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3)
■ 마녀재판
 
끝까지 자신이 마녀임을 자백하지 않은 마녀는 발가 벗기운체 광장에 끌려나가 만인의 눈요기 꺼리가 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녀행위에 대해 낭독하고 끝이 뽀족한 창위에 올려졌다.
뽀족한 창끝은 먼저 여인의 질을 통과하고 가려린 여인의 몸무게에 의해 서서히 몸을 관통한 다음 입으로 튀어 나왔다.
여인으로써 창날이 몸을 관통하는것보다 더욱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것은 이모든 과정을 동네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진다는 것이며, 시체가 썩을 때까지 광장 귀퉁이에 그 형태로 방치된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마녀"임을 자백할경우 "주님의 은총"이 주어지는데, 이는 옷을 다입고 산채로 불태워지는 은혜로운 특혜를
받는 것이다.
 
 
1. 마녀재판의 시작
 
마녀재판이 절정에 이렇을때는 AD1400년경부터 1600년 말까지이다.
10세기 이전에도 마녀재판은 가끔 있었지만, 교황 요하네스 22세의 교서(1318년 2월 27일자)
"언제, 어디에서라도 마녀재판을 개시하고 계속하고 판결하는 충분하고 완전한 권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는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
 
 
2. 마녀의 정의
 
원래 마녀란 여자의 모습을 한 악마의 총칭이며 저주하여 농작물을 말라죽게 하거나, 인형에 바늘을 찔러 누군가를 죽게 하는
검은 주술사, 또는 주문이나 약초로써 병을 고치고, 농작물의 증산을 위해 비가 오기를 천신께 비는 따위의 일을 하는 흰 주술사,
그리고 원시종교의 양물숭배 등의 비의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여자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교회에서 마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어 악마를 섬기고,
그 대가로 부여되는 마력을 사용하며, 공중을 날아 마녀 집회(사바트)에 참석하여 악마와 교접을 하는 자로,
그 몸뚱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늘 있었다고 전한다
마녀재판으로 처형된 마녀의 약80%는 여자였고, 20%는 남자였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이런 마녀에 대한 살육은 1865년 마지막 마녀가 처형될때까지 지속되었다.
 
 
3. 마녀재판의 목적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1560년에서 1660년이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갈등이 증가하고 악화되면서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을 "Reformation(개혁)"이라고 하지만, 카톨릭에서는 "Deformation(기형 또는 변형)" 이라고 비꼬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마녀사냥은 신교와 구교가 각각 점령한 지역에 대한 배교를 막기위해 공포 정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는 사실이다.
칼뱅을 위주로한 프로테스탄트들의 마녀사냥이 훨씬 지독하고 잔혹했으며, 이는 상대적 약자라 생각하던 그들의 발악이 도를
치나쳤다는것을 알수 있다.
 
 
4. 마녀재판의 희생자수
 
마녀재판으로 희생당한 무고한 시민의 숫자는 줄잡아 900만명을 웃돈다.
그중 약 500만명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몫이였고, 나머진 카톨릭이 자행한 만행이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종교권력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희생양을 삼은 불쌍한 양민의 숫자가 너무나 많다는것이다.
아무리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마녀사냥을 했다지만, 900만명이라는 터무니 없는 희생자 숫자는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당초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종교권력에 빌붙은 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전 유럽을 집단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 규정요금
 
1.네 마리의 말로 사지를 찢게 한다: 5타렐 26알푸스
2.팔다리와 몸을 넷으로 잘라 나눈다:4타렐 0알푸스
5.참수. 화형:5타렐 26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9.산채로 화형:4타렐 0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11.차바퀴에 묶어 생체분쇄:4타렐 0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29.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라내고 그 위에 빨갛게 달군 인두로 구강내를 태운다:5타렐 0알푸스
ㅡㅡㅡ중략ㅡㅡㅡ
32.익사,물에 뛰어들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살한 죄인의 사체를 이동시켜 구멍을 파고 묻는다:2타렐0알푸스
 
위의 요금표는 마녀사냥꾼들이 터무니 없이 마녀사냥 비용을 받는것에 대해 교회에서 적정요금표를 만들어 배포한것이다.
당연히 재판및 사냥, 처형비용은 압수한 마녀의 재산에서 지급된다.
마녀재판으로 인해 들어오는 이익은 상당했다.
재판은 크게 벌이가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썩어가고 있는 마녀의 유해를 성직자들끼리 서로 빼앗는 일도 일어났다.
몰수재산은 관리의 손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잔인한 도살로 죄 없는 사람 들의 목숨을 빼앗고 새로운 연그물이 사람의 피에서 금은을 만든다"
(코르넬리우스 루스 『요술의 참과 거짓』1592년)
 
 
5. 교회의 참회와 그 진실
 (2) 카톨릭의 참회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2000년 3월 12일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참회의 미사'에서 중세 종교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원정, 유대인 박해 등 2000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를 사상 최초로 공식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카톨릭의 교황이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하는 광경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은 감동 했으며,
대희년(제3천년기)을 맞으면서, 카톨릭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인류에게 참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로 변모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개지랄"을 떨었다.
그동안 쉬쉬하던 불편한 진실을 더 이상 감출수 없어 어쩔수 없이 인정 한것이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는 카톨릭 신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 "의도된 연출"임에는 틀림없다.
 
 
(3) 참회의 진실
 
2004년 6월 15일 교황청 에서 "종교 재판에 관환 국제 심포지움의 기록들" 이라는 제하에 783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자.
 
"이태리 라 시피엔차 교수(역사학) 아우구스티노 보로메오 에 의하면 가장 혹독한 종교재판이 이루어진 스페인의 1540년부터
 1700년 사이에 모두44,674건의 재판이 이루어 졌는데 그중 1.8% 만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중 대부분이 궐석 재판으로
 이루어저서 인형이 대신 처형 되었고 실제로 처형된 사람은 0.1% 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오늘날에도 전해저 오는 인형 화형식은 이때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악명 높은 마녀 사냥에 대해서도 스페인 종교 재판 역사상 총 125,000 건의 재판중 불과 59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탈리아에서 36명, 포루투갈이 4명 입니다.
 이런 수치는 근대 유럽 전역의 시민 법정에서 100,000건의 재판중 50,000 여명이 사형된 시민 법정과 비교하면 종교 법정은
 그 잔혹함이 훨씬 덜한것도 사실 입니다."ㅡㅡㅡ중략 ㅡㅡㅡ
 
그들은 이 보고서에서 중세 종교재판으로 처형된 사람의 숫자를 약 176명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2000년 3월 12일에 있었던, 교황이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한 내용은 카톨릭이 각종 종교재판이라는 만행으로
고작 176명을 죽였다고 인정하면서 "개지랄"을 떤것이다.
더 나아가 이 보고서에서는 이단 심문과 같은 종교재판이 계속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비판의 글이 주어진기도 한다.

 

 
1세기경 기독교가 태동하는 순간부터 현재 기독교에 이르기 까지 그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다.
그들이 권력을 가졌을때는 산채로 불태워지거나, 참혹하게 난도질 당하거나,아니면 공포에 떨면서 무조건 복종하거나를
선택할 "자유의지"가 주워졌을 뿐이다.
다소 편향적이것 같은 저의 주장이 과거의 일일뿐이고, 현재는 그렇치 않다고 반론하실분이 계실 것이다.
현재는 그렇치 않다고 생각되어지는것은 단지 그들이 권력을 갖지 못해서 그를뿐 그들의 기본 사상은 전혀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종교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깜도 안돼는 한줌의 권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김홍도"목사는 이런말을 한다.
"이단을 척결하는것은 교회 100개를 세우는것보다 더 중요하다"
"사탄의 권세에 놓여있는 세상과 우리 믿는자들은 끊임없는 전쟁을 해야한다."
만약에 이런자들이 권력을 가진다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기독교는 인류에게 커다란 저주이며, 본질적인 타락이며, 영원한 오점이다. ㅡㅡ중략 ㅡㅡㅡ
 기독교 내에서의 갈등 그 또한 기독교적인 것이다. ㅡㅡ중략 ㅡㅡㅡ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다."   <니체>
 
"성경이란 세상에 일어날 수가 있는 모든 악과 범죄를 타당하게 여긴 책이다"<존 램스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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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보여라!


요한복음 5:31-32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시면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냐?”고 살기등등하게 따지고 덤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 같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니 나도 죽은 자를 살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

심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모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모든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맡긴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심판은 생사화복, 천국과 지옥의 주관자, 곧 우주의 주재자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하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요 주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계속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면서 하신 “증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주시라면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기적과 표적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행하신다면 그것은 참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행하셨다면 진작 마귀가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드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병고침과 살리심과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증거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다만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자요 광야의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그 보내심의 증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마침내 그를 증거하셨습니다.
증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눈을 치켜뜨고 죽이겠다고 덤비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증거는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입니다. 증거를 보이지 않으시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광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으니 예삿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로 나타내셨다면 얼마나 통쾌하고 속시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엎드렸을 것이며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믿음은 우주의 비밀입니다. 구원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네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증거를 보여랏!”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 데리고 와서 보여라. 아니면 네가 선악과 먼저 따먹어 봐라. 어디 하나님과 같이 되는지 보자.”
아담과 하와가 진작 이렇게 증거를 요구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뱀을 믿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들, 유대인들이 뒤늦게 똑똑해져서(?) 정작 예수님께는 안 속겠다고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똑똑하게도 아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아, 그 때 뱀을 못 박아 죽여 버렸었더라면, 그걸로 뱀탕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 아니 죄인들에게,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믿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예수님이 쓰시거나 보이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쓰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곧 성경,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막상 눈앞에 오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기적을 요구하고 초자연적인 기도응답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것이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과 응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씀이 증거입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 말씀,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감으로써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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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재판 (1)
글쓴이 : 예술이
아울러 종교라는 특정한 신념체계가 세속권력과 야합할때 얼마나 참혹해지는지도 깊이 생각해 보아함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아래글은 "천주교의 종교재판 약사"와 "중세 종교재판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연구"및 "유럽에서 자행된 칼빈주의자들의
인간사냥과 목적"이라는 책을 대부분 인용하여 작성한 글이며, 상세한 인용 페이지는 생략하겠습니다.   
 
 
"역사가에게 요구되고 기독교인에게 허용되는 모든 사항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종교 재판을 우리 시대의 전쟁과 박해와 함께 어떤
짐승에게서도 볼 수 없는 포학성을 드러낸 인간이 기록한 가장 암울한 오점 이라고 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윌 듀란트)
 
"사람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할 때만큼 기쁘고 용감하고 철저하게 악을 행하는 일은 없다." - 파스칼의 『팡세』中에서 -
 
 
■ 이단자에 대한 교황 루시우스 3세의 칙령  
 
<최근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양하게 싹트고 있는 이단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에게 위임된 힘을 일깨우는 동시에
황제권의 지원을 받아 거짓된 목적을 가진 이단의 오만과 후안무치를 박멸하고,
거룩한 교회에 밝게 비치는 카톨릭의 단순성의 진리를 이단의 거짓 교리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순수하고 자유스럽게 발현하기
위함이다... 나아가서 특히 모든 카타리파, 빠터파 (Paterines), 그리고 자신을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
파시파 (Passignes), 조셉파 (Josephists), 아널드파 (Arnoldists)에 대해서 영구적인 파문을 선언한다...
그리고 당해 이단을 받아들이거나 옹호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에게 어떤 호의나 정신적 지지를 나타내어 위로하거나, 믿거나
완전하게 하는 등 그 명칭이 어떠하든지 이단을 강화시키는 자들, 혹은 어떤 미신적인 명칭으로든 자신을 위장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처벌을 선언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범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유죄로 판명된 평신도는 그 이단을 
철회하고 즉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속 재판관의 판결에 맡겨서 그 죄질에 상응하는 타당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단을 철회하거나 카톨릭 주교 앞에서 조사를 받아 자신을 깨끗이 한 후에 자신이 철회한 이단으로
돌아간 자들은 어떤 심리도 하지 않고 세속 당국에 인도되며, 그들의 재산은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기 위해
몰수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존스, 23쪽).  
 
