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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고의 명물 발보아 팍은 역사가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68년 샌디에고의 지도층이 1,400 에이커의 땅을 시 공원(City Park)으로 조성하였는데 처음에는 나무를 심고 정원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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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공원 조성은 1892년 케이트 세션스(Kate Sessions)라는 묘목상이 약 32에이커의 땅을 상업용도로 쓰는 조건으로 연간 100그루의 묘목과 꽃, 잔디를 심어주었습니다. 세션스의 노력으로 여러 가지 진귀한 식물들이 심어지고 가꾸어졌는데 지금도 그녀의 노력이 깃든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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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공원모습을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15년에 이곳에서 열렸던 파나마 아메리칸 국제 박람회 (Panama-California International Exposition)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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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까지 시티 공원으로 불리던 이곳을 새로이 이름 짓기 위해 공모를 하였는데 발보아 팍으로 당첨이 되었습니다. 오래전 파나마 원정당시 태평양 바다를 처음 발견한 유럽인으로 간주된 스페인 출신 바스코 뉴네즈 데 발보아 (Vasco Nunnez de Balboa)를 기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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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국제 박람회는 파나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미국과 파나마 운하의 관계를 조금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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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부터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연방에 속해있었습니다. 미국이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요청을 Colombia가 거절하자 미국은 파나마에 독립을 부추기고 지원을 하여 1903년 새로운 파나마 독립정부를 출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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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정부는 프랑스 사업가인 Philippe Bunau-Varilla를 내새워 미국과 협정을 맺게 되는데 The Hay-Bunau-Varilla Treaty로 불리는 이 조약은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 5마일 반경을 영구히 미국이 자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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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프랑스가 1880년에 운하 건설을 시도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의해(1904-1914) 완공이 됩니다. 운하가 완공되자 미국은 운하 반경 50마일에 해당하는 지역을 점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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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운하로 인해 나라가 두 동강이 나 버린 파나마는 매우 불안해했는데 더구나 운하의 건설로 인한 이익이 파나마인들에는 거의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화가 난 파나마인들의 시위가 들끓게 되었고 미국과 파나마 정부는 미국 점령지역에 대한 문제를 놓고 협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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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운하 지역 60%를 1979년에 파나마에 돌려주는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12월 31일자로 운하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역을 파나마에 귀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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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운하의 소유는 파나마에 넘어갔으나 운하의 운영과 보호를 위한 미국의 입김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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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미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오던 배들이 약 15시간 만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 올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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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퍼 탱크로 불리는 유조선이나 항공모함 등은 통과가 불가능해서 이후로는 파나마운하에 맞는 사이즈로(Panamax) 배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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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52억불을 들여 지금의 운하를 두 배로 늘리는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2014년에 완공이 된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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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보아 공원으로 돌아가서 공원 안에는 14개의 박물관과 수많은 정원들 그리고 식당 기념품점이 입주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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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고 자연 역사박물관(San Diego Natural History Museum)이 1874년 출범했고 1905년에는 예술품과 공예품전시를 위한 The Marston House 가 완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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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에서 16년 사이에 열린 국제 박람회를 위해 엄청난 건물들이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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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고 인류 박물관(San Diego Museum of Man)이 들어선 캘리포니아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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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 파이프 오르간을 소장한 Spreckels Organ Pavilion, Balboa Art Conservation Center, Museum of Photographic Arts, Museum of San Diego History Archives and San Diego Model Railroad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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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Diego Botanical Foundation, San Diego Civic Youth Ballet, San Diego Floral Association, San Diego Junior Theater and the San Diego Youth Symphony, Mingei International Museum and San Diego Art Institute: Museum of the Living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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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0년에 들어선 Japanese Friendship Garden등이 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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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Lily Pond와 Botanical Building 은 샌디에고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히는 장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샌디에고 동물원(San Diego Zoo)이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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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아 팍의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며칠간의 시간도 모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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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많은 박물관들 중 입장료를 받는 곳이 있고 무료로 입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요금은 장소에 따라 $6 - $12을 받습니다. 만약 $43 패스를 끊으면 14곳 박물관을 전부 1회씩 관람하고 동물원은 할인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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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흥미로운 정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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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예술품을 소장한 박물관들 그리고 역사가 담긴 건축물을 볼 수 있는 발보아 팍은 남가주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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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Timken Museum of Art에 소장된 40인의 순교자(40 martyrs of sebaste) 입니다. 전 세계에 5장 밖에 없는 귀한 그림이라고합니다. 이 박물관에서는 사진을 전혀 찍지 못하게 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몰래 한 장 찰칵 했습니다. 용서하소서.  이 그림 뒤에는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베누고의 풀무 불 그림이 있는데 천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 후 접어서 보관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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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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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엑세사리와 물건들로 가득한 기념품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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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가가 괜찮은 식당들도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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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마르투스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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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의 날씨가 무척 덥다지요.
저도 지난 주말 더운 날씨에 좀 무리했더니 몸살이 나려는지 몸이 좀...
그래서 시원한 음악과 함께 겨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오늘 언젠가 읽었던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사냥하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에스키모인들에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늑대 사냥법이 있다고 합니다. 얼음바닥에 가축의 피를 적신 날카로운 칼을 꽂아 놓으면 냄새를 맡은 늑대가 다가와 그 칼을 핥기 시작합니다.

칼날 위에 얼어붙어 있던 피를 모두 핥아 내고, 결국 날카로운 칼날을 핥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칼날에 혀가 베이게 되겟지요.

그러나 피맛에 취한 늑대는 그 피가 자신의 피인 줄 모르고 계속 핥고 또 핥아 댑니다. 어차피 얼어있는 칼날이라 고통을 느끼기는 힘들겠지요... 그래서 계속 핥게 됩니다. 자꾸만 어지러워지는데도 계속..

그렇게 자신의 피를 다 흘리며 서서히 죽어 가게 된다고 합니다..

유혹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마약 일수도 있고 그보다 조금 익숙한 담배 술 더욱 나아가서는 게으름.....

내가 잠시 편하다고, 아니면 즐겁다고 행하던 것들이 결국 나 자신을 낭떠러지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절제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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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대장쟁이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무엇도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 하실까봐 자신의 몸종 애굽여인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하여 하갈이 잉태하였습니다. 자신이 잉태함을 깨닫자 하갈은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래가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았다 하여 하나님께서 그걸 사용하실 턱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끼어들어 만드는 것은 다툼과 고통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 불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뻐꾸기라는 새가 생각났습니다. 뻐꾸기는 우는 소리가 ‘뻐꾹, 뻐꾹“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시계의 시각을 알리는 소리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뻐꾸기란 놈의 하는 짓이 몹쓸 짓입니다. 맷새, 종달새, 떼까치, 할미새 같은 자기보다 좀 작은 새들의 둥지를 찾아다니며 알을 낳습니다. 보통 열 두어 개의 알을 이곳저곳에다 한 개씩 낳으니 열 두어 새들의 둥지와 그들의 인생(조생?)을 망치는 셈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다른 새는 뻐꾸기의 알을 자기의 알과 함께 열심히 품습니다. 그런데 뻐꾸기의 알이 제일 먼저 깨어납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뻐꾸기는 다른 알들을 모조리 둥지 밖으로 밀쳐내 버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미새는 자신의 새끼들을 다 죽인 원수인 뻐꾸기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알고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먹이며 기릅니다. 나중엔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커진 새끼 뻐꾸기를 먹이느라 등골이 다 빠집니다. 너무나 불쌍합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불신이 낳은 애굽여종 하갈의 아들....., 뒤늦게라도 사래가 후회를 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갈과 하갈의 아들이 아브람과 사래의 약속의 아들을 밀쳐내 버리고 둥지를 차지하는 뻐꾸기가 되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브람과 사래가 뻐꾸기를 자신들의 둥지에 끌어들인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하는 불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사래가 잉태한 하갈을 내어 쫓습니다. 뒤늦게라도 하갈을 내쫓으니 잘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어야 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자신들의 불신의 열매, 하나님의 일에다 뻐꾸기를 불러들인 씨앗의 열매를 후손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남겨주게 됩니다. 그 뻐꾸기 둥지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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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여종 하갈이 뻐꾸기(?)를 임신한 몸으로 쫓겨나 광야의 샘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를 셀 수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이스마엘이 들나귀 같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은 그를 치고 그는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은 “내가 어떻게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하면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로 부릅니다. 그리고 사래에게 돌아가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게 하시거나 태어났더라도 죽거나 후손이 번성하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번성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세력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부르신 자, 믿는 자들을 번성케 하시고 이기게 하시면 좋을 것을... 싶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아들과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아들로 비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나타나셨고 이스마엘도 번성케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나 원수의 자식들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고 계십니다. 전혀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차별 없이 다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들보다 하나도 더 나을 것 없는 죄인이었던 내가 구원을 얻은 것으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교만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원수이었을 때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사 아들을 내어주신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셨던 것처럼, 우리도 원수같은 저들에게 복음 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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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나의 삶의 모습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지 ...

늘 닮고싶고 늘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출처: 사모님사모님/켈리 - 힘찬글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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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Of Christian Liberty and Liberty of Conscience)

 

1.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조 1)

먼저, 20장에서의 자유의 의미와 신앙고백서 제9장에서 이미 다룬 자유의 의미는 다른 것임을 밝혀 둔다.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 즉 인간이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외부로부터 강요 당하거나 또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본래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유는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의 죽음으로 값주고 사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께서 부여해 주시는 진리 안에서 성도들이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 즉 요8:32에서 말씀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부여해 주시는 자유함인 것이다. 자유함을 제19장의 율법 바로 다음인 20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전에는 율법에 순종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인 우리는 그 율법에 얽매임 없이 자유함 가운데에서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와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누릴 수 있는 본래의 자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후 죄의 노예상태에 있게 됨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죄 값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1)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을 대신 지켜 주신 그 순종과 댓가 때문에 성도는 은혜로 인하여 생명의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생명을 얻는 수단으로써의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2) 성도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다. 성도는 더 이상 사탄이 지배하는 죄의 종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3) 성도는 죄의 마지막 요구인 사망으로부터 자유하다. 비록 성도도 죽지만, 죽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자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율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더욱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다.

