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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앞에서

 

 - 이 해 인 -

 

 

 

바다에 나가

큰 소리로 빌었습니다

 

부디

출렁일 준비를 하십시오

 

겉으로 드러나는 고요함으로

평화를 측정하진 말라고

파도가 나에게 말해줍니다

 

멈추지 않아야 살 수 있다고

출렁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오늘도 파도 앞에서

큰 소리로 빌었습니다

 

 

 

 

* 이해인 시집 '작은 기쁨'(열림원)중

 

 


Amembo _ Chris Glas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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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리스 인근에  Vernon 이라는 시티가 있다. 로스앤젤리스 인근에는 자잘구레한 시티들이 많기 때문에 그저 그런 중의 하나려니 하였는데 얼마전 신문기사를 보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주민의 수가 40여명에 불과한데 몇명 안되는 시정종사원의 년봉이 1백만불에 이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공공용무에 지출되는 비용은 년봉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출장비로 계상되는 호텔의 숙박비는 최고급호텔기준으로 계상되는 것은 기본이고 센프랜시스코에 거주하는 한  행정위원은  출퇴근을  비행기를 이용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비행기 요금을 1등석으로 지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의 예산은 년간 4억불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런 예산을 지출할 수 있는만큼의 세수가 확보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 일것이다. 40여명의 주민에게서 4억불의 세수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안되지만 그 이유는  뜻밖에도 단순하다.

 

 이 도시의 세원은 많다. 도시의 대부분이 공장이기 때문인데 이런 기형적인 형태의 도시는 이곳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이다.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로스앤젤리스시가 이런 사실을 알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주정부와 합작으로 도시흡수작전을 시작하려하자 이를 눈치챈 산하공장들이 반대운동을 먼저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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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자진납부로 원만하게 돌아가고있는 세정에 만족하고 있는 공장들은 대도시와의 합병으로 세정이 한층 가혹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Bell이라는 시티도 있다. 그 시티는 작년에 똑같은 사실이 들어나 신문에 난 것을 보았는데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있다.

 

와이오밍주에 Lost Springs라는 시티가 있는데 지금까지 주민 수가 단 1명으로 알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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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a Price라는 주민 겸 시장은 이혼녀인데 지난 30년동안 연방정부관할인 녹색 도로표지판의 정정투쟁을 벌여 이번에 그 숙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샘"인지 "잃어버린 봄"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명칭은 알고보면 그 지정적인 위치가 해발 4996피트이기 때문인듯 한데 사실 이 도시는 이미 1세기도 이전에 석탄광산이 개발되면서 생겨났고 한창때는 주민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켓을 경영하고 있는 지금의 주민 겸 시장은 2000년 주민센서스에 조사원의 실수로 하이웨이25의 양쪽주민을 계상해야 되는데도 한쪽주민만을 계상했기 때문에 주민 수가 단 1명으로 되어 있다가 이번에 여시장의 노력으로 2010년 센서스에 이를 바로잡았고 하이웨이 그린싸인에도 주민수 4명이라고 밝힌 새로운 싸인을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주민수를 4배로 늘린 나머지 흥분에 들뜬 여시장은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계획중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주민 1명이나 주민 4명이나  얼마나 달라서 그리 흥분할 일이 되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1인도시가 미국에는 3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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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의 상속자들이고,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락의 소망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7:12-13). 또한 마찬가지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7:5-7).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천 가지도 넘게 인용할 수 있다.

 

모세는 율법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 그리고 죽음과 생명을 제시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 무익하고 무효가 되든지, 아니면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을 한다. 만일 율법을 붙잡게 되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모든 범죄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저주가 우리 위에 드리워지게 된다(27:16). 왜냐하면 주께서는 오직 그의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자들에게만 약속을 하시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통해서는 온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요, 거기서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말하자면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 자유가 육체적인 자유라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일에 방종해지며, 마치 자물쇠가 망가져버렸고 고삐가 풀려버린 것처럼 우리의 욕심이 마음껏 활개치게 되겠지만, 이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실망에 빠져 있는 상한 양심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서, 율법이 억누르고 얽매어 놓고 족쇄를 채워놓고 있던 그 저주와 정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음을 분명히 확신케 해 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잡을 때에 이러한 자유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을 얻게 된다. 율법이 양심으로 죄를 의식하도록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찌르고 괴롭혀 왔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죄를 사함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지 않으셨더라면 율법에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약속들이 모두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율법을 준행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의 행위들의 의의 일부로 인정하시고 또 나머지 일부는 그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그 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지정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 다음 이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부패함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는 상급의 혜택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른 의를 얻고서야 비로소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자기 종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상급을 기억하고서 곧바로 그 상급을 무효화시키는 죄를 떠올리는 것이다. 시편 19:12에서 율법의 유익함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곧바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25:10)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이어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25:11)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율법에 우리를 위하여 제시되어 있어서 행위로써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그 자비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행위를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약속들이 복음을 통하여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약속이 열매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사라지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율법의 약속들은 행위의 공로와 관련지을 때에는 전혀 그 혜택을 누리는 일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폐기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18:5)라는 유명한 약속이 있으나 그냥 거기서 그쳐버리면 그 약속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한 없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10:5,312).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온갖 과실과 허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그들조차도 그 약속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로 그것들을 대체시키면, 그 약속들은 값없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만들어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만들어 주게 된다. 주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기뻐하시기로 정하실 뿐 아니라, 그의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축복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서 그의 율법에서 의와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상급들이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베풀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 이러한 상급이 베풀어지는 데 대해서 우리는 주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을 인정하셨는지 그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면 언제나 칭찬보다는 책망이 앞서게 되는데, 그가 그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들을 품어 안으시고, 행위의 도움이 없이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그들을 자기 자신과 친히 화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지니신 그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신 사랑으로 그들의 행위를 그토록 존귀한 자리로 높이 인정하셔서 그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시는 사실이다. 셋째는, 그 종들의 행위들을 그 불완전하며 부패한 상태 그대로 보신다면 덕이 아니라 죄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시지 않고, 그 행위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궤변가들은 자기들이 공로를 세워준다고 보는 그 행위들이 과연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조건들에서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직 믿음에 근거하는 의롭다 하심과 죄 사함을 통해서 선한 행위들이 흠도 티도 없이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만 그런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53-357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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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대장쟁이


내가 무슨 공으로 세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혹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거나 하나님을 오해하는 생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빚을 지실 분이 아닙니다.
무엇이 부족하시거나 필요하시거나 우리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십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지구에서 1억 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태양은 지구가 130만 개나 들어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1초에 수소 약 400만 톤을 핵융합하여 헬륨으로 변환시키면서 빛과 에너지를 내뿜습니다.
수소 400만 톤이면 수소폭탄 몇 개냐고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몇 천억 개인지, 몇 조 개인지..
그렇게 엄청난 수소를 태우는데 태양이 금방 다 타버리는 거 아니냐고요?
그런 걱정 필요없습니다. 태양이 가지고 있는 수소는 수십억년을 쓰고도 앞으로도 수십억년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랍니다.

인간 중에 누가 그 태양의 에너지를 사용한 대가로 연료를 넣어 주고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공기와 물을 쓰고 그 사용량을 보충하여 되갚아 드리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거저 쓰고 공짜로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을 있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 위에, 그 태양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무슨 도움이 필요하며 무슨 빚을 지시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에는 아무것도 도움 받지 않으시면서 모든 것을 베푸시는 전능자, 창조주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품는 순간 그것은 내가 무엇을 넣어 주어야 태양이 나를 비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 드려야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내게 먼저 빚을 지고 그 빚을 구원으로 갚으시는 "빚 지시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우주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다만 감사와 순종밖에,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밖에 드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비춰지게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별을 보여주시면서 후손을 약속하실 때 믿어서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 후손은 복수가 아닌 단수명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면서 무엇을 약속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며 약속하고 계십니다.  
"저와 같으리라."
그러므로 그저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처럼.
그러면 궁창에 빛나는 영원한 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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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建物)은 높아졌지만
      인격(人格)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高速道路)는 넓어졌지만
      시야(視野)는 더 좁아졌다.

      소비(消費)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家族)은 더 적어졌다.

      생활(生活)은 편리(便利)해졌지만
      시간(時間)은 더 부족(不足)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所重)한 가치(價値)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學力)은 높아졌지만
      상식(常識)은 더 부족(不足)하고,
      지식(知識)은 많아졌지만
      판단력(判斷力)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專門家)들은 늘어났지만
      문제(問題)는 더 많아졌고,
      약(藥)은 많아졌지만
      건강(健康)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法)은 잊어 버렸고,
      평균수명(平均壽命)은 늘어났지만
      시간(時間) 속에 삶의 의미(意味)를 넣는
      법(法)은 상실(喪失)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宇宙)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世界)는 잃어버렸다.

      공기(空氣) 정화기(淨化器)는 갖고 있지만
      영혼(靈魂)은 더 오염(汚染)되었고,
      원자(原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偏見)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自由)는 더 늘었지만
      열정(熱情)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平和)는 더 줄어들었다.


      글 / 반기문 UN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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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과 쭉정이

노기송 ㆍ 2014/07/03

2년 만에 집회 차 한국과 중국 하얼빈에 다녀왔다. 팔십이 넘으신 외삼촌이 안산시에 계셔서 인사차 방문하였는데, 역시 지난 4월16일 세월호 침몰에 제일 피해가 컸던 단원고등학교가 있어서 안산시 전체가 마치 초상집 같았다. 단원고를 방문하여 애도라도 표시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긴 추모행렬에 일정상 밖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고 왔다.

전남 완도 섬에도 집회 차 가보니 초상집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와 완도는 해상거리로 10분 거리라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완도에서는 4월11일부터 5월 11일까지 국제해조류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행사 또한 썰렁하다 못해 같은 초상집 같았다. 그 대회 미주 홍보대사로 완도군에서 PGA 프로골퍼 최경주와 김정두 목사님(완도선교교회)을 두 명 선발하였다. 그중에 김정두 목사님은 행사 전 3개월 동안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전 미주를 돌며 열심히 홍보하였는데, 그만 세월호 침몰로 빛을 바랬다. 그런데 초상집 분위기는 안산과 완도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다. 특히 전라남도 교계는 이번 부활절 때 ‘예수 다시 사셨네’ 찬송가도 크게 부르지 못할 정도로 전체 부활절 예배가 침울한 가운데 드렸다고 한다. 세월호가 대한민국 전체를 침몰시켰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대한민국을 이런 분위기로 만들어 놓으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도 기독교의 가장 기쁘고, 즐거운 큰 절기인 부활절을 앞두고. 거기에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큰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 영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더욱 정신 차리라는 것이다. 특히 이번 사고로 밝혀진 대로, 그 배후에는 이단으로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 ‘구원파’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구원파’는 한국 창시자 권신찬(1996년 사망)의 사위 유병언과 박옥수가 이어가고 있는 무서운 이단 집단이다. 그 집단에서 운영하는 해운 회사 배 세월호가 이번에 침몰한 것이다. 사고 경위는 알려 진대로,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선박에 대하여 얼마나 엉터리로 점검과 관리가 허술했는가? 마치 ‘구원파’ 교리가 엉터리고 가짜 인 것처럼. 이로 인해 전 국민이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반감을 더 사고 있는가. 특별히 그 이단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우리에겐 얼마나 소중한 이름들인가. ‘기독교’, ‘복음’, ‘구원’. 이 모두가 우리가 전도할 때 잘 사용하는 단어들인데, 이제는 그런 말조차 꺼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전도가 막힐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이 세 단어를 합치면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제는 ‘예수’라는 말도 전하기가 힘들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귀하신 메시지가 있다. 말세 장 마태복음 24장 6절 말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이런 일들이 벌어짐이 지극히 말세 징조임에도 끝이 아니라? 왜 그럴까? 그것은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난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난리를 보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참 믿음을 보시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의 죽음이 다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으라는 영적인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메시지인 것이다. 평소에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이런 난리를 통하여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난리들이 나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욱 열심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장 12절 말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런 난리가 터지고 나면 서로 남만 탓한다. 정부가 어떻고, 관피아 어떻고, 누가 어떻고, 남 탓하기 바쁘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말씀처럼 교회를 심판하신다. 이런 난리 속에 교회 안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신다. 그 말씀이 요한계시록에도 있다. 11장 1절,2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예수님 재림의 진짜 징조는 교회 안을 심판하실 때 이다. 그래서 요즘 국내외 교회들마다 문제가 많고 시끄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항상 내 자신의 부활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평소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 믿음, 부활 신앙으로 살고 있는지.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보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서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교회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 성도다. 마라나타!

노기송 목사.(뉴욕새예루살렘교회)

ⓒ 크리스찬투데이
USA아멘넷



한국인이 만든 인류역사상 가장 큰 배


488 미터, 26만5000톤의 FLNG선 진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길어...섬 같은 해상 정유공장

인류가 신석기 때 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새로운 배는 탐험과 개척의 상징물이었다. 노아가 대홍수에서 살아남거나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개척할 때에도 배가 함께 했다. 중국 명나라 시대 정화 장군이 남쪽 바다 대원정을 떠날 때에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과를 올릴 때에도 전례없던 규모와 형태의 배가 등장했다. 새로운 배는 기술의 진보를, 그리고 인류의 새로운 삶을 의미했다.

바다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면 배가 필수품이다. 동·서·남 3면이 바다인 한국인에게 크고 좋은 배를 만드는 것은 오랜 꿈이었다. 세계 1위의 한국 조선업계는 이러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왔다. 그것이 최근의 한국 조선사(史)이다. 이 조선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더 추가됐다. 경남 거제의 삼성중공업 조선소가 지난해 12월 3일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를 만들어 거제 앞바다에 진수(바다 위에 띄운 것)한 것이다. 네덜란드·영국 합작의 세계적 정유회사인 로열더치셸이 주문한 ‘프리루드(Prelude) FLNG’이다. FLNG(Floating LNG)는 해상에서 천연가스를 채굴한 뒤 정제하고 LNG로 액화해 저장·하역할 수 있는 해양플랜트 설비이다.삼성중공업이 만든 프리루드는 세계 최초의 부유식 LNG 생산설비이다. 



