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가르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과 가치 (아더 핑크)



“하나님의 말씀을 보든, 교회 역사를 보든 간에,

교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장기간 결핍될 때 발생하는 비극적인 결과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성도의 이해를 밝게 해주며, 지성을 훈련하며, 판단력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함이다.

교리는 감사의 동기를 마련하여 주며, 선행에의 동기를 마련하여 준다.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를 전혀 배우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이

건전할 수가 없다.

근본적인 교리를 “하나님 말씀의 초보”(히 5:12), 혹은 ‘성경의 기본진리’라고 하는데,

이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성령의 감동과 성경의 권위’, ‘영원토록 복되신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내재하는 두 가지 본성들’,

‘그분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희생’, ‘우리의 타락’,

‘중생’, ‘무조건적인 칭의’

이런 것들은 진리의 성전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들인데,

이것들이 없으면 성전은 유지될 수 없다.


옛적에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베임을 당하는도다)” (호 4:6)

그리고는 선언하셨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목마를 것이며..(사 5:13)

하나님께서는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고 하신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시의 교리를 통하여 제일 먼저 전달되어 졌다.

교리적인 기독교가 되어야만 실제적인 기독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생활의 원동력이 감정이나 충동적인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원리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깨닫고 바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진리에 의해서 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우리는 진리의 지식(요 17:3, 딤전 2:4)과 진리에 대한 믿음(살후 2:13)에 의해

구원받는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또한 우리는 진리에 의하여 자유(요 8:32)케 되고 성화(요17:17)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의 은혜도 증가한다.(벧후 1:2, 3:1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우리를 보존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이다.(시 61:7, 잠 21:28)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시 61:7),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잠 21:28)〕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이 질문은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터’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데 이사야 19:10에 나온다.

“애굽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히브리 원어는 ‘터’)에 근심하리라”(사 19:10)

우리의 계획과 행동이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2차적인 진리들이 도출되는 곳이 바로 ‘1차적인 원리(*터)들’ 이다.

모든 교훈의 기초가 바로 이 진리들인 것이다.

‘의인의 믿음과 소망은 신앙의 원리들 위에 설립된다.’(메튜 헨리)

이 기초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동치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것을 시험해보신다.

‘신앙의 기초들이 무너질 때 의인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 안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뒤흔드는 자들의 모든 계획들과 시도들을 중지시켜 달라고 간구해야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이 거룩한 믿음 위에 서기 위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존 길)



지난 세기 동안 교리교육은 눈에 띄게 쇠퇴하여 갔다.

주의와 신조들이 무가치한 것들로 인식되었다.

신학공부보다는 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 대한 공부에 열심 내었다.

‘우리에게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달라!’ 는 요청이 있었다.

이 요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는 

그 요구가 영적이며 적절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중요한 의미도 내포하지 못한 가상의 구분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양성적 인격, 중보자적 특징, 

택함 받은 자와의 공적인 특징과 그들에 대한 구속사역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그분의 신성, 독특한 인성, 약속의 머리되심, 

그리고 그분의 삼중직을 인정할 때만 형성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그리스도 교훈’(요이9)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분리(‘기독교’와 ‘그리스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교훈은 

주님의 신비한 인격과 그 큰 구원에 관한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신비)’(골 4:3)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진리의 말씀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영광뿐 아니라  기독교의 거룩한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교리에 나타나고 있는데,

교리는 인간의 고안물이 될 수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왕자의 죽으심, 

그분이 순종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님,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은

가장 최고로 고상한 거룩하고도 신비한 진리들로서 

유일한 이성의 최고봉을 훨씬 능가하는 진리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들은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우리들을 향하신 요구들과 그것을 실천하게 해주는 원동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리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진리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 그것들의 상호관계, 그 주제의 일치성, 영광의 주님의 대한 찬미 등을 

이해하게 될 때 분명하여 진다.

어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교리가 일관성이 없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교리의 부수적인 것들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전체적인 이해와 안목이다.

그런데, 그것은 부지런하고 끈질긴 적용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설교는 많지만, 슬프게도 교육은 거의 없다.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선포하고,

그 각각의 관계를 설명하며, 진리의 전 영역을 보여주여야 하는 것이며,

균형에 따른 안정감을 얻게 하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가 나타나게 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공언할 뿐만 아니라, 증명도 해야 하며

확신시키려는 것 뿐 만 아니라,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입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했다”

(행17:2,3)는 말씀을 읽는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이성적인 능력을 상당히 많이 이용했다.

그는 자기가 전하는 것을 증명도 하지  않고 믿으라고 강권하지는 않았으며

자기가 강권하는 것에 대해서는 증거를 내세웠다.

그는 복음의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교리들을 전파했는데,

그때마다 쉽고도 결정적인 논리로써  그것을 증명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4)

강론이 악용될 수 있다고 해서 강단에서 그 강론을 그쳐서는 안 된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면,

올바를 원리들로부터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며,

명쾌하고도, 확실한 주장들을 추론해 낼 수도 있다.

어떤 명제의 진리들을 효과적으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며,

반대되는 진술에 대해 대답한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볼 때 명백하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초보적인 문제인 하나님 존재를 설명할 때,

바울은 간단하면서도 인상 깊게 강론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

먼저 이방세계 특성과 행위를 길게 증명한 후, 구약을 인용하여 결론짓기를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우리의 마음은 이해력과 양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여” 

그 로마의 관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행 26:25)


그러나, 슬프다!

이처럼 성경을 강론하고 설명하며,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경험만 외쳤으며 교리의 지식은 무시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보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심지어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조차 결핍하고 있다.

소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설교들이 신학적인 강론을 대신하게 되었고

복음의 커다란 근본들은 모욕을 받고 있다.