 

2.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기준과 자유 (신조 2, 3)

성도에게 주어진 신앙 양심의 기준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될 수가 없으며 그의 말씀만이 양심의 규칙이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교회와 양심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거나 과장된 사람의 교훈들과 계명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속박 당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과거 중세시대의 로마 카돌릭 교회의 부패 요소 중 하나로서,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성령의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대신에 교황과 사제들의 말을 맹종함으로 신앙의 양심이 침해 당 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도 개신교의 어떤 교파들의 교회가 어떤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게 금하는 등 성경에 어긋나고 더하여진 사람들의 주장과 규칙들로 성도들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속박하고 무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사신 자유를 성도들에게 주셨기에 성도들은 이 신앙 양심의 자유를 감사함으로 바르게 누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그 자유를 남용하여 무책임하게 죄를 범하거나 정욕에 끌려 남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육체의 정욕을 죽이게 하기 위함이며 (5:22-24) 그리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12:11).

 

3.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의무 (신조 4)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구애를 받지 않을 자유를 주셨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성도의 의무도 함께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국가에게 성도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권세를 주셨고 또 그 권세를 가진 자들은 그 자체의 영역 안에서 그 권세를 시행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자기의 영적 자유를 구실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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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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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 늦은 후회 ◈
      
      
      
      평생을 일그러진 얼굴로 숨어 살다시피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심한 화상을 입어 자식들을 돌볼 수가 없어
      고아원에 맡겨 놓고
      시골의 외딴집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한편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자식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라며 나타난 사람은
      화상을 입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손가락은 붙거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낳아준 아버지란 말이야?"
      자식들은 충격을 받았고, 
      차라리 고아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더 좋았다며
      아버지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은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혼자 외딴집에서 지냈습니다.
      
      몇 년 뒤, 
      자식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동안 왕래가 없었고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자식들인지라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별다른 슬픔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낳아준 아버지의 죽음까지 외면할 수 없어서
      시골의 외딴집으로 갔습니다.
      
      외딴집에서는 아버지의 차가운 주검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을 노인 한 분이 문상을 와서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버릇처럼 화장은 싫다며뒷산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아버지를 산에 묻으면 명절이나 때마다 찾아와야 
      하는 등 번거롭고 귀찮아서 화장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화장하고 돌아온 자식들은 다시 아버지의 짐을 정리해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덮었던 이불이랑 옷가지들을 비롯해 아버지의 흔적이 
      배어 있는 물건들을 몽땅 끌어내 불을 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책들을 끌어내 불 속에 집어넣다가 빛바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불길이 일기장에 막 붙는 순간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얼른 꺼내 
      불을 껐습니다.
      그리곤 연기가 나는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읽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일기장을 읽다가 그만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일기장 속에는 아버지께서 보기 흉한 얼굴을 가지게 된 사연이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일기장은 죽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로 끝이 났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여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 놈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 날 당신을 업고 나오지 못한 날 용서하구려. 
      울부짖는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당신만을 업고 나올 
      수 가 없었다오.
      이제 당신 곁으로 가려고 하니 너무 날 나무라지 말아주오. 
      덕분에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오. 
      비록 아버지로서 해준 것이 없지만 말이오..."
      
      "보고 싶은 내 아들 딸에게.
      평생 너희들에게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짐만 되는 삶을 살다가 가는구나.
      염치 불구하고 한 가지 부탁을 하려한다. 
      내가 죽거들랑 절대로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난 불이 싫단다. 
      평생 밤마다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리며 30년 넘게 살았단다.
      그러니 제발...!"
      
      뒤늦게 자식들은 후회하며 통곡하였지만 
      아버진 이미 화장되어 연기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아버지의 희생 앞에서
      그저 가슴 먹먹한 눈물만 흐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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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33번째 날인 지난 2월 2일에 일루미나티의 제전으로 치러진 2014 슈퍼볼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미국의 일부 대형교회들이 주일예배를 취소하거나 시간을 변경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애틀랜타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노스포인트커뮤니티(North Point Community)는 주일 오후 6시 30분 예배를 취소하고 교회 웹사이트에 “슈퍼볼 경기를 즐기세요”라는 문구를 올려놓았다. 뉴스프링스교회(NewSpring Church)와 워싱턴D.C의 피어스 카운티에 있는 일부 가톨릭 성당들도 저녁 미사를 취소했으며, 타코마의 사운드라이프교회(Sound Life Church)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한 체육관에서 챔피언십주일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기사원문>> “하나님 잠시만요, 교인들 슈퍼볼 보고 가실게요!”

 

 

 




하프타임 공연에 등장한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대표적인 상징인 피라미드 - 위의 사진이 2013년 하프타임 공연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이 프리메이슨 33도를 기념하기 위해 2014년 33번째 날(2월 2일)에 열린 슈퍼볼 하프타임 때 등장한 피라미드의 모습이다. 
 



Broncos Jersey의 Peyton Manning을 응원하는 팬들이 보여주고 있는 666과 펜타그램

 

 

 

 

 

 

 

 

MVP에 오른 시애틀의 수비수 말콤 스미스가 인터뷰 때 입고 있는 옷에 태양빛이 비추는 전시안이 새겨진 피라미드 문양이 새겨져 있다

 

 

현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선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매년마다 일루미나티의 제전으로 치러지고 있는 슈퍼볼 경기를 위해 교회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배의 의무(권리)마저 외면했다는 소식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교회가 세상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논리로 시작된 교회의 세속화가, 결국 교회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할 시간에 사탄 마귀를 찬양하는 일루미나티의 제전을 관람하며 열광하는 교회들의 모습은, 그 옛날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 앞에 열광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점차 사단의 회로 바뀌어가는 세속화된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할 것이다.

  

 

 

 

- 예레미야 -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 칼릴 지브란


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모든 걸 사랑하라고
또한 다른 이들이 헐뜯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라고.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까지도 고귀하게 만든다는 걸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는 사랑이
가까이에 피어난 두 꽃 사이의 거미줄과 같았네.

그러나 이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는 후광(後光)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것을 감싸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을 에워싼 채
영원히 빛날 후광과도 같다네.

2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형태와 색채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라고
또한 추해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일 때까지
잘 살펴보라고.

내 영혼이 이렇게 충고하기 전에는
아름다움을
연기기둥 사이에서 흔들리는 횃불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연기는 사라져 없어지고
불타고 있는 모습만을 볼 뿐이라네.

3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혀끝도 목청도 아닌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그 날 이전에는 나의 귀가 둔하여
크고 우렁찬 소리밖에는 듣지 못했네.

그러나 이제 침묵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으니
시간과 우주를 찬송하며
영원의 비밀을 드러내는 침묵의 합창을 듣는다네.

4
내 영혼이 나에게 말했네
잔에 따를 수도 없고
손에 들 수도
입술로 느낄 수도 없는 포도주로
나의 갈증을 풀라고.

그 날까지 나의 갈증은
샘에서 솟아난 한 모금으로도 쉬이 꺼지는
잿불 속의 희미한 불씨였네.

허나 이제 나의 강한 동경(憧憬)은
하나의 잔이 되었고
사랑이 나의 포도주로
그리고 외로움은 나의 즐거움으로 변하였다네.

5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보라고.
우리가 매달려 온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었음을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 나는, 겨울에는 따스함으로
여름에는 서늘한 미풍으로 만족했으나

이제 내 손가락들이 안개처럼 되어
붙잡았던 모든 것들을 떨어뜨려
보이지 않는 나의 갈망들을 뒤섞어버리려 하네.

6
내 영혼이 나를 초대했네
뿌리도 줄기도 꽃도 없는 보이지 않는 나무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예전에 나는 정원에서 향기를 찾았었고
향긋한 풀잎이 담긴 항아리와 향기로운 그릇에서
그걸 찾았었네.
그러나 이제 타버리지 않는 향기만을 느낄 수 있네.
지구의 모든 정원과 우주의 모든 바람보다도

더욱 향기로운 공기를 숨쉬고 있네.

7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미지의 것이 나를 부를 때
"나는 따르겠다." 대답하라고.

지금까지는 시장에서 외치는 목소리에만 대답해왔고
잘 닦여진 길로만 다녔었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깨달음을 한 마리 말로 삼아
미지의 것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또한 길은 그 험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놓인
사닥다리가 되었다네.

8
내 영혼이 나에게 시간을 헤아리라고 훈계했네
"어제가 있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다." 말하면서 그 때까지 나는
과거란 단지 잃어버린 채 잊혀질 시대라고 생각했었고
미래란 내가 얻을 수 없는 시대라고 여겨왔었네.

이제는 이것을 배웠다네.
덧없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시간이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젠가는 얻어지는 것이며
마침내는 실현되리라는 것을.

9
내 영혼이 나에게 말하였네
"여기에, 저기에, 또 너머에."라는 단어들에 의해
나의 자리가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나는 언덕 위에 서 있었고
다른 모든 언덕들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언덕이
실로 모든 언덕이기도 하다는 것과
내려가는 이 골짜기도
모든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네.



10
내 영혼이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자고 있을 때 깨어서 보고
그들이 깨어 있을 때 베개를 찾아 나서라고.
내 생애 동안 나는 그들의 꿈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 역시 내게 그러했었네

그러나 이제, 낮에는 내 꿈 속을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자는 밤에는 그들이 자유로움을 보며
그들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되었네.

