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후크마의 중생의 본질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중생을 이해하는 일에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로 언급하려 한다: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시금 에베소서 2장 5절을 생각해 보자. 중생은 죽은 죄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구절의 동사는(synezoopoiesen) 부정시제로서 순간적 동작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돼 있는데,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르킨다. ‘연다’(dienoixen)는 동사 역시 부정시제이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알미니안들ㅡ처음에는 레몽스트랑트(Remonstrants)라고 불리움ㅡ은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뤄지는 변화라고 돌트총회(synod of Dort)에서 주장했다. 이 돌트회의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펠라기우스주의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했다:

 돌트 총회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ㅡ여기서 ‘돌아선다’는 것은 ‘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ㅡ 은혜는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본성에 가장 적당하고 고상한 방법인 설득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의 오류를 배척한다.18)

 돌트에 모였던 신학자들이 알미안주의자들에 대답했던 내용들, 특히 그들이 볼 때 성경적 중생관은 인용할 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중생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남, 다시 살아남 등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안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사역이나 부활보다 결코 뒤떨어지거나 열등하지 않다.19)

 (3) 중생은 근본적(radieal) 변화이다: 

‘근본적’(radieal)dlfks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에서 유래됐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본성상 영적으로 죽었다.(엡 2:1,5; 골 2:13; 롬 8:7,8). 죽은 죄인들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께 대한 저항이 없어지며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중생의 순간이다. 중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이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불란서 신학자인 요한 카메론(John Cameron:1579~1625)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에서 성령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이나 지성을 밝게 비춰서 사람의 의지가 결과적으로 도덕적, 영적 문제에서 지성의 인도함을 따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주장은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배격됐다.

 이 견해는 기능 구조 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잘못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실제적이기도 하다. 내 마음으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죄와 범법함들 가운데서 죽어’ 있다면 나는 결토 올바른 행동들을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트회의에 섰던 알미니안들은 중생에서 의지의 역할에 대해 온당치 못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람 의지는 죄의 영향을 절대로 받지 않으며,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의지가 잘 기능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한 장애물이란 “마음의 어두움과 억제되지 못한 감정들”20)이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은 전적 변화로서 한 인격 전체를 변화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적 용어를 빌리자면, 중생은 새로운 마음을 부여받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한 인격의 중심부이며, 모든 내적 기능의 중앙으로 정신적, 영적 경험들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즉 생각, 느낌, 의지, 믿는 일, 기도하는 일, 찬양하는 일 등이 결국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중생 시에 새롭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원천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 된 성향성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것은 아니다.21)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 점은 우리의 자연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태도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리가 본성상 죄와 부패 가운데 죽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바꾸려고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자연적 방법으로 우리의 존재 밑바탕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소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영역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의 의식적 삶속에 반영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변화가 의식의 아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은 중생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용어를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내가 새마음을 너에게 줄 것이라.”, “만일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이러한 종류의 표현구들은 중생 시에 일어나는 변혁이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우리라는 존재 속에 있는 무의식의 뿌리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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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7항. 근자에 나온 알미니안적 중생론으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이하 각주 생략}···

 

19) Canons of Dort, Ⅲ~Ⅳ, Art. 12. Art. 11도 보라. 개혁주의 신조들 가운데 나타난 중생에 관한 언급으로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질문 8항; [벨직 신앙고백문] 24항(넓은 의미의 중생)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반적으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유효한 부르심’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Ⅹ장 및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31항을 보라.

 

20)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3항.

 

21) 중생과 죄 된 성향들 간의 관계는 본서 12장에서 다룰 것이다.

 

*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69쪽~173쪽.

* 읽기 쉽게 제가 문단을 나누고 칸을 띄웠습니다.

 

 

나그네 | | 조회 40 |추천 0 | 2012.01.1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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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님

 

  



우동 한그릇 

구리 료헤이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우동집으로서는 일년 중 가장 바쁠 때이다. 북해정도 이 날만은 아침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보통 때는 밤 12시쯤 이 되어도 거리가 번잡한데 그날만큼은 밤이 깊어질수록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10시가 넘자 북해정의 손님도 뜸해졌다. 사람은 좋지만 무뚝뚝한 주인보다 오히려 단골손님으로부터 주인 아줌마 라고 불리고 있는 그의 아내는 분주했던 하루의 답례로 임시종업원에게 특 별상여금 주머니와 선물로 국수를 들려서 막 돌려보낸 참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막 나갔을 때, 슬슬 문 앞의 옥호막을 거둘까 하고 있던 참에, 출입문이 드르륵하고 힘없이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6세와 10세 정도의 사내애들은 새로 준비한 듯한 트레 이닝차림이고, 여자는 계절이 지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라고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그 여자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 . . . . . 우동. . . . . . 일인분만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 . . . . "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 . . . . 네. 자, 이쪽으로. "

난로 곁의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주방 안을 향해,

"우동, 1인분!"

하고 소리친다.

주문을 받은 주인은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예!"

하고 대답하고, 삶지 않은 1인분의 우동 한 덩어리와 거기에 반덩어리를 더 넣어 삶는다.

둥근 우동 한 덩어리가 일 인분의 양이다. 손님과 아내에게 눈치 채이지 않은 주인의 서비스로 수북한 분량의 우동이 삶아진다.

테이블에 나온 가득 담긴 우동을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고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카운터 있는 곳까지 희미하게 들린다.

"맛있네요. "

라는 형의 목소리.

"엄마도 잡수세요. "

하며 한 가닥의 국수를 집어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가는 동생.

이윽고 다 먹자 150엔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

라고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모자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주인 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했다.


신년을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한해를 보내고, 다시 12월 31일을 맞이했다.

전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끝내고, 10시를 막 넘긴 참이어서 가게 를 닫으려고 할 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자아이를 데리 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주인은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무늬의 반코트를 보고, 일년 전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그 손님들임을 알아보았다.

"저. . . . . . 우동. . . . . . 일 인분입니다만. . . . . .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

여주인은 작년과 같은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일 인분!"

하고 커다랗게 소리친다.

"네엣! 우동 일 인분. "

라고 주인은 대답하면서 막 꺼내린 화덕에 불을 붙인다.

"저 여보, 서비스로 3인분을 내줍시다. "

조용히 귀엣말을 하는 여주인에게,

"안 되요. 그런 일을 하면 도리어 거북하게 여길 거요. "

라고 말하면서 남편은 둥근 우동 하나 반을 삶는다.

"여보,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은 구석이 있구려. "

미소를 머금는 아내에 대해, 변함없이 입을 다물고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는 주인이다.

테이블 위의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싼 세 모자의 얘기 소리가 카운터 안 과 바깥의 두 사람에게 들려 온다.

"으. . . . . . 맛있어요. . . . . . "

"올해도 북해정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내년에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 . . . "

다 먹고, 150엔을 지불하고 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에 주인 내외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날 수십 번 되풀이했던 인사말로 전송한다.


그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여느 해보다 더욱 장사가 번성하는 중에 맞게 되었다. 북해정의 주인과 여주인은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9 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10시를 넘긴 참이어서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은, 벽에 붙어 있는 메뉴표 를 차례차례 뒤집었다. 금년 여름에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표가 150엔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2번 테이블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져 있다.

10시 반이 되어, 가게 안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모자 세 사람이 들어왔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 형이 입고 있던 잠바를 헐렁하게 입고 있 었다.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엄마는 색 이 바랜 체크무늬 반코트 차림 그대로였다.

"어서 오세요!"

라고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엄마는 조심조심 말한다.

"저. . . . . . 우동. . . . . . 이 인분인데도. . . . . . 괜찮겠죠. "

"넷. . . . . 어서 어서. 자 이쪽으로. "

라며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거기 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카운터를 향해서 소리친다.

"우동 이 인분!"

그걸 받아,

"우동 이 인분!"

이라고 답한 주인은 둥근 우동 세 덩어리를 뜨거운 국물 속에 던져 넣었 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고, 이야기도 활기가 있음이 느껴진다.

카운터 안에서, 무심코 눈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짓는 여주인과, 예의 무뚝 뚝한 채로 응응, 하며 고개를 끄떡이는 주인이다.

"형아야, 그리고 쥰아. . . . . . 오늘은 너희 둘에게 엄마가 고맙다고 인사 하고 싶구나. "

". . . . . . 고맙다니요. . . . . 무슨 말씀이세요?"

"실은,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켰던 사고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 을 입었잖니. 보험으로도 지불할 수 없었던 만큼을, 매월 5만 엔씩 계속 지 불하고 있었단다. "

"음_____ 알고 있어요. "

라고 형이 대답한다.

여주인과 주인은 몸도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지불은 내년 3월까지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오늘 전부 지불을 끝낼 수 있었단다. "

"넷! 정말이에요? 엄마!"

"그래, 정말이지. 형아는 신문배달을 열심히 해주었고, 쥰이 장보기와 저 녁 준비를 매일 해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던 거란다. 그 래서 정말 열심히 일을 해서 회사로부터 특별수당을 받았단다. 그것으로 지 불을 모두 끝마칠 수 있었던 거야. "

"엄마! 형! 잘 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 준비는 내가 할 거예 요. "

"나도 신문배달, 계속 할래요. 쥰아! 힘을 내자!"

"고맙다. 정말로 고마워. "

형이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지금 비로소 얘긴데요, 쥰이하고 나, 엄마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요. . . . . .
11월 첫째 일요일, 학교에서 쥰이의 수업 참관을 하라고 편지가 왔었어요. 그때, 쥰은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놓고 있었 지만요.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로 뽑혀, 전국 콩쿠르에 출품하게 되 어서 수업참관일에 이 작품을 쥰이 읽게 됐대요.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엄마에게 보여드리면. . . . . . 무리해서 회사를 쉬 실 걸 알기 때문에
쥰이 그걸 감췄어요. 그걸 쥰의 친구들한테 듣고. . . . . . 내가 참관일에 갔었어요. "

"그래. . . . . . 그랬었구나. . . . . . 그래서. "

"선생님께서, 너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라는 제목으로, 전원에 게 작문을 쓰게 하셨는데, 쥰은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냈대 요. 지금부터 그 작문을 읽어드릴께요.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 문에. . . . . .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죠.

