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성경의 해석자들로서의 청교도

 

청교도주의는 무엇보다도 성경 운동이었다. 청교도에게 성경은 진실로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소유물이었다. 청교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은 성경을 경외함이고 하나님을 섬김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청교도의 생각에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모욕은 있을 수 없었다. 성경을 소중히 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다음에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대한 더 참된 경외의 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대한 열렬한 존경과 성경이 명하는 모든 것을 알고 행하려는 애정깊은 관심은 청교도주의의 품질보증서였다.

 

청교도의 해석방법은 세 가지다.

1) 청교도의 해석들은 문화와 시대 간의 차이와 거리를 성경에 침투시키지 않는다.

청교도의 해석들은 많은 현대 성경 학자들을 무능하게 하고 그들의 해석 활동을 매우 타락시키는 종교적 진화라는 상상적인 사상들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청교도의 해석들은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인물들과 그들의 경험들 간의 수천 년의 세월로 인한 거리감을 느끼는 대신 그들과의 혈연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들도 동일하게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외하고 교제하였고, 또한 동일한 영적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싸웠던 같은 인류였기 때문인 것이다

 

2) 청교도의 본문에 대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종종 고지식하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어떤 지식있는 독자가 보더라도 매우 충분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매튜 헨리의 성경 전체의 대주석을 볼 때 그렇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을 적용하기 위해 해석했다.

 

해석의 전제 2

 

전제1 성경의 본질에 관한 것.

 

성경은 하나님의 발언이었다. 곧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 열린 하나님의 마음이며 선포된 하나님의 생각들이었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이다. 토마스 구드윈, “우리의 성경이 규정하고 기록한 바는 하나님의 마음 속의 성경에서 나온 발췌이며 복사로서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성경이 영원으로부터 기록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독자에게 계속 하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토마스 왓슨, “당신이 읽는 모든 항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라”

 

하나님의 마음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성경에도 무오한 심오함이 있다.

“그 안에 있는 진리의 보고들은 무진장하다.” “절대로 충분한 지식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씀을 더 완전하게 연구하라”. 성경에는 어린 양이 건널 수 있는 얕은 곳들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수영할 수 있는 깊은 곳-가장 박식하고 경건한 자들도 빠질 수 있는 깊은 곳-이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이 배우기를 갈망하고 성경 공부에 착수해야 한다.

 

전제2 성경의 주제에 관련된 것.

 

첫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말씀을 기록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셨다. 그러므로 이 하늘의 공적 비서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들 자신의 이해력으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기도로 하나님의 가슴을 열고 하나님의 연구실을 열어 하나님의 모든 원고들과 문서들로 나아갈 수 있는 지식의 열쇠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익인가! “성경을 읽기 전후에 성경을 쓰신 성령께서 당신께 성경을 설명해 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기를 열심히 기도하라”(박스터).

 

둘째,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도 가르친다. 성경의 교훈 실천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실천에 의해 많은 것을 배운다. 오직 실천으로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배운 바가 진실로 진리라는 확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순종의 실천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곧 관념들로 가득 차 진리의 샘으로부터 흐름이 막혀버릴 것이다.

 

해석의 원리

 

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리고 문법적으로 해석하라.

2) 성경을 일관되게 조화적으로 해석하라.

① 모호한 내용은 명확한 내용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② 지엽적인 모호한 표현들은 근본적인 확실성들과 조화시켜 해석되어야 한다. “신앙의 원칙들, 신조에 규정된 요리문답의 요점들, 주기도문, 십계명 그리고 성례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어떤 본문의 해석도 옳지 않다.

3) 성경을 교리적으로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라.

타락된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

4) 성경을 기독론적으로 그리고 복음적으로 해석하라.

성경은 아기 예수의 강보와 같은 것이다.

5) 성경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해석하라.

6) 성경을 신실하고 현실적인 적용으로 해석하라.

   

 

 

제7장 청교도의 양심

 

1. 양심의 의미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지적 기관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양심을 드러내고 복종하기 전에는 진정한 영적 깨달음이나 참된 경건이 있을 수 없었다. 웜즈에서 한 루터의 중대한 말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리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1530년의 아우스버그 신앙고백 20장 칭의 교리에 대한 유명한 문장, “이 교리 전체는 ‘양심의 전투’와 관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투가 없이 이 교리는 이해될 수 없다.”

양심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율법의 심판 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받아들여지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였다. 양심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이 내려지는 법정이었다. 양심은 이 곳에만 참된 믿음과 소망과 평안과 기쁨이 자라날 수 있는 온상이었다.

 

살아 있는 기독교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의 엄중한 지시와 성령의 조명을 받는 양심의 이해와 활동에 직접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도 청교도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전체로서의 서양 사회에 있어 양심은 부패하였다. 배교가 일어남으로 믿음이 타락할 때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도덕 기준들이 타락하고 있다. 지식인들 중에서 때로 양심은 악용되고 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그들은 화있을진저”(5:20). 기독교회에서 양심은 예민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2. 양심의 정의

 

퍼킨스 이후 모든 청교도 신학자들은 양심을 선과 악, 의무와 의무 포기에 대한 문제들을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권위있게 처리하는 이성적 기능, 도덕적 자각과 판단의 능력으로 이해함에 있어 일치하였다. 양심이 소유하는 지식(con-science, 라틴어의 con-scientia에서 나온 말)은 공유된 지식, 공동의 지식, 타인-하나님과- 과 함께 공동으로 소유된 지식이었다. 윌리암 에임즈, “하나님의 그에 대한 판단에 따른 인간의 자신에 대한 판단이다.”(아퀴나스의 정의)

 

토마스 구드윈, “양심은 실천이성의 한 부분이다”. 양심이 작용할 때 상당히 자율적이라는 것은 보편적 경험이다. 비록 때때로 우리가 양심을 억압하거나 억누를 수 있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양심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하며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양심은 우리 위에 존재하여 우리가 주지도 않았고 우리가 빼앗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양심을 인격화하고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파수꾼과 대변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단순한 환상의 비약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필연이다. 청교도들은 양심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부섭정”,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염탐꾼”, 하나님께서 죄인을 체포하기 위해 고용하신 하나님의 경찰“이라고 한다.

 

십스,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 이 양심의 법정을 설치하셨다. 다시 말해서 양심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홀이다. 그리고 양심은 모든 역할을 행한다. 양심은 기록하고 증거하고 고소하고 심판하고 처형한다.”

 

페너, “양심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모두 우리에게 말해 주는 설교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양심은 강력한 설교자이다. 양심은 훈계하고, 강권하고, 선동한다. 양심은 하늘 아래에서 가장 견고하고 다루기 힘든 심령을 수시로 흔들어 놓는다. 양심은 하나님 자신의 영과 함께 연합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길로 우리를 지도한다. 그러므로 성령과 양심은 함께 반항을 받거나 순종을 받거나 하며 함께 탄식하거나 즐거워한다.”

 

3. 양심적 선택

 

1) 양심에 대한 청교도의 가르침은 청교도의 성경관을 반영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무조건적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이 양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따라서 이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스스로 주권적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에 제한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맞추라는 피할 수 없는 요구가 따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행하든지 그릇되게 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양심을 업신여기는 것이나 그릇된 양심을 좇는 것이나 모두 죄악이기 때문이다.

 

박스터는, 양심이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당신 자신의 판단이나 양심을 당신의 율법이나 당신이 해야 하는 의무의 결정자로 삼지 말라. 양심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의 분별자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하신 의무의 분별자이며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불순종하는가에 대한 분별자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위험한 오류가 너무나 평범하게 증대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입법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양심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분별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라고 명하기 위해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양심은 순종하지 말고 잘 분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그 길은 우리의 양심에 성경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계시된다. 청교도에게 있어 성경은 계시 그 자체였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었으며, 믿음과 생활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모든 시대의 교회에 분명한 지시를 주시기 위해,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성령께서 기록하신 하나님 자신의 구속의 활동과 계획에 대한 신령한 간증이었다.

 

우리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며 기대를 갖고 성경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우리가 직면하는 각각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확실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박스터, “하나님께서는 무지와 잘못을 치유하는 방법을 정해 놓으셨다. 자기를 믿지 말고 흔들림이 없이 빛으로 나아오라.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방법을 근면하게 사용하며 허위와 착오의 원인들을 피하라. 그러면 즉각 진리의 빛이 당신에게 진리를 보여줄 것이다.”

 

 

2) 양심에 대한 청교도의 가르침은 그들의 개인 신앙에 대한 견해를 반영했다.

청교도에게 있어 경건은 본질적으로 양심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경건은 알려진 복음 진리에 대한 충심의, 훈련된, 신중한 응답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선한 양심을 소유하고 유지함에 중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한 양심은 번연의 순례자와 같이 깨달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한 양심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을 통해 유지된다.

 

청교도는 선한 양심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십스, “양심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가 아니면 제일 악한 대적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을 아는 양심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다. 페너는 그 이유를 말한다.

① 평온한 양심은 모든 위로들 중의 으뜸이다.

② 평온한 양심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의 신령한 일들의 달콤함을 맛보게 한다.

③ 선하고 평온한 양심은 모든 외부의 일들, 곧 고기, 음료, 수면, 친구들과의 교제--에서 달콤함을 맛보게 한다.

④ 선하고 평온한 양심은 환난, 시련, 슬픔, 고통과 같은 불행도 달콤하게 한다. 질병과 죽음의 다가올 때 선한 양심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분명히 온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양심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평안의 메아리이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선한 양심은 부드러운 양심이다. 불신자의 양심은 너무 굳어 있어 거의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구하며 자기 경계와 자기 비판에 민활하게 부단히 활동한다.

 

3) 청교도의 양심에 대한 가르침은 그들의 설교관에 반영되었다.

청교도의 설교에 대한 이상에 있어 가장 독특한 특징은 듣는 사람들의 양심에 진리를 적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강조였다. ‘신령하고 유능한’ 설교자의 한 가지 표준은 사람들의 양심을 찢어 열어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스스로를 직시하게 하는 적용의 정확성과 신실성이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절하게 적용하는 기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를 능력으로 적용하신다는 경험에서 나온다. 신중하고 통찰력있는 적용들로 타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가장 큰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가장 깊은 훈련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청교도는 말한다. 오웬, “만일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4. 양심적 행위

 

1) 청교도의 윤리적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복음에 기초된 것이었다. 독선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복음에 기초된 것이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의 절대적인 윤리적 동기들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였으며 자신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었다.

 

2) 이 윤리적 가르침은 모두 기계적인 정확성을 완수하기 위한 판에 박힌 행동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태도와 적용적인 원리들의 형태로 주어졌다.

 

3) 청교도의 윤리적 가르침은 독재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가르침은 성경의 해석과 적용으로 주어졌다. 청교도들은 인간의 양심이 인간의 가르침에 속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속박되기를 바랐다. 청교도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하게 일치될 때에만 거기에 속박되기를 원했다.

 

4) 청교도의 윤리적 가르침은 열심있고 지혜로운 경건의 긍정적 이상의 형태를 취했다. 실제로 청교도의 윤리적 가르침보다 정신과 내용에 있어 비율법적인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 성직자들은 원칙을 을 포기하는 절개없는 자로 보임으로 그들의 과거의 목회 전체를 손상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필요하다면 고난을 받음으로 자신들이 공적으로 주장해 온 바를 진리로 확인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도방식 통일법령의 조건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해졌을 때 그 문제를 놓고 이리저리 방법과 수단들을 찾기 위해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광야로 물러났다. 그것은 행동하는 청교도 양심의 가장 중요한 예증이었다.

 

청교도 결의론의 두 가지 지배하는 원리는

1) 알려진 진리는 실행에 있어 타협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는 것.

2) 타협과 죄의 결과가 아무리 큰 유익이 될지라도 피할 수 있는 죄는 절대로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편의는 부정한 행동의 정당화가 될 수 없고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진리를 따르고 세상이 어떠한 대가를 준다 해도 그 진리를 팔거나 버리기를 거절하는 그들에게 있어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유일한 길을 택함으로 선한 양심을 지켰다.

 

그러므로 내가 내리고자 하는 결론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곧 모든 청교도 신앙을 특징지었고, 1662년의 축출에서 절정으로 나타난 이러한 양심적 행동은 언제나 필요불가결한 그리스도인의 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계시된 진리에 대한 인간의 정당한 응답이다. 1662년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러한 양심적 행동은 희생이 클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이 없을 때 성직은 불경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된다. 오늘날은 교회 생활의 타협 시대이다. 계시된 진리의 존재 자체가 널리 의심되거나 부정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고 성경이 그 계시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거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 다른 말로 우리가 청교도의 견해를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청교도를 특징짓는 성경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정절은 우리의 특징도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시여, 이 라오디게아와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빛과 그 진리를 적용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양심과 어떠한 희생도 무릅쓰고 그 진리를 고수하는 양심적 행동을 허락하옵소서.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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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 청교도사상(Among God's Giants), CLC, 2001

 

제 1 장 서론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둘레가 18미터, 키가 108미터, 수백년 천년 이상)는 나로 하여금 영국의 청교도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또 하나의 거인족이다. 1550년에서 1700년 사이에 그들은 꿋꿋한 삶을 살았다. 위대한 청교도들의 성숙된 경건함과 연단된 꿋꿋함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능력을 능가하는 하나의 횃불로 우리 앞에 비취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지나간 세대의 풍요가 우리 모두를 난쟁이와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청교도 거인들의 교훈과 모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책의 소론들은 40년 이상의 추구의 열매이다.

청교도 거인들은 적어도 일곱 가지 방법으로 나를 형성했다.

 

1) 나의 회심 직후에 있었던 어떤 위기의 때에 있어 존 오웬은 나의 계속적인 죄악과, 소명된 자기를 믿지 않는 것과 정욕의 억제의 훈련에 있어 현실적이 되도록(근시안적이 되거나 자포자기적이 되지 않도록)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오웬이 없었다면 나는 미쳐 버렸거나, 아니면 신비적 광신의 늪에 빠졌을 것이며, 오늘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2) 오웬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사랑의 주권과 특별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가 얼마나 일관되고 명백한지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었다.

 

3) 리차드 박스터는 규칙적으로 광범위한 묵상을 하는 것이 영적 건강에 있어 극히 중대한 훈련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영적 진리를 찬송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당신 자신에게 적용함에 있어 당신이 지금까지 들어온 중에 가장 강력한 설교자를 모방하라”. 시편과 교부들, 특별히 청교도가 계승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유산인 묵상 방법과 관계를 모방하라. 정관식(contemplation)의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다.

 

4) 박스터는 성직자의 목회 임무에 대한 나의 시각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5) 청교도들은 나에게 이 땅의 삶이 덧없는 것임을 보고 느끼도록 가르쳤다. 이 땅의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예비 학교이며 옷을 갈아입는 방에 불과함을 가르쳐 주었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사는 것을 배우는 첫단계임을 가르쳐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정의 평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약품과 의술은 초보적이었다. 반 이상의 성인이 젊어서 죽고, 태어난 아기의 반 이상이 영아로 죽은 세상에서 그들의 불변하는 동반자는 질병과, 빈곤과 고통과 죽음이었다.

 

오늘날의 풍요하면서도 나약하고 땅에 얽매인 서양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처리하지 못하는 삶의 직무에 대해 고요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심오한 진지성을 그들에게 주었다. 청교도들이 소유하고 살았던 비범한 활기, 환희는 그들이 죽음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움츠리지 않고 평범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던 현실주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6) 청교도들은 나의 교회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해 주었다. 개혁의 천재 토마스 크랜머나, 19세기의 거인 라일에게서도 전면적인 복음주의적 갱신이라는 이 이상을 배웠다. 대부분의 이상을 나는 청교도들에게서 배웠고, 리차드 박스터에게서 배웠다

 

7) 청교도들은 나로 하여금 모든 신학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어떤 영향력을, 받는 자들의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관계의 결여에 끼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의 신학이 믿음의 헌신을 조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신의 이탈을 강화한다. 만일 신학이 겸손을 고무하는 데 실패한다면 필연적으로 오만을 조장한다. 나는 청교도들이 알고 있는 모든 ‘교리(진리)’를 삶의 기초로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을 관참함으로써 이 책임의 본질을 터득했다.

 

본서의 장들은 청교도들이 우리와 비교할 때 거인들이며, 우리가 언제나 성장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인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의 그리스도인 영웅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성도의 교제에 있어 극히 중요하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제 1 부 청교도의 윤곽적 소개

 

제 2 장 우리에게 청교도가 필요한 이유

 

1. 성숙한 그리스도인

 

청교도들은 원칙적인 사람들이고 헌신적이고 단호하고 훈련적인 사람들이며, 가정의 미덕에 있어 특히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할 때 말씀에 의존하였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성숙 때문이다. 성숙은 지혜와 선의와 쾌활과 창조성의 복합이다. 우리는 영적 난장이라면 그들은 거인들이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들이었다. 맑은 머리의 열정과 따뜻한 가슴의 동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며 조직적인 그들은 위대한 신자들이었고, 위대한 소망자들이었고, 위대한 행위자들이었고, 위대한 고난자들이었다. 영국에서는 권력자들에게서 고난을 당했고, 뉴잉글랜드에서는 자연으로부터 고난을 당했다. 그 고난이 그들의 성숙을 이루었다. 우리의 풍요와 안일과 사치는 성숙을 이루지 못한다. 이 영적 전투가 전형적인 청교도를 만들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대장이며, 그의 무기는 기도와 눈물이었다. 십자가는 그의 군기이며, 그의 문장은 “고난받는 자가 승리한다”였다.

 

청교도들은 대개 모든 공적 전투에서 졌다. 영국에서는 영국교회를 원하는 만큼 변화시키지 못했고, 소수파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대서양을 건너가서는 뉴잉글랜드에 새 예루살렘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처음 50년 동안 청교도의 작은 이민들은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속적인 압박과 좌절들 아래에서 청교도들이 계속 즐겁고, 평화롭고, 인내하고 소망에 차 있음으로 쟁취한 도덕적 승리와 영적 승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제 일석을 차지한 신자들의 명예와 자리 중의 높은 영광의 자리를 그들에게 주었다.

 

휘트필드는 말했다. “시련 아래 있을 때 성직자들은 가장 휼륭하게 저술하고 설교한다. 그리스도와 영광의 왕이 그 때에 그들에게 거하시는 것이다. 청교도들을 그처럼 찬란하게 비추이는 빛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이유였던 것이다. 1662년의 검은 바돌로매 법령에 의해 쫓김을 당하여 헛간과 밭과 도로와 울타리에서도 설교할 수 없는 자리로 내몰림을 당하였으나,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처럼 저술하고 설교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저술로 말했다. 바로 이때에 독특한 감동을 주는 열정이 그들을 따랐다”

 

그들의 감동을 주는 열정은 계속되고 있고, 그 권위도 계속 느껴지며, 성숙한 지혜는 여전히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이 문헌의 역사를 통해 청교도들은 그들이 알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오늘날의 우리를 도울 수 있다.

