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 아타나시우스
1. 서 론
기독교의 대박해는 콘스탄틴 시대(니케아 시대)종식 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박해가 끝이 나고 평안의 시대가 교회 안에 주어졌을 때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리의 논쟁이었다.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었던 최대의 교리 논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성,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등의 문제는 주후 수세기 동안 초대 교회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것을 ‘삼위일체 논쟁’이라 한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러한 삼위일체 논쟁들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는 이러한 교리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가 참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리우스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니케아회의가 소집되었다. 따라서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를 연구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기타 여러 교리논쟁을 정리하는데 중요한 일이며 가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Ⅱ. 본 론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삼위일체 논쟁의 기원은 기독교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온 신학적 발전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속사도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 성부/성자/성령을 하나님으로고백.
②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폴리갑 - ‘예수 그리스도는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
변증가
①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신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함.
② 저스틴 -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종속설과 유사)
③ 데오필루스 - 삼위일체(Trinity:Trias).
④ 저스틴,타티안,아테나고라스 - 로고스를 삼위의 제2위로 인정.
교 부
①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 함
② 이레니우스 - 창조주가 성자이심을 고백하고 성자와 성부를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함.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모든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얻는 것이다.’
③ 터툴리안 - 삼위일체 교리의 윤곽을 제공.
삼위의 한 본성(one substans), 본질(nature), 그리고 삼위(three persons)의 개념을 도입.
성부, 성자, 성령을 연관시킴.
*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 - 단일신론
단일신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류로 아리우스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류
단일신론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 성부 고난설 Patripassianism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샤벨리안주의 Sabellianism
주장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오류들
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
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으로 봄.
② 성부고난설에서는 성자가 성육신하신 성부 자신이며, 따라서
성부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다고 주장함.
③ 시벨리안주의는 단일신론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성령의 다른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주장.
영향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
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 그리스도를 단순히 신성이 충만한
인간으로 봄.- 에비온파(Ebionites)
<영향>
에비온파 --> 데오도투스의 양자설 --> 사모사타의 바울 -->
2. 아리우스 생애와 사상
1) 생 애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연설을 잘했으며 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인 루시안(Lucian312)에게 배웠으며,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260-272)의 여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 서신 그리고『향연(饗宴,Thaleia)』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기독론을 가르쳤다.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한 뒤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귀한하여 니케아 신조에 형식적으로 동의함을 복직되었다.
2) 사 상
이미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시벨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발산된 형태, 또는 성부의 뜻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했었다. 이에 대하여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받아야 하는 강제력을 가진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아리우스는 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사모사타의 바울에게서 배웠다. 아리우스의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알렉산더 감독이 삼위일체신의 현현(顯現)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것이 사벨리우스설이라고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3) 아이우스의 교리체계
① 하나님의 특징은 단독과 영원이다.
② 하나님 안에 지혜와 말씀이 거하지만 이들은 위격체가 아니다.
③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한 독립된 실체를 만물 창조의
도구로 존재케 하셨다.
④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의 존재이며 실체와 본성에 있어 아버지와 다르다.
⑤ 아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고 소위 말씀과 지혜에 불과하다.
⑥ 하지만 이들은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다.(완전한 피조물)
⑦ 그리스도는 실제로 신체를 취하였으나 로고스가 영혼을 대신하므로 그
것은 영혼이 없는 몸이었다.
⑧ 기타 피조된 존재들 가운데서 성령은 제2의 독립된 실체로서 아들 곁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성령은 아들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이단적 사상이라는 반박을 받게 되었다.
3.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와 신학
1) 생 애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는 약 3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고 373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작성하는데 기여했고, 그의 여생을 그것을 옹호하는 데 바쳤다. 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소유한 그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적 신학자였다. 그는 수도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며, 에집트의 수도사들중에 그의 최대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학자와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253년에 사망한 오리겐과 354년에 출생한 어거스틴 사이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신 학
그의 신학과 신앙은 벧후1:4에 있는 말씀에 지배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간의 큰 차이점에 직면하게 된다.