작문은. . . . . .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많은 빚을 남겼다는 것,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 내가 조간석간 신문을 배달하고 있다는 것 등. . . . . . 전부 씌어 있었어요.

그리고서 12월 31일 밤 셋이서 먹은 한 그릇의 우동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것. . . . . . 셋이서 다만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동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해주신 일.

그 목소리는. . . . . .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요.

그래서 쥰은, 어른이 되면, 손님에게 힘내라! 행복해라! 라는 속마음을 감 추고,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는 것 이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었어요. "

카운터 안쪽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주인과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 는다. 카운터 깊숙이에 웅크린 두 사람은,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 길 듯이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작문 읽기를 끝마쳤을 때 선생님이, 쥰의 형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와 주 었으니까, 여기에서 인사를 해 달라고 해서. . . . . . "

"그래서 형아는 어떻게 했지?"

"갑자기 요청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지만. . . . . . 여러분, 항상 쥰과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맙습니다. . . . . 동생은 매일 저녁식사 준 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클럽활동 도중에 돌아가니까, 폐를 끼치고 있 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동생이 <우동 한 그릇>이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 . . 나는 처음엔 부 끄럽게 생각했습니다. . . . . . 그러나, 가슴을 펴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는 사이에,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 . . . . 한 그릇의 우동을 시켜 주신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 . . . 형제가 힘을 합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습니 다. . . . . . 앞으로도 쥰과 사이좋게 지내 주세요 라고 말했어요. "

차분하게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웃다가 넘어질 듯이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작년까지와는 아주 달라진 즐거운 그믐날밤의 광경이었다.

우동을 다 먹고 300엔을 내며 잘 먹었습니다. 라고 깊이깊이 머리를 숙 이며 나가는 세 사람을, 주인과 여주인은 일년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목소리 로,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라며 전송했다.

다시 일년이 지나_____

북해정에서는, 밤 9시가 지나서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을 2번 테이블 위 에 올려놓고 기다
리고 기다렸지만, 그 세 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2번 테이블을 비우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 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북해정은 장사가 번성하여, 가게 내부수리를 하게 되자, 테이블이랑 의자 도 새로이 바꾸었
지만 그 2번 테이블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새 테이블이 나란히 있는 가운데에서, 단 하나 낡은 테이블이 중앙에 놓 여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이 여기에?"

하고 의아스러워 하는 손님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우동 한 그릇>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
테이블을 보고서 자신들의 자극제로 하고 있다, 어느 날인 가 그 세 사람의 손님이 와 줄지
도 모른다, 그때 이 테이블로 맞이하고 싶 다, 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 이야기는, 행복의 테이블로써, 이 손님에게서 저 손님에게로 전해졌다. 일부러 멀리에서 찾아와 우동을 먹고가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테 이블이 비길 기다려 주문을 하는 젊은 커플도 있어 상당한 인기를 불러 일 으켰다.

그러고 나서 또, 수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섣달 그믐의 일이다.

북해정에는, 같은 거리의 상점회 회원이며 가족처럼 사귀고 있는 이웃들 이 각자의 가게를 닫고 모여들고 있었다.

북해정에서 섣달 그믐의 풍습인 해 넘기기 우동을 먹은 후, 제야의 종소 리를 들으면서 동료들과 그 가족이 모여 가까운 신사(神社)에 그해의 첫 참 배를 가는 것이 5, 6년 전부터의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도 9시 반이 지나 생선가게 부부가 생선회를 가득 담은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들어온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평상시의 동료 30여명이 술이랑 안주를 손에 들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가게 안의 분위기는 들떠 있 었다.

2번 테이블의 유래를 그들도 알고 있다. 입으로 말은 안해도 아마, 금년에 도 빈 채로 신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 석은 비워 둔 채 비좁은 자리에 전원이 조금씩 몸을 좁혀 앉아 늦게 오는 동료를 맞이했다.

우동을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서로 가져온 요리에 손을 뻗히는 사 람, 카운터 안에 들어가 돕고 있는 사람, 멋대로 냉장고를 열고 뭔가 꺼내 고 있는 사람 등등으로 떠들썩했다.

바겐세일 이야기, 해수욕장에서의 에피소드, 손자가 태어난 이야기 등, 번 잡함이 절정에 달한 10시 반이 지났을 때, 입구의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몇 사람인가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오바를 손에 든 정장 슈트 차림의 두 사람의 청년이 들어왔다. 다시 얘기 가 이어지고 시끄러워졌다. 여주인이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로

"공교롭게 만원이어서"

라며 거절하려고 했을 때 하복(일본 옷) 차림의 부인이 깊이 머리를 숙이 며 들어와서, 두 청년 사이에 섰다.

가게 안에 있는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인다.

화복을 입은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 . . . . 우동. . . . . . 3인분입니다만. . . . 괜찮겠죠. "

그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변했다. 십수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 어 젖히고, 그 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과 겹쳐진다.

카운터 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주인과, 방금 들어온 세 사 람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저. . . . . 저. . . . . . 여보!"

하고 당황해 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일 인분의 우동을 주문했 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 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외가가 있는 시가현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금년, 의사 국 가시험에 합격하여 교오또의 대학병원에 소아과의 병아리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4월부터 삿뽀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인사도 하고 아버님 묘에도 들를 겸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 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오또의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에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 . . . .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뽀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과 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 흘렀다.

입구에 가까운 테이블에 진을 치고 있던 야채가게 주인이, 우동을 입에 머금은 채 있다가 그대로 꿀꺽하고 삼키며 일어나,

"여봐요 여주인 아줌마! 뭐하고 있어요! 십 년간 이날을 위해 준비해 놓 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이잖아요, 안내해요. 안내를!"

야채가게 주인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

"잘 오셨어요. . . . . . 자 어서요. . . . . . 여보! 2번 테이블 우동 3인분!"

무뚝뚝한 얼굴을 눈물로 적신 주인,

"네엣! 우동 3인분!"

예기치 않은 환성과 박수가 터지는 가게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눈발도 그치고,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창문의 빛에 비친 <북해정>이라고 쓰인 옥호막이 한 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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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면서 살아요, 우리 최송연
너무 욕심내지 마세요 한 세상 사는 것 별것 아니랍니다 인색한 맘 버리고 나누면서 살아요, 우리 나눈 만큼 향기로 되돌아온답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세요 오늘 인내한 그만큼 내 마음의 폭도 넓어진 것이니까요 잠시 쉬었다 가는 길목에서 내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많지만 진정한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답니다 (학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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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차 한 잔 드리고 싶은 당신...♡
 
 
 
이 가을엔 당신에게
가을차 한 잔을 드리고 싶어요...
 
 
햇살 잘 드는 창가에서
당신의 고운 미소를 바라보며
빛이 고운 하늘 닮은 찻잔에
 

가을 바람, 하얀 구름 띄워서
빛 고운 가을잎 닮은 티스푼으로
당신의 고운 미소를 휘저어
가을차를 드리고 싶어요...
눈이 부실만큼 고운
당신의 환한 모습에
가슴 뭉클하도록 좋은 가을소식 전하며
 
 
차암 좋다며
밝게 웃는 당신 얼굴 안으로
하얀 치아가 보이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차 한 잔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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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신앙

       네번째로 살펴볼 것이 구원받은 자의 신앙, 구원의 실증으로서 신앙입니다. 즉 ‘구원의 신앙’입니다. 구원은 믿음을 대가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이 단번에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동시에 성도에게 믿음이 심긴 것입니다. 오랫동안 씨름해서 조금씩 얻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어둠에 있다가 빛으로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회의, 방황,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던 상태에 있다가 “아, 그렇다!” 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오는 경계는 분명합니다. “혹시 그런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그런 것 같다.” 이런 건 결국은 아닌 것입니다. 아닌 부류 가운데 짙은 것이 있고 옅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뒤집어져 가지고 전연 딴 세계에서 있는 사람이 돼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나셨다. 이것은 요지부동한 사실이다. 안 그렇다면 큰일 난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인가? 이것이 유다서 1장 3절에 있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상 쓰는 ‘믿음의 씨(semen fidei)’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게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오는 문제, 하나님 나라의 여러 경륜의 내용이나 하나님의 크신 약속이나 하나님의 크신 경영에 대해 차례차례 깨닫고 “아, 그렇습니다.” 하고 자꾸 더 믿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믿음의 씨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이 아직 구원받기에 부족한데도 그것이 들어가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어떤 시기가 지나니까 비로소 형체를 온전히 이뤄서 그 사람에게 구원의 사실이 발생했다는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산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서 산 사람이 되니까 산 자의 의식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도리를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금방 깨달아 가지고 다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 제일 먼저 받고 확신하는 중요한 도리들이 있습니다. 막 믿고 온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에커너미(economy)를 건설하셨다.”고 말을 해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참으로 죽음에서 다시 산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산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신께서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어떤 말씀이 그에게 들어가서 역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복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복음이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자연인이라면 누구나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할 만한 생명의 활동이 아니고 인간의 생명 활동일 뿐입니다. 그런 인간의 생명 활동 가운데에 성신님께서 역사하시면 복음의 사실에 대해서 그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서 그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되자마자 그에게 들어간 그 말씀을 진리라고 믿고 받게 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언제 새로운 생명을 받았는가는 아무도 단정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도리, 복음의 기초를 처음으로 그게 이야기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새 생명을 받았다고 단언을 못 합니다.

 복음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많습니다. 의식이 없는 사람도 못 알아듣고 어린 아기들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 없는 사람은 다 구원받을 수 없다. 어린 아기들은 그런 까닭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건지고자 하는 자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거기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했습니다. 정상적인 의식이 있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가 그것을 거부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부지불식간에 언젠가 구원하셨겠지.”라고 못 합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그런 태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무슨 의미한 것이라도 끄집어내다가 “아마 구원을 하셨겠지. 하나님께서 아마 천당으로 보내셨겠지.” 하고 말하기 쉬운데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욕심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은 복음이 전달될 때 그 복음에 의한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은 특수한 경우뿐입니다. 이런 아기들이나 완전히 폐인이 돼 그것을 이해할 아무런 의식 작용을 못하는 사람들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다 절대로 구원 못 받았다.”고 단정은 않지만, 만약 그런 사람이 의식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항거를 했다면 일생을 그렇게 마쳤다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가 사람답게 의식 활동을 할 때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항거를 했으면 항거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의식 활동이 없는 동안에 나님께서 갑자기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고 장담을 하거나 주장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멸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하나님 사랑의 거룩한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김홍전 [구원의 신앙] (서울:성약출판사, 1999) 95쪽~98쪽.
개혁주의마을/사계(四季)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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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라

21:39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 바울(그리스어 이름) = 사울(히브리어 이름)

22:3

 

행 23:6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바리새인 사람이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

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

을 받노라.”