한번 개신교 국가가 되었던 지역에 다시 가톨릭이 들어가곤 했었다.

바로 그 때, 경험으로는 그들을 물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건전한 교리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은 그 행위의 원천이 되는 뿌리가 마르고 시들게 될 때에 

쇠미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믿음의 교리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순종은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행위 없는 교리 또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지식들은 실천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교리와 실천은 병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행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처음 불을 밝힌 자는 또 다른 불에 이를 것이다.’(존 길)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먼저) 교훈과 (그 후에)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는 말씀의 순서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마찬가지로 디도에게도 분부하고 있다.

“이 말(3-7의 교훈)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기쁘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슬프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되,

그 줄기와 가지, 그 대의(大意)와 효력을 다 가르치는 자는 너무도 너무도 적다.

영적인 진리를 바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것 보다

더 멋지게 영적인 마음을 꾸미는 교양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멀리하는 것도 거기서 시작된다.

영적인 결실도 거기서 시작된다.

교리는 하나의 틀(모형)이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던져 우리 마음의 모양을 얻는 것이다.(‘교훈의 본’, 롬 6:17)

뿌려진 씨가 어떤 씨냐에 따라 추수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늘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문하생의 삶이 결정된다.

16,17세기의 기독교를 상징했던 그 순결성, 그 독실함, 그 열심,

인간 앞에서의 의로움,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설교는 주로 교리적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과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명과 교훈을 포기하느니

그들의 생명을 내어 놓았고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행동이 선하기만 하며, 그가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께 옳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가장 높이 들어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이 청교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찰스 스펄젼, 시이저 맬런, 로버트 머리 멕체인,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지도자들은

설교할 때마다 교리 전파에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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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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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출처; http://cafe.daum.net/ymh779/D6Rg/17541 글쓴이; 깡아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바다를 자주 찾게 된다. 내게 그만큼 스트레스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바다를 즐겨 찾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다는 살아있고 바다가 내게 가르치는 교훈들이 쏠쏠하게 제법 많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는 나의 감성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스승이라고나 할까...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인생살이의 희노애락(喜怒哀樂), 보다 깊은 삶의 여정을 배울 수 있어 좋고, 검푸른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는 행운이라도 얻는 날이면,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시상(時想) 비스무리한 아름다운 언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제법 형이상학적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나는 바다가 좋다.

바다는 날이면 날마다, 때로는 거칠고 높게, 때로는 얕고 부드럽게, 파고의 높낮이는 달라도 파도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사르륵사르륵  모래를 감싸 안듯, 다독다독 다독이듯 부드럽기 그지 없는 천사의 치마 자락 같은 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치마 자락에 폴싹 뛰어들어 어린애처럼 투정이라도 부리며 실컷 울고 싶을 만큼 정겨운 때도 있다. 이렇듯, 파도가 잔잔한 때면 물과 하나가 되어 물장구를 치면서 키득거리는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비키니 수영복의 눈부신 아가씨들이 한껏 뽐내며 백사장을 활보하기도 하고 수영도 하며 물놀이를 즐기지만, 막상 집채보다 크고 태산만큼 높은 파도가 휩쓰는 때면 유약한 아이들과 여인들, 뿐만 아니라 장정들이라고 하여도 보통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힘을 가진 것이 또한 바다의 위력이다.

바다는 이렇듯 무딘 감성을 일깨우고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바닷가에 매일처럼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파도 앞에서 모두 꼭 같은 감정이 아니란 것을 배우게 된다.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극명하게 다른 반응으로 대응하는 두 부류의 인생을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으르렁거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를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더 멀리 달아나려고 도망을 치는 나처럼 유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고의 높이가 더해 갈수록 파도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파도타기를 즐기는 근육질의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 즉, 꼭 같은 환경에서 두 가지 다른 반응의 인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찌 파도 앞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생이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모든 분야에서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천한 자와 존귀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교수와 학생은 그들대로, 모두 꼭 같은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로 나뉘게 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뉜다. 알곡과 쭉정이, 가라지와 곡식,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감사의 사람과 불평의 사람 등등...

믿음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감사하는 수준과 믿음은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감사하는 수준을 봐서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잴 수 있다. 신약에서 병 고침을 받은 열 문둥이 중에서 감사를 알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만 참 믿음의 소유자로 주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볼 때, 감사하는 수준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재는 시금석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 된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가 쉬운 대로 부모 자식 간의 예를 한번 살펴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일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다. 부부지간도 형제. 자매도 이웃 간에도 꼭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설령 내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저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같이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며 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이것은 육신 적인 면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면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와중에서 오늘까지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재앙 속에서 여지껏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십자가의 사랑…인간 편에서 보면, 값없이 그저 받는 은혜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의 고귀한 목숨과 맞바꾸어야만 할 만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 하나만 제대로 깨닫게 되어도 너무나 크고 놀라워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감사 또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의 감사를 업그레이드 시키자