위 교황 칙서의 사고 중 많은 부분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400명의 주교와 800명의 수도원장에 의해 성문화 되었으며,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는 반드시 파문하고, 세속 당국에 넘겨서 처벌할 것을 선언했다.
처벌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재산의 몰수는 분명하게 허용되었다.
이와 같이 장래의 종교 재판에서 가장 크게 남용된 분야 중 하나인 카톨릭 교회와 세속 당국에 의한 재산 몰수가 공식적으로
성문 법전에 명시되어 종교 재판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게 된것이다.
 
 
■ 종교재판의 시작
 
AD 1124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프리드리히 황제 2세와 공동으로 이단에 관한 법령을 선포하면서 처음으로 사형의 조항을
명문화 시켰다. AD 1231년, 교황청에서는 "종교재판관"을 임명했고, 1232년 프리드리히 2세는 전 국가에 대해 이단 색출을
명했고 이는 국가에 일임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에 따라 색출된 이단자, 마술사, 무당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칙령에 동반된 정치적 야망을 파악한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교황청이 직접 이단색출과 심문을 맡을 것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소'라는 교황 직속의 독립된 기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를 참혹한 종교재판의 시작이라 보지만, 사실 기독교의 탄생기 부터 종교재판은 늘 있어왔다.
 
"에클레시아 아브호렉트 아 상구이네"
이것은 "카톨릭 교회는 피 흘리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인데 카톨릭 교회의 좌우명이기도 한 이문구때문에
카톨릭 교회는 직접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세속 당국에서 집행하도록 했다.
교회에서 직접 집행할때는 산채로 불태우는 "화형"을 시행했는데 이는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으로써 고안된 것이며,
교회의 자우명과 잘 부합되기 때문이였다.
 
이단이 카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범죄라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는 이단을 사형에 해당하는 반역으로 간주했는데, 초기 순교자들 중 다수가 로마 황제를 일종의 신(god)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을 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로마의 재판관은 이단 혐의자에 대한 심문 (인퀴시티오)―이 명칭으로부터 "종교 재판(Inquisition)"이 유래됨―을 할 수 있었다.  
중세 카톨릭의 종교 재판이 시작되기 전 (공식적으로 시작한 것은 AD1227~31년이었음) 200년 동안 이단자에 대한 화형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화형은 때때로 세속 당국이나 폭동에 의해 선동되었다.
잘 알려진 중세의 이단자 화형 중의 하나로서 AD 1022년에 프랑스 왕 로베르 비오가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에게 가한 것이 있었다.
폭도에 의한 것은 AD1028년경의 밀라노 (Milan), AD1114년의 쓰와쏭 (Soissons), AD1143년의 콜로뉴 (Cologne)에서
성난 폭도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를 카톨릭 교회 감옥으로부터 끌어내어 화형시키는 사태가 일어 났었다.
 
이와 같이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것은 AD1227~31년의 종교 재판의 시작 당시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종교 재판의 신학적 근거  
 
종교 재판의 옹호자들은 (그리고 놀랍게도 종교 재판이 1834년에 끝난 후-현재도 간접 종교재판은 계속되고 있지만-
호교 교부들도) 종교 재판을 정당화하는 성서적 신학적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 종교 재판관들에 의해 가장 자주 인용된 성구는 구약의 모세 율법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의문스러운 신학 이론으로서, 말하자면 음식물의 제한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는 1세기 이래 계속 완전히
무시해 오다가, 갑자기 (13세기에) 수천명의 사람들을 기둥에 묶어 화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그 법을 완벽하게 합리화 시키면서
정당하다고 본 것이다.
주요 성구는 아래에 인용되어 있다 (간략하게 편집했음)  
 
(신명기 13장)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네게 말하기를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너는 돌로 쳐 죽이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출애굽기 22:18) "너는 무당(sorceress-여자 마법사)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발췌한 위에서 언급한 원리 중 다수는 후에 종교 재판에서 모방되었는데 그 중에는 다음의 것이 포함되었다.   
 
ㅇ 예언자와 꿈을 꾸는 자의 "제거" (잔다르크의 죽음을 가져온 혐의)
ㅇ 종교 재판에서 가족 성원은 서로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한 것
ㅇ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단자를 죽이는 것
ㅇ 카톨릭 믿음에서 돌아 선 마을을 심문하고 살피고 조사하기 위한 지침이 후에 종교재판관의 직무 내용 설명서가 됨
ㅇ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전체 마을을 없애는 것  
 
종교 재판 옹호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다.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은 요한 복음 15장에서다.  
 
(요한 복음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종교 재판의 방법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원 1225?∼1274)의 방대한
신학적 저술 신학 대전 (Summa Thelogica)의 다음과 같은 대경실색하게 하는 구절이 알려주는 바가 그러하다.
도미니크회(Dominican) 수도 신부였던 아퀴나스는 일반적으로 4/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가장 영향력있는 카톨릭 신학자로
여겨지는데 그는 이단의 박멸을 언급하고 있다.  
 
 P(2b)-Q(11)-A(8)…<화폐 위조자와 기타 행악자들이 세속 당국에 의해 즉시 사형의 형벌을 받는다면, 이단자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데, 그들이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자마자 파문을 시키는 동시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쪽에서는 이단에 빠진 사람의 회개를 바라는 자비 때문에 당장 처벌하지는 않지만 사도가 지시하는 것처럼
"일 이차 권고 후에" 아직도 그가 고집을 부린다면 카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의 회개를 바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를 파문하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며, 사형을 시켜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 세속 법정에 인도한다...
아리우스 (Arius)는 알랙산드리아에서 하나의 불꽃에 불과했으나 그 불꽃은 금방 꺼지지 않고, 전 지구가
그 불꽃에 의해 소모되었다.> (신학 대전-3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제2부(제1부) 중의 제 2부, 150쪽).  
 
종교 재판의 재판관은 그들의 대의의 정당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대의명분은 너무나 혐오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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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재판(2)
요람에서 무덤까지 카톨릭교회에 충성을 해야하고, 그들의 말만 들어야하고 그들이 지시하는대로 따라야함을 근본정신으로 하는
"살아있는 그리스도(교황)"를 모시는 종교권력은 AD1962~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종교재판을 끝낼때 까지
(비공식적으로는 아직 지속되고 있음) 그 피의 향연을 계속했다.  
 
 
■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황의 종교 재판  
 
ㅇ 완전한 사람들 (카타리파)  
 
13세기 즈음이 되면서 성지회복에 의한 영원한 십자군 왕국의 꿈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를 갈구하는 기독교란 종교는 또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 전쟁에 대한 열의를 동료 카톨릭 그리스도인에게 돌린것이다.
AD1209년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에 대해 십자군을 보낸다.
역사기록에 "알비장스 십자군"으로 알려진 이 동료 카톨릭 그리스도인에게 행해진 유혈원정은 제 1차 종교 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알비장스 십자군은 1209~1229년까지 20년간 지속 되었으며, 같은 카톨릭이지만 이단이라 명명된 카타리파는 이교도
전쟁에서 "적"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간혹 더욱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209년 7월 22일 베제가 약탈 당했을 때인데, 20,000명이 훨씬 넘는 남녀 및 심지어 젖먹이 어린이까지
주님의 군대(십자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교황의 특사 아르노는 역사에 길이남을 명언을 남기는데, 공격 중에 카톨릭 교인은 살려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모두 죽여라, 진짜 기독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실것이다" 라고 한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있을때면, 화형이라는 이밴트를 했는데, 1211년 라보르에서 400명이 화형되었고,
카세에서 94명이 화형되었다.
완전한 사람들이라 불리던 카타리파의 모든 도시는 황폐화 되었고, 주님의 칼날을 피해 도망갔던 카타리파 사람들은 철저한
추적을 당하며 결국에서 피에 굶주린 카톨릭의 사냥감이 될수 밖에 없었다.
1239년 몽비메르에서 183명이 잡혀서 산채로 불태워 졌고, 1244년 몽세귀르 산성에서 215명이 그들 뒤를 따랐다.
 
그후로도 지속된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으로 카타리파인들이 최후의 만찬시 사용된 "성배"를 가지고 있다라는 거짓 소문에
현혹된 주님의 군대에 의해 "완전한 사람들"이라 불리던 카톨릭 신자들은 영원히 지상에서 소멸되었다.  
 
"정결하다"라는 말인 카타리가 최초의 종교 재판에서는 "이단"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처음 목적은 카타리파 였지만,
그후 확대된 종교재판은 훨씬 광범위하게 "왈도파" "프라티젤리파", "성전기사단"그리고 후대에 "프로테스탄트"까지 확대 되었다.   
 
ㅇ 왈도파(The Waldensians) 그리스도인들  
 
왈도파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 삐에르 왈도 (혹은 발데르)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한다.
1173년경에 왈도는 그의 전 재산을 팔고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의 신학적 근거는 마가복음 10:21인 것처럼 보인다.  
 
(마가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때가 되자 다른 사람들도 삐에르 왈도의 금욕적이며 영적인 생활 방식에 이끌리게 되어, "리용의 빈자들"이 결성되었다.
삐에르 왈도가 몇 가지 방언 (프랑스의 프로방스어)으로 성서를 번역하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처음에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상당히 정통적인 신학 이론을 유지했지만, 리용의 대주교에 의해 복음 전파 허락이 거절되었을 때
카톨릭 교회로부터 탈퇴했다.
1184년에 교황 루시우스 3세는 "리용의 빈자들"을 파문했다.  
때가 되어 왈도의 추종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들 중 다수를 배척했는데, 그 중에는 사제직, 면상(免償), 연옥, 성변화,
그리고 성인에 대한 기도가 포함되었다.
다수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허스 (John Hus) (1415년에 화형되었다)의 추종자가 되었다.
1532년에 왈도파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죤 칼빈(John Calvin)의 친구인 윌리엄 파렐 (William Farel)이 그 교류의 도구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종교 재판과 세속 당국에 의해 색출되어 살육을 당한 왈도파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끔찍하게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왈도파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박해는 "피드먼트 이스터 (Piedmont Easter)"로서 프랑스 군인들이 1,712명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 남녀와 어린이를 학살했다.
이런류의 학살이 36차례나 지속?으며 완벽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클라크의 "순교자 열전"은 13세기 초반에 단지 프랑스에서만 살해된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를 2백만명이라고 계산한다.
AD1570년까지 지속된 왈도파에대한 종교재판의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는것으로 비공개적으로 살육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거의 3백만명을 웃돌고 있다.   
 