그림: DANIEL GERHART


1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지나친 칭찬에 우쭐해 하지도 말고
비난받았다고 괴로워하지도 말라고.
예전에는 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의심했었지만

이제 이것을 배웠다네.
나무는 칭찬이나 두려움, 부끄러움이 없이도
봄이면 꽃 피고
여름에 열매 맺고
가을에는 잎을 떨구고
겨울에는 홀로 앙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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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시작! 5분만에 보는 지구와 달의 탄생영상!


http://youtu.be/XbJAd5mtH-s


▼[1분만에 지구 한바퀴]환상적인 지구의 모습


http://youtu.be/Dw4TqbNgVqM


▼ 허블망원경에서 본 우주의 놀라운 광경


http://youtu.be/KgQ16F4sDQA


▼우주의 크기(당신은 신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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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역사화된 구속사적 종말론






1. 들어가는 말.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었던 이 장림 목사의 시한부 종말론이 신학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 기독교계를 강타한(1992년) 이래로 종말론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야 할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생존의 위기인 환경문제가 대두된 이래로 관습적이고 교리적인 종말론은 오히려 묵시적인 우주적 파국과 연결되어 환경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인류멸망을 계속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필요성과 이유 때문에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더욱 시급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약의 종말론이 방대한 연구과제로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의 연구대상인 신약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 안에 담겨있는 예수의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의 종말론은 신약학계에서 200년 이상 줄곧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되어갈 전망이다. 이러한 신약학계의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지금까지 예수의 종말론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제시되어 왔다. 이것에 관한 제학설들을 연구사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A. Ritschl은 “윤리적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고 공동체 내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인도하길 원하는 목표인 최고선(最高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에서 우러난 상호간의 행위를 통하여 실현되는 인류의 윤리적 공동체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자란다.

이 견해에 반대(反對)하여 J. Weiss는 “철저한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엄격히 미래적이고 초(超)세상적인 크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서 가까운 미래에 아직 그 세대 내에서 우주적인 파국을 통하여 동터온다.

이와 같은 철저한 종말론으로부터 R. Bultmann(과 M. Dibelius)은 “현존적 종말론”(die aktuelle Eschatologie)을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묵시론에서 빌어왔고 한번도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하여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최후(의 날)를 선포한 선지자였다. 불트만은 이러한 임박한 세계 전환기에 대한 신화적 선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는 세상에 반대하고 하나님을 찬성하는 결정적인 결단이 자기의 말씀에 대하여 지금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이런 방법으로 둘러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입장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며, 그리고 그의 결단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의식은 결단의 시간이 세상에서 바로 여기에 와 있다는 의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하여 C.H. Dodd은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윤리가 아니라 능력이다. 이 나라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앙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성의 영향력 있는 관철인데 예수의 오심 안에서 이미 현재적이다. C.H. Dodd의 영향을 받은 J. Jeremias는 그의 설을 수정해서 대안으로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을 예수의 비유연구를 통하여 제시한다.

불트만과 아주 유사한 입장을 취하면서 H. Conzelmann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적 종말론”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에게는 그렇게 가까이 있어서 그것은 이미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없다. 관찰자가 오히려 완전히 요구되어진다. 예수는 언제라는 질문을 넘어서 버린다. 그의 부르심을 듣는 자는 즉각적인 회개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W.G. K?mmel은 위의 입장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보면서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는 예수가 그 자신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영향과 자신의 죽음 후에 그 나라의 궁극적인 실현 사이의 중간시기를 고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미래적 도래를 모두 말했다고 생각한다.

H. Conzelmann과 W.G. K?mmel과는 조금 달리 E. J?ngel은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적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는 불트만이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비유들을 인용하면서 씨앗의 비유는 그 미래적 관점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통치의 미래적인 차원에서 특이한 것은 이 미래가 현재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미래는 장래에 올 그 무엇이 아니라 현재로 투사되고 있는 미래이다. 즉 이 미래 -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 는 예수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하나님 사랑의 제안을 통하여 현재로 투사된다. 신약의 종말론의 전제로서 이런 예수의 종말론은 신약의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신약의 종말론(=신약성서 기자들의 종말론)은 다른 신학적 관점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뿐만 아니라 인자의 재림, 성령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등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특별히 재림과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저마다 각기 나름대로 종말론을 그가 속해있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재림을 이해하는 대로 전개하고 있다. 재림과 관련하여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이들의 종말론을 연대기적으로 개관하면, 우선 바울은 AD 약 50년에 집필한 그러므로 그가 가장 먼저 쓴 데살로니가전서에 의하면 임박한 재림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생전에 도적같이 임할 “임박한 재림에 대하여 항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권면한다(비교. 살전 4:13-5:11). 거기에 따르면 재림은 꼭 일어나며 그것도 곧 일어난다. 재림 때에 살아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살전 4:15). 그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살전 4:17). 이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임박한 재림을 확언한 바울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것에 관하여 훨씬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7절에서 재림 전에 죽는 교인이 생길 것을 완전히 배제했지만 AD 54/55년에 집필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서는 죽는 교인이 몇 명 있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에 기록한 로마서에서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재림이 지연되고 죽는 사람이 생기자 임박한 재림기대에 대한 표상이 처음에는 수정이 되었다가 더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되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Q저자는 AD 약 50-70년에 집필한 예수의 어록에서 재림의 지연 때문에 임박한 재림 기대를 언제 오실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오시는 재림의 항시 기대로 변경하여 신자들의 나태해짐을 경고한다(마 24:39-51 병행 눅12:36-46). 마가는 유대 전쟁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는 상황적 시점에서 인자 예수의 재림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갖고 그의 종말론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기독론과 구원론과 연결하여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유대 전쟁과 같은 시대적 사건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징후이나 그것의 시점은 역사의 마지막 근거이며 지배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로 머물러 있다. 마태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면서(비교. 마 22:1-14) 교회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서 있다고 본다. 그는 재림의 지연 때문에 이 중간기를 사는 마태 공동체는 그 기간의 연장을 계산에 넣어야만 하지만 재림이 언제 올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요한은 임박한 재림 지연의 문제가 더 이상 초미의 관심사가 아닌 1세기의 마지막 십년 대에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재림을 다른 세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이처럼 재림과 관련해서 모든 저자들의 종말론이 각각 특색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전적으로 더욱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이들 중에서 마가복음서 저자와 Q문서 저자이후에 이 두문서를 사용한 누가문서(=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의 종말론도 이 천년이 지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학적 반성의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런고로 이 소고에서는 집중적으로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을 상세히 다루려고 한다.

2.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은 그의 나머지 신학적인 관점들, 예를 들면 구속사, 하나님의 길, 종말의 역사화 그리고 Elija-revidivus (엘리야-재생) 기독론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종말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관점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1) 누가문서의 구속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대한 편집사적 연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H. Conzelmann은 누가를 구속사의 신학자로 보고 그의 구속사는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재림 때까지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이 구속사는 이 두 시점 사이를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한다: 이스라엘, 즉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 (미래적 구원의 선(先) 제시로써)예수의 시대, 예수의 등장과 그의 재림 사이의 시대, 즉 교회 내지는 성령의 시대. 이 세 시대들은 연속성 안에 서있고 이 시대들의 중심은 예수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 “Conzelmann적인 구속사의 세 단계 나눔은 누가에게 근본적인 ‘약속과 성취’란 두 단계 도식에 의해 수정되어져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그리고 교회의 시대가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시대와 성취의 시대가 연속된다. 구속사는 그것에 따르면 창조와 재림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나누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시금 족장의 시대와 이스라엘 시대로 이분되고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역시 이분된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소수의 순종적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거기에 대한 불순종적인 이스라엘의 거역이라면, 즉 스테반의 설교에 의하면(행 7:2-53: 특히 51절 참조) 성령에 대한 거역이라면, 새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성령에 의해 형성된 새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즉 메시아의 백성의 성령에 대한 순종이다. 그런데 누가가 묘사하는 구속사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누가가 다루는 문서의 전제일 뿐이고 오로지 새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구속사의 묘사대상이 된다. 이것에 해당하게끔 누가복음이 메시아 시대를 다루고 있다면 사도행전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누가의 두 문서가 다루고 있는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끝난다. 이 역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행 13:23) 다윗의 위에 앉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한다(눅 24:21; 행 1:6)는 것이다. 이 역사는 상세하게는 부분적으로 이사야의 종말론적인 역사상에 기대어서 전개된다. 이렇게 주제를 기댈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이스라엘의 닫혀짐(비교. 사 6:9-13), 메시아의 탄생(비교. 사 9:1-7)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써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미래적인 번영(비교. 사 37:31f.)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누가가 그의 두 번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닫혀짐을 이사야서의 인용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이 기대기의 첫 주제를 나머지 두 주제들과 관련하여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인들을 그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에 이사야의 부름과 파송을 통하여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닫혀지게 했다. 그들의 닫혀짐의 기간은 한정된다(비교. 사 6:9-11). 닫혀짐의 해소는 메시아 희망과의 관련성 속에서 약속되어진다(비교. 사 29:17-19; 35:5-6). 그러나 우선은 그들의 닫혀짐에서 멸망과 추방의 하나님의 징벌이 따라온다(비교. 사 6:11-12). 이런 파멸 때에도 “구출되어져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살아 남는다(비교. 사 1:7-9;6:13;10:18-23;17:4-6;30:17).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주를 진실하게 의뢰하는 자(사 10:20)들로 “하나님의 심음”이고 거룩한 씨로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사 6:13)이다. “이때 씨의 상을 통하여 남은 자는 새 창조임을 시사한다.” 새 창조로서 남은 자는 메시아와 관계를 갖는다(사 4:2ff.). 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 내에서 ‘남은 자’를 상징적으로 구체화한(비교. 사 8:16-18; 1:9;7:10f.;11:1ff.) 그리고 임마누엘 이름과 사 9:5을 통하여 지시되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새로운 공동체가 의거하는 원인이다.”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근간은 이 원인에 의해 새로이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사 37:31). 구출되어져야만 하는 남은 자로 된 이스라엘의 새롭게 된 형성은 실현될 것이고(비교. 사 37:32b) 이것은 궁극적인 언약에 해당한다. 이 이사야적인 이스라엘의 닫혀짐의 해소와 그루터기의 개화는 궁극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누가에게 중요한 근본적인 “약속과 성취” 도식에 따르면 성취되어져야만 한다. 그런고로 누가가 묘사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는 대체로 이사야의 예언적 역사 상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반부인 메시아의 시대는 구속사에 있어서 “큰일”(눅 1:49)에 해당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러나 메시아의 공적인 사역의 길은 세례요한에 의해 준비된다. 그는 참회의 설교와 죄의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물세례를 통하여 준비된 백성을 예수의 사역에로 예비한다(비교. 눅 1:17;3:1-22). 그는 예비된 백성에게 오시는 “더 강한 자”, 즉 메시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한다. 그의 선포에 따르면 메시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이 메시아의 시대에서 메시아인 예수의 공적인 사역은 세례 받고 기도할 때 그에게 성령의 임함으로 시작된다(눅 3:21-22). 성령에 충만한 예수의 사역의 과제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함과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 이외에 이사야적인 역사 상에 따라 눈 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눅 4:18-19). 이것은 이스라엘의 희망의 성취로서 닫혀짐의 해소를 의미한다. 바로 이 메시아 적인 사역으로서 눈을 떠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 즉 이스라엘의 구속을 이스라엘의 경건한 부분의 사람들이 고대하고 희망해 왔다(비교. 눅 2:25-38). 이 과제에 따라서 예수는 사역의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파송과제를 선포하고 이어서 고향 마을의 청중들의 닫혀진 눈과 귀를 열려고 시도하나 그들이 거부함으로 실패한다(비교. 눅 4:16-30). 이 과제의 성취는 부활절 이후에 이루어진다.