딤전 1:13

 

22:4

 이전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박해하던 육신의 사람이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 스데반집사의 순교(7:58)

9:3-5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

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

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9:8-9

 식음을 전패하고 3일 동안 금식하며 회개를 하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

지도 아니하니라.”

9:17-20

 안수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져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 3번의 선교여행

9:16

 

20:23-24

 복음을 위해서라면 환난은 물론 생명조차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

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

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후 4:8-10 참고)

 

 13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했고, 로마에서 순교했다.

바울은 67-68년경 이태리의 로마 남문 밖에서 순교 했다고 한다.

사도가 참수당할 때 잘려진 머리가 세 번을 튀었고, 그 각각의 장소

에 샘물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장소에 지은 교회가

사도 바울 순교 교회<세 분수의 성당>(Chiesa di Tre Fonta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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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들의 순진함”영화와 이슬람의 정체                

   

최근에 미국의 한 영화작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화 “무슬림들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폭력사태를 야기하여 리비아의 미국대사와 직원들이 무슬림들의 테러공격으로 사망하고 이집트, 예멘을 비롯한 중동 각 나라와 호주를 비롯한 서방세계 국가에서도 무슬림들의 항의시위로 폭력사태가 야기되었다. 필자가 “무슬림들의 순진함”영화를 보았는데 그 내용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조롱하지만 그 내용이 거짓된 것은 아니다.

이란출신으로 전에 무슬림이었던 반 이슬람 운동가인 알리 시나(Ali Sina)는 자신의 반-이슬람 웹사이트(http://www.faithfreedom.org/challenge.htm)에서 무함마드를 자기도취자(나르시스트), 여성혐오자, 강간범, 어린아이에 대한 이상성욕자, 호색가, 고문자, 집단살인자, 이단교주, 암살범, 테러리스트, 정신병자, 약탈자의 12가지 명칭으로 고발하고 있다. 알리 시나는 2001년 이후로 이슬람 학자들에게 자신의 무함마드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온라인상 토론으로 반박하여 이기는 사람에게 5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알리 시나는 그동안 수차례 저명한 이슬람학자들과 이에 관한 토론을 하였지만 토론에서 그를 이겨서 이 상금을 찾아간 사람은 아직 없다. 이 토론에서 이슬람 학자들이 알리 시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알리 시나가 고발하는 무함마드의 범죄들이 그들의 경전인 꾸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와 시라(무함마드의 전기)에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함마드의 범죄들을 평범한 무슬림들은 모른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지고한 인격을 가진 예수와 같은 성인으로 알고 있다. 보통의 무슬림들은 하디스와 시라의 내용은 물론 그들의 정경인 꾸란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이슬람은 고대 아랍어로 기록된 꾸란을 읽고 예배 때 낭송하며 번역된 꾸란은 꾸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랍어를 하는 무함마드의 고향인 아랍 사람들도 고대 아랍어로 된 꾸란을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들은 의미도 모르면서 꾸란을 낭송하고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학자들은 무함마드의 범죄들을 잘 알고 있다. 이슬람 학자나 이슬람 지도자와 같이 이슬람의 경전(꾸란, 하디스, 시라)을 알고 믿는 자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고 이슬람의 경전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범죄를 모르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속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은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속이고 있는 자들과 속고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범죄자인 무함마드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을 그들은 최고의 선으로 알고 있다. 범죄자 무함마드를 그들의 삶의 모범으로 모방하는 이슬람 세계에서 전쟁과 폭력사태가 만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슬람은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하겠다는 공격적인 포교전략으로 대학가에 이슬람문화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이슬람 문화 쎈터를 설립하고 기도실을 만드는 방식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집중적으로 포교하고 있다. 한국은 이슬람을 단순한 종교로 생각하며 이것을 방치할 경우 장차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유럽은 무분별하게 무슬림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이민 온 후에도 기존 사회체계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자신들만이 모여 사는 지역사회를 형성하며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법으로 무슬림들의 자치권을 허용해달고 요구하는 무슬림들로 인하여 국가 안에 국가가 있고 정부 안에 정부가 있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 지역에서 태어난 이민 2세, 3세들이 부모보다 더 근본주의자, 급진주의자가 되는 예기치 못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근본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은 꾸란을 헌법으로 하는 신정정치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란과 수단을 제외한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정치범으로 감방에 들어가 있거나 활동이 제약되며 감시의 대상이 되는데 유럽과 같은 서구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종교의 자유 권리를 주장하며 칼의 종교 이슬람을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포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치안이 불안정하며 국민의 소수가 무슬림인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태국과 같은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슬람을 단순한 종교로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이슬람을 알려면 이슬람 경전자료들을 보면 된다. 이슬람 경전자료는 다음의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 무함마드가 알라에게 받은 계시들을 모은 꾸란(Quran)과 2)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와 3) 무함마드의 전기인 시라(Sira)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자료의 내용을 서방의 통계학자 Bill Warner(www.politicalislam.com)가 조사하였는데 전체적으로 30%가 종교에 관한 내용이며 70%가 정치적인 내용이라고 분석하였다. 종교적인 내용은 천국에 가는 방법과 같은 것들이고 정치적인 내용은 불신자를 죽이고 정복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들이다. 다음은 정치적인 내용들의 구체적 목록들이다.

1. 불신자들의 씨를 말리라.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꾸란 9:29에 따라 딤미(이슬람에 복속되어 굴종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지위를 받아들여 무슬림들에게 인두세(Jizya tax)를 지불하여야하며 아니면 죽어야 한다. 불신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는 종교적인 거룩한 행위이다.

2. 불신자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지하드를 선포하라. 불신자들에 대한 전쟁은 거룩한 행위이다.

3. 불신자 여성들을 강간하라. 성노예들을 소유하고 강간하라. 무슬림 아내들을 강간하라. 강간은 거룩한 행위이다. 무슬림 어린아이 신부와 결혼하는 것은 무함마드의 전통이다.

4. 노예들을 소유하고 사육하라. 노예제도는 이슬람의 거룩한 제도이다.

5. 불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탈취하라. 강도질은 무함마드의 전통이다.

6. 모든 다른 종교들을 파괴하라.

7. 샤리아 법을 강요하라.

8. 간음자를 돌로 쳐 죽이고 채찍질하라.

9. 이슬람의 적들을 암살하라.

10. 이슬람에 도전하는 모든 자들을 살해하라.

11. 이슬람의 우월함을 강요하라.

12. 불신자들을 공포로 떨게 만들라.

13. 불신자들을 고문하라.

14. 동성연애자들을 살해하라. 이슬람의 배교자들을 살해하라.

15.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모든 다른 불신자들에 대한 증오를 전파하라.

이 통계적 분석에 따르면 이슬람은 종교이기 보다는 정치이념에 더 가깝다. 이슬람은 공산주의, 나치주의, 파시즘과 같은 정치이념이며 정치사상이다. 필자는 이슬람의 한국침투를 막기 위해서 한국은 국가보안법과 같은 지혜로운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은 세계정복을 원한다.

 

한국이슬람지하드워치(http://www.koreaislamjihadwatch.com/)소장 장 성 일/자료ⓒ창골산 봉서방           



 

 

죽음이 임박했늘 때 예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6) 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진리를 믿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외로움이 예수님을 부활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그를 따라 그가 당했던 외로움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 속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제한된 가슴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당하셨던 외로움을 경험할 때,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맡길 수 있는
축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높은뜻 정의교회 시온찬양대 홈페이지]

 
 
 

                                    

 

 

 

 

 

 

 

 

선택 예정의 실행 방편들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6항: “하나님께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바처럼, 그의 영원하시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에 의해 그곳에 이르기 위한 모든 방편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후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고, 성령께서 알맞은 때에 역사하심으로써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되며, 양자로 되고, 거룩하게 되며,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능력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을 받지 못하며,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지도 못하고, 의롭게 되지도 않으며, 양자가 되지를 못하고, 거룩하게 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지 못 합니다.”

 

“믿음의 고백은 자유의지 아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

 

제6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의 예정을 하실 때에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목적만을 정하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 실행 방편들도 아울러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어떤 목적을 설정한 다음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방편들을 사용할 것인지를 계획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라는 목적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의 예정을 통해 선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라면, 그 목적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들에 대한 계획이나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방편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이루기 위한 목적은 결코 목적일 수가 없으며, 우연히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물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는 이번 항목에서 하나님의 예정은 그 목적을 정하신 바처럼, 또한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한 방편들도 정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결국 이러한 방편들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에는 결코 방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성취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핑계로 삼아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편들을 실행하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선택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영광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국에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게 판단하여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여 작정하실 때에 그를 선택하시는 작정과 더불어 또한 그로 하여금 선택의 목적에 이르는 방편들을 따르거나 실행할 것도 아울러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행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반면에 그 예정의 목적을 실행하시는 일은 창조하신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그 타락한 사람을 구원의 영광으로 이르도록 하는 절차 또는 방편들을 영원 안에서 정하셨고, 이제 선택을 받은 자들이 시간 안에서 그것들을 실행하거나 받음으로써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작정을 빌미로 삼아, 시간 안에서 그 선택의 작정을 실행하는 절차와 방편을 밟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선택의 예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편들의 작정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가 먼저 밝히는 바는 그것을 정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지극히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가장 지혜로운 방식으로 스스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인간의 어떤 형편이나 조건들을 고려하여 정하신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편들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유효적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됨, 성화,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방편들은 흔히들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로 표현이 됩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의 의미로 이러한 방편들 안에는 일정한 순서 또는 질서가 있음을 뜻하지만, 이것은 시간상의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논리적 순서를 살피어 그 방편들의 상관성을 순서로 표시한 것 뿐입니다. 예를 들어 믿지 않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논리적 순서상 믿음이 칭의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믿을 때에 의롭다함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신앙고백서가 밝히는 방편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는 일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택을 받은 자들의 죗값이 모두 치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선택한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하는 값을 치루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선택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주어지게 될 구원의 요소들, 곧 칭의, 양자됨, 성화와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죗값이 십자가에서 치러졌음을 뜻할 뿐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들은 이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또 다른 방편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죗값을 치렀음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오직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을 받았음을 확고히 합니다(요 10:15,28,29; 17:9).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며, 오직 그들만을 위하여 죗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 끝에 선택을 받은 자들 이외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지 않았음을 덧붙여 둠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방편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부르심이 유효적으로 나타나 믿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복음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죗값을 치러 구속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든 이들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보편적인 초청을 주장하며, 이를 들은 자들 가운데 자신의 자유의지로 순종의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대하여 신앙고백서는 타락한 죄인이 믿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며 오직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서만 복음의 초청이 유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고백을 합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을 고백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또한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기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이어져 갑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의롭게 되는 믿음에 따라 성화의 순종을 행하게 되며, 마침내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기까지 보호를 받게 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모든 구원의 방편들의 실행이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택한 자인 성도를 견인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확고히 합니다.