로열더치셸에서 수주한 FLNG 이미지/삼성중공업 제공

현재 바닷속 LNG 생산과정을 보면 해저 가스전에서 뽑아 올린 천연가스를 파이프 라인을 통해 육상으로 보낸 뒤 액화해 저장한다. 그리고 LNG 수송선으로 수요처까지 운송했다. 하지만 FLNG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해상에서 수행할 수 있다. 배는 배지만 사실상 바다 위에 떠 있는 가스공장인 셈이다. FLNG를 이용해 해저 가스전을 개발할 경우 평균 2조원에 달하는 육상의 액화·저장설비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 해저 파이프를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가스 누출로 인한 해저 생태계 파괴도 막을 수 있다. 프리루드는 선체 골격만 건조된 상태로 세부 시설물까지 갖추려면 아직 2~3년간 추가공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벌써 각종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도크에 물이 가득차자 프리루드 FLNG가 해상으로 떠올랐다. 길이 640 미터, 폭 97.5 미터의 도크를 가득 채운 모습이 이채롭다

여의도 63빌딩의 약 2배,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보다도 길어

Q :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라는데 얼마나 큰 가.

A : 길이 488m, 폭 74m, 높이 110m, 중량 20만톤(2013년 12월 3일 기준)이다. 길이 488m는 남산 서울N타워(236.7m)나 여의도 63빌딩(249m)을 눕혀 놓은 것보다 2배나 길다. 국내에서 현존하는 제일 높은 건물인 부산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301m)는 물론,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381m)보다 길다.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건물인 대만 타이베이 금융센터(508m)에는 다소 못 미친다.

중량 20만톤은 세계 최대 항공모함의 2배이다. 세계 최대 항공모함인 니미츠함의 만재(전투기 등 화물을 모두 채웠을 때) 중량이 10만6000톤에 불과하다. 최근 명명식을 가진 미국의 신형 항공모함인 제럴드 포드함은 중량이 다소 늘어난 11만2000톤이지만, 프리루드와는 비교가 안된다. 몸무게가 평균 5~6톤인 아프리카 코끼리 3만5000마리를 합한 무게에 해당한다. 프리루드는 향후 2~3년 동안 상부 플랜트 설비 탑재 등 추가공정을 마치면 선체 무게가 26만5000톤으로 늘어난다. LNG 액화설비 등 각종 플랜트 모듈이 설치되는 상부 면적은 축구장 5개를 합한 것보다 넓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뒤 LNG를 가득 채우게 되면 총 중량은 60만톤이 된다. 최대 배수량도 세계 최대규모 항공모함의 6배에 이른다. 




한국인이 만든 인류역사상 가장 큰 배

 

Q : 역사상 다른 유명한 배들과 비교해 본다면.

A : 2012년 8월 네델란드의 사업가 요한 휘버스가 구약 성경에 나온 크기 대로 노아의 방주를 실물로 재현했다. 크기는 길이 300큐빗(약 137m), 높이 30큐빗(약 14m), 폭 50큐빗(약 21m)이다. 창세기 신화에 나오는 방주의 규모가 과장됐다고 하더라도 방주의 크기는 프리루드의 3분의 1도 안된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정화 장군은 영락황제의 명령에 따라 1406년 6월부터 모두 7차례에 걸쳐 남쪽 바다 대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1차 원정을 떠날 당시 함선 62척, 승무원 2만7800명으로 이뤄진 선단을 이끌었는데, 가장 큰 배는 길이 44장(丈·약 137m미터), 폭 18장(약 56m)이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120톤급 3척(승무원 170명)이었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승무원 88명)이었다. 대서양에서 침몰한 타 이타닉호(4만6000톤)보다는 프리루드가 5배 이상 크다. 현재 기네스 기록에 따르면 가장 큰 배는 1975년 일본 오파마 조선소가 건조한 유조선 ‘자르 바이킹’(458.5m)인데, 프리루드가 30m 더 길다. 

Q : 배를 건조하는데 얼마나 많은 철강재가 사용됐나.

A : 선체 중량 26만5000톤 중 철강재의 무게는 약 26만톤이다. 호주 시드니 하버 브릿지(Sydney Harbour Bridge) 건설에 사용 된 철재량의 약 5배이다. 26만톤의 철강재 중 후판이 약 15만톤을 차지하는데, 포스코가 전량(공급 금액 1200억원)을 공급한다. 

,br> 아침 햇빛을 맞으며 프리루드 FLNG가 도크 밖 해상으로 나오고 있다.

Q : 배인가, 해상구조물인가.

A : 배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자체 동력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물건을 싣고 운항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호주의 북서쪽 프리루드 유전지대에서 20~25년간 정박하면서 LNG 가스를 채굴하고 액화시키고 저장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력이 필요없다. 이런 점에서 배 형태를 띤 해상구조물, 혹은 바다 위 공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미국 공영라디오방송인 NPR은 “배라기 보다는 떠 다니는 섬”이라고 표현했다. 만약 동력이 필요하다면 엔진을 달면 된다.

Q : 동력이 없다면 거제 앞바다에서 호주까지 어떻게 이동하나.

A : 마치 소인국 소인들이 걸리버를 묶어 운반하듯, 4척의 예인선이 앞에 3대, 뒤에 1대가 붙어서 방향을 조절하며 끌고간다. 그리고 적도를 지나 태평양 남쪽으로 호주까지 간다. 30일이 걸린다. 태풍 시기를 피해 2016년 초에 예인이 이뤄질 예정이다.

Q : 프리루드는 호주에서 어떤 일을 하나.

A : 호주 서부의 육지에서 약 200㎞ 떨어진 바다에 정박하면서 20~25년간 심해 가스 채굴 및 처리 작업을 한다. 채굴된 천연가스를 영하 162℃에서 600분의 1 부피로 액화시킨다. 이 때 천연가스를 냉각시키기 위해 퍼올리는 바닷물의 양이 시간당 5000만리터에 이른다. 저장된 액화가스는 LNG 운반선들이 와서 옮겨 싣고 소비자들에게 나르게 된다. 2주간 교대근무하는 형태로 항상 100명의 직원이 상주한다. 프리루드는 폭풍우나 최고등급의 사이클론(태풍)에도 끄덕없이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국내 LNG 소비량의 11%를 생산

Q : 프리루드의 연간 LNG 생산량은 얼마나 되나.

A : 연간 360만톤이다. 국내 1년 소비량의 11%에 해당한다. 홍콩의 연간 LNG 소비규모의 117%에 이른다. 선체 내부 45만5000㎥ 부피의 저장 탱크에는 국내 3일 소비량에 해당되는 LNG를 저장할 수 있다. 45만5000㎥는 올림픽 공식 수영장 175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규모이다. 완공 후 프리루드의 자체 중량은 26만5000톤이지만, 저장탱크를 모두 채우면 총 중량이 60만톤에 달한다.

Q : 총 건조비용은 얼마나 되나

A : 삼성중공업은 프랑스 설계회사인 테크닙(Technip)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2011년 5월에 프리루드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설계는 삼성중공업과 테크닙이 공동으로 실시하고, 제작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중 삼성중공업의 수주 금액은 약 30억달러(3조1500억원)이다. 30억 달러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중형 승용차 약 12만대의 수출 금액과 맞먹는다. FLNG 1척 수주가 중형차 12만대 수출 효과와 맞먹는 셈이다.

Q : 해상에 석유시추시설을 만들듯이 바다에 해상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비용이 더 저렴하지 않은가.

A : 수심이 깊지 않은 대륙붕일 경우에는 해상에 고정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대륙붕 자원이 점점 고갈되면서 채굴업자들이 계속 바다쪽으로 멀리 나가고 있다. 수심이 너무 깊으면 고정물을 만드는 것보다 배 형태로 만들어 섬처럼 띄워 놓는 것이 경제적이다. 그래서 FLNG(부유형 LNG) 선박이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심해유전이 정유업계의 새로운 큰 시장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호주, 동남아시아, 쿠바 지역이 주목을 받고 있다. 호주의 경우 2010년 490억㎥인 천연가스 생산이 프리루드 덕택에 2020년까지 곱절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거제 앞바다에 떠오른 세계 최초 FLNG의 웅장한 모습. 축구장 크기 5개 면적의 선체 상부에는 8만톤 규모의 플랜트 설비가 설치될 예정이다.

Q : 총 인력은 얼마나 투입됐나.

A : 선박을 건조할 때 한 사람이 한시간 동안 일한 노동단위를 1시수(時數)라고 한다. 보통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만드는데 60만 시수 정도 든다. 프리루드는 지난 2년 동안 선체를 만들어 진수하는데 670만 시수가 필요했다. 앞으로 2~3년간 추가공정을 하려면 더 많은 시수가 들 것이다. 설계에 투입된 인원만 600명이다.

Q : 앞으로 2~3년간 진행될 추가공정은 어떤 작업인가.

A : 선체 내부의 LNG 저장탱크 제작, 선체 상부의 플랜트 설비 설치, 내·외부 의장 작업 등이다. 특히 선체 위에 8만톤 규모의 플랜트 설비를 설치하는 작업이 핵심 공정이다. 6000톤 규모의 모듈 14개로 나눠 제작한 뒤 8000톤급 해상크레인을 이용해 순차적으로 탑재하게 된다. 

Q : FLNG 선박 시장은 전망이 어떤가.

A : 로열더치셀 등 글로벌 석유 회사들은 호주와 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FLNG를 이용한 가스전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만 20여개에 달한다. 특히 중형 FLNG를 통해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매장량 1억톤 미만의 중소형 가스전이 전세계적으로 350여개에 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향후 FLNG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 같다. 


[Kim’s Thought]
한국인은 엔고 덕택에 세계 조선업의 주도권을 일본에서 넘겨 받았다. 그리고 ‘프리루드 신화’를 썼다. 이 신화는 얼마나 갈까?

최근의 해외언론 보도를 보면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프리덤 쉽 인터내셔널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 ‘프리덤 쉽’(Freedom Ship)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길이 1.4㎞, 폭 228m, 제작 비용이 무려 100억달러(약 10조60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길이가 프리루드의 3배이다. 배 안에 학교, 병원, 쇼핑센터, 위락시설, 스포츠시설을 갖추고, 옥상에는 항공모함처럼 비행기와 헬기가 이착륙 할 수 있는 공항시설을 설치했다. 5만명의 사람들이 1년에 지구를 2바퀴 돌며 세계여행을 즐길 수 있는 호화 유람선이다. 언론은 이 프로젝트를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이름 붙였다. 만약 한국이 국제입찰 경쟁에서 이겨 이 배의 제작을 수주하면 ‘프리루드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초, 프리루드는 거제항을 떠나 호주로 향한다. 배 주인인 로열더치쉘과 배를 만든 삼성중공업 사람들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적도를 넘어 지구 남쪽으로 내려갈 프리루드를 위해 축배를 들고 축가를 부를 것이다. 새로운 여정을 출발한 선원들은 낮에는 꿈에 부풀고, 밤에는 태평양을 요로 삼고 달빛 은은한 밤하늘을 이불로 삼아 프리루드를 베고 단잠을 잘 것이다. 멋질 것 같다.


건강장수를 위한 '발끝 부딪히기'

 

 

발끝 부딪히기는 / 앉아서도, 누워서도 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효과 만점인 운동법으로 지난 7년 동안 하루에 적게는 1천 번,  많게는 5천 번 이상 발끝 부딪치기를 한 결과 "31년 동안 써온 안경을 벗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를 하더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네요.

 


<운동 방법>

발끝 부딪히기는 양발의 뒷꿈치를 축으로 삼고 발끝을 좌우로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면서 엄지발가락 옆부분을 서로 맞닿아 부딛히게 하는 것이다.

'건강에 좋은 발끝 부딪치기'

건강한 사람도 70대 고비를 넘기면 예외가 있긴 하지만, 몸의 어딘가에 이상(고장)이 생긴다. 특히 심장질환과 관절 등 하체가 약해진 경우가 많다. 그밖에 당뇨병 혈압 전립선비대증 등으로 고생한다. 또 불면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병원을 찾거나 약을 복용한다. 그러나 이런 운동법으로 혼자서도 고치거나 예방할 수 있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 수련법의 하나인 '발끝 부딪히기'가 그 중에 하나다. 고희(일흔) 전후의 나이가 되면 무릎도 약해지고 다리 힘도 떨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쉽지가 않다. ‘발끝 부딪히기’를 해 보라고 권해서 매일 200번씩 하기 시작했다. 200번씩 하는데 소요 시간은 2분정도. 처음에는 그것도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번 시작했으니 효과를 볼 때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틈이 나는 대로 ‘발끝 부딪치기’를 계속했다.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무릎은 물론이고 다리 힘이 상당히 좋아져 행동도 민첩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끝 부딪히기’를 계속하는 동안 3개 여 월이 지난 어느 때부턴가 그런 증상이 모두 사라졌고 잠도 잘 왔다.

또 다리 힘이 좋아지다 보니 골프의 비(飛)거리가 10〜15% 정도(나의 기준) 늘었다. 이렇게 몇 가지 효과를 몸으로 느끼게 되자 '발끝 부딪치기'를 하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발끝 부딪히기'는 많이 할수록 좋다는 말에 200번에서 500번으로 그리고 5개월 뒤에는 1,000번으로 숫자를 차츰 늘려 나갔다.

7년차에 들어간 지금은 잠자리에 들면서 1,000번,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1,000번씩 규칙적으로 '발끝 부딪히기'를 한다. 가끔은 저녁 뉴스시간에 TV를 시청하거나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면서 '발끝 부딪히기'를 즐긴다.

이렇게 하면 천천히 해도 하루에 3,000번 정도는 족히 할 수 있다. 이제는 하루라도 발끝 부딪히기를 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듯하고 뭔가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릎 때문에 ‘발끝 부딪히기’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무릎만 좋아진 게 아니라 그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늘 배변이 잘 안 되어 고생했는데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순서

1)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쭉 펴고 손은 편안하게 뒤로 짚어준다. 2) 발뒤꿈치를 띄우지 말고 발끝을 ‘탁탁탁’ 빠르게 부딪친다. 3) 같은 방법으로 누워서도 해준다.

(TIP) 처음 할 때 100번으로 시작해 서서히 횟수를 늘리는 것이 좋다.

효과

1)잠자기 전에 하면 숙면효과가 있고, 2)간이 안 좋을 때, 3)다리가 저릴 때, 4)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 5)집중력이 떨어질 때, 6)혈액순환이 잘 안 될 때, 7)시력이 좋지 않을 때, 8)다리에 힘이 없을 때, 9)얼굴이 상기될 때 이 동작을 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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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끝 부딪히기’ 요령 ☆

"1)다리와 팔을 편안하게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2)어께 팔 다리 등 몸의 긴장을 푼다. 3)입으로 숨을 길게 ‘후〜’ 하고 토해내듯 내쉰다. 그리고 4)양쪽 발뒤꿈치를 모아 축으로 삼고 발을 벌렸다 모았다 하면서 엄지발가락 모서리를 툭툭 쳐 준다."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은 1,000번을 친다는데, 어떻게 세느냐 힘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100번마다 손가락을 곱으면서 세었으나 나중에는 핸드폰이 10분후에 울리도록 시간을 맞춰놓고 ‘발끝 부딪히기’를 한다고 내가 해온 방식을 알려준다. 보통 발끝을 1,000번 부딪히는데 8분 정도 걸린다.