서방 신학
서방신학의 중심된 문제는 죄의 제거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고, 우리는 그분 앞에 죄인으로 서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제거되지 않고는 다시는 그의 호의를 누릴 수 없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화육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동방 신학
인간의 타락의 문제였다. 창조의 머리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그의 창조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은 신성과 결합했고, 그 안에 인간의 타락된 사망은 아름다운 영생으로 변환되었다. “우리에게 신성을 주시기 위하여”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그는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이 아니면 구원은 없다.
아리우스는 완전한 신성도, 완전한 인성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는 전심 전력 그를 반대했다.
4.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사실 두 학파는 신학적 접근 방법이나 강조점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이단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논쟁은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것은 유일신 사상과 기독론의 피상적 부조화에서 오는 아리우스의 오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기독론’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 발 단
아리우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32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직분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추종자인 세쿤두스(Secundus)와 데오나스(Theonas)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같이 루시안에게서 배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동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은 보기에 ‘하찮은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에게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통일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과 정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을 파견하는데, 정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체재비용과 왕복 여비를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Nicea)에 최초의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모인 인원은 300여 명이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서방측에서는 1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니케아․칼케돈․에베소 감독들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호시우스 등의 소수-.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립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등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콘스탄틴은 다만 통일과 평화 유지만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신조를 제출한 것은 아리우스파의 니코메디아의 제출한 신조가 수정이 가해져서 채택되었다. 아다니시우스는 ‘유사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본질’(Homoousios)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주장
아리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유사본질이다(΄ομοιουσιοςHomoiousios-Like Substan -ce)
인 성:그리스도는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다.
아다나시우스파
신 성: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시다(΄ομοουσιος:Homoousios-one Substance)
인 성: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3) 결 과
니케아 회의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의 추방, 부활절 날짜 재정, 멜리티우스(Melitius) 분파 문제 등을 다루었다.
4) 니케아 신조 전문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지도 만들어지지는 아니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적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5. 니케아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회의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은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의 종말은 준비되어 있었고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제1기:콘스탄틴대제의 사망까지(337년5월)
①니케아 신조가 ‘진실한 신앙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짐.
②그러나, 황실 교회 고문으로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임명된후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확장됨
③안디옥 감독 유스타스유배, 아다나시우스의 감독직을 박탈하고 파문, 앙크라의 마르셀루스 파문 유배.
④ 337년 아리우스와 콘스탄틴 황제 사망으로 새로운 국면.
제2기: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직후부터 361년까지
①정치적,교회적 혼란기
②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의 유배를 두고 동서방교회간에 논쟁, 타협안으로 아다나시우스 복직.
③정치적으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가 황제의 고문이 되어 아다나시우스파를 정죄, -칼라리스의 루시퍼,베르셀라이의 유세비우스 ,밀란의 디오니시우스, 로마의 리베리우스을 추방 알렉산드리아의 아다나시우스를 몰아내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조오지를 감독으로 임명, 안디옥에도 아리우스주의자 유독시우스를 감독으로 임명.동방교회의 혼란.
④아다나시우스와 앙크라의 바실파의 동맹
제3기:줄리안의 즉위부터 데오도시우스 1세까지
①줄리안의 즉위 - 아다나시우스와 니케아신조에 호의적 : 아리우스주의 영향력 상실
②데오도시우스 즉위 - 아리우스주의 배척
③아다나시우스 활동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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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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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성도의 견인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 욥기 17:9
1. 교리를 살펴봅시다.
p.33.
우리는 특별구속을 믿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그 구원의 결과로 일어나는 구속받은 자의 견인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효과적 소명을 믿습니다. 이것은 영화를 보증하는 칭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 교리는 하나의 사슬과 같아서, 여러분이 하나의 교리를 믿으면 그 다음 교리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교리는 나머지 교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교리를 받아들인 여러분은 반드시 견인교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견인교리는 은혜교리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효과적 소명
매우 담대한 예언
p.55.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교하는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명시대는 은혜교리를 거부합니다. 복음을 가르칠 때 은혜교리는 핵심입니다.
p.90.