업그레이드된 감사란 어떤 것일까?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 다니엘의 감사가 바로 이런 감사다. 다니엘은 주어진 환경이 좋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가정이 안전하고 일신이 평안하거나 받은바 은혜가 커서 그 은혜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감사는 죽음 앞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단 6: 10 절 참조) 하박국 선지자 역시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였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좋아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 감사에도 두 종류의 감사가 있다. 주어진 환경이 좋을 때 감사하는 것, 주어진 환경이 열악하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은총도 “일반은총”이 있고 “특별은총”이 있다. 일반은총이란 세상사람 모두가 누리는 은총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햇빛과 비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불신자에게 동일하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지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로 선택된 택자들, 창세전부터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들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이 마음속에서 받아지고 확실하게 믿어진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특별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분류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당신 자신이 믿어진다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도의 입에서,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와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실상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서 어려울 때 더욱 감사하라고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려움이 당하게 되면 정금 같은 믿음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네 속물이 위대한 신적 기적을 체험한다고 하여서 감사의 마음이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눈앞에서 홍해가 쫙 갈라지는 크나큰 기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신적 기적이 두 눈 앞에서 실현되는 어마어마한 체험을 하였고,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사는 순간적이었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과 입에서 불평이 떠나질 않았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나는 예외라고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감사와 불평이 번갈아가면서 내 마음을 주장한다면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개인의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도움이 될가 하여 잠시 나눈다. 우리가 개척하였고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사랑하던 교회가 이번에 큰 환란을 통과하였다. 길고 캄캄한 터널 속에서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환경에 내던져졌다.(그렇다 순전히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예전의 숫자 2/3 정도가 대풍에 흔들리는 선 과실처럼,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1/3정도가 가차 없이 돌아섰고, 1/3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무대응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작정하였으나 만들어진 말들, 온갖 유언비어가 우리 지역을 강타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 겪는 일들이었기에 심히 당황이 되었고 낙심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함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은 선하시고 모든 일에 섭리하신다.”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을 깨달았다. 이런 때일수록 고개를 들어야 한다. 내가 악을 행하지 않은 한, 반드시 주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 큰 환난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은 지금 이 자리에까지 나를 인도해 주시고 세워주신 그분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은 항상 내편이시다!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만이 내가 할 나의 본분이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정하니까 마음의 동요가 끝나고 하늘의 평강이 몰려왔다. 물론, 아직은 복잡하고 어렵던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확실하게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환난 중에서 성도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목하 배우고 있는 중이다. 교회란 주님의 피로 값 주시고 산 양무리가 모인 곳이다, 그 양무리가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 양들의 선택이 내 눈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목자 되신 그분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나니까 형언할 수 없는 평강이 몰려왔고 찬송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교인 쟁탈전도 아닌데 성도가 어디로 가건 얼마가 모이건,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믿으며 교회와 교회 사이에 심판하실 분도 그분이신데 우리가 서로 다툴 일이 뭐가 있는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라 명하신 그분을 감사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자. 내 교회, 내 이웃, 내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함을 깨닫고 따뜻하게 치하해주는 말, 감사함을 나타내는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특별운동이라도 벌려보는 한 주간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듯, 헤아려보면 감사할 조건이 많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없어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감사치 못하는 것이다. 감사란….오직 깨닫는 자만 느낄 수가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닫는 곳에 감사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환란 중에서 감사하는 성도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성도이다. 이런 차원이 높은 감사, 업그레이드된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나는 믿는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50:23)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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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항력적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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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알듯이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록 여러 다른 곳에 거처한다할지라도 마음에 역사하시기에 그들은 같은 믿음과 같은 진리를 믿고 받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러브-
      내적인 부름은 성령님께서 외적인 말씀의 부르심과 동반하여 그 사람을 무지에서 지식으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부르실 때 일어난다. -크리스토퍼 러브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연합할 자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윌리암 아메스
      그리스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운데서 성령의 은혜원리가 작용되는 과정이다. 내적인 부름은 영적인 계몽이며, 여기서 약속들은 내적인 말씀에 의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증거된다. -윌리암 아메스-
      하나님에 의해 영적이며 신적인 빛이 곧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는데 이는 자연적인 도구에 의해 얻어진 무엇과는 전혀다른 속성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육신에 있는 편견은 거룩한 진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제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진리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적절히 민감해 지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거룩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적 교리에 대한 완전한 반감이다. 이것은 진리를 입증하는 논쟁에 대해 무익하며 마음에 힘을 잃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누군가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적 교리들의 영적인 탁월함을 밝혔을 때에는 이것이 모든 반감을 부수고 모든 편견을 제거하며 이성을 거룩하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논쟁의 힘에 마음을 열게 만든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죄로 죽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은혜로 불러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며 그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한다 -프란시스 튜레틴
      양자됨은 우리에게 아들의 특권, 즉 아들들의 새로운 본성의 거듭남이다. -스테판 차르녹
      첫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렇듯이 두번째 창조, 거듭남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지식과 의와 진실한 거룩성, 사랑에서 새롭게 만드신다. -바바서 파웰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변화이다. -토마스 아담스
      사람의 관점에서는 인생이 아름답게 보일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못한데, 다만 그 마음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때까지 그러하다. 이 세상의 어떤 약도 성령님의 거룩케 하는 역사가 없이는, 상처와 병이난 부위를 덮을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료하고 고칠 수는 없다.
      -오지 스윈녹-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꾸밈: 최송연의 목양연가"묵상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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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 뿐인 여자, 그 상처들로 인하여 몹시도 뒤틀리고 꼬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한 낮 뙤약볕 아래 우물가에서 낯선 남자가 물을 좀 달라 하는데 차갑게 쏘아붙입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 달라 하십니까?”
유대인에게 몹시 반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주님이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내게 생수를 구했으리라.” 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을 계시하자,
“흥, 두레박커녕 바가지도 없이 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요?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가요?” 하고 쏘아 부칩니다.
주님이 다시 “내가 주는 물을 마신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시자,
“그래요? 그럼 그 물 내게 주세요, 다시는 여기 물 뜨러 올 필요 없겠네요.” 하고 비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꼬고 쏘는 여자의 말대꾸를 계속 받아 주시며,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계시해 나가십니다.

주님이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여자에게는 소유권이 없고 남편에게 있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전 남편 없습니다.”
“그래, 남편 없다고 생수 못 주겠다는 거지요?”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은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놀라고 맙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갈 데까지 다 간 타락한 여자, 동네사람 눈을 피해 땡볕아래 물길러 우물에 나온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 사람이 알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 보니 선지자시로군요.”