☆ ‘효과’ 체험담 ☆

머리가 맑아지고, 집중력이 좋아져, 머리 회전이 빨라진 것 같다고 했다. ‘발끝 부딪히기’로 혈액순환이 잘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발끝 부딪히기’로 얻은 효과를 몇 가지 소개하면 가장 큰 소득은 눈이 좋아진 것이다. ‘발끝 부딪히기’를 300〜500번 정도 하면 눈이 맑아진다.

‘발끝 부딪히기’는 걷기나 마찬가지로 다리만 튼튼하게 해줄 뿐 아니라 암의 발생을 예방하거나 악화를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암환자에게 걷기를 많이 하라고 권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발끝 부딪히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실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걷기보다 하기 쉬고 효과도 더 클 것이 라고 생각한다. 걷기도 하고 ‘발끝 부딪히기’도 한다면 상승효과를 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입안이 자주 마른다. 나는 언제부턴가 입안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곤 했다. 그런데 ‘발끝 부딪히기’를 한 지 2, 3개월 뒤부터는 입안에 침이 많이 고이는 현상이 생겼다. 또 늘 코를 풀어도 코 안에 코딱지가 굳어서 나오지 않아 손가락으로 파내곤 했다. 지금은 코가 뻥 뚫려서 기분이 상쾌하다. ‘발끝 부딪히기’로 하체의 찬 물 기운이 위로 올라오고 상체의 뜨거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는 수승화강(水昇火降) 현상이 일어나는 때문이라고 한다.

골프나 테니스를 하거나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을 많이 한 날 밤에 ‘발끝 부딪히기’를 하면 다음날 아침에 몸이 거뜬해진다. 나이가 젊은 원로일수록 그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바 회춘효과라고 생각한다. 50대 중반의 어느 공기업 전직 사장은 ‘발끝 부딪히기'로 부부간 금슬(琴瑟)이 좋아졌다면서 나에게 좋은 수련법을 가르쳐 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적도 있다.

‘발끝 부딪히기’는 "뇌경색, 당뇨병, 신장병, 간경화 등"에도 효험이 있는 것으로 나는 느끼고 있다. 나는 한 동안 우측 머리가 아파(쑤셔)서 병원에 가볼까 생각 했는데 솔직히 말해 겁이 나 ‘발끝 부딪히기’를 열심히 많게는 하루에 여러 차례 나누어 5,000번이나 했다. 그렇게 한 3개월이 지난 후 머리의 아픈 현상이 없어졌다. 당뇨도 심해서 발뒤꿈치가 터서 갈라지고 발톱이 검게 변하는 등 아팠으나 ‘발끝 부딪히기’를 계속하는 동안 깨끗해졌다. 신장병은 족욕을 해서 치유가 되었는데 그 후 ‘발끝 부딪히기’로 종목을 바꾸었으나 효과는 마찬가지로 좋았다. 간경화는 스트레스 해소로 자연히 치유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발끝 부딪히기’를 하면 우리 몸의 모든 기능이 되살아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내면에 간직된 ‘내부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분은 이 내부의 힘을 자연치유력(自然治癒力)이라고 한다. 어떤 운동이든지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효과를 많이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발끝 부딪히기’는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나에게는 여러 가지로 효과가 남달리 크다고 생각한다. ‘발끝 부딪히기’는 앉아서도 할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다. 나는 주로 잠자리에 들 때와 일어나기 전에 누워서 한다. 내 경험으로는 누워서 하면 허리와 어깨가 펴지고 또한 눈을 지그시 감고함으로 명상효과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발끝 부딪히기’를 지속적으로 해오면서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 시간이 없으면 한 가지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해줄 때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발끝 부딪히기’로 내 몸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걸음걸이 등 움직임이 나이에 비해 예전보다 더 민첩해졌다.

출처 : 경향신문 사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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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선행을 무너뜨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을 높임으로써 오히려 행위가 장려되고 격상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유지되는 칭의는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선행이 반드시 서로 굳게 결합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의 기초를 선행이 아니라 믿음에 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붙잡음과 동시에 거룩함도 함께 붙잡게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때문이다(고전1:30).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뗄 수 없는 끈으로 서로 엮어져 있다.

 

사람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구속과 부르심의 목적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격려와 자극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들을 통해서 바로 그런 자극을 해주고 있다. 곧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니 우리도 그를 사랑하여 보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하며 배은망덕한 처사일 것이라고도 가르치며(요일4:19), “그리스도의 피가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고도 가르치며(9:14), 한 번 깨끗해진 상태에서 새로이 더러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피를 욕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증되고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라고도 가르치며(10:29),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고도 가르치며(1:74-75),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정신으로 의를 배양하게 되었다고도 가르치며(6:18), “우리의 옛 사람이 ---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6:6) “새 생명 가운데서살리심을 받았다고도 가르치는 것이다(6:4).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므로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라고도 명령하고(5:8-9),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라”(살전4:7)고도 말씀하며,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의 거룩함이요 또한 우리가 부정한 욕심들을 버리는 것이라고도 가르친다(살전4: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셨으며(딤후1:9) 그 부르심은 순전한 삶을 요구한다고도 가르치며, 또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은 의에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도 가르친다(6:18).

 

또한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으면 우리가 한 몸의 지체들이므로 서로 같이 돌보아야 한다는 바울의 논지도 얼마나 큰 자극제가 되는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 삶을 살도록 하는 강력한 자극제로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0라는 요한의 말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또한 우리가 양자의 약속을 의지하고 있으니 육과 영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는 바울의 말은 어떤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라는 말씀은 어떠한가?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6-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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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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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 목사(언론인)의 정이철 목사의 부정적 방언관에 대한 반론

잠긴동산 ㆍ 2014-07-01 (화) 

김삼 목사(언론인)의 정이철 목사의 부정적 방언관에 대한 반론

이 글은 최근 뉴스파워에 실린 정이철 목사의 비평적 칼럼, '옹알거림이 외국어이고 영의 언어?'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정 목사의 그 글을 먼저 일독할 필요가 있다.

[ 먼저, 독자의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 영적/초자연적 개념으로 쓰인 언어에 대한 한글 성경의 '방언(方言)'이란 용어는 세상의 지방 언어나 사투리에 더 가까운 표기여서 혼동스럽고, 따라서 한글 성경 번역상 초기의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나름대로 '영언'(靈言)이란 용어로 대신한다. ]

정 목사의 글에 구체적인 반론을 하기 앞서 우선 서론적인 얘기를 좀 하련다. 이 글은 좀 길다. 독자의 끈기를 요한다. 긴 이유는 그동안 이 방면에 대한 본격적인 변증이나 반론이라고 할 만한 글이 별로 없었기에, 성경을 원용한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양면작전: 무장해제와 광분

신자에 대한 사탄의 효율적인 주요 전략 하나는 '영적 무장해제'이다. 또 다른 전략은 미혹령(迷惑靈/seducing spirit)을 통한 성도의 혼란과 광분이다. 양면작전에 방불한 극과 극의 이 두 전략으로 마귀는 성도를 밀 까불듯 까불면서 교회에서 성령님의 권능 사역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현실 교계를 보니 어쩌면 사탄의 이 전략이 잘 먹혀들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셨는데, 현실 교회는 거의 다 미지근하되 무력하며, 일부는 뜨겁되 자칫 쉽사리 광분한다.


근래에는 소위 '신사도개혁운동'(NAR)의 후유증에 몸살을 앓다시피해온 대다수의 성도들이 영적/초자연적이고 열띤 것은 다 이상하니 "안전제일"이라는 생각 아래, 영적인 것을 열망하긴커녕 "난 어디까지나 말씀 중심이야"라고 몸을 사리며 조용하고 안일하게 지낸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여전히 '신사도' 영성과 '관상' 영성 등 온갖 희한하고 화려한 영성들과 교설, 운동에 휘말리고 사로잡힌 채, 비진리의 풀무불로 과열되어 있다.

왜 이럴까? 마귀는 예수의 보혈 적용, 성경 말씀의 효율적인 활용과 더불어 성령의 진리와 권능을 끔찍히 싫어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자기 나라가 무너지고 망할 일을 마귀가 왜 좋아하겠는가? 적극 사전 봉쇄하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게 뻔하다. 아무튼 그래서 성도들은 "마귀들과 싸울지라!"라고 열심히 성경을 보고 찬송은 부르지만, 정작 말세지말에 앞서 사도가 경고하고 촉구한 영적 싸움은커녕 이에 필수적인 "하나님의 완전무장"=(전신갑주/온몸갑옷, 에페소서 6:10~18 참조)이 뭔지조차 잘 모르며, 자연히 데시근하고 미적지근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진리가 빠져 버린 초자연을, 사실상 성령을 흉내내는 더러운 친숙령(familiar spirit)인데도 성령인 줄 알고 열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양자 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권능이 거의 없고 미지근한데도 있는 양 착각하며 자족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참고: 요한계시록 3:14~18)처럼 돼 버리거나, 아니면 성령 아닌 엉뚱한 잡령에 시달리면서도 신나는 천국 체험을 하고 있는 줄 알기가 일쑤이다.

물론 우리 누구나 말씀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나 말씀 중심이라는 것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되 효율적으로 실천/활용하는 삶이며, 따라서 동시에 성령 중심의 삶이 필수적이다. 왜 성령 중심이어야 하는가?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聖子)님을 보내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신 뒤, 말세에 성자님을 통해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써 교회를 세우시고 일으키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 교회에 하나의 무기로 주신 것이 곧 성령의 권능과 은사들이다. 그러나 현대 성도 대부분은 이 무기를 쓰기보다는 이상한 '영성'들을 선호하거나 평소 설교나 편하게 듣고 영적인(옛 표기: '신령한') 노래보다는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운 찬양을 즐기면서 안일하게 지낸다. 또는 그 무기를 교회의 목적 아닌 자기 목적에다 오용하기도 한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은 증언자로 오셨고(요한복음 15:26, 행전 5:32)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기 원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린도전서 12:7). 성령께서는 그저 온유하셔서 설교에 잔잔한 감동이나 "얹어"주시며 주로 관망하시는 줄로 알고 지낸다. 그러다 가끔 갈급하거나 생각나면, 또는 모임에서 자주, "오 성령이여 오소서!", "임하소서!"를 뜨겁게 부르짖긴 하는데, 이미 2000년전 지상에 내리신 뒤 줄곧 교회에 계신 성령님은 오히려 그 분의 두나미스 곧 영적 파워하우스를 통해 우리의 바람(願)보다 훨씬 더 일하고 싶어 하신다는 진상을 알지 못하거나 그에 대해 무심하다. 그러면서도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스스로 건전하고 건강하다고 자부까지 한다. 이것이 대다수 교회의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많은 교회들이 신사도 운동 탓에 성령 권능 면에서 많이 위축된 분위기다. "말씀 중심의 개혁주의가 제일"이라며 거기 안주하려 든다. 여기엔 인터넷의 역할이 다대(多大)하다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초기부터 신사도운동 비평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중 하나이며, 여러 이단비평가들에게 많은 영문 관련 자료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당시, 신사도운동의 불똥으로 향후 오순절교와 은사 계열은 물론, 영언자(방언자)와 은사자들의 정당한 신앙까지도 싸잡아 비판 받게 될 것이라고 충분히 예견하면서 우려했었다. 나는 오랜 영언자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최근엔 방언을 이단시하는 한글 사이트만 수백 만 개나 된다. 그렇더라도 필자의 영언관은 한시도, 조금도 위축돼 본 일이 없다. 나의 영언은 친숙령의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총임을 절대 확신하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도 이런 대세에 편승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과 유튜브 동영상 등을 통해 근래 폭넓게 알려지고 있는 젊은 세대 이단비평가의 한 사람이다. 이단비평 사역자들은 교계를 해치는 이단들의 문제를 파헤쳐 알려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부 비평가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영적이기보다 이성적인 판단 아래 교계의 다수를 이루는 정통 교회의 전통에 어긋나 보이거나 이상스럽게 생각되는 모든 것을 '이단'시하는 자의적 월권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이단비평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무소불위의 진리가 아닐진대, 자기의(自己義)가 지나친 것 같다. 영언에 관한 비평과 단죄가 가장 진전된 경우가 이번 정 목사의 글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보다 못한 필자가 이처럼 반론에 나서게 되었다.

다른 모든 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단비평가들은 나중 후회할 글들을 써서는 좋지 않다. 일단 써 놓고 뒤늦게 후회할 바에야 안 쓰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현대의 영언자들에 대한 일부 이단비평가들의 성마른 판단과 단죄는 경박하고 섣불러, 제 얼굴 위로 침 뱉기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단비평권(圈)의 한 가지 맹점이랄까..는 신학적 원리와 말씀엔 퍽 투철하다지만, 그 실천의 결과로 필히 따르는 성령의 초자연적 권능에 대해서는 단순히 '요주의'라는 경고 팻말만 붙여 놓고 경원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이단비평권에는 말씀-신학과 말씀-권능 사이의 균형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성령의 실제적인 권능은 뒷전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교파/교단을 막론하고, 성경이 명증해 주는 성령 권능의 표출인 이적과 기사, 은사와 신유, 영언 등 영적/초자연적 요소들은 모두 사도시대 또는 계시 시대로 이미 "끝나", 성경 계시가 완결된 지금은 그치고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소위 '종식론'(cessationism)이라는 원리를 그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특히 신사도운동 탓에 이단비평가들 대부분이 더욱 개혁주의에 집착된 것으로 보인다.  




영적 대안이 없는 신학

이런 개혁주의나 이단비평적 입장들의 일차적인 문제점은 한 마디로, 정신적 대안은 있는데 영적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정 목사도 자신이 거짓 은사라고 믿는 것들을 적극 경계할 뿐이지, 성경적인 참 은사에 관해선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못하고 있다. 그의 총결론은 "그냥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이 최고요, 안전 제일"로 요약될 뿐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권능사역은 최저요 가장 밑바닥이라는 얘기인가? 바닷가에서 안전 제일이라면 찰싹거리는 파도만 보고도 뒤로 물러서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참 평화는 그 분의 품과 같은 깊은 은총의 바다에 풍덩 잠겨 맘껏 잠수도 하며 헤엄치는 것이다.
 