그 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만, 값없이 주는 은혜는 그를 찾아가서 죄인이여,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도 그리스도는 손으로 문을 여십니다. 우리가 일어나지 않고 그분을 냉정하게 거절해도 그분은 내가 들어가야 하겠으니 들어갈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눈물로 우리를 이기실 때까지 우리를 보고 우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울부짖음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시면서 우리를 따라다니십니다. 마침내 자신이 정한 시간,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거기 거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한적 속죄
예수님께 담당시킨 죄
p.110.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나의 경험을 솔직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대속의 교리만큼 나의 영혼을 기쁨으로 불타게 하는 교리는 없었습니다.
무조건적 선택
야곱과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로마서9:13
p.164.
사람들이 많은 논쟁에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대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씀에 확고히 서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이 큰 교리를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내가 생각한 것, 곧 어떤 사람은 택함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성경적 증거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커다란 증거는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본문 속에 증거됩니다.
이 구절은 무서운 본문입니다. 나는 가능한 한 솔직히 이 본문을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워하다라는 말이 미워하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한다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를 덜 사랑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나는 그렇다고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미워하다라는 뜻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다른 성경을 제시할 때까지, 나는 이것을 고집할 것입니다. 나는 이 단어가 정확하고 알맞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다라는 단어가 원문의 뜻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덜 강하게 (p.165)표현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덜 사랑한다는 의미 없는 단어를 제공하는 다른 번역서보다는 나은 표현입니다. 나는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본문의 뜻을 그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사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야곱은 택하셨지만, 에서는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야곱을 끝까지 일생동안 복주셨지만, 그의 은혜는 에서에게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죄의 길로 가도록 여전히 내어버려 두셔서 내가 에서를 미워했다는 무서운 진리를 입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불쾌한 본문을 회피하고자, 다른 사람들은 이 본문이 에서와 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손, 에서의 자손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자손, 에돔 자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 차이점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뜻을 확대 해석함으로 곤란한 점이 없어졌습니까?
웨슬리파의 형제 중 몇몇은 민족적 선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민족은 택하시고, 다른 민족은 택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우리에게 말하기를, 한 사람을 택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합리적으로 그들에게 한 민족을 택하고 딴 민족을 버리는 것은 똑같은 하나님의 불공평이 아니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한 논법이 그들을 역시 뒤엎었습니다. 민족적 선택을 입증하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속임수는 결코 없습니다. 단체나 다수의 선택이 아니라 민족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개인의 제한적 선택과 같은 것입니까? 좀더 생각해 볼 때, 비록 우리는 순간이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 사람을 택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불공평이라면, 한 민족을 택하고 다른 민족을 택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불공평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려움은 이렇게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과 싸우는 어리석은 싸움으로 더 커질 뿐입니다. 게다가 여기 옳지않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앞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민족들에 대한 것을 (p.166)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구절은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 후에 협박적인 이 말씀이 두 나라의 상태, 곧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상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구절에서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그 사람 야곱을 말합니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대로 만지작 거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 있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고개 숙이도록 만들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는 하나님의 보좌만큼 확실하며,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나는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하여 말할 것입니다. 나는 본문이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는 의미를 그대로 지닌다고 설명(p.167)했으므로, 이 구 절을 변경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입술을 깨물게 만든 무서운 이 교리의 위세를 꺾기 위해, 나는 이제 이 말씀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자 합니다.