예수는 거부된 첫 시도 후에 곧 제자들을 부르고(비교. 눅 5:10-11.27) 사도들을 선택한다(비교. 눅 6:12-17). 이들은 세례요한에 의해 주께로 돌아온 많은 이스라엘인에 속하고(비교. 눅 1:16; 3:1-21) 주를 위해 예비된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이룬다(비교. 눅 1:17;3:21).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서 개화한 주를 위한 백성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인 셈이다. 열두 사도의, 즉 “하나님의 백성(역자 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선택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의 재건에 해당한다(비교. 행 15:16).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과 게다가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의 선(先) 조건이다(비교. 행 15:17). 예수는 선택한 열두 대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사명을 주어 파송한다(비교. 눅 9:2). 그것을 통하여 대표적으로 이미 새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모아진다. 본격적인 모음은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닫혀진 부분과 유대인의 지도층은 이에 반하여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처형한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한다.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닫혀진 눈(비교. 눅 24:16.31)과 열두 사도들의 이성(비교. 눅 24:45)을 열어준다. 이것으로 부활한 예수가 눈을 열어주는 그의 메시아적 과업이 대표적으로 수행된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도들에게만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마침내 닫혀짐의 징벌이 해제되어진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새 가지를 내기 시작한다. 이 새 가지는 예수의 승천 후 성령을 부어주신 후에야 번성하게 된다. 예수의 승천으로 메시아의 시대는 막을 닫게 된다.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하나님의 큰일에 해당하는 메시아의 성령세례로 충만하게 시작된다. 이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한 예수는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비교. 행 2:33) 그것을 사도들에게 부어준다(비교. 행 1:26;2:14). 이 성령의 부어주심은 메시아의 성령세례에 관한 예언의 성취이자(눅 3:15f.;행 1:5) 동시에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과 세계적인 선포를 위한 궁극적인 무장이다. 이스라엘의 새 열두 지파의 재건된 대표자들의 성령무장 후에는 그들이 다스릴(비교. 눅 22:28-3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모음(비교. 행 2장)만이 남아있게 된다. 이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스라엘 나라”(행 1:6)의 시민은 부어준 성령과 사도적 선포를 통하여 모아진다. 이 모음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다. 그에 따라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의 편입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에서 종말론적으로 자라난 새싹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계속성안에서 단순한 이스라엘, 즉 옛 하나님의 백성에게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에게서 발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그리고 동시에 구속사적인 불연속성안에서 메시아적이고 종말적인 새창조이다. 메시아의 탄생을 통하여 그리고 열두 사도의 선택을 통하여 새롭게 개화한 그리고 승천한 메시아에 의하여 부어진 성령을 통해서 인도되는 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을 모으는 데에 존재이유를 갖는다. 보편적인 선포를 통한 이 이스라엘의 모음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 “‘모든 것이 회복될 때까지’, 그러므로 καιροι εθνων (필자 주: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회개의 설교를 들을 때까지(눅 24:47), 재림은 지연된다.” “이방인의 시간으로서 재림까지의 시간은 ... 동시에 계속되는 이방인 선교의 시대이다”.

새 이스라엘의 모음의 시대와 그와 동시에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의 재림으로 끝난다.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던 메시아는 땅위의 재앙과 창조질서의 흔들림과 혼돈으로 떨어짐처럼 보이는 하늘의 표시들 하에서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온다(비교. 눅 21:25-27). 다시 오신 예수는 주(눅 19:38;행 10:36), 구원자(눅 1:69f.;2:11;21:28), 왕(비교. 눅 19:12.15.38;23.42)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자(행 17:31;24:25)로서 그것에 해당하는 기능들을 갖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회복하신다(행 3:20f.). 이것은 메시아적인 새창조에 해당한다. 그는 동시에 구속자로서 예수의 제자들을 궁극적으로 구속할 것이다(눅 21:28). 이 “구속은 여기에서 해방으로, 더 상세하게는 고난과 박해의 끝으로 이해된다”. 그는 그 외에도 심판을 행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다(비교. 행 10:42). “예수의 심판자 기능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눅 2:34; 행 3:23). 이 재림 그리스도는 마침내 왕으로서 다윗의 위를 차지한다. 이 등극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다. 이 때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해있다. 그런데 재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등하다(눅 22:29f.),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 없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구속이 가까이 온 것처럼(눅 21:25-33) 하나님의 나라도 끝 사건 때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그의 사역과 인격) 안에서 역사적으로 현재적이고 승천한 메시아에 의하여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구속사 안에서 역사 하는 임박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고로 궁극적으로 재림 그리스도와 함께 온다. “우선 재림은 현재적인 것이 그것의 상(像)인 나라 자체를 가지고 온다.” 그렇다면 예수는 명백하게 “이스라엘의 영원한 βασιλευ?(필자 주: 왕)”이며 동시에 항상 이미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βασιλευ?”이다. 이스라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통치는 끝이 없다(눅 1:32f.). 그러므로 “오고 있는(필자 주: 재림으로 말미암은) 세대의 전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구속사의 목표이다”.









이 구속사의 개요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

H. Conzelmann의 견해

창조 ?????????????????????????????????????????????????????????????????????????> 재림

이스라엘 시대 예수의 시대 교회의 시대




본인의 견해

구속사를 계획하시는 분: 하나님



구속사를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분: 성령님





?????????????? 이스라엘의 역사 ???????????????????????????새 이스라엘의 역사??????????????

? ?? ?

? ?? ?

? 성령집중① 성령집중② ?

창조???????????????????????????????????????????????????????????????????????????????????>재림

족장의 시대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교회의 시대

(메시아) (메시아의 백성)

<??????????????????????????????????????????><???????????????????????????????????????????>

누가문서의 전제적 요약 누가문서의 대상:

누가복음 사도행전

??

성령에 거스르는 시대 <???????????????????????????????????????????>성령에 순종하는 시대



성령이 집중되는 부분: ①눅1:49: μεγαλα

②행2:11: μεγαλεια

결과:

구속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이 계획을 세상에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수행한다: 성령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계속성 안에 있는 순종하는 소수의 이스라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의 계속성을 담보하고, 둘째로 예수 존재의 근거이며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의 근거이며,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예수의 사역에 함께하시사 그의 사역 안에서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인간에게 도래케 하며, 넷째로 그의 승천에 직면하여 재림 임박 기대의 대체가 아니라 예수의 승천과 관련하여 예수를 대체한 종말론적인 선물로 메시아 백성들의(교회) 존재의 근거이며 “그리스도 증언을 위한 결정적인 장비”로 메시아 백성 모음의 담지자이며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일반적인 특성이고, 다섯째로 예수가 주로서 자기의 것들을 섬기듯 예수를 잉태케 한 창조주로서 예수를 섬기는 종이 된다. 이처럼 성령은 전 구속사의 영웅으로 구속사의 계속성을 보장한다. 이 구속사의 중심은, 마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중심이 예수 자신인 것처럼, 예수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다. 왜냐하면 승천한 메시아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예수는 구속사를 주도하는 성령의 주가 되어 하나님의 우편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 구속사역을 계속하다가 왕(메시아)으로 재림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예수가 주이며 왕이며 구속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로 오시는 세대의 전환점인 새로운 시대(재림이후), 우주적인 완성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이다.

이 구속사는 누가문서의 전제가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누가문서의 대상이 되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가 문서에서 전제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족장의 시대와 이스라엘의 시대로 나누어지며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와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대비로 특징지어진다. 그 반면에 누가가 묘사한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속사에 있어서 각각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두 큰 일(비교. 눅 1:49; 행 2:11)에 해당하는 예수의 성령잉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예수(메시아)의 시대와 교회의(메시아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나누어지며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주도하는 성령에 대한 새 공동체 회원들의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누가적 구속사는 구속사의 목표를 향해 점점 고조되는 역사로 이스라엘 시대보다는 새 이스라엘 시대가, 예수의 시대보다는 종말이 역사화 된 교회의 시대가, 궁극적으로는 재림 이전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재림 이후의 시대가, 더 높은 단계다. 그런데 구속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두 큰 일에 의해 전개되며 나누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누가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서 오시는(비교. 눅 1:68) 길과 동일시된다. 이 길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주의 길”(την οδον του κυριου 행 18:26) 이란 용어로 표시하고 있다. 이제 주의 길 내지는 하나님의 길이 누가문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2) 주의 길.