그런데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생활과 죄를 말갛게 드러내시는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도망하지 않고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말 속에는 그 옛날 북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이를 하나님이라면서 예배하던 우상숭배, 그리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흩어지고 더럽혀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까지 잃어버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당해 온 뼈아픈 민족의 과거, 그 속에서 또한 타락하여 구제불능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적 비관과 원망과 냉소가 깔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상처투성이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거기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는 성경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 때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글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는 “영과 진리 안에서”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들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안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예표였습니다.
성막이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겠지요.”
사마리아 여자가 그 비참한 환경과 삶과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이 그의 질문과 말 속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로라.”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겠습니까?
그분이 그리스도라니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난리를 합니다.
그 때까지의 좌절과 아픔과 차별과 모멸과 수치는 온데간데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참 생수요 진리가 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켜버린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구원을 기다린, 상처뿐이었던, 주님을 만난 여인의 변화요 승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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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세계 최대의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숲과 하천이 흐르는 동굴 안의 모습이 장관이다.

이 동굴은 200-500만 년 전 유수침식지 아래
석회암 작용으로 형성되었고

산 중심부의 꼭대기 부분 돌들이 무너져 내려
거대한 내부 공간이 만들어졌다.

동굴은 길이가 5.5마일(약 8855m), 넓이 650피트(약 198m), 높이 150m로
세계 최대 동굴이며 아직까지 계속해서 확장 중이다.

동굴 안에는 적어도 150개의 독립된 작은 동굴이 있고
호수와 하천, 삼림까지 존재한다.

이 동굴은 산중에 있는 하류 동굴이란 의미로
가끔씩 비춰지는 햇빛을 통해

탐험가는 운좋게도 동굴 안의 복잡한 석질구조를 볼 수 있었다.

동굴은 쩡 손 산맥 아래 위치하며 몇 백만 년 동안
베트남 중부의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

1991년에야 한 현지 농민이 눈보라를 피하려다
우연히 이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농민은 그 후 이 동굴을
다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2009년에 영국 동굴탐험대가
그 농민의 도움으로 마침내 동굴을 발견해

그때부터 이 동굴은 정식으로 세계 최대의 동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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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 스테판 차녹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호후5:17)

 

1. 본문은 놀라운 교리를 제시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이라면, 그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가 대신한 그 모든 사람은 다 죽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 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이상 근심해서는 안 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그분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칼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살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신 분의 영광과 그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이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은 삶의 목적이 다르다. 자아는 모든 자연인의 최상의 목적이다. 자연인에게는 자아가 그 목적이고, 거듭난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자신을 의존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담의 큰 죄악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담은 자기 자신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의 피 속에도 그러한 욕망이 흐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이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찍 죽음을 당하사--우리들을 피로 구속해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즉, 우리를 더러운 욕망의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셔서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었다(벧전1:18,19). 그저 가까운 선조들의 잘못된 길에서뿐만 아니라, 첫 조상 아담의 망령된 행실에서도 구속되었다. 자기 앞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 흉악한 우상숭배, 곧 자기숭배에 빠져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이다.

 

4) ‘우리를 위하여’ 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하다. 그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통치권을 얻으셨다.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그 통치권이 확증되었고,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과 봉사의 의무가 늘어났다.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 성장해 갈 때, 그것은 영적 성장의 위대한 증표가 될 것이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이다. 그분의 즉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후5:16).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외적 치장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분을 알게 된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난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이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인다.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자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게 되고, 누구나 그분에게로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들은 지나갔다. 대신에 하나님께 지명하신 새로운 머리 아래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 그렇게 지명되신 분을 우리의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죄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며, 또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담이 가장 실패했던 것은 불신앙과 자기 사랑이었다.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은혜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 스테판 차녹, 『거듭남의 본질』, pp 2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영적 성장을 위한 다섯가지 필수 영양소

 

 

1. 성경공부

 

 성경공부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풍성한 경험 중의 하나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마음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시작되고

강해진다.

 

 

2. 기도

 

기도는 우리의 의무와 특권이며

또한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3. 예배

 

하나님은 교회의 건물 안에만

제한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말씀을 필사적으로 듣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높일 수 있도록 반응해야 한다.

 

 

4. 섬김

 

종이 되는 것은

그 누구의 감독고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우리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 어깨 너머 뒤에서

감시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5. 청지기 사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지구상에 두셨다.

 

 

  

당신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 R. C. 스프롤 지음 』중에서

출처: withyou80331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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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하나하나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좋은인연을 가질수 있는 뜻깊은 하루가 되시기를~~♡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 받지만 힐링해주는 것도 사람인 것 같아요
서로 사랑하고 살아요


[[이런 인연으로 살면 안 될까요?]]]

움켜진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기다리는 인연보다 찾아가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의심하는 인연보다 믿어 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눈치 주는 인연보다 감싸 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슬픔 주는 인연보다 기쁨 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시기하는 인연보다 박수 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비난 받는 인연보다 칭찬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무시하는 인연보다 존중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원망하는 인연보다 감사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흩어지는 인연보다 하나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변덕스런 인연보다 한결같은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속이는 인연보다 솔직한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부끄러운 인연보다 떳떳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해가 되는 인연보다 복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짐이 되는 인연보다 힘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오늘,
인연을 맺고 사는 지인들에게 고맙다는 메세지나

안부 전화 한 통화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홧탕!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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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3월 29일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주최한 춘계 세미나에서는 “세기말적 종교현상, 어떻게 볼 것인가”를 제목으로최근들어 기승을 부리는 시한부종말론을 정면으로 다뤄 관심을 모았다.