 

이처럼 선택의 예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방편들을 정하여 두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운명론적인 결정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밝혀줍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는 영원한 작정으로 선택의 대상을 예정을 하셨지만, 이를 운명론적인 결정론으로 받아들여 어차피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변함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핑계로 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뻐하며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책임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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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가네...
                   최송연

    깊어가는 가을 따라 노오란 낙엽이 쌓여져 가듯 서러운 세월도 수북이 쌓여만 가네
                                              가을이야 가고 또 가고
                                              푸르른 솔잎마저 
                                              누렇게 퇴색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 사모하는 내 마음만은 
                                              영원히 파아란 하늘 그대로이면 좋겠네...
                                              그분의 따사로운 숨결은 
                                              그렇게 늘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
                                              生의 아픔과 고통일랑
                                              떨어지는 저 낙엽과 함께
                                              모두 다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네,
                                              정말 좋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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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 토레이의 성령론

     

    1. 토레이의 성령론


    우리나라의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개혁파 교회 내에서 신학적인 면과 목회적인 면에 있어서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분명한 이질감이 생기게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을 받아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목회적으로 볼 때는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중생과는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또한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서 있는 외국 목회자들의 저술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개혁파 계통의 인물들, 특히 케즈윅(Keswick) 계통의 지도자인 머레이(Andrew Murray), 그리고 무디(D. L. Moody)와 함께 동역했던 토레이(R. A. Torrey)의 성령론 관계 서적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 성령운동과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고, 또 뒤를 이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또한 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모두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동일한 선상에서 사역을 했던 토레이 성령론의 가장 주요한 논리가 중생 이후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에 대한 이정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의 영향을 받고 오순절 계통의 신학이 발전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교회성장을 이루는 교단으로 세워지고 있다.

    2. 토레이가 미친 신학적인 영향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세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세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다. 그는 성령세례가 반드시 이적을 행하게끔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증인되게끔 하는 권능을 주시는 일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는 사람을 뉘우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는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의 성령세례론은 또한 성결 중심도 아니다. 그는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 성령세례 자체의 목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은 현저하게 성결과는 직결되지 않는 ‘봉사 중심의 능력’에 치중하고 있음을 본다. 은사의 나타남도 아니요, 성결의 체험도 아니라, 오직 복음전도의 능력을 부여받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세례론은 ‘받았으니 이제 전하라’는 복음의 역동성을 뚜렷이 지닌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은 신자들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데 있는데, 그의 성령세례론에는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와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특이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세가지로 대답하였다.
    첫째, 성령세례는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구분되며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 주시는 역사이다. 셋째, 성령세례는 권능을 수반하며 이 권능은 복음의 증거와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3.토레이가 미친 교회사적인 영향


    한국의 진보적인 학자인 김경재교수는 토레이의 영향에 대해서 오순절 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역사 속에서 19세기 말에 구미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된 개신교 교파신학은 그 주류가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는데, 19세기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했던 선교신학의 원천은 18~19세기 미국 개신교의 대각성 운동 이후 줄기차게 지속되어온 영적 부흥운동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웨슬리신학 영향을 받은 감리교 선교사들은 물론이요, 장로교 목사들마저도 머리는 청교도적이고 칼빈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으로 훈련되었을지라도 그들의 가슴은 무디와 토레이, 채프만(J. W. Chapman) 등 19세기 부흥운동가들의 성서실재주의, 성령세례, 신유경험, 성결운동, 전도운동 등에 의해 강렬하게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
    1907년 한국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성격이나 그 발단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 초기선교사 신학과 신앙의 성격을 잘 반증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시작하여 한국교회의 대형집회는 ‘대규모전도부흥운동’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교회사적 사실들은 한국 개신교가 오순절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또 성공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여러 가지 요인을 고루 갖춘 신앙적 옥토라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하고서..

    이러한 신학자들이 말한 성령론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알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모두가 이해한 성령론에 대해 다른점들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아직 우리는 성령론의 전문가가 아니기에...이런 이해도 있다는 것을 알면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기고' http://www.iepn.co.kr/?subi=5&type=board&id=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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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토트의 성령론

     

    1.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로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설교가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강해’,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등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복음주의 운동의 대반전으로 평가받는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의 로잔언약의 입안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또 그는 영국 런던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의 교구목사로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했으며,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LICC) 소장을 지내면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 등에서 폭넓게 활동해 왔다.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한 마디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며 이후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의 성령론을 주장한 외국의 신학자들로는 찰스 핫지(Charles Hodge), 워필드(B. B. Warfield),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iper), 개핀(Richard B. Gaffin) 등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박형룡이 ‘신학지남’을 통해 처음 이런 입장을 펼쳤고, 신성종과 김해연 등을 통해서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했다.

    스토트는 그의 저서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성경의 긍정적인 진리를 더 분명히 밝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을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고 있다.

    2. 기본적인 접근원리


    존 스토트는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접근원리들을 제시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위의 원리는 성령론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경을 기반으로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원리의 경우 부연설명에서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성경이 묘사하는 행습이나 경험이 아닌 분명한 가르침이 주어진 부분으로부터 우리의 믿음과 표준을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행전 역시 성경의 일부이므로 교리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는 주장을 통해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려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성령의 약속(성령세례)


    먼저 그는 중생이 곧 성령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3:3~8). 또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롬 8:15~16)” 말씀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라는 바울의 확언이 이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성령의 선물이 곧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선물 곧 중생과 성령세례가 다르다고 보며 구원을 받은 신자가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존 스토트는 중생은 곧 성령세례이며, 따라서 구원과 성령세례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주장한다.

    4. 성령의 은사들


    스토트는 성령의 충만이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교회는 통일성의 근거를 ‘카리스(charis: 은혜)’에, 그 다양성의 근거를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혜의 은사들)’에 두고 있다.”

    5. 결론


    개혁주의 성령론에 기반을 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영국 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의 원인이 성령론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존 스토트는 위대한 복음주의자답게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보여주며, 성경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대화를 제안한다. 존 스토트의 설교방법을 ‘Bridge Building’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경과 현실을 연결하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전통적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는 교회들조차 성령님의 이해와 적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오순절운동을 따르는 모순된 경우를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Again in 1907'같은 기독교 내 운동이 그렇다. 과연 성령의 역사가 100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오히려 평양대부흥운동은 20세기 초의 한국적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독특한 성령의 사역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21세기의 성령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노예해방운동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소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과 다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스토트는 대답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소수가 아닌 다수 기독인들을 기반으로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의 역사 역시 Bridge Building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고 적용해 간다면 성령의 역사가 더 다양한 방면에서 포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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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vis Presley-03-Anything That's Part Of You

     

     


     

    미국의 기본 노동시간은 주 40시간, 멕시코는 48시간입니다
    아침 7시에 근무를 시작하여 5시 까지가 정규 근무시간이며
    그 후에는 과외 수당을 지급하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5시에 퇴근하고 밀린 공정이나
    조금이라도 더 벌려는 일꾼들은 남아서 일을 계속합니다

     

    오늘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 몇몇이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장 분위기가 어수선해 집니다

    일꾼 중의 하나가 졸도를 해서 테이블에 누였더군요
    이마를 짚어보니 온기가 없고...식은 땀을 흘리는데...
    잠시 후에 정신이 드는지 손으로 의사 표시를 합니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하면 손을 흔들고,....
    그러더니 글을 쓰는 시늉을 합니다
    펜을 손에 쥐어주니...'PASTOR' 라고 씁니다
    (들은 적은 있으나 실제로 누워서 글을 쓰는 것은
    오늘 처음 목격했습니다)

     

    목사님을 불러 달라는 뜻이겠죠
    일단 구급차를 부르고...응급처치를 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집, 교회가 멀고, 연락처를 알지 못해서
    모셔오지는 못했습니다만...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Pastor' 를 쓸 수 있었을까?
    과연 나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누구를 찾을 것인가?
    당신은 누구를 찾으시겠습니까?

     

    글/김만니 



    

    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Reading its Theology in Historical Context, R&P Publishing: 2009, p. 248. 

    In both the Confession and the Larger Catechism, calling is said to come about by God's enlightening the minds of the elect spiritually and savingly, so that they understand the things of God.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에서는 부르심이 택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심으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Reflecting the words of Ezekiel, God takes away their heart of stone and replaces it with a heart of flesh. He renews their wills and by his almighty power makes them ready and willing to answer his call, to do so freely, and to accept and embrace his grace. 에스겔선지자의 말을 반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당신의 부르심에 대해서 준비하여 응답할 수 있게 만드셔서, 자유롭게 응답하게 하시고, 또한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Both Confession and Catechism here preserve the delicate balance between the almighty, sovereign power of God - seen in his gracious and loving invitation in the gospel - and the free agency of the ones called, for God's call results in the elect responding freely of their own will, God having granted them the capacity to understand, believe, and respond.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는 모두 여기서 복음을 통해서  당신의 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초청에서 드러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부르심을 받은 자의 자유로운 힘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택자의 자유로운 반응을 낳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해하고, 믿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기 때문입니다. This call is the point where union with Christ is effected. 이러한 부르심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어나는 그 지점입니다. The Father calls, and the Holy Spirit grants faith and brings into union with the Son. 성부께서 부르시고, 성령께서 믿음을 허락하셔서 성자와의 연합에 이르게 합니다. The Son united himself to us in the incarnation, in one indivisible person, permanently, everlastingly. 성자는 성육신 속에서 당신을 우리들과 연합시키는데, 분리불가한 한 인격 속에서, 영구히, 영원토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Now we are united to him, as the Father calls countless human persons.이제는 우리들이 그에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성부께서 부르시는 대로 말입니다.