Ⅰ. 이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의 교리를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몇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알미니우스파 형제에게 선택에 대해 물어 보십시오. 금방 그는 당신을 무섭게 쳐다보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 사실을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전쟁의 아우성 같은 끔찍한 일이며, 그는 즉시 논쟁의 칼을 날카롭게 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 형제여! 당신을 자연의 상태에서 부르셔서 지금의 당신을 만드신 분이 주님이 아니십니까?라고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는 말하기를 물론이지요.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 다음, 왜 한 사람은 개종하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그는 오, 성령님께서 이 사람 안에 역사하셨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의 형제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취급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 안에는 놀라운 일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이것이 사실임을 인식합니다. 저기 2층 복도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한만큼 열심히 일했지만, 일주일에 15실링 이상 벌 수 없었습니다. 여기 일년에 일천 실링 버는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한 사람은 왕의 궁궐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지붕도 없는 마굿간에서 그의 첫 호흡을 내쉬어야 하다니!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하나님의 예정이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이 상황에, 또 어떤 사람은 저 상황에 놓으십니다. 여기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은 할 수 없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함께 무엇(p.168)을 할 것입니까? 여기 앉아서 책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것은 독수리로, 어떤 것은 벌레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것은 사자로, 어떤 것은 기어다니는 도마뱀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은 왕으로, 어떤 사람은 거지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은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 났고, 어떤 사람들은 거의 천치가 되려고 합니다. 왜 이럴까요? 이것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뿐, 불평함으로써 유익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들에 반항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맨발로 저항하면 상처를 입을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만 상처를 입을 뿐, 사실들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자, 그렇다면 선택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광처럼 분명합니다......(p.169)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잘 믿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견해를 달리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단순한 교리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를 바꿀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시는 것보다 확실히 몇 사람을 더 잘 대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변호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해석자이시며 사실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그 교리에 대해 논쟁하기 전에, (p.170)여러분이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이 교리를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이 교리를 반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전적 구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디모데후서1:9
p.185.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확고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생각이 얕은 사람은 단지 감정과 흥분에 의해서도 설득되지만, 사회 중요 계층의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영향을 주기 원할 때-디모데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있는 제자였고, 은혜와 은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확고한 교리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디모데에게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에서 행해져야 할 학습입니다.
어떤 열심히 있는 목사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흥분시키지만, 교육시키는 (p.186)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불을 많이 일으키지만, 빛은 거의 비춰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에 호소하여 말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정처리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감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흥분에 기초하여 지탱하고 유지하는 종교는 틀림없이 보잘것없고 견고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편의 도전이나 짓누르는 시간의 손아귀에 매우 빠르게 굴복할 것입니다. 그 목사는 하프 연주자가 하프 줄을 튕기듯이 큰 호소력으로 감정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만약 잘 준비된 훌륭한 악기를 무시한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그는 반드시 이치와 이해에 바탕을 두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령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잘 이해력에 호소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강력한 동기를 우리에게 틀림없이 부여해 줍니다.
만약 우리가 비이성적인 충동에 의해 여러분을 어떤 행동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안전하고 신빙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와 같은 일에 능수 능란한 사람들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똑같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러분의 마음에 확고한 진리와 견고한 논증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에 도 변치 않는 능력의 불변성에 의해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깃털은 바람에 날리지만, 그것은 고유의 힘이 있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풍이 불 때, 깃털은 땅에 떨어집니다. 흥분의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자체 내에 생명을 지녔으므로, 바람이 불든 아니 불든, 높이, 드높이 날아갑니다. 진리의 확실성으로 견고한 종교는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실패하거나 사라지는 곳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진리 안에 잘 서 있어서 요동치 않습니다.
다소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p.187)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목할 만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즉, 사도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그가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견고히 서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위대한 교리를 디모데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사도는 이 구절 속에서 복음의 짧은 요약을 제시합니다.-이 구절을 어떤 사람은 삽입 구절로 보지만, 나는 완전 문장으로 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드러지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담대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유용성이 은혜 교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교리적 진리를 비실용적인 이론으로 여기기보다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더 실제적으로 더 유용한 것으로 말하여 왔습니다. 우리가 더 밝은 빛 속에서 건전한 교리가 실제적으로 거룩함을 이루는 생명력과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들을 순종으로 인도하며, 거룩함을 유지하는 길 중 가장 평탄하고 확신에 찬 길입니다.
