는 아버지, 혹은 요즘 한창 인기 절정인 드라마에 나오는 극 중 인물, 김탁구, 그 아버지의 빵을 만드는 기술과 직업을 그 아들이 물려 받아 대대로 이어가는 것을 세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하여 크게 칭찬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대를 이어 목사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요 복된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날,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수행하던 목사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되는가? 세습, 그 허와 실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 보자.

      1. 우리나라 특성상, 지금 한반도의 북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3대 세습의 부정적 이미지가 교회로 파고들어 온 때문일 수 있다. 국가 최고 원수의 자리에 애송이 청년 (20대 ~ 30대 초반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파랗게 젊은이가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3대 째, 권력의 최고위급으로 급부상한 데 대한 암묵적 반항심은 우리를 철저한 세습반대자의 입장에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다.

      2.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 요인이랄 수 있는 1% 미만(그렇다. 확실히 1%미만일 뿐)의 대형교회 담임 목사들의 횡포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신들을 글자 그대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듯, 그들은 교회 재산을 사유 재산인양, 남용하기도 하고, 착복(?)하기도 하고, 그 아들들에게, 또는 부인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마구 물려주어도 좋은 것처럼 착각한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야 당연히 그 직분과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니 ‘세습’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3. 아버지가 피땀 흘려 이룩(?)한 교회를 이어 받으려는 것은 사명자의 자세가 아니라, 물량주의자로 변질된 자세일 뿐이다. 그런 마음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 안일한 길, 평탄한 길, 넓은 길의 목회를 하겠다는 것, 발람의 교훈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자라면, 교회 재산은 사유 재산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부르심’ 즉 위로부터의 calling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Calling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면 다음은 그분의 양 떼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그에게 부여되고 그 부여된 책임을 인지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명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부르심이나 사명의식이 없는 목사라면 교회를 하나의 기업으로 치부하게 되고 그 기업의 총수가 자신의 전 생애를 투자하여 이룩한 자산이랄 수 있는 기업체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을 지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거기다, 85 vs 14, 주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낸다면…ㅠㅠ. 그러나 그 99명 중 14명, 소수의 약한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설곳을 빼앗긴 교회를 향해 탄식하시는 우리 주님의 아픈 음성이 섞여있음을 알아야 하고, 변질된 교역자를 향해서 우뢰처럼, 벽력같이 질타하시는 그분의 책망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야만 하지 않는가?

      아들아, 광야로 가라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메마른 땅, 시뻘건 모래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그곳, 끝없는 들판에는 짧고 앙상한 가시나무 떨기가 듬성듬성 어른의 주먹 뭉치만 하게 군데군데 엉겨붙어 있는 것 외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그곳, 광야로 가라.

      너는 오직 그곳에서만 하늘의 만나를 먹을 수 있고, 광야의 모진 가시 떨기 나무 아래서 너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광야의 불뱀과 전갈이 너를 해치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너의 앞길을 가로막는 홍해가 너의 간구로, 네 눈 앞에서 좌~악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오직 광야에 들어섰을 때뿐이란 것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네온싸인이 휘황찬란한 곳에서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곳에는 안일함과 평안함이 너의 영혼을 좀먹게 할 것 뿐이다. 아들아, 광야로 가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 8)“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 7-9)




      글: 별똥별/ 최송연

      

        주어지다(Being Given) 예수님은 세상에 주어지셨습니다 그는 주어지기 위하여 선택되고, 축복받고, 그리고 부서지고 짓밟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명과 죽음이었습니다 영원으로부터 선택받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부서지고 깨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의 생명이 번식하여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위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택되고 축복받은 자녀로서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작은 생명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위하여 부서지고 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세상을 위한 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으며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살 때, 우리 생명은 자자손손 계속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에 관한 얘기가 바로 이러한 얘기입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후손들의 가슴속에 계속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는 또한 우리 자신의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Charlie Landsborough/My Forever Friend (나의 영원한 친구)

      



      [서울신문 나우뉴스]미국항공우주국(이하 NASA)의 우주 망원경이 포착한 신비한 성운의 사진이 공개됐다고 스페이스닷컴 등 전문매체가 보도했다.