ㅇ 신전 기사단(The Knights Templar) 카톨릭 십자군 후예들<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정치조직>  
 
신전 기사단은 아마 교황의 종교 재판의 가장 잘 알려진 희생자이며, 종교 재판이 사적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어떻게 조종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신전 기사단은 기원 1190년에 성지 순례 여행 길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여러 번 이와 같은 전사 수도승들은 십자군의 주요 인물 (한 자료는 20,000명 이상의 신전 기사단이 십자군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산한다)이 되었다.
신전 기사단이 교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지방 교회 당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때가 되자 신전 기사단은 지역 사무소 (신전이라고 부름)를 서구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걸쳐 설치했다.
언제나 혁신적인 신전 기사단은 최초의 유럽 은행 체계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족시켰는데, 그들의 몰락을 가져 온 것도
은행가로서의 그들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1300년대 초에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파리 신전 조직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307년에 그는 그 기사단에 이단 혐의를 씌웠다. 신전 기사단에 불리하게 작용한 혐의에는 신전 기사단 지원자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 신전 기사단이 바호멧(Baphomet)이라는 이름의 신비에 싸인
우두머리를 숭배한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혐의는 종교 재판이라는 도구를 통해 고문을 가하여 얻어낸 자백이다.  
프랑스의 종교 재판은 신전 기사단에게 공식적으로 혐의를 씌웠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했듯이 신전 기사단이 지역 카톨릭 교회 당국의 관할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1312년의 비엔느 (Vienne) 종교 회의는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의 대부분을 유사 단체인 호스피털 기사단에에
주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 역사의 마지막 사건은 1314년에 발생했는데, 그 때 기사단의 우두머리 쟈크 드 모레이
(Jacques de Molay)가 그의 이전의 자백을 철회한 후 산체로 화형되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이 해체된 후 프랑스 왕은 기사단에게 진 모든 빚을 탕감 받고 아울러 그들의 금전적 부의 상당 부분도
취하게 되었다.(오늘날 유럽을 비롯 미국의 중요정치인들은 신전기사단이란 비밀 결사 회원으로 바티칸을 위해 일하고 있다 )   
 
ㅇ 프라티첼리파 (The Fraticelli)  
 
청빈한 사람들로도 알려진 프라티첼리파는 카톨릭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리 집단이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완전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재산이 없었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에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프라티첼리파에 대한 첫 번째 종교 재판은 1318년 마르세이유에서 4명이 화형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들은 1426년에 종교 재판 당국이 세속 당국의 지원을 받아 그들에게 동정적이라고 알려진 31개 마을(약15만명)을 황폐시키고
전멸시킴으로써 완전히 일소되었다.   
 
■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제수이트 예수회에의해)  
 
15세기 말엽에 원래의 교황의 종교 재판 (카타리파를 박멸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기억하라)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화형시킬 더 이상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종교 재판의 불길은 16세기 중엽에 새로운 연료를 얻게 되었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새로운 적으로 인식된
프로테스탄트와 싸우기 위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에 의하여 재개되었다.  
1540년대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 전체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한 때는 교황이 전체 서구 유럽제국을 지배했으나, 1540년까지는 전체 나라들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즉 카톨릭이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찬탈자들에게 빼앗겼으며, 여기에는 영국 (헨리 8세), 독일 (루터) 그리고 스위스 (칼빈)가 포함되었다.
프랑스 역시 증가하는 칼빈개혁주의 사회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주의는 심지어 이탈리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파손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채택된 일련의 방법은 전체적으로 반종교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  
반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구하기 위한 시도에서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중 하나는 전체 종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려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고 카톨릭 신앙을 고쳤다.
다른 방법으로는 호전적인 새로운 종교 집단 (예수회-The Jesuits)을 설립한 것과 프로테스탄트 요새와의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을 개시한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구인 종교 재판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수회는 트렌트 공의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정부를 추진하고 있다 )  
 
1542년 6월 21일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 재판 의회" 혹은 "성성(聖省)" (상크툼 오피시움)으로서 교황의 종교 재판을
(리세트 아브 이니티오 칙서로) 재개했다. 교황은 종교 재판을 시행하도록 위원회를 임명하고 추기경 지오반니
카라파 (Giovanni Caraffa)를 최고 재판장으로 삼았다.
카라파는 다음과 같은 그의 성명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아무도 칼빈주의는 물론 어떤 종류의 이단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더렵혀서는 안 된다."
―추기경 카라파 (후에 바오로 4세), 1542년  
 
1555년에 그 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은 교황 바오로 4세가 되었다.
바오로 4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종교 재판의 힘을 증가시켰다.
1559년에 그는 금서 색인 (인덱스 아우크토레움 ? 리브로룸 프로히비토룸)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마침내 칼뱅, 쯔빙글리 (Zwingli), 루터 등 모든 주요 개혁자의 저술이 그 목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바오로 4세는 다음과 같은 어리둥절하게 하는 정서를 지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내 아버지가 이단이더라도, 나는 그를 화형시킬 나무를 모을 것이다.>  
 
가톨릭 역사가인 베르제리우스(Vergerius)는

 교황 바오로 4세의 임기 중에(1555~1559) "고문과 아사와 화형에 의한

종교 재판으로만 15만명 이상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죽였다."고 희색이 만연하였다.
이것은 종교재판 기간중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의견을 달리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쏟아부은 만행의 보잘 것 없는
사례에 불과하다. 1559년에 바오로 4세가 죽은 후 유럽은 몇 년간 종교 재판이 잠시 멈추게 되었다.
재판장 미셀 기슬리에리 (Michele Ghislieri) (바오로 4세에 의해 임명됨)는

 

교황 비오 5세 (1566∼1572)―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이 교황이 된지 10여년 후에 두 번째로 (1585년에, 이전의 종교 재판관이 다시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되었다)―교황이 되었다.
비오 5세 하에 고문이 다시 종교 재판의 일상 무기가 되었다.
1566년 6월 23일 비오 5세는 대중의 아우토 다 페스 ("믿음의 행위")가 된 여러 개 중 첫 번째 것을 로마 내에서 조직하였는데
참수와 화형이 일상사가 되었다.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이 되어 거의 모든 초기 프로텐스탄트 주의의 자취가 16세 말까지는
일소되었다.(이기간에 공식적으로 200만명이 살해됨.)
 
 
 
                                          <다음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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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로이드 존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건져내 달라고 말한 후에는 이미 건져 내 주신 것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결국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달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계속 넘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그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 문제를 가져 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베소서 4:28에서 계속 물건을 훔치는 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취하는 자에게 명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해 주어야 할 말이 무엇입니까? “그 죄를 그리스도께 갖고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자에게 명하는 바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도적질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음과 음행과 음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1:14-15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문제를 그리스도께 내 놓고 건져 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하고 당장 그 일을 구만 두라”고 말합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유혹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소위 친구라는 사람이 우정을 위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악한 일을 하게 한다면 친구가 아닙니다.   유혹하는 사람은 유혹받는 사람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유혹받는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유혹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잭 하일스 박사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사람을  죄짓게(, '넘어지게 하는')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범죄의(, '넘어지게 하는 일') 유혹이 없을 수는 없으나 유혹하는(, '넘어지게 하는 일')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18:7)

 

  “실족하게 하는 일” 이라는 말씀을 보십시오실족하게 하는 일은 곧 거침돌이 되는 일을 말합니다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일을 하게 만들거나 그렇게 인도하려는 시도그리고 다른 사람이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은 고의로 행한 것일 수도 있고 부주의나 무지로 인해 떨어진 거침돌일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경우든우리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그것이 심각한 잘못일 수도 있고가벼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거나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이런 사람을 일컬어 거침돌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장애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와 교회 안의 모든 기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주일학교 교사들 가운데도 있고형제회나 자매회나 청년회 중에서도 있고집에서도 있고사회에도 있으며교회학교 학급에도 있고직원이나그리고 신학교나 목회자 친교회에도 있습니다거침돌들을 고의로 놓거나 부주의하게 떨어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마약에서부터 험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동원하여 다른 그리스도인을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려고 할 것입니다이제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살펴봅시다.

 

1. 저들은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우리가 그 잘못된 일을 하도록 인도합니다.

  이 사람들은 가장 악한 거침돌입니다잘못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잘못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자기들이 그 잘못을 행하고 있으면서 자신들만 그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이기 원치 않습니다이 일의 비극은많은 경우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큰 복으로 주신 우정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축복이 저주로 타락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때대로 유혹하는 사람은 그 유혹이 거절되고 저항을 받으면 우정을 잃어버리는 값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그는 그와 우정을 유지하려면 말도 안되는 값에 우리가 그것을 사야할 것처럼 믿게 하려합니다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러한 우정은 살 가치가 없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소위 친구라는 사람이 우정을 위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악한 일을 하게 한다면 친구가 아닙니다. 이러한 유혹은 마약에 중독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의 습관으로 끌어들이려고 행해질 수 있습니다또한 젊은이가 이성(異性친구에게 성관계를 강요하면서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또는 지도자에게 신실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그의 불만에 다른 사람이 동참하도록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거의 매주 교회 안에서 문제가 있는 목사님들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이야기는 언제나 비슷합니다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과 그의 사역과 그의 지도력을 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죄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다른 사람도 그와 합세하기를 원하여 다른 사람들의 충성심 앞에 거침돌을 던집니다이 거침돌에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결국은 큰 슬픔을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것입니다오늘날 불러내어 모인 무리와 목사님들이 당하는 그 일을 모세와 아론도 당했습니다.

이제 레위의 증손이요고핫의 손자요이스할의 아들인 고라와르우벤의 자손들 엘리압의 아들들인 다단과 아비람과벨렛의 아들인 온이사람들을 모아들였더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대항하니 회중 안에서 유명하고잘 알려진 사람들곧 그 집회의 지도자들 이백오십 명이니라.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역하여 사람들을 모으고그들에게 말하기를모든 회중 각자가 거룩하고주님께서 그들 가운데도 계시거늘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도다그런즉 어찌하여 주님의 회중 위에 군림하느냐(16:1-3).

 

  2절을 보십시오“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대항하니” 3절에서도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역하여 사람들을 모으고,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십시오“회중 안에서 유명하고잘 알려진 사람들곧 그 집회의 지도자들 이백오십 명이니라. 마귀는 그의 방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삼천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3절에서 저들이 고소하는 내용을 보십시오“모든 회중 각자가 거룩하고주님께서 그들 가운데도 계시거늘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도다그런즉 어찌하여 주님의 회중 위에 군림하느냐? 돌아가는 모든 것은 돌아오게 되어 있으며 사탄은 그다지 독창적이지 못합니다그의 방법은 세대를 지나도 여전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지도자를 험담합니다그리하여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되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에게 특히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8) 하신 말씀은 그 기억에서 망각되어 버리고 자신의 위치를 나타내려 애씁니다.

 

2. 저들은 우리가자기들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는 나쁜 것으로 알고 있은 것들을 행하게 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우리의 분명한 확신을 거슬러 가야하는 것으로 믿게 만들려 합니다또한 우리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듣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진정한 친구는 “그것은 잘못된 게 없어!”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진정한 친구는 우리가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용납합니다그리고 우리가 확신 안에 거하면서 그 확신대로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참된 친구는 우리의 확신을 존중할 것이며 확신을 그에게 맞추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저들은 우리가 옳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삶을 쉽게 하려고 최선을 다할 때그것이 동료 그리스도인을 어렵게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우리는 서로에 대해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의 개성우리의 대화우리의 습관은 틀림없이 서로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장애가 됩니다우리의 친구가 나쁜 일을 하고 있을 때우리의 좋은 성품이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나쁜 일을 계속하도록 부추기거나 유혹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친구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그에게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우정을 증명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즉 우리는 친구를 돕기 위해 장려하는 일을 할 수도 있고 막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지체가 나쁜 일을 하도록 인도하지 않을 것뿐만 아니라 바른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침돌이 되는 사람과 우리가 가는 의로운 길에 거침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1. 그의 거침돌에 걸려 넘어짐으로 그에게 거침돌이 되지 마십시오.

