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둘 수 있는 고운마음                


  

     채워짐이 부족한 마음들...
완벽 하고픈 생각의 욕심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만은 완벽한것 처럼...
말들을 하고 행동들을 합니다.
자신들만은 잘못된 것은 전혀 없고
남들의 잘못만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남들의 잘못된 일에는 험담을...
일삼고 자신의 잘못은 숨기려 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아픔을 즐거워 하며..
나의 아픔은 알아주는
이가 없어 서글퍼 하기도 합니다.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며
허물을 탓하고 험담을 입에담는다면

남들도 돌아서면 자신의 허물과 험담이
더욱 부풀려져 입에 오른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조금은 부족한듯이...
마음을 비우고

조금만 덜 채워지는 넉넉한 마음으로..
조금 물러서는...
그런 여유로움으로
조금 무거운 입의 흐름으로..
간직할수 있는...
넓은 마음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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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설교자를 위한 준비


1. 자신의 서재를 만들어라.  사실, 어떤 때는 설교가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준비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설교는 항상 깊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깊게 연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서재다, 크기는 양팔 길이 정도면 충분하다. 다음에 쓴 목록은 개인 서재를 만들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서적들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성경 외에 최소한 세 권의 번역판 성경, 여러 종류의 주석, 헬라어 히브리어 사전, 성경시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참고서적, 대형사전, 백과사전, 연감, 여러 종류의 인용을 위한 서적. 해마다 서적을 새롭게 단장하고 구미가 당기도록 만들어라. 그러면 당신의 설교는 풍성해질 것이다.

2.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어라.  지방 신문을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일간 신문을 읽어라. 시사 주간지를 샅샅이 살펴라. 여러 종류의 잡지를 규칙적으로 탐독하라. 최소한 전문 학술지 한 권 정도는 구독하라. 자서전과 전기를 읽음으로써 삶을 통한 교훈들과 재미있는 일화들을 얻으라. 소설을 통해 경이로운 단어사용을 맛보라. 시를 가까이하라. 설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읽어라. 곧 그 모든 것이 설교와 관계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 항상 필기도구를 챙겨라  설교자는 언제, 어느 순간에 놀라운 이야기를 듣거나 흥미진진한 사건을 읽게 될지 모른다. 또는 한순간에 멋진 생각이 떠오르거나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연필이나 볼펜을 집어들어라. 혹은 당신이 컴퓨터광이라면 키보드 앞에 앉아라. 약속을 적어놓는 수첩에 메모를 하든지 주머니나 지갑에 작은 수첩을 넣고 다녀라. 밤에는 침대 곁에 종이철 한 묶음을 준비해 두라. 밤낮으로 언제나, 이 작은 진주들을 보관할 방법을 마련하라. 절대 "나중에 기억하지" 라는 말은 하지 말라. 당신은 결코 당신이 처음 가졌던 통찰력과 생동감을 기억해 낼 수 없을 것이다.

4. 예화나 인용문을 적은 파일을 만들어라.  좋은 예화와 인용문은 설교를 더욱더 재미있고, 구체적이고, 기억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자신만의 파일 정리 방식을 정하라. 오랜 동안 가장 믿음직스러운 방법은 파일을 카드화하는 것이다. 자료의 출처를 표시하고 각 카드에 인용문, 예, 이야기 등 한 카드에 한 가지 내용만을 기록하라. 컴퓨터인 경우엔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램에 저장하라. 큰 제목 아래 '아이들', '용서', '인내' 와 같이 항목을 만들어라. 비슷한 내용인 경우에는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제목을 아래에 삽입시킴으로써 혼돈하지 않고 쉽게 참고할 수 있다. 카드에 사용할 때마다 카드에 그 기록을 남겨, 곧 바로 또 사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5. 주제에 따라 일반적인 정보 파일을 만들어라. 이것은 많은 주제들에 관련된 배경 지식, 일반적인 상식, 수치와 기록들을 알게 해준다. 마닐라지로 된 접어쓰는 서류철을 사용하라.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일에 끼워 넣어라. 신문 기사, 잡지 사설, TV 프로그램 복사물, 책에서 복사한 사진 그리고 각종 팜플렛, 어떤 제안 사항이나 세미나 기록, 설교나 강의도 모으라. 여기에 최상의 규칙이 있다. "잘 모르겠다 싶으면, 모으라."

6. 설교 파일을 만들 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이용하기 쉽게 파일을 관리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파일들을 분류하고 타이핑하는 일에 비서의 도움을 받는 건 어떨까? 교회의 성도 중 과거에 도서관 사서를 했거나,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일을 돕는 것은 어떨까? 당신이 모으고 있는 파일이 무엇이여, 그것을 어떻게 보관했으면 하는지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이해시키도록 하라. 가끔 설교 중에, 유용한 예화를 말해준 사람을 언급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도록 권하는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당신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격려할 것이고, 성도는 동역의식을 느끼게 되어, 당신의 일은 더욱더 쉬워질 것이다.

7.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라.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모든 설교자에게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설교에 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두 손만 가지고는 충분치가 않다. 모든 장비를 갖추어 짊어메고, 당장이라도 전원을 연결해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라. 유행하고 있는 영화와 연극을 선별하여 감상하고, 비디오도 빌려 보라. 컴퓨터를 잘 다루든 못 다루든, 당신은 소프트웨어가 하고 있는 기능과 인터넷의 역할과 인공위성들이 보내는 정보를 알 필요가 있다. 물론 힘든 일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8. 일지를 기록하라. 저자들이나 강연자들과 끊이지 않고 연락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과 끊임없이 만나는 것 또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별개의 일이다. 만약 자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효과적으로 설교 할 수가 없다. 사람을 알려면 자신부터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돌아보는 좋은 방법은 일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매일, 때로는 하루에 여러 차례라도 기록을 하라. 자신의 기쁨, 좌절, 두려움, 희망, 의건, 반성들을 일지에 기록하라. 아마 이 기록들이 설교 속에서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때문에 당신의 설교는 더욱더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9. 설교의 선구자들에게 배우라. 지상 최대의 설교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배우라. 그가 무엇을 말씀 하셨는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에도 주의를 집중하라. 그리고 그분의 뒤를 이었던 설교의 선구자들을 연구하라. 바울과 오리겐, 요한 크리소스톰과 버나드 드 클레르보,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 칼빈, 화이트필드, 웨슬리의 설교를 탐톡하라. 메리 세베지, 셀리 파슨스, 소저너 트루스 그리고 루크레티아 모트 등이 말했던 것을 보라. 드와이트 무디, 빌리 선데이, 해리 에머슨 포스딕, 폴 틸리히, 조지아 하크니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그리고 하워드 터먼 등의 최근 설교도 가깝게 접하라.

10. 현대의 유명한 설교자로부터 배우라, 오늘날 영향력있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접해 보라. 프레드 크래독, 존 스토트, 윌리암 윌리몬, 월터 버가트, 빌리 그래함 그리고 찰스 스윈돌과 같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기회를 가져라, 가드너 테일러, 엘라 피어슨 미첼, 신디아 헤일 그리고 제임스 포브스와 같은 미국의 흑인 설교자들의 개성적인 설교의 풍요함을 경험해 보라.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에드위나 헌터, 바바라 런드블래드 그리고 바바라 지크문드 등의 여성들이 갖는 독특한 생각들을 들어보라.

11. 조금은 덜 알려진 설교자로부터도 배우라. 당신이 사는 지역에서 견고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누구인지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과 교제를 나누라. 그리고 짬을 내어 그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라.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강단을 서로 교류해 보라. 설교자들끼리 작은 모임을 만들어 연구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그리고 서로 비평도 하고 공동으로 설교도 만들어 보라. 서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라.

12. 설교에 관한 좋은 책들을 공부하라. 설교학은 하나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점점 발전해 가는 분야이다. 설교학을 다룬 최근의 책을 공부하라. 폴 윌슨의 [설교의 실제], 프레드 크래독의 [기독교 역사 속의 설교], 바바라 테일러의 [설교하는 삶], 제임스 해리스의 [설교의 해방], 헨리 미첼의 [흑인 설교], 토마스 롱의 [성경의 문학적 형식과 설교]

13. 듣고 또 들으라. 성도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듣는 것이다. 당신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들의 얘기를 충분히 그리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것이다. 거실에서든 사무실에서든, 잠자리에서든 점심식사 테이블에서든, 모든 장소에서 들어라. 개인적으로 듣고 가족들에게 듣고, 젊은이들과 지혜로운 자들에게서 듣고, 친근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판적이 사람들에게서도 들어라. 귀기울여 들어라.

14. 풍성한 삶을 살아라.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단순히 설교만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설교를 한다는 것은 주일 아침에 청중들 앞에 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설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는 또한 한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체험 속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당신의 설교는 주중의 생활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당신이 전하는 말이 생명을 더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삶에서 살고, 죽고 또 다시 사는 경험을 하는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15. 영성을 유지하라. 간혹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데 너무 바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의 삶 속에 기도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진실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충분한 기도시간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수양회에 참가하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영적인 지도자를 모시고 지속적으로 배워라. 당신의 생활에서 이 영역을 신성시하라.

16. 설교를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라.  설교는 당신의 기분에 따라 변덕스럽게 바뀌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한 달이나 한 주간의 설교계획을 세워놓고는 할 일을 다한 것 마냥 있어서는 안 된다. 좀더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일년 내내 성구집을 찾아볼 것인가? 매 계절마다 또는 매주 설교제목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가지를 병행할 것인가? 최소한 6개월 이전에 계획을 세워두라. 장기적인 설교계획을 위해서 며칠을 투자하라. 관심이 분산되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의 가지라. 그러나 때로는 계획되지 않은 일을 우선시해야 할 때도 있음을 기억하라. 간혹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바꾸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17. 조직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라.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만약 성경을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절대로 훌륭한 설교가 나올 수 없다. 당신은 성경의 발 아내서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그룹으로 주마다 모여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목회자들과 함께 해도 좋고, 평신도들과 함께 모여도 좋다. 특정 본문으로 설교를 하기 전에 몇 주전에 그 본문을 연구하라. 문단과 단어의 뜻을 연구하라. 문화적인 내용을 완전히 밝혀내라. 당신이 새로이 알게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열인 자세를 가져라. 당신의 수고와 노력에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이다.

18. 앞으로 하게 될 모든 설교를 준비하는 파일을 만들어라.  마닐라지로 된 접는 서류철을 이용하여 하나의 설교 또는 설교 시리즈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아놓는 두 번째 파일 시스템을 만들어라. 도움이 되는 인용문, 산문의 논설 그리고 참고가 되는 책들의 장을 주의깊게 보라. 당신이 나눴던 대화나 들었던 노래, 당신이 보았던 영화, 당신이 들은 이야기나 감동받은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라. 이러한 모든 자료들을 기록해서 파일에 모아두라.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분량보다 5배정도 수집하라. 그러면 그저 수집해 놓은 것이 아닌 선별해 놓은 자료에서 설교에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 당신의 성차(gender)를 이해하라.  설교에 앞서 당신이 설교자료를 준비하거나 자신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대하라. 당신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인정하고, 확증하는 방식으로 설교에 접근해 가라. 그리고, 당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성이 설교에 접근하는 방식을 인정하고, 그것에서도 배우라.

20. 자신에게 솔직하라.  당신은 선천적으로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굉장히 사교적일 수도 있다. 당신은 조직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직관적일지로 모든다.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당신은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본 성품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불꽃튀는 열정으로 설교하기도 하나, 반면 어떤 사람은 아주 심각한 태도로 훌륭하게 설교한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큰소리로 설교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조용한 목소리로 영향력있는 설교를 한다. 하나님은 입이 굳은 모세나 웅변술이 능한 아론, 활동적인 마르다나 조용한 마리아 둘 모두를 통해서 동일하게 말씀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인정받고 부름받았다. 당신은 온전히 당신 자신이도록 부름받았다.

21.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임을 기억하라.  당신이 헬라어를 조금 안다고 해서 청중이 모두 그것을 알아야 하고, 알기를 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당신이 어려운 신학용어를 발음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설교시간에 마구 사용해서도 안된다. 당신이 너무 박식한 예화를 사용하면 결국 청중들은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코 당신의 지식으로 감동시키려 하지 말라. 아니, 어떤 것으로든 감동시키려 하지 말라. 오직 분명하고 진실되며 정직하려고 노력하라.

22. 청중들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라.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청중들은 수천번도 넘는 전문 프리젠테이션을 본 사람이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 연주회와 테이프, 콤팩트 디스크를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현란한 광고로 군데군데 장식된 유명한 프로그램을 보아왔고, 발표자를 재빠르게 평가하는 법도 익히 알고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당신 스스로도 진짜 알고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를 금새 알아차린다. 당신이 예리하다 해도 그들은 당신보다 훨씬 더 예리하다.

23. 완전하게 일을 하되, 실수는 용납하라.  당신이 범하는 최대의 실수는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모은 일을 실수없이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순간에는 말이나 행동에서 실수를 하게된다. 당신도 인간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를 통해 사람들은 당신의 인간성을 알게 되고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서게 되며,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갖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당신의 실수를 통해 알게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즉, 당신의 신뢰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은 한 분밖에 없다.

24. 설교의 한계를 인정하라.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능력있는 중보 역할을 한다. 설교는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설교가 만능은 아니다. 설교를 통해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법으로 감동을 전할 수도 없다. 당신의 설교만으로는 사람이나 관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당신이 모든 것을 다 바로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의 설교가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해도 그 중에는 항상 연약한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25.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진실되고 권위있는 설교는 당신을 통해 나올 뿐이지,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때로는 설교가 흐르는대로 따라가야 할 때가 생길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거나, 하고 싶지않았던 말을 하고있는 자신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 분만의 방식대로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제2부. 설교를 위한 준비


26. 먼저 스스로 본문을 강해하라.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본문을 풀어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공부해서 아랍어와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들을 해석해야 한다. 특별한 성경적 사건들과 성경과 관련된 모든 인물들에 관해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공부하라. 가능한 한 신선한 눈을 가지고 본문의 각 문단을 살펴보라. 자신의 힘으로 각 구절을 생생하게 이해했다고 생각되면 그 때 가서 비로소 주석들을 찾아보라.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해서 알아낸 것들을 설교에 직접 사용하지는 말라.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발표할 때, 그것을 어떤 색깔로 어떻게 그렸는가를 묘사하는가?

27. 묵상하라.  본문을 오랜 시간 묵상하라. 설교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거든 곰곰히 생각하라. 또 그 생각들을 이리저리 바꿔보기도 하고 정리하거니 단순화시켜보기도 하라. 산책을 하거나, 운동할 때 혹은 운전할 때에도 마음껏 생각하라. 그곳이 부엌이든, 욕실이든 아니면 숲 속이든 간에 장소에 구애받지 마고 생각을 펼쳐라. 며칠을 두고 그것을 생각하라. 그것을 묵상하고, 놓고 기도하라. 이러한 투자없이는 결코 능력있는 설교를 할 수 없다.

28. 창조력이 가장 활발한 시간을 찾아서 그 때를 활용하라  능률이 최대가 되는 시간에 설교를 계획하고 기록하라. 만은 사람들에게 아침 시간이 그런 시간에 해당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각기 나름대로 최대의 능률이 나타나는 시간이 있다. 당신의 생활리듬을 발견해서 그것을 잘 활용하라. 설교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여가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에너지와 창조성을 총동원하여 투자해야 한다.

29. 설교를 쓰기 전에 전체적이 윤곽을 잡으라.  아무리 자신이 넘친다고 하더라도, 이 중대한 과정을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된다. 설교의 중요한 강조점들을 질서있게 나열하고 각각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 것인지를 적으라. 설교시간의 처음과 끝에 어떤 얘기를 할 것인지를 짜놓으라. 한동안 이 윤곽을 유지하며 살펴 보라. 구성이 잘 되어있는가? 설교의 흐름은 어떠한가? 건설적이고 설득력이 있는가? 세워놓은 계획이 괜찮은 것 같으면 그것에 따라 설교를 준비해 보라. 때로는, 이렇게 테두리가 잡히면 설교를 쓰는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때도 있을 것이다.

30. 설교원고를 작성하라.  "그러나 나는 주일 설교를 할 때 원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원고를 작성하라. 당신의 설교를 한마디 한마디 적어놓음으로써 그것을 더 다듬고 새롭게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어떤 생각이 가장 전달이 잘 되는지, 어떤 단어가 가장 적절한지 그리고 어떤 순서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등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또한 설교를 구체화하고 실제화 하도록 하며, 어느 부분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아닌지를 보게 해준다. 설교를 기록하는 일은, 당신이 그 원고를 설교 때 실제로 보든 안 보든, 설교자로서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31. 당신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악해 보라.  만약 메시지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당신의 너무 많은 내용을 전하려고 하거나, 전달하려는 내용에 확신이 없어서 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재난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 쓰기 전에, 설교의 기본 주제를 10 내지 12 단어로 표현해 보라. 이것을 카드에 기록하라.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이 카드를 참조하라. 설교를 다 쓰고 나면, 핵심 내용이 들어간 문장을 찾아서 표시해 보라. 당신이 그 문장들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하물며 청중들은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32. 단순하고 쉽게 써라.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라. 문장을 짧게 기록하라. 구체적인 단어와 활동적인 동사를 선택하라. 듣고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형용사나 부사는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이 말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도록 글을 써라. 설교가 끝난 후, 성도들로 하여금 당신이 사용했던 표현들이 아닌, 그 내용을 기억하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33. 당신의 설교문을 가차없이 편집하라.  간결하게 작성하기로 마음을 먹어도 필요없는 단어들을 사용하게 된다. 적절치 못한 말을 사용할 때도 있고, 옳은 것 같긴하지만 명확하지는 않은 생각들을 적어 놓을 때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편집하는 일은 설교자로서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이다. 세련되게 잘 기록해 놓았다고 생각되는 설교를 다시 편집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설교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면, 과감히 잘라내야 한다. 조지 보나드 쇼가 친구에게 했던 사과를 기억하라. "너무나 긴 편지를 써서 미안합니다. 편지를 짧게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34. 눈이 아닌 귀를 위한 설교를 써라.  당신의 설교문은 들려주기 위한 것이지,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할 때 어떤 말투를 사용하는 지를 유념해서 그 스타일로 글을 써라.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준말을 사용하고 발음하기 쉬운 단어들을 선택하라. 때로는 미완성 문장도 이용하라. '당신', '우리', '우리의'와 같은 인칭대명사도 사용하라. 이러한 표현은 청중을 포용하는 힘이 있다. 설교문을 작성하는 중에 간혹 큰 소리로 읽어 보라. 그것이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가? 그렇지 않다면 다시 쓰도록 하라.