대다수 교인들은 성경을 이성과 마음으로만 이해하고 강조할 뿐, 히브리서 4:12 말씀 그대로 성경 말씀이 영적/초자연적 권능을 발산한다는 진리를 모르고들 지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에 받아들이면, 영과 혼이 서로 쪼개어지듯 확연히 구분된다. 영과 혼의 구분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도 밝히 말한 바 있다(고전 2:10~16; 14:2b,14,15, 데살로니가전서 5:23b).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현대 교인들은 성경을 한사코 이성적/혼적/자연적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요즘은 '초자연'이라는 말조차 잘못 꺼내다가는 대뜸 색안경들 앞에 이단 취급 받는다. 그러면서 그걸 '말씀 중심' 신앙이라고 자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유감스럽게도 성도가 영적/초자연적인 권능에 대하여 되도록 무관심하고 무지하길 바라는 것이 바로 마귀이고 악령들이다. 반면, 현대 세속사회는 갈수록 뉴에이지적인 거짓 초자연과 신화 등에 나날이 탐닉해 가니, 얼마나 아이러닉한가? 교회는 신학으로 '드라이'해지고, 세상은 인터넷의 영향 때문에 뉴에이지와 신화적 사상으로 나날이 '영성화/종교화' 돼 가는 것이 현실이다. 무신론/진화론 따위는 조만간 발을 붙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 역시 마귀의 양면작전의 면모이다.

종식론을 성경적이라고 믿는 대다수의 현실 교회는 말씀과 그로 인한 감동, 거듭남과 구원 사역만을 성령의 권능으로 자임하며, 나머지는 거의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마치 '성경, 구원, 천국, 그리고 끝!' 같은 분위기이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여 그것으로 충분하니 신유가 불필요하며, 성경전서와 메시지가 충만하니 영언 및 그 해석('통역') 따위가 필요 없으며, 해독제가 있으니 초자연적인 해독 같은 것이 구태여 필요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예컨대 선교지나 오지에 의학과 의술, 해독제가 상비되어 있는 건 아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선교사가 독뱀에 물리면 어쩌겠는가? 마가복음 16:18a과 실제로 이를 실천/입증한 행전 28:3~6을 진리로 의지할 뿐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보다 종식론을 더 신봉한다면, 이런 시도마저도 안 하고 신자라는 사람이 하릴없이 맥없이 죽어 가게 된다.  

어제만의 권능?

혼동하고 오해하지 말자! 성령의 권능과 은사는 절대로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라! 서가나 책상에 먼지 쌓인 채 놓여 있는 성경전서 자체가 우리의 권능이나 영적인 무기가 아니다. 그 속의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믿고 간구하면서 실천하고 영적으로 활용해야 비로소 권능이 된다. 사도들은 우리가 바라보고 우러르기만 해야 할 신적 존재나 우상도 아니었고, 지나간 "아득한 옛날의 흔적'도 아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도움과 권능이 필요했고, 사도들도 순수인간이었기에 더욱 성령의 도움과 권능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은사가 필요했다. 우리도 사도들보다 더욱 연약한 인간이기에 똑같은 성령님의 도움과 권능이 필요하다. 하물며 당대보다 더 죄악이 사무치고 당대보다 더 사탄과 그 종자들이 날뛰는 지금에랴.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은사나 영언 등 초자연적 권능은 모두 오직 사도시대나 성경전서 시대 이전만의 것이었다고 과거화 내지 신화화(神話化)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다른 모든 교훈들도 일부만을 제외하곤 모두 당대의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발상은 일종의 복음의 신화화이다.

현대 교회는 "(계시의 완결판인) 성경전서 한 권만으로 만족하옵니다"로 자족하고 있다. 물론 성경은 기록계시로서는 가감할 수 없이 종결되었다. 사실 구약 시대에도 성경은 있었고, 초기 교회 시대에도 지난 날의 계시와 현재의 계시, 앞날의 계시들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구약인들과 초기 교인들에게 모두 권능이 필요했다.


구약에서 성령님의 이적적인 권능은 흔히 하나님의 "강한 손"(히브리어: 야드 카자크)과 "펴신 팔"(비즈로아 너투야)로 묘사되곤 했다(예: 신명기 5:15, 에스겔 20:34). 그런데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을 이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필요악'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단지 성경전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어찌 보면, 이건 인본주의도 보통의 인본주의가 아니다. 구약인들은 물론, 주님과 사도들에게도 물 붓듯, 기름 붓듯한 성령의 권능이 필요했거늘(행 10:38), 우리가 어떻게 성경 한 권만 갖고 권능 없이도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님과 사도들에게도 성경책이 없었던 게 아니라 두루말이 성경책이 있었다. 그런데도 초기교인들은 말씀을 뒷받침할 따르는 표적과 기사를 절절히 간구하곤 했다(행 4:29,30).


우리는 단지 완성된 신약만 더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추가된 이 신약 한 권이 권능이 없어도 되는 '권능 대체 티킷'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복잡하게 말고 간편하게 성경 한 권만 갖고 지내자"라는 것인지?

우리 하나님은 늘 신실하시며 어제나 오늘, 언제나 한결 같으시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약속과 복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2000년전과 같이 그대로 적용된다. 대속과 구원의 언약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현대교회는 초기교회의 연장이지, 알맹이는 빼 놓은 불연속선상의, 여과된 모범만의 답습이 아니다.  초기교회가 영언을 했다면 하나님은 현대 교회도 영언을 할 수 있게 해 놓으신 것이다.

이런저런 선교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지인 선교지에서는 때때로 아니 수시로 권능사역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문화지역일수록 크리스천들도 '문화화'되어 초자연적 권능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의심한다. 심지어 "귀신 놀음"이라며 적극 반대하기도 한다. 거의 전능한(?) 의술과 거의 전능한 환상적인 스마트폰이 늘 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인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의 권능과 은사 등은 그냥 기념이 되는 옛 문자와 화석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기교회에 나타난 성령사역의 패턴에 따르면, 영언이 없으면 예언 같은 다른 초자연적 은사도 없고, 하나님께 영적 비밀을 직고하는 "영적인" 기도(고전 14:2b. 바울은 이에 따라 그 누구보다 영언을 많이 했다! 고전 14:18)도 없다. 이 신비는 아는 신자들만 안다.    

미지근함과 자만: 현대 라오디게아 교회

대다수의 신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평소 '기도 꼬리표'로만 사용하곤 한다. 예수 이름의 무한 광대한 효능을 거의 전혀 깨닫지 못한다. 과거엔 성경 교훈 그대로(막 16:17a) 예수 이름으로 질병도 고치고 악령들을 무수히 내쫓았고, 가난하고 아쉬운 가운데 주님의 교훈(일독 바람: 마 18:18~20; 28:19; 막 9:37~39; 16:17,18, 누가복음 10:17; 24:47, 요 14:12,13; 15:16b; 16:23b,24,26, 행 3:6,16; 4:12,30; 5:16; 9:28; 10:48; 14:3; 16:18; 19:5, 고전 5:4, 약 5:14) 그대로 예수 이름으로 온갖 것을 하나님께 청구하다시피 하여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쩔쩔 매며 예수 이름을 무서워하기까지 했으나(행 5:17,28,40), 오늘날은 주님의 이름을 통한 그런 권능 실천이 갈수록 드물어져 간다. 권능사역을 했어도 주님께 퇴짜를 맞은 사례였던 마태복음 7:22,23 등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현실의 빌미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 경배찬양 때마다 막연하게 입버릇처럼 "성령이여 오소서!", "임하소서!"를 부르짖어, 마치 성령님을 경배 참석자의 한 분 또는 무슨 경배의 들러리나 심지어 장식용으로 여겨지기가 일쑤이다. 증언자이신 성령께서는 정작 거듭난 신자 속에 계시면서 그 분의 권능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기를 바라고 계신데 말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에는 나날이 성령님이 당신을 나타내실 고린도전서 12장적(的)인 채널이 점점 줄어 간다. 영적인 판별도 제대로 안 해 보고 걸핏하면 모조리 다 '이단', '귀신 놀음'으로 몰아붙이니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 분의 악령 축출 사역을 바리새들이 악령들의 두목인 바알제붑의 힘을 빌어 한다고 빈정대며 단죄한 적이 있다.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바리새들의 주된 임무는 성령 훼방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주 받을 현대의 바리새가 되지 않게 자신을 돌봐야 옳다.


아무튼 하도 '마귀 방언!', '귀신 방언!', '옹알거림!', '이단 방언!'하고 떠들어대니, 자신이 애써 시작한 영언이 과연 성령의 것인지 긴가민가 의심하게 되어 안 그래도 평소 잔뜩 주눅 들어있다가 그나마 새벽기도회 때 혼자 담대하게 또는 쭈볏쭈볏 눈치를 보며 조금씩 영언을 하던 성도들도 이젠 잠잠해져 간다. "방언은 집에서 혼자나 할 것이지 왜 교회에서 그러느냐?"라고 눈을 부라리며 호통치는 목회자들도 많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교회의 경배 때 (해석용 및 화답송 용도의) 영언이 있다면서 영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도 고린도교회 모두들보다 더 영언을 한다고 밝혔다(고전 14:18,26~27,39~40). 바울이 금기시한 듯 보이는 영언은 오직 서로 자랑하며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마구 영언을 주절대는 무식한 경우뿐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 성구들이 모두 부정적으로만 뵈니, 신기하고도 안타까운 노릇이다. 결국 자기네 심사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모든 초자연적 요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목적이며, 동시에 이것은 교회에서 초자연적 권능이라곤 가장 기초적인 영언부터 몽땅 다 몰아내려는 마귀의 효율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성령의 권능을 왜곡/오용하는 신사도운동은 더구나 성령 권능사역의 전선에 찬물 아니 X물을 끼얹다시피 해 왔다. 그래서 권능사역이나 은사/영언 따위의 영적 요소 이야기를 꺼내면, 웬만한 교인들은 "무슨 소리냐? 지금은 성경시대다"라는 식으로 대답하고 만다. 성경시대이랄 뿐 동시에 성령시대임을 망각하고 산다. 그래선지 지금은 신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하는 것이 고작 평소의 기도뿐이다. 사도들과 초기교회 성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풍부히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지냈으나, 오늘날은 예수 이름이 권능과 사역의 도구가 아니라 그냥 이름일 뿐이다. 사탄의 영적 무장해제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다는 인상이 드는 대목이다.




지금 우리가 교회시대를 산다고는 하나, 권능적 시대는 다 지나가버린(?) 양 지금은 '문화적 교회시대'이다. 교회 지도자들이나 이단비평가들도 대동소이하다. 종식론 원리에 충실하려면, 은사나 영언을 멀리 할 뿐 아니라 귀신 내쫓기나 신유 등 비문화적인(?) 행각은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사도시대와 계시 시대로 끝났으니, 생각도 하지 말아야 옳단다. 결국 성경을 '반쪽'만, 아니 일부만 믿고 사는 셈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맨날 하던 거룩한 권능사역들이 지금은 다 케케묵은 원시요 거의 야만이 돼 버렸다. 성경을 통째로 믿는 신자는 희귀할 뿐더러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대이다. 그러면서도 신학이나 영성 따위는 모두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를 강조 내지 강요하는 현실이다.  


소극적인 죄

죄에는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가 있다. 영어에서는 흔히 sins of commission and omission이라고 불린다. 나 자신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짓는 죄가 있다는 얘기와도 같다. 사도 바울은 그가 주님께 받아 고린도 교우들에게 전한 계시에서 특히 영적 요소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과 더 나아가 사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것들을 열망하라고 촉구하고 있다(고전 1:7; 2:14; 12:1,31; 14:1,39,40). 여기서 '영적 요소들(프뉴마티카)이란, 말 그대로 성령님과 그 분의 신비에 연계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이지, 물적/육적/심적/혼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근거에서, 나는 바울의 이 영적인 교훈을 신자인 우리가 가볍게 여겨 소홀히 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최소한 소극적인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회자, 사역자 등 교회의 지도자가 이에 대하여 잘못 가르쳐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님의 뜻에 어긋나거나 반(反)할 경우, 물론 적극적인 죄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무익하다고 판명될 말이나 글을 함부로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마땅할 것이다. 심판 날 심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마 12:36). 하물며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거나 훼방하는 경우이겠는가. 수많은 다양한 미디어가 있고 정보의 바다가 넓고 깊다고 해서, 모든 생각과 모든 말이 다 정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크리스천들은 되도록 아니 오직 진리만, 참된 것만 정보로 흘려야 바람직하다.

선물과 약속: "너희가 보고 듣는"(!)

성부 하나님은 성자(聖子)님을 세상에 선물로 주셨고, 성자님은 성령님을 교회에 선물로 보내셨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께서 내리신 오순절 그 날에 행한 즉흥 설교(행전 2:1~37; 38~40)의 결론에서, 이 성령의 선물을 말하면서 이 약속은 당대인들과 그 자녀들은 물론, 모든 먼뎃사람들 즉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대상에게 하신 것이라고 명언했다(2:38a,39). 여기서 '먼뎃사람'들이란, 곧 시공간을 넘어선 세상과 미래의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선물과 약속은 막연하고 모호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당대인들이 현재 "보고 듣는(see and hear)", 시청(視聽) 차원의 것이었다(33절 참조). 바꿔 말하면,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나머지 약110명의 성도들은 잠자코 설교를 듣기만 했던 게 아니라 계속 영언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15절과 33절을 비교해 보라)! 이런 놀라운 광경은 첫 교회가 세워진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 베드로가 로마 군인인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벌어졌다(10:44~48). 유대인들의 동족에 비교적 가까운 사마리아 교회를 제외하고는(참고: 행 8:5~25), 사실상 최초의 이방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고넬료의 '가정교회'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성령님이 내리셔서 거기서도 영언이 시작된 것이었다.

무슨 뜻일까? 성령님과 그 분의 '보고 듣는' 영언의 선물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온유하신 성령님께서 왜 은밀하고 조용하게 일하시지 않고 자못 육적/심적이고 감각적인 '시청' 차원에서 사역하실까? 그 분은 증언자로 오셨기 때문이다(참고: 요 15:26b; 요한1서 5:7,8a)! 증언자인 그 분은 반드시 나타내 보이시고 드러내신다. 바로 그래서 바울은 영적 은사들을 "성령님의 나타내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고전 12:7).          

성령님은 성부/성자님의 영이시므로, 어제나 오늘, 언제나 한결같으시다. 그러므로 그 분이 이랬다 저랬다, 수시로 변하시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변모' 발상이나 개념은 그 분의 신격과 말씀 자체에 모순된다. 어제의 그 분은 오늘의 그 분이시고, 알파이셨던 그 분은 오메가이시다. 처음과 나중이시다.  