 

2. 일상생활의 통합

 

1) 그들의 일상 생활의 통합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묵상을 행동과 통합하였고, 예배를 일과 통합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자기사랑과 통합하였고,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의 정체성과 통합하였고, 넓은 범위의 관계적인 책임들을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주도 면밀한 방법으로 관계적 책임들과 통합하였다.

 

2) 그들의 영적 경험의 특성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청교도의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고 성경이 가장 중요했다. 성경 진리의 전체 범위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묵상을 했다. 묵상 가운데 자기 심령을 탐색하고 도전하고,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감정을 분발시키고, 하나님의 약속들로 자신을 격려하고자 했다. 이 이성적이고 단호하고 열정적인 경건은 강박됨이 없이 신중하였고, 율법주의에 빠짐이 없이 율법 지향적이었고, 수치스러운 방종의 경향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성경은 변할 수 없는 거룩한 법칙이었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 심령의 부정직성과 기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변치 않는 마음가짐으로 겸손과 자기 불신을 교화하였고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흠들과 숨어있는 마음 속의 악들을 찾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자신을 검사했다. 그러면서도 병적으로 되지 않았고, 성경에 의한 자기성찰이었다.

 

3) 효과적인 활동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우리를 위한 교훈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타인들에게 맡기는 게으르고 수동적인 사람의 나태가 없었다. 그들은 조금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함이 없이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순수한 개혁 정신을 소유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자신들이 행한 일에 있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일꾼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들을 사용하시되 자신들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기를 열심히 기도하는 은사의 사람들이었다. 교회나 국가에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는 죄에서 거룩함으로 변화가 요구되는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해 효과적인 동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크롬웰과 그의 군대는 전투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고, 설교자들은 강단으로 감히 나아가기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고, 평신도들은 모든 중요한 문제, 즉 결혼, 사업 거래, 중요한 구매 등 무엇이나를 처리하기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다.

 

4) 가정의 안정을 위한 그들의 프로그램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당장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로 견실하게 사랑할 있는 배우자를 찾음으로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데로 나아갔다. 청교도의 자녀 양육 원리는 그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로 자녀들을 훈련시키고, 자녀들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돌보며, 근실하고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성인의 삶을 위해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청교도의 가정 생활 윤리는 질서와 예의와 가정 예배를 유지함이 기초가 되었다. 친절과 인내와 언행 일치와 격려의 태도는 가정에서 필수의 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가정을 요새로 삼아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칭송을 받을 만하다. 청교도들은 가정에서의 어려움과 실망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어려움과 실망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풀이 꺾이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성숙의 모범을 보였다.

게리, “그는 자신의 가정을 교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기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중생하도록 하기 위해 힘썼다.”

 

5) 청교도의 인간 가치 의식에 배워야 할 교훈들이 있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덕적 문제들과 영원과 인간 영혼이 중대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간 개개인들에 대한 경이감을 그들은 예민하게 느꼈다. 죄는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중세기의 양향을 받아 비록 그들이 분명히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언제나 존경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진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은 강력하였는데, 특별히 인간의 아름답고 고귀한 거룩성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6) 청교도의 교회 갱신에 대한 이상에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사>는 칼빈주의를 유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와 교사와 교리 문답자와 직무의 귀감으로서 그 자신이 ‘부흥된’ ‘갱신된’ 사람이다.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이해, 하나님을 향한 애정의 분발, 헌신에 대한 열심의 증가 그리고 자신의 소명과 개인적인 삶에 있어 확고한 기독교적 목적과,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이었다. 이와 조화하여 교회를 위한 이상은 곧 ‘개혁된’ 성직자를 통해 각 회중의 모든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청교도의 위대성

 

청교도주의는 핵심에 있어 하나님과 경건에 열정적으로 관심을 두는 영적 운동이었다.

청교도주의는 본질적으로 교회 개혁과 목회 갱신과 복음 전도를 위한 운동이었으며, 청교도주의는 세계관이며 기독교 철학이었다.

 

청교도의 목표는 영국의 개혁이 시작한 바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곧 영국국교회 예배의 형태 수정을 완성하고, 영국 국교회 교구에 효과적인 교회 기율을 도입하고, 정치와 가정과 사회 경제 쳬계에 정의를 수립하고, 모든 영국인들을 살아 있는 복음적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도하고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모든 예술, 과학, 기술들의 성경화를 통해 영국은 성도들의 땅, 집합적 경건의 귀감과 모범이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세계의 축복 수단이 되는 것이었다.

 

4. 청교도의 교훈

 

오웬, 박스터, 구드윈, 하우이, 퍼킨스, 십스, 브룩스, 왓슨, 거어널, 플라벨, 번연, 맨턴 등과 같은 위대한 청교도 목사이며 신학자들은 영적 통찰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적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착실한 학문에 의해 육성된 지적 기질은 하나님을 위한 불타는 열심과 인간 심령에 대한 세밀한 지식에 연결되었다. 그들은 사고와 관점에 있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심원하였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다룰 때 그들의 경의는 깊고 불변적이었다. 그들은 인간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방법들과 중보이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신자와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가장 풍성하게 이해하였다.

 

그들의 지식은 단순한 이론적 정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신 모든 것을 실행과 ‘일치시키고자’ 애썼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자신들의 파악을 삶의 모든 지류에 적용시켰고 교회, 가정, 국가, 예술과 과학, 상업과 산업의 세계를 개인의 헌신에 못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하나님께서 섬김을 받으시고 영광을 얻으셔야 하는 많은 영역들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의 창조주를 삶의 각 부분의 주인으로 보았고, 그들의 목적은 ‘주님께 대한 거룩함’이 삶에 기록되고 삶의 영원성 가운데 기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복음세계에 있어 세 집단이 청교도만이 줄 수 있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1) 불안한 경험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로 착각하기 쉬운 자들이다. 외부에 대한 시각은 일관성이 없고 매우 성급하며 신기한 것들과 즐거움과 ‘높은 이상들’을 추구하며 깊은 사고보다는 강한 감정을 존중한다. 그들은 딱딱한 공부 겸손한 자기 반성, 훈련된 묵상, 호화롭지 않고 힘든 직업과 기도에는 거의 흥미가 없다. 믿음의 전투나 ‘낮아짐’과 같은 균형감각이 없고, 기쁨, 평화, 행복, 만족, 영혼의 안식같은 주제들만 계속 강조한다. 이 떠들썩한 사람들은 들뜬 상태 가운데, 보다 더 기묘하고 인상적인 경험이 더 신령하고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경험이 틀림없다고 무비판적으로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고 진실한 사고에는 성경적인 덕성을 거의 부여하지 않는다.

 

청교도의 어떤 강조점들이 불안한 경험주의자들을 안정시켜 차분하게 할 수 있을까? 신적 요구로서의 하나님 중심에 대한 강조. 언제나 겸손하고 인내하고 절제하라는 요구와 성령의 주요 사역이 흥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 닮은 인격을 창조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요구. 시 139:23-24에 제시된 대로 성경에 의한 규칙적인 자기 반성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신령한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은혜 가운데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청교도의 교육 전통보다 더 능숙한 권위를 가지고 이렇게 정화하고 강건하게 하는 약을 사용한 다른 기독교 교육 전통은 없다.

 

2) “자기 방어적 주지주의자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엄격하고 논쟁적이고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 정통적 관행이 모든 것인 자들, 하나님의 진리의 옹호자들로 나타낸다. 칼빈주의건 알미니안이건, 세대주의건 오순절파이건, 국가 교회 개혁주의자이건, 비국교파 교회 분리주의자이건, 무엇이거나 간에 자신들의 진리관을 옹호하고 방어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이며, 그들은 이 과제에 아낌없이 자신을 투자한다. 그들의 주위에는 거의 온기가 없이 냉랭하다. 그들은 교제 관계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 있어 경험은 큰 의미가 없다. 지적 정확성을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들의 하나의 큰 목적이다. 그들은 지성의 우선권을 잘 이해하고 있다

청교도 전통이 빈약한 주지주의에 대해 어떤 강조점을 제시하는가? 참된 신앙은 지성 뿐만 아니라 애정을 요구한다는 것. 신학적 진리는 실천의 위한 것이라는 것. 실제들을 아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관념적 지식은 죽이는 것이 된다는 것. 사랑과 거룩한 생활의 필요하다는 것. 묵상의 훈련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끊임없이 열심을 내고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두뇌가 명석했던 것만큼 마음이 겸손하고 따듯했으며 성결 지향적인 만큼 인간 지향적이었으며, 진리를 위해 열정적인 만큼 평화를 위해서도 열정적이었다.

 

3) 불평적인 분리주의자들

이들은 현대 복음 운동의 조난자이며 태만자들이고 그들 중의 많은 자들은 이제 복음 운동에 악감을 가지고 복음 운동을 기독교의 신경증적 왜곡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복음으로 양육을 받았거나 또는 복음적 영향권 내에서 회심을 고백함으로 한때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들로 보았으나 복음주의적 관점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복음주의가 자신들을 실망시켰다고 느끼고 등을 돌린 사람들이다. 지적인 이유로, 또는 상처와 분노로 인해 그들은 자신을 신용 사기의 희생자로 생각하게 되어 복음주의가 자신들을 실패시키고 바보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원망하며 포기해 버린다.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청교도들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청교도 저자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손실과 고난’, 즉 우리의 소망들과 관련된 좌절과 실망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에 있어 반복되는 요소라는 것이다. 둘째, 청교도 저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들은 죄인들을 구속하고, 회심시키고, 성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영광에 대한 열망과 이 영광을 즐기 위한 능력을 조금씩 배움으로 이 영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예배와 변함없는 사랑의 순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이 땅의 거룩은 내세의 행복으로 가는 고속도로인 것이다. 넷째로, 세상과 육체와 악마와 우리를 타락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방법의 ‘영적 전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다섯째로, 악을 허용하기도 하며 영적 전투를 지배하시고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여섯째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완전히 맡기고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의 기쁨과 희락으로 삼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나는 지금까지 읽어왔던 어떤 다른 신학자들보다 청교도들에게 더 많은 신세를 지고 있고, 청교도들이 나에게 아직도 필요하다. 우리 청교도의 유산을 함께 계속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하자. 더 많은 황금이 발굴될 것이다.

 

제 3 장 부흥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

 

1. 청교도 운동의 정의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이 운동은 일세기 이상 동안 계속 뭉쳐 이어진 성직자-평신도 운동이었다. 그들은 특성에 있어 성경주의자이며 칼빈주의자였다. 참되고 진정한 신약성경 형태의 교회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공유하는 문헌이 있었다.

 

나는 부흥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영적 사망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생명의 믿음을 전달하시고 활기없이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역사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흥 가운데 엣것들을 새롭게 하시고, 율법과 복음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시고, 마음과 양심이 눈멀고 딱딱하고 차가운 자들에게 새로운 영적 각성을 주신다. 따라서 부흥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 집단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회에 신령하고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게 한다. 사도행전 처음 몇 장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시켜 볼 때 부흥의 표적들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감과 복음의 진리를 들 수 있다. 곧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은 깊은 회개로 이어져,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결과가 된다. 다음에 영의 강력한 언어의 자유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억제할 수 없이 증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서 은혜의 역사를 강화하고 급속하게 진행시키심으로 사람들은 말씀에 의해 거꾸러지고, 성령에 의해 변화를 받게 된다. 사도행전을 모범으로 따른다면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자신의 나라를 넓히시고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본질적으로 집합적인 현상이다.

 

2. 청교도의 개혁

 

나는 청교도 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교도의 역사가 부흥의 역사로 이야기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감히 말한다. 그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청교도의 전도와 교육과 경건과 목회 사역과 영적 경험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갈 길이 멀고 이 자료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유아 상태에 있다. 나의 논증에 대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영적 부흥은 청교도들이 추구하고 있다고 공헌한 바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청교도는 ‘부흥’이라는 말을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나타내는 전문적 술어로 사용하지 않고, ‘개혁’이라는 어휘로 자신들의 목적을 표현하였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사>는 활력과 열심과 목적에 있어서 갱신되었다는 의미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목회를 개혁하셔서 그들이 자신들의 의무들을 열심히 그리고 신실하게 행하게 하신다면 분명히 이 백성은 개혁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일관되게 교회의 ‘개혁’을 교리와 질서와 같은 외적인 문제들로만 이해하고 심령과 생활의 내적인 갱신에 대해서는 상관을 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던 ‘개혁’ 목표의 영적 차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영적으로 흥하는 것을 보기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갱신된 목회자 없이는 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복음적인 자격을 갖춘 목회자에 대한 관심이 청교도의 우선권 목록 중에 언제나 최우위였다.

 

청교도에게는 죄인들의 구원이라는 말은 단지 그들의 회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제 가운데 영적 건강과 힘과 헌신적 순종으로 성장-간단히 말해서 ‘거룩’(청교도는 이 위대한 말을 경건한 삶의 모든 국면과 범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한 성직자에 대한 청교도의 세 가지 칭찬 ‘능력있고(powerful)’ ‘수고하고(painful)’ ‘유용한(useful)' 목회가 없다면 영국 백성 가운데 거룩은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성직자가 일 세기 이상 동안 설교와 목회에 자신을 바친 이유였다. 그들의 추구한 대의는 개조라기보다는 부흥이었다.

 

‘청교도 경건 문헌의 중심 주제는 개인의 부흥이었다’. 존 다우네임, ‘그들은 설교와 문헌에서 이론과 적용에보다는 경험과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판단의 정보를 주고 지식을 증가시키기 보다는 주로 심령의 성화에 더 이바지하였다. 또한 경건한 생활의 의무들 가운데 실행을 분발시키고 새로운 순종 가운데 믿음의 열매를 맺는 데 이바지하였다’.

 

청교도 서적들의 범주로는 다음과 같은 서적들이 포함된다.

 

1) 복음 서적들

이 서적들은 죄와 유혹, 회개와 믿음, 회심과 중생을 다루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은 중생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으로 중생의 신학이라고 칭해져 왔다. 존 로저스의 <믿음의 교리>, 퍼킨스의 <회개의 본질과 실제에 대한 논문>, 리차드 십스의 <상한 갈대>, 윌리암 와틀리의 <새로운 탄생>, 존 플라벨의 <은혜의 방법>, 일년에 2만부가 팔린 박스터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회심자에게 돌아와 생명을 얻으라는 부르심>, 한 세대 내에서 7만부가 배포된 조셉 알레인의 <비회심자에 대한 경고>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한 ‘예비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2) 결의론적인 서적들

이 서적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정해진 행위 기준들을 낱낱이 기술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결의론은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었다. 결혼과 가정, 생업, 신비, 재물의 사용, 진리의 청지기 직분 등을 다룬다. 박스터의 대작 <훈령집>이 대표적이다.

 

3) 공생적 서적들

이 서적들은 ‘위로하기’, 즉 강건하게 하고 격려를 주기 위해서와 그리스도인에게 ‘승리의 보장’에 근거한 ‘즐거운 순종’을 위한 동기와 자원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이 범주로는 복음의 여러 주제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공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 그리고은혜의 언약 가운데 삼위일체의 세 인격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 을 설명하는 무수한 책들이 분류된다. 이 풍성한 내용들은 아무리 오래 되었고 난해할지라도 아직까지도 필적할 만한 책들이 없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전체로서의 청교도 경건 문헌은 비범하게 동질성을 나타내며 그 목적은 일관되고 있다. 그 목적은 성도들에게 소명된 순례와 전투와 선행의 생활 가운데 믿음과 회개와 확신과 기쁨의 열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개인적 부흥이라고 칭하는 것을 매우 적절한 영적 상태로 창출하고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성직자를 “주님의 가족을 가르치고 먹이고 부양하며, 널리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양들을 찾는 주님의 사자와 파수꾼과 청지기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목회자의 선구자인 리차드 그린햄은 1570년에서 1590년까지 캠브리지 부근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신의 양떼가 일터로 흩어지기 전에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월, 화, 수, 금요일에 새벽 설교를 했다.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했고, 매주일 저녁과 목요일 아침에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하였다. 그는 아침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병자들을 심방하거나, 또는 쟁기를 잡고 일하는 이웃들과 협의하기 위해 밭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너무 열렬했고 비상한 노역을 하였으므로 모든 그의 와이셔츠는 물에 흠뻑 담근 것같이 땀으로 젖곤 했다. 그는 강단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시 올라갈 정도로 과로를 했다. 그는 보기 드문 목회 상담자였다. 그는 괴로워하는 양심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해주는 큰 경험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근 도처에서 영적 고통과 유혹들로 번민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이 신령한 의사의 명성은 널리 퍼져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부름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의 수고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므로 그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위로의 회복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건함과 통찰력과, 복음적인 메시지와 근면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회는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그는 그의 후임자에게 ‘나는 한 가정 외에는 아무에게도 나의 목회로 이루어진 유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린햄은 푸른 초장을 갖고 있었으나 양떼는 야위어 있었다.’