주의 길이란 용어에 대하여 E. Schweizer는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매우 적게 나오고 또한 주의 길이 구약적인 언어사용법에 있어서 주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품행이기 때문에 그것이 유대적 서기관에게만 어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설은 매우 일면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쿰란 공동체는 주의 길이란 용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쿰란-에센인들의 공동체는 자기의 자리 매김을 “광야에로의 이주”(비교. 1QM12)로 표시했다. 그들의 광야에로의 이주는 확실히 예언자의 글인 사 40:3의 요구를 통하여 야기되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1QS 8:12-14에는 “만일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 규정들에 따라 이 공동체에 연합하려고 한다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는 기록된 말씀에 따라 광야에 가서 거기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죄인들의 거주장소로부터 떠나야만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쿰란-에센파들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사야서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른 셈이다.

세례 요한도 에센파 사람들처럼 사 40:3의 요구에 의해 자극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실을 그의 광야 체류, 쿰란 사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요단강에서의 설교와 세례가 이야기해준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활동은 분명히 주의 길을, 그러므로 개연적으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함에 해당한다. 세례요한과 사40:3 사이의 결합을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를 들면 마가복음, 어록과 누가의 특별자료 안에서 전승시켰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하나님(특별자료와 Q: 눅 3:3f. 병행 마 3:3f.) 혹은 예수(마가와 Q: 눅 7:24f. 병행 마 11:7f.)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처럼 쿰란인, 세례요한 그리고 기독 공동체들이 “주의 길”이란 어귀를 하나님이나 예수가 스스로 취하시는 길과 관련하여 해석하기 때문에 쉬바이쩌의 가설은 경솔한 것으로 드러난다.

“주의 길”은 그러나, W.C. Robinson이 지적한 것처럼, 누가문서에서 중요한 구성적 사실관련성 안에 서 있다. 이 관련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눅 3:4-6에 있는 사 40:3-5의 인용부터 시작하는 것이 의미 있다. 공관적 비교에 의하면 누가는 마가복음에서가 아니라 Q에서 따온 사 40:3의 인용을 다음의 두절인 사 40:5까지 확장시킨다. 이 인용의 확장은 누가의 구성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진술(비교. 눅 1:76b-77; 2:30-32; 행 28:28)인 6절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주의 길”이란 어귀와 “하나님의 구원”이란 어귀가 서로 연결되게 된다. 이 이사야의 인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주의 길”과 관계를 갖기 때문에 “주의 길”이 “하나님의 길”과 동일시된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마가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의 역할은 이미 눅 1:16-17에서 천사를 통해 선포되어진다. 그때 요한의 기능(비교. 눅 1:17b)은 하나님의 길이 약속된 말 3:1의 빛에서 해석되어지고 요한의 사역의 성공과 관련하여 “주 하나님”이란 자세한 규정(비교. 눅 1:16)이 말 3:1에 기대기 바로 앞에 온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의 역할이 재차 Benedictus에서 울려나온다(비교. 눅 1:76b-77). 거기서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예언자로 불린다(비교. 눅 1:76a). 그의 역할이 다시금 말 3:1과 사 40:3-5의 의역으로 해석되어진다. “‘주’는 협의의 문맥에 따르면 자명하게 예언자가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 자신이다.” 세례요한은 그러므로 Benedictus에서 자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비교. 눅 1:68)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러한 세 구절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길 예비자이고, 주의 길은 하나님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두 문서에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의 역할이 진기하게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그의 역할에 의해 겹쳐진다. 광의의 문맥들과 몇개의 진술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이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도 된다. 누가적인 사항관련성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요한이 예비한 (주의) 길에 들어 선다(비교. εισοδο?: 행 13:24f.). 그럼으로서 예수의 공적사역이 시작된다.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비교. 눅 22:22) 길을 마땅이 가야한다(πορευεται: 비교. 눅 13:33). 그의 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근거하고 있다. 이 길은 지리적으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통하고 사항적으로는 예수의 올리움으로 끝난다(비교. 눅 9:51;13:31-33). “예수의 올리우심은 누가의 이해에 따르면 단순히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지상으로부터의 빼앗아감 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 그것들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퇴장한다(εξοδο?: 눅 9:31). 이 구성적인 사항관련성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세례요한이 예비한 주의 길로 들어가서 많은 고난을 통하면서 그 길을 가고 마침내 주의 길로부터 영광에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버지로 부터 성령을 받아서 사도들에게 부어 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길의 목적은 성령세례를 주는 것이 된다(비교. 눅 12:49). 성령세례는 주의 길의 전환점이다.

“주의 길”에 관한 누가적 견해는 마가의 그것과의 비교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마가에게 있어서 “주의 길”이 예수의 세례받음으로 시작해서 그의 부활로 끝나는 예수의 길과 동일시 되는 반면에, 누가에게 있어서 주의 길은 그 반대로 예수의 길이 그의 올리워 감으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공동체에게 부어진 성령이 주(예수)의 길의 계속성을 보장한다. 주(예수)의 길의 계속되는 지리적인 진행은 복음서의 끝과 행전의 처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눅 24:47)와 “땅끝까지”로 잘 알려진다. “구속사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예수의 길이 예루살렘을 향해 뻗어 나갔드시, 예수 증인의 길도 그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 뻗어 나간다.” 예수의 길은 그러므로 주의 길의 진행과 관련하여 증인들의 길 앞에 놓여 있다. 또한 고난에의 그리고 고난을 통한 영광에의 길(비교. 눅 22:22;24:26)로 표시되어진 예수의 길은 (예수의 증인 내지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전형(典型)이 된다(비교. 눅 14:27;9:23). “그 길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른다는 것”은 예수에게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유효하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내지는 증인들)의 대표자로서 누구보다도 바울은 예수의 뒤를 따라 동일한 길을 간다(참조. 예수와 바울 사이에 있는 수많은 병행들). “바울의 길은 하나님의 인도 하에 있고(δει: 행 9:16;14:22;19:21;23:11; προχειριζομαι: 행 22:14;26:16: 비교. 10.14; αναγκαιον: 행 13:46)”, 이방인의 구원에 관하여는 예수의 길처럼 바로 그렇게 기능 한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예비하신 구원(비교. 눅 2:30)을 의미하는 메시아이다. 그는 빛으로 역시 이방인들을 비춘다(눅 2:32a). 그는 나사렛에서 “옛 시대에 축복을 받은 비 이스라엘인에 대해(4:25ff.)” 이야기한다. 바울은 예수의 사환과 증인으로 부름 받았고(비교. 행 26:16) 주로 이방인에게 보내어지나(비교. 행 9:15;13:46;15:12;18:6;21:19;26:20), 놀라웁게도 이방인의 빛으로 지정된다(비교. 행 14:47). 바울의 파송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향하고(비교. 행 26:18)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 가운데에서 발생한다(비교. 행 14:46f.;28:28).

바울은 예수의 사환과 증인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민족들 앞에 준비한 구원을 이방인에게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비교. 행 28:28). 거기에 따르면 바울은 이방의 빛으로서 그들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고 그것을 완성한다. 바울의 길은 그러므로 예수의 길의 계속이다. 이 두 길은 더욱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선교적인 사역의 시작에서 바울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진력하고(행 13:10), 그의 사역 끝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보내졌다”(행 28:28)고 선포한다. 바울의 전체적 선교 사역이 이 두 단락을 통하여 감싸지기 때문에 구원을 위하여 이방인에게로 통해야만 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바울의 전체 길에 해당한다. 여기서 바울의 길은 예수의 길의 계속일 뿐만 아니라 한 조각 주의 길 자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요약: 만약 누가가 주의 길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그는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는 주, 곧 하나님의 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세례요한의 준비를 통하여, 예수의 등장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의 증인들의 선교사역을 통하여 뻗어간다. 예수의 길은 그런고로 주, 곧 하나님의 길의 주요한 부분이나 전체는 아니다. 메시아인 예수의 길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령세례이고 성령세례가 주의 길의 전환점으로 예수 증인들의 길을 연다. 이 증인들의 길은 구속사의 마지막 단계인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 전체를 관통하면서 재림까지 뻗게 된다. 성령은 종말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전환점인 성령세례를 통하여 전개되는 이 길은 종말이 역사화 된(실현되어 가는) 고조된 길이다. 이제 증인의 길을 통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를 특징짓는 종말의 역사화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3) 종말의 역사화.

종말의 역사화는 성령세례의 실현을 통해서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 은사인 성령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하는 근거도 제공한다. 종말의 역사화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종말시대의 도래와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들의 생각들로 이루어진 관련성은 사도행전의 서두(행 1-2장)에서 잘 나타난다. 종말이 역사화 되었다는 생각은 성령강림사건의 기사(행 2:1-41)에서 특히 민족목록 부분(행 2:5-13)의 구성에서 뚜렷이 반영되고, 종말적 은사인 성령의 강림을 통해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성령강림사건을 해석하는 요엘 인용구(행 2:17-21; 특히 17절)의 편집에서 시사되고 있고, 성령사건들을 추적해서 역사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행 1:4-8에서 편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세 부분을 살펴 보 것는데 편의상 요엘 인용구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1) 요엘 3:1-5 인용구의 편집에 나타난 종말시대의 도래.