신본적이 아닌 '종식론'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는 주로 신학계를 중심으로 마치 성령님이 변질되셨다는 식의 망령된 주장들이 있어 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첫 교회 당시의 오순절적 역사는 사도 시대 이후 끊기고 사라졌다는 소위 '종식론이라는 설이다. 사실 이런 사상은 카톨릭교 초기부터 있어 왔다. 주로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신학을 발전시킨 소위 '교부'들이라는 사람들이 당대에 이미 그런 성령의 역사가 "흐릿하다"거나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끊겼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거의 20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 발상과 사상이 교계에 만연해 있다. '교부'들이 카톨릭교를 비롯한 기독교에 기여한 바가 컸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과오 또한 다대(多大)하다. 그들은 오점과 실수가 많은 인간이었지, 결코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다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로마서 3: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그럴 듯한 신학 제설보다 성경에 더 밀착되어야 한다.

이 '종식론'은 알고 보면, 성경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 대신 순전히 인간의 이성적/감각적 판단에 의해 비롯된 인본적인 발상이다. "지내고 보니 첫 교회와 같은 그런 현상은 이젠 더 없더라"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 통신'이 만들어 낸 오판이고 오보이다. 그것은 불신이지 진상이 아니다. 조금 전 밝힌 대로, '종식론'은 늘 변함없이 한결같고 신실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존재적 본성과 영원한 속성(屬性)에 어긋난다. 더욱이 일반 신학교에서 흔히 가르치는 교의신학(조직신학)의 신론과 성령론의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신학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신학은 잘못된 요소를 빼고 나면 여전히 유용하다! 특히 성경 원문을 다루는 성경신학은 그렇다). 베드로의 설교 그대로, 어제의 성령의 약속과 영언의 선물은 오늘날의 우리까지 포함한 '모든 먼뎃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사도시대만을 위한 짧고 단명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 점을 초기 '교부'들을 비롯한 종식론자들이 아직도 파악하거나 착안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첫 교회의 120명과 훗날 추가된 3,000명(플러스 기타), 역시 '보고 듣는' 시청 차원의 선물을 받은 사마리아 교인들(행 8:5~25 참조), 전술한 고넬료 가정, 다메섹 근교 노상에서 변화 받아 성령 채우심을 받은 사울(바울, 9'17), 바울에게 인도 받은 에베소 교우들(19:6) 등 약속의 선물을 받은 이 모든 영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 누구나 이 선물의 약속대로 기본적으로 영언자들일 수 있고, 영언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약속과 선물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교인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가 목도하는 교계 현실이어서 답답하다. 그러나 진리는 거의 언제나 소수의 것이다. 진리의 길은 넓기보다 좁다. 다수가 진리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계약(언약)과 약속이란 것은 권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어도, 효과는 언제나 쌍방적이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질 것을 한 쪽이 굳게 믿고서 이행되게(fulfilled and executed) 해야 한다. 또 영적인 선물은 수여자의 일방적인 호의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태도가 관건이고 문제시 된다. 베드로가 분명히 모든 먼뎃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 이 약속과 선물을 대다수의 교인들이 아직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은 최소한 소극적인 죄를 짓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것이 끊기고 중단됐다는 '성령변질설'과 '성령비영원설'을 성경 말씀을 대신하는 진리인 양 태연하게 천명하여 수많은 교인들을 호도해 온 종식론자들은 적극적인 죄의 범주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선물로 주신 성령의 (영구적인) 영언을 "도시락 싸 들고" 부정하며 반대하고 다니는 지도자와 교인들을 하나님이 '죄 없다'고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영언 이슈가 이전부터 늘 '뜨거운 감자'였는데, 지금은 이 감자가 나날이 다 달궈져 간다. 주된 이유는 한 마디로 영언자가 점점 더 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교계 비평가들의 단죄와 맞물려 오순절교와 은사 계열 사람들, 은사자/영언자들까지 덩달아 단죄되는 성향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영언의 사례들: 몽땅 이단?

좀 미안한 말이지만, 우선 이들 비평가들은 하도 자기의에 넘치다(?) 보니, 상황 판단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한국의 정상급/유명 목회자/부흥강사들을 비롯해 수많은 교계 인사와 사역자들이 현재 (외국어가 아닌) 성경적인(!) 영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주변의 수많은 목회자/사역자/성도들이 지금도 모두들 외국어가 아닌 영언을 하고 있다. 필자 자신 1985년 성령님의 은총을 입어 '첫 입'을 뗀 이후 감사하게도 현재까지 날마다 영언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며, 필자의 가족이 모두 영언을 한다. 필자의 막내딸은 4살 때 이미 영언을 시작했다. 물론 나와 가족의 영언도 외국어가 아니다. 성령침례를 받고 시작하게 된 영적인 언어일 뿐.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
필자가 거쳐온 모교회를 비롯한 3개 교회에서 사역했던 고(故) C(새 표기: J)모 목사는 널리 알려졌던 부흥강사이자 장로교 합동측 총회장을 지낸 분이다. 그가 젊은 시절 J 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린이들을 비롯한 교회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 영언 모임 같은 것을 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부인은 필자가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분으로 어린 나를 위해 치유안수 기도와 함께 영언 및 해석('방언통역')기도를 해 주곤 했다. 어느날 갑작스런 복통으로 그녀에게 안수를 받던 중 그 자리에서 복통이 즉시 사라지면서 영언과 해석이 나왔는데, "너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과연 정확하게 그 내용에 해당했던 필자는 그 영언과 해석을 100% 성령님의 음성을 믿고 받아들였으며 지금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또 구태여 (현 기자인) 필자의 시각으로 보지 않더라도, 지난 1980년대부터 90년대의 미주 한인교계는 '성령충만의 시대'로 평가된다. 현재도 건재하는 한국의 C모 원로목사나 H 기도원 설립자/원장이었던 고 L모 목사를 비롯한 한국의 국내외 부흥강사들이 LA와 뉴욬 등지의 굵직굵직한 한인 교계 집회를 이끌면서 수많은 영언자들이 생겨났고, 당시 J 목사, A 목사, H 목사, K 목사 등 필자도 잘 아는 뉴욕 한인교회협의회 및 목사회의 역대 회장들을 포함한 수많은 중진 목회자들도 (외국어가 아닌 성경적인) 영언을 시작한 바 있다. 정 목사의 논지에 따르면, 이들이 다 이단적인가?

특히 J 목사의 경우, 다년간 모 개혁신학교 교장을 지내온 철두철미한 보수 신학자인데도 그가 교협 중직을 맡아 있을 당시 미국인인 D. G. 목사를 초청하여 우드사이드의 N 교회에서 열린 집회 기간 중 강사의 호텔 방을 찾아갔다가 마침 호실 안에서 영언이 터져나와 방바닥을 구르며 한동안 사울 왕과 같은 경지(슈무엘A서/삼상 10'10; 19'23,24)를 헤맨 양, 강사가 유머스럽게묘사했다. 또 교협회장/목사회장을 모두 맡은 H 목사는 나의 형뻘 친구로, 현재도 날마다 때마다 영언을 하는 독실한 영언자/은사자이다. 오래 전 그와 내가 함께 다니던 미국인교회의 교우들도 90%가 ('외국어' 아닌) 영언을 했다.
미주와 한국 교계의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목회자들이 현재 영언자들이다. 이 모두가 성령의 역사이겠는가, 아니면 (일부 이단비평가들의 주장처럼) 악령의 역사이겠는가?

현대 영언을 이단시하는 비평가들이 좀 놀랄 일이겠지만,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겸 이단비평가로 필자의 '절친'이기도 한 C모 목사는 필자에게 대강 이런 진술을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미국 유학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G모 교회 사역자로서 어린 중고등 학생들의 여름 수련회를 이끌면서 마가복음을 강의하던 중 기도 시간에 참석자들의 거의 전원이 영언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렐루야로 반겼지만, 정작 그 영광스런 집회를 이끈 C 목사 자신은 긴가민가 의심하곤 했다. 현대의 영언을 믿긴 믿지만, 그런 유의 (괴이한?) 영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 목사에게 묻는다. 자신의 집회에서 영언 현상이 나타났다고 진술한 (이단비평가) C 목사는 촬즈 파햄을 이어받은 이단아인가? 자기가 이끈 집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도 정작 본인은 믿지 않는 C 목사의 태도는 정상적인 것인가? 그리고 현재 영언을 하는 필자와 가족을 비롯한 한국과 세계의 수많은 목회자들과 수 억 영언 성도들은 죄다 이단인가?  
또 묻는다. 정 목사와 같은 노선을 걷는 이단비평가들의, 영언에 대한 판단은 곧 성부 하나님과도 같은 최종적 판단인가? 진정 영적인 판단인가?

이들 이단비평가들은 종식론을 포함한 개혁주의 사상이 표준적이고 가장 성경적이라는 노선에 서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실 현대의 영언을 부정하는 종식론 입장은 단지 개혁주의의 입장일 뿐 아니라 초기 카톨릭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대다수 교회와 교파들의 입장이다. 즉 개혁교회가 아니라 교계의 거의 절대 다수가 현대 영언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수가 진리인가?

그런데도, 영언자나 은사자 (기타 신유 등 현대에도 상존하는 영적/초자연적 이적과 기사, 신비를 믿는) 등의 현재의 성령의 초자연적 권능 및 역사를 믿고 현재 체험하고 있는 성도들은 단지 오순절교/은사계열 교인들 뿐 아니라, 개혁교회권은 물론 모든 교파와 모든 교단에 두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 일부 이단비평가들의 영언에 대한 강성 비판은 어찌 보면 교계 단합을 해칠 뿐더러, 중도적/진보적인 교계가 자기네 시각으로 본다면 그들이 강조해온 '에큐메니즘'과도 모순된다. 단적으로 대표적인 오순절교 교단인 하나님의성회 등도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가. 보수적이라는 남침례교가 오순절 계열인 미하나님의성회(AG)와 교류하지 않는가? 에큐메니칼 교단의 비평가들은 하나님의성회를 비롯한 모든 오순절 교파와 교단들이 현재의 영언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감연히 손가락질 하면서 단죄할 수 있을까? 그럴 용기나 의사가 있을까? 물론 필자는 에큐메니즘에 거의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식자들은 앞뒤를 가려가며 생각을 해야 하고, 발언자들은 사리판단을 잘 하면서 말을 하고, 필자들은 더군다나 인터넷 지면에 오래 남는 글을 신중하게 써야 할 것이다. 자칫 자신들이 미숙하고 어리다는 판단을 받는다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이다.  




[영언=외국어]?

정 목사의 논지는 일견하건대, 세 겹 얼개 내지 삼중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성경의 영언은 외국어이나 현대의 영언은 외국어가 아니므로 성경적인 영언이 아니며, 따라서 현대 영언을 외국어가 아닌데도 외국어라고 했던 파햄 등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영언자들은 모두 파햄을 이어받은 이단아들에 불과할 수 있다는 암시를 똥기고 있다.
이 주장은 여러 모로 모순점이 쉽게 발견된다. 그것도 자체적인 모순 말이다. 논리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모순은 (사도)행전의 영언이 외국어로 보이지만 바울의 계시에서의 영언은 결코 외국어일 수 없기 때문에, 이 모순을 피하려고 종식론자들은 첫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영언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결국 첫 교회의 성령님과 바울의 성령님이 다른 분 또는 단기간의 '시대' 차이로 "변질"된 분이었다는 어이없는 주장과도 같다.

영언이 '외국어'라는 주장은 이미 오래 묵은 것이지만 전혀 비성경적이다. 기본 논리로도 하등 가당치가 않다. 우선, 영언은 성령께서 애당초 범(凡) 교회에 주신 성령침례(성령세례, 참고: 고전 12:13)와 언변에 의한 초자연적 언어이지만, 외국어는 초자연적인 언어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한국어가 영적/초자연적인 언어라고 주장하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정 목사는 "옹알거림을 옹호하는 어떤 사람은 '배우면 되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무슨 성령의 특별한 은사인가?'라고 반문한다"면서 "그런 말은 교묘하게 본질을 왜곡하는 간교한 말이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의 말에 동조하는 필자로서는 왜 그 말이 '간교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으로, 정 목사의 논술을 '간교한 것'이라고 필자가 뒤집어 간단히 단죄할 수도 있다. 그래도 되겠는가?

정 목사가 빗대어 한 표현인 '옹알거림'이라는 말을 영언자의 입장에서 좀 재론해 본다. 사실 어떤 인간도 옹알이로 언어 생활을 시작한다. 옹알이를 하지 않고 유창하게 말을 시작하는 아기는 단 한 명도 없다. 마찬가지로 영언도 거의 대부분 일종의 '옹알이'로 시작된다. 처음부터 마치 유창한 외국어처럼 들리는 영언도 있긴 하지만 그다지 흔치가 않다. 그보다는 "럴럴러...", "다다다...", "바바바..." 형이 더 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옹알이식 영언은 초기 영언의 일부 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성령침례를 받던 날, 혀가 굳어지면서 더(Duh)!'라는 외마디로 영언을 시작했다. 필자도 영언인지 거의 확신이 없었으나 나를 도운 사역자는 분명히 그것이 영언이라고 밝혀 주었다. 물론 현재는 '유창'하게 들리는 영언이지만.  




정 목사와 같은 '영언=외국어' 주장은 특정인이 마음만 먹으면, 예컨대 한국어 등 특정 외국어를 하는 외국인 신자가 자칭 '(진짜) 영언'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거나 위장할 위험성마저도 있다. 외국어를 웬만큼만 배우고서는 자신이 '영언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은 전혀 영적인 언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필자는 살아오면서 외국어 영언을 하는 신자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여태껏 필자가 돕거나 안수 또는 함께 기도하여 영언을 시작한 모든 신자는 한결같이 외국어가 아닌 영언을 했다. 그럼, 필자도 파햄을 대물림한 이단인가?


역지사지로, 필자는 비교적 논리에 밝다고 자신하기에, 정 목사와 혹시 일대일로 만난다면, 지금까지 이 글에서 펼쳐온 논리만으로도 정 목사를 얼마든지 확실한 이단(?)으로 몰아가는 논리를 펼칠 수 있다. 이단을 그렇게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외국어라는 지상언어는 영적인 초자연적 언어가 결코 못 된다는 점이 비평가들의 중대한 혼동과 착각이다.  