 

리차드 페어클로프는 1647년에서 1662년까지 한 촌락에서 목회했다. 그의 친구인 존 하우이가 그의 장례식 설교에서, ‘그에게는 항상 많은 성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병든 사람들을 심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 안에 있는 모든 가정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개인적으로 그리고 따로따로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 영혼의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 노력하였고 게다가 또 교훈과 책망과 권고와 훈육과 격려 가운데 자신을 적절하게 그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힘들어하지 않고 즐겁게 그리고 철저하게 행했다. 그의 마음 전체는 자신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해 동안 매일 그는 새벽 세 시에, 또는 더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이것은 그가 진실로 기뻐하는 일이었다)’

 

이 생활 방식은 그린햄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으나 이제 추수기가 이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리차드 박스터의 사역이다. 그는 1641년부터 1660년까지 키더민스터에서 사역하였다. 키더민스터는 성인 2천명 정도의 촌락인데 그들 대부분이 그의 목회에 의해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들을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로-- 그들은 생명있는 진실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회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내가 그곳에 처음에 왔을 때에는 한 거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한 가정이었으나 내가 그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여러 거리에 몇 가정밖에 안되었다. 내가 개인 면담과 그들을 교리문답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마을 전체에서 오기를 거절한 가족은 매우 적었다(박스터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표면상으로 경건한 삶에 대해 진지한 약속을 하지 않고 나와 헤어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박스터가 말하는 바는 <개혁된 목사>에서 그가 묘사하고 추천하는 실행이며 또한 우리가 하우이에게서 들었고 페어클로프도 따랐던 실행으로, 곧 개인적인 영적 교제를 위해 조직적으로 가족들을 면담하는 것이다. 박스터는 한 주에 이틀을 할애하여 매일 7,8가정 비율로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과 만나 매년 교구의 8백 가정들과 모두 관계를 가졌다. ‘나는 먼저 그들이 교리문답의 내용을 암송하는 것을 듣는다(그가 사용한 교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의미에 대해 구두시험을 보고, 마지막으로는 가능한 한 모든 마음을 끌 수 있는 이유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있는 사랑과 실천을 그들에게 강권한다. 나는 한 가족에 약 한 시간을 사용했다. 그 실행의 가치에 대한 그의 간증은 강조적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흑암의 왕국을 분쇄하는 가장 바른 진로를 전혀 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한 나의 모든 공적 설교보다 더 뚜렷한 성공의 표적들을 알고 있다.’ ‘진실한 경건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겸손한 정신과 태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제 공백 기간이 지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추수 때가 온 것이었다. 나의 마지막 논평은 이것이 바로 부흥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과거에 목회자들이 중요한 역할들과 거룩한 삶을 담당하며 영혼들의 유익을 목타게 구했고, 완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들의 시간과 힘과 재산을 바치며 고통이나 희생을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경건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연구에 있어 나의 과제를 청교도주의가 부흥운동이었다는 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휘필드는 1767년에 썼다.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보다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이 부흥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훌륭한 과거의 청교도 저술들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20년대에 앤트림에서 있었던 부흥만큼 극적인 사건은 청교도의 영국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에 열광적인 제임스 글랜디닝은 복음을 설교하는 법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설교하여 로버트 블래어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를 대신하여 설교를 했는데 로버트 플래밍은 이 일을 ‘복음의 밝고 뜨거운 태양의 명멸’이라고 칭했다. 또한 청교도의 영국에는 1631년 월요일 커크 오 쇼츠에 있었던 일같이 압도적인 사건도 없었다. 그때에 수줍은 존 리빙스턴은 그 전에나 그 후에 두 번 다시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설교를 했고 그 설교 후에 500명이 그의 설교에 수반된 능력에 의해 회심을 했다거나 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화했다고 간증했다. 1620년대 언제쯤인가 유명한 존 로저스가 청중들에게 성경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질타했던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입장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너희에게 오랫동안 나의 성경을 맡겼다. 그런데 그 성경이 아무아무 집들에서 먼지와 거미줄에 완전히 덮혀 있다. 너희는 성경을 듣는 것에 관심이 없다. 너희가 내 성경을 그렇게 사용하느냐? 좋다. 너는 내 성경을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자에서 성경을 집어들고 마치 그것을 그들에게서 가져가 버리는 것같이 보이게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역을 바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역할을 취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극히 진지하게 소리지르며 간청했다. “주여,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셔도 좋지만 당신의 성경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마소서, 우리 자녀를 죽이시고 우리 집을 불태우시고 우리 재산을 멸하소서. 그러나 우리에게서 당신의 성경만은 남겨두시고 당신의 성경은 가져가지 마소서.” 그 다음에 그는 다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할을 취했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느냐? 좋다. 잠시 동안만 너희를 시험해 보도록 하겠다. 자. 너희를 위한 성경이 여기 있다. 나는 너희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지 볼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더 말하고 더 실행하고 더욱 그에 따라 사는지 볼 것이다.

 

이 말은 그곳에 있었던 토마스 구드윈이 존 하우이에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는 교회에 가득한 사람들이 눈물에 젖었고 구드윈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밖으로 나갔을 때 말에 올라탈 힘이 없어 15분 동안 말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처럼 비범한 영감이 그에게 임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대체적으로 임하여 성경에 대한 태만을 고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청교도의 부흥은 비교적 조용하고 질서적인 역사였던 것 같다. 예외가 있다면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1640년대와 1650년동안 지나치게 끓어올랐던 광신을 들 수 있다.

 

3. 청교도의 부흥

 

청교도 신학과 예배는 발전함에 따라 더욱 부흥의 산출물과 부산물로서의 그 특성을 나타냈다. 청교도 목회 기록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부흥 운동에 신선한 빛을 던져 줄 것이다. 엘카나 웨일스는 “그 자신의 사람들보다는 낯선 사람들과 이따금씩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더 많은 회심자를 얻었으며 전국에서 영혼을 회심시키는 데 가장 성공한 설교자”로 간주되었다. 헨리 오스랜드는 “이곳 저곳을 말타고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설교하여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또한 어린이 복음 전도자인 토마스 라이는 목회를 마친 후 40년 이상 동안 “어린이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뛰어난 재주”로 기억되었다. 이들 외에도 수백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부흥기에 활동한 부흥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내력은 우리를 청교도 운동의 바로 중심에 데려다 줄 것이다.

 

 

제 4 장 영국 청교도의 실천적 저서들

 

1. 국교회의 상태

 

1570년 ‘애정깊고 실제적인’ 목회자들과 저술가들의 아브라함이 자신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갔으니 그의 이름은 리차드 그린햄이었다. 그는 자기 도시에서 약 7마일쯤 떨어진 드라이 드레이턴의 목사가 되기 위해 켐브리지의 펨브로크 문학회의 특별 회원의 지위를 사임하였다. 그는 박스터 유형의 선구자적 개혁된 목회자였으며 진정한 사도적 방법으로 영국 농촌에 복음을 뿌리내리는 과제에 도전한 첫 번째의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회 상담자. 또는 영적 의원으로서의 큰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성직 수임 후보자들이 사실상 견습생으로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그와 함께 공부했다. 지역의 목회자들과 먼 곳으로부터의 방문자들이 항상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이렇게 그린햄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봉사와 목회 사역에 많은 경건하고 학식있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양성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요, 수단이었다.”고 홀란드는 말한다.

 

그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대학에 계속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캠브리지의 장로교 선동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방침은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덮는 것과 같다.” “자신을 개혁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교회 기율에 바빠서 자신의 사적인 타락을 보지 못한다.“. 캠브리지에서의 그의 모든 영향력은 인격적인 신앙과 교회의 평화를 조장하고 죄와 교회의 분립을 막는 데 기울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평화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나 심지어 자신이 공감하는 견해들까지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반대하였다. 그가 요청한 모든 것은 자기 양심에 순종하고 자기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유였다. 그는 영적 암흑으로부터 지역을 인도해낼 청교도 목회자들의 새세대의 전형이었다.

 

다른 반 세기 이상에 걸쳐 캠브리지는 그린햄 형의 많은 영적 의원들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그들의 양성소는 그리스도의 대학이었다. 로렌스 체덜턴은 캠브리지의 재학생 시절에 신교도가 되었고 1584년 임마누엘 대학의 초대 교장이 되기 전에 20년의 가장 좋은 기간 동안 캠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있었다. 채덜턴은 50년 동안 성 클레멘트 교회에서 한 주에 한 번 ‘강의’(설교)를 했다. 그리고 82세에 설교를 그만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40명의 성직자들에게서 설교를 그만두지 말기를 간청받으며 자신들이 그의 사역의 덕택으로 회심을 하였다고 증거하는 서신들을 받았다. 풀러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채덜턴은 언젠가 두 시간 동안 설교를 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을 하자 청중들이 “하나님을 위해 계속해 주십시오, 계속해 주십시오”라는 눈물의 외침을 들었다고 한다. 1574년부터 웨드스필드에서 목회를 한

‘또 한 명의 그린햄’, 리차드 로저스와 윌리암 구쥐와 존 프레스턴의 선도자이며 아쉬비델라 주크에서 40년 동안 설교했던 아더 힐더샘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 재학생 시절에 회심하여 1584년 특별 연구원이 된 채덜턴의 제자 윌리암 퍼킨스도 그러했다. 퍼킨스가 1602년 사망했을 때 뒤를 이어 성 안드레 대교회에서 매주 강의했던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의 사람 폴 베이네스는 리차드 십스를 설교로 회심하게 했고, 리차드 십스는 존 코턴을 설교로 회심시켰고, 존 코턴은 존 프레스턴을 설교로 회심시켰다. 구드윈이 1613년에 20세의 나이로 그리스도의 대학에 왔을 때 청교도로 칭해지는 여섯 명의 특별 연구원 교수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교장인 메인브릿지가 한 회개에 대한 설교는 곧 구드윈 자신을 회심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채덜턴, 로저스, 힐더샘, 퍼킨스, 구쥐, 베이네스, 십스, 코턴, 프레스턴 그리고 구드윈 모두는 ‘애정깊고 실제적인’ 목회자와 복음 전도자들 중에 모범적인 역할을 하는 지위를 얻었다. 이렇게 캠브리지 운동은 항상 영적 깊이를 유지하며 또한 숫적인 힘을 모으면서 진행되었다.

 

놀라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슬픈 사실은 이 존경할 만한 인물들에게서 본을 받은 젊은이들이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 캠브리지 대학생이 1586년 의회에 낸 탄원은 이 문제에 있어 행동을 요구한다.

 

현재 우리 대학에는 이 땅의 대부분에 있어 해결되어야 하는 공통 과제인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위해 충분한 은사를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 중에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 직무에 부름을 받는 자는 거의 없다. 무식한 목회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 쓰레기인 자들은 수천의 영혼들의 파멸과 하나님의 교회의 수치와 학문의 완전한 멸망을 오히려 좋아한다. 우리 자신이 책임을 맡는 어떤 수단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성직 임명자들의 탐욕이 이처럼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성직 매매, 거짓 서약, 나아가 거의 명백한 동냥의 방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일꾼이 크게 부족한 가운데 우리는 하루 종일 시장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우리 교회의 상태는 이처럼 탄식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공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으나 이 젊은 청교도들에게 설교직을 주기 위해 많은 교구들에 강사직이 생겼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제임스 그리고 찰스 시대에 영국 도처에 복음의 누룩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2. 청교도 저서들

 

모든 사상 운동은 그 자체의 문헌을 필요로 하는데 청교도 운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쾌하고 단순한 문체의 은사를 받은 퍼킨스는 이 점에 있어 선구자였다. 1589년 그는 청교도의 경건을 장려하기 위해 설교 형식으로 쓰여진 일련의 대중적인 책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정죄의 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은혜의 상태에 있는지를 선포하기 위한 논문>, <금사슬 이론; 구원 계획에 대한 칼빈주의적 연구>, <영적 방치>, <육과 영의 전투>이다.

뒤를 이어 리차드 로저스는 <7개의 논문--이생과 장래의 생 모두에 있어 참된 행복으로 가는 인도와 안내--기독교 신앙의 실행--그 중에 가장 특별히 참된 그리스도인은 매일 경건하고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기독교 신앙의 실행>을 썼다. 존 다우네임은 <그리스도의 전투>를 썼고, 아더 덴트의 <천국으로 가는 인간의 평탄한 길>,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실천>, 존 도드와 로버트 클리버의 <십계명>이 있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설교와 동일 수준인 평신도 수준으로 저술함으로 곧 매우 넓은 독자층을 획득할 수 있었고 17세기 전반에 있어 그들의 서적들의 영향력은 원대하고 깊었다.

 

두 세대에 걸친 청교도 서적들의 영향력은 그린햄의 드라이 드레이턴 목회와 박스터의 키어민스터 목회를 비교해 봄으로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린햄은 20년 동안 수고하였으나(1570-1590)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박스터는 14년 동안(1641-1642,1647-1660) ‘그때까지 생명력있고 진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사역하여 약 8백 가정과 2천여명의 건강한 성인들이 살고 있는 그 지방의 대부분에서 “나는 얼마나 가치없는 벌레와 같은 존재인가--나의 어린 시절의 존경하는 목회자들이 한 곳에서 50년 동안 수고하고도 자신들의 교구에서 한 두명의 회심자를 얻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하게 나를 격려해 주시다니!”라는 의미심장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경우에 있어 사용된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박스터도 강단에서나 개개인들과의 교제에서 ‘나 자신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며’ 평생을 보냈다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세대의 청교도 설교와 경건한 저술들에 발효된 박스터의 영국은 그린햄의 영국과는 다른 곳이었다. 묵은 땅이 파헤쳐져 수십 년 동안 충실하게 씨가 뿌려져서 이제 추수기가 이른 것이었다. 그린햄과 로저스와 같은 사람들을 목회로 인도했던 회심된 공동체라는 박스터의 목회 비전이 결국 그 성취를 보게 된 것이다.

 

공화국 시기 동안 영국의 많은 지역에 추수의 태양이 밝게 비추었으나 곧 폭풍의 구름이 다시 몰려와 ‘애정깊고 실제적인 영국 작가들’의 역사는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어두운 그림자에 덮혀 끝이 난다. 1640년대에 정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일치하지 못했다(이것이 크롬웰이 그 자신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던 바와는 반대로 마음 내키지 않는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에 일치하였으나 교회 종류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괴한 행동들과 광신이 들어와 청교도의 계획을 망쳐 버렸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양심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제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내적인 빛의 인도들을 확인했다. 목회자들은 영원의 빛 가운데 땅에서 사는 기술을 가르쳐 왔으나 이제 열심파들은 17세기에 영국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직분을 높여 왔으나 이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영감을 받는 대로 자기 생각을 담대하고 무제한적으로 공공연하게 발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설교자들은 성령이 없는 학문은 성경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해 왔으나 이제 교육을 통해 부적격자도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육을 받고 신학적으로 학문을 갖춘 청교도 목회자들이 이 경향들에 대해 반박하자 퀘이커교도들, 광적인 설교자들, 머글레토니안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자들은 청교도 목회자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스터는 이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는 인쇄물들의 활동에 무엇인가 마귀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다. 1653년에 “나는 최근 인쇄물의 방종하고 사치한 범람은 전에 사람들에게 읽혔던 분별력있고 경건하고 뛰어난 저술들을 매장시키고 압도해 버리려는 대적의 계획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혼란과 불안이 만연하고 있었다. 청교도 부흥은 스스로의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죽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왕정과 영국 국교회의 의 복고는 필연적인 반동으로 1660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이 결과는 재난이었다. 무시무시한 클래런던법이 그들을 몰아내고 억압하였다. 그들이 영국 국교회 밖에서 지속하던 사역은 불법이 되어 그들을 한꺼번에 감옥으로 밀어넣어졌다. 존 오웬, 토마스 구드윈, 존 하우이, 리차드 박스터, 스티븐 차녹과 같은 위대한 목회 신학자들은 이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많은 저술을 했고 번연의 훌륭한 우화들도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영국 교회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들은 그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젊은 비국교주의자들에게 문을 잠그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의 동류를 효율적으로 재생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던 조직화된 비국교주의는 자유가 도래했으나(1689) 그들의 선구자였던 청교도 사상의 장성함에 이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1705년 마지막 거인인 존 하우이가 죽었을 때 청교도 운동도 끝이 났다.

 

3. 청교도 저술가

 

경건한 청교도 저술가들 중에 리차드 박스터는 처음부터 내용과 양식 모두의 장엄함에 있어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앗다. 문체의 명쾌함과 힘, 질서와 열정, 지혜와 온정, 넒이와 깊이, 목회자의 신실성과 권위는 그의 모든 ‘애정깊고 실제적인’ 저작들에 함께 나타난다. 첫 번째의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독교 훈령집>과 <빈자의 가정서>, <가정교리 문답> 이 시리즈는 청교도 경건 서적의 정점이며 청교도의 영적 가르침의 영향을 받는 넓은 세계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손쉽고 편리한 지도서로 기여할 것이다.

 

 

4. 청교도의 실천신학

 

청교도 실천 신학은 유럽 대륙의 개신교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륙의 교회들이 청교도의 실천신학을 얼마나 크게 평가했는가는 그들의 번역들의 수를 볼 때 알 수 있다. <경건의 실천>은 계속 유럽어들로 번역되었다. 퍼킨스의 영어 작품들은 라틴어, 화란어, 스페인어, 아일랜드어 그리고 웨일즈어로 번역되었다. 박스터는 폴란드와 항가리까지 널리 읽혀졌다. 청교도의 실제적인 저서들이 온 유럽 전체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우리도 그 가치를 깨달으려는 준비를 하게 한다.

 

이 경건 문헌이 단순하게 표현되었고 어떤 전문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중적이었으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청교도 저자들은 박학하고 정신력이 강하고 책을 많이 읽는 퍼킨스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적인 사람들이었다. 퍼킨스는 그의 시대에 서유럽 전체에 최고의 개혁 신학자로 알려졌다. 전세계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은 교회 질서에 대한 문제들 뿐만 아니라 교리에 대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대논변가들이었고 이러한 논변을 자신들의 목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성경의 진리는 영양을 주는 것이며 인간의 그릇된 생각은 죽이는 것이므로 신령한 목자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존 오웬은 말한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진리, 곧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복음의 교리를 보존하고 모든 반대에 대해 진리를 변호하는 것은 의무이다. 이것은 목회에 있어 한 가지의 중요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의무에 대한 죄악된 태만은 교회를 해치고 타락시켜 온갖 간악한 이단과 그릇된 생각들의 큰 원인이 된다.” 오직 진리의 직접적인 해설과 적용만이 긍정적인 방법으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다. 청교도 실천 서적들의 고의적인 단순성의 뒤에 명석하고 학문깊은 신학자들의 배려와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문헌의 참된 가치를 평가하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다섯 가지의 결정적인 자질들로 인해 청교도 저자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지금까지 현대의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룩하게 되었다.

 

1) 그들은 영혼의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가 죄인들의 삶에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퍼킨스가 신학을 “영원히 복된 삶의 과학”으로 정의할 때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식에서 기인하는 생명은 복되도다”라고 덧붙인다. 즉 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문제이며 직접적으로 실제적인 목적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복음의 교리는 순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자는 가장 실천적인 신학자이며, 가장 실천적인 신학자가 가장 성경적인 신학자일 것이다. 그리고 도처에 실천적인 적용과 도전들을 수반하는 설교 형식이 가장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방법일 것이다.

 

청교도들은 순종된 진리는 낫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이다. 이 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는 심령을 황폐하게 하여 죽이는 질환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죽을 병에 걸린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중생한 자들도 여전히 병에 걸려 있지만 은혜의 역사가 그들의 삶에 계속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나아지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아무도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 없고 누구나 항상 병이 도질 수 있는 병원이다. 목회자들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압박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이익과 쾌락과 자만으로 인해 그들 자신도 성경의 약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단계에 있는 자신들의 영혼을 위한 약으로서의 성경 진리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기 반성과 자기 지식은 그들의 심령을 얼밀히 조사하여 죄를 못박고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를 도덕적인 악과 영적 악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숙련된 기술의 비결이다.

 

2) 그들은 양심을 향한 해설자들이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교리)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양육, 훈련)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경 자체에서 터득된 청교도 설교학은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과 상호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며, 사랑의 언약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되는 길이며, 일단 이 관계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에 따라 사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청교도의 해석 방법은 본문이 제시하는 교리들- 즉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원리들- 을 설명한 다음 그 교리들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청교도 저자들을 ‘실제적’, 또는 ‘실천적’이라 칭한 이유이다. 그들의 적용들은 양심, 즉 스스로 판단하는 실천 이성, 각각의 현실적 순간에 있어 자신의 의무와 자신의 공과와 자신의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심사 숙고하는 이성을 향한 것이었다. 청교도는 이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적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된 신령한 진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부여함으로, 자기 판단 과정을 시작케 함으로, 그리고 내려진 판단에 적절한 응답을 유발시킴으로 말씀을 존귀케 함에 있어 성령께 의지하였다. 이 응답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전 영역에 미치는 것이었다. 곧 회개, 겸손, 자기 불신, 자기 부정, 헌신, 순종, 찬송, 감사, 간구 여기에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집착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성향의 ‘애정’(단지 지나가는 감정의 기복이 아니라 정서를 수반한 심령의 확고한 기울임)이 추가된다. 청교도의 이 성향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이 성향들(기쁨, 슬픔, 갈망 등등의 특유한 대상을 지향하는 성향들)을 일깨우고 강화하려는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은 이 저자들이 ‘애정깊은’ 저자들로 칭해진 이유를 설명해 준다.