누가문서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세례요한의 예언(눅 3:16)과 그것을 새로이 언급한 예수의 예언(비교. 행 1:4-8)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요엘 3:1-5의 성취도 된다. 그런데 누가는 그 오순절 사건을 직접 요엘 인용구로 해석한다. 그 사건의 해석을 위해 사도행전에 사용된 요엘 3:1-5 인용구는, R. Morgenthaler가 지적한대로, 몇 개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우선 이 인용은 셉튜아진타의 요엘 본문에서 και εσται로부터 και εσται까지 선택되어졌다. 이것으로 그리고 πασα σαρξ - πα?로 대체로 인용구 전체의 테두리가 형성된다. μετα ταυτα를 εν ται? εσχαται? ημεραι?로 대체함을 통해서 그리고 και προφητευσουσιν의 삽입을 통해서 전체 테두리 내에서 몇 개의 병행적 테두리를 갖는 첫 번째 통일성이 생긴다. 인용구의 중간 조각의 교차 대조적인 통일성은 두 번 삽입한 μου를 통하여 완성된다. 두 번째 중간 조각의 첫 부분에서는 σημεια, ανω와 κατω의 삽입을 통하여 병행적 구조와 그것과 동시에 두 번째 병행부분에 해당하는 통일성이 형성된다. 그런고로 이 인용된 구절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셉튜아진타의 구성양식을 인공적으로 완성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런 인공적인 개선 중에서 우리의 문맥과 관련하여 보면 μετα ταυτα를 εν ται? εσχαται? ημεραι?로 대체한 것이 특별히 눈에 뜨인다. 이 편집적인 대체를 통하여 요엘 인용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두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들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실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런 편집적인 작업을 통하여 저자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마지막 날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분명히 오순절 사건과 더불어 종말의 시대가 동터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오순절 사건과 함께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에 걸맞게 오순절에 열 두 사도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과 동시에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모음을 위한 무장을 뜻한다. 성령강림사건으로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밝힌 누가는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성령강림사건이 성령세례임과 동시에 이 종말적 시대에 있어서 성령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할 것을 시사한다.

b) 행 1:4-8에 나타난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 의도.

이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모음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세례요한의 예언과 부활하신 예수의 예언의 성취로 메시아의 성령세례가 된다. 누가가 자기문서에서 주동기로 전개해온 메시아의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세례기사의 앞에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도행전의 서두에서(행 1:4-5) 부활하신 분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다음 처럼 언급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이 선언은 바로 앞에 있는 4절 “몇 날이 못되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약속과 밀접하게 연결됨으로써 한편으로는 오순절기사를 준비하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의 받음을 성령세례로 규정한다. 여기서 선언되고 규정된 성령세례는 사도행전의 순서와 배치를 언급하는 행 1:8에서 “성령 받음 - 예루살렘으로 부터 땅끝까지의 파송”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것으로 메시아적 성령세례는 증인사역의 전제로 분명히 그리스도 증거를 위한 파송에로 규정되어진다. 그러므로 이 메시아적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모든 민족에게로 파송함과 그것을 통한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모음을 목적으로 하고 이 시대 내에 일어나는 모든 성령부어줌을 규정한다. 거기에 따라 누가는 한편으로 증인의 길의 지리적 정돈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서, 고넬료 가정에서 그리고 에베소 제자들에게서의 성령의 발생을 묘사할 뿐만이 아니라 성령과 증인들에 의한 그리스도 증언의 확장을 묘사하고 그것의 계속적인 확장을 위한 시각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누가는 여기서 “성령세례”란 주제로 기독인에게 있어서 성령의 발생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성령의 부어주심 - 땅끝까지 파송”한다는 개요로 성령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한다고 밝힌 셈이다.

c) 민족목록의 구성에 나타난 종말의 역사화.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는 종말의 역사화를 전제한다. 종말의 역사화는 성령강림기사 가운데에 있는 민족목록의 구성사적인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이 민족목록은 문장론적인 구조분석을 통해서 보면 “동에서 서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의 방위체계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론 서에서 동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방위체계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구축되었다”. 민족목록 정돈의 원리인 이 “사방 방위”의 주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저자가 민족순례 기사(눅 13:28-28)를 마태와 마찬가지로 ‘Q’자료에서 받아들이나 마태와는 달리 Q의 동과 서의 두 방위를 분명히 동서남북의 네 방위로 편집적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목록을 구성하는 사방 방위체계가 민족순례 기사의 편집적 사방 방위체계를 닮았다는 사실에서 저자가 민족목록을 구성할 때 천국잔치에로의 민족순례에 관한 기사를 기대어 민족목록을 조직적으로 배열했다는 결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 실마리에 따라 두 기사의 관계를 살펴보게 될 때 이런 결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하여 강화된다: 첫째로, 민족순례 기사의 문맥(비교. 좁은 문: 눅 13:22-27 특히 2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목록의 문맥(비교. 오순절 설교: 행 2:14-41)에서도 동일하게 “구원 얻다”가 다루어진다. 둘째로, 민족순례의 기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순례의 주체자는 편집적으로 표현된 배척 당하는 “행악자들”(눅 13:27)과는 다른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과 비슷하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몰려온 주체는 천하 모든 민족을 대변하는 각처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이다. 셋째로, 민족순례기사는 사도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것에 관한 말씀(눅 22:29-30)과 다음과 같은 구성적인 조화를 이룬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와서 순례에 참여하는 의로운 자들은 종말적으로 사도들이 다스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된다. 오순절 기사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적인 관계가 그대로 반영된다. 오순절에 성령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사도에게 임한다. 이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자 이들 쪽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천하 각국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몰려든다. 이들 중에서 3000명이 오순절 설교를 통해서 세례를 받는다. 이들이 세례를 받음은 모든 민족 중에서 종말적 이스라엘의 범례적인 모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들은 열 두 사도에 의하여 다스려질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오순절 기사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열 두 사도와 천하 각국에서 몰려와 세례를 받은 범례적이고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적 조화가 반영되고 있다.

이런 구성적 기대기 방법을 통하여 누가는 “모든 민족들을 대표하는 천하에 흩어져 있다가 예루살렘에 우거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장소로 몰려옴을 종말에 동서남북 사방에서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순례의 선취이자 시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놀랍게도 종말을 역사화 한다”: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이며 동시에 그 나라의 시민들을 모으기 위한 궁극적인 무장이다. 이 사건은 종말적인 천국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12사도들이 다스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천국잔치에로 초대하는 첫 사건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종말적인 은사인 성령이 강림한 사건에 관해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는 “성령세례”란 주제로 성령강림사건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종말적인 천국잔치로 구속사를 전환시키는 대망하던 메시아의 성령세례이다. 이렇게 종말이 역사화 되었기 때문에 그는 종말적인 천국잔치에로의 첫 초대를 시사하는 민족목록 기사를 천국잔치에의 순례기사에 기대어 작성한다.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심 - 땅끝까지 파송”한다는 개요로 종말적인 성령의 사역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묘사한다.

이렇게 구속사의 전환점인 오순절 성령강림(메시아의 성령세례)으로 부터 종말이 역사화 된(실현되어 가는) 시대는 성령과 증인의 사역이 지배해야 하는 시대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한 죄사함의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하는(비교. 눅 24:47ff.) 시대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중요한 전세계에 전파될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는 승천 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부어주신 성령을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를 회복하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사역을 계속하시던 예수께서 구속사의 목적으로서 그 끝에 메시아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루실 만유의 회복사역과 더불어 메시아 예수의 기독론적 정체성(正體性)을 밝혀준다. 거기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는 재생한 엘리야이다. 이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4) 재생한 엘리야로서의 메시아 예수.

재생한 엘리야의 과제는 말라기 3:23f.와 시락 48:10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회복(restitutio in integrum): 회개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회복’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복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인 회복’이고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한 모든 것들의 회복이다. 다시 올 엘리야의 이런 과제에 기대어 누가문서에서는 일련의 예수의 과제가 제시된다.

먼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세례요한이 선포한다(비교. 눅 3:3). 그러나 그의 세례가 죄 사함의 효력을 발생한다고 하지만, 누가문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죄사하는 권세는 오로지 예수에게만 있다(비교. 눅 5:24;7:48f.).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눅 5:32). 이 죄 사함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에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서 계속된다. 성령을 받아서 전 세계에, 모든 민족에게 증언해야 할 내용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다(비교. 눅 24:47f.). 그러므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예수의 사역은 재생한 엘리야의 사역인 죄로부터 멀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회복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예수의 사역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구속등으로 표현되고, 이스라엘 지파의 열 두 대표자의 회복 그리고 그들이 다스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회복등의 커다란 사항 관련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관련성을 위하여는 먼저 누가복음의 서론부분에서 이스라엘의 구원(눅 2:25)과 예루살렘의 구속(눅 2:38)은 예수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새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그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은 메시아 예수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이 나라의 열 두 지파의 회복은 대표자들의 회복으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음으로 실현된다. 종말적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의 회복과 그 회복에 해당하는 성령세례 받은 열 두 사도들이 그 나라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사상과 성령사건을 통하여 이 나라의 백성들의 모음으로 실현되는 열 두 지파의 회복으로 구성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회복이라고 하는 재생한 엘리야의 과제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누가문서에서는 재생한 엘리야의 마지막 과제로서 모든 것들의 회복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재림하신 예수가 궁극적으로 관장한다(비교. 행 3:21).

이와 같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죄사함은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과제로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 이스라엘 나라(내지는 백성)의 완전한 회복과 연결되면서 역사의 끝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만물을 새롭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와 더불어 메시아가 누구인지 밝혀준다. 거기에 따르면 이 메시아 예수는 분명히 Elija-revidivus이다.