35. 참신하고 명확한 말을 사용하라.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문법에 유의하고 용어의 정의가 옭은가를 확인하라. 특별한 용어를 찾으러 하지 말고, 일상적인 단어를 참신하게 사용하라. 내용을 명확하게 해주고 의미가 풍성한 용어들을 선택하라. 지, 정, 의에 동시에 호소력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라. 항상 언어가 지니는 신비한 매력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연마하라.

36. 생각을 사로잡는 설교를 써라.  사람들은 무엇을 계속해서 듣는 것을 지루해 한다. 듣는 속도보다 생각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때로는 딴 생각에 빠진다. 때로는 설교자가 전하는 생각을 확대시키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과 견주기도 하다가 어떤 때에는 설교를 완전히 무시하고 듣지 않기도 한다. 설교자는 끊임없이 청중의 마음을 환기시켜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청중이 자문하는 것을 알아내서 그것에 답해주라. 이미지가 떠오르는 단어와 문구를 사용하고 예화를 설교에 맛을 더하라. 설교가 절정에 이르도록 구상하라.

37.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는 설교를 써라.  청중의 생각을 사로잡았다면, 이제 그들의 영혼과 마음까지도 사로잡아야 한다. 당신이 제시하는 생각들 가운데는 머리로 받아들이기에만 적합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설교가 청중의 마음과 그 갈망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생명력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나누는 이야기와 추억들, 당신이 언급하는 사람과의 관계나 당신이 표현하는 몸짓 등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영향력있는 설교는 각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생각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38. 청중의 주의를 재빨리 사로잡아라.  당신은 30초안에 청중이 "이거 흥미있겠는데, 들어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예상치 못하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라.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라. 흥미있는 인용문을 낭독하라. 깜짝 놀랄 사실을 진술하라. 당신의 설교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내용과 잘 조화되는 유머를 던져라. 청중이 일단 당신과 공감대를 형성하면, 본 설교로 들어가라.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를 서두에서 약간 보여주고, 본론에서 그것을 전달하라.

39. 통찰력있는 말로 설교를 끝내라.  이에 반대되는 충고를 하기도 하지만, 이미 했던 얘기를 반복하면서 설교를 끝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당신이 설교를 제대로 했다면 다시 말하지 않아도, 교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청중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잇는 방법이 필요할 뿐이다. 간단한 '재치 있는 말'로 마무리를 하라. 아니면 인용문을 반복하든지 청중이 적용할 수 있도록 예를 들라. 당신이 설교를 끝내려 한다는 것을 청중에게 넌즈시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서둘러 마무리를 지어라. 모든 것이 엇비슷한 상황에서라면, 청중은 설교의 두 부분을 기억할 것이다. 즉, 처음 들은 것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다.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남겨주도록 하라.

40. 인용문은 짧게 활용하라.  청중들은 무언가를 들을 때, '빨리 감기'를 해서 앞으로 나올 내용을 미리 알 수도 없지만, 반대로 '되감기'를 해서 다시 들을 수도 없다. 사람들이 듣고 이해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인용문을 사용하라. 시나 산문 몇 문장 또는 30에서 60초 사이의 인용문이 적당할 것이다. 인용문의 출처를 밝힐 때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허용하라. 그러나 표절하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원저자의 공적에 충분한 경의를 표해야 함을 기억하라.

41.이야기를 사용하라.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청중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 속 이야기들을 당신만의 스타일로 바꾸어서 말해 주라. 오래된 것이든 최근 것이든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라. 가장 좋은 이야기는 종종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싸우고 인내했던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당신의 언어로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표현하라. 현장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대화체도 사용해 보라. 그리고 가끔은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훌륭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라.

42.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라.  사용하려는 이야기가 당신이 의도한 느낌들을 일으키는지, 신중하게 선택하라. 너무 많은 일화를 사용하지 말라. 이야기가 설교의 10퍼센트 범위를 넘지 않게 하라. 이야기를 하나씩 따로 사용하라. 두 종류를 함께 사용하면 그 영향력이 떨어진다. 설교의 성격이나 어떤 사람들이 듣느냐에 따라 스포츠, 경제, 오락, 유명인, 평범한 사람, 지역 소식 또는 전국적인 사건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라. 때로 교인들은 당신이 한 이야기만을 기억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이 담겨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43. 때로는 설교 전체를 이야기로만 구성하라.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하지는 말라. 그러나 간혹 한 번씩 만담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해서 멋진 이야기를 풀어 놓으라.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와 장면을 구상해 보라. 이야기 속 인물에 인격을 불어넣고, 그 역할에 따라 목소리도 변화시켜가며 이야기해 보라. 이야기를 극으로 꾸며보라. 철저히 연습해서, 다른 이들도 이야기를 하는데 참여시켜라. 이야기를 잘 전달했으면, 물러나 있어라. 이야기가 스스로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지켜보라. 만약 정말 훌륭한 이야기였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44. 설교 제목을 창조적으로 정하라.  사람들이 당신이 설교 주제를 추측하지 않고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는 제목을 선택하라. 청중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제목으로 하되, 웃음을 터트리게 하거나 농담을 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설교는 제목이 소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제목이 친근한 서두가 되게 하라.

45. 예화는 남, 여성비(比)에 맞게 사용하라.  과거에 사용했던 예화를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 여성의 삶이 담긴 예화를 남성의 삶이 담긴 예화와 비슷한 정도로 사용하는가? 성경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얼마만큼 사용하는가? 교인들이 사라, 한나, 에스더, 미리암, 막달라 마리아, 브리스길라 그리고 그 외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성에 대하여 상투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설교를 할 때 남성과 여성들에게 명확하고 동등하게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라.

46. 청중을 이해하라. 예를 들어, 어머니날을 생각해 보자. 당신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 가운데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람도 있고, 평생 어머니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또한 자기들을 방치하고 학대한 어머니를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나 나이 많은 형제들 또는 아버지가 '어머니'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결혼한 사람뿐만 아니라 독신자나 이혼한 사람 그리고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라.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또한 그러한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 방탕한 사람과 동성애자, 마약중독자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번 주에 어느 특정 그룹의 필요에 맞게 설교할 수 없다면, 그 다음주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설교자가 지니는 매력중 하나이다.

47. 개개인을 향한 설교를 하라.  설교를 준비할 때, 교인들의 이름을 몇몇 적어놓고, 그것을 간간히 보면서 설교문을 쓰라. "그녀가 이것을 이해 할 수 있을까?" , "그가 직면한 문제에 이러한 설교가 맞을까?" 등을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 당신이 설교할 때 그 사람들도 참석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도 설교가 그들 한 명 한 명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설교 주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생각이 맞을 것이다.

48.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라. 설교 시간은 당신의 방어심을 풀어놓아야 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줘라. 시간을 보내면서, 당신이 겪은 고통이나 느꼈던 기쁨에 대한 얘기를 나누라. 신앙생활에서 마음을 여는 것과 성장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 되라. 물론 이것도 너무 많이 하면 지나친 것이 된다. 그러니 더러운 빨래감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널어놓지는 말아라. 그리고 청중들에게 당신의 고통을 너무 많이 털어놓아서 정작 자신들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좀더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보여줘라. 그런 다음, 당신의 삶에서 그들 자신의 삶으로 그리고 모든 이들의 삶으로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하라.

49. 유머를 사용하라.  사람들은 웃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웃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에 도움이 된다. 웃음은 설교자와 청중을 하나로 묶어주고 엔돌핀이라는 치료물질을 생성한다. 유머는 지식을 빨리 이해하게 하고 또 오래 간직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머 사용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도 유머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비유를 얘기하시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셨을까? 유머를 설교보다 더 두드러지게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을 더 인간적이면서도 믿음직스럽게 만든다. 유머를 사용하라. 즐거움을 나누라.

50. 유머를 적합하게 사용하라.  유머는 설교의 서두에서 사용할 때 효과적일 수 있다. 유머는 인간의 단점을 설명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태도를 강조하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순수하고 재미있는 유머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용하려는 유머는 분명한 요점이 있어야 하고, 설교의 흐름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유머는 청중의 생각의 흐름을 역류시키고 흩어지게 만든다.

51. 근래에 일어난 심각하고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라.  교회나 그 지역 사회에서, 설교 바로 몇 시간 또는 몇 일 전 매우 심각한 일어날 경우가 있다. 이런 사건들이 교인들을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면, 당신에게는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어야 할 책임과 기회가 있다. 이러한 중요한 사안을 설교나 목회자의 언급 기회를 통해서 다루어 보라. 사건의 중요성과 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확실히 하라. 이런 일들을 믿음에 대한 문맥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 안에서 다루도록 하라.

52.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 흐름을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하라.  설교 사이사이에 짧은 문장을 반복해줌으로써 듣는 이들을 당신의 사고의 흐름에 끌어들일 수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 꿈이 있다" 라는 설교를 읽거나 들어 보라.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설교도 교인들에게 똑같은 힘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설교도 교인들에게 똑같은 힘을 지닐 수 있다. 청중이 당신의 사고의 흐름을 쉽게 따라 오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들로는,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상기시키는 짧은 문장들이나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현재의 요점을 분명히 하는 화제 전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턴의 변화가 너무 뻔해서 청중이 너무 쉽게 당신을 앞지르게 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설교하는 시간만큼은 청중이 당신을 따르게 해야 한다. 

53. 다른 설교자들을 모방하려고 하지 말라.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자신이 설교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일에 특별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실패를 가는 분명한 길이다. 설교에서 느껴지는 진실함과 능력은 대부분 그 사람만이 지니는 독특한 인격과 개인적으르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회에서 경험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설교란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려고 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이 될 수 없다.

54. 겸손하게 설교하라.  어떤 설교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 수용력이  풍부한 회중 앞에 서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런 감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는 겸손한 설교이다. 당신은 주일이 지날 때마다 자문해 봐야 한다. "나의 본래 모습과 내가 행한 행동들을 생각할 때,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권위있게 할 수 있는 무슨 마땅한 권리가 있겠는가?" 설교는 당신이 그것을 할 '자격' 이 있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허락'이 주어졌기에 하는 것이다. 겸손한 설교는 당신을 더 나은 설교자로 만들뿐만 아니라 더 나은 그리스도인, 더 나은 인격자로 만든다.

55. 항상 당신 자신에게 설교하라.  설교는 다른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항상 당신 자신을 생각하며 설교를 시작하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떠나지 말라. 당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할 때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적용하라. 당신이 죄에 대해 언급할 때도, 자신의 죄를 마음에 두라.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도, 당신 자신의 필요와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에도, 당신이 어느 때 이기적이 되고 어떤 경우 베풀게 되는지, 자신의 경우를 점검해 보라.56. 사람들의 정서를 결코 부당하게 이용하지 말라  설교할 때마다 당신은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관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또,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당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 전하는 분노, 당신이 발생시키는 무기력함 그리고 격려하는 칭찬 등으로 사람들을 동요시킬 수 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실질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는 지를 생각해 보라. 당신의 설교와 당신의 모든 사역에 걸쳐 신뢰받는 것에 합당하게 행하라.

57. 도덕적으로 규정짓는 일을 피하라.  설교자마다 도덕적 규정을 내리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 어떤 설교자들은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엄중한 규범들을 가르친다. 또 어떤 설교자들은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항상' 과 '결코', '좋은'과 '나쁜'과 같은 단어들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그들은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한다. 훨씬 더 건강하고 효과적인 설교는 겸손과 열정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고  삶을 빛 가운데로 인도 받게 된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도덕적이지 않은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결단을 내릴 때, 사람들은 책임감도 더 지니게 되고 윤리적으로도 성숙하게 된다.

58. 당신의 내면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경계하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서나 발견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이렇게 객체화 시켜서 언급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종종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해 보라. "내가 지닌 점들 중 내가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의 어떤 점들을 숨기고 싶어하는가?" 당신이 지닌 부정적 특성들은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을 살피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만들게 된다. 왜냐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전가해서 그들의 참모습을 왜곡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59. 청중에게 능력을 더하라.  능력있는 설교는 교인들을 단순히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당신의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를 듣고 있는 동안 그리고 끝난 후까지도 계속해서 생각하고 느끼게 만들 것이다. 그런 과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능력있는 메시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당신의 설교는 청중에게 그들만의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준비시켜 주는 생명력과 권능을 공급해 줄 것이다. 사실인즉, 그들은 당신보다 더 큰 일들을 해낼 수 있다.

60. 어린이 설교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것을 매우 중요하고, 호기심 많고 대부분의 경우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 즉, 어린아이들을 위한 탁월하고도 시의 적적할 메시지로 여기라. 어린이들에게 알맞는 언어를 구사하라. 그러나 결코 그들을 경시하는 말투를 사용하지 말라. 그들과 재미있게 보내라. 그러나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게 하라.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신체적, 정서적, 영적 수준에 맞추어라. 이것에 쏟아 마땅한 많은 시간과 노력과 관심을 기울인다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즉, 당신이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61. 설교를 연습하라.  설교는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우에 맡기기엔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당신이 설교하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며 그 내용 또한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설교문을 다 작성한 후에는 반드시 연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녹음기로 녹음을 해 보라. 더 좋은 방법은, 설교할 장소에 미리 가서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를 해보는 것이다. 마지막 연습은 예배 시작과 가장 근접해서 가능한 시간에 해 보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전하는 내용에 편안함을 느끼고 그것을 전하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62. 원고는 보기 편하게 작성하라.  만약 당신이 설교할 때 원고를 사용한다면, 사용할 때 어려움이 없게 작성하라. 쉽게 읽으려면 정자체의 큰 글씨로 기록하고, 띄어쓰기를 두 칸씩 하는 것이 좋다. 시선이 너무 아래로 가지 않도록 여백을 충분히 두어서, 원고를 쓴 종이의 밑 5센티미터 정도는 비워두라. "여기는 천천히 설교하라", "이것은 강조하라" 등의 메모를 하라. 원고 상단 모서리 부분을 접어서 원고를 쉽게 넘길 수 있게 해 두라. 원고 상단에 페이지를 적어 놓고 중요한 단어는 다양한 색깔로 밑줄을 그어라. 절대로! 절대로! 설교를 읽어 내려가지 말라. 당신이 원고를 따라가며 설교한다고 할지라도, 설교하려는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제3부. 예배를 위한 준비


63. 설교하기 전에 조용한 시간을 가져라.  간혹 예배 시간 바로 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나 적어놓을 광고사항들, 또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눠야 하는 일등, 갑작스럽게 많은 일들이 생길 때가 있다. 내적인 평을 갖는다면, 이런 일들이나 곧 하게 되는 설교도 차분하게 치뤄 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늑한 공간을 찾아가 혼자 시간을 보내라. 그리고 긴장 이완 운동을 하거나, 부드러운 음악을 듣거나, 그저 조용히 앉아 있거나, 묵상과 기도를 해 보라. 자신과 하나님께만 집중하라.

64. 편안한 옷을 입음으로 간혹 하찮은 일이 큰 차이를 나게 할 때가 있다. 예배 때는 편안한 신발을 신어라, 강단에 서 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설교자로서 호흡하기가 편안하고 활동이 간편한 옷을 선택하라. 설교할 때는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땀을 흘리게 된다. 당신에게 자신감을 더해 주는 옷을 입으라. 옷차림이 불편할 때, 설교하면서 주의가 분산될 확률은 더 높아진다. 말을 시작하기 전, 옷차림만으로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느낌을 전할 수 있다.

65. 청중의 입장에서 보아도 편안한 차림을 하라.  당신이 어떤 옷을 어떻게 입는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두드러지는 무늬가 있는 옷은, 특히 강단에서 많이 움직일 경우, 청중을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 너무 현란하고 극단적인 색깔의 옷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다. 흔들거리는 귀걸이와 소리가 나는 팔찌는 설교 시 방해가 될 수 있다. 동전이나 열쇠 등이 들어있는 호주머니는 완전히 비우고 강단에 서라. 머리 모양은 너무 얼굴을 가려서도 안 되고 손으로 자주 쓰다듬지 않도록 단정히 하라. 수염은 입 주위가 단정하고 깔끔하게 보이도록 하라. 콘텍트 렌즈가 가장 좋긴 하지만 광택이 나지 않고 빛이 반사되지 않는 적당한 크기의 안경을 써도 무방하다. 작은 돋보기 안경은 사용하지 말라. 이런 안경을 쓰면 눈의 움직임이 너무 잘 보여서 청중들을 정신없게 할 수 있다.

66. 다른 준비 사항들도 미리 살피라.  설교 중에 언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를지, 이름이나 날짜 혹은 과제들을 간단히 기록하고 싶어질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때를 대비해서 펜을 준비하라. 그러나 보이지 않게 가지고 들어가고 설교하는 중에는 손 가까이에 두지 말라. 화장지도 목캔디도 필요할 수 있다. 물도 한 잔 준비하되, 너무 차갑지 않게 하라. 물 온도가 체온과 가까울수록 목소리에 더 좋다. 너무 드러나게 마시지 말고  꼭 필요한 때만 마셔라.

67. 안절부절 못하는 것에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  중요한 공적인 사역 전에 불안해지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다. 당신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 키우는 것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정도 '긴장하여 떠는 것'은 그 설교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현상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증가되고, 정신적인 활동이 가속화된다. 이 에너지로 실력을 닦고 집중할 수 있다. 만약 설교를 하러 들어서면서도 아무런 초조감을 느끼지 않는 그런 날이 온다면, 바로 그 때야 말로 불안해져야 할 때이다.