      이 사진은 지난 3일 NASA의 스피처 우주 망원경(Spitzer Space Telescope)과 갤렉스 우주만원경 (GALEX·Galaxy Evolution Explorer)으로 포착한 나선성운(Helix Nebula·또는 NCG 7293)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특별한 형태 때문에 '신의 눈'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운은 지구에서 650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초신성 또는 신성 등의 폭발에 의하여 날린 기체의 가스 성운인 행성상 성운의 대표이다.

      크기는 우리 태양과 비슷하며 수소와 헬륨이 구성성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성운의 핵은 백색 왜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바깥으로 뿜어내는 가스들로 형광 현상이 발생한다. 50억년 후 우리 태양도 외부가 떨어져나가 이와 유사한 행성상 성운이 될 것으로 학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한 사진은 이전까지 공개된 것 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선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구약시대의 안식일 준수와 예배의 정신

       

      <현창학 목사,  합신 구약학 교수> 

        “구약의 안식일은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기념하도록 주신 특별한 은혜의 날로 진정한 삶의 질서 회복하게 해 ”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붙드는 행위이며 사랑에 성실히 응답하는 자세로 힘써 주일 지켜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안식일은 세상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는 일주일의 첫째 날로 바뀌었다”고 진술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XXI. 7).

      이 고백의 기초 위에 구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의미와 정신을 살펴서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에 적용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구약 성경이 보여주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과 이스라엘의 안식일 경험을 살핌으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이로써 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예배에 대한 이해가 약해지는 이때에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잘 깨달아 주일을 의무나 율법적 부담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는 기회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능력을 덧입고 새로워지는 기회로 기쁘고 즐겁게 지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안식일은 자유의 날이며 예배의 날

       

      1) 먼저 십계명에 나타난 안식일 명령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십계명은 언약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말해주기 때문에 십계명을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2-17과 신명기 5:6-21 두 군데에 나온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도 두 번 나오는 셈이다(출 20:8-11; 신 5:12-15).

       

      출애굽기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하고 있고(20:8), 신명기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로 되어 있다(5:12).

       

      신명기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라는 구절을 첨부하는데 이는 출애굽기의 안식일 계명을 전제하여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므로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두 안식일 계명은 동일한 계명이다. 신명기는 이미 알려진 출애굽기의 안식일 계명을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잘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동기만은 두 계명이 다르게 말하고 있다. 즉,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엿새 동안 만물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고,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 노예살이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한다. 동일한 신학적 실체(안식일)를 다른 시각과 논리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2) 하나의 계명이면서 동기가 이렇게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안식일은 인간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함의로 볼 수 있다. 인간은 두 가지 자유가 필요하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노예됨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창조 질서의 관점에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고,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 두 가지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기념하도록 주신 특별한 은혜의 날인 것이다.

       

      인간은 쉼이 필요한 존재이다. 안식일은 인간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날이다. 그럼으로 삶의 창조적인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죄로 부터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을 기억하면서(기념하면서) 영혼이 죄에서 놓임 받고 새로워지는 날이다.

       

      창조(창조적 능력)와 구원(죄를 극복함)이 안식일이라는 하나의 신학적 실체 안에 하나로 융해되어 있다.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창조와 구원은 한 신학적 실체의 두 얼굴인 셈이다.

       

      3)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두 가지 자유는 하나는 창조(섭리) 질서에서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구속 질서에서의 자유이다.

       

      a) 창조 질서에서의 자유란 어떤 것인가. 인간은 성취를 향해 채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채우기만 하면 포화되어 폭발할 수 있다. 적절한 주기로 비워줘야 한다. 노동은 귀한 것이지만 적절히 쉬어가며 할 때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일주일의 하루 안식일은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acknowledge) 청지기 고백의 날이다. 이 날을 지킴으로 해서 인간에게는 진정한 삶의 질서가 회복된다.

       

      b) 구속 질서에서의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비록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악의 때(더러움)에 지속적으로 오염돼 가게 되어 있다. 늘 회개하는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일주일에 하루는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총을 확인하고 고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남은 엿새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능력을 덧입을 수 있다.

       

      안식일은 이처럼 두 가지 자유를 얻는 날이다. 일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 회복과 새 창조의 능력을 맛보는 날이다.

       

      4) 또한 안식일은 이러한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이었다.