첫째, 본문 속에서 사도가 가르친 교리를 살펴보고, 둘째, 그 교리의 목적을 살펴보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 본문 중에서 사도가 가르친 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우리의 목적은 가장 인기가 있거나 가장 마음에 맞는 교리를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며, 집회에서 어떤 사람의 견해를 발표하려는 것도 아님을 친구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단 한가지 목적은 본문이 의미하고 판단한 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교리를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교리를 싫어한다 해도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이 속상해 하며 화를 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설교를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도록 위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은혜로운 자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청중의 견해에 우리의 견해를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본문에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본(p.188)문의 의미를 제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와 모순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가 영감된 말씀 속에 분명히 들어 있다면, 정직한 마음을 지닌 모든 자들은 그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p.196) 4. 영원한 목적이 제시되었으므로, 본문은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자기 뜻대로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오, 낚시꾼의 낚시에 달린 미끼처럼 사람들은 이 말에 꿈틀거리고, 그곳에 매달려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아니 자기 자신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여,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힘은 이 말씀에 아무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의 행위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나는 여기에서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목적은 선택하신 사랑의 놀라운 신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도 그 진리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가 구원받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증거를 결코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주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
(p.198) 6. 또한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선물이라고 말합니다......선물 보다 더 대가없이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은혜보다 더한 것이 무엇입니까?......
(p.199) 8. 더욱이 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원한 때 전부터. 이 말씀은 영원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 있었습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어떤 손이 여러분을 은혜 안에 있게 했습니까?......
(p.200)Ⅱ.나는 이 교리의 목적을 설명하는 동안 여러분의 인내를 원합니다.
은혜 교리는 잡동사니가 모인 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조 속에서 고백되었기 때문에 진리임이 알려졌습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영국 교회 신조에서도 나타나며, 모든 종류의 개신교 고백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너무도 적게 설교됩니다! 과거의 유물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활동적인 봉사를 기대할 수 없는 은퇴한 군사를 향해서 갖게 되는 일종의 존경의 요소로밖에 여 겨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 진리가, 주님의 군대에서 늙어 퇴직한 군사가 아니라, 여전히 힘과 정력이 충분한 군사라고 믿습니다......(p.201) 더욱이 이 교리는 사람들에게 견고케 하는 어떤 것을 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견고케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는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님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이 신앙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교리는 마치 진흙(p.202)과 구르는 돌이 뒤범벅이 된 산비탈처럼 미끄러 운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자는 순간적으로 발을 발판 위에 디뎌 보기도 전에 산 아래 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이 발판은 마치 영원한 진리의 피라밋 위에 서 있는 견고한 발판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발을 이 발판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그러면 교리적 기준이 서 있는 곳에서 멀리 미끄러져 내려가리라는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영국 교회에 서 잘 배우고 진리를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 나님의 영원하신 뜻의 참된 진리를 세상에 알려야만 합니다. 오, 성령님께서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기록하옵소서.
나의 형제여, 게다가 이 교리는 마치 눈사태처럼 사제의 책략적인 모든 주장을 부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줍시다. 그러면 그들은 즉시 그렇다면 사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그렇다면 면죄부를 사거나 미사를 올리기 위하여 돈을 들일 필요가 없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제는 곧 몰락합니다. 사랑하는 이 여,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옥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하신 공성망치입니다. 이것은 많은 신학자의 아름다운 글보다 더욱 힘이 있습니다. 그 글은 큰 고랭이보다 힘이 없고, 연기 나는 아마의 빛보다 빛나지 않습니다.