 

틴데일은 말한다. “성경은 자체에 대해 증언하였고 언제나 또 하나의 밝혀진 본문에 의해 자신을 해석했다”. 해석의 열쇠는 믿음에 의한 칭의이며 들어가는 문은 로마서이다. 틴데일은 로마서를 ‘성경 전체를 밝히는 빛이며 전체로 통하는 길’이라고 칭하고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판단을 “밝은 빛, 모든 성경을 밝히기에 충분한 빛”이라고 번역한다. 이 해석의 원리들은 퍼킨스에 의해 청교도 형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는 만일 로마서로 공부를 시작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을 공부한다면 전체 성경을 여는 열쇠를 소유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원리들은 사실상 모든 청교도의 성경 해석에 있어 공리였다는 것이 분석 결과 드러났다.

 

청교도의 믿음- 칭의로 이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그에 의해 생활하는 믿음- 에 대한 설명은 모든 면에 있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초점과 활동과 열매들에 대한 청교도의 설명은 칭의와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점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의 빛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언약의 자비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양심과 관련하여 구성되었다.

 

개혁자들이 교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교리의 고전적 조직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믿음과 양심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영적 요구에 그 교리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고전적으로 설명한 대표자들이라고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개혁자들이 고전적인 신학자들이라면 청교도들은 고전적인 목회자들이며 신령한 안내자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저서들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곧 깨달을 것이다.

 

3) 청교도들은 정신 교육자들이었다. 이 점은 그들의 교육 방법과 관련이 있다. 17세기와 18세기는 교육 이론에 대해 많이 생각한 시기였다. 출발점은 믿음과 순종이 가능할 수 있게 되기에 앞서 정신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한다는 그들의 확신이었다. 박스터는 “무지는 거의 모든 죄이다”라고 기술했고 설교에 대해 그가 즐겨 사용하는 금언들 중의 하나는 “먼저 불을 붙인 다음에 뜨겁게 하라”는 것이었다. 불꽃이 없는 열기, 교육학적 정밀성을 갖추지 않은 설교의 열정은 아무에게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교회 출석자들의 쪽으로 볼 때 설교에서 믿음을 배우고 교훈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은 불성실의 표적이다. “만일 당신들이 회개를 했다면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수고하라”고 박스터는 노동자 신도들에게 말했다. 그는 말했다. “사리를 아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박식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가 사는 목적을 알아야 하며, 그의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서 자신의 뜻을 그대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무지함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학자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이 만일 지식에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랑과 모든 순종에서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이 없다면 이것 중 어느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들이 직업에서 일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늘의 일들의 지식을 얻고 싶어한다면 오늘이 가지 전에 이를 시작할 것이며 그것을 얻기까지 어떠한 희생이나 고통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자신의 직업을 익히는 데는 7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문제들을 부지런히 배우는 데는 칠 년 중 하루도 바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청교도들은 지식없는 종교적 감정이나 경건한 정서는 무익하기보다 악한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진리를 느끼고 있을 때의 정서라야만 바람직한 정서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느끼고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고 지식없는 감정에 의해 지배될 때 그것은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확실한 표적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순종 없는 지식이 영혼에 파멸을 초래하는 것과 같이 지식과 분리된 감정과 어두운 정신의 충동들도 영혼에 파멸적인 것이다. 진리를 가르침이 목회자의 제일 과제인 것처럼 진리를 배움은 평신도의 제일 과제다.

 

4) 청교도는 진리의 시행자들이었다. 그들은 재치있는 설교자들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와 궁정에서 얻는 명성을 버렸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위해 명백하고 솔직한 형식, 엄숙하지만 활기있고 소박한 형식을 택했다. 구드윈은 회심 후에 자기 과시를 포기했다. “나는 재치의 허식과 웅변의 허영이 없이 완전히 확실하고 건전한 말로 설교하겠다는 이 확고부동한 원칙에 도달했다.” 이것은 전형적이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청교도는 설교자가 할 일은 자신의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며 자신이 박수 갈채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설교를 계획하는 것이라는 점에 있어 명확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 설교는 성경 신앙의 세 가지 즉 타락, 구속, 중생을 중심으로 회전하였으며 이 복음 진리들에 고의적인 단순성이라는 눈부신 옷을 입혔다.

 

존 플라벨은 말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문체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설교자들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신중성은 화려한 단어들보다는 딱딱한 단어들을 택한다. 단어는 내용의 종에 불과하다. 바위의 자물쇠에 꼭맞는 강철 열쇠는 보물 창고의 문을 열지 못하는 황금 열쇠보다 더 유용하다. 신중성은 양심을 꿰뚫고 심령에 도달하는 하나의 단어를 위해 천 개의 세련된 단어들을 버린다.” 우리도 평범성이 하나님의 열정과 능력의 통로라는 것을 경험한다.

 

5) 청교도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을 섬기는 데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있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삶의 주된 세 가지 특징이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회자>는 목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권고들로 시작한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결여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한 여러분의 은혜가 활발하고 생기에 넘쳐 계속 발휘토록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연구한 설교를 자신에게 하라. 그러므로 자신의 심령을 지켜보라. 육욕과 정욕과 세속적인 기호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라. 믿음과 사랑과 열심의 삶을 유지하라. 집에서 하나님과 많이 거하라. 여러분의 모범이 여러분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의 혀로 말한 바를 취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설교를 잘하는 법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처럼 잘 생활하는 법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를 구성하는 법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에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법을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실제로 위대한 청교도들이 행한 바였다. 그리고 그들의 저술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에 대해 증거한다.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신의 영혼에 설교를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잘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음식을 자신이 먹고 잘 소화시켜 보지 않은 사람은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지 못한다.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퍼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한 삶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익하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납같은 생활이 해를 주는 것만큼 그들의 금같은 말이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박식하고 거룩한 성직자보다 더 존경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종하고 음탕한 생활로 자신의 가르침을 수치스럽게 하는 사람보다 더 경멸하여 마땅하고 그로 인하여 더 비참하게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칼빈은 말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첫째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강단에 올라갔을 때 목이 부러지는 것이 그에게 더 좋을 것이다.”

 

청교도 교육자들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뛰어나게 거룩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인쇄된 말이 전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 자체의 권위일 뿐 아니라 그들이 성경의 조명하고 적용하는 힘으로 인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경험적인 성경의 권위이기도 했다. 청교도들이 타인들의 심령과 양심에 말하는 바는 그들이 가르쳐야 하는 진리를 철저하게 자신의 심령과 양심에 실행한 다음에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고 하는 바울의 공식을 이행했다.

 

영적 권위는 말로 꼭 집어서 나타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위와 마주칠 때 알아볼 수 있다. 영적 권위는 성경에 대한 양심의 신실성과 합성된 산물이며, 하나님의 실재와 위대성에 대한 생생한 인지이며,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확고한 열망이며, 깊은 자기 조사와 철저한 자기 부정이며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사모함이며, 인간을 향한 편견없는 동정이며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솔직한 순진성, 곧 솔직성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반면에 지식에 있어서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신적 권위에 복종함으로 권위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형은 죽음과 같은 무거운 짐 아래에서 초자연적으로 일으킴을 받은 세례의 형태이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그들의 시대에 이 원형으로 살며 나쁜 건강과 환경적 혼란과 빈궁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나태한 심령과 싸우며 ‘생명과 빛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므로 3세기 반후에 그들이 설교를 위해 준비한 바를 읽는 우리들은 그들의 권위가 우리에게도 여전히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애정깊고 실제적인 영국 작가들’의 저술들을 참조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의 시야는 밝아지고 그의 생각은 정화되고, 그의 심령은 분발된다. 그는 겸손하여져 가르침을 받아 활기를 얻고, 회개 가운데 낮아지고 보장 가운데 높아진다. 이보다 더 유익한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슬프게도 라오디게아인들이다. 그들은 자만하고 잠들어 있고 천박하고 숨이 막혀 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영혼의 창문을 열고 17세기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106

 

제 2 부 청교도와 성경

 

제 5 장 존 오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의사전달

 

1. 청교도 존 오웬

 

존 오웬은 청교도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성경에서 파악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드러내는 견실함, 심오함, 당당함 그리고 위엄에 있어 그와 필적한 사람이 없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규범들과 발전된 경건의 이상과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청교도 주류의 중심에 위치한다. 존 칼빈과 유사했다.

 

2. 의사전달

 

오웬은 의사전달이라는 단어를 인간에 대한 모든 신적 은혜의 수여를 망라하여 사용했다.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인식적 의사전달에 대한 오웬의 기술이다. 즉 성경과 말씀에 대한 교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들을 이끄사 자신을 이해하게 하시고 영적 실재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오웬은 그의 시대의 개혁 신학자들에 일치하며 그리고 분명히 성경과 일치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과의 직접적이 화합과 일치를 추정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이야기하실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와 일치되는 한 그 생각들은 정확하며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 지식, 우리의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에 중요한 지식을 이룬다.

 

그러나 오웬은 모든 주류 개혁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문제를 인식한다. 우리 안의 죄, 아담에게 물려받은 유산인 인류의 기질 가운데 있는 반하나님적 충동은 행동의 결과일뿐 아니라 순수 지성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 죄 또는 충동이 신약성경이 마음의 ‘강퍅’과 ‘완악’이라고 칭한 보편적 무반응을 낳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이성적인 교육은 무효하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여시는 성령의 조명만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일들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과 동의를 일어나게 한다. 타락한 인간 정신의 비참한 무지와 왜곡에 대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일들의 효과적인 전달이 언제나 있을 수 있기 위해, 성경의 설교자와 교사와 청중과 학생에게 역사하셔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오웬보다 더 예민한 의식을 갖고 있는 청교도는 없었다.

 

오웬의 신적 의사전달 개념은 다섯 개의 표제 아래 분석하면 편리하다. 1) 계시를 주심, 2) 성령의 영감, 3) 성경의 인증, 4) 성경 신앙의 확립, 5) 성경의 해석

 

3. 계시

 

오웬은 ‘계시’라는 말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정보를 주는 전달, 다른 방법으로는 알려질 수 없는 일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 전달은 음성, 또는 간혹 꿈이나 환상이 동반하는 내적인 감동에 의해 수령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오웬은 이런 종류의 모든 계시들을 ‘예언’이라는 항목 하에 일괄적으로 다루고 ‘예언자’는 신적 계시들을 수시로 받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 계시를 주는 것은 ‘모든 신적 계시들의 직접적인 장본인’이신 성령의 역사였다. 계시들에 신적 기원에 대한 확증이 수반되었다는 것은 기록들을 볼 때 분명하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가해하게 보일지라도 절대적인 신봉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스스로 증거하였다. 오웬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생각, 의지 또는 신탁들의 해석자이며 타인들에 대한 선포자들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교회에 일반적으로 유익한’ 이 계시들이 기록되었고 구약성경은 현재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유사한 과정에 의해 신약성경도 생겨났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무오하게 받아 이해하고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그들이 후시대의 교육을 위하여 알고 있는 바를 기록할 수 있게 하였다.

 

일단 성경이 쓰여지고 예언자와 사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완성된 다음에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개인적인 계시의 필요성은 없게 되었다. 오웬은 그 이상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말씀과 별도로 또한 말씀을 초월하여 받을 것으로 상상하는 계시를 믿는 퀘이커교도들과 같은 자들의 ‘광신’에 반대했다. 이 모든 점에 있어 오웬은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해석의 정상적인 노선을 따른다.

 

‘성령의 영감’에 대해서.

그는 ‘영감’을 계시가 구두로 그리고 기록으로 주어져 받아 전달되는 성령의 고취(inbreathing)로 정의한다. 이 과정 동안에 영감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비독창적이라는 의미에 있어 수동적이라고 오웬은 말한다. 비록 심리학적 의미에 있어 그들의 정신은 능동적이지만 그들은 성령에 좇아 작용되고 있으며 또는 오웬이 말하는 대로 단순히 ‘성령에 의해 작용되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벧후1:21).

 

인간은 악기의 줄을 조율함으로 성경의 손가락의 감동들을 바르게 받아 성령께서 의도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인간들의 기능들을 친히 활동시키심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들을 표현하도록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 완전한 신적 주도와 통제가 기록자의 인격과 개성이 말살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께서는 인간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그들을 강압하시거나 또는 그들 자신의 본성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움직이시지 않고 그들의 갖고 있는 재능과 자질들이 결합하여 사용되고 활동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암시하시는 단어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단어들이며 또한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낯익은 표현들을 사용하게 하셨다. 우리는 그들이 단어와 표현을 선택할 때 자신의 정신과 이해력의 능력들을 사용했다고 가정해도 좋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했다(전12:10). 그러나 인간 자신들보다 인간들의 생각과 기능들에 대해 더 잘 아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이 고른 단어들이 마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처럼 직접 분명하게 성경의 말씀과 같이 되도록 그들 안에서 인도하시고 조종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자들의 저작들의 궁극적인 저자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들이 알린 율법, 그들이 전한 교리들, 그들이 준 교훈들, 그들이 기록한 역사들, 그들이 발표하고 계시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들, 복음 시대에 대한 약속들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이론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들었던 바의 기억들 속에 간직되었던 것이 아니었고, 전에 그들이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었다. 그 내용들이 수용에 있어 그들이 이성적 능력들은 단지 수동적인 협력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내용적이며 축어적이다. 즉 내용 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경에 담겨진 교리와 그 교리가 전달되는 말도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안에서 성경으로(in it and by it) 말씀하신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의미이고 이 때문이다.

 

족장들에게 임한 계시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영감받은 설교들이 그 최초의 수령자들에게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믿음의 대상들이었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믿음의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대상이다. 모든 믿음은 증거에 대한 동의라는 본질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동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에서 꽃피워난 기독교 신앙은 그 근원에 있어 하나님의 증거에 입각한 복음의 진리에 대한 동의를 갖고 있다고 오웬은 말한다. 따라서 이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신성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근거하는 기초가 -즉 성경의 증거가- 하나님 자신의 자신에 대한 무오한 증거라고 인정하는 데서 솟아나는 신성한 믿음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신성한 진리를 믿는 신성한 믿음의 근거는 성경의 권위의 원천인 성경의 ‘신적 기원’이다. ‘신적 기원’은 성경이 쓰여지게 하실 때 그 내용을 ‘말씀하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세대에게 그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록된 말씀의 진리와 권위를 믿는 신적인 믿음을 요구하신다.

 

4. 성경의 인증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라는 이중적 효력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신령한 믿음에 역사하신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이며, 외적 증거는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해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에 의해 증거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외적 역사’이다. 전자는 후자를 전제하며 또한 상관적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고전적 개혁주의 교리의 진술인데, 칼빈이 최초로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성령의 증거를 말함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칼빈은 외적 증거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웬의 탁월한 점은 성령의 외적 증거에 대한 강조이다. 오웬의 교리는 성경에 대한 성령의 이중적 증거이다.

 

성령의 외적 증거.

“모든 성경의 직접적인 저자이신 성령은 안에서 그리고 성경에 의해 신령한 진리와 성경의 기원에 증거를 하셨다. 즉 성경에 가동된 신적 권위와 정확성의 특징들에 의해 그리고 성경의 능력과 효력 안에서 그 특징들 자체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이 효력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세 가지 활동으로 하신다.

① 성령께서는 성경에 불변하는 “빛”의 특성을 부여하신다. 오웬은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벧후1:19),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등 유사 구절들을 인용하여 빛으로서의 성경을 나타낸다. 빛은 그 본질에 있어 자기 증명적이다.

② 성령께서는 성경에 ‘권능’을 주심으로 신령한 결과들을 낳게 한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분쇄하고 재창조하는 영향력에 의해 자신의 신적 기원을 증거한다. 오웬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하나님의 능력”(히4:12,행20:23,고전1:18)의 성경의 묘사들을 인용한다.

③ 성령께서는 성경을 개개인 의식에 침투하게 하여 각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이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의식하게 하여 경외감과 하나님 앞에, 하나님 눈 아래 있는 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성령의 활동을 통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증거하고 인증한다.

 

성경을 믿는 믿음의 확립- 내적 증거

성령의 내적 증거는 인간의 선천적인 영적 무지를 제거하고 그의 심령의 눈에서 장막을 걷고, 그의 오만과 편견을 함께 깨뜨리고 그에게 영적 실재들에 대한 이해력과 ‘지각’(히5:14)을 모두 주는 내적인 조명의 활동이다. 신약 성경이 마 11:25~27, 엡 1:17~19에서 ‘나타내다’ 또는 ‘계시하다’는 동사를 사용할 때 언급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또한 사도 요한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기름부음’으로 성령에 대해 말할 때(요일2:27) 마음 속에 생각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라고 오웬은 말한다. 영적 실재들에 대한 지각이라는 수반되는 경험은 즉각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다.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믿는 사실들의 능력과 실재에 대한 영적 감각을 주심으로 그들의 믿음은 매우 확고해진다. 이 지각은 종종 맛보고, 눈으로 보고 느끼는 감각 활동들로 표현되며 자연적인 일들에 확신을 얻는 방법과 같은 식으로 표현된다.

 

또한 성령께서는 자신이 조명한 사람들이 성경의 신성을 의심하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계속 보살피며 또한 그 의심들이 솟아나는 모든 원천- 정욕, 불신, 반대적 논증의 압박,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지각의 결핍, 그 밖의 모든 영적 불안- 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이 모든 일들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속한 것이라고 오웬은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을 소유하는 근거들은 성경 안에서 성경으로 계속 제시하는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성령의 외적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셨고 우리 안에 믿음을 생기게 하사 우리로 믿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5. 성경의 해석

 

오웬의 첫 번째 주장은 그가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삶과 경건을 위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성경에서 터득할 수 있다는 의미에 있어 성경은 명쾌하다는 개신교의 표준적인 주장이다. 오웬은 교회의 공식(설교) 비공식(그리스도인들과의 토의)의 단체적인 성경 학습에서만 개인이 성경의 가르침의 바른 이해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 그러한 학습도 쉬운 것은 아니다. 마음 속에 있는 선천적인 악들- 오만, 타락된 감정, 나태, 음침한 생각, 변덕스러운 관습, 악한 합리화-은 우리의 진보를 방해한다. 오직 신령한 방법으로만 이 악들을 역습하여 정복할 수 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신령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즉 빛을 구하는 끊임없는 기도, 터득되는 모든 진리의 능력을 경험하려는 열망, 모든 진리를 알자마자 바로 양심적으로 순종을 실행하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의 예배 생활이다.