 

KCRP 사무차장 박광수 교수(원광대)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세미나는 ‘종교적 광신과

시민사회의 윤리’(길희성 교수), ‘신학적으로 본시한부종말론’(김명용 교수), ‘시한부

종말론의 사회심리학적 조명’(이훈구교수), 폐쇄적 신앙집단의 사회적 분석(김종서 교수) 등 모두 4개의 주제 발표와각 주제에 대한 토론, 종합토론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신학적으로 본 시한부종말론’을 발제한 김명용 교수는 시한부종말론과 기독교의

종말론을 구분하고 “시한부종말론은 세상과 역사에서 도피하는 탈역사적인 삶을 불러오기때문에 매우 위험한 반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악의 역사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싸울 것을 가르치는 동시에 역사의 어둠속에서역사의 희망을 가르치는 교리”라고 설명해 주목받았다. 한편 이 날 행사에는시한부종말론 단체의 신도들도 대거 참석,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야유를 보내는등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본고는 지면관계상 각 주제와 토론 발제문을 대폭 요약한것임을 밝힌다.

 

제1주제 종교적광신과 시민사회의 윤리

 

‘광신성’종교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길희성 교수(서강대/종교학)

 

종교는 그 자체가 가지는 초월성과 신비성을 완전히 포기하고일상적 사회질서의 일부로

편입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상식이나 합리성의잣대만으로 재단될 수 없는 ‘광신성’을 지닌 종교적 자유의 한계와 자유시민사회가요구하는 관용의 덕은 어디까지인가.

 

시민사회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자기가 믿고있는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양한 신념과 신앙이 공존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수조건이있으며 이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가 필요하다. 즉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누릴 권리가 있는 조건적 자유인 것이다.

 

광신적 종교집단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는 적어도 광신의형태가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만을 강요하는 독선이라면 이러한 신앙의 자유는 제한받아 마땅하다. 납치, 구금, 구타, 세뇌, 가족과의절연, 사회생활의 거부, 재산 갈취, 혼음이나 강간같은 반인륜적 행위들은 자유민주주의의질서를 지키기 위해 제한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는 다종교사회에서 각 종교들이 공존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되 관용에 한계가 있음을 명백히 해야 한다.그 한계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과 가치의 존중, 타인의 자유와 인권의 존중,사회 전체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유교윤리이다.

 

제1토론 종교윤리와 시민윤리는 일치 이루어야

 

광신적 종교행태에 대한 관용의 한계로 제시한 ‘최소한’의유교 윤리에 전적으로 공감하나 시민사회의 건전한 윤리와 종교가 가지는 속성인 광신의 자유를 양립시킨데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종교가 사회제도의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종교적 행위와 도덕적 행위, 종교의 윤리와 시민윤리는 양립하거나 유리될 수 없고 언제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광신적 종말론의 경우 그러한 종교 행태가 교회내에서 끝나야지사회로 진출, 일반인을 상대로 선동하거나 유혹하면 제재를 받아 마땅한 혹세무민의반사회윤리가 된다.

 

종말론이 재산, 성 등을 착취하는 비사회윤리적인 문제를야기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신학적 성찰이 앞서야 한다.그리고 종말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결단과 참여를 요구하는 실존적현실임을 일깨워야 한다.

【이은윤·중앙일보 전문위원】

 

제2주제 신학적으로본 시한부종말론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날가르침

김명용 교수(장로회신학대/신학)

 

종말에 대한 성경의 정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수 있다.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다는 것(행 1:11), 종말의 시기를 아무도알 수 없다는 것(마 25:13), 종말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순간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막 13:33~37)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시기에 대한 예언은지금까지 교회역사 속에 너무나 많이 있었다. 이장림씨의 1992년 종말설, 윌리암밀러(William Miller)의 1843년 종말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인 러셀(C.Russel)이 주장한 1874년 예수 재림과 그 후의 천년왕국설 등등이 그것이다.거기에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근거로 주의 날을 천년으로 계산하여 종말의 시기를 추정하는 세대주의 종말론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종말에관한 날짜를 예언하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날에대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의하고 깨어서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준비를 해야한다.

둘째, 주인의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마 24:45~51).

셋째,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복음전파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넷째, 복음전파와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마 25:31~46).

다섯째, 주님의 의의 힘 앞에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이 땅위에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를 근거로 했을 때 시한부종말론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교리이다.이 교리는 성서적으로 신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역사에서 도피하는 탈역사적인 삶을 초래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제2토론 기독교의자기비판 계기로 삼아야

 

기독교의 종말관은 타종교나 다른 세계관에서는 볼 수 없는직선적 종말사관이다. 기독교가 종말론을 말하고 있는 한 시한부종말론은 생겨날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불안, 좌절, 절망들이 짙게 깔려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맥락에서 종말의식 자체가 인류 보편적현실이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시한부종말론이 주는 폐해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자들만을 비판하기전에 기독교 신학 및 교회 역사에 대한 반성과 기독교의 자기비판의 계기로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다음 몇가지를 거론한다.

 

첫째, 어거스틴 이래로 성서내용과 과학적, 객관적 사실이일치하지 않는 경우 은유적 해석을 인정해 왔다. 따라서 세대주의 종말론은이러한 기독교의 전통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둘째, 종말에 대한 관심은 주후 1000년경에 종말이 이를 것으로생각했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도 갖고 있었다. 그 후 수많은 종말선포가이러한 전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셋째,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신앙인들에 의해 야기되는 종말현상을 직시하면서 기독교

교회는 정신적·물질적 소외를 겪고 있는 사람들,현실을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헌신적 배려를 먼저 철저하게수행해야만 할 것이다.