68. 자신이 은혜받는 예배로 계획하라.  예배 전에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 외에도, 예배 중에 자신이 은혜받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계획을 세워라. 예배당에 들어설 때나 설교하기 위하여 일어설 때,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기를 자원하라. 청중과 함께 당신 자신도 설교와 기도에 젖게하는 음악과 찬양을 선택하라. 성령님께서 인도하실 수 있도록 잠시 묵상하는 시간도 가지라. 당신이 직접 찬양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므로 예배에 충만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게 된다.

69. 강단의 환경을 당신에게 맞추라.  강단의 환경을 설교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라.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강단이 너무 높지않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설교자의 머리와 어깨만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만약 필요하다면 계단이나 박수를 높아도 좋다. 카페트를 씌워 놓아라. 설교 노트는 눈에 잘 들어오는 자리에 두라. 조명을 잘 조절하고, 마이크는 당신의 목소리와 잘 어울리도록 미리 맞추어 놓으라. 설교를 강단에서 할 계획이 아니더라도 시작은 거기서 하라. 강단은 전통과 능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70. 열정을 발산하라.  열정은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설교에서 가장 원초적인 요소인 열정은 자연스럽게 발산되어야 한다. 자리에 앉아있는 성도들은 당신의 생명력과 태도를 느끼기를 원한다. 그들은 당신의 열정에 감동되기를 원한다. 청중이 감동받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당신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강단에 올라가지 말라. 힘차고 활기있게 걸어 올라가라. 강단에서 몸을 수그리지 말라. 바른 자세를 취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나타내라. 비행을 시작해서 마음껏 날아라.

제4부. 설교하기


71. 설교를 커다란 모험으로 생각하라.  설교하는 것은 마음 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전하고, 그들이 믿는 바를 주장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그리고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일어서는 그런 자들을 위한 것이다. 능력있는 설교는 수준높은 연극과 같은 요소를 가진다. 듣고, 읽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글을 썼던 그 모든 시간이 짤막한 예측불허의 시간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설교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이 과연 잘 들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될까? 당신은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오직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설교를 충실히 준비하여 담대히 전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

72. 권위를 가지고 설교를 시작하라.  설교의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중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이 앞장서서 인도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나타내는 기대감을 바탕으로 설교하라. 준비하는데 시간을 충분히 들이고, 그들을 똑바로 보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설교를 시작하라. 이렇게 하는데 5~10초를 사용하라. 그리고 나서는 확신과 권위와 감정을 넣어 설교를 시작하라. 당신이 만약 원고를 사용한다면 첫30초간의 내용은 암기를 해서 청중과 마주친 시선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73. 말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설교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연구에 의하면 표현되는 의사소통에서 60%이상이 비언어적 수단에 의존한다. 사상, 이미지, 언어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조, 눈 표정, 손놀림 그리고 얼굴 표정이다. 사람들을 북돋울 수 있는 이야기도 단조로운 음조로 표현한다면 별 반응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설교가 능력을 나타내려면 말 외에 다른 표현 방법들도 함께 사용해야 한다.

74. 눈빛으로 설교하라.  누군가를 진짜 알고 싶을 때에는 그 사람의 눈빛을 보면 된다. 눈은 표현력이 가장 강한 부분이다. 눈은 설교를 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예배당 곳곳에 앉은 사람들과 골고루 눈을 마주치는 연습을 하라. 곳곳에 의미있는 시선을 던지고 한번에 몇 초간을 응시하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을 보는 시선도 움직여라. 아래를 10초 이상 보지 마라. 당신의 눈빛이야말로 청중과 마주치는 가장 직접적인 연결고리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라.

75. 얼굴 표정으로 설교하라.  모든 청중이 당신의 눈빛을 자세히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얼굴을 통해서도 당신의 말을 잘 표현해 주어야 한다. 특별히 어떤 예화나 감정을 표현할 때 그리고 중요한 부분을 강조할 때 얼굴 표정으로 잘 나타내라. 도움이 안되는 표정들이 있다. 시의적절하지 않거나, 너무 순간적인 표정은 불안감을 전달한다. 굳은 표정은 두려움이나 적대심을 표현한다. 인간의 얼굴은 수천 가지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당신의 얼굴 표정을 잘 조절해서 설교에 깊이와 감동을 더하라.

76. 당신의 목소리를 조절하라.  설교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잘 들리게 해야 한다. 만약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으면 사람들은 설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당신 자신도 의심스러워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흥미가 없어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설교를 잘 전달하려면 당신의 목소리를 잘 조절해야 한다. 성량보다는 그 안에 담긴 에너지를 잘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음성은 목에서 내기보다는 횡경막으로부터 깊게 끌어올려 발성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설교에 확신을 가져라. 생명력을 불어놓고 생명이 전달되게 하라.

77. 자연스럽게 설교하라.  청중은 당신의 꾸밈없는, 자연스런 목소리를 듣기 원한다. 당신이 특별히 경건한 체 하는 떨리는 목소리를 사용한다면 청중은 금방 흥미를 잃을 것이다. 또 당신이 다른 사람의 음성을 모방하려고 하면, 청중은 속고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의 설교하는 목소리가 평소 생활 속에 쓰던 목소리와 다르면 청중은 혼돈 속에 빠질 것이다. 긴장을 풀고 자연스런 어법으로 리듬을 가지고 말하라. 말의 높낮이와 속도에 변화를 주라. 평소에 말하듯이 휴지(休止) 기간을 가지라. 대화체로 설교하라. 그러면 당신의 설교는 실제적이 될 것이다.

78. 명확하게 설교하라.  발음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라. 얼굴의 하반부를 잘 움직여야 한다. 턱을 움직여라. 입은 충분히 벌여라. 입술과 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라. "음~", "에~"와 같은 소리를 반복하거나, 설교와 관계없는 무의미한 단어를 계속적으로 사용해서 전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흐리지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없는 용어들이 설교를 애매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아도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79. 손과 팔을 사용하라.  제스처가 없는 설교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다. 설교할 때 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를 연구하라. 당신의 말뿐만 아니라 얼굴 표정과 목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동작을 연구해 이런 동작들을 당신의 생각들과 연계시켜서 능동적으로 사용하라. 당신의 몸에서 우러나와서 청중에게 보여지는 행동을 하라. 설교의 여러 가지 내용에 어울리도록 손과 팔의 표현법을 다양하게 개발하라. 장소와 사람들의 수가 클수록 더 큰 제스쳐가 필요하다는 것도 기억하라. 손을 비틀고 비비거나 설교 단상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행동은 삼가라.

80. 온몸으로 설교하라.  당신의 머리, 팔, 손만으로 제스쳐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온몸으로 설교하라! 발을 어깨넓이 정도로 벌려서 양쪽에 몸의 균형이 잘 배분되게 서라. 다리는 꼬지말고, 간혹 가다가 무게 중심을 바꾸기도 하라. 몸을 완전히 돌려가며 예배당 곳곳을 향하게 하라. 설교할 때 허리를 뒤로 젖히지 말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가까워지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들과 멀어지게 된다. 필요하다면 청중을 향하여 몸을 숙여라. 당신의 온몸으로 설교하라.

81. 천천히 침착하게 설교하라.  당신 생각에 약간 너무 느리다 싶을 정도의 속도로 말하라. 그래도 아마 사실은 조금 빠른 정도의 속도일 것이다. 얘기 사이에 짤막한 휴지(休止)를 두라. 당신이 던진 질문이 청중에게 스며들 수 있는 시간을 가져라. 이런 휴지기를 "한 번 생각해 보시오"하고 강조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라. 침묵도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침묵은 당신이 말하는 전후나 기도할 때, 심지어 설교할 때에도 빈 부분을 채워 넣는다. 서두르지 않고 간간이 휴지기를 갖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라. 그러면 청중은 더 잘 들을 것이고, 또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82.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라.  저명한 설교가인 죠지 버트릭은 설교는 철학이나 논리보다 희곡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했다. 설교는 모든 설교자가 혼신을 다해 연기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수님이 마치 강의 노트를 읽는 것처럼 군중에게 설교하셨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는 변론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셨다. 그는 설교할 때 훈계하기도 하고, 선포하기도 하셨다. 그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그는 청중을 사로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이 점을 생각해 보라. 아니 '생각하지 말라' '느끼고 행하라'

83.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라.  예배당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하라. 장년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에게도 설교하라. 이웃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에게도 설교하라. 형식적으로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깝게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설교하라. 교회에 있는 당신의 동역자들에게도 설교하라. 그리고 물론, 당신 자신에게도 설교하라.

84. 졸고있는 사람을 개의치 말라.  아마 조는 사람은 매주일마다 어김없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난히 피곤해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딴 데 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지루해 할 것이다. 당신의 설교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들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빠진 이가 있던 자리에 혀를 계속 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85.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살피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청중들이 있다. 당신의 의사가 얼마나 잘 전달되는지 혹은 전달되고 있기는 한지를, 이 사람들을 보면서 평가하라. 때로는 이 사람들을 보고 힘을 얻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그 사람들만을 위한 설교가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간혹 이들에게서 힘과 격려를 얻을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들도 이것을 느낄 것이다. 이 점을 솔직히 말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86. 어린아이가 운다면 그대로 두라이런 경우에, 놀라서 쳐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만 아이나 그 부모에게 주의를 집중하지 말라. 목소리를 약간 더 크게 해서 계속 진행하라. 당신은 조금 더 빨리 수습되었으면 하고 바라겠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 부모나 보호자가 재빨리 사태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 간혹 사람들이 무디게 반응할 경우에는, 안내인들이 조용히 다가가 예배 진행을 위해 잠시 밖에 나갔다 오도록 권면하게 하라.

87. 울고 있는 성도가 있거든 그대로 두라.  그렇다고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전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응시하되, 지나치게 쳐다보지는 말라. 때로는 예배가 끝난 후 인사를 하면서 팔이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는 것으로 당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들이 이 정도만을 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우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음을 명심하라.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때로는 다른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간혹 흘리는 이유가 설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때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도 명심하라.

88. 설교자인 당신이 울게 되는 경우에도 역시 그대로 두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때 사과할 필요는 없다. 우는 이유를 꼭 설명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잠시 멈춰서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을 추스리고, 다시 설교를 계속하라, 청중은 당신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설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89. 설교 능력을 키워가라.  당신의 나이가 경륜이나 능력에 매이지 말고, 매번 설교할 때마다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라. 그것은 원고에 쓰여져 있는 문장을 더 유려하게 하려는 작은 노력이나 또는 원고보다는 요약노트로 설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해본 적이 없다면, 1인칭을 사용하여 설교해 보라. 설교단상 가까이 에서만 있었다면, 조금 떨어져 보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변화를 주어 보라. 제스처를 줄이고, 그 대신 목소리에 변화를 주어 설교해 보라. 마음속으로 성경 본문 전체를 기억하라. 매주 당신의 설교 능력을 키워가라.

90. 실수를 잘 다루라.  강단은 엉덩방아를 찧는 것과 같은 겸연쩍은 실수를 하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실수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말이 꼬이고 문장을 잊어버리고 생각이 혼동될 경우가 있다. 이런 실수가 생기면, 시치미 떼는 것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가능하다면 유머를 곁들이는 것을 통해 그 날의 본문 못지 않게 좋은 내용을 전할 수도 있다.

91. 당신의 설교에 대해서 결코 변명하지 말라.  모든 설교자들은 은혜가 풍성한, 잊지 못할 설교를 연속적으로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말문이 막히는 주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때는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다른 일이 생겨서 정리나 준비가 덜 된 느낌을 지닌 채 주일 설교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면 당당하게 해내라. 설교가 좋지 않았을 경우, 청중들은 분명 그것을 느낀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어떤 청중은 이런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들이 지니고 온 기대를 채워서 돌아가기도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당신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신다.

92. 너무 길게 설교하지 말라.  청중의 한계선을 시험하지 말라. 설교시간을 재서 미리 파악하고 있어라. 도움이 된다면 시간을 보면서 설교를 하되, 결코 팔을 올려 시계를 보는 일이 없게 하라. 그렇게 할 경우 청중도 시계를 보게 되어 집중력을 분산시키게 된다. 주일 저녁식사 때 그 날의 설교가 얘깃거리가 된다면, 그 주제가  '설교의 길이'가 되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93. 권위를 가지고 결론은 맺어라.  설교의 서론뿐 아니라 결론도 외워야 한다. 자신있는 태도와 힘있는 목소리로 청중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라. 단어 하나 하나를 이해하기 쉽게 명확하게 말하라. 말하는 속도를 약간 줄이고 마지막 말은 힘있게 전하라. 그리고 잠시 동안 움직임 없이 선 채로 있으면서, 당신의 설교가 청중의 가슴속에 계속 파고들게 하라. 지나치게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라고 하지 말라. 설득력있고 확신에 차있는 것이 중요하다.

제5부. 마무리 하기


94. 모든 설교를 기록해 두라.  설교를 마친 후 원고를 정리하여 보관하라. 설교가 전체적으로 어땠는가? 강점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떤 예화가 가장 효과적이었는가? 청중이 가장 흥미 있게 받아들인 부분은 무엇인가? 다시 한다면 어떤 점을 바꾸겠는가? 시간이 지난 후에 정리한 것을 보면서, 설교 스타일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라. 설교를 통해 당신의 역할, 믿음, 하나님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어떤 모습이 드러나는지 보라.

95. 설교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라.  당신의 설교가 진짜 어땠는지를 알아보려면 다른 출처에서 나온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 당신의 설교를 녹음해 놓고, 그 주중에 들어보라. 어조, 억양, 발음 그리고 시간 사용하는 것을 잘 살펴보라. 더 좋은 방법은 비디오롤 녹화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시선, 표정, 몸 동작을 유심히 살펴라. 소리를 소거하고 보면 더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평가를 부탁해 보라. 당신의 배우자에게 부탁을 해도 될까? 절대 금물이다.

96. 설교를 대한 평가를 은혜스럽게 받아 들이라.  설교 후 성도들과 인사를 나눌 때, 당신은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목사님, 좋은 설교였습니다."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의 격려와 칭찬을 존경과 은혜로 받아들이라. 그리고 유머 감각도 잊지 말라. 다음 이야기를 기억하라. 첫 설교를 마친 설교자에게 어떤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설교는 지금까지 내가 들은 설교 중 제일 안 좋은 설교였어요." 목사가 깜짝 놀라 서있을 때, 줄 서있던 다음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저 여자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여자는 항상 약간 모자란 듯한 여자입니다." 목사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 남자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정말입니다. 저 여자는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계속 반복하기만 해요."

97. 설교를 전한 후에는 그것을 놓아 보내라.  끝마친 설교는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 설교에 감동한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수명이 짧든 길든, 탁월하든 미흡하든 그 자체의 생명을 지니게 된다. 설교와 작별인사를 하고 세상으로 내어 보내라. 하나님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주실 것을 믿어라. 그리고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라!

98. 다양한 주제와 내용으로 설교하라.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설교에 같은 주제와 내용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들의 신하가, 생활체험, 인격, 사역에 대한 이해와 설교에 접근하는 방식 등에서 비롯되는 주제들이다. 설교의 제목이 바뀌고, 본문 구절도 다양하지만, 비슷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설교자로서 어떤 설교를 하는가? 당신의 설교는 다양한 주제와 내용으로 구성되는가?

99. 능력있는 설교자일수록 조심하라.  모든 설교자들은 큰 위험을 안고 있다. 당신이 만일 설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고 소위 '청중을 매료시키는 설교자' 라면 그 위험은 더욱 커진다.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를 듣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당신은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우상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랑과 겸손 안에서 복음만을 증거해야 한다. 당신의 설교에는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라.

100. 당신에게 있는 특권을 깨달으라.  당신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희망, 실패와 성공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위임받는다. 당신에게는 이 사화에서 어느 누구도 말 할 수 없는 영역을 설교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당신은 많은 용납과 용서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엄청난 자유와 존경과 신뢰다 부여받은 것이다. 설교할 때마다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라 그 은혜에 겸손히 감사함으로 끝을 맺어라. 이 시작과 끝 사이에는 당신의 마땅히 할 바를 행하라. 열정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라.<종합결론> "설교할 때마다 누구에게 영광인지를 기억하라" 

영광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료 출처 : 제임스 밀러 지음/ 정형수 옮김/ 설교자를 돕는 소중한 책/ 1999년/ 요단출판사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크리슬람 (Chrislam)이란 영어로 Christian과 Islam을 합친 말로서, 말 그대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혼합종교를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코란도 믿고 성경도 믿고, 알라도 믿고 하나님도 믿자는 것이다.

1980년대 나이지리아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크리슬람 혼합종교 운동은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 소개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미국 전역에만도 잘 알려진 몇 몇 대형교회를 비롯하여 약 100여개의 교회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슬람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하나의 충격적인 실체로 보다 가깝게 다가오게 된 계기는 아마도 2009년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행했던 릭 워렌 목사의 기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아, 이사, 헤수스, 그리고 지저스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는데, 이 중 예수아는 히브리어, 헤수스는 스페인어, 지저스는 영어로 각기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문제는 이사 (Isa)가 아랍어로 또한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당시 미국은 아랍권에 대하여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뜻밖의 말이었기에 상당한 논란이 일었었다.

오바마는 물론이고, 릭 워렌 또한 사실은 그동안 모두 이슬람교에 대하여 친밀한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행보를 해왔기 때문에, 그 날의 이벤트는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비근한 예로 오바마는 수많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911 사태가 일어났던 뉴욕 맨하탄 그라운드-제로(Ground-Zero) 지점 바로 옆에다가, 2,000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이슬람교 기도실이 포함된 ‘이슬람 공동체 센터 (Islamic Community Center)’를 짓도록 허락 해줌으로 자신의 친 이슬람 성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릭워렌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크리슬람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소위 예일대학이 주최한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대화의 자리를 주동이 되어 이끈 것일 것이다.