둘째로, 지상 언어인 외국어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새 언어"(막 16:17a)가 아니다. 바벨탑에서 흩어져 버린 언어의 후예 격인 인간의 낡은 언어들은 결코 영적이거나 초자연적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하늘에서 낡은 언어의 찌꺼기를 내려 주시겠는가?!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전도서 1:9~11), 따라서 낡은 언어인 지상의 외국어나 지방언어들은 그 영적인 "새 언어"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비평가들은 행전의 영언은 곧 '외국어'였다고 한사코 우겨대니, 주님의 새 것과 땅에서 말하는 낡은 '새'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나 보다. 그렇다면 혹시 장차 올 새 하늘, 새 땅도 외국 하늘, 외계인의 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는가?

[영언=외국어]라는 등식을 내세우려면, 120 성도가 말한 첫 영언이 당시까지 지상에 존재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언어라고 해야 그나마 약간이라도 먹혀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진 새 언어인 영언이 정작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날도 잔존하는 언어라면, 결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새 언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겨댄다면, 우리 주님을 잘못 알고 지내온 셈이다.


주님이 새 언어라고 하셨으면 말씀 그대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언어'이다. 그리고 어학적인 언어가 아닌, 영적/초자연적 언어이다. 따라서 이단비평가들을 비롯한 종식론자들의 [영언=외국어] 주장은 성경적이긴커녕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영언=외국어]일 수 없는 이유

그렇다면, 이제 남은 토론은 왜 성경의 영언이 외국어가 아니냐는 것일 터이다. 성경의 영언이 지상언어가 아닌 단적인 이유는 사도 바울의 계시 속에서 영언은 전혀 외국어로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이 언어가 (초자연적인 해석은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밖에는 해득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며, 심지어 영언자 자신도 (해석은사 없이) 자기 마음으로는 모른다고 했다(코14'2,14). 외국어를 하는 은사자 자신이 그 외국어의 뜻을 모르며, 해석은사자도 은사가 내려지지 않으면 그 뜻을 모른다니, 온 세상 천지에 외국어도 이런 외국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것을 '지상언어'라고 하다니, 종식론자들은 영적인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되어 있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고대 바벨탑에서 몸소 흩어버리고 혼잡케 하여 다분화 시켜버리신 그 땅의 구태의연한 언어를 하늘에서 다시 새롭게 중생시켜(리사이클링 하여?) 다시 땅으로 도로 내려 보내주신다 생각하면, 신선하다는 감각도 의식도 들지 않는다. 그런 것이 어떻게 주님이 말씀하신 새 언어일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얼마든지 지상의 언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다! 비평가들은 권능의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셈이다.

그 다음으로는 지상언어인 외국어가 영적 경배의 특별 방편일 수가 없다. 경배의 방편은 비록 모국어도 되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진 새 언어인 특수 언어가 영과 진리로 하는 경배와 영적인(옛 표기 '신령한') 찬양의 방편으로 쓰였다. 사마리아 교회의 경우 '영과 진리의 경배'는 주님이 수가 성을 방문해 그곳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하신 그 예언(요 4:23,24)이 바로 행전 8:4~25에서 이루어진 모습을 본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초기 교회의 하나인 고린도 교회의 경배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고전 14'26). 당대 교회에서 했던 영적인 찬양(옛 표기 '신령한 노래')은 바로 영언으로 화답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영언화답송'을 하는 교회들이 간혹 있다. 필자가 다니던 미국인교회가 바로 그러했다.

그 점이 구약교회와 다른 점이다. 구약 광야교회와 왕국시대 성전은 모든 경배를 오직 종족언어이자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만 진행했다. 그러나 첫 교회를 제외한 신약 시대 초기의 교회는 기존의 히브리어보다 옛 종주국의 언어인 아람어/그리스어 등을 썼고, 그 후로는 다양한 언어로 갈래를 틔운다. 하지만 첫 교회가 모든 후배 교회에 모범을 보인 것은 바로 모국어 외에 (외국어 아닌) 영언을 썼다는 점이다. 만약 초기교회에서 교우들이 거주하는 해당 지방의 언어가 아닌 외국어를 경배 때 영언으로 썼다면, 예컨대 소 아시아의 교회가 히브리어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통역했다는 얘기인데, 모슨 영적인 의미가 있겠는가?

다음으로, 바울이 말한 바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초기교회에서 사용된 영언해석은사(일명 '방언통변 은사', 고전 12:10끝, 14:26~28)도 오늘날의 외국어 통역이 아니었다! 또 해석은사자는 오늘날의 외국어 통역사가 아니었다! 만약 고린도교회에서 외국어로 히브리어 영언이 터져 나왔다면, 그 해석을 위해 이스라엘 모국인 또는 통역가가 낫겠는가, 해석은사자가 더 낫겠는가? 해석은사자는 특정 외국어가 아니라 오직 교회 내지 성도 모임에서 수행되는 영언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영언이 서로 달랐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 식 영언을 했을까, 자신이 계시받은 자기식 영언을 했을까? 그가 본디 예루샬렘 교회 출신인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으면서 성령 채우심을 받지 않았는가? 그 영언과 자신의 영언이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예루살렘교회의 첫 영언이 왜 외국어가 결코 아니었는지를 성경상으로 논증해 보련다. 첫 교우들 120명의 주류를 이룬 어부 출신 중심의 갈릴리 사람들이 평생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그것도 유창하게 한다면 해외에서 온 국제 유대인들로서는 실로 놀랍고 사뭇 존경스런 일일 터이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 저들이 단기간에 외국어 수업이라도 했다는 말인가..?"라고.  
오순절 그 날 이 요란한 영언 현장에 몰려온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유창한 외국어를 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분명 마치 낮술에 취한 사람처럼 주절주절 읊어대는 '옹알이' 식 영언을 하는데, 자기네 귀엔 자기 지역 방언으로 들린 것이다. 행 2:8a,12,13 원문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현대와 같은) 중얼중얼 영언을 하는데, 그들의 귀엔 자기네 방언으로 들렸다는 말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는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존중하는 마음을 갖지, 결코 "대낮부터 술취했나, 왜 저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날 오순절에 일어난 상황은 정말 그럴 만 했다.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쑹얼쑹얼 대는 말이 자기네 귀에는 자기네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당시는 유다와 주변국가들이 모두 종속국가였기에, 어쩌면 웬만한 현대사회보다 더 국제적인 사회였다. 당대 유대인 대다수가 하던 아람어는 물론이고, 모국어인 히브리어, 당대 국제 공통어인 그리스어,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던 소아시아의 각 지방어, 로마 제국의 본래 언어인 라틴어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흔했다. 고넬료 가정에서 터져나온 영언들도 당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외국어(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였다면, 시쳇말로 "그닥" 감동스러울 것도 없는 셈이다.

정 목사는 "배우면 되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무슨 성령의 특별한 은사인가?"라는 말을 비웃다시피 인용했지만, 사실 당대인들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부대끼며 접하던 것이 최소한 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소아시아어 등 국제언어의 소용돌이였다. 그런데 영언마저 보통의 외국어라면, 뭐가 그리 대단했겠는가? 하늘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겠는가? 오히려 실망스럽고 환멸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한 영언이 "당시까지는 자신이 몰랐던 외국어였기에 새 언어였다"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거기 몰려든 해외 유대인들 가운데는 유대 출신들도 있었다(행 2:10). 갈릴리 사람들도 포함된 유대 지방인들의 유대어(곧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외국어인가?! 그리고 120명이 제각기 외국어를 했다면, 몰려든 국제 유대인들이 최소 16개 지역(바대/메대/엘람/메소보다미아/유대/가바도기아/본도/아시아/프리기아/밤빌리아/애굽/리비아/로마/그레데/아라비아) 출신들인데 120명이 15 계열로 분류되어 최소 15개 외국어를 했다는 말인지?  




왜 외국어처럼 들리는가?

자,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에 몰려든 해외 유대인들이 놀랐던 [ 나는 그냥 영언으로 지절거리는데도 상대방은 유창한 자기 모국어로 들리게 되는 ] 그 언어현상의 시청각적 면모는 오늘날도 존재하는가? 오늘날도 선교지에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수많은 증언들을 듣고 있다. 식인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다가 대뜸 사로잡혀 먹히게 된 선교사들이 묶인 채로 마지막으로 영언기도를 하자 그 소리를 토속어로 알아 듣고 추장부터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믿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비행기 속에서 옆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도 그의 언어를 알 수 없어 영언으로 기도하는데 상대방의 귀에 모국어로 들렸다는 얘기, 훈련 받던 러시아의 한 연병장을 찾은 믿는 나그네가 허락을 받아 지휘대 위에서 울면서 했던 영언 기도에 군인들이 무릎 꿇고 엉엉 울며 회개하게 한 이야기.. 등등 여기 해당되는 에피소드가 무척 많다.

그 무엇보다 필자가 직접 현지에서 거의 겪다시피 한 실화를 말해 보련다.


1980년대말 '콴 마마'라는 중국 교계 인사가 뉴욬 한인 교계 연합 행사의 강사로 섰다. 집회 기간중 필자는 친구가 이끄는 찬양의 키보드 반주를 맡아 했다. 어느날 밤 집회가 끝난 뒤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던 강사에게 한국 교인 한 명이 다가가 말을 건네는데, 분명 중국어를 몰랐던 그가 영언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콴 마마의 말이 놀라웠다. "님은 분명 중국인도 아니시고 (중국어를) 배우신 것 같지도 않은데, 유창하게 우리 말을 하시네요."  


행 2장의 상황은 바로 이것이었다. 전능하신 성령께서는 외국어가 아닌 '옹알이' 영언도 외국인 상대방에게는 유창한 모국어로 들리시게끔 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시냐고? 그 분은 그럴 권위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왜 이단처럼 보였는가?

이제 끝으로, 그럼 파햄이나 기타 인사들이 정이철 목사가 단죄한 대로 모조리 마냥 사악하고 그릇된 이단으로 보이는데도 그것이 어떻게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발(始發)이 되었는지를 필자 나름으로 설명하련다.


완전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누구나 털면 먼지 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누구나 허를 찌르면 찔리게 되어 있다. 파햄이 문제 인사인데도 왜 그런 역사가 일어났는가? 그것이 악령의 역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성경 공부에 침잠해온 애그니스 오즈먼 양이 혹시 성경 말씀대로 안수를 하면 뭔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와 무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늘 신실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에 몰몬교에서 놀라운 시간이 벌어졌다. 여러 몰몬교도들이 어쩌다 외부 교회에 연결되어 영언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몰몬교 안에서 은사파를 이루다 결국 진리의 영에 이끌려 몰몬교를 탈퇴해버렸다.




필자 자신 교계 명사들을 비평하면서 열매와 뿌리를 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해 왔지만, 극적인 이단 단죄는 삼가해 왔다. 열매와 뿌리가 좀 이상하다고 해서 돌아가며 모조리 '이단'으로 단죄하면, 종국에는 이단 아닌 인사가 몇 명 남지 않고 말 것이요,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며 이전투구하다 급기야 아비규환을 이룰 지도 모른다. 이단 단죄는 마구 남발할 성질이 아니라, 성경적이고, 영적이고, 권위적, 최종적인 리조트여야 한다.


파햄이 이상했다고 해서 오순절교 사람들과 모든 은사자/영언자들이 다 이단적이라면, 10억 가까운 그들은 모두 아예 천국과 인연이 없고, 개혁주의자나 종식론자들에게는 천국이 떼어놓은 당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역사 속의 영언 부재?

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역사 속에 거의, 영언 사건 같은 것이 없었을까? 우리가 역사를 다 알지도 못할 뿐더러 카톨릭교 중심으로 흘러오고 구성된 현재의 '교회사'가 바른 교회사도 아니다. 역사는 뒤집어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영언 사건이 있었는지를 전능하지 못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 '부재'는 성령님 탓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탓도 아니었다!





사실 역사 속의 이런 영언 '부재' 현상은 바로 성령 권능의 초자연을 이상하게 여긴 인간의 불신과 의심 탓이었다! 온유하신 성령님은 결코 인간을 강압하며 역사하시지 않고, 그 분의 말씀대로 믿고 실행할 인간이 나타나기만 오래오래 기다리시며 바란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테면 오즈먼의 순수하고 단순한 요청이 성령의 파워하우스에 플러그를 꽂는 접촉점이 된 것이다.

왜 지난 역사 속의 숱한 '부흥'이나 대각성에서 영언이 전혀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영언이 전혀 없을 리가 없지만, 지도자들이 수상쩍게 여기고 여기저기 영언이 터져 나오는 것도 적극 막았기 때문이다.

다른 종식론자들처럼 정 목사도 요한 크리소스톰 등 후대 교부들이 영언/은사 따위의 종식을 가르쳤다고 믿지만,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는 (자기 스승과 그 스승의 스승처럼) 분명 영언을 비롯한 초자연 은사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Ante Nicene Fathers", vol 1, Irenaeus Against Heresies, bk 2, ch. 32, sec. 4, p. 847.). 일부 이론가들이 종식론의 시조로 삼아 온 어거스틴조차도 그의 신국론 등에서 영언 등을 비롯한 초자연적 이적들이 당대에 미약하여 "불분명하다"고 했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다(참고: 어거스틴, 요한1서 설교 제6화, 신국론 제22권 참조. 불확실론과 종식론과는 확실히 서로 다른 이야기이다.  




결론

오늘날 지상엔 수 억의 영언자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일부가 혹 '마귀 영언'을 받았을지언정 대다수는 정상적인 거듭난 신자들이다. 왜냐 하면 영언은 오직 거듭난 성도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을 귀, 읽을 눈이 읽는 독자들은 귀 기울여 듣기를.


정 목사를 비롯한 비평가들은 신학적 선입견을 따라 성경을 뒤틀지 말고 성령님의 애당초 뜻 그대로, 제대로 알고, 영언과 은사들을 갈망하게 되기를.

필자는 단언한다. 지상에서 영언을 '외국어',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며 의심하여 시작하지도 써 먹지도 않던 신자들은 100% 후회할 것이라고. 그 까닭은.. 영언은 하나님께 내 영이 내적인 비밀을 직고(直告)하는 영적 모르스 부호와 같은 긴요하고 소중한 도구이기 때문이다(고전 14'2b). 우리 모두 하나님 보좌 앞에 서는 그 날, 후회 없이 "제가 땅에서 계속 영언을 하게 하셨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아멘.


김삼 (목사/언론인, '티엘티' 블로거)


방언의 은사는 중지 되었는가? (Q&A) / 박신 목사

[질문]


오늘 대형 서점에서 기독교 서적을 보다가 우연히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서점에 앉아서 책을 속독으로 보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아들 옥성호 형제님께서 쓴 책인데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와 비슷한 색깔의 책으로 현재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반박 글 입니다.