       

      안식일은 단순히 주신 것을 누리기만 하는 날이 아니었다. 그날은 축제일(day of feast)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날이었다. 주일도 마찬가지다. 주일은 일에서 손을 놓고 안식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한편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속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날이다.

       

      2.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

       

      1) 안식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었다.

       

      구약 이스라엘의 경험과 선지자들의 설교를 보면 안식일은 무거운 짐을 지우는 날이 아니었고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었다. 물론 안식일의 시행에 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출애굽기 31:14, 15에 보면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이라고 하신다(참고: 출 35:2; 민 15:32-36).

       

      그러나 이것은 안식일 준수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는 엄중한 경계의 말씀에 다름 아니다. 실상 안식일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태도는 큰 기쁨이었다. 출애굽기 16:25은 안식일은 금식 등의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는 날이 아니고 “먹는” 날, 즉 즐거운 잔치일(축제일)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휴식일이요(30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29절).

       

      선지자의 설교도 이것을 말한다. 이사야 58:13-14에 따르면 안식일은 매일매일 애쓰는 수고로부터 해방을 경험하는 자유의 날일 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다. 안식일은 율법적으로 힘든 짐을 지우고자 하는 제도가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기쁨을 창조해내는 제도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여호와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땅의 높은 곳에 다니게 되며 야곱의 기업으로 배부르게 된다.

       

      2) 이사야 56:1-8, 66:23 등에 보면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회복된 관계와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큰 복락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교회에 주일성수가 약해지는 것은 혹시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인 열심에만 경도했던 탓은 아닐까.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단순한 공식으로만 주일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을 가차 없는 심판만 가하시는, 인격도 없으신 기계와 같은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주일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단순 공식도 이에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하잘 것 없는 인간의 공적에나 의존해서 반응하시는 작고 치졸한 하나님이요, 역시 철저히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격하한 이해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극히 부패하여 희망이 없는 우리를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신 데도 조건 없이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어 무서운 심판에서 건져주셨다.

       

      3)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무한히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은 그 사랑의 표현으로 주신 제도이다. 복을 받거나 문제 해결을 하려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 주일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량없는 은혜와 자유를 누리며 이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올리려고 모이는 것이 주일이다.

       

      주일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공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만 의존한다. ‘받으려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받은 너무나 큰 것을 누리고 감사하는 것이 주일의 기쁨이다. 물론 우리 주변에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 해소돼야 할 문제들이 일부일 다가오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문제는 사소한 것이 되며 하나님은 그들의 문제를 흔쾌히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복을 받고 못 받고 문제를 해결하고 못하고에 주로 매달리는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먼저 기리는 신앙을 훈련할 필요가 절실하다. 주일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향유하며 이러한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큰 즐거움의 날이다.

       

      3. 안식일의 ‘윤리’

       

      1) 안식일은 ‘나’ 자신만 쉬는 날이 아니라 자녀, 남종과 여종, 가축이나 이방인까지도 쉬게 하는 날이었다(출 20:10; 신 5:14).

       

      신명기 5:14는 출애굽기에는 없는 한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리하여 네 남종과 여종이 너처럼 쉴 수 있도록”이라는 말이다. 여기 쓰인 “쉰다”는 말은 말 그대로 “휴식하고 안식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백성에게 안식을 명하면서 그들과 함께한 종의 안식까지 염두에 두신 하나님이시다. 아마도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해 내셨으니 너도 종된 이들에게 인도적인 배려를 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한다.

       

      신명기의 안식일 계명은 자신이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누릴 뿐 아니라, 배려와 놓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같은 구원과 사랑을 베풀라고 권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은총을 받은 자들은 전에는 안 보이던, 자신들 곁에서 무거운 고통과 수고로 허덕이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부여받은 자들이다.

       

      2) 그리스도인의 구속은 혼자만의 차원의 것이 아니다.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이들에게도 구원과 안식의 은총이 함께 돌아가게 하는 그러한 구속이다.

       

      현대인들은 ‘혼자’에 지나치게 훈련되고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더더욱 병들고 시달린다. 성경의 신앙은 ‘같이’, ‘함께’의 교제이며 윤리이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고 있고, 신약도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부르며 “함께 지어져 간다”고(엡 2:22) 말한다. ‘혼자’를 버리고 ‘같이’를 찾는 것만으로도 현대인에게 큰 회복과 치유가 올 것이다.