 

넷째, 교회사적으로 볼 때 종말론 운동은 교회가 임박한 종말에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제도적 교회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인습화된 신앙을 공고히할 때 그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시대의 종말론자들 역시 계승화되고제도화된 기성교회에 대한 도전, 반발로써 숙고

되어야 할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신학】

 

제3주제 시한부종말론의사회심리학적 조명

 

대중매체 통한 계몽 시급

이훈구 교수(연세대/심리학)

 

종말론이 싹트는 이유는 다양하다. 예컨대 오존층의 파괴,엘리뇨 및 라니뇨 현상과 같은

기상변화, 지구온난화 현상 등은 더 이상 지구가지탱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을 조성하고 이러한 불안감은 노스트라다무스의종말론, Y2K 종말론, Deep Impact 종말론 등으로 이어진다.

 

개인이 종말론을 신봉하게 되는 이유는 심리적 이유만이 아닌사회적 또는 시대적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개인이처한 현실이 너무 괴로워 이로부터 도피하려는 현실도피이다. 즉 종말론과 어지러운사회상은 서로 맞물려 작용한다.

 

인간이 갖고 있던 기대와 실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 부조화(불쾌감)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부조화를 조화로 바꾸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Festimger의인지적 부조화이론에 의하면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자신의 되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합리화하기 위해서 계속 종말론에 매달린다.

인민사원을 지휘했던 짐 죤스와신도들의 집단자살도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인지적

부조화를 겪고 싶지 않아서이다.

 

물론 모든 종말론 신도들이 다 자살을 감행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면 어떤 종말론 신자들은 자살하고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가? 그것은 종말론에얼마만큼 심취했는가의 정도와 얼마나 개인적 투자를 했는가에 달려있다.

 

올해는 IMF 시대의 곤란한 경제 상황에다 새로운 세기에 대한불안감이 겹쳐 종말론의 기승이 명약관화하다. 이에 정부와 매스컴은 여러 경로를통해 일반 대중에게 종말론에 현혹되지 않도록 알릴 필요가 있다. 또 종말론을 흥미위주로 다루기보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며 만일 이에 현혹되면 얼마나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인가를 주지시켜야 한다.

 

제3토론 개인의 정신건강이 우선

 

종말론의 첫 단계인 세계의 멸망이라는 주제에 대한 심리적분석을 해보자. 기존 세상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다가 미운 마음이 생기는데이것이 외부로 발산되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물론 내부세계로 들어오면자학이나 자해, 우울, 자살 등이 된다.

 

개인이 과거 생활사의 열등감과 불만에 차 있을 때 혹은 사회가개인에게 불안과 실망을

안겨주었을 경우 고통을 해결하는 하나의 집단적 방법이말세와 새 세계의 건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기말적 종말론에 대한 대책을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의 정신이 건강해야 한다.

인격의 발달은 0~6세 사이에그 기초가 형성된다고 한다. 이 시기의 부모의 올바른 양육이 어떠한 사회적어려움에서도 견뎌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사회의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욕망을 외면하지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박용천 교수·한양의대/신경정신과】

 

제4주제 폐쇄적 신앙집단의사회적 분석

 

사교집단 신도 자체도 피해자

김종서 교수(서울대/종교학)

 

폐쇄적 사교집단에 의한 가장 큰 피해는 연루된 자가 개인적으로종교심성을 다쳐서

건강한 영성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탈교 후에도오랫동안 후유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경우도 종종 있으며 헌금에 의한 재산탈취와 가출로 인한 가정파괴, (성)폭행, 살인 등으로 인해기본적 생존권이 위협받는다면 사회 전체가 온전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폐쇄적 사교집단의 문제를 우리 사회는 대체로 세가지 차원에서 처리하여 왔다.

 

첫째는 상담조정적 차원이다. 예컨대 문화관광부 종무실에서운영해온 ‘신문고’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대개 형식적 제재나

조정으로 끝나기 일쑤이다.

 

앞으로는 문제가 되는 종교단체에 대한 등록 취소나 면세혜택박탈 등 실질적인 제재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을 본격적으로 하기위해서는 종교단체들의 법적 지위를 더욱 명백히 하고 관리체계를 강화하는일이 급선무이다.

 

둘째는 형사처벌의 차원이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는현대 국가에서 종교적

사실은 결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 나라의수사당국은 사교집단들의 기존 사건에 대체로 사기죄를 적용해 왔다. 하지만성실성을 부정할만한 명백한 증거를 잡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재판결과에대해서도 여론에 밀려 판결을 내린다는 인상을 주어 왔다.

 

셋째는 종교 윤리적 정죄의 차원이다. 성폭행이나 부정기적헌금, 공소시효가 지난 경우

매스컴을 통해 비리를 널리 알려 사회 윤리적으로그 집단을 정죄하고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하지만 매스컴이 여론재판을 이끌어내거나 무고한 종교단체들을 마녀사냥 식으로 몰아부치는 경향은 잘못이라는지적도 있다.

 

제4토론 사회에대한 무관심의 양면성

 

교리적 측면에서 사교집단들을 구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사교집단들의 고도화된 신도유입 방법과 신도들에 대한 세뇌적인 교리 주입도질시와 비난을 할 수는 있어도 범죄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범죄를 서슴지 않는 그들의행태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 전체의 구조적 모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종말론자들이 종말의 증후로 말하고

있는 위기가 바로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때문이다. 즉 사회의 폐쇄성과 폐쇄적 사교집단의 출현은 표리(表裏)의 관계에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사회 전체에 대한 무관심이 낳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폐쇄적 신앙 집단이 야기하는 문제들도 사회 전체의문제로 인식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정부가 폐쇄적 사교집단의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국민의 건강한 영성 생활’을 위해노력하는 것도 정부의 일이란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폐쇄적 사교 집단에서탈출한 사람에 대한 보호와 갱생을 위한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폐쇄적 구조를 무너뜨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류성민 교수·한성대/종교학】