이 Elija-revidivus의 모범적 유형(Typus)은 엘리야이다. 말하자면 엘리야는 Elija-revidivus인 메시아 예수의 모범적 유형이다. 엘리야에 관한 여러 동기들이 예수와 엘리야 사이의 많은 병행을 통하여 예수의 유형이 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죽은 자 살리는)기적이 엘리야의 (죽은 자 살리는)기적과 동등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엘리야-예수 유형에 “‘엘리야와 엘리사’-‘예수와 제자들’의 유형”이 덧붙여진다. 이 엘리야와 엘리사-예수와 제자들의 유형도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관계와 이루는 여러 병행을 통하여 밝혀진다: 예를 들면 제자의 부름들이 예수와 엘리야에게서 서로 병행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죽은 자 살리는 치유기적들도 두 관계에서 서로 병행한다. 또한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은 엘리야의 승천과 그의 제자 엘리사의 성령충만함을 회상시켜준다. 예수와 제자들의 유형은 분명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된다.

위와 같이 엘리야는 메시아 예수의 유형이고 예수는 재생한 엘리야가 된다. 그는 공생애 기간동안재생한 종말적 엘리야로서 일면 엘리야를 모범으로 활동하며 승천 후에는 성령세례 주심과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전세계적 전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새 창조로서 만유를 회복하신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누가문서에 나타난 종말론은 거대한 구속사의 일부인 마지막 시대에 관한 견해로 주의 길과 종말의 역사화와 Elija-revidivus 기독론과의 커다란 사항 관련성 안에 서있다. 종말론이 관계하는 그리고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재림에서 완성되면서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이 구속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말적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누가문서의 대상(對象)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길, 즉 세례요한에 의해서 준비되고 예수가 가고 그의 제자들이 이어 가는 길의 경로다. 주 하나님의 길의 경로를 통해 엮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의 시대와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구성되어진다. 이 두 시대의 시작점은 두개의 크신 하나님의 일로 점 찍혀진다: 성령에 의한 메시아 잉태와 메시아의 오순절 성령세례로. 성령에 의한 메시아의 잉태가 구속사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시대적으로 이등분하면서 메시아의 시대를 연다면, 메시아의 오순절 성령세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를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나누면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를 연다.

두 성령사건으로 이루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종말적 역사로 볼 수 있다. 종말적 역사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도 약속과 성취 도식이 지배한다. 새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누가문서)도 누가문서의 주동기인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과 성취 도식에 의해 역시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뿐만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이등분된다. 메시아의 시대가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을 다룬다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성령세례에 대한 성취를 취급한다. 그런고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가 메시아의 시대보다 종말론적으로 더 점증된 시대다. 이 시대는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이 성취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개막된다. 이 사건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실현된 사건이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열 두 대표자들을 회복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12사도들이 다스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기 위한 천국잔치에로의 초대와 민족들의 순례가 시작되는 사건을 예표적으로 야기시킨다. 천국잔치에로의 초대와 민족들의 순례인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모음은 재림시까지 진행된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그리고 범인류적인 모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지파가 회복된다. 그러나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과 이스라엘 지파의 회복을 포함한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은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가 재림하셔서 왕으로 등극함으로 이루어진다. 재림한 종말적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만유를 회복하신다. 만유의 회복은 새창조에 해당한다.

이와같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구속사의 목적이며 끝인 메시아의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질 이스라엘 나라와 만유의 회복을 지향하며 진행하는 종말이 실현되어 가는, 다시 말하자면 종말이 역사화 되는 시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여는 재림은 종말이 역사화 된 시대의 끝에 일어난다. 종말이 역사화 되는 시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길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길은 전체가 종말론적인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큰 일인 성령사건을 통해 일어나는 종말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종말적인 시대에서 종말이 역사화되는 종말론적으로 더욱 고조된 시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은 단계적으로 종말이 역사화 되는, 종말이 실현되어 가는 구속사적 종말론이다. 이 종말론을 예수의 종말론에 관한 제학설(諸學設)들과 비교해보면 누가문서에 나타난 종말론은 J. Jeremias의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과 E. J?ngel의 현재에 시작되고 가까운 미래에 완성되는 종말론이 결합된 종말론처럼 보여진다. 거기에 따르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의 종말론은 과거(예수잉태)에 시작되었고 현재에 실현되어가며 미래(재림)에 완성될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흥미 있는 다음과 같은 구성사적으로 중요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누가문서의 저자는 그의 구속사적 종말론과 그의 문서를 전개할 때 세례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적 선포(눅 3:16-17)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가 중요시하는 약속과 성취도식에 의하면 이 세례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선포는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메시아에 관한 선포의 내용으로 메시아의 성령세례와 심판이다. 그는 한편으로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의 성령세례를 누가문서 구성의 주동기로 삼아 그것의 약속을 누가복음에서 다루고 그것의 성취를 사도행전에서 추적한다. 오순절에 메시아의 성령세례는 성취된다. 다른 편으로 누가문서 저자는 메시아의 심판을 구속사의 끝인 재림 때로 미룬다. 분명히 그 저자는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의 종말적이고 동시대적인 두 가지 사역들을 분리해서 구속사의 종말이 역사화 되는 마지막 시대의 첫 사역과 마지막 사역으로 삼는다. 그는 그 사이에 재생한 엘리야로서 메시아의 사역인 이스라엘의 회복의 단계를 삽입하여 종말적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의 내용을 채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문서 저자는 묵시적 종말론, 구속사, 인자의 재림 그리고 재생한 엘리야 기독론을 결합하여 그의 독특한 종말론을 만든 것이다.



[출처] 누가의 역사화된 구속사적 종말론|작성자 성산지기


가져온 곳 : 
블로그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수채화처럼 고운 生...
                           / 최송연
마음이란
물감을 뿌리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하얀 도화지

꿈을 품게 되면
오색 찬란한 무지갯빛 
사랑을 품게 되면
은빛으로 반짝이는 별빛

원망과 불평
시기 질투 미움은
먹구름 칙칙한 하늘빛

주의 말씀을 붓으로 삼아
날이면 날마다
수채화처럼 고운 生을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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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가 누구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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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직접 빛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등대였는지 알수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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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등대 아래에 머물기만 했었기에

그때는 미처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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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을 때 비로소 그가 보인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후 알게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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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까이 있었기에 나는 알지 못하였지요.

그가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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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언제나 나를 밝혀주었음에도

나는 그때 그 것이 무엇인지 몰랐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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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을 늘 지나쳐 배회만 하였을뿐

나는 그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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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 내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그 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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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던 그가 내게 바라던 것은 오직 하나 -

내가 창공을 훨훨 날아 오르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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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창공을 마음껏 누비며

하얀 구름처럼 꿈을 펼지기를 원했던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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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답니다.

그가 거친 암반 위에 힘들게 서 있었던 것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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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 자리에 말없이 있어주었기에

그가 있던 자리의 힘겨웠음을 몰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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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그가 밝힌 빛을 외면한 채

세상의 관심만 쫒는 탕아(蕩兒)였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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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그 고마운 등대를

오히려 빛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 생각하기도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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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멀리 시선을 두라고 하던 그 -

그가 자신을 태워 나를 밝히려 했음을 이제야 깨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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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밝히기 위해 고난을 딛고 서 있었음이 분명한데도

나는 왜 그것을 깨닿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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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이제야 깨닿습니다. 

그가 서있던 자리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자리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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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지고, 감미로운 미풍이 세상을 어루만져도

그는 그 것을 차마 음미하지 못하였음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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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있던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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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거센 파도가 밀려오고 폭풍이 이는 자리 -

그래도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준 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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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힘들 때 

은은한 빛으로 위안과 용기를 주던 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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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세월이 지나

이제야 느껴봅니다.

 

그가 낮에도 그렇게 빛나고 있었음을....

그가 멀리서 나를 인도해 지금에 이르게 하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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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있어 세상이 아름다웠고...span>

그가 있어 행복을 떠올릴 수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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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빛나고 아름다웠던 그대 -

 긴 세월을 돌아 이제야 느껴봅니다.

 

흠 흠

그대를... 그대를 사랑해요...

 

****

 

등대가 그리워 집니다.

인생의 등대가 되어준 사람들...

 

아직 그 자리에 있어주면 좋을텐데...

세월이 조금은 두렵습니다.

 

기나긴 인생 길...

그리고 수 많은 삶의 질곡들...

그 속에 빛이 되어준 등대 -

 

과연 여러분의 등대는 무엇이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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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말을 들으라
Hear the Words of Jesus

 

하나님은
진리로 권하신다
그가
말씀하신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시고
마침내 구원을 얻게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이시다(마 1:21-23)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초월해서는 결단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 14:6)
이미 첫 언약에도 말씀하셨고
또한 새 언약에도 확고히 하셨으니
예수는 그 언약의 피를 흘리신 이다(히 9:27-28)
이스라엘이 양과 염소의 피를 의지하고도
출애굽 하여 바로의 손을 벗어나 성민이 되었거늘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자들은 온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다(히 10:19-23)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들으라고 분부하신다

 

○ 우리의 믿음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니
   예수의 말씀은 진리다

 

○ 진리가 아닌 세상의 학문으로도
   율법과 종교의 교리로도 구원할 수 없으며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것만이 구원이다

 

○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함 받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예수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자
   이것이 구원이요 생명이다

 

 

... 2014년 7월 13일 주보에서/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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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 담임목사와 부목 목회에 성공비법

장달윤목사

제2강 : 牧會란 무엇인가?

본 교회 후임연수생 부목사에게 牧會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였더니 양들을 잘 돌보는 것 아닙니까 하였다. 독자여러분들은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문적으로는 맞는 대답이다. 문자 그대로 牧會란 모여 있는 양들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본질에서는 너무 거리가 멀다.
牧會本質의 牧會란? 牧=죽을 목. 會=장례회자이다. 목회는 내가 죽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죽지 않으면 아니 되는 직업이다. 목회 실패자는 내가 죽지 못한 결과요, 목회 성공 자는 자신을 죽여 장례를 치른 목회자들의 결과이다.