 

그는 성경을 하나의 풍경으로 관찰했다. 즉 관찰자에게 그 경치의 매력적이고 충격을 주는 부분은 외관적인 배열의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분명히 바울의 몇몇 서신들, 특별히 로마서에는 가장 중요한 복음 교리들의 일정한 방식에 따른 배열이 있으나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교리들, 또는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어떤 체계나, 순서나, 방법에 적응시켜 배열하지 않으셨다.” 오웬은 대체적으로 성경을 교리들(하나님에 대한 사실들)과 그 교리들을 적용하는 모범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오웬은 성경의 여러 책들의 현상태의 배열은 실제로 다른 어떤 책들의 배열보다 더 실제적이고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배열은 우리에게 바른 형태로 묵상하는 공부를 하게 하며, 교리 지식에 대한 지적 오만감을 가지려는 유혹을 막아준다.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거룩한 메시지는 모든 변화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적용된다. 성경의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경외와 순종과 경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다. “때로 성경의 어떤 이야기의 한 구절, 한 단어, 또는 한 표현이 한 권의 박식한 토론보다 우리 영혼에 믿음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데 더 많은 공헌을 한다.”

 

6. 존 오웬의 교훈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의 질문 4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분명한가?이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그 위엄과 순정함에 의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는 모든 부분들과 전체 범위의 일치에 의해, 죄인들을 납득시키고 회심시키며 신자들을 위로하고 구원을 학립시켜 주는 그 빛과 능력에 의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의해 그리고 성경으로 사람들의 심령에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만이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완전하게 납득시킬 수 있으시다.

 

오웬의 신적 의미 전달에 대한 교리는 단지 이 견해를 자세히 쓴 것일 뿐이다. 오웬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고 유력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을 확신시키시는 성령에 대한 교리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연구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는 성경의 가장 훌륭한 증거는 언제나 성경이라는 사실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경의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 성경의 영감과 성경이 선포하는 신적 실재들에 대한 믿음을 생기게 하기 위해 많은 논증을 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는 또한 우리 자신이 성경을 탐구하고 가르칠 때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영광을 성령께 드리고 있는지 자문하라는 도전을 준다. 해석의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완전하게 설교하는 사람들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고 적용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행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자들로서 우리의 영광인가? 오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의사전달에 대한 교리가 이러한 사역을 완수하려는 우리의 열심을 갱신시키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이 사역이 얻게 되는 결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갱신시키기를 축원한다. p 129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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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밑의  끝자락에서

                       최송연



        "이 몸이 주거 가셔 무어시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샛파란 쪽빛을 뿜어내는

        차가운 달빛 아래 앉아

 

        조선 선비의 기개와 충정을

        노래하고 있노라니...,

 

        세상의 왕께 바친 충정도

        이리 곱고 아리따운 절개이거늘

 

        이제 한 해도 다 저물어 가는

        세밑의 끝자락에서 뒤돌아 보니

 

        지난날, 주님께 못다 바친

        충성과 절개가 회한(悔恨)이 되어

        천근으로

        내 가슴을 짓누릅니다.

 

        섣달 그믐 찬 바람이

        세월 속의 회한을 거두어 내듯

 

        내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일랑

        주님의 보혈로

        올올이 씻어내어 희게 하시사

 

        새해엔

        새 충정으로 빚어지게 하시옵소서

 

 

      **사육신 중 대표적 인물인

         성삼문의 조선 선비 기개와 왕께 대한

         충정을 읊은 시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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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의 크기에 따라 마음의 크기는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현실적인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마음을 키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키우는 동안은 때때로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것만 같이 느껴질 때도 있게 됩니다 마음을 키우는 일은 힘겨운 일이며 고독한 일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마치 홀로 걸어야 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서둘러 마음 키우는 일을 멈추게 됩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고독하고, 너무 외롭게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직업을 소유하려면 골방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하며, 자기 무능력과 씨름해야 합니다 골방을 통하지 않은 직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직업입니다 그러나 골방을 통하여 얻어진 직업은 그 직업을 통하여 자기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바닷물을 작은 바가지에다 담을 순 없습니다 바닷물을 담으려면 바닷물보다 큰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바다보다 크고 넓습니다 내게 복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음이 아니라 그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고 그 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 그릇은 오직 내 인생이 해야 하는 땀 흘림, 눈물 흘림, 피 흘림의 몫입니다 - 담아온 글 -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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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기에 대한 단상

 

< 이승구 목사, 합신 교수 >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는 뜻

 

 

성탄절을 보낸다는 것은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임하신 일을 기념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정확히 어느 날 이 세상에 태어나셨는지 알지 못한다. 성경이 그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서만 100%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해 가는 작업을 할 수 있고, 성경 계시의 빛에서 자연의 책을 바라보고, 또한 그로부터 바르게 추론하는 내용들이 바른 학문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 날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날에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로마 시대에 태양신을 기념하던 이교적 절기에 교회는 태양이 신(神)이 아니며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영적인 의미로 진정한 태양이심을 증언하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 크리스마스(Christ-mas)의 기원이 되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이교(異敎) 나라였던 로마에서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생긴 절기이다. 이전에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성탄절인 크리스마스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시기부터, 특히 청교도들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천주교적 미신을 일소(一宵)하는 의미에서 성탄절을 절기로 지키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에 어떤 적극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청교도들의 이런 태도를 존중해야 한다.

 

반면에 이 날에 우리 주님의 탄생 사실 자체를 기념하는 일을 비판하거나 제거해야만 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주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12월 25이나 24일 저녁에 태어나셨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면서,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바르게 생각되는 성탄절이란 이 날에 우리 주께서 탄생하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실을 생각하며 기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주님의 성육신(成肉身)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였기에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대리속죄(代理贖罪)의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정도이며, 이와 같이 심각한 죄 문제 때문에 주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실을 주의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성육신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성탄절이라면 참으로 무의미한 날이다.

 

또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날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한 의미 없이 이 절기를 보내는 데에 익숙해졌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성탄절 즈음에 믿지 않는 이웃과 친구들을 교회당으로 초대하여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또한 어떻게 이 기회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왕 모든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이 절기를 이용해서 ①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②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탄의 참된 의미를 전하는 기회로 삼으며, ③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참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성탄의 절기에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좋은 기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자세를 다잡기를 바란다.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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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어머니의 말씀"

아들아! 

결혼할 때 부모 모시겠다는 여자 택하지 마라. 너는 엄마랑 살고 싶겠지만 엄마는 너를 벗어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단다. 


엄마한테 효도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마라. 네 효도는 너 잘사는 걸로 족하거늘 네 아내가 엄마 흉을 보면 네가 속상한 것 충분히 이해 한다. 


그러나 그걸 엄마한테 옮기지 마라. 엄마도 사람인데 알면 기분 좋겠느냐? 모르는 게 약이란 걸 백번 곱씹고 엄마한테 옮기지 마라.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널 배고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바쳤거늘 널 위해선 당장 죽어도 서운한 게 없겠거늘 네 아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조금은 이해 하거라. 너도 네 장모를 위하는 말이 네 엄마 만큼은 아니지 않겠니. 


혹시 엄마가 가난하고 약해지거든 조금은 보태주거라. 널 위해 평생을 바친 엄마이지 않느냐. 그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독거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는데 자식인 네가 돌보지 않는다면 어미가 얼마나 서럽겠느냐. 널 위해 희생했다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이 들지 않겠니. 


아들아!

명절이나 어미 애비 생일은 좀 챙겨주면 안 되겠니. 네 생일 여태까지 한번도 잊은 적 없이 그날 되면 배 아파 낳은 그대로 그때 그 느낌 그대로 꿈엔들 잊은 적이 없는데 네 아내에게 떠밀지 말고 네가 챙겨 주면 안되겠니.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아내가 네 어미에게 효도 하길 바란다면 네가 먼저 네 장모에게 잘 하려무나. 네가 고른 아내라면

너의 고마움을 알고 내게도 잘 하지 않겠니. 난 내 아들의 안목을 믿는다.


딸랑이 흔들면 까르르 웃던 내 아들아!

그런데 네 여동생 그 애도 시집을 가겠지. 그러면 네 아내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겠니. 항상 네 아내를 네 여동생과 비교해 보거라. 네 여동생이 힘들면 네 아내도 힘든 거란다 


내 아들아! 내 피눈물 같은 내 아들아.

내 행복이 네 행복이 아니라 네 행복이 내 행복이거늘 혹여 나 때문에 너희 가정에 해가 되거든 나를 잊어다오. 그건 어미의 모정이란다. 너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인데 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들 아깝겠느냐. 물론 서운하겠지. 힘들겠지, 그러나 죽음보다 힘들랴?


그러나 아들아!

네가 가정을 이룬 후 어미 애비를 이용하지 말아 다오. 평생 너의 행복을 위해 애써온 부모다. 이제는 어미 애비가 좀 편안히 살아도 되지 않겠니.


너희 힘든 것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 다오. 늙은 어미 애비 이제 좀 쉬면서 삶을 마감하게 해다오. 너희 어미 애비도 부족하게 살면서 힘들게 산 인생이다. 그러나 너희 힘든 거 너희들이 헤쳐 가다오. 다소 늙은 어미 애비가 너희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건 살아 오면서 따라가지 못한 삶의 시간이란 걸 너희도 좀 이해해다오. 우리도 여태 너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니. 너희도 우리를 조금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 안 되겠니.


잔소리 같지만 너희들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렴. 우린 그걸 모른단다. 모르는게 약 이란다.


아들아!

우리가 원하는 건 너희들의 행복이란다. 그러나 너희도 늙은 어미 애비의 행복을 침해하지 말아 다오. 손자 길러 달라는 말 하지 마라. 너보다 더 귀하고 예쁜 손자들이지만 매일 보고 싶은 손자들이지만

늙어가는 나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강요하거나 은근히 말하지 마라. 날 나쁜 시어미로 몰지 마라. 


내가 널 온전히 길러 목숨마저 아깝지 않듯이 너도 네 자식 온전히 길러 사랑을 느끼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사랑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지 않을 정도에서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BAND 글 옮김-

http://youtu.be/6QL9miRNmps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
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
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
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
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
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
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
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
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
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
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
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
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
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
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
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
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
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
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
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
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
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
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
(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
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
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
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
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
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
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
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
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
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
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
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
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
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
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
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
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
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
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
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
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
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
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
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
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
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
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
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
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
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
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
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
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
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
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
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
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
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
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
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
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
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
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
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
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
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
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
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
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
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
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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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지요.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삼십 대의 나이로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교회를 세우겠다는 신념이 차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신혼집에서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예배 드리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12월 17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송 아무개 목사는 ㅈㅎㅈㅇ교회를 개척했을 때를 떠올렸다. 경기도 남양주 장현리에 위치한 ㅈㅎㅈㅇ교회는 개척한 지 7년 만에 등록 교인 1000명이 넘을 정도로 부흥했다. 2000년에 들어서는 4층짜리 건물을 신축했다. 송 목사와 교인들이 건축비를 아끼려고 직접 도장하고 못질을 하며 마련한 예배당이었다.

하지만 ㅈㅎㅈㅇ교회는 2012년 하나님의교회에 매각됐다. 빚이 문제였다. 2007년 송 목사는 또다시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 기존 건물을 담보로 18억 원을 대출했다. 그런데 원리금 상환 문제로 금융기관과 갈등이 생겼다. 금융기관에서 기존 교회 건물을 팔아 원리금을 당장 상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착공도 하지 않은 상태라 당장 길거리로 내쫓길 상황이었다. 교회는 상환을 미뤘고 빚은 40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송 목사는 결국 예배당을 팔았다.

인천 신흥동에 위치한 ㅋㅅㄹ교회는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내리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다. 교회는 2009년 103억 원을 받고 하나님의교회에 예배당을 넘겼다. 당시 ㅋㅅㄹ교회를 시무했던 서 아무개 목사는, 교회가 수십억 원의 부채를 갖고 있고 교인 수도 감소하고 있어 신도시로 이전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했다. 서 목사는 교회를 매입하겠다는 이들 중 하나님의교회가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해 매각을 결정했다.

한 목사가 젊은 시절부터 반평생 동안 개척하고 일군 교회를 이단에 넘기거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견딘 교회가 빚 때문에 매각되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2주 동안, 하나님의교회 건물 중 207곳을 조사한 결과 35곳이 일반 교회가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원인을 알아보니, 24곳은 매매했고 11곳은 경매로 넘어갔다.



대다수 문 닫거나 교회명 변경…"빚내는 건 하나님의 뜻 아냐"

예배당을 매각한 교회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기부등본에 명시된 교회명을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해도, 엉뚱한 교회가 나왔다. 홈페이지가 매매된 연도를 기점으로 정지된 교회도 있었다. 홈페이지 하단에 있는 주소는 이미 하나님의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홈페이지에 나온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도, 수화기에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거나 신호음만 계속 들렸다.

ㅈㅎㅈㅇ교회 송 목사도 수소문 끝에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송 목사는 "교회는 문을 닫고, 다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지인의 사무실에서 십여 명의 교인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예배당을 매각한 ㅈㅎㅈㅇ교회는 작은 상가로 이전했다. 하지만 건물이 이단에게 넘어가고 규모도 작아지자, 교인들은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은 교회는 ㅈㅎㅈㅇ교회뿐만이 아니다. 용인시 수지구 아파트 단지에 있었던 ㅅㅅㅁ교회도 2011년 하나님의교회에 예배당을 43억 원에 판 뒤 해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정보 업체 태인에 따르면, 지난 6년 동안 연평균 261건의 종교 시설이 경매에 나왔다. 이중 한국교회가 차지하는 비율은 70~80%에 달한다. 모두 부채를 갚지 못해 경매에 넘어갔다. 빚이 원인이었다.

하나님의교회에 건물을 넘긴 목사들은 하나같이 무리한 대출을 경고했다. 대형 교회 지상주의에 젖은 교회가 과도하게 융자를 얻기 때문에 이단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ㅈㅎㅈㅇ교회 송 목사는 건물을 크게 짓는다고 교회가 커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잘못된 믿음 때문에 교회가 무리하게 빚을 내 건축을 한다. 하지만 1년 동안 경매로 쏟아지는 교회가 200여 곳이나 된다. 개신교인 수가 감소하면서 교회들도 하나둘씩 없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맞게 현실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ㅇㄷㅇㅅ교회 이 아무개 목사도 교회가 빚을 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ㅇㄷㅇㅅ교회는 49억 원의 부채 때문에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 이 목사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빚을 내는 것도 반대했다.


하나님의교회에 건물을 매각한 교회 중에는 이름을 바꾸고 새 출발을 하려는 교회들도 있었다. 서울 은평구 ㅅㅂㅇㅅㅇ교회도 그중 하나였다. ㅅㅂㅇㅅㅇ교회는 2010년 인근 뉴타운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면서 ㄴㅌㅇㅅㅂㅇ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2013년 부채 때문에 새 예배당을 70억 원에 매각하고 나서 다시 ㅅㅂㅇㅅㅇ교회로 변경했다.

ㅅㅂㅇㅅㅇ교회처럼 이름을 바꾼 교회는 한둘이 아니었다. 고양 일산동구 ㅊㅇ교회는 인근 상가로 이전하면서 ㅎㅁㅇ교회로, 부천 소사구 ㅂㅇ교회는 ㅂㅊㅈㅇ교회로, 서울 마포구 ㅇㄹ교회는 ㅇㅂ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들은 교회를 매각하고 나서 한동안 내부 갈등으로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떠난 교인들도 많았다. ㅂㅊㅈㅇ교회 오 아무개 목사는 이단에 건물을 팔았다는 죄책감과 외부의 비난으로 교인들이 상처를 받고 떠났다고 했다. ㅅㅂㅇㅅㅇ교회 김 아무개 목사도 예배당을 하나님의교회에 매각한 이유로 교인 중 3분의 2가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교회에 건물을 매각한 뒤에도 대다수 교인들이 남아 있는 교회도 있었다. 이름도 그대로였다.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에 있는 ㅂㅈ교회다. 지난 2007년 ㅂㅈ교회는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은행에 35억 원을 빌렸다. 담임목사 이 아무개 목사는 당시만 해도 부채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건축업체 두 곳이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빚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ㅂㅈ교회는 결국 89억에 매각됐다.

이 목사는 건축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교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이 목사는 부채 현황과 건축비 등에 관한 정보를 모두 투명하게 공개했다고 했다. 교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비록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른 뒤에야 상대측이 하나님의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 목사는 업체 선정도 잘해야 한다고 했다. 교계 방송과 신문에 건축업체와 금융기관 광고가 나오는데,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금융기관과의 갈등으로 낭패를 입었던 ㅈㅎㅈㅇ교회 송 목사도, 대출이나 건축 등의 일은 업체의 얘기만 듣지 말고 전문가를 통해 신중히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151



하나님의 종은 모든 일이 마음에 바라는 대로 잘 이루어질 때에,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느꼈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든, 그 모든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덕분으로 돌리게 된다. 모든 일이 번창한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감사하게 된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의 손길에서 인내와 마음의 평안을 풍성하게 얻게 될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배신을 계속해서 마음에 두었더라면, 절대로 그들을 향하여 형제다운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들을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욥의 경우도 만일 갈대아 사람들의 잔악한 행위를 계속 마음에 두었더라면 즉시 보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였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다윗의 경우도 시므이에게서 협박과 모욕을 당하였을 때에 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더라면,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보복하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39:9).

 

끓어오르는 분노와 조급한 마음을 치료하는 것으로 과연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를 배운 사람은 분명 굉장한 유익을 얻을 것이고, 언제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곧 “주께서 그렇게 뜻하셨으니 반드시 견뎌야 마땅하다. 비단 그것을 대적하여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주께서는 정의로우며 유익한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뜻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혹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상처를 당할 때에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우리의 고통만 더 악화되고 우리의 마음에 복수할 생각만 날카롭게 일어날 뿐이니-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경륜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를 배우기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보복할 마음을 갖지 않도록 절제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6:12) 우리의 영적 원수 마귀에 대한 것임을(엡6:11) 지혜롭게 지적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싸움을 잘 대비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일으킬 모든 충동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교훈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와 모든 악인들을 무장시켜 싸우게 하시며, 친히 그 싸움의 재판장으로 앉아 계셔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45:7).