 

월간 현대종교 99년 5월호  P100~107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청교도의 길  http://blog.daum.net/kds2012/732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나의 입술의 고백

올 삼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는 자매를 일전에 방문하였다. 유월쯤에는 일터에 돌아가 일할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지금 팔월 말이 되었건만 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약해 있다. 좋은 의사를 만나 수술이 성공적이고 많은 위로객으로 그분의 병실은 꽃속에 뭍혀 있었었다. 그런데 오(5)개월이 지난 지금은 병색이 완연하고 본인도 투병생활이 힘드는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아도, 앞으로의 생을 놓고도 뚜렷이 무엇하나 잡을것이 없는 그 허무함이 그녀를 더욱 서글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땅에 던져진 날은 확실하지만 언제 갈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지금 은 그런대로 산다고 하지만 내일 일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생명과 건강이 있을 때 우리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가야할 곳이다. 내가 가야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화평할 수있다.

그러나 그 좋은 구원에 대한 확신은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이루어야할 과제이다. 침례받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고 시인하므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다.(롬10:9) 그런 엄청난 고백을 한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고 하루 아침에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언짢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새벽기도도 하고 성경도 공부하는 것이다.

한 자매는 성경공부 시간에 자신은 의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쁨으로 예배나 성경공부를 하기보다는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애를 쓰며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작동하여 그에게 가까이 오시기를 원하신다. 지성과 감성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신다.

눈먼 자 거지 바디메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바디메오는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담한다. 소경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주님은 나의 의지와 소원을 나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가야할 천국에 대한 확신은 내가 생명이 있을 동안에 해결해 놓아야할 과제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아들이니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도마와 같이 우리도 고백해야 한다.

오늘도 나의 입술은 무엇을 고백하며 살고 있는가!

글쓴이:  어느 자매
펌 글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상호비교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 5대 교리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신다.

죄인은 각각 자유의 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된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각자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된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믿기 전에 성령에 의하여 중생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일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구원 얻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에 이르는 어떤 사람들을 선태하신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ㅇ ?루스임ㅔ 응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택하여 믿음을 가진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또 제약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으시는 믿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죄인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아떤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선택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보편 구속 혹은 일반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각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믿는다는 구원의 조건이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물리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성령은 효과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성령은 복음의 초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을 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은 죄인들이 구원 얻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유한 만큼 성공적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믿지 않는 한 중생시킬 수 없다. 즉 믿음(인간이 공헌하는 부분)이 선행해야만 중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와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혜로부터의 타락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죄인이 한번 거듭나게 되면 그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알미니안에 의하면 :

구원은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 된다.

 

※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됨 :

(비록 이러한 순서로 나열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항론"(Remonstrance)에 담겨진 사상의 체계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것을 1610년 네덜란드 교회에 제출하였고, 이것은 1619년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되었다.

 

전적 무능력 혹은 전적 부패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일들엘 관해서는 죽었고, 눈이 멀었으며 듣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그의 악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하지 않으며 사실은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결국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성령의 다시살게 하심과 새로운 본성을 주시는 사역에 의해 죄인은 중생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은 아닌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은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결코 죄인이 가지는 믿음이나 회개등과 같은 미리 알 수 있는(예지할 수 있는) 반응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근거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특별 구속 혹은 제한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피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들만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써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 것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들을 연합시키시는 일은 물론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보장한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모든 자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게 확증된다.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외적 부르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을 향해 반드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지속해서 모든 사역을 하신다.

외적 소명(모든 사람들에게 구별없이 하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적 소명(오직 택한 자만을 부르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 없다.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을 항상 회개로 초대한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도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은혜로 택함받은 죄인을 협력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자유롭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은혜가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진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 칼빈주의에 의하면 :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모든 과정(선택, 구속,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를 결정하신다.

 

 

※ 도르트 총회에서 재확인됨 :

이 신학체계는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성경에 담긴 구원의 교리로서 재확인 되었다.

이 체계는 당시에 "5대 교리"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5대 교리에 상응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 로 형성되었고, 이때 이후로 "칼빈주의 5대 교리" 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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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 스테판 차녹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구세주의 부활은,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그 죄책들로부터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이며, 주님께서 의로우신 종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것인데, 그 부활을 새로운 출생(a new begetting)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말씀은, 그분이 이전에는 인생의 연약함으로 감춰져 있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책으로부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새롭게 출생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모두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1).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엡2:5,6 참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는 '아브라함의 복'(갈3:14)을 받게 되고, 믿음에 의해서 그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은, 모두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relative)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해서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상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physical)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이 구절을 번역한 사람은 뒤에 나오는 5절을 참고하여 '살리셨도다'라는 말을 1절에 삽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한 '충만케 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도 영적 생명으로 충만케 하였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사도가 그리스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한 뒤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그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nature)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빠져들기 쉬운 본성,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그 본성에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칭의가 상태(state)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disposition)의 변화입니다. 종이나 노예가 자유인이 되면 그 사람의 상태에 있어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들을 채워 넣거나 그의 본성에 새로운 뼈대를 세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와 본성은 서로 다른 것들입니다.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또한 존재의 위계상 피조물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 위에 첨가된 것입니다.