       

      안식일은 부패의 결과로 나온 반역적인 ‘혼자’를 버리고 성경적인, 순종과 회복의 ‘같이’를 찾는 날이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에만 그치는 날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서로 받으며”(롬 15:7), 놓임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 실천의 날이기도 하다.

       

      주일을 통하여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 주일성수의 참 뜻이라 하겠다.

       

      4. 안식일의 근원적이며 신학적인 의미

       

      이 점은 앞에 논의한 것들보다 선행하며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안식일은 언약의 징표(sign)였다(출 31:13, 17; 겔 20:12, 20). 이 점은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명령, 이스라엘의 안식일 경험, 선지자들의 안식일 설교 등 안식일에 대한 제반 사항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1)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행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애굽기 31:16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심지어 “영원한 언약”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성실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며 인도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향한 고백 행위요,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제반 힘을 공급받는 통로였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안식일 준수를 강력한 마로 권고했고(출 31:14, 15) 그것이 느슨해졌을 떼는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느 13:15-22).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붙드는” 행위였다(사 56:4, 6).

       

      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특히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 세워주신 새 언약의 백성이다(눅 22:20).

       

      새언약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록”(롬 8:39)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강력히 접붙인다.

      우리가 언약 백성이라면 안식일을 기억해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에 성실히 응답하는 자세로 주일을 지켜야 할 것이다.

       

      기독교개혁신보/개혁주의마을


      
      가슴에 흐르는 가을 향기 - 

        최송연 꽉 막혔던 가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실바람 흐르는 가을을 조금 느낄 수 있어 정말 좋네 바람을 휘감아도는 가을 노래 향긋한 빛깔로 물들여지는 나뭇잎 내 마음에도 수채화처럼 고운 가을이 빈 공간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에 흐르는 이 가을 향기 따라 내 사랑 그분이 오신다면 좋겠는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절 下)"

      가슴에 흐르는 가을 향기 -

                              최송연

      꽉 막혔던 가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실바람 흐르는 가을을
      조금 느낄 수 있어 정말 좋네

      바람을 휘감아도는
      가을 노래
      향긋한 빛깔로 물들여지는 나뭇잎

      내 마음에도
      수채화처럼 고운 가을이
      빈 공간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에 흐르는 이 가을 향기 따라
      내 사랑
      그분이 오신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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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원(구속)의 범위에 대한 교리

      기독교에는 양대 구원론이 있다. 칼빈주의 구원론과 알미니안주의 구원론이 그것이다.

       

      1) 칼빈주의 구원론 - 장로교의 선택 교리

      예수님의 구속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선택)을 강조한다. 이것을 ‘제한 구원론’이라 한다.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 인간은 아담 이후에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한다.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하나님은 구원받을 백성을 조건 없이 자신의 뜻을 따라 미리 선택하셨다. 사람의 어떠함 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졌다(二重豫定).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 예수님의 구속은 이와 같이 선택된 백성들에게만 그 효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은혜를 저항, 또는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시지만 ,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한다.

      성도의 견인(Perseverence of Saints) - 한 번 선택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불들어 주신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된다.

      * 이상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늘날 장로교회 신조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데, 영어 표현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튤립’(Tulip)으로 칭하기도 한다.

       

      2) 알미니안주의 구원론 - 감리교의 선택 교리

      예수님의 구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믿음)를 강조한다. 이것을 ‘만인 구원론’이라 한다.

      자연적인 무력함(Natueao Inability) - 인간은 비록 타락했지만 스스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조건적인 선택(Conditonal Election) -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것을 조건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예지(豫知)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

      보편적 속죄(Universal Atone-ment) - 예수님의 구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효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이다.

      저항 가능한 은혜(Resis-tible Geace)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사람이 거부할 수 있다.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役事)하시는 방식에 인간이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택적으로 응답 할 수 있는 능력(선행적은총, Prevenie-nt Geace)을 주셨다.

      조건적인 견인(Condi-tional Perseverance) - 한 번 믿은 사람도 역시 중간에 타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懶怠)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다.

       

      2. 제한 구원론인가? 만인 구원론인가?