 

경건한 사람은 부차적인 원인들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섬기는 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베푼 인간적인 친절에 대해서 무시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려 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주님을 근원으로 여겨 그에게 찬양과 공경을 돌리며,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존귀하게 여길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뜻을 가지셔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부주의나 태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경우라도, 이 경건한 사람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경우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런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나 그들의 조언을 청하는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무엇이든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께서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한 도구들로서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 조치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베푸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에게 최상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저런 조치들을 취할 때에,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서 올바른 목표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후원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온통 기대고 확신 가운데서 안심하거나, 혹은 그런 것이 없을 때에는 그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떨 정도로 그런 것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만 생각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리하여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궁리로 그 섭리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서 벗어나지를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10:12)

 

-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pp 266-270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PBA)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트 성의 대학교회 정문에 대자보가 게시되었다.  
이러한 논재를 게시했던 루터는 처음에 이 일이 유럽일대와 전 세계의 종교개혁을 가져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글은 결국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신학적 개혁사상의 기폭제가 되고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며 대학교회의 설교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그 곳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바 있다.  비텐베르크에서 자신이 내어 걸었던 대자보의 95개 문제는 자신이 강의 하려고 할 때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강의를 하기에 앞서 과연 이렇게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한번 공개적으로 논의 해 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루터는 직접 토론에 참여하여 이 문제를 토론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서신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혀 상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치달아 마침내 세계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001. 우리의 주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땅
       위에 믿는 자들의 전 생애는 계속적 참회라야 한다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

002. 이 회개라는 말은 참회의 예전 곧 사제의 직에 의하여 집행되는 참회나 사죄에 대한
       말로 이해될 수 없다.

003. 참회는 내면적 참회가 외적으로 여러 가지 육욕을 죽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참회할 수 없다.

004. 형벌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동안은 계속되는 것과 같이 내면적 참된 회개 역시 우
       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005. 교황은 그 직권에 따라서나 교회의 칙령에 따라서 부과하는 징벌 외에 다른 아무것
       도 용서할 수 없다.

006.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사해 졌다는 것을 선언하고 확증하는 것 이외에 아무
       죄책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만일 억제 당한 일에서 사죄한다든지 그의 직책
       이 멸시받는 경우에는 죄는 제거되지 않고 용서받지도 못한다.

007. 하나님은 철저히 겸손하게 되지 않은 사람의 죄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자
      기의 대행자인 사제에게는 굴복하신다.

008. 고해와 참회를 하게 하는 교회의 법규는 산 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다.

009. 그러므로 교황이 언제나 죽음과 외적 공경을 예외로 취급할 때면 성령께서 교황을
       통하여 자비를 내리신다.

010. 임종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장차 사면을 받을 연옥 때문에 교회가 제정한 참회를 보
       류하는 사제들이 몽매하고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011.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참회와 사죄를 연옥의 징벌이란 것으로 변해버린 이 가라지는 감독들이 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다.

012. 전에는 일어난 죄의 사건에 대한 참회와 사죄라는 소위?교회법에 따른 징벌?은 진
       실한 회개가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사면 선언 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부과되는
       것이다.

013.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으로써 모든 허물에 대하여 치루어야 할 것을 만족시켰고 교회 법규에 대하여 이미 폐기되었다.

014. 죽은 사람의 불완전한 경건이나 불완전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큰 공포를 동반하는데
       사랑이 적으면 적을 수록 더 큰 공포가 있게 된다.

015. 이 공포와 놀람 자체만으로도-다른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연옥의 고통과 아픔을 느
      끼기에 충분하다.

016. 지옥,연옥, 또 천국은 각각 구별되기를 이미 절망한 상태와 절망에 빠져들어 가는
       경우와 구원의 확실성이 각각 구별되는 것과 같다.

017.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불안과 공포가 증가하고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그들에게서
       점점 자라고 더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018.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공로의 상태에나 사랑의 증가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성의 근거로나 성서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 것 같다.

019.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들의 축복을 확신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실한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다.

020. 그래서 교황은 ?모든 징벌의 완전한 사면?이란 말로써 벌이 깨끗이 사면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부과하려 했던 징벌만을 사면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0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를 샀다고 해서 사람이 모든 징벌에서 해방 받고 행복해 진다고 말하는 면죄부 판매 권유자는 그릇되다.

022. 사실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에 대해서 단 하나의 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징벌은
       그들의 교회의 법규에 의하여 받아야 하는 것이다.

023. 만일 징벌의 사면이 누구에게든지 주어질 수 있다면 그러한 사면은 소수밖에 없는
       완전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 확실하다.

024. 그래서 백성은 대부분은 모든 징벌에서 해방 받는다는 무차별적이고 찬란한 약속에
      의하여 기만을 당한 것이다.

025. 교황이 연옥에서도 일반적으로 장악했다는 것은, 같은 권세를 가진 모든 감독과 목
      사도 자기의 감독구와 교구 안에서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다.

026. 교황은 그가 (연옥에 대하여 전혀 갖지 않은) 이 열쇠의 권세를 근거로 하여 사유하
       는 것이 아니라 대도의 방법으로 영들에게 용서를 사유한다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
       이다.

027. 헌금궤에 떨어진 돈이 쩌렁 소리를 내자마자 연옥에서 영혼들이 올라온다고 하는
       사람들의 사람은 교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028. 헌금궤 안에서 울려나자마자 이득과 탐욕이 자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교직
       자의 도움이나 대도가 성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다.

029. 성 베리누스와 파스칼리스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사면을
       받겠는지 더욱 확신할 수 없다.

030. 아무도 자기의 회개가 진실 된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가 죄의 완전한 사면을 받
       겠는지는 더욱 확신할 수 없다.

031. 진실된 참회를 하는 사람도 드물고 진실 된 마음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다.

032. 그들이 산 면죄부 증서로써 행복을 확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교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033. 교황의 면죄부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데 의존하는 가장 높고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한다.

034. 왜냐하면 면죄부로서 얻는 은총은 사람으로서 지워진 성례전적 속죄행위로 사하는
       벌에만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035. 영혼을 연옥에서 구출한다거나 참회사를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참회 증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비 그리스도적인 것을 설교한다.

036. 어떤 크리스쳔이든 자기의 죄에 대하여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히 면죄 받는다.

037. 모든 참된 크리스쳔들은 산 자든지 죽은 자든지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의 선물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역 재산에 참예 할 수 있다.

0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사죄와 거기에 참예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교황의 사죄는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039. 면죄부의 관대한 선사와 동시에 참된 회개를 민중 앞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며 학식이 있는 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040. 참된 회계는 징벌을 구하고 그것을 사랑하나 많은 면죄부를 갖는 것은 징벌에서
       해방하고 사랑이 그것이 싫어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그렇게 할 기회를
       준다.

041. 교황의 사죄권에 대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그것을 사랑의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042. 면죄부에 의한 사죄는 자선사업과 비슷한 것으로 비교하는 것은 교황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3.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궁핍한자에게 꾸어주는 사람은 면죄부를 사는 것 보다 더 낳은 것을 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의 행위로 성장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면죄부
       로써 더 선명해지지 못하며 다만 징벌을 면할 뿐이다.

045. 이웃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도 본체만체하고 면죄부를 하는 사람들은 교황의 사죄
       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
       어야 한다.

046. 그리스도인들이 넉넉한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면 자기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장할 의무를 지며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

047. 면죄부를 사는 일은 자유로 할 것이며 결코 강제로 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
       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8. 교황은 면죄부를 주는데서 얻는 돈보다는 사랑의 열성이 깃든 기도를 더 원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9. 교황의 면죄부는 사람이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
       로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을 잃는다면 그처럼 해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판매에 설교자들의 공갈행위를 안다면 그는 그의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더 원할 것
       이다.

051. 어떤 면죄부 판매설교자들 그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교황은 자기 돈으
       로 또는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라도 갚아줄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야 한다.

052.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행복해지리라 믿는 것은 헛된 신앙이다. 교황 자신이 자기의 영혼을 걸고 보증을 하려 한대도 그렇다.

053. 면죄부 설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선포되기를 금지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054. 만일 사람이 한 설교에서 사죄권을 행사함에 복음말씀을 전하는 시간보다 더한 시간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055. 만일 사람이-매우 적은 가치를 가진-면죄부를 한 방울과 단순한 행렬과 축제로써 축하한다면 매우 값비싼 백 개의 방울과 백 배의 행렬과 굉장한 축제로써 기리고 축제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교황의 견해이다.

056. 교황이 면죄부를 나눠주는 것은 근본인 교회의?보화?(여분의 공적을 말함)는 그리
       스도의 교회에서는 충분히 묘사할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057. 왜냐하면 그것이 현세적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보화를 쉽
       게 나누어주지 않고 도리어 모으기에만 힘쓴다는 것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058. 그 보화는 그리스도의 보화이지 성자들의 공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교황의 작업 없이도 언제나 역사하고 내적 인간을 위해서는 은총을 주며 외적 인간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지옥을 주는 것이다.

059. 성 로체스는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보배라고 불렀지만 그는 그 시대
       의 통용되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060. 우리는 이 보화란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교회의 산물로 준 교회의 열쇠의 권한
       이라고 근거 있게 또 심증 있게 말할 수 있다.

0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이 관리하도록 된 조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권한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062. 그러나 교회의 참된 보호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거룩한 복음이다.

063. 이 보화는 자연적 상태로는 미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 된 자를 마지막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064. 그 반대로 면죄부의 근거인 보화는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다. 그것
       은 마지막 자를 첫째로 만들기 때문이다.

065. 그래서 복음의 보화는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다.

066. 그러나 면죄부의 보화는 오늘날에는 사람의 부를 낚는 그물이다.

067. 설교자가 큰 은총을 주기 위하여 외치며 파는 면죄부는 큰 이익과 향락을 갖다주기
       때문에 큰 은총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068. 그러나 그같은 면죄부는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축복과 비교한다
       면 매우 적은 은총이다.

069. 감독들과 교구 목사들은 교황의 사죄권을 위임받은 자들을 큰 경의를 가지고 맞아들이게 한 책임이 있다.

070. 그러나 그들이 더 큰 책임을 지는 일은 이 위임받은 자들이 교황이 맡긴 일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대해서 이다.

071. 교황의 사죄권을 반대하는 사람은 저주받고 추방당할 것이다.

072. 그러나 면죄부 판매 설교자들의 변덕스럽고 파렴치한 말을 거슬러 걱정하고 슬퍼하
       는 축복을 받을 찌어다.

073. 교황은 면죄부 판매에 손해를 입히고자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 분노나 추방으로 보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074. 교황은 면죄부라는 구실 안에서 거룩한 사랑과 진실성에 손실을 끼치기 위하여 책동하는 사람들에게 더 심하게 분노와 추방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볼 것이다.

075. 교황의 면죄부에는 굉장한 힘이 있어서 어떤 사람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성
       모를 능욕했더라도 죄에서 해방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생각이다.

076. 그와 반대로 우리는 교황의 면죄부는 가장 적은 죄도 없이 할 수 없으며 죄로써 남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077. 만일 성 베드로가 지금 교황이었더라도 큰 은총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와 교황을 모독하는 것이다.

078.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 교황이나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부보다 더 큰 은총, 즉.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福音)과 성령의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들을 자유로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079. 교황의 문장을 화려하게 찍은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능력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080. 이 같은 가르침이 민중 앞에서 말해지는 것을 보고 묵인하는 감독 교구 목사 신학자
       들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081. 면죄부에 대한 그 같은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설교는 교황의 명예와 품위를 비방이나 또는 순박한 삶을 끌 수 없는 예리한 질문에 대해서 수호하는 것은 아무리 학식 있는
       사람일 찌라도 어렵게 만든다.

082. 예를 들면 교황은 왜 모든 영들을 그의 가장 정당한 이유로서 가장 거룩한 사랑떼문
       에 또 심령들의 지극한 곤궁 때문에 연옥에서 해방시키지 않는가. 실제로 그는 베드
     로 성당을 세우는데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돈으로써 하기보다는 자기의 돈으로 해
       야 할 것이 아닌가.

083.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데 왜 아직 죽은 자의 장래
       식이나 해마다 하는 제사가 남아있으며 교황은 죽은 자들을 위해 바친 것을 돌려 주
       지도 않고 그 기부금을 취소하기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084. 또는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자 즉, 적대자들에게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
        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영혼으로 속해내기를 허락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영혼자체의 큰 곤경을 위해서 사랑으로부터 해방하여 내지 않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하나님과 교황에 대한 경건이 아니겠는가.

085. 또는 참회에 관한 옛 조문이 오래 전에 사실 폐지되고 사용되지 않고 죽은 글이 되었는데 왜 아직 사죄권과 관련되어 그것이 아직 효력이 있고 산 조문인 것처럼 돈으로써 구해낸다고 인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086. 또는 오늘날 제일 부자보다 더 능력을 가진 교황이 지금 성 베드로 성당을 세우는데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돈으로 하기보다는 자기 돈으로 할 것이 아닌가.

087. 또는 교황은 참회로써 완전한 용서를 받고 영적 재산에 참예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사해주고 나누어주려고 하는가.

088. 또는 교황은 용서와 은총에 대한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대신에 백번 모든
       믿는 자에게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 되겠는가

089. 교황이 면죄부로써 돈보다 구원을 관심했다고 본다면 왜 그는 똑같은 효력을 가졌다고 보이는 면죄부에 대한 옛 교서를 정지시켰겠는가

090. 만일 평신도의 예리하고 사려 깊은 항의를 권력으로 억압하고 근거제시를 통하여 가라않히지 않는다면 교회의 교황은 원수에게 조소거리가 되고 그리스도인은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091. 만일 면죄부가 교황의 정신과 의견에 따라 설교로 권유한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해답
       되었을 것이며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092. 평화가 없는데도?평화?,?평화?하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093. 그러나 십자가 없는 곳에?십자가?,?십자가?하고 그리스도 백성들에게 말하는
       예언자만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094. 그리스도인들은 저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고통과 죽음과 지옥을 통과해서라도 따를 것이다.

095. 그래서 여기 평화가 있다고 하는 태평한 환상으로보다는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더 의지하게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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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전쟁說·땅굴說 책임 물어야”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좌담 “거짓 예언 재발 방지 시급… 한국교회 대응 능력 미흡”

 

최근 ‘12월 전쟁설’ ‘남침 땅굴설’ 등으로 혼란을 부추긴 이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예언을 빙자한 허위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문도 제기됐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은 23일 서울 용산의 한 카페에서 ‘땅굴과 전쟁설,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긴급 좌담회를 개최했다. 홍혜선(사진)씨의 ‘12월 14일 전쟁설’과 공군 예비역 소장인 한성주씨가 주장한 ‘남침 땅굴 발견설’이 모두 근거 없는 주장으로 확인된 상황에서 재발을 방지하고 교계의 바람직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패널로 참석한 윤은주 뉴코리아미션 이사장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왕 앞에 서서 하는 예언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엄중한 행동”이라며 “하지만 (홍씨의 전쟁설 주장에 대해) 아무런 판단조차 하지 않고 지나가는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분명한 책임 추궁과 재발을 막을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희송 청어람 대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한 시간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간 뒤에도 홍씨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이를 확실히 근절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 홍씨는 SNS 등에서 이미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만 종북 언론이 보도하지 않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 양 대표는 “(홍씨의 전쟁설 등은) 예언 은사를 받은 이들의 해석에 대한 지평이 얼마나 협소한지 보여주고 있다”면서 “신비 체험이 아닌 한반도 역사와 이를 둘러싼 정황에 대한 공부가 그들에게 더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최근 사태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처 능력이 미흡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일부 교회연합기관이 땅굴·전쟁설 등에 대해 주의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음에도 좀처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윤환철 미래나눔재단 사무국장은 “한국교회가 무지의 흐름을 키우고 있다”면서 “음모론을 자제시킬 만한 자정 능력을 한국교회가 상실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윤 이사장은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인들의 사고가 남북간 대결 의식과 반공주의 체제에 머무는 한 기독교의 핵심가치인 용서와 화해, 사랑의 구현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기능을 철저히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출처: 국민일보

알미니안 주의? - 김명도박사

 

아르미니우스 주의란 영어로는 Arminianism 이라고 하며 칼빈주의 (Calvinism) 에 정반대가 됩니다.

Jacobus Arminius 또는 Jakob Hermandszoon (영어표기는 James Arminius) 는 1560-1609 에 이르기까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화란 Leyden 대학의 저명한 신학 교수 였습니다. 그는 젊어서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Calvin 의 오른 팔격이었던 Theodor (독일식 표기) Beza 에게 사사한 분으로 상당히 개혁주의 적 성향을 가진 분이었지만 화란으로 돌아와서 화란개혁교단 (GKN,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에서 5 년 남짓 목회 하면서 칼빈주의를 부정하고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그가 1609년 세상을 쩌나자 그의 제자들이 Arminius 교수의 가르침과 당시 화란정부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되는 것을 이상히 여겨 화란정부에 시정을 촉구하는 항의문 (Remonstration)을 제출했습니다.
이것이 1610년의 일이었습니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에는 사정이 달라졌지만) 화란은 개혁주의의 보루였습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대로 미국에 1620년에 건너온 청교도들이 처음 영국 서남단에 있는 항구 도시 Plymouth에서 Speedwell 이라는 배를 타고 신대륙 으로 항해하던 도중 배가 고장이 나서 도중에 화란의 기항하여 배를 Mayflower 호로 갈아타고 미국의 Boston 앞 바다에 있는 Cape Cod의 Provincetown에 도착하였고 얼마후 다시 배를 타고 미국 본토인 Boston 근교 Plymouth 에 정박하여 상륙했던 것을 보아 알수 있듯, 당시 화란은 철저한  개혁주의 나라였고, 칼빈주의적 Belgic Confession (베르기 신안고백서 1561) 과 Heidelberg Catechism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을 수용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Arminius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이들을 “항의자, Remonstrants" 라고 함) 은 화란정부에 항의하기를, ”우리 Arminius 교수는 지금 화란 정부에서 믿는 것과 같이 가르치지 않고 다르게 가르쳤는데 지금 화란 정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5 가지 교리가 다르니 화란정부는 우리 Arminius 교수가 가르친대로 바로 잡아 주시오“ 라는 내용이 었습니다.

Arminius 교수의 제자들 (Remonstrants) 들이 화란 정부에 제출한 5 가지 항의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은 완전타락하지 않아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

    2. 하나님은 예수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거기에 근거하여 선택해 주셨다 (예지예정)

    3.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주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으므로 믿고
       싶은 분은 스스로  힘으로 믿을 것이며 믿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다.

   4. 하나님이 특별한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은혜를 주셔도 인간은 구원을 거절 할 수 있다.
  
   5. 성도가 한번 구원을 얻었다가도 나중에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이런 다섯 가지였습니다.
이에 대해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부터 Dordt Council (영어표기 Dort Council)을 열었는데 화란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80 여명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모여서 153 회에 걸친 회의 끝에 결론은 아르미니우스 교수의 제자들이 항의한 내용과 정반대가 되는, 다시 말하면 화란 정부가 이전부터 믿고 가르치던 대로 결정되었습니다.