     

    This effectual call is by God's grace alone and hinges on nothing in man. 이러한 효과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 인간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습니다. Nor is it based on God's foreknowledge of future events(WCF 10.2).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에지하심에 근거하는 것조차도 아닙니다(웨신10.2). This rebuts the Arminian idea that God's decisions in salvation are based upon his foreknowledge of who will respond in faith to the gospel.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결정이 복음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게 될 사람이 누군지 미리 아시는 것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적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This theology denies that faith and repentance depend on God' determination in election, insisting that God simply ratifies the choices humans make themselves. 이 알미니안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을 단순히 인허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믿음과 회개가 선택 안에서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부인합니다.

     

    The divines posit two stages in the call. In the first, the called are passive, for God changes the heart. 웨스트민스터를 작성한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있어서 두 단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단계에서는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 수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However, in the second phase, they become active. Having been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they answer the call, embracing the grace offered in the gospel. 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는 그들이 능동적이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깨어나고 새롭게 되고 난 후에야 그들은 부르심에 응답하여서 복음 속에 제공된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퍼온 글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났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매우 많다!(찰스 스펄전)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7)


    중생은 구원에 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거듭났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거듭났으면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았으면서
    자기 혼자 중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해서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난다든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
    이런 것은 중생이 거기 첨부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느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즉 거룩한 행위에 의해 알려지고
    은혜로운 체험에 의해 느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중생은 초자연적인 위대한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어떤 작용이 아닙니다.
    대신 가슴 속에서 역사하고,
    영혼을 새롭게 하며,
    그 전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새로운 원리가
    그 사람 안에 불어넣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체를 깨끗이 씻겨 옷을 입히는 것과
    그 시체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간이 할 수 있고
    후자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제 영혼의 아버지십니다.
    주님의 영이 제 안에
    이 새롭고 거룩한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오늘까지 ‘죄와 허물로 죽어’있을 것입니다.
    저의 천국 생활은 전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입니다.
    ‘제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바 되었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십니다.”

    주여,
    우리가 지극히 중요한 이 사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중생하지 않은 것은
    곧 구원얻지 못한 것이요,
    용서받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펄젼의 아침 묵상’ (생명의 말씀사 역간)중에서

    http://www.newsnjoy.co.kr/bbs/list.html?table=bbs_25&idxno=58287&page=1&total=17148&sc_area=&sc_word=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롬니 대선주자 만난 뒤 '신학적 논쟁하고 싶지 않아' 대선 영향력 '글쎄'

       
     
     

    ▲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협회 인터넷 사이트가 모르몬교를 이단 목록에서 삭제했다. 10월 11일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를 만난 뒤 취한 조치라 그 배경을 놓고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사진은 복음주의협회 사이트 첫 화면에 배치된 롬니와 그래함 목사의 회동 장면.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협회 갈무리)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협회' 인터넷 사이트가 모르몬교를 이단 목록에서 삭제했다. 10월 11일 빌리 그래함 목사가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를 만난 뒤 이어진 조치여서 그 배경에 미 언론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협회 사이트 총 책임자 캔 바런(Ken Barun)은 "그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집중했다"며 "선거 기간 동안 신학적인 논쟁이 정치 쟁점화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삭제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 일이 미트 롬니의 방문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이 사이트에는 신앙의 성숙을 돕기 위한 그래함 목사의 해답(Answer) 중 '무엇이 이단인가'에서, 모르몬으로 잘 알려진 '후기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교리를 전파하며 잘못된 신앙을 가르친다며 모르몬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 사이트는 통일교와 여호와의 증인, 사이언톨로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CNN에 따르면, 그래함 목사의 대변인 래리 로스(A. Larry Ross)는 "60년 이상 빌리 그래함은 복음을 전 세계 곳곳에 그들의 종교적 배경과 관계없이 선포했으며, 특별한 그룹이나 교파를 목표로 하고 개종시키지 않았다"며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모든 이들을 대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며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 반응하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며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이번 조치와는 반대로, 그래함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대부분 기독교인은 모르몬교를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미국의 가장 큰 개신교 교파인 남침례교 역시 모르몬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는 모르몬교를 기독교로 받아들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롬니는 모르몬교의 배경에서 자랐고,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최근 조사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다수가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의 종교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성애와 낙태에 관련된 정책 때문에 그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어 '모르몬교 논란'은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동시에 미국 개신교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는 조사도 진행된 바 있어, 롬니 후보의 '모르몬교 정체성'을 희석하는 시도들이 미국 대선에 큰 변수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다.

    오경환 기자 / shalom@newsnjoy.us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강의는 두번째 주제강의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다. 이 강의는 박영돈 목사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요약한것으로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지적하며 성경적으로 성령의 특성을 해석한 내용이다. 다음은 두번째 내용이다.


    영적탈선의 요인들

    성경적인 이해를 따지기 보다는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시대의 실용주의적인 가치관과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대중을 선동하는 표풀러리즘이 이런 성령운동을 부추켰다고 볼수있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 하던 교인의 열심을 자극하여 교회를 속히 부흥시켜 보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빚어낸 현상이라고 볼수있다. 어떤 목사는 온갖 세미나를 돌아다니며 쓰러뜨리는 기술이나 방언과 예언하는 법을 습득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전수받아 정체된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안성 모수양관에서 이런 집회가 열렸을때 수백명의 목회자들이 모였다.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둘씩 짝을 짓게하고 입을 벌려서 아말감으로 때운 이를 확인하게 하고 "예수이름으로 아말감은 금니로 변할지어다"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금니로 변했다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처음에는 그런 현상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막상 눈앞에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고 한다. 기적앞에서는 너무도 상식적인 판단마저도 무기력해질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다. 성경은 사단도 이적과 표적을 행해서 미혹케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미국에서 어떤 그리스도인 여성은 마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한 주술사에게 놀랍게 치유함을 받았다. 두발의 길이가 5센티 차이가 나는데 주술사를 통해 놀랍게 치유함을 받았다. 그후에 그녀는 심한 우을증과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시달렸는데 담임목사에게 고백하고 회개하자 심리적인 압박이 떠나게 되었다. 그순간에 발의 길이는 원상태로 돌아갔다. 표적과 기사는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의 성자로 알려진 바바 화리드는 죽은자도 살리고 불치의 병을 고치고 마른 대추나무 열매를 황금덩이리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였다고 얼려졌다. 그러므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성경적으로 분별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 어떤 선교지에서 사람들이 나쁜음식으로 인해 잇몸이 상해서 이빨이 다 빠졌다. 이가 다시 날수가 없는 상태인데 선교사의 기도로 인해 기적적으로 생니가 돋아났다고 한다. 그것은 기도로 통한 하나님의 긍휼의 나타남,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가난해서 의료적인 혜택을 받을수 없는 곳에 기도를 통해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이를 요술과 같이 노란색 이로 둔갑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고 미혹의 영의 장난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와 질서의 영이시기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없이 기적을 남발해서 우리를 혼란과 무질서속에 빠뜨리게 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지금도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기적을 경제적으로 행하신다. 분명한 경륜적인 목적과 의미가 없이 기적을 마구 행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기적을 아끼신다. 그것은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데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가운데 살도록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 뜨림으로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시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육체가운데 살도록 이런 세상의 질서속에서 살도록 정하였다. 그런데 주님이 기적을 행함으로 당신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면 우리들은 엄청난 혼란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표적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수는 있을수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을 주님앞에 인도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거침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을 일격에 날려버림으로 그 표적앞에 믿지 않을수 없도록 그들을 굴복시킬수는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 그들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과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낼수는 없다.

    만약 기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그로인해 유대인들은 더욱 강팍해지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을 하게된다. 그 이후부터 복음서에서 기적은 무대뒤로 사라지고 에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건이 전면에 부곽되는 것을 볼수있다.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순종의 반응을 이끌어 낼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만이 완고한 죄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표적과 기사를 쫓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다.

    지금도 십자가를 피상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복음보다 마술과 같은 표적으로 사람을 끌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과 은사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강조가 십자가에 대한 포커스를 흐리게 하는데 있다고 볼수있다.