2007년 10월경,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이슬람 지도자들의 공개편지가 <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라는 제목 하에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세계의 유수 언론에 대대적으로 광고가 나간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총 138명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서명을 한 이 편지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결국 커다란 부분에 있어서 같은 관점을 지향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 평화를 위하여 손잡고 하나가 되자는 내용이 요지였다. 이에 부응하여 상당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 다음 해에 예일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화를 모색하는 컨퍼런스에 모이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그들의 뜻을 모아 환영 일색으로 이슬람과 ‘하나’가 되는데 동조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과 여기에 서명을 한 사람들의 명단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직접 읽어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릭워렌을 비롯하여 로버트 슐러, 브라이언 맥라렌,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이름도 들어 있다.

http://www.yale.edu/faith/acw/acw.htm

  
무엇이 잘못 되어 가고 있는가? 세계 곳곳에 이슬람의 자본을 앞세운 포교가 활발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님을 뉴스를 통하여 이미 보고 있지 않은가?

크리슬람, 굳이 아래의 성경 말씀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왠지 ‘키메라’ 같은 기이한 이름으로 느껴짐은 내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함일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요 14:6)



출처: 성경지킴이(KeepBible)-김정훈/개혁주의마을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요즘 그릇된 성령론을 주장하며 또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서 성도들로하여금 혼란을 이르키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 성령은 회심하여 예수를 믿고 난 다음 다시 받는다" 라 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날로 늘어만 갑니다. 고린도전서 12:3 에는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에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며 로마인서 9:8 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면 모두 구원 얻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한 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중생" 자체가 성령으로만 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헤 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사람이 중생할 수 없습니다. 근자에  본 선교회 "질의응답 시간" 에는 성령에 관한 질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오늘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n of the Spirit) 이 무엇인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성령의 조명을 오해하여 마치 <성령의 조명> 이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이는 가장 비성경적인 교리 입니다. 오늘날 "다른 복음" 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너무 많아서 기독교  교계가 이처럼 어지럽습니다. 바로 배우고 바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성령의 조명” 은 새로운 계시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 사이에서는 성령의 조명을 마치 새로운 계시를 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서 같은
성경구절을 놓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에는  이단들이 무성하고 교회가 분렬되며 성도들은 무엇이 참 복음인지 모르게 됩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류는 모두 지.정.의가 완전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나아
올 수도 없지만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깨닫는 성경은 항상 인간 중심이며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의 자주장사 루디아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안식일에 바울을 만나서 바울의 설교를 들었는데 들으면서도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고 했습니다 (행 16:14). 마음이 열려져서 예수를 믿게 되었지요.  누가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나요?  그것은 성령입니다.  완악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항상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아담의 죄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진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성경구절은 고전 1장과 2 장 일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혼이 어두어진 인간에게는 십자가는 미련스럽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신화처럼 들립니다. 동정녀 탄생도  옛날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든 것처럼 미개한 하나의 이야기 꺼리로 들립니다.  이것이 자연인 (예수를 모르는 사람) 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이런 분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자연인에게 우리가 가장 능한 변술로 설교해 보십시오. 가장 그럴사한 논리로 설득하려 해 보십시오.  가장 좋은 예화를 들어서 기독교릐 교리를 설명하려 해 보십시오.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전도하는 마음이나 방법이 잘 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비성경적인 말을 전해서가 아닙니다. 그 영혼이 죄로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 하늘에 햇빛이 비치는 날 두 사람을 밖에 데리고  나가서 머리를 들어 하늘에 무엇이 보이는가 물어 보세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장님입니다. 하늘에 눈부신 태양이 보인다고 하는 사람은 장님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너무나 밝게 빛나는데 한 사람은 못보고 한 사람은 그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태양을 못보는 사람은 태양이 그 사람에게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은 그대로 있는데 바라보는 사람의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 다시 말하면 태양을 볼 능력이 없는 장님이기 때문에 남이 보는 태양을 그 분은 못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불변한데 성경을 읽은 사람이 글은 읽어도 그 뜻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지능지수 (IQ) 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그의 영혼이 진리를 볼 능력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일에 아주 무식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회 명사라고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죄악된 인간,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기의 “죄” 라는 검은 안경을 벗어야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깨달을 수 있고, 자기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자기의 지식은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속에 역사하여 잘못된 길에서 떠나 바른 길로 가게하고 어두어 진 영의 눈을 뜨게 할 때 성경말씀을 바로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날마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영의 눈이 열려도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20/20 의 완전한 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설명됩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그때부터 “성화” 라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성화는 과정입니다. 즉 죽을때까지 성화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소명, 회심, 중생, 칭의 양자 과정는 모두 일시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소명이 있고나서 얼마 있다가 중생이 일어나고 얼마 있다가 칭의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만 신학에서 논리상 이렇게 구분을 두눈 것 뿐입니다.

    성화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죽을 때 완성되어 영혼은 하늘에 올라가고 몸은 땅속에 묻혀 흙에서 취함을 받았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날 땅속에 묻혀있던 성도의 몸이 부활하여 주님과 같이 내려오는 영혼과 연합하여 영화로운 몸이 되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이 지식과 지혜는 유한하여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조명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보려면 망원경을 이용합니다.  그 별들을 보기 위해서 다른 물체를 놓는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놓을 뿐입니다.  발람은 앞에 천사가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그 천사를 보고 앞으로 한발직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있듯, 객관적인 사실인데 미미한 나귀는 볼 수 있어도 발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가장 무식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를 알고 성경을 이해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고등교육을 받아 유식하지만 성경을 모르고 기독교의 진리를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신들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성령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읽고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 결코 아 닙니다. 한 가지 계시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천가지 만가지 새로운 게시를 준들 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조명이란 새로운 지식의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바로 이해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고로,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대상자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영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진리의 말씀을 전해도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눈을 뜨게해 주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또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19:18에 보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인한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거듭난 우리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성령계서 더 좋은 지식과 지헤로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야합니다. -끝-



오늘 새벽 바닷가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습니다
가시거리 불과 3~5미터 정도...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늘은 물론, 멀리 보이던 도시의 불빛도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인데...
누구나 할 것없이 다 아는 체를 하며 삽니다
 
첨부한 사진은 고아원인데 장애 어린이들만 돌보는 곳입니다
35명 정도의 어린이를 30여 명의 봉사자들이 돌보고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이 Diaper(기저귀)라고 합니다
하루 필요한 숫자가 대략 200여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 외에 먹을 것...어린이 보다는 자원 봉사자들에게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Diaper 를 구할 수 있는 분들은 관심을 가지시고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10월도 중순 입니다
찬서리와 비바람, 이슬을 맞은 과일,
채소들이 더 알차고 탐스럽고 풍성하다고 합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고....승리가 있습니다
오늘도 승리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승리!!!
 

멕시코에서 김만니 드림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JuNick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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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길-사탄의 공격  (0) 2014.03.06
성령을 이용하는 한국교회의 성령집회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강의는 두번째 주제강의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다. 이 강의는 박영돈 목사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요약한것으로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지적하며 성경적으로 성령의 특성을 해석한 내용으로 이를 2번에 걸쳐 소개한다.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과 영적인 분별력

최근 한국교회에 성령에 대한 혼란이 아주 심한편이다. 수십년전에 한국교계를 휩쓸고 지나간 방언의 열풍이 다시 오는 것 같고 치유집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예언과 환상과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온갖 은사집회에 그리고 성령집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무질서한 현상으로 인해 성령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증폭되어 가고 있다. 어디까지가 성령의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소위 성령집회라는 곳에서 성령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왜곡된 가르침과 사역으로 인해 성령의 형상이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광명의 천사라고 자기를 위장하는데 명수인 마귀는 성령의 얼굴도 모방한다. 성령집회에서 성령의 얼굴과 미혹의 마귀의 얼굴이 혼재해서 나타나며, 성령의 사역자라는 이들에게서 두얼굴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어느때보다 더 예리한 영적인 분별력이 절실한때이다.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면 안된다는 논리로 냉철한 성경적인 검증과 분별을 거부할때 교회안에 온갖종류의 사이비 가르침과 미혹의 영이 들어오게 된다. 성경으로 입증될수 없는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한다고 겁박하는 것이 사이비 성령운동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영적인 건강을 진단하는 것은 중대한 과제이고 임무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까 두려워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며 성령의 뜻을 거스리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 성령은 말씀의 영이다. 자유하지만 말씀을 통해 역사한다. 말씀의 테두리안에서 역사하신다. 말씀의 굴레를 벗어난 성령운동은 이단들이 가장 많이 득실거리는 미혹의 온상이다. 성경의 기본진리만 알아도 쉽게 파악할수 미혹의 영의 장난을 분별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모습은 그만큼 교인들이 성경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증거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이나 다 믿는 것이라 할수 있다. 한국교회 문제는 아무것이나 너무 잘믿는데 있다. 비성경적인 것까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한다. 교인들이 아멘을 너무 잘하는 것이 문제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멘을 한다. 생각하면서 아멘을 하게 해야한다.

요즘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예언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그곳에서 선무당처럼 어설픈 예언자들이 무더기로 배출된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직통계시라도 받은 것 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했다" 또는 "성령님이 말씀했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기 생각에서 나온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되고 마귀적인 음성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수이다. 그래서 온갖 허튼소리까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한국교회를 혼란하게 한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귀를 솔깃한다.

성령은 성경말씀을 계시하셨고 그리고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는 표현과 말은 성경의 계시가 주어진 통로로 사용되었던 선지자들과 사도들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할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분명히 말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있는 사업이 번창할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미혹의 영의 장난이라 말할수 있다.

어느 목사가 큰기업을 하는 장로를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찾아가면 개척교회를 하는 자금을 후원해줄것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 장로가 자금을 후원할 사람은 나인데 그런 계시가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나에게도 주어져야 할텐데 나에게는 그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고 지혜롭게 목사를 돌려 보냈다고 한다. 어떤 청년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당신이 나의 배우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고 겁박하는 수단으로 예언을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구속사와 직접 관련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이 예언하는 일을 성경에서는 찾아볼수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간혹 성경의 감동과 메세지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확신과 감동이 틀릴수도 있음을 알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증적으로 단정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이 존재하여 복잡한 메세지가 우리안에서 교차되고 있기에 어떤 것만이 성령의 음성이라고 확증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안에 어떤 분명한 확신이 있는 경우에 성령님이 나에게 이런 감동을 이런 메세지를 주시는 것 같다 정도로는 말할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진리의 말씀은 잘 안믿고 점쟁이같은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표적에 끌려가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국교회에 초자연적인 표적 현상으로 인해서 광적인 열심을 내는 이들은 많지만 복음의 진리에 사로잡혀 불꽃처럼 타오르는 건강한 신앙의 열심을 가진 사람은 희소하다. 말씀앞에 엎드리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지만 기적과 표적앞에 무분별하게 굴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령과 거룩한 수줍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진리로 우리를 자유케해서 그리스도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은 아름다운 분이다. 그래서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키신다. 지금 한국교회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은사가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없어서 복음의 빛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히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은 얼굴이 없는 인격이라는 말이 있다. 성령은 자신을 감추시는 신비로운 인격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임재와 사역을 분별하기가 어려울때가 많다. 성령의 얼굴에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신학자들은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표현했다. 이 수줍음은 인간에게 볼수있는 병든 자의식의 산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너무 자신을 의식하고 그리고 자신감이 없어서 수줍어 한다.

그러나 이 거룩한 수줍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사랑의 속성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통해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거룩한 수줍음을 가졌다. 자신의 영광을 베일로 가리고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 거룩한 수줍음은 예수님의 속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추구했다.

성부 하나님마저도 수줍어 한다는 말이 있다. 성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러나 성부 하나님 또한 성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또한 주님안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시는 겸손하신 분이다. 자신만이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때 우리들이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심히 부끄러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이다.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거룩한 수줍음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능력과 은사를 과시함으로 자신의 영광과 명성을 추구하려는 욕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그들에게서 나타날때가 많다.

성령의 얼굴이 나타나는 집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가 바르게 전파되고 옛사람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받는 은혜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외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르게 전파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아니한 옛사람이 주관하며, 그런 옛사람이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과시하는 곳에는 성령이 현저히 부재할수 박에 없다.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

성령운동이 아니라 주술운동

성령운동이라는 말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하지만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말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운동을 하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에수님의 사역과 이름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성령의 특성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가 굳이 운동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면 성령은 성령운동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운동을 하는 분이라고 말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운동을 하는 성령사역을 강조했다. 그러나 작금에는 성령의 이름으로 인간을 높이는 성령운동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마음대로 성령을 운행하고 조정할수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부적합한 용어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성령을 조정하고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자유롭게 편하게 사용하셔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수 있는 에너지나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모하고 순종해야 할 인격적인 대상이다.

한국교회에 성령운동과 집회가 많이 열리기에 그만큼 성령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성령님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성령님을 참으로 사랑해서 매일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고 성령님과 함께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성령운동과 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그런 운동에서 나타나야 할 열매,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작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없이 광신적인 운동으로 성령운동이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이고,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주술이다. 성령운동이 자칫 잘못하면 주술운동으로 변해가고 있다.

성령을 인간의 도구로

최근 성령운동에서 임파테이션이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사용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다른사람에게 전수해 준다는 말이다. 은사집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안수를 통해 방언과 예언과 병고치는 은사를 전수해 주고 성령의 기름을 그에게 흘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을 하나의 인간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반면에 인간을 신격화하는 말이 될수가 있다. 자신이 마치 성령님을 유출시킬수 있는 성령의 원천처로 생각하는 위험에 빠질수 있다.

성령님은 신적인 인격이다. 이것이 성령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인식이다. 성령님이 인격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신앙은 붕괴된다. 구원도 있을수 없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도 불가능하게 된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 능력이나 영향력이라면 우리들에게 구원의 효력과 은혜를 전달하는 채널역할을 할수 있지만, 주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우리들에게 중재해주는 채널은 될수 없다. 신적인 인격을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구원의 경륜과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면 삼위일체적인 신앙이 붕괴하게 된다. 성령을 통해 우리안에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적인 신앙이 붕되된다.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할지라도 성령을 자신이 마구 끌어당겨 사용할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하는 일은 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인들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체함함으로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에서 부터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도와 예배가 나오게 된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리보다 체험이 앞선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함으로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가장 자애롭고 친밀한 아빠로 체험하게 되었다. 아빠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가운데 부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그들의 존재속으로 밀려들어옴으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물러나고 부활의 능력과 생명력이 그들안에 밀려들어와서 그들을 주관하고 점령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게 된것이다.

초대교인들은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잘 정리하고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는 없었지만 성령체험을 통해 그들의 삶속에 삼위 하나님의 부요한 임재와 축복을 만끽하는 삶을 산 것이다. 현대교회는 초대교회에 비해 아주 정교하게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는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속에 삼위 하나님의 부요한 임재와 그 분과의 깊은 교제의 체험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교인들이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그들의 삶속에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순위이든지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성령체험의 3박자

성령체험의 3박자는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빠로 체험하는 것이다. 아빠의 사랑이 우리안에 밀려들어옴을 체험하게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생명력이 우리를 사로잡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두번째 성령체험의 축은 성령을 체험하면 나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평안해진다.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내가 평안해 진다. 짓눌렸던 내가 자유해진다. 겁먹었던 내가 관대해진다. 새로워진 나를 체험하게 된다. 주님을 사모하는 나, 주님을 닮아가는 나, 아름답게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체험의 3번째 축은 너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이용할 대상으로 너는 있지만 사랑하고 교제하고 내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서 너와 당신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우리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를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삼위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나를 체험하게 되고, 그리고 너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천국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체험의 3박자이다.  

한국교회에 그렇게 많은 성령집회가 열리지만 진정한 성령체험은 희소하다. 대부분의 성령집회가 은사체험과 초자연적인 현상에 온통 관심이 집중한채 성령체험의 심장과 영원이라고 할수있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빠져있다. 성령체험을 모든 다른 영의 체험과 구분하며 기독교 영성을 다른 모든 영성과 구별되게 하는 삼위일체적인 특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렇게 성령운동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고 본다.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것에 끌리는 한국교인들의 종교적인 심성과 단숨에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갈구하는 영적인 요행심이 이런 성령운동과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수있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아서 방황하는 많은 교인들에게 그런 성령운동은 금방이라도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과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은 기대를 안겨주기도 한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종교적인 흥분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을 보아야 믿음이 지탱되고 믿음의 열심을 낼수있는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성령운동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이어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2부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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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사자군..ㅋㅋ

생각없이 행동하는 인간보다 났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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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생활을 위한 창문  
(A Window on Our Spiritual Lives) 
                  
비록 감정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느낌은
우리의 영적인 여행을 들여다보는
창문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질투의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라고 소리치고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접촉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우 평화로우며
'중심이 잡혀 있다' 고 느낄 때,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깊이 깨닫고 있다는 표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우리의 기도 생활도 우리의 감정, 느낌,
그리고 열정을 보는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이 기도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열정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한 우리의 긴 여정에서
어떻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가을 노래

                  최송연

 

 

가을의 오솔길 위에는
황금빛 잎새들의 슬픈 노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

 

 

땅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 위로
스산한 바람 핥으며 지나가고...

억새의 서걱거리는 소리는
먼 길 걸어온 나그네의 苦歌

 

                   그대여

오늘을 슬퍼하지 말지니

그대 지나온 여름 동안

사랑과 인내로 씨뿌렸다면
이 가을은 아름다운 열매로
그 진실을 드러내리니...

 

열매는 오직 뿌리는 자의 것

눈물로 씨를 뿌린 기쁨을 거둘 수 있으리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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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그 제목은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성령과 기도'등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다음은 주제강의후 질답을 통한 박영돈 목사의 대답이다. 교회밖 신비체험을 하기 원하며 무분별한 성령운동속으로 들어가려는 교인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손기철 장로 집회같은 쓰러뜨리기 집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혹시 그러한 집회들의 유익은 없는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질문] 목사는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이 경험하는 일들을 바르게 가이드할 필요가 있는데 배우기는 했어도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현상에 대하여 대답하기 여려운 경우가 많다. 교인들이 아이합등 교회외 집회에서 일반 장로교회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넘어지는 현상등 영적인 액스타시 같은 것을 경험한다. 더우기 갔다와서 하는 말이 집회에 참석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말썽을 피우면 이야기가 하기가 쉬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무분별한 성령운동속으로 교인들이 들어가는 문제를 어떻게 가이드하면 좋겠는가?