      장로교의 경우 예수님의 구원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감리교는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을 보면 이 두 가지 모두 지지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1) 제한 구원론의 근거

      ① 창세 전에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 있었다(엡1:4).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②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이 있었다(롬9:11;갈1:15).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③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있었다(막13:22;사41:8,44:1;벧전2:9).

      [사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막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사44: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④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 택한 사람이 있었다(신14:2,10:15;행22:14;롬1:1).

      [신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신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행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⑤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아시고 택한 자가 많다고 하셨다(요13:18;행18:10;막13:27;마24:24).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행18:10]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막13: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⑥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다(요17:9,13:18).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⑦ 모든 육체가 구원얻지 못하고 택한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단12:1;마24:22;막13:20).

      [단12:1]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마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막13:20]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⑧ 바울이 하나님의 택하신 형제를 안다고 하였다(살전1;4).

      [살전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⑨ 예수님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셨다(마22:14).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⑩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살후3:2).

      [살후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2) 만인 구원론의 근거

      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다(딤전2:4;딛2:11).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②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하셨다(요3:16;요1:7;딤전4:10;행10:43).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딤전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③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셨다(롬10:4).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④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다(롬1:16).

      [롬1: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모든 사람을 부르는 내용이 있다(마22:8,9).

      [마22:8,9]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부서지고 깨어지다(Being Broken)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부서지고 깨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통과 죽음의 삶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악으로 생각하고 사신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는 사명감으로 생각하고 사셨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부서지고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어진 육체를 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가슴을 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부서지고 깨어진 인간 관계로 인하여 고통받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를 끌어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끌어안고

      그것을 우리 사명의 하나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서진 삶을 우리의 죄 많음을 상기시켜주는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여 이것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우리의 순수함과 죄의 정화를 위한

      하나님의 축복에 예속시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은

      새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5. 가정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우리는 개혁교회론을 구성하는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 그리고 교회법적인 관점에서 가정교회론을 평가하려고 한다.

       

      a. 성경적인 사역 분담(엡 4:11-12)에 근거하여 마태복음 28:19-20을 설명한다. 교회 개척의 명령은 교회에 주신 명령이요,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곳이다.13) 제자 만드는 길이 가정교회이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심지어 설교도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제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가정교회 구로조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최 목사는 제자 만드는 사역을 분담한다. 가정교회는 전도하고 목사는 성경공부와 침례로 제자를 만든다. 이런 식의 포괄적인 역할 분담을 성경 주석적으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만 하면 됩니다. 사실 목사들은 전도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14)는 발언은 주석적 근거가 없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주석이 널리 퍼져있다. 그렇지만 전도 역시 설교자가 받은 직무에 속한다. 목사는 설교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주석은 그 근거가 약하다.15)

       

      b. 그런데 제자 삼는 방법 가운데 설교가 있다고 전제하지만, 설교에 대한 발언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막 4:13-15).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보고 배웁니다. 제자는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임으로써 만들어집니다. ... 목회자가 무슨 설교를 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보고 배우지 듣고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16) 최 목사는 기성 교회와 목회자의 취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발언은 문제도 안고 있다. 종교개혁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에 기초하여 설교를 중시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8장에서 제자들이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전도) 사역이다. 그런데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는 발언이나 “설교도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제자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17)는 발언은 지나치다.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임무 수행과는 관계없이 설교를 제정하신 주님의 명령과 그 명령에 담긴 설교의 방편적 성격은 절대적이다.

       

      이 발언은 직분론적 문제도 담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에 생사를 걸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님께서 설교를 방편으로 삼아 역사하시게 섬겨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삶의 모범도 보여야 한다. 목회자는 삶으로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목사에 대한 대단한 질책을 담고 있지만, 이 질책이 목사직 자체에 어떤 훼손도 가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하여 평신도의 위치를 더 부각시킬 수도 없다.

       

      c.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침례는 서울 침례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아주 옳은 입장이다. 그리고 영접과 침례는 담임 목사가 책임진다는 말도 직분론에서 보자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목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목사가 관장한다는 근거는 직분론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18) 세례가 지닌 은혜의 방편의 성격도 약화된다.