    복음사역의 편법을 동원하려는 유혹

    성령운동 하는 이들이 그토록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을 갈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제압하고 콘트롤하기에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아무리 전해도 사람들이 눈하나 까닥 안하지만 놀라운 표적앞에 사람들이 쉽게 압도된다. 표적이 사람들을 간단하게 굴복시키는 비결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불순종과 완고함을 오래참고 기다리는 고통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광적인 열심과 교인들의 자원과 에너지를 유도하는데도 효과만점이다. 몇년동안 아무리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교인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때 설교자는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복음전파 사역이 에너지와 정력과 시간을 마냥 소모하는 일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청춘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왜 이렇게 맥없는 말을 주셨는가, 불을 좀 내려 주시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복음전파의 성과가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조급증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맞물리면 성령의 원칙보다 변칙을 따라서 목회하려는 사람들을 끌고 조종하려는 유혹이 극대화된다. 많은 사역자들이 복음만을 전하며 불순종하는 이들을 오래참고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을 견디지 못하고 쉬운길을 택하려고 한다. 편법을 동원하려고 한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성령운동은 성령님을 따라가는 느리고 힘든길을 회피하고 속성반을 택하려는 방편으로 이용된다. 종교의 주식시장에서 기적만큼 인기있는 상품은 없다. 말씀은 아무리 전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지만 병고치는 능력이라도 받아서 암환자라도 고쳐서 그것이 소문이 나면 텅빈 교회당이 가득할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워 진다.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느릴지라도, 사역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정도를 따라서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을 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했던 것 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사역이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과 우리들의 모든것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소모하는 것 같은 우리들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구체적으로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무한히 탕진하고 낭비하는 분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낭비하는 사랑과 소모하는 사랑이 우리의 소모하는 것 같은 복음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거가 된다고 볼수있다. 이런 낭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를 설복시킨것처럼 우리들의 소모하는 것 같은 복음사역이 탕자들을 결국 설복시켜서 주님앞으로 돌이키게 한다. 목사 자신도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사랑을 실천하고 본받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성령은 우선적으로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복음의 세미한 음성가운데 역사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약하고 미련해 보이듯이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방법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약하심이 구원이 되는 것 같이 성령님의 약하심이 우리들에게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강압적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대함으로 우리가 충분히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신다. 우리가 얼마든지 불손종할수도 있게 하셨다. 성령님은 단숨에 우리들의 완고함과 강팍함을 꺽어서 우리를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수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고집을 부리면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져주신다. 오래참고 기다려 주신다. "성령님도 자신의 성질은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이지만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다.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못된 성질을 성령님은 뜯어고치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자원해서 간절히 원할때까지 성령님은 기다려주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 삶에 신물이 나야, 죄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들이킨후에 죄의 쓴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할수 없을정도로 비참하고 곤고해져야 죄에서 돌이키려고 한다. 죄의 삶이 아직 숨쉴 여유가 있는 동안 우리는 성화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평생동안 성화가 거의 진행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완고한 옛자아가 성령님을 평생동안 이겨버린 것이다. 굉장히 센 사람들이다.

    우리교회에 변화가 안된 교인이 많은 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오래참고 기다리신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만큼 성령님이 온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분명한 반증이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떤 신학자는 2천년 교회역사는 성령의 수난받은 역사라고 했다. 우리 개인의 신앙역사도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오래 고난을 받는 역사라고 할수있다. 성령님이 그동안 우리안에서 우리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심히 고난을 받아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평생을 걸쳐서 그들의 마음의 강팍함과 완고함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근심시키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한순간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무한한 인내와 온유로 기다리신다. 이 성령님의 오래참으심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성령님이 오래참으시고 기다려 주셨다. 나의 많은 죄악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너무 인자하심으로 나를 대해주셨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지금 우리는 전무후무한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사야 32장 15절에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라고 나온다. '부어주다'의 히브리어는 특별한 의미를 띄고 있는데 벌거벗기다, 비우다, 바닥을 드러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를 살려서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표현을 한다면, 하늘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하늘이 텅빌정도로 성령님을 몽땅 이땅에 부어주셨다는 말씀이다.

    성령님이 그 거처를 완전히 하늘에서 이 지상으로 옮긴것과 같다. 우주에서 성령이 가장 거하시기 원하시는 곳이 우리안이다. 당신의 아들의 핏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거처로 그리고 성전으로 삼으셨으니 우리안에 얼마나 그분이 거하시기를 원하시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성령님이 우리를 오래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를 오래 기다리고 계시는 성령님께 돌이켜야 한다.

    침체된 목회의 유일한 돌파구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살고 사용하던 것에서 우리들이 돌이켜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운동은 회개운동으로 시작한다.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은 한 길 밖에 없다. 우리의 옛자아가 예수그리스도와 못박힌 십자가가 우리의 삶과 사역의 한복판에 복귀되는 것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오순절로 나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회개의 은혜를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만을 체험하려고 하기에 성령운동이 변질된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오순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십자가 없이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이 땅에 부흥이 아니라 재앙이 임하게 될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순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후에 오순절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오순절을 체험하기 위해 예수님의 구원사건에 주관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한후에 우리들은 오순절을 체험할수 있다. 객관적으로 구원역사의 관점에서는 오순절이 지난지가 2천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인 신앙역사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자아가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우리 신앙의 주관적인 역사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것 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부진한 목회를 돌파하는 성경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침체한 한국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는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대안은 없다.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다른 기롤 우회하려고 할때 영적인 불모지에서 끓임없이 맴돌게 될 뿐이다. 옛사람의 부패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성령의 깊은 사역을 먼저 추구하지 않은채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성령운동이 한국교회를 참된 개혁과 부흥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광신과 혼란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부진한 목회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교회의 강단에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교회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말씀사역자에게 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는 목사대로 매주 반복되는 설교사역을 꾸려가기가 힘들고, 교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식상한 내용의 설교를 들어주느라 무척 힘들다. 교인들 뿐만 아니라 목사들도 자신의 설교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교해도 변화가 안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점차 잃어간다. 그래서 여러가지 세미나나 은사집회에 기웃거리며 부진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열매없고 무기력한 말씀사역의 공백을 다른데서 메우려고 하다 보니 복음사역의 정도에서 벗어나 편법을 사용하게 된다. 말씀의 능력대신 사람들을 쓰러뜨리거나 신비한 표적이나 은사를 나타냄으로 교인들을 제압하여 사역의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려는 유혹에 빠진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설교가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고 중요하다고 굳게 믿지만 실제 목회현장에서 나타나는 설교의 효과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것 같다. 우리 개혁교회가 설교중심의 목회를 포기하던가 아니면 개혁교회의 간판을 내려놓아야 할 판이다.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능력있게 전파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는 복음전파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자와 상관없이 역사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오순절을 체험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감당할수 있다. 십자가에서 못박혔으나 다시 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다시 산 신자안의 성령을 통해 다시 사시고 강림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전할수 있는 것이다.

    오순절에 이르는 광야의 훈련

    이러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력있게 사용하실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우리의 사역이기보다 우리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일을 먼저 끝내셔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실패와 고통을 통해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가신다. 이를 위해 성령님이 우리를 번성케 하시기 전에 우리를 시들게 하신다. 육신의 야망을 시들게 하시고 육신의 완고함을 깨뜨리셔서 육신의 힘을 다 빼게 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는 우리들의 기도를 많은 경우 거꾸로 응답하신다. 우리의 능하게 해달라는 간구를 우리를 깨뜨려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력한 자리로 내려가게 하는 희안한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심히 당혹스럽게 하신다. 육신의 힘과 지혜를 막다른 길에 이르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심히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성령의 충만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과정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죽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완강함이 불러온 비상사태이지 성령님이 지시한 정상코스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경험에서 이런 쓰라린 과정을 대개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곤혹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 자원해서 하지 않려고 하는 자기 비움의 자리와 자기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통해 아주 서서히 자기 죽음의 자리로 기어 내려가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내려가기 싫어하는 죽음의 자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는 축복의 동산이다. 그 심연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장소이다. 새역사를 창조하시는 곳이다.

    우리의 실패의 심연을 부흥의 정점으로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공이시다. 오순절의 성령충만의 은혜는 철저히 실패한 제자들에게 임했다. 성령충만의 은헤는 실패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선물이다. 이러한 선물이 우리들에게도 임해서 다시 한번 우리 사역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성령충만은 영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인정하는 개인과 교회만이 받을수 있는 은혜이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하기에는 자격미달이다.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하기에는 너무 충만하고 크고 강한것 같다. 막강한 숫적 위력과 거대한 조직력, 그리고 재정적인 파워가 상당부분 성령의 능력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령님이 사용하시기에 너무 비대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형교회와 탁월한 지도자들을 보면 부흥이 일어나면 과연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지 심히 의심이 된다.

    한국교회는 자만할때가 아니라 회개할때이다. 외적성장을 자축할때가 아니라 내적인 타락을 애통해야 할 때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고 숫자와 조직과 재정의 위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게 하시기에 충분히 작고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교회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하게 하실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어떠한 이유로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 지 모른다면, 그 진행되고 있는 일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당신은 그것을 고칠 방법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본 내용은 미국 2012년 Catalyst 컨퍼런스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 리더들은 진행되는 일을 평가하는 일에 탁월하지 않습니다. 물론 리더들은 문제를 평가하는 일에는 탁월한 경향이 있죠. 이런 이유로 교회 리더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면, 시스템보다는 그 일에 포함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많죠. 어쩌면 새로운 중고등부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어떤 일이 잘 진행되고 있을 때, 이런 질문을 해 보십시오. “어떤 이유로 이 일은 잘 진행되는가?” 어떤 일이 교회 안에서 잘 진행되는 이유는 최고의 실행능력을 갖춘 팀사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섬기는 사역의 크기와 관계없이, 당신은 최고의 실행능력을 갖춘 팀을 원하고 필요로 할 것입니다.

    높은 실행력을 갖춘 팀사역을 위한 타협할 수 없는 최소 조건

    #1:: 팀을 세우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실행력이 강한 사람들을 정하고 리더로 세우십시오.

    사고자보다 실행자를 구하십시오.
    사고자와 실행자를 두고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실행자를 선택하십시오. 사고자를 실행자로 바꾸는 것보다 실행자를 교육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짐 콜린스는 말하기를, “당신의 버스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 타고 있다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을 동기화 시켜야 하는 문제는 없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없는 위대한 비전은 부적절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들의 최대의 공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위치에 세우십시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나무타는 능력으로 물고기를 평가한다면, 그 물고기는 평생의 삶을 ‘나무타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야’ 하면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리더인 당신은 당신의 섬기는 사역팀 안에서 가장 정확한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세우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것은 대개가 재임기간 내 짜여진 틀에서만의 역할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팀 안 모든 팀원들은 팀 안에서의 상호의존성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신과 함께 한 사역자들과 봉사자들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그로 인해서 그들은 리더와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담임목회자는 그가 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린이 사역 봉사자들에게 의존적이게 됩니다. 모든 역할은 전체 사역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호의존성은 핵심리더들이 팀원들로 그들의 가치를 느끼게 만들어 주고 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인식시켜 주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2 :: 일과 이유를 명확히 하십시오.