우리들의 신학과 논리세계는 한계가 있기에 영적체험의 다양성을 모두 설명할수 없고 그런 체계안에서 우리들의 영적인 현상을 다 제한하고 가두어 놓을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잡다한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성경의 척도에 의해 검증해야 한다. 교인들이 너무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다. 먼저 성경적인가 진리인가 바른것인가를 판단하기 보다는 나에게 실제적인 유익이나 효과가 무엇인가를 먼저 고려한다. 이런것으로 진리를 진단할수 없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인 접근이다. 경험적인 차원을 완전히 무시할수는 없지만 신앙체험을 항상 성경적으로 완벽하게 검증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제시를 해 주어야 한다.

쓰러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이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쓰러지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기도원을 방문했다. 바닥에 사람들이 앉아 1시간동안 예배를 드리고 다 일어나라고 하더니 사열을 하듯이 목사가 지나가면서 손가락을 대도 사람이 넘어지고 어떤 경우는 그냥 지나가도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차례에 그 목사는 저를 보고 심상치 않게 생각하고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을 가슴에 댔는데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 스러졌는데 혼자만 그냥 서있기 멋적어서 그냥 나왔다.


▲손기철 장로가 집회에서 두손으로 빠르게 지나가며 손을 대자 쓰러지는 사람들

쓰러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손기철 장로 집회등 다른 집회에서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쓰러진 사람중에 영적인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쓰러져서 평안함과 안식을 경험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유익이 있는 반면에 그것을 하나의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맨날 나가 쓰러지려고 한다. 그래야 안식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부흥집회등 집회에서 말씀이 전파될때 성령이 강력히 역사해서 사람들이 각성하여 울고 쓰러지는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사람을 쓰러뜨리려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쓰러뜨리려는 현상을 창출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미혹의 영이 그 가운데 역사할수 있다. 사역자들의 그런 능력과시를 통해 온전한 성령의 역사가 주관하는 집회가 될수 없게 된다.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수 있다. 손가락만 대도 사람들을 넘어지는 것을 보고 목사를 이상적으로 추종하는 일도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로 그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면 모르는데 일부러 사람을 불러내서 사람들앞에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 처럼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현상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유익이 아주 없을수는 없다. 유익이 있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더 혼란과 무질서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보다 항상 나가 그런것을 체험해야 은혜를 유지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끔가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간혹있는 일이고 그것이 하나의 모멘트가 되면 좋은데 그런것을 통해서만 신비한 현상을 체험하고 그래서 짜릿함을 느끼고 그래야만 신앙을 유지하는 그러한 것이 문제가 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똘레랑스+이슬람의 결과, 노르웨이 테러

- 이만석 목사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유럽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똘레랑스’라고 생각한다. 즉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문화다. 이것은 종교와 국적과 피부색과 언어와 성별과 문화권에 관계없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들과는 매우 달라 보이는 것을 개성 혹은 새로운 발상의 신선함이라고 여겨 존중하며 보호해주는 문화다.

유럽에 이슬람이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인들은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둘러싼 특이한 무슬림 여인들의 복장에 신기해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복장 문화로 여겨 존중해 왔었다. 그들이 들어와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땅을 사들여 모스크를 지을 때도, 우리도 외국에서 살 때 형편만 된다면 우리의 교회를 짓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도와주었다. 무슬림들은 선량한 이웃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며 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점점 숫자가 많아지자 그들은 서서히 부드러운 이웃의 모습보다는 똘똘 뭉친 단체행동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여 목표를 관철해 나가는 달갑지 않은 집단(움마)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여 무고한 이웃을 해치기도 하고 이슬람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순진한 인권운동가들이나 소위 열린 마음의 정치인들을 이용하여 제도적으로 이슬람 또는 무함마드나 그들의 경전인 꾸란 등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스크를 통해서 무슬림들이 그 사회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학문과 기술을 배워 사회에 기여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이슬람 문화만을 고집하며 유럽인들과의 평화공존을 멸시하며 서구문화를 타락한 문화요 파괴해야 할 문화로 가르치면서 저출산율로 인구가 줄어가는 유럽에서 출산 장려를 통해서 무슬림 인구를 급격히 늘려나가고 있다. 이제 20년 안에 프랑스 인구의 10.3%, 스웨덴의 9.9%, 영국의 8.2%, 스위스의 8.1%, 독일의 7.1%가 무슬림인구로 채워질 것이라는 전망이다.(2011.7.25 문화일보) 리비아의 가다피는 “이제 이슬람은 더 이상 테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멀지 않은 장래에 무슬림 출산율로 유럽을 점령할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늘어가는 무슬림 집단의 표를 의식하여 그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의 집단행동을 두려워하여 소위 ‘다문화 정책’을 부르짖으며 무슬림 이민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이슬람이 문제가 아니라 테러가 문제라고 하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지만 일부 몰지각한 테러범들만 보고 이슬람을 폭력과 테러의 종교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사회적으로 이슬람에 의한 불안 현상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은 채 정치인들이 다문화 정책을 부르짖고 있어 불난 집에 휘발유를 끼얹고 부채질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는 국민들은 답답하여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비근한 예로 성공적인 다문화 정책으로 유명하던 스웨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말모(Malmo)는 현재 무슬림들이 25%나 된다고 한다. 거기서 2009년 3월 데이비스 컵이라는 국제 테니스 대회가 열렸는데 이스라엘 선수가 경기를 할 때 무슬림들은 “감히 무슬림 지역에 유대인이 와서 경기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6천 명의 무슬림들이 경기장을 에워싸고 시위를 했다. 

이에 경찰은 치안과 선수 보호를 위하여 관객들의 입장을 불허하여 관객 없이 경기를 치른 탓에 말모 시는 국제 테니스 연맹의 징계를 받았다. 말모 시는 무슬림 비율이 적은 바로 물 건너 도시 코펜하겐보다 인구가 적은데도 강간 사건은 5-6배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무슬림 학교에서는 유대인 증오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유럽의 대도시에서 주민들의 반대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못하게 되면 이들은 조그만 상가의 가게를 임대해서 모스크 간판을 붙여 놓고 수천 명의 무슬림들이 등록을 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정기 기도를 할 때는 장소가 좁다는 핑계로 모두 나와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 엎드려 수천 명이 줄지어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한다. 가뜩이나 교통이 혼잡한 도심에서 무슬림들의 기도 때문에 정기적으로 통행을 금지당하는 시민들의 눈길이 고울 리가 없다. 인터넷에서 ‘muslim street prayers’를 검색해보면 뉴욕, 파리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이슬람 인구 팽창으로 인한 불편함과 피해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언론과 정치권이 입을 다물고 오히려 그런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무슬림들을 더욱 보호하며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무슬림들의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견딜 수 없었던 노르웨이의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가 스스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기 위해서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동기가 무엇이든 무방비 상태의 어린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이유 없이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쏘아 76명이나 살해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그는 마땅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일부 매스컴에서는 그를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고 보도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셨고(마 26:52), 핍박이 오면 그저 피하라고 가르치셨으며(마 10:23),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어도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으며(롬 12:19), 원수를 용서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라고 하셨다(눅 6:27).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분노케 한 이런 흉악한 살인범을 기독교인으로 몰아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조장하려고 하는 매스컴의 의도된 기만책에 속아서 기독교인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에 대해 분개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우리의 이웃에는 선량한 무슬림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한다거나 브레이비크 같은 사람 때문에 기독교를 살인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한 평가다. 종교는 몇몇 추종자들의 말이나 행위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경전과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평가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마태5:44),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갈라디아5:14)는 가르침이 있지만 이슬람 꾸란에는 오히려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네 이웃이 알 수 있도록 그들과 싸워라. 알라는 경건한 자들과 함께 하시느니라’(꾸란9:123)고 가르치고 있다. 이 간단한 차이로 인하여 이슬람이 들어가는 곳마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 잘못된 가르침을 맹종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열매일 뿐이다.

최근에 뉴욕 중심에 있는 이슬람 사원 안에 있는 상점을 방문했다. 다섯 평도 채 안 되는 가게에 간식뿐 아니라 잡화 및 기념품 등을 늘어놓고 한 쪽 벽면에는 책을 꽂아놓고 팔고 있었다. 그 가게에 있는 책을 다 합해 봐도 1천 권도 채 안 될 것이다. 

그 중에 놀라운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사가지고 왔는데 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읽어 보니 ‘이정표(Milestones)’라는 책에는 “이슬람 이외의 사상과 문화는 모두 파괴해야 하며, 이슬람의 지하드를 방어 전쟁이라고 하는 자들은 패배주의자들이며, 모든 무슬림들은 알라만 섬기는 세상,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자들과 싸우되 승리를 얻든지 순교를 당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씌어 있었다.

또한 ‘알 왈라 왈 바라(Al Walaa Wal Baraa)’라는 작은 책이 있었는데 거기 보니 ‘알왈라(Al Walaa)’라는 말은 무슬림들끼리는 언어와 국적과 성별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서로 돕고 뭉치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며, ‘왈 바라(Wal baraa)’라는 말은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Kufar) 및 위선자들, 배신자들은 철저히 증오하며 원수로 여겨야 하며 사랑하거나 존경하거나 도와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아랍 방송국에서 “기독교인은 우리의 친구다”는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교리를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무슬림들 내부 교육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들은 선진국들에 살면서 그들의 법적인 보호와 각종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런 책들로 교육을 받고 그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무슬림들 때문에 발생되는 일들을 견딜 수 없었다면 언젠가 우리도 다문화정책 때문에 쓴잔을 마셔야 할 때가 올 것을 예상하고 이제부터라도 지혜롭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일에 무관심하면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고통을 당하며 원망할 때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하루를 뜻있게 보내라
인생은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성실로써 이루고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아름답고 참 된 것들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이라야 한다.
[존 러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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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생활의 원동력
우리의 감정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의 원동력은 서로 다릅니다 감정적인 생활의 기복은 우리의 과거 또는 현재의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과거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 때문에 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고, 슬프고, 화내고, 지루해 하고, 흥분하고, 우울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미워하고, 또는 복수심에 불타기도 합니다 영적인 생활의 기복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움직임에 대한 우리의 복종, 즉 성령의 움직임을 우리가 주의 깊게 경청하느냐 경청하지 않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이러한 경청이 없이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결국 바람에 휩쓸려가는 우리 감정의 파도에 굴복하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요즘 입신하여 천국에 다녀온다는 이들이 많다. 토마스 주남 여사가 쓴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책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영문판이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한글 번역본은 무려 83쇄나 발행된 것이다. 그만큼 천국체험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주남 여사는 그 책에서 자신이 과거 7년 동안 천국을 17번 다녀온 경험을 기록하였다. 예전에 시한부종말론이 기승을 부릴 때도 “내가 본 천국”등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재림날짜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자 사람들의 관심을 그토록 끌던 그들의 천국체험담도 외면당하고 거의 폐기처분되었다. 한동안 천국소동이 뜸하더니 주남 여사의 책으로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런 천국경험담을 검증할 수 있는 어떤 잣대나 기준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특별한 영적인 체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극히 주관적일 뿐 아니라 환상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참된 영적 체험인지를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여자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고 참일 수도 있다. 전적으로 독자가 어떻게 믿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그것이 꾸며내거나 환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순진하게도 그 말을 굳게 믿은 이들은 완전히 멍청한 바보가 되는 셈이다. 반면에 그 말이 그녀의 영적인 체험에서 나온 진술인데도, 믿지 않았다면 성령님의 계시를 의심하고 불신한 과오를 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그녀의 진술이 그녀의 어떤 영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령님의 계시나 역사라는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믿기보다 의심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처사이며 성경말씀을 신앙과 체험의 척도로 삼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그녀는 주님께서 친히 이 책을 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누차 강조한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지상명령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책을 쓰게 하셨다는 것이다(토마스 주남, 조용기 옮김 천국은 확실히 있다!,서울: 서울 출판사, 2009, 62). 과연 그럴까?
 
  그녀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고통 받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슬퍼하는 자신을 위로하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딸아, 나는 네가 그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 쓰는 책에 이 체험을 반드시 기록하여야 한다. 이것이 네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네 부모님과 친구들을 보여준 이유이다. 너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경고해야만 한다. 내가 나의 교회를 내게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재림하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되기를 원한다.” 

  이 대목에서 베일에 가려진 미혹의 영이 그 모습을 슬며시 드러낸다. 주님이 했다는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과는 아주 다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사로와 부자의 예화가 등장한다. 이 예화에서 나사로는 죽어 하늘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받으며 아브라함을 보고 이렇게 애원한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7-31).

  이 예화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말씀, 즉 모세와 선지자들로 대변되는 구약성경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옥의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해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그 예화 속의 부자와 같이 성경말씀보다는 죽었다 살아난 자가 전하는 지옥과 천국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사람들이 더 잘 믿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 주남 여사는 이 주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주님의 음성과 말씀인 것처럼 위장하여 전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혹의 영의 역사이다. 주님께서는 죽어서 실제 천국을 경험하고 지옥을 목격한 사람이 살아서 지상으로 돌아와 그 본 것을 증언해도 별 효과가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주남 여사의 증언은 훨씬 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죽어서 실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고 부활해서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작 어떤 환상 속에 체험한 것을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죽었다 부활한 사람의 증언보다 훨씬 신빙성이 떨어질 것이다. 이런 황당한 얘기를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밝혀진 주님의 뜻이다. 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이들은 어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증언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감화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성령의 감동은 복음의 진리를 통해 역사한다. 이 복음의 진리를 제쳐놓고 허황된 천당이야기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어둠의 영의 미혹케 하는 은밀한 역사가 함께 한다.
 
  그런 책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지는 모르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성경말씀으로부터 분산시켜 허황된 신화에 쏠리게 하고 말씀을 통해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며 복음의 진리를 혼잡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주남 여사는 천국을 방문할 때마다 심한 진동과 몸에 진통을 경험했다고 한다. “나는 내 몸이 침대에서 들려지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나는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내 뱃속에 있는 것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p.74). "때로 초저녁에 주님과 두서너 시간을 함께 일하는 경우에도 나는 지쳐 잠들어 버렸고 그러면 주님은 새벽 2시나 3시에 나를 깨우셔서 다시 두세 시간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에는 몸이 너무나 지쳐서 얼굴이 수면부족으로 인해 퉁퉁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손을 사용하셔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반복해서 만지셨습니다. 나는 마치 때를 씻어 내는 것처럼 손으로 나의 몸 전체를 문지른 다음 다시 더러워진 손을 씻어 내는 것 같이 양손을 잡곤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게 지시 하신 분은 성령이셨습니다.”(p.324). 이렇게 몸을 만지거나 괴롭게 하는 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녀의 책에는 이같이 도저히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는 해괴한 이야기로 가득한다. 

  성경은 신비한 체험을 자세히 간증하거나 진술하는 것을 전혀 권장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아무런 유익과 의미가 없고 역효과만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사도는 참으로 삼층천에 다녀온 체험을 했음에도 그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봐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왜 바울사도는 그 놀라운 천국체험담을 주남 여사처럼 그의 서신서에 기록하지 않았는가? 왜 그는 그가 보고 경험한 천국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와 영적성숙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생각하므로 인간이 높임을 받을 수 있으며, 영적세계에 대한 수많은 억측들과 공상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울의 태도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주님의 말씀과 부합된 자세이며,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성령 사역자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아직도 허락되지 않은 천상의 세계를 엿보려는 영적관음증을 경계해야 한다. 이는 너무 성급하게 천국을 청구하는 영적인 조급함의 소치이다.
  

선지동산 56 게재 / 성령의 얼굴(6) / 박영돈 교수


    믿음의 날개 / 최송연 내게 믿음의 날개 하나 달아주십시오 내가 비상할 수 있도록... ... 주께서 달아주신 믿음의 날개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뚫고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를 수 있다면 골고다 언덕, 그 은총의 밝은 빛을 내 작은 가슴에 그득히 채우고 담을 수 있으리이다 이 죄악된 세상에 날개 접지 않고 날마다 주님 은총의 빛으로 더 가까이 올라갈 수 있기를... ... "사 4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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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 | 아타나시우스

진실 2009.09.09 10:27   http://blog.daum.net/kkho1105/2435 

 Ⅰ. 서 론

기독교의 대박해는 콘스탄틴 시대(니케아 시대)종식 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박해가 끝이 나고 평안의 시대가 교회 안에 주어졌을 때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리의 논쟁이었다.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었던 최대의 교리 논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성,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등의 문제는 주후 수세기 동안 초대 교회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이라 한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러한 삼위일체 논쟁들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이러한 교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가 참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리우스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니케아회의가 소집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를 연구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기타 여러 교리논쟁을 정리하는데 중요한 일이며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Ⅱ. 본 론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삼위일체 논쟁의 기원은 기독교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온 신학적 발전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속사도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 성부/성자/성령을 하나님으로고백.
②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폴리갑 - ‘예수 그리스도는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

변증가
①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신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함.
② 저스틴 -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종속설과 유사)
③ 데오필루스 - 삼위일체(Trinity:Trias).
④ 저스틴,타티안,아테나고라스 - 로고스를 삼위의 제2위로 인정.

교 부
①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 함
② 이레니우스 - 창조주가 성자이심을 고백하고 성자와 성부를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함.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모든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는 것이다.’
③ 터툴리안 -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
삼위의 한 본성(one substans),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
성부, 성자, 성령을 연관시킴.
*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 - 단일신론
단일신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로 아리우스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류
단일신론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 성부 고난설 Patripassianism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샤벨리안주의 Sabellianism

주장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오류들
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
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으로 봄.
② 성부고난설에서는 성자가 성육신하신 성부 자신이며, 따라서
성부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다고 주장함.
③ 시벨리안주의는 단일신론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성령의 다른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주장.