       

      d. 가정교회에서는 친교를 위하여 공동식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찬의 근거로 사도행전 2:46절에 나오는 “떡을 떼다”는 표현을 제시한다. 그런데 과연 이게 애찬일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중에 성찬을 제정하셨다. 이를 따라 초대교회는 식사 중에 성찬을 행하는 풍습을 지켜왔다. “떡을 떼다”는 표현은 오히려 성찬을 말한다. 46절 하반절에 나오는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가 애찬을 지시한다. 그러나 교회사의 상당히 초기부터 애찬 풍습은 사라지고 성찬만 남았다. 한국교회가 회복한 애찬 풍습은 세계 교회를 향한 기여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의 풍습을 회복하려면, 애찬과 성찬이 결합된 원래의 모습의 복원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이것은 가정교회의 역할이 아니라, 전체가 참여하는 예배, 곧 은혜의 방편으로 교회를 구현하는 교회의 본래적 직무이다. 이 직무는 목사의 직무이기도 하다.

       

      e. 이렇게 볼 때, 가정교회를 ‘교회’라 부르는 것은 주석적으로 약하다. 최 목사는 가정교회가 지닌 포괄적 성격을 부각하면서 ‘교회’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처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19)

       

      또 가정교회는 개교회의 역할을 하며, 완전히 교회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주일은 합동 목장으로 모인다. 같은 목장의 목원들끼리는 잘 알지만 다른 목원들은 잘 알지 못하는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목장 모임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대치하지 않도록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권면한다.20) 이런 권면의 근거는 실용적이다. 교회를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f. 가정교회는 침례교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가정교회가 재량권을 가진 만큼, 독자적으로 발전할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가정교회는 ‘집단적인 개인’이다. 이 집단적 개인은 기존의 목회 방식이나 교회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영적 완결체를 목표로 삼는다.

       

      특히 가정교회는 성인 위주의 목회론이기 때문에 어린이의 위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차라리 가정교회를 ‘구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특활’이라고 본다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g. 가정교회론은 교회 정치적으로 회중교회론에 기초한다. 회중교회답게 등록교인과 회원을 구분한다. 직분을 맡고 투표권을 갖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하고, 이미 침례를 받은 이들은 안수집사회의를 거치고 임시 신도(信徒) 사무 총회에서 정식 의결을 거쳐 회원이 된다.21) 이것은 전통적인 회중교회의의 모습이다. 즉 치리권을 회중이 지닌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목사가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하는데, 이 점에서는 전통적인 회중교회론을 벗어나기도 한다.

       

      미국 회중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목사, 장로, 교사와 집사직이 있었으나, 이미 17세기 말에 장로와 교사직은 사라졌다. 미국 제1차 부흥운동의 여파로 회중교회가 많이 침례교회로 바뀌었다. 침례교는 전통적으로 목사(감독; 장로)와 집사 두 직분만을 인정한다.22) 가정교회론에서는 교사직이 회복되고 있음을 본다.23) 신도 사무 총회가 치리권을 갖는 한, 안수집사회는 당회를 대신할 수 없는 제도이다.

       

      가정교회라는 목회 방법론도 목사가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 방법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장로교회의 노회와 같은 조직이 이 방법론을 시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노회가 이런 일을 바로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이미 교파의 분리를 당연하게 전제하고 성장이 목회의 잣대가 된 상황에서 보자면, 장로교회의 노회는 이미 이런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못하고 있다.24)

       

      h. ‘평신도 목회’라는 말이 지닌 의도를 동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여도, 평신도는 목회의 사명을 받지 않았다. 이 용어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평신도를 활성화시켜야 하며, 이들이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목회’라고 부를 성경적 근거는 약하다. 목회자가 평신도 목회를 도와준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사람에게 목회의 사명을 맡기셨다. 직분자의 사역인 목회의 원래 의미를 순수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배경에는 이른바 ‘만인사제직’이 있다. 그러나 이를 주창한 루터가 ‘절대적인’ 만인제사장직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인 것은 옳다. 그러나 모두가 목사는 아니다. 그가 신자요 제사장이라는 사실 위에 직분과 위임받은 교구도 가져야 한다. 소명과 위임이 목사와 설교자로 만든다.”25) 비록 말씀과 성례 집행권이 교중과 전체 교인들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라도 이 권을 스스로 행할 수는 없다. 먼저 청빙을 받아야 하고, 교중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교중은 특정인을 말씀과 성례 집행을 위하여 청빙한다.26) 이처럼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으로부터 이 특별한 직책, 곧 목사직을 도출한다.27) 칼빈이 교회의 표지를 목사직의 두 사역, 곧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서 도출한 것도 루터의 이런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다.28) 이렇게 볼 때, 만인사제직에 기초하여 ‘평신도 목회’를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6. 몇 가지 결론