    실행력 중심의 사람들은 성취하기를 즐겨합니다.
    리더인 당신은 모든 사역자들과 봉사자들을 위해 사역의 성취를 명확하게 해야만 합니다. 사역의 성취를 명확하게 할 때, 이것은 마치 나침반의 북쪽표시와 같이 되어서 사역의 에너지를 나타내고 또한 팀 안에서 반드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실행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역의 성취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을 때, 팀원 각자가 자기 자신들을 위한 사역 성취를 정하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 팀은 해체됩니다. (문제는 항상 존재하기에, 팀은 항상 필요합니다.)
    변화를 위한 대화는 문제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위한 대화는 세워둔 목표에 대한 대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신은 꼭 해야할 일을 계획해야 합니다.
    당신이 해야할 일과 그 일의 성취를 명확하게 하자마자, 당신은 반드시 모든 자원들을 동원하여서 그 명확화한 사역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조직을 세워야만 합니다. 당신의 사역자와 봉사자들로 하여금 이미 세워진 조직구조 속에서 일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만큼 높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낙담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시간과 물질의 대부분은 결정적인 일을 감당하는 것을 위해 사용되어져만 합니다.

    #3 :: 전체를 지휘하며 평가하십시오.

    전체를 지휘한다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이 알려질 때까지 말입니다. 훌륭한 팀들은 결코 개인적인 사고나 창의력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팀들은 게임이 시작될 때,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 지를 정확하게 압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를 제외하고는 풋볼 경기 수비수는 창의적인 수비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지휘는 자유재량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높은 실행 팀들은 정확한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지휘는 모든 진행과정을 위한 지속력과 예견력을 가지고 옵니다. 지휘는 당신의 조직으로 하여금 좀 더 개인적인 것(주인의식)으로 보이게 만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평가하십시오.
    피드백을 위한 공간을 창조하십시오.

    리더로서, 당신은 결정적인 일들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장된 수치들에 속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교회 사역 중에서 핵심적인 일들에 가장 민감하게 가까울 수 있는지를 찾아내십시오. 당신의 섬기는 사역의 성장이 당신으로 하여금 단지 수치들만 보도록 멀리 밀어내고 있진 않나요? 수치들은 결코 정확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가끔씩 그 수치들을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수치 그 이상의 것을 알고 배우기 위해 미팅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하는 일들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Andy Stanley, "3 Keys to Creating High Performance Teams"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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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과 용과 음녀

    ㅇ -


    사단도 성육신을 하고 성령을 흉내내어 악령으로 인간의 사상 속에, 종교 속에 오묘와 신비의 환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편 사단은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군사력 속에 성육신하여 묵시록의 짐승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단의 최후 카드는 예수의 신부인 교회를 이단 신학을 통해서 배교시켜 영적 간음 죄를 범하게 하여 음녀화하는 일이다.

    묵시록의 열 뿔 달린 짐승은 구라파 공동체의 변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용은 사단의 사상적 화신, 음녀는 사단의 교회 변신이다. 용이 짐승에게 힘을 주고 음녀가 짐승을 탄다. 이 신비의 복합 세력이 적그리스도가 된다.


     

    



    우리의 기질을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기

    (Putting Our Temperaments in the Srvice of God)

     

    우리의 기질은ㅡ 그것이 불길과 같이 급하든,

    무기력하든, 내향적이든 또는 외향적이든ㅡ

    우리의 성품에 영원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우리가 이 기질을

    '사용' 하는 방법은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우리의 기질을 덕망있는 생활을 위한

    봉사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될 것입니다

     

    불 같은 성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성으로 변하고, 무기력한 성질은 위기에 닥쳤을 때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며,

    내향적인 기질은 명상적인 측면을 깊게 하며,

    그리고 외향적인 성질은 창조적인 사역을 북돋아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질을 우리의 영적 생활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선물로 생각하고 그 기질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 이유는, 비록 지금 자기를 때리는 사람도 부모이지만 맞고 있는 자기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도 그 부모뿐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자녀에게 징벌을 내리실 때에도 똑같습니다. 비록 벌은 주고 있지만 그처럼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야말로 그 자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석기현 목사 설교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끝까지 의지하고 믿는 신자는 비록 벌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전보다 훨씬 더 사모하고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자칫 범죄한 후에도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자들입니다
        매를 맞고 있다고 생각되면 당장 일어나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복하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으십시오.
        따끔한 매를 맞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더욱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만을 붙잡으면 그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

    개혁주의란?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개혁주의'는 형식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 못지않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개혁주의다. 영어로 개혁주의는 'Reformed'로 'Re'와 'form'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며 ‘다시 틀을 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Reformed’의 뜻은 '개혁 된'이다. 즉 개혁주의는 '개혁된 신앙' 혹은 '개혁된 신학'을 가리킨다.

         개역한글번역성경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에서 "혼돈"이란 단어는 히브리원전성경에서는 "토후"란 단어를 사용하며 NIV영어번역본성경에서는 "formless"로 번역되어 있다. 이 토후의 정확한 의미는 '형태가 없는', 혹은 '모양이 없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허"는 히브리어로는 "보후"로 NIV영어번역본성경에서는 'empty'를 사용하며 이 뜻은 '비어 있는'이다. 우리가 창세기 1장 2절에 사용된 이 단어들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다음으로 주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내용물을 담을 틀과 함께 내용물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주님께서는 앞의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대로 틀을 만드시고 그 틀에 담길 내용물들을 주님의 지혜대로 차례로 만들어 나가셨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무엇인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내용은 그것들을 담을 틀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개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형식을 결코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중세의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그 틀(예배, 신학)이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 교회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삼위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며 온전한 신앙고백(신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선택받은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지만 중세교회의 예배는 타락하고 부패 했으며 그들의 신앙고백(신학)은 온갖 마귀적인 것들로 더렵혀졌다. 예배가 타락했다는 것은 말씀과 성례(세례와 성찬)의 타락과 부패를 의미하며, 신학의 타락은 구원관의 타락을 뜻한다. 그들의 말씀선포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알레고리적(풍유적)인 설교였으며 미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성찬은 이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희생 제사였다. 한편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 사제(교황)를 세웠으며, 행위로 말미암은 공로사상이 발전하여 면죄부를 팔았으며, 연옥교리 및 성자숭배사상 등 수 없이 많은 거짓된 교리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었다.

     

       이러한 까닭에 16세기 개혁자들은 교회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은 깨어진 틀(예배, 신학)을 오직 성경(모든 성경)에 근거하여 다시 만드는(Reformed) 위대한 작업이었으며, 이 작업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거는 거룩한 사명이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말할 때에 넓은 의미에서 16세기 종교개혁자들 곧 교회개혁자들의 교회개혁운동과 그들의 신학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한다. 그것은 개혁자들 그들의 신학과 예배는 성경적이고 로마가톨릭의 신학과 예배는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기준이 되기에 그들은 맞고 로마가톨릭은 틀리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로마가톨릭은 교회가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으며 섬기는 사람들이지 결단코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 같은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섬김)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인간을 믿지 않으며 인간이 만든 무슨 사상이나 주의는 철저히 배격 한다. 그러한 우리들이, 왜 16세기 교회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을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지금까지 믿고 따르며 그들의 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할까? 도대체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16세기 초 유럽은 거대한 변혁의 물결에 휩싸였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독일의 루터에게서 시작하여 전 유럽으로 타올랐던 것이다. 이것을 헤겔(Hegel, 1770-1831)은 그의 저서인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종교개혁은 “중세기 끝에 여명을 띄우고 솟아나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이다. 역사학자들은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헤겔의 표현처럼 종교개혁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중세의 암흑을 걷어내는 빛의 역할을 감당했고, 이 개혁의 주요한 동인이 되었던 것이 인문주의였다. 즉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서 ‘원전성경’으로와 함께 ‘초대교회의 예배와 삶’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예배와 삶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휴머니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던 원전성경의 연구와 함께 고전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켰던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고전어 연구와 함께 문헌학 연구의 발전을 가져왔다. 고전어 연구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원전성경의 연구를 촉진시켰고, 문헌학은 고전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개혁자들은 원전성경에 대한 연구로 말미암아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고대교회의 삶과 예배는 고대 교회 교부들의 문헌을 통하여 전해져 오고 있었으므로, 문헌학에 정통했던 종교개혁자들은 고대교회의 문헌들을 연구하여 당시의 로마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원전성경의 연구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록들은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함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확장시켜 나가셨다. 역사는 문서이고 기록이며 이것은 반드시 후손들에게 진실 되게 알려져야 한다. 역사가 없는 우리와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종교개혁의 결과로 바른 신앙이 전 세계 곳곳에 전해지게 되었고 한국에도 전해지게 되었다.

     

       A.A. 하지(A.A. Hodge, 1823-1886)는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해석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강조와 함께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잘못된 성경해석이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는 중세의 로마교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올바른 성경해석에 따른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 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어진 책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철저하게 과학적인 언어학의 원리에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이에 따라 해석된 글은 개혁주의 교리에 비추어서 검증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로 성경을 건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이다.

     

       두 번째는 교회사에 있어서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교부들의 가르침이 성경 해석의 기준점이 된다. 크리스토퍼 홀(Christopher Hal) 은 그의 저서에서 윌리엄 애이브러햄(William J. Abraham)의 “서양 문화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독교의 고전 전통을 거부한다는 것에서부터, 오늘날 신학은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를 인용하여 현대 신학의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 이 말은 교부들의 가르침을 모른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가장 바르게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았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앙고백과 삶을 모르고서 성경을 건강하게 해석할 수 있을까? 교회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우리들의 뿌리를 모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개혁주의는 오직성경(원전성경)과 함께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을 따르는 사상이다. 즉 역사적 사도의 전통을 올바로 이어 받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개혁주의마을/아바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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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을 정리하여 바울은 에베소서 429절에서 말과 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런데 지금 이 내용 에베소서 4 29절은 바울의 벗고 입는 원칙 속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4:22-24).

     

    ,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뚜려한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덕을 세우며 은혜를 끼치는 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라고 할 때 더러운 말이란 무엇입니까?