  유혹하는 사람은 유혹받는 사람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유혹받는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유혹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유혹하는 죄의 왕관을 씌우는 것입니다유혹하는 사람이 유혹받는 사람의 죄를 지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혹받는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면 자신을 유혹한 사람의 죄를 지원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거침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놓은 사람을 더 큰 악곧 또다른 악을 행하는 것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유혹하는 사람은 유혹받는 사람이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범죄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유혹에 넘어가면그가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유혹하는 사람은 유혹받는 사람 앞에 거침돌을 둠으로써 범죄 합니다유혹받는 사람은 걸려 넘어질 때 죄를 짓습니다그는 유혹하는 사람의 죄가 완성되고 두 배가 되게 함으로써 유혹하는 사람이 이중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합니다그렇게 함으로 그는 술 권함을 받은 사람의 의로운 길에 거침돌을 두는 죄를 지었습니다유혹을 받은 사람이 술을 마심으로 죄를 지었습니다그런데 그는 그에게 술을 권한 그 사람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그는 이미 술을 마심으로 죄를 지었고 그의 이웃에게 술을 권하는 죄를 지었는데이제는 그의 이웃이 술을 마셨으니 이웃이 술을 마시게 한 결정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이제 그는 두 가지 죄가 아니라 세 가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젊은 여자를 불륜으로 끌어가려 합니다그렇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그렇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는 여자는 그의 죄를 완성시켜 줌으로 유혹하는 자의 죄를 두 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지도자에게 신실하지 못하고 그의 불만에 다른 사람이 동참하도록 험담을 늘어놓습니다이 때 대부분은 즉각 거절하지 않으므로 동참을 시작합니다그리고는 끈질긴 그의 험담에 동요되어 버려 교회를 허무는 일에 맞장구를 치게 됩니다이 경우 그 동참한 사람은 그 형제에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사람은 누구나 조그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불만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불만을 묵인해 줌으로써 그 불만이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 주는 꼴이 됩니다그리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옳은 것인양 생각하게 하는 중대한 범죄를 교회에 행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이것은 작은 불씨가 산 전체를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2. 즉각 거절하십시오.

 

  내가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데신속히 하되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119:60).

 

  악을 거절하기 가장 좋은 때는 그 순간입니다. 때때로 바른 일을 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그 바른 일을 즉시 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이 시편은 우리에게 바른 일을 하라고 장려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즉시 하라고 장려합니다모든 그리스도인은 의무의 소명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 소명에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아름다운 순종마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한 아이가 재빨리 행하는 것과 같은 즉각적 순종과 마지못하여 억지로 느릿느릿 행하는 순종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보더라도 어떤 순종이든 미루면 더 어려워집니다. 일부러 미루는 순종을 통해서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그러한 순종은 일을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즉각적인 순종만큼 기쁜 순종은 없습니다거기에는 매력이 있습니다그렇게 하면 유혹이 일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많은 유혹을 막을 수 있습니다즉각적인 순종은 그 자체로 많은 어려움을 정복합니다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과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을 아는 뿌듯함을 우리에게 줍니다그것은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을 막습니다.

 

3. 거침돌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과는 함께 다니지 마십시오.

 

  모든 교회와 교회의 모든 기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우리가 지혜롭다면그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은혜로써 대하기는 해도 그들과 함께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해몬드 지역에서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 도중에는 중앙이 분리된 사차선 고속도로가 있습니다주간도로(州間道路) 65번입니다이 고속도로가 지나는 길에는 마을도 없습니다멈춤 신호도 없고 끝까지 중앙이 분리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 구도로가 있는데, 41번 고속도로입니다해몬드를 떠나서 41번 고속도로를 타면 인디애나 주 하일랜드를 지나야 하는데 그 길에는 대여섯 개의 신호등이 있습니다쉬러빌을 통과하는 데에는 신호등이 둘이나 더 있습니다그리고 세인트 존을 거쳐야 하고시더레이크,또 여러 작은 도시들을 거쳐야 합니다인디애나폴리스까지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65번 주간도로를 택할 것입니다. 41번 고속도로를 탓하거나 비판하거나 그 도로에 대해 험담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냥 그 도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 그의 생각 속에 41번 고속도로는 빠져 있을 것입니다거침돌이 없는 길로 그냥 가면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거침돌을 두는 사람이 가는 길을 가지 않으면 됩니다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해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그저 그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으면 됩니다그는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사람들과 여행하느라 너무 바빠서 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불화가 있을까요그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만족되지 못한 기대들’ 때문입니다우리에게는 우리가 받지 못하는 어떤 것을 받고자 하는 소원이나 기대가 있습니다하지만 그 바라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물론 이러한 만족되지 못한 욕구들 때문에 일어나는 불화를 막는 비결은 그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우리의 원함이나 욕구를 우리의 능력 한계 내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그 대접을 받지 못하면 불화가 생깁니다이런 일은 가정에서도직장에서도그리고 사석에서도 불화를 일으킵니다만일 그와 반대로 우리의 욕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라면 그 욕구는 채워질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법으로 대접을 받아야겠다고 기대하지 마십시오오히려 다른 사람을 적절히 대접하고자 하십시오.

  감사의 말을 듣고자 하지 마십시오오히려 감사를 표하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오히려 당신이 다른 이들을 인정하십시오.

 

  우리 교회 문제의 대부분은 우리의 소원우리의 바람우리의 욕구가 정결하게 되고 성화되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내가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분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 삶을 다른 교회(형제나 자매)를 위해 사용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사도 바울은 그랬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2:20 상반절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무에 달려 못박혀 있나니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 있음은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나를 사랑하셔서나를 대신해서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그는 살았다가 죽고살았다가 죽고살았다가 죽었습니다사는 것이 없으면 죽을 것이 없습니다죽는 것이 없으면 살아야 할 목적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향하여 살고우리가 죽어도 주님을 향하여 죽는 것이니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로다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일어나셔서 다시 살아나셨으니곧 그분께서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의 주님이 되심이니라그런즉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멸시하느냐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되리라이는 기록된 바주가 말하노라내가 살아 있으므로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하셨음이니라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진술(陳述)하게 되리라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도리어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실족하는 것들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하라.(14:7-13).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며 스스로 복종하라그들은 너희 혼들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들이 반드시 회계(會計)보고 할 자인 것같이 하나니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슬픔으로 하지 아니하게 하라이는 너희에게 유익이 없음이니라.(13:17).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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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과 안식교의 출발


안식교는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윌리암 밀러의 소위 시한부종말론에서부터 그 뿌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불발로 끝난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엘렌 지 화이트가 계시를 받아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나름대로 재해석함으로 생겨난 종파가 모여서 소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가 만들어졌다.

-  율법적인 구원관
안식교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을 주장하는 집단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고 있고, 현세의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품성의 변화를 위해서 부정한 음식과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85, 127∼129, 265-266,.[대쟁투 상] p.433)."

-  안식일 문제
안식교의 주장에 의하면 안식교는 '남은 자손'으로서 참 교회요, 로마 카톨릭은 배도(背道) 했으며 개신교회는 성서 진리로부터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인간의 계명을 따르는 것으로 거짓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될 수 없고, '짐승의 표'를 받으며, 가장 참혹한 심판을 초래한다고 주장함으로서 '안식일 준수'는 그들에게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151-161, 238-241, 244).

-  계시론
안식교에서는 비록 성경만이 모든 교리의 기준이며 하나의 신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엘렌 지 화이트가 보았다는 환상이나 그녀가 쓴 책들 또한 그들의 특별계시이다. 특히 말세의 참 교회의 특징은 예언의 은사를 가진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엘렌 지 화이트야말로 그 '예언의 신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로서 그가 받았다는 계시가 말세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라고 주장함으로 안식교는 성경 계시 외에 다른 계시를 가진 자들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204-211, 156-157)

- 영혼멸절의 문제
안식교는 여호와 증인의 주장과 같이 영원한 지옥과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함으로 소위 영혼멸절설을 취한다. 즉 의인은 부활하여 영생하지만, 악인은 부활하여 불태워 소멸되기 때문에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340-341)

- 연구결론
안식교는 율법주의적 구원론, 토요일 안식일 문제, 엘렌 지 화이트의 계시론, 영혼멸절설, 영원지옥부재설, 또는 조사심판 및 2300주야 문제 등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건강문제를 앞세우고, 정통교회를 표방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미혹성이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다.

펌: 예장통합 이대위 자료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란 무엇인가?
알기 쉽게, 문답식으로 설명해주는 CBS 안식교 특강 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재림교회는 우리와 다른 성경관을 지닌 "2단"입니다.  

제 1편: http://ikccah.org/free_board/13433
제 2편: http://ikccah.org/free_board/13438
제 3편: http://ikccah.org/free_board/1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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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명을 발견하는 주된 방법은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 되었고 어떤 재능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이 곧 너' 라고 말하지만, 소명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일을 하라' 고 말한다."

소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 않는다. 가령 교통사고 현장에 10여명이 함께 도착했다고 하자. 똑같은 현장을 목격하지만 저마다 보는 것도 다르고,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한 남자는 운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한 여자는 사고를 자세히 관찰한 후 휴대전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정확하게 사고 현장을 설명한다. 한 은퇴한 여교사는 길가에 죽어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경악하고 있는 두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달래준다.

한 간호사는 부상이 심한 사람들에게 즉시 응급조치를 취한다. 한 목사는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한 목격자를 보고 곁에 가서 진정 시킨다. 어떤 사람은 혼란 스러운 상황을 보고 요긴하게 쓸수 있도록 자기 차에서 담요며, 조명기구며, 비상용품을 가져다 놓는다.

같은 사고를 보면서도 저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른 것은 저마다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나 운영상의 문제가 있는 단체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그 기관을 더욱 효율적인 체제로 바꿔놓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주택문제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헤비타트 운동 같은 기관에 몸담아 주택문제를 줄여간다.

나는 세상에 잘못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문제가 내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청소년 흡연, 에이즈 확산, 무능한 정부,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높은 문맹률, 난민문제.. 이런 문제들을 알고 해결을 돕고자 가끔 돈도 보내지만, 이런 일로 밤잠을 설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게도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내 눈에는 영적 고아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인다. 기독교 신앙을 실 생활의 경험과 연결시킬 줄 모르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찬 교회가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언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씨앗은 땅을 헤집고 올라온다.

우리는 깊은 소명의식에 이끌려 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에 올라야 한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꼭 따라가야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 제랄드 싯처, 하나님의 뜻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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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죤즈의 로마 카톨릭 평가


by Martyn Lloyd Jones
Originally Printed in Great Britain at The Burlington Press, Foxton, Near Cambridge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로·마·카·톨·릭·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3.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라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장 11절).

*청교도 클럽 puritan,hanmom.com 자료이며, 개혁신학연구소에서 퍼온 글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카나다와 미국 국경사이에는 약 1800개의 섬이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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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aHLbp



은 진짜 여우





 

 

 

 

 

 

 

 


 

 

 

 

 

 

 

 

 

 

 

 

 

 

 

 

 


 

11.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를 누가 외칠 것인가’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시편89:14-18]

무리에게 말씀하신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en clothed in soft raiment?]