박해 시대 때 사람들이 숲속에 자주 모이는 것이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 안트위프 시 밖 수천 킬로나 떨어진 유럽대륙이나 이와 비슷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이 시대의 우유에 물 탄 듯 한 힘없는 신학을 들으러 다 함께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현대 반(反) 칼빈주의자들의 우유에 물을 탄 미적지근한 것을 받으러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형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고기와 그들의 구미에 당기는 더 맛있는 음식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밤의 그림자 아래서, 폭풍우 날개 가운데서, 철학적 연설이나,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나, 물에 물 탄 듯 하고, 가짜같고, 영혼이 없는 신학적 가설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만한 일로, 사라들은 (p.203)자기 생명이 위협당하는 곳에 모여들지 않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죽음의 밤에 무엇이 그들을 모이도록 했습니까? 무엇 이 그들을 모이게 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 교리요, 예수님의 교리요, 예 수님의 종 바울의 교리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교리 때문입니다. 이 교리 속에는 기독교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혼의 사랑과 같은 음식과, 하늘 나라에 태어난 그들 의 구미에 맞는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듣는 사람 들은 용감하게 죽었고, 칼 따위는 문제삼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빨간 모자가 착용자의 머리에서 벗겨지고, 번쩍번쩍 빛나고 번드르르한 로마의 관들이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면, 또 그것들과 함께 퓨지주의 신봉자의 국교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외쳐야만 합니다. 이 교리가 선언되고 여러 곳에서 주장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들에 게 한순간도 그들의 땅에 설 수 없음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 하 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검과 기드온의 검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은혜 교리를 선포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사람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 진리를 기록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이 진리가 사람을 똑바로 서게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걸어갈 것 입니다. 그는 자연과 예정 속에 계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그는 주님께서 모든 곳에서 일하심을 깨닫고 겸손히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연 법칙이나 국가의 계획에 돌리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보이지 않는 통치자를 존경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내가 행하리라. 이것이 신자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 위에 살리라. 이것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는 복받은 생활 습관입니다.
동시에 이 교리는 사람에게 자신을 쳐다보도록 합니다. 그는 이렇게 (p.204)말합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존경받을 만한 장점이 내겐 아무 것도 없어. 내겐 선한 것이 전혀 없어. 구원을 받아도 나 자신을 찬양할 수 없지. 나는 조금도 자신에게 존경을 표할 수 없어. 하나님이 하신 거야. 하나님이. 아무 것도 그 사람을 이처럼 겸손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매우 기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은혜자리 까지 낮출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그의 동료의 얼굴을 쳐다볼 만큼 용기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굉장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강력한 능력을 알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귀중한 진리는 죄인에게 충만한 만족을 줍니다. 이것이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첫 열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
p.206
열렬히 믿음에 의한 칭의론을 주장한 믿음의 옹호자인 마틴 루터는, 자기를 대적하기 위하여 야고보서를 인용한 반대자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주어지는 각양 좋은 은사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믿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합니 다. 야고보는 1장 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나니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나 어떤 자유로운 행위에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완벽하고 선한 은사들은 인간의 더러운 본성 위에 피어난 귀하고 풍요로운 꽃과 같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야고보는 어떻게 영광을 (p.207)돌려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지라.
사도 야고보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는 면류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면류관을 드리고,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본서는 Charles H. Spurgeon의 SPURGEON ON THE FIVE POINTS(Florida:Tyndale Bible Society)를 완역한 것입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찰스 스펄젼, 김군섭역 서울:크리스 챤 다이제스트, 1997.
[출처] 찰스 스펄젼의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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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장로의 참된 실체는 무엇인가?