1. 인간은 완전 타락하여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어서 오로지 하나님이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먼저 이끌어 주셔야 믿게 된다는 교리.
   Total Depravity 인간의 완전타락
  
2.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성도를 택해 준 것이 아니고 (예지예정이 아니고)
   무조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그가 구원할 자를 오로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일방적으로 택해 주셨다는 교리 (이것을 예정예지론 이라함).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3. 예수님의 십가가의 죽으심으로 이룩한 대속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만 위한 교리  
   Limited Atonement (제한된 속죄)

4. 하나님이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 로 은혜를 주시시면 인간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효과적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다는 교리.
   Irresistible Grace (무저항적 은혜)

5. 한번 중생하여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영원히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    
    다는 교리.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궁극적 견인)

위의 다섯 교리의 영문자 멀기 글자를 모두 나란히 나열해 놓으면  TULIP 가 됩니다. 이는 화란 나라의
국화 (national flower) 이며 동시에 본 튤립 교육 선교회의 명칭이 유래한 출처이기도 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는 아르미니우스 교수가 가르친 것과 정반대 이며 따라서 아르미니우스 교수의 제자들이 화란정부에 항의했던 그 순서대로 <도르트공회> 에서 대답을 해 준 것인데 아르미니우스 의 가르침과는 모두 정반대이며 일부만 맞고 일부는 틀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두 교리의 체제 입니다. 지금 복음주의자 (Evangelicals) 들은 아르미니우스 주의를 받아 드리고 개혁파 교회에서는 칼빈주의를 받아 드리고 있습니다. 장로교의 어머니 라고 하는 John Knox 의 Scotland 에서는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47) 을 대부분 수용하여 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편 구라파의 개혁교단, 이를 테면 GKN, 이나 독일 개혁교단 은 THREE FORMS OF UNITY  라고 해서 “3대 기본  교리“를 따르는데 그 ”3대 기본 교리“ 란  

     1. Belgic Confession (베르기 신앙고백서, 1561)
     2. Heldelberg Catechism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3. Canons of Dordt (도르트 신경, 1619)

이상과 같이 답변 드립니다. 도움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본 선교회 홈페이지의 “동영상”을
참고 하시면 많은 도움을 얻으실 것입니다.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운 동영상물을 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10월중으로 다시 동영상 강의나 동영상 설교를 올릴 수 있게 될 것으로 알고
기도중에 있습니다. 본 선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안에서 평강을 기도합니다.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10051

 


남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 해안에 적어도 30년동안에는 볼수 없었던 이변이 일어났다.

어린 북방멸치떼가 해안을 까맣게 뒤덮고 있는데 흡사 해양을 오염시키는 기름띠의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인간에 의한 어획은 이루어지지 않고 다만 온 바다의 굶주린 새떼들의 향연이 벌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마른 멸치가 식탁의 필수품인 한국을 비롯한 동양 민족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겠지만 어쩌랴, 여기는 미국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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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불씨를 던진 ‘마틴 루터’

루터(1484-1546)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교회는 물론 세계 역사가 일대 큰 변혁을 이루게 된다. 루터의 등장과 ‘95개조 반박문’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그 불씨에 의해 번진 파장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루터의 독특성은 그의 생애에서 비롯된다. 1505년 22세 때, 훌륭한 대학이었던 엘푸르트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와서 잔치를 치렀다. 그 후 엘푸르트로 돌아가다가 루터는 번개를 맞은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죽음의 공포에 빠지게 되고, 공포 가운데 하나님께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 후 루터는 곧장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왜 하나님을 따르고 위하고 싶은데,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했다. 로마에 가서 스칼라 상타라 부르는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기도했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스승은 불안해 하는 그를 위해 신학을 공부하게 했다.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공부를 하고 1513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어느날 자기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루터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라는 시편 22장 1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도 고통을 당했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게 됐다.

그 후 루터는 계속 공부를 하다가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진리가 바로 ‘칭의’였다. 그때까지 로마 가톨릭은 세례를 받을 때 원죄가 사라지면서 첫 번째 칭의를 받지만, 두 번째 칭의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두 번째 칭의는 첫 번째 주신 은혜의 체험을 기초로 선행을 행하는 우리의 삶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구원받는 칭의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선행과 봉사가 필요하고,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지금까지는 행함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배웠는데, 로마서 1장 16-17절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루터가 발견한 것이다.

루터가 칭의의 진리를 발견할 당시, 교회(로마 카톨릭)가 면죄부를 발행해 신자들에게 팔아먹고 그것으로 죄를 감해주는 것을 보았다. 루터는 학자요 목사로서 이처럼 진리를 왜곡시키는 당시 교회의 모습을 95개 조항으로 만들어 1517년 10월 31일에, 전설에 의하면 당시 대학교회인 ‘캐슬 처치’ 입구에 붙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다.

맨처음 독일어로 쓰인 그것을 독일인들은 2주 만에 읽었고, 곧바로 라틴어로 번역돼 두 달 만에 온 유럽이 다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제기한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동의했고 같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봇물은 막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갇혀 있었던 울분을 터뜨렸다. 루터가 쓴 글에 온 세상 사람들이 집중하면서, 이 움직임이 대중화가 되고 세상은 서서히 개혁의 분위기로 진행됐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한 ‘츠빙글리’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 시발의 전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1484-1531)라는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터와 같은 시기에 신부로서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과감하게 개혁활동을 단행한 인물이다.

당시 스위스에는 용병제도가 있었다. 그 용병들과 함께 츠빙글리는 군목으로 생활했다. 그는 1515년에 마리그나노 전투에서 함께 동참한 젊은이들이 1만명이나 죽는 것을 목도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 츠빙글리는 용병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쫓겨났다.

갈 곳이 없어진 츠빙글리는 당시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교회에서 3년 간 설교를 했다. 그러던 중 순례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궐석 상태에 있던 취리히의 목회직에 츠빙글리를 추천했다. 그 때가 1519년이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목회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복음적인 내용을 성실하게 설교했다.

당시 스위스는 여러 자치 도시들이 모여 한 나라를 구성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스위스는 프로테스탄트를 따를 것인지 로마 가톨릭을 따를 것인지를 시의회에서 결정했다. 츠빙글리는 시의회와 함께 교회를 개혁해 나가자고 했다.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으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말했으며,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독교 신앙 개요’ 및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해석’을 출간하고, 개혁은 가톨릭의 종교 의식과 법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지킬 필요가 없음을 주장했다.

종교개혁을 체계화한 ‘
칼빈

오늘날 수많은 신학자들은 ‘만약
칼빈(1509-1564)이 없었으면 기독교는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로마 가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로테스탄트의 칼빈을 대조해서 비교한다. 아퀴나스가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신앙을 총정리했다면,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과 신앙을 총정리한 위대한 인물이다.

카톨릭의 신학체계 정립을 위해 아퀴나스는 수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저술한 ‘신학총론’, 다른 말로 ‘신학대전’이 수십 권이다. 반면
칼빈은 단 한 권의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다. 그는 이 책 안에 기독교의 기본진리, 무엇을 믿으며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기독교인이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섰다.

칼빈은 프랑스인이지만 스위스에서 목회를 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썼다.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도전을 받았다. 이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는 제네바를 지나다가 귀욤 파렐을 만나서 그의 목회를 도왔다.

칼빈은 1538년에 제네바에서 어려움을 당해 스트라스부르그로 옮겨 3년간 마틴 부처와 함께 목회를 하다가, 1541년 다시 제네바 사람들의 후원과 초청으로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게 됐다. 그 때부터 말년까지 시종 목회를 하면서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고, 기독교 강요도 썼다. 그의 모든 설교는 성경 강해였기 때문에 칼빈 주석으로 남아있게 됐다.

칼빈에게는 츠빙글리와 같은 극적인 회심이나, 루터와 같은 극적인 개종의 경험은 없었다. 그는 법학도로서 사리판단이 분명했고 논리적이었으며 내성적이었다. 칼빈이 루터나 츠빙글리와 다른 점은 종교개혁을 체계화한 것이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종교개혁 1세대 인물인 반면 칼빈은 2세대 인물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약 30년 후에 그 속에 뛰어들어 개신교의 신학체계를 정리한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을 체계화한 ‘
칼빈

종교개혁자들은 처음에 가졌던 숭고한 신앙이 사회적 정황으로 인해 정치적인 성격을 띠면서 후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잃기도 했다.

1525년 독일 전역이 농민전쟁의 전운에 휩싸였을 때, 루터는 처음에는 압제적인 귀족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농민 편을 들었다. 그러다가 농민들의 반란이 맹렬해지자, 입장을 바꾸어 농민들이 제시한 12개 조항을 비판하고,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국의 개입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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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이 사라져가는 교회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안겨준 진귀한 선물은 구원의 확신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칭의의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음으로 이 신앙의 유산이 유실되고 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칭의론은 거짓 구원의 확신만을 남발하였다. 교인들을 믿기만 하면 삶의 변화와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구원받는다는 거짓 안위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환각이다.


사탄은 교인들이 가진 거짓 구원의 확신을 전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켜 철저한 자기기만에 빠져 확실하게 멸망하게 한다. 값싼 은혜의 복음, 구원파적인 변종 복음은 사람들을 파멸로 인도하는 사단의 도구인 셈이다. 회개의 열매, 복음에 합당한 삶이 전혀 없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확신으로 충만한 이들은 화가 있을 진저!


반대로 사단은 진정으로 거듭난 이의 확신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신자 안에 부패성, 즉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부추겨서 확신이 계속 흔들리게 한다. 값싼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설교가 참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며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는 사단의 도구로 교묘히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교인들이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이 신자의 의무와 헌신과 열심을 요구하며 닦달하는 설교가 교인들을 율법주의에 찌들게 한다.


한국교회를 쇠락하게 하는 것은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인한 거짓구원의 확신뿐만이 아니다. 신자의 올바른 삶과 봉사를 복음의 바탕에서 강조하지 못하는 새로운 율법주의가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는 것이 교회에 치명적인 폐해를 끼치고 있다. 십자가 복음에 담긴 은혜의 풍성함과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칭의 복음의 진수를 들려주는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 속히 회복되어야 한다.


-박영돈 목사-

 

                                               

 

 

 
♡*.기도 하자 *♡
 
마지막 종말이 가까울수록
해야 할 일을
바이블에서는 베드로를 통해 다음
3가지를 명하고 있다.
 
기도하라!
사랑하라!
봉사하라!
 
기도의 사람중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큰소리 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잘 참고 기다립니다. 
물론 해야할 일은 하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좋
은 결과가 있으리라 너무 쉽게 자신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직접 일하실 것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위대한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망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겐 실망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앞 길이 캄캄해도,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고, 나날이 
더 힘들어지기만 해도,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결코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은근함을 느낍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많은것을 
생각나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그를 만나면, 괜히 힘이 납니다.
희망이 솟구칩니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오늘의 만나]
 
잠언19 : 22절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흐르는곡/>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달빛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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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프로테스탄트를 학살한 나라

잘 알다시피 프랑스는 가톨릭이 국교인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16세기 초에 프랑스 내에는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생겨났는데,
많을때는 프로테스탄트가 전체 국민의 3분의 1이상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톨릭은 왕권을 이용해 프로테스탄트를 공격하였는데,
1521년에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는 루터의 저서의 출판을 금지했으며
1534년에는 한층 더 나아가 이를 탄압하는 일련의 칙령을 반포하였습니다.
프랑스 왕 앙리 2세(1547~59 재위)때는 보다더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였으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즉 위그노들은 날로 그 세력이 커졌습니다.

그런데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프랑스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를 공개적으로 대학살하기 시작합니다.
가톨릭 가문인 "기즈"가의 프랑수아 드 기즈가 군대를 동원해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 못지않게 성장한 프로테스탄트도 이제 무력으로 대응함으로써,
16세기 말까지 8차례에 걸쳐 신구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1570년에 양측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프랑스의 신구교를 대표하던
프랑스왕 샤를 9세의 동생과 나바르왕 엔리케 간에 혼담이 오갑니다.
바로 이 혼담을 빌미로 가톨릭이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를 대학살하게 됩니다.

당시 파리에서 이 둘간에 혼인식이 치러질 무렵이 성 바돌로메를 추모하는 성 바돌로매의 날이었습니다.
혼인식에 참석하려고 올라온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죽은 성 바돌로매에게 예를 표하는 의식을 가진날
가톨릭은 무방비 상태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대학살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살이 오늘날까지도 바돌로매 학살로 불립니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우선적으로 학살되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오른팔이던 콜리그니 장군도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란 이유로 총살되고
머리는 잘려 로레인의 추기경에게 선물되어 교황청으로 보내졌고 그 시체는 거리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뿐 아니라 프랑스 내의 모든 프로테스탄트에게도 학살이 가해집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하기위해 가톨릭 시민군이 소집되고 파리를 탈출할 수 있는 성문을 굳게 닫힙니다.
파리는 학살의 도시가 되었고, 파리시내 전체에서 모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살인이
프랑스 정권의 비호 아래 합법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파리의 가톨릭 교도들은 '프랑스와 가톨릭을 위하여'라는 구호아래 살인마가 되었고,
프로테스탄트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으며
파리의 모든 거리는 숨이 끊어지는 프로테스탄트들로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부들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서
살인자들의 우두머리들에게 가서 "친척이나 친구들도 봐주지 말라"고 그들을 훈계합니다.
가톨릭은 왕의 허락을 받아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합니다.

오렌스에서는 1000명이 살해되었고
로렌에서는 6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펜나에서는 안전을 약속한 후 300명을 학살했습니다.
멜디스에서는 2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사마로브리지에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에게 평화를 약속한 후 100명 이상을 살해했습니다.
안티시도에서는 100명이 살해되어 강으로 던져졌습니다.
오리언즈에서는 감옥에 투옥된 100명이 분노한 군중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로첼레에서는 18,000명이 죽었습니다.

리용에서는 800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여기서 부모에게 매달린 어린이들과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안고있던 부모들이
칼과 피에 굶주린, 스스로를 카톨릭 교회라고 칭하는 자들의 희생양이 됩니다.
여기서는 300명이 가톨릭 주교의 집에서 살해되었고,
가톨릭 수도사들은 그들이 매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보덱스에서는 설교 중에 카톨릭 교인들에게 살육하라고 충동질을 하곤 했던
악한 수도사의 부추김으로 264명이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들 중의 몇 명은 상원의원이었습니다.
비슷한 신앙심의 또 다른 가톨릭 우애단체가 메인의 아겐디컴에서 유사한 학살을 행했습니다.
거기서 종교 재판관들의 사탄적인 제안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프로테스탄트에게 돌격해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그들의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투린의 수장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했음에도
곤봉으로 잔인하게 두들겨 맞았으며, 옷이 벗겨지고, 강에서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들은 그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강에 던졌습니다.

브로이스에서 살인자의 우두머리인 구이세 공작은 그의 군인들에게
약탈품에 달려들며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죽이거나 익사시키도록 했습니다.
이 말에 그들은 나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더럽힌 후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구이세 공작은 미레에 가서 똑같은 폭동을 며칠 동안 자행했습니다.
미레에서 카세보니우스라는 관료는 강에 던져졌습니다.

안쥬에서 그들은 관료인 알비아커스를 살해했으며,많은 여인들이 더럽혀지고 거기서 살해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두 자매가 있었는데 그들을 아버지 앞에서 추행한후 그들과 그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논네에서는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하자,
남녀를 조건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해하였고, 거리는 슬픈 외침 소리가 울렸으며,
피가 흐르고 집들은 파렴치한 군인들이 던진 불로 화염에 뒤덮여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숨어있던 곳에서 남편과 함께 끌려 나와서
먼저 잔인한 군인들에게 추행을 당한 후에 강제로 그녀 남편의 내장을 찌르게 했습니다.

마티스콘 시에서는 팔과 다리를 자른 후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스포츠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방문객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그들은 때로
"사람들이 저렇게 잘 뛰어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바레(Barre)에서도 극악한 잔인성이 행해졌습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어 극심한 분노로 그것을 씹기도 했습니다.
성으로 도망했던 사람들은 항복했을때 거의 모두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오거스토보나에서는 사람들이 파리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자마자
프로테스탄트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나서서
감옥에 넣고는 후에 야만스럽게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아바리콤, 트로이, 토울로우스, 로엔과 다른 많은 곳에서도,
도시에서 도시로, 시골로, 읍으로, 온 나라 전체에 걸쳐 그와 똑같은 잔인성을 실행했습니다.

그 결과 일주일만에 약 10만 명의 프로테스탄트가 프랑스 전역에서 조각조각 찢겨졌습니다.
미슐레는 "성 바돌로메의 날의 대학살은 하루가 아니라 온 계절에 가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그 기쁨이 너무나 엄청나서
그들은 하루를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것을 지켰고
그들이 고안해낼 수 있는 모든 기쁨의 표현들을 드러내었습니다.
교황은 축포를 떠뜨리고 환희의 날을 선포했고, 영광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72년 위그노들의 학살"(Ugonottorum Strages 1572)이라고 적힌 기념주화를 만들었습니다.



바돌로메 대학살은 다음과 같이 새겨진 문구와 함께 바티칸의 왕의 홀에 그려져 있습니다.

"교황은 콜리그니의 죽음을 승인한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후에도 계속 학살되어서 전멸되었습니다.
현재도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전체 국민의 1% 내지 2%에 지나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가 이렇듯 몰락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말만 프로테스탄트였지, 형상과 영에게 예를 표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학살의 명칭이 죽은 바돌로매에게 예를 표하는 날인
성 바돌로매의 날의 학살로 칭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를 구하지 못하셨겠습니까?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이 속수무책으로 프랑스 가톨릭 교도들에게 전멸당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겸해서 섬김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종교개혁 당시의 프랑스의 폭발적인 프로테스탄트 성장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추기경의 말에 따르면 심지어 전체 국민의 절반이 프로테스탄트라고 추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성장은 근래에 유래가 없다고 말해지기까지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우상숭배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는것 또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의 우상숭배에 타협하는 자세와 똑같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심판받을 차례입니다.
가톨릭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려고 프로테스탄트에게
태양숭배며 마녀사냥이며 원주민 학살, 종교재판 등등의 자신들의 죄악을 죄다 뒤집어 씌우고 있는
오늘날의 인격적인 테러쯤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우상숭배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프랑스에서든 한국에서든 차별이 없습니다.

신 8: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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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턴 강도단이 차량으로 도주하던 중 벼락에 맞아 전원 사망했다는 소식이 온라인상으로 알려졌다.

      지난 19일(현지 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회를 턴 강도단이 탄 차량에 낙뢰가 떨어져 현장 즉사하고 말았다.

      해당 영상은 강도단 뒤에서 달리던 한 차량의 블랙박스에 기록된 것이다. 영상에 따르면 붉은 차량이 강도단이 탑승한 흰색 차량을 쫓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흰색 차량이 ‘펑’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차량의 파편은 사방팔방으로 튀었고, 결국 흰색 차량에 탑승했던 강도단은 현장 즉사했다.



      [경향신문]



      이렇게 확률적으로 희박한 일이 어떻게 생기는지 모르겠다.