보고 들어서 믿고 체험하여 더 믿고
더하여 은사를 받으라는 유혹적인 기도원식 예배는
방언은 필수가 되어 주문을 하듯이 외우듯 연습과 훈련을 하여 받고
치유가 기본이 되더니 어느 때부터
사이비 부흥사나 사이비 선교단체들은 순회(巡廻)팀을 만들어
집회 때 강사의 시나리오(?)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연출을 하게 되었다.
강사의 인도로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다가
‘보혈’ ‘피로 산 구원’등 자극적인 강사의 바람이 새는 마이크소리를 시작으로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하라는 강권(强勸)적이 되면서
부흥사가 팀이 된 여기저기에 섞여있는 사람들 중 한사람을 지명하여 나오게 하여
그 사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하면서 머리를 밀면 쓰러지고
바닥에 엎드려 입신하고...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강사의 손이 몸에 대기만 하면
쓰러지는 일을 연출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제 참석자들에게 그리하여 군중심리처럼 쓰러지는
쓸어져야 죄 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라 여기는
이제 쓰러지지 않으면 아직 죄가 남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회개하라는 강사의 핀잔이나 야단을 여러 사람 앞에서 들어야 했다.
시범을 보인 입신 자는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체험의 간증을 하고
또 다른 간증 자는 특별히 믿음 좋은 자로 인정된 자가 되었고
은사도 무당 식 귀신분별은사, 예언을 받고 예언을 하여야 최상의 믿음이 된 예언의 은사, 영혼을 읽는 분별의 은사, 등 온갖 분별없는 분위기 몰 이식
선동인지 협박인지 예배인지 간증인지 분간 못할 형태였고
다른 신유집회도 그런 팀을 짠 사람들과 더불어
개척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존의 중소형 교회의 부흥을 위한 방편으로 누룩이 되어 전국에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형태의 모임은 공식처럼 매 순서 마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할 때 마다
은사를 주고받듯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였고
그 집회의 헌금은 강사와 교회의 목사가 헌금을 나누거나
강사의 강사비와 유행처럼 번진 기도원 건축과 교회건축비로 사용하였고
집회의 마무리는 늘
지상명령인 선교를 위하여 'OO선교회, ‘선교연합회,
‘국내 국제 선교회, ‘선한...이웃, 마리아, 장애인..., 등 수 많은 단체의 이름으로
작정헌금 작정서를 나누어 주고 우편으로 헌금할 것을 다짐 받았다.

보여주기 식 치유 예배와 온갖 간증과 입신 경험의 간증 등
무분별한 행위로 체험이 성경으로 여과된 분별이 아니라
특정한 구절의 성경을 대입하여 그럴듯한 해석과 인식과 분위기 잡기 식 집회는
기존 예배의 엄숙한 형식에 얽매인 율법적인 환경에서 감성의 해방 같은
죄에서 해방 같은
죄의식의 해방으로 의식(意識)하여
복을 빌어주고 복을 받는
헌금을 낸 만큼 배로 차고 넘친다는 물질적인 세속화는 성경의 의를 초월하고
경험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리 저리 성경을 짜깁기하는
반 복음적인 일이 다반사 이었다.

미국에 온지 십년 만에 또 똑같은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금이빨, 금가루 기적,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기적, 키 크기 기적, 입신, 성령의 춤
예언, 직접 계시, 선지자 학교 등 ...
그리고 오늘날 자극적이지 않으면 고리타분한
분위기 몰 이식 감성의 경배와 찬양, 같은 찬송가를 몇 번씩 부르고
외치는 구호와 박수...
그런 모든 자극적인 집회나 예배는
이를 테면 믿음이라는 기관차가 감성이라는 열차를 이끄는 형태가 아니라
감성이라는 열차가 믿음이라는 기관차를 끄는
믿음에 의(義) 보다 감성적인 자극이 의(義)를 끌기에
성경을 읽고 성경의 구절과 장을 대조하여 뜻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설교를 듣고 그런가 상고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스턴트 음식이 음식의 고유한 참 맛을 잃게 하듯이
성경의 참뜻을 이해하기 보단 쉽고 간단하게 단정하여 다수의 뜻을 좇는
인스턴트 신자가 되어갔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린 이 세대의 우리들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천 명에게 떡을 떼어 준 예수님의 말씀은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And he said unto them, How is it that ye do not understand? 마가복음 8:21]
마음이 둔함을 탓하신다.
둔함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 라
믿음이 있다하나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지 아니하고
마음의 중심에 깊지 않은 믿음의 뿌리는
작은 거슬림의 못마땅한 감정에
조금 힘든 환경에
작은 사건에 갈대처럼 끝없이 흔들리는 생활이 습성이 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면
주께 주시는 평강과 평안을 누릴 수 없어
그리스도의 사랑만 입으로 외쳐대는 어리석음이
사랑을 말하고 노래하고 찬송하나 사랑 없는 사랑이 갈증이 되어
서로의 의를 바라는 굶주린 갈등이 되어 삶을 지배하면
화려한  자색 옷을 입은 자의 높은 마음을 품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여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니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는 [디모데 후서3:2-7]
그런 자들은 화려한 가운이나 자색 천을 걸치기를 권위의 상징으로 좋아하고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를 자청하여 자기 자랑의 교만에
스스로 침몰(沈沒)한 자 이거나 그들을 좇는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으신 자색 옷은
친히 세상에 오셔서
로마 군병이 조롱한 유태인의 왕으로서 우리의 왕으로의 상징 이였고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종교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하여 돌아가심으로
친히 낮아 지셔서 언약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그 언약을 증거하고
다시 오시어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눈부시고 호화로운 헤롯 성전의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갈릴리
빈자(貧者)들의 갈릴리
경멸의 땅 갈릴리 그 길로 향하셨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태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도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27: 28-31]

홍포(Scarlet fobe)는 홍색 염료로 물들인 홍색 옷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마가는 홍포를 자색 옷으로 표현했고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And they clothed him with purple, and platted a crown of thorns,
and put it about his head, 마가복음 15:17]
요한도 자색 옷으로 표현했다.
자색 옷도 왕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이고
성막을 지을 때 장식으로 쓰인 자색 실,
성막의 기구를 싸 두던 자색보자기 등이 있으나
자색은 권위의 상징이자 존귀를 상징이며 성(聖)스러운 상징이지만
그러나
자색 가운을 입은 종교지도자는 이미 제사장이 되어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 노릇을 하기에
그런 자 무리들의 모임 공동체는 투명할 수 없고
투명하지 못함은
신자와 신자사이에 높아 질려는 교만이 직책이 되어
낮은 곳으로 오셔서 높아지신 예수님의 복음이 사랑이 됨을 알지 못하고
진리에서 멀어졌기에
공의와 멀러진 까닭이었기에
우리가 사는 미국이 신앙의 공동체로 공의가 시들었기에
정의가 희미해져 가고
그 원인은 초심으로 살려는 청교도 신앙이 둔해졌기에
이 도시 저 도시에 화려했고 거대했던 교회는 황폐(荒廢)한 건물이 되었고
수많은 church street 의 교회는 건물만 남아 교인이 없는 거리가 되었듯이
한국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의 건축과 더불어
신앙이 초심을 잃은 종교집단이 되어 감은
교회사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처럼 역사에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시고 경고하신다.
기억하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무리는
다름 아닌 호화(豪華)한 대제사장이며 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이며
그들을  따르는 맹신자 광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함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또 배교가 있을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주어 또 경고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나나기 전에는
그 말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 후서2:3]

공의를 잃어버린 교만의 길은
박수 받기 좋아하고 그 박수에 열광하는 권위와 존경의 길은
고귀하고 존귀한 길 같으나
비천하고 미천한 길이라
이미 세속화된 신앙이라 분별력을 잃어버렸기에
그래서 보고 듣지도 못하고 자기 합리화의 긍정의 늪에 빠져서
자극이 없으면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자극이 없으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마음의 둔함은
영혼의 눈을 가려서 단순한 진리가 혼미한 머리와 혀에 머물러
몸에 미치지 못하는 지식에 함몰(陷沒)하면
그 지식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자기 지식에 갇혀 습관적인 예배와 관례(慣例)적인 의식에 머문
예배의 지속(持續)이 타성(惰性)이 되어 젖으면 굳어지고
둔한 마음에 둔한 영혼이 길들려져 배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라
얼마나 사이비가 많은지
이 세대를 본받고 이 세상을 본받아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곡해(曲解)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세속의 욕심에 탐욕(貪慾)한 자들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And 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e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 and perfect , will of God. 로마서12:2]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지 않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자들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to every man that is among you,
not to think of himself more highly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berly,
according as God hath dealt to every man the measure of faith.
로마서 12:3]

돌아보라
보이는 만큼 그 만큼의 믿음의 분량으로 라도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의
맘몬(manmon)의 우상이여.
세상을 보라
세상의 막장 연속극을 보고 감동하고 흥분하고
연속극의 이야기가 설교에까지 등장하는 비극을.
세상의 언론을 보라
세상의 언론이 공정하지 못함은 정의 보다 인기를 모색한 선전으로 빛바랬고
시대와 사상에 굴절된 정의를 정의라 하기에
충동과 선동을 조장함은
회칠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의 건물에서 일어나는 진리와 무관한
세속화된 획일한 인간관계와 맘몬니즘과 무엇이 다른가.
빛이 곧듯이 빛이 밝듯이 진리가 그렇듯
투명하지 못한 조직과 재정은 이미 진리에서 멀어진 상태라
진리를 얘기 하고 들은 들 진리의 변함없음에 떠난
진리의 항구를 떠나 세상의 거친 풍랑에 떠밀려
언제 부셔질 줄 모르는 난파선과 같은 현대의 교회는
이미 공동체의 공의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 외쳐야 한다.
누가 외칠 건가
공의가 사라진 삭막한 광야에서
사랑이 메마른 광야의 공동체에서.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사야4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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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 요즘과 같이 지성이 발달한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충고하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생각은 큰 잘못이다. 우상 숭배는 우리의 주변과 우리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위기에 처했다. “역병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상 숭배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이나 피조물이 창안한 것에 돌리는 행위로 정의하고 싶다. 우상 숭배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 야만이냐 문명이냐에 다라, 즉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무지나 지식의 정도에 따라 우상 숭배의 형태가 크게 달라진다.

 

성경의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얼마든지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 구약에서 우상은 하나님과 경쟁 관계가 아니라 그분을 섬기기 위한 디딤돌, 곧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우상 숭배는 멸망의 아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살후2:4) 위세를 떨치고 있다.

 

죄 중에서 우상 숭배의 죄만큼 교회에 혹독한 심판을 가져다준 죄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애굽, 앗수르, 바벨론의 군대에 짓밟혔다. 예루살렘이 불타고, 열 지파가 뿔뿔이 흩어졌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포로로 잡혀 갔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우상 숭배의 원인이다. 야담의 후손을 오염시킨 이 큰 유전병은 온갖 형태의 죄를 통해 나타나는데, 우상 숭배도 그중 하나이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부터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7:21,22)이 흘러나온다.

 

인간은 형태는 다를지라도 제각각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록 타락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폐허 속에 묻혀 있는 고대의 비문처럼, 글자들이 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양피지 사본처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쯤 지워진 글자처럼 희미한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갖고, 어떤 식으로든 무엇인가를 경배하려는 성향을 띤다. 어디를 가더라도 거의 예외 없이 이 진리가 확실히 증명된다.