영향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
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 그리스도를 단순히 신성이 충만한
인간으로 봄.- 에비온파(Ebionites)
<영향>
에비온파 --> 데오도투스의 양자설 --> 사모사타의 바울 -->

2. 아리우스 생애와 사상
1) 생 애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연설을 잘했으며 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인 루시안(Lucian312)에게 배웠으며,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260-272)의 여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 서신 그리고『향연(饗宴,Thaleia)』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기독론을 가르쳤다.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한 뒤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귀한하여 니케아 신조에 형식적으로 동의함을 복직되었다.

2) 사 상
이미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시벨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발산된 형태, 또는 성부의 뜻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했었다. 이에 대하여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받아야 하는 강제력을 가진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아리우스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사모사타의 바울에게서 배웠다. 아리우스의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알렉산더 감독이 삼위일체신의 현현(顯現)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것이 사벨리우스설이라고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3) 아이우스의 교리체계
① 하나님의 특징은 단독과 영원이다.
② 하나님 안에 지혜와 말씀이 거하지만 이들은 위격체가 아니다.
③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한 독립된 실체를 만물 창조의
도구로 존재케 하셨다.
④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의 존재이며 실체와 본성에 있어 아버지와 다르다.
⑤ 아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고 소위 말씀과 지혜에 불과하다.
⑥ 하지만 이들은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다.(완전한 피조물)
⑦ 그리스도는 실제로 신체를 취하였으나 로고스가 영혼을 대신하므로 그
것은 영혼이 없는 몸이었다.
⑧ 기타 피조된 존재들 가운데서 성령은 제2의 독립된 실체로서 아들 곁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성령은 아들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이단적 사상이라는 반박을 받게 되었다.

3.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와 신학
1) 생 애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는 약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고 373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작성하는데 기여했고, 그의 여생을 그것을 옹호하는 데 바쳤다.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그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적 신학자였다. 그는 수도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며, 에집트의 수도사들중에 그의 최대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학자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253년에 사망한 오리겐과 354년에 출생한 어거스틴 사이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신 학
그의 신학과 신앙은 벧후1:4에 있는 말씀에 지배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간의 큰 차이점에 직면하게 된다.

서방 신학
서방신학의 중심된 문제는 죄의 제거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고, 우리는 그분 앞에 죄인으로 서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제거되지 않고는 다시는 그의 호의를 누릴 수 없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화육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동방 신학
인간의 타락의 문제였다. 창조의 머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그의 창조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은 신성과 결합했고, 그 안에 인간의 타락된 사망은 아름다운 영생으로 변환되었다. “우리에게 신성을 주시기 위하여”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그는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이 아니면 구원은 없다.

아리우스는 완전한 신성도, 완전한 인성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는 전심 전력 그를 반대했다.

4.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사실 두 학파는 신학적 접근 방법이나 강조점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이단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논쟁은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것은 유일신 사상과 기독론의 피상적 부조화에서 오는 아리우스의 오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기독론’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 발 단
아리우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32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직분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추종자인 세쿤두스(Secundus)와 데오나스(Theonas)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같이 루시안에게서 배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동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은 보기에 ‘하찮은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에게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통일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과 정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을 파견하는데, 정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체재비용과 왕복 여비를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Nicea)에 최초의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모인 인원은 300여 명이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서방측에서는 1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니케아․칼케돈․에베소 감독들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호시우스 등의 소수-.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립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등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콘스탄틴은 다만 통일과 평화 유지만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신조를 제출한 것은 아리우스파의 니코메디아의 제출한 신조가 수정이 가해져서 채택되었다. 아다니시우스는 ‘유사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본질’(Homoousios)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주장
아리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유사본질이다(΄ομοιουσιοςHomoiousios-Like Substan -ce)
인 성:그리스도는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다.

아다나시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시다(΄ομοουσιος:Homoousios-one Substance)
인 성: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3) 결 과
니케아 회의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의 추방, 부활절 날짜 재정, 멜리티우스(Melitius) 분파 문제 등을 다루었다.

4) 니케아 신조 전문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지도 만들어지지는 아니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적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회의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의 종말은 준비되어 있었고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제1기:콘스탄틴대제의 사망까지(337년5월)
①니케아 신조가 ‘진실한 신앙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짐.
②그러나, 황실 교회 고문으로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임명된후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확장됨
③안디옥 감독 유스타스유배, 아다나시우스의 감독직을 박탈하고 파문, 앙크라의 마르셀루스 파문 유배.
④ 337년 아리우스와 콘스탄틴 황제 사망으로 새로운 국면.

제2기: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직후부터 361년까지
①정치적,교회적 혼란기
②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의 유배를 두고 동서방교회간에 논쟁, 타협안으로 아다나시우스 복직.
③정치적으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가 황제의 고문이 되어 아다나시우스파를 정죄, -칼라리스의 루시퍼,베르셀라이의 유세비우스 ,밀란의 디오니시우스, 로마의 리베리우스을 추방 알렉산드리아의 아다나시우스를 몰아내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조오지를 감독으로 임명, 안디옥에도 아리우스주의자 유독시우스를 감독으로 임명.동방교회의 혼란.
④아다나시우스와 앙크라의 바실파의 동맹

제3기:줄리안의 즉위부터 데오도시우스 1세까지
①줄리안의 즉위 -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신조에 호의적 : 아리우스주의 영향력 상실
②데오도시우스 즉위 - 아리우스주의 배척
③아다나시우스 활동의 절정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는가?


[질문]

교회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3대까지 흐르는데 우리 대에서 기도로 끊어 줘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제 딸이 우리 집안에도 흐르는 저주가 있어서 그동안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지금도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인지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으니 말입니다.

[답변] 박신목사

신자의 가계에도 사탄의 저주가 흐르고 있으니 이를 끊어야 한다는 이론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비성경적입니다. 이는 풀러신학교의 실천신학교수였던(지금은 그 학교에서 퇴직함) 피터 와그너에게 뿌리를 두고 매릴린 히키가 발전시킨 것을, 이윤호 교수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으라"는 책으로 1999년 한국에 소개한 것입니다.    

와그너는 죄와 허물을 구분하여 허물(iniquity)이 "가계를 통해 대물림 된 죄로 인한 죄책(guilt)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컨대 가문마다 특유의 동일한 허물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조상의 죄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증거로 맥스 죽스와 죠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을 분석한 사례를 듭니다. 흉악범 죄수였던 불신자 죽스는 불신자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의 가문 516명이 선조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청교도 목사이자 미국의 일차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 1,394명은 모두 출세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가문의 표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양 극단에 속하는 두 표본을 선택 비교했기에 통계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비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 불신자나 흉악범 집안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나오고, 믿음이 좋은 가문에서도 현실적으로 비참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하자면 이 이론 자체의 합리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한두 극단적 예로 그 부족한 합리성을 억지로 메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이론을 주창 내지 동조하는 사람들은 가문의 영적지도를 그려보라고 합니다. 족보에 적힌 모든 선조들의 인생 이력을 가능한 일일이 상세하게 적어서 비교 분석하면 어떤 공통적인 단점이 명백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컨대 주정뱅이 집안에 주정뱅이 후손이 나고, 선조가 이혼을 하면 후손도 많이 이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이 이론이 옳다고 믿거나, 뭔가 석연찮은 것 같기는 한데 현실 상황은 그러니 곤혹스러워 합니다.

와그너, 히키, 이윤호 교수의 이론과 저서에 대해선 이미 반발 논문, 서적 등이 많이 발간되었습니다. 그들의 결정적 잘못은 자기들 이론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 구절들이 자의적으로 선택된 데다, 그 해석마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학술적 혹은 구체적 측면이 궁금하시다면 인터넷에서 서취하면 관련 정보와 자료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가장 원론적인 측면에서만 그 잘못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묶을 존재는 없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1:17)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4,25)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므로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물이 다른 것에 기원을 두고 또 상호 관련을 맺지만 하나님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만은 그 어떤 것에도 부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역사가 당신께서 정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특정 규칙에 의해 이뤄진다는 뜻이 조금이라도 내포된 어떠한 진술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운행할 수 있는(다른 말로 자존하는) 사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계에 사탄의 저주가 흐른다는 진술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미 결정된 어떤 법칙이, 그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사탄이 만든, 한 가문의 중요 인생사를 주도한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세계에, 동물까지 포함해서, 당신의 일정 법칙을 사전에 심어 놓았습니다. 천체나 지구의 운행, 기후, 환경 등은 자연법칙에 따르며, 동식물은 종족보존이라는 본능에 종속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아도, 엄밀하고도 실제적인 의미에선 피조세계 전부를 다 주관하시지만, 자연과 동식물은 존재하고 번식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게끔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코로 받은 생령으로서 그분과 항상 교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만은 미리 정해진 법칙인 본능에만 따르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묶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그 형상은 파괴되고 사단의 미혹하는 영에 지배를 받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오히려 사탄이 인간을 묶고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구속계획은 당신의 뜻과 일정에 따라 완벽하게 진해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과 특정인에게는 성령이 간섭하여 그분의 뜻을 좇을 수 있게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후에는 그 은혜의 길이 복음 안에서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신자의 심령에 성령이 내주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통제만 받는 존재로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신자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면 그 저주의 근원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3-4대 이상의 인생들을, 그것도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전혀 미치지 못하거나 막힌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그 저주하는 힘이 묶어버린다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 법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먹은 신 포도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이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우선 모든 영혼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비의 영혼이 속함같이 아들도 속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각자 일대일로 대면하시어 교제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께 벌을 받아도 오직 자기만의 잘못 때문이지, 아비의 죄 때문에 아들이 벌 받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어떤 사람이라도 평생에 지은 모든 죄는 한 번의 심판으로 끝이 납니다. 죽음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면 어떤 다른 벌이나 상도 추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쪽에서 못다 내린 벌이 남아서 또 다시 그 후손을 힘들게 하거나, 사탄이 그렇게 하도록 묵인하신다면 하나님의 품성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일입니다. 거기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것으로 이미 심판이 내려졌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예수를 믿는 순간 영생에 들어간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과거, 현재, 장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용서 받은 것입니다. 신자의 가계에마저 사탄의 저주가 흐른다면 이런 모든 성경의 진리가 부인되는 셈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영생과 영벌을 변경시키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에서 힘든 일만 생긴다고 반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그너가 십자가로 구원 받아야 할 죄와 후손이 당할 허물을 구분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가계에 몇 대에 걸쳐서 흐른다는 것은, 아무리 죄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 아닌 허물에 대한 현세적 고난이라고 해도, 그 저주를 당하는 자의 잘못된 행위나 결점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순전히 선조의 허물로 인해 후손이 억울하게 덤터기를 덮어쓰는 셈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생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은 완전히 배제 됩니다. 그분이 묵인만 한다 해도 당신의 품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밝혀 놓은 당신의 징벌과 심판의 원칙과도 상충됩니다.

성경에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7, 신5:9,10)는 말씀이 있긴 합니다. 아비의 악을 자손 3-4대까지 보응한다고 합니다. 이는 죄의 용서와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생각을 밝힌 것이지 문자적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만약 아비의 악을 후손 3,4대까지 보응하는 것이 옳으려면, 당연히 인자를 베푸는 것도 1,000대까지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조가 잘한 일로 후손 천대가 복을 받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세상에서조차 재벌 집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이 온갖 혜택을 누리는 일은 엄청난 비난을 받는데 하나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행하겠습니까?

한국이 반공(反共)을 국가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았을 때에 아비가 공산주의자면 자식의 사회 활동에 여러 제약을 가하는 연좌제(連坐制)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불합리한 전근대적 제도라 한국사회가 성숙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을 인간사에 적용하거나, 사단에 의해 적용되는 것을 묵인하시겠습니까?

죄의 형벌이 삼사 대까지 미치는 것은 순종의 축복이 천대까지 이른다는 것과 대조한 표현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빨리 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면 회개치 않은 죄에 대한 징벌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말하자면 3대 1,000의 비율) 은혜를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당신께 순종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그렇게 귀하고도 기쁘게 여길 뿐 아니라 신자 자신의 유익 및 복락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이지 않습니까?  

조상의 죄를 품은 다니엘의 기도

문제는 다니엘이 조상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그것도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를 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단9장) 분명히 열조(조상)가 지은 죄로 인해 자신들이 수욕을 받았기에 그에 대한 분노를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단9:7-10)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16절)

그러나 7-10 절을 자세히 보면 "쫓겨 간 그들"과 또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고 패역하였다고 합니다. 선조뿐 아니라 후손들도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는 16절에선 아예 "우리의 죄"를 "열조의 죄악"보다 앞에 내세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단지 조상의 죄로 인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죄악을 선조부터 대대로 지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그 세대도 동일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조상의 죄를 억울하게 덮어 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사50:1) 심판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의심 혹은 불평하는 자에 대하여 분명히 각자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크신 하나님께서 참고 참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징벌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다니엘이 속했던 세대의 죄만으로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에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인내의 한계가 차서 벌을 주어야 할 때가 마침 그 세대가 된 것 뿐입니다.

어떤 한 세대의 죄악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삼사 대에 걸쳐서 계속 벌만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에게도 그들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사백년을 참아주셨지 않습니까? 그것도 자기 백성은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각 세대의 죄를 일일이 그 세대에만 주어도 한 세대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삼사 대까지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지금껏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그분이 인류에게 회개의 기회를 더 오래, 더 많이 주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따라서 그 무엇보다 신자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각자가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마땅히 내려야 할 벌을 당신의 무한하신 긍휼 때문에 연기하고 있음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본심은 우리에게 죄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에서 구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가계에 저주가 흐르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 인간은 각 세대들마다 또 다른 죄를 짓고 그에 따른 징계들은, 선조의 죄를 참으셨다 해도 동일한 죄를 짓고 있기에, 항상 나타날 것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기도를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자기와 자기들 세대의 잘못부터 주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고 있는 환난의 원인을 영적으로 정확히 분별하였기에 백성을 대표하여 열조들이 미처 못 한 회개를 대신하면서 징계를 거두어 달라고 용서를 구하는 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시내 산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쳐가며 기도한 모세와 동일한 심정인 것입니다.

DNA와 결혼

죄를 지으면 삼사 대에 이어서 벌주겠다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 오해할만한 말씀을 십계명을 주시면서 덧붙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십계명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작 주목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2,5-7)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아들과 손자를 하나님 말씀으로, 당시로선 율법으로 잘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온 이유입니다. 각 가계마다 부모가 신앙과 도덕의 훌륭한 본을 보이는 가운데 그 천성과 교육과 환경이 아주 잘 조화를 이룬 결과일 뿐입니다.

시쳇말로 의사 집안에 의사 나오고 사기꾼 아들이 사기꾼 되는 것이 가계에 축복이나 저주가 흐르고 그것을 이어가거나 끊는 일을 안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바 대로 된 것입니다. 교육과 환경에 따른 후천적 결과일 뿐입니다.

물론 가계마다 타고난 천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특유의 허물이 실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인범 아버지에 살인범 아들이 생겨도 아비가 아들에게 살인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네 만은 바로 살라는 훈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았을 것입니다.

설령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기질적으로 포악한 면을 타고 나고 또 살아가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긴 했어도 아들이 스스로 살인하지 않고 선하게 살면 됩니다. 살인범이 된 것은 전적으로 아들의 죄이자 책임입니다. 성경이 오직 각 자의 죄로만 벌을 받는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우환이라도 일차적으로 본인과 당사자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업에 실패한 것은 담력, 지혜, 자금, 계획 등에 착오가 있었고, 사기를 당한 것은 정보와 주의력의 부족이었고, 질병은 건강관리를 못한 때문입니다.

거기다 천성은 기계적으로 똑같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한 형제들 중에서도 서로 기질과 성격이 다릅니다. 사이코패스의 아들이라도 교육과 환경에 따라 천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났다는 것은 분명 특정 분야에서 죄악과 사탄의 시험에 잘 넘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올바른 (신앙)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유별나게 나쁜 천성이 있다 해도 서로 다른 천성을 가진 남녀 간의 대를 이어가는 결혼을 통해 점차 순화되어질 수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에서부터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 믿는 자끼리 결혼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도 가계의 우월한 특성을 유지하도록 열성 대신에 우성이 유전되는 법칙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항은 신앙교육에 헌신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어떤 믿음이 좋은 선조가 가문의 저주를 끊어서 후손 천대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약속은 아들과 손자를 철두철미 십계명으로 양육할 때만 유효하다고 성경이 분명히 밝혀 놓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수명으로 따지면 믿음의 사람이 자기 가문 안에서 영향을 끼치는 한계는 삼사 대(손자 내지 증손자)까지 뿐입니다. 아주 장수하여 오대(고손자)까지 볼 수 있는 자도 있지만 극히 드물고 또 그 정도 되면 이미 현실적으로 믿음의 본을 보이거나 신앙 교육을 할 처지를 넘어섭니다.

성경이(아니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갚는다는 말씀의 진짜 의미입니다. 한 인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대수 안에서 본을 잘 보이고 신앙 교육을 철저히 시키면 하나님의 축복은 천대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삼사대의 마지막 후손은 그 다음 삼사대 후손의 선조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 표본적인 예로 창세기에 족장 스토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계의 저주를 끊는 것 같은 주술적 측면이 아닙니다. 자식들을 믿음 안에서 바로 양육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가계의 영적 지도를 그려서 자기 가문의유전적, 기질적, 사회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항들을  앎으로써 교육과 환경을 바로 잡는 데에 응용해야지 혹시라도 허물을 저주라고 간주하면 하나님조차 사단에게 묶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모르거나 믿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니엘처럼 자신의 죄부터 회개하고 잘못을 고쳐나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미 심판이 끝난 선조의 죄까지 용서 받을 수는 결코 없으며, 또 후대의 축복까지 대신 책임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자녀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키워서 그 자녀 스스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요컨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자식이 결코 이가 시지 않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왜 오직 예수인가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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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적 자원 파고들기
(Digging into Our Spiritual Resources)

 

어떤 사람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

우리를 성나게 하며,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를 거부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거센 항의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분노일 수도, 우울함일 수도,

복수심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자해하려는 충동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수 있으며,

또는 자살처럼 자기를 극복하고 싶은

기분에 빠져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반응은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으나, 결코 우리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나긴 밤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행동한 것들에 대응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했으며 어떤 행동을 취했나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 자원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우리 내부에 있는 중심부,

즉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해칠 필요가 없는

또한 우리가 자유롭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중심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성경의 올바른 사용(존 칼빈)

(딤후 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검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마귀는 우리를 속이고 죄악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면서 끊임없이 도전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복종해야 할만큼 말씀에서 얻는 유익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씀을 존중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반박을 받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므로 수치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을 의심케 하려는 몽상가들이 모든 세대에 걸쳐 항상 있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모든 것은 그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한 험담을 합니다.