                강도단이 탄 차량(흰색)이 달리고 있다



      .

      .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며 하얀 섬광이 일어난다



      .

      .



      강에서 사는 사람들


       

       

       

       

       

       

       

       

       

       

       

       

       

       

       

       

       

       

       

       

       

       

       

       

       

       

       

       

       

       

       

       

      내면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고 있습니까?
      자연에서 혹은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옳습니다.
       

       

       


       

       

       
      고뇌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움은
      친절하고 따스합니다.

      하지만 정열적인 사람에겐
      아름다움이 오히려
      힘차고 무서운 것입니다.

      또한 피로에 지친 사람에게
      아름다움은
      부드러운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성난 파도와 같다고 말합니다.
       

       

       

       


       
      새벽을 지키는 파수꾼은
      아름다움을 여명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낮에 일하는 사람들은
      석양과 함께 깃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겨울철 눈 속에 있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봄과 같이 온다고 믿고,
      여름철 뜨거운 햇살 아래 있는 사람은
      가을의 풍요로움과 함께 다가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모두
      당신들의 욕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아름다움은 욕구가 아니라 희열입니다.

      목마름에 타는 입술이나
      헛된 허우적거림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며
      귀를 막아도 들리는영혼의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영원히 꽃이 피어나는
      정원과 같은 것이며
      영원히 춤추는 천사들의 모임입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생명이 그 거룩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일 때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실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은
      물질적 포장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생명의 신비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삶과 생명을 한탄하며
      불행하다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숨쉬는
      생명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칼릴지브란의 글 중에서 -
       

       

       

       

       

       


      ♬ 내 인생의 첫사랑 (Erste Liebe meines Lebens)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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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다(16:18). 이 교회는 유형의 건축물이 아니다.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 교회는 세상이 있는 유형교회나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 또는 잉글랜드 교회나 스코틀랜드 교회를 가리키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 교회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인간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지극히 보배롭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신자들로 구성된다.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그분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분의 양 떼요 그분의 신부, 즉 어린양의 신부이다. 이것이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의미이다. 이 교회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다.

       

      참신자는 모두 한마음으로 예배한다. 그들은 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두 진정으로 거룩하고, 한목소리로 할렐루야라고 외치고 아멘이라고 화답한다.

       

      세상의 유형교회는 모두 이 보편 교회를 섬기는 종이요 시녀이다. 세상의 교회는 큰 건축물을 짓는데 필요한 비계와도 같다. 세상의 교회는 껍데기요, 그 안에 살아 있는 알곡이 자란다. 물론 세상 교회도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그중 가장 가치 있는 쓰임새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위해 신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라고 말씀하신다. 반석은 베드로 사도가 아니라 그가 조금 전에 고백한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반석은 불안정하고 실수가 많은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가리킨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 곧 중보자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바로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다. 예수님이 약속된 구원자요 참된 보증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중보자시라는 진리가 바로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이요 토대이다.

       

      이 토대는 큰 희생으로 얻어진 결과이다. 이 토대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 받고 죽임 당하셨다. 또한 이 토대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자기 백성을 위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심판의 날, 모래 위에 지은 궁전보다 반석 위에 지은 초가집이 수천 배나 더 낫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지옥은 우리 뒤에 있고, 천국은 우리 앞에 있다. 험한 바다 저편에 본향이 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온갖 역경을 물리치고 천국에 들어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음부의 권세가 그들을 대적했지만, 승리하지는 못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전진하라.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승리는 확실하다.

       

      음부의 권세가 대적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라.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룰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의 성화를 독려하고,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싸움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든다. 이 싸움은 세상을 멀리하게 도와주고, 더욱 열정을 쏟아 기도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 싸움은 천국을 사모하게 만들고, “주 예수여, 어서 옵소서”(22:20)라고 진심으로 부르짖게 도와준다.

       

      음부의 권세 앞에서 좌절하지 말라. 내면의 평화와 음부의 권세와의 싸움은 그가 하나님의 참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은혜의 증표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 싸움이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구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전능하신 건축가께서 영광스런 약속을 허락하셨다. 그분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 세운 제국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초창기에 세워진 유형 교회들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에베소교회와 안디옥교회가 어디 있는가? 고린도교회와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디 있는가? 그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그들은 주교와 교회 회의와 의식과 학문과 전통을 자랑할 뿐,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 안에서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복음을 굳게 붙잡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촛대가 옮겨졌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참된 교회는 한 곳에서 박해를 당하면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참된 교회는 한 곳에서 짓밟히거나 압제를 당하면 다른 곳에 뿌리를 내려 번성한다. 불과 칼, 감옥과 벌금과 형벌 등 그 무엇으로도 그 생명력을 없애지 못했다.

       

      마태복음 1618절의 약속은 참된 교회 전체에 적용된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언제나 존재한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그분의 백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 율리우스 황제가 지금 그 목수의 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떤 나이 든 신자가 그분은 율리우스를 위해 관을 만들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율리우스는 전투 중에 사망했고, 그의 모든 영광과 권력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도 참된 교회에 속해 있는가? 위대한 토대와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가? 성령을 받았는가?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셨다고 증언하시는가? 성경의 세계와 복음의 환한 빛에서 벗어나 어두운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형제들이여, 거룩한 삶을 살라. 우리가 속한 교회에 합당하게 처신하라. 천국의 시민답게 살라.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 우리의 행위로써 그들을 유익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읽게 하라. 용기 있게 살라.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담대히 고백하라. 기뻐하는 삶을 살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복된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살라.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9-41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모의 모유를 사모하는 사람들....

       

      앞의 글에서 한약 속에
      성모 모유의 성체 기적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이는 개신교의 금 이빨로 바뀌는 뿌리 없는 신학 사상과 달리...
      성모 모유에 관한 기적에 대한 사모함은
      천주교의 오랜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논문 가운데
      성모의 젖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찾아봤지만 찾지를 못하였는데
      찾게 되면 인용문을 제시할 것임)

      천주교에서 성모의 모유를 직접 먹었던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시토파의 <성인 베르나르>이다.

      그는 환시를 통하여 성모를 직접 본 사람이며
      성모를 본 정도로 끝나지 않았고
      성모가 친히 그에게 모유를 주신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사진 첫 번째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

      그 이후로 베르나르는 성모에 관한 박사로 성모에 관한 최고 연구가가 된다.

      벧전 2:2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의 대비하여
      예수님께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난 것처럼
      천주교 신자들 역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성모의 젖을 먹는 장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사진은 두 번째 그림을 확대한 장면인데
      모유로 가득찬 매우 탱탱한 성모의 가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주 건강한 많은 젖으로
      여러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모 모유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퍼져나가면서
      중세 프랑스 샤르트르의 한 주교가
      눈 병으로 고생하다가 성모에게 기도하였더니
      성모가 친히 나타나셔서
      가슴을 젖히고 그녀의 젖을 눈에다가 분사(?)하여
      눈에 발라 주시므로 낫았을 뿐 아니라
      성모의 젖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성모에 대한 신심이 발달하여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그림 가운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14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흉작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받던 시기로
      이때 유행하던 것이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제의 그림인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할 뿐 아니라,
      비너스를 비롯한 수 많은 여신들의 벗은 가슴을 통하여
      이방 여신들의 세계를 훔쳐봤던 관음증 환자들이
      이런 간접 카타르시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모의 가슴과 모유를 통하여 충족하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단들의 행보를 확인하게 된다.성모의 모유를 사모하는 사람들....

앞의 글에서 한약 속에 
성모 모유의 성체 기적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이는 개신교의 금 이빨로 바뀌는 뿌리 없는 신학 사상과 달리
성모 모유에 관한 기적에 대한 사모함은
천주교의 오랜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논문 가운데
성모의 젖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찾아봤지만 찾지를 못하였는데
찾게 되면 인용문을 제시할 것임)

천주교에서 성모의 모유를 직접 먹었던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시토파의 <성인 베르나르>이다.

그는 환시를 통하여 성모를 직접 본 사람이며
성모를 본 정도로 끝나지 않았고
성모가 친히 그에게 모유를 주신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사진 첫 번째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

그 이후로 베르나르는 성모에 관한 박사로 성모에 관한 최고 연구가가 된다.

벧전 2:2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의 대비하여
예수님께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난 것처럼
천주교 신자들 역시 성모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성모의 젖을 먹는 장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사진은 두 번째 그림을 확대한 장면인데
모유로 가득찬 매우 탱탱한 성모의 가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주 건강한 많은 젖으로
여러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모 모유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퍼져나가면서
중세 프랑스 샤르트르의 한 주교가 
눈 병으로 고생하다가 성모에게 기도하였더니
성모가 친히 나타나셔서 
가슴을 젖히고 그녀의 젖을 눈에다가 분사(?)하여
눈에 발라 주시므로 낫았을 뿐 아니라
성모의 젖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성모에 대한 신심이 발달하여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그림 가운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14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흉작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받던 시기로 
이때 유행하던 것이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주제의 그림인데
젖을 물리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할 뿐 아니라,
비너스를 비롯한 수 많은 여신들의 벗은 가슴을 통하여
이방 여신들의 세계를 훔쳐봤던 관음증 환자들이
이런 간접 카타르시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모의 가슴과 모유를 통하여 충족하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단들의 행보를 확인하게 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토지사랑  http://cafe.daum.net/tozisarang/


      입신-환상-예언-직통계시 추구자들에게
      글/최병규 박사

      "예언, 입신, 환상, 천국과 지옥 간증을 터부시하는 것은 바람
      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 하시기 원하며 또한 그 일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죄를
      범하는 것 입니다. 당신 뭔데 성령을 거부합니까? 성령사역
      한다는 사역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목욕 도구를 챙겨서 목욕탕에
      갔다. 예수님께 ‘예수님, 아시면서 왜 데리고 오셨어요?’ 여쭈
      니, ‘한 번 와 보고 싶었어’ 하셨다. ‘난 여탕이 좋아!’하셨다.
      아내가 ‘안돼요!’ 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들어가셨다. 성령님
      은 나와 **이, **이와 함께 남탕에 들어가셨다. 내가 성령님
      께 ‘천국에는 목욕탕이 있어요?’ 여쭈니 ‘남탕과 여탕이 있
      어’하셨다."

      "말씀이 끝나고 기도할 때,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수를 받고 누운 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
      을 보고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있었고 큰 웃음을 웃고 있었습니
      다. 그 때 주님이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 거한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제가 더 죽어지길 구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
      어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여 따르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와 천국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기로 약속이 되
      어...성령님은 지구를 한 바퀴 도시고, 아버지는 천국에 계신
      다고 말해주었다. 아버지가 먼저 내려오시고 그 다음 성령님,
      그리고 쇼핑을 마치셨다며 예수님이 내려오셨다."

      위에 열거한 인용문들은 그들이 속한 교회와 단체가 서로 다
      르지만 소위 입신이나 환상, 예언기도, 직통계시 등을 추구하
      는 부류에 속해 있는 이들의 간증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단
      및 불건전 단체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극단적 신비주의 추구
      자들이 계속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필자가 볼 때 한국교회
      는 앞으로 이단 단체들로부터는 물론이요 극단적인 신비주
      의 운동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극단적인 신비주의 형태는 다양한 양상으로 전
      개되고 있다고 본다. 신학 훈련을 받지 못한 개인들로부터 시
      작하여 빈야드 운동 및 그것을 계승해 온 신사도적 운동에 속
      한 일부 인사들과 그들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극단적 신비
      주의로 몰입되는 경우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외국에서 유입
      된 사조들에 대하여 정보가 없는 국내 인사들 가운데도 그들
      이 겉으로는 그러한 운동을 표방하지 않지만 실제적으로는
      빈야드 혹은 신사도 운동과 유사한 행위들을 시행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물론 현재까지 교계에 드러나지 않은 많은 이들
      이 일련의 극단적인 신비주의 형태의 신앙 행위를 시행하고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극단적 신비주의를 부추기는 일부 교회나 운동단체
      들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먼저 그들은
      입신, 환상, 꿈, 예언 등을 추구한다. 물론 그들도 표면적으로
      는 나타나는 신비 현상들 보다는 성경이나 성령의 증거에 따
      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꿈에 정통, 환상 잘 보고 예언
      하는 것. 이거 위험한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 정통하고 성령
      이 내적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에 정통하십시오. 성령의 내적
      인도, 영의 음성, 성령의 증거, 여기에 정통하십시오. 그래야
      바르게 나갈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그래야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도 그래야 정통으로 쓰임 받고 크게 쓰
      임 받습니다. 예언 사역자들도 그게 안 되면 교회를 혼란시킵
      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나
      단체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신비주의적 행위들을 시행하고
      있다.

      앞서 꿈이나 환상 그리고 예언하는 것 등을 위험한 것이라고
      한 동일인이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은 '일종의 언어유희
      (playing with words)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이곳(천국)을 방문합니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데 이것을 가리켜 바로 ‘입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입신
      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영이 몸을 떠나서 천사나 예수님의
      인도로 천국 혹은 지옥에 다녀오는 경험입니다. 입신이 은사
      가 된 사람은 매우 쉽게 그리고 자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에서 입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입신이 은사가 됩
      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입신, 환상, 예언기도 등을 추구하고 있는 교회나 단
      체의 지도자들은 종종 자신이 증거할 설교나 메시지를 '직통
      계시'를 통하여 받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얻게 되기
      도 한다. 그러나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직통 계시 수준
      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가 어제 '좋은 말씀을 전해줘야 하
      는데 내가 뭘 말해야지?'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요. 원래 준비
      를 안 하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 뭐하지요? 아무것도 없
      는데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뭘 얻으려
      고 그러느냐? 그냥 기도하고 있어. 그냥 너나 준비하고 있어
      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너나 준비하고 있어
      라. 주일날도 아무것도 없고 월요일에도 아무것도 없어도 그
      냥 가만히 나만 신뢰하고 있어. 뭐 올라가기 전에 받으려고
      하느냐?" '주님, 맞는 말씀이네요. 뭐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말씀을 받으려는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내려놓았습니
      다." "기도시간에 기도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
      다. '오늘 **시간에 이것 얘기해라.' 기도하는데 저는 기도하
      면서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하고, 이것 얘기하고 그 다음에
      이것 얘기해라.' 한 내용을 단계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무
      엇을 얘기해야 하는지 영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다음에 **
      학교 시작했더니 '기도 끝나고 그 얘기하기 전에 이 얘기부터
      해라.' 그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학교 좋았습
      니다."

      그리고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 자신'이야말로 성도들이 체험하는 입
      신, 꿈, 환상, 예언 가운데 어떤 것들이 맞고 맞지 않는 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직통계시를 받는
      수준에 있는 자신들이야 말로 '타인의 신비 체험들'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가령 어떤 이는 누군가가 그 교회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는 것
      을 보게 되는데, 이 글을 읽어보면 직통계시 체험자는 또 다
      른 체험을 받은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분
      은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단한 선지자라도 되는 양 우리나라 뿐
      아니라 각 나라에 관한 환상과 계시를 받아 천국 카페를 위시
      해 여러 카페에 올렸던 분입니다. 우리는 환상과 계시를 다
      믿지 않습니다. 거짓된 계시와 환상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읽어보았는데 거짓 영들에게
      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
      에는 '그들 자신의 메시지는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들의
      설교는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와는 뭔가 다른 것'이라고 차별
      화시키는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즉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설교자(목회자)들과는 뭔가 다
      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본다: "이게 제
      게는 실제입니다. 늘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지성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
      설교에는 다른 설교하고 다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뇌싸움에서, 두뇌 플레이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인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게 제 스승이셨습니
      다. 그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제 신학입니다. 저
      는 신학이 따로 없어요. 그게 제 신학입니다. 그게 제 견해입
      니다. 그게 제가 가진 분별력입니다. 그게 제가 가진 메시지
      입니다. 그래서 저의 멘토는 성령님이십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은 입신, 환
      상, 예언기도, 직통계시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파한
      다. 그리고 그러한 신비 현상들에 대한 진위 여부를 소위 직
      통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고 전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일련
      의 신비 경험들의 진위 여부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받았다고 하는 직통계시에 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성경 보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인간 자신
      의 권위를 높이고 나아가서 인간의 주관적인 체험을 성경 보
      다 높은 권위에 두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극단적 신비체험 위
      주의 신앙을 지향해서는 안 되겠다. 성경은 지옥이나 천국 체
      험 즉 소위 말하는 입신에 대하여 상술하지 않고 있다. 예언
      기도를 받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 말씀 대신에 직통계
      시 받기를 사모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된 하나
      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켜 행하라
      고 하신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 안에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라고 요청하신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합하여 전
      체 66권이며, 성경은 성도의 신앙과 삶의 규칙(the rule of
      faith and life)이라고 가르친다(참조. 「웨스트민스터 대교리
      문답」 제3문답).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실 수도 있고 영적 체험을 하게 하실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러나 만약 우리가 성경에 명시되어져 있지 않은 것을 위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해 가게 된다면 분명히 극단적 신비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경 권위 보다 인간이 받았다고 하는 입신, 환
      상, 예언기도, 직통계시 등에 늘 의존하면서 살게 된다. 성경
      에 근거한 생활 실천은 추구하지 않으면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일상화시켜서 추구한다면 건전한 신앙에
      서 벗어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균형을 갖춘
      신앙관을 잃어버릴 수 있으므로, 우리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
      한 규칙인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면서 건전하게 생활해 가기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입신과 환상 그리고 예언과 직통계시 등의 극단적 신
      비주의적 체험을 추구해 온 성도들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성
      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
      서 건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자신
      을 다스리도록 하면서(엡 5:18 하반절 - 오직 성령의 충만함
      을 받으라 ) 성령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갈 5:22-23- 오직 성
      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
      니라), 주의 복음이 증거되도록 직간접적으로 애쓰는 삶(마
      28:18-20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
      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
      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
      라 하시니라 )이야 말로 건전한 신앙일 것이다.

      극단적 신비체험 신앙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로 다시 돌
      아가자!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사역은 다르다. 성령
      님도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이시며, 예
      수님을 높이면 성령님도, 아버지하나님도, 높이심을 받는다.
      미안증에 걸려서 삼위하나님을 다 불러야 역사하는 하나님
      이 아니시다. 성경에는 아들(예수그리스도)을 높일때 아버지
      도 성령님도 같이 영광을 받으신다. 성령님을 높이라고 한 성
      경구절이 없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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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x두 목사의 <내가 네게 불세례를 주노라> 황당 내용 발췌
      “천국은 확실히 있다”의 저자 토마스주남의 시한부종말론
      2009.10.28 수요일 재림.주장 하는 제2 장승포교회 천국
      은 있다.저자 '토마스주남'은 영(靈)적인 사람이 아니다.
      한국 이단사의 뿌리는'입신'체험 베니힌의 성령론 '안녕하
      세요.성령님!' 신비주의를 경계하라 연금술의 비밀과 금가
      루현상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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