       

      은혜의 방편론, 직분론과 교회법적으로 볼 때, 가정교회론과 개혁교회론은 서로 다르다. 가정교회론의 배경에 있는 은혜의 방편론과 교회법적 측면은 취할 수가 없지만, 직분론 즉 장로교회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장로직에 대해서도 강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목회 방법론으로서 가정교회론의 특성은 참고할만하다. 친교를 추구하는 가정교회는 현대 사회와 교회가 점차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기여는 적지 않다. 그렇지만 친교는 일차적으로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를 말한다(행 2:42 참고). 이점에서 ‘공’예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가 일차적이며, 이 일차적 교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예배에서 확인하며, 구역이나 소모임에서 강화한다. 이를 인지하고 전제할 경우, 공동 식사와 기도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확인하는 가정교회는 현대병을 치유하는 좋은 방편이며, 교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비록 이 배경에 침례교나 회중교회론이 있다 하더라도, 장로교화하여 도입하고 배울만한 방법론이다.29)

       

      가정교회는 성경적이며 초대교회를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물론 다른 목회 방법론과는 달리 가정교회론은 세례와 성찬의 공적 성격을 확인하며, 가정교회만을 고수하는 아집을 보이지 않는 유연성도 지닌다.30) 그러나 회복하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이 조차도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과 함께 영원한 현재인 장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초대교회를 회복하겠다고 나온 새로운 운동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느 기성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교회사적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방편으로 창조된다. 은혜의 방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셨고, 이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사가 진다. 이를 기초로 하여 개혁교회는 언약론적 교회론을 제시한다. 이 교회론은 가정교회론이 지닌 ‘집단적 개인주의’를 교정할 수 있다. 언약론은 애초부터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극복한다. 친교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말한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교회의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교회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개혁교회는 설교와 성례와 목회를 통하여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양육한다. 다만 개혁교회론은 교인들이 지금보다는 전도와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인도하는 방법론을 꾸준히 계발해야 한다. 전통적인 교회가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에는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역의 초점을 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맞춘다는 랄프 네이버의 한탄은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도 해당한다.31)

       

      목회방법론은 다양하지만, 그 출생배경은 항상 존속한다. 가정교회론이 침례교회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경우 침례교회가 발생 초기부터 주장한 만인사제직이나 직분 등 교회론이 작용한다. 침례교회는 지역교회의 완전한 독립을 기조로 삼는다. 침례교회는 상부 기관에서의 하달식 명령이나 하급 기관에서의 절대 복종식 제도를 배제한다. 즉 개교회중심체제로서 각 지역교회는 다른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목회자의 파송, 총회나 및 그 산하 기관으로부터 하달식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교회는 완전한 독립 기관으로서 자의에 의하여 협동할 뿐이다.32) 이처럼 침례교회는 감독제도 뿐만 아니라 장로교 제도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자의에 의한 협동으로 총회와 그 산하 기관이 있지만, 총회는 이러저러한 문제에서 교회들을 구속할 수 없다.33)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와는 무관하게 가정교회를 시행하는 교회들이 자의적으로 협동할 경우, 이들은 교회 정치에서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게 될 것이다. 옥상옥이랄까,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가 침례교적인 연합체의 일원으로 사역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직분론에서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침례교가 애초부터 교회에 두 직분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장로직은 여전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정교회의 장점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미 장로가 시무하는 장로교회를 가정교회로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예 개척 형태로 시작하여 장로를 임직함과 동시에 목자로 계속 세우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운용의 미를 기대할 수야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장로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서 나온 가정교회를 장로교화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일 것이다. 총회나 직분론 등은 교회법의 소관사인데, 교회법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는 은혜의 방편을 직분자인 사도들에게 맡기셨고, 목사직은 이 일을 계속한다. 교회법도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목자를 선발하는 인선위원회도 당회이면 되고, 목자를 안수하여 장로로 세우면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당회에 해당된다는 안수집사회를 따로 둘 필요도 없다. 장로가 목자이면 가정교회론이 지닌 장점도 살리고 회중교회론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34)