 

우리가 율법과 예언서와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와 복음 속에서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변명하지 못하도록 사도 바울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가 율법과 예언서 안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영속성과 불멸성을 지닌 성경

또한 그는 누구도 작 마음대로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부분적으로만 복종하지 않도록 모든 성경 말씀에는 존엄성이 있다는 사실과 그 모두가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기분에 맞추어 성경 말씀을 고르거나 발췌해서는 안 되고 전체를 예외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한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성경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 때 쓰고 있던 말씀이나 다른 사도나 전도자들이 쓴 말씀을 의미하지 않고 구약 성경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예언서가 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보존되고 남아야 할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제쳐놓고서 그것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무시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회당이나 주막에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나 예언서가 필요 없다”라는 평범한 속담을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터키 사람들에게서처럼 그들 가운데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제동을 가하면서 만약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복종심을 증명하려면 율법과 예언서가 우리의 생활을 다스려야 한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우리의 생활이 그것들에 의해서 규제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 말씀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고 또한 변화시킬 수 없는 영속적이고 불멸의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 동안만 유용하도록 일시적 교리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진리는 오늘날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만약 그 권위가 약해질 우려에 부딪친다면 차라리 이 세상의 멸망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의 뜻은 우리가 자신을 성경에 의하여 다스리도록 힘을 써야 하고 지혜를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를 선택할 재량을 주시지 않으시며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여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주는 절대적 유익

자! 여기에 제시된 두 가지 점을 주의해서 살펴봅시다. 그는 먼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고 했으며 그리고 “유익하다”라는 말을 첨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매우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할 때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제하려고 감히 망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움을 벌이고 성경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성경이 만들어졌습니까? 성경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 안에 세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항자가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에 굴복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이렇게 첨가했습니다. 더욱이 경의를 표함으로써 하나님께 돌릴 경외심 이외에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무익한 일로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 성경의 내용 중에서 선하지 않거나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고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거저 주시는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권능이 성경 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성경을 찬양합니다. 그러한 후에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출하시고 목표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거기에서 유익을 얻겠다는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우리가 시인하지 않는 한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합시다. 우리가 모세나 어떤 선지자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이 유한한 한 인간의 족적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를 불태우는 하나님의 영이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비로소 성경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그가 말하는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가면과 덮개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속임을 당하고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속임을 당하고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된 교리의 독이 금제 컵에 담기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이 귀한 슬로건 밑에 숨겨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견고히 보증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사단의 환상이나 사람들이 꾸며낸 동화가 아니라는 사실과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점과 하나님께서 그 저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선하심에 경의를 표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를 집어넣고 밀봉하시며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를 무지한 상태로 그냥 두시므로 그들은 어차피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한 말들을 취합해 보면 하나님의 교회 그 자체에 어떤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어떤 교리를 인정하려면 그 교리는 인간의 권위나 인간의 지혜에서 따온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눈여겨볼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검증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법률과 규례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의 왕이십니다.

 

말을 시키신 분은 하나님

우리의 영혼이 우연히 인도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형식적인 가장을 잘 할지라도 그것은 위장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성경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세가 탁월한 사람이었다거나 이사야가 대단히 웅변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인간적인 명성을 높여 줄 만한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혀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기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말을 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으로 즉 그들에게 맡긴 재물을 감독하는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잘 지켜졌다면 인간은 지금 천주교도들이 처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모두 인간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는 위선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들이 만든 의식을 지킵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경에만 의지하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의 권위를 배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우뚝 솟은 탁월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회의 길을 택할 때는 우리를 보내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기쁜 소식을 가졌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그가 무모하게 나서거나 자기가 만든 이론으로 꿰맞춘다는 식의 인상을 주지 말고 순수한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인하여 존귀히 여김을 받도록 하나님의 교훈이 사람들을 교화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유익과 구원을 싫다하는 자 있는가

사람이 만든 교리가 여기 이렇게 땅바닥에 버려졌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러한 일이 다시는 허용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것을 추방합시다. 복음의 단순성을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유념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것은 꽉 붙잡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양심을 묶어서 그들 멋대로 신앙의 신조를 만들지 못하게 합시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모든 성경은 유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이 유익하다면 그것을 공부하는 데 전념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유익과 구원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화가 있을 찌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의견과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교리 즉 성경의 전 내용에 기꺼이 복종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설명할 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교훈에 의해서 유익이 되고 그것이 주는 그르침을 받아들이도록 제 주위를 항상 성경 말씀으로 에워싸야 합니다. 만약 제게 이런 애정이 없어서 저의 설명을 듣는 사람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면 저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어리석은 공론을 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하여 설교를 들으려고 오는 사람은 복음을 더럽히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본래의 용도에서 어긋나게 사용하여 성경을 통해서 유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 속에서 문제점만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오염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만을 구하신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가장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성경을 오염시켜 성경이 우리의 환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진리에 의한 교육만이 확실성 알게 해

성경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도록 만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아 우리는 가르침을 받으려 와야 합니다. 이제 이 유익이라는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알아보는 일이 우리들 각자에게 남아 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 말 한 마디만 선언하였다면 그 의미는 다소 막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의 뜻을 오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이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성경의 용도를 한 가지로만 표현하거나 사용치 않게 하기 위하여 교훈에 대해서 말할 때에 책망하기 바르게 하기 그리고 교육하기라는 말을 첨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냉담하여 그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대한의 열성을 내도록 격려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 안에는 죽은 교훈이 아닌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도록 분발시키는 책망과 바르게 함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악한 자를 교화하는 말씀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교훈에 유익하다”고 말한 후에 책망하기, 바르게 하기, 등을 첨가했습니다. 왜 교훈을 먼저 썼을까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면 권면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가르쳐진 것은 선하고 참되고 옳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교훈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진리 안에서 교육되어야 하며 전적으로 진리 안에서 결심을 해야 하고 진리로 교훈을 받아 진리의 확실성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훈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어서 진지하고 의롭게 하나님을 닮아 가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하늘나라의 생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약한 감정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야 합니다.

복음의 교리를 몇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전적으로 믿는 것이며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교훈 통해 과거의 참상을 보게 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찾아가야겠다는 담대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언자로 임명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는 죄와 악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법과 순결한 마음과 영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내포되어 있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이 책망하기라고 말했을 때의 그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 뜻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싶으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설명될 때에 믿는 자가 교화될 뿐만 아니라 만약 믿지 않는 자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교훈을 듣게 되면 그는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비록 그 불신자가 어둠에 휩싸여 있기 자기의 무지에 만족해 왔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충분히 감화시켜서 그가 살아 왔던 과거의 참상과 죄악을 보게 만드십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한심스러운 그의 처지를 보게 될 때 그에게 실제로 하늘 문이 열려 있으며 사람은 이 지구상의 삶뿐만 아닐 더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지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불신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그것을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비밀한 말씀이 묻혀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주의하지 않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되고 우리 영혼의 구원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마음 소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우리의 전 생활을 돌아보고 우리의 부정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준비된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들 자신의 재판관이 됩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책망이라는 단어를 써서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축복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그것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우리들 자신을 엄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석 앞으로 출두하라고 소환하시는 것처럼 하나님 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한 악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공기를 들여 마실 때 우리는 옳은 길에서 벗겨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종하는 법을 깨닫게 하는 성격

그렇게 책망 받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므로 바르게 함이 똑같은 방법으로 첨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씻겨져 있어야하며 우리의 죄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죄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분리시키기 위해 우리는 강력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정죄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느낌을 갖게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강제로 그러한 경지에 끌리어 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맛있는 음식으로 취해 있고 또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이나 공상에 빠져 있어 그것에 속고 있다면 바르게 하는 일을 즉각적이고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개조하시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해 달라고 의탁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행동이 마땅치 않고 옳지 않은 것을 볼 때 그냥 “왜 그렇게 했니?”라고 묻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여 “한심한 녀석아! 네가 나에게 이렇게 보답하라고 너를 기르고 양육했겠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점잖게 대해 주었는데 나에게 이런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 너에게 어울리니? 너는 마땅히 교수형 집행자의 손에 넘겨져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도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불효자들이 그들의 아비들에게 반항했던 것보다 하나님께 더 반항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실 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속에는 다루기 힘든 어떤 열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열정을 우리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필요하면 뜨겁게 책망하라

자! 이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설명할 때에 성경이 단순한 역사에 불과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성경에 관해서 한 말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선하고 충성스러운 목자의 임무는 성경을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힘과 권능을 나타내도록 열성과 날카로움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교회의 목자는 성가실 정도로 열성적이어야 하며 무엇이 선한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그들을 책망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겸손하고 온유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책망함에는 아무튼 바르게 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라도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이러한 종류의 것은 취급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책망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차라리 하나님 의외의 다른 주인을 찾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기꺼이 받을 것입니다.

바르게 하려고 위협을 가하면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온화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사로잡히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악마의 학교에 보냅시다. 악마는 아첨을 할 것입니다. 네! 그리고 그들을 멸망시켜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들은 그 교훈을 받아들인 후에 겸손해져야 하며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구도 실수를 할 때면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모든 죄악에서 깨끗해지기 위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와 악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침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제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함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첨가했습니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할 때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배제하였으며 우리가 사람이 도입한 제도를 지키는 것으로는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천주교도들이 같은 인간이 그들에게 과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킴으로써 그들이 한 모든 노력이 어떻게 허사가 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의로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그렇게 명령했다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있는 내용 이외에는 종교도 교리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네 그렇습니다. 성경 안에만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도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따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삶이 매우 은혜롭기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인간의 일에 뿌리를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과해 주신 것만 따릅시다.
만약 우리의 삶을 성경에 있는 가르침에 따라 규제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람의 교훈은 실패하며 하나님께서 증오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의로 교육하기”라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둡시다.
다시 그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는 법과 말을 잘하고 민감하게 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만약 인간이 복음을 통해서 유익을 얻는지 못 얻는지를 알아보고 싶다면 그의 생활을 주목해 봅시다. 사람들은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할 줄도 알고 나름대로 경건한 생활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유익을 얻는 법’도 배워야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고문으로 모셔서 말씀에 의해 떳떳이 행하고 또 우리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같이 할 때 하나님의 사람은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의로움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인간의 창안물들은 모두 사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증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의향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것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규례 안에서 억제하지 못하는 그런 모호한 용기가 있음을 보고 그 병폐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있으면 우리의 생활은 올바르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덕과 거룩함이 있다고 마음껏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늘에 계시는 재판관 앞에 나오게 되면 모든 것이 겨와 같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제도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와 섞어버리면 모든 것을 해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든 것은 무엇이나 아무 값어치가 없고 썩어빠진 것뿐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됩니다.

천주교도들은 어떠한 성자를 위해 저녁에 금식하는 것,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 사순절을 지키는 것, 성자에게 시중드는 것, 이 제단 저 제단을 찾아다니는 것. 이 교회 저 교회를 방문하는 것, 이사에 참석하는 것, 순례 여행을 하는 것 등을 선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법률과 규정을 만들었으나 그것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대 재판관 앞에 출두하여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명세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유익을 얻으면 모든 선한 일을 한 데 넉넉히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도들이 만들어낸 전통과 제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파묻히는 것 같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만든 전통의 백분의 일만큼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함을 측정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에 더 첨가한 것은 무엇이나 배격하며 그것을 인정하시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제정한 법규를 아무 쓸모 없이 만듭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배가시켜 줄뿐입니다.

괴물이 아닌 자 라면 진리를 확신한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그렇게도 많은 공정함이 있는데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율법이나 예언서에 대해 일점일획도 가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복음이 전에 가르쳐 준 것을 더 분명하게 해 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선조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내리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문제를 더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과 예언서에 바르게 함과 온전한 의로움이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복음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성경 말씀 즉 신약과 구약에는 이와 같은 일치함이 있습니다. 율법에 내포되어 있는 교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친근하게 가르쳐졌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태초부터 명령된 것에 국한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아주 분명한 말로 알려 주셨고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 하셨기 때문에 사악한 괴물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진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유익을 얻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상에 따라 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경건하게 생활하는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생활을 규정지을 확실한 규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성경 말씀을 향하게 합시다. 그러면 하늘에 계시는 재판관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모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하셔서 당신의 뜻을 쉬운 방법으로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조금이라고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Grace


♥ 들어가며

기독교 부패와 타락은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성경 계첼� 대한 오해가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을 교회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기독교적인 계시의 올바른 정의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Ⅰ. 계시의 어원(語源)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갈라’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벗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창35:7). 헬라어로는 ‘아포칼뤂시스’는 ‘폭로하다’,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파네루운’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뚜껑을 연다’고 하는 뜻을 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계시란 가려지고 덮어져서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것을 (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어 보이시는 섭리를 의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하신 영광과 능력은 물론, 그의 본질과 속성 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시는 사역을 총괄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2. 계시의 정의(定義)

묵시(계1:1)라고도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신29:29;마11:27;롬16:25).

 

3. 계시의 개념(槪念)

인간이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방법뿐이다. 이 방법 밖에는 달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revelation)라고 말한다.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된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 능력, 속성, 성품, 의지, 뜻, 목적 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그래서 계시에 근거한 신학을 ‘계시신학’(啓示神學)이라 하고, 그리스도교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 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 계시(啓示)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 내용(what)에 관한 것이고,

영감(靈感)은 그 내용이 전달된 방법(how)을 말하며,

조명(照明)은 그것이 왜 전달되었는가 하는 이유(why)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계시의 필요성(必要性)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보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알 수가 없다(욥11:7,8).

2)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한 부패성으로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다(엡4:18)

 

5. 계시의 구분(區分)

계시의 방법에 따라 '자연계시'와 '초자연 계시'로, 계시의 성격과 대상에 따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한다.

1) 방법에 의한 구분

(1) 자연계시(自然啓示) - 일반적인 자연현상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

(2) 초자연계시(超自然啓示) -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

2) 성격, 대상에 의한 구분

(1) 일반계시(一般啓示) - 창조에 기초하여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주시는 계시

(2) 특별계시(特別啓示) -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는 계시

 

*일반적으로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로, 특별계시는 초자연 계시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자연계시와 일반계시, 그리고 초자연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에도 자연적인 요소와 함께 초자연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으며, 특별계시에도 초자연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6. 일반계시(一般啓示, general revelation)

일반계시는 창조에 기초하여(시19:1-6;사40:12,26;행14:17;시8:1;시104:24)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주시는 계시로서(마5:45;행14:17), 자연법칙(롬1:20)과 인간의 역사(시9:16;단4:25)와 인간의 양심(롬2:15)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택한 자나 택하지 않는 자의 구별없이 모든 인류에게 계시를 하셨다는 뜻이다. 자연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하며, 그 성격상 ‘비언어적 계시’(non-verb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창세로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1) 일반계시의 목적(目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2) 일반계시의 방법(方法)

(1)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지혜, 선, 능력들을 보여 주고 있다(시19:1;롬1:20).

(2)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나타내 준다(전9:1;롬11:36).

(3)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이 없다함을 핑계치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3) 일반계시의 특징(特徵)

(1)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2) 신자와 불신자의 접촉의 장을 제공한다.

(3) 특별계시의 보조역할을 한다.

4) 일반계시의 불충분성(不充分性)

(1)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죄의 결과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종교를 위한 충분한 기초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구원의 방도인 그리스도를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마11:27;요14:6,17:3;행4:12).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권능, 섭리 등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지 않는다.

 

7. 특별계시((特別啓示, Special revelation)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격에 의해 행하신 특별한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마11:27;엡3:3,5;벧전1:12).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게 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특별계시가 요청되게 되었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완성은 성경이다(롬16:25,26). 초자연적 방식을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必要性)

인간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일반계시를 통하여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수행할 특별한 신적사역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일반계시의 모호한 점을 해석하거나 인간의 잘못된 견해를 정정한다.

(2)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를 인간에게 마련해 준다.

(3) 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의 영적상태를 전적으로 변화시킨다.

2) 특별계시의 목적(目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3) 특별계시의 방법(方法)

(1) 하나님의 현현(顯現, theophany)

① 그룹들 사이에 나타나셨다(시80:1,99:1).

② 불, 연기, 구름 속에 나타나셨다(창15:17;출3:2,33:9;시78:14,99:7).

③ 폭풍 속에 나타나셨다(욥38:1;시18:10-16).

④ 세미한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다(왕상19:12).

⑤ 천사를 통하여 나타나셨다(단8:13,9:11,10:15;행7:35;갈3:9).

⑥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창2:16,3:8-19,4:6-15,6:13,32:26;출19:9,10;신5:4,5).

⑦ 그리스도 안에서 신격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임재하셨다(골1:19,2:9).

(2) 하나님의 예언(豫言, divine word)

① 선지자를 통하여 음성으로 들려주셨다(창2:16;출19:9;삼상3:4).

② 제비뽑기나 우림과 둠밈으로 뜻을 전하셨다(민27:1;신33:8;삼상10:21;느11:1).

③ 꿈을 통하여 전하셨다(창40:5;민12:5-7;삼상28:6;삿7:13;욜2:28).

④ 환상을 통하여 들려 주셨다(단1:17;암7:1-9:15).

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들려주셨다(4복음서).

(3) 하나님의 이적(異蹟, divine work)

① 이적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는 방편인 것이다(막16:20;행14:3).

② 모든 이적 중에서 최대의 이적은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성육신의 사건이다(사7:14;마1:23).

 

4) 특별계시의 특징(特徵)

(1) 점진성(漸進性) : 처음부터 완전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보다 명확하게 주어져 왔다. 내용면에서는 최초의 원시 복음에서부터 모세 언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방법 면에서는 처음에는 신언이나 이적, 혹은 선지자를 통하였으나 결국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을 통함으로서(히1:1-2) 선민들이 충족한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사실성(事實性) : 특별계시는 전적으로 말씀과 교리로만 된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율법과 예언서,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만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구약의 의식적 예배에서, 현현과 이적에서, 또는 예수님 생애의 구속적 사실에서도 계시하셨다(히4:12).