    <로고스 사프로스>고 되어 있는데 원어 사전을 보면 나쁜 말, 썩은 말, 가치 없는 말, 남에게 대하여 해를 끼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에 그러한 더러운 말이 무엇인지 몇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수군 거림, 또는 Gossip 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보통 근거없는 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정확한 사실이기보다 말이 보태어지면서 변조된 이야기들입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 보면 누군가에 대해 수군거리면서 그 대상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 싶은 교만한 죄성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쟁 대상을 향하여 시기와 질투 가운데 수군거리는 것이며 그 Gossip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더 추가하는 것이 수군거림입니다. 보통 열등감이 수군거림으로 방출됩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로서 자신들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한한 수군 거림의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수년 동안 타불로의 학력 위조를 밝히려는 타진요가 등장하여 결국 타불로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진상을 알아보니 학력 위조가 없고 정상으로 학교를 졸업한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수군거림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씁씁할 예입니다.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중에는 수군거림때문에 외롭고 비참하여 죽는 자들이 많습니다. ‘수군거리는 자들은 기껏 말 장난을 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살인죄를 짓는 것과 방불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특히 인터넷 시대에 수군거리는 입술의 죄악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비방입니다. 비방은 더러운 말입니다. 비방이라는 단어는 마귀라는 단어에게서 나왔습니다. 비방은 알지도 못하면서 나름대로 상상하여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4:11)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벧후 2:12).

     

    , 비방이란 그 당시의 상황이나 여러 가지 다른 조건을 떼어내고 몇가지를 끄집어 내어 오해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비방하는 목적은 그 비방의 대상을 비참케 하고 멸망시키고 부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특히 비방은 의도적이며 계획적이란 점에서 수군거림과 차원과 정도가 다릅니다. 비방은 무서운 사탄의 역사입니다.

     

    셋째는 간교한 말입니다. 간교한 말로 자신의 뛰어남을 나타내려는 말입니다. 의도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분리시키려는 말들입니다. 이간질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계산하고 그 심리를 이용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랑을 독차지 하거나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할 때 시기와 질투로부터 간교한 말을 하게 됩니다. 간교한 말은 대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실성이 없다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약을 올리는 말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들추어 상대로 하여금 기를 죽이는 말들입니다. 상대를 깍아 내리려고 고집스러운 이야기를 합니다. 보통 약을 올리는 말은 협박 및 조롱, 무시하는 말투가 병행합니다. 상대를 판단하는 말과 트집잡는 말이 여기에 속합니다.

     

    다섯째로 거친 말과 모독하는 말과 악독한 말과 조롱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미움의 표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분 때문에 거친 표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말은 내 중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에 노골적인 분노와 미움과 원수의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거친 말, 또는 악독한 말인 것입니다. 사탄은 악독한 말을 하는 자들에게 쉽게 틈탑니다. 그래서 악독한 말과 함께 다른 무서운 죄악들이 병행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여섯째로는 아첨의 말이 있습니다. 아첨의 말 또한 더러운 말입니다. 아첨은 세력이나 자기 이득을 위해 상대를 올려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이러한 말들을 정확하게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질투와 미움의 죄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가를 드러내기 위하여,

    상대를 깍아내리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서 내 자신을 높이고 의롭게 보이는 거짓들과 과정이 더러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더러운 말이 라는 것이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하는 말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는 더러운 말, <로고스 사프로스>는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에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말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의 원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원칙은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이 나오고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온다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말과 혀를 치유하기 위하여는 마음을 치유하여야 하는 것이요, 이는 바울의 말처럼 철저히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아야만 말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이러한 내용을 깨닫고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9:14)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개혁주의마을/참된 개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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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추(晩秋)
                                 이응환
     
    산자락을 태우던 단풍이 꺼지고
    갈색 이파리들이 타다만 재처럼
    패잔병처럼 나뒹군다

    이렇게 떠나야 하는가고
    늙어버린 억새들이 흰머리를 흔들며 수군댄다

    우리 청춘 간밤에 어디로 가버렸냐고
    페이브먼트 위에 나뒹구는 이파리들
    궁시렁거린다

    가을이 황금색?
    아니다, 똥색, 똥색이란다
    가로수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날 보고 까르르 웃는다
    지나온 길바닥에 내 청춘이 떨어졌단다
    주워가란다, 놀린다

    무심한 흰 구름은 저 혼자 달아나고
    코스모스는 하늘을 향해 가녀린 손을 내젓는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다들 떠나느라고 분주하다
    눈 내리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그대여,
    찬 서리 내리고 두려운 어두움이 깔릴지라도
    그대는 슬퍼하지 말지니 방황하지 말고 오라,
    내가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있나니
    ...
    갈 곳이 있다는 것,
    날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것,
    이보다 더 축복 있으리요 


    별똥별의 "가을노래" 패러디임 


     
    별빛 세레나데(피아노)

     
    It's Suppertime
    

    정신질환을 종교적으로 치유한다며 정 모씨(26)를 테이프로 묶고 감금하다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된 사건을 뉴욕한국일보는 10월 16일과 17일 연속으로 보도했다. 다행히 뉴욕교계 한인교회 목회자의 문제는 아니었다. 용의자인 정씨의 누나와 약혼남 윤 모 씨는 정 씨의 입에는 양말이 물리고 포장용 박스 테이프가 붙였다고 검찰청은 전했다. 병원의 신고를 받은 109경찰서는 10월 12일 이들 두 남녀를 체포했다.

    다음날에는 용의자 측 가족이 "이번 사건을 주도한 교회 관계자 3명도 공범"이라고 주장하며 경찰에 고발했다. 정씨 누나와 약혼자는 1년전 한국의 용인에 소재한 E교회 신도가 됐으며, 2개월전 담임인 신 모 여성 목사와 뉴욕에 돌아와 정신질환을 종교적으로 치유한다며 평소 복용하던 정신질환 약을 못 먹게 했다고 가족들이 전했으며 피해자인 정모씨도 이를 확인했다.


    ▲용인에 소재한 E교회 신 모 목사. 현대종교 기사 캡처

    용인 E교회는 최근 플러싱 주택가에 교회를 세워 한인마켓에서 전단지를 돌리는등 기성교인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용인 E교회 신 모 목사는 P사관아카데미와 Y군사훈련원 원장을 맡아 왔다. 한국의 주류교단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것은 아니지만 신 목사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의 이단대책 전문지인 현대종교는 지난해 11월호 "P사관아카데미, Y군사훈련원 신 모 목사는 비유풀이"라는 기사를 통해 경기도 용인시 E교회를 본원으로 활동하면서 대구분원, 동경분원등을 개원해 왔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중세미나, 공개세미나, 특별세미나 등을 개최해 왔다고 소개했다.

    또 신 목사의 비유풀이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P사관아카데미는 성경해석에 있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전 성경(聖經)은 방언(方言)으로 기록되어 있다.' 며 '방언은 반드시 통역해야만 하며, 통역하지 않으면 영혼과는 관계없는 말이 될 수 있으며,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풀어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그리스도의 비밀을 밝히는 것을 방언통역이라고 하며, 이를 다른 말로는 예언이라고 한다.'고 주장해 정통교회와의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신 목사의 공개세미나는 비유풀이 성경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구절에서 뽑은 단어는 전후문맥을 살펴 그 의미를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 목사는 성경은 방언으로 되어 있고, 방언을 통역해야만 한다며 잘못된 비유풀이로 일관하고 있다. 정통적인 성경해석을 부정하고 개인의 독특한 성경해석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P사관아카데미에 대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에게 교회밖 성경공부를 하지 않도록 홍보하는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또 주춤했던 뉴욕교계 차원의 대 이단대책 활동의 강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선택 예정의 이유와 목적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3장 5항: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며 불변한 목적과, 그리고 그의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을 따라서, 생명으로 예정이 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들에게서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 또는 그것들이 끝까지 유지될 것을 미리보시는 일과 상관이 없이, 즉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들을 미리 보지 않은 채, 그저 순전히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택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목적”

     

     

    본 항과 관련하여 두 번째로 살필 것은 선택의 예정의 이유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선택의 예정을 하시는 이유가 자신에게서가 아닌 다른 어떤 이유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진술합니다.

    선택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서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과 같은 것들을 선택의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아 그것들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즉 외적인 피조물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선택을 예정하도록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진술은 신앙고백서 제3장 2항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소위 “예지예정론”이 잘못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선택의 예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합니다.

     

    예정의 이유와 관련하여 개혁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데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련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은 항상 단일합니다. 하지만 알미니안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선택의 대상을 정하는 조건과 관련한 작정과 그 조건에 상합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미리 보고 그를 선택하는 작정으로 구분을 합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 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에서 말씀하고 있는 야곱과 에서의 예정에 관련한 해설에 있어서 개혁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은 다르게 이해를 합니다.

     

    개혁신학은 앞의 본문이 야곱이라는 특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또는 에서라는 특정한 사람을 유기하셨음을 교훈하는 것을 이해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항상 대상을 향하여 특정적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 신학에 따르면 앞의 본문이 하나님은 단지 야곱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선택하고, 에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유기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음을 보여줄 따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어 말하기를 야곱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고 선택의 예정을 한다는 “예지예정”을 주장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알미니안주의가 잘못되었음을 확고히 선언하면서, 오직 선택의 예정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앞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이라는 특정한 사람을 오직 자신의 기쁜 뜻을 따라서 선택하셨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는 말씀이나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 9:15)는 말씀, 그리고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9)는 말씀 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서 특정한 사람들 선택하신다는 개혁신학의 해석을 분명하게 지지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을 따라서” “그저 순전히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의 예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의 예정에 대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다 알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시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을 선택을 하지 않으시는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쁜 뜻에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에 따라서 사람의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을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지 않고 오직 순전히 거저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의 예정을 행하셨음을 올바르게 고백을 합니다. 예정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으며, 그의 뜻은 항상 선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신학이 밝히고 있는 선택의 예정과 관련한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선택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이러한 선택의 예정이 과연 선하신 하나님의 작정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의 선택의 예정에는 어떠한 냉정한 무자비함이나 자의적인 불의함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주권자가 자의로 그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이루어지며 또한 실행이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개혁신학은 선택의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불의와 변덕을 말하는 잘못된 주장을 일소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의 예정을 하심으로써 자신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예정을 통해 선택된 자들을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며, 이 모든 선택의 예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토록 하십니다. 이것이 여기서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 5항이 밝히는 선택 예정의 목적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먼저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목적을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며”(엡1:4), “그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엡 1:5) “그의 기업”(엡 1:11)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은택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영광은 후에 사라지거나 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영원한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예정을 통해 이러한 영광을 선택한 자들에게 부으심으로써, 결국 이들로 하여금 이제 이 모든 일을 통해 받은 은혜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도록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선택의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며 목적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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