성경의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린도 전서 12-14장을 상세히 얘기하고 있는데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혹시 목사님께서 이 책을 접하실 수 있으시다면 의견을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얘기하시는 방언과는 비슷한 부분도, 그리고 분명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답변]

먼저 방언에 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믿기에 막연히 방언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도 절실하게 소원하지는 않습니다.
- 방언에 관해선 성경(고전12-14장)에 기록된 그대로만 이해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며 그 이유와 근거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할 것입니다.
- 방언중지론자의 의견 중에 일부 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예컨대 오순절의 방언은 오늘날 이해하고 시행되는 방언과 달리 외국어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 반면에 방언지속론자의 의견 중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컨대 방언을 받아야만 구원 받은 것이라든지, 성령 받아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이차로 방언을 받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것 등입니다.  
- 방언 은사는 중지되지 않았지만 그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는 필히 성경 지침에 따라야 하며 특별히 은사자는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만 증거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 외에도 각종 은사에 대해 잘 가르쳐서 교인들로 은사를 받고 싶은, 사실은 이미 받은 은사를 발견하고 키워서 실현하고 싶은 소망을 생기게 해주어야 합니다.
- 그러나 방언을 훈련해서 받는다든지, 어떤 특정한 방법대로 따르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반대합니다.
- 대신에 한 개인이 방언을 받으려 하면 그 전후에 성령 은사에 관한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쳐서 부작용과 폐해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 결국 방언을 포함해 은사는 구원 받은 신자가 그 믿음을 성숙시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고 각자에게 나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소중히 가꾸고 적극적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실현해야 합니다. 반면에 개인적 이득과 욕심을 위한다면 사용하지 않아야할 뿐 아니라 그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아래의 답변은 순전히 이런 중립적 입장에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중지되었는지 지금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지에 관해선 지금껏 수 없는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또 양쪽 진영 의견들 모두가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논리적 설득력을 갖고 전개되고 있기에 언뜻 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미 수없이 논의된 내용과 같거나 비슷한 이유를 또 다시 들어봐야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저만의 특별한 이유를 먼저 말씀드린 후에, 옥 형제의 주장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언 은사 찬성의 현실적 근거

소제목을 현실적 근거라고 붙였듯이 실제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를 살피기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1. 신실한 크리스천의 방언

무엇보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실제로 방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구원의 표식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영적 우월성으로 인식해 주위 사람에게 자랑하지도 않고, 자기 개인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뜻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히 대화하며 교회의, 여기선 조직체 개별 교회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더 강함, 덕을 세우려 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교회의 영적으로 피폐한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영적으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하고 온갖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이들 신실한 형제들이 하고 있는 방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 모두가 악령의 방언입니까? 또 그럼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입니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사단에 넘어간 것입니까? 그럼 사단이 성도더러 새벽기도마다 어려운 자와 교회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도록 시킨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매일 한두 시간씩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도 많은데 구원 받은 신자를 사단이 그렇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No.” 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정신적 장애가 있거나, 감정적 절정(ecstasy)에 이르렀거나, 단순히 어떤 초자연적 기운이 작동했거나, 진짜로 혀를 열심히 굴리는 훈련의 결과로 하는 기계적 언어거나, 심지어 뇌의 손상이 있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일부 그런 근거에서 방언하는 일도 분명 있겠지만 방언하는 신자 모두에게 다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또 열거한 그런 이유들은 방언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건 부족하고 심지어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일종의 정신병자 즉, 증상이 항구화 일상화된 병자라기보다는 심각한 mental problem을 최소한 잠재적으로 지닌 셈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자주 혹은 가끔은 그런 부작용들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고등 교육을 받아 아주 지성적이고, 건전한 가치관과 사고를 가졌으며,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도 없으며, 오직 성경 말씀 위에 균형 잡힌 신앙을 가졌음에도 방언 기도를 합니다. 정말로 불신자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도해 변화시키는 신실한 성도들과 목사님들 가운데 방언을 하시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방언 은사는 받지 못했는데 남들이 하는 방언을 통변만 하는 은사를 받은 분도 실제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대로의 방언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설명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심지어 사단도 그분의 통제 아래 있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언 은사가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데 그 모두를 악령의 짓이나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 감정적 작용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옥 형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하려고 방언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히 확신하고 복음 안에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려는 사람에게 방언이 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또 성경은 분명히 성령이 임의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했는데 순전히 인간의 욕심으로 방언을 얻는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해버리면 진짜로 방언하는 자들은 전부 악령의 자녀가가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1.2. 악령의 방언이 있다면?

물론 방언이라고 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아닙니다.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이 주는 방언도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 울음 같은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기괴한 행동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또 귀신 들린 점쟁이도 다른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를, 주문과는 다른, 주절주절 외우지 않습니까? 모두가 악령이 주는 방언입니다.  

비록 악령이 주는 방언이 있고 또 교회 안에 방언 은사의 온갖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서 성령의 방언까지 배제할 이유와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엄연히 실재하는 현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방언이 성경대로 실행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방언 기도의 유익이 분명히 있으며 많은 신실한 신자와 사역자들이 영적 싸움에 그 은사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악령의 방언이 현재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성령의 방언 은사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와 알곡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공존하지 않습니까? 진짜에는 반드시 가짜가 들어붙게 마련입니다. 기독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까닭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진짜 방언이 있으니까 가짜 방언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악령의 방언만 있고 성령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이들이, 특별히 불신자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점쟁이에게 넘어가는 것만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지금껏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제 뜻은 교회 안의 방언들이 전부 악령이 하는 방언이라고 하면, 혹시 그게 아니라 단순하게 말해 정신이상자들이 하는 방언이라 해도, 거기서 불신자가 영향을 받는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분히 부정적입니다. 미국에서 은사주의자들 집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언중지론자들의 반박 구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교회 안의 방언이 악령에게만 지배되도록 계속 방관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주님 재림하실 때가 임박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한 명의 남은 자라도 찾고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비록 거짓 사역자와 거짓 성도가 많아도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저주까지 하셨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요23:3) 아무리 흠결이 많은 제도적 교회라도 완전히 사단의 놀이터로 그분이 내어주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령의 방언만 설치도록 방관하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성령의 방언을 지속케 하실 것입니다. 아니 역으로 성령의 방언이 지속되니까 사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마치 성령의 방언처럼 혼동되는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많이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여전히 세상을 미혹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 전과는 다를 것이 이제는 그분의 복음 안에 드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무기로 전신갑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신자만이 사단과 대적해 싸울 수 있습니다. 사단이 방해하는 무엇이라도 신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음부의 권세를 얼마든지 깨트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병균에 의한 질병이 아니라 사단이 심어준 질병이라면, 물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특별한 경우에도 가능하지만, 신유의 은사로 사단과 대응토록 했습니다. 악령의 방언이 성행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성령의 방언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점쟁이 앞이나 잘못된 은사 집회에 가서 일일이 성령의 방언으로 전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뜻이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영적 차원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에 방언 기도하는 자가 동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악령의 방언이 있으니까, 대적하라고 성령의 방언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를 미혹시키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거짓 방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려면 반드시 거의 같은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또 흉내 내고자 하는 모습이 이미 실재(實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성령의 방언이 이왕에 있으니까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방언해서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또 주님 오시는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계속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다 그 방식마저 효능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는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누가 봐도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교회 안에 비슷한 모습을 띈 두 종류의 은사들이, 특별히 방언에서 더더욱 성행하며 병존할 것입니다. 방언만큼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까 그러합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은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부터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관심을 우선 끌게 해놓고 율법에 묶인 유대인들과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불신자들로 영적 차원에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신 세상의 형편이 오순절보다 그리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방언 은사는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2. 방언 은사 지속의 성경적 근거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방언중지론자는 그 핵심 근거로 “온전한 것”이 오면 방언이 폐해진다는 상기 구절에서 찾습니다. 온전한 것을 신구약 66권으로 "완성된 성경"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속론자는 그것을 마지막 때의 "주님의 재림"으로 해석합니다. 또 두 진영 다 방언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자기 입장에 맞추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어쨌든 본문대로 정말 온전한 것이 이미 왔다면 방언은 폐지된 것이며, 아직 오지 않았다면 지속되어야 함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그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은 제쳐두고 이 구절에 관한 옥성호 형제의 해석만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정경의 완성시기와 방언의 유효성

그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방언중지론자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알고도 짐짓 간과하는 요소일지 모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시기와 신약성경이 27권의 정경으로 완성되어 인정받게 된 시점의 비교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8) 중에 에베소에 체류했던 시기인 AD 55 년  경에 저작한 것으로 봅니다. 신약성경이 현재 27권의 모습으로 공식적으로 확정 된 것은 397년의 칼타고 종교회의에서였습니다. 물론 4세기 초부터 오리겐이 현재 27권을 모두 정경으로 인용했고 또 다른 교부들의 서신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정경화된 칼타고 회의와 바울의 저작시기와는 단지 340년의 차이만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방언중지론자의 “온전한 것”은 정경의 완성으로 아무리 늦어도 주후 397년에는 도래한 셈입니다. 그럼 방언은 아주 길게 잡아야 340년만 유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 밖에 유효하지 않았던 은사를, 말하자면 일부 세대의 일부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유효했던 은사를 성경이 그렇게 많은 구절을 할애해서 설명할 필요가 구태여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혹시 몇 구절 안 된다고 반발할지 몰라도 방언이 신앙의 근본 요소가 아닌데도 그 정도라면 상당히 많은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역으로 따져 만약 방언이 일부 시대와 지역의 일부 사람에게만 유효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너무 많은 언급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경우는 그 배경에 담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별도로 하고 이제는 무효로 된 구절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의 정결법과 제사법과 일부 사회법 등이 대표적인 예이지 않습니까? 당시 시대에만 유효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실제 역사 속에서 궁극적인 한 지점 즉,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갔기에 당신의 계시도 그에 상응하여 발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면 당연히 폐지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 안에 예정되었던 사항이며 또 신약성경이 그런 의미에 오해가 없게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의 진술은 어떠합니까? 학자에 따라 신약성경에도 약 200여개의 예언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취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초림 때에 다 완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고, 섬기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무엇보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자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초림 전에 성취된 구절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게 된 것은 분명히 성령이 오신 후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예언도, 특별히 요한 계시록의 경우는 더더욱,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 예언이 실현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히 성취되고 혹시 그 전에 성취될 것이 있다 해도 마지막 때에 가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에 비추어 보면 방언의 경우 신약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분명 신약시대의 믿는 자를 위한 책입니다. 구약이 유대인으로 메시아의 초림을 대망케 만드는 책이었다면, 신약은 새 이스라엘인 모든 믿는 자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케 하는 책입니다. 신약은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인종의 신자들에게 절대적 진리로서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따져 보십시오. 신약성경을 신자들이 제대로 읽게 된 시기가 언제입니까? 잘 알다시피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활자 인쇄술이 발전되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본이 대량으로 출간하게 된 이후입니다. 나아가 책값이 크게 부담되지 않았던 근자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고,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가르쳐지며, 또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 전부도 사실은 성령의 간섭 하에 이뤄집니다. 그럼 문제의 고린도전서의 본문 구절도 결국은 현대의 최소한 종교개혁 이후의 독자들에게도 분명히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뜻이 됩니다.  

바꿔 말해 극히 일부 지역과 시대에만 성행하다가 1600여 년 전에 완전히 폐지된 은사를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신자들더러 참조만 하라고 기록되었다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바울 본인으로선 당장 눈앞에 문제되고 있는 사안인지라 당연히 기록했어야 했겠지만 성령님이 곧장 폐지될 은사와 그 의미와 특별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에게 계시해주고 또 기록하게 했을지는 의문이라는 뜻입니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은 후대 사람들더러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오히려 그렇다고 분명하게 기록했어야 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처럼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신자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는 성령의 온전한 조명을 받으면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의, 단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 십자가 복음 안에 완전히 들어온 자라면, 해석이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고 사람마다 해석이 다 다를 수 있으며 또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한마디로 성경 자체도 존재할 의미가 아예 없어집니다.

어쨌든 최대한 양보하여 이미 1600년 전에 효력이 상실된 방언인지라 후대 신자로 혼동하지 않게 성경에 기록했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서두에서 말한 대로 현재 방언을 하는 모든 신자는 악령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됩니다. 아무리 감정적, 신체적, 종교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쳐도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령의 통치 하에 있지 않다면 악령의 수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회색 지대는 성경적으로 없습니다. 신자에겐 매 순간, 매 사건이 다 영적 전투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현재의 방언이 영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단순한 현상이라고 우겨도, 진짜 그렇다면 그런 의미 없는 일을 성경이 구태여 그렇게 길게 기록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2.2. 옥성호 형제의 변증에 대하여

방언중지론자 가운데는 옥 형제님이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변증을 하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맹점(盲點)들이, 특별히 논리전개의 일관성이 부족하여 스스로 모순이 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일단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보고 또 그 이유를 성경의 완성이라고 단정해 놓고 해석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런 결함이 노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셋인데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2.2.1. 방언과 사랑

첫째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예언, 지식, 방언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전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셋만 따로 떼어서 말했으니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옳습니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항상 전체 문맥에서 살펴야 하고 또 그 문맥이 일차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분별해야 합니다.  

먼저 문제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한다는 말씀(10절)은 사실상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13장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장입니다. 은사의 부작용은 가르치려 했지만 세 은사가 폐지되는 시점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려는 의도가 원저자에겐 전혀 없었거나 훨씬 부차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고린도 교회의 은사자들 가운데 방언과 예언 등은 능하게 하면서도 오늘날처럼 많은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것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겼던 것뿐입니다. 특별히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이 영적 우월을 과시하거나 개인의 유익을 채우는 경우를 많이 봤기에 은사를 사용하되 반드시 사랑에 바탕을 두라고 권면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방언, 예언, 지식 셋이 8절에서 언급된 이유는 꼭 그것만 폐하고 나머지는 폐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장의 1-3절에서 사랑이 없는 은사의 대표적인 예로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산을 움직이는 믿음, 구제, 심지어 자기 몸을 내주는 것 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8절에서 그 예 든 것 중에서 대표적 예로 예언, 방언, 지식을 사랑과 대비하려고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4:1 절에서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또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3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과 방언이 곧 폐지될 것을 예상한 언급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고 두 은사를 사용하라는 면에 초점이 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에서 셋 중에서 지식은 빠지고 방언과 예언만 언급된 이유는 14장은 교회에서 말로 의사 전달하는 그 두 가지 일을 대조해 가르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의도로 저술하다보니까 13:1에서부터 예언과 방언이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13;8절에선 이왕 앞에서 예로 들었기에 온전한 것이 오면 폐지될 것의 대표라는 의미로만 다시 그것들을 거론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저자는 지금 방언의 폐해를 예언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저술하고 있으니까 방언과 예언이 자꾸 언급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옥형제의 논리대로 만약 그 셋만 폐지될 것이므로 따로 떼어서 강조했다면 중지론자들은 왜 방언만 집중적으로 문제 삼습니까? 정작 더 파고들어 따져야 할 쪽은 예언과 지식이지 않습니까? 바울도 방언보다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했는데 예언의 폐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셋만 폐지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반증 아닐까요?