 

자연인에게는 마음과 믿음과 영의 종교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은혜로 새롭게 되지 않는 한 타락하고 부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한, 인간은 잘못된 것을 예배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우상 숭배는 인간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결과물이다. 인간의 마음은 개간되지 않은 땅처럼 언제라도 잡초를 무성히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천성적으로 성경이 명령하는 예배가 아니라 속되고도 감각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성향과 습성이 존재한다. 나태함과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눈에 보이는 보조 수단이나 디딤돌을 고안하고, 결국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에 돌리는 죄를 범한다. 우상 숭배는 살짝 경사진 넓은 길처럼 쉽고 자연스럽다. 그와는 달리 영적 예배는 마치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듯이 우리의 성향을 거스른다. 오직 은혜로만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진리로’(4:23)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자연인의 마음은 그런 예배를 싫어하고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기를 기뻐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못하는(16:18)’ 교회는 유형 교회가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의 집합체, 곧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백성 가운데서 불러내신 참신자들이다. 유형 교회는 종종 극악한 이단 사상을 지지하곤 했다. 유형 교회에 속한 교회 가운데 신앙과 실천의 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로부터 안전한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우상 숭배를 하거나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5:11).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이는 신자들 사이에서 우상 숭배가 모습을 드러낼 것을 암시한 말씀들이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9:20). 이 재앙이 유형 교회에 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요한 사도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교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상 숭배는 유형 교회 안에서 실제로 나타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50:11). (우상 숭배의 종말을 말씀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과의 일치와 연합을 모색하는 자들이 많다. 일치는 이론상으로는 매우 고귀한 개념이다. 그러나 진리 없는 일치는 아무 유익이 없고 해로울 뿐이다. 평화와 화합은 귀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복음 없는 평화, 곧 공통된 믿음이 아니라 획일화된 감독 제도에 뿌리를 둔 평화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무익한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주교 쥬얼은 저서 변증학에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일치와 평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황이 진정으로 우리와 화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상 숭배로부터 영혼은 지키는 방책을 몇 가지 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하라.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그 모든 내용에 정통하라.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 성경을 아는 일에 마음과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경계하라. 성경은 성령의 검이다. 성경의 검을 한쪽에 버려두지 말라. 성경은 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때에 빛을 비추는 등불과 같다. 그 빛이 없이 길을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성경은 천하 만민의 공도(公道)이다. 그 길을 떠나 아름답고 오래되고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것처럼 보이는 곁길을 선택한다면, 결국 형상과 유골을 숭배하고 정기적으로 고해실을 찾는 습관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복음을 철저히 고수하라.

복음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철저히 고수하려는 경건한 열정으로 자신을 무장하라. 복음의 일점일획이라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거나 부처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더욱 부각시켜 복음의 참된 요소를 흐릿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조금이라도 엿보이거든, 절대 동조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 영혼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 무엇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예배와 관련된 문제라면 무엇이든 조심하라.

 

누구의 설교를 듣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꼼꼼히 따지라. 결벽증이 심하고 너무 예민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개의치 말라. 우리는 사소한 행위가 중요한 원리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번 퇴락의 길로 접어든 그들은 점차 깊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했고,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강력하게 미혹되어 거짓을 믿기에 이르렀다(살후2:11). 그들은 마귀를 시험하다가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사소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노골적인 우상 숭배로 나아갔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교리로 무장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구원에 관한 건전하고도 명확한 교리로 무장하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의 토대 위에 우리 자신을 굳건히 세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의지하는 수단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 뿐이다.

 

주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라.

무엇보다 우리는 주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눠야 한다. 날마다 그분 안에 거하라. 날마다 그분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으라, 날마다 그분의 충만하심을 받아 누리라. 그렇게 한다면, 다른 중재자나 다른 위로자, 다른 중보자라는 개념이 전혀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마땅한 자리에 앉으신다면, 믿음의 다른 요소들도 이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 성례와 예식 등이 모두 본래의 부차적인 위치로 한 단계씩 내려갈 것이다.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223-269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억을 위한 기도 최송연      
      내 가슴 속에 새겨주신 당신의 핏빛 사랑 내 기억이 둔하여져서 혹여, 그 사랑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내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사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노년이 되어서도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보존하여 주시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잊을지라도 주님께 받은 그 크신 사랑만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하시사 주의 사랑하심이 날이면 날마다 더 크게... 더 밝게... 더 선명하게... 자라나는 소년의 기억처럼, 소록소록 새로워질 수 있도록 내 기억까지도 늘 지켜주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베푸신 그 사랑 나 항상 기억하기 원합니다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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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템테이션(Temptation)

               

              - 존 오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의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가난한 심령으로 인도하심으로 죄를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함일 수도 있고, 또는 욥과 같이 우리를 고난의 시험을 통과시킴으로써 놀라운 은혜와 믿음을 주시기 위함일 수도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징계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고난의 징계를 받을 때는 절대로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가난한 심령이 될 것이고, 가난한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실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실 것이며, 그 가운데 주님은 그들을 만나 주실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더욱 낮추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믿음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사탄의 유혹하는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모든 유혹에 있어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혹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 유혹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면서도 유혹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겠는가? 당신은 그 유혹이 하나님과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정말 알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하며 유혹이 실패하든지 성공하든지 간에 당신의 영혼에 얼마나 큰 손상을 주는지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냥 자신을 방치하거나 유혹에 대하여 소홀히 생각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유혹의 큰 힘을 알고 있다면 사탄이 당신을 유혹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분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 주신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경건의 훈련들을 떨림과 감사함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며 죄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유혹을 받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베드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유혹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누군가 유혹에 빠져 있는데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을 죄에 방치하고 있다면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이 가룟 유다가 될 가망성이 훨씬 큰 것이다.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죄를 싫어하고 유혹을 민감하게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항상 권면을 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 존 오웬, [템테이션(Temptation)] 중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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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졸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썩지 않듯이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활기에 넘치고 열정으로 얼굴에
                  빛이 납니다.

                  고여있지 마시길...
                  멈춰있지 마시길...
                  삶은 지루한 것이 아닙니다.
                  삶은 권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삶은 신선해야 합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삶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열중하고 몰두할 때
                  행복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결코 아는 자가 되지 말고
                  언제까지나 배우는 자가 되십시오.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에서
                  더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망설이기보다는 불완전한 채로 시작하는 것이
                  한 걸음 앞서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새로움으로 다시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도록 하세요.

                  마음의 밀물과 썰물이 느껴지지 않나요?
                  밀물의 때가 있으면,
                  썰물의 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삶이란...
                  어쩌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행운과 고난의 연속 드라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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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케팅 원리 적용의 결과

               

              - 박순용 목사 (배교를 향해 나아가는 현대 기독교)

               

               

              실용적인 마케팅 원리를 수용해서 전달할 수 있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아무리 놀랄 만한 마케팅 원리를 동원해도,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칭의, 성화의 삶과 최후의 심판 등의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게 포장할 수 없습니다.

               

              실용주의의 더 심각한 위험은 이러한 현상이 초래할 결과에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교회에 적용됨으로써 파생된 결과는 크게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 예배에 대한 왜곡, 말씀 선포와 교육에 대한 왜곡, 회심관에 대한 왜곡, 하나님의 복과 인정에 대한 왜곡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왜곡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입니다.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가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 없어도 된다는 인식, 곧 현대판 이신론을 만들었습니다. 이신론이란 하나님의 존재만 인정할 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론입니다.


              즉, 교회가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를 수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람의 구원과 회심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전도 방법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입니다. 교회가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후 사람들에게 세상을 맡겼듯이, 구원도 그 길만 하나님이 마련하셨을 뿐 이후의 것은 사람의 수완에 맡겨 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을 잘 팔 수 있도록 옆에서 보조 역할이나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진리 왜곡입니다.


              이러한 왜곡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조장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까지 양산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의 왜곡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용주의적 신앙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용주의적인 마케팅 원리가 교회를 움직이면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절대적인 신뢰는 답답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인간 손에 맡겨 두고 일절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하나님에게 누가 절대적인 의존과 신뢰를 바치겠습니까?

               

               

              2. 예배에 대한 왜곡


              두 번째 결과는, 예배에 대한 왜곡입니다. 문화 행사와 예배 사이의 경계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예배를 엔터테인먼트로 바꾸고 있습니다.


              온갖 문화 프로그램을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인 예배에까지 끌어들이고, 부담 없는 예배를 표방하며 예배를 오락화 하는 일까지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이 강대상의 주요 게스트가 되고, 예배 시간 대부분이 다양한 공연으로 채워지는 일들을 이제는 아무도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배를 즐기는 태도가 점점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구도자 중심적인 예배’ 개념을 교회에 도입하면서, 예배의 목적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것보다, 참석자들의 욕구 충족과 즐거움을 더 우선시합니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방식대로 성전에 나와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그리고 급기야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마케팅 원리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처럼 조작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저 종교적 유흥에 불과한 자리를 만들고 있기에 하나님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데이비드 웰스는 이 문제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케팅 위주의 접근이 안겨 준 최고의 실망은 그들이 최고의 정찬으로 내놓은 예배가 완전하게 실패했다는 것이다. 사실 열 명 중 여덟 명이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예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와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 결과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배다운 예배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고 경건한 예배, 하나님께 집중된 예배, 우리가 만든 분위기가 아니라 주의 성령이 우리를 이끄심으로 생겨난 감동이 있는 예배를 찾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산만하고, 시끄럽고, 조작과 선동이 난무하는 예배가 점점 흔해집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모습을 답답하고 칙칙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다음 세대에 대해 걱정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젊은 세대는 마케팅 원리에 따르지 않는 교회를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공연과 결합한 형식의 예배를 세련된 예배라고 생각하며 동경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몇 십 년 후, 하나님께 집중하는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예배가 오히려 독선에 치우친 이상한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3. 선포하는 말씀에 대한 왜곡 (대중의 기호 중심)


              세 번째 결과는, 교회 안에서 제시하는 가르침과 설교 메시지의 왜곡입니다. 소비자 만족을 최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를 따르려면, 소비자가 좋아하는 것은 부각하고, 소비자가 싫어하는 것은 기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당에 와 있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로 선포하는 설교 주제나 사람들이 서점가에서 주목하는 기독교 서적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죄와 심판이나 복잡하고 지루한 교리들을 다룬 것은 여간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디를 보나 예수 믿고 잘 되는 것, 복과 치유, 우리 삶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의 제시 등에만 열을 올릴 뿐,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회개의 필요성을 선포하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실제로 1983년 미국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그 해 기독교 출판사 여덟 곳에서 출판된 도서의 87.8퍼센트가 자기 계발과 성공, 대인 관계 기술과 자존감 향상 등 현대인이 선호하는 충족적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동향은 우리나라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행한 경향은 10~20년 안에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합니다. 그래서 일단 미국에서 대중성을 획득한 아이템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하지 않고 수입 먼저 하고 보는 형편입니다. 그 결과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가 교회 속에도 깊이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마케팅 원리를 따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말하는 교회가 과연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을까요? 죄에 대한 선포 없이, 회개에 대한 언급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불가능합니다.


               

              마케팅 원리로 파악한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이 파악하고 있는 인간의 필요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복음을 듣고 스스로 순종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을 제시하는 동시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실용주의 관점은, 인간은 타락해서 성령 하나님의 개입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없이는, 그 누구도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수용할 수 없다는 기존의 견해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효과적인 방법과 뛰어난 수완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팔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심리 치료법, 잘 생활할 수 있는 테크닉, 자신의 자아에 몰입하게 하는 가짜 복음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음은 효과적인 마케팅을 진행한다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보십시오.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 참혹한 죽음을 야기한 우리의 죄, 이것이 수완 좋게 전달한다고 해서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 떠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특성입니다.