 

본문의 뒤에 따라 오는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화목, 곧 우리의 범죄함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와는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matter)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form)은 ‘전가하는(imputing)’ 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infusing)’ 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putting into)’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condemnation)’에서 ‘무죄언도(absolution)’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pollution)’에서 ‘친교(communion)’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right)’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fitness)’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perfect)’ 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to)’ 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in)”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46~50p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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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지

 

네가 힘이 들 때 하늘을 한번 더 보아라 끝도 없는 창공
그곳에서 나는 너를 보고 있다
 웃고 있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은 기쁨이고 
 울고 있는 너를 보는 내 마음은 가슴에서 짓이겨지는 아픔이 온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통을
없이 해 주고 싶어도
인생으로 주어진 숙제로서 어차피 네가 넘어야할 산이고
네가 한번은 지나야 할 고행이라서
그리하여 너의 오만함의 돌덩어리를 깎아내어
나의 귀한 보석으로 만들어내 귀한 사랑으로 보듬어 주려함이니
너무 슬프다고만 말고 너무 아프다고만 말고 너의 마음과 생각을
더욱 굳건히 지켜 내 귀한 열매가 되어 주기를 내 아가야~

 나는 간절히 바란다. 네가 태어나기 전 너는 이미 내게 선택하여 졌고
이길로 오기까지 내가 너를 인도하였다. 내 사랑아~ 내 보배야

내 아들을 피 흘리기까지 너무나 아팠던 천 갈래 만 갈래의 가슴 아림의그 십자가!
네가 모르는 죄까지도 씻어 주려는 나의 간절한 애태움!
그 육 천 년속의 기다림속에 너는 분명히 내게서 준비된 열매였었다. 

나에겐 사소하고 작지만 이러한 희생을 자주 바쳐다오..
너에게 주어진 귀한 생명과 바꾸는 죄 어리석은 사탄의 놀림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마지막 주어진 그날을 강하게 버티고 이겨서
 내가 너를 부른 내 사랑을 확인 하려무나 너는 세상의 어느 것 보다 견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보배 첫 열매이노라

 나 또한 너를 위한 그 아픔을 모른 채 하지 않는다.
가끔은 빛이 찬란한 하늘에서 너를 지키고있다.
나는 어디에서도 너를 향한 눈길을 놓지 않는다.

 아 멘 브라질 10세 소년의 찬양(음표)

 

출처: 사모님사모님/


◆어느 감동이야기- 흐뭇한 실화! 

http://blog.chosun.com/tndyd7627/7586449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이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방에 근무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사병의 실수로 수류탄 사고를 당해 한 쪽 팔을 잃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 중 대학에 다닐 때 사귀던 여자 친구가 병원으로 병문안을 온데서
그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몇 번이나 망설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여자 친구에게 “팔이 없는 나를 지금도 좋아하느냐?” 고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물었다.

반신반의 하면서 묻는 질문에 여자 친구는 “나는 너의 팔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팔이 있고 없고는 상관하지 않는다.” 는 대답을 얻었을 때 정말로 천지를 다시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 친구는 그 때부터 병원 근방에 방을 얻어놓고 병원엘 드나들면서 간호에 간호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한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이 되어야 하는 딸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의 딸에게 그 남자를 포기하고 새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랬더니 그의 딸은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아버지가 한 팔을 잃으신다면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말에 아버지도 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남자와 사귀는 것을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제대하여 한 팔이 없는 것만큼 더 큰 노력을 하여 린스와 샴푸를 합친 효과를 내는
하나로를 개발했고 20세부터 80 세까지 사용할 수 있는 2080 치약을 개발하고, 영상통화를 가능하게 한 앱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워 통신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그가 바로 조서환 前 ktf부사장, 前 애경산업 이사 현재 세라젬헬스앤뷰티 대표
조서환씨의 이야기이다.

아래는 그의 수기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어찌나 공부를 잘하던지 초등학교 때 그 사람 성적을 앞선 적이 없다.  어린 마음에 ‘저 애와 결혼하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고교 졸업 직후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했을 때는 연애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고1 때부터 펜팔 친구로 지낸 우리는 편지를 엄청나게 주고받으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얼마 안돼 오른손을 잃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입원해 있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렇지만 머리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을 보이려니 덜컥 겁이 났다. 한 손이 없는 상태로 그녀를 어떻게 만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머릿속에 세 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첫째, 나를 본 순간 놀라 도망칠 것이다.
둘째,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엉엉 울 것이다.
셋째,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내 가슴이 미어질 것만은 확실했다. 연락하자니 두렵고, 안 하자니 보고 싶고, 하지만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지라 힘들게 연락을 했다. 그녀가 왔을 때 내 왼손엔 링거가 꽂혀 있고, 오른팔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양손을 쓸 수 없어 어머니가 떠주는 밥을 먹고 있었다.
고향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산도라지꽃색의 코트를 입은 하얀 얼굴의 그녀가 통합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그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다.  그런 그녀가 날 본 뒤 아무 말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맞았다. 병실 안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어머니는 밥을 먹여주다 멈췄고, 병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피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탓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보다 더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만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나.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불쌍해 보일 내 처지보다 저 사람이 왜 그렇게 안타깝고 딱해 보이는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날 사랑하느냐고 묻고 싶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보내줘야 하는데 누가 나만큼 사랑해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없이 바라만 보기를 30분째. 용기를 내어 겨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 사랑해?”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지금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천사 같았다. 세상을 다 얻어도 이보다 기쁠까.  ‘불행의 깊이만큼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만 정말 그때 느꼈던 행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왼손만 가지고 이 예쁜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텐데. 이건 너무 이기적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만 보내줘야 한다.’ 나는 “얼굴 봤으면 이걸로 끝내자”는 마음에 없 말을 했다.

그러자 아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진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턴 당신 곁에 내가 있어야 해요.”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큰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그때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불굴의 거인’이 깨어났다. 모태신앙인 아내는 날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했고 나는 링거를 꽂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 항상 아내는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며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이후 내 인생의 목표가 된 아내는 지금까지 매일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사업상 힘들 때도 꼭 아내와 상의한다. ‘백발백중’ 명답을 말해 하나님 음성처럼 듣고 산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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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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