(3) 목적성(目的性) : 특별계시는 다만, 하나님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데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구원을 위하신 하나님의 계획,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구원의 길, 변화하시며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감화, 그리고 영적인 삶에 참여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등, 이 여러 사실에 관한 특수한 지식을 인간에게 드러내 준다.

 

8. 특별계시와 성경(聖經)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와 언어를 성문화한 특별계시의 최종형태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며, 성경 기록과 기록된 말씀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계시행위와 언어이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특별계시의 책이며,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 특별계시와 성경의 같은 점

(1)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다.

(2)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다.

(3)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다.

2) 특별계시와 성경의 다른 점

(1) 특별계시는 전달 사건이나 성경은 전달 사건의 내용이나 상황의 기록이다.

(2) 특별계시는 그것의 기록인 성경보다 먼저 주어졌다.

(3) 특별 계시의 일부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계시는 구속사 전개의 각 시점에서 주어진 계시이고, 성경은 그것의 문자적 보존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특별계시이나 특별계시 전체는 성경이 아니다.

 

9.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비교(比較)

< 구분 >              < 일반계시 >                   < 특별계시 >

1) 계시의 시기         천지창조 ~ 심판                      아담 타락 ~ 사도 요한

2) 계시의 대상         모든 인류                               택한 자

3) 계시의 목적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

4) 계시의 방법         자연적 섭리                            언약적 섭리(성경)

5) 계시의 성질        명확하지 못함                         명확함

6) 계시의 진행       계속 주어짐                             완성되어 종결됨

7) 계시의 지식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요 구속주의 하나님

8) 계시의 방편        정죄하기에 충분함                  구원하기에 충분함

 

일반계시는 특별계시에 의해 완성되고,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그것의 계시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

 

나가며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을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만이 기독교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특별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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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바꾼 돼지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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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동요를 극복하기

(Overcoming Our Mood Swings)

 

 

우리는 감정의 피동적인 희생물이라는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아" 또는

 "오늘은 영 기분이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분에 맞추어 살도록

요구해야만 할까요?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잘 훈련된 영적인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감정을

점차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으로

행동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느끼'거나, 또는 일이 지겹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아침에 일어나서

복음서를 읽고 시편을 읊고 기도하며,

그리고 새날을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우리를 사로잡는 우리의 감정은 그 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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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善, Bonum, Good)

 

1) 선의 어원(語原)

성경에서 선(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tob)는 ‘아름다운, 옳은, 좋은’ 등의 뜻을 의미하여, 지각(知覺)에 관련되어 씌어졌는데 '좋았더라'(창1:4,10,12,18,21,25,31)가 그 사례이다. 히브리어 ‘토브’(tob)에서 파생된 헬라어는 ‘아가도스’(agados)와 ‘칼로스’(kalos)가 사용되었는데, ‘아가도스’(agados)는 도덕적으로도 선한 것을 의미하고(롬8:28), ‘칼로스’(kalos) 도덕적으로도 선하고, 외형적으로 아름답기도 한 것을 의미한다(막14:6).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에서 쓰인 '선'(크레스토테스)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심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은 결코 선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성경적 선의 개념은 인간 중심적 선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사전적 정의(定義)

착하고 도리에 맞는 것.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모든 것의 행위 및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그리스어 agathon, 라틴어 bonum).

 

3) 철학적 이해(理解)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는 선이란 한 존재의 존재 목적 달성에 이로운 것을 말한다. 그 이로운 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윤리적인 질서가 될 수도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1)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선 = 진리(眞)

(2) 윤리적(倫理的) 선 = 도덕적으로 착한 선(善)

(3) 심미적(審美的) 선 = 아름다움(美)

이 세 가지 선은 존재(有) 안에 포함되어 관찰된다. '선은 바람직하고 좋은 어떤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지, 그것이 없으면 좋음 자체도 없는 것이다. 참된 것, 아름다운 것, 착한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선이다.

 

4) 성경적 접근(接近)

악의 반대말. ‘의’와 동의어(창4:7;신6:18;막10:18;살전5:15). 선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사람은 결코 그 스스로는 선할 수 없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은 없다(막10:18).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하나님의 선의 표적으로 보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이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사하신다는 것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선한 일이란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게 적합한 행위이다(막12:34;마5:16,25:34-).

 

5) 선의 기준(基準)

① 하나님이 선(善)이다."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②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선(善)이다."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딤전4:4).

③ 하나님의 은사들은 선(善)이다."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④ 하나님의 말씀은 선(善)이다."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즉,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옳다’ 또는 ‘착하다’를 의미하는 단순한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며,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을 선하다고 말한다.“.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13:21).

 

6) 선의 가치(價値)

선은 객관적으로 선한 것과 주관적으로 선한 것이 있다. 나에게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도 좋은 것이어야 객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선은 그것을 올바르고 좋은 것으로 체험하는 자의 인격 안에 받아들여진다. 선은 인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때 선의 진가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은 인격적인 체험을 통해 행복으로 나타나게 된다.

 

2. 악(惡, malum, evil)

 

1) 사전적 정의(定義)

도리에 어긋나는 못되고 나쁜 것..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대상·행동·사태를 가리키며, 긍정적인 가치로서의 선(善)에 반대되는 것이다(그리스어 kakon, 라틴어 malum). 그리스어에서 악을 뜻하는 'Kakos'나 'Poneros'라는 말은 인간이 책임져야 할 악한 행위라는 뜻도 있지만, 인간의 책임을 뛰어넘는 파괴적인 세력이라는 뜻을 갖는다.

라틴 말의 'malum', 히브리 말의 'ra'라는 말은 '악'을 뜻하는데, 이 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아니하는 일, 우상 숭배,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하는 일 등을 뜻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고통과 슬픔,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세력을 뜻한다.

 

2) 철학적 이해(理解)

철학적으로 악은 윤리악과 자연악, 형이상학적 악으로 나눈다.

(1) 윤리악(倫理惡) :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의지나 나쁜 행위를 말한다.

(2) 자연악(自然惡) : 인간에게 해로운 병, 천재지변, 나쁜 제도나 나쁜 풍속, 나쁜 사회 현상을 말한다.

(3) 형이상학적 악 : 인간이 자기 존재의 유지와 완성을 방해하는 불행, 슬픔, 고통, 죽음, 병, 추함 등을 말한다.

 

3) 성경적 접근(接近)

결과에서 판단하여, 화나 해를 낳는 행위(창13:13;렘44:9;요삼1:11;딤전6:10). 자기에게 해를 초래하는 행위가 악인 동시에, 타인에게 해를 주는 행위도 악이라고 말해진다(삼하13:16).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라는 말은 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대하12:14;욥1;1).

 

4) 악의 기원(起源)

창세의 에덴동산의 사건을 통해 악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창2:8-3:19). 즉 악의 기원을 하나님이나 사탄 또는 인간에게 둘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입장 중에 어느 하나를 취한다고 해도 논리적인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첫째, 하나님에게 둘 경우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타락시키셨고, 그 후에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은 마치 하나님이 먼저 병을 주고 그 다음에 약을 주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와 악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또 하나님은 선한 것만을 창조했다. 그가 창조한 것은 그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창1:1-31)

둘째, 사탄에게 둘 경우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게 된다. 사탄이 에덴동산에 침입하고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하나님은 결코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되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에게 둘 경우에,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게 된다.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그러나 미리 타락할 것을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시니까 결과적으로 인간 타락의 책임은 하나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계에 내재하는 악(惡)의 사실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창조주에게서 악(惡)의 기원을 찾을 수는 없다. 한편 창조주에 대립하는 악신(惡神)에게서도(신은 유일하므로),

조악한 질료(質料)에서도(신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악(惡)의 기원을 찾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악(惡)을 존재의 결핍(privation) 또는 결여(absence of being)로 보았다.

따라서 '악(惡)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있어야 할 선(善)의 결핍'으로 정의했다.

 

3. 선악과 규례(規例)

1)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이다. 선악과는 먹지 말고(창2:17), 심지어 만지지도 말라(창3:3)고 명령하신 것은, 주(하나님의 명령). 종(사람의 복종)의 관계를 설정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하게 구현하시기 위함이다. 창조세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언약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 언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창17:9).

3)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계4:11).

4) 하나님의 참 자녀를 얻기 위함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다(창3;22).

하나님께서는 상대성(선과 악, 행복과 불행 등)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이다(신30:20;요3:36;행5:29).

5) 인간의 성품을 선하게 갖추시기 위함이다. 인간이 선과 악을 알되, 악을 이기고 선을 따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만이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명령을 수행할 자격과 능력이 생기는 것이며(창2:28),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천지 만물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창2:28).

 

하나님의 시험은 항상 선한 목적 즉 참 자녀를 만들기 위한 연단을 목적한다. 인간을 시험하여 자유의지를 연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선이시므로 사망과 저주를 불러들이는 악을 스스로 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도록 허용하셨다(욥1:12,2:6).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란 존재가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잠정적으로 필요한 악의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시험을 위해 쓰임 받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악이 갖는 제한성을 발견한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사망을 스스로 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여 주었다.

 

4. 선(善)과 악(惡)의 관계

선(善)을 지향해야 할 의지가 그것을 지향하지 않고 질서를 깨뜨리는 일, 그것은 곧 '의지의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죄(罪)라고 한다.

바로 이 죄를 회개하는 것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일이다. 이 죄(罪)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악(惡)에 대해 벌을 받게 되므로, 기독교에서는 악(惡)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된다.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근본은 계약(언약)인데서, 계약을 강화하는 행위가 선(善)이고, 계약관계를 해치든가, 위태롭게 하는 행위는 악(惡)이다. 그러나 악(惡)은 밖으로 드러난 말이나 행위보다도, 그 근원인 마음의 생각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인간 그것에 대해 말해진다(눅6:43-45).

형식적으로 정의하면 선(善)과 악(惡)의 구별은 모든 인간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환경, 사회구조, 정신적 능력 등에 따라 선(善)과 악(惡)의 판단기준이 달라진다.

 

5. 성경에서 밝힌 선악(善惡)에 대한 진리

 

1) 하나님은 선악을 알고 계신다(창2:9,17,3:5,22;잠15:3)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2) 하나님은 선악을 초월하신 분이다(약1:13).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3) 선과 악은 공존한다(롬7:21;전7:20).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4) 택함 받은 자는 선악을 분변한다(히5:14;벧전3:11,17;롬12:9,21;삼하14:17;왕상3:9)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5) 선과 악은 마음에 쌓은 것에 따라 달리 드러난다(마12:35;눅6:45;잠11:27).

[마 12:공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잠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6) 선보다 악을 행하기가 쉽다(롬7:19;렘4:22,23).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렘 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렘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7) 하나님께 속한 자는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한다(습3:13;요삼1:11).

[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습 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요삼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8)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한다(잠13:6'살전5:22).

[잠 13:6] 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하느니라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잠 28:5]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악의 기원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는 분명 악이 존재한다. 창조주이시고 주도권자인 하나님은 현실에 존재하는 작은 악조차도 살피고 계신다. 종말의 날에 하나님은 악의 뿌리까지 전부 제거하실 것이다.

 

6. 현재적인 악의 극복(克復)

아무리 착하게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고 고난을 당하는데,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허무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 의문의 해답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볼 수 있습니다.

악은 심판 때까지 하나님을 훼방하며 인간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의 몸부림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서 악을 이기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힘이며 능력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12:9)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은사-Gifts
 
주님께서 주신 은사들이 
우리의 게으름으로
소멸되지 않도록
사용하자. 

Let us use the gifts of God 
lest they be extinguished 
by our slothfulness. 
- John Calvin 
 
칼빈은 은사 중단론자가 아니다
칼빈 선생은 거짓 영,
성령을 가장한 미혹의 영을 
경계하려 했을 뿐이다 -별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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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들[II]

 

성경적인 번영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총체적인 부흥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이기적인 욕망으로 부자가 될 것을 열망하라는 것도, 부의 축적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도, 부의 축적을 위해 하나님과 흥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번영과 형통을 이야기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부를 마음껏 축적하고 흥청망청 마음껏 소비하는 삶을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이기적인 가르침.

내세 천국보다는 지상적인 현세의 물질형통에 만족하도록 부추기는 악한 가르침.

그리스도인들이 번영과 형통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협상과 흥정을 잘 해야 한다는 세속적인 가르침.

 

미국 이단연구 전문가인 행크 해네 그래프는 1989 24건의 사기건으로 판결을 받은 짐 베이커(Jim Baker), - 내가 믿기로, 그가 번영을 이야기하는 유명한 설교자였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복음적인 사역자는 아니었다. 그의 열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그 짐 베이커(Jim Baker)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함으로 번영신학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일침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체적으로 살핀 후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 말씀 전체를 살펴본다면, 부 혹은 물질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지상의 형통을 설교했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는 참회하는 어조로 고백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복의 증거를 새 차, , 좋은 직장 그리고 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부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표지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는 이런 충격적인 말을 전한다. “‘누가 즐거움과 진진한 물질, 새 집, 새 차, 그리고 재물 등등으로 가득 찬 삶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려는가?’로 강단이 전환되어야 할 때가 됐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베커가 내리는 결론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을 저버리고 지상적인 물질에 만족하는 태도를 거부하지 않을 때 슬퍼하신다.’”

[행크 해네 그래프, 바벨탑에 갇힌 복음-번영신학을 고발한다. 김성웅 옮김, (서울: 새물결풀러스, 2010) pp.375-376]

 

행크 해네 그래프가 이상과 같은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가르침을,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부를 마음껏 축적하고 마음껏 소비하는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이기적인 가르침과, 내세 천국보다는 지상적인 현세의 물질형통에 만족하도록 부추기는 악한 가르침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에 대한 가르침을 그가 생각하는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을 설교하는 사역자들 중에 그러한 식으로 설교하는 사역자가 그 누구란 말인가? 물론 개중에 그런 식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진리 자체를 부인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행크 해네 그래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은 부가 아니라 구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된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간직하신 것’(11:16)을 상속하게 하는 전체 과정의 한 예비단계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모든 언약-계약의 예표와 그림자들은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형통이 아니라 에덴동산이다.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21:2)은 곳이다. 그때까지 부하든 가난하든,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4:13)(행크 해네 그래프., Ibid., pp.377-379)

 

행크 해네 그래프는 이상과 같이 이야기하였지만, 과연 그 어떤 복음사역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통과 번영을 신앙의 최종 목적으로 이야기하였는지 궁금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번영이 아니라 장차 가야 할 내세의 천국임을 모르는 사람이 그 누구이겠는가?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그 누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을 고작 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번영으로 삼고 있겠는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고작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번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을까?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형통하고 번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형통과 번영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오히려 우습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실한 복음의 사역자들이 신앙 안에서의 형통을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켜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삶의 지표인 10계명과 제사법, 사회법, 안식년과 절기법을 주신 후에 이방인의 우상숭배를 금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

 

( 23:25-26)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댓가로 재정과 건강과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해가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말씀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해야 할 성소와 그것을 집전할 제사장들에 관한 것들을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 모든 것들을 다 갖춘 이스라엘이 드디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하였고 그 땅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진군하라 명하셨지만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이 불신앙의 말들을 내뱉었다.

 

( 13:31-33) [31]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백성들도 그 말에 동조하였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함께 불신앙의 말들을 내뱉었다.

 

( 14:1-4)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 14:28-35)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출애굽의 당세대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불신앙의 말과 태도로 하나님을 거역하였기에 광야로 밀려났으며, 불신앙의 세대가 다 죽기까지 40년의 광야생활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광야 40년 동안 불신앙의 세대가 다 죽고, 새로운 신앙의 세대로 교체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둔 상황이 되었다. 그 때 모세가 과거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정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한 말을 기록한 책이 신명기이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상기해 보자.

 

(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누려야 할 복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믿음의 선진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 사실이지만(11:16,40),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재물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갔던 것도, 또 재물과 상관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재정적인 부흥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 112:1-3)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시고 가난의 저주를 받고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위에서 가난하게 돌아가신 이유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재정적인 부요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말씀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부요의 복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이 과연 잘못된 가르침이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요하게 살아갈 권리와 자유가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번영신학에 대하여 혹평하는 자들의 말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재정적인 부요를 사리사욕을 위해 흥청망청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말도, 또 그렇게 살아가라는 말도 아닌 것이다. 재정적인 부요를 위하여 하나님과 재정적인 협상과 흥정을 할 수 있다는 말도, 또 그렇게 하라는 말도 아닌 것이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까닭에 하나님의 은혜로 부요하게 되었으니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살아가지 말고 기쁨으로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주는 삶을 살아감으로 재정적인 선순환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후 9:6-11)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딤전 6:9-10,17-19)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11:24-25)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 28:8,27) [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12:33-34)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너희 자신에게)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상의 말씀들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재정의 복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재정의 선순환이라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불우한 이웃에 대하여 눈을 감고 못본체 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필요이상의 지나친 개인적인 사치의 늪에 빠지지는 못할 것이다.

 

주님의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25:41-46)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기꾼 설교가로 사역하였던 짐 베이커(Jim Baker)와 같은 사람이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복음을 잘못이해하고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비슷한 언어들도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사기꾼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성경적인 참된 형통과 번영의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참된 복음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님을 알고,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복음에 대하여 함부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복음이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부를 마음껏 축적하고 흥청망청 마음껏 소비하는 삶을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이기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복음이란, 내세 천국보다는 지상적인 현세의 물질형통에 만족하도록 부추기는 악한 가르침도 아니다.

성경적인 형통과 번영의 복음이란, 그리스도인들이 번영과 형통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협상과 흥정을 잘 해야 한다는 세속적인 가르침도 아니다.

 

성경적인 번영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총체적인 부흥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 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6:9-10,17-19)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고후 9:6-11)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아멘.

 

 

번영신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들[I]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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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병천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 이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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