(자료출처 https://www.facebook.com/mahnyol?hc_location=timeline)"그 목회자가 문제삼는, '퀘이커 이단설'은 '인간의 내면에 빛이 있다'고 퀘이커들이 말하기 때문이란다.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에 빛이 없다는 것이 그 목회자의 주장이다.그렇다면 그가 지적했듯이, 퀘이커들이 주장하는, ‘내면의 빛’은바로 ‘하나님의 씨앗’이요, ‘하나님의 영’이며,‘그리스도’로도 대치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그렇게 대치시켰을 때에도 이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퀘이커는 누구나 내면의 빛(또는 '하나님/하느님의 씨앗', '하나님/하느님의 영', '그리스도' 등으로 불림)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내면의 빛을 바라봄으로써 신적 체험을 경험하고,하느님(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퀘이커 신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며, 스스로와 타인에게 진실 된 삶을 살려 노력한다. 또한, 하나님/하느님과의 교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에 예배중 진행하는 예배자가 없이, 교도들이 예배당 (meeting house)에 앉아 묵상한다.(자료출처 http://blog.daum.net/wbellk/6344659)
함석헌이 퀘이커로 간 것은 퀘이커가 종교단체로서는 유일하게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정도로 평화애호가들이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적이며 사랑의 완성인 십자가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적이고 정복적인 십자군만 득실거리는 오늘의 상황을 보면서 평화애호자로서 몇 번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대된 함석헌이 퀘이커를 선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그는 일제 강점기 관동대진재 때에 사경을 헤맸고 해방 후에는 동족상잔, 잦은 투옥 등을 경험하면서 평화에 목말라했던 경험이 그를 퀘이커로 몰아가게 했던 것은 아닐까.
함석헌이라는 사람이 "평화애호가"로서 퀘이커 이단이 되었든지,
함석헌에게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단’ 운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는 이미 그 속에 유교는 물론이요 불교와 힌두교, 노장사상(老莊思想)을 포괄하면서 이것들을 뛰어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누구보다도 자부했던 것으로 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 약점 때문에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함석헌은 한국 그리스도교가 낳은 사상가요 종교인이며 시대를 통찰하며 앞서간 예언자이다. 저명한 철학교수 김상봉이 함석헌을 두고 “함석헌의 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느낀다”거나 함석헌이야말로 “한국철학의 전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빈 말이 아니다. 수년 전 세계철학회가 한국에서 회집되었을 때에 함석헌을 주제로 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함석헌에게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리의 잣대를 들이대며‘이단’ 운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다."(자료출처 https://www.facebook.com/mahnyol?hc_location=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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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땅밑은 보물 창고
서울의 땅 밑은‘보물창고’… 어찌하오리까 [중앙일보]
팠다 하면 나오는 조선시대 유물 유적, 개발·보존 딜레마
① 보물급 불랑기자포 등 철제무기류와 각종 도자기류, 유구 수십 기가 발굴된 서울시 신청사 부지. 발굴 전에 군데군데 박아놓은 H빔이 눈에 띈다. ②서울 종로 청진5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백자명기 세트. 무덤 부장품인 명기가 살림집터에서 발굴돼 화제가 됐다. ③청진1지구에서 출토된 15~16세기의 달항아리. 당장 보물로 지정되어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 |
◆도심 지하는 보물창고=최근 열린 서울시 신청사부지 발굴 지도위원회에서 박성근 문화시설사업단 단장은 “신청사 부지에는 지하 방제시설이 설치돼 있어 이미 문화재가 교란된 상태라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조선의 흔적이 살아있을 줄 몰랐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 도심 재개발과 함께 발굴된 조선시대의 유적은 지하 1.5~6m 아래에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었다. 세종로 지하 1.5m에서는 육조거리 유적층이, 경희궁에선 지하 6m에서 17세기 광해군 무렵의 지층이 나왔다. 선조들은 전란으로 불타 무너진 집터 위에 흙을 덮어 대충 집 짓고 살았던 것이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지금이라도 개발의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 원장은 “서울 4대문 안이라도 보존했더라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을 텐데, 조선시대를 느끼며 잘 수 있는 여관 하나 없다”며 “의식적으로 우리 역사를 무시하면서 어떻게 뿌리를 단군에서 찾느냐”고 반문했다.