              실용적인 마케팅 원리를 수용해서 전달할 수 있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아무리 놀랄 만한 마케팅 원리를 동원해도,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칭의, 성화의 삶과 최후의 심판 등의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게 포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끼는 것은 전할 수 없는 교회,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는 교회, 심리학적 위로밖에는 줄 것이 없는 교회, 이러한 모습의 교회를 원하십니까? 실용주의적 마케팅 원리를 수용한 교회의 종착지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 출처 :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5820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 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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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극동방송에서 채택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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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 후크마의 중생의 본질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중생을 이해하는 일에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로 언급하려 한다: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시금 에베소서 2장 5절을 생각해 보자. 중생은 죽은 죄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구절의 동사는(synezoopoiesen) 부정시제로서 순간적 동작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돼 있는데,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르킨다. ‘연다’(dienoixen)는 동사 역시 부정시제이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알미니안들ㅡ처음에는 레몽스트랑트(Remonstrants)라고 불리움ㅡ은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뤄지는 변화라고 돌트총회(synod of Dort)에서 주장했다. 이 돌트회의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펠라기우스주의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했다:

                 

                돌트 총회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ㅡ여기서 ‘돌아선다’는 것은 ‘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ㅡ 은혜는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본성에 가장 적당하고 고상한 방법인 설득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의 오류를 배척한다.18)

                 

                돌트에 모였던 신학자들이 알미안주의자들에 대답했던 내용들, 특히 그들이 볼 때 성경적 중생관은 인용할 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중생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남, 다시 살아남 등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안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사역이나 부활보다 결코 뒤떨어지거나 열등하지 않다.19)

                 

                (3) 중생은 근본적(radieal) 변화이다: 

                ‘근본적’(radieal)dlfks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에서 유래됐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본성상 영적으로 죽었다.(엡 2:1,5; 골 2:13; 롬 8:7,8). 죽은 죄인들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께 대한 저항이 없어지며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중생의 순간이다. 중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이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불란서 신학자인 요한 카메론(John Cameron:1579~1625)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에서 성령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이나 지성을 밝게 비춰서 사람의 의지가 결과적으로 도덕적, 영적 문제에서 지성의 인도함을 따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주장은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배격됐다.

                 

                이 견해는 기능 구조 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잘못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실제적이기도 하다. 내 마음으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죄와 범법함들 가운데서 죽어’ 있다면 나는 결토 올바른 행동들을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트회의에 섰던 알미니안들은 중생에서 의지의 역할에 대해 온당치 못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람 의지는 죄의 영향을 절대로 받지 않으며,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의지가 잘 기능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한 장애물이란 “마음의 어두움과 억제되지 못한 감정들”20)이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은 전적 변화로서 한 인격 전체를 변화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적 용어를 빌리자면, 중생은 새로운 마음을 부여받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한 인격의 중심부이며, 모든 내적 기능의 중앙으로 정신적, 영적 경험들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즉 생각, 느낌, 의지, 믿는 일, 기도하는 일, 찬양하는 일 등이 결국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중생 시에 새롭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원천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 된 성향성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것은 아니다.21)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 점은 우리의 자연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태도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리가 본성상 죄와 부패 가운데 죽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바꾸려고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자연적 방법으로 우리의 존재 밑바탕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소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영역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의 의식적 삶속에 반영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변화가 의식의 아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은 중생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용어를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내가 새마음을 너에게 줄 것이라.”, “만일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이러한 종류의 표현구들은 중생 시에 일어나는 변혁이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우리라는 존재 속에 있는 무의식의 뿌리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

                 

                18)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7항. 근자에 나온 알미니안적 중생론으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이하 각주 생략}···

                 

                19) Canons of Dort, Ⅲ~Ⅳ, Art. 12. Art. 11도 보라. 개혁주의 신조들 가운데 나타난 중생에 관한 언급으로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질문 8항; [벨직 신앙고백문] 24항(넓은 의미의 중생)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반적으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유효한 부르심’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Ⅹ장 및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31항을 보라.

                 

                20)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3항.

                 

                21) 중생과 죄 된 성향들 간의 관계는 본서 12장에서 다룰 것이다.

                 

                *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69쪽~173쪽.

                * 읽기 쉽게 제가 문단을 나누고 칸을 띄웠습니다.

                 

                 

                http://cafe.daum.net/jesuname/BsLS/77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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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회개하십시오!!

                '큰빛 교회' 담임목사부터 회개하십시오

                 

                홍혜선이를 교회로 초청해서 성도들에게

                거짓 영에 미혹시킨 수 많은 한국교회 분별없는 담임목사들!!

                옷을 찢으며 회개하십시오


                홍혜선의 마이크 밑에서 거짓말에 속고 있는 성도들에게 

                홍혜선이가 서있던 강대상에서 담임목사 당신이 무릎꿇고 사죄하란 말입니다. 


                생각 좀 하며 목회 합시다!

                성경 좀 보며 목회 합시다! 


                벌써 홍혜선의 거짓말에 생각없는 목사가 성도들 이끌고 도망갔으니 

                정말 한심한 것을 넘어 헛웃음이 나올지경입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917

                 

                 


                 

                 

                <홍혜선과 아버지>

                 

                 

                 

                연극배우였던 홍혜선 조부모 부모를 따라 연극을 하고

                글쓰는 재주는 있어서 연극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사람이


                하나님과 홍혜선이를 주인공으로 환타지 소설 몇 개 쓰고 강대상에서 

                마이크 잡고 연극하는 것 좀 보고 듣고는

                목사들이 더 난리가 나서 성도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 넣는

                이런 무식한 짓들을 그만 멈추란 말입니다.  


                한심하고 답답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이 무엇인지 

                홍혜선이를 자기 교회로 초청한 목사님들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홍혜선이를 초청할 만큼 이해력이 떨어지는 목사님들을 위해

                아이들이 보는 쉬운 번역서인 '쉬운성경'으로 가르쳐 드립니다. 

                 

                고전 14:3-4

                3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용기를 북돋우고 위로를 주는 말을 합니다.

                4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덕을 세우지만, 예언하는 사람

                  은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하고 영적인 은사이며 축복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의 목적과 이유는 

                 

                한국전쟁이 나서 한국이 망조에 이른다는 예언을 말하는 목적이 아니라

                백두산이 폭발할 것인데 홍혜선이가 기도해서 폭발하지 않는다는 이런

                허무맹랑한 예언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사역한다고 교회 조명 꺼놓고 찬양소리 크게 틀어놓고

                귀가 찢어지게 마이크 소리로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러라고 주시는 예언이 아니라...

                 

                '홍사목(홍혜선을 사랑하는 목사들)' 님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냐면 

                 

                14, 사람(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며, 용기를 북돋우고 위로를 주고

                15,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거 하라고 하나님이 예언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 자녀들에게 격려하며 위로 하라고 

                하나님이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홍혜선의 예언이라는 말 중에 덕을 세우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말 한토시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듣고 싶고, 믿고 싶은 목사님들의

                분별없는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망한다'. '전쟁난다'. '목사들 회개하라'. '성도들 회개하라'

                맞는 말입니다.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도 맞았고 신약시대에도 맞았고 미래에도 맞을 말들입니다.

                 

                인류가 존재하고 인간의 죄성이 있는 한 100% 맞을 말들입니다. 

                홍혜선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망조 예언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위협하고, 강압적이고, 독설적인.... 이런 단어조차 사용하고 싶지 않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하는 듣보잡 예언과 성령사역을 하는 홍씨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강대상에서 성령사역한다고 헌금이나 

                갈취하는 부흥강사 '아류', 'imitation', '코스프레' 홍혜선이를

                 

                미국에서 건너와 영어단어 몇 개 쓰면서

                마이크 잡고 설교하니 그럴듯 해 보여 여기 저기 목사들이

                 

                "우리 교회도 오세요, 우리 교회로 와 주세요" 

                 

                그렇게 교회에서 홍혜선이 거짓말 듣고 몇 십만원, 몇 백만원 

                두둑하니 감사하다고 사례금 줄텐데

                그 돈은 어디에서 나온 돈입니까? 성도들의 헌금 아닌가?

                왜 헌금을 그렇게 쓰레기 처럼 버립니까?

                담임목사가 그렇게 쓸데없이 버리라고 성도들이 힘들게 헌금하는 줄 아시오?


                예수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노릇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목사들이 나서서 호도하지 말란 말입니다. 


                홍혜선이야 자기 환타지에 빠져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그 거짓말을 들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망가지고 상처받고 그래서 

                실족한 믿음의 성도들은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누가 멧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지겠습니까? 

                 

                홍혜선을 초청해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듣게 한 

                당신들이 그 엄청난 죄의 대가를 책임지겠습니까?

                 

                구약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예언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내리겠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런 심판의 예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 모두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예언적 소망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망한다'라는 예언보다 더 중요한 예언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면서 죄와 사망에 눌려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격려와 위로와 복음을 전하라고 예언을 주시는 것이지

                전쟁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빠지라고 예언을 주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홍혜선이 처럼 12월에 한국전쟁이 나고 백두산이 자기가 기도해서

                폭발하지 않는다는 망조의 예언을 듣고

                목사들이 더 날뛰는 것을 보면 나도 목사지만 참 부끄럽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만 선포하십시요.

                 

                 


                 

                 

                 

                어떤 인터넷 정보에서 보니 홍혜선이와 함께 사역했던 사람이

                예전에 홍씨가 성령사역한답시고 교회목사와 눈이 맞아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홍씨의 상반신 누드 사진을 첨부로 올렸습니다.

                 

                "과거에 일들이라 그렇수도 있고 이제는 하나님의 예언을 하는 사람이다."

                '홍사목' 목사들 중에 이렇게 믿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유부남과 간음을 저지른 여자에게 하나님이 과연 남한과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영적 예언의 권세를 주셨을까요?

                 

                그리고 한국전쟁이 어디 동네 양아치들 싸움입니까?

                한반도에 걸쳐있는 패권국가들이 강건너 불구경하고 있을까요?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세계에서 가장 쎈 나라가 다리 하나씩 

                걸쳐놓은 판국에 동네 양아치 싸움으로 끝날 것 같냐 이 말입니다.

                 

                세계가 뒤 흔들리고 인류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전쟁을

                목사와 간통이나 하고 연극 시나리오 쓰던 하나님 이름팔이나 

                하는 여자에게 이 엄청난 인류의 역사를 말씀해 주셨겠냐 이 말이외다.

                 

                "이제는 회개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령한 사람이 됐다"

                그래도 이렇게 믿고 싶습니까?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수백번 왕복하고

                하나님의 직통 계시와 예언을 들으시고

                백두산이 자기 기도 때문에 안터지고 

                한국전쟁도 자기 기도 덕분에 안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을까요? 


                홍혜선이가 정말 정상인지 귀가 있으면 좀 제대로 보란 말이오!!


                '홍사목' 목사들 덕분에 서울 부터 지방 곳곳 교회 강대상에서 굿판을 벌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굿판 한번 신나게 벌리고 성도들의 헌금 뚱뚱하게 수거하고 미국으로 가면서 홍혜선이가 하는 소리를 


                귀가 있으면 좀 제대로 들어보시라 이 말입니다!


                 

                <2014.11.29.출국>

                 

                 미국으로 출국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 '홍사목' 목사들 홍혜선이 불러 놓고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광기를 재현하고 있으니 무아지경이오.