       

      장로교회는 은혜의 방편론, 직분론, 예배와 교회정치에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목회 방법론을 단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정체성을 바로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7. 남은 과제: 개혁교회의 공교회성을 위하여

       

      가정교회론의 비판처럼,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성장 일변도의 목회 방법론에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한국교회가 부흥과 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도입한 방법론의 부침은 심하다. 방법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장은 목회자의 투쟁의 현장이요, 신학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장을 통하여 세계 선교의 두 번째 주역이 된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지향할 때가 되었다.

       

      현대 침례교회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 제2차 부흥운동에서 나온 ‘신조가 아니라 성경만’(no creed but the Bible)이라는 신조 아닌 신조만을 충실하게 고수한다. 침례교도 그 역사의 초기에는 여러 신조들을 작성하고 참고하였다. 그러나 현대 침례교도들 중에는 심지어 사도신경도 고백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침례교의 시초부터 있었던 저항 정신(Non Conformist)이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이다. 전통이라는 전통은 모두 거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정치 부분에서만 제외하고 따르던 미국 초기 회중교회와도 다르다.

       

      이미 언급한 교회론이나 직분론과 더불어 신조에 대한 이런 자세는 침례교회가 외부의 영향에 쉽게 노출되게 하였고, 무엇보다도 교회 조직이나 전통보다는 자발적인 조직을 통한 사역 위주의 교회론을 창출하였다. 이 교회론의 연장선상에 가정교회도 있다고 하겠다. 이 교회론은 교구교회보다는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연합한 성도들로 ‘모인’ 교회(a gathered church)를 강조한다.35) 이것이 국가교회를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성인세례만을 인정하는 침례로 가시화된다. 스스로 결정하고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만이 회원이 된다. 이것은 미국 내지 선교와 외지 선교의 저력이었다. 이런 자발적 단체가 목회 방법론적으로는 가정교회이다. 즉 가정교회는 사역 중심의 자발적 단체이며, 은혜의 방편과 표지로써 말하는 교회는 부차적이다.

       

      사실 교회 연합 운동에 익숙한 한국교회로서는 이런 교회론에 이미 익숙하다. 랄프 네이버도 프로그램 위주의 전통주의 교회를 심하게 비판한다. 사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는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요 분석이다. 그렇다 하여 가정교회인가?

       

      여기에서 교의학자는 안타까움만을 토로할 뿐이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다른 교파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교인들을 훈련시키지 못하며 세계 선교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허공을 치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만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로교의 전통과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며, 탁월한 목회 방법론을 개발할 책임도 져야 한다.

       

      이런 고민 중에 미국의 한 침례교신학자의 부르짖음을 듣는다. 하몬은 침례교회가 고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공교회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가 말하는 공교회성은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공동생활에서 표현되는 한 믿음과 한 성찬 공동체가 나타내는 가시적 일치이다. 그는 이를 “성례전적 영성”이라고도 표현한다.36) 이 공교회성과 영성을 바로 확보하지 못하면, 침례교회도 모르몬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로 자칭하지만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37) 그의 관심은 공교회적 전통을 도입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 곧 침례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는 침례교회의 초기 역사에는 ‘공교회적 침례교도’들이 있었다는 것도 밝히면서 전통을 거부하는 현대의 침례교회인들을 정체성 회복을 향한 대화에 초청한다. 그는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신조와 예배와 전통의 권위를 강조한다.

       

      우리 고신교회 역시 이런 절박한 현실 앞에 서있다. 그간 많은 목회방법론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은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공교회적인가? 이 질문에 몰두하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영지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제 가정교회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은 개혁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새로운 모델을 계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가정교회론을 남에게도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신교회의 신학은 방법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도입되는 방법론에 대해서 시의적절하게 평가하고, 목회 현장에서 공교회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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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받다(Being Blessed)

        예수님은 축복받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이런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
        (마가복음 1:11)
        이 소리는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그를 떠받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찬양을 받든, 비난을 받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이 축복의 말씀이
        큰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축복을 우리들과 나누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라는
        당신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열리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그리고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로서
        우리의 생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이 축복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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