만약 13:10절에서 따로 셋을 구별해서 말했기에 그 셋만 폐지되었다는 논리가 옳다고 치면, 13:13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왜 다른 은사는 다 없어지고 믿음의 은사만 끝까지 폐지되지 않습니까? 또 그럼 나머지 은사들도 혹시 폐지 시기가 각기 다른 것은 아닌가요?  

예언, 방언, 지식은 특별히 말씀과 연관되기에 성경이 완성되면 없어진다는 논리는 아주 미약합니다. 왜냐하면 12:8-10절에서 각종 은사의 종류를 말하면서 지혜도 지식처럼 말씀으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지식이 폐지되면 자연히 지혜도 폐지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혜란 지식을 삶에 적용해 활용하는 능력이기에 지식이 없이는, 꼭 학술적이 아니라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라도, 지혜가 발휘되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한 마디로 14장의 내용은 방언은 본인만 아니까 교회의 공중집회에선 통변이 없는 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교회에선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4장에서 “예언”은 순전히 교회에서 일상 언어로 설교하고 교육하고 권면하는 언어적 교통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럼 그런 의미로서 예언은 아무리 성경이 완성되어도 결코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13장은 모든 은사는 영원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은사라는 뜻입니다. 또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셋 다 영원하신 주님을 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은사가 끝까지 남고 모든 은사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면, 10절 말씀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포함한 은사들의 폐지에 대한 구체적 시점을 적시하기보다는 그 폐지가 영원과 관련되어서 이뤄질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입니다.  

2.2.2. 장성한 분량까지 자람과 방언

옥 형제가 든 방언중지의 둘째 이유는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그 때까지 12절 묘사대로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야만 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권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가야만 이루어질 목표를 왜 성경은 미리 이루라고 권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은 완성된 말씀을 통해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 않고 또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그러나 확실해지고 명료해진 것은 구원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주는 칭의 구원에 관한 측면입니다. 반면에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할 부분은 성화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이 땅에선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언제 완성되었던,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닥치든 간에 성도에겐 항상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 것입니다. 성경이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라고 했으니 “온전한 것”이 성경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어긋난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궁극적인, 정확한 의미로는 이상적인(ideal), 목표이긴 해도 현실적으로는 성취 가능한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곳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기에 최종 목표지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 상식적으로도 먼 장래에 가서야 완성되는 일이라도, 심지어 자기 생애에는 불가능하지만 먼 후손들이 달성해야 할 일도 얼마든지 선대(先代)부터 목표로 정해서 권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 쌍의 은유로 부분적으로 아는 지금과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이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반면에 그 때는 장성한 사람이 되었고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옥형제의 주장대로 성경이 없어 진리를 모르다가 성경 완성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대조한 뜻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부연해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즉, 출생에서 죽음과 영원까지 심령에 가장 깊숙이 숨겨진 것까지 하나 남김없이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도 인간이 주님을 그렇게까지 알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성경의 예언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런 토론을 벌리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특별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주님이 우리를 아는 정도로 알게 되는 때는 언젠가 도래합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서 주님처럼 영화로워질 때, 나아가 마지막 때에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이지 않습니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3:12)라는 표현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됩니다.

나아가 바로 그 앞 절에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오해의 여지없이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자란다는 뉘앙스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짝지어 대조하는 대상은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지금과 그 때, 거울과 맞대면, 부분과 온전한 것, 모두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점차 자라면서 변화 성숙되는 이미지의 대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버렸노라”라는 헬라어도 “쓸모없게 만든다.”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자람의 의미라면 이전 것이 전혀 쓸모없거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전 것에 더 좋은 것이 첨가된 것일 뿐입니다.      

설령 성경이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으로 대조한다고 해서 당연히 성장이라는 개념이 둘 사이에  개입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어린아이나, 장성한 사람은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보충 설명해주는 은유(metaphor)에 불과하지 중심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의 표현방식 또한 그러합니다. 성장의 의미를 나타내려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 가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이라고 이미 다 자란 상태를 은유에 사용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신앙성숙 하도록 권면하려는 비유가 아니라, 이 땅과 천국, 신약시대와 재림 후 새 시대를 대조하여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당연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보다는 예수님의 재림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캘빈도 온전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고 강해했습니다.  

2.2.3. 로마서와 방언

옥 형제가 방언이 중지 된 세 번째 이유로 고린도전서 외의 다른 성경에는 방언의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보다 1-2년 후에 저술된 로마서에선 그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방언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로선 방언의 은사는 곧 사라질 줄 예측했기에 고린도전서에 그런 언급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먼저 다른 성경에 언급이 없는 것은 이미 고린도전서에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곧 사라지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무리한 가정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고린도전서에도 기록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후대에 이런 식의 오해와 논란이 없게끔 명료하게 그 뜻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손으로 쓴 편지가 먼 지역의 교회까지 배달되고 또 전 교인이 회람되는 데만도 족히 최소 수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저자들도 그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저작하는 시점에 이미 방언 은사가 곧 사라질 줄 확신, 예상, 최소한 감을 잡은 저자라면 구태여 그것을 편지에 쓸 이유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편지를 읽고 그 의미를 교인들이 충분히 숙지했을 때는 이미 방언 은사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견책해야하는 당장의 필요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혀 틀림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를 고치려는 의도로 이 편지를 저작했습니다. 그 말은 저자인 바울로선 이 편지를 저작할 당시에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성경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확신 내지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마 바울을 필두로 사도들이 서신서를 저작할 당시에는 자기들 편지가 나중에 수집되어져 정경으로 완성될 것을 알았거나 예측한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 해도 저작 시에 약 3백년 후에 이 편지들이 신약성경으로 편찬 될 것이니 정신 차리고 쓰라는 영감은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전히 수신자인 교회와 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와 믿음만 심어주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신약성경의 완성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는데도 어떻게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 정경의 완성으로 뜻하고 저작했겠습니까? 너무 무리한 억측입니다. 또 후대 사람이 저자도 몰랐던 일을 어떻게 제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에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소개하지 않고 복음만 말한 것은 오히려 당시의 모든 상황과 이치에 더 들어맞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오순절에 성전 순례 온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자생적 교회입니다.(행2:10)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방언과 베드로의 설교만 보고 듣고 간 셈입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문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로선 무엇부터 전해야 합니까?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는 사도들이 처음부터 복음을 제대로 가르칩니다. 오순절 순례객은 방언 현상과 베드로의 일회 설교, 그것도 이스라엘 역사에 간섭하셨던 하나님이 보내주기로 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단순한 내용의 설교만 들었습니다. 당연히 복음의 진리와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했습니다. 방언은 그들이 이미 봤기에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기보다는 구원의 핵심진리와는 상관없으니 로마서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옥 형제의 주장대로 하자면 방언과 함께 폐지될 예언의 은사가 로마서 12장에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절)라고 소개되어야 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후대에 더 천천히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동일한 문장에서 분석해낸 이유와 근거가 방언에만 적용하고 예언에는 적용하지 않은 셈으로 논리 전개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을 예측했기에 로마서에 예를 들지 않았다면, 비록 늦게 사라질지라도 예언도 포함시키지 말았어야 합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사라지지 않을 다른 은사들 예컨대 신유, 통변은 왜 로마 교회에 소개해줄 신령한 은사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방언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일,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방언이 사라지면 통변도 자연히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통변은 폐지되는 목록(고전13:8)에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은사 폐지 여부를 옥 형제 식으로 단호하고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서 은사들을 열거한 이유는 바로 그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 안에 많은 지체가 있고 당연히 많은 은사들이 따르는데 여전히 사랑의 바탕에서 실행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의 많은 종류들을 설명하려다보니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권위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등도 포함시킨 것입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거나 조금이라도 그와 연결되는 예시는 로마서엔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도 은사를 열거한 직후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다시 강조했지 않습니까? 또 각종 은사를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맡은 직분의 본질에만 충실하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 자랑이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고 또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두 서신서를 망라한 바울의 논리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옥형제의 주장처럼 1-2년 사이에 방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2.2.4 은사의 본질

옥 형제는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와 거의 같은 반열에 두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완성되었으니 완전히 용도 폐기 되었다는 것은 그 전에는 어쨌든 성경이 맡을 역할을 대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일종의 절대적 계시이거나 그와 유사한 계시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초대 교회 시절,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초대 교회 신자들은 최소한 이 셋 중에 하나는 받았어야 그분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사도와 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음으로 계시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초대교회 모두가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다 받은 것은 아니기에 성경은 모든 성도가 이 세 은사 중 하나는 받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그 셋은 계시에 준하는 은사라는 언급은 있었어야 합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전이니까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 셋은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않아도 될 만한 은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12:11)

우선 은사는 “성령의 (겉으로) 나타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내면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본인이나 제삼자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나서 자신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또 각 사람에게 성령이 당신 임의로 나눠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각 지체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방언과 예언과 지식들도 당연히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을 수 있는 은사였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꼭 받아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고 했습니다. 방언과 가르치는 말씀(여기선 예언을 의미)을 계시와 분명히 다르게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언이란 장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도 일부 포함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선 주로 방언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14:22)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제 삼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이고, 예언은 통용어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예언이 성경 완성으로 폐지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바울의 초점은 시종일관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방언을 통변자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불신자와 방언을 받지 못했거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영적 지식이 모자라는 자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제거하는데 두고 있습니다. 곧 폐지될 방언이라면 그렇게까지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등도 다른 모든 은사와 같이 이미 계시된 말씀이나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권능이나 은혜를 더 정확히 이해하여서 주위에 증거, 교육, 실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초대교회에 한해 말씀을 대체할 만한 계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와 그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설교들만이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이 셋도 문자 그대로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는 한에는 그 은사의 나타남도 계속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악령도 설치고, 악령의 방언이 있는 한 성령의 방언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컨대 방언이 구원과 성화에 절대불가결한 계시의 역할을 맡았기에 성경이 완성되자마자 폐지되어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3. 맺는 말

결론적으로 옥형제가 온전한 때를 성경이 완성된 때라고 든 세 근거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무리하고도 부족한 해석입니다. 방언중지라는 예단된 결론에 맞추려다 보니까 성경을 좁은 시각으로 풀어나간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전의 다른 책들이 참고할 내용이 풍부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물론 책의 다른 부분까지, 본 논의에선 구태여 다룰 필요가 없었음,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를 좀 더 넓혀 주었고, 옳고 그름을 떠나, 또 방언 은사의 부작용과 폐해를 다시 심각하게 지적했다는 면에선 분명 이 책의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대할 때에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온전한 때에 방언, 예언, 지식이 폐해지리라는 말씀의 근본 목적은 그 폐기시점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영원하도고 진정한 사랑의 바탕 위에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그 때를 밝히자면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에 따라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전에는 비록 방언이 폐해가 많아도 지속될 것입니다.

만약에 방언중지론자의 주장대로 성경 완성으로 방언이 폐지 된 것이 옳다면 현재 신실한 교인들이 방언기도를 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이고도 합리적인 해석을 내어 놓아야만 합니다. 아니면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와 같은 크기로 그들은 악령의 부하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정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방언 반대의 주장만큼 예언과 지식의 폐지에 대한 성경적 논의는 따라 나와 주어야 합니다. 예언과 지식이 정확히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폐지되었는지에 관해 그동안 있어왔던 방언의 논쟁만큼 활발하게 전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 주장의 모순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신약성경은 신약시대 즉, 성령시대의 신자를 대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주후의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항상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이 수없이 남아있습니다. 설령 일부 성취되었다 해도 정확한 의미는 그분이 다시 오셔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달리 신자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 전부를 기록된 내용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함부로 일부 내용을 빼버려선 안 됩니다. 방언을 폐지하면 그와 관련된 고린도전서 12-14장의 일부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게 아니라 후대의 독자에게 경고만 줄 목적이라고 해석해도 누차 강조하지만 현재 방언을 하는 신실한 신자에게 정말로 납득될 만한 확정적인 증거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양과 염소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성령이 주는 방언과 악령이 시키는 방언이 교회 안에서도 혼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주었습니다. 또 성경은 그 분별의 기준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계 내부에서 서로 방언이 중지되었다 지속되고 있다는 논쟁은 접어야 하고 오히려 이왕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또 그래서 그 폐해를 어떻게 방지할지에 관한 논의와 실천으로 초점이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의 폐해를 스스로 줄이고 영분별을 정확히 해나가다보면, 실현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언젠가는 이 논의에 대한 모두가 공감하는 확실한 정답도 자연히 얻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알다시피 갈라디아서 5:22, 23절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 안에서의 화합”입니다. 반면에 악령에 넘어간 육체가 도모하는 일은 그와 완전 대조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온갖 악행으로 인한 분열”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있는데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분의 향기를 더 드러내느냐 여부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되 예수님을 더 확실히 증거하며 성도 간의 화평도 더 증진되면 성령의 방언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하면 할수록 은사자 개인이 앞세워지고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면 악령의 방언입니다.

4/21/2010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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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왜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오순절날에 120명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이것은 며칠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5)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처음 나타나는 이 체험은 단지 전 생애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의 시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령으로 늘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마도 하나의 예는 이 점을 분명히 해 줄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전력을 생산하는 저수지와 비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우리들의 저수지 건축은 완성이 됩니다. 이제 우리들은 유용하고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수지의 문이 열리고 강물이 그곳을 통하여 흘러내리기까지는 전력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고, 성령님은 우리 속으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흐릅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효과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저수지와 관련해서, 이 전력을 만드는 체험은 단 한번 일어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 진행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전력이 낮아질 때에 우리들은 그 자원으로 되돌아가서 축복하는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다시 흘러 들어 오셔서 새로운 전력을 공급하시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초대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새로운 성령의 능력의 충만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다시 한번 기도를 드렸으며,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 충만한 신자가 주님을 섬길 때, 영적 전력의 소모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능력을 재충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성령님께 열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한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받고 주는 것, 성령 충만함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고 복음의 사역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의 연속적인 과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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