현재 재개발 대상지역 건물은 대부분 저층이라 지하를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았다. 문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유다. 그러나 현재 개발 중인 건물은 지하 5~6층까지 파고들어가는 추세라 ‘지하 보물창고’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나선화 문화재위원은 “4대문 안은 ‘문화수복지구’로 가는 게 옳다”며 “선진국의 사례를 참고해 유물과 유적을 어떻게 보존할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건길 매장문화재분과위원장은 “현재 서울시 개발계획대로 밀고 나가면 ‘서울’은 완전히 없어진다”며 “서울 전반이나 4대문 안, 그것도 무리라면 고지도를 놓고 보존할 부분을 선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하 문화재, 기록으로라도 남겨야=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신축·재건축 부지가 3만㎡ 미만이면 관할 구청과의 협의 하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생략할 수 있다. 가령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종로구 관할인 관철동 5-13번지는 발굴 중이고, 중구 관할인 수표동 88-1번지는 지표조사 없이 빌딩이 건설되고 있다. 문제가 된 서울시 신청사 부지 역시 중구 관할 지역이다. 발굴 관련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종로에는 학예사가 있고, 중구에는 학예사가 없어 문화재 관련 건축 인허가에 차이가 난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개발은 피할 수 없더라도, 공동의 유산인 지하의 유적은 철저히 기록하고 중요한 부분은 보존·전시해야 한다”며 “서울 도심의 문화재 조사를 의무화하고 조사 결과를 기록해 시대별 ‘지하 문화재 지도’를 완성하자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남규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이 거점지역의 향교 등 중세(고려·조선) 도시의 파괴였기에 경주·충주·청주 등의 지하엔 중세 유적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학계의 인식 부족으로 중세 고고학 전공자가 거의 없고, 국가적 몰이해와 개발론이 겹쳐 고려·조선시대 유적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있다”며 “역사에 대한 국민적 이해 없이는 결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대안은
매장문화재 기금 조성, 지표·발굴조사 비용부터 만들어야
양심적으로 절차 밟는 건축주들만 손실 보지 않게
역사와 문화재가 중요하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평당 1억원이 넘어가는 도심 금싸리기 땅의 소유자에겐 재산권의 문제다. 재산권이 늘 앞서 문화재 조사는 흐지부지 넘어가던 서울 4대문 안의 발굴이 본격화된 건 2004년 종로구 청진동 르 메이에르 빌딩부터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2004년 1월 1일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공사현장에서 뒹굴던 장대석 사진을 찍어 신고했다”고 기억했다. 황 소장은 “건물을 짓기 전에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가장 먼저 끝내고 그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컨셉트가 나와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전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은 차치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앞장서서 대규모 공사를 추진하며 문화재를 뒷전으로 밀어두는 것도 문제다.
피맛골 일대를 비롯한 서울 도심 곳곳의 발굴을 맡고 있는 김홍식 한울문화재연구원장은 “제일은행·교보빌딩·경희궁의아침 등은 물론이고 지하철 공사를 할 때도 문화재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양심적으로 절차를 밟는 건축주들만 극심한 손해를 떠안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유적 보존을 위해 지하는 파지 못하게 하되 지상의 건축제한을 완화해준다거나, 주차장기준법을 풀어주는 등 숨통을 터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건물 신축이나 재건축 때문에 문화재 지표·발굴조사를 할 때는 건축주가 비용을 댄다. 출토 유물 등의 매장문화재는 모두 국가로 귀속된다. 문화재가 걸려 발굴이 시작되면 공사 지연으로 인한 손실까지 떠안아야 한다.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심영섭 과장은 “다른 국가들도 홍역을 앓고 지나갔지만, 유적을 파괴하는 원인 제공자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은 만국 공통”이라 전제했다.
하지만 이남규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건축주는 ‘재수없이’ 문화재에 걸려 재산권을 잃고, 국가는 매입할 여력이 없어 유적을 방치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매장문화재 기금을 만들어 지표조사·발굴조사 비용이나 중요 유적 보존 부지를 국유화하는 자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주택공사·건설업체 등이 개발비의 일정액을 보험금처럼 불입해 펀드를 조성하자는 것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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