                이민교회 힘들면 더 성경보고 기도를 해야 할 일이지 홍혜선이가 왠 말입니까!


                20년 전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오신다는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자들이나 '홍사목' 목사들이나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014년 12월 14일 주일 04:30분" 한국전쟁 일어난다는 홍혜선 예언입니다.

                12월 14일 주일아침 예배시간 홍혜선이를 불렀던 한국과 미국의 '홍사목'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12월 14일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성도들에게 부끄러워서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지 내가 더 걱정이 됩니다.


                 

                 



                목사님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생각 좀 하며, 성경 좀 보며, 분별 좀 하며 목회 합시다. 

                 

                제발 더는 하나님 교회에 기독교 무당들 데려와서

                성도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지 맙시다. 


                그래도 무당들이 신뢰가 가면 '홍사목' 당신들끼리 한데 모여

                거기서 기독교 굿판이나 신명나게 하십시오.

                내가 얼음띄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씩 보내드리다.


                이런 후안무치한 믿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렇게 할일 없고 생각없으면 조용히 목양실에 앉아 다시한번 

                창세기부터 성경통독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하기 싫으면 올 겨울 눈이 많이 온다고 하니 거리마다 

                눈이나 쓸면서 사회봉사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기독교 무당에게 봉사하느니 눈길이나 쓸면서 좋은 일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기독교 무당짓 하지 말고

                성도들 선무당이 하는 굿판 자리에 끌고가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그렇게 좋거든 본인만 혼자 가시기 바랍니다. 


                 

                나도 홍혜선이 마냥 예언하나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교회에 무당하나 불러놓고 굿판 벌려 

                성도들을 미혹하게 한 모든 목사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기독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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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志咸| 원글보기

                 



                (written by 90세 노인)
                ♥이 글은
                우리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읽어야만 하는 글입니다!!
                반드시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이 글은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의 플레인 딜러(Plain Dealer)에 사는
                90세 노인인 레지나 브렛(Regina Brett)이 쓴 글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예전에 내가 인생에서 배운 45가지의 교훈을 글로 적었다.
                그 글이 내가 인생에서 지금까지 썼던 가장 유용한 칼럼이다.
                내 나이는 이제 8월이면 90이 넘는다.
                그래서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그 칼럼을 게재한다.“



                1.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생은 좋습니다.


                2. 의심이 들 때는 그저 약간만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3.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인생을 즐기십시오.


                4.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의 직업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친구와 가족만이 당신 곁을 지켜줄 것입니다.

                 

                5. 카드빚은 매달마다 정산하십시오.



                6. 당신이 모든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 스스로 진실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7. 누군가와 함께 우십시오.
                혼자 우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을 치유해 줄 것입니다.


                8. 신에게 화를 내도 괜찮습니다. 신은 그것을 받아줄 수 있습니다.

                 

                9. 첫월급을 탈 때부터 은퇴할 때를 대비하여 저축을 시작하십시오.

                 

                10.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 쓸데없는 짓입니다.



                11.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과거가 현재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12.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13. 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14. 만일 어떤 인간관계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면,
                그런 인간관계는 맺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15. 모든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결코 눈을 깜빡거리지 않습니다.



                16. 숨을 깊이 들이쉬십시오.
                그럼 당신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17. 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하십시오.
                잡동사니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18. 어떤 고통이든지간에 그것이 실제로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항상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19. 행복해지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당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0. 당신이 인생에서 정말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대답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21. 촛불을 켜십시오. 좋은 침대시트를 쓰십시오.
                근사한 속옷을 입으십시오.
                그런 것들을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지 마십시오.
                오늘이 바로 가장 특별한 날입니다.

                 

                22. 준비는 항상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하고,
                실전에서는 흐름에 따르십시오.

                 

                23. 괴짜가 되십시오.
                자주색 옷을 입기 위해서 나이가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24. 섹스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뇌입니다.

                 

                25. 당신 외에는 아무도 당신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26. 소위 재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일들을
                다음 질문의 틀 속에서 판단하십시오.
                ‘5년 후에도 이 일이 정말로 내게 중요할까?’

                 

                27. 항상 삶을 선택하십시오.

                 

                28. 용서하십시오.

                 

                29.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당신이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30.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합니다. 시간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31. 상황이 좋건 나쁘건, 상황은 반드시 변하게 됩니다.

                 

                32. 당신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 말고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33. 기적을 믿으십시오.

                 

                34. 신은 그저 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하거나 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35. 인생을 청강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당히 앞으로 나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36. 성장해가는 노인이 죽어가는 젊은이보다 낫습니다.

                 

                37. 당신 자녀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은 인생에서 오직 한번 뿐입니다.

                 

                38. 결국 마지막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39. 매일 밖으로 나가십시오.
                기적이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0.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쌓아 올린 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을 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41. 질투는 시간낭비입니다. 당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42.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43. 당신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잘 차려입고 당당하게 나오십시오.

                 

                44. 양보하십시오.

                 

                45. 인생에
                나비넥타이가 묶여있지 않더라도, 인생은 여전히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93%는 이글을 전송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글을 전송하는 7%중 한 명이라면
                이 글을 ‘7%’라는 제목으로 전송해 주십시오.

                저는 그 7%의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친구들은 우리가 선택한 가족입니다.
                ?
                ?
                ?


                우리들의 삶 속에
                늘~좋은 소식이 가득한 날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배경음악:

                Just for You / Giovani Maradi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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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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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공동주관한 ‘21세기의 교회와 선교 -설교자를 위한 WCC 제10차 총회 주요 문서의 내용’ 주제 제3차 심포지엄이 15일 오후 서울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우진성 목사(과천영광교회)의 사회로 신익상(감신대)·최순양(이화여대)·박지은(이화여대)·이은경(감신대)·김희헌(성공회대) 박사가 발제자로, 김기석(청파교회)·김경호(들꽃향린교회) 목사가 논평자로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발제자들은 지난 WCC 제10차 총회의 주요 문서들을 살피며, 그 안에 나타난 생명과 양성평등, 생태정의, 에큐메니칼 신학교육, 평화통일 등의 문제들을 고찰했다.

                특히 최순양 박사는 ‘WCC 문서와 양성평등의 문제’를 다루며 “WCC 문서를 통틀어 볼 때 양성평등의 관점이 ‘세상을 향한’ 혹은 ‘주변부를 향한’ 부분에서는 적용돼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 또는 ‘신학교육 안에서의 여성’의 문제에는 적용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기독교 선교의 핵심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 및 한국 교회교육에 대한 반성과 제언’을 제목으로 발표한 이은경 박사는 “나와 남을 가르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하나요 이웃이며, 친구이자 가족이라는 생각을 먼저 할 줄 아는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 신앙교육의 목적이며 교회의 책임”이라고 역설했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서 ‘한국교회 선교과제로서의 통일선교’를 제목으로 발표한 김희헌 박사는 “한국교회가 통일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먼저 겸허히 서야 할 것”이라며 “과거에 형성된 반북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이나 더욱 큰 경제적 욕망을 확장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한국현대사의 굴곡과 복음의 요청에 대한 신앙의 통찰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김진영 기자

                 

                >

                 

                 오거룩한 밤 음악...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찾아 나설 것인가?

                대림 절기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찾아 나서고 있다. 성경 역사나 인류역사를 보면 기다리던 사람보다 찾아 나선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불신앙인 것 인고로 멸망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게 유혹한 뱀(마귀)의 머리를 밟고 에덴동산에서 살던 신분을 회복시킬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되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통하여서 율법을 지키며 기다리도록 하셨다.

                그런데 초림하신 예수님을 탄생하였을 때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스라엘 유대인들조차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며 ‘임마누엘’ 임을 알아본 자들은 극소수였고, 공생애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오실 자’인 것을 수많은 표적과 말씀을 하였지만 예수님을 믿질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방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 중에 극소수만이 성경대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순수한 믿음을 지키고 대다수는 믿지 않고 있다. 그 형태는 어떤 이들은 우상과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또 어떤 이들은 아예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들을 찾다가 종교를 만들고, 또 어떤 자들은 아예 하나님(신)을 인정치 않고 인간 이성을 통하여 과학을 발전시켜 에덴동산의 삶을 회복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들이 있고 유신론자 가운데 기독교가 있고 타종교가 있다.

                2013년 7월 통계에 의하면 세계 인구가 70억 7천이라고 한다. 그중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인이 23억인데 이들 기독교인 중에서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자들이 80%가 넘어 급속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를 살펴보자.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대단한 기독교 열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교인의 절반인 ncck 계열의 교단들은 다원주의를 이미 표방하고 모든 종교를 통합하려는 카톨릭과 교리와 직제까지 일치하려고 서명하였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과연 이들을 인정하실까? 예수님 외에도 구원자를 다른 종교인들 아니 종교를 가지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인정하실 것입니다. 라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본적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말이다.

                나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만을 믿고 예수님을 기다리려고 한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면…….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있을 것이란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김정한 목사

                    내가 모르고 있는 소중한 것 어느 등산가가 험한 산을 오르다... 길을 잃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쳐서 이제 죽었다고 생각할 쯤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작은 초가 산간 집이였습니다. 그는 거의 탈진 상태에서 "계십니까? 계십니까?" 그 때 어떤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그는 무조건 들어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깨어보니 할머니가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이 드오?" "아,,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이렇게 폐를 끼쳐서." "아니오,, 더 머물다 가시오! 눈보라가 멈추려면 몇일은 더 있어야 한다오" 할머니는 가난했지만 등산가에게 겨울 양식을 꺼내어 함께 몇일을 보냈습니다. 등산가는 눈보라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할머니는 등산가를 아들 대하듯 정성껏 보살펴주었습니다. "나도 자네만한 아들이 있었다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이놈의 산이 문제요, 이놈의 산이 변덕이라." 등산가는 이 생명의 은인인 할머니에게 보답하기 위해 어떻게 해 드릴까 생각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보니 온통 구멍이 나고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 할머니 집을 따뜻하게 살 수 있도록 새로 사드려야겠구나" 그 등산가는 다름 아닌 거대 기업의 사업가 회장이였습니다. 눈보라가 끝나는 날 회장은 몰래 거액의 수표를 꺼내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요?" "이제 이 거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회장은 다시 그 산에 등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과연 따듯하게 지내고 계실까 궁금도 하고 해서 끔찍한 등산 경험이였지만, 그 산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집이 그대로 있는 것이였습니다. 뛰어 들어가자 방안에서 부패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할머니는 홀로 죽어 계셨습니다. 아마도 겨울 양식도 없고 작년에 너무 추워 동사한 듯 보였습니다. "아니 이럴수가,,, 내가 분명 그 큰 돈을 드렸는데!" 그 때, 자신이 준 수표가 창문에 구멍 난 곳에 문풍지로 사용된 걸 발견했습니다. "아뿔사.." 그때서야 회장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할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았답니다. 귀한 것이라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는 휴지조각이구나. 어쩌면 내 주변에도 휴지 조각 같지만 귀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할머니가 주신 그 귀한 음식이 어쩌면 내겐 귀한 보석인데 난 그것을 휴지로 드렸구나... 주변에 보석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문풍지로 사용하듯.. 그것이 친구일 수도 있고 .. 직장일 수도 있고ᆢ 남편일 수도 있고 .. 아내일 수도 있고 .. 부모일 수도 있고 .. 상사일 수도 있고ᆢ 자식일 수도 있듯... -받은 메일 중에서-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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