죽은 목회자는 어떤 것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두들겨 맞아도 반응이 없고, 죽은 자는 송장냄새가 난다. 목회는 침묵으로 웃는 얼굴을 하고 분노를 극복해야하는 직업이요, 어떤 억울한 욕설과 폭언을 듣고 짓 밟혀도  반응이 없어야하는 직업이요, 목회는 목회자가 썩어 냄새가 나야하는 직업이다. 침묵과 무반응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요(갈2:20)냄새는 예수님의 향기이다(고후2:14-15.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 우리는 구원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목사가 죽어 썩어 냄새가 날 때에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고,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할 때에 범나비들과 꿀벌들이 날아든다. 牧=죽을 목, 會=장례회자를 모르면 그의 목회는 반드시 실패한다. 죽을(牧), 장례(會)자가 없는 교회는 마귀의 전쟁터로 변한다.

고후2: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목사의 썩는 냄새는 生命으로 좇아 生命에 이르게 하고 교회를 부흥 시키는 예수님의 향기가 된다.

흥분하며 얼굴을 붉히고, 신경질 내며 맛 대응하고, 증오하며, 분노하며 고함을 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자를 향해 강단에서 난도질을 하며 고치려하는 목사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아마추어 목사이다. 이런 목사는 얼마동안 밥은 얻어먹을 수 있지만  교회를 평탄하게 장기적으로 끌고 갈 능력이 없다. 속세에서 시달리다가 천국복음을 듣고 위로받고 희망을 얻기 위해 오는 양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다. 아마추어들은 훌륭한 멘토를 찾아 장례지내는 법을 배워 장례부터 치르라. 그렇지 않고 목회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마귀로 틈을 타게 하여 어지럽히고 많은 상처를 잎이게 되어있다. 참 牧會를 實踐하는 목회자가 되라. 牧會란? 죽어 장사 지내는 것.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여유 있는 웃음으로 한여름을 시원하게~~~

어느 집사가 죽어 천국에 들어갔다.

그런데 천국 입구에
많은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시계 밑에는 시계주인들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여긴 왠 시계가
이렇게 많이 걸려 있죠?"

베드로가 하는 말

"여기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기들이 세상에서 살 때
나쁜 일을 한 만큼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느니라."

그 말을 들은 집사는...

자기 이름이 붙은 시계를 입구에서
아무리 찾아도 자기 시계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답답해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전 나쁜 일을 하나도 안해서
내 시계가 여기 입구에 없나 보죠?"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너무 가관이었다.
.
.
.
.
.
.
.
.
.
.
.
"당신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고 있어서.......!!!

더위 많은 모세 할아버지가 ........!!!
지금 선풍기로 쓰고 있소ᆞ

주제 때를 아는 감각


마16:2-3‘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
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
별할 수 없느냐’
-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생의 영원한 소망이자 동시에 삶의 감각
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존재(성도)
로서 합리적으로 사는 일반인과 다르게  우리 성도들은 <때를 아는
감각>으로 살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성경진리가 삶의 원칙

성도가 되면 성령으로 중생했기 때문에 성경이 삶의 철학이 됩니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
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이 삶의 원칙이 된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합리적, 과학적, 통계적, 상황적으로  변질된 처세(處世)를
하다가 유럽과 서구교회가 몰락을 했습니다. 한국교회도 목사를 직
업으로 생각하다가 그런 생활문화로 만연해 있으므로 위험 중에 있
습니다.


2. 성령의 감각을 좇아 사는 것

성경은 삶의 목적적 설정이고 구체적인 삶의 요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갈5:16).

가령 이사를  가야하나 가면 어디로 가나, 결혼을 앞둔 사람들로서
상대를 어떻게 만나기를  소원하고 그 소원이 내게 정당한가? 등의
결정을 볼 때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
라..’ 는 말씀만으로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나서는 것이 아니라
는 점을 봅니다.
행16:6-7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성경은 상식 가운데서 움직이게 하시지만 때로는  상식을 초월하게
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마16:3 ‘.. 너희가 날씨는 분별
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고 하십니다.세상
을 사는 동안 우리의 행보는 주님이 이끄시는  영적 감각을 살려서
분별력 있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순간순간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요2:4 ‘...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릅니다.
잠27: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
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개역)(잠16:9)


3. 성령님의 인도는 어떻게 나타나나?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요소를 기초하여 감각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1)성경내용과 그 사상성이 있는가?(요16:13,지식)

2)욕심(정욕,사욕,개인영광 의식)이 아닌 평안인가?(감정)

빌4:7 ‘..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
각을 지키시리라’
(9), 살후3:16 ‘.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을 주시고 ..’
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
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
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
락이라’

3)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들을 보고 확인

롬8:28‘..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
루느니라’

4)영적 음성이나 꿈과 환상도 있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직통계시, 환상 꿈에 빠지면  성경이 주는 지성이 부족해져서 신비
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무조건 이런 방편으로 응답을 받거나
삶의 계시로 삼으려는 습관은 이미 상당히 위험한 단계입니다.이런
일들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성도로서는 크게 회개하고 영적 눈을
뜨고 이제부터라도 성경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간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성도의 삶의 존재적 감각을  살려서 모든 일에 적절히 대처하
게 하시는 지각을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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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와 같은 목사가 이 대한민국의 땅에서도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전하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 양무리 마을/아굴

방언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요즘도 교계에는 방언과 관련하여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방언논쟁은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방언은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민감한 사안이다. 이럴 때 신약성경은 방언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제시하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천사의 방언과 사람의 방언이다(고전 13:1). 천사의 방언(글로사)은 사도 바울 자신이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고후 12:4)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의 몫으로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람의 말은 순수한 외국어와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없이 외국어란 문법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한 언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 말과 히브리 말(디아렉토스)을 했다( 21:40). 그는 당연히 로마 말을 할 줄 알았을 것이며, 이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말 가운데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글로사)는 타의적 방언과 자의적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타의적 방언은 오순절 날 초대교회에 발생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언어이다( 2:4). 그런데 타의적 방언은 말함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고, 들음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제자들이 여러 지방 사람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말했다( 2:6)는 표현과 여러 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 들었다( 2:8)는 표현 때문에 모두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이해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법이 있는 방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을 통역한다는 것은 문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10; 14:13,26-28).

 

자의적 방언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기도자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내용을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만 사용하는 기도 말을 만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 기도자는 기도할 내용이 산더미처럼 많은 데 마음은 바쁘고 시간이 부족할 때 앞뒤 말들이나 가운데 말들을 생략하고 압축해서 자신만의 특유한 어법으로 기도할 수 있다. 이런 자의적 방언에는 문법이 없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조어이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을 가리켜 구태여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억지이다. 그것은 기도를 돕는 데 어느 정도 유익하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굳이 제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방언에 관해서 논의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방식보다도 내용과 목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라면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며( 2:11), 그 목적은 자기를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교회를 건설적으로 만들며(고전 14:5) 심지어 불신자에게도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전 14:22). 이런 내용과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은사를 주시지만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혜로시기 때문에 함부로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 모든 은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두 속성은 사람이 감지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헬라어로 글로사는 혀를 가리키며디아렉토스는 말을 가리킨다


   조병수 교수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 신학박사(Dr. theol.)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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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핵심 교리 해설 (2) -정준모 목사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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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 [칼빈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2)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앞 문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듭나도록 촉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판을 말함으로써 조롱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많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에게 제시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거만스럽게 배척하는 만큼 그들 앞에 기다리는 형벌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엄한 심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불신자를 비교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아무 탈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무감각에서 일깨워지고 구원의 주(主)로 조롱했던 바로 그 분이 보복자로 등장하는 날,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이 가르침을 우리도 역시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그리고 요한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성취하실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를 가리켜 '키'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 전에는 온 세상이 뒤범벅인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고, 사실상 쭉정이로 가득차 있음으로써 그들은 쾌락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는 날, 온 마당에 가득찼던 쭉정이는 이 키의 바람에 날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복음이 각 개인에게서 쭉정이를 제거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많은 쭉정이를 버림 받은 자에게, 신실한 자를 알곡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타작 마당은(어떤 사람들 생각대로)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이것은 요한의 말이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명백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들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잠시 동안 뿐이고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없어지듯 곧 날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잠시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무용지물로 질식하고 있지만 곧 복음의 강풍으로 제거될 당시에 타락한 교회 상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쭉정이 밖에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받은 자들은 알곡이 되기 때문에 쭉정이와는 상관없이 곧 곡간으로 거둬들여질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정화작업을 시작하였으며 날마다 그 결산을 보고 계시지만, 전체 결과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최후의 순간을 지적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신실한 자들은 오늘날은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가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체험할 그 불의의 열기를 현재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을 고통으로서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갑론을박하지만, 여러 성경 귀절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불이라면 이사야 30장33절에 나오는 유황과 사름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은 벌레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벌레'라는 단어가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퍅한 사람들이 쓸데 없이 고민하는 온갖 억측같은 것은 뒤로 제쳐놓자. 이 여러가지 표현은, 우리의 단순한 마음이 파악하는 대로라면, 오늘날 인간의 이해력과 표현력을 초월하는 그러한 무서운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칼빈 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아래의 Tomas Kinkade의 '귀향' 그림을 보며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돌아갈 내 고향 (Grace Lee)분명 돌아갈 영원한 집이 있는데...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노는 아이처럼 이 땅에 안주하려는 나, 나의 본향은 과연 어디인가? 잠시 잊고 갈 곳을 잊고 살 때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믿는 것은 이제 잠시 후엔 그 분과 얼굴 마주하여 뵈올 날이 있으리라 그 때 나를 품어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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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said to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요한복음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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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향으로 갈 때 저 가방에 무엇을 담아 갈까?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것도 담아 가야지...


귀향(歸鄕) /김 광진

나 돌아갈 집 있어

외롭지 않네
육신의 장막 벗는 날, 나 돌아갈 고향 있어

슬프지 않네
그런 날 애타게

기다려지기까지 하여 나 돌아갈 곳 있어,
서러운 땅이라도

나, 견